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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역사와 고구려 드라마 주몽 발표 : 서길수(서경대) 차례 Ⅰ. 머리말 - 한국 사람들은 드라마로 역사를 배운다. Ⅱ. 역사와 드라마 주몽 에 등장하는 인물 1. 해모수와 금와왕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2. 소서노ㆍ주몽ㆍ대소는 삼각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3. 유화부인은 주몽이 왕이 된 뒤에 죽었다. 4. 송양은 나쁜 사람이 아니고, 주몽과 사돈간이다. 5. 협부( 陜 父 )는 동성연애자가 아니었다. 6. 무골, 묵거, 재사는 무사가 아니라 현인들이었다. 7. 부분노( 扶 芬 奴 ), 부위염( 扶 尉 猒 )은 고구려 건국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8. 유리가 옥저에서 밀수를 한 사실이 없다. Ⅲ. 사서에 나타난 사실과 드라마 주몽 에 나타난 사실 1. 부여는 황제 칭호를 쓰지 않았다. 2. 현토 가 아니라 현도 이다. 3. 주몽이 진번과 임둔을 칠 수 없다. 4.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 현도를 없앤 기록이 없다. 5. 현도성과 요동성이란 표현은 잘 못 된 것이다. 6. 세발까마귀( 三 足 烏 )는 고구려 국기나 상징이 아니었다. Ⅳ. 주몽 에게 고구려 이름 추모 를 찾아주지 못했다. 1. 각 사서에 나타난 고구려 건국자의 이름 2. 고구려 건국자는 추모라고 써야 한다. Ⅴ. 맺는말

Ⅰ. 머리말 - 한국 사람들은 드라마로 역사를 배운다.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규정하고, 구체적인 작업의 하나 로 동북공정이란 프로젝트를 실시하여 우리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한편 이러한 중 국의 역사침탈은 우리 국민들에게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 폭발적인 관심을 갖게 하였다. 이 점은 중국이 우리나라의 역사의식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런 국민적 관심사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드라마다. 한국의 방송 3사가 모두 주몽 (MBC), 연개소문 (SBS), 대조영 (KBS) 같은 고구려와 발해 관련 사극을 방영하는 것 은 시청자들의 뜨거운 시청률이 없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두 시청율이 20~50% 이상 오른 것을 보면 가히 국민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어찌 되었든 고 구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반가운 일이다. 이 논문에서 다루려고 하는 MBC 드라마 '주몽'(연출 이주환, 극본 최완규ㆍ정형수)은 2006년 5월 15일 첫 방송이 나간 뒤 2007년 3월 6일 81회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제작사는 초록뱀미디어와 올리브나인이고, 제작진은 정운현 기획, 이주환, 김근홍 연출, 최완규, 정형수 극본이다. 2006년 5월, 16%대의 평범한 시청률로 출발한 '주몽'은 2 개월 만에 40%대로 시청률을 끌어올리며 6개월간 '고공행진'을 이어오다 막바지에 이르러 서는 50%의 벽마저 뛰어넘으며 '국민 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이 논문은 시청률이 50%가 넘었던 역사드라마에 내용 가운데 어느 정도가 사실( 史 實, historical facts)이고 어느 정도가 꾸며낸 이야기(fiction)인가를 검토하므로 해서, 앞으로 고대사를 다루는 역사드라마에서 사실( 史 實 )과 꾸며낸 이야기의 한계와 비중을 어떻게, 어 느 정도로 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위해 실증자료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다. 드라마는 재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는 문제가 다르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사극에 나오 는 역사를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한국 사람들은 역사를 드라마에서 배우기 때문 이다. 특히 고대사는 사료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드라마의 성패를 좌 우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과 꾸며낸 이야기의 한계가 더욱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드라마 주몽 이 81회를 방영하는 동안 작가들이 쓴 원고는 한 회에 적어도 200자 원고지 100매, 많은 것은 130매가 넘는다. 모두 합치면 최소한 원고지 8,000매가 넘는 대작이다. 그에 비해 주몽과 고구려 건국사에 관한 정사의 사료는 10분의 1도 안 될 것이다. 이 논문 에서 다루는 것은 이 10%에 대한 검증이다. 이 논문은 Ⅱ장에서 주로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대목이 역사적 사실과 어떻 게 차이가 나는가를 검토하고, Ⅲ장에서는 드라마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과의 차이를 검토하고, Ⅳ장에서는 주인공의 이름 주몽 은 중국식이고, 고구려에서는 추모 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한다.

Ⅱ. 역사와 드라마 주몽 에 등장하는 인물 드라마 주몽 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여기서 다물군의 모팔모, 부여궁 사람들 전원, 찬수, 사용, 양정은 모두 가공의 인물이기 때문에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1. 해모수와 금와왕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2. 소서노ㆍ주몽ㆍ대소는 삼각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 주몽, 유류, 비류, 온조의 족보 이 부분은 드라마의 주인공인 주몽, 소서노, 대소, 유리, 비류, 온조 문제를 한꺼번에 풀어 야만 가능하다. 모두가 한꺼번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서기전 37년 주몽은 나이 22세 때 부여를 탈출해서 홀본(졸본)에서 나라를 세우게 되는 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왕편에 보면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이 나온다. 1 첫째, 직접 나라를 세웠다. 졸본천에 이르러 바로 도읍을 하였고, 궁실도 짓지 못하고 초막에서 살았다고 했다. 3) 삼국유사, 북부여

이 기록에는 비록 초막을 짓고 살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기 록처럼 현지 세력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다. 2 두 번째, 졸본부여 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의 뒤를 이었다는 설이다. 위에서 본 건국 사실 바로 이어서,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며 전혀 다른 건국기 를 쓰고 있다. 주몽이 졸본부여의 공주와 결혼하여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 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여기서는 졸본부여 왕의 딸이 셋 있었는데 둘째 딸과 결 혼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하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 沸 流 )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 溫 祚 )라 하였다. 고 하였다. 그러니까 주몽과 졸본부여 둘째 딸이 결혼하 여 비류와 온조를 낳은 것이다. 백제의 건국기에 백제를 세운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라는 것 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백제 건국 기록에는 고구려 건국 기록과는 달리 주석이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주석 은 주된 역사사실을 기록하고, 정사의 기록과 다른 설이 있는 것을 절반 크기의 작은 글씨 로 쓴 것이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 越 郡 )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 고도 하였다. 이 다른 설은 졸본부여의 공주가 아닌 다른 여인과 결혼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세 번째, 졸본부여의 공주가 아닌 다른 여인, 즉 소서노가 등장한다. 삼국사기 의 백제 건국 기록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까지도 비류와 온조는 분명 주몽의 아들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뿐 아니라 삼국유사 에도 왕력 맨 처음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동명의 셋째 아들( 東 明 第 三 子 )이라 고 기록하였다. 고구려 초기 문헌이 아주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기록이라면 추 모와 졸본부여의 공주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는 것은 정설로 인정해야 한다. 이 렇게 되면 나중에 부여에서 온 유리는 당연히 비류와 온조의 배다른 형이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도 아직 소서노는 등장하지 않았다. 역사 기록에서 소서노는 아주 초라하게 등장 한다. 백제의 건국에 대한 중후한 기록이 모두 끝나고 맨 마지막에 이런 얘기도 있다. 라 고 하면서 절반 크기의 글씨로 단 주석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류와 온조의 족보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주몽과 관련된 새로운 여인이 3명이 나 등장한다(부여에 남겨놓고 온 예씨부인을 빼고). 즉, 졸본부여의 공주, 월군에 사는 여인, 소서노이다. 우선 복잡한 가계를 정리하고 넘어가자. * 원래 가계 해모수 + 유화부인 = 주몽 주몽 + 예씨부인 = 유리(유류) 주몽 + 졸본부여 공주 = 비류ㆍ온조 * 다른 설의 가계 해부루(아버지) - 우태(아들) 4) 연타발(아버지) - 소서노(딸) 우태 + 소서노 = 비류ㆍ온조 여기에는 백제의 족보가 고구려가 아닌 바로 부여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무리가 있다. 해부루는 자식이 없어 금와를 양자로 삼았는데 이런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만일 이런 관계가 성립되려면 금와의 전설이 거짓이 된다. 여기서 서자 라 는 것은 작은 부인에서 낳은 자식이라는 뜻이 아니고, 큰아들(적자)이 아닌 나머지 자식 모 두를 뜻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부루는 아들이 하나가 아니고 적어도 둘이 된다는 뜻 이 된다. 아울러 과부인 소서노와 결혼한 주몽은 의붓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친자식처럼 보 살폈다고 한 것이다. 물론 당시 주몽도 부여에 부인과 아들이 있었으니 총각이 아니고 유부 남이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유부남과 과부가 맺어진 것이지요. 어째든 이 새로운 설에 따르 면 소서노가 주몽의 건국을 돕고 왕비가 되기 때문에 졸본부여 공주와 결혼해 왕위를 물려 받았다는 설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소서노설을 뒷밭침해 주는 기록이 있다. 바로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고 한 것이다. 이 기록은 소서노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을 상당히 높여주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소서노의 태어난 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 4) 해부루는 자식이 없어 금와를 양자로 삼았는데 이런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만일 이런 관계가 성립되려면 금 와의 전설이 거짓이 된다. 여기서 서자 라는 것은 작은 부인에서 낳은 자식이라는 뜻이 아니고, 큰아들(적자) 이 아닌 자식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부루는 아들이 하나가 아니고 적어도 둘이 된다는 뜻이 된다.

다. 소서노의 출생년도와 주몽의 출생년도를 역산해 보면 다음과 같다. BC 37년. 주몽 22세에 고구려 건국 -> 주몽은 BC 59년 출생 BC 6년. 소서노 61세에 사망 -> 소서노는 BC 67년 출생 결과적으로 소서노는 서기전 67년생이고, 주몽은 서기전 59년생이므로 소서노가 주몽보 다 8살 연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서노와 관계되어 생각해 봐야 되는 다른 한 가지는 소서노가 정말 상단을 운영하여 돈 을 많이 벌었을까 하는 점이다. 역사 기록에는 소서노가 상단을 운영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 다. 다만 소서노가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 禮 氏 )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 孺 留 )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 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소서노가 주몽이 나라를 세울 때 재산을 기울려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썼다. 는 것 은 그만큼 재력이 있었다는 것인데, 드라마 주몽 의 작가는 바로 이 한 줄을 가지고 그 많 은 이야기를 써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역사기록에 소서노가 장사를 했다는 기록은 없으 나 대단한 재력가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 건국에서 소서노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고, 비류와 온 조가 주몽의 아들이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마지막 이설을 채용하여 22세 유부남 주몽이 8살 연상인 과부 소서노와 결혼했다고 해도,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부여를 탈출하고 난 뒤 홀본(졸본)에 도착한 뒤의 일이었다. 따라서 주몽과 소서노가 부여에서 만날 수 없다. 하물 며 부여의 왕자인 대소와는 삼각관계가 벌어질 수 없다. 3. 유화부인은 주몽이 왕이 된 뒤에 죽었다. 드라마 주몽에서 주인공의 어머니 유화의 인기는 대단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부여의 왕자 와 여러 신하가 주몽을 죽이려고 하자, 이것을 눈치 채고 주몽에게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 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 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격려해서 큰 뜻을 펴도록 하였다. 유화부인은 주몽을 잉태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전설적인 인물이고, 정사에 부인의 죽음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 하나이다. 5) 삼국사기 백제본기

드라마 주몽 에서는 유화부인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 금와왕의 칼에 죽는다. 이것은 명 백하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드라마의 극적인 장면을 위해 역사에 나온 인물을 14 년이나 일찍 죽게 한 것이다. 아무리 드라마이지만 그것이 역사드라마일 때는 역사를 왜곡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명성황후가 철종 때 죽고, 육영수 여사가 5. 16 이전에 죽는 드라마 가 나온다면 용납될 수 있겠는가? 4. 송양은 나쁜 사람이 아니고, 주몽과 사돈간이다. 또 한 가지 주몽이 송양왕을 처음 만난 것은 고구려를 세운 뒤이고, 고구려를 세우고 일 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대형 사실이다. 그런데 송양을 고구려가 세우기도 전에 등장하여 그 것도 갖은 악역을 다 하게 만든 것은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큰 혼란을 심어줄 것이다. 꼭 필요하다면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등장시켜야지, 몇 년 뒤에 등장해야 하는 역사 속의 인물을 미리 당겨 소비하고 나서, 그것도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악역을 시킨다는 것은 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 1, 동명성왕 14년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5. 협부( 陜 父 ) 7) 는 동성연애자가 아니었다. 오이( 烏 伊 ), 마리( 摩 離 ), 협부( 陜 父 )는 주몽과 함께 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최고 의 영웅이다. 드라마에서 세 사람은 시정잡배들로 출발하여 나중에 주몽을 만나 건국의 영 웅이 된다. 주몽도 과단성이 없고 우유부단한 어린 시절을 그리다 나중에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로 변신한다. 부분노와 부위염도 가난한 사람이나 해적으로 만들어 나중에 건국의 주 도 세력으로 만든다. 이것은 작가가 인물을 설정하여 드라마틱하게 끌어가는 틀로 보인다. 오이, 마리, 협부가 시정잡배가 아니었다는 기록은 없지 않은가? 부위염이 해적이 아니었다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작가들은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다. 다 만 주몽은 역사 기록에 날 때부터 영특하고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했다. 작가라고 해도 역사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무엇이든지 바꾸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시청 자들은 그 드라마를 보고 역사를 배우기 때문이다. 또 식상한 바보에서 영웅으로 의 틀을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훌륭한 대본을 쓸 수 있다. 오이, 마리, 협부, 세 사람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협부의 동성연애다. 이것은 작가 의 설정이 지나쳤다. 작가는 물론 협부가 동성연애자가 아니라는 기록이 없지 않는가? 라 고 강변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사극에서 을지문덕 장군은 동성연애자다. 최영은 동성연 애자다. 서희는 동성연애자다. 이순신은 동성연애자다. 고 해도 되는 것인가? 고대사는 국민들이 모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는 데 어떤 것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지 마라. 지금 누리는 인기도 모두 시청자들을 때문인데 그들은 기만해서는 안 된다. 선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작가는 분에 넘치는 인기가 부담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만일 중국이 연개소문을 동성 연애자로 그리는 드라마를 제작하였다면 역사왜곡이라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사실 건국 당 시 협부의 역할은 역사상 어떤 인물보다 뛰어나다. 7) 시중의 삼국사기 번역본에 협부( 陜 父 )를 협보 라고 옮긴 것이 많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도 협보라고 했다. 부 ( 父 )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1 아비 부, 2 남자 미칭 보 이다. 그렇기 때문에 협부에 부( 父 )가 있고 남 자 미칭이니 협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남자 미칭으로 쓰이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는데 1 남자를 높여 부르는 말로 태동망( 太 公 望 )을 사상보( 師 尙 父 )라 부르는 따위를 말하는 것이고, 2 신분이 낮 은 늙은이를 부르는 말로 촌에서 농사짓는 늙은이를 전보( 田 父 )라고 하는 따위를 말한다. 그러나 협보의 경우 는 이런 칭호가 아니고 고구려 당시 불렀던 이름을 한자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만일 남자의 미칭으로 불렀다 면 오이와 마리도 모두 오보나 마보로 불러야 했을 것이다.

그는 동명성왕은 물론 유리명왕 때도 22년간 왕을 보필하여(만일 추모와 비슷한 나이라 면 60이 넘었다.) 끝까지 옳은 소리를 하다 쫓겨나는 충신 가운데 충신이다. 그런 충신을 무엇 때문에, 무슨 권리로 동성연애자로 만들었을까? 만일 가공의 인물을 통해서 그런 내용이 전개 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시청자의 50%가 보고 있고, 온 가족이 보고 있는데 고구려 건국의 영웅이 동성연애자다? 지금 많은 국민들이 주몽 보니까, 고구려에도 동성연애가 있더군! 이런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작가는 인기를 위해서는 줄거리를 마음대로 만들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시청자의 상 당부분을 차지하는 초중고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혹시 작가가 동성연애자라서 그 것을 일반화시키고 합리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6. 무골, 묵거, 재사는 무사가 아니라 현인들이었다. 삼국사기 동명왕편에 나온 무골, 묵거, 재사 3인과의 만남은 부여에서 함께 온 오이, 마리, 협부 3총사와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우선 삼국사기 원문을 보기로 한다. 성을 내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왕이 신하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국가를 건설하는데 제법 구체적인 체계를 갖추어 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 야 할 것은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 진 사람( 三 賢 )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한 부분이다. 오이, 마리, 협부가 무인들이라면, 재사, 무골, 묵거는 어진 문관들의 출현을 표현한 것이다. 한 국가가 형성되려면 이처럼 반드시 문무가 겸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주몽 에서는 이 세 사람도 모두 칼싸움을 잘하는 무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 서 무인도 필요하지만 세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혜를 가진 현인들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역할을 삼현( 三 賢 )이 해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부분을 속편하게 팽개치고 모두 8) 삼국사기 제1, 유리명왕 22년

무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문무를 모두 갖추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깊이 있고 탄탄한 대본을 쓰는 것보다는 모두 칼잡이로 만들어 무협지 수준의 건국기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드라마 주몽 은 인기 있는 드라마였는지 모르지만 명작을 만들지는 못했다. 7. 부분노( 扶 芬 奴 ), 부위염( 扶 尉 猒 )은 고구려 건국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역사서에서는 이 두 사람의 부( 扶 )씨, 즉 부분노, 부위염이 모두 고구려 건국 이후 등장하 는 인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건국까지만 계획했던 작가들은 이 두 사람의 진짜 무 용담과 영웅담을 한 가지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건국 이전의 여러 사건(역사에는 나오 지 않은)들에다 써먹은 것으로 끝났다. 다음 후속편에 그들의 영웅담이 이어질 수도 있겠지 만 그마져도 부위염에게는 기회가 없다. 삼국사기 에는 동명성왕 10년(서기전 28)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 扶 尉 )에게 명하 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는 기록이 있다. 옥저는 그 말이 고구 려와 거의 같고 약간만 다르다( 其 言 語 與 句 麗 大 同 時 時 小 異 ) 9) 고 하여 일찍 고구려 영역 안 에 편입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북옥저의 정복은 고구려의 동쪽 국경을 결정적으로 넓히 는 계기가 된다. 북옥저의 위치는 함경북도에서 현재의 연해주에 걸치는 지역이라는 설(북 한의 리지린)과 함경북도 경성이 그 중심이라는 설(이병도)이 있다. 고구려의 동쪽 변경을 사실상 확정 짓는 중요한 일전이었던 것이다. 부분노의 역할은 고구려 초기에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장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 부분노는 필자가 고구려 초기의 최고 명장으로 소개하곤 하였으나 이 장군 이 름을 아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 이름을 알고 있어 드라마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것은 분명히 역사드라마가 갖는 순기능이 다. 부분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대첩을 이룩한 위대한 장군이다. 첫 번째는 동명 성왕 때이고, 두 번째는 유리명왕 때이다. 필자는 행인국을 지금의 함경북도로 본다. 바로 지금의 백두산 동남쪽을 공략하여 고구 려 영토에 편입시킨 대첩을 이룬 것이다. 필자가 부분노를 위해한 장군이라고 한 것은 바로 두 번째 이룩한 대첩 때문이다. 내용이 많지만 그 진면목을 자세히 알기 위해 전문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9) 삼국지( 三 國 志 ) 권30, 魏 書, 동옥저

고구려 초기에 한 전쟁 과정을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선 비는 흉노의 지배를 받으며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지역은 나중에 광개토태왕이 다시 정복하는 기사가 나오지만 건국 초기에 북방 민족에 대해 이처럼 통쾌한 승리를 한 것은 그야말로 대첩이라고 할 수 있다. 선비는 나중에 흉노 을 무너뜨리고 요동방면으로 세력을 펴면서 태조대왕 69년 고구려와 연합하여 한의 요대현 을 공략한 기록이 나온다. 학계에서는 이 기사의 시기가 너무 이르다고 해서 그 진위 문제 를 논의하고 있지만 고구려가 건국한지 30년이 넘은 시점의 기록이고, 당시 선비는 아직 부 족국가 단계였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 초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들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던 것은 건국 을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작가들의 의도에서 벗어났고, 연장 방영을 했지만 시간에 쫓기다보 니 제대로 조명할 시간이 없었으리라고 본다. 앞으로 속편이 나온다면 고구려가 서북 유목 지대로 뻗어나가 대초원을 경략하는 부분노의 진면목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8. 유리가 옥저에서 밀수를 한 사실이 없다. 1) 유리는 유류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유리의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은 추모와 마찬가지로 광개토태왕비에서 처음 나온다. 광개토 태왕비에서는 유리를 유류( 儒 留 )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에 이름은 유리( 類 利 )이다. 혹은 유류( 孺 留 )라고도 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유자의 변이 다르지만, 삼국사기 를 쓸 때 이미 유류라는 이름도 전해오고 있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유리나 유류는 모두 고구려 이름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쓰는 법이 나왔을 것이라고 본다. 사료적 가치로 보았을 때 유리보다는 유류가 더 원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보며, 유류로 써야 한다고 본다. 2) 동명성왕 6년에 유류가 밀수패와 놀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드라마 주몽 에서는 74회(2007-02-12) 때, 북옥저 국경지역, 저자거리 주막에서 일하는 예소야와 함께 옥저의 한 상단에서 위험을 무릅쓴 밀거래를 해 얻은 대가로 생활하는 유류 가 나온다. 유류가 돈을 벌기 위해 왈패들과 어울려 상단을 드나드는 것이다. 이 장면에 이 어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직접 주변국 정벌에 나서 점차 세를 넓혀간다. 주몽을 대신해 행인국 정벌에 나선 오이 대장군은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작전을 펼친 끝에 승리해 고구려에 서는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를 연다. 여기서 작가는 시간적으로 큰 오류를 범한다. 고구려가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행인국 정 벌한 것은 동명성왕 6년(기원전 32)이고, 이때 주몽의 나이 27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몽 이 17살에 결혼하고, 1년 뒤 18살에 유류가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10살도 안 되는 유류가 어떻게 왈패들과 어울려 상단을 드나든단 말인가? 그리고 1주일 뒤 77회(2007-02-20)에서 시청자들은 갑자기 13년이 지난 동명성왕 19년 의 유류를 만나게 된다. 동명성왕 19년(BC 19년) 4월 유류는 부여를 도망쳐 고구려로 온 다. 그리고 5개월 뒤 9월 추모왕이 죽자 (드라마에서 이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왕위에 오 른다. 그런데 주인공은 13년 전 10살도 안 되었어야 할 모습이나 20이 넘어 고구려에 올 때나 똑 같고,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까지 똑 같다. 60회 방송에서 20회 연장 방송을 하면서 작가들이 어처구니없는 시대착오를 일으킨 것이 다. 3) 유류가 현도나 남옥저에 간 적이 없다. 드라마에서 유류와 예씨부인은 도망가다 한나라 관리에게 발견되어 현도성으로 가게 되 고, 현도성을 뛰쳐나온 모자는 주몽의 즉위식을 바라보면서도 다시 떠나는 장면을 연출해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리고 얼마 뒤 모자는 북옥저의 저자거리에 나타난다. 극적 인 전개를 위해서 작가들이 번뜩이는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 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유류의 성장과정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 온다.

기록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면 작가들이 마음대로 그릴 수 있지만 이 기록을 살펴보면 유 류 모자가 부여를 떠났다는 정황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유류에 대한 기록에서 가장 드 라마틱한 것은 바로 아버지가 남긴 부러진 칼을 찾는 장면이 될 것이다. 위에서 나왔지만 다시 한 번 그 장면만 되살려보자 :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드라마틱한 장면을 볼 수 없다. 유리가 허겁지겁 부러진 칼을 찾는데 주춧돌 아래서 캐내는 장면을 연출하고 만다. 그 장소에 그 칼이 묻혀 있어야 할 아 무런 정황도 없이 찾아내고, 그것도 주춧돌과 기둥 사이가 아니라 주춧돌 밑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유류가 부여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흥미 있는 사건이 이어질 수 있고, 역사에 나오는 장면 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더 드라마틱한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나 드라마 주몽 에서는 그 럴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두 번째 왕이 될 유류에 대한 이야기는 드라마 의 흐름 속에 급하게 역사적 사실을 적당히 뜯어 맞힌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Ⅲ. 사서에 나타난 사실과 드라마 주몽 에 나타난 사실 드라마 주몽은 주몽의 청년시절부터 승하 10) 할 때까지 20년 남짓한 시기이다. 주몽이 생 존한 시기는 BC 59년~19년의 40년간이다. 그러나 드라마 주몽이 시작될 때 이미 청소년 기가 넘었기 때문에 시대 배경은 빨라야 BC 44(15세)년부터 BC 19년(40세) 사이 20년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드라마에서 고구려가 건국된 것은 73회(2007년 2월 6일)로 건 국(BC37년) 이후의 내용은 8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81회 가운데 73회까지가 약 7 년간의 건국 전 이야기고, 건국 이후 19년간은 9회로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고구려 건국 뒤 74회(2007년 2월 12일)는 6년을 훌쩍 뛰어넘어 동명성왕 6년(BC 32년) 행인국 정벌이 잠깐 나오고, 77회(2007년 2월 20일)에 이미 동명성왕 19년(BC 19년)으로 13년을 뛰어넘어 유리가 고구려를 찾아오게 된다. 그 사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부위 염이 북옥저를 아우른 것과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은 일인데, 유화부인의 죽음은 이미 고구려 건국 전 20년이나 먼저 일어난 사건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그냥 뛰어넘은 것이 다. 78회에서 81회까지 4회는 유리가 돌아온 4월부터 주몽이 승하한 9월까지 5개월간의 이야기다. 10) 승하( 升 遐, 昇 遐 )란 천자가 죽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본기 권1 동명성왕 19년과 권 29 연표(상)에 모두 승하( 升 遐 )라고 기록하고 있다.

1. 부여는 황제 칭호를 쓰지 않았다. 부여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보다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면에서 부여궁을 그리는 작가는 아주 자유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써도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벗어난다. 고 시 비를 걸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정도는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첫째, 부여에서는 황제라는 칭호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제라는 칭호는 진나라 시황 제가 BC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처음 사용한 칭호이다. 황제란 중국의 전설적인 3황5제 ( 三 皇 五 帝 )에서 따온 이름으로 진시황제가 처음 쓰기 시작했다고 해서 시황제라 한 것이다. 진시황제 이전에는 비록 천자와 제후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천자도 왕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한국사를 쓰면서 황제라고 쓰는 것이 중원과 같은 위치를 설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황제는 중원을 위주로 한 국가가 자신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황제라고 쓰지 않고 천황( 天 皇 )이라는 다른 칭호를 쓰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광개토태왕비나 진흥왕순수비에 분명하게 태왕( 太 王 )이라는 칭호가 나온다. 고 구려가 태왕이라는 칭호를 쓸 때는 주변의 신라, 백제에서는 왕 이라 했고,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여 한강 이북으로 세력을 확장했을 때 진흥왕은 스스로 태왕 이라고 일컬었다. 태왕 이라는 칭호는 왕중왕( 王 中 王 )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황제라는 칭호보다 낮은 것이 아니다. 1996년 고구려연구회가 광개토호태왕 연구 100년 이란 국제학술대회를 하면서 공 식적으로 학계에 호태왕 또는 태왕 이라는 칭호를 쓰자는 제안을 한 뒤 최근에는 상당히 일반적인 추세이다. 드라마 주몽 에서도 태왕 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고, 드라마 연개소문에 서도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여가 왕 으로 부르다가, 고구려가 옛 조선의 땅을 더 찾아 크게 통일해 가는 과정에서 는 태왕 으로 쓰는 과정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왕의 칭호가 황제 태왕으로 바뀌었다 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중국 남북조 시대에 나온 용어인 호위총관이란 관직을 쓴다거 나, 고려 말에나 쓰인 마마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도 어색한 일이지만 황제, 황상 같은 호칭은 무분별한 호칭이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부여궁의 세트가 너무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의상을 비롯하 여 모든 것이 적어도 부여시대보다 최소한 500년에서 1000년은 뒤에 나타난 것들이다. 서 력기원 전의 부여가 조선왕조 드라마와 거의 같은 규모와 화려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 청자들은 부여라는 시대를 가늠하지 못하고 드라마 주몽 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시 판에 올라온 시청자들의 글에 보면 무송과 모팔모가 술안주로 먹던 호박부침은 임란 후에 들어온 것이고, 다물군의 식량인 감자는 임란 후에 들어온 것 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가 장 심한 것은 바로 부여궁을 둘러싼 웅장한 돌성이다. 참고로 사서에 나온 부여의 건축물 수준은 목책( 木 柵 )을 둥글게 쌓아 성을 만들고, 궁실 과 창고와 감옥이 있었다. 11) 지금까지 부여가 쌓은 돌성( 石 城 )은 발견되지 않았고, 백제도 초기에 주로 목책을 사용하였으며, 6세기 이후에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돌성을 쌓기 시작 한다. 성문을 아치꼴 홍예문으로 하였고, 성벽 위에 몸을 숨기고 틈으로 활을 쏘는 성가퀴 ( 垜 口 )가 설치되어 있다. 돌성이 가장 발달했던 고구려도 5세기 이전에는 그런 성문이나 성 가퀴를 갖추지 못했으며, 흙으로만 성을 쌓던 중원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시설은 마치 조선시대 사극에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일이다. 11) 후한서 권 15, 동이열전, 부여국

드라마 주몽 에서는 세트나 소품에서는 시대 라는 시간적 개념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역사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와 달리 적어도 당시의 시대상을 어느 정도 표현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시청자가 아, 그 시대는 저렇게 살았구나! 하는 시대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2. 현토 가 아니라 현도 다. 현도를 이야기 하려면 먼저 현도 라는 읽는 법부터 설명하고 들어가야 한다. 드라마 주 몽 에서 부여, 고구려와 함께 삼각구도를 이룬 한나라의 변방 군( 郡 )을 현토 라고 했다. 그 러나 현토 가 아니라 현도 라고 해야 한다.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빈도가 고구려보다 더 많 이 나왔기 때문에 그 부작용도 역시 크다. 2003년 교육인적자원부가 펴내고, 국사편찬위원 회에서 펴낸 국사 책 54쪽과 보진재에서 펴낸 고등학교 역사부도 8~10쪽에 분명히 현 도성 이라고 나와 있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어사전까지도 모두 현도 라고 나와 있다. 그런 데 드라마 작가는 왜 현토 라고 했을까? 그것은 두 가지로 볼 수가 있다. 첫째 문헌에 나온 한자를 그대로 옮기면 玄 菟 (현토)가 된다. 토( 菟 )자를 옥편에서 찾아보 면 새삼 토, 토끼 토 와 호랑이 도 라고 나와, 토 와 도 두 가지 음으로 읽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지명인 현도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래도 작가들이 국사책이나 사전에 현도 라고 나온 사실을 모르고 옥편만 가지고 글을 썼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국사책을 따르지 않고 굳이 현토 라고 했을까? 그것 은 사학자들이 현도 라고 한 것을 작가들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역사학자들 의 책임도 있다. 왜냐하면 역사학자들이 왜 현도 라고 읽어야 하는지 제대로 설명해주기 않 고, 음을 그렇게 읽어야 한다. 고만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 도 현도라고 읽지만 왜 그렇게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1) 자치통감( 資 治 通 鑑 ) 에 나타난 현도( 玄 菟 ) 의 소리값 읽기 자치통감 은 중국 송( 宋 )나라 사마광( 司 馬 光 )이 1065-1084(19년간)년 편찬한 편년체의 사서이다. 약칭 통감 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403년 주나라 때부터 959년 후주( 後 周 )까지 1362년간의 통사이다. 자치통감 漢 나라 왕망전( 王 莽 傳 )에 현토가 고구려, 낙랑, 부여와 함께 처음 등장한다. 이 문장 가운데 그 가운데 동쪽으로 나온 자는 현도, 낙랑, 고구려, 부여에 이르고 라는 문장에 대하여 작은 글씨로 읽는 법에 대한 주석을 달았다. 12) 資 治 通 鑑, 권 37, 漢 紀 29 王 莽

고구려 읽는 법은 다음 세미나 때 발표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현도, 낙랑, 부 여 읽는 법만 보기로 한다. 읽는 법을 다시 알기 쉽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菟 : 도( 塗 )와 같은 음이다. 樂 浪 : 낙랑( 洛 浪 )과 같은 음이다. 夫 : 부( 扶 )와 같은 음이다. 여기서 부여를 읽는 법은 두 글자가 같기 때문에 따져볼 필요가 없다. 菟 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토끼 토, 호랑이 도 처럼 두 가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치통감 에서 혼 란을 피하기 위해 도( 塗 )자처럼 읽으라고 특별히 주를 달았던 것이다. 도( 塗 )자는 옥편에 읽 는 법이 한 가지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토 가 아니고 현도 가 되는 것이다. 樂 浪 은 컴퓨터에서 한자단어를 찾을 때는 악랑 을 치고 변환키를 눌러야 한다. 樂 자가 1 퓽류 악, 2 즐길 락, 3 좋아할 요 처럼 3가지로 읽히고 낙 으로는 읽지 않기 때문이 다. 이처럼 樂 자가 여러 가지로 읽히기 때문에 자치통감 에서 읽는 법이 한 가지만 있는 낙( 洛 )자로 읽으라고 특별히 주를 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악랑 이나 요랑 이라고 읽지 않고 낙랑 이라고 읽게된 것이다. 2) 왜 자치통감 에 특별히 그런 주를 달았을까? 그것은 현도, 낙랑, 부여가 중원의 행정구역이 아니고, 모두 옛 조선의 지명이었기 때문에 원래 한자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서 쓰던 이름을 소리글이 아니고 뜻글인 한자로 옮 겨 적게 된다. 현재 코카콜라를 크어커 크얼러( 可 口 可 樂 ) 라고 옮기면서, 소리를 비슷하게 하고, 뜻도 마실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식으로 비슷하게 만든 것과 같다. 그 때 어느 정도 뜻과 소리를 감안해서 단어를 만들었는데, 음가가 여러 개인 글자는 사 람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게 된다. 그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 옛 조선 이름과 다른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석을 단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교과서와 사전에 현토 라고 하지 않고 현도 라고 한 것은 옛 조 선의 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인데 드라마에서는 이 점을 존중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역사 를 배우는 많은 학생들이 현도 라고 배우는데, 드라마에서 수없이 현토 라고 반복했기 때문 에 그에 따른 역효과가 클 것이다. 대학입시에서 현도 를 현토 라고 쓰면 당연히 틀린 답이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역사드라마라고 해서 역사적 사실을 함부로 왜곡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다. 3. 주몽이 진번과 임둔을 칠 수 없다. 진나라를 멸하고 들어선 서한이 주변 국가를 강력한 무력으로 주변국을 침략할 때 옛 조 선도 망하게 된다. 한나라 무제는 옛 조선을 멸하고 그곳에 4개의 군을 세웠다. 그것이 한

사군이다. 한서 조선전에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ㆍ임둔ㆍ낙랑ㆍ현도 같은 4군을 설치하였 다. 고 했는데, BC 108년이다. 다만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현도군은 1년이 늦은 BC 107년에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13). 양서 고구려전에도 한 무제 원봉 4년(BC 107년),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설치하였으며,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속하게 하였다( 漢 武 帝 元 封 四 年, 滅 朝 鮮, 置 玄 菟 郡, 以 高 句 麗 爲 縣 以 屬 之 ) 고 한 것을 보면 현도군을 설치한 연대는 BC 107년이 정확하다. 이처럼 세운 4군은 25년쯤 지난 BC 82년 큰 변화가 일어난다. 한나라 소제( 昭 帝 )는 시원 ( 始 元 ) 5년(BC 82년) 임둔과 진번을 없애고 낙랑과 현도에 병합시키고( 罷 臨 屯, 眞 番, 以 幷 樂 浪, 玄 菟 ), 14) 아울러 현도군 소재지를 현도의 고구려현쪽으로 옮겼다. 한나라가 이처럼 두 군을 폐지하고 합친 것은 이맥의 침략을 받아( 爲 夷 貊 所 侵 ) 15)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결국 현지 동이와 맥족이 한나라 현도군을 쫒아낸 것이다. 앞에서 보았지만 드라마에서 나온 주몽이 태어난 것은 BC 59년, 그리고 드라마에서 나온 청년으로 성장한 해는 이미 BC 40년 전후로 보았을 때, 드라마 주몽 에서는 이미 40년 전 에 망해버린 진번과 임둔을 쳐들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주 몽은 태어나기도 전에 없어진 진번과 임둔을 청년이 되어 무찌르는 이상한 무용담이 나타난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40년이 지난 1985년에 일본군을 무찌르는 독립군을 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대사라고 해서 적당히 시대가 시간대가 틀려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 히려 자료가 많지 않는 고대사에서는 분명한 연대가 나온 역사적 사실은 절대로 뒤틀어서는 안 된다. 4.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 현도를 없앤 기록이 없다. 드라마 주몽 에서는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의 일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역사에서 고구 려가 건국된 뒤 일어난 사실들을 많이 끌어다 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현도를 쳐부순 것이 다. 드라마에서는 참으로 통쾌한 일이지만 이것은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고구려가 건국된 뒤 동명성왕 때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같은 주변 세력들을 아우르고, 유리명왕 때는 부분노가 북방민족인 선비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고구려가 이처럼 쉽게 세 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서한이 말기에 혼란스러워 현도가 실질적으로 크게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기 8년 결국 서한은 멸망하고 만다. 서한을 멸망시키고 신( 新 )이란 나라 를 세운 왕망은 흉노를 치기 위해 현도군에 속한 고구려현의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으나 결 국은 실패한다. 고구려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결국 고구려현의 우두머리인 구려후( 句 麗 侯 ) 추( 騶 )는 이 와중에 사망한다. 서기 14년 고구려 유류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그 현도 군의 고구려현을 차지한다. 13) 漢 書 卷 28 下, 地 理 志 第 八. 14) 後 漢 書 卷 85, 濊 傳. 15) 後 漢 書 卷 85, 東 沃 沮 傳, 16)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1) 유리명왕

이것이 역사상 한나라와 고구려가 맞붙은 첫 사례이다. 한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고구 려는 부여를 쳐서 왕을 죽이고, 개마국과 구다국을 아울렀다. 서기 25년 후한의 광무제가 들어서면서 잃었던 땅을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한나라 요동 태수가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그 뒤 고구려와 한나라 요동ㆍ현도군 사이의 일진일퇴가 계속된다. 태조대왕 53년(105) : 한나라 요동군 6현을 빼앗았다. 가을 요동 태수가 맥인(고구려)를 격파하였다. 태조대황 66년(118) : 한나라 현도군을 쳤다. 태조대왕 69년(121) : 봄에 한나라 유주자사, 현도 태수, 요동 태수가 고구려 침입. 왕은 아우 수성을 보내 요동ㆍ현도 두 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4월에 요동과 전투 9월에 현도성을 포위, 그러나 부여가 한나라를 도와 패하였다. 태조대왕 70년(122) :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태조대왕 94년(146) :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을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결국 고구려가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한나라의 현도ㆍ요동군과 부딪칠 수밖 에 없었고 이런 상황은 오랜 동안 계속된다. 그런데 드라마 주몽 에서는 마치 고구려를 세 우기 전에 현도를 쳐부수고, 고구려를 세우고 주몽이 죽기 직전 요동과 한나라 원군을 한꺼 번에 쳐부수는 전과를 올리면서 끝이 난다. 우선 이 두 가지 전쟁은 역사 기록에는 없는 전 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큰 혼란을 줄 것이다. 5. 현도성과 요동성이란 표현은 잘 못 된 것이다. 드라마 주몽 에 보면 현도성과 요동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주몽 생존시 한나라의 현도 군과 요동군에서는 현도성이나 요동성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고구려 주변의 한나라 군 으로는 서북쪽에 현도군, 서남쪽에 요동군, 남쪽에 낙랑군이 있었다. 각 군에는 그에 딸린 현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7) 현도군 : 고구려현, 상은대현, 서개마현. 요동군(18개 현) : 양평현, 신창현, 무려현, 망평현, 방현, 후성현, 요대현, 요양현, 험독현, 거취현, 고현현, 안시현, 무차현, 평곽현, 서안평현, 문현, 답씨현, 번한현, 낙랑군(25개 현) : 조선현, 염감( 䛁 邯 )현, 패수현, 함자현, 점선( 黏 蟬 )현, 수성현, 증지현, 대방현 사망현, 해명현, 열구현, 장령현, 둔유현, 소명현, 누방현, 데해현, 혼미현 탄열현, 동 시현, 불이현, 잠대현, 화려현, 사두미현, 던막현, 부조현 그렇기 때문에 당시 행정구역은 성 이 아니라 군이나 현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사부 17) 한서 지리지

도에 나오는 요동성이나 현도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한 뒤로 행정구역을 모두 성 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 성( 城 ) 은 적군을 막는 군사시설을 뜻하는 것뿐 아니고, 행정구역을 나타냈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면 고구려의 가장 큰 행정단위는 성( 城 )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 다. 그리고 그 성( 城 ) 아래 규모에 따라 주ㆍ군ㆍ현의 구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이라는 행정단위도 그 크기에 따라, 주재하는 벼슬아치들이 달랐는데, 가장 큰 성 에 욕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안시성, 오골성, 요동성 같은 큰 성에는 모두 욕살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역사부도에 나오는 요동성은 한나라 때 요동군 양평( 襄 平 ) 현으로 현재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 遼 陽 市 )에 있었다. 6. 세발까마귀( 三 足 烏 )는 고구려 국기나 상징이 아니었다. 드라마 주몽 에는 마치 세발까마귀( 三 足 烏 )가 고구려의 국기처럼 따라 다닌다. 드라마에 상징적인 문양이 등장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것이 마치 국기처럼 쓰이는 것은 도가 지나친 것이다. 최근 드라마에서 고구려를 다룬 사극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고구려 관련 용어 들을 상표로 출원하는 건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주몽, 연개소문, 해모수, 고구려, 광개토왕, 대막리지, 삼족오 등 고구려 관련 용어의 단독 또는 도형 및 다른 문자와 결합되어 총 435건(2006년 11월 20일 현재)이 출원되었는데, 이 중 올해에만 총 100건이 출원되어 역대건수 23%를 차지하여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역사서에 나 오는 이름들인데 그 자리에 역사책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세발까마귀가 당당하게 들어가 있 다. 1) 사서의 기록에 나오는 까마귀 그렇다면 이 고구려에서는 이 세발까마귀가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했을까? 우선 고구려 역사기록에 나오는 까마귀를 보기로 한다. 18) 삼국사기 권 14, 고구려본기 2, 대무신왕

이 기록이 삼국사기 에 나오는 까마귀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논의하 고 있는 것은 까마귀 색깔이 검은 색이냐? 빨간 색이냐? 하는 것이고, 머리 하나에 몸이 둘 인 기형이라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지, 이 새가 국기를 상징한다든가 상서로운 것이라는 내 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2) 벽화에 나오는 세발까마귀 지금까지 보고된 벽화 고분은 압록강 북녘에서 36기, 압록강 남녘에서 78기, 모두 114기 가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27기쯤 되는 무덤 벽화에서 세발까마귀가 발견되었다. 세발까마 귀가 동아시아에 퍼진 보편적인 사상이기는 하지만 고구려 무덤 벽화처럼 집약적이고 다양 하게 그려진 곳은 없다. 고구려 벽화 가운데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광개토태왕(391~413) 무렵인 408년에 축조된 평안도 남포시 덕흥리무덤 벽화무덤 안 칸 동쪽 천정에 그려진 세 발까마귀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세발까마귀는 씨름무덤( 角 觝 塚 ) 동벽 천정 에 그려진 것과 다섯무덤( 五 盔 墳 ) 천정 고임에 그려진 그림이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세발까마귀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첫째, 반드시 해 속에 그려져 있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북량( 北 涼,397~439)의 월량( 月 亮 )과 서왕모( 西 王 母 )라는 그림에 는 서왕모가 거느리는 동물로 구미호와 함께 세발까마귀가 서왕모의 발밑에 자리하고 있다. 해 속에 그려진 고구려 벽화와는 다른 모티브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해 속의 세발까마귀는 반드시 건너편 달과 함께 마주보고 있다. 달에는 해처럼 그림이 그려지는데 주로 두꺼비, 토끼가 등장한다. 3 해와 달은 북두칠성, 남두육성들과 같은 별자리와 함께 반드시 천정에 그려진다. 전반기 고구려 벽화는 주로 벽면에 회를 바르고 4면 벽에는 생전 무덤주인의 생활이 그 려져 있고, 천정에는 해ㆍ달ㆍ별과 함께 여러 가지 하늘나라 사람과 동물들을 그렸다. 4면 벽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천정에는 죽은 뒤 하늘나라의 모습을 그려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후반기에는 4면 벽에 대부분 4신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천정은 역시 하늘나라를 그 리고 있고 해ㆍ달ㆍ별자리와 함께 여러 가지 하늘나라 신들을 그리고 있다. 이상 3가지 특징을 가지고 보면 벽화에 나타난 세발까마귀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하늘나 라의 근본인 해와 달, 별자리를 그리는 과정에서 옛날 사람들이 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 을 표현한 것이 세발까마귀다. 옛날 사람들이 해의 흑점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신비한 전설 이 탄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옛 사람들은, 그 까마귀가 아침마다 해 뜨는 골짜기에서 해 를 씻긴 뒤 부상나무 위에 올라가 힘차게 날아올라 하루 종일 해를 등에 지고 날아가다가 해지는 골짜기에 다다르면, 그 해를 잠깐 내려놓고 쉬었다가, 다시 동녘 해 뜨는 골짜기까 지 밤새도록 해를 옮겨다 놓는다고 믿었다. 서왕모가 부리고 있는 세발까마귀와는 분명 다른 하늘나라의 해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진파리 7호 출토 해 뚫음무늬( 透 刻 ) 금동 장식품 벽화가 아닌 유물에서 세발까마귀가 나온 유일한 케이스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 는 진파리 7호무덤에서 나온 것인데 길이 22.8cm 너비13cm의 아담한 유물이다. 마치 작은 왕관처럼 생겼지만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는 베갯모라고 본다. 시기는 4~5세기 때이다. 한 가운데 동그라미 안의 중심에 힘차게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세발달린 봉황이 있고, 주 변에 두 마리의 용과 한 마리의 봉황이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한 기운 속에 휘감아 돌 고 있어 고구려 장인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테두리의 굵은 선과 가는 선 사 이에 59개의 구슬무늬 뚫음 무늬( 透 刻 )를 가지고 형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한 때 최인호의 소설 때문에 우물 정( 井 )자가 고구려의 상징이고 국기처럼 행세를 했다. 세발까마귀가 우리에게 일반화 된 것은 1993년 조선일보의 아! 고구려 전시회에서 전시 회 상징로고를 세발까마귀로 사용하면서부터이다. 이때는 주로 씨름무덤과 다섯무덤 4호에 그려진 세발까마귀가 널리 알려졌다. 그 뒤 2002년 평양에서 온 고구려 유물이 전시되면서 진파리 7호에서 출토된 장식품의 세발까마귀를 상징으로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다. 4 까마귀인가 봉황인가? 벽화에 그려진 해를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그리지 않고 둥글고 빨간 해만 그리다가, 나래를 펴고 정면으로 서있는 세발 달린 까마귀를 그렸고, 뒤에 가서는 까마귀 대신 봉황을 그린다. 이것은 세발까마귀 사상이 고구려에서 세발봉황이라는 새로운 관념으 로 발전해 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한시대의 화상석이나 서왕모가 부 리는 세발까마귀는 모두 까마귀가 분명한 데 비해, 고구려는 초기 덕흥리무덤 벽화는 까마 귀지만 5세기 초반으로 편년되는 씨름무덤과 그보다 시대가 늦은 다서무덤의 그림은 모두

까마귀가 아닌 봉황을 그리고 있다. 또한 진파리 7호 출토 장식도 현재 각종 드라마와 일반 인들이 쓰고 있는 그림은 모두 까마귀가 아닌 봉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가지고 까마귀가 아니고 봉황이라고 하는가? 그림을 자세히 보면 새 머리에 갈기 가 뒤로 길게 휘날리고 있고, 날개도 까마귀 날개에 비해 크다. 이런 생김새가 봉황이라는 것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운산 용호동1호무덤에서 나온 봉황 장식과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금동 판으로 만든 3마리의 봉황 장식은 벽화에 나온 것처럼 머리에 갈기가 휘날리 고 있고 날개도 크다. 세발까마귀가 고구려에 들어와 세발봉황으로 변해 간 것은 아주 큰 변화이기 때문에 이점을 살려 앞으로는 세발까마귀( 三 足 烏 ) 가 아니고 세발봉황( 三 足 鳳 凰 ) 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후 기 고구려 벽화를 보면 고구려의 최고 상징으로 등장한 것이 해(까마귀)나 달(두꺼비, 토끼) 보다는 오히려 청룡 백호 같은 4신들이다. 추모성왕이 승하한 뒤 하늘로 올라갈 때도 분명 히 용을 타고 올라갔다고 했다. 고구려 벽화에 나온 수많은 용을 보면 고구려에서 용이 갖 는 상징성은 오히려 세발봉황보다 더 높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드라마 주몽의 마지막 타이틀에 세발봉황이 그려져 있다가 날아갈 때는 도마뱀이 되어 날아가는 것이 볼 때마다 눈에 거슬렀다. 만일 그것이 까마귀가 아니고 봉황이라고 생 각했다면 그렇게 천박하게 날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작사가 초록뱀미디어 였기 때문에 초록도마뱀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봉황을 도마뱀으로 만든 것도 왜곡이 아니겠는가? Ⅳ. 주몽 에게 고구려 이름 추모 를 찾아주지 못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인 주몽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 이름이 중국식 이고, 북위에서 고구려 건국자를 비하해서 부른 이름을 그대로 썼다. 이것은 물론 이 드라 마 작가의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 바로 우리 학계의 문 제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미 여러 전시회나 강의에서 이 점은 수없이 강조했기 때문에 작 가들이 노력만 했다면 주몽의 고구려식 이름은 추모라는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 다. 문제는 아직 추모 로 써야 하는 절실한 이유를 학계나 일반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회에 고구려 건국자의 이름에 대한 부분을 좀 깊이 있게 다루어 올바른 이름을 되찾고자 한다. 만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름이 버젓이 이승만 이라는 한국 이름이 있는 데, 역사책에서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면(물론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해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되겠는가? 1. 각 사서에 나타난 고구려 건국자의 이름 이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 건국자의 이름이 시대별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시계열 분석을 해 보기로 한다.

아, 옛날 시조 추모왕( 鄒 牟 王 )께서 처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도다( 惟 昔 始 祖 鄒 牟 王 之 創 基 也 ). 광개토태왕비 맨 첫머리에 추모 왕( 鄒 牟 王 )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서기 414년(장수왕 2년) 장수왕이 직접 세웠기 때문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자료이다. 고구려의 왕이 자신의 시조 이름을 잘 못 쓸 수 없기 때문이다. 5세기 중엽의 무덤으로 보이는 모두루무덤에 먹으로 쓰인 글에서도 추모 란 이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문장은 5세기에 만들어진 무덤 안에서 나온 것으로, 그 뒤 거의 1,500년이 지난 뒤에 야 발견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쓴 비나 벽화에는 모두 추 모 라고 나오지 주몽 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2)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고구려 건국자의 이름 그렇다면 주몽 이란 이름은 언제 처음으로 등장하는가? 광개토태왕비보다 먼저 발행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233 297)와 후한서 (398~445)에 실린 고구려전을 검토해본 결과 아예 건국 이야기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고구려 건국 기록과 함께 추모 라는 시조 이 름이 적힌 광개토태왕비가 세워지고, 모두루무덤 벽화에 같은 이름이 쓰인 뒤에 편찬된 중 국의 사서 송서 (487~488) 고구려 전에도 고구려 건국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에서는 일반화 되어 있던 건국 이야기가 아직 중원에는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고구려 건국 이야기가 맨 먼저 나온 것은 북위의 위서 고구려 전이다. 북위 (386~534)에서 동위(534~550)까지의 역사를 북제( 北 齊, 550~558)의 위수[ 魏 收, 506~572]가 551~554년 사이에 지은 책이다. 광개토태왕비보다 140년의 뒤에 나온 책인 것이다.

북위는 한족의 정권이 아닌 북방민족 정권이고, 고구려와 바로 국경을 대하고 있었기 때 문에 고구려 건국 기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써넣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당나라 때 편 찬된 주서( 周 書, 618~628), 북사( 北 史, 627~659) 같은 북방민족의 사서들은 이 위서의 내 용을 그대로 베껴 모두 주몽 이라고 했고, 남사( 南 史, 627~849)에서는 그 선조의 출생에 대한 사적은 북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만 했다. 통일왕조가 들어선 뒤 수서( 隋 書 )에 서는 알 속에서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니 이름을 주몽 이라고 하였다 고 기 록하였다. 그 뒤 당서( 唐 書 )부터는 고구려 건국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주몽 이라는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3) 일본의 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건국자 일본서기 (720)에서는 중모( 仲 牟 ) 라고 했고, 속일본기 (997)에서는 도모( 都 慕 )라고 했 다. 모두가 추모를 자기 말로 옮겨 쓰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찬성씨록 ( 新 撰 姓 氏 錄 ) (788~830)에서는 두 군데서 정확하게 추모 라고 기록했고, 한 군데서 주몽이 라고도 한다. 고 했다. 추모 라고 기록한 것은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고, 주 몽이라고도 한다. 고 토를 단 것은, 중국의 사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찬성씨록은 칸 무( 桓 武 )천황이 수도를 나라( 奈 良 )에서 쿄오토( 京 都 )로 옮기고 20쯤 지난 815년에 만다친왕 ( 萬 多 親 王 ; 칸무천황의 제5 子 ) 등이 수도권(= 近 畿 지역)에 살던 고대의 1182개의 유력씨족을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서기 나 속일본기 에 비해서 신빙성이 있는 자료이다. 조사 당 시 자신의 시조 이름을 틀리게 제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추모라는 이름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으로 불리면서 다른 글자를 썼지만 비슷한 음을 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 후예들은 인구조사 당 시 정황하게 추모 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한국의 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건국자 삼국사기 (1145)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본문에서는 주몽 이라 쓰고, 이어서 추모 19) 위서 열전 고구려

또는 중해 라고도 한다고 해서, 3가지 이름이 나온다. 20) 반면에 백제본기 에서는 백제 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는 추모( 鄒 牟 )인데 주몽( 朱 蒙 )이라고도 하였다. 고 하여 주몽보 다 추모를 앞세웠다. 그러나 신라본기 문무왕 10년조에서는 중모( 中 牟 ) 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1281 1283년 사이) 왕력( 王 曆 ) 에서는 주몽은 추몽이라고도 한다( 朱 蒙 一 作 鄒 蒙 )고 하였고, 같은 책 기이( 紀 異 ) 고구려조에서는 주몽 이라고 썼다. 광개토태왕비보다 731년이나 뒤에 쓰인 삼국사기는 고구려 때부터 전해 내려온 추모 와 중국의 사서에 나온 주몽 사이에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 고구려 전에는 추모보다 주몽을 먼저, 백제전에는 주몽보다 추모를 먼저 썼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추모와 주몽을 합해서 추몽 이라고 쓰기도 하였다. 신라본기 에서 중모 라고 썼던 것도 주몽 보다는 추모 에 가까운 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썼던 고려 시대에는 아직 광개토태왕비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온 혼란이었을 것으로 본다. 만일 이 당시 사가들이 광개토태왕비를 참고하였다면 당연히 추모 를 썼을 것이다. 2. 고구려 건국자는 추모라고 써야 한다. 지금까지 나온 이름을 보면, 추모, 주몽, 추몽, 중모, 도모 같은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모 두다 추모 를 다르게 옮겨 쓰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북위 사서에 추모의 음을 따서 한자로 옮기면서 주몽( 朱 蒙 ) 이라고 한 것은 단순 히 비슷한 음만 딴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좋지 않은 글자를 선택했다. 주( 朱 ) 자는 주로 난쟁이( 侏 )라는 뜻이 있고, 몽 자는 속이다, 어리석다 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지 몽매( 無 知 蒙 昧 )하다고 할 때의 몽매( 蒙 昧 )는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 는 뜻이다. 결국은 난 쟁이 같이 어리석다. 어리석은 난쟁이 라는 아주 나쁜 뜻이다. <표 1> 각종 자료에 나타난 고구려 건국자의 이름 기록된 사적 제작 연대 시조 이름 비고 고구려 광개토태왕비 414년 추모( 鄒 牟 ) 추모왕( 鄒 牟 王 ) 고구려 모두루무덤 5세기 중엽 추모( 鄒 牟 ) 추모성왕( 鄒 牟 聖 王 ) 위서( 魏 書 ) 551~554 주몽( 朱 蒙 ) 주서( 周 書 ) 618~628 주몽( 朱 蒙 ) 북사( 北 史 ) 627~659 주몽( 朱 蒙 ) 수서( 隋 書 ) 629~636 주몽( 朱 蒙 ) 일본서기( 日 本 書 紀 ) 720 중모( 仲 牟 ) 일본 신찬성씨록( 新 撰 姓 氏 788~830 추모( 鄒 牟 ), 일명 주몽 右 京 諸 蕃 下 高 麗 長 背 錄 ) 連 일본 신찬성씨록( 新 撰 姓 氏 山 城 國 諸 蕃 高 麗 高 井 788-830 추모( 鄒 牟 ) 錄 ) 造 21) 속일본기( 續 日 本 記 ) 997 도모( 都 慕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122~1146 주몽( 朱 蒙 ), 일명 추모 ( 鄒 牟 )ㆍ 중해( 衆 解 ) 삼국사기 백제본기 1122~1146 추모( 鄒 牟 ), 일명 주몽 삼국사기 신라본기 1122~1146 중모( 中 牟 ) 삼국유사 1281~1283 주몽( 朱 蒙 ), 일명 추몽 20)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 高 氏 )이고 이름이 주몽( 朱 蒙 ) <추모( 鄒 牟 ) 또는 중해( 衆 解 )라고도 하였다.>이다.

중원을 지배한 국가들이 주변 국가를 비하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많은 예가 있다. 1 고구려( 高 句 驪 ), 고려( 高 驪 ), 하구려( 下 句 驪 ) : 려( 驪 )자는 가라(검은)말 로 국가 이름에 짐승 이름을 일부러 붙인 경우이다. 하구려는 왕망이 고구려가 반기를 들자 높다는 고( 高 ) 자 대신에 낮다는 하( 下 )자를 붙인 것이다. 2 흉노( 匈 奴 ) : 떠들썩하다 는 뜻을 가진 흉( 匈 )자와 종 노( 奴 )를 써서 떠들썩한 종 이라 는 나쁜 뜻이 된다. 3 선비( 鮮 卑 ) : 일찍 죽는다( 夭 死 ) 는 뜻을 가진 선( 鮮 )자와 천하다, 비속하다 는 뜻을 가진 비( 卑 )자를 써서, 일찍 죽고 천하다 는 나쁜 뜻이 된다. 4 돌궐( 突 厥 ) : 갑자기 돌( 突 ), 조아리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자꾸 숙이다 는 뜻이 있는 궐( 闕 )자를 써서, 갑자기 머리를 조아린다. 는 나쁜 뜻이 된다. 5 몽고( 蒙 古 ) : 어리석을 몽( 蒙 )자와 옛 고( 古 )자를 써서 어리석은 옛것 이라는 나쁜 뜻 이 된다. 6 회흘( 回 紇 ) : 위구르를 한문으로 바꾼 것으로, 돌리다 는 뜻을 가진 회( 回 )자와 묶다 는 뜻을 가진 흘( 紇 )자를 써서 실로 칭칭 돌려서 묶는다. 는 나쁜 뜻이 된다. 7 사타( 沙 陀 ) : 투르크 계통의 종족인데, 모래 사( 沙 )자와 무너지다 는 뜻을 타( 陀 )자를 써서 모래가 무너진다. 는 나쁜 란 뜻이 된다. 8 토번( 吐 藩 ) : 토하다 의 토( 吐 ) 자와 오랑캐( 蕃 )라는 뜻이 있는 번( 蕃 )자를 써서 토하 는 오랑캐 라는 나쁜 뜻이 된다. 9 예맥( 濊 貊 ) : 더럽다( 穢 ) 는 뜻을 가진 예( 濊 )자와 짐승의 이름인 맥( 貊 )자를 써서 더 러운 맥 이라는 나쁜 뜻이 된다. 10 연나부( 椽 那 部 ) 연노부( 涓 奴 部 ), 관나부( 貫 那 部 ) 관노부( 灌 奴 部 ) : 고구려 벼슬을 일부러 종 노( 奴 ) 를 섰다. 11 실위( 室 韋 ) 실위( 失 韋 ), 오라( 烏 拉 )부 올랄( 兀 剌 )부, 휘발부( 輝 發 部 ) 회배부( 灰 扒 部 )라고 해서 모두 나쁜 뜻으로 바꾸었다. 뜻이 좋은 한자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나쁜 한자를 집어넣 은 것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멸시하는 중국인의 인식, 즉 화이관( 華 夷 觀 ), 중화사상이 잠재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시조가 추모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논의된 것이 아니다. 근대적인 고구려 연구가 시작된 것은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카와가 1883년쯤 광개토태왕비 쌍구가묵본을 일 본으로 가져가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연구결과가 1889년에 나온 회여록( 會 餘 錄 ) 이다.

여기서 이미 고구려 시조가 추모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이 자료를 통해서 한국 사 서에는 주몽이라고만 쓰지 추모라고 쓴 것은 한 가지도 없다. 고 한국 역사학자들을 무시하 는 논조이다. 그러나 한국의 사서인 삼국사기 에도 분명히 고구려 시조는 주몽 또는 추모 추모 또는 주몽 이라고 나왔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쓴 요꼬이 타다나 오( 橫 井 忠 直 )는 그 사실을 몰라서 그랬을까? 그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를 가지고 일본이 이미 5세기에 한국을 지배했다는 논리를 만들고, 궁극적으 로는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전인수가 극에 달하는 표현을 쓴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를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회여록이 나오고 9년이 지난 뒤 한 프랑스 학자가 이 문제를 좀 더 학술적으로 정리한다. 1898년 프랑스 학자 모리스꾸랑(Maurice Courant)은 고구려 왕국의 한문( 漢 文 ) 비석 이 라는 논문을 쓰면서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왕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고구려 시조는 추모왕이고, 주몽, 상모, 중모, 도모 같은 다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베끼 어 쓴 것에 불과하다 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 외국 학자들이 고구려 시조는 추모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데, 어찌 하여 우리는 아직도 중국이 낮추어 부른 주몽 을 계속 쓰고 있는가? 그것은 첫째 고구려 사와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태도에 있다. 초기 연구사를 섭렵하지 않고 있으며, 새로 운 자료가 나와도 옛날의 논리를 바꾸려 하지 않는 안일한 태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에는 광개토태왕비를 직접 가볼 수 있고, 이에 관한 자료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며, 한국 의 연구 수준도 상당히 활발해지고 있다. 두 번째는 그처럼 연구 성과가 한계를 가지고 있 기 때문에 교과서에 주몽으로 계속 나올 수밖에 없고, 교과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기 때문 22) 高 句 麗 古 碑 考, 회여록( 會 餘 錄 ) (5집), 아세아협회( 亞 細 亞 協 會 ), 1989, 23) 한국의 지명과 인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한국 발음을 사용하였다. 24) Maurice Courant, Stéle Chinoise du Royaume de Ko Kou Rye, Journal Asiatique, 1898 mars-avril.

이다. 만일 그동안의 연구가 상당히 진전되어 이번 드라마 제목을 추모 로 했다면 그 효과는 100년 교육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현재 방영되고 있는 연개소문 에서는 추모성 왕( 鄒 牟 聖 王 )이라고 쓰고 있지만 극히 제한적이라 시청자가 무든 뜻인지 알 수 있을지 의문 이다. 참고로 최근 중국에서 차츰 주몽 을 접고 추모 를 쓰고 있다. 고구려 역사를 자기 역사라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 출판 고구려 시조 추모왕 전기 Ⅴ. 맺는말 이상에서 드라마 주몽 을 역사적 사실과 비교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결 국 꾸며낸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 가운데, 역사적 사실은 이런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제안이 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이 고대사, 그것도 하나의 드라마를 통해서 본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한계가 있지만 역사드라마에서 역사적 사실을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 깊이를 가지고 다 룰 것인가 하는 것을 토론할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본다. 1.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관계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소서노ㆍ대소의 관계, 주몽ㆍ유 류ㆍ비류ㆍ온조의 관계에서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히 다른 설정들을 했다. 그러나 이런 관계

를 사실에 맞게 고증하고 잘 엮은 뒤, 역사에 나오지 않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탄탄하게 그려갈 수 있다. 고대사 부분은 자료가 없어 서 어렵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고대사에서의 인간관계는 오히려 단순하 고 쉽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관계는 허물어서는 안 된다. 2. 역사적 사실의 시간문제를 정확하게 하고, 시기의 선후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드라마 주몽 에서는 고구려 건국 뒤 14년 뒤 죽는 유화부인을 건국 전에 죽게 한다든가, 역사에는 고구려 건국 뒤 등장하는 부분노, 부위염을 미리 등장시키는 등 시간의 선후 문제 가 완전히 다르거나 분명하지 않다. BC 82년 사라진 임둔과 진번을 40년 뒤 주몽이 쳐들어간다든가, 건국하고 난 뒤 한참 뒤에 일어나는 현도와 요동 정벌을 미리 해치우는 것 같은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큰 혼란을 주기 때문에 고증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3. 역사에 나온 기록과 다른 활동을 하는 인물은 새로운 가공의 인물을 써야 한 다. 드라마 주몽 에서는 주인공 소서노를 부각시키기 위해 송양을 악역으로 등장시킨다. 그러 나 송양은 나중에 주몽이 건국하여 기반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하고, 그 딸은 2대 유리명왕 의 부인이 될 정도로 공신가족이다. 이 경우 전혀 다른 가공의 인물을 악역으로 만든다고 해서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의 시청률이 다르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송양을 모르고 있기 때 문이다. 협부( 陜 父 )를 동성연애자로 만든 것도 같은 경우이다. 극중 가공의 인물인 모팔모나 아니 면 전혀 새로운 장수를 등장시켜 그런 역할을 마껴야지 고구려 건국 초기 최고의 역할을 한 충신을 그렇게 그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 4. 사서에 기록된 인물의 성격과 행보를 충분히 살려야 한다. 역사의 기록에는 무골, 묵거, 재사가 3현( 三 賢 )이라고 부를 정도로 현인들인데, 칼싸움하 는 무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구려가 건국하는데 천편일률적으로 여자제사장들만 등장하지 말고, 일반인의 예지를 훨씬 뛰어넘은 세 현자들의 각기 다른 지혜를 통해서 천년 왕국이 탄생하게 하는 대 서사시를 그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고구려 2대 왕이 되는 유류만 하더라도 밀수패를 만들지 않아도, 어려운 부여의 삶을 슬 기롭게 헤쳐 나가는 과정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밀도 있고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5. 시대적으로 다른 칭호나 지명, 그리고 생활상을 제대로 고증해야 한다. 드라마 주몽 에서 황제나 황상이라는 호칭을 쓴다든가, 고구려가 강성해져 요동을 지배할 때 붙인 요동성이나 현도성 같은 지명을 쓴 것은 모두 고증이 부족한 것이다. 당시에는 일 반적으로 목책을 썼던 성벽을 500년에서 1000년은 뒤에 나타난 돌성으로 하는 등 세트나

소품에서는 시대 라는 시간적 개념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역사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와 달 리 적어도 당시의 시대상을 어느 정도 표현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시청자가 아, 그 시대는 저렇게 살았구나! 하는 시대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교과서에 나온 현도 를 현토 라고 한 것은 고증이 필요 없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부정적 효과는 앞으로도 아주 클 것이라고 본다. 6. 상징물로 사용하는 로고는 정확하게 고증하여야 한다. 드라마 주몽 에 나오는 로고는 세발까마귀( 三 足 烏 ) 가 아니고 세발봉황( 三 足 鳳 凰 ) 이다. 이미 많이 논의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정확하게 고증했더라면 고구려의 상 징새가 까악 까악 하는 까마귀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세발봉황 의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 다. 최근 이 세발봉황이 7. 역사드라마는 새로운 역사 지식을 일반화 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드라마 주몽 은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본다. 고구려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높이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였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기회에 주몽에게 고구려 이름 추모 를 찾아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 드라마의 내용은 제목을 주몽 이 아니고 소서노 로 하는 것이 더 알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국민 드라마 라에 걸맞게, 드라마가 끝나면 부족한 고증에 대한 빚을 갚는다는 측면에서 고구려 건국 에 다큐멘터리 한 편 쯤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주몽 발자취 따라 평양으로 라는 신문기사가 났다. 신문을 보자마자 평양 에 무슨 주몽의 발자취가 있는데? 라는 반문과 함께, 내가 너무 이상론을 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