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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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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1 창화현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1018) 양주에 예속시 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조선) 태조 6년 (1397)에 양주에서 치소를 이곳 견주로 옮겼다가 뒤 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지금의 古 州 內 이다. 라고 하여 두 기사간에 다소의 차이점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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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중점연구소 1세부 조선왕조실록 내용 -여수, 여천- -대경도, 묘도, 송도, 돌산도, 장도, 금오도, 안도, 부도, 개도, 백야도, 사도, 거문도, 평도, 초도- 2008년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 대경도(大鏡島)의 내용 1. 1600 / 선조 121권, 33년 1월 28일(계유) / 좌의정 이항복이 왜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 책을 논하는 차자를 올리다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차자(箚子)로 아뢰었다. 신은 상심(傷心)이 누적되어 질병이 되었고 그 질병이 오래되어 고질이 되었습니다. 그리 하여 1년을 누워 있었으므로 근해(筋骸)와 골절(骨節)이 지칠 대로 지쳐 일어나지 못한 지 가 이미 9개월이나 되었습니다. 지난번 사은(謝恩)한 뒤 다시 소명(召命)을 받들고 부축을 받으면서 예궐하였었는데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갑자기 기력(氣力)을 쓴 탓으로 노열(勞熱) 이 가중되어 식음을 전폐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비변사 낭관이 성 교(聖敎)를 전하여 왔는데 몸져 누워 있는 상태에서 받들어 다 읽기도 전에 성려(聖慮)의 미 치신 바가 정신(廷臣)들이 천만번 계책을 세워도 이를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임을 더욱 분 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변신(邊臣)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지극한 훈계인 것입니다. 신이 경인년사이에 비변사 낭청으로 있었는데 그때 적추(賊酋) 수길(秀吉)이 우리에게 신사 (信使)를 요구하면서 우리 나라의 반민(叛民) 사화동(沙火同)과 오도(五島)의 왜적으로서 누 차 우리의 변경을 침략한 바 있는 신삼보라(信三甫羅) 긴요시라(緊要時羅) 망고시라(望古時 羅) 등 세 왜적을 박송(縛送)하여 왔고, 이어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1백 30여 구(口)를 다시 쇄환(刷還)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김대기(金大璣) 공태원(孔太元) 등 2인은 자못 영리하여 문 자(文字)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오도(五島)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하면서 그 섬의 두추 (頭酋)의 소위(所爲)와 토지의 비척(肥瘠)과 인민의 다소와 풍속 형세에 대해 매우 상세히 이야기하였으므로 지금도 기억 할 수 있습니다. 또 을미년, 병신년 사이에는 양 책사(楊冊 使)의 접반사로 해상(海上)을 왕래하면서 제장(諸將)과 변민(邊民)을 만날 적마다 해상의 형 세에 대해 문의하였습니다. 이에 의하면 오도(五島)는 대마도 오른쪽에 있는데 땅도 작고 토지도 척박하며 인호(人戶)는 1천도 못되고 백성들은 항업(恒業)이 없어서 판매(販賣)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출몰하면서 노략질하는 것이 다른 왜적보다 더욱 극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시 우리 변경에서 노략질 하는 영적(零賊)들의 태반은 이 섬에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침구해 오는 길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도에서 동남풍을 타고 삼도(三島)에 이 르러 유숙(留宿)한 뒤 선산도(仙山島)를 지나 곧바로 고금도(古今島)와 가리포(加里浦) 등처 에 도달되는 길이고, 대마도에서 동북풍을 타고 연화도(蓮花島)와 욕지도(浴知島) 사이에 이 르러 유숙한 뒤 곧바로 남해(南海)의 미조항(彌助項) 방답(防踏) 등처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이는 왜적이 전라도를 침구하는 익숙한 길인데 그 사이의 수로(水路)가 매우 멀어서 순한 바람을 탄다 하더라도 모두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하지는 못하고 반드시 바다 가운데 있는 섬들 사이에서 유숙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일 좋은 바람이 있을 수는 없기 때 문에 바다에 정박하고 있던 적선이 다음날 풍세가 순하지 못하면 또다시 순풍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연화도와 욕지도는 바로 경상 우수영(慶尙右水營)의 연대(煙臺)와 마주 바라 다 보이는 섬으로 적선이 왕래하는 숫자를 분명하게 셀 수 있습니다.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 에 오도의 왜적이 삼도와 선산도를 지나서 고금도(古今島)를 침범할 경우는 늘 뜻밖에 나오 - 2 -

기 마련이지만 대마도의 왜적이 연화도와 욕지도를 지나 남해 등처를 침범할 경우에는 우리 에게 발각이 됩니다. 그러나 대마도서 부산에 닿을 경우 정동풍을 만나기만 하면 한번 돛을 올려서 금방 도착하 게 됩니다. 부산에서 대세(大勢)로 여겨 의지하고 있는 것은 우수영뿐인데 수영과 대마도는 향배(向背)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에 바람의 역순(逆順)도 이에 따라 구별됩니다. 왜적이 순 풍을 타고 부산을 향하게 되면 수영 쪽에서는 역풍이 되는데 더구나 몰운대(沒雲臺) 해운대 (海雲臺) 아래에는 파도가 높고 물결이 사나와 배를 운행하기가 불편하여 갑자기 급한 일을 당하게 될 경우 서로 구제하기가 어렵습니다.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적의 계책을 헤 아려 보건대, 그들이 작은 숫자로 산만하게 흩어져 있을 경우는 그 의도가 사세를 엿보아 출몰하면서 노략질하는 데 있으니, 호남(湖南)이 우려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대군(大軍) 을 이끌고 평탄한 길을 따라 올 경우에는 그 의도가 공격 함몰시키는 데 있는 것이니, 영남 (嶺南)이야말로 적을 맞는 문호(門戶)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이 일찍이 들은 일이고 눈으로 본 적은 없으며, 또 그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도 잘 모 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에 의거해서 말해 본다면 주사(舟師)의 대진(大陣)을 부산에 설치한 다음 남은 병력을 나누어 견내량(見乃梁) 입구를 지키고 고금도(古今島)의 전면에 웅거하게 하여야 바야흐로 장책(長策)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수군과 함선이 호남에 견주어 영남이 더욱 단약(單弱)하기 때문에 지금 영남 좌도의 수군을 옮겨다가 부산의 전면을 전담시키고, 우도의 수군을 신지(信地)에서 진을 쳐 양남(兩南)의 요로를 끊게 함으로써 부산의 성원(聲 援)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함선의 숫자와 군액(軍額)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막강 한 흉봉(凶鋒)을 대적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이들은 부산은 이미 적이 나오는 순로(順路)인데 호남의 형세는 위에서 진 달한 것과 같으니, 적의 대병(大兵)이 반드시 바다에서 유숙하고 도서(島嶼)에 출몰하면서 부산의 순로를 버리고 위태로운 곳을 거쳐 호남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호남의 수군을 다 철수시켜 부산에 집결시킨 다음 한번 결사전(決死戰)을 벌여 승부를 짓는 것이 옳다. 고 합 니다. 이 또한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성교(聖敎)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곧바로 호남 을 공격하여 아군의 후면으로 돌아나올 상황을 더욱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아주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임진 왜란 이후 호남 연해의 백성들은 한번 수군에 예속되면 죽지 않고서는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본토(本土)를 멀리 떠나서 한산도 (閑山島)나 영남(嶺南)의 지역에 가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호남의 백성들은 수군을 귀굴(鬼窟)로 여기고 있습니다. 군정(軍情)이 이러하기 때문에 지난 병신년과 정유년 사이에 조정에서 통제사(統制使)를 독책하여 노량(露梁) 밖에다 진을 치도록 누차 독촉하여 왔습니다만, 수군이 감히 한산도에서 일보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안골포(安骨浦)와 가덕도 (加德島) 이하의 해로(海路)의 형세가 진을 설치하기가 곤란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호남의 군정이 일보를 나아가면 그만큼 고통이 가중되고 고통이 가중되면 금방 무너지기 때문이었 습니다. 군정에 따르고 지의(地宜)를 살펴 주저하며 감히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때 문이었습니다. 지금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한효순(韓孝純)이 통제사 이하 장관(將官)들과 상의하여 경도 (鯨島)에 1진(陣)을 설치하고 고금도에 1진을 설치하려 하고 있는데, 비변사에서는 통제사 가 멀리 경도에 가 있게 되면 부산 거제도로 오는 적에 대해 성세(聲勢)를 이룰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달려가 구원하려 해도 반드시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니, 경상우도 근처로 나아가 주둔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하였습니다. 한효순이 이 때문에 수일 전에 신에게 서신을 - 3 -

보내어 적이 향하는 곳을 어떻게 미리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전함을 영남으로 다 옮기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것이 상의 분부에 이른바 호남 우도에 중병( 重 兵 )을 주둔시켜야 한다. 는 뜻인 것입니다. 이밖에 또 영남에 나아가 진을 설치한다면 민심이 안 정되기 어려운 것은 물론 인력도 지탱하기가 어렵고 군량도 계속 잇대기 곤란하다. 지금의 사세로는 부득불 호남과 영남을 나누어 지키는 것이 득책( 得 策 )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양남( 兩 南 )은 물력( 物 力 )이 너무도 단약( 單 弱 )하여 두 도( 道 )의 병력을 합쳐 일면( 一 面 )만을 지키게 하여도 오히려 진( 陣 )을 이루지 못할 형편인데 여러 진영으로 나누어 주둔 시키면 형세가 멀고도 외로와서 수미( 首 尾 )가 서로 돌볼 수 없게 되니, 옛말에 이른바 7백 리에 연이어 친 진영으로는 적을 막기가 어렵다. 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육군의 경우는 더더욱 두서가 없으니 이는 근일 이미 기진 맥진한 기운을 뿜어내어 수군에만 전력 하고 육군은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형세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주야로 걱정하면서도 계책을 세울 방법을 모르는 이유인 것입니다. 양남의 근일 형세가 대략 이와 같습니다. 마침 상의 분부를 받들어 신이 멀리 떠나야하므로 대강 한두 가지를 진달하였습니다. 시조( 施 措 )의 사의( 事 宜 )와 포치( 布 置 )의 편의에 대해서 는 모두 멀리서 미리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군전( 軍 前 )에 달려가서 다시 수륙( 水 陸 ) 의 제장( 諸 將 )들과 대면하여 상의하고 만일 특별한 의논이 있으면 조목조목 열거하여 치계 한 다음 삼가 성재( 聖 栽 )를 기다리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74책 121권 22장 B면 영인본 24책 30면 분류 *정론( 政 論 ) / *군사( 軍 事 ) / *외교-왜( 倭 ) / *교통-수운( 水 運 ) 2. 1600 / 선조 121권, 33년 1월 29일(갑술) / 이항복 이산해와 남방 방비책 마정 군공 봉 화법 도적 대책 관왕묘 건립 등의 문제를 논의하다 좌의정 겸 도원수( 左 議 政 兼 都 元 帥 ) 이항복과 영의정 이산해를 인견하였다. 도승지 유희서 ( 柳 熙 緖 ), 가주서( 假 注 書 ) 이욱( 李 稶 ) 권태일( 權 泰 一 ), 겸 춘추( 兼 春 秋 ) 이이첨( 李 爾 瞻 ), 봉교 ( 奉 敎 ) 김선여( 金 善 餘 )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의 병은 무슨 증세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어떠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처음 담증( 痰 症 )이었는데 지금은 상기( 上 氣 )가 주가 되었기 때문에 심기( 心 氣 )가 허약해지 면서 정충증( 怔 忡 症 )이 더욱 심함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여러해 동안 국사를 위해 힘쓰느라 질병이 난 것이다. 내려갈 적에 의관( 醫 官 )을 데 리고 가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의관의 숫자가 적은데다가 정부 약방( 藥 房 )에 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의술( 醫 術 )을 모르 니 데리고 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능숙한 의원을 데리고 가라. 외사( 外 司 )에 약( 藥 )이 없으면 내약( 內 藥 )을 가지고 가라. 전라 - 4 -

도로 먼저 가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먼저 호남으로 갔다가 보리가 익은 다음 영남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성식( 聲 息 )이 있는 곳이 있으면 즉시 책응( 策 應 )해야 하기 때문에 예정( 豫 定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들은 바에 의하면 남방의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을 얼마나 조치했다고 하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바다를 방어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있는데 전선( 戰 船 )은 3도( 道 )를 합쳐 모두 80여 척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80여 척이 모두 판옥선( 板 屋 船 )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판옥선입니다. 소선( 小 船 )은 정수( 定 數 )가 없기 때문에 판옥선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선 하나마다 소속되는 소선의 수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판옥선은 아무리 작아도 속선( 屬 船 )이 2척은 있어야 되는데 1척도 없는 실정입니다. 지나번 육군을 조발하여 벌목( 伐 木 )하느라고 많은 공역( 功 役 )을 허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재( 船 材 )는 바닷가의 모든 섬에 무한히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선재는 이제 머지 않아 죄다 없어질 형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전죽( 箭 竹 )은 닥나무와 같아서 벨수록 무성하여지지만 선재( 船 材 )는 50 60년이 아니면 성 장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남( 兩 南 )의 연해에는 벌레가 먹기 때문에 더욱 쉽게 썩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도 들었는데 그 벌레의 모양이 어떠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모양은 굼벵이와 같고 진액은 콧물같은데 연기를 쐬면 조금 덜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겠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이는 1 2인의 하루 역사( 役 事 )에 해당되는데 자주 하면 벌레먹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80 척에 격군( 格 軍 )의 숫자가 다 충원되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정착하여 사는 집이 없어서 짐을 싸놓고 앉아 있는데 이들을 격군으로 삼았기 때 문에 임진년 이후 전라도 연해에 사는 백성의 원고( 怨 苦 )가 제일 극심합니다. 그래서 격군 이 되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비변사에서는 3번으로 나누어 하면 고통스럽 - 5 -

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순찰사 한효순( 韓 孝 純 )이 사사로이 보내온 통문( 通 文 )을 보 니 초운( 初 運 )은 교체시킬 수 있어도 2 3운( 運 )으로 갈수록 점점 교체시키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동궁( 東 宮 )께서 갑오년에 남방에 계실 적에 연해를 순심( 巡 審 )하시다가 충청 수 영( 忠 淸 水 營 )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그날 한밤중에 온성에 통곡 소리가 진동하였으므로 사연 을 물어보니, 한산도에서 소식이 왔는데 죽은 사람이 83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처자 가 모두 통곡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이 이렇게 많기 때문에 기필코 사력을 다 하여 모피( 謀 避 )하려 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격군이 고통스러움을 느끼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용동( 聳 動 )시키는 일을 거 행해야 하는데 춘신( 春 汛 )이 이미 박두하여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항복이 아뢰기를, 더욱 극심한 것은 격군입니다. 사부( 射 夫 ) 포수( 砲 手 )에 있어서도 일체 수군에 편입시켜 집 을 돌아볼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연해의 무사들이 모두 서울로 도피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격군뿐만이 아니라 군량 등에 대한 일도 조판( 措 辦 )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화포( 火 砲 )가 제일 필요한데 주조( 鑄 造 )하여 만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왜선( 倭 船 )은 작은데 우리의 배는 크다고 한다. 저들이 우리처럼 큰배를 만들어 대포를 싣고 오지는 않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황윤길( 黃 允 吉 ) 등의 말을 들으니 우리의 배보다 큰 적선( 賊 船 )이 매우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진년 이후 접전처( 接 戰 處 )에서는 큰 배를 못보았는데 황신( 黃 愼 )이 판옥선( 板 屋 船 ) 을 타고 바다를 건너갔을 적에 왜인들이 그 제도를 보고 좋아하였으나 느리고 무거운 것을 싫어하여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지난번 패전 때 우리의 배가 적에게 나포되어 간 것이 많고 포로로 잡혀 간 우리 백성 가 운데 배를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이 또한 많으니, 과연 상의 분부처럼 지극히 우려 된다고 하 겠습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배를 부림에 있어 우리는 삼풍( 三 風 )을 쓰는데 저들은 일풍( 一 風 )을 쓸 뿐 횡풍( 橫 風 )은 쓰 지 않습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지금은 필시 배웠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사( 將 士 )들에게 힘써 싸울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군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임진년의 경우에는 견고하고 치밀한 대선( 大 船 )이 있어도 믿고 싸울 수가 없었는데 힘을 다하다가 패하였다는 말은 못들었습니다. 배 안이 황란하여 한쪽이 비게 되면 저들이 우리 배로 뛰어 올라와 공격했기 때문에 아군이 매번 패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각기 힘을 내어 - 6 -

싸울 수만 있다면 배를 탔을 때는 육지와 달라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적이 대거 침입하여 오면 막기가 어렵겠지만 대마도의 노략질하는 왜적이라면 제제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의 장수가 어떤지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군함이 다소 있기는 하지만 대패( 大 敗 )한 뒤이어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 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인심이 임진년 때만 못한 것인데,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이런 농사철에 아문( 衙 門 )이 많이 내려가면 백성들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부득 이한 일 이외에는 모두 농사철 뒤에 하도록 하라.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봄보리는 때를 놓치면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농가에서는 보리로 여름을 넘기는 밑천 을 삼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방어하는 일 때문에 가는가, 조정의 명 때문에 가는가, 무슨 일로 가는가? 그곳에 가게 되 면 반드시 폐단이 있게 되어 백성들이 지탱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남방뿐 아니라 온 나라가 이미 고갈된 상태입니다. 적이 육지에 상륙하면 방어하기가 해중 ( 海 中 )에서보다 더 어렵습니다. 아군은 말을 타야 싸울 수 있고 보병으로는 작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판출할 국력이 없습니다. 목장의 말들은 모두 모축( 耗 縮 )되어 한 목장에 50 60필이 있는 곳도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목장의 말이 유명무실하다는 것은 세시( 歲 時 )의 우마적( 牛 馬 籍 )에 의거하여 위에서도 알고 있다. 한 섬에 단지 암말만 있어 소무( 蘇 武 )가 숫양을 기르던 것과 같으니 어떻게 번식시킬 수가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국초( 國 初 )에는 목장이 2백여 군데나 되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평일 내가 그 장부를 보았는데 지금은 그 숫자가 줄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국초에는 목장의 말이 7만 필이었고, 중종조( 中 宗 朝 )에는 3만 필이었으며, 명종조( 明 宗 朝 ) 에는 1만 필이었습니다. 감목관( 監 牧 官 )을 처음 설치할 적에는 1만 8천여 필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목관은 유익한가, 아니면 용관( 冗 官 )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처음 설치했을 적에는 매우 효험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복시( 司 僕 寺 ) 관리의 말에 따르면 그때 번식시킨 것이 5 6천 필에 이른다고 합니다. 말이 없으면 무사들이 전장에서 무용( 武 勇 )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 평시에도 국력이 중국처럼 사서 지급해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 다. 다만 값을 싸게 하면 사람들이 쉽게 살 수 있을 것인데 지금은 말 값이 매우 뛰었습니 다. 평안도의 경우, 포살수( 砲 殺 手 )와 수하( 水 下 ) 무사들을 시재( 詩 才 )할 때의 장계를 보면 논상 - 7 -

을 한 적이 있는데, 남방은 없습니다. 소신이 내려간 다음 시재를 위하여 가지고 간 물품이 없이 상만으로 시재를 더 실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직부전시( 直 赴 殿 試 ) 하게 하면 남방 사람들이 용동될 것입니만,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내려가서 인재를 선발할 적에 국사에 마을 다하는 자가 있거든 작은 허물이 있다 하 더라도 구애하지 말고 각별히 포장( 褒 奬 )하도록 하라.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군관( 軍 官 )으로 유치( 留 置 )시키겠습니다. 그러나 국사에 마음을 다 하여 공을 많이 세우면 군진( 軍 陣 )을 떠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에 이것이 도리어 민망스럽 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재의 권장에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수령들 가운데 현부( 賢 否 )가 뒤섞여 있는지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 무사 가운데 장수가 될 만한 자가 반드시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이것이 경이 제일 힘써야 될 일이다. 국사에 마음을 다한 사람이 도리어 죄구( 罪 咎 )를 받으 니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은 관재( 官 災 )를 당하는 근본이다. 라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분언( 憤 言 )인 것이다. 반드시 농사에 힘을 쓴 뒤라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농사에 힘쓰지 않으면 양장 경솔( 良 將 勁 卒 )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싸울 수가 있겠는가. 경은 감사 와 수령을 계책시키라. 농사는 때가 있는 것이니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인재를 권장하는 것은 소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반드시 위에서 특명( 特 命 )을 내린 뒤에야 용동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외에 다른 조항은 없습 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공( 軍 功 )에 거짓이 많게 되면 공이 있는 사람이 도리어 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말은, 상은 반드시 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요 거짓된 자를 지적하여 추개( 追 改 )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당초에 마련한 곡절을 신이 제일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진( 各 鎭 )의 거짓을 어떻 게 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훈정( 訓 正 ) 이하는 유사가 하고 당상( 堂 上 )은 위에서 가자( 加 資 ) 하십니다. 서로( 西 路 )에는 순안진( 順 安 鎭 )이 제일 크고 접전도 제일 많아서 군공도 다른 곳 보다 많습니다. 처음 수문장( 守 門 將 )에 제수한 것은 적을 사살( 射 殺 )했다는 이유에서였는데 그뒤에는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직접 전장( 戰 場 )에 나가지 않았다 하더라 도 관하( 管 下 )에서 수급을 베면 불러모은 것을 공으로 직( 職 )을 제수하였는데, 그뒤에는 그 렇게 하지 않고 적을 사살한 사람도 수급 하나를 벤 경우에 해당시켜 승직( 陞 職 )시켰습니 다. 그리하여 제장( 諸 將 ) 가운데에는 인정( 人 情 )이 오가는 즈음에 4 5명을 사살한 경우에도 다 주었던 까닭에 백신( 白 身 )으로 훈정에 이른자가 있었습니다. 그뒤 관하에서 벤 수급을 제목( 題 目 )으로 가선 대부에 오른 자도 있었고, 한 명의 왜적을 사살하지 않고도 훈정에 이 른 자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살한 일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했었지만 내가 매번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전장에 임하여 수급을 베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장( 賊 將 )을 사살할 수 있다면 이는 옛말에도 있듯이 세 개 - 8 -

의 화살로 천산을 평정하고, 한개의 화살로 승부를 결정했다. [ 三 箭 定 天 山 一 箭 決 勝 負 ] 는 것 이 된다. 그러나 국가에서 논공( 論 功 )할 때 이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사살했다고 하여 논공한다면 허위만 조장시킬 뿐이다. 이순신( 李 舜 臣 )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의논한 바 있었는데 아직까지 하지 않았는가? 여지도( 輿 地 圖 ) 를 보건대, 우리 나라에 사당을 세운 것이 외방에 많이 있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전조( 前 朝 )에서는 원충갑( 元 沖 甲 )의 사당을 세웠었고, 진주( 晉 州 )에는 김천일( 金 千 鎰 )의 사 당을 세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민간에서 사사로이 세운 사당은 있지만 국가에서 명하여 세운 것은 없다. 이 일에 대해서 는 문견( 聞 見 )을 헤아려서 하라.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이 내려가는 것은 단지 군무( 軍 務 )를 위해서인데 시폐( 時 弊 )의 측면에서 말씀드린다면 패군( 敗 軍 )에 관한 율( 律 )은 늦추고 머뭇거린 죄는 엄하게 할 작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째서인가? 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적과 싸우다가 패한 자는 군대를 복멸시켰다는 죄를 받고, 군대를 거두어 도망간 자는 군 대를 온전케 했다는 것으로 벌을 면하였습니다. 지금은 머뭇거린 데 대한 율을 무겁게 해야 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경이 절제하기에 달려 있다. 적을 헤아린 다음에라야 변에 대응할 수가 있을텐데, 양남( 兩 南 )의 병세( 兵 勢 )와 형세 그리고 도로에 대해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대마도에서 배를 타고 진시( 辰 時 )에 출발하여 순풍을 만나면 오시( 午 時 ) 말에는 부산에 닿 을 수 있습니다. 바람이 순하지 않더라도 미시( 未 時 )나 신시( 申 時 ) 사이에는 부산에 도착할 수 있는데, 정동풍( 正 東 風 )이 순풍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주즙( 舟 楫 )에 서툴다는 말은 나도 들었다. 주즙이 그들의 장기인데 어찌 우리 나라 만 못할 리가 있겠는가. 믿을 수 없는 말이 아닌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이 말은 신이 익히 들은 것이어서 믿을 만합니다. 저들이 전라도를 향한다면 순풍이라 하 더라도 한 번 돛을 올려 가지고는 도달할 수 없고 중간에 바다에서 유숙( 留 宿 )을 해야 됩니 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도( 鯨 島 )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순천( 順 天 ) 앞바다에서 멀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충청도로 향하면 전라도에서 알 수 있지만, 전라도의 적을 충청도에서도 알 수가 있 는가? - 9 -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서해( 西 海 )에는 해로가 하나 뿐이니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우리 나라의 포작한( 鮑 作 干 )을 많이 잡아갔기 때문에 해로의 형세에 대해 허실을 이 미 알고 있을 터인데, 먼저 충청도를 침범하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적은 필시 전라도를 먼저 침범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적이 중국을 침범하려면 산동( 山 東 )의 제( 齊 ) 노( 魯 ) 지방을 이곳에서 모두 갈 수가 있다.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중국을 침범하려면 충청도에서 가는 것이 쉽습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창성 부사( 昌 城 府 使 ) 오정방( 吳 定 邦 )이 금주위( 金 州 衛 )의 수로와 해랑도( 海 浪 島 ) 및 충청도 수로에 대해 역력히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랑도라고 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바로 중국의 판적( 版 籍 )에 들어 있는 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은 무슨 할 말이 있거든 좌상에게 말하라.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소신은 미열하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소신은 눈이 흐려 한쪽 눈은 소경과 같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담( 痰 )이 위로 치솟아 병세가 가볍지 않습니다. 항복이 내려가고 소신 혼 자 있게 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항복이 있을 적에 복상( 卜 相 )하여 들이도록 하 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매우 합당한 말이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요시라( 要 時 羅 )와 전후의 왜인을 군문( 軍 門 )이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왜인이 또 오면 대답 할 적에 어긋나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인이 우리 나라에 오지 않고 중국 장수에게로 갔기 때문에 요리사를 군문이 데리고 갔고 전후 왜인도 군문이 데리고 간 것이다. 뒤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요시라는 중국에서 복주 ( 伏 誅 )되었는데 이는 군문이 포로로 바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자, 희서( 熙 緖 )가 아뢰기를, 군문이 요시라를 평정성( 平 正 成 )이라고 속여 바쳤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리한 말이다. 요시라는 분명히 살해되었다. 그뒤 서간을 가지고 온 왜인도 군문에게 보 냈는데 어떻게 조처했는지 모르겠다. 좌상은 그 곡절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응변( 應 變 )할 일 이 있게 되면 중국으로 입송시켰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모른다. 라고 해야 된다. 그리고 - 10 -

중국의 아문이 모두 우리 나라에 있다. 고 하면 위세( 威 勢 )가 있게 될 것이다. 도원수( 都 元 師 )가 내려가면 군대가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군대가 없습니다. 아병( 衙 兵 )이 1천 명도 못되어 보잘것없기가 따로 떨어져 있는 별과 같 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뜻밖의 변보( 邊 報 )가 있을 경우 중간에서 지체될 걱정이 없지 않으니, 따로 군관을 정하여 올려보내라.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임진년의 경우에는 계본( 啓 本 )이 3일이면 서울에 도착했었습니다만, 지금은 역말이 없으니 반드시 군관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보가 매우 긴급할 경우 도원수에게 먼저 알릴 필요가 없다. 다른 장수라도 반드시 군관 을 차임하여 올려보내므로써 중간에서 계달하지 못하는 걱정이 없게 하라.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관하( 管 下 )에 수십 필의 말을 세우고 싶습니다. 하였다. 산해가 아뢰기를, 급히 보낼 변보가 있을 경우 반드시 각 고을에 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막하( 幕 下 )의 말 하나로는 진달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변보를 알아야 책응( 策 應 )할 수 있으니 심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군령을 엄 히 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산해가 아뢰기를, 봉화( 烽 火 )를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우리 나라의 봉화법을 고쳐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나의 분언( 憤 言 )이다. 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봉화가 허사로 된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울산( 蔚 山 )에서 보성( 寶 城 )까지 6 7백 리 연해에 있는 봉화는 평소에도 허사가 아니었으니, 지금 구법( 舊 法 )을 거듭 엄히 한다면 경상도에 적변이 있을 경우 전라도에서 알게 되고, 전라도에 적변이 있을 경우 경상도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사면( 四 面 )으로 적의 침입을 받고 있는 위치인데, 불행히도 시사( 時 事 )가 이렇 게 되었다. 지난번 통보를 보니, 노추( 老 酋 )의 아비 조씨( 早 氏 )가 요동에서 죽었으므로 매양 일어나 복수하려 한다 하는데 어찌 우리 나라에 노략질하지 않겠는가? 조정에서는 잊어서는 안 된다. 남방에 걱정이 있어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사건이 발 생한 뒤에는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하니, 희서가 아뢰기를, 임진 왜란 때에 겉으로는 돕는 체 하면서 은근히 해를 끼쳤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성한 서적( 西 賊 )이 우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경내( 境 內 )의 도적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 - 11 -

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중국군이 일단 철수하면 수백 명의 토적( 士 賊 )일지라도 주군( 州 郡 )에서 체포할 수가 없습니 다. 소신이 갑오년에 호남에 가 있었는데 5 6월 사이에 한 걸음만 잘못되었어도 큰 변이 발생할 뻔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무슨 말인가? 나는 듣지 못하였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사람마다 도둑이 되었기 때문에 이일( 李 鎰 )이 순변사( 巡 邊 使 )로서 전적으로 토적을 토벌하 였는데도 고부( 古 阜 )가 다시 포위되었습니다. 관군( 官 軍 )이 가서 토벌하였으나 번번이 패퇴 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곤궁함이 극도에 이르면 황소( 黃 巢 ) 방납( 方 臘 )같은 자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중국 조 정의 아문이 우리를 침책( 侵 責 )한다 해도 진압시킨 것은 저들의 공로인 것이다. 중국군이 일단 철수해 버리면 경성( 京 城 ) 40리의 치첩( 雉 堞 ) 또한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 두 포수를 증오하고 있는데 이는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훈련 도감( 訓 鍊 都 監 )의 군액( 軍 額 )이 매우 적어서 신역은 고달픈데도 늠료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하는 것이다. 군대란 잘 먹여 기르고 그들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해야하니, 모두에게 보솔( 保 率 )을 후 히 지급하여 임무를 맡겨야지 관가의 돼지 배 앓는 격 으로 해서는 결코 안 된다. 평시 금 군( 禁 軍 )에게는 모두 보솔을 지급하여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들을 부양하는 즐거움을 이루게 하여 왔으니, 지금도 이를 본받아 흥기하게 해야 한다. 군액이 부족하면 더 모집하여 경성으로 하여금 은연( 隱 然 )한 형세를 구축하게 해야 한다.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난후( 亂 後 )에 조련한 군사 중에서 포수가 제일 유익하니, 행행( 幸 行 )할 때에도 이들로 모양 을 갖추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울의 일은 영상이 비변사와 함께 힘을 기울여서 하겠지만, 외방의 일은 적을 방어하는 것 외에도 곤궁한 백성을 진무( 鎭 撫 )하여 도적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갑오년과 을미년 사이에는 각 고을에 별장( 別 將 )이 있었으므로, 경상도의 박기백( 朴 己 百 )은 늙었지만 오히려 도적을 잡았습니다. 지금은 병사와 수사 외에는 군사가 없으니 별장을 두 루 배치하여야 합니다. 전라도에는 안위( 安 衛 ), 충청도에는 박명현( 朴 名 賢 ), 경상도에는 김응 서( 金 應 瑞 )가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위는 쓸 만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용감하고 힘껏 싸울 뿐만 아니라 자질도 총명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나이는 젊지만 토적( 土 賊 )을 많이 체포하였습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이몽학( 李 夢 鶴 )의 변란 때 박명현이 세운 공을 지금도 호서( 湖 西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 - 12 -

다. 명현이 홍주( 洪 州 )로 들어가자 적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중국군이 철수한 뒤에는 토적이 우려스럽습니다. 이들이 만연되면 도모하기가 어려우니 계 책을 써서 제거하도록 감사에게 은밀히 하서하여 각별히 체포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도에도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근일 전라도가 제일 걱정됩니다. 하니, 산해는 아뢰기를, 모질게 하면 적이 되는 것이고, 보살펴주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하서할 적에 내용을 잘 만들라.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출신( 出 身 )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디 출신을 말하는가?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호남 출신은 정유년에 가업( 家 業 )을 잃은 사람이 많은데 전주( 全 州 )가 더욱 극심합니다. 그 들은 모두 연소하고 활을 잘 쏘는데, 끝내 제대로 안정되지 못하자 점차 위언( 危 言 )을 퍼뜨 리고 있으니,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대해서는 한 가지 계책이 있다. 그들이 도적이 된 것은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쓸 만한 사람이 있거든 직( 職 )을 제수하라.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군관( 軍 官 )에 차임하여 궁전( 弓 箭 )을 지급해 주어서 데리고 다닌다면 차비( 差 備 )와 다를 것 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들을 수용( 收 用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싶다. 이는 모두가 좌상( 左 相 )이 지휘하기에 달려 있다. 지금은 국가가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중국군이 철수하 면 서울이 공허해지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규획( 規 劃 )과 조처를 비변사는 소홀히 하지 말 라.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군량이 매우 곤란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훈련 도감은 폐치( 廢 置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량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봄에 씨를 뿌려야 가을에 수확할 수가 있다. 그러니 감 사와 수령을 계칙하여 반드시 농사에 힘쓰게 해야 한다. 진실로 군량을 계속 대지 못하였으 므로 제갈양( 諸 葛 亮 )도 퇴군( 退 軍 )했었다. 하였다. 산해가 아뢰기를, 관왕묘( 關 王 廟 )의 역사( 役 事 )가 매우 거창합니다. - 13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왕묘는 어찌하여 아직껏 완성하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희서가 아뢰기를, 공역이 너무 거창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역이 남관 왕묘( 南 關 王 廟 )와 같은가? 하였다. 희서가 아뢰기를, 남묘( 南 廟 )의 역사에 비해 훨씬 거창합니다. 농사철이 다가왔으니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 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문( 衙 門 )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중지하기는 어렵다. 남묘는 내가 가보았는데, 뒤에 들으니 소상( 塑 像 )을 헐고 다시 만든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가? 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소상이 작기 때문에 다시 고쳐 만든다고 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역사를 정지시킬 것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 武 將 )은 말할 것도 없고 경리( 經 理 )도 알성( 謁 聖 )을 하지 않는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중국군이 향교( 鄕 校 )의 전중( 殿 中 )에서 유숙하고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힐문하니 전쟁 중 이라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천( 端 川 )에 사람을 보내는 일을 대신은 알고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폐( 流 弊 )가 단천에까지 이르렀는데 저지시키면 반드시 노할 것이다. 하니, 희서가 아뢰기를, 경리의 차관( 差 官 )은 폐단을 끼치니, 우리 나라 사람을 차송( 差 送 )하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곡절을 알아야 한다. 황옥( 黃 玉 )으로 술잔을 만드는 것이야 본래 관계가 없지만 단 천에서 옥이 난다는 것을 저들이 어떻게 알았는가. 나의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지만 단천에 서 은이 생산되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아는 일이니 은광( 銀 鑛 )을 찾으려는 것은 아닌가? 중 국 조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 은향( 銀 餉 )을 독책할 것이다. 그리고 태감( 太 監 )을 보내어 전조( 前 朝 ) 때처럼 국( 局 )을 설치하고 채련( 採 鍊 )하게 하면 어찌하겠는 가. 막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옥을 캔다고 칭탁하면서 은을 캘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가게 되면 반드시 은이 생산된다 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 14 -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접반사( 接 伴 使 )는 정의( 情 意 )가 서로 통하니 접반사로 하여금 주선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은 잘 갔다오라. 훈업( 勳 業 )을 죽백( 竹 帛 )에 전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으니 잘 갔다오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4책 121권 24장 B면 영인본 24책 34면 분류 *행정-중앙행정( 中 央 行 政 ) 3. 1600 / 선조 124권, 33년 4월 4일(정축) /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가 해안의 방 비책과 병기 문제에 대해 아뢰다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全 羅 右 道 水 軍 節 度 使 ) 김억추( 金 億 秋 )가 장계를 올렸다. 본도 순찰사 한효순( 韓 孝 純 )의 품의에 대한 조정의 분부에 의거하여 신( 臣 )이 전선( 戰 船 ) 11척을 거느리고 고금도( 古 今 島 )를 지키는 동시에 부근을 통망( 通 望 )하기에 마땅한 선산도 ( 仙 山 島 ) 완도( 莞 島 ) 지도( 智 島 ) 조약도( 助 藥 島 ) 등처에서 날마다 조망을 새롭게 하고 있었습 니다. 그런데 선산도는 진( 陣 )의 남쪽에 솟아 있어 외양( 外 洋 )으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지난 을묘년과 정해년의 왜변 때 적들이 모두 이 섬을 경유하여 침략하였을 뿐 아니라 태평 시대 에도 소수의 적들이 기회를 엿보는 변이 없는 해가 없었으므로, 모든 주사( 舟 師 )들이 합력 ( 合 力 )하여 수색하고 토벌하였던 것입니다. 임진 왜란을 겪은 뒤에 본도의 수군이란 수군은 모두 영남으로 달려가서 힘을 합하여 기각( 掎 角 )의 형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적이 물러갔다고는 하지만 충동격서( 衝 東 擊 西 )의 환란이 없지 않으므로 각도의 주사들이 나 누어 파수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에게 소속된 각 고을 나루터의 수군은 모두 좌도의 경도 ( 鯨 島 )에 예속되었으며, 그 나머지 11척만이 나누어 머물고 있는데 거느린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여 항상 토벌 수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변란이 생긴다면 외롭고 미약한 수 군으로는 이에 대응할 대책이 전혀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투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현자 총통( 玄 字 銃 筒 )인데 각 전선에 분배된 숫자가 매우 부족합니다. 신이 가까스로 주조해서 만든 것이 겨우 30여 병( 柄 )인데 역시 부족합니다. 넉넉하게 주조하려 해도 공사 전( 公 私 錢 )이 모두 고갈되었으므로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조처하기가 어렵습니다. 철물( 鐵 物 )의 출처에 대해 조정에서 선처하소서. 태백산사고본 75책 124권 3장 A면 영인본 24책 54면 분류 *정론( 政 論 ) / *군사-지방군( 地 方 軍 ) / *군사-군기( 軍 器 ) / *외교-왜( 倭 ) 4. 1600 / 선조 126권, 33년 6월 15일(병술) /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 요역 관방 수령 적정 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 15 -

사도 도체찰사 겸 도원수 의정부 좌의정( 四 道 都 體 察 使 兼 都 元 帥 議 政 府 左 議 政 ) 이항복( 李 恒 福 ) 이 남방에서 올라왔다. 상이 별전( 別 殿 )에서 인견( 引 見 )했는데 동부승지 민중남( 閔 中 男 ), 가 주서( 假 注 書 ) 변응벽( 邊 應 壁 ), 기사관( 記 事 官 ) 2인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남방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라 충청 두 도를 순심( 巡 審 )하였으나 경상도는 소명( 召 命 )이 계셨으므로 미처 순심 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주사( 舟 師 )를 보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에 이순신에게 있을 적에 보았는데, 그때엔 배의 수효는 많았으나 병사의 수가 부 족하여 격군( 格 軍 )을 충정한 배가 많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누어 배치된 것이 일정한 수효가 있고 격군의 충정도 잘 정제되어 있는 듯하였습니다만, 원수( 元 數 )가 단약한 것이 우려됩니다. 조정을 떠나던 날 전교하신 봉수( 烽 燧 )에 관한 것을 말씀드리면, 양남( 兩 南 ) 연해 지방의 봉수가 간격이 너무 먼 것 같아서 지금 두 곳을 더 설치하게 하고 잘 거행 하도록 신명( 申 明 )하였으니, 설령 사변( 事 變 )이 있더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성( 京 城 ) 근처는 어렵습니다. 또 금년의 삼도( 三 道 ) 농사는, 밭곡식은 충실치 못하였습니 다만 흉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논농사는 앞으로 7 8월 사이에 풍재( 風 災 )만 없다면 결 실이 잘 될 듯한데 성패( 成 敗 )는 바로 여기에 달렸습니다. 혹 풍년이 든다면 백성들이 그래 도 의지할 바가 있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 비가 많지 않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폭우가 내린 적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오면서 본 것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냇물이 넘치거나 논밭이 무너져 떨어져 나간 것은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간( 開 墾 ) 상태는 어떠했는가? 하니, 답하기를, 작년은 재작년보다 나았고 금년은 작년보다 낫습니다. 다만 남방의 물력( 物 力 )이 매우 모 자라는 형편임을 지난번에 이미 차자를 올려 아뢰었는데 이번에 소미( 小 米 )를 포( 布 )로 바꾼 것이 8백 동( 同 )이나 되니, 판탕이 극심한 이런 때 징수( 徵 收 )가 이러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와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심과 방비에 대한 일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방비는 시원치 않았으나 이미 마친 일은 그래도 두서( 頭 緖 )가 있었습니다. 충청도의 인심 은 전라도 같지는 않았습니다. 전라도 사람은 본디 성질이 강한( 强 悍 )하고 쉽게 동요될 뿐 아니라 물력( 物 力 )을 쓰는 것이 심합니다. - 16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만이 요역( 徭 役 )이 갑절인가? 하니, 답하기를, 하삼도( 下 三 道 )는 평시에도 부담이 많았지만 임진년 난리에 전라도만 무사했던 까닭에 서 로( 西 路 )의 모든 요역이 오로지 이 전라도 지방에 부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세가 대족( 世 家 大 族 )이 이 지방에 많기 때문에 군량미 등을 거둘 때도 있는 힘을 다 기울였는데 정유년 이후 변란이 끝난 뒤에도 차역( 差 役 )이 여전하므로 물력( 物 力 )이 고갈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흉적이 온다면 어떻게 방어하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소규모로 온다면 방어할 수 있겠지만 대규모로 온다면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왜적은 천하에 대적하기 어려운 적이다. 임진 왜란 때 천하의 힘을 동원하였지만 어디 당하겠던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정유년에 울도( 蔚 島 )와 명량도( 明 梁 島 )에 왜선( 倭 船 )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 安 衛 )가 하나의 판옥선( 板 屋 船 )을 띄워 해전( 海 戰 )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전선( 戰 船 )은 어찌해서 패몰한 적이 있었는가? 하니, 답하기를, 배 위에서 무력을 쓸 수 없기 때문에 패한 것입니다. 신은 용맹한 장수를 수군의 장수로 삼았으면 합니다. 오로지 익숙한 사람이라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데, 각진( 各 鎭 )의 첨사( 僉 使 )나 만호( 萬 戶 )가 타는 배에는 숙련된 뱃사공을 돌려가며 교체시키기 때문에 이내 서툴게 됩니다. 아무리 병선( 兵 船 )이 있더라도 진실로 뱃사공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성 패는 여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 統 制 使 )는 어떤 사람이던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본디 그 사람을 알고 있는데 영민하고 비범하며 날카로운 기상이 있습니다. 다만 처 음엔 사졸들이 물에 익숙하지 못하여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그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자못 진정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장수는 수군 장수로서의 재능과 육군 장수로서의 재능이 각기 달랐는데, 이시언( 李 時 言 )은 수전( 水 戰 )에도 능한가? 하니, 답하기를, 이시언은 육전( 陸 戰 )을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는 용맹을 믿기 때문이다. 지난번 사직을 청하였는데, 지금은 병이 없는가? 하니, 답하기를, 심하게 아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바닷가에 오래 있게 되면 반드시 상독( 傷 毒 )을 받기 - 17 -

마련입니다. 신이 경도( 鯨 島 ) 노량( 露 梁 ) 등지에 며칠 동안 있어 보았는데 바다 안개가 자욱 하여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으며 옷이 다 젖었습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을 얻게 됩니다. 또 양남( 兩 南 )의 해안은 거리가 매우 멀어 동래( 東 萊 )에서 해남( 海 南 )까지 거의 1천 여 리가 되는데 그 사이의 진소( 陣 所 )가 개의 어금니처럼 서로 엇물려 있으므로 부산( 釜 山 ) 경도 고금도( 古 今 島 )가 아득하여 서로 접속되지 않음은 물론 적이 오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비하지 않는 곳이 없고 분치( 分 置 )하지 않는 곳이 없게 하라. 부산에서 진도( 珍 島 ) 비인 ( 庇 仁 ) 남포( 藍 浦 ) 등지에 이르기까지는 대부분 적이 쳐들어 올 만한 곳이니 모두 요해처( 要 害 處 )를 골라서 방어하라. 또 대마도에서는 부산이 매우 가까우므로 밤에 바다를 건너와 몰 래 습격한다는 말이 전부터 있어 왔다. 공갈하는 말이지만 대마도는 뱃길로 한나절 거리라 고 하니, 순풍( 順 風 )을 만난다면 기습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지금 수종( 水 宗 )을 정탐하는 사람이 연락 부절이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정탐( 偵 探 )할 수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대담한 자가 없으면 어렵습니다. 강항( 姜 沆 )이 나왔으니 틀림없이 적의 실정을 알 것입니 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어떻게 알겠으며 그의 말을 어떻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답하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은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하문하였으나 동병( 動 兵 )의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정원이 들은 바는 어떠하 였는가? 하니, 승지 민중남( 閔 中 男 )이 아뢰기를, 형편으로 보아 동병하지 않을 듯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민중남이 답하기를, 왜적 중 가강( 家 康 )이란 자가 있는데 청정( 淸 正 )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잘 모른 것이다. 왜적의 간사한 꾀는 그 부하 졸개도 오히려 모르는데 강항이 어떻 게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왜적들은 은밀하게 맹세하면 부자 형제 사이라도 누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를 훈련하는 일은 반드시 없을 것이지만 그 백성들은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군사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할 것이요, 적의 움직임 따위는 논할 필요가 없다. 그 러나 일의 형편으로 말하건대, 그들이 이것으로 그칠 것이라는 말은 기필코 그럴 리가 없 - 18 -

다. 내년에 나온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어찌 끝내 결말( 結 末 )이 없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지난날 많은 무리를 동원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사망자를 냈고 수길( 秀 吉 )도 이 미 죽었으며 나라의 물력( 物 力 )도 많이 고갈되었으므로 스스로 중지할 계획이거나 아니면 자체에서 서로 틈이 생겨 스스로 도모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어서 당장 군대를 일으키지 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마도의 왜적은 자구 침구하여 올 것이니 남쪽 국경이 반드시 시끄러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들이 기를 쓰고 있다니 매우 큰 걱정이다. 그러나 스스로 굳건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그래도 믿을 수 있겠다. 하니, 답하기를, 백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배는 80척에 지나지 않고 육군은 겨우 6천 명인데 경상도는 육전( 陸 戰 )의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군이 원수( 元 數 )도 매우 적은데 산성( 山 城 )의 요새에 의지할 계획은 아예 하지도 않는 것 은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 적이 해안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적이 대규모로 온다면 접 전( 接 戰 )하면서도 병력을 나누어 해안으로 상륙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80척의 전선( 戰 船 )을 믿고 육전( 陸 戰 )에 쓰이는 기계들을 준비 하지 않으니, 적이 마구 휘몰아쳐 공격해 온다면 어찌하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마치 분을 바르듯이 가까스로 군량을 공급하는 형편이어서 약간의 군대가 있다 하더라도 군량을 계속 댈 길이 없습니다. 안위( 安 衛 )도 지금 두어 달 먹을 군량도 없어 장차 버티어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반드시 한 곳에 힘쓸 필요가 있다. 전자에 산성은 지킬 수 없다고 하여 모두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지킬 만한 곳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옳다. 단지 산성 을 싫어할 줄만 알뿐 그것에 의지해서 지킬 줄을 모른다면 이는 구토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 하니, 답하기를, 전라 병사 안위는 금성( 金 城 )을 지키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듣기로 금성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지금 병사의 장계를 보건대 좋지 않다고 하였 다. 하니, 답하기를, 담양 산성( 潭 陽 山 城 )은 크고도 튼튼하여 평양성( 平 壤 城 )보다 낫습니다. 힘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5분의 2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안위는 어찌하여 좋지 않다고 하였는가? - 19 -

하니, 답하기를, 성은 큰데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태조( 太 祖 )께서 운봉( 雲 峯 ) 싸움에 승리하셨을 때 변안 련( 邊 安 烈 )에게 정병 5천 명을 주면서 만일 차질이 생기거든 물러나서 금성( 金 城 )을 지키 라. 고 하셨고, 아기발도( 阿 只 拔 都 )는 일찍이 말은 금성에서 길러야 한다. 고 했고 주( 註 )에 금성은 광주( 光 州 )에 있는데 광주와 남원( 南 原 )두 곳으로 나뉘어졌다. 고 하였는데, 생각건 대 바로 이곳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기발도가 금성에 갔었는가? 하니, 답하기를, 운봉을 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수령( 守 令 )과 변장( 邊 將 )들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변장 가운데 송희립( 宋 希 立 ) 소계남( 蘇 繼 男 ) 등은 다 쓸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수령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처음 지방에 도착했을 적에 매우 잘못 다스린 자는 이미 6 7인을 아뢰어 파직시켰 습니다만, 그 뒤에 역시 적격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혹 장벌( 杖 罰 )을 가하여 견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를 체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고 전조( 銓 曹 )가 잘 가리지 않은 탓이고 또 수령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남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광주 목사( 光 州 牧 使 ) 이상길( 李 尙 吉 ) 은 어떻게 정사를 다스리기에 봉명 사신( 奉 命 使 臣 )들이 한결같이 그의 선정( 善 政 )을 일컫는 가? 하니, 답하기를, 상길은 처사가 상세하고 부역( 賦 役 )이 균평합니다. 또 홍주 목사( 洪 州 牧 使 ) 우복룡( 禹 伏 龍 ) 도 참으로 잘 다스리는 수령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 가운데 작은 것에는 능하지만 큰 것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 상 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감사( 監 司 )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니, 답하기를, 그 사람을 살펴보면 말은 안하지만 일을 당하면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대개 수령을 포장( 褒 奬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처음엔 잘 다스리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예가 드 물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치적이 제일 좋은 자를 골라서 포상하고 그 나머지는 포상할 필요 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금년의 급무는 전결( 田 結 )을 상정( 詳 定 )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 20 -

수령들이 마음을 쓰지 않은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난리 뒤에 원정수( 元 定 數 )가 없어서 그 런 것인가? 하자, 답하기를, 수령들이 상정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요역( 徭 役 )들을 반드시 전결( 田 結 )에 의 거하여 분정( 分 定 )하기 때문에 사실대로 하는 고을은 부역이 매우 무겁게 되어 민원( 民 怨 )이 한이 없게 되므로 수령들이 백성을 위하여 전결의 상정을 간략하게 합니다. 팔도( 八 道 )가 다 똑같이 된 뒤에야 부역이 고르게 되고 백성들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노고가 매우 많다. 전에 있던 병세는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신은 본시 담증( 痰 症 )을 앓았는데 노상( 路 上 )에서 더위를 먹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안색을 보니 전보다 매우 좋지 않다. 이는 필시 국사 때문에 노심 초사한 탓일 것이 다. 하니, 항복이 일어나 배사( 拜 謝 )하고 아뢰기를, 신이 올라오는 도중에 들었는데, 지난날 홍여순( 洪 汝 諄 )이 탄핵받을 때 장관( 將 官 ) 최한( 崔 漢 ) 등이 상소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지금 옥에 갇혀 형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곡 절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형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 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죄범이 가볍지 않다. 경은 어찌하여 이 일을 말하는가? 장관들이 군사들을 거느리 고 상소하는 일이 있을 터이니 지금 경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발호할 조짐이 있게 될 것이 다. 하니, 답하기를, 발호할까 의심하시는데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지( 無 知 )해서 저지른 망령된 행동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단한 일이건 대단치 않은 일이건 간섭해서는 안 될 일을 저들이 간섭하였으니, 이는 반 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터이므로 통렬히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한두 사람이 집집마다 찾아다닌다고 하여 그 말을 따르겠습니 까. 각사( 各 司 )가 다투어 서계( 書 啓 )하는 것을 보고 망령되이 사람들을 따라서 하려 한 일인 데 형장을 맞다가 죽는다면 성대( 聖 代 )의 누가 될지 모릅니다. 설령 탈루( 脫 漏 )되는 폐단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이르기를, 남쪽 지방에서는 무사( 武 事 )를 단련하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전라도엔 훌륭한 인재가 많은데 경상도엔 전혀 무사( 武 事 )를 단련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 다. 또 우리 나라엔 말이 없는데 무사( 武 士 )는 반드시 말을 탄 뒤에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두 준비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것이 진실로 우려 됩니다. - 21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에도 포수( 砲 手 )와 살수( 殺 手 )가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수령이 간혹 단련하려고 하지만 충총( 衝 銃 )과 염초( 焰 硝 ) 등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살수는 백성들이 기예( 技 藝 )에 서툴기 때문에 숙달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유생들은 독서를 업으로 삼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남방의 폐습이 논의( 論 議 )는 좋아하지만 학업에는 힘쓰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민중남( 閔 中 男 )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홍주 목사( 洪 州 牧 使 )로 있을 적에 이웃한 몇몇 고을이 해도( 海 島 )에서 대나무를 많이 베어 왔는데 가을이 되면 더 많이 벨 수 있습니다. 전결( 田 結 )에 대한 일은 수령들이 상정( 詳 定 )하려고 하더라도 세입( 稅 入 ) 외에 쌀을 거두는 등의 일을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 기 때문에 전결이 많으면 사람들이 원수처럼 보므로 양전( 量 田 )을 쉽사리 할 수 없습니다. 상명( 詳 明 )한 수령을 가려뽑아 5 6 고을을 전담시켜 결부( 結 負 )를 자세히 살피게 한 뒤에 경차관( 敬 差 官 )을 보내어 간심( 看 審 )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죽( 箭 竹 )은 충청도에도 있다고 하니 베어서 써도 된다. 또 선왕조( 先 王 朝 ) 때부터 전죽을 북도( 北 道 )에 옮겨 심은 것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경기와 황해도 등지에 옮겨 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6책 126권 6장 B면 영인본 24책 77면 분류 *왕실-국왕( 國 王 ) / *정론( 政 論 ) / *행정-지방행정( 地 方 行 政 ) / *인사( 人 事 ) / *사 법( 司 法 ) / *군사( 軍 事 ) / *외교-왜( 倭 ) / *재정( 財 政 ) / *교통-수운( 水 運 ) / *농업( 農 業 ) / * 사상-유학( 儒 學 ) - 22 -

2) 묘도(猫島)의 내용 1. 1448 / 세종 121권, 30년 8월 27일(경진) / 의정부에서 병조의 첩정에 의거해 소나무에 관한 감독 관리에 대해 상신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병조(兵曹)의 첩정에 의거하여 상신하기를, 병선(兵船)은 국가의 도둑을 막는 기구이므로 배를 짓는 소나무를 사사로 베지 못하도록 이미 일찍이 입법을 하였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가만히 서로 작벌(斫伐)하여 혹은 사사 배 를 짓고, 혹은 집재목을 만들어 소나무가 거의 없어졌으니 실로 염려됩니다. 지금 연해(沿 海) 주현(州縣)의 여러 섬[島]과 각 곶(串)의 소나무가 잘되는 땅을 방문하여 장부에 기록하 였는데, 경기 남양부(南陽府)의 선감미(仙甘彌) 대부(大部) 연흥(鷰興) 세 섬과 거재곶(巨才 串), 인천군(仁川郡)의 자연도(紫鷰島)와 용류도(龍流島), 부평부(富平府)의 문지도(文知島)와 보지곶(甫只串), 안산군(安山郡)의 오질이도(吾叱耳島), 강화부(江華府)의 금음북(今音北) 미 법도(彌法島) 말도(末島) 정포(井浦) 이북의 망산(網山) 남건동을산(南巾冬乙山) 사도(蛇島), 교동현(喬桐縣)의 서빙장곶(西憑將串), 수원부(水原府)의 둑삼곶(纛三串) 형두산(荊頭山) 홍원 곶(弘原串) 광덕성산(廣德城山) 통진현(通津縣)의 고리곶(古里串) 대명곶(大明串) 어모로(於毛 老), 황해도(黃海道) 안악군(安岳郡)의 영진(迎津) 대산(大山), 풍천군(豊川郡)의 귀림곶(貴林 串) 초도(椒島) 석도(席島), 장련현(長連縣)의 사곶(蛇串) 가을곶(加乙串), 장연현(長淵縣)의 보 구장령(甫仇長嶺) 백령도(白翎島) 장산곶(長山串), 해주(海州)의 둔다산(屯多山) 추적곶(槌赤 串), 황주(黃州)의 모곶(茅串), 강령현(康翎縣)의 사장곶(沙匠串) 등산곶(登山串) 허사포(許沙 浦) 배 대는 곳과, 서령(西嶺) 오차포(吾叉浦) 육사외도(六沙外島) 용매갈곶(龍媒葛串) 가을포 (茄乙浦) 무지곶(無知串) 소강(所江) 금물여곶(今勿餘串) 백암곶(白岩串) 아랑포(阿郞浦), 옹진 현(甕津縣)의 서장곶(西粧串), 강원도(江原道) 강릉부(江陵府)의 빈지(賓之), 울진현(蔚珍縣) 의 어물리(於勿里) 북산(北山)과 약사산(藥師山), 통천군(通川郡)의 소산(所山) 마산(馬山) 총 석정(叢石汀), 충청도(忠淸道) 면천군(沔川郡)의 장택곶(藏宅串) 천곡(泉谷) 등처, 서산군(瑞 山郡)의 파치도(波治島) 대야도(大也島) 안면곶(安眠串) 광지곶(廣知串), 홍주(洪州) 임내(任 內)의 신평현(新平縣)의 명해곶(明海串)과 내도(內島) 진두(津頭) 웅도(熊島) 초도(草島) 연륙 곶(連陸串), 당진현(唐津縣)의 당진포(唐津浦) 북산(北山) 탕자도(湯子島) 난지도(難知島), 결 성현(結成縣)의 용생두산(龍生頭山) 동산산(東山山), 해미현(海美縣)의 훤길곶(喧吉串) 승선산 (勝善山) 선현산(扇峴山), 보령현(保寧縣)의 능성곶(陵城串) 송도(松島) 우현(牛峴) 고만도(高巒 島), 비산현(庇山縣)의 도둔곶(都芚串), 서천군(舒川郡)의 개야조도(開也助島), 함길도(咸吉道) 안변부(安邊府)의 압융곶(押戎串)과 여도(女島) 낭성포(浪城浦) 등처, 덕원부(德原府)의 신도 (薪島) 서현(西峴)과 대모성(大母城), 용진현(龍津縣)의 가퇴도(加退島) 조지포(曹至浦) 북봉 (北峯), 영흥부(永興府)의 영인사(寧仁社) 구리지(仇里池) 백안포곶(白安浦串) 등처, 함흥부(咸 興府)의 보청사(甫靑社) 퇴조사(退潮社) 동명사(東溟社) 선덕사(先德社) 등처, 북청부(北靑府) 의 장진포 해정(長津浦海汀) 속후 해정(俗厚海汀), 길주(吉州)의 고다포리(古多布里) 해변곶 (海邊串), 경성부(鏡城府) 남황가진곶(南黃加津串), 회령부(會寧府)의 호음야곶(好音也串) 쌍 포곶(雙浦串), 경흥부(慶興府)의 두이산(豆伊山) 녹둔도(鹿屯島), 평안도(平安道) 박천군(博川 郡)의 덕안곶(德安串) 대장산(大藏山) 등처, 가산군(嘉山郡) 남미동음리(南未冬音里), 정주(定 州)의 잉박곶(仍朴串) 등처, 수천군(隨川郡)의 진해곶(陳海串) 등처, 곽산군(郭山郡)의 금로곶 - 23 -

(金老串) 우리곶(亐里串) 등처, 선천군(宣川郡)의 검산굴곶(撿山屈串) 등처, 철산군(鐵山郡)의 서소곶(西所串) 다지도(多只島) 대곶(大串), 용천군(龍川郡)의 석곶(石串) 신지도(信知島) 덕천 산(德泉山), 인산군(麟山郡)의 창포곶(倉浦串), 의주(義州)의 진병곶(鎭兵串) 등처, 안주(安州) 의 고맹산(古孟山) 청천강변(淸川江邊) 등처, 숙천부(肅川府)의 검음산(撿音山), 영유현(永柔 縣)의 유원소산(柔遠所山) 대선곶(大船串) 등처, 함종현(咸從縣)의 백석산(白石山), 삼화현(三 和縣)의 오음산(吾音山), 용강현(龍崗縣)의 가을곶산(加乙串山), 강서현(江西縣)의 동부(東部) 금정량산(金丁梁山), 전라도(全羅道) 부안현(扶安縣)의 외도(猥島) 구도(鳩島) 화이도(火伊島), 영광현(靈光縣)의 모야도(毛也島) 매음점도(每音岾島) 고이도(古耳島) 증도(甑島) 사도곶(沙島 串) 창두곶(槍頭串) 구수산(九岫山) 임치도(臨淄島), 함평현(咸平縣)의 해제곶(海際串) 서발포 (西鉢浦) 아사라산(阿士羅山) 석포곶(石浦串) 김포곶(金浦串), 나주(羅州)의 가야산(可也山) 다 리도(多利島) 비시도(飛示島) 도초도(都草島) 암태도(巖泰島) 안창도(安昌島) 자은도(慈恩島) 기 좌도(其佐島) 팔시도(八示島) 하의도(河衣島) 이시도(伊示島) 송도(松島), 內)의 영암(靈巖) 임내(任 귀산(貴山) 갈두산(葛頭山) 보길도(甫吉島) 두와두산(豆臥頭山) 노도(露島) 해제곶(海除 串), 강진(康津)의 월이곶(月伊串) 좌곡곶(佐谷串) 산달도(山獺島) 완도(莞島) 고시도(古示島) 선산도(仙山島), 해남현(海南縣)의 진산곶(珍山串) 백야포(白也浦) 백방산(百房山) 초도(草島) 평도(坪島) 가아도(加兒島), 장흥부(長興府)의 대이매도(大伊每島) 우두곶(牛頭串) 장내곶(帳內 串), 순천부(順天府)의 송도(松島) 장성포곶(長省浦串) 삼일포곶(三日浦串) 경도(京島) 금오도 (金鰲島), 광양현(光陽縣)의 묘도(猫島), 낙안군(樂安郡)의 장도(獐島) 용두곶(龍頭串), 보성군 (寶城郡)의 초라산(草羅山), 무장현(茂長縣)의 이진곶(梨津串), 옥구현(沃溝縣)의 천방산(千方 山), 흥양현(興陽縣)의 송곶(松串) 주포곶(舟浦串) 우두곶(牛頭串) 망지곶(望智串) 황산곶(荒山 串) 장암곶(場巖串) 박길곶(朴吉串) 이로도(伊老島) 협도(俠島) 정도(井島) 주도(酒島) 경죽도 (頃竹島) 사포곶(蛇浦串) 가라포(加羅浦) 수덕산(愁德山) 유주산(楡朱珊) 소흘라곶(所訖羅串) 말 개도(末介島) 기화도(其火島) 팔전산(八巓酸) 천등산(天燈山) 재산도(災山島) 성두곶(城頭串), 진도군(珍島郡)의 가사도(加士島) 평도(坪島) 초도(草島), 무안현(務安縣)의 고철금산(古鐵金 山) 유달산(鍮達山) 모두곶(茅頭串), 흥덕현(興德縣)의 소요산(所要山), 임파현(臨陂縣)의 성산 (城山), 함열현(咸悅縣)의 성산(城山), 경상도(慶尙道) 영해부(寧海府)의 봉송평(奉松坪) 오항 곶(烏項串), 동래현(東萊縣)의 소과정산(蘇苽亭山) 절영도(絶影島) 염포(鹽浦) 이북 삭장포곶 (朔長浦串) 등처, 울산(蔚山)의 장생포곶(長生浦串) 가리곶(加里串) 남해도(南海島) 망소흘산 (望所訖山) 장도(場島), 고성현(固城縣)의 임포곶(林浦串) 어리도(於里島) 초도(草島) 오비도(吾 非島) 곤이도(昆伊島) 상박도(上樸島) 하박도(下樸島) 추도(楸島) 자란도(自亂島) 국정도(國正 島) 신이도(申伊島) 노대도(爐大島) 욕지도(欲知島) 두밀도(豆密島) 질법길곶(叱法吉串) 소비포 (所非浦) 고반계곶(古反溪串) 행랑암곶(行廊巖串) 미을가조음곶(彌乙加助音串) 고가배량(古加 背梁) 안도(鞍島) 종해도(終海島) 심수도(深水島) 개도(介島) 미륵산(彌勒山), 거제현(巨濟縣)의 사화곶(沙火串) 거대곶(巨大串) 송용곶(松茸串) 적을도(赤乙島) 오시항곶(吾時項串) 주원도(朱 元島) 소좌리도(小左里島) 대좌리도(大左里島) 송도(松島) 송곶(松串) 굴량곶(崛梁串), 사천현 (泗川縣)의 초영도(初永島) 초도(草島) 백야도(白也島) 저도(楮島) 구랑도(仇郞島) 김해부(金海 府)의 우음도(亐音島) 벌도(伐島) 수도(水島) 가덕도(加德島) 명지도(鳴旨島) 마도(馬島) 감물도 (甘勿島), 진주(晉州)의 부화곡리(夫火谷里), 곤양군(昆陽郡)의 비도리곶(非刀里串) 영덕현(盈 德縣)의 사동포(沙冬浦) 남역포(南驛浦) 하저포(下渚浦) 오보포(烏保浦), 남해현(南海縣)의 고 독절도(孤獨絶島) 금산(錦山) 소흘산(所屹山) 호을포(呼乙浦) 우물포(亐勿浦) 소가도(小柯島) 양 가도(兩柯島), 영일현(迎日縣)의 삼사랑(三士郞) 등처, 창원부(昌原府)의 사도(蓑島), 기장현 - 24 -

( 機 張 縣 )의 금음말곶( 今 音 末 串 ) 냉정산( 冷 井 山 ), 양산군( 梁 山 郡 )의 대저도( 大 渚 島 ) 등 상항( 上 項 ) 주현( 州 縣 )의 도( 島 )와 곶( 串 )에 전부터 소나무가 있는 곳에는 나무하는 것을 엄금하고, 나무가 없는 곳에는 그 도 감사( 監 司 )로 하여금 관원을 보내어 심게 하고서 옆 근처에 있는 수령( 守 令 ) 만호( 萬 戶 )로 하여금 감독 관리하고 배양하여 용도가 있을 때에 대비하게 하소 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38책 121권 39장 B면 영인본 5책 96면 분류 *군사-군기( 軍 器 ) / *교통-수운( 水 運 ) / *농업-임업( 林 業 ) / *사법-법제( 法 制 ) 2. 1598 / 선조 107권, 31년 12월 4일(을묘) / 군문 도감이 수군과 승리한 것에 대해 중군 과 담화한 내용을 아뢰다 군문 도감( 軍 門 都 監 )이 아뢰기를, 오늘 신이 나아가 중군( 中 軍 )을 만나 보고 적이 도망간 사정과 수군이 크게 승리한 연유에 대해서 담화하였습니다. 그러자 중군이 1폭의 당보( 塘 報 )를 내보이고, 이어 말하기를 적추 소서행장( 小 西 行 長 )이 도망 간 것에 대해서 나도 그 상세한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전날 국 왕께서 물으셨지만 번거롭게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지관( 質 官 )을 들여보낸 일은 노야도 알고 있다. 다만 노야의 생각은 그들로 하여금 적추를 찔러 죽이고 돌아오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못하여 왜적이 그들을 그대로 데리고 들어가게 된 것 이다. 그러나 그들은 필시 등한히 왕래하지 않고 도중에서라도 시행하려고 했을 것인데 복 건( 福 建 ) 등지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 일은 그 사이에 어떠한 곡절이 없지 않을 것인데, 유 제독( 劉 提 督 )의 생각은 대개 적중에 이간질을 시키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부실한 일이 있더라도 그대 나라에서는 말하지 말라. 훗날 그런 일이 발각되면 유 제독이 스스로 그 죄 를 모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국왕께서 군문 경리를 만나보더라도 이러한 이야기를 제 기할 필요가 없다. 두 노야도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을 것이다. 군사를 머물러 두는 일에 대해서 전일 노야가 나에게 묻기를 유 총병( 劉 總 兵 )을 머물게 하려는데 어떻겠는가? 하 기에, 나는 배신의 말을 들은 적이 있으므로 즉시 대답하기를 유 총병의 일에 대해서 이 나라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으니 결코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 진 도독에게 수군 육 군을 아울러 통솔하게 하여 머물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니, 군문도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품하기를 오유충( 吳 惟 忠 )은 노성하고 청검하며, 진인( 陳 寅 ) 진잠( 陳 蠶 )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니 머물게 할 만하다. 하니, 중군이 말하기를 진 도독은 이미 결정된 것이고, 오 진 두 장수는 다시 품달하여 조처하겠다. 다만 그대 나라에서 군문 경리 과도( 科 道 ) 어사( 御 史 )의 네 아문에 모두 자문을 보내되, 어느 장수라고 성명은 쓰지 말고 단지 수군이 가장 긴요하니 다수의 수군을 남겨 달라고 하고 육군의 장수는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는 사람을 머물게 해달라고 범연히 청한다면, 나도 곁에서 찬조할 생각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일에 기패관( 旗 牌 官 ) 주충( 朱 忠 )이 독전하는 일로 영기( 令 旗 )를 가지고 주사의 진 영에 가서 적들이 탈출하여 도망치지 못하도록 진 도독에게 경계하였는데, 그가 어제 돌아 - 25 -

와서 말하기를 적추 소서행장이 강화를 칭탁하면서 여러 왜추에게 구원을 청하여 울산( 蔚 山 ) 부산( 釜 山 ) 사천( 泗 川 ) 등지의 적들이 모두 구원병을 보내왔다. 사천이 순천( 順 天 )과 가 장 가까우므로 먼저 주사와 서로 마주쳐 혈전이 벌어졌다. 당초에 행장이 천위( 天 威 )를 두 려워하여 유 제독과 진 도독에게 강화하자고 하면서 유 제독에게는 수급 2천을, 진 도독에 게는 수급 1천을 보내 줄 터이니 자기를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였다. 진 도독은 그 말을 믿 고서 말하기를 나에게도 수급 2천을 보내주면 보내 줄 수 있다. 하자, 행장이 날마다 예물을 보내고 주찬( 酒 饌 ) 창검( 槍 劍 )따위의 선물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남 해( 南 海 )에 사위가 있는데 그와 만나 의논해야 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려고 하니 이곳 의 배를 내보내주기 바란다. 하자, 이순신( 李 舜 臣 )이 말하기를 속임수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위를 불러 온다는 것은 구원병을 청하려는 것이니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 다. 하였으나, 진 도독은 듣지 않았다. 14일 1척의 작은 배를 보냈는데 왜인 8명이 타고 있었다. 그 뒤에 이순신이 말하기를 왜선이 나간 지 이미 4일이 되었으니 구원병이 반드 시 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도 묘도( 猫 島 ) 등지로 가서 파수하여 차단시켜야 한다. 하였 다. 18일 4경에 여러 곳의 구원병이 크게 몰려와 드디어 대전이 벌어졌는데 포와 화살은 쏘지 도 않고 불뭉치만을 적선에 던져 2백여 척을 소각시켰다. 그러자 옷가지와 온갖 물품이 바 다를 덮었는데, 행장은 떠내려오는 물품과 하늘에 치솟는 화염을 보고서 구원병이 크게 패 한 것을 알고 외양( 外 洋 )으로 도망쳤다. 먼 곳의 구원병도 그들의 선봉이 패한 것을 알고 감히 와서 구제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만약 며칠만 더 지체하여 사방의 구원병이 모여 왔더라면 왜교( 倭 橋 )의 일이 매우 위태로왔을 것이다. 대개 행장의 계책은 겉으로는 강화를 하는 체하면서 몰래 구원병을 청하여 먼저 주사를 함께 치고 이어 육군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인데, 적선의 선봉이 이미 패하여 흉계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하늘의 뜻이 천 리에 순종하는 자를 돕는 것인 듯하다. 21일에 주사가 남해로 나아갔으나 왜적은 벌써 도망 치고 없었다. 하였습니다. 당보를 동봉하여 입계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7책 107권 4장 B면 영인본 23책 539면 분류 *군사( 軍 事 ) / *외교-명( 明 ) / *외교-왜( 倭 ) - 26 -

3) 송도( 松 島 )의 내용 1. 1454 / 단종 10권, 2년 1월 8일(경신) / 돌산 만호와 내례 만호로 하여금 목장을 감독 하는 일을 겸임하게 하다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 呈 文 )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제리도 목장( 濟 里 島 牧 場 )은 돌산 만호( 突 山 萬 戶 )가, 송도 목장( 松 島 牧 場 )은 내례 만호( 內 禮 萬 戶 )가 관리하는 땅이니, 청컨대 감목( 監 牧 )을 겸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4책 10권 6장 A면 영인본 6책 659면 분류 *교통-마정( 馬 政 ) / *행정-지방행정( 地 方 行 政 ) - 27 -

4) 돌산도( 突 山 島 )의 내용 1. 1408 / 태종 15권, 8년 1월 22일(신미) / 왜적을 막지 못한 전라도 군관의 죄를 다스리 다 전라도의 군관( 軍 官 )이 왜적( 倭 賊 )을 막지 못한 죄( 罪 )를 다스리었다. 수군 첨절제사( 水 軍 僉 節 制 使 ) 구성미( 具 成 美 ) 좌도( 左 道 ) 도만호( 都 萬 戶 ) 정간( 鄭 幹 )은 태형( 笞 刑 )을 가하여 환임 ( 還 任 )시키고, 우도( 右 道 ) 도만호( 都 萬 戶 ) 방구령( 方 九 齡 )은 두 번이나 범( 犯 )하였으므로 장 형( 杖 刑 ) 60대를 가하여 환임시키고, 법성포( 法 聖 浦 ) 만호( 萬 戶 ) 하소( 河 疏 )는 적선( 賊 船 )이 지나가도 미쳐 쫓아가 잡지 못하였으므로 탐진포( 耽 津 浦 ) 만호( 萬 戶 ) 노지충( 魯 之 忠 )과 함께 각각 장형 1백 대를 가하여 돌산포( 突 山 浦 ) 수군( 水 軍 )에 충당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15권 3장 B면 영인본 1책 429면 분류 *사법-행형( 行 刑 ) / *군사-지방군( 地 方 軍 ) / *군사-군역( 軍 役 ) / *외교-왜( 倭 ) 2. 1421 / 세종 12권, 3년 7월 21일(신사) / 전라 감사 장윤화가 김맹균 섭한룡 등의 치죄 를 청하다 전라도 감사 장윤화( 張 允 和 ) 가 계하기를, 좌도 도만호( 左 道 都 萬 戶 ) 김맹균( 金 孟 鈞 ) 돌산 만호( 突 山 萬 戶 ) 섭한룡( 葉 漢 龍 ) 진례 만 호( 進 禮 萬 戶 ) 강이충( 姜 以 忠 ) 축두 만호( 築 頭 萬 戶 ) 노흥도( 魯 興 道 )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 김호( 金 湖 ) 등이 맡은 병선을 파손하고, 사졸( 士 卒 )을 물에 빠져 죽게 한 죄를 신이 국문( 鞫 問 )하였으니, 청하건대, 도안무사 박초( 朴 礎 ) 의 죄를 아울러 다스려서 뒷사람들을 징계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왕이 체복사( 體 覆 使 ) 조치( 趙 菑 ) 를 내려 보내어 계한 대로 그들을 국문하도록 명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6장 A면 영인본 2책 443면 분류 *군사-군기( 軍 器 ) / *사법-탄핵( 彈 劾 ) 3. 1425 / 세종 27권, 7년 2월 25일(을축) / 도내 각 포 병선의 이박에 대한 편의 여부를 조목별 열거하여 병조에서 아뢰다 전라도 감사가 병조의 관문에 의하여 계하기를, 도내 각포( 各 浦 ) 병선( 兵 船 )의 이박( 移 泊 )에 대한 편의 여부를 신이 도절제사( 都 節 制 使 ) 문 효종( 文 孝 宗 )과 더불어 현지를 방문 시찰하고 이를 조목별로 열거하여 보고하나이다. - 28 -

1. 좌도(左道)의 내례(內禮)와 돌산(突山)은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양포의 병선이 모여 서 머무르기가 불편하고, 순천부(順天府) 장성포(長省浦)에 현재 머무르고 있는 돌산 만호 (突山萬戶)의 병선 4척은 용문포(龍門浦)에 이박시키고, 그 용문포에 현재 머무르고 있는 도 만호(都萬戶)의 병선은 좌도(左都)의 중앙인 여도(呂島)에 이박시켜, 도만호가 순환하면서 방어 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1. 회령포 만호(會寧浦萬戶)의 병선이 머무르고 있는 장흥부(長興府)의 소마포(召麻浦)는 조 수가 물러가면 물이 얕아지기 때문에, 병선의 출입이 용이하지 않고 주포(周浦)는 왜적(倭 賊)이 밟는 첫 길이요, 또 토지가 비옥하고 많아서, 소마포의 병선 4척을 주포로 이박시켜 드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1. 당진현(唐津縣) 고조눌이(高助訥伊)에 현재 머무르고 있는 마도 만호(馬島萬戶)의 병선 4 척을 본형 원포(垣浦)에 이박시키면, 좌곡(佐谷) 도시(都示) 등 11개의 촌락 및 칠양(七陽) 대구(大丘)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안심하고 토착할 것입니다. 1. 우도(右道) 검모포(黔毛浦)의 도만호(都萬戶) 병선 9척은 함평(咸平)으로 이박시키고, 원 관(垣串)에 현재 머무르고 있는 임치 만호(臨淄萬戶)의 병선 4척은 폐지하여, 방어에 긴요한 좌도의 도만호 영(都萬戶營)과 수영(水營)에 나누어 예속시키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이를 정부와 육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계한 대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9책 27권 26장 B면 영인본 2책 656면 분류 *군사-군기(軍器) / *과학-지학(地學) 4. 세종실록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순천 도호부 순천 도호부(順天都護府) 사(使) 1인. 본래 백제의 삽평군(歃平郡)이었는데, 일명 무평(武平)이라 한다. 신라에서 승평군(昇平 郡)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 15년 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2년. 에 새로 10도 (道)를 정할 때 승주 연해군 절도사(昇州兗海軍節度使)로 하였다가 일명 승화(昇化)라고 한 다. 정종(靖宗) 2년 병자 송나라 인종(仁宗) 경우(景祐) 3년. 에 다시 승평군으로 하 였고, 충선왕(忠宣王) 원년 기유 원나라 세조(世祖) 황제 지대(至大) 2년. 에 승주목(昇州 牧)으로 승격하였다가 2년에 순천부로 강등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로 하였다. 옛 속현(屬縣)이 3이니, 여수(麗水)는 본래 백제의 원촌현(猿村縣)이었는데, 신라에서 해읍현(海邑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여수현으로 고쳐서 승평군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가 충정왕(忠定王) 2년 경인에 따로 현령(縣令)을 두었는데, 본조 태조(太祖) 5년 병자에 본부에 환속(還屬)시켰으며, 돌산(突山)은 본래 백제의 돌산현 이었는데, 신라에서 노산현(盧山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다시 돌산현으로 고쳤으며, 부유 (富有)는 본래 백제의 둔복현(遁攴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부유현으로 고쳐서 곡성군(谷城郡) 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내속(來屬)시켰다. 향(鄕)이 2이니, 삼일포(三日浦) 정 - 29 -

방(正方)이요, 소(所)가 3이니 상이사(上伊沙) 두잉지(豆仍只) 두평(豆坪)이요, 부곡(部曲)이 10이니, 가음(嘉音) 이촌(梨村) 죽청(竹靑) 율촌(栗村) 진례(進禮) 적량(赤良) 소라포(召羅浦) 하이사(下伊沙) 별량(別良) 송림(松林)이다. 진산(鎭山)은 인제(麟蹄)이다. 부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광양(光陽)에 이 르기 20리, 서쪽으로 동복(同福)에 이르기 72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70리, 북쪽으로 구례(求禮)에 이르기 48리이다. 호수가 4백 67호요, 인구가 2천 6백 1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7명이요, 수호군이 79명 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장(張) 박(朴) 김(金) 강(康)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도(陶)요, 내접성 (來接性)이 1이니, 임(林) 풍산(豊山). 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이(李) 향리(鄕吏). 이다. 여수(麗水)의 성이 3이니, 박(朴) 신(辛) 백(白)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도(陶)요, 내 접성(來接姓)이 1이니, 김(金)이다. 부유(富有)의 성이 4이니, 현(玄) 김(金) 심(沈) 이(李)요, 내접성(來接姓)이 2이니, 박(朴) 고(高)요, 속성(續性)이 1이니, 임(林) 향리(鄕吏). 이다. 돌산(突山)의 성이 5이니, 정(鄭) 윤(尹) 정(丁) 석(石) 노(盧)요, 삼일포(三日浦)의 성이 2이 니, 박(朴) 전(田)이요, 내접성(來接姓)이 2이니, 강(康) 경주(慶州). 이(李) 광주(光州). 이다. 정방(正方)의 성이 1이니, 김(金)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박(朴) 향리(鄕吏). 이 요, 두잉지(豆仍只)의 성이 2이니, 박(朴) 신(辛)이요, 가음(嘉音)의 성이 2이니, 임(任) 여 (呂)요, 내접성이 1이니, 박(朴) 승주(昇州). 이요, 이촌(梨村)의 망성(亡姓)이 2이니, 백 (白) 임(林)이요, 죽청(竹靑)의 성이 1이니, 도(陶)요, 율촌(栗村)의 성이 4이니, 김(金) 강 (康) 박(朴) 차(車)요, 진례(進禮)의 성이 3이니, 전(田) 박(朴) 신(申)이요, 망성(亡姓)이 1이 니, 김(金)이요, 적량(赤良)의 성이 2이니, 박(朴) 신(辛)이요, 소라포(召羅浦)의 성이 2이니, 박(朴) 백(白)이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전(田) 신(辛)이요, 하이사(下伊沙)의 성이 1이니, 임 (林)이요, 별량(別良)의 성이 3이니, 박(朴) 도(陶) 황(黃)이다. 인물은 좌승(左丞) 강영규(康 英規)이니, 고려 태조 때 사람이요, 견훤(甄萱)의 사위는 죽어서 해룡 산신(海龍山神)이 되었 다. 땅이 기름지며, 기후가 따뜻하다. 간전(墾田)이 7천 3백 15결이요, 논 밭반반이다. 토의 (土宜)는 오곡 뽕나무 삼 밤 닥나무 왕골이다. 토공(土貢)은 범가죽 삵괭이가죽 여우가죽 잘 족 제비털 칠 감 귤 석류 배 매화 분곽(粉藿) 꿀 밀[黃蠟] 대추 지치 죽순 상어 전복 홍합 붉은 큰 새우 차[茶] 표고 목화 오죽 대방석이요, 약재(藥材)는 흰매화[鹽梅] 녹용 호라비좆뿌리[天門 冬] 겨우살이풀뿌리[麥門東] 난향(蘭香) 오징어뼈 심황(深黃) 속돌[水泡石] 백복령 인삼이요, 토산(土産)이 은어 조기 가는 대 왕대이다. 염소(鹽所)가 9이니, 6소(所)와 부의 동쪽에 있 는데, 하나는 토수포(吐繡浦)에 있고 하나는 예교포(曳橋浦)에 있고, 하나는 사전포(沙田浦) 에 있고, 하나는 동산포(東山浦)에 있고, 하나는 마두포(馬頭浦)에 있고, 하나는 생성포(生成 浦)에 있다. 3소(所)이다. 부의 남쪽에 있는데, 하나는 다로도(多老島)에 있고, 하나는 사도(沙島)에 있고, 하나는 마골포(麻骨浦)에 있다. 염창(鹽倉) 읍성 안에 있다. 공사 염 간(公私鹽干)이 아울러 50명이며, 봄 가을에 바치는 소금이 4백 9석이다. 자기소가 1이 요, 부의 북쪽에 있다. 도기소가 3이었다. 하나는 부의 북쪽 말촌(末村)에 있고, 하나는 부의 동쪽 토진(吐津)에 있고, 하나는 부의 남쪽 이포(梨浦)에 있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5백 81보(步)이다. 여수(麗水) 목책 도니성(木柵塗泥城) 둘레 가 1백 43보이다. 관방(關防)은 내례(內禮) 돌산(突山)이다. 병선이 머무른다. 봉화가 4곳이니, 돌산(突山) 부의 동쪽에 있는데, 서쪽으로 백야(白也)에 응하고, 북쪽으로 성두(城 - 30 -

頭 )에 응한다. 성두( 城 頭 ) 북쪽으로 진례( 進 禮 )에 응한다. 진례( 進 禮 ) 북쪽으로 광양 ( 光 陽 ) 건대산( 件 臺 山 )에 응한다. 백야( 白 也 ) 서쪽으로 장흥( 長 興 ) 팔전산( 八 巓 山 )에 응한 다. 이다. 송광사( 松 廣 寺 ) 선종( 禪 宗 )에 속하고, 전지가 1백 30결( 結 )이다. 역( 驛 )이 2 이니, 양률( 良 栗 ) 낙수( 落 水 )요, 예전에는 고양역( 高 陽 驛 )이 있었는데, 왜적으로 말미암아 없 어졌다. 해도( 海 島 )가 3이니, 돌산( 突 山 ) 개도( 蓋 島 ) 금오도( 金 鼇 島 )다. 영인본 5 책 664 면 5. 1454 / 단종 10권, 2년 1월 8일(경신) / 돌산 만호와 내례 만호로 하여금 목장을 감독 하는 일을 겸임하게 하다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 呈 文 )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제리도 목장( 濟 里 島 牧 場 ) 은 돌산 만호( 突 山 萬 戶 )가, 송도 목장( 松 島 牧 場 ) 은 내례 만호( 內 禮 萬 戶 )가 관리하는 땅이니, 청컨대 감목( 監 牧 )을 겸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4책 10권 6장 A면 영인본 6책 659면 분류 *교통-마정( 馬 政 ) / *행정-지방행정( 地 方 行 政 ) 6. 1457 / 세조 6권, 3년 1월 16일(신사) / 하삼도 도순찰사 박강 등에게 행해야 할 일들 의 조목을 아뢰게 하다 충청도( 忠 淸 道 ) 전라도( 全 羅 道 ) 경상도( 慶 尙 道 ) 의 도순찰사( 都 巡 察 使 ) 박강( 朴 薑 ) 과 부 사( 副 使 ) 구치관( 具 致 寬 ) 등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의 여러 진( 鎭 )과 여러 포( 浦 )를 순 심( 巡 審 )하고, 당연히 행할 사건( 事 件 )을 아뢰어, 하나씩 하나씩 조목조목을 열기( 列 記 ) 하였 다. 1. 이보다 앞서 남쪽 변방에서는 수군( 水 軍 )은 많이 설치했는데도 육병( 陸 兵 ) 은 너무 적었 는데, 대저 도이( 島 夷 ) 는 수전( 水 戰 )에는 장점( 長 點 )이 있어도 기전( 騎 戰 )에는 단점( 短 點 )이 있으며, 우리 나라는 기전( 騎 戰 )에는 장점이 있어도 수전( 水 戰 )에는 단점이 있습니다. 저들 이 비록 수전( 水 戰 )을 잘하지마는, 우리가 전함( 戰 艦 )으로써 응전( 應 戰 )하지 않고 이들을 끌 여들여 스스로 패주( 敗 走 )하는 체하여 그들로 하여금 육지에 내려오도록 하고는, 우리의 장 기( 長 技 )를 사용하여 기병( 騎 兵 )으로써 친다면 거의 도적을 방어하는 계책에 합당할 것입니 다. 경상좌도( 慶 尙 左 道 ) 는 영해( 寧 海 ) 에서 경주( 慶 州 ) 의 감포( 甘 浦 ) 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이 험악하고 섬[ 島 嶼 ]도 없으니, 비록 수군( 水 軍 )이 있더라도 또한 배를 부리는 일에는 익숙지 못하므로 혹시 적병( 賊 兵 )이 창졸히 이른다면 이를 방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모름지기 육군 ( 陸 軍 )을 사용해야만 우리의 장기( 長 技 )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보건대, 흥해군( 興 海 郡 ) 은 북쪽으로 영해부( 寧 海 府 ) 와의 상거( 相 距 )와 남쪽으로 장기현( 長 鬐 縣 ) 에 이르기가 - 31 -

각기 80여 리(里)나 됩니다. 적(賊)이 만약 장기현 의 동을배곶이[冬乙背串] 를 경유(經由) 한다면 바로 흥해군 에 다다를 것이니, 실제로 요충(要衝)의 땅이 되므로 거진(巨鎭)을 설치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본군(本郡)은 땅이 협착하고 백성이 적으니, 가까운 곳의 청 하현(淸河縣) 및 영일현(迎日縣) 의 북면(北面) 주진(注津) 이북(以北)과 경주(慶州) 임내(任 內)의 신광(神光) 등의 지역으로 합속(合屬)시켜 진(鎭)으로 삼고, 영해(寧海) 의 축산포(丑 山浦), 흥해(興海) 의 칠포(漆浦), 장기(長鬐) 의 포이포(包伊浦) 를 혁파(革罷)하고, 그 선 군(船軍)을 이속(移屬)시키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영일현(迎日縣) 은 동을배곶이[冬乙背 串] 와의 상거(相距)가 60여 리(里)이므로 방수(防戍)할 필요는 없지마는, 장기현(長鬐縣) 은 바닷길을 통하여 바라다보게 되니 실제로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이므로, 지금 영일현(寧日 縣) 의 진(鎭)을 혁파하고 장기현(長鬐縣) 에 소속시켜 진을 두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영 해현(寧海縣) 에 진을 둔 것이 비록 오래 되었지만, 땅이 협착하고 백성이 적으며, 영덕군 (盈德郡) 이 영해현 과의 상거가 28리(里)이고, 또 민호(民戶)가 너무 적으므로 현(縣)을 두 는 것이 적당치 못하니, 지금 영해진(寧海鎭) 에 합속(合屬)시키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1. 여러 도(道)의 도절제사(都節制使)의 영병(營兵)이 다만 1백 명 뿐이므로 주장(主將)이 외 롭고 약한데, 하물며 경상도(慶尙道) 는 왜인(倭人) 이 왕래하여 우리의 허실(虛實)을 죄다 알고 있으니, 더욱 약점(弱點)을 보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있는 곳의 고을 수령(守令)들 은 자기 일에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여, 영해(營廨)가 무너졌는데도 수리하지 않으니, 청컨 대 평안도(平安道) 의 예(例)에 의거하여 본영(本營)이 있는 곳의 고을 수령으로써 도절제 사를 겸차(兼差)시키소서. 경상 좌도(慶尙左道) 는 울산군(蔚山郡) 에 부근의 언양현(彦陽縣) 으로써 합속(合屬)시키고, 우도(右道)는 창원부(昌原府) 에 부근의 칠원(漆原) 진해(鎭海) 의 두 현(縣)으로써 합속시 키고, 전라도 는 나주(羅州) 에 무안현(務安縣) 으로써 합속시키고, 충청도 는 홍주(洪州) 에 진(鎭)을 이치(移置)하고 결성현(結城縣) 으로서 분할(分割)하여 소속시키고, 나란히 승격시 켜 대도호부 도절제사(大都護府都節制使)에 판부사(判府使)를 겸하게 하고, 소윤(少尹)과 판 관(判官)을 더 설치하여 군대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겸하게 하소서. 1. 여러 진(鎭)의 수군(戍軍)은, 객병(客兵)은 다른 고을에 우거(寓居)하므로 왕래하기가 저 절로 곤란하게 되니, 반드시 적(敵)에게 달려가 싸우기를 즐겨하지 않을 것이지만, 토병(土 兵) 은 향리(鄕里)를 보호하고 아끼므로 형세가 반드시 힘을 다하여 싸울 것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먼저 본읍(本邑)의 군사를 써서 수병(戍兵)으로 정하고, 액수(額數)가 차지 않은 연후에야 이웃 고을의 군사를 써서 충정(充定)하게 하소서. 1. 여러 도(道)의 연변(沿邊) 여러 고을의 시위패(侍衛牌)는 경중(京中)에 번상(番上)하고, 내 지(內地)의 여러 고을의 영진군(營鎭軍)은 해변(海邊)에 부방(赴防)하게 되니, 내왕하는 사이 에 모두가 스스로 곤란을 당하므로, 만약 적변(賊變)이 있다면 깊숙하고 먼 곳에 번하(番下) 한 군사는 시기에 맞추어 징집(徵集)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서로 바꾸어 정속(定 屬)시키게 하소서. 1. 울산(蔚山) 의 개운포(開雲浦) 는 도절제사 영(都節制使營)에 매우 가깝고, 또 염포(鹽浦) 와 서생포(徐生浦) 의 사이에 있으므로 만호(萬戶)를 임명하고 병선(兵船)을 많이 정박(停泊) 시킬 필요는 없지마는, 그러나 개운포 는 바다에 가까이 있고 백성과 산물(産物)이 많으며, 고기를 낚는 왜선(倭船) 이 많이 염포 를 경유(經由)하여 지나가게 되니, 수호(守護)를 또한 오로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개운포 만호(開雲浦萬戶)를 혁파하여, 그 병선과 수군 (水軍)을 염포 에 이속(移屬)시키고, 경선(輕船) 3, 4척을 사용하여 개운포 에 정박시켜 윤 - 32 -

차(輪次)로 수호하게 하소서. 1. 동래(東萊) 웅천(熊川) 등의 진(鎭)은 왜인(倭人) 이 항시 거처하는 곳이니, 이런 까닭으 로 수령(守令)을 모두 무인(武人)으로써 임명하여 내려보냈으므로, 접대하는 사의(事宜)를 많이 잃어서 분원(忿怨)을 초래하였으니, 대체(大體)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또 수령이 사고 가 있으면 객인(客人)을 낱낱이 계산하고 선척(船隻)을 자로 재는 등류의 일은 오로지 만호 (萬戶) 및 감고(監考) 통사(通事) 등에게 위임하고 있으니, 더욱 미편(未便)합니다. 지금 기 장현(機張縣) 을 혁파하여 동래 에 합속(合屬)시키고, 창원(昌原) 의 사현 북면(私峴北面) 과 안민역(安民驛) 등의 지역으로써 분할하여 웅천현(熊川縣) 에 소속시키고, 청컨대 동래 와 웅천 에는 모두 판관(判官)을 더 설치하여 사무를 알고 숙달(熟達)한 인원(人員)으로써 임명 하여 내려보내게 하소서. 1. 해운포(海雲浦) 는 동래진(東萊鎭) 과의 상거가 9리(里)이고, 부산포(富山浦) 와의 상거는 15리(里)이므로 수륙(水陸)의 방수(防戍)하는 곳이 멀지 않으니, 지금 해운포 를 혁파시키 고, 본포(本浦)해운대(海雲臺) 의 북쪽 부근 산기슭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동래진 의 군 사 50명으로써 수호하게 하소서. 1. 전라도 의 도절제사 영(都節制使營)을 지금 만약 나주(羅州) 에 이치(移置)한다면 장흥(長 興) 해남(海南) 등지에는 방수(防戍)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지금 두 고을의 중앙인 강진 현(康津縣) 에 진(鎭)에 설치하여 군사 4백 명을 두고서 본현(本縣) 의 누락된 민호(民戶)로 써 쇄정(刷定)하되, 만약 정원(定員)에 차지 않는다면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혁파된 가정 군(加定軍) 내의 한량인(閑良人)으로써 충정(充定)하도록 하소서. 1. 전라도 순천(順天) 의 돌산포(突山浦) 에는 동쪽에는 내례 석보(內禮石堡) 가 있고, 서쪽 에는 여수 석보(呂水石堡) 가 있어 바다와의 상거가 동떨어지게 멀므로 방어가 긴요하지 않 으니, 지금 돌산포 를 혁파하고 그 선군(船軍)을 내례(內禮) 와 여도(呂島) 에 분속(分屬)시 키게 하소서. 흥양(興陽) 의 축두포(築頭浦) 는 본진(本鎭)과 상거가 멀지 않으며, 동쪽에는 발포(鉢浦) 가 있고 서쪽에는 녹도(鹿島) 가 있어 포구(浦口)가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지금 축두포 를 혁파하여 그 선군(船軍)을 발포 와 녹도 에 분속(分屬)시키게 하소서. 진도(珍島) 와 금갑도(金甲島) 의 남면(南面)은 동쪽에 가깝고, 남도포(南桃浦) 의 남면(南面)은 서쪽에 가까와서 방어가 가장 긴요한데, 사월곶이[沙月串] 는 동면(東面)이 북축배(北縮排) 에 가깝 고, 소가포(所可浦) 는 서면(西面)이 북축배 에 가까우니, 지금 사월곶이 와 소가포 를 혁파 하고 그 선군(船軍)을 각기 본포(本浦)에 돌리게 하소서. 또 금갑도(金甲島) 는 방어가 가장 긴요하고 군사의 수효도 또한 많으므로, 다만 권관(權管)만 두는 것은 적당하지 않으니, 마 땅히 만호(萬戶)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1. 충청도 보령(保寧) 의 고만포(高巒浦) 는 처치사 영(處置使營)과의 상거가 멀지 않으니 별도로 만호(萬戶)를 두는 것은 적당치 못합니다. 지금 만호를 혁파하고 그 선군(船軍)을 처 치사 영(處置使營)과 좌도(左道) 도만호 영(都萬戶營)에 분속(分屬)하게 하소서. 대진(大津) 은 이것이 경기(京畿) 와 충청도(忠淸道) 두 도(道)의 경계이므로 방어가 긴요하지 않으니, 지금 두 도(道)의 해구(海口) 중앙인 난지도(難地島) 에 당진포(唐津浦) 및 대진(大津) 의 병 선(兵船)으로써 합쳐 정박(停泊)하고, 만호 1원(員)은 혁파하소서. 파지도(波知島) 는 해문 (海門)의 요충(要衝)인데도 병선이 없으므로, 이에 물러가 서산(瑞山) 의 소요항(所要項) 10 여 리(里)의 곳에 정박(停泊)하고 있으니 그 형세가 적당하지 못합니다. 지금 파지도 에 옮 겨 정박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1. 연해(沿海)의 여러 진(鎭)은 땅이 협착하고 백성이 적으므로 명칭은 군문(軍門)이라 하지 - 33 -

만 외롭고 약한데, 하물며 군대와 백성의 일은 지극히 중대하니, 땅이 협착하다는 것 때문 에 1원(員)만 홀로 설치할 수는 없습니다. 전라도 의 무장진(茂長鎭) 은 고창(高敞) 과 흥덕 (興德) 에, 부안진(扶安鎭) 은 김제(金堤) 만경(萬頃) 에, 옥구진(沃溝鎭) 은 임피(臨陂) 에, 충청도 의 남포진(藍浦鎭) 은 비인(庇仁) 과 보령(保寧) 에, 순성진(蓴城鎭) 은 서산(瑞山) 에 각기 부근의 고을로 합속(合屬)시키고, 모두 아관(亞官)을 두어서 가부(可否)를 서로 도 우게 한다면 비록 법을 범하려고 하더라도 반드시 방자스럽게 행하지 못할 것이며, 군문(軍 門)도 또한 저절로 번성(繁盛)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남포진(藍浦鎭) 만은 동쪽은 전라도 의 경계에 이르고, 서쪽은 처치사 영(處置使營)에 이르고, 가장 가까운 남면(南面)에 또 우 도(右道)의 도만호(都萬戶)가 있으니 진(鎭)을 설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청컨대 가까운 동쪽 의 비인 읍성(庇仁邑城) 에 진(鎭)을 옮겨서 수병(戍兵)을 두게 하소서. 1. 경상도 상주(尙州) 의 낙동강(洛東江) 으로부터 초계(草溪) 의 사기소(沙器所)에 이르기까 지 그 중간의 여울물이 모두 배가 운행(運行)할 만하니, 마땅히 수참(水站)을 두어야 할 것 입니다. 또 김해(金海) 의 도요저(都要渚) 는 비록 본디는 선척(船隻)이 있었지마는, 그러나 제포(薺浦) 와의 상거가 90리(里)이고 부산포(富山浦) 에 이르기가 70리(里)이므로, 왜인 이 가지고 온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양산(梁山) 동원진(東院津) 의 동쪽 부근에 수참(水站)을 두고, 가까운 고을의 김해(金海) 양산(梁山) 의 공천(公賤)으로써 참부(站夫) 로 정하고,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하여금 관찰(管察)하도록 하소서. 1. 충청도 의 안면곶이 [安眠串]는 바다에 들어가기가 1백 20리(里)나 되니, 인민(人民)이 모여서 거주하기가 적당하지 못합니다. 또 소나무가 있는데, 염부(鹽夫)와 잡인(雜人)이 작 벌(斫伐)하여 거의 없어질까 염려되니, 청컨대 거주하는 백성을 쇄출(刷出)하고, 태안(泰安) 서산(瑞山) 등의 고을과 처치사(處置使)로 하여금 소나무의 작벌(斫伐)을 금하게 하소서. 1. 경상도 거제현(巨濟縣) 에는 영등포(永登浦) 옥포(玉浦) 지세포(知世浦) 조라포(助羅 浦) 오아포(吾兒浦) 가 있는데, 한 고을에 다섯 곳이 있어 방수(防戍)가 지나치게 많습니 다. 지세포 와 조라포 는 포구(浦口)가 허활(虛闊)하고 또한 모두 사석(沙石)이어서 닻을 내 리기가 튼튼하지 못하고, 지세포 로부터 서남(西南)으로 이르는 사이는 돌산이 높고 험준하 며, 민가(民家)는 동떨어져 먼데도 영등포 오아포 옥포 등 삼포(三浦)가 분열(分列)되어 있으므로 거제(巨濟) 의 수호(守護)는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지세포 조라포 의 두 포 (浦)를 혁파하고 그 선군(船軍)을 옥포 에 이속(移屬)시켜 방어(防禦)하게 하소서. 1. 거제현(巨濟縣) 은 바다 가운데의 절도(絶島)이므로, 비록 수군(水軍)이 있더라도 만일에 수전(水戰)에서 해를 본다면 수성군(守城軍) 1백 명을 써서 방수(防戍)하게 되니, 지극히 외 롭고 약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지세포(知世浦) 조라포(助羅浦) 등의 포(浦)를 혁파한다면, 두 곳에 전혀 군졸(軍卒)이 없게 될 것이므로 더욱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두 포(浦)의 중앙 에 석보(石堡)를 축조(築造)하여 새로 구자 만호(口子萬戶)를 두고, 두 포(浦)의 군졸 6백 명 으로써 옮겨 지키게 하소서. 1. 소비포(所非浦) 는 당포(唐浦) 와 적량(赤梁) 의 중앙에 있어서 실제로 요해(要害)의 곳이 므로 수병(戍兵)을 합쳐 두는데, 가도(柯島) 는 동쪽에는 당포 가 있고 서쪽에는 적량 이 있 어서 적선(賊船)이 왕래하기가 실제로 어려울 것입니다. 하물며 가도 는 수로(水路)가 30여 리(里)나 되므로 구원하는 군사가 동떨어지게 머니, 지금 소비포 에 그전대로 배를 정박시 키고, 수병(戍兵)을 더 두도록 하되, 그 만호(萬戶)는 소비포 만호(所非浦萬戶)란 칭호를 쓰 게 하소서. 1. 전자에는 하삼도(下三道) 의 여러 영진(營鎭)과 여러 포(浦)의 군관(軍官)을 대개 권지 직 - 34 -

장(權知直長) 영사(令史) 별군(別軍) 등 잡직(雜職)의 거관인(去官人)으로써 스스로 천거했기 때문에 공름(公廩)만 허비했을 뿐, 방수(防戍)는 허소(虛疎)했으니 매우 옳지 못한 일이었습 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도절제사(都節制使) 처치사(處置使)의 군관(軍官) 중의 1명은 전함 (前銜) 조사(朝士) 중에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으로써 차정(差定)하여 도진무(都鎭撫)라 칭 함(稱銜)하고, 만 2주년을 기다려 경중(京中)의 전함 별좌(前銜別坐)의 예(例)에 의거하여 서 용(敍用)하게 하며, 그 나머지 군관 및 도만호(都萬戶)의 군관과 방어(防禦)가 가장 긴요한 동래(東萊) 웅천(熊川) 등 진(鎭)의 군관은 모두 하번(下番)한 경군사(京軍士) 중에 무재가 있는 사람으로써 자원(自願)에 따라 차정하고, 평안도(平安道) 함길도(咸吉道) 의 예(例)에 의거하여 1주년을 방수한 후에 날수를 계산하여 도(到)를 주도록 하소서. 1. 영진군(營鎭軍)은 본디부터 권려(勸勵)하는 방법이 없으며, 선군(船軍)은 비록 3년마다 한 차례씩 해령(海領)의 관직을 임명하지마는, 그러나 사도(仕到)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 서 용하게 되므로 전혀 재주를 시험하지 않는 까닭에 다만 활을 쏠 때에 과녁을 맞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활줄을 당길 줄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도절제사(都節制 使)와 처치사(處置使)가 봄 가을에 재주를 시험하되, 영진군은 1백 80보(步)에 화살 2개가 똑바로 통과하고, 기사(騎射)는 다섯 번 쏘아서 네 번 이상 맞힌 사람으로써 1등으로 삼고, 1백 20보(步)에 화살 2개가 맞고 기사(騎射)는 다서 번 쏘아서 세 번 이상 맞힌 사람으로써 2등으로 삼고, 1백 보(步)에 화살 1개가 맞고, 기사(騎射)는 다섯 번 쏘아서 두 번 이상 맞 힌 사람으로써 3등으로 삼을 것이며, 선군(船軍)은 1백 80보(步)에 화살 2개가 똑바로 통과 하고, 수로(水路)의 어렵고 쉬운 것을 잘 알아서 노(櫓)를 잘 젓고 돛대를 달고 닻을 내리기 를 잘 하는 사람은 1등으로 삼고, 1백 20보(步)에 화살 2개가 맞고, 배를 부리는 데 익숙한 사람을 2등으로 삼고, 1백 보(步)에 화살 1개가 맞고, 배를 부리는 데 익숙한 사람을 3등으 로 삼을 것이며, 그 중에서 기사(騎射)까지 아울러 시험 보기를 자원(自願)하는 사람은 청허 (聽許)하고, 그 고하(高下)를 등급별로 매겨 계문(啓聞)하면, 영진군(營鎭軍)은 산관직(散官 職)을 임명하고, 선군(船軍)은 해령직(海領職)을 임명하게 하소서. 그 활쏘기의 연습과 배를 부리는 일의 잘못과 배 위의 기계(器械)의 허실(虛實)은 혹은 병조(兵曹)의 낭관(郞官)이든지 혹은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일정한 시기가 없이 점검해서, 만약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 이 있으면 논죄(論罪)하여 파직(罷職)하도록 하소서. 1. 평안도 함길도 의 갑사(甲士)는 도절제사(都節制使)가 관찰사(觀察使)와 함께 재주를 시 험하여, 합격한 사람은 충보 갑사(充補甲士)라 일컫고는 여러 진(鎭) 및 구자(口子)에 나누 어 보내어 방수(防戍)하게 하고, 쏜 화살 수효와 사도(仕到)를 빙고(憑考)하여 실직(實職)을 임명하게 하소서. 지금 보건대, 하삼도(下三道) 연변(沿邊)의 여러 진(鎭)의 군사는 수효가 적어서 방어(防禦)가 허술하니, 청컨대 양계(兩界) 의 예(例)에 의거하여 본도(本道)에서 재 주를 시험하여 뽑아서, 합격한 사람은 충보 갑사라 일컫고는 가까운 영진(營鎭)에 나누어 지키게 하고, 사도(仕到)와 쏜 화살의 수효를 상고하여 갑사직(甲士職)에 임명하여 번상(番 上)해서 숙위(宿衛)하게 하소서. 임금이 명하여 병조(兵曹)에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니, 병조에서 아뢰기를,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시행하되, 그 여러 읍(邑)의 연혁(沿革)과 칭호(稱號) 등의 일은 이 조(吏曹)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4장 B면 - 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