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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15 - 이를 통해 중전과 신료들 사이에 군신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묘현 이후 백관의 陳賀를 폐 할 수 없다고 나섰던 것도 이러한 입론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친영에 이은 묘현례의 시행은 중전의 위상을 새로운 차원에서 규정하는 것이었 고, 이는 신씨 복위 상소에서 드러나듯이69) 중전으로 간주되는 신씨를 출궁시킨 반정공 신의 위상을 忠逆是非로까지 몰고 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70) 이 때문에 친영까지는 혼례 의 일반적 차원에서 수용될 여지가 있었으나, 친영이 묘현례와 연계될 경우 전혀 다른 차 원의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초 친영례를 반대한 입장에서 보면 묘 현례는 더더욱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광필 등은 앞서 묘현을 행한 예가 없다는 것을 지적함과 아울러 하물며 우리나라의 五禮儀 는 오로지 開元의 禮를 따랐으나 유독 謁廟의 의논은 깎고 싣 지 않았으니, 그 또한 고금의 情文을 참고하고 時俗의 마땅함을 참작한 것입니다. 祖宗께서 刊定하신 뜻에는 반드시 소견이 있으니 지금도 또한 先王의 舊制를 다 버리고서 억지로 古 典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71) 라며 반대하였다. 앞서 館所에서 친영례를 시행하는 데 찬동하였던 南袞 역시 더구나 祖宗朝에서 古禮를 참고하여 一代의 제도를 정했으되 묘현의 예를 빼버렸습니다. 왕후의 묘현은 經傳에 실려 있지 않으니, 이것으로 보면 친영을 경하게 여기고 묘현을 중하 게 여기는 뜻을 신은 알 수 없습니다. (중략) 비록 廟에 가 뵙지 않더라도 조정의 흠이 되 는 일은 아닙니다.72) 라고 하여 묘현에는 반대하였다. 申用漑 역시 廟見이 중한 禮이기는 하나 祖宗께서 時宜를 참고하여 만세의 모범을 삼으셨고, 宋元綱 目 도 그것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그 사이에 은미한 뜻이 있는 것이므로 가벼 이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73) 69) 친영이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신씨 복위 상소에 인용된 공자의 언급 에서 나온 것이다. 70) 신씨가 복위된 후 유순정 등의 후손이 대죄를 청하는 상황에서도 이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英祖代 신씨 복위의 의미에 대해서는 윤정, 朝鮮 中宗 英祖代 大學衍義補 進講의 의미, 奎 章閣 24, 2001 참조. 71) 中宗實錄 권28, 中宗 12년 7월 己亥, 况我朝五禮儀 專祖開元禮 而獨謁廟議 則刪而不著 盖 亦參取古今情文 酌以時俗之宜 祖宗刊定之意 必有所見 今亦不必盡捨先王舊制 而强從古典也. 72) 中宗實錄 권29, 中宗 12년 8월 乙巳, 况祖宗朝 參攷古禮 定爲一代之制 而闕其廟見之禮 王 后廟見 不載經傳 以此觀之 親迎爲輕 廟見爲重之意 臣未之知也 (중략) 雖不見于廟 亦非朝廷欠闕 之事也. 73) 中宗實錄 권29, 中宗 12년 8월 乙巳, 廟見 雖禮之重者 祖宗參攷時宜 以爲萬世之懿範 宋元

- 16 - 國史館論叢 第106輯 라고 하여 정광필 남곤과 같은 입장을 보였다. 이들 외에 金詮 高荊山 李繼孟 安瑭 金克愊 등이 같은 의견이었다. 이들은 묘현과 관련하여 공통적으로 祖宗 과 時宜 라는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오례 의 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時俗의 마땅함을 고려한 결과라고 본 것이나 祖宗朝에서 古禮 를 참고하여 一代의 제도를 정했다고 한 것, 그리고 祖宗께서 時宜를 참고하여 만세의 모 범을 삼았다고 한 것 등은 그 표현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초 친영에 반대한 논거이기도 하였다. 이는 사림파가 원론적인 차원에서 친영과 묘현을 연계하여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을 祖 宗의 권위와 時宜의 적합성이라는 관점에서 반박한 것이다. 사림파가 친영 뒤에 당연히 묘현이 이어져야 한다고 본 것과 달리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신용개의 지적처럼 친영한 뒤에 반드시 묘현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이다.74) 趙光祖와 奇遵을 비롯한 사림파는 반대론을 펴는 대신들을 맹렬히 비난하였으나, 중종 은 정부와 육조의 반대를 명분으로 끝내 거부함으로써 묘현은 실행되지 않았고, 중종이 중전과 함께 大妃에게 豊呈을 올리는 것으로 의례가 마무리되었다.75) 친영을 적극 수용하던 중종이 묘현에는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이것이 야기할 수 있 는 정치적 문제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당초 친영에 찬성하여 중종의 실 행 결정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던 남곤이 묘현에서는 강력한 반대론으로 돌아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상 묘현례의 실행을 둘러싼 정책 논의에서 사림파와 대립적 인물을 보인 주요 인물 로는 鄭光弼 申用漑 金應箕 金詮 南袞 高荊山 李繼孟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 개 당초 친영례의 시행에도 반대했던 사람들이었다. 南袞만은 친영례에 찬성하였으나 묘 현례에서는 반대로 돌아섰는데, 이는 그의 입론이 친영과 묘현을 연계하여 이해하는 사림 파의 주장과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綱目 亦不書之 則必有微意存乎其間 不可輕變也. 74) 中宗實錄 권28, 中宗 12년 7월 庚子 親迎後必爲之廟見 臣未之知也. 75) 中宗實錄 권29, 中宗 12년 8월 戊午.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17 - Ⅲ. 훈구파의 정치적 사회적 속성 1. 정치적 속성 1장에서는 인사 및 정책 논의 과정에서 사림파와 대립하는 훈구파 인물들을 추출하여 보았다. 하지만 훈구파로 분류되더라도 이들이 보여주는 행적은 매우 다양하고 詳略의 차 이가 있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적 사회적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속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을 선정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차적으로 고려되는 요소는 이들이 역임한 관직이다. 당시 훈구파와 사림파간의 갈등이 심화된 데에는 사림파가 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하여 비판 세력으로 기 능하고 있었다는 점이 강하게 작용했다.76) 따라서 이들과 대비되는 훈구파는 정책의 입 안 실행 주체인 정승 판서를 중심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종대 의정부 및 육조판서의 역임자 명단을 정리한 것이 <표 1>과 <표 2>이다. 이 때 훈구파는 주로 중종 10년에서 14년 사이에 사림파와 대립하고 있던 정치세력을 준거로 하지만, 이들 중에서 관직을 매개로 핵심적인 인물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전후 시 기 정치적 경력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중종 원년부터 중종 25년까 지를 대상으로 정리하였다.77) <표 1> 중종 원년 25년 의정부 역임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좌찬성 박원종 박안성 1 유순 김수동 박원종 김수동 유순정 2 유순 박원종 유순정 박안성 성희안 성희안 송일 3 유순 박원종 유순정 권균 우찬성 노공필 노공필 박안성 송일 송일 이손 좌참찬 박원종 민효증 이손 이손 권균 이손 신용개 윤금손 우참찬 민효증 이손 김응기 이손 신용개 장순손 신용개 76) 김범, 조선전기 훈구 사림세력 연구의 재검토, 韓國史學報 15, 2003. 77) 중종 25년은 南袞 등에 의해 실각했던 金安老가 복귀하여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기점으로서 이후 정계는 世子(仁宗)와 慶源大君(明宗)의 輔導를 둘러싸고 外戚을 매개로 새롭게 분화되었 다. 이 시기는 훈구파 사림파의 대립 구도와는 다른 차원에서 분석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본 고의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명종대 정계의 동향에 대해서는 李宰熙, 朝鮮 明宗代 戚臣政 治 의 전개와 그 성격, 韓國史論 29, 1993 참조.

- 20 이조판서 김극성 18 이항 김극픽 이행 19 김극핍 윤은보 20 윤은보 허굉 21 22 23 24 25 國史館論叢 第106輯 호조판서 고형산 김극픽 이자견 안윤덕 안윤덕 안윤덕 예조판서 홍숙 김극성 윤은보 윤은보 장순손 장순손 심정 허굉 김극성 김극성 이항 허굉 안윤덕 심정 허굉 성세숙 안윤덕 김극픽 허굉 윤은보 이항 신공제 신공제 손중돈 한효원 윤은보 허굉 윤은보 홍숙 조계상 신공제 김극성 윤은보 홍숙 홍언필 신공제 윤은보 유여림 홍언필 장순손 신공제 유여림 병조판서 형조판서 장순손 홍숙 조계상 홍숙 유담년 조계상 유담년 김극픽 조계상 심정 심정 김당 김극픽 신상 한형윤 성운 한형윤 이항 한형윤 신공제 이항 한형윤 신상 윤은보 조계상 박호 홍언필 김극성 공조판서 안윤덕 김굉 임유겸 임유겸 조계상 손중돈 성운 한형윤 홍언필 한효원 조윤손 조윤손 조원기 조계상 조계상 윤인경 조계상 위의 표를 보면 鄭光弼 申用漑 金應箕 金詮 李惟淸 權鈞 南袞 沈貞 李荇 張 順孫 高荊山 孫澍 李繼孟 洪淑 등 인사나 정책 논의에서 사림파와 대립하던 인물들 을 발견할 수 있다.78) 이들의 관력을 보면 기묘사화 전후에 의정부와 육조판서를 역임하 고 있다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 중에서도 정승 역임자들은 당대의 정책을 이끌어 가는 주 체인 만큼 사림파와의 대립성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나고, 정승에 오르기까지 정치적 사 회적 요소가 작용할 여지가 크다. 따라서 이들을 통해 훈구파의 속성을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종 10년에서 기묘사화가 발생하는 중종 14년까지 정승을 역임한 사람은 柳洵 鄭光 弼 申用漑 金應箕 安瑭 金詮 등 6명이다. 이 중 柳洵은 연산군 당시부터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반정 초기에도 정승을 역임하였고, 成希顔 등의 사망 이후 다시 영의정으로 등용되었다.79) 따라서 중종 초반 정권의 한 축을 구성한 연산군 舊臣의 일원으로 파악하 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80) 金詮은 기묘사화 직전에 정승에 임용되었다가 사화 발생의 책 78) 이들 중 사림의 신망을 받던 安瑭이나 사림파의 핵심 인물인 尹自任의 아버지 尹金孫은 제외 된다. 반대로 정책 대립과정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중종의 인척으로서 기묘사화를 이끌어간 중요 인물의 하나인 洪景舟도 훈구파에 포함될 수 있다. 79) 朴元宗 등 三功臣과 柳洵의 가계와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李秉烋, 앞의 책, 1984, pp.52 62 및 pp.80 81 참조. 80) 중종 초반 정승을 역임하는 金壽童 宋軼 등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반정공신과 함께 포 괄적 의미에서 훈구파에 속하지만, 사림파와 대립하는 훈구파의 중심 인물로 설정하기는 어렵다.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21 - 임을 지고 다른 정승들과 함께 교체되어 재임 기간이 한 달도 되지 않는다. 그가 정승으 로 활동한 주된 시기는 사화 후이므로 사화 이전의 정승 역임자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편 安瑭은 中宗實錄 의 史評에서 정치적으로 사림파 쪽에 서 있었음이 자주 지적되 고 있고, 실제 기묘사화 후 金安國과 함께 파직되었다. 특히 이조판서로 재임할 당시 趙 光祖 金湜 朴薰 등을 탁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림파의 정치적 진출에 중요한 역 할을 하였다.81) 그밖에 신씨 복위 상소를 올린 金淨 朴祥을 적극 옹호하였고,82) 사림파 가 적극적으로 정승으로 밀었던 사정을 감안하여 사림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83) 따라서 기묘사화 이전 정승 역임자로서 훈구파의 중심 인물로 설정되는 것은 정광필 신용개 김응기 등 3인이다. 이들은 사림파와의 제반 대립 과정에서 중심 축을 구성하고 있었다. 다음에 중종 14년에서 25년까지를 보면, 鄭光弼과 金詮 南袞 沈貞 權鈞 李惟淸 李荇 등이 정승을 역임하였다. 이 중 정광필을 제외하면 모두 기묘사화 이후에 비로소 정 승으로 활동한 인물들로서 사림파가 축출된 이후의 정국을 주도하였다.84) 또한 탄핵으로 낙향했던 이행을 제외하면 공통적으로 기묘사화 이전에 贊成과 判書 등을 역임하고 있다. 이들은 사화 이전의 정승 역임자들을 이어 훈구파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었던 인물로 설 정된다. 이상에서 鄭光弼 申用漑 金應箕 金詮 南袞 沈貞 李惟淸 權鈞 李荇 등 9명을 분석 대상으로 잡았다.85) 이들 9명의 공통적 요소를 추출함으로써 사림파와 대립한 정치 81) 中宗實錄 권22, 中宗 10년 6월 癸亥. 안당은 당시 吏曹正郞이었던 金正國과 相避되고 었던 金安國을 承旨에 議望하기도 하였다. 82) 中宗實錄 권22, 中宗 10년 8월 庚辰. 83) 안당은 그 자신이 사림파의 일원이라기 보다는 사림파의 정치적 후원자라는 의미가 강했고, 실제 정책적인 면에서는 사림파 인물들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반대세력 및 사림파 자체로부터 領袖 대우를 받는 인물로 승화되었다(李秉烋, 앞의 책, 1984, pp.87 89). 84) 이러한 관계로 인해 흔히 기묘사화 기화인이라는 점이 훈구파를 판단하는 핵심적인 기준이 되 기도 한다. 이것은 당초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정치세력에 대한 이해가 기묘사화라는 사건을 매 개로 인식된 데 따른 결과이다(申奭鎬, 己卯士禍의 由來에 관한 一考察, 靑丘學叢 20, 1935). 그러나 기화인이라는 것은 훈구파의 범주를 설정하는 하나의 보조적인 매개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정책 집단, 혹은 정치세력을 나누는 일차적인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화인이라는 사실 자체 보다는 그들이 기화인으로 인식된 이유와 관련하여 사림파의 대립집단 이라는 속성 쪽에 무게를 두고 이해할 것이다. 85) 정광필은 안당과 함께 사림파로 인식되곤 하였으며(李秉烋, 앞의 책, 4장2절, 1984), 최근에 는 신용개를 사림파로 분류하는 견해가 있다(최이돈, 조선중기 신용개의 정치활동과 정치인식, 朝鮮의 政治와 社會, 集文堂, 2002). 그러나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은 오히려 훈구 파의 중심 인물로 파악된다. 이들을 사림파로 인식하는 것은 己卯黨籍 己卯錄補遺 己卯 諸賢傳 에서 정광필을 立傳한 데서 비롯되는데, 이는 기묘사화 이후 사림의식의 확립과 명종 선조대의 정치적 현창 작업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 22 - 國史館論叢 第106輯 세력이자 당시의 지배세력으로서 훈구파의 속성을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86) 이들의 정치적인 공통성을 찾아볼 때 가장 주목되는 것은 대부분 연산군 10년 甲子士 禍를 전후한 시기에 유배되거나 파직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산군 8년에 과거에 급제한 沈貞과 연산군의 총신이었던 權鈞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갑자사 화 피화인이다.87) 鄭光弼은 갑자사화 당시 吏曹參議로 재직하면서 廢妃 尹氏의 尊號를 加上하는 것을 비 판하였다가88) 장 1백에 아산으로 유배되었다.89) 그는 앞서 연산군 8년 弘文館 直提學으 로 재임할 당시 庭試에서 製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태 50에 해임된 일도 있었다.90) 연 산군 9년에도 임금이 저녁까지 사냥하는 것을 간하였을 때 光弼이 급제하고 오래지 않아 당상관에 승진하여 그 몸이 편해졌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 것이다.91) 라고 하여 論罪된 바 있었다. 申用漑는 무오사화 당시 金馹孫이 밝힌 김종직의 제자 명단에 포함되어 연루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92) 그러나 연산군 10년 承旨 재임 중에 다시 논죄되었는데, 당시 연산군은 申用漑가 아뢴 포도의 일은 백성만을 위하고 임금은 위하지 않은 것이니 그 죄가 중한데, 경 등의 조율이 어찌 그렇게도 경한가? 다시 照律하라.93) 라고 하여 엄한 처벌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장 1백 도 3년으로 조율되었으며 告身이 추탈되었다.94) 그러나 任崇載의 加資를 탄핵한 사건에 다시 연루되어 장 80에 외방으로 定配되었다.95) 86) 이외에 기묘사화 후 정승직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판서 찬성에 포진한 인물들 다수는 훈구파 에 속한다고 볼 여지가 많다. 특히 기묘사화 기화인으로 지목된 洪景舟, 기묘사화를 전후해서 지속적으로 판서와 찬성 등을 역임하는 高荊山과 孫澍, 洪淑, 李繼孟 등도 훈구파로 분류된다. 다만 이들은 정승직에 진출한 인물들에 비해 정치 활동이나 가문 배경 등을 자세히 검출하기에 는 한계가 있고, 또 본고에서 이들을 모두 다루기는 어려우므로 차후 중종대 정책논의를 구체적 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87) 심정과 권균은 모두 靖國功臣에 녹훈되었다. 88) 燕山君日記 권52, 燕山君 10년 3월 甲申. 89) 燕山君日記 권54, 燕山君 10년 6월 丙子. 90) 燕山君日記 권42, 燕山君 8년 정월 戊寅. 91) 燕山君日記 권51, 燕山君 9년 10월 壬寅, 光弼登第未久而陞堂上 其身旣安 故如是耳. 92) 燕山君日記 권30, 燕山君 4년 7월 丙辰. 93) 燕山君日記 권55, 燕山君 10년 8월 乙丑, 申用漑所啓葡萄事 乃是爲民而不爲上 其罪重矣 卿 等照律 何其輕也 其改照. 94) 燕山君日記 권55, 燕山君 10년 8월 丁丑.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23 - 金應箕는 연산군 10년 廢妃 尹氏의 賜死 당시 담당 승지였던 李世佐 등을 凌上의 죄로 논하여 巨濟에 정배할 때, 이 일이 宗社에 관계되지 않았다고 했다가 盧公弼과 함께 논죄 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재상 중에서 이 두 사람만이 이렇게 아뢰니, 틀림없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 로 마땅히 刑訊하여 杖配해야 할 것이나 일단 職牒을 회수하고 外方에 付處하라.96) 라고 하여 이들에 대한 처벌을 지시하였고, 그 결과 城外黜送되었다.97) 李惟淸은 무오사화 당시 執義로 있으면서 김종직의 죄를 논할 때 爵號를 추탈하고 자 손을 廢錮하는 선에서 처리할 것을 건의했다가, 김종직을 비호하는 무리라 하여 형신을 받았고 장 80에 外方付處되었다.98) 이어 특지로 迎曙道察訪으로 나갔으나,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장 1백에 官奴로 되었다.99) 당시 연산군은 지금 조정을 맑게 하려 하니, 하나라도 죄인이 법망에서 빠지면 조정이 깨끗하다 할 수 없다. 戊午年의 李惟淸 같은 자는 무슨 죄를 받아 어느 곳에 있는가? 그때 죄받은 자를 모 두 고찰하여 보고하라.100) 라고 하여 무오사화 피화인 전반으로 논의를 확대하면서 이유청을 지목하였고, 이로 인해 이유청은 관노가 되는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金詮은 무오사화 당시 김종직 제자 명단에 포함되어 파직 조치되었다가101) 곧 복직되 어 大司成에 이르렀다. 연산군 10년 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장 1백 도 3년에 照律되었으 나 문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杖은 贖바치고 校理로 좌천되었다.102) 그러나 연이어 궁중 에서 활쏘기를 하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 간한 홍문관의 상소에 참여했다가 피회되 어103) 山陰으로 유배되었다.104) 95) 燕山君日記 권56, 燕山君 10년 12월 丁卯. 96) 燕山君日記 권52, 燕山君 10년 3월 庚辰, 宰相中獨此二人 啓之如此 其心必有異 故當刑訊 又可杖配 然姑收職牒 付處外方. 97) 燕山君日記 권54, 燕山君 10년 6월 乙亥. 98) 燕山君日記 권30, 燕山君 4년 7월 辛亥 庚申. 99) 燕山君日記 권56, 燕山君 10년 10월 辛未. 100) 燕山君日記 권56, 燕山君 10년 10월 戊辰, 今欲淸朝 而一有罪人 漏綱則不可謂之淸朝也 戊 午年如李惟淸者 坐何罪 在何處 其時受罪者 並考啓. 101) 燕山君日記 권30, 燕山君 4년 7월 辛亥. 102) 燕山君日記 권53, 燕山君 10년 5월 己亥. 연산군은 나중에 그를 유배한 뒤에도 유배지에서 글을 쓰게 하였는데, 이는 등 연산군의 자의 적 국정 운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03) 燕山君日記 권53, 燕山君 10년 5월 己未. 104) 燕山君日記 권56, 燕山君 10년 10월 丁卯.

- 24 - 國史館論叢 第106輯 南袞은 연산군 10년 국왕이 사냥을 하는 것에 대한 대간의 논의와 관련하여105) 태 50 에 告身을 추탈하고 원방에 부처하는 처벌을 받았다.106) 李荇은 연산군 10년 당시 副應敎로서 폐비 윤씨를 왕후로 追崇하는 것이 지나친 조치 라고 간했다가107) 장 60에 충주로 유배되었으며,108) 사건이 확대되면서 咸安으로 유배 되었다가 다시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들은 유배 후에도 국왕에 비판적인 세력으로 간주되어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다. 곧 연산군 12년 연산군의 정치를 비판하는 익명서 사건이 있자, 연산군은 김전 정광필 이 행 등이 유배되어 있는 道의 觀察使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 압송하여 刑訊하고, 자손도 의 심스럽다는 이유로 아울러 刑訊케 하였다.109) 또한 김응기는 이에 연루되어 族親이 유배 되기도 하였다.110) 이들은 중종반정과 함께 유배 등에서 풀려나 정계로 복귀하였다. 정광필은 弘文館副提 學으로 임용되었고,111) 이유청은 司憲府執義로 복귀하였다.112) 이행은 弘文館 校理 로,113) 김전은 禮曹参判으로 각각 임용되었다.114) 김응기는 명나라에 연산군의 손위를 전하는 請辞位使가 되었으며,115) 이후에도 禮曹判書로서 명나라에서 중종의 고명을 받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신용개는 刑曹參判으로 임용되었다가116) 곧이어 大提學이 되었는데117) 이 때 成希顔 과 함께 中宗의 誥命을 받기 위하여 奏聞使로 명에 다녀온 공로를 인정받아 靖国原従功 臣에 책록되었다.118) 한편 南袞은 반정 당시 喪中이었기 때문에 바로 관직에 임용되지는 않았으나 중종 2년 朴耕의 역모사건에서 沈貞 등과 같이 고변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119) 105) 燕山君日記 권55, 燕山君 10년 8월 甲申. 106) 燕山君日記 권55, 燕山君 10년 9월 乙巳. 107) 燕山君日記 권52, 燕山君 10년 3월 甲申. 108) 燕山君日記 권52, 燕山君 10년 4월 戊戌. 109) 燕山君日記 권63, 燕山君 12년 8월 癸酉. 110) 燕山君日記 권61, 燕山君 12년 1월 庚子. 111) 中宗實錄 권1, 中宗 원년 9월 壬午. 112) 中宗實錄 권1, 中宗 원년 10월 戊申. 113) 中宗實錄 권1, 中宗 원년 9월 丙申. 114) 中宗實錄 권1, 中宗 원년 9월 壬寅. 115) 中宗實錄 권1, 中宗 원년 9월 庚辰. 116) 中宗實錄 권1, 中宗 원년 9월 丙申. 117) 中宗實錄 권2, 中宗 2년 2월 戊寅. 118) 이러한 신용개의 정치적 입지는 誥命을 받은 데 대해 謝恩使로 가는 左議政 朴元宗에게 준 序 에서 더욱 정확히 드러난다. 그는 박원종이 반정을 일으킨 공을 들어 백성을 구제하여 不世의 공 훈을 세우고 萬代의 基業을 삼았다고 극찬하고 있었다( 二樂亭集 권7, 送左議政朴元宗赴京序). 119) 中宗實錄 권2, 中宗 2년 윤정월 己巳.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25 - 이처럼 훈구파의 중심 인물 다수가 갑자사화에 피화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정계에 복귀하 였으며, 반정 이후의 국가운영의 실무진으로 활동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120) 이것은 이들 이 연산군대의 정치를 부정적으로 인식함과 아울러 반정공신들로부터 정치적으로 지원받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나아가 훈구파의 정치적 지향을 규정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中宗反正 이후의 정국은 朴元宗 柳順汀 成希顔 등 반정을 일으킨 소위 三大將(三功 臣) 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표1)과 2)에서 드러나듯이 중종 원년 박원종은 우의정 좌의정을, 유순정은 우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성희안은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곧 반정 직후 병권과 인사권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 등은 연산군의 반대 세력이기 보다 측근 세력에 가까웠 기 때문에 이들의 반정에는 명분적 약점이 있었다. 이에 반정공신들은 任士洪 愼守勤 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제거하여 자신들을 차별화시키는 한편, 그 밖의 사람들은 대대적인 공 신 책봉으로 수용하였다. 따라서 중종 초반 정계 요직에는 柳洵 宋軼 등 연산군대 고위 직 역임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 역시 정국 주도자로서 부담을 안고 있었다.121) 이들은 자신들의 명분적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일군의 인물들에 주목했는데, 그들이 바로 갑자사화 피화인들이었다. 연산군 정치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만큼 그들을 정치적으 로 부각시킴으로써 반정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고, 나아가 그들을 배경으로 삼아 자신들 의 입지가 부당하다는 비판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도에서 훈구파의 주요 인물들이 정승직에 보임되는 과정에 반정공신이나 초 기 대신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림파의 일원이었던 李耔는 日 錄 에서 정광필이 정승에 오른 것이 성희안의 힘이었음을 전하고 있고,122) 신용개 역시 성희안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올랐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123) 또한 중종 11년 영의정 유 순은 신용개와 김전을 정승의 재목으로 추천하였고,124) 그 결과로 신용개가 우의정으로, 김전이 좌찬성으로 각각 임용되었다.125) 한편 먼저 정승직에 오른 정광필 신용개 등은 다른 훈구파 인물들의 정승 진출에 중 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광필은 중종 8년 좌의정으로 재임할 당시 남곤과 이행의 자질을 칭송하며 적극적으로 발탁할 것을 주장하였고,126) 중종 11년에도 유순과 함께 정승감으 120) 이들 외에 張順孫도 같은 경력을 보이고 있다. 121) 반정공신들의 반정 이후 정국 수습책에 대해서는 윤정, 앞의 논문, 1장 1절, 1997 참조. 122) 陰崖集 권3, 日錄 癸酉七月. 123) 容齋集 권10, 議政府左議政申公神道碑銘. 124) 中宗實錄 권24, 中宗 11년 4월 戊辰. 125) 中宗實錄 권24, 中宗 11년 4월 辛未. 126) 中宗實錄 권21, 中宗 9년 10월 辛卯.

- 26 - 國史館論叢 第106輯 로 신용개와 김전을 추천한 바 있다. 곧이어 대제학 임용에서도 김전과 남곤을 적임자로 꼽았다.127) 기묘사화 직전 신용개가 사망하고, 새로이 재상감을 논의할 때에도 정광필은 老成한 신하를 먼저 써야 한다는 논지에서 老病의 부담을 무릅쓰고 김전을 추천하였 고,128) 결국 김전은 우의정에 기용되었다. 이처럼 훈구파의 중심 인물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갑자사화 피화인으로서 반정공 신과 연결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 특징은 훈구파의 정치적 지향과도 관련되어 있 는 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연산군의 정치를 선왕대의 법제를 무너뜨린 弊政으로 규정하여 부정하면서, 중 종대의 정책 운영의 방향을 祖宗成憲의 준수 로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經國大典 과 五禮儀 로 대표되는 성종대 법제를 복구하고 이를 정책의 운영 논리로 채용하고자 하였다. 경국대전 을 祖宗成憲의 구현체이자 국가 운영에서 다른 어떤 규범보다 우선하 는 一代의 定規 로 간주하였으며,129) 국가 의례의 경우에는 오례의 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130) 이러한 지향은 1장에서 살펴본 묘현례 반대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정광필은 선 왕의 舊制를 다 버리고 억지로 古禮를 따를 필요는 없다 고 하였고,131) 남곤은 祖宗朝에 서 古禮를 참고하여 一代의 제도를 정했다 고 하였으며,132) 신용개는 祖宗께서 時宜를 참고하여 만세의 훌륭한 모습을 만드셨다 라고 하여133) 한결같이 조종의 법제인 오례의 의 禮制 틀을 준수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지향은 법제나 경제 정책 전 반에 걸쳐 투영되고 있었다.134) 이처럼 훈구파가 조종성헌의 준수를 강력하게 천명한 것은 이들이 연산군 폐정의 직접 적인 피해자로서 반정 후 폐정을 바로잡는 책임자였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연산군 정치에서 드러난 바와 같은 국왕의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국정 운영을 견제하려는 지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135) 127) 中宗實錄 권24, 中宗 11년 4월 癸酉. 128) 中宗實錄 권37, 中宗 14년 11월 庚戌. 129) 윤정, 앞의 논문 2장 1절, 1997 참조. 130) 經國大典 禮典 儀註에는 五禮儀 를 준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31) 中宗實錄 권28, 中宗 12년 7월 己亥, 不必盡捨先王舊制 而强從古典也. 132) 中宗實錄 권29, 中宗 12년 8월 乙巳, 祖宗朝 參攷古禮 定爲一代之制. 133) 中宗實錄 권29, 中宗 12년 8월 乙巳, 祖宗參攷時宜 以爲萬世之懿範. 134) 윤정, 앞의 논문, 1997 앞의 논문, 1998. 135) 이것은 정책의 안정성과 신뢰성이라는 요소와도 관련되어 있는데, 사림파보다는 사림파의 입 론에 이끌려 입장을 자주 번복하는 중종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기묘 사화 과정에서 중종이 密旨를 통해 전격적으로 사화를 일으킨 것이나 趙光祖의 賜死를 비롯해 과격한 처벌 조치를 내리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중종의 정계개편에 대해서는 金墩, 中宗代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27 - 다른 하나는 중종반정 및 반정공신의 명분에 관한 사항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 를 보인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사안은 개별적으로 고치는 것을 배제하지 않으나 원칙 적으로 그것이 반정의 명분을 손상시키는 데는 반대하였다. 신씨 복위에 대한 논의에서 훈구파가 복위 반대를 천명한 것은 그 예이다. 논의 당시 김정과 박상은 신씨의 폐출이 신수근을 제거한 三功臣이 保身을 위해 저지른 행위라고 보았다. 이는 일차적으로 반정공신의 도덕성에 대한 비난의 의미였지만, 이들이 주도한 반정의 정당성 자체를 위협하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앞 절에서 본 것처 럼 이들의 상소에 대해 훈구파 대부분이 경솔하고 잘못된 행동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功臣改定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靖國功臣이나 定難功臣이 과람하게 책정되었 다는 것은 훈구파도 인정하는 것이었으나 개정 자체에는 난색을 표하였다. 신하로서 勳 籍에 오른 이상 社稷에 관계되는 大罪가 아니라면 함부로 고칠 수 없다 는 것이 기본 입 장이었다.136) 후대의 논의는 가능하지만 당대에 追改하는 것은 정치 운영의 신뢰성을 떨 어뜨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문제가 많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던 定難功臣에 대해서도 경솔하게 고칠 수 는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137) 靖國功臣에 대해서도 정국공신은 이미 歃血同盟하였으므로 追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간이 논한지 이 미 오래고 사직하기에 이르렀으니, 4등 중에서 物論이 시끄러운 자만을 특별히 재량하여 줄 이소서. 그러면 공론이 진정되고 조정이 안정될 것입니다.138) 라고 주장하였다. 곧 過濫을 인정하여 개정에 들어간 상황에서도 훈구파는 원칙적으로 개정은 불가하다 는 점을 전제하면서 부득이 실행되는 개정의 폭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時宜에 따른 補修 139)의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로서 개정 논의가 공훈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볼 때 훈구파는 갑자사화 피화인으로서 반정공신의 지원 속에 정치적으로 성 장하였으며, 경국대전 등 성종대의 법제를 토대로 중종과 반정공신의 정치적 입지를 인 정하는 방향에서 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훈구파의 정치적 속성 密旨 에 의한 정치운영과 그 성격, 朝鮮의 政治와 社會 集文堂, 2002 참조. 한편 연산군의 자의적 국가운영에 대해서는 金墩, 앞의 책, 2장 3절, 1997 참조. 136) 中宗實錄 권32, 中宗 13년 4월 癸巳, 人臣有微榮 策名勳列者 非關社稷大罪 則豈宜容易更改乎. 137) 中宗實錄 권27, 中宗 12년 3월 己卯. 138) 中宗實錄 권37, 中宗 14년 11월 壬辰, 靖國功臣 旣與之歃血同盟 今不可追改也 然今臺諫之 論已久 至於辭職 請於四等中物論勝播者 特令裁减 則公論定而朝廷安矣. 139) 이것은 경국대전 에 입각한 체제 운영에도 적용되는 입론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윤정, 앞의 논문, 2장 1절, 1997 참조.

- 28 - 國史館論叢 第106輯 은 기존의 체제(= 경국대전 체제)를 유지하는 바탕에서 당면 문제를 해결(=時宜 補修) 해 나가는 保守 로서 규정할 수 있다. 2. 사회적 속성 앞에서는 사림파와 대립하던 훈구파가 가지는 정치적 속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은 정치 주도세력으로서 기존의 체제를 토대로 현안을 풀어가려는 保守 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은 이들의 사회적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인 바, 훈구파의 속성을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통상 정치 주도세력으로서 보수 의 속성 은 사회적으로 보면 지배계급으로서의 속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훈구파의 사회적 속성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선조 이래의 사회적 기반, 곧 가문적 배경이다. 중세 사회에서 정치적 성장과 가 문적 배경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거니와 勳舊 라는 개념에 부합하는 조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家系와 주요 先祖들의 사적을 찾아볼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혼인 등을 통해 형성되는 횡적인 연결망이다. 고대 사회와 같은 강력한 계급내혼은 아니지만 지배계급 내부에는 결혼을 통한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이것이 현실 적인 세력 기반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여기에 결혼과 같은 직접적인 결합은 아니라 하 더라도 각 인물 사이에 형성된 교유 관계도 사회적 연결망을 파악하는 데 참고할 수 있 다. 먼저 앞서 다루었던 9인의 계보를 정리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 鄭光弼 龜齡 賜 蘭宗 光輔 士龍 光弼 勞謙 惟仁 芝衍 福謙 惟吉 昌衍 廣成 太和 정광필의 증조부 鄭龜齡은 結城縣監을 지냈고, 조부 鄭賜는 과거에 급제한 뒤 直提學 을 거쳐 晉州牧使를 지냈다.140) 부친 鄭蘭宗은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이 左參贊에 이르 렀으며, 성종 2년 佐理功臣에 녹훈되었다. 정광필의 가문은 그의 후손대에 더욱 번창했는데, 鄭惟吉이 그의 손자이고 鄭昌衍은 증손이다. 현종 때의 재상 鄭太和는 정창연의 손자이다. 한편 명종 대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湖陰 鄭士龍은 그의 조카이다. 140) 鄭文翼公遺稿 附錄, 神道碑銘.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29 - ② 申用漑 德麟 包翅 檣 叔舟 澍 從濩 潛 㴐 用漑 涼 汝樑 신용개의 가문은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명문이다. 申德麟은 고려에서 典儀判書를 지냈 고, 李穡 鄭夢周와도 교분이 있었다. 申包翅는 고려 우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 선이 개국한 뒤에도 관직 생활을 이어 工曹參議에 이르렀다. 또한 신용개의 증조부인 申 檣은 태종 2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工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오래 동안 大提學을 역 임하였다. 이처럼 신용개의 가문은 고려말부터 이미 중앙 정계에 진출해 자리를 잡고 조 선초기까지 그 위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용개의 가문은 조부인 申叔舟에 이르러 최고의 가문으로 자리잡았다. 주지하듯이 신 숙주는 세조가 그를 唐 太宗의 魏徵에 견주어지던 측근으로서 조선 국가체제의 수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141) 세조의 癸酉靖難을 지원하여 靖難功臣 2등에 녹훈되었고, 세조가 즉위한 뒤 佐翼功臣에, 예종 즉위 후 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翊戴功臣에, 성종이 즉위한 뒤에는 佐理功臣에 각각 녹훈되는 등 거듭된 勳封을 받았으며, 관직도 領議政에 이르렀다. 곧 당시 최고의 훈구 대신이었던 것이다. 부친 申㴐 역시 都承旨를 거쳐 咸鏡道觀察使로 재임하던 중 李施愛의 난으로 순절하 여, 敵愾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로 인해 신용개는 어려서부터 조부인 신숙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다. 신용개 자신은 중종반정 뒤 成希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중종의 誥命을 받아와 그 공 으로 靖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또한 장인 朴楗도 정국공신 3등에 올랐으나 공신 개정 때 그 대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한편 과거에 세 번 장원을 한 것으로 유명한 申從濩와는 사촌간이다. 신종호의 아들인 申潛은 현량과에 포함되었다가 파방된 후 은거하면서 서화에 몰두하였다. ③ 金應箕 元老 澍 揚普 地 之慶 應箕 世孝 김응기의 선조 金元老는 고려말에 禮儀判書를 역임하였고, 金澍는 공양왕 4년에 명나 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지 않고 명나라에서 생을 마 쳤다고 전한다. 증조 金揚普는 聞慶縣監, 조부 金地는 德山縣監을 지냈다. 부친 金之慶은 세종 21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大司憲에 이르렀다. 141) 세조와 신숙주의 군신관계에 대해서는 윤정, 조선 世祖代 訓辭 편찬의 정치사상적 의미, 韓國學報 108, 2002, pp.42 43 참조.

- 30 - 國史館論叢 第106輯 ④ 金詮 自知 侅 友臣 諶 訢 安老 禧 詮 安道 김전의 증조부 金自知는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조선 개국 후에도 관직을 지 내 開城留後를 역임했고, 조부 金侅는 內資尹을 역임했다. 부친 金友臣은 戶曹參議에 이 르렀다. 김전의 가문은 당대에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성가를 높였다. 金諶은 金宗直의 문 인으로 성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大司憲에 이르렀다. 金訢 역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 학하였으며 성종 2년 문과에 급제한 뒤 工曹參議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金安老는 중종 과 사돈지간이 되어 한때 중종의 지원 아래 권력자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⑤ 李惟淸 穡 種學 叔野 畜 塤 惟淸 彦浩 叔畝 亨增 禮堅 耔 이유청의 가문은 牧隱 李穡의 후손으로서 조선 왕조 개창으로 이색과 이종학 부자가 화를 입는 등 굴곡은 있었으나 명망은 유지되고 있었다. 증조 李叔野는 光州牧使를 역임 했고, 李畜은 黃海道觀察使를 역임했다. 李塤은 孝寧大君의 사위로서 佐理功臣 4등에 책 록되었으며 관직은 左參贊에 이르렀다. 한편 사림파의 중요 인물 중 하나인 李耔는 이유청과 8촌지간이다. 이자는 사림파 중 에서도 급진적 개혁에 제동을 걸고 완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었다.142) 실제 이자는 정국공신 개정 당시 鄭光弼 李惟淸 등과 함께 정국공신을 追改할 수 없다는 전 제하에 문제가 있는 일부만을 개정하자는 입장을 보였다.143) 이자는 갑자사화 피화인이 자 정국공신 4등에 들어 있던 蔡壽의 사위이기도 한데,144) 그가 정국공신 개정에 소극적 이었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묘사화 후 처벌이 告身을 추탈하는 선에서 그 치는 것도145) 그의 가문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146) 142) 그가 기묘사화로 피화된 趙光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뜻을 피력하고 있다( 陰崖集 권2, 與趙季良). 143) 中宗實錄 권37, 中宗 14년 11월 壬辰. 144) 역시 채수의 사위인 金勘 金安老와 동서지간이 된다. 145) 中宗實錄 권37, 中宗 14년 12월 丙子. 146) 李耔의 年譜에 따르면 그는 高祖 李種學의 문집을 李惟淸의 가문에서 얻어 교정한 뒤 간행했 는데, 여기서 그가 이유청과 가까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陰崖集 年譜).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31 - ⑥ 南袞 天老 乙蕃 在 景文 智 儞 忭 世準 誾 乙珍 珪 致信 袞 의령 남씨는 개국공신 南在의 가계가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남재 는 동생 南誾과 함께 開國功臣이 되었으며, 관직은 領議政에 이르렀다. 남재의 손자인 南 智는 문종 때 左議政으로 皇甫仁 金宗瑞와 함께 단종의 보필을 부탁받은 誥命大臣의 한 사람으로 安平大君과는 사돈지간이었으나 계유정난 때 화는 면하였다. 남곤의 가문은 증조부 南乙珍이 남재의 부친인 南乙蕃과 형제로 되어 있다. 남을진은 參知門下府事를 지냈고, 그 아들 南珪는 都官正郞을 지냈으며, 남곤의 부친 南致信은 谷 山郡守를 지내 남재의 가문보다는 현달하지 못하였으나 비교적 가까운 관계로서 그 후광 이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147) ⑦ 權鈞 權㫜 溥 僖 近 踶 擥 儼 詳 繼 彌 逈 鈞 안동 권씨, 특히 權近 가문은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명문가였다. 권근은 물론 아들 權踶 와 손자 權擥이 모두 현달하였는데, 특히 권람은 申叔舟 韓明澮와 함께 세조의 최측근이 었다. 권균의 가문은 권근의 숙부인 權儼으로부터 내려오는 가계로서 권근 가문만큼 현달하 지는 않아 그를 제외하면 가까운 선조나 후손에 고관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남곤 가문이 남재 가문의 후광이 예상되듯 권균 가문 역시 권근 가문과 멀지 않은 관계이므로 그에 부수된 가문적 위망은 작지 않았을 것이다. ⑧ 李荇 明晨 抽 宜碩 葳 元秀 珥 宜茂 芑 荇 元禎 147) 南袞의 묘지명에서 직계 선조가 아님에도 南在와 南智를 언급한 것은 가문의 위세에서 이들이 중요한 의미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頤庵遺稿 권7, 外祖考領議政贈諡文敬南公墓誌, 高祖諱天老 知靈光郡事 以二孫在誾 俱爲開國 元勳 故追贈門下侍中 曾祖諱乙珍 參知門下府事 祖諱珪 刑曹都官正郞 贈議政府左贊成 考諱致信 谷山郡守 贈議政府領議政.

- 32 - 國史館論叢 第106輯 이행은 고려말 政堂文學을 역임한 李仁範의 후손이다. 증조 李明晨은 知敦寧府事를 지 냈고, 조부 李抽는 知溫陽郡事를 지냈다. 부친 李宜茂는 성종 8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 직은 洪州牧使에 이르렀는데, 무오사화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바 있다. 이행은 형인 李芑와 함께 당대에 촉망을 받았다. 이기는 연산군 7년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성희안의 추천에도 불구하고148) 贓吏의 사위라 하여 처음에는 출세하지 못하였 다. 중종 후반기부터 그의 재능을 아낀 사람들의 추천으로 점차 고위직에 올랐으나 乙巳 士禍를 주도하여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한편 栗谷 李珥는 이행과도 멀지 않은 친척으로 손자뻘이 된다. ⑨ 沈貞 龜齡 寘 膺 貞 思遜 守慶 義 심정의 선조는 현달하지는 못했으나 부친 심응은 府使를 지내고 敵愾功臣에 녹훈되었 다. 심정 자신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에 올랐다. 손자 沈守慶은 명종 원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청백리로 뽑혔으며, 선조 때 右議政까지 이르렀다. 이상에서는 훈구파 주요 인물의 가계를 살펴보았는데, 다수가 주목할만한 가문적 배경 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申用漑는 고려말 이래의 현달한 가문이거니와 신숙주의 후손이라는 가장 확실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李惟淸 또한 李穡의 후손으로서 아버지가 공신이자 효령대군의 사위였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문적 후광이 있었을 것이다. 이외에 鄭光弼과 沈貞은 부친이 공신이었다. 金詮과 李荇, 金應箕 등은 선조대에 중앙 관직에 진출하고, 당대에 이르러 가문의 위세 를 높인 경우에 해당한다. 특히 김전과 이행은 당대에 형제가 함께 명성을 얻었다. 南袞이나 權鈞은 가까운 선조대에 공신이나 현달한 인물은 보이지 않으나 고려말부터 명망이 있었던 가문 출신으로 각기 南在 및 權近 가문과 멀지 않은 관계에 있었다. 사림파 인물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당대에 관로에 진출했거나 父祖가 微官에 그치는 등 가문적 배경이 취약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훈구파 인물 다수의 가문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훈구파의 사회적 속성으로서 뚜렷한 가문적 배경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혼인과 교유 등을 통해 이들 사이에 형성된 사회적 연결망에 대해 살펴보기 148) 權橃, 冲齋集 권5, 冲齋日記 1510년 2월 丁卯.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33 - 로 한다. 혼인의 경우 해당 가문끼리 형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의 고관이나 중요 인 물을 매개로 간접 연결되는 경우도 있고, 교유를 매개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 사 이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추출하는 것은 자료적 한계로 용이하지 않지만, 묘지 명이나 문집 등에서 확인되는 사례를 통해 그 대체적인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훈구파 가문 사이의 통혼의 대표적인 사례는 鄭光弼과 申用漑 가문 사이의 통혼이다. 정광필의 장자인 鄭勞謙의 딸은 신용개의 손자인 申汝樑과 결혼했다. 통혼 자체는 정광필 과 신용개가 모두 서거한 한참 뒤의 일이지만, 이전 시기 두 사람의 남다른 정치적 관계 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용개와 이행은 가문끼리 직접 통혼한 것은 아니지만 朴誾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이행의 아들 李元禎은 신용개의 외손녀사위였다. 신용개의 장녀는 朴誾과 결혼했으며 그 의 둘째 딸이 이행의 아들과 결혼한 것이다. 이행은 신용개의 神道碑銘에서 이 인연으로 한 집안 식구처럼 여기며 살았다고 술회하고 있어149) 양자가 인척관계로 가까이 연결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훈구파 인물의 통혼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왕실이다. 중종과 직접적인 인척 관계 를 맺은 인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洪景舟이다. 중종 후궁의 한 사람인 熙嬪 洪氏의 아 버지인 그는 중종의 측근으로서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그의 오른팔 역할 을 하였다. 이외에 직접은 아니지만 제3자를 통해 중종과 통혼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도 보인다. 남곤은 중종초 정승을 지낸 宋軼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송질은 중종반정 때 禮曹判書로 서 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었고, 중종 7년부터 정승직에 올라 유순과 함께 박원종 성희 안 등 반정공신과 정광필 신용개 등 훈구파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송질의 아들 宋 之翰은 남곤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 아들인 宋寅은 바로 중종의 딸 貞順翁主와 결혼한 부 마였다. 결혼 시점이 중종 21년임을 볼 때, 이러한 통혼에는 중종과 남곤의 정치적 관계 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金詮의 경우에도 중종과 간접적인 인척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조카인 金安老의 아들 金 禧가 중종의 章敬王后 소생의 孝惠公主와 결혼하였던 것이다. 김전은 기묘사화로 일시 정 승직에서 물러나지만 곧 복귀하여 남곤 등과 함께 사화 이후의 정국을 수습하는 데 주도 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남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통혼의 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훈구파 인물 사이에는 인척 관계의 형성과는 별도로 각별한 교유 관계를 가진 경 149) 容齋集 권10, 議政府左議政申公神道碑銘.

- 34 - 國史館論叢 第106輯 우도 발견된다. 우선 鄭光弼과 申用漑는 같은 시기 정승으로 함께 의정부를 주도하였고, 손자대에는 통혼이 이루어질 정도로 가문간의 관계도 내력이 깊었다. 실제 양자의 교유 관계도 남달리 돈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鄭文翼公遺稿 에 인용된 朴東亮의 寄齋雜錄 에 따르면 양자는 金石之交 를 맺고 있 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중종이 정광필에게 친구가 있는지, 그가 누구인지를 물 었을 때, 정광필은 그저 신용개 한 사람 뿐이라고 답하였고, 중종이 다른 기회에 신용개 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신용개 역시 정광필이 친구라고 답하였는데, 이에 대해 중종은 知己之友 라 할만하다고 평했다고 한다.150) 金石之交 내지 知己之友는 양자의 정치적 동 반 관계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한편 申用漑는 金詮과도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용개는 김전의 아버지 金 友臣의 神道碑銘을 찬술했는데, 여기서 用漑與公之子觀察使詮友 라 하여 자신과 김전이 각별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151) 신용개가 타계한 뒤 김전이 그의 신도비명 을 짓는 등 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보였다.152) 한편 제3자를 매개로 각기 통혼과 교유를 통해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보인다. 전술 했듯이 신용개의 장녀는 박은과 결혼했고, 그 딸은 다시 이행의 아들과 결혼했다. 그런데 박은은 남곤과 막역한 친구였다. 갑자사화로 화를 입은 박은은 남곤이 승지로 재임할 때 살던 곳에 大隱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일화가 있다.153) 또한 박은은 부인이 일찍 죽자 남 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지은 부인의 行狀을 교정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어 각별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154) 또한 이행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은 朴誾이 중종 2년 都承旨에 추증된 후 집안에서 禮葬할 때 그의 묘지명을 써 주었는데, 여기서 자신을 友人德水李荇 으로 표현하고 있어155) 이행과 박은도 가까운 친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신용 개 이행과 남곤 사이에 남다른 친분이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훈구파 인물 중에는 직접 간접적인 통혼과 교유 등으로 보다 가까운 관계를 형성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상호 지원하는 관계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라 는 점에서 활발한 통혼 교유 는 가문적 배경과 함께 훈구파의 중요한 사회적 속성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156) 150) 鄭文翼公遺稿 事蹟附錄, 寄齋雜錄. 151) 二樂亭集 권13, 知中樞府事金公神道碑銘. 152) 二樂亭集 附錄 墓誌. 15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 漢城府 大隱巖. 154) 挹翠軒集 권4, 亡室高靈申氏行狀. 155) 容齋集 권9, 朴仲說墓誌.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35 - Ⅳ. 맺 음 말 이상에서는 인사 및 정책 논의를 통해 중종대 훈구파의 구성원을 추출하고, 그 중 특 히 중심이 되는 인물들을 선정하여 이들의 정치적 사회적 속성을 찾아보았다. 여기서 얻 어진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종 12년 8월 李荇의 大司憲 임용에 대해 臺諫이 탄핵 의견을 제기하면서 정계에 뚜 렷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대간에 포진한 사림파는 이행이 앞서 신씨 복위 상소를 올 린 金淨 朴祥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을 문제삼아 나라를 그르칠 사람이라며 대사 헌 임용에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일군의 인물들이 이행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탄 핵한 대간의 처사를 부당한 행동으로 비판하였다. 중종은 반론에 의거하여 대간을 교체하 였으나 새로 임용된 대간이 公論에 대한 억압이라며 계속 반발하였고, 결국 이행이 사직 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행을 비호하고 대간을 비판한 인물로 鄭光弼 申用漑 權鈞 張順孫 金詮 李惟淸 沈貞 南袞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중종 13년 金詮을 右議政에 기용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양상이 재현되었다. 정승 정광 필과 신용개는 우의정이 공석이 되자 位次를 중시한 전례에 따라 김전을 首望으로 하여 李繼孟 南袞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사림파는 위차보다 덕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安瑭을 지원하였고, 중종도 이를 수용하여 안당을 우의정에 임용하였다. 한편 정책 논의에서 정계의 대립 구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례로는 親迎 廟見禮의 시행 논의를 들 수 있다. 중종 10년 3월 章敬王后가 사망한 뒤 사림파는 金淨 朴祥이 중종의 본 부인으로 반정공신에 의해 폐출된 愼氏의 복위를 청한 것을 계기로 뚜렷한 정 치세력으로 결집하였다. 이어 새 중전을 간택하는 과정에 親迎禮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친영례의 실시에 강력하게 반대한 일군의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 다. 이들은 사림파가 古禮와 배필을 중하게 여기는 뜻 을 명분으로 내세운 데 맞서 時俗 이 친영을 행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祖宗의 成憲인 五禮儀 의 儀註대 로 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중종은 양자의 팽팽한 대립 속에 시행과 철회로 입장을 번복하다 결국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친영례 시행에 반대한 인물로는 鄭光弼 金應箕 申用漑 金詮 權鈞 李繼孟 尹金孫 高荊山 등을 들 수 있다. 156) 훈구파 인물 중에서 金應箕는 安敦厚의 딸을 後妻로 맞이했는데, 그는 사림파의 형성에 중요 한 역할을 한 安瑭의 누이였다. 곧 김응기는 안당과 처남 매부 사이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사 림파가 좌의정 재임 당시 김응기를 탄핵하여 체직시켰고, 그 후임으로 안당을 적극 지원한 것을 보면 이러한 인척 관계가 정치적으로 크게 작용하지는 못한 듯하다.

- 36 - 國史館論叢 第106輯 친영례 시행에 성공한 사림파는 연이어 廟見禮의 시행을 주장하고 나섰다. 친영에 이 은 묘현례의 시행은 중전의 위상을 국왕과 같은 宗廟 社稷의 주인 으로 확증하는 것이었 고, 이는 신씨를 폐위시킨 반정 공신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것이 반 정 자체의 명분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일군의 인물들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으 며, 중종도 묘현례 시행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 포함된 인물로는 鄭光弼 申 用漑 金應箕 金詮 南袞 高荊山 李繼孟 등이 있는데, 대체로 친영례 반대론자들과 일 치한다. 남곤은 친영례 시행에는 동의했으나 이것이 廟見禮 시행 주장으로 이어지자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처럼 인사와 정책 논의에서 사림파와 대립한 인물들이 바로 훈구파로 설정되는데, 이들은 대개 대간에 포진한 사림파와 대비되어 주로 政曹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중 기 묘사화를 전후해서 정승직을 역임한 사람들은 훈구파의 정치적 사회적 속성을 잘 보여 줄 수 있는데, 사림파로 분류되는 安瑭을 제외한 鄭光弼 申用漑 金應箕 金詮 南袞 沈貞 李惟淸 權鈞 李荇 등 9명을 선정할 수 있다. 이들의 중요한 정치적 공통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대개가 甲子士禍 被禍人이라는 점이 다. 심정과 권균을 제외한 7명이 모두 피화인으로서 중종반정 후에 관직에 복귀하였고, 나머지 둘은 靖國功臣에 포함되어 있었다. 중종반정의 주도 세력과 중종 초기의 대신들은 연산군의 측근 세력에 가깝다는 명분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갑자사화 피화인들을 적극 등용하여 지원하였고, 정광필 등은 이를 발판으로 정계의 중심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훈구파는 크게 두 가지의 정치적 지향을 보이고 있었다. 하나는 연산군의 정치를 弊政으로 규정하여 부정하면서 정책 운영의 방향을 祖宗成憲의 준수 로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經國大典 과 五禮儀 를 祖宗成憲의 구현체이자 국가 운 영에서 가장 우선하는 一代의 定規 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친영 묘현례 시행 논의에서 사림파의 주장을 반박한 논리이거니와 훈구파의 제반 정책에 관철되는 이념이었다. 다른 하나는 중종반정 및 반정공신의 명분에 관한 사항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 를 보인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사안은 개별적으로 고치는 것을 배제하지 않으나 원칙 적으로 그것이 반정의 명분을 손상시키는 데는 반대하였다. 이들이 신씨 복위를 반대한 것이나 공신 개정에 대해 원칙적으로 개정 불가의 입장을 보이고, 궁극적으로 개정이 이 루어질 때에도 그 폭을 최소화하려고 한 것은 그 표현이었다. 이 점에서 훈구파의 정치적 속성은 기존의 체제(= 경국대전 체제)를 유지하는 바탕 에서 당면 문제를 해결(=時宜 補修)해 나가는 保守 로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보수의 속성은 사회적으로 지배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회적 속성과 깊 이 연관되어 있다. 이들의 家系를 보면, 다수가 주목할만한 가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

중종대 勳舊派의 구성과 정치적 사회적 속성 - 37 - 다. 고려말 이래의 명문가이자 申叔舟의 손자인 申用漑와 李穡의 후손이자 효령대군의 외 손인 李惟淸이 대표적이며, 鄭光弼과 沈貞도 부친이 공신이었다. 金詮과 李荇, 金應箕 등 은 선조대에 중앙 관직에 진출하고, 당대에 이르러 가문의 위세를 높였다. 南袞이나 權鈞 은 가까운 선조대에 공신이나 현달한 인물은 보이지 않으나 각기 명문가인 南在 및 權近 가문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사림파의 경우 당대에 관로에 진출했거나 父祖가 微官에 그치는 등 가문적 배경이 취약한 경우가 많았음을 감안하면, 훈구파의 사회적 속성으로서 뚜렷한 가문적 배경 를 꼽을 수 있다. 이와 함께 훈구파는 혼인과 교유 등을 통해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정광필 과 신용개는 손자대에 통혼하였고, 신용개의 외손녀(朴誾의 딸)는 이행의 아들과 혼인하 였다. 왕실과의 간접적인 통혼관계도 보이는데, 남곤의 외손인 宋寅과 김전의 조카 金安 老의 아들 金禧는 중종의 부마가 되었다. 긴밀한 교유 관계 역시 정치적으로 상호 연계하고 지원하는 토대가 되었다. 정광필과 신용개는 金石之交 知己之友로 지칭되고 있었고, 신용개와 김전도 가까운 친구였다. 또 한 남곤과 박은, 박은과 이행은 가까운 친구로 확인되어 남곤과 이행 사이에도 친밀한 교 유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에서 중종대 훈구파의 사회적 속성은 뚜렷한 가문적 배경 을 통해 정치적 지배세 력으로 성장하는 한편 활발한 통혼 교유 를 통해 지배세력으로서의 사회적인 연결망을 형성하는 조선전기 지배세력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