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상 별책 제3권 제22호 철학 텍스트들의 내용 분석에 의거한 디지털 지식자원 구축을 위한 기초적 연구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신 상 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발 간 사 편집위원 : 백종현(위원장) 이태수 심재룡 김남두 김영정 허남진 윤선구(주간)
발 간 사 2002년 8월부터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지원 아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철학문헌정보센터 전임연구팀이 수 행하고 있는 <철학 텍스트들의 내용 분석에 의거한 디지털 지식 자원 구축을 위한 기초적 연구>의 1차 년도 연구 결실을 지난해 에 철학사상 별책 제2권 전14호로 묶어낸 데 이어, 이제 제2 차 년도 연구결과 총서를 별책 제3권으로 엮어 내며, 아울러 제2 권 몇몇 호의 보정판을 함께 펴낸다. 박사 전임연구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서울대학교 철학사상 연구소 철학문헌정보센터의 연구팀은 우리 사회 문화 형성에 크 게 영향을 미친 동서양 주요 철학 문헌들의 내용을, 근간 개념들 과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해설해 나가는 한편, 철학 지식 지도를 작성하고 있다. 우리 연구팀은 이 작업의 일차적 성과물로서 이 연구 총서를 펴냄과 아울러, 이것 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여러 서양어 또는 한문으로 쓰여진 철 학 고전의 텍스트들을 한국어 표준 판본이 확보되는 대로 이를 디지털화하여 상식인에서부터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각자 의 수준과 필요에 따라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연구 작업은 오늘날의 지식 정보 사회에 있어 철학이 지식 산업과 지식 경제의 토대가 되는 디지털 지식 자원을 생산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초 연구라 할 것이다. 우리 연구팀은 장시간의 논의 과정을 거쳐 중요한 동서양의 철 학 고전들을 선정하고 이를 전문 연구가가 나누어 맡아, 우선 각 자가 분담한 저작의 개요를 작성하고 이어서 저작의 골격을 이루
는 중심 개념들과 연관 개념들의 관계를 밝혀 개념위계도를 만든 후, 그 틀에 맞춰 주요 개념들의 의미를 상술했다. 이 같은 문헌 분석 작업만으로써도 대표적인 철학 저술의 독해 작업은 완료되 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획 사업은 이에서 더 나아가 이 작업의 성과물을 디지털화된 철학 텍스트들에 접목시켜 누구나 각자의 수준에서 철학 고전의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대표적인 것으로 꼽는 철학 고전들은 모두 외국어나 한 문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이를 지식 자원으로서 누구나 활용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에 앞서 현대 한국어로의 번역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적절한 한국어 번역이 아직 없 는 경우에도 원전의 사상을 이루는 개념 체계를 소상히 안다면 원전에 대한 접근과 이용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우리 연구 작 업의 성과는 우선은 이를 위해 활용될 수 있을 것이고, 더욱이는 장차 한국어 철학 텍스트들이 확보되면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 기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 공동 연구 사업의 성과물이 인류 사회 문화의 교류를 증진시켜 사람들 사이의 이해를 높이고, 한국 사회 철학 문화 향상에도 이바지하는 바 있기를 바란다. 2004년 5월 25일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철학문헌정보센터 센터장 철학 텍스트들의 내용 분석에 의거한 디지털 지식 자원 구축을 위한 기초적 연구 연구책임자 백 종 현
철학사상 별책 제3권 제22호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신 상 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머리말 20세기 영미 철학계의 슈퍼스타는 누가 뭐래도 비트겐슈타인이 다. 철학적 탐구 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 유고작으로서, 명실 공 히 그의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탐구 는 철 학적 작업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언 어 철학과 심리 철학의 여러 논의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 으며, 거기서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논의되고 있다. 말하자면, 탐구 는 단순히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저작일 뿐만 아니라, 아직도 새로운 해석과 끊임없는 문제 제기의 원천으로서 살아 있는 이 시대의 고전이다. 이는 탐구 에 대한 새로운 주석서가 최근 몇 년 사이에도 끊임없이 출간되고 있는 것 을 보아도 분명하다. 현대 영미 철학자들의 문제 의식이 무엇이며, 이들이 도대체 어떠한 작업을 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싶은 철학 도라면, 탐구 는 꼭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다. 본 연구서는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에서 주관한 철학 텍스트들의 내용 분석에 의거한 디지털 지식 자원 구축을 위한 기초적 연구 의 일 환으로 연구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 연구에 동참하게 된 필자 는,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을 넘는 심정으로 탐구 의 핵심적인 주장과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려고 노력하였 다. 그런 점에서, 이 연구서는 탐구 에 대한 새로운 정보나 전문 적인 논의를 제공할 목적이 아니라, 필자와 같이 탐구 에 본격 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은 비전문가들을 위한 입문서이다. 인터넷을 이용한 디지털 지식 자원 구축의 일환으로 진행된 연 구였기에, 충실한 연구 결과를 내어 놓기엔 일정이 너무나 촉박
하였다. 내용도 부족하고, 군데군데 틀린 부분도 있을 것이라 짐 작된다. 이제 탐구 라는 산을 정복하기 위한 하나의 조그만 봉 우리를 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 로 어떤 형태로든 보완과 수정을 해 나갈 것을 약속한다. 연구를 진행하는 중에 여러 가지 조언과 도움을 준 김영건 박사, 백승영 박사, 석기용 선생에게 감사를 드린다. 2004년 6월 10일 교하 목동리에서 신 상 규
목 차 제1부 철학적 탐구 의 저자 및 작품 해제 1 Ⅰ.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의 저작 1 Ⅱ. 비트겐슈타인의 저술 목록 13 1. 영문으로 발간된 비트겐슈타인의 저술 목록 13 2. 비트겐슈타인 저술의 우리말 번역 14 Ⅲ. 철학적 탐구 의 세부 내용 목차 15 1. 논리철학논고 의 비판 1-133 15 2. 인식론적 개념, 지식과 이해 134-242 15 3. 감각 개념, 고통, 시각, 촉각 243-314 15 4. 심적 개념, 사유와 상상 315-430 16 5. 불만족스러운 심적 개념, 기대, 소망, 믿음, 의도, 의미, 의지 431-693 16 6. 단어 의미의 경험 16 Ⅳ. 철학적 탐구 의 해제 17 1. 탐구 라는 책 17 2. 논고 와의 관계 22 3. 철학의 본성 24 4. 언어와 의미 29
(1) 논고의 언어관 비판 29 (2) 사용과 언어 놀이 33 (3) 내적인 심리 과정으로서의 이해 개념 비판 35 (4) 규칙 따르기와 삶의 양식 37 5. 철학적 심리학 39 (1) 이원론의 극복 39 (2) 사적 언어와 심리적 언어의 문법 43 (3) 표현 행위로서의 통증 언어 46 (4) 타인의 마음의 문제 48 (5) 심리적 언어와 삶의 양식 50 제2부 지식 지도 53 Ⅰ. 철학 문헌, 철학자, 철학 용어 지식 지도 53 철학 문헌 : 철학적 탐구 53 철학자 : 비트겐슈타인 55 Ⅱ. 철학적 탐구 의 지식 지도 58 1. 철학 58 2. 언어 59 3. 철학적 심리학 61 제3부 철학적 탐구 의 주요 주제어 분석 65 1. 철학 65
1.1 철학의 본성 65 1.1.1. 철학의 문제의 성격 65 1.1.1.1. 언어의 오해와 오용 65 1.1.1.2. 언어적 오해의 원천 66 1.1.1.2.1. 일반성에 대한 열망 66 1.1.1.2.2. 문법적 혼란 66 1.1.1.2.3. 우리를 오도하는 언어의 그림 67 1.1.1.3. 철학적 문제의 반복성 68 1.1.2. 치유로서의 철학 69 1.2. 철학의 방법 70 1.2.1. 문법적 탐구 70 1.2.1.1. 치유와 해소 71 1.2.1.2. 철학적 문제의 깊음 72 1.2.2. 기술과 설명 73 1.2.2.1. 기술로서의 철학 73 1.2.2.2. 경험적, 가설적 접근의 부당성 74 1.2.2.3.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들 75 2. 언어 76 2.1. 의미 76 2.1.1. 아우구스티누스(논고)의 언어관 비판 76 2.1.1.1. 왜 아우구스티누스인가? 76
2.1.1.2.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미론 77 2.1.1.3. 의미의 본질주의 78 2.1.1.3.1. 논고의 언어관 79 2.1.1.3.2. 본질주의 비판 81 2.1.1.3. 언어의 비지시적 사용 82 2.1.1.4. 가상의 원초적 언어 83 2.1.1.4.1. 원초적 언어의 지시적 가르침 84 2.1.1.4.2. 총체적 훈육으로서의 언어학습 85 2.1.2. 지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 86 2.1.2.1. 지시적 정의 비판 88 2.1.2.1.1. 지시적 정의의 부당한 단순화 88 2.1.2.1.2. 지시적 정의 비판 논변 88 2.1.2.2. 지시적 정의의 가능 조건 90 2.1.2.2.1. 체스 게임의 왕 에 대한 정의 91 2.1.2.2.2. 아우구스티누스적 설명의 순환성 91 2.1.2.3. 이름의 담지자와 그 의미 92 2.1.3. 사용 93 2.1.3.1. 언어의 다양성 93 2.1.3.1.1. 다양성의 무시 93 2.1.3.1.2. 언어적 표현의 다양성 94 2.1.3.1.3. 도구와 언어의 비교 94 2.1.3.1.3.1. 도구의 기능과 본질 94
2.1.3.1.3.2. 도구로서의 언어 95 2.1.3.1.4. 이론적 경향성에 대한 저항 96 2.1.3.2. 언어놀이 97 2.1.3.2.1. 놀이의 개념 98 2.1.3.2.2. 가족 유사성 99 2.1.3.2.3. 언어의 비본질주의 100 2.1.3.2.4. 다양한 언어 놀이들 100 2.1.3.2.5. 논리학자들의 언어 101 2.1.3.3. 사용으로서의 의미 102 2.2 이해 103 2.2.1. 심리적 과정으로서의 이해 비판 103 2.2.1.1. 이해에 있어서의 심리적인 것의 역할 104 2.2.1.2. 심리적 과정과 발화의 맥락 106 2.2.1.3. 지시적 정의와 심리적 과정 108 2.2.1.3.1. 주의의 집중을 통한 지시적 정의 108 2.2.1.3.2. 동반하는 것과 전후를 둘러싼 맥락 110 2.2.1.3.3. 동일한 심리적 체험의 무용성 110 2.2.2. 이해와 사용 112 2.2.2.1. 심리적 영상과 이해 113 2.2.2.1.1. 심리적 영상의 적용 114 2.2.2.1.2. 영상의 적용과 의미 115 2.2.2.1.3. 투영방식을 포함한 영상 116
2.2.2.1.4. 그림과 적용의 충돌 117 2.2.2.2. 수열과 규칙 118 2.2.2.2.1. 규칙과 심리적 상태 119 2.2.2.3. 이해라는 개념의 문법 120 2.2.2.3.1. 이해의 개념과 경험적 개념들 121 2.2.2.3.2. 이해하다 와 할 수 있다 의 근친성 121 2.2.2.3.3. 언어의 의미나 이해는 심리적 과정이 아니다 122 2.2.2.3.4. 능력이나 기술의 터득으로서의 이해 123 2.2.3. 규칙 따르기 124 2.2.3.1. 규칙과 규칙의 적용 124 2.2.3.1.1. 규칙 파악의 표면적 문법 126 2.2.3.1.2. 적용으로부터 독립적인 규칙 126 2.2.3.1.3. 규칙은 과연 그 적용으로부터 독립적인가? 127 2.2.3.2. 관행과 규칙 따르기 128 2.2.3.2.1. 규칙 따르기에 대한 새로운 관점 128 2.2.3.2.2. 관행으로서의 규칙 따르기 129 2.2.3.2.3. 사적인 규칙 따르기의 불가능성 129 2.2.3.3. 규칙 따르기의 정당화 131 2.3 삶의 양식 131 2.3.1. 삶의 양식으로서의 언어 132 2.3.1.1. 언어 해석과 습득의 준거의 틀 132 2.3.1.2. 삶의 양식의 일치 133
2.3.1.2.1. 정의와 판단의 일치 134 2.3.1.2.2. 우리는 사자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134 2.3.2. 자연사와 삶의 양식 135 2.3.3. 문화적 개념으로서의 삶의 양식 137 2.3.4. 궁극적 정당화의 원천으로서의 삶의 양식 137 3. 철학적 심리학 138 3.1. 데카르트주의 비판 138 3.1.1. 심적 대상 138 3.1.2. 내적 경험의 확실성 139 3.2. 사적언어 141 3.2.1. 감각 개념 141 3.2.2. 사적 의미 142 3.2.2.1. 사적 의미의 불가해성 143 3.2.2.1.1.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 143 3.2.2.1.2.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의 기만성 144 3.2.3. 사적인 지시적 정의 145 3.2.3.1. 감각에 대한 사적 지시 146 3.2.3.2. 사적인 지시의 무용성 147 3.2.3.3. 사적인 규칙 준수의 정당화 148 3.2.3.4.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 149 3.2.4. 감각어의 의미에 있어서 사적 감각의 무용성 150
3.2.4.1. 상자속의 딱정벌레 150 3.2.4.2. 그림 속의 항아리 151 3.3. 표현과 기술 152 3.3.1. 감각어의 학습 152 3.3.2. 표현으로서의 감각어 153 3.3.3. 학습된 통증 행위 153 3.3.4. 심리적 언어의 공공성 154 3.4. 타인의 마음 문제 156 3.4.1. 타인의 마음 문제의 문법적 오류성 157 3.4.2. 타인의 마음은 추리의 대상이 아니다. 157 3.4.3. 타인의 마음의 확실성 158 3.4.4. 규준론적 행동주의 160 3.4.4.1. 일인칭과 삼인칭의 비대칭성 161 3.5. 심리적 언어와 삶의 양식 162 3.5.1. 사유와 고통의 주체 162 3.5.2.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 165 3.5.2.1. 영혼에 대한 태도 166 참고문헌 168 1) 국내 문헌 168 2) 번역본 168 3) 국외 문헌 169
일 러 두 기 이 책에 사용된 탐구 의 인용문은 기본적으로 이영철 교수가 번역한 철학적 탐구 (서광사, 1994)의 번역을 그대로 사용하였 고, 필요에 따라 약간의 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 탐구 의 페이지 표기는, 1부의 경우 원문에 표기된 절 번호 를 표시하였고, 2부와 그 외 부분은 페이지 번호로 표시하였다. 2부의 페이지 번호에서 앞의 번호는 영문 번역본, 뒤의 번호는 한글 번역본의 해당 페이지 번호이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제1부 철학적 탐구 의 저자 및 작품 해제 Ⅰ.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저작 1999년 시사 주간지 타임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백 명의 인물을 선정하면서, 그 중의 한 명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이 름을 포함시켰다. 20세기에 활동했던 그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 서, 과연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일부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가령, 그레일 링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영향력은 과대평가되었으며, 그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자신의 제자 군에 국한된다고 주장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분석철학의 논의만 보더라도, 이는 비트겐슈타인 적이기 보다는 프레게나 러셀의 노선에 훨씬 더 가깝다. 비트겐 슈타인이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될지, 아니면 당대에 있어서는 비록 엄청난 명성을 누렸지만 지 금은 거의 잊혀져 버린 프랑스의 근대 철학자 말브랑슈의 전철을 밟을지는 오랜 시간을 더 기다려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레일링의 조심스러운 평가이다.(Grayling, Wittgenstein, pp.112-133) 하 지만 20세기 영미 철학의 전개에 국한하여 말한다면, 비트겐슈타 인이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만은 분명하며, 철학적 저 작의 서술 양식이나 삶의 행로에 있어서도 여타의 철학자들과는 구분되는 매우 독보적인 면모를 보여 준 것이 사실이다. 비단 그 의 철학적 주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굴곡과 드라마로 점철된 그의 일생은 범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흥미로워 보 인다. 인간 비트겐슈타인은 탁월한 지적 통찰력과 고상함을 지니 고 있었지만, 동시에 매우 까다로운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처럼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보인다. 타임지와 같은 시사 잡지에서 20세기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아마도 그의 삶의 궤적이나 성 격, 저술의 양식에서 느껴지는 강인한 개성과 대가적인 풍모 때 문일지도 모르겠다.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우리말로 된 좋은 소개들이 이미 많이 출간되어 있다.(남기창 교수가 2권으로 나누어 번역한 레이 몽크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천재의 의무 가 그 대표적 인 책이다. 박병철 교수가 쓴 비트겐슈타인 의 1부에는, 비록 간략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간의 풍모를 파악하기에는 충 분할 정도로 그의 이력과 성품이 잘 정리되어 있다. 연도별로 비 트겐슈타인의 삶에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었는가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박교수 책의 말미에 제공되는 연보를 참조하면 된다. 이승종 교수의 비트겐슈타인이 살아있다면 에도 간략하게 잘 정리된 연보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이하에 소개되는 비트겐 슈타인의 생애에 대한 정리는 박병철 교수의 책을 주로 참조한 것이다.) 여기서는 주요 사건들과 저술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간략히 재구성해 보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 리아의 비엔나에서 유태계 철강 부호였던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 인과 어머니 레오폴디네 사이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 늘날로 말하자면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일종의 재벌 2세였던 셈이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음악, 미술 등 당대의 비엔나 문화 계에서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브람스나 말러, 브루노 발터 와 같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비트겐슈타인 저택의 저녁 식사 에 초대되어 연주를 하곤 했다. 비트겐슈타인가의 형제들은 특히 음악에 상당한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한스는 4세에 작곡을 시작할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셋 째 쿠르트는 첼로, 넷째 파울은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파울은 직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업 연주가로도 활동하였는데, 1차 세계 대전에서 오른팔을 잃게 된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파울을 위해 특 별히 작곡한 곡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또한 상당한 정도의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교향악 지휘자가 되려 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위 사람들과 제자들 앞에서 웬만 한 소나타 전곡을 휘파람만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많은 천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비트겐슈타인가의 자식들은 정 서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지 는 않다. 가장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큰형 한스는 사업가의 길을 강요하는 아버지 칼과의 불화 끝에 1902년 미국에 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루드비히의 나 이는 13세였다. 비트겐슈타인가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스가 자살하고 바로 2년 후에, 연극계에 몸담기를 원했던 둘째 루돌프도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어 베를린에서 자살을 하였고, 셋 째 쿠르트는 1918년 1차 대전의 와중에 전선에서 자살한다. 8명 의 형제, 자매 중에서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보통의 일은 아니다. 예술적 재능이 남달랐고 감수성이 매우 예민했을 이 들 형제들과,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 칼과의 불화 사이에서 이런 불행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을 것이라 추정해 볼 뿐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또한 평생 동안 끊임없이 자살의 충동 을 느꼈다고 하며, 그렇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지 않다. 루드비히는 집안에서 별다른 재능을 지니지 않은 평범한 아이로 여겨졌다. 당시 부유한 집안이 모두 그러했던 것처럼, 그 는 14세 때까지 정식 학교를 가는 대신에 가정교사로부터 교육 을 받았다. 14살이 되던 1903년,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린츠 에 있는 기술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린츠에서 생활하던 3년 동 안에도 루드비히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며, 성적도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중하위권에 머물렀고 교우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13살과 15 살이 되던 해에 두 형이 잇달아 목숨을 끊은데다가, 그 전에 한번 도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해 보지 않았던 루드비히가, 어떠한 학 창 생활을 보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 실은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히틀러가 린츠에서 같은 기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학년이 달랐고, 서로 접촉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17세가 되던 1906년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그 기술 전문대학으로 진학하여 기계 공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거 기서 2년의 학업을 마친 후,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 대학에서 항공 공학을 전공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 요하게 작용한 요소는 그의 자발적인 선택보다는 아버지의 강압 이나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 19세가 되 던 해, 영국으로 건너온 루드비히는 비행기 엔진이나 프로펠러의 설계에 대한 연구에 3년이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그 는 수학의 기초에 관한 러셀과 프레게의 책을 읽게 되고, 점차 수 학의 기초론, 수리 철학, 논리학 등으로 관심을 전환하게 된다. 1911년 여름, 그는 독일의 예나에 있던 프레게를 찾아갔다. 그리 고 프레게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러셀에게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 였다. 1911년 가을, 비트겐슈타인은 드디어 러셀을 만나게 된다. 비 트겐슈타인은 대략 1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케임브리지에서 러 셀과 함께 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었 다고 한다. 케임브리지에서 한 학기를 마친 비트겐슈타인이, 아직 도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채, 자신에게 철학자로서의 재 능이 있는지를 러셀에게 물었다. 만일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면 철학을 계속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행기 조종사가 되겠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는 것이었다. 러셀은 방학 동안에 한편의 글을 써올 것을 요구하 였고, 비트겐슈타인은 방학이 끝난 이듬해 1월에 그 글을 제출하 였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과장이 섞인 이야기이겠지만, 비트겐슈타 인이 써온 글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러셀은 이렇게 외쳤다고 한 다. 자네는 절대로 비행사가 되어는 안 되네! 러셀로부터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은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철학 으로 완전히 진로를 정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대단히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려 주는 이 시기의 또 다른 일화 한 토막 을 러셀의 자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셀의 자서전에서 이 무 렵의 비트겐슈타인은, 천재성이 번득이며 열정으로 가득 찬, 그렇 지만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불안정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로 묘사 되어 있다. 그는 매우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인 다혈질의 성격을 지 니고 있었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엄격하였다. 그 리고 러셀과의 만남 이후 비록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우울 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러셀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 은 자정이 넘은 시간에 러셀의 집을 불쑥 찾아와선 아무런 말도 없이 거실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고 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 이 자살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차마 그를 집 바깥으로 내쫓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듯 이,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의 관계는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 제지간은 아니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이 알고 있는 가 장 완벽한 천재의 사례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천재성과 광기가 교차하는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제자였음 에 틀림없다. 러셀은 1913년 자신이 집필해 오던 지식론에 관한 저작의 일부를 비트겐슈타인에게 보여 주었고, 그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자 급기야 책의 집필을 중단하기도 한다. 몇 번의 굴곡 을 거친 후에, 1922년 이후 이들의 인간적인 관계는 단절되었다.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24세가 되던 해인 1913년,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이 사망하 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상속받은 재산의 일부를 오스트리아의 예 술가들에게 기부하였다. 이 해에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에 관한 노트 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10월경에는 케임브리지를 떠나 노르 웨이로 이주하였고,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이듬해 여름 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914년 겨울에는 당시 케임브리지의 철학 교수였던 무어를 노르웨이의 오두막에 초대하여, 논리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받아 적게 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글을 자신의 학사 학위 논문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학교 당국은 적절한 형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논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한 다. 이 과정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단순한 연락책의 역할만을 수행 했던 무어에게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으며 절교를 선언하였 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트겐슈타인은 무어에게 화해의 편지를 보냈지만, 무어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그 후 15 년이 흐른 다음,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던 기 차간에서 우연히 만나 예전의 친분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로서의 무어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현재 이들은 케임브리지의 성 가일스 교회 묘지에 나란히 묻혀 있 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 아 군대에 자원 입대한다. 탈장으로 인하여 이미 면제 판정을 받 은 상태였지만,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개 선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해 9월, 파리의 교통사 고 재판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언어의 그림 이론에 대한 착상 을 하였다. 1916년, 그는 자신이 희망한대로 러시아 전선의 최전 방 관측소에 배치되었고,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체험한다. 그리 고 전투 중의 공로로 훈장을 받았고, 소위로 진급하여 장교가 되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었다. 그는 이러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자신의 체험과 함께 철학 적 생각들을 기록해 나가고 있었다. 29세가 되던 1918년 여름, 휴가 중이던 오스트리아의 할레인에서 자신의 종군 노트를 바탕 으로 그는 마침내 논리철학논고 를 완성하였다. 같은 해 10월, 둘째형 쿠르트가 군대에서 총으로 자살을 하였고, 11월에 비트겐 슈타인은 휴전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전쟁 포로가 된다. 논고 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논고 를 집필한 후 비트겐 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고, 그런 만큼 그는 철학을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1919년 포로 수용소에 서 석방된 그는,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정리한 다음, 초등학교 교 사가 되려고 사범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실제로 1920년에서 26년까지 오스트리아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의 교사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때로는 체 별도 불사할 만큼 아동들의 학력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다. 초등학생용 철자 사전도 손수 만들었고, 정해 진 수업시간을 넘겨가며 가르칠 정도로 열심이었지만, 그의 이러 한 열정은 거의 일방통행으로 흘렀던 것 같다. 방과 후 부모의 일 을 도와야만 하는 산간 마을의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비트겐슈 타인은 결코 환영받는 선생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러셀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마을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 1/4은 동물이 고, 3/4만 인간이라고 쓰고 있다. 1926년, 체벌 중에 한 학생이 쓰러지는 사고로 인하여 비트겐슈타인은 교직을 떠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가톨릭 수사가 되려고 시도했지만, 동기가 적절치 못하 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잠시 동안 휘텔도 르프 외곽의 한 수도원에서 정원사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1928 년까지 누이 그레틀이 새로 짓는 저택의 건축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이 저택은 일체의 불필요한 장식이나 치장을 배격한 건축물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로, 그의 누이는 이 건물을 가리켜 논리를 구현한 저택, 신들을 위한 숙소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은 이 건물 은 한때 해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베른하르트 레이터너라 는 건축가의 노력에 힘입어 지금까지 원래의 그 자리에 남아 있 게 되었다. 현재 이 건물은 불가리아 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케임브리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고, 그의 친구였던 경제학자 케인스와 램지 등이 그의 복귀를 추진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1920년 초 결성된 비 엔나 서클의 사람들과도 교류하게 된다. 슐릭과 바이즈만이 비트 겐슈타인과 교분이 두터웠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비엔나 서클 사람들과 램지 등 일련의 철학자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비트겐슈 타인은 점차 자신의 전기 견해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함을 깨달았다. 드디어 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케인스의 영접 을 받으며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이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무어를 우연히 만나 예 전의 우정을 회복한다. 케임브리지에 돌아온 그의 최초 신분은 램지를 지도 교수로 하는 학생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케 임브리지의 스타였으며, 이내 논고 를 학위 논문으로 삼아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지도 교수는 램지였고, 러셀과 무어가 심사 위 원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대 초반 이후 이미 비트겐슈타인과의 개인적 관계가 단절되었던 러셀은 내 생애에 이렇게 불합리한 일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고 불편한 심기의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재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비트겐슈타인은, 박 사 학위를 받은 후 곧 바로 5년짜리 특별 연구원 자리를 신청하 게 되는데, 이때 샘플로 제출한 원고가 철학적 고찰 (Philosophical Remarks)의 일부이다. 특별 연구원이 된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에서 강의를 하게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된다. 그가 가르치는 과목은 한결같이 모두 철학 이라는 동일한 제목을 달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매우 특이 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강의안을 미리 준비해 오지 않았 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쥐어 짜내듯이 강의하 였다. 그의 강의는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다가도, 때때로 깊은 침묵 속에 빠져 들곤 하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으며, 참 을성 없이 쉽게 화를 내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강의는 주 로 소수의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폰 리히트가 전 하는 바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강의 중에 늘 친근한 얼굴들 을 보기를 원했고, 학기 중간이나 끝날 무렵에 새로운 학생들이 강의에 들어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이후 1929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기간 은, 일종의 전환기라 부를 수 있는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비트 겐슈타인은 강의와 더불어 방대한 양의 원고를 작성하였다. 이때 저술된 원고들에는 전기의 견해와 후기의 견해들이 부분적으로 공존하고 있는데, 이들 저작들을 통해서 우리는 논고 의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탐구 를 중심으로 하는 후기의 견해로 넘어가는지 추적할 수 있다. 전환기인 이 기간 동 안에 첫 번째로 쓴 원고가 사후에 철학적 고찰 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원고이다. 1932년까지 집필된 철학적 고찰 은, 검증의 개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실증주의자들과의 접촉이 비트겐 슈타인에게 끼친 영향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책에서는 논 고 의 그림 이론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후기 입장의 근간이 되는 사용으로서의 의미 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 다. 1932~1934년 사이에는 철학적 문법 (Philosophical Grammar)의 원고를 작성하는 기간이었다. 철학적 문법 은 명제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와 그것의 의미 (The Proposition and its Sense), 논리학과 수 학에 관하여 (On Logic and Mathematics)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 어 있다. 그리고 철학적 문법 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구술한 내용 이 바로 청색책 과 갈색책 이다.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구 술된 청색책 과 철학적 문법 의 전반부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 이 존재하며, 특히 이들 책에는 철학적 탐구 에 등장할 많은 내 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철학적 문법 의 첫 번째 부분은,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부호나 소리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는가의 문제 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이해는 우리의 머 리 속에서 진행되는 어떤 심적인 과정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인가 를 할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 고 있다. 탐구 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가족 유사성 의 개념 또한 철학적 문법 에 처음 등장하며, 청색책 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청색책 에서는,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부호나 소리에 생명을 불어 넣는 사용으로서의 의미 라는 개념이 보다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1934년과 1935년에 걸쳐 비트겐슈타인은 두 명의 학생들에게 갈색책 을 구술하였다. 갈색책 은 그 내용 이 탐구 와 매우 유사하여, 일종의 탐구 초안으로 간주될 수 있다. 갈색책 이후에 1930년대 중반 이래 써온 원고를 묶어서 책으로 출판하려 한 것이 철학적 탐구 이다. 비트겐슈타인은 1938년과 1944년 두 번에 걸쳐 케임브리지 대학의 출판부와 철 학적 탐구 의 출판을 위한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렀다. 하지만 비 트겐슈타인은 두 번 모두 자신의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 유로 출판을 포기하였다. 탐구 의 첫 번째 버전은 1936~39년, 두 번째 버전은 1942~44년 사이에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두 번의 출판 포기가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비트겐슈타인은 탐 구 의 수정과 보완 작업을 계속하였다. 사후에 출간되어 현재 우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리가 보고 있는 철학적 탐구 는 1945-49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 로 추정된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러시아를 향해 오랜 애착 을 가지고 있던 비트겐슈타인은, 1935년 집단 농장의 노동자가 되고자 러시아를 방문한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 대신에 모스크바 카잔 대학의 교수직을 제의받았다. 결국 그는 고민 끝에 영국으 로 다시 돌아온다. 케임브리지에서 특별 연구원 계약이 끝난 후, 비트겐슈타인은 1936년부터 37년까지 노르웨이에 머물면서 철 학적 탐구 의 집필에 몰두하였다. 1937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1938년에 영국 시민권을 신청하였고 이듬해 봄에 영 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1939년 비트겐슈타인은 무어의 후임으로 케임브리지의 정식 교수가 된다. 당시 비트겐슈타인이 무어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점에대해 커다란 이견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별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던 브로드(C. D. Broad)조 차 비트겐슈타인을 철학 교수직에 앉히지 않는 것은 아인슈타인 을 물리학 교수직에 앉히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고 말했다. 그러나 교수로서의 생활이 평온하게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아니 었다. 1941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대학을 떠나 폭격의 와중에 있던 가히 병원에서 자원 봉사자로 일한다. 전쟁 중에 대학에서 편하게 학생들이나 가르친다는 것은 정당치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1943년에는 뉴캐슬에 있는 병원의 실험실에서 실험 보조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1944년 비트겐슈타인은 대학으로 다시 돌아온다. 1946년에는 그 유명한 포퍼와의 부지깽이 사건이 있었다. 1946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이 회장으로 있던 케임브리지 대학 도덕 과학 클럽에 포퍼가 세미나 발표자로 초청이 되었다. 포퍼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가 실재한다 는 포퍼와 철학 적 문제란 언어적 유희에 불과하다 는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격렬 한 논쟁이 오갔으며, 비트겐슈타인이 포퍼에게 시뻘건 부지깽이 를 들어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다 러셀의 제지를 받은 비트 겐슈타인이 도망치듯 강연장을 빠져나갔다는 것이 이른바 비트 겐슈타인의 부지깽이 사건이다.[영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에 드먼즈와 존 에니디노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비트겐슈타인 과 포퍼 두 사람의 삶을 추적한 평전이 Wittgenstein's Poker 라 는 책이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은 왜?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 어 있다.] 이 이야기는 그 날 참석한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내용 이 약간씩 다르게 전해지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날 발표의 내 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비트겐슈타인이 도덕적 규범의 예를 하나 들어 보라고 질문하였고, 포퍼는 벽난로의 부지깽이를 만지 작거리고 있던 비트겐슈타인을 향하여 초청 연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않는 것 이라고 응수했다는 것이다. 이에 격분한 비트겐 슈타인이 손에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내팽개치며 밖으로 나갔다 는 것이 사건의 대략적인 전모이다. 어찌 되었거나 이 일화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지적인 결벽증에 빠져 있던, 오만하고 다혈질적인 비트겐슈타인 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 학교수로서의 생활은 그에게는 그렇게 편안하거나 행복했던 것 같지 않다. 그의 미국인 제자 노먼 멜컴의 이야기에 따르면, 비트 겐슈타인은 직업적인 철학자의 삶을 혐오하였으며, 정상적인 사 람이라면 대학 교수인 동시에 정직하고 진지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케임브리지의 경직되고 삭막 한 분위기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그는 넥타이를 매어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야 하는 교수 식당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케임브리지로 복 귀한지 3년만인 1947년, 비트겐슈타인은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 기 위하여 결국 대학 교수직을 사임한다. 대학 교수직을 사임한 비트겐슈타인은, 아일랜드 해변 가의 오 두막에 칩거하면서 집필에 몰두한다. 1949년에는 맬컴의 초청으 로 미국을 다녀왔으며, 노르웨이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때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암에 걸려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남아 있는 시간을 자신의 제자인 폰 리히트, 앤스콤, 리스 등을 만나기 위해 케임브리지, 런던, 옥스퍼드 등을 오가며 지내게 된다. 비트 겐슈타인은 생의 마지막 순간인 이 기간 동안에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그의 집필 작업은 죽기 이틀 전까지 계속 된다. 이때에 쓴 책이 확실성에 관하여 이다. 1951년 비트겐슈 타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돌봐 주던 의사, 베반 박사의 집 에서 멋진 삶을 살았다고 사람들에게 전해 달라 (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는 말을 남기고 62세의 나이로 사망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유고의 소유 및 처분권 을 세 명의 제자 폰 리히트, 앤스콤, 리스에게 넘겨주었다. Ⅱ. 비트겐슈타인의 저술 목록 1. 영문으로 발간된 비트겐슈타인의 저술 목록 Notebooks 1914-1916, ed. G. H. von Wright and G. E. M. Anscombe (Blackwell, 1961) Prototractatus (an early version of the Tractatus), ed. B. McGuinness, G. Nyberg, G. H. von Wright (Routledge & Kegan Paul, 1971)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Routledge & Kegan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Paul, 1922/1961) Philosophical Remarks, ed. R. Rhees (Blackwell, 1964) Philosophical Grammar, ed. R. Rhees (Blackwell, 1969) The Blue and Brown Books, ed. R. Rhees (Blackwell, 1958) Lecture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ed. C. Diamond (Harvester Press, 1976) Remark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ed. G. H. von Wright, R. Rhees, G. E. M. Anscombe (Blackwell 1956, revised ed. 1978)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ed. G. E. M. Anscombe and R. Rhees (Blackwell, 1953) Zettel,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 (Blackwell 1967, revised ed. 1981) Remarks on the Philosophyof Psychology, 2vols : vol 1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 vol 2 G. H. von Wright and G. Nyman (Blackwell, 1980) On Certainty, ed.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Blackwell, 1969) Culture and Value, trans. P. Winch, ed. G. H. von Wright (Blackwell, 1980) Philosophical Occasions : 1912-1951, edited by James Klagge and Alfred Nordmann (Indianapolis : Hackett, 1993) 2. 비트겐슈타인 저술의 우리말 번역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논리철학논고, 이영철 역, 천지, 1991. 철학적 탐구, 이영철 역, 서광사, 1994.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서광사, 1990. 문화와 가치, 이영철 역, 천지, 1998.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박정일 역, 서광사, 1997. Ⅲ. 철학적 탐구 의 세부 내용 목차 다음은 Judith Genova 가 탐구 의 전체적인 구조에 대한 개 략적인 목차를 정리한 A Map of the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이다.(Genova, J., Wittgenstein - A way of Seeing, Routledge, 1 995) 이 지도를 통하여 탐구가 어떠한 순 서로 되어 있고, 어떠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대강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1. 논리철학논고 의 비판 1~133 그림 이론 비판 1~59 언어적 분석의 목표와 전제 60~88 논리의 이상성 89~108 철학의 본성과 한계 109~133 2. 인식론적 개념, 지식과 이해 134~242 명제 134~142 이해 134~155 읽기 156~178 지식 179~184 규칙 따르기 185~24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3. 감각 개념, 고통, 시각, 촉각 243~314 어떤 의미에서 내 감각이 사적인가 243~255 시적 언어의 불가능성 256~314 규준과 정당화의 개념에 의한 논변 256~292 대상의 비적절성을 보여주는 논변, 상자 속의 딱정벌레 논변 29 3~ 314 4. 심적 개념, 사유와 상상 315~430 사유와 언어 행위 316~343 상상 가능성의 역할 344~366 이미지 367~402 인격적 동일성 403~411 의식 412~430 5. 불만족스러운 심적 개념, 기대, 소망, 믿음, 의도, 의미, 의지 431~693 기대 434~445 부정 446~8, 547~557 의미 449~68, 503~524, 558~70, 661~93. 정당화 466~502 이해 525~546 심적 과정은 상태인가 571~610 의지 611~630 의도 631~60 6. 단어 의미의 경험 보는 것과 무엇으로서 봄 XI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Ⅳ. 철학적 탐구 해제 1. 탐구 라는 책 익히 알려져 있듯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크게 전기와 후기 로 나누어진다. 전기 철학의 결정판이 논리철학논고 라면, 후기 철학은 바로 철학적 탐구 에 집약되어 있다. 철학적 탐구 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하고 발전시킨 생각들 을 담고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마치 일기를 쓰듯이 집필된 작품 인 만큼, 탐구 의 원고는 쓰고 지우고 또다시 쓰는 끊임없는 수 정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구 는 끝내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중에서 생전 에 출간된 책으로는 논고 가 유일하며, 여타의 저작은 모두 그 의 사후에 유고에 대한 저작권을 물려받은 제자들이 편집해 출간 한 것들이다. 생전의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유고작과는 달리 탐 구 만큼은 분명히 출판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1938년과 1943년에는 출판사의 승낙을 얻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원고에 만족할 수 없었던 비트겐슈타인은 끝내 출판을 포기하였 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탐구 는 1943년에 출판하려 했던 원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편집자들이 전하는 바 에 따르면 1부의 원고는 1945년경 마무리되었고, 2부의 원고는 1946년과 1949년 사이에 작성된 것이다. 1부의 원고는 비트겐슈 타인이 정리해 놓은 그대로이며, 2부는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인 리스(R. Rhees)와 앤스콤(G.E.M. Anscomb)이 유고를 바탕으로 편집한 것이다. 2부의 내용이 현재와 같은 순서로 정리되고 배열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된 것은 전적으로 편집자들의 선택과 책임이다. 철학적 탐구 는 거칠게 말해서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철학의 본성, 언어와 의미에 관한 이론, 마 음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심리학이 각각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부 89-133는 철학적 탐구의 본성, 1부 1-88, 134-242는 언어의 의미에 관한 이론, 1부 243-693와 2부는 마음과 심리학적 개념들에 대한 철학적 심리학의 논의로 채워져 있다. 본 해제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구도를 그대로 따를 것이다. 그런데, 탐구 를 이루고 있는 전체적 대강이 그렇다고 해서, 탐구 라는 책 자체가 이 세 가지의 주제를 따로 엄격하게 구분 하고 있다거나, 이들 주제들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적 서술로 이 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탐구 를 관통하고 있는 주요한 생각 중의 하나는 오히려 체계적 이론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부정이라 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탐구 를 이와 같이 세 가지 주제 들에 대한 이론으로 구분하여 요약하고 이해하는 것이 과연 탐 구 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인가에 대해 약간의 해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탐구 의 서술 방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서술 방식에서, 탐구 는 기존의 철학 책들에 비해 매우 파격적인 형 식을 취하고 있다. 주제의 중요성이나 그 연관 관계에 따라 장이 나 절로 분류되는 일반적인 서술 형식과는 달리, 탐구 는 잠언 과도 같은 일련의 생각들에 번호를 매겨서 쭉 나열해 놓은 형식 을 취하고 있다. 먼저 1부에는 1부터 693까지 번호가 붙어있는 일련의 절들이 아무런 제목도 없이 나열되어 있다. 2부는 크게 14개의 절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각의 절속에는 다시 짤막한 단 락들이 아무런 단서도 없이 배치되어 있다. 1부와 2부의 각 절이 나 단락들은 공히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묶여져 있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하지만, 각각의 단락들이 전제와 결론을 갖는 분명한 논증의 형태 를 띠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핵심적인 생각들은 책 전체 에 걸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명쾌한 결론 을 쉽게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일부의 구절들은 대화 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많은 경우 화자와 청자의 구분이 불분 명하고, 대화의 내용이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주장인지, 아니면 상 대방의 주장인지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탐구 에는 수 많은 유비와 가상의 예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때때로 이러한 예들 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도 쉽지가 않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요약 하거나 체계적으로 소개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 적하고 있다. 가령 비트켄슈타인의 제자 중 한 명인 노만 멜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요약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일 수도 없으며 유용하지도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생각을 더 이상의 압축이 불가능한 지점에까지 압축해 놓았 다. 필요한 것은 이것들을 다시 펼쳐 놓고, 그것들 간의 상관 관 계를 추적하는 일이다. (Grayling, Wittgenstein, p.v 에서 재인 용) 멜컴의 이러한 주장은 탐구 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 철학적 저술을 정리하여 소개하려면 어느 정도의 체 계화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파격적인 탐구 의 서술 방식을 고려 할 때, 그런 체계적 요약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두서 없고 산만한 탐구 의 비체계적 서술 방식은, 철학적 탐 구의 본성과 특징에 대한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면밀하게 의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탐 구 의 비트겐슈타인은 무엇보다도 체계로서의 철학을 부정하고 있다. 탐구 에 따르면 철학은 이론 구축을 통하여 문제의 해결 이나 설명을 꾀하는 작업이 아니다. 탐구 의 서문에서 비트겐슈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쓸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은 언제나 단지 철학적 소견으로서만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 만일 내가 나의 사고들을 그 자연스러운 경향 에 반하여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더 강요한다면 나의 사고들은 곧 절 름발이가 될 것이라는 것을.--그런데 이것은 물론 탐구 자체의 본성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탐구는 우리로 하여금 광대한 사고 영역 을 종횡무진으로, 모든 방향으로 편력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이 책의 철학적 소견들은 말하자면 이 길고 얽히고 설킨 여행에서 생겨난 다수의 풍경 스케치들이다.( 탐구, 머리말, p.vii/p.13)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탐구 에서 개진되고 있 는 철학적 논의들과 그것을 풀어가는 서술 방식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본질적인 연관성이다. 탐구 의 텍스트 속에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모호함과 산만함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결함이 아니 라,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고 있는 철학의 목적이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이 다. 마리 맥긴(Marie McGinn)은 탐구 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탐구 가 취하고 있는 이러한 서술 형식과 철학적 방법에 대한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언급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연관을 드러 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Marie McGinn, Wittgenstein and the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p.12]다른 한편으로, 그레일링 같은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비록 체계적 이론 으로서의 철학에 반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철학 자체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들이 체계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론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트겐슈 타인이 말한 것과 그것을 말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그의 후기 저작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 양식에 있어서 비체계적이라는 사실이 그 내용 또한 비체계적이라 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Grayling, op. cit., p. vi) 여기에 덧붙여, 그레일링은 비록 비트겐슈타인의 해석에 많은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저작에서 무엇 이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인가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 역시 이루 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심적인 부분들은 상호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레일링은 비트겐 슈타인의 저작 또한 다른 철학적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체 계적으로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러한 논쟁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용 어상의 분쟁으로 발전하기 쉽다. 가령,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중심 개념들을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것들이 과연 하나의 완결된 체계적 이론을 구성하고 있는지에 대 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이론 이라는 용어를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 다. 탐구 에 의하면 이론은 설명을 목표로 하는 작업이며, 설명 은 기술(description)과 대비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론은 새 로운 지식의 발견을 목표로 하는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 로 이해된다. 이 경우 탐구 에 포함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체계적 이론으로 부를 수 있는가의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 지엽적 인 문제 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론 의 의미를 그렇게 보고 있다면, 그의 생각이 그런 의미에서 이론 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공허한 주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 연구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그레일 링이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탐구 에 개진된 그의 생각을 체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단서이다. 탐구 에 대한 이 정도 분량의 주석서에서는, 이미 그 분량의 한계 때문에 어느 정도의 단순화와 어쩌면 왜곡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결 국 어떻게 하면, 그런 단순화와 왜곡을 최소화하면서도 탐구 에 포함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탐구 가 철학의 본성, 언어와 의미에 관한 이론, 마음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심리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다. 그리 고 여기에 포함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들을 그가 의도했던 것과 는 다른 의미에서 일종의 이론 으로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이에 따라 본 해제는 철학적 문제와 탐구의 본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 의 입장, 탐구 에 나타난 언어와 의미의 본성, 그리고 심리학적 개념들에 대한 철학적 심리학의 내용들을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2. 논고 와의 관계 비트겐슈타인은 탐구 의 머리말에서, 이 책에 논고 가 함께 포함되기를 바란다고 적고 있다. 4년 전에 나는 나의 최초의 저서 논리철학논고 를 다시 읽고 그 사 고들을 설명할 기회를 가졌다. 그때 나에게는 갑자기, 나는 그 옛 사고 들과 새로운 사고들을 함께 출판해야 한다고, 즉 후자는 오직 나의 옛 사고 방식의 배경 위에서 그것과 대조함에 의해서만 그 올바른 조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 ] 내가 다시 철학에 몰두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내가 저 첫 번째 책에 수록되었던 것 속에서 중대한 오류들 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탐구 머리말, p.viii/p.14) 탐구 는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논고 에 대한 반작용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를 완성한 후 자신이 철학의 주요 문제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을 모두 해결하였다고 공언하고 철학계를 떠난 바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래 비엔나 서클 사람들 그리고 프랭크 램지와 일련의 접촉을 거치면서 논고 에서 전개한 입장에 대한 확신이 점차 흔들리게 되었고, 급기야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입장 변화에 램지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해, 그는 위의 구절에 이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이 오류들을 깨닫는 데에는 내가 프랭크 램지(Frank Ramsey) 를 통해 경험한 비판이 나 스스로는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도움이 되었다.(그의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나는 그와 함께 나의 생각들을 수 많은 대화 속에서 토론했었다.)( 탐구 머리말, p.viii/p.14) 이러한 그의 고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탐구 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은 논고 에서 전개된 그의 철학이 어떠한 변화를 거쳐서 탐구 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 하였듯이 탐구 는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이래 일련의 과도기적 저작을 거친 다음,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 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사색하여 계속 된 수정과 보완을 거친 작품이다. 우리는 그의 과도기적 저작에 해당하는 철학적 의견, 철학적 문법, 청색책, 갈색책 에 서, 논고 의 저자가 논고 에서 펼쳤던 견해들을 어떻게 수정하 고 변화시켜 가는지,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떻게 새로운 중 심 개념들이 부상하는지 일련의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 고 그 최종적인 종착점이 바로 탐구 이다. 물론 이 책들 속에서, 변화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추적하는 것은 엄밀하고도 방대 한 연구를 필요로 하며, 여기서 간단히 논의할 수 있는 문제는 아 니다.(박병철 교수의 비트겐슈타인 이란 책에 전환기의 비트겐 슈타인 이란 독립된 절이 포함되어 있다.)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본 연구에서는 서술의 편의상 논고 와 탐구 를 연결시켜 주 는 근본적인 공통점 한 가지와 차이점 한 가지에 주목하고자 한 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철학 과 언어 이다. 논고 와 탐구 사이 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 는 방식이다. 이른바 그림 이론으로 알려진 논고 의 언어관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는 이름과 대상 간의 지시 관계, 명제와 사태 간의 대응에 입각한 단일한 논리를 통하여 작동한다. 탐구 의 핵 심적인 생각은 우리의 언어를 관통한다는 단일한 본질, 혹은 단일 한 논리에 대한 거부이다. 사용, 언어 놀이, 가족 유사성, 삶의 양식 과 같은 탐구 의 핵심적인 개념들은, 우리의 언어가 실제로 작동하는 다양한 방식과 논리를 해명하기 위한 개념들 이외에 다 름 아니다. 논고 에서 철저히 도외시되었던 심리학적 개념들에 대한 방대한 분석이 탐구 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결국 언어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에 힘입은 것이다. 탐구 가 비록 논고 와는 다른 새로운 사고 방식을 전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논고 에 포함된 모든 주장 을 포기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철학적 문 제의 성격이나 본성에 대한 입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기본적으 로, 철학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며, 철학은 언어 비판이라고 생 각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논고 의 내용과 탐구 의 주장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연속성과 유사성이 있으며, 이에 대한 그의 입장 이 어떤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고 볼만한 증거는 없다. 이제 탐 구 에 포함되어 있는 주요 개념들을 중심으로, 철학의 본성과 언 어와 의미에 대한 이해,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철학적 심리학 의 주장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3. 철학의 본성 논고 와 탐구 를 관통하는 주요 문제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도 바로 철학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다. 철학적 질문들의 본성 에 대한 이해와, 철학적 질문들에 올바로 접근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의 모색은, 비트겐슈타인의 일관된 관심사로 남아 있었다. 철 학의 정체성 문제는, 특히 수많은 경험 과학들이 등장하고, 한때 철학의 핵심 영역으로 여겨졌던 존재나 인식의 문제를 이제는 과 학의 영역에서 다루고자 할 때 가장 첨예하게 제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다루어 왔던 수많은 물음들은 이제 자연과학을 통하여 설명되고 해결된다. 과학은 눈부신 성장 과 축적을 거듭하면서 그 설명력과 효용성의 측면에서 타의 추종 을 불허하는 듯이 보인다. 반면에 철학은 어떠한가? 어떤 측면에 서 보면, 철학은 이미 2000년 전에 제기되었던 동일한 질문들을 앞에 놓고 아직도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학과 철 학의 성과에 대한 이러한 반추는 철학자들로 하여금,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한다. 과학과 철학 각각의 고유한 역할과 그 경계에 대한 고민은,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 보다도 20세기 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더욱 첨예하게 제기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20세기 를 살았던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대답을 내 놓은 철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은 경험 과학과 같이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과 예측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경험 과학의 기초를 이룬 다고도 할 수 있는, 우리의 언어에 대한 비판적 작업이다. 철학이 철저히 언어 비판의 작업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비단 논고 뿐만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아니라, 탐구 를 관통하고 있는 지배적인 주제 중의 하나였다. 논고 의 핵심적인 주장 중의 하나는 바로, 철학적 문제들은 우 리가 언어의 논리를 오해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이다. 논고 의 서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을 다 루고 있으며 내가 믿기로는 이 문제들이 제기되는 것은 우리 언 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 논고, p.3) 만일 철학적 문제라는 것이 우리 언어의 논리를 오해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 해결책 또한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그 오해의 덫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서 찾아 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4.0031) 모든 철학은 언어 비판 이다. (4.111) 철학은 자연 과학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4.112)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이 명료하게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자연과학(경험 과학)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이론을 구축하며,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철학은 그러한 목적을 가진 경험 과학의 하나가 아니다. 경험 과학들과는 달리, 철학의 목적은 어떤 새로운 진리를 발견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하여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철학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전통적인 철학의 개념 은, 모종의 진리에 대한 일반적 추구로 규정되는 인지적 작업이 다. 물리학이나 수학, 그리고 철학은 모두 모종의 앎, 즉 지식을 추구하는 작업이었고, 이들은 단지 그 탐구의 주제에 의하여 구 분될 뿐이었다. 해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플라톤주의자들에 따르면 철학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성격 을 드러내는 추상적인 대상을 [ ] 탐구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은 철학이 분과 학문과 연속선상에 있으며, 다만 얼마나 보편 적인가에 따라서 구분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철학 이 토대를 놓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이 할 일은 모든 앎을 확실하 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반위에 정초하는 것이었다. [ ] 영국의 경험 론자들은 관념들의 근원을 추적하고 앎의 본성과 범위를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 ] [칸트]에 따르면, 철학은 어떤 주어진 영역 에 관한 앎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을 밝히는 일이며, 철학이 내놓 은 결과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알 수 있으면서도 경험 영역에 관한 필 연적인 참을 진술한 일련의 명제들이어야 했다. 이와 같은 긴 전통 속에 서 공유된 믿음은 철학이 앎을 위한 노력이라는 것이다.(P.M.S. 해커, 전대호 역, 비트겐슈타인, pp.15-16)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자연과학의 한 분과가 아니며 자연과 학과 경쟁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주장을 통하여, 철학의 목적을 모종의 앎이나 지식의 추구로 파악해 온 철학사의 유구한 전통과 결별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적 문제의 원천과 그 성격, 그 리고 철학과 경험 과학의 차이에 대한 논고 의 이러한 규정은 탐구 에서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지된다. 즉, 탐구 에서도 철 학적인 난제들은 여전히 언어의 오용이나 그 본성에 대한 오해에 서 비롯된다고 주장되고 있다.( 38, 122, 132) 철학은 바로 언어 에 의해서 야기된 지성의 현혹에 맞선 투쟁인 것이다.( 109) 철학적 문제가 문법적 유사성에 의하여 논리적 차이가 가려짐으 로써 발생한 지성의 현혹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철학에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별로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우리가 과거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한, 우리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경 향성에 끊임없이 현혹될 것이며, 그 결과 동일한 문제가 반복적으로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11. 66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성에 대한 열망과 언어의 작동 방식에 대한 오 도된 그림 등을 들고 있다. 일반성에 대한 열망이라 함은 다양성 에서 통일을, 차이에서 동일성을, 다수에서 하나를 추구하려는 경 향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특정한 그림에 사로잡혀 있다.( 115) 여기서 그림이란 우리가 사고하는 어떤 특정한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즉 어떤 낱말의 의미를 생각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어떤 모형이나 패턴을 따라 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원인들이 야기한 철학적 문제 와 이론의 대표적인 예가 플라톤의 철학이다. 가령 우리는 수많 은 빨간 대상들을 접하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일반성의 열망 을 통하여, 이들에게 공통적인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그 리고 이러한 본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빨강이란 보편자를 생각하 고, 그 보편자를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개별적인 대상들의 그림에 맞추어 생각한다. 그리하여 빨강 은 비공간적, 비시간적 이지만 여전히 유사 물리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추상체를 가리킨 다는 주장이 따라 나오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우리의 언어적 경향성에 기인한 오도된 형 이상학 외에 다름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혼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철학적 질문 들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철학자들은 일종의 지성의 병에 걸린 환자들이며,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철학적 작업은 이러한 질병을 치료하는 치유적 작업이라 는 것이다. 그가 치료의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는 방법은 문법적 탐구이다. 여기서 문법은 우리 언어의 사용 및 그와 관련된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인 실천적 관행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통칭하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표현이다. 문법적 탐구는 기본적으로 철학적 혼란을 일으키는 여 러 낱말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는 다양한 양상 들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그러한 표현들이 가 지고 있는 심층적 문법들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문법적 탐구는 기술(description)의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그런 점에서 가 설적인 이론 구축을 통해 현상의 설명을 목표로 하는 경험 과학 의 방법과 대비된다.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철학은 경험 과학과 달리 새로운 정보나 진리의 발견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철학적 이론의 구성을 통하여 문제의 해결을 꾀하지도 않는다. 철학적 문제는 그 성격상 언어의 오해로부터 기인하는 것인 만큼, 그 오 해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해소된다. 따라서 철학은 곡해된 낱말 이나 개념들에게 원래의 쓰임새를 복원시켜 줌으로써, 철학적 문 제를 해소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4. 언어와 의미 (1) 논고의 언어관 비판 철학의 문제가 언어의 본성과 논리를 오해함으로써 발생한다는 주장은 논고 와 탐구 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바로 그 언어의 본성과 논리, 오해의 성격, 그리고 이에 대한 진 단과 처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제 논고 와 탐구 는 커다란 차이를 드러낸다. 탐구 의 언어관은 기본적으로 논고 에서 전 제한 언어 모형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논고 의 핵심 문제 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 세계를 표상하는 언어의 능력을 설 명하기 위한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세 계를 표상하고 이해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어떻게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언어를 사용하여 세계를 기술하고 가리킬 수 있는가? 언어가 세 계를 표상하려면, 세계와 언어는 각기 어떤 본성이나 구조를 가지 고 있어야만 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명제 와 사실의 유사성에 입각하여 의미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논고 에 따르면 명제는 세계의 사실에 대한 그림이며, 이러한 그림 관계는 바로 이름과 단순 대상의 지시 관계, 그리고 이름들 의 배열로 이루어진 요소 명제와 단순 대상들의 배열을 통하여 결정되는 원자적 사실의 대응 관계에 기초해 있다. 언어가 세계 를 표상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이상화된 요소 명제들의 시스 템과 원자 사실들의 시스템, 이 두 가지 사이에 성립하는 구조적 유사성 때문이다. 복합 명제의 경우, 그 진리치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에 의해 결정되며, 그 복합 명제를 구성하는 요소 명제 들이 원자 사실들과 일치하거나 혹은 불일치함에 따라서, 그 원 자 사실들의 결합인 복합 사실을 표상하게 된다. 결국 복합 명제 가 표상하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 명제들이 나타내는 사실 들 외에 다름 아니다. 탐구 의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한 논고 의 언어관은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논고 에서 전개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에는 일종의 본질로서의 단일한 논리가 우리의 언어를 지배하고 있다 는 생각이 깔려 있다. 논고 의 이른바 그림 이론에 따르면 언어 의 본질적인 기능은 사태를 기술 혹은 서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은 저 깊숙이 숨겨져 있으며, 분석적 방법을 통하여 꿰뚫어 보거나 파헤쳐 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언어에 대한 비트 겐슈타인의 이러한 태도는, 경외심이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 인가 등의 질문을 통하여 모든 개체적인 것들의 공통적 본질로 서의 이데아 세계에 다가서려고 했던 플라톤의 태도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부딪치는 많은 철학적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문제와 혼란은 일반성에 대한 갈망 에 사로잡힌 채 모든 개체적 인 것에 공통적인 어떤 보편적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에서 발생한 다. 가령, 아름다움 이라는 일반 명사의 경우, 아름답다 고 지칭 되는 모든 개체들은 어떤 공통적인 본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본질이 아름다움 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논 고 의 비트겐슈타인도 이 점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비트겐 슈타인은 명제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하여, 모든 명제를 관 통하는 하나의 일반적인 형식을 발견함으로써 언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이에 반해, 탐구 는 기본적으로 논고 에서 전제로 한 언어에 대한 단일한 이론적 모형의 가정을 포기하는 데서 출발한다. 탐 구 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에, 실제적인 구체적 사용의 맥락에서 각각의 표현들이 수행하고 있 는 다양한 역할에 주목하고, 이러한 언어의 사용이 우리의 비언 어적 활동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탐구 에 의하면, 우리의 언어는 다양한 언어적 활동들로 구성 된 복합체이다. 언어란 단일한 본질이나 논리를 통하여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다양한 논리를 따르는 실천적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표현의 의미는 단순히 그 표현이 가리키 는 대상이 아니라, 언어를 구성하는 다양한 실천적 맥락 속에서 그 표현의 사용을 통하여 결정된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에게, 우리 가 찾아내야 할 언어의 숨겨진 본질이라는 것은 없으며, 그것을 찾아내기 위한 분석도 불필요하다. 우리의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 은 이미 명백히 백일하에 드러나 있고, 다만 정돈을 통해 일목요 연하게 되는 어떤 것일 뿐이다.( 126, 129)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의 언어관을 대변하는 전형으로 고백 록 에 나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인용하면서, 거기서 제시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된 견해를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한다.(.1)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지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 대한 그의 비판을 간략히 살 펴보자. 고백록 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논고 에서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언어 기능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언어의 기 술적인(descriptive) 측면을 유일한 기능으로 간주하면서, 언어의 의미를 단지 낱말과 대상 간의 지시적 관계로만 파악하였다. 이러 한 언어관에 따르면 언어 학습은 본질적으로 지시적 정의를 통해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가령 대상을 손 으로 가리키면서 이것은 ~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지시적 정의 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지시적 정의를 통해 대상을 명명하는 행위는, 그러한 행위가 대상의 명명 이라는 언어 사용 혹은 언어 놀이의 맥락에 속하는 것임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 능하다. 즉, 지시를 통하여 명명된 것이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 위 해서는, 학습자 스스로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대상의 명명 이라는 언어 놀이임을 이미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령, 빨간 사과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사과이다 라는 지시적 정의를 통하여 사과 라는 낱말을 학습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일 그 행위가 대상을 가리키는 명명 행위라는 것에 대한 선행 적인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통하여 그 대 상을 지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의 색깔, 기능, 용도 등을 가 리키거나 혹은 아예 다른 어떤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인지를 알 도리가 없다. 물론, 이 대상의 이름은 사과이다 라는 식으로 말 함으로써, 즉 다른 낱말의 도움을 빌어서 정의되고 있는 낱말의 역할을 분명히 해 줌으로써 그러한 혼란이나 오해를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우리가 대상 이나 이름 이란 낱말을 이미 습득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낱말들은 또 어떻게 우리의 언어에 도입되는가? 이들 낱말들도 지시적 정의를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통하여 도입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지시적 정의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다른 낱말의 도움 을 빌어서 어떤 낱말의 역할을 정의하는 이러한 과정이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다.( 26-30) 언어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최소 한 그런 과정이 적용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 고 지시적 정의를 통한 지시적 관계의 확립이 의미의 단일한 기 초를 이루는 것이라면, 최초의 언어 학습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이 논의에서 우리가 잠정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지시 적 정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정의되고 있는 낱말이 그 언어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가 명료해야만 한다 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지시적 이름 관계는 의미의 단일한 기초 가 될 수 없으며, 이름 관계 그 자체도 단순한 지시적 정의를 통 한 대응관계로 확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2) 사용과 언어놀이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어떤 표현의 의 미는 그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언어 활동의 맥락에서 그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름 과 이름 짓기도 우리의 언어 활동이라는 맥락, 다시 말해 사용이 라는 넒은 범주의 틀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 타인은 언어 사용과 맞물려 있는 맥락, 그리고 그 맥락을 지배하 는 규칙을 해명하기 위하여 언어 놀이 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언 어란 규칙의 지배를 받는 일종의 규칙 지배적인 활동이며, 언어 의 사용은 일종의 언어 놀이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언어 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어 놀이의 다양한 맥락을 고려하 여야 한다. 그리고 한 낱말의 의미는 바로 다양한 언어 놀이에서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그 낱말의 사용에 달려 있다. 이것이 이른바 우리가 의미의 사용 이론 이라고 부르는 주장의 핵심이다. 다양한 언어적 활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핵심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개념이 언어 놀이 이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언 어 놀이 란 개념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거나 분명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탐구 의 전면에 걸쳐서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의미로서의 언어 놀이 개념은 언어와 그 언어가 뒤얽혀 있는 활동들의 총체 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7) 즉, 언어 놀 이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여 수행하고 있는 다양한 의사 소통 행위, 즉 언어 사용과 맞물려 있는 일련의 맥락, 실천, 활동, 행 동, 반응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언어 놀이의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선 놀이 의 개념을 살펴보자. 세상에는 축구, 야구, 권투, 바둑, 카드 놀이와 같이 매우 다양한 놀이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 가 이들 모두를 놀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 고 있는 어떤 하나의 단일한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놀이들 은 우리가 가족 유사성 이라고 부를 수 있는 느슨한 고리로 묶여 져 있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공유하는 어떤 공통된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구성원이 서로 중첩되고 교차하는 방식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들의 유사성을 통하여 한 가족을 이루게 되는 것 이 바로 가족 유사성이다. 다양한 놀이들은 놀이들 사이에 성립하 는 이러한 가족 유사성 때문에 모두 놀이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놀이도 다른 놀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단일한 본질을 갖는 현상이 아니라, 단지 가족 유사성을 갖는 다양한 활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65-67) 우리의 언어가 다양한 언어 놀이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비트겐슈 타인은 우리의 언어에 어떤 통일적인 이론을 통하여 밝혀야 할 단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일한 본질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언어적 표현은 다양한 언어 놀이의 맥락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 게 사용된다. 그리고 언어 놀이란 것은 다른 놀이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한 것이어서, 그러한 다양성을 한번에 포착해 줄 수 있 는 단일한 이론은 있을 수 없다.( 23)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가 비 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의 의미 이론을 사용 이론 이라고 부를 때에 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 낱말의 의미는 그 표현이 속한 언 어에서 그것의 사용이다 ( 43)라고 말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결코 의미에 대한 어떤 정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탐구 의 비트겐슈타인은 체계로서의 이론을 부정 하고 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탐구 의 전편에 걸쳐, 사용 이 라는 말 대신에 낱말이나 문장의 기능, 목적, 역할과 같은 다양한 표현을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하여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언어의 기능이나 쓰임새에 대한 어떤 이론을 구축하려하지 말고, 말의 쓰임에서 실제로 무엇 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직접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340) (3) 내적인 심리 과정으로서의 이해 개념 비판 언어 놀이와 사용으로서의 의미 개념을 통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하는 바는, 이러한 주장에 대비하여 그가 반대하고 있는 주 장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 보다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 언 어를 구성하고 있는 낱말이나 문장이 어떻게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탐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질문 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언어의 이해를 우리의 언어적 활동에 동반하는 모종의 심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가령, 내가 말을 하거나, 듣고, 읽을 때, 나의 마음 속에는 사용된 낱말의 의미를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뜻하거나 포착하는 어떤 심적인 과정이 진행되고 있으며, 언어 의 이해는 바로 이러한 내적인 심적 과정의 문제라는 것이다. 가 령, 로크와 같은 경험론자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낱말의 의미는 화자의 마음속에 있는 심상(image)이나 관념과 같은 것이다. 이 러한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낱말을 듣고 이해할 때 우리는 특정한 심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등의 어떤 심적 상태에 처하게 되고, 이러한 심리적 과정이 바로 우리의 이해를 구성하게 된다. 의사 소통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청자에 게 어떤 낱말이나 문장을 발화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존 재하는 어떤 관념이나 생각을 바깥으로 표현하여, 청자의 마음 속에 내가 가졌던 것과 동일한 관념이나 심상을 갖도록 유도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어떤 낱말이나 문장을 뜻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어떤 심적 상태를 갖느냐의 문제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의 이해에 대한 이러한 심성주의적(menatalistic) 입장에 반대한다. 어떤 낱말이나 문장을 통해 무엇을 뜻 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내적인 심리적 상태나 과정에 처하 는 것에 달린 문제가 아니며, 의사 소통의 목적도 청자의 마음 속 에 의미의 포착과 같은 어떤 과정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다. 단 적으로 말해서, 의미의 이해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진행되거나 발 생하는 심적인 과정이 결코 아니다.( 154) 비트겐슈타인에 의하 면, 안다, 이해하다 와 같은 개념들은 의식적인 심리 상태를 기술하는 개념들과 그 문법적 역할이 전혀 다르다. 어떤 낱말이나 문장을 이해했다고 말할 때, 이해라는 개념의 문법적 역할은 우리 의 마음 속에서 발생한 내적인 과정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러한 낱말이나 문장이 속한 다양한 언어 놀이 속에서 우리가 그 것들을 사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술 혹은 능력을 획득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99) 물론 우리가 어떤 낱말을 듣거나 사용할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때, 거기에 어떤 특정한 영상이나 경험이 동반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논점은, 그러한 영상이나 경험으 로부터 언어적 표현의 의미를 읽어 내기란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 것들이 표현의 의미나 이해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규칙 따르기와 삶의 양식 언어 놀이는 규칙의 지배를 받는 규칙 지배적인 활동이다. 비 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따를 때, 우리가 어떤 표현의 의미를 이해 했다는 것은 다양한 언어 놀이 속에서 그 표현의 사용과 관련된 규칙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즉, 내밀한 심리적 과정이 아니라, 기 술의 터득이나 실천적 능력으로서의 언어 이해는 표현의 사용과 관련된 규칙 따르기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규칙이란 본질적으로 공적인(public) 성격을 갖는 개념이다. 누군가가 규칙을 터득하고 이해했다고 할 때, 그러한 이해는 바깥으로 드러난 규준에 의하 여 평가되고 인정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능력은 우리 가 어떤 낱말을 사용하는 방식, 타인이 그 말을 사용할 때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 그리고 누군가 그 낱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 을 때 우리가 대답하는 방식 같은 행위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평 가되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규칙 따르기는 공동체의 확립된 관 행을 전제로 한다. 규칙은 그것을 따르는 우리의 실천적인 관행, 적용, 사용으로부터 결코 독립적일 수 없으며, 관습 내에서의 규 칙적인 사용이 없다면,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로 표지판이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이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오 직 그 표지판을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사용하자는 잘 확립된 우리 의 관행,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적인 규칙 따르기란 불가능하다. 즉, 오직 한 사람만이 따르는, 혹은 단 한번만 따르는 규칙이란 불가능하다는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것이다. 의미의 이해가 규칙의 파악에 있다고 할 때, 규칙의 파악 이 화자의 내밀한 심리적 상태, 즉 화자의 심리 상태의 변화나 어 떤 심적 과정의 진행에 달린 문제일 수가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 에 있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올바로 규칙을 따르는 것과 그렇 지 않은 경우를 구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규범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규칙의 파악을 일종의 심리적인 과정으로 생각 한다면, 규칙을 따른다고 믿는 것 과 규칙을 따르는 것 의 구분 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이다.( 202) 그렇다면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올바른 규칙 따르기는 어떻게 분간될 수 있는가? 앞서도 지적되었듯이, 언어 는 우리 삶의 활동과 분리되어 추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영역 의 것이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독립적 인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삶 속의 행위와 활동 속에 서로 얽혀져 있으며, 오로지 그러한 맥락 속에서만 그 의의와 내용이 주어질 수 있다. 하나의 낱말은 언어 놀이의 일부로서 그 사용의 맥락에 서 의미를 획득한다. 그런 점에서, 언어란 단순히 문자나 소리만 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결부된 일종의 활동이 다. 어떤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의 삶의 양식 을 상상하는 것이다. ( 19) 이른바, 언어는 우리의 삶의 양 식 (fo- rm of life)의 일부를 구성하며, 그 언어 세계에 살고 있 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표현한다. 논고 에 나타난 언어가 실 재를 그리기 위한 언어였다면, 후기에서 언어를 해명하는 기본 축은 바로 언어와 삶의 양식 간의 관계이다. 삶의 양식이라고 함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언어적 비언어적 행동, 관행, 관습, 전통, 자연적 생물학적 성향 등을 총괄하는 표 현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의 일치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여 의 사 소통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며, 우리는 이러한 삶의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양식의 기초적인 일치와 조화를 바탕으로 했을 때에만 비로소 언 어를 습득하고 사용할 수 있다. 동시에 삶의 양식은 우리의 언어 사용과 이해의 가능성, 그리고 그에 대한 궁극적인 정당화를 제 공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양식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만 하는 것, 주어진 어떤 것 으로 그 자체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 장 원초적인 현상이며 설명과 정당화의 경계를 넘어서 있다. 규 칙 따르기는 바로 이러한 특정한 삶의 양식에 입각한 언어 게임 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올바른 규칙 따르기란 삶의 양식에 기초한 언어 놀이의 일상적인 관행에 따라 교육받은 대로 반응하 는 것이다. 가령 +2 의 수열과 관련된 일련의 관행이 있고, 누군 가 나에게 1000 다음에 무슨 수가 와야 하느냐? 고 묻는다면, 그 러한 관행에 따라서 내가 1002 라고 답할 것이라는 일상적인 사 실이 규칙 따르기의 정체인 것이다. 여기서 내가 왜 이런 종류의 언어 놀이를 수행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을 구하거나 정당화를 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5. 철학적 심리학 (1) 이원론의 극복 언어의 오해에 기초한 잘못된 철학적 문제가 가장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발견되는 곳이 우리의 심리적 개념과 연관된 부분이 다. 비트겐슈타인은 탐구 1부의 후반부와 2부에 걸쳐 탐구 의 가장 많은 분량을 심리적 개념의 해명과 분석에 할애하고 있 다. 기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심리학은 데카르트의 이 원론적 구분에 입각한 정신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는 이원론적 전통에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따르면, 인간은 마음과 육체가 결합된 합성물이다. 인간이 마음과 육체의 합성물이라는 생각은 고대와 중세의 종교적 철학적 전통 을 관통해 온 뿌리 깊은 사고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하나의 철학적 체계로 세련된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데카르트에서 였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마음과 육체는 상호 독립적이지만 영 향을 주고받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실체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 원론에 대해서, 심적인 실체를 어떻게 개별화할 수 있는가, 서로 다른 두개의 실체가 어떻게 인과적 상호 작용을 주고받을 수 있 는 가 등과 같은 수많은 철학적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사실상 오 늘날에는 그 누구도 그의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제기한 원형 그대로의 이원론 은 무너졌다 할지라도, 그 이원론을 지탱하고 있는 마음과 몸의 개념적 이원성의 구도까지 온전히 극복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많은 심리 철학자, 심리학자, 신 경 생리학자들이 비록 이원론에 반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논의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이원적인 개념적 구 조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해커는 이 점 에 대하여 데카르트의 정신/육체 이분법은 거부되었지만, 그가 제기한 핵심적인 이분법 구조는 뇌/육체라는 구분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고 진단한다.(P.M.S. Hacker, op. cit.,, pp.35-36. 개 념적 이원성이라는 데카르트적 유산에 대한 본격적인 심리 철학 적 논의는 J. Searle의 The Rediscovery of the Mind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적인 개념적 이원성에 근본적인 의문 을 제기한 철학자로 간주될 수 있다. 먼저 마음에 대한 우리의 이 해를 아직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원론적 사고 방식의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정형화된 그림을 정리하여 보자. 데카르트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 은 그 반성의 주체만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내면적이고 은밀한 사적 (private) 공간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우리는, 감각을 통하여 외부 세계를 지각하고 관찰하듯이, 내면적인 반성(introspection) 을 통하여 자신의 정신 세계를 들여다 본다. 외부 세계가 3인칭적 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공적인 세계라면, 내면적인 정신의 세 계는 철저히 주관적인 경험의 세계이다. 가령 내가 아픔을 갖는 다 고 할 때에, 그 아픔은 오직 그 경험의 소유자인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경험이다. 여기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반성은 우리의 사 적인 경험에 대한 인식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또한 나는 이러한 반 성을 통해 나의 경험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나는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심리 적 상태에 놓여 있는지 판단할 때 결코 틀릴 수 없다. 내적인 감각이나 경험이 그 주체에게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알려 지는 것이라면, 타인들에게는 그 내면적 상태가 어떻게 전달되는 가? 즉, 우리는 타인의 경험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 는 타인의 내면 혹은 심적 상태를 들여다볼 수 없다. 우리는 오직 3인칭적인 관점에서 타인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 행동의 원인 이 되는 내적인 상태가 무엇인지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타인의 행동을 통하여 그 사람의 심적인 상태를 추 측하는 것은 연역적인 추론도 아니고 귀납적인 상관 관계에 기초 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적인 관점에서, 심리적인 세 계는 외부로부터의 관찰에서 철저히 격리되어 있는 공간이다. 따 라서 우리는 겉으로 표출되는 말이나 행동에서 자신의 내밀한 심 리적 상태를 철저히 위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심리적 상태와 겉으로 표출되는 행동 사이의 관계는 철저히 우연적인 것으로 머 물러 있다. 결국 타인의 행동으로부터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심리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상태를 추측하는 것은 기껏해야 가설적인 유비 추론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나 자신에게 한정된 심적 상태와 행동 간의 상관 관계에 기초하여 타인의 경우도 그러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심적인 상태에 대한 이와 같은 1인칭적 접근과 3인칭적 접근의 비대칭성에 입각한 이원론적 그림은 수많은 철학적 난제를 야기한 다.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 왔던 자아의 본 질, 심리적 상태의 본성, 자기 지식의 가능성, 마음과 육체의 관계, 타자의 마음 등과 같은 물음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원론적 그림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평가는, 그것이 우리가 사 용하고 있는 언어의 특성에 근거하고 있는 잘못된 그림이라는 것 이다. 가령 아픔을 가지고 있다 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영어식 의 이 문장에서 아픔 은, 마치 내가 동전 하나를 가지고 있다 고 말할 때의 동전 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런 생각은 그 두 문장이 보여 주는 표면적인 문법적 유사성 때문에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문법 적 차이를 간과한 철저히 잘못된 왜곡과 오해의 소산 이다. 표면적인 문법이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장 규칙으로 서의 문법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문법 은 언어의 사용과 관련된 언어적 비언어적 요소를 모두 통괄하는 규칙으로서의 심층적 문법 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내밀한 사적 공간으로서의 마음이 나 심적 상태에 대한 비대칭적 접근을 중심으로 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기본적인 틀은 심리 언어가 갖는 심층 문법의 기능과 의 미를 곡해함으로써 생겨난다. 즉, 위의 두 문장은 전혀 다른 논리 적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동화시킴으 로써 마음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그 결과 잘못된 철학적 질문으로 인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음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전통적인 철학적 질문은 대부분 언어적 왜 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사적 언어와 심리적 언어의 문법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어떠한 오해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 먼 저 내 자신의 경험은 사적이며 나 자신만이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주장을 검토해 보자. 데카르트주의적인 주장에 따르면 나는 내 자 신의 경험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오 류 불가능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사적 경험에 대해 확 실한 앎을 주장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모름이 있을 수 없는 특별한 경우를 특별한 앎이 있는 경우로 오해함으로써 생겨나는 문법적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 무엇을 안다 는 말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 서는, 또한 그것을 모른다, 믿는다, 추측한다, 의심한다 고 하 는 말들도 동시에 성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말들이 적용될 수 없는 경우에 대해서 그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 다.(2부 221/328) 통증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내가 통증을 가지 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른다던가, 아니면 통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하거나 의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나는 내가 아픈지를 모 른다 거나 내가 아픈지 추측한다 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적 문법에 위배되는 말이기 때문이 다. 만일 나는 내가 아픈지를 모른다 는 표현이 무의미하면,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 는 말도 문법적으로 무의미하다. 다음으로 사적 경험과 사적 언어에 대한 그의 논의( 243-363) 를 따라가 보자. 데카르트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내적 감각은 공 적인 접근 및 확인 가능성이 없는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내적 감각의 성격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사적 감 각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는 감각어(sensation-words)를 이용 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의사 소통을 한다. 도대체 이러한 의사 소 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감각어가 내적인 감각을 지칭하고 의미하는 표현이라면 그 언어는 사적 언 어일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그러한 사적 언어가 불가능함을 논 증함으로써,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틀을 공박하고자 한다. 사적 인 언어란 오직 한 사람의 사용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 다.( 243) 그의 정의에 따르자면, 사적 언어는 오직 그 언어나 낱 말을 사용하고 있는 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며, 타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다. 그런데 앞서도 논의된 바와 같이, 언어 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언어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나의 언어 놀이는 그 게임을 지배하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사적인 언어 놀이가 가능하다는 것은 본인만이 따를 수 있는 사 적인 규칙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사적인 규칙이라는 것 이 있을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먼저 우리의 감각어가 우리의 내면적인 경험을 지칭함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는 견해를 검토한다. 감각어의 의 미가 논고에서 생각했던 방식대로,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과의 관 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해 보자. 이때, 감각어의 의미는 그 것이 가리키는 우리 마음 속의 사적인 경험이나 감각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감각어의 의미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도 대체 어떻게 그런 언어를 배울 수 있고, 어떻게 그런 언어를 이용 하여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감각어를 사용하여 그 감각어의 의미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아픔 과 같은 감각어의 역할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 사적인 감각을 이름 짓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면, 나는 타인이 나는 아프다 라고 했을 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타인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통상적으로 우리는 내가 그런 말을 할 때 가졌던 동일한 내적 감각을 타인에게 귀속 시킴으로써 그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수행하는 일이란 타인의 모습을 떠 올리면서 실제 로는 자신의 아픔을 상상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 와 동일한 감각을 느낀다고 결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구체적 조건 도 알지 못한다.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그의 아픔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 에서 타인이 내가 느낀 것과 동일한 아픔을 느끼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만적인 가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점을 설명 하기 위해서, 각자 본인만 들여다 볼 수 있는 상자를 하나씩 가진 경우를 상상한다. 우리는 각기 자신만의 상자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 딱정벌레가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293)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상자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한, 사실상 상 자 속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의사 소통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상자 속의 내용물은 딱정벌레 라는 표 현과 관련된 언어 놀이의 정당한 부분이 아니다. 이러한 지적이 비단 타인의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감각 경험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려 할 때 에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우리가 어떤 특이한 감각을 느끼고 그 감각을 E 라는 이름(기호)으로 지칭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것과 동일한 감각을 느낄 때마다 달력에 E 를 기록한다. 이 경 우 E 는 그 감각을 지칭하는 이름인가? 만일 E 가 감각 E를 지 시하는 이름이라면, 최소한 그것은 E 라는 기호가 처음 도입될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때의 원래의 감각과 동일한 감각을 규칙적으로 지시하는 데 사용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서 기호 E 가 적용된 감각이 본래의 감각과 동일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하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하다. E 의 적용이 올바른 경우 와 단순히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경우 의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적 감각의 이름이라고 하는 기호 E 는 언어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적 언어는 불가능하 다. (3) 표현행위로서의 통증 언어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이 우리 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부 정하는 것은, 감각어가 작동하는 방식이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물을 명명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즉, 감각어가 우 리들이 가진 사적 감각의 이름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무 나 빨강 과 같은 말로써 하는 언어 놀이에서 나무와 빨강(빨간 사물)은 어떤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름과 명명된 사물 사이 의 연관성이 확립되는 것은 이 놀이에서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픔 이 라는 말로써 하는 수많은 언어 놀이에서, 사적인 감각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픔 은 예를 들어 나무 가 그런 종류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적인 감각을 지칭할 수 없다. 아픔 언 어에서 역할을 하는 것은 아픔의 행위(예를 들어 시음, 울음, 아픈 부 위를 움켜 짐)와 아픔을 달래는 행위(가령, 위로의 말을 하기, 진정제 를 복용하기, 붕대를 감아 주기, 베개를 베어 주기)이다. 요컨대 아픔 이라는 말이 쓰이는 외적인 상황이다.(G. Pitcher, 박영식 역, 비트겐 슈타인의 철학, p.329)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 놀이란 본질적으로 공적인 성격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을 갖는 것이며, 언어의 학습도 공적인 틀 내에서 수행되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의 감각은 사적이고 내밀한 것일 수 있다고 하더 라도,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언어는 공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적 경험은 가능해도 사적 인 언어는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 기 위하여, 감각어의 학습과 관련된 한 경우를 고찰한다.( 244) 비트겐슈타인이 검토하고 있는 예는 통증 의 경우이다. 우리는 통증을 느낄 때, 울음이나 신음, 찡그림 등과 같은 행위를 통하여 우리의 통증을 표현한다. 이러한 행위는 학습이 필요하지 않은 너무나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아직 통증에 관한 언어 를 습득한 적이 없는 아이가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어른들은 이 아이가 통증 행위를 표현할 때마다, 아프다 라는 문장을 사용하 는 법을 가르친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아이가 자신의 통증 행위에 덧붙여 새롭게 통증 언어를 학습함으로써 원초적이고 자 연적인 통증의 행위를 대체할 새로운 표현의 양식을 배운다고 주 장한다. 즉, 아프다 라는 문장은 자연적인 통증 행위를 대신하는 새로운 학습된 통증 행위라는 것이다. 아프다 라는 문장의 기능 은, 내적으로 느끼는 통증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통증을 겉으 로 표현해 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통증 언어와 관련된 언어 놀이 의 뿌리가 되는 것은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으로서의 통증 행위이다. 가령 아이가 다쳤다고 해 보자. 아이는 울고, 소리 지 르고, 다친 부위를 감싸며 자신의 통증을 표현할 것이다. 이때 아 이는 결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며, 이러한 통증 행위 를 통하여 자신의 통증을 보고하거나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 다. 통증 언어가 학습을 통하여 습득되는 원초적이고 자연적인 통증 표현 행위의 확장이라면, 통증 언어 또한 그 기능은 보고나 기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표현하는 것이다.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3권 제22호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만일에 아이의 자연적인 통증 행위가 없었다면, 아프다 와 같은 감각어, 혹은 통증어의 가르침이나 학 습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257) 아이가 느끼는 통증 감 각은 사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통증의 외적인 표현으로 서의 행위는 공적으로 접근 가능해야 한다. 우리가 통증어를 이 용하여 주관적인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의미론적 근거는, 바로 이 관찰 가능한 공적인 행위에 바탕하고 있다. 아이가 통증 행위 와의 결합을 통하여 통증어를 학습하듯이, 감각어의 학습은 그와 관련된 언어 놀이가 공적인 틀 안에서 수행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은 감각어의 의미가 그것이 가리키는 지칭체, 즉 주 관적 경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만든다. (4) 타인의 마음의 문제 통증어의 사용이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통증 행위를 대체하고 확장하는 학습된 통증 행위라는 주장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감 각어의 의미와 관련된 논의에서, 내적인 경험과 겉으로 드러난 행위의 관련성이 우연적이라는 전제에 도전하고 있다. 자신의 내 면에 특권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주의의 이면에는, 타 인의 내면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입각하여 일종의 유 비 추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내면은 공적인 접근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되 어 있으며, 겉으로 표출된 행위와는 우연적인 연관만을 맺고 있 을 뿐이다. 전통적으로 타인의 마음의 문제라고 불리는 철학적 난제는 바로 이 가정에 기초해 있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특권적 지식의 주장이 왜 문법적 오류에서 기인한 잘못이며, 1인칭 감각어의 사용은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