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희의 일본어에 의한 창작 활동 -3 편의 일본어 소설에서 보는 시국 대응 형식- 니가타현립대학교 야마다요시코 1 머리말 1931 년 삼천리사에 입사한 최정희는 기자로서 활동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1937 년에 흉가 로 등단했다. 그 동안 습작기에 일본어 소설 1 편을 포함해 소설 15 편을 발표했다. 일본어 소설 그늘 은 역시 습작기에 쓴 가버린 美 禮 의 번역판이다. 그후 최정희가 일본어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39 년부터이다. 글의 내용은 시국에 관련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소설에서는 1941 년에 환상 속의 병사, 1942 년에 2 월 15 일의 밤, 야국초 를 썼는데 모두 시국적인 내용이다. 같은 기간에 소설 2 편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본고에서는 최정희의 일본어 소설 3 편과 관련 기사, 수필 등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식민지 말기 최정희의 창작 활동을 살펴보겠다. 2 1939 년부터 1942 년까지 집필 수와 내용의 추이 최정희가 1939 년부터 1942 년까지 발표한 글을 언어별(조선어/일본어)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소설 외 수필과 기사, 최정희가 참석한 좌담회 기사 등은 하나로 묶었다. -기사 수필 좌담- -소설- -일본어로 번역- 1939년 8/2 2/0 1940년 22/4 4/0 1 1941년 7/10 2/1 1 1942년 8/8 2/2 이것을 보면 1940 년 숫자가 많은데 여기에는 좌담회 7 건이 들어 있다. 일본어로 된 글은 새로 창간된 国 民 新 報 에 실린 어머니의 마음 -아이를 가지고 보면 (1939.5.14) 이 처음이다. 조선문인협회가 설립된 이후 1940 년에는 일본어 글이 4 건이 확인되었고 1941 년에 크게 증가했다. 京 城 日 報 에 실린 것이 많다. 삼천리 도 1940 년 7 월부터 일본어 페이지를 만들었다(발표매체별 집필 수를 아래에 적었음). 1940 년부터는 매일신보 에도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시국에 관한 내용이 늘어났다. 매일신보 에 실린 글은 여성지도부대 와 같은 주제 밑에서 여성 계몽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다. 그것은 애국반 결성에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42 년에는 징병제 실시가 결정됨에 따라 소년과 어머니를 소재로 한 글들이 되풀이돼서 나왔다. 소설은 1940 년부터 1942 년까지 거의 같은 수를 유지했는데 1942 년에 쓴 것은 4 편
모두 언어와 상관없이 시국적 내용이다. 발표매체별 집필 수(K=조선어 N=일본어) 1939년 기사 등 K 文 章 3 三 千 里 2(좌담2포함) 女 性 1 作 品 1 東 亜 日 報 1 N 国 民 新 報 2 소설 K 文 章 2 1940년 기사 등 K 三 千 里 10(좌담4포함) 毎 日 新 報 3 文 章 2(좌담1포함) 女 性 3(좌담1포함) 人 文 評 論 2 家 庭 之 友 2 N 国 民 新 報 1 모던 日 本 1 緑 旗 1(좌담) 京 城 日 報 1 소설 K 文 章 2 家 庭 之 友 1 단행본수록1 1941년 기사 등 K 毎 日 新 報 5 三 千 里 1 文 章 1(좌담) N 京 城 日 報 8 三 千 里 2 소설 K 三 千 里 1 春 秋 1 N 国 民 総 力 1 1942년 기사 등 K 大 東 亜 3 毎 日 新 報 3 春 秋 1 半 島 の 光 1 N 国 民 文 学 3 京 城 日 報 2 大 東 亜 1 文 化 朝 鮮 1 緑 旗 1 (좌담) 소설 K 大 東 亜 1 野 談 1 N 国 民 文 学 1 新 時 代 1 3 3 편의 일본어 소설에서 보는 시국 대응 형식 (1) 환상 속의 병사 앞에서 말한 수필 어머니의 마음 -아이를 가지고 보면 은 저자 최정희가 일요일에 창경원이나 조선신궁에 간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시국을 느끼게 하는 내용은 아니다. 그 다음에 역시 国 民 新 報 에 실린 그럼 안녕히 (1939.12.3)는 조선문인협회가 일본인 병사들에게 보낸 위문문집 속에 들어 있다. 문인협회 이름으로 된 전언에서는 八 紘 一 宇 의 정신을 힘있게 외치고 있는 데 비해 최정희가 쓴 글은 아마 당신은 좋은 병사이시고 좋은 인간이시겠습니다 라는 애매한 내용이고 무슨 말을 써야 할지 헤매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환상 속의 병사 ( 国 民 総 力 1941.2)는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 병사와 조선인 소녀의 교류를 그린 작품이다. 최정희는 1940 년 10 월에 조선문사무대 로서 양주 지원병 훈련소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병사를 소재로 한 글은 그 동안 별로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럼 안녕히 가 익명의 일본인 병사에게 쓴 글인 데 비해 환상 속의 병사 는 일본인 병사 3 명과의 구체적인 교류 장면을 그린 독특한 내용이므로 그것이 저자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창작인지 궁금하다. 작품 후반부에 이르면 신동아 건설, 일본정신, 지나와 조선과 일본은 신의 시대로부터 숙명적 관계 와 같은 말이 나와서 시국 소설의 면모를 보여 주지만
일본인 병사가 원해서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살짝 아리랑 노래를 가르치거나 한글을 배운 병사가 이 글자는 살아 있습니다 라고 하는 장면 등은 정서적이기도 하다. 환상 속의 병사 보다 먼저 쓴 일본어 글 중에 내선문답-친애하는 내지의 작가에게 ( 모던 日 本 朝 鮮 版 1940.8)가 있다. 이 글에서 최정희는 일본 작가들에게 서로가 모르는 데서 어떻게 이해가 생기겠습니까? 당신들이 지금까지 가지던 태도를 버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며 조선 문화에 대한 이해를 당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어로 쓴 글을 통해 최정희는 말 그대로의 내선일체 를 내세우면서 조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2 월 15 일의 밤 최정희는 1940 년부터 매일신보 에도 글을 쓰게 되었다. 新 生 活 의 樹 立 과 舊 習 打 破 [3]-신식가정에까지도 미신이 남어잇다. 그리고 어린이를 좀더 존종하자! (1940.8.8) 에서는 가장만 소중히 여기고 아이를 등한시하는 습관을 고쳐야 한다고 했으며, 女 性 指 導 部 隊 -얼골 化 粧 보다도 마음 修 養 이 必 要 (1940.8.13)에서는 독서를 창례하는 것과 동시에 몸단장도 부정하지 않는다. 女 性 訓 -아름다웁게 (1941.4.20)는 아주 짧은 글이지만 거기서는 몸과 행동과 표현 모두 아름답게 살고 싶다고 썼다. 이 시기에 쓴 글은 그 밖에도 女 流 随 筆 -빨강치마를 입든날 ( 家 庭 之 友 1940.12)과 같이 여성의 몸단장이나 미 를 소재로 한 것들이 눈에 띄며, 시국에 관련된 글이라고 해도 근면이나 절약 등 일반적인 여성 계몽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일본어 수필 두 개의 이야기 ( 京 城 日 報 1941.1.5)는 비교적 내용이 갖추어진 글이다. 여기서도 역시 여자의 몸단장을 허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몸을 단장하는 것은 정신 차림의 한 방법이고 수단인 것 같습니다 라며 미 를 강조했다. 이어 자기는 남달리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 앞에 나가기가 어려운 성격이라서 부인회나 동회의 반장 역할을 거절했다고 썼다. 그것은 아마 애국반에 관한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애국반은 1940 년 말부터 결성이 강화되고 여성 반장이 늘어나고 있었다. 삼천리사는 1941 년 8 월 25 일 부민관에 각계 저명 인사들을 모아 임전대책협의회 를 개최했다. 그것을 계기로 최정희 글에 시국이 더욱 더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임전대책협의회는 곧 임전대책협력회 로 이름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총후( 銃 後 )의 활동을 추진해 나갔다. 9 월 7 일에는 채권가두유격대 을 조직하여 모두 76 명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채권 판매를 실시했는데 최정희도 그 속에 끼었고 곧 그 경험을 썼다. 일본어 수필 첫가을의 편지(1) 채권을 파는 날 ( 京 城 日 報 1941.9.23)이다. 그리고 삼천리사의 사장 김동환은 같은 시기에 노동 천시 타파를 내세우고 시작된 國 民 皆 勞 運 動 에도 참여했었다. 김동환의 이러한 활동이 그와 내연관계에 있었던 최정희의 시국 협력을 촉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가을의 편지 에서 최정희는 자신의 생각은 이전과 똑 같지만 이전에는 열정이 부족해서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변명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작가로서 설 위치가 명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르지 못하겠다고 의미심장한 표현을 쓰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일본어 소설 2 월 15 일의 밤 ( 新 時 代 1942.4)은 애국반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후에 나온 이 소설에서는 미 가 적의 전투기를 추격 중인 비행기 로 비유된다. 그리고 애국반장이 된 주인공이 자신의 역할의 중요성을 이야기함으로써 아내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는 남편을 설득한다. 그 대목을 보면 사람들이 애국반을 우습게 여기고 활동에 안 나가기 때문에 당국의 지도가 강화되었던 그 당시 실제 상황이 그대로 주인공 말에 옮긴 것처럼 보인다. 같은 해 1 월에는 大 詔 奉 戴 日 이 제정되었고 애국반원들은 꼭 참가하여야 했었다. 그리고 최재서는 애국반을 다룬 작품에 대하여 국민문학의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 国 民 文 学 1942.3 p.14) 고 했었다. 두 개의 이야기, 첫가을의 편지, 2 월 15 일의 밤 을 비교해 보면 시국의 변화에 따라 글 내용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양상을 알 수 있다. 한국어로 쓴 여성 계몽의 글과 달리 일본어로 쓴 이들 작품에는 작가 최정희의 입장과 함께 시국의 변화에 따라가려는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그후 2 월 15 일의 밤 을 바탕으로 방송소설 장미의 집 ( 대동아 1942.7)을 조선어로 썼다. (3) 야국초 야국초 ( 国 民 文 学 1942.11)는 최정희가 1940 년 10 월에 양주 지원병훈련소를 방문한 경험이 배경에 사용된 작품이다. 화자인 나 가 자기와 아들을 버린 당신 에게 그후의 생활을 보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유부남과의 애정 관계와 아이를 둘러싼 갈등은 최정희 소설에서 되풀이돼서 다루어진 주제인데 야국초 는 그 주제에 시국이란 틀이 박혔다. 따라서 전쟁 협력의 작품임에 틀림없으면서 동시에 최정희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어느날 나 는 지원병을 동경하는 11 살 아들을 데리고 지원병훈련소를 찾아간다. 훈련소 생활은 규칙이 엄격한 데다가 식사도 제대로 못 하지만 나 는 소장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아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서 전장에 보내기로 마음을 먹은 나 는 자신과 아들의 씩씩함을 당신 에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으로 당신 과의 잘못한 과거를 극복하려고 한다. 태평양전쟁 시작과 징병제 실시 결정에 따라 최정희의 글은 애국반 대신 소년과 그 어머니의 역할의 중요성을 다루게 된다. 対 米 開 戦 과 婦 人 의 決 意 사욕을 청산하고 참된 전시가정생활 ( 매일신보 1941.12.12)에는 야마도 다마시이( 大 和 魂 ) 를 말하는 국민학교 3 학년 소년이 등장하는데, 그것과 똑같은 대목이 歸 還 勇 士 와 文 人 座 談 会 ( 緑 旗 1942.1)에서도 이야기된다. 그리고 名 士 徴 兵 의 感 激 을 말한다 -아이를 데리고 ( 国 民 文 学 1942.5,6) 半 島 의 徴 兵 制 와 文 化 人 (8) 御 國 의 아이의 어머니에게 ( 京 城 日 報 1942.5.19)와 강연 君 國 의 어머니 ( 대동아 1942.5)에도 군국소년 과 군국의 어머니 가 나온다.
그런데 최정희는 야국초 보다 먼저 여명 ( 야담 1942.5)을 조선어로 썼다. 삼인칭을 사용한 여명 에는 3 명의 여학교 동창들과 각자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 중 2 명은 인맥 ( 문장 1940.4) 의 등장인물과 이름이 동일하기 때문에 속편으로 볼 수도 있다. 인맥 은 여자 주인공의 바람기가 검열에 걸려서 단행본 발간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 있어서 최정희는 여명 을 쓰는 것으로 오명을 씻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2 명 여성 외에 새로 등장한 여성이 이 작품의 주인공 격이다. 남편을 잃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는 그 젊은 여성은 부민관에서 나라를 위해서 아들을 바치자 고 연설한다. 최정희는 자신의 연설 君 國 의 어머니 에서도 그것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 결국 주인공의 용감한 행동은 친구들에게 감화를 주고 아이들 역시 군국소년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여명 은 환상 속의 병사 와 2 월 15 일의 밤 과 비교해서 길이와 수준에 있어서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3 편 모두 먼저 쓴 기사와 수필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최정희는 왜 야국초 를 썼을까? 그 이유는 생각해 볼 만하다. 최정희의 소설에서 드물게 일인칭이 사용된 야국초 는 일본어로 썼다는 것과 시국소설이라는 것을 넘어, 그것과는 다른 문맥으로 쓰여졌다고 볼 수가 있다. 최정희가 김유영과 헤어진 후 그들의 아들은 둘 사이를 왔다갔다 했었다. 그러나 1940 년에 김유영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은 최정희한테 오게 되었다. 그때 최정희는 김동환과 내연관계에 있었고 1942 년 11 월에는 첫딸이 탄생한다. 바로 야국초 가 발표된 시기이다. 최정희에게 아들과의 이별은 그전부터 피할 수 없는 문제였고 몇 번이나 소설 주제가 되었었다. 그런데 사정이 여기까지 이르러 최정희는 일본 병사라는 손이 닿지 않는 먼 데로 아들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몰린 어머니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그림으로써 자신의 삶에 어떤 답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결국 야국초 는 최정희만 쓸 수 있는 전쟁 협력의 소설인 것이다. 5 맺음말 이번 연구에서 최정희 글을 집필 순으로 검토하면서 글 내용이 시국의 추이에 딱 맞추어서 변화해 가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최정희는 소설가이기 전에 먼저 기자였다는 것을 실감했다. 앞에서 본 名 士 徴 兵 의 感 激 을 말한다-아이를 데리고 는 저자 자신이 인터뷰를 받고 있는 장면을 그린 짧은 글인데, 작가와 저널리즘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저널리즘의 역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최정희는 사회의 현실을 충실히 전하려고 했고 그 연장선으로 소설을 쓴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어떤 조건 밑에서도 다만 쓴다 는 행위가 본능적으로 우선되었을 것이다. 너무 충실히 시국을 그렸기 때문에 오히려 최정희 자신의 사상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겠다. 참고문헌은 일본어 페이지에 적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