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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 49, 2013. 11, 473~500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뉴스영화 제도화의 제 양상을 중심으로 1)함충범 ** 정태수 *** 1. 서론 2. 본격적 전쟁 돌입에 따른 뉴스영화 활동의 확대 3. 각종 영화회의 개최와 시국 뉴스영화의 유행 4. 영화 프로그램의 종류 및 성격, 그리고 뉴스영화 전문관의 개관 5. <일본뉴스>의 조선 파급과 뉴스영화 상영의 의무화 6. 결론 <국문초록> 본 논문은 중일전쟁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 뉴스영화가 어떻게 매체적 입지를 강화하고 영사기와 관람석을 점유하며 문화 정책의 중심에 놓이는 지 그 과정을 탐구한다. 영화 기술과 국제 정세의 변화로 전 세계적으로 뉴스영화가 성행하던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도 뉴스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제작의 기운 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 인 전시 상황에 돌입한 뒤 영화의 선전-계몽 역할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 이 논문은 2011년 정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 2011-616-A00003). **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강의교수(008mm@hanmail.net) ***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ctalker@hanmail.net) - 473 -

2 / 한국민족문화 49 정책, 산업 양면에서 뉴스영화의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의 관변 단체, 군대 기구, 관공 기관 등에서는 시국 인식과 전시 동원을 목적으로 강연회와 영화회를 결합한 형태의 각종 군중 집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신문사들, 그 중에서도 총독부의 기관지를 발행하던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여기에서는 주로 국가 의 시책 선전과 계몽을 위한 시국영화 가 상영되었는데, 대부분은 전 시의 상황과 후방의 역할을 필름 속 영상과 소리를 통해 투사하였다. 그 중에서도 뉴스영화가, 특히 사변뉴스 로 불리던 중일전쟁 관련 뉴스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 조선(경성)에 도 뉴스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이른바 뉴스영화 전문관 이 등장하였 다. 아울러, 1940년 6월부터 일본의 뉴스영화를 일원화하여 제작-배급되 기 시작한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의 <일본뉴스>가 조선에서도 그 입 지를 강화하였다. 뉴스영화의 의무 상영에 대한 법제적 장치 역시 일본과 의 교신 및 연동을 통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는 1941년 12월 8일 이후 더욱 강화되어 간다. * 주요어: 뉴스영화, 중일전쟁, 식민지 조선, 조선총독부, 일본뉴스 1. 서론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이 중국, 러시아, 일본 등지에 서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발굴, 공개하면서 해당 시기 한국영화(사) 연구 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중일전쟁 이후 관련 연구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며 여타 시기 한국영화(사) 연구를 선도하였다. 여기에는 주요 연구 대상으로서의 필름 자료가 집중되어 있다는 점, 1) 전시체제 하에 1) 한국영상자료원에 의해 2004년 이후 발굴, 공개된 극영화는 모두 10편이었으며, 이 가운 데 1937년 이후 작품은 <군용열차>(서광제 감독, 1938), <어화>(안철영 감독, 1939)이며 - 474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3 서의 시대적 특징이 존재한다는 점, 인접 학문 분야의 연구 시도 및 성과 또한 지속성을 띤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그런데 연구 주제의 다양성 확보의 차원에서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으 니, 그것은 바로 해당 연구가 주로 발굴된 극영화 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되는 문화 영화 2) 나 뉴스영화에 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특히 현존하는 영상 자 료가 거의 없고 문헌 자료의 발굴 및 정리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뉴스영화 관련 연구는 상당 부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3) 1940년 이후 작품은 <지원병>(안석영 감독, 1941), <집 없는 천사>(최인규 감독, 1941), <반도의 봄>(이병일 감독, 1941), <조선해협>(박기채 감독, 1943), <병정님>(방한준 감독, 1944), <그대와 나>(허영 감독, 1941 -필름의 일부 보존) 등이다. 2) 현재 DVD 형태나 온라인 상으로 공개되어 있거나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는 일제 강점기 문화영화는 대개 1930년대 작품이다. 간단한 내러티브를 취한 <한 성심의 힘>(무 성영화, 1935년 추정),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1939)와 기록영화 양식을 띤 <총후의 조선>(1937), <당시의 조선>(1938), <조선 우리의 후방>(1939), <조선의 애국일>(1940), <경성>(1940) 등인데,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진 바가 없다. 그 대신 일본 철도 성 국제관광국(BTI)이 도호문화영화부에 촬영을 의뢰하여 1939년에 제작한 <동경-북경: 조선과 만주를 거쳐(Tokyo-Beking: through Tyosen and Manchoukuo>, <동경-북경> 의 일부분인 <Tyosen>, <Tyosen>의 일본어 버전인 < 朝 鮮 素 描 >에 각각 초점을 둔 연구들 이 연속적으로 발표되었는데, 오카와 히토미의 일제시대 선전영화에 표상된 조선의 이 미지- 조선소묘 (1939)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김려실의 기록 영화 <Tyosen> 연구 ( 상허학보 24, 상허학회, 2008), 김한상의 조선-만주 관광 문화 영화와 동아신질서 의 극장 경험 ( 영화연구 43, 한국영화학회, 2010)이 그것이다. 흥미 로운 점은 동일 작품을 두고 세 연구자가 일컫는 단어가 선전영화, 기록영화, 문화영 화 등으로 제각각이라는 사실인데, 이를 통해 관련 용어 및 개념에 대한 고찰의 필요성 또한 자연스레 제기된다. 3) 일제강점기 뉴스영화를 비교적 충실히 살펴본 선행연구로는 이충직의 한국의 문화영화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를 들 수 있다. 이 논문은 연구의 주요 대상으 로 하는 한국 문화영화 에 대한 개념 정의에 있어 명확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대신, 범위 안에 뉴스영화를 포함시켜 Ⅲ. 한국 문화영화의 약사 단원에서 1900년대부터 1970년대 까지의 기록영화(다큐멘터리) 중심의 비( 非 ) 극영화 제작의 흐름을 개괄한다. 특히 1. 일 제치하기 (1903~1945) (16~27쪽) 부분에서 일제강점기 뉴스영화 제작 약사를 소개하는 데, 비록 구체성은 떨어지나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참고의 대상이 될 만 하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부분의 경우 문화영화 관련 내용과 혼재된 채 4~5쪽 분량 (23~27쪽)에 머물러 있는 등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한편, 최근 발표된 일제강점기 뉴스 영화 관련 연구로는 김승구의 조선일보의 1930년대 영화 관련 활동 ( 한국민족문화 36,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0)과 함충범의 중일전쟁 이전 시기 한반도에서의 뉴 - 475 -

4 / 한국민족문화 49 물론 특정 국가나 민족의 영화사 연구가 제작 부문 중에서도 상업 극영 화를 중심으로 진행됨은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느 때보다 역사적 특수성 이 강하게 자리하는 일제말기 한국영화사 연 구에서 이러한 보편성 에 대한 검토와 재고는 반드시 필요하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영화(계)의 경향과 성격을 명확히 파악함으로써 당시 한국영화 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제작, 배급, 상 영 부문을 조망하며 관심의 저변을 기존의 극영화 일변도에서 뉴스영화 등으로도 확장해야 한다. 이에, 본고는 중일전쟁을 통과하며 식민지 조선에서 뉴스영화가 어떻게 매체적 입지를 강화하고 영사기와 관람석을 점유하며 문화 정책의 중심에 놓이는지, 제도화의 과정을 전시 상황 전개 및 체제 구축과 관련하여 탐구 하려 한다. 이를 통해, 뉴스영화를 중심으로 당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적 특성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파악함은 물론 극영화에 집중되어 있는 일 제말기 한국영화사 연구의 지평을 뉴스영화 부문으로 넓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연구 대상의 공간적 범위는 일차적으로 조선에 두면서도, 식민지 본국 과의 관련성이 두드러지는 부분에서는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기도 할 것이 다. 4) 시간적 범위는 기본적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7일부터 스영화, 그 역사적 궤적 및 특수성 연구-일본과의 관련성과 더불어 ( 국학연구 22, 한국 국학진흥원, 2013)가 있으나, 둘 모두 중일전쟁 이전 시기를 범위로 한정하고 있으므로 본 고의 대상 시기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4) 일본의 연구 자료 검색 사이트 등을 통해 살펴본 결과, 중일전쟁 이후 일본에서의 뉴스영 화(의 변화상)에 집중한 단행본 및 논문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한국과는 달리 당시 뉴스영화에 관한 정보의 부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전( 戰 前 ) 일본 뉴스영화에 대한 연구를 새삼스레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본적인 자료 수집과 내용 파악이 이루어진 상태로 보인다. 일례로, NHK의 激 動 の 記 録 第 一 部 戦 時 時 代 日 本 ニュース 昭 和 15~20 年 (NHKエンタープライズ, 2008)나 아사히신문사의 ニュース 映 画 と 朝 日 新 聞 朝 日 動 画 社 ( 朝 日 新 聞 社, 2013)의 경우처럼 DVD를 통한 영상 자료 발행은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다나카 준이치로( 田 中 純 一 郞 )의 日 本 映 画 発 達 史 ( 岩 波 書 店, 1980) 시리즈나 사토 다다오( 佐 藤 忠 男 )의 日 本 映 画 史 ( 岩 波 書 店, 2006-증보판) 시 리즈의 예를 보건대, 일본영화 통사 서술에 이미 일부분이 할애되어 왔다. 특히, 다나카 준이치로의 日 本 敎 育 映 画 発 達 史 ( 蝸 牛 社, 1979) 등과 같이 뉴스영화를 포함한 비( 非 ) 극 - 476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5 조선과 일본의 뉴스영화 제작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태평양전쟁이 발발 하는 1941년 12월 8일까지로 상정한다. 그러면서도, 이 역시 글의 맥락에 따라 다소의 범위 축소, 집중, 확대, 연결을 탄력적으로 동반하고자 한다. 2. 본격적 전쟁 돌입에 따른 뉴스영화 활동의 확대 뉴스영화(ニュース 映 画, Newsreel) 란 실제로 발생한 특정 사건(들)을 필름에 기록한 영상물로, 빠른 보도를 위한 속보성과 일정한 시간 간격의 정기적 발행이라는 주기성을 기본 요건으로 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개발 및 대중화 물결과 더불어 이미 1900년 무렵부터 유럽 각국과 미국 등지에 서 뉴스영화의 제작이 이루어졌고 일본에서도 1914년경부터 제작이 시도 되었으며, 이들 영화 중 일부는 한반도에서도 간간히 상영되었다. 그러나 근대화에 뒤처진 채 서구 열강 및 주변 국가의 간섭과 침략에 시달리던 대 한제국,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병합된 식민지 조선의 경우 뉴스 영화에 있어서도 서양 각국 및 일본의 그것과 현저한 차이를 드러낼 수밖 에 없었다. 1920~30년대 일본에서 정기적인 뉴스영화 제작이 실현되고 있었던 데 반해, 조선에서는 간헐적 시도만이 있었을 뿐 현실화되지는 못 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에서 뉴스영화는 중일전쟁 이전부터 당국의 주요 문화정 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는 <경기뉴스>라는 뉴스영화를 통해 선 전 활동을 계획하던 경기도의 모습을 소개한, 중일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37년 7월 6일자 매일신보( 每 日 申 報 )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이를 통해,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기관뿐만 아니라 지방 관청 에서도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그 속에서 뉴스영화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물론 당시 뉴스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유행 은 비단 조선과 일본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는데, 이러한 외국의 사례가 영화를 비교적 자세히 다룬 일본영화사 연구도 존재한다. 5) 영화화하는 경기도, 매일신보, 1937. 7. 6, 3면. - 477 -

6 / 한국민족문화 49 뉴스 로서 신문 기사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6) 이처럼 1930년대 중후반을 통과하며 식민지 조선에서 뉴스영화는 점차 그 정책적, 산업적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1937년 7월 7일 발발한 중 일전쟁을 계기로 이러한 추세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개전 이후 중국 주요 도시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갈수록 전황을 더욱 생생하게 전 달 또는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도 그 크기를 더해 갔다. 이러 한 가운데 뉴스영화는 과거 어느 때보다 언론 매체 및 오락 거리로서 자리 매김하였다. 그리하여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뉴스영화는 정책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가장 특별한 종류의 영화로 부상하게 되었다. 우선 정책적인 측면에서, 중일전쟁 발발 3주 후 동아일보 에 게재된 기사를 살펴보자. 7월 26일 오후 1시부터 조선총독부 내에서 조선중앙정 보위원회 간사회가 개최되어 북중사변과 관련된 정보 수집과 연락에 대한 협의가 잇엇는데 앞으로 시국에 대처할 것으로 세 가지 정도의 사항이 결 정되었다는 내용이다. 첫째는 시국( 時 局 ) 을 둘러싼 대중 선전 방법에 대 한 총독부 농촌진흥과 및 사회교육과의 안 등을 종합하여 문서과에서 각 도지사에게 통첩하기로 하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일전쟁 관련 각종 선 행 미담이나 외국의 여론을 수집하여 강연회 등에서 활용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무엇보다도 실제 실물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킬 필 요 성에 입각하여 금번 사변과 관련된 뉴스 중심의 영화와 사진 등을 수집하야써 각지에 순회선전할 게획을 세웟다 는 것이다. 7) 이를 통해 식 민지 당국이 중일전쟁 이후 부각된 대중 선전-계몽의 주체, 내용, 방식 등 을 치밀하게 통제하고자 하였다는 점과, 특히 선전과 계몽의 도구로서 뉴 스영화를 매우 중시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다음으로 산업 면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극장 상영 극영화는 전반적인 부진을 겪게 되지만 시국을 영화의 주요 소재로 삼거나 주제로 다룬 이른 6) 구라파의 영화 극장 뉴-스 영화 중심의 윤돈( 倫 敦 )과 파리( 巴 里 ), 매일신보, 1937. 6. 24, 8면. 7) 세계 여론을 전달 사변뉴스 중심의 영화로 선전 중앙정보위원회 결정, 동아일보, 1937. 7. 28, 3면. - 478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7 바 시국영화 또는 시국물 의 제작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일전쟁 이후 3개월간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의 검열 통계 수치를 통해서 도 단번에 드러난다. <표 1> 중일전쟁 이후 3개월간 총독부 도서과의 영화 검열 수치 8) 보통영화 시국물 합계 건수 권수 건수 권수 건수 권수 1937년 7월 217 1,032 69 70 286 1, 102 1937년 8월 213 1,045 83 99 299 1, 144 1937년 9월 178 855 115 99 293 988 * 출처 : 동아일보, 1937. 10. 21, 3면 보이는 바대로 영화 검열의 총 건수 및 권수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 년 7월 이후 별 차이가 나지 않으나 권수에 있어서는 9월 들어 약간 주춤 하게 되었는데, 이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보통의 영화의 수는 감소한 반면 편당 필름 길이가 짧은 뉴스영화나 문화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주목할 부분은 8월과 9월의 통계치를 보면 1개월 사이 시 국물의 건수는 83건에서 115건으로 32건이 증가한 반면 권수는 99권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인데, 이는 시국물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러닝 타임의 소 요가 적은 뉴스영화의 비중이 커졌음을 시사한다. 이에 대해, 위의 자료를 제시한 동아일보 기사에도 시국물 그 중 사변 관게 뉴-스 영화 가 격증 하였음이 강조되어 있다. 9) 사변 관계 뉴스영화 라 함은 전선에서 전투를 하고 중국 대륙을 침탈하 는 일본군의 모습이나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하는 민간인의 모습을 촬영한 8) 신문 기사에는 7월 총 건수가 386건, 8월 총 건수가 399건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시국물 과 보통 영화의 각 건수 수치 및 권수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건대 이는 각각 286건, 299 건의 오기로 파악된다. 9) 사변과 영화 뉴-스 영화 격증한 반면에 보통 영화 매우 부진, 동아일보, 1937. 10. 21, 3면. - 479 -

8 / 한국민족문화 49 다큐멘터리 필름에 아나운서의 음성 및 배경음악과 자막 및 지도 등이 덧 붙여진 영화를 지칭하는데, 전쟁 이후 이러한 영화가 대단한 인기를 얻었 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전황을 소개하고 전시( 戰 時 )를 강조한다는 점에 서, 전쟁 발발 이후 영화를 통한 시국 인식 과 영화 보국 이라는 목표 달 성에 보다 더 박차를 가하고 있던 정책 당국의 가장 핵심적인 영화 통제 및 장려의 대상이 되었다. 1937년 10월 15일, 조선총독부는 영화 상영에 대한 지도 방침 을 각 도 에 하달함으로써 영화업자 및 영화관을 통제하려 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다음과 같이 뉴스영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상영 상설관에 대하야는 시국뉴스상영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동 시에 관내의 적당한 장소에 시국인식 또는 총후 국민의 각오를 보이는 적절한 표어를 게시하는 동시에 총독부에서 맨든 황국신민의 서사( 誓 詞 ) 를 나타나게 하고 이 필림 을 상설하야두어 시국뉴스 영화상영의 전후 그적절한 기회에 상영시켜 더욱 거국일치 관렴을 진작시키고 애국사상을 고취시켜 그결과의 민중에 미친 영향에 대하야는 총독부에 보고시켜 금 후 영화행정의 만전을 기하랴는것이라 한다. 10) 이러한 조치는, 물론 동경 등 제 도시에서는 뉴-스 전문관이 대유행하 고 잇을 뿐 아니라 경성에도 뉴-스 전문관 설치설이 대두하는 등 모든 영 화가 시국 인식 뉴스영화에 압도되어 잇으며 이것이 일반 민심에 미치는 영향은 자못 큰 바 11) 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 내선일체( 內 鮮 一 體 ), 생업보국( 生 業 報 國 ), 일억일심( 一 億 一 心 ), 국민정신총동원( 國 民 精 神 總 動 員 ), 일본정신발양( 日 本 精 神 發 揚 ) 등의 선동적 표어와 1937년 10월 2일 교학진작( 敎 學 振 作 )과 국민정신 함양을 도모한다는 명목으 로 12)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주도로 기획되어 미나미 지로( 南 次 郞 ) 조선총 10) 영화 통제 강화 시국 인식, 영화 보국 목표로 업자의 지도 방침 통첩, 동아일보, 1937. 10. 16, 2면. 11) 위의 기사. 12) 정운헌, 친일파는 살아 있다-30: 기원절, 천장절, 황국신민의 서사, 오마이뉴스, 2011. - 480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9 독의 결정으로 공식화된 황국신민서사( 皇 國 臣 民 の 誓 詞 ) 를 결합시켜 대중 선전과 계몽을 극대화하였다는 점에서 군국주의 일본 문화정치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가 지니는 오락성과 더불어 매체적, 정치적 성격이 전 쟁 이라는 사건과 조우하며 발생한 역사적 사례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하다. 3. 각종 영화회의 개최와 시국 뉴스영화의 유행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영화의 대중적 영향력이 보다 증대되고 국제 적 교류가 더욱 활성화됨에 따라 전반적으로 외국영화 수입에 대한 통제 가 강화되는 한편 국산영화 수출 활동이 둔화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유독 뉴스영화의 경우는 규제 범위 밖에 위치한 채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어갔다는 사실이다. 먼저 외국영화 수입 관련 정책에 있어서는, 1937년 9월 4일부터 대장성 ( 大 藏 省 )의 위체관리법( 爲 替 管 理 法 ) 에 의해 외국영화 수입 제한 조치가 내려졌고 다시 9월 24일에는 외국영화 주요 회사로 조직된 10개 회사의 간사에게 해당 연도에는 일체의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을 허가하지 않는다 는 방침이 통보되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뉴스영화만은 현하의 국정 에 비추어 통제의 영역에서 제외되었다. 13) 다음으로 국산영화 수출 관련 산업에 있어서는, 대체로 흥행영화, 오락영화는 해외 수출이 상당히 곤 란 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을 계기로 뉴스영화의 수출량은 오히 려 현저하게 증가 하였으며, 기존의 미국 서부 도시에서 뉴욕 등 동부 도 시와 베를린, 런던, 파리, 로마 등 유럽 주요국의 수도는 물론 검열 수속 이 필요 없는 만주국의 각 도시까지 수출 지역 또한 확장되기에 이르렀 다. 14) 11. 7. 13) 9월 중순부터 연말까지 해외영화 수입 불허가 뉴스영화는 종전대로, 동아일보, 1937. 9. 25, 7면 참조. 14) 오락영화는 곤란하나 뉴스영화 수출 격증 구미 대도시로 발송되어, 동아일보, 1937. 10. 8, 5면. - 481 -

10 / 한국민족문화 49 이러한 분위기 속에, 중일전쟁 이후 조선에서 뉴스영화는 극장이나 영 화관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월경하며 영화회 혹은 영화대회 라는 이름으 로 다양한 자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1937년 9월 25, 26 양일간 경성 부민관( 府 民 館 )에서 열린 영화회에서는 초등학생, 남자 중등학생, 여자 중등학생, 학부형 동반 등을 상대로 시국 인식을 철저 보급식히 15) 고자 뉴스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이를 주최한 단 체는 경성학우영화회( 京 城 學 友 映 畵 會 ) 였고 16) 입장료는 초등 5전, 중등 10전, 부형 동반 15전 등으로 차등되어 있었다. 당시 영화회 개최가 일상 화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7) 학생층과 더불어 18) 영화를 통한 선전과 계몽의 주요 대상으로 동원된 이들은 여성층이었다. 조선의 여성들은 식민지 현실, 전시의 상황 속에 애 국부인회 등 총독부 산하 조직에 편입되어 총후 부인, 군국의 어머니 등의 역할을 강요받았는데, 뉴스영화는 이들을 교화 시키는 대표적인 수 단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또한 1938년 2월 7일 조선일보 강당에서 개최된 부인보국 강연 의 예에서와 같이, 관련 집회에는 영화 상영과 더불어 유 력 인물이나 초청 연사의 강연회가 병행되는 일이 잦았다. 19) 입장은 대체 로 무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20) 15) 학우영화회서 사변뉴-스 상영 25, 6일 부민관서, 매일신보, 1937. 9. 25, 4면. 16)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경성학우영화회는 1937년 8월 28일부터 29일까지 부민관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시국의 인식을 철저화 시키기 위하야 뉴스영화 상영회를 마련한 적도 있었다. 강연과 영화회 교화단체연합회 주최, 동아일보, 1937. 8. 18, 3면. 17) 시국영화 학생을 위주로, 동아일보, 1937. 9. 25, 2면. 18) 식민지 권력의 영화를 통한 학생 교육 활동은 중일전쟁 이전부터 문부성을 위시한 중앙 정부와 사단법인 영화교육중앙회 라는 외곽 단체와 도쿄, 오사카( 大 阪 ), 나고야( 名 古 屋 ) 등 주요 도시의 교육 기관은 물론 조선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육영화 점점 활발해 지다: 문부성 외곽단체, 영교중앙회의 탄생, 國 際 映 畵 新 聞, 1937. 4( 下 旬 ), 27쪽(한국 영상자료원 편,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 1, 현실문화연구, 2010, 135~136쪽 재인 용). 19) 이 날의 연사는 조선군사후원연맹위문단장 인 마에다( 前 田 ) 소장이었다. 부인보국 강 연 7일 조선일보 강당에서, 동아일보, 1938. 2. 8, 3면 참조. 20) 일례로 중일전쟁 발발 약 3주 후에 경성부의 후원으로 개최된 씨자( 氏 子 )총대연합회 의 시국강연회에서는, 신국( 神 國 ) 일본인의 자랑 이라는 제목의 일본 소재 대학 교수의 강 연과 함께 중일전쟁 관련 뉴스영화 상영이 무료로 행해졌다. 씨자총대연합회 시국강연 - 482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11 전쟁 이라는 화두가 곳곳에 파급 침투하는 가운데 군 관련 기관 및 모 임에서 연사 강연과 영화 상영을 마련하는 경우도 많았다. 재향군인 경성 연합분회 에서는 1937년 9월 28일에는 부민관 경성군사후원연맹 과의 공 동 주최로 군 출정자( 出 征 者 ) 및 응소자( 應 召 者 ) 가족을 대상으로 응소자 가족 위안회 를, 21) 동년 11월 24일에는 사망 군인 유가족을 대상으로 응 소 출정 군인 유가족 위안의 밤 을 22) 진행하였다. 1937년 12월 12일에는 명치좌( 明 治 座 )에서 일본군의 난징 점령 축하 행렬 의 일환으로 조선군 사령부 신문반 주최의 강연회와 영화회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23) 여기서도 뉴스영화는 언제나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 였다. 이처럼 중일전쟁 이후 폭넓은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마련된 시국 또는 사변 관련 강연회와 영화회는 조선에서의 전시체제 구축을 위한 인적, 물적 자원 확보에 대한 식민지 권력의 필요에 의해 사회 저변에서 발생되 고 확산된 가장 흔한 국가적 이벤트 중에 하나였다. 그 과정에서 권력의 강요와 대중적 동의가 암묵적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인 바, 당시 뉴스영화 는 대중을 규합하고 선동하는 핵심 기제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 도서과의 경우처럼 예전부터 영화를 통해 적극적 으로 홍보 활동을 펼쳐 오던 철도국, 24) 전매국, 25) 체신국 26) 등에서도 영화 개최, 동아일보, 1937. 7. 31, 3면. 21) 지나사변에 대하야서 라는 제목으로 마에다( 前 田 ) 육군 소장의 강연과 함께 뉴스영화와 <미야모토무사시( 宮 本 武 蔵 )>라는 극영화가 상영되었다. 응소자 가족 위안회, 동아일 보, 1937. 9. 25, 3면 참조. 22) 아베( 安 倍 ) 소장의 강연과 더불어 뉴스영화가 상영되었다. 위안의 밤, 동아일보, 1937. 11. 25, 3면 참조. 23) 마키노( 牧 野 ) 대좌 등의 전쟁 실화 강연에 이어 뉴스영화가 상영되었다. 군부의 축하 행 렬 금일 명치좌에서 축하 강연 사변영화도 동시상영, 동아일보, 1937. 12. 12, 3면 참 조. 24) 철도국에서는 이때까지 매주일 한번씩 본국에서 뉴-스 영화회를 열어 국원의 시국인 식 게발에 진력하야 왓엇는데 이번이를 전선적( 全 線 的 )으로 확대하기로 되엇다. 우선 각 철도사무소 소재지에서 개최하기로되어 제 一 회로서 오는 十 八 일의 성진철도사무소( 城 津 鐵 道 事 務 所 )관내부터 시작하야 순차로 각지를 순회할터이라 한다. 철도국 시국뉴-스 전선전( 全 線 的 ) 확대, 동아일보, 1939. 7. 16, 2면. 25) 전매국에서는 二 十 五 일 오후 八 시 三 十 분부터 서대문정( 西 大 門 町 ) 전매국원집회소광장 ( 專 賣 局 員 集 會 所 廣 場 )에서 국원가족 위안과 납량을 겸하야 영화의 저녁 을 개최하기로 - 483 -

12 / 한국민족문화 49 회를 열게 되었다. 1939년 시점에서 이들 부처의 경우, 뉴스영화회 의 정 기적 인 확대 실시 를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하다. 이와 함께 칠 곡, 삼척, 당진 등 전국 각지에서도 지방 관청 또는 국영 조직 등의 주최로 영화회가 개최되어 중일전쟁 관련 뉴스영화 중심의 영화들이 지역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도 하였다. 27) 한편, 당시 가장 중추적인 언론 기관으로 자리하던 신문사의 뉴스영화 제작 및 상영 또한 더욱 활기를 띠어 갔다. 여기에는 물론, 뉴스영화에 대 한 장려 방안이 총독부를 중심으로 하는 식민지 당국에 의해 논의되기까 지 하였다는 정책적 요인도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시국 정세를 감안하여 흥행자들에게 뉴스영화 및 문화 영화 등을 상영할 것을 장려하기로 하고, 지난번에 흥행자 및 배급자 측 과 여러 가지로 교섭을 했다. 이번에 총독부의 경찰부는 각 도 경찰부에 게 시국영화, 뉴스영화의 상영을 적극적으로 추장( 推 獎 )할 것을 시달하 고, 이에 대한 편의도 도모하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고려 중인데, 이 로써 각 신문사의 뉴스영화 상영관도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 다. 28) 3.1운동(1919) 이후 일본의 통치 방식이 기존의 무단정치 에서 소위 문 화정치 로 전환된 1920년대 초반부터, 대표적인 조선어 일간지 조선일보 와 동아일보 를 발간하던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뉴스영 되엇다. 映 畵 題 目 一, 世 界 뉴-스 一 卷 전매국원 가족 위안 영화의 밤 개최, 동 아일보, 1939. 7. 25, 3면. 26) 체신국에서는 시국의 다난한데 비치어 종업원들에게 시국인식의 철저를 기하기위하야 오는 十 월부터 매월제 一 일, 제 三 양금요일에 체신사업회관에서 오후 四 시반부터 동 七 시까 지 二 회에긍하야 뉴-스영화회를 개최할터이라 한다. 뉴-스영화회 체신국에서 시작, 동아일보, 1939. 9. 13, 3면. 27) 관련 기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지나사변 뉴-스 삼척에 영화의 밤, 동아일 보, 1937. 10. 3, 3면; 칠곡 시국영화 선전, 동아일보, 1937. 10. 4, 4면; 당진 시국 영화, 동아일보, 1937. 11. 28, 7면. 이 가운데 당진의 경우 영화회는 전주 전매국 당 진 판매소의 주관으로 열린 것이었다. 28) 조선 전역에 시국영화: 뉴스영화의 상영을 장려, 國 際 映 畵 新 聞, 1937. 11( 上 旬 ), 2쪽 (한국영상자료원 편, 앞의 책, 142쪽 재인용). - 484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13 화 를 표방한 기록영화 제작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1930년대 중반부터 아사히( 朝 日 ), 마이니치( 每 日 ), 요미우리( 読 売 ) 등 3대 유력 신문사에 의해 1주일 간격의 정기적인 뉴스영 화 발행이 실현된 데 반해,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족 자본을 근간으로 하는 민간 신문사의 뉴스영화 제작에 관한 특별한 활동이 포착되지 않고 있다. 다만, 현재로서 파악되는 부분은 총독부의 기관지 발행처인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의 활동이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조선어 기관 지 매일신보 를 발간하던 매일신보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937년 8월 31일자 매일신보 기사에는 교동공보학부형회( 校 洞 公 普 學 父 兄 會 ) 주최로 다음 날 오후 2시부터 부민관에서 시국 관련 강연회와 영 화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실려 있는데, 주목되는 것은 필림 은 북지 사변의 매신뉴쓰( 每 申 ) 였다는 사실이다. 29) 여기서의 매신뉴쓰 는 바로 매일신보사의 뉴스영화 를 지칭한다. 이를 통해 1937년 8월 시점에서 이 미 매일신보사에서 중일전쟁 관련 뉴스영화를 제작 배부하고 있었음이 확인 가능하다. 또한 중추 절을 맞이하여 9월 18일 오후 7시부터 매일신보사 강화지국 주최 및 강화국방의회 후원으로 사변영화대회 를 무료로 개최한다는 내 용의 1937년 9월 16일자 광고에 따르면, 당시 매일신보사는 일정 수준 이 상의 영화 제작 인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30) 자신들이 촬영 편집 한 영화를 지역별 각 지국을 통해 영사까지 하고 있었다. 31) 29) 교동공보부형회서 영화회와 강연 본사 뉴-스로, 매일신보, 1937. 8. 31, 4면. 30) 관련 광고 문구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에 상연할 사변영화는 본사에서 제작한 토- 키 영화( 發 聲 映 畵 )이다 북지와 상해 1대의 전적이 여실히 은막에 보히어 보는 이로 하야 금 손에 을 쥐게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통해 당시 매일신보사에서 전장( 戰 場 )에 직 접 종군 촬영반을 파견하였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음이 추측 가능하다. 본사뉴-스 사변 영화대회 강화지국 주최로, 매일신보, 1937. 9. 16, 4면. 31)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 내 각종 신문사의 영화(활동사진) (순회)영상 활동은 이미 신문 사의 설립 직후, 즉 매일신보사, 경성일보사 등의 경우 1910년대부터, 조선일보사, 동아 일보사 등의 경우 1920년대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독자위안회 형식을 갖추 어 해당 신문 구독자를 대상으로 신문 광고 및 시사 계몽 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연사 의 강연회와 함께 개최하는 사례도 많았다. - 485 -

14 / 한국민족문화 49 1937년 12월 7일 오후 6시, 이때부터 매일신보사는 매일 3시간 동안 본사에서 경성에 제일 번화한 종노 네거리에 신축 화신( 和 信 ) 옥상에 설 치한 전기식 조명 보도판을 통해 전광뉴-스 라는 이름의 속보 뉴스를 내 보낸다. 이는 조선서는 처음 보는 일 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도쿄 ( 東 京 )나 오사카 등 대도시 소재 신문사 몇몇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은 일 이었다. 더욱이, 이날 옥외 전광판을 통해 전해진 첫 소식이 일본군이 맛침 남경 총공격 을 감행하였다는 내용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 다. 32)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1937년 11월 23일 매일신보사 영등 포지국 주최로 마련된 초등학교 학생 대상의 오전 상영과 일반인 대상의 오후 상영 등 두 번의 뉴스영화 상영회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 이 몰렸는데, 이 행사의 이름이 바로 제2 경일( 京 日 )뉴-쓰영화회 였다. 33) 두 번째 맞이하는, 경성일보사( 京 城 日 報 社 )에서 제작한 뉴스영화 상영회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경성일보사는 한일병합 이전 시기부터 조 선총독부의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 京 城 日 報 ) 를 발간하는 한편 1938년 4월 29일까지는 매일신보( 每 日 申 報 ) (이후 매일신보( 每 日 新 報 ) 로 명칭 변경)의 경영까지 관리하던 언론사였다. 이로써, 매일신보사의 모회사로 칭할 만한 경성일보사가 제작한 뉴스영 화가 매일신보사의 지국을 통해서도 영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뉴스영화의 언론 매체적 중요성 및 대중적 인기가 상당하였음에 대한 방 증이기도 하다. 아울러 대중들의 눈과 귀를 장악해 가던 뉴스영화만큼이 나 그것을 소개하고 광고하는 신문 기사나 상연 전단지 34) 등이 보통 사람 32) 본사 전광뉴-스 찬영히 빗나는 종로가, 매일신보, 1937. 12. 8, 3면. 33) 본사 영등포지국 뉴-스영화회 성황, 매일신보, 1937. 11. 25, 3면. 34) 한국국학진흥원 옛문서생활사박물관에는 지나사변 뉴스 영화 상연 통지문 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는 1939년 1월, 시국뉴스영화순업부( 映 畵 巡 業 部 )의 이만섭( 李 萬 燮 )이 안동군 의 각 면장, 주재소주임, 소학교장, 소방조두에게 보낸 협조요청서이다. 이 편지는 풍천 소방조두( 豊 川 消 防 組 頭 ) 앞으로 보낸 것인데, 내용인즉, 성전( 聖 戰 ) 3주년을 맞아 대판 매일신보사( 大 阪 每 日 申 報 社 )가 현지 촬영한 지나사변( 支 那 事 變 ) 뉴스영화를, 충남 각지 를 거쳐 경상북도 청송, 영양, 봉화, 영주, 예천의 70개 면을 경유하여, 안동에서 일정표 (별지 첨부) 대로 순회 상영할 예정이니, 방문 시 후원해 달라. 는 것이다. 또한 보통 1-486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15 들의 일상을 파고들고 있었음을, 시대의 조류로도 볼 수 있는 이유이다. 4. 영화 프로그램의 종류 및 성격, 그리고 뉴스영화 전문관의 개관 중일전쟁 이후 대중 속을 파고들던 시국영화, 뉴스영화, 사변뉴스 라는 이름의 영화들은 과연 어떠한 종류의 영상물이었을까. 우선, 시국영화 에는 시국적 사안을 소재로 삼고 특정 메시지를 주제화 한 극영화와 기록영화 형식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도 장편영화는 대개 극영화 형식을 띠며 상업적인 목적 하에 제작되어 메인 프로그램으로 상영되었기에, 시국영화 대부분은 단편 혹은 중편의 다큐멘 터리(documentary, 기록영화)와 비교적 단순한 플롯을 지니는 극영화 양 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뉴스영화(Newsreel)는 말 그대로 새로 운 소식 을 담은 필름으로서 크게 보도성 기록영화를 가리킨다. 중일전쟁 을 계기로 마치 유행처럼 폭발적으로 발행되던 사변뉴스 는 전쟁 상황, 전투 장면, 병사 모습 등을 담은 영상 및 음성 요소를 통한 사실 재현과 정 보 전달을 위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뉴스영화에 있어 하나 더 부가되는 중요한 특징이 있었으니, 그 것은 바로 정기적 발행 이라는 조건이다. 그런데, 1930년대 일본에서는 이미 많은 신문-영화사를 중심으로 뉴스영화의 1~2주 간격 발행이 정착 된 상태였던 데 반해 조선의 경우 그 시도가 있었을 뿐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국 과 식민지 사이에 차이가 발생되 었으며, 이로 인해 전쟁 기간 내내 일본과 조선 간 뉴스영화의 다소 일방 적인 이동과 불균형적 교류가 고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 영사실비( 映 寫 實 費 )로 35원 정도가 소요되는데, 그간 도내 각 면에서는 면사무소, 소 방조, 공려청년단( 共 勵 靑 年 團 ) 등의 주최로, 어른 10전, 소인 5전의 회원권을 발행하여 이를 충당하였고, 그 날 수입이 영사실비를 초과하면 주최 측 수입으로 하였다. 고 적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시국뉴스영화순업부( 映 畵 巡 業 部 )는 경비와 주최, 관람객 모 집 등 모든 제반사항을 지방에 전가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 koreanhistory.or.kr)에서 발췌. - 487 -

16 / 한국민족문화 49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양상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앞서 살펴본 영 화회를 통해 종합해 보도록 하자. 먼저, 당시 뉴스영화가 어떠한 프로그램 속에 포함되어 상영되었는지를 알아보자. 크게 여러 편의 뉴스영화만이 존재하는 경우와 다른 영화들과 함께 있는 경우로 나뉠 수 있는데, 뉴스영화 길이의 제한과 형식의 단조로 움과 이로 인한 오락적 요소의 부족 등으로 인해 후자의 경우도 적지 않았 다. 이때 뉴스영화와 함께 상영되던 영화들은 대개 짧은 길이의 기록영화 나 비교적 간단한 내러티브의 극영화로서, 흔히 문화영화( 文 化 映 畵 ) 로 불리던 것들이었다. <총후의 조선( 銃 後 の 朝 鮮 )>, 35) <총후부대( 銃 後 部 隊 )>, <여성총동원 총후의 애부( 女 性 總 動 員 銃 後 の 愛 婦 )> 36) 등 전시 관련 시국영 화가 일반적이었고, 조선축산협회 주최 조선축산보급대회 에서의 축산 관게 영화의 예처럼 집회의 주체나 성격에 걸맞게 배치되는 경우도 있었 다. 37) 물론 <시국연예풍경( 時 局 演 藝 風 景 )>(3권), <철완권투왕( 鐵 腕 拳 鬪 王 )> (7권), <지상천국( 地 上 天 國 )>(8권) 38) 등 오락성을 띠는 비교적 긴 극영화 가 배치되기도 하였다. 다음, 당시 상영된 뉴스영화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알아보자. 대 체로 편당 필름 2권 분량의 길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상영 시 10~12분 정도의 러닝 타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내용 면에서는 중일전쟁을 다룬 사변뉴스 가 대세였다. 이 중에는 매일신보사, 경성일보사 등에서 제작된 뉴스영화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미 1주일 간격의 정기적인 뉴스영화 제 작이 이루어지던 일본 소재 신문사와 영화 제작회사에서 만들어진 필름이 상당 비율을 점유하고 있었다. 정확한 영화명이 소개되어 있지 않는 경우 35) 당진 시국영화, 동아일보, 1937. 11. 28, 7면, 이 영화의 필름은 DVD 타이틀(한국영 상자료원, <발굴된 과거 네 번째 고스필모폰드 발굴영상 모음>, 블루키노, 2009)에 담겨 있다. 약 8분 정도의 분량에 35mm 발성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하여 1937년 10월 진 해만 요새사령부의 검열을 통과, 각 도에 배급되었다. 중일전쟁의 원인, 의의, 일본 정부의 수행 방침 및 총독부의 역할, 그리고 총후 조선(인)의 다양한 전쟁 지원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일본어 내레이션으로 설명을 이어가고 경쾌한 배경 음악으로 분위기를 조성한다. 36) 이상 부인보국 강연 7일 조선일보 강당에서, 동아일보, 1938. 2. 8, 3면. 37) 시국 뉴-스영화, 동아일보, 1937. 10. 29, 3면. 38) 이상 전매국원 가족 위안 영화의 밤 개최, 동아일보, 1939. 7. 25, 3면. - 488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17 가 많지만, 표기된 것들을 보건대 요미우리신문사의 <독매( 讀 賣, 요미우 리)뉴-스, 39) 아시히신문사 제작으로 여겨지는 <세계( 世 界, 세카이)뉴- 스>, 40) 그리고 일본육군 뉴스 영화 41) 등 다양하게 확인된다. 이 가운데 <요미우리뉴스>는 1935년 10월부터 사내에 순회 활동사진 반을 설립, ( ) 요미우리단편( 読 売 短 篇 ) 을 제공하던 요미우리신문사가 1937년 4월부터 사내에 영화과( )를 설치하고, 영화음악연구소( 映 音 硏 究 所 )에 제작을 위탁하여 정기 발간되기 시작한 뉴스영화였다. 42) 정식 명칭이 <아사히세계뉴스>인 아사히신문사의 <세계뉴스>는 도쿄아사히신 문사와 도쿄다카라쓰카( 寶 塚 )극장 제공으로 1934년 2월에 매월 2회로 발 행 개시된 <도호발성( 東 宝 発 声 )뉴스>가 <아사히유니버설발성뉴스( 朝 日 ユ ニバーサル 発 声 ニュース)>와 <아사히우파발성뉴스( 朝 日 ウフア 発 声 ニュー ス)>로 바뀌었다가 1934년 7월 제20호부터 <아사히세계뉴스( 朝 日 世 界 ニュース)>로 통일된 것이었다. 43)44) 미국 등 서양 뉴스영화 또한 상영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들 뉴스영화의 배급은 일본의 유력 뉴스영화 제작 신문사에 의해 독과점 형 태로 이루어졌다. 일본의 미국의 5대 뉴스영화 를 소개하고 있는 동아일 보 1938년 12월 4일자 기사에 따르면, <폭스 뮤비톤 뉴-스>, <허-스 톤 메트론 뉴-스>, <파라마운트 뉴-스 릴>, <유니버살 뉴-스>, <파 테 뉴-스>(RKO의 일익) 등 5대 미국 뉴스영화들은 모두 아사히, 요미우 리, 그리고 정부의 정보 전달 기관으로서, 제2차 대전 중 동양 최대의 규 39) 영화로 간보( 簡 保 ) 선전 체신 신계획, 동아일보, 1938. 10. 5, 3면. 40) 전매국원 가족 위안 영화의 밤 개최, 동아일보, 1939. 7. 25, 3면. 41) 군부의 축하 행렬 금일 명치좌에서 축하 강연 사변영화도 동시상영, 동아일보, 1937. 12. 12, 3면. 42) 田 中 純 一 郞, 日 本 敎 育 映 画 発 達 史, 蝸 牛 社, 1979, 132~133쪽. 43) 위의 책, 94~95쪽. 44) 1937년 9월, 그동안 아사히신문사와 뉴스영화 제작을 제휴하던 P.C.L(Photo Chemical Laborotory, 필름화학연구소)이 도호영화주식회사에 합류한다. 이에 아사히신문사는 자 본금 50만 원의 1/4을 선지불하는 한편 기존 P.C.L 뉴스부 의 인사 기구를 6만 원에 매 수하여 아사히영화제작주식회사( 朝 日 映 畵 株 式 會 社 )를 설립하고 아사히신문사 영화반의 기획이 되는 시국영화나 문화영화의 제작 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위의 책, 119쪽. - 489 -

18 / 한국민족문화 49 모를 가지며 1936년 1월 설립된 도메이( 同 盟 )통신사 45) 등 일본 내지 신 문사 영화 부과( 部 課 )와 교환 계약을 맺고 잇 었다. 46) 중일전쟁 이후 일본 뉴스영화는 세계 각국과 교류를 지속해 가며 전 세 계로 판로를 넓혀가고 있었는데, 47)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식 민지 조선에 그 영향력이 파급되지 않을 리 만무하였던 것이다. 사실, 당시 뉴스영화의 대중적 인기 자체가 일본 내지( 內 地 ) 의 경우와 공유되어 있던 추세였다. 도쿄의 경우, 라디오의 청취자 격증과 함께 뉴 스 영화관의 번창 현상이 일어난 것은 이미 중일전쟁 직후부터였다. 이는 뉴스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에 인하여 급속도로 발전하야저서 흥행적 으로도 충분하게 존속할 수 잇는 뉴스 전문관이 각 도시에 상설되 48) 었다 는 내용으로 신문 지면에 실릴 만큼 식민지 조선에서도 관심을 끌 만한 소 식거리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조선에도 경성을 중심으로 뉴스영화를 집중적으로 상 영하는 이른바 전문관 이 등장하게 되었다. 영화관의 장소, 흥행 방식, 프 로그램 종류, 관람 문화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일본에서의 유행이 짙게 묻 어났다. 49) 1939년 12월 23일 본정( 本 町, 혼마치) 삼중정( 三 中 井, 미나카 이)백화점 뒤에 입장객 200여명 규모로 개관한 경일문화영화극장( 京 日 文 化 映 畵 劇 場 ) 에서는 <경일세계뉴-스>를 비롯하여 요미우리신문사의 뉴스 45) 1937년 9월부터 뉴스영화 <도메이뉴스( 同 盟 ニュース)>를 제작하던 회사이다. 田 中 純 一 郞, 앞의 책, 133쪽. 46) 뉴-스영화와 기록영화의 차이 미국 오대 뉴-스영화, 동아일보, 1938. 12. 4, 5면. 47)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1937년 7월 14일부터 8월 말일까지의 영화 수출량은 총 261권 34,930미터였는데, 그 가운데 사변 관계의 뉴-스 는 149권, 19,370미터였다. 즉, 전체 수출 영화에서 중일전쟁 관련 뉴스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이 권수로는 약 57%, 미터수로 는 약 55%에 달하였던 것이다. 오락영화는 곤란하나 뉴스영화 수출 격증 구미 대도시로 발송되어, 동아일보, 1937. 10. 8, 5면. 48) 지나사변 이후에 문화영화 환영 뉴스 전문관도 족출, 동아일보, 1940. 3. 30, 5면. 49) 일본 최초의 뉴스영화 전문관은 1935년 12월 30일 도쿄 마루노우치( 丸 ノ 内 ) 일본극장( 日 本 劇 場 ) 지하에 문을 연 제1지하극장( 第 一 地 下 劇 場 ) 이었는데, 이것이 호응을 얻자 그 유행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고층극장( 高 層 劇 場 ) 이 개관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사변뉴스 중심으로 그 인기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田 中 純 一 郞, 앞의 책, 135~136쪽 참조. - 490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19 영화, 문화영화, 만화 등을 상영하였다. 50)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극 장은 경성일보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1940년 5월 28일 종로 화신백화점 건물 6층에 문을 연 화신영화관( 和 信 映 畵 館 ) 의 경우 뉴-스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내외 뉴스 급( 及 ) 문화영화 를 구비하였다. 51) 전자는 주로 재조선 일본인이 거주하던 남촌( 南 村 ) 에, 후자는 주로 조 선인이 활동하던 북촌( 北 村 ) 에 세워졌는데, 이로써 주 관객층의 민족적 차이로 인해 전통적으로 양분되어 있던 경성 영화 중심가 두 곳에 뉴스영 화(문화영화) 상설관이 각각 자리하게 되었다. 52) 이들 영화관은 뉴스영화 상영을 특성화하여, 경성을 대표하는 뉴스영화 전문 상영관 으로서의 입 지를 계속 유지해 갔다. 53) 5. <일본뉴스>의 조선 파급과 뉴스영화 상영의 의무화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뉴스영화 제작 환경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 다. 1940년 4월 9일 설립 총회와 동년 4월 15일 당국의 정식 허가를 통해 도메이를 중심으로 아사히, 다이마이도니치( 大 每 東 日 ), 요미우리 등 4개의 뉴스영화 제작 신문사가 합병됨으로써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 社 團 法 50) 경일 문화영화 극장 준공되어 성대히 개관, 매일신보, 1939. 12. 24, 3면. 51) 화신영화관 입팔( 卄 八 )일부터 개관, 동아일보, 1940. 5. 28, 3면. 52) 종래 금, 토, 일요일 6층 홀에서 뉴스 및 기타 영화를 무료로 상영해 오던 화신백화점이 시설을 한층 개량하여 관객 삼백오십 명을 수용하도록 규모를 넓혀 십 전 균일 요금 으로 뉴스영화 전문관을 개관한 것에 대해, 당시 신문은 북촌 중앙에도 뉴-쓰 영화극장 이 출현 하였음에 주목하며 보도하기도 하였다. 북촌 중앙에도 뉴-쓰 영화극장이 출현 화신백화점에 설립 인가, 조선일보, 1940. 3. 12, 2면. 53) 1942년 7월 현재 일본에 소개되고 있는 경성 소재의 뉴스영화 전문관은 경일뉴스, 화신 뉴스, 종로문화 등 모두 세 곳이었으며,( 朝 鮮 通 信 -ニュース 館 誕 生 -, 映 畵 旬 報, 1942. 7. 21, 56쪽) 1943년 조사된 경성 소재의 문화영화 전문관 은 위의 세 곳을 가리 키는 경일문화영화극장, 화신영화관, 경일종로문화극장 및 동보중앙극장( 東 寶 中 央 劇 場 ) 등 모두 네 곳이었다. 이들 영화관의 정원은 순서대로 각각 240명, 315명, 814명, 850명 이었다( 田 中 三 郞, 昭 和 18 年 映 画 年 鑑, 日 本 映 画 雜 誌 協 會, 1943; 김려실, 일제시기 영 화제도에 관한 연구: 영화관 추이를 중심으로, 영화연구 41, 한국영화학회, 2009, 28 쪽 <표9> 참조). - 491 -

20 / 한국민족문화 49 人 日 本 ニュース 映 畵 社 ) 가 출범하였는데, 이곳에서 1940년 5월 14일부터 임시뉴스 <일본뉴스( 日 本 ニュース)>가 발행되어 6월부터 상영이 이루어졌 던 것이다. <일본뉴스>는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전국 지정 상영이 실시된 1941년 1월 1일 이후 일본의 뉴스영화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54) 아울러, 1941년 2월 27일 내각 정보국에서 주요 문화영화 제작, 배급업자 의 대표들을 불러, 지정 상영 문화영화의 배급을 일본뉴스영화사를 통해 일원화하기로 한 방침을 통보하고 그 준비를 위해 대일본문화영화협회( 大 日 本 文 化 映 畵 協 會 )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1941년 4월 5일 총회를 거 쳐 5월 1일 기존의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는 문화영화의 제작 및 배급 을 겸하는 사단법인 일본영화사( 社 團 法 人 日 本 映 畵 社 ) 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게 되었다. 55)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와 <일본뉴스>는 조선에서도 갈수록 그 입지 가 강화되어 갔다. 1940년 8월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는 그때까지 아사 히, 오사카마이니치, 요미우리, 경성일보 등 4자 합작으로 행해지던 <일본 뉴스>의 배급권을 조선총독부에 일임하였는데, 조선총독부는 경성일보사 측에 조선 전 지역의 <일본뉴스> 배급권을 넘겨주었다. 56) 이에 따라 1941 년 8월 5일 사단법인 일본영화사의 지사가 경성일보사 건물 내에 개설되 기도 하였다. 57)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에는 조선 내에서 <일본뉴스> 프린 터의 수가 제79호 분부터 기존의 8본에서 24본으로 3배 증가하게 됨으로 써 그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어 갔다. 58)59) 54) 映 画 法 二 周 年 史, 映 畵 旬 報, 1941. 10. 1, 41쪽 참조. 55) 위의 기사, 46~47쪽 참조. 56) 조선: 뉴스 배급 해결, 東 京 映 画 新 聞, 1940.8( 下 旬 ), 31쪽(한국영상자료원 편, 앞의 책, 178쪽 참조) 57) 田 中 三 郞, 昭 和 17 年 映 画 年 鑑, 日 本 映 画 雜 誌 協 會, 7-2~3쪽 참조. 58) 전황 뉴-스 영화 근간 강제상영 선내( 鮮 內 ) 프린트 24본, 매일신보, 1941. 12. 12, 4면. 소화17년 영화연감( 昭 和 17 年 映 画 年 鑑 ) 에는 제80보부터 증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田 中 三 郞, 앞의 책, 7-3쪽 참조). 59) 함충범, 194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정책의 특징적 양상 (1940~1942), 서 강인문논총 35,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 2012, 338~339쪽 참조. - 492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21 <일본뉴스>는 보통 1주일에 1호씩 발행되었으며, 호당 4~6편의 단편뉴 스를 포함하였다. 편당 길이는 대개 1~2분 정도였다. 영화의 내용은, 뉴 스영화 라는 특성에 맞게 여러 가지로 혼합되어 있으면서도 전쟁 뉴스의 비중이 높았다. 60) 영상 화면은 대체로 동시기 기록영화의 그것과 유사하 나, 이러한 뉴스영화 특유의 양식 구성으로 적어도 표면 상으로는 보다 다양하고 객관적인 소식을 담고 있는 듯이 제시된다. 일주일 간격으로 일 본은 물론 조선 대중을 선전, 계몽하는 데 필요한 기제였다 할 수 있다. 한편, 뉴스영화 제작과 상영에 대한 제도적 장치 역시 일본과의 교신 및 연동을 통해 마련되었다. 이는 제국-식민지라는 위계적 질서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동시기 일본과 조선의 뉴스영화 제작 능 력 및 상영 환경의 차이가 작동의 조건이 되었다. 중일전쟁 장기화에 따른 전시체제 구축으로 인한 일제말기 조선영화 (계)의 일대 변화의 시발점이 된 조선영화령 공포(1940.1.4) 및 시행 (1940.8.1) 이후 조선에서의 영화 신체제( 新 體 制 ) 의 핵심 사항은 바로 극 영화뿐만 아니라 문화영화와 뉴스영화를 의무 상영하는 데 있었다. 물론 이 역시도 일본영화법(1939) 도입, 7.7금령 61) (1940) 발포, 관민간담회 개최 등을 거치며 확정된 영화 제작사의 극영화 제작 편수 제한과 영화관 의 극영화+문화영화+시사영화(뉴스영화) 상영이라는 시스템에 관한 정 책적 기조가 조선으로 파급된 결과였다. 1940년 1월부터 도쿄, 교토( 京 都 ), 오사카, 요코하마( 横 浜 ), 고베( 神 戶 ), 나고야 등 6대 도시에서 문화영화가 지정 상영되었고, 동년 7월부터는 전 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뉴스영화에도 파급되었다. 1940년 10월부터 6대 도시에서, 1941년 1월부터 뉴스영화의 강제 상영이 전국에서 실시되었 다. 62) 더불어, 영화 상영 시간의 제한이 1941년 1월부터는 6대 도시에서, 60) 1940년 6월 11일 공개된 제1호의 경우, 황실 동정( 天 皇 陛 下 関 西 御 巡 幸 ), 경기대회( 豪 華 若 人 の 祭 典 東 亜 競 技 大 会 ), 중일전쟁( 漢 水 渡 河 急 追 進 撃 戦 ), 2차 대전( 独 強 襲 成 功 英 艦 隊 を 猛 爆, 凄 絶 空 海 の 大 決 戦 ) 관련 내용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61) 1940년 7월 영화통제를 전시통제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며 이윤 추구에서 생산 본위로 의 경제 신체제 차원에서 실시된 사치품등제조판매제한규칙 을 가리킨다. 加 藤 厚 子, 総 動 員 体 制 と 映 画, 新 曜 社, 2003, 80쪽. - 493 -

22 / 한국민족문화 49 동년 7월부터는 전국에서 이루어졌다. 1941년 1월부터는 극영화의 제작편 수 제한이 제도화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영화와 함께 뉴스영화의 비중도 더욱 커지게 되었다. 63) 관련 소식은 시시각각 조선에도 전해졌는데, 64) 그만큼 영화계에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영화령 실시(1940.8.1)를 계기로 식민지 조선에서도 문화영화에 대한 강제 상영이 결정되었다. 1940년 11월부터 경성, 평양, 대구, 부산 등 4대 도시의 영화관에서 총독부 경무국과 학무 국이 지정하는 문화, 과학, 시국, 교육, 예술 분야의 문화영화가 회당 250 미터 이상 의무적으로 상영되었다. 65) 1941년 1월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 었고, 흥행 시간도 3시간 이내로 제한되었다. 66) 그리고 일본의 진주만 공 습(1942.12.8)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7월 10일부터 조선에서도 뉴스영화 강제 상영이 실시되었다. 67) 62) 이때 상영되는 뉴스영화는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의 <일본뉴스>였다. 즉 각 영화관은 내각정보부, 내무성, 문부성, <일본뉴스> 제작 관계자로 구성된 기획위원회를 거쳐 편집 된 <일본뉴스>(2개월 이내에 제작된 것) 한 가지 이상을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하였다. 문 화영화 강제 상영, 매일신보, 1940. 9. 8, 2면. 63) 또한 주목되는 점은, 일본에서의 이러한 뉴스영화의 제도화가 영화법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 법령 개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먼저 1940년 9월 9일 영화법 시행규칙 일 부 개정으로 뉴스영화 제작 및 배급 통합 및 지정 상영이, 다음으로 동년 12월 21일 칙령 제916호 영화법 시행령 일부 개정에 따른 내각 정보국 설립을 계기로 영화의 보도, 계발, 선전의 일원적 통제 운용이, 그리고 동년 12월 22일 영화법 시행규칙 일부 개정에 기반 하여 상영시간 2시간 30분으로의 단축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映 画 法 二 周 年 史, 映 画 旬 報, 1941. 10. 1, 43~44쪽 참조. / 특히 내각 정보국은, 설립 직후부터 생필름 할당량 조절과 배급 일원화 원칙을 통해 조선영화제작자협회와 조선내외영화비급업조합을 압박 하고 조선총독부를 매개로 하여 조선에서의 영화 제작과 배급을 강력하게 통제하기 시작 하였다. 관련 내용은 高 島 金 次, 朝 鮮 映 画 統 制 史, 朝 鮮 映 画 文 化 硏 究 所, 1943, 45~46쪽, 144쪽 참조. 64) 관련 기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문화영화 강제 상영, 매일신보, 1940. 9. 8, 2면; 인정 문화영화의 강제상영 명년부터 전국에 완전실시, 매일신보, 1940. 12. 21, 4면; 문화영화의 배급에 송죽과 동보가 제휴, 매일신보, 1940. 12. 23, 4면; 문화영 화의 직배소 설치, 매일신보, 1941. 4. 13, 4면; 문화영화 배급 일원화 5월 1일 시행, 매일신보, 1941. 5. 4, 4면 등. 65) 영화관 프로 에 혁명 11월부터 문화영화 강제상영 경무, 학무국서 선정중, 매일신보, 1940. 8. 20, 3면. 66) 田 中 三 郞, 앞의 책, 1942, 7-1쪽 참조. - 494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23 이로써 일본의 영화 통제의 강도가 더욱 높아진 1940년대 식민지 조선 에서의 영화 정책 및 활동의 초점은 뉴스영화에 있어서도 자연스레 상영 부문에 맞추어졌다. 그것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영화를 통한 조선(인)에 대 한 전쟁 동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조선 에서의 뉴스영화 비중 강화에 따른 제도화는 전시체제 및 영화 통제 시스 템 하에서, 제국 일본이 발신하는 영상 메시지를 식민지 조선이 수신하 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6. 결론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의 관변 단체, 군대 기구, 관공 기관 등에서 는 시국 인식과 전시 동원을 목적으로 강연회와 영화회를 결합한 형태의 각종 군중 집회를 더욱 자주 보다 다양하게 개최하였다. 특히 일간지를 발 간하던 신문사들, 그 중에서도 총독부의 기관지를 발행하던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의 활동이 상영은 물론이고 제작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졌다. 이 러한 자리에서는 주로 국가 의 시책 선전과 계몽을 위한 시국영화 가 상 영되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시류에 맞추어 전시의 상황과 후방의 역할 을 필름 속 영상과 소리를 통해 투사하였다. 아울러 특유의 속보성과 사실 성에 따라, 그 안에서 뉴스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그리하여 흔히 사변뉴스 로 일컬어지던 중일전쟁 관련 뉴스영화의 유행이 한동안 지속된다. 또한 동시기 일본의 경우처럼, 전황 소식을 다룬 실사 필름을 중심으로 뉴스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인기가 높아졌고 뉴스영화 상영 관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1940년대 들어서는 전시체제 구축에 따른 영화 신체제의 일환으로, 뉴 스영화의 강제 상영이 국책 의 차원에서 의무화되었다. 영화 제작 또한 사단법인 형태의 국영 영화사로 그 주체가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기존의 67) 함충범, 앞의 논문, 2012, 332~333쪽 참조. - 495 -

24 / 한국민족문화 49 몇몇 유력 신문사에서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로 통합되었다. 사단법 인 니치에이( 日 映 ) 는 일본을 대표하는 뉴스영화 <니혼뉴스(일본뉴스, 日 本 ニュース)> 를 정기적으로 발행하였는데, 그 영향력은 식민지 조선으로 도 파급되었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뉴스영화는 전쟁과 일본, 시대와 끊 임없이 조응하며 조선영화(계)의 식민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환원 하면, 이러한 특수성은 바로 중일전쟁을 계기로 극대화된 것이었고, 전황 의 전개에 따라 대륙 전장과 반도 후방의 모습은 당대 유일한 영상 매 체였던 뉴스영화 필름에 이미지화되어 사실(reality) 이라는 이름으로 포 섭-포장되었다. 또한, 전쟁 동원 및 수탈을 위해 제국의 전시 체제가 이 식되었던 것처럼 조선영화계에도 뉴스영화가 제도화되어 갔다.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계)의 변화상 또는 전쟁과 영화와의 관계 성을 고찰함에 있어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뉴스영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 유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 496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25 참고문헌 1. 자료 동아일보, 매일신보( 每 日 申 報 ) (~1938.4.29), 매일신보( 每 日 新 報 ) (1938. 4. 29~), 조선일보, 映 畵 旬 報, 오마이뉴스 (www.ohmynews.com) 2. 논저 김려실, 기록영화 <Tyosen> 연구, 상허학보 24, 상허학회, 2008. 김려실, 일제시기 영화제도에 관한 연구: 영화관 추이를 중심으로, 영 화연구 41, 한국영화학회, 2009. 김승구, 조선일보의 1930년대 영화 관련 활동, 한국민족문화 36, 부산 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0. 김한상, 조선-만주 관광 문화영화와 동아신질서 의 극장 경험, 영화연 구 43, 한국영화학회, 2010. 오카와 히토미(おかわ ひとみ), 일제시대 선전영화에 표상된 조선의 이미 지- 조선소묘 (1939)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 문, 2007. 이충직, 한국의 문화영화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 한국영상자료원,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 1, 현실문화연구, 2010. 함충범, 194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정책의 특징적 양상 (1940~1942), 서강인문논총 35,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 2012. 함충범, 중일전쟁 이전 시기 한반도에서의 뉴스영화, 그 역사적 궤적 및 특수성 연구 -일본과의 관련성과 더불어, 국학연구 22, 한국 국학진흥원, 2013. 加 藤 厚 子, 総 動 員 体 制 と 映 画, 新 曜 社, 2003. 高 島 金 次, 朝 鮮 映 画 統 制 史, 朝 鮮 映 画 文 化 硏 究 所, 1943. 田 中 三 郞, 昭 和 17 年 映 画 年 鑑, 日 本 映 画 雜 誌 協 會, 1942. - 497 -

26 / 한국민족문화 49 田 中 純 一 郞, 日 本 敎 育 映 画 発 達 史, 蝸 牛 社, 1979. 田 中 純 一 郞, 日 本 映 画 発 達 史 2, 岩 波 書 店, 1980. 佐 藤 忠 男, 日 本 映 画 史 2, 岩 波 書 店, 2006. - 498 -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1937~1941) / 27 <Abstract> A Study on the Newsreel in Colony Chosun(Korea) after the Sino-Japanese War Ham, Chung-Beom Chung, Tae-Soo This study is on the newsreel of colonial Chosun(Korea) after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07/07/1937): the process of strengthening its position as the important media and of being placed in the center of the cultural policy.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newsreel begun to play a bigger role both in the industry and in the policy as the film propaganda had been emphasized. In colonial Chosun, the newsreel was frequently used as a vehicle of propaganda when the various types of rallies, which usually included both a lecture and a film screening, were held by the pro-government organizations, military organizations, government agencies, newspapers with the purpose of wartime mobilization. Especially, the activities of Maeil Sinbo(Korea Daily News) and Kyungsung Ilbo were stood out, from the film screening to the production. In this situation, so-called 'the news theater' such as Kyungil Munhua Movie Theater (opened in 1939) and Huasin Theater(opened in 1940) emerged in Chosun (Kyungsung), which showed newsreels intensively. And <Japan News> of the Japan Newsreel Corporation, which had begun to produce and distribute all the Japan's newsreels under one authority since June, 1940, also strengthened its position in Chosun. Furthermore, the policy on the production and screening of the newsreel was introduced, linked to the policy in Japan. And this tendency grew stronger after Japan's attack on Pearl Harbor in 1941. - 499 -

28 / 한국민족문화 49 * Key Words: Newsreel, Sino-Japanese War, Colony Chosun(Korea), The Chosun Government-General, The Japan News ㆍ논문투고일: 2013년 10월 5일 ㆍ심사완료일: 2013년 11월 18일 ㆍ게재결정일: 2013년 11월 29일 - 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