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5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정상호 서원대학교 논문요약 한국에서의 양원제에 관한 기존의 논의들은 서구의 경험에 기초하여 찬반을 표명하고 있는 원론적 연구들이 대부분이다. 본 연구는 제2공화국의 민의원과 참의원의 상호 관계는 물론 의회와 정부는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양원제의 고유한 특징과 원리가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본 연구가 해명한 주요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객관적 성과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장면 정부는 양원제가 내장한 제도적 장점들을 창출하는 데 실패하였다. 무엇보다 도 장면 민주당 정부의 허약한 리더십과 내각의 극심한 균열이 효율적인 입법화를 가로 막았 다. 유례없이 낮은 장면 정부의 입법률은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둘째, 참의원은 구성과 역할 면에서 보수화 경향을 노정하였는데, 이는 신파와 구파의 묵시적 합의, 즉 참의원을 충원 과 지지를 창출할 정치혁신의 요체로 인식하기보다는 명망과 연륜을 갖춘 정치원로들의 조용 한 퇴출구로 인식하였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었다. 또한 새롭게 도입된 복잡한 제한 연기명 투 표라는 선거제도 역시 유권자의 관심을 떨어뜨리고 친일관료나 구자유당 출신의 원내 진입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이론적 수준에서의 양원제 찬반 논의나 또는 한국의 양원제 실 패 요인 분석에서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상원, 한국의 경우 참의 원의 독자적 위상과 역할 정립의 실패가 지금까지 양원제 회의론의 가장 유력한 경험적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제어 양원제, 제2공화국, 장면 정부, 참의원, 민의원, 파벌
6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I. 문제제기와 예비적 고찰 1. 양원제: 이론의 과잉과 역사적 접근의 부재 거시적으로는 정부형태의 변경 논의 속에서, 아니면 국회 개혁의 일환으로 양 원제 개헌 주장이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단원제 국회 의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그 구성을 선출직으로 하지 않고 광역자치단체장과 주요 사회단체 대표, 국민이 공감하는 사회원로급 인사 등 80명의 분야별 전문가로 구 성된 가칭 국가균형원의 설립을 제안한 바 있다(성경륭 2003, 78-79). 이명박 정 부 출범 이후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양원제 도입을 제안하였다. 헌법연구자문 위원회는 상호견제를 통한 의안 심의 과정의 신중성 제고와 상원을 통한 입법부 행정부의 극단적 대립상황 조정이라는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였다(헌법연구자문 위원회 2009, 125-127). 1) 가장 최근에는 2012 총선 유권자연대 가 지역 균형발전 을 위한 가칭 국가균형원 설치 를 20대 정책의제 중 하나로 각 정당에 제시( 한겨 레신문 2012.3.22)한 바 있다. 이처럼 양원제는 여전히 뜨거운 정치개혁 이슈 중 하나이다. 양원제에 관한 찬반 논의는 그동안 학계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먼저, 한국에서 양원제를 반대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현재의 대통령제 권력구조가 양원 제와 제도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폭 넓은 지지층을 갖고 있는 이 주장은 분단과 휴전이라는 긴급한 상황에서 양원제는 오히려 양원 간 의사불일치로 인한 입법 지연과 행정부 견제력 약화, 그리고 정쟁 강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김현우 1997, 115). 같은 맥락에서 양원제는 대통령제가 아니라 의원내각제 1) 또한 그 구성방안으로서 1의원정수는 법률로 정하되 현재 국회의원 정수를 유지할 경우 이를 하원 221명(74%)과 상원 78명(26%)으로 하고, 2임기는 하원 4년 상원 6년으로 직선 하되 상원은 2년마다 1/3씩을 교체하도록 했다. 끝으로 권한 배분에 있어서는 1법률안은 원칙상 양원의 의결을 요하는 것으로 하고, 2양원의 의사가 불일치할 때는 양원협의회에서 단일안을 만들어 의결하되 그렇지 못하면 하원 재적의원 2/3의 재의결로써 확정하며, 3 예산법률안은 하원이 우선 심의 의결하여 상원으로 송부하고, 4헌법개정은 각원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발의하여 양원합동회의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하도록 했다.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7 와 제도적 정합성이 있다는 주장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자민련을 이끌었던 JP는 오랫동안 권력 분산, 입법과 사법권의 견제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의원내각제 를, 의원내각제에 어울리는 의회 제도로서 양원제 도입을 일관되게 옹호하여 왔다 ( 동아일보 1997.9.24). 둘째, 반대론자들은 보다 많은 민주국가들에서 양원제 보다는 단원제가 채택되고 있다는 근간의 추세를 거론하고 있다. 사실 1차 대전 이후에만 하더라도 양원제는 국민 의사를 민주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바람직한 제도로 인식되었다. 1927년의 시점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한 62개 국가 중 양 원제를 도입한 국가는 44개 국가로 단원제 국가(18개)를 압도하였다. 이러한 양원 제 우위현상은 2차 대전 이후 역전되었는데, 1983년에는 양원제와 단원제의 비율 이 36: 69로, 1998년에는 61:117로 그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단원제의 압도 경향은 세계화의 가파른 진행 속에서 의사 결정의 신속성과 효율성이 강조되 면서 나타난 결과이다(김현우 1997, 118-128). 끝으로, 본 연구가 주목하고 있는 반대 논거는 양원제가 자칫 특정 지역과 계층의 과잉대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지 적이다. 신우철(2010)은 우리의 여건에서 양원제 도입으로 인해 대표성을 우대받 게 될 지역은 결국 인구 밀도가 낮은 비수도권-농어촌지역이 될 수밖에 없고 이는 장기적으로 상원에서의 자유주의 정당 보수정당의 과잉대표로 귀결될 소지가 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편, 양원제를 지지하는 입장은 지방분권 활성화, 지역균형발전 촉진, 지역갈 등 해소, 통일 이후 국민통합 등을 근거로 상원의 필요성을 지적해왔다. 우선, 양 원제가 한국에서 가장 큰 설득력과 지지자를 얻게 된 근본 이유는 연방제와 통일 국가의 비전 때문이다. 많은 비교연구 연구가 지적하고 있듯이 연방제와 양원제는 매우 밀접한 제도적 조응성이 있다. IPU 조사에 의하면 17개 연방국가 중 16개 국가가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박찬표 1998, 90). 바로 이 점은 한국의 경우 양 원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통일 이후 발생할 엄청난 사회적 갈등, 특히 계층 및 지역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연방 제의 도입과 양원제의 채택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2) 또한 연방주의적 양원제는 2) 단원제 의회는 인구비례에 의한 원 구성으로 인하여 남한 지역을 과잉 대표하고 북한지역을 과소 대표함으로써 남북한 간의 지역적 불균형을 해소하는데 근본적인 어려움을 안고 있다 (최진욱 1995, 99). 따라서 남북한 통합국가의 의회는 양원제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이제
8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권력의 분립과 분산을 통한 민주주의의 심화, 중앙과 지방 사이의 갈등 해소, 중앙 집권 국가의 폐단 척결 등을 고려할 때 통일 국가의 필요한 조직 원리이다(성경륭 2000, 389). 최근에는 통일과 연방제와 같은 중장기 목표보다는 분권과 자치 또는 민주주의 라는 현재의 관점에서 양원제를 옹호하는 논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박찬표 2002; 안성호 2006; 김철수 2003). 이는 강조점에 따라 두 개의 층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지향을 다수제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 로 설정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일련의 제도적 배열 즉 양원제를 비롯하여 정당명 부비례대표제, 다당제, 연합정치, 지방분권형 연방제 등을 아우른 개헌론의 일환 으로 양원제를 주장하는 입장이다(선학태 2010, 78; 정연정 2007). 다른 하나는 포괄적 개헌이 아닌 양원제만을 신설하자는 주장이다. 정영화는 정치개혁의 일환 으로 개방형 비례대표에 의해 직능별 계층별 세대별로 구성된 양원제를 제안하 였다(정영화 2005). 한편, 신기현(2002, 177)은 중앙집권적 개발정책에 의해 혜택 을 받는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 사이의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상원에게 동의권과 거부권, 이의 제기권 등을 부여하는 양원제를 제시하였다. 김만흠(1998) 또한 지역을 대표하여 중앙정치에 참여하는 제도로서 광역자치단위를 단위로 하 는 양원제의 검토를 제안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존의 논의들은 서구의 경험에 기초하여 찬반을 표 명하고 있는 원론적 연구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연구들이 우리가 실 제 경험하였던 양원제의 구체 유형과 작동 방식을 간과하여 왔다. 설령 있다하더 라도 구체적 작동 방식에 기초한 엄밀한 분석보다는 제2공화국의 붕괴에 끼친 의 원내각제와 양원제의 부정적 영향만을 중심으로 한 일방적 평가가 다수이다. 3) 하나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선학태(2001, 98)는 규모에 관계없이 등가대표 원칙에 따라 광역자치단체별로 동일 수의 의원 선출에 의하여 구성되는 통일국가의 상원은 남북한 전국 차원에서 부유한 지역과 가난한 지역, 도시지역과 농촌지역 사이의 불평등을 완화하여 종국 적으로 남북한 통합국가를 공고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3) 대표적인 것은 타협과 협상의 정치문화가 미약한 조건에서 도입된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는 한편으로는 신구파 간의 파벌 갈등을 첨예화시켰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리더십의 위기를 가 중시켰다는 설명(한승주 1983, 27)이다. 또한, 민의원의 경솔과 횡포를 방지한다는 소위 참의원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기는커녕 오히려 거액의 국가경비를 소비해 가면서 법률안의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9 이처럼 제2공화국의 양원제는 한국정치사 연구의 공백에 해당된다. 본 연구는 제2공화국의 민의원과 참의원의 상호 관계는 물론 의회와 정부는 어떤 관계에 있 었으며, 양원제의 고유한 특징과 원리가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단명하기는 하였지만 제2공화국에서 시도되었던 양원제의 경험은 향후 의회 형태를 비롯한 개헌을 논의할 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자 지침이 될 수 있다. 새 삼 강조하건대 본 연구의 출발점은 추상화된 이론과 외국의 사례, 또는 통일 이후 의 의회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4.19 이후의 혁명적 상황에서 의회와 입법을 둘러 싸고 벌어졌던 두 개의 주권 기구 사이의 실제적 거래와 논쟁의 기록이다. 그것이 해명될 때 비로소 우리는 관념화된 이론으로서의 양원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서 상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의 전개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양원제 도입의 배경과 논쟁의 역사 를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이어 입법가결률, 의안발의률, 법안처리현황, 재의법률 안 처리현황 등과 같은 실증적 근거를 바탕으로 당시의 양원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밝힐 것이다. 이어 그 원인을 리더십 차원과 제도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 하고자 한다. 2. 예비적 고찰: 왜곡된 헌정주의와 천연( 遷 延 )된 출발 참의원 선거 그것은 십 년째 내려쏘는 공포( 空 砲 )였다( 경향신문 1958.7.4) 는 한 언론사의 사설 제목은 본 연구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헌법이나 한국정 치를 전공하지 않은 많은 이들은 마치 양원제가 4.19 혁명의 산물로서 제2공화국 의 장면 정부에 의해 최초로 도입된 헌정체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유진오를 비롯한 제헌 기초의원이 구상한 정부형태는 내각책 임제와 양원제였다. 심의를 거듭하던 중 기초의원들은 대통령 취임직전 이승만 박사의 의견을 따라 대통령제와 단원제로 전격 수정함으로써 양원제는 정부수립 이후 등장하자마자 무산되었다( 동아일보 1958.7.10). 4) 단원제가 양원제로 바 심의를 지연시키고 기타 입법사항을 복잡하게 만들어 귀중한 시간만을 낭비 한 것이라는 평가(최요환 1990, 246) 또한 여기에 해당된다. 4) 여기에는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김수용(2008, 256-257)은 양원제에서 단원제로의 변경이
10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뀐 것 역시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 자유당의 발췌개헌(1952)이라는 초유의 정치파 동의 결과였다. 당시 이승만은 야당이 우세하였던 국회가 일방적으로 개헌을 추진 하거나 정부가 원치 않는 입법을 독자적으로 의결하는 상황, 즉 여소야대 국회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서 상원으로 하여금 국회를 견제할 수 있는 양원제를 추진하 였다. 2대 정부통령 선거(1952)가 다가오면서 야당의 연합전선이 다수 세력을 규 합해 내각책임제 개헌에 착수하자 이에 맞서 이승만은 악명 높은 5.26 부산 정치 파동을 통하여 정 부통령제의 직접선거제, 양원제 의회를 내용으로 하는 소위 발 췌 개헌안을 밀어 붙여 헌정 파괴의 길로 들어섰다. 1952년 발췌개헌에서 4.19 직후 내각책임제 개헌(1960.6.15)에 이르기까지 무 려 10여 년 동안 참의원은 헌법에만 규정되어 있던 상상의 제도였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제헌절만 되면 참의선 선거의 조속 실시를 약속하였으며, 야당인 민주 당은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참의원 구성을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는 정부 처사를 위헌 이라며 의례적으로 비판하여 왔다. 5) 이러한 참의원 기피 사상 에 대한 가장 신랄한 공격은 언론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람마다 정당마다 양원제에 대한 호불 호는 있겠지만 헌법상 설치된 참의원 구성을 여태까지 아니한 것은 헌법 위반이 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침해하는 용서할 수 없는 처사 라는 것이다( 동아일보 1957.10.14). 이러한 대내외 비판에 직면한 정부 여 당 및 정치권은 결국 1958년 1월에 이르러 참의원과 민의원의 협상 선거법을 공 포하였다. 이 중 참의원의원 선거부칙은 합동선거법 공포일로부터 1년 이내에 최 초의 참의원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경향신문 1958.1.26). 하지만 정부 여당은 여야 합의로 공포된 참의원 선거법마저 지키지를 않았다. 이승만 정 부는 약속한 선거 일시가 다가오자 대통령령으로 선거 일자를 결정하는 법률안을 이승만의 강력한 요청이 아니라 내각책임제를 통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입법 재량권 을 누리기 위한 한민당의 정략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5) 몇 가지 예를 들면, 우리헌법의 운영 면으로 엿본다면 위헌이 다반사처럼 자행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우선 참의원을 예로 든다고 하더라도 양원제 개헌이 있은 지 벌써 몇 해나 되었 는가. 만일 헌법에 참의원이 구성기간에 관한 규정이 없는 것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너무도 구차한 궤변이다 ( 경향신문 1956.7.17). 조병옥 대표최고위원은 이대통령이 4년 전에 상 하양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오늘까지 지연된 것은 위헌이며 참의원선거는 조속히 실 시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고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다( 동아일보 1956.9.18).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11 <표 1> 이승만 정부하의 역대 총선 결과 제1당 제2당 제3당 무소속 기타 의석 제1대 (48) 대한독촉(55) 한민당(29) 대동청년단(12) 85 19 200 제2대 (50) 대한국민당(24) 민주국민당(24) 국민회(14) 126 22 210 제3대 (54) 자유당(114) 민주국민당(15) 국민회(3) 68 3 203 제4대 (58) 자유당(126) 민주당(79) 통일당(1) 27 0 233 제출하였고, 이를 강행 통과시키는 꼼수를 부렸다(1958.12.4). 그렇다면 어떻게 헌법에 규정된 양원제가, 구체적으로는 참의원의 구성이 10여 년이나 무산될 수 있었을까? 가장 본질적 이유는 이승만 정부의 독선과 야당의 무원칙한 야합의 결과였다. 애초 이승만 정부가 양원제를 채택한 근본적 이유는 야당이 지배하고 있던 의회에 대한 견제가 목표였다. 그러나 <표 1>이 보여주는 것처럼 발췌개헌 이후 의회의 여야구도는 크게 변화하였다. 개헌 이후 자유당은 조직적 이념적 수준에서 강화되었던데 반해 야당은 사분오열하여 행정부에 대항 할 기력조차 상실하였다. 3대 민의원이 구성되면서 여당인 자유당은 절대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야당의 횡포가 아니라 여당의 독주가 문제되었던 만큼 참의원 구성 을 서두를 이유가 사라졌다. 이승만 정부시기에 참의원 구성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보다 직접적 원인은 장면 부통령과 참의원의 제도적 연관성에 놓여 있다. 1956년에 부통령에 당선된 장면은 헌법 규정에 따라 참의원 의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자유당 실세들은 참의원의 구성은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장면에게 정치무대의 전면에 나설 기회를 제공하고 상원의장으로서 국사에 관여할 정당한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을 우려하였 다. 6) 한편 야당 또한 양원제에 대한 정치적 소신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들(민의원) 6) 장면조차 참의원 선거가 지연되는 근본 이유를 자신과 연관하여 회고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고의로 참의원의 구성을 천연시켜 야당 출신 부통령의 권한을 박탈하고 말았던 것이 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예로서도 경향신문 폐 정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헌법위원회 구 성이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방법으로 그 구성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 가? 참의원의 구성이 불가능하게 되어 그나마도 부통령으로 국민에게 봉사할 기회는 전적 으로 박탈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정말 부통령이란 유명무실한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되고
12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의 권한과 역할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하여 그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동아 일보 1958.7.10). 이처럼 양원제는 이승만 독재정권의 붕괴 직후 갑자기 등장한 만병처방이 아니 었다. 10여 년 동안 헌법에 규정된 제도로서 풍부한 정치적 논쟁을 담고 있었다. 양원제와 의원내각제가 한국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역사적 교훈 이자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낳은 책임은 장면 정권의 무능력과 야당의 파벌에만 전적으로 귀속시켜왔다. 제2공화국에서 실험되 었던 양원제의 비극적 운명의 출발은 제도와 정치문화의 미성숙만이 아니라 이승 만 정부의 反 헌정주의적 인식에 일차적 원인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승만 정부의 위헌적 통치가 양원제가 운용되고 정착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였기 때문이 다. 우여곡절 끝에 시행된 제2공화국의 양원제가 당대의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를 살펴볼 차례이다. II. 제2공화국 양원제의 평가: 불능화의 경험적 근거들 제2공화국의 양원제는 불필요하였거나 비능률적이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 다. 당시 장면 정부의 공보비서관을 역임하였던 송원영조차 국회의원 수가 너무 많아지고 원로원 격인 참의원이 권리만을 주장한 점도 양원제의 폐단 이었으며, 그 예로 장면 총리는 사소한 것까지 물어오는 것에 답하기 위해 거의 매일 국회에 드나들었는데, 오전에는 민의원, 오후에는 참의원 하는 식 이었다고 기록하였다. 국방부 사무차관을 지냈던 김업 역시 양원제는 일본 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우리 실정에는 불필요 했었다고 평가하였다(이용원 1999, 274-275). 하지만 비록 1년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2공화국의 의정기록은 5대 양원 제 국회가 비능률과 태업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앞의 <표 2>에서 나타난 것처럼 양원제 하에서 법안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5대 국회 (1960.8~1961.5.15)에서 제출된 법안은 모두 298건인데 이는 제헌국회(1948~ 말았던 것이다 (장면 1967, 119-120).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13 <표 2> 역대 국회의 법안 처리현황 5대 대별 접수 가결 처리내용 부결 계 원안 수정 계 폐기 대안 반영 폐기 폐기 제헌 248 148 53 95 1 95 18 77 1 2대 420 215 83 132 2 190 39 151 9 4 3대 410 154 68 86 249 19 230 7 4대 325 75 42 33 249 18 231 1 의원 139 25 9 16 1 113 11 102 정부 159 39 22 17 119 4 115 1 계 298 64 31 33 1 232 15 217 1 6대 658 332 173 159 312 103 209 14 7대 535 357 137 220 2 170 49 121 6 8대 49 40 16 24 6 2 4 3 9대 633 544 309 235 85 28 57 4 10대 130 101 59 42 28 28 1 11대 491 341 176 165 8 123 42 81 19 12대 379 222 116 106 145 62 83 12 13대 938 492 257 235 397 215 182 49 14대 902 656 350 306 228 72 156 18 15대 1951 1120 577 543 784 304 480 47 16대 2507 948 402 546 1514 634 880 41 17대 7489 1915 954 961 5 5480 1906 3574 89 18대 13913 2353 1634 719 7 11045 3825 7220 508 계 32,574 10,141 5,468 4,673 31 21,564 출처: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bill/jsp/statfinishbill.jsp 철회 반려 1950)보다도 많은 수이며, 연간 법안수로 볼 때 15대 국회 이전까지 최고의 기록 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표 3>이다. 의원발의와 정부발의의 비율은 흔히 입법-행정
14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표 3> 시기별 발의 주체별 비율 비율 (%) 구분 의원발의 정부발의 1948-1959 43 57 1960-1961 47 53 1961-1979 15 85 1980-1987 33 67 1988-1992 35 65 1993-1997 18 82 1998-2002 26 74 2003-2007 55 45 2008-2012 88 12 자료: 법제처, 2007.3, 참여정부 입법추진의 특징과 성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부 관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제시되어 왔다. 때문에 입법부가 아니라 고무도장 에 불과한 통법부( 通 法 部 )라고 조롱받았던 박정희 유신체제하에서 정부발의 비율 이 가장 높았고,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의원발의 비율이 증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장면 정부 시기 의원발의와 정부발의의 비율은 47:53인데, 의원발의 비율의 급증이 두드러지고 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제5대 국회는 내각제 정부형태의 특 성을 반영하여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까지 정부와 국회의 관계에서 가장 대등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7) 제2공화국 양원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표 4>와 <표 5>다. 한 눈에 봐도 5대 국회의 법안 가결률은 역대 최저이다. 정부형태의 차이를 불문 하고 평균 가결률을 보면 18대 국회에 이어 두 번째로 낮다. 의원발의 가결률 역 시 18.0%에 불과하다. 민주화 이후 시민단체의 의정 평가가 활발해지면서 실적 7) 위의 표에 대한 독해는 주의가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를 계기로 의원입법의 발의 건수와 가결률이 높아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위의 가결률에는 정부가 인정한 것처럼 여대야소 상황에서 법률안의 신속한 통과를 위하여 의원입법의 형태를 빌린 것이 상당수 포함(9.4%) 되어 있다.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15 <표 4> 역대 국회의 입법 가결률 의원발의 정부발의 평균 제헌 48.6 67.8 59.7 2대 39.6 61.9 51.2 3대 41.5 34.7 37.6 4대 25.8 21.4 23.1 5대 18.0 24.5 21.5 6대 42.8 63.6 50.5 7대 50.4 80.4 66.7 8대 50.0 94.3 81.6 9대 54.5 96.0 85.9 10대 60.0 78.4 77.7 11대 41.2 89.5 69.5 12대 31.3 92.9 58.6 13대 30.0 87.2 52.5 14대 37.1 92.4 72.7 15대 40.3 81.7 57.4 16대 27.0 72.4 37.8 17대 21.2 51.1 25.6 18대 13.6 40.8 16.9 평균 37.4 68.4 31.1 출처: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bill/jsp/statfinishbill.jsp 늘리기에 급급한 의원 입법의 남발이 급증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실제로는 의 원발의 가결률이 역대 최저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입법 산출량이나 가결률 만으로 의회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이다. 의회의 바람직한 모델 로 제시되는 미 의회의 경우 의원 제출 법안이 연간 수천 건을 초과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이 지역구 이익 및 로비스트들의 청원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하나의 정책 및 쟁점에 대해 수십 수백 개의 유사 법안이 개별 의원들에 의해 제출되고 있다. 8) 따라서 통상 위원회에 회부된 법률안 중 본회의에 보고되는 것은 10% 이 8) 우리의 입법 발의 건수는 미국과 비교해볼 때도 지나치게 많은 편이다. 미국의 의원 435명
16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하이며 최종적인 법안 성립률은 5% 전후에 불과하다(박찬표 2000, 27). <표 4>에서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24.5%에 불과한 정부발의 입법의 가결 률이다. 통상 의원내각제의 경우 내각이 의회를 지배하기 때문에 입법 과정은 순 탄하다. 폴스비에 따르면 내각제 의회는 경합장형 의회로서 내각이 제시한 입법안 은 활발한 논쟁과 토의를 거치되 심각한 수준의 수정을 거치거나 의회 통과 자체 가 문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때로 내각제 의회는 단순한 고무도 장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 1945년부터 1978년까지 영구의 보수당이 하원에 제출한 의안 중에 97%가 통과되었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내각은 1,772건의 수정안을 제출했는데 그중에 1,770건이 통과되었다. 반면, 같은 시기 하원의원들 이 개별적으로 제출한 수정안은 4,198건이었는데, 이 중에서 단지 210건만이 통과 되었다(필립스 쉬블리 2010, 357). <표 5>에서 알 수 있듯이 제2공화국의 정부발 의 입법 가결률 24.5%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과 일본, 그리고 독일의 수치와 비교해 봐도 턱 없이 낮은 수준이다. <표 5> 주요국 의회의 입법실적 비교 항목 국가 한국 2001~2012 1988~2000 1948~2000 제출법안 중 의원안의 비중 56.3 53.7 47.6 통과법안 중 의원안의 비중 21.2 33.1 31.8 정부 안 통과율 54.8 86.3 75.3 의원 안 통과율 20.6 36.9 38.6 영국 (1975~93) 67.4 22.0 94.4 12.9 일본 (1947~92) 32.0 15.0 87 31 독일 (1949~92) 41.3 22.0 83.2 34.8 출처: 박찬표(2003), 26에서 재인용. 2001년 이후 자료는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bill/jsp/statfinishbill.jsp에서 작성 은 지난 110대 국회(2007~2008년)에서 7,336개 법안을 발의해 1인당 8.4개꼴로 법안을 발 의했다( 매일경제 2009.1.25). 반면 우리는 지난 18대 국회 동안 총 의원발의 건수는 12,220건으로 의원 1인당 10.2개꼴로 법안을 발의하였다.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17 III. 불능화된 양원제의 원인 분석 1. 장면 내각의 취약한 리더십과 첨예한 파벌 갈등 의원내각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부가 제출한 법안의 가결률이 극히 낮았 던 가장 큰 원인은 신파와 구파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한 내각의 응집력 붕괴에 있었다. 물론 갑작스런 5.16쿠데타 직후 국회 해산으로 인해 다수의 법안이 자동 폐기되었다는 점도 십분 고려되어야 한다. 5대 국회의 38회기(1961.1.1~1961. 5.15) 동안 정부 발의 법안의 무려 80%가 회기 불계속으로 인해 자동 폐기되었다. 그렇지만 보다 본질적 원인은 내각의 안정성을 손상시켰던 정당규율(party discipline)의 결여에 있었다(이정복 2006, 643-645). 서구의 의원내각제에서 정당 은 그 내부에서는 활발한 논의와 대립이 있으나 일단 결론이 나면 반대 의원들조 차도 내각의 결정에 따르는 민주 집중제를 확립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의 신구 파는 내각책임제 개헌, 7.29 총선 후보자 공천, 국무총리 지명, 그리고 내각구성 등의 권력배분과 관련되는 모든 정치과정에서 대립하였다. 신구파의 감정 대립은 자유당에 대한 감정보다 더 적대적인 수준이었다(이기택 1987, 83). 내각의 불안정성과 응집력 결여는 장면 정부가 9개월의 재임기간 중 3번의 개 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데서 여실히 나타났다. 9) 구조화된 당 내부의 분열과 잦은 개각은 주요 입법에 대한 내각과 여당의 효과적인 정책 조율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하였다. 차라리 인사를 둘러싼 갈등은 집권 여당의 프리미엄이 있기 때문에 봉합의 여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양파의 사전 합의에 따라 초대 민의원 의장에는 9) 장면 총리는 첫 번째 내각을 그를 지지한 신파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나 이러한 조각에 대해 구파는 물론이고 신파의 소장층조차도 반발하여 10여 일 만에 신파 8명, 구파 5명, 무소속 2명으로 구성되는 개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구파는 이러한 인사에 불만을 품고 9월 22일에는 신당 발족을 선언하였고 신파는 민주당으로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하였 다. 구파는 다시 분당파와 협상파로 나뉘어 분당파는 10월 18일 신민당을 발족시켰다. 구파 분당 후 민주당은 다시 노장파, 소장파, 합작파로 나뉘었고 노장파가 소장파 모임인 소장동 지회의 해체를 요구하자 소장파는 1961년 1월 26일에 신풍회를 결성하였다. 장 총리는 민주 당 내의 이러한 분파 경향을 막기 위해 1월 30일에는 세 번째 개각을 하고 각파의 간부들을 입각시켰다(중앙선관위 1968, 223-225).
18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곽상훈(신파), 부의장에는 이영준(구파), 서민호(구파)가 선출되었고, 참의원 의장 에는 백낙준(무소속), 부의장에는 소선규(구파)가 당선되었다. 구파와 신파는 민 의원과 참의원의 상임위원장, 신설된 특별재판소 및 특별감찰부의 위원까지 합의 하에 분배하였다. 하지만 신구파 간의 합의 결렬은 곧바로 내각의 위기로 치달았 다. 상징적 국가원수였던 윤보선의 잦은 월권으로 인한 대통령과 총리의 잦은 충 돌, 내각 안에서의 구파와 신파의 불협화음,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스며든 민주당 과 신민당의 긴장은 심각한 수준의 정책 갈등을 낳았다. 이러한 당정 간의 첨예한 마찰 속에서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정치운동에관한법>, <국가보안법>, <집회와 시위운동에관한법>, <검찰청법>, <공안법> 등의 개정안이 모두 폐기되었다. 예를 들어 <공안법>의 경우 정부는 경찰의 중립강화를 위해 중앙공안위원회 의 설치를 명시하였으나 신민당은 공안위원을 국회 동의 없이 총리가 임명한다는 점에서 이 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한미경제원조협정> 또한 신민당은 제3, 4, 6조가 대한 민국의 주권을 침해한 굴욕적인 내용이라며 반대하였고, 이에 대해 장면은 신민당 의 반대를 북한괴뢰의 파괴음모 와 연관시킴으로써 당정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다 (백영철 1996, 142-143). 집권당 내부의 분열에 의해 정부가 추진하였던 법안이 부결된 가장 대표적 사례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과 <반공을 위한 특별법>이 다. 장면 정부는 당시 분출되고 있던 대중의 정치세력화와 연대투쟁에 위기를 느 끼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시법과 반공법 제정을 서둘렀다. 그러나 이 러한 시도는 곧 벽에 부딪혔다. 1961년 3월 8일 소위 2대 법안 이 발표되자 신민 당과 민주당 내의 신풍회를 비롯하여 언론계 및 법조계에서 일제히 반대의사를 표명하였고 특히 혁신세력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즉각적인 반대투쟁에 돌입하였 다. 소위 2대악법 반대투쟁이 전국화 조직화되자 신민당은 악법제정 반대로 입장 을 선회하였고 두 법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었다(지병문 외 2010, 131). 요약하자면 제2공화국의 양원제 국회는 입법 건수나 의원입법 비율만을 보면 과거보다 더 활발한 의정 활동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예외적일 정도 로 낮은 정부입법 가결률은 제2공화국의 양원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였음 을 보여준다. 가장 본질적인 원인은 정당정치, 의회정치, 나아가 정부 자체의 분열 을 야기하였던 장면의 유약한 리더십에 있었다. 장면 정권이 추구했어야 할 문제 해결 방식은 대통령중심제에서보다 더 적극적인 의회로의 진입과 의회 및 정당정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19 치의 장악 및 활용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장면은 그를 관철할 비전, 결단력과 추진 력을 결여하였다. 결국 장면의 리더십은 정책결정과정에서 신구파 간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분당 이후에도 당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함으로써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있어 무능한 정부라는 평가를 자초하였다(백영 철 1996, 150-151). 아울러 상이한 파벌들이 타협의 규칙과 합의의 예술을 제도화 한 일본의 55년 체제와 달리 한국에서의 양원제는 사회세력과 단절된 채 압도적 으로 정치중심적인, 특히 권력 배분을 둘러싼 신구파 간의 첨예한 갈등을 초래하 였고, 이는 행정부와 의회의 균열을 한층 가속화시킨 제도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최장집 1996, 53). 2. 제도 설계의 실패: 참의원의 모호한 법적 제도적 위상 통상 양원제는 미국, 스위스, 독일, 호주 등 상원의 선출 방식과 권한, 즉 상원 이 주민 직선으로 선임되고 또 양원에게 동등한 권한을 배분하는 대칭적 양원제와 프랑스, 캐니다, 스페인, 영국 등 하원에게 보다 많은 권한과 우선권을 부여하는 비대칭적 양원제로 구분된다(Lijphart Arend 1999, 200-215). 비슷한 맥락에서 사 르토리는 양원의 권한과 세력이 비슷하여 균형을 이룬 미국의 강한 양원제(strong bicameralism)와 영국과 프랑스의 약한 양원제(feeble bicameralism)로 구분하고 있다(Sartori 1994, 184). 3차 개정된 제2공화국의 헌법은 법률안과 예산안은 먼저 민의원에 제출하여야 한다 (39조)고 민의원의 선의권( 先 議 權 )을 규정하였고, 양원의 의결이 일치하지 아니할 때에는 의안을 민의원의 재의에 附 하고 각원에서 의결된 것 중 민의원에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재석의원 3 分 之 2 以 上 의 찬성으로 다시 의결된 것을 국회의 표결로 한다 (37조)며 참의원의 거부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내각 에 대한 불신임권한을 민의원에만 부여하였다(70조 2항). 이런 점에서 제2공화국 의 양원제는 민의원의 권한과 역할이 참의원을 압도하는 비대칭적 또는 약한 양원 제에 해당된다. 필자는 제2공화국 양원제가 제도적 수준에서나 대중적 차원에서 정착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로 애초 양원제를 설계할 때 참의원의 독자적 기능과 역할이 확보되지
20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못한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실 이 점은 처음으로 양원제가 도입될 때부터 강조되 어 왔으나 정부나 정치권 모두 이를 오랫동안 외면하여 왔다. 개정법 32조 국회 양원제에 있어 그 선거 방법이 양원 모두 같은 방식의 민선제로 서 그 결과는 국회의원수를 증가한 것밖에 안 되고 참의원으로서의 민의 반영의 특별 한 요소는 없는 것이다. ( 동아일보 1952.7.6) 모처럼 하원 이외에 상원을 두는 이상 그것은 조직이나 성격에 있어서 하원과는 다른 무슨 특색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데 개정헌법에는 임기와 선출방식(1/3의 개 선) 이외는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아니하였다. ( 동아일보 1952.7.11)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훗날 경남도지사, 통일원장관을 역임하였던 신도성 은 양원제의 성패가 상이한 역할과 구성 원리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지만 헌법에 서 이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선거법 개정을 통하여 비례대표제나 직능 대표제를 통한 상원 구성을 제안하였다( 동아일보 1953.4.13). 이 문제가 중요 한 까닭은 당시만 해도 양원제는 이웃 일본을 통해 간간이 귀로 접했지 실제 이를 체험하거나 적용 가능성을 깊이 있게 고민한 정치인이나 학자 집단이 거의 없었다 는 점이다. 실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보면 단원제와 양원제를 구분 하지 못한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무려 44.7%에 달하였다( 경향신문 1962.5.14). 이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던 한 언론사의 사설은 정곡 을 찌르고 있다. 단일민족소규모의 국가요 국제정치위기의 첨단에 있어서 입법의 신속을 요하는 한 국에서는 양원제보다는 단원제가 이상적이라는 것은 이미 본란에서 누차 지적한 바 있고 아직도 그 정당성을 확신하는 바이다. 어쨌든 실정 헌법의 존엄은 수호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양원제의 실시에 참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민의원 이외 참의원 이 있어야 한다는 참의원의 존재 이유가 뚜렷이 나타나야 할 것이므로 이른바 양원조 직의 異 別 의 원리가 유달리 선명히 반영되어야 함이다.( 동아일보 1955.4.25)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21 고려대 법대 교수출신으로 장면 정부의 내무부 정무차관을 역임하였던 김영구 는 의회가 민의원, 참의원으로 나뉘었지만 똑같은 법률을 이중으로 다루었을 뿐 고유의 업무는 따로 없었다 고 회고하였다(이용원 1999, 274). 국민여론 또한 참 의원이 제2의 민의원( 동아일보 1961.1.24) 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장면 총리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자 이승만 독재정권을 매섭게 비판하였던 경향신 문은 5.16 쿠데타 발발 2주일 만에 다음과 같은 사설을 게재하였다. 첫째. 우리는 새로운 정부형태에 대한 언급하고자 한다. 대내대외로 과감한 행정력 이 가장 긴급하며 불필요한 정치적 유희보다 국력의 배양이 시급하다. 역시 대통령책 임하의 안정된 강력한 시책이 의회의 세력에 의존하는 내각책임제보다 현실적 타당성 이 있다. 우리가 체험한 바에 따르면 양원제의 필요성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은 오직 쓸데없는 정치적 장식품이며 고급 봉급인의 안식처이다. 참의원은 오직 많은 국고금을 낭비하고 이권운동의 발정지인 것 이외에 우리에게 무엇 하나 플러스 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 새로운 정치체제를 위한 몇 가지 제언. 경향신문 1961.5.30) 제2공화국이 무능과 분열의 대명사가 되면서 당시 채택되었던 내각제와 양원제 역시 오랫동안 우리에게 맞지 않는 비효율적인 제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표 6>을 보면 내각제에 대한 선호는 전반적으로 낮지만 시기별로 상이한 양상을 보여주었 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서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는 개헌론자의 4분의 1 정도가 내각제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경향신문 창립 50주년 기념 여론조사(1995.10.6)를 보면 내각제에 대한 지지가 급격히 상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세종연 구소에서 수행한 여론조사 역시 대통령제와 내각제에 대한 지지 비율이 45.5% 대 33.6%로 나타났다(한배호 2003, 245). 하지만 양원제에 대한 지지는 해방 이후 단 한 차례도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이는 5.16 쿠데타 이후 실시 된 한 여론조사에서 단원제 지지(36.6%)가 양원제 지지(14.1%)를 두 배 이상 압 도한 사실로 뒷받침된다( 경향신문 1962.5.14). 이러한 경향은 커다란 변화 없 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1980년 한국공법학회 회원을 대상으로 한 개헌안 쟁
22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표 6> 개헌안에 대한 여론조사 현행 단임제 4년 중임제 이원 집정부제 의원 내각제 한국경제 (2012.5.8) 7.3 73.3 4.4 5.8 19대 국회의원 당선자 한국일보 (2009.6.9) 29.4 40.9 4.1 13.4 국민의식여론조사 시사저널 (2008.6.10) 6.9 53.4 6.9 25.0 18대 국회의원 당선자 국민일보 (2007.1.9) 32 42 non 26 국민의식 여론조사 경향신문 (1995.10.6) 52.8 non non 46.2 국민의식여론조사 비고 점에 관한 여론조사를 보면, 단원제(90.8%) 지지가 양원제 지지(9.2%)를 압도하 였다( 동아일보 1980.1.5). 필자는 이처럼 양원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 게 된 결정적 원인이 제2공화국에서 우리가 경험하였던 양원제의 한계, 특히 대표 와 작동 방식에 있어 상원으로서 참의원의 독자성이 확보하지 못한 데 있다고 평 가하고 있다. 독자적 원리와 기능에 입각한 참의원 구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 3.15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 수뇌부들은 직능대표제로 구성된 참의원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 추진을 공약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3.15 부정선거 규탄의 수위가 점 차 전국화 조직화되자 궁지에 몰린 자유당 정책위원회는 지방의회 의원이 간접 선거로 선출한 의원,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걸쳐 지명한 국가유공자, 직능단체별 대표자로 구성된 참의원 제도를 제안하였다( 동아일보 1960.4.5). 그러나 야당 으로서는 이미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한 상황에서 이기붕 부통령이 추진하는 참의 원 제도를 수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민주당은 자유당의 이러한 제안을 관제 어용화 시도 로 전면 거부하였다( 동아일보 1960.4.7). 이처럼, 너무 늦게 그리고 정략적 차원에서 양원제가 구상되면서 참의원의 독 자적 위상과 역할 마련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논의는 생략되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참의원의 기능과 역할의 모호성과 중복성이 민의원, 즉 양원제 자체의 기 능 부실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23 3. 시대와의 부조화, 참의원의 보수성 양원제의 고유한 장점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있다. 양원제를 옹호하는 쪽에 서는 무엇보다도 법안 심의 과정의 졸속과 경솔을 방지할 수 있으며, 의회 내 권 력분립 원리 구현을 통해 다수 횡포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 러한 장점들이 제2공화국의 양원제에서는 어느 정도 발현되었을까? 의회의 행정 부 견제는 인사와 입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정부의 인사권에 대한 견제는 임명동의안을 살펴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2공화국은 임명동의안 부결 건수에 있어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역대 국회에 서 정부가 제출한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국회의원구속동의안>이거나 <체포동의안>, 또는 일신상의 사유로 인한 <사직의 건>이었다. 정치사적 의미가 있는 부결된 임명동의안 중 몇 가지만 살펴 보면,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13대), 장대환 국무총리 임명동의안(16대), 조 용환 헌법재판소 재판관 선출안(18대) 등이다. 부결된 동의안의 공통점은 여소야 대 국회에서 발생한 사건(정기승, 장대환)이거나 여대야소하에서 야당 추천 몫에 대한 집권당의 거부(조용환)로 인해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제2공화국에서의 주요 임명동의안 부결은 이전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었 다. 그것의 본질은 민의원 의석의 75%(175석/233석)를 차지하고 있었던 거대 여 당 내부의 구파와 신파의 파벌 갈등에 연유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윤보선 대통령은 먼저 구파의 김도연을 총리후보로 지명하였으나 민주당 신파 의원들은 민의원에 서 그의 인준을 거부하였고, 그 직후 윤 대통령이 두 번째로 지명한 신파의 장면 은 의원 117명의 지지로 가까스로 인준을 받을 수 있었다. 장면을 국무총리로 지 지한 의원 중 한 명만 이탈하여도 그의 내각은 붕괴될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정한 과반수였다. 곽상훈 민의원 의장과 이영준 부의장 사임 역시 구파와 신파의 첨예 한 갈등 수준을 잘 보여준다. 1960년 10월 13일 곽상훈 의장과 이영준 부의장은 이틀 전에 발생한 대학생들의 의사당 난입사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이유로 사임 서를 제출하였다. 구파는 이참에 사임서를 수리하고 새로운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며 총공세를 펼쳤고 신파는 사표가 수리될 경우 내각불신임으로 간주하여 총사퇴 하겠다면서 배수진을 쳤다. 투표 결과 곽의장은 재석 218 중 가 96 부 119, 이부
24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표 7> 임명동의안 부결 현황 일시 내용 구분 1960-10-18 사무총장(이창수)임명승인에관한건 참의원 1960-10-14 의장(곽상훈)사임에관한건(곽상훈의원) 민의원 1960-10-14 부의장(이영준)사임에관한건(이영준의원) 민의원 1960-08-16 국무총리(김도연)지명에대한동의요청의건 민의원 의장은 재석 211중 가 85, 부 124로 부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장면 정부는 국민들 에게 집권 안정선을 확보하였다는 인상을 처음으로 남겨주었다( 경향신문 1960. 10.14). 또한 이창수 참의원 사무총장의 임명동의안은 54명 중 가 19, 부 33으로 부결되었는데, 석연치 않은 과거행적과 부정축재 등을 구실로 백낙준 의장과 소선 규 부의장 등 구파가 밀고 있는 인사에 대한 신파의 반발이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참의원의 성격과 양원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표 8>의 재의 법안 현황이다. 한국 헌정사에서 재의 요구된 법률안이 국회에서 법으로 확정된 사례는 제헌국회 때 14건의 거부권 행사 법안 가운데 귀속재산 임시조치법 등 5건, 2대 국회에서 25건의 거부권 행사법안 가운데 14건, 5대 국회에서 8건의 거부권 행사 법안 가운데 3건이 전부다( 한겨레신문 2003.12.4). 이후 노무현 정부 시기 대통 <표 8> 재의 ( 再 議 ) 법률안 처리 상황 (참의원에서의 廻 付 또는 還 付 ) 구분 건명 일시 국회법 개정법률안 1960.9.19 가결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폐지에 관한 법률안 1960.12.30 부정축재특별처리법안 1961.4.10 부정선거관계자처벌법안 1960.12.29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안 1960.12.31 부결 감찰위원회법안 1960.12.31 헌법재판소법안 1961.4.10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거법안 1961.4.18 출처: 국회사무처, 國 會 史 : 제헌국회-제6대국회, 자료편 (중화출판사, 1971), 593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25 령측근비리 특검이 국회에서 재의결된 2003년까지 재의결은 42년간이나 우리의 의회에서 사라졌다. 장면 정부 시절 불과 1년 만에 재의 법안이 8건이나 나왔다는 사실은 양원제 의회에서 작동되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2공화국의 양원제는 민의원의 권한과 역할이 참의원을 압도하는 비대칭적 또는 약한 양원제에 해당된다. 실제 입법 과정에서 선의권( 先 議 權 )을 갖지 못한 참의원은 예산안을 비롯하여 법률안 심의에 있어 민의원과 중 요안건에 대하여 충돌하는 사례가 허다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참의원의 완패로 끝 났다. 10) 그러나 예외적인 것으로 국회법 개정에 있어 9월 15일 민의원이 통과시 킨 것을 참의원에서 일부 수정을 가하여 민의원에 재의에 회부한 결과 참의원안이 채택된 일도 있다. 이 법안은 양원제하에서 참의원이 재의 요구하였던 의안 중 최초로 본회의를 통과한 사례라는 의정사의 의미가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부결을 예상하였으나 양원 합동위원회를 통한 신구파 간의 정치적 타협으로 참의원 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11) 참의원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참의원의 수정안이 민의원에서 최 종 통과된 <부정축재특별처리법안>이다. 당시 참의원이 의결하였던 수정안의 골 자는 부정축재의 정의를 3.15 선거 당시 집권당에 자진하여 3천만 원 이상의 자 금을 제공했거나 조달한 자 또는 공무원과 정당인이 부정선거에 관련하여 재산상 의 이득을 취득한자 (제2조)로 규정한다는 내용이다. 12) 이는 원안에 비해 그 처벌 10)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첫째, 헌법개정안은 참의원에서 형벌불소급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반대가 다수였지만 민의원과 여론의 눈치를 살피던 참의원은 회기 시점을 30분 넘겨 가까 스로 통과시켰다. 둘째, 민의원을 통과한 혁명입법 중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은 참의원 에서 이미 기소된 자에 국한하여 심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수정안이 채택되었으나 12 월 29일 민의원의 재의표결에서 민의원의 원안이 확정되었다. 마찬가지로 <공민권제한법 안>도 참의원의 수정안을 기각하고 민의원 원안을 최종 확정하였다(국회사무처 1971, 324-325). 11) 민의원에서 송부되어온 <국회법개정법률안>을 심의하였던 참의원은 논란의 초점이 됐던 35조와 117를 수정하여 참의원에도 예산결산위원회를 신설하고 또 민의원에서 부결된 안 건도 참의원으로 송부할 수 있도록 동 법안을 수정 통과시켰다. 민의원 본회의에서 재의 표결 결과 참의원 수정 통과안을 재석 184명 중 가 129표, 부 55표로 재석의원의 3분의 2인 123표 이상을 얻어 참의원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경향신문 1960.9.19). 12) 원안은 본 법에서 부정축재라 함은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재산상의 이득을 취한 행위를 말한다 이다. 이처럼 원안은 자의든
26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범위를 대폭 축소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강력한 혁명입법의 조속한 통 과를 주장하였던 비판적 성향의 언론조차도 재계 인사를 제외시킨 참의원의 수정 안을 적극 옹호하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부정축재처리 법안의 현명한 수정 이 라는 기사에서 동아일보는 민의원안이 부정축재의 정의를 귀걸이, 코걸이 식으로 규정한데 반해 참의원안은 그 대상자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축소하였고, 기업과 기업인들을 되도록 덜 건드려서 부정축재처리로 인한 국민경제의 혼란과 기업인 들의 불안과 기업의욕상실 등을 극력 방지하려고 애쓴 것이라는 데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는 사설을 게재하였다( 동아일보 1961.4.6).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민의원 본회의는 참의원의 수정 통과안을 재석 160석 중 가 138 부 25표의 압도적 지지로 채택하여 마지막 혁명 입법의 끝을 맺었다( 동아일보 1961.4.10). 참의원이 회부한 나머지 수정안들의 공통된 의도 역시 민의원에서 전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소위 혁명 입법의 처벌 범주와 속도를 제어하는 데 있었다. 부정선 거처벌법과 부정축재자처리를 위한 헌법개정안이 참의원을 가까스로 통과(44표/52 표)하였는데 이는 구자유당이 중심이 된 삼우구락부 소속의원들의 표결 포기 또 는 부결 태도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1960.11.29). 또한, 참의원은 부정선거관련 자처벌법안 6조에 이미 수사 기소된 자에 한하여 적용 한다는 부칙을 신설함으로 써 대상자를 대폭 줄이는 방향으로 원안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였다( 경향신문 1960.12.17). 그리고 참의원 법사위는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대폭 수정을 가하여 통과시켰는데, 예를 들면 자동케이스 대상자 중 서울특별시와 각도의 지도 과장 및 정부기업체의 책임자급 등을 삭제하고 심사케이스 중 5.25 선거 때 부정 선거로 당선무효의 판결을 받았던 자유당 공천후보자, 경찰서장, 선거 또는 정보 담당 부장검사와 검찰 지청장급을 제외하기로 하였다. 다음 보도에서 나타난 것처 럼 참의원의 이러한 행태는 당시 시민들과 언론의 공분을 초래하였다. 참의원들은 혁명입법을 방해하지 말라(사설): 참의원 법사위는 25일 하오 반민주행 위자공민권제한법에 대폭 수정을 가하여 통과시켰다. 중략 참의원이라는 고급유 타의든 집권 자유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한자로 포괄적으로 규정하였 다면 수정안은 자진 납부한 자로 그 범주를 대폭 제한하였다는 차이를 갖고 있다.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27 한의 봉급생활자와 국사방해기관을 해마다 수십억 환의 경비를 들여 유지함이 과연 현명한가에 관하여 식자간에 회의론이 대두되고 있다. 양원제 국회의 훌륭한 전통을 세우기에 힘써야 할 초대 참의원이 처음부터 반민주적으로 행동하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경향신문 1960.12.26) 참의원은 자가 숙청을 깨끗이 하라: 참의원은 발족한지 얼마안가 구자유당계 의원 들이 많이 모인 탓으로 반혁명세력의 집결체이니 그들의 성분이 학자, 교육자, 언론인 심지어 예술인 등이어서 정치의 초년병의 집합체라 하여 신정부가 요구하는 제 입법을 쾌속도로 제정해야 할 중대시기에 처하여 법안심의에 있어 심의지연으로 입법과업에 커다란 장애물이 된 것이 사실이다. 최근의 사례만 들더라도 공민권 제한법에 걸린 현역의원을 심판하기 위한 심사위구성에 관한 결의안이 심의태만으로 2월로 이월됐다. 이 역시 참의원이 반혁명세력의 결집체로서 불성실한 태도의 일 표현이다.( 경향신문 1960.12.26) 참의원이 역할의 보수성과 더불어 질타를 받은 또 다른 이유는 참의원들의 정 치 경력의 일천함과 구성의 다양성이었다. 이러한 지적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참의원 전원의 직업별, 연령별 분포를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띠는 차이는 연령별 분포이다. <표 9>를 보면 참의원이 민의원보다 훨씬 고령화되어 있음을 한 눈에 할 수 있다. 민의원의 경우 40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지만, 참의원은 50대의 비 중이 압도적이다. 또한 61세 이상 의원 비중도 참의원이 민의원보다 10% 이상 높다. 1960년 당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52.3세(http://www.insvalley.com/ board/common/boarddetail.jsp)에 불과하였으며, 제헌의회부터 4대 국회까지 의원들의 평균 연령 46.2세와 비교해볼 때(민준기 2003, 407), 이 같은 참의원의 <표 9> 제5대 국회의원의 연령별 분포 30세~40세 41세~50세 51세~60세 61세 이상 민의원 (233) 45(19.3%) 94(40.3%) 61(26.2%) 33(14.2%) 참의원 (45) 2(4.4%) 13(28.9%) 18(40.0%) 12(26.7%)
28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연령 분포는 대단히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높은 연령 변수가 정치충원의 폐쇄 성과 보수성을 반영하는 일반적인 지표(박재창 2003, 70)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왜 제2공화국의 참의원이 양로원 또는 반혁명 세력의 집결체 라는 항간의 비판( 경향신문 1960.12.2)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참의원의 보수성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자료는 그들 중 적지 않은 인물이 친일 파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에 수록된 참의 원 인사로는 백낙준(교육), 여운홍(학술), 김장섭(법조), 심종석(관료), 김대식(군), 김용주(관료), 이범승(관료) 등 무려 7명(14.6%)에 달하고 있다. 또한 참의원의 안호상 의원과 구자유당 출신 박종웅 의원은 부정선관련자처벌법 에 대해 인도주 의 차원에서 사형을 폐지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하여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하였다 ( 경향신문 1960.12.16). 참의원 자폭론이 대두: 자유당을 예찬하는 혁명의 역풍이 참의원을 몰아치자 일부 참의원들은 사태가 이쯤 되었다면 참의원을 깨끗이 없애자는 강경한 자폭론을 제시. 구자유당의 박철웅 의원에 의해 선거원흉이 애국자로 미화되고 사형폐지론이 인도주 의로 장식된 망발이 참의원의 단상을 휩쓸자 교수출신인 엄민영 의원(민주)이 참의원 의 반동성을 폭로하면서 자폭론을 제기하였다.( 경향신문 1960.12.15) 참의원은 직업별 구성에서도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참의 원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지적이 많았지만 이는 정확한 비판이 아니다. 왜냐하면, 참의원 중 전직 국회의원의 비중은 김진규, 송방용, 이남규 등 3명의 제헌의원을 포함하여 무려 33.3%에 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호상(초대 문교부장관),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이인(법무장관) 등 국정경험을 갖춘 전직 관료의 비중 역시 3분 의 1에 달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5대 민의원의 국회의원(9.0%) 및 관료(19.3%) 비중을 훨씬 압도하는 것이다. 참의원의 구성에서 가장 눈여겨 볼 부분은 교육계 인사의 활발한 진출이다. 무려 교육계 인사의 비중이 18.8%에 달하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철웅(조선대 총장), 백낙준(연대 총장), 이훈구(성대 총장) 등이 있다. 이처럼 제5 공화국의 참의원의 역할과 구성은 다분히 보수적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상당수는 전직 관료나 교육계 인사로서 친일 및 자유당 경력을 갖고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29 <표 10> 제5대 국회의원의 직업별 구성 구분 당선 인수 국회 의원 정당 관료 농축 산업 직업별 당선인수 상공 의료 법조 회사원 교육 언론 문화 무직 기타 민의원 233 21 45 47 10 6 19 12 1 4 44 24 참의원 48 16 16 0 2 1 1 0 9 2 1 0 있었으며, 고령화된 집단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참의원 공천의 상당수가 민주 당 신파와 구파 사이의 묵계, 즉 사회적 명망가와 원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이 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참의원의 보수화는 친일 및 자유당 경력을 둘러싼 선거 쟁점화가 전국단위의 민의원 선거보다는 지역단위의 참의원 선거에서 덜 공 론화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실 참의원의 보수화 경향에 대해서는 이미 선거 이전부터 언론의 지적과 우려가 뒤따랐다. 동아일보 는 참의원이 민주반역자의 소굴로 墮 해서는 안 된다 는 사설(1960.6.28)을 통해 정당의 거물 지도급이 민의 원에 집중되고 그보다 모자라는 인물들이 참의원에 편중되는 양극화 현상은 양원 제의 동시 실시를 예상하지 못한 결과, 즉 유력 인사가 이미 민의원 선거에 대비 해 막대한 정치자금과 조직을 투입하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끝으로,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던 참의원의 보수화를 가져온 중요한 제도적 원 인은 선거제도에 있었다. 참의원 의원은 민의원 의원 정수의 4분의 1 이내에서 주민이 직선토록 했다. 참의원의 임기는 민의원의 임기 4년보다 길게 6년으로 하 고 3년마다 절반씩 개선( 改 選 )토록 했다. 주목할 점은 민의원 선거가 지역구에서 1위 당선자만을 선출하는 단순다수 소선거구제(FPTP)였던 데 비해 참의원 선거는 도별로 2명에서 8명을 선출하는 대선거구제였다는 점이다. 아울러 참의원의 의석 배분은 유권자들이 해당 지역에 할당된 의원 정수의 절반을 표기하는 제한연기명 투표제였다(김용욱 2004, 453). 복수 투표제의 영향으로 4.19 혁명 이후의 정치적 분위기와 상관없이 각 분야의 고령화된 명사 집단이 대거 참의원에 당선될 수 있 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한 언론사는 다수 득표자는 임기 6년, 소수 득표자는 임기 3년을 보장하는 복합한 선거 규정과 투표제도 역시 유권자의 관심을 떨어뜨리고 구자유당 간부나 고관대작들이 참의원에 대량 입후보하게 된 원인을 제공 하였다
30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고 분석하였다( 경향신문 1960.6.28). IV. 맺음말 제2공화국의 경험은 오늘날 양원제를 옹호하는 이들이나 반대하는 이들 모두에 게 대단히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의 양원제 논의는 제2 공화국의 역사적 경험이나 한국적 현실보다는 서구의 이론과 제도 차원의 추상적 논의가 지배하여 왔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와 양원제의 부정합성을 주장 하였던 근거는 신구파간의 갈등과 그로인한 장면 정부의 무능이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임기 9개월의 장면 정부에만 전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평가이다. 양원 제를 정략에 따라 헌법에 도입한 것도, 헌법에 명시된 참의원을 8년 동안이나 시 행하지 않은 것도 이승만 정부였다. 그러한 위헌적, 반헌정주의적 처사 때문에 양원제를 체험하고 운용의 노하우를 적립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하였던 것 이다. 원론적 차원에서 보자면 양원제는 숙고의 전당이 될 수도 보수반동세력의 은신 처가 될 수도 있다. 긍정적 차원에서 보자면 참의원은 서릿발 같은 혁명의 풍운 속에서 자칫 대중영합으로 기울기 쉬운 허술한 졸속 입법을 보완하고 정련( 精 練 ) 하는 공론장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양원제의 장점인 의원입법의 증 대와 인사 및 입법을 통한 정부 견제의 활성화라는 일부 긍정적 효과들이 나타나 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도가 아니라 성과의 관점에서 엄밀하게 보자면, 장면 정부 는 양원제가 내장한 제도적 장점들을 창출하는 데 실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장면 민주당 정부의 허약한 리더십과 내각의 극심한 균열이 효율적인 입법화를 가로 막았다. 유례없이 낮은 장면 정부의 입법률은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아울러, 제2공화국의 참의원은 구성과 역할 면에서 혁명정부의 기세와 대중의 조직화에 제동을 건 정치퇴물들의 양로원( 경향신문 1960.12.2) 에 불과하였다 는 질타를 받을 만하였다. 신파와 구파는 모두 참의원을 충원과 지지를 창출할 정치혁신의 요체로 인식하기보다는 명망과 연륜을 갖춘 정치원로들의 조용한 퇴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31 출구로 사유하였다. 또한 새롭게 도입된 낯설고 복잡한 제한 연기명 투표라는 선 거제도 역시 유권자의 관심을 떨어뜨리고 친일관료나 구자유당 출신의 원내 진입 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이론적 수준에서의 양원제 찬반 논의나 또는 한국의 양원제 실패 요인 분석에 서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상원, 한국의 경우 참의원 의 독자적 위상과 역할의 정립 문제이다. 실례로 필자가 인터뷰하였던 참의원 출 신의 정치인들조차 참의원 자체의 고유한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 었다. 13) 언론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의 부정확하고 모호한 인식은 그때나 지금 이나 크게 변함이 없다. 이는 제도 개혁 차원에서 양원제를 옹호하는 이들이 세심 하게 경청해야 할 부분이다.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2공화국 양원제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애초 설계 단계에서부터 참의원의 고유하고도 독자적인 역할 부여 와 양원의 생산적 관계 정립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양원제가 한국사회에 서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지나치게 다의적인 차원에서 접근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양원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때로 그것은 협의제 적 민주주의 지향, 대화와 타협의 정책조정 문화형성, 보편적 지역주의 지향, 평등 한 입법과정 구현, 지역대표체제의 재구조화 등 마치 만병통치약인양 제시되고 있다(정연정 2010, 199). 실례로 헌법연구자문위원회 의 권고안조차도 양원제의 장점만 길게 나열하였지 그것의 구성에 있어서는 지역대표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인구비례로 할 것인지, 그리고 상원의 권한을 하원과 대등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범위로 제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 쟁점과 관련된 논거만을 제시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헌법연구자문위원회 2009, 125-127). 최근 양원제 논의가 입법권과 거부권을 보장하는 대단히 강력한 지역대표형 상원(안성호 2007)이나 균형적 양원제(선학태 2010) 등 보다 세분화된 논의로 진전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13) 참의원 원내부총무를 역임하였던 김용성 의원과의 인터뷰. 그는 체면 유지와 힘의 과시를 위해 참의원들이 정부출석 동의안을 남발하였고 이는 정부의 기능과 권리를 제약하였던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또한 부정부패가 범람하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양원제는 요정정치로 상징되는 일본식의 밀실담합정치를 더욱 가중시켰다고 진술하였다. 구술은 2009년 12월 17일 김용성 의원의 과천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32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끝으로 한국에서 양원제의 결코 짧지만은 않았던 비극적 운명은 책임성과 대표 성, 능력과 규율을 갖춘 정당체계야말로 특히 양원제의 성공을 위한 필수요건임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33 참 고 문 헌 국회사무처. 1971. 國 會 史 : 제4대국회, 제5대국회, 제6대국회.. 1971. 國 會 史 : 제헌국회-제6대국회, 자료편. 중화출판사. 593. 김성호. 1997.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방자치단체의 국가정책결정 참여방안. 김수용. 2008. 건국과 헌법. 경인문화사. 김용욱. 2004. 한국정치론. 오름. 김현우. 1997.9. 각국 의회제도 분석. 국회보 371호. 민준기. 2003. 한국의 정치발전 무엇이 문제인가. 을유문화사. 박세일. 1994.3.11. 세계화시대의 지방자치. 지방자치실무연구소 토론회 발제논문. 박재창. 2003. 한국의회정치론. 오름. 박찬표. 1998.6. 양원제의 이론과 실제: 한국 양원제론의 심화를 위하여. 입법조사연구 251호.. 2002. 한국의회정치와 민주주의: 비교의회론의 시각. 오름. 백영철. 1996. 제2공화국의 의회정치. 백영철 편.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나남. 서병조. 1981. 정치사의 현장 증언: 제2공화국. 중화출판사. 선학태. 2001.9. 남북한 통합국가 모형. 민주주의와 인권 제6권 2호.. 2010. 한국민주주의 공고화 관점에서 본 헌정체제 디자인: 합의제형. 민주주의 와 인권 제10권 1호. 성경륭. 2000. 지역대립과 남북대립의 극복을 위한 새로운 접근. 도정일 성경륭 외. 새 천년의 한국인, 한국사회. 나남출판. 2003. 분권 분산시대를 열기 위한 국가개혁 과제. 성경륭 박양호 외. 지방분 권형 국가 만들기. 나남. 성경륭 박양호. 2003. 지방분권형 국가만들기. 나남. 송길웅. 2000.12. 양원제에 관한 연구. 헌법학 연구 제6권 4호. 신기현. 2002. 한국적 분권과 분산모델. 정치정보 연구 제5권 1호. 신우철. 2010. 양원제 개헌론 재고. 법과 사회 38호. 안성호. 2003.5. 시 도의 국정참여 현황과 확충방안. 한국지방자치학회. 성공적인 지방 분권을 위한 대토론회: 결과보고서.. 2007. 지역대표형 상원의 논거와 특징 및 설계구상. 한국행정학보 41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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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35 Sartori, Giovanni. 1994. Comparative Constitutional Engineering. Macmillan Press Ltd. 투고일: 2012년 9월 28일, 심사일: 2012년 10월 29일, 게재확정일: 2012년 11월 23일
36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제3호 2012년(통권 22호) ABSTRACT The Research on Bicameral System in the Second Republic of Korea Sang Ho Jeong Seowon University In August 2009, the Parliamentary Advisory Committee of Constitutional Revision proposed changing Korea s National Assembly into a bicameral legislature. However, almost all arguments which support bicameral system are showing a tendency to neglect the firsthand experience of the Second Republic of Korea. As is generally known, the weak and unstable leadership of Primier Changmyun was responsible for much frustration and failure of The Second Republic of Korea. the political leadership of Changmyun was exclusive in nature, lacking integration capabilities. His leadership was not able to integrate political competitors in political process by showing exclusive attitude and unbalanced leadership style when he was dealing with the political opposition. More importantly, I attributed that failure to institutional ambiguity and obscurity of bicameral system in the Second Republic of Korea. Bicameral system in Changmyun Government was lacking in originality and differency between the senate and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KeyWords bicameral system, Parliament system, The Second Republic of Korea, Changmyun Government, faction
제2공화국의 양원제 연구 37 보론 제5대 참의원 명단 의원 정치인 재계 의료 법조 교육 관료 출판문화 기타 박기운(3대/충북), 강경옥(2.3대/제주), 김장섭(4대/경북), 김진구(제헌/강원), 송방용(제헌/전북), 송필만(제헌/충북), 신의식(3대/경기), 안동원(3대/서울), 여운홍(2대/경기), 오범수(4대/충북), 오위영(2대/경남), 조국현(제헌/전남), 최희송(4대/경북), 한광석(4대/충남), 황성수(전국회부의장/전남), 이남규(제헌/전남) 박찬희(민주당중앙당무위원/충북), 소관규(민주당정무위원장/전남) 조중서(민주당부장/서울), 하상훈(민주당중앙위원/경기) 전용순(상공회의소장/서울), 이원만(무역협회장/경북) 정순응(강원의사회장/강원) 심종석(변호사/충남) 강택수(전주사범교장/전남), 김동명(이대교수/서울), 김병로(춘천고등학교장/강원) 김용성(서울대강사/경기), 박철웅(조선대총장/전남), 백낙준(연대총장/서울) 백남억(동국대학원장/경북), 이효상(경대교수/경북), 이훈구(성대총장/충남) 김대식(해병대사령관/강원), 김용주(주일공사/경남), 김홍일(주중화민국대사/서울) 송관수(경북도지사/경북), 안호상(초대문교부장관/경남), 이교선(상공장관/경기) 이범석(전국무총리/충남), 이범승(전서울시장/충남), 이인(전법무장관/서울) 정극모(해군총장/충남), 정악필(해운공사감사/경기), 한통숙(상공부차관/서울) 김남중(전남일보사장)/고희동(화가/서화협회장/서울) 강세량(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