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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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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 고려 인들의 팔경학 향유에 대하여 조선 후기 潘 南 朴 氏 西 溪 家 門 의 宗 中 운영 - 京 華 士 族 宗 中 운영의 一 例 - 우반동 김씨 가 내에서 서자의 역할과 활동 조선 후기 음택풍수의 유행과 정약용의 풍수 인식 張 韓 節 孝 記 硏 究 1930년대 간행된 諺 文 讀 本 에 대한 연구

藏 書 閣 34 고려 인들의 팔경학 향유에 대하여 김건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Ⅰ. 머리말 Ⅱ. 高 麗 中 期 의 八 景 詩 1. 瀟 湘 八 景 詩 의 著 作 과 和 次 韻 2. 韓 國 八 景 詩 로의 變 容 Ⅲ. 高 麗 後 期 의 八 景 詩 와 詞 1. 韓 國 八 景 詩 의 流 行 2. 韓 國 寫 景 詞 의 創 作 과 展 開 Ⅳ. 맺음말 138

국요약 이 글은 고려시대의 팔경학의 전개양상을 통시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고려 인 들이 중국의 소상팔경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차 화운하는 한편, 고려의 특정지역이 나 공간을 팔경으로 정하고 학활동을 영위한 과정을 저작경위와 영향관계에 주목 하여 고찰하였다. 특히 소상팔경시와 한국 팔경시, 八 景 詩 와 八 景 詞 로 나누어 그 전 개과정을 파악하고, 기존연구의 몇 가지 제점을 검토하였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소상팔경시와 소상팔경도가 제작된 것은 명종이 신하들에게 지시를 하면서부터이다. 李 仁 老 의 한시 < 宋 迪 八 景 圖 >가 그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것은 후대에 지어진 여러 팔경시의 전범이 되었다. 이어서 李 奎 報 가 6편, 陳 澕 가 1편의 소상팔경시를 남기고 있는데, 당시 관료 인 승려들 사이에 소상팔경시를 짓고 차운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소상팔 경시가 그다지 지어지지 않았다. 李 齊 賢 이 지은 1편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신 李 穡 은 소상팔경이 아닌 중국의 다른 승경을 대상으로 < 東 吳 八 詠 >과 < 鳳 山 十 二 詠 >을 지었 다. 곧 대상과 형식이 다양해진 것이다. 한편 고려 인들은 소상팔경을 한국적으로 변용하여 한국 팔경시를 창작하였다. 金 克 己 는 강릉의 8곳을 유람하며 최초의 한국 팔경시 < 江 陵 八 景 >을 남겼다. 실경을 소표제로 삼고 경관과 관련 있는 역사나 전설을 원용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규보는 2 편의 한국 팔경시를 지었지만, 모두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지어준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한국 팔경시가 여러 인들에 의해 성행하였다. 단의 종주였 던 이제현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가 원나라에 머물면서 송도를 그리워하며 < 憶 松 都 八 詠 >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安 軸 은 관동지방의 관리로 나갔다가 < 三 陟 西 樓 八 詠 >을 지었고, 李 穀 과 李 達 衷 이 그 시에 차운하였다. 또 안축은 경상도의 여덟 경치를 < 東 南 八 景 詩 >로 읊었다. 이색은 자신의 고향을 대상으로 < 韓 山 八 詠 >을 지어 자부심을 드러내는 한편, 간신 廉 興 邦 을 위해 < 金 沙 八 詠 >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팔경학의 한 특징으로 寫 景 詞 의 창작을 들 수 있다. 이제현이 원나라 사들과 교유하며 詞 를 익혀 독보적인 솜씨를 보였는데, 巫 山 一 段 雲 으로 <소상팔경 사>와 <송도팔경사>를 지었다. 그의 영향 아래 鄭 誧 가 < 蔚 州 八 景 >, 陳 義 貴 가 < 淸 安 八 景 >, 安 魯 生 이 < 寧 海 十 二 詠 > 등을 차례로 지었다. 모두 귀양지에서의 閑 適 한 삶을 무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139

藏 書 閣 34 산일단운으로 읊은 것이다. 무산일단운이 유행한 것은 이제현에 의해 새로 전해진 詞 調 인데다, 오언과 칠언의 조합으로 상대적으로 짓기가 쉬웠기 때이다. 한편 고려시대 팔경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기존연구의 몇 가지 오류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특히 진화의 소상팔경시 저작시기, 김극기의 학사적 위치, 虔 州 八 境 및 東 吳 八 景 의 소상팔경과의 관계, 봉산십이경의 대상 등에 대해서는 재고할 여 지가 있다. 주제어 宋 迪, 소상팔경시, 한국 팔경시, 이제현, 寫 景 詞, 무산일단운 투고일자 2015년 8월 13일 심사일자 2015년 9월 21~24일 게재확정일자 2015년 9월 30일 140

Ⅰ. 머리말 중국에는 많은 역사 고적들이 전해오는 한편, 사람들 사이에 명승으로 일컬어지는 곳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勝 景 의 하나가 瀟 湘 江 과 洞 庭 湖 일대의 이른바 瀟 湘 八 景 이다. 역대의 많은 시인 묵객들은 이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는 등 다양한 양식의 예술작품을 남겼다. 팔경은 < 平 沙 落 雁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 遠 浦 歸 帆 >(먼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 山 市 晴 嵐 >(아지랑이 갠 산마을), < 江 天 暮 雪 >(저물 녘 강천에 내리는 눈), < 洞 庭 秋 月 >(동정호의 가을달), < 瀟 湘 夜 雨 >(소상강에 내리는 밤 비), < 煙 寺 暮 鍾 > 1) (연기 낀 절간의 저녁 종소리), < 漁 村 落 照 >(어촌의 저녁노을) 등이다. 이 팔경을 소재로 한 그림과 시는 중국 송나라 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소상 지역을 대상으로 일찍이 黃 筌 (903?~965?)과 李 成 (919~967) 등 여러 화가들이 승경 을 그렸으나, 2) 沈 括 (1031~1095)의 夢 溪 筆 談 을 비롯한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宋 迪 (1014~1083?)이 <소상팔경도>를 그림으로써 팔경이 정해지고 완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3) 소상팔경을 소재로 한 그림과 시는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서 模 寫 하고 次 韻 하는 한편, 이를 변용하여 자국의 경관을 대상으로 팔경을 선정하고 향유하는 팔 경화를 이룩하였다. 그 동안 소상팔경도, 소상팔경시와 한국 팔경시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 다. 소상팔경도에 대한 미술사학적 분석, 소상팔경시에 대한 고전학 분야의 연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특히 소상팔경시의 수용과 영향, 형상화 방식과 表 象 性, 함의와 미의식, 그리고 한국 팔경시의 유형과 성격 등에 두루 주목함으로써 상당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4) 그러나 기존연구에서 중국 소상팔경 화의 전래 초기인 고려시대의 양상이 다소 소 략하게 다뤄진 점을 제로 지적할 수가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소상팔경도가 현전하는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1) < 煙 寺 晩 鍾 >으로 쓰기도 한다. 2) 송희경( 남송의 소상팔경도에 관한 연구, 미술사학연구, 한국미술사학회, 1995)은 宋 迪 이전에 黃 筌 이 팔경도를 그렸음을 논증하였고, 전경원( 소상팔경-동아시아의 시와 그림,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7)은 李 成 이 최초로 소상 팔경도를 그렸다고 주장하였다. 3) 沈 括, 夢 溪 筆 談 권17, < 書 畵 >, 度 支 員 外 郞, 宋 迪 工 畵, 尤 善 爲 平 遠 山 水. 其 得 意 者, 有 平 沙 落 雁, 遠 浦 歸 帆, 山 市 晴 嵐, 江 天 暮 雪, 洞 庭 秋 月, 瀟 湘 夜 雨, 煙 寺 晩 鐘, 漁 村 落 照, 謂 之 八 景. 好 事 者 多 傳 之, 後 來 名 勝 處, 多 分 八 景. 4) 안장리, 한국의 팔경학, 집당, 2002; 전경원, 2007, 앞의 책; 전유재, 소상팔경 한시의 한국적 수용 양상 연 구, 숭실대학교 박사학위논, 2013에 연구 성과와 연구목록이 잘 정리되어 있다. 141

藏 書 閣 34 것이 없고 소상팔경시 및 한국 팔경시의 작품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조선 초기 安 平 大 君 (1418~1453)의 匪 懈 堂 瀟 湘 八 景 詩 帖 및 조선시대의 다양한 작품 활동에 가려 진 면과도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고려 중엽 송나라의 소상팔경 화가 전래되어 소상 팔경시를 짓고 화 차운하는 한편, 고려 후기에 여러 인들이 특정지역의 경관을 대상 으로 팔경을 정하고 학활동을 영위한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존연구의 일부 역사적 객관적 사실에 대한 논증상의 오류로 인해 고려시대 팔경학의 올바른 이해에 혼란을 초래한 점도 제이다. 특히 소상팔경시와 한국 팔 경시, 詩 와 詞 를 뒤섞어 논의하는가 하면, 더욱이 팔경시 작자의 순서를 뒤바꿔 논의 하거나 지역을 잘못 제시하는 착오가 있었다. 따라서 대상과 양식을 구분하여 계통 을 수립하고, 고려시대 팔경학의 전개양상을 부분적으로 바로잡을 필요성이 있다. 기존연구에서 팔경시의 내면세계가 거듭 분석되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저작경위와 영향관계에 주목하여 전개양상을 통시적으로 살피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를 통하여 한국 팔경학의 초기 모습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국 고전학 간의 영향 및 수용관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현 전하는 고려시대의 팔경학 관련 자료는 <표 1>과 같다. 표 1 高 麗 時 代 八 景 詩 詞 1 2 3 4 5 作 家 李 仁 老 (1152~ 1220) 金 克 己 (미상) 李 奎 報 (1168~ 1241) 陳 澕 (미상) 李 齊 賢 (1287~ 1367) < 宋 迪 八 景 圖 > 瀟 湘 八 景 ( 中 國 ) 韓 國 八 景 詩 詞 ( 長 短 句 ) 詩 詞 ( 長 短 句 ) < 次 李 平 章 仁 植 虔 州 八 景 詩 > (16 首 ) < 次 韻 李 相 國 復 和 虔 州 八 景 詩 來 贈 > (16 首 ) < 次 韻 復 和 李 相 國 八 景 詩 各 一 首 > < 次 韻 英 上 人 見 和 > < 宋 迪 八 景 圖 > < 和 朴 石 齋 尹 樗 軒 用 銀 臺 集 瀟 湘 八 景 韻 > < 江 陵 八 景 > < 次 韻 惠 文 長 老 水 多 寺 八 詠 > < 奇 尙 書 退 食 齋 八 詠 > < 瀟 湘 八 景 >(16 闋 ) < 憶 松 都 八 詠 > < 松 都 八 景 >(16 闋 ) 142

6 7 8 9 10 11 12 安 軸 (1287~ 1348) 鄭 誧 (1309~ 1345) 李 穀 (1298~ 1351) 李 達 衷 (1309~ 1384) 李 穡 (1328~ 1396) 陳 義 貴 (?~1424) 安 魯 生 (미상) < 東 吳 八 詠 > < 鳳 山 十 二 詠 子 通 臨 行 索 賦 > < 三 陟 西 樓 八 詠 > < 白 文 寶 按 部 上 謠 ( 東 南 八 景 )> < 蔚 州 八 景 > < 次 三 陟 西 樓 八 詠 詩 韻 > < 次 鄭 仲 孚 蔚 州 八 詠 > < 三 陟 八 景 > < 韓 山 八 詠 > < 金 沙 八 詠 > < 淸 安 八 景 > < 寧 海 十 二 詠 >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Ⅱ. 高 麗 中 期 의 八 景 詩 1. 瀟 湘 八 景 詩 의 著 作 과 和 次 韻 중국의 소상팔경도 혹은 소상팔경시가 언제 한국에 전해지고 알려졌는지는 정확 히 알 수가 없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소상팔경 작품은 고려 무신집권기 李 仁 老 (1152~1220)의 한시 < 宋 迪 八 景 圖 >이다. 5) 따라서 고려 仁 宗 ~ 明 宗 대의 단과 화단 에서 소상팔경시를 짓고 소상팔경도를 그렸던 저간의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종 때의 장가인 金 富 軾 (1075~1151)은 일찍이 소상강 언덕의 두 떨기 대나무 를 묵화로 그렸으며, 6) 李 之 氐 는 선물로 받은 < 晉 陽 山 水 圖 >를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 5) 동선 권20. 6) 이인로, 파한집 권상, 樞 府 金 立 之, 詞 翰 外 尤 工 墨 君, 嘗 以 湘 岸 兩 叢, 獻 大 宗 伯 崔 相 國, 作 一 絶 謝 之. 143

藏書閣 34 고 鄭與齡은 그 그림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7) 이 사례에서 당시 인들이 소상강 주 변의 경물을 잘 이해하는 한편 산수도와 제화시를 함께 즐긴 단의 분위기를 헤아 릴 수 있다. 또 인종 대의 화가 李寧(?~?)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禮成江圖>를 그려 송 徽宗의 총애를 받고 송나라 사람 王可訓 陳德之 田宗仁 趙守宗 등에게 그 림을 가르쳤다.8) 특히 이녕에게 배운 왕가훈은 <春景山水圖>를 그렸는데 그것이 고려 에 전해져서 李湛之(?~?)가 소장하였으며, 林椿(?~?)이 그에 대한 제화시를 지었다.9) 임춘이 지은 시의 내용을 보면 소상강 유역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 분명한데, 그가 일 찍이 <瀟湘夜雨圖>를 그리기도 한 바,10) 소상팔경도 계열의 그림일 가능성이 크다. 한 편으로 고려와 송의 활발한 교역에 따라 송나라 상인들이 고려왕에게 그림을 바치기 도 하였다. 송나라 상인이 고려 인종에게 중국의 진귀한 작품으로 이녕의 그림을 진 상품으로 올린 일화가 그 단적인 예이다.11) 고려에서 소상팔경시와 소상팔경도가 제작된 것은 명종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서 였다. 다음은 소상팔경이 언급된 첫 헌기록이다. (이녕의) 아들 이광필 또한 그림으로 명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이 신들에게 명 하여 소상팔경시를 짓게 하고 이어서 광필에게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왕은 그림에 정교하여 산수화에 더욱 뛰어났으며, 이광필 고유방 등과 함께 경물을 그리며 종일토록 피곤한 줄 모르고 나라의 정사를 게을리 하여 뜻을 두지 않았다.12) 고려 명종은 송나라 휘종에 비길 수 있을 정도로 화예술을 좋아한 임금이다. 예 7) 같은 곳, 晉陽古帝都, 溪山勝致爲嶺南第一. 有人作其圖獻李相國之氐, 帖諸壁以觀之, 軍府參謀榮陽鄭與齡往謁, 相 國指之曰; 此圖是君上梓鄕也, 宜有一句. 操筆立就云; 數點靑山枕碧湖, 公言此是晉陽圖. 水邊草屋知多少, 中有吾廬 畵也無. 一座服其精敏. 8) 고려사 권122, <李寧列傳>, 仁宗朝, 隨樞密使李資德入宋, 徽宗命翰林待詔王可訓陳德之田宗仁趙守宗等從寧學畫. 且勑寧畫本國禮成江圖, 旣進, 徽宗嗟賞曰; 比來, 高麗畫工, 隨使至者多矣. 唯寧爲妙手, 賜酒食錦綺綾絹. 9) 임춘, 서하집 권1, <題湛之家王可訓家春景山水圖>, 湖上靑山山上屋, 山色湖光春更綠. 潮來潮去怒,濤呑吐疑無陸. 漁翁歸去一竿竹, 鶴汀鳧渚知幾曲. 遠近蘭皐花簇簇, 縹緲天涯遙極目. 洞庭波淨日暮孤帆何處宿. 摩詰後孫心不俗, 摸 寫鵝溪綃一幅. 李侯家藏千萬軸, 此本尤非世所蓄. 至寶由來鬼神欲, 再三珍重爲君囑. 10) 鄧椿, 畵繼 권6, 王可訓, 京西人. 熙豊待詔也. 工山水, 自成一家, 曾作瀟湘夜雨圖. (이상아, 조선시대 팔경도 연 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 2008, 46쪽에서 재인용). 11) 고려사 권122, <李寧列傳>. 12) 같은 곳, 子光弼亦以畵見寵於明宗, 王命文臣賦瀟湘八景, 仍寫爲圖. 王精於圖畵, 尤工山水, 與光弼高惟訪等, 繪畵 物像, 終日忘倦, 軍國事慢, 不加意. 144

종, 인종, 충렬왕과 함께 고려의 대표적인 好 文 之 主 로 꼽힌다. 13) 위 인용의 기사는 高 麗 史 節 要 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이는데, 1185년(명종 15)의 일이다. 14) 면에 따르 면, 명종의 지시를 받아 신들이 소상팔경시를 먼저 짓고 그 시의 내용과 느낌에 따 라 李 光 弼 (?~?)이 소상팔경도를 그렸다고 한다. 15) 곧 소상의 경치를 상상해서 시를 지은 것이고, 그림을 보고 감흥이 일어 시를 지은 것이 아니다. 당시 고려 인들은 소상팔경을 시로 묘사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던 바, 각기 상상하는 팔경의 아름다움 을 시로 표현했던 것이다. 한편 명종의 지시에 따라 소상팔경시를 지은 신들이 어 떤 사람들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인로의 칠언절구 <송적팔경도>는 이때 지어졌 을 것으로 추측된다. 16) 이인로는 이담지 임춘과 함께 竹 林 高 會 의 구성원이었으므로 이담지가 소장한 왕 가훈의 <춘경산수도>를 직접 감상하여 소상팔경에 대하여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 며, 또한 破 閑 集 의 첫머리에 <진양산수도>와 관련한 기사를 배치할 정도로 산수도 와 제화시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점에서 소상팔경시를 지을 수 있었던 여건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인로의 칠언절구 <송적팔경도>는 三 韓 詩 龜 鑑, 東 文 選, 箕 雅, 大 東 詩 選 등 역대 시선집에 거듭 뽑혔는데, 8개의 小 標 題 중에서 <소상야우>와 <동정추 월>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徐 居 正 (1420~1488)은 東 人 詩 話 에서 대간 이인로의 소 상팔경 절구는 淸 新 하고 富 麗 하며 묘사를 잘하였다. 고금의 절창이다 라고 칭찬하 고, 17) <동정추월>에 대하여 蘇 舜 欽 의 시구에 點 化 한 것이 저절로 아름답다 고 평가 하였다. 18) 이후 이인로의 <송적팔경도> 시는 팔경시의 전범이 되어 후배 인들에 의 해 거듭 차운시가 지어졌다. 고려 후기에는 朴 孝 修, 尹 奕, 李 齊 賢 등이 차 화운한 바 있으며, 19) 조선 초기에는 안평대군의 비해당소상팔경시첩 에 陳 澕 의 시와 함께 부록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13) 서거정, 동인시화 권하, 高 麗 光 宗 始 設 科, 用 詞 賦. 睿 宗 喜 文 雅, 日 會 文 士 唱 和. 繼 而 仁 明 亦 尙 儒 雅. 忠 烈 與 詞 臣 唱 酬, 有 龍 樓 集. 由 是 俗 尙 詞 賦, 務 爲 抽 對. 14) 고려사절요 권12, 명종 15년 조, 命 文 臣 製 瀟 湘 八 景 詩, 倣 其 詩 意, 摹 寫 爲 圖. 15) 안장리, 2002, 앞의 책, 51-52쪽에서 명종 대의 盛 事 를 무신난이라는 혼란한 정세 속에서 왕이 개인적인 향락 을 탐닉하는 한편, 위축된 신들과 탈속적인 공간을 희구한 결과로 파악하였다. 16) 그간의 연구에서는 서거정이 동인시화 에서 李 仁 老 와 陳 澕 의 <송적팔경도> 시를 合 評 한 것을 확대 해석하여 진 화의 시도 이때 함께 지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진화는 이인로보다 훨씬 후진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 론하기로 한다. 17) 서거정, 위의 책 권상, 李 大 諫 仁 老 瀟 湘 八 景 絶 句, 淸 新 富 麗, 工 於 模 寫, 古 今 絶 唱. 18) 같은 곳, 李 大 諫 仁 老 瀟 湘 八 景 詩 ; 雲 間 灩 灩 黃 金 餠, 霜 後 溶 溶 碧 玉 濤. 欲 識 夜 深 風 露 重, 倚 船 漁 父 一 肩 高. 語 本 蘇 舜 欽 雲 頭 灩 灩 開 金 餠, 水 面 沈 沈 臥 綵 虹 之 句. 點 化 自 佳. 19) 이제현, 익재난고 권3, < 和 朴 石 齋 尹 樗 軒 用 銀 臺 集 瀟 湘 八 景 韻 >. 145

藏 書 閣 34 으로 첨부되기도 하였다. 20) 이인로 다음으로 소상팔경시를 지은 인은 李 奎 報 (1168~1241)이다. < 次 李 平 章 仁 植 虔 州 八 景 詩 > 16수, < 次 韻 李 相 國 復 和 虔 州 八 景 詩 來 贈 > 16수, < 次 韻 復 和 李 相 國 八 景 詩 各 一 首 > 8수, < 次 韻 英 上 人 見 和 > 8수 등이 소상팔경을 읊은 시이다. 21) 이규보는 고 려시대 인 중 가장 많은 6편 48수를 남겼다. 다음 인용은 그가 당시 相 國 이던 李 仁 植 에게 소상팔경시를 짓게 된 경위를 밝힌 글이다. 상국 합하께서 진양공의 객이 지은 <건주팔경시>에 화답한 것을 나에게 보여주 면서 그대도 일찍이 이 팔경시를 지어 보았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고금 의 시인들이 읊은 것이 많은데, 우레를 버티고 달을 찢을 듯이 서로 다투어 기발한 구가 아닌 것이 없으므로, 제가 거기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서 감히 짓지 못하였 습니다. 공께서 굳이 저에게 짓기를 재촉하신다면 즉시 차운하여 각기 두 수씩을 지 어 올리겠습니다. 다만 제현들이 지어 놓은 것을 보지 못했으니, 혹시 그 분들이 쓴 운자를 내가 범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이 유독 두려울 따름입니다 하였다. 22) 이인식은 평장사를 지내고 衛 社 功 臣 號 를 하사받은 인물로 이규보와 친한 사이였 다. 23) 동국이상국집 에 그와 화 차운한 시가 여러 편 남아있다. 위 인용에 따르면,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진양공 崔 瑀 (?~1249)의 객들이 < 虔 州 八 景 詩 >를 지었고, 여 기에 이인식이 화답한 시를 지었으며, 이 화답시에 이규보가 차운한 것이다. 최우는 자기 집에 書 房 을 설치하여 당시의 이름 있는 선비들을 객으로 두고 정치에 이용하 였다. 무신집권기에 서방에 출입하던 인들을 중심으로 소상팔경시가 지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이규보가 처음에 고금 시인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서 감히 소상팔경시를 짓지 않았다는 말은 겸사이지만, 이인식에게 화답시 1편에 각 2편의 차 운시를 지어 올리겠다는 언사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그러나 이규보의 시가 모두 차운 20) 李 永 瑞, < 匪 懈 堂 瀟 湘 八 景 詩 帖 序 >, 匪 懈 堂 一 日 謂 余 曰 ; 我 嘗 於 東 書 堂 古 帖, 得 宋 寧 宗 八 景 詩, 寶 其 宸 翰, 而 因 想 其 景. 遂 令 搨 其 詩, 畵 其 圖, 以 名 其 卷, 曰 八 景 詩. 仍 取 麗 代 之 能 於 詩 者 陳 李 二 子 之 作 系 焉. 21)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6. 22) 같은 곳, < 次 李 平 章 仁 植 虔 州 八 景 詩 幷 序 >, 伏 蒙 相 國 閤 下 和 晉 陽 公 門 客 所 賦 虔 州 八 景 詩 示 予 曰 ; 子 嘗 著 此 八 景 詩 耶? 予 曰 ; 古 今 詩 人, 賦 者 多 矣. 未 嘗 不 撑 雷 裂 月, 爭 相 爲 警 策 者, 予 懼 不 及, 故 不 敢 爾. 公 固 督 予 賦 之, 卽 次 韻 各 成 二 首 奉 寄. 但 未 覩 諸 賢 所 賦, 焉 知 不 有 犯 韻 者 耶? 此 獨 所 恐 耳. 23) 같은 책 후집 권2, < 紅 柿 寄 同 寮 李 相 國 仁 植 >에서는 이인식을 同 寮 라고 일컬었다. 146

한 것이라는 점에서 소상팔경시 저작의 동기가 적극적이거나 주도적이지는 않다고 할 것이다. 한편 < 次 韻 英 上 人 見 和 >는 英 上 人 이 화답한 소상팔경시에 이규보가 차운한 것이다. 당시에 승려들도 소상팔경시를 즐겨 지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瀟 湘 八 景 과 虔 州 八 景 의 관계이다. 이규보의 차운 시 < 次 李 平 章 仁 植 虔 州 八 景 詩 >의 8개 소표제는 <강천모설>부터 <동정추월>까지 송적 의 그림 <소상팔경도> 및 이인로의 칠언절구 <송적팔경도>와 동일하다. 다시 말하면 최우의 객이나 이인식, 이규보 등은 건주팔경 과 소상팔경 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 고 있는 셈인데, 이는 착각이나 부정확한 인식으로 보인다. 소상팔경은 湖 南 省 에 있 다. 瀟 水 는 湘 江 의 지류이고, 상강은 호남성 동부의 여러 지류와 합쳐져서 洞 庭 湖 로 흘러든다. 반면 24) 虔 州 八 境 은 南 康 八 境 이라고도 하는데 江 西 省 에 있다. 건주는 강서 성 남부의 贛 州 (감주)로, 隋 나라 때 현이 군으로 승격되고 건주로 불렸으며, 贛 江 상 류의 章 水 와 貢 水 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南 康 은 감주에 속하는 현이다. 25) 蘇 軾 (1037~1101)은 宋 迪 의 그림과 관련하여 < 瀟 湘 晩 景 圖 > 시를, 26) 孔 宗 翰 의 그림과 관련하여 < 虔 州 八 境 圖 > 시를 27) 각각 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식의 <건주팔경도> 시 8수에는 소표제가 붙어 있지 않은데, 청나라 查 愼 行 이 주석을 붙인 補 註 東 坡 編 年 詩 권16에 실린 <건주팔경도> 시에는 < 石 城 >, < 章 貢 臺 >, < 白 鵲 樓 >, < 皂 蓋 樓 >, < 馬 祖 巖 >, < 塵 外 樓 >, < 鬱 孤 臺 >, < 峰 山 > 등 건주지역의 실경이 소표제로 제시되어 있다. 곧 소상팔 경의 여덟 장면과는 완전히 차이가 난다. 물론 호남성과 산서성이 접경을 이루고 있는 동정호 이남을 소상지역으로 범칭할 수도 있겠지만, 28) 소상팔경과 건주팔경은 여덟 경치의 구체적인 대상이 엄연히 다른 것이다. 29) 이규보 다음으로 소상팔경시를 지은 이는 陳 澕 (1180?~?)이다. 칠언고시 < 宋 迪 八 景 圖 >가 동선 권6과 梅 湖 遺 稿 에 실려 있다. 물론 8개 소표제는 이인로, 이규보의 소상팔경시와 같다. 이 시에 대하여 서거정은 右 諫 議 진화의 칠언장구는 豪 健 하고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24)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에서는 虔 州 八 景 이라 하였으나, 중국 측 자료에는 모두 虔 州 八 境 으로 표기하고 있다. 25) 송호열, 세계지명유래사전, 성지화사, 2006. 26) 蘇 軾, 東 坡 全 集 권28, < 宋 復 古 畫 瀟 湘 晩 景 圖 三 首 >. 27) 같은 책 권9, < 虔 州 八 境 圖 八 首 >. 28) 米 芾, < 瀟 湘 八 景 圖 詩 幷 序 >, 瀟 水 出 道 州, 湘 水 出 全 州, 至 永 州 而 合 流 焉. 自 湖 而 南, 皆 二 水 所 經. 至 湘 陰 始 與 沅 水 會, 又 至 洞 庭 與 巴 江 之 水 合, 故 湖 之 南, 皆 可 以 瀟 湘 名. (전경원, 2007, 앞의 책, 61쪽에서 재인용). 29) 안장리, 2002, 앞의 책, 34쪽에서 남강팔경도(건주팔경도)는 소상팔경도와 같은 지역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 으 로 이해하였다. 147

藏 書 閣 34 雄 壯 하여 奇 詭 함을 얻었다. 古 今 의 絶 唱 이다 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30) 이 시는 안평대 군의 비해당소상팔경시첩 에 이인로의 소상팔경시와 함께 부록으로 첨부되었다. 그런데 시의 제목이 이인로의 <송적팔경도>와 같고, 또 서거정이 두 사람의 시를 나 란히 평가하고 있어서 함께 지은 것 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더구나 매호유고 의 <송적팔경도> 시 말미에 부기되어 있는 살펴보건대, 명종이 일찍이 여러 신하들에게 소상팔경도시를 지으라고 명했으니, 대개 이 시는 이때 지어진 듯하다. 대간 이인로는 한 시대의 宗 匠 이었고, 공은 어린아이로 그와 수레를 나란히 하여 함께 절창이 되었 다 라고 한 후인의 부연설명 31) 은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지 금까지 진화의 소상팔경시를 언급한 대부분의 연구가 함께 지은 것 으로 잘못 다루 어 왔다. 32) 진화는 118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33) 명종이 신들에게 소상팔경시를 짓게 한 것이 1185년(명종 15)인 바, 5살에 소상팔경시를 지은 셈이 되므로 설득력이 없다. 반면 이인로는 당시에 33살이었다. 또 두 사람이 지은 시의 형식이 다르다. 이인 로의 시는 칠언절구(4구), 진화의 시는 칠언고시(8구)이다. 함께 지었다면 詩 型 이나 韻 字 가 같기 마련이다. 제목이 <송적팔경도>로 같은 것은 동선 편찬자가 시를 수집 하여 편찬하는 과정에서 임의로 같은 제목을 붙였기 때으로 보인다. 34) 한편 매호 유고 는 1784년(정조 8) 후손들이 동선, 동인시화 등 시선집과 시화집에 실린 작품과 행적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며, 특히 按 說 은 후손이 다소 과장 하여 추기한 것으로 신빙성에 제가 있다. 진화는 이규보(1168~1241)보다 후진으 로, 이인로(1152~1220)와 함께 소상팔경시를 지었다고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기존 논 의는 마땅히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30) 서거정, 앞의 책 권상, 陳 右 諫 澕 七 言 長 句, 豪 健 峭 壯, 得 之 奇 詭, 皆 古 今 絶 唱. 31) 진화, 매호유고, 按, 明 宗 嘗 命 群 臣 製 瀟 湘 八 景 圖 詩, 蓋 此 詩 作 於 是 時. 李 大 諫 一 代 宗 匠 也, 公 以 童 丱, 與 之 方 駕, 俱 爲 絶 唱. 32) 한국민족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었고 명종이 신하들에게 <소상팔경> 시를 짓도록 하였을 때에 어린 나이로 장편을 지어 李 仁 老 와 더불어 절창이라는 평을 받았다 고 기술하고 있다. 또 최경환은 이인로와 진화의 소상팔경도 시 대비 ( 한국고전연구 1, 한국고전연구학회, 1995)에서 동일한 그 림 을 대상으로 지은 것이라 간주하고 이미지 재산출의 양상을 대비 분석하였다. 33) 崔 粹 翁 이 쓴 < 小 傳 >( 매호유고 )에 의하면, 1198년(신종 1) 사마시에 장원급제했는데 이때 나이가 20세가 채 안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118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34) 이러한 예는 파한집, 보한집, 역옹패설 등에서 수습한 동선 소재 군소 작가의 시 제목에서 흔히 볼 수 가 있다. 148

2. 韓 國 八 景 詩 로의 變 容 중국의 소상팔경도가 고려에 전해지고, 고려의 시인 묵객들 사이에 소상팔경을 소 재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팔경화가 유행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치를 대상 으로 팔경시를 창작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는 소상팔경의 한국적 변용 혹은 적용이라 할 수가 있다.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한국 팔경시 35) 는 金 克 己 (?~?)의 < 江 陵 八 景 >이다. <강릉팔경>의 소표제는 < 綠 筠 樓 >, < 寒 松 亭 >, < 鏡 浦 臺 >, < 崛 山 鍾 >, < 安 神 溪 >, < 佛 華 樓 >, < 文 殊 堂 >, < 堅 造 島 >이다. 소표제를 8개로 정한 것은 소상팔경의 영향이며, 실경의 이 름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았다. 팔경을 김극기가 정한 것인지, 이후 東 國 輿 地 勝 覽 편찬 시에 김극기의 시를 팔경에 붙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극기가 사신의 공무로 강릉에 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승경 8곳을 유람하며 읊은 것이다. 36) 각 시편은 제1구 에 해당 승경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으며, 승경과 관련 있는 역사나 고사, 전설을 원용 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우리 산천에 대한 애정과 역사 전설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낸 것이다. 37) 김극기는 명종 대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지만, 무신들의 신에 대한 핍박을 피해 전 국을 주유하며 山 林 處 士 의 생활을 하다가 50세가 다 되어서 義 州 防 禦 判 官 에 보임되 었으며, 3년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와서는 명종에게 文 名 이 알려져 한림원에 입직하였다. 38) 개경에서 내직에 근무하면서부터 당대의 일류 사들과 어울렸는데, 1199년(신종 2)에는 당시 실권자 崔 忠 獻 (1149~1219)의 집에 千 葉 榴 花 (석류)가 만개 했을 때 이인로, 이담지, 함순, 이규보와 함께 詩 會 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39) 이러한 인들 간의 시회와 교류로 미루어 김극기의 <강릉팔경> 시 저작은 이인로 및 이규보의 팔경시 저작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김극기는 생몰년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동선 의 작가 편제가 임춘-이인로-김극기-이규보-진화 순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35) 한국 팔경시 의 개념에 대해서는 안장리, 2002, 앞의 책, 36~37쪽에서 정리한 바 있다. 36)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도호부, <제영>; 안장리, 2002, 앞의 책, 47-51쪽에서 <강릉팔경>의 시 세계를 자 세히 분석하였다. 37) 여운필, 김극기 연구, 한국한시작가연구 1, 한국한시학회, 1995. 38) 兪 升 旦, < 金 居 士 集 序 >( 동선 권83). 靑 丘 風 雅, 箕 雅, 大 東 詩 選 에는 高 宗 때 한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으 나, 잘못이다(김건곤, 노봉 김극기와 지월당 김극기의 유고 귀속제, 한국한시연구 6, 한국한시학회, 1998). 39) 이규보, 앞의 책 권9, 己 未 五 月 日, 知 奏 事 崔 公 宅, 千 葉 榴 花 盛 開, 世 所 罕 見. 特 喚 李 內 翰 仁 老, 金 內 翰 克 己, 李 留 院 湛 之, 咸 司 直 淳 及 予, 占 韻 命 賦 云. 149

藏 書 閣 34 면 이인로보다 후진으로, 의종 명종 신종 희종 초에 걸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40) 이규보는 2편의 한국 팔경시를 지었다. < 次 韻 惠 文 長 老 水 多 寺 八 詠 >과 < 奇 尙 書 退 食 齋 八 詠 >이다. 41) <차운혜장로수다사팔영>은 이규보가 승려 惠 文 이 水 多 寺 에 기거하 면서 팔경을 정하고 읊은 시에 대하여 차운한 것이다. 팔경은 < 柏 軒 >, < 竹 閣 >, < 石 井 >, < 荷 池 >, < 盆 池 >, < 松 徑 >, < 南 澗 >, < 西 臺 > 등으로 모두 수다사 경내의 특색 있는 경물들 이다. 특별히 사찰과 관련하여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경관을 선정하지는 않았다. 수다사 는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月 精 寺 의 전신이다. 혜은 이인로, 이규보 등과 교유할 정 도로 시를 잘 지어 山 人 體 를 터득한 시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水 多 寺 詩 외에 普 賢 寺, 天 壽 寺, 天 龍 寺 등에서 읊은 시들이 전하고 있다. 42) 앞서 이규보가 차운한 英 上 人 의 소상팔경시(< 次 韻 英 上 人 見 和 >)에서 보았듯이, 혜의 수다사 팔경을 통하여 당시 승 려들의 팔경 향유를 거듭 확인할 수가 있다. < 奇 尙 書 退 食 齋 八 詠 >은 이규보가 奇 洪 壽 (1148~1209)의 별장인 퇴식재의 여덟 경 치를 읊은 것이다. 팔경은 < 退 食 齋 >, < 靈 泉 洞 >, < 滌 暑 亭 >, < 獨 樂 園 >, < 燕 黙 堂 >, < 漣 漪 池 >, < 綠 筠 軒 >, < 大 湖 石 >이다. 이 중에서 퇴식재 라는 이름은 이규보가 정하고, 나머지는 기홍수가 정하였다. 退 食 이라는 말은 관청에서 물러나와 집에서 밥을 먹는다는 뜻으 로, 공직에서 은퇴했음을 비유한다. 곧 기홍수가 만년에 개성 龍 首 山 아래에 별장을 짓고 팔경을 즐긴 것이다. 그는 무신집권기의 武 將 이었지만, 門 下 侍 郎 에서 물러난 후 음악과 시를 즐기고 서예로 기쁨을 삼았던 바, 43) 팔경은 그의 풍류생활을 위해 설정 한 공간이라 하겠다. 이규보가 지은 팔영시의 앞부분에는 긴 서이 있는데, 기홍수 가 이규보보다 20세 연장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위인과 팔경에 대해 역대의 고사를 인용하여 인자하고 지혜로운 사람, 신선의 경지 라고 칭송과 아부로 일관하며 공손 히 팔영시를 바친다 고 하였다. 이 글에서 이규보 학에 대해 부정적 평가가 나오는 일면을 볼 수가 있다. 이규보의 한국 팔경시는 자신이 팔경을 즐기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의 관계에서 차운하거나 남을 위해 지어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규보는 개인적으로 40) 안장리(2002, 앞의 책, 47-56쪽)는 김극기를 이인로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로 추정하고, 김극기의 강릉팔경시 를 명종 대의 성사(이인로) 앞에 잘못 배치하였다. 41) 이규보, 앞의 책 권2. 42) 같은 책 권37, < 文 禪 師 哀 詞 >. 43) 고려사 권101, < 車 若 松 附 奇 洪 壽 列 傳 >. 150

팔경 자체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생활 주변의 하 찮은 영물을 6~8가지로 정해서 읊는 데 관심을 보였다. 두꺼비 개구리 쥐 달팽이 개미 거미 파리 누에를 읊은 < 群 蟲 詠 八 首 >, 44) 오이 가지 순무 파 아욱 박을 읊은 < 家 圃 六 詠 > 45) 등이 그것이다. 한편 안장리는 이규보가 권력자의 별장(퇴식재)을 대상 으로 팔경시를 지은 것에 대하여 개인적인 향유물로 위축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46) 소상팔경시가 상상의 공간을 대상으로 관념적으로 노래하였다면, 한국 팔경시에서는 실경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현실생활과 관련하여 보다 실질적으로 즐긴 것으로 볼 수 가 있을 것이다.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Ⅲ. 高 麗 後 期 의 八 景 詩 와 詞 1. 韓 國 八 景 詩 의 流 行 고려 후기에는 소상팔경시가 그렇게 유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소상팔경시는 이제현이 지은 1편이 남아있을 뿐이고, 대신 李 穡 (1328~1396)은 瀟 湘 을 포함하는 吳 楚 지역을 대상으로 < 東 吳 八 詠 >을, 소상팔경이 아닌 중국의 다른 실경을 대상으 로 < 鳳 山 十 二 詠 >을 지었다. 곧 대상과 형식이 다양해진 것이다. 이제현의 < 和 朴 石 齋 尹 樗 軒 用 銀 臺 集 瀟 湘 八 景 韻 > 47) 은 朴 孝 修 (?~1377)와 尹 奕 (?~?) 이 이인로의 집 銀 臺 集 에 실려 있는 소상팔경시의 운으로 지은 시에 화답한 것이 다. 48) 고려 후기의 인들이 이인로의 칠언절구 <송적팔경도>를 소상팔경시의 전범으 로 삼아 차운시와 화운시를 즐겨 지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동선 에 실려 있 44) 이규보, 앞의 책 권3. 45) 같은 책 권4. 46) 안장리, 2002, 앞의 책, 63쪽. 47) 이제현, 앞의 책 권3. 48) 세 사람의 관계는 다음 자료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1320년(충숙왕 7) 9월 이제현이 지공거가 되고 박효수가 동 지공거가 되어 崔 龍 甲 李 穀 등을 선발하였는데, 왕이 인재 얻은 것을 가상히 여겨 學 士 宴 을 열어 주었으며( 익 재난고, <연보>), 윤혁이 < 賀 李 通 憲 齊 賢 學 士 宴 >( 동선 권15)이라는 시를 지어 축하한 바 있다. 151

藏 書 閣 34 는 이인로의 原 詩 와 이제현의 和 韻 詩 간에는 8개 소표제의 배열순서가 다를 뿐만 아 니라, 韻 字 도 일부 차이를 보이고 있다. 49) 8개 소표제 중에서 <소상야우>가 名 篇 으로 일컬어지는데 동선, 기아, 대동시선 등 여러 시선집에 거듭 뽑혀 있다. 서거정 은 이제현의 소상팔경시에 대해 精 深 하고 典 雅 하며 한가롭고 여유가 있어서 앞 시대 의 이인로 진화와 수백 년을 두고 오르내리며 겨룰 만하다 고 평하였다. 50) 이색은 < 東 吳 八 詠 > 8수를 남겼는데, 瀟 湘 보다도 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읊었다. 다음은 시의 제목이자, 저작경위이다. <동오팔영>은 沈 休 文 이 지은 것이다. 宋 復 古 가 그림으로 그렸고, 東 坡 集 에 실려 있다. 내가 젊어서 그 시를 읽었으나 잊어버렸는데, 지금 병을 앓은 나머지 번민이 심 하여 우연히 東 坡 詩 註 를 펴보다가 동오의 흥취가 일어나서 팔영 絶 句 를 짓는다. 51) 沈 休 文 은 沈 約 (441~513)으로, 휴은 字 이다. 그가 浙 江 省 東 陽 郡 ( 現 金 華 市 ) 태 수로 있을 때 玄 暢 樓 를 짓고 팔경을 읊었는데, < 登 玄 暢 樓 > 시가 유명해져서 후인들이 그 누각을 八 詠 樓 라 불렀다고 한다. 52) 심약의 시는 팔경시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색이 말한 <동오팔영>은 이 시를 일컫는 것이다. 宋 復 古 는 <소상팔경도>를 그린 북 송 화가 宋 迪 이다. 위 맥대로라면 송적이 <소상팔경도> 외에 심약의 팔경시를 그림 으로 그린 것인데, 이는 呂 昌 朝 (?~?)가 얻었다는 < 宋 復 古 八 景 圖 >를 가리킨다. 53) 蘇 軾 은 여창조가 嘉 州 태수로 부임할 때 < 送 呂 昌 朝 知 嘉 州 >라는 송별시를 지어 주었다. 그 시의 제1, 2구 不 羨 三 刀 夢 蜀 都, 聊 將 八 詠 繼 東 吳.( 三 刀 의 꿈으로 가주 태수로 영전하 는 건 부럽지 않고, 팔영을 지어서 동오팔영 잇기를 바라노라) 에 대해 송나라 왕십붕 ( 王 十 朋 )이 次. 公 昌 朝 得 宋 復 古 畫 八 景 圖, 來 嘉 州, 其 目 曰 ; 洞 庭 晚 靄, 廬 阜 秋 雲, 平 49) 칠언절구는 제1, 2, 4구에 압운을 하는 바, 차 화운시는 원시의 글자를 따르는 것이 원칙이다. <동정추월> 제1구, <어촌낙조> 제1구, <강천모설> 제2구의 운자가 상이하다. <어촌낙조> 제1구의 경우 이인로의 원시도 압운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차 화운 과정에서 임의로 바뀌었다기보다도 은대집 이 작가의 집으로 원본인 점에서 동 선 편찬과정에서 변개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50) 서거정, 앞의 책 권상, 惟 益 齋 李 文 忠 公 絶 句 樂 府 等 篇, 精 深 典 雅, 舒 閑 容 與, 得 與 二 老 頡 頏 上 下 於 數 百 載 之 間 矣. 51) 이색, 목은시고 권10, 東 吳 八 詠, 沈 休 文 之 作 也. 宋 復 古 畫 之, 載 於 東 坡 集, 予 少 也 讀 之 而 忘 之 矣, 今 病 餘 悶 甚, 偶 閱 東 坡 詩 註, 因 起 東 吳 之 興, 作 八 詠 絶 句. 52) 中 國 古 名 詩, < 八 詠 詩 >, 金 華 志 曰 ; 作 詠 詩, 南 齊 隆 昌 元 年 太 守 沈 約 所 作. 題 於 玄 暢 樓, 時 號 絕 倡, 後 人 因 更 玄 暢 樓 爲 八 詠 樓 云. 53) 清 나라 宮 夢 仁 이 편찬한 讀 書 紀 數 略 卷 12에 < 宋 復 古 八 景 圖 >와 < 瀟 湘 八 景 >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宋 復 古 八 景 圖, 呂 昌 朝 得 宋 復 古 八 景 圖. 東 坡 賦 詩 云 ; 聊 將 八 詠 繼 東 吳, 即 此. 152

田 雁 落, 闊 浦 帆 歸, 雨 暗 江 村, 雪 藏 山 麓, 泉 巖 古 柏, 石 岸 孤 松. 八 詠 繼 東 吳, 則 沈 休 文 嘗 有 詠 東 吳 者 也.(차운한 것이다. 창조 公 이 <송복고팔경도>를 얻어서 가주로 왔는데, 그 소제목은 동정만애, 여부추운, 평전안락, 활포범귀, 우암강촌, 설장산록, 천암고백, 석 안고송이다. 八 詠 繼 東 吳 라고 한 것은 沈 約 이 일찍이 東 吳 를 읊었기 때이다) 라 주 석하였는데, 54) 이색이 이를 읽고 감흥이 일어 <동오팔영>을 지은 것이다. 8개 소표제 는 < 洞 庭 晚 靄 >, < 廬 阜 秋 雲 >, < 平 田 雁 落 >, < 闊 浦 帆 歸 >, < 雨 暗 江 村 >, < 雪 藏 山 麓 >, < 泉 巖 古 柏 >, < 石 岸 孤 松 >으로 송적의 그림에 있는 제목 그대로이다. 제목상으로는 심약의 팔경 시 55) 보다 소상팔경시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동정만애>, <평전안락>, <활포범귀>는 각 각 소상팔경시의 <동정추월>, <평사낙안>, <원포귀범>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색의 시에 나오는 廬 阜 는 강서성 廬 山 이다. 또 君 山 은 동정호 가운데 있고, 逐 臣 騷 客 은 楚 나 라의 신하 屈 原 을 가리키며, 禹 廟 는 절강성 紹 興 會 稽 山 에 있다. 곧 <동오팔영>은 절 강 강서 호남성을 아우르는 吳 楚 지역의 승경을 대상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56) 팔 영 중에서 <동정만애>는 동선, 기아, 대동시선 에 거듭 뽑혔는데, 徐 居 正 은 그 넓고 온화한 기운은 비록 杜 甫 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찌 전대의 몇몇 聯 句 에 많이 양보하랴? 라고 호평하고, 曺 伸 은 우리나라에서 진실로 고금에 가장 뛰어나 다 라고 극찬하였다. 57) 이색의 < 鳳 山 十 二 詠 詩 > 58) 은 당시에 유행하던 팔영에 사영을 더한 확장형으로 우리 나라 인이 지은 최초의 十 二 景 詩 이다. 더욱이 중국의 실경을 대상으로 중국인에게 써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봉산은 鳳 凰 山 을 가리키며, 山 東 省 東 平 縣 에 있는 산이다. 59) 원나라 학사 傅 亨 (?~?)이 길을 떠날 때 이색에게 시를 청하므로 지어 준 送 詩 이다. 부형은 李 仁 復 (1308~1374)과 중국 과거의 同 年 이고, 이색의 부친 李 穀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54) 王 十 朋 集 註, 東 坡 詩 集 註 卷 21, < 送 呂 昌 朝 知 嘉 州 >. 55) 8개 소표제는 < 登 臺 望 秋 月 >, < 會 圃 臨 東 風 >, < 歲 暮 愍 衰 草 >, < 霜 來 悲 落 桐 >, < 夕 行 聞 夜 鶴 >, < 晨 征 聽 曉 鴻 >, < 解 佩 去 朝 市 >, < 被 褐 守 山 東 >이다. 표제어가 각 5글자로 되어 있다( 中 國 古 名 詩, < 八 詠 詩 >). 56) 안장리는 동오팔경 이 소상팔경 과 같다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비해당소상팔경시첩 한시의 특징, 비해당소상 팔경시첩, 화재청, 2008). 57) 서거정, 앞의 책 권상, 其 廣 漠 沖 融 之 氣, 雖 不 及 老 杜 徑 庭, 豈 足 多 讓 於 前 數 聯 哉. ; 조신, 소쇄록, 於 東 方, 眞 可 橫 絶 古 今. 58) 이색, 앞의 책 권3, < 鳳 山 十 二 詠 子 通 臨 行 索 賦 >. 59) 같은 곳, < 奉 送 傅 子 通 亨 應 奉 奉 使 東 平 賑 濟 客 戶 因 過 鳳 凰 山 >이라는 시에 東 平 과 鳳 凰 山 이 언급되고 있으며, 중국 검색 포털 사이트 www.baidu.com에서도 확인된다. 안장리는 <봉산십이영>을 황해도 봉산군을 대상으로 지은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분석하였다(안장리, 2002, 앞의 책, 138쪽). 153

藏 書 閣 34 (1298~1351)이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전별시를 써준 적이 있다. 60) 당시 이색은 봉황 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부형이 使 命 을 받들고 동평현의 客 戶 (외지에서 전입해 온 사람)를 구휼하러 갈 때 이곳을 지나게 되었으므로 61) 봉황산의 주요 경물을 대상 으로 시를 지어준 것이다. 12경은 < 鳳 凰 臺 >, < 白 鶴 巖 >, < 觀 音 殿 >, < 藏 經 閣 >, < 羅 漢 洞 >, < 居 士 菴 >, < 兩 翼 峯 >, < 神 龍 潭 >, < 百 尺 楸 >, < 五 里 松 >, < 靈 泉 >, < 水 洞 >이다. 모두 실경이다. 부형이 12개의 경물을 제시하여 작시를 요청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색이 소표제를 12개로 확장했다면 중국인에게 자신의 학적 재능을 과시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봉황산 내의 불교 사적과 아름다운 경관을 탈속적인 분위기로 그려내었다. 한편 고려 후기에는 전대에 창작되기 시작한 한국 팔경시가 여러 인들에 의해 본 격적으로 지어졌다. 고려 후기 단의 첫머리에 이제현이 자리하듯이, 한국 팔경시의 유행에 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 시기에 팔경시를 지은 작가들이 그의 벗이거나 제 자들인 점에서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제현은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元 都 의 만권당에 가서 머물던 중 30세 때(1316) 사천성 峨 眉 山 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33세 때 절강성 普 陀 山 에 향을 내리기 위 하여 충선왕을 모시고 두 차례 중국여행을 한 적이 있다. 37세 때(1323)는 西 蕃 (티베 트)으로 귀양 가 있던 충선왕을 배알하러 朶 思 麻 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고향 송도를 그리워하며 < 憶 松 都 八 詠 >을 지었다. 62) 8개 소표제는 < 鵠 嶺 春 晴 >, < 龍 山 秋 晚 >, < 紫 洞 尋 僧 >, < 靑 郊 送 客 >, < 熊 川 禊 飲 >, < 龍 野 尋 春 >, < 南 浦 煙 蓑 >, < 西 江 月 艇 >이다. 송도 주변의 여덟 정경을, 이전의 김극기와 이규보가 실경의 명칭을 그대로 소표제로 삼은 것과는 달리 소상팔경시의 방식으로 제목을 붙였다. 곧 소상팔경의 소표제 진술방식을 송도 에 적용시켜 송도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는 소상팔경의 관념적인 미의 세계와는 달리 송도팔경의 일상적인 면을 미의 세계로 승화시켰다. 63) <억송도팔영> 시 는 그의 장단구 <송도팔경>과 구분하여 前 八 景 으로 불린다. 64) 이제현과 40년 친구였던 安 軸 (1282~1348)은 < 三 陟 西 樓 八 詠 >을 지었다. 65) 삼척 竹 60) 이곡, 가정집, 稼 亭 雜 錄 에 傅 亨 의 < 送 詩 >가 수록되어 있다. 61) 이색, 같은 곳. 62) 이제현, 앞의 책 권3. 익재난고 가 지은 순서대로 편집되어 있는 바, 이 시가 < 涇 州 >( 甘 肅 省 涇 川 縣 )와 < 朝 那 >( 甘 肅 省 平 涼 縣 ) 사이에 편차되어 있는 것에서 이때 지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63) 김성룡, 이제현 학의 중세의식 연구, 호서어연구 3, 호서대학교 국과, 1995에서 자세히 분석하였다. 64)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 개성부 상, <제영>. 65) 안축, 근재집 권1. 154

西 樓 에서 바라본 여덟 가지 경관을 읊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삼척팔경 이라 부른다. 안축은 47세 때(1328) 江 陵 道 存 撫 使 로 나가 관동지방의 경치와 백성들의 삶을 시 으로 기록하여 關 東 瓦 注 를 남겼는데, 이 시도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8개 소표제 는 < 竹 藏 古 寺 >, < 巖 控 淸 潭 >, < 依 山 村 舍 >, < 臥 水 木 橋 >, < 牛 背 牧 童 >, < 壟 頭 饁 婦 >, < 臨 流 數 魚 >, < 隔 墻 呼 僧 >이다. 이제현이 관동와주 의 서에서 풍속의 좋고 나쁨과 백성들의 편안과 근심에 관계된 것 이라 평가하였듯이, 66) <삼척서루팔영>에는 삼척의 경치뿐만 아니라 목민관으로서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67) 이 시는 후대의 여러 사람들에 의 해 거듭 차운되었다. 일부 소표제를 차운한 시로 金 贊 (?~?)의 < 題 三 陟 木 橋 >, 68) 辛 蕆 (?~1339)의 < 臥 水 木 橋 >와 < 依 山 村 舍 > 69) 가 동선 에 전하고 있으며, 李 穀 (1298~ 1351)은 시 전체를 차운하여 < 次 三 陟 西 樓 八 詠 詩 韻 >을 지었고, 70) 李 達 衷 (1309~1384) 도 차운시 < 三 陟 八 景 >을 남겼다. 71) 특히 이곡은 1349년(충정 1) 8월 14일 송도를 떠 나 금강산과 동해안을 유람하고 < 東 遊 記 >를 지었는데, 72) 9월 13일 직접 삼척 죽서루 에 올라 안축의 자취를 더듬으며 차운하였다. 한편 안축은 < 白 文 寶 按 部 上 謠 > 8수를 지었다. 73) 흔히 < 東 南 八 景 >이라 일컫는다. 그 는 1343년(충혜 복4)에 상주목사로 나가 있었는데, 이때 白 文 寶 (1303~1374)가 경상 도 안렴사로 오게 되자, 전례에 따라 환영하는 시를 지어 올린 것이다. 그 서에 李 仁 復 이 중국의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온 이래 사대부들이 시를 지어 전송할 때 우리 나라의 異 迹 을 제목으로 삼은 체제를 본떠 지방 유생들이 각각 동남지역(경상도)의 8 경을 읊어서 바친다 고 소개하고, 74) 이어서 引 을 붙여 백보의 위인, 학, 공덕을 기 렸다. 여러 선비들이 팔경시를 짓고 詩 軸 으로 만들어 안축에게 보냄에 따라 안축도 이 <동남팔경>을 지은 것이다. 8개 소표제는 < 商 山 洛 東 江 (상주)>, < 永 嘉 文 華 山 (안동)>, < 月 城 瞻 星 臺 (경주)>, < 寧 海 觀 魚 臺 (영해)>, < 東 萊 積 翠 軒 (부산)>, < 金 海 七 點 山 (김해)>,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66) 이제현, < 關 東 瓦 注 序 >, 근재집 卷 頭, 其 感 憤 之 作, 關 乎 風 俗 之 得 失, 生 民 之 休 戚 者, 十 篇 而 九. 讀 之 使 人 慘 然. 67) 안장리, 2002, 앞의 책, 148-163쪽에서 자세히 분석하였다. 68) 동선 권20. 69) 같은 책 권21. 70) 이곡, 앞의 책 권20. 71) 이달충, 제정집 권1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삼척도호부, <제영>. 72) 이곡, 같은 책 권5. 73) 안축, 같은 책 권2, 補 遺. 74) 같은 곳, < 白 文 寶 按 部 上 謠 幷 序 >, 近 者, 起 居 注 李 公, 自 中 朝 登 第 而 還, 士 夫 賦 詩 贈 行, 各 占 三 韓 異 迹 爲 題, 語 意 不 類, 眞 奇 作 也. 僕 等 謹 效 其 體, 各 賦 東 南 八 景 一 絶, 幷 短 引, 拜 呈 行 軒. 155

藏 書 閣 34 < 珠 浦 月 影 臺 (마산)>, < 晉 陽 矗 石 樓 (진주)>이다. 三 韓 의 異 迹, 즉 경상도의 산천과 누정 으로 제목을 삼음으로써 이전 팔경시의 소표제와 같은 진부함 대신 구체적이고 참신 함이 느껴진다. 한편 안축은 유생들이 선정한 8경에 정작 자신의 고향인 順 興 [영주] 의 靈 龜 山 宿 水 樓 가 빠져 있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에 사위 鄭 良 生 에 게 절구 한 수를 짓게 하여 권말에 덧붙였다. 75) 이러한 그의 고향에 대한 애착은 훗날 경기체가 < 竹 溪 別 曲 >의 창작으로 나타났다. 76) 李 穡 (1328~1396)은 2편의 한국 팔경시를 남겼다. 한 편은 자신을 위해서, 다른 한 편은 남을 위해서 지었는데, 다분히 자부심에서 비롯되고 또 개인적으로 향유했다는 성격이 강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고향을 대상으로 < 韓 山 八 詠 >을 지었다. 다음은 시의 제목이자 서이다. 한산이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우리 父 子 가 중국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천 하 사람들이 다 우리나라에 한산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좋은 경치를 시가로 전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팔영을 짓는다 고 하였다. 77) 곧 아버지 이곡과 함께 부자가 이어 서 원나라 制 科 에 급제한 文 才 에 대한 자부심 자긍심에서 <한산팔영>을 지은 것이 다. 8개 소표제는 < 崇 井 巖 松 >, < 日 光 石 壁 >, < 孤 石 深 洞 >, < 回 寺 高 峯 >, < 圓 山 戍 鼓 >, < 鎭 浦 歸 帆 >, < 鴨 野 勸 農 >, < 熊 津 觀 釣 >이다. 이색은 각 소표제에 대하여 [ 松 -책려], [ 日 光 -원 근에 두루 미침], [ 孤 石 -확고한 바탕 위의 우뚝함], [ 回 寺 -고을의 사적을 중히 여김], [ 圓 山 -병사를 삼감], [ 鎭 浦 -백성의 이로움], [ 鴨 野 -백성의 생활 정립], [ 釣 -곧음]이라 는 의미로 설정했다고 부연하였다. 78) 곧 <한산팔영>은 자연경관을 기본으로 하면서 인경관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79) 이색은 간신 廉 興 邦 (?~1388)을 위해 < 金 沙 八 詠 >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염흥방이 1375년(우왕 1) 北 元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권신 李 仁 任 의 미움을 받아 경기도 驪 州 金 沙 面 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을 8개 소표제로 만들어 喜 悲 의 情 75) 같은 곳, < 白 文 寶 按 部 上 謠 後 序 >, 諸 生 示 余 以 獻 按 部 歌 謠 一 軸, 愛 其 新 意, 玩 讀 至 三. 然 吾 興 州 所 有 靈 龜 山 宿 水 樓, 其 風 致 不 居 八 景 之 後, 而 漏 而 不 賦 余 甚 怪 焉. 使 家 贅 鄭 生, 賦 一 絶, 書 于 卷 末, 以 雪 吾 鄕 山 水 之 恥. 76) 안장리, 2002, 앞의 책, 74-78쪽에서 안축의 팔경시와 경기체가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77) 이색, 앞의 책 권3, 吾 家 韓 山 雖 小 邑, 以 予 父 子 登 科 中, 國 天 下 皆 知 東 國 之 有 韓 山 也, 則 其 勝 覽 不 可 不 播 之 歌 章, 故 作 八 詠 云. 78) 같은 곳. 韓 山 八 詠, 始 於 松, 自 策 礪 也. 終 於 釣, 思 其 直 也. 次 之 日 光, 生 於 東 而 及 於 遠 近 也. 次 之 孤 石, 確 其 質 而 表 其 介 特 也. 次 之 回 寺, 重 郡 乘 也. 次 之 圓 山, 謹 兵 事 也. 次 之 鎭 浦, 示 民 利 也. 次 之 鴨 野, 立 民 命 也. 由 輕 入 重, 先 末 後 本, 傚 晉 問 終 於 唐 也. 鄕 之 善 士 幸 鑑 焉. 79) 안장리, 2002, 앞의 책, 115쪽. 156

을 붙이다가, 돌아온 뒤에도 잊지 못하여 이색에게 함께 짓기를 요청한 데 따른 것이 다. 80) 이색이 염흥방의 아버지 廉 悌 臣 (1304~1382)의 신도비명을 짓고, 81) 염흥방과 함께 지공거와 동지공거로서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등 82) 두 사람은 매우 친밀했던 것 으로 보인다. 8경은 < 西 山 採 薇 >, < 東 江 釣 魚 >, < 龍 門 斲 藥 >, < 虎 谷 耕 田 >, < 漢 浦 弄 月 >, < 婆 城 望 雨 >, < 長 興 拾 栗 >, < 注 邑 尋 梅 >이다. 이 소표제는 염흥방이 정한 것으로, 승경을 선 정하기보다 경내의 8개 지명에 그의 일상을 하나씩 붙인[ 隨 事 立 名 ] 것이다. 이 중에 서 <한포농월>은 동선, 청구풍아, 기아, 대동시선 에 거듭 뽑혀 명편으로 꼽 힌다. 이색은 <금사팔영>에서 염흥방의 유배생활을 伯 夷, 張 翰, 安 其 生, 諸 葛 孔 明 의 은거와 한적에 비기는 한편, 그를 高 人 ( 隱 士 )과 龍 으로까지 추켜세우며 유배지를 탈 속적인 공간으로 미화하였다. 그러나 염흥방은 공민왕 때 과에 장원급제하고 신진 관료로서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귀양갔다온 뒤로 이인임의 심복이던 林 堅 味 와 함께 청렴한 신들을 몰아내고 매관매직을 자행하며 토지와 노비를 강탈하는 등 간신이 되었다. 83)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2. 韓 國 寫 景 詞 의 創 作 과 展 開 고려시대 인들 중에서 이제현(1287~1367)만이 유일하게 塡 詞 ( 詞 調 에 따라 가사 를 채워 넣음)에 능한 솜씨를 보였는데, 84) 이는 그가 원나라에 가서 중국 사들과 교유하며 詞 를 접하면서 익힌 결과이다. 그는 당대 최고 학자이던 趙 孟 頫 (1254~1322), 張 養 浩 (1269~1329), 元 明 善 (1269~1322)과 특히 교분이 깊었다. 30세 에 충선왕을 모시고 西 蜀 峨 眉 山 으로 奉 祀 하러 떠날 때 장양호는 < 江 湖 長 短 句 > 1편 을 지어 송별하였고, 이에 대해 이제현은 시로써 사례하여 <강호장단구>를 소리 내어 80) 이색, 같은 책 권16, < 金 沙 八 詠 >, 廉 東 亭 謫 居 川 寧 縣 金 沙 莊, 隨 事 立 名, 題 其 目 凡 八, 因 以 舒 憂 娛 悲, 旣 還 不 能 忘 也, 請 予 同 賦 云. 81) 이색, 목은고 권15, < 高 麗 國 忠 誠 守 義 同 德 論 道 輔 理 功 臣 壁 上 三 韓 三 重 大 匡 曲 城 府 院 君 贈 諡 忠 敬 公 廉 公 [ 悌 臣 ] 神 道 碑 并 序 >. 82) 고려사 권115, < 李 穡 列 傳 >. 83) 같은 책 권126, < 廉 興 邦 列 傳 >. 84) 서거정, 앞의 책 권상, 吾 東 方 語 音, 與 中 國 不 同, 李 相 國 李 大 諫 猊 山 牧 隱, 皆 以 雄 文 大 手, 未 嘗 措 手. 唯 益 齋 備 述 衆 體, 法 度 森 嚴, 先 生 北 學 中 原 師 友 淵 源, 必 有 所 得 者. 157

藏 書 閣 34 읽어보니, 만 리 고국 강산이 눈앞에 와 닫는 듯하네 라고 감흥을 나타내었다. 85) 그가 詞, 즉 장단구를 86) 직접 접하고 배워서 잘 지을 수 있었던 저간의 사정을 엿볼 수가 있다. 그는 15 調 53 闋 의 장단구를 남겼는데, 팔경과 관련하여 巫 山 一 段 雲 調 의 <소상 팔경>과 <송도팔경>을 지었다. 이제현이 원나라에서 활동할 당시에도 소상팔경을 대상으로 한 시와 그림이 매우 유행하였다. 그와 직접 교유하였던 조맹부는 < 瀟 湘 夜 雨 圖 >와 < 山 市 春 嵐 圖 >를 그렸고, 虞 集 (1272~1348)은 < 歐 陽 元 公 待 制 瀟 湘 八 景 圖 >라는 제화시를 지었으며, 朱 德 潤 (1294~1365)은 < 跋 馬 遠 瀟 湘 八 景 圖 >라는 발을 지었다. 이로 미루어, 그가 소상팔 경에 관한 지식을 충분하게 얻을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87) 이에 그는 고려에 돌아온 후, < 和 朴 石 齋 尹 樗 軒 用 銀 臺 集 瀟 湘 八 景 韻 >이라는 7언절 구 소상팔경시를 지었던 바, 이때 무산일단운을 사용하여 장단구 <소상팔경>을 함께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이전에 西 蕃 으로 충선왕을 배알하러 갈 때 지은 한시 < 憶 松 都 八 詠 >을 떠올리고 그 餘 興 으로 무산일단운 <송도팔경>도 지었던 것이다. 88) 곧 팔경시를 무산일단운으로 새롭게 시도한 셈이다. 89) 여기에서 한국 寫 景 詞 가 시작되었 으며, 제자와 후배 인들이 거듭 무산일단운 조로 塡 詞 함으로써 그 전통이 이어질 수가 있었다. 90) 이제현은 장단구 <소상팔경>을 2벌 16결 지었으나, 마지막의 < 煙 寺 暮 鐘 >은 제목만 남아있고 가사는 없어졌다. 장단구 <소상팔경>은 7언절구 <화박석재윤저헌용은대집 소상팔경운>과 소표제의 배열순서에서 차이가 난다. 두 작품 모두 사계절의 진행에 따른 시간적 순서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장단구 <송도팔경>도 2벌 16결로 지었는 데, 後 八 景 이라고도 한다. 91) 8개 소표제는 < 紫 洞 尋 僧 >, < 靑 郊 送 客 >, < 北 山 煙 雨 >, < 西 85) 이제현, 앞의 책 권1, < 張 希 孟 侍 郞 見 示 江 湖 長 短 句 一 篇 以 詩 奉 謝 >, 便 覺 有 功 名 敎 事, 誰 言 費 力 短 長 篇. 興 來 三 復 高 聲 讀, 萬 里 江 山 只 眼 前. 86) 詞 는 다른 이름으로 長 短 句, 樂 府, 新 聲, 餘 音, 別 調, 詩 餘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87) 이상남, 조선 초기 소상팔경도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 2000. 88) 익재난고 는 장단구를 권10에 詞 調 별로 배열하면서 무산일단운 <소상팔경>과 <송도팔경>을 맨 뒤에 배치하였 다. 그의 장단구 대부분이 서촉 아미산행과 강남 보타산행 때 지어진 점을 감안하면, 무산일단운 <소상팔경>과 <송도팔경>은 고려로 귀국한 후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홍우흠, 익재사의 풍격에 관한 연구, 중국 어학 2, 영남중국어학회, 1981). 89) 무산일단운은 雙 調 前 後 段 각 4구 3 平 韻 에 전 후단의 제3구가 7언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구는 모두 5언이다. 무산일단운이 조선 초기까지 유행한 것은 5언과 7언의 조합으로 다른 詞 調 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짓기가 쉬운 면과 관련이 있다. 90) 차주환, 中 國 詞 文 學 論 考,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2, 287쪽. 91)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 개성부 상, <제영>. 158

江 風 雪 >, < 白 岳 晴 雲 >, < 黃 橋 晩 照 >, < 長 湍 石 壁 >, < 朴 淵 瀑 布 >이다. 전팔경 <억송도팔영> 과는 <자동심승> 및 <청교송객> 2개 소표제만 일치한다. 한시 <억송도팔영>이 원나라 에서 충선왕의 유배지를 찾아갔다가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에서 지어졌다면, 장 단구 <송도팔경>은 고려로 돌아온 뒤에 보다 편안하고 차분한 상태에서 송도의 아름 다움을 돌아보며 전팔경 을 가다듬었기에 둘 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색 은 이제현이 무산일단운으로 송도팔경을 자유자재로 표현하였다 고 칭찬하였고, 92) 權 遇 (1363~1419)는 일찍이 송도팔영을 읽었는데 <황교만조>가 가장 마음에 든다 고 하였다. 93) 또 서거정은 이제현의 소상팔경을 읊은 시와 장단구가 精 深 하고 典 雅 하며 한가롭고 여유가 있어 앞 시대의 이인로 진화와 수백 년간 우열을 다투었다 고 평가 하였다. 94) 이제현에 이어서 鄭 誧 (1309~1345)는 무산일단운 조로 < 蔚 州 八 景 >을 지었다. 95) 그 는 성품이 강직하여 충혜왕의 폭정을 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면직되고, 더욱이 원나라 로 망명하려 한다는 誣 告 까지 당하여 1342년에 蔚 州 (현재 울산)로 유배되었다. 96) 유 배지 울주에서 < 題 蔚 州 官 舍 壁 >, < 大 和 樓 送 海 峯 >, < 次 蔚 人 韻 > 등의 시편에 자신의 심 사를 부치는 한편, 승경 8곳의 아름다움을 장단구 <울주팔경>으로 노래하였다. 팔경 의 소표제는 < 大 和 樓 >, < 平 遠 >, < 藏 春 塢 >, < 望 海 臺 >, < 碧 波 亨 >, < 白 蓮 巖 >, < 開 雲 浦 >, < 隱 月 峯 >이다. 김극기의 <강릉팔경>이나 안축의 <동남팔경>과 같이 실경을 제목으로 삼았다. 97) 그는 유배지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좌절하거나 낙심하기보다도 유배 와서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게나, 말발굽 이르는 곳마다 좋은 강산인 것을! 98) 이라 하 여 자연을 즐겼다. 곧 <울주팔경>에서는 유배당한 자신의 고통이나 울분을 드러내기 보다 자연경관의 아름다움 자체를 표현하였다. 그가 무산일단운으로 장단구를 지은 것은 전적으로 이제현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현이 당대 단의 宗 主 였을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92) 이색, 목은시고 권7, < 讀 益 齋 先 生 松 都 八 詠 >, 益 老 文 章 逈 出 群, 馳 烟 走 海 勢 沄 沄. 松 都 八 詠 牢 籠 盡, 只 是 巫 山 一 段 雲. 93) 權 遇, 梅 軒 集 권5, < 黃 橋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 개성부 상, <교량>, 曾 讀 松 都 八 詠 詩, 黃 橋 晩 照 最 關 思. 今 來 正 値 黃 橋 晩, 一 詠 前 詩 一 解 頤. 94) 서거정, 앞의 책 권상. 홍우흠은 이를 부연하여 그의 寫 景 詞 는 형식미와 정감이 조화되어 이룩된 平 易 典 雅 하고 淸 新 孤 寂 한 풍격의 詞 이다 라고 비평하였다(홍우흠, 1981, 앞의 논). 95) 정포, 앞의 책 권하, 詩 에 수록하였는데, 무산일단운 조의 詞 임에도 불구하고 5 7언 雜 體 詩 로 이해한 듯하다. 96) 고려사 권106, < 鄭 誧 列 傳 >. 97) 이태형, 이곡과 정포의 사에 투영된 울주팔경 형상 고, 도선화 9,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 2010에서 팔 경의 각 위치와 경관에 대해 자세히 검토하였다. 98) 정포, 앞의 책 권상, < 次 蔚 人 韻 >. 莫 道 謫 來 無 所 得, 馬 蹄 到 處 好 江 山. 159

藏 書 閣 34 뿐만 아니라, 정포의 스승인 崔 瀣 (1287~1340)와 막역한 친구였고 장인 崔 文 度 (?~1345)와는 묘지명을 지어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던 점에서 그 영향관계를 짐작 할 수가 있다. 이제현은 자신보다 22살 어린 정포가 37세로 죽자, 설곡집 의 서을 써 주며 그의 요절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99) 李 穀 (1298~1351)은 정포의 무산일단운 <울주팔경>을 차운하여 < 次 鄭 仲 孚 蔚 州 八 詠 >을 지었다. 100) 그는 1349년(충정 1) 8월 송도를 떠나 금강산과 동해안 1,200여 리 를 유람하고 < 東 遊 記 >를 지은 바 있다. 101) 이때 삼척 죽서루에 올라 안축의 팔영시에 차운하여 < 次 三 陟 西 樓 八 詠 詩 韻 >을 짓고, 이어서 울주로 여행하여 정포의 장단구에 차운하여 무산일단운 <차정중부울주팔영>을 지은 것이다. 이곡의 <동유기>는 그해 8 월 14일부터 9월 21일까지의 기행인데, 그 말미에 平 海 이남 경상도는 전에 가본 곳이라 따로 적지 않는다 고 기록되어 있다. 102) 즉 기행록은 쓰지 않지만, 평해 이남으 로 계속 여행하여 울주까지 답사했음을 알 수가 있다. 정포가 울주에 유배 왔다간 지 7년 뒤, 정포가 죽은 지 4년 뒤에 11살이나 연장자인 이곡이 정포의 자취를 찾아 차 운한 것이다. 두 사람은 시로써 교유하였으며, 정포는 이곡이 원나라로 돌아갈 때 < 送 中 父 李 翰 林 還 朝 >라는 송시를 써준 바 있다. 또 이곡의 가정집 에는 정포와 관련한 시이 30여 편 남아있다. 이곡은 이 紀 行 詞 에서 여행지의 경물을 통해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관망하는 한편 경물을 바라보고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었다. 103) 이곡은 원나라 制 科 에 합격하고 그곳에서 벼슬한 덕분에 塡 詞 에 비교적 능하였던 것 으로 보인다. 이 무산일단운 외에 浣 溪 沙, 南 柯 子 조의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104) 한편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동한 인 陳 義 貴 (?~1424)는 무산일단운으로 < 淸 安 八 景 >을 노래하였다. 105) 청안은 충청북도 槐 山 郡 에 있는 면이다. 그는 공민왕 때 과에 급제하고 간관으로 있던 1391년(공양왕 3) 3월 李 成 桂 를 제거하려는 계획과 관 련한 彛 初 의 獄 에 106) 연루되어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그 계획을 밀고한 西 京 千 戶 尹 99) 이제현, 앞의 책 권7, < 崔 文 度 墓 誌 銘 > 및 습유, < 雪 谷 集 序 >. 100) 이곡, 앞의 책 권20. 101) 같은 책 권5, < 東 遊 記 >. 102) 같은 곳, 平 海 以 南, 則 慶 尙 道 之 界, 予 甞 所 往 還 者, 玆 不 錄 云. 103) 이태형, 2010, 앞의 논. 104) 이곡, 앞의 책 권20, < 眞 州 新 妓 名 詞 浣 溪 沙 > 및 < 次 平 海 客 舍 詩 韻 南 柯 子 >. 105)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청안현, <제영>. 106) 1390년(공양왕 2) 무신 尹 彛 와 李 初 가 명나라 朱 元 璋 에게 찾아가 공양왕과 이성계가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 한 다고 무고한 사건이다. 이후 이성계의 측근인 정도전이 명나라에 가서 무고임을 해명하고 돌아와 이색 우현보 160

龜 澤 을 判 書 雲 觀 事 에 제수한 告 身 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陳 義 貴, 鄭 習 仁, 李 滉, 權 湛, 禹 洪 富, 宋 愚, 孟 思 誠, 尹 珪, 尹 須 를 모두 지방으로 귀양 보냈는데, 107) 이때 진의 귀는 청안으로 귀양 가서 풀려난 그해 10월까지 그곳에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청안 팔경>의 8개 소표제는 < 龍 門 送 客 >, < 龜 石 尋 僧 >, < 薍 谷 牧 馬 >, < 磻 溪 捕 魚 >, < 杻 城 白 雨 >, < 椒 嶺 晴 雲 >, < 淸 河 禊 飮 >, < 黌 舍 閑 吟 >이다. 귀양살이의 고단한 삶은 전혀 드러내지 않 고, 그 지역의 8개 풍광과 어우러져 閑 適 한 삶을 즐기는 은자의 모습을 그렸다. 뒷날 姜 希 孟 (1424~1483)은 一 菴 禪 師 와 함께 남쪽지방을 유람하다가 청안현에 이르러 板 上 의 <청안팔경> 무산일단운 8편을 보고 시어가 매우 고상하니, 과연 평소 듣던 대로 이다 라고 평가하는 한편 7언절구 8수를 지은 바 있다. 108) 진의귀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安 魯 生 (?~?)도 무산일단운으로 < 寧 海 十 二 詠 >을 읊 었는데, 109) 이것 역시 유배지에서 지은 것이다. 그는 1376년(우왕 2) 과에 급제하고, 1392년(공양왕 4) 4월 兵 曹 摠 郞 으로 있을 때 鄭 夢 周 (1337~1392)가 李 芳 遠 에게 피 살되었는데, 그 일파로 몰려 파직된 후 경상도 寧 海 都 護 府 로 유배되었다. 12영은 < 騰 雲 山 >, < 望 日 峯 ), < 西 泣 嶺 >, < 南 眠 峴 >, < 燕 脂 溪 >, < 丑 山 島 >, < 揖 仙 樓 >, < 奉 松 亭 >, < 觀 魚 臺 >, < 梵 興 寺 >, < 含 恨 洞 >, < 貞 信 坊 >이다. 모두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의 산천과 누정 등 실 경을 소재로 하였다. 작품 자체는 자연경관에 대한 묘사보다 정치적인 갈등에 빠진 자신의 심정을 주로 토로하였다. 110) 이색의 <봉산십이영>에 이은 두 번째 십이영 작품 으로, 고려 후기에 이르러 형식이 다양해졌음을 볼 수가 있다.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일파까지 엮어서 제거하였다. 107) 고려사 권46, 공양왕 3년 3월 및 권104, < 金 周 鼎 列 傳 附 金 宗 衍 >. 108) 강희맹, 사숙재집 권1, 與 一 菴 南 遊, 至 淸 安 縣, 板 上 有 府 君 陳 義 貴 淸 安 八 景 巫 山 一 段 雲 八 篇. 詩 語 極 高, 果 愜 素 聞, 因 題 八 詠, 借 一 菴 名, 書 板 掛 壁. 109)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영해도호부, <제영>. 110) 안장리, 2002, 앞의 책, 140-148쪽에서 자세히 분석하였다. 161

藏 書 閣 34 Ⅳ. 맺음말 중국 호남성 소상강과 동정호 일대의 이른바 소상팔경 은 동아시아 한자 화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승경의 대표로 인식되었다. 많은 시인과 화공들이 이를 대상으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양식의 예술작품을 남겼다. 소상팔경을 소재로 한 그림과 시는 중국 북송 때 크게 유행하였으며,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서 이를 변용 하여 자국의 특정지역이나 공간을 대상으로 팔경을 선정하고 향유하는 팔경화를 이룩하였다. 이 글에서는 중국 소상팔경 화의 전래 초기인 고려시대의 팔경학의 전개양상 을 통시적으로 살펴보았다. 고려 인들이 소상팔경시를 짓고 차 화운하는 한편, 거 주지 주변의 경관을 대상으로 팔경을 선정하고 학활동을 영위한 과정을 저작경위 와 영향관계에 주목하여 고찰하였다. 특히 소상팔경시와 한국 팔경시, 팔경시와 팔경 사를 구분하여 그 전개과정을 파악하고, 기존연구의 몇 가지 제점을 검토하였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소상팔경시와 소상팔경도가 제작된 것은 명종이 신하들에게 지시를 하면서부터이다. 李 仁 老 의 한시 < 宋 迪 八 景 圖 >가 그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것은 후대에 지어진 여러 팔경시의 전범이 되었다. 이어서 李 奎 報 가 6편, 陳 澕 가 1편의 소상팔경시를 남기고 있는데, 당시 관료 인 승려들 사이에 소상팔경시를 짓고 차운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소상팔 경시가 그다지 지어지지 않았다. 李 齊 賢 이 지은 1편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신 李 穡 은 소상팔경이 아닌 중국의 다른 승경을 대상으로 < 東 吳 八 詠 >과 < 鳳 山 十 二 詠 >을 지었 다. 곧 대상과 형식이 다양해진 것이다. 한편 고려 인들은 소상팔경을 한국적으로 변용하여 한국 팔경시를 창작하였다. 金 克 己 는 강릉의 8곳을 유람하며 최초의 한국 팔경시 < 江 陵 八 景 >을 남겼다. 실경을 소표제로 삼고 경관과 관련 있는 역사나 전설을 원용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규보는 2 편의 한국 팔경시를 지었지만, 모두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지어준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한국 팔경시가 여러 인들에 의해 성행하였다. 단의 종주였 던 이제현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가 원나라에 머물면서 송도를 그리워하며 < 憶 松 都 八 詠 >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安 軸 은 관동지방의 관리로 나갔다가 < 三 陟 西 樓 八 詠 >을 지었고, 李 穀 과 李 達 衷 이 그 시에 차운하였다. 또 안축은 경상도의 여덟 경치를 < 東 162

南 八 景 詩 >로 읊었다. 이색은 자신의 고향을 대상으로 < 韓 山 八 詠 >을 지어 자부심을 드러내는 한편, 간신 廉 興 邦 을 위해 < 金 沙 八 詠 >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팔경학의 한 특징으로 寫 景 詞 의 창작을 들 수 있다. 이제현이 원나라 사들과 교유하며 詞 를 익혀 독보적인 솜씨를 보였는데, 巫 山 一 段 雲 으로 <소상팔경 사>와 <송도팔경사>를 지었다. 그의 영향 아래 鄭 誧 가 < 蔚 州 八 景 >, 陳 義 貴 가 < 淸 安 八 景 >, 安 魯 生 이 < 寧 海 十 二 詠 > 등을 차례로 지었다. 모두 귀양지에서의 閑 適 한 삶을 무 산일단운으로 읊은 것이다. 무산일단운이 유행한 것은 이제현에 의해 새로 전해진 詞 調 인데다, 오언과 칠언의 조합으로 상대적으로 짓기가 쉬웠기 때이다. 한편 고려시대 팔경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기존연구의 몇 가지 오류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특히 진화의 소상팔경시 저작시기, 김극기의 학사적 위치, 虔 州 八 境 및 東 吳 八 景 의 소상팔경과의 관계, 봉산십이경의 대상 등에 대해서는 재고할 여 지가 있다.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163

藏 書 閣 참고헌 34 姜 希 孟, 私 淑 齋 集. 權 遇, 梅 軒 集. 徐 居 正, 東 人 詩 話. 安 軸, 謹 齋 集. 李 穀, 稼 亭 集. 李 奎 報, 東 國 李 相 國 集. 李 達 衷, 霽 亭 集. 李 穡, 牧 隱 集. 李 仁 老, 破 閑 集. 李 齊 賢, 櫟 翁 稗 說 益 齋 亂 藁. 林 椿, 西 河 集. 鄭 誧, 雪 谷 集. 曺 伸, 謏 聞 鎖 錄. 陳 澕, 梅 湖 遺 稿. 崔 滋, 補 閑 集 이상 韓 國 古 典 飜 譯 院, 韓 國 文 集 叢 刊 및 趙 鍾 業 편, 韓 國 歷 代 詩 話 叢 編. 高 麗 史. 高 麗 史 節 要.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箕 雅. 大 東 詩 選. 東 文 選. 三 韓 詩 龜 鑑. 靑 丘 風 雅. 宮 夢 仁, 讀 書 紀 數 略 ( 文 淵 閣 四 庫 全 書 本 ). 查 愼 行, 補 註 東 坡 編 年 詩 ( 文 淵 閣 四 庫 全 書 本 ). 蘇 軾, 東 坡 全 集. 沈 括, 夢 溪 筆 談. 王 十 朋 集 註, 東 坡 詩 集 註 ( 四 部 叢 刊 景 宋 本 ). 中 國 古 名 詩 (동양고전 검색 사이트 尙 友 千 古 ). 중국 검색 포털 사이트(www.baidu.com).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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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 書 閣 Abstract 34 Regarding the Enjoyment of the Eight-View Literature of Writers in the Goryeo Period Kim, Kun Kon This study is about observation of how the eight-view literature in the Goryeo period has been evolved. Goryeo writers made and quoted a poem based on the eight views of Xiaoxiang of China. Also, they appointed a certain area and space as the eight views and studied the process of literature activity focusing on the purpose of writing and effect relationship. Especially they tried to understand the development process by splitting into a poem on the eight views of Xiaoxaing, Korea eight-view poem, the eight-view poem and cí ( 詞 ). The first painting/poem on eight views of Xiaoxiang in Goryeo period was produced by an order from the king, Myung-Jong ( 明 宗 ). A poem on eight views of Xiaoxiang by a writer, Lee, In-Ro ( 李 仁 老 ) was written in this period and it is known as the oldest existing poem. This became a role model for the later poem of eight views. Following his poem, there were 6 poems from Lee, Gyu- Bo ( 李 奎 報 ), and 1 poem from Jin-Hwa ( 陳 澕 ). At that time, it was popular among bureaucrats, writers, and monks to make and rhyme a word [character] of a poem on eight views of Xiaoxiang but the type of poem was not in popular in the late Goryeo. There was only one poem left from Lee, Je-Hyun ( 李 齊 賢 ). Instead, Lee, Saek ( 李 穡 ) wrote a poem on the eight-view and twelve-view poem about other magnificent views in China, not the Xiaoxiang. That is, a subject and a form of poem were varied. On the other hand, Goryeo writers customized the eight views on Xiaxiang in 166

Korean way and created the unique style of a poem on eight views Kim, Geuk- Ki ( 金 克 己 ) travelled eight places in Gangneung and left the very first poem on eight views in Korea history. It is distinctive that he set a sub-heading using the real view and quoted a related history and legend. Lee, Gyu-Bo wrote two Korea eight-view poems, not for his enjoyment but for someone else. From the late Goryeo, the Korea eight-view poem started to be written in earnest. It was mainly because of the influence of Lee, Je-Hyun, the leader of the literary world at that time. Following the eight-view poem that he wrote 고 려 인 들 의 팔 경 학 향 유 에 대 하 여 during his stay in Yuán ( 元 ) with heart missing Songdo ( 松 都 ), Ahn, Chuk ( 安 軸 ) made a poem on eight different views in Samcheok in Gangwon-do, and Gyeongsang-do. Lee, Saek wrote a poem about his hometown so he showed pride, and he even wrote a poem for his disloyal subject. One of characteristics of eight-view literature in the late Goryeo is a creation of Sa-gyung cí ( 寫 景 詞 ; cí to describe the view). Lee, Je-Hyun associated with writers in Yuán learned cí and showed the distinctive skill. He wrote Xiaoxiang and Songdo eight-view cí with Moosanildanwoon ( 巫 山 一 段 雲 ). Under his influence, many writers wrote the eight-view cí such as Jung, Po ( 鄭 誧 ), Jin, Ui-Gui ( 陳 義 貴 ), and Ahn, No-Saeng ( 安 魯 生 ). They all wrote the cí about the lonely life using Moosanildanwoon. The fame of Moosanildanwoon was because it was the new form of literature introduced by Lee, Je-Hyun and relatively easy due to the combination of five words and seven words Key Words XiaoXiang eight-view poem, Korea eight-view poem, Lee, Je-Hyun ( 李 齊 賢 ), Sa-Gyung cí ( 寫 景 詞 ), Moosanildanwoon ( 巫 山 一 段 雲 )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