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체질인류학자들



Similar documents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7단원 1(252~269)교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CR hwp

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놀이. 스포츠의 관점에서 본 화랑과 기사의 신체활동

³»Áö_10-6


- 2 -

120~151역사지도서3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연구노트

2ÀåÀÛ¾÷

박광현발표.hwp

152*220

* pb61۲õðÀÚÀ̳ʸ


나하나로 5호

¾ç¼ºÄÀ-2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¾Æµ¿ÇÐ´ë º»¹®.hwp

**09콘텐츠산업백서_1 2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178È£pdf

04 Çмú_±â¼ú±â»ç

ÃѼŁ1-ÃÖÁ¾Ãâ·Â¿ë2

....pdf..


CC hwp


<3429BFC0C1F8BCAE2E687770>

CT083001C

CONTENTS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 D E20F1E9CFD0CDAFD3DBF0E3E0CFE2FAC0C720DBA1D3B9DEC8205B20F5CBCEC3D1F5205D292E687770>

ë–¼ì‹€ìž’ë£„ì§‚ì‹Ÿì€Ł210x297(77p).pdf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

???德嶠짚

2002report hwp

병원이왜내지최종본1


allinpdf.com

(001~009)248사회문화(연)

0.筌≪럩??袁ⓓ?紐껋젾 筌

<B3B2C0E7C7F62E687770>

핵심조직행동론,13판.indd

hwp

트렌드29호가제본용.hwp


<C7D1B1B9C7FC20B3EBBBE7B0FCB0E82DC3D6C1BE612E687770>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3635B1E8C1F8C7D02E485750>

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2저널(11월호).ok :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È޴ϵåA4±â¼Û

한류동향보고서 26호.indd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º»ÀÛ¾÷-1

10월추천dvd

»êÇÐ-150È£

hwp

학점배분구조표(표 1-20)

½Å½Å-Áß±¹³»Áö.PDF

<BABBB9AE2DC7D5C3BC2E687770>


G hwp


참고 1 실시간관측부이설치위치및관측항목 참고 2 해운대이안류발생감시및상황전파


<C3CAC1A DC1DFB1B92E687770>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39-0 머리말외.indd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

¼Òâ¹Ý¹®Áý¿ø°í.hwp

<B9CEBCBCC1F828C8AFB0E6B1B3C0B0292E687770>

기후변화는 인류사회가 직면한 가장 거대한 불확실성 중 하나

coverbacktong최종spread

<652DB7AFB4D720BFECBCF6B1E2BEF720BAB8B5B5C0DAB7E E687770>

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 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

모두 언어와 상관없이 시국적 내용이다. 발표매체별 집필 수(K=조선어 N=일본어) 1939년 기사 등 K 文 章 3 三 千 里 2(좌담2포함) 女 性 1 作 品 1 東 亜 日 報 1 N 国 民 新 報 2 소설 K 文 章 년 기사 등 K 三 千 里 10(좌담4

아이콘의 정의 본 사용자 설명서에서는 다음 아이콘을 사용합니다. 참고 참고는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 주거나 다른 기능과 함께 작동하는 방법에 대한 요령을 제공합니다. 상표 Brother 로고는 Brother Industries, Ltd.의 등록 상

<B9AEC8ADC0E7C3A2766F6C2E31325FBDCCB1DB2E706466>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내지(교사용) 4-6부

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핵 1 학년 2 학년 3 학년합계 문학과예술 역사와철학 사회와이념 선택 학점계 학년 2 학년 3 학년합계비고 14 (15) 13 (14) 27 (29) 2

hwp

<3231C3A4C8F1C5C22E687770>

논총51-06_이종국.indd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하다 고 평가했다. 3) 우두는 인류에게 글자 그대로 축복이었다. 그러나 우두법이 전세계로 확산되던 19세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이

Transcription:

<제국일본의 문화권력 : 학지( 學 知 )와 문화매체1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과 식민지 공간의 역사적 재구성: 사토 다케오( 佐 藤 武 雄 )와 이마 무라 유타카( 今 村 豊 )를 중심으로 鄭 駿 永 (한림대학교) 1. 문제제기 - 1926년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식민지에 설립된 첫 제국대학으로서, 설립 당시부터 內 地 와 支 那 를 역사적으로 매개했던 조선 의 제국 내 위상을 감안해 동양문화 연구의 권위 로 자리매김 하 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실제로 조선사 와 조선어문학 등 일본 본토에서는 정규적인 학문분과로 인 정받지 못했던 소위 조선학이 식민지에서는 천황의 칙령에 의해 경성제대의 공식적인 강좌로 자리 잡았고 1), 기생충을 매개로 한 감염이 많았던 조선 특유의 질병 환경을 다루는 미생물학 강좌, 독자 적으로 발달된 조선한의학 및 본초학적 지식을 고찰하여 이를 약리학적으로 활용하려는 약물학 강 좌 등 본토 제국대학에는 없는 새로운 강좌가 처음으로 설립되기도 했다. 2) 하지만 경성제대의 조 선연구는 이처럼 창설 당시 설립된 식민지 특유의 강좌=교실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경성제대 법 문학부와 의학부 대부분의 강좌=교실들은 설립 직후부터 직간접적으로 조선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 기 시작했다. 식민지에 설립된 제국대학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학 설립 이전부터 총독부의 관료 또는 촉탁으로 경력을 쌓아왔던 일부 교수를 제외하 고 다수의 연구자들이 교수 부임 이전까지 조선과 무관한 연구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감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경성제대의 조선연구는 단순히 대학의 입지적 이점을 넘어서 대학의 설 립자인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지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일본 본토였다면 불가능 했을 연구 활동에 대한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비교적 빠른 시기에 연구 성과의 측면에서 두각을 드 러낼 수 있었다. - 의학부 해부학교실과 법의학교실이 중심이 되어 수행된 체질인류학 연구는 이렇게 단기간에 두 각을 드러낸 대표적인 분야 중 하나였다. 경성제대의 체질인류학자들은 본토의 연구자들이라면 불 가능했을 정도로 많은 사체를 확보해서 정밀한 계측을 시도했고, 식민당국의 체계적인 지원을 기반 으로 조선 전역에서 방대한 생체계측 조사를 실시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엄밀한 통계적 기법 으로 처리되어 방대한 조선인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될 수 있었다. 이 데이터베이스에 기반을 둔 경 1) 이것은 조선어조선어문학 강좌교수였던 오쿠라 신페이가 동경제대에 부임하면서 전임했던 강좌가 언어학강좌였다는 점, 조선사학 강좌교수였던 이마니시 류가 경도제대에서는 동양사학과 교수였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조선어, 조선어문학, 조선사학 등은 경성제대의 설립과 더불어 관학의 공식적 학문분과로 공인 받았지만 그 효력은 여전히 식민 지 공간에 머물렀을 뿐, 일본 본토에서는 여전히 국사학과 동양사학, 언어학과 국어국문학의 특수 연구로 간주되고 있 었던 것이다. 2) 미생물학강좌의 경우, 경성제대가 제국대학 중 처음으로 설치했다. 또 서구의학 기반의 약물학교실과 별도로 한약을 중심으로 제2 약물학교실을 개설한 것도 제국대학 중에서는 드문 사례였다. - 1 -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과 식민지 공간의 역사적 재구성 :사토 다케오( 佐 藤 武 雄 )와 이마무라 유타카( 今 村 豊 )를 중심으로2 성제대의 체질인류학 연구는 사례의 규모, 측정의 정교함, 해석의 엄밀함 등에서 조선인을 연구대상 으로 하는 기존 연구를 압도했다. 심지어 경성제대 인류학자들이 구축한 데이터베이스는 오랜 기간 에 걸쳐 개별 연구의 성과들을 통해 축적된 일본인에 대한 체질인류학 데이터베이스에 비해서도 양 과 질에서 나은 양상을 보였다. 오구마 에이지( 小 熊 英 二 )가 지적했듯이, 일본 본토에서 이루어진 체 질인류학 연구가 얼마나 신뢰할 만 한 계측을 했으며 이 수치에 대해 얼마나 타당한 해석을 했느냐 하는 것이 경성제대의 데이터베이스를 기준으로 평가되는 양상마저 나타났던 것이다. - 이러한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의 작업이 조선인들의 인종적 또는 민족적 열등성을 과학이라 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우등한 일본인에 의한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근거로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그들의 작업을 면밀히 추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기 존 연구들은 식민지 체질인류학이 얼마나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과학의 외피를 썼지만 실제로는 민족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日 鮮 同 祖 를 옹호하는 정치적 도구로 어떻게 활용되고 있었는 지를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어 왔다. 3) 체질인류학 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식민통치에 동원된 학 문의 정치적 성격,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로써 충분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기존 연구는 여러 척도로 측정된 조선인의 신체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작위적인 민 족차별의 언어로 해석하고 있는지를 폭로하거나 일본인과의 체질적 유사성을 근거로 당시 식민당국 의 통치이념이기도 했던 동화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원하고 있었는지를 밝히는데 집중하는 양상을 보 인다. - 필자도 이런 기존 연구의 입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당시의 체질인류학적 작업은 그저 일 고의 가치도 없는 사이비 과학일 뿐이며, 오늘날 과학의 시점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스캔들로써 그 런 것이 존재했다는 자체를 폭로하는 것으로 충분할 지는 의문이다. 당시 체질인류학자들이 구축한 조선인 신체에 대한 계량화된 정보는 객관적인 데이터로써 식민통치가 끝난 이후에도 인구의 체질 적 특성을 규명하는 과학적 연구에 계속적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체질적 측면에서 민족/인종들 사이 에 차이와 위상 또한 정치적 해석을 최소화한 일종의 분류체계로서 의학 및 자연인류학의 영역에서 여전히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체질인류학을 사이비 과학으로 단죄하기에 는 진짜 과학과 사이비 과학 사이의 거리는 실제로는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체질인류학 을 사이비과학으로 치부하는 것만으로, 혹은 올바른 정보에서 그릇된 해석을 떼어내는 것만으로 정 말 충분할까. 지식과 권력 사이에 존재하는 중층적인 연루의 메커니즘을 푸코가 말했던 바, 실증성 의 차원에서 드러내기 위해서는, 체질인류학을 단죄 내리기 이전에 그들의 작업 내부로 깊숙이 들 어가서 그들이 식민지인들의 개별 신체에 대한 계측을 통해서 조선인 이라는 인구집단을 어떻게 표 상하려 했는지, 그리고 연속적인 데이터 값으로 중첩되어 나타는 인구집단들의 특징을 조선인, 일 3) 이들 성과들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만 거론해도 다음과 같다. 坂 野 撤, 帝 国 日 本 と 人 類 学 者, 1884-1952 年 ( 勁 草 書 房, 2005); 김옥주, 京 城 帝 大 医 学 部 의 体 質 人 類 學, 醫 史 學 17-2, 2008; 박순영, 일제 식민통치하의 조선 체질인 류학이 남긴 학문적 과제와 서구 체질인류학사로부터의 교훈, 비교문화연구 10, 2004; 정준영, 피 의 인종주의와 식민지의학, 醫 史 學 21-3, 2012; Hoi-eun Kim(2013), "Anatomically Speaking: the Kubo incident and the paradox of race in Colonial Korea", Race and Racism in Modern East Asia, Brill, 2013. - 2 -

<제국일본의 문화권력 : 학지( 學 知 )와 문화매체3 본인, 퉁구스인, 몽고인 등 불연속적인 집단들의 위계구조로 재구성하기 위해 그들이 어떻게 민 족 과 로컬, 현생 과 발생 이라는 이항 대립적 범주를 넘나들었는지, 그리고 측정과 수치화의 다양 한 장치들-테크네를 활용하여 인구학적 모호성을 어떻게 진리효과 의 원천으로 활용할 수 있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따라서 현재 구상중인 이 연구에서는 기존의 연구와는 달리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의 작업 그 내부로 들어가, 이들이 인종적 근친성 때문에 항상 모호한 존재로밖에 드러날 수 없는 조선인 이라는 범주를 어떻게 구축하려 했는지, 그리고 제국 전체의 인종적/민족적 위계 속에 어떻게 위치 지우려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모호성이 조선인 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실 피부색, 모발, 체형 등 가시적 징표로 식민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명확히 구별되는 서구의 식민지와는 달리, 일본이 통치했던 식민공간은 문화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종적 차원에서도 근 친성을 특징으로 한다. 문명의 격차도 압도적이지 않았고 식민지 주민들과의 가시적인 구별도 명확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은 서양의 인종주의처럼 명확한 차이를 상정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일본의 인종주의는 인종적 근친성을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원천으로 삼으면서도, 현존하는 일본인의 우월 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모순적인 과제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이 당면했던 과제는 이와 같이 일본 인종주의가 처했던 모순적 상황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조선 인이라는 인구학적 범주를 구축하고 제국의 인종적 위계 속에 이를 위치 지운다는 것은 사실은 일 본인이 누구인가를 묻으며 위계체제 자체를 구축하는 작업과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의 작업, 구체적으로는 우에다 츠네키치( 上 田 常 吉 ), 이마무라 유타카( 今 村 豊 ), 시마 고로( 島 五 郞 )가 주도했던 해부학교실과 사토 다케오( 佐 藤 武 雄 )와 구니후사 ( 國 房 二 三 )가 주도했던 법의학교실의 연구 활동을 살펴보겠다. 해부학교실은 조선 전역에 걸친 광 범위한 생체계측조사를 바탕으로 해부학적 측면에서 현생 조선인의 체질적 특징을 종합적으로 규명 하는 한편, 고분 등에서 발굴된 遺 體 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조선인의 기원을 추적하는 작업을 병행 했다. 법의학교실은 혈액형과 지문의 분포양상이 민족/인종 별로 상이하게 나타난다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인의 인종적 특징을 규정하는 연구를 진행시켰다. 이들 해부학교 실과 법의학교실은 공동의 조사 작업을 통해 조선인들의 체질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으며, 조사결과의 공유를 통해 일본 본토의 체질인류학 연구들과도 구분되는 독특한 학풍을 견지하고 있 었다. 그리고 이들 해부학교실 및 법의학교실은 1930년대 후반 이후 조사대상의 범위를 만주와 내 몽고지역으로 확대하면서 조선까지를 포함하여 동북아 諸 민족들의 인종적/민족적 위상을 연구하는 滿 蒙 인류학 -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이 가지는 특징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먼저 일본 인류학 형성과정에서 체질인류학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성제대 설립 이전까 지 인류학의 차원에서 조선이 어떻게 포착되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경성제대 체질인류학 연 구가 가지는 특징적 측면들, 예컨대 엄격한 과학주의 적 지향과 조선 범주의 지방적 분할과 만몽으 - 3 -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과 식민지 공간의 역사적 재구성 :사토 다케오( 佐 藤 武 雄 )와 이마무라 유타카( 今 村 豊 )를 중심으로4 로의 범주 확장 등이 어떤 지식-권력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는 이를 통해 다소 분명 해 질 것으로 기대한다. 2. 일본 인류학의 탄생과 체질인류학의 위상 - 앞서 일본 인종주의의 모순적 과제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일본의 인류학 형성과정은 이런 딜레마 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 인류학의 탄생과 정은 서구 인류학의 출현과정과 비교하면 매우 독특한 양상으로 전개되어왔다. 통상적으로 인류 학이 서유럽세계의 지구적 팽창과 연동해서 역사를 가지지 못한 비서구세계의 타자들에 대한 학문적 시선으로서 등장했다면, 일본의 인류학은 이런 他 者 化 의 학문적 시선을 자기 사회 및 민 족 형성에 들이대면서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의 문제에 천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인류학의 초기 과제는 서구 인류학의 인종적 위계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을 일본을 중심으 로 한 동아시아 인종(민족)의 위계적 체계로 변용시킴으로써 일본의 식민주의/인종주의의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있었다. 일본 주변 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답사를 통해 일본 내부의 기원논쟁 을 동아시아 인종의 위계로 확장시킨 도리이 류조( 鳥 居 龍 藏 )의 시도는 이러한 초기 일본 인류학 의 과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일본 인류학의 탄생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쓰보이 쇼고로( 坪 井 正 五 郞 )의 학문적 이력은 일본의 인류학이 직면했던 문제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동경제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던 쓰보이는 모스(E. Morse)와 미른(J. Milne) 등 인류학적 차원에서 일본인의 기원에 관심을 가졌던 서구 학자들의 인류학적 시선을 내면화하면서도, 이를 에도시기부터 유행 했던 古 物 愛 好 또는 古 物 熱 의 전통과 결합시켜 오히려 지역유력자 집단과의 결합 속에서 인류학 회가 지방 각지에 설립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일본 지식인의 눈에 비친 대부분의 서 양인 학자의 활동은 그 자체가 인류학자의 활동으로 비춰지곤 했는데, 쓰보이도 인류학을 인류 일반에 관한 諸 事 를 설명하는 理 學, 즉 인간에 대한 종합학문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박물학(natural history)적 전통에서 인류학을 이해했던 쓰보이는 고고학, 선사학, 고대사 등과의 결합 속에서 인류학을 위치 지웠고, 숨은 유적 및 유물에 대한 지식을 소 유한 지방의 유력자 집단을 결집시킴으로서 대학 밖에서 인류학의 학문적 확산에 기여했다. 츠보 이는 1892년 동경제대 이학부에 신설된 인류학교실의 초대 교수가 되었지만, 전문적인 학술활동 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 인류학과로 재편되기 이전까지 인류학교실이 정 규 학생을 받지 않은 채 選 科 生 과 硏 究 生 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것도 이러한 일본 인류학의 초 기 조건과도 무관하지 않다. - 그런데 이러한 쓰보이 중심의 박물학적 인류학 연구 흐름과 별도로 의학, 특히 해부학의 차원 에서 일본민족의 기원을 추적하는 또 다른 인류학의 움직임이 있었다. 동경제대 해부학교실의 고 카네이 요시키오( 小 金 井 良 精 ), 경도제대 해부학교실의 아다치 분타로( 足 利 文 太 郞 )이 대표적인 인 물들로 이들은 독일의 의학적 인류학에 영향을 받아 엄밀한 신체의 계측을 통해 인종, 종족, 민 - 4 -

<제국일본의 문화권력 : 학지( 學 知 )와 문화매체5 족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식별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들은 종합학문이 아니라 엄격한 분과학문으 로서 인류학을 구축하고, 측정의 정확도 및 사례수의 확장 등을 통해 인류학의 과학적 신뢰성과 타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고고학과 선사학, 고대사를 중시해서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제 민족의 역사적 기원을 구축하려 했던 츠보이와 그의 제자 도리이 류조( 鳥 居 龍 藏 )와는 달리, 이들 은 고고학이나 선사학 등 엄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어려운 학문들을 주변화하면서 현생 일본 인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 그리고 이러한 박물학적 인류학과 해부학적 인류학, 즉 체질인류학의 갈등양상은 츠보이의 客 死 이후 동경제대 인류학 교실을 이끌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1920년대 마츠무라 아키라( 松 本 瞭 )의 박사논문 사건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인류학교실 제1회 선과생이자 동경인류학회 간사였던 마 츠무라는 일본인의 기원 및 지역적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체질인류학의 생체계측을 방법론으로 도입했는데, 당시 인류학 교실의 주임으로 있었던 조교수 도리이가 이에 반대하면서 박사논문이 지연되었고, 결국에는 인류학교실이 아닌 의학부에서 고카네이 요시키오( 小 金 井 良 精 )의 지도로 박사논문을 쓰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리이가 동경제대를 물러나게 되는데, 일본 인류학의 주도권이 의학적 인류학, 즉 체질인류학으로 넘어가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후 일본의 인 류학은 고카네이와 아다치의 제자들, 하마다 고사쿠( 濱 田 耕 作 ), 기요노 겐지( 淸 野 謙 次 ) 등 의학 자들이 주류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 이들 체질인류학자들은 인류학의 의학적 성격을 강화시켜서 인류학을 하나의 전문적인 분과학문 으로 정착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실제로 이후 대학 내 제도적 학문으로서 인류학은 인문 학이 아니라,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의학의 분과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인종/민족의 문화적 속성 을 다루는 민족학과 민속학이 제국관학의 학문체제 속에 편입되지 못하고 민간학 으로 남아 있 었던 것을 감안하면, 인류학의 자연과학적 성격ㆍ의학적 성격의 강조는 과학적 인종주의 에 대한 일본의 이중적 성격과도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민족 또는 인종의 기원 또는 그 이동의 문제를 문화사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의 피의 변화 또는 혼합이 없어서 문화의 이동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질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上 田 常 吉, 1935) 즉 유색인종인 일본인에 대한 서구인의 인종주의적 성격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한편, 주변 동아 시아인들에 대한 일본인의 우월적 위상을 객관적으로 확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학적 권위 가 필요했으며, 일본과 동아시아 주변민족 사이의 문화적-역사적 同 源 性 을 강조하는 사회적 기 조 속에서 인종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노골적인 강조는 자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 황에서 제도화된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主 流 에는 의학의 체질인류학이 자리 잡게 된다. - 체질인류학은 초기 인류학에 비해 훨씬 더 진전된 방법론에 입각해서 일본과 주변 아시아 인종 의 체질적 위계를 구축해나갔다. 역사학 및 민속학과의 분화 속에서 체질인류학은 가치판단을 최 대한 자제하면서 일본 중심의 인종적 분류체계, 즉 인종론을 정교하게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작 업은 인종/민족의 역사시대 를 다루는 일본의 근대 역사학(관학적 역사학), 인종/민족의 문화적 특성을 다루는 민속학/사회학/종교학(관학으로서는 사회학/종교학, 민간학으로서는 민속학)과의 분업관계 4) 를 이루면서 일본 중심의 인종적 위계를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고, 나아가 서구의 인종 주의와는 달리 인종적 배제와 포섭 사이를 오갔던 일본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학문적 - 5 -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과 식민지 공간의 역사적 재구성 :사토 다케오( 佐 藤 武 雄 )와 이마무라 유타카( 今 村 豊 )를 중심으로6 근거로서 작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인종주의의 구축에 중심에 있었던 것이 식민지 제국대 학의 체질인류학, 즉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의 인종론(racialism)이었다. 3. 포섭과 배제의 분열- 경성제대 이전의 식민지 인류학 - 여기에서는 경성제대 체질인류학 이전의 조선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의 흐름 고찰한다. 종전까지 조선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에 대한 기존 연구는 한편으로는 일선동조를 강조한 도리이 류조의 논 의를 다루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1922년 경성의전 학생들의 집단투쟁으로 이어진 해부학자 구보 다케시( 久 保 武 )를 가지고 인류학의 인종차별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인류학의 범 주에서 도리이와 구보를 같이 다루는 연구는 없다. - 그런데 츠보이의 제자 도리이와 고카네이의 제자 구보가 그리는 조선인에 대한 완전히 상이한 인류학상은 일본 인류학 내부의 대립관계, 특히 일본인이란 무엇이며 인류학은 이를 어떻게 포착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이해한다면 같이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 포섭의 학문적 계열과 배제의 학문적 계열, 이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1926년 설 립된 경성제대의 인류학자들이 직면했던 과제. 4. 통계기법이라는 무기, 조선 의 지방적 해체-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의 조선연구 - 하지만 조선인의 인종적 열등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던 구보 다케시( 久 保 武 )의 작업은 식민통치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었지만, 1921년 이른바 구 보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조선인들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과 같은 작업이었 다. 과학 의 차원에서 보아도 구보의 작업은 사례수의 취약함, 측정의 불명료함 등 문제가 많았다.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확인되는 해부학적 차이를 곧바로 인종적 우열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가지 는 한계도 명확했다. 따라서 경성제대 해부학교실과 법의학교실은 인종주의적 해석을 억제하고 최 대한 과학적 위치에서 일본과 조선 사이의 인종적 분류체계를 정교하게 만드는데 집중했다. 정밀한 척도의 생체계측 방법이 동원되었고, 인종계수와 같이 혈액형의 민족적-지역적 분포 차이도 조사되 었다. 당시 서구에서 인종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성장했던 통계적 기법도 폭넓게 활용되었다. 경성제 대의 체질인류학 작업은 인종주의적 우열을 곧바로 판별하려 했던 이전까지의 인류학 작업과는 달 리, 인종분류체계의 정교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인종주의 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경성제대의 인종론이 당시 식민당국이 처했던 인종주의적 태도와 전혀 무관한 것 은 아니었다. 우선, 정교한 분석을 통해 조선 내의 지역적 차이가 객관적 사실로 드러나면서 과학적 4) 선사시대 를 다루는 고고학과 언어학은 역사학과 (체질)인류학을 매개하는 분과학문이 되었다. - 6 -

<제국일본의 문화권력 : 학지( 學 知 )와 문화매체7 분석의 차원에서 조선 을 단일한 범주로 설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최소한 조선의 남부 와 북부는 해부학적 차원에서나 혈정학적 차원에서 별도의 단위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종 주의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러한 결과는 당시 일본의 인종주의가 가졌던 딜레마, 조선인과 일본인의 이항대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조선인의 열등적인 위상을 추인하 면서도 다른 한편 역사적으로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역사적으로 하나였다는 포섭의 근거도 과학적으 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조선남부와 북부의 분할은 당시 식민지 역사학에서 전개되었던 식민사관과 관련해서도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북부가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 권에 있었다는 1920년대까지 식민사관의 기본입장과 조선북부와 만몽지역을 같이 묶어서 이 지역 에서 북방민족 의 활동을 강화시키는 이후의 입장변화에 대해서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의 인종론은 과학적 근거로 작동했다. 4. 만 몽 의 발견, 조선 의 재규정범 -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의 만몽 연구과 전쟁인류학 - 이런 점에서 1930년대 후반들어 경성제대 체질인류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만몽지역 북방 諸 민족 에 대한 광범위한 학술조사를 통해 일본과 조선으로 한정되었던 인종적 위계를 만몽지역까지 확장 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 중심으로 동심원적으로 그려지는 인종적 분류체계는 대동아전쟁이 본격화 된 이후에는 점차 위계적 성격 보다는 연계적 성격 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재해석되어갔다. 순혈을 강조했던 기존의 입장을 뒤집어 아시아 諸 민족 사이의 혼혈에 초 점을 맞추었던 사토 다케오의 작업이나, 종전까지 수행했던 조선에 대한 체질인류학적 작업 전체를 만몽 인류학이라는 더 포괄적인 범주 속에 포함시켜 체계화하려 했던 이마무라 유타카의 작업이 이러한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하지만 이러한 변환은 인종론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분리함으로써 체질 인류학의 과학적 위상을 담지하고자 했던 1920년대 중반의 무화시킨 것으로 과학의 전쟁동원, 이데 올로기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전쟁인류학과 대동아 인종주의, 민족학의 회귀. -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