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고고학 31~59쪽 제17호(2013.7) 목 차 박정민* Ⅰ. 머리말 Ⅱ. 한양에서 출토된 중국 청화백자와 그밖에 중국 자기들 1. 청화백자 2. 그 밖에 중국 자기들 Ⅲ. 조선 전기 중국 자기의 유입상황 Ⅳ. 조선 전기 중국 청화백자의 소비상황 Ⅴ. 맺음말 * (재)한울문화재연구원
국문초록 조선은 국초에 수준 높은 자기문화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료 수급과 비용의 한계로 인하여 청화백자는 양산할 수 없었다. 15세기 후반에는 조선이 사옹원의 사기 소를 통해 청화백자를 자체생산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왕실을 비롯한 소수의 사용 층을 위한 제품이었으며 그 양 또한 적었다. 조선 전반 한양도성의 상인( 商 人 )들은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 서 부를 소유한 일부 사대부와 중인계층을 중심으로 사치품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그러 나 조선 전기 조선산 청화백자들은 재력만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던 물품이었다. 그러한 한계 상황이 중국산 자기들의 수입으로 연결되었으며 현재 한양도성 안에서 출토되는 중국산 청화백자들이 그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중국산 수입자 기들을 종류별로 구분하여 중국산 자기들을 수입했던 류큐국[ 琉 球 国 ] 등의 타국과 비 교를 통해 당시 한양이 가지고 있던 소비성향을 확인하였다. 한양에서 출토된 중국산 자기들의 출토양상은 류큐[ 琉 球 ] 및 일본 등 주변국과 비교해 볼 때,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타국에 비해 조선은 중국산 청화백자만을 주로 수입하 였는데 이는 조선이 가지고 있던 자기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주변국들에서는 15세 기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중국 용천요에서 제작된 청자들이 발견되는 예가 많다. 그 러나 조선은 독자적으로 청자를 제작할 수 있었으므로 청자의 수입은 불필요했다. 자주 요 등지에서 만들어진 백지흑화기법의 자기들 역시 조선 전기 한양도성민들에게는 크게 각광받지 못한 중국산 자기이다. 조선 전기 한양에 거주했던 중국산 자기의 수요층은 구 하기 쉽지 않았던 국산 청화백자를 대신할 중국산 청화백자를 주로 수입하였다. 출토된 중국산 청화백자들의 기종은 주로 소량의 잔을 포함한 접시와 발 등의 반상기 이다. 대부분 경덕진( 景 德 鎭 )을 비롯한 중국의 민요( 民 窯 )에서 생산된 그릇들로 판단된 다. 시문된 문양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릇의 내외측면은 당초문과 절지문을 아우르 는 화문( 花 紋 )과 송죽매 등의 세한삼우문( 歲 寒 三 友 紋 ), 사자 등의 서수문( 瑞 獸 紋 )과 기 타 추상장식문 등의 순으로 주로 배치되었다. 그릇의 내저면 중앙에 배치되는 문양으로 는 괴석문( 怪 石 紋 ), 연지문( 蓮 池 紋 ) 등과 함께 범어( 梵 語 ), 수복( 壽 福 )자도 문양소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에 수입된 중국산 자기들의 제작시기는 주로 15세기 후반에 서 16세기에 해당하며 16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수입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에서 다량으로 수입된 청화백자이지만 조선사회에서는 여전히 고가의 사치품이 었다. 그 때문에 사용하다가 깨어진 청화백자들은 파편을 다시 접합하고 그 위에 시유 를 다시해서 번조하는 방식으로 수리하였다. 중국산 청화백자의 수리는 당시 양질의 백 자들을 제작하던 경기도 광주에 자리한 관요( 官 窯 ) 가마들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 해 보았다. 주제어 : 한양도성, 중국산 수입자기, 경덕진 청화백자, 용천 청자, 류큐국[ 琉 球 国 ], 소비성향 32 야외고고학 제17호
Ⅰ. 머리말 한국도자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국과의 상호 영향관계에 대한 접근은 반드시 수 반되어야 하는 요소이다. 우리 민족이 자기문화( 瓷 器 文 化 )를 향유할 수 있게 된 고려 전 기 이후 우리의 자기( 瓷 器 )에는 중국의 다양한 제자( 製 瓷 ) 요소들이 투영되었다. 조선 초 기의 자기문화는 청자에서 백자로 전이되었고 그 과정에서 백자에 청화안료로 문양을 시 문한 청화백자의 생산도 함께 증가했다.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청화백자는 원명교체 기( 元 明 交 替 期 )에 더욱 발전하였고 15세기를 거치면서는 중국을 대표하는 귀한 물산으로 전세계( 全 世 界 )에 인식되었다. 이러한 청화백자의 위상은 조선의 청화백자 자체 생산으 로 연결되었으나 조선의 청화백자는 값비싼 원료의 수급이라는 원론적인 제작 한계를 안 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유입된 청화안료는 관요( 官 窯 )에서만 쓰였고 1), 조선의 청화 백자들은 국왕과 그 주변의 한정적인 계층을 위주로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조선 전기 청화백자에 대한 수요는 한정적인 생산구조를 가지고 있던 조선 청화백자의 대체제 <그림 1> 백자청화운용문병, 높이 39.4cm, 홍무( 洪 武, 1368~1398년) 년간, 중국 하남성( 河 南 省 ) 주정왕( 周 靜 王 ) 묘 출토, 하남박물원 ( 代 替 製 )로서 중국 청화백자의 수입으로 연결되었 다. 이러한 배경은 현재 서울에서 조사된 다수의 유적들에서 명대( 明 代 ) 제작된 중국 청화백자들이 출토되는 원인이 되었다.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는 조선의 청화백자 발전 에도 촉매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중국 청화백자의 수 입과 그에 따라 조선전기 백자에 나타나는 명대 청화백자들의 영향관계들을 밝히는데 집중을 하 였다(윤효정 2002; 방병선 2005; 김영원 2006; 이현 정 2007; 전승창 2009; 김혜정 2011; 김윤정 2011). 조선( 朝 鮮 )과 명( 明 ) 사이에 이루어진 도자교류 의 산물은 청화백자에 집중된다. 이와는 달리 14 세기 전반 일본( 日 本 )의 수요층을 위한 도자기들 을 실었던 신안선( 新 安 船 )에서는 백자류 이외에도 매우 다종다양한 중국산( 中 國 産 ) 자기들이 출수되 1) 成 宗 實 錄 211 卷, 19 年 (1488) 1 月 23 日 戊 午 條. (전략) 회회청( 回 回 靑 )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또 민간에서 쓰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33
<그림 2> 백자청화운용문병, 높이 21.5cm, 보물 제785호, 삼성미술관 리움 었다. 상당량의 용천요( 龍 泉 窯 ) 청자를 비롯하여 건요( 建 窯 )와 길주요( 吉 州 窯 )의 완( 盌 ) 등 차( 茶 )와 관련된 그릇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조선 과 일본에서 수입한 중국 자기는 재질과 기종 구 성에서 차이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조선의 수요자 들은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수입하였는데, 그 이유 는 당시 중국의 내수( 內 需 ) 상황이 청화백자 위주 의 거래구조이었기 때문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는 경덕진( 景 德 鎭 )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뿐만 아니라 절강성( 浙 江 省 )의 용천요와 하북성( 河 北 省 )의 자주요( 磁 州 窯 )에서도 자기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이들 청자와 백지흑화자기 들도 많은 양이 제작되어 중국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로까지 팔려나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나라 유적에서는 청화백자들이 주로 출토된다. 서울의 발굴조사들에서 용천요 의 청자들과 자주요 계통의 자기들이 일부 확인되고는 있으나 그 양은 여전히 소량이다. 이 논문에서는 조선 전기 한양 2) 중에서도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종로( 鐘 路 )의 여러 유적들과 경기도 광주에 자리하는 관요 가마터들에서 발굴된 중국 자기, 특히 청화백자 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소비상황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서울 도심의 발굴조사 결과, 중국 자기들은 주로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이 일어나기 전인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이는 이미 일부 선행연구들에서 언급된 조선 전기 사무역( 私 貿 易 ) 의 증가와 사치품의 수입이라는 사회경제적 현상에 기인하는바 크다고 생각된다(박평식 2004: 99-102). 그러나 실제 서울에서 출토되는 중국 청화백자들을 살펴보면, 문양이나 청화의 발색 등 전반적인 수준이 당시 조선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들에 비해 월등하게 뛰 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 청화백자들에서 확인되는 문양들은 당시 조선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들과는 긴밀한 영향관계가 포착되지 않는다. 당시의 조선 청화백자들은 오히려 원말명초( 元 末 明 初 ) 중국의 청화백자들에서 드러나는 조형과 문양의 특징들과 연 결되는 모습이 드러난다<그림 1, 2>. 또한 서울에서 출토된 일부 중국 청화백자들의 조악 한 시문상태와 유태의 질은 이 그릇들이 당시에 실제로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 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기도 한다<그림 3>. 물론 중국 청화백자들은 수입품이므로 희소 2) 이 논문에서 사용한 한양( 漢 陽 )은 조선의 수도로 당시 도성( 都 城 )의 내부, 즉 사대문 안의 지역을 의미한다. 실제 조선 전기의 정치, 사회, 경제적인 활동들은 대부분 도성 내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재 서울의 행정구역이 아닌 조선 전기의 도성 내를 한양으로 한정하여 통칭하였다. 34 야외고고학 제17호
성은 높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희소성은 시문된 문 양의 소재나 기종이 아닌 그릇에 시문된 청화 라는 안료에 기 <그림 3> 서울 군기시터 유적 출토 중국산 청화백자들, (좌로부터) 잔존높이 1.7cm 잔존높이 2.4cm 잔존높이 1.6cm, 한강문화재연구원 인하는바 크다고 생 각된다. 그러한 배경 으로 인하여 일부 중 국 청화백자들은 사용 중에 파손되면 재번조를 통해 수리했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중국 청화백자의 수리방식을 통해 경기도 광주의 관요 가마터와 그 외의 일부 지방 의 백자 가마들에서 출토되는 중국 청화백자의 존재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 청화백자들은 문양의 시문방식이나 기형이라는 측면에서 조선 청화백자보다 월 등하다기 보다는 청화안료로 시문된 그릇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당시 조선 청화백자의 희소성에 기인한다. 조선 전기 한양에 거주했던 중 국 청화백자 수요층은 중국 청화백자들을 조선 청화백자의 대체품으로 사용하였으나 조 선의 자기문화는 그 문양이나 기형은 적극적으로 차용하지는 않았음이 출토품들을 통해 드러난다. Ⅱ. 한양에서 출토된 중국 청화백자와 그밖에 중국 자기들 2003년 이후 서울에서는 60건 이상의 매장문화재조사들이 이루어졌다(서울특별시 2011: 82-95). 3) 그 중에서 종로 청진동 일대를 비롯하여 동대문운동장 유적(중원문화재 연구원 2011), 종묘 광장 유적(서울역사박물관 2012), 군기시터 유적(한강문화재연구원 2011), 청진동 맞은편의 서린동 유적(한강문화재연구원 2012) 등 많은 유적들에서 15세기 부터 19세기 이후에 이르는 다양한 중국 자기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한양 내의 중심지인 종로에서는 다양한 중국 자기들이 출토되었다<그림 4, 5>. 4) 3) 2003년 이후부터 2012년 말까지 서울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는 시굴조사 등을 포함하여 60여건을 상회한다. 이들 조사는 대부분 도성( 都 城 ) 내부에서 이루어졌으나, 조사결과 남아있는 유적의 상황이 미비하여 정식 보고서의 간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들도 상 당수이다. 4) 통계를 위한 기본자료들은 (재)한울문화재연구원에서 주로 담당하였던 종로 청진동 유적들 중에 현재 보고서가 간행된 청진 1지구 유적, 청진 2~3지구 유적, 청진 5지구 유적, 청진 6지구 유적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들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35
<그림 4> 육조거리와 종로대로 지역의 주요 관청들과 발굴조사지역(항공사진) 출토된 중국 자기들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소량의 홍록채자기(紅 綠彩瓷器), 청자(靑瓷), 자주요계(磁州窯係)의 백지흑화자기(白地黑畵瓷器) 등이다. 15세 기 전반 이전에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청화백자들은 주로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물량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이후 조선은 사옹원(司饔院)을 통해 원하던 청화백자를 생산하였고 이에 중국 청화백자들에 대한 욕구도 차츰 감소했을 것이다. 대신 이때부터 중국자기에 대한 수요욕구의 주체는 조선왕실에서 상층 사대부들과 국왕의 인척들로 확 5) 산된다. 16세기 이후에는 중국 청화백자에 대한 수요욕구가 한양의 부상(富商)들과 지 방까지 확대된다. 현재 궁궐들 이외에 서울에서 출토되는 중국 청화백자들은 이처럼 변 화된 수요층을 위한 산물이었을 것이다. 선행 연구에서도 명(明)과의 공식 외교관계에 따 5) 成宗實錄 77卷, 8年(1477) 閏2月 13日 辛亥條.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 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김영유(金永濡) 가 아뢰기를, <중국>청화자기(靑畫磁器)는 이미 사용을 금지하였는데, 다만 대신(大臣)과 척리(戚里)들이 이를 사용하기를 좋아하 니, 본부(本府)의 금란리(禁亂吏)가 어찌 적발(摘發)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칙(申飭)하여 금지하소서. (후략). 36 야외고고학 제17호
른 선물형식의 중국 자기 들과 조선의 수요층 변화 에 따라 사무역으로 수입 된 청화백자들을 이중적 으로 구분한 바 있다(전 승창 2009: 45). 또한 16 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한 양에서 출토되는 중국 청 화백자들의 양도 증가한 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 선 내부의 수요증가뿐만 아니라 16세기 후반 크게 확대된 중국의 청화백자 생산 상황과도 관련이 있 을 것이다(바바라 자이 역 2012: 257-262). 당시 한양에서 사용된 <그림 5> 서울 시내 주요 매장문화재조사 일람표(2003~2012년 현재) 6) 중국 청화백자들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출토유물들을 살펴보겠다. 출토 양상을 입체적으로 살피기 위하여 출토유물들 중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 청화백자 들과 함께 소수의 여타 재질들의 자기들도 함께 확인해 보겠다. 1. 청화백자 서울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들 가운데 절대 다수는 청화백자들이며 그 중에서도 주로 16 세기에 제작된 유물들이 중심을 이룬다. 확인되는 문양들은 주로 화당초문(花唐草紋), 범 자문(梵字紋) 등의 장식적인 요소가 강한 유형과 세한삼우문(歲寒三友紋)과 함께 일부 연 지문(蓮池紋), 괴석난간문(怪石欄干紋), 산수문(山水紋) 등의 문인화풍의 요소가 가미된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 외에도 반리문(蟠螭紋)으로도 지칭되는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뿔 이 없는 용이나 보주를 희롱하는 사자들과 같은 서수문(瑞獸紋)이 시문된 종류들도 있다. 6) 언급한 선행 연구들에서 중국 청화백자와 조선 청화백자의 기형과 문양 등을 비교하기 위한 세부적인 분석들이 이루어졌다. 이 글에 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부분은 조선 전기 한양에서 이루어진 중국 청화백자의 소비상황이므로 중국과 조선의 청화백자들에 나타나 는 문양과 조형적인 특징에 대한 비교와 더불어 출토 정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37
<그림 6> 백자청화세한삼우문발편, 높이 10.0cm, 청진동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 <그림 7> 백자청화범자문발편, 잔존높이 5.6cm, 저경 5.7cm, 청진동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 장식문이 시문된 청화백자들의 경우 외면에 화당초문을 두르고 그 사이에 팔보문( 八 寶 紋 )을 부가한 유물들이 다수이다. 이러한 유물들의 문양 특징은 원대( 元 代 ) 청화백자들로 부터 이어진 것이다. 출토된 청화백자들의 문양 표현과 세부 필치들은 대부분 명대( 明 代 ) 관요풍의 정세한 문양 묘사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중국 청화백자들은 주로 15세기 후반 에서 16세기에 제작된다. 중국 북경( 北 京 ) 인근 모가만( 毛 家 灣 )에서는 명대 청화백자들이 폐기된 구덩이들이 조사되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에는 서울에서 출토된 청화 백자들과 조형적인 특징이나 문양 소재가 유사한 경우가 많다( 北 京 市 文 物 硏 究 所 2007). 이들 중국 청화백자들의 굽은 대체로 수직굽으로 접지면을 좁게 마무리하였으며 저부 전체를 시유하였다. 굽 안쪽에 특별한 관지( 款 識 )가 시문되는 경우가 적어 정확한 제작시 기를 알 수는 없다. 다만 굽 안쪽에 萬 ( 万 ) 福 攸 同, 長 命 富 貴, 富 貴 長 春, 長 春 佳 器, 福 壽 康 寧, 天 福 佳 器, 天 下 太 平, 金 玉 滿 堂, 淸 風 明 月 등과 같은 길상 의미를 가진 네 글 자의 명문들이 시문되는 경우가 많다. 해당 유물들은 주로 가정( 嘉 靖, 1521~1566년), 만력 ( 萬 曆, 1572~1620년) 년간에 주로 만들어졌고 숭정( 崇 禎, 1628~1644년) 시기까지도 제작 된다. 명대 후반에는 이러한 유물들은 경덕진( 景 德 鎭 )의 민요( 民 窯 ) 뿐만 아니라 복건성 덕화( 德 化 ) 등지의 민요( 民 窯 )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제작되었다( 張 柏 主 編, 2008). 기종은 소량의 잔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발과 접시 등의 반상기류이다. 이와 함께 극히 소수의 고족배( 高 足 杯 )와 호( 壺 )가 확인된다. 서울에서 출토되는 중국 청화백자들의 문양 과 조형적인 특징들이 변화하는 양상은 당시 중국내에서 이루어진 청화백자들의 일반적 인 변화상과 대부분 일치한다. 조선 전기에 수입된 중국 청화백자들은 중국의 시장에서 이미 생산되어 있던 기성품들 을 수입했을 뿐, 조선의 수요자들이 구체적인 문양의 제작을 주문하거나 조선의 식생활 을 반영한 기종의 생산을 구체적으로 도모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초문과 절지문을 포함한 화문( 花 紋 )과 송죽매( 松 竹 梅 )를 문양소재로 삼은 세한삼우문( 歲 寒 三 友 38 야외고고학 제17호
<표 1> 종로 청진동 유적 출토 중국 청화백자 문양별 출토상황 연지문(4점) 4% 인물문(3점) 3% 화조문(1점) 1% 서수문(4점) 4% 紋) 등이 다른 문양들에 비해 출 토량이 많다. 중국 청화백자들이 출토되는 종로지역에는 다양한 계층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현재 종로구 괴석문(6점) 5% 청과 그 주변의 업무시설 주변 으로는 정도전(鄭道傳, 1342 추상장식문(7점) 6% 문자문(9점) 8% 화문(61점) 56% 세한삼우문 (15점) 14% 1398년)의 집터를 비롯하여 예 종(睿宗, 재위 1468~1469년)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 君, 1466~1525년)의 저택 등 고 관(高官)들과 종친(宗親)의 집들 이 다수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해당지역은 육조(六曹) 거리와 시전행랑(市廛行廊)의 배후지이기도 하였으므로 관리(官 吏)들이 생활하는 경중각사(京中各司)들의 부속 건물들과 상공인(商工人)들을 위한 공간 들이 병존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 청화백자들은 대부분 잔편 으로 건물지 내부의 퇴적토나 배수로 등에서 확인된다<그림 8>. 조선 전기 다양한 재화들 이 거래된 종로대로변의 시전행랑에서도 일부 중국 청화백자들이 출토되지만 시전행랑 이외의 발굴조사 지역에서 출토된 청화백자의 양에 비해 많지는 않다. 더욱이 시전에서 도 여러 칸의 행랑에서 중국 청화백자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일물일전(一物一廛)이라는 시전의 원칙을 기준으로 볼 때, 시전에서 출토된 중국 청화백자들이 판매를 위한 물건이 기 보다는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그릇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청화백자들은 종로의 비 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 출토되 며 어느 한 곳에서 출토량이 집 중되는 등의 특이한 정황은 포 착되지 않는다. 종로의 넓은 범 위에서 중국 청화백자들이 공통 적으로 출토된다는 것은 당시 중국 청화백자의 사용이 폭 넓 게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 <그림 8> 청진동 유적의 중국 청화백자 출토 장면 라 사료된다<그림 9>. 39
청자양각모란문접시편 높이 2.8cm, 추정구경 25.5cm, 저경 12.1cm 백자청화보상당초문접시편 높이 5.2cm, 구경 32.2cm, 저경 18.1cm 백자청화송죽문발편 높이 5.8cm, 구경 13.2cm, 저경 5.0cm 백자청화당초문발편 높이 6.4cm, 구경 13.1cm, 저경 5.5cm 청자양각화문주자형연적편 높이 6.3cm, 저경 4.2cm 백자청화연화당초문발편 높이 5.0cm 백자청화연지수금문저부편 잔존높이 1.4cm 백자청화화절지문발편 높이 3.7cm 백자청화절지문접시편 높이 3.6cm, 구경 14.9cm, 저경 8.6cm 백자청화당초문발편 높이 5.4cm, 저경 5.8cm 백자청화연화문주자편 높이 9.6cm, 구경 4.0cm, 저경 5.0cm 백자청화보상당초문접시편 높이 4.6cm, 저경 11.5cm <그림 9> 청진동 유적 중국 자기 출토 위치(청진 1지구와 청진 2~3지구 유적 16세기 문화층 합성) 40 야외고고학 제17호
2. 그 밖에 중국 자기들 대다수의 청화백자들 이외에 유상채( 釉 上 彩 ) 7) 안료를 시문한 소량의 홍록채자기( 紅 綠 彩 瓷 器 )들과 청자( 靑 瓷 ), 백지흑화자기( 白 地 黑 畵 瓷 器 )들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기타 중 국자기들의 청화백자들에 비해 매우 적게 출 토되었다. 비록 기타 중국 자기들의 출토량 이 소수이지만 그 유물들의 기종 및 문양을 살펴, 중국 청화백자의 출토상황을 보다 구 체화하기 위한 비교자료로 삼고자 한다. 홍록채자기들은 주로 접시들로 적색과 두 청색( 豆 靑 色, 녹색)의 안료로 문양을 시문하 였다. 중국의 경우 이러한 유물들은 주로 금 ( 金 ) 나라이후부터 제작되며 중국( 中 國 )의 여 러유적들에서 확인된다. 중국의 유상채자기 는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원대 경덕진( 景 德 鎭 )에서는 금채자기( 金 彩 瓷 器 )도 만들어졌 다. 명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의 유상채자기는 붉은색의 화려함이 강조되는 특징으로 귀결 된다. 명초( 明 初 ) 홍무( 洪 武, 1369~1398년) 년 간에 주로 제작된 유리홍백자( 釉 裏 紅 白 瓷 )들 또한 비록 그릇의 최종 발색은 회색에 가깝 지만 근본적으로는 붉은색으로 문양을 드러 내고자 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명 대 경덕진에서 제작된 오채자기들의 문양은 주로 적색, 녹색, 황색 등이 사용되었다. 주로 제작된 문양은 연지원앙문( 蓮 池 鴛 鴦 紋 ), 운 <그림 10> 백자홍록채모란문접시편, 높이 3.4cm, 저경 9.0cm, 청진동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 <그림 11> 백자홍록채보상화문구연편, 잔존 높이 4.9cm, 청진동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 <그림 12> 청자초화문발편, 높이 4.2cm, 구경 14.3cm, 저경 7.4cm, 청진동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 룡문( 雲 龍 紋 ), 운봉문( 雲 鳳 紋 ) 등이다. 명대 초기에는 유상채, 유하채를 막론하고 홍색의 문양이 다수 제작된다. 이러한 배경을 주원장의 홍건군( 紅 巾 軍 )과 연계시켜 언급할 정도 7) 유약이 시유된 완성 자기의 유면( 釉 面 ) 위에 에나멜 등의 채색안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기법. 41
로 명황실에서는 적색문양으로 장식된 백자들을 다수 제작하였다. 그러나 실제 유리홍자 기가 선명한 붉은색으로 번조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기술적 한계 때문에 유상채 로 적색 위주의 홍록채자기들이 제작되었던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선덕제( 宣 德 帝, 1425~1435년)부터 정덕제( 正 德 帝, 1505~1521년)을 거치면서 중국에서 홍록채자기들의 제 작은 더욱 증가한다. 홍록채자기는 청화백자들과 함께 출토되지만 그 양이 매우 적다. 홍록채자기들은 수입 제품인데 반해 사용 중에 문양이 지워지는 경우가 잦아 고가품으로서의 수준 유지에 다 소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홍록채자기의 특징이 낮은 출토 비율과 결부될 수도 있으며, 당시 조선의 취향과도 잘 부합되지 않았던 것으로도 해석 할 수 있다. 서울의 유적들에서는 용천요( 龍 泉 窯 ) 청자들도 소량 출토된다. 다만 그 양은 중국 청화 백자들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확인되는 기형들은 주로 발과 접시이지만 일부 고족배, 연 적 등도 출토되었다. 문양은 범( 范 )으로 찍어낸 화문( 花 紋 )이 일반적이다. 청진 2~3지구 유적에서는 반상기 이외에 주자( 注 子 ) 형태로 만들어진 녹색이 짙은 소형의 연적( 硯 滴 )도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의 제작지는 절강성( 浙 江 省 ) 용천( 龍 泉 )과 그 주변이거나 강서성 ( 江 西 省 ) 경덕진( 景 德 鎭 )이나 복건성( 福 建 省 ) 민요( 民 窯 )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경덕진에 서는 주로 청화백자들을 생산하였지만 명대( 明 代 ) 관요( 官 窯 )에서는 청자들도 생산했다. 또한 복건성의 여러 가마터들에서도 청자들이 제작되어 중국의 내수( 內 需 )와 동남아시아 와의 교역에 이용되었다. 종로 청진동 유적에서 출토된 용천요계 청자편들은 회백색의 태토에 암녹색의 청자유 가 두껍게 시유되었다. 저부까지 전체를 시유한 다음 고리형 번조받침을 받치는 부분의 유약만을 닦아내고 번조하였다. 청진동 유적에서 출토된 중국 청자들은 용천대요풍동암 요지( 龍 泉 大 窯 楓 洞 岩 窯 址 ) 등 용천지역 청자들과 번조 받침 등에서 유사한 점이 드러난 <그림 13> 청자화형접시편, 높이 5cm, 구경 26cm, 군기시터 유적 출토, 한강문화재연구원 <그림 14> 청자음각연화문화형접시편, 높이 6cm, 구경 25.6cm, 군기시터 유적 출토, 한강문화재연구원 42 야외고고학 제17호
다( 浙 江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9). 8) 서울 군 기시터 유적에서도 용천요계의 청자로 보 고된 청자화형접시편들이 출토되었다<그 림 13, 14>. 9) 종로 청진동 유적들에서 자주요( 磁 州 窯 ) 혹은 자주요계( 磁 州 窯 系 ) 가마에서 10) 제작된 백지흑화자기편( 白 地 黑 畵 瓷 器 片 ) 들이 출토되었다. 잔편들이지만 잔존하는 편들의 기측선을 고려 할 때, 주로 호의 구연부와 동체편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된 다. 국내의 조선시대 유적에서 중국으로 <그림 15> 백지흑화용문호편, 최대길이 19.6cm, 청진동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 부터 수입된 자주요계통의 자기들이 출토 되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까지 경기 도 광주의 관요 가마터에서 잔편들이 출 토된바 있으며(국립중앙박물관 1995: 108) 최근에는 김포 양촌 유적 발굴조사에서 자주요계 호편들이 출토되었을 뿐이다(고 려문화재연구원 2013) <그림 16>. 11) <백지흑화용문호편>은 청진 2~3지구 유적의 279번지 건물지1에서 출토되었다 <그림 15>. 해당 건물지 내부의 소토층( 燒 <그림 16> 백지흑화화문호편, 잔존높이 15.1cm, 김포 양촌 유적 출토, 고려문화재연구원 土 層 )에서 상술한 홍록채자기 구연부편 8) 풍동암요지에서는 ' 永 樂 ', ' 官 ' 등의 명문 자료가 확인되어 명대의 홍무( 洪 武, 1368~1398년), 영락( 永 樂, 1403~1424년)연간 에 궁정용의 청자도 만들어진 가마로 판단되는 곳이다. 9) 군기시터 유적에서 출토된 청자(유물번호 123 124)들에 남아있는 음각의 문양이나 굽까지 시유한 다음 입자가 고르지 못한 내화 토를 받친 번조 상태 등을 고려 할 때 해당 유물들을 용천청자로 분류하는 것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요망된다. 10) 자주요는 송나라와 원나라를 거쳐 그 생상량과 기종에 다양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자주요는 주로 현재 중국 하북성( 河 北 省 ) 한단 시( 邯 鄲 市 ) 자현( 磁 縣 )과 봉봉광구( 峰 峰 礦 區 ) 지역의 가마들을 총칭한다. 이 지역이 송 원시대 자주( 磁 州 )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 가마 중에서도 관대요( 觀 臺 窯 )와 팽성요( 彭 城 窯 )가 중요한 가마들이다. 이 외에도 인근 하남성( 河 南 省 ) 학벽집요( 鶴 壁 集 窯 ), 교태( 絞 胎 ) 기법으로 유명한 당양욕요( 當 陽 峪 窯 )와 산서성( 山 西 省 )의 여러 가마들이 자주요의 백지흑화( 白 地 黑 畵 ), 백유각화( 白 釉 刻 畵 ), 공작람유( 孔 雀 藍 釉 ) 등의 요업방식과 시문기술의 영향을 받아 그릇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자주요 주 변의 비슷한 양식의 일련의 가마들을 자주요계( 磁 州 窯 系 ) 가마로 통칭한다. 이 때문에 자주요계 가마는 한단시 자현의 가마뿐만 아니라 자주요 자기를 모방하여 만든 여타 지역의 자기들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11) 해당유적의 1지점 B구역 2호 수혈에서 자주요계통의 백지흑화화문호편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은 별다른 시설이 확인되지 않는 수 혈에서 선문( 線 紋 ) 위주의 분청자편들과 함께 수습되었다. 43
들도 수습되었다. 이 자주요편이나 홍 록채자기편들은 문양의 시문상태를 고 려할 때, 원말명초( 元 末 明 初 )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나 12) 주로 16세기에 해당 하는 조선 자기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해당 건물지에서 함께 출토된 중국 청 <그림 17> 백지흑화문편들, 최대길이 12.5cm, 두께 1.4cm, 청진동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 화백자들의 제작시기는 15세기 후반 이후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조사 된 건물지의 평면형태는 ㄷ 자형이며 정면 4칸, 측면은 2칸에 양쪽 끝 칸을 한 칸씩 덧댄 형식으로, 주변에 중국 자기들이 출토 된 다른 건물지들 보다 잔존상태는 양호하였으나 건물의 격이나 규모가 우월하지는 않 았다(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202-204). 이 경우는 전세( 傳 世 )되던 유물이 폐기되었던 것 으로 판단된다. 같은 유적에는 자주요계통의 자편들이 소량 출토되었다. 이 유물은 문양 대의 분할현상이 사라지고 화문계통의 문양을 성글게 시문하는 등 15세기 이후에 제작된 특징이 확인된다<그림 17>. 기타 종류의 중국 자기들 역시 중국 청화백자들처럼 어느 한 곳에 편중되지 않지만 중 국 청화백자에 비해 출토량이 적어 출토 유구별로 구체적인 성격을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중국 청화백자의 출토량이 높은 유적들을 중심으로 소량의 기타 중국 자기들 이 동반 출토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기타 자기들만 독립적으로 출토되는 경우는 없으므로 기타 중국 자기들이 중국 청화백자 위주의 수입상에 부가적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높 여준다. Ⅲ. 조선 전기 중국 자기의 유입상황 중국 자기들은 조선 초부터 유입되었으며 사대부가에서 국왕에게 예물로 바치기도 하 였다. 13) 15세기에는 중국 청화백자들이 조( 朝 ) 명( 明 )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에 따라 회 사품의 형태로 조선에 유입되었다(이현정 2007: 표12). 그러나 16세기에는 대명외교의 회 12) 해당 유물은 원말명초에 제작되었을 것이며 자주요계의 가마 중에서 주로 학벽집( 鶴 璧 集 ) 가마터의 생산품들과 조형적인 특징과 시문양상이 일치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비록 사진자료들이었지만 서울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들의 성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 북경대학 고고문박학원( 考 古 文 博 學 院 )의 진대수( 秦 大 树 ) 교수와 고미경( 高 美 京 ) 선생께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표한다. 13) 世 宗 實 錄 45 卷, 11 年 (1429) 7 月 15 日 己 未 條. 이빈( 李 彬 )의 아내가 청화자기( 靑 花 磁 器 )와 나배( 螺 盃 )를 바치니, 미두( 米 豆 ) 30석을 하사하였다. 44 야외고고학 제17호
사품 중에 청화백자가 등장하지 않으며 당시 공무역( 公 貿 易 )의 품목에도 청화백자를 위시 한 자기( 瓷 器 )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조선 왕실이 경기도 광주의 관요( 官 窯 )를 통해 자체적으로 청화백자를 생산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16세기 이후에 조선 으로 유입되는 중국 청화백자들은 주로 사무역을 통한 수입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전기에 중국 물산의 수입은 외교사행과 연계된 공사간( 公 私 間 ) 무역으로 이루어졌 기 때문에 명( 明 )으로 가는 사신단의 규모와 그들이 가져올 수 있는 물량과도 연관성을 지 니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행단의 규모는 30여명에서 많게는 500여명에 이르렀다. 조선초 기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명( 明 )에 파견된 사신단은 총 1,053회(정기사행 477회와 비정기 사행 576회)였다(김구진 2001: 827). 이는 1년에 5.3회의 사신단이 중국으로 파견된 것으로 이러한 외교사절들을 통해 값비싼 공예품과 직물( 織 物 ), 약재( 藥 材 ), 서적( 書 籍 )들과 함께 중국 청화백자들이 조선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일부 사신들은 명( 明 )에 입조할 때, 상인( 商 人 )들을 자신의 종으로 속여 더욱 많 은 이윤을 챙기려했다. 14) 중국산 사치품에 대한 수입은 연산군( 燕 山 君, 1495~1506년) 시절 에 크게 증가한다. 15) 조선은 외교활동에 의한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다수의 사신을 명( 明 ) 에 파견하였고 명( 明 )에서는 조선의 사신들이 지나치게 자주 입조하여 무역하는 것을 곱 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16) 그러나 왕실에서는 공무역의 양을 적당히 줄이라고만 할 뿐 사행의 숫자를 감할 생각은 하지 않았으며 거듭된 중국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사치품 에 대한 무역을 지속하였다. 17) 명종( 明 宗, 1545 1567년) 시기에는 국왕이 측근들과 상의 14) 世 宗 實 錄 22 卷, 5 年 10 月 18 日 乙 丑 條.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공조참의( 工 曹 參 議 ) 이양( 李 揚 )이 북경에 갈 때에, 상정( 詳 定 ) 한 이외의 물건을 가지고 가서 이내 적발된 것이 저포( 苧 布 )와 마포( 麻 布 )를 합하여 44필이고, 초피( 貂 皮 )가 60장이요, 또 상인 손석( 孫 錫 )을 자기의 종[ 奴 ]으로 사칭하여 데리고 갔으며, 손석이 가지고 간 것이 저포와 마포를 합하여 2백 37필이요, 초피가 2 백여 장이며, 인삼( 人 蔘 )이 12근이며, 진주( 眞 珠 )가 2냥쭝[ 兩 ]이요, 유후사( 留 後 司 )에 소속된 상인 박독대( 朴 獨 大 )도 또한 자기 의 종이라고 가칭으로 조작하여 가지고 간 물건이 또한 상당히 많으나, 상항( 上 項 )의 사람들은 유후사에 관련되거나 평안도 숙천 ( 肅 川 )에 거주하던 사람들이므로, 만약 본부에서 공문을 보내어 체포케 한다면 먼저 알고 도피할 우려가 있으니, 비옵건대, 서리 ( 書 吏 )를 파송하여 체포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5) 燕 山 君 日 記 32 卷, 5 年 3 月 27 日 丙 戌 條. (전략) 선왕 때에 무역 물건은 정한 수량이었는데, 근일에는 점차 많아졌습니다. 중국산 물품과 국산 물품은 그 가격이 현격하여 우리나라의 만전( 萬 錢 )이 겨우 중국의 백전( 百 錢 )에 해당합니다. 1년 동안 공무역 ( 公 貿 易 )으로 들여온 저마포( 苧 麻 布 )의 총수는 3천7백여 필에 달하며, 이를 면포로 계산하면 1만8천6백여 필로 이것만으로도 국 고가 거의 바닥이 나는데 (후략). 16) 中 宗 實 錄 49 卷, 18 年 8 月 11 日 戊 申 條. 또 아뢰기를, 또 듣건대, 중국에서 우리나라 사신이 자주 왕래하는 것을 싫어하여, 순천부( 順 天 府 )에서는 조선이 예의( 禮 義 )를 가칭하여 자주 왕래하나, 실은 흥판( 興 販 )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거절하면 저들이 섭 섭해 할 것이므로 외국을 대접하는 도리에 어그러지고, 거절하지 않으면 역로( 驛 路 )가 더욱 곤폐( 困 幣 )할 것이다. 라는 책제( 策 題 ) 를 내어 물었다 합니다. (중략) 공무역( 公 貿 易 )은 긴요하게 관계되는 물건이 아니니 수량을 줄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행차에 있어서 법금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시 더욱 밝혀서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신도 아울러 죄주도록 하라. 공무역도 적당히 줄이도록 승전( 承 傳 )을 바치라. 하였다. 17) 中 宗 實 錄 76 卷, 28 年 11 月 4 日 壬 寅 條. 전교하였다. 지난번 정승으로부터 잡물( 雜 物 )을 무역하지 말자는 아룀이 있었다. 그러 나 연삼지( 連 三 紙 ) 명박( 明 珀 ) 호박( 琥 珀 ) 서각대( 犀 角 帶 ) 궁각( 弓 角 ) 서책( 書 冊 ) 백황사( 白 黃 絲 ) 그리고 각색 물감은 모두 없 어서 안 될 물건들이니, 무역하는 것이 어떻겠는지 해당 관아에 하문하라. ; 中 宗 實 錄 76 卷, 28 年 12 月 10 日 戊 寅 條. 45
한 후, 내탕금으로 무역에 직접 참여하기까지 했으며 이와 같은 사실은 중국의 빈축을 샀 다. 18) 이처럼 조선 전기에는 중국과의 무역을 통한 사치품의 확보를 위해 왕실에서부터 시 전( 市 廛 )의 부상대고( 富 商 大 賈 )들까지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15세기에는 조정의 대신들 이 한양의 돈 많은 상인들과 서로 혼인관계를 맺어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다. 19) 이러한 정 경유착( 政 經 癒 着 )은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대중국 사무역에 기반을 둔 상인층의 성장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조선 왕실은 사치를 방지하고 명( 明 )으로 유출되는 조선의 재화를 통제하기 위해 중국 청화백자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20) 그러나 당시 세간의 조류를 철저하게 차단 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무역에 대한 감찰은 조선( 朝 鮮 )에서 명( 明 )으로 떠날 때에만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귀국시에 수입되는 물품들에 대한 구체적인 통제 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具 都 暎 2013: 56). 조선왕조실록( 朝 鮮 王 朝 實 錄 ) 등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중국에서 외교관계를 통해 유 입되는 자기들의 경우 청화백자와 백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청자들의 경우 중국 에서 직접 들어오는 경우는 매우 적다. 당시 명( 明 )나라가 조선( 朝 鮮 )이 청자보다는 청화 백자를 선호했음을 인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 朝 ) 명( 明 )간의 외교 관계에는 주로 청화백자들이 예물로 활용되었는데 비하여 류큐[ 琉 球 ]와 일본( 日 本 )에서는 조선에 주로 청자를 예물로 보내왔다. 21) 이 같은 상황은 서일본의 실력자들과 류큐[ 琉 球 ]의 국왕이 확보할 수 있었던 중국 자기 가 주로 청자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당시 명( 明 )은 일본( 日 本 )과의 직접적인 무역에 매우 한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명은 일 본을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왜구( 倭 寇 )의 발흥 역시 명( 明 ) 일( 日 ) 무 역의 걸림돌이었다. 다만 16세기 이후 일본에서 은( 銀 )의 생산이 확대되고 명나라에서 세 18) 明 宗 實 錄 34 卷, 22 年 3 月 6 日 辛 酉 條. (전략) 매번 내탕의 재물을 북경에 가는 역관에게 사사로이 주어서 많은 채단( 綵 緞 )과 보완( 寶 玩 )을 무역해 오도록 하였기 때문에 중국 조정 사람들이 국왕이 사사로이 무역하는 물목( 物 目 )도 의당 자문( 咨 文 )에 아울 러 기록해야 한다. 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다 이 무리들이 그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임금을 속이고 말썽을 만들어 임금으로 하여 금 과오를 범하고 수모를 당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후략) 19) 世 宗 實 錄 31 卷, 8 年 3 月 15 日 己 酉 條. (전략) 무술년에 원( 原 )이 홍여방( 洪 汝 方 )과 부자상인( 商 人 )이었던 내은달( 內 隱 達 )의 딸을 서로 첩으로 들이려고 다투다가, 일이 발각되어 탄핵을 받았었는데, 태종( 太 宗 )께서 그들이 모두 대신이므로 특히 용서하여 문제를 삼지 아니하고, 인하여 궁중에서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못하게 하셨는데, (후략) 20) 成 宗 實 錄 77 卷, 8 年 (1477) 閏 2 月 10 日 戊 申 條. (전략) 지금 호부( 豪 富 )의 집에서 청화기( 靑 畫 器 )를 다투어 쓰는데, 중국 의 물건[ 唐 物 ]은 저절로 올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수송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 폐단이 작지 않으니, 청컨대 엄히 금하소 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의 물건을 무역하지 못하도록 일찍이 이미 법을 세웠으니, 그것을 거듭 밝히라. 하였다. 21) 世 宗 實 錄 1 卷, 卽 位 年 8 月 14 日 辛 卯 條 ; 世 宗 實 錄 21 卷, 5 年 9 月 24 日 壬 寅 條 ; 世 宗 實 錄 22 卷, 5 年 10 月 15 日 壬 戌 條 ; 世 宗 實 錄 54 卷, 13 年 11 月 14 日 乙 亥 條 ; 文 宗 實 錄 4 卷, 卽 位 年 10 月 7 日 丁 丑 條 ; 成 宗 實 錄 50 卷, 5 年 12 月 24 日 乙 巳 條 ; 成 宗 實 錄 81 卷, 8 年 6 月 6 日 辛 丑 條 ; 成 宗 實 錄 118 卷, 11 年 6 月 7 日 丙 辰 條 ; 成 宗 實 錄 290 卷, 25 年 5 月 11 日 戊 戌 條. 46 야외고고학 제17호
금을 은납화( 銀 納 化 )하여 은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부분적인 감합무역( 勘 合 貿 易 )이 다 소 증가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15세기에는 자기( 瓷 器 )를 포함한 중국의 다양한 물 화가 일본으로 대량 유입되기는 어려웠다( 具 都 暎 2013: 61-63). 그러나 류큐[ 琉 球 ]는 명 ( 明 )과 주변국들 간의 중계무역에 적극적이었으므로 청자를 위시한 중국 자기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표 2> 조선왕조실록 에 등장하는 일본( 日 本 )과 류큐[ 琉 球 ]의 청자 봉진 일람표 년도 봉진국 내용 세종즉위년 (1418년) 세종 5년 9월 (1423년) 세종 5년 10월 (1423년) 세종 13년 11월 (1431년) 문종 즉위년 (1450년) 성종 5년 12월 (1474년) 성종 8년 6월 (1477년) 성종 11년 6월 (1480년) 성종 25년 5월 (1495년) 류큐[ 琉 球 ] 국왕의 둘째 아들 하통련( 賀 通 連 ) 일본국 축전주태수( 筑 前 州 太 守 ) 등원만정( 藤 源 滿 貞 ) 외 일본 구주( 九 州 ) 다다량덕웅( 多 多 良 德 雄 ) 축전주관사( 筑 前 州 管 事 ) 평만경( 平 滿 景 ) 유구의 정사( 正 使 ) 하례구( 夏 禮 久 ) 일본국( 日 本 國 ) 관서( 關 西 ) 비주( 肥 州 ) 축주( 竺 州 ) 태수( 太 守 ) 등원조신( 藤 原 朝 臣 ) 국지위방( 菊 池 爲 房 ) 일본국( 日 本 國 ) 경성관령( 京 城 管 領 ) 전산전( 畠 山 殿 ) 좌경대부( 左 京 大 夫 ) 원의승( 源 義 勝 ) 청자기( 靑 磁 器 ) 열 가지, 청자화병( 靑 磁 花 甁 ) 하나 청자분( 靑 磁 盆 ) 70개, 백자완( 白 磁 椀 ) 크고 작은 것 20개 청자다완( 靑 磁 荼 椀 ) 30개, 청자반( 靑 磁 盤 ) 30개 청자배( 靑 磁 盃 ) 1벌 청자주구( 靑 磁 酒 具 )와 동 받침[ 同 臺 ] 청자대완( 靑 磁 大 碗 ) 2구( 口 ) 류큐[ 琉 球 ]의 왕( 王 ) 상덕( 尙 德 ) 청자향로( 靑 磁 香 爐 ) 1개( 箇 ) 류큐[ 琉 球 ]의 국왕( 國 王 ) 상덕( 尙 德 ) 류큐[ 琉 球 ] 중산부주( 中 山 府 主 ) 사승( 使 僧 ) 천장( 天 章 ) 청자주해( 靑 磁 酒 海 ) 1개( 箇 ), 청자발( 靑 磁 鈸 ) 2매 청자수기( 靑 瓷 嗽 器 ) 1개 류큐[ 琉 球 ]와 일본( 日 本 )이 보내오는 예물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 정부가 크게 반색할 만한 품목이나 수량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은 이국취향의 공예품들을 봉진 국( 奉 進 國 )들의 성의 표현으로 인식했을 뿐,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앙망( 仰 望 )했다고는 볼 수 없다. 류큐[ 琉 球 ]나 일본( 日 本 )은 청화백자보다는 청자를 조선과의 외교에 필요한 선물 로 활용했다. 이는 예물을 받는 조선의 취향보다는 자신들의 상황에 따른 처사였다. 다만, 당시 중국을 둘러싼 아시아 국가들 간의 외교관계에 용천요계 청자들을 포함한 중국 자기 가 예물로서 교류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서울에서 중국 청자들이 거의 출토되지 않 는 점은 당시 류큐[ 琉 球 ]와 일본( 日 本 )과는 달랐던 조선 수요층의 청화백자 위주의 취향이 반영된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서울의 유적들에서는 소량이지만 자주요계 유물들도 확인된다. 자주요와 자주요계의 생산품들은 당시 중국 국내의 수요뿐만 아니라 국외로도 부분적으로 수출되었다. 자주요 생산품들 중에 특히 관( 罐 )으로 분류되는 항아리들에 주목해보자. 중국 요녕성( 遼 寧 省 ) 수 47
<그림 18> 백지흑화용문호, 높이 29cm, 중국 요녕성 ( 遼 寧 省 ) 수중삼도강원대침선( 綏 中 三 道 崗 元 代 沈 船 ) 출수( 出 水 ), 중국국가박물관 중삼도강원대침선( 綏 中 三 道 崗 元 代 沈 船 ) 에서는 다수의 백지흑화관들이 출수되었 다( 張 威 主 編 2011)<그림 18>. 출수된 유 물들은 청진 2~3지구 유적에서 출토된 자 주요편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호들은 주로 여러 가지 소비재들을 담아서 운송 하기도 유리하고 항아리 자체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여 적극적으로 제 작, 소비되었다. 원대 침몰선은 좌초 위치 등을 고려 할 때, 하북성( 河 北 省 ) 자현( 磁 縣 ) 등지에서 생 산된 자주요계통의 그릇들이 발해만( 渤 海 灣 )으로 연결되는 북부항로를 통해 중국의 동북지방이나 한반도로 유입되었던 정황을 살필 수 있다( 吳 春 明 2010: 17-21). 도자기와 같이 깨지기 쉬운 소비재( 消 費 財 )를 운송하기 위해서는 원활한 물류망을 확 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은 중국과 육상과 해상으로 모두 교역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타 주변국들에 비해 중국 물품을 수입하는데 있어서 지리적으로 물류상의 한계는 적 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바다를 통한 물류의 운송에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왜구( 倭 寇 )의 창궐로 인하여 고려말부터는 주로 육운( 陸 運 )으로 조운제도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고려시대 활성화 되었던 연안 항로들은 이미 상당부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한정훈 2009: 196-200). 동시에 명( 明 )의 해금령( 海 禁 令 )으로 인하여 중국과의 교류에서도 해상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또한 조선 전기의 사행( 使 行 )들은 대부분 한 양을 출발하여 의주( 義 州 )를 거쳐 요동( 遼 東 )을 지나 북경( 北 京 )에 이르는 육로로 이루어 졌고 중국에서 수입된 자기들 역시 이 길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비록 16세기 에 명과의 국경지역에서 비정기적인 개시( 開 市 )를 통한 무역이나 조선상인( 朝 鮮 商 人 )들 의 월경무역( 越 境 貿 易 )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이는 국법( 國 法 )으로 금지되었으며 거래물목도 은( 銀 )을 매개로 하는 가축과 직물류였으므로 중국 자기의 수입 창구 역할은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명의 해금정책( 海 禁 政 策 )에도 불구하고 일부 상인들은 중국의 동남해안까지 건 너가서 불법무역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22) 이례적으로 조선에서 생산된 사기( 沙 器 )를 곡 22) 中 宗 實 錄 73 卷, 28 年 (1533) 2 月 6 日 己 卯 條. 48 야외고고학 제17호
물 수입을 위해 중국 남방에 판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당시 조선에서는 처벌대 상이었고 상대적으로 작은 배를 이용한 원양항해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그 때문에 조선 상인들이 해로무역을 통해 중국에서 청화백자들을 수입하는 일은 빈번하 지 않았을 것이다. Ⅳ. 조선 전기 중국 청화백자의 소비상황 조선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독자적인 자기문화( 瓷 器 文 化 )를 확보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자기는 다양한 형태와 기법으로 제작된 분청자들과 백자로 대별된다. 이러한 자 국산 그릇들과 함께 중국에서 수입된 청화백자들이 부분적으로 활용되었다. 경덕진( 景 德 鎭 )의 민요( 民 窯 )들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들이 조선시대 토광묘 등에서 출토되는 것은 조 선 전기 한양을 넘어 경기와 충청권에서까지 확인된다. 15세기 후반, 조선의 청화백자는 오직 경기도 광주에 자리하는 관요에서만 제작되었으 며 그러한 백자를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은 왕실과 일부 사대부들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조 선에서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위한 안료는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청 화안료는 주로 명나라를 오가는 사신단을 통해 조선에 유입되었으며 비싼 가격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23) 이러한 배경 때문에 조선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는 금전적 인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을 수반해야만 확보할 수 있는 그릇이었다. 고려말의 혼란을 넘어 사회경제적인 성장을 구가하던 조선전기에는 화려한 청화백자에 대한 수요 가 더욱 증가하였다. 국내에서 필요한 만큼 생산되지 못했던 희소한 소비재에 대한 수요 는 다수의 중국 청화백자가 조선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경우 주변의 다른 중국자기 수입국들과 그 소비양상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일본 과 류큐[ 琉 球 ]의 유적들에서도 중국 청화백자들이 출토되지만 조선과 같이 중국 청화백자 일색의 출토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24) 이러한 상황은 비슷한 시기에 류큐[ 琉 球 ]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들의 종류별 출토비를 23) 成 宗 實 錄 211 卷, 19 年 1 月 23 日 戊 午 條. (전략) 화원( 畫 員 ) 이계진( 李 季 眞 )이 일찍이 공무역( 公 貿 易 )하는 회회청( 回 回 靑 ) 의 값으로 흑마포( 黑 麻 布 ) 12필( 匹 )을 받고서 마침내 사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부( 本 府 )로 하여금 그 본색( 本 色 )을 받아들 이게 하기 위하여, 그의 가동( 家 僮 )을 구속하고 연루된 자가 수백 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이계진이 환납( 還 納 )하지 못하는 것은, 회회청( 回 回 靑 )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또 민간에서 쓰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후략) 24) 청진 1지구, 2~3지구, 5지구, 6지구 유적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들은 총 127점이며 그 중에 청화백자는 112점으로 약 88%를 차지한다. 보고서에 수록된 중국 자기들을 기준으로 종류별 출토비를 분석하였다. 유적별로 중국 자기들의 출토량을 살펴보면, 청진 1지구 31점, 청진 2~3지구 73점, 청진 5지구 20점, 청진 6지구 3점 등이다. 49
25)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슈리 성[首里城]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들을 살펴보면 용천요 청자들의 출토비중이 약 59% 로, 38%의 출토비를 나타낸 경덕진의 청화백자들보다 높 다(弓楊紀知 2008: 151-162). 기종 또한 호, 병, 매병, 대반, 합 등으로 한양에서 출토되는 <그림 19> 일본 오키나와 슈리성[首里城]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류 발, 잔, 접시 위주의 반상기 26) 들과는 다수 차이가 있다. 물론 15세기의 류큐[琉球]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였고 용천요에서 제작된 청자들 역시 류큐[琉球]의 무역상품이었으므로 다수의 용 천요 청자들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오키나와[沖縄]의 유적들에서 중국의 청자들이 많이 출토되는 것은 이러한 무역구조와 연관이 깊을 것이다(那霸市立壺屋燒物博物館 1998: 12-29).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당시 류큐[琉球]에서 중국 자기를 사용할 수 있는 계층들은 주 로 청자들을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한 당시 조선과 류큐[琉球]의 경제적 규모 차 이로 인하여 서로 다른 중국 자기의 소비상황을 야기한 것으로도 인식할 수 있다. 15, 16세기의 조선과 류큐[琉球]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고려 할 때, 중국 자기의 소비상 황을 출토량과 같은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 지만 청화백자와 청자의 출토 비율을 통하여 당시 양국의 중국 자기에 대한 소비상황의 차이에는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 후반 류큐[琉球]에 표류했던 조선인들이 실견 한 내용을 보면 당시 류큐[琉球] 사람들 중에는 식생활에 자기(瓷器)들을 활용하기도 하 였고 그러한 그릇들이 시장에서 거래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표류민들은 당시 27) 류큐[琉球]의 여러 일상모습들이 조선과 닮았다고 하였다. 25) 류큐[琉球]의 궁성인 슈리성[首里城] 정전(正殿)과 京の内로 불리는 성역(聖域)의 발굴조사에서 많은 수의 중국자기들이 출토되었 다. 슈리성은 1453년(景泰 4) 지노(志魯)와 포리(布里)의 난에 의해 소실되었고, 재건 후 1459년(天順 3) 창고가 소실되는 화재 가 있었다. 그 후 1660년(順治 17), 1709년(康熙 48)에도 화재가 있었다. 이렇게 재난과 몇 번의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그때마 다 재건되었다. 일본의 학계는 京の内에서 출토된 도자기의 경우 1459년의 화재 때 폐기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26) 이 논문에 제시된 출토 유물들의 수량은 발굴 보고서를 종합하여 유바 타다노리(弓楊紀知) 선생이 추산한 양을 인용하였다. 슈리성에 서 출토된 중국 자기들은 청자가 15,673점, 청화백자가 10,262점, 오채 유리유(瑠璃釉) 유리홍(釉裏紅)자기 829점 등이다. 한양의 출토양상과 비교하기 위하여 동일시기, 동일 종류의 중국 자기에 대한 출토량을 활용하였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조사 된 슈리성 유적에서는 14세기말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중국 자기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으며 2000년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7) 成宗實錄 105卷, 10年 6月 10日 乙未條. (전략) 밥은 옻칠한 목기에 담고, 국은 작은 자기(磁器)에 담으며, 또 자접(磁楪) 이 있고, 젓가락은 있으나 숟가락은 없는데 젓가락은 나무였습니다. 국중(國中)에 시장이 있는데, (중략) 자기(磁器) 등의 물건 이 있었습니다. 50 야외고고학 제17호
<표 3> 종로 청진동 유적들과 오키나와 슈리성 유적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의 종류별 출토상황 비교 청자(6점) 3% 홍록채자(5점) 3% 백지흑화자(4점) 3% 청화백자(112점) 88% <종로 청진동 유적 출토 중국자기 출토현황> 청자(15,673점) 59% 청화백자 (10,262점) 38% 홍록채와 유리유자 (829점) 3% <류큐국[ 琉 球 国 ] 슈리성 출토 중국자기 출토현황> 위의 두 표를 비교해 보면 중국 청자의 종류별 출토 비율에 큰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는 청자들이 자체적으로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중국 청자에 대한 수요는 그다지 높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주요계통의 백지흑화기법의 자기들 역시 분청자와 그 미감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높은 소비욕구의 대상물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특히 명대( 明 代 )에 제작되는 자주요계통의 그릇들은 공주( 公 州 )의 학봉리( 鶴 峯 里 ), 고흥( 高 興 )의 운대리( 雲 垈 里 ) 등지에서 생산되는 철화분청자들과 가시적인 시문효과가 유사하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조선의 소비층이 자기 수입에 소용되는 물류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자주요계통의 그릇들을 수입할 필요성은 낮았을 것이다. <그림 20> 수리된 백자청화화문구연편, 잔존길이 3.6cm, 청진동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 <그림 21> 수리된 백자청화화문잔편( 右 ), 높이 3.8cm, 구경 7.1cm 청진동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 51
유약Ⅰ층 유약Ⅱ층 유약Ⅲ층 <그림 22> 그림 20의 수리된 백자청화화문구연편의 단면 세부 <그림 23> 그림 21의 수리된 백자청화화문구연편의 단면 세부 그릇의 재질과 문양, 기종 이외에도 조선 전기 수요층이 중국 청화백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소비인식을 확인 할 수 있는 유물들이 있다. 깨진 그릇을 수리해서 다시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중국 청화백자들이 그 예이다. 비록 중국 청화백자들이 많이 수입되었 다고는 하나 여전히 희소한 물품이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깨진 그릇을 수리해서 다시 사 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하여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에서는 조선에서 제작된 백자 류를 수리해서 사용한 사례는 현재까지 출토된 바 없다. 수리하여 복원한 중국 청화백자들을 분석해 본 결과 이 유물들은 깨어진 부분을 접합 하고 그 위에 다시 유약을 시유하여 구워내는 과정을 통해 수리되었다(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593-596). 수리흔이 있는 청화백자들이 애초에 수리가 된 상태에서 조선으로 유입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중국에서 이미 수리가 된 중고품이었다면 수입품으 로 분류하기보다는 해당 유물의 소유자가 중국에서 직접 사용했던 물건을 조선에 들여온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미 수리되었던 제품이라면 수리 방법에 의 문점이 생긴다. 중국은 주로 꺾쇠 등의 결구재를 사용하여 자기를 수리하였다. 비록 조선 후기의 기록이지만 조선인들은 중국에서 자기를 쇠못 등을 사용하여 수리하는 모습을 이 28) 채롭게 여겨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쓰다가 깨진 중국 청화백자들은 어디에서 수리되었을 것인가. 이 부분에 대 한 해답을 조선시대 백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중국 청화백자편들을 통해 유추해 보고자 28) 湛軒書 外輯 10卷 燕記, 器用 (전략) 자기의 깨어진 것은 밖에서 쇠못을 박는다. 언젠가 못 박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쇠송 곳으로 뚫고 못을 걸어 망치질을 하여 잠깐 사이에 박아 버렸다. 다만 송곳이 안에까지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못이 여물게 박혀 빠 지지 않는 것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薊山紀程 5卷 符籙 器皿, 기명(器皿)은 모두 푸른 그림을 새긴 자기이되, 푸른 색깔이 아니면 흰 색깔이다. 깨어지면 쇠로 꿰맨다. 그 꿰매는 법은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가는 쇠로 못질하여 망치를 휘둘러 바람을 내면 그 소리가 쟁그렁 거린다. 52 야외고고학 제17호
<그림 24> 백자청화모란문저부편, 잔존높이 2.4cm, 용인 초부리 백자 가마터 출토, 명지대학교박물관 한다. 중국 청화백자편들은 주로 경기도 광주의 조선 전기 관요의 가마터들에서 출토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외 2000). 하 지만 그 밖에도 16세기에 운영된 경기도 용인 초부리 가마터 등의 비관요계( 非 官 窯 係 ) 백자 가마들에서도 출토된 경 우가 있다(명지대학교박물관 2009: 34) <그림 24>. 이러한 중국 청화백자편들은 조선 청 화백자의 제작을 위한 샘플(Sample)로 간주할 수도 있겠으나 중국 청화백자편들이 발견된 조선 전기 백자 가마에서 청화백자의 제작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거나 이루어졌다 해도 문양이 서로 상이한 경우에는 상술한 내용으로 중국 청화백자의 존재이유를 설명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관요 가마터들에서 출 토된 중국 청화백자와 동일한 문양이 시문된 관요백자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 은 이미 지적된 바이다(전승창 2009: 43). 그 때문에 관요 가마터들에서 출토된 중국 청화 백자들과 조선의 관요에서 출토된 백자들 간에 이루어진 기형적인 유사성을 중국 청화백 자의 출토 이유로 제시하기도 한다(전승창 2009: 55). 비록 출토된 파편들이 잔편으로 정확한 원 기형의 파악에 한계가 있어 양국 자기들 간 의 체양비교는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지만, 용인 초부리 백자 가마터 출토품과 같이 해당 가마에서 제작된 백자들의 기형과 출토품과의 연관성이 적은 경우도 확인된다. 또한 중 국 청화백자들을 체양( 體 樣 )을 위한 견양( 見 樣 )의 용도로 활용하여 조선 왕실이 필요한 백자들을 제작하였더라도 대명외교( 對 明 外 交 )의 회사품으로 유입된 중국 관요의 청화백 자들을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보다 높다. 당시 한양의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된 상대적으 로 낮은 수준의 중국 경덕진( 景 德 鎭 ) 민요산( 民 窯 産 ) 청화백자들을 토대로 조선왕실의 여 러 가지 백자들을 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요 가마터에서 출토된 중국 청화백자들 의 문양을 살펴보면 서울에서 출토된 중국 청화백자들의 문양과 조형적인 특징들이 일치 한다. 이러한 추론들 역시 조선의 관요에서 출토된 중국 민요의 청화백자들이 왕실의 백 자제작과는 무관하게 단순한 수리의 대상물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물론 광주의 관요 가마터들에서 출토된 중국 청화백자편들을 모두 수리복원을 위한 유물로 간주하기에는 명백한 증거가 적다. 하지만 청화백자를 생산하지 않은 조선 전기 의 백자 가마터들에서 출토되는 중국 청화백자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수리복원과의 관련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더욱이 도마리 1호 가마터에서 53
출토된 자주요 계통의 자편 들 역시 조선의 백자생산과정 에 직접적으로 결부시키기 어 려우므로 수리의 목적으로 관 요로 보내진 유물일 가능성이 <그림 25> 백지흑화자호편, 광주 도마리 1호 가마터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높다<그림 25>. 조선 전기 한양의 중국 자기 수요자들은 조선의 제자(製瓷) 기술력이 수입품의 활용연한을 연장시킬 수 있음을 인식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깨져버 린 중국청화백자들을 수리하여 다시 사용했던 것은 당시 조선이 독자적인 자기문화와 생 산 능력을 확보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소비양상이다. Ⅴ. 맺음말 서울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는 대부분 청화백자들이다. 특히 조 선 전기에는 자체 생산된 청화백자들의 생산량이 적고 그 수요층도 왕실과 일부 상층 사 대부에 국한되었다. 조선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들을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은 경제적인 능 력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까지도 확보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반 사대부들과 부유한 상인(商人) 계층에서는 조선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들을 대신해 중국 청화백자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한 당시 소비성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한양이며 이러한 사실이 최근 이루어진 종로 청진동 일원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다양한 중국 청화백자들의 존재를 설 명해 준다. 다른 나라에 비해 조선(朝鮮)은 중국 청화백자만을 주로 수입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가 지고 있던 독자적인 자기문화(瓷器文化)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주변국들에서는 15세기 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중국 용천요 등지에서 제작된 청자들이 발견되는 예가 많다. 그 러나 조선은 청자를 제작할 수 있었으므로 청자의 수입은 불필요했다. 자주요 등지에서 만들어진 백지흑화기법의 자기들 역시 조선 전기 한양 사람들에게는 크게 각광받지 못한 중국 자기이다. 조선 전기 한양에 거주했던 중국 자기의 수요층은 구하기 쉽지 않았던 국 산 청화백자를 대신할 중국 청화백자만을 수입하였다. 출토된 중국 청화백자들의 기종은 주로 소량의 잔을 포함한 접시와 발 등의 반상기이 54 야외고고학 제17호
다. 굽 안쪽에 연호( 年 號 ) 등의 특별한 관지( 款 識 )가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적다. 다만, 장 명부귀( 長 命 富 貴 )와 같은 송축( 頌 祝 ) 문구가 굽 안에 시문되거나 특정한 작방( 作 房 )을 나 타나낸 부호가 표시된 경우들은 확인된다. 이들은 대부분 경덕진( 景 德 鎭 )을 비롯한 중국 의 민요( 民 窯 )에서 생산된 그릇들로 판단된다. 시문된 문양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릇 의 내외측면은 당초문과 절지문을 아우르는 화문( 花 紋 )과 송죽매 등의 세한삼우문( 歲 寒 三 友 紋 ), 서수문( 瑞 獸 紋 )과 기타 추상장식문 등의 순으로 주로 배치되었다. 그릇의 내저 면 중앙에 배치되는 문양으로는 괴석문( 怪 石 紋 ), 연지문( 蓮 池 紋 ) 등과 함께 범어( 梵 語 ), 수복( 壽 福 ) 등의 문자도 문양소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에 수입된 중국 자기들의 제작시기는 주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해당하며 16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수입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서울 도심에서 출토된 중국산 청화백자들은 중국에서 다량으로 수입된 것이지만 조선 사회에서는 여전히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그 때문에 사용하다가 깨어진 청화백자들은 파 편을 접합하고 그 위에 다시 시유하여 번조하는 방식으로 수리하였다. 중국 청화백자의 수리는 당시 양질의 백자들을 제작하던 경기도 광주의 관요 가마터에서 이루어졌던 것으 로 추정해 보았다. 조선시대 한양은 경치, 경제, 사회, 문화의 다방면에 걸친 중심지였으며 매우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함께 모여 살던 곳이다. 또한 계급과 부의 차이에 의해 구분되는 다층적 인 소비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때문에 출토 유물들에 대한 해석과 접근도 이러 한 다양한 배경들을 인식하며 진행되어야 한다. 이번 글을 통해 조선 전기 한양에서 이루어진 중국 청화백자들의 소비상황을 살펴보았 다. 당시 조선과 중국 사이에 이루어진 도자무역의 특징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류큐 [ 琉 球 ]뿐만 아니라 일본과 동남아시아 지역에 분포하는 다수의 유적들과의 포괄적인 비 교연구가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조선이 가지고 있던 중국 자기에 대한 소비성향이 더 욱 뚜렷해 질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의 중국 자기 수입 상황에 대한 입체적인 고찰과 비교 연구들을 차후의 과제로 삼아 조선이 가지고 있던 중국 자기에 대한 소비 특징과 그 변화 에 접근하겠다. 논문접수일(2013.1.4) 심사완료일(2013.6.10) 게재확정일(2013.7.11)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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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Consumption of Chinese Blue and White Porcelains in Hanyang during the Earlier Half of the Joseon Period Park Jungmin (Hanu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It is well known that the Joseon Dynasty, from the beginning, had a ceramic culture of high quality. However, blue and white porcelain was not produced due to the absence of pigments such as cobalt. It is from the late 15 th century that the royal kilns of the Joseon court began to manufacture blue and white porcelains, but such products were limited in number and intended for the use of the royal family and a few members of the nobility. In the first half of the Joseon dynasty, the merchants of the capital city Hanyang developed, maintaining close links with the political authority. In this process, demand for luxury items by the merchant and noble classes increased. However, at that time, blue and white porcelain was a luxury item that could not be obtained with money alone. Therefore, it is in such circumstances that Chinese blue and white porcelains came to be imported. The porcelain sherds discovered at many excavation sites in the Hanyang capital are an evidence of this phenomenon. The aim of the current research is to examine Joseon society's consumption of Ming trade-ceramics at this time, and to compare it with the nature of consumption observed for other areas, such as the Ryûkyû kingdom, which also imported Chinese ceramics. The members of Joseon society preferred blue and white porcelains to any other type of Chinese trade-ceramics. At other neighboring regions (such as the western parts of Japan and the Ryûkyû kingdom), on the other hand, it is Longquannyao celadon sherds that are frequently excavated. The reason that this is not the case for Korea is because Joseon was able to independently produce celadon and thus did not need to import it. A similar pattern can be observed for the Cizhouyao ceramics Joseon consumers were only interested in obtaining blue and white porcelains and therefore were not interested in buying Cizhouyao ware. The sherds of imported Chinese blue and white porcelain mostly comprise tableware, such as bowls, cups and dishes, the majority of which came from the Jingdezhen kilns. The decorative patterns and designs mainly utilize foliage scrolls with lotus and auspicious flowers, designs of pine, bamboo and apricot blossoms, and 58 야외고고학 제17호
patterns of auspicious animals, such as lions. In addition, lotus point designs and designs comprised of written characters, including Sanskrit, were also used. The amount of Chinese blue and white porcelain that was imported appears to have increased in the middle of the 16 th century. Although a considerable amount of Chinese blue and white porcelain was imported, it was still highly expensive product. Therefore, if blue and white porcelain vessels were broken they were repaired and continued to be used. Repaired fragments and evidence of restoration have been found around the royal kiln sites of the Gwangju area. Key words : Hanyang, Chinese trade-ceramics, Jingdezhen blue and white porcelain, Longquannyao celadon, Ryûkyû, Nature of consumption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