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본 연구대상지인 동악산 3개 구곡의 특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비교 고찰하기 위해 산지 형( 山 地 型 ) 구곡 중 유사한 여건과 규모를 갖는 구곡 사례를 조사함 사례대상지로는 경남 산청 구곡산 무이구곡, 경북 영주 소백산 죽계구곡, 전북 남원 지 리산 용호구곡 그리고 충북 제천 대미산 용하구곡 등 지역별로 4개 현존 구곡을 선정 하고 이들 구곡의 현황과 특성을 살펴봄 1. 산청 무이구곡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무이구곡은 명암( 明 庵 ) 정식( 鄭 拭 : 1683 1746)에 의해 지리 산의 한 줄기인 구곡산( 九 谷 山 )에 설정된 구곡임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복건성의 무이산( 武 夷 山 )에 안거하며 유명한 무이도가( 武 夷 櫂 歌 )를 남긴 주자( 朱 子 )의 삶을 매우 존숭( 尊 崇 )한 나머지 그의 학문과 사상을 자신들의 삶의 방식마저 흉내 내고자 하였으며 무이구곡 이란 명칭에서 부터 주자 흠모의 사상 이 고스란히 반영됨 구곡 설정자인 명암의 자는 경보( 敬 甫 ), 호는 명암( 明 庵 )으로 동지중추부사 대형( 大 亨 ) 의 손자 4) 이며 주자에 대한 추앙은 남달랐음 퇴계나 율곡 또 다른 선비들이 세거지 인근의 산천을 무이산에 견주어 구곡( 九 曲 )으로 설정하고서 다양한 형식의 무이도가( 武 夷 櫂 歌 )를 남긴데 반해, 명암은 세거지를 무이정 사( 武 夷 精 舍 )라 이름 짓고 인근의 계곡을 무이구곡( 武 夷 九 曲 )이라 설정해서 모양 좋은 반석 아홉 곳을 골라 반석들의 이름을 짓고 각자( 刻 字 )함 무이구곡은 하류로 부터 제1곡 수홍교( 垂 虹 橋 )을 비롯하여 순서대로 옥녀봉( 玉 女 峰 ), 농 월담( 弄 月 潭 ), 낙화담( 落 花 潭 ), 대은병( 大 隱 屛 ), 광풍뢰( 光 風 瀨 ), 제월대( 霽 月 臺 ), 고루암 ( 鼓 樓 嵒 ), 와룡폭( 臥 龍 瀑 )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현재 확인된 5곡 대은병 은 난가암( 爛 柯 嵒 ) 으로 파악되고 있음 구곡의 각자 외 무이구곡을 알리는 의미에서 쓴 듯한 무이구곡( 武 夷 九 曲 ) 글씨와 함께 명암 정식( 明 庵 鄭 拭 ) 을 새긴 각자도 계곡에 함께 있음 한편 명암( 明 庵 )의 저서 명암집( 明 庵 集 ) 에 구곡의 각자들을 새긴 개요를 다음과 같 이 기록하고 있음 임술( 壬 戌 : 1742년) 삼월 십일에 새기었으며, 수홍교 옥녀봉 농월담은 막내 아들 상화( 相 華 )의 글씨이고, 대은병 낙화담 광풍뢰는 가운데 아들 상문( 相 文 )의 글씨이고, 제월대 고루암 와룡폭은 맏 4) 병자호란 때 김지순( 金 之 純 )이 쓴 척화소( 斥 和 疏 )를 읽고 당세에 영리를 구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항상 패랭이를 쓰 고 명산을 유람하였고, 만년에 두류산( 頭 流 山 ) 속에 암자를 짓고 여생을 마쳤으며 지평( 持 平 )에 추증되었다. 도연유 록( 陶 淵 遊 錄 ) 은 정식의 문집인 명암집( 明 庵 集 ) 4권에 수록되어 있는 기록으로, 기미년(1739년) 가을에 도사( 道 事 ) 때문에 호계서원에 모였다가 일을 마치고 청량산으로 가고자 했는데 소릉( 少 陵 )이 도연을 구경하고자 하여 함께 유람하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 73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아들 상협(相協)의 글씨이다. 명암 정식이라는 네 글자는 나의 글씨이다. 석공은 김인발(金仁發)이 다. 제9곡 와룡폭 상부에는 옛 무이정사(武夷精舍) 터의 석축 흔적이 남아 있으며 무이정사 는 현재 산 아래 국동마을로 이전하여 후손이 기거하며 관리하고 있음 a. 제1곡 垂虹橋 b. 제2곡 玉女峰 c. 제3곡 弄月潭 d. 제4곡 落花潭 e. 제5곡 爛柯嵒 f. 제6곡 光風瀨 g. 제7곡 霽月臺 h. 제8곡 鼓樓嵒 그림 34. 무이구곡의 바위글씨 i. 제9곡 臥龍瀑 - 74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a. 무이구곡과 명암 정식 바위글씨 b. 국동마을의 무이정사 c. 9곡 와룡암 상부의 무이정사터 d. 무이구곡 위치도 그림 35. 구곡산 무이구곡의 현황 2. 영주 죽계구곡 경상북도 영주시에 소재한 죽계구곡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안축( 安 軸 : 1287 1348)이 지은 죽계별곡( 竹 溪 別 曲 ) 의 배경이 된 곳이며, 퇴계 이황도 비경에 취 해 찬사를 보냈다고 하는 유서 깊은 구곡임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소백산 초암사( 草 庵 寺 ) 앞의 제1곡을 시작으로 삼괴정 근처의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2km 계곡에 설정되어 있음(죽계구곡은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영주시 순흥면을 휘감아 돈 뒤 낙동강 상류로 흘러들어 가는 죽계천 ( 竹 溪 川 )의 상류 지역임) 구곡의 위치는 백운동 소수서원에서부터 상류의 중봉합류까지 구간임. 죽계구곡에 대해 서는 죽계지 와 흥주지 에는 상류부터 1곡 백운동 취한대( 白 雲 洞 翠 寒 臺 ), 2곡 금 성반석( 金 城 盤 石 ), 3곡 백자담( 栢 子 潭 ), 4곡 이화동( 梨 花 洞 ), 5곡 목욕담( 沐 浴 潭 ), 6곡 청련동애( 靑 蓮 東 崖 ), 7곡 용추비폭( 龍 湫 飛 瀑 ), 8곡 금당반석( 金 堂 盤 石 ), 9곡 중봉합류( 中 峯 合 流 )로 기록되어 있음 순흥읍지 에는 반대로 하류에서 상류를 향해 구곡이 설정된 것이 특징임. 죽계지 는 주세붕, 흥주지 는 이황, 순흥읍지 는 신필하( 申 弼 夏 : 1688?)에 의한 것으 - 75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들은 모두 풍기군수를 지낸 공통점이 있음. 주세붕( 周 世 鵬 : 1495 1554)의 죽계지 기원설이 유력함 2013년 11월, 영주시와 소백산국립공원사무소는 죽계구곡 문화생태탐방로 를 개통함으 로서 정상 정복 위주의 수직형 탐방문화를 저지대 수평 탐방문화로 탈바꿈시킴 안전성과 접근성 등 탐방효율을 높이기 위해 총 사업비 5억원을 들여 3.4km 구간에 목 재데크와 교량, 전망데크 등을 갖춘 문화생태탐방로를 조성하는 한편 소백산국립공원사 무소와 영주시, 영주문화연구회, 지역의 역사학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죽계구곡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 이밖에 탐방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기 위해 표지석, 안내판, 경관해설판, 구곡설명판 등 을 각 곡에 설치하여 탐방객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음 a. 표지석 b. 죽계 구곡 바위글씨 c. 바위글씨 안내도 d. 구곡 배분 안내도 e. 9곡 설명판 f. 1곡 전경 g. 구곡시 소개판 h. 자연친화형 목재 데크 그림 36. 죽계구곡의 안내시설 3. 남원 용호구곡 전북 남원시 주천면에 위치한 용호구곡은 지리산 서북쪽 능선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 는 대표적 명승으로 특히 구룡폭포( 九 龍 瀑 布 )는 만복대(1,438m)에서 발원해 남원시 주 천면으로 흘러드는 원천천 중간에 형성된 구룡계곡 최상류에 위치한 폭포로, 원천천 상 - 76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류에 있어 원천폭포라고도 불림 구룡계곡에는 음력 4월 초파일이면 하늘에서 아홉 용이 내려와 폭포를 하나씩 끼고 놀 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 계곡의 구룡폭포는 남원팔경 중 제1경으로 꼽힘 지리산국립공원 북부사무소 구룡분소와 육모정 중간지점에 크게 각석된 용호석문( 龍 湖 石 門 ) 바위글씨는 창암( 蒼 巖 ) 이삼만( 李 三 晩 : 1770~1847) 5) 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좌측으로는 방장제일동천( 方 丈 第 一 洞 天 ) 김두수( 金 斗 秀 ) 서( 書 ) 라 각자됨 용호구곡의 제1곡은 송력동( 松 瀝 洞 ), 제2곡은 옥용추( 玉 龍 湫 ), 제3곡은 학서암( 鶴 捿 岩 ), 제4곡은 서암( 瑞 岩 ), 제5곡은 유선대( 遊 仙 臺 ), 제6곡은 지주대( 砥 柱 臺 ), 제7곡은 비폭동 ( 飛 瀑 洞 ), 제8곡 경천벽( 擎 天 壁 ), 제9곡은 교룡담( 交 龍 潭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3곡의 바위글씨를 제외하고 구곡을 알리는 바위글씨가 존재함 김사문( 金 思 汶, 1889 1978) 6) 의 용호구곡경승안내( 龍 虎 九 曲 景 勝 案 內 ) 에는 제1곡 송 력동의 이름이 붙여진 유래, 송림사가 폐사가 된 전설, 제2곡 불신당 주변의 석문( 石 文 )을 쓴 작자들, 제4곡 칠성암( 七 星 唵 )의 명칭 유래, 제5곡 유선대에 전해지는 산서( 山 西 ) 조경남(1570 1641)의 일화, 제8곡 경천벽( 擎 天 壁 )과 제구곡 용화굴( 龍 化 窟 )이 그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경관의 모습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곡진하게 묘사하고 있 어 조선 말기 지역민이 가졌던 용호구곡의 경관을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정 보를 제공해 줌 한편 용성지( 龍 城 誌 ) 에 기록된 용호구곡 내용을 볼 때 구룡계곡에는 용추동( 龍 湫 洞 )에는 불영추( 佛 影 湫 ), 구룡추( 九 龍 湫 ), 이수추( 梨 樹 湫 : 배나무못), 괴음추( 槐 音 湫 ), 대 야추( 大 也 湫 ) 등 총 열두 개의 추( 湫 )가 언급되고 있는 바 이들 경물의 구명과 경관의미 의 전달은 용호구곡의 경관매력도 제공은 물론 스토리텔링을 위해 매우 유효한 콘텐츠 (contents)이자 테마(theme)가 될 것으로 기대됨 제2곡 옥용추 인근의 위치한 용호서원 7) 에는 용호구곡십영( 龍 湖 九 曲 十 詠 ) 제영시가 있어 용호구곡시의 변형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음 5) 이삼만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윤원( 允 遠 )이며, 호는 창암( 蒼 巖 ) 강암( 强 巖 ) 강재( 剛 齋 ) 등이다.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여 만년 에는 전주에서 살았으며, 이광사( 李 匡 師 )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도처에서 그가 쓴 편액( 扁 額 )을 볼 수 있으며, 경남 하동 칠불암의 편액도 그의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6) 김사문( 金 思 汶 : 1889~1978)은 고종6년(1889년) 전라남도 남원군 주천면( 朱 川 面 ) 호경리( 湖 景 理 ) 양호정( 兩 浩 亭 )에서 출생했으니, 3형제 가운데 둘째이다. 김사문은 평생 학문을 닦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는데, 저술인 한훤문답( 寒 喧 問 答 ) 강고야설 ( 講 古 野 說 ) 한문속법해( 漢 文 屬 法 海 ) 간찰입문( 簡 札 入 門 ) 등은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다. 감사문의 용호 구곡경승안내 는 평생 동안 이 지역에 살면서 직접 보고 느낀 경험과 축적된 지식에 근거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가치를 가진다(전병철, 2013; 151-152). 7) 주천면 호경리 구룡계곡 근처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건립한 서원이으로 1927년 원동향약계( 源 洞 鄕 約 ; 1572년 남원도호부 관내에 서 만들어져 현재까지 유지 계승되고 있는 향약계)에 소속된 유림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서원이다. 설립 당시에는 송나 라의 유학자인 주자( 朱 子 )의 영정을 봉안하고 주자를 배향하였으나 이후 한말의 우국지사 연재 송병선( 宋 秉 璿 1836~1905)을 비 롯하여 남원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덕행을 펼쳤던 영송 김재홍( 金 在 洪 ), 입헌 김종가( 金 種 嘉 )로 배향 인물이 바뀌었다. 해마다 음력 3월 15일 지역의 유림이 참여하여 제향을 올린다. - 77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a. 불신당(용호석문) c. 용호구곡 제1곡 바위글씨 b. 용호석문 바위글씨 d. 방장제일동문 바위글씨 e. 우측의 구룡계곡(용호구곡) 그림 37. 용호구곡 불신당의 바위글씨 a. 一曲 松瀝洞 b. 二曲 玉龍湫 c. 四曲 鶴捿岩 d. 四曲 瑞岩 e. 五曲 遊仙臺 f. 六曲 砥柱臺 g. 七曲 飛瀑洞 h. 八曲 擎天壁 i. 九曲 交龍潭 그림 38. 용호구곡의 경관상 - 78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a. 一曲 松瀝洞 b. 二曲 玉龍湫 c. 四曲 鶴捿岩 유실됨 d. 四曲 瑞岩 e. 五曲 遊仙臺 f. 六曲 砥柱臺 g. 七曲 飛瀑洞 h. 八曲 敬天壁 i. 九曲 交龍潭 그림 39. 용호구곡 바위글씨 - 79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a. 一 曲 松 瀝 洞 b. 二 曲 玉 龍 湫 c. 四 曲 鶴 捿 岩 d. 四 曲 瑞 岩 e. 五 曲 遊 仙 臺 f. 六 曲 砥 柱 臺 g. 七 曲 飛 瀑 洞 h. 八 曲 擎 天 壁 i. 九 曲 交 龍 潭 그림 40. 용호구곡 각 곡별 경관이미지(자료: 지리산국립공원 북부관리사무소) 그림 41. 용호서원 목간당에 게판된 용호구곡십영( 龍 湖 九 曲 十 詠 ) 표 18. 용호구곡의 바위글씨 분석 구간 구룡분소- 육모정 바위글씨 각자 주체 주내용 보조내용 李 三 晩 龍 湖 石 門 (1770~1847) 方 丈 第 一 洞 天 金 斗 秀 書 金 斗 秀 佛 神 堂 東 壁 金 燦 詠 過 此 感 古 李 秉 植 己 巳 春 松 秦 與 諸 金 次 九 曲 池 名 龍 湖 品 題 八 斗 孫 待 行 三 月 望 日 - 80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육모정과 용호 정 주변 용호구곡 自 龍 湖 一 曲 至 九 曲 精 舍 口 管 隱 汕 朴 仲 植 濟 山 朴 鳳 植 檀 紀 四 二 六 五 (1932) 乙 巳 秋 後 松 朴 燦 植 士 友 同 志 錄 佛 神 堂 南 無 阿 彌 陀 佛 觀 世 音 菩 薩 石 壁 盧 洙 鉉 龍 湖 精 舍 洞 口 육모정 甲 子 春 不 二 坮 석벽 (불이대) 龍 湖 六 愚 小 松 鄭 宗 黙 黙 齋 盧 鏞 鉉 小 山 金 庸 鉉 又 松 柳 永 郁 素 晦 朴 善 和 秋 園 朴 昌 圭 甲 子 瑞 龍 湖 九 老 會 風 乎 臺 9인명 甲 子 三 月 龍 湖 三 友 석벽 三 男 妹 同 酌 許 炫, 黃 海 周, 李 容 默, 翰 情 登 是 臺 喜 酌 二 三 盃 眞 像 誰 能 盡 名 刻 石 來 壬 寅 春 日 山 從 方 丈 出 發 龍 湖 天 詠 廻 壬 戌 秋 十 月 一 曲 松 瀝 洞 二 曲 玉 龍 湫 三 曲 鶴 捿 岩 유실 四 曲 瑞 岩 五 曲 遊 仙 臺 六 曲 砥 柱 臺 七 曲 飛 瀑 洞 八 曲 擎 天 壁 九 曲 交 龍 潭 方 丈 第 一 洞 天 李 鐘 默 李 鐘 鶴, 九 龍 沛 龍 湖 七 柱 太 弘 基 등 7인 九 龍 臺 親 睦 契 員 22명 親 睦 契 員 名 錄 李 佳 南 외 31인 戊 申 六 月 二 十 二 日 崔 成 官 구룡폭포 상부 와 구룡정 주변 4. 제천 용하구곡 용하구곡은 한말의 심리 철학자인 의당( 毅 堂 ) 박세화( 朴 世 和 : 1834~1910)와 그의 제자 들이 주자( 朱 子 )의 무이구곡( 武 夷 九 曲 )을 본떠 이곳 용하동의 경치가 좋은 아홉 곳을 택 해 붙인 이름으로 굽이마다 주자의 무이도가( 武 夷 棹 歌 )를 한 수씩 바위에 새겨 놓았음 구곡 입구 안쪽 암벽에는 용하동문( 用 夏 洞 門 ) 이라는 대형 바위글씨가 각자되어 있어 이곳이 신선이 사는 선계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암시하고 있음 - 81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그림 42. 용하동문( 用 夏 洞 門 ) 바위글씨 용하구곡은 제1곡 홍단연쇄( 虹 斷 烟 鎖 )[무지개는 끊어지고 안개가 감싼 곳], 제2곡 전산 기중( 前 山 幾 重 )[앞산이 몇 겹으로 싸인 곳], 제3곡 가학정도( 架 壑 停 棹 )[가학산이 노를 멈춘 곳], 제4곡 암화수로( 巖 花 垂 露 )[이슬 머금고 바위에 핀 꽃이 있는 곳], 제5곡 산 고운심( 山 高 雲 深 )[산은 높고 구름은 짙은 곳], 제6곡 원조춘한( 猿 鳥 春 閒 )[원조가 봄을 한가로이 즐기는 곳], 제7곡 봉우비천( 峰 雨 飛 泉 )[봉우리에 나린 비가 나는 샘물이 된 곳], 제8곡 풍연욕개( 風 烟 欲 開 )[바람과 안개가 걷히는 곳], 제9곡 제시인간별유천( 除 是 人 間 別 有 天 )[모름지기 인간 세상의 별천지] 등임 8) 한편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 사림의 항일운동을 위한 강학 장소로 구곡( 九 曲 )이 활용 되었다는 주장이 중원대 이상주교수에 의해 제기된 바 있음 이상주(2013)는 연구논문 기호사림의 도통의식이 구곡문화와 그 시대에 끼친 영향 9) 에 서 "조선말과 일제강점기에는 구곡을 도통의식( 道 統 意 識 ) 10) 의 표상이자 항일( 抗 日 ) 의 지를 높이고 항일운동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강학소( 講 學 所 )로 활용됐다"고 주장함 2000년 기준, 구곡을 발굴 수집한 결과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화서( 華 西 ) 이항로( 李 恒 老 : 1792 1868) 11) 의 도통( 道 統 )을 이어받은 사림이 설정한 구곡은 경기도 6곳, 서울 8)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 용하구곡은 수문동폭포( 守 文 洞 瀑 布 ), 수곡용담( 水 谷 龍 潭 ), 관폭대( 觀 瀑 臺 ), 청벽대( 靑 壁 臺 ), 선미대( 仙 味 臺 ), 수룡담( 睡 龍 潭 ), 활래담( 活 來 潭 ), 강서대( 講 書 臺 ), 수렴선대( 水 簾 仙 臺 ) 등 구체적 명소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중 수문동폭포( 守 文 洞 瀑 布 ), 수곡용담( 水 谷 龍 潭 ), 관폭대( 觀 瀑 臺 ), 수렴선대( 水 簾 仙 臺 )는 용하계곡이 아닌 수문동계곡에 있어 관련이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9) 이상주(2013), 기호사림의 도통의식이 구곡문화와 그 시대에 끼친 영향. 청풍명월의 역사와 인물. 황금알 10) 도통의식은 유학을 계승 전수하려는 의식, 즉 도학( 道 學 )을 말한다. 11) 학문은 주리철학( 主 理 哲 學 )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 奇 正 鎭 ), 영남의 이진상( 李 震 相 )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 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주리철학은 이기합일설( 理 氣 合 一 說 )을 주장한 중국의 나흠순( 羅 欽 順 ) 일파의 우주론을 반대하고, 이( 理 )와 기( 氣 )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하였다. 즉, 이 가 주가 되고 기 가 역( 役 )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만일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 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하여 이 기를 차등적으로 보았다. 또,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 心 專 說 ), 즉 심즉리( 心 卽 理 ), 심즉기 - 82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1곳, 충남 8곳, 충북 27곳, 전북 6곳 등 기호지방과 강원도 4곳, 평남 2곳, 황해도 4 곳 등 58곳으로 밝힌 바 있음. 이 중 충북의 구곡 27곳 중 상당수가 화양구곡 완성 이 후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설정되었으며, 이 기간 구곡 설정이 늘어난 것은 사림 의 특수 목적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주장함 12) 기호사림( 畿 湖 士 林 )은 위정척사( 衛 正 斥 邪 ) 13), 존화양이( 尊 華 攘 夷 ) 14) 사상의 관점에서 일제를 물리칠 대안을 모색하는 장소로 구곡을 설정하고 우암 송시열이 머문 충북 괴산 군 청천면 화양구곡을 순례하며 의지를 다짐. 이들은 구곡의 이름과 9개 곡 각각의 이 름에 도통의식을 반영함 이 같은 대표적 사례로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541-5번지를 중심으로 설정된 용하 구곡( 用 夏 九 曲 )과 충주시 동량면에 설정된 명도구곡( 明 道 九 曲 )을 든 바 있음 특히 용하구곡은 설정자 의당( 毅 堂 )이 도통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무이도가를 원전으로 차용하여 곡명으로 삼은 최초의 구곡으로 평가함. 또한 용하구곡과 명도구곡 등은 산 간오지에 있어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좋은 지역에 구곡을 설정해 항일 의식에 필요한 강학과 집회를 했다 고 주장한 바 있음 1895년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시해사건으로 분기하여 도사( 都 事 ) 윤응선( 尹 膺 善 )과 함께 경상북도 문경( 聞 慶 )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다 체포되었으며, 그 후 석방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글 읽은 선비로 책임을 통감한다 며 23일간 절식 ( 絶 食 ) 끝에 순국( 殉 國 )한 선비정신의 표상이고, 한말의 대학자로 1962년 건국훈장 독 립장이 추서됨 의당은 성재( 省 齋 ) 유중교( 柳 重 敎 : 1832 1893)나 간재( 艮 齋 ) 전우( 田 愚 )와 교유하면서 ( 心 卽 氣 )설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 心 合 理 氣 說 )을 주장하였다. (http://terms.naver.com/). 12) 조선 말~일제강점기 화서 계열 기호사림이 설정한 구곡은 벽계구곡 금계구곡 백운구곡(이상 경기도), 주산구곡(황해도), 옥계구곡 용하구곡 구곡리구곡 명도구곡(이상 충북), 무이구곡 이산구곡(전북), 니산구곡(강원도), 석계구곡(평남), 등 12곳이다. 13) 조선 후기 외국의 세력 및 문물이 침투하자, 이를 배척하고 유교 전통을 지킬 것을 주장하며 일어난 사회적 운동이다. 위정( 衛 正 ) 이란 바른 것, 즉 성리학과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자는 것이고, 척사( 斥 邪 )란 사악한 것, 즉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것이다. 위정척사 세력들은 전통적인 사회 체제를 고수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개화사상에도 반대하였으며, 수구 당이라고도 불렸다.[네이버 지식백과] 위정척사 [ 衛 正 斥 邪 ]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12.20., 신원문화사). 14)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중화사상의 일부 관념이다. 줄여서 화이론( 華 夷 論 )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원래 오 경( 五 經 ) 가운데 하나인 춘추( 春 秋 ) 에서 나온 말로, 공자( 孔 子 )가 주( 周 )나라를 존중해야 한다고 한 존주론( 尊 周 論 )에 바탕을 두 고 있다. 성리학에서는 이를 춘추대의( 春 秋 大 義 )라 하여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한국에서는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이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자는 뜻으로 배원친명( 排 元 親 明 ) 정책을 주장하였는데, 한국에서 존화양이론이 실질적으로 대두된 것은 이 때부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어 조선이 유교( 儒 敎 )를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인 뒤, 존화양이론은 조선의 대외정책의 하나로 굳어졌다. 당시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조선은 소중화사상라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중국을 존중한다는 화이 론이 곧 세계관이었으므로, 유교적 명분론을 중시하는 조선 역시 이 존화양이론에 바탕을 두고 국제관계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예 는 17세기, 서인( 西 人 )들을 중심으로 인조( 仁 祖 )가 취한 친명배금( 親 明 排 金 ) 정책, 곧 존명배청( 尊 明 排 淸 ) 정책과 효종( 孝 宗 )의 북 벌계획에서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해 고려 말에는 최영( 崔 瑩 )이 요동정벌론으로 맞섰고, 17세기에는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실학자들 의 북학론이 맞섰다. 그 뒤 1866년(고종 3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보수적 유생들을 중심으로 다시 존화 양이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 衛 正 斥 邪 派 )가 중심이 된 이 사상은 기존의 존화양이에서 벗어나 '서양 오랑캐'들의 압력 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자는 자주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존왕양이론( 尊 王 攘 夷 論 )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은 최익현( 崔 益 鉉 ), 이지호( 李 贄 鎬 ), 이항로( 李 恒 老 ), 김평묵( 金 平 默 ), 기정진( 奇 正 鎭 ), 이강년( 李 康 秊 ) 등이다. 존왕양이 사상은 흥선대원군( 興 宣 大 院 君 )이 '서양 오랑캐'를 배척하자는 뜻으로 세운 척화비( 斥 和 碑 )에도 잘 나타나 있다. 존왕양이는 '왕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 다'는 뜻이다. 여기서 '오랑캐'는 물론 '서양 오랑캐'를 지칭하는 어휘이다(http://ko.wikipedia.org/wiki/). - 83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성리학상의 예리한 논쟁적 성격을 충분히 인식하였고 그 자신이 주자의 전통적 계승자 로서 율곡을 지지하는 입장에 섬(금장태, 2014; 7) 이 같은 특성은 화서계열 사림 즉 화서학파( 華 西 學 派 ) 15) 가 지역 사림을 결속 교육하고 항일운동을 위해 위정척사( 衛 正 斥 邪 ) 와 존화양이( 尊 華 攘 夷 ) 의 도통(학통) 계승을 상징 으로 설정한 결과로 판단됨 16) 용하구곡의 경영자인 의당( 毅 堂 )은 위정척사 계열의 학문을 견지한 한학자이며 충북 제 천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음. 그가 집필한 의당집( 毅 堂 集 ) 17) 이 2002년 내제문화연구회에서 재발간됨 의당집( 毅 堂 集 ) 의 제5권 잡저 중 용하구곡각자사실( 用 夏 九 曲 刻 字 事 實 ) 에 용하구 곡의 각자 사실이 수록되어 있음(제천시, 2013) 문화재청에서는 2014년 6월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구곡(암각자만 121건으로 전국 단일 구곡 가운데 가장 많음. 실제 구체적으로 확인된 연구는 없음)을 우리나라 구곡 중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으로 지정 예고한 바 있음 제천시와 충북도는 화양구곡 외에도 제천 능강구곡 과 용하구곡 의 명승 지정도 문화 재청에 신청한 바 있고 현재 지정절차가 진행중임 18) 15) 화서 이항로는 병인양요 때 서양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주전( 主 戰 ), 척화론( 斥 和 論 )을 전개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사상적으 로 후원하였다. 그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10년 동안 독학하여 주희, 송시열 등의 저작에 담긴 존화양이론( 尊 華 攘 夷 論 )에 입각한 배외적 민족주의를 깊이 사숙, 체득하였다. 이후 그는 대외적으로는 서양의 사상, 종교, 물품의 유입을 막고, 대내적으로는 천주교 를 신봉하는 남인세력의 발호를 저지함으로써 대표적인 위정척사론자가 되었다. 그의 문하에서 김평묵, 최익현, 박문일, 유중교, 유인석, 홍재구, 홍재학 등이 배출되어 화서학파를 이루었다. 이들은 이항로 사후 스승의 강학처인 양근현의 벽계정사( 蘗 溪 精 舍 )를 비롯하여 경기, 강원, 충청, 황해, 평안, 전라도 등에 널리 퍼져 활발한 강학활동을 전개하여 1900년 이후 전국 각지에 포진한 위 정척사파 중 최대세력을 이루었다. 화서학파의 활동을 보면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그를 하야시켰 으며, 1876년(고종 13) 개항을 반대하는 집단 상소운동을 일으켰고, 1881년(고종 18) 신사척사운동 때 고종 및 민비정권을 비판 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을미왜변 후부터 대한제국 멸망 직전까지 국내의 제천, 평산, 춘천, 홍천과 국외의 간도지방과 연해 주 등지에서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서학파의 반세도( 反 勢 道 ), 반개화( 反 開 化 ), 항일( 抗 日 )운동은 최대 규모로 장기간 지속 되어 이후 일제강점기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화서학파의 학자들이 물길로 오갔던 니산구곡이 지역의 문화유적 으로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니산구곡의 아름다운 풍광도 보면서 항일 의지를 다진 선인들의 구국 정신을 체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http://www.kado.net/news/). 16) 이항로의 화서학파는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가 기점으로 학풍을 이어받은 유인석 등의 의병장들이 봉기한 곳이 공전리 자양영당 이다. 실제로 이항로의 편저인 화동합편강목( 華 東 合 編 綱 目 )은 자양영당에 보관돼 있다. 17) 조선 말기의 의병 박세화( 朴 世 和 )의 시문집으로 본집 6권, 부록 2권, 육례홀기( 六 禮 笏 記 ) 2권, 총 10권 5책. 석인본. 1960년 이석 희( 李 錫 羲 )가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육례홀기의 권말에 정규해( 鄭 糾 海 )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권1 6에 시 208 수, 서( 書 ) 106편, 예의문답 74편, 잡저 23편, 명( 銘 ) 4편, 잠( 箴 ) 5편, 찬( 贊 ) 3편, 사( 辭 ) 1편, 설( 說 ) 10편, 서( 序 ) 7편, 기( 記 ) 17 편, 제발( 題 跋 ) 12편, 제문 10편, 뇌사( 誄 辭 ) 2편, 행장 5편, 유사 4편, 묘갈명 3편, 묘지 4편, 전( 傳 ) 3편, 기적( 記 蹟 ) 2편, 부록은 권1 2에 어록 15편, 연보 1편, 행장 1편, 육례홀기는 권1 2에 예( 禮 ) 6편 등이 수록성되어 있다. 잡저인 서위학지요시학도( 書 爲 學 之 要 示 學 徒 ) 는 제자들을 분발시키고자 학문의 다섯 가지 중요한 사항인 입지( 立 志 ) 거경( 居 敬 ) 존심( 存 心 ) 궁리( 窮 理 ) 역행( 力 行 ) 을 들어 그 방법을 설명한 글이다(정경훈, 2014; 106). 18) 문화재청은 2014년 6월, 화양구곡과 전남 구례군 문척면 오산 사성암 일대 두 곳을 명승으로 지정 예고했다. 화양구곡은 화양천 을 중심으로 약 3km에 걸쳐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며 자연경관이 빼어난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 암, 학소대, 파곶의 9곳을 구곡으로 했다. 화양구곡은 조선의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66년부터 머물던 화양계 곡에 제자인 수암 권상하(1641~1721)가 구곡을 설정했고 단암 민진원(1664~1736)이 구곡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고 전한다. 앞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천연기념물분과위원회는 지난달 28일 2014년 5차 회의를 열어 화양구곡의 명승 지정을 심의한 결과 타당 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뉴시스 6월4 7일 보도). 천연기념물분과위는 "화양구곡은 송시열을 모신 화양서원과 관련한 명승지 로 조선시대 선비와 시인묵객이 찾아와 시국을 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면서 구곡의 경치를 즐긴 곳으로 화양동의 경치를 읊은 시가 많이 전한다"며 "구곡문화를 대표하는 화양구곡을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호하는 게 타 - 84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또한 춘천 출신 의병장 의암 유인석( 柳 麟 錫 : 1842~1915)이 홍천강과 북한강 일대에 설정한 이산구곡( 尼 山 九 曲 ) 또한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화서학파의 사림( 士 林 )이 설정해 놓은 열두 곳의 구곡으로 분류됨 기왕에 알려져 있던 춘천시 남면 가정리 홍천강가의 큰 바위인 홍무벽( 洪 武 壁 ) 에 전서 체로 箕 封 疆 域 洪 武 衣 冠 ( 箕 封 疆 域 洪 武 衣 冠 )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기자가 봉한 강역이요, 홍무 곧 명나라의 문물제도 라는 뜻으로, 급변하는 시대에 성리학을 지 켜내야 한다는 당시 사림의 일념을 드러낸 문구로 알려짐 19) 충북 제천문화원(원장 이광진)과 병산영당(도유사 안광영)은 2014년 7월14일 제천서 의당 박세화 선생 을 주제로 한 학문세계 학술세미나를 개최함 용하구곡각자사실( 用 夏 九 曲 刻 字 事 實 )에 의한 각 구곡별 주제어는 다음과 같음 표 19. 무이구곡가에 차용된 용하구곡의 주제글 구분 용하구곡 주제글 경물 서사 용하동문( 用 夏 同 門 ) 무이구곡가(무이도가) 1곡 홍단연쇄( 虹 斷 烟 鎖 ) 청벽대( 靑 壁 臺 ) 万 壑 千 岩 鎖 翠 烟 골골이 암봉에는 푸른 안개 자욱하네 2곡 전산기중( 前 山 幾 重 ) 선미대( 仙 味 臺 ) 興 入 前 山 翠 幾 重 흥겨워 앞산 들어가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3곡 가학정도( 架 壑 停 棹 ) * 호호대( 好 好 臺 ) * 三 曲 君 看 架 壑 船 삼곡에서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不 知 停 櫂 幾 何 年 노젓기를 멈춘지 얼마인지 모르겠네 4곡 암화수로( 暗 花 垂 露 ) 섭운대( 躡 雲 臺 ) 巖 花 垂 露 碧 監 毛 바위에 핀 꽃은 이슬을 머금은 채 무성하네 5곡 산고운심( 山 高 雲 深 ) 수룡담( 睡 龍 潭 ) 五 曲 山 高 雲 氣 深 오곡은 산 높고 구름 깊어 6곡 원조춘한( 猿 鳥 春 閒 ) 우화굴( 羽 化 窟 ) 猿 鳥 不 驚 春 意 閑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고 봄빛은 완연하네 7곡 봉우비천( 蜂 雨 飛 泉 ) 양병협영( 兩 屛 夾 映 ) 세심폭( 洗 心 瀑 ) 却 燐 昨 夜 峰 頭 雨 어여뻐라 지난밤 봉우리에 비 내리더니 添 得 飛 泉 幾 道 寒 나는 듯한 물줄기 몇줄기련가 8곡 풍연욕개( 風 烟 欲 開 ) 활래담( 活 來 潭 ) 八 曲 風 煙 勢 欲 開 팔곡에 바람이 불어 구름은 개려하고 9곡 소립탁이( 所 立 卓 爾 ) 제시인간별유천 ( 除 是 人 間 別 有 天 ) 강서대( 講 書 臺 ) 활연대( 豁 然 臺 ) 除 是 人 間 別 有 天 이곳이 인간세상의 별천지라네 별도 映 雲 潭, 照 寒 臺, 霽 月 光 風, 生 生 天 心 당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화양구곡이 명승으로 지정되면 전국 구곡 가운데서는 구곡이란 이름으로는 첫 명승으로 탄생한 다. 19) 홍무벽은 니산구곡의 제6곡이며 제1곡 입석 을 비롯해 제9곡 오지소 까지 설정되어 있다. - 85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제1곡 청벽대(靑壁臺)- 虹斷烟鎖 제2곡 선미대(仙味臺)- 前山幾重 제3곡 자연대(自然臺)- 架壑停棹 제4곡 석운대(石雲臺)-暗花垂露 제5곡 수룡담(水龍潭)-山高雲深 제6곡 우화굴(羽化窟)-猿鳥春閒 제7곡 세심대(洗心臺)-蜂雨飛泉 제8곡 활래담(活來潭)과 제9곡 강서대(講書臺)-風烟欲開 활연대(豁然臺)-除是人間別有天 그림 43. 용하구곡의 동계 경관상(자료: 백승준 등, 2013, 491쪽) 1곡의 주제어인 홍단연쇄(虹斷烟鎖) 는 청류구곡 제1곡이기도 한 쇄연문(鎖煙門) 과 부 합하는 것으로 무지개가 끊어지고 연기가 자욱한 것을 말하는데, 한말 외세의 침략과 안으로 부패한 집단 등 암울한 현실에서 꿈은 사라지고 흉흉한 연기 속에 갇힌 형국이 며, 또한 도학(道學)이 쇄락한 것을 통한(痛恨)한 것(안광영, 2014)20)으로 풀이됨 一曲溪邊上釣船 한 굽이 돌아 시냇가 낚싯배에 오르니 幔亭峯影潛淸川 만정봉의 그림자 맑은 물에 잠겨있네 虹橋一斷無消息 무지개 다리는 한번 끊어진 후 소식이 없고 慢壑千岩鎖翠烟 절벽 가득한 바위는 비취 빛 안개가 둘러있네 제9곡 제시인간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 또한 청류구곡의 제9곡 주제어와 일치하며, 이곳이 바로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로구나 하는 무이구곡가의 내용으로 속세를 떠나 별천지를 만나듯 우리의 국운과 도학이 별천지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 로 해석됨(안광영, 2014; 223) 九曲將窮眼豁然 아홉 굽이 다다라 눈앞이 훤히 트이는데, 漁廊更覓桃源路 뱃사공은 무릉도원 가는 길 다시 찾아, 20) 안광영(2014), 의당 박세화 선생의 학문세계와 제천 병산영당. 의당 박세화선생의 학문세계와 제천 병산영당 학술세미나: 220쪽 - 86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桑麻雨露見平川 뽕나무 삼나무에 비 이슬로 맺힌 평천(平川)을 보네 除是人間別有天 이곳이 바로 인간 세계의 별천지라네 자료: http://blog.daum.net/idogok/18131086 한편 9곡의 경물명이기도 한 활연대(豁然臺)는 원계구곡 제9곡의 경물명과 일치됨 a. 용하구곡 제9곡 b, 청류구곡 제9곡 그림 44. 除是人間別有天 바위글씨 그림 45. 용하구곡의 위치(자료: 백승준 등, 2013, 490쪽) - 87 -
제Ⅴ장 유사 구곡의 사례조사 표 20. 용하구곡 각 곡의 명칭과 바위글씨 경물명 경구명 경물 바위글씨 경구(주제어) 바위글씨 이미지 1곡 靑 壁 臺 虹 斷 烟 鎖 : 홍교는 끊어지고 안개가 감싸는 곳 2곡 仙 味 臺 前 山 幾 重 : 앞산이 몇 겹으로 쌓였는가 3곡 好 好 ( 臺 ) 架 壑 停 棹 : 가학선이 노를 멈춤 4곡 躡 雲 臺 暗 花 垂 露 : 이슬 머금고 바위에 핀 꽃 5곡 水 龍 潭 山 高 雲 深 : 산은 높고 구름은 깊음 6곡 羽 化 窟 猿 鳥 春 閒 : 원숭이와 새도 봄을 한가로이 즐김 7곡 洗 心 臺 峰 雨 飛 泉 : 봉우리에 내리는 비가 나르는 샘물이 됨 8곡 活 來 潭 講 書 臺 風 烟 欲 開 : 바람과 안개가 걷히려함 除 是 人 間 別 有 天 : 인간세상에서 제외된 별천지 所 立 卓 爾 : 서 있는 것이 우뚝함 9곡 豁 然 臺 주) 경구명은 충청북도 제천시(2013), 능강( 凌 江 ) 용하( 用 夏 )구곡 학술조사 77쪽을 기준으로 정리함 - 88 -
제Ⅵ장 동악산 구곡의 특성 1. 동악산 구곡의 형태론적 특성 동악산 구곡은 3개 구곡이 형제봉과 깃대봉을 중심으로 약 1km내 동남향으로 펼쳐진 계곡에 밀집해 설정 청류구곡을 제외한 2개 구곡은 미완성으로 판단 청류구곡은 경물( 景 物 )과 경구( 警 句 : 주제어)가 육로와 수로에 대응하며 쌍( 雙 )을 이뤄 설정된 특이한 형태로 주목됨 청류구곡은 일제강점기 초기 춘기( 春 沂 ) 정순태( 丁 舜 泰 :?~1916)와 하정( 荷 亭 ) 조병순 ( 曺 秉 順 : 1876~1921)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 판단되지만, 몇 개의 곡(2곡 무태동천, 8 곡 해동무이 등)은 이전 설정된 경물에 곡명을 추가한 것으로 추정됨. 원계구곡 또한 청류구곡 설정자의 역할이 큰 것으로 봄 청류구곡의 경구로 구성된 구곡은 도림사계곡의 기반암 암상을 활용하였지만 경물로 된 육로의 9곡과 원계구곡과 고반구곡은 계곡과 주변의 암반 등 지형경관을 활용하여 구곡을 표시함 청류구곡과 원계구곡은 실학자와 항일운동가 등 선현 장구지소( 杖 屨 之 所 )가 다수 설정 된 것을 볼 때, 오래전부터 명인들의 산수탐방과 은거의 공간으로 활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 청류구곡은 총 길이 약 1.2km, 평균 곡거리 149m, 원계구곡은 약 1.7km, 평균 곡거리 214m 그리고 고반구곡은 약 0.9km, 평균 곡거리 115m로 계상됨 국내 유수한 구곡과 비교할 때 연장거리가 현저히 짧은 것은 평지형 하천이 아닌 산지 에 형성된 계류에 구곡에 형성된 관계로 판단됨 2. 동악산 구곡의 의미론적 특성 1) 전남 유일의 구곡 (1 ) 동 악 산 구 곡 의 희 소 성 중국 남송시대 朱 子 (1130 1200)로 부터 연원한 무이구곡( 武 夷 九 曲 ) 의 구곡문화는 조 선조 성리학자들에게 도학( 道 學 )의 가르침을 일깨어 주는 성리문화( 性 理 文 化 )의 전범( 典 範 )으로 널리 전파되고 향유( 享 有 )되어 옴 - 91 -
구곡으로 설정된 계곡 및 하천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일 뿐 아니라 구곡 설정자나 조영 자의 유가미학적( 儒 家 美 學 的 ) 정신이 반영된 문화경관으로 보존가치가 높음 최근에 자연 및 문화경관이 복합된 구곡원림( 九 曲 園 林 ) 을 산수정원( 山 水 庭 苑 )의 장르 로 까지 인식되는 가운데 지역을 대표하는 경승지이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음 국내 설정된 구곡은 주로 속리산권과 영남지역에서 집중 형성됨에 따라 경상북도와 문 경시 그리고 충청북도와 제천시 등에서는 지역의 구곡원림 자원을 활용하여 지역의 정 체성 확립, 명승 지정 건의운동 전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민간 활동, 그리고 구곡관련 서적 발간 및 학술세미나 등 다양한 방법의 활용과 보존방안을 모색하고 있 는 실정임 이러한 실정에도 불구하고 구곡원림의 형성 및 향유가 폭넓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전라 도권역에서는 구곡 존재 여부의 확인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실정임 전라권에서는 전라북도에 변산구곡(부안), 무계구곡(무주), 이산구곡(진안), 용호구곡(남원) 등 4개 구곡이 확인되고 있으나 전라남도권에서는 구곡의 존재가 전혀 알려진 바 없음 따라서 동악산의 3개 구곡은 현재 전남지역에서는 확증된 유일한 구곡으로 그 가치가 인정됨 2) 동천 동문의 집산지 (1 ) 동 천 동 문 의 개 념 과 의 의 동천( 洞 天 )은 일반적인 의미로 신선이 사는 세계 를 의미하는 것으로 도교적 용어인 동천복지( 洞 天 福 地 ) 에서 유래된 용어로 알려지고 있음. 국내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동천 ( 洞 天 )이란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조선시대 제영시( 題 詠 詩 ) 유산기( 遊 山 記 ) 소품 문[ 散 文 ] 등의 기문과 그림 속에서의 동천은 도교적 성격에서 신선이 거처하는 장소의 상징어로 언급되고 있음(이혁종, 2009)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자가 설정한 무이구곡( 武 夷 九 曲 ) 과는 달리 한국 고유의 풍광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성리학 체계를 이룩하면서 설정된 구곡들이 국내에는 다수 산재 분 포함. 지금도 바위에 새겨진 다수의 동천구곡 관련 바위글씨[ 巖 刻 書 ]가 다수 발견되고 있으며, 바위글씨와 시서화( 詩 書 畵 ) 속에서 발견되는 동천이 단순히 신선이 거처하는 세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승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 뿐만 아니라 대유( 大 儒 )로 자처하는 유학자들에게는 그 장소나 경관이 도학적( 道 學 的 ) 사고의 산물이며 자 신을 중심으로 한 주거( 住 居 )와 관련된 독특한 장소성이 배태( 胚 胎 )된 현장임을 발견하 게 됨 복건성 무이구곡 제4곡에도 무이동천( 武 夷 洞 天 ), 승진원화지동( 昇 眞 元 化 之 洞 ) 등의 바위 글씨가 전함. 여기서 진원화( 眞 元 化 )는 도교의 이상향, 근본이란 뜻이므로 결국 승진원화지 동은 이상향으로 들어가는 골짜기란 뜻이 됨, 또한 6곡 인근에는 도원동( 桃 源 洞 )이 존재함 - 92 -
그림 46. 무이구곡의 武 夷 洞 天 昇 眞 元 化 之 洞 그림 47. 무이구곡의 桃 源 洞 이 같은 동천의 명명은 기문이나 바위글씨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음. 현재도 수려 한 산이나 계곡 바위에 새겨진 洞 天 ( 洞 門 ) 혹은 洞 의 글씨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같은 바위글씨가 남겨진 공간 주변을 은둔( 隱 遁 )과 거주 또는 유( 遊 )를 위한 이상적 공간으로 상정하고 이를 기념하여 남기고자 했던 표식( 標 式 )으로 볼 수 있음 - 93 -
그림 48. 화양구곡 제1곡 경천벽에 각자된 華 陽 洞 門 또한 지리산 청학동( 靑 鶴 洞 ), 속리산 우복동( 牛 腹 洞 ), 금강산 이화동( 梨 花 洞 )과 같이 국 내의 실존하는 이상향과 같은 공간 명칭에도 동( 洞 ) 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때의 동은 이상향의 의미와 함께 세속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복지( 福 地 )이자 낙토( 樂 土 )와 같은 마 을의 의미를 함께 갖음(유가현, 2012) 동천하면 쉽게 연관되는 용어가 있으며 바로 구곡으로 동천구곡이란 용어를 흔히 지칭 함. 동천구곡은 그 명칭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동천과 구곡으로 분류되며 동천이 특정 개별경관을 지칭하는데 반해 구곡은 주체인물이 자신의 지향의지에 따라 몇 개의 동천 을 조직화한(김덕현 2008) 경우가 대부분임 우리나라 동천구곡은 주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산지 지역에 입지 분포하며, 이는 인 근에 위치한 양반의 계거촌과 관련이 있음. 동천구곡이 자리 잡은 지역의 기반암 특성 이 지형경관 특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화강암과 퇴적암 경관이 이 를 가장 대표함 우리나라 동천구곡은 산지 내부를 흐르는 곡류하도에 주로 입지하여, 곡류하도 주변에 나타나는 다양한 지형요소들이 주요 경관을 이루고 있음. 이러한 주요 지형요소로는 봉 우리, 소규모 평탄면, 토르, 수직절벽, 폭포, 여울, 소, 포인트바, 그리고 너럭바위, 거 력, 암설사력퇴, 마식된 암반하상과 포트홀 등이 있다. 이를 동천 구곡에서는 대( 臺 ) 암 ( 巖 ) 봉( 峰 ) 벽( 璧 ) 벼리( 遷 ) 학( 壑 ) 반석( 盤 石 ) 천( 泉 ) 폭( 瀑 ) 담( 潭 ) 연( 淵 ) 추( 湫 ) 소( 沼 ) 천 ( 川 ) 탄( 灘 ) 등으로 칭함(기근도, 2012) - 94 -
a. 청류동( 淸 流 洞 ) b. 고반동( 考 槃 洞 ) c. 무태동천( 無 太 洞 天 ) d. 선암동문( 船 巖 洞 門 ) 그림 49. 동악산에 설정된 동천 동문 김덕현(2008)은 전통 명승으로 우리나라 동천의 유형을 계정풍류( 溪 亭 風 流 ), 고대망수 ( 高 臺 望 水 ), 절벽범주( 絶 壁 泛 舟 ), 비폭격진( 飛 瀑 隔 塵 ) 그리고 암봉고절( 巖 峰 高 節 )로 분류 하는 한편 구곡은 곡류심유( 曲 流 尋 游 )와 계곡각자( 溪 谷 刻 字 )로 분류한 바 있음 그림 50. 원림의 한 영역으로 본 동천 동문 자료: 유가현(2012), 58쪽 - 95 -
동천의 유형으로는 도교적 이상세계로서의 동천, 생활경으로서의 동천, 이상향으로서의 동천, 선경( 仙 境 )의 신선세계 그리고 의원( 意 園 )으로서의 동천으로 분류되기도 함 표 21. 전국적으로 바위글씨가 확인된 동천과 동악산의 동천 서울 경기도 (인천 포함)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대구 울산 포함) 경상남도 (부산 포함) 전라북도 전라남도 (광주 포함) 바위글씨 및 현판 등으로 확인된 동천 淸 鑾 洞 天 白 石 洞 天 三 淸 洞 天 桃 花 洞 天 淸 溪 洞 天 陽 山 洞 天 玉 壺 洞 天 三 光 洞 天 仁 智 洞 天 歸 來 洞 天 武 溪 洞 三 溪 洞 月 巖 洞 紫 芝 洞 泉, 雙 溪 洞 (종로구), 伏 虎 洞 天 道 峯 洞 門 明 月 洞 門 (도 봉구), 雙 流 洞 天 (성북구), 紫 霞 洞 門 (관악구), 第 一 洞 天 (노원구), 清 潭 洞 (강남구) 涵 虛 洞 天 (인천 강화군), 金 流 洞 天 水 落 洞 天 (의정부시), 紫 霞 洞 天 白 雲 山 人 紫 霞 洞 天 (과천시), 溫 水 洞 天 (부평시 계양구), 碧 夜 洞 天 碧 波 洞 天 (남양주시), 靑 霞 洞 門 重 興 洞 13 門 (고양시 덕양구), 屯 村 洞 門 (여주시), 洞 天 石 門 (포천군), 篤 才 洞 文 章 洞 天 (양주군) 頭 陀 洞 天 (동해시), 五 福 洞 天 子 開 門 (태백시), 密 陽 朴 氏 世 業 洞 天 白 雲 洞 天 (강릉시), 龜 龍 洞 天 汶 淵 洞 天 (원주시), 淸 平 仙 洞 (춘천시) 中 臺 洞 門 (삼척시) 花 陰 洞 天 (화천군), 10 淸 溪 洞 天 (영월군) 用 夏 洞 門 桃 花 洞 天 (제천시), 七 鶴 洞 天 仙 遊 洞 門 沙 潭 洞 天 煙 霞 洞 門 龜 彎 洞 天 道 德 洞 天 (괴산군), 天 台 洞 天 (영동군), 桃 源 洞 門 北 壁 洞 門 (단양군), 愚 伏 洞 天 (보은군) 12 石 松 洞 天 武 陵 洞 天? 學 洞 門 翠 陰 洞 天 (공주시), 巍 巖 洞 天 (아산시), 太 乙 洞 天 (태안군), 竹 浦 洞 天 (금산군), 鸎 化 洞 天 (청양군) 8 臥 龍 洞 天 (경주시), 麻 姑 洞 天 龍 安 洞 天 雲 安 洞 天 石 溜 洞 天 石 溜 洞 門 鵲 山 洞 天 鵲 山 洞 門 靈 芝 洞 天 大 峴 洞 門 龍 巖 洞 天 麻 姑 洞 天 鳳 岡 洞 天 桃 杹 洞 天 晨 城 李 氏 墓 下 洞 天 雲 巖 金 先 生 墓 下 洞 天 聾 巖 先 生 墓 下 洞 門 (안동시), 鷗 湖 洞 天 梅 陽 洞 天 文 巖 洞 天 龍 陽 洞 天 運 圃 洞 天 謁 聖 洞 天 鷗 湖 洞 天 栗 藪 洞 天 蓮 花 洞 天 佳 巖 洞 天 月 里 洞 天 放 鶴 洞 天 栗 數 洞 天 허문 동천 霞 岩 洞 天 廣 陵 洞 天 佳 巖 洞 天 高 石 洞 天 放 鶴 洞 天 月 里 洞 天 蓮 花 洞 天 文 巖 洞 天 雲 圃 洞 天 蓮 花 洞 天 謁 聖 洞 天 廣 陵 洞 天 郁 錦 洞 天 (영주시), 金 烏 洞 壑 (구미시), 佛 靈 洞 天 玉 流 洞 (김천시), 愚 山 洞 天 洞 天 (상주시), 桃 花 洞 廣 陵 洞 天 霞 巖 洞 天 落 霞 洞 天 (영천시), 丹 83 霞 洞 天 仙 國 洞 天 (울진군), 水 落 洞 天 仙 臺 洞 天 (예천군), 金 烏 洞 天 (칠곡군), 仙 臺 洞 天 (예천군), 嘉 禮 洞 天 (의령군), 椧 谷 洞 天 九 老 洞 (성주군), 白 雲 洞 門 (의성군), 仙 國 洞 天 (울진군), 月 湖 洞 天 (영양군), 二 十 洞 天 (1) 二 十 洞 天 (2)(영덕군), 石 泉 洞 鶴 邱 洞 天 靑 霞 洞 天 漁 隱 洞 天 鳳 崗 洞 天 龍 虎 洞 天 (봉화군), 道 德 洞 天 晩 悔 洞 天 一 柱 洞 天 松 石 洞 瀑 布 洞 仙 遊 洞 放 化 洞 (쌍룡구곡 제5곡)(문경군), 南 溪 洞 天 (군위군) 金 魚 洞 天 (부산 금정구), 潮 音 洞 天 (부산 기장군), 주산동천(밀양시), 生 林 洞 天 神 魚 洞 天 (김해시), 慈 藏 洞 天 淸 流 洞 天 (양산시), 花 開 洞 天 白 巖 洞 天 雙 溪 石 門 義 信 洞 天 三 神 洞 富 春 洞 (하동군), 龍 門 洞 天 자연동천 廣 齊 嵒 門 (산청군), 玉 流 洞 天 紅 流 洞 紅 流 洞 門 (합천군) 錦 山 洞 天 (남해군), 雲 興 洞 天 紅 流 洞 門 (울주군), 杜 陵 洞 天 (의령군), 葛 川 30 洞 門 猿 鶴 洞 (거창군), 龍 遊 洞 天 西 溪 洞 天 花 林 洞 尋 眞 洞 方 丈 第 一 門 (함양군) 武 陵 洞 天 (함안군) 獅 子 洞 天 (익산시), 金 山 洞 門 (김제시), 斗 山 洞 天 白 雲 洞 天 玉 流 洞 天 (정읍시), 方 丈 第 一 洞 天 1 方 丈 第 一 洞 天 2 龍 虎 石 門 玉 壺 洞 天 (남원시), 馬 耳 洞 天 三 溪 石 門 (진안군), 蓬 萊 12 洞 天 (부안군), 三 溪 石 門 (임실군), 羅 濟 通 門 (무주군) 方 壺 洞 天 紅 流 洞 (구례군), 長 川 洞 門 四 戒 洞 天 靈 隱 洞 天 幢 幡 洞 天 靑 鶴 洞 天 玉 溪 洞 天 蓮 花 洞 天 (장흥군), 洞 天 石 室 (완도군), 淸 流 洞 船 巖 洞 門 神 仙 洞 門 白 雲 洞 門 無 15 太 洞 天 (곡성군) 계 205 개 소 22-96 -
(2 ) 동 악 산 의 동 천 동 문 동악산에는 서계동의 선암동문( 船 巖 洞 門 )을 비롯하여 청류구곡에 청류동( 淸 流 洞 ) 제2곡 인 무태동천( 無 太 洞 天 ), 신선동문( 神 仙 洞 門 ) 그리고 고반구곡에 고반동( 考 槃 洞 ) 등 총 5 개 동천 동문이 집중 분포하고 있음 그림 51. 동악산에 설정된 동천 동문의 위치 3) 국내 최대 바위글씨의 집결지 우리나라 구곡 중 가장 먼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으로 지정 예고한 바 있는 화양구곡 ( 華 陽 九 曲 )에 우암( 尤 庵 )의 신념을 상징하는 문구를 새겨 넣는 등 암각자만 121건으로 전국 단일 구곡 가운데 가장 많다고 알려진 바 있으나 이는 확인된 자료로 보기 곤란함 동악산 구곡에서 현재 확인된 단일 바위글씨 수는 청류구곡에 109건, 원계구곡은 38건 그리고 고반구곡은 12건으로 총 159건의 바위글씨가 분포함(부록 참조) 4) 다양한 유형의 장구지소 밀집지 (1 ) 장 구 처 ( 杖 屨 處 ), 기 념 비 적 공 간 장구( 杖 屨 ) 란 사전적인 정의로 선현들의 지팡이와 신발 이란 뜻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면 당연히 지팡이와 신발이 수반되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므로 장가( 杖 家 ) 장향( 杖 - 97 -
鄕 ) 장국( 杖 國 ) 장조( 杖 朝 )는 각각 50대부터 80세를 연령대를 지칭하는 한자어로 지 팡이와 연륜간의 상호 관련성을 잘 보여주고 있음 선인들의 자취가 깃든 장구지소( 杖 屨 之 所 ) 로는 대현( 大 賢 )이 태어나신 곳, 사시던 곳, 맡아 다스렸던 곳, 또는 강학( 講 學 )하던 곳 등이 있으며 후손이나 제자 등은 인근에 서 원이나 사당을 짓거나 비석을 세워 그 곳에 남겨진 선현의 사상이나 덕행을 후세 사람 들이 본받도록 하였음. 이러한 장소는 특별한 인물과의 관련성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동 안 장소 전승이 이루어진 곳으로 가히 명소( 名 所 )라 아니할 수 없음 표 22. 전국의 장구지소 등 지소( 之 所 ) 개념의 데이터베이스 건립시기 및 주체 No. 금석문 내용 추념 인물 위치 시기 주체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 산 1 眉 叟 先 生 杖 屦 之 所 眉 叟 許 穆 (1595 1682) 65번지( 老 姑 山 ) 2 海 仙 遊 戱 之 所 헌종 3년(1837년)에 이규헌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3 三 槐 堂 南 知 言 先 生 考 槃 之 臺 三 槐 堂 南 知 言 (1507?) 충북 영동군 상촌면 유곡리 817 죽림처사 朴 璟 (성종10년 丁 丑 秋 後 孫 朴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호동 136 4 竹 林 處 士 杖 屦 之 所 (1479) 기해( 己 亥 ) 별시( 別 東 春 번지 試 ) 을과( 乙 科 ) ) 5 吳 駿 善 臧 修 之 所 後 石 吳 駿 善 (1851 1931)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 산3-2 6 松 江 先 生 杖 屦 之 所 松 江 鄭 澈 (1536 1593) 전남 담양군 창평면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 599번 7 沙 涯 先 生 杖 屦 之 所 沙 涯 閔 胄 顯 (1808~1882) 지 8 尤 庵 宋 時 烈 杖 屦 之 所 尤 庵 宋 時 烈 (1607 1689) 전남 영광군 백수읍 구수리 9 송정 김경추의 杖 屦 之 所 松 汀 金 景 秋 (1519 1612) 전남 장흥군 장동면 봉동리 밤실 10 梧 岡 金 先 生 講 學 處 梧 岡 金 正 昊 (1871 1909) 11 丁 春 沂 流 觴 處 丁 舜 泰 (?~1916) 潘 溪 柳 馨 遠 (1622 1673) 柳 潘 溪 李 星 湖 丁 茶 山 許 生 星 湖 李 瀷 (1681 1763) 12 杖 屨 處 茶 山 丁 若 鏞 (1762 1836) 許 生 ( ) 13 丁 觀 齋 先 生 佑 星 杖 屨 處 14 15 奇 正 鎭 (1798 1879) 16 奇 蘆 沙 松 沙 先 生 杖 屨 處 松 沙 奇 宇 萬 (1846 1916) 小 松 鄭 在 健 (1843 1910) 17 鄭 小 松 黃 梅 泉 先 生 杖 屨 處 梅 泉 黃 玹 (1855 1910) 18 奇 松 沙 奇 正 鎭 (1798 1879) 19 奇 松 沙 兩 先 生 杖 屨 處 松 沙 奇 宇 萬 (1846 1916) 元 曉 祖 師 義 湘 大 師 尹 弼 居 士 道 詵 國 師 智 還 大 師 南 破 大 師 20 訥 峰 大 師 靈 山 大 師 虛 舟 禪 원효대사 등 師 편월 大 師 龍 珊 大 師 春 峯 大 師 留 錫 處 梅 月 堂 金 時 習 21 金 淸 閒 子 逍 遙 處 (1435 1493) 丁 土 軒 芝 谷 蘭 谷 松 谷 杖 전남 곡성군 곡성읍 월봉리 22 屨 處 李 心 齋 姜 蓮 溪 李 處 菴 柳 松 溪 23 申 介 石 趙 明 谷 吳 懼 菴 趙 韋 堂 杖 屨 處 24 曺 西 山 東 岡 杖 屨 處 西 山 曺 衡 鎰 (1800 1860) 金 農 巖 先 生 金 三 淵 先 生 杖 田 艮 齋 先 生 玄 石 ( 朴 世 采 ) 金 雙 湖 先 生 杖 農 巖 金 昌 協 (1651~1708) 艮 齋 田 愚 (1841 1922) 玄 石 朴 世 采 (1631 1695) 屨 處 宋 淵 齋 先 生 杖 屨 處 屨 處 三 淵 金 昌 翕 (1653 1722) 淵 齋 宋 秉 璿 (1836 1905) 雙 湖 金 載 海 (1658-1720) 전남 곡성군 곡성읍 구원리 비고 경기도기념물 제97호 25 雲 谷 慕 谷 先 生 杖 屨 處 - 98 -
26 曺 華 菴 杖 屨 處 27 丁 觀 齋 墻 東 昌 德 希 菴 大 杖 屨 處 28 申 文 齋 有 明 軒 德 奎 性 善 菴 性 所 杖 屨 處 29 艮 齋 田 愚 (1841 1922) 田 艮 齋 宋 淵 齋 鄭 小 松 三 先 生 淵 齋 宋 秉 璿 (1836 1905) 杖 屨 處 小 松 鄭 在 健 (1843 1910) 30 黃 梅 泉 進 士 杖 屨 處 梅 泉 黃 玹 (1855 1910) 31 都 隱 先 生 杖 屨 之 臺 葵 庵 先 生 考 槃 之 臺 都 隱 全 文 軾 (??)조선 단종 (15C) 葵 庵 全 繼 宗 (1516~1592) 1924년 참봉 전영선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32 美 溪 杖 屦 之 所 美 溪 愼 義 蓮 (1581~?) 거창 愼 氏 전북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미계 천변 33 金 重 鼎 杖 屨 之 所 雙 高 道 德 大 明 日 月 金 重 鼎 ( 1602~1690) 전북 진안군의 주천면 대불리 34 四 公 杖 屦 之 所 午 圃 權 喆 魯, 柏 南 河 鉉 雲 坡 河 在 萬, 石 癡 李 海 敎 전북 무주군 설천면 張 制 (1586~1666), 韓 賓 35 六 九 老 杖 屦 所 (1588~1655), 河 得 道, 韓 愈, 張 曙 (1592~1663), 張 전북 임실군 둔덕면 䁢 (1592~1683), 河 萬 里, 崔 徽 之, 崔 攸 之 36 服 齊 奇 遵 (1492~1521) 服 齊 河 西 眉 巖 河 西 金 麟 厚 (1510~1560) 三 先 生 遊 賞 所 巖 眉 柳 希 春 (1513~1577) 金 佶 中 ( 鐫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18 37 桃 灘 邊 先 生 遺 基 桃 灘 邊 士 貞 (1529~1596)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38 草 堂 李 先 生 杖 屨 之 所 ( 林 隱 遊 賞 之 臺 ) 草 堂 李 長 源 (1560 1649) 1929년 후손 鶴 山 ( 鉉 璣 ) 경북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 39 柳 二 山 杖 屨 之 所 二 山 柳 濟 陽 (1846 1922) 1937년 柳 瑩 業 (1886 1944) 경북 구례군 토지면 문수제 운조루 7대 주인 40 龍 巖 朴 先 生 杖 屨 之 所 龍 巖 朴 雲 (1493 1562) 경북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 낙동 경북기념물 강변 제158호 41 南 溪 東 天 西 厓 柳 先 生 杖 屨 之 所 西 厓 柳 成 龍 (1542 1607) 경북 군위군 군위읍 대북리 비고 42 寒 岡 先 生 杖 屨 之 臺 寒 岡 鄭 逑 (1543 1620년) 1892년 경북 김천시 대덕면 가례리 석정 마을 43 朴 可 權 杖 屦 之 所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동 44 友 巖 蔡 公 藏 修 之 所 友 巖 蔡 德 東 (17C) 후손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36번지 45 黔 澗 趙 先 生 杖 屦 之 所 黔 澗 趙 靖 (1555 1636) 후손과 사림 경북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46 西 厓 先 生 杖 屨 之 所 西 厓 柳 成 龍 (1542 1607) 1602년 유림 경북 예천군 감천면 포리 47 晩 遯 尹 相 健 杖 屢 之 所 晩 遯 尹 相 健 의 동생 尹 相 馹 48 沖 齋 先 生 山 水 舊 庄 權 忠 定 公 山 水 舊 庄 冲 齋 權 橃 :(1478~1548) 49 聾 巖 先 生 亭 臺 舊 庄 聾 巖 李 賢 輔 (1467 1555) 한말 진사 李 康 鎬 또는 제자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구고 동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경북 안동시 예안면 분천리 50 李 光 俊 藏 修 之 所 鶴 洞 李 光 俊 (1531 1609)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474 풍양조씨 부사 공파 종중 1975년 안동댐 건설 51 四 未 軒 張 先 生 杖 屨 之 所 四 未 軒 張 福 樞 (1815 1900) 경북 예천군 52 猿 鶴 洞 守 吾 齋 趙 先 生 游 永 之 所 守 吾 齋 趙 先 生 경남 거창군 마리면 율리 53 猿 巖 郭 先 生 藏 修 臺 猿 巖 郭 訒 조선 경종 때(1720) 후손 경남 거창군 마리면 월현리 54 樂 水 慎 先 生 藏 修 洞 樂 水 愼 權 (1501 1573) 후손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890 55 喧 蠹 兩 先 生 杖 屨 之 所 一 蠹 鄭 汝 昌 (1450~1504)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도리 - 99 -
( 坪 村 崔 公 講 學 地 所 ) 寒 喧 堂 金 宏 弼 (1454~1504) 56 葛 川 杖 屨 之 所 退 溪 命 名 之 臺 葛 川 林 薰 (1500 1584) 58 熊 軒 白 公 杖 屦 之 所 (2개소) 熊 軒 白 沈 ( 己 卯 士 禍 이후 16C) 후손 사림 韓 復 衍 후손(수원백 씨 문중)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890 경남 거창군 주상면 연교리 59 林 秀 顯 風 詠 之 所 경남 거창군 북상면 중산마을 갓 돌 (중무) 60 壽 軒 先 生 全 義 李 公 杖 屨 之 所 壽 軒 李 重 慶 (1599 1678) 후손 경남 밀양시 상동면 매화리 61 性 齋 許 先 生 杖 屨 之 所 性 齋 許 傳 (1797~1886) 경남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상광 마을 62 退 溪 李 先 生 杖 屨 所 退 溪 李 滉 (1501 1570) 1928년 유림 경남 사천군 서포면 외구리 63 農 隱 閔 先 生 杖 屨 之 所 高 麗 禮 儀 判 書 農 隱 閔 先 生 杖 屨 之 所 農 隱 閔 安 富 (1328 1401) 1961년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개리 특리 64 南 冥 先 生 杖 屨 之 所 南 冥 曺 植 (1501 1572) 1893년 물천 김진호 ( 1 8 4 5 1908)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 웅석 봉(1099m) 백운계곡 65 德 谿 吳 先 生 杖 屨 之 所 德 谿 吳 健 (1521 1574)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 수월 마을 66 孝 廉 齋 公 杖 屨 之 所 孝 廉 齋 李 擎 柱 (1500 1597) 경남 산청군 우사마을 67 圃 隱 鄭 先 生 杖 屨 之 所 圃 隱 鄭 夢 周 (1337 1392) 1939년 후손 정상진 경남 진주시 상봉동 887-1 68 松 亭 先 生 杖 屨 之 所 松 亭 河 受 一 (1553 1612) 후손 경남 진주시 수곡면 사곡마을 69 葛 菴 先 生 杖 屨 之 所 杏 亭 先 生 葛 菴 李 玄 逸 (1627 1704) 후손 경남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70 李 漢 南 君 杖 屨 所 漢 南 君 李 於 (1429 1459) 경남 함양군 송전 산촌마을 71 知 足 堂 杖 屨 之 所 知 足 堂 朴 明 榑 (1571 1639) 경남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72 大 孤 臺 東 北 講 會 所 天 嶺 諸 介 隱 鄭 在 箕 (1811 1879) 경남 함양군 지곡면 공배리 남계 鄭 台 元 先 賢 杖 屨 所 등 천변 73 介 隱 杖 屨 所 介 隱 鄭 在 箕 (1811 1879) 孫, 孫 近 相 경남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82 74 晩 隱 先 生 杖 屨 之 所 晩 隱 洪 載 (고려조 14C) 미상 유림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산23 번지 경남 문화재자 료 제329호 경남기념물 제 262호 75 孤 雲 崔 先 生 杖 屨 之 所 孤 雲 崔 致 遠,(857?)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76 密 城 朴 氏 進 士 公 杖 屢 之 所 박성균 77 同 春 杖 屨 所 同 春 堂 宋 浚 吉 (1606 1672) 敦 齎 柳 相 大 (1864 1935) 78 鄭 遯 巖 藏 修 之 所 鄭 遯 鄭 芝 榮 (16C) 후손 79 逸 老 堂 九 拙 菴 先 生 生 長 之 村 杖 屨 之 所 逸 老 堂 梁 灌 (1437~1507) 九 拙 菴 梁 喜 (1515~1580) 정 조 연 간 (1752~1800) 拙 窩 鄭 鎭 鼎 경남 합천군 三 嘉 郡 毛 台 面 노곡 리 경남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대로 마을 경남 함양군 안의면 하원 (심진동 심원정)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효리 마을 80 文 貞 公 南 冥 曺 先 生 杖 屨 a. 所 南 冥 曺 植 (1501 1572) 유림 경남 함양군 유림면 휴천계곡 광무 원년(1897) 81 松 亭 姜 先 生 杖 屨 所 松 亭 姜 文 弼 후손이 추모하 경남 함양군 백전면 평정리 여 건립 82 竹 圃 杖 屨 所 竹 圃 李 圭 鉉 (1848?) 경주이공규현,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의중 갑진년 3월 마을 83 灘 叟 李 公 杖 履 之 所 灘 叟 李 鍾 植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의평 마을 84 慶 州 鄭 公 冀 鉉 杖 屨 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의중 樵 隱 鄭 裁 朝 子 炳 春 樵 隱 鄭 裁 朝 公 遊 憩 所 마을 85 文 忠 公 佔 畢 齋 金 先 生 文 獻 公 一 蠹 鄭 先 生 杖 屨 所 文 愍 公 濯 纓 金 先 生 杖 屨 所 佔 畢 齋 金 宗 直 (1431~1492) 一 蠹 鄭 汝 昌 (1450~1504) 濯 纓 金 馹 孫 (1464~1498)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文 貞 公 南 冥 曺 先 生 杖 屨 所 寒 沙 姜 先 生 大 遊 詠 歸 所 南 冥 曺 植 (1501~1572) 寒 沙 姜 大 遂 (1591 1658) 86 仁 山 朴 公 杖 屨 之 所 경남 합천군 봉산면 노곡리 진날 산소 87 橫 溝 先 生 藏 修 之 所 橫 溝 趙 性 宅 )(1827 1890) 경남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三 佳 勝 景 (원학 동 수승대, 화 림동 농월정) - 100 -
그림 52. 전국의 장구지소 분포 비율 그림 53. 知 足 堂 朴 明 榑 의 杖 屨 之 所 (함양 농월정) - 101 -
그림 54. 대표적 장구지소 사례 장소는 일정한 활동이 이루어지거나 또는 특정한 사건이 발생하는 한정된 범위의 공간 (space)으로 일정한 활동이나 사물들 또는 환경을 가지는 위치들 간의 연장으로서 추 상적이고 물리적인 범위와 관련되며 체험적이고 구체적인 활동의 기반이 되면서 맥락적 이고 문화적인 의미와 관련됨 장소에는 우리의 의도, 태도, 목적과 경험이 모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임(문재원, 2008). 따라서 장소성은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담론과 실천에 의해 만들어지 는 사회적 고안물 이라는 정의는 매우 역사적임 옛 선비들에게는 자연과 어울리는 자족함, 세속을 벗어난 탈속적 태도, 그리고 학문에 침잠하는 수양적 태도를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물러나 사는 선비에게 있어 소요( 逍 遙 ) 와 유람( 遊 覽 )의 생활문화는 한적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서실( 書 室 )이나 거처 를 마련하고 학문과 도리를 강론하는 생활문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음 국내의 대표적 명소( 名 所 ) 의 개념에는 승경, 명승 등의 광역적 개념을 포함하여 팔경, 구곡 등의 승처( 勝 處 )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한 보다 장소적 특성이 명백한 유허 지( 有 虛 地 )나 강학처( 講 學 處 ) 등이 있는데 그 중 장구지소는 보다 구체적 공간개념으로 해당 공간에는 반드시 그 공간을 되풀이하여 이용한 이용주체는 물론 영역성이 명기되 어 있음 문헌을 통한 예비조사 과정에서 장구지소 이외 유사 개념이 다수 도출되었음. 즉 장구 소( 杖 屨 所 ), 장구처( 杖 屨 處 ), 장구대( 杖 屨 臺 ), 장구지대( 杖 屨 之 臺 ), 장구우유지( 杖 屨 優 游 之 ), 장수지소( 藏 修 地 所 ) 또는 장수동( 藏 修 洞 ), 유영지소( 游 永 之 所 ), 정대구장( 亭 臺 舊 庄 ), 산수구장( 山 水 舊 庄 ), 고반지대( 考 槃 之 臺 ) 또는 고반대( 考 槃 臺 ), 강학지소( 講 學 地 所 ), 둔 적지지( 遯 跡 之 地 ), 명명지대( 命 名 之 臺 ) 또는 명명지지( 命 名 之 地 ) 등이 그것임 - 102 -
장구지소가 뛰어난 경관을 갖는 승경의 요처에 있고, 그 공간은 선현과 깊은 장소적 유 대감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추념과 흠모의 주체인 사림과 후손에 의해 바위에 선현의 장구지소 임을 새기고 선현의 행적과 덕행을 기리기 위한 정자가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국에 분포한 장구지소는 총 87건으로 이 중 경남이 37개소 (43%), 전남이 25개소(29%), 경북 14개소(16%) 등의 순으로 나타남 (2 ) 동 악 산 의 장 구 지 소 ( 杖 屨 之 所 ) 전남의 장구지소는 총 25개소 중 21개소가 동악산에 집중된 것으로 확인됨. 이 중 청 류동 12개소, 원계동 9개소 등 총 21개소(84%)의 장구지소가 동악산에 몰려있음 이 중 장구지소의 유형으로는 장구처( 杖 屨 處 )가 17개소로 월등히 많으며 이밖에 강학처 ( 講 學 處 ), 유상처( 流 觴 處 ), 유석처( 留 錫 處 ), 소요처( 逍 遙 處 )가 각 1개소씩 분포하며 1인 단독의 인물을 추념하는 장구처가 5개소이며 2인 추념 장구처가 9개소로 나타남 그림 55. 세진대의 장구처(원계동) 그림 56. 청류구곡의 장구처(4곡과 8곡 기로사 노사 양선생) 추념인물 중 승려를 제외하고 매월당( 梅 月 堂 ) 김시습( 金 時 習 : 1435 1493)만이 15C의 인물이며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17C 이후에 활동한 인물로 분석됨 - 103 -
원계동에는 특히 국내 실학의 대가들의 장구처가 인상적이며 제2곡과 제3곡 그리고 제 9곡 등은 장구처가 곧 구곡명과 일치하는 특성을 보임 기노사 송사선생 장구처( 奇 蘆 沙 松 沙 先 生 杖 屨 處 ) 와 전간재선생 송연재선생 장구처 ( 田 艮 齋 先 生 宋 淵 齋 先 生 杖 屨 處 ) 그리고 정소송 황매천선생 장구처( 鄭 小 松 黃 梅 泉 先 生 杖 屨 處 ) 은 청류구곡과 원계구곡에서 공히 발견되는 점은 매우 주목되는 현상으로 이들의 직간접 영향력을 엿볼 수 있음 이밖에도 청류구곡에서는 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사찰 도 림사와 암자와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됨 서계동에도 金 梧 岡 丁 春 沂 言 志 處 가 있는 바 이들 2인이 동악산 구곡 설정 및 항일 운동에 모종의 밀약이 있는 것으로 추정됨 표 23. 청류구곡의 장구처 곡 구분 4곡 丹 心 臺 장구처명 奇 蘆 沙 松 沙 兩 先 生 杖 屨 處 추념인 인물 蘆 沙 奇 正 鎭 (1798 1879) 松 沙 奇 宇 萬 (1846 1916) 성격 유형 추념인 수 杖 屨 處 2 비고 元 曉 祖 師 義 湘 大 師 尹 弼 居 士 道 詵 國 師 智 還 大 師 南 破 大 師 訥 峰 大 師 靈 山 大 師 虛 舟 禪 師 편월 大 師 龍 珊 大 師 春 峯 大 師 留 錫 處 원효대사 등 승려 留 錫 處 12 7곡 暮 遠 臺 金 淸 閒 子 逍 遙 處 梅 月 堂 金 時 習 (1435 1493) 逍 遙 處 1 丁 土 軒 芝 谷 蘭 谷 松 谷 杖 屨 處 杖 屨 處 4 李 心 齋 姜 蓮 溪 李 處 菴 柳 松 溪 申 介 石 趙 明 谷 吳 懼 菴 趙 韋 堂 杖 屨 處 杖 屨 處 8 曺 西 山 東 岡 杖 屨 處 西 山 曺 衡 鎰 (1800 1860) 杖 屨 處 2 雲 谷 慕 谷 先 生 杖 屨 處 杖 屨 處 2 曺 華 菴 杖 屨 處 杖 屨 處 1 丁 觀 齋 墻 東 昌 德 希 菴 大 杖 屨 處 杖 屨 處 5 8곡 夷 海 東 武 申 文 齋 有 明 軒 德 奎 性 善 菴 性 所 杖 屨 處 杖 屨 處 6 田 艮 齋 宋 淵 齋 鄭 小 松 三 先 生 杖 屨 處 黃 梅 泉 進 士 杖 屨 處 艮 齋 田 愚 (1841 1922) 淵 齋 宋 秉 璿 (1836 1905) 小 松 鄭 在 健 (1843 1910) 梅 泉 黃 玹 (1855 1910) 杖 屨 處 3 杖 屨 處 1 표 24. 원계구곡의 장구처 곡 구분 2곡 유상대 장구처명 추념인 인물 성격 유형 추념인 수 비고 梧 岡 金 先 生 講 學 處 梧 岡 金 正 昊 (1871 1909) 지역 유림 講 學 處 1 丁 春 沂 流 觴 處 지역 유림 流 觴 處 2 3곡 인지대 柳 潘 溪 李 星 湖 丁 茶 山 許 生 杖 潘 溪 柳 馨 遠 (1622 1673) 조선 후기 杖 屨 處 4-104 -
屨 處 星 湖 李 瀷 ( 1681 1763) 茶 山 丁 若 鏞 (1762 1836) 許 生 실학자 丁 觀 齋 先 生 佑 星 杖 屨 處 杖 屨 處 1 6곡 7곡 9곡 활연대 金 農 巖 先 生 金 三 淵 先 生 杖 屨 處 田 艮 齋 先 生 宋 淵 齋 先 生 杖 屨 處 奇 蘆 沙 松 沙 先 生 杖 屨 處 鄭 小 松 黃 梅 泉 先 生 杖 屨 處 玄 石 ( 朴 世 采 ) 處 金 雙 湖 先 生 杖 屨 農 巖 金 昌 協 (1651~1708) 三 淵 金 昌 翕 (1653 1722) 艮 齋 田 愚 (1841 1922) 淵 齋 宋 秉 璿 (1836 1905) 蘆 沙 奇 正 鎭 (1798 1879) 松 沙 奇 宇 萬 (1846 1916) 小 松 鄭 在 健 (1843 1910) 梅 泉 黃 玹 (1855 1910) 玄 石 朴 世 采 (1631 1695) 雙 湖 金 載 海 (1658 1720) 杖 屨 處 2 杖 屨 處 2 杖 屨 處 2 杖 屨 處 2 杖 屨 處 2 그림 57. 오강 김정호선생 관련 장구지소(A: 원계동, B: 서계동) (3 ) 유 불 선 ( 儒 彿 仙 )이 혼 재 된 문 화 경 관 청류구곡의 대부분의 바위글씨는 성리학적 가르침을 담는 경구로 구성되고 있으며 특 히 주자와 관련된 시와 경구로 구성되어 있음 또한 청류구곡과 원계구곡은 다수의 승려 등의 이름 또한 다른 구곡에서 발견하기 어 려운 독특한 현상임 청류구곡의 소도원, 무태동천 그리고 제시인간별유천 등의 바위글씨는 선계지향의 특성 이 발견되며 서계동에 설정된 선암동문과 계곡 상류에 놓인 신선바위는 이러한 특징을 보다 부각시키고 있음 무이구곡의 제8곡 북쪽에는 품자암( 品 字 嵒 )이란 3개의 커다란 바위가 품( 品 )자 모양의 봉 우리를 이루고 있음. 이 바위를 삼교봉( 三 敎 峯 )이라고도 하는데 이름에서 보듯이 유교( 儒 敎 ), 불교( 佛 敎 ), 도교( 道 敎 )의 삼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가로 말하면 주자의 무이정사 - 105 -
( 武 夷 精 舍 ), 불가로 말하면 극락국( 極 樂 國 ), 도가로 말하면 도원동( 桃 源 洞 )으로 해석됨 5) 도통( 道 統 ) 계승과 항일의지 현장 (1 ) 기 호 사 림 의 도 통 의 식 계 승 기호사람이 구곡을 설정하는 이유는 도통계승( 道 統 繼 承 ) 즉 자연에의 표상화된 학통계 승의식의 일환으로 구곡 설정과 구곡시는 그 시문학적 상징화에 있다고 할 수 있음 21) 도통의식은 학문의 발전과 학파의 결속에 지대한 영향을 줌. 구곡은 조선시대 도통계승 의 한 양상을 산수자연에 가시적으로 표상화한 대표적인 사례로 우암( 尤 庵 ) 송시열( 宋 時 烈 : 1607 1689)은 율곡( 栗 谷 ) 이이( 李 珥 : 1536 1584)의 도통을 계승하고 그 도통 계승의 표상화로 고산구곡가( 高 山 九 曲 歌 ) 를 한역( 漢 譯 )함 율곡 이이의 도통을 계승한 우암 송시열은 당시 기호사림의 영수로 도통계승의식을 형 성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 그 후 그를 흠모 계승한 기호사림들은 그의 도통을 계 승했으며, 그의 도통의식이 기호사림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였음 22) 이런 도통의식은 조선말까지 지속되었는데, 우암의 후손은 물론, 우암의 적통( 嫡 統 )을 표방한 화서 이항로( 李 恒 老 : 1792 1868)의 문하생들에 와서 더욱 확산됨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항로 학맥의 기호사림들은 강원 경기 전북 충남 충북 등 기 호지방과 평남 황해도 지방에 상당수의 구곡을 설정했음. 이렇듯 기호사림에 있어서 구 곡의 설정은 도통을 계승하려는 의지의 자연에의 표현이자,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 의 학문적 표현이기도 함 23) 화서학맥인물들은 도통계승의지를 강화하고, 척사위정( 斥 邪 衛 正 ), 존화양이( 尊 華 攘 夷 ) 사상을 공고히 하여 일제강점기에 항일의지( 抗 日 意 志 )를 고취 심화하기 위해 화양구곡 을 순례하기도 함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용하구곡을 설정한 의당( 毅 堂 ) 박세화( 朴 世 和 )도 이런 시대사조 에 부응 병진한 정통 도학사림( 道 學 士 林 )으로, 동악산구곡에 흔적을 남긴 간재( 艮 齋 ) 전 우( 田 愚 : 1841 1922)와도 교유하였음 21) 이상주(2013), 기호사림( 畿 湖 士 林 )의 도통의식( 道 統 意 識 ) 이 구곡문화와 그 시대에 끼친 영향, 景 雲 申 哲 雨 先 生 서거십주년추도기 념논총: 256 257. 22) 서원과 사당의 명칭에도 도통의식이 반영되어있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회양리에 화양서원이 있다. 또한 대노사( 大 老 祠 )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하리 200-1에 우암을 제향하기 위해 1787년에 세웠으며, 정조( 正 祖 )가 대노사비( 大 老 祠 碑 ) 라는 글씨를 썼다. 제 천시 봉양읍 장담리에는 1906년(고종 43년) 유림들이 자양서원( 紫 陽 書 院 )을 창건하여 주자 우암 화서 유중교 유인석 등을 제향한다. 그리고 도통사( 道 統 祠 )는 충주시 신니면에서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재건했다. 23) 이상주(2006), 산수평론( 山 水 評 論 )에 대한 고찰: 화양구곡( 華 陽 九 曲 )을 중심으로, 한문학보제14집, 241면. - 106 -
그림 58. 유 불 선 사상이 혼재된 동악산 바위글씨 기우만( 奇 宇 萬 : 1846 1916), 전우( 田 愚 : 1841 1922), 송병선( 宋 秉 璿 : 1855 191 0) 24), 황현( 黃 玹 : 1855 1910), 최익현( 崔 益 鉉 : 1833 1906) 등의 조선 말기 사림 등 이 주자 성리학의 도통의식을 계승하고 위정척사와 항일의지 고취의 수단으로 동악산의 구곡이 조성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함 특히 우암( 尤 庵 ) 송시열( 宋 時 烈 )의 9대손인 연재( 淵 齋 ) 송병선( 宋 秉 璿 : 1836 1905)은 무주구천동에 은둔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따 무계구곡( 武 溪 九 曲 )을 설정함 24) 선조들의 문집을 편찬하고, 벽사설(1870) 근사속록(1874) 동유연원록(1881) 무계만집(1889) 동감강목(1900) 등의 저술을 통해 조 선을 유지해 온 성리학 사상을 널리 확산시켰다. 이를 통해 외세에 대한 사상적 무장을 강화하는 한편, 1867년 옥천 이지당에서 비롯된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전국 각지를 순례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일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인적 기반을 확대하여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1877년부터 1905년에 이르기까지 20여 차례가 넘는 상소를 통해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를 비판하였다. 나라와 道 의 수호를 위해 결국 죽음을 선 택하여 12월 30일 자결, 순국하였다 - 107 -
(2 ) 위 정 척 사 ( 衛 正 斥 邪 ), 존 왕 양 이 ( 尊 王 攘 夷 ) 사 상 의 고 취 조선 말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경기도, 충남북, 전남북과 강원도 지방에 구곡을 설정한 사례가 다른 어느 시기보다 많았음 이와 같은 사유는 조선말 일제강점기에 와서 기호사림들이 소중화( 小 中 華 ), 존화양이 ( 尊 華 攘 夷 ), 위정척사( 衛 正 斥 邪 ) 사상을 강화하는 교육장소로 구곡을 설정, 활용하였 다는 학설이 비중 있게 제기됨 조선 말 일제강점기 화서 계열 기호사림이 설정한 구곡은 벽계구곡 금계구곡 백운구곡 (이상 경기도), 주산구곡(황해도), 옥계구곡 용하구곡 구곡리구곡 명도구곡(이상 충북), 무계구곡 이산구곡 (전북), 니산구곡(강원도), 석계구곡(평남) 등이 전해짐(이상주, 2013) 청류구곡 설정자 중 한 명은 조병순선생의 가문은 집의 상량문 연호( 年 號 )를 공부자( 孔 夫 子 ) 로 쓸 만큼 철두철미한 위정척사론의 실천자였음에서도 이러한 사상을 엿볼 수 있음 그림 59. 이이재( 怡 怡 齋 ) 상량문의 공부자( 孔 夫 子 ) 연호 (3 ) 고 종 어 필 의 존 숭 ( 尊 崇 ) 가. 保 家 孝 友 바 위 글 씨 청류구곡 제3곡 대천벽 석림 아래에는 보가효우( 保 家 孝 友 ) 청류동( 淸 流 洞 ) 이란 바위글 씨가 있으려 그 좌측으로는 주연서우석어당( 珠 淵 書 于 昔 御 堂 ) 이라 표기되어 있는 바 여 기서 주연( 珠 淵 )은 고종황제의 호이며 석어당( 昔 御 堂 ) 은 덕수궁에 있던 고종의 집무실 을 뜻함 - 108 -
제Ⅵ장 동악산 구곡의 특성 그림 60. 보가효우 청류동 바위글씨(청류동) 그림 61. 오얏꽃 문양 이 글씨 아래로는 상(上) 자(字) 위에 꽃잎으로 보이는 문장이 보이는 바 박혜범(2010; 46)은 이를 오얏꽃(자두꽃) 즉 이씨왕조를 상징하는 아이콘(icon)으로 해석한 바 있으 며, 밑에 光武五年 이란 연호(年號)로 보아 1905년 각자되었을 확률이 높음 - 109 -
보가효우( 保 家 孝 友 ) 는 보가지본막여효우( 保 家 之 本 莫 如 孝 友 ) 의 준말로, 집안을 보전 하는 근본은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 만한 것이 없다 는 뜻임 청류동 제2곡의 바위글씨는 청류구곡 설정자 중 하나인 하정( 荷 亭 ) 조병순( 曺 秉 順 )의 서실( 書 室 )이기도 했던 이이재( 怡 怡 齋 ) 대청에 게판( 揭 板 )된 현판( 懸 板 ) 의 보가효우 이외에 珠 淵 書 于 昔 御 堂 모든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이재 현판 내용을 집자한 것으로 추정됨 그림 62. 이이재 현판과의 일치성 1910년부터 1922년까지 조사된 조선환여승람( 朝 鮮 寰 輿 勝 覽 ) 25) 에, 하정( 荷 亭 ) 조병순 ( 曺 秉 順 : 1876~1921)을 집주인으로 하여 해관 윤용구가 머물러 살면서 당호를 이이 ( 怡 怡 )라 하였다( 海 觀 尹 用 求 扁 其 居 曰 怡 怡 堂 ) 는 내용과 1929년 10월 윤용구가 환여승 람의 서문을 썼다는 사실이 드러남 자( 字 )가 선일( 善 日 )이고 호( 號 )가 하정( 荷 亭 )으로 괴천( 槐 川 ) 필승( 弼 承 )의 아들이다. 부모를 섬 김이 효성스럽고 자식을 가르침은 엄하였다. 아우 병흠( 秉 欽 )과 함께 송사( 松 沙 기우만)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다. 해관( 海 觀 ) 윤용구( 尹 用 求 )가 그의 집에 머물러 살면서 편액( 扁 額 )을 걸었는데, 당 호를 이이( 怡 怡 )이라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음 25) 조선환여승람( 朝 鮮 寰 輿 勝 覽 )은 우리나라의 인문지리 현황을 한지( 韓 紙 )에 담은 국내 최대의 한문체 지리서로 충남 공주의 유학자 인 이병연( 李 秉 延 : 1894 1977)이 1910년부터 1922년까지 100여 명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를 돌면서, 전국 13도 229개 군 가 운데, 129개 군의 인문 지리 현황을 직접 조사하여, 발간한 백과사전식 지리서이다. - 110 -
그림 63. 이이재에 걸린 保 家 孝 友 현판 논어의 자로( 子 路 ) 28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이( 怡 怡 )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음 子 路 問 曰 何 如 斯 可 謂 之 士 矣 子 曰 切 切 偲 偲 怡 怡 如 也 可 謂 士 矣 朋 友 切 切 偲 偲 兄 弟 怡 怡 (제자 자로( 子 路 )가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선비라 부를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절절( 切 切 )은 절책( 切 責 )이니, 간절하게 책선( 責 善 )해서 권장하는 일이다. 시시( 偲 偲 )는 친절하게 알 려주어 격려하는 일이다. 이이( 怡 怡 )는 화순( 和 順 )이니, 순순하게 화락( 和 樂 )하는 것을 말한다. 형제 는 같은 부모의 형제만이 아니라 상복( 喪 服 )을 입는 동족( 同 族 )을 가리킨다. 하였다. 따라서 이이재( 怡 怡 齋 )와 보가효우( 保 家 孝 友 )의 본 뜻은 서로 상통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음 석촌( 石 村 또는 石 邨 ) 윤용구( 尹 用 求 : 1853 1939)는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의 남 편 윤회선( 尹 會 善 )의 아들이며, 일제강점기 끝까지 지조를 지켜 학이 되어 천 년 만에 돌아온 은일지사로 불렸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서화가임. 15세에 돈령부( 敦 寧 府 ) 직 장을 지내고, 19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함 26) 보가효우( 保 家 孝 友 ) 는 을미사변 이후 1895년에서 1900년 사이에 고종황제 도승지를 지냈던 윤용구( 宮 內 府 特 進 官, 고종황제의 고문)에게 전해졌고 이를 조병순 등이 청류구 곡에 각자한 바위글씨로 추론됨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915년( 乙 卯 年 ) 봄에 제작된 행서체의 보가지본막여효우( 保 26) 그는 후에 규장각에 들어가 상대( 常 帶 ), 한림( 翰 林 ), 대교( 待 敎 ), 직각( 直 閣 ), 사인부제학( 舍 人 副 提 學 ), 이조참의( 吏 曹 參 議 ), 대사성,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로 법부 탁지부 내무부 등 대신에 십 수 회 배명( 拜 命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 은거하면서, 장위산인 이라 자호함.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 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 自 娛 )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 111 -
家 之 本 莫 如 孝 友 ) 편액이 고종 어필로 전하고 있음 이 글씨는 좌변의 관서 을묘년춘일서 우석어당( 乙 卯 年 春 日 書 于 昔 御 堂 ) 의 간지( 干 支 ) 로 보아 폐위된 고종이 1915년 봄에 석어당에서 쓴 것으로 보이며 우상 글머리에는 주 문대방인( 朱 文 大 方 印 )인데 안으로 문자 대신 날개를 펼친 봉황이 그려져 있음 또 다른 글씨는 보가막여효우( 保 家 莫 如 孝 友 ) 로 축약되어 있고 글 쓴 시기는 표시되지 않은 반면 좌중에 주연( 珠 淵 ) 이라는 고종의 호가 보이는 바 보다 강한 필체로 느껴지 기 때문에 아래 글씨 보다 빠른 시기인, 1895년 이후 쓰여진 글씨로 추정됨 그림 6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종 어필(1915년) 그림 65. 소장자 미상의 고종 어필(제작연도 미상) - 112 -
나. 鮮 史 御 帝 바 위 글 씨 청류구곡 제2곡인 무태동천 바위글씨가 있는 석벽 하단의 선사어제( 鮮 史 御 帝 ) 바위글 씨는 조선의 역사와 임금을 보위한다. 는 개념으로 해석되며 특별히 집자( 集 子 )하는 수고를 들여 각( 刻 )한 것을 볼 때 매우 비중 있는 인물이 글씨 주체임을 예상하게 함 선사어제 바위글씨는 구원(언동)마을 언동서당에 있음. 현재는 언동경로당 좌측에 놓 인 잉어 형상의 바위에 새긴 전서체( 篆 書 體 ) 글씨인 망형어제( 忘 形 御 帝 ) 에서 어제( 御 帝 ) 를, 구원리 장철수( 張 喆 洙 )선생의 도동재( 道 東 齋 )에 글인 선사발적( 鮮 史 發 跡 ) 에서 선사( 鮮 史 ) 를 집자함으로써 일종의 존왕양이( 尊 王 攘 夷 ) 27) 운동의 양상이 전개됨 그림 66. 구원(언동)마을의 전서체 忘 形 御 帝 바위글씨 존왕양이 사상은 유교의 위정척사사상( 衛 正 斥 邪 思 想 ) 안에 포함되어 있었음. 따라서 양 이론자들은 <양물배격론( 洋 物 排 擊 論 )> <양물금단론( 洋 物 禁 斷 論 )> 등을 주장하여 서양을 배격하였으며, 당시의 기존질서를 끝까지 보존하려 하였음. 이에 가담한 대표적인 인물 로는 이항로( 李 恒 老 ), 기정진( 奇 正 鎭 ), 김평묵( 金 平 默 ) 등으로 주로 성리학자 출신이었음 그림 67. 청류구곡 제2곡의 전서체 鮮 史 御 帝 바위글씨 27) 천자인 주왕을 존경하고 보필하면서 동이( 東 夷 ) 서융( 西 戎 ) 남만( 南 蠻 ) 북적( 北 狄 ) 등 사방 이민족들을 물리쳐 중원( 中 原 )의 평화와 질서를 수호하겠다는 의미임(열국지사전, 2001.6.15., 솔출판사). 1857년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개항한 후 등장한, 천황을 지지하고, 서구 열강은 배척할 것을 주장한 존왕양이파들의 정견을 가리키는 뜻도 있다. 국내에서 존왕양이 사상이 구체성을 띠고 드러난 것은 서유럽 열강의 압력에 대한 위기의식과 병인양요 등의 직접적인 외세( 外 勢 ) 침입에 직면하고서 부터임. 당시의 양이사상은 척사사상의 한 표현이다. - 113 -
그림 68. 忘 形 御 帝 와 鮮 史 御 帝 바위글씨의 비교(자료: 박혜범, 2010, 127쪽 재구성) 한국의 존왕양이 사상은 기존의 화이사상( 華 夷 思 想 )에서 주장해 오던 그 틀과는 달리 자주사상으로 발전하여 한민족의 역사의식을 크게 고취시켰으며 전통적 보수적 성격에 도 불구하고 그 뒤 의병활동과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음 망형어제 가 새겨진 바위의 형태가 물고기 중에서도 잉어의 형상을 한 것도 매우 주목 되는 바 이는 이씨왕조 를 상징하는 것으로 판단됨 망형어제에서 망형( 忘 形 ) 은 형( 形 ) 즉 몸을 버리고 지( 志 ) 즉 뜻을 받든다는 의미이며, 어제( 御 帝 ) 는 임금의 마부를 뜻하는 것으로 결국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자 는 구호를 해석됨 오강 김정호선생의 후손이기도 한 경주 김씨 김 옹(82세)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글씨 가 임금이 전한 글씨 로 진술하고 있음 청류구곡 제2곡의 선사어제 바위글씨 좌우에는 우측에 송석( 松 石 ) 이중희( 李 重 禧 )를 비롯하여 오강( 梧 岡 ) 김정호( 金 正 昊 )를 비롯하여 청류구곡 설정자인 춘기( 春 沂 ) 정순태 ( 丁 舜 泰 )와 하정( 荷 亭 ) 조병순( 曺 秉 順 ) 등 총 17명의 인물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일종 의 결의를 다지는 인명 바위글씨로 추정됨 - 114 -
그림 69. 김 옹과의 인터뷰 다. 思 無 邪 바 위 글 씨 논어( 論 語 ), 위정편( 爲 政 篇 ) 에 나오는 글( 子 曰 詩 三 百 一 言 以 蔽 之 曰 思 無 邪 )로서 조금 도 그릇됨이 없는 마음 을 의미하며 경기도 가평 조종암( 朝 宗 巖 )에도 명나라 마지막 황 제 의종 글씨 사무사( 思 無 邪 ) 가 전해짐 그림 70. 청류구곡 제2곡의 思 無 邪 바위글씨 백성을 이끄는 정치는 덕망으로 이끌어야 하며, 그릇됨 없이 펼쳐야 함을 일컫는 의미 의 글씨로 전( 傳 ) 고종황제 어필 로 알려져 있으며 밑으로 오헌( 梧 軒 ) 조병식( 曺 秉 湜 : 실 제로는 曺 秉 然 )을 비롯하여 13명의 명단이 각자되어 있음 320cm 210cm 크기의 지붕을 갖는 보호각( 保 護 閣 ) 초석의 흔적으로 보아 상당한 의미 와 보호가치가 있는 바위글씨로 추정되며 어필이 아니더라도 동악산 바위글씨 중 가장 예술성이 탁월한 것으로 판단됨 - 115 -
그림 71. 가평 조종암의 사무사 바위글씨 (명나라 의종의 친필)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고종 어필로 추정되는 3개 바위글씨에 대한 본 연구진의 견해를 밝혔으나 이는 금석문 분야 전문가의 추가 고증과 확인이 필요한 사항으로 후속 연구가 필요함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 바위글씨를 고종의 어필로 믿고 추앙했다는 점으 로 이는 바위글씨를 통해 존왕양이( 尊 王 攘 夷 ) 의 정신을 배양했다는 점으로 귀결할 수 있음 - 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