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발간사 금년은 전후 70년으로 한국에게는 광복 70주년, 중국에게는 항일전쟁 및 반 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일본에게는 종전 70주년입니다. 한일관계에 있 어서는 국교정상화 50주년으로 한중일 3국이 역사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기에 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책이 앞으로 국내외에서 한중일 3국 협력 연구의 유용한 참고서가 되어 견실한 한중일 3국 관계 발전에 보탬 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해였습니다. 하지만 한중일 3국은 협력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역사인식의 차이를 잘 극복하지 못한 채 전후 70년의 아까운 한 해 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5년 12월 2015년 11월 1일 박근혜 대통령의 주도적 역할로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3국 정상회의를 개최하여 대화 모드로 흐름을 바꾼 것 은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협력의 훈풍을 불어넣은 좋은 본보기였습니다. 한중 일 3국 관계가 갈등에서 협력 으로 전환되는 것은 동북아 지역의 평화를 위해 서 중요합니다. 협력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3국 전문가들 간에 이루어진 학술적 논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2년 동안 한중일 3국 협력의 걸림 돌이었던 역사 갈등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대해, 한중일 3국 전문가가 참 여한 공동연구의 결과물인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를 출판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재단의 연구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여 한중일 관계의 현주소와 협력관 계 수립을 위한 제언을 포함한 학문적 결실을 내놓은 한국 중국 일본의 연구 4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발간사 5
차례 발간사 4 책머리에 10 1부 한중일 3국 협력의 선결과제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모리 가즈코 I.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사태를 생각한다 19 II. 중일관계에 대한 기본 입장 20 III. 중일 국교정상화 40주년, 첫 번째 전환점이 된 1990년대 23 IV. 중일 양국의 세 가지 차원의 이슈와 여론 28 V. 중일관계의 두 번째 전환점 31 VI. 배타적(과격한) 민족주의론 33 VII. 글로벌 대국, 중국: 중일관계 긴장의 배경 36 VIII. 중국은 제국( 帝 國 ) 이 될 수 있을 것인가 38 IX. 중일관계의 현재: 대립관계로 가지 않기 위해 40 X. 관계 재정립을 위한 세 가지 제언 43 XI. 한중일의 공생을 위해 45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류장융 I. 머리말 51 II. 한중일 관계의 복잡성, 비대칭성 및 규칙성 53 III. 한중일 관계 개선의 기회와 새로운 시련 66 IV. 한중일 관계의 역사 반추와 미래 협력 83 한중일 관계 중일관계 타개에서 전진으로 다카하라 아키오 I. 머리말 93 II. 후진타오 정권 제1기의 내정과 외교의 연동 95 III. 후진타오 정권 제2기의 내정과 외교의 연동 99 IV. 센카쿠열도 매입을 둘러싼 중일 간 충돌 115 V. 시진핑 정권의 대일관계 개선 정책 116 VI. 한일 양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123 동북아 지역은 역사와의 공생 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큰 역사 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한중일 화해와 협력의 길 양보장 I. 머리말 129 II. 동북아 지역의 역사 유전자 130 III. 역사가 국가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137 IV. 역사의 그림자 아래에 놓인 지역 현실 142 V. 역사와의 공생 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150 6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7
2부 한중, 한일, 중일 양자관계와 한중일 3국 협력 시진핑 시기 한중관계와 한중일 협생( 協 生 ) 이희옥 I. 시진핑 시기 중국 외교의 진화 163 II. 한중관계의 외부 환경 167 III. 중국의 핵심이익 강화와 한중관계 171 IV. 신형 한중관계로의 진화 175 V. 미래 지향적 한중관계 발전의 과제와 방향 184 한일 역사 마찰을 넘어 한중일 협력체제로 이원덕 I. 왜 한중일 협력체제가 필요한가 193 II. 3국 협력체제의 최대 장애물은 한일 역사 마찰 197 III. 한일 간 역사 마찰의 핵심 쟁점과 해법 모색 205 IV. 한일 역사 마찰 문제를 넘어 한중일 협력체제로 221 동북아 3국의 협생을 향하여 엘리제 조약의 변용을 통한 제도화된 우호관계 구축 박창건 I. 머리말 265 II. 제도화된 우호관계 268 III. 과거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노력: 유럽과 동북아 지역의 관계사적 비교 273 IV. 엘리제 조약에서 얻은 동북아 3국 협생의 길 279 V. 결론을 대신하여 293 부록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1998) 298 중일관계 4문건 306 동북아 평화협력을 위한 공동선언문(한중일 3국 정상회의, 2015) 319 중일 갈등관계와 한중일 3국 협력 차재복 I. 중강일강( 中 强 日 强 )의 신형 중일관계 227 II. 중일 갈등관계 지속의 원인 231 III. 중일 갈등관계가 동아시아 신질서 형성에 미친 영향 247 IV. 결론을 대신하여 259 찾아보기 332 8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9
책머리에 동아시아 지역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객관화되고 있 는 것은 한중일 3국 협력 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한중일 3국 협력 의 근 원은 정상회의에 있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1998년 1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된 아세안과 한중일의 9+3 정상회의에 김대중 대통령, 중국 후진타오 [ 胡 錦 濤 ] 국가부주석, 일본 오부치 게이조[ 小 淵 惠 三 ] 총리가 처음으로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98년의 국내 언론( 매일경제, 1998. 12. 17)에는 동남아 국가 지도자가 한중 일 3국 협력을 부추기며 앞장서서 손을 내미는 모습이 실렸다. 당시 고촉통 [ 吳 作 棟 ] 싱가포르 총리는 한중일과 아세안을 분리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 다. 공동체다 라고 말했고, 판반카이(Phan Van Khai) 베트남 총리는 앞으로 아 세안 정상회의가 있을 때마다 한중일 정상이 참여하도록 하자 고 제안했다. 이 후 한중일 3국 정상회의는 1999년 11월부터(캄보디아가 1999년 4월 아세안에 가입하여) ASEAN 10+3 체제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또한 한중일 정 상은 2008년부터는 3국 간 별도 정상회의를 개최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을 추진해왔다. 그 과정에서 2011년에는 서울에 한중일 3국 협력사무국 을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012년 5월 베이징에서의 한중일 별도 정상회 의 이후 중국과 일본 사이의 극심한 역사 영토 갈등으로 3국 정상회의는 2년 연속 불발되었다. 한국 중국 일본은 1998년 아시아 전체의 외환위기 상황에서 뭉쳐야 산 다 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지금은 다른 갈등 요인으로 인해 뭉치지 못하고 있 다. 중국 부상에 따른 국제정치 경제적 요인, 역사 문제와 민족주의, 해양의 중요성과 영토 갈등 등 복합적 요인이 뒤섞인 가운데 한일, 중일 갈등은 심화 되고 한중일 3국 협력은 퇴색하고 있다. 한중일 3국 협력체제를 복원하기 위 해서는 무엇보다 중일, 한일 양자관계의 개선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중일 3국의 협력을 논할 수 없다. 오늘날 한중일 3국 간 갈등 반복과 협력 퇴색의 가장 큰 요인은 역사, 영 토, 민족주의로 진단할 수 있다. 이에 2013년 6월부터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중일, 한일, 한중 갈등관계와 한중일 3국 협력 을 연구 과제로 삼아 한중일 3국의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고 진단하는 공동연구를 진행해왔다. 공동연구팀 으로 중국에서는 일본 전문가인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부소장 양보장 [ 楊 伯 江 ] 박사와 칭화대학 국제관계연구원 부원장 류장융[ 劉 江 永 ] 교수가 참여했 고, 일본에서는 중국 문제 전문가인 도쿄대학의 다카하라 아키오[ 高 原 明 生 ] 교 수, 와세다대학의 모리 가즈코[ 毛 里 和 子 ] 명예교수가 참여했다. 그리고 한국에 서는 한중관계 전문가인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장 이희옥 교수, 한일 관계 전문가인 국민대학교 일본연구소장 이원덕 교수, 중일관계 분야에서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차재복 연구위원, 그리고 유럽의 역사 갈등과 역사 화해의 10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책머리에 11
집필을 맡았던 박창건 교수 등 총 8명이 참여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한중일 3국의 상생( 相 生 )을 위한 조건, 즉 선결과제가 무엇인지를 다루고, 2부에서는 한국 학자들이 한중일 3국의 상생을 위한 노력 은 무엇인지에 대해 양자 관계 차원에서 조명했다. 공동연구의 목적은 3국 간 현안의 문제 를 직시하여 갈등을 넘어 협력을 지 향 하기 위해 각자, 양자, 삼자가 할 수 있는 단기적 중장기적 정책 대안을 제 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8편의 글 모두 궁극적으로 3국 간 협력과 상생을 지향 하는 3국 협생( 協 生 ) 체제 구축을 위한 정책적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한중일 3국 전문가들의 국제 공동연구의 결과물로, 역사학과 국제정치학의 학제적 맥락에서 한중일 3국 간 갈등을 넘어 협력체제 복원 에 접근한 것이다. 3국 학자에 의한 국제 공동연구 과제 수행에는 무엇보다 언어 소통의 불편함, 주제 설정의 상이함, 양자관계 차원에서 내용의 중첩, 분석 틀 의 다양함이 예견되었다. 이러한 애로사항을 극복하고 연구자 간 연구 내용의 소통을 충분히 하여 동일한 분석 틀에서 공통의 문제의식을 도출하기 위해 현 지 학술 세미나를 적극 활용했다. 공동연구팀은 2013년 9월 도쿄대학과 12월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각각 중 간 결과 보고를 겸한 세미나를 개최하여 도쿄와 베이징 현지 학자들의 목소리 도 반영해 왔다. 그리고 2014년 9월 동북아역사재단과 국민대학교가 주관하 여 서울에서 연구 결과 보고를 겸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서울회의에서는 김 학준 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벳쇼 고로[ 別 所 浩 郞 ] 주한 일본대사, 추궈홍 [ 邱 國 洪 ] 주한 중국대사(서면), 한국외교부의 신봉길 외교안보연구소 소장, 천펑 [ 陳 峰 ] 한중일 3국 협력 사무차장이 각각 기조연설과 축사를 통해 한중일 3국 협력을 위한 소중한 견해를 더해주었다. 한중일 3국 관계 연구는 1국의 외교정책과 양자 관계 차원에서, 그리고 동 아시아 국제관계 차원에서 볼 때 중요한 연구 주제이나 복잡한 갈등 요인으로 인해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공동연구에서는 역사, 영토, 민족주의 등 갈등 요인을 껴안은 채 한중일 3국 관계의 새로운 협력 을 위한 정책적 대안을 모색했으나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책으로 출판하는 이유는 기존의 한일, 한중, 중일 등 양자 관계 연구에 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중일 3국 관계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단초가 되고 관 련 정책을 구상하는 데 지침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한중일 3국에서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었 다. 우선 집필자로 참여해주신 한중일 3국의 학계 선배님들께 진심 어린 감사 의 말씀을 드리며, 이번 공동연구의 처음부터 통역과 행정처리를 맡아 준 동 북아역사재단의 윤선화 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또한 중국과 일본 집필자 의 글을 번역해 준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도희진 교수(중한 번역)와 길영숙 교 수(일한 번역) 및 남지언 씨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책의 말미에는 앞으로 한중일 3국 협력과 관련하여 집필진들이 강조한 주 요 공동성명과 문건을 정리하여 부록으로 첨부했다. 일본의 모리 가즈코 교수 는 향후 3국 협력 관계 구축을 위해 중국과 일본도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의 공동선언 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고, 중국의 류장융 교수와 양보 장 박사는 3국 관계 개선을 위해 중일 간 4개 정치문건 의 중요성을 강조했 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의 주도적 역할로 성사된 한중일 3국 정상회의(2015. 11. 1, 서울)에서 3국 정부가 합의 도출한 동북아 평화 협력을 위한 공동선언문 을 첨부했다. 끝으로 이 책이 국내 동아시아 전문가들에게 한중일 3국 관계 연구 의 지침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독자 여러분의 질정을 바란다. 2015년 12월 필자를 대표하여 차재복 12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책머리에 13
1부 한중일 3국 협력의 선결과제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한중일 관계 중일관계 타개에서 전진으로 동북아 지역은 역사와의 공생 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큰 역사 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한중일 화해와 협력의 길 일러두기 1. 이 책은 한중일 관계를 다루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어 지명 을 통일하여 표기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양자관계의 갈등 이슈에 대한 언급 시 일본 학자가 쓴 글 에서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중국학자가 쓴 글에서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로 첫 언급 시에만 병기한다. 그리고 필자의 국적에 구애받지 않고 한중일 3자 관계의 국명 표기 시 에는 한중일 순서로, 양자관계의 국명 표기 시에는 한중, 중일, 한일로 통일한다. 2. 이 책은 한국 학자 4명, 중국 학자 2명, 일본 학자 2명의 집필진으로 구성된 한중일 3국의 국제 공 동연구의 결과물이다. 한국 학자 4명의 글은 2015년 10월까지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고, 국외 학 자는 2015년 상반기까지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글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국외학자 글의 번 역과 감수 작업 등으로 원고 제출 기일이 달랐기 때문이다. 3. 중국, 일본 학자의 경우 각주는 한국 독자를 위해 한글로 번역하였으나, 원문을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도울 경우에는 그대로 두었다.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I.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사태를 생각한다 II. 중일관계에 대한 기본 입장 III. 중일 국교정상화 40주년, 첫 번째 전환점이 된 1990년대 IV. 중일 양국의 세 가지 차원의 이슈와 여론 V. 중일관계의 두 번째 전환점 VI. 배타적(과격한) 민족주의론 VII. 글로벌 대국, 중국: 중일관계 긴장의 배경 VIII. 중국은 제국(帝國) 이 될 수 있을 것인가 IX. 중일관계의 현재: 대립관계로 가지 않기 위해 X. 관계 재정립을 위한 세 가지 제언 XI. 한중일의 공생을 위해
모리 가즈코 와세다대학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I.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사태를 생각한다 2012년 9월 국교정상화 40주년의 축제 분위기는 격렬한 반일시위로 인해 순 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일본과 중국 간에는 이런저런 예상치 못 한 일이 생기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놀라지도 않는데, 이번 반일시위의 심각 성과 댜오위다오는 고유의 영토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틈타 강탈했다 라 는 중국 외교부의 일본에 대한 집요한 비판은 필자를 놀라게 했다. 우선 시위 에 참여한 청년들이 애국심은 무죄[ 愛 國 無 罪 ] 라는 풍조에 편승해서 벌이는 폭 력적인 애국 행위는 결코 무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중국의 집요한 반일 언론이 군비 확장과 개헌을 노리는 일본의 보수 모리 가즈코[ 毛 里 和 子 ] 동아시아 국제관계, 중국정치외교 / 와세다대학 명예교수 日 中 関 係 戦 後 から 新 時 代 へ ( 岩 波 書 店 岩 波 新 書, 2006), 21 世 紀 の 中 国 政 治 社 会 編 共 産 党 独 裁 を 揺 るがす 格 差 と 矛 盾 の 構 造 ( 共 著, 朝 日 新 聞 出 版, 2012), 現 代 中 国 政 治 第 3 版 グロ ーバル パワーの 肖 像 ( 名 古 屋 大 学 出 版 会, 2012), 共 同 討 議 日 中 関 係 なにが 問 題 か 1972 年 体 制 の 再 検 証 ( 共 編, 岩 波 書 店, 2014). 세력을 자극하여 반중 여론을 부추길 뿐이기에 일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 는 중국에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차분히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았다. 이런 사태가 지속된다면 일본 과 중국 양국 국민 모두 고유의 영토 중독증에 걸리게 될 것이다. 세계적인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村 上 春 樹 )는 영토 문제가 국민감정의 영역으로 파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19
고들면 출구가 없는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마치 싸구려 술에 취해 주 정하듯이 사람을 취하게 만들고 흥분시킨다. 남는 것은 괴로운 두통뿐이다 라고 갈파했다. 1 동중국해의 섬은 이렇게 많은 중국인, 일본인을 취하게 만들 고 자고 일어나도 개운치 않은 숙취 상태로 몰아넣었다. 민족주의는 실로 애 물단지다. 20세기 초반 제국주의적 지배에 저항한 민족주의는 진보의 일익을 담당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면서 편협한 민족주의는 분쟁의 화약고가 될 수도 있다. 민족주의라는 괴물 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세계사적인 과제 가 되고 있다. 일본과 중국 양국의 가장 큰 적은 상대국의 국민이 아니라 선동 된 배타적 민족주의라고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최우선 과제로 삼는 한편 대외관계에서는 유엔(UN) 중심주의 를 관철해왔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대한 일본 국민의 내적 비판을 실천한 것 과 다름없다. 미국의 한 연구기관은 이를 소극적 평화주의 라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일본의 행보가 전후 아시아 70년의 평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 다고 자부한다. 중국 또한 특히 근대화 정책으로 돌아선 1980년대부터 아시 아의 평화와 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셋째, 아래에서 밝히는 필자의 중일관계론 은 중국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현재 일본에서 다수파가 아니다. 2010년부터 일본에서는 중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 20% 아래로 내려갔고, 중일 관계가 양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0%를 밑돌고 있다. 이른바 혐중( 嫌 中 ) II. 중일관계에 대한 기본 입장 이 글에서는 중일 국교정상화 40주년, 평화우호조약 체결 35주년이 지난 상 황에서 2012년 영토를 둘러싸고 벌어진 심각한 충돌 사태와 관련하여 필자의 견해를 표명하고자 한다. 양국관계가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악화 된 데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우선 중일관계에 관한 필자의 기본적 인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혀두고자 한다. 첫째, 1972년 국교정상화 협상을 포함하여 40년간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 해 중일 간의 전후( 戰 後 ) 처리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수많은 문제를 그대로 남겨둔 채 시간이 흘렀다. 둘째, 일본은 전후 70년 평화헌법하에서 국민주권을 주축으로 경제 발전을 기류가 형성되고 있으며, 중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넷째, 중국의 강경한 반일은 중일관계를 점점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 는데, 이 배경에는 일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부족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악 의 중일관계가 이어지는 가운데 필자는 이 글에서 중국의 지식인과 학생들에 게 진심으로 기대하는 희망사항을 솔직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일 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미래지향적인 대일관( 對 日 觀 )을 만드는 것이다. 다섯째, 아시아의 이웃나라와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은 우선 역사 문제로 인한 상대국에 대한 불신, 다른 하나는 상대국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갖는 일종의 감정적인 억지떼쓰기 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항상 상대국에게 배신당했다 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중국 의 역사교육은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고 있는데, 이는 어릴 때 부터 상대국에 대한 증오 와 원한 을 심어주게 된다. 중국의 논객 마리청( 馬 1 朝 日 新 聞 (2012. 9. 28). 20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21
立 誠 )이 시의적절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仇 恨 没 有 未 来 2 ( 경제관찰망, 2013. 2. 5), 즉 원한은 미래를 만들 수 없다. 양측 모두 상대국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미 래지향적인 역사를 계승해나갈 필요가 있다. 일본도 건국 이래 20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침략 만 일삼아온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 글의 목적은 양국이 냉정하게 상대를 인식하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존 경심을 갖도록 지적 공헌을 하는 것,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것뿐이다. 이에 다음과 같은 논점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6 양국 국민에게 최대의 적은 배타적 민족주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지 적( 知 的 ) 노력이 필수 불가결하다. 7 2010~2012년 중일관계는 중대한 전환점을 지났다. 역사인식의 차이, 세력을 둘러싼 다툼, 다르면서도 원리주의적 측면에서는 공통된 양국의 대외정책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마찰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8 중일관계 재구축을 위한 세 가지 제안이 있다. 모델은 1998년 10월 8일 의 한일공동선언(김대중 오부치 게이조)이다. 한일 양국은 이때 최소한 의 역사적 화해를 실현시켜 최소한의 존중을 바탕으로 관계 재구축을 성 1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에는 몇 가지 결여된 부분이 있었다. 공시켰다. 2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중일(미)은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일 본의 원조 가 중국 근대화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3 그러나 전반적으로 수교 이후 중일 양국은 관계의 제도화와 기초의 재구 축에 성공하지 못했다. 관계 자체가 너무 취약하고 깨지기 쉬웠다. 4 1990년대 중반 중일관계는 근본적인 전환점을 맞았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해 새로운 단계를 위한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못했고 이로 인해 인식 차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5 21세기 들어서 중국굴기( 中 國 崛 起 ) 는 공세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반 면 침체일로를 걷는 일본은 보수화 군사화 경향을 보이는 등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영토 분쟁은 쌍방의 배타적 민족 주의를 부추겨 양국관계를 불신과 시기심이 난무하는 위험한 경지로 몰 아넣었다. 비상시 안전 확보가 가능한 긴급체제(mechanism)가 필요할 것이다. III. 중일 국교정상화 40주년, 첫 번째 전환점이 된 1990년대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협상은 단 5일 동안에 이루어졌지만, 제2차 세계대 전 이후 지속된 비정상적 관계 를 마감하고 배상 문제도 처리했으며, 양국 사 이에 큰 걸림돌이었던 타이완 문제도 한편으로 매듭을 짓는 등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 미국과 중국 양국이 서로 접근하는 엄청난 상황과 마오쩌둥( 毛 澤 東 ) 저우언라이( 周 恩 來 ) 다나카 가쿠에이( 田 中 角 榮 ) 오히라 마사요시( 大 平 正 芳 )라는 네 사람의 걸출한 정치인들의 결단이 양국관계를 극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대미문의 참상을 겪었으면서도 배상청구 까지 금지당한 중국 국민들의 감정 문제 등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무엇보 다 가장 큰 문제는 과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남겨두었다 또는 방치했다 는 2 经 济 观 察 网 (2013. 2. 5). 자각이 일본 측에 특히 부족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배상청구를 포기한 중 22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23
국 측과 중국 국민에 대한 배려나 방법이 강구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 제다. 1980년대 오히라 총리가 선봉에 섰던 중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가 심정적으로는 배상에 상응한다 할지라도 그런 뜻이 중국 측에 전달되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일본 스스로 어떤 형식으로든 배상을 하겠다는 결단이 부족했다. 중국으로부터 일부 양보를 얻어낸 1972년 의 협상은 일본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일인 동시에 성공적으로 인식되어 협상 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이 해결을 방치한 또 다른 문제는 1950년대 이후 맺어온 타이완과의 관계를 중일관계의 모든 것으로 보는 허구( 虛 構 )의 대중( 對 中 )정책, 그리고 그 것과 1972년 중국과의 국교정상화 협상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없앨 것인지 고심하던 일본이 1972년의 협상을 성공적 인 협상으로 인식하면서 허구의 대중정책 에 대한 재조명을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 입장에서 이 협 상은 과거와의 모순을 없애 정합성( 整 合 性 )을 꾀하려 했을 뿐 미래를 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와 같이 문제 해결을 유보 함으로써 어떤 문제를 초래하게 된 것일까? 결과적으로 중국 지도자와 국민들 사이에 일본에 대한 뿌리 깊고 집요한 불신 감과 시기심이 자리 잡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일본이 전후( 戰 後 )는 끝났다 면서 과거를 단절하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중국에서는 전후 가 시작된 것 이다. 40년 동안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중요한 전환점이 두 번 있었다. 1980년대 이후의 중일관계는 두 가지 접근법을 바탕으로 해왔다. 즉 역사인식 전후처 리에 대해 극소수의 군국주의자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국민 이라는 이분법적 계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이런 중일관계도 1990년대 중반에 첫 번째 전환점 을 맞이하게 된다. 1990년대 중반에는 두 종류의 이후(post) 가 존재했다. 하나는 탈냉전( 脫 冷 戰 ), 다른 하나는 특히 일본의 경우 전후( 戰 後 ) 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일본 에서는 이른바 55년 체제 가 무너지고 호소카와 모리히로( 細 川 護 熙 ) 무라야 마 도미이치( 村 山 富 市 ) 정권이 반체제를 표방한 사회당을 포함하여 연립정권 체 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4년에 출범한 무라야마 내각은 자위대 합헌, 일 장기와 기미가요를 공식 인정하고 그때까지 지켜오던 비무장 중립이라는 기 본 노선을 포기했다. 변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자민당 내에서도 분출했다. 1993년 오자와 이치로( 小 澤 一 郎 )가 제기한 보통국가 론이 그것이다. 즉 평화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자국의 방어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헌법을 개 정하여 제9조 제3항에 평화 창출 무력, 유엔 대기군 보유와 활동 을 인정해 야 한다며 국방군을 용인하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오자와에 따르면 군대라 는 자위 능력을 보유하는 것, 대외적인 군사활동을 하는 것 등이 보통국가 의 요건이다. 3 참고로 일본국 헌법 제9조 제1항은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이를 포 기한다 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제2항은 육 해 공군, 기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라고 전 세계에 선포하면서 전후 일본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1990년대에 대부분의 일본인이 전후는 끝났다 고 인식했다는 사실은 여론 주장으로 대표되는 도덕적 접근 과 일본이 원조하고 중국이 원조를 받는 경 제 관계가 서로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이익 접근법 이다. 1980년대는 양국관 3 小 澤 一 郎 (1993), 日 本 改 造 計 画. 24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25
<그림 1> 일본인의 헌법의식 변화(1950~2005) 히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 나는 미래에 (%) 90 80 70 60 아사히신문 개헌 찬성 개헌 반대 요미우리신문 개헌 찬성 개헌 반대 이런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 을 표명한다. 50 40 이와 동시에 문화보수주의, 일본주의로 회귀하는 경향이 특히 정치인들에 30 게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야스쿠니 신사( 靖 國 神 社 ) 참배나 극동군사재판에 대 20 10 0 1950 1955 1960 1965 1970 1975 1980 1985 1990 1995 2000 2005 * 출처: 五 百 旗 頭 真 (2006), 전후 일본 외교사, 108쪽 (년) 한 공공연한 비판에 대해서 전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전통적인 지지 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다. 하나는 일본에 대해 전 쟁 배상을 요구하는 민간 차원의 움직임이다. 중국민간대일배상연합회의 퉁 쩡( 童 増 ) 회장은 1990년부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일본에 대한 중국의 피해배 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개헌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아사히신문( 朝 日 新 聞 ) 과 요미우리신문( 讀 賣 新 聞 ) 의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둘 다 1990년대 중 반에는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다 마침내 역전하는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그림 1> 참조). 양국의 인식 차이도 이 시기에 결정적으로 벌어졌다. 일본 전역을 뒤덮은 전후종식론( 戰 後 終 熄 論 ) 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듯이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총리는 전후 50년에 즈음한 총리 담화 를 발표하고,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침략전쟁 의 과오를 아시아인들에게 사죄했다. 그는 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 요구가 시급하다[ 中 国 要 求 日 本 受 害 赔 偿 刻 不 容 缓 ] 는 글을 보냈으며, 1992년에 는 중국인 위안부에 대한 민간 보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주중 일본대사관에 제 출했다. 나아가 1996년에는 민간 댜오위다오 보호연합회( 民 間 保 釣 連 合 會 ) 를 설립하여 민간 차원에서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이 시기에 분노한 청년 들의 울트라 민족주의(초민족주의) 도 두드러지게 된 다. 그 대표격이 왕샤오둥( 王 小 東 )이다. 그는 전통문화를 비판하는 다큐멘터리 허상( 河 殤 ) 을 민족적인 허무주의, 자학주의라고 일축하고, 중국인들의 생활 공간이 이렇게 더럽고 비좁은 것은 마오쩌둥의 인구정책 탓이 아니라 근대 이 후 범세계적인 싸움에서 늘 패했기 때문이다 라고 갈파한다. 또 국제관계에 서 영원한 친구는 없다. 오로지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라고 주저 없이 우리 나라는 머지않은 과거 한 시기에 국책을 그르쳐 전쟁의 길로 들어서 국 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많은 나라, 특 26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27
단언하여 청년들의 울분을 발산시켰다. 4 1990년대 중반에 표면화된 일본과 중국 양국의 인식 차이는 이후에도 좁 혀지지 않고 오히려 커져만 갔다. 당시 양국은 모두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었 다. 이제와서 만약 그때 중일관계를 새로운 토대 위에서 재구축할 수 있었다 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1998년 장쩌민( 江 澤 民 ) 주석의 일본 방문 당시 에도 관계 재구축에 성공하지 못하고 골이 더 깊어지고 말았다. IV. 중일 양국의 세 가지 차원의 이슈와 여론 <그림 2> 일본 중국 간의 이슈 센카쿠열도 (댜오위다오) 전후 보상 국가 배상 민간 배상 영토 영해 타이완 문제 동중국해 미일동맹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역사 문제 경제적 마찰 지역 리더십? ODA (공적개발 원조) 민족주의 역사인식 교과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몇 가지 이슈가 있다. 필자는 세 가 지 층위의 이슈가 있으며, 그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풀기 어려운 상태라고 생각한다(<그림 2> 참조). 먼저 저층, 기초 층위에서 역사인식, 가치를 둘러싼 대 립과 차이가 있다. 1980년대부터 일본과 중국 간의 대립과 싸움은 주로 이 층 위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층위는 세력, 특히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세력을 둘러싼 대립 싸움이다. 타이완 문제, 미일안보조약 등과 함께 2005년 반일시 위에서는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 초점이 되었다. 두 번째 층 위로 이슈가 확대된 것이다. 세 번째 층위는 영토 영해 무역 경제협력 등 구 체적인 이익을 둘러싼 대립 싸움으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이슈이지만, 2010년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충돌이 원리화( 原 理 化 )된 이후 양측 모두 고유 영토 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 문제가 가장 뜨거운 대립 요인이 되어왔다. 특 히 2012년 중국의 주장( 댜오위다오백서( 釣 魚 島 白 書 ), 2012. 9. 25)을 살펴보면, 일본 과 중국 간의 대립을 세 가지 층위 전부로 확대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가능한 한 세 가지 층위의 분쟁 요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과 각 층위의 분 쟁을 그 층위에서 대화 등을 통해 해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전면적인 대결, 게다가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는 대결만큼 큰 위험은 없다. 2000년대 이후 중일관계의 특징은 여론과 상대국에 대한 이미지가 유례없 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 중일 양국 모두 정부의 통치력이 쇠퇴하면서 필연적 으로 여론에 영합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포퓰리 즘에 빠진 상황이다. <그림 3>은 1988년 이후 일본인의 대외 이미지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데 중국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1989년 톈안먼 ( 天 安 門 ) 사건, 1996년 타이완해협에서의 군사훈련, 2005년 반일시위, 2010년 4 王 小 東 (2000), 当 代 中 国 民 族 主 義 論, 戦 略 与 管 理 第 5 期. 과 2012년의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충돌을 계기로 악화일로를 걸었다. 한국에 28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29
<그림 3> 중국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이미지 추이 80 70 60 50 40 30 20 10 0 1988 1989 중국에 친밀감이 있다 한국에 친밀감이 있다 일중관계는 양호하다 일한관계는 양호하다 1990 19911992 1993 19941995 1996 19971998 1999 20002001 2002 20032004 2005 20062007 2008 20092010 * 출처: 중국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이미지 1988~2012(내각부,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 2011 2012 <그림 4> 베이징 지역 대학생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2012년 4~5월) 매우 친근감이 있다 2.30% 친근감이 있다 10.6% 보통 53.2% 친근감이 없다 21.8% 친근감이 전혀 없다 10.4% 잘 모르겠다, 무응답 1.70% * 출처: 王 星 宇 (2012), 중국 대학생의 일본에 대한 인식 조사, 日 本 學 刊 제5기 * 10개 대학, 2029건 회수(회수율 92.9%) V. 중일관계의 두 번째 전환점 대한 이미지는 중국보다 훨씬 좋았으나 이 또한 독도를 둘러싼 충돌로 인해 2010년부터 급격히 악화되었다. 영토 문제는 그 어떤 것보다 국민감정을 자 극하는 요소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했다. <그림 4>는 2012년 봄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본에 대한 이 미지를 조사한 결과다. 9월 센카쿠열도 국유화 반대 반일시위가 벌어지기 전 의 데이터다. 흥미로운 점은 친근감이 없다 는 응답이 30% 이상이지만, 보 통 (중국어로는 일반( 一 般 ) )이라는 응답이 절반을 넘는 사실이다. 기타 정보까지 고 려해보면 2012년 9월 12일부터 일주일 동안 지속된 격렬한 반일시위의 주역 은 대학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인과 중국인 모두 친근감이 있다 는 응답이 전체의 20%를 밑 돌고 있는데,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다. 반일( 反 日 )이 반중( 反 中 )을 부르고, 혐중( 嫌 中 )이 반일( 反 日 )을 부른다. 이 부정적인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 인가. 관계 재구축을 위한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 2010~2012년에는 두 번째 전환기가 찾아온다. 2005년에 발생한 반일시위 이후 중일관계의 토대를 뒤흔드는 중대한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2010 년 가을 센카쿠열도 해역에서 벌어진 중국 어선 나포사건, 특히 2012년 9월 일본의 국유화 조치에 항의하는 중국의 폭력적인 반일시위와 치열한 외교 공 세로 인해 양국 간에는 이웃나라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자취를 감춘 것처 럼 보인다. 사건의 배경에는 중일관계의 구조적 변화가 있다. 첫째, 일본을 추월한 중 국의 경제 성장으로 동아시아에 본격적인 세력의 전이가 일어났다는 점. 둘 째, 양국 모두 권력 기반이 불안정하다는 중대한 내정 문제를 안고 있어 그것 이 포퓰리즘적인 민족주의를 자극하기 쉬워졌다는 점이다. 국가의 구심력을 회복하는 데 민족주의보다 뛰어난 특효약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두 번째 전환점이 심각한 이유는 중일관계의 토대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고, 재구축의 방향성이나 조짐도 보이지 않기 때 30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31
문이다. 1980년대 이후 지속되어온 구조를 지탱해온 두 가지 접근법, 도덕적 접근법과 경제 이익 측면의 접근법 모두 지금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특히 도 덕적 접근법, 극소수의 군국주의자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국민을 나누는 양 분론은 중국 내부에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2012년 11월 중국의 시사 잡 지 옌황춘추( 炎 黄 春 秋 ) 에 게재된 허팡( 何 方 ) 전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소 장의 자아비판 은 심각한 수준이다. 허팡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VI. 배타적(과격한) 민족주의론 중국에서 자유로운 언론 공간의 확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더 불어 민족주의, 그것도 감정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하 지만 중국에서도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지식인들이 많다. 사 상가 리쩌허우( 李 澤 厚, 중국사회과학원)는 이미 1980년대에 중국의 근현대사 과정 에서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는 것이 민중에 대한 계몽을 압도 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과거 인식과 표현에 큰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대외침략을 민족적 범죄로 간주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일부 군국주의 분자만 의 탓으로 돌려 일본 인민을 우리와 같은 군국주의의 피해자라고 간주한 점 이다. 이것은 시시비비를 혼동한 커다란 실수였다. 5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만연과 함께 쓰디쓴 결과를 가져왔다면서 경종을 울리 고 있다( 啓 蒙 与 救 亡 的 双 重 変 奏, 1987). 철학자 뉴우훙바오( 牛 宏 寶, 중국인민대학)도 중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가 강한 생명력을 지니는 이유 중 하나는 왕조국가에서 국민국가로 전환할 때 근대적 가치를 찾지 못해 임시변통으로 전통(법가적 국가민족주의와 유교적 문화민족주의)에 의 극소수의 군국주의자와 피해를 입은 일본 국민을 구분 하는 양분론 은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대일 전략의 양대 축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미 국과 일본을 나눠 일본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다. 이것은 냉전시기의 국제 대립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한편 전자는 패전국을 관용으로 대한 다는 일본판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원칙 인 동시에 중국의 지도자 마오 쩌둥 저우언라이가 목표로 한 새로운 중국의 도덕 외교 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은 이로 인해 큰 혜택과 이익을 보았다. 배상청구를 포 기한 중국의 결정은 중일관계를 구원했고, 특히 일본 국민의 마음을 감동시 켰다. 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논한다. 게다가 뉴우훙바오는 권위주의적 억 압과 친화성이 강하고, 이문화 이민족을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며, 보편적 가 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중국의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할 대상 이라고 강조한다. 6 일본과 비교해보더라도 매우 수긍할 만한 논지다. 또한 서양 사상사 연구자 충르윈( 叢 日 雲, 중국정법대학)은 2005년과 2012년의 반일시위로 상징되는 중국의 새로운 민족주의를 급진민족주의 로 명명하고, 호전적 배타적 비이성적이라는 중국 고유의 특징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 다. 문제는 왜 이런 급진민족주의 가 나타나는가, 왜 여론을 끌어당기는가라 는 점이다. 충르윈은 민족주의에 대해 1 일본 우익세력, 미국의 대중( 對 中 ) 강 경파에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 학교와 언론에 의한 역사교육 선전의 5 何 方 (2012), 時 代 問 題 判 断 有 误 就 会 危 害 全 局, 炎 黄 春 秋 11 号. 6 牛 宏 寶 (2013. 1. 23), 2012 中 国 民 族 主 義 思 潮 動 向, 中 国 改 革 網. 32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33
결과이며,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그는 원한과 증오만을 가르치는 중국의 근대사 교육이 건전한 애국주의 와는 무관하며, 이웃나라와 건전한 관계를 구축할 수 없게 만든다고 강조하고 있다. 중국 고유의 급진민족주의 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형아 라고 주장 하는 충르윈의 관점은 세계에 통하는 가치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7 일본에서도 세계적인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2012년 9월 센카쿠에 서 충돌사태가 일어난 직후 고유의 영토 론,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싸구려 술 <그림 5> 헌법 개정 등에 대한 일본의 여론 개헌 집단자위권 소득세 증세 원전 재가동 TPP 참여 의원 정족수 반감 당선자 유권자 에 취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 자부로( 大 江 健 三 郎 )를 비롯한 시민들 은 센카쿠 반일시위가 벌어진 직후인 9월 28일 영토 문제의 악순환을 멈추자 일본 시민의 호소문 을 발표하여 영토 문 0 20 40 60 80 100 (%) * 출처: 아사히신문 과 도쿄대학 다니구치 마사키( 谷 口 將 紀 ) 연구실이 국회의원 및 유권자 1,89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아사히신문 (2013. 1. 28) 제가 얼마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지를 비롯하여 언론과 정부에 내셔널리즘을 억제시키고 진정시킬 책임이 있다는 점, 영토 문제는 협상을 통한 해결 외에 는 방법이 없다는 점, 애초부터 고유의 영토 등의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 는다는 점 등을 호소했다. 귀 기울여 마땅한 시민의 호소 를 일본 언론들은 거의 무시했는데, 이는 최근의 보수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화 와 관련하여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 내각 이후 일 본의 동향이다. 가장 큰 문제는 평화헌법의 향후 전망이다. <그림 5>는 다소 오래된 자료이지만, 헌법 개정, 집단자위권, 원전 재가동 등 현재 일본의 핫이 슈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여준다. 국회의원과 정당지지 유권자 약 1800명 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개헌은 국회의원의 경우 80%가 찬성하는 반면, 유권자는 50% 지지에 그쳤다. 집단자위권에 대해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 타났다. 한편 원전 재가동에 찬성하는 의원은 45%이지만, 찬성하는 정당지지 유권자는 35%로 소수에 불과하다. 전반적으로 2012년 12월에 당선된 국회의 원과 유권자는 이러한 핫이슈에 대해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2013년 참의원 선거 이후의 정치 전망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중국의 강경한 반일정책, 언론, 중국 국민의 반일시위가 일본의 보수 파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군사력 강화, 미일안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밀어붙 이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일본이 소극적 평화주의 노선을 전환하는 데 중국이 결정타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일본의 실정을 감안 한 이성적이고 온건한 대일정책을 희망한다. 7 叢 日 雯 (2012. 10), 当 代 中 国 激 进 民 族 主 义 兴 起 的 原 因, 领 导 者 总 第 48 期. http:// www.21ccom.net/articles/zgyj/ggzhc/article_2012112571712_4.html. 34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35
VII. 글로벌 대국, 중국: 중일관계 긴장의 배경 21세기에 접어든 이후 중일관계가 긴장된 배경에는 현재 동아시아에서 진행 되고 있는 중대한 파워 시프트, 즉 상승기에 들어선 중국의 글로벌화(경제대국, 군사대국, 정치대국화)와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일본이 자리하고 있다. 거기에 동아 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결정해온 미국의 쇠퇴도 미묘하게나마 중일관계에 중 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선 중국의 세계화와 위협에 대해 분석해보자. <그림 6>은 1990년 대비 (억 원) 9,000 8,000 7,000 6,000 5,000 4,000 3,000 2,000 1,000 0 <그림 7> 중국 공식 발표 국방비(1988~2014) 1988 1990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0 2012 2014 (년) * 출처: 중국의 국방비 추이 1988~2014년, 4년간 두 자릿수 성장. 아사히신문 (2014. 3. 5) 2020년의 GDP를 예측한 분포도다. 1990년에 중국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 는 비율은 2%, 일본은 14%였다. IMF 데이터에 따르면 도쿄에서 올림픽이 개 최되는 2020년에는 중국 15%, 미국 22%, 일본 6%로 예측된다. 중국의 GDP 가 불과 30년 만에 2%에서 15%로 증가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성장세가 유 지된다면 이 수치는 17~20%까지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 <그림 6> 세계의 GDP 분포(1990, 2020년) 국과 팽팽하게 맞서는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1990년 6 일본 2020년(예상) 이외에도 중국의 부국강병 상황을 국방비 추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군 사 비용은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중국이 발표한 공식수치를 사용할 수밖에 기타 36 26 % 14 2 27 15 중국 없는데, <그림 7>에 나타난 1988년부터 2014년까지의 추이를 보면 중국의 국방비가 장기간에 걸쳐 급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 서는 매년 두 자릿수로 성장하여 2004년 약 2,000억 위안, 2014년 8,000억 위안으로 10년 사이에 4배나 증가했다. 이 수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 31 22 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전문가들이 분석 중에 있다. 미국 그렇다면 향후 중국은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 영국의 경제사학자 앵거스 EU 21 매디슨(Angus Maddison)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의 GDP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 * 출처: 田 中 均 (2014. 4. 15), 흔들리는 국제질서상 미일, 전략대응을 재조정하라, 닛케이신문 * IMF 자료, EU는 현재 28개 회원국 36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37
중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1820년으로, 전 세계의 32%였다고 한다. 8 구미에서는 최근 중국의 고도성장을 보면서 구미가 세계의 패권을 쥐어 온 것은 고작 300년에 불과하다. 중국이 일찍이 19세기에 30%의 GDP를 차 지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패권국의 지위를 중국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9 셋째, 자신의 주변국에 대해 자립적인 국민경제를 허용하지 않는 글로벌 경제력을 제공할 수 있는가? 넷째, 제국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세계질서의 중심지(Métropole)인 제국 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가? 10 이러한 조건들을 종합하여 중국을 생각해보면, 현 단계에서 제국 으로서 의 중국은 실현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전 세계에 공공재를 제공할 수 없을 것이고, 세계적 가치와도 거리가 멀다. 문화적 지배 가치의 경우에는 VIII. 중국은 제국( 帝 國 ) 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이 예전처럼 제국이 될 수 있을지, 혹은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제국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현대 미국으로 대표되는 패권적 제국이나 명 청 왕조 같은 고전적인 제국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제국 이 되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생각했을 때, 후지와라 기이치( 藤 原 帰 一 ) 의 주장에 따르면 조건 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 전 세계에 공공재를 제공할 능력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공공 재인가? 둘째, 문화적인 힘을 제공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 유를 사명으로 전 세계에 이를 전파하고 있으며, 그것이 세계의 제국으로서 미국을 지탱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은 유교를 회생시킴으로써 문화적인 힘 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인권 문제를 둘러싼 상황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전 세계의 존경을 받을 수 없다. 반면 글로벌 경제력 부분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 중 국은 제국화하기보다 거대한 국민국가로서 주권을 유지하는 근대적 주권국가 에 매우 집착하고 있다. 중국이 제국을 향한 욕망을 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기 때문에 제국으로서의 중국을 가정한 상태에서 글로벌 상황을 생 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중화제국의 시대에 중국 왕조는 티베트와 투르키스탄에 대해 상당 부분 관 용의 정신을 베풀며 통치했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를 희구하는 현대 중국의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는 가혹하다. 최근 우루무치와 카슈가르 등 신장( 新 疆 ) 자치구 지역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상황은 분명 예사롭지 않다. 위구르인에 대 한 중국 당국의 대응은 과잉반응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며, 비극의 씨앗을 스 스로 잉태시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점점 더 폭력적인 보 복이 연쇄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위구르와 한족 간의 문제는 다음 세대 이후에도 이어질 것이다. 8 Angus Maddison(2007), Contours of the World Economy, 1 2030 AD Essays in Macro Economic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9 マーチン ジェイクス, 中 国 が 世 界 をリードするとき (원제: When China rules the world). 신장 지역의 한족은 1949년에는 전체의 6.7%였으나 2005년에는 39.6%로 10 藤 原 帰 一 (2002), デモクラシーの 帝 国, 岩 波 新 書. 38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39
증가했다. 급증한 시기는 1960년대로, 에너지와 면화 등 자원개발을 위해 한 족 간부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말하자면 국내 식민 이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동투르키스탄과 한족이 항쟁을 벌여온 역사도 있다. 일본과 중국의 화해가 어려우면서도 필수 불가결한 것과 마찬가지로 중 국에서 한족과 위구르, 또는 티베트와 한족 간에도 진정한 화해가 필요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상황은 지금까지의 중일관계와는 매우 다르다. 중일관계의 구조가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세 가지 새로운 상황이 있다. 첫 째는 가치 파워 구체적인 이익 등 세 가지 차원 모두에서 대립하고 있다는 점, 두 번째는 이러한 대립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 세 번째 는 양측 모두 원리주의적으로 대응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베 정권은 전 후 체제로부터의 탈피, 보통국가 를 노리고 있는 반면에 중국은 150년 동안 열강의 지배를 당했던 원한 을 풀어 냉전시기에 받은 불이익을 회복함으로써 IX. 중일관계의 현재: 대립관계로 가지 않기 위해 2012년부터 중일관계는 전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일본의 센카쿠열도 국유화, 이에 반대하는 반일시위, 일본과 중국 양국의 상호 격렬한 비난전으 로 인해 정상회담을 비롯하여 양국의 정치관계가 거의 중단 상태에 있다. 국 교정상화 이후 최대의 위기다. 이후 정상회담은 열리지 못하고 있으며, 양국 의 정치권, 외교가는 서로가 먼저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미미하게나마 일본 재계에서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여 2014년 9월, 경제동우회 대표단, 경제단체 연합회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고 중국 측도 이에 부응하기 시작했지만 전면 적 개선으로 발전할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2012년 질적으로 달라진 양국관계는 이제 가치, 파워, 이익이라는 3층 구 조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각각의 이슈를 따로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양국이 총체적인 대립관계에 놓인 것은 아 닌가 싶다. 2012년 9월 25일 중국 국무원이 내놓은 댜오위다오 백서 를 읽 일등국가 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11 이견도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아베 정권의 대중국 안보정책은 신보수주 의(Neoconservatism)로 비친다. 중국은 아베 총리를 종전부터 있어온 오래된 민 족주의자로 보고 있지만, 단순한 민족주의는 아니다. 아베는 헌법 제9조를 정 점으로 하는 전후 평화주의에 대한 복수로서, 일본은 자위적 방위력을 가진 보통의 군사대국 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 옹호 하는 신민족주의자들이 아베를 지지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원리주의적 인 것이다. 한편 시진핑( 習 近 平 ) 주석은 중국의 꿈 을 통해 정체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지만, 근대 150년 동안의 원한을 풀려는 의도만이 아니라 근래의 가 차 없는 외교적 행보를 접할 때마다 예를 들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배제된 냉전기의 부당한 대우 에 대한 복수를 노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왕지스( 王 緝 思 ) 교수는 국제사회를 향해 중국은 일등국가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고 호소했다. 또한 국제정치학자 옌쉐퉁( 閻 學 通 ) 칭화대 교수도 2014년 4월 인터뷰에서 중국 외교의 목표를 국가 존엄의 문제를 해결하는 어보면 문제는 단순한 영토 분쟁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의 입장이 역사 문제 와 맞물려 전면적 대립으로 맞서는 방향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11 아사히신문 (2012. 10. 25), 王 緝 思 인터뷰. 40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41
것 이라고 단언하고 있지만, 스스로의 지위에 대한 억울함에 대해 답답함을 품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런 억울함은 일본의 신민족주의적인 보수파 엘리 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양국의 지도자가 원리주의를 고수하며 상대국에 대응한다면 양국 모두 상 당히 어려움을 겪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양국 모두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매 우 크다. 양국의 정치인은 우선 분쟁을 군사화하지 않기 위한 긴급조치를 강 구할 책임이 있다. 참고로 소개하자면 극단적인 현실주의자(realist)인 옌쉐퉁 교수는 아사히신 문 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중국의 양국관계를 네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바 있 다. 첫째 우호 협력관계(러시아), 둘째 보통의 선린협력관계(독일과 프랑스), 셋째 신형대국관계(때로는 전략적으로 대립하지만, 때로는 전략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대미관계). 넷째 대립관계인데 일본이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12 이렇게 되면 일본과 중국의 대립은 단순히 어떤 섬을 둘러싼 영토 분쟁을 넘어서 전면적인 대립관 계로 치달아 개선에 대한 전망을 찾기 어려워진다. 양국관계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관계로 변질되었음을 양국 정부 모 두 확실히 인식하고 대립과 항쟁을 구체적인 군사적 충돌로 비화시키지 않으 려는 지혜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X. 관계 재정립을 위한 세 가지 제언 아시아의 이웃하는 강대국 중국과 일본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시아 의 미래는 양국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달려 있다.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 의 상황을 앞에 두고 보통의 선린관계 를 구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 지, 보통의 선린관계의 기초를 무엇에 둘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필자는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특히 위험 관리(risk management)는 지금 당장 나서야 하는 시급한 과제다. 첫째, 영토 분쟁의 원리성( 原 理 性 ), 양국의 분쟁 방지 메커니즘의 결여 등으 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정상 차원과 방위 실무 차원에서 위기관리를 위한 비상 채널을 구축할 것. 특히 양국 국방 담당자 차 원에서 계속되어온 해상 연락체제 등의 본격화, 어업 안전과 관련된 다자체 제가 시급한 당면 과제다. 둘째, 지금까지의 관행과 원칙이 무너져버린 중일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하 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응이 필요하다. 첫째, 일본 정부는 영토 문 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바꿔 분쟁을 인정하고, 유보 된 문제에 대해 서는 쌍방이 재차 유보 하는 식의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내는 등 영토 문제를 의제화할 필요가 있다. 어찌 됐든 외교 를 가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역 사 문제, 전후처리 문제와 관련하여 1998년 10월 8일에 이루어진 한일공동선 언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일본과 한국의 파트너십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은 중일관계의 재정립을 위한 모델이다. 1998년에 한국과 일본 양국은 다음 사실을 확인했다. 첫째, 일본이 정식 사죄를 표명했고, 최소한의 화해를 실현했다. 선언은 말 12 朝 日 新 聞 (2014. 4. 11). 한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회고하며 일본이 과거 42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43
한때 한국 국민에 대해 식민지 지배로 인해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함께 진심에서 우 러나온 사죄를 했다. 둘째, 한일 양측은 전후 상대국의 노력을 칭송했다. 일본은 한국의 경제 발 전과 민주화를 높이 평가했으며, 한국은 전후 평화헌법하에서 전수방위( 專 守 防 衛 ) 및 비핵 3원칙을 비롯한 안보정책과 세계경제 및 개발도상국에 대한 일본 의 경제 지원 등을 높이 평가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1998년 한일공동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탄생한 양자 간 합의문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다. 키워 드는 화해 와 상대에 대한 존중 이다. 2012년 시점에서 일본과 중국 양국은 국교정상화 40주년, 우호조약 35주년을 맞았다. 이제 양국은 한일공동선언을 모델로 삼아 위의 내용이 포함된 다섯 번째 문서를 작성하고 관계를 다시 시 작해야 한다. 양국이 작은 섬을 둘러싼 분쟁을 넘어서서 일본은 역사를 진지하게 마주하 고, 중국은 전후 아시아 및 일본의 행보를 냉정하게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쌍방에 결여된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셋째, 양국 모두 자국의 이익을 넘어 동아시아 지역의 공동이익을 염두에 둔 협력을 시작하는 것이 경직된 양국관계의 돌파구로 이어질 것이다. 구체적 으로는 아시아 지진계측예보센터, 아시아 방역기구, 아시아 긴급공동기금, 아 시아 사람의 안전 공동센터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공기도 바다도 하늘도 모두 공공재다. 글로벌 경제대국 중국과 선진국 일본이 책임져야 할 지역의 공동사업은 얼마든지 있다. 근대 주권국가 구축을 위해 부심해온 일본, 중국, 한국이 이제는 서로 협력 하여 지역, 또는 글로벌 공공재를 만들어나갈 책임이 있다. XI. 한중일의 공생을 위해 일본은 지금 동북아시아의 모든 이웃과 갈등을 빚고 있다. 하나는 역사 문제, 다른 하나는 영토 문제다. 당면한 분쟁 해결을 위해서는 먼저 각자 배타적 민 족주의 를 졸업해야 한다. 동북아 3국은 모두 국민국가로서 젊고 혈기왕성하 다. 최고 지도자도 모두 젊다. 맺음말에서는 중일관계 및 한일관계를 비교, 고 찰할 것이다. 분쟁의 완화와 화해를 향한 접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첫째, 각각의 출발점을 생각해보자. 한국과 일본은 1965년에 국교정상화 를 실현하면서 오늘날의 양국관계를 출발시켰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 루어진 국교정상화 협상은 여러 가지 과제를 남겼지만, 정상화 및 배상, 경제 원조를 연계시킴으로써 전후처리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한편 1972년 일본과 중국의 국교정상화는 전쟁 상태의 종식, 정통 정부 인정이라는 어려운 과제 를 해결했지만, 전쟁 전후처리를 완벽하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의 배 상청구 포기 는 중일관계 정상화에 크게 기여했지만, 전쟁 피해의 회복이라는 중국 국민의 염원에 대해 일본은 부응하지 못했다. 둘째, 일본은 한중 양국과 모두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를 빚고 있다. 하지 만 한걸음 물러나서 생각하면, 중일관계보다 한일관계 쪽이 교착상태를 돌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3년 12월 13일에 중국사회과학원 에서 개최된 공동연구팀의 한중일 세미나에서 이원덕 교수(국민대학교)가 한 주 장을 살펴보자. 우선 양국은 비교적 가치와 제도를 공유하고 있다, 둘째, 한국 과 일본보다 일본과 중국의 대립이 정면충돌하고 있다. 셋째, 양국관계를 좌 우하는 미국의 역할에 차이가 있다. 즉 한일관계에서는 미국이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지만, 중일관계에서는 미국의 역할이 모호하여 때로는 중일관계를 44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45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등의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중일 관계보다 한일관계가 더 다루기 쉽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필자도 동의 한다. 필자는 이외에도 추가적으로 중일관계의 비대칭성(규모, 오르막길에 있는 신 재구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3국은 모두 젊은 국가이며, 2012년 에 젊은 지도자들이 탄생했다. 부디 젊음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꿔주기를 간 절히 바란다. (번역: 길영숙) 흥국과 내리막길에 있는 선진국 등)이 중일관계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생 각한다. 이상의 논의는 접어두고, 중일 양국의 충돌을 완화시키기 위해 한일관계가 하나의 학습 가능한 모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특히 1998 년 한일공동선언을 토대로 하여 일본과 중국은 관계를 재정립하고 화해의 첫 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동북아시아 3국의 관계 재구축이 가능 해지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 훌륭한 선린의 역사를 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2007년 4월 일본을 방문한 원자바오( 温 家 寶 ) 중국 총리는 얼 음을 녹이는 여행 이라 일컬으며 최초의 일본 국회 연설에서 흥미로운 사항을 지적했다. 먼저 중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 정부와 일본의 지도자는 여러 차 례 역사 문제에 대해 태도를 표명하고, 침략을 공개적으로 인정했으며, 피해 국에 대해 깊은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 이것을 중국 정부와 인민은 적극적 으로 평가하고 있다 라고 천명했다. 다음으로 1980년대부터 이루어진 일본 의 원조에 대해 중국의 개혁개방과 근대화 건설은 일본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지지와 지원을 받았다. 이것을 중국 인민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라면서 재차 강한 사의( 謝 意 )를 표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원자바오 총리의 연설은 일본에 대한 최초의 화해 제안이 아니었나 싶다. 한중일 3국은 화해의 첫걸음 을 이미 내디뎠다는 점, 다시 되돌아갈 수 있 는 선린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면서 관계를 46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중일관계의 재정립과 한중일 3국 관계 47
참고자료 새로운 일중관계를 생각하는 연구자 모임에 대해 일본의 뜻 있는 중국 연구자들이 2013년 10월, 일중관계 악화를 우려하고 개선을 바 라며 새로운 일중관계를 생각하는 연구자의 모임(약칭 생각하는 모임) 을 결성했다.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12월 현재 260명의 연구자(중국, 일본, 일중관계 연구자, 재일 중국인, 재외 중국인 포함) 가 이 네트워크형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I. 머리말 생각하는 모임 은 다음 세 가지 사항을 호소하고 있다. 첫째, 국제적인 규범과 평화적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할 것. 둘째, 영토 분쟁을 다른 차원으로 파급 확대시키지 않는 냉정함과 지혜가 필요하다. 경제, 문화, 지역 풀뿌리 관계의 유지 및 강화. 셋째, 양국 정부와 국민이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극복할 것. 생각하는 모임 은 또한 다음 세 가지를 과제로 내걸고 있다. 우선 일중 양국 정부, 국민, 그리고 연구자들 사이에 신뢰 구축을 추진하고, 민족주 의를 극복하여 동아시아 국가 간의 화해의 길을 모색할 것, 다음으로 일중 양국 연구 자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지적 네트워크를 확장하여 동아시아 지역의 긴장 완화를 위해 다 함께 노력할 것, 나아가 새로운 선린관계 구축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일중관계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할 것(비교화해학 등) 등이다. II. 한중일 관계의 복잡성, 비대칭성 및 규칙성 III. 한중일 관계 개선의 기회와 새로운 시련 IV. 한중일 관계의 역사 반추와 미래 협력
류장융 칭화대학교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I. 머리말 동북아시아의 인접국인 한국, 중국, 일본은 상호 공통점이 많지만 차이도 적 지 않으며,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경우가 많으나 일부 갈등과 문제점도 안고 있다. 역사적으로 당( 唐 )의 백강전투( 白 江 戰 鬪 ), 명( 明 ) 만력 연간 명 조선 연합 군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 침략 격퇴, 청 말의 청일전쟁 등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은 예외 없이 한반도와 관련된다. 2015년은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해다. 불평등조 약인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120주년이자, 제2차 세계대전 및 중일전쟁 승리, 대한민국 광복, 일본 패전 및 항복 70주년이다. 또한 불평등조약인 한일병합 류장융[ 劉 江 永 ] 동아시아 국제관계, 일본정치 / 칭화대학교 국제관계연구원 부원장 中 国 与 日 本 : 变 化 中 的 政 冷 经 热 关 系 ( 人 民 出 版 社, 2007), 当 代 日 本 的 对 外 关 系 (공저, 世 界 知 识 出 版 社, 2009), 从 国 际 战 略 视 角 解 读 可 持 续 安 全 真 谛 ( 国 际 观 察 第 6 期, 2014), 地 缘 政 治 思 想 对 中 美 日 关 系 的 影 响 ( 日 本 学 刊 第 3 期, 2015). 조약 체결 105주년이자 전후 한일수교 50주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의 관련성 및 역사와 현실의 결합 지점에서 일본 정치의 우경화, 특히 아 * 이 글은 安 倍 政 治 学 与 中 日 韩 关 系 ( 东 北 亚 论 坛 2015 年 第 3 期 )을 수정 보완한 것임 을 밝힌다. 50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51
베폴리틱스(Abepolitics) 가 중일관계 및 한일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필요 가 있다. 아베폴리틱스 에 확립된 정의는 없지만, 아베노믹스(Abenomics) 에서 파생 하여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 정권의 정치 및 외교노선을 전반적으로 이르는 용어 로, 주로 아베 총리가 2012년 재집권하면서 추진한 우경화 대국노선이라는 정책 목표, 방침 및 행동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보면, 대내적으로 전후 일본국 헌법 및 일본이 해외에서 군사 력을 사용하고 집단자위권 을 행사하기 위한 일련의 관련 법안의 수정을 모 색해왔다. 또한 아베노믹스 및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에 편승하여 자신 II. 한중일 관계의 복잡성, 비대칭성 및 규칙성 전후 70년 동안 한국, 중국, 일본의 관계는 특수한 복잡성을 띠면서 정치와 경 제 무역 관계의 상호 영향 속에서 모종의 규칙성을 보여왔다. 현재 중국과 한 국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를 전면적으로 강화하고 있고, 중국과 일본은 불안정한 전략적 호혜관계 이며, 한일관계는 갈등이 있는 협력동반자 관계 다. 21세기 들어 한중, 중일, 한일관계는 비대칭적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일본 이 불리한 상황에 처한 동시에 한중일의 협력을 저해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정치 우경화, 특히 아베폴리틱스의 직 간접적 영향에 있다. 의 집권 기반을 다지면서 장기 집권을 꾀하고, 전후 금기를 깨면서 전후 국내 체제의 변화를 모색했다. 이 밖에도 일본의 침략과 식민 역사를 희석하거나 미화하면서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또는 우회적으로 참배했고, 적극적 평화주 의 라는 미명 아래 중일 전략적 호혜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중국의 군사력 및 군사 배치 강화에 대해서는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베트남 등과의 군 사협력을 통해 동중국해, 남중국해, 나아가 글로벌 차원에서 대중국 억지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또한 전후 70년을 활용하여 안보리 이사국 확대를 추진하 면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노리고 있다. 사실 아베폴리틱스는 일본을 소위 정상국가 또는 보통국가 로 만들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전후 체제와 국제질서로부터의 탈각( 脫 却 ), 즉 전후 평화국가 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해온 궤도를 벗어나 해외에서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강대국이 되려는 것이다. 아베폴리틱스가 점차적으로 추진된다면, 중국과 한 반도에 복합적인 영향을 끼치고 한중일 관계의 비대칭성을 가중시키게 된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한중일 관계에 대한 아베폴리틱스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한중일 3국의 중요성과 3국 경제 발전의 불균형 중국과 일본은 경제 규모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와 3위이며, 한국의 경 제 규모도 13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중일은 세계경제의 20%, 아시아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등, 세계평화와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의 GDP는 2000년 1조 달러를 돌파했고, 2014년에 63조 6,463억 위안을 기 록하여 처음으로 10조 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일본 경제의 2배이자 세계경제의 12%를 넘는 규모이다. 중국의 성장은 동북아시아, 나아가 세계경제 지도를 바꾸 고 있다. 21세기 들어 3국의 경제 성장에 중국의 부상, 일본의 침체, 한국의 안정 이라는 불균형이 나타났다. 세계은행의 데이터를 보면, 2000~2013년 중국 의 GDP는 1조 800억 달러에서 9조 2,400억 달러로 7.6배 증가했다. 반면 일 본의 GDP는 4조 8,000억 달러에서 4조 9,000억 달러로 제자리걸음하면서 상대적으로는 줄었고, 한국의 GDP는 5,600억 달러에서 1조 4,000억 달러 52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53
로 1.5배 늘었다. 13년 동안 3국 경제에서 중국의 비중이 18.5%에서 60%로 늘어난 반면, 일본은 73%에서 32%로 줄었고, 한국은 8.3%에서 8%로 조정되 었다. 1 일본은 중국 경제라는 쾌속열차에 올라타지 못했고, 한국은 뒤늦게 출 발했지만 따라잡았던 것이다. 엔화 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중국이 지속적으로 7%대 경제 성장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몇 년 안에 중국의 경제 규모가 일본의 3배로 커지고 한국과 일본의 경제 규모 격차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중국 직접투자는 동기대비 29.8% 늘어 39억 7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2015 년 한중 간 무역총액이 3000억 달러를 돌파하여, 중일 간 무역총액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중국의 대외무역 분야에서 일본의 지위는 한국 보다 아래인 6위로 떨어진다. 중한관계는 정치 분야와 경제 분야가 상승 작용 을 하는 정열경열( 政 熱 經 熱 ) 의 선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은 정치관계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냉경냉( 政 冷 經 冷 ) 의 악순환이 이어져, 양국 간 무역과 직접투자 모두 하락 2. 3국 정치관계의 불균형 세이다. 중국의 해관총서( 海 關 總 署 )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중일 무역액은 1조 9,200억 위안(약 3100억 달러)으로 동기대비 1% 줄었고, 이 가운데 중국의 대일 매수자 우위의 시장경제에서 자국 상품이 타국 및 그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려 면 가성비 외에도 국제적으로 좋은 국가 이미지를 형성해야 하며, 특히 정치 적으로 안정된 관계 구축이 가장 중요하다. 외국인 직접투자 역시 국제 정치 관계, 투자 환경, 이윤과 리스크의 균형 같은 요인이 불가피하게 영향을 끼친 다. 따라서 한중, 한일, 중일의 정치관계는 필연적으로 경제 무역관계의 잠재 력 발휘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록 한중 수교가 중일 국교정상화에 비해 20년 늦게 이루어졌지만, 21세 기 들어 한중 정치관계가 순조롭게 발전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단계로 격상되 면서, 한중 경제 무역관계 역시 빠르고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한국의 전체 수 출 가운데 대중국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0년 10.7%에서 2013년 26.1% 수출과 수입이 각각 1.4%와 0.5% 하락했다. 한때 일본은 1993~2003년 연속 10년 동안 중국의 최대 무역 동반자였다. 이제 일본은 중국의 무역 동반자 순 위에서 5위에 불과하다. 2014년 중일 무역액이 중국의 대외무역 총액에서 차 지하는 비중은 7.3%였고, 3 일본의 대외무역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 였으며, 일본의 대중국 직접투자는 전년대비 38.8% 줄어든 43억 3000만 달 러로 축소되었다. 이는 일본의 대중국 직접투자가 동기대비 4% 줄어든 2013 년에 이은 하락세로, 하락폭이 25년 만에 가장 컸다. 4 비록 2015년 1월 중일 무역이 다소 회복하면서 늘어났지만, 앞으로 중일 기업 간의 무역이 줄어들고 거기에 한중 FTA 체결까지 이루어진다면, 한중 무역의 증가폭이 앞으로도 중 일 무역을 상회할 것이다. 로 늘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해외시장이 되었다. 2 2014년 한국 기업의 대 1 江 瑞 平 (2014. 9. 28), 한중일 협력 속의 경제적 상호이익과 정치적 상호신뢰의 문제, 칭화대학, 고려대학, 도쿄대학 공동 주최의 제4차 동아시아공동체포럼 동아시아 국제 질서 형성의 미래 회의자료집, 211쪽. 2 江 瑞 平 (2014. 9. 28), 위의 글, 208쪽. 3 중국 해관총서( 海 關 總 署 )에서 2015년 1월 13일에 발표한 통계 데이터. 4 중국 상무부( 商 務 部 ) 뉴스 대변인 선단양( 沈 丹 陽 )이 2015년 2월 16일에 발표한 데이터, http://news.xnnews.com.cn/gnxw2/201502/t20150219_2158391.htm. 54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55
3. 3국 간 정치적 상호신뢰 관계의 불균형 발전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중국을 공식 방문했고, 2014년 시진핑( 習 近 平 ) 주석이 한국을 단독 방문했다. 양국은 한중 미래비전 공동성명 과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내실화를 위한 행동계획 에 따라 여러 가지 협력을 착실히 추진해왔다. 그러나 2012년 아베 신조 재집권 이후 일본은 한국 및 중 국과 지도자 상호 방문을 추진하지 않았고, 심지어 국제회의 등 다자간 무대 에서의 짧은 만남도 상호관계의 개선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 도자의 교류를 보면, 한국과 중국 사이는 지기를 만나 마시는 술은 천 잔도 모자란다[ 酒 逢 知 己 千 杯 少 ] 는 표현 그대로지만, 중일과 한일의 관계는 말이 통하 지 않는 사람과는 반 마디도 많다[ 話 不 投 机 半 句 多 ] 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재 한국과 중국의 정치적 상호신뢰는 돈독해졌지만, 중국 및 한국과 일본 사이는 정치적 신뢰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은 이미 FTA 협정에 서명했지만, 정치관계의 영향으로 인해 중일 및 한일 FTA 협상은 쉽지 않다. 한중 FTA에 따르면, 한국은 58.9%의 공 산품 시장을 즉각 개방하고 10년 안에 그 비율을 90%로 끌어올릴 예정이다. 중국은 즉각 개방하는 공산품이 대략 20.3%이며, 10년 안에 71.7%의 공산품 시장을 개방하게 된다. 이 밖에도 한국은 9.96%의 농산품을 즉각 개방하고 10년 안에 31.3%로 늘릴 예정이며, 중국은 19.3%의 농산품을 즉각 개방하고 10년 안에 69.8%로 늘리게 된다. 한중 FTA가 일단 구축되면 중국 GDP 성장 률을 1~2%, 한국의 성장률을 2~3%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5 현재 일본이 한중일 3국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임에도, 아베폴리틱스가 주 도하는 아베노믹스는 전혀 변화하지 않고 계속 다른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인 다. 아베 내각은 대내적으로 우선, 국민들이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소비세 인 상을 2016년 7월 참의원 선거 이후인 2017년 5월로 미루기로 결정함으로써, 선거 때 자민당에 대한 악영향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또한 국제유가 하락 기 조와 지속적인 양적 완화 정책을 활용하여 엔화의 평가절하와 증시부양을 부 추기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 기업의 무기 수출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했는 데, 심지어 공적개발원조(ODA) 제공을 통해 이를 지원했다. 일례로 이러한 방 식으로 필리핀에 해상 순시정을 제공한 바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鳩 山 由 紀 夫 ) 총리 사임 이후, 일본은 중국과의 FTA 체결 문 제에 대해 줄곧 소극적이었다. 아베 총리는 2015년 4월 말 방미 당시 실현 여 부에 상관없이 미국과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을 우선적으로 고 려한다고 밝혔다.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 一 帶 一 路 : 육상 해상 실크로드-역자주) 건설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의제에 대해 일본의 태도는 소극적이었 다. 하지만 2015년 3월 영국에 이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트레일리아, 한국 등이 앞다투어 AIIB 가입을 결정했다. 이에 당연히 일본의 정책 담당자 들이 매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중국은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아 베 내각이 과연 스스로의 고립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가 현실적인 문제로 떠 오르고 있다. 아베폴리틱스가 해외 파병을 허용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개헌을 추진하면 서, 아베노믹스는 일본 산업구조와 국가발전 모델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2016년에는 미국, 러시아, 한국, 일본에서 선거가 치러질 예 정이다. 여기에 중동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국제유가가 상승세로 돌아선다면, 엔화는 필연적으로 평가절상 주기로 들어서게 되고 이에 따라 일본 증시가 동 5 國 際 商 報 (2015. 3. 16). 반 하락하면서 수출 악재 역시 커질 것이다. 아베 내각의 약속에 따르면 2017 56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57
년 5월 일본은 소비세가 10%로 인상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일본의 국내 소비 가 억제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 경제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하고 아베폴리틱 스와 아베노믹스가 씨앗을 뿌린 이중고를 맛보게 될 것이다. 화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정당 가운데 상대적으로 온건한 자유파 에 비해 우익민족주의적 색채가 훨씬 더 짙다. 이들은 전전 일본의 국가관 및 전쟁관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일부는 전전 일본의 황국사관 과 야스쿠니 사관 을 계승했다. 6 아베의 재집권 이후 일본 정치의 우경화가 가속화되었지 4. 일본 정치의 우경화가 중일관계에 미칠 영향 일본 국내 정치의 우경화가 억제될 때 중일 정치관계의 개선과 민간 정서의 호 전이 가능하다. 한일관계의 악화 역시 같은 규칙성을 보인다. 일본에서는 일부 언론이 의식적이든 아니든 일본 정치의 우경화 를 일본의 우경화 로 슬며시 만, 어느 정도 제약도 받아왔다. 현 단계에서 일본의 전전 군국주의를 다시 부 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치 우경화가 점점 더 심해진다면 일본이 새로 운 방식으로 아시아 인접국과 동아시아 정세에 골칫거리를 만들거나 사단을 일으키면서 아시아의 미래에 가장 큰 불안정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 면, 미국의 유화정책이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꿔 부르고는, 이어서 일본은 우경화가 아닌 보수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목적은 일본 정치의 우경화 라는 객관적 사실과 문제의 본질을 부정하는 데 있다. 개념을 바로잡고 정리해보면, 냉전 종식 후 일본에서 대다수 유권자 가 보수정당의 정책에 동조하는 보수화된 사회 분위기가 나타났고 일본 정계 에서 보수정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올바른 결론일 것이다. 이 러한 배경에서 일본 정치의 우경화가 고개를 들었지만, 이를 일본 사회 전체의 우경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2015년 7월 아베 내각의 안보법 강행 통과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필자는 2007년에 출간한 중국과 일본 변화 속의 정냉경열 관계 라는 책에서 소위 일본 정치의 우경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이는 주 로 일본 우익세력과 그 주장이 정계에서 점차 득세하면서 정부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정치적 경향을 가리킨다. 이는 일본 정계와 사회의 다 양한 우익 정치세력이 핵심이 되어 교과서를 수정하고 야스쿠니 신사의 지위 5. 한중일은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에 입각해 미래를 지향하자 중국 명나라 만력 연간, 즉 1592년과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두 차례 에 걸쳐 일본군을 이끌고 한반도를 침략하여 중국을 차지하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 내각 당시 일본은 1894년 7월 청일전 쟁을 일으키고 나서 중국의 타이완을 50년 동안 식민통치했다. 1910년 8월 일 본은 한일병합조약 을 통해 한반도를 식민통치했다. 1931년 일본 군국주의 자들이 9 18사변(우리에게는 만주사변으로 알려져 있다 역자주)을 일으키고 이어 1937년 7 7사변(루거우차오사건 역자주) 을 날조하여 본격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시작했으 며, 이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하여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는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인접국에게 막대한 민족적 재난을 가져왔다. 따라서 역사 요인은 한일관계와 중일관계에 미치는 를 전전( 戰 前 )의 전통적인 수준으로 회복시키며 일본의 침략 역사를 미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려는 정치적 경향이다. 이들은 전후 일본의 평 6 劉 江 永 (2007), 중국과 일본-변화 속의 정냉경열 관계, 人 民 出 版 社, 163쪽. 58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59
영향력이 매우 크다. 전후 한국 및 일본과 다른 사회체제를 구축한 중국은 한 국전쟁과 미국의 냉전정책으로 인해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중일 양국 은 전후 27년 만인 1972년에 국교정상화를 실현했고, 다시 20년이 지난 1992 년에 한중 양국이 비로소 수교했다. 이후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사회체제와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더 이상 한중관계 및 중일관계 진전에 장애물이 되지 않 았고, 공동의 한자문화와 유교사상이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사이에 친근감 을 형성했다. 그러나 일본 우익세력과 일부 정부 인사가 한국 및 중국과 역사 관이나 전쟁인식 측면에서 갈등을 빚었는데, 이는 인류사회의 양심과 가치관 뿐 아니라 과거 일본이 국제사회에 한 약속에도 위배되는 행위로, 한일 및 중 일 정치관계와 민족 화해를 저해하는 중요한 문제다. 그 결과 한중일 3국의 정치적 상호신뢰 관계는 비대칭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전후 70년 동안 이어진 중국과 타이완 및 남북한의 분열 상황이 오늘날 한 중일 관계에 특수한 복잡성을 빚어내고 있다. 중국과 북한은 전통적으로 우 호관계를 유지해왔고, 중국과 한국은 2008년 이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다. 반면 북한은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 및 일본과 외교관계가 없는 대 립 국면을 유지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및 중국과 타이완 관계의 평 화로운 발전이 한중일 세 나라의 공동 이해에 부합한다. 하지만 북핵 문제와 타이완 독립 주장은 한반도와 중국과 타이완의 관계에 긴장을 조성하게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도서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과 해양경계 획정 문제가 있다. 여기에 문제의 실질과 역사인식 문제가 긴밀히 초 -역자주] 영유권 분쟁이 있으나, 이는 영토 분쟁이라기보다는 해양경계 획정 문제로 보아야 한다. 현재 한국과 중국은 해양경계 획정 협상을 시작했으며, 해양 분야에서 양국은 협력 잠재력이 크다. 2015년 3월 중일 고위급 해양안 보대화가 4년 만에 재개되었는데, 충돌을 피할 방안을 찾는 것이야말로 중일 양국의 외교 및 국방 부처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3년 만에 한 중일 실무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제7차 한중일 외교장관회의도 재개되었다. 한중일 외교장관회의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왕이( 王 毅 ) 중국 외교 장, 윤병세 한국 외교부장관, 기시다 후미오( 岸 田 文 雄 ) 일본 외무상은 모두 세 나라가 역사를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정신에 입각하여 관련 문제를 적절 히 처리하고 양국 간 관계를 개선하며 세 나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중국과 일본의 외교장관은 한국의 동북아 평화협 력 구상 을 크게 환영하고 높이 평가했다. 3국 외교장관은 앞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원자력 안전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핵 안보, 재난 관리, 환경 및 청년 교류 등의 협력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앞으로 3국 온라인 정책 협상, 환경부장관회의 기제하의 공기오염 방지 대화 및 동아시아 문화의 도시, 아시 아 캠퍼스, 인문 교류 포럼, 미디어 교류 등의 활동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3 국 외교장관은 또한 청년정상회담, 한중일 외교연수기관 협력, 지식인 풀네트 워크와 중동호흡기증후군 정책협상 등 새로운 협력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수 도권, 노령화 분야의 협력을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7 하지만 이번 외교장관회 의에서는 3국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지 못했다. 만약 전후 70년 아베 담화 가 무라야마( 村 山 ) 담화의 정신을 부정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직 간접적으로 얽혀 있으며, 또한 관련 국제법이나 해양법 등 법률 문제와도 연관되므로, 외 교 협상을 진행하면서 상호신뢰 조치와 위기 통제 기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 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해수면 아래에 있는 이어도[중국명: 쑤옌자오( 蘇 巖 礁 ) 암 7 신화사( 新 華 社 ) 홈페이지 서울발 2015년 3월 22일, 제7회 한중일 외교장관회의 후 발표 한 공동 보도자료. http://japan.xinhuanet.com/2015-03/22/c_134086647.htm. 60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61
참배한다면, 3국 정상회담 성사가 다시금 불투명해질 것이다. 한일 및 중일 정치관계의 개선은 일본 정치 정세와 정치 경향의 변화에 달려 있다. 일각에서는 중일관계가 악화된 책임을 중국이 강대해지면서 나타난 동아 시아 파워 이동의 탓으로 돌리지만, 이러한 관점은 같은 상황에서 한중관계가 끊임없이 개선되고 강화되는 반면 한일관계는 중일관계처럼 악화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한중일 경제 무역관계의 발전은 비록 대부분 시장에 의해 결정되지만, 민간 정서도 물건을 구매할 때 어느 정도는 선호도를 결정하기 때문에, 정치관계의 성격과 친소( 親 疏 )가 경제 무역 기술 인적 왕래 등의 협 력에도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21세기 들어 일본 정치의 우경화를 배경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 泉 純 一 郎 )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고, 아베 총리 역시 재집권 후 2013년 12월에 또 한 번 공공연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 했다. 당시 아소 다로( 麻 生 太 郎 ) 내각은 소위 가치관 외교 를 추진했다. 민주당 집권 당시 일본 우익 매파세력은 미국의 아시아 회귀전략과 긴밀히 협조하면 서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분쟁을 고조시켰다. 노다 요시히코( 野 田 佳 彦 ) 내 각은 센카쿠 국유화 방침을 천명하여 중국의 격렬한 반대와 저항에 부딪혔 다. 일본 정치의 우경화 및 대중국 정책의 후퇴가 한일관계와 중일관계의 정 냉경냉( 政 冷 經 冷 ) 및 관냉민냉( 官 冷 民 冷 ) 을 초래한 것이다. 이 시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중국의 성장과 부상 등 기타 요인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상황에서 자민당 후쿠다 야스오( 福 田 康 夫 ) 총리와 민주당 최초의 총리인 하토야마 집권 당시에는 일본 정치의 우경화가 억제되었고, 한일관계와 중일 관계도 뚜렷하게 개선되었다. 당시 3국 정상회담 기제와 공식 상설 협력기구가 6. 미국의 전략과 동북아 3국 관계 2013년 9월 각각 16명의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신시대 한일 협력 7대 핵 심과제 라는 제목의 공동연구 프로젝트 보고서를 완성했다. 여기에는 인문 및 미디어 교류 강화, 인적 네트워크 형성, 동아시아 복합 안보질서 구축, 원 자력 안전 및 에너지 협력, 환경 동반자 관계, 동아시아 공생경제 질서 구축, 복합 공생 기술협력 등이 의제로 포함되었다. 보고서는 한일 양국이 중국의 실력, 의도 및 대처에 대해 모두 의견이 달랐다고 지적했다. 또한 한국과 일본 은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미관계에 주목하면서 한중일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8 미국의 영향력이라는 요인의 중요성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과 연합하여 중국에 맞서려는 전략적 의도가 없는 한국은 중국과 미국 이 신형대국관계를 구축하리라 낙관하지만, 일본의 현행 정책은 이와 상반된 다. 3국 관계에서 미국 요인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은 역사 문제에 대한 아베 내각의 언행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이 한층 더 강하게 결속하는 상황을 바라지 않으며 한일관계 개선을 희망한다. 또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한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자 한다. 미국은 중국과 일본의 충돌을 방지하고자 하지만 중일관계의 접근도 원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지 키기 위해서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북한 연례 군사훈련과 한반도의 적절한 긴장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 서 볼 때, 북한의 과격한 반응은 미국의 관련 정책 결정권자들이 예상한 바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진전이 장애에 가로막힌 근본 원인은 일본 정치의 우경화 물결 및 미국이 아시아로 회귀하는 재균형 전략의 영향에 있다. 8 한일 신시대 공동연구 프로젝트 위원회(2013. 9), 신시대 한일 협력 7대 핵심과제 (일 본어판), HANULBOOKS, Printed in Korea, 64쪽, 65쪽, 68쪽. 62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63
자 또한 기대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중관계의 강화와 진전에 대해, 미국은 견 제할 만한 수단이 별로 없다. 한반도 사드(THAAD) 미사일시스템 배치 문제의 경우,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한 방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한국과 중국의 전 략적 상호 신뢰를 약화시키고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에 골칫거리를 만들기 위 해 한국과 중국,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쐐기를 하나 박아넣으려는 것이다. 이 는 객관적으로 볼 때 일본 우익세력에게 유리하며, 아베 정권을 간접적으로 고무하고 있다. 중일관계 역시 미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다. 2014년 12월 재집권한 아 베 총리는 외교 분야에서 미국과의 동맹관계 강화와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 을 가장 먼저 완료했다. 일본의 가장 큰 목표는 미국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 여 댜오위다오 문제에 있어 중국에 공동으로 맞서는 것이다. 방위성은 2015 년 6대의 미국 F35전투기와 3대의 장시간 체공 무인정찰기를 구매하는 데 1,769억 엔을 투입할 예정이다. 그 주요 목적은 중국을 겨냥한 소위 난세이 ( 南 西 ) 제도 방어 강화다. 미국 정부는 일본이 미국의 무기를 사들이고 TPP 협 상을 조속히 완료하여 집단자위권 행사 제약에서 벗어나 IS(이슬람국가)와의 싸 움에서 미국과 협조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하여 한국 및 중국과의 갈등을 더 키우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중국과 일본 간의 댜오위다오 분쟁에 휩쓸리는 것은 더욱 원하지 않는다. 중장기적으로 아베 내각은 강경한 정치 우경화 대 국노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데 유리하도록 2016년 미국 공화당 집권과 박 화를 직 간접적으로 견제한 바 있다. 이는 한중일 협력과 동아시아 공동체 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하토야마 내각 붕괴의 중요한 외부 요인이었다. 이는 객관적으로 일본 우익세력의 부상을 초래했고, 동시에 필연적으로 미국과 일 본 간 역사관의 충돌을 격화시켰다. 2014년 하반기부터 오바마 미국 정부는 미국이 직면한 진정한 안보 위협과 전략 과제가 중국이 아니라 IS 및 우크라 이나 문제에 손을 뻗은 러시아임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2014 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대외전략이 다소 조정되면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문 제에 대한 대중국 압박을 유지하면서도 중동과 유럽의 골칫거리에 집중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안정에 주력했다. 일본 언론이 특히 주목한 것은, 2014년 11월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을 방 문했을 때 미국과 중국의 협력관계가 미국의 아시아 회귀전략의 핵심 이라고 밝힌 점이다. 9 이를 배경으로 아베 내각 역시 한국과 중국 양국에 대한 태도를 조정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부득이한 전략적 조정의 결과 한중 양국과의 정 상회담 실현을 단기적 외교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2015년 4월 카터 미 국 국방부장관의 일본 방문과 아베 총리의 미국 방문이 보여주듯이 미국과 일 본의 대중국 전략의 기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오히려 일본을 활용하 고 그 힘을 빌려 글로벌 위기에 대응하려는 미국의 편향성이 더 커진 듯하다. 미국 군부와 국무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 자민당 내의 우익세력은 갈수록 기세등등해지고 있다. 이들의 압력에 따라 일본은 2015년도 방위백서에서 아 시아 인접국에 대해 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근혜의 대일정책과는 다른 새로운 한국 대통령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보면, 중일관계가 새로운 시련을 맞이할 가능성도 있다. 2009년 막 금융위기에서 벗어난 미국은 전략적 경쟁자로 중국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2014년 상반기까지 미국은 중국의 부상과 한중일 협력 강 9 니혼게이자이신문 홈페이지(중국어판), 닛케이 중문넷 편집위원 秋 田 浩 之 (2015. 3. 27), 중미 간에 일본이 모르는 묵계가 있는가?. http://cn.nikkei.com/. 64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65
III. 한중일 관계 개선의 기회와 새로운 시련 2014년 12월 24일 다시 일본 총리에 당선되어 새로운 내각을 조직한 아베 총 리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대내외 정책을 유지하겠지만 상황 변화와 필요에 따 라 조정하기도 할 것이다. 한중 양국은 일본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태 도를 기반으로 3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그 열쇠는 일 본이 쥐고 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다. 과거 능욕을 당한 일부 한국 여성들은 이미 연세 가 많다. 이들이 평생 마음속에 쌓아온 원망과 분노에는 절망감이 섞여 있다. 하지만 일본 우익정치인들은 일본군 위안부 의 강제성을 공공연히 부인하면 서 이를 상업행위 라고 주장해왔다. 2015년 4월 일본 문부과학성이 심의를 통과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강제로 잡아갔다고 직접적으로 증명하 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0 라는 일본 정부의 관점이 추가되었다. 이 렇게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가 한국의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정신적 상 처를 입히고, 필연적으로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강한 불만을 일으키고 있다. 1. 아베 내각의 정치 우경화라는 걸림돌 2015년 일본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다시 한 번 노리면서 중국에 대해 소위 지구의( 地 球 儀 ) 외교 를 펼칠 것이다. 베이징 APEC 전날인 2014년 11월 7일 야치 쇼타로( 谷 内 正 太 郎 )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이 중국을 방문하여 양제츠( 楊 潔 篪 ) 중국 국무위원과 중일관계 4대 원칙에 합의했다. 여기에는 댜 오위다오와 동중국해에 관한 양국의 위기관리 기제 구축을 통한 대화 진행이 포함되었다. 중국은 양측이 합의한 4대 원칙의 합의를 일본이 준수하여 양국 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기반으로 아베 총리와 시진핑 주석의 회담이 성사되기 를 바란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밝 히지 않은 채 중국에 구속받고 싶지 않다면서 스스로 입장을 선회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전후 70주년 아베 총리의 언행이 다시 한 번 중일 이 합의한 4개 정치문서의 정신을 저버린다면, 중국과 일본의 정치관계가 다 시 악화될 것이다. 2. 중국의 대일관계에 대한 태도 2014년 12월 13일 중국은 처음으로 난징대학살 희생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추모식을 진행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연설을 통해 국가 추모식은 평화에 대 한 모든 선량한 사람들의 갈망과 의지를 환기하려는 것이지 원한을 지속하려 는 것이 아니라면서, 중일 양국 인민들은 대대손손 사이좋게 지내면서 역사를 귀감으로 삼아 미래를 지향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함께 공헌해야 한다고 강 조했다. 또한 역사를 망각하는 것은 배반하겠다는 의미이고 범죄 책임을 부인 하는 것은 다시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의미라면서, 우리는 한 민족 가운데 소 수 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침략전쟁 때문에 이민족을 적대시해서는 안 되며, 전쟁의 책임은 인민이 아니라 소수 군국주의자들에게 있지만 인민은 항상 침 략자들이 범한 심각한 범죄 행위를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침략전쟁을 미화 하는 모든 발언은 얼마나 자주 되풀이되든 얼마나 그럴 듯하든 상관없이 모두 2015년 아베 내각은 한일 수교 50주년을 집중 활용하여 한일관계를 풀어 내고 중국을 다시 압박했다. 그러나 미래를 여는 한일관계의 열쇠는 일본군 10 검정교과서에 정부 견해 넣어, 朝 日 新 聞 (2015. 4. 7). 66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67
평화와 정의를 해치며, 이러한 잘못된 언행에 대해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경계하고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 2015년 3월 15일 리커창( 李 克 强 ) 중국 총리는 아사히신문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올해는 중일전쟁 및 제2차 세계대전 승리 70주년으 로, 중국뿐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들이 다양한 형식의 기념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목적은 아픈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여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고 제 2차 세계대전 승리의 성과와 전후 국제질서 및 일련의 국제법을 지키고 인류 의 영속적인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현재 중일관계는 분명 어려운 형편 이지만, 근원은 역시 당시 전쟁에 대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시 종일관 견지 여부에 있다. 올바른 역사관을 견지하려면 역사를 귀감으로 삼아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선조들이 창조한 성과를 계승해야 할 뿐 아니라 선조의 범죄 행위에 따르는 역사적 책임도 져야 한다. 당시 일 본 군국주의가 중국 인민에게 강제한 침략전쟁이 막대한 재난을 가져왔고 최 종적으로 일본 민중도 피해자였다. 2015년과 같이 중요한 시기는 중일관계에 시련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만약 일본 지도자가 역사를 직시하고 일관된 자세 를 보인다면 중일관계 개선 및 발전의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며, 중일 경제 무역 관계 발전에도 양호한 여건이 조성될 것이다. 12 이는 중국 정부의 대표 적인 입장이자 주장이다. 3. 중일 및 한일 민간 정서는 정치관계의 개선에 달려 있다 중국과 일본 양국 국민의 상호 이미지가 바뀌는 일반 규칙을 살펴보면, 중일 정치관계와 국민감정은 정비례 관계를 보였다. 즉 정치관계가 악화될수록 국 민 상호 간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정치관계가 개선될수록 국민 상호 간의 이 미지도 좋아진다. 중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 변화가 이러한 경향을 더 뚜렷하게 보였고, 일본인들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 변화의 이유는 조금 더 복 잡했다. 여기에는 중국 군사 위협론, 외교 강경론, 경제 붕괴론, 정치 독 재론, 식품안전 위협론, 대기오염 위협론 등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복잡한 이유가 뒤섞여 중국의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 고, 한번 형성된 부정적인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여기에 위안화에 대 한 엔화 가치절하로 인해 2012년 이후 중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숫자가 뚜렷 이 감소했다. 비록 일본을 여행하는 중국인 관광객은 크게 늘었지만, 2013년 중일 상호 방문자는 전년대비 14% 감소해서 2012년의 연인원 548만 명에서 471만 명으로 줄었다. 비슷한 현상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중국과 일본 간 인문 교류는 새로운 복잡한 요인과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 다. 일례로 전후 일본의 젊은 세대는 근대 역사에 대한 교육과 이해가 부족해 서 우익민족주의 정서의 영향을 받기 쉽다. 또한 일본 정부의 중일 인문 교류 에 대한 통제 및 활용이 강화되고 있는데, 특히 중국 청소년의 일본에 대한 견 해를 바꾸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일부 일본 언론은 종종 중국의 역사교육과 애국주의 교육을 반일교육 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국 민간 정서 개 선 측면에서 중국은 더 많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 11 人 民 日 版 (2014. 12. 14), 시진핑, 제1회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 기념식 석상 연설. 12 人 民 日 報 (2015. 3. 16), 李 克 强, 중국 제12차 전인대 3차 회의 기간 인터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포츠담 선언과 카이로 선언을 받아들이고, 일 본국 헌법 에 따라 평화발전의 길을 걸어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1972년 68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69
중일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은 통상왕래와 인문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해왔 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심각한 역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를 빠 르게 부상하는 중국과 보통국가 가 되고자 하는 일본 사이의 갈등이라고 분 석한다. 이는 세력전이 이론(power transition theory)에 입각하여 중일관계를 판단 한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할 뿐 아니라 문제를 일 으킨 근본 원인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현재 역사인식을 둘러싼 중일과 한일의 갈등은 실질적으로 평화를 사랑하 고 우호를 주장하는 한중일 민중과 일본 우익세력 사이의 역사관과 전쟁관의 갈등이다. 전후 70년 동안 중국은 일본에 대해,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태도 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관용과 화해를 보여주었다. 일례로 중국인은 수 많은 일본인 전쟁 고아들을 거두어 키웠고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중국 정부 는 양국의 우의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요구를 포기했다. 문제의 핵심 은 일본의 일부 정치인이 역사 문제에 대해 독일보다 훨씬 못한 태도를 보이 면서, 자꾸 양심의 마지노선을 넘고 역사의 피해자들에게 반복적으로 정신적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선거철의 정치를 제외하면 일본 민중이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지 못하고, 더욱이 정부의 정책 결정에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단 정권이 우익세력의 손에 들어가면 곧 일본 의 국가정책에 편향이 나타나고 중일 및 한일 정치관계에 필연적으로 위기가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다시 민중의 감정에 영향을 준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러한 우경화 정책이 장기화하고 극단적으로 흐르면 결국 낭떠러지로 돌진하 는 자동차가 될 것이고, 일본 국민이 이 차량의 희생자가 된다. 일본 국내외 정 4. 중일 및 한일 역사관 충돌의 배경 요인 아베 신조 등 일본 지도자들은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이웃나라 민중과 역사 문제에 대해 교류할 기회도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어 려서부터 자신의 특정한 가족과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우익사관의 분위기에 휩싸여 자랐다. 일본의 특수한 가정과 고향에서 태어난 이들은 젊었을 때부터 일본 정계의 우익단체에 가입했다. 일례로, 아베 신조의 고향은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총리를 배출한 야마구치 현( 山 口 縣 )으로, 그는 야마구치현에서 탄생한 여덟 번째 총리다. 시대마다 야마 구치현 출신의 총리가 중국과 한반도를 침략하려고 일으킨 전쟁에 참여해왔 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 縣 有 朋 ) 등이 그들이다. 도조 히데키( 東 條 英 機 ) 내각 구성원이자 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 岸 信 介 )는 아베의 외조부다. 자민당 내에서 아베의 가장 큰 정치적 배경인 모리 요시로( 森 喜 朗 ) 전임 총리는 일본을 신의 나라 라고 하였고, 문부상 재임 당시 교과서 수정을 적극 추진했다. 그의 부친인 모리 시게루( 森 喜 茂 )는 1937년 일본군 소대장으 로서 난징 공격에 참여했다. 13 일본 우익의 두목격인 다모가미 도시오( 田 母 神 俊 雄 )는 그의 소위 증언 을 빌려 난징대학살 만행의 역사 사실을 부정했다. 14 일본의 중국 및 한반도 침략의 시발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 하고 1592년과 1597년에 사쓰마번( 薩 摩 藩 )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침 략한 사건으로, 중국을 차지하려는 목표로 일으킨 이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1609년 사쓰마번이 류큐국( 琉 球 國 )을 처음 침략한 이후 지속적으로 침범한 결 세가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압박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13 森 喜 朗 (2013), 나의 이력서 모리 요시로 회고록, 日 本 經 济 新 聞 出 版 社, 19쪽. 14 田 母 神 俊 雄 (2009), 田 母 神 塾 (TAMOGAMI JYUKU), 雙 葉 社 (FUTABASHA), 53쪽, 54쪽. 70 한중일 3국 관계: 새로운 협력을 향하여 아베폴리틱스와 한중일 관계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