钁
- 12 - 國史館論叢 第74輯 한 것은 그 기능의 다양성을 고려한 때문인데 먼저 이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李京華가 제시한 도면(도면1)에서 보는 바와 같이62) 钁은 木柄의 장착방법에 따라 괭 이(외날, 쌍날), 따비(외날, 쌍날) 등의 기능을 갖는 것이지만 현재까지 국내외 학계에서는 이것을 주조괭이,63) 쇠괭이64) 혹은 鑄造鐵괭이65)로 보는 견해, 자귀로 보는 견해,66) 및 주조철부로 보는 견해67)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이처럼 명칭이 다양한 것은 거의 모두가 銎部에 장착되었던 木柄이 남아있지 않아 그 기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 기 때문인데 이제까지의 견해들은 농구와 공구로 분리해서 보거나 혹은 두가지의 복합적 기능을 인정하는 것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공구로 판단하는 견해에 대해서 그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钁은 급속한 空冷에 의해 성형된 단순 白鑄鐵조직만으로 제조될 경우 강도는 높으나 쉽게 부러지는 재질적 취약성을 갖기 때문에 특별한 열처리과정을 통한 軟化처리를 하지 않으면 斧나 자귀와 같은 공구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이며 비록 열처리를 한다고 하 더라도 단조제품의 철부나 자귀에 비해 상당히 취약한 공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튼 이러한 철기가 斧와 같은 공구로 사용되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특히 刃部에 대한 金相學 的 분석이 요망되나 아직 이에 관해 충분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태여서 이러한 철기의 용도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68) 그리고 삼국시대의 각 고분들 에서 보다 강인한 강철제의 단조철부나 자귀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초기에 钁이 斧나 자 귀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시대가 내려오면서 그러한 기능은 거의 소멸하고 만 것으로 보 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주조철부라는 용어의 사용은 이제 종식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주조괭이란 용어에 있어 그것을 농구로 판단한 점에서는 타당하다 하겠으나 木柄 62) 李京華, 十年來河南冶金考古的進展 ( 華夏考古, 1989-3) pp.68 81. 63) 千末仙, 주 7)의 논문 및 釜山女子大學校 博物館, 주 10)의 보고서. 64) 李賢惠, 주 1)의 논문. 65) 盧泰天, 新羅初期 鑄造鐵괭이의 系譜 ( 新羅産業經濟의 新硏究,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 集 第十三輯, 1992) pp.125 130. 66) 李殷昌, 農工具 ( 韓國の考古學, 河出書房新社, 1972). 씨는 일본식 용어인 手斧로 명명. 이상율, 주 7)의 논문. 67)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의 대다수 학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여 왔으며 村上恭通은 이를 세분 하여 단면 梯形의 것을 梯形斧로 칭하고 있다(村上恭通, 東アジアの二種の鑄造鐵斧をめぐっ て たたら硏究 第29號, 1988). 그리고 川越哲志는 土掘具, 農具, 斧, 祭祀用具 및 權力과 富의 상징물의 기능을 갖는 多用途 철기로 보면서도 鑄造鐵斧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川越哲 志, 彌生時代の鐵斧と鐵釿 考古論集, 潮見浩先生退官記念論文集, 1993, p.401). 68) 현재까지 날 부분이 금상학적으로 분석된 钁 가운데 慶州 九政里유적의 展性鑄鐵(혹은 可鍛 鑄鐵) 제품이나 金海 禮安里유적의 班鑄鐵제품(展性鑄鐵보다 열처리가 미비하여 흑연의 형성 이 덜된 것) 같이 열처리가 된 예들도 존재하나 그 외의 대부분은 耐衝擊性이 모자란 白鑄鐵 조직으로 되어 있다(拙稿, 南韓 初期鐵器文化의 一考察 韓國考古學報 13, 1982, pp.54 56 및 尹東錫, 韓國初期鐵器遺物의 金屬學的 硏究, 1984, p.75).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13 - 의 장착법에 따라 다른 기능의 농구, 즉 앞서 지적한 따비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간 과해서는 안될 것이며 茶戶里유적이나 皇南大塚南墳에서 2점이 결박된 상태로 부장되어 있었던 점은 바로 이 钁이 쌍날의 따비나 괭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好 例라 할 것이다. 그리고 上記한 農耕文靑銅器의 따비가 쌍날형인 점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부터 쌍날따비가 중요 농구였으며, 그러한 농구의 사용이 최근까지 존속했다고 하는 민속 학적 자료를 통해 볼 때 고대에 있어 钁이 날부분에 장착된 쌍날따비가 상당기간 동안 起耕具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판단된다. 하여튼 이와 같이 다양한 기능을 갖는 钁에 직접 대응되는 우리말이 없다는 점이 문제 이긴 한데 잠정적으로 주조괭이란 용어를 혼용하기로 하고 그 外延의 의미로 따비의 기 능도 포함시키는 것이 현재로서는 그중 무난하다고 보여진다. 附言하자면 앞서 李京華가 제시한 <도면 1>에서 보았다시피 一字形具나69) 凹字形具(혹 은 U字形具)70)도 그 크기에 따라 着柄방식을 달리하여 서로 다른 기능의 농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钁을 내부에 充塡되어 있는 鑄物砂를 근거로 철기의 소재, 즉 鐵鋌과 같은 기 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71) 만일 그러할 경우, 鑄型의 제조나 단조철기 제작을 위한 탈탄과정 등과 같은 불필요한 공정과 에너지의 과다한 소비가 뒤따르 는 지극히 불합리한 방식이 되므로72) 그러한 의견은 수긍하기 곤란하다.73) 따라서 鑄物砂 69) 橫長方形으로 중국에서는 春秋시대부터 출현하며 鍤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국내에서는 함경 북도 虎谷洞유적의 예가 알려져 있다. 70) 철제의 凹字形具 혹은 U字形具는 春秋時代 말기에 楚지역에서 출현한 농공구로서 이후 주변 지역으로 서서히 전파되어 漢代에 해당하는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의 유적들에서도 발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전통은 조선시대의 U字形具로까지 이어지고 일본의 경우도 유사한 변천 양상을 보이고 있다(拙稿, 東アジア初期鐵器文化の硏究, 廣島大學 博士學位論文, 1992). 그 리고 德積島나 瑞山의 최근자료(도면2)에서 보다시피 이러한 형태의 농구가 따비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71) 李健茂, 茶戶里遺蹟 出土 붓(筆)에 대하여 ( 考古學誌 第4輯, 1992) p.10. 72) 예를 들어 炭素가 4.3% 정도 포함된 共晶鑄鐵의 钁을 소재로하여 직접 단조철기를 만드는 것은 곤란한데, 굳이 그러한 작업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炒鋼法(銑鐵을 고온으로 가열하여 鎔 銑 상태로 한 후 석회석과 같은 脫炭劑를 첨가하여 탈탄하는 방법)이나 鑄鐵脫炭鋼法(주조된 철기를 고온으로 장기간 가열하여 고체상태에서 탈탄을 실시하는 방법)으로 탄소량 2% 이하 鋼을 제조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기술들은 前漢代에 개발된 것으로서, 낙랑지역의 철기들 가 운데는 그와 같은 기술로 제조되었을 가능성을 보이는 단조철기들이 확인되어 있다(尹東錫, 주 68의 책, pp.108 109). 하지만 남한의 경우는 4세기대의 製鐵場이었던 鎭川 石帳里유적 의 일부 遺構가 炒鋼爐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나, 원삼국시대의 그러한 유적은 아직 알려진 바 없고 철기 가운데도 炒鋼法이나 鑄鐵脫炭鋼法에 의한 제품은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어 당시 그러한 기술이 도입되어 있었는지는 불확실한 실정이다. 다만 그 파편을 일본의 경 우와 같이 銑御し 에 의해 보다 간단히 탈탄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73) 그 불합리성에 대해 金榮珉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다(金榮珉, 蔚山 下垈 수습철기의 검
- 14 - 國史館論叢 第74輯 가 內在되어 있는 것은 무덤에의 부장을 의식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 하다. 上記한 龍淵洞, 細竹里, 素素里, 合松里 및 南陽里의 예와 같이 낙랑설치 이전에 해당 하는 钁은 銎部 횡단면 長方形, 종단면 이등변삼각형으로 되어 있으나 그 이후 원삼국과 삼국시대로 이행되면서 거의 대부분 銎部 횡단면 梯形에 종단면 직각삼각형으로 그 형태 가 변천되고 있다. 이는 李京華의 견해대로 농구와 공구의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던 戰國 系의 钁이 한반도내로 유입돼 들어온 후 점차 기능분화의 과정을 거쳐 거의 농구로만 專 用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크기에 있어서는 茶戶里1號墓 출토품(長 10.3, 刃幅 4.6 )을 위시해서 이른 시기 에 해당하는 것들은 다소 소형인데 비해 이후 4세기대의 것들은 전반적으로 長 16 18 의 크기로 보다 대형화되고 幅에 비해 長이 길어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타지역의 예 이기는 하나 경주지역의 5세기대 유물 가운데는 20 가 넘는 예들이 다수 확인되고 있 어74) 이 钁이 농구 전용의 철기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钁은 표면에 縱走突帶가 없거나 좌우 양측에만 있는 형태에서 3 4條의 突 帶가 鑄出된 형태로 변화하고 또한 刃部가 좌우로 넓어지는 모습으로 바뀌는데 이러한 현상은 김해의 退來里유적(도면5-10, 11)75)이나 七山洞유적(도면5-8)76)의 예로 볼 때 4 세기말 5세기초에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李賢惠는 4세기까지 钁의 부장양상이 묘광의 넓이가 4 이상 되는 중대형급 분묘에 매 납되는 것이 일반적인 점을 근거로, 이러한 철제 농구의 소유는 주로 그에 상응하는 계급 이상에게 가능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77) 이러한 钁의 소유형태에 관한 사항은 생활유적 에서의 출토상황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나 아직 가야지역에서는 주거지 의 발굴보고 예가 극히 적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될 수 있겠다. 이러한 점이 바로 고분 중 심으로 진행되어 온 가야고고학의 한계라 할 수 있겠는데, 다른 지역의 예이기는 하지만 坡州郡 舟月里유적78)이나 龍仁郡 水枝2地區유적79)과 같은 백제의 4세기대 주거지유적의 경우를 볼 때 대형주거지들에서 钁이 다수 출토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도 하여 氏의 견해 토 伽耶考古學論叢 2, 1997, p.275). 74) 대표적인 예로 황남대총 南墳(副槨)출토품들을 들 수 있다(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皇 南大塚, 1994). 75) 주 39)의 보고서. 76) 주 36)의 보고서. 77) 李賢惠, 三國時代의 농업기술과 사회발전 ( 韓國上古史學報 第八號, 1991) p.61. 78) 경기도박물관, 坡州 舟月里遺蹟 指導委員會 會議資料 (1996). 이 유적에서 대형에 속하는 1호주거지(한변 10m)로부터 2점의 钁이 출토되었다. 79) 한신대학교 박물관, 龍仁 水枝2地區 百濟遺蹟 指導委員會 資料 (1996). 이 유적의 2호주거 지(8m 8m규모의 5각형)에서 완형과 파편의 钁이 다수 출토되었다.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15 - 는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다만 舟月里유적에서도 최대규모에 해당하는 7 호주거지(17.5m 10.85m)의 경우 화재로 폐기되어 상당한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 나 钁은 1점도 출토되지 않았고, 水枝2地區유적에서는 소형의 주거지에서도 출토되는 양 상을 보이고 있어, 주거지유적의 예를 통해 钁 등의 농구 소유형태를 규명하는 작업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차후 보다 많은 생활유적의 자료가 축적되 고 그에 대한 종합적 해석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5세기에 해당하는 陜川 玉田M3호 분이나80) 경주 皇南大塚 南墳81)에서와 같이 집중적으로 매납된 예는 아직 확인되지 않 고 있어 4세기 단계까지만 해도 钁의 대량소유에까지 부의 집중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가야지역에서는 경주 隍城洞유적에서와 같이82) 單合笵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钁을 제조한 생산시설은 발견된 바 없으나 유물의 형태나 출토분포를 볼 때 여러 거점지역들 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여 단위지역내에서 유통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속히 이 와 관련된 유적을 확인하여 당시 가장 중심적인 起耕具였던 钁의 생산과 보급에 관한 사 항을 보다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 하겠다. 3) 鎌(도면7 8) 한편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묘에 부장된 농구류 가운데 최대 다수를 점하는 鎌 은 그것이 물론 鉤兵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伐草나 잔가지 치기 기 능도 동시에 갖는 수확용 농구로 규정되고 있다. 한반도 내 수확구의 沿革을 볼 때 선사시대부터 石鎌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靑銅器時 代의 主種은 半月形石刀였으며, 龍淵洞유적이나 虎谷洞유적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초기철 기시대에는 그것을 모방한 半月形鐵刀나 주조제품의 鎌이 일부지역에서 사용되기도 하였 다. 하지만 그것들은 북한의 북부지역에서만 출토될 뿐 남한지역의 예는 아직까지도 확인 되지 않고 있어 한반도 전체에 있어 종래의 수확구가 점차 계기적인 변화발전을 거쳐 철 기화되었다고는 보기 힘든 실정이다. 한편 기원전 1세기로 편년되고 있는 서북한의 台城里유적83)이나 그 주변의 유적들에 서 보는 바와 같이 돌연히 단조鐵鎌이 출현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낙랑의 설치에 따 라 前漢의 단조철겸이 급속히 유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남한지역의 경우도 九政洞유적의 예에서 보듯이 기원전 1세기부터 단조철겸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80) 慶尙大學校 博物館, 陜川玉田古墳群Ⅱ M3號墳(1990), 121점 출토. 81) 주 68)의 책, 295점 출토. 82) 隍城洞遺蹟發掘調査團, 慶州隍城洞遺蹟 第一次 發掘調査 槪報 ( 嶺南考古學 8, 1991) pp.1 102. 83)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태성리 고분군 발굴 보고 (유적발굴보고 제5집, 1958).
- 16 - 國史館論叢 第74輯 이 시기의 남한지역 단조鐵鎌은 초기철기시대 말 漢의 철기문화가 낙랑을 통해 본격적으 로 전파되던 시기에 유입된 대표적인 철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茶戶里유적 1호묘의 木 柄附鎌形鐵器가 鎌으로 인정될 수 있다면 가야지역에도 기원전 1세기 후반경에 이미 樂 浪계통의 단조철겸이 존재하였던 것이 된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鎌은 극히 적은 편이어서 당시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수확구라고 하기는 아직 곤란하다. <표 1>의 수치에 나타난 바와 같이 원삼국시대에 그 보급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 진다. 千末仙은 鎌의 형태가 直刃 曲刃, 날끝이 직선 아래로 굽은 것, 날끝의 폭이 넓은 것 좁고 뾰족한 것, 날폭이 넓은 것 좁은 것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데,84) 창원 三東洞유적 출토품(도면7-10)과 부산 老圃洞유적 출토품(도면7-6 9)과 같은 3세기 대 유물들과 그보다 시기가 늦은 김해의 七山洞유적 출토품(도면8-9)이나 退來里유적 출 토품(도면8-8)들을 전체적으로 상호 비교해보면 그와 같은 견해는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다만 이처럼 鎌 형태의 時期差가 대략적으로 확인되기는 하나 낙동강하류지역을 대상으 로 동시기에 있어서의 지역차를 확실히 논하기에는 아직 자료가 부족하다 하겠다. 그리 고 예외적인 경우들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木柄의 장착부위와 身部 사이에 존재하는 段은 이 시기의 후기에 나타나 점차 보편화되는 현상을 보이는 것 같다. 그 크기는 형태에 따 라 차이는 있으나85) 일반적으로 길이 14 25 의 것들이 다수를 점하며 이 시기의 유 물 가운데 30 를 초과하는 대형품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1 3세기의 유물 가운데는 길이에 대해 폭이 넓은 것이 상대적으로 많으나 4세기 이후로 가면서 점 차 좁은 것들이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내는 점이 鎌의 변천과정에서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基部 끝의 구부린 방향에 따라 左 右手用이 판단된다고 하는 의견이 있어 왔으 86) 나 A類(꺾여 접혀진 부분을 上面으로 하고 날부분을 아래로 향하게 놓았을 때 先端部가 우측 에 위치)와 B類(그 반대 방향)로 분류하는 徐姈男은87) 이것이 그에 관한 기준이 되기는 곤란하고 대신 날을 세운 방향이나 鎌身의 휘인방향이 보다 고려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여지는데, 다만 氏가 그 차이를 匠人의 差로 보고자 하 84) 千末仙, 주 7)의 논문, p.38. 85) 위의 논문, pp.7 8. 86) 中田英, 左鎌 について ( 國學院大學考古資料館紀要 5, 1989). 藤井純夫, 鎌を持つ手の左右性 ( 彌生 No15, 東京大學考古學硏究會談話會, 1985). 全榮來, 南原, 月山里古墳發掘調査報告 (1983). 金東鎬, 昌寧, 桂城地區 古墳群의 再檢討 ( 考古歷史學志 第五 六合輯, 1990). 87) 徐姈男, 鐵鎌에 대하여 ( 東萊福泉洞古墳群 Ⅱ, 本文, 遺蹟調査報告 第14輯, 1990) p.98.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17 - 는데 대해서는 松井和行도 언급한 바와 같이88) 차후 재검토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대형분에서 다수 출토되는 鎌은 钁과는 달리 소형분에서도 鍛造鐵斧나 鏃과 함께 매납된 예들이 상당수 보이고 있어 하위층 분묘에 있어서는 武器의 의미로 부장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여진다. 즉 兵農一致였을 당시의 사회에 있어 이 鐵鎌이 농구로서 뿐만 아니라 서민용 무기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하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4) 살포(도면6-4) 철제농구 가운데 中耕具로 볼 수 있는 것으로는 극히 제한된 유물만 발견되는데, 이제까 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方形 身部의 상부에 긴 소켓이 달린 살포가 있을 뿐이며, 4세기 대까지의 유물로는 김해 禮安里유적 출토품(138, 150號墓;도면6-4) 2점만이 알려져 있다.89) 이는 제초, 이랑고르기, 배수작업 등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4세기 중반 이후에 출현하고 5, 6세기에 그 수가 증가하여 대가야의 중요 유적들에서는 模型品들이 상당수 부장된 양상을 보이나90) 분포적으로 볼 때 낙동강하류지역에서는 별로 성행하지 못한 철 제농구로 보이기도 한다. 2. 工 具 類 <표 3> 種 類 鍛造鐵斧 世 紀 1 3 4 地 金 海 8 37 釜 山 31 44 域 昌原 馬山 (27) 7 計 83 44 前期加耶 鐵製 工具類의 출토상황 ( ):板狀鐵斧 刀子 鑿 刻 刀 鍛冶具 錐 기 타 1 3 4 1 3 4 1 3 4 1 3 4 1 3 4 1 3 4 計 28 41 2 20 2 1 1 1 140 26 7 3 1 68 30 10 10 3 6 1 1 1 2 116 84 58 12 26 7 4 1 1 2 1 2 324 농구류에 비해 공구류는 다소 다양성을 보인다고 하겠으며, 현재까지 <표 3>에 제시된 바와 같이 8종 이상이 알려져 있다.91) 이 표의 수치는 농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96 년까지 정식으로 보고된 <표 4> <표 6>의 각 유적들 출토품을 집계한 것으로서 이에 발 88) 松井和行, 鐵鎌について ( 考古論集, 潮見浩先生退官記念論文集, 1993) p.568. 89) 주 35)의 보고서, p.154, 180. 90) 安順天, 小形鐵製模型農工具 副葬의 意義 ( 嶺南考古學 18, 1996) pp.109 160. 91) 鍛造斧를 板狀斧와 袋狀斧로 양분한 수치임.
- 18 - 國史館論叢 第74輯 굴은 되었으나 아직 정식으로 報告되지 않은 자료들까지 포함시키면 그 수는 이보다 월 등히 많아질 것이다. 하여튼 이미 정식으로 보고된 것들 가운데 중요 공구류들(鍛造鐵斧, 刀子, 鑿, 刻刀 및 鍛冶具)의 용어, 형식적인 계보, 변천 및 기능 등에 대해 살펴보자면 다 음과 같다. 1) 鍛造鐵斧 출토수가 刀子 다음으로 많은 鍛造鐵斧는 크게 板狀鐵斧와 有銎鐵斧로 양분해 볼 수 있다. 이제까지 발굴보고서의 鐵斧에 대한 설명에 있어 많은 경우에 有銎의 鍛造鐵斧에 대해 주조괭이(钁)인 소위 鑄造鐵斧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순히 鍛造鐵斧로 명명하고 있 으나 板狀鐵斧도 엄연히 鍛造鐵斧에 해당하므로 이러한 개념용어의 사용은 再考의 여지 가 많다고 하겠다. 그리고 鐵斧는 초기의 일부 주조제품을 제외하면 단조가 기본이므로 鍛造란 수식어를 생략해도 별 무리가 없다고도 보여지나 통상적인 鍛造鐵斧란 용어를 그 대로 쓰기로 하겠다. 上記한 바와 같이 本考에서는 鍛造鐵斧라는 類槪念을 板狀鐵斧와 有 銎鐵斧의 種槪念으로 일단 분류하고 이를 각각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들 가운데 소형에 해당하는 것들은 자귀(錛)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높지만 거의 모두 木柄 이 잔존해있지 않아 斧와 錛의 엄격한 구별이 곤란한 상태이므로 이를 각 부분에서 함께 다루고자 한다. (1) 板狀鐵斧(도면9 10) 钁과 유사하게 이 板狀鐵斧도 그 기능이 다양하여 현재 사용명칭이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어 먼저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東潮는 板狀鐵斧가 斧, 자귀나 괭이, 소재 등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 다목적 철기라는 인식에서 板狀鐵製品이라 명명하고 이것이 4세기대에 鐵鋌으로 형태가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92) 宋桂鉉은 刃의 有無를 기준으로 鐵斧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을 구분하여 板狀鐵斧와 板狀鐵斧形 철기로 분류하고 특히 후자에 있어서는 鐵鋌과의 연 계성을 지적하고 있다.93)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각종 기능을 고려하여 용어 자체의 분류 체계가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는 공구에 대하여 논하는 것인 만큼 일단 木柄이 장 착된 유물들(도면10)이나 弧狀의 兩刃을 갖고 있어 확실히 板狀鐵斧로 규정될 수 있는 것 들만을 주대상으로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철기가 괭이로도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이 전 92) 東潮, 弁韓 辰韓의 鐵 ( 加耶諸國의 鐵, 인제대학교 부설 가야문화연구소 창립기념 국제 학술대회 발표요지, 1994) p.47 및 弁辰과 加耶의 鐵 ( 加耶諸國의 鐵, 仁濟大學校 加耶文 化硏究所 編, 1995) p.92. 93) 宋桂鉉, 洛東江下流域의 古代 鐵生産 ( 加耶諸國의 鐵, 1995) p.138.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19 - 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동시기에 주조괭이인 钁이 다수 사용되고 있었고, 茶戶里1호묘에 서 출토된 板狀鐵斧의 木柄은 45 정도의 예각을 이루고 있어(도면10-1) 괭이 같은 농구 보다는 나무를 다듬는 자귀로 보여지는 만큼, 이를 주로 공구로 이용되던 철기로 규정하 는 것이 보다 무난할 것 같다. 이처럼 板狀鐵斧는 木柄의 裝着방식에 따라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앞서 설명한 钁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의 여러 철기 가 아직 기능과 형태간에 분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는 못한 단계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까지 발견된 板狀鐵斧들의 크기는 길이가 27 내외에 해당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20 정도로 비교적 작은 것들(茶戶里 43호묘 출토품, 도면9-1,2)이나 32 정도로 상당히 큰 것들(三東洞 3호 石棺墓 출토품 3점, 도면9-7 9)도 알려져 있으나 일본에서 다수 출토되 고 있는 것과 같은 아주 작은 예들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그 형태에 있어서는 弧狀의 刃部가 着柄部에 비해 약간씩 넓어진 것이 일반적이며 그 가운데에도 후기에 속하는 三 東洞의 예가 가장 넓게 벌어진 모습을 보인다. 板狀鐵斧가 강도 높은 공구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갖기 위해서는 제조과정에서 浸炭에 의한 增炭이 이루어져 금속적 재질이 中炭鋼 내지 高炭鋼 수준으로 강화되는 것이 바람 직하나 분석된 유일한 예인 昌原 三東洞유적의 3호 石棺墓 출토품 1점은 頭部가 含炭量 0.12%의 低炭鋼으로 밝혀져 있어94) 이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정도로 적은 탄소량을 갖는 鋼은 강도가 낮은 것이어서 工具鋼보다 構造用鋼에 적합하다 하겠는데, 문제는 보고된 含炭量이 이 철기 頭部의 것일 뿐이지 각 부분이 모두 그러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고대의 단조철기들은 일반적으로 부위에 따라 다른 含炭量 을 갖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刃部의 경우가 반복적으로 가열, 단조되면서 보다 침탄이 이루어져 다른 부분보다 많은 含炭量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三東洞유적의 板狀鐵斧에 대한 금속학적 분석에 있어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刃 部가 조사되지 못함에 따라 이 철기의 재질과 기능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했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 분석조사의 의미는 반감되고 만 셈이다. 그리고 유적의 보고 자는 최초에 이 철기를 鐵鋌으로 이해하려 하였으나 분석결과를 근거로 板狀鐵斧로 보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頭部 재질만을 보자면 前者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 겠다. 특히 이 板狀鐵斧는 철소재의 기능도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것으로 말해지고 있는 만큼 다른 철기들에 비해 각 부위의 탄소량과 금속조직에 대한 분석조사가 보다 면밀하 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에서 우리나라의 철기에 대한 94) 주 33)의 보고서, p.209.
- 20 - 國史館論叢 第74輯 금속학적 분석연구가 체계적이지 못하고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 는 것이다.95) 동북아시아에 있어 이 板狀鐵斧의 계보를 보면 그 始原은 중국의 戰國시대부터 시작되 는 것이라 하겠는데,96) 서북한지역의 경우는 기원전 1세기에 해당하는 銀波郡 葛峴里유 적97) 출토품 정도만 알려져 있고 기원후의 유물이 전혀 보고되지 않고 있어 중국의 경우 와 마찬가지로 공구 가운데 일찍 사라진 器種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비해 남한지 역의 경우는 이제까지 경상도지역에서만 발견되었는데 경주 入室里유적,98) 九政里유 적,99) 三千浦 勒島유적100) 및 昌原 茶戶里유적 1號墓101) 출토품 등은 기원전 1세기에 서북한지역으로부터의 영향하에 제작, 사용되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중국이나 서 북한지역과는 달리 3세기까지 존속하였다는 점이 이 지역의 특징이라 하겠다. 本稿에서 다루는 낙동강하류지역의 세 거점지역 가운데는 현재까지 茶戶里유적 출토품 이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셈이며 특히 이곳에서는 木柄이 함께 출토되어 着柄法을 알게 하여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일본의 경우도 彌生時代 前期 後半의 예(福岡 下稗田C-5號 주거지 출토품)가 알려져 있어 韓日 양국에 있어 이러한 철기의 사용 개시기는 大差가 없었던 듯하며, 그 이후의 것들에 있어서도 경상도지역의 출토품들에 片刃을 갖는 것이 없고 대다수가 무덤 부장품이라는 사실에 차이가 있으나 九州지역에서 출토된 상당수가 형태상 유사한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102)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4세기대 이후로 내려오면서 점차 단절되 95) 이러한 문제에 있어 책임의 일부는 분석을 의뢰하는 고고학자들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분석에 있어 각 부위를 충분히 검사하기 위해서는 철기의 상당한 파괴가 전제되는데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차후 동일한 형태의 철기가 다 수 출토될 경우 1점 정도는 각 부위의 시료채취를 철저히 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분 석이 가능하도록 고고학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96) 河北省의 燕下都 유적들(22號遺址, 郎井村10號作坊遺址 등)과 河南省 輝縣 固圍村 1號墓의 예 등이 알려져 있으며, 揚子江流域圈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철기가 아직 출토된 바 없어, 주 로 黃河流域圈에서 사용되던 철기로 보인다. 이 시대의 板狀鐵斧는 縱斷面이 刃部를 향해 서 서히 좁아지는 형태이고 평면형태도 우리나라의 것들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漢 代의 유적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어 일찍 소멸된 器種이 아닌가 생각된다. 河北省文化 局文物工作隊, 燕下都第二二號遺址發掘報告 ( 考古 1965-11) pp.526 570. 河北省文物硏 究所, 郎井村西北10號作坊遺址的勘察与發掘 ( 燕下都, 文物出版社, 1996) p.403. 中國科學 院考古硏究所, 輝縣發掘報告 (中國田野考古報告集 第一號, 1956). 97)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황해북도 은파군 갈현리 하석동 토광묘 유적 조사 보고 ( 고고학 자료집 제2집, 1959) pp.33 34. 98) 주 23)의 보고서. 99) 金元龍, 慶州九政里 出土 金石倂用期遺物에 對하여 ( 歷史學報 第1輯, 1952) pp.3 14. 100) 1985년과 1986년에 부산대학교에 의해 발굴되었으나 이 板狀鐵斧에 대해서는 아직 정식으 로 보고되어 있지 않다. 101) 李健武 외, 주 25)의 보고서.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21 - 는 양상을 나타내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그 계통이 古墳時代의 短冊狀鐵器로 계속 이어지 고 있어 양국간에 차이를 나타낸다. 이 板狀鐵斧의 부장양상을 볼 때 이미 기원전 1세기의 茶戶里유적 1호묘에 18점이나 매납되어 있었는데 비해 같은 유적의 그 이후에 해당하는 분묘에서는 그처럼 많은 수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103) 기원후 1세기에 있어서의 증가추세를 논하기는 다소 어렵다 하 겠다. 그리고 2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말해지고 있는 金海 良洞里유적 162호 토광목곽묘 에서 40점이나 일괄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104) 筆者가 實見한 바로는 그것들의 형태가 茶戶里 1號墓에서 출토된 方柱狀鐵斧와 유사하여 이에 관하여는 再考의 여지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제까지 정식으로 보고된 板狀鐵斧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은 昌原 三東洞유적 3호石棺墓 출토품 3점(도면9-7 9)으로서 이 무덤의 연대를 기준으로 그 소멸 의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이 분묘의 연대에 대해서는 3세기설과 4세기 설이 대립되어 있는 상태여서 그 시기의 결정이 간단하지는 않은데105) 이 유적을 일단 제외해놓고 볼 때 4세기대의 분묘유적에서는 이 板狀鐵斧가 출토되지 않는 양상을 나타 내고 있어 이 시기로 들어서면서 점차 소멸해간 것으로 추정된다.106) (2) 有銎鐵斧(도면10 14)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鐵斧는 橫孔型式이지만 이 시기의 것들은 雇柄이 삽입되 는 銎 혹은 袋를 갖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흔히들 이러한 형태의 鐵斧를 단순히 鍛造鐵 斧라 이름붙여 왔으나 앞서 설명한 板狀鐵斧나 橫孔鐵斧도 사실상 鍛造鐵斧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그 성격을 보다 정확히 반영하는 용어로서는 鍛造鐵斧의 一種에 속하는 有銎鐵 斧라는 명칭이 보다 적합하다고 보여진다. 일부에서는 이를 鐵製銎斧라 이름 붙이고 있 고107)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袋狀鐵斧라 부르고 있는데108) 銎 혹은 袋가 주조괭이처럼 102) 川越哲志, 주 67)의 논문, pp.402 411. 103) 이 유적의 각 분묘에서 출토된 板狀鐵斧의 수는 다음과 같다. 1호묘(18, 方柱狀鐵斧포함), 8호묘(8), 10호묘(3), 13호묘(1), 18호묘(1), 23호묘(6), 27 호묘(1), 40호묘(4). 104) 東義大學校 博物館, 金海 良洞里遺蹟 槪要 (1991). 그런데 김해지역에서는 아직 기원전까지 시기가 올라가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3세기대의 예도 제대로 보고된 것이 없어 이 지역에서의 실상은 아직 불투명한 점이 많다. 다만 입지면에서 볼 때 이 지역이 외래 의 철기문화를 우선적으로 수입하기 쉽고 또한 前期 가야의 철기문화를 주도하여간 중심지 (central place)라는 점을 감안하면 차후 보다 이른 시기의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과 3세기까 지의 자료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105) 그 연대에 대한 논의는 주 10) 참조. 106) 이에 비해 4세기의 유적들에서는 철 소재로 말해지고 있는 일명 板狀鐵斧形 鐵器가 다수 출 토되나(주 88 참조) 아직 정식으로 보고된 예들이 없어 현재 자세히 논하기는 곤란하다. 107) 李健武 外, 주 25)의 보고서. 그리고 이와는 달리 주조괭이를 銎斧로 명명한 예도 있다(주
- 22 - 國史館論叢 第74輯 下部에까지 내려오지는 않고 上部에만 위치하고 있어 袋狀鐵斧란 용어는 어색한 감이 있 다. 이보다는 鐵製銎斧라는 용어가 적합한 듯 하기도 하나 銎이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는 점에서 有銎鐵斧라 명명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鐵斧로 보고된 유물 가운데 길이와 폭이 짧은 것들은 엄격히 말해 자귀(錛)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고 실제로 木柄이 그대로 잔존해 있었던 茶戶里1호묘 출토품(도면 10-2, 길이 13.6, 銎部幅 5.3 )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보다 작은 예들은 斧보다 자귀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한다.109) 하지만 그 외에 木柄이 잔존한 예는 없는 상태여서 크기만을 기준으로 자귀를 斧와 명확히 구분한다는 것은 아직 어려운 일 이므로 板狀鐵斧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단 有銎鐵斧에 포함시켜 함께 다루고 자 한다.110) 한반도에서 단조제품의 有銎鐵斧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것은 기원전 1세기부터로서 台城里유적으로 대표되는111) 서북한지역 토광묘 계통 무덤들의 유물 부장양상에서 그러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서북한지역으로부터의 전파에 의해 남한지역에서도 有銎鐵斧 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일부 분묘에 大小의 2점이 부장되어 있는 점 은 서북한지역의 토광묘에서부터 전래되어 내려온 遺制처럼 보여지기도 한다.112) 비록 이러한 철기의 계통을 서북한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고는 하나 茶戶里유적에서부터 보이 기 시작하고 이후의 유적들에서도 계속 출토되는 有肩式은 서북한지역 유적들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의 독특한 형태라는 점이 주목되며113) 이를 통해 이른 시기부터 독자적 인 공구의 생산단계에 진입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형식면에서 有銎鐵斧는 평면형태를 기준으로 할 때 有肩式(도면11, 12)과 無肩式(도면 13, 14)으로,114) 銎部의 횡단면을 기준으로 할 때 타원형과 장방형으로 각각 분류된다. 32의 보고서). 108) 川越哲志, 주 67)의 논문, p.426. 109) 木柄의 장착형태를 볼 때 이 철기는 자귀라 해야 할 것이고 발굴보고서(李健武 外, 주 25)에 서 木柄附鐵製銎斧로 표현한 것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110) 日本에서는 자귀를 斧와 구분하여 일반적으로 手斧라 부르고 있으나 加工斧로서의 釿으로 규정 한 예도 있다(川越哲志, 주 67). 그리고 日本에서는 斧와 자귀의 木柄이 다수 출토되고 있으며 北部九州에서는 彌生時代에 後者의 鐵器化가 보다 진전되었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111)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주 83). 112) 老圃洞유적을 예로 들자면 이곳에서 有銎鐵斧가 출토된 16개 분묘 중 4개소에 大小의 2점 내지 3점이 부장되어 있었다. 113) 중국의 경우에도 前漢代의 일부유적(河南省鞏縣鐵生溝製鐵址, 陝西省臨潼縣沙河村遺跡 橫孔 斧)에서 有肩式의 鐵斧가 소수 출토되었으나 한반도의 것들과는 형태상 차이를 보이고 있고 서북한지역의 예가 없어, 일본 이외의 주변지역과 관련한 계보를 논하기는 곤란하다. 주 70) 참조). 114) 이 구분에 있어 有肩式은 확실하게 肩部가 인정되는 것으로서, 아주 미세한 肩部를 갖는 것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23 - 茶戶里1號墓를 근거로 할 때 有肩式은 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는 사용되기 시작한 것 같으며 <도면 11 12>를 볼 때 1 2세까지는 肩의 각도가 크게 둔각을 이루는 것이 일 반적이었다가 3세기대부터 거의 직각에 가까운 형태의 것들이 출현하여 4세기대에 보다 보편화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가운데는 肩部의 양단이 현저하게 돌출하여 刃이 鉞刃形을 보이는 것들(도면12-3, 6 등)도 있는데, 이러한 양상은 일본의 경우와 동일한 것 으로서, 東아시아의 有肩鐵斧를 4형식으로 분류하고 있는 野島永은 그 형태의 계보를 鉞 刃 주조철부에서부터 변형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115) 이러한 有肩式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는 無肩式도 기원전 1세기부터 사 용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아직 이들 兩種의 선후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 경주지역의 예를 볼 때 後者가 前者보다 먼저 출현하지 않았나 추 정된다. <도면 13 14>에서 알 수 있듯이 茶戶里유적 출토품(도면13-1, 2)과 良洞里유적 출토품(도면13-8 10) 같은 1 2세기의 無肩式은 銎部 鍛接線이 상하로 정연하게 접착되 어 있다. 이에 비해 3세기 이후의 것들은 대부분 간단하게 말아붙인 형태를 보이고 있으 며 상당수는 아예 접착되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는 점이 대조적이다. 이와 같은 銎部 처 리의 간략화는 有銎鐵斧 생산의 대량화에 따른 결과가 아닌가 추정된다. 그리고 1 2세 기의 예들에서는 평면이나 刃部의 형태에서 약간의 다양성이 看取되나 그 이후의 것들에 서는 大小의 차이에서 큰 편차를 보이고 있을 뿐 형태상의 다양성은 별로 인정되지 않는 다는데 특징이 있다. 한편 銎部의 단면을 보면 1 2세기의 유물들 가운데는 장방형 혹은 그에 가까운 타원 형이 다수 보이나(도면13-1, 2, 8 10) 그 이후의 것들은 거의 모두가 타원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나타내는데 이 또한 대량생산에 따른 결과로서 삽입되는 木柄 제 작의 간략화와도 유관하다고 보여진다. 앞서 有銎鐵斧는 斧와 자귀(錛)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일단 규정하였지만 이에 대해 굳이 구분이 필요하다면 有肩式의 대부분과 無肩式 중 대형에 弧狀刃을 갖는 것은 斧로, 소형에 直刃을 갖는 것은 자귀로 일단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며 이러한 작 업에 있어 기준 수치를 설정한다면 身部의 길이보다 刃部의 幅이 보다 고려되어야 할 것 이다. 斧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적어도 刃幅이 5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만일 이 수치를 기준으로 한다해도 또하나의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즉 有銎鐵斧가 다수 출토된 老圃洞유적과 禮安里유적을 예로 들자면 刃幅 5 이상에 해당하는 것은 겨우 20% 정도에 불과한 상태여서 나머지 약 80%가 자귀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은 無肩式에 포함시켰다. 115) 野島永, 古墳時代の有肩鐵斧をめぐって ( 考古學硏究 第41卷 第4號, 1995) pp.53 77.
- 24 - 國史館論叢 第74輯 다수에 있어 그 종단면이 대칭의 이등변삼각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는 점도 斧보다 자귀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하여튼 이 문제는 차후 보다 상세히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과제 로서 木柄이 장착되거나 그 흔적이라도 알 수 있는 자료들의 증가를 기대하게 된다. 2) 刀子(도면15) 공구류 가운데 최대다수를 점하는 刀子는 지배층의 무덤에서 뿐만 아니라 하위계급의 분묘나 패총 및 주거지 등의 생활유적에서도 상당수 출토되고 있어 당시 가장 보편적으 로 보급되었던 철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철제 刀子는 춘추시대에 출현하여 戰國時代 중만기에 그 보급도가 크게 증가하였다.116) 이 시기는 단조제품과 함께 주조제품도 다수 사용되었다는데 특징이 있 다.117) 이후 漢代에 주조제품보다는 단조제품이 주류를 이루면서 사용의 증가 추세는 지 속되며118) 이러한 배경에서 기원전 1세기에 낙랑지역으로 유입되고 후속적으로 가야지역 에까지 전파된 계통성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刀子들은 戰國時代의 주조제품이나 漢代의 것들 대부분이 有環頭式(單環頭 혹 雙環頭)이고 낙랑지역의 경우도 이러한 형식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119) 이에 비해 가야지역의 것들은 초기의 것들을 제외하면 無環頭式 이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더욱이 주조제품은 全無한 상태이다. 즉 이제까지 보고된 刀子 가운데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茶戶里유적의 1號墓 출토품(도면 15-9)이나 30號墓 출토품(도면15-8) 정도가 有環頭式으로 되어 있고 그 이후의 것들로는 모두 無環頭式만이 보고되어 있다. 따라서 초기에 낙랑지역으로부터 중국계통의 有環頭式 이 전래되어 상당기간 동안 사용되다가 점차 無環頭式으로 변천되고, 이후 木柄이나 鹿角 柄에 장착된 後者가 주류를 이루게 된 것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점이 바로 이곳의 刀子가 갖는 지역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刀子들의 전체적인 형태를 보면 대부분 平刃이나 外彎刃으로 되어 있으나 드물게 약간 의 內彎刃을 갖는 것(도면15-1)도 보이고 있으며, 3세기대부터는 심하게 外彎된 曲刀子가 출현하기도 한다(도면15-4). 그 가운데 특히 4세기대에 속하는 福泉洞유적의 57號墳 출토 116) 주 70)의 논문, pp.337 341. 117) 주조제품의 刀子가 다수 사용되고 있었음은 河北 平山縣 靈壽城址(李恩佳, 初論戰國中山國 農業發展狀況 農業考古 1986-2, pp.117 121)와 河南 登封縣 告成鎭유적(中國歷史博物 館考古調査組 外, 河南登封陽城遺址的調査与鑄鐵遺址的試掘 文物 1977-12, pp.52 65) 의 鑄型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118) 예를 들어 洛陽市 西郊 漢墓(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洛陽發掘隊, 洛陽西郊漢墓發掘報告 考 古學報 1963-2, pp.1 58)의 경우 조사된 217基의 분묘 가운데 135基에서 600여 점(甲片 328점)에 달하는 철기가 출토되었으며 이들 중 刀子는 132점에 달하여 가장 높은 부장율을 보이고 있다. 119) 拙稿, 1 3세기 낙랑지역의 금속기문화 鐵器를 중심으로 ( 韓國古代史論叢 5, 韓國古代 社會硏究所, 1993) p.245.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25 품(도면15-5)과 60號墳 출토품(도면15-6)은 先端이 고사리무늬처럼 말려있는 점이 현저한 특징이다. 이러한 비실용적인 장식적 요소의 추가는 刀子 생산의 확대와 제조기술의 발전 하에 비로소 가능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세부적인 형태에 있어 環의 有無에 관계없이 거의 모두 刃部가 柄部에 이르러 段을 이루는 關部를 형성하고 있다. 그 크기에 있어서는 10 내외의 것들이 일반적이지만 30 정도에 달하여 小刀라고 도 할 수 있는 大形(도면15-8)도 존재하며, 身幅은 1 2 로 좁은 편으로서 2 를 넘는 예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이러한 刀子들의 일부가 평상시 漆鞘나 木鞘 혹은 皮革鞘에 삽입되어 보관되었던 사실 은 잔존한 鞘나 身部에 부착되어 있는 물질을 통해 파악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 세기 후반의 茶戶里1號墓 유물(도면15-1)은 漆鞘에 내장된 채로 출토되었으며120) 福泉洞 60號墓 출토품(도면15-10)의 경우는 身部의 앞쪽 반 정도에 구멍으로 끈을 엮은 가죽 칼 집이 씌워져 있었다. 또한 같은 분묘에서 출토된 1점은 身部 표면에 木質, 짚흔 및 布痕 이 銹着되어 있어 木鞘에 넣어져 있었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121) 이러한 鞘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낙랑지역의 예들과 같다고 하겠으나122) 石巖里 219號墳(王根墓) 출토품의 장 식성123)과 비교한다면 소박한 수준의 것들에 불과하여 아직 이 시기까지 刀子가 신분과 富를 상징하는 威身財로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여러 성격의 유적들에서 공통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이 刀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佩用할 수 있을 정도로 보급도가 높았고 상황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갖는 만능적 도구로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생산작업용이나 취사용 뿐만 아니라 漁撈用 도구로도 이용이 가능하며124) 더 나아가 일부에서는 이것을 鐵鎌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의 穗摘具로 판단하고 있기 도 하다.125) 물론 그러한 기능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나 良洞里유적이나 茶戶里유적의 경우 이른 시기의 분묘로부터 鎌이 상당수 출토되고 있어(<표 4>, <표 5> 참조) 만일 刀子가 收穫用 농구로 이용되었다 하더라도 그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3) 鑿(도면16) 통상 목공용 공구는 鑿(끌), 석공용 공구는 鏨(정)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이에 관련된 전기가야의 철제 유물들은 細長한 형태이고 銎을 갖는 것들도 있어 모두 前者에 해당한 120) 주 25)의 논문, pp.19 20. 121) 주 37)의 보고서, p.27. 122) 주 70)의 논문, p.245 참조. 123) 樂浪漢墓刊行會, 樂浪漢墓 第二冊(1975) p.23. 124) 郭鐘喆, 洛東江河口域에 있어서 先史 古代의 漁撈活動 ( 伽倻文化 제3집, 1990) pp.213 214. 125) 주 23)의 보고서, p.237 및 주 1)의 이현혜 논문(1990) pp.50 52.
- 26 - 國史館論叢 第74輯 다고 할 수 있으며, 확실히 後者로 판단되는 예는 아직 없는 셈이다. 이 鐵鑿은 銎의 有 無에 따라 有銎式과 無銎式으로 분류되며 銎部와 身部의 단면이나, 그 기능을 말해주는 刃의 형태에 따라 보다 세분될 수 있다. 이제까지 발견된 한반도 最古의 鐵鑿은 기원전 2세기경 중국으로부터 서남부지역으로 전파된 銎部 단면 방형의 주조제품인데126) 이러한 철기가 가야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았 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에 해당하는 유물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가야지역에 最古의 鐵鑿이라고 볼 수 있는 유물은 기원전후한 시기에 해당하는 茶戶里 유적 4號墓 출토품이라 하겠다. 이것은 외견상 단조품으로서, 身部의 단면이 장방형에 가 깝고, 頭部에 약간 홈이 나있다고 보고되어 있으나 도면이 제시되지 않아 정확한 형태를 알기가 어렵다.127) 한편 시기가 이보다 다소 늦은 것으로 보이는 同 유적 29號墓 출토품 (도면16-1, 長 15, 幅 1.3 )은 銎部 단면 원형의 단조제품이고 같은 유적의 출토품들(도 면16-3, 5)이나 良洞里 16號墓 출토품(도면16-2) 및 老圃洞 3號墓 출토품(도면16-4)도 같 은 有銎式인데 비해 無銎式은 三東洞 10號 토광묘 출토품(도면16-11, 長 25.7 )만이 알 려져 있어 3세기까지는 前者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有銎式은 銎部가 대 부분 완전히 鍛接되어 있는 것과 간격을 남기고 있는 형태로 세분되나 前者가 多數를 점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有銎式으로 4세기 前葉으로 편년되고 있는 禮安里 160號墓의 출토품(도면 16-6, 長 29.1, 幅 2.0 )128) 이 보고되어 있기도 하나 그 외의 4세기대 유물들은 모두 無銎式만이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上記한 160號墳에서 頭部에 끈이 감기어진 채 출토 된 鐵鑿(도면16-12, 長 33.7, 幅1.2 ), 마산의 縣洞 22號墓 출토품(도면16-8, 長 22 ), 김해의 七山洞유적 출토품들(도면16-9, 10) 및 부산의 福泉洞 60號墓 출토품(도면16-7) 등을 볼 때 3세기대까지와는 달리 4세기대부터는 無銎式이 주류를 이루는 형태상의 변화 가 있었던 것 같다. 이 鐵鑿은 다양한 크기를 보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3세기까지의 有銎式은 길이 15 126) 忠南 唐津郡 素素里, 忠南 扶餘郡 合松里 및 全北 長水郡 南陽里에서 钁과 셋트를 이루어 출 토된 4점이 알려져 있다. 주 15) 16) 17)의 논문 참조. 이러한 주조제품의 鐵鑿은 중국에 서 戰國時代 中晩期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북으로는 燕의 동북지역(遼寧省 撫順市 蓮 花堡遺跡), 남으로는 楚의 남부지역(湖南省 湘鄕縣52號墓)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그 사용범위 는 全國的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秦代의 유적(陝西省 鳳翔縣 高庄21號墓)에 이어 前漢代의 유적(河北省 滿城縣1號墓, 河南省 鄭州市 古滎鎭製鐵址)에서도 계속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의 유물은 前漢代의 이른 시기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 은데, 문제는 서북한지역에서 이와 같은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27) 주 25)의 보고서, p.32. 128) 주 35)의 보고서, p.212.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27 - 전후의 소형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無銎式은 20 이상의 것들로서 이에는 30 를 초 과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 크기면에서 점차 대형화 다양화되는 양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頭部의 단면형태에 있어 有銎式은 원형 내지 타원형을, 無銎式은 원형, 방형 내지 梯形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나타내나, 身部의 단면의 경우는 방형, 장방형 및 梯 形 등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鐵鑿의 세부 설명에 있어 일반적으로 각 보 고서의 본문이나 도면에서 銎部와 身部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충실히 다루고 있으나 그 기능과 보다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刃部의 형태에 대해서는 정확히 보고하고 있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는 점이다.129) 그 결과 이를 기준으로 한 상세한 분류가 아직 곤란한 실정 인데 일단 <도면 16>에 제시된 자료들만을 보면 尖刃(도면16-1)과 平刃(도면16-5 10)으 로 분류되고 다시 後者는 兩刃(도면16-5, 6)과 扁刃(도면16-8, 11)으로 세분될 수는 있겠 으나 확실하게 斜刃으로 볼 수 있는 유물은 아직 없는 셈이다.130) 그리고 시기별 출토상황 면에서 1 3세기에 비해 4세기에 급증하는 양상을 보이는 점 과 크기와 형태의 다양화 추세는 이 시기에 수공업이 이전보다 한층 발전하였음을 반영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한 배경하에서 4세기대에 武器 武具, 馬具 등 보다 다양 한 종류와 형태의 철기들이 제작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4) 刻刀(일명 鍦, 도면17-1 3, 6 8) 이것은 長棒形 鐵身 先端의 弧狀刃을 이용하여 목제품이나 죽제품 표면의 平滑작업이 나 마무리작업을 하는데 쓰이는 공구로서 그 계보상의 기원은 청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명칭에 있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통상 鐵鍦131)라 이름 붙이고 있는데 비 해 중국의 경우는 削, 刮刀, 匕首, 刀, 刻刀, 楔刻刀 및 夾刻刀 등으로 너무 다양하게 혼 용되고 있어 용어의 통일이 시급한 실정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鐵鍦란 용어는 우리의 일반인에게는 물론 전문가들에게도 생경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 생각되며, 그 형태와 기능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彫刻刀와 유사한 면이 있으므로 중국에서 사용되 는 刻刀란 명칭이 보다 적합하다고 보여진다. 129) 이제까지 대부분의 발굴보고서에서 완형품의 경우에도 이 刃部의 파악에 대해 소홀히 한 경 향이 있는데, 이는 鐵鑿이 갖는 기능의 다양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으 며 차후 이러한 점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130) 그 가운데 頭部가 무수히 加擊된 상태를 보이는 無銎式의 三東洞 10號토광묘 출토품(도면 16-11)의 刃은 도면만을 볼 때 斜刃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나 身의 하부 단면을 고려하 여 일단 扁刃으로 분류하였다. 131) 이를 鉈(字典의 의미는 短矛)로 표현한 예(주 35의 보고서, p.167)도 있으나 鍦로 사용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 28 - 國史館論叢 第74輯 이러한 철제 刻刀는 중국의 楚지역에서 春秋時代 晩期에 출현한 것으로 보여지는데132) 이후의 中原지역 유적이나133) 燕지역의 유적에서도134) 일부 출토되고 있으나 그 사용의 중심지역은 森林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남부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135) 우리나라 서북한지역의 경우에는 龍淵洞 출토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원전 3 2세기 에 이미 청천강 이북지역에 戰國系, 즉 앞서 말한 燕系統의 철제 刻刀가 유입되어 있었으 나 대동강유역의 초기철기시대 것으로는 청동제품만이 일부 알려져 있을 뿐이며,136) 漢 代 黃河流域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이후의 낙랑지역 유적들에서도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남한지역의 경우는 관련된 유물이 동남부지역에서만 확인되고 있는데, 청동제 刻刀가 金海甕棺에서 다수의 파편으로 출토된 바 있으나137) 같은 시대의 철제품은 아직까지 발 견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김해지역의 기원후 1 3세기 유적에서도 제대로된 철제 刻刀 가 출토되었다는 정식 보고는 아직 없고 그와 유사한 철기(도면17-8)만이 알려져 있을 뿐 이다.138) 따라서 청동제품을 모방하여 자체적으로 철제 刻刀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 현재로서는 그 계보를 서북한지역보다는 중국의 남부지역에서 찾 아야 할지 모르겠다. 전기가야지역의 이른 시기 철제 刻刀로는 昌原 茶戶里유적의 예들(도면17-1 3)이 알 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22號墓 출토품(도면17-2, 長 13.5, 幅 1.6 )과 32號墓 출토품 (도면17-3, 長 15.9, 幅 1.5 )은 평면과 단면의 형태가 중국의 戰國時代 유물과 유사 132) 이 시기의 유물로는 湖南省 長沙市 楊家山65號墓 출토품이 알려져 있다(長沙鐵路車站建設工 程文物發掘隊, 長沙新發現春秋晩期的銅劍和鐵器 文物 1978-10, pp.45 47.) 133) 河南省 洛陽市 糧倉遺址 62號 窖藏에서 6점이 출토된 바 있으나 그 외의 유적들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洛陽博物館, 洛陽戰國糧倉試掘紀略 文物 1981-11, pp.55 65). 134) 燕지역에서는 河北省 易縣 燕下都 44號墓 출토품 4점만이 정식으로 보고되어 있으며 이는 龍淵洞유적의 刻刀와 관련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河北省文物管理處, 河北 易縣燕下都44號墓發掘報告 考古 1975-4, pp228 240). 135) 이제까지의 출토수를 보면 楚지역의 예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廣西省 平樂縣 銀山嶺유적(총 111基墓)에서는 59점이나 출토되었다(廣西壯族自治區文物工作隊, 平樂銀山嶺戰國墓 考古 學報 1978-2, pp.211 258). 그리고 漢代의 경우 黃河江 유역권의 유적들에서 출토되었다 는 정식보고는 아직 없는 것 같다. 136) 서북한지역의 예로는 황해도 봉산군 松山里유적(황기덕, 황해도 봉산군 송산리 솔뫼골 돌돌 림무덤 고고학자료집 제3집, 1962, pp.77 81), 평남 대동군 反川里유적(梅原末治 藤田 亮策, 大同大寶面反川里出土一括遺物 朝鮮古文化綜鑑, 1947, pp.40 41)의 출토품 정도 가 알려져 있다. 137) 榧本社人, 金海貝塚の甕棺と箱式石棺 ( 朝鮮の考古學, 1980) pp.68 83. 138) 이 良洞里 15號墓 출토품(長 약22, 幅 약 1 )은 불명철기 로 보고되어 있는데 비록 날이 세워져 있지 않은 것으로 관찰되었으나 전체적인 형태와 身의 단면이 활형으로 되어 있는 점 으로 보아 刻刀의 未成品일 가능성이 있어 함께 다루었다.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29 하다. 이에 비해 3세기의 3/4 분기로 편년되고 있는 부산 老圃洞 33號墓 출토품(도면 17-7, 殘長 28.7, 幅 1.6 )은 身의 중간부위와 先端部의 단면이 각각 장방형과 片볼록 렌즈형으로 되어 있어 시대가 내려오면서 크기와 세부형태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일본에서 古墳時代로 내려오면서 수적으로 풍부해지는 현상과는 대조적으로 前期加耶 지역 4세기대의 분묘 출토품은 1 3세기의 예들 보다 오히려 감소된 추세이다. 禮安里 143號墓 출토품(도면17-6)이나, 도면에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4세기대 유물일 가능성이 있는 단면 V형의 道溪洞 5號토광묘 출토품(長 25, 폭 1.6 )139) 및 先端部 蛇頭形의 加 音丁洞 5號木槨墓 출토품(殘長 19.7, 身幅 1.1 )을 보면 이 시기 이후에 형태가 보다 다양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刻刀를 刮刀로 명명하고 있는 黃展岳은 이것을 공구라기보다 劈麻用, 竹器編織用 및 書刀用 등의 雜用具로 판단하고 있다.140) 물론 그러한 기능도 인정되는 바이나 앞서 말 한 바와 같이 목제품 및 죽제품의 平滑작업이나 세부가공에 유용한 도구로 보여지는 만 큼 기본적으로는 공구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附言하자면, 중국의 湖南省 및 그 남부지역이나 일본의 유적들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많은 철제 刻刀가 출토되는 것은 이 지역들에 森林이 풍부하고 대나무도 무성하다는 점 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한반도의 경우 주로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출토 되고 있는 현상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5) 鍛冶具 前期가야지역에 있어서는 이제까지 단조철기 제조에 있어 기본도구라 할 수 있는 망치(鎚), 집게(鉗) 및 모루(砧) 가운데 앞의 두종류만 확인되었고, 鑿으로 보고된 유 물 가운데 철편의 절단용으로 사용된 것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에 대한 파 악은 철기제작장과 같은 생산관계유적에서만 가능하고 분묘 출토품으로는 판단이 곤 란하다. 기원전 1세기에 해당하는 茶戶里 1號墓의 철기들이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 점에서 당시에 이미 여러 종류의 鍛冶具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그보다 늦은 시기의 17號墓에서 출토된 鎚(도면17-4, 長 6 ) 1점에 불과하며141) 다 른 기원후 1 3세기의 유적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수백 139) 주 38)의 보고서, p.86. 보고서에서는 이를 짧은 창 으로 보고하고 있으나 그 형태가 刻刀로 되어 있다. 140) 黃展岳, 試論楚國鐵器 ( 湖南考古輯刊 1984-2) pp142 157. 141) 주 25)의 보고서.
- 30 - 國史館論叢 第74輯 기의 분묘가 조사된 金海 良洞里유적의 경우 무수한 철기들 가운데 鍛冶具가 1점도 포함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142) 이 시기에 이러한 종류의 철기는 副葬 대상에서 거의 제외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金海 大成洞유적의 경우도 4세기 후반 이전의 분묘에는 鍛冶具가 전혀 부장되 어 있지 않고 4세기말 이후의 분묘들(土壙木槨墓)에서 그 출토예가 보이기 시작한다.143) 5세기 이후에는 다른 여러지역들에서도 부장된 예들이 확인되고 있다.144) 이와 같은 鍛 冶具 부장의 확산현상은 장인의 증가와 철기생산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배경에서 가야지역으로부터 일본으로 제철과 철기제조의 기술이 본격적으로 수출될 수 있었을 것이고 일본의 경우 5세기 전반경부터 鍛冶具가 고분에 부장되는 것 은145)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Ⅳ.맺 음 말 이상에서 낙동강 하류지역을 김해, 부산, 마산 창원의 소지역으로 구분하여 이 지역 들에서 보여지는 1 4세기 前期加耶 철기문화의 발전양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본 후 이 시기 철제 농공구 각각에 대해 명칭, 형식과 계보, 변천상 및 기능 등을 중심으로 고찰 해 보았다. 먼저 명칭이 문제가 되고 있는 철기들 가운데 農具부문에 있어서는 흔히 鑄造鐵斧라 불리우고 있는 철제 농구에 대해 중국 용어인 钁과 우리말인 주조괭이를 혼용하고자 하 였다. 공구의 경우는 鍛造鐵斧를 類槪念으로 놓고 이를 板狀鐵斧와 有銎鐵斧의 種槪念 으로 분류하였으나 자귀(錛)와의 구분은 일단 유보하였으며 흔히 鍦로 말해지고 있는 공구에 대해서는 刻刀로 새로이 명명하였다. 이러한 명칭에 대한 제시는 試論的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현재 韓 中 日 三國에서 유사한 철기들이 출토되고 있으나 서로 다른 명칭의 사용으로 혼란이 야기되고 있어 차후 국제적인 통용어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보 여진다. 이 지역 농공구의 계보는 상당수가 중국에 淵源을 두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이 서북한 142) 주 26)의 보고서. 143) 주 12)의 논문, pp.244 246. 144) 김해에 인접한 유적의 예로는 馬山 縣洞유적의 64호묘 출토품(도면17-5)을 들 수 있다(昌原 大學校博物館, 馬山縣洞遺蹟, 昌原大學校博物館學術調査報告第三冊, 1990, p.240). 145) 松井和幸, 古代の鍛冶具 ( 古文化論叢, 兒島隆人先生喜壽紀念論集, 1991) p.560.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31 - 지역을 경유하여 전래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나 钁, 板狀鐵斧, 有銎鐵斧, 刀子, 刻刀 등은 전래 이후 독자적인 변화와 발전의 양상을 보일 뿐 아니라 따비나 살포 같은 독창 적인 농구도 개발되었던 점 등이 주목된다. 농구 가운데 起耕具는 따비와 钁(주조괭이)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이 시기는 따비 괭 이농법의 시기라 규정할 수 있다. 4세기말까지도 쟁기와 같은 획기적인 철제농구의 출현 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上記의 2種이 급증하는 양상도 아직 확실하게는 포착되지 않고 있어 철제 起耕具 자체의 급진적인 질적, 양적 발전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논하기 는 어렵다. 이에 비해 鐵鎌은 4세기대에 형태상의 변화를 보이면서 상당히 보급도가 높 아지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4세기에 들어와 中耕具인 살포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아직 극히 소수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한편 공구류에 있어서는 鍛造鐵斧 가운데 板狀鐵斧는 점차 소멸되거나 기능이 變容되 는 양상을 보이는데 비해 有銎鐵斧는 4세기대 이후 형태의 다양화와 더불어 양적 증가현 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벌목에 의한 농경지의 확대와 목제 농기구 생산의 증대와 밀접 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철제 起耕具가 4세기까지 현저 한 발전을 보이고 있지 못한데 비해 도끼나 자귀로 사용되는 다양한 크기의 有銎鐵斧가 다수 출토되고 있는 점은 刃部에 철기가 장착되지 않은 목제 농구의 보급도가 크게 증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이 시기의 농업생산력 증대는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하 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刀子, 鑿, 刻刀 등도 점차 증가하고 형태상의 다 양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농구제작 이외의 기타 수공업도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고 판단하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농공구들에 비해 武器 武具나 馬具가 보다 획기적으로 발전한 점이 4 세기 前期加耶 철기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이는 고대국가로 발전해 나가는데 있어 기본이 되는 생산력의 증진에 철제 농공구가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발달하기 보다는 급박해지는 주변정세로 인해 自存을 위한 軍事 부문에 보다 중점이 놓인 철기문화가 유 지되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戰國時 代에도 철이 무기보다는 거의 대부분 농공구의 제조에 사용되었던 중국의 경우와는 크게 대비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그리고 상당수의 철기들이 그 용도에 있어 다양성을 갖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지적하 였다. 이러한 기능에 관한 사항은 명칭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는 만큼 앞으로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당시 철기의 성격 규명에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은 그 계통과 발전의 문제를 밝히는 것
- 32 - 國史館論叢 第74輯 으로서, 이에 있어서는 먼저 각 유물별로 중국이나 서북한지역과의 비교, 내적 발전논리 를 밝히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연구 및 일본과의 비교고찰 등이 충분히 이루어져 하겠으나, 사실 본 논문에서는 多種의 철제 농공구들을 동시에 거론함에 따라 개별 철기 들에 대한 설명에 있어 미흡한 점이 한 둘이 아니라는 점과 고분 출토품을 주된 대상으 로 한 논지에 상당한 한계가 있다는 점 등을 솔직히 自認하지 않을 수 없다. 차후 가야 철제 농공구의 성격이 보다 종합적으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우선 고분 중 심의 절름발이 고고학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균형있게 조사되어야 할 것 이고, 이를 기반으로 각 기능별 철기들의 기본적인 문제들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경 제, 사회적인 측면 등의 보다 다각적인 문제들까지 활발하게 논의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先學諸賢의 叱正을 바라마지 않겠다. 本考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료의 도움을 주신 安承模, 權五榮, 李在賢, 郭東哲 등 諸 氏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追 記 脫稿 직후 茶戶里유적(李健茂 外,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 Ⅳ, 考古學誌 第7輯, 1995) 과 道溪洞유적(東義大學校博物館, 昌原道溪洞古墳群, 東義大學校博物館學術叢書4, 1996)과 같 은 창원지역 유적들의 新資料가 보고되었다. 前者의 유적에서는 龍淵洞유적의 梯形具와 유사한 철기(異形鐵器로 보고)가, 그리고 後者의 유적에서는 有銎의 삽형 철기가 각각 출 토되어 당시 철제 농구의 종류가 보다 다양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들에 대 해서는 차후 철제 농구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論考에서 다루고자 한다.
<표 4> 遺蹟名 遺 構 數 土壙墓 1 良 土棺墓壙 木 3 洞 里 土 壙 木 17 槨墓 會峴里 貝塚 府 貝塚 A地區 院 B地區 洞 C地區 土壙木 槨墓 1 (74號) 石棺系 4 禮 石槨墓 安 石槨墓 3 里 Ⅰ 石槨墓 3 石槨墓 13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33 金海地域 鐵器 出土樣相 鐵 器 備 考 農工具 兵 器 其他 供伴遺物 劍把頭飾1 劍2, 鉾2 A.D.1세기 方格規矩四神鏡1 鎌1, 钁1 土器 有銎斧1 A.D.1세기 (瓦質3, 軟質1) 刀子片1 鎌5, 钁1 劍4, 鉾12 有 銎 斧 7, 鏃44(+일괄) 瓦質土器 20여 점 A.D.2 3세기초 鑿2 小刀1 玉類多數 刀子6 有刺利器1 鎌1, 斧2 刀?1 石器 片1 土器類, A.D.1 3세기 刀子2 鏃1 骨角器, 貨泉外 *鐵滓2 刀子19 鏃3 土器(軟質, 陶質) A.D.2 4세기 釣針1 錐1 裝飾品, 骨角器 石器外 土器(軟質, 陶質) A.D.1 2세기 鏃1 骨角器, 石器外 土器(軟質, 陶質) A.D.1 2세기 钁1 骨角器, 石器外 土器(瓦質:臺附直口壺 钁2 鉾2 1, 爐形1, A.D.4세기 前葉 有銎斧1 (大小) 陶質短頸壺1外) Ⅰa期 骨鏃12 刀子1 土器(軟質:高杯2, 短頸 A.D.4세기 中葉 *钁片 壺1, 陶質:短頸壺2外) Ⅰb期 채집 骨鏃1 土器(陶質:高杯3, 短頸 A.D.4세기 後葉 刀子2 壺1外) (鹿角柄附) Ⅰc期 玉類25 鎌2, 有銎 土器(陶質:高杯5, 短頸 斧1 壺4外, A.D.5세기 前半 刀子2 軟質土器2 Ⅱa, b期 (鹿角柄附) 紡錘車) 鎌8, 有銎 斧4 釣針1 土器(8種74점) A.D.5세기 後半 刀子14 鉾4 꺽쇠 1 金銅耳飾1 鏃10 Ⅱc, d期 (鹿角柄, 3 玉類9, 砥石1 木柄)
- 34 - 鐵 器 農工具 兵 器 其 他 供 伴 遺 物 備 考 土器43(瓦質, 鎌2, 钁2 鉾2 A.D.4세기 軟質, 陶質) 土壙木槨墓 7 有銎斧8, 鑿2 鏃34 前葉 骨鏃45 刀子3, 刻刀1 Ⅰ段階 도질토기증가 土器82(瓦質, 鎌4, 钁2 陶質) A.D.4세기 鉾3, 鏃40 꺽쇠20, 針1 軟質, 土壙木槨墓 11 有銎斧8, 玉類13 中葉 살포1 有刺利器1 도질토기가 Ⅱ段階 刀子6 절대다수 鎌5, 有銎斧6, 鉾2, 鉾形利 土器(陶質,軟質)81, A.D.4세기 土壙木槨墓 165 살포1, 鑿2, 器3, 鏃22, 玉類43, 土製 後葉 石槨墓 刀子9 (鹿角柄 冑1, 紡錘車1 Ⅲ段階 附 다수) 有刺利器1 土器(陶質,軟質)43, A.D.5세기 土壙木槨墓 27 鎌4, 有銎斧2, 鉾1, 鏃2 土製紡錘車2 前葉 石槨墓 刀子6 *모두 여성, 소아墓 Ⅳ段階 土器(瓦質, 軟質, A.D.4세기 有銎斧2, 鏃5 土壙木槨墓 7 鎌2, 陶質)34, 玉類43, 中半 刀子1 鐵器는 7호묘출토품 鉾 鋌多數, 교具 钁3, 有 大刀片1, A.D.4세기 土壙木槨墓 4 鎌2, 5, 鏃19, 銎斧4, 刀子6 有刺利器3 1, 꺽쇠3 土器(陶質)15 後半 교구1, 環2, 有銎斧3, 鏃4, A.D.4세기 石槨墓 2 鎌2, 띠장 신 구4, 土器(軟質)1 刀子1 有刺利器2 꺽쇠6 初 有銎斧2, 鏃4 陶質土器8種17点 A.D.4세기 土壙木槨墓 2 鎌1, 刀子2 瑠璃玉60 中葉1期 陶質土器5種27点 A.D.4세기 有銎斧1, 土壙木槨墓 3 鎌1, 玉類3, 철기는 25 中葉1期 刀子1 호묘출토품뿐 鎌3, 钁1, 軟質土器 A.D.4세기 鏃9, 異形1, 교具 陶質, 石槨墓 3 有銎斧4, 鉾3, 7種26点, 1, 꺽쇠9 甲冑(35號) 後葉2期 刀子3, 刻刀1 甲冑1 鎌1, 钁4, 異形2, 陶質, 軟質土器 A.D.5세기 土壙木槨墓 4 有銎斧3, 環鉾2,頭大鏃4刀 1, 鋌2, 片(鏃莖?)1 8種16点, 숫돌1 前葉3期 刀子2 遺蹟名 遺 禮 安 里 Ⅱ 退 來 里 七 山 洞 國史館論叢 第74輯 構 數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35 - 遺蹟名 遺 構 數 農 工 具 鐵 兵 器 器 其 他 供 伴 遺 物 備 考 七 軟質土器4種12点 A.D.5세기 山 石槨墓 4 刀子2 紡錘車1, 土製玉30, 前葉3期 洞 玉類138 A.D.2세기後 土壙木棺墓 1 鎌1, 斧1 鉾1, 鏃1 瓦質土器5 3前半 斧2, 大刀3, 釣針2 土器46, 銅鉾1, 玉類 A.D.3세기 土壙木槨墓 1 鎌1, 鑿多數 鏃多數 後半 劍2, 大刀4, 筒形銅器3, A.D.4세기 刀子1, 鉾3, 槍2, 曲 꺽쇠8 土器38, 土壙木槨墓 4 斧12, 巴形銅器6, 盾2, 前半 鑿1 刀1, 刀1, 鏃 大 玉類12外 123余, 冑2 劍4, 大刀1, 銜1, 杏葉1, 土器93, 筒形銅器2, 鏃34, 꺽쇠26, 異 巴形銅器1, 銅鏡1, A.D.4세기 土壙木槨墓 61 斧5, 刀子5 曲刀2, 刀1, 冑2, 挂 鋌60 玉類多數, 骨角器2, 後半 成 石槨墓 甲1, 短甲1, 形1, 頸甲2, 腰甲1 余, 쐐기4 紡錘車1 土器80黎, 筒形銅器 劍6, 鏃50余, 鑿10, 冑3, 挂甲2, 轡3, 鐙3, 2, 巴形銅器1, A.D.4세기末 土壙木槨墓 1 斧6, 鍛冶具1 石鏃3, 短甲1, 頸甲2 鋌150 骨鏃30, 洞 玉類多數 杏葉4, 土器49, 鉾37, 鏃243 銜3, 鐙子1, 鉸具 筒形銅器9, 犁2, 鎌5, 斧 余, 冑2, 挂 土壙木槨墓 91 16, 鑿105, 刀 甲3, 短甲1, 2, 銨橋2, 盾2, 화살통1, A.D.5세기 石槨墓 異 玉類多數, 破鏡1, 前葉 子8, 鉗1 馬冑1, 馬甲 꺽쇠33, 形1, 鋌30?1 余, 쐐기15 紡錘車1
- 36 <표 5> 國史館論叢 第74輯 釜山地域 鐵器 出土樣相 遺蹟名 遺 構 數 農 工 具鐵 兵 器 器 其 他 供 伴 遺 物 備 考 無文土器 福泉洞 住居址 1 片2 彌生土器 B.C.2세기? 萊城 紡錘車1 硬質 1 鎌1 釣針1 土器(軟質多數, 刀子1 少數), 骨角器 等 A.D.2 3세기? 朝島 貝塚 圍石墓 1 劍1, 鏃3 骨鏃, 頸飾 樂民洞 貝塚 1 刀子1 金海式土器骨角器 鎌7, 钁10, 環頭大刀3, 瓦質土器多數 A.D.3세기 老圃洞 土壙墓 45 有銎斧28, 刀 陶質土器小數 (木槨墓主) 子22, 사1 鉾10, 鏃178 中後半 玉類多數 福泉洞 土壙木槨墓 1 鉸具狀2, 土器(瓦質2, 陶質4, A.D.4세기 38號墳 異形1 軟質1), 靑銅製劍把1 前半 福泉洞 土壙木槨墓 1 鎌1, 有銎斧2, 鉾4(板狀2), 有刺利器1 土器(瓦質1, 陶質31, A.D.4세기 57號墳 刀子3, 鑿1 鏃5, 板甲1, 꺽쇠5 軟質10) 中後葉 鐙子 따비1, 鎌1, 環頭大刀2, 轡1, 1, 有刺利 福泉洞 土壙木槨墓 1 钁2, 有銎斧 小刀1, 鉾12, 器1, 꺽쇠 土器(瓦質3, 陶質32, A.D.4세기末 60號墳 7, 刀子10, 鏃25 3, 馬具附 軟質2) 鑿2 屬具 石棺墓 鎌2, 刀子2, 劍1, 鉾1 土器(陶質:4種11, A.D.3 4세기 6 (板石) 钁1, 有銎斧3 鏃2 軟質1) 劍1, 大2 五倫台 石槨墓 鎌7, 钁1, 有 小刀2, 鉾3 꺽쇠2 土器(陶質:8種81 29 銎斧7, 刀子 鏃26 A.D.4세기 (割石) 鋌11 軟質9) 7, 鑿3 紡錘車2 有刺利器5 鎌1, 钁2, 鉾1 鋌片3 土器(瓦質少數, 陶質 A.D.4 5세기 華明洞 石槨墓 7 有銎斧4 鏃12 ㄱ字形1 多數) 靑銅鉸具일괄 刀子4, 錐1
<표 6> 遺蹟名 遺 構 數 茶 戶 土壙木槨墓 46 里 城 貝塚東區 西南區 山 北區 甕棺墓 三 東 土鑛墓 洞 石棺墓 表土層 土壙墓 道 溪 洞 34 11 6 3 土壙墓 10 石槨墓 2 前期加耶의 鐵製 農工具 - 37 昌原 馬山地域 鐵器 出土樣相 鐵 器 供 伴遺物 備 考 農工具 兵器 其 他 板狀斧42, 柱狀 斧1, 有銎斧17, 劍11, 劍 蕨手形裝飾鐵器 土器(無文, 瓦質)2, 钁13, 따비7, 片4, 鉾 1, 螺旋形1, 異 靑銅(劍, 鉾, 鏡, B.C.1 鎌11, 鑿8, 刀 20, 戈1, 形3, 釣針2, 塊 五銖錢, 鐸), 子4, 刻刀6, 槌 鏃21 2, 片類点 漆器(容器, 弓矢, 筆 A.D.1세기 1, 扇外), 玉類外 대팻날1 土器, 石器, 玉類骨 A.D.0 4세기 有銎斧1 角器 土器, 石器, 玉類骨角 * 冶 鐵 址? 鑿1, 刀子2 鏃1 꺽쇠片 器, 銅釧, 五銖錢 A.D.0 4세기 钁1, 有銎造1, 土器, 石器, 玉類骨角 A.D.0 4세기 鑿1, 刀子16, 鏃14 器, 靑銅器 椎?1 靑銅鏃2, 玉類多數, A.D.2 3세기 鎌2, 刀子4 劍11, 鏃5 土器10 鎌1, 钁1, 有銎 土器17(瓦質, 硬質), A.D.3세기 造1, 鑿1, 刀子 鉾1, 鏃20 玉類多數 3 鎌1, 有銎斧3, 鏃1 土器13(瓦質, 硬質), A.D.3세기 異形2 板狀斧3, 刀子1 玉類多數 钁6, 有銎斧2 劍1, 鉾2, 有銎斧1 土器1(火爐形, 瓦質) A.D.3세기? 鏃3 鏃35 鎌2, 钁3, 有銎 鉾3, 小 銜1, 鉸具4, 環 土器(軟質10, 硬質 A.D.4세기 斧3, 鑿1, 刀子 胡籙1, 刀1, 有刺 1, 金具5 54), 玉類4 5, 刻刀1 利器1 大刀1, 鉾 鉸具1, 金具5, 2, 土器(軟質2, 硬質8), A.D.5세기 刀子1 鐙子1, 環1, 鏃7, 꺽쇠2 金銅耳飾3, 玉類1 有刺利器2
- 38 遺蹟名 遺 構 數 土壙木 5 (Ⅰ期) 土壙木槨墓 6 縣 (Ⅱ期) 土壙木 13 (Ⅲ期) 洞 土壙木槨墓 12 (Ⅳ期) 土壙木 7 (Ⅴ期) 加音丁洞 土壙木槨墓 9 國史館論叢 第74輯 鐵 器 農 工 具 兵 器 其 他 供 伴 遺 物 備 考 土器(陶質)5種19 A.D.4C 鏃5 紡錘車1, 玉類104 初 前半 土器(硬質7種37, 鎌1, 有銎斧3, 鏃23 鋌5, 槐1 軟質2), 紡錘車1, A.D.4C中葉 刀子1, 鑿1 玉類48 鎌1, 有銎斧1, 釣針1 土器(硬質10種54, A.D.4C後半 刀子4, 鑿1, 鉾1, 鏃23 鋌4, 異形2 軟質4), 紡錘車2 錐?1 鎌1, 有銎斧3, 大刀1, 鉾3, 釣針1, 銜1, 土器(硬質11種47, A.D.4 5C初 刀子7, 鑿3 鏃20 鉸具1, 鋌7 軟質4種8), 玉類5 鎌2, 有銎斧1, 長劍1, 鏃14 釣針1, 鋌6, 土器(硬質6種32), A.D.5C前半 錐?1 異形2 玉類82 鎌3, 有銎斧2, 鏃2 鋌8 土器(陶質), 玉類 A.D.4C後半 刀子5, 刻刀1 5C前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