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Unit: Basic Research to Rebuild Japanese Philosophy 이노우에 엔료 井上円了 아 동아시아 (1) - 이노우에 엔료의 조선순강 朝鮮巡講 - 미우라 세쓰오 三浦節夫 1선행연구 이노우에 엔료 ( 井上円了 ) 는 61 년의 생애 중 2 번의 조선순강 ( 朝鮮巡講 ) 을 했다 첫 번째는 메 이지 ( 明治 ) 39 년 (1906) 에 실시한 것으로 満韓紀行 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었다 (1) 두 번째는 다이쇼 ( 大正 ) 5 년 (1916) 에 실시한 것으로서 朝鮮巡講第 1 回 ( 조선 서부와 중부 ) 日誌, 朝鮮 巡講第 2 回 ( 남부와 동부 ) 日誌, 朝鮮巡講 第 3 回 ( 북부 ) 日誌 로 3 회로 나누어 기록되었다 (2) 이 2 번의 조선순강에 대해서는 이미 2 편의 先行研究 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박경식 ( 朴慶植 ) 의 井 上円了 의 朝鮮巡講 의 歴史的背景 이고 그 歴史的位置 에 대해 이다 (4) (3), 다른 하나는 허지향 ( 許智香 ) 의 井上円了 와 朝鮮巡講, 재일조선인 ( 在日朝鮮人 ) 이자 역사연구자였던 박경식의 연구는 엔료의 두 차례의 조선순강에 대 해, 우선 그 각각의 역사적ㆍ정치적인 배경을 들고 있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리고 엔료의 순강일지 ( 巡講日誌 ) 의 내용을 분석해서 그 문제점을 밝히고, 특히 도쿠토미 로카 ( 徳富蘆花 ) 의 조선에 대 한 견해와 대비시켜 엔료의 조선순강을 평가하였다 한편 철학이나 사상사의 연구자인 허지향 ( 許智香 ) 의 연구는 엔료의 순강 가운데 두 번째 순강에 대해, 당시 잡지에 게재된 강연내용을 분석한 점에 특징이 있다 또 박경식의 론문과 다른 점은 엔료 의 생애의 업적을 지탱한 사상과 朝鮮巡講의 사상을 일관된 것으로 규정하려고 했던 점이다 그러나 필자의 엔료에 관한 연구의 지금까지의 견지에서 보면 허지향의 론문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지향의 논문에서는 본문 시작부분에서 실제로 메이지 ( 明治 ) 시대의 철학수용사 ( 哲学受容史 ) 에서 이노우에 엔료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평가되어 왔다 (5) 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 시바타 다카유키 ( 柴田隆行 ) 는 저서 哲学史成 立의 現場 에서 엔료의 哲学要領 앞 부분을 거론하여 이 부분은 일본인의 손으로 쓴 최초의 서양철학 통사 ( 通史 ) 이다 (6) 라고 하며, 고사카 구니쓰구 ( 小坂国継 ) 는 저서 메이지 철학의 연구 에서 메이지철학사에서 순정철학 ( 純 正哲学 ) ( 형이상학 ) 이 나타난 것은 겨우 메이지 20 년대 이후이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로서는 이 누오에 엔료 ( 井上円了, 1858-1919), 이누우에 데쓰지로 ( 井上哲次郎, 1855-1944), 기요자와 만시 ( 清沢満之, 1863-1903), 니시다 기타로 ( 西田幾多郎, 1870-1945) 의 이름을 들을 수 있다 (7) 고 지적한다 그것을 보면 엔료의 업적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 허지향의 론문에서는 이노우에 엔료는 철학 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근대 천황제를 지탱하는 전통 이데올로기 로서의 불교 를 시도한 점이나 철학관 ( 哲学館 ) 을 바탕으로 한 전국수신교 회운동 ( 全国修身教会運動 ) 을 전개한 점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관학 ( 官学 ) 아카데미 로서의 철 학 과 국가와의 관계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했던 지식인이었다 (8) 고 하며, 본고에서는 국가 에 의한 학문의 제도화의 바깥쪽에 있으면서도, 아니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의미에서의 확 장 사업에 정열적으로 상관했었던 이노우에 엔료에 주목한다 여기서의 두 가지 의미로서의 확장 Journal of International Philosophy, No4 2015 215
이란 그의 철학당 ( 哲学堂 ) 과 제국 일본의 식민지주의를 가리킨다 (9) 고 한다 허지향의 논문이 말한 전통 이데올로기 로서의 불교 혹은 승려이기 때문에 불교의 이데올로 그 였다는 평가에 관해서는 불교학자인 타무라 고유 ( 田村晃祐 ) 의 저서 近代日本의 仏教者 들 에서의 불교의 본질을 구한 (10) 첫 번째 대표자라는 것과 다르다 혹은 허지향의 철학관 ( 哲学 館 ) 을 바탕으로 한 전국수신교회운동 이란, 사실과 달리 엔료가 본격적으로 수신교회운동을 전개 한 것은 철학관 대학에서 은퇴한 메이지 39 년 (1906) 이후의 일이다 더구나 허지향이 말한 철학당 ( 哲学堂 ) 의 확장 은 수신교회운동에서의 주된 목적 ( 수신에 의한 사회교육 ) 을 계승하는 것으로 서, 철학당의 확장은 그 부수적인 목적이었다고 생각된다 ( 허지향은 엔료의 철학관대학의 은퇴의 원 인인 문부성과 대립한 철학관 사건 ( 哲学館事件 ) 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 허지향은 논문의 결론으로 이상으로 본고에서는 이노우에 엔료의 조선순강 에 관한 자료를 들 고, 그의 철학에 대한 인식과 국가주의적인 활동의 관련성에 관해 고찰하였다 (11), 그가 실현하려는 철학은 이러한 분투활동 ( 奮闘活動 ) 하는 학 ( 学 ) 이었다 철학관 설립에서 수신교회운동까지 동 경에서 조선, 그리고 만주까지 그는 생애에 걸쳐서 참으로 분투활동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투활동 과는 따로 그의 발화 ( 発話 ) 의 입장을 물어야 하는 것을 지적함으로 본고를 마치고 싶 다 (12) 고 말했다 라이너 슐쩌 (Rainer Schulzer) 는 동양대학에서의 이노우에 엔료 연구 (13) 중에서 허지향의 론문 등을 言及하면서 엔료의 국가주의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한편으로, 철학관의 창립에 관한 엔료의 사상을 철학관개설의 지취 와 철학관 개관지취 (14) 를 바탕으로 밝히고 그 사상이 철학에 있었음을 논증했다 그러나 허지향은 철학관의 개관식 에서의 연설이자 라이너 슐쩌가 거론한 철학 관 개관지취 를 분석하여 그 뒷면에는 보다 현실적인 목적과 과제가 있었다, 또 하나의 현실적 인 과제는 제국대학과의 관계에 있었다 당시 서양철학을 정규과정으로 교육하는 유일한 기관이었던 제국대학과 비교하여 학생모집을 의식하고 있던 그는 세간일반 에 눈을 돌린다, 이처럼 이노우 에 엔료는 철학관을 창립한 시점부터 동본원사 ( 東本願寺 ) 에 대한 자기의 위치와 사립학교의 사회적 지위에 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15) 고 한다 이 분석에는 엔료 철학관을 창립했을 때 공 리성 ( 功利性 ) 이나 실리성 ( 實利性 ) 을 뒷면 에서 중시했다고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 에 대해서는 순수하게 철학적 인식의 중요성으로 철학관을 창립했다는 라이너 슐쩌의 논문과 정면으 로 대립한다 지금까지 선행연구를 검토해 왔는데 다음에 엔료의 조선순강를 들고 싶다 또한 조선순강에 대해서는 엔료 자신의 일지 이외에도, 본지에 발표된 사토 아쓰시 ( 佐藤厚 ) 의 이노우에 엔료의 조선순강에 관한 자료 식민지기 조선발행 기사를 중심으로 를 참조했다 2제 1 회 만한기행 ( 満韓紀行 ) 엔료가 조선에서 강연활동을 하기 전에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엔료의 조선에 관 한 견해를 보여 주는 논고는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엔료는 메이지 20 년 (1887) 에 현재의 동양대 학의 전신인 사립학교 철학관 을 창립했다 이 창립사업을 뒤받침한 것을 철학관의 세 은인 ( 恩 人 ) 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세 은인이란 가토 히로유키 ( 加藤弘之 ), 데라다 후쿠주 ( 寺田福寿 ), 가쓰 가이슈 ( 勝海舟 ) 이다 이 가운데 데라다 후쿠주는 엔료와 같은 동본원사의 승려로 경응의숙 ( 慶応義塾 ) 에서 배우고 후쿠자와 유키치 ( 福沢諭吉 ) 의 신뢰를 얻었던 인물이다 (16) 이 데라다 후쿠주는 조선의 근대화에 노력한 김옥균 ( 金玉均 ) 을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다 (17) 김옥균은 초기 개화파의 일익을 담당한 동지 스님인 이동인 ( 李東仁, -1881) 을 1878 년 6 월에 몰래 일본에 파견했다 동본원사 부산별원 ( 釜山別院 ) 오쿠무라 엔신 ( 奥村円心 ) 의 소개로 쿄토의 동본원사를 방문한 이동인은 그 후 1880 년 3 월, 토쿄의 동본원사 별원으로 옮겨 승려 데라다 ( 이시 216 이노우에 엔료 井上円了 아 동아시아 (1) - 이노우에 엔료의 조선순 강 朝鮮巡講 -
가메 ) 후쿠주 ( 寺田 [ 石亀 ] 福寿 ) 를 소개받아, 그 데라다 ( 寺田 ) 를 통해서 후쿠자와 ( 福沢 ) 와 연 락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오사카 경응의숙에서 배운 경험이 있는 데라다 ( 寺田 ) 는 그 인연으로 이동 인을 후쿠자와 ( 福沢 ) 에게 소개했고, 그 후 잠시 이동인은 후쿠자와 ( 福沢 ) 의 집을 거점으로 일본 의 사정을 시찰하고 1880 년 9 월, 조선에 귀국한 후 그 견문을 김옥균에게 보고했다 이러한 사전에 준비를 한 후 1882 년에 김옥균은 제 1 차 일본방문을 실시하고 도중에 교토까지 먼 길을 마중 나온 데라다 후쿠주 ( 寺田福寿 ) 와 함께 같은 해 6 월 도쿄에 가고, 도쿄에서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시설을 시찰했다 이 때 김옥균은 미타 ( 三田 ) 의 후쿠자와 ( 福沢 ) 자택을 방문했 다 이것이 후쿠자와 ( 福沢 ) 와 金玉均의 첫 대면이었다 그런데 이 해의 3 월 11 일 時事新報 사 설에 조선의 교제를 논한다 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조선론 ( 朝鮮論 ) 이 게재되었다 후쿠자와의 조 선문제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높아지는 시기이다 (18) 1884 년 12 월 조선의 혁신에 몰두하는 김옥균은 일본 공사 ( 公使 ) 의 協力을 얻어 민씨정권을 타도 하는 쿠데타 ( 甲申事変 ) 를 일으켰는데,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김옥균의 망명생활을후쿠자와 나 데라다는 지원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을 한 데라다 ( 寺田 ) 는 엔료에게 조선문제를 전하지 않았을까? 엔료의 조선관의 형성 에 데라다가 관계했을 가능성은 생각될 수 없을까? 엔료는 메이지 39 년 (1906) 10 월말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 강연여행을 소개하기 전에 당시의 일본과 한국의 정치적 정세를 소개해 두고자 한다 박경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05 年 7 月 日本 은 미국과 가쓰라 - 태프트 밀약 을 같은 해 8 월에는 제 2 차일영동맹 을 맺고 영 미와의 군사동맹관계를 만들어 갔다 같은 해 9 월 노일강화조약 이 체결되고 일본은 한 국에서의 정치상, 경제상, 군사상의 탁월한 이권을 보유하는 것, 그리고 일본이 한국에서의 필요로 인정한 지도, 보호 및 감리조치 ( 監理措置 ) 를 취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러시아에 인 정시켰다 같은 해 10 월 일본은 한국보호권확립의 건 의 각의결정 ( 같은 해 4 월 ) 을 바탕으로 아울러 그 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을 하고, 이를 근거로 11 월 17 일에 第 2 차일한협약 ( 을사 5 조약, 한국보호 조약 ) 을 무력을 배경으로 강제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일본에 빼앗기고, 나아 가 한국을 보호국 으로 하여 내정까지 감독하는 한국총감부의 설치를 규정했다 이것은 일본군에 의한 한성부, 왕궁 등의 제압 아래에서 한국황제, 한국정부를 무력협박하고 강제적으로 체결시킨 것 으로 국제법상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구체적으로 진행 되었다 1906 년 2 월 전년도 말에 결정된 한국총감부가 설치되고, 3 월에 이토 히로부미 ( 伊藤博文 ) 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통감은 천황에 직례하고 한국의 정치 군사 등의 관한 절대적인 권한이 부 여되어, 한국의 내정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해 갔다 이렇게 해서 한국정부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권 은 한국총감부가 장악해 갔다 (19) 엔료의 첫 번째의 만한기행 은 이러한 일본의 한국총감부 초기에 실시했는데, 이 강연여행은 계화 적으로 실시한 것이 아니었디 메이지 39 년 (1906) 은 엔료가 철학관대학장을 은퇴하고 수신교회운 동에 일교육자로서 몰투하고 전국순강을 시작한 해이다 이 해의 4 회째 순강은 7 월 8 일부터 시작하 여 10 월 27 일까지 국내를 순강하고, 그 계속으로서 한국에 건너간 것이다 도쿄 ( 東京 ) 에서 시코 쿠 ( 四国 ), 시코쿠 ( 四国 ) 에서 사가현 ( 佐賀県 ) 을 순강했다 그러부터 조선에 건너갔습니다 이 것은 여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가사키 ( 長崎 ) 까지 간 김에 조금 더 가려고 생각해서 조선에 건너간 것입니다 조선에 건너가면 한 발 더 나아가 만주에 들어가려고 생각했습니다 (20) 10 월 28 일에 한국 부산에 배로 도착한 엔료는 한국의 산은 나무도 없고 풀도 없고, 적토를 노출 한다 정말 살풍경 ( 殺風景 ) 하다 고 느꼈다 숙소는 본원사 별원이었다 필자는 본고의 말미에 엔 료의 일지를 바탕으로 해서 조선순강일람 을 작성했는데, 부산에는 10 월 28 일부터 11 월 1 일까지 6 일간 체재하고 담화 연설 강연을 5 회 진행했다 다음의 경성에는 11 월 2 일부터 6 일까지 5 일 Journal of International Philosophy, No4 2015 217
간 체재하고 2 회 연설했다 경성에서 인천으로 옮겨 11 월 6 일부터 7 일까지 2 일간 체재하고 2 회 연 설했다 마지막으로 평양에서는 11 월 8 일부터 9 일의 이틀간 체재하고 1 회 강연했다 그리고 11 월 10 일에 신의주역에서 만주로 향했다 한국체재는 2 주간인데 연설 강연은 합계 11 회였다 이 체 재의 일지를 분석한 박경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산에서는 철학관 출신의 아라나미 헤이지로 ( 荒波平治郎 ) 가 교장을 맡은 개성학교에서 담화를 나누는데, 동교 ( 同校 ) 의 본교 ( 本校 ) 분교 ( 分校 ) 에는 한국인 학생이 300 여명이나 있고 정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라고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아라나미 ( 荒波 ) 교장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의 한시 ( 漢詩 ) 를 보냈는데, 일본의 조선침략에 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년신고 ( 多年辛苦 ) 끝에 차례차례로 그 공 ( 功 ) 은 결실했다 문명 ( 文明 ) 을 내걸고, 월일 ( 日月 ) 을 새롭게 하고, 팔도 ( 八道 ) 의 낡은 산천 ( 山川 ) 을 비추는 것이다 [ 漢詩 - 인용자 ] 부산에서 경성에 이르는 도중에 한국인의 가옥에 대해 전에 들은 바와 같이 돼지우리 ( 豚小屋 ) 와 다를 바가 없고, 미개야만 ( 未開野蛮 ) 의 주택이지만 다만 놀라운 것은 그런 작은 가옥에 살면서 사람의 체격이 의외로 큰 것이다 나무를 보고 숲을 못 보는 편견과 우월감에서 동정을 나타내고 있다 요컨대 한국인은 수백년간 아무런 진보도 없고 오래 악정 아래에 억압당하고 오직 구관 ( 舊慣 ) 을 고수해서 하루살이 생활의 경계를 보낼 뿐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는 정말 불쌍히 여겼 다 그런 사람에게 인간에게는 영지영능 ( 靈 知 靈 能 ) 이 있는 것을 가르치고 인격에 대한 것, 천직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저는 일본인의 임무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고 해서 일본의 조선침략과 식 민지지배를 합리화하는 견해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에 조선인의 도덕에 대해 조선인은 일반적으로 도덕의 관념이 모자라다는 것을 전해 듣고 있 다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즉 오늘날까지 교육도 종교도 결여되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고 했는데, 이것은 편견이 가장 큰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노우에의 발언은 아무런 조사도 없이 남의 편견을 받아 옮기고 있을 뿐이다 이 발언은 일본의 침략 자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노우에는 11 월 2 일 경성에 도착, 다음 날 3 일 한국통감부 총무장관인 쓰루하라 데이키치 ( 鶴 原貞吉 ), 부장인 기우치 주시로 ( 木内重四郎 ), 이사관인 미우라 야고로 ( 三浦弥五郎 ), 군정부의 구 로다 다쿠마 ( 黒田太久馬 ) 등을 방문, 당일은 천장절 ( 天長節 ) ( 메이지 천황의 생신 ) 이라 다음 과 같은 천황숭배사상, 조선인에게의 황은 ( 皇恩 ) 의 혜택 을 말하고 있지만 일본인은 몰라도 조선 인에게 천황은 불구대천 ( 不倶戴天 ) 의 적이었다 이노우에의 사상에는 이 천황숭배사상이 근간에 있는 것일까? / 천장절인 오늘은 조선에 기쁨의 얼굴이 많고, 이 이국도 역시 우리 황은의 혜택을 받 고 있는 것이다 아침부터 천황의 장수를 축하하려고 요리는 청국 ( 清国 ) 과 조선, 술은 일본주로 축 연을 열었다 [ 漢詩 인용자 ] 라고 피상적인 견해로 시종일관한다 평양에서 읊은 한시의 일부에는 한국의 사람은 함부로 의례를 자랑하는데, 어떤 냄새가 집에 가득하고 그 옷도 비린내가 난다 [ 漢詩 인용자 ] (21) 엔료는 11 월 10 일에 만주로 향하고 11 월 29 일에 도쿄로 돌아왔다 엔료의 조선에 대한 견해는 이미 박경식이 지적한 것 처럼 청일전쟁 노일전쟁의 전승국의 것이고 일본의 한국통감부라는 지배자 쪽에 선 것이었다 3제 2 회 조선순강 엔료는 1918 년 즉 다이쇼 ( 大正 ) 7 년 5 월, 조선총독부에서 13 도국민도덕강화촉탁의 명을 배수 ( 拝受 ) 하여 24 일 ( 금요일 ) 맑은 아침, 8 시반의 특급을 타고 선지로 향 (22) 했다 제 1 회의 조선에서의 강연부터 12 년이 경과했고 이번은 지난번처럼 여행의 속편이 아니라 조선총독 부에서의 의뢰라는 명확한 목적의식과 계화을 가진 것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과 조선의 정치적관계에 218 이노우에 엔료 井上円了 아 동아시아 (1) - 이노우에 엔료의 조선순 강 朝鮮巡講 -
대해 박경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같은 해 [1905 년 인용자 ] 8 월 16 일, 데라우치 ( 寺内 ) 통감은 이완용 내각과 병합조약안, 병합각서 를 수교, 각의에서는 학부대신 이용직이 반대했지만 8 월 22 일에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이 이완용, 데라우치의 서명 아래에 조인됐다 그러나 조선인민의 반대를 두려워서 8 월 25 일 경무총 감부에서는 정치적집회, 옥외민중집회를 금지하는 집회취체에 관한 건 을 공포하고, 8 월 29 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을 공포했다 동시에 대한제국은 조선 이 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됐다 한국병합조약 서두는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하는 바 이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고 확신하여 이며 그 제 1 조에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전부에 관한 일절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제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 2 조에 일본국 황제폐하는 앞의 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한국을 완전히 일본제국에 병합하 는 것을 승낙한다 고 했다 이 병합조약 은 무력의 위협 아래에서 강제된 제 1 차, 제 2 차, 제 3 차 일한협약 을 토태로 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완전한 무력 점령에 다름이 아니었고, 이것 또 한 국제법상 무효라고 할 수 있겠다 (23) 1910 년 이전 일본의 상업자본가가 조선의 도시 개항장에 진출하여 조선인상업을 압박했다 일본 상인은 사금, 모피, 인참, 미곡 등을 싸게 사고, 일본에서 면포, 약품, 잡화 등을 비싸게 팔았다 일 본의 잡화상, 여관 요리집, 고리대금업자가 각 도시에 출현했다 그리고 일본자본은 경부선 등의 주요철도의 부설과 재정고문 메카타 다네타로 ( 目賀田種太郎 ) 에 의한 한국에서의 화폐정리를 강행 하고, 한국의 화폐제도를 일본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그 실무자인 제일은행이 한국의 중앙금융기관이 되고 제일은행권을 태환권 ( 兌換券 ) 으로 무제한으로 발행, 한국지배의 경제적기반을 이룩했다 일본자본은 초기에 정미업, 식품가공업, 피혁 연초제조업에 진출했다 일본은 1910 년 12 월에 회사령 ( 會社令 ) 을 공포해서 조선에서의 회사의 설립을 허가제로 해서 조선공업의 발전을 억압했 다 조선은 쌀을 중심으로 한 식료품 및 공업원료의 공급지, 일본상품의 판매시장으로 1910-20 년대 에는 약탈무역에 의한 식민지수탈이 강행돼 갔다 (24) 이러한 시기에 엔료는 조선 전토를 순강했다 5 월 25 일에 시모노세키 ( 下関 ) 부터 조선의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경성으로 향했다 다음 날 경성에 도착한 엔료는 저는 메이지 39 년 총감부 시대 에 처음으로 조선을 역유 ( 歴遊 ) 했는데 그 당시에 비하면 경성만으로도 별천지의 모습을 보이고, 우 편국 부근은 동양의 작은 파리를 연상하게 한다 (25) 고 일지에 써있는데, 박경식은 조선총독부에 의 한 무단정치 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26) 고 말했다 본고 말미의 조선순강일람 에 보이듯이 5 월 27 일부터 경성에서 순강을 개시하고 5 월 30 일에서 6 월 9 일까지는 서조선을, 6 월 10 일에서 6 월 12 일까지 중조선을 6 월 12 일에서 6 월 25 일까지는 남조선을 6 월 25 일에서 7 월 3 일까지는 동조선을 7 월 4 일에서 7 월 18 일까지는 북조선을 순강했 다 부산으로 입국하고 부산에서 출국했는데 일수는 합계 56 일에 달한다 이 사이에 엔료는 13 도 11 부 26 군 30 면리 91 개소 116 석 청중 35,910 인 (27) 의 순강을 했다 엔료의 일지를 바탕으로 해 서 순강지를 동그라미로 치고 작성한 것이 본고 말미의 조선순강지도 (28) 이다 이 지도를 보면 엔 료의 순강이 조선 전토에서 개최된 것이 일목료연하다 그리고 엔료가 정리한 조선전도개회일람 (29) 를 바탕으로 필자가 작성하고 일본의 전국순강과 비교한 것이 다음의 조선순강통계 이다 朝鮮巡講統計 大正 7 1918 年 巡講 의 会場 寺院 小学校 他の学校 その他 合計 朝鮮 21 38 11 21 91 231 418 121 231 日本 365 459 79 97 Journal of International Philosophy, No4 2015 219
巡講 의 主催者 教育関係 町村有志 諸団体 仏教関係 組織連合 自治体 合計 朝鮮 18 6 20 8 9 30 91 198 66 220 88 99 330 日本 270 178 177 102 111 161 演題類別 詔勅修身 妖怪迷信 哲学宗教 教育 実業 雑題 合計 朝鮮 75 20 14 4 1 2 116 647 172 121 34 09 17 日本 巡講 의 聴衆 408 236 154 79 68 54 朝鮮人 日本人 合計 1 回平均 実数 5100 30810 35910 395 142 858 註 이 통계는 이노우에 엔료 南船北馬集 제 16 편, pp112-118 및 井上円了選集 제 15 권, pp496-498 를 기초로 해서 작성했다 이 조선순강통계 를 보면 엔료의 순강의 전체를 리해할 수 있다 제 1 은 순강의회장 인데 소학 교 가 가장 많고 (41 ), 다음은 사원, 기타 로 같은 23 이다 다른 학교 는 12 이다 학교관계를 합계하면 53 로 반수를 넘는다 이것을 일본과 비교해 보면 학교관계의 할합은 50 태로 똑같고 사원 은 10 포인트 일본보다 적고 대신 기타 가 일본보다 10 포인트 이상 많이 차지하고 있다 제 2 의 순강の주최자 를 보면 특별히 반수를 넘는 것은 없다 자치체 가 33, 제단체 가 22, 교육관계 가 20, 조직련합 이 10, 불교관계 가 9, 지방 유지 가 7 로 되어 있다 일본과 비교해서 눈에 띄는 점은 자치체 가 일본보다 많고 지방 유지 가 일본보다 적은 것 이다 엔료의 조선순강이 조선총독부라는 위에서의 의뢰 였다는 것이 여기에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제 3 의 강연의 주제 ( 演題類別 ) 를 보면 조칙수신 ( 詔勅修身 ) 이 가장 많고 65 이다 다음은 요괴미신 ( 妖怪迷信 ) 17, 철학종교 12 로 조칙수신과 큰 차를 보이고 있다 기타의 교육, 잡제 ( 雑題 ), 실업 ( 実業 ) 은 합계해도 10 미만이다 일본과 비교해서 눈에 띄는 점은 역시 조칙수신이 높은 것으로 일본보다 25 포인트 웃돌았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국민도덕강화 라는 의뢰에 엔료가 충실히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의미에서 엔료의 순강은 관제 ( 官製 ) 에 의한 것 이었다 제 4 는 순강의 청중 이다 합계로 약 3 만 6 천명인데 이것을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나누면 일본인 이 3 만 810 명 ( 엔 료 는 내 지 인 으 로 부 르 고 있 다 ) 으 로 86 를 차 지 하 고 조 선 인 은 5100 명 으 로 14 로 적다 1 회의 청중의 평균은 399 명으로 되어 있다 그럼 엔료는 구체적으로 어떤 강연을 했던 것일까? 허지향의 논문에서는 朝鮮及満州 에 게재한 강 사토 아쓰시 ( 佐藤厚 ) 의 이노우에 엔료의 조선순강에 관한 자료 (31) 에는 허지향의 논문이 거론한 기사 이외에 매일신보 ( 毎日申報 ), 조선신보 ( 朝鮮新報 ), 경 성일보 ( 京城日報 ) 의 기사가 있고, 당시의 강연내용을 밝히고 있으므로 참조를 바란다 전술한 통 연기사가 인용되고 있다 (30) 계의 강연의 주제 에서 말한 것 처럼 강연은 조칙수신, 요괴미신 으로서, 특히 전자의 조칙 수신 이 많았다 그런데 사토 아쓰시 ( 佐藤厚 ) 가 수집한 당시 조선의 신문기사를 보면 요괴학 관계 는 심리적요괴 ( 心理的妖怪 ) ( 매일신보, 경성일보 ) 와 미신론 ( 迷信論 ) ( 조선신보 ) 이 있다 국민도덕관계로는 조선인동화론 교육만능주의 ( 매일신보 ) 가 있고, 국민도덕의 대 강 ( 大 綱 ) ( 朝 鮮 及 満 州 ) 이 있 다 여 기 서 는 후 자 인 국 민 도 덕 의 대 강 을 인 용 하 고 자 한 220 이노우에 엔료 井上円了 아 동아시아 (1) - 이노우에 엔료의 조선순 강 朝鮮巡講 -
다 (32) 이 국민도덕의 대강 은 다이쇼 7 년 (1918) 5 월 26 일에 경성고등여학교 강당에서 실시한 것이다 이 강연의 요점을 정리해서 열거해 두고자 한다 첫 번째는 우리 국민도덕, 선제 ( 先帝 ) 의 교육 칙어와 무신조서 ( 戊申詔書 ) 의 이대칙어 ( 二大勅語 ) 에 근본이 있고 적어도 제국의 신민이라면 이 천고부마 ( 千古不磨 ) 의 대유훈 ( 大遺訓 ) 을 준법해서 제국의 발전향상을 도모해야 한다 고 한다 두 번째로는 현재의 서양문명은 만개상태, 이에 반해 동양문명은 쇠퇴빈사의 상태이지만, 이 사이에 서 흘립 ( 屹立 ) 하여 서양의 문화 ( 文華 ) 와 미 ( 美 ) 를 다투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제국이 있을 뿐이다, 동양에서의 모든 책임은 다 일본에 걸려 있다 고 한다 세 번째로, 우리 국체 ( 國體 ) 의 존엄을 유지해 온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면 충효의 이도 ( 二道 ) 이다, 서양인의 국가 에 대한 근본관념 [ 이기주의 인용자 ] 은 우리 일본국민의 국가에 대한 관념과는 전혀 다르다 충군 애국의 정신사상은 그 출발점을 다르게 한다 고 한다 ( 같은 동양에서도 중국과 일본은 사상에 큰 차 이가 있고 중국의 국민성에 감동해서는 안 된다 ) 네 번째는, 일본인의 마음에는 대의 ( 大義 ) 가 있는데, 이것이 일본의 정화 ( 精華 ) 이고, 이것이 충효가 되고 일본민족의 특색이지만 서양인은 애국 심의 함양에 고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에 이대칙어를 신조로 나가야 된다 이제 일본과 조선은 합병되고 한 나라가 됐는데 원래 국명으로부터 일한은 하나이다 라고 한다 이제 이 량국은 합방하 고 일단으로 화해서 광영있는 만세일계의 천황폐하를 봉대하고 미이쓰 ( 御稜威 ) 아래에 동양의 문명 을 발달시키고 동아민족의 흥륭를 기도하며 세계의 문명에 공헌해야 된다 고 한다 엔료의 조선순강의 일지에는 같은 취지의 기사가 말해지고 있다 오늘날 조선의 도로는 내지이상이고 자동차가 종횡으로 분주할 수 있게 되고, 또 각도회에는 수도설 비가 있어서 음용수에 불편함이 없으며, 또한 전등전화가 골고루 미친 것은 다 조선합병의 덕택이 아 닌 것이 없다 학교교육의 보급도 생명재산의 안전도 다 그 덕분이다 조선인은 그 은혜를 심두에 명 하고 이에 보답하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33) 합병 이래 악정은 선정으로 일변하고 인민은 처음으로 안도 ( 安堵 ) 할 수 있었다 조선인은 영원히 이 혜택을 잊지 않음을 바란다 저는 각 회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이름은 욱일 ( 旭日 ) 이고, 조선의 이름은 조는 아침, 선은 선명함, 즉 아침의 경치이다 이 경치는 욱일에 의해 생기는 것 이고 만일 욱일이 없으면 조선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34) 엔료는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을 찬미한 논리를 전개할 뿐이다 박경식은 이러한 엔료의 조선순강을 다음과 같이 총괄했다 (35) 이노우에 엔료는 유럽의 근대화를 배우고 일본사회의 근대화의 확립을 염원하고 교육칙어에 제시된 국민도덕을 목표로 계몽운동, 수신교회운동을 전개해 갔다 이노우에 엔료의 일본내의 순강에서는 관학 에 대한 전학 ( 田學 ) 이라는 민중적 입장에서 近代的 계몽운동에 일정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인에 대해서는 민족의 존재와 그 주체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부정 해서 일본으로의 동화라는 일본정부의 조선식민지정책을 뒤쫓아 간 것 같다 이노우에의 조선순강이 조선총독부관헌 등에 의한 조직 동원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부터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것은 이노우에 엔료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대부분의 이데올로그가 그랬던 만큼, 이노우에는 그 대 표적 인물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註 1 井上円了 満韓紀行 井上円了 南船北馬集 第一編 pp64-77 2 井上円了 朝鮮巡講第一回 西鮮及中鮮 日誌 井上円了 南船北馬集 第 15 編 pp103-116 井上円了 朝鮮巡講第二回 南鮮及東鮮 日誌 井上円了 南船北馬集 第 15 編 pp116-130 井上円了 朝鮮巡講第 3 回 北鮮 日誌 井上円了 南 船北馬集 第 16 編 pp1-28 同書는 井上円了研究 第 3 号 pp91-118 에 수록돼 있다 3 朴慶植 井上円了의 朝鮮巡講의 歴史的背景 井上円了研究 第 7 号 pp81-107 4 許智香 井上円了와 朝鮮巡講 그 歴史的位置에 대해 日本思想史学 第 45 号 pp146-161 5 許智香 위의 논문, p146 Journal of International Philosophy, No4 2015 221
6 柴田隆行 哲学史成立의 現場 弘文堂 1997 年 p78 7 小坂国継 明治哲学의 研究 岩波書店 2013 年 pp297-298 8 許智香, 위의 논문, pp146-147 9 許智香, 위의 논문, p147 10 田村晃祐 近代日本의 仏教者들 日本放送出版協会 2005 年 p72 11 許智香, 위의 논문, p157 12 위의 논문, pp157-158 13 라이너 슐쩌 東洋大学에서의 井上円了研究 国際井上円了研究 第2号 pp181-199 参照 14 井上円了 哲学館開設 의 旨趣 東洋大学百年史 資料編Ⅰ 上 pp83-84 井上円了 哲学館開館旨趣 同書同編 pp89-93 15 許智香, 前掲論文 pp148-149 16 拙稿 福沢諭吉 井上円了 寺田福寿 小栗栖香頂 福澤諭吉年鑑 第 23 号 参照 同論文은 井上円了研究 第 7 号에도 収録돼 있다 17 猪木武徳 오사카 경응의숙이 후쿠자와와 김옥균을 결합시켰는가? 近代日本研究 第 27 号 p7 福沢와 金의 関係에 대해서는 姜健栄 開化派리더들의 日本亡命 金玉均 朴泳孝 徐載弼의 足跡을 더듬다 飛鳥社 2006 年이나 金秉洞 金玉 均과 日本 그 滞日의 軌跡 緑蔭書房 1991 年을 참조 18 猪木武徳, 前掲論文, p8 19 朴慶植, 前掲論文, pp82-83 20 井上円了 満韓旅行談 ( 東洋哲学 第 14 巻第 1 号 )pp51-55 21 朴慶植, 前掲論文, pp84-87 同文의 漢詩의 口語訳은 닛타 고지 新田幸治 에 의한 것이다 朴論文에는 日誌 외에 井上円 了 朝鮮旅行談 修身 第 4 巻第 1 号 을 資料로 했다 이 満韓紀行 에 대한 円了의 談話에 대해서는 註 20 의 満 韓旅行談, 井上円了 朝鮮旅行談 護法 第 20 号第 5 号 pp21-25 이 있다 22 井上円了 朝鮮巡講第一回 西鮮及中鮮 日誌 前掲書 p103 23 朴慶植, 前掲論文, pp90-91 24 위의 논문, p93 25 井上円了 朝鮮巡講第一回 西鮮及中鮮 日誌 前掲書 p104 26 朴慶植, 前掲論文, p95 27 井上円了 朝鮮巡講第三回 ( 北鮮 ) 日誌 前掲書 p28 28 原図는 조선 일람 朝鮮総督府, 大正 12(1922) 年의 地図이다 29 井上円了 朝鮮巡講第三回 北鮮 日誌 前掲書 pp22-28 30 許智香, 前掲論文, pp156-157 31 佐藤厚 井上円了의 朝鮮巡講에 関한 資料 植民地期 朝鮮発行 記事를 中心으로 井上円了센터연보 第 23 号 32 위의 논문 33 井上円了 朝鮮巡講第三回 北鮮 日誌 前掲書 p18 34 위의 논문, p21 35 朴慶植, 위의 논문, p105 엔료의 동화론에서는 동화문제의 첫 번째는 언어의 보급이다 조선인이 어학의 천재를 보유하는 점은 참으로 놀랄 만하다 보통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내지어를 배우고 반년을 지나면 자유롭게 국어를 문해하고 그리고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고 하는데, 만일 분교장적 ( 分教場的 ) 인 서당을 두고 서당에 있을 당시부터 내지어를 배우게 되면 국어의 보급에 한층 더 진보를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더구나 교육을 보급함으로 조선인의 지견 을 열리게 하면, 처음으로 문명의 혜택의 감사를 자각하게 되고 병합전과 병합후의 상위도 잘 식별하고 충심으로 내지 를 향해서 감사를 나타나게 함은 의심이 없다 ( 佐藤厚 井上円了의 朝鮮巡講에 関한 資料 植民地期 朝鮮発行 記事를 中心으로 ( 井上円了센터연보 第 23 号 )) 고 한다 메이지 20 년대에 일본주의를 주창하고 일본의 독립을 논한 엔료 는 그 정신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역사, 언어, 종교의 주체성을 주장했다 조선순강에는 그 시대의 사상적 문제는 전혀 되돌아보지 않는다 222 이노우에 엔료 井上円了 아 동아시아 (1) - 이노우에 엔료의 조선순 강 朝鮮巡講 -
Authors alphabetical order ETO, Takumi FUJII, Chikayo GIRARD, Frederic HORIUCHI, Toshio ISHIHARA, Yuko ISSHIKI, Daigo IWAI, Shogo KANEKO, Tomotaro MIURA, Setsuo MIYAMOTO, Hisayoshi MOREAU, Pierre-Francois MURAKAMI, Katsuzo MUTO, Shinji NAGAI, Shin NUMATA, Ichiro OBERG, Andrew ONISHI, Yoshitomo SATO, Atsushi SHIRAI, Masato SIEG, Urlich SONI, Luitgard TAKENAKA, Kurumi TAKEMURA, Makio WATANABE, Shogo WATANABE, Hiroyuki KANG, Mun-sun Venerable Hyewon Part-Time Lecturer, Toyo University JSPS Research Fellow Professor, 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Research Associate of IRCP PhD student, University of Copenhagen Project Researcher, the University of Tokyo Associate Professor, Faculty of Letters, Toyo University Assistant Professor, Tokyo University of the Arts Professor, Faculty of Human Life Design, Toyo University Professor, Faculty of Letters, Toyo University Professor, Institut d histoire de la pensée classique, Ecole Normale Supérieure de Lyon, Professor, Faculty of Letters, Toyo University Research Associate of IRCP Professor, Faculty of Letters, Toyo University Professor, Faculty of Letters, Toyo University Lecturer, Faculty of Regional Development Studies, Toyo University Associate Professor, Faculty of Letters, Kumamoto University Specially-Appointed Professor at Senshu University Research Associate of IRCP Professor at the Philipps-Universität Marburg Innsbruck Doctoral student, graduate school of Letters, Toyo University President of Toyo University Professor, Faculty of Letters, Toyo University Part-Time Lecturer, Toyo University Professor, College of Buddhist Studies, Dongguk University Journal of International Philosophy No4 Published in March 2015 Edited by Editorial Board of International Research Center for Philosophy, Toyo University KIKUCHI Noritaka Editor in chief, IBUKI Atsushi, OHNO Takeshi Published by International Research Center for Philosophy IRCP, Toyo University Director: MURAKAMI Katsuzo 112 8606 Toyo University, 5-28-20 Hakusan, Bunkyo-ku, Tokyo TEL FAX +81-3-3945-4209; E-mail ircp@toyojp; URL http://wwwtoyoacjp/rc/ircp/ Printed by SATO PRINTING CO,LTD This was published as part of the Strategic Research Base Development Program for Private Universit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