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외래음악의 유입과 한국적 수용 에 대한 논평 윤중강 * 이상만님의 근대 외래음악의 유입과 한국적 수용에 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이 시기 는 서양음익t 양악)과 한국음악t국악)의 두 분야를 두루 바라볼 수 있는 시 각이 있어야 하겠는 데, 그런 변에서 볼 때 발표자는 가장 주제 에 적당하신 분이 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습니 다. 발표자의 글은 외래음악외- 한국음악의 상호관린성에 관심 이 가지 고 있는 이 들은 물론이요 그리고 20세 기 초반의 서양음악의 유입, 일제깅점기의 서양음악의 수용, 특히 60 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음익R국악)분야에 있어서의 창작음악의 성과와 한계 를 짚 어 보는 데 도 도움이 되 는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모든 미덕을 제외하고, 이제 부터는 논평자가 발표자와 생각 을 달리하는 부분이라거나, 발표자의 글에서 제 목, 연대 등의 질못 기 록된 것 이나 소략하게 다푼 내용을 조금 덧 붙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외래음악의 유입에 관련해서 일제의 음악교육에 관한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빌표자는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되입된 것은 크게 두 줄기 로 보고 있다. 그 하나는 군악 대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사에 의한 찬송가의 도입 이디. 이 시기 외래음악의 유입과 관련하 여 위의 두 가지 사실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 동안 한국음악학제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고 본다. 이유선, 장사훈, 남궁요열, 노동은 등의 글에서 도 강조되고 있는 바이다. 그러 나 간과한 것 이 있다. 개화기부터 시직해서 일 제강점기끼-지의 외래음악t서구음악)과 그 수용을 이야기할 때, 일제 의 음악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나, 발표자의 이 글에서 는 이 부분은 전혀 배제되어 있다. 군악대와 선교사가 한국 서양음악에 일정 영향을 끼친 것에는 동의한다. 새 로운 음악문화에 대한 당시 서 울의 지식층의 충격 내지 영향은 결코 간 * 좋 l 重 때 IJ, 음악평 론 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 예술원 강시
272 國 樂 P폈융 文 集 第 1 1 輯 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군악대나 찬송가는 본질적으로 지역적 계층적 종교적으 로 한계가 분명한 음악 내지 음악문화인 것이다. 중요힌 것은 일제의 음악교육이다. 그들에 의해서 이식된 창가 가 한국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일제강점기에 만 들어진 한국의 음악교과서와 일본의 음악교과서와의 상호 관련성에 관한 기술이 없어 아쉽 다. 일제강점기 외래음악t서구음악)의 유입을 이야기할 때,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의 음악교과서 7 }, 한국인들이 서양음악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는 기초적인 발판이 되었다 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2) 개화기로부터 8 15 광복이전까지 곧 일제강점기까지에 이르는 시기에 유입된 외 래음악은 서구음악뿐인가? 발표자는 외래음악의 유입에 관련된 글에서는 근대화, 특히 일반적으로 개화기라고 말하 는 갑신정변 이후에 외래음악이라고 하면 서구음악을 가리킨다 고 적어놓고 있다. 발표자의 글이 담아내야할 시기는 20세기 초반(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 를 두루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 을 하는데, 이 시기의 외래음악을 서구음악 이라고 한정 짓는 것은 글 자체의 한계라고 생 각한다. 일제강점기에 있어서, 음악교과서와 음반을 통해서 일본음악의 영향권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의 음계에 바탕을 둔 노래 를 음반이나 교과 서 등을 통해 들을 수 밖에 없었고, 그 잔재는 지금끼-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불려졌다는 희망가 와 같은 노래는 어떤 범주에 넣을 것인가? 그 것은 서양음악의 영호f을 받은 노래인개 아니면 한국의 민족음악의 커다란 맥락을 살펴볼 때, 자연스레 생겨난 음악인가? 이 노래는 국악분야에서도 신민요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고, 또한 요즘도 이른바 국악가요적인 음반 속에도 수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이 노 래는 일제강점기에 당시 조선이 철저하게 일본의 창가나 군가에 영향을 받았음을 반증하는 노래이다 이 글에서는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일본의 가요가 한국의 가요에 어느 정도 영 irj:을 끼 친 것은 사실이다. 이 말에 대해 오해가 없기 를 바란다. 이것은 당시 한국의 대중가요가 스 스로 세력을 넓힐 지생성이 없었다거나, 또한 당시 한국의 대중음악시장이 일본에 의해 잠 식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음악인들이 일본식 음계와 일본식 창법의 영 호f을 어느 정도 받았으며, 그러한 잔재가 지금의 대중음악계에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거듭 말하자면, 일제강점기의 외래음악을 이야기할 때, 서구음악뿐만 아니라 일 본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의 대중가요는 일본의 전통음악과 맥락을 같이한다. 곧 음계 와 창법 정서변에서 일본의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아울러서 당시 일본의 클래식계에서 만들어낸 가곡과 당시 한국의 서양음악계에서 만들 어내기 시작한 가곡과의 상호 관련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도 개화기 이후의 외래음악을 서구
근대 외 래음악의 유입 과 효택적 수용 에 대한 논평 273 음악으로 한정짓는 시 각은 재구의 필요성 이 있다고 생각한다. (3) 신국악 ( 新 國 樂 ) 이라는 용어는 신국악예술인회 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는가? 발표자는 신국악 이란 말이 언제 어떻게 쓰여졌는지 그 연원은 찾기 어려 웠다고 기록하 면서도 그 용어가 공식화된 것은 신국악예술인회를 조직하고 그 첫 정기연주회를 시작하면 서 공식화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신국악예술인회가 조직된 것은 1961 년이라고 적고 있다. 발표자가 서 울대 국악과 정기연주회와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생각된다. 서 울대학교 음악 대학 국악과의 첫 번째 정기연주회 가 있었던 것은 국악과가 신설된지 3년만의 일로, 1961 년 11 월 18 일 서 울대 음대 국악연주실 에서 이 루어 졌 다. 신국악예술인회가 조직 이 된 것은 그보 다 5 년뒤인 1 966년의 일 이다. 신국악예술인회의 제 1 회 발표회는 1966년 4월 26일 서울대음 대 콘서트홀에서 이 루어졌다 (장사훈 저 IT' 여명의 동서 음악4 및 서울대학교 음악대 학 국악 과 30년사 참조) 신국악예술인회는 서울대 국악과의 졸업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단체의 첫번째 연 주회 에서 는 이 른바 신국악 을 연주하기도 했으며, 신국악예술인회에 소속된 김용진, 이성천, 조재선 등이 1960년대 신국악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 이다. 그러 나, 신국악예술인 회의 연주회 프로그램 속에 는 전통음악도 포함이 되어 있다. 신국악예술인회는 처음으로 대 학교육을 받은 국악학도들 이 기존의 국악인들과의 변별성을 갖기 위해서 만들어낸 단체라 고 규정 짓는 것 이 타당하디고 생각한다. 신국악예술인회는 서울대 국악과라는 학맥, 곧 인적 자원 중심으로 뭉친 것이지 신국악이 라는 음악 하나만을 지향한 단체로 봄은 확대해석이 아닌가 싶다. 로그램을 보면 전통음악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 단체의 연주 프 (4) 신국악이라는 용어는 국립국악원의 신국악 작품공모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해방이후, 관현악 중심의 국악창작은 오랜동안 김기수에 의해 주도되어 왔 다. 그러다가 이러한 새 로운 국악창작에 사회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 반이다. 이것은 서 울대학교 국악과의 창설과 유관하다고 본다. 서 울대학교 국악과 출신 이 신국악 의 형성에 절 대 적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나 신국악이 서울대학교라는 공간과 서 울대 학생 이라는 신분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신국악 이라는 용어가 공식화된 것은 1962년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국립국악원에서는 신국악 작품공모 를 시 작한다. 이러한 작품공모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작곡가로 데뷔 하게 된 이 들 가운데 당시 서울대학교 국악과의 재학생 들이 상당수였으나 이왕직 아악부 출신의 이 강덕과 당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이상 규도포함되어 있었다
274 國 蘭 뚫융 文 集 第 11 輯 이것은 신국악이라는 것 이 서울대학교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 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러 한 작품을 악보화한 신국악보 가 국립국악원에 의해서 나오게 된다. 신국악이라는 용어 및 그 음악 형성 에 는 국립국악원과 서울대 국악과가 공히 큰 역할 을 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곧 서울대학교에서 작곡을 가르쳤던 정회갑을 중심으로 창작활동 이 활발히 펼쳐졌으나, 국립국악원의 김기수에게 직, 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이강덕이나 이 상규 동도 당시 신국악을 논할 때 배제 될 수 없음을 뜻한다. (5) 60년대 창작음악과 관련된 작품명과 작품연도 바로잡기 이상만님께서 이 글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지냈던 중요한 작곡가와 작품들을 다 시한번 환기시켜 주였다고 생각한다. 그러 나 몇군 데의 작품 제목이 불분명하거나 작품 발표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발표자의 좋은 글을 보다 더 좋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가능한한 그 곡의 정확한 제목과 발표날짜 및 장소를 덧붙혀 보겠다. 1960년에 정회갑이 발표한 한국교향악단에 의해 가야금 협주곡을 발표했다고 했는데 그 작품은 가야고와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 이라는 작품이다. 1961 년 서울대학교 국악과 정기연주회에서 초연된 루 헤리슨(Lou Harrison) 작콕의 관현악 무궁화 새당악 (Sh따onrose A New Tang Me\ody)은 김기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김기수 작독의 개천부 ( 開 天 麻 ) 중 에서 셋째장의 시와 노래, 기악에서 받은 감동을 바탕으로 해서 이 를 자신의 음악으로 새 롭 게 탄생시킨 작품이다. 김기수는 이 작품을 생전 무궁화 새당악 이라고 하기 보다는 새당악 무궁화 로 불렀음을 밝히며, 아울러 서울대학교 국악과 정기연주회에서도 새당악 무궁화 로 표기되어 있다. 도날드 徐 (서영세)의 작품명의 경우도, 발표자의 글에서 는 만장풍진 으로 되어 있으나, 홍진만장 ( 紅 塵 萬 文 )이 바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일보사 Ii'국악의 향연 5.JJ 의 한국창 작음악작품연보, 및 국립국악원 한국국악교육학회 Ii' 한국음악 창작곡 작품목록집 참조) 이 작품은 1967년 12월 20일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서영세 작곡발표회에서 초연됐으며, 작곡 가는 이외에 가야금 독주독 목리 ( 木 理 )를 발표했다. 아울러 작곡가는 1966년 12월 27일 제 6회 국립국악원 신국악발표회를 통해 우하영적 을 발표하기도 했는 데, 그는 한국 타악기가 낼 수 있는 독특한 음향에 관해 일찍이 관심을 갖은 작곡가라 생각된다. 또한 발표자가 다 룬 김용진 작곡의 합주곡 l 번 이성천 작곡의 청성한잎 주제에 의한 변주곡 (62년) 정회갑 의 가야고 2중주'(65 년)와 함께 다룬 조재선의 대 금협주곡 의 곡명은 젓대 를 위한 시나위 로, 1965년 11 월 26일 서울대 음대 리사이 틀홀에서 열린 제 6회 서울대 국악정기연주회에서 발표된 작품이다. 이외에도 서우석 강석희와 함께, 우리 나라 초창기 해 금을 중심 으로 한 실내악콕을 위해 많은 작품을 남긴 김홍교에 대한 언급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근대 외래음악의 유입과 효택적 수용 에 대한 논평 275 이 글을 위해서 밝힌 대로 한국의 현대음악사에 있어서 외래음악의 유입과 수용 둥과 관 련하여 누락되거나 간과된 부분이 발견되고, 음악 및 음악회와 관련해서 연대 및 제목 등에 몇 가지 오기가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에게 오늘날의 음악현실을 바르게 직시하는데는 크게 기여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발표자에게 경의 를 표하며 논평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