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국가성 모색* 1) Searching for stateness in Ukraine 우준모 (선문대학교) Ⅰ. 서론 소연방의 해체로 냉전이 종식되었고 유럽연합이 초국가적 지역통합의 전형을 선도하고 있는 21세기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시대를 넘어서는 세계시민의 시대로 규정되기도 한다. 그 러나 탈근대의 21세기에도 국가는 여전히 가장 강력하고 우월하며 안정적인 사회조직이다. 따라서 국가건설은 사실상 오늘날 세계 공동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 가운데 하나이 다. 왜냐하면 지구촌 인류가 직면한 빈곤, 에이즈(AIDS), 약물 중독, 테러리즘 등과 같은 제 반 문제들의 근원에 바로 취약한 국가 또는 실패한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1) 근대적 의미의 국가는 대규모의 군대를 육성하고 과세권을 확립하며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통해 넓은 영토 에 걸쳐 주권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국가는 근대화를 주도해온 유럽 및 북미 국가들과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 해당할 뿐 국가 건설에 나섰던 지구촌 모든 국가들의 보편 적 양상은 아니었다. 소연방 해체이후 새로 독립한 나라들 역시 저마다 국가 건설 에 나섰 으나 대부분 불안정한 국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는 16세기 이후 서유럽의 민족주의 물결에서 등장하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탈식민화 과정에서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급격하게 진행된 중동부유럽과 소 연방의 탈공산주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시장경제체제와 다원주의 정치체제를 갖춘 국민국가 를 건설하는 것은 최고선( 最 高 善 )의 가치로 여겨졌다. 그러나 탈소비에트의 체제전환을 시 도한 국가들은 저마다 어떤 형태의 국가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준비를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가건설의 길에 내몰려야 했다. 1991년 8월 소연방에서 보수 군부 세력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연방 구성공화국들이 서둘러 독립선언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준비되지 못한 독립국가 건설의 과정은 시행착오와 혼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올해로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 건설 20주년을 맞이하였다. 우크라이나는 소연방의 15개 구성공화국 가운데 모든 면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공화국이다. 따라서 소연방이 해체되었을 때 우크라이나는 가장 성공적인 체제전환과 경제발전을 이룩할 국가로 기대를 모았다. 2) 우크라이나는 잘 발전된 산업기반, 풍부한 광물자원, 높은 교육수준, 적절 한 규모의 인구수와 민족구성, 영토규모, 토양 및 기후, 역사문화적 응집력 그리고 지정학적 위치 등 모든 측면에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데 유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 졸고는 발표용 초고이므로 학술적 인용이 불가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프랜시스 후쿠야마, 강한 국가의 조건, 안진환 옮김 (서울: 황금가지, 2005), 5-16쪽. 2) John Morrison, "Pereyaslav and After: The Russian-Ukrainian Relationship," International Affairs, Vol. 69, no 4 (April 1993), p. 685; 한스 게오르그벨링 외, 새로운 러시아, 독립국가연합, 한종만 옮김 (서 울: 대륙연구소 출판부, 1994), 116-117쪽. - 38 -
러나 지난 20년간 우크라이나의 체제전환과 독립국 건설의 과정은 서구세계의 낙관적 전망 과는 달리 상당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난관으로 점철되어왔다. 이 연구는 우크라이나공화국이 지난 20년간 추진해온 국가 건설의 과정을 국가성 모색 의 맥락에서 분석한다. 필자는 국가성을 근대의 국민국가적 개념에 입각하여 국가건설과 일 정한 수준의 통합성을 갖춘 국민형성을 이룬 상태로 개념화할 것이다. 말하자면 탈소비에트 공간에 신생국으로 등장한 우크라이나가 국가의 기본적인 틀인 헌법을 어떻게 만들었고 독 자적인 군대를 창설하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국민형성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어왔 는지를 분석해 보겠다는 것이다. 연구의 순서는 먼저 국가성에 대한 개념적 논의와 우크라 이나가 독립적인 정치공동체를 구성하게 된 역사 문화적 연원을 배경지식으로 살펴보고 다 음에서 국가의 기본틀인 헌법 및 군대에 관한 고찰과 국민적 통합성 형성에 관한 내용을 순 서 따라 분석할 것이다. 결론은 연구내용을 종합하고 간략한 전망으로 마무리 한다. Ⅱ. 국가성의 개념과 우크라이나의 역사 문화적 연원 1. 국가성의 개념 국가란 무엇인가? 에 대한 개념적 논의는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매우 다양한 갈래 로 진행되어왔다. 고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중세의 마키아벨리와 홉스 근대 의 마르크스와 베버 나아가 현대의 헬드(David Held)와 틸리(Charles Tilly), 만(Michael Mann) 그리고 후쿠야마 등 대부분의 정치학자들에게 있어서 국가론은 연구의 바탕이거나 중심적인 주제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의 기원과 본성 그리고 기능과 제도, 역할 등을 놓고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분석수준과 기제를 동원하며 국가론 논쟁을 이끌어 왔다. 그 결과를 묶어 개괄적인 수준에서 근대국가의 개념을 정의하자면, 국가는 영토적으로 통합된 지역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전문 관료를 지니고 있으며 그 권력(주권)이 미치는 영역 에 대해 독점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단위체 하고 할 수 있다. 3) 그렇다면 근대국가에 있어서 국가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후쿠야마는 국가성의 본질을 강제성 에서 찾았다. 국가성이란 국민이 법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궁극적 능력이 라는 것이다. 그는 국가성을 국가 활동의 범위와 국가 권력의 힘(국가의 능력)이라는 두 가 지 특질로 구분하여 개념화하였다. 4) 국가 활동의 범위란 정부가 지닌 다양한 기능과 목표 이며 국가 권력의 힘(국가 제도의 역량)이란 정책을 입안/시행하고 법을 개끗하고 투명하게 집행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성은 1국가 제도의 능력과 2국가 기능의 범위라 는 두 가지 기준으로 그 효율성을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적정한 수준의 국가기능 과 높은 국가 제도의 능력이 조합을 이룰 경우 최적의 강한 국가 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 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프릿츠(Verena Fritz)는 약한 국가-강한 국가 의 개념과 국가의 능 3) 임석준, 국가와 권력, 박준영 외 공저, 정치학 (서울: 박영사, 2007), 60쪽. 4) 후쿠야마가 채택한 국가 기능의 범위는 세계은행의 세계개발 보고서의 기준을 참고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최소기능은 순수 공공제 제공, 국방 법과 치안, 재산권, 거시경제 관리, 공중보건, 공평성 증대, 빈곤층 보호 등 에 개입하는 것이고 중간기능의 국가는 외부 역점 사안, 교육 환경, 독점 규제, 불완전한 정보 개선, 보험 금융 규제, 사회보험(가족수당, 실업보험) 등에 개입하는 것이다. 끝으로 적극적 기능의 국가는 민간 활동을 조정하 며 국가가 산업정책을 통해 시장에 개입하고 나아가 부의 재분배에 관여하는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앞 의 책, 17-30쪽. - 39 -
력 개념을 엮어서 탈소비에트의 국가건설과정을 경험과학적 입장에서 비교하였다. 프릿츠 의 개념 역시 국가를 정치제도의 힘과 기능적 효율성에 주안점을 두고 분석한다는 점에서 후쿠야마의 국가성 개념과 닮아있다. 5) 한편, 린쯔와 스테판은 국가성을 국가, 민족, 민주화 등 3가지 변인간의 상호작용으로 설 명한 바 있다. 민주주의 체제가 성립하려면 주권국가와 시민의 존재가 선행조건이기 때문에 민주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국가건설(주권국가)과 국민형성(시민권 확립)이 성공적으로 이루 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국가는 배타적으로 구획된 영토적 경계 안에서 하나의 정치공동 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공동체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대중)은 민족, 종교, 언어, 문화, 역사 등 다양한 이질적 속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시민권을 보장받고 국가에 대해 일체 감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 국가성을 제대로 갖춘 민주주의 국가의 요건이라는 것이다. 6) 린 쯔와 스테판은 이와 같은 국가성 개념을 통해 전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민주화 이행과 공 고화의 사례를 검증한 바 있다. 국가성 개념을 연구의 틀로 삼은 국내의 선행 연구를 선별해 보면 우선 손병권 교수의 미국에 대한 사례연구를 들 수 있다. 손 교수는 먼저 국가를 전( 全 ) 영토 내에서 통합적 권 력을 행사하는 정치단위의 등장이라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국가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전국 적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하는 중앙정부의 수립과 제도화된 관료기구를 구축하여 집행부를 강화시키는 일이라고 규정하였다. 손 교수는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의 혁신주의 국가를 사례 로 분석하였다. 7) 그리고 김창진 교수는 국가성을 본질적으로 경로의존적인 것으로 규정하 여 그것이 형성되는 특정 국가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주장을 전 개하였다. 8) 따라서 특정 국가의 종단면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결코 국가성의 특성과 구조를 온전히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당대의 국가성은 그 사회의 지배적 사회세력 들의 위계와 관계의 망(결합태)으로 분석이 가능하다. 더불어 국가성은 국가 또는 국가로 조직된 사회의 생활이며 다양한 특성을 구비한 국가 내부 활동성의 과정이자 국가 제도와 그 조직이기도 하다. 이 외에 이인성 교수, 권세은 교수 등의 선행연구를 통해 국가성 개념 이 탈소비에트 체제전환 국가의 국가건설 과정을 평가하는데 유용한 분석틀 혹은 관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선행연구를 통해 논증하였다. 9)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여 필자는 우크라이나의 체제전환과 국가건설의 과정 20년을 평가하는데 필요한 분석틀로써의 국가성 개념을 다음과 같이 상정하였다. 먼저 정치제도의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우크라이나의 국가건설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구체적으로 국가성의 핵 심 이념과 제도를 담은 헌법제정의 과정과 그 후속 논쟁 그리고 국가의 존립을 담보할 독자 적 군대창설의 과정을 살펴 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크라이나의 국민적 통합성 형성과정을 분석할 것이다. 5) Verena Fritz, State-Building: A Comparative Study of Ukraine, Lithuania, Belarus, and Russia (Budapest, New York: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2007). 6) J. 린쯔 & A. 스테판, 민주화의 이론과 사례: 이상과 현실의 갈등, 김유남 외 옮김 (서울: 삼영사, 1999), 제2장, 41-65쪽. 7) 손병권, 미국의 국가: 국가성(stateness)의 문제와 국가성의 충족제로서 혁신주의 국가, 미국학논집 제36 집 2호(2004 가을), 174쪽. 8) 김창진, 러시아 국가성의 형성과 그 유산: 비교 역사적 접근, 국제정치논총 제43집 2호(2003), 390쪽. 9) 이인성, 러시아의 국가체제와 정치경제개형: 국가성 요인의 재조명, 국제정치논총 제40집 2호(2000), 199-218쪽,; 권세은, 러시아 연방 타타르 민족의 국가성 모색 및 쟁점, 슬라브학보 제22집 4호(2007), 159-184쪽. - 40 -
2. 역사 문화적 연원 우크라이나의 독립국가 건설과정과 그 국가성의 모색과정을 분석하기에 앞서 먼저 우크 라이나가 정치공동체로서의 국가를 건설하게 된 역사 문화적 연원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성 모색은 경로의존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 문에 역사 문화적 연원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크라이나 독립국가 건설의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한계와 전망까지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동슬라브족 최초의 도시국가였던 키예프 루시 공국에 정치공동체의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라는 국명의 유래는 19세기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 이 전개되면서 비로소 등장하였다. 그 이전에는 이 지역을 루스, 말라야 루스, 말로 로시야, 말라야 로시야 그리고 로시야(러시아)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러왔다. 역사적으로 현재의 우 크라이나 공화국을 모두 포괄하는 지역이 독립된 정치적 실체를 꾸려본 경험은 존재하지 않 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부터 우크라이나 라는 고유 명칭이 우크라이나 지식인들 사이에 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러시아 제국의 공식문서와 법률 등에 제국을 구성하는 지역의 일부로 사용되던 말로 로시야 라는 이름에 거부감을 느꼈다. 따라서 우크 라이나라는 이름을 통해 역사적 기억을 되살려내고 고유한 민족적 정서를 응축함으로써 자 유의 숨결을 호흡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10) 또한 이것은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민족주의의 물결이 우크라이나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독립적 정체성을 자극한 결과이기도 하다. 11)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시(Kievan Rus': 880~1240) 공국의 소멸 이후, 역사적 으로 동과 서, 남과 북이 언어와 종교적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된 정치적 실체를 구성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적 정체성을 만들기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 우크라이나는 13세기 중엽부터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해서 1991년 소연방을 해체하 고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7세기 넘는 세월을 주변 강대국에게 예속된 상태로 존재해 왔다. 12) 갈리시아, 트랜스카르파치아, 부코비나 등 우크라이나의 서부지역은 1918년 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였고 1939년까지는 동유럽 국가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경험 은 오히려 폴란드인과의 지속적인 민족적 사회적 갈등을 겪게 만들어 우크라이나의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은 우니아트 정교를 신봉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면서 소연방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반( 反 ) 러시아적 정서가 강한 형국이다. 오 늘날 우크라이나가 자랑하는 코삭의 전통이 이 지역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이유 도 여기에 있다. 반면 현 우크라이나의 중앙 및 동남부 지역은 1654년 페레야슬라프 협정 (Pereyaslav 10) 한정숙,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과 근대 우크라이나의 민족정체성, 러시아연구, 제14권 2호(2004), 394-399쪽; 이 시기 우크라이나가 찾아낸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핵심 특징은1개인주의 2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 3대지와 민속문화에 대한 사랑 4감성주의/낭만주의 5관용과 인내 등으로 요약된다. 이는 역사문 화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달리 유럽적 특성을 갖는다는 차별성을 강조한 것이다. 홍석우, 우크라이나 의 국가정체성: 구성요소와 형성과정,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러시아 유라시아연구사업단 엮음, 유라 시아 지역의 국가 민족 정체성 (서울: 한울 아카데미, 2010), 104-111쪽. 11) 19세기 초에 발아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의식은 19세기 중반 우크라이나의 대문호로 칭송되는 셰브첸코 (Taras Shevchenko)의 문학적 영감을 거쳐 20세기 초 우크라이나의 정치조직 건설로 연결되었다. 이후 우크 라이나는 볼셰비키 혁명과 더불어 짧았지만 독립국가를 수립했다가 소연방의 구성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이 에 대해서는 John A. Armstrong, Ukrainian Nationalism, Third Edition (Englewood, Colorado: Ukrainian Academic Press, 1990) 참조. 12) 김경순, 脫 소 우크라이나의 체제이행: 특성과 전망, 중소연구, 제28권 제1호 (2004), 126쪽; 우준모, 우크라이나 민족과 민족주의 진로, 러시아지역연구, 제1권 (1997. 4), 68-70쪽. - 41 -
Agreement)으로 러시아에 편입된 이후 계속해서 러시아 제국의 일원으로 자리해 왔다. 13) 이 지역에는 러시아인이 많이 살고 있으며 산업화와 도시화도 상대적으로 많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우크라이나인은 동슬라브족 공동체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 특히 크리미아 지역은 1954년 소연방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가 페레야슬라프 협정 300주년을 기념하 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굳건한 동맹과 우호선린을 기원하면서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영 토로 편입시킨 것이다. 14)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에서 유일하게 러시아인의 비율이 우크라이 나인보다 압도적으로 높아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통합성 형성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하여 러시아 제국이 소멸할 때 우크라이나는 독립공화국의 정체( 政 體 )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질적 역사경험과 문화를 보유한 집단의 혼성체에 불과하였으며 그나마 1922년에 소연방의 구성공화국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현재의 우크라 이나 공화국은 소연방 구성주체였던 우크라이나사회주의소비에트공화국(Украи нская Сове т -ская Социалисти ческая Респу блика)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독립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소연방 구성주체로서 우크라이나는 비록 독립적인 국가는 아니었으나 정치 공동체로서의 단 단한 실체를 구축할 수 있었다. 1945년 소연방이 미국, 영국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지으며 국제연합(UN)을 창설할 때 우크라이나는 소연방과 함께 연방의 대표 공화국으 로 유엔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하였다. 15) 소연방이 유엔에 소연방(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 고 벨라루스 등 3개국 지분으로 가입했기 때문이다. 소연방의 해체과정에서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벨라루스와 더불어 민스크 협약을 주도하여 국제법상 소연방의 주체적 지위와 실체 를 종식시켰다. 소연방에서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실체가 굳건하게 성장한 것이다. Ⅲ. 국가건설 -정치제도 구축 1. 헌법 제정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의회인 최고회의 (Verkhovna Rada)는 소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에 대한 국민투표와 대통령 선거를 같은 해 12월 1일에 실시하기로 의 결하였다. 12월 1일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는 유권자의 84.2%가 투표에 참여 하고 90.32%가 찬성함으로써 독립국가 건설의 전국민적 열망을 표출하였다. 동시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최고회의 의장 출신인 크라프축(Leonid Kravchuk)이 61.59%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16) 이로써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으나 독립국가의 13) 페레야슬라프 협정은 1654년 코삭의 추장(Hetman) 흐멜르니츠키(Bohdan Khmelnytsky)와 러시아의 짜르 알렉세이(Alexei Mikhailovich)가 맺은 협정이다. 이 협정으로 러시아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중동부 및 남부 크리미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복속시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들은 페레야슬라프 협정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으면서 대립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황영삼, 페레야 슬라브 회의가 러시아-우크라이나에 끼친 영향과 역사적 평가, 슬라브학보, 제21권 4호(2006), 333-368 쪽,; Ivan L. Rudnytsky, Essay in Modern Ukrainian History (Edmonton: Canadian Institute of Ukrainian Studies, University of Alberta, 1987), pp. 77-90 참조. 14) 우준모, 크리미아 갈등의 해결과정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관계 연구, 세계지역연구논총, 제22집 1호 (2004), 195쪽. 15) 오늘날 우크라이나는 유엔 창립과정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공로를 자랑스러운 외교사로 묘사하고 있다. 자세 한 내용은 우크라이나 외무부 web-site 참조. http://www.mfa.gov.ua/uno/en/4263.htm (2011년 3월 27일 검색). 16) 대선에서 크라프축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운동을 주도하던 루흐 (Rukh)당의 초르노빌 (Vycheslav Chrnovil) 후보였으나 23.27%의 득표에 그쳤다. 자세한 내용은 Taras Kuzio and Andrew - 42 -
근본적인 틀인 헌법을 제정하기까지 4년 이상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최고회의는 1992년 7 월과 1993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서 전형적인 준대통령제 (semipresidential model) 헌법 초안을 마련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고회의와 크라프축 대통령 간의 이견뿐만 아니라 최 고회의 내 정치엘리트들 간에도 정치제도 및 권력구조에 대한 합의도출이 이루어지지 못해 헌법채택은 미루어지고 말았다. 17) 따라서 독립 초기 우크라이나는 소연방 시기였던 1978년 에 제정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헌법 을 상황에 따라 변용시켜 국가를 운 영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4년 7월 우크라이나는 소연방 계승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교체 하는 평화적 정권이양을 이룩했다. 크라프축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통령으로 쿠츠마(Leonid Kuchma)가 취임한 것이다. 쿠츠마는 국가적 면모를 갖춘 우크라이나 건설을 위해 경제를 개혁하고 정치를 안정시킬 방안을 강구했다. 1995년에 이르자 탈소비에트 신생국 가운데 헌법제정조차 못한 나라는 우크라이나밖에 없게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국가건설 역량이 의 심받게 된 것이다. 쿠츠마는 1995년 6월 국가권력 구조를 대통령 중심으로 재편하고 좌파 가 장악한 최고회의와의 관계를 제도화하기 위해 헌법적 합의 (Constitutional Agreement) 를 마련했다. 헌법적 합의는 대통령에게 국가원수와 행정부 수반의 지위를 부여하는 순수 대통령중심제의 권력구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1년 후인 1996년 6월까지는 무조건 헌법 을 제정한다는 강제규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 대통령과 최고회의는 1년 동안 집중적 인 논의과정을 거쳐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였다. 18) 1996년 헌법의 골격을 보면, 제1조에서 우크라이나가 민주, 사회, 법치에 근간을 둔 주 권국가임을 밝히고 있다. 제2조는 영토와 국경의 불가침성과 주권이 전 영토에 미치는 단일 국가임을, 제5조는 우크라이나가 공화국이며 주권의 원천은 국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 다. 그리고 제6조에서 국가권력이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의 분립원리에 따라 행사되며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범위 내에서 권한을 행사한다고 명시하였다. 헌법 제 4장(제75조~제101조)은 최고회의에 관한 규정이며 제5장(제102조~제112조)은 대통령에 관한 규정, 제6장(제113조~제120조)은 내각 및 기타 집행기관에 관한 규정인데 그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 헌법 상 우크라이나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성격의 국가체제로 이해가 가능 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국가의 수반으로 최고회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권한을 보유하 고 있다. 대통령은 최고회의가 채택한 법률안에 대해 재의를 요청하거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최고회의가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시키려면 의석수 2/3의 찬성을 받아야 한다. 대통령은 법률에 준하는 포고령을 발포할 수 있고 총리와 내각의 각료 임면권을 가지며 총 리의 추천을 받아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관 수장을 임면한다. 이 외에도 대통령은 최고회의 의 동의를 거쳐 검찰총장을 임면하고 중앙은행장과 방송위원장 등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 한 다양한 직책의 권력 엘리트에 대한 임면권을 갖는다. Willson, Ukraine: Perestroika to Independence (Hampshire: MacMillan Press Ltd., 1994), pp. 184-191. 17) Kimitaka Matsuzato, "Semipresidentialism in Ukraine: Institutionalist Centrism in Rampant Clan Politics," Demokratizatisiya, Vol. 13, no. 1 (Winter 2005), p. 50. 18) 헌법적 합의에 담긴 순수대통령제 권력구조는 최고회의와의 협상과정에서 퇴색되어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 각제적 성격이 융합된 형식의 권력구조로 탈바꿈하였다. Ibid.; 법무부, 독립국가연합 체제개혁 개관: 공산주 의체제 포기과정의 법적분석 (서울: 법무부, 1998), 266-268쪽. 19) 1996년 헌법은 법무부에서 전문( 全 文 )을 번역하여 자료집으로 발간하였다. 법무부, 독립국가연합 제국 신 헌법: 규정집 (서울: 법무부, 1998), 357-418쪽. - 43 -
1996년 헌법의 특징을 평가하자면 기본적으로 헌법은 대통령과 최고회의가 상호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20)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 크라이나에는 여타 소연방 계승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력정당 (paty of power)도 없었 고 그렇다고 대통령을 안정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하고 통합된 야당도 존재하지 않았 다. 21) 우크라이나의 정당정치는 무수한 군소정당과 분파의 난립으로 맹아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전국 단위의 지지세력을 거느린 제대로 된 정당은 공산당과 루흐(Rukh)당 정도였다. 그나마 루흐는 1999년 3월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 초르노빌이 대선 유세 초기 단계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두 개의 분파주의적 정당으로 분열되었다. 따라서 최고회의가 입법권을 가진 권력기관으로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견제하고 권한을 감시 통제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쿠츠마 대통령은 1996년 헌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막대 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22) 쿠츠마 대통령은 1999년 재선에 성공한 다음 대통령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기 위한 헌법 개정안 23) 을 마련하여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2000년 4월에 실시된 국민투표는 국제사회와 헌법재판소로부터 정당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진행되어 80%를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공가제(Hryhorii Gongadze) 사건을 비롯한 대통령과 고위층의 추문과 범죄연루 증거가 공개되면서 전국민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그 결 과 쿠츠마의 대통령 권력강화를 위한 개헌시도는 최고회의에서 부결되었다. 24) 국면전환이 필요했던 쿠츠마는 이번에는 최고회의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개헌안을 최고회 의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최고회의를 조기에 해산하고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려는 음모라는 비판을 받았다. 개헌을 향한 쿠츠마 대통령의 끈질긴 노력은 2004년 12월 대통령 선거의 진행과정에서 뜻밖의 결실로 나타났다. 선거의 투 개표 진행과정에서 선거부정에 항의하던 시민저항 운동 이 이른바 오렌지 혁명 으로 확대된 것이다. 25) 오렌지 혁명은 대통령 선거의 부정에 항의 하는 시위가 확산되면서 발생한 것이지만 기저에는 10년간에 걸친 쿠츠마 대통령의 권위주 의적 통치행태와 누적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반발과 고질적인 동서 지역갈등 그리고 정치 적 지배계층에 대한 혐오감 등이 한꺼번에 표출된 것이었다. 쿠츠마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 하기 위해 최고회의의 비상 임시회의를 소집하고 선거법과 헌법개정안을 상정하였다. 26) 20) 유럽연합(EU)의 국제적 헌법재판 자문기구인 법을 통한 민주주의 유럽위원회 (European Commission for Democracy through Law: 일명 베니스위원회, Venice Commission)도 우크라이나 헌법은 견제와 균형의 효 과적인 체제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권위주의적 회귀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Worldwide News Ukraine 참조. http://wnu-ukraine.com/files/constitutional_court.pdf (2011년 2월 24일 검색). 21) Nadia Diuk, "Sovereignty and Uncertainty in Ukraine," in Larry Diamond and Marc F. Plattner, (eds.), Democracy after Communism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2), p. 237. 22) 헌법제정을 전후한 시기의 크라프축, 쿠츠마 대통령의 통치 행적과 최고회의가 드러낸 한계에 대해서는 Andrew Wilson, "Ukraine: Two Presidents and Their Power," in Ray Taras, (ed.). Postcommunist President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 86-96. 참조. 23) 헌법개정안은 의원들에 대한 전반적인 면책특권을 폐지하고 최고회의 의석을 450석에서 300석으로 축소하 며 제2원을 도입하여 의회를 양원제로 만들고 대통령의 의회해산권을 강화하는 등 4개 항이 주요 골자였다. 24) 김경순, 앞의 글(2004), 131-134쪽. 25) Adrian Karatnycky, "Ukraine's Orange Revolution," Foreign Affairs, Vol. 84, no.2 (March/April 2005), pp. 35-52. 26) 조선일보, 2004년 12월 10일자. 12월 8일 개최된 최고회의 비상 임시회의에서는 선거법 개정과 헌법개 정안 통과 외에도 대통령 선거 감시를 소홀히 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15명 정원 전원을 재구성하도록 하는 개정안도 통과시켰다. - 44 -
2006년 3월부터 발효된 개정헌법은 최고회의에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구조를 의원내각제에 가까운 형태로 전환한 것이다. 개정헌법의 핵심 골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7) 우선 대통령은 국가원수 및 행정수반으로 국민의 직접 보통선거로 선출된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한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은 최고회의의 과반을 차지한 세 력의 추천을 받은 총리와 외교부, 국방부 장관에 대한 임명권을 최고회의에 제출한다. 나머 지 내각 구성권한은 최고회의가 갖는다. 최고회의는 단원제이며 임기 5년의 450명의 의원 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회의는 총리와 모든 장관들에 대한 심의를 진행하며 거부권을 행 사할 수 있다. 최고회의 과반의석을 차지한 정치세력에서 총리직을 맡는 것이다. 총리는 외 교부와 국방부를 제외한 다른 각료들을 추천하며 최고회의에서 임명한다. 내각은 행정권한 집행기관 중 최고기관으로 헌법상 최고회의의 통제 하에 있다. 내각은 대통령과 최고회의 모두에 책임을 진다. 헌법재판소는 18명의 판사로 구성되는데, 대통령, 최고회의, 사법부(법 관회)가 각각 6명씩 임명하며, 임기는 9년으로 연임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최고 회의, 대법원 등이 제소하는 헌법 관련 사항을 심의, 결정하며, 대통령 탄핵 여부의 최종 결 정권을 가지고 있다. 2004년 12월 헌법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쿠츠마는 집권 1기 초반에 헌법을 제정하고 집권 2기를 마무리하고 퇴임하기 직전에 헌법을 개정하는 별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쿠츠 마가 어떤 의도로 헌법을 제정하고 또 개정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더욱이 그의 대통령직 수행이 우크라이나의 헌정질서와 법치제도의 확립에 긍정적으로 기여하지 못 했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쿠츠마가 우크라이나의 국가성 모색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헌법을 제정하는데 중요하고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런데 2006년에 발효된 개정헌법은 여전히 많은 논란에 휩싸여 있다. 일부에서는 개정 헌법이 최고회의와 내각 그리고 대통령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잘 반영하고 있어 우크라이 나 정치체제를 유럽의 권력구조 모델과 유사하게 만든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 헌법은 대통 령의 권한은 축소하고 총리와 내각 그리고 최고회의의 책임과 역할은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헌법은 개정과정에서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절차를 무시했다는 점 28) 과 쿠츠마의 개헌의도가 불순했다는 점 29) 그리고 결과적으로 헌법개정안 채택 이후 우크라이나 정치불 안정이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점 등의 이유로 국내외로부터 거센 비판과 끊임없는 재개정 요 구를 받고 있다. 30) 2004년 12월 오렌지 혁명을 통해 힘겹게 대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에 오른 유쉬첸코도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헌법을 재개정해야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는 06년 개정헌 법으로 우크라이나 권력구조가 분산되어 대통령과 최고회의 간, 정당 간, 파벌 간 권력투쟁 이 가중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개정헌법은 책임정치 구현이 불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27)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web-site 참조, http://gska2.rada.gov.ua/site/const_eng/constitution_eng.htm (2011 년 2월 8일 검색). 28) 자세한 내용은 Worldwide News Ukraine 참조. http://wnu-ukraine.com/files/constitutional_court.pdf (2011년 2월 24일 검색). 29) 많은 전문가들은 쿠츠마의 헌법 개정을 퇴임 후 자신의 신변안전을 고려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쿠츠마 는 정적( 政 敵 )인 유쉬첸코(Viktor Yushchenko)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자신을 탄압할 것을 두려워하여 퇴임 직전에 최고회의로 권력이 분산되도록 헌법을 개정했다는 것이다. 쿠츠마의 개헌 추진에 대한 정치적 함의는 Oleh Protsyk, "Constitutional Politics and Presidential Power in Kuchma's Ukraine," Problems of Post-Communism, Vol. 52, no. 5 (2005), pp. 23-31. 30) Pavel Korduban, "Constitutional Reform Questioned in Ukraine," Eurasia Daily Monitor, Vol. 3, Issue, 220 (29 November 2009). - 45 -
때문에 경제적 위기국면에서 그에 대한 신속한 대처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따 라서 헌법재개정을 통해 법치와 민주주의에 기반을 두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그리고 사회보 호가 가능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쉬첸코는 새로운 헌법의 기본원리와 전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31) 권력기관들 간에 권력과 의무와 책임을 민주적으로 분산한다. 시민들에 책임을 지는 정치지도자들은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정당들은 유권자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 후보자 명단을 공개한다. 최고회의 의원에 대한 면책특권을 박탈한다. 의회제도는 민주적 대표성을 강화하고 국가 전체와 지방의 이익을 고르게 반영할 수 있도록 양원제로 개편한다. 시민의 인권과 이익을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사법기관과 법집행 기구를 재교육 하고 개별 시민이 헌법소원을 청구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유쉬첸코는 정치엘리트, 학자, 일반 시민 등 모두가 참여하여 신중하고 합리적인 토론과 검토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였다.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것만이 우크라 이나를 발전적인 민주국가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헌법 재개정 논의는 현 대통령 야누 코비치(Viktor Yanukovych) 측에서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야누코비치는 이미 2010년 10월 헌법재판소를 통해 2006년 헌법개정안을 1996년 헌법으로 되돌린다는 판결을 얻어놓 은 상태이다. 32) 지난 20년간의 체제전환의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헌법제정과 개정 그리고 재개정 문제 를 놓고 계속해서 논쟁을 이어오고 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정치제도의 미비점과 정국불안 을 보여주는 증표이면서 동시에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20년째 헌법과 관련 된 논쟁을 지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타 탈소비에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속하 면서도 안정적인 정치제도를 정착시켜 나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적 사법체제 구축과 정부구성, 주권국가로서의 외교활동, 중앙은행 설립(화폐발행), 군대창설 등 국가건설의 과 제를 빠른 속도로 수행한 점은 역설적인 요소이다. 2. 군대창설 국가안보 확립 신생 독립국에게 있어서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는 것은 헌정질서 구축과 더불어 핵심적 인 과제에 해당한다. 군대는 영토와 국민 그리고 주권에 대한 국내외의 안보위협에 대처하 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는 내부의 민족갈등과 지역갈등이 영토적 통합성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심각했다. 특히 러시아와 흑해함대 분할협상을 통해 크리미아 반도에 대한 영토적 통합성을 지켜야 했고 영내의 핵무기 이전협 상을 통해 러시아와 서구(미국 포함) 양측 모두로부터 국가안전을 보장받도록 군사안보 협 상을 진행시켜야 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으로 체제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면밀하게 군대창설을 진행시켜 나왔 31) Viktor Yushchenko, "Why Does Ukraine Need Constitutional Reform?" BRAMA (September 25, 2009), http://www.brama.com/news/press/2009/09/090925yushchenko_constitution-e.html (2011년 3월 4일 검색). 32) Andrey Volkov, "Changes to Ukraine Constitution Roll Country Back to 1996 Status," the epoch times (October 03, 2010), http://www.theepochtimes.com/n2/content/view/43625/ (2011년 3월 7일 검 색). - 46 -
다. 33)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가 임시회의를 통해 독립을 선언하면서 크라 프축을 비롯한 최고회의 지도자들은 곧바로 독자적인 군대창설을 위한 결의안을 마련하였 다. 여기에는 1우크라이나 영내에 배치되어 있는 모든 소연방 군대를 최고회의에 배속시키 고 2우크라이나 국방부를 설치하며 3우크라이나의 독자적 군대와 치안 유지군을 창설하고 최고회의와 내각 그리고 중앙은행을 보호할 별도의 부대를 창설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 다. 34) 최고회의는 곧바로 우크라이나 영토를 수비할 국경수비대와 안보부대 창설에 관한 법 령을 공표하고 9월 3일 전체회의를 통해 소연방 공군 소장 모로조프(Konstantyn Morozov) 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35) 모로조프 장관은 독립초기 우크라이나의 국방부 창설과 국가안보정책 마련에 중요한 역 할을 수행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국방부와 군대 창설에 매진하여 1992년 6월 국방부 설 립을 완료하였다. 모로조프의 지휘 하에 우크라이나 군 창설 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모로조프는 소연방 군대를 우크라이나 군대로 전환하기 위해 장교들로부터 우크라이나에 충 성하겠다는 서약을 받았고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약속했다. 더불어 크리미아 반도 세바스토 폴 기지를 사용하는 흑해함대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이를 우크라이나 해군으로 재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36) 1991년 12월 최고회의에서 승인된 군 창설안에 근거하여 우크라이나 군은 소연방 군편 제를 그대로 인수하여 키예프 군관구, 카르파치아 군관구, 그리고 오데사 군관구를 인수하 였다. 병종은 지상군, 해군, 공군 등 3개로 재편되었다. 소연방 군 편제를 계승하여 임시로 편성했던 우크라이나의 군편제는 1993년 11월 카르파치아 군관구 중심의 서부 군관구와 키예프 군관구와 오데사 군관구를 통합한 남부 군관구 등 2개의 군관구로 재편되었다. 지상 군은 7개의 군단으로, 공군은 3개 지상기지 항공단과 1개 해군 항공단 그리고 방공부대 등 으로 편성되었다. 해군은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흑해함대를 분할하여 전함과 항공대 그리 고 해안방어부대 등으로 편제할 계획이었으나 흑해함대를 러시아에 매각하면서 규모가 축소 되었다. 37) 흑해함대 분할 문제는 독립국가 건설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군사안보적 독 립성을 보장받고 협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할 최대의 쟁점이었다. 군사 적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는 해군 창설을 위한 자산으로 흑해함대가 일정 정도 가치를 지닌 것이었으나 대규모의 원양 해군을 유지할 군사비 지출 능력이나 필요는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우크라이나에게 흑해함대 기지인 세바스토폴을 비롯한 주요 항구는 곡물과 석탄 등을 33) 소연방 해체 당시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어 있던 군사력의 규모는 지상군 부대, 로켓부대, 공군부대, 방공부대, 흑해함대 등을 포함하여 78만 명 규모의 대군이었다. 우크라이나 영내에는 핵무기와 가공할만한 재래식 병 기가 배치되어 있어 무기체계에 있어서도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체에서 최고의 군사강국으로 등장하는데 손색이 없는 규모였다. 자세한 내용은 Adrian Karatnycky, The Ukrainian Factor, Foreign Affairs, Vol. 71, no. 3 (Summer, 1992), pp. 90-107. 34) Nicholas. S. H. Krawciw, "Ukrainian Perspectives on National Security and Ukrainian Military Doctrine,"in Bruce Parrott, State Building and Military Power in Russian and the New States of Eurasia (New York: M. E. Sharpe, Inc., 1995), p. 140. 35) Ustina Markus, "Recent Defense Development in Ukraine," RFE/RL Research Report, No. 8 (1994.2.25), pp. 26-27. 36) 그러나 이에 대해 흑해함대 소속 장교들과 러시아 언론의 반발과 비난이 쏟아졌고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직 접 나서서 흑해함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항상 러시아에 속한다고 선언하였다. John W. R. Lepingwell, The Black Sea Fleet Agreement: Progress or Empty Promises? RFE/RL Research Report, Vol. 2, no. 28 (July 9, 1993), pp. 48-49. 37) 정형균, 우크라이나 안보정책의 체계론적 분석: 군사적 측면을 중심으로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사논 문, 1998), 16-17쪽, 53쪽. - 47 -
수출하는 기지로 활용할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흑해함대를 중요한 전략적 안보수단으로 내세 워 최소 50%의 지분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첫째, 흑해에서의 러시아의 존재를 최소화하는 데 있었다. 38) 우크라이나는 흑해함대와 세바스토폴을 러시아에 양도할 경우 크리미아반도의 영토적 통합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를 했다. 둘째, 흑해함대는 러시아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에서 유용한 협상카드로 사용 가능했다. 최후의 경우 우크라이나는 함대에 대한 지분을 매각하고 세바스토폴 기지를 대여함으로써 경제적 실리를 추구할 수 있다. 셋째, 국내정치 적 맥락에서 볼 때, 흑해함대와 세바스토폴, 나아가 크리미아를 러시아에게 양도할 경우 민 족주의 세력의 정치적 도전을 감당할 수 없었다. 독립국가 건설에 있어서 우크라이나의 최 우선 과제는 영토적 통합성을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흑해함대 문제는 1992년 6월 다고미스(Dagomys)회담과 8월의 얄타(Yalta)회담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협상을 통해 함대를 절반씩 분할하기로 합 의하고 유지비도 공동으로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함대에 대한 분할합의는 양국 모두 군부의 반발로 실무회담을 진행하지 못했고 함대의 지휘권과 재정분담 문제, 함대 내 양국 군인들간 충돌 등 심각한 혼란상황을 초래했다. 39) 결국 1993년 9월 양국 정상은 마산드라 (Massandra)에서 함대분할에 관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했다. 러시아가 흑해함대의 우크라이 나 측 지분을 매입하는 형식으로 우크라이나에게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를 공급하기로 합의 한 것이다. 40) 흑해함대 문제는 1994년 7월 쿠츠마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더욱 순조롭게 해결되어 갔다. 쿠츠마는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시절부터 흑해함대의 지분을 러시아에 매각하고 러시아와 경제적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6년 8월 양국의 실무회담 에서 흑해함대 기지를 세바스토폴 항구와 노보로시스크(Novorosisk)항구로 분할하고 헤르 손(kherosn)을 비롯한 4개 항구를 러시아가 조차하기로 합의하였다. 41) 같은 해 10월, 양국 은 협약을 체결하여 흑해함대 세바스토폴 기지의 지위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타결함으 로써 우크라이나는 함대의 10-15% 정도를 소유하게 되었다. 42)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고 국가안보 정책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배 치되어 있는 핵무기 제거는 러시아와 서구 모두에게 사활적 이해가 걸린 쟁점이었다. 안정 적인 국가성을 갖추지 못한 신생 독립국이 핵을 보유한 군사강국의 면모를 갖추는 것은 역 사적으로 영토갈등을 빚어왔던 폴란드를 비롯한 접경국가들 뿐만 아니라 양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유럽국가 전체에게 크나큰 안보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43) 우크라이나는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체제전환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극대화하기 위해 독 립선언과 동시에 핵무기 포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크라프축의 성급한 핵포기 선언을 비판하면서 영내의 38) Ian Brezezinski, The Geopolitical Dimension, The National Interest, Vol. 27, (Spring 1992), p. 50. 39) John W. R. Lepingwell, op. cit., p. 50. 40) Bohdan Nahaylo, The Massandra Summit and Ukraine, RFE/RL Research Report, Vol. 2, no. 37 (September 17, 1993). pp. 3-4. 41) 세계일보, 1996년 8월 14일자. 42) Ustina Markus, Another Agreement on the Black Sea Fleet, Jane's Intelligence Review (December, 1996), pp. 531-532. 43)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전략핵탄두가 장착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1272기, 전술핵 미사일 2500개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우크라이나 국방부 설명 참조. http://www.mil.gov.ua (2011년 2월 21 일 검색). - 48 -
핵무기를 국가안보를 위한 안전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러시아의 크리미아 반도 환수 움직임과 흑해함대 소유권 주장 공세에 핵무기 보유 주장은 강력한 협상카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정치 지도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의 우려를 이해하면서도 핵무기를 러시아로 양도하고 서구와 러시아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지원과 분명한 안 전보장을 약속받는 실리적 전략을 추구했다. 44) 크라프축 대통령은 마산드라 협상을 통해 핵무기를 러시아로 완전하게 이전시키고 그 대 가로 핵발전용 연료를 공급받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핵무기에서 추출된 농축 우라늄은 미 국이 구매하는 형식으로 우크라이나에 현금 지원을 하게 되었다. 1994년 1월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미국과 더불어 삼자협정을 체결하여 핵무기 이전과 경제적 지원 그리 고 국가 안전보장을 약속받았다. 1994년 7월에 출범한 쿠츠마 정부는 삼자협정에서 합의된 경제적 지원과 국가 안전보장 약속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모든 핵탄두를 러시아로 이송하고 관련 시설을 해체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1996년 5월 우크라이나 영내의 모든 핵탄두가 러 시아로 이송되었으며 7월에는 모든 미사일과 사일로가 해체되어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완 결되었다. 45) 우크라이나는 영내에 주둔하던 소연방 군대의 편제를 계승하여 신속하게 독자적인 군대 를 창설하는 과정을 마무리했다. 특히 창군 과정에서 흑해함대 분할과 핵무기 이전과 해체 협상을 성공적으로 매듭지음으로서 러시아와 미국으로부터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동 시에 크리미아를 비롯한 분리주의 움직임이 강한 자국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통합 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독자군 창설과정이 개혁적이고 성공적이었다는 평가 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크라이나의 국방부는 군사( 軍 史 )에서 독자군 창설과 발전의 기초가 흑해함대 분할 및 비핵화가 마무리된 1996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46) 그 이후인 1997년부터 현재까지는 우크라이나 군대의 2단계 발전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군 조직의 세분화와 감 축 그리고 발전이 목표이다. 더불어 2001년부터는 제3단계의 발전이 추진되는데 군개혁과 무기체계 현대화, 군사교육을 통한 전문화와 군비감축 등이 주요 목표로 상정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우크라이나 국방안보전략은 방어적이다. 47) 따라서 러시아를 비롯한 그 어떤 국가라도 명시적 적국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군은 국가안보, 즉 주권수호와 영 토적 통합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적정 규모의 전력만 유지할 뿐이다. 더불어 집단안보에 편승하려는 동기에서 우크라이나는 나토(NATO) 회원국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그 러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독립국가연합 내의 집단안보조약(CSTO)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48) 이 연구에서는 독자군 창설에 관한 내용만 다루기로 한다. 44) Nicholas. S. H. Krawciw, op. cit., pp. 145-146. 45) 정형균, 앞의 논문, 77-78쪽. 46) 우크라이나 국방부 web-site 참조 http://www.mil.gov.ua (2011년 2월 17일 검색) 47) 국방부 홈페이지에는 2005년부터 매해 우크라이나 군 국방백서를 게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에 대한 자 세한 내용은 국방백서를 참조할 것. http://www.mil.gov.ua/index.php?part=white_book&lang=en (2011년 2 월 22일 검색). 48)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2009년 대선 유세과정에서 나토가입 노력 중단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2010년 6월 3 일 최고회의는 투표를 통해 나토가입 포기를 확정하였다. 그러나 CSTO 가입 움직임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향신문 2010년 6월 4일자. - 49 -
Ⅳ. 국민적 통합성 형성 우크라이나는 120개가 넘는 민족 혹은 인종집단이 하나의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어 유럽 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을 가진 국가 중의 하나이다. 독립 당시 총 인구 수는 5천 2백만 명 에 육박했는데 이 가운데 우크라이나인이 37,419,000명으로 72.7%, 러시아인이 11,358,000명으로 22.1%를 차지했다. 49) 이 밖에 소수계 인종으로 유태인, 폴란드인, 벨라 루스인, 몰도바인, 불가리아인,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그리스인, 크리미아 따따르인 등을 합 하여 2,677,000명으로 전체 인구구성비의 5% 정도가 되었다. 50) 인구통계 누적자료를 살펴 보면 소연방에서 인종적 경계를 허물기 위해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강제이주와 혼혼장려, 러 시아화 정책 등이 우크라이나의 인구구성비에 미친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1959년 우크라 이나에 거주하던 러시아인은 7,090,000명으로 당시 전체 인구 대비 16.9%에 머물렀으나 1989년에는 러시아인의 수가 60% 이상 증가하여 전체 인구 대비 22.1%를 차지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은 주로 중 동부 및 남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우크라이나는 동 남부와 서부가 지역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양극적 대립구도를 지니고 있다. 51) 동부 및 크리미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산업화 수준이 높은 편이 며 이 지역 우크라이나인들은 일상어로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 문화적으 로 러시아와 보다 높은 동질성과 연대감을 갖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미래전략도 러시아와 결부시켜 설계하고자 한다. 반면 서부 지역은 산업화 정도가 미미하며 이 지역 우크라이나 인들은 우크라이나어를 일상어로 사용한다. 그들은 역사 문화적으로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 아 등 중 동부유럽 국가들과 보다 높은 동질성과 연대감을 갖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미래 전략도 유럽연합 및 나토와 연대하는 유럽지향적인 성향을 보인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의 뚜렷한 지역균열 양상은 비단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내정책과 대외관계, 정치 경제와 사회 문화 등 모든 정책결정에 있어서 갈등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원 인으로 작동한다. 언어문제의 경우,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는 크리미아를 제외한 영토의 모든 지역에서 우 크라이나인이 인종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전체 우크라이나인 1/3 이상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였다. 당연히 동부와 남부지역은 러시아어 사용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52) 우 크라이나는 헌법에 국가의 유일한 공식언어로 우크라이나어를 규정하고 러시아어 사용자들 을 언어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성과는 미미한 형편이다. 몇 가 지 통계자료를 보면, 53) 2001년 공식 인구통계조사에서 우크라이나인 가운데 러시아어를 모 국어로 사용하는 인구가 14,273,000명으로 여전히 전체인구의 29.3%를 차지했다. 이들 러 시아어 사용인구 가운데 인종적 러시아인은 56%정도 이고 그 밖에 우크라이나인 5,545,000명, 벨라루스인 172,000명, 유태인 86,000명, 그리스인 81,000명, 불가리아인 49) 자세한 내용은 고재남, 구소련 지역 민족분쟁의 해부 (마산: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6), 39-40쪽. 50) 한편 독립을 전후한 시기에 재외거주 우크라이나인의 수는 구 소연방 지역에 6,767,000명, 미국 750,000명, 캐나다 700,000명, 브라질 200,000명, 폴란드 250,000명 정도가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영국과 호주 등 해외 거주 우크라이나인의 분포는 매우 넓으며 이들은 거주 국가에서 우크라이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Adrian Karatnycky, "The Ukraine Factor," Foreign Affairs, Vol. 71, no. 3 (Summer 1992), p. 106. 51) Olesia Oleshko, "In Search of Ukraine's Identity," The New Presence (Summer 2009), p. 30. 52) Denis J. B. and Michael J. Bradshaw, "Problems of Ukrainian Independence," Post-Soviet Geography, Vol. 33, no.1 (January 1992), p. 11. 53)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_language_in_ukraine (2011년 3월 11일 검색). - 50 -
62,000명, 몰도바인 46,000명, 타타르인과 아르메니아인 각 43,000명, 폴란드인 22,000명, 독일인 21,000명, 크리미아 따따르인 15,000명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2004년 키예프 국 제사회학연구소 (Kiev International Sociology Institute)의 조사에 의하면 가정에서 러시아 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는 국가의 공식 인구통계조사에서 러시아어가 모국어라고 밝힌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이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43%-46% 정도가 가정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우크라이나어 사용자와 맞먹는 비율이다. 따라서 언어문제는 우크라이나의 국민적 통합성 창출에 있어서 주요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에는 현재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러시아인 그리고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 등 세 가지 주요 언어집단이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는 지난 20년 간 우크라이나어의 보급확대를 통해 민족주 의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국민적 통합성을 확보하려는 정책을 유지해왔다. 54) 이에 대하여 러 시아어 사용자들은 지속적으로 러시아어를 우크라이나어와 더불어 국가의 공식언어로 만들 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사용인구는 유럽에서 국가로부터 자신들 의 사용언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인구집단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또한 러시 아연방 입장에서 볼 때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사용인구는 재외거주 러시아인 및 러시아 어 사용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러시아어 공동체에 해당한다. 우크라이나는 유럽헌장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는 원칙과 재외동포 권익수호에 적극적인 러시아연방의 정책 등을 고려할 때 보다 유연하고 개방적인 언어정책으로 선회하는 것이 국민적 통합성 제고에 유리 할 것으로 보인다. 55) 분명한 것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우크라이나의 정치 사회적 균열이 국가의 통 합성을 훼손할 만큼 위험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우크라이나는 국가가 갖추어야할 핵심적 기능인 폭력수단에 대한 독점적 통제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56) 실 제로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선언 직후 곧바로 영토적 통합성을 훼손할 목적으로 활동하 는 모든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 엄격한 법률을 제정한 바 있다. 57) 따라서 러시아화 정도가 가장 심한 크리미아도 자치공화국의 지위를 갖고 있으나 단일 공화국 체제를 지향하는 헌정 질서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크리미아 지역의 분리주의 움직임이 간혹 위험 수위를 넘어선 적도 있으나 독립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통합성을 훼손할 만큼 극단 화되지는 않았다. 이해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이 문제를 법적 테두리 내에서 잘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국민국가가 등장한 것은 중산층의 성장이 시민권 확보로 귀결된 결과였다. 말 하자면 상인과 공장주, 일정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와 자영농 등이 시민으로서의 정 54) 홍석우, 앞의 글, 122-123쪽. 55) 2005년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지대 3개 도시-수미(Sumy), 하리코프(Kharikiv), 루한스크(Luhans'k)-에서 현 지조사를 통해 밝혀낸 한 연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정치 사회적 균열구조는 우크라이나어 대 러시아어 혹 은 동 남부 지역 대 서부지역이라는 단순한 대립구조가 아니다.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어 사용자들은 자 신들이 러시아와 언어, 역사, 문화적으로 전통을 공유해온 다양성을 존중받게 되면 우크라이나 국민으로서 국 민적 통합성 형성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려는 인식과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러시아와의 재통합을 꿈꾸는 분리주의자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Peter Rodgers, "Understanding Regionalism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in Ukraine's Eastern Borderlands," Nationalities Papers, Vol. 34, no. 2 (May 2006), pp. 157-174. 56) BTI 2010 "Ukraine Country Report," http://www.bertelsmann-transformation-index.de/ukraine.pdf (2011년 3월 16일 검색). 57) Taras Kuzio and Andrew Wilson, Ukraine: Perestroika to Independence (Hampshire: MacMillan, 1994), p. 191. - 51 -
치적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과 희생으로 빚어낸 결과물이 국민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시민권은 소연방 해체라는 외생변인이 초래한 뜻밖의 선물이었다. 우 크라이나는 소연방 해체 당시 영토 내의 모든 거주 등록자들에게 민족 혹은 인종적 배경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시민권을 부여 (zero citizenship principle)하여 우크라이나 국민으 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모든 우크라이나 시민은 국민으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러시아 측의 이중시민권 부여 정책은 거부함으로써 국민적 통합성 유지 의 목표와 방향을 명확히 하였다. 독립의 초기 단계에서 루흐(Rukh)는 이와 같은 다문화적, 포용적 시민사회의 창조를 위한 개념과 원칙을 만들어 이를 우크라이나의 국민운동으로 세 력화시켜내는데 성공하였다. 58) Ⅴ. 결론 금년은 탈소비에트 체제전환 국가들의 독립국 건설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크라이나는 여타 소연방 계승국가에 견주어 볼 때 훨씬 안정적인 체제전환과 발전의 기대를 받았던 국 가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국가건설의 기본 바탕인 헌법을 만드는데 가장 뒤늦었으며 선 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는 가장 먼저 이룩한 국가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의 군대창설 과정은 국내외 다양한 행위자들의 지원과 신뢰 속에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우크 라이나는 국가로서 폭력수단의 독점적 지배와 운용의 원칙을 비교적 신속, 용이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국민적 통합성 구축과정은 여전히 많은 난관에 봉착해 있는 형국이 다. 우크라이나는 국민형성의 이상으로 영토 내의 모든 인민을 아우르는 공민(civic territorial)적 개념의 열린 민족주의를 제시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정체 성에 경도된 인종적 민족주의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국가의 공식언어로 우크라이나어 하나 만을 지정한 점은 이를 뒷받침할 전형적인 논거라 하겠다. 그 결과 동부와 남부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러시아어 사용자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적 기반과 정체성을 위협하여 통합 성 창출을 방해하고 정치불안을 조장하였다. 도쿄경제대학의 서경식 교수는 모어(Mother tongue)와 모국어(Native language)를 개 념적으로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모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에 익힘으로써 무자각인 채 로 자신 속에 생겨버린 언어, 일단 몸에 익히면 그 다음부터는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 언어 이다. 반면 모국어는 국가가 정하는 것,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주입하고 국민을 만들어가 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언어이다. 그런데 모어와 모국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국어를 강요하 는 것은 언어 내셔널리즘 이며 이것은 강고한 배타적 내셔널리즘의 강고한 기반이라는 것 이다. 59) 서 교수의 주장을 우크라이나의 언어정책에 대입시켜 보면 우크라이나의 단일언어 정책이 지닌 편협하고 폭력적인 민족주의 의식의 소산임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개헌논의가 진행 중일만큼 정치적 제도화 수준이 낮고 부정 부패가 만연하며 민주화 수준도 낮은 형편이다. 그만큼 국가성 모색이 쉽지 않은 것이다. 58) Serhiy Tolstov, "Dimensions of Inter-ethnic Relations in Ukraine," The Ukraine Review, Vol. 40, no. 2 (Summer 1993), p. 29. 59) 서경식 지음, 언어의 감옥에서, 권혁태 옮김, (서울: 돌베개, 2011), 33-34쪽; 한겨레 21, 2011.4.11. (제855호), 90-91쪽. - 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