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2015 제7집
목 차 Ⅰ. 근현대미술 연구 문화학원과 이중섭 김인혜 7 한국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본 육명심의 삶 장순강 21 황규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양옥금 32 Ⅱ. 미술관 연구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Journal of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Vol. 7 발행일 2015년 12월 31일 발행처 국립현대미술관 발행인 바르토메우 마리(Bartomeu Mari) 기획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2실 진행 및 편집 박지혜 편집 디자인 허봉선 국립현대미술관 (412-701) 경기도 과천시 광명로 313 전화 02-2188-6000 팩스 02-2188-6122 이 책에 실린 내용은 필자 및 국립현대미술관의 동의 없이 무단전재할 수 없습니다. 총체예술의 실험실로서의 파빌리온: <쿤스트디스코> 정다영 45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 2015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사례를 중심으로 한정인 58 Ⅲ. 2015 미술연구센터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조수진 75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류한승 103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장석원 대담 장석원 128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미술연구센터 140 C 2015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427-701 313 Gwangmyeong-ro, Gwacheon-si, Gyeonggi-do, Korea All rights reserved. No parts of the book may be reproduced or utilized in any forms or by any means without permission from writers and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ISSN 2093-0712
Ⅰ. 근현대미술 연구
문화학원과 이중섭 1) 김 인 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Ⅰ. 문화학원 Ⅱ. 문화학원에서 만난 사람들 Ⅲ. 졸업 후 일본에서의 활동 이중섭(1916~56)은 한국인에게 단연 가장 잘 알려진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중섭에 대한 사실관계 의 확인은 의외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그의 일본 체류기 활동에 대해서는 심층적인 연구가 부족한 편이다. 이 시기 남아 있는 작품이라고는 문화학원의 후배로 후에 부인이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 山 本 方 子, 1921~ )에게 보낸 엽서들뿐이며, 당시 제작된 야심찬 유화작들이 대부분 흑백 도판으로만 전하고 있는 점도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일본 체류기는 본격적인 미술 실기 교육 기간이었을 뿐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태도 를 형성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중섭은 정주의 사립학교인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1936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제국미술학교를 잠시 거친 후 1937년부터 문화학원( 文 化 學 院. 분카가쿠인)에 입학했다. 이 글은 이중섭이 일본의 문화학원에서 수학한 1937~1940년, 그리고 졸업 후 문화학원에 적을 두며 일본화단에서 활동했던 1943년까지의 시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당대 일본 문예계의 상황, 문화학원의 특수한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이중섭의 활동 등을 살펴보면서, 이중섭의 예술 태도가 형성되는 근원을 탐구해보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1) 이 원고는 2014년 9월 1일,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개최된 이중섭 세미나(서귀포시 및 조선일보 주최)의 발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문화학원과 이중섭 7
Ⅰ. 문화학원 이중섭은 1936년 4월 10일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한 후 1년간 3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맞아 원산으로 돌아왔다. 2) 그리고는 1937년 2월 다시 일본으로 가서는 재학 중이던 제국미술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같은 해 4월 문화학원에 입학해버린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분들의 엇갈린 증언과 해석이 있는데, 3) 그러한 주장의 시비를 따지기 전에 도대체 문화학원 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학원은 니시무라 이사쿠( 西 村 伊 作, 1884~1963)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1921년 설립한 학교였다. 1884년생인 니시무라 이사쿠는 그의 이름 이사쿠 가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에서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이시 요헤( 大 石 余 平, 1854~1891)는 선교사를 초대해 세례를 받고 신도들과 교회당을 건립할 정도로 일본의 초기 장로교 유입기에 적극적인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니시무라 이사쿠가 7살일 때(1891년) 지진으로 그의 부모님이 모두 사망하게 된다. 만 7세에 고아가 된 그는 부유한 산림지주 집안인 외가, 즉 니시무라가( 家 )에서 자랐다. 4) 니시무라 이사쿠의 성장과정에서 부모님을 대신해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그의 숙부 오이시 세노스케( 大 石 誠 之 助, 1867~1911)였다. 그는 19세기 말 이미 미국 유학을 했던 인물로 유학 후 돌아와 의원을 개설하고 무료 진료를 했으며, 태평양식당을 매입해서 스스로 요리를 하며 서민에게 서양식 요리를 접하게 했다. 싱가포르와 인도 등지에서 체류, 카스트 제도의 부당성을 비판하며 사회주의에 눈을 떠, 고토쿠 슈스이( 幸 德 秋 水, 1871~1911)와 교류했다. 사회주의 전도를 위해 행상을 다니기도 하며 메이지말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리더였던 그는 1910년 유명한 대역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토큐 슈스이와 마찬가지로 사형을 당했다(1911년). 이 사건은 일본 지식인의 계보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고(무정부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계열의 지식인에 대한 첫 번째 강력한 경고), 니시무라 이사쿠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개인사였다. 숙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니시무라 이사쿠는 반전주의자여서,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징병을 피해 싱가포르로 피신할 정도였다. 1907년에 결혼을 하여 9명의 자녀를 2) 이중섭의 제국미술학교 학적부 참조.(박형국 무사시노대학 교수 제공) 3) 제국미술학교의 학내분규에 따른 혼란, 문화학원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대한 동경 등이 이유로 거론되어 왔다. 무사시노대학 박형국 교수는 이중섭의 제국미술학교 시절 한국인 선배들의 인터뷰를 근거로 하여, 이중섭의 동기생들이 선배들의 혹독한 오 리엔테이션에 불만을 가지고 군국주의 분위기가 심한 학교를 떠나, 한국인 선배들이 별로 없는 문화학원을 택했다고 밝혔다. 4) 니시무라 이사쿠에 대한 상세한 자료로는, 生 活 を 藝 術 として 西 村 伊 作 の 世 界, 神 奈 川 縣 立 美 術 館, 2002; 我 に 益 あり: 西 村 伊 作 自 敍 傳, 紀 元 社 出 版 株 式 會 社, 1960 참조. 두었고,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가 그랬던 것처럼 생활을 예술로 를 모토로 하면서 삶과 예술의 일체를 실천했다. 자신 스스로는 건축가가 되어 집도 직접 지었고, 당연하게도 문화학원 건물도 자신이 직접 설계, 시공하였다. 사상적으로 굉장히 서양에 경도되었기 때문에 건축, 요리, 의상, 생활 하나하나가 대부분 서양식이었다. 니시무라 이사쿠가 문화학원을 설립하게 된 동기는 잘 알려진 대로 그의 큰 딸 아야(アヤ)가 다닐 적당한 학교가 없어서, 그의 많은 자녀들을 위해 자신 스스로 학교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존 학교는 너무 틀에 박혀 있고 집단의 질서를 따르게 했다. 이미 1886년 처음 발표되어 개정을 거듭했던 학교령 의 개입이 전혀 없는, 자유롭고 쾌활하며 학생들이 다니고 싶은 학교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병영을 연상시키는 학교 건물이 아니라, 가정집 같은 분위기, 나무와 정원이 아름다운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 건물 내부에는 여기 저기 유화, 수채화가 걸려있고, 문학, 미술, 음악 등 각종 예술이 장르를 초월하여 공존하며, 그것이 무엇보다 생활과 통합되는 그런 유토피아를 설계하고자 했다. 학생들은 교복 대신 자율복을 입고 일본 최초로 중학부 남녀공학을 실현했다. 1921년 니시무라 이사쿠가 이 학교를 설립할 때 모신 인물은 요사노 부부와 이시이 하쿠데이였다. 요사노 뎃칸( 與 謝 野 寬, 1873~1935), 요사노 아키코( 與 謝 晶 子, 1878~1942) 부부도 5남 6녀를 두었기 때문에 자녀교육이 절실했다. 요사노 뎃칸은 유명한 문예지 묘조( 明 星 ) 를 간행했던 문학가, 정치인으로 조선의 일본인 학교 을미의숙의 교사로 재직하며 한국에 체류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의 아내 요사노 아키코는 문학가이자 여성운동가로, 문화학원의 여학부 학감을 오랫동안 맡았다. 이들이 문화학원의 문학부를 초창기에 이끌었다. 또한 한국의 근대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이시이 하쿠데이( 石 井 柏 亭, 1882~1958)가 문화학원의 미술부를 맡았는데, 그의 6명의 자녀 중 4명이 문화학원을 다녔다. 그는 동경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묘조( 明 星 ) 의 삽화를 그렸으며 시도 발표했던 문예가였다. 야마모토 가나에( 山 本 鼎 )와 함께 미술잡지 호슨( 方 寸 ) 을 창간했으며, 1913~14년에는 아리시마 이쿠마( 有 島 生 馬, 1882~1974)와 함께 이과회를 결성, 1920년대 당시로서는 상당히 재야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작가이다. 이시아 하쿠데이의 친구이자 이과회의 창립멤버인 아리시마 이쿠마도 곧 문화학원의 교사로 합류했는데, 그의 형이 바로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시라카바( 白 樺 ) 의 창간 동인이었던 아리시마 다케오( 有 島 武 郞, 1878~1923)였다. 그러니까 이들 무리들은 문학과 미술, 심지어 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일본 다이쇼 시기 일종의 문예운동 을 주도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당시로는 일본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상가들이었기에 대체로 조선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 세대들이 문화학원의 초창기 창립 주체들이었기 때문에, 이후 1930년대에도 문화학원 구성원들의 조선에 대한 우호적 입장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문화학원과 이중섭 9
이들은 문화학원이 그저 좋아서, 월급도 받지 않고 기꺼이 강사가 되어주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학원을 이끌었다. 1921년 처음 중학부를 설립했던 학교에서 1925년 제 1회 중학부 졸업생이 나오자, 자연스럽게도 대학부를 만들게 된다. 1925년 대학부 본과와 미술과를 처음 개설하고, 이후 미술부에는 다케히사 유메지, 히라츠카 운이치( 平 塚 運 一 ), 온치 코시로( 恩 地 孝 四 郞 ), 무나카타 시코( 棟 方 志 功 ), 도고 세이지( 東 郷 青 児, 1897~1978), 무라이 마사나리( 村 井 正 誠, 1905~1999), 야마구치 카오루( 山 口 薰, 1907~1968), 와키다 카즈( 脇 田 和, 1908~2005) 등이 실기와 미학, 미술사를 가르쳤다. 문학에는 유명한 사토 하루오( 佐 藤 春 夫, 1892~1964), 다니사키 준이치로( 谷 崎 潤 一 郞, 1886~1965) 등이, 음악에는 야마다 코사쿠( 山 田 耕 筰, 1886~1965) 등이 지도했다. 이 학교는 점차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자리매김해서, 다케히사 유메지, 무나카타 시코, 다케우치 요시미( 竹 內 好 ) 등 당대 가장 진보적인 지식인 예술가들이 자녀들을 이 학교로 보냈다. 5) Ⅱ. 문화학원에서 만난 사람들 다시 이중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중섭이 문화학원에 입학한 해는 1937년이다. 이 해에는 문화학원이 설립 초기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게도 소규모 귀족학교여서, 아는 사람들이 자녀들을 보내는 그런 학교로 학생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학생 수가 점차 줄어들자 1930년경에는 창작, 저널리즘 전공과를 신설할 정도였다. 그러나 1937~38년경 이 학교는 갑자기 각광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학교령의 지배를 받는 대부분의 다른 학교들이 1937년부터 근로봉사, 체육교련 등을 정식으로 대학 커리큘럼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1937년 즉 이중섭과 같은 해에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갔던 조각가 윤효중이 후에 김종영, 이순종, 김재선, 조규봉 등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았던 상황과 비교하면, 같은 해에 문화학원으로 들어갔던 이중섭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935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던 한 일본인( 小 谷 博 貞 )의 회고록에 따르면, 1936년부터 재학 중 징집유예제도가 없어져서, 학생신분으로도 전장에 끌려가야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6) 이 5) 문화학원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文 化 學 院 史 編 纂 室, 愛 と 叛 逆 ー 文 化 學 院 の 五 十 年, 文 化 學 院 出 版 局, 1971 참조. 6) 小 谷 博 貞, 昭 和 を 送 った 画 学 生 : 第 2 次 世 界 大 戦 をはさんで, 札 幌 大 谷 短 期 大 学 美 術 科 論 文 集 25, 1992, pp.1~21 참조. 7) 최열, 문화학원의 조선인 학생, 인물미술사학회 2012년 추계발표문 참조. 8) 위의 글 참조. 9) 문화학원의 학적부는 전쟁 중 소실되었고, 출신 동창생들을 통해 사료를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문화학원 동창생 명부 참조.(문화학원 사료실을 통해 박형국 무사시노대학교수 제공) 제국미술학교 학생은 1938년 9월 소집되어 북중국의 전장을 돌다가 1940년 7월 소집해제된 후, 학내 분규 이후 떨어져 나온 타마제국미술학교로 복학했다. 이는 1936년 입학했던 제국 미술학교를 재등록하지 않고 1937년 돌연 문화학원으로 적을 바꾼 이중섭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이중섭은 학교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군국주의 시대 자유주의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문화학원에서 3년간의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문화학원에는 1937년 갑자기 늘어난 학생들 때문에 콘크리트로 신교사를 지어 1938년 9월 낙성식을 했다. 이 해에 이중섭과 함께 문화학원으로 들어온 한국인들은 이중섭을 포함해 안기풍(1914~?), 이정규(1916년 이후~?), 이주행(1917~?), 홍하구 등 총 5명이나 된다고 한다. 7) 이중 오산고보 출신의 안기풍도 제국미술학교에서 문화학원으로 적을 옮긴 경우로, 이중섭과 안기풍은 일부 사진에서도 증명되는 바 매우 친한 친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섭 이전에 문화학원을 다녔던 한국인 유학생으로는 박성규(1910~1994), 이철이(1915~1969), 유영국 (1916~2002), 김병기(1914~ ), 김종찬(1910년 이전~1945년 이후), 문학수 (1916~1988)가 있었고, 이중섭의 후배로는 박성환(1919~2001)이 있어, 문화학원 출신으로 확인되는 한국인 유학생은 총 12명이라는 연구가 있다. 8) 또한 문화학원 동창생 명부를 통해 확인되는 졸업생 명단에서 한국인으로는 박성규(1935년 졸), 김종찬(1936년 졸), 이철이(1937년 졸), 한중근, 유영국(1938년 졸), 김병기, 문학수(1939년 졸), 안기풍, 이중섭 (1940년 졸), 이병규(1943년 졸) 등 총 9명이다. 9) 여기서 잠시 당대의 일본 사회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927년 대공황의 국제 경제 상황 속에서 다나카 내각이 들어서고, 대중국 적극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다나타 내각의 정책 중에는 조선인들의 만주 이동을 적극 권장함으로써, 그곳의 조선인 인구를 비약적으로 늘인 후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분쟁을 조장하여 전쟁의 발판을 삼아야 한다는 전략이 이미 나온다. 이후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상하이 공습을 감행했으며, 1933년에는 국제연맹을 탈퇴하여 본격적인 전쟁 모드로 진입했다. 1933년은 여러 모로 전환점 이 된 해인데, 전쟁총동원을 정신적으로 준비하는 맥락에서 어떠한 종류의 자유주의적 사상(무정부주의(아나)와 사회주의(프로))도 불허한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은 이미 1925년 치안유지법의 제정을 통해 시작되다가, 1933년에는 유명한 교토대사건(교토제국대학 다키가와사건, 京 大 滝 川 事 件 )으로 사상통제가 학교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 해를 기점으로 하여,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그토록 강렬했던 아나, 프로 운동은 거의 극적이라고 할 만큼 빠른 속도로 소멸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었을 때는 이미 사상통제 의 상황이 마무리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문화학원과 이중섭 11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도 문화학원의 교장 니시무라 이사쿠는 태연했던 것 같다. 그는 문화학원에서 발간하던 여러 잡지에 글을 쓰면서, 개인'을 강조할 뿐 국가나 단체의 개념을 학교 밖의 일로 간주했다. 1940년에는 월간문화학원 이라는 기관잡지에 숫자와 우상 이라는 글이 검열당해 삭제명령을 받기도 했다. 소위 비상시국 에도 니시무라 이사쿠는 시국에 맞지 않는 발언을 서슴지 않아 다들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나는 전쟁반대에나 총력을 기울여볼까 하고 말할 정도였다. 10) 그러한 교장의 언행으로 인해 1940년경에는 교장배척운동이 일어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이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이시이 하쿠데이였다. 이시이 하쿠데이는 이미 1937년 제국예술원 회원이 되어 국가주의 예술의 체제 속으로 편입되어 있었다. 결국 교장과 이시이 하쿠데이의 의견대립이 노골화되어, 1941년에는 이시이 하쿠데이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0년 졸업한 이중섭의 졸업사진(도판 1)에는 그 전까지 언제나 등장하던 이시이 하쿠데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기류가 계속되던 중 1943년 4월 12일 새 학기가 시작되는 입학식 날, 니시무라 교장이 천황에 대한 불경죄 로 구속되었고, 같은 해 9월 학교가 강제폐교되어 건물이 군대에 접수되었다. 일본역사상 사상적 이유로 학교가 강제폐교된 유일한 경우이다. 도판 1. 1940년 문화학원 졸업식, 앞줄 왼쪽 세 번째 이중섭, 가운데 니시무라 이사쿠 교장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김복기 기증) 한편 이중섭이 문화학원을 다닐 무렵 에는 이시이 하쿠데이나 아리시마 이쿠마와 같은 이들의 다음 세대가 화단의 중추로 떠오를 때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 중에는 무라이 마사나리( 村 井 正 誠, 1905~1999), 야마구치 카오루( 山 口 薰, 1907~1968), 츠다 세이슈( 津 田 正 周, 1907~1952) 등 문화학원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중섭보다 약 10살 정도씩 차이가 나는 문화학원의 대선배들인데, 예를 들어 무라이 마사나리는 1925년 문화학원 대학부가 처음 생겼을 때 1회 입학생이자 1회 졸업생이며, 이중섭이 이 학원을 다니던 1938년부터 문화학원의 강사로 나왔다. 이들은 대부분 문화학원 졸업 후 바로 프랑스 유학을 하였고, 귀국 직후인 1934년 신시대양화전 을 함께 결성하였다(하세가와 사브로( 長 谷 川 三 郞, 1906~1957), 무라이 마사나리, 츠다 세이후( 津 田 正 豊 ), 츠다 세이슈 형제, 야마구치 카오루, 야바시 로쿠로( 矢 橋 六 郞, 1905~1988), 하마구치 요조( 浜 口 陽 三, 1909~2000), 에이큐( 瑛 九 ), 샤를류크(シャルル ユーグ) 등 총 9명). 이들이 처음 신시대양화전 을 결성했을 때 평균나이가 31~32세 정도였는데, 선언서도, 공동의 -주의(ism) 도 없으며, 오로지 현대의 화가 를 추구한다고만 내세웠다. 기성의 화단정치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소그룹 활동을 강조했던 이들은 당시 일본화단의 매우 예외적으로 전위적인 이들이었다. 후쿠자와 이치로( 福 沢 一 郎, 1898~1992)가 이끄는 초현실주의 경향과, 그보다 조금 더 젊은 세대로 하세가와 사브로를 중심으로 한 추상예술 경향이 1930년대 말의 중요한 두 개의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시대양화전 은 1937년 동인들의 개인전을 한 명씩 열어주고 해산한 후, 자유미술가협회 로 재창립된다. 이때 신시대양화전 회원들은 그대로 남아있고, 흑색양화전 등의 소그룹들이 여기에 합류, 연립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신시대양화전 의 규모가 더욱 확장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 자유미술협회 가 아니라 굳이 자유미술가협회 라는 용어를 쓴 것은 각자의 개인 이 개성을 지니고 작품 활동을 독려하는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당시 국가주의, 집단주의, 군국주의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역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 라는 용어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도래했고, 1940년에는 단체의 명칭을 미술창작가협회 로 바꿀 수밖에 없게 된다. 그 후로도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초현실주의의 두 거두 후쿠자와 이치로, 다키구치 슈조 ( 瀧 口 修 造, 1903~1979, 이중섭 작품평도 많이 했던 평론가)는 1941년 4월 5일 초현실주의가 공산주의라는 이유로 검거되어 8개월간 구속되었고, 하세가와 사브로도 단기간이지만 2번에 걸쳐 구치 생활을 했다. 11) 1941년 이후 젊은 아방가르드 미술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시대양화전-자유미술가협회-미술창작가협회로 이어지는 이들 무리 중에 문화학원 출신으로 조선인, 대만인들에 대해 상당히 평등하고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던 인물들이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은 문화학원을 다니고 있던 이중섭의 삶의 방식, 예술적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중섭은 1938년 문화학원 2학년 재학 중일 때 이미 자유미술가협회 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이후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도 이 일본인들(무라이 마사나리, 야마구치 카오루, 야바시 로쿠로 등)은 끝까지 전쟁화를 그리지 않았으며, 1950년에는 모던아트협회 를 재결성하여 그들의 진로를 이어갔다. 1952년 야마모토 마사코가 일본에 가 있을 때, 이중섭이 일본에서의 체류허가를 받기 위해 모던아트협회의 초청장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편지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12) 이를 통해 볼 때 이중섭과 ( 자유미술가협회 에서 시작된) 모던아트협회 회원들과의 연대는 이 무렵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0) 文 化 學 院 史 編 纂 室, 愛 と 叛 逆 ー 文 化 學 院 の 五 十 年, 文 化 學 院 出 版 局, 1971 참조. 11) 小 谷 博 貞, 昭 和 を 送 った 画 学 生 : 第 2 次 世 界 大 戦 をはさんで, 札 幌 大 谷 短 期 大 学 美 術 科 論 文 集 25, 1992, p.3. 1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문화학원과 이중섭 13
문화학원 시절 이중섭이 만났던 사람들로, 일본인 작가들뿐만 아니라 조선인 작가들과의 교유도 매우 중요하다. 무라이 마사나리, 츠다 세이슈의 주변에는 길진섭, 김환기, 유영국이 있었고, 그 누구보다 중요한 문학수가 있었다. 오산고보 선배였고 후에 시인 백석의 처형이 되었던 문학수는 이중섭보다 한 해 일찍 문화학원에 입학하여 자유미술가협회 활동도 조금 더 빨랐다. 같은 해에 태어났음에도 이중섭이 항상 깍듯하게 대했던 문학수는 신비로움과 순박함을 동시에 지닌 말 그림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13) 문학수나 이중섭 모두 프랑스 문학, 특히 프랑스 시인들을 동경했고 프랑스로의 유학을 꿈꾸었던 이들이었다. 또한 미술의 영역에서는 동물을 소재로 하여 환상적이고 신화 같은 꿈의 세계, 상징의 세계를 동경했다. 츠다 세이슈를 누구보다 존경했던 문학수는 그와 이중섭을 포함한 한국인 작가들을 연결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섭이 문화학원에서 만났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구보다도 야마모토 마사코일 것이다. 그녀는 이중섭의 문화학원 후배였다. 그녀의 부친은 기업의 중진이었을 뿐 아니라 가톨릭 신자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딸을 문화학원에 입학시켰던 것이다. 이중섭이 1941~42년 문화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여전히 문화학원에 적을 두고 동경에 머물면서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수많은 그림엽서는 그에게 마사코가 얼마나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는지를 말해 준다.(도판 2, 3 참조) 그림엽서에 등장하는 사람들, 동물들, 나무들, 풀들은 상상의 것인지 현실의 것인지 그러한 구분 자체가 모호하다. 각각의 개별 존재들이 하등의 차별도 없이 다함께 뒤엉켜 평화로이 공존한다. 우주의 갖가지 생명 들이 생겨나 자라고 자유롭게 어울려 유희하는 세상. 그러한 세상은 1941년 세계대전이 한창인 현실의 시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도판 2. 이중섭이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 도판 3. 이중섭이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 12) 이 편지를 받는 대로 부탁한 서류 새로이 한 통씩 속히 작성하여 보내주시오.(중략) 어머님의 증명, 히로카와( 廣 川 )씨의 증 명, 모던아트협회의 서류, 이마이즈미( 今 泉 )씨의 증명, 지급 항공편 등기로 부탁하오. 이중섭 편지, 1953년 3월 초순(이중 섭 지음, 박재삼 옮김, 이중섭 서한집-그릴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 한국문화사, 1980, p.39. 13) 김병기의 인터뷰, 삼성미술관편, 한국미술기록보존소 자료집 제3호, 2004 참조. 있다. 이중섭이 평생 목숨과도 같이 예술을 지켰던 힘은 바로 그런 피폐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유토피아에의 몸부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한 유토피아의 세계에는 언제나 마사코를 향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Ⅲ. 졸업 후 일본에서의 활동 이중섭은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한 이래, 문화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1943년 8월경 귀국하기 전까지 매년 자유미술가협회 (1940년부터 협회명이 바뀐 미술창작가협회 )에 작품을 출품했다. <서 있는 소>, <소와 여인>, <망월>, <소묘(황소)> 등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작품은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의 소묘나 수채화를 유화로 발전시킨 것처럼 보인다. <망월>(도판 4)에는 동물들, 새들, 도판 4. 이중섭, <망월>, 1940 그리고 나체의 여인이 자연 풍경 속에 자유로이 자리를 잡았고, 이들은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멀리 저 달을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평화로운 세계의 공존을 꿈꾸는 이중섭의 갈망이 이 작품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천진한 동경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이중섭의 작품에 소 가 등장할 때는 어쩐지 힘이 느껴지고, 분노와 고통의 감정이 묻어난다(도판 5). 인간과 동물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믿었던 이중섭의 세계에서 소를 통해 암시되는 인내의 미덕, 참고 또 참고도 일어서는 우직하고 순박한 눈망울은 이중섭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탱하는 힘의 원천을 표상한다. 이중섭은 미술창작가협회의 활동을 통해 당대 초현실주의 계열 최고의 평론가였던 다키구치 슈조, 이마이 한자부로( 今 正 繁 三 郞 ) 등의 극찬을 받았고, 1943년에는 <망월>로 태양상을 수상, 회원의 자격으로 뽑히게 된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문화학원을 매개로 한 선배 강사들의 도움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1944년 5월, 제8회전을 마지막으로 미술창작가협회전 도 막을 내렸다. 이중섭은 이미 1943년 8월 귀국했기 때문에 이 마지막 협회전에 회원 자격이었으나 작품을 내지 못했다. 이 시기 이중섭의 일본 활동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한국인 작가들과의 그룹 활동 이었다. 1941년 동경에서 결성된 조선신미술가협회 가 그것이다. 동경미술학교를 제외한 1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문화학원과 이중섭 15
도판 5. 이중섭, <서있는 소>, 1940년 타대학 출신 작가들, 즉 제국미술학교의 이쾌대, 김학준, 태평양미술학교의 최재덕, 일본미술학교의 진환, 문화학원의 김종찬, 이중섭이 함께 결성한 조선신미술가협회 는 그 1회전을 도쿄 긴자의 수사( 靑 樹 社 ) 화랑에서 1941년 3월 2일~3월 6일 개최하였다. 현존 하는 방명록(도판 6)에는 안기풍, 츠다 세이슈를 비롯하여 많은 일본인 작가들의 이름이 확인되며, 그중에는 니시무라 이사쿠, 야마구치 카오루 뿐 아니라 문화학원의 문학부 교수인 사토 하루오( 佐 藤 春 夫, 1892~1964)의 이름도 보여 흥미롭다. 그 외에도 시라카바의 창립동인 중 한 사람인 무샤노코지 사네아츠( 武 者 小 路 実 篤, 1885 ~1978), 노동운동가이자 문학가이며 <불령선인>의 작가인 나카니시 이노스케( 中 西 伊 之 助, 1887~1958) 등 한국에 동정적인 원로 문예인들의 이름도 보인다. 이중섭은 이 전시에서 <연못이 있는 풍경>(도판 7)이라는 다소 우울한 느낌의 그림을 출품했다. 소와 물고기가 육지 인지 연못인지도 알 수 없는 공간에 함께 그려졌고, 그 옆에는 한 남자의 우울한 초상이 우두커니 들어섰다. 조선신미술가협회 는 3월 동경전 에 이어 5월 경성전 을 개최했고, 이후로도 1944년까지 지속되었다. 14) 이중섭은 1943년 제3회 신미술가협회전 이 경성에서 열릴 때 아직 일본에서 귀국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경성에 없었고 작품도 출품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시절, 이차대전이 가장 급박한 총력전으로 치닫고 있던 이때, 이중섭은 그래도 어디에서든 상대적으로 행복한 편이었다. 조선에는 이중섭의 자리를 비워둔 채 그를 기다리는 많은 화우들이 있었고, 일본에는 그를 지지해주는 일본화가 및 평론가들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연인 야마모토 마사코가 있었다. 세상은 시끄러웠지만, 이중섭은 그의 그림처럼 우울하지만 행복한 세계 속에 있었다. 이중섭이 처한 현실은 점차 그러한 행복감을 오래 지속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은 그의 예술 세계에서만큼은 그러한 행복한 세계를 평생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중섭의 세계에 존재하는 현실과 예술의 극적인 괴리,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이중섭이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일종의 드라마 를 완성하는 원천인지도 모르겠다. 도판 7. 이중섭, <연못이 있는 풍경>,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 출품작 도판 6. 신미술가협회 제1회 동경전 방명록 14) 이쾌대, 진환, 이중섭, 최재덕, 김학준 등이 주요 멤버인 신미술가협회는 다양한 학교 출신의 회원 구성, 한 명씩 개인전을 열어주며 그룹전과 병행하는 방식 등에서 신시대전을 포함한 일본의 소그룹 활동의 운영방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1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문화학원과 이중섭 17
참고문헌 Abstract 我 に 益 あり: 西 村 伊 作 自 敍 傳, 紀 元 社 出 版 株 式 會 社, 1960. 文 化 學 院 史 編 纂 室, 愛 と 叛 逆 ー 文 化 學 院 の 五 十 年, 文 化 學 院 出 版 局, 1971. 小 谷 博 貞, 昭 和 を 送 った 画 学 生 : 第 2 次 世 界 大 戦 をはさんで, 札 幌 大 谷 短 期 大 学 美 術 科 論 文 集 25, 1992, pp.1~21. 生 活 を 藝 術 として 西 村 伊 作 の 世 界, 神 奈 川 縣 立 美 術 館, 2002. 김병기, 김병기의 인터뷰, 한국미술기록보존소 자료집 제3호, 삼성미술관편, 2004.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이중섭 서한집-그릴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 한국문화사, 1980. 최열, 문화학원의 조선인 학생, 인물미술사학 8호, 인물미술사학회, 2012, pp.219~248. Bunka-Gakuin( 文 化 學 院, Institute of Culture) & Lee Jung Seob Kim Inhye Curator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This text is a study focusing on the period from 1937 to 1940 when Lee Jung Seob attended the Bunka-Gakuin( 文 化 學 院, Institute of Culture) in Japan, then extending to 1943 where Lee worked within the Japanese artistic circle as he was still enrolled in this institute. This text aims to examine the Japanese arts and cultural circumstances of the time, the liberal ambience of the Bunka-Gakuin and Lee Jung Seob s practice within this environment to explore the root of formation of Lee s artistic attitude. The Bunka-Gakuin was established in 1921 by an architect and education entrepeneur, Nishimura Isaku(1884-1963). It was a private institution with great liberty, not under the school ordinance legisla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Nishimura Isaku participated in the actual architectural design to create building with comfortable atmosphere, resounding private household. In fact, the institution did not have uniform, allowing students to wear their own clothes and it not only implemented the first junior high level coeducation in Japan, but also continued to stand with its liberal spirit to the end, amongst the extreme militarism at the end of the 1930 s. As Principal Nishimura Isaku was imprisoned for the crime of violating majesty of the Japanese Emperor in 1943, this institution was forced to shut down and it holds a painful history of being used as military barracks. Lee Jung Seob graduated from Osan High School in Jeongju, Korea and entered first the Imperial Art Academy( 帝 國 美 術 學 校 ) of Japan in April 1936. However, he quit after a year and re-enrolled in the Bunka-Gakuin. Here, Lee was educated by artists like Ishii Hakutei, but it appears that he was deeply influenced by the older alumni who taught as 1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문화학원과 이중섭 19
part-time instructors rather than official teachers of the institution. Along with his alumni including, Murai Masanari, Yamaguchi Kaoru and etc., who formed emerging artists collective, Lee worked within this circle of Free Artist Society( 自 由 美 術 家 協 會 ) (renamed as Creative Artists Association( 美 術 創 作 家 協 會 ) in 1940) until 1943 after his graduation. In pursuit of free artistic activity, this collective resisted drawing war paintings in the firsthalf of 1940 s, even when Asia-Pacific War reached its extremity. It could be suspected that their movement did have certain degree of influence on small collective activities of Koreans, including Lee Jung Seob. In 1941 Tokyo, Koreans who studied in various art schools initially organized Joseon New Artist Associatio( 朝 鮮 新 美 術 家 協 會 ) and it is especially remarkable that figures with pro-joseon tendency from Japanese arts and culture sphere visited their exhibition. Except for the postcards Lee sent to his junior, Yamamoto Masako he met in the Bunka- Gakuin, very few works of Lee Jung Seob remain in this era. Nonetheless, Lee Jung Seob s period at the Bunka-Gakuin is entirely momentous in that it resolved the attitude of a free spirited artist through the sincere companionship between Japanese and Joseon artists in Japan during the time. 한국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본 육명심의 삶 Ⅰ. 머리말 Ⅱ. 본문 1. 교육자로서의 삶 2. 사진이론가로서의 삶 3. 작가로서의 삶 Ⅲ. 맺음말 Ⅰ. 머리말 장 순 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육명심( 陸 明 心, 1932~ )은 우리 땅에서 본격적으로 사진의 예술성에 대한 논의가 발화된 1960년대에 처음 사진을 시작한 한국사진의 원로 작가이다. 당시 한국은 제대로 된 사진학과는 물론이려니와 사진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서적조차 변변치 않을 만큼 사진가들에게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1) 육명심은 목우회( 木 友 會 )의 창립 멤버였던 서양화가 이동훈( 李 東 勳 ) 선생의 막내딸인 아내 이명희를 통해 처음으로 사진을 접한 이후 독학을 통해 사진을 공부해나가며 교육자이자 이론가, 작가로서 한국사진의 기틀을 닦아왔다. 그는 이론가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사진사를 정리하고, 해외의 유명한 사진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고 리얼리즘 사진과 살롱 사진만이 존재하던 한국사진계에 해외의 풍부한 사례를 제시하여 이를 통해 사진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북돋우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교육자로서 걸출한 작가들을 키워내는 한편, 작가로서는 한국의 정체성을 다루는 작업들을 선보이며 한국사진의 중심을 잡아나갔다. 1) 1880년대에 한국에 들어온 사진은 단순히 있는 현상을 기록하는 기계적인 기술로만 인식되어 오다가 인화기술의 발달과 함께 회화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지면서 비로소 예술성 논의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64년에 이르러 서는 국전에 사진부가 신설되고, 사진 단체가 문화예술단체로 인정받는 등 예술의 한 분야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육명심, 60년대 사진의 흐름, 한국현대미술사(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78. 2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한국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본 육명심의 삶 21
이 글에서는 올해로 사진을 시작한지 만 50주기를 맞이하는 육명심의 교육자, 이론가, 작가로서의 삶을 통해 한국 사진의 지형을 그려보고 그의 삶이 한국사진사에서 가지는 의의를 고찰해보려 한다. Ⅱ. 본문 1. 교육자로서의 삶 육명심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교육자로서의 역할이다. 그는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지금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과 강사로 사진 교육자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사진과 학과장이던 박필호( 朴 弼 浩 ) 선생 2) 의 소개로 세계사진사 강의를 시작한 것이다. 그가 학생들에게 가르친 세계사진사는 기존의 사진사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사진사와 미술사를 구분해서 정리하기보다는 당시 예술 전반에서 일어나던 현상들을 사진사와 함께 엮어 풀어냈다. 이러한 태도는 기존의 사진사 책들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는 데 주효했다. 단순히 사진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술사, 문학사 등 다양한 예술계의 상황을 두루 살피며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방법으로, 1937년 발행된 버몬트 뉴홀(Beaumont Newhall)의 사진사 나 일본의 미술잡지인 미술수첩 등 다양한 참고서적들을 통해 자신만의 강의노트를 만들어냈다. 3) 그리고 이러한 그의 강의방식은 학생들에게 기존 리얼리즘 경향에 고착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국 사진계의 상황을 조망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었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 한국 사진계에 비로소 현대사진이라 일컬을 만한 다양성의 흐름이 나타나게 된 것도 그의 이러한 교육방식이 맺은 결실과 무관하지 않다. 육명심에게 사진사는 학생들의 시야를 넓히는 도구였다. 그는 늘 지뢰밭 을 피하기 위해 사진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강의했다. 여기서 지뢰밭 이란 기존의 명망있는 사진가들이 이뤄놓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의미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라는 지뢰,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라는 지뢰 를 피하기 위해서는 사진사를 공부하고, 이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바로 그의 가르침이었다. 2) 육명심과 박필호의 만남은 청계천에 있던 헌책방에서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1967년부터 매주 주말마다 사진예술과 관련된 일본과 서양의 책들을 찾아 서점을 드나들던 육명심을 눈여겨본 박필호 선생이 후에 그를 중앙대학교 강사로 초청하게 된다.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제2차 구술면담: 교육자로서의 육명심, 한국사진사 구술프로젝트: 육명심, 가현문화재단, 2011, pp.65~68. 3) 위의 책, pp.69~70. 그는 중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사진작가 권부문( 權 富 問 )을 발굴해내기도 했다. 대학 2학년생이던 권부문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보고, 개인전을 개최할 기회를 주어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는 데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이후 신구대로 옮겨서는 이갑철( 李 甲 哲 )과 최광호( 崔 光 鎬 )를 키워냈다. 찍고 싶은 것을 찍어오게 하는 그의 실기수업 방식과 학생 스스로 끝없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사진사 수업 방식은 제자들에게 자신만의 시각을 기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이를 통해 권부문, 이갑철, 최광호 같은 고유한 시선을 가진 사진작가들이 배출되었다. 그는 학생들이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세계를 가지도록 늘 독려했고, 선생의 세계에 말려들지 않도록 결코 단점을 지적하지 않는 교수법을 고수했다. 그는 자신의 교육방식이 학생들이 가진 임계의식을 자극하고 이를 극복, 확장해나갈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믿었다. 4) 특히 사진계에서 육명심의 다섯 아들 중 하나로 불리는 이갑철의 작품세계는 주목할 만하다.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갑철의 경우 한국의 전통 정서가 담긴 소재들을 다루지만 기존의 보편적인 미를 드러내는 구도가 아닌 이미지가 프레임 밖으로 튀어나갈 듯한 독창적인 구도를 사용해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5) (도판 1) 이러한 이갑철의 접근법은 육명심이 다큐멘터리 실기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이미지를 생각에 동조시키는 훈련, 즉 자신이 느낀 것을 이미지로 담아내는 훈련이 일궈낸 큰 수확 중 하나이다.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해외 유학파 작가들이 쉽게 손에 넣지 못했던 우리의 토착적인 정서와 현대성을 이처럼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작가를 한국사진사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육명심이 교육자로서 가지고 있던 신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진사 수업과 실기수업 방식은 모두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소우주를 가지고 있다 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주체적 자아에 대한 굳은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특별한 세계인 자아를 가지고 있고, 이 자아라는 소우주를 개발하고 가꿔나가는 것이 인간 삶의 목적이며 예술은 이를 촉진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생각이다. 개개인의 개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태도는 학생들이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지금 4) 위의 책, pp.69~70. 5) 배문성, 이갑철 작가론, 이갑철, 열화당, 2012, pp.4~15. 도판 1. 이갑철, 아버지와 아들, 남원, 1995 2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한국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본 육명심의 삶 23
한국사진계를 이끌어가는 튼튼한 허리가 되는 세대인 사오십대 사진작가들 중 많은 수가 그의 손때가 묻은 제자들이며,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한국사진의 풍경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한국사진계의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사진예술이 나아가야 할 더 먼 미래를 제시하는 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2. 사진이론가로서의 삶 한국사진사 속에서 현대사진이 시작되는 시점을 1980년대 말로 보는 시각에는 큰 이견이 없다. 6) 이전의 리얼리즘적 경향과 공모전 중심의 살롱풍 사진에서 벗어나, 세계사진의 조류를 받아들여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이 사진에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결코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변화의 뒤에서 육명심은 이론가로서 큰 역할을 했다. 그가 교육자로서 강조했던 개개인의 개성과 고유한 시각의 개발은 당시 사진계가 바라던 현대적 의미의 작가주의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현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객관적인 태도를 버리고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개개인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작가들이 속속 등장했고 이를 통해 한국 사진은 현대사진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도 바로 육명심이었다. 사진이론가 진동선( 陳 東 善 )은 자신의 책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 1989~2000 에서 한국 현대사진의 신호탄이 된 전시인 사진, 새 시좌( 視 座 ) (1988)에 대해 논하면서 전시 서문에서 드러나는 육명심의 예리한 판단력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서문에서 새로운 세대에 거는 새로운 기대 라는 말과 한국 사진사의 한 페이지의 장식 이라는 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예견하고 있다. 7) 물론 이러한 변화의 산파 역할을 한 것도 그였다.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펴낸 한국현대미술사: 사진 을 최인진( 崔 仁 辰 )과 공동 집필하며 1950년대부터 1970년대 말에 이르는 한국사진사를 세계사진사의 흐름에 따라 정리한 것을 비롯해, 사진을 가르치던 교재가 없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1980년에는 와타나베 쓰토무( 渡 邊 勉 )의 책 사진의 표현과 기법 을 번역했고, 이제 막 창간한 다양한 사진잡지들에 서양 사진가들의 사진세계를 소개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1987년 열화당에서 출판한 그의 저서 세계사진가론 은 현대사진을 마주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가 된 책들 중 하나로 꼽힌다. 육명심은 이처럼 한국사진사를 세계적인 사진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며, 리얼리즘 사진과 살롱 사진으로 양분되는 6) 진동선은 자신의 책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 1980~2000 에서 한국사진이 1985년을 기점으로 현대성을 지각하고 수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하며, 1988년 워커힐미술관에서 있었던 사진, 새 시좌( 視 座 ) 를 통해 현대성의 불꽃이 비로소 피어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진동선, 1980년대 한국현대사진의 토대,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 1980~2000, 아카이브북스, 2005, pp.19~20. 7) 진동선, 현대성의 불꽃 <88 사진, 새 시좌전>,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 1980~2000, 아카이브북스, 2005, pp.28~29. 3. 작가로서의 삶 육명심이 걸어온 작가로서의 삶은 그가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던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을 강조하며 남을 따라하지 않기 위해 사진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처럼, 처음으로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가 담아낸 화면들은 당시 한국사진의 주류가 되었던 리얼리즘 경향과는 사뭇 다른 것들이었다. 그가 1966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찍었던 초기 사진이 보여주는 화면 구성과 소재는 당시의 사진들이 주력하던 사실에 대한 기록성 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특히 생활주의 사진 의 주창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응식이나 이해선 등 그보다 이십여 년 이상 먼저 사진을 시작한 앞세대 작가들의 기록사진에 가까운 작업들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초기 사진의 또 다른 이름은 인상 연작인데 이는 작가가 주변의 사물을 보면서 느끼는 인상 을 그대로 담았다는 의미로, 1960년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을 극복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는 사진사 공부를 통해 이미 1960년대 말에 리얼리즘 사진이 가지는 한계를 직감했고 세계 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했다. 그리고 초기 사진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그가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사물과 교감하는 작가의 내면적인 세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담하게 트리밍되거나 화면 가운데가 텅 빈 장면들(도판 2), 인물이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뒷모습 혹은 사물에 가려진 채로 등장하는 장면들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구성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가 보여주려 했던 기록성은 단순히 리얼리티에 대한 자각 을 넘어 작가가 느끼는 삶에 대한 비애 까지 표현해내는 진하고 깊은 진실에 가까운 기록성 이었다. 8) 그 의 인상시리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모홀리 나기(Moholy Nagy)의 신시각(New Vision) 운동이다. 이 운동은 사진의 시각이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것과 같다는 일반인들의 믿음과는 달리 우리가 볼 수 없는 것까지 8) 윤세영,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시선, 육명심, 열화당, 2011, pp.4~15. 도판 2. 육명심, 서울 종로구, 1969 2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한국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본 육명심의 삶 25
다양하고 뚜렷하며,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모홀리 나기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사진과 육안을 동일시하여 사진의 기록성에만 치중하는 것을 벗어나 카메라를 통해 볼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것은 육안이 아닌 카메라 아이 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육명심의 영상사진은 이 신시각 운동의 잠재적인 무한한 가능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신시각 운동에서 제시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평범한 것을 영상적으로 새롭게 이미지화하는 사진을 찍었고 그 결과로 얻은 것이 기존 리얼리즘 경향과는 차별화된 작품들이었다. 9) 도판 3. 육명심, 박두진 (1916~1998, 시인), 서울 연희동 자택, 1966.12. 이후 이어지는 예술가의 초상 연작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남다른 태도가 이어진다. 1966년 대학교 시절의 스승이었던 박두진( 朴 斗 鎭 ) 선생의 사진을 찍은 것을 계기로 문인과 화가, 국악인, 연극인 등의 초상을 담은 예술가의 초상 연작은 사실상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리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육명심이 사진을 통해 예술가들의 얼굴을 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지닌 생각과 태도, 삶이 드러나는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이다. 서재를 배경으로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시인 박두진의 사진에서는 단정하고 기품있는 문인의 태도가(도판 3), 담배를 빼물고 잔뜩 화면을 노려보는 영화감독 김기영( 金 綺 泳 )의 사진에서는 그의 고집스럽고 괴팍한 성격이 드러나고,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고 있는 화가 장욱진( 張 旭 鎭 )의 초상에는 그가 추구해온 순수한 작품세계가 겹쳐진다. 그는 다른 사진가들처럼 예술가들의 완벽한 순간을 담으려 하지 않았다. 쭈그리고 앉거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거나, 앞섶을 풀어헤치고 화면을 바라보는 예술가들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이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사진의 대상이 된 예술가들과의 교감이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예술가들에게 곧바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 몇 시간이고 대화를 하며 그들과 친해지고 그들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사진가가 관찰자로 남아 얼굴을 묘사하는 표면적인 사진이 아닌 작가들과의 소통과 교감을 바탕으로 한 삶과 정서가 담긴 사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크게 백민 연작으로 묶을 수 있는 백민 연작, 검은 모살뜸 연작, 장승 연작을 거치면서 그의 사진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해나간다. 지금은 사장된 단어인 백민 은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을 뜻하는 말로 한국의 토박이들, 기층민들의 정서와 뿌리를 찍어 나간 그의 연작을 대표하는 제목이 되었다.(도판 4) 초기 사진과 예술가의 초상 연작에서 사물과 인물의 표면이 아닌 내면까지 아우르는 사진을 찍었던 것처럼 백민 연작에서도 우리는 우리 나라를 지켜온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사람들의 소박하고 담백한 정신성을 도판 4. 육명심, 강원도 철원, 1986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육명심의 사진을 통해 이미지로나마 우리 곁에 붙잡아둘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육명심이 작가로서 이뤄낸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싶다. 그는 사물의 표면에 머무르던 리얼리즘 사진의 한계에서 벗어나 이들이 담고 있는 정신과 정체성을 카메라라는 또 하나의 작가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었고, 그가 포착한 우리 고유의 정신과 정체성은 작품을 통해 앞으로도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생명력을 얻었다. 이 부분이 바로 육명심을 작가로서 다른 사진작가들과 구별해 주는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각 대학의 사진과 교수로 활동하며 세 교수 시대 를 열었던 홍순태( 洪 淳 泰 ), 한정식( 韓 靜 湜 )과 육명심은 비슷한 듯 다른 행보를 보이며 활동해왔다. 언뜻 그와 비슷한 소재를 다뤄온 것처럼 보이는 홍순태와 한정식이 끊임없이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을 추적하며 이를 기록하고 새로운 대상과 소재를 추구해왔다면, 육명심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한국의 정신성과 정체성에 천착해왔다. 그가 하나의 주제를 십 년 가까이씩 찍어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대상을 하나 정하면 다른 것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 대상만을 고집하며 사진을 찍는 작가로 유명하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그가 사진작가들과 함께 지방에 내려가는 길에 사진가들이 평생 한번 찍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기상이변을 겪은 적이 있었다. 다른 작가들은 모두 카메라를 들고 들판으로 뛰어나갔는데 당시 장승을 주제로 작업하던 육명심만 혼자 차 안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눈앞에 놓인 표면적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 뒤에 앉은 정신성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온 육명심의 지고지순한 태도는 백민 연작에서 비로소 그 결실을 얻는다. 우리가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작품 속의 인물과 사물들은 단지 그때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말하고,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것이다. 9) 육명심, 이것은 사진이다, 글씨미디어, 2012, pp.26~29. 2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한국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본 육명심의 삶 27
Ⅲ. 맺음말 참고문헌 길지 않은 한국사진의 역사 속에서 육명심이 일궈낸 성과는 참으로 크다. 세계사진사와 미술사를 통해 한국사진을 넓게 조망해온 그의 시선은 이제 한국 정서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고 있다. 그가 키워낸 수많은 제자들이 세계를 무대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동안 그는 이를 떠받치는 뿌리가 되어 한국의 정체성,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을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배문성, 이갑철, 열화당, 2012. 육명심, 60년대 사진의 흐름, 한국현대미술사(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78., 이것은 사진이다, 글씨미디어, 2012. 윤세영,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시선, 육명심, 열화당, 2011. pp.4~15. 진동선,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 1980-2000, 아카이브북스, 2005. pp.19~20., 현대성의 불꽃 <88 사진, 새 시좌전>,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 1980~2000, 아카이브북스, 2005. 한국사진문화연구소, 한국사진사 구술프로젝트: 육명심, 가현문화재단, 2011. 2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한국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본 육명심의 삶 29
Abstract The Life of Yook Myong-shim seen in the Course of the History of Korean Photography Sunkang Chang Associate Curator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Yook Myong-shim( 陸 明 心, 1932~ ) is an elder artist who first set foot on photograhy in 1960 s, when discussion on the artistic value of photography intently began to kindle in the face of Korea. He studied photography on his own and laid firm foundation of Korean Photography as an educator, theorist, and artist. Yook organized the history of world photography in his own unique way as a theorist, introduced acclaimed photographers from abroad, and assumed the role of encouraging diverse perspectives on photography by informing abundant foreign cases to the scene of Korean photography, where only realism and salon photography existed. Also as an educator, he cultivated prominent artists and as an artist, he maintained his position in the center of Korean photography as he presented works imbedded with Korean identity. Yook Myong-shim first began teaching at Seorabeol Art College in 1972, through a course on Photography and History of World Photography. In this lecture, he unraveled the phenomenon occurring across the artistic realm along with the history of photography. Such instructional method further developed students who were fixed on the trend of realism to survey the conditions of Korean photography, which was unable to move forward. Afterwards in 1980 s, he made remarkable contribution for creating diversity in Korean photography, which was worthy to be deemed as modern photography at last. Moreover, through his pedagogy of encouraging individuality in students, he fostered various different photographers with their own peculiar prospects including, Kwon Boomoon, Lee Gapchul, and Choi Kwang-ho. He also played an integral role as a theorist in the advancement of Korean photography, escaping the trend of realism and entering into contemporary photography. Yook Myongshim and Choi Injin co-wrote Korean Contemporary Art History: Photography, arranging the history of Korean photography along the history of world photography between 1950 s to 1970 s. This was published in 1978 by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Considering the lack of theoretical materials at the time, Yook had translated Expression and Technique of Photography by Watanabe Tsutomu in 1980. Also, his book, Theories of World Photographers published in 1987 from Youlhwadang Publication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texts for theoretical basis in learning contemporary photography. Yook Myong-shim comprehended the history of Korean photography within the course of world photography in the means to prevent the reality of Korean photography being buried in the two parties of realism and salon photography, thus made endless efforts to pose the distant future that photography art shall progress into. On the other hand, Yook has been displaying distinctive works as an artist, surpassing the limit of realism photography. His early photograph series and Portrait of Artist series notably unveil the inner world of an artist, communicating with the object apart from simply recording the reality. Yook continues on his exploration of Korean identity, investigating through the series of Baekmin, Black Sand Bathing and Jangeung (Totem Poles). Yook delivered to us the spirit and identity of object through camera, as another lense of an artist and eloped the limitation of realism photography, as in remaining in the surface of object. The inherent Korean spirit and identity have gained vitality through his capture and this will continue to last together with us hereupon. 3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한국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본 육명심의 삶 31
황규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 알 베르티나 박물관 등지에 소장되었다. 특히 그는 1984 년 당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작가 16명이 참여한 양 옥 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사라예보 제14회 동계올림픽 공식 포스터 제작을 위해 Ⅰ. 머리말 Ⅱ. 황규백의 작업여정 1. 이주( 移 住 )와 조우( 遭 遇 ) 2. 음각판화(intaglio)의 실험자, 그리고 시인 3. 종이에서 캔버스로 Ⅲ. 맺음말 기획된 작품집(the Official Art Portfolio of XIV Olympic Winter Games in Sarajevo, Yugoslavia 1983~84) 3) 에 수록되는 판화를 제작함으로써 국제적인 작가로서의 입지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도판 1, 2) 도판 1. <The Tortoise and the Hare>, 1983, 46x40cm, Mezzotint 도판 2.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공식 작품집 리플릿 표지 본 논문에서는 황규백이 1968년에 도불 후 파리에서 제작한 초기 판화작품과 이후 뉴욕에 정착하여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제작한 메조틴트 작품, Ⅰ. 머리말 그리고 2000년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 후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회화작품들을 연대기적으로 구분하여 작가의 60년에 걸친 작업여정을 포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황규백은 1932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1968년 이후 30년 이상 파리와 뉴욕에 거주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펼쳐온 대표적인 한국의 현대판화가이다. 그는 1954년부터 1967년까지 신조형 2) 과 신상회 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한국현대작가초대전 등에 출품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황규백은 서양미술에 대한 갈증과 전후 황폐했던 한국에서의 상황을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한 무대를 찾아 1968년 프랑스로 떠났다. 이후 황규백은 1970년에 또 한번의 이주를 통해 현대미술의 중심부인 뉴욕에 정착하여 작업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전통적인 판화 매체인 메조틴트를 현대적으로 승화시키는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하였다. Ⅱ. 황규백의 작업여정 1. 이주( 移 住 )와 조우( 遭 遇 ) 1960년대 초반 프랑스에서 판화는 주류미술의 하나로 이에 대한 제작과 전시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파리에 정착한 직후 황규백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판화제작소 중의 하나인 S.W. 헤이터의 아틀리에 17 4) 에서 수학하면서 숙명처럼 판화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영국 일찍이 해외에서 판화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한 황규백은 루브리아나 판화 비엔날레 (1979, 1981), 브래드포드 판화 비엔날레 (1974), 피렌체 판화 비엔날레 (1974) 등의 국제판화제에서 수상하였고, 그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 파리현대미술관, 대영박물관, 1) 이 논문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작가 시리즈 황규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2015.4.28. ~8.2.) 전시 도록에 실린 원고를 재수록한 것이다. 2) 김윤수 외 57인, 한국미술 100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 한길사, 2006, pp.556~557. 3) 1984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제14회 동계올림픽이 열렸을 당시 올림픽 공식 포스터 제작을 위한 작품집 Art and sports portfolio 가 만들어졌다. 그 작품집에는 황규백을 비롯하여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데 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2011),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 1933~ ) 등 당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던 작가 16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4) 1927년 헤이터는 파리에 그의 스튜디오를 오픈하였고, 1933년에 캉파뉴-프르미에 가 7번지(7 Rue Campagne Première)로 옮겨갔으며 이것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판화제작소인 아틀리에 17이 되었다. 그곳에서 협업 등을 통하여 판화를 제작했던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 호안 미로 (Joan Miró, 1893~1983) 등이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stanley_william_hayter 내용 참조. 3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황규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33
태생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스텐리 윌리엄 헤이터(Stanley William Hayter, 1901~1988)에 의해 1927년에 파리에 설립된 아틀리에 17에는 당시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이 판화작업과 연구를 위하여 모여들었다. 헤이터는 판화 라는 장르를 당대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매체로 인식시키고, 이를 통해 작업의 폭을 확장시키도록 적극 권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밑바탕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황규백 역시 1960년대 후반에 그곳에서 수학하며 다양한 기법을 습득하고 판화작가로서 새로운 실험과 작품제작에 매진하였다. 황규백은 이 시기 파리에서의 삶을 통해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태도를 배우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과 인적 교류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판화라는 장르는 역사적으로 인쇄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였으며 동양에서는 목판화가, 서양에서는 동판화가 발달하였다. 5) 그중에서 동판화는 제작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직접 묘화법 과 간접 묘화법 으로 분류되는데 그 기준은 판면 위에 잉크가 묻는 요철부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방식에 둔다. 6) 판 위에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미지를 그려나가는 기법인 인그레이빙(engraving), 드라이포인트(drypoint) 등이 대표적인 직접 묘화법인데 황규백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메조틴트가 여기에 속한다. 반면 황규백의 초기 작품인 에칭(etching)과 아콰틴트(aquatint) 등과 같이 산( 酸 ) 등에 판을 부식시키는 화학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판면에 이미지를 만들어낸 기법이 간접 묘화법이다. 황규백이 1968년 이후 파리에서 제작했던 판화작품들은 한국에서의 회화작업과 맥을 같이하는 추상화 경향의 연작들이다. 그는 에칭과 콜라그래프 등 음각판화(intaglio) 전반에 도판 3.<Origine de l Histoire>, 1968, 39x33cm, Etching 도판 4. <Évolution>, 1969, 52x41.5cm, Soldered, Engraved on Copper 걸친 다양한 기법을 통해 정형화되지 않은 재료들을 실험하고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우연의 효과와 물성의 표현을 극대화하는 작업들을 제작하였다. 이때 제작된 대표적인 판화들이 <Origine de l histoire>(1968), <Évolution>(1969), <Fossile-1>(1969), <Document de l histoire>(1970) 등의 작품이다.(도판 3, 4) 2. 음각판화(intaglio)의 실험자, 그리고 시인 파리에서 판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통해 황규백의 작품들이 다양한 전시에서 소개되고 미술시장에서 호응을 얻기 시작할 즈음인 1970년, 그는 뉴욕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삶에 있어 또 다른 전환점을 맞았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 작업에 대한 탐구와 고민의 시기를 거쳤던 황규백은 동판화 중에서도 특히 메조틴트를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마스터하였다. 이 무렵 황규백은 뉴욕 근교의 베어 마운틴의 잔디밭을 즐겨 찾아가곤 하였는데, 그곳에서 작품 구상에 대한 몰입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 우연히 그의 뇌리에 하늘, 잔디 그리고 손수건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들을 포착하게 되었고, 그렇게 저장해 두었던 기억 속의 소재들은 판화작품인 <White Handkerchief on the Grass>로 남게 되었다.(도판 5) 이 작품은 제작 직후 각종 국제판화제에서 수상하게 되었으며 황규백이 말하는 나만의 방식(my way) 7), 즉 작업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황규백은 그의 예술적 비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이상적인 매체인 메조틴트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전향하게 되는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황규백이 집중적으로 제작한 메조틴트 기법은 17세기 독일 태생의 루드비히 폰 지겐 우트레히트(Ludwig von Siegen Utrecht, 1609~1680)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18세기 영국에서 성행했던 대표적인 전통판화의 일종이다. 우트레히트는 금속세공, 가죽공예, 북아트 등에 쓰였던 도구인 룰렛(roulette)을 동판 위에 요철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메조틴트 기법을 개발하였는데, 8) 도판 5. <White Handkerchief on the Grass>, 1973, 33x27cm, Mezzotint 황규백 역시 메조틴트 제작시 룰렛을 즐겨 사용하였다. 황규백은 그의 메조틴트 작업이 집중과 반복, 그리고 치밀함을 동반한 노동집약적인 5) 이경성, 현대미술의 이해를 위하여, 예술지식, 1989, pp.299~308. 6) 구자현, 版 画, 미진사, 1989, pp.79~92. 7) Ronny Cohen, K.B. Hwang Complete Prints 1968~1988, John Szoke Graphics, 1989, pp.9~12. 8) Carol Wax, The Mezzotint, Harry N. Abrams, 1996, pp.15~17. 3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황규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35
도판 6. <Watch in the bowl>, 1983, 30x35cm, Mezzotint 도판 7. <Three Moons>, 1993, 34x27.5cm, Mezzotint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테크닉 자체는 지극히 단순한 작업이라고 말하며, 그의 작품을 언급할 때 그 제작방법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완성된 작품을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황규백은 그의 작품이 현학적인 문구로 묘사되는 것을 경계하고 보이는 것과 그 이면 9) 에 담긴 서사와 함축이 열린 구조 안에서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밝힌다. 황규백의 판화가 특별하고 주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전통적인 메조틴트 작품의 화면 배경색이 어두운 색인 것에 반하여 황규백은 그것을 깃털과도 같이 밝고 부드러운, 독특한 회색 톤으로 만들어냄으로써 화면 안에서 보여지는 여백을 시각언어로 전이시킨다는 것이다. 미국의 브룩클린 미술관 큐레이터 조 밀러(Jo Miller)는 황규백을 음각판화의 위대한 실험자 10) 라고 평하였으며, 시( 詩 )적인 구도 안에서 인생을 관조한다 11) 고 언급 하였다. 최소의 단어와 운율로 쓰여지는 한 편의 시와도 같은 황규백의 작품에는 일상의 사물과 풍경이 화면 안에 은유적으로 병치되고 새롭게 재구성된다. 메조틴트 기법이 지닌 특유의 부드럽고 섬세한 디테일이 집약된 작품 속에 시적인 함의와 내밀한 환상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소소한 생물과 사물의 은밀한 대화, 혹은 무심코 놓아 두었던 기억과 현재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페르소나가 부재하는 풍경 속에 남겨진 그 자취가 다만 소리 없이 우리에게 말은 건네는 것이다.(도판 6, 7) 황규백이 미국에 정착하여 판화가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할 무렵인 1970년대 초 중반 한국판화계의 상황은 1968년에 설립된 한국현대판화가협회 를 중심으로 판화에 대한 제작과 보급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당시 국내에서 보여지던 판화작품들은 회화를 위한 형식실험의 한 방편으로 보았으며, 그런 관계로 화가가 판화를 제작하는 형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판화자체의 장르적 특수성을 인식하고 판화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본격적인 판화가가 등장하게 된 것은 70년대 이후였다. 12) 1970년대에 이르러 판화작업에 대한 확장과 관심이 증대되면서 한국판화의 국제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1970 창립),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1970 창립) 등이 개최되었으나 황규백은 국내 판화계와는 거의 직접적인 교류와 연결고리를 갖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이 시기 황규백의 활동에 대해 오광수는 해외에 진출하여 새롭게 판화 영역을 습득한 작가들의 출현은, 판화가 갖는 특수한 기술적 영역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현대회화로서의 판화가 갖는 조형적 매제적 실험의 진폭을 확인시켜준 일로 기억된다 13) 고 말하며 헤이터 공방에서 판화 수업을 받고 다시 뉴욕으로 건너가 정착한 황규백의 메조틴트 방법에 의한 동판화전 (1973), 동양화의 중견작가로 활약하다가 미국에 건너가 동판화의 방법을 습득하고 돌아온 박래현의 귀국판화전 은 판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일깨운 계기가 되었다 14) 고 언급하였다. 판화가로서 작업의 깊이와 확장을 거듭하였던 황규백은 총 230여 점에 달하는 작품들을 이 시기에 제작하였다. 3. 종이에서 캔버스로 2000년에 이르러 황규백은 30년이 넘는 타국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육체적인 한계로 인하여 판화작업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던 작가는 다시 돌아온 그의 터전에서 새로운 작업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70세가 넘어 다시 붓을 든 황규백은 기존의 판화작품에서 다루었던 소재들을 회화작업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와 시도를 거듭하였다. 이에 평소 그가 많은 예술적인 영감을 받았고 매료되었던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떠남으로써 회화에 대한 연구와 창작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특히 중점적으로 실견했던 프레스코 벽화(fresco)에서 회화작업의 기법적인 토대를 도판 8. <Violin on the Rock>, 2002, 102x122cm, Oil on Canvas 도판 9. <Hat in the Sky>, 2014, 122x102cm, Oil on Canvas 9) Jo Miller, The recent mezzotints of K.B Hwang, HMK Fine Arts, New York, 1975 재인용. 10) Jo Miller, Art Magazine, 1976 수록 글 재인용. 11) 위의 글. 12) 고충환, 한국현대판화 1958~2008, 국립현대미술관, 2007, pp.8~14. 13)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 열화당, 2000, p.237. 14) 위의 책, p.237. 3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황규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37
찾았다. 프레스코의 특징들은 캔버스 표면에 만들어진 거친 마티에르와 그 위에 중첩되어 정교하게 그려진 사실적인 이미지들과의 미묘한 대조를 통해 보여진다. 황규백의 서정적이며 정제된 메조틴트 작품이 작은 스케일의 화면 속에 집약된 완성도를 농축하고 있다면, 그의 회화는 판( 板 )이 갖는 일종의 강박을 벗어난 자유로움과 또 다른 차원의 깊이를 더한다. 황규백의 회화는 우산, 모자, 악기, 시계 등 빈번하게 등장하는 일상의 사물들이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혹은 미지의 세계에 존재할 법한 풍경과의 조합을 통해 우리 내부의 깊은 바다 15) 로 침잠하게 한다. Ⅲ. 맺음말 황규백이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작업해온 근작들은 감성적인 직관과 내면적 통찰이 균형을 이루는 작가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다. 뉴욕 소호의 작업실에서 차가운 동판 위에 눈으로 보는 한 편의 시 를 새겨 놓았던 그의 정묘함은 무뎌졌으나, 그의 회화작품들은 사그러들지 않는 창작의욕에서 우러나오는 완숙한 붓질로 완성된다.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사유와 관조를 바탕으로 하는 황규백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잃어가는 서정성의 회복을 이끌어내고, 내면의 낮고 깊은 대화에 귀 기울이게 한다. 참고문헌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옮김,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고충환, 한국현대판화 1958~2008 展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2007. 곽남신, 한국 현대 판화사, 도서출판 재원, 2002. 구자현, 판화, 미진사, 1989. 김윤수 외 57인, 한국미술 100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 한길사, 2006.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 열화당미술책방, 2000., 한국현대판화의 오늘, 한국판화 드로잉대전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1980. 윤명로, 한국현대판화의 형성과 전개, 한국현대판화40년 展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1993. 이경성, 현대미술의 이해를 위하여, 예술지식, 1989. 이구열, 한국 판화예술의 흐름, 한국현대판화40년 展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1993. 장화진, 판화 감상법, 대원사, 1996. 하세가와 기미유키, 구자현 옮김, 현대판화의 기초지식, 시공사, 2002. 한운성, 판화세계, 미진사, 1993. Carol Wax, The Mezzotint, Harry N. Abrams, 1996. Jo Miller, The Recent Mezzotints of K. B. Hwang, HMK Fine Arts, New York, 1975., Exhibition Review Article, Art Magazine, 1976. John Szoke & Ronny Cohen, K.B Hwang Complete Prints 1968-1988, John Szoke Graphics, 1989. Riva Castleman, Prints of the 20th Century, Thames and Hudson Ltd, London, 1988. 15) 세계는 크다. 하지만 우리들의 내부에서 그것은 바다처럼 깊다 는 릴케의 말 참조.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동문 선, 2003, p.317. 3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황규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39
Abstract Hwang Kyu Baik: Seen and Unseen Yang Okkum Associate Curator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Hwang Kyu-Baik (b.1932) was born in Busan and he had actively worked in Paris and New York since 1968 for over 30 years as a representative modern printmaker of Korea. He was a member of Shin Jo Hyung and Shin Sang Group from 1954 to 1967, and carried on his career by participating in the Korean Contemporary Artists Invitational Exhibition organized by Chosun Ilbo Company. However, Hwang s thirst for Western art and his will to escape the post-war devastation of Korea led him to the scene of more liberal creative activities as he departed to France in 1968. Afterwards in 1970, Hwang moved again and settled in New York, the center of contemporary art. He began to seek new transformation and thus constructed a distinctive style by internalizing the traditional printmaking technique of mezzotint in his own way. Apart from home, Hwang Kyu-Baik secured unrivaled position as a printmaker early on and won various awards at international print exhibitions including, Lublijana Print Biennale (1979, 1981), Bradford Print Biennale (1974), and Firenze Print Biennale (1974). Hwang s works are housed in the collection of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the British Museum, Victoria & Albert Museum, the Albertina and more. He especially established solid foothold as an international artist when he participated in the production of the official art portfolio of XIV Olympic Winter Games in Sarajevo, Yugoslavia (1983-84) with 16 internationally renowned artists. This thesis will extensively examine the 60 years working journey of Hwang Kyu-Baik in chronological order, from the early prints created in 1968 after he left to Paris, to the mezzotint works he concentrated between 1970 s to 1990 s settling in New York, and then the recent painting works Hwang has been working on since he permanently relocated to Korea in 2000. 4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Ⅱ. 미술관학 연구
총체예술의 실험실로서의 파빌리온: <쿤스트디스코> 정 다 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Ⅰ. 머리말 Ⅱ. 추진 배경 Ⅲ. 건축적 특성 Ⅳ. 운영 프로그램 Ⅴ. 맺음말 Ⅰ. 머리말 파빌리온(pavilion)은 온전한 건축물이 아닌 가설 건물이나 임시 구조체를 뜻하는 말이다. 영구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능적으로도 모호하며 지어진 후 재빨리 허물기도 하는 가변적이면서 용도가 다양한 건축물이다. 천막과 텐트와 같은 원시적인 구조물이 파빌리온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갖게 된 것은 13세기로 추정된다. 일상을 벗어난 유희적 성격의 공간으로서 파빌리온은 귀족들의 정원에서 빈번히 만들어졌으며, 근대에 들어 만국박람회의 국가관이나 아케이드(Arcade)처럼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장소로 성행했다. 현대적 의미의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미술관과 같은 시각예술 기관에서 촉발되었다. 특히 최근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미술관뿐만 아니라 공공 자치단체에서 장소브랜딩(place branding)을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유행과 같은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오늘날 파빌리온이 예술가들의 활동을 통해 그 자체가 단순한 임시 구조물이 아닌 하나의 작업 으로 조명 받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이 설치미술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물리적으로 짓는 것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사회 전반으로 획득한 것이 주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도시적인 맥락에서는 파빌리온이 성장의 동력을 잃어버리고 침체기에 진입한 도시 조직의 틈새를 파고들 수 있는 실험적이면서 대안적인 총체예술의 실험실로서의 파빌리온: <쿤스트디스코> 45
도판 1. 자하 하디드, 서펜타인 갤러리 파빌리온, 2000 건축작업으로 조명 받고 있기 때문이다. 1)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의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21세기 파빌리온을 대표하는 사례다. 2000년 자하 하디드의 첫 번째 파빌리온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매해 영국에 건축 경험이 없는 스타 건축가들을 초청하여 작업을 의뢰하였다.(도판 1) 1998년에 시작된 뉴욕현대미술관이 주최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oung Architects Program) 또한 건축가들의 실험과 도전 정신을 선보이는 대표적인 파빌리온 작업이다. 2012년 김찬중 건축가의 파빌리온 프로젝트 <큐브릭>을 선보인 국립현대미술관도 2014년부터 이탈리아 MAXXI, 이스탄불 현대미술관, 산티아고 컨스트럭토와 함께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네트워크에 합류하여 서울관 마당을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4년 당선작 프로젝트팀 문지방의 <신선놀음>, 2015년 당선작 SoA의 <지붕감각>은 모두 전통에 기반한 건축적 요소와 장소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으로 많은 이들의 인기를 얻었다.(도판 2~4) 국립현대미술관의 사례 외에도 <광주폴리(Gwangju Folly)>를 비롯, 2015년 한해만 해도 구 국세청 부지에 세워진 <럭스틸(Luxteel) 파빌리온>(운생동 설계),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의 <다이나믹 릴렉세이션(Dynamic Relaxation)>(국형걸 설계), 구 서울역 앞 광장에 설치한 <댄싱 포레스트(Dancing Forest)>(염상훈 & 이유정 설계), DDP 키오스크 등 건축가들의 다양한 파빌리온 작업이 선을 보였다. 건축과 미술에서 파빌리온은 경계를 허무는 매개체이다. 사회적으로는 뚜렷한 용도를 담지 않는 건축물이기에 복잡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요구들을 시의적절하게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민관이 펼치는 여러 문화사업의 한가운데 파빌리온은 유용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임시성, 가변성, 융통성 등 파빌리온이 가진 본질적인 속성들은 여러 전문 분야와의 협업을 가능하게 하며, 빠른 속도로 모습을 바꾸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특징과 잘 맞아떨어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분명히 파빌리온은 폴리, 키오스크 등 다양한 이름으로 확장하며 최근 우리 문화예술계를 달구고 있다. 미술관 바깥에서도 파빌리온은 팝업 스토어, 홍보관, 쉼터 등과 같이 여러 목적과 이름으로 게릴라처럼 견고한 도시의 틈새를 채우고 있다. 임시 구조물인 파빌리온의 물리적 한계를 떠나, 이러한 대안적이고 전복적인 특성은 건축과 미술 분야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이 글은 1988년 88서울올림픽 문화축전행사를 위해 기획된 <쿤스트디스코(Kunst Disco)>를 조망한다. 당시 서독 정부가 서울시에 기증한 이 임시 건축물은 전위적인 문화예술의 기지로서 여의도 앙카라 도판 5. 쿤스트디스코 외관 도판 6. 쿤스트디스코 내부 공원에 설치되어 26일간 가동되었다. 독일의 젊은 예술가 70여 명이 참여하여 운영된 <쿤스트디스코>는 국내에 전례 없던 사례로서 현대적 의미의 파빌리온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형식의 이 건축물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쿤스트디스코>는 그 실험성과 전위성에도 불구하고 임시 건축의 특성상 관련 연구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로컬 건축가로 협력했던 건축가 정기용(1945~2011)이 공간 지에 쓴 논고를 통해서 국내 건축계에 소개되었다. 또한 정기용이 <쿤스트디스코> 프로젝트에 협력하는 과정에서 남긴 도면, 사진, 스케치 등이 국립현대미술관 건축 아카이브에 수집되어 있다. 이 글은 <쿤스트디스코> 프로젝트 리뷰를 통해 파빌리온의 의미를 재고하는 것이 목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정기용 컬렉션 에 담겨 있는 문헌자료와 한국과 독일의 신문 및 잡지 기사를 토대로 작성하였다.(도판 5, 6) 도판 2. 김찬중, <큐브릭>, 2012 도판 3. 프로젝트팀 문지방, <신선놀음>, 2014 도판 4. SoA, <지붕감각>, 2015 Ⅱ. 추진배경 1) 건축가 구마 겐코는 저서 나, 건축가 구마 겐코 에서 최근 젊은 건축가들이 실제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아닌 미술관이나 갤 러리 같은 예술 세계의 전시나 공간 구성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일컬어 파빌리온 계열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연계한 문화예술 행사의 일환으로 탄생한 <쿤스트디스코>는 한강축제 프로그램 중 청소년 축제를 위한 장소로 기획되었다. 예술(kunst)과 디스코(disco)의 결합을 의미하는 이름대로 서독 정부가 문화교류 차원에서 서울에 청소년을 위한 현대적인 만남의 4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총체예술의 실험실로서의 파빌리온: <쿤스트디스코> 47
디스코 공간을 제공했으며, 행사 이후 서울시에 건물을 기증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쿤스트디스코는 여러 장르의 서독 예술가 70여 명이 출연하여 레이저와 조명과 같은 요소가 부각되고, 안무, 영상 등 여러 장르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을 보여주었다. 460만 마르크 (한화 약 17억원)가 들어간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당시 KBS가 미디어 파트너였기 때문에 <쿤스트디스코>는 부지에 대한 별다른 대안 없이 여의도 앙카라 공원에 세워졌다. 2) 독일문화원(현 괴테인스티튜트)이 서독 외무성의 요청을 받고 올림픽게임 문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쿤스트디스코>를 제안했을 때 이는 체제전복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고 여겨졌다. 한국 은 88서울올림픽 개최 직전까지만 해도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괴테인스티튜트는 이러한 측면들을 문화적으로 전복시키는 향락과 자유주의 가 배어든 총체예술의 기지를 세우고 자 하였다. 3) 건축물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세계 청소년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제공할 수 있도록 기존의 예술 장르를 내세우기보다 음악과 춤을 접목한 프로그램으로 관심을 끌도록 했다. 당시 프로젝트 책임자는 괴테인스티튜트 소속의 음악감독 유르겐 드류(Jürgen Drews)였다. 파빌리온에 해당하는 <쿤스트디스코>는 뮌헨공과대학교를 졸업한 뮌헨 출신의 건축가 율리아 망-본((Julia Mang-Bohn)과 페터 본(Peter Bohn)이 설계했다. 당시 나이로 20대 후반이었던 이 두 젊은 건축가를 비롯해 <쿤스트디스코>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의상 디자이너, 안무가, 음악가, DJ 등 30세 전후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대거 협업하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젊고 진보적인 예술가들이 1998년 9월 6일부터 10월 2일까지 총 26일간에 걸쳐 매일 다른 춤과 의상, 음악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총체적인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이 <쿤스트디스코>의 핵심이다. 건축의 형식적 요소와 퍼포먼스가 여러 층위로 결합된 <쿤스트디스코>는 기존과는 다른 서브컬처의 기지로 올림픽 기간 동안 청소년들의 전위 무대로 사용되었다.(도판 7, 8) Ⅲ. 건축적 특성 여의도 앙카라 공원에 설치된 <쿤스트디스코>는 대지면적 6,800m2에 건축면적 926m2, 연면적 1,320m2의 지상 3층 규모로 대형무대, 레스토랑, 바(bar), 휴식공간 등으로 채워졌다. 외부는 노출철골조에 샌드위치 패널과 라미네이티드 글라스로 마감하였다. 건축 설계를 맡은 율리아+페터 본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업하였는데, 인테리어는 산업 디자이너 빕스 호삭 롭스(Bibs Hosak-Robbs), 실내설치 작업은 의상 디자이너 미하엘 오디(Michael Ody), 전기와 레이저 시설은 조명 디자이너 울리 페졸트(Uli Petzold)가 맡았다.(도판 9, 10) 율리아+페터 본은 당시 시공현장에 건축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많지 않고 기술이 부재한 상황에서 구식 방법을 동원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작업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또한 원활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면서 내부 협업과정에서도 갈등은 발생했다고 밝혔다. 특히 레스토랑과 바 설계를 맡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빕스 호삭 롭스의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설계 방식과 엄숙하고 논리적인 뮌헨 공과대 출신의 두 건축가들의 작업 방식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반면 노출철골조의 구조물에 부드러운 직물 조각을 내 외부에 설치, 개입시켜 파빌리온을 한층 풍부하게 만든 의상 디자이너 미하엘 오디의 작업은 오히려 건축 형식과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면서 이질적인 부분들이 복합적인 조화를 이루는 결과를 낳았다. 4) (도판 11~13) 도판 9, 10. 쿤스트디스코 건축 설계 다이어그램 현장의 기술적 어려움과 협업과정에서 자연히 발생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쿤스트디스코>는 도판 7. 쿤스트디스코 외관 도판 8. 무대 내부 2) 쿤스트 디스코 서울 건립 독일서 한국문화행사 벌여, 한겨례, 1988.6.2.; 독일문화공연장 건립 올림픽행사 소개위해, 경향신문, 1988.6.8.; 88기간중 행위예술 축제 펼쳐, 동아일보, 1988.6.10.; 서독정부기증 여의도 쿤스트 디스 코, 매일경제, 1988.6.13. 3) BAUNETZWOCHE #332 special, 2013.8., p.332. 도판 11, 12. 쿤스트디스코 레스토랑 및 바 인테리어 4) BAUNETZWOCHE #332 special, 2013.08, 유르겐 드류 페터 본 율리아 망-본과의 인터뷰 4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총체예술의 실험실로서의 파빌리온: <쿤스트디스코> 49
도판 13. 미하엘 오디의 직물 조각 매일 300여 명이 방문 하는 명소로 성황리에 개막 하였다. <쿤스트디스코>의 한국 파트너로서 페터 본, 율리아 망-본과 교류했던 정기용은 공간 지 1988년 9월호 기고를 통해 <쿤스트디스코>의 세 가지 주요한 건축적 이슈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첫째는 도시건축과 임시구조물의 상응관계이다. 모두 비슷비슷한 상자형 건물이 즐비한 서울에서 젊은 두 독일 건축가는 가볍고 개방적인 하나의 깃털 과 같은 가건물을 제시했다. <쿤스트디스코>는 도시계획과 건축법규의 제약에서 벗어난 임시 건축의 관용적 측면 때문에 다른 건축물과는 다르게 실험적인 접근이 가능했으며, 이러한 현실적 규약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각은 견고한 서울의 건물들에 대응하는 유연한 유랑건축(Architectur Normade)의 재현을 꿈꾸게 했다. 둘째는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한국 전통건축의 만남이다. <쿤스트디스코>에는 철저한 비례감각 뒤에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문법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한국 전통지붕 형상을 역으로 사용한 환기그릴의 의장처리는 전통건축과 구성주의 문법의 적절한 조화를 보여준다. 추녀의 내민 모습에서 내외공간 사이의 전이공간을 해석하고, 쳐든 지붕선에서 역동적인 모습을 찾아내거나, 남쪽을 개방하고 북쪽을 부속 건물로 폐쇄하는 등의 모습은 서구의 전위적인 언어와 우리 전통이 교차하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셋째는 건축자재로서 노출철골조에 대한 재해석이다. 페터 본과 율리아 망-본이 서울의 도시 건축물에 대해 느낀 바와 같이 서울은 선이 사라지고 폐쇄된 덩어리로 차있었다. 임시구조물 이라는 점에서 시공비 절감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었겠지만 쿤스트디스코는 당시 도시 풍경과 대비되는 있는 그대로의 구조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세 관점은 서로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당시 한국 건축계에 신선한 자극을 던진 건축으로 보일 수 있었다. 5) (도판 14, 15) Ⅳ. 운영 프로그램 <쿤스트디스코>는 건축뿐만 아니라 내부 프로그램 기획과 운영에도 혁신적인 측면들이 돋보였다. 오후 5시에 개장하여 밤 11시에 문을 닫는 <쿤스트디스코>에는 매일 공연과 음악이 바뀌었으며, 연주자 들을 비롯한 여러 참가자들을 위해 미하엘 오디는 150여 벌의 의상을 제작했다. 미하엘 오디의 의상과 복장 또한 매우 전위적으로 기묘한 모습을 띠었다. 6) 디스코를 위한 음악은 슈트뢰어-브뢰어(Ströer-Brüder)가 총괄했고, 안무가 하워드 파인(Howard Fine)이 퍼포먼스와 댄스를 기획했으며 실제 현장 에서 웨스트밤(WestBam)이 DJ로 활약했다. 하워드 파인과 그의 팀원들은 놀이와 예술성을 가미한 흥미로운 프로그램으로 다양하게 퍼포먼스를 구성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디스코라는 음악 장르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프로그램 기획자들은 퍼포먼스를 통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자 했고 사람들 사이에 활기가 생기도록 독려를 아끼지 않았다.(도판 16~18) 슈트뢰어-브뢰어의 컨셉에 맞춰 <쿤스트디스코>용으로 제작된 음악을 가지고 베스트밤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적절한 배경음악을 제시하는 등 민첩하게 대처했다. 베스트밤은 다양한 상황과 분위기에 맞춰 사용할 수 있는 LP 30장을 제작했고 쿤스트디스코가 폐장된 후 이중 일부가 서울의 베스트밤(WESTBAM in Seoul) 이라는 음반으로 출시되었다. 하워드 파인과 슈트뢰어-브뢰어, 베스트밤은 무대 뿐만 아니라 <쿤스트디스코>의 다른 부속 공간 안에서도 유연하게 관객과의 상호 교감이 이루어지도록 작업하였다.(도판 19) 음악에 초점을 맞춘 어둡고 큰 보통의 다른 디스코텍과 달리 <쿤스트디스코>는 외부공간을 개방해 춤을 추는 대상과 그 밖의 다른 대상과의 상호응시와 관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위해 자연통풍을 이용한 환기시스템을 고려했으며, 공항터미널에서 컨셉을 차용해 전체적으로 도판 16~18. 오디의 의상을 입은 퍼포머, 댄서들 도판 19. 서울의 베스트밤 음반 도판 14. 쿤스트디스코 지상층 평면도 도판 15. 쿤스트디스코 단면도 5) 정기용, 쿤스트 디스코, 콘크리트 공간 속의 깃털같은 시어, 공간, 1988.9. 6) 인터뷰: 독 쿤스트디스코 의상 담당 오디 씨, 무대 옷은 관객 이해 돕는 도구, 경향신문, 1988.10.2. 미하엘 오디의 의상 은 뮌헨패션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5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총체예술의 실험실로서의 파빌리온: <쿤스트디스코> 51
밝은 구성으로 알루미늄 타입의 간이 건축 방식을 선보였다. 이러한 디스코 클럽 속에서 <쿤스트디스코>는 발레, 오페라와 같은 고전예술 형식과 달리 전자음악과 관련하여 이를 건축물에 적용한 진보적이고 독특한 총체예술을 선보인 것이다. 음악의 경우, 건축보다는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여 퍼포먼스는 진지하기 보다는 가볍고 즉흥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 퍼포먼스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였다. 7) 입장료 3,000원을 내면 자유롭게 행위예술 이라는 혁신적인 문화를 즐기고 참여할 수 있었지만, 비싼 입장료를 내야 했기에 <쿤스트디스코>는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개장 기간 동안 일부 언론들은 의도와 달리 결국 삼류 디스코장으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8) 독일의 전위예술가들의 몸짓과 이에 호응하는 신세대들의 환호성 속에는 기성세대가 감지하지 못한 서울올림픽 이후의 새로운 문화적 양태들이 담겨져 있었다. <쿤스트디스코>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과 더불어 등장하여 신세대로 호명된 새로운 젊은이들의 문화소비를 위한 실험적인 기지였다. 1988년 국내 최초 맥도날드 매장이 압구정동에 개장하고, 1990년대 오렌지족이 등장하는 등 문화적 사건에 맞춰 트렌디하고 급진적인 소비를 이끌었던 젊은이들은 <쿤스트디스코>에서 벌어진 26일 간의 축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Ⅴ. 맺음말 <쿤스트디스코>는 오늘날 민간과 공공기관 등 다양한 주체의 주도로 실현되는 파빌리온의 기획 배경과도 연결된다. 개발과 성장의 정점에서 문화적 갈증을 해갈하기 위한 낯설고도 급진적인 영토를 탐색하는 시도는 가건물의 문화공간화를 이루었다. <쿤스트디스코>는 유희적 도판 20. 보라매공원에 방치된 쿤스트디스코 도판 21. 앙카라 공원에 세워진 터키식 찻집 성격의 공간으로서 그전까지 한국사회에서 터부시 되었던 임시건축 혹은 가건물의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킨다. 가건물은 한국 근대화를 위한 장치이자 임시 주거민으로써의 삶을 버리고 제대로 된 정착지를 찾고자 했던 한국인들에게 부정적인 대상이었다. 하지만 <쿤스트디스코>를 매개로 파빌리온(가건물)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이후의 삶이 펼쳐지는 곳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위한 장치로서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쿤스트디스코>는 올림픽이 끝난 후에 여러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예정이었지만 이후 폐쇄된 채 몇 년간 방치되었다. <쿤스트디스코>는 1990년 9월 서울시 동작구 보라매공원으로 이전된 뒤 1991년부터 한국체육진흥회의 관리 하에 체육 프로그램 시행 장소나 서울액션스쿨 등으로 활용되었다. <쿤스트디스코>가 있던 앙카라공원에는 터키식 찻집이 세워졌다. 보라매공원에 옮겨진 <쿤스트디스코>는 외관에 패널들이 덧붙여지면서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모했으며, 가끔 바둑대회나 결혼식장으로도 이용되며 점심시간에는 주변 직장인들이 탁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2007년 보라매공원 재정비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쿤스트디스코>는 철거되어 사라졌다. 9) (도판 20, 21) <쿤스트디스코>는 양질의 문화적 토양에서 발아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 가건물의 문화적 맥락을 이끌어냈다. 결국 준비되지 않은 미완의 토양에 불시착한 셈이 되었지만 새로운 문화적 실험을 위한 장을 제공하였기에 중요한 건축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건축물은 현재에도 지어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플래툰 쿤스트할레(Platoon Kunsthalle)>가 있다. 이곳은 2000년대 들어 탄생한 한국의 서브컬처 기지로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에 세워졌다. 28개의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이 구조물은 일견 임시적으로 보이나 상설 운영되는 문화 상업공간이다. <플래툰 쿤스트할레>는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적 현상을 신속하게 반영하는 곳으로 젊은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전시, 강연, 프리마켓 등을 열고 있다.(도판 22) <쿤스트디스코> 이후 국내에서 파빌리온 사례들은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와 같이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나타나다가 2010년 이후 미술관 등 기관이 주최로 참여하면서 작업 주체, 규모와 성격 면에서 좀 더 건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실험적이고 임시적인 건축은 보다 많은 도판 22. 플래툰 쿤스트할레 7) BAUNETZWOCHE #332 special, 2013.8., 베스트밤, 안무가 루스 가이어스베르거와의 인터뷰. 8) 디스코 場 (장)된 獨 (독) 전위예술무대, 경향신문, 1988.9.21. 9) 방치된 88공연장, 동아일보, 1989.4.20.; 쿤스트디스코 보라매 공원 이전, 한겨례, 1990.7.19.; 신건축기행/신 대방동 쿤스트 디스코, 매일경제, 1997.11.7.;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서울액션스쿨, 씨네21, 2005.9. 5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총체예술의 실험실로서의 파빌리온: <쿤스트디스코> 53
이들과의 협업과 형식적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쿤스트디스코>는 향후 파빌리온 프로젝트에 주요한 연구의 단초를 제공한다. 물론 <쿤스트디스코>가 국가주도의 이벤트를 위한 행사장으로 기획되었다는 특수성이 있지만, 앞으로 보다 많은 파빌리온 프로젝트들이 건축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 안을 채울 프로그램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선행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파빌리온 같이 임시적으로 점유했다가 사라지는 프로젝트의 경우, 과정에 대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쿤스트디스코>의 경우에도 기록과 관련된 재원이 없었기 때문에 괴테인스티튜트도 당시 진행 과정에서 발생한 자료를 많이 남기지 못했다. 주최측은 물리적으로 <쿤스트디스코>가 도시의 새로운 자원으로 새롭게 활용되길 기대했으나, 결국에 사라졌고, 현재는 신문 기사나 참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도 이 프로젝트가 다시 회고될 수 있었던 까닭은 건축가 정기용이 남긴 아카이브와 그의 논고를 통해서 반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쿤스트디스코>에 대한 학술적인 평가보다는 흩어져 있던 빈약한 <쿤스트디스코>에 대한 정보를 한데 모아 정리함으로써 이 프로젝트의 가치를 다시 환기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정리 작업 이후 축적될 여러 자료들에 주목하여 임시건축 혹은 가건물로 통칭되는 파빌리온 프로젝트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파빌리온은 오늘날 복잡한 도시를, 혹은 더 이상 성장이 멈춰버린 늙어버린 도시를 채우는 상상력의 산물이며, <쿤스트디스코>는 경직된 도시를 전복시키는 획기적인 시도로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쿤스트 디스코 서울 건립 독일서 한국문화행사 벌여, 한겨례, 1988.6.2. 독일문화공연장 건립 올림픽행사 소개위해, 경향신문, 1988.6.8. 88기간중 행위예술 축제 펼쳐, 동아일보, 1988.6.10. 서독정부기증 여의도 쿤스트 디스코, 매일경제, 1988.6.13. 獨 (독)전위 藝 術 (예술)잔치 8일 개막, 경향신문, 1988.9.5. 디스코 場 (장)된 獨 (독) 전위예술무대, 경향신문, 1988.9.21. 인터뷰: 독 쿤스트디스코 의상 담당 오디 씨, 무대 옷은 관객 이해 돕는 도구, 경향신문, 1988.10.2. 방치된 88공연장, 동아일보, 1989.4.20. 쿤스트디스코 보라매 공원 이전, 한겨례, 1990.7.19. 신건축기행/ 신대방동 쿤스트 디스코, 매일경제, 1997.11.7.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 - 서울액션스쿨, 씨네21, 2005.9. BAUNETZWOCHE #332 special, 2013.8., pp.3~21. 정기용, 쿤스트 디스코, 콘크리트 공간 속의 깃털같은 시어, 공간, 1988.9. 파레르곤포럼 기획,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 홍시, 2016.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정기용 컬렉션>(김희경, 정구노 기증) www.peterbohn.com www.bohnarchitekten.de 도판출처 도판 1: Helene Binet 사진 도판 2: 김용관 사진 도판 3: 이미지 줌 사진 도판 4: 슈가소트페퍼 사진 도판 5~11, 13~15: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정기용 콜렉션>(김희경, 정구노 기증) 도판 12, 16~22: BAUNETZWOCHE #332 5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총체예술의 실험실로서의 파빌리온: <쿤스트디스코> 55
Abstract Pavilion as the Experiment of Intermedia Art: Kunst Disco Dah-young Chung Art, Korea. Concentrating on number of data to be accumulated in the near future, it will be able to invest new significance to pavilion, commonly known as temporary architecture or makeshift building. Pavilion is the fruit of imagination and a remedy for the complicated city of today or aged and stunted city. Kunst Disco would be deemed of its value in the innovative attempt to subvert the rigid city. Assistant Curator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Pavilion is rising as an experimental and alternative architecture in the age of austerity today, despite its physical limitation as temporary construction. In particular, it is noteworthy that pavilion blurs the boundary between architecture and art, thereby facilitating collaboration and formal experimentation among various architects, artists, and professionals from different genres. For instance, Kunst Disco planned as part of the 1988 Seoul Olympics Culture Festival could be recognized as the origin of contemporary pavilion project in Korea. Kunst Disco was a temporary structure donated by the government of West Germany to Seoul city and it was installed for 26 days in Ankara Park of Yeouido as a base of avant-garde culture and arts. As 70 young German artists participated to manage Kunst Disco, it was by far an unprecedented case and truly the original modern sense of pavilion in Korea. This new style of architecture unseen beforehand, not only shocked the general public but also the figures from culture and arts scene. Regardless of its experimental and avant-garde features, scarce research materials remain on Kunst Disco, yet it was introduced to the domestic architecture field when Chung Guyon, who cooperated as local architect at the time, wrote disquisition in SPACE Magazine. Furthermore, drawings, photographs and sketches left by Chung Guyon during the collaboration process of Kunst Disco project are housed in the architecture archive of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assess the possibility of pavilion through the review on Kunst Disco project. Rather than conducting academic evaluation, it is to awaken the value of a lapsed project by recollecting and organizing the few dispersed materials on Kunst Disco. This text is written based on the literary material, newspaper and magazine articles held in Chung Guyon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5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총체예술의 실험실로서의 파빌리온: <쿤스트디스코> 57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사례를 중심으로 Ⅰ. 머리말 Ⅰ. 머리말 Ⅱ. 본문 1. 문화나눔 프로그램 소개 2.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1) 2011~2014 사업 경과 2) 2015 사업 결과 3) 참여자 반응 및 외부의견 (1) 참여자 반응 (2) 외부의견 Ⅲ. 맺음말 한 정 인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국립현대미술관은 모든 계층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미술문화 향유권 확대에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참여 대상 및 주제에 따라 전문인 교육, 일반인 교육, 학교연계 교육, 문화나눔 교육, 전시연계 교육, 어린이미술관 으로 구분한다. 각 프로그램은 담당 학예연구사 및 연구원, 직원들이 기획 및 진행하며, 수시로 개최하는 프로그램 자문회의 등 관련 전문가들과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양질의 미술관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2011년부터 2015년까지의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교육프로그램을 간단히 소개하고,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사례를 중심으로 문화나눔 사업의 성과 및 의미, 그리고 향후 사업 방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Ⅱ. 본문 1. 문화나눔 교육프로그램 소개 문화나눔 교육은 참여대상 특성에 따라 문화다양성교육, 장애인 미술관교육,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문화나눔 초청 으로 세분화하여 운영되고 있다. 사회 전반의 다문화 흐름에 대응하기 위한 문화다양성교육 은 국가의 주요 정책인 다문화가족정책 기본계획 기조에 발맞추어 미술문화를 통해 함께하는 다문화 사회여건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정책에서 미술관 다문화교육과 관련된 조항은 다양한 문화가 있는 다문화가족 구현, 다문화가족 자녀의 성장과 발달지원, 다문화가족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 제고 1) 이다. 이에 미술관에서는 미술관에 방문하는 다문화가족 및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문화다양성 교육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결혼 이주민 및 자녀 대상의 미술관 초청 프로그램으로 다문화 어린이 소풍 을 운영하였다. 이 과정은 참여대상의 특성을 고려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는데, 결혼 이주민 어린이와 가족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미술관에서 만나는 이웃나라 이야기 운영을 통해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 등 각 나라의 동물, 식물, 상징물 등을 배우고 그림으로 표현하며 부모 나라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2013년부터는 다문화 어린이 및 가족만이 아닌 모든 계층이 참여할 수 있도록 대상을 확대하여 다문화가족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 확장은 물론 다양한 문화적 현상에 대한 이해확장에 기여하고자 했다. 참여대상이 확대된 만큼, 연령 및 대상별 참여자 특성을 고려한 어린이 대상의 <Da? 多! 다>, 청소년 대상의 <다양한 공감이 있는 미술관>, 가족 대상의 <조각공원 9경가요!> 등 프로그램을 다각화하고 있다.(도판 1) 장애인 미술관교육 은 장애를 가진 참여자가 쉽고 즐겁게 전시를 관람하고 창작 워크숍에 참여하는 내용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대표 프로그램으로 <장애아 미술관 소풍>이 있다. 이 과정은 실행 전반에 있어 신체적 불편함이나 장애등급에 제약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 도판 1. 문화다양성교육 프로그램 1) 제2차 다문화가족정책 기본계획(2013~2017), 여성가족부, 2012. 5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사례를 중심으로 59
주제 및 내용을 구성하였다. 지체장애, 신체장애, 지적장애 등 장애 특성을 고려한 특화된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특수교육 관련 외부전문가와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추진한다. 그 결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해설 동영상 자료, 시각장애인을 위한 촉각(점자)교재 등 장애에 따른 특수성을 고려한 다양한 교육 자료를 개발하였으며, 관련 기관 및 단체에서 활용하도록 널리 배포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장애인 교육의 방향성은 문화예술기관의 특수교육은 장애를 치유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닌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자존감을 되찾아 궁극적으로 삶의 질 향상에 그 의미가 있다 는 전문가들의 입장과 의견을 함께하고 있다. 2) 이는 미술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이 미술관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에 직접 참여하는 작은 활동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평소 도움 받았던 소중한 사람을 쿠키(입체작품)로 만들고 나눔의 의미를 생각하는 <쿠키로 만든 나의 소중한 사람>, 종소리가 나는 움직이는 조각(모빌)을 만들고 나무에 설치해보는 <흔들흔들~ 움직이는 조각 만들기> 등은 재미있는 활동으로 장애 어린이의 감수성 확장을 기대해볼 수 있는 사례라 하겠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은 인지장애(치매 등) 노인 대상의 <시니어 조각공원 소풍>을 시범 운영하였다. 대한치매학회와 업무협약(MOU)을 통해 협업으로 진행한 이 과정은 치매 노인이 자연 속 미술관에 조성되어 있는 수십 여점의 야외조각작품을 작품해설과 함께 감상하는 산책 프로그램이다. 전문 의료진이 동행하도록 하여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응급상황에 대비하는 등 세심한 준비를 통해 운영했다. 문화나눔 초청 사업은 장애, 다문화, 차상위계층 등 사회적 경제적 소외대상은 물론 평소 미술에 대한 인식이 적은 군인, 경찰, 소방대원 등 경험적 소외계층까지 대상으로 한 확장된 의미의 문화나눔 프로그램이다. 대부분 미술관에 처음 오는 경우가 많은 만큼 참여자 수준을 고려한 교육과정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본 과정은 최근 문화소외계층의 대상 설정이 다각화되고 있는 현실에 맞추어 보다 적극적인 미술문화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3) 과천관의 경우 지역적 접근성에 불편함이 있기에 적극적인 초청사업을 통해 보다 다양한 계층이 미술관에 방문할 수 있도록 다양한 초청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도판 2. 교내 미술활동 공간조성 2.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1) 2011~2014 사업경과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아웃리치 프로그램이다. 이 사업은 기존 1990년대 이전부터 진행되다가 2008년경에 운영이 중단된 작품 전시 중심의 찾아가는 미술관(또는 움직이는 미술관) 과는 구분되는 미술관교육 프로그램으로, 2011년부터 전국 미술문화 소외지역 어린이를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운영 5년차가 되었으며, 해마다 꾸준히 15개 지역 내외의 전국 초등학교에 찾아가고 있다. 사업 목표는 미술관에 방문하기 어려운 어린이를 위해 직접 초등학교 및 교육박람회 현장으로 찾아가서 미술문화를 알리고자 하는데 있다. 2011년에 시험사업 성격으로 4개 지역에서 운영하였는데, 실기 창작 및 미술 콘텐츠 자료 등을 포함한 워크북 활동을 현장에서 시험 운영하여 아웃리치 사업의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실행 지역은 해남, 울산, 충주, 평창지역이며, 충주지역의 경우 초등학교 내부에 미술공간을 조성하기도 했다.(도판 2) 울산지역의 경우 해당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로 개최하는 평생학습축제에 참가하여 지역민에게 미술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알리고자 하였다. 2012년에는 사업을 확대하여 12개 지역에서 운영하였으며, 교육 및 자료 전시가 가능한 찾아가는 버스 를 조성했다. 버스 구성은 지역 특성상 미술관에 방문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가상의 미술관 체험이 가능하도록 2) 한국교원대 산학협력단, 특수아동을 위한 미술관교육 활성화 방안연구, 2012, p.163. 3) 평생교육법에서는 소외계층을 저소득층, 저학력자, 장애인, 노인, 이주여성 및 다문화가정, 조손가정, 한부모 가정, 외국인 근로자, 노숙인, 새터민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문화와 관련한 소외계층 설정 은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문화적소외계층, 문화적 서민, 문화소외계층 등으로 구분된다. 도판 3. 국립현대미술관 찾아가는 버스 조성 6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사례를 중심으로 61
설계하였다. 버스 외부는 미술관교육을 의미하는 EDUART'의 각 글자를 버스 외부 전면에 자유롭게 배치함으로써, 창의적 미술관교육의 가능성을 표현하고자 했다.(도판 3) 또한 미술관 야외조각공원의 작품을 드로잉으로 재구성했다. 도화지와 같은 하얀 버스 외부 면에 선으로 쉽게 그린 작품 이미지를 통해 아이들은 미술문화에 친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버스의 내부구성은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의 주제를 담고자 하였다. 버스라는 한정적인 작은 공간이지만 집약적으로 주제를 표현하여, 창작, 체험, 감상을 근간으로 한 교육콘텐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2013년에는 15지역에서 운영하였으며 사업 전반의 안정적 체계를 바탕으로 교육관련 행사 등을 통해 교육관계자 및 일반인 등에 적극적 홍보하고자 했다. 지역에서 개최되는 교육박람회 및 평생학습축제 등 전국 각지에서 개최하는 박람회에도 참가하여 자료 배포 및 현장 워크숍 등을 통해 미술관 및 미술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 2014년에는 찾아가는 버스 내부에 미디어 아트 작품을 설치하여 기존의 자료 중심의 찾아가는 버스 콘텐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참여 어린이는 어둡게 암막처리를 한 버스 내부에 빛 을 주제로 한 오정선, 신성환 작가의 작품 2점을 감상 및 참여해보는 과정으로 진행하였다.(도판 4) 동시에 국립현대미술관 창작 레지던시 입주작가 등 신진작가와 함께 창작 워크숍도 운영했다. 도판 4. 참여형 미디어 아트 작품 왼쪽) 오정선, <조각 맞추기>, 거울, 아크릴, 영상, 모터, 알루미늄, 135x113x4cm, 2014. 오른쪽) 신성환, <빛으로 세상을 그리다>, 휴대용LED, DSLR카메라, 관객참여공간, 2014. 2) 2015 사업 결과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은 공모를 통해 선정된 5개 작가팀이 전국 각지에서 워크숍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해마다 미술관 고유의 콘텐츠를 구성하여 초등학교 등으로 찾아가고 있는데, 2015년에는 예술가와 어린이가 함께하는 창작 워크숍 을 중심 주제로 운영했다. 사업 홍보는 미술관 및 전국 교육청, 관련 사이트 등에 사업안내문을 게재하여 진행했다. 접수결과 총 183개교에서 참여신청을 하였으며, 심의를 통해 18개교가 선정되었다. 심의는 참여신청서에 기술된 내용을 다각도로 검토하였고, 도서지역, 농촌 및 어촌, 원거리, 교육복지 우선지원 선정학교 등 더욱 미술문화가 필요한 학교에 가점을 주었다.(표 1) 구분 대상 내용 지역 방문교육 교육행사 참여 문화적 경험기회 소외 초등학생 등 교육관계자 및 참여자 표 1. <2015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운영 결과 - 미술문화 접근성 취약한 어린이 대상 미술관교육 프로그램 실행 - 예술가와 함께 하는 워크숍 프로그램 운영 등 - 교육박람회 등 교육관련 행사 참여를 통한 사업 홍보 등 파급 확대(자료배포 및 워크숍 부스 등 운영) 18지역 (30회 750명) 3회 (10,320명)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은 예술가 및 예술교육기획자 등 문화예술 전문 인력과 협업을 통해 사업의 효과를 확장하고자 노력하였다. 워크숍 기획안을 공모한 결과 총 48개 팀이 제출하여 많은 예술가들이 미술관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격한 서류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최종 선정된 5팀의 작가 및 제목은 김용관 작가팀의 시차적 상상력, 박경주 작가팀의 샐러드 맛 좀 볼래?, 윤주희 작가팀의 우리가 있는 기념비-살아있는 기념 조각상 되기, 전명은 작가팀의 바늘구멍 운동장: 핀홀카메라 제작과 사진촬영 워크숍, 최선영 작가팀의 관계에서 피어나는 플레이 극장 이다.(표 2) 심사기준은 기획안의 창의성, 계획 구체성, 실행 가능성, 교육적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심의 하였다. 심사위원 구성은 1차 및 2차 각각 다른 5인의 내부 및 외부 전문가로 위촉하여 심사의 공정성을 확보토록 했다. 많은 작가들이 참신한 워크숍 기획안을 제안하였으나, 선정 가능한 수가 한정되어 있어 모든 기획안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예를 들면, 지역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활동(사운드 아트), 친구와 함께 꽃을 함께 심어 특색있는 화단 만들기(커뮤니티 아트), 움직이는 창작물 워크숍(키네틱 아트)등 여러 작가들이 다양한 활동을 제안하였다. 선정된 작가팀은 미술을 비롯한 문화예술 전반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작가들로, 회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작업 경향을 보여준다. 제안한 기획안 역시 작가들의 활동만큼이나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용관 작가팀(김용관, 김성호, 강숙진, 이사라)은 시차적 상상력 을 주제로 워크숍을 진행하였는데, 사물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형태를 이해하는 내용으로 구성하였다. 사각형, 삼각형을 기본으로 한 골판지 상자를 재료로 한 기하학적 형태의 특성을 알아보고, 여러 위치에서 다르게 보이는 조형물을 제작하는 활동이었다. 윤주희 작가팀(윤주희, 최성균, 박주희, 윤정로)은 지역의 상징적인 기념비적 존재가 되어보는 창작 및 퍼포먼스 활동 주제로 워크숍을 진행하였는데, 어린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6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사례를 중심으로 63
상징물 대해 생각해보고 스스로 상징적 기념비가 되어보는 퍼포먼스 활동으로 구성하였다. 양양 송이버섯, 진도 진돗개 등 각 지역의 상징적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고, 스스로 제작한 오브제를 착용 또는 소품으로 활용하여 퍼포먼스 활동으로 연결하였다. 박경주 작가팀(박경주, 유지혜, SINGH ANIMA/네팔, TSOGTBAATAR URANCHIMEG /몽골)은 미술,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퍼포먼스 워크숍으로 진행하였는데, 외국 국적을 가진 팀원은 어린이에게 해당국가의 문화를 포함한 활동으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참여 어린이들은 모둠 활동으로 소품 제작, 시나리오 작성, 연기까지 직접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미술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의 다양함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 분 김용관 <시차적 상상력> 윤주희 <우리가 있는 기념비 -살아있는 기념 조각상 되기> 박경주 <샐러드 맛 좀 볼래?> 예술가 워크숍 장면 전명은 작가팀(전명은, 정민호, 김영호, 김성은)은 카메라 기본원리 이해 및 일상 공간 재발견을 통해 미술문화를 이해하는 워크숍을 진행하였다. 수업은 손바닥만큼 작은 핀홀 카메라를 제작한 뒤, 교실, 운동장, 친구모습 등 학교풍경을 담아내는 내용이었다. 어린이들은 검은 판지로 만든 핀홀 카메라에 1회용 폴라로이드 필름을 장착한 후 담고자하는 풍경을 바늘구멍을 통해 상을 담아낸다. 한편 초기 카메라 발명의 원리인 카메라 옵스큐라 를 몸소 체험했다. 온통 검은 천으로 교실로 들어오는 빛을 가린 후 작은 구멍을 내었을 때 서서히 교실 밖 풍경이 맺히는 과정을 통해 카메라에 대한 이해를 더욱 확장했다. 최선영 작가팀(최선영, 이재환)은 어린이와 함께 대화를 통해 생각을 나누는 공감이 있는 워크숍을 진행하였다. 간단한 종이, 연필, 소품들을 워크숍 도구로 활용하여 마음에 담아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으로 운영했다. 작가는 가상의 의사가 되어 아이들의 고민을 듣고 가상의 처방전(드로잉 등)을 나누어주는 미술심리 치료의미가 담긴 활동을 진행하였다. 수업과정 중 어린이들과 친근감을 형성하기 위한 작가가 고안한 간단한 게임보드 등을 활용하였다. 해마다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은 아웃리치 사업에 대한 파급 확산을 위해 교육박람회 등 관련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올해에는 대한민국평생학습박람회(국가평생교육진흥원), 대한민국 어린이축제(육영재단), 과천시평생학습축제(과천시) 에 참가하였다. 개최 규모 등을 고려하여 사업성과가 큰 행사에 참가하는데, 대한민국평생학습박람회의 경우 서울시평생학습박람회와 함께 열리게 되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렸기에 많은 참여자들에게 사업을 홍보할 수 있었다. 3일간의 행사기간 동안 우리 관 홍보부스를 찾은 인원은 7,212명이며, 그 중 212명이 창작 워크숍에 참여했다.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은 운영 첫 해인 2011년부터 교육관련 행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어쩌면 미술문화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박람회 행사에 홍보부스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미술문화를 더욱 확산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도판 5) 전명은 <바늘구멍 운동장: 핀홀카메라 제작과 사진촬영 워크숍> 최선영 <관계에서 피어나는 플레이 극장> 표 2. 예술가 워크숍 실행 도판 5. 교육박람회 부스운영 6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사례를 중심으로 65
3) 참여자 반응 및 외부의견 (1) 참여자 반응 매번 워크숍에 참여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는데, 설문 결과는 대부분 긍정적 반응을 나타냈다. 프로그램 만족도 문항의 결과는 만족 이상 92%, 보통 7%, 불만족 이하 1%를 보였으며, 미술문화에 대한 이해도 변화 문항의 결과는 만족 이상 2%, 보통 15%, 불만족 이하 3%를 보였다. 설문 결과는 매해 비슷한 수치를 보이며, 전국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한편 예술가와 소통이 잘된 학급단위일수록 설문 만족도가 높게 나오는 경향을 보인다.(표 3) 주관식 질문인 예술가와 함께하는 워크숍에 대해 좋았던 점 에 대해서는 친절했다, 즐거웠다, 재미있다 등 대부분 긍정적인 답변하였으며, 개별 응답으로 박스로 특정 형태 구성하기, 색칠하기 (김용관 작가팀), 조각보 소품 제작, 사람이 작품이 되는 퍼포먼스 활동, 외부 자연물에 아크릴 거울 조각 부착 활동 (윤주희 작가팀), '스티로폼 소품 만들기', '연극 및 무용 등 퍼포먼스 활동'(박경주 작가팀), 카메라 만들기, 같이 사진 찍었던 것, 감광지 활동, '암실에서의 카메라 옵스큐라 활동 (전명은 작가팀), 게임 및 드로잉 활동, 가상의 약 처방, 마음을 보여주는 활동 (최선영 작가팀) 등으로 답변했다. 어린이들은 워크숍 전반에 있어 만족하고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정적인 활동보다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을 선호하고 있는 경향이 있었다. 사업 후 개별적으로 제출한 실행결과보고서에서 참여 예술가들은 공통적으로 찾아가는 사업 의미에 대해 공감하고 적극적인 실행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사업결과에 대해 대체적으로 만족했다. 원거리 이동에 따른 불편함 등 찾아가는 사업의 물리적인 여건에 대해 다소 불편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 예술가들은 어린이와 함께 소통하는 워크숍 활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한편 작가 개인별 소감을 정리하자면, 김용관 작가팀은 결과물을 통해 어린이 스스로 자부심을 <프로그램 만족도> <미술문화 이해도 변화> 가질 수 있도록 역할을 한 것에 보람을 느꼈다. 고학년은 박스 형태 조립 및 패턴 채색 등 작가가 의도하는 작업방식을 잘 이해하여 어렵지 않게 수행한 반면, 저학년은 작업 방향을 다소 이해하지 못했던 점을 아쉬워했다. 윤주희 작가팀은 지역에 따라 어린이의 다양한 결과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양양 강현초, 진도 조도초 등 원거리 지역 어린이의 순수한 생각이 작품으로 연결된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각 지역의 어린이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설악산(양양), 바다(조도)와 연결된 다양한 창작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는데, 지역의 특색이 절묘하게 결과물로 연결된 점을 높게 평가했다. 박경주 작가팀은 여러 지역에서 워크숍을 진행한 결과 가장 주변 여건이 어려운 학교일수록 더욱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참여 어린이의 순수함과 적극성이 창의적 결과물로 이어져 보람을 느꼈다. 평소 의미 없게 지나치던 일상 공간이 예술적 공간으로 변하는 과정의 워크숍을 통해 어린이들이 일상을 새롭게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전명은 작가팀은 아이들의 순수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인해 활력있는 워크숍을 운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꾸밈없는 표현력으로 의도한 것과 다른 다소 엉뚱한 결과가 작가를 더욱 즐겁게 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어린이들과 창작 워크숍을 진행하다보면 어느덧 친해지는 소통이 의미있었다고 회고했다. 최선영 작가팀은 물리적인 창작 결과물이 생기는 워크숍을 진행하기보다는 참여 어린이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하고자 했다. 짧은 워크숍 시간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나 를 이야기하는 소중한 활동을 통해 학급 아이들은 서로의 친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으로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창작물을 만들어내지 않고도 소통 을 주제로 함께한 시간만으로도 예술적 활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이해하기를 바랬다. (2) 외부의견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은 사업 실행 후 차기년도 사업방향에 대한 논의를 위해 2차례의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안건은 올해 진행한 예술가 워크숍 운영사례에 대한 공유 및 향후 방향 설정 전반 에 대한 논의였다. 초청한 외부 전문가는 미술 분야뿐 아니라 과학,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하였다. 4) 미술계 내부에서 뿐 아니라 외부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찾아가는 미술관 교육 사업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문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는 해당 소속기관에서 표 3. 참여자 설문결과 (단위: %) 4) 1차 자문회의 참여자는 정연희(한국문화예술진흥원 창의교육지원본부장), 한민지(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 매니저)이며, 2차 자문회의 참여자는 김준기(미술평론가), 심재헌(서울시과학전시관 남산분관장), 김재경(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학교교육팀 장), 이현지(다음세대재단 올리볼리 사업팀장)이다. 6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사례를 중심으로 67
문화나눔 또는 사회교육 을 근간으로 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기에, 각 분야 전문가의 입장에서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사업에 대해 나름의 조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문회의 결과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의견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첫째, 국립현대미술관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은 타 문화예술기관에서 진행하는 예술가 참여 프로그램과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 둘째, 지자체, 학교 등 지역 커뮤니티와 협력을 통해 미술관 고유의 콘텐츠를 확산해야 한다. 셋째, 찾아가는 활동 못지않게, 쉽게 찾아오는 초청 프로그램을 동시에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미술관 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확산하여, 언젠가 반드시 가봐야하는 곳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인식개선 의 측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표 4. 자문회의 결과 자문의원들의 의견을 정리하자면 첫째, 미술관 이 드러나는 내용으로 주제를 설정하여, 타 문화예술기관에서 운영하는 유사프로그램과 뚜렷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미술관 이라는 기관의 개념에 대한 내용 또는 미술관의 다양한 전문인들에 대한 내용 등 타 기관과의 차별화된 미술관에서만 운영할 수 있는 주제설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연간 15개 지역에 찾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자원의 한계치라면, 1~2개 지역이라도 충분한 사전조사를 통해 지역 커뮤니티와 적극적인 협력하여 모범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최근 지자체 및 단체에서 문화관련 사업을 적극 추진하려는 시도가 많은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콘텐츠는 굉장히 환영 받을 것이다. 셋째, 원거리로 찾아가는 한계성은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미술관 외부에서 진행하는 미술관교육은 미술관 맥락을 떠난 장소에서 이루어지기에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가능하면 최대한 미술관으로 초청하여 전시를 관람하도록 해야 한다. 넷째, 찾아가는 사업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미술관 이 유의미한 장소이며, 언젠가 기회가 있을 때 방문하고 싶은 장소로 인식할 수 있는 잠재적 관람객을 확장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이 총 2차례에 걸친 자문회의에서 외부 전문가들의 제안을 정리하여 보았다. 내부적으로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에 공감할 만한 부분이 많지만, 한편 현실적으로 반영하기 어려운 의견은 더욱 내부 논의를 통해 더 나은 방안을 찾을 예정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의 향후 사업방향은 국립미술관의 차별성 있는 미술 콘텐츠를 특화하여, 학교는 물론 지역 커뮤니티와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자생 가능한 미술문화 분위기 조성에 있다. 찾아가는 것 과 동시에 찾아오는 초청사업을 확장하여, 직접 미술관에 방문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은 아웃리치 사업의 특성상 농촌, 어촌, 산간지방 등에서 진행할 경우가 많은데, 외지인의 입장에서 모든 과정을 수행하는 만큼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기본적으로 원거리 여행의 성격이 있기에, 오래 전부터 내부 매뉴얼에 의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재료준비, 교통편 예약, 여행자 보험가입, 구급약 준비 등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한 세심한 준비가 필수적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현실 과 이상 의 접점을 잘 찾는 일이 중요한데, 인력 등 행정 자산 투입 대비 성과에 대해 명확한 한계선을 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을 들이는 만큼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선택 과 집중 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지난 5년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은 전국 소외지역에서 미술문화 확산을 위한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미술관에 오기 어려운 지역에 직접 찾아다니는 사업을 통해 국립미술관으로서의 공공성 확장을 모색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예술가와 함께하는 워크숍 을 통해 비록 오지의 운동장일지라도 살아있는 예술의 현장이 되었다. 앞으로도 국립현대미술관은 다양한 문화나눔 프로그램으로 미술문화가 필요한 모두에게 더욱 다가갈 것이다. Ⅲ. 맺음말 지금까지 찾아가는 미술관교육 을 중심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사업의 목적은 단지 미술문화 확산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닌 문화복지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계층이 불편함 없이 미술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6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사례를 중심으로 69
Abstract The Culture Sharing Program of MMCA, Korea: 2015 Outreach Program art contents of MMCA, Korea and it will aim to establish self-sustaining arts and cultural practice in cooperative efforts with the local communities and educational institutions. Han Jung-in Associate Educator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Korea) administrates education program for everyone to participate, in endless effort to encourage and expand public enjoyment of arts and culture. This text will briefly introduce the 2011-2015 education program of the MMCA, Korea, and further seek the product and significance of culture sharing programs and the direction of future programs based on the case of 2015 Outreach Program. The culture sharing education is divided into Culutral Diversity Program, Learners with Disabilities Program, Outreach Program and Culture Sharing Invitation according to the features of the participants. Within this, the Outreach Program initiated in 2011 and continues to this day for the children in the local areas deprived of arts and cultural activities. The 2015 Outreach Program was centered on the theme of Creative Workshop with Artist and Children Together. The outreach program of 2015 strived to extend the effectiveness of the program through collaboration with artists, art education specilaists and arts and culture professionals. The program this year was run by five collective of artists along the theme of workshop, and these artists conducted workshops in connection to their usual creative activities. The culture sharing program of MMCA, Korea simultaneously carries the purpose of proliferating arts and culture and the promotion social welfare.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useum actively administers open projects for the entire stratum of the society to appreciate and enjoy arts and culture. From hereafter, the direction of Outreach Program will be specialized with distinctive 7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나눔 프로그램: <2015년 찾아가는 미술관교육>사례를 중심으로 71
Ⅲ. 2015 미술연구센터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1) 조 수 진 이화여자대학교 Ⅰ. 머리말 Ⅱ. <제4집단>의 결성 과정과 그 주체의 성격 Ⅲ. 대항적인 청년 하위문화로서의 <제4집단>의 활동 Ⅳ. <제4집단>의 해프닝으로 촉발된 전위예술 개념의 위기 Ⅴ. <제4집단>에 대한 당국의 탄압과 미술계의 부인 Ⅵ. 맺음말 Ⅰ. 머리말 <제4집단>은 1970년 6월 20일 결성되어 두 달 남짓한 활동을 마지막으로 사라져버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단명했던 행위미술 단체이다. <제4집단>의 활동은 몇몇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그간 연구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 논의의 범위나 평가의 기준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형편이다. <제4집단>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해프닝을 통해 기성세대와 사회현실을 비판했던 그들의 시도가 당국의 탄압과 미술계의 냉대 속에 무력화되어 말 그대로 해프닝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의 평가 역시 <제4집단>의 사회 비판적 의지의 진정성 문제나 체제 저항적 행위의 성공 여부 같은,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서의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다. 2) 1) 이글은 미술사학보 제40집(2013.6.)에 게재한 원고를 재수록한 것이다. 2) <제4집단>의 해프닝을 같은 시기 다른 해프닝들과 비교해 사회비판적 가치가 큰 것으로 파악하는 시각은 1980년대부터 한국 행위미술에 관한 심도 있는 글을 자주 기고했던 이벤트 행위미술가 이건용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는 1960년대의 해프닝을 전기 행위미술 로, 1975년 4월부터 본인이 주도한 이벤트를 후기 행위미술 로 명명하고, <제4집단>이 거리에서 행한 해프 닝은 본래의 의미가 변질된 것으로 사회비판적 요소를 띠게 되어 기존 가치에 대한 테러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고 밝히면서, 이러한 요소들이 당시의 한국적 문화 기류로 보아 한국 해프닝을 규정짓는 성격의 또 다른 일면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또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75
본 연구는 <제4집단>의 해프닝이 40년이 넘도록 이 같은 잣대로만 평가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제4집단>의 활동에 정치적 전위주의의 가치만을 적용할 경우, 그 예술은 영원히 실패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현시점에서 <제4집단>의 해프닝을 사회비판적 가치로 평가하는 것은 가장 타당한 일이나, 그것이 당대의 사회 변혁에 기여한 정도가 미미함 역시 분명하기에 이는 결국 <제4집단>에 필연적 실패의 굴레를 씌우는 일이 된다. <제4집단>의 해프닝이 우발적, 충동적, 퇴폐적이었으며, 지나치게 난해해 사회 변화 의지를 예술 형식에 내재화하지 못했고, 근본적으로는 체제 변혁을 위한 진정성이 부족했다는 식의 기존의 평가들은 예술, 특히 실험적인 예술에 정치성 이라는 기준만을 적용한 단선적 사고의 결과일 수 있다. 3) 나아가 앞서 제시된 <제4집단>에 대한 평가 속에 어쩌면 당시 그들의 사회비판적 활동을 억압했던 세력, 혹은 그들의 전위적 미술 실천을 무시했던 이들이 내린 부정적 언사들이 이미 포함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제4집단>을 영원한 실패자로 낙인찍지 않기 위한, 나아가 이들의 행위미술에 사회비판적 가치 외에 다른 미술사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본 연구는 이와 같은 의문에 답하기 위해 <제4집단> 주체의 성격과 그들의 행위미술이 표명된 양상의 규명에 주력하고자 한다. 즉 <제4집단>이 표방한 전위 개념은 기성 예술계의 그것과 어떻게 차별화되며, <제4집단>의 주체들은 전위 예술 가로서의 자아정체성을 어떤 모습으로 구축하려 했는지, 또한 그들의 해프닝이 소개된 방식과 그 결과물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제4집단>의 도전이 당대 사회와 기성 예술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미처 말하지 못했거나 말했음에도 은폐되었던 발언들의 복원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본 연구는 방태수, 손일광 도판 1. <제4집단> 결성식, 1970.6.20. 같은 <제4집단> 소속 예술가들과의 최초의 인터뷰와 당시 발행된 각종 인쇄매체 자료들에 대한 분석을 병행할 것인데, 이로써 <제4집단> 사건의 숨겨진 전말이 일부나마 드러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한국 미술계의 가장 도발적 해프닝 중의 하나로 기억되는 <제4집단> 사건에, 말 그대로의 해프닝, 즉 어이없는 웃음거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Ⅱ. <제4집단>의 결성 과정과 그 주체의 성격 한 그는 <제4집단>의 선언문을 예로 들며 그것이 서양에 대한 문화적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 다는 증거라고 밝히면서 이 그룹의 예술적 자주성을 높게 평가했다. 이건용, 한국의 입체, 행위미술, 그 자료적 보고서: 60 년대 해프닝에서 70년대의 이벤트까지, 공간, 1980.6., pp.13~14.; 이러한 관점은 국내 최초로 <제4집단>에 대한 단 독 연구를 발표했던 김미경의 글에 계승되어, <제4집단>을 사회와 소통하는 미술 로서 예술 내적인 문제에 침잠하는 기성 예 술계를 비판하는 동시에 사회와 문화를 통합하려는 이상을 지녔던 존재로 정의 내리게 했다. <제4집단>의 예술 활동은 기성 문화와 사회체제에 대한 반성의 발로이자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젊은이의 정신이었다는 것이다. 김미경, 제4집 단 (1970), 미술사논단 제11호, 한국미술연구소, 2000, pp.255~256, p.268. 3) <제4집단> 해프닝의 사회비판적 성격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 연구자는 바로 윤진섭이다. 그는 1960년대의 해프닝 미술 가들이 반란과 전위의 기수들이었으며 특히 <제4집단>의 반문화적 시위는 사회 내지 미술제도에 대한 비판적 아방가르드 (critical avant-garde) 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제4집단>의 해프닝은 그 우발적이고 스캔 들과 같은 성격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대중의 이해를 얻는데 실패했으며, 따라서 그들을 진정한 정치적 아방가르드 로 볼 수 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윤진섭은 나아가 전위주의자들을 선택된 소수(selected minority) 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들 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행동주의(activism)와 적대주의(antagonism)이며, 이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갖춰야 진 정한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4집단>은 행동양식에 있어선 급진적인 측면이 있었으나 대체로 그 태도가 심약했기에, 선택된 소수 로 선뜻 정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윤진섭, 한국의 초기 해프닝 (Happening) 에 관한 연구, 예술논문집 제49집, 2010, 대한민국예술원, pp.132~133.; <제4집단>을 사회비판적 아 방가르드 전통의 계보 속에서 파악하면서도, 이들이 내세운 전위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또 다른 연구 자는 김영나이다. 그녀에 의하면 <제4집단>은 앵포르멜이 생명력을 잃어버린 1960년대 말 새롭게 등장한 전위 세력으로서, 이들의 행동은 이 무렵 서구의 공공 영역에서 해프닝이나 이벤트를 선보이던 전후 네오아방가르드와 그 맥을 같이한다. 그러 나 이들이 내세운 전위는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삶과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투쟁성이 부족했다. 전위운동은 단지 하나의 미술형식에서 또 다른 형식으로의 실험 이상으로, 삶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태도에 기인하는데, 그런 면에서 <제4집단>은 한국 미술에서 이를 실현해낸 유일한 사례인 민중미술 수준의 정치적 전위주의를 담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영나, 한국미술의 아방가르드 시론,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21권, 2010, pp.240~244. 1970년 6월 20일 정오, 서울 을지로 입구의 소림( 笑 林 ) 다방에서 열린 결성식을 시작으로 해프닝 예술을 추구한 행위미술 단체 <제4집단>은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도판1) 김구림 (35, AG 회원), 정찬승(29, 화가), 정강자(28, 화가), 강국진(28, 화가), 최붕현(31, 화가), 방거지(31, 본명 방태수4), 극단 에저또 대표 4), 손일광(31, 패션 디자이너), 고 호(22, 판토 마임 배우), 전유성(21, 극단 에저또 회원), 강석희(36, 작곡가), 이익태(24, 영화작가, 필름 70대표), 임중웅(시나리오 작가), 탁 영(음악가), 석야정(28, 승려, 전각 篆 刻 예술가), 이자경 (27, 기자), 김벌래(29, DBS 동아방송 음악효과 담당, 소림다방 주인) 이상 총 16명 5) 으로 구성된 <제4집단>은 그 활동 분야가 미술, 연극, 패션, 음악, 영화, 언론, 대중예술, 종교계를 총 망라하고 있어 가히 전 방위 문화집단이라 할 만했을 뿐 아니라, 연령대가 모두 20~30대로 4) 극단 에저또 대표 방태수는 <제4집단> 결성 당시 방거지, 또는 방저거 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에저또 창단 준 비공연 <춤추는 영웅들>(1966.7.1.~3., 건국대학교 강당)을 준비할 당시 헐벗은 연극 등장인물들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 해 스스로 방거지 라는 별명을 지었다고 회고했다. 서영석, 극단 에저또 연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7, p.23. 5) 방태수와 손일광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제4집단> 소속 총회원수는 16인보다 훨씬 많았다. 16은 그들 중 각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을 선별한 숫자였다고 한다. 방태수, 손일광과의 인터뷰, 2012.4.28. 7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77
당시 각 분야 신진 세력의 선두주자들이 모인 청년 공동체이기도 했다. <제4집단> 6) 회원들은 이날 언론 앞에서 애국가 제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마친 뒤 준비한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체의 결성 이유와 그들이 추구해나갈 새로운 예술형태, 즉 음악, 영화, 연극, 미술, 무용, 문학 등을 종합한 해프닝의 모습을 밝혔다. 당시 대변인을 담당했던 방태수가 작성한 결성 선언문은 총 4개항의 행동 강령과 13인의 상원의원 명단을 비롯해 총칙, 조직기구, 회계, 상벌, 부칙 등이 포함된 집단규약을 갖추고 있었으며, 행동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우리는 인간을 본연으로 해방한다. - 우리는 순수한 한국문화의 독립이 세계 문화의 주체임을 확인한다. - 우리는 참여로서 모든 체제를 통합한다. - 우리는 무체( 無 體 )로서 일체를 이룬다. 선언문 내용과 당일 행해진 언론과의 인터뷰 자료, 회원들의 개인적인 회고를 종합해볼 때 <제4집단>의 예술 사상은 한 마디로 무체주의( 無 體 主 義 ) 란 용어로 요약된다. 노자( 老 子 ) 사상의 핵심인 지배의욕을 버리고 무위자연( 無 爲 自 然 )에 의해 지배하려는 정치사상 에서 가져왔다는 이 개념은 무체예술( 無 體 藝 術 ), 즉 이름 그대로 형체가 없는 예술의 논리적 기반이 되는데, 이는 방태수의 회고에 따르면 바로 해프닝처럼 실체가 없이 흔적만 남는 예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체( 無 體 ) 는 또한 지금까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오던 사고방식을 지양해 일체화할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모든 것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일체화시키는 것 7) 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독립된 모든 분야들이 일단 무( 無 )의 상태로 돌아가야 하기에 각 분야들의 경계는 필연적으로 해체된다. 이 논리를 따를 경우에도 단체에 가장 적합한 예술 형식은 역시 해프닝이 되는데, 행위미술이야말로 시각예술에서 오랫동안 대상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몸의 주체적 가치를 회복시킨 예술이자, 각 예술 장르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대표적인 총체예술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4집단>에게 해프닝은 존재하는 모든 예술로부터 비롯된 동시에 그 어떤 예술과도 닮은 점이 없는, 무체주의 의 예술적 현현( 顯 現 )이었던 셈이다. 8) 6) <제4집단>이라는 이름은 방태수가 지은 것이다. 단체의 명칭으로 사용된 4 는 모든 것이 무( 無 )로 변했다는 의미에서 죽을 사 ( 死 )를 뜻하기도 하며, 그들이 보다 고차원적인 세계인 4차원 세계를 갈구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들 자신이 삼류도 아닌 사(4)류 인간, 즉 기존의 어떤 인간형도 아닌 전혀 새로운 인간형을 지향하고 있음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방태수 와의 인터뷰, 2012.4.28. 7) 장윤환, 한국의 전위예술, 신동아, 1975.1., pp.316~329. 8) <제4집단>의 무체주의 사상은 4개항으로 이뤄진 행동강령에 이르러 현실에서의 실천 방안으로 구체화되는데, 먼저 제1항인 인 간을 본연으로 해방한다 는 문구에서는 <제4집단>의 주체이자 일명 4.19 세대 인 청년 예술인들의 개인적 자유에 대한 열망이 발견된다. 박정희 정권의 전체주의에 맞서고자 했던 이들의 민주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삶의 태도는 블루진에 히피 스타일의 더벅 <제4집단>은 인간해방과 한국문화의 독립을 외치며 사회 현실에 주목하고 기성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청년 예술가 공동체였다. 그들의 행동강령은 이들 집단의 의지, 즉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전통문화와 현대문명,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등을 통합해 당대를 대표할 새롭고 진보적인 예술을 선보이겠다는 열정의 언어적 요체였다. 그렇다면 이들 청년 예술가들은 어떤 계기를 통해 일체를 이루자는 결의를 하게 된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제4집단> 회원들이 서로 친분을 맺기 시작한 1968년에서 1969년경의 문화계 현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제4집단> 결성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회원들로는, 미술계에서는 김구림, 최붕현, 정찬승, 정강자, 강국진이, 연극계에서는 방태수가, 패션계에서는 손일광이 있었다. 이중 최붕현, 정찬승, 정강자, 강국진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 을 개최했던 무동인 9) 과 신전동인 10) 소속 미술가들로서, 최붕현은 1968년 5월 2일 개최된 제3회 세미나 현대미술과 해프닝의 밤 에서 강국진과 함께 <색 비닐의 향연> 11) 이라는 행위미술을 소개한 적이 있으며, 정찬승, 정강자, 강국진은 1968년 5월 30일 심선희, 홧(What) 동인의 김문자 등과 함께 한 국내 최초의 누드 해프닝 <투명풍선과 누드>와, 기성 문화계의 자성을 촉구한 야외 해프닝 <한강변의 타살>(1968.10.17.) 등을 발표하며 일명 해프닝 쇼 12) 작가들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머리, 턱수염에 베레모를 쓴 고전파, 단정히 넥타이를 맨 신사 등 각자의 개성 넘치는 용모에서도 나타났다. 또한 <제4집단>은 순수한 한국문화의 독립 을 외친 제2항을 통해 단지 서구 첨단 문화의 모방에 그치고 있던 당시의 예술계를 비판하면서, 진정한 한국적 전위예술을 창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들이 결성식의 맨 첫 순서에 애국가 제창과 국기에 대한 의례를 배정한 것 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강한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였다는 당시 인터뷰나, <제4집단> 예술의 사상적 근간을 한국 전통문화의 정신적 터전이었던 동양사상에 두고 있는 점은 이런 사실을 입증해준다. 모방이냐 예술이냐: 한국 전위예술의 기수들, 김구림 보관 자료, 출처 미확인; 한편 참여로서 모든 체제를 통합 하겠다는 제3항에서는 현실 지향적이며 사회 비판적인 <제4집단>의 성격이 엿보이는데, 이는 결성식의 전 과정에서 이들이 보여준 세태 풍자적인 태도나 구체적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겠다는 여러 발언들에서도 알 수 있다. <제4집단>의 기성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구성원 각자에게 부여한 임원 신분의 명칭에서 확 연히 나타난다. 회원들 중 최고 연장자였던 김구림이 통령 직분을, 정찬승이 총령 을, 의령 을 손일광이 맡았는데, 여기서 통령, 총령, 의령은 각각 대통령, 사무총장, 국회의장 등의 정부 요직의 명칭을 희화화한 용어로서, 당시 권력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이 들이 고안해낸 것이었다. 또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날 <제4집단>은 장차 현실 정치에도 관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유 럽 어느 나라에선 히피족이 5명의 하원의원을 냈다 는 실례를 들며 자신들의 창작활동을 저해하는 독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 하다면 국회의원 출마도 서슴지 않겠다 고 말하고, 기성문화권은 너무 귀족적이기에 <제4집단> 멤버들은 현실참여, 정치참여, 종교참여 등에 적극적인 참여를 꾀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을 할 작정이다 라고 선언하며 본인들의 정치적 포 부를 밝혔다. 이 밖에 다음 모임에서는 대기오염에 대한 시위로 모든 회원이 마스크를 착용할 계획이다 라는 발언이나, 개최 예 정으로 있는 <제4집단> 시화전에서의 수익금을 그즈음 청주에서 옥중결혼식을 올렸던 복역수 문정규 씨의 신부 정선금 여인에게 보내주기로 한 것 역시 <제4집단>의 결성 목표가 사회와의 긴밀한 연계 및 기성체제에 대한 비판에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법당 에 사이키와 고고춤을, 선데이 서울, 1970.6.28, pp.12~13, 모방이냐 예술이냐: 한국 전위예술의 기수들, 김구림 보관 자료, 출처 미확인 참조. 9) 최붕현. 10) 정찬승, 정강자, 강국진. 11) 이 날 최붕현이 각본을 쓴 <화투놀이>라는 해프닝도 선보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12) 한강변( 漢 江 邊 )서 진기한 해프닝 쇼, 한국일보, 1968.10.18.; 한강변( 漢 江 邊 )서 해프닝 쇼, 조선일보, 1968. 10.18. 7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79
이들 해프닝 미술가보다 연배가 높았던 김구림은 1969년 3월 일렉트릭 아트로 분류되는 <공간구조>를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제1회 서울현대음악제(1969.9.5., 국립극장)에서 백남준의 음악 해프닝 <피아노 위의 정사>(정찬승, 차명희 출연)를 연출하고, 김차섭과의 공동 작업으로 한국 최초의 메일 아트로 불리는 <매스미디어의 유물>(1969.10.10., 서울 전역)을 제작하는 등 본격적으로 실험적인 미술을 추구해나갔다. 김구림은 또한 영상예술 분야에도 진출해, 정찬승, 정강자 등의 협조로 1969년 여름 한국 최초의 전위영화 <24분의 1초의 의미>(16mm, 25분)를 제작하고, 7월 21일 이 영화를 상영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아카데미 음악실에서 정강자와 함께 흰 색 타이즈 의상을 입고 직접 스크린이 되어 몸에 영상 이미지를 투사시키는 행위미술 <무제>를 발표했다. 13) 이 같은 김구림과 해프닝 미술가들과의 공동 작업은, 일회성의 사건에 머물던 해프닝의 개념에 기존 회화나 조각 장르의 경계를 넘어 각 예술 장르가 종합되는 총체예술로서의 의미까지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국제복장학원을 졸업하고 1968년 국제박람회 의상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손일광은, 명동에 의상실 살롱 아방가르드 를 개업하고 신진 남성 패션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쌓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의상실에 우연히 정찬승이 찾아오면서 손일광과 홍익대학교 출신 미술가들과의 오랜 교분이 시작되었다. 당시 살롱 아방가르드 에는 매일 저녁 미술가들이 많게는 수십 명씩 찾아왔고, 모인 사람들은 전위예술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회화와 의상,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장르 간의 경계를 완전히 타파한 예술이야말로 전혀 새로운 예술인 동시에 예술의 원초적 상태일 것이라고 여겼다. 14) 손일광은 이후 해외의 백남준과 편지를 교환하면서, 나의 생각, 나의 음악을 오선지 안에 다 넣을 수 없다 15) 는 그의 발언에 깊은 감명을 받고 본인의 전위의상 제작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패션의 3대 요소인 원단, 패턴, 봉제를 완전히 부정한 의상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정강자와 함께 기획한 해프닝에서 선보인 <휴지의상>(도판2)이었다. 1969년 어느 날 장충단공원에서 실연된 이 해프닝은 손일광이 제작한 휴지의상을 입은 정강자가 분수대 속으로 들어가면 옷이 물로 인해 흘러내리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었다. 16) 13) <무제>에 사용된 영상물은 영화 <24분의 1초의 의미>와는 다른 백여 장의 이미지들로 따로 편집해 만들었다. 신 진, 김 구림의 작업에 있어서의 오브제와 일상의 의미: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9, p.26. 14) 손일광은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1, 2학년 학생들 사이에 살롱 아방가르드 를 찾아오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었 으며, 이들은 매일 저녁의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회고했다. 손일광과의 인터뷰, 2012.4.28. 15) 손일광과의 인터뷰, 2012.4.28. 16) 손일광은 정강자가 결국 분수대 안으로 들어갔었는지, 아니면 휴지의상을 입고 사진만 찍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손일광과의 인터뷰, 2012.4.28. 손일광이 이처럼 패션과 미술이 결합된 해프닝을 창조하고 있을 때, 방태수는 연극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방태수는 극단 에저또 17) 의 전신인 건대극회( 建 大 劇 會 ) 를 창설하고 1967년경부터 사실주의 연극에 도전하는 실험극을 발표해나갔다. 당시 그는 동양사상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서구 현대극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앙토넹 아르토(Antonin Artaud)의 잔혹극 개념, 소극장 운동의 역사, 미국의 대표적인 전위연극 극단 리빙 시어터(Living Theatre)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1968년 11월, 을지로 3가에 전용 소극장을 마련한 방태수는 극단 에저또를 창단하고 개관 공연 <판토마임> 18) 의 막을 올렸다. 극단 에저또는 그 명칭과 첫 공연에서부터 사회비판적 성격을 도판2. 손일광, <휴지의상>, 1969, 모델 정강자 강하게 드러냈는데, 에저또 라는 이름은 언론탄압이 심해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사회 상황에서 사람들이 더듬거리듯 발언하는 간투사 19) 에 저 또 를 결합해 지은 것이며, 몸짓으로만 이뤄지는 판토마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채택된 것이었다. 극단 에저또는 그 출발부터 군부독재 정권과 기성 연극계에 대한 반항을 표명한 셈인데, 그때의 심정을 방태수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판국에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는가, 아무 말도 말자, 그리고 오로지 행동만 하자 20) 는 발언으로 드러낸 바 있다. 21) 이처럼 당시 신진 연출가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던 방태수가 김구림을 만나게 되면서 행위미술계는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한국의 해프닝에 사회비판적, 세태풍자적 성격이 17) 1960년대에 출범한 동인제 극단들 중 실험연극을 가장 끈질기게 추구했던 단체. 극단 에저또는 우리나라에서 시도된 소극 장 연극들 가운데 서구의 반 기성 연극 운동으로서의 소극장 운동과 가장 닮아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8) 마임(mime)은 인간, 자연, 그리고 주위의 모든 요소를 배우의 몸동작으로 재창조하는 예술이다. 한국에서는 1968년 12월 독일의 마임 예술가 롤프 샤레(Rolf Scharre)가 내한해 공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방태수가 이끄는 극단 에저또는 이 시기부터 정기적인 마임 워크숍 공연을 열어 마임 예술의 확산에 기여했으며, 이를 통해 유진규, 김성구, 김동 수 등의 마임 전문 연기자들이 배출되었다. 19) 문장의 의미를 구성하기보다는 담화 상에서 담화적인 기능을 위해 쓰이는 요소, 담화표지 라고도 한다. 20) 장윤환(1975), p.322. 21) 시대적 현실에 대한 방태수의 관심은 곧이어 대중들의 일상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그는 1969년 12월 <속속속 돌아가는 태양의 끝에 대롱대는 지난 아픔들의 이야기>(1969.12.20.~21.)라는 전위연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 작품은 서울 시내 125곳의 화장실에 시민들이 적어놓은 낙서들만을 모아 구성한 것으로 그 독특함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곳 없던 대중들이 낙서에 털어놓은 울분은 주로 돈, 섹스, 정치 사회적 욕구불만에 관한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해프 닝과 유사한 부조리극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기저에는 권력층에 대한 비웃음과 냉소적 의미를 담았던 이 연극은 권력에 대 한 신랄한 풍자를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8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81
선명하게 도입된 것이다. 과거 정찬승, 정강자, 강국진이 선보였던 <한강변의 타살>에도 문화계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으나, 당시의 행위미술은 극단 에저또의 전위연극처럼 본격적인 사회비판 의지까지는 담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태수는 이후 김구림을 통해 만난 해프닝 미술가들과 미술은 캔버스를 떠나고, 연극을 극장을 떠나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자 22) 는 모토 아래 결집해, 이들과의 합작으로 가두극( 街 頭 劇 ) 이라는 해프닝의 연극적 형태를 여러 편 발표했다. 방태수와 행위미술가들의 첫 합작품은 김구림, 정찬승과 함께한 <콘돔과 카바마인>(1970.5.15.) 및 <육교 위에서의 해프닝>(1970.5.16.)이었으며, <제4집단>의 결성은 바로 이 같은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 이상에서와 같이 <제4집단>은 그 핵심 구성원들이 결성 전부터 이미 전위적 예술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가운데 등장했다. 이로써 이 단체의 설립 이유가 회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추구하던 해프닝을 힘을 합쳐 좀 더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는데, 결성식 전 약 한 달여 기간 동안 심도 있는 토론을 거쳤다는 김구림의 증언은 이런 가정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23) 그러나 <제4집단>은 결성 당시의 계획들을 거의 실현하지 못한 채 1970년 8월의 마지막 활동을 끝으로 정부 당국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이는 그 시작에 비해 너무나 빠르고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으며, 따라서 회원들이 <제4집단>이라는 깃발아래 선보였던 예술행위는 실제로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제4집단> 회원들은, 이후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각 분야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기성세대가 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창조하려했던 당시의 열정이, 그들에게 평생의 예술적 자산이 되어 남았던 것이다. 24) Ⅲ. 대항적인 청년 하위문화로서의 <제4집단>의 활동 1970년 6월 20일 행해진 <제4집단>의 결성식은 일주일 뒤인 6월 28일, 잡지 선데이 서울 에 법당에 사이키와 고고 춤을 (1970.6.28.)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예술 집단의 결성식이 일간지 문화면이나 예술 전문 잡지가 아닌 대중오락 잡지를 표방한 주간지에 소개된 이유에 대해, <제4집단> 회원들은 해프닝 예술의 속성상 일간지 기자들의 취재가 어려웠다고 증언했다. 당시 일간 신문사 기자들은 보도 일주일 전에 미리 자료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는데, 22) 방태수와의 인터뷰, 2012.4.28. 23) 오상길 엮음, 김구림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Ⅱ: 6, 70년대 미술운동의 비평적 재조명, 도서출판 ICAS, 2001, p.24. 24) 방태수, 손일광, 강석희, 이익태, 전유성, 김벌래 등이 각각 연극, 패션, 음악, 영화, 대중예술, 광고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제4집단> 활동 자체가 하루나 이틀 전에 계획된 경우가 많아 이에 부응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매일 기사를 마감해야 하는 일간지 기자들과 달리 시간 여유가 있던 주간지 기자들은 행위미술의 현장에 늘 함께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해프닝 전담 취재기자까지 생겨났다. 따라서 당시 <제4집단>의 해프닝은 먼저 주간지에 소개된 후 그 기사를 본 일간지나 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재차 취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69년에서 1970년까지 <제4집단> 핵심 구성원들과 그들의 활동은 주간지의 가장 주된 취재원 중 하나였으며, 몇몇 주간지 기자들은 회원들과 상당한 친분을 맺기도 했다. 25) 1964년 창간된 주간한국 을 시작으로 1968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발간된 주간중앙, 선데이 서울, 주간조선, 주간경향, 주간여성 등의 주간지들은, <제4집단>이 등장할 무렵에는 그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4.19 혁명을 무화시키며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국민 장악을 위해 언론을 지배했고, 신문사는 편집자의 손 이 아닌 중앙정보부의 손 에 의해 좌우되어 정치, 경제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함구해야만 했다. 정부는 이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고자 신문사가 다른 탈정치적 매체를 경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당근 을 제공했는데, 당시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던 신문사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탄생한 것이 바로 주간지였다. 대중오락 주간지는 언론의 탈정치화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려는 정부의 계산과 신문사의 상업적 동기가 결합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26) 1960년대의 한국 현실에서 주간지는 국민의 현대적 삶을 다종다양하게 담아내는 대중적 보고서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27) 산업 역군으로 차출되어 조국 근대화 에 매진하던 피로에 지친 도시인들은, 일주일간의 세상사를 요약 정리해주고 연예, 스포츠, 성적 담론 등의 가십성 기사로 오락거리를 제공하던 주간지에서 위안을 얻었다. 주간지는 차차 대중들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당대 한국 사회의 대중적 관심사가 교직되고 유통되는 공론의 장이자 본격적인 대중문화의 지평이 열리는 현장이 되었다. 28) <제4집단>은 이처럼 가히 주간지의 시대 로 불릴 만한 언론환경에서 등장해, 주간지 기자들의 주요 취재 대상이 되면서 대중오락 잡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예술가가 대중문화계에서 25) 당시 선데이 서울 기자 김홍기와 주간한국 기자 권대홍 등이 <제4집단> 활동을 적극 취재했다. 방태수, 손일광과의 인터 뷰, 2012.4.28. 26) 박성아, 선데이 서울 에 나타난 여성의 유형과 표상, 한국학 연구 제22집, 2010, p.162 참조. 27) 전상기, 1960년대 주간지의 매체적 위상: 주간한국 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제36집, 2008, p.231. 28) 특히 1968년 창간한 선데이 서울 은 대중의 구미에 맞는 넘치는 멋과 풍부한 화제 그리고 감미로운 내용 을 모토로 내걸 었던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대중오락잡지였다. 6만부를 찍은 창간호가 두 시간 만에 매진되었을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 했는데, 한국에 대중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 주간지가 본격 등장 하면서부터이며 그 중에서도 선데 이 서울 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는 한 언론사의 평가는 당시 이 잡지의 인기와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박성아 (2010), p.161. 8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83
활동하고 전위예술이 흥미본위 를 모토로 하는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일은 이전까지의 예술계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던 현상이었다. <제4집단>은 한국 최초로 대중문화적인 요소를 수용한 순수예술단체였으며, 이들의 등장으로 고급문화의 범주에 속해있던 전위예술의 개념은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이했다. 이들이 순수와 대중예술의 양 영역에서 모두 활동하게 되자 대중문화와 전위예술 사이에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관계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와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야말로 <제4집단>의 행위미술이 지닌 핵심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제4집단>은 결성식 이전부터 주간지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69년부터 시작된 주요 회원들의 전위예술 활동이 이미 주간지에 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방태수의 판토마임 공연과 김구림의 대지예술 작업은 각각 주간경향 과 선데이 서울 에 화보와 함께 상세히 보도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간지가 도외시했던 전위예술을 주간지가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69년 5월 25일자 주간경향 은 침묵의 연극 으로 도전: 판토마임 전문 소극장 에저또 프로그램 (1969.5.25)(도판 3)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처음 도입된 판토마임 예술과 그 주체인 신생 극단 에저또에 대해 소개했으며, 김구림이 1970년 4월 11일 뚝섬 살곶이 다리 근처 강변 둑에서 행한 <현상에서 흔적으로>, 혹은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는 대지에 불 놓다 죽을 뻔한 전위예술 (1970.4.19.)과 강둑에 불 지르고 이것이 예술이다 (1970.4.22.)이란 제목으로 선데이 서울 과 주간경향 에 각각 기사가 실렸다. 이들 기사는 김구림을 한국화단의 문제아(?) 29) 로 소개하면서, 그의 작업에 대해 얼핏 보기엔 쇼 냄새 30) 라거나 미치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31) 라는 표현을 사용해 주간지 특유의 선정적 도판 3. 침묵의 연극 으로 도전: 판토마임 전문 소극장 에저또 프로그 램, 주간경향, 1969.5.25. 태도를 드러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서구에서 시작된 대지예술 의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고 김구림 작업의 전 과정을 풍부한 화보를 곁들여 기술함으로써, 당시 어느 매체보다 전위예술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29) 강둑에 불 지르고, 이것이 예술이다, 주간경향, 1970년 4월 22일. 30) 위의 글. 31) 대지에 불 놓다 죽을 뻔한 전위예술, 선데이 서울, 1970년 4월 22일. 한편 <제4집단>의 회원 중 몇 명은 당시 주간지의 총아( 寵 兒 )로도 활약했는데, 이들은 전위예술가인 동시에 떠오르는 청년 도판 4. 아가씨는 물감으로 날개를 달고, 선데이 서 울, 1970.7.5.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손일광은 남자 디자이너, 그거 괜찮아요 (1969.1.26.)라는 선데이 서울 기사에서 여성 중심의 패션계에 남성 디자이너로 혜성과 같이 등장해 돈도 잘 벌고 매스콤 의 스타 가 된 인기명사 32) 로 소개되며, 아가씨는 물감으로 날개를 달고 (1970.7.5.)(도판 4)라는 또 다른 기사에서는 해프닝과 함께 1960대 말 전위예술의 한 분야로 도입되어 김구림, 정찬승 등의 <제4집단> 예술가들이 활발히 선보였던 보디페인팅 예술가로서 등장한다. 특히 이 기사는 잡지 1면에 총 천연색 화보로 게재되어 패션과 미술 분야를 넘나드는 신진 전위예술가로서의 손일광의 존재감이 더욱 부각되었다. 33) 주간지의 스타는 손일광뿐만이 아니었다. 1967년 미술가들의 가두시위에 참여한 여성 중 한 명이며 충격적인 누드 해프닝의 주인공으로서 세간에 이름을 알렸던 정강자는, 주간지에 의해 남성에 의존하지 않고 본인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신세대 여성으로 묘사되었다. 주간경향 에 실린 남자애들은 송충이야: 전위아가씨들 방담 (1969.6.8.)(도판 5)이라는 기사에서, 자칭 행동적 전위 예술가이자 묘한 바람둥이(?) 34) 여성인 정강자는 키스를 2만 4천 번쯤 해본 35) 성( 性 )에 개방적인 아가씨이자, 우리 화단의 기성세대는 너무 관념적으로만 살아간다. 도무지 문제의식도 행동도 없다 36) 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전위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지닌 인물로 소개되었다. 도판 5. 남자애들은 송충이야: 전위 아가씨들 방담, 주간경향, 1969.6.8. 이처럼 <제4집단> 회원들은 주간지에서 전위예술가인 동시에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유입된 미국 중심의 서구 대중문화는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대중매체의 보급, 교통 및 통신시설의 확장, 도시화의 촉진 등으로 32) 남자 디자이너, 그거 괜찮아요, 선데이 서울, 1969.1.26. 33) 손일광은 보디페인팅을 옷감을 부정하고 몸에 직접 옷을 그려 넣는다는 전위적인 패션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손일광과의 인 터뷰, 2012.4.28. 34) 남자애들은 송충이야: 전위아가씨들 방담, 주간경향, 1969.6.8. 35) 위의 글. 36) 위의 글. 8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85
사회 전역에 걸쳐 그 영향력이 확대된다. 대중문화는 특히 유교적 윤리 규범을 강조한 전통 문화에 반감을 지닌 청년들의 공감을 얻었으며, 따라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청년문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37) <제4집단> 회원들은 정치혁명으로 성공할 수 없게 된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을 문화분야에서 표출한 4.19 청년세대 38) 의 전형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4.19를 경험하며 생성된 민주주의에의 갈망이 청년들에게 삶의 방식 으로써의 개인주의적 태도와 함께 새로운 문화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39) <제4집단>의 전위예술 행위는 그러므로 대중문화적인 요소를 지닌 청년문화일 뿐 아니라 기성문화의 핵심가치에 정면 도전하는 대항문화(counterculture)의 산물이기도 했다. 대항문화는 지배문화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일관된 철학을 지니며 그 정치성을 대외적으로 명시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제4집단>이 무체( 無 體 )사상이나 결성 선언문을 갖춘 것은 이 예술 단체의 대항적인 성격을 입증해주는 근거가 된다. 또한 대항문화는 반체제 언론사 같은 지배문화에 대한 대안적 제도들을 추구하는데, <제4집단>의 경우는 주간지가 이런 대안적 언론 매체의 역할을 수행했다. 즉 <제4집단>에게 대중매체로서의 주간지는 고급문화의 틀에 갇힌 기성예술에 대항하는 행위를 널리 알리고 공감을 호소할 수 있는 대안적 언론 제도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선데이 서울 이 국립미술관 난장판 미수사건 전모 (1970.6.14.)라는 기사에서 예술이 따로 있나 놓고 보며 함께하자는데 40) 라는 부제를 걸고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에 출품한 전위예술가 김구림, 정찬승, 정강자의 소식을 알린 일이다. 기사는 이들의 작품 41) 이 한국화단을 주름잡는 17명의 심사위원들에게 충격을 주고 낙선된 과정을 37) 실제로 이 시기 많은 지식인들이 대중문화의 주체를 청년세대로 정의하고 그 성격을 분석하려 시도했다. <제4집단>이 출범 한 해인 1970년 동아일보 에 실린 기사에서는 경제적 후진국임에도 선진문화 흡수에 민감한 한국에서 청년문화 적 징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면서, 4.19 혁명으로 촉발되어 1960년대에 줄기차게 성장해온 스튜던트 파워 가 집적된 결과로 보인다고 그 원인을 지적했다. 또한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주 수요층을 이루는 이들 세력은 신문화 창조에도 힘쓰고 있는데, 그중 전위예술 분야의 활약이 두드러져 정찬승, 정강자 등의 미술가들은 캔버스로부터의 탈출 을 시도, 다방과 한강변에서 해프닝을 열었다 고 밝혀 전위예술과 대중문화, 그리고 청년문화와의 연관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시각을 보여주었다. 김병 익, 청년문화의 태동: 전통의 구속 벗어난 새 징후, 미니 장발족으로부터 전위예술까지, 대중문화의 주 수요층 이뤄, 동 아일보, 1970.2.19., p.5. 38) 4.19 세대 란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에서 박정희의 유신 지배가 시작되는 1972년까지 12년 남짓한 사이에 스무 살 에 접어든 연령대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세대는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과 한국전쟁이 끝나려던 시점 사이에 태어나 유아 기와 아동기에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겪고,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이승만 독재와 보릿고개로 점철된 1950년대를 보낸 뒤, 청소년기에 이르러서는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목격하고, 20대 초에서 30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겪었다. 4.19 세대는 6.25 세대 의 후배이면서 첨예한 경쟁관계였다. 그들은 안보 지향적으로 바라보는 6.25 세 대에 맞서 국민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권을 강화하는 경향과 좌파정치성향으로 수정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강내희, 4.19 세대의 회고와 반성, 문화과학, 문화과학사, 2010년 여름, pp.136~137 참조. 39) 김병익, 4.19와 문화: 개인주의 바탕위에 민족주의의 재발견, 동아일보, 1970.4.18., p.6. 40) 국립미술관 난장판 미수사건 전모, 선데이 서울, 1970.6.14. 41) 정찬승의 작품 <중성공간>은 빨강, 파랑, 노랑, 초록 4색의 풍선 2천개에 각기 산소, 수소를 넣고 접착제를 사용, 조각 전 시실 천장에 붙여놓았으며, 정강자의 작품은 가로 세로 20cm의 정사각형 거울 백여 장을 목욕탕 타일처럼 전시장에 깔아놓 소개하면서, 폭 30cm의 흰 베로 국립현대미술관(당시 경복궁 미술관) 외벽 전체를 감으려 했던 42) 김구림의 계획이 주최 측에 의해 무산된 사건을 집중 보도했다. 선데이 서울 은 공식 초대작가로서 철거 명령에 따라야만 했던 그의 사정과 함께 새로운 미학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심사위원들에 저항해 끝까지 싸우겠다 43) 는 항변을 상세히 전해 전위예술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들의 대항 의지를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에서처럼 <제4집단>은 대중문화적인 요소를 도입한 전위적 행위로 순수예술계에 대항한 청년 예술단체였으며, 그들의 활동은 주로 주간지라는 대안적 언론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4집단>을 한국 최초의 하위문화(subculture) 예술 공동체로 볼 수 있는데, 하위문화는 주류문화에 비교되는 비주류문화, 지배문화에 비교되는 주변부 문화, 제도권 문화에 비교되는 대중문화를 지향하며, 급진적이고, 동적이며,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위문화는 그 대표적인 주체형태가 독자적인 세대의식을 지니고 부모문화 와 지배문화 에 저항하는 청년 으로서, 의상, 말투, 음악 등의 영역에서 자율성을 추구하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상당 부분 <제4집단>의 성격과 부합된다. 특히 일부 <제4집단> 회원들이 히피 스타일의 외모를 추구하며 기성세대와 자신들을 차별화시키고자 한 것은, 청년으로서의 독자적인 세대 정체성을 스타일을 통해 표현하려는 하위문화적인 욕망의 표출로 볼 수 있다. 기성문화에 대한 거부를 패션으로 표현하는 방식, 즉 스타일을 통한 세대적 저항은 이미 서구의 대표적 하위문화인 히피문화에서 등장한 바 있었다. <제4집단> 회원들이 보여준 장발과 맨발에 샌들, 청바지 차림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육체적 반항의 선언이었다. 44) 도판 6. 미장원 단골 총각 4인조, 선데이 서울, 1969.10.19. 1969년 10월 선데이 서울 (1969.10.19.)에는, 정찬승과 손일광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미장원 단골 총각 4인조 45) 라는 기사가 실렸다.(도판 6) 남성으로서 여자 미장원을 단골로 았다. 정찬승의 <중성공간>은 낙선되어 철거해야 했으나 20미터나 되는 천장의 높이 때문에 그조차 쉽지 않았으며 정강자 의 거울 작품의 경우 스커트를 입은 관객은 아예 전시실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42) 마지막으로 국립현대미술관 현관 앞에 가로 60cm, 세로 40cm의 구멍을 파서 천의 두 끝을 그곳에 묻으려는 계획이었다. 43) 국립미술관 난장판 미수사건 전모, 선데이 서울, 1970.6.14. 44) 딕 헵디지, 이동연 옮김, 하위문화: 스타일의 의미, 현실문화연구, 1998, pp.8~9 참조. 45) 미장원 단골 총각 4인조, 선데이 서울, 1969년 10월 19일. 정찬승, 손일광 외에 소개된 나머지 두 사람은 김희준(29 세, 상업)과 양덕수(28세, 조각가)였다. 8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87
이용하는 이 청년들은 모두 뒤가 더부룩한 긴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일명 코리언 히피 헤어스타일은 각자의 개성의 표현이자 남성이라면 반드시 머릿기름을 바르고 짧게 헤어를 유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며, 무엇보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한 계속되는 해프닝의 일상화라는 것이다. 기사에는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뽐내고 있는 이들의 사진과 미장원에서 매만진 사나이들의 해프닝 이라는 문구와 함께, 정찬승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소개되었다. 개인생활은 현대에 있어서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개성은 죽어가고 있다. 개성은 자기 이외의 것에 부닥쳐서 그것과 격투를 벌이면서 자기를 관철했을 때 비로소 실현 되는 것이다. 46) <제4집단>에게 삶은 곧 스타일이며, 스타일은 곧 해프닝이었다. 이들에게는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일조차 예술 행위였기에, <제4집단>의 해프닝은 삶의 전 영역에 걸쳐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세대 정체성의 표현방식이 될 수 있었다. 서구 히피족의 상징인 장발 이 한국에서는 전위예술로서의 해프닝 이라는 새로운 문화형태로 변형된 셈인데, 이는 또한 그 자체로 한국적 하위문화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사례였다. <제4집단>은 이처럼 주간지를 통해 기존 예술의 한계를 넘어 국민 대중의 삶과 함께하는 새로운 전위예술의 창조를 시도했으나, 그들의 꿈은 곧 대중오락 잡지로서의 그것의 본성과 충돌하고 말았다. 주간지는 근본적으로 대중문화를 호명하고 위치지우며 소비하는 매체이기에, 전위예술로서의 해프닝 역시 대중매체의 시각적 정보로서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창간 이후 흥미본위 의 편집방침을 유지했던 주간지는, 발전하는 사회상을 스펙터클 한 전시효과로서 제시해 대중들에게 근대화의 장밋빛 꿈을 심어주는 동시에, 당대 모든 사건 사고의 구체적 내막과 사회적 의미를 희화화해 오락적 소재로 활용함으로써 대중들이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제4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선데이 서울 조차 다른 한편에선 이들을 꾸준히 선정적 기사거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제4집단> 결성식 보도 2주 전에 실린 기사 돈과 나체와 싸움으로 엮는 예술 (1970.6.14.) 47) 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찬승, 방태수, 손일광 48) 등은 그즈음 전위 예술가들이 한국미술대상전 에서 거부당한 일에 항거해 제1회 한국전위예술 페스티벌 을 기획했는데, 이 기사는 전위 예술가들의 놀랬지 잔치 계획 49) 이란 소제목 아래 이들의 사전 콘티를 미리 입수해 소개한다. 해프닝 대본의 내용은 몸에 붙인 돈이 떨어지면 여인의 누드도 볼 수 있다. 가히 꿩 먹고 알보고 라거나, 페스티벌이 끝난 뒤 동인들이 화폐훼손죄, 음란물공연죄, 소란죄 등으로 입건될지 여부는 당일이 되어야 알 일 이란 조롱 투의 문구로 끊임없이 희화되었으며, 이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금전 만능주의와 성 46) 위의 글. 47) 돈과 나체와 싸움으로 엮는 예술, 선데이 서울, 1970.6.14. 48) 이 밖에 김구림, 이익태 등이 이 기획에 참여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49) 위의 글. 상품화 현상을 비판하려 한 <제4집단> 본래의 의도는 무시되었다. 주간지들은 특히 성 담론 의 생산과 교환이 허용된 공식적 매체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대중성을 확보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 관련기사가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50) 이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에서, 남성은 산업화의 역군으로 호명된 반면 여성은 남성의 소비대상으로서 대중문화 콘텐츠로 급부상한 일과 관련이 있으며, 51) 이 경우 대상화된 이미지로서의 여성은 가정에 소속된 부녀자 가 아닌 성적 욕망을 숨기지 않는 부도덕한 여자 들이었다. 즉 당시 주간지에서 남성의 볼거리로 활용된 여성은 여성노동자처럼 조국의 발전에 동참하거나 가정주부처럼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지 않은 여성들로서, 성적으로 문란한 아가씨나 바람피운 유부녀, 매매춘 여성 등이었다. 주간지는 이러한 여성들을 노골적으로 혐오하고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제4집단> 소속 여성 행위미술가로서 누드 해프닝을 선보였던 정강자에게도 적용되었다. 정강자는 1970년 8월 국립공보관에서 <제4집단> 회원들과 함께 기획한 본인의 첫 개인전 무체전( 無 體 展 ) (1970.8.20.~24.)을 개최했다. 52) 전시 첫 날인 20일, 사방 벽을 검은 비닐로 덮은 어두운 전시실 바닥에는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가득하고 스피커에선 계속 고고리듬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오프닝 파티가 열렸다. 다음 날인 21일에는 무체( 無 體 )는 가능한가? 라는 세미나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그러나 평상시 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정부기관의 지시로 23일 개최 예정이었던 판토마임 공연 <에저또>와, 24일의 프로그램 <제4집단> 공동 작품 발표회 53), 25일 대단원의 막을 내릴 해프닝 <무체( 無 體 )에서 유체( 有 體 )로>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22일 오후 4시경 미술평론가 이구열이 찾아간 전시실 입구에는, 정강자 본인의 사진을 콜라주한 전시포스터 위에 본 전시회는 당국의 지시에 의해 예정대로 진행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로서 관객 여러분과 함께 통곡합니다.- 정강자 54) 라는 별지만이 붙어 있었다. 이렇듯 강압에 의해 도판 7. 전위가 뭐길래 알몸의 남녀가, 선데이 서울, 1970.8.23. 50) 선데이 서울 의 경우 창간호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성 관련 기사가 전체기사의 약 50%를 차지했다. 51) 박성아(2010), p.165. 52) 이 전시는 <그림 없는 그림전>으로도 불린다. 정강자, 정강자 1942~, 소담출판사, 2007, p.171. 53) 24일의 <제4집단> 공동작품 발표회 에서는 방태수와 손일광의 사회 고발 발언과 김구림 기획의 연극 등이 결합된 총 5장에 걸친 종합예술 작품이 선보일 예정이었다. 김미경(2000), p.269.; 신 진(2009), p.29. 54) 이구열, 좁고 폐쇄적인 발표 기관: 미술 분야, 예술계, 1970년 가을, p.129. 8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89
도판 8. 왼쪽: 선데이 서울 게재 사진 오른쪽: 정강자 <무체전> 포스터 비정상적으로 끝나버린 현실의 무체전 과는 달리, 전시 개최 전 취재되어 8월 23일 발간된 선데이 서울 의 기사 전위가 뭐길래 알몸의 남녀가 (1970.8.23.) 55) (도판 7)에는, 8월 12일부터 시작된 <제4집단>의 전시 준비 과정과 본 전시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가 상세히 담겨 있어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구열의 회고담에서는 텅 빈 전시실에 모여 앉아 우리가 믿는 바의 새로운 예술의 표현을 발표할 수 있는 장소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중단시킨 요소를 성명서로 사회에 고발할 생각입니다 56) 라고 결의에 찬 발언을 남겼던 <제4집단> 회원들의 의도가, 선데이 서울 의 기사에서는 여전히 선정적 방식으로 곡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사는 일단 <제4집단>의 예술사상인 무체주의( 無 體 主 義 ) 를 인체를 얽어놓고 무체라니 웬 말 이라는 소제목으로 조롱하고, 작품보다는 옷 잘 벗는 것 으로 더 유명한 전위화가 정강자씨가 오랜만에 푸짐한 해프닝 쇼를 마련했다 며 예술가 정강자를 성적대상으로 묘사한 뒤에, 마지막으로 이들의 해프닝이 전위예술인지 아니면 전위란 이름의 장난인지 란 문구로 <제4집단>의 예술 의지를 완전히 부정해버린다. 정강자를 전위 예술가라기보다 자신의 몸을 스스럼없이 볼거리로 드러내는 여자 로 보는 주간지의 시각은, 연기 속에 나체로 엎드려 무체예술 을 창조(?)하고 있는 정강자씨 57) 라는 문구와 함께 실린 작가의 사진(도판 8)에서 결정적인 것이 된다. 무체전 포스터로 제작되기 전 단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의 제공자가 누구인지, 또는 당시 제공자의 의지가 어떠했는지 와는 상관없이, 이 이미지는 기사의 전반적인 논조를 그저 뒷받침하는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당시 주간지는, 나아가 대중문화는 이들 전위 예술가를 어떤 존재로 보았는가. <제4집단>은 청년문화의 모델로서 해프닝을 제시하고 고급문화와 하위문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연결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그들 예술의 전위성은 주간지의 이면에 자리한 권력의 시선, 즉 박정희 정권의 검열에 포섭되어 점차 퇴폐와 연관되게 되었다. 주간지들은 주간경향 의 대학가에 쳐들어간 해프닝 바람 (1970.5.13.) 58) 에서처럼 선정적 내용의 기사에서 해프닝이라는 용어를 남발해 이 같은 현상을 심화시켰으며, 그 결과 전위예술로서의 55) 전위가 뭐 길래 알몸의 남녀가, 선데이 서울, 1970.8.23. 56) 이구열(1970), pp.129~130. 57) 전위가 뭐 길래 알몸의 남녀가, 선데이 서울, 1970.8.23. 58) 대학가에 쳐들어간 해프닝 바람, 주간경향, 1970. 5.13. 해프닝 개념에 혼란이 일어났다. 정부 주도의 압축 근대화가 창출해낸 문화적 소산인 퇴폐는, 주간지에서는 대중의 관음증적 호기심의 대상인 동시에 국가에게는 반윤리적 반전통적 존재로서 퇴출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전위예술가로서의 <제4집단>은, 마침내 조롱의 대상을 넘어 사회위기와 불안을 야기하는 범죄자이자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1970년 7월 1일과 8월 15일, <제4집단>은 거리로 나가 결성식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 중지된 두 번의 해프닝을 실행에 옮겼다. 7월 1일 늦은 오후 중구 명동의 뉴 서울 비어홀 앞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극단 에저또 의 판토마임 배우 고 호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가두극>으로 명명되었는데, 당신은 처녀임을 무엇으로 증명하십니까 라는 구호를 앞가슴에 붙인 정찬승과 등 뒤에 목표액 4천 4백 4십 4만원, 잃어버린 나를 찾음, 연락처 제4집단 이란 글을 써 붙인 고 호가 상점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판토마임을 공연했다. 이후 이들은 신세계백화점 앞 육교 59) 를 거쳐 국립극장 60) 으로 향하며 행위를 계속했고, 백여 명에 이르는 군중이 그 뒤를 따랐으나 결국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미완으로 끝난 이 <가두극>에서 <제4집단>이 대중들에게 전달하려 했던 것은 현대인은 모두 (자본에 의해) 소외당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란 어렵다 61) 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처녀 62) 라는 용어의 성적 의미에만 몰두하거나, 쇠고랑 찬 가두극 이란 기사 제목에서처럼 이들 행위의 위법성이 가져온 결과에만 관심을 쏟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8월 15일 오전 11시, <제4집단>은 그들의 해체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해프닝 <기성문화예술과 기존체제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광복 25주년을 기념해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비판하고 더불어 낡은 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문화인들을 매장하기위해 63) 꽃으로 장식한 관을 메고 행진하던 이들은, 매장지인 제1한강교 아래를 향해 사직공원에서 독립문을 거쳐 광화문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했으나 그곳에서 경찰에 연행되어 즉심에 넘겨지고 말았다. 64) 데모대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해 행렬에 50m 간격까지 두었던 이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통행방해 와 도로교통법위반 이었고, 경찰은 관을 발로 차며 자신들의 예술이 해프닝이라고 설명하는 <제4집단>을 도무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기성문화예술에 59) 육교 중간쯤에서 정찬승이 갑자기 주저앉아 선( 禪 )을 시작하고, 고 호는 그 옆에서 약 20분 동안 빵과 포도주를 마시며 판토 마임을 했다. 장윤환(1975), p.319. 60) 당시 국립극장에서는 연극 <산불>이 공연되고 있었는데, <제4집단>은 이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 앞에서 <뱅뱅 돌아가는 세 상>이라는 해프닝을 선보이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61) 전위 연극 제4집단의 쇠고랑 찬 가두극, 김구림 보관 자료, 상세일자 및 출처 미확인. 62) <제4집단>의 주장에 의하면 처녀 란 현대문명으로 말살되어 가는 인간의 순결을 나타낸다. 63) 관 메고 예술 하니 경관이 웃기지마, 김구림 보관 자료, 상세일자 및 출처 미확인. 64) <제4집단>의 무체사상( 無 體 思 想 )과 순수화합을 상징하는 백기( 白 旗 )를 든 김구림을 선두로, 50m 간격으로 역시 백기를 든 정강자, 관을 멘 손일광과 임중웅, 태극기를 든 정찬승과 최영식이 뒤를 따랐다. 9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91
대한 장례식 은 결국 <제4집단>의 장례식 이 되고 말았다. 이들의 해프닝이 <제4집단>의 전위예술적인 스타일 을 상징했던 장발 에 대한 사회적 물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했던 주간지 기사는 <제4집단>의 광복 25돌 기념 해프닝은 싱겁게 끝난 셈이다 65) 라고 끝을 맺었으나, 그것은 결코 싱겁게 끝난 결말이 아니었다. 한때 주간지의 스타 전위예술가였던 이들이 타락한 예술가, 퇴폐사범, 범죄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기성문화예술과 기존체제의 장례식> 사건 며칠 후, 국립공보관에서의 무체전 을 마지막으로 <제4집단>은 활동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2년이 지난 1972년 7월, 선데이 서울 은 옷 입기를 배우는 나체 예술인들 (1972.7.2.) 66) 이란 기사에서 <제4집단> 회원들 근황을 소개한다.(도판 9) 그즈음 열렸던 정찬승의 결혼식 현장과, 이미 결혼해서 아들까지 둔 손일광의 모습, 과거 옷 벗기를 즐겨하던 정강자가 국제복장학원에 다니며 옷 입기를 배우고 있다는 소식까지 상세히 전하면서, 기사는 이들이 드디어 질풍노도의 시대를 마감했다 는 결론을 내린다. 주간지는 도판 9. 옷 입기를 배우는 나체 예술인들, 선데이 서울, 1972.7.2. <제4집단>에 대한 마지막 보도에서조차 이들의 전위예술 활동을 청년기의 한때의 치기어린 행위로 격하할 뿐 아니라, 전위예술가들을 마치 죄 값을 치르고 갱생한 범죄자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해프닝 예술은 이처럼 대중매체의 흥미본위 가치관 속에서 근대적 소비주의 오락 담론의 상품으로 정의되고 그 개념이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그 과정의 핵심에는 바로 <제4집단>이 있었다. Ⅳ. <제4집단>의 해프닝으로 촉발된 전위예술 개념의 위기 <제4집단>이 결성되던 1970년 무렵, 해프닝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최고조에 달해있었을 뿐 아니라 그 보도 태도 역시 비교적 호의적인 것에 가까웠다. 당시 신진 미술평론가였던 이 일은 청년작가연립전 의 젊은 미술가들이 단지 행동했다는 데서 나아가 기성 미술 그 자체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평가했으며 67) 여타 언론들도 해프닝에 대해 기성적 예술기법을 철저히 파괴한 특수한 예술언어 라고 설명하면서, 행위미술가들에게 기성에 도전하는 새 정예부대 라는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칭호를 붙여주었다. 68) 이처럼 해프닝은 앵포르멜 추상미술이 화단의 주류가 되어갈 무렵 새로운 전위예술 후보로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향후 언론보도와 비평가들의 발언을 살펴보면, 해프닝에 대한 초기의 흥미와 기대감이 점차 부정적 반응과 무관심으로 변화해갔음을 알 수 있다. 이 현상의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 <제4집단> 같은 일탈적 성격의 행위미술 단체가 등장해 화단의 비주류 세력을 자처했기 때문인데, 미술계 인사들은 이에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홍기삼은 <제4집단> 결성 전인 1969년 이미 해프닝 예술가를 히피와 비트족으로 보면서 국민에게 비교육적 영향을 미친다고 비판했으며, 69) 오광수는 아쉬운 정신적 지주: 최근 전위미술에 붙여 라는 글에서 무릇 전위적인 예술에는 철학적인 배경이 있어야 하나 최근의 정강자 무체전 같은 산발적인 해프닝에는 그것이 결핍되어 전위란 표방 아래 스캔들리즘에 편승한 저질의 쇼가 될 위험성이 크다 70) 고 지적했다. 또한 이 일은 한국아방가르드 협회(AG) 창설을 주도하면서 전위예술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데카당스 를 뽑았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의 참된 미술은 전위적인 성격을 띤 것이기에 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미술이기에 전위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 71) 이라고 정의하고, 미술 운동이 참되어야 한다는, 즉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당위명제를 천명했다. 퇴폐에 대한 혐오와 도덕적인 전위예술의 주창은 한국미술사에서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되었다. 서유리에 따르면 1920년대 카프(KAPF) 미술을 주도했던 신흥( 新 興 )미술운동가들과 전위회화로서의 추상을 욕망했던 1930년대 후반의 미술가들 모두에게서, 전위예술은 현대의 부도덕한 물질문명의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도덕적 요구를 만족시킬 전통이나 민족적 고전을 현대적 형식과 결합시켜야 한다 는 의식이 발견된다. 근대기의 전위화가들은 미술은 발전을 지향하되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태도를 내내 견지했으며, 그 결과 작품에서 사회의 관습적 윤리의 금기를 넘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을 뿐 아니라 시도된 경우에도 곧 주류 운동 담론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72) 도덕적 전위예술을 요청하는 이 같은 전통이 한국 미술운동의 역사에 엄격성과 금욕주의를 부여함에 따라, 서구 전위예술에서 퇴폐나 유희적 일탈로 사회 위선과 부도덕을 공격했던 방식이 한국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웠다. <제4집단>의 마지막 가두 해프닝 이후 미술계의 반응이 부정적 반응 일색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국 해프닝이 퇴폐풍조로 흐르게 된 것은 정신적 65) 관 메고 예술 하니 경관이 웃기지마, 김구림 보관 자료, 상세일자 및 출처 미확인. 66) 옷 입기를 배우는 나체 예술인들, 선데이 서울, 1972.7.2. 67) 이 일, 생활하는 젊은 미술: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을 보고, 동아일보, 1967.12.23., p.5. 68) 기성에 도전하는 전위 예술 정예들, 경향신문, 1969.5.17., p.5. 69) 홍기삼, 전위예술론, 예술계, 1969년 겨울, pp.59~60. 70) 오광수, 아쉬운 정신적 지주: 최근 전위미술에 붙여, 동아일보, 1970.8.29., p.5. 71) 위의 글. 72) 서유리, 전위의식과 한국의 미술운동: 1920~3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18집, 2007, pp.33~36 참조. 9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93
지주가 부족하기 때문 73) 이라는 인식은 미술뿐 아니라 미학 분야의 반응까지도 불러왔는데, 1971년 열린 한국미학회 의 학술발표회 현대예술과 미학의 과제 에서는 해프닝으로부터 현대예술을 지켜내기 위한 방안들이 강구되었다. 발표자들은 해프닝은 현대예술을 파멸의 궁지로 몰고 갈 위기의 예술 이며, 한국미학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전통예술문화의 발굴과 확립을 주요과제로 삼아야 한다 74) 고 역설함으로써 그 예술적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미술계는 해프닝으로 인해 퇴폐의 오욕을 쓰게 된 전위예술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김윤수는 전위예술은 퇴폐가 아니다: 창조의 활력과 독창성이 전제 75) 라는 글에서 한국에서 전위예술이 등장한 것은 앵포르멜 추상회화에서부터라고 명시하고, (해프닝 같은) 그 후의 전위예술은 사실상 공전( 空 轉 )한 감이 있다며 부정해버림으로써 그 개념의 순수성을 수호하고자 했다. 이렇듯 미술계 전반에서 해프닝을 퇴폐예술로 정의하고 그로부터 전위의 지위를 박탈하려 시도하는 가운데, 오직 장윤환 같은 이만이 유일하게 <제4집단>의 일탈적 행위 이면에 담긴 진의를 알리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신동아 에 실린 한국의 전위예술 76) 에서, 전통적인 예술 장르를 해체시킨 전위예술은 그 기원이 다다이즘에 있으며 끝까지 가다보면 해프닝으로 귀일된다고 설명하고, 이러한 전위예술은 보수적인 일반 대중으로부터 부정당한다고 분석했다. 이어서 <제4집단>의 해프닝들을 차례로 소개하며 이들이 집단적으로 예술을 등에 업고 기성에 반항한 최초의 전례를 남겼는데도, 미술계를 포함해 사회 전체가 퇴폐풍조로 몰아세우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장윤환은 당시 상황 속에서 드물게 예술에서의 전위주의를 부정의 인간정신 으로 파악하고 <제4집단>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보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전위예술의 반체제성이란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추구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한 유일한 해석자였던 것이다. Ⅴ. <제4집단>에 대한 당국의 탄압과 미술계의 부인 조각전이 아니고, 반( 反 )대중적인 이상한 행동이며, 모처에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그들이 사회질서에 위배되는 자들이기 때문 77) 이라고 밝혔다. <제4집단>은 1970년 6월의 결성식 이후 두 달여 기간 동안 어느새 퇴폐적인 외국풍조의 아류이자, 이른바 전위예술이라는 이름의 사회질서 파괴자 78) 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4집단>의 주요 회원들은 이미 결성식 전부터 관계 당국의 내사를 받고 있었으나, 79) 두 번의 가두 해프닝으로 사회 전반의 시선이 이들에게 집중되는 기미를 보이자 정부는 신속하게 법적 조치에 돌입했다. 1970년 8월 28일, 무체전 이 무산된 지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경찰은 시내에서 6백여 명의 장발족을 적발했다. 언론은 해프닝, 히피족 일제단속 80) 이라는 이날의 사건 보도에서 정부는 전위예술이라는 이름의 해프닝과 히피족이 사회에 퇴폐적인 풍조를 불러일으킨다고 판단, 철저히 단속키로 했다 고 전하고, 경찰의 단속 대상은 해프닝 등 소위 전위예술 을 포함해 공개장소에서 신체의 전부나 주요 부분을 노출, 음란한 행위를 하는 자, (중략) 지나친 더벅머리로 통행인에게 불쾌함을 주는 자 등이다 라고 명시해 <제4집단> 회원들을 사회의 범법자로서 대외에 공표했다. 거리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불시 단속 이후 정부는 곧 연석회의를 거쳐 내무부를 통해 퇴폐적 사회풍조 일소 방안 을 발표했다. 이 방안에 따른 일소 대상은 전위미술(나체그림, 보디페인팅, 나체쇼, 성행위쇼, 음화), 전위연극(거리에서의 연극, 성행위 연극 및 실연), 전위의상(종이, 비닐 재료를 사용한 것, 누더기옷 입기, 과다노출 활보), 전위영화(극, 줄거리 없는 영화나 도색영화), 전위집단(<제4집단> 등, 고고 춤, 히피족, 장발족)의 모임, 전위디자이너, 전위음악가 모임 등으로, 전위라는 낱말이 붙은 미술, 연극, 의상, 영화 등을 직접적으로 지목해 이른바 전위예술 전반을 전적으로 부정 내지는 단속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언론은 정도가 지나치다며 우려하면서도, 이 같은 사태가 지난 8월 15일 있었던 <제4집단>의 가두 해프닝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며 그 원인을 <제4집단>에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81) 결국 <제4집단>은 가두 해프닝 한 달여 만에 풍속사범 이 되었고, 김구림이 기자간담회 를 열어 해체선언을 한 후에도 회원들 각자에 대한 당국의 감시와 사회의 모멸적 시선은 계속 이어져, 그해 11월에는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이들 행위의 문제를 분석해 보도하기도 했다. 82) <제4집단>의 마지막 활동이었던 정강자와 함께 한 <무체전>은, 개최 사흘째 되는 1970년 8월 22일 당국에 의해 전시가 거부되었다. 당시 미술관 전시과장은 <제4집단>의 행위에 대해 괴상망측한 소위 전위예술이라는 쇼 라고 표현하며, 이들의 전시가 취소된 이유는 그것이 73) 오광수(1970), p.5. 74) 현대예술과 미학의 과제, 경향신문, 1971.5.20., p.5. 75) 김윤수, 전위예술은 퇴폐가 아니다: 창조의 활력과 독창성이 전제, 동아일보, 1973.1.23., p.5. 76) 장윤환(1975), pp.316~329. 77) 이구열(1970), pp.126~131. 78) 위의 글. 79) 손일광은 당시 친척이 정보기관에 근무하고 있어 자신이 내사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증언했다. 방태수, 손일광 과의 인터뷰, 2012.4.28. 80) 해프닝, 히피족 일제단속, 조선일보, 1970.8.29, p.7. 81) 한국의 전위예술: 고작 미술의 해프닝 정도, 경향신문, 1970년 9월 1일, 5면; 내무부 새 풍속사범 단속법 만들기로, 동아일보, 1970.9.23., p.7.; 풍속사범은 경범죄로, 경향신문, 1970.9.24., p.2. 82) 1970년 11월 23일, MBC TV, 밤 8시 55분 MBC 리포트 프로그램, <전위예술>. 전위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물의 를 일으키는 일을 자주하게 되는 행태와 그 사회적 영향, 작가적 심리를 분석한 내용의 프로그램이었다. 9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95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유신개헌으로 불리는 제7차 개정헌법을 공포하며 장기집권 체제에 돌입하기 직전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제4집단> 가두 해프닝의 저항적 성격에 대중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시선을 퇴폐라는 선정적인 측면으로 돌림으로써, 그들 행위의 사회비판적 의미를 무화시키고자 했다. 박 정권은 미디어에 대한 검열을 주요 통치기술로 삼았는데, 문공부를 통해 지속적으로 모든 매체를 감시하면서 가끔씩 제기하는 외설시비를 통해 통제의 고삐를 쥐는 전략을 사용했으며 <제4집단>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전위예술 에 대한 정권의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신개헌 이후 정부는 문예중흥 5개년 계획(1974~1978)을 발표하며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정신적 각성과 무장을 독려했고, 이 과정에서 <제4집단>의 일부 핵심 회원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서 관계기관의 표적이 되었다. 1976년 1월 28일, 검찰은 전위화가들의 모임인 <제4집단>의 멤버 거의가 대마초를 상습적으로 피우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수사를 확대했다 83) 고 발표하고 영화감독, 가수, 전위화가 등 9명을 습관성 의약품 관리법 위반혐의로 입건했는데, 정찬승과 정강자가 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정권의 태도는 아예 전위예술 의 싹을 잘라버리려는 듯 공세적이었다. 대마초 예술인을 단속한 직후인 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문공부 지시내용 을 대대적으로 공표하고, 우리 문화를 오염시키는 외래문화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택할 것은 택하고 퇴폐적이고 백해무익한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며 전위예술인이니 하면서 대담하게 하는 것이 머리가 앞선 사람인 것처럼 아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위험하다 고 단언했다. 84) 이렇게 대통령이 정확히 전위예술 을 지칭해 단죄하는 언사를 내리자마자, 국립현대미술관은 즉시 각 미술단체와 동인 그룹에 전위미술작품전시에 관한 협조의뢰 공문을 보냈다. 공문의 내용은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예정인 미술가들은 전위를 위장한 사이비미술 과 옥외 해프닝 같은 공서양속( 公 序 良 俗 )에 저촉되는 미술행위 는 삼가 달라 85) 는 것이었다. 이처럼 퇴폐적인 전위예술단체 <제4집단>의 기억은, 해체된 지 무려 6년이 지난 뒤에까지 남아 미술계에 파문을 던졌다. 당국의 해프닝에 대한부정적인 인식은 이 무렵 활동하던 이벤트 행위미술가들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쳐, 이건용은 1976년 봄 관계 기관에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되어 안가에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86) 83) 영화감독, 가수, 전위화가 등 대마초 상습 흡연한 9명 입건, 동아일보, 1976.1.28., p.7. 당시 입건된 예술인은 다음 과 같았다. 이장호(31. 영화감독), 정찬승(34. 전위화가), 정강자(32. 여 전위화가), 이영석(24. 영화배우), 하재영(24. 영화배우), 하용수(27. 본명 박순식, 영화배우), 전유성(27. 개그맨), 석찬(26. 본명 강희완, 디스크자키 겸 가수), 정원섭 (30. 촬영기사) 84) 박 대통령 문공부 지시 내용, 경향신문, 1976.2.5., p.1. 85) 미술계 일각을 긴장시킨 전위규제 조항, 동아일보, 1976.3.15, p.5. 86) 이건용, 한국 행위미술의 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퍼포먼스 아트, 이혁발 엮음, 다빈치 기프트, 2005, p.22. 이처럼 1970년대 중반 <제4집단>뿐 아니라 행위미술 전반에로까지 확대된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은 미술계의 행위미술에 대한 암묵적인 부인을 야기했다. 이 현상을 증명하는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1967년 해프닝 예술을 한국에 소개했던 당사자이자 1975년 당시 미술 전문지 화랑 의 편집장이었던 오광수의 발언이었다. 그는 해방 후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정리한 해방 30년 문화 1세대: (3) 격동, 변혁의 드러머 미술 이라는 글에서, 1957년에서 1967년 사이의 미술에 대해 청년작가연립전 이 앵포르멜의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논리적 이면서 환경적 인 새 시대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보였다 87) 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앵포르멜 추상미술에 대항한 전위예술로서 청년작가연립전 활동의 핵심이었던 해프닝 에 대한 발언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미술계는 또한 해프닝 과 함께 전위예술 이란 용어의 사용도 꺼리기 시작했는데, 1973년 윤우학이 실험예술의 개념 설정과 풍토적 정착 문제 88) 라는 글에서 전위예술 대신 실험예술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그 예다. 이후 1977년 무렵에 이르자 일간지에도 실험미술 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경향신문 에 실린 최노석의 글 실험미술, 그 실상과 허상 은 한국 실험미술 운동의 시작이 1950년대 현대미술가협회 의 창립에서부터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전위예술이란 용어를 실험미술로 완전히 대체한 실례였다. 89) 그리하여 한국에 해프닝 예술이 등장한지 십여 년이 지난 1978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는 과거 20년간의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살피는 전시 한국 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 이 열렸다. 그러나 20년 역사를 거친 한국 현대미술의 궤적을 현 시점에서 정리해볼 수 있다 90) 는 이 중요한 전시에서, 해프닝은 청년작가연립전 과 관련해서만 간략히 언급되었을 뿐이며 <제4집단>의 총체예술행위, 특히 가두극 등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이들의 전위적인 활동은 하나의 이념으로 뭉쳐지지 못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센슈얼한 화제만 뿌리고 좌절되고 말았다 는 한 줄의 평가만이, 당시 미술계가 해프닝에 보여준 관심의 전부였다. Ⅵ. 맺음말 <제4집단>이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할 무렵, 정찬승은 퇴폐와 불온의 상징이 되어버린 자신의 장발을 잘라 당국의 탄압에 몸으로 항거했다. 그의 이러한 삭발 행위는 그 자체로 <제4집단>의 진정한 마지막 해프닝이 되었으며, 그간의 예술활동 중 가장 체제 저항적인 87) 오광수, 해방 30년 문화 1세대: (3) 격동, 변혁의 드러머 미술, 경향신문, 1975.8.6., p.5. 88) 윤우학, 실험예술의 개념 설정과 풍토적 정착 문제, 홍익미술, 1973, 제2호, pp.99~103. 89) 최노석, 실험미술, 그 실상과 허상, 경향신문, 1977.7.12., p.5. 90) 김용익, 한국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 공간, 1979.1., pp.53~59. 9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97
도판 10. 미풍양속에 깎이는 장발, 주간한국, 1970.9.6.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런데 사건이 지난 얼마 후, 주간한국 (1970.9.6.)에 삭발한 정찬승의 모습이 표지로 등장해 세간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91) (도판 10) 풍속사범으로 몰려 더 이상 해프닝 예술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제4집단>의 처지는, 주간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으로 대중들에게 전해졌다. <제4집단>은 결성부터 해체까지 모든 활동의 역사를 대중오락 잡지인 주간지와 함께 했던 것이다. <제4집단>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예술단체는 분명 아니었다. 그들의 선언문에 담겼던 사회비판적 의식이 가두 해프닝에서 구체적 사안에 대한 정치 시위로 발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4집단>은 그보다는 제도권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려는 열망 아래 규합해, 삶의 영역인 대중문화에 접근하려 시도한 문화인 집단이자 총체예술 단체였다. 이들은 또한 당시 윗세대에 반감을 지녔던 20~30대 젊은이들로서, 독자적인 세대 정체성을 구축하고 이를 주간지라는 대안적 언론매체를 통해 홍보한 청년 하위문화 공동체였다. <제4집단>에게 해프닝은 보수적인 사회 풍조와 기성 문화예술계에 대한 비판의 언로( 言 路 )로서, 각 예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위예술 형식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다. 해프닝은 이들에게 현실 정치적인 체제변혁의 도구는 아니었으나, 반( 反 )예술의 도구, 나아가 세대 정체성에 기초한 문화정치의 도구였던 것이다. <제4집단>의 해프닝은 이처럼 한국 최초로 전위예술과 대중문화간의 관계를 형성하며 하위문화의 한국적 양상을 창출해냈으나, 그 과정에서 서구예술의 수용 과 전통문화의 수호, 엘리트 예술가 와 대중, 기성세대 와 청년세대, 현실참여 와 예술을 위한 예술 등 당대 사회문화의 대립항들이 창출하는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즉 해프닝에 대한 정부당국, 순수예술계, 대중문화계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서로 교차되며 첨예한 논쟁과 새로운 자각들이 발생하게 된 것인데, 권위적 정권은 <제4집단>에 퇴폐라는 부정적 개념을 덧씌워 이를 은폐하고자 했다. 그 결과 미술계는 실험미술 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중립적인 오브제 작업이나 관념적인 추상회화에 몰두했으며, <제4집단> 주요 회원들은 한국을 떠나거나 활동을 중단하는 등 예술가로서의 입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92) 현재까지 <제4집단>의 해프닝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사회 비판적 예술행위의 도전이었으나 말 그대로 해프닝에 그치고 말았다 93) 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실패 를 암시하고 있는 이러한 평가는 온전히 사건의 결과, 즉 목적에 따른 행위의 성과 여부에만 가치를 둔 것으로 당대의 한국적 상황을 고려치 않은 것이다. <제4집단> 해프닝의 본질은 서구의 첨단예술 장르인 해프닝이 한국이라는 주변부 문화를 통과하며 변용( 變 容 )된 사건, 다시 말해 문화변용( 文 化 變 容 ) 94) 의 과정 그 자체에 있다. 동 서양이 결합된 <제4집단>의 예술체제, 대안언론으로 대중문화 잡지가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당대 미술제도의 미비함, 주간지와의 결합으로 청년 하위문화의 형태를 취하게 된 과정, 사회비판적 행위인 가두 해프닝을 퇴폐와 불온의 표명으로 인지한 시대 상황, 퇴폐적 전위예술로서 해프닝을 부인했던 미술계 등이야말로 서구 해프닝의 한국적 변용의 증거들이다. 그러므로 <제4집단>은 한국적 해프닝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좌절했을 뿐,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결성에서 해체까지 <제4집단>을 둘러싸고 진행된 사건의 전말, 그것이 바로 한국적 해프닝의 본질이자 미술사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91) 표지 사진에는 미풍양속에 깎이는 장발 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첨부되었다. 지난 8월 28일을 D데이로 서울시 경은 이른바 미풍양속을 해치는 히피 性 장발족을 일제 단속했다. 장발족에 대한 삭발령을 싸고 일부에서 비판이 들끓는 속 에 삭발시위? 하는 청년도 나왔다. 방태수와 손일광의 증언에 의하면 이는 주간지에서 여성이 아닌 남성이 단독으로 표지인 물로 등장한 최초의 사례였다고 한다. 방태수, 손일광과의 인터뷰, 2012.4.28. 92) 김구림은 1973년 일본으로, 정강자는 1977년 싱가포르로, 정찬승은 1980년대 초반 미국으로 떠났으며, 방태수는 1972 년 정권이 무너지는 소리 를 판토마임으로 표현한 작품 <무너지는 소리>(윤대성 작, 방태수 연출, 1972.9.12~10.30, 에 저또 소극장)를 공연한 일로 극단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다. 93) 김경운,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국립현대미술관, 2007.9, 결 출판사, p.8. 94) 둘 이상의 이질적인 문화가 직접적으로 접촉한 결과 그 한쪽 또는 쌍방이 원래의 문화형태에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 9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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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a tool for the reformation of the system of realpolitik, but it was a tool for anti-art and further a tool for cultural politics based on the identity of their generation. The first Korean subculture was substantiated and nurtured by the Fourth Group s happenings as the first endeavors to create a relationship between avant-garde art and popular culture in Korea. Yet in the course of it, they located themselves in the center of the conflicts caused by the then socio-cultural oppositions such as the reception of Western art and the preservation of traditional culture, the artist as the elite and the populace, the older generation and the younger generation, and art s duty to engage in social reality and art for art s sake. In other words, acute disputes and new awarenesses were generated as the stances and interests of government authorities, the fine art scene and the popular culture milieu ran counter to one another. The essential significance of the Fourth Group s happenings lies in such a process itself their existential status as a cultural metamorphosis in which one of the most up-to-date art forms of the West was subject to transformation as it was introduced to and interacted with Korea, which was a marginal culture. The Korean metamorphosis of Western Happening is clearly evinced by the artistic structure of the Fourth Group in which the East and the West are combined, the inertia of the then institution of art that a popular culture magazine was the only option available to be chosen as an alternative mass media, the fact that the group came to assume a form of youth subculture through its collaboration with a weekly magazine, the then socio-cultural circumstances that its street happenings were understood as embodying decadence and impropriety, and the then art scene that rejected happening by accusing it as a form of decadent avant-garde art. Accordingly, it is true that the Fourth Group was frustrated in the process of its efforts to establish Korean Happening. But the group was not a failure at all. For everything about the Fourth Group from its formation and dismantlement constitutes the cardinal nature and art-historical significance of Korean Happening.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류 한 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1970년대 중후반은 소위 이벤트 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67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퍼포먼스(해프닝)는 1970년까지 활발히 진행되지만, 이후 3~4년 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그러다가 1975년 4월 이건용이 <이벤트 현신>을 발표하면서 퍼포먼스의 열기가 재점화된다. 이어서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 이강소, 윤진섭 등이 차례로 이벤트를 발표했으며, 더불어 대구현대미술제 에서도 여러 작가들이 다양한 이벤트를 선보였다. 필자의 조사 결과, 1975년 4월부터 1979년 말까지 행해진 새로운 퍼포먼스는 100여 개로 추정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시 발표된 이벤트가 모두 잘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벤트는 그나마 그 내용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벤트는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이다. 물론 자주 거론되는 이벤트라고 해도, 초연 당시 이벤트의 진행상황과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상이한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이벤트가 초연된 날짜와 장소가 잘못 알려진 경우도 꽤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이벤트가 기록이 잘 안 된 이유를 작가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때는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이라 시청각자료를 충분히 남기고 싶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 더불어 그 이후에도 이벤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부족하다보니 남겨진 자료도 분산되거나 소실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사진과 텍스트 그리고 작가의 기억에 의존하여 당시의 이벤트를 복원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작가의 기억마저 희미해져간다면 한국현대미술의 중요한 자산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다. 사실 상당수 퍼포먼스의 경우 이미 자료의 소실과 작가의 작고로 인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이 시기의 이벤트를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 이 시기의 이벤트에 대해 어떤 평가를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퍼포먼스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행해졌는가에 대한 기초 조사가 우선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본고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너무 많다. 하지만 본고를 계기로 분산된 자료와 기록이 모아져 부족한 부분들이 10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03
메워지기를 기대한다. 본고는 1975년 4월부터 1979년 말까지 행해진 이벤트를 시간 순으로 다루고자 한다. 1975년 우리나라에서 이벤트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표된 <이벤트 현신>은 백록화랑에서 1975년 4월 19일 행해졌다. <이벤트 현신>은 두 가지 이벤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추후 각각 <실내측정>과 <동일면적>으로 명명되었다. <실내측정>은 <테이프 방 재기>, <테이프와 측정>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벤트의 진행상황은 초연사진, 동영상, 이건용이 작성한 노트 1) 등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더불어 이건용은 <실내측정>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벤트 현신>은 백록화랑의 신만현씨의 지금부터 이건용의 이벤트 가 있겠습니다 로 시작되었다. 이때 나의 손에는 돌돌 말은 고무테이프(너비 10cm)가 쥐어져 있었고 작업복 호주머니 속에는 엽서보다 조금 크게 차곡차곡 접은 한지(켄트지 전지 만한 크기)가 들어 있었다. 1 나는 먼저 테이프를 가지고 시작했다. 우선 방 한쪽 모서리로 가서 테이프의 끝을 바닥 모서리에 대 놓고 그 실내의 최장의 길이인 대각선으로 테이프를 풀어가며 재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각선의 길이가 8미터에서 내가 펴놓은 테이프 7미터로는 1미터가 모자랐다. (물론 이건 관객 앞에서의 계획된 행위였다.) 그 다음 그 테이프를 다시 걷어서 5각형 전시장의 각기 다른 길이의 변들을(최장 6미터 30에서 최단 1미터 70) 긴 것부터 차례로 하나하나 재어가면서 재고 남은 여분의 테이프는 차례로 끊어갔다. 이런 행위가 전부 끝난 다음 다시금 대각선상에 토막난 모든 테이프들을 연결해놓음으로써 첫 번째 이벤트 는 끝났다. 2) <동일면적>은 <종이조각 쓸기>, <비질> 등으로 불리기도 했고, 역시 이건용이 작성한 노트, 초연사진, 동영상 등을 통해 비교적 명확히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2 다음 이벤트 는 한지를 사용했는데 나는 우선 방 한가운데 조용히 있다가 호주머니에서 꺼낸 종이를 한겹 두겹 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장이 모두 펼쳐지자 그것을 방모서리로 가지고 가서 종이의 두변이 방의 벽과 나란히 닿도록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는 종이의 나머지 두변을 따라서 하얀 초크로 방바닥에 선을 그어서 방변의 선과 연결된 종이크기 만한 사각공간을 만들었다. 그 다음 백지를 손에 들어올려, 종이가 펼쳐졌던 공간은 비워두고 나머지 화랑 공간 전체에 임의의 크기로 종이를 찢어 늘어놓았다. 조용히 다 늘어놓은 다음 잠시 후, 행위를 시작했던 반대쪽부터 서서히 비로 쓸기 시작하여 화랑 안의 종이 조각들을 모두 사각 공간 안으로 쓸어 모았다. 3) 이어서 이건용은 1975년 8월 27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공간대상전 에서 Logical Event 라는 이름으로 두 가지 이벤트를 발표한다. 이때 그는 <동일면적>과 <테이프 자르고 잇기>를 행했는데, 각 이벤트의 이름은 추후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광수는 이 1) 이건용은 자신의 이벤트와 관련하여 작가 노트를 몇 권 남겨 놓았다. 그중 표지에 1974년부터 라고 적힌 작가 노트가 있는 데, 여기에 그의 초기 이벤트에 대한 드로잉과 글이 실려 있다.(앞으로 이건용 74 노트 로 지칭) 또한 표지에 1976년 이라고 적힌 작가 노트도 있다.(이 노트는 앞으로 이건용 76 노트 로 지칭) 2) 이건용, 이벤트 현신: 지각의 논리적 행위, 한국 월간 Program, 1975.6. 3) 위의 글. 이벤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이 두 이벤트를 촬영한 사진도 다수 남아 있다. 이날 처음 발표된 <테이프 자르고 잇기>는 <테이프 자르기>, <테이프>로 불린 적도 있었다. 이건용 74 노트 에는 <테이프 자르고 잇기>에 대한 드로잉과 글이 실려 있다. 오광수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노란색의 테이프를 길게 바닥에 부착하고는 다시 이 긴 띠 모양의 테이프를 일정하게 가위로 잘라 나갔다. 자르는 작업이 끝나자 붉은 색 테이프로 이 잘라진 부분을 일일이 때워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자르고 다시 잇고 하는 과정의 반복. 일정의 반복이 끝나고 이벤트는 끝났다. 4) 1975년 10월 ST 4회전 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고, 10월 6일 이건용은 5개의 이벤트를 선보였다. 이때 발표된 것이 <금 긋기>, <건빵 먹기>, <열번 왕복>, <두 사람의 왕복>, <셈 세기>이다. 이건용은 이 이벤트를 위해 포스터를 만들었고, 이 이벤트에 대한 기록을 자신의 노트에 기록해두었다. 또한 각 이벤트에 대한 초연사진도 일부 남아 있다. 당시 박용숙은 이 이벤트를 보고 공간 지에 기사를 썼다. 이 기사를 통해 초연 당시 제목과 이벤트의 진행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금 긋기>는 <걸음 걷기>, <걷기와 금 긋기>로 불리기도 했는데, 후에 작가는 <다섯 걸음>으로 개칭한다. 박용숙은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관중이 둘러싼 한가운데 길다란 깔개를 펴놓은 후 이건용은 한쪽 끝에서 하나 둘 셋 넷 다섯을 외면서 걷는다. 그러다가 다섯 발자욱만에 멈춰 선 후, 자기의 발끝에다 백묵으로 금을 그어둔다. 그리곤 다시 뒤로 돌아서서 처음 출발했던 자리로 되돌아온다. 다시 처음과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 한다. 똑같은 동작이지만, 그가 멈춰서는 자리는 조금씩 다르다. 발자국이 똑같은 자리에 놓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깔개에 그어진 백묵의 금은 마치 일자( 一 字 )를 차례로 그어놓은 듯하다. 행위가 여러 번 되풀이된 마지막에 이건용은 현장에서 자기의 몸을 감춰버리기 위해 돌연히 관중 사이를 뚫고 나가버린다. 5) <건빵 먹기>는 <과자 집어먹기>, <팔과 건빵>, <과자 먹기>로 불리기도 했다. 박용숙은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조그마한 탁상과 의자가 놓여지고 그 옆에는 붕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판대기가 놓여진다. 이윽고 이건용은 탁자 위에 건빵을 쏟아 놓은 후 의자에 정좌한다. 팔소매를 약간 걷어 올리면서 오른쪽 손으로 건빵을 집어먹기 시작한다. 한두 번 그런 상태로 먹은 다음, 옆에 서 있던 보조원이 가장 짧은 판대기 하나를 그의 오른손목에다 대고 붕대를 감는다. 마치 골절한 손을 치료하듯이. 그러나 그는 한번도 다쳤다는 시늉을 해보인 적은 없다. 붕대에 감긴 손으로 그는 다시 건빵을 먹는다. 손목에 판대기를 대였기 때문에 약간은 먹기가 불편해 보인다. 조금 후에 보조원은 다시 판대기를 하나를 들어 팔굽 관절에다 대고 붕대를 묶는다. 그러므로 그의 먹는 모습은 마치 뻗뻗한 기중기의 집게가 4) 오광수, 전환기의 미술, 열화당, 1976, p.109. 5) 박용숙, 이건용의 이벤트, 공간, 1975.11~12., p.79. 10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05
물건을 들어 올리듯이 건빵을 집어서 꼭대기로부터 입속으로 건빵을 떨어뜨려서 먹는다. 물론 건빵은 입에 들어가는 도수보다도 들어가지 않는 도수가 더 많다. 마지막에 보조원은 다시 긴 판대기를 그의 겨드랑이 관절에 대어 붕대로 묶는다. 그러므로 그의 팔은 위로 뻗힌채 완전히 묶이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그때 이건용은 의자에서 일어선다. 팔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는 이번에는 팔 대신 허리를 굽혀서 자기의 손을 건빵으로 가져가고, 건빵을 집은 다음 허리를 편다. 그러니까 건빵은 머리 위로 높이 뻗은 손에서 입속으로 떨어진다. 그 어느 때 보다도 건빵이 입으로 들어가는 율은 적다. 6) <열번 왕복>은 <녹음기와 달리기>로 불리기도 했는데, 후에 작가는 <10번 왕복>으로 표기법을 바꾼다. 탁자 위에 녹음기가 준비된다. 이건용은 녹음기를 작동시켜 놓은 후, 녹음기를 향해 하나! 하고 구령을 한다. 그는 후딱 뒤로 돌아서서 뜀박질하여 약 5 6미터의 거리를 갔다가 되돌아온다. 그는 다시 녹음기 앞에서 둘 하고 소리친다. 또 뜀박질. 그렇게 해서 모두 열! 하고 구령을 내린 후 마지막으로 그는 녹음기 앞으로 되돌아온다. 일단 이벤트가 끝난 것 같이 보이는가할 순간 그는 다시 녹음기를 작동하여 자기의 구령이 녹음된 것을 틀어놓는다. 녹음기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허겁지겁 뜀박질하며 했던 구령이 차례차례 되살아난다. 이건용은 녹음기 앞에서 그 소리를 확인하고 서 있는다. 7) <두 사람의 왕복>은 후에 <5번의 만남>으로 개칭된다. 박용숙은 아래의 글을 썼다. 이건용 외에 보조원 한 사람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약 6~7미터 간격을 두고 양쪽에 마주선 후, 똑같이 성큼 걸음으로 앞을 향하여 걷는다. 거의 마주치게 될 거리에서 두 사람이 함께 선 후 다시 되돌아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같은 동작을 몇 번 되풀이하다가, 이윽고 이건용은 자기 앞에 멈춰 선 보조원의 뺨을 후려갈긴다. 다시 두 사람은 되돌아서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또 마주 향하여 걷는다. 그러나 둘이 마주 섰을 때, 이번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맞은데 대한 보복이나 두 번째 때리는 행위 같은 것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가 않다. 이건용은 두손을 들어 상대방의 양쪽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시 그 손을 어깨와 양쪽 팔로 더듬어 내려온다. 8) <셈 세기>는 <녹음기와 나이 세기>로 불리기도 했지만, 후에 <나이 세기>로 개칭된다. 다시 탁자위에 녹음기가 등장한다. 이건용은 녹음기에 자기의 목소리가 녹음되도록 작동시켜 놓은 후, 그 앞에서 셈을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스물까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센 후에 녹음기의 작동을 정지시킨다. 녹음테이프를 리와인드시키고, 지금까지 자기가 센 셈을 다시 틀어 보인다. 이윽고 녹음기에서 이건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나, 둘, 셋 스물. 분명 그것은 조금 전에 이건용이 셈했던 목소리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새로 일어난다. 즉 스물까지는 이건용이 조금 전에 녹음시킨 목소린데 녹음기는 계속해서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서른셋까지 세는 것이다. 스물하나부터의 목소리는 대체 언제 녹음되었다는 말인가. 물론 그 목소리도 그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셈했던 그 목소리는 아닌 것이다. 9) 6) 위의 글. 7) 위의 글. 8) 위의 글. 9) 위의 글, pp.79~80. 이건용은 11월에 열린 제2회 대구현대미술제 에 참가했고, 11월 2일 계명대학교 전시실에서 9개의 이벤트를 보여주었다. 이때 행한 것은 <내가 보이느냐>, <이리 오라>, <다섯 걸음>, <건빵 먹기>, <10번 왕복>, <나이 세기>, <5번의 만남>, <물 마시기>, <성냥 켜기>, <물 붓기>인데 초연 당시의 제목은 불분명하다. 그리고 초연사진은 <건빵 먹기>만 남아 있는 듯하다. 이중 <내가 보이느냐>, <이리 오라>, <물 마시기>, <성냥 켜기>, <물 붓기>가 신작이었다. <내가 보이느냐>는 명령자가 내가 보이느냐 라고 외치면, 행위자(이건용)가 다양한 모습으로 명령자에게 대답하는 것이다. 이 이벤트의 상세 내역은 오직 이건용의 노트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1 명령자 행위자 쪽으로 뒤돌아서면서 내가 보이느냐 2 행위자 A. 왼쪽으로 뒤돌아보면서 네! B. 오른쪽으로 뒤돌아보면서 네! C. 허리를 꾸부려 다리 사이로 보면서 네! D. 상기 A,B,C 계속 반복 3 행위자 뒤돌아보지도 않고 내가 보이느냐! 하는 질문에 대답만 네! 반복 4 명령자도 뒤돌아서서 내가 보이느냐, 행위자 네! (이건용 74 노트) <이리 오라>는 명령자가 이리 오라 라고 하면, 행위자가 여러 방법으로 명령자에게 다가가는 이벤트였다. 이 이벤트 역시 이건용의 노트를 통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1 천천히 걸어서 명령자 앞에 감 2 조금 급히 명령자 앞에 감 3 급히 걸어서 명령자 앞에 감 4 뛰어가기 5 아주 달려가기 6 무릎으로 걸어가기 7 엉금엉금 기어가기 8 중간쯤 왔다가 되돌아가기 9 명령자가 이리 오라 하면 행위자가 선 자리에서 그냥 네!, 온 것이냐 하고 명령자가 물으면 네! 9번 행위 반복 10 두 사람 다 뒤돌아서서 9번 행위 반복(이건용 74 노트) <물 마시기>에 대해서는 장석원의 글 10) 과 이건용의 기록을 통해 그 진행상황을 알 수 있다. 물 마시는 영상 30초간 비춤. 잠시 후 꺼짐. 행위자 입속에서 물을 쭉 뿜어냄. 1 행위자가 스크린 앞에 잠시 선다. 2 그 위에 컵에 물을 마시는 장면이 슬라이드로 비침 3 행위자가 5초간 있다가 사라짐. 슬라이드 30초간 계속 같은 장면 비춤 4 행위자 스크린 앞에 다시 등장. 3초간 슬라이드 비추다가 실내 불이 들어오고 동시에 슬라이드 꺼짐 5 잠시 행위자 계속 같은 포즈로 있다가 입속에 물을 쭉- 내뿜음 (이건용 74 노트) 반면 <성냥 켜기>와 <물 붓기>는 이건용의 노트를 통해서만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두 이벤트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이 각각 기술되어 있다. 1 탁자와 의자가 놓이고 2 행위자가 의자에 앉아 성냥통에서 성냥개피를 수북이 탁자 위에 쏟아 놓는다. 3 성냥 개피 하나를 황에 긋는다. 4 동시에 실내 불이 꺼지고 성냥불이 계속 켜지다가 개피가 다 타서 꺼지자 5 동시에 슬라이드에서 성냥개피에 불이 켜진 영상 비춰진다. (탁자 뒤쪽 벽) 6 행위자 개피가 다 타서 꺼지면 계속 그어대고 꺼지면 다시 그어대고 반복 행위 계속 7 마지막 개피까지 다 타버리면 잠시 (3초간) 동안 계속 불켜진 개피의 불을 슬라이드로 비추다가 8 실내의 불이 들어오고 잠시 후 실내 불이 꺼지고 9 2번의 상황이 슬라이드에 10) 장석원, 어째서 전위미술인가?, 1979, pp.12~13. 10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07
의해 비춰짐.(이건용 74 노트) 탁자 위의 병에 물이 가득. 병에 물을 세수대야에 줄줄 붓는다. 곧 실내 불이 꺼지고 슬라이드 (병의 물이 쏟아지는 영상) 병에 물이 다 쏟아지면 세수대야 물을 바닥으로 쏟아버리는 영상으로 바뀜(5초간) 곧 실내 불이 들어오고 행위자가 다시 나타남. 세수대야 물을 자신의 머리로부터 뒤집어 씀 (이건용 74 노트) 한편 제2회 대구현대미술제 도록에는 <장소의 논리> 이미지가 실려 있다. <장소의 논리>가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것은 제4회 AG전 (1975년 12월)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1975년 가을 홍익대학교 운동장에서 찍은 사진을 제2회 대구현대미술제 도록에 실었지만, 계명대학교에서는 실행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계속해서 이건용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4회 AG전 에 참가하여 12월 16일 다양한 이벤트를 발표하였다. 이건용은 이 이벤트를 위해 공연 목록을 쓴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바늘과 실>, <거기+여기+저기+어디>, <상자와 컵>, <이리 오너라!>, <내가 보이느냐?>, <태권>, <숨쉬기>가 표기되어 있다.(도판 1) 따라서 당시 이 제목들로 이벤트가 발표된 듯하다. 그런데 행위 장면을 촬영한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도판 1. 제4회 AG전 이벤트 목록 포스터 않았다. 11) 이날 가장 먼저 행해진 <바늘과 실>의 내용은 오직 이건용의 노트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후에 이건용은 이 이벤트의 제목을 <바늘구멍 잇기>로 바꾼다. 1 사방 벽면에 일정한 거리로 바늘 네 개 정도를 박아 놓음(이벤트 전에) 2 이벤트 시작하면 방 가운데에 바늘 하나를 박아 놓고 실 꾸러미에 실을 풀어가면서 벽에 꽂힌 바늘귀에 하나씩 끼어감 3 나중에 방 가운데 바늘귀에까지 실을 연결 4 잠시 후 가위로 바늘과 바늘 사이에 연결된 실의 중간 쯤을 끊어 나감으로써 이벤트는 끝난다.(이건용 74 노트) <거기+여기+저기+어디>는 <장소A>, <여기+거기+저기+어디>로 불렸으며, 후에 작가는 <장소의 논리>로 개칭한다. 이건용의 작가 노트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원을 긋고, 전면의 원을 가리키면서 거기, 원 안에서 여기, 원을 뒤로 하고 저기, 원을 밟고 돌면서 어디, 어디, 어디 (이건용 74 노트) <상자와 컵>은 <장소B>로 불리기도 했는데 관련 기록은 거의 없다. 이건용의 노트에도 단지 상자와 컵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이벤트에 대한 내용은 이건용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AG 전시가 있기 1주일 전, 컵에 물을 반 정도 담아서 전시장에 아마 놔두었을 겁니다. 그리고 1주일 동안 다른 전시가 벌어지고. 내가 교묘하게 어떤 장소에다가 컵을 숨겨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몰라요. 그리고 AG 전시 개막 전날(디스플레이 하는 날) 컵을 상자에 넣어 다시 집으로 가져왔어요. 물이 엎질러지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AG 전시 당일, 컵이 담긴 종이상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다시 전시장으로 가서, 종이상자에서 컵을 꺼내고, 본래 있던 장소에 컵을 다시 놓는 겁니다.(이건용과의 인터뷰, 2015년 7월 31일) <태권>도 관련 기록이 거의 없다. 다만 2주 뒤 3인의 이벤트 에서 재연할 때 촬영한 사진이 2장 남아 있다. 첫 번째 사진에서 이건용은 태권도의 기본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고, 두 번째 사진에서 이건용은 앞 찌르기를 하고 있다. <숨쉬기>는 <손수건과 숨쉬기>와 <손수건>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후에 <손의 논리 4>로 개칭된다. AG 전시 때의 초연사진은 없지만, 당시 다른 곳에서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 이건용의 노트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1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면서 나는 코로 숨을 쉰다! 2 손수건을 대각으로 양손에 쥐고 돌돌 말아서 대변 누는 자세로 자신의 히프 밑바닥에 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코를 막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는 바라보던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는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자리를 한참 주시하다가 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일어나면서 나는 입으로 숨을 쉰다! 고 외친다.(이건용 74 노트) 1975년 12월 30일 그로리치 화랑에서 3인의 이벤트 가 열렸고, 김용민, 이건용, 장석원이 참가하였다. 이건용은 이 이벤트를 위해 포스터를 만들었다. 포스터를 보면, 김용민은 <금 긋기>, <칠하기>, <끈 당기기>를, 이건용은, <걸음걷기>, <과자 먹기>, <손수건과 숨쉬기>, <여기+거기+저기+어디>, <손과 타격>, <태권>을, 장석원은 <웃음>, <시계>, <돌며 걷기>, <숨쉬기>, <박수>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도판 2) 현재 김용민과 관련된 자료는 충분하지 못한 편이다. 더욱이 작가의 사정상 그를 직접 인터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김용민의 퍼포먼스는 다른 작가의 글이나 증언을 참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금 긋기>에 대해 이건용은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겨 놓았다. 현재까지 초연사진은 1장 발견되었다. <금 긋기>는 후에 <긋는 것과 지우는 것>로 개칭된다. 도판 2. 3인의 이벤트 이벤트 목록 포스터 11) 다만 이건용과 이두식이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아 있다. 이 사진에는 1975.12.16. 국립현대미술관 EVENT를 끝내고 두식이와 함께 라고 쓰여 있다. 이건용은 이날 <이리 오라>와 <내가 보이느냐>에서의 명령자 역할을 이두식이 맡았다고 하 였다. 김용민은 화랑 바닥에 백묵으로 둥근 원을 그으며 돌았고, 그 뒤를 따라서 한 사람이 걸레로 백묵선을 10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09
지워나가는 행위였다. 12) 위치까지 내리고 두 손을 내리고는 들어간다. 14) 후에 <샌드 페이퍼>로 개칭되는 <칠하기>에 대해서는 장석원이 아래의 글을 남겨 놓았다. 김용민은 붓을 가지고 등장한다. 벽에는 빼빠가 4장 붙어 있다. 그 밑에는 깡통이 있고 그 속에는 흰색의 유화물감이 테레핀에 풀어져 있다. 그는 붓털을 만지작거리면서 서 있다가 벽으로 가서 붓에 물감을 발라 빼빠 위에 긋기 시작한다. 반복해서 그어 나가기 때문에 4장을 긋는 동안 붓털은 닳아빠지고 막대기만 요란히 빼빠 위를 달린다. 행위를 마치고 그는 털이 없어진 붓대를 들고 걸어 나와서는 붓이 그렸나, 빼빠가 그렸나?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진다. 13) <끈 당기기>는 사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이벤트에 대해 동료작가 이건용은 아래와 같이 말해 주었다. 김용민은 후에 <두개의 돌>로 이름을 바꾼다. 이렇게 당기면 양쪽에 팽팽하게 있다가, 댕기니까 끌려오면서 돌이 서로 모아져요. 그러면 다시 펴놓고, 또 댕기면 모아지고. 계속.(이건용과의 인터뷰, 2015년 7월 31일) 이건용은 3인의 이벤트 에서 6개의 이벤트를 했는데, 이중 신작은 <손과 타격>뿐이며,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손수건과 숨쉬기>, <손과 타격>, <태권>이다. 장석원은 <손과 타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자세히 묘사하였다. 장석원의 글을 보면, <손과 타격>은 상대자가 이건용을 대나무 방망이로 내리치는 행위, 손가락을 펴고 구부리는 행위, 두 주먹을 쌓아 올리고 내리는 행위 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당시 이벤트를 촬영한 사진 중에서도 장석원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진이 발견된다. 따라서 <손과 타격>은 <손의 논리>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도판 4. <태권>, 1975.12.30. 손가락을 펴고 구부리는 행위 는 <손의 논리 1>이 되고, 두 주먹을 쌓아 올리고 내리는 행위 는 <손의 논리 2>가 된다. 한편 이날 행해진 <태권>의 사진을 보면, 전시장 벽에 이건용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다. 이는 손으로 머리카락, 코, 입, 목을 쥐는 행위, 즉 현재 <손의 논리 3>으로 불리는 이미지이다. 아마도 이날 손으로 머리카락, 코, 입, 목을 쥐는 행위 는 직접 행해지지 않고, 사진으로만 발표된 것 같다.(도판 3, 4) 장석원은 3인의 이벤트 에서 5개의 이벤트를 선보였다. <시계>는 비록 초연사진은 없지만 장석원의 글과 이건용의 글 15) 을 통해 진행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그는 상대자(이두식)와 마주 서 있다. 상대자는 대나무를 뒤로 감추고 서 있는데, 대나무는 禪 家 에서 放 禪 用 으로 쓰는 죽비처럼 갈라져 있어 소리가 크게 나도록 되어 있다. 이건용이 앉으면 상대자는 그의 뒤로 돌아와 여전히 대나무를 뒤로 감춘 채로 서 있다. 어느 정도 긴장감이 돌며는 대나무로 그의 어깨를 내려친다. 그때 이건용은 깜짝 놀라 뒤돌아본다. 때리는 것이 반복되자 그는 놀라지 않고 좌정한 채로 앉아 있다. 상대자가 요란한 소리가 나는 때리는 행위를 멈추고 원위치로 돌아가면 그는 손의 동작을 하는데 그 동작은 펴든 엄지손가락의 논리적 거리를 얘기할 뿐 별 의미를 주지 않는다. 다시 상대자가 뒤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머리통을 내려치고 들어가 버린다. 그는 주먹을 내고 쌓아 올리며 일어나서 신체가 허용하는 한 쌓아 올리다가 이번에는 쌓아 내려 어깨 이벤터가 가운데로 나아가 왼팔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구부려 팔목을 눈앞에 두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헤어서 시간을 본다. 들여다보고 있다가 시계를 풀어서 오른손으로 헤어서 시간을 본다. 들여다보고 있다가 시계를 풀어서 바닥에 천천한 동작으로 놓는다. 그리고 전시장 밖으로 나가 버린다. 2~3분 후 다시 들어온 이벤터는 시계를 들어 시간을 보고 손목에 차고는 들어가는데 다시 나와 손수건을 꺼내 시계가 놓였던 자리를 마치 더러운 것이 묻어있는 것처럼 몇 번이고 닦는다. 그리고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는 들어간다. 16) <돌며 걷기>에 대한 텍스트는 남아 있지 않다. 단 초연사진이 1장 있다. 장석원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해주었다. 제가 나가서 빙빙 도는 거예요. 사람들이 나와서 따라 걷기도 하더라고요. 외국인도 있었고. 그렇게 빙빙 돌다가 멈추는 것입니다.(장석원과의 인터뷰, 2015년 10월 13일) <박수>에 대한 텍스트도 남아 있지 않다. 장석원은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나와서 천천히 박수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는 거예요. 아마 소리가 나기도 할 겁니다. 박수라는 단순한 동작을 가지고, 칠듯 말듯한 동작을 하기도 합니다.(장석원과의 인터뷰, 2015년 10월 13일) 도판 3. <손과 타격>, 1975.12.30. 12) 이건용, 한국의 입체 행위미술 그 자료적 보고서, 공간, 1980.6., p.19. 13) 장석원(1979), p.43. 14) 위의 글, pp.43~44. 15) 이건용(1980), p.19. 16) 장석원(1979), pp.44~45. 11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11
반면 <웃음>, <숨쉬기>는 초연사진도 없고 관련 텍스트도 남아 있지 않아 현재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다. 1976년 1976년 4월 4일 서울화랑에서는 4인의 이벤트 가 열렸다. 이건용,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이 참여하였다. 이건용은 <고무줄과 끈>, <로프와 두 사람>, <고무줄 감기>, <수도계량기 덮개>, <장소의 논리>를 행했다. 17) 이중 <장소의 논리>를 제외한 4개의 이벤트가 신작이었다. <고무줄과 끈>은 초연사진과 이건용 76 노트 에 드로잉이 남아 있다. <고무줄과 끈>은 <로프와 고무줄>로도 불리기도 했다. 이 이벤트에 대해 작가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고무줄과 로프를 양 벽에 연결시켰어요. 고무줄은 잡아당겨 연결했기 때문에 팽팽해졌고, 로프는 좀 길어서 축 늘어졌어요. 그래서 로프가 팽팽해지게끔 매듭을 자꾸 만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둘 다 팽팽해져요. 그리고 둘 다 벽에서 풀었어요. 그러면 고무줄만 줄어들잖아요. 그때 고무줄의 길이만큼 로프에서 또 매듭을 만들어요. 고무줄과 로프의 길이를 같게 하는 거죠. 그 다음에 두 줄을 당겨요. 고무줄은 쫙 늘어나니까 맞은 편 벽에 묶을 수 있어요. 그런데 로프는 아무리 당겨도 소용없죠.(이건용과의 인터뷰, 2015년 7월 31일) <로프와 두 사람>도 초연사진과 이건용 76 노트 의 드로잉을 통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로프와 두 사람>은 <만남>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건용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김용민하고 둘이 한 겁니다. 김용민은 로프를 붙들고 있었어요. 나는 저쪽에서 그 로프를 붙들고 있고. 김용민을 중심으로 내가 빙빙 돌아요. 자꾸 감길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자꾸 거리가 가까워져 나중에는 몸과 몸이 만나요. 그럼 둘이 쳐다보는 겁니다. 미소도 짓고. 그리고 다시 빙글빙글 돌아서 처음으로 돌아가요. 굵고 하얀 로프를 놔 하면 놓는 겁니다.(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고무줄 팔뚝에 감기>로 불리기도 했던 <고무줄 감기>는 초연사진과 작가의 증언을 통해 이벤트의 진행상황을 알 수 있다. 팔뚝에 고무줄을 감고, 그 고무줄을 자르고. 그러면 나머지가 생기잖아요. 그걸 매듭으로 지어서 하나의 끈을 만들어요. 그걸 다시 또 감아, 또 잘라, 그래서 길이도 짧아지지만, 묶는 바람에 나중에는 매듭 투성이가 되어버려요. 2미터를 넘어가는 줄이 불과 요만해져요. 매듭만 생겨가지고. 그걸 벽에다 핀으로 꽂아요. (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서울화랑 벽에 수도계량기 덮개가 있어요. 덮개를 열면, 사람들은 수도계량기가 벽에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하여튼 거기로 가서 갑자기 덮개를 열어요. 그럼 수도계량이가 돌아가는 게 보이죠. 그걸 한참 들여다봐요. 그리고 내가 입고 있던 바바리를 벗고, 바바리로 계량기를 덮어요. 그렇게 바바리가 덮인 상태에서 덮개를 닫아요. 그러면 바바리가 꽉 끼게 됩니다. 그리고 바바리코트를 당기는데, 절대로 안 빠져요. 바바리코트가 막 찢어지고. 완전히 다 찢어지게 계속 잡아당깁니다.(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김용민은 <물걸레>, <발자욱>, <테이프>를 발표했다. 18) 모두 신작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물걸레>의 초연사진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장석원의 글, 윤진섭의 글 19), Event Logical 브로슈어에 실린 이미지 등을 통해 그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장석원은 아래와 같이 이 이벤트를 묘사한 바 있다. 그는 젖은 수건을 들고 나타났다. 관중 앞에서 그는 수건을 짠다. 천천히. 물이 쏟아진다. 수건을 폈다가 다시 접어 짠다. 처음보다 세게. 물도 처음보다 떨어지는 양이 적다. 다시 편다. 물기가 없다. 다시 접어 짠다. 강하게 힘주어서 물은 몇 방울 떨어진다. 다시 편 다음 접고 더 힘주어 짜고, 다시 펴고 접고 또 짜내고 반복될수록 수건의 물기는 완전히 가시어 물이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수건을 탈탈 털어서 바닥의 물을 훔쳐둔 채 퇴장한다. 20) 반면 <발자욱>과 <테이프>는 초연사진과 기록이 없어 안타깝게도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성능경은 <신문>, <돈 세기>, <돌 던지기>를 행했다. 21) 초연사진은 모두 남아있다. <신문>은 4인의 이벤트 포스터에 진행상황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이벤트를 할 장소 중앙에는 미리 준비된 의자와 탁자가 놓아진다. 그리고 나는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 나의 윗 옷 안주머니에 신문지 1장과 면도날 1개를 넣고 준비된 의자에 앉는다. 그런 다음에는 안주머니에서 신문지를 꺼내 펴들고 어느 한 기사 혹은 광고 부분을 소리 내어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한 부분의 기사를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신문지를 탁자 위에 그대로 놓고 호주머니에서 꺼낸 면도날로 읽은 부분을 오려낸다. 이러한 행위가 계속 반복되는 동안 신문지는 기사란과 광고란이 모두 제거되고 인쇄되지 않은 부분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된 후 나는 인쇄되지 않은 나머지의 신문지를 잘 접어 다시 안 호주머니에 넣고, 읽고 오려진 신문지 조각을 손바닥으로 자연스럽게 탁자 위에서 쓸어버린 후 퇴장한다. 22) <돈 세기>와 <돌 던지기>는 관련 텍스트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이 두 작업에 대해서는 작가의 증언이 필요하다. 반면 <수도계량기 덮개>는 초연사진이 없어 이건용의 증언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수도계량기 덮개>는 <수도계량기 뚜껑 나르기>, <수도계량기>로 불리기도 했다. 17) Event-Logical 브로슈어, 1976, p.11. 18) 위의 글, p.10. 19) 윤진섭, 하나의 풍경, 다시 70년대 추억으로, 옛날과 오늘을 오락가락하면서 70년대 이벤트 읽기, 2011, 경기도미술관, p.71. 20) 장석원(1979), pp.10~11. 21) Event-Logical 브로슈어, 1976, p.10. 22) 성능경, 4인의 이벤트 포스터, 1976. 11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13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합산을 해요. 100원 짜리 꺼내면 100원, 또 100원 짜리를 꺼내면 200원, 500원 짜리 꺼내면 700원, 1,000원 짜리 꺼내면 1,700원, 그때 내가 삼만 얼마의 돈을 준비했어요. 상당히 거금이죠. 꺼내 놓은 것을, 다시 나중에 셀 때는 개수로 세는 겁니다. 동전이든 지폐든, 하나, 둘, 셋, 넷, 다섯 ~ 열, 그러니까 35,000원짜리가 열이 될 수도 있고요. 센 다음에 도로 집어넣고 나가는 것입니다.(성능경과의 인터뷰, 2014년 9월 12일) 돌멩이 하나 들고 와서, 굴리고, 멈춘 위치에 백묵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다시 돌멩이를 굴리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바닥에는 돌멩이가 있었던 위치에 여러 원만 남는 행위죠.(성능경과의 인터뷰, 2014년 9월 12일) 장석원은 아마도 이날 3개의 이벤트를 선보인 것 같다. 그러나 제목은 모두 알 수 없다. 첫 번째 이벤트는 성냥통을 이용한 것으로 초연사진은 남아 있다. 이 이벤트에 대해 이건용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석원은 팔각의 성냥통을 들고 나와서 성냥을 한 개비씩 태우다가 마침내 성냥통 전체에 불을 질러 충격을 주는 행위를 보여주었다. 23) 두 번째는 눈가리개를 이용한 이벤트이다. 현재 초연사진을 발견할 수 없어 장석원의 증언으로만 그 내용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이 서 있어요. 제가 까만 띠로 제 눈을 가릴 거예요. 그럼 저는 안 보이죠. 그리고 내가 상대방을 잡으러 가고, 상대방은 도망을 다녀요. 봉사가 되면 쫓기는 게 일반적인 것인데, 봉사가 멀쩡한 사람을 쫓아간다는 것이죠. 시국에 대한 것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요. 눈 먼 놈이 성한 놈을 쫓아간다는.(장석원과의 인터뷰, 2015년 10월 13일) 세 번째 이벤트는 종이를 자르고 종이를 일렬로 이어붙인 후 그것을 둘둘 감는 것이다. 현재 초연사진이 여러 장 있는데, 초연사진으로도 그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건용은 1976년 4월 18일 다사랑에서 개인전의 형식으로 <나이 세기> <건빵 먹기>, <다섯 걸음>, <장소의 논리>, <손의 논리> 24), <로프와 두 사람>, <고무줄과 끈>, <10번 왕복> 등 8개의 이벤트를 보여주었다. 이중 <건빵 먹기>, <로프와 두 사람>, <고무줄과 끈>, <10번 왕복>은 사진이 남아 있고, 또한 <건빵 먹기>, <다섯 걸음>, <로프와 두 사람>은 동영상도 존재한다. 그리고 6월에는 장석원도 다사랑에서 개인전의 형식으로 이벤트를 발표했으나, 25) 23) 이건용, 한국행위미술의 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퍼포먼스 아트, 다빈치 기프트, 2005, p.22. 24) 이건용 76 노트 를 보면, 다사랑 전시(1976년 4월 18일) 기록에 <좌선과 선>이 나온다. 이는 <손의 논리>로 추정된다. 그리고 Event-Logical (1976년 7월 3일) 브로슈어에는 <손의 논리>라고 표기되어 있다. 즉 이건용은 75년 12월에는 <손과 타격>으로, 76년 4월에는 <좌선과 손>으로, 76년 7월에는 <손의 논리>로 부른 것이다. 물론 76년 4월과 76년 7월 에도 75년 12월처럼 타격을 행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25) 이건용(1980), p.19. 안타깝게 그가 어떤 이벤트를 행했는지는 현재 알 수가 없는 상태이다. 1976년 7월 3일 신문회관에서는 Event Logical 이 있었다. 이건용, 성능경, 김용민이 참가하였다. 이건용은 <다섯 걸음>, <손의 논리>, <장소의 논리>를, 성능경은 <15초간>, <수축과 팽창>, <신문>을, 김용민은 <긋는 것과 지우는 것>, <두 개의 돌>, <물걸레>를 발표하였다. 이중 신작은 성능경의 <15초간>과 <수축과 팽창>뿐이었다. <15초간>의 초연사진과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작가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보자기에서 라디오를 하나 싸가지고 나와서 보자기를 풀어요. 스위치를 온 하고 15초간 가만히 듣고 있는 거예요. 잡음이 나오고 있어요. 정규방송은 아니고요. 나는 15초간 이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라고 하고 끝나는 거예요.(성능경과의 인터뷰, 2014년 9월 12일) <수축과 팽창>도 초연사진과 기록이 없다. 다만 Event Logical 브로슈어에 이미지가 실려 있어 그 내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이미지는 브로슈어에 싣기 위해 7월 3일 이전에 촬영한 것 같다. 성능경은 이 이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 몸을 최대한 팽창시키고, 최대한 수축시키고.(성능경과의 인터뷰, 2014년 9월 12일) 1976년 11월 22일 출판문화회관에서는 ST 제5회전 이 열렸다. 장석원에 의하면, 개막 당일 가나다의 역순으로 장석원, 이건용, 성능경, 김용민이 차례로 이벤트를 펼쳤다고 한다. 26) 먼저 장석원은 <원과 원>과 <하나, 둘, 셋, 넷, 다섯>을 행했다. 장석원은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겨 놓았다. 초연사진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 원과 원 이라는 event에서 필자는 가운데 나와서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커다란 원을 그려나간다. 반복해서 좀 더 빨리 그려나가게 됨으로써 어지럽게 되고 중심을 더 이상 잡지 못하게 되어 손가락을 바닥에 붙인 채로 정지해 있다가 일어나 나간다. 27) 두 번째 event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데 eventer가 가운데 나가서는 오른손을 어깨너머로 내놓으면서 하나! 를 외치고 보면 엄지손가락을 하나 접어놓는다. 둘, 셋, 넷, 다섯 손가락까지 외치면서 내놓았다가 내놓은 손가락을 역으로 말없이 편다. 다시 반복해서 외치고 펴고 다섯 차례쯤 하다가 마지막엔 새끼손가락이 펴진 채로 응시하다가 눈높이까지 들어올려 손바닥을 활짝 펴더니 들어간다. 그런데 내가 하나, 둘, 셋 외칠 때 바깥에서 넷, 다섯 을 받는 목소리가 있었고 내가 외칠 때마다 그 일은 계속되었다. 내가 관여하지 않고 행위를 하니까 그것도 자연스러웠던지 나중에 한 관객이 그저 짜고 한거요 하고 묻는다. 28) 26) 장석원(1979), p.70. 27) 위의 글. 28) 위의 글. 11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15
76 노트 現 身 1976-1 現 身 1976-3 1970년대 후반 표기 76 노트 작품 목록 29) 現 身 B (화면을 앞으로) 現 身 A (화면을 뒤로) 1999년 표기 30) 신체드로잉 76-1 화면 뒤에서 신체드로잉 76-2 화면 앞에서 신체드로잉 76-3 옆으로 서서 現 身 1976-2 現 身 C (팔에 기브스를) 신체드로잉 76-4 팔에 기브스 現 身 1976-4 現 身 F (양다리 곧은선) 신체드로잉 76-5 다리 사이로 現 身 1976-5 現 身 E (양팔을 벌려서) 신체드로잉 76-6 양팔로 現 身 D (무릎 꿇고, 반원) 신체드로잉 76-7 어깨를 축으로 한편 <신체드로잉 76-1>은 제2회 서울현대미술제 (1976.8.29.~9.4., 국립현대미술관) 도록에 등장한다. 하지만 제2회 서울현대미술제 에서 <신체드로잉 76-1>이 행해졌거나, 행위를 촬영한 사진이 전시된 것 같지는 않다. 도록에서 이 이벤트는 <논리적 사건>으로 표기되어 있다. 김용민도 같은 날 이벤트를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떤 것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도판 5. 성능경, <위치>, 1976.11.22. 성능경은 <위치>를 발표했다. <위치>는 신체의 각 부위를 이용해 10가지 방법으로 잡지를 잡고 있는 것인데, 그중 9개만 사진으로 남아 있다. 성능경은 편집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 즉 미술잡지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느냐를 위치시키기 위해 이 이벤트를 행했다고 한다.(도판 5) 이건용은 이 전시에 신체드로잉 연작 7점을 출품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마도 이벤트 장면을 촬영한 사진과 행위의 결과물을 전시했던 것 같은데, 이건용에 따르면 <신체드로잉 76-5>만 이날 실연했다고 한다. 이 이벤트에 대해 작가는 아래와 같이 말하다. 처음에는 나는 직선을 긋는다, 나는 직선을 긋는다 하며 그어요. 그런데 직선을 그으려고 해도 선이 휘어요. 휘어지기 시작하면 나는 곧은 선을 그을 거야, 나는 곧은 선을 그을 거야 라고 해요. 옆에 보던 젊은 친구들이 같이 곧은 선을 그을 거야 라고 소리를 질러주었어요.(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이건용의 노트에서 신체드로잉 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면, 신체드로잉 연작은 아래와 같이 각각 다양한 이름이나 약칭을 가지고 있었다. 1977년 1977년 4월 2일 서울화랑에서 <혼인의 이벤트>가 있었다.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장석원이 자신의 결혼식을 이벤트의 형식으로 행한 것이다. 주례는 이건용이 맡았고, 이 이벤트는 장안에 화제가 되어 당시 여러 매체에 보도되었다. 장석원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랑신부가 등장하기도 전에 주례 혼자서 이벤트와 결혼에 관한 특강(?)을 열정적으로 외치다가 힘들어 뜸해질 무렵 신랑 장석원과 신부 유상선은 녹음기 3대를 현장에 두고 카세트테이프를 장치한다. 테이프는 금강경, 춘향가, 김추자 가요, 고고, 팝이 있었다. 동시에 발생하는 소리들을 크게 혹은 작게 조절하면서 한편 미리 준비된 종이(켄트지, 45 420cm)를 펼쳐놓고 그 중간에 크레파스를 둔다. 그때 녹음기에서 명령의 목소리가 들린다. 신랑신부가 종이의 양쪽 끝에서 뒤돌아서기를, 그리고 준비 상태를 물은 뒤 다음의 사실을 진술한다. 나는, 나는 오늘 결혼한다. 결 혼 한다. 나와 결혼 하는 신부는 이것을 신랑은 글씨로 받아쓰고 신부는 다른 쪽에서 색색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진술이 끝난 뒤 녹음기의 명령대로 일어서고 뒤돌아 서로 가까이 간 뒤 3분간의 키스가 이루어졌다. 31) 1977년 봄 제3회 대구현대미술제 가 열렸고, 5월 1일 낙동강 강정에서 이강소, 박현기, 백미혜, 이상남, 이종윤, 장성진, 정재규 등이 이벤트를 펼쳤다. 먼저 이강소는 <낙동강 29) 이건용은 이건용 76 노트 마지막에 자신이 행한 이벤트의 목록을 기록해놓았다. 30) 이건용: 논리, 삶, 일상,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9, p.95. 31) 장석원, 전위로서의 퍼포먼스, 소통의 비밀, 발해 그래픽스, 2014, p.75. 11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17
이벤트>로 불리기도 하는 <무제>를 선보였다. 이벤트의 내용은 조선일보 기사와 초연사진 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강소씨(대구)는 넓은 모래바닥에 구두를 벗고 상의와 넥타이 와이셔츠, 양말을 일렬로 벗어놓은 채 직경 5m의 모래성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30분 남짓 외곽에서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모래를 쌓아올리는 행위를 계속, 마지막에는 모래무덤 위에 올라앉아 소주를 마셨다. 이씨는 이런 행위를 일상과 다른 차원에서 사물을 보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한 것 이라고 했다. 32) ( 조선일보, 1977년 5월 3일) <누드 퍼포먼스>를 발표한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 이벤트를 직접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이전에 촬영한 것을 사진으로 출품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강소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사진 스튜디오에서 물감을 제 몸에 붓으로 칠하고 그 다음 헝겊으로 그 칠을 닦아내는 프로세스를 촬영한 겁니다. 그래서 77년도 에꼴 드 서울 전에 사진하고 헝겊을 출품했습니다. 박현기가 촬영했습니다.(이강소와의 인터뷰, 2010년 4월 28일) 한편 1977년 12월에 열린 제3회 서울현대미술 (국립현대미술관, 1977.12.8.~12.18.) 도록을 보면 이 이벤트의 이미지가 실려 있고, 제목은 <사건 77-2>로 기재되어 있다. 33) 여기서 사건 은 event 를 의미한다. 도판 6.박현기, <무제>, 1977.5.1. 박현기는 <무제>를 발표했는데 역시 조선일보 기사와 초연사진으로 이벤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도판 6) 박현기씨(대구)는 강변에 늘어선 포플러나무에 횟가루로 수없이 그림자를 그렸다. 나무와 그림자를 역으로 표현하는 행위 라고.( 조선일보, 1977년 5월 3일) 더불어 정재규, 이종윤, 장성진, 이상남, 백미혜도 이벤트를 행했고, 그 내용은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정재규씨(서울)는 강가 모래틈에 평행선을 그어나가면서 산과 강, 그리고 모래 위의 선이 평행임을 현장에서 행위로 검증하는 작업 을 보였다. 이종윤씨(대구)는 작가들의 이름이 인쇄된 전시회 카탈로그를 잘게 찢어 강물에 띄워 보내 수장의식을 보여주는 듯 했다. 장성진씨(서울)는 포플러나무에 못을 박아 외투를 거는 것으로 작업을 끝냈는데 나무에 인위적으로 못을 박아 자연과 인간의 관계 를 나타냈다고 한마디. 2시간 남짓 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이상남씨(서울)는 강가를 따라 발로 물결무늬를 뭉개는가 하면, 백미혜씨(대구)는 모래 위에 수없이 까치집을 만들어냈다.( 조선일보, 1977년 5월 3일) 이중 백미혜의 까치집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상남은 자신의 이벤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해 주었다. 강변에서 물과 육지가 닫는 경계, 귀퉁이. 거기를 발로 하나하나 밟으면서 가는 거예요. 경계라는, 이쪽에 속하지도 않고, 저쪽에 속하지 않는. 밟는다는 행위를 통해 두 가지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요. 동양철학적인 것, 노자 같은 게 이야기 될 수도 있고요. 또 이때 우리는 현상학 쪽에 관심이 많았죠.(이상남과의 인터뷰, 2015년 11월 3일) 1977년 9월 17일 서울화랑에서는 이건용과 윤진섭이 참가한 2인의 이벤트 가 열렸다. 여기서 이건용은 <나무 잇기>, <화랑속의 울타리>, <색종이와 분신>, <건빵 먹기>를 보여주었는데, 초연사진은 모두 남아 있다. 이중 <나무 잇기>, <화랑속의 울타리>, <색종이와 분신>이 신작이다. 이 이벤트들과 관련된 텍스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작가의 증언과 초연사진을 통해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무 잇기>, <화랑속의 울타리>, <색종이와 분신>에 대해 이건용은 아래와 같이 각각 말하고 있다. 1.2~1.5m 나뭇가지를 산에서 가져와서 화랑에 갔다 놨어요. 서울갤러리는 안국동에 있어요. 내가 앉아서 끈으로 나뭇가지를 이어요. 갤러리 문을 열어놓고. 바깥으로 계속 내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연결된 나무가 길가로 나갑니다.(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내가 구석에 앉아 있었어요. 나뭇가지를 연결했잖아요. 어차피 남았으니까, 나뭇가지를 연결해 바닥과 천정 사이에 세웠어요. 그래서 울타리가 되었어요. 나는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었고. 행위자가 자기가 만든 울타리에 갇혔고, 보는 사람은 바깥에 있고. 그래서 안과 밖이 생겼어요. (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마치 광야를 거니는 예언자나 순례자와 같이 바지를 걷고 맨발로 막대를 짚으면서 그 주변을 배회하다가, (배를 위로 향하게) 누워서 분필로 윤곽선을 만들고, 색종이를 찢어서 연결해요. 그리고 (색종이가 놓인 방향과 크로스 방향으로) 엎드려뻗쳐 의 자세를 해요.(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윤진섭은 이날 <노란 구두>, <종이와 물>, <돌과 반죽>을 행했다. 이 세 이벤트의 초연사진은 모두 남아 있고, 더불어 강태희와 김미경 34) 도 기록을 남겨 놓았다. 바로 아래의 글은 강태희가 <노란 구두>에 대해 쓴 것이고, 그 아래의 글은 윤진섭이 자신의 이벤트를 설명한 것이다. 이강소는 1977년 6월 제3회 에꼴 드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1977.6.25.~6.30.)에서 32) 이강소에 따르면, 일상과 다른 차원에서 사물을 보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한 것 은 이벤트가 끝난 뒤 신문기자들과 있었을 때 한 말이라고 한다. 33) 이강소가 이 이벤트를 <사건 77-2>로 명명한 한 것을 감안하면, <낙동강 이벤트>가 <사건 77-1>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34) 김미경, 1960~70년대 한국의 행위미술,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결, 2007, pp.24~25. 11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19
노란색 비닐 봉투에 노란색의 색종이, 크레용, 국화 한 송이, 밴드 그리고 자갈을 넣어서 들고 나와 앉아서 색종이를 찢어서 쌓고 자갈을 크레용으로 칠한 뒤 밴드로 감고 국화는 꽃잎을 떼고 하여 모두 봉투 속에 넣고 검은 매직으로 겉에 신촌을 지나는 여자의 구두색 이라고 쓴 다음 퇴장하는 것이다. 35) 노란 서류봉투에 노란 국화꽃, 노란 자갈, 노란 크레용, 노란 고무줄, 노란 색지. 전부 노란색이잖아요. 국화 꽃잎을 따고. 흰 자갈에 노란 크레용을 칠하고, 또 그걸 노란 고무줄로 감고 뭐 이런 걸 보여주다가 다시 서류봉투에 넣고. 그리고서 나중에 매직으로 겉봉에 신촌을 지나가는 여자의 구두색이다. 이렇게 쓴 거예요. 왜 신촌을 지나는 여자의 구두색이냐면, 노란색을 노랗다고 해야 노란색의 본질에서 멀어진다, 이게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불립문자. 36) 계속해서 강태희는 <종이와 물>, <돌과 반죽>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습자지 20여 장을 들고 나와 앉아서 잘게 찢어서 쌓은 다음 주전자로 물을 부은 뒤 짜서 한 웅큼을 만든 다음 퇴장하는 것. 37) 까만색의 돌을 구석에 놓고 15미터 정도 떨어져서 돌 크기의 밀가루 반죽을 들고 있다가 10초 동안 응시 한 뒤 발걸음을 떼면서 반죽을 바닥에 점차 떨어뜨리고 돌에 접근해서는 그것을 손바닥에 들고 10초간 응시하는 작품이다. 38) 이어서 1977년 10월에는 ST 제6회전 (견지화랑)이 열렸다. 전시기간 중에 이벤트가 열렸는데, 이벤트의 제목과 일정은 전시 브로슈어에 기재되어 있다. 윤진섭은 10월 25일 <서로 사랑하는 우리들>을 선보였다. 이 이벤트를 찍은 사진은 남아 있고, 강태희는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그가 노란색의 어린이 마차에 자갈과 색종이와 나뭇가지 등을 담아서 끌고 나와 전시장을 한 바퀴 돈 다음 색종이를 원형으로 늘어놓고 그 위에 자갈을 놓고 싼 다음 실로 묶어서 가운데에 모아 돌담을 쌓는다. 다음으로 나뭇가지를 엮어서 조그만 귀틀집을 만들고 색종이를 돌돌 말아서 집 앞에 울타리를 치는 작업으로 관객과 함께 놀이적인 행위를 해본 것이다. 39) 10월 29일에는 4명의 작가가 이벤트를 발표했다. 먼저 강용대는 <공간=점유성>을 보여주었는데, 현재 초연사진은 2장이 발견되었다. 이 이벤트의 진행상황에 대해선 강태희가 쓴 글이 있다. 바닥에 가로 세로 1미터 정도의 크기로 테이프를 붙여서 정방형을 만들고 그 안에 모래를 담은 통들을 놓은 다음 35) 강태희, 1970년대의 행위미술 이벤트: ST 멤버의 작품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사학회 13, 2001, p.24. 36) 윤진섭, 이건용의 이벤트 좌담회,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2014, 국립현대미술관, p.161. 37) 강태희(2001), p.24. 38) 위의 글. 39) 위의 글, p.25. 빈 프로젝터를 벽에 비추면서 서서히 모래를 한 줌씩 정방형 위로 뿌려서 빛에 모래가 날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업은 3~4시간 계속해서 모래가 상당한 높이로 쌓인 뒤 테이프를 뜯어내는 것으로 완성된다. 40) 이어서 김용민도 <무제>란 이벤트를 했는데, 안타깝게 그 내용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성능경은 <한 장의 신문>을 발표했다. 초연사진은 있지만 관련 텍스트는 없다. 작가는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신문을 들고 나와서 바닥에 놓고. 칼로 오리고, 접어서 자르고, 손바닥 크기만큼 자른 후, 그것을 바닥에 흩어 놓은 다음에, 신문 모양으로 복원을 시켜요. 하나를 들어서 읽고 찢어서 버리고, 설치된 신문 앞에 가서 한 장을 읽고 돌아오면 끝나는 거죠. 이게 신문 한 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려고 했던 거예요. 한 장 가지고 내가 놀 수 있는 것.(성능경과의 인터뷰, 2014년 9월 12일) 장경호는 <물닦기>와 <이것이 이것이요>를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관련 사진과 기록을 찾지 못한 상태이다. 이어서 10월 30일 이건용은 <얼음과 백묵>과 <울타리>를 행했지만, 두 이벤트에 대한 초연사진과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작가는 <얼음과 백묵>을 1979년 6월 남계화랑에서 다시 보여주었는데, 그때의 사진은 남아 있다. <얼음과 백묵>의 내용은 재연 사진과 작가의 증언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지만, <울타리>는 그 내용을 알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얼음과 백묵>은 후에 <얼음과 백묵은 발신하라>로 개칭된다. 얼음덩어리 요만한 것을 두 개 들고 들어갔어요. 바닥에 자연스럽게 얼음을 놓았어요. 나는 백묵 한 자루를 가지고 조용히 앉아서 얼음과 백묵은 발신하라 고 썼습니다. 계속. 한참 쓰다 보니까 바닥에 글씨가 많아지잖아요. 그리고 그 백묵이 다 닿아서 없어져 쓸 수가 없잖아요. 그때 녹음기를 틀어요. 그러면 거기서 얼음과 백묵은 발신하라 라는 말이 계속 나와요. 얼음이 다 녹아서 물이 되면 끝입니다. 그러니까 소멸을 말한 겁니다. 없어져간 것, 사라져간 것.(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1977년 12월 서울화랑에서는 김성구와 최철환의 <두 사람의 일상생활>이 행해졌다. 이 이벤트가 있었다는 것은 이건용의 글 41) 과 김성구의 홈페이지 42) 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1978년 1978년 5월 1일 공간사랑에서는 정찬승과 이건용이 <삭발 해프닝>을 보여주었다. 해프닝과 이벤트의 만남으로도 유명한 이 퍼포먼스는 초연사진과 이건용의 글을 통해 그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40) 위의 글. 41) 이건용(1980), p.20. 42) http://mimescope.blog.me/50165174631 12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21
정찬승이 무대 위의 의자에 앉으면 이건용은 넓은 천을 가운데를 뜯어 정찬승의 얼굴 부분만 나오게 씌우고 그의 손이 나오도록 양쪽에 구멍을 낸다. 그러면 정찬승은 장발의 미학 이라는 그의 글을 읽어가며 이건용은 가위로 그가 가장 아끼는 것 중의 하나인 그의 머리를 잔인(?)하게도 싹둑싹둑 잘라가는 것이다. 잠시 후 정찬승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싶으면 누구나 나오라고 한다. 이때 많은 남녀 관객은 참여한다. 정찬승의 머리카락이 전부 잘리우자 이건용은 정찬승이 쓰고 있던 천을 일정 면적으로 잘라내면서 그 잘라낸 천에 정찬승의 머리카락을 일정량만큼 싸서 정찬승이 앉아있는 주변에 원형으로 놓는다. 그러면 정찬승은 그것에 자신의 사인을 하고 희망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43) 1978년 9월 제4회 대구현대미술제 가 열렸고, 9월 24일 가창면 냉천에서 강정헌, 김문자, 김성구, 김연환, 김영진, 김용민, 도지호, 문범, 이강소, 이건용, 이상남, 이영배, 장경호, 황현욱 등이 이벤트를 선보였다. 강정헌은 <선택>을 발표하였다. 영남일보 는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초연사진은 없다. 강정헌씨의 선택 은 인간의 흔적이 남은 부분을 선택하여 그것을 작업장의 선으로 한정한 후 천에 접착제를 묻혀 땅에 뒤집어 씌워 들어낸 후 천에 묻고 남은 것들은 분류해 놓는 행위를 통해 자연과 인간과의 무의도적인 관계에서 형성되는 상황을 분석했으며 ( 영남일보, 1978년 9월 27일) 김문자는 <다듬이 소리-08-78>을 보여주었다. 매일신문, 영남일보, 조선일보 등이 보도하였다. 초연사진은 남아 있다. 이 이벤트를 보았던 장석원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김문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그녀는 과거의 해프너(happener)였다. 오랜 침묵을 깨고 그녀가 두들긴 방망이는 대구 교외 냉천 천변을 울렸다. 자갈밭 위에서 그녀가 두들긴 방망이 소리는 멀리서 같이 두들기는 진짜 빨래를 하는 아낙네의 것과 닮았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김문자가 두들기는 방망이 짓은 행위미술의 언저리를 두들기는 것이다. 44) 김성구는 <성구의 대구 나들이>를 발표하였다. 김성구의 홈페이지를 보면 이 이벤트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사진이 실려 있다. 45) 조선일보 는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판토마임을 하는 연극인 김성구씨는 전시장에서부터 냉천에 이르는 동안 자신의 작품발표회를 알리는 포스터를 뿌림으로써 페이퍼 디어터를 연출했다.( 조선일보, 1978년 9월 27일) 김연환은 <무너지는 소리>를 보여주었다. 영남일보 와 조선일보 가 보도하였고, 초연사진은 없다. 김미경은 아래와 같이 이 이벤트를 설명한다. 개울 한복판 자갈밭에는 <위험>이란 글자가 새겨진 신호판을 세우고 수성페인트로 둥근 원을 그린 후 명상의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그 신호판 밑에는 또 (주) 냉천개발 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선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 가 들린다. 그것은 우리의 안에서인가, 밖에서인가?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새로운 우리의 장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46) 김영진은 <풍선 이벤트>를 행했다. 영남일보 와 조선일보 가 이 내용을 보도하였다. 초연사진은 몇 장 남아있다. 김영진씨는 풍선에 참가자들의 이름을 써넣은 종이를 매달아 가을 하늘로 날려보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조선일보, 1978년 9월 27일) 김용민은 <무한대의 공간과 선의 해방>를 발표하였다. 매일신문, 영남일보, 조선일보 등에 보도되었다. 초연사진은 남아있다. 김용민씨는 두 개의 흰 끈으로 나무와 나무사이를 연결, 두 끈이 만나게 한 다음 다시 다른 방향으로 계속 나무사이를 이으면서 펼쳐나가는 행위를 전개했는데, 작가자신은 갇힌 상태에서의 만남을 변증법적으로 파괴 광대무변한 공간으로의 출발을 표현해본 것 이라고 풀이했으며 흰 페인트로 타원과 짧은 일직선을 그리고 그 타원 속에 가방 돌 나뭇잎동을, 일직선상에는 카메라를 배열한 뒤 구두로 퍼온 냇물을 끼얹고 사진촬영을 해보인 용민씨는 대상을 선택해 사진으로 재현해 보았다 고 코멘트하기도.( 매일신문, 1978년 9월 27일) 도지호도 이벤트를 행했는데, 그 제목을 알 수가 없는 상태이다. 영남일보 와 조선일보 가 보도하였지만, 초연사진은 발견되지 않았다. 도지호씨는 분무기로 비닐수지를 뿜어 자갈밭에 거미줄 형상의 땅을 얽어놓아 공간속의 상황 을 표현했다.( 영남일보, 1978년 9월 27일) 문범은 <See & Look>을 보여주었다. 이 이벤트를 위해 문범이 그린 드로잉과 초연사진은 문범의 도록에 실려 있다. 47) 영남일보 는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문범씨는 흰 페인트로 구획된 공간속에 사진으로 잡은 영상 중 임의대로 고른 물질(돌 가방 등)을 재현해 보임으로써 대상의 표현방법을 새롭게 발견해 내었다.( 영남일보, 1978년 9월 27일) 이강소는 <무제>를 발표하였다. <무제>는 <수탉 이벤트>, <가창 이벤트>로 불리기도 하였다. 매일신문, 영남일보, 조선일보 등에 보도되었고, 초연사진은 여러 장 남아 있다. 매일신문 은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이강소씨는 닭에 엎지른 흰 페인트를 묻게 해 걷게 함으로써 그 흔적을 보인 뒤 그 흔적이 묻은 돌들을 물속에 던져넣고 닭과 자기의 손을 씻는 행위를 보여주었으며( 매일신문, 1978년 9월 27일) 43) 이건용(1980), p.20. 44) 장석원(1979), p.10. 45) http://mimescope.blog.me/220051906137 46)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시공사, 2003, p.239. 47) MOON BEOM, 갤러리 시몬, 2011, pp.282~283. 12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23
이건용은 <울타리와 탈출>을 보여주었다. 매일신문, 영남일보, 조선일보 등이 보도하였고, 초연사진도 많이 남아 있다. 매일신문 은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이건용씨는 모래사장에 말뚝을 세우고 흰 끈을 말뚝과 자신의 몸에 연결 원을 그린 다음 다시 자신의 발목을 말뚝에 묶어 포복으로 원을 그린 뒤 물위에 집을 짓고 말뚝 주위의 원과 물속의 집주위에 울타리를 만드는 행위를 전개해 보였다.( 매일신문, 1978년 9월 27일) 이상남도 이벤트를 발표했으나, 현재 제목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초연사진도 발견하지 못 하였다. 다만 김미경은 이 이벤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기록하였다. 큰 돌은 큰 돌대로 작은 돌은 작은 돌대로 또 빛깔이 같은 것만 골라 돌무덤을 쌓은 이상남 48) 이영배의 이벤트 제목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매일신문 과 영남일보 에 보도되었지만, 현재 초연사진은 없는 상황이다. 영남일보 는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이영배씨는 횟가루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선을 그어 나감으로써 땅에는 선이 났으나 흐르는 물에 그어진 횟가루는 흘러가버렸다. 이씨는 이를 통해 환경적인 데다 작가가 오브제를 사용해서 표현해줌으로써 강한 현상적인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영남일보, 1978년 9월 27일) 장경호의 이벤트 제목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다. 초연사진도 발견된 것이 없다. 영남일보 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장경호씨는 주위에 흩어진 돌들을 모아 공간의 구획을 이룬 후 그 속에 들어갔다가 그 돌들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갖다놓음으로써 원래의 현상에 행위가 첨가함으로써 이루는 의미를 들추어내고 있다.( 영남일보, 1978년 9월 27일) 황현욱은 <돌글 이벤트>를 발표하였다. 매일신문, 영남일보, 조선일보 등에 보도되었고, 초연사진도 남아 있다. 매일신문 은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따라서 남아있는 사진을 토대로 이건용이 한 이벤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6월 10일에는 <횟가루와 끈>, <건빵 먹기>, <색종이와 분신>, <장소의 논리>, <선 잇기>, <달팽이 걸음>, <손의 논리> 등이 행해졌다. 이중 <횟가루와 끈>, <선 잇기>, <달팽이 걸음>이 신작이다. 현재 <횟가루와 끈>과 관련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없다. 이에 대해 작가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남계화랑 구석에서 했어요. 흰 양회( 洋 灰, 시멘트) 부대를 풀어서 양회를 보여줘요. 붓기 전에 코너에다가 못을 박아서 끈을 늘어뜨린 다음에 그 위에 횟가루를 붓는 겁니다. 그럼 횟가루가 쌓이잖아요. 그리고 밖에서 그 끈을 휘저었어요. 그러면 처음에 횟가루가 쌓여 있다가 점점 낮아지면서. 그리고 흔적이 남잖아요. 어떤 물질감, 부피를 가지고 있는 분말 형태의 사물을 끈이라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운동시켜 그것을 바닥과 일체화되고 평평하게 만드는, 그런 어떤 물리적 현상을 보여주는 겁니다.(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선 잇기>는 작가가 자신의 소지품을 꺼내 한 줄로 늘어놓는 이벤트이다. <선 잇기>는 같은 해 7월 제5회 대구현대미술제, 10월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에서 재연된다. <선 잇기>는 후에 <이어진 삶 79-2>로 개칭된다. 50) 그리고 이건용의 이벤트 중 가장 유명한 <달팽이 걸음>이 발표된 것도 바로 남계화랑 개인전이었다. 이건용은 <달팽이 걸음>을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에서 다시 공연한다. <달팽이 걸음>은 널리 알려진 작업이라서 본고에서는 그 내용을 생략한다. 한편 6월 16일에는 <기계인간>, <얼음과 백묵>, <나이 세기> 등이 행해졌다. 이중 <기계인간>이 신작이며, <기계인간>은 후에 <이건용은 발신하라>로 개칭된다. 현재 <기계인간>과 관련된 텍스트는 발견된 것이 없다. 이 이벤트에 대해 이건용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도판 7~9) 몸을 휴지로 붕대처럼 전부 감아요. 몸 가운데에 녹음기를 넣은 채로. 내가 들것에 누워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들고 전시장 안쪽으로 가요. 거기에 나를 내려놓으면, 내가 녹음기 버튼을 눌러요. 그러면 이건용은 발신하라 오버, 이건용은 발신하라 오버 가 계속 나와요. 마치 이건용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이건용과의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물속의 돌을 꺼내 페인트로 숫자를 적어 다시 물속에 넣는 작업을 되풀이한 황현욱씨는 물에 의해 행위의 흔적은 지워지고 관념과 숫자개념만 남는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창작행위의 무상성을 암시해주는 듯했다.( 매일신문, 1978년 9월 27일) 1979년 이건용은 1979년 6월 대전 남계화랑에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벤트는 10일, 12일, 14일, 16일에 행한 것 같지만,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10일과 16일뿐이다. 49) 도판 7. <달팽이 걸음>, 1979.6.10. 도판 8. <기계인간>, 1979.6.16. 도판 9. <얼음과 백묵>, 1979.6.16. 48) 김미경(2003), p.239. 49) 이건용의 작가 노트에 의하면, 12일에는 <다섯 걸음>, <선 잇기>, <장소의 논리>, <달팽이 걸음>, <손의 논리> 등을, 14일 에는 <신체드로잉 76-1>, <신체드로잉 76-2>, <신체드로잉 76-4>, <신체드로잉 76-5>, <신체드로잉 76-7>, <달팽 이 걸음> 등을 실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50) 1976년 4월 4인의 이벤트 에서 발표한 <고무줄 감기>는 이후 <이어진 삶 79-1>로 개칭된다. 12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25
1979년 7월 8일 제5회 대구현대미술제 의 일환으로 강정에서 이벤트가 펼쳐졌다. 이건용, 김정태, 문범, 김용민, 김수자, 구마가이 고이치로 등이 참가했다. 이날 이건용은 <선 잇기>와 <장소의 논리>를 행한다. 그런데 이때의 <장소의 논리>는 1975년 발표된 <장소의 논리>와는 다른 이벤트이다. 물론 비슷한 점은 있다. 이후 작가는 이 이벤트를 <여기, 저기>로 개칭한다. 이건용은 <선 잇기>를 먼저 보여주었고, 매일신문 과 영남일보 가 이 이벤트를 취재했다. 이벤트를 촬영한 사진도 여러 장 남아 있다. 이강소는 아래와 같이 <선 잇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건용이 미루나무 뿌리 한줄기가 뻗어나간 방향으로 모래를 헤치며 자기 키만큼 뿌리를 노출시키다가 그 한쪽 끝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나아가며 주머니 속의 소지품을 하나 하나 꺼내어 가지런히 놓는다. 성냥, 볼펜, 지전, 동전, 껌 모두 꺼내놓고는 자기도 엎드려 뻗쳐 땅위에 내놓아 버린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일어나 아까 한 방법과 반대로, 꺼내 놓은 물건들을 도로 집어넣고 파 놓은 땅도 다시 메워 버리고는 딴 쪽으로 가버렸다. 51) 이어서 이건용은 <여기, 저기>를 보여주었다. 이강소의 글, 이건용 76 노트, 동아일보 기사, 초연사진 등을 통해 진행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작업복 차림의 이건용씨 들고 온 말뚝을 조심스레 모래를 파고 박는다. 말뚝을 기점으로 자로 7m쯤 재더니 끈을 말뚝에 걸고 걸음을 옮기면서 말뚝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손짓을 하며 거기, 여기, 저기 라고 중얼거린다. 끈을 팔에 걸고 말뚝을 구심점으로 심각한 표정을 한 채 터벅터벅 돌기 시작한다. 모래 위를 걷다가 여울에 첨벙거리기도 하는 단조로운 원 운동이 6,7회 반복되더니 뜀박질로 이어간다. 몇 바퀴를 돌았을까, 끈이 풀려지자 말뚝을 향해 걸어 들어와 멈추면서 하늘을 향해 팔을 뻗는다. 두 손가락은 하늘을 찌르고 눈은 허공을 응시하다가 말뚝으로부터 떨어지면서 여기, 거기, 저기 하고 내뱉더니 어디, 어디 를 연발하면서 말뚝 주위를 뱅글뱅글 돈다. 이윽고 말뚝을 뽑아 들면서 이벤트는 끝난다.( 동아일보, 1979년 7월 10일) 이건용의 작업이 끝난 다음, 저쪽 강물 가까이 모래위에 문범이 자기 키만한 나뭇가지 하나를 꽂고는 10여 미터 되는 노끈으로 양은그릇과 나무와 연결시켜 묶고는, 그릇을 물 위에 던져 버린다. 그릇은 줄에 매달린 채로 강물 위로 서서히 떠내려간다. 문범이 그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첨벙첨벙하며 들어가 그릇을 손에 들고 물을 가득 퍼서는 나뭇가지를 응시하다가 눈을 감고 그곳을 향하여 똑바로 걸어가서는 나뭇가지가 있는 장소로 예상되는 곳에 서서 눈을 뜬다. 그리고 실제 있는 장소와 자기가 겨냥해서 온 장소를 번갈아보며 자기가 선 곳에 물을 쏟아버린다. 그는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해 본다. 52) 김용민과 김수자는 <2인의 이벤트를 위한 공간>을 보여주었다. 매일신문 기사, 영남일보 기사, 이강소의 글을 통해 진행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몇몇 사람들의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 이미 서울에서 출발한 시각부터 작업의 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김용민, 김수자는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작업을 계획했다. 그들 두 사람은 제각기 떨어져서 일상적인 행위를 하면서 자기들의 행위를 메모하기도 하고, 강변이나 들판에 버려진 여러 가지 잡동사니, 풀줄기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을 수집하기도 해서, 화랑(매일화랑) 안에 나란히 제각기의 방을 구획 짓고, 자기가 한 메모지랑, 갖가지 모은 물건들을 그 방에다 붙이기도, 걸기도, 놓아두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작업은 전시기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었다. 53) 1979년 7월 17일 비디오라이프스튜디오에서 장석원은 <난간의 이벤트>를 행했다. 이 이벤트에 대해 장석원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행위와 영상을 결합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저와 와이프가, 서로가 서로를 묶어서 완전히 동여매고, 더 이상 묶을 수 없는 단계에서 끝나는 거예요.(장석원과의 인터뷰, 2015년 10월 13일) 김정태는 <이벤트 79-7 8>를 선보였다. 영남일보 기사, 동아일보 기사, 이강소의 글, 초연사진 등이 남아 있다. 김정태란 이름의 미술가가 반반한 포퓰러 숲 잡풀 위에 얇은 비닐포를 3m쯤 길이로 죽 폈다. 가장자리를 손으로 다독거려 비닐포를 팽팽하게 고정시킨 뒤 주머니에서 매직펜 을 꺼냈다. 그리고는 비닐포 위로 건너비치는 풀잎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닐포 위에 모습을 그린 풀들은 하나하나 뽑아서 비닐포 내에 담았다. 이런 작업이 오후 1시 35분쯤까지 이어졌다. 네시간 35분간의 작업이 끝나자 비닐포 위에는 갖가지 모양의 풀들이 평면으로 나타나 벽지 무늬를 닮았다. 작업을 마치자 비닐포를 둘둘 걷어 풀을 넣은 비닐포대에 넣은 뒤 강변 모래벌을 후벼파고 묻어버렸다. 그리고 말없이 돌아섰다.( 영남일보, 1979년 7월 10일) 문범은 <본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매일신문 기사, 초연사진 등이 남아 있다. 이강소는 공간 에서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51) 이강소, 내일을 모색하는 작가들, 공간, 1979.9., p.72. 52) 위의 글. 53) 위의 글, pp.72~73. 12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70년대 중 후반의 이벤트 127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장석원 대담 일시: 2015년 11월 27일(금) 17:00~18:00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미술연구센터 김인혜(사회):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장석원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자 합니다. 장석원 선생님은 지금 이 자리에는 작가로 모셨지만, 그 당시 자료에 선생님은 미술평론가로 나와요. 미술평론도 굉장히 많이 쓰셨고, 기자 역할로 기록도 많이 해주셨고, 그리고 스스로 이벤트도 많이 한 작가였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미술행정가로 전북도립미술관 관장으로 계시거든요. 이 시대의 증언자로서, 또 어떤 면에서는 참여자로서, 어떤 면에서는 한 걸음 멀리서 이것을 객관화하는 시각 등, 여러 가지로 저희에게 조언 말씀을 많이 해주실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소감이라든지 지금까지 못다한 얘기들을 류한승 선생님이 질의 응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장석원 선생님을 소개해드립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 류한승(이하 류): 오래 기다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금 소개해드린 대로 선생님께서는 현재 전북도립미술관 관장님이시지만 사실 이론가셨고, 그 당시에는 전위미술을 이끄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미술을 시작하기 위해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즉 고등학교 때는 법대 지망생이셨는데, 의대 시험을 보셨고 그러다가 절에 들어가시고, 그리고 나서 미술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장석원(이하 장): 지금도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가가 직업이 되기 어려운 시절인데, 제가 예술계에 입문하려고 할 때 예술가는 뭐랄까, 그야말로 직업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회적으로 거의 의미가 없는, 그래서 굶어 죽는, 뭐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예술을 하고 싶다고 하니까, 저희 아버님은 교육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으셨던 분인데도 절대로 하지 말아라. 의과 대학을 가라 해서 의과대학을 가려고 실제로 준비도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예비고사 발표 날 눈이 펑펑 내리는데, 의사가 돼서 나이가 한 40대 후반쯤 에 하얀 가운을 입고 환자를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그 길로, 제가 한때 불교에 심취해 있을 때라, 절로 들어가서 차라리 중이 되겠다 해서.(웃음) 그때 해안스님이라고 전라북도에 큰 스님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스님이 법회할 때 가서 인사도 드리고, 스님 옷도 빌려서 위에 입고는 법회를 듣고 있는데, 그 당시 의과대학을 다니던 저희 형님이 방학 때 오셔서 집으로 돌아가자 그래요. 못 간다 했죠. 스님 옷이 잘 찢어지잖아요. 밀당을 하다가 옷이 다 찢어지고, 결국은 저를 끌고 가지 못했어요. 제가 다른 절에 있었더니 저희 아버님이 밤에 불교 선배님과 같이 와서 너 미술대학 보내줄 테니까 돌아가자 해서 순순히 따라와서 비로소 미술을 공부를 하게 된 거죠. 아마 지금은 예술가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매력 있는 직업이 될 수도 있어요. 예술가와 신부는 직업이 아니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그런 것 같아요. 예술가도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라기보다는, 예술을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보통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술로 드러내고 그것에 공감하고, 거기서 얻어진 가치가 어떤 경우에는 하늘을 찌르는 그런 매력이 있기 때문에 예술을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류: 선생님께서 좀 간략하게 얘기해주셨는데, 사실은 스토리가 더 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튼 선생님은 그렇게 해서 대학을 들어가신 거잖아요. 홍대 서양화과에 들어가셔서는 주로 어떤 것에 관심이 있으셨고 어떤 것을 공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장: 저는 반대 과정이 너무 길어서 제대로 석고 데생을 할 시간이 없었어요. 의과대학을 준비했기 때문에 학력은 높았는데 실기는 너무 짧게 준비를 해서 가장 거칠고 못 그렸어요. 홍대 회화과에서 가장 못 그리고 가장 시커멓게 그리는 그런 학생이었지만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그 동안 제가 다니던 전주고등학교에서는 공부만 너무 시켰어요. 거기에 질려서 공부가 아닌 다른 데에 관심을 많이 가진 것 같습니다. 그중 하나가 불교였고, 음악이라든지 철학, 또 예술이란 것도 단순히 기능적으로 잘 그린다기보다는 예술에 대한, 특히 현대미술은 여러 사유적인 면들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때는 그런 정보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자란 부분들을 현대철학이라든지 다른 분야에서 많이 찾았고, 그런 것들이 미술을 단순히 어떤 조형적인 측면으로 몰아서 보지 않고 포괄적으로 보는 계기를 주었다고 봅니다. 도판 1.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장석원 대담, 장석원(왼쪽), 류한승(오른쪽) 12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장석원 대담 129
류: 그때 선생님께서 공부하셨던 게 현상학인가요? 어떤 것을 주로 하셨나요? 장: 네. 그 당시 특히 현대미술하는 사람들이 현상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까 이건용 선생님 얘기도 나왔지만,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이건용 선생님이 아현동에 동양미술학원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저 같은 사람이 와서 논쟁을 했죠.(웃음) 일종의 젊은 혈기에 가서 현대미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쟁을 하고, 힘에 부치니까 다시 돌아가서 공부를 더 해서 2, 3일 있다가 또 쳐들어가서 논쟁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럴 때도 현상학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이우환 씨가 쓴 글을 보면 만남의 현상학 이란 말이 나오잖아요.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현상학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걸 동양적으로 변용시켰다고 봐야 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후설이 말하는 현상학에도 관심이 있었고. 이건용 선생님 이벤트를 보면 논리성 이 많이 등장해요. 자기의 행위를 객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논리성을 끄집어냈는데, 그 배면에는 현상학적으로, 현상학은 어떤 주관적인 선입견 없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게 있는데, 그런 것을 방법론적으로 논리성을 끌어내지 않았나 합니다. 한때 같이 초기의 이벤트를 할 때, 그렇게 몇 차례 논쟁 끝에 너 우리 ST에 좀 들어와서 활동했으면 좋겠다 해서 들어가서 보니까, 아마 ST 그룹에서도 이벤트를 몇 작가들이 주도해서 할 때에요. 그 중심에 이건용 선생님이 있었고. 그런데 저도 관심이 있으니까 같이 밤새도록 골방, 특히 성능경 선생님 자택에 있는 골방에서 밤새도록 담배 피우면서 몇 차례 토론을 하다가 4인의 이벤트 (도판 2), 3인의 이벤트 를 하게 된 것이죠. 그게 저한테 계기가 돼서, 저희 초기 이벤트에도 논리성이나 불교의 선사상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논리적인 프로세스의 모순, 이런 것들을 드러내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70년대 <혼인의 이벤트>(도판 3)를 하게 되면서, 그때 치열하게 생각했던 것이 삶과 예술이 일치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실제 제가 <혼인의 이벤트>를 통해서 결혼을 했거든요. 그것이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히 주목을 받았습니다. 예술이라는 도판 2. 4인의 이벤트 포스터, 김용민, 성능경, 이건용, 장석원 참가, 1976년, 서울화랑 도판 3. 혼인의 이벤트 초청장, 1977년 4월 2일 오후 3시, 서울화랑 것이 삶과 일치하고 사회적인 문제의 하나로, 사회와 분리되어서 쓸쓸한 이름으로 자꾸 박제화되는 것보다는, 사회와 사회적인 문화와 일치되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 그런 점에서 점점 그런 논리성이나 현상학하고는 조금 거리가 멀어지지 않았는가 생각이 듭니다. 류: 제가 여쭤볼 것을 선생님이 미리 다 조금씩 말씀을 해주셔서 조금 앞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건용 선생님이 동양미술학원 하실 때, 이건용 선생님이랑 어떤 논쟁을 하셨고, 이건용 선생님이 그 당시 어떻게 보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장: 이건용 선생님은 제가 20대 때 만났으니까 선생님은 30대였고, 파리 비엔날레 에 참가해서 한국 현대화단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스타 작가였죠. 그리고 철저히 자기 논리성이나 자기 세계를 확고하게, 단순히 어떤 자신의 작가적 입지를 다진다기보다는 큰 논리를 통한 철학화, 이런 분야에 명석한 분이었어요. 그래서 나같이 젊은 후배가 찾아가서 논쟁을 할 때도, 권위적으로 누르지 않고 대화 형식으로 치열하게 논쟁을 했었거든요. 지금 군산에 사시거든요. 제가 전북도립미술관에 있고, 이건용 선생님은 이 미술관의 운영위원장이십니다. 군산대학교에서 정년을 하시고 군산에 머물러 사시지만,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작가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류: 선생님께서 1975년 12월에 3인의 이벤트 에 참여하신 계기를 말씀해주셨잖아요. 선생님께서는 다른 작가들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려고 하셨는지요?, 불교를 잠깐 언급해주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장: 저는 전위성이라고 하는 것, 그 당시는 가장 전위적인 것이 행위미술이었어요. 이건용 선생님의 이벤트는 현상학이나 논리성, 논리적인 프로세스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것이거든요. 말하자면 <장소의 논리>에서도 원 하나를 그려놓고 바깥에서 가운데를 가리키고 저기 했다가 가운데 들어가서 여기, 그 다음에 또 원 밖에 나와서는 거기, 이런 식으로 장소 하나를 놓고 논리적인 프로세스를 아주 정확하게 얘기를 해요. 그런데 제 정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동양적인 파격성이라고 할까요? 동양의 선사상을 보면 그보다 더 파격적이고 간명하고 가슴에 와 닿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선불교 화두 몇 가지 장면들을 들춰보시면 이미 동양의 문화권은 논리를 초월하는 논리랄까? 그런 정신적인 것들이 있어요. 그것은 단순히 논리의 형식이 아니라 가슴에 탁 와 닿거든요. 그런 것들이 저한테 더 크게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예술을 통해서 그런 정신적인 면과 삶의 문제 이런 것을 일체화시키면서 실현할 수 있는 길, 그런 것들을 저도 모르게 추구해왔던 13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장석원 대담 131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았던 그 당시 1970년대 후반은, 잘 아시다시피 굉장히 권위적인 유신시대였고, 제4집단 의 사회적인 퍼포먼스를 미속을 해치는 행위로 취급해서 단속하고 금지시키고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였는데, 그런 측면에 대한 반발도 우리가 그런 행위를 통해서 얘기할 수가 있거든요. 직접적으로는 얘기 안 하지만. 그래서 1980년대 초에 제가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장석원 이벤트>나 <생명의 이벤트>, 이런 것들을 할 때 그런 것들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들을 무대에서 펼쳐요. 당시에는 무대에서 돈을 받고 관객들에게 행위예술을 보여주었는데, 그중 하나를 보면, 초록색 보자기에다가 사과를 담아서 무대 가운데에 쌓아놓고, 제가 벙거지 모자 같은 걸 쓰고 나타나서 사과 보자기를 열어서 사과를 관객을 향해서 던져요. 관객이 이렇게 삥 둘러 앉아있거든요. 관객이 앉은 벽면에다가 던지는 그런 행위라든지. 조용필의 꽃피는 동백섬에 하는 <돌아와요 부산항>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유행가죠. 네 명의 사람을 동원해서 그분들이 낮은 단계부터 점점 한 단계씩 높여서 나중에는 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거의 악을 쓰듯이 그 노래를 하다가 소리가 안 나오니까 그치는 그런 행위를 했었어요. 그때 삼일로 창고극장에 이원경(연출가) 선생님이 그걸 보시고 굉장히 감동을 받아서 제3세계 연극제 에 제 행위미술을 참가시키죠. 그것이 <생명의 이벤트>입니다.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데, 시대가 정권 교체기였고 군부정권이 집권하면서 굉장히 어수선하고 데모대가 다니고 할 무렵이었는데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올 정도로 관심을 가졌거든요.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예술을 통해서 공감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어쩌면 시대가 위기상황이나 어수선할 때 더 예민하게 전위적인 의식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젊은 분들이 1960년대, 70년대 실험미술에 관심을 갖고 오신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시 말하자면 현대 한국학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 그런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저는 젊은 세대들을 아직 잘 몰라요. 그런데 젊은 세대들이 아주 개인적이거나 돈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 같은데, 오히려 1960년대, 70년대라는 이미 잊혀진, 우리 자신이 하긴 했지만 잘 기억도 안 나는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고 끝까지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지금 이 자리가 현대 한국학이 점점 힘을 받는 그런 현장인 것 같아요. 김미경 선생님이 1960~70년대의 주류에서 벗어난 실험미술을 연구해서 박사논문을 쓰시고 그랬는데, 사실은 그런 활동이 없으면 다 잊혀져서 없어지고 주간지에나 짤막하게 남을 것들인데, 거기에 주류가 말하지 못하는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미경: 궁금한 게 많지만 시간상 간단히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그 당시에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잖아요? 또 현장에 계셨고, 많은 사람들의 활동을 곁에서나 직간접적으로 지켜보신 증인이시구요. 그런 입장에서 보셨을 때, 당시 소위 행위, 퍼포먼스를 하셨던 분들의 행위들이 극히 몇 사람 외에는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고 할까요? 그런데 그것을 쉽게, 어떻게 보면 너무 일차원적으로 마이너리티가 되었지만, 그 당시의 사회를 일궈내는 데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라고 보았지만, 지속성을 갖지 못한 요인들을 현장에 있었던 체험자의 입장에서 선생님께서 어떻게 느끼시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그런 현상이 있었지만, 일본 같은 경우는 또 다르고, 일본은 우리와 정치사회 현실이 다르니까 또 다른 경우가 있었겠지만, 서구는 더 더욱이나 다르고요. 다른 나라들과 다른 경우가 많은데, 타이완 같은 경우에는 우리와 비슷한 사회체험이 있는데도 저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활동들이 많이 남아 있더라고요. 우리 경우에는 그런 자의식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솔직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장: 제가 만나본 행위예술가 중에 가장 멋진 사람은 정찬승 씨가 아닌가 싶어요. 뉴욕에 갔을 때, 물론 뉴욕 가기 전에 한국에서 제가 함께 그룹전 같은 걸 했었는데, 오픈 날이면 망토 같은 걸 척 걸치고 나타나세요. 대선배님이시거든요. 아마 이건용 선배님하고 비슷하거나 더 선배님. 그런데 스타일이 전혀 틀려요. 이건용 선생님은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웃음) 지금도 만나면 아주 논리적으로 말이 마치 녹음테이프 돌아가듯이 계속 나오거든요. 그런데 정찬승 씨는 우선 생김새부터 키도 크시고, 아주 멋쟁이예요. 원래 태생부터 대지주 집의 손자라서 평생 자기가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평생 작품,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걸 실현해가면서 살아간 분이죠. 오프닝 날 선배가 오셔서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자기 의견을 말하고 그러셨어요. 벌써 한 30여 년 전에 제가 뉴욕의 현대미술을 연구하려고, 전남대 교수된 지 얼마 안 돼서 미국에 갔을 때, 한 6개월 정도 있는 동안 정찬승 선생님이 저를 뉴욕 곳곳의 전위적인 현장을 다 안내해주셨어요. 거기서 본 정찬승 선생님은 그야말로 삶 자체가 전위적이었어요. 예를 들어, 이건용 선생님이나 이런 분은 자기 기록을 빠짐없이 노트로, 사진으로 다 남겨놓잖아요. 이분은 남겨놓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삶 자체가 작품인 거죠. 없어지면 없는 거고 그런 거예요. 이 방보다 더 큰 작업장을 얻어서 정크아트를 한다고 뉴욕에 고물상이나 이런데 다니면서 관심 있는 고철덩어리를 갖다 놓고 그것을 연결해서 소리도 나고 빛이 움직이고 하는 그런 작업을 하셨어요. 스튜디오 전체가 어떻게 보면 쓰레기장이고 어떻게 보면 키네틱아트 현장처럼 꽉 차있었거든요. 거기가 뉴욕에 있는 예술가들의, 특히 한국 사회의 중심지였어요. 거기 있으면 사람들을 다 만나고, 일주일에 2~3일은 꼭 거기서 파티가 벌어지는 그런 현장이었거든요. 몇 년 후에 결국은 자기 몸 관리도 못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 끝에 병에 걸려서 일찍 가셨지만, 예술가로서 멋쟁이로서 제일 인상에 남는 분이 정찬승 선생이죠. 13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장석원 대담 133
물론 예술가도 자기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서 명예를 추구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벌입니다만, 그보다는 예술가는 예술가적인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예술가답게. 유명하건 유명하지 않건, 기록에 남건 남지 않건,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도 못하는 것을 류 선생님이 다 기록을 갖고 거꾸로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다 파편을 찾아서 연구를 하거든요. 우리 한국사회에 그런 예술가들이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한국사회는 너무 경쟁이 치열하고 긴장감이 심하기 때문에 그런 틈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 진짜 예술가다운 예술가들이, 어떻게 보면 좀 미쳤다거나 퇴폐적이라고 해도 좋으니까, 예술가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좀 있으면, 그것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풍부하게 하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요. 저는 나이가 60대 중반 정도 됩니다만, 그렇게 예술가로서의 어떤 명예나 자료나 자기의 어떤 세계를 글로 남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술가답게 사는 것. 그런 것을 유지해가고 점점 더 그런 냄새랄까 느낌이 더 전달되게 하는 것, 이런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사실 이벤트보다 정찬승이나 정강자 씨나 김구림 씨가 했던 그런 것들이 사회적 충격이 더 크죠. 그런 것은 보도가 되고 잡지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이벤트 작가들 전부 자기 자신이 기록을 남겼어요. 그런데 퍼포먼스, 해프닝에 대해서는 전부 기자들이 쓰지 않았습니까? 사실은 이게 진짜 살아있는 기록 아니겠습니까? 그런 실험미술의 속성을 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내가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것을 두서없이 하면서 계량 없이 사는 사람도 있고, 마치 매일같이 가계부 쓰듯이 자기의 하루의 목표나 그런 것을 정리해가면서 사는 사람도 있고. 일상생활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행복이라든지, 행복을 추구한다고 했을 때, 행복은 자기 마음이 알고 있는 것이고 자기 마음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물리적으로 계량할 수가 없거든요. 그런 전위미술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현대사회에서는 누구에게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어떤 가치나 예술성이나 이런 것들, 예술가 입장에서 봤을 때는 거꾸로겠죠. 예술가 입장에서는 사회나 삶이나 유신 독재나 역사적인 굴복같은 것들이 보일 수 있겠지만, 거꾸로 지극히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도 예술을 얼마든지 음미하고 볼 수가 있는 거죠. 저는 똑같은 일이라고 봅니다. 질문에 대해 엉뚱한 대답을 한 것 같은데(웃음) 저 같은 경우만 해도 행위미술을 했지만 행위미술을 지속하지 않았거든요. 조금 활동하다가 <혼인의 이벤트>를 하고 군대를 갔었고, 2년 반 정도 하고 와서 <난간의 이벤트>, <장석원 이벤트> 같은 걸 했지만, 군대 가기 전 <혼인의 이벤트> 같은 이전의 행위미술하고는 전혀 틀려요. 그때의 이벤트에는 사회성,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 위기의식 이런 것들이 들어가 있거든요.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한 가지 길을 꾸준히 간다는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고 지루하게 느껴졌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현대사 자체가 한 가지 길을 가고 있지 않지 않습니까? 1970년대 말까지 한국 현대미술이 뭘 했냐 하면, 모노크롬부터해서 서울현대미술제 나 에콜 드 서울 이라고 해서 집체적인 경향을 띠었었거든요. 1980년대 와서 보면 민주화 운동 때문에 민중미술이 주류를 이루잖아요. 그 동안에 줄기차게 해왔던, 싸워 왔던 체계들이 하루아침에 다 무의미해지게 된 거죠. 그러니까 우리 한국 사회는 한 가지 방향으로 일관되게 싸울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고, 그것이 맞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나 그런 도판 4. 장석원, <난간의 이벤트>, 1979년 7월 17일, 공간 1980년 6월호 수록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그때그때 느낌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적응할 수 있는 것, 우리 한반도의 역사가 그렇듯이. 한반도는 중국하고는 다르죠. 중국은 어딜 가든 가게 간판에 중심 이라고 쓰여 있어요. 세탁소를 가도 그렇고 구멍가게를 가도 중심 이라고 쓰여 있거든요. 자기들의 무의식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봐요. 그런데 한반도의 역사는 중심이 될 수가 없죠. 항상 외침에 시달려왔고 변화에 그때그때 적응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그런 역사를 밟아왔기 때문에. 아까 현대 한국학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는 한국학, 현대적 관점에서 본 한국미술, 이런 부분들을 조금 더 그런 관점에서 드러낼 필요가 있지 않나? 제가 방금 잠깐 조성묵 선생님이 작품 설치하는 장면을 보고 왔어요. 그런데 이분이 담배를 너무 피우시다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휠체어를 타고 작품 설치를 지시하고 있더라고요. 그분만 해도 이른 나이에 홍대 조소과를 나오셨지만, 그야말로 거의 독학하다시피 자기 세계를 만들어왔고, 석조로 빛에 반사된 굴곡을 해서 큰 상도 받았고, 그 뒤에 메신저 라는 의자 시리즈로 묵상적인 것, 명상적인 것을 표현하셨어요. 이분도 굉장히 자기 변화를 추구해요. 청동으로 된 의자 형태, 즉 메신저가 한때 잘 나갔는데, 그걸 더 하지 않고 국수를 바닥에다 세워서 풀밭처럼 설치를 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놓는다든지, 소파 같은 의자를 놓는다든지. 조성묵 같은 조각가만 봐도 한 사람이, 의자면 의자 하나를 가지고 평생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집해서 간다고 하면 내가 보기에는 살아남지 못하고 죽어요. 왜냐하면 한국에서 정치인들이 사는 걸 보세요. 매일매일 말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같은 말을 한 일주일만 해보세요. 그 사람은 신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술도 제가 보기에는 같은 것이 아닌가? 또 우리들의 정서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13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장석원 대담 135
해봅니다. 조수진: 장석원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고요.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저의 소회와 다짐인데, 제가 제4집단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나 뵌 선생님들과 오늘 선생님 말씀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으신지. 그때 그분들이 하셨던 말씀이나 아직까지 갖고 계신 삶의 태도가 굉장히 인상 깊었거든요. 그분들께도 자료를 여쭤보면 하나도 남김이 없으시고 (웃음) 기록을 안 하시고 계시고. 그야말로 흐르는 대로 남겨두셨고, 저희가 찾아가면 너무나 설명을 잘해주셔서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걸 하나도 남기지 않으셨을까? 약간 의문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니까 제가 계속 공부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늘 생각하는 예술과 삶의 결합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 다다이스트부터 시작해서 처음 퍼포먼스를 했던 그분들을 계속 머리로 이해하고 공부하고 했던 게 그냥 한번에 이해가 되는 거예요. 삶 자체가 그냥 예술인데 굳이 뭘 남길 필요가 있느냐? 하신 그 말씀이 오늘 너무 인상 깊었고요. 그렇게 삶 그대로가 예술이 된 분들이 행위예술을 하신 분들이구나 하고 깨달아서 오늘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저희 같은 연구자들은 기록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행사나 여러 연구 기회를 통해서 저희가 많이 자료를 수집할 수 있게끔 오래오래 기억해주시고, 저희 곁에 계셔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장: 정찬승 씨가 한 유명한 퍼포먼스 중에 하나가, 서울 국립극장에서 했던 <피아노 위의 정사>라는 것이 있어요. 아마 공간 지 같은 자료를 보면 나올 겁니다. 서울국제현대음악제 인가요? 두 남녀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정사를 벌이는 퍼포먼스를 해서 경찰의 제재를 당하고 이런 장면들이 나옵니다. 저는 그 세대들이 그렇게 사회적인 충격을 주는 전위적인 행위를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을 겪었던 세대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전쟁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 의도와 상관없이, 예를 들어, 한국 전쟁만 해도 북한과 남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런 것이 치열하게, 자기들끼리만 싸운 게 아니라 미국과 소련, 중공까지 끼어서 싸운 거 아닙니까? 말하자면 그런 한국 전쟁 같은 치열하고 참혹한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개인으로서의 생존을 생각해보면, 아마 그런 걸 넘어갈 수 있는 해방공간이 필요할 겁니다. 다다이즘도 1차 대전이나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나오잖아요. 세상의 질서나 가치를 전부 부정하고 비웃고, 말하자면 세상이 무게를 두는 것과 전혀 틀린 것들만 나오잖아요. 그런데 아마 한국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앵포르멜 세대도 있지만 앵포르멜 세대는 주류를 형성했어요. 벽전 부터해서 제4집단 에 이르기까지, 거기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반항적이고 기성체제의 권위를 부정하며 일관되게 움직이는데, 한국 전위의 속성은 그런 배경을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1970년대 예술이 꼭 정치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유신체제라든지 이런 위기 상황에서, 거기에 순응해서 길들여진 것이 백색화 같은 집단개성이라면, 정찬승이나 이런 사람들이 말했던 행위성은 저항했던 것, 반항했고 그것을 좀 혼돈스럽게 몰아간, 사회적인 행위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질문자: 제가 아직 1학년이라 전위라는 단어에 대해서 많이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이유 없이 조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가 이 흐름을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도 전위적이라기보다는 실험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는데, 실험적인 예술이라든지 다다나 플럭서스 이런 미학들을 배우는데요. 이런 이벤트라거나 행위예술들이 혹시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맥락을 갖지 않고도 예술로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장: 1970년대 이벤트는 거의 정치에 개입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서 논리성, 논리적인 행위를 했다고 생각이 돼요. 정찬승이나 김구림 같은 분들이 오히려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서 행위를 했다면, 반대로 이건용, 성능경, 김용민, 또는 많은 이벤트 작가들은 정치성이나 사회성과 그것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논리성, 논리적인 행위를 했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그것은 관점에 따라서 무엇이 좋다, 무엇이 옳다 이런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한 개인에게 있어서 논리적인 행위가 필요할 때도 있고, 사람이 논리적인 또는 도덕적인 룰로만 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가끔 술도 먹고 노래방도 가고 데이트도 하고 그러지 않아요? 그런 것처럼 한 개인에게도 다 그런 양면성이 있거든요. 김미경: 선생님 말씀에 제가 부연설명을 해도 될까요? 선생님 말씀은 작가의 입장에서, 초기의 정찬승 같은 작가들은 정치현실에 직접적인 반응을 하면서 작업을 했던 작가라면, 후에 1970년대 이건용 같은 작가들은 오히려 정치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논리적인 작업을 했다.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100% 맞는 말씀이고요. 지금 질문하신 학생이 공부하는 입장에서 다다나 플럭서스를 공부하고 비교해보고 싶은 취지라고 생각해요. 그 차이가 어디 있을까, 그런 취지에서 제가 부연을 조금 해드린다면, 다다나 플럭서스는 서구의 사회 배경이 있죠. 예를 들면,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서 무정부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스위스에서 모였다든가, 1960년대 플럭서스는 독일이나 유럽을 중심으로 새로운 68혁명 세대의 어떤 저항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저항정신을 표출하는데 있어서 자유로웠어요. 중립국에 가서 하기도 했고, 유럽이라는 68혁명정신 아래에서 움직였던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발언이나 이런 것들을 탄압 이전에 자유롭게 13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장석원 대담 137
발언할 수 있었고 그 반항적인 기질을 즐겼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1970년대가 굉장히 엄격했어요. 겨울공화국이라고 불리는 유신시대는 모든 정치발언이나 사회집회가 금지되어 있었던 시대에요. 그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속성을 이해해야 해요. 우리는 그들과 다른 사회상황이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엽 유신이 나오기 이전까지, 유신헌법이 나온 72년 직전까지는, 정찬승 같은 작가들이 굉장히 자유롭고 분방하게 자기 발언을 하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그걸 제가 한국의 실험미술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1972년 유신 이후에는 급속도로 냉각이 됩니다. 아예 작가들 스스로가 그런 정치현실에 개입했다가는 소위 안가에 끌려가서 탄압받거나 뒷조사를 받거나 고문당하거나, 이런 것들이 예견돼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예술가가 밥 벌어 먹고 살기가 어려운데 그런 현실을 오히려 냉소적으로 부정한다든가, 거리를 둔다든가, 내지는 역설적으로 무감동해진다든가. 사회적인 발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직격탄을 맞기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자기논리, 예술논리 안에서 미술개념을 탐구하고, 그 안에서 퍼포먼스나 행위의 의미를 찾고, 논리성이나 서구 퍼포먼스와 변별성을 갖는 자기 독자적인 퍼포먼스를 개발해내는 어떤 예술적인 행위로 더 집중됐다는 말씀이신 거예요. 장: 맞습니다. 한국의 전위는 서양 전위하고 다르고, 우리가 전위라고 하는 것은 물론 유래는 서구 다다이즘 이런 데서 왔겠지만,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안 맞아요. 우리의 전위는 따로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전위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권위적인 어떤 제도나 질서 이런 것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 몸부림 과정에서 예술의 영역이 다른 영역하고 접촉하고 그 영역을 확장해가고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거든요. 제가 아까 예술과 삶의 문제, 예술과 삶이 일치해야 된다. 사실은 순수예술 개념에서는 예술은 예술이고 삶은 삶이어야 해요. 분리가 되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전위에 있어서는 예술이 시대와 같이 가야하고, 시대를 앞서 가야하고, 삶과 일치되어 삶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예술로 할 도판 5.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심포지엄, 왼쪽부터 조수진, 장석원, 류한승, 김미경 수 있고, 이런 일들을 벌이게 되고, 미술이 미술이라는 영역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까 제4집단 에도 보면 연극이 들어와 있고, 패션이 들어와 있고 미술이 같이 움직이잖아요. 거리에서 패션쇼를 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이런 것이 경계를 허물고 넘어가는 현상이거든요. 그런 일들이 흔히 벌어지죠. 그런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전위예술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전위예술을 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왜 내가 예술을 해야 하고 나에게서 예술이 뭐고, 예술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이런 것들을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다 보면 그게 전위가 될 수 있고, 여러분이 직접 작가를 하지 않더라도 예술적이고 작가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꼭 작품을 해야 작가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예술가적인 삶. 저는 예술을 하는 작가만 예술가의 삶을 산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술가적인, 예술적인 삶을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예술가보다 오히려 예술에 정통할 수가 있어요. 제가 만나본 많은 예술가들, 제가 평론을 하면서 작가들을 만나보면, 제가 보기에 70%의 작가들은 자기가 작품을 하면서도 자기 작품이 뭔지 몰라요. 비평을 한다고 처음 작품을 보는 비평가보다 훨씬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그 작품에 대해서 말을 해주면 그때서야 아, 내 작품 그렇게 보이냐고 그런다고. 그런데 비평가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예술적인 마인드나 예술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그 사람들이 예술가예요. 꼭 작품을 해서 명성을 얻어야만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은 그렇게 열린 개념으로 봐야 하고, 현대미술에서는 특히 그 개념이 맞거든요. 그래서 저는 흔히 우리가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물론 서구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의 현대미술은 한국 현대미술다운 독자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서구미술을 모방하거나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가 없어요. 우리 때는 콤플렉스를 많이 가졌습니다. 그래서 파리나 뉴욕 같은 중심지로 작가들이 나가려고 했고, 거기서 배우려고 했고, 그것을 여기에 이식시키려고 애를 썼는데, 진정한 세계성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기본적으로 경험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또는 우리 한국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어떤 독자성. 이것 없이는 세계무대에서 인정받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그냥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인식들이 바닥에 깔렸을 때 거기서 뛰어난 예술가들이 나오고, 그 예술가들을 뒷받침하는 층이 있고 그렇게 되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현재 그 층이 형성되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 한국미술, 특히 실험적인 1960~70년대 실험미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끝까지 질문도 해주시는 것을 보면, 우리 문화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대단히 성숙한 변화의 흐름이 있다. 그런 것이 느껴져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녹취 및 정리: 박지혜, 윤정인 13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19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장석원 대담 139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 2015년 공개 컬렉션 목록 1) 박현기 컬렉션 박현기 컬렉션은 2012년 유족 박성우가 미술관에 아카이브 기증의사를 밝힌 후, 총 4차례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가 2013년 10월 31일 개소한 지도 올해로 3년째로 접어 들었다. 그동안 미술연구센터에서는 아카이브 전용 수장고를 확보하고 전산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으며, 현재 더 많은 작가들이 기증 의사를 밝히고 더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를 위해 미술연구센터를 방문하고 있다. 현재까지 미술연구센터에 기증된 컬렉션은 총 11개로(정기용, 최열, 김복기, 박현기, 이타미준, 권진규, 유강열, 박이소, 김종성, 강국진, 이건용) 이중 2014년에 서비스를 시작한 정기용, 최열, 김복기 컬렉션과 함께, 2015년에는 정리와 기술이 완료된 박현기(9,000여 점), 이타미 준(1,210점) 컬렉션과 작가들의 개인전 브로슈어(3,000여 건), 기관자료(200여 건)도 추가로 공개 열람서비스되었다. 1) 또한 강국진, 이건용, 유영국, 최열(2차 기증), 김복기(2차 기증) 아카이브가 추가로 기증되었다. 미술연구센터가 다양한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한 한국 근 현대미술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만큼, 미술연구센터에서는 소장 자료를 토대로 아카이브 전시인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와 학술 심포지엄도 진행되었다. 2014년에 처음 시작된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는 한국 근대미술 연구의 활성화와 근대미술 자료의 자발적 수집을 위해 향후 5년 동안 꾸준히 지속될 예정이다. 올해 2015년에는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이중섭 (2014.12.12.~2015.7.31.)과 지사들의 삶과 예술 (2015.8.25.~2016.3.6.)이 개최되었다. 또한 미술연구센터에 대량으로 기증된 60~70년대 실험미술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 작가들의 해외 비엔날레 활동: 파리 비엔날레와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와 한국의 60~70년대 실험미술: 초기 해프닝과 이벤트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여기에서는 2015년에 새로 공개된 아카이브 컬렉션인 박현기 컬렉션, 이타미 준 컬렉션, 그리고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에 출품되었던 자료 목록들을 일부 공개한다. 걸쳐 20,000여 점, 총 64박스 분량의 아카이브가 반입되었으며 2012년 12월에 기증약정이 이루어졌다. 2015년 1월에는 과천관 제1원형전시실에서 작품과 아카이브를 대규모 공개한 박현기의 회고전이 개최된 바 있으며, 같은 해 12월에 아카이브 정리가 완료되었다. 컬렉션은 1960년대부터 2000년까지 박현기가 비디오 아트 작가로 활동하면서 제작, 수집한 것으로, 박현기의 작업과 그의 생애에 대한 포괄적인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도심지를 지나며 (Pass through the City)>, <비디오 워킹(Video Walking)>, <우울한 식탁(The Blue Dinning Table)>을 비롯한 1세대 비디오 아트 작가 박현기의 작품의 오리지널 소스가 되는 영상자료를 포함하여 사진, 슬라이드 필름 등 작업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시청각자료들의 원본 및 디지털본을 과천관 열람서비스를 통해 직접 접할 수 있다. 또한 박현기 작품과 미발표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드로잉 및 스케치북, 작가노트 육필원고, 동료 작가, 미술관 측과 주고받은 서신 팩스,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소장 도서 200여 권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포트폴리오 방명록 회의록 등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자료, 백남준, 이우환, 이강소, 김영진, 이건용, 오쿠보 에이지( 大 久 保 英 治, Eiji Okubo) 등 동시대 교류하던 국내외 아티스트 관련 자료 등도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 도판 1. 박현기, <무제>, 1980, 16mm 필름, 흑백, 무음; 비디오 프로젝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도판 2. 박현기, <포플러 이벤트(Popular Event)>, 1977, 제3회 대구현대미술제 출품작 1) 원본자료는 미술관 홈페이지(www.mmca.go.kr)에서 자료의 열람여부를 확인한 후 사전 신청하면, 미술연구센터 내 원본 자료열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14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41
시리즈 유형 범위와 내용 수량 시리즈 유형 범위와 내용 수량 Series Ⅰ Series Ⅱ Series Ⅲ 전시 인쇄물 드로잉 시청각 자료 시리즈Ⅰ은 주로 1964년부터 2000년까지 박현기가 생산 및 수집한 전시인쇄물(도록, 브로슈어, 포스터, 리플릿, 초대장 등)과 유족 등에 의해 박현기 사후 2014년까지 수집된 박현기 관련 전시인쇄물로 구성되어 있다. 총 6개의 하위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Ⅰa는 박현기의 개인전 전시인쇄물, 하위시리즈 Ⅰb는 박현기가 참여한 단체전 전시인쇄물이 생산연도 순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박현기 사후 유족 등에 의해 수집된 박현기 회고전 등의 전시인쇄물이 추가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Ⅰc는 박현기가 소장한 김영진, 백남준, 심문섭, 이강소, 이우환 등 한국 작가들의 개인전 전시인쇄물, 하위시리즈 Ⅰd는 박현기가 소장한 오쿠보 에이지( 大 久 保 英 治, Eiji Okubo), 이마이 노리오( 今 井 祝 雄, Norio Imai) 등 외국 작가들의 개인전 전시인쇄물이 알파벳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Ⅰe는 박현기가 소장한 국내 단체전의 전시인쇄물, 하위시리즈 Ⅰf는 박현기가 소장한 국제 단체전의 전시인쇄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산연도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시리즈 Ⅱ는 1965년부터 2000년까지 박현기가 제작한 드로잉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는 총 4개이다. 하위시리즈 Ⅱa는 박현기가 1960년부터 1970년대 제작한 드로잉, 하위시리즈 Ⅱb는 박현기가 1980년대에 제작한 드로잉, 하위시리즈 Ⅱc는 박현기가 1990년대부터 임종 전까지 제작한 드로잉이다. 하위시리즈 Ⅱd는 박현기가 제작한 연도미상 드로잉과 박현기가 소장한 작자미상 드로잉이다. 시리즈 Ⅲ은 1974년부터 2000년까지 박현기가 생산한 시청각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는 총 3개이다. 하위시리즈 Ⅲa는 영상이다. 주로 아날로그 비디오테이프와 필름매체(16mm필름, 8mm필름, U-Matic, 베타맥스(Betamax), 베타캠(Betacam), VHS, VHS/C, mini DV)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현기의 비디오 작품의 영상 소스, 비디오 퍼포먼스(Video Performance) 및 이벤트(event) 기록 영상, 작품의 설치 과정이나 전시의 오프닝 장면을 담은 영상, 강연 및 아티스트 토크 기록 영상, 오쿠보 에이지( 大 久 保 英 治, Eiji Okubo), 백남준, 이강소, 최병소, 김영진 등 교류 작가들에 관한 영상, 건축 및 인테리어 관련 영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Ⅲb는 사진이다. 박현기가 직접 인화한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적으로는 <포플러 이벤트>( 제3회 대구현대미술제 출품작), <무제(TV돌탑)>, <도심지를 지나며(Pass through the City)>, <비디오 워킹(Video Walking)>, <우울한 식탁(The Blue Dinning Table)> 등 박현기의 전시 출품작 사진, 제5회 에꼴 드 서울, 제11회 파리비엔날레, 부산-도쿄 일한 현대미술전 84 등 참여한 전시의 현장 사진, 쾰른(Köln) 아트페어 등 박현기가 방문한 전시의 사진, 그 외에 백미혜, 이강소 등 동료 작가들의 작품 사진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Ⅲc는 슬라이드이다. 박현기가 제작한 작품, 전시전경들을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857건 198건 440건 Series Ⅴ Series Ⅵ Series Ⅶ 합계 일반 문서 간행물 상패류 지도 2) 이타미 준 컬렉션 시리즈 Ⅴ는 1977년부터 2000년까지 박현기가 소장한 일반문서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는 총 3개이다. 하위시리즈 Ⅴa는 박현기의 포트폴리오와 이력서(CV)로, 1981년부터 1999년까지의 박현기의 약력 및 포트폴리오이다. 하위시리즈 Ⅴb는 박현기의 미술계 활동 관련 회의자료를 모은 것이다. 제4회 대구현대미술제,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광주비엔날레 등 주로 전시 참여 과정 중에 생산된 회의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Ⅴc는 박현기 전시 관련 보도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시리즈 Ⅵ는 1972년부터 2000년까지 박현기가 수집한 간행물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는 총 4개이다. 하위시리즈 Ⅵa는 박현기가 1976년부터 2000년까지 수집한 신문기사이다. 주로 박현기 관련 기사와 비디오 아트 관련 기사, 백남준, 이강소, 차계남, 이상남 등 동료 작가의 활동에 대한 기사 등이 스크랩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Ⅵb는 박현기가 소장한 잡지이다. 주로 박현기 관련 기사가 실린 잡지와 박현기가 생전 즐겨보던 미술 및 건축 잡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Ⅵc는 박현기가 생전 소장한 예술일반, 건축, 고미술품, 인테리어 관련 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Ⅵd는 박현기가 소장한 미술 관련 학술 논문집이다. 시리즈 Ⅶ는 박현기가 소장한 상패류, 지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는 총 2개이다. 하위시리즈 Ⅶa는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박현기가 받은 상패류로 구성되어 있다. 제3회 광주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Media-City Seoul) 관련 위촉장 등 박현기가 활동하며 받은 위촉장, 위임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Ⅶb는 박현기가 소장한 지도이다. 박현기의 1990년 <비디오 워킹>에 사용된 쿠알라룸푸르 지도와 1995년 <비디오 워킹>에 사용된 나고야 지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타미 준 컬렉션은 2011년 6월 이타미 준이 작고한 이후, 2012년 그의 딸이자 건축가인 유이화가 미술관에 아카이브 기증의사를 밝혔고, 2013년 기증약정이 이루어져 미술관으로 반입되었다. 2014년에는 과천관 제5전시실에서 아카이브와 유족 소장품으로 구성된 회고전이 개최되기도 하였고 2015년 7월 아카이브 정리가 완료되었다. 105건 495건 6건 2,337건 시리즈 Ⅳ는 1958년부터 2000년까지 박현기가 생산한 사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는 총 5개이다. 하위시리즈 Ⅳa는 박현기의 작가노트와 메모, 박현기의 작품에 관한 육필 원고이다. 제4회 대구현대미술제 에 출품된 비디오 작품 <무제>를 비롯하여 <비디오 워킹(Video Walking)>, <우울한 식탁(The Blue Dinning Series Ⅳ 사문서 Table)>, 야시로국제조각심포지움(Yashiro International Sculpture Symposium) 출품작 등 박현기 작품의 구상계기, 작업의 의미를 담은 작가노트, 메모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Ⅳb는 박현기의 전시 방명록이다. 1974년부터 1998년까지 박현기가 참여했던 개인전 및 단체전 전시 방명록, 2000년 박현기의 조위록을 포함하고 있다. 하위시리즈 Ⅳc는 박현기가 가족, 지인, 기관(미술관, 갤러리, 재단, 업체) 등과 주고받은 서신(편지, 엽서, 팩스 등)이 연도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Ⅳd는 박현기의 명함과 박현기가 수집한 명함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시리즈 IⅣe는 박현기의 여권, 반공필증이다. 236건 도판 3. 이타미 준, <먹의 집>, 1975년경 도판 4. 이타미 준, <하늘의 교회 드로잉>, 2009년경 14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43
이타미 준 컬렉션은 이타미 준이 평생 설계한 건축자료와 회화자료 중 기증자에 의하여 선별된 실물자료, 그리고 유족 소장품 중 미술관에 의하여 디지털화 된 파일로 구성되었다. 이타미 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도 포도호텔, 하늘의 교회 드로잉 및 모형, 수 풍 석 미술관의 스케치 등 39개 프로젝트 자료를 과천관 미술연구센터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외 70여 개의 프로젝트 스케치도 디지털파일로 열람할 수 있다. 각각의 컬렉션에 속한 아카이브는 작가 또는 건축가들의 각기 다른 삶의 배경과 작업방식을 살펴보는 단서가 된다. 이타미 준 컬렉션은 다른 건축가 컬렉션인 정기용 김종성 컬렉션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자연 속의 건축물, 사적인 영역의 건축물 유형을 주로 살펴볼 수 있고, 재일 한국인 건축가로서 활동범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건축작업 시리즈는 최종 결과물인 도면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설계 과정자료로만 구성되어 있고, 그중 프레젠테이션을 위하여 그린 연필 드로잉은 다른 건축가들 작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표현방식을 보여준다. 또 건축뿐만 아니라 회화와 디자인 작업에 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브로슈어와 스케치, 서예 등도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 2.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전시 목록 1)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이중섭 (2014.12.12.~2015.6.30.) 2013년 개소한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과천관)는 한국 근 현대미술의 이해와 연구를 통해 다양한 아카이브를 수집과 활용하여 한국 근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 및 흐름을 회고하고 조명하고자 한다. 미술연구센터는 이러한 설립 목적에 부합하기 위하여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를 기획하였으며 그 시작으로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이중섭 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이중섭의 작품이 아닌 아카이브를 통해 이중섭의 생애와 화업을 조망하고자 하였다. 출품자료는 192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이중섭 삽화 표지화, 작품이미지, 전시인쇄물, 이중섭 평전 등 450여 종이다. 출품된 아카이브의 대부분은 미술사학자 최열이 2014년 미술관에 기증한 것으로 2014년 발간된 그의 저서 이중섭 평전: 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 (돌베개)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이중섭 의 대표자료는 이중섭의 표지화 삽화였다. 이중섭은 그의 인생 마지막을 정릉에서 보내며 주로 삽화를 그렸는데 그의 작품은 현대문학, 문학예술, 시리즈 유형 범위와 내용 수량 자유문학 의 표지화, 목차화로 사용되었다. 이 잡지사 대부분은 이중섭의 지지자들이 근무하는 Series Ⅰ 건축작업 본 시리즈는 이타미 준이 1968년부터 2010년까지 약 40년 동안 한국과 일본 등에서 건축가 로서 작업한 총 110여개의 신축, 리노베이션, 인테리어 프로젝트와 관련된 자료로 구성되었다. 프로젝트는 대부분 건물 완공연도가 아닌 자료 생산연도 순으로 정리되었다. 각 프로젝트는 실현여부와 실현된 시기, 위치, 용도, 프로젝트 성격, 규모(알 수 있는 경우)에 따라서 기술하였으며, 이타미 준 생전 영어 제목을 발표한 프로젝트는 제목에 영어를 병기하였다. 자료 유형에는 프리젠테이션용으로 그린 드로잉 35장, 설계 과정에서 그린 스케치 49장, 디지털 파일 750여개 그리고 일부 프로젝트에 포함된 모형 11점이 있다. 디지털 파일은 모두 유이화가 소장하고 있는 프리젠테이션 드로잉과 설계과정 스케치를 2013년 스캔 한 것으로 디지털로 생산한 파일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236건 곳이었기에 이 또한 가능했다. 현대문학 에는 조연현와 오영수가, 문학예술 에는 오영진과 김이석이, 자유문학 에는 이헌구와 모윤숙이 있었다. 최열이 기증한 아카이브를 토대로 개최된 한국미술 공부방 시리즈: 이중섭 을 통해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중섭의 자료들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물리적인 한 공간에 자료를 집대성하여 정리 보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본 시리즈는 이타미 준의 건축설계 외 작업 자료이다. 총 4개의 하위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는데, 13개의 가구 및 소품 디자인 프로젝트와 관련된 디자인 작업, 회화 작품과 스케치로 구성된 Series Ⅲ 건축 외 작업 드로잉, 작품집에 싣기 위해 쓴 원고, 이타미 준의 전시 활동과 관련된 전시 인쇄물 이 있다. 자료 유형에는 드로잉, 전시인쇄물, 디지털 파일이 있다. 디지털 파일은 모두 유이화가 소장하고 있는 드로잉과 스케치를 2013년 스캔 한 것으로 디지털로 생산한 파일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22건 Series Ⅲ 합계 2014년 전시 관련 추가 기증자료 본 시리즈는 2014년 이타미 준의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계기로 추가 기증된 자료이다. 이타미 준의 건물을 촬영한 영상과 이타미 준 주변인물 및 연구자를 인터뷰한 영상으로 구성된 정다운의 영상, 이타미 준의 건물을 촬영한 사진으로 구성된 김용관의 사진 총 2개 하위시리즈가 있다. 자료 유형에는 디지털로 생산된 비디오 3점, 사진 2점이 있다. 5건 139건 도판 5. 이중섭, <유일의 사람>, 25.5x19.5cm, 종이에 색연필, 1954년 11월 중순, 국립현대미 술관 소장 도판 6. 이중섭의 표지화 (에드거 앨런포(Edgar Allan Poe) 저, 원응서 역, 황금충, 중앙출판사, 195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도판 7. 이중섭의 표지화 ( 자유문 학, 1957년 9월호) 14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45
1 이중섭 관련 단행본(1953~2014)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1 황금충 E. A. 포오 저, 원응서 역 중앙출판사 2 민주고발 구상 남향문화사 1953 3 초토의 시 구상 청구출판사 1956 4 구상문학선집 구상 성바오로출판사 1975 5 말씀의 실상 구상 성바오로출판사 1980 6 구상문학총서 제1권: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구상 홍성사 2002 7 시집 '응향' 필화사건 전말기, 구상문학총서 제6권: 시와 삶의 노트, pp.164~175. 구상 홍성사 2007 8 세계문예사전, p.283. 백철 민중서관 1955 9 어두운 지역 하인 향도출판사 1956 10 미술입문 이경성 문화교육출판사 1961 11 근대한국미술가논고 이경성 일지사 1974 12 한국의 인간상 5 문학예술가 신구문화사 1965 13 포우 단편집 포우 상서각 1970 28 이중섭의 비평적 연구 오병욱 서울대학교대학원 1988 29 천재 시인 이상, 이중섭과의 비어있는 거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활 명문당 1989 30 예술과 인생을 못다한 작가 이중섭, 한국근대회화선집: 양화7 이중섭 임영방 금성출판사 1990 31 무사시노미술대학 60년사 1929~1990 무사시노미술대학 무사시노미술대학 1991 32 천재화가 이중섭 이야기: 은박지에 그린 사랑 류시철 한라 1992 33 흰소 1 최정주 행림출판사 1994 34 흰소 2 최정주 행림출판사 1994 35 명사교류도, 글 그림 박고석, pp.224~233. 박고석 열화당 1994 36 이중섭의 생애, 글 그림 박고석, pp.197~223. 박고석 열화당 1994 37 한국오페라 50년사 한국오페라 50주년 기념축제 추진위원회 세종출판사 1998 38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 전인권 문학과 지성사 2000 39 이중섭 오광수 시공사 2000 40 이중섭 평전: 흰 소의 화가, 그 절망과 순수의 자화상 최석태 돌베개 2000 41 성냥갑 속의 메세지 백영수 문학사상사 2000 14 이중섭 혹은 평화의 기도: 작품의 주제와 표현을 중심으로, 문학과 지성, 1972 여름호, pp.312~320. 이구열 일조각 1972 42 암각화에서 이중섭까지: 초등학생을 위한 우리나라 미술 여행 엄광용 산하 2001 15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 고은 믿음사 1973 43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이중섭 다빈치 2003 16 이중섭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이구열 효문사 1976 44 제국미술학교와 조선인 유학생들 한국근현대미술기록 연구회 눈빛 2004 17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 선집 44: 이중섭 박용숙 금성출판사 1977 18 한국인물오천년: 현대의 인물2 한국인물 오천년편찬위원회 일신각 1978 19 이재현 제2희곡집: 화가 이중섭 이재현 근역서재 1979 20 그릴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 이중섭 서한집 이중섭 한국문학사 1980 21 이중섭의 사랑과 예술 이중섭 백미사 1981 22 백영수 회상록: 검은 딸기의 겨울 백영수 전예원 1983 23 한국현대미술 100년 윤범모 현암사 1984 24 오산팔십년사, p.267. 오산중 고등학교 오산중 고등학교 1987 25 시집 이중섭 문학과 비평사 문학과비평사 1987 26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 남강문화재단 남강문화재단 출판부 1988 27 무엇이든 사랑할 만하며 양명문 샘터 1988 45 황폐한 세기에 격정, 화전, pp.369~379. 최열 청년사 2004 46 이중섭 평전 고은 향연 2004 47 이중섭과 세발자전거 타는 아이 엄광용 글, 윤종태 그림 산하 2005 48 이중섭, 고독한 예술혼 엄광용 산하 2006 49 진짜와 가짜의 틈새에서 김광림 다시 2006 50 조향래 기자의 향촌동 소야곡: 낭만의 대구문단 일화 조향래 시와반시 2007 51 기독교 민족운동의 영원한 지도자 이승훈 한규무 역사공간 2008 52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다: 격동의 20세기를 살았던 15인의 예술가 진회숙 청아출판사 2009 53 한국 화가 기인열전 양태석 EJONG 2010 54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 이중섭 다빈치 2013 14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47
55 이중섭 평전: 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 최열 돌베개 2014 56 한국미술사의 라이벌: 감성( 感 性 )과 오성( 悟 性 ) 사이 이태호 세창출판사 2014 11 자유문학, 1956년 7월호 자유문학 1956 12 자유문학, 1957년 7월호 자유문학 1957 13 자유문학, 1957년 9월호 자유문학 1957 14 문학예술, 1956년 2월호 문학예술 1956 2 이중섭이 거주하던 지역 관련 도서(1973~2006)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1 평안북도지 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2 대구시사 제3권 대구시사편찬위원회 1975 3 평안남도지 평안남도지편찬위원회 1977 4 서울육백년사 제1권 서울특별시 1983 5 내 고장의 전통 진주시 1983 6 서귀포시지 서귀포시 1987 7 충무시지 충무시지편찬위원회 1987 8 함경남도지 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88 9 부산시사 제1권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89 10 제주도지 제2권 제주도 2006 11 제주도지 제6권 제주도 2006 15 문학예술, 1956년 3월호 문학예술 1956 16 문학예술, 1956년 10월호 문학예술 1956 17 문학예술, 1956년 10월호 문학예술 1956 18 화가 이중섭의 빈곤과 초극의 역정, 주간희망, 1956년 10월, p.38. 정규 주간희망 1956 19 향우( 鄕 友 ) 중섭 이야기, 주간희망, 1956년 10월, pp.39~40. 구상 주간희망 1956 20 돌아오지 않는 강, 주간희망, 1956년 10월, p.41. 조영암 주간희망 1956 21 이중섭의 닭, 여원, 1964년 11월호 김광균 여원 1964 22 문학, 1966년 8월호 문학사 1966 23 문학, 1966년 12월호 문학사 1966 24 이중섭, 그의 생애와 예술의 면모, 공간, 1967년 10월호, pp.78~82 이경성 공간 1967 25 이중섭의 생애, 공간, 1967년 10월호, p.83 박고석 공간 1967 26 실향의 바다 송, 주간한국, 1969년 6월 22일 한국일보사 주간한국 1969 27 사과의 말씀 사진오보, 주간한국, 1969년 6월 29일 한국일보사 주간한국 1970 3 이중섭 관련 간행물(1955~1986)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28 이중섭 예술의 경이: 이중섭 작품전에 붙인다, 신동아, 1972년 4월호 박용숙 동아일보사 1972 1 현대문학, 1955년 4월호 현대문학사 1955 29 고은, 이중섭 평전2, 신동아, 1973년 7월호, pp.314~353 고은 동아일보사 1973 2 이중섭작품전평, 현대문학, 1955년 창간호 A.J 맥타카트 현대문학사 1955 3 현대문학, 1956년 3월호 현대문학사 1956 30 고은, 이중섭 평전3, 신동아, 1973년 8월호, pp.344~382 고은 동아일보사 1973 4 현대문학, 1956년 4월호 현대문학사 1956 5 현대문학, 1956년 6월호 현대문학사 1956 6 현대문학, 1961년 12월호 현대문학사 1961 7 현대문학, 1962년 12월호 현대문학사 1962 8 묘지송, 현대문학, 1969년 11월호 이봉구 현대문학사 1969 31 신동아, 1973년 10월호 동아일보사 1973 32 양명문, 순수의 사도 이중섭형, 신동아, 1974년 5월호 pp.186~189 양명문 동아일보사 1974 33 월간중앙, 1972년 5월 월간중앙 1972 34 손응성, 그 시절: 기조전 무력, 화랑, 1974년 봄호, pp.58~59 손응성 화랑 1974 9 신미술, 1956년 2호 신미술 1956 10 자유문학, 1956년 창간호 자유문학 1956 35 김춘수, 이중섭, 고은 저 '이중섭'에 대하여, 월간문학, 1974년 4월호 김춘수 월간문학 1974 14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49
36 구상, 성당부근과 이중섭의 발병 전후, 문학사상, 1974년 8월호 구상 문학사상사 1974 6 이중섭 회화가 제주 미술에 미친 영향 논문 박시현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2002 37 김춘수, 이중섭, 문학사상, 1975년 4월호, pp.210~211. 김춘수 문학사상사 1975 7 Freud적 관점에서 분석한 이중섭의 흰 소, 한국예술 치료학회지, 제3권 제1호, 2003년 5월, pp.71~84. 김옥경 한국예술치료학회 2003 38 39 40 고은, 여관 복도를 걸레질하는 화가 이중섭, 문학사상, 1975년 8월호, pp.288~289 김영주, 이중섭과 박수근, 뿌리깊은 나무, 1976년 창간호 천재화가 이중섭 연구, 한국문학, 1976년 9월호, pp.309~311 고은 문학사상사 1975 김영주 뿌리깊은 나무 1976 한국문학 1976 8 2003 이중섭과 서귀포 자료집 서귀포시, 조선일보 서귀포시, 조선일보 2003 9 2014 이중섭과 서귀포 자료집 서귀포시, 조선일보 서귀포시, 조선일보 2014 10 제주를 찾은 외지 미술인, 탐라문화 제25호, 제주대학교 김현돈 2004년 8월, pp.115~130. 탐라문화연구소 2004 11 제1회 기조전, 근대미술연구 2004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2004 41 42 43 고은, 정신세계의 내면-이중섭은 정신 이상자가 아니다, 한국문학, 1976년 9월호, pp.312~318 임영방, 이중섭의 미학의 분석, 한국문학, 1976년 9월호, pp.319~323 이구열, 이중섭의 한국미술사적 위치, 한국문학, 1976년 9월호, pp.324~328 고은 한국문학 1976 임영방 한국문학 1976 이구열 한국문학 1976 이중섭의 소 그림 다시 읽기, 미술평단 제92호, 12 기혜경 미술평단 2009 2009년 봄호 이중섭의 서귀포 시대 연구, 탐라문화 제39호, 제주대학교 13 전은자 2011 2011년 8월, pp.295~337. 탐라문화연구소 14 근현대 미술사 아카데미 제1기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2012 44 45 구상, 이중섭의 인간 예술, 한국문학, 1976년 9월호, pp.329~338 이마동, 김경승, 최영림, 이경성, 6.25와 한국작가와 작품, 미술과 생활, 1977년 6월호 구상 한국문학 1976 이마동, 김경승, 최영림, 이경성 미술과 생활 1977 5 이중섭 관련 단체전 전시인쇄물(1952~2014)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46 독점공개: 아내의 감동 애서 - 사랑과 그리움의 몸부림, 주간여성, 1979년 11월 25일, pp.26~28 주간여성 1979 1 제1회 기조전 리플릿 1952 2 제3회 신사실파미술전 리플릿 1953 47 계간미술 1986년 여름호 중앙일보사 1986 48 문학수, 동일에 제하야, 여성, p.58 문학수 여성 3 근대유화 3인의 개성전 도록 이구열 진화랑 1990 4 박고석 화집: 1951~1989 갤러리현대 갤러리현대 1990 5 근대유화 명작전: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이인성 호암미술관 삼성미술문화재단 1990 6 박수근과 이중섭 브로슈어 송원갤러리 송원갤러리 1990 4 이중섭 관련 학술지(1971~2012)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1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 논문 조정자 홍익대학교 대학원 1971 2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에 관한 연구 논문 류수교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1975 3 이중섭 연구 논문 이기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1976 4 이중섭 회화의 상징성, 임상예술 제1권 곽영숙 한국임상예술학회 1985 7 갤러리현대 30주년 기념전 갤러리현대 갤러리현대 2000 8 요절과 숙명의 작가전 가나아트센터 가나아트센터 2001 9 이중섭과 친구들 도록 이중섭전시관 이중섭전시관 2003 10 한국적 아름다움의 원형 박수근, 이중섭 전 도록 가람갤러리 가람갤러리 2004 11 20세기 7인의 화가들 이태호 노화랑 2004 12 이중섭에서 백남준까지 민성식 서귀포시립 이중섭미술관 민성식 서귀포시립 이중섭미술관 2004 5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세계 논문 조진행 공주대학교 교육대학원 1999 13 제94회 한국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 서울옥션 서울옥션 2005 14 한국 근대회화 10인전 김해문화의 전당 김해문화의전당 2006 15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51
15 이중섭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 "둥섭, 르네상스로 가세!" 도록 서울미술관 서울미술관 2012 16 신옥진 컬렉션 이중섭미술관 이중섭미술관 2014 8 이중섭 <게와 생선에 낀 아이 2> 이중섭 이중섭 1953 9 이중섭이 유강열에게 보낸 편지 이중섭 이중섭 1953 10 이중섭 <유일의 사람> 편지 이중섭 이중섭 1954 11 이중섭 <복숭아와 아이-야스카타에게> 편지 이중섭 이중섭 1955 6 이중섭 관련 개인전 전시인쇄물(1955~2005)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1 이중섭 작품전 리플릿 미도파화랑 1955 2 이중섭 작품집 현대화랑 현대화랑 1972 3 대향 이중섭 이중섭기념사업회 한국문학사 1979 4 미발표 이중섭 작품집 도록 국제화랑 국제화랑 1979 5 이중섭 작품전 리플릿 이중섭기념사업회, 이중섭기념사업회, 미도파백화점 미도파백화점 1979 6 고 이중섭화백 작품 서한전 리플릿 롯데미술관 롯데미술관 1983 7 이중섭 미공개 작품전 브로슈어 동숭미술관 동숭미술관 1985 8 이중섭 미공개 작품전 리플릿 동숭미술관 동숭미술관 1985 9 30주기 특별기획 이중섭전 도록 호암갤러리 중앙일보사 1986 10 30주기 특별기획 이중섭전 리플릿 호암갤러리 중앙일보사 1986 11 이중섭 도록 갤러리현대 갤러리현대 1999 12 이중섭 개인전 브로슈어 현대아트갤러리 현대아트갤러리 1999 13 이중섭 드로잉: 그리움의 편린들 도록 리움 리움 2005 14 리움 뉴스레터, 2005년 봄호 리움 리움 2005 12 이중섭 <원자력 시대3> 이중섭 이중섭 1954 13 이중섭 <화가의 초상 05 방 02> 이중섭 이중섭 1954 14 이중섭 <남쪽 나라를 향하여 03> 이중섭 이중섭 1954 15 이중섭 <꽃과 아동 02> 이중섭 이중섭 1954 16 이중섭 <비둘기와 손바닥2> 이중섭 이중섭 연도미상 17 1929년 3월 이중섭 종로공립보통학교 졸업사진 이중섭 이중섭 1929 18 1930년대 동경유학시절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30년대 19 1930년대 후반 일본 유학시절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30년대 20 1940년 3월 이노가시라 공원에서 송경, 나키니시 기쿠코와 함께한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40 21 1940년 제13회 문화학원 미술과 졸업사진 이중섭 이중섭 1940 22 1943년 5월 화신화랑에서 열린 제3회 신미술가협회전 기념사진 이중섭 이중섭 1943 23 1943년 8월 제6회 재동경미술협회전 기념사진 3장 이중섭 이중섭 1943 24 1945년 5월 원산에서 치러진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의 결혼사진 2장 이중섭 이중섭 1945 25 1952년 부산에서 김서봉, 황영수와 함께 찍은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52 26 1952년 12월 부산 남포동 거리를 걷고 있는 한묵과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52 27 1952년 12월 기조전 무렵 박고석, 한묵과 함께 찍은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52 28 1954년 1월 통영에서 찍은 이중섭, 유강열 사진 2장 1954 7 이중섭 관련 아카이브(1937~1954)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1 이중섭 제국미술학교 학적부 이중섭 제국미술학교 1937 29 1954년 4월 통영에서 찍은 이중섭 사진 3장 이중섭 이중섭 1954 30 1954년 봄 통영에서 찍은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54 31 1954년 5월 진주에서 찍은 이중섭 사진 허종배 이중섭 이중섭 1954 2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전 출품작 소묘 엽서 연도미상 3 조선신미술가협회전 출품작 연못이 있는 풍경( 池 ノアル 景 ) 엽서 연도미상 32 1954년 6월 25일 경복궁에서 열린 제6회 대한미술협회 전람회 당시 찍은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54 4 제1회 신미술가협회 도쿄전 방명록 1941 5 백영수 개인전 방명록 1952 6 이중섭 <서귀포 게잡이> 드로잉 이중섭 이중섭 1952 7 이중섭 <비둘기와 나비> 이중섭 이중섭 1953 33 1954년 4인전(유강렬, 장윤성, 전혁림, 이중섭)에서 찍은 이중섭 사진 및 <통영 흰 소> 작품사진 이중섭 이중섭 1954 34 1955년 1월 미도파화랑 개인전 당시 찍은 이중섭 사진 4장 이중섭 이중섭 1955 35 1955년 4월 대구 작품전 당시 김이석과 찍은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55 152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53
36 최태웅의 집에서 최태웅, 이기련 등과 찍은 이중섭 사진 이중섭 이중섭 연도미상 37 일본 도쿄 외할머니 집에서 찍은 이중섭의 두 아들 사진 2장 이중섭 이중섭 연도미상 38 일본 집에서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두 아들 이중섭 이중섭 연도미상 39 이중섭의 가족 사진 이중섭 이중섭 연도미상 40 이중섭이 간직하고 있던 1945년 일본에서 찍은 야마모토 마사코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45 41 1958년 10월 이중섭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문화훈장 추서 포상식 이중섭 이중섭 1958 42 1967년 이중섭 10주기 추모식장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67 43 1976년 5월 이중섭 묘소를 찾은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76 44 1976년 5월 20일 이중섭 묘소에서 야마모토 마사코와 조카딸과 함께 찍은 구상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76 45 1986년 4월 18일 한국에서 찍은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사진 이중섭 이중섭 1986 46 이외 이중섭 관련 사진 10여 장 이중섭 이중섭 47 이중섭 작품이미지 250여 장 이중섭 이중섭 도판 10. 지사화가들의 삶과 예술 설치 전경 출품된 작품은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의 작위 수여와 은사금을 거절하고, 장위산에 은거하며 시서화 제작에 몰두한 석촌 윤용구의 <사군자병풍>과 <사군자-묵죽>, <산수운당> 등 5점과, 김일의 <화조병풍>, 김진우의 대나무 그림 <묵죽>, <석죽>, 김진만과 조인좌의 난초 작품 등 모두 16점이다. 이 중 윤용구의 <사군자-묵죽>은 노룡음 ( 老 龍 唫 ) 즉 드러누워 늙은 용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라는 화제가 있는 작품으로, 가로로 누운 대나무( 臥 竹 )를 통해 국권 피탈 시기 고종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그의 작품 중에 수작으로 꼽히는 것이다.(도판 9) 또 김진우의 <묵죽>은 여느 대나무 그림과는 달리 뾰족한 가지와 잎이 일제를 향해 날리는 푸른 화살과 같다고 하여 청시( 淸 矢 ) 라고 불리며, 독자적인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 받는 대표작이다. 이밖에 출품된 자료들은 그동안 미술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지사화가들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독립운동관련 문헌과 화집, 국내에서 열렸던 크고 작은 전시의 도록, 관련 이미지 자료 등을 망라하여 정리한 것이다. 2) 지사 志 士 들의 삶과 예술 (2015.8.25.~2016.3.6.)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에서는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화가들의 삶과 예술을 조망할 수 있는 특별전시를 개최하였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격변하는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쓰러져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뜻을 세웠던 지사화가들로, 참여 작가는 윤용구, 민영익, 민영환, 이회영, 김진만, 김일, 김진우, 조정규, 조인좌로 모두 9명이다. 전시에는 이들의 서화 작품과 관련 이미지 자료 및 도서 등의 아카이브가 출품되었다. 1 동양화 일반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1 한국서예사 원곡 원곡 1966 2 한국 서예가 총람 우일출판사 우일출판사 1978 3 동양미술론 김영기 우일출판사 1980 4 한국현대서예사 임창순,이구열, 이흥우 통천문화사 1981 5 19세기 문인들의 서화 열화당 열화당 1988 6 간송문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91 7 사군자 감상법 최열 대원사 2000 8 신고 한국서예사 동력서예연구원 동력서예연구원 2006 9 근대의 아틀리에: 대구 근대미술 산책 김영동 한티재 2011 도판 8. 윤용구 필적, 순종실기, 신민, 1926년 6월호 22x15cm 도판 9.윤용구, <묵죽 노룡음( 老 龍 唫 )>, 37.5 65cm, 종이에 수묵, 개인소장 154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55
2 항일운동사 관련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1 한국삼십육년사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66 2 고종시대사(1) 증보판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0 3 고종시대사(2) 증보판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0 4 고종시대사(3)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0 5 고종시대사(4)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0 6 고종시대사(5)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1 7 고종시대사(6)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2 8 韓 國 獨 立 運 動 之 血 史 1 朴 殷 植 著, 南 晩 星 譯 서문당 1975 9 韓 國 獨 立 運 動 之 血 史 2 朴 殷 植 著, 南 晩 星 譯 서문당 1975 10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史 李 康 勳 瑞 文 堂 1975 11 한국삼십육년사 10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5 12 한국아니키즘 운동사 전편. 민족해방투쟁 무정부주의 운동사 무정부주의 운동사 편찬위원회 편찬위원회 1978 13 동학난 황현 을유문화사 1985 14 (사진으로 보는) 獨 立 運 動 上 : 외침과 투쟁 李 圭 憲 서문당 1988 15 한국학자 요층서 제1집 한국잡지 개관 및 호별 목차집 김근수 한국학연구소 1988 27 한국의 독립운동 F.A. 매켄지, 신복룡 역 집문당 1999 28 홍성담: 1999 脫 獄 홍성담, 가나아트 가나아트 1999 29 한국의 아나키즘(사상편) 이호룡 지식산업사 2002 30 일제하 아나키즘 운동의 전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국학자료원 2003 31 한국 아나키즘 100년 구승회 이학사 2004 32 105인 사건과 신민회연구 윤강노 일치두 2004 33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홍영기 일조각 2004 34 동학과 농민전쟁 이영호 혜안 2004 35 대한계년사 정교 소명출판 2004 36 식민지 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 박환 선인도서출판 2005 37 대륙에 울려 퍼진 항일정신: 먼구름 한형석의 생애와 독립운동 부산근대역사관 부산근대역사관 2006 38 독립기념관 애국시 어록비(1)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2006 39 신간회의 민족운동 신용하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200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0 근대 한국인의 삶과 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편 독립기념관 2008 41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이호룡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6 한국학자 요층서 제5집 김근수 한국학연구소 1988 17 한국잡지 개관 및 호별 목차집 광복회대구 경북연합지부 광복회대구 경북연합지부 1991 42 1930년대 민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장세윤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8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사 이병헌 3.1독립기념회관 건립위원회 1992 19 3 1운동 비사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1992 20 1894년 농민전쟁연구1: 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1993 43 개항이후 일제의 침략 하원호 44 통감부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김혜정, 이상찬, 이계형, 조성운, 한명근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009 21 1984년 농민전쟁연구3: 농민전쟁의 정치. 사상적 배경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1994 45 서울항일독립운동사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2009 22 1894년 농민전쟁 연구4: 농민전쟁의 전개과정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1995 23 한말 호남지역 의병 운동사 연구 홍순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24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신용하 일조각 1996 25 한말의병연구 김상기 일조각 1997 26 함안 항일 독립 운동사 이규석 함안문화원 1998 46 한말 순국 의열 투쟁 오영섭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2009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7 한국광복군 그 뿌리와 발자취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2011 48 3 1운동 새로 읽기 3 1문화재단 예지 2012 49 새로 쓰는 동학기행1 채길순 모시는 사람들 2012 156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57
3 참여작가 관련 문헌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27 김종영 창원생가 새터마을 소답꽃집(삼현삼절을 낳은 명문세가) 김종영미술관 김종영미술관 2012 1 해천추범 민영환 을유문화사 1959 2 소년소녀 한국충 효 예 위인전집: 민영환 춘추문화사 춘추문화사 1979 3 운미 민영익의 문인화 연구 이지원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학과 1985 4 민충정공유고집 추정민충정공 기념사복회 추정민충정공 기념사복회 1985 28 이회영 평전 김상웅 책보세 2012 29 문인화의 연원과 영남문인화 이나나 서예문인화 2013 30 캐나다 선교사가 본 한국 한국인 독립기념관[편] 독립기념관 2013 31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결 민영환 조재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역사공간 2014 5 역사 속의 진도와 진도 사람 박병술 학연문화사 1999 6 근대 대구 경북 49인: 그들에게 민족은 무엇인가 김도형 혜안 1999 7 해평윤씨인신 삼산윤용구 삼산윤용구 1995 8 해평윤씨대동보(1) 해평윤씨 해평윤씨 대동보간행위원회 대동보간행위원회 2003 9 해평윤씨대동보(2) 해평윤씨 동보간행위원회 해평윤씨 동보간행위원회 2003 10 민충정공 유고(전) 민홍기 일조각 2000 11 새로운 한국음악사 전인평 현대음악출판사 2000 12 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2001 13 운미 민영익의 생애와 회화 연구 강영주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2001 14 나라사랑 충정공 민영환 선생 특집호 외솔회 외솔회 2001 15 나라사랑 무당 이회영 선생 특집호 외솔회 외솔회 2002 16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3 17 한국근대자본가연구 오미일 한울아카데미 2003 18 충정공 민영환 서거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고려대학교 민영환의 개혁구상과 외교활동에 대한 평가 아세아문제연구소 고려대학교 2005 19 해천추범 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 민영환 책과함께 2007 20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김명섭 역사공간 2008 21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여운형 이정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22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덕일 역사의 아침 2009 23 한국고악보연구 이동복 민속원 2009 4 지사화가 관련 전시 도록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1 김진만서화집 맥향화랑 맥향화랑 1980 2 호남의 전통회화 광주박물관 회 국립광주박물관 광주박물관 1984 3 독립기념관 전시품 요록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87 4 독립기념관: 전시품 도록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1997 5 독립기념관: 전시품 요록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2004 6 사이부사 민영환 고려대학교 박물관 고려대학교 박물관 2005 7 애국지사유묵전 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 1995 8 대구미술 70년 역사전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문화예술회관 1997 9 맥향화랑 30년 1976~2006 맥향화랑 맥향화랑 2006 10 독립기념관: 전시품 도록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2006 11 삼일절 기념특별기획전: 기와예로 맞선 그들 고양어울림 미술관 고양문화재단 2007 12 개관20주년 기념 기증자료 특별기획전 (사)민족문제연구소 독립기념관 2007 13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자료집: 독립운동가의 생활유품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2009 14 대구의 근대미술 독립기념관 대구문화재단 2009 15 독립운동가의 글과 그림: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자료집 대구문화재단 독립기념관 2010 24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앙드레 슈미드 휴머니스트 2009 25 백양 조정규 경남도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2010 26 항일무장 투쟁의 전위,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 이회영 평전 김상웅 책보세 2011 16 김해전통 서화의 맥: 차산에서 한산당까지 독립기념관[편] 17 엽서로 보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인의 삶 김해문화의전당, 김해전통사회연구회 김해문화의전당 김해전통사회연구회 2011 독립기념관 2012 158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59
18 우당 이회영과 6형제: 난잎으로 칼을 얻다 독립기념관[편]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위원회 2015 28 원주시사(민속.문화재편) 원주시 원주시 2000 29 원주시사(역사편) 원주시 원주시 2000 30 원주시사(현대편) 원주시 원주시 2000 5 시사( 市 史 ) 번호 제목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 1 경주시지 경주시 경주시 1971 33 국역경주읍지 경주시 경주문화원 경주시, 경주문화원 2003 35 경주시사 경주시사편찬위원회 경주시사편찬위원회 2006 36 진도군지(상, 하) 진도군지편찬위원회 진도군지편찬위원회 2007 2 토향지 내무부 내무부 1973 3 한선각도읍 태학 태학사 1978 4 영남서화총람 경상남도 예술 문화사 예술 문화사 1981 5 황해도지 황해도지편찬위원회 황해도지편찬위원회 1982 6 전라남도지(1)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82 7 전라남도지(2)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83 8 전라남도지(3)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84 9 경상북도사 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1983 10 대구시사(1) 대구시사편찬위원회 대구시사편찬위원회 1983 11 대구시사(2) 대구시사편찬위원회 대구시사편찬위원회 1983 12 경상남도사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 1988 13 경상남도사(하)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 1988 14 경주시사 경주시사편찬위원회 경주시사편찬위원회 1989 15 부산시사(2)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0 16 부산시사(3)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1 17 부산시사(4)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1 18 만주 한인민족전통사 연구 박항 일조각 1991 19 진주시사 진주시사편찬위원회 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5 20 진주시사(상) 진주시사편찬위원회 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4 21 진주시사(하) 진주시사편찬위원회 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5 23 강원도사: 전통문화편 강원도 강원도 1996 24 강원도사: 역사편 강원도 강원도 1996 25 향토의 숨결 연합통신 연합통신 1996 26 함안군지(함주지.칠원읍지) 함안군지편찬위원회 함안군지편찬위원회 1997 27 진도군지 진도군지편찬위원회 진도군지편찬위원회 1999 160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 2015년 미술연구센터 결과 보고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