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전 미국 합참의 비상전쟁계획과 미국의 한반도 전략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김 영 호 (성신여자대학교) I. 서 론 II. 미합참의 조직 구성과 전쟁계획 작성 과정 III.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과 한반도 전략 IV. 결론 Ⅰ. 서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의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의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가 작성한 비상전쟁계획(Emergency War Plan)은 미국의 동아시아와 한반도 전략에 지 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계획들은 미국이 소련의 도발에 의해 불가피하게 세계전쟁에 이끌 려 들어갈 경우를 상정하고, 이 상황에 대비하여 군사작전과 병력배치 방법을 수립하기 위 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병력과 군비를 급격하게 감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미국 으로서는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군사력 배분의 우선 순위를 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군사 전략적 비상대책을 마련하는 임무를 미합참이 담당했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합참의 대한반도 정책안을 한국전쟁 직전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결정 과정과의 연관 하에서 논의하면서 많은 성과를 낸 바 있다. 2) 이러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미합참의 전쟁계획 작성과정과 내용을 일차자료를 동원하여 분석하고, 그 내용이 어떻게 미 국의 전반적인 한반도 전략과 연관되는지를 분석한 연구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글은 미 국의 대외전략의 한 축인 군사전략을 담당하고 있는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에서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어떠한 근거에 기초하여 평가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이러한 합참 의 의견이 한국전쟁 직전 주한미군 철수를 비롯한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에 어떻게 실질적으 로 반영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의 변화는 합참의 군사전략적 판단을 중시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미합 참의 전쟁과 전략 계획 수립의 과정과 내용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미국에 의한 주한미국의 철수 및 감축 결정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전쟁 직전, 한국전쟁 종전 직후, 닉슨 행정부 시절, 카터 행정부 하에서 이루어졌다. 카터 행정부의 철군 결정은 실현 되지 못했지만, 그 밖의 철군과 감축 결정은 미국 합참의 군사전략적 판단 하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최근 집권한 공화당의 부시행정부는 주한미군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주둔 미군들 의 감축과 지위 변경에 관한 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이러한 정책
재조정은 미국 군부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합참의 의견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직전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이 대한반도 전략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 은 탈냉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과 대한반도 정책을 분석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이러한 분석 과정에서 놓쳐서 안될 점은 비상전쟁계획은 어디까지나 전면전에 대비한 계획 이라는 사실이다. 일차자료를 통한 비상전쟁계획의 내용에 대한 분석 자체로서도 충분히 그 의의는 있겠지만, 이 계획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정책에 반영되고 실행되었는지를 구체적으 로 검토해야만 그 계획의 성과와 한계점을 명확히 할 수 있다. 이 계획의 작성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은 합참의 전략적 판단을 평가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 서 이 연구는 단순히 계획 수립의 과정과 내용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서 실질적 정책 실행 과정과 그 한계점을 동시에 규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우선 이 글은 한국전쟁 직전의 미합참의 조직 구성과 비상전쟁계획 작성 과정을 살펴본다. 여기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국가안보 문제를 체계적으로 수립하기 위해 국가안 보법(National Security Act)를 통과시키고, 합참이 군사전략 수립의 중추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는 제도적 변화 과정과 합참 내부 조직들의 역할 분함에 관해 분석할 것이다. 또한 여기 서는 미합참의 군사전략 수립의 근거가 되는 대소봉쇄전략의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 로 이 글은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인 핀처(PINCHER)의 구체적 내용을 검토하고, 핀처의 일 부로서 작성된 미국의 극동에서의 비상전쟁계획인 문라이즈(MOONRISE)를 상세하게 검토 한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한국전 쟁이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 계획이 미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대응방식에 어떠한 영 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Ⅱ. 미합참의 조직 구성과 전쟁계획 작성 과정 1904년부터 영국은 국가안보정책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대영제국 방위위원회(British Committee of Imperial Defense)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제2 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이전까지 미국은 영국과 같이 육군과 해군 등을 통괄할 수 있는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4) 1941년말의 아카디아(Arcadia)회의에서 루스벨트 (Franklin Roosevelt)와 처칠(Winston Churchill)은 양국의 공동 군사작전을 지휘할 최고의 군 사기관으로서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을 설치하기로 합의했고, 이때의 경험 은 향후 미국의 합동참모본부 설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5) 이때부터 미국은 영국과 달 리 자신들의 조직을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라고 부르기 시작했지만, 군사정책 수행에서 대통령의 자율권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했던 루스벨트는 입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 고 이 조직을 운용해 나갔다. 1947년 7월에 제정된 국가안보법에 의해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정식 기관으로 설립되었 다. 6) 이 법에 따르면 미합참은 합참의장을 통하여 대통령, 국방장관, 국가안보회의의 요청이 있을 경우 또는 자체의 판단에 따라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군사문제에 관한 정책적 조언 과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합참은 야전 사령부에 대해서 직접 군사작 전 지휘권을 행사했지만, 이 법에 의해 합참은 비상전쟁 계획 수립과 군사전략에 관한 조언
자로서의 지위만을 부여받았다. 7) 1949년 개정된 국가안보법은 육군, 해군, 공군 장관을 국 가안보회의의 당연직 위원에서 제외시키고 부통령과 합참의장을 당연직 자문위원으로 추가 함으로써 국가안보전략 결정에서 합참의 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미국의 비상전쟁계획을 수립하고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조정하는 군사전략을 입안하는 기관인 미합참은 한국전쟁 직전에는 합참의장(Chairman of JCS), 합참실장 (Director of Joint Staff), 합참참모진(Joint Staff)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기구표 참조) 합참실 장 밑에는 합참전략계획위원회(Joint Strategic Plans Committee, JSPC), 합참병참계획위원 회(Joint Logistics Plans Committee, JLPC), 합참정보위원회(Joint Intelligence Committee, JIC)가 비상전쟁계획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8) 특히 비상전쟁계획은 합참전략계 획위원회에 의해 주도적으로 작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합참전쟁계획국(Joint War Plans Section), 정책 및 작전국(Policy & Operations Section), 훈련 및 교육국(Training & Education Section)을 그 휘하에 둔 합참전략계획그룹(Joint Strategic Plans Group, JSPG)의 자문을 받았다. 9) 합참전략계획위원회에서 작성된 전쟁계획은 병참과 정보 위원회의 검토를 거쳐서 합동참모본부의 최종안으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외교적으로 중요한 사안이 발생할 경우 국방성 및 국무성과 긴밀한 협의를 거쳤다. 미국 합참 조직 기구표 대통령 국방장관 합참의장 합참전략조사위원회 합참실장 역사조사국 합참전략계획위원회 합참병참계획위원회 합참정보위원회 합참전략계획그룹 합참병참계획그룹 합참정보그룹 합동전쟁계획국 정책 및 작전국 훈련 및 교육국
비상전쟁계획은 대통령이나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의해 결정된 국가전략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우선 미국의 군사력 보유 현황과 군사자원의 한계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하여 전략적 가정들을 도출하게 된다. 다음으로 합참정보위원회에 의해 제출된 적국의 군사력 평 가와 배치상황 분석에 기초하여 전략적 개념을 도출해 낸 후 합참전략계획위원회는 이 개념 에 맞는 비상전쟁계획안을 작성한 후 합참병참위원에게 넘겨서 병참상의 실현가능성 검증을 거쳐서 최종안이 확정된다.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은 미국의 공식적인 대소봉쇄전략에 기초하고 있다. 봉쇄전략을 입 안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케난(George F. Kennan)은 1946년 2월 22일 자의 8천자로 된 "긴 전문"(Long Telegram)에서 미국과 소련의 화해와 협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요 인들이 이미 소련 내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소련에 대해서 어떠한 유화정책을 추구하더라도 미소협력은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0) 케난은 소련 체제의 성격 상 내부 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어떤 적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일본과 독일이 사라진 후 소련은 그 대신 미국과 영국을 소련 체 제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정통성이 없는 억압적인 소련 체제 유지의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이 소련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보상의 정책(quid pro quo policy)을 통하여 스탈린의 신뢰를 얻어려고 시도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이 소련과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미국 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소련의 세력이 더 이상 대외적으로 팽창하지 못하도록 전후 미소 사이에 성립된 경계선 내부에 소련을 묶어두고 차단하여 인내를 갖고 기다린다면 소련 체제 는 결국 내부로부터 붕괴할 것이라고 케난은 보았다. 여기서 소련을 현존 경계선 밖으로 벗 어나서 팽창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은 바로 소련을 봉쇄( 封 鎖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경계선은 미국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지켜야 하는 봉쇄선이 되는 것이다. "긴 전문 에서 제시된 케난의 봉쇄전략은 그가 정책기획실(Policy Planning Staff) 실장으로 임명된 후 "X"라는 익명으로 발표한 논문에서 더욱더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11) 케난의 봉쇄전략은 NSC 20/4에 의해 미국의 공식적인 세계전략으로 결정되었다. 12) 이 문서의 작성 과정에는 미합참도 국방장관의 요청에 의해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 다. 13) 이러한 세계전략에 기초하여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은 수립되었다. 합참에 의해 작성되는 전쟁계획은 비상전쟁계획(Emergency War Plan), 중기전쟁계획 (Medium-Range War Plan), 장기전쟁계획(Long-Range War Plan), 인적 및 산업 동원계획 (War Plan for Mobilization Planning and Industrial Mobilization Planning)으로 구분되고 이 들 각각은 초기에 작성된 합동전쟁계획안 초안(Joint Outline War Plan)에 기초하여 완결된 형태로 발전된다. 14) 이 계획안들은 전략개념, 미국의 군사력, 적의 군사력 평가 등의 변화에 따라서 계속해서 수정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하나의 계획이 아니라 일련의 계획의 집합체 로 구성되어 있고, 그 계획들은 수정을 거칠 때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각각 다른 암호 명이 주어진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비상전쟁계획이다. Ⅲ.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과 한반도 전략 제2차 세계대전후 급격한 병력과 군비 감축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미국으로서는 아시아
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지역들을 군사적으로 지켜주겠다는 공약을 할 수 없는 형편 이었다. 한국전쟁 이전 트루만(Harry S. Truman)은 1947년 군사방위비의 지출을 약130억불 로 상한선을 그어두고 있었고, 1950년의 경우 150억불을 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소련 과의 전면전에 대비하는 비상전쟁계획(Emergency War Plan)을 수립해야 했던 미합참은 군 비와 병력의 절대 부족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15) 따라서 미합참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군 사력 배분에 있어서 지역적으로 우선 순위를 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합참은 제한된 자원 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방어할 지역과 동맹국가를 미국의 국가이익과 국력의 한계에 맞게 선별( 選 別 )하지 않으면 되었다. 예를 들어 미합참은 미국의 안보이해관계라는 기준에 따라서 군사원조에 대한 우선 순위를 정해놓고 있었다. 이 측면에서 본 우선 순위는 영국 1위, 터 키 9위, 그리스 10위, 일본 13위, 한국 15위였다. 16)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은 가까운 장래에 미국이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 황에 대비하여 군사작전과 병력배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조치였다. 17) 여기서 가까운 장 래 는 주로 3년의 기간을 의미했다. 실제로 미국의 비상전쟁계획은 하나의 계획안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계속해서 수정된 일련의 계획안들의 집합체였다. 결국 미국의 비상전 쟁계획은 그 안을 작성한 때로부터 3년 이내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 을 상정하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전략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또한 비상전쟁계 획의 수립은 인적 및 산업 동원력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의회에 제출될 국방예산안을 마련 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비상전쟁계획의 부재로 인하여 많 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고, 당시 국방장관 포레스탈(James Forrestal)은 그 안 마련의 긴급 성을 지적했다. 18) 비상전쟁계획 수립 작업은 합참전략계획그룹(JSPG)의 전신인 합참전쟁계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 JWPC)에 의해서 1946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이 작업은 유 럽과 극동 등 특정 지역에 관한 군사전략과 그것에 수반되는 특수한 군사적 문제점들을 연 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러한 개별적인 연구들은 통칭하여 핀처(PINCHER)라는 암 호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연구들을 검토한 1947년 7월 16일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충분 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합참은 이것들에 기초하여 향후 3년 내에 소련과의 전면 전 발생에 대비한 종합적인 비상전쟁계획수립을 지시하게 된다. 이때 만들어진 비상전쟁계 획은 브로일러(BROILER)라는 암호명으로 불리게 되는데, 그 내용은 핀처의 내용과 거의 동 일하다. 19) 특히 이 계획은 이후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게 되지만, 극동과 한반도와 관련된 합참의 전략적 발상은 핀처의 내용을 수정없이 반영하게 된다. 따라서 핀처의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미합참의 극동과 한반도에 관한 인식은 설명될 수 있다. 소련과의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핀처는 극동에서 미군 병력은 일본에 가능한 한 빨리 집중 적으로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소련의 상당한 군사적 압력에 직면하여 한 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많은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한반도에는 2개 전투사단을 포함하여 약57,000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
다. 따라서 핀처는 병력 손실을 줄이고 일본 방어를 위해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을 빠른 시 일 내에 남한에서 일본으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핀처는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적과 싸울 수 있는 충분한 지상군 병력을 아시아에서 확 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따라서 전쟁 초기에 미국은 공군력을 동원하여 적 을 공격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공격을 위하여 공군기지들이 필요했다. 결국 아시아 지역에 서 가용한 지상군 병력은 필요한 공군 기지들을 확보하기 위해 배치되지 않으면 안되었 다. 20) 극동에서는 일본, 특히 오키나와가 미공군력을 동원하여 아시아 대륙의 적의 목표물 들을 공격하기 위한 중심지로 상정되었다. 핀처의 수정안들에서는 극동에서 미군의 임무는 알류산 열도, 일본, 류쿠열도(오키나와), 필리핀 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이었다. 21) 여기서 우리는 나중에 애치슨(Dean Acheson)이 1950년 1월 12일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제시 하는 도서방위선 개념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핀처에 따르면 주한 미점령군인 하지(John Hodge)의 제24군단 휘하의 2개 전투사단은 유 사시에 가능한 한 빨리 일본으로 철수해야 한다. 1946년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소련 과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은 일본 방어를 위해 철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그의 주장은 핀처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22) 한반도와 관련된 이러한 핀처의 기본적 전략 개념은 그 이후 만들어지는 수많은 비상전쟁계획들에서도 변하 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미국무성이 합참에게 남한의 군사전략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요구할 때마다 합참은 핀처의 기본적인 주장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합참은 핀처를 작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역별 전쟁계획을 수립하 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극동에서의 비상전쟁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 과정을 더욱 구체 적으로 살펴보면, 1946년 8월 16일 합참은 합참전쟁계획위원회에 핀처에 기초해서 극동에 서의 비상전쟁계획 수립을 수립을 지시하게 된다. 23) 10개월 후인 1947년 6월 16일 문라이 즈(MOONRISE)라는 암호명으로 불리우게 되는 극동에서 미국의 비상전쟁계획이 완성되었 다. 24) 약160페이지에 달하는 이 계획은 향후 3년 내에 소련이 극동에서 전쟁을 일으킬 경 우 미국의 군사작전 계획에 관해서 상술하고 있다. 특히 이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생 할 경우 미국은 유럽에서는 공세로 나가고 극동에서는 방어에 주력한다는 핀처의 전략개념 을 그 가정으로 수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계획은 핀처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미국은 베링해협-동해-황해를 잇는 도서방어선을 군사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군사전략 개념을 그 대로 수용하고 있다. 이 계획이 작성되었을 때 한국, 일본, 오키나와에 미군이 계속해서 주 둔하고 있다는 현실이 전략개념에 반영되고 있다. 소련의 전쟁 목적과 관련해서 이 계획은 소련은 극동지역보다는 유럽이나 중동 지역에 우 선 순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극동에서 소련측 군사작전의 목적은 전쟁 종식 이후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 내에 아시아 공산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군 사적 제반 조건들을 창출하는 데 있다고 보고 있다. 향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의 실질적 인 정치군사적 상황변화에 비추어볼 때 아시아보다 유럽을 우선시한다는 합참의 판단은 많 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은 유럽에서 미소 사이의 냉전이 고착화되자 중국 공산혁명의 성공 이후 아시아를 전략적으로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25) 특 히 이 계획에서 미합참은 아시아 지역을 통해서는 서구에 위치한 소련에게 정치적, 군사적 으로 중요한 지역들에 대한 공격 통로를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것은 아시아 지역에서 시베리아를 거쳐서 모스크바 지역 등을 공격하는 것이 군사전략적으로 어렵고, 그
결과 소련과의 전면전에서 극동이 미국의 군사작전에 갖는 중요성은 그만큼 떨어지게 된다 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서 문라이즈는 소련의 일차적 목적은 38선 이남 지역을 완전 히 장악하여 한반도가 미국의 군사작전의 기지로 활용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보고, 부차적으로는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 병력을 가능한 한 많이 궤멸시기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한반도가 적화될 경우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은 소련으로부터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에 직면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문라이즈는 소련이 전면전을 시작할 경우 아시아 지역에서 45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와 달리 당시 미국이 가용한 병력은 일본에 4개 사단, 한국에 2개 사 단, 중국에 2개 해병 대대 뿐이었다. 미합참은 소련이 가용한 사단들 중 만주를 공격하는 데 33개 사단을 동원할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될 경우 문라이즈는 소련이 전쟁 개시 40일 (D+40)만에 만주를 완전히 점령할 것이고 황화강 이북을 점령하는 데에는 150일(D+150)이 소요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문라이즈는 소련이 만주 공격과 동시에 한반도에 6개 사단을 동원하여 그 중 5개 사단을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공격하는 데 사용할 것으로 보았다. 이 안은 소련군은 서울로 즉시 진격한 후 병력을 두 개로 나누어 동쪽으로는 부산 지역으로 진격하고 서쪽으로는 목 포 지역으로 진격하여 남한의 완전 점령을 시도할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될 경우 한반도는 전쟁 개시 20일(D+20) 이내에 북한의 도움을 받은 소련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될 것으로 이 안은 예상했다.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 투입될 5개 사단에 맞서서 남한을 지키려고 한다면 상당한 증원군이 파견되어야 하겠지만, 소련도 역시 증원군을 투입하게 될 경우 미군은 결 국 한반도에서 패배하거나 철수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이 계획은 판단하고 있다. 소련군의 진격은 완전히 수적으로 열세에 있는 주한 미군에 의해 차단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남한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견한다고 하더라도 미군의 패배와 한반도로부터의 철수를 궁극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일본 주둔 미군 병력을 남한으로 증원시키는 것은 미국에게 한반도보다 더 전략적으로 중요한 일본의 방어를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맥아더는 소련이 전면전을 개시할 경우 남한에 대한 공격과 동시에 호카이도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26) 문라이즈는 전쟁 발생 후 남 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즉시 일본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 본, 오키나와, 대만은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문라이즈는 베링해협-동해-황해를 잇는 아시아에서의 도서방위선을 확보해야 한다고 보았 고, 이 방위선의 설정은 미국이 알류산 열도, 일본 본토, 오키나와, 가능하면 중국 내에 있 는 공군 기지들을 기점으로 하여 아시아 대륙에 위치해 있는 적의 목표물들을 공격한다는 전략적 구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개석이 중국 본토로부터 대만으로 밀려난 후 합참과 맥아더는 대만을 아시아의 도서방위선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게 된다. 27) 1950 년 1월 5일 기자회견에서 트루만은 미국은 현시점에서 대만을 군사적으로 방어할 의사가 없다고 천명하고,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애치슨의 프레스클럽 연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트루만 기자회견 당시 합참의장인 브래들리(Omar Bradley)는 미국이 대만을 나중에 군사적 으로 점령하여 공군 기지로 사용해야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트루만에게 현시 점에서 라는 외교적 용어를 삽입해 줄 것을 요구했고 그의 요구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28) 그러나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대만의 군사적 방어를 위한 어떠한 약속도 하지 않았고, 한국전쟁 이후 미제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파견됨으로써 미국의 대만 방어는 구체화 되었다. 문라이즈는 미국의 도서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시켰는데, 이것은 한반도에 관한 핀처의 기
본적 전략개념과 동일한 것이었다. 남한의 배제는 1949년 12월 8일 미합참이 승인하는 비 상전쟁계획인 오프태클(OFFTACKLE)에 의해 그대로 수용되었다. 29) 오프태클이 미국의 공식 적인 전쟁계획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중국이 공산화되었고, 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 만을 남기고 남한에서 철수한 이후였다. 이전의 전쟁계획들과 마찬가지로 오프태클은 유럽 에서는 공격적 전략을 구사하고 아시아에서는 도서방위선을 중심으로 공군력을 동원한 방어 적 전략을 구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안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도서방위선은 일 본, 류쿠열도(오키나와), 필리핀을 포함했다. 장개석의 몰락 후 미국의 비상전쟁계획은 아시 아 대륙의 어떤 지역도 미국이 확보해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결국 남한은 소련과의 전면전 이 발생할 경우 아시아에서 미국의 도서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 오프태클은 1951년 7월 이전에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미합참에 의해 승인된 비상전쟁계획 이 되었고, 이 계획에 기초하여 합참은 맥아더에게 유사시 남한에서 미국인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킬 수 있는 비상계획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30) 맥아더의 지시를 받은 주한미군사고 문단은 크룰러(CRULLER)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는 비상철수계획을 작성하게 되고, 한국전쟁 발발시 미국인들은 이 안에 따라서 아무런 차질없이 모두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31) 따라 서 유사시에 맥아더와 주한 미군사고문단은 남한을 군사적으로 방어할 의무는 없고 미국인 들을 무사히 철수시키는 임무만을 부여받았다.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에서 발전된 도서방위선 개념은 군부와 민간인 지도자들 사이에 미 국의 대아시아 전략을 논의할 때 종종 원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8년 3월에 이루어 진 케난과 맥아더의 회담이다. 32) 이 회담에서 맥아더는 태평양의 방어를 위해서 알류산 열 도, 미드웨이, 일본의 위임통치 하에 있는 섬들,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기지, 오키나와를 포 함하는 U자 모양의 지역(U-shaped area)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오키 나와로부터 아시아 대륙에 있는 어떤 항구들도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미국 이 오키나와만 확보할 수 있으면 일본 본토에 미군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일 본 본토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는 한 미국은 오키나와로부터 공군력을 동원하여 아시아 대륙에 있는 적의 목표물을 파괴하고 대륙으로의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 다고 맥아더는 주장했다. 핀처와 문라이즈가 작성된 이후 미합참은 국무성으로부터 남한이 미국에 대해서 갖고 있는 군사전략적 가치를 판단해 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이 비상전쟁계획에 기초하여 유사시에 남 한을 군사적으로 방어할 가치가 없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1947년 1월 국무성과 국방성 전 문가들로 구성된 한국문제 특별위원회가 미합참에 의견을 물었을 때 합참은 미국이 아시아 대륙에서 행할 공격 작전들도 한반도를 비켜갈 것이 거의 확실시되기 때문에 남한에 병력이 나 군사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33) 그러나 1947년 4월 소련과의 냉전 대결에서 남한을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던 국무성은 군사적으로 남한을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남한의 자생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부흥계획안 (Korea Rehabilitation Program)을 마련했고, 국방성의 전신인 육군성은 이 안에 동의했다. 34) 물론 군부측은 국무성이 주한미군 철수 이후 남한 지역의 정치, 경제, 문 화 분야에 걸쳐 행정의 책임을 떠 맡는다는 조건 하에서 국무성의 안에 동의했다. 이 부흥 안은 3년간에 걸쳐 총5억 4천만불의 무상지원금을 상정하고 있었고, 1948년에만 2억1500만
불을 제시하고 있다. 지원금의 구체적인 항목은 남한의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위해 서 식량, 비료, 산업 및 통신 시설, 석유, 교육 시설, 미국 및 한국인 민간인 임금 등을 포함 하고 있었다. 국무성은 이 금액을 의회에 요구하기 위해 이미 대통령이 의회에 보내는 한반 도에 관한 특별선언문을 작성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때 미국은 터 키와 그리스에서 발생한 비상사태에 직면하여 1947년 3월 12일 트루만독트린을 발표함으로 써 한반도 문제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게 되고, 한국부흥안 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한국부흥안 마련이 좌절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에 작성된 일련의 국방성과 합 참의 문서들은 한반도의 군사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았던 비상전쟁계획에서의 입장을 되풀이 견지하게 된다. 1947년 9월 국무성이 합참의 기존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를 물었을 때 합참 은 남한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한반도가 아시아에서 군사작전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미공군력을 동원하여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인 SANACC 176/38을 작 성하여 보냈다. 35) 이 보고서에서 합참은 공군력에 의한 무력화의 시도가 지상군을 투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크고 군사적 부담이 적다고 밝히고 있다. 1948년 4월 2일 국가안보회의에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관한 합참의 보고서인 SANACC 176/39가 제출되었다. 36) 트루만에게 약간 수정되어 제출된 이 문서는 NSC 8로 승인되었다. NSC 8은 미국이 남한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의 보존을 확고하게 보장해 주기 위해서는 미 국에게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지역인 한반도에서 소련과 군사적으로 직접 대결하지 않으 면 안되는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37) 따라서 미국이 아시아 대륙으로 진격하기 위해 한반 도에서 그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는 시도는 일본의 침공시 필리핀의 바탄반도(Bataan Peninsula)에서 미국이 겪었던 것과 같이 실패하고 말 것이고, 이러한 결과는 미국의 군사적 위신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고 합참은 지적했다. 이러한 합참의 주장은 NSC 8/2에 그 대로 반영되었다. 38) 이 결정에 따라 주한미군은 1949년 6월말 약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 긴 채 남한에서 완전 철수하게 된다. 이 NSC 8/2의 의견은 애치슨이 연설하기 약2주일 전 에 트루만에 의해 승인된 중국공산화 이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을 마무리짓는 NSC 48/2 에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39) 군사적으로는 미합참이 핀처와 문라이즈에서 제시한 계획에 따 라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직전 미합참의 비상전략계획이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Ⅳ. 결론 중국의 공산화에 뒤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은 유럽과 아시아의 국제정세가 합참 의 군사적 판단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 지역은 미국의 나토 설립과 소련에 의한 동구권의 소비에트화로 인하여 미소의 세력권으로 뚜렷하게 양분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미소의 냉전 대결은 일종의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합참의 판단과는 달리 아 시아에서는 중국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세력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됨으로써 스탈린은 유럽 보다는 아시아지역을 공산세력 팽창을 위한 지역으로 선택하고 김일성의 무력통일론을 지원 함으로써 극동 지역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또한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 개념인 도서방위선은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인 핀서와 문라 이즈에서 비롯되었고, 이것은 맥아더에 의해서도 그대로 수용되었고, 애치슨의 내셔널프레 스클럽 연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전 미합참, 맥아더, 애치슨 사이에 방위선에 관한 일정한 합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40) 도서방위선 전략에 기초하여 작성된 수많
은 국가안보회의 문서들을 트루만이 승인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트루만도 이러한 전략 개념에 동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서방위선 개념에 관한 민간 및 군부 지도자의 일치된 의견에서 외교적 목적의 설정과 군 사적 수단의 상응성에 관한 문제점이 제기된다. 흔히 군사력은 특정 국가의 외교적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에서 발전된 전략 개념의 실질적인 수용 과정은 오히려 외교적 목적이 군사적 수단의 가용 여부에 의해 제한되거나 영향받는다 는 역설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특히 국제정치현실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군사 적 가용 자원의 한계점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외교적 목적 실현의 우위를 강조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군사적 자원의 한계점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그 목적을 조정해 나가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이 분석은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분명하게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은 도서방위선에 대한 미합참과 국무성의 합의는 군사적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미합참은 병력과 군비가 절 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군사적으로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 황에 직면해 있었다. 미합참은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미국의 방위공약 범위를 확대하려는 국무성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의회가 군비의 증강을 승인하지 않는 한 군사전략적 차원에서 명확한 지역적 우선 순위를 두려고 했다. 합참은 비상전쟁계획에서 유럽에서는 공 세적 전략을 추구하고 아시아에서는 방어적 전략을 세웠다. 나아가 아시아라는 지역 내에서 도 아시아 대륙에 군사기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원과 병력이 없다고 합참은 판단하고 그 대 신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섬들을 중심으로 하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하게 된다. 결국 합참에 의해 발전되고 애치슨에 의해 대중화되는 도서방위선이라는 개념은 미국 안보의 군사적 우 선 순위가 세계적 차원과 지역적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고려된 결과이다. 비록 한국이 미국의 도서방위선에서 제외되었지만 미국은 한국의 군사적 자위와 경제적 자 립을 도모하기 위하여 한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41) 한국의 적화는 유엔과 함께 한국의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의 위신에 심각한 타격 을 줄 것이라고 NSC 8은 선언했다. 42) 위신은 매우 중요한 무형의 국력 요소 중의 하나이 기 때문에 한국의 상실은 미국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것 은 바로 미국 국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 문서들에 나타난 위신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미소의 냉전 대결이 군사적 측면에만 결코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 라서 군사적 측면에만 초점을 둔 도서방위선에서 한국의 배제가 미국의 대소봉쇄선에서 한 국이 제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군사력이 부족한 상태에 서 미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키는 것이 어렵다면 오히려 한국을 방위선에서 배제시키는 것이 유사시에 정치전략적 판단에 따라 미국의 정책적 선택의 범위를 넓혀주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핀처, 문라이즈, 오프태클 등과 같은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안들이 갖고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한국전쟁과 같이 전쟁의 범위가 한반도에만 지역적으로 국한되는 국지전 ( 局 地 戰 )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면전에만 초점을 맞추는 합참의 융 통성없는 전쟁계획안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온 사람은 바로 케난이었다. 1947년 초 그는 미본토로부터 제한전이 벌어지고 있는 특정 지역으로 짧은 시간 내에 투입되어 효율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소규모의 비상기동타격부대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 다. 43) 그는 미국이 소련과의 전면전을 위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 지 않았지만, 소련과 전세계적 차원에서 냉전 대결을 벌이고 있는 현실에서는 봉쇄선 주변 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국지전에 미국이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따라 서 한반도에서 북한의 전면 남침과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면 미국은 소련이 남침을 전면전의 신호탄으로 승인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44) 만약 남침이 미국의 대소봉
쇄선 전체에 걸쳐 진행되는 전면전의 일환이라면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이 발동되고 한국을 포기하고 도서방위선 내의 공군 기지들을 중심으로 소련에 대해서 군사 공격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소련이 한반도 내에 전쟁이 제한되는 국지전을 추구한다면 미국의 대응은 대 소봉쇄정책의 관점에서 완전히 새롭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비록 국무성이 한국전쟁 이전에 합참의 의견을 수용하여 군사적으로 남한을 도서방위선에서 배제했다고 하 더라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전면전의 일환이 아니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미국이 자신의 국 가이익에 대한 판단에 기초하여 한국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의 실질적인 전개과정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미국이 전쟁 개입을 결정하고 미국 의회가 대대적인 군비 증강과 예산 지원을 결정하게 되었을 때 미합참은 38선을 넘어서 북 한지역으로 전쟁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미합참을 비롯한 미군부는 군비 지원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군사전략의 반경이 38선 이남에 국한되어야 한다 는 제한이 제거되었을 때 대단히 강경한 군사노선을 채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미국 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중국 위협론은 핀처와 문라이즈가 작성되고 있는 상황과는 다른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 이들 비상전쟁계획은 소련을 주요 적국으로 상 정하고 군사전략을 수립함으로써 한반도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과소평가되었다. 그러나 만약 중국이 미국의 군사적 위협국가로 부상한다고 할 경우 오히려 한국의 군사전략적 가치는 미 국에도 한국전쟁 직전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다. 따라서 탈냉전 이후 한미동 맹과 주한미군은 한국전쟁 직전보다는 미국의 국가이익을 관철시키는 데 더욱 중요한 위치 를 점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한반도에 위치한 남한과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각각 긍정적 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미국에게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의 분석은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1차 자료 Records of the U.S. Joint Chiefs of Staff, Record Group 218, National Archives (N.A.). CCS 381 USSR (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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