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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鄭 道 傳 의 出 生 에 관한 考 察 鄭 柄 喆 著

머리말 정도전은 麗 末 鮮 初 정치적 격동기에 시대적 矛 盾 을 克 復 하기 위하여 낡은 弊 習 을 타파하고 조선왕조개창에 先 驅 的 으로 역할한 實 踐 的 정치사상가 이다 그는 뛰어난 자질과 學 問 的 재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官 僚 가 되었으며 자신 의 낮은 지위를 잊고 執 權 層 의 불의에 맞서 명분을 주장하다가 유배당하였다 9 년의 유배와 유랑을 통하여 무능하고 패악한 정부와 不 正 腐 敗 가 만연한 관료들 의 횡포로 고통스런 民 生 을 피부로 체험하였다 이를 改 革 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것이 고려 말 정쟁이었다 그는 자신 앞에 닥친 苦 難 과 시련에 결코 挫 折 하지 않았다 당당히 맞서 조선건 국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건국 후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전반에 걸친 모든 文 物 制 度 를 整 備 체계화하였다 이것은 이성계의 두터운 信 任 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국가이 념과 통치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朝 鮮 經 國 典 經 濟 文 鑑 經 濟 文 鑑 別 集 등을 찬 진하고 성리학적 民 本 思 想 의 실행에 저해되는 요인을 차단하기 위해서 佛 氏 雜 辨 을 저술하였다 이 저술은 고려말에 이르러 타락하고 부패한 佛 敎 가 국가사회 에 미치는 弊 害 를 최소화하기 위함에 있으며 斥 佛 論 이라는 획기적인 이론을 주 장하고 있다 또 그는 遼 東 의 古 土 回 復 을 위해서 陣 法 을 편찬하여 軍 事 訓 鍊 을 계획 지휘한 군사전문가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정도전은 經 世 家 로서 思 想 家 로서 군사 전문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 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정치가 사상가로서 그에 대한 硏 究 는 꾸준히 계속되 고 있다 지금까지 정도전에 관한 연구경향을 보면 多 角 的 인 측면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대체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뉘어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는 정치가로서 인 식 하고 있다 이성계의 咸 州 軍 幕 을 찾아간 이후 그는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충분 히 보여주고 있다 朝 鮮 經 國 典 經 濟 文 鑑 에 나타난 통치이념과 사상은 政 治 經

濟 社 會 軍 事 등 전반적인 제도의 改 革 과 整 備 를 포함하고 있어 그가 탁월한 정치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하나는 사상가로서 斥 佛 論 으로 인식하는 경 우이다 이는 정도전의 心 氣 理 篇 佛 氏 雜 辨 등의 저술이 척불에 焦 點 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건국 후 斥 佛 政 策 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理 解 하고 있다 이렇듯 정도전은 정치 경제 사회 군사뿐만 아니라 民 本 思 想 家 로서의 역량 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바 선행연구자들은 政 治 思 想 은 물론 文 學 에 이르기 까지 多 角 度 로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王 權 世 襲 과 관련하여 李 芳 遠 일당에게 피습되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함으로써 올바른 歷 史 評 價 를 받지 못하였다 특히 그의 출생과 관련하여 지 금까지 丹 陽 의 母 系 賤 出 로 歪 曲 되어 왔다 이에 대한 연구는 한영우의 論 意 가 답습되고 있고 후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로 인한 弊 害 가 헤아릴 수 없이 확산되고 사실처럼 굳혀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정도전의 가계와 通 婚 圖 를 사실대로 정리하고 그를 통하여 출생 의 진실을 살펴보고 交 流 文 人 들의 시문을 통하여 成 長 한 곳과 그의 호 三 峯 의 의미를 유추해 볼 것이다 또 文 獻 기록의 造 作 과 허구성을 살펴서 歪 曲 된 사실 을 밝히는 한편 단양의 傳 說 과 車 文 節 公 遺 事 의 僞 作 과 造 作 사실을 살펴서 그 虛 構 性 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한영우의 論 意 가 개인적인 상상과 脚 色 에 의한 창 작임을 밝혀 지금까지 정도전의 出 生 에 관하여 알려진 내용이 虛 構 임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씌워진 천출의 멍에가 깨끗이 벗어지고 후학들의 올바른 歷 史 評 價 를 통하여 실추된 名 譽 를 回 復 시키는 契 機 를 삼고자 한다

目 次 鄭 柄 喆 1 Ⅰ 序 說 1 Ⅱ 眞 實 된 歷 史 記 錄 의 필요성 5 Ⅲ 鄭 道 傳 家 系 의 通 婚 연계 8 Ⅳ 鄭 道 傳 의 家 門 1 鄭 道 傳 의 家 系 10 2 奉 化 鄭 氏 와 順 興 安 氏 연계 12 3 鄭 道 傳 의 아버지 鄭 云 敬 14 4 鄭 道 傳 의 어머니 榮 川 禹 氏 17 Ⅴ 鄭 道 傳 의 出 生 과 成 長 18 Ⅵ 文 獻 의 허구와 歷 史 解 釋 오류 1 高 麗 史 節 要 의 人 身 모독 36 2 太 祖 實 錄 의 虛 構 40 1 禹 洪 壽 졸기의 造 作 과 허구 40 2 鄭 道 傳 졸기의 造 作 과 허구 43 3 車 原 頫 雪 冤 錄 의 造 作 47 4 丹 陽 傳 說 의 허구 61 Ⅶ 韓 永 愚 의 鄭 道 傳 生 涯 에 관한 歷 史 解 釋 오류 64 Ⅷ 結 言 71 * 1957 年 慶 北 醴 泉 出 生 韓 星 企 業 株 式 會 社 株 孝 光 商 社 豊 榮 建 設 株 式 會 社 部 長 歷 任 奉 化 鄭 氏 文 憲 公 宗 會 弘 報 委 員 Blog 鄭 道 傳 三 峯 集 http://jbc304eglooscom/ 運 營 編 著 : 증보삼봉집ⅠⅡⅢⅣ 外

Ⅰ 序 說 高 麗 말은 안으로 政 治 의 문란과 관료들의 수탈 寺 院 經 濟 의 팽창과 타락으로 인한 國 家 社 會 의 구조적 矛 盾 이 양극화 되었으며 밖으로 원 명의 內 政 干 涉 과 왜구의 침탈로 인한 內 憂 外 患 에 온 나라가 시름하고 있었다 鄭 道 傳 1341?~1398은 이렇듯 격변기를 살면서 유랑과 유배를 통하여 민초들의 고통과 국가적 위난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이처럼 혼란한 時 局 에 만일 鄭 道 傳 이 개인 의 安 慰 와 榮 達 을 취하는 政 治 人 이었다면 그의 사회적 지위와 局 量 으로 보아 얼마든지 현실과 妥 協 하여 충분히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저 없이 정치 속으로 뛰어들어 자연인 鄭 道 傳 한 몸의 安 樂 을 취하지 않 았다 塗 炭 에 허덕이는 민생을 救 濟 하고 외세로부터 自 主 國 을 이루기 위하여 당시 고려가 안고 있는 총체적 苦 難 을 해결하고자 목숨을 걸고 혁명을 決 行 하였 다 그가 내린 結 論 은 새 시대의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길 밖에 직면한 국가적 危 機 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 로운 思 想 과 理 念 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要 求 에 따라 정 도전은 결연한 意 志 를 굳히고 뜻을 함께할 동지를 摸 索 하게되었다 그 첫 대상자 가 함흥에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는 李 成 桂 였다 이성계는 國 境 최전방에 있으 면서 원나라 하나추를 격퇴하였고 탑사첩목아를 물리쳐 武 將 으로 이름을 전면 에 나타냈으며 특히 전라도 운봉으로 쳐들어 온 왜구를 물리치는 황산대첩에서 大 勝 하여 그 名 聲 이 일반백성들에게 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어 民 心 을 얻고 있었 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동반자로 指 目 한 동기는 첫째 민심이 이성계에게 쏠리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 혁혁한 武 功 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로부터 疏 外 된 변방의 武 將 에 불과 하다는 점과 셋째 그 역시 한번쯤 野 心 을 품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 있었을 것이다 정도전은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鄭 夢 周 의 소개로 1383년 10월 함흥으로 찾아 가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와 遭 遇 하였다 이때 정도전과 李 成 桂 는 단순히 몇 날 1

을 談 笑 한 것이 아니라 이듬해 봄까지 약 4~5개월 동안 시대적 難 局 을 타개 해 야만 하는 속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뜻을 같이 하기로 의기투합하였다 함흥 에서 김포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은 1384년 여름 정도전은 재차 함흥으로 이성 계를 찾아갔다 이때 정도전은 지난 가을에 만나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한 것에 대 하여 그동안 구상한 구체적인 實 踐 方 案 의 實 體 를 보여줌으로써 이성계에게 確 信 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정도전이 수립한 政 治 理 念 과 思 想 이성계가 갖추고 있는 거대한 軍 事 力 이 文 武 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相 互 작용하여 더욱 탄 력을 받아 緻 密 한 계획을 쉽사리 實 行 에 옮길 수 있었다 정도전은 1385년 7월 이성계의 薦 擧 가 유효하여 함흥에서 돌아와서 곧 바로 전의부령으로 중앙 政 界 로 복귀하였고 信 望 이 두터운 圃 隱 鄭 夢 周 의 書 狀 官 이 되어 명나라로 使 行 을 떠났다 사행에서 명나라가 집요하게 요구한 국경폐쇄와 과중한 조공 헌납을 무마시키고 공민왕의 諡 號 와 우왕의 承 襲 을 승인을 받는 등 그동안 양국 간 첨예한 외교적 갈등을 원만히 解 結 하였다 이듬해 4월 귀국 지방 관을 自 請 하여 남양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稱 頌 을 받아 관료 로서 管 理 能 力 을 대내에 다시 認 定 받았다 1388년 이성계의 천거에 따라 정도전 은 성균관대사성으로 중앙에 復 歸 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등 눈부시게 활약하였 다 한편 정도전과 이성계가 정치전면에 浮 上 함으로써 집권층은 두 사람의 정치 적 行 步 에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들을 경계대상 인사로 주목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崔 瑩 의 요동출정 명령이다 최영의 名 分 은 요동 수복에 있었 지만 내심은 이성계를 除 去 할 목적으로 단행된 것이었다 이성계는 적은 나라로 서 큰 나라에 挑 戰 하는 것은 옳지 않고 농사철이라 장정 징발이 어렵고 멀리 원 정하면 왜구들이 틈을 노려 침범할 우려가 있고 장마철이라 활의 阿 膠 가 녹아 武 器 로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며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다는 이른바 4 不 可 論 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출정하였다 그러나 막상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한 현지 狀 況 을 접하게 되었다 進 軍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간 兵 力 과 軍 2 鄭 道 傳 의 出 生 에 관한 考 察

需 질병의 확산 軍 糧 과 군수의 補 給 지체 일부 군졸들의 離 脫 등 불리한 조건 에서 출정군은 戰 爭 을 수행하기도 전에 이미 戰 意 를 喪 失 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 다 戰 場 에서 잔뼈가 굵은 이성계로선 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더 이상 무고 한 병력과 군수품의 損 失 을 초래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조정에 몇 차례 箋 文 을 보내 출정의 불가함을 알렸으나 중앙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遂 行 하라는 명령만 내려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回 軍 이라는 중대한 決 心 을 하게 되었 다 회군에 성공하여 崔 瑩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掌 握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여 확고하게 민심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도전 역시 이성계의 강력한 후원을 바탕으로 정치일선에 부상 하여 십학도제조로서 상명태일제산법 의 강술 진맥도결 의 저술 趙 浚 을 전 면에 내세워 田 制 改 革 을 단행하는 한편 우왕과 창왕을 폐하여 공양왕을 옹립 廢 假 入 眞 을 실현하는 등 정치세력 강화에 일대의 轉 機 를 마련하였다 두 번째 사건은 공양왕 원년1389에 발생한 金 佇 의 우왕복위 사건이다 김저 와 鄭 得 厚 가 여주에서 流 配 중인 우왕을 접하였다 우왕은 金 佇 에게 칼을 주면서 이성계를 除 去 해 줄 것을 당부하였는데 力 士 한사람을 매수하여 이성계만 해치 운다면 뜻을 이룰 수 있다 내가 평소 예의판서 郭 忠 輔 를 좋아 하였으니 相 議 하 여 八 關 日 에 도모하라 고 하였다 2 김저와 정득후의 모의가 있었지만 郭 忠 輔 가 이 사실을 이성계일파에 알림으로써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김저의 자 백으로 우현보 일당이 배후로 알려지게 되었다 세 번째 사건은 1390년에 발생한 尹 彛 李 初 의 이성계 誣 告 이다 이른바 이성 계가 요동 攻 伐 을 획책하고 있으므로 명나라 주원장에게 그를 제거해 달라고 허 위로 밀고한 사건이다 정도전은 1390년 6월 聖 節 使 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 이초 의 무고사건을 원만히 辨 誣 하고 그해 11월 歸 國 하였다 3 정도전이 명나라에서 듣고 본 것은 尹 彛 李 初 의 背 後 에 李 穡 과 禹 玄 寶 가 있다는 사실과 두 사람을 追 2 高 麗 史 節 要 第 34 卷 恭 讓 王 1 年 11 月 [ 前 大 護 軍 金 佇 前 副 令 鄭 得 厚 潜 往 黃 麗 謁 見 禑 但 得 一 力 士 害 李 侍 中 吾 志 可 濟 也 吾 素 善 禮 儀 判 書 郭 忠 輔 汝 往 見 圖 之 仍 遺 劍 于 忠 輔 曰 今 八 關 日 可 擧 事 ] 3 高 麗 史 節 要 恭 讓 王 2 年 1390 11 月 23 日 [ 政 堂 文 學 鄭 道 傳 等 還 自 京 師 帝 言 尹 彛 李 初 謨 亂 汝 國 事 朕 旣 不 言 已 會 斷 罪 汝 國 復 何 虞 疑 ] 3

從 하는 인사들을 파악하였다 이때부터 이색 우현보를 중심으로 한 旣 得 權 勢 力 과 이성계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新 進 改 革 勢 力 간의 정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 었다 정도전이 먼저 사건의 선봉에 있는 이색 우현보에 대하여 辛 禑 辛 昌 을 세워 고려왕통을 끊은 죄 외세를 끌어들여 국내문제를 해결하려고한 반국가적 행위 를 들어 處 斷 할 것을 상소하였다 4 이들 역시 즉각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정도전 을 彈 劾 하였다 이와 같이 1391년 5월부터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 원에게 맞아 죽을 때까지 5 생사를 넘나드는 尖 銳 한 대립에 있었다 1390년으로 접어들면서 신진개혁세력은 신왕조 開 創 이라는 대의 앞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이와 반대로 이색 우현보를 비롯한 기득권세력은 이성계 정도전 등 신진개혁세력의 혁명 意 圖 를 확실하게 感 知 하였으므로 고려왕조를 守 護 하기 위해서는 단호히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新 舊 양대 세력 간에 生 死 를 건 절 대 絶 命 의 긴박한 순간들이 첨예하게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극한 상황에서 정도전은 새 시대를 열기위한 대세에 同 參 하지 않는 사람은 사적으로 아무리 親 分 이 있더라도 斷 乎 히 배척하는 決 斷 을 보여 주었다 존경하는 스승 이색은 물론이요 절친한 벗 정몽주와 동생처럼 아끼던 이숭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천하는 科 程 에서 자연인 정도전 은 수 십 년을 莫 逆 하게 지냈던 많은 문우와 同 僚 들로부터 적대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고 정치인 정도전으로선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침내 그는 고려 왕조의 정치적 難 關 을 극복하고 1392년 7월 讓 位 라는 결론 을 이끌어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 새나라 조선을 건국함에 있어 주도적인 役 割 을 하였다 조선을 개창하는데 主 役 이었던 만큼 개국 一 等 功 臣 으로서 주요 要 職 을 겸하여 한사람이 이루었다고 하기에는 가늠조차 쉽지 않는 실로 尨 大 한 업적 을 남겼다 그가 남긴 主 要 業 績 일부는 태조실록과 그의 문집 삼봉집을 통하여 4 高 麗 史 節 要 恭 讓 王 3 年 1391 5 月 27 日 [ 黨 附 外 戚 反 欲 迎 辛 禑 令 絶 王 氏 幾 使 聖 天 子 存 亡 繼 絶 之 恩 不 得 行 其 爲 逆 謀 實 金 佇 鄭 得 厚 所 明 言 金 宗 衍 潜 結 姦 黨 同 惡 相 濟 以 圖 不 軌 令 尹 彛 李 初 流 言 相 國 請 親 王 動 天 下 兵 遂 啓 聖 天 子 疑 我 之 心 罪 莫 大 於 此 者 ] 5 앞의 책 恭 讓 王 3 年 1392 4 月 [ 梟 夢 周 首 于 市 飾 虛 事 誘 臺 諫 謀 害 大 臣 擾 亂 國 家 ] 4 鄭 道 傳 의 出 生 에 관한 考 察

알 수 있다 그는 조선의 기본 統 治 理 念 과 조직에 관하여 朝 鮮 經 國 典 經 濟 文 鑑 經 濟 文 鑑 別 集 등을 저술하여 종합적인 국정운영체계를 제시하였다 또 心 問 天 答 心 氣 理 編 佛 氏 雜 辨 등을 저술하여 조선왕조의 사상적 土 臺 를 마련하였다 이 저술들은 性 理 學 이 사상적으로 새나라 조선이 志 向 할 목표이며 불교와 도교 는 現 實 과 동떨어진 虛 構 로써 비생산적인 사상임을 批 判 하였다 실전되어 내용 은 알 수 없지만 高 麗 國 史 37권을 찬진하여 현재 전하는 鄭 麟 趾 가 지은 고려사 의 母 胎 가 되었다 자주국방을 표방하고 陣 法 五 行 陣 出 奇 圖 講 武 圖 四 時 蒐 狩 圖 등 병서를 저술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직접 陣 頭 指 揮 하 였다 이는 사병을 혁파하여 군을 국가의 군대로 재편하고 지휘체계를 일원화하 여 안으로 치안을 공고히 하여 질서를 회복하고 내란을 방지하는 한 편 밖으로 외세의 침략을 원천적으로 封 鎖 하고 광대한 고구려 고토 요동을 收 復 하기 위함 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창업의 當 爲 性 과 태조 이성계의 盛 德 을 稱 頌 하여 새 나라 조선의 무궁한 太 平 聖 代 를 念 願 하는 악장을 지은바 있으며 그리고 그가 남 긴 詩 文 을 통하여 넓고 깊은 學 文 과 理 想 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정도전은 탁월한 經 世 家 이자 思 想 家 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원의 기습 으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 이상은 다 펼쳐보지도 못하 게 되었고 고려를 背 反 한 不 忠 의 代 名 詞 로 왕권에 挑 戰 한 逆 賊 의 수괴로 또 賤 出 이라는 汚 名 을 쓰는 등 올바른 역사 평가를 받지 못하고 왜곡 貶 下 되어 왔다 Ⅱ 眞 實 된 역사 記 錄 의 必 要 性 역사 서술에 있어 사실이 명확하지 않거나 造 作 된 사료를 인용하였다면 역사 서로서 가치가 없는 삼류소설 보다 못한 잡서일 따름이다 역사의 記 錄 과 해석은 사실에 立 脚 해야 하고 사실은 正 確 한 史 料 를 근거로 해야 한다 올바른 史 論 은 정확한 사실에서 도출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客 觀 的 이고 眞 實 한 사료에 5

根 據 해야 한다 歪 曲 된 事 實 이 전파되어 미치는 害 惡 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 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麗 末 鮮 初 신진사대부로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개혁을 주도하고 조선건국에 막대하게 기여하였지만 왕권세습을 둘러싼 정쟁에서 不 幸 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불행한 沒 落 과 죽음은 업적이 매몰되고 신분까지 賤 出 로 매도 되었다 6 이렇게 부당한 평가와 사실을 왜곡한 身 分 폄하는 18세기에 이르러서 車 天 輅 에 의해 庶 孼 로 조작되기에 이르렀고 7 차천로의 조작은 단양의 傳 說 로 變 質 되어 세간으로 번지게 되었다 8 그리고 최근 한영우의 입체적인 脚 色 에 의 해 더욱 심각하게 왜곡되어 사실처럼 굳어지고 있다 9 한영우가 鄭 道 傳 思 想 의 硏 究 에서 사료적 가치가 없는 단양의 전설과 조작 된 차문절공유사 를 인용 정도전의 生 涯 를 脚 色 하여 언급함으로써 정도전이 마치 단양 출신의 미천한 奴 婢 의 피가 섞인 인물인 것처럼 왜곡되어 擴 散 되고 있 다 다시 말해 한영우가 정도전의 생애에 관한 근거가 불분명한 자료의 引 用 과 歷 史 해석에 있어 중대한 誤 謬 를 범한 결과 정도전이 庶 孼 과 賤 出 로 왜곡되어 사실처럼 굳혀지고 있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영우가 인용한 자료는 鄭 云 敬 行 狀 高 麗 史 節 要 공민왕 3년 10월 기사 와 동 4년 4월 기사 太 祖 實 錄 우홍수 졸기와 정도전 졸기 車 文 節 公 遺 事 丹 陽 의 傳 設 등으로서 단양의 전설에 18세기말 조작된 차문절공유사 10 끝에 첨부된 연안차씨 족보 記 錄 을 대입하여 정도전의 家 系 를 圖 表 로 제시 정도전이 천출이라고 斷 定 하였다 11 한영우의 鄭 道 傳 思 想 의 硏 究 를 놓고 一 角 에서는 정도전에 대한 記 念 碑 的 연구라고 평가 12 하지만 정도전의 立 場 에서는 한영우로부터 그 業 績 을 어느 정 6 본고 文 獻 의 誤 謬 와 歷 史 解 釋 의 오류 p36 7 본고 車 原 頫 雪 冤 錄 의 造 作 p47 8 본고 丹 陽 傳 說 의 虛 構 p61 9 본고 韓 永 愚 의 鄭 道 傳 生 涯 에 관한 歷 史 解 釋 오류 p64 10 李 樹 健 대구사학 86집 朝 鮮 時 代 身 分 史 관련 資 料 操 作 2007 11 韓 永 愚 鄭 道 傳 思 想 의 硏 究 1983 서울대학교출판부 p14~19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1999 지직산 업사 p18~23 12 삼봉 정도전의 건국 철학 2004 통나무 김용옥 p15 주 4 6 鄭 道 傳 의 出 生 에 관한 考 察

도 평가 받았다고 할지라도 생애에 있어서는 致 命 的 인 천출의 나락으로 轉 落 되 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영우의 동 저서가 정도전에 관한한 後 發 연구자 나 寄 稿 자들에게 교과서적인 役 割 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고 또 한 결 같이 한영 우의 敍 述 을 인용하여 천출로 言 及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가계를 綿 密 히 들여다보면 한영우가 해석하여 세상에 流 布 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지극히 평범한 영주지방 士 族 을 父 母 로하여 출생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3 정도전의 집안은 당시 인물들에 비해 월등한 집안도 아니 요 그렇다고 형편없는 집안도 아니다 이색의 韓 山 李 氏 집안은 李 穀 1298~1351에 서 비로소 중앙관료가 되었고 우현보의 丹 陽 禹 氏 집안은 그의 조부 禹 倬 1262~1342이 文 名 을 떨침으로써 이어서 門 閥 을 이루었으며 정몽주의 집안은 鄭 襲 明?~1151 대에서 역시 중앙관료로 등장하였으며 차원부의 延 安 車 氏 는 車 松 祐?~1368 대에서 順 興 安 氏 도 安 珦 1243~1306 대에서 비로소 名 門 으로 등장하였 다 마찬가지로 정도전의 奉 化 鄭 氏 家 門 도 그의 아버지 鄭 云 敬 1305~1366에서 비 롯하여 중앙관료가 되어 세상에 알려 졌다 이와 같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政 界 로 入 門 한 신흥사대부들이다 다만 이들 가문들이 정도전의 奉 化 鄭 氏 가문보다 조 금 앞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을 뿐 정도전 가문에 비해 월등하게 優 勢 한 가문은 아니다 그런데 한영우는 이색 우현보 차원부 정몽주 등을 名 門 巨 族 으로 지칭 하였고 鄭 道 傳 은 이들 보다 형편없는 가문으로 취급하였다 본고는 정도전이 쓴 그의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 과 鄭 道 傳 家 系 通 婚 圖 를 통 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를 논할 것이다 그리하여 導 出 된 결론으로 정도전의 출생 과 출생지를 논할 것이다 특히 정도전 본인의 시문과 交 流 文 人 중 둔촌 이집 도 은 이숭인 약재 김구용 목은 이색 등과 주고받은 詩 文 을 통하여 출생지와 성장 한 곳 또한 그의 字 인 宗 之 와 號 인 三 峯 을 사용하게 된 일련의 過 程 을 살펴보고 鄭 道 傳 思 想 의 硏 究 에서 言 及 된 정도전의 외가와 출생에 관한 한영우의 論 旨 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허망한 창작임을 밝혀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 失 墜 된 정도 전의 名 譽 를 회복시키는 契 機 를 삼고자 한다 13 본고 9폐이지 정도전가계통혼도 참조 7

Ⅲ 鄭道傳家系의 通婚 연계 鄭道傳의 가계 通婚은 다음 페이지 통혼도와 같다 鄭道傳의 할아버지 鄭均은 순흥안씨 安尙悅의 딸과 혼인하였고 安尙悅의 아들 安奮은 장원급제하여 翰林 學士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정운경은 부인이 둘인데 본처는 軍 尉官인 散員 榮川禹氏 禹淵의 딸이고 別室은 연안차씨 車裕의 딸이다 정도전은 찬성을 지낸 慶州崔氏崔隰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정운경은 공조전서를 지낸 平海黃氏 黃有定 에게 딸을 출가 시켰으며 황유정의 아버지 黃瑾은 여말 명유 順興安氏安軸의 딸과 혼인하였고 성균사예를 지냈다 황유정의 조부 黃原老는 丹陽禹氏禹倬의 종형제 禹伻의 딸 과 혼인 하였으며 영해부사를 지냈다 그리고 황유정은 현감을 지낸 宣城金氏金 少良에게 딸을 출가시켰다 황유정은 정도전의 여동생과 혼인하였으므로 妻男妹夫 사이이고 황유정은 안 축의 外孫子이므로 정도전과 안축의 아들 安宗源은 査頓 사이이다 그리고 황유 정은 단양우씨 우팽의 外曾孫으로서 우현보의 外 再從姪이고 현보의 아들 우홍 수와는 外三從兄弟 사이이다 엄밀히 말하면 정도전은 매제 황유정을 매개로 우 현보와는 査家 또는 姻戚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봉화정씨는 정도전이 慶州崔氏와 연결 되었고 아버지 정운경은 모친 順興安氏 부인 榮川禹氏와 延安車氏 사위 平海黃氏로 연결되어 있다 정도전 의 매제 평해황씨 황유정은 부인 奉化鄭氏 어머니 順興安氏 할머니 丹陽禹氏 로 연결고리를 形成하여 榮州에 살고 있는 일족들과 通婚하여 連繫되었음을 알 14 15 1343~1421 수 있다 高麗史 選擧志 三峯集 鄭云敬行狀 [從舅氏翰林 安狀元名奮母之兄來開京] 奉化鄭氏大同譜卷1 [鄭云敬 配榮川禹氏墓榮州文丹束谷戌座合祔 左有別室墓延安車裕之 女 14 15 ] 8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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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鄭道傳의 家門 1 鄭道傳의 가계 小白山 자락에 위치한 봉화지방의 土俗 성 씨이다 오늘날 전하는 각 성씨의 始祖를 살펴보면 일부 극소수 몇몇 가문을 除 外하고 대부분 가문의 源流 또는 시조는 고려 말에서 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서 가장 오래 된 現存 최고 족보는 년에 간행된 안동권씨 成化譜이고 다음 은 년에 간행된 문화류씨 嘉靖譜이다 이후 세기로 접어들면서 족보간행 이 확산되어 量産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봉화정씨도 이때 정도전의 고조 鄭公美를 시조로 하여 족보를 간행하였다 봉화정씨 족보 와 정운경 행장에 따 르면 정공미는 고려조 戶部令을 역임한 봉화호장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戶長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屬縣에서 그곳의 행정을 全擔하였 으며 수령이 파견된 주군현에서도 부세 부역 호구 등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가 건국되고 지방의 鄕吏制度를 점진적으로 整備하면서 성종 년 상대등을 호장으로 개칭하여 正式 명명되었다 현종 년 향리의 公僕 制度와 주부군현의 장정 수에 따라 호장 수를 정하였는데 장정이 명 이상일 정도전의 봉화정씨는 경상도 북부 1476 1562 18 16 983 9 2 1018 1000 경우 8명 500명 이상은 7명 300명 이상은 5명 100명 이하는 4명이었다 주부군 鄕吏를 두는 것은 기존의 지방 土着勢力을 인정하는 반면 한 사 람의 鄕吏가 支配하는 것을 防止하기 위한 조치였다 향리의 임명은 지방관이 다 수의 후보자 가운데 가문과 지방의 慣例를 참조하여 적임자를 尙書省에 추천하 고 尙書省에서 승인하여 직첩을 발급하였다 문종 년 향리의 考課法을 정 하여 말단 향리에서 호장까지 순차적으로 昇進하도록 하였으나 호장직은 소수 현에 여러 명의 5 1051 乙酉譜 16 봉화정씨 족보는 1765년 영조41 가 처음 간행되었다 이전에는 개별적으로 수기하여 가첩형 태로 보관해 왔으며 일족을 망라한 종합적인 족보는 없었다 이때 각 성씨마다 종합적인 족보 발행이 유행하였고 봉화정씨도 시류에 따라 후손 성균진사 이 주선하여 일족을 망라한 종합적인 족보 를 처음 간행하였다 이후 1805년순조5 1860년철종11 1865년고종2정도전 복훈을 기념하여 1900년 1934년 1965년 1980년 2004년 등 9차 에 걸쳐 간행되었다 乙丑譜 10 庚子譜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乙丑譜 甲戌譜 鄭錫祥 庚申譜 乙巳譜 壬戌譜 辛巳譜

奉 化鄭氏와 奉化琴氏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봉화정씨는 봉화지방에 土着基盤 을 둔 일족으로써 향리에서 중앙정부의 지방행정 집행에 影響을 미친 토착세력 의 일원이었다 봉화정씨 始祖 鄭公美도 역시 선대로부터 호장을 世襲하였다고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에 따르면 봉화지방 토성에는 보여 진다 鄭英粲은 비서랑동정을 지냈다 고려시대 비서랑은 비서성 소 속의 품직으로 公文書와 經籍을 관리하였는데 同正은 실직이 아닌 散職 즉 명 예직을 표시하는 품계이다 정영찬의 아들 鄭均은 검교군기감을 지냈다 군기감 은 병기 기치 융장 戎仗 집물 등을 製造 管理하는 기관이다 鄭云敬의 행장에 따르면 鄭均은 젊은 나이에 夭折한 것으로 보인다 鄭均은 아들 정운경이 고 려를 통틀어 인밖에 없는 良吏傳에 오르고 종 품 刑部尙書에 이르러 부모의 資級을 올려주는 관례에 의하여 이 같은 品階를 贈職한 것으로 짐작 된다 봉화 정씨는 鄭均 대에 영주로 移住한 것으로 보인다 奉化鄭氏 가문에서 처음으로 중 앙관료가 된 사람은 정균의 아들 鄭云敬이다 정운경의 행장에서 정운경은 어려 서 부모를 잃고 외가 순흥안씨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鄭均이 순흥안씨 정공미의 아들 6 17 5 2 에게 장가가서 처가에서 산 것으로 생각된다 持病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고향 榮州로 내려와 얼 마 살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가 살던 집은 정도전 등 아들에게 相續하지 않고 사 위 黃有定에게 상속하였다 황유정은 또 사위 金少良 에게 물려주었으며 김소량은 아들 金淡 에게 물려주었다 정운경의 딸 아들 차별 않는 상속 사례가 美談이 되어 영주지방에서 지금까지 널리 稱頌되고 있다 정운경 황유정 김담 등 세 사람이 모두 판서를 지냈으므로 三判書 古宅이라 하였다 최 근 영주시에서는 이 삼판서 고택을 영주시 가흥동 龜鶴山 자락에 重建하여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이와 같이 그 예날 영주지방에서는 子女 親外 구분하지 않았고 가족 成員으로 처가살이와 사위 상속이 普遍化된 것 으로 생각 된다 이어서 정운경 역시 만년에 1416~1464?? 18 19 三峯集 정운경 행장 [早喪母養於姨母家] 榮川郡誌 金應祖 영주의 역사인물 학술대회3 2008 榮州文化院 p33 文化柳氏嘉靖譜 여기서 직계를 비롯하여 사위 외손은 물론 외손의 외손 내력까지 자세하게 기록하 17 18 19 11

따라서 봉화정씨는 先 代 로부터 鄭 均 대까지 호장을 世 襲 하면서 봉화에 살다가 鄭 均 이 영주로 移 住 하여 아들 鄭 云 敬 과 손자 鄭 道 傳 을 낳아 정착하게 되었다 다음 정운경의 맏아들 정도전은 1360년 成 均 試 에 급제하고 1362년 進 士 試 에 동진사로 급제 이듬해 충주사록으로 官 路 에 진출하였고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 건 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건국 초기 일체의 文 物 과 制 度 를 창안 정비하 여 조선이 500년 동안 이어질 수 있는 土 臺 를 마련하였다 정도전은 봉화정씨를 名 門 巨 族 으로서 士 大 夫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상에서 정도전의 부계를 중심으로 文 獻 에 나타난 시조로부터 정도전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봉화정씨는 향리 奉 化 에서 대대로 戶 長 을 世 襲 하였으며 정도 전의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 중앙관계에 올라 사대부 반열에 올랐다 그가 家 門 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자신의 타고난 학문적 才 能 이 탁월하였고 또한 그를 길러준 姨 母 와 재능을 일찍이 발견한 외숙 安 奮 의 지극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도전 家 門 의 사대부 등장은 당시 만연한 賂 物 이나 권력가의 추천이 나 권문세가의 蔭 職 에 의해서 진출되는 것과는 매우 판이하고 정운경에 이르러 자신의 탁월한 학문적 재능과 不 斷 한 노력 공정 명료한 職 務 遂 行 결과에 있었 다 그리고 그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한 주변의 따뜻한 보살핌에 의해서 成 就 되었 으며 정도전 부자에 의하여 確 固 하게 사대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 奉 化 鄭 氏 와 順 興 安 氏 의 連 繫 봉화정씨와 순흥안씨는 봉화와 영주라는 이웃고을에 貫 鄕 을 두고 호장을 세습 한 가문이다 정운경의 아버지 鄭 均 이 순흥안씨 安 尙 悅 의 여식과 혼인함으로써 血 族 을 이루었다 정운경의 아버지는 전술한바와 같이 고려 말 검교군기감을 역 임하였으나 정균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정운경 의 행장에 있는 짧은 記 錄 이 유일하여 그의 일생을 照 明 하기에는 未 洽 하다 그 러나 순흥안씨의 가계를 통하여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순흥안씨는 그의 처가이 고 있다 12 鄭 道 傳 의 出 生 에 관한 考 察

며 순흥지방에 기반을 둔 土着勢力이다 순흥안씨는 봉화정씨에 비해 조금 앞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순흥안씨 계보를 살펴보면 安子美를 시조로 호장을 세습하여 오다가 대 3 安 孚가 중앙정계에 올라 밀직부사를 지냈다 안부의 아들이 성리학의 비조로 일컬 어오는 文成公晦軒安珦 이다 그 후 안향의 從孫子들이 두각을 나타내 어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계 진출하였는데 文貞公 安軸 文 敬公 安輔 성균제주 安輯 등 형제가 그들 이다 이들 형제가 1243~1306 1302 ~ 1357? ~? 3 1282~ 1348 3 중앙에 진출하여 현양함으로써 순흥안씨는 비로소 지방향리를 벗어나 일약 신 흥사대부로 부상하였다 20 정운경의 외조부는 순흥안씨 安商悅인데 안타깝게도 순흥안씨 족보에는 이름 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안상열이 족보에 누락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틀림없는 家牒을 남기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러나 그의 아들 安奮은 충렬왕 년 지공거 權漢功 동지공거 崔誠之의 정 미방에서 약관 세로 壯元及第하여 翰林學士로 出仕하였고 安軸은 급제 동기 이다 따라서 안분과 안축은 同鄕人이면서 親族이고 과거까지 함께 급제한 同流이고 보면 비슷한 연령대의 매우 절친한 사이였을 것으로 推定 된다 순흥안씨 이다 대략 절손 되었거나 33 1307 25 21 안분은 정균의 처남이요 정운경의 외숙이다 정도전이 지은 정운경 행장에서 정운경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모가 의 길로 引導하여 성취시켰다 養育하였으며 한림학사 외숙 안분이 學問 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운경을 개경으로 데려가 學業成就度 점검을 부탁하였고 안축은 정운경 의 재능을 크게 稱讚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안축은 黃有定의 外祖父이 고 안축의 아들 安宗源은 黃有定의 外叔이다 한편 黃有定은 정운경의 사위이 고 정도전의 妹弟이므로 안축과 안종원은 정도전과 사돈지간이다 친구인 안축에게 조카 정운경의 그래서 안종원은 정도전과 연대하여 조선건국에 크게 이바지 한바 있고 안종 원의 아들 安景溫은 정도전과 급제동기이고 安景良과 安景恭은 정도전의 제자 榮州文化院 2008 정도전가계통혼도 순흥안씨족보 高麗史 選擧志 亞細亞文化史 20 영주의 역사인물 학술대회 4 21 13

로서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였다 특히 간곡히 청하는 22 安景恭은 태종 년 8월 정도전의 신원을 11 등 봉화정씨와 순흥안씨는 깊은 인연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봉화정씨와 순흥안씨는 지방의 토착세력으로 이웃하여 호장을 세습 한 향리가문으로 상당히 밀접한 紐帶關係를 가졌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처지에서 약 한 두 대를 전후하여 중앙관계로 진출한 영주지방의 대 표적 신흥 사대부 가문이다 따라서 정운경의 아버지 정균은 봉화정씨와 순흥안 共同紐帶에 의한 정략적인 相互信賴를 바탕으로 혼인한 것으로 추정할 수 씨의 있다 3 鄭道傳의 아버지 鄭云敬 奉化鄭氏 가문에서 처음으로 중앙관료가 된 사람은 정도전의 아버지 鄭云敬 이다 정운경은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고 姨母에게 養育되었으며 점차 자라면서 才能을 나타내므로 외숙 安奮의 도움을 받아 榮州鄕校에 입학하였다 곧 두각을 나타내므로 얼마 되지 않아 安東鄕校로 월반하였다 이곳에서 역시 卓越한 학업 성적을 나타내어 李穀과 막역한 文友로 지내게 되었다 이곡의 권유로 함께 영해 지방을 遊覽 하였으며 특히 영해에서는 수 년 동안 머물러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 후 외숙 안분은 정운경을 開京으로 전학시켜 당시 유명한 엘리트 그룹 도에 合流시켰다 정운경은 학문이 날로 成就되어 한림학사 劉東美와 근재 安軸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三角山으로 이주 定着하여 윤안지와 함께 深度 있게 학문 23 12 에 몰두하였다 司馬試에 급제하고 년 뒤 년 월 세에 송천봉의 방에서 同進事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상주사록으로 관로에 년 충숙왕13 약관 21세에 1326 4 1330 충숙왕17 10 24 25 진출하여 용궁감무의 무고 사건을 명료하게 처결하였다 년 충숙왕6 1337 세에 32 興寧君安景恭等亦上言曰:南誾 鄭道傳在開國之初濱于死地幸賴宗 社之靈得免 若無此輩 太祖誰與開國乎? 以此惡彼理固然矣 非道傳私怨也 其設心出於公是可恕也臣 等亦參開國敢有此請 稼亭先生文集卷五 東遊記 平海以南則慶尙道之界予甞所往還者玆不錄] 高麗史 選擧志 知貢擧安文凱 同知貢擧李湛이 주관한 과거에서 宋天逢이 장원하고 鄭云敬은 3등 同進仕 22 태종실록 11년 8월 11일조 [ ] 23 [ 24 로 급제하였다 14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개경으로 올라와 전교교감 주부 도평의녹사 등 하급서리를 거처 1339년충숙왕 8 삼사도사 통례문지후 홍복도감 판관 등 당상관으로 진급하였다 이때 영천우 씨 禹 淵 의 여식과 婚 姻 하여 아들 정도전을 낳았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38세에 지밀성군지사로 나아가 公 務 와 관련 없는 재상의 사적인 債 權 처리 요구에 굴하지 않고 公 私 區 分 을 확고히 하였으며 다음해 복주 판관으로 옮겨 옛 친구 권원의 환영 坐 席 에서 엄격한 公 私 구분과 법 집행의 엄정 함을 主 旨 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강도 상해 사건을 명쾌하게 처리하여 지방 수령 으로서 탁월한 手 腕 을 발휘하였다 1345년충목왕1 40세에 개경으로 올라와 書 狀 官 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본국출 신 宦 官 들이 무례하게 업신여기므로 그들의 오만불손을 꾸짖어 愛 國 心 을 일깨 웠다 1348년충목왕4 43세에 양광도안렴사 교주도 안렴사 전의부령 전법총랑 등을 역임하면서 請 託 에 추호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옥사를 迅 速 明 確 하게 처결 하여 국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352년공민왕1 47세에 전주목사로 전보되어 미결된 殺 人 事 件 을 면밀하게 搜 査 종결 처리하였고 어향사의 횡포에 맞서 홀연 히 관직을 사직하였다 그리고 1356년공민왕5 51세에 병부시랑 서해도 찰방으로 나아가 군량을 適 期 에 수송하여 군량수급의 模 範 事 例 를 남겼다 다음해 비서감 보문각 직학사로 승 진하고 곧 존무강릉 겸삭방도 채방사로 나아가 국경을 분명히 하여 女 眞 의 침범 으로부터 민생을 안전하게 보호한 공으로 부민들의 추천을 받아 良 吏 傳 청백리에 올랐다 1358년공민왕7 53세에 중앙으로 올라와 형부사가 되어 송사를 公 正 하 게 잘 처결하여 원고와 피고 모두에게 公 平 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다음해 형부상 서로 승진하였다 1360년공민왕6 55세에 왕이 紅 巾 賊 의 난을 피해 安 東 으로 파 천함에 따라 충주에서 배알하고 扈 從 하였다 1363년공민왕12 58세에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에 제수되었고 1365년공민왕14 겨울 60세에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영주로 歸 鄕 하여 이듬해 정월 61세를 일기로 운명 하였다 형부상서는 종 2품으로 비록 나라에서 諡 號 를 받을 수는 없는 품계였지만 벗 15

廉義라고 私諡하였다 슬하에 남 녀를 두었 는데 맏아들은 道傳이고 둘째는 道存이며 막내는 道復이다 딸은 평해황씨 黃 有定에게 출가하였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鄭云敬은 정도전의 아버지로서 봉화정씨를 중앙정 계 士大夫 반열에 끌어올린 인물이다 鄭云敬을 설명하자면 그의 아들 정도전이 지은 三峯集 정운경 행장이 가장 說得力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봉화정씨와 정 도전에 關한 限 가장 오래된 최초의 文獻이기에 이후 나온 문헌들이 이를 앞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행장은 정운경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정도전이 년 동안 侍 墓살이를 하면서 아버지의 遺品과 行蹟을 정리하여 탈상한 다음 년경에 손 들이 그의 청렴함과 의로움을 기려 3 1 3 1369 수 지은 것 이다 25 作成은 자손들이 자료를 모아서 故人과 생시에 두터운 친분으로 交遊 한 학식 높은 벗이나 학문이 깊은 인사에게 부탁하여 짓는 것이 일반적인 常禮이 다 그런데 정도전 자신이 아버지 鄭云敬의 행장을 손수 짓게 된 동기와 緣由를 알 수 있는 문헌이 없다 그러나 정운경의 행장은 形式이나 수사에 있어 비교적 잘 갖추어진 文章이다 혹 그 아들 정도전이 직접 지었기 때문에 客觀性이 결여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春秋筆法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질박 質朴 행장의 꾸밈없 이 순수함 한 문장임은 부인할 수 없다 經濟觀은 평소 집안의 家産에 별로 신경 을 쓰지 않고 세상의 公利에 담박하였으므로 집안에는 쌓아놓은 財物이 없고 처자식들은 춥고 배고픔을 면치 못하였지만 이를 淡泊하게 생각하였다 라고 하였다 비교적 넉넉하고 윤택하지는 못하였으나 자녀들이 노비를 相續받았다 행장에서 그의 아버지 정운경의 가정 26 27 는 28 4 것으로 보아 중소지주 정도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관직 25 행장 말미에 도전은 선덕랑 통례문지후 이다 라고 저자의 관작을 명시하였는데 정도전이 통례문 지후로 임명된 시기는 1365년공민왕 14 이다 정운경이 작고한 것은 1366년 정월이므로 1년 전에 쓴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도전이 1365년에 통례문지후로 승진하여 아버지의 병환과 별세로 인하여 더 이상 진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최종 관직을 명기한 것으로 보인다 삼봉집 정운경 행 장 26 삼봉집 정운경 행장 [ ] 27 삼봉집 정운경 묘표 [ ] 28 삼봉집 부록 사실 [ ] 先生平日不事家產於世利淡泊如也 而家無宿貲妻子未免飢寒處之淡如也 臧獲彊壯悉與弟妹自取老弱 16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생활에서는 용궁감무의 무고 사건처결 안동의 강도 상해 事件 처결 권력을 배경 傲慢放恣한 관리와 宦官에 대한 대응 등 일련의 업무처리 결과를 살펴보 면 原則을 고수하는 淸廉剛直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공직자임을 알 수 있다 으로 4 鄭道傳의 어머니 榮川禹氏 榮川禹氏로서 영주지방에 주둔한 군 인 禹淵의 여식 이다 영천우씨는 번성 정도전의 어머니는 영주지방 토속성씨인 散員 대의 군관[ 오늘날 위관급 중대장 소대장] 29 小數에 불과하나 안향의 어머니가 영천우씨라는 기록이 보이 고 현재도 엄연히 存在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정도전의 아 버지 정운경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姨母에게 양육되었으며 외숙 안분의 보살핌 으로 학문에 입문하여 그 名聲을 떨쳤다 그를 돌봐 준 외숙 안분 역시 壯元及第 할 정도로 깊은 학문의 소유자이고 당대의 巨儒 안축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러나 안분은 한림학사가 最終官職인 것으로 보아 관직에 그다지 野望이 없어 하지 못하여 비록 30 낙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정운경에게 있어 외숙 안분은 부 絶對的인 역할을 한 것으로 推定할 수 있고 정운경 역시 외숙 안분 을 극진히 恭敬하고 依支하는 바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운경은 언제 어디서 婚姻하였는지 내용을 알 수 있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정도전 또한 正確한 출생 기록이 없고 다만 추측에 의해 년 혹은 년으 모 버금가는 로 의견이 엇갈린다 31 일 1337 1342 그러나 정도전의 출생년도는 태조실록 태조 5년 7월 26 記事와 三峯集 포은봉사고서와 交流한 여러 門人들과 비교하여 볼 때 1341 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 이어지는 정도전의 출생과 성장에 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基準하여 逆算하면 대략 정운경의 혼인 년도를 짐 작할 수 있다 일반적인 여성들은 대개 혼인 후 년 사이에 受胎하는 경우가 보편 다만 정도전의 출생 년도를 高麗史 百官誌 榮州禹氏族譜 三峯集 順興安氏族譜 安珦 1 奉化鄭氏族譜 29 정운경 행장 30 통계청자료 2000 721가구 2244명 31 이상백 이병도 신석호의 1337년 설과 태조실록 태조5년 7월 26일 기사를 근거한 한영우의 1342년 설이 있음 17

除外하고 일반적인 예를 든다면 정운경이 혼인한 년도는 정도전이 태어나기 년 전인 년으로 推定할 수 있다 이때 정운경은 地方職 을 마치고 개경으로 올라와 전교교감으로 補任하던 세경 이다 당시로 보면 비 교적 늦은 나이에 婚姻하였다 그의 혼인에 대하여 외숙 안분이 後見人 또는 保 護者로서 깊숙이 관여하였을 것으로 짐작 된다 이때 안분은 약 세 의 初老에 고향 영주 山林에 묻혀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면서 同 鄕의 선비 영천우씨 禹淵의 여식을 조카며느리로 맞이한 것으로 생각된다 적이다 특수한 경우를 1 1340 35 과 동갑으로 추정 58 안축1282년생 Ⅴ 鄭道傳의 出生과 成長 鄭道傳은 선향과 외가가 있는 榮州에서 년 출생하였고 성장한 곳은 오늘 날 서울시 강북구 도봉구 일원인 楊州三角山 부근이다 이를 뒷받침 할 수 있 는 근거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아버지 鄭云敬의 집이 있는 삼각산부근에 살았었다 는 사실과 外家가 분명한 榮州라는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정운경은 젊은 시절 尹安之와 더불어 삼각산에서 학문을 硏磨하였다는 기록이 정운경의 행장 1341 32 에 있다 故 간의대부 尹公 安之와 三角山에서 글을 읽었는데 한번 본 것은 모두 記憶하였고 大 意를 깨우친 다음에 책을 놓았다 33 靑雲의 뜻을 품고 개인 학습에 沒入하는 곳으로 오늘날 考試村과 같이 자연 발생적으로 形成되었다 정운경 역 시 개경에서 도에 合流하여 일정한 定規課程을 마치고 마음이 맞는 벗 윤안지 삼각산 일대는 당시 엘리트 선비들이 모여들어 12 素履堂遺稿 卷 楊州三間門地有三峯公墓所云故感吟 鄭致能1792-1866 P235 [居民指點到今云 埋沒荒原宿草墳 언덕위에 잡초 우거진 무덤일래/ 澤號爭傳公所釣 家基留在世相聞 집터는 세상에 알려져 남았네/ 迎來三角峰頭月 護送七陵樹上雲 칠릉 나무 위로 구름이 호송하네/ 疑信心中多悵感 의혹 無言竚立夕陽曛 말없이 서서 저녁노을 바라보네] 諫議大夫尹公 名安之讀書三角山一覽輒記通大義卽止] 32 2 주민들 가리키며 지금 말하는 곳은/ 연못은 공이 낚시 하던 곳 이라 하고/ 세 봉우리 위로 달 떠오르니/ 가득한 심중은 슬픔만이 쌓이고/ 33 앞의 책 정운경 행장 [ 18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와 同 行 이곳 삼각산으로 들어 온 것이다 한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고 대의를 깨 우친 다음 책을 놓았다는 것은 매우 集 中 하여 深 化 學 習 한 모습이 역역하다 鄭 云 敬 은 21세인 1326년충숙왕1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25세 되던 1330년충숙왕 17 진사시에 及 第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사마시 이후 진사시에 급제하기 전 4 년여 공백 기간 동안 이를 대비하기 위하여 심화 학습할 장소를 찾아 이곳 三 角 山 으로 이주한 것으로 판단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운경의 妻 家 는 榮 州 에 있고 처는 榮 川 禹 氏 禹 淵 의 딸 이다 榮 川 은 榮 州 의 옛 지명이다 그는 1340년 35세에 혼인하여 개경에서 전교교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전교교감 직은 낮은 품계이기 때문에 가족 을 同 伴 할 수 없는 처지었다 따라서 정운경은 楊 州 三 角 山 부근의 新 接 집에 부 인을 두고 개경에서 근무하였을 것이다 정도전의 어머니가 정도전을 언제 어디에서 出 産 하였다는 문헌 기록은 지금까 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당시에도 生 日 과 忌 日 을 중시하여 매년 음식을 장만하 여 생일을 祝 賀 하고 기일에 祭 祀 로서 追 慕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출생 년월일 에 대한 記 錄 또한 가첩으로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되나 갑작스런 滅 門 之 禍 와 여 러 세대를 지나오면서 湮 滅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당시 대개의 산모는 親 庭 으로 가서 출산하는 것이 일반화된 慣 習 이었다 이러 한 풍습은 지금과 같이 醫 術 이 발달되지 못하였고 普 遍 化 되지 않았던 1960년대 말까지도 盛 行 되었었다 왜냐하면 産 母 는 출산을 위해서 부끄러운 身 體 를 타인 에게 露 出 시켜야 하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이 절실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산모들 특히 초산인 경우 經 驗 이 풍부한 친정어머니로부터 여자로서 부끄럼을 잊을 수 있고 또 慈 愛 로운 친정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 편안한 마음으로 출 산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장가를 든다하여 男 便 이 처가에서 일정기간 동안 자녀 를 낳고 기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집을 온 후에 출산하기 위하여 친정 으로 갔다 따라서 정도전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당시 일반적인 慣 習 에 따라 친 정에서 출산한 것으로 가정한다면 정도전은 榮 州 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큰 것 이다 19

정도전이 자란 곳은 어디일까? 그곳을 사고서에 정도전이 確然히 밝혀 주는 기록이 있다 포은봉 成長한 곳을 示唆하는 내용이다 聲律을 공부하느라 對偶를 만들고 있었는데 어느 날 麗江 閔子復이 나에게 이르기를 내가 達可 鄭夢周를 만나보았는데 詞章은 보잘 것 없는 재주에 불과 하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이 있다 그것은 大學과 中庸 두 책에 잘 갖추어져 있다 라고 하였다 李順卿과 함께 三角山 절에서 講究하고 있다 그대는 아는가 라고 하였다 도전이 16~17세 때? 나는 그 말을 듣고 두 책을 구하여 읽어 보았는데 비록 잘 알지는 못하였으나 못내 기뻤 賓興科가 있어서 선생이 삼각산을 내려와 연속 삼장에 壯元하여 명성이 자자하 였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찾아가 만나 뵈었다 선생께서는 말씀하심에 있어 平生의 親舊 다 그때 처럼 대하시고 가르쳐 주셔서 날마다 듣지 못한 바를 들었다 34 引用文에서 우리는 정도전이 科擧에 대비하여 삼각산에서 심층 학습하고 있었다는 事實과 成長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이 여기서 공부할 때가 세라고 하였으니 성균시에 합격하기 이전이고 민자복의 忠告를 듣고 대학 과 중용 을 구하여 읽어 보고 사뭇 기뻤다고 하였으므로 상당한 學問的 경지에 이 른 것으로 推定된다 그리고 민자복의 충고 후 일정한 시일이 經過한 뒤에 정몽 위 16~17 주가 삼장에 급제하여 만나 보았다고 하였다 정도전이 정몽주를 만난 것은 정몽 주가 급제한 이후 관로에 진출하지 않은 대기 상태로 있을 때임을 알 수 있다 따 라서 정몽주의 과거 급제 연도와 의 나이 算出이 가능하게 된다 最初로 관로에 진출한 해의 나이를 알면 정도전 金得培와 동지공거 韓邦 信이 시관인 文科에 응시 살로 급제하였고 년 예문검열로 初任되어 관로 에 진출하였다 한편 정도전은 년 성균시에 급제하여 개경으로 올라와 成均 館에 입학하였다 정도전이 정몽주와의 만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정몽주가 급 제하여 입관하기 전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은 해 級數의 차이는 있지만 鄭道 정몽주는 1337년에 태어나 1360년 공민왕 9 지공거 23 1362 1360 道傳十六七習聲律爲對偶語一日驪江閔子復按子復閔安仁字謂道傳曰吾 見鄭先生達可曰詞章末藝耳有所謂身心之學其說具大學ㆍ中庸二書今與李順卿携二書往于三角山僧 舍講究之子知之乎予旣聞之求二書以讀雖未有得頗自喜屬國家設賓興科先生來自三角山連冠三場 名聲藉藉予亟往謁則與語如平生遂賜之敎日聞所未聞] 34 앞의 책 포은봉사고서 [ 20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傳은 성균시에 鄭夢周는 진사시에 同時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정도전이 정몽주를 만난 것은 성균관 儒生으로 있을 때 인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 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만남은 정도전이 삼각산에서 17세 때 민자복을 통하여 정 몽주의 명성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다가 대학과 중용 등 과거 대비로 약 3년여에 걸쳐 공부하여 급제한 다음 1360년 개경에서 儒生과 及第者로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結論으로선 정도전의 나이를 導出할 수 없다 정도전 의 나이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자료 太祖實錄 태조 년 월 일 기사에서 정도전은 나이가 세 라고 명시 되었으므로 역산하면 년이 정도전의 그러나 이와 같은 막연한 5 55 1396 7 19 1341 출생연도 이다 이와 비교하면 정도전은 1360년 19살에 성균시에 급제하였다 그 러므로 정도전과 정몽주가 만나게 된 시점을 1360년으로 설정하면 정몽주는 23 세 정도전은 19세로서 정도전은 정몽주보다 4살 연하이다 정몽주의 출생년도에 년에 4를 더하면 정도전의 출생년도는 1341년으로 산출 된다 이렇게 도출된 1337 것이 곧 鄭道傳의 정확한 출생 연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년 영 1341 주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어서 成長期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위 인용문에 그는 16~17세 되던 해 삼각 산에서 성율과 대우모를 공부하였다 하였음으로 그가 성장한 곳이 삼각산임을 明示하였다 세라면 청소년으로 최성장기임에 틀림없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當代에 많은 활약을 보여주었던 민자복을 言及한 사실로 보아도 당시 삼각산은 엘리트들의 考試村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정도전은 鄭夢周가 진사시에 급제한 그해 곧바로 성균시에 급제하였다 다시 말하면 鄭道傳은 성균관에 입학 16~17 하고 정몽주는 관리가 되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 입학함에 따라 양주 삼각산을 떠나 개경으로 올라왔다 년 정도전도 공민왕의 피란지 1362 淸州에서 실시한 문과에서 지공거 洪彦博 柳淑에 의한 박의중의 방에서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다음해 곧 충주 사록으로 임명되어 벼슬길로 나아갔다 따라서 정도전은 楊洲 三角山 부근에서 동지공거 35 國朝榜目 壬寅科 陶隱集 李崇仁 35 21

청소년기를 보내며 성균시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도전은 기회 있을 때마다 찾은 곳이 楊州 三角山 이다 년 여름 1369 先塋에서 부모의 삼년 喪期를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 년 가을 復職되기 전까지 약 년 동안 살았다 또 년 가을 從便 許諾 후 유랑생활 을 청산하고 삼각산으로 돌아와 三峯齋를 열어 학문 연구와 後學을 교육하며 살 았다 객지를 떠도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한 歸巢本能을 갖는 다 정도전 또한 삼각산 옛집에 대한 강한 執着과 鄕愁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 련하여 號를 三峯을 지칭하는 곳을 參照하기 바란다 정도전이 號로 지을 정도의 의미가 있는 三峯이란 어디일까 정도전 본인의 시 문과 교류문인의 시 중에 정도전이 양주 삼각산에 있을 때 특히 그 地名을 示唆 하는 작품이 있다 본인과 遁村 李集 陶隱 李崇仁 若齋 金九容 獨谷 成石璘 陽村 權近 牧隱 李穡 등의 시문을 통하여 자세히 考察해 보기로 한다 정도전은 여러 편의 시문에서 三角山三峯을 언급하고 있다 영주 1371 36 2 1380 37? 登三峯憶京都故舊 올라 경도의 옛 친구를 생각하다 삼봉에 自註병오년1366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榮州에서 侍墓하면서 3년 복제를 마치고 기유년1369 에 三峯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端居興遠思 陟彼三峯頭 松山西北望 峨峨玄雲浮 故人在其下 日夕相追遊 飛鳥入雲去 我思終悠悠 고요히 앉았자니 먼 생각일어 삼봉 마루에 올랐네 저 서북쪽 송악산 바라보니 높이높이 검은 구름 떠있고 벗님네들 그 아래 있어 낮이나 밤이나 서로 어울리누나 새는 날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내 생각 끝내 아득히 멀기만 하네 三峯集 登三峯憶京都故舊 [公自丙午年繼有兩親之喪居榮州終制己酉還三峯舊居] 還三峯若齋金 九容送至普賢院 [是夏公還三峯舊居] 37 三峯集 移家 [公講書于三峯齋四方學者多從之時鄕人之爲宰相者惡之撤齋屋公率諸生往依富平 府使鄭義居府之南村] 증보 삼봉집Ⅰ 鄭道傳年譜 2009 한국학술정보 정병철 36 22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이시는 정도전이 1369년 여름 榮州에서 상기를 마치고 三角山으로 돌아와 복 念願하면서 지은 삼봉에 올라 경도의 옛 친구를 생각하다 라는 시이다 제목 밑에 본인이 註를 달아 병오년 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榮州에 살 의 옛집 으로 돌아왔다 하였다 면서 년 복제를 마치고 기유년 에 三峯 삼봉집 에는 각 작품마다 저작년도와 여러 사람의 註가 아주 세밀하게 잘 기록 되어 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정도전이 榮州에서 三角山으로 돌아왔음을 설 명하였다 이 시에서 정도전은 가만히 있자니 松都 생각이 간절하여 툭 털고 三 角山 마루에 올라가 松嶽山을 바라보며 그 아래서 정답게 어울리는 벗들을 상상 직을 38 3 1366 39 1369 하고 있다 새가 자유로이 날아서 가듯 가볼 수 도 있지만 자못 용기가 없어 망설 임을 나타내고 있다 訪李佐郞崇仁 獨騎款段似騎驢 醉睡垂鞭任所如 馬欲駐時仍睡覺 毁垣柴戶是君廬 이좌랑 숭인을 방문하다 관단마 홀로 타니 당나귀 탄 것 같아 채찍 내리고 졸며 가는대로 맡겨두네 말이 멈추려 할 때 잠도 따라 깨니 무너진 담 싸리문이 바로 자네 집이로세 40 勇氣를 내어 개경으로 올라가 李崇仁의 집을 訪問하면서 의 옛집에 살다 지은 것이다 이 시에서도 경술년 여름에 공이 三角山三峯 조정에서 성균관을 重修하고 儒臣들을 모아 經學 가 을 講論하도록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올라와 陶隱 李崇仁을 방문하면서 지었다 라고 註를 하 이 시는 1370년 여름 1370 성리학 였다 41 若齋金九容送至普賢院 還三峯 삼봉으로 돌아올 때 약재 김구용이 보현원까지 전송하였다 三峯集 登三峯憶京都故舊 三峯 鄭云敬이 尹安之와 더불어 공부하던 삼각산에 있는 옛집을 말한다 訪李佐郞崇仁 公居三峯聞國家命儒臣聚成均館講明經學赴開京] 38 39 여기서 의 옛집은 아버지 40 삼봉집 41 삼봉집 [ 23

聯鞍共詠出都門 朝市山林一路分 他日相思何處是 松山秋月華山雲 나란히 말 타고 읊조리며 도성 벗어나니 시가와 산림이 길 하나로 나눠지네 훗날 서로의 생각이 어디 메냐 한다면 송산이라 가을 달 화산의 구름일래 42 이시는 1370년 정도전이 개경 나들이를 마치고 楊州三角山으로 돌아올 때 若 齋 金九容이 전송하면서 파주 長短 普賢院까지 동행해 줌을 사례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말을 타고 담소를 나누며 시가를 벗어나 한적한 산길을 가는 모습과 멀지 않은 시일 가을이 되면 개경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잘 나타내었 다 이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의 제목인데 이라고 還三峯 若齋金九容送至普賢院 하였다 제목 첫 구절에 삼봉으로 돌아올 때 還三峯 라고 하였다 앞의 시와 관 련지어 본다면 三峯이라는 곳은 곧 楊州 고을 삼봉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 ] 與翫月別後却寄 庚戌中秋之夕李順卿存吾扶餘過于三峯 43 경술년 추석에 이순경 존오가 부여에서 삼봉으로 왔기에 함께 달을 구경하고 헤어진 후 붙인다 平生愛明月 明月不長圓 對月思故人 故人天一垠 今夕是何夕 月與人共適 皎皎月如霜 溫溫人似玉 평생에 달을 좋아 하건만 밝은 달은 항상 둥글지 않네 달을 대하니 벗님이 생각나는데 벗님은 저 하늘가에 있네 오늘 저녁은 또 어떤 저녁인가 달과 사람이 어울린다네 새하얀 달빛은 서리와 같고 따습고 따습다 옥 같은 사람 李存吾가 부여에서 삼봉으로 왔기에 함께 달을 보며 회 포를 푸는 장면을 描寫한 것이다 여기서도 제목에 庚戌中秋之夕李順卿存吾扶 라고 하였다 경술년 추석에 이존오가 扶餘에서 찾아온 三峯이 어디 餘過于三峯 이시는 1370년 추석에 還三峯若齋金九容送至普賢院 三峯集 庚戌中秋之夕李順卿存吾扶餘過于三峯 42 삼봉집 43 24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인가? 곧 정도전이 머물고 있는 送安定入京 我家三峯下 寄此林泉幽 蓬蓽生光輝 之子肯來遊 盤餐愧菲簿 此意仍綢繆 相與歌大雅 亦足忘吾憂 楊洲三角山 이다 서울로 가는 안정을 보내다 1371 나의 집 삼봉 아래 있어 아늑한 이 숲 속에 의탁하였지 44 비틀어진 사립문에 문득 광채가 나니 그대가 노닐자고 즐거이 왔네 반찬이 빈약해 부끄럽지만 그러나 살뜰히 성의를 다하였네 마주 앉아 대아를 노래하니 역시 나의 근심 잊기에 족하구려 安定을 전송하면서 지은 것인데 집의 위치와 모 양 살림살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첫 연에서 보듯 그의 집은 三峯아래 숲으로 이시는 1371년 개경으로 가는 둘러쳐진 속에 있고 찌그러진 사립문을 삐죽이 열고 들어오는 손님은 멋이 있어 光體가 난다고 하였다 보잘 것 없는 반찬이지만 정성을 다한 것이고 詩文을 주고받으니 근심을 잊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하였다 山 中 二首 弊業三峯下 歸來松桂秋 家貧妨養疾 心靜定忘憂 護竹開迂徑 憐山起小樓 鄰僧來問字 산중에서 2수를 짓다 마주 보며 1380 가을 하찮은 나의 터전 삼봉아래 있어 돌아와 송계 어우러진 가을을 맞았네 집이 가난하니 괴로움 일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니 근심 잊기 족하네 대나무를 아껴서 길을 돌리고 산이 예뻐 작은 정자를 세웠네 이웃 스님 찾아와 글자 물으며 按 楊雄의 古事를 引用하였다고 후인이 評하였다 盡日爲相留 종일 도록 날 위해 머물러 주네 45 三峯集 送安定入京 44 25

鄭道傳이 두 번째로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 가을에 지은 것 이다 그동안 유배에서 풀려나기는 하였지만 거주에 制限이 있어 한강 이남에서 만 살 수 있었다 선영이 있는 榮州 벗 金九容이 사는 安東 提川 벗 元天錫이 사는 原州 등으로 유랑할 수밖에 없었다 년 비로소 자유로이 居住도록 종편 허락도 있고 倭寇들의 침탈도 심하여 이를 피하여 楊州三角山 옛집으로 귀환하 아래 있어서 달빛이 소나무 숲으로 쏟아지는 가을 날 가난 였다 나의 집은 三峯 하니 慾心도 없고 마음 또한 잔잔하니 길을 만들고 대나무를 심고 산모퉁이에 아 담한 亭子도 한 칸 마련하였다 이웃에 사는 스님이 찾아와 온 종일 벗이 되어 주 어 점차 心理的으로 안정을 찾아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시는 1380년 봄 1380 題秋興亭 추흥정에 제하다 自註 정자는 용산강 龍山江 에 있는데 이 숭인 李崇仁 의 기 記 에 의하면 김봉익 金奉 翊 이 이 정자를 창건하고 김 비감 金秘監 이 추흥이라 편액 扁額 하였다 秋風無限興 浩然不可量 下 我家三峯 兩地遙相望 何堂歸去來 一笑共深觴 가을바람에 이는 끝없는 흥은 넓고 커서 헤아릴 길이 없네 집은 삼봉 그 아래 있어 나의 곳은 멀리 서로 바라다 보이고 두 어느 때 그 곳으로 돌아가 술잔 들고 크게 한번 웃어볼거나 龍山 秋興亭 三角山 이시는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1380년 가을 에 있는 을 두고 지은 것 집이 아래 있어서 에서 멀리 용산이 바라보인 이다 여기서도 나의 라고 하였다 또 추흥정은 용산에 있고 봉익 벼슬을 하는 김 모가 정자를 짓 다 三峯 고 비감 벼슬을 하는 김 모가 정자 이름을 지어 扁額하였으며 이숭인이 記文을 自註하였다 三角山에서 龍山을 바라보며 한번쯤 찾아가 벗들과 즐거이 어울리고 싶은 衝動을 읊은 시이다 썼다고 三峯集 山中 二首 45 26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移 家 집을 옮기다 1382 三峯齋 를 열어 글을 講論 하자 四方에서 배우러 오는 學者들이 많았 按 공이 삼각산에서 다 이때 이곳 출신의 宰相이 이를 시기하여 齋屋을 철거하였다 공은 제자들을 데리고 부평으로 가서 부평부사 鄭義의 도움을 받아 富坪府 남촌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전임 宰相 王某가 그곳에 별장을 짓는다는 구실로 또 다시 재옥을 철거하였다 그래서 공은 다시 金浦로 거처를 옮겼다 五年三卜宅 今歲又移居 오년 동안 세 번이나 집을 옮겼는데 금년에 또 이사를 하게 되다니 46 이 시는 1382년에 지은 것으로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 三峯齋를 열어 門徒들 學問에 熱情을 토로하면서 겨우 안정 을 찾아가고 있을 때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긴 宰相이 방해하고 齋屋을 철거하였 다 三峯齋는 오늘날 개인 사설학원과 마찬가지 性格을 띠고 있는데 단기간에 盛況을 이룸으로써 정도전의 講義가 생도들에게 매우 흡족하였던 것으로 짐작 된다 그러나 齋屋이 철거 되어 정도전은 生業을 잃고 전전하다 부평부사로 있는 벗 鄭義에게 부탁하여 다시 學宿을 열었으나 이 역시 전임재상의 橫暴로 철거당 하하고 말았다 정도전은 慘憺한 심정으로 오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이사 하게 된 虛脫한 심경을 移家라는 시로 나타내었다 舊居 병중에 삼봉의 옛집을 생각하다 病中懷三峯 이 각지에서 몰려와 성황을 이루고 교육과 嗟我抱沈痾 居常畏炎天 況復車馬塵 衣冠苦拘纏 所以氣煩欝 五月猶未痊 懷哉三峯雲 故人在其巓 아! 나는 해묵은 병이 있어 언재나 더위를 두려워하네 더군다나 거마의 먼지 속에서 의관의 속박을 너무 받고 보니 그래서 기운이 답답하고 번거로워 오월에도 오히려 낫지 않네 삼봉의 저 구름이여 그립다 그 산마루에 살면서 벗님네 三峯集 移家 46 27

爲我泛瑤琴 亂以歸來篇 淸風振林莽 遺響何冷然 問我久行役 何時當來還 山靈未移文 巖壑聊竚延 我感故人意 危涕流潺湲 君臣義甚重 病矣猶勉旃 天門九重深 欲叫空盤桓 三峯渺何處 極目但雲烟 나를 위해 거문고를 둥둥 타며 귀거래사 한편으로 끝을 맺누나 맑은 바람 짙은 숲 헤치고 오니 맑고 고운 그 소리 어찌 그리 시원 한가 나의 오랜 행역을 위로하면서 언재나 돌아올 것이냐네 산신령이 이문을 하지 않아도 고향산천은 그대로 나를 기다린다네 벗님네 후한 뜻에 나는 느끼어 눈물이 줄줄 흐르네 군신의 의가 너무 소중하기에 몸은 병들었어도 아직 쉬지를 못 하네 천문은 구중이라 깊기도 하여 외치고자 해도 걸음이 내키질 않네 삼봉은 아득히 어디메냐 저 멀리 하늘 끝엔 흰 구름뿐이네 47 朱元璋과 표전문 시비로 尖銳하게 대립할 때 괴로운 心 思를 읊은 것이다 태조실록 에서 정도전은 몸집이 크고 肥大하였으며 胃腸病 이 있는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조선과 명나라 간 表箋文 시비가 심각한 수준에 있었고 특히 여름철에 심한 持病을 앓고 있어도 중차대한 국가 大事 앞 에서 관직을 그만 둘 수도 없는 進退兩難의 심사를 나타낸 것이다 저 三峯 아래 고향 벗들이 나를 돌아오라 손짓하며 歸去來辭를 노래하니 현실을 잊고 故鄕으 로 돌아가고 싶기는 하나 혼란한 정국에 君臣의 義를 놓을 수 없기에 三峯은 아 득하여 저 멀리 하늘 끝 흰 구름 속에 있어도 가지 못하는 心情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 정도전의 시에서 三峯이 어디를 指稱하는 곳인가 살펴보았다 삼봉이란 楊州 三角山을 말하며 그 부근에 있는 집을 의미 한다 아버지 鄭云敬이 청년시 절 공부한 곳이기도 하고 본인도 역시 登科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靑少年 시절을 이 시는 1394년 명나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마치고 1369년 三峯集 病中懷三峯舊居 47 28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이곳에 와서 살았으며 1380년 從便許諾 후 역시 이곳에서 三峯齋를 열어 후학을 生業을 도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그와 交流한 문인들로부터 받은 시문을 통하여 三峯이란 지명이 어느 곳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선배이면서 벗으로 가까이 지낸 遁村 李集 의 시를 통하여 三峯이 어느 곳인지 유추해 보기로 한다 贈鄭三峯 삼봉에게 주다 가르치며 鄭生應似我 無屋屢遷移 只賴同年愛 今爲相國知 借書勤夜讀 乞米續晨炊 莫向三峯隱 君王亦爾思 정생도 응당 나처럼 집이 없어 누차 옮겨 다니네 다만 동년의 사랑을 입을 뿐이더니 이잰 정승의 지의를 입었네 책을 빌려 밤에 부지런히 읽고 아침엔 쌀을 빌어 끼니를 잇네 돌아가서 은거마오 삼봉으로 임금님도 그대를 생각하리라 48 遁村李集이 정도전에게 當付하는 것이다 정도전이 년 이후 벗들 에게 의지하여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년 봄 楊州 三角山 옛집으로 돌아와 칩거하니 둔촌 이집은 정도전에게 朝廷에서 곧 불러줄 것이므로 상심 하지 말라 는 慰勞의 시이다 한양 촌에 사는 정 삼봉을 방문하다 訪鄭三峯漢陽村居 이 시는 1377 1380 欲訪三峯下隱者 亂山深處跨征驢 數年遠別容顔改 一笑相逢意熊餘 榮辱有時何慘戚 行臧信命且躊躇 삼봉 아래 은둔자를 찾아서 저 산 깊은 곳으로 가는 말에 오른다 험한 수년을 멀리 떨어져 얼굴 모습은 변했지만 한번 웃음으로 만난 의기는 여유로울 테지 영화와 곤욕은 때가 있는 것을 무엇을 섭해하리오 나가고 물러남은 운명에 맡기리니 遁村集 48 29

邇來吾亦亡人世 須向城南問草廬 요사이 나 역시 세상일 잊고 모름지기 성남을 향하여 은자의 초려를 묻는다 江東區 遁村洞에 사는 遁村 李集이 삼각산 옛집에 머물고 있 는 鄭道傳을 방문하여 지은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鄭三峯이 한양촌에 살고 있어 찾아 간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 연에서 三峯아래 숨어사는 사람을 찾아가니 산은 깊고 험난한 곳에 있어 征伐하러가듯 말을 탔다고 술회한다 그리 이 시는 지금의 1 고 못 본지 오래여서 모습은 변했어도 즐거이 만나 마주보며 웃고 나니 옛 모습 邂逅 장면을 묘사하였다 모든 일은 다 때가 있으니 운명에 맡기라고 慰勞하였다 그러면서 自身도 세상일 잊고 草野에 묻혀 숨어사는 三峯의 집이 어 그대로라고 디인가 물어물어 여기 왔다고 하였다 다음은 연하이지만 及第同期로서 가장 많은 시를 주고받은 陶隱 李崇仁을 통 三峯이 어느 곳인지 살펴보겠다 次如大虛九日韻 대허와 함께 구일운에 차하다 하여 아득아득 가을하늘 높이 솟아 三峯渺渺聳高秋 삼봉은 꼭대기에 오른이 원유를 부의 하네 峯頂騷人賦遠遊 봉우리 今日飄零猶故熊 오늘 회오리바람과 비 조차 예전과 같은데 皇天老眼幾時收 하나님의 어두운 눈은 언제나 밝아지려나 自註 三峯曾吾也感時懷友自不能已矣 삼봉이 증오이다 불현듯 벗이 생각나 스스로 이 49 기지 못하였다 楊州 三角山 옛집에 올라와 있을 때 마침 공민 왕이 魯國公主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馬巖에 影殿을 짓고 있었다 정도전은 이 공사로 인한 백성들의 고단함을 周나라와 秦나라의 예를 비유하여 遠遊歌를 지어 諷刺하였다 李崇仁은 원유가를 읽어 보고 정도전이 三角山 산봉우리에 올 이 시는 정도전이 1369년 여름 라 원유가를 부른다고 하였고 자연은 옛날과 다름이 없는데 어리석은 임금은 언 陶隱集 49 30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精神이 돌아올 것인지 라고 同調하여 나라를 걱정하고 있다 특히 自註에 서 鄭道傳의 字를 曾吾라도 附記하고 갑자기 벗 생각이 일어 이기지 못하여 지 제나 었다고 하였다 重九感懷 구월구일에 느낌이 있어서 去年重九龍山巓 坐客望若登神仙 達可放歌徹廖廓 敬之下筆橫雲烟 曾吾醉談聽下厭 子虛詩句淸且姸 년경작 1381 작년 구월구일에는 용산에 갔었지 함께한 친구들 바라보노라니 신선이 하늘을 오르는 듯 달가는 노래 불러 쓸쓸함을 달래고 정몽주 경지가 붓을 돌리니 안개구름 피어나네 김구용 증오의 취담 들어 싫지 않고 정도전 자허의 시구는 맑고 아름다웠네 박의중 重九에 함께하였던 벗들을 追憶한 시이 다 당시 李崇仁 鄭夢周 金九容 鄭道傳 朴宜中이 용산에 있는 추흥정에서 重 九 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일을 회상하면서 지은 것이다 다음은 若齋 金九容의 시를 통하여 三峯이 어느 곳인지 살펴보겠다 이 시는 1381년경 9월9일을 맞아 작년 同至普賢院次韻送別 鄭宗之歸三峯 1370 三峯으로 돌아가는 鄭宗之와 함께 보현원에 이르러 次韻하여 送別하다 送君直到普賢門 別袂秋風不忍分 三角山深千萬疊 白雲何處望靑雲 그대를 전송하려고 보현문에 다다르니 이별 앞에 추풍도 스산하여 잡은 소매 놓을 수 없네 깊고 깊어 수천만겹 일진데 삼각산은 어느 곳에서 청운을 바라보랴 백운대 50 鄭道傳의 시문에서 알 수 있었듯이 鄭道傳이 년 復職을 위해 서 개경을 訪問한 후 三角山으로 돌아올 때 김구용이 장단에 있는 보현원까지 동 가 三峯 으로 돌아 간다 鄭宗 행하여 傳送하면서 지은 것이다 題目에서 鄭宗之 은 깊어서 천 만 겹이 之歸三峯 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 본문 제 연에서 三角山 이시는 앞서 1371 ] 3 [ 若齋遺稿 50 31

白雲臺 靑雲을 바라볼 것인가 라고 하였다 따라서 鄭道傳이 돌 아가는 三峯은 三角山 깊은 곳이라고 명시하였다 다음은 獨谷 成石璘 의 시를 통하여 三峯이 어느 곳인지 살펴보겠다 聽夜鶴 밤에 학의 울음소리를 듣다 니 어디쯤에서 1338 1423 結廬華山下 蒼翠秀窮冬 獨鶴從何處 來鳴最上峯 應嬚宿凡毁 高擧見孤松 幽人獨不睡 夜半霜露濃 화산아래 초가집 있으니 짙푸른 소나무 한겨울에도 뻬어 나네 한 마리 학 어디서 왔는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와서 울고 있네 아마도 너는 잡목에서 자기 싫어서 높이 날아 고고한 솔을 보고 왔겠지 은둔자 홀로 잠 못 이루는데 밤이 깊을수록 상로는 짙어만 가네 51 鄭道傳이 년 가을에 지은 시 秋夜에서 初疑笙鶴來 라는 구절을 보고 獨谷 成石璘이 읊은 것이다 鄭道傳은 生鶴이 어디서 처음 왔는지 疑問이 三角山 라고하였다 成石璘은 和答하기를 그 생학은 바로 소나무가 울창한 華山 초가집 에 사는 鄭道傳 이며 三角山 상상봉에서 울고 있는데 어지러운 밑 雜木 속이 싫어서 우뚝한 長松을 찾아 왔다고 하였다 곧 정도전을 학에 비유하 여 고고함을 나타내었다 다음은 陽村 權近 이 스승 정도전의 鶴歌에 이 시는 1380 의 별칭 1352 ~ 1409 화답하는 시 이다 和三峯先生鶴歌 三峯嶄嵒漢之陽 故人卜築於焉藏 興來孤嘯登高岡 久與雲鶴同翶翔 삼봉 선생의 학의 노래에 답하다 세 봉우리 우뚝 솟은 한양고을 양지에 터 가려 집을 지어 벗님네 숨었구려 흥겨우면 휘파람 불며 높은 뫼에 홀로 올라 구름이랑 학 어울려 오래도록 노닐었네 獨谷集 51 32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歸來京闕服朝章 雲愁鶴怨遙相望 鶴兮來舞何昂昂 風淸月白鳴聲長 主人撫琴心內傷 鶴去歌闋終茫茫 安得駕爾歸故鄕 이시는 서울로 돌아와서 조복 입으니 학과 구름 멀리서 바라보며 원망하누나 학이 와서 춤을 추니 어이 그리 헌칠한고 맑은 바람 달 밝은 밤 울음소리 길고 기네 거문고 둥둥 타며 네 주인은 슬프단다 학은 가고 노래 멎어 남은 심사 아득아득 언제나 너를 타고 고향으로 간다지 陽村權近이 成石璘과 마찬가지로 52 秋夜 년경 정도전의 시 를 받아 높이 솟은 에 집을 짓고 보고 화답한 것이다 정도전이 세봉우리가 을 1380 漢陽 自然 벗 삼아 悠悠自適하게 지내는 모습을 담았고 陽村은 자신이 먼저 登用되어 鄭 道傳에게 미안함과 안타까운 마음을 잘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도 鄭道傳이 사는 곳은 漢陽고을 三峯이다 다음 두 작품은 牧隱 李穡 이 삼각산을 지나다 그 밑에서 感興을 노 1328 ~ 1396 래한 시 이다 三角山下 삼각산 밑에서 牧隱詩稿卷之三 亦知無所期 歲晚勤我行 駐馬三峯下 悠然生遠情 天高松偃蹇 雪積山崢嶸 僧舍香煙散 跏趺送晦明 특별이 정한 곳도 없건만 지는 해에 나 갈 길 바쁘기만 해라 아래 말 세우니 삼봉 나도 몰래 그리움 밀려오네 하늘 높으니 소나무는 우뚝하고 눈 쌓인 산 깎아지른 듯 가파르구나 절간에 향 피워 날리며 가부좌 틀고 그믐을 보내 볼거나 望三角山 삼각산을 바라보며 三峯削出太初時 듯이 솟아난 태초의 세봉우리 깎은 陽村集 52 33

仙掌指天天下稀 松影扶疎橫日月 巖姿濃淡雜烟霏 聳肩有客騎驢去 換骨何人駕鶴歸 自少己知眞面目 人言背後玉環肥 하늘 가린 선인장은 천하에 드물구나 무성한 솔 그림자엔 일월이 스며들고 짙고 옅은 바위는 연기 안개 섞여있네 어깨 솟은 나그네 있어 나귀 타고 돌아가건만 53 신선된 어떤 이는 학을 타고 돌아오는구나 젊어서부터 이미 자기의 참 모습을 알거늘 사람들은 뒤에서 옥환비라 말하네 54 李穡의 두 편의 시에서도 三角山을 三峯이라고 하였다 삼각산을 지나다 말 을 세우고 바라보고 感興을 나타내었다 하나는 三峯아래 말을 세웠다 하였고 하나는 깎은 듯이 솟은 태초의 三峯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李穡의 시 가운데 정 도전이 三峯齋를 연 場所임을 明示하는 作品 한편이 있다 위 莊授徒六韻 聞鄭司藝道傳在堤州村 정사예 도전이 제주촌에서 학도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육운으로 짓다 藏名已無術 講學要傳心 鹵莽從前悔 精微向後尋 水流源最遠 山密境彌深 白鹿洞中夢 黃驪江上吟 衣巾花露濕 庭戶嶺雲侵 自有育材樂 餘風驚士林 이름을 숨기기엔 이미 묘책이 없고 강학의 요체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 암울했던 지난날 유감이지만 정미한 학문 차후 꼭 찾아야겠지 흐르는 물 근원이 가장 멀고 울창한 산 골 더욱 깊다네 백록동 안의 꿈을 꾸기도 하고 황려강 물위에서 시도 읊조리누나 55 56 의복과 두건은 꽃이슬에 젖고 영재들 몰려들어 문전성시라 스스로 인재양육 즐거움 있으니 남긴 풍도 사림을 감동케 하리 蘇軾 贈寫眞何充秀才 又君不見雪中騎驢孟浩然皺眉吟詩肩聳 牧隱詩藁卷之十一 白鹿洞書院 朱子 講學 漢水 黃麗 53 어깨 가건만 : 의시 에 또 보지 못했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 리고 시 읊으며 산처럼 어깨 솟구친 것을 하였다 54 55 당나라 때 세워진 을 말하는데 가 일찍이 여기서 하였기에 이른 말이다 56 한강의 별칭으로 라 하기도 하고 라고도 하였다 34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鄭道傳이 三角山에 三峯齋를 열었다는 것은 익히 알 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곳이 어디 인지는 지금까지 밝혀진 記錄이 없다 그런데 李穡의 위 시 제목에서 鄭司藝라고 하였으므로 司藝는 鄭道傳이 년 유배 가기 전의 最終 官職이다 요즘처럼 職責 앞에 前자를 붙이자면 鄭 前司藝 라고 해야 하나 李穡은 전자를 생략하고 정사예라고 하였다 그리고 提州村에서 學徒들을 가르친다 라고 하였다 시 전체의 內容을 보면 鄭道傳의 學問은 이미 名聲이 자자하여 숨어 지내기에는 한계가 있고 暗鬱한 긴 세월 안타깝지만 深 奧한 學問은 後學을 가르침으로 報償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자가 白鹿洞書院 에서 講學한 것처럼 性理學을 가르쳐 문예부흥을 꿈꾼다고 높이 評價하였으며 때로는 漢江에 배 띄우고 시를 지으며 風流도 꾸준히 즐기고 있음을 表現하였 다 또 이마에는 구슬땀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도록 熱辯 을 토로하는 가운데 제생들은 문전에 盛況을 이루어 눈망울은 초롱초롱 하고 숨 죽여 敬聽하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도전 자신이 人材 養成을 즐거움으로 여기므로 士林들에게 感動을 주어 모범이 될 것이라고 하였 다 이 시는 정도전이 년 三角山에서 三峯齋를 開設하였다는 사실과 一致하 는 내용이다 따라서 鄭道傳의 삼봉재는 楊州 삼각산 제주촌에 있었다는 것을 년 종편허락을 받아 1380 1375 1380 알 수 있다 鄭道傳이 出生하여 成長한 곳을 아버지 鄭云敬의 旅程과 어머니 또 본인의 詩文과 교류 문인들의 시문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정도전과 三角山 三峯 과의 因緣은 아버지 정운경이 젊은 시절 과거 공부에 精進하면서 비롯되어 신 접살림을 차린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외가 榮州에서 년 出生하였고 이곳 삼각산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과거에 대비하여 經書를 두루 섭렵하 이상으로 1341 였다 1360년 성균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어 이곳을 떠나 개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부모 탈상을 마치고 1369년 다시 이곳으로 와서 1371년 가을 復職하기 전까지 시 이곳으로 와서 년을 살았다 그리고 1380년 가을 거주제한이 해제되어 또 다 2 三峯齋를 열었다 정도전의 시문 여러 편과 교류 문인 遁村 李集 陶隱 李崇仁 若齋 金九容 獨 35

谷 成石璘 陽村 權近 牧隱 李穡 등의 시문을 통하여 당시에 三峯이라면 곧 三 角山을 지칭하였다는 것이 證明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정도전의 호와 출생을 단양의 도담 삼봉과 관련지어 해석한 것은 그의 시문에 나타난 三峯을 사려 깊게 살피지 않는 행위에 있고 대단히 잘못 된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楊州 三角山 三峯은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공부하고 살았던 집이 있었고 그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成長한 곳이다 Ⅵ 文獻의 허구와 歷史解釋 오류 鄭道傳의 出身을 언급한 文獻은 전술한바 있는데 高麗史節要 공민왕 년 월 기사와 동 년 월 기사 太祖實錄 禹洪壽 졸기와 鄭道傳 졸기 車原頫 雪冤記 丹陽의 傳說 을 중심으로 歪曲된 오류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단양의 전설에 차문절공유사의 記錄을 代入하여 鄭道傳의 家系를 圖表로 제시 정도전 이 賤出이라고 斷定한 韓永愚의 해석에 대한 오류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0 4 4 3 1 高麗史節要의 人身 모독 高麗國史 를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 는 1395년에 완성된 정도전의 편년체 개찬한 고려실록이다 태종 14년1414 하륜이 태종의 명으로 찬정을 착수 다섯 차례나 개수되는 과정을 거쳐 문종 2년1452 에 편찬 완료하여 단종 2년1454 에 간행하였다 57 같이 고려사절요 공민왕 3년1391 鄭道傳을 論劾 청원하였다 월 10 成憲에서 합사하여 다음과 道傳은 家風이 바르지 않고 派系가 밝지 않는데 朝廷에 섞여 있으므로 告身과 功臣錄券 을 회수하고 그 죄를 밝히기를 청합니다 58 邊太燮 高麗史의 硏究 1987 編修過程을 통하여 본 高麗史 p8~18 高麗史節要 恭愍王 3年1391 10月 [道傳家風不正派系未明混淆朝廷請收告身及功臣錄券明正 其罪] 57 58 36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分析하기 위해서는 당시 新舊勢力 간 政治的 입장차에 대한 전후 설 명이 있어야 하겠다 單純히 일부 모욕적인 문구를 보고 사실인양 結付 짓는 것 은 바람직한 結論이 아니기 때문이다 鄭道傳은 당시 복직한지 불과 년 정도 밖 에 되지 않았고 李穡 禹玄寶 鄭夢周 등과 같은 탄탄한 官僚基盤 세력에 미치 위 기록을 7 지 못하였다 鄭道傳은 복직한 후 곧 바로 廢假入眞을 명분으로 실행에 옮겨 우왕 창왕을 폐하고 恭愍王을 옹립하였다 이어 趙浚을 앞세워 田制改革을 주도하였 다 이와 같이 당면한 정치적 조건들을 하나둘 整理 개혁하는 과정에서 다소 急 進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매우 긴박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공양왕을 옹 립한 것은 별개의 문제라 하더라도 전제개혁은 旣得權 勢力에 대한 정치경제적 根幹을 壓迫 또는 위협하는 수준에 달하였다 李成桂와 鄭道傳이 추구하는 정치 적 방향과 목적이 鄭夢周를 통하여 李穡 禹玄寶 등에게 알려지자 신구 양대 세 력 간에 葛藤과 衝突은 목숨을 擔保로 하게 되었다 이색 우현보를 비롯한 守舊勢力은 이성계 정도전의 新進勢力을 와해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반대 세력의 首長인 그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마침내 김저 정 득후를 使嗾한 우왕 복위 사건 金宗衍 사건 명나라에 이성계를 무고한 윤이 이 초 사건 등을 謀議 試圖하였으나 모두 사전에 發覺되어 그들의 속내와 背後가 명백히 들어나 無爲로 끝나고 말았다 정도전은 년 월 신진세력의 先鋒에서 명나라 使節로 가서 윤이 이초의 이성계에 대한 무고임을 밝혀 外交的으로 원만히 해결하고 월 돌아와 국가적 危機를 잘 극복하였다 鄭道傳이 명나라에서 알게 된 사실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들의 배후는 李穡 禹玄寶 鄭夢周였음으로 곧바로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 결하려고 하는 이들의 反國家的 행위에 대하여 反擊을 개시 처단을 요구하였 그리고 1390 6 11 다 59 한편 이색 우현보 정몽주는 鄭道傳의 목적은 고려왕조 전복 企圖에 있다는 高麗史節要4 권제35 공양왕 3년 5월 27일 조 p404 415 증보삼봉집Ⅰ 上恭讓王疏 上都堂書 59 p284 307 37

사실을 명백히 알았음으로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이와 같이 死活을 건 정치적 상황에서 정도전을 제거할 목적으로 속된말을 빌어 가풍이 바르지 못하고 파계 鄭道傳을 언급한 가풍이 바르지 않고 파계가 밝지 않다는 표현은 정도전의 個人 家庭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政治勢力으로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색깔이 없는 存在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政治的 根本이 없는 사람 이 세력을 形成하여 높은 지위에 있고 國政을 混亂에 빠뜨린다는 뜻이다 누구든 死活이 걸린 극한상황에서 무슨 말인들 못 할 것인가 몇 번을 생각해도 應當할 수 있는 적개심이 표출된 인신공격이다 따라서 高麗史節要 의 위 記錄은 정도 전 개인의 身分을 指稱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전은 政治的 뿌리가 없는 人士로 서 朝廷을 혼란시키므로 公職을 박탈하라는 뜻의 인신공격성 발언이다 다음은 년 월 金震陽 李擴 등이 더 한층 원색적인 중상모략으 로 사건의 선봉은 鄭道傳임을 主張 거듭 처벌을 청한 상소이다 가 불분명 한 자가 조정을 어지럽히니 처단하라 고 청원하였다 그들이 1392 공민왕 4 4 정도전은 賤地에서 몸을 일으켜 堂司의 자리를 도적질하여 賤根을 감추기 위하여 本主 를 제거하려고 한다 혼자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연좌시 켰다 60 金震陽 李擴 등이 鄭道傳의 죄를 청원하면서 언급한 내 용 중 賤地에서 몸을 일으켜 堂司의 자리를 도적질하였다 라고 하는 것은 극도 위에서 살펴보았지만 로 인신을 모욕하는 험구이다 천지라는 것은 촌놈 과 같은 모욕이며 관작은 도 高麗史節要 의 전후기록을 살펴보면 鄭道傳이 미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나 說明이 없 다 정도전이 미천한 신분이 되기 위해서는 充分한 설명이 제시 되어야할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趙浚의 죄목을 길게 列擧하였으며 南誾은 정도전에게 빌붙어 慾 心을 부리므로 삭탈하라고 한 다음 鄭道傳은 處斷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정 적질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高麗史節要 恭愍王 4年1392 4月 [鄭道傳起身賤地竊位堂司欲掩賤根謨去本主無由獨擧織成萋 斐之罪連坐衆多之人] 60 38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적인 정도전을 추종하는 세력 일당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목은 정도전은 堂司의 높은 地位에 있다 라고 해석하 는 것이 온당하다 그런데 이것을 태조실록 우홍수 졸기와 연관지어 微賤한 身分으로 擴大 해석하는 것은 憾情이 개입된 것이고 嚴密한 意味의 客觀的인 歷史解釋이라고 할 수 없다 다음기록 賤根을 감추기 위하여 本主를 제거 하려고 한다 는 문구를 분석하 기 위해서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신구 政爭의 전후 事情을 통하여 과연 本主가 누구인지 考察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이 要求한 鄭道傳의 核心 죄목은 本主 를 除去하려고 한다 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정도전 세력들이 고려왕실 전복 을 기도하고 있다는 意味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칭한 本主는 누구일까 韓永愚는 이 대목을 태조실록 우 홍수 졸기와 단양전설에 대입하여 禹玄寶라고 단정하였다 이것은 결단코 잘못 된 해석이라고 斷言 한다 우현보가 정도전에게 있어 주인이 될 만한 명백한 이유 와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우홍수 졸기를 빌어 정도전을 우현보의 奴僕쯤으로 취급하였다 는 식의 恣意的인 해석은 역사를 호도하는 더욱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현보와 정도전을 主從關係로 인식하는 자체가 역사해석의 정치적 뿌리가 없으면서 갑자기 나타나? 61 큰 오류라고 할 것이다 本主는 당연히 군주 또는 君王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려왕조가 무너지느냐 새 왕조를 誕生시키느냐에 대한 兩對 勢力 간 첨예한 對立構圖에서 그들의 정치적 性向과 目的을 파악해서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왕조라는 현실 속 에서 主人은 누구인가 명백한 군주는 恭讓王이다 鄭道傳을 중심으로 結集된 개혁세력들이 고려왕조를 뒤 엎고 恭讓王을 버리려한다는 계획은 이미 명백하? 게 들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양왕과 정도전은 완벽하게 주종관계가 성립 된다 新王朝의 개창에 있고 李穡 禹玄寶를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들은 高麗王朝를 지키는 것이 目的이었다 어 따라서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의 목표는 61 한영우의 앞의 책 p20 39

政敵은 李穡 禹玄寶를 중심으로 결집한 모든 사람 즉 政治 的 見解를 달리하는 守舊勢力이었다 그런데 정도전이 禹玄寶 한사람을 상대로 消耗的인 정쟁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정적 중에 禹玄寶가 포함되었을 뿐 이다 그러므로 韓永愚와 같이 禹玄寶 한 개인만을 指目해서 鄭道傳의 정적 對 象으로 결부시켜 정도전 개인의 출신 성분을 조선 太祖實錄 과 丹陽의 傳說에 대입하여 해석함은 온당하지 않다 그들이 지목한 本主를 단순히 생각해서는 전 말이 糊塗되는 歷史 解釋에 있어 큰 오류를 범하고 만다 따라서 수구세력들이 지키고자하는 대상은 高麗王朝이고 고려의 本主는 국왕인 恭讓王임은 분명한 디까지나 정도전의 사실이다 2 太祖實錄의 虛構 太祖實錄 태조 원년 월 일 禹洪壽 졸기 태조 년 월 일 鄭道傳 졸기를 중심으로 歪曲된 오류를 분석 고찰하기로 하겠다 歷史 記 錄은 사실에 立脚해야 하고 사실은 正確한 史料를 근거로 해야 한다 만약 사실 이 不分明하거나 사료가 혹 造作되었다면 이는 雜書에 지나지 않는다 올바른 史 論은 正確한 사실에서 導出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客觀的이고 眞實한 사료 에 根據해야 한다 더욱이 歪曲된 事實이 세상에 전파되어 미치는 害惡은 홍수가 넘치고 산불이 번지는 것보다 심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태조실록 禹洪壽 졸기 가 과연 春秋筆法에 따른 올바른 기록인지 檢討 分析해 볼 필요가 있다 태조실 다음은 1392 8 23 7 1398 8 26 록은 태종10년1410 정월에 착수하여 하윤 유관 정이오 변계량이 주무로 우승 범 이심 등이 참여하여 태종14년1414 완성하였다 그러나 세종 20년1438 태 종비문 오서 誤書 사건 발단으로 개수를 시작하여 무려 차에 걸쳐 수정 세종 24 7 년1442 9월에 간행되었다 1 禹洪壽 졸기의 조작과 허구 太祖實錄 태조 원년 다 40 월 23일 1392 8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禹洪壽 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

玄寶의 族人 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 樹伊의 아내와 몰래 정을 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김전의 족인들은 모두 樹伊의 딸이라고 하였으나 오로지 김전은 자기 의 딸이라고 하여 비밀히 사랑하고 보호하였다 김전은 후일 還俗하여 수이를 내쫓고 그 처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취하였다 그 딸을 사인 禹延에게 시집보내고 노비와 논밭과 집을 모두 주었다 禹延이 딸 하나를 낳아서 貢生鄭云敬에게 시집보냈는데 운경이 벼 슬을 오래 살아 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운경이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곧 鄭道傳이 다 그가 처음 벼슬할 때 玄寶의 아들들이 모두 그를 경멸하였고 매번 관직을 옮기고 임 명할 때마다 臺省에서 告身에 署經하지 않으니 道傳은 玄寶의 자식들이 시켜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여겨 일찍부터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공양왕이 등극하고 洪壽의 아들 成 範이 駙馬가 되자 道傳은 우성범 등이 권세를 이용하여 그 근원을 발설할까 두려워 禹 玄寶 한집안을 모함하는 일을 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開國한 즈음에 성범을 무함 誣 陷 하여 죽이고는 마침내 현보의 父子를 무함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또 趙浚이 이색 이숭인과 틈이 있으므로 이내 李穡과 種學 崇仁 등을 무함하여 원한을 갚고자 하였다 처음에 62 禹玄寶의 아들 禹洪壽가 죽어서 쓴 그의 卒記이다 과연 이 기사가 얼마나 事實的이고 眞實性이 있는 正確한 史料를 바탕으로 기록 한 史論인지 오늘날 史料로서 價値가 있는지 면밀히 考察해야 될 것이다 그리 고 정도전가계통혼도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정운경이 丹陽禹氏와 연결된 것은 그의 딸이 출가한 평해황씨 媤祖父 黃原老 이다 그런데 근거 없이 정운경의 장 인 禹淵을 우현보의 족인 김전과 엮어 교묘히 꾸민 것은 한마디로 야비하고 稚 拙한 모략이라고 판단된다 자기 노비의 처와 간통하였다는 김전이란 승려의 천 박하고 저속한 비행 기록은 차치하고 그 김전은 단양우씨 禹玄寶의 族人이라고 하였다 족인라면 매우 가까운 外戚을 뜻한다 그런데 그 딸을 역으로 단양우씨 禹延에게 시집보냈다고 하였다 고려사회의 婚姻 風俗이 매우 紊亂하였다고 하 위 인용문은 조선개국 후 榮川禹氏禹淵 丹 62 위 사료는 날조된 것이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의 장인은 이고 위 김전의 사위는 이다 또 의 사위는 으로 되어 있어 내용이 서로 다르다 발음이 같아 언뜻 우연이 두 아내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한영우 각각 우연은 한자 이름이 다르고 본관과 생몰연대가 서로 상이하다 이것은 근본이 다른 세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위 기록은 같은 맥락에서 공신 살해와 정권 탈취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방원의 의도대로 하륜 변계량 우현보 의 손자 우승범 등이 기술한 것이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아버지 이방원의 유지를 받들어 세종의 주도로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무려 7차례의 개수와 거듭 수정을 통하여 왜곡 날조한 것이다 그리고 최 근에 한영우의 해석 오류는 정도전을 더욱더 천출의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다 陽禹氏禹延 車公胤 木川禹氏禹淵 41

納得하기 어려운 婚事임에는 틀림없고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비행 승려 김전의 사위 禹延이 鄭道傳의 외조부 禹淵과 같은 사람인지 규 더라도 쉽게 명되어야할 것이다 外祖父는 그의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에서 살펴본바 분명히 榮川禹 氏散員禹淵이라고 기록하였다 漢字 이름에서 글자가 틀리다면 同名異人이라 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또 김전의 사위 禹延은 丹陽禹氏이고 鄭道傳 의 외조부 禹淵은 榮川禹氏이다 각각 우연은 글자도 틀리고 本貫도 같지 않다 그런데 태조신록청 史官이 잘 못 記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정도전의 두 사람 우연은 동일인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조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 다 鄭道傳의 아버지를 貢生으로 지칭하면서 禹延이 딸을 鄭云敬에게 시집 보냈다고 하였다 鄭云敬이 婚姻할 때 공생이었나를 살펴보자 정운경은 살 되 던 년에 及第하였고 누차 昇進하여 전교교감 직에 있으면서 년 살의 늦은 나이로 혼인하였다 貢生이란 科擧에 급제하지 못했거나 벼슬이 없는 사람 즉 學生 또는 儒生이라는 뜻으로 공부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鄭云 敬이 婚姻할 당시에 공생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고 이 記事가 쓰여 질 때 그는 이미 刑部尙書라는 최종 직함이 있는 故人이었다 그러므로 위 인용문에 서 鄭云敬에게 붙여진 貢生이라는 記述은 지극히 비하하는 말로 惡意的인 意圖 다음 1326 21 1340 35 가 내포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玄寶의 아들들이 모두 그를 경멸하였고 매번 관직을 옮기고 임명할 때마다 臺省에서 告身에 서명하지 않으니 道傳은 玄寶의 자식들이 시켜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여겨 일찍부터 憤慨하고 怨望하였다 라 고 하였다 정도전은 년 성균시에 급제하고 년 恭愍王이 홍건적의 난으 로 파천하여 淸州에 있을 때 그곳에서 지공거 洪彦博 동지공거 柳淑이 시관인 壬寅科 朴宜仲의 榜에서 급제하였다 그리고 아무런 장애 없이 이듬해 곧 바로 忠州司祿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정도전이 처음 벼슬할 때 1360 1362 63 高麗史選擧誌 壬寅科榜目 陶隱集 63 42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1363

禹玄寶의 아들이 그를 경멸할 수 있는 나이 인지 考察해보기로 하자 우 현보의 아들은 다섯인데 큰아들 禹洪壽 는 세 둘째 禹洪富 는 홍수와 연년생으로 세 셋째 禹洪康 은 세 넷쩨 禹洪 得 은 홍강과 두 살 터울로 보면 세 막내 禹洪命 은 홍득과 두 살 터울로 보면 갓난아이 이다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禹洪壽를 보더라도 겨우 세 정도로서 아직 自我도 形成되지 않은 어린아이 에 불과하다 그런데 과 연 이 어린아이들이 정도전의 내력을 알고 嘲弄할 수 있는지 매우 疑問스럽다 그러므로 鄭道傳이 급제하여 관로에 나아갈 때 이들은 겨우 살 미만이거나 젖 먹이 어린아이로서 施政에 觀心을 가지거나 끼어들 정도가 못 된다 더욱이 이 어린아이들이 臺省職에 있어서 정도전의 告身에 書名하지 않았다는 것은 現實 的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鄭道傳은 년 가을 淸州에서 급제하였고 다음해 봄 그곳에서 충주사록으로 부임하여 告身이 遲滯된 사실이 없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들이 그곳까지 鄭道傳을 따라 다녔다고 斷定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1355~1392?~1414 6 7 1357~1423?~1392 3 5?~1392 7 7 1362 따라서 우홍수 졸기의 정도전이 처음 벼슬할 때 현보의 아들들이 경멸하였다 거나 관직을 옮길 때 마다 고신에 서명하지 않아 憤慨하였다는 기록은 물론 그 眞實性이 缺如된 虛構로서 실록청 사관이 뒤에 정도전을 貶毁하기 위하여 악의적인 의도로 造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뒤 기사도 마찬가지로 鄭道傳 졸기의 조작과 허구 太祖實錄 년 월 일 정도전 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 7 1398 8 26 奉化伯 鄭道傳 과 의성군 남은 宜城君 南誾 그리고 부성군 심효생 富城 君 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모해 謀議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 하고 복주 伏 誅 되었다 중 략 정도전 외조부 우연 禹延 의 처부 妻父 인 김전 金戩 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 樹伊 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 外祖母 였는데 우현보 禹玄寶 의 자손이 김전 金戩 의 인척 姻戚 인 이유로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 전이 처음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 告身 이 지체 遲滯 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 봉화백 정도전 43

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 드시 현보의 한집안을 무함 사주 誣陷 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 居正 등을 使嗾 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인을 죽였으며 64 5 禹洪壽 졸기와 내용이 大同小異 하고 다만 禹玄寶의 族人 김 전 에서 禹玄寶의 子孫이 김전의 姻戚 으로 變更되었고 현보의 아들들은 김전 의 인척인 關係로 정도전의 내력을 들어 자세히 알았다는 것 鄭道傳의 告身이 지체된 理由 또한 우현보의 아들들이 퍼뜨려서 알려졌다는 것 이러한 原因에 따 라 정도전이 黃居正을 使嗾하여 우현보의 세 아들을 죽였다는 것이 禹洪壽 졸기 이 기록은 앞의 와 다른 내용이다 禹洪壽 졸기에서 김전은 현보의 족인이었는데 여기서는 현보의 자손이 김전 의 인척이라고 서술하였다 이는 현보와 김전의 關係가 정 反對狀況으로 바뀌었 다 姻戚이란 姻婭戚黨의 줄임말로서 姻族 婚戚이라고도 하는데 外戚 妻家 査家 등 외가와 처가의 血族을 포함한 말이다 즉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혈족 배우자 혈족의 배우자를 인척으로 規定하고 있다 따라서 禹玄寶의 자손들이 김 전의 인척이 되기 위한 條件은 김전이 취한 樹伊의 처가 丹陽禹氏 라야 만 가능 하다 아니면 김전은 수의의 처 외에 別途의 단양우씨 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김전은 승려로서 자신의 노비여자를 취한 다음 破戒하여 그 딸을 시집보냈다고 하였으니 노비 처와 오랫동안 偕老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외에 다른 처가 있 었다는 언급이 없다 이와 같이 현보의 자손들이 김전의 인척이 되기 위한 조건 을 立證할 수 있는 아무런 端緖가 없다 그리고 우현보의 자손들이 김전의 인척 조건을 充足하였다고 假定하면 노비 丹陽禹氏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족이 인족을 처로 취하 고 그 사이에 태어난 딸을 역으로 다시 인족인 丹陽禹氏禹延에게 시집보냈다는 것이 된다 아무리 가정이라 해도 간단히 首肯하기 어려운 關係이다 수이의 처는 당연히 그리고 우현보의 자손들이 정도전 외조모의 내력을 김전에게 들어 자세히 알 고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말이 어느 정도 太祖實錄 태조 7년 8월 26일 鄭道傳卒記 64 44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信憑性이 있는지 김전과 우현보

相計하여 이들이 서로 터놓고 對話할 수 있는 관계가 成立하는지 또 김전이 자신의 부끄러운 過去事를 철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새삼스럽게 해야 할 必要性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禹延과 김전의 생몰년대는 記錄이 없어 나이를 알 수 없으므로 편의상 道傳 이 처음 관직에 임명될 때 라고 한 년을 基準으로 거슬러 김전의 나이를 推 算해 보면 鄭道傳 세 현보 아들 禹洪壽 세 禹玄寶 세 鄭云 敬 세 정도전의 어머니 禹氏는 정도전과 년 연상으로 가정해서 세가 된다 禹延의 妻 金氏는 정도전 어머니 우씨와 년 연상으로 가정해서 세 禹 延은 사위 정운경과 년 연상으로 가정해서 세가 된다 金戩은 사위 禹延과 년 연상으로 假定해서 세가 된다 위 기사에서 禹玄寶의 자손이라고 하였지 만 孫子는 제외하고라도 맏아들 禹洪壽는 겨우 세이고 김전은 세의 高齡이 다 이러한 연령 推算은 한 代數 평균 最小 년을 基準하여 산출된 結果이다 가 령 이 보다 短縮 될 수 있는 代數를 적용한다 하더라도 거의 稀薄하다고 판단된 다 이 結果를 놓고 보면 과연 세의 高齡인 김전이 세의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過去事를 들추어 鄭道傳이 내 딸의 외손자라고 자랑삼아 이야기를 늘 어놓았다고 하기에는 쉽게 納得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대목 역시 虛構로 누군가 에 의한 意圖的인 造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음은 鄭道傳이 처음 관로로 진출할 때 현보의 자손들이 천출임을 세상에 퍼 트려 고신이 遲滯되었기때문에 정도전은 怨恨을 품고 그들을 죽였다라고 기록 자손의 나이를 1341 1305 57 21 1362 1355 7 1333 20 41 20 20 20 29 61 77 99 7 99 20 99 7 하였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우현보의 아들들은 어린아이로서 설령 주 鄭道傳의 출생내력을 들었다 해도 그 意味를 이해할만한 知 覺을 가진 나이도 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鄭道傳은 禹玄寶 가족과 개인 적인 원한을 품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정도전은 년에 登科하여 이듬해 아 무런 장애 없이 지극히 正常的으로 忠州司祿으로 벼슬길에 진출하였기 때문이 변 사람들을 통하여 1362 다 建國되고 나서 禹玄寶의 아들 중 죽은 사람은 맏아들 禹洪壽 넷째 禹洪得 막내 禹洪命 이다 가령 禹洪壽 졸기에서처럼 鄭道傳이 禹玄寶 가 년 조선이 1392 45

私憾을 품고 이들을 해쳤다면 왜 이 세 사람만 죽였겠는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조선이 건국되기 직전 첨예한 政爭의 소용돌이에서 양대 세력의 頂点은 鄭 道傳과 禹玄寶 이다 정도전이 打倒해야할 대상은 당연히 우현보이다 그러나 우 현보와 둘째 洪富 셋째 洪康 등 세 사람은 죽지 않고 온전히 살 아서 禹玄寶는 년 방간의 난을 미리알고 그의 아들 禹洪富를 통하여 李芳 遠에게 알림으로써 功을 인정받아 歡待를 받았다 조선은 건국 후 태조 원년 월 일 卽位敎書를 발표하여 조선건국을 反對한 모든 사람들을 輕重에 따라 처벌하는 지침을 내렸다 문에?~1414 1357~1423 1400 65 7 28 職貼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해상海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은 그 직첩 강회백 이숭인 上으로 옮겨서 종신토록 같은 계급에 끼이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홍수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 杖 백 대를 집행하여 조호 김진양 이확 이종학 우홍득 1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게 할 것이며 최을의 박흥택 김이 이내 김묘 이종선 우홍강 서 견 우홍명 김첨 허응 유향 이작 이신 안노생 권홍 최함 이감 최관 이사영 유기 이 강여 김윤수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 70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첨 우홍부 杖 귀양 보내게 할 것 66 위 기록을 보면 禹玄寶 李穡 偰長壽를 해상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이는 곧 죽 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죽지 않았고 우현보와 이색은 參與하지 않았지만 偰長壽는 나중에 동참하여 높은 官職에 오르 고 天壽를 누렸다 그리고 禹洪壽 禹洪得은 곤장 백대 禹洪康 禹洪命 禹洪 富는 곤장 대에 먼 지방으로 귀양 처벌을 받았다 이것은 비단 우현보의 아들만 別途로 처벌 받은 게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도평의사사의 議決에 따른 품신 을 國王의 裁決에 의하여 執行된 것이다 조선이 이들에게 처벌하는 것은 當然한 歸結이고 이들은 처벌 받을 수밖에 없는 理由가 分明하였다 따라서 禹洪壽 禹 洪得 禹洪命은 형집행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죽은 것으로 理解하여야 온당한 歷 史 해석일 것이다 신왕조 정부의 最高責任者는 국왕이고 국왕은 곧 李成桂이다 국왕의 決定과 끝까지 조선에 1 70 定宗實錄 2년 2월 戊申 良浩堂實記 1997 良浩堂禹玄寶의 生涯와 業績 p26 太祖實錄 원년 7월 28일 즉위교서 65 66 46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

裁可가 있어야 비로소 모든 行政 執行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 녹을 받는 사관이 그들의 죽음을 두고 鄭道傳 個人이 저지른 行爲라고 한다면 국왕 李成桂의 存在를 아예 無視하는 처사이다 나아가 조선왕조를 否定하는 것이고 왕실 능멸과 역모를 自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방원 일파의 목적 은 이성계 정권 전복에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鄭道傳의 使嗾에 따라 이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기보다는 반 대로 鄭道傳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죽고 李芳遠이 權座에 오른 다음 태조실록을 編纂改修하면서 의도적으로 이들을 엮어 歪曲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 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제 太祖實錄 의 鄭道傳에 관한 기록은 무려 차에 걸쳐 改修하였다 그러므로 禹洪壽 형제의 죽음을 鄭道傳의 사적인 원한에서 비롯되 었다는 認識은 歷史 해석에 있어 또 다른 私憾의 介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 라서 이들이 處罰 받은 이유는 조선개창 반대운동에 積極 加擔한 반체제 인사이 기 때문에 정치적인 立場差에 있고 처벌과정에서 不幸하게 죽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7 3 車原頫雪冤記의 造作 車原頫雪冤記 는 作成者나 作成年月日 그리고 異本에 따른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어 후대의 僞作으로 確認된 것이다 그런데 한영우가 사료로 引用한 사례 가 있으므로 鄭道傳을 어떻게 얼의 範疇에 포함 시켰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설 원기에는 다음과 같이 鄭道傳을 포함한 명을 延安車氏의 서얼족으로 記錄하고 4 4 있다 정도전과 조영규가 화의 기틀을 조성하고 뒤에서 함부림과 하륜이 난을 빗어내었다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은 모두 차씨 가문의 가까운 서얼로서 당시의 권세 있는 신 하들과 공모하여 차원부 등을 죽이고 가문에 화를 입히고 자신들의 내력이 들어 있는 족 보를 불태웠다 車原頫雪冤記 가 과연 信憑性이 있는 文獻으로 史 料的인 가치가 있는지 그 板本의 編次 내력과 내용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위 인용문의 분석에 앞서 47

車原頫雪寃記 는 정조 년 후손 車錫周와 車信用 이 수집 간행한 순천판 이 初刊本으로 추정되며 년 국역차원부 설원기 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간행 되었고 내용이 다른 다수의 筆寫本이 있 는데 초간본과 중간본을 통하여 編次 상 내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알려진 15 1791 67 1748~? 1998 車原頫1320-1398의 遺文과 遺事를 수록한 책으로 서울대 奎章閣에는 내제명 車雲巖雪寃錄과 표제명 雲巖實記 두 본이 있다 차운암설원록은 정조 년 후손 錫周 信用이 수집 간행한 것으로 朴宗岳1735~ 1795의 序와 李福源1719~1792의 後 洪 良浩1724~1802의 跋 信用의 後書가 각각 수록되어 있다 차운암설원록을 이용 次序를 고친 운암실기는 附編으로 차원부의 먼 조카인 車云革1393~1467의 행장이 첨부되어 있 설원기는 고려말 15 다 字는 思平 號는 雲巖이며 본관은 延安으로서 고려 공민왕대에 문과에 급제하고 간의대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鄭夢周 李穡과 함께 당대에 名聲을 떨쳤으며 고려말 사회가 혼란해지자 사직하고 평산의 雲巖洞에 隱居하 였다고 한다 년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가 내린 官職과 功臣錄券을 拒絶하고 받지 않 았다고 하였으며 년 松原에서 鄭道傳 趙英珪 咸傅霖 河崙 등 얼들이 보낸 자객 들에게 억울하게 殺害 당하였다하였고 이 때 내외 일족 여명도 沒殺되었다고 하였다 杜門洞 인의 한사람으로 불려 지기도 하며 태종때 伸寃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세종 때 文節이라는 諡號가 내려졌으며 순천 雲巖祠에 제향 되었다고 하였다 雲巖實記는 내용이 동일하고 木板도 같은 것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雪冤錄과 운암실 기의 차이점은 洪良浩의 발문이 설원록에서는 끝에 있고 운암실기에는 맨 앞 서문에 이 어 수록되고 있으며 끝에 차운혁의 유사가 附編으로 첨부되어 있는 것이다 상권은 유고시 수와 설원록으로 엮었는데 陳啓 皇甫仁?~1453 朴彭年 1417~1456 등 명의 주가 있고 河緯地1412~1456 申叔舟1417~1475등 應製者 명이 내용은 차원부의 1392 1398 4 70 72 2 24?~? 44 수록되어있다 景泰 년세조2 1456 월 일 世祖의 명으로 河緯地가 지은 것으로 설원기는 같은 해 월 일 文宗의 명으로 朴彭年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應製詩 여수와 李福源 崔 晛 洪良浩 金龜柱1740~1786 등이 지었다는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설원록에 참여한 인물들은 대부분 不事二君의 義節에 투철한 사람들로 世祖의 왕위찬탈에 반기 를 들고 端宗 復位를 도모했던 사람들이다 擧事가 실패하고 정치적인 불운에 처하게 되 서문은 5 7 5 21 17 60 67 전남 광양시 옥룡면 용곡리 323 연안차씨 옥룡병암종중 소장 48 鄭道傳의 出生에 관한 考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