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표조사-김해한림면용덕리 산1-5 -본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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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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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보고서 2016.03

CONTENTS 목 차 Ⅰ. 조사개요 01 Ⅱ. 조사지역과 주변 환경 02 1. 자연 지리적 환경 02 2. 고고ㆍ역사자료로 본 김해의 역사 10 Ⅲ. 조사내용 18 1. 고고분야 19 2. 조사구역 내 유적 현황 22 3. 민속분야 24 4. 지명분야 25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 의견 30 1. 종합고찰 30 2. 조사단 의견 30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서 31 참고문헌 33 지도목차 지도 1 김해지역 지질도(김정윤; 2008) 04 지도 2 고해면기(6,000~1,800 yr BP)의 김해지역 고지형(김정윤; 2008) 05 지도 3 조선시대 말엽(200 yr BP경) 김해지역 고지형(김정윤; 2008) 06 지도 4 대동여지도(1861년)의 김해지역 06 지도 5 조사구역과 주변의 지질도(1/50,000) 07 지도 6 김해의 옛길(최헌섭; 2013) 09 지도 7 조사구역 및 주변유적표시지도(1/25,000) 18 지도 8 조사구역 표시 지형도(1/5,000) 39 -ⅰ-

사진목차 사진 1 독점고분군 원경 19 사진 2 장원고분군 원경 19 사진 3 안하리 유물산포지 20 사진 4 김득기 묘 원경 20 사진 5 용덕리 고분군 21 사진 6 용덕리 일반산업단지내 용덕리 유물확인지점 21 사진 7 수전 조사 중 전경 21 사진 8 용덕리 유물산포지 21 사진 9 조사구역 현황 23 사진 10 용덕리 장원마을 전경(서 동) 25 사진 11 조사구역표시 위성사진 38 사진 12 조사구역 전경(남 북) 40 사진 13 조사구역 전경(북 남) 40 사진 14 조사구역 뒤편 산자락 공지 41 사진 15 조사구역 남쪽 공지 주물공장 부산물 적치장 41 -ⅱ-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Ⅰ. 조사개요 조 사 명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조사경위 : 조사 의뢰자인 범석산업(대표 김순현)이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2,382m2)에 공장을 건립하기 위해 허가를 받는 과정에 김해시에 서 문화재지표조사를 조건부로 제시하였다. 이에 해당구역에 대하여 문화재 지표조 사를 실시한 후 그 결과에 따라 사업시행 여부를 결정하도록 조치됨에 따라 국비지 원을 신청하여 해당 구역에 대한 문화재지표조사를 수행하게 되었다. 조사지역 및 범위 (621-872) 경남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산1-5번지 외 7필지(2,382m2) 조사기간 : 2016년 03월 28일 2016년 04월 01일(05일간) - 문헌조사 : 03월 28일(1일간) - 현장조사 : 03월 28일 04월 01일 중(1일간) - 정보분석 : 03월 29일(1일간) - 보고서작성 : 03월 30일~31일(2일간) - 제본 및 제출 : 04월 01일 제출 조사단 구성 - 조 사 단 장 :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장; 고고학) - 조 사 위 원 : 박태성(두류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민속 및 지명) - 조 사 원 : 임지승(두류문화연구원 조사연구부 연구원 : 고고학) 조사의뢰 기관 : 범석산업(대표 김순현) - 1 -

www.duryu.or.kr Ⅱ. 조사지역과 주변 환경 1. 자연ㆍ지리적 환경 1) 김해의 자연환경 김해시는 우리나라의 동남쪽을 자리하고 있으며, 남한에서 가장 긴 洛 東 江 이 남해 와 만나는 河 口 를 차지하고 있다. 1) 수리적 위치로는 동쪽 끝은 낙동강과 접하는 대 동면 월촌리 평촌마을의 동경 129 0 48, 북위 35 16 16, 서쪽 끝은 진영읍 좌곤 리 廣 大 峴 마을의 동경 128 41 47, 북위 35 18 12 으로 동서 거리는 약 27km이 다. 북쪽 끝은 낙동강과 만나는 생림면 도요리의 동경 128 51 59, 북위 35 23 3 1, 남쪽 끝은 장유면 장유리의 동경 128 49 44, 북위 35 9 10 로 남북 거리는 약 32km에 이른다. 사방 경역 안의 면적은 463.26km2로 경상남도의 약 4.4%를 차지하 고 있다. 2) 사방 경계를 이루는 自 然 地 理 區 는 북쪽과 동쪽은 낙동강, 남쪽은 밤내재와 태정고 개 사이의 산계, 3) 서쪽은 창원과의 경계에 있는 광대현이 地 境 고개가 된다. 이렇 듯 서쪽을 제외한 방면은 지리적 경계가 강과 산(과거에는 바다)으로 명료하다. 이 와 같은 자연환경은 옛 김해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던 가락국의 번영과 쇠퇴를 이해 하는 주요한 환경인자가 된다. 4) 인접 지역과의 관계적 위치는 동쪽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부산광역시와 양산시, 서쪽으로는 창원시, 남쪽으로는 부산시, 북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밀양시와 접하고 있다. 김해시의 주요 산계는 洛 南 正 幹 5)의 龍 池 峰 (743m) 6) -장고개-매봉산(338m)-황새봉 (393.1m)-금음산(376.1m)-나밭고개- 神 魚 山 (630.4m)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시역을 반분하고 있다. 이 낙남정간을 분수령으로 삼아 그 북쪽은 낙동강 유역에 속하고, 그 남쪽은 남해 또는 古 金 海 灣 7)의 영향을 받는 해안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 지금은 행정구역의 조정으로 낙동강의 하구가 부산시에 속하게 되었지만 문화사적 의미에서 김해를 고찰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다. 2) http://www.gimhae.go.kr 3) 낙동강 하구가 부산에 귀속되기 전, 김해의 남쪽 경계는 남해 바다를 향해 열려 있었다. 4) 서쪽으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창원지역과는 대체로 지금의 국도 14호선이 지나는 선형을 따라 열려 있어, 두 지역 간의 문화가 쉽게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잘 갖추고 있다. 이런 환경 인자가 창원지역 고대문화 형성의 한 바탕을 이루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5) 智 異 山 迎 新 峰 ( 三 神 峰 )에서 김해군 大 東 面 梅 里 에서 洛 東 江 에 몰입되는 산줄기를 이른다. 낙동강의 남쪽 산줄 기로서 서쪽으로는 蟾 津 江 유역의 동쪽 경계로 작용하고, 이 구간에서 종점까지는 洛 東 江 유역과 경남의 해안 지대를 구분 짓는 경계를 이룬다. 대개의 경우 洛 南 正 脈 이라 부르고 있지만, 白 頭 大 幹 을 계승한 산줄기라는 위격을 부여 받은 점에서 洛 南 正 幹 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신경준 지음, 박용수 해설. 1990, 산경표, 푸른산, pp.20~21. 최헌섭, 1998, 창원 반계동 취락유적 조사예보, 제8회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발표회, 사단법 인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pp.68~69. 6) 옛적에는 이곳에서 무제( 祈 雨 祭 )를 지냈다고 하므로 용지봉의 원래 이름은 龍 祭 峰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가 지로 된 것은 제사를 지사라 하는 이 지역의 언어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 2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가운데 옛 가락국의 성장과 번영에 연동되는 핵심 지역은 낙남정간 남쪽의 해안 지 역이다. 바로 이곳에서 가락국이 태동 성장하여 밖으로 열린 물길을 이용한 철의 수출을 통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낙남정간 북쪽 지역에는 낙동강에 이어지는 가지 능선(평균 고도 300~400m)으로 이루어진 낮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평지가 적은 편이다. 서쪽은 飛 音 山 (486m)-남산치(393m)- 大 岩 山 (669m)- 龍 池 峰 (743m)- 上 店 嶺 (430m)- 花 山 (798.4m)- 窟 庵 山 (662m)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높은 산지로 에워싸여 있어 고개를 통한 제한적인 교통이 이루어졌을 뿐 폐쇄적이다. 8) 이 지역의 지형은 지질구조의 영향을 받았다. 대체로 험준한 산계는 풍화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가진 쳐트와 안 산암류 등이 우세하고, 평야지대는 저항력이 약한 화강암류가 저반을 이루며, 하천 의 발달은 구조선에 일치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침식윤회로 보아 山 系 는 대체로 晩 長 年 期 에 해당되고 平 野 는 老 年 期 지형을 형성한다. 9) 이 지역의 지질은 경상계 신라통에 속하는 퇴적암과 이를 관입한 반심성암류 및 화산분출암과 화강암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퇴적암류는 화성암류에 비하여 그 분포가 약세이며 주로 시역의 북동쪽과 남서쪽 및 중서부에 발달해 있다. 퇴적암이 형성된 뒤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화성활동이 일어나서 반심성암과 화산암류의 관입 및 분출이 있었다. 이 반심성암과 화산암류는 주산안산암질에 속하는 안산암류 중 에서 장석반정을 갖는 도대동안산반암류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분포한다. 10) 바로 이 신라통 주산안산암질암 및 도대동안산반암 내에는 鐵 鑛 脈 이 배태되어 있으며, 그것은 대체로 시역의 북동쪽 상동면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11) 구체적으로 이곳에서 채광이 이루어진 광산은 상동면 우계리의 삼우철광, 상동면 봉발리의 해동광산, 대 동면 주동리의 김해철광 등이 있다. 12) 김해의 대표적 水 系 는 洛 東 江 이다. 그 명칭은 상주의 옛 이름인 洛 陽 의 동쪽으로 흐른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많은 이들의 이야기이지만, 다산 丁 若 鏞 (1762~1836)은 我 邦 疆 域 考 (1811)에서 洛 東 이라 하는 것은 駕 洛 의 동쪽이다. 라고 했다. 삼국시대에는 黃 山 江 이라 했는데, 13)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洛 水, 낙동강 이라 하였다. 그런데 다산에 앞선 시기를 살았던 이중환(1690~1751)의 擇 里 志 (1751) 14) 와 이긍익(1736~1806)의 練 藜 室 記 述 地 理 典 故 에는 낙동은 尙 州 의 동쪽을 말함이다. 15) 라고 했는데, 상주의 옛 이름이 洛 陽 16)인데서 7) 古 金 海 灣 은 完 新 世 에 들어와 기후가 계속 온난해 지면서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 현재의 김해평야 일대에 해수 가 침입하여 형성된 해역을 말한다. 8) 남산치와 상점령을 넘어 창원시 성산구를 오갔고, 밤내재와 너더리고개를 통해 창원시 진해구와 통했다. 9) 국립지질연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 (SHEET 6919-Ⅰ), pp.1~2. 10) 국립지질연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 (SHEET 6919-Ⅰ), p.2. 11) 국립지질연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 (SHEET 6919-Ⅰ), p.20. 12) 국립지질연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 (SHEET 6919-Ⅰ), pp.26~27. 13)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가락국의 사방 경계를 이르기를 동쪽은 黃 山 江 서남쪽은 滄 海 서북쪽은 地 理 山 동북쪽은 伽 耶 山 으로써 경계를 삼았고, 남쪽이 나라의 끝이 되었다. 고 하였음이다. 三 國 遺 事 紀 異 第 二 駕 洛 國 記 東 以 黃 山 江 西 南 以 滄 海 西 北 以 地 理 山 東 北 以 伽 耶 山 南 以 爲 國 尾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황산강 또는 黃 山 河 는 낙동강 하류의 물금 구간을 이르는 이름으로 제한 사용되었다. 14) 擇 里 志 八 道 總 論 慶 尙 道 洛 東 者 謂 尙 州 之 東 也 - 3 -

www.duryu.or.kr 비롯한 이름으로 본 것이다. 지도 1. 김해지역 지질도(김정윤; 2008) 위의 기록에는 낙동강이란 이름이 조선시대에 비롯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름은 이미 고려 때부터 그렇게 불렸다. 고려 말의 문인 李 奎 報 가 남긴 시에 洛 東 이란 이 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한가로이 낙동강을 지나네/ 閑 行 過 洛 東 17) 라 한 구절 15) 練 藜 室 記 述 別 集 卷 之 十 六 地 理 典 故 總 地 理 慶 尙 道 洛 東 江 洛 東 者 謂 尙 州 之 東 也 16) 擇 里 志 八 道 總 論 慶 尙 道 尙 州 一 名 洛 陽 17) 백 겹으로 두른 푸른 산 속에/ 百 轉 靑 山 裏 한가로이 낙동강을 지나네/ 閑 行 過 洛 東 풀은 우거졌어도 오히려 길이 있고/ 草 深 猶 有 路 소나무가 고요하니 저절로 바람이 없네/ 松 靜 自 無 風 가을 물은 오리 머리처럼 푸르고/ 秋 水 鴨 頭 綠 새벽 노을은 성성이 피처럼 붉도다/ 曉 霞 猩 血 紅 누가 알랴 게으르게 노니는 손이/ 誰 知 倦 遊 客 사해에 시 짓는 한 늙은이인 줄을/ 四 海 一 詩 翁 - 4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이 지역의 북쪽과 동쪽 경 계를 따라 흐르는 낙동강 은 경계로서는 자연지리구 로도 작용하지만, 그 하구 는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들머리가 되기도 하 고, 바다를 통해 밖으로 나 가는 날머리가 되기도 하 여 이곳을 오가는 물길의 關 門 으로 기능하였다. 18) 현 재의 김해평야를 이루는 낙남정간 남쪽 충적지는 조선시대까지 內 灣 을 이룬 곳이므로 당시의 하구는 보다 더 내륙에 있었던 것 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관 요소는 가락국의 성 지도 2. 고해면기(6,000~1,800 yr BP)의 김해지역 고지형(김정윤; 2008) 장 동력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바로 물길을 이용한 交 易 을 통해 가락국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이론자료로 삼아 교역을 유추하였지만, 봉황 대 구릉 서쪽에서 海 上 交 易 을 시사해 주는 유구가 발굴되면서, 19) 교역에 대한 자 료가 적극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그 뒤 고김해만의 서쪽 灣 奧 인 관동리에서 가 야시대의 교역장인 부두와 도로 및 그 배후시설 등 津 과 聚 落 의 전모가 조사되어 해상교역의 실체를 밝힐 수 있게 되었고, 20) 최근에는 김해 봉황동에서 가야시대 船 舶 의 부재와 櫓 가 출토되어 그 사례를 더 하였다. 21) 이렇듯 봉황대와 관동리 등 고 김해만 연변에 패총과 해상교역과 관련되는 시설이 위치하는 것은 당시 이곳이 내 만 환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22) 이규보의 낙동강을 지나다 에서 18) 그 위치는 기후변화에 따라 드나들었는데, 대체로 완신세의 고해수면기 이후로는 내륙(창녕 부곡면 근처)에 서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였다. 대동여지도 (1861)가 그려지던 조선시대 말엽에는 대체로 지금의 김해 불 암동과 부산 구포 사이에 낙동강의 하구가 위치했다. 대동여지도 18-1, 19-1. 19) 심재용 김용탁, 2003, 김해 봉황동유적 발굴조사 고구려 고고학의 제문제, 제27회 한국고고학전국대 회, 韓 國 考 古 學 會. 20) ( 財 ) 三 江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金 海 官 洞 里 三 國 時 代 津 址. 21) 김갑진, 2012, 해상왕국 가야시대의 선박 -김해 봉황동 유적의 발굴 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계간 한 국의 고고학 21, 주류성출판사, pp.26~35. 22) 최근 관동리유적에서 수행한 홀로세 후기 지형발달에 대한 연구에서 규조분석과 퇴적상을 통해 복원된 1,800 yr BP 경 남해안의 해수준은 2.6m 정도에 다다랐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면, 당시 봉황동유적 부근의 - 5 -

www.duryu.or.kr 지도 3. 조선시대 말엽(200 yr BP 경) 김해지역 고지형(김정윤; 2008) 지도 4. 대동여지도(1861년)의 김해지역 김해를 에우고 지나는 낙동강은 하류인 삼랑진에서 물금 사이가 협곡을 이루고 있 어 큰물이 들면 쉽게 물에 잠긴다. 23) 양산협곡을 벗어난 본류는 구포 위에서 세 갈 래로 갈라지므로 옛적에는 三 叉 水 또는 三 叉 江 이라 했으며, 24) 그 사이에는 대저도 와 같은 큰 하중도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렇듯 낙동강 하부 삼각주의 발달에 따라 내만은 서서히 충적 환경을 이루어 옛 김해만은 지금과 같은 모습의 金 海 平 野 가 되 었다. 2) 조사구역과 한림면 일대의 地 形 조사구역이 위치한 한림면 일원의 충적지는 낙동강 남안의 背 後 濕 地 로 구성되어 있 어서 이 지형대에서의 토지 이용은 근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조사구역이 속 한 한림면 내의 하천은 대부분 花 浦 川 으로 모아져서 慕 禎 里 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된 다. 한림면 일원의 지형은 동쪽으로는 望 川 峴 25)에서 羅 田 峴 26)을 잇는 낙남정간에서 분 기하여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安 谷 里 북쪽의 427.6m봉을 거쳐 218.9m봉과 해반천과 관동리유적 부근의 율하천 하류는 내만의 형태를 띠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황상일 김정윤 윤순옥, 2009, 김해시 관동리지역의 Holocene 후기 지형발달, 金 海 官 洞 里 三 國 時 代 津 址, p.589. 23) 바로 이 구간을 일러 예전에는 黃 山 河 라 했다. 24) 이즈음에 이르러 낙동강 하부 삼각주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고김해만의 육화가 서서 히 진행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해동지도 (1750년대 제작)에는 불암창과 나루가 있는 그 아래에 三 叉 水 라 적었고, 德 島 와 鳴 旨 島 만 섬으로 표현되었고 다른 섬들의 주변으로는 이미 육화가 진행되어 충적지 상의 구릉으로 묘사되었다. 25) 김해시 삼계동과 한림면 신천리 망천 마을을 넘나들던 고개를 이른다. 26) 김해시 삼계동과 생림면을 넘나들던 고개를 이른다. - 6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346.5m봉 사이의 쇠실고개 - 芍 藥 山 모정고개를 거쳐 낙동강으로 몰입되는 산릉을 따라 생림면과 경계를 이룬다. 이 산줄기는 조사구역 북쪽의 생림면 생림리에서 사 촌천에 의해 개방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앞서 본 망천현에서 서쪽의 금음산 (375.1m) - 武 陵 山 (312.3m)으로 이어지며 산계 남쪽의 주촌면과 경계를 이루는 지리구로 기능한다. 서쪽으로는 화포천을 사이에 두고 진영과 경계를 이루다가 烽 火 山 (140.5m) 27) 을 거쳐 柳 等 과의 경계에서 낙동강으로 이어지며 서쪽을 경계 짓는 다. 북쪽은 낙동강이 자연지리구가 되어 밀양과 경계를 이룬다. 낙동강 남쪽으로 한 림면 소재지와 그 외곽의 골짜기 들머리까지는 홍수기에 침수를 면치 못하는 곳이 었다. 3) 조사구역과 주변의 地 質 당 조사구역 일 원의 기반암은 경상계 신라통 의 도대동 安 山 斑 岩 (Cdap)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동쪽의 배후 산록에는 硅 長 斑 岩 (Fph)이 분 포한다. 북쪽의 구릉은 主 山 安 山 巖 質 岩 (Cca) 으로 구성되어 비탈의 기울기 가 밋밋하다. 조사구역은 도 대동 안산반암 으로 이루어진 구릉이 제4계 충적층으로 접 속되는 接 觸 帶 지도 5. 조사구역과 주변의 지질도(1/50,000) 에 해당한다. 상기한 지질 구성에 의해 서로 경사도를 달리하는 구릉과 이에 둘러싸인 저지의 충 적지가 발달하게 되었다. 주변 구성 지질의 走 向 帶 가 북북서-남남동으로 뻗어 있어 27) 산정에 子 巖 山 봉수대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남았다. - 7 -

www.duryu.or.kr 그 사이에 분포하는 충적층은 지질의 주향과 일치하는 좁은 곡간 盆 地 를 이루고 있 다. 28) 4) 조사구역과 그 주변의 交 通 路 조사구역으로 직접 지나는 전통시대의 교통로는 없다. 다만 이곳에서 다소 떨어져 고려시대의 金 州 道, 조선시대의 自 如 道 에 속한 金 谷 驛 과 조선시대에 새로 둔 大 山 驛 을 잇는 교통로가 지난다. 金 谷 驛 의 옛터로 비정되는 곳은 김해시 생림면 金 谷 里 금곡마을(본금곡 또는 쇠실) 과 생림면 鳳 林 里 本 鳳 林 ( 驛 村 ) 등 두 곳이다. 지지에 전하는 김해부에서의 북쪽으 로 35리라 한 것은 금곡리에 비정되고, 해동지도 김해부지도와 조선후기지방 지도 김해지도에 부기된 25리, 대동여지도 에 표시된 위치 등은 봉림리에 해 당된다. 그것은 금곡역이 처음 설치된 곳(금곡리)에서 어느 시점에 남쪽으로 옮겨졌 음을 뜻한다. 본금곡 시절은 아마도 대산역과의 관계가 이곳에 역을 두게 한 중요 한 입지인자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김해에서 금곡역으로 이르는 길은 나밭 고개-봉림-쇠실고개-금곡역으로 설정된다. 서쪽의 대산역으로는 낙동강변의 구릉 을 잇는 자연제방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밀양으로 이르기는 만만치 않았다. 모정 에서 도강하거나 고개를 넘어 마사에서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29) 大 山 驛 30)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새로 둔 역이다. 그 위치는 대산면 일동리로 헤아리 기도 하지만, 강 건너 良 洞 驛 및 동쪽 금곡역과의 관계성이나 雪 倉 에서의 접근성 등을 고려할 때 대산면 북모산리로 비정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김해부에서 대산역으로 이르는 노정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조선후기지방지도 의 김해지도(규12154)다. 이 지도에는 김해부의 북문에서 서쪽으로 길을 잡아 許 后 陵 과 구지봉 남쪽 길을 지나고 防 浦 를 건너면, 갈림길인 삼거리에 도착한다. 여기서 서쪽으로 길을 잡아 件 羅 峙 31)를 넘고, 望 川 마을을 지나 명동리 금음마을에서 서쪽 으로 茅 亦 峴 32)을 넘어 병동리 어병마을에 든다. 어병마을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薪 橋 川 33)에서 揷 橋 34)를 건너고 설창을 지나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 주천강을 건너서 대산면 동북쪽의 大 山 驛 에 닿는다. 그 위치는 지금의 牟 山 里 쯤이 되겠다. 이 지도 에는 역의 배후에 구릉을 그렸고, 그 뒤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대산면의 동북쪽이면 서, 유등나루의 서쪽에 낮은 구릉이 있는 곳이라면 모산리가 분명해 보인다. 35) 28) 국립지질연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 29) 최헌섭, 2010, 자여도, 한가람, p.97. 30) 달리 太 山 驛 이라고도 했다. 31) 해동지도 에는 望 川 峴 이라 했다. 海 東 地 圖 金 海 府 地 圖 望 川 峴 32) 朝 鮮 後 期 地 方 地 圖 金 海 地 圖 ( 奎 12154) 茅 亦 峴 平 夷 距 官 門 二 十 二 里 33) 지금의 화포천을 예전에는 그렇게 불렀는데, 그것은 여기에 섶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34) 薪 橋 와 같은 말인데, 흙과 나뭇가지나 섶으로 만든 다리를 섶다리 또는 삽다리라 하는데, 그것을 한자로 적 을 때 훈차하면 신교가 되고, 음차와 훈차를 병용하면 섭교가 된다. 35) 최헌섭, 2010, 자여도, 한가람, pp.56~58. - 8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지도 6. 김해의 옛길(최헌섭; 2013) 대동여지도 에서는 조사구역은 羅田峴36) 북쪽, 금곡과 신교천 사이에 자리하는 데, 직접적으로 교통망에 배속되어 있지 않다. 36) 삼계동에서 생림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달리 露峴이라고도 했다. - 9 -

www.duryu.or.kr 2. 고고ㆍ역사자료로 본 김해의 역사 1) 선사시대 (1) 신석기시대 김해에서 조사된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할 때,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인간생활은 먼 신석기시대로부터 비롯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 하구의 북정, 수 가리 조개더미 유적과 옛 金 海 灣 37)의 언저리에 자리했던 농소리 조개더미 등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김해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엿보기 위해 수가리 조개더미 를 사례로 고구( 考 究 )할 수 있다. 수가리 조개더미 유적은 1978~79년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수행한 조사를 통해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이 조개더미의 조사를 통해 3기의 문화층으로 나눌 수 있는 6개의 퇴적층(해발 5~7m)이 드러났다. 출토유물의 형식학적 연구와 방사 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해 유적이 조성된 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에서 늦은 시기(만 기)에 걸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수가리 Ⅰ기(Ⅵ Ⅴ층)는 남해안 지역의 특징적인 굵은생선뼈무늬(태선어골문) 토기 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토기의 모양은 뾰족하거나 둥근 바닥이 기본이며, 무늬는 날카로운 줄무늬( 針 線 文 )를 새긴 것이 대부분이나 입술 위를 눌러 찍은( 押 捺 ) 것도 있다. 무늬는 그릇 바깥 전체에 베푼 것과 몸통과 바닥에는 새기지 않은 것이 섞여 있는데 그 비율은 비슷하다. 수가리 5층의 방사성탄소연대는 2,560±115 B.C.로 헤 아려져 그 편년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수가리 Ⅱ기(Ⅳ Ⅲ)는 굵은생선뼈무늬를 새긴 토기가 줄어들고 무늬도 단순한 것이 많으며, 무늬가 없는 토기가 뚜렷하게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무늬를 새긴 경우에 는 토기 위쪽에만 사격자문을 새긴 것이 압도적이며, 생선뼈무늬는 뚜렷하게 새긴 것이 적고 대부분 스치듯 그어 새겼다. 수가리 Ⅲ기(Ⅱ Ⅰ)에는 무늬가 없는 토기가 더욱 늘어나며, 새로 겹아가리( 二 重 口 緣 )토기가 나타난다. 무늬를 새긴 경우라 하더라도 Ⅱ기보다 더욱 퇴화하여 하나의 무늬를 입술 아래에 희미하게 새기는 정도이다. 이와 같은 수가리 조개더미 유적의 Ⅰ Ⅱ기는 남해안 신석기시대 토기 편년의 기준 이 되는 동삼동 조개더미 유적의 Ⅳ기에 해당되며, Ⅲ기는 동삼동 Ⅴ기에 해당되므 로 이곳 수가리 조개더미가 만들어진 때를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로 편년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3구 패총의 Ⅱ층 상부와 Ⅳ층에서 확인된 磨 耗 貝 層 은 당시의 海 水 面 變 動 을 37) 고김해만의 성립을 기초로 김해평야 각지에서는 비로소 內 灣 系 패총이 성립하게 되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漁 撈 文 化 가 전개된다. 郭 鍾 喆, 1990, 洛 東 江 河 口 域 에 있어서 先 史 ~ 古 代 의 漁 撈 活 動, 伽 倻 文 化 제3호. - 10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자료로 보고자는 적기하였다. 38) 그러나 1990년대 이래 로 발표된 일련의 논문에서 3구 패총의 패각 마모 현상은 해수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地 下 水 에 의한 風 化 現 象 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39) 수가리 보고자의 견해대로 이곳에서 확인된 마모패층이 해수면의 변동을 지시하는 자료라면 그것은 수가리 2 4층이 퇴적되고 난 이후 각각 두 차례의 해수면 상승이 있었다는 이야기 가 된다. 먼저 4층이 형성되고 난 뒤인 신석기시대 후기에 해수면 상승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한 번은 이 유적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신석기 시대 만기 이후에 도 다시 그러한 자연현상이 일어났었다는 것이다. (2)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에는 고김해만에 연한 배후 구릉의 경사가 완만한 사면이나 고립 구릉의 정상부에서 당시의 유적이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지형대를 입지배경으로 한 취락 의 존재가 상정된다. 최근 조사된 분산 남서록의 화정지구와 구산지구의 조사에서 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지석묘로 추정되는 분묘가 조사된 바 있다. 보다 더 저 지에 입지한 내동 구산동 서상동 수로왕릉경내 지석묘군과 장유면 무계리 율하리 주촌 면 유하리 지석묘의 존재는 이 시기에 이르러 고김해만 연변에 인간거주가 집중적 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적의 분포양상을 통해 弁 辰 狗 邪 國 형 성의 기반을 헤아릴 수 있다. (3) 철기시대 철기시대에 이르면 고김해만으로 돌출된 봉황대유적을 거점으로 변진구사국이 형성 되기 시작하였다. 金 官 加 耶 중심 집단의 생활장소로 추정되는 봉황동유적 40) 은 鳳 凰 38) 鄭 澄 元 林 孝 澤 申 敬 澈, 1981, 金 海 水 佳 里 貝 塚 Ⅰ. 패각 마모의 동기를 海 水 의 流 動 에 의한 것이라고 최초로 제기한 것은 李 彦 宰 의 석사학위논문을 통해서이 며,( 李 彦 宰, 1980) 이를 수가리패총의 보고자들이 수용한 것이다.( 鄭 澄 元 外, 1981) 그 뒤 尹 銑 과 李 彦 宰 는 고생물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마모패각이 출토되는 層 準 은 潮 間 帶 내지는 그 직하에 있었음을 의미한 다고까지 논의를 진전시켰다.( 尹 銑 李 彦 宰 ) 李 彦 宰, 1980, 水 佳 里 貝 塚 의 軟 體 動 物 化 石 群 集 에 관한 硏 究, 釜 山 大 學 校 大 學 院 理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7. 尹 銑 李 彦 宰, 1985, 水 佳 里 貝 塚 의 軟 體 動 物 化 石 群 集 과 海 水 面 變 動, 한국고생물학회지 1, p.148. 秋 淵 植, 1993, 貝 塚 의 形 成 過 程 - 水 佳 里 貝 塚 의 後 堆 積 過 程 에 대한 검토를 中 心 으로-, 韓 國 考 古 學 報 29, 韓 國 考 古 學 會, pp,77~109에서 再 引 用. 39) 이에 대한 최초의 반론은 吳 建 煥 과 郭 鍾 喆 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들은 마모 패층이 형성된 원인의 하나로 地 下 水 의 作 用 을 들었다. 吳 建 煥 郭 鍾 喆, 1989, 金 海 平 野 에 대한 考 古 學 的 硏 究 (1) - 地 形 環 境 과 遺 蹟 -, 古 代 硏 究 2, p.13. 이후 秋 淵 植 에 의해 구체적인 해석이 제기되었는데, 그는 렌즈상으로 협재되어 있는 磨 耗 貝 層 의 위치가 과거 의 海 水 面 의 위치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 貝 塚 의 堆 積 層 속에서 구분되는 通 氣 帶 와 飽 和 帶 의 경계면에 형성된 間 層 속에 있던 純 貝 殼 의 일부가 地 下 水 面 과 부딪치면서 생긴 化 學 的 風 化 作 用 의 副 産 物 로 생성된 것일 뿐이라고 규정하였다. 秋 淵 植, 1993, 貝 塚 의 形 成 過 程 - 水 佳 里 貝 塚 의 後 堆 積 過 程 에 대한 검토를 中 心 으로-, 韓 國 考 古 學 報 29, 韓 國 考 古 學 會, pp,77~109. 40) 金 官 加 耶 중심세력의 생활 장소인 봉황동 유적의 범위는 최근 확인된 土 城, 交 易 시설, 古 金 海 灣 의 존재 등 - 11 -

www.duryu.or.kr 臺 자락의 가장자리를 아우르며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土 城, 41) 竪 穴 住 居 址 貝 塚 등으로 이루어진 취락지 42), 당시의 해안선에 연해 있는 陶 窯 旱 田 形 水 田 交 易 과 관 련되는 시설로 추정되는 고상건물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43) 토성은 봉황대의 북 동쪽에서 확인되었다. 그 범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봉황대 서쪽 구 릉과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44) 봉황대의 서쪽 충적지에서 교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상건물지군이 조사되었다 45). 그 밖의 봉황대 외곽 구간에서는 성 내부 에 위치하는 취락과 관련되는 시설들이 각 층마다 매우 조밀하게 확인되고 있다. 또한 봉황동유적 북쪽 약 500m정도에 분포하는 대성동고분군 46) 은 금관가야 지배 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집인 陽 宅 과 陰 宅 을 구분 하고자 묘역을 성 밖에 두는 등 배치의 조절을 통하여 이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상기한 유적 외에 저명한 대성동유적 47) 을 비롯하여 조사지 역과 인접한 구지로 48) 와 화정지구에서도 당시의 분묘가 발굴된 바 있다. 加 耶 時 代 로 접어들면서 유적의 분포는 더욱 조밀해지는데, 이는 金 官 加 耶 의 成 長 및 繁 榮 과 연동된다. 김해의 진산인 분산 남록의 거의 전역에서 이 시기의 유적이 확인되므로 상기한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을 고려하여 도면2)와 같이 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적은 靑 銅 器 時 代 부터 유적이 조성되기 시작했지만 중심 시기는 鐵 器 時 代 ~ 加 耶 時 代 에 해당된다. 봉황동 유적의 성격과 그간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최근에 발 간된 아래의 책에 잘 정리되어 있다. 釜 山 大 學 校 博 物 館, 1998, 金 海 鳳 凰 臺 遺 蹟.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2004, 金 海 會 峴 洞 消 防 道 路 區 間 內 遺 蹟 -13 14 15통-. 慶 南 考 古 學 硏 究 所, 2005, 鳳 凰 土 城 - 金 海 會 峴 洞 事 務 所 ~ 盆 城 路 間 消 防 道 路 開 設 區 間 發 掘 調 査 報 告 書 -. 41) 경남고고학연구소, 2003, 김해 회현동사무소~분성로간 소방도로 개설구간 발굴조사 영남고고학 33호, 영남 고고학회. 42) 聚 落 의 중심지는 鳳 凰 臺 라 불리는 구릉 일원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이 구릉에 대한 발굴자료를 검토해 보 면, 구릉의 중심지를 개별 주거 단위가 집중되는 狹 義 的 개념의 聚 落 으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방증자료는 구릉 정상부위의 외연을 따라 분포하는 貝 塚 과 그 말단의 외연을 따라 조성된 土 城 을 들 수 있 다. 즉, 토성은 防 禦 施 設 임과 동시에 협의적 개념의 聚 落 을 규정하는 境 界 的 요소를 겸비한 장치로 이해된다. 釜 山 大 學 校 博 物 館, 1998, 金 海 鳳 凰 臺 遺 蹟. 釜 山 大 學 校 博 物 館, 2002, 金 海 會 峴 里 貝 塚. 43)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2005, 加 耶 人 生 活 體 驗 村 敷 地 發 掘 調 査 報 告 書. 44) 慶 南 考 古 學 硏 究 所, 2005, 鳳 凰 土 城 - 金 海 會 峴 洞 事 務 所 ~ 盆 城 路 間 消 防 道 路 開 設 區 間 發 掘 調 査 報 告 書 -. 45) 조사자는 高 床 建 物 址 의 성격을 交 易 시설 혹은 交 易 品 을 보관하는 倉 庫 등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추정의 근거는 당시의 地 形 環 境 的 배경과 해안 埋 立 地 에 고상건물이 설치된 점, 고대의 교역기사 등을 들고 있다. 이것은 情 況 논리에 입각한 추정인 바, 향후 이 입론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심재용 김용탁, 2003, 김해 봉황동유적 발굴조사 -가야인 생활체험촌 조성부지 내- 고구려 고고학의 제 문제, 제27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韓 國 考 古 學 會, pp.115~137. 46) 慶 星 大 學 校 博 物 館, 2000, 김해 대성동고분군 47) 경남고고학연구소, 2006, 김해 대성동 유적 동편지구 48) 대성동고분군의 북동측 龜 旨 路 개설구간에 대한 발굴에서 木 棺 墓 14기, 木 槨 墓 38기, 石 槨 墓 1기, 甕 棺 墓 4 기 등 57기의 분묘가 조사되었다. 木 棺 의 구조는 割 竹 形 통나무 관과 板 材 를 사용한 箱 子 形 목관이며, 그 시 기는 漆 器 부장의 유무에 의해 Ⅰ Ⅱ기로 구분된다. 보고자는 목관묘 Ⅰ기의 연대를 2세기 전엽~중엽으로 비 정하고 있다. 木 槨 墓 는 바닥에 시상석이 깔리지 않고, 부곽이 채용되지 않은 單 獨 墳 이다. 목곽묘의 경우 墓 制 와 土 器 文 化 에 의해 2기로 구분된다. 목곽묘 Ⅰ기는 3세기 2/4분기~3세기 4/4분기, 목곽묘 Ⅱ기는 4세기 1/4분기~4세기 4/4분기로 비정하고 있다. 慶 星 大 學 校 博 物 館, 2000, 金 海 龜 旨 路 墳 墓 群. - 12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2) 역사시대 (1) 고대 1 駕 洛 國 의 형성과 성장 가락국(금관가야)은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지금의 김해 일원을 세력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수로왕 탄강신화에서 보듯, 가야의 형성 이전 에 이미 이곳에 존재하였던 소단위 재지 권력 집단들을 통합하여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화에 나타난 대로 9간이라 불리는 9개 집단 지배자들의 합의에 의해 이 주민 계통의 수로왕을 추대함으로써 가락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주민의 진원 은 탄강 및 난생이라는 신화적 요소에서 이미 북방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 다. 이는 김해 일원의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북방계 문물인 동복 등의 유물과, 대도 를 꺾어 묻는 등의 매장습속에 잘 나타나 있다. 금관가야 성장의 모태가 된 동력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철의 생산과 이를 통한 무 역이다. 현재적 개념에서 볼 때, 이는 김해라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발전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다소 지겨운 인용이 되더라도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어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했다. 49) 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기실 이들 지역과의 교역의 증거는 고분 출토 유물이 잘 방증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앞서 든 가락국기의 수로왕 혼인기사도 이 러한 국제교류를 반영하는 한 사례가 아닐까 한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연구자들 이 이 기사를 통해 許 黃 玉 의 출자를 규명하는 데에 집중해 왔다. 허왕옥을 비롯해 그녀와 동행한 잉신인 趙 匡 과 申 輔 등이 중국식 이름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가지 고 온 많은 물건 가운데 한나라의 저자에서 사온 여러 가지 물건( 漢 肆 雜 物 ) 이 포 함되어 있음은 무역에 대한 다른 표현은 아닐까. 그녀를 태우고 온 배가 쌀과 포목 등 많은 물건을 싣고 돌아갔다는 점은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우지 못하게 한다. 남북 으로 왜와 한을 잇는 중계무역도 행하였을 것이므로 南 北 市 糴 의 중간에서 이를 중 개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와 같은 무역로의 설정은 탈해 관련 기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방증되는 바이다. 이 시기는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사적 연구 성과에 의하면, 3세기를 전후한 무렵으 로 이해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로는 분묘에서의 대형목곽묘의 출현을 들 수 있다. 2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양동리 162호분이 그 예증이다. 바로 이때를 즈음하여 무덤에 덩이쇠가 다량으로 부장되기 시작하므로 이로부터 가야 철기의 전성기를 열 어가게 된 것이다. 번영을 거듭하던 가야의 철 산업은 4세기 전반 국제정세의 변화 에 의해 그 수요가 크게 감소하게 된다. 바로 고구려 미천왕의 313년과 314년에 연이은 낙랑 대방 등 한사군 축출에 따른 주요 수요처의 상실이 그것이다. 낙랑 등 49) 三 國 志 魏 書 東 夷 傳 弁 辰 國 出 鐵 韓 濊 倭 皆 從 取 之 諸 市 買 皆 用 鐵 如 中 國 用 錢 又 以 供 給 二 郡 - 13 -

www.duryu.or.kr 과의 원거리 무역의 차단은 시장을 잃은 이상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이를 문화 전반의 문제에 걸쳐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2 가락국의 번영과 쇠퇴 가락국의 번영을 이끈 동력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철의 생산과 무역이다. 번영 을 구가하던 가락국은 4세기 이후 동아시아 해상 무역체계의 변화에 따라 서서히 쇠잔해 가기 시작한다. 동아시아 국제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한사군 설치 이후부터이다. 한은 衛 滿 朝 鮮 을 멸하고 고조선의 옛 땅에 樂 浪 帶 方 등의 군현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韓 濊 와 바다 건너 倭 와의 무역을 중개하도록 했다. 한반도와 일 본 九 州 및 關 西 지역에 이르는 연안의 무역 항로를 따라 貨 泉 五 銖 錢 등의 고대 중 국 화폐가 발견되는 것은 낙랑군 설치 이후 동아시아 국제무역이 활성화되었음을 반영하는 예증이다. 50) 우리 지역의 한반도 남부 해안지역에서 이와 같은 화폐가 출토된 곳으로는 창원 다 호리유적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五 銖 錢 3, 51) 성산패총의 五 銖 錢 1, 52) 김해 회현 리패총의 貨 泉 1, 53) 삼천포 勒 島 貝 塚 출토 前 漢 代 의 半 兩 錢 1매 등이 있다. 54) 이러한 유물이 전해지는 루트는 三 國 志 倭 人 傳 에 묘사된 바와 같다. 대방군에 서 왜에 이르는 노정은 해안을 따라 韓 國 을 지나 동남쪽으로 가면 왜의 북쪽 狗 耶 韓 國 (지금의 김해)에 이르고, 다시 바다를 건너면 對 馬 島 에 도착한다. 55) 물론 대마 도 이후의 노정은 一 岐 島 를 거쳐 열도로 이르게 된다. 최근 중간 기착지인 일기도 에서 彌 生 時 代 의 선착장이 발굴되어 이 루트를 일본학계에서는 南 北 市 糴 을 이끈 교 역로라고 하며, 56) 최근의 일본 연구자들은 이 길을 쇠의 길( 鐵 の 道 ) 이라고도 부른 다. 57) 이것은 이 길을 통해 바로 우리 지역 변한의 鐵 ( 鐵 鋌 ; 덩이쇠)이 왜로 수출되 었음을 방증하고 있음이다. 그러다 4세기 초엽 고구려에 의한 낙랑군(313년)과 대방군(314년)의 축출에 따른 국제질서의 변화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가락국은 철의 주요 수요처를 상실하게 됨 에 따라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漢 代 의 유물은 영남지역에 편중되어 발 견되는데 비해 魏 晉 ( 西 晉 )의 유물이 馬 韓 百 濟 의 고지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은 대조 적인 현상이다. 58) (윤재운; 2006) 이와 같은 고고학적 사실이야 말로 국제질서의 변 화를 반영하고 있는 단적인 예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50) 姜 鳳 龍, 2002, 古 代 동아시아 海 上 交 易 에서의 百 濟 의 역할, 韓 國 上 古 史 學 報 38, p.38~77. 51) 李 健 茂 外, 1989, 義 昌 茶 戶 里 遺 蹟 發 掘 進 展 報 告 (Ⅰ), 考 古 學 誌 第 1 輯, 韓 國 考 古 美 術 硏 究 所. 52) 崔 夢 龍, 1976, 西 南 區 貝 塚 發 掘 報 告, 馬 山 外 洞 城 山 貝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pp.12 7~128. 53) 朝 鮮 總 督 府, 大 正 九 年 度 古 蹟 調 査 報 告 書, 圖 版 27. 54) 李 健 茂, 2001, 勒 島 遺 蹟 을 통해 본 古 代 國 際 交 流, 勒 島 遺 蹟 을 통해 본 韓 中 日 古 代 文 化 交 流, 慶 尙 南 道 慶 尙 大 學 校 博 物 館, pp.6~7. 55) 三 國 志 卷 三 十 魏 書 三 十 烏 丸 鮮 卑 東 夷 傳 三 十 倭 人 傳 從 郡 至 倭 遁 海 岸 水 行 歷 韓 國 乍 南 乍 東 到 其 北 岸 狗 耶 韓 國 七 十 餘 里 始 渡 一 海 千 餘 里 至 對 馬 島 56) 長 崎 縣 敎 育 委 員 會, 2003, 壹 岐 原 の 辻. 57) 大 塚 初 重 外, 1997, 考 古 學 による 日 本 歷 史 - 交 易 과 交 通 - 9, 雄 山 閣. 58) 윤재운, 2006,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 景 仁 文 化 社, p.36. - 14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42년 김수로에 의해 건국된 가락국은 491년을 이어오다 10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 라에 투항하니, 그때가 법흥왕 19년인 532년이었다. 이때 신라는 가락국을 金 官 郡 으로 고쳤다. 3 통일신라시대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가락국 후예들의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자, 문무왕은 20년(680)에 가락국 고지를 金 官 小 京 으로 삼았다. 경덕왕 16년 (757)에는 전국의 행정 구역을 중국의 제도를 차용하여 군현제로 개편하면서 金 海 小 京 으로 고쳤다. 이때의 행정개편은 별다른 변화 없이 통일신라 전반 및 고려시대 초까지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 (2) 중ㆍ근세 1 고려시대 고려 太 祖 23년(940)에 김해소경을 김해부로 고쳤다. 뒤에 臨 海 縣 으로 내렸다가 다 시 臨 海 郡 으로 올렸다. 成 宗 2년(983)에는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전국을 12 牧 으로 나누어 설치하는 행정구역개편을 실시하였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지방 豪 族 勢 力 들로 인하여 당시 중앙에서 지방을 실질적이고 조직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는 상 황이었고, 단지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의 독자적인 호족들을 통제하였던 점에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성종 14년(995)에 지방 행정체계를 다시 4 都 護 府 10 道 로 개편하였으며, 顯 宗 9년(1018)에 전국을 4 道 護 府 8 牧 56 州 郡 28 鎭 으로 나누게 됨으로써 고려의 지방제도가 완성되었다. 이때 비 로소 통일신라 때 이루어 진 지방명칭과 행정체계에 대한 완전한 정비가 이루어지 면서 기존의 체계와 명칭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김해시의 행정개편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成 宗 14년(995)에는 金 州 安 東 都 護 府 로 고쳤고, 光 宗 22년(971)에 금주도호부라 하였다가 穆 宗 3년(1000)에는 안동도호부로 고쳤다. 顯 宗 3년(1012)에 다시 金 州 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었다. 元 宗 11년(1270)에 방어사 金 咺 이 密 城 에서 일어난 반 란을 평정하고 삼별초를 막은 공으로 金 寧 都 護 府 로 승격되었다. 忠 烈 王 19년 (1293)에 현으로 강등되었으며, 동왕 34년(1308)에 다시 金 州 牧 으로 승격되었고, 忠 宣 王 2년(1310)에 이르러 김해부로 개편되었다. 59)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는데, 高 宗 10년(1223)~ 恭 讓 王 4년(1392)에 이르기까지 169년간 총 529회에 이를 만큼 빈번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恭 愍 王 ~ 禑 王 통치 시기에는 총 493회로써 침략빈도가 가장 많았으니, 그 노략질과 규모 또한 점차 대담해져 남해안과 삼남지방은 물론 심지어 평안ㆍ함경지역, 그리 고 내륙지방까지 침략하여 그 피해가 高 麗 王 朝 의 기저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이러 59) 高 麗 史 卷 五 十 七 < 志 > 第 十 一 地 理 二 - 15 -

www.duryu.or.kr 한 상황은 김해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김해지역은 日 本 ( 倭 )과 가장 가까운 海 路 의 요충지였으며, 物 産 또한 풍성한 큰 고을로서 잦은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의 대상이 되어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禑 王 때 김해부사 朴 葳 는 이를 격퇴하는 한편, 김해에 邑 城 과 盆 山 城 을 수축하여 왜구의 침탈로부터 방비를 강화하기도 하 였다. 2 조선시대 조선 초기에 이르러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道 중심체제 의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행 정개편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김해시는 먼저 太 宗 13년(1413)에 金 海 都 護 府 로 승격되었다. 이때에서야 이곳에 鄕 校 가 설치되었으며, 웅천ㆍ완포를 속현으로 대 산ㆍ천읍을 부곡으로 삼았다. 世 宗 實 錄 地 理 志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김해부 의 호구 수는 1,290호, 인구는 6,642명이었다. 60) 그리고 文 宗 2년(1452)에는 웅신 현과 완포현을 웅천현으로 통합하여 현감을 두었고, 世 祖 13년(1467)에 지방군제 개편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관하의 鎭 管 을 설치하였다. 조선 중기 宣 祖 25년 (1592)에 壬 辰 倭 亂 이 발발하여 가락면 죽동에 상륙한 왜군 제3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김해성이 함락되기도 하였다(김해성 전투). 61) 이후 金 海 府 邑 誌 의 기록에 의하면, 英 祖 35년(1759) 김해도호부의 호구 수가 8,511호에 인구가 33,015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전기에 비해 많은 증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인근 지역들과의 통합과 분 리를 거치면서 승강을 거듭하면서도 대체적으로 府 단위의 행정체계를 유지하였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는 郡 으로 행정개편 이 이루어 졌으며, 인근 지역들과 여러 차례 개편과 편입을 거치면서 현재 김해시 의 틀을 갖추게 된다. (3) 근ㆍ현대 조선 말기인 高 宗 32년(1895)의 23 府 制 의 지방관제 개편으로 인하여 金 海 郡 으 로 되었다. 이듬해인 高 宗 建 陽 元 年 (1896)에 다시 道 體 制 가 부활되면서 행정개편 되었으며, 光 武 10년(1906)에 大 山 面 이 창원군으로 편입되고, 양산군에 大 上 面 ㆍ 大 下 面 이 편입되었다. 이후 1910년 9월, 21개 面 이 13개 面 으로 개편되었고, 1914년 군ㆍ면 폐합에 따라 밀양군의 下 南 面 ㆍ 下 東 面 의 일부를 병합하여 14개 面 과 134개 里 로 개편하여 관할하였다. 1918년 좌부면과 우부면을 병합하여 金 海 面 을 신설하 고, 1928년 4월 하계면을 進 永 面 으로 하고, 1931년 11월 김해면을 金 海 邑 으로 승 격하였다. 1942년 진영면을 읍으로 승격, 2읍 11면이 되었다. 이후 해방이 되고도 60) 世 宗 實 錄 卷 一 百 五 十 < 地 理 志 > 金 州 都 護 府 戶 口 條 61) 이때 四 忠 士 를 중심으로 백성들은 끝까지 왜군과 싸웠고,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사충사는 宋 賓 ㆍ 李 大 亨 ㆍ 金 德 器 ㆍ 柳 湜 등 4명으로 후일 이들을 위해 분산성에 四 忠 壇 을 설치하고, 高 宗 8년(1871)에는 사충단비를 설 치하였다. - 16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1978년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던 해에 김해군의 대저면, 명 지면, 가락면의 강동지구가 현 부산광역시 北 區 에 편입되었고, 1981년 김해읍이 김 해시로 승격되면서 김해군과 분리되어 한때 김해군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기도 하였 다. 1983년 2월 김해군 生 林 面 의 금곡리와 생림리 일부가 二 北 面 에 편입되었으며, 1987년 1월 입구면이 翰 林 面 으로 개칭되었다. 1993년에는 낙동대교가 완공 개통되 었다. 그리고 1995년 도농통합시로 金 海 市 ㆍ 郡 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62) 62) 김해시의 面 단위 행정구역명 변천관련은 경상남도 연구 에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조하면 된다. 경남대학교경남지역문제연구원 저, 1997, 경상남도 연구, 경남대학교 출판부. - 17 -

www.duryu.or.kr Ⅲ. 조사내용 지도 7. 조사구역 및 주변유적표시지도(1/25,000) - 18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1. 고고분야 1) 주변유적 현황 조사대상구역에는 문화재 분포 사실이 보고된 바 없다. 다만, 조사구역 약 150m에 장원고분군이 분포해 있고, 1km 정도 떨어진 곳에 독점고분군과 용덕리 고분군, 안 하리 유물산포지 등이 분포한다. 이외에 용덕리 유물확인지점과 용덕리 유물산포지, 용덕리 868-6번지 유적 등은 조사대상구역과는 1km 이상 이격되어 있으나 조사대 상구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참고로 정리해 둔다. (1) 獨 點 古 墳 群 독점고분군은 장원 고분군과 덕촌 고분 군에서 북쪽으로 1.2km 정도 지점에 있 는 독점마을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 군은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남쪽의 산 기슭에서 정상부에 이르기까지 분포하고 있는데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은 듯하다. 이 산기슭에서 마을 쪽으로 향하고 있는 북쪽 능선에는 감나무 과수원이 있고, 나 머지 소나무들이 산을 덮고 있다. 얼핏 사진 1. 독점고분군 원경 보기에는 전혀 고분군이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과수원에서 覆 土 를 위해 파놓은 흙더미 속에서 가야토기 파편들이 출토되었 으며, 이 산 정상부에서 약간 아랫쪽 남쪽 경사면에 봉토가 파괴되고 개석과 벽석 이 일부 노출된 유구가 있으나, 도굴을 당한 흔적은 없다. 노출된 석실의 규모는 소 형에 속한다. 이 고분군은 과수원 개간으로 일부 훼손되었으나 나머지는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 (2) 壯 元 古 墳 群 사진 2. 장원고분군 원경 용덕리 고분군 맞은편에 있는 장원마을 뒷산에 있는 고분군이다. 마을 배후의 주봉은 해발 152m이고, 주봉에서 동쪽 으로 마을과 만나는 말단부는 해발 50m 정도이다. 주봉에서 마을과 만나는 구릉 전체가 고분군이다. 고분군에는 곳곳에 도굴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이 가끔 바깥사람들이 와서 땅을 파는 것 - 19 -

www.duryu.or.kr 같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최근까지도 도굴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산견되는 유 물은 주로 회청색 경질토기이고 간혹 적갈색 연질토기편도 섞여 있다. 지표상에 蓋 石 들이 노출되어 있는데 대체로 규모가 작은 소형 石 槨 墓 가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3) 김해 안하리 유물산포지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안하리 348번이 일대에 있는 이 유적은 낙동강 남쪽 낙동 강에 유입되는 화포천 연결 용덕천과 안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 북편 구릉 남쪽 사 면부에 해당한다. 경사변환점 상에는 안명 초등학교와 안하로가 구릉을 감싸고 돌고 있다. 유적은 안명초등학교의 바로 북쪽 뒤편과 서쪽 사면부까지 넓게 해당한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과 반 사진 3. 안하리 유물산포지 월형석도편을 비롯하여 삼국시대 각종 토 기편과 조선시대 자기편까지 선사에서 조선시대까지의 복합유적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4. 김득기 묘 원경 (4) 金 得 器 墓 김득기의 묘는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낙산마 을 뒤편 구릉에 있다. 임진왜란 때 김해 부 사가 진주성으로 가 버린 후 이곳 유림이던 김득기( 金 得 器 ) 등 4인이 왜구를 끝까지 방 어하다 순사하였다. 김득기 묘는 일반 민묘 형태이다. 화강암제의 묘비는 1901년에 고쳐 세운 것으로 비 전체 높이 2.1m, 비신 높이 1.46m, 폭 0.58m, 두께 0.2m이다. (5) 龍 德 里 古 墳 群 용덕리 고분군은 장원마을의 맞은편 구릉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항마을 뒤 편 구릉에 위치하는데 그 규모는 비교적 작다. 산중턱에 철탑이 세워져 있고 그 아 래쪽에 고분의 개석이 노출되어 있는데 출토유물은 없으며 그 주변에도 1~2기 정 도의 封 墳 이 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서 토기가 몇 점 출토되었다고 하나 그것만으로 유적의 성격을 알기는 어렵다. 현재 용덕리 고분군 북쪽 공장지대 방향에 상당히 넓은 규모로 산의 북쪽 구릉부가 개발된 상태이다. 현재 빈 터로 남 - 20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아있는데 이를 개발할 경우 용덕리 고분군과의 연관관계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사진 5. 용덕리 고분군 사진 6. 용덕리 일반산업단지내 용덕리 유물확인지점 (6) 용덕리 유물확인지점 용덕리 유물확인지점은 용덕일반산업단지 조성사업 부지에 있다. 이곳에서 확인된 유물은 삼국시대 토기편과 조선시대 자기편 등이 수습되었는데 삼국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분묘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현재 이곳은 용덕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된 상태이다. (7) 용덕리 868-6. 13번지 유적 수전 2면 의사논둑 수전 1면 수전 3면 사진 7. 수전 조사 중 전경 사진 8. 용덕리 유물산포지 이 유적은 개인이 의뢰한 문화재지표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이다. 지표조사 결과 유 적의 존재가능성이 높아 표본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수전층이 발견되어 다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려 ~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수전 일부와 이와 관련 된 관개시설인 수로가 확인되었다. 수전의 기능면은 훼손되어 논둑 및 경작 관련 흔적 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의사 논둑을 통해 수전면의 길이는 확인되었다. 또한 식물 규산체분석을 통해 조사구역의 당시 자연적 환경이 복원됨에 따라 생산유적이 입지 하는 자연 지리적 환경에 대한 자료도 확보할 수 있었다. - 21 -

www.duryu.or.kr (8) 용덕리 유물산포지 용덕리 유물산포지는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2010년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건설사업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보고되었다. 보고서에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것으 로 추정되는 유물이 수습되었고 주변입지를 고려할 때 고려-조선시대 생활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63) 현재 도로개설 공사가 진행 중이다. 2. 조사구역 내 유적 현황 사진 9. 조사구역 현황 조사대상구역은 경남 김해시 한림면 산 1-5번지 외 7필지다. 김해시 삼계에서 진 영으로 진행하는 舊 국도 14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신천리 망천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에서 한림면 안하리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다 안명 초등학교에서 생림면으로 돌아가는 곳에 가축분뇨처리장이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 로 한림정역 방향으로 진행되는 길을 따라가면 하천 옆에 목재분쇄공장이 있고, 그 남쪽이 조사현장이다. 조사대상구역의 면적은 2,382m2로 해당부지는 기왕에 대성석 재라는 석재공장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주물공장의 폐기물을 적치하는 적치장으로 활용되어 왔다. 63)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0,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건설사업 문화재 지표조사보고서. - 22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조사대상구역의 거시적 지형환경은 남동-북북서 방향의 선구조를 따라 발달한 중산 성 산지와 그 사이의 곡간지로 구성되어 있다. 남동쪽의 경운산(377m)을 최고봉으 로 하는 중산성 산체로부터 분기한 두 줄기의 능선이 남동-북북서로 진행하는데 곡 간의 서남쪽 산지는 경운산-금음산(376m)을 지나면서 해발 150m를 넘지 않는 나 지막한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진행하다 장원마을 뒷산 152m봉을 마지막으로 분기 한 후 화포천과 만난다. 북동쪽 산지는 서남쪽 산지에 비해 산체의 규모가 크고 해 발고도도 높은 편이나 해발 300m를 넘지 않는 중산성 산지이다. 경운산-신천리 새 동네 뒷산의 301m봉-가영마을 뒷산 233m봉을 끝으로 남남동-북북서향으로 진행 하던 능선은 안곡리 상리마을에서 서류하는 안하천에 의해 단절된다. 그러나 곡간 은 북쪽의 410m-201m봉으로 이어진 남동-북서방향의 산체에 의해 다시 제어되면 서 곡간의 전체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곡간 충적지 상면을 따라 소하천인 용 덕천이 남쪽의 신천리에서 남동-북북서 방향으로 흐른다. 조사구역이 위치한 용덕리 산 1-5번지는 망천현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는 용덕천에 연접한 구릉의 기스락이다. 조사구역의 동쪽에서 북류하는 용덕천은 한림면 소재지 에서 화포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에 유입된다. 용덕천은 곡부의 횡방향으로 개석곡이 발달하면서 수지상 하계망을 이루고 있다. 화포천의 범람과 용곡천의 활동으로 형 성된 곡간 충적지의 길이는 대략 6.1km, 최대 폭은 약 540m이며, 현재 논으로 경 작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곡간충적지는 선사시대로부터 인간 활동의 주요 무대로 활 용되어 왔으며, 당 조사구역 주변으로도 화포천의 범람에서 안전한 곡간 충적지와 그 연변의 구릉에 다수의 유적이 입지해 있어 이를 방증해 준다. 곡간 충적지에 연 한 곡부 내에 자리한 자연취락도 가영마을과 새터마을처럼 곡의 종방향에 입지하거 나 장원마을과 안하마을처럼 횡방향의 소규모 개석곡에 입지한 유형으로 나뉘며, 이는 토지 이용의 효용성을 극대화한 입지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지표조사에서는 당 조사구역의 서남쪽으로 약 150m 떨어져 있는 삼국시대의 소형 석곽묘로 구성된 장원 고분군과 관련한 자료의 확인에 주력하였다. 용덕리 고 분군은 고도가 낮고 경사가 완만한 구릉의 정상 부위와 남쪽 사면에 입지해 있다. 이에 비해 당 조사구역은 사면 경사가 심한 편이고, 용덕천과 연접한 곳은 하천의 공격에 의한 침식으로 경사가 더욱 조장되었다. 또한 음지사면에 해당되며, 표토는 암설로 구성되어 있어 여러 모로 토지이용에 불리한 곳이다. 더욱이 이곳은 지금까 지 오랫동안 석재공장, 주물공장 부산물 적치장 등으로 사용되면서 이미 원래의 지 형이 대부분 개변되었다. 상술한 내용을 토대로 조사구역 일원을 대상으로 면밀하게 지표조사를 수행하였으 나 인간 생활과 관련한 어떠한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 의 현재부재는 원래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조사구역에 예정된 사업을 원안대로 수행해도 무방하다. - 23 -

www.duryu.or.kr 3. 민속분야 1) 한림면 현황 한림면은 김해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밀양시 하남면과 접하고, 서쪽으로 진례면, 남쪽으로 생림면과 김해시 삼계동, 서북쪽으로 진영읍과 창원시 대산면과 접하고 있다. 입지적 특성 때문에 한림면은 경전선 철도 및 국도14호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나 낙동강하류의 저지대인 하포천 수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장마로 인 해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상습적인 수해지역이기도 하다. 한림면의 연혁 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9 --- 화포천 경계 북쪽은 상북면, 남쪽은 하북면 1914 --- 이북면 개칭 11개리 32개 마을 1964 --- 이북면 장방리 한림마을 1,2,3구 분동 1968 --- 이북면 장방리 333-5번지 면청사 신축 이전 1982 --- 이북면 시산리 시호 1,2구 분동 1983 --- 생림면 6개마을 편입 1987 --- 이북면을 한림면으로 면명 개칭 2005 --- 한림면 한림1구 청원마을 분동, 한림3구 신봉마을 분동 2009 --- 한림면 신천리 망천마을 1,2,3구 분동 한림면은12개의 법정리에 속하는 46개 행정리로 조직되어 있다 12개의 법정리 중 하나인 장방리에는 한림 대항 장방 진말 등 7개의 행정리가 있다. 한림면은 근래에 들어 김해시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급격한 공업화 및 도시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에 비하여 유입된 인구의 수는 많지 않다. 한림면의 지난 10여년간 변화 된 인구 동향을 보면 다음과 같다. 2003년 01월 가구수 4274 총인구 11776 남자 6069 여자 5707 2007년 01월 가구수 4392 총인구 10611 남자 5577 여자 5034 2011년 01월 가구수 4487 총인구 9831 남자 5267 여자 4564 2012년 01월 가구수 4500 총인구 9703 남자 5208 여자 4495 전체적 인구동향은 가구수는 늘어나는 반면 인구수는 줄어들고 있다. 이는 농업생 산을 바탕으로 하는 대가족 가구구성에서 공업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핵가족 가구구 성으로 변형되고 있는 것이 이유이다. 한림면의 소재지는 장방리에 위치하는데 면소재지 일대를 한림정( 翰 林 亭 )이라고 한 - 24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다. 이곳에는 관공서들이 밀집해 있는데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중학교, 초등학 교등이 있다. 20여년 전까지 다른 곳에 비하여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1983년 소도읍가꾸기가 완공되었고 1984년에 겨우 상수도가 시설되었다. 동북쪽에 상진교, 동남쪽에 화진교가 있다. (1) 용덕리 장원마을 현황 및 민속 용덕리 장원마을은 마을 뒤로 길게 형성된 파랑성 산줄기의 지간 사이 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화포천으로 흘러가는 작은 하천이 용덕천과 합류하고 마을 앞에는 저 수지가 있다. 마을은 원래 논농사 와 밭농사에 의존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약 20여년 전 부터 소와 돼지를 키우는 축산농 가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하여 사진 10. 용덕리 장원마을 전경(서 동) 마을 곳곳에 축사가 자리를 차지하 였다. 그러나 다시 최근 약 10여년 전부터는 이 마을 주변, 특히 마을 맞은편에 공 장들이 들어서고 마을 안으로도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서는 추세이다. 논농사는 거 의 식량을 충당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밭농사도 자체적으로 반찬을 제공하는 수준이 다. 마을의 노인들은 이제 이마저도 그만두려는 추세이다. 마을에는 젊은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집들도 거의 절반 정 도나 된다. 마을에는 노인들이 거의 대부분인데 그 중에 남성은 한 두어명 정도이 고 나머지는 모두 여성 노인이다. 그러므로 마을의 공동체는 해체되고 특별하게 행 해지는 민속은 남아 있지도 않다. 마을의 성씨는 김해김씨로 마을에는 김해김씨 서강파( 西 岡 派 ) 여천종중( 與 天 宗 中 )소 유의 재실이 콘크리트 몸체에 기와를 입힌 형태로 지어져 있고 그 옆에 증산정( 甑 山 亭 )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이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일가친척이므로 친족 간의 결속은 매우 강한 편이다. 특히 같은 집안의 혈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 문에 서로에 대한 의존과 믿음이 두터워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4. 지명분야 1) 김해의 지명변천 김해( 金 海 )라는 지명은 김해 이외에도 다양한 이름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만을 거 론할 뿐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언급하는 경우는 없다. 김해라는 지명에 표 - 25 -

www.duryu.or.kr 기된 쇠 금( 金 )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금관가야의 금( 金 )이다. 또한 金 寧 이라고 기 록하고 김령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금관도 김관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결 론이 나온다. 즉 금( 金 )이 김( 金 )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인데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발음상의 문제만으로 보면 경상도 지방말로 금 발음은 검 이다. 검은 검다. 까맣다. 가마득하다 등에서 검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그런데 검은 감으로도 발음이 변형 되는데 검다가 까맣다로 발음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말 지명에 가물창(창녕 적포의 玄 倉 ), 가막골(까막골=가마골= 釜 谷 ), 까막섬, 감골 감나무골(창원 팔용 부곡 의 감나무먼당) 등이 있는데 이때 지명에 사용되는 '감'은 옛말 '감'에서 온 말로, ' 신성하고 높다. 으뜸', 또는 '크다'의 뜻이다. '감'은 검, 곰, 가마, 가막, 까막'으로도 변이되기도 한다. 여기서 감, 검, 곰, 가마 등은 지모신을 뜻하는 우리말 - (감 -가마)의 변이형이다. 그런데 고대에는 우리말을 우리글로 기록할 수 없었다. 그러 므로 한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표기하였는데 한자의 음이나 훈을 따서 표기하였다. 이러한 표기법을 借 字 表 記 라고 한다. 지모신을 뜻하는,, 곰, 검 등을 한자로 표기할 때 사용되는 한자는 감 柿, 가마 釜, 곰 熊, 거북 龜 (=검) 등이다. 이 중에 서 김해와 관련되는 지명에 사용된 한자는 龜 이다. 龜 山 洞, 龜 旨 峰 이 그것이다. 여 기서 구산과 구지는 같은 말이다. 구산은 검산으로 읽히는데 거북 龜 의 고어발음은 검이기 때문이다. 구지에서 구는 검이며 맛 지( 旨 )는 봉우리나 언덕을 표기하는 우 리말 맏을 한자로 차자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지와 구산은 같은 말이다. 구지가 첫 구절의 노랫말을 풀면 검하 검하 머리를 내어라 라고 읽을 수 있다. 이 때 검으로 불리는 구( 龜 )는 주술의 대상으로서의 검 곧 신이다. 구지봉 즉 검산, 검봉, 지모신에서 우두머리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두머리 즉 머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首 露 이다. 그러므로 우두머리를 부르는 한자말 수로는 일반명사이다. 일반명사로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다른 우두머리와 구분할 수 없다.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 사람이 태어난 장소를 이름에 같이 사용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택호를 사용하여 출생지를 표시하는 것과 같다. 수로는 검산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 이 름에 검을 붙이는 것은 당연하다. 검을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검( 金 )이 되고 검( 金 )이 쇠금( 金 )과는 달리 지모신을 뜻하는 검( 金 )임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또한 노력 절감을 위한 음운탈락으로 김( 金 )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금 령( 金 寧 )이 김녕으로 읽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해( 金 海 )라고 기록해 놓고 김해( 金 海 )로 읽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한편 김수로라는 이름과 유사하게 일반명사형의 이름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그 뜻을 강조하거나 그 출신지를 강조하는 말을 앞에 붙인 경우가 박혁거세이다. 朴 赫 居 世 의 원래 이름은 혁거세이다. 赫 은 밝다 이다. 居 世 는 거서간 즉 무당이나 왕을 지칭하는 고어이다. 그러므로 밝은 왕이 그 의미이다. 세상의 이치나 신을 모시는 일이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밝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반명사이다. 그런 데 혁거세라는 말이 사람들에게서 다른 사람과 구분하지 못하는 일반명사가 되면서 그를 다른 사람과 구분하기 위하여 밝다는 의미를 가진 다른 한자를 붙여서 그 뜻 - 26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을 강조한 것이 박( 朴 )이다. 김해도호부의 연혁 변천에 대해서는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김해도호부 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金 海 都 護 府 는 본디 駕 洛 國 인데, 後 漢 光 武 皇 帝 建 武 18년 임인에 가락의 장 我 刀 干, 汝 刀 干, 彼 刀 干 등 아홉 사람이 그 백성을 거느리고 禊 飮 ) 하다가 구지봉을 바 라보니, 이상한 聲 氣 가 있기에 가서 보았더니, 金 盒 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 속 에 둥글기가 日 輪 과 같은 금빛 알이 있었다. 아홉 사람이 절을 하고 신령스럽게 여 겨 아도간의 집에 奉 置 하고 이튿날 아홉 사람이 함께 모여서 합을 열고 보니, 한 아이가 껍데기를 벗고 나왔는데 나이는 열다섯 살 가량 될 만하고, 용모가 매우 잘 났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拜 賀 의 예를 다하였다. 아이가 날마다 크고 뛰어나서 10여일이 지나매 신장이 9척이었다. 그달 보름날에 아홉 사람이 마침내 받들어서 임금을 삼으니, 바로 首 露 王 이다. 나라 이름을 駕 洛, 또는 伽 倻 로 일컫다가 뒤에 金 官 國 으로 고쳤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 黃 山 江 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伽 倻 山 에 이르 며, 서남쪽은 큰 바다에 닿았고, 서북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하였다. 즉위한 지 1백 58년, 後 漢 獻 帝 建 安 4년 기묘에 죽고, 9대손 仇 亥 王 에 이르러, 梁 武 帝 中 大 通 4 년 임자에 國 帑 과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수로왕으로부터 仇 衝 이 나라 를 두기까지 무릇 4백 91년이다. 신라 法 興 王 이 이미 구해의 항복을 받아 客 禮 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식읍으로 삼고, 이름을 金 官 郡 으로 하였는데, 文 武 王 이 비로소 金 官 小 京 을 설치하고, 景 德 王 이 金 海 小 京 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23년 경자에 金 海 府 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서 臨 海 縣 으로 하였다가, 또 올려서 郡 으로 하였고, 成 宗 14년 을미에 金 州 安 東 都 護 府 로 고치고, 顯 宗 3년 임자에 낮추어서 金 州 防 禦 使 로 삼았다. 元 宗 11년 경오에 防 禦 使 金 暄 이 密 城 의 난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를 막아 공이 있는 까닭으로, 올려서 金 寧 都 護 府 로 하고, 인해 김훤을 발탁하여 都 護 로 삼아 鎭 守 하게 하였다. 忠 烈 王 34년 무신에 金 州 牧 으로 올렸다가, 忠 宣 王 2년 경술에 여 러 牧 을 없앰에 따라 다시 김해부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 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쳤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타 자료들을 참고하여 김해의 지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 은 지명의 변천을 볼 수 있다. 수로왕 때 駕 洛 國 혹은 伽 倻 라고 하였다. 신라 법흥왕이 金 官 郡 이라 하였다. 680년 金 官 小 京 을 설치하였다. 756년 金 海 小 京 으로 개칭하여 良 州 (현 양산시)에 속했다. 940년 金 海 府 로 강등되었다. 臨 海 縣 으로 강등되었다가 臨 海 郡 으로 승격하였다. 971년 다시 김해부로 올렸다. 995년 嶺 東 道 金 海 安 東 都 護 府 로 개칭하였다. 1012년 김해군방어사로 강등되었다. 1270년 金 寧 都 護 府 로 승격하였다. - 27 -

www.duryu.or.kr 1293년 金 寧 縣 으로 강등되었다. 1308년 金 州 牧 으로 승격하였다. 1310년 김해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 金 海 都 護 府 로 승격하였다. 그 뒤 1895년(조선 고종 32년) 음력 윤5월 1일 진주부 金 海 郡 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경상남도 김해군으로 개편되었다. (2) 한림면( 翰 林 面 ) 한림면은 옛 김해부 북쪽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후기부터 하북면에 속하 였다. 조선후기 1896년에 상북면( 上 北 面 )과 하북면( 下 北 面 )으로 분리되었으나, 1914년 다시 병합하여 이북면( 二 北 面 )이 되었다. 1987년에 한림면( 翰 林 面 )으로 개 칭하여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림정 : 翰 林 亭 은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을 역임한 퇴은( 退 隱 ) 김계희( 金 係 熙 )가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서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계희 는 이곳으로 낙향하여 화포천 변에 정자를 지었는데 그 정자의 이름은 퇴은정( 退 隱 亭 )이라 하였다. 그 뒤에 그의 손자와 증손, 현손이 다 한림학사( 翰 林 學 士 )를 지냈 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자 이름을 한림정 이라 불렀다. 한림정은 이미 오래전 임진 왜란 때 불타고 없어졌지만 지명은 길게 이어져 오늘의 열차역 이름으로까지 전한 다. 1905년10월 마산선 철도 즉 현재의 경전선이 개통되면서 이곳에 역을 두게 되 었고 일본이 이곳의 지명을 유림( 楡 林 )으로 고쳤던 것을 해방 후에 다시 한림으로 고쳤다. (3) 용덕리의 지명 용덕리( 龍 德 里 ) : 용덕리는 원래 하북면 지역으로 용덕이라는 마을의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덕리라 하고 이북면에 편입되었다가 한림면 용덕리가 되었다. 용덕리에는 용덕, 장원, 수조, 신기, 오항, 가영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龍 德 은 중심을 뜻하는 - 와 마을이나 골짜기를 뜻하는 우리말 실 을 차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德 은 得 과 통훈이 되고 得 은 실로 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심마을이라는 의미의 미르실 머리실 등으로 읽 힐 수 있다. 오항( 烏 項 ) : 오항은 호구총수 에 등장하는 亦 里 의 또다른 표기로 생각된다. 역 리의 亦 은 고대사회에서 행해졌던 입사식과 관련된 장소를 뜻하는 - 의 병 이형태인 여 를 里 는 마을일 것이다. 오항은 오목이 라고도 부르는데 김해지리 지 에는 용덕의 북쪽에 풍수지리설에 금까마귀가 시내로 내려오는 모양의 명당이 있어 4 代 후에 百 子 千 孫 의 將 相 이 나올 자리라고 소개하고 있다. - 28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오항의 烏 는 지모신을 뜻하는 우리말 의 가마를 차자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즉 가물 오( 烏 )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오항마을 뒷산을 오산( 烏 山 )이라 하고 이곳 에 용덕리 고분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의의식이 치루어진 산으로 보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수조리( 水 助 里 ) : 수조리의 水 는 중심을 의미하는 우리말 = 의 변형인 물 을 助 는 들판을 뜻하는 돌 을 차자로 표기한 것으로 파악된다. 助 의 훈이 도올 이 기 때문이다. 음을 그대로 풀면 물돌말 이 된다. (민긍기 김해의 지명 참조) 그 러나 이러한 지명풀이는 방위만을 고려한 것이다. 이곳이 옛날 홍수로 범람을 하던 곳이고 수조리가 하천과 인접한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물이 돌아가는 마 을이라는 의미도 가능할 것이다. 신기( 新 基 ) : 새터라고도 부른다. 다른 마을이 형성되고 난 뒤에 새롭게 형성된 마 을이라는 의미이다. 장원( 壯 元 ) : 용덕 북쪽의 마을로 오항고개를 넘으면 바로 장원에 닿는다. 용덕천 의 골짜기에 위치하는데 들판의 남쪽이라는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壯 의 훈을 많고 넉넉하다는 의미의 우리말 걸다 로 볼 수 있고 元 을 마을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 다. 즉 들판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가영( 佳 永 ) : 용덕 동쪽의 마을이다. 마을의 의미는 불분명하나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佳 永 의 佳 의 훈이 고울 이고 永 의 훈이 길 이기 때문에 골짜기 혹은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우리말 골 을 차자표기하였을 것이다. 인현( 仁 峴 ) : 인현고개 인태고개라고 부른다. 수조에서 명동리 인현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인현과 인태는 같은 말이다. 峴 과 峙 (치)는 같은 말인데 峙 가 티로 읽히 고 이것이 다시 태로 읽혔기 때문이다. 장원산( 壯 元 山 ) : 장원 북쪽의 뒷산이다. 도야산이라고도 한다. 텃골산 : 수조 서쪽에 있는 산이다. 옛날 이곳에 사람이 살던 집터가 있으므로 텃 골이라고 하였고 텃골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 29 -

www.duryu.or.kr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 의견 1. 종합고찰 調 査 面 積 : 2,382m2 調 査 期 間 : 2016년 03월 28일 2016년 04월 01일(5일간) 調 査 依 賴 機 關 : 김 순 현(님) 역사ㆍ고고 분야 - 총 현황(면적단위 : m2) 조사기관 두류문화 연구원 유적 번호 유적이름 행정구역 (주소) 면적(m2) 유적성격 조사기관 의견 비고 2. 조사단 의견 경남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2,382m2)에 대한 문화재 지표조 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당 조사구역은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로 일대로 장원마을 북동쪽 산 기슭 동쪽 말단부에 해당되는 곳이다. 2) 당 조사구역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심한 편이고, 용덕천과 연접한 동쪽은 하천 의 공격에 의한 침식으로 경사가 더욱 조장되었다. 또한 음지사면에 해당되며, 표토 는 암설로 구성되어 있어 여러 모로 토지이용에 불리한 곳이다. 더욱이 이곳은 지 금까지 오랫동안 석재공장, 주물공장 부산물 적치장 등으로 사용되면서 이미 원래 의 지형이 대부분 개변되었다. 3) 상술한 내용을 토대로 조사구역 일원을 대상으로 면밀하게 지표조사를 수행하였 으나 인간 생활과 관련한 어떠한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유 적의 현재부재는 원래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조사구역에 예정된 사업을 원안대로 수행해도 무방하다. 4) 단, 이번에 수행한 문화재지표조사는 육안관찰에 의하여 매장문화재의 분포여부 를 판단할 수밖에 없는 조사 상의 한계가 있으므로 사업의 시행 중에 위에 명시하 지 않은 문화재가 발견될 때에는 반드시 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의거 이를 관련기관에 신고하여 처리해야 한다. - 30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서 사 업 명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사업기간 2016, 03 사업 내용 지표 조사 조사 결과 사업지역 ( 621-872 )경남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산1-5번지 외 7필지 면 적 전체사업면적 2,382m2 사업목적 건물건립 지표조사면적 2,382m2 사업시행자 기관명 범석산업 연락처 010-7613-0482 조사기관 고고,역사분야 책임조사원 최헌섭 조사원 이하 임지승 민속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박태성 수중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고건축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자연문화재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조사기간 사전조사 1일, 현장조사 1일, 정리분석 1일, 보고서 작성 2일(총 05일) 조사비용 *계약금액 기준 지정문화재 주변문화재 조사결과 비지정 문화재 사업부지내 문화재 조사결과 기존 지상문화재 신규 기존 매장문화재 신규 기존 건축물 신규 기존 민속자료 신규 조사기관 종합 의견 고고 역사 1,914,000 민속 원 분야 원 수중 분야 원 고 건 축 장원고분군(약 150m이격), 독점고분군(약 800m이격), 리 고분군(약 1km이격), 안하리유물산포지(약 1km이격) 유적 있음 유적 없음 문화유적분포지도 등에 표기된 유적일 경우 해당사항 없음 문화유적분포지도 등에 표기된 유적일 경우 해당사항 없음 문화유적분포지도 등에 표기된 유적일 경우 해당사항 없음 문화유적분포지도 등에 표기된 유적일 경우 해당사항 없음 원 용덕 당 조사구역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심하고, 용덕천과 연접한 동쪽은 하 천의 공격에 의한 침식으로 경사가 더욱 조장되었다. 더욱이 이곳은 지 금까지 오랫동안 석재공장, 주물공장 부산물 적치장 등으로 사용되면서 이미 원래의 지형이 대부분 개변되었다. 상술한 내용을 토대로 조사구역 일원을 대상으로 면밀하게 지표조사를 수행하였으나 인간 생활과 관련한 어떠한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의 현재부재는 원래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 되므로 예정된 사업을 원안대로 수행해도 무방하다. 지표조사의 방법 및 절차 등에 관한 규정 별표 3에 따라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서를 제 출합니다. 2016 년 04월 01일 문 화 재 청 장 귀 하 기관명 : 두 류 문 화 연 구 원 (인) - 31 -

www.duryu.or.kr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표 1연 번 2문화 재명 3소 재지 4면 적 5시 대 6종 류 7유적구분 기존 신규 8의견 구분 조사의견 9조사 면적 10사유 11비 고 1-32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참고문헌 三 國 志 卷 三 十 魏 書 三 十 烏 丸 鮮 卑 東 夷 傳 三 十 倭 人 傳 三 國 史 記 卷 第 34 雜 志 第 3 地 理 1 金 海 小 京 高 麗 史 志 卷 第 10 地 理 2 金 州 慶 尙 道 地 理 志 金 海 世 宗 實 錄 地 理 志 慶 尙 道 晉 州 牧 金 海 都 護 府 宣 祖 實 錄 卷 二 百 三 十 九 年 六 月 二 十 七 日 慶 尙 道 續 撰 地 理 志 金 海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第 32 卷 金 海 都 護 府 輿 地 圖 書 慶 尙 道 金 海 鎭 金 海 都 護 府 大 東 地 志 卷 十 慶 尙 道 八 邑 金 海 三 上 次 男, 1961, 滿 鮮 原 始 墳 墓 の 硏 究, 吉 川 弘 文 館. 국립지질조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SHEET 6919-Ⅰ)-. 金 龍 基 ㆍ 鄭 澄 元, 1965, 農 所 里 貝 塚 의 發 掘 調 査 報 告, 釜 山 大 學 校 博 物 館. 朴 敬 源, 1970, 金 海 地 方 出 土 의 靑 銅 遺 物, 考 古 美 術 106 號. 岡 內 三 眞, 1973, 金 海 良 洞 里 出 土 遺 物 에 對 하여, 史 林 56 卷 3 號. 崔 夢 龍, 1976, 西 南 區 貝 塚 發 掘 報 告, 馬 山 外 洞 城 山 貝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文 化 公 報 部 ㆍ 文 化 財 管 理 局, 1977, 文 化 遺 蹟 總 覽 中 卷. 建 設 部 國 立 地 理 院, 1980, 韓 國 地 誌. 李 彦 宰, 1980, 水 佳 里 貝 塚 의 軟 體 動 物 化 石 群 集 에 관한 硏 究, 釜 山 大 學 校 大 學 院 理 學 碩 士 學 位 論 文. 鄭 澄 元 ㆍ 林 孝 澤 ㆍ 申 敬 澈, 1981, 金 海 水 佳 里 貝 塚 Ⅰ. 한글학회, 1981, 한국지명총람 8(경남편 Ⅰ). 東 亞 大 學 校 博 物 館, 1981, 金 海 府 院 洞 遺 蹟. 金 海 文 化 院, 1984, 國 譯 金 海 邑 誌 地 方 編 Ⅲ( 釜 山, 大 邱, 慶 北, 慶 南 ). 尹 銑 ㆍ 李 彦 宰, 1985, 水 佳 里 貝 塚 의 軟 體 動 物 化 石 群 集 과 海 水 面 變 動, 한국고 생물학회지 1. 金 海 文 化 院, 1986, 金 海 文 化 財. 金 海 文 化 院, 1989, 金 海 人 物 誌. 金 海 文 化 院, 1989, 金 海 人 物 誌. 吳 建 煥 ㆍ 郭 鍾 喆, 1989, 金 海 平 野 에 대한 考 古 學 的 硏 究 (1) - 地 形 環 境 과 遺 蹟 -, 古 代 硏 究 2. 李 健 茂 外, 1989, 義 昌 茶 戶 里 遺 蹟 發 掘 進 展 報 告 (Ⅰ), 考 古 學 誌 第 1 輯, 韓 國 考 古 美 術 硏 究 所. 문화재연구소, 1989, 김해양동리고분. -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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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閔 肯 基, 2005, 金 海 의 地 名, 金 海 文 化 院. 허인욱, 2005,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무예 풍속, 푸른역사. 김광명, 2005, 청동기시대 영남지역의 무덤과 제사, 제14회 영남고고학회 학 술발표회-영남의 청동기시대 문화. 윤재운, 2006,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 景 仁 文 化 社. 이홍숙, 2008, 김해의 지명전설, 김해문화원.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8, 金 海 柳 下 里 遺 蹟. 경남고고학연구소, 2010, 金 海 龜 山 洞 遺 蹟 Ⅸ- 無 文 時 代 集 落. 창원대학교 박물관, 2010, 김해 삼계일반산업단지 문화재 지표조사보고서.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0,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건설사업 문화재 지표조 사보고서. 두류문화연구원, 2012, 김해 한림면 장방리 1040-2번지 일대 문화재지표조사 보 고서. 두류문화연구원, 2012, 김해 한림면 가산리 738-1번지 외 2필지 문화재 지표조 사 보고서. 頭 流 文 化 硏 究 院, 2013, 김해 산본리 창고 신축 예정지 내 유적. 두류문화연구원, 2013, 김해 한림면 안하리 449-10번지 외 10필지 문화재 지표 조사 보고서. 두류문화연구원, 2013, 김해 한림면 용덕리 868-6. 13번지 문화재 지표조사 보 고서. ( 財 ) 頭 流 文 化 硏 究 院, 2013, 김해 감로사지 분성. ( 財 ) 頭 流 文 化 硏 究 院, 2013, 김해 송현리 창녕 여초리. ( 財 ) 頭 流 文 化 硏 究 院, 2014, 김해시 관동동 188-5번지 일원 공동주택 건립부지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결과약보고. ( 財 ) 頭 流 文 化 硏 究 院, 2014, 154kV신김해-진영 송전선로 건설공사 부지 내 문화 유적발굴조사 결과약보고서. ( 財 ) 頭 流 文 化 硏 究 院, 2015, 김해 장유면 관동리 160-8번지 문화재지표조사보고 서. ( 財 ) 頭 流 文 化 硏 究 院, 2015, 김해읍성 신기산성. ( 財 ) 頭 流 文 化 硏 究 院, 2015, 김해 유하동 유적. ( 財 ) 頭 流 文 化 硏 究 院, 2016, 김해 부곡동 봉황토성. - 35 -

DCRI Duryu Cultural Research Instiute 관련 사진 및 도면 Photograph & Plat

www.duryu.or.kr 사진 11. 조사구역표시 위성사진 - 38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지도 8. 조사구역 표시 지형도(1/5,000) - 39 -

www.duryu.or.kr 사진 12. 조사구역 전경(남 북) 사진 13. 조사구역 전경(북 남) - 40 -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사진 14. 조사구역 뒤편 산자락 공지 사진 15. 조사구역 남쪽 공지 주물공장 부산물 적치장 - 41 -

재)두류문화연구원 지표조사 보고서 2016-07 김해 한림면 용덕리 산 1-5번지 외 7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보고서 발행일 2015년 4월 1일 編 輯 發 行 : (재)두류문화연구원 連 絡 處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로 334번길 2 재단법인 두류문화연구원 TEL : 055)329-3937 FAX : 055)329-3938 http : //www.duryu.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