應 永 外 寇 の 前 後 ( 中 世 の 日 鮮 交 涉 ) JB349.13011-5 高 木 眞 太 郞 (다카기 신타로) 著 - 東 京 : 八 木 書 店 1942년( 昭 和 17) [저자의 서문] 文 永. 弘 安 役 (1274년.1281년의 元 寇 ) 후, 일본 서부 해변 사람들이 조선에 건너가 때때 로 침범과 약탈을 감행하여, 고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된 사실이 있다. 본서는 조선이 이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괴로워하였으며,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를 應 永 外 寇 의 사 건을 중심으로 개략 기록하였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여러 가지 충돌이 일어났으나, 결국은 서로 오해가 있거나 처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수습하지 못한 것이다. 어려운 문 제를 멋지게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다면 모든 일은 온건하게 끝났을 것이다. 본서는 소위 연구 서적이 아니고, 이정도의 지식을 갖추어야 할 교양 층을 대상으로 쓴 것이다. 여기서는 보통으로 쓰이는 왜구( 倭 寇 ) 라는 문자를 쓰지 않고 해구( 海 寇 ) 라는 문자를 썼다. 이는 조선의 기록인 왕조실록에서도 자주 쓰인 문자이다. * 應 永 外 寇 응영은 일본연대이며(서기1394년 1427년), 외구는 조선의 對 馬 정벌을 칭한다. 1419년6월20일(세종2년) 대마의 豆 知 浦 에 돌연히 조선군사 17,000여명이 공격하였다. 대마도주 宗 貞 盛 (소 사다모리) 이하가 조선군을 맞아 역전하여 얼마 후 조선군은 물러갔다고 하는데, 일본 역사에서는 이를 응영외구라 한다. 조선의 침공 목적은 왜구 징벌 정책의 하나이다. 구체적 설명은 四 항에 있다.* 一. 서설 1. 고려 멸망까지의 반도의 역사적 형세 ⑴ 중국의 堯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태백산 단목 하에 내린 한 사람의 神 人 을 왕으로 모시니 이가 단군이며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단군의 조선 건국에 대한 이야 기이다. ⑵ 은나라 기자는 무도한 紂 王 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아, 광인으로 위장하여 결국 주나라 무 왕의 서자와 무리 5000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피신하였다. 무왕은 이를 조선왕으로 봉하 니 그 영역은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남만주부터 조선 북부에 걸쳤으며 수도는 평양으로 정하였다. ⑶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기자의 후예인 否 라는 자가 항복하였고, 否 의 아들 箕 準 때에 燕 人 인 위만이 조선에 망명하여 準 에 청하여 서쪽 땅에서 살았다. 그런데 위만은 점차 세력을 키워 준을 압박하여 타파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이것이 위만조선의 건국 이며, 기자로부터 기준까지 약 900여년 이어진 기자조선은 망하였다. 위만은 한나라 요 동태수와 약속하여 점차 근린제국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그의 손자 右 渠 때에 이르자 漢 人 의 망명자가 많아졌고 또 우거의 세력이 커지자 교만해져 결국 한무제의 조 선정벌로 나타났다. 이 조선정벌은 상당히 어려운 공방전이었으나 결국 왕검성은 무너 지고 위씨조선은 86년만에 망했다. ⑷ 한나라 무제는 조선을 자국 영토로 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의 四 郡 을 두었으니 소
위 한사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군은 昭 帝 때 진번, 임둔은 파하고 낙랑, 현토의 이 군으로 되었으나, 이어서 현토군은 압록강 북방으로 옮겨지고 낙랑은 반도 유일의 군이 되었다. ⑸ 이보다 앞서 한강 이남에는 韓 族 이 번성한 마한, 변한, 진한의 세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를 합쳐 삼한이라 하였다. 이 삼한 중 가장 큰 것이 마한이며 대강 54국으로 나누어졌으며 경기도 남부와 충청, 전라도에 걸쳐 있었다. 마한 동쪽이 진한이며 현 경상북도로 12국이다. 변한은 마한의 남쪽에 끼어있는 낙동강 연안지역이다. 삼국의 건국연대와 그 성쇠에 관하여는 사료가 없어 상세하지 않으나 한국인이 중국에 입공한 최초의 기록은 魏 의 景 元 2 年 이라 하며, 또 西 晉 무제 때에 馬 韓 의 遣 使 朝 貢 의 기사가 있다고 한다. ⑹ 조선역사에 많은 흥망성쇠가 있었다고 인정되는 삼한 땅에 백제, 신라, 任 那 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西 晉 末 경이다. 마한 옛 땅에 백제, 진한 옛 땅에 신라가 일어난 것은 의 심할 수 없으나 변한 땅이 그대로 임나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있다. 임나는 신라, 백제 어느 쪽에도 병합되지 않고 존속한 소국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국 남부 에 삼한이 정립해 있을 때, 북은 현토군이 고구려, 예, 맥의 침입을 받은 적이 자주 있 었고 낙랑도 당하였다. 후한의 獻 帝 초에 遼 東 侯 를 칭한 公 孫 氏 의 2대 公 孫 康 은 반도 의 영유로 되어 있던 낙랑군 남부를 회복, 여기에 帶 方 郡 을 세웠다. 이윽고 한나라가 망하고 위가 일어나자 낙랑, 대방의 2군도 위나라 영토가 되었다가 곧 위가 망하고, 서 진시대가 되어서는 반도 형세에 일대 변동이 일어난다. ⑺ 이미 세력을 떨친 북방 고구려는 이때부터 활동을 개시하고 점차 남하하여 현토를 취하 고 또 낙랑군을 습격하였다. 그때 충청, 경기의 백제는 남방으로부터 대방군을 공격하였 으므로 서진의 영토는 날로 좁아졌다. 최후로 낙랑, 대방을 다스리고 있던 張 統 이라는 자는 패하여 요동으로 도망가니, 이에 낙랑, 대방은 전멸하고 고구려, 백제는 접경하게 되었다. 무제의 한 사군 설치로부터 421년만이었다. ⑻ 이렇게 하여 조선반도에는 북은 고구려, 남에는 신라, 백제, 임나의 존립을 보았으나 신 라가 점점 세력을 뻗어 570년경 임나는 망하고, 다음 661년 백제도 망하고 고구려는 8 년 뒤에 망하니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였다. ⑼ 삼국정립시대를 거치고 신라가 내치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획기적 발전을 이룩한 것은 23 대 법흥왕 및 24대 진흥왕 때이다. 진흥왕 때 고구려와 백제에 대하여 침략정책을 진일 보하였고, 임나가 망한 것도 이때이다. 그리고 반도 통일을 이룩한 때는 29대 태종시대 이다. 신라는 당에 대하여 실력적 반항과 외교를 교묘히 구사하여 31대 신문왕은 당 고종으로 부터 책봉을 받고 신라왕이라 칭하였다. 신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세가 점차로 약 해지며, 궁예, 견훤, 왕건 등 군웅이 각지에서 봉기했다. 그 중 왕건은 중망이 가장 높 고, 드디어 경명왕 2년 왕위에 올라 나라를 세우고 고려라 칭하였다. 이어 17년 후에 경순왕을 마지막 왕으로 하고 신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신라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56왕 992년이며, 신라의 이름이 중국사에 보인지 559년만이었다. ⑽ 고려는 왕권 확립을 위하여 대외관계에 특히 뜻을 두었다. 五 代 諸 國 興 亡 후, 새로 건국 한 宋 나라로부터 책봉사를 맞아 이에 속하고, 그 후 내부의 중앙집권화에 힘을 경주하 였다. 개국 후 70년 成 宗 때 契 丹 國 과 접경함에 이르러 대외관계는 이원적이 되어 극히
곤란한 입장이 되었으나, 契 丹 이 망할 때까지 120년간 이에 잘 대처하여 고려 문화의 최성기를 현출하였다. 그러나 고려 귀족의 성숙은 드디어 외척의 전횡으로 나타나고, 이 어서 일어난 몽고의 신세력은 金 國 과 만주를 휩쓸고 조선에 닥쳐 이에 몽고 즉 원의 고 려 통치가 시작된다. 그 후 80년간 고려왕은 원의 한 귀족인 듯 보였으나 明 이 건국하 자 즉시 이와 통하였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親 元 파와 向 明 파의 대립 항쟁이 있었고, 더 구나 대외적으로 東 北 面 의 방어와 왜구진압의 중대 문제 등이 있어 국력의 약화가 두드 려져 드디어 고려 주권은 이성계의 수중에 들어간다. 고려는 태조 건국 후 34대 475년 에 망하고 이조가 건국된다.
2. 일선통교고찰( 日 鮮 通 交 考 察 ) ⑴ 日 本 書 紀 에 素 戔 鳴 尊 (스사노오노.미코도)가 그 아들 五 十 盟 神 (이소치키이.가미)을 데리고 신라에 가서 曾 尺 茂 利 (소시모리)땅에서 살았다 운운. 이란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역사상 에 보이는 일선관계의 가장 고대의 것으로 한다. 曾 尺 茂 利 땅은 지금의 강원도 춘천부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화로 본다. ⑵ 신화 이후에 나타난 일선 양자의 관계는 10대 崇 神 天 皇 때(BC97 BC30)의 意 富 加 羅 (오 호카라)의 朝 貢, 11대 垂 仁 天 皇 때(BC29 70)에 있었던 신라왕자 天 日 槍 (아메노.히보코) 의 歸 化 등을 들 수 있는데, 주의할 것은 이렇게 일찍이 통교가 행해졌는가에 있다. 한국 산출의 물자 교류를 통교의 이유로 든 학자도 있다. ⑶ 일본과 중국과의 공적 교통은 낙랑, 대방을 경유하는 것으로서 특히 낙랑군에의 교통은 반도경유가 필연적이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 前 漢 書 地 理 志 에 낙랑의 해중에 왜인이 있 고 100여국으로 분할되어 있다. 등이 있다. ⑷ 조선과 일본의 통교 이유에 한국 산출의 물자 교역 이라고 하는데, 일본서기에 素 戔 鳴 尊 가 韓 鄕 (한국)의 섬은 모두 金 銀 이 있다 라고 말했고, 위지에 진한은 철을 산출하여 韓, 濊, 倭 는 이를 채취한다. 철이 돈의 역할을 한다. 중국의 돈은 철인 것 같다. 이들 기록 을 보아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국의 물자를 교역하였으며, 특히 진한의 철을 얻기 위해 많이 왕래한 것 같다. ⑸ 崇 神 天 皇 때 임나의 사자가 일본에 와서 신라의 침략을 고하고 원병을 청하였다. 따라서 천황은 장군에 명하여 임나를 통치하도록 하고 그 땅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 후 임나는 쇠망의 길을 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고구려, 신라의 압박과 침략 그리고 임나 역대 통치자의 무능 실정을 들 수 있다. ⑹ 백제의 의자왕은 유락에 빠지고 간신을 죽여 국치가 불능했을 뿐만 아니라 병력을 고구려 와 합쳐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의 무열왕은 당시 신흥의 강대국인 당의 원조를 청하였 으므로, 당은 蘇 定 方 으로 하여금 20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소정방은 신라 와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왕성을 함락시키고, 왕 및 왕자와 대신을 잡아 당으로 돌아갔 다. 그때 백제의 유신들은 의병을 일으켜 회복을 꾀하고, 의자왕의 자 풍장( 豊 璋 )이 인질 로 일본에 있는 것을 맞이하고 일본의 원병 파견을 요청하였다. 37대 齊 明 天 皇 (655 661)이 이를 허가하고 파병하나 원군은 白 村 江 에서의 일전에서 패하고, 풍장은 고구려로 피신, 백제는 망한다. 오래 유지된 日 鮮 의 관계는 여기에서 커다란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 게 된다. ⑺ 신라 통일 후 일본의 실 세력이 반도에서 퇴보를 거듭하고 있던 시기로부터 신라와의 관 계가 중절될 때까지의 100년간, 신라 사신의 일본 파견은 전후 38회였고, 일본 사신의 조선 파견은 신라 사신이 끊긴 후에도 계속되어 모두 27회였다. 일본 사신의 중단을 결 정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의 遣 唐 使 船 이 조선 남해를 항해하는 이상, 신라의 태도 여하를 불문하고 일본으로서는 신라와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었다. ⑻ 68대 後 一 條 天 皇 의 寬 仁 3월7일, 함선 50여척이 갑자기 對 馬 를 습격하고 壹 岐 (이키)에서 약탈하고 지방관리가 죽었다. 이어 4월에는 북부 九 州 를 또 습격하였으나 이를 격퇴하였 다. 이것이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刀 伊 의 賊 亂 이다. 이 습격자는 여진이라는 것이 후에 밝혀졌지만 이와 같은 소요는 신라의 말기부터 고려시대까지 자주 일어났다. 일찍이 일본은 백제로부터 유교, 불교를 받아들였고, 혹은 遣 隋 遣 唐 使 에 의하여 대륙문화
를 수입하였는데, 그 경유지로서의 조선은 일본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고려시 대는 일본과의 국제관계가 밀접하지 않고, 교역이나 약탈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관계가 좋 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신라말, 고려초에 일선간의 관계가 활발하지 못한 원인으로, 남 중국방면과 일본과의 통교가 활발해진 것을 들 수 있다. 이 지방의 공예품 또는 토산품 에 대한 일본 대중의 기호의 전환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고려와 일본의 관계는 몽고의 반 도 제패에 의해 갑작스럽게 전개된다. 당시 몽고에 짓밟힌 고려의 참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며, 고려가 일본에 대하여 情 誼 를 표한 국서는 일본을 대하는 고려의 태도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왜구는 몽고 침공으로부터 60년 후에 소위 왜구가 날뛰는 시대가 출현하고 고려 멸망의 一 因 이 된다. 여하튼 고려 일본 간의 관계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
二. 해구(왜구)와 고려 1. 해구의 창궐 소위 해구가 고려를 침범한 기사는 고려사 고종10년5월조에 倭 金 州 를 침범함 을 처음으로 보지만, 그들의 활동상황이 역사에 실린 것은 충렬왕2년2월 이후이며 그 세력이 날카로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해구는 경상도 거제, 고성반면으로 침입하였으며 고려사에는 合 浦 千 戶 崔 禪 등이 해구 와 싸워 격퇴하였으며 적의 죽음이 300여인 이라 기록되어 있고, 이어 동년5월에는 66척의 배 로 順 天 府 침입, 6월에는 20척으로 합포를 재침하고 계속하여 고성, 회원( 會 源 ), 장흥부도 습 격하였다. 익년에는 113척으로 대거하여 자연도( 紫 燕 島 ), 三 木 島 를 약탈하고 민가를 모조리 태웠으며 남양부, 双 準 縣 도 침범하였다. 고려병들은 침범선을 보면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고 할 정도로 해구는 잔인하였다고 한다. 이후 계속하여 그들의 침범약탈은 행해지고, 몇 해 지 나지 않아 그 화는 경기도에 미쳤고 약탈의 손은 왕도 개성에 이르렀다. 충정왕, 공민왕, 신우 ( 辛 禑 ) 시대를 거치면서 피해는 확대되고 그 범위는 반도 태반에 미쳤다. 고려말 해구에 대한 일본 측 기록도 조금 있다. 그들 해구들은 일본의 중앙정부나 지방관부 의 지시명령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토적 야심은 전혀 없고 오직 반도의 생산물 중 특히 쌀을 얻으려는데 있었으며, 이때의 통례인 남녀의 약취도 크게 행해진 것 같다. 고려 사에 我 人 民 을 虜 掠 한다 인민을 노략하고 沿 海 州 郡 遠 近 이 騷 然 하다 라든지 또 운반선을 습격하여 주로 곡물을 강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구의 지배자들은 서부 일본(주로 九 州 ) 중 대마도주 宗 貞 盛 등 지방 호족들이며, 그들에 의하여 통제되었고 對 馬 島, 壹 岐 島, 內 外 大 島 등이 해구들의 주된 본거지였다. 당시 일본의 武 人 政 府 인 室 町 幕 府 (무로마치 막부)는 전란이 계속되어 국내 생산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고 국력 진흥을 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부일본 주민은 살기 위해 해적이 된 것 같다. 당시 일 본에 사신으로 간 朴 瑞 生 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해적의 수, 본거지, 해적선 수, 각 본거지의 해적을 지배하는 절대권자의 성명 등을 밝히고 있다. 2. 고려의 대책 고려는 내부에 산적된 외교상의 어려운 문제로 정치적 상황이 어지러웠는데 그 틈을 타 해 구의 활동은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고려로서도 이를 방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주 사신을 일 본에 파견하여 해구의 금지를 부탁하고 있다. 사자 파견을 들면 공민왕15년에 李 龍, 金 逸 을 보내어 국서를 제출하였으며, 당시 일본의 室 町 幕 府 의 회서(답장)에는 異 國 을 침략함은 四 國, 九 州 의 해적의 짓이며, 京 都 (일본수도인데 막부를 표현하기도 한다)로서는 엄한 벌을 가할 수 도 없지만, 어쨌든 禁 壓 의 방침은 세울 생각이다 라는 실로 모호한 회서였다. 그 후의 고려 사 자는, 羅 興 儒 1375.2파견 금압의 회신을 받음 安 吉 祥 1377.6파견 금압의 회신을 받음 鄭 夢 周 1377.9파견 九 州 지방관 今 川 了 俊 (이미가와 료슌)은 정몽주를 우대하였으며 1378년 7월 귀국 때 해구가 납치한 수백명의 동포를 송환하였다. 今 川 은 표면상 금압에 진력하였고 고려로서는 그를 크게 신뢰하였다.
그러나 사신을 보내어 해구침입을 금하도록 청하는 일의 성과는 별로 거두지 못하였고, 해 구의 창궐은 계속되고 개성까지 위협 받자 천도까지 논하게 되었다. 경상, 전라 연해의 州 縣 은 침략에 견디지 못하여 육지 깊이 옮기는 자도 있고, 농토의 황폐, 각지의 곡창 운반선의 피해는 극심하여 남쪽의 벼의 운송 단절, 국고는 궁핍해졌다. 이와 같이 어려운 때에 軍 備 의 소홀함은 더욱 심했고 무력으로 해구를 격멸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고려 기록에 不 克 敗 續, 不 戰 百 退, 望 敵 不 取 進 등을 볼 때 실로 통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 이래 외정내란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려 드디어 고려의 정권을 좌 우함에 이른 무장 두 사람이 있었다. 崔 瑩 과 李 成 桂 이다. 최영장군은 철원 사람으로 항상 해 구 토벌에 종군하였으며 굳은 정신과 忠 直 한 장군이었다. 이성계장군은 함남 永 興 사람이다. 영흥은 元 에 속하였으며, 부친 李 子 春 은 고려 유민을 통 치하여 세력이 있었다. 이성계도 咸 州 를 근거로 북변에 사건이 나면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또 해구 토벌에도 성공하여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노장 최영과 武 名 을 다투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元, 明 에 대한 사대정책상 양자는 충돌하고 최영은 축출된다. 그로부터 이성계는 辛 禑 를 폐하고 아들 昌 을 세웠으나 이도 폐하고, 공양왕을 영입하여 제도의 개혁을 단행, 신 세력과 결탁, 드디어 인심을 수람하고 군신 추대의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다. 익년 국호를 조 선으로 고치니 이성계가 곧 조선 태조이다.
三. 이조건국 당초의 일선관계 1. 日 鮮 修 交 로 이성계 곧 태조는 국가의 병으로서 왜구보다 심한 것은 없다 라고 하였다. 왜구 진압에 골 치를 앓았는데, 태조는 일본에 대하여는 수교를 강구함과 함께 왜구 그 자체의 회유를 꾀하 고, 국내적으로는 군비를 정리하여 변경 경비에 노력하였다. 태조 즉위의 해에 이미 교린공작 이 시도되어 승려 각추( 覺 鎚 )가 국서를 가지고 室 町 幕 府 에 파견, 禁 寇 를 청하여 幕 府 將 軍 의 동의를 얻었으며, 해적선의 단속과 피납자 다수의 송환이 이루어졌다. 그 후 사자의 교환은 계속되었다. 그때 막부장군이 조선에 계속 요구한 것이 대장경이며 일부 주기도 하였다. 조선 에서는 막부를 금구의 교섭상대로 하고 그 세력을 과대평가하였으나, 실은 막부의 힘은 지방 호족에까지 정치적 세력을 펴지 못한 유명무실한 중안 武 家 정치집단이었다. 三 代 태조는 일본국왕(막부장군을 칭함)이 위력을 왜구본거지에 행하여 왜구의 해를 그치게 할 수 없다 하면서 그 실력을 의심하였다. 禁 寇 를 목적으로 하여 조선이 사자를 파견한 곳은 九 州 를 중심으로 한 今 川 (이마가와), 大 內 (오우치), 澁 川 (시부가와) 등 지배자들이다. 이 사람 들과의 통교에 대하여는 정몽주와 今 川 了 俊 의 관계는 이미 서술하였다. 이조에 와서도 今 川 와 교섭하는 이익을 알았으며, 태조 말(1393.5)에 사자 金 巨 源, 승려 범명( 梵 明 )이 가자 피납자 650명을 송환하여 금구의 뜻을 알렸다. 1394년7월 사자 崔 龍 蘇 의 귀국시는 피납자 570명을 송환하였다. 今 川 은 중요한 관직인 九 州 探 題 의 직을 면하게 되어 이조와의 외교적 교섭은 1년 정도로써 그치고, 그 후 探 題 의 임명, 해임, 사자의 교환, 금구 등에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九 州 지방의 해구정책은 좋은 편으로 나아갔다. 대마도와 조선과의 관계를 본다. 대마도는 그 위치가 조선에 가깝고 일선통교의 요충이며 고래로 조선과의 교섭이 깊었다. 이조에 와서도 구주의 주민들에 비하여 특수한 친밀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 이 날로 심해져 공양왕원년(1389)에는 100척의 병선으로 대마를 공격한 적도 있는 등 대마도 주 宗 氏 와 고려와의 관계는 대단하지 않았으나, 양 관계가 긴밀히 맺어진 것은 조선시대이며 1389년 이후의 일이다. 대마도는 원래 조그만 섬으로 농지가 적어 농산물의 산출량도 적고 기근에 빠지는 등 주민을 부양하기 어려웠다. 조선은 이를 알기 때문에 대마도가 요구한 쌀, 콩 등을 항상 충분히 주고, 그 代 償 으로 해구의 단속을 의뢰하였다. 이조 건국 당초의 일선 양국 문제의 중심은 해구였다. 조선사자 파견도 이 문제 해결 때문 이며, 쌀, 대장경 등 일본 측 청구에도 조선은 충분히 들어주었다. 태종17년 柳 廷 顯 의 상서 중에 米 布 를 보내는 것은 결코 관계 개선을 위해 한 것이 아니다. 보내지 않으면 변경이 침 범됨으로 어쩔 수 없이 청에 응할 뿐이다 라고 한 것은 그의 진정을 말한 것이다. 당시 일본 은 국민의 해외 발전사상, 특히 무역을 통한 이익추구 등의 사상이 일어나, 조선만으로는 이 익추구를 이룰 수 없고, 중국 등 근해를 약탈하는 양상으로 되었으나 결국 그 문제가 중심이 되어 일선양국의 수교는 점차 그 양상을 정리해 나갔다. 일선관계 특히 대마와 조선과의 관계는 이해 편이 때문에 근근히 평화를 유지하고 있으므 로, 무슨 원인이 있으면 이것이 파기되는 것은 당연했다. 후에 말할 應 永 外 寇 가 바로 그것이 다. 2. 해구 종식( 終 熄 )되다.
혹독한 왜구도 조선의 삼대왕 태종8년을 고비로 거의 끝났다. 그 이유는 대마의 禁 寇 策 과 조선의 외교정책과 해구자체에 대한 회유책, 조선의 군비충실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에서도 태조 정조를 거쳐 태조에 이르게 되자 해구의 진정한 목적을 알게 되었다. 즉 해구는 영토적 야심, 정치적 특수 의도는 없고 단지 생활의 자료를 얻으려고 來 寇 하는 것이며, 만약 그 희망 대로 교역을 허락하고 의복을 준다면 감히 난동하지 않을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 하여 조선에서는 먼저 일본에서 보내는 토산물 獻 上 을 구실로 보낸 무역선에 그때마다 막대한 양의 쌀, 마포, 虎 皮, 인삼 등을 실어 보내어 일본의 환심을 얻으려고 했다. 그래서 일본은 조 선 사자가 오면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한다. 태조 때에는 조선의 행사에 소위 해구의 본거지인 對 馬, 壹 岐, 博 多 (하카다) 등에서 많은 일본인이 참석한 예가 있다. 고려시대부터 幕 府 및 豪 族 들의 간청 및 각종의 회유책 외에 해구 진압에 효과가 있었던 것은 역시 군비의 충실이다. 조선 태조는 일찍이 金 士 衡 에게 명하여 대마도 공격의 계획까지 세운 적이 있었으나, 그 후 공세는 취하지 않고 오직 방어에만 힘썼다. 임진왜란 때 일본 수 군을 파멸시킨 조선수군은 고려조 말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辛 禑 9 년11월에 鄭 地 라는 사람의 건의에 의하여 各 道 에 병선을 만들도록 명한 것이 수군 창설의 효 시라고 한다. 이조에 들어와서는 태조 때 수군의 모습이 갖추어지고 태종시대에 그 정비를 보 게 되었다. 실록에 근래 왜구가 그친 것은 실로 병선의 힘에 의한다(태조3). 근년 바다가 조 용해진 것은 오직 戰 艦 의 공이다(태조6) 등 태조8년에 군비의 확장을 행한 사실이 보이며, 각 도의 병선 수를 보면 경기도 76척, 전라도 111척, 경상도 187척으로 증가되었다. 수군의 직제 도 정비되고 당시 수군 수도 5만5천명으로 되어 있다. 고려말에 崔 茂 宣 이 화약제조법을 알고 화약을 실전에 사용토록 건의한바 조정에서 받아들여 이후 制 敵 之 具 로 중요하게 썼다고 한다. 이렇게 수군의 정비에도 불구하고 날쌘 왜구의 침 입을 방어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왜적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음은 왜구 드디어 그 세력 이 꺼지다 에서 알 수 있다. 四. 應 永 의 外 寇 1. 외구의 전말( 外 寇 는 조선수군을 말함) 일본 응영26년6월20일(서기1419년6월20일) 대마도 豆 知 浦 ( 淺 茅 灣 )에 돌연히 조선군 17000 명이 습격하였다. 島 主 宗 貞 盛 이하 역전하여 얼마 후에 이를 격퇴하였다. 이를 일본역사에서 는 응영의 외구(응영년에 일어난 외구침입)라 한다. 이때 조선의 대( 對 )해구정책은 점차 효력 을 발생하여 태종8년(1408)부터 해구의 침략은 그 수가 줄고, 그 후 10년간은 연해가 편안하 여 조선도 안심할 수 있게 되었는데, 1418년5월 壹 岐, 대마의 무리들이 32척의 배를 타고 명 나라 변경에 가는 도중 충청도 비인현( 庇 仁 縣 )의 도두음곶( 都 豆 音 串 )에 침입하고 또 황해도 해 주의 연평곶(연평도)에도 침범했다. 이때의 모양을 실록에 성 밖의 민가를 약탈하고 닭, 개는 모두 잡아 없애다 라는 것을 보아도 그 피해를 알 수 있다. 이 보고에 접한 태종은 분연히 일 어나 대마도 공격을 단호히 외쳤고 국가 흥망이 이에 있다고 하였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여 상왕으로 있었으나 실제는 정치를 잡고 병마의 권도 그의 손안에 있었다. 조선은, 해구의 근거지는 대마라고 생각하였으므로 태종은 대마를 정벌할 것을 외치 게 한 것이다. 태종의 지시에 의해 조정의 의견은 일치하고 6월 대군을 발진하게 하였다. 조 선에서는 이를 己 亥 東 征 이라 부른다.
태종 때에 10년이나 조용했던 변해침범이 왜 갑자기 일어나 비인현을 침범하였는가. 그 직 접적인 원인에 대하여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일본국내의 정치적 사정 등을 논급하고 있다. 기 해동정에 대한 당시의 조선 측 사정을 약술한다. 응영26년(1419)5월13일 비인현 침공의 상세 한 보고가 도달한 날 태종, 세종은 대신들을 소집, 대마도 공격의 방법을 논의하고 14일 다시 논의하였다. 그때 세종은 시종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고 여러 대신도 다수 반대하였으나, 趙 末 生 은 혼자 강경한 태종의 생각에 찬성하니 드디어 대마토벌을 단행토록 하였다. 태종은 강한 결의를 표하였다. 이렇게 하여 李 從 茂 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하고 이하 여러 장장의 부서를 정하고, 삼도의 병선 200여척을 동원 견내량에 집합토록 하였다. 다음으로 간첩의 단속과 各 浦 의 방비를 엄 하게 하고, 경상도 각포에 머물고 있는 九 州 이외의 일본 使 者 를 모두 구류하고 병선, 병졸을 정비 점검하여 토벌의 준비는 완성하였다. 5월16일 朴 礎, 禹 博 이 먼저 출발하고 23일 백령도 에서 前 衛 戰 이 있었고 일본 선박 한 척이 잡혔다. 25일 도통사 유정현이 경성을 출발하였다. 태종, 세종이 친히 이들을 전송하였다. 29일 도체찰사 이종무로 하여금 書 를 대마도주 宗 貞 盛 에게 보내어 정벌의 이유를 고하게 하고, 6월 9일 태종은 征 戰 을 중외에 고하고, 12일 이종무 는 九 節 度 使 를 거제도에 이르게 하고 19일 드디어 대마로 향발하였다. 병선227척, 병졸 17,285명, 所 持 糧 食 65일분이었다. 6월25일 낮 토벌군은 대거 豆 知 浦 에 이르렀다. 대마도민 들은 조선군의 침공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고, 어선들이 돌아오는 줄 알고 환 영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군은 상륙하여 항복한 왜인으로 하여금 도주에게 문서를 보냈으나 회답이 없었다. 따라서 섬 안을 수색하고 왜인을 압도하였으며 주둔하기 위해 훈내 곶( 訓 乃 串 )에 목책을 세웠다. 26일 이종무는 尼 老 郡 에 이르러 삼군을 상륙시켰으나 복병을 만나 싸움이 있고 전사자를 냈 다. 이때의 양상은 燃 黎 室 記 述 (권3)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처음 불의의 내습으로 대승리를 얻은 듯 보였으나, 그 후 진용을 정비한 대마군의 반격도 있었다고 하여 7월에는 항상 태풍이 있다 라는 말을 구실로 삼아 戰 線 을 돌려 7월6일에 환국하였다고 되어 있다. 유정현의 보고에 의하면 전사자 188명이라고 한다. 조선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 못하고 환국하였다. 그 후 再 伐 의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상왕 태종은 중지의 뜻을 피력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2. 외구(조선군 침공)의 영향 사대사상이 강하고 이웃나라끼리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조선이 무엇 때문에 대마토벌이라는 대사를 감행했는가. 그 이유를 몇 가지 들면,
⑴ 원래 조선은 대마를 일본 영토가 아닌 조선 영토이며 경상도에 속해 있으나 단지 멀리 해 상에 있으므로 政 令 이 잘 통하지 않을 뿐이라면서 자국의 영토에서 무리지어 해구가 된 자를 토벌함은 국가 보위 상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⑵ 대마도 토벌은 태종의 주장 이전 고려조 말기 이래 이미 세 번 계획된 것으로 실로 역대 의 현안이었다. 단지 태종이 가장 토벌의 의사가 강하였으며, 왜구 섬멸은 쉬우나 단지 백성을 위해 隱 忍 하고 있다고 하며 토벌은 기회가 되면 필연적으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 하였다. 五. 일선관계의 一 轉 1. 막부 및 구주의 호족 諸 氏 와 조선과의 관계 응영외구에 의하여 대마와 조선의 통교는 일시 두절상태에 놓였으나 원래 조선은 막부 및 각지 호족에 대하여는 최초부터 타의가 없었으므로 토벌전 전후에 걸쳐 그들과의 관계는 표면 상 하등의 변화는 없었다. 대마 토벌에 대한 언급도 없었고 통교도 정상적이었다. 곧 대마 이 외는 통교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막부장군은 계속 대장경을 요구하였으나 세종대왕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사 실은 약간 부를 증여하고 있다. 조선은 교린의 의로 사신의 왕래가 자주 있었고, 옛날처럼 해 구의 금압을 요구하는 식의 어리석은 통교가 아닌 떳떳한 통교의 자세를 취하였다(세종6년) 2. 대마와 조선과의 통교 복구 己 亥 東 征 후 대마에 대한 선후책의 여하는 조선의 큰 골칫거리였다. 기해동정은 실패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조선 將 士 로 하여금 대마에의 재 정벌의 용기를 잃게 하고, 국민들도 전화 를 두려워하며 인심의 부동을 볼 수 있었다. 태종상왕은 대마토벌의 무익함을 인식하였으며, 일본의 복수전도 생각하기에 이르러 이에 대마와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침을 세우게 된다. 한 편 대마도로서는 조선과의 단교가 경제적 치명상을 입게 됨으로, 조선의 재침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조선과 평화로이 문제의 해결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세종7년 즉 동정군 귀환 후 곧 태 종은 書 를 宗 貞 盛 에게 보내어 화평의 교섭을 권하였던 바 宗 은 회신의 사신을 보내어 예조판 서를 통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그 사이 대마에 관한 영토문제, 왜구문제 등 교섭도 많았으나 여하튼 교섭의 결과는 전후 4,5년 내에 양자의 관계가 표면화 되었다. 부산포( 富 山 浦 =현 부 산)를 개항하는 등 무역이 허가된 것은 대마에게 부여한 조선의 선심이었다. 부산포 개항 후 대마 사람들은 개항을 늘릴 것을 청함에, 통교 제한지를 넓힌다는 뜻으로 세종8년 조선에서는 울산 염포를 개항장으로 인정함으로써, 이에 부산포, 乃 而 浦, 鹽 浦 의 소위 삼포의 개항이 이 루어진다. 六. 嘉 吉 條 約 ( 癸 亥 約 條 ) 대마가 日 鮮 간의 통교 매개체가 되어 대마해협의 교통권을 잡은 것은 前 後 400년에 걸쳐 있다. 그 사이 피아의 통교상 많은 교섭, 많은 사건들이 야기되어 조약의 체결도 몇 번이나 되지만, 그 최초의 조약으로 역사상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가길조약이며 조선에서는 계해약조
라고 부른다. 조선과 일본과의 통교를 정리하기 위해 宗 氏 에게 文 引 ( 宗 氏 가 발행하는 渡 航 證 ) 의 특권을 주고, 혹은 개항지, 어조소( 漁 釣 所 =낚시터)를 설치하고 서로 어시장을 허락하였으며 결과는 宗 氏 측 선박의 내왕이 빈번하게 되었다. 그 중에는 개항지에 와서 거류하는 자도 생겨 조선으로서는 그 처치가 곤란하게 되었다. 세종11년3월에는 내이포에 재류하는 일본인으로부 터 징세하자는 안까지 나올 정도로 체류 일인의 수는 늘어갔다. 세종17년4월에 乃 而 浦 恒 居 倭 人 600여명, 富 山 浦 亦 然 이라 하였고, 세종18년에는 처자를 데리고 거류를 원하는 자 거의 500명이라 고 되어 있다. 삼포 중 내이포 거류를 원하는 자는 매년 그 수가 증가되었는데, 그 것은 대마는 원래 쌀이 적고 생활이 어려워 도민이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으로서는 그 수를 줄이려하나 갑자기 이를 강요하면 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려워하 고 감히 실행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 거류수가 늘고 있음을 대마의 정책인 줄 생각하 기도 하여 宗 氏 에게 서를 보내 대책 강구를 통고하기도 하였으나 일인의 도항자는 여전히 많 으며 재류하는 자도 많아졌다. 이에 세종18년 조선은 부득이 삼포 거류의 일본인을 퇴출시키 는 강경수단을 취하게 되었다. 이 통첩을 받은 宗 氏 는 어쩔 수없이 조선의 통첩에 응하게 되 나 오직 특수관계에 있는 60명은 각포에 체류하게 된다. 그런데 60명 이외 귀환을 거부하는 자가 206명 있었는데 그들도 여전히 예외적으로 거주를 허락받았다.
가길조약의 성립 세종대왕25년2월 하순 卞 孝 文 이 정사, 尹 仁 甫 는 부사, 서장관에 申 叔 舟 등이 일본의 초청 사로 한성을 출발하였다. 일찍이 대마도주 宗 貞 盛 의 使 送 船 을 제한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고려 를 하고 있었던 조선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다년의 현안을 해결하려고 문서를 가지고 변효문 등을 대마에 들리도록 하였다. 이에 의하여 숙원을 풀게 되는데 가길조약 성립의 경위 및 내 용에 앞서 그 체결된 시일에 대하여 고찰한다. 세종25년2월 하순 한성 출발 동 년4월 대마 도착 동 년6월 경도 입경(일본 수도) 동 년6월19일 막부장군 만남 변효문이 4월에 대마에 도착했다고 하면 조약 체결을 추적할 수 있으나, 대마 도착의 시기 가 명기되지 않았으므로 조약 체결에 대한 논의가 지금도 있으나,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세종 25년 癸 亥 (일본 嘉 吉 3년4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가길조약의 조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견선( 歲 遣 船 =사송선) 규정에 관한 것이라 한다. 실 록 세종26년윤7월조에 대마도주에게 보낸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전후에 있어서의 실제의 통교상황은, 대마도주 宗 貞 盛 의 사송선 100척, 대마에서 보낸 내헌( 來 獻 )의 도수 18회, 그리고 가길3년 에 대마에서 보낸 使 者 의 도수 18회에 이른다. 通 交 가 잘 된 것 같다. 가길조약 체결 후의 사 송선은 4척으로 격감하였다. 조선으로서는 사송선 문제 해결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후 사송선 수를 20척만 늘려달라는 청을 조선은 거부한다. 사송선(세견선)은 대마의 기근을 벗어나게 하 는 도구임에 틀림없고, 대마의 민중들도 島 主 처럼 세견선 척수를 늘려달라고 한 적이 있다. * 이상으로 본서의 개략을 소개하였으나, 우리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다. 저자는 일 본 지식층이 상식으로라도 이 역사적 사실을 알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