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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다산 정약용과 브레바드 S. 차일즈의 유신론적 경전해석학 비교연구 1) 목차 들어가는 말 1. 탈 이데올로기적 해석 1.1. 다산의 탈성리학적 해석학 1.2. 차일즈의 탈역사비평학적 해석학 2. 유신론적 해석학 2.1. 다산의 유신론적 해석학 2.2. 차일즈의 유신론적 해석학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그의 책 과학적 혁명의 구조 (1962[1판], 1972[2판])에서, 파라다임의 전환 (paradigm shift)은 기존 파라다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anomaly)이 너무나 오래되고, 심각하여 위기상태로 접어들어가게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예를 들어 톨레미의 천동설은 별과 행성의 위치 파악 에는 놀라운 정확성을 갖고 있지만, 행성의 위치와 세차( 歲 差 ) 운동 (precession of the equinoxes)의 관계에 대해서는 항상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긴 세월 동안 이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그의 지동설로 이 문제를 풀게 되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제기하는 수많은 문제들 때문에 갈릴레오가 진동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고, 기존하고 있던 파동 이론 (wave theory)으로서는 스펙트럼(spectrum)의 길이를 측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뉴톤은 빛과 색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코페르니쿠스, 뉴톤, 아인슈타인이 만든 새로운 파라다임들은 모두 기존하고 있던 파라다임을 대규모로 파괴하고 (large-scale destruction), 정상적 과학의 문제와 기술에 거대한 전환 을 혁명적으로 가져왔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물론, 새로운 이론이 출현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전문가들은 불안정 상태(insecurity)에 있었으며, 그 불안은 (기존하고 있는) 표준 과학(normal science)으로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풀 수 없는 데 기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없이 새로운 파라다임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오늘날 우리는 성서학에 있어서도 기존하고 있는 해석적 파라다임으로서는 풀 수 없는 심각한 문제들에 봉착하고 있으며, 새로운 파라다임을 절실하게 요청하는 시점에 서 있다고 1) 이 글은 <대학교육협의회>의 지원으로 쓰여진 글이다. 필자를 파견교수(2002.9.1-2003.8.31)로 초대해준 서 울대학교와 종교학과 교수님들과 특히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가르침을 준 금장태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2) 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The University of Chicago, 1972), 67. 3)Ibid. 68. - 1 -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신학과 성서학에서 지난 200여년 동안 지배적인 파라다임으로 군림하였던 역사비평학은 확연하게 퇴조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대안적인 모델로서 역사비평학과 어울려(with), 혹은 대립하여(against) 제시되었던 다양한 해석적 방법론들, 예로서 구조비평, 수사비평, 정경비평, 서사비평, 독자반응비평, 탈이데올로기 해석 등은 그 폭넓은 기여에도 불구하고 각 방법론이 담고 있는 세계관과 추구하는 가치관과 지향점에 있어서 지나치게 협소하여 새로운 물꼬를 틀만한 해석적 파라다임으로 자리잡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이 글에서 동양 유학의 경전해석학 과 서양 성서해석학 의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해석학적 파라다임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유학( 儒 學 )과 성서학은 그 성격과 내용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1) 경전 (canon)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삼고 있으며, (2) 각자의 경전에 대한 유구한 해석적 전통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3) 하늘( 天 ), 세상( 地 ), 인간( 人 )에 대한 포괄적인 사상과 실천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두 학문의 만남은 유익하리라고 본다. 유학과 기독교의 경전해석학 간의 만남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 글에서 다산 정약용 (1762~1836)과 차일즈(B. S. Childs, 1923~)의 경전해석을 중심으로 접촉점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4) 물론 두 사람 사이에는 시대(약 150여년)와 삶의 자리(근세초의 조선과 탈현대의 구미)의 거리감 뿐 아니라, 유학자와 기독교신학자로서 서로 다른 종교적 체계를 따르는 점에서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도 적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산은 유학자이지만, 젊은 시절에 기독교적 세계관 의 변화를 경험하였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평생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적 경전 해석 방법론에서 벗어나, 원문의 본 뜻을 경전으로 찾아내는 ( 以 經 證 經 ) 고증학적 방법론을 통해 상제를 두려워 하는 마음 으로 경전의 의미를 현재의 삶에 실천하는 원동력으로 삼으로고 하였다. 차일즈 역시, 크게는 조직신학적 방법론에서 독립된 성경신학의 방법론을 따르며, 5) 성서해석에서 경전 (canon)으로서의 성경의 위치를 새롭게 확립하고, 신약과 구약으로 구성된 성경의 증거를 함께 들으려는 정경적 해석 (canonical approach)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신학 을 추구하여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두 사람은 해석적 방향성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지배적인 경전해석의 파라다임을 깨뜨리고, 경전중심적인 새로운 해석의 파라다임을 제시하고 구현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의 유사성과 일치점은 깊다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다산과 차일즈는 단순한 해석의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였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해석에 수반되는 다양한 기술들을 정확하게 4) 차일즈의 생애에 대해서는 R. A. Harrisville, W. Sundberg, The Bible in Modern Culture. B. Spinoza to B. Childs (Eerdmans, 2002), 309-10을 보라. 또한 차일즈의 방법론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으로서는 그를 위 한 기념논총으로 쓰여진 책, Theological Exegesis. Essays in Honor of B. S. Childs. Ed. by C. Seitz, K. G.-McCreight. (Eerdmans, 1999)를 보라. 5) B.S. Childs, Biblical Theology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Theological Reflection on the Christian Bible. (London: SCM, 1992). - 2 -

파악하고 적용하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학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 속에 숨쉬면서 자의식적 해석자 로서 전승을 통하여 주어진 경전 본문의 의미(meaning)와 의의(significance)와 씨름하며, 이전에 보지 못하였던 새로운 정신 세계를 창출해 낸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해석이란, 본문, 방법론, 해석자, 독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운명적이고 실존적인 상호교호적 작업이었다. 이런 점에서 두 학자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은 새로운 경전해석학의 차원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다산과 차일즈는 둘 다 자신의 경전해석방법론을 완성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만남을 주선하는 유익 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은 당대에 기독교신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경전의 원문에 충실하다 는 의미에서의 성경신학적 방법론 을 유교의 본문에 시도하였지만, 그의 방법론은 이후의 조선 유학계에서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차일즈 역시 그의 정경적 접근 을 통하여 지난 2000년 동안의 성서해석사에서 새로운 획을 그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방법론은 내재적인 모호성 과 한계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여러 학자들에게서 심한 비판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한 평생 쓴 여러 저술들 속에서도 어떤 일관성 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또한 사실이다. 즉, 차일즈는 이 시대의 해석학적 난국 을 타파하기 위하여 새로운 해석적 시도를 하였지만, 그 역시 스스로의 또 다른 난국 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산의 경전해석 방법론을 통하여, 차일즈의 정경적 해석 을 조명해 보며, 또한 차일즈를 통하여 다산을 조명해 봄으로써, 우리의 경전해석에 새로운 조명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문화인류학에서 형성된 내재적 방법 (emic)과 외부적 방법 (etic)을 우리의 방법론으로 도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은 원래 파이크(K. Pike, 1954)가 문화 분석에서 형성한 개념으로서, 최근에는 성서해석학과 사회학에까지 널리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유학과 성서학을 내재적 관점 에서 볼 뿐 아니라, 외부적 관점 에서 서로를 비추어 봄으로써, 통합적인 이해에 이를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6) 우리는 제한된 지면 때문에, 이 글에서 다산과 차일즈의 해석에서 핵심을 이루는 유신론적 해석을 탈이데올로기적 관점과 함께 다루고자 한다. 6) 이 두 용어는 원래 언어학에서 사용하는 음소학 (phonemics)과 음성학 (phonetics)에서 나온 것으로서, 전자 는 본토박이 화자가 자기 언어체계 안에서 실제적으로 구별해내는 소리에 대한 설명이며, 후자는 입술소리 ( 脣 音 ), 치음( 齒 音 )등과 같은 다양한 언어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내재적 방법'(emic)은 '안 에서 안으로 보는 방식'( 自 內 觀 內 )으로서 '본토박이(native)의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외부적 방법'(etic)은 외 부의 전문가가 자신의 과학적인 해석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한 사회나 문화를 들여다 보는 방법으로 정의되었 다( 自 外 觀 內 ). 이 방법론에 대한, 더 자세한 토론은 K. Pike, Language in Relation to a Unified Theory of the Structure of Human Behavior.(Glendale. California. 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 1954). 2nd ed. rev. (The Hague: Mouton, 1967). P. F. Craffert, "Is the Emic-Etic Distinction a Useful Tool for Cross-Cultural Interpretation of the New Testament?" R & T 2/1 (1995):14-37등을 보라. 브렛은 차일 즈와 곳발트의 방법론적인 차이를 내재적 관점 과 외부적 관점(즉, 맑스적 관점)으로 설명한다. M. Brett, Biblical Criticism in Crisis? (Cambridge Uni. Press, 1991), 15-18. - 3 -

1. 탈 이데올로기적 해석 1.1. 다산의 탈성리학적 해석학 다산 정약용은 조선에 근대화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하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역사적 시점에서 그 시대를 지배하던 중세적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으로서는 변화하는 시대의 조류를 따라 유학이 추구하는 수기치인 ( 修 己 治 人 )의 이상을 이룰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되며, 7) 경전해석과 실천에 있어서 근본적인 파라다임의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8) 그의 새로운 파라다임은 부정적인 지향점 으로서의 탈성리학 과 궁극적인 지향점 으로서의 유신론적 해석학 으로 이름지을 수 있으며, 이 두 지향점은 그의 우주관, 경전관, 신관, 인간관, 역사관, 문화관, 실천관 등의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다. 9) 1.1.1. 성리학적 세계관 다산 당시의 성리학적 세계관은 송대의 주렴계가 만들고 주자가 세계화시킨 태극도 에 농축되어 있다. 10) 주렴계의 태극도는 (1) 태극, (2) 음양, (3) 오행, (4) 건도( 乾 道 )와 곤도( 坤 道 ), (5) 만물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다섯 항목을 통하여 성리학적 우주론을 소개하고 있다. (1) 여기에서 태극이라는 용어는 주역 에서 易 에는 태극이 있다 ( 易 有 太 極 )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며, 유학에서 우주의 궁극적 존재와 만물의 발생 근원 11) 혹은 우주와 삼라만상의 최초원인이며 주재자 로 12) 여겨진다. 주자에 따르면, 태극은 바로 모든 것의 이치이니, 극이라고 말한다 13)... 그것보다 더 근본이 되는 것이 없으며 궁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극이라고 말한다... 태극이란 밖으로부터 미루어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경지까지 극진히 도달한 것이다. 14) 이런 점에 있어서 태극은 무극 ( 無 極 )이 된다. 만물의 근본 이치로서의 7) 다산은 자신의 학문 체계를 육경사서로써 수기하고 일표이서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리니 본말을 갖추었다 고 하였다. ( 六 經 四 書, 以 之 修 己, 一 表 二 書, 以 之 爲 天 下 國 歌, 所 以 備 本 末 也 ). 금장태 다산실학탐구 (소학사, 2001), 11쪽에서 인용됨. 8)정치구조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왕조는 양반중심의 신분제 사회 구조 속에서 양반 신분층이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하여, 고정된 정치 제도에 따른 인재 등용의 한계성 때문에, 결국 양반관료들 사이의 대립과 분열은 피할 수 없게 되었었으며, 이것은 당파 싸움으로 비화되었다. 한우근, "다산사상의 전개." 정다산 연구의 현황 대우학술총서. 다산학연구1. (민음사, 1985), 11-22를 보라. 9) 박부연은 그의 학위 논문 정약용의 수양론 연구 (서울대, 2004)에서 다산학에 대한 세 가지 중심 접근법으로 서, (1) 천주교와 관련하여 보는 접근(최석우, 김옥희, 최기복등), (2) 성리학과 관련하여 보는 접근(김상홍, 한 형조 등), (3) 다산 사유의 내적인 구조와 관련하여 보는 접근(이을호, 김형호 등)으로 분석한다. 다산의 탈성 리학적 해석학은 이을호, 윤사순, 금장태, 정일균 등의 학자들에 의하여 거의 이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10) 이후 주자는 주렴계의 태극도설 에 주석을 달고 풀이하여 태극도설해 를 만들고 소개하였다(1173년) (1188년). 그러나 주렴계의 태극도 는 그의 제자인 정이천에 의해 전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자의 태극 도에 대한 역사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태극도 그림은 금장태, 성학십도와 퇴계철학의 구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4에서 보라. 11) 금장태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85. 12) 정일균, 다산사서경학연구 (일지사, 1997), 324. 13) 太 極 者 事 物 所 以 然 之 理 也 謂 之 極 也.. - 4 -

태극은 천지와 만물 속에 있지만,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만약에 이치가 없었다면, 천지는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치로서의 태극 은 정의, 계도, 조작이 없는 형이상의 도 이므로, 태극이나 理 는 스스로 만물을 발생시킬 수 없다. (2) 그러나 태극 안에는 動 의 理 와 靜 의 理 가 있으므로, 동과 정의 상호작용이 스스로 이루어져, 움직이기도 하며 정지하기도 하여 음양이 발생한다( 陽 動, 陰 靜 ). 태극이 움직여서 양의 기운을 낳고 움직임이 극에 이르면 고요해지며, 고요해져서 음의 기운을 낳는다. 15) 주희에 따르면, 이 음양이 바로 기 이며( 陰 陽 氣 也 ), 형이하의 존재이다. 16) 그는 중용 1장의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이르고, 성을 따름을 도라 이르고, 도를 품절함을 교라고 한다 17) 에 대한 주석에서 하늘이 음양오행( 陰 陽 五 行 )으로 만물을 화생할 적에 기( 氣 )로는 형상을 이루어주고, 이( 理 ) 또한 거기 부여하였다 고 밝힌다. 18) 여기에서 주자는 우주의 기원과 운행에 있어서 음양오행설 과 이기론 을 불가분의 관계로 밀착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 음양은 다시 오행( 火 水 木 金 土 )을 발생시킨다. (4) 건도는 남자를 이루고, 곤도는 여자를 이룬다. (5) 이 음양과 오행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재료가 되며, 이 둘이 서로 왕성하게 합하고, 교감하는 연쇄작용을 통하여 만물이 생성된다. 따라서 만물은 태어날 때부터 理 와 氣 를 부여받게 되며, 이기의 복합체로 만들어지게 된다. 1.1.2.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다산의 비판 다산은 주자가 세운 성리학적 우주관과 특히 음양오행론에 대하여 근본적인 부정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1) 다산은 먼저 만물의 근원으로서 모든 유형적 존재에 우선하는 무형적 존재인 理 와 형이상의 道 로 이해하는 주자의 태극관 이 道 家 와 佛 家 에서 나온 것이며, 儒 家 의 본래 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가 볼 때, 유가에서 하늘의 주재자는 오직 상제 이며, 따라서 어떤 이치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태극도의 한 둥근 동그라미는 육경( 六 經 )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영( 靈 )이 있는 물건인가? 텅비어 있는 불가사의한 것인가? 천하의 영( 靈 )이 없는 물건은 주재자가 될 수 없다 고 말한다. 19) 다산의 관점에서 볼 때, 태극은 氣 로서, 단지 기계적인 법칙에 따라 자기 분화를 거듭함으로써 만물을 생성시키는 것 에 불과하다. 20) 달리 14) 朱 子 語 類 大 全 권98, 26. 朱 子 語 類 계청덕편, 허탁, 이요성역주 (청계, 1999). 1권 86쪽에서 인용됨. 15) 위의 글. 91쪽. 16) 朱 子 語 類 74권. 隂 陽 氣 也.. 94권. 隂 陽 氣 也. 17) 天 命 之 謂 性, 率 性 之 謂 道, 修 道 之 謂 敎. 18) 天 以 陰 陽 五 行 化 生 萬 物 氣 以 成 形 而 理 亦 賦 焉. 또한 氣 는 원래 그 성격 상 맑은 것 ( 淸 者 )과 탁한 것 ( 濁 者 )를 갖고 있다. 이것들은 기가 가진 지각과 운동 의 요소와 골육모피 와 같은 형체의 요소를 나누어 포괄하게 된 다. 19) 이지형, 다산 맹자요의 (현대실학사 1994), 384-85. 太 極 圖 上 一 圓 圈, 不 見 六 經... 況 以 空 蕩 蕩 之 太 虛 一 理, 爲 天 地 萬 物 主 宰 根 本, 天 地 間 事, 基 有 濟 乎? ( 맹자요의 진심 상). 20) 정일균, op. cit. 331쪽. - 5 -

말자면, 태극이란 만물 생성에 있어서 주재적 권능을 갖고 있지 않다. (2) 다산은 주자의 태극론을 비판하며, 이어서 자연스럽게 음양론도 거부하고 있다. 그가 볼 때, 음양이란 이름은 햇살이 비치고 가려지는 장소 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으로서, 해가 비추어지지 않는 곳을 음이라고 하며, 비취는 곳을 양이라고 하니, 본래 체질은 없고 명암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음양 이라는 것은 만물의 부모가 될 수 없다. 21) 다산이 볼 때, 음양이란 단지 물( 物 )의 성질에 대한 가차어로서, 가볍고 맑은 것( 輕 淸 )은 양이라 이르 고, 무겁고 탁한 것( 重 濁 )은 음이라 이른 것 일 뿐, 本 質 은 아니다 라고 주장다. 22) (3) 다산은 五 行 에 대해서도, 하늘 위나 하늘 아래의 수화토석( 水 火 土 石 )과 일월성신( 日 月 星 辰 )도 오히려 萬 物 의 대열에 있는데, 하물며 동철( 銅 鐵 )이나 초목( 草 木 )으로 나아가 만물 ( 萬 物 )의 어미가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며, 오행이란 만물 가운데 다섯 개의 물( 物 )에 불과한 것이며, 또한 물( 物 )과 동일한 것 에 불과하다. 23) 따라서 이 오행으로 만물을 화생한다고 말 할 수 없다. 다산이 볼 때, 오행론 에 대한 유일한 경전적 근거는 禮 記 에 나오는 바, 인간은 오행의 빼어난 기운을 받았다 는 데 있지만, 오행이 우주의 질서를 이루는 원천적인 힘이 될 수 있다 는 성리학의 주장은 후대의 자연철학적 해석을 경전의 원문에 집어넣은 것(eisgesis)에 불과할 뿐이다. 24) 나아가 다산은 성리학의 오행설 대신에 서학에서 말하는 하늘( 氣 ), 땅( 土 ), 물( 水 ), 불( 火 )의 사행( 四 行 )이 오히려 만물의 요소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리하자면, 다산은 성리학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태극 과 음양오행 을 그 근원에서부터 부정하고 있으며, 이들이 결코 우주만물에 대하여 주재적 권능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25) 1.1.3. 성리학적 이기론( 理 氣 論 ) 자연철학에 근본을 두고 있는 성리학의 우주관및 세계관에 있어서 이기론 은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理 와 氣 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며 ( 理 氣 之 合 ), 음양오행이라는 기 로써 형질을 이룬다고 믿는다. 주자는 자신의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천하의 이치는 지허 ( 至 虛 ) 가운데서 지실 ( 至 實 )이 존재하고, 지무 ( 至 無 ) 가운데서 지유 ( 至 有 )가 존재한다. 26) 즉, 이 세계에서 지극히 참되면서 가장 중요한 實 在 는 텅빈 것, 실체가 없는 21) 今 案 陰 陽 之 名 起 於 日 光 之 照 掩 日 所 隱 曰 陰 日 所 映 曰 陽 本 無 體 質. 原 不 可 以 爲 萬 物 之 父 母.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 2집 경집. 김성진편. 정인보, 안재홍 교정. N.d. 238쪽. 국역여유당전서 전주대호남학연구소 역 (전주대 출판부, 1986), 262쪽 참조. 22) 국역여유당전서 263쪽. 23) 五 行 不 過 萬 物 中 五 物 則 同 是 物 也. 여유당전서 241쪽. 24) Ibid. 음양오행론을 우주의 질서로 보지 않고, 현상학적인 언어로 보는 다산의 입장은 마태오리치의 천주실 의 에 나오는 음양오행설 비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25) 이을호는 다산이 "음양오행론을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산은 둘이 하나 라는 妙 合 의 원리를 여기에서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이을호, "다산경학 성립의 배경과 성격." 정다산 연구의 현황 대우 학술총서. 다산학연구1. (민음사, 1985), 128-29. - 6 -

것으로 존재한다 는 것이다. 27) 그렇다면, 허 ( 虛 )와 무 ( 無 )에서 존재하고 있는 실재는 구체적인 실존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주희가 볼 때는 바로 이기 ( 理 氣 )가 실제적인 고리를 만든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치와 기운은 만물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가진다. 즉, 理 란 형이상의 도( 道 )로서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본이며, 氣 란 만물을 생성시키는 형이하의 도구 이다. 28) 이리하여, 理 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道 가 되며, 형체도 그림자도 없을 뿐 아니라, 정의도 없고, 계도도 없으며, 조작도 없다. 29) 그러나, 이 세상 만물은 理 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약 천지만물들의 理 들을 총괄하면 태극이 될 수 있다 고 주장하고 있다. 30) 뿐만 아니라, 우주의 원리로서 理 는 주자에게 있어서 결국 천도( 天 道, 自 然 )와 人 道 ( 社 會 )를 동일하게 관통하는 원리가 된다. 주자가 볼 때, 理 와 대칭을 이루는 氣 는 시공 속에 존재하며, 구체적인 현상적 존재로서 정과 상 ( 有 情 有 狀 )을 갖추고 있는 개체가 된다. 개별적 사물에 있어 이 氣 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種 子 로서 스스로 응결하고 조작할 수 있다. 31) 그렇지만, 이 세상 만물은 현상적 관점에서 볼 때, 理 氣 두 가지가 뒤섞여 있다 고 본다. 32) 1.1.4. 다산의 탈성리학적 이기론 주자의 형이상학적 이기론은 사단칠정론 ( 四 端 七 情 論 )과 맞물려 이후 조선 유학에서 최고의 논쟁으로 자리잡게 되며, 결국 이황(퇴계)의 이기호발설 ( 理 氣 互 發 說 )과 이율곡의 기발리승일도설 ( 氣 發 理 乘 一 途 說 )의 두 축을 만들게 되었다. 전자는 기발 과 함께 이발 도 인정하여야 하며, 四 端 은 理 가 발한 것이라면, 七 情 은 기가 발한 것이요, 四 端 은 곧 도심에, 七 情 은 인심에 해당한다 는 명제를 주장한다. 후자는 이발 ( 理 發 )은 인정하지 않고, 기발 ( 氣 發 )만 인정하며, 결국 사단 과 칠정 을 모두 기발 로 보는 입장이다. 33) 다산의 이기론에 대한 입장은 단순하게 취급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인 차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번쇠의 극에 달한 이발기발론 과 사단칠정론 에 대하여, 녹피( 鹿 皮 )에 왈( 曰 )자쓰기 라는 비유를 통하여 그 허구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34) 26) 朱 子 語 類 13권. 天 下 之 理 至 虚 之 中 有 至 實 者 存 至 無 之 中 有 至 有 者 存. 정일균, 다산사서경학연구 (일 지사, 1997), 274 참조. 27) Ibid. 28) Ibid. 주자는 이치와 기운 중 어느 것이 먼저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이치는 기운에서 떨어진 적이 없지만, 이치는 형이상의 것이고, 기운은 형이하의 것이므로, 형이상과 형이하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어찌 앞뒤 가 없겠는가! 라고 대답한다 ( 朱 子 語 類 권1. 10조목. 허탁, 이요성역. 94쪽). 29) 理 却 無 情 意, 無 計 度, 無 造 作. 30) 정일균, 상동. 31)Ibid. 32) 우리는 여기에서 주자학의 性 卽 理 論 문제는 인간론과 연관되어 별도의 연구를 요청하나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33)정일균, 다산사서경학연구 (일지사, 1997), 281-82. 34) 여유당전서 1집, 19권. 윤사순, "다산의 인간관-탈성리학적 관점에서." 정다산 연구의 현황 (대우학술 총서. 다산학연구 1. 민음사 1985), 141. - 7 -

그러나 理 氣 의 설이란 동으로도 서로도 될 수 있고, 백으로도 흑으로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좌로 끌면 좌로 기울고, 우로 당기면 우로 기우는 것입니다. 필생 다투다가 자손에게까지 넘겨 다투게 해도 끝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다사한 것이니, 형이나 나야 어느 여가에 이러한 것( 理 氣 說 )을 하겠습니까? 즉, 다산이 볼 때, 성리학의 핵심인 이기론은 해결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비실제적이고, 비생산적이며, 원시유교가 추구하는 수기치인 의 목표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놀이에 불과하였다. 물론 다산은 여전히 성리학 용어인 理 氣 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역시 이기론에 있어서 일가견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주자학의 이기 개념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 (1) 다산은 주자 중심의 성리학에서 말하는 理 개념에 있어서, 그것이 모든 현상의 소이연자( 所 以 然 者 ) 로서 주재( 主 宰 ) 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천명 과 태극 과 같다 는 입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런 입장은 원시 유교의 경전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로서 그는 회남자, 예기, 황제내경, 한서, 중용, 역전, 맹자, 시경, 좌전, 등과 같은 책에서 理 는 옥의 결, 살결, 나무의 결 등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脈 理, 治 理, 法 理 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고증하고 있다. 따라서 고경에서 理 개념은 하나의 원리에 불과한 것이며, 결코 천명이나 태극이나 性 과 동일시 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35) (2) 유학자로서의 다산에게 있어서 기독교와 같은 창조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만물이 理 에서 나오기 보다 氣 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다산의 말을 빌린다면, 氣 란 자유적인 물이며, 理 는 부수적인 것인데, 의부적인 것은 반드시 자유적인 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기가 발하면 곧 거기에 理 가 있게 된다. 36) (3) 다산에게 있어서 주자학의 理 개념에 대한 거의 전면적인 거부는, 그것이 결국은 만물의 주재자인 상제의 자리를 위협하고 대체함으로써 경전 해석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만약 비인격적인 理 가 보편타당한 원리로서 만물에 대한 주재적 권능을 가진 것이라면, 상제의 존재는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학은 성인( 聖 人 )이 되라 고 말하지만, 天 이 만약 理 라면 하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결코 성인이 될 수 없다. 또한 性 이 만약 이치( 理 )에 불과하다면, 내 속에 있는 性 만 보게 될 것이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적 노력은 없어질 것으로 다산은 보고 있다. 1.2. 차일즈의 탈역사비평학적 해석학 다산이 근대화의 물결이 밀어닥치기 시작하던 시점에 서서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고 35) 맹자요의 告 子 上, 이지형, 다산 맹자요의 (현대실학사, 1994), 336-38. 36) 정일균, op. cit. 278쪽. 각주 39쪽에서 인용됨. - 8 -

있었다면, 차일즈는 모더니즘의 정점 에서 출발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을 내다보며 그의 작업을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산이 탈주자학적 목표 를 가지고 경전해석을 시작하였다면, 차일즈는 그를 형성하여 주었고, 그가 몸담고 있었던 당대 신학적 세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역사비평학에 대한 거부감으로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우리는 차일즈의 대작인 구약서론 (1979)의 서문에서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차일즈에 따르면, 현재의 성서학계는 그 학문적 기초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 (something fundamentally wrong). 37) 따라서 그는 학자들이 오늘날의 학계를 풍미하고 있는 자료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등을 좀 더 예리하게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학문적 과제를 설정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성경 연구에 대한 개념 전체 를 문제 삼을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와 그 신학적 용도 사이의 관계 문제를 완전히 재고하여야 한다 (completely rethought)고 주장한다. 38) 그리고 그는 자유주의적 좌파(Wellhausen, Gunkel, Eissfeldt)와 보수주의적 우파(Hengstenberg, Vigouroux, Cassuto),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중도파(Delitzsch, Lagrange, Kaufmann, Engnell, Albright)에 대하여, 이들이 모두 19세기 초에 시작된 성서학의 매개변수(parameter) 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고 비판하며, 이 불모의 난국(sterile impasse)을 타파하고, 비평 후 시대 (post-critical era)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없겠는가? 라고 묻는다. 39) 여기에서 차일즈가 '비평 후 시대'(post-critical era)를 언급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 용어를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정경적 접근 이 역사비평학의 한 줄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작업이 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역사비평학의 전성기인 1979년 경에 이와 같은 방향전환을 제시함으로써, 비평학 시대 를 넘어서, 비평 후 시대 에 적합한 사고를 요청하고 있다. 그는 이 시점에서 역사비평학의 근본적인 문제가, 경전으로서의 성경을 외면한 데 있다고 지적한다. 40) 현대 해석학의 난관(hermeneutical impasse)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다리를 성공적으로 놓지 못하여, 성경의 정경적인 형성을 무시하는 데에서 주로 기인되고 있다. 성경해석을 하는 데 있어서 비평학의 일반적인 방법론은 먼저 정경적인 모양을 형성한 바로 그 요소들을 배제해 버림으로써 원래의 역사적 배경을 찾는 데 있다. 그러나 성경을 비정경화하여 (decanonizing) 성경본문이 역사적인 과거에 안전하게 닻을 내린 순간, 해석자는 성경을 현대의 종교적 맥락 속에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이 차일즈의 새로운 해석학적 제안은 계몽주의 이후 지난 200년 동안 발전해 온 역사비평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 근거하고 있다. 37)B.S.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Fortress, 1979), 15. 38)Ibid. 16. 39)Ibid. 16. 40)Ibid. 79. - 9 -

(1) 역사비평학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 성서해석과 해석자의 세계관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41) 오늘날 만개한 성서학은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의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발견한 성서신학으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스마트(Smart)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루터와 칼빈의 성서신학에 대한 참신성과 창조성은 곧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정통주의의 경직성 때문에 시들어 버리게 되었으며, 이것은 다시 성서비평학을 일구어낸 계몽주의에 의하여 부수어져 버리게 되었다. 42) 역사비평학은 바로 계몽주의의 산물로서, 그 근본정신에 있어서 철저한 합리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은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유신론적 세계관과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판넨베르그는 이 점에 대하여 잘 말하였다. 43)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세계관과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역사 사이에는 근본적인 대립이 있다. 역사비평적 방법은 인간중심적이며, 당연히 모든 초월적 실재를 배제하게 되었다. 사실, 초기 역사비평학의 세계관은 트뢸취(Troelsch)가 제시하는 유추의 원리 위에 근거하고 있으며, 자연과학적 세계관 속에서 초월적 세계관을 배제할 수 밖에 없었다. 44) 우리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것과 우리 안에 주어진 것 사이에 있는 유추(analogy)는 비평의 열쇠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의 발생 양식과 조건들은 정상적이며,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입증된다. 비평가들은 이런 기준에 따라 어떤 사건이 과거에 참으로 일어난 것으로 인정하던지 혹은 제쳐둘 것인가에 대하여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트뢸취가 제시한 유추의 원리 를 받아들인 역사비평학적 성서해석학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나타난 기적과 이적의 요소는 신화적인 세계관 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그 역사성이 부인되고, 성서학은 종교사학적 기술( 記 述 )이 되며, 신학은 형이상학화 되어,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자리 는 상실되어 버리고, 나아가 성경은 믿음의 공동체와는 무관한 것 이 되고 말았다. 41) 성서해석을 둘러싼 어거스틴적 세계관 과 계몽주의적 세계관 의 충돌에 대해서는 R. A. Harrisville, W. Sundberg, The Bible in Modern Culture. B. Spinoza to B. Childs (Eerdmans, 2002), 26-29를 보라. 42)James D. Smart,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Biblical Theolgy. (Westminster Press, 1979). 김판 임 역, 성서신학사 (대한기독교서회, 1983), 15-16. 스마트는 역사비평학과 연관하여, 일반 학자들은 그의 비평적 분석이 설교자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모른다 는 흥미로운 말을 하였다., The Strange Silence of the Bilbe in the Church (Westminster, 1970), 70. Paul R. Noble, The Canonical Approach : A Critical Reconstruction of the Hermeneutics of Brevard S. Childs. (E.J. Brill, 1995), 10을 보라. 43)Pannenberg REH 39; Noble, ibid. 111에서 재인용. 44)Ibid. 112. - 10 -

차일즈는 역사비평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트뢸취의 방법론이 결국은 합리주의적 편견에 의하여 새로운 도그마를 만들었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역사비평학은 원래 전통과 도그마의 무거운 손에서 본문을 자유하게 하려는 의도 에서 나왔지만, 실제적으로 본문의 문자적 의미에 대한 의의, 온전성, 확신을 파괴하게 되었다. 45) 이것은 역사비평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평가로 여겨진다. 46) (2) 역사비평학의 중립성 문제 조벳(Jowett)은 그의 유명한 글, 성서해석 (1860)에서 성경도 다른 책과 같이 읽어야 한다 (like any other book)는 입장을 천명하며, 후대 공동체의 해석에서 자유로운 원래의 의미 (original meaning)를 추구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해석자는) 성경책의 단순한 뜻을 후대의 세련화 작업(refinements)과 구분화 작업(distinctions)에서 절대적으로 순수하도록 보전하여야 한다... 해석자는 다른 의미를 첨가해서는 안되며, 원래의 의미를 회복하여야 한다. 즉, 처음 그 말을 듣거나 읽은 자들의 귀에 들렸고, 눈에 번쩍인 그 뜻을 찾아야 한다 고 하였다. 47) 차일즈는 조벳의 중립성과 객관성에 대한 해석적 방향성이 역사비평학적 해석의 중심 속으로 들어왔다고 보며, 참으로 역사비평학의 성경 해석이 중립적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48) 차일즈가 볼 때, 역사비평학은 성경에 묘사된 여러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성경 자체의 증거 보다는 비평학적인 기준에 따라 역사를 중립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하여, 성경을 하나의 자료로 보기 때문에, 결국 선험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증거 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비평적 역사기술의 중립성은 가상적이며, 결코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비평학에는 선험적으로 초월성을 배제하여 버리는 감추어진 원리 가 있기 때문이다. 예로서,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에 대한 보고에 있어서 비평학자들은 이것이 기적설화 이므로, 역사적 사건일 수 없으며, 사건 이전에 미리 말하는 것 으로서의 예언 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건 후 예언 (vaticinium ex eventu)으로 만들어 45)B.S. Childs, "The Sensus Literalis of Scripture: An Ancient and Modern Problem." In Beitraege zur Alttestamentlichen Theologie. FS fuer W. Zimmerli zum 70. Geburstag. Ed. by H. Donner. (Goettingen: Vandenhoek & Ruprecht 1977), 91-92. 46)Childs, Introduction, 454-55. 한 예로서 차일즈는 하박국서를 다루면서, 역사비평학이 결국 그 방법론을 교 조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성서해석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지적하 고 있다. 역사비평학을 교조적으로 적용한 것은 이 책의 핵심에 도달하는 길을 찾는 데 실패하였을 뿐 아니 라, 일련의 잘못된 질문들을 제기하게 되어, 참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여버리는 심각 한 위험을 만들게 되었다. 47)B. Jowett, "On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In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and Other Essay (London: George Routledge & Sons, n.d.). P. R. Noble, "The Sensus Literalis: Jowett, Childs, and Barr." JTS 44 (1933), 3, 4에서 인용됨. K. J. Vanhoozer, "The Spirit of Understanding: Special Revelation and General Hermeneutics." In Discipling Hermeneutics. Ed. by R. Lundin. (Grand Rapids: Eerdmans 1999), 133-35참조. 48) 이 문제는 이후 차일즈와 바아 사이에 심각한 논쟁으로 발전한다. J. Barr, "Jowett and the 'Original Meaning' of Scripture." Rel. Stud. 18 (1982), 433-37., "Jowett and the Reading of the Bible 'Like Any Other Book.'" HBT 4 (1985), 1-44. - 11 -

있다. 51) 요약하자면, 차일즈는 비평적 연구의 결과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 한계에 대하여 버린다. 차일즈는 이것을 역사비평학의 중립적 일원화 작업 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차일즈는 역사적 연구를 배제하지 않으며, 이것은 최선을 다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연구를 역사주의의 철학적 전제와 동일시 하려는 것을 대항하여야 한다. 49) 그가 볼 때, 표준적인 비평학적 방법들은 그 기준이 모든 실재를 검사하는 데 적합하다는 잘못된 가정 을 갖고 있으며, 정의에서부터 신학적인 쟁점들을 배제하였다 고 본다. 50) 물론 차일즈는 반역사비평학자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역사비평학의 역할을 잘 알고 있으며, 그 한계에 대하여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그는 역사비평학의 기여에 대해서 본문이 담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조명함으로써, 성경연구에 불가결한 도움을 주었다고 본다. 이 점을 비평 이전 (pre-critical) 학자들은 몰랐으며, 반비평학자들은 학문을 희생하면서까지 (sacrificium intellectus)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본문을 평이하게 (flat) 만들어 버렸다고 평가하고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비역사적인 (a-historical) 작업을 성서학에서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성경의 본문은 특정한 역사적-문화적 상황에서 나왔으므로, 이 상황을 아는 것은 최종형태를 민감하게 읽는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작업은 그 신학적 작업을 드러내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파악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차일즈는 역사비평학이 중립성을 추구함으로써, 기독교 성경으로서 성서이해에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혹은 해롭다 고 평가를 내리게 된다. 정리 다산의 탈성리학적 몸부림은 차일즈의 탈역사비평학 과 어우러진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전은 영원하지만, 경전을 보는 해석자의 시각은 역사의 변천을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두 학자는 새로운 시대가 배태하고 요청하는 새로운 세계관 을 가지고, 그들에게 전수된 경전을 새롭게 보려고 한다. 그러나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다산에게 있어서 탈성리학적 노력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굽혀 죽을 자리를 찾을 겨를조차도 없는 ( 人 將 捧 頭 屈 躬, 求 死 之 不 暇 ) 위태로운 작업이었다. 52) 차일즈 역시 역사비평학 을 사용하면서도 충분히 역사비평학적이지 않다 는 비판을 동료학자들로부터 끊임 없이 받아 왔지만, 그는 탈역사비평학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세계관과 내면적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탈이데올로기적 비판에 있어서, 다산과 차일즈를 비교해 본다면, 다산은 차일즈가 역사비평학적 세계관 을 비판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성리학적 세계관 을 비판하고 49)B.S. Childs, Memory and Tradition in Israel (SBT 37. London: SCM. 1962), 86; Noble 96. 50)B.S. Childs, Exodous: A Commentary. (OTL. London: SCM, 1974), 300. 51)Noble, op. cit. 40. 52) 여유당전서 I-19. 정일균, op. cit. 295에서 인용됨. - 12 -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차일즈는 역사비평학의 우주관과 세계관 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산은 그의 경전해석의 주요부분에서 지속적으로 성리학적 세계관 과 부딪치고 있다. 2. 유신론적 해석학 2.1. 다산의 유신론적 해석학 다산의 탈성리학은 유신론적 해석 이라는 이면을 갖고 있다. 그는 당대의 관념적이고, 형이상학화 되어 실천을 잃어버린 유학은 원시 유교에는 나타나고 있는 인격적 상제 개념을 회복할 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원시 유교는 상제에 대한 인격신 개념과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윤리적 실천이 가능하였지만,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천명을 천리로 대체함으로써 유신론적( 天 命 ) 입장을 무신론적( 天 理 ) 입장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53) 정감적이고 체험적인 종교적 삶이 상실되었고 결과적으로 윤리적 실천도 붕궤되었다고 보았다. 54) 이리하여, 그는 형이상학적인 주자학에서 벗어나, 체험적이고 정감적인 유신론적 유학에로의 파라다임의 전환을 모색하고 추구하게 되었다. 2.1.1. 유학과 성리학에 있어서의 신론 유교의 고대 문헌에서 하늘 은 皇 天, 昊 天, 上 天 등의 용어 뿐 아니라, 상제, 천제 등으로 불려졌으며, 하늘에 대한 숭배 사상에 있어서 敬 天, 畏 天, 奉 天, 事 天, 配 天, 祭 天 등의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만유의 주재자로서의 천 개념을 뚜렷이 갖고 있었다. 금장태는 유학과 성리학의 하늘 개념을 크게 셋으로 잘 분류하고 있다. 55) (1) 머리 위의 푸른 하늘 ( 蒼 蒼 有 形 之 天 ). 이것은 감각적인 경험의 대상이며, 자연의 천 으로 불려진다. (2) 신령한 주재자로서의 하늘 ( 靈 明 主 宰 之 天 ). 이것은 신앙적 대상이며 주재의 천 으로 불려진다. (3) 우주적 원리로서의 하늘 ( 理 法 的 天 ). 이것은 철학적 이해의 대상으로서 이치의 천 으로 불려진다. 유학에서 하늘은 (1) 편재성과 영명성이라는 속성과, (2) 자연적 변화의 생성을 조장하는 조화의 작용 과 조화를 통하여 만물을 관장하는 주재의 역할 이라는 두 가지 대표적 53) 이을호, op. cit. 130쪽. 54) 예를 들어 다산은 당대의 학자들이 실제적인 仁 은 추구하지 않고, 번쇄한 논쟁 만 일삼으며, "자신의 부모들 은 당장 추위를 호소하고 배고픔을 참으며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도 이를 태만히 여기고 보살피지 않을 뿐 아 니라, 아예 타성이 되어 노력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기 기만의 모습에 대하여 깊이 탄식한다(정일균, op. cit. 299). 55) 금장태, 유학사상의 이해 (집문당, 1996), 68. - 13 -

기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즉, 원시 유학에 있어서 하늘은 초월적인 주재자로서의 경외의 대상이 되며( 天, 上 帝, 神 ), 또한 보편적 원리와 내재적인 이치( 太 極, 理, 道 )로서 함께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성리학에 있어서 주재천( 主 宰 天 )의 사상은 희미해지며, 의리천( 義 理 天 )이 모든 경전을 해석하는 지배 원리가 된다. 주자에게 있어서 하늘은 인간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理 이며, 곧 천리이다. 56) 이리하여 하늘은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원리로 규정되고 말며, 고대적인 상제 개념은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송대의 성리학자인 정이천 역시 天 에 대하여, 형체 쪽으로는 天 이라 하고 主 宰 쪽으로는 上 帝 라 하고 公 用 쪽으로는 鬼 神 이라고 하고, 妙 用 쪽으로는 神 이라 하고 性 情 쪽으로는 乾 이라 한다. 저 天 은 곧 道 이다. 57) 다산은 바로 理 와 太 極 과 性 과 道 로서의 하늘이라는 형이상학적 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격적인 유신론적 해석학을 도입하게 된다. 2.1.2. 다산의 유신론적 해석학 (1) 유신론적 해석의 배경 다산 경학에서 유신론적 해석은 다양한 맥락과 주제 속에 폭넓게 나타나고 있지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곳은 그의 중용강의보 라고 말할 수 있다. 58) 다산은 1784년 태학에 입학한 후 정조의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면서, 그의 절친한 친구인 광암( 光 菴 ) 이벽( 李 壁 )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되며, 그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59) 갑진년 (1784) 4월 보름에 맏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나의 형제들은 이벽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한강) 물을 따라 내려왔다. 배 안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시원이나 신체와 영혼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들으니 놀랍고 의아하여 마치 은하수가 무한한 것과 같았다. 서울에 돌아오자 이벽( 李 壁 )을 따라가 천주실의 와 칠극 등 몇 권의 책을 보고 비로소 기뻐하여 마음이 기울어졌다. 젊은 시절 서학을 통한 유신론적 체험은 그의 경학 해석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점은 특히 그의 중용 해석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56) 性 理 大 全 書 卷 二 十 九. 天 即 理 也 命 即 性 也 性 即 理 也. 57) 김영일, 정약용의 상제사상 (경인 문화사, 2003), 126쪽에서 인용됨. 58) 이 책은 그의 나이 23세 봄 (1783), 그가 경의시( 經 義 試 )로 태학( 太 學 )에 입학하고, 그 이듬해 (1784) 정조 가 태학생들에게 중용 ( 中 庸 )에 대해 던진 70개의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한 것을, 약 30년 후 강진 유배 생 활 중에 완성한 것이다(1814년, 순조14년). 59)금장태, 다산 정약용 (성균관대출판부, 1999), 182. 기독교적 세계관의 관점으로 그는 주자학적 사상체계 를 완전히 새롭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정조에게 바친 그의 답변은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정조는 그의 도승 지를 통하여, 다른 학생들은 이발기발론( 理 發 氣 發 )으로 구태의연하게 답하나, "정약용의 대답 만은 특이하니" ( 獨 庸 所 對 特 異 ), "그가 유식한 선비임이 분명하다"( 其 必 有 識 之 士 )고 말하였다. ( 여유당전서 238쪽). - 14 -

(2) 인격적 유신론적 해석학 중용 장구 1장의 천명지위성 ( 天 命 之 謂 性 )에 대하여, 송유들의 성리학은 天 命 을 天 理 로 해석함으로써, 중용 의 유신론적 입장( 天 命 )을 무신론적 입장( 天 理 )으로 대체할 뿐 아니라, 천리에 의하여 천명과 인성도 분리하게 되었다. 이런 성리학적 천관 을 의리적 천관 이라고 이름 붙인다. 60) 즉, 주자학에서는 理 를 근원적 본체로 인정하며, 하늘 이 인간에게 준 性 이 바로 理 라고 본다( 性 卽 理 ). 61) 다산은 주자학의 理 개념을 신앙적인 신관으로 회복하려고 하며, 바로 이 점을 중용 의 계신공구 ( 戒 愼 恐 懼 ) 절에서 강하게 논증하고 있다.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이러므로 군자는 그 보지 않는 바에도 조심하며, 그 듣지 않는 바에도 두려워 떠는 것이다 62) 라는 구절에 대하여, 주자는 중용혹문 에서 보다 와 듣다 의 주체를 인간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항상 공경함과 두려워 함을 두어, 비록 보고 듣지 않을 때라도 또한 감히 소흘히 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천리의 본연함을 보존하여 잠시의 시간이라도 道 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주자는 비록 군자인 내가 보고 듣지 못하는 데에서도 조심하고, 귀로 미쳐 듣지 못하는 데에서도 두려워 한다 로 해석한다. 63) 주자는 중용 의 바로 다음 구절인 莫 見 乎 隱 幕 顯 乎 微 故 君 子 愼 其 獨 也 에 64) 대한 설명에서도 보고 듣는 주체 를 다른 사람들로 보고 있다. 獨 은 다른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자기만이 홀로 아는 곳이다... 남이 비록 알지 못하나, 자기 만 홀로 알고 있으니, 이는 천하의 일이 드러나 보이고 밝게 나타남이 이 보다 더 함이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군자가 이미 항상 공구하고, 이에 더욱 삼가는 것이다. 65) 그러나 다산은 이 본문에서 보고 듣는 주체 를 인간으로 보는 주자의 해석을 60) 금장태, 다산실학탐구 (소학사, 2001), 29. 61) 주자가 무신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주재용이 그 근거로 다음의 본문을 제시하고 있다. " 天 地 自 有 箇 生 物 之 心 無 有 箇 人 在 裏 主 宰 "(주재용, 1958:261. 이을호 op.cit. 130쪽에서 재인용). 나아가 주자는, " 神 伸 也 鬼 屈 也 鬼 神 不 過 陰 陽 消 長 只 是 氣 屈 伸 而 己 陰 陽 無 始 不 可 分 先 後 "라고 말한다(주재용 263; 이을호130). 즉, 귀신이란 일종의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무신론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영일 역시 주자학은 인격 적인 신으로서의 천을 부정한다 고 본다. 김영일, op.cit. 27쪽. 그렇지만, 주자가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입장을 주장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신중을 요한다. 금장태는 주자의 敬 齋 箴 에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 바라보는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침잠하여 머물러서, 상제를 마주대한다 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주자에게도 상제의식이 있음을 말한다. 금장태, 유학사상의 이해, 73쪽. 62) 道 也 者 不 可 須 臾 離 也 可 離 非 道 也 是 古 君 子 戒 愼 乎 其 所 不 睹 恐 懼 乎 其 所 不 聞.. 63)정약용, 여유당전서, 중용강의보, 269쪽에서 인용함. 64) 隱 [어두운 곳]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微 [작은 일] 보다 나타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삼가는 것이다. 65)성백효, 대학, 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6), 61. - 15 -

비판하며, 그 주체를 신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천지의 귀신이 환하게 늘어서 있으나, 귀신이란 것은 형상도 소리도 없는 것이다. 66) 또한 부도부문( 不 睹 不 問 )이란 귀신이 내려와 살피는 것이다. 67) 이 점에 있어서 소천청구( 小 川 晴 久 ) 역시 동일하게 해석하며 다산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다산은 암실 가운데 전전율율하며 군자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상제가 照 臨 하며, 자신을 감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68) 다산이 볼 때, 상제의 강림이나 귀신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신독이 불가능하다. 하늘의 영명은 인심을 직통한다. 아무리 숨겨진 것이라 하여도 헤아리고, 아무리 작은 것도 비추어낸다. 이 방에도 내리 비추며 날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을 감시하고 있다. 이를 안다면 아무리 담대한 자라도 계신공구하지 않을 수 없다. 69) 다산이 볼 때, 주자학의 인본주의적인 신독론은 경전이 추구하는 실천적인 삶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며, 오직 원시유학의 유신론으로 돌아가야 진정한 실천이 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용의 덕은 신독이 아니면 이룰 수 없고, 신독의 공은 귀신이 아니면 두려워함이 없으니, 귀신의 덕은 우리 유교가 근본하는 것이다. 70) 바로 이점에서 그는 윤리와 신앙을 알파와 오메가로 설정하고 있다. 군자의 공부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하늘을 섬기는 것으로 마친다. 71) (3) "귀신의 덕이 지극하다 72) ( 중용 16장)에 대한 유신론적 재해석 이 구절에 대한 주자학적 해석에 따르면, 귀신은 천지의 공용이요, 조화의 자취 ( 程 子 ), 혹은 귀신은 음양 두 기운의 양능 ( 張 子 )으로 해석되고 있었다. 주자는 내가 생각하건대, 두 기운으로써 말하면 鬼 는 陰 의 靈 이요, 神 은 陽 의 靈 이며, 한 기운으로써 말하면 이르러 퍼짐은 神 이 되고 돌아가 되돌아감은 鬼 가 되니, 그 실제는 한 물건일 뿐이다. 爲 德 은 性 情, 功 效 라는 말과 같다 로 풀이한다. 73) 그러나 다산은 공용 과 발자취 가 곧장 신 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천지는 귀신의 공용이며 조화는 귀신이 남긴 발자취인 데에도 오늘날 곧장 발자취와 공용을 신이라 할 수 있는가? 二 氣 는 음양이니 그림자는 음, 햇빛은 양이다. 이것은 지각이 없는 것으로써 水 禽 蟲 豸 (수금부치)에 전혀 미칠 수 없다. 이것이 어떻게 양능이 있어 66)다산이 여기에서 말하는 '귀신'은 기독교적 입장의 '귀신'이 아니라, 유가에서 말하는 '상제'를 가리킨다. 다산 은 주례 의 大 宗 白 에서 제사로 받드는 세 등급의 귀신을 天 神, 地 示 (지기), 人 鬼 로 제시한다( 국역 여유당 전서, 302-3). 67) 여유당전서 2. 권4,5. 금장태 다산실학탐구, 29. 68) 小 川 晴 久, "다산의 경학해석의 태도-다산의 신독론을 중심으로". 다산학탐구 (민음사, 1990), 150. 69)Ibid. 다산은 상제에 대한 계신공구를 사람이 밤 길에서 느끼는 공포심으로 연결하며 비유하고 있다. 공구는 허위로 얻음이 가능할까?... 밤에 산림을 걸으며 공포를 느끼는 것은 호랑이나 표범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 이다. 군자가 암실 가운데 전전율율하며 감히 악을 행하지 아니함은, 상제가 있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고 있 기 때문이다... 降 監 을 믿지 않는 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음을 삼가 함이 없다 (ibid. 157). 70)Ibid. 156. 소천청구가 볼 때, "다산은 기독교에 접촉하기 전부터 사서육경에 의하여 천명, 귀신에 경외의 마 음을 지니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것이 20대 시절 기독교에 접함으로써 더욱 강해졌다는 것, 그 위에 투옥, 유배에 의해 결정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71) 君 子 之 學 於 事 親 終 於 事 天. 여유당전서, 280쪽. 72) 子 曰 鬼 神 之 爲 德 其 盛 矣 乎. 73) 성리학에서는 체용론을 통하여, 하늘의 형이상학적 본체를 리로 보며, 인간과 세계에 나타나는 신비한 힘의 작용을 신과 귀신으로 이해한다. 금장태 유학사상의 이해, 64쪽. - 16 -

조화를 주장하고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여 제사를 받들게끔 할 수 있겠는가? 74) 요사이 사람들은 천을 理 라 하고 귀신을 공용이라고 하고 조화의 자취라고 하고 이기의 양능이라 하여 그들의 마음 속에 알고 있는 바라 아득하기만 하여 한결같이 지각이 없는 사람과 똑 같다. 그러므로 어두운 곳에서 마음을 속이고 방자히 꺼리낄 바 없으므로 몸이 맞도록 도를 배우고 있으나 요순의 경지로 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모두가 귀신설에 대하여 명백하지 못한 까닭이다. 75) 다산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해석 대신에, 원시유학적인 태도, 즉 실심으로 하늘을 섬기고, 실심으로 신을 섬겨,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에서나 한 생각이 싹터 나옴에서, 참되거나 거짓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날이 감시함이 여기에 있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계신공구하여 신독이 절실함이 진절하고 독실( 篤 實 )하여 천덕에 도달한다. 76) 다산은 이런 신앙적 자세를 實 心 의 事 天 學 으로 언명한다. 이런 관점에서 다산은 인격적인 유신론을 통한 실천을 경전 해석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2.2. 차일즈의 믿음으로 해석하기 와 유신론적 해석학 차일즈의 해석학적인 프로그램이 가장 처음으로 제시된 글인, 믿음으로 해석하기 를 보면(1964), 77) 그는 성서학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향설정 을 하여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 글이 발표되던 때는 역사비평의 절정기였기 때문에, 이 글을 주목할 만 하다. 그는 이 글에서 주석학 과 해석학 의 근원적인 문제를 던지고 있다. 그는 당대에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주석들을 보면서, (1) 주석의 목표는 무엇인가?, (2) 그 전제는 무엇인가?, (3) 누구를 위하여 주석이 쓰여져야 하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78) 그는 당대의 주석가들이 역사비평적 방법론 을 통하여 본문에 대하여 초연한 태도 (detachment)로서, 가능한 한 객관적 으로, 철저하게 서술적인 작업 을 시도하고 있다고 파악하며, 주석가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묘사하는 역사가의 임무를 넘어가야(going beyond) 할 필요성이 있다 고 말한다. 79) 이어서 그는 역사적 방법론의 제약성을 거부하는 것은 과연 객관적인 연구의 근거를 상실하게 하고, 걷잡을 수 없는 주관성의 늪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 를 묻는다. 80) 그는 이 질문과 연관하여, 스텐달이 제시한 성서신학 방법론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스텐달은 74) 정약용, 국역 여유당전서 전주대호남학 연구소 역 (전주대학교 출판부, 1986), 303-4. 75) 소천청구 op. cit. 156에서 인용됨. 76) 금장태, 다산실학탐구, 30쪽 77) B.S. Childs, "Interpretation in Faith: The Theological Responsibility of an Old Testament Commentary." Interpretation 18 (1964):432-49. 78) Ibid. 432. 79)Ibid. 43. 80)Ibid. - 17 -

성서신학 연구에서 방법론 이란 글에서, 81) 성서 안에서 발견되는 실제적인 신학과 신학들에 대한 서술적인 연구 와 성서적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규범적이고 조직적인 신학 사이에 명백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 는 주장을 하였다. 즉, 스텐달은 성서학에서 서술적 연구 와 규범적 연구 라는 두 축을 설정하였으며, 이것은 그의 유명한 글인, 현대의 성서신학 에서 더욱 구체화 된다. 그는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의 연구를 통하여 우리 시대와 성서 시대 사이에 깊은 간격이 설정되었으며, 성서해석에서 급진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다 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의미의 문제는 두 개의 시제로 나누어질 수 있다. 즉,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였느냐 (what did it mean)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what does it mean) 로 압축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82) 스텐달이 볼 때, 성서신학은 원래의 본문이 의미하였던 것 에 대한 순수한 서술적 작업을 의미하며, 성경이 오늘 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는 문제는 조직신학의 임무로 보았다. 이 입장을 차일즈의 관점에서 새롭게 풀이한다면, 구약신학은 이스라엘이 믿었던 것을 객관적으로 세우는 것이며, 그 내용은 역사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83) 차일즈는 바로 스텐달의 이 두 단계적 해석 을 거부하면서, 스텐달이 출발점에서 근본적으로 실패하였다 고 본다. 84) 즉, 스텐달은 처음에는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마지막 단계에 믿음을 도입하는 해석작업을 하고 있다. 이것은 스텐달 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의 주석들이 대부분 도입하는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주석들은 중립적 토대 위에서 출발하며, 아무런 신학적 입장에 대한 헌신도 없이, 본문비평과 자료에 대한 역사적, 언어적 문제를 다룬다... 진정한 신학적 주석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파괴되었다. 85) 따라서, 무신론자도 기쁘게 사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방법론은 진정한 의미에서 중립적 이 아니며, 오히려 반-신학적이며 (anti-theological) 기독교적 성서신학에 적절하지 않다고 차일즈는 지적한다. 차일즈의 관점에서 보면, 서술적인 작업도 신학적인 작업의 심장부 에 있다. 따라서 주석작업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명백한 믿음의 뼈대(explicit framework of faith)에서 시작될 때 진정한 신학적 작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86) 요약하여 말하자면, 그가 이해하는 성서해석은 서술적인 작업(descriptive)일 뿐 아니라 규범적인 것(normative) 이다. 87) 물론 차일즈가 말하는 믿음 은 해석에 있어서 모든 객관적인 기준들을 파괴하는 것 은 아니다. 즉, 그는 개블러(Gable) 이전 시대에 기성( 旣 成 )의 신학으로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침묵시킨 데로 되돌아가는 작업을 하자는 것 은 아니라고 빈번하게 말한다. 88) 그는 우리가 잘 아는바 대로, 자료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등의 방법론을 늘 사용하고 있다. 8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81) K. Stendahl, "Biblical Theology, Contemporary." In IDB (Abingdon Press. 1962), 418-32. 82)Ibid. 419. 83)Childs, "Interpretation in Faith," 434. 84)Ibid., 437. 85)Ibid. 86)Ibid. 438. 87)Ibid. 443. 88)Noble, op. cit. 23. 89)Ibid. 439-40. - 18 -

서술적 작업에서 신학적 작업이 처음부터 충분히 고려되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차일즈는 궁극적으로, 서술적이고, 규범적인 작업의 차이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구별을 상대화 하려고 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그는 믿음으로 해석하기 에서 세 가지 점을 강조한다. (1) 우리는 한 본문에서 전체로 넘어가는 해석적 순환의 변증법을 따라야 한다. 즉, 서술적 분석은 신학적 임무에 소속되도록 하여야 한다. 90) 달리 말하자면, 믿음의 뼈대는 (본문 속에) 이질적인 구조를 부과하여 결과를 미리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석학의 온전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해준다. 91) (2) 신구약 성경은 둘 다 한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로서, 서로의 빛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믿음의 체계에서 볼 때, 구약과 신약은 단순한 종교적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이르는 길로서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 92) 차일즈가 볼 때, 두 성경의 관계를 해석에서 추구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 관계 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공통의 의미론적 구조 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신적 목적에 대한 믿음의 뼈대 속에서 주석가는 두 증거가 가리키는 (신적) 실재의 성격에 대하여, 더욱 온전히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93) (3) 주석가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94) 즉, 모세나 예레미야, 바울이나 요한의 증거는 다른 말씀의 매체(vehicle)가 된다. 주석가는 단지 역사적인 과거에 함몰되지 말고, 성경의 증거를 넘어서 그것들이 지시하는 참된 실재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차일즈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95) 신앙의 뼈대 속에서, 혹은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의 실제에 동참함으로써, 주석가는 구약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그 실재를 이해하려고 한다. 신학적인 해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알리신 교회의 임무이다. 성령은 해석의 방법은 아니지만, 교회에 약속된 신적 실재이며 이해하려는 자유를 창조하는 참된 조명의 원천이시다. 차일즈의 믿음으로 해석하기 는 독자들에게 그가 말하는 믿음 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게 한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믿음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서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신앙의 규칙 (regula fidei)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새롭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볼 때, 초대교회는 유대인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지만, 말시온(Marcion)이 등장하여 전통적 정경관을 부정하고 교회가 그의 진정한 경전(authentic scriputure)을 결정할 수 있는 비평적 원리를 도입하게 되었다. 96) 이리하여 말시온은 기독교회가 유대교의 경전에서 벗어나서, 그가 믿는 기독교성경을 뽑아냄으로써 원시기독교의 90)Ibid. 440. 91)Ibid. 92)Ibid. 93)Ibid. 94)Ibid. 443. 95)Ibid. 96)Childs, Introduction, 42. - 19 -

전통을 비평적으로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말시온이 복음서에서는 오직 누가복음 만을 인정하고, 몇 개의 바울 서신 만을 진정한 기독교 성경이라고 주장한 바에 대하여, 차일즈는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은 믿음의 규칙 (rule of faith)에 호소함으로써 대항하였다 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거스틴에 의하여 믿음의 유추 (analogy of faith)라는 용어로 발전된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97) 이리하여, 차일즈는 말시온으로부터 역사비평학에 이르기까지, 신구약성경을 기독교회의 경전으로 보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모든 해석의 흐름들을 열거하면서, 그는 믿음의 규칙 과 믿음의 유추 라는 초대교회의 입장을 견지하여, 두 성경의 통일성과 신적인 차원에 대한 믿음을 해석에 있어서 요청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가 경전에 대한 건전한 비평 의 자리까지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98) 차일즈는 그의 믿음으로 해석하기 (1964)라는 초기 글 이후에도 해석에 있어서 믿음의 필요성 에 대한 신학적 헌신을 포기한 것 같지 않다. 그로부터 20년 후, 또다른 주요역작인 정경으로서의 신약 (1984)에서 그는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99) 신약성경에 반영된 믿음에 대하여 별로 혹은 거의 참여하지 않는 사람에 의하여 신약에 대한 통렬한 신학적 주석이 이루어 진 것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주석작업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달리하게 되면, 본문에 대한 관심 역시 달라지게 된다. 핵심적인 해석적 쟁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전수된 믿음의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의지(willingness)가 있느냐 하는 데 있다. 2.3. 차일즈의 정경관과 정경적 접근 이 시점에서 우리는 차일즈가 그의 해석적 방법론에서 핵심적으로 사용하는 정경 개념과 그의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정리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2.3.1. 차일즈의 정경관 차일즈는 그의 구약서론 에서 한 장에 걸쳐 정경 문제 를 다루고 있다. 그는 정경론 에 대한 전통적 입장, 19세기 역사비평학적 입장, 새로운 합의를 찾기 위한 노력 등을 길게 다룬 후, 정경이란 용어에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이 함께 있다 는 자신의 입장을 제시한다. 100) 이어서 그는 정경의 역사적 차원 을 약화시키고 신학적 차원 인 성경의 권위와 정경화 (canonization)를 강조하는 레이만(Leiman)과 그 반대의 자리에서 신학적 차원 을 약화시키고 역사적 차원 을 부각시키는 선드버거(Sundberg)와 스완슨(Swanson)의 입장을 97)Ibid. 98) Ibid. 41-45. 99) B.S. Childs, The New Testament as Canon: An Introduction. (London: SCM, 1984), 39; Noble, 300에 서 인용됨. 100) Childs, 구약서론 58쪽. - 20 -

비판한다. 101) 차일즈가 볼 때 정경의 형성 과정에서는 권위가 있는 문헌으로 자라가는 책 과 그것을 보전하는 공동체 (the community which treasured it)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102) 권위 있는 말씀이 공동체로 하여금 거룩한 명령(divine imperative)에 순종함으로써 그 모양과 내용을 형성하게 한다. 달리 말하자면, 말씀을 듣는 자들이 권위 있는 전통을 듣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선택하고, 수집하고 배열하는 과정을 통하여 그 작품을 만들어 가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경이란 후대의 공동체가 원래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속에 존재하고 있는 권위를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인정해 가는 과정을 포함하며, 최종적으로 경전의 범위를 확정해 가는 것 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차일즈는 성경이 정경으로 형성되어 가던 역사적 과정 속에 이미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주장하며, 성경본문의 해석에 있어서는 바로 이런 정경적 형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함 을 지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역사비평학적인 구약서론에서 정경론을 마지막 장으로 밀쳐내어 버리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되었으며, 부적절하다 (entirely misleading and deficient). 103) 우리는 차일즈가 이처럼 정경론에 대하여 높은 비중을 두는 것으로 보면서, 그가 전통적인 성경의 영감성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주제는 차일즈가 이전에 제시한 믿음으로 해석하기 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차일즈는 성경의 영감론 에 대해서는 그의 구약서론 에서 전혀 말하지 않고 있으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신앙의 규칙 (rule of faith) 혹은 진리의 규칙 (rule of truth)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다. 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일즈가 영감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입장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문자적 의미와 풍유적 의미에 대한 제임스 바아의 이해에 대한 비평적 고찰 (1990)이란 글에서, 오리겐(Origen)이 말한 바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 같다. 105) 성경본문은 거룩한 진리가 전달되는 여러 의미 차원을 갖고 있다. 이 차원은 성경을 그렇게 형성한 신적 저자(divine author)께서 믿음의 비밀에 대하여 들어갈 수 있는 여러 길을 제공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드신 것에 기인하고 있다. 본문의 차원 중 어느 것이 들려지든 간에, 계시의 양식(mode)은 직접적이며 진실하다. 오리겐은 문자적 영감관(verbal inspiration)을 견지한 주석가의 고전적 모범으로 101) 선드버거와 스완슨은 권위 있는 책 으로서의 성경(scripture)과 그 책의 범위를 교리적으로 확정하여 만든 정경 (canon)을 개념적으로 분리하고 있다 (Childs, ibid). 102) Ibid. 59쪽. 103) 상동. 60쪽. 104) 상동. 50쪽. 105)B.S. Childs, "Critical Reflections on James Barr's Understanding of the Literal and the Allegorical." JSOT 46(1990), 4. - 21 -

남아 있다. 또한 차일즈는 성서신학의 위기 (1970)라는 역작에서 성경으로부터 영감을 분리하고 영감을 성경 기자 내면의 일종의 상상력으로 재해석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는 확고한 신학적 대안을 주지 못하였다. 성경신학 운동의 와해를 가져온 주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는 성경의 영감을 파악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한 것이었다 라고 주장하였다. 106) 차일즈가 볼 때, 성서영감설에 대한 주장은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의 정경적인 정황의 독특성에 대한 주장이다. 하나님의 영감은 이 한 정황에 대한 특별한 특권을 주장하는 방법이다. 107)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차일즈는 성경의 영감론 에 대한 가능성을 상당히 열어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08) 이런 차일즈의 관점은 현대교회의 성서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강조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교회가 성서해석을 함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은 잊혀진 경건시대에서 온 무의미한 자취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백성들에게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알려달라는 지속적 필요를 인정하는 것이다. 109) 그는 또한 신구약의 성서신학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0) 비록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자신을 명백하게 알리셨지만, 인간의 죄성 때문에 그의 계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오직 거룩한 은혜의 조명, 즉 성령의 내적 증거 (inner witness of the Holy Spirit)에 의해서만 말씀이 들려지고 이해될 수 있다(Institute I.vii.12). 뿐만 아니라, 칼빈은 말씀과 성령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오직 성경 본문의 통하여 성령이 조명하심을 애써 분명하게 하려고 한다. 111) 우리의 주제인 유신론적 관점 에서 정리한다면, 차일즈는 성경을 교회의 경전으로서 처음부터 신학적 차원에서 심각하게 읽어야 할 것을 강조하며, 그의 성경관에는 영감성과 권위 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라는 신학적 차원까지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6) B. S. Childs, Biblical Theology in Crisis (Westminster Press, 1970). 박문재역. 성경신학의 위기 (크 리스찬다이제스트 1992), 104. 107) Ibid. 108) 바르트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차일즈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연구에서 역사비평적 방법은 정당한 자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지성을 준비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내가 그것과 유서깊은 영감교리 사이 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더 넓고, 깊고 중요한 후자를 택하겠다. 영감교리는 이해의 수 고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서, 그것 없이는 아무리 기술적인 장비가 완전해도 쓸모가 없다. K.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Oxford Uni. Press), 1. R. A. Harrisville, W. Sundberg, The Bible in Modern Culture. B. Spinoza to B. Childs (Eerdmans, 2002), 13에서 인용됨. 109) Childs, 성경신학의 위기 100쪽, Noble, 290쪽에서 인용됨. 110) Childs, Biblical Theology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Theological Reflection on the Christian Bible (SCM, 1992), 48. 111) 노블(Noble)은 이와 같은 차일즈의 성령론에 대하여 "비록 차일즈가 성령의 조명은 '칼빈에 의하여 너무나 철저하게 발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듬을 필요가 없다'라며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그의 성령론은 매우 산발적이며 불분명함 을 지적하고 있다(290쪽). - 22 -

2.3.2. 차일즈의 정경적 해석 우리가 볼 때, 차일즈의 정경적 해석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을 지닌다. (1) 차일즈에 따르면 자신의 정경적 해석은 정경비평 (canonical criticism)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정경적 접근 (canonical approach)으로 부른다. 전자는 샌더스가 처음 사용한 것이며, 112) 차일즈는 자신의 해석이 자료비평, 양식비평, 수사비평 등과 같은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의 시각으로 이해되길 원한다. 113) 그는 성서(Bible)를 성경(Sacred Scripture)로 보는 입장에서 해석을 하는 것을 자신의 정경적 접근 으로 설정한다. (2) 정경적 해석은 문학비평과 달리 원래의 문학적 혹은 심미적인 통일성 을 찾지 않고, 공동체의 믿음과 실천과의 연관성 속에서 성경 본문을 해석한다. 114) 왜냐하면 성경 본문은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특정한 신학적 역할을 공동체의 믿음과 실천에 행사하기 때문이다. 115) (3) 정경적 해석은 양식비평이나 전승사와는 달리 성경의 최종적 형태 (final form)에 관심을 갖는다. 성경은 그 전 역사(pre-history)가 어떠하든지 간에 원래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배경들은 뒤로 사라지게 되었으므로, 그 최종적인 본문 만이 계시의 총체적인 역사에 대한 증거 (witness to the full history of revelation)가 된다. (4) 정경적 해석은 성경을 하나님을 만나는 매체 (the vehicle to encounter God)로 보며, 116) 구약성서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만남의 역사를 반영하며 형성된 것 으로 본다. 117) 바로 이런 특수한 역사가 이후의 모든 동일한 믿음의 공동체에 규범적이 되었으며, 이 규범성은 역사적으로 한정지어진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한 명령과 약속으로 주어지며, 기독교 교회는 그 유산을 상속받았다. 118) 성경은 그 자체를 넘어 하나님의 실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주석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이다. (5) 정경적 해석은 신구약 성경을 통일성의 관점에서 보며, 구약성경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이며,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두 성경은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112) J. A. Sanders, Torah and Canon (Fortress Press, 1972). 샌더스는 자신의 정경비평을 역사비평학의 자 연스러운 확장 으로 본다. 왜냐하면, 성경연구란 정경이 현재의 정경으로 자라간 과정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정경을 형성한 다양한 형식과 해석의 과정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샌더스는 이 점에 있어서 정경 을 수용한 공동체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하고 있다. 차일즈는 샌더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 다. 나는 고대 이스라엘 안에서의 해석적 과정을 재구성하려는 샌더스의 시도에 대하여 비평적이다. 그것은 정경화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작업을 한다는 것은 매우 사변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Childs, 구약서론, 57쪽. P. R. Davies, Scribes and Schools. The Canoniz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Westminster Press, 1998), 48-51을 보라. 113) B. S. Childs, "The Canonical Shape of the Prophetic Literature." In Interpreting the Prophets. Ed. by J. L. Mays, P. J. Achtemeier. (Fortress Press, 1987), 48-49. 114) Childs, 구약서론, 74쪽. 115) Ibid. 116) R. A. Harrisville, W. Sundberg, The Bible in Modern Culture. B. Spinoza to B. Childs (Eerdmans, 2002), 320-21. 117) Childs, 구약서론, 75쪽. 118) Ibid. 75-77쪽. - 23 -

신중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 두 증거는 따로 그리고 조화되어 들려져야 만 한다(must be heard, both separately and in concert). 119) 차일즈는 자신의 정경적 해석을 신구약 성경의 모든 부분에 적용하고 있지만, 선지서(예언서)에 대한 몇가지 적용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아모스 9:11-12에 있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는 예언은 아모스의 전체적인 심판 예언과 상충되기 때문에 역사비평학에서 진정성이 없는 (non-genuine) 본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차일즈가 볼 때, 이 본문은 아모스의 말씀을 선지자의 역사적 전망을 초월하는 더욱 넓은, 종말론적인 뼈대 속에 둔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모스가 본 파괴를 넘어 희망이 있다. 120) 또한 '소위 제 2 이사야'(사40-55장)에 있어서도, 역사비평가들은 이 본문을 바벨론 포로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지만, 현재의 정경적 위치에서 이 장들은 원래의 배경에서 의도적으로 느슨하게 흘거워졌으며, 주전 8세기의 선지자인 예루살렘의 이사야의 배경 속에 놓여지게 됨 으로써 새로운 신학적 맥락 을 만들게 되었다고 본다. 121) 2.4. 차일즈의 정경적 접근에 대한 평가들 122) 해리스빌과 선드버거는 현대문명에 있어서 성경 (2002)이란 책에서 계몽주의의 시작으로부터 후기비평시대까지 이루어진 성경비평사를 다루면서, 성경에 대한 첫 철학적 비평을 시작한 스피노자로부터 역사비평을 넘어가려고 한 차일즈까지 다루고 있다. 123) 존 바톤 역시 20세기 구약학 연구를 되돌아 보면서 라는 글(1999)에서 19세기 최고의 구약학자로서 벨하우젠을 소개한 후, 20세기에서 가장 기억될 인물로서는 차일즈를 꼽고 있다. 124)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차일즈는 성서학 분야에서 역사비평학에서부터 후기현대적 해석으로 넘어가는 주된 관문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이 학계에서 제시되었으며, 그것들을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 차일즈는 성경해석에서 정경 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경성은 믿음의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으며, 각 공동체 마다 정경의 내용과 범위를 달리 설정하고 있다. 바톤(Barton)은 이와 연관하여 기독교회의 정경은 히브리 성경인가 혹은 그리스 성경인가, 119) Ibid. 78쪽. 120) Childs, "Canonical Shape of the Prophetic Literature." 44. 차일즈가 볼 때, 고레스도 아브라함과 거의 분리할 수 없는 신학적 표상(theological construct)이 된다." 121) Ibid. 45쪽. 122)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차일즈 연구에 대하여서는 김은규 "정경비평: 차일즈와 샌더스의 주장." 성공회대 학논총 8 (1995), 156-170. 김이곤, "B. S. Childs의 성서해석 방법론." 신학연구 (1980), 49-77. 배정 훈, "정경해석 방법(Canonical Analysis)의 이해." 신학과 문화 9 (2000), 71-90. [장로회대전신학교]. 왕 대일 "정경과 토라: 오경에 대한 정경비평적 고찰." 신학과 세계 23 (1991), 42-84. 장일선, "공시적 성 서연구 방법으로서의 구약정경 비평 소고." 기독교사상 (1988.11), 127-41, 김정우, "시편 89편의 정경적 해석." 시편 89편: 그 문학과 신학 (총신대출판부 1990), 103-33을 보라. 123) R. A. Harrisville, W. Sundberg, The Bible in Modern Culture. B. Spinoza to B. Childs (Eerdmans, 2002). 124) J. Barton, "Looking Back on the 20th Century. 2. Old Testament Studies." ExpTimes 110 (1999), 348-51. - 24 -

혹은 라틴 성경인가 혹은 이디오피아어 성경인가? 라는 질문을 적절하게 던진다. 125) (2) 차일즈는 최종적 본문 (the final text)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데, 무엇이 최종적 본문인가? 차일즈는 구약성서에 있어서 마소라 사본 을 최종본문으로 여기지만, 고대역본들은 최종본문으로 여겨질 수 없는가? 예를 들어, 70인역의 예레미야는 마소라 사본 보다 훨씬 짧으며 배열도 다른데, 최종본문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3) 최종적 본문 의 중요성 문제는 본문비평과 역사비평을 해석에 포함하는가, 혹은 배제하는가?의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역사비평가들은 차일즈가 역사비평을 사용다고 한지만,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복음주의자들은 차일즈가 여전히 역사비평에 안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코긴스는 차일즈의 작업은 역사비평학의 기초 위에 이루어졌으며, 결국은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126) 예로서, 그는 차일즈가 이사야서를 전체로 읽는 데 있어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최근에 나온 차일즈의 이사야 주석 역시 온갖 편집비평으로 가득 차 있다. (4) 차일즈의 정경적 해석은 성경의 통일성 을 강조하며, 결국 다양성과 상이성, 불연속성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칼라웨이는 정경이 고대의 소리들을 보호하고 있으며, 본문 안에서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으므로, 차일즈이 해석은 소리의 다양성 (plurality of voices)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지적한다. 127) (5) 모벌리는 차일즈가 성경 본문이 오늘날의 믿음의 역동성과 연관하여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고 말한다. 그가 볼 때, 차일즈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규범이 된다 고 하지만, 그 규범이 어떻게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고 잘 지적하고 있다. 128) 나가는 말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재판에서 판결을 내릴 때,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 고 하였다(신19:15). 다산과 차일즈는 비록 다른 시대에 다른 종교적 체계 속에 살았지만, 동일한 증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증거는 우리의 신학함 에 있어서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경전의 원래의 정신을 회복함으로써, 당대에 이데올로기화된 해석에서 벗어나도록 제안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고착되어 가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의 위험성에 대한 밀뱅크의 고언을 다산과 차일즈의 해석적 방향과 함께 들을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129) 125) Ibid. 350쪽. 126) R. J. Coggins, "New Ways with Old Texts." Exp Times 107 (1996), 365. 127) M. C. Callaway, "Canonical Criticism." In An Introduction to Biblical Criticisms and Their Application. To Each Its Own Meaning. Ed. by S. L. McKenzie, S. R. Haynes. (Westminster, 1993), 132. 128) R. W. L. Moberly,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In The Face of Old Testament Studies Edited by D. W. Baker, B. T. Arnold. (Baker Books, 1999), 470. - 25 -

현대신학의 파토스는 그 거짓된 겸손에 있다. 신학이란, 치명적인 질병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학이 형이상학적 담화(meta-discourse)임을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 연구, 인본주의적 심리학, 혹은 초월적 철학과 같은 유한한 우상의 신탁이 되고 말 것이다. 다산과 차일즈는 탈이데올로기적 해석에 머무러지 않고, 더욱 적극적인 대안으로서 유신론적 해석학을 추구하여야 함을 역설함에 있어서 동일한 증거를 하고 있다. 다산에게 있어서 西 學 이 가져다준 유신론적 인식론은 그의 세계관의 변화 뿐 아니라, 경전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유신론적 관점에서 유학 본래의 정신을 찾게 하고, 실천적인 동기를 일깨워주었다. 물론, 다산이 가진 신관이 기독교적 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원시 유교와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 상제 와 귀신 의 존재를 경전해석에서 새롭게 요청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신의 본체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논증에 대하여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 신학의 유신론은 유학의 막연한 상제와 귀신관에 대하여 보다 분명한 증거를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차일즈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역사비평학의 정점에서 이미 형이상학화 되고, 믿음의 공동체에서 벗어난 무신론적 신학화 의 위험성을 충분히 느끼고 있으며, 믿음 을 해석에 도입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주관성의 문제 까지 끌어 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신학적 헌신을 끝까지 견지하려고 애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일즈와 다산의 공통점은 앞으로 유학과 기독교가 어떻게 창의적으로 만날 수 있는지 제시해 주고 있으며, 한국신학의 새로운 토착화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29) J.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Oxford: Blackwell, 1990), 1. S. E. Fowl, Engaging Scripture (Oxford: Blackwell,1998), 23에서 인용됨. -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