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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Land Ownership and Farm Management of Itoh's Family in Japanese Occupation Choi-Woo-Jung(Jeonju Historical Museum Curator) 日帝强占期 伊藤家의 土地所有와 地主經營*1) 崔 宇 中**2) (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Abstract This paper is to analyze an case of Itoh(伊藤) Farm managements which possessed a landed property of Chon-ju and Ik-san countrys' areas in Chonbuk province, as a case study related to Japanese colonial agriculture policy in Southern Korea in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In other words, this paper tries to analyze the actual proof of the exploitative colonial agriculture managements of the Japanese landlord and semi-feudal suppression model of Korean tenant through a case study of Itoh(伊藤) Farm managements. Itoh Choube'e(伊藤長兵衛) who owned Itoh(伊藤) Farm, comparatively early brought capital into Korea from Japan. He established the his own Farm office in SaMrye-myeon(參禮面) for the purpose of collecting the high rate of farm rent. He bought up lots which were equipped with good irrigation facilities and near the his office, or Samrye-myeon(參禮面)and Bongdong-myeon(鳳東面) areas. His Farm reached about 1,200,000 lands and 1,000 tenant farmers. He manipulated higher earnings through his Farm managements, because of mechanism's re-creation that he forced them to plant the Japanese seeds, pay the farm rent, keep the crops' quality, appoint surety and so on by Tenancy Practices of all sorts. Thus Itoh(伊藤) Farm managements was one of examples that the distortion of Korean agriculture and economic truth of Korean tenants, namely a characteristic of Japanese landlords could be grasped in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915

Ⅰ. 머리말 본고는 일제강점기 日本人 地主 伊藤長兵衛가 전라북도 全州, 益山, 金提 등의 토 지를 매입하여 운영하였던 伊藤農場의 농업경영 사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이곳의 일본인 농장들 가운데 伊藤農場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의 농업경영 과정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많 다는 점이다. 伊藤農場의 토지소유현황에 대한 자료, 소작료 수취현황에 대한 자료, 소작인 통제에 관한 자료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일본인 지주의 농업경영1)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는데 좋은 소재라 생각된다. 둘째, 伊藤農場 자료는 당시 伊藤農場이 소유했던 3개 郡, 11개 面, 42개 里에 대한 토지소유 및 소작료 납부현황까지 파악할 수 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의 수탈 양상과 전북지역 농촌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셋째, 농장경영에서 한 해의 영농계획을 어떻게 편성하며 또 이를 수행하기 위해 농사현장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소작인을 통제하였는가를 치밀하게 분석한 연구는 많지 않다. 하지만 伊藤農場 자료는 영농방침을 구현하기 위한 영농조직과 업무분 장내역, 소작인 통제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 참고한 자료2)는 農場一覽 (1934년)3), 不動産目錄 4), 定租 臺帳 甲, 乙 (1939년)5), 伊藤農場 土地臺帳 (1935년)6), 朝鮮伊藤農場の社員 家族簿 7)등이다. 이상의 자료를 토대로 伊藤農場의 설립과 토지매입과정, 토지소유현황, 그리고 식 민지 지주제 경영실태에 관한 사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2) 5) 916

Ⅱ. 지역개황과 농장설립 伊藤農場의 사무소가 들어섰던 參禮는 예부터 전라도의 관문이요 교통의 요충지 였다. 전국의 중요지점을 역로로 연결시켰던 고려시대부터 驛站이 설치돼 중요 거 점역으로 부상해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을 연결하는 7개 간선 도로망 중 통영로(서울~통영), 제주로(서울~제주) 등 2개 노선이 삼례역에서 갈려 져 내려갔다. 서울-수원-천안-공주-노성-은진-여산을 거친 역로는 삼례에 이르 러서 전주-임실-남원-함양-진주 쪽의 길과 금구-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 쪽 길로 갈리었던 것이다. 전라도 지역과 관련된 조정의 명령이나 지방 관리의 보고, 군사적 통신은 경중을 막론하고 반드시 삼례를 거쳐 오갔다. 새로 부임하는 전라감사도 이곳을 지나야 했 고, 부근에서 출도 하는 어사도 이곳의 말과 역리를 징발했다. 삼례역에는 관리 들이 이용하는 관용 숙박시설이 있으며 나그네들이 쉬거나 묵어가는 주막도 많았 다. 또한 삼례역은 1892년 11월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사면 시켜달라고 탄원했던 삼례취회의 현장이었고, 1894년 10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거점으로 근대 민족운동의 중심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목포 간 1등도로가 삼례를 경유하고 있었고, 이리~삼 례~고산 간 3등도로가 통과하고 있었다. 이렇듯 삼례는 전통시대부터 교통의 요지 였고, 물산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대장촌을 비롯한 춘포면의 사람들은 이곳의 삼례의 전통 5일장을 이용하였다고 한다.8) 그리고 이 도로의 교차점과 삼례역 사 이에는 자연스레 시가지가 조성되어 행정기관, 서비스기관, 교육기관, 상업교역시설 이 조성되었다.<그림 1> 참조. 917

<그림 1> 삼례지역 개황도 <그림 1>을 보면 삼례역 주변에는 농장의 사무소인 동척회사 삼례출장소, 박기순 농장, 화성농장을 비롯해 교육기관인 삼례공립보통학교와 행정기관인 삼례면사무소 가 있었고 삼례공립보통학교에는 삼례신사도 있었다. 또한 병원 및 우편소 등 서비 스기관도 있었으며, 1등도로와 3등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삼례경찰관 주재소와 삼례학교조합, 伊藤農場도 있었고 1등도로변에는 삼례금융조합이 위치하고 있었다. 918

이러한 사회기반시설이 확충된 삼례에 伊藤長兵衛9)는 渡邊爲吉10)과 함께 조합을 설립하여 농장을 운영한다.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한국에 들어와 농업경영을 통해 부를 축척하고자 할 때, 자연적 조건과 정치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伊藤長兵衛와 渡邊爲吉은 1905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全羅南道 木浦와 光州일원, 全羅北道 평야지역 대상으로 농업수익성에 대한 철저한 사전조사를 통해 伊藤渡邊企業組合을 설립한다. 이 조합의 존립기한은 10년이며11), 얻어진 이익 중 1/10은 적립금, 2/10은 사무 원 급여 및 상여금, 7/10은 출자금에 대한 배당금으로 산정하였다.12) 또 토지매수 와 가옥 등의 명의는 伊藤長兵衛로 하고 이를 제외한 기타 제반사항에 대해서는 渡 邊爲吉의 명의로 하였다.13) 조합원은 伊藤長兵衛와 渡邊爲吉 2명이며, 출자금은 각각 40,000원, 10,000원 총 50,000원이었다.14) 이 출자금으로 1906년 4월에 삼례면 新金里와 石田里 소재 의 논 400여 두락과 밭 80여 두락을 매수15)하여 마침내 伊藤農場을 설립하였다. 당시 사무소 내 건물로는 사무실 건물 1동(17평), 창고 3동(각각 25평), 사택 1동 (24평) 등이 있었다. 농장의 운영방침은 한국의 토지를 매수하여 농사경영을 통해 고율의 소작료를 수 취하는 것16)이었으며 부대사업으로 부동산 저당, 대부업 등을 계획하였다. 더불어 농사개량을 구실로 소작인에게 각종 부대사항을 강요하여 투자한 자본에 대해 고율 의 수익률을 담보로 했다. 이러한 계획 하에 伊藤長兵衛는 사무원들과 함께 鳳東面, 參禮面, 春浦面 등에 집 중적으로 토지매수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1907년에 暴徒17)들의 농장 침입으로 사 무실, 창고 등 농장 유지를 위한 기반시설들이 소실된다. 이 때문에 직접적인 농장 운영은 어렵게 되었다.18) 따라서 토지매입계획을 수정하여 농장부근의 토지가 아닌 群山府의 외곽지역인 平東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게 된다.19) 이후 상황이 안정되자 1911년 9월에 大場村으로 피난했던 伊藤農場의 임시사무소를 삼례로 옮겨와 사무 919

소와 주택의 부속건물, 창고를 재건축하였다. 그리고 본래 계획했던 대로 봉동면과 삼례면 일대의 토지매입을 진행하게 된다.20) 한편 1917년에 농장경영의 방식에 변화가 찾아온다. 1917년 3월 4일, 渡邊爲吉 의 사망으로 더 이상 조합운영이 어려워졌으며, 또 조합의 존립만기기간인 10년이 다 되어 조합의 해산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일에 그간의 자산을 분배함으로써 농장운영을 위한 조합은 해체되어 伊藤長兵衛는 개인이 단독으로 경 영하는 개인운영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이후 1945년에 광복과 더불어 伊藤農場의 모든 자산은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한국에 편입되어 자산을 상실하게 되었고, 일본인의 한국에서 농장운영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21) Ⅲ. 토지매입과 토지소유현황 伊藤農場은 다음과 같은 방침을 세워 토지를 매입한다.22) 첫째, 한 지역에 토지 를 집중 매수하기보다는 여러 지역에 분산하여 매입한다. 즉 토지를 분산시켜 놓음 으로써 토지가 일시에 早 水害의 피해를 입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둘째, 농 장사무소에서 되도록 가까운 지역의 토지를 매입한다. 이는 농장 사무원들이 수시 로 농사현장에서 소작인들의 영농을 점검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우선적 으로 수리시설이 좋은 지역을 매입한다. 대규모의 황무지 개간이나 바다 또는 호수 의 간척은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효율적인 농업경영을 위해서 수리시설이 좋은 지역의 토지를 매수하여 수확의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이러한 방침아래 1932년에 伊藤農場이 소유했던 토지는 총 1,332,217평(약 444정보)이었다. 이 가운데 논이 1,179,204평, 밭 대지 임야 등 기타 153,013평이었다. 연도별 토지매입과 매각 규모를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920 토지가

<표 1> 伊藤農場의 연도별 토지매입 매각 현황 (단위: 坪) 伊藤農場의 토지소유 면적은 농장설립 후 4년 만에 100정보를 상회하였고 이후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며, 특히 1914~1916년에 이르러 약 240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는 이 시기에 일본과 한국의 경기가 침체되어 은행으로부터 거 액을 빌려 농지를 구입했던 지주들은 심해진 자금압박 때문에 헐값에 농지를 매각 할 수밖에 없었다. 伊藤長兵衛는 이러한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농장사무원으로부터 편지로 보고 받고 직접 농장을 방문하여 대규모로 토지를 인수하였기에 이식에 많 은 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23) 921

이후 토지매입은 소극적이었다. 伊藤農場에서 토지매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 았던 것은 토지를 매입하려면 중개인이 필요한데 중개인이 중간에 농간을 부려 비 싼 값을 치러야만 했고, 게다가 뒤늦게 토지에 투자하는 자가 속출함으로써 地價가 상승한데 이유가 있다.24) 한편 伊藤長兵衛는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직후인 1918~1919년에 대규모 토지를 매각하는데, 농장설립 초기 군산지역에서 매입했던 토지 238,603평을 군산부에 거 주하는 森菊五郞에게 198,040원에 매각한 것이다.25) 이후에도 계속 토지매각이 이 뤄지는데, 대부분 助村水利組合 치수사업, 삼례와 고산 방면의 도로공사, 만경강 개 수사업 등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가 편입되어 매각하거나 기부한 결과이다. 이등농장은 농장설립 초기부터 1930년 중반까지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하였는데 1평당 매수가격은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표 2>는 伊藤農場의 1평당 평 균매수가격이다. <표 2> 伊藤農場의 1평당 평균토지매수가격(1934년) (단위 : 錢) <표 2>를 보면 伊藤農場이 전주군에 소유했던 沓의 1평당 평균매수가격은 19.21 錢, 田은 7.77錢, 익산군의 경우 沓은 18.19錢, 田은 8.41錢, 김제군의 경우 沓이 18.19錢이었다. 伊藤農場의 1평당 평균매수가격은 전라북도 田, 沓 모두 下等地의 가격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26) 伊藤農場이 매입했던 토지들은 대부분인 수리안정성이 높고, 922

비옥한 토지들이어서 척박한 下等地가 아닌 上等地나 中等地에 해당한다. 따라서 1 평당 매입가격 역시 높아야 하지만 전라북도 하등지 매매가격 보다 낮은 가격에 토 지를 매입하였다. 이는 앞서 기술한 것처럼 경제적 여건을 잘 이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伊藤農場이 소유했던 토지내역을 면별로 정리해 보면 <표 3>과 같다. <표 3> 伊藤農場의 면별 지목별 토지소유면적(1934년) (단위 : 坪) 1934년에 伊藤農場이 소유했던 토지 중 가장 많은 곳은 전주군 삼례면(436,330 坪)과 봉동면(420,275坪)이다. 그 다음은 전주군 조촌면(213,249坪), 익산군 춘 포면(144,525坪), 전주군 용진면(66,253坪), 익산군 왕궁면(34,808坪), 전주군 초포면(11,064坪), 익산군 이리면(2,551坪), 김제군 백구면(2,327坪), 익산군 팔 봉면(528坪), 전주군 비봉면(336坪)의 순이다. 923

<그림 2> 1935년 이등농장이 소유한 토지현황 지도 주 : 은 伊藤農場이 소유한 토지를 표시한 것이며, 은 소유한 토지 중 水害가 심했던 지 역을 표시한 것이다. 伊藤農場이 봉동면과 삼례면 토지를 소유하기 위해 집중했던 이유는 이 지역이 고산천을 끼고 있어 근대적 수리시설이 보급되기 이전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양호 한 영농환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伊藤長兵衛는 1920년 이후 호남선 철도개통 시점과 함께 이 지역이 호남미 반출의 거점지역이 될 것이라는 정보를 파 악하고 있어 전략적인 토지매입을 진행했던 것으로 파악된다.27)<그림 2>참조. 다음으로 伊藤農場에서 소유했던 토지 가운데 里별 소유현황을 살펴보겠다. <표 4>는 伊藤農場이 소유했던 沓의 분포 및 地價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伊藤農場은 용진면 운곡리 용흥리 신지리 등 3개 里에 56,305坪을 소유했는데, 이 들 地價 총액은 10,371.76円이었고, 평당지가는 14.84錢이었다. 그 중 토지면적이 가장 넓은 곳은 신지리(45,054坪)로 평당지가는 19.89錢이었다. 924

<표 4> 里별 토지분포 및 地價 현황(沓) 자료 : 不動産目錄, 伊藤農場 土地臺帳 (1935년) 위의 두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里별 번지, 토지 소유 면적, 지가를 기입한 후 地價를 면적으로 나눠 평당 地價를 산출하였다. 고산천 주변에 위치한 봉동면은 예로부터 수리안전답으로 농사경영에 유리한 조 건을 갖추고 있어 伊藤農場이 가장 많은 양의 토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곳 389,529坪의 토지는 구만리 율소리 운하리 장기리 낙평리 신성리 고천리 성덕리 구미리 용암리 구암리 등 11개 里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다. 평당지가는 21.49錢으로 총 地 價는 85,652.07円이었다. 토지면적은 구만리, 구미리, 성덕리 순으로 각각 80,210 坪, 75,262坪, 67,988坪이었다. 한편 낙평리는 30.12円으로 봉동면내에서 평당지 가가 가장 비싼 지역으로 나타났다. 삼례면에는 수계리 석전리 신탁리 구와리 신금리 삼례리 후정리 어전리 등 8개 里에 376,772坪을 소유하였다. 삼례면의 총 地價는 79,893,69円으로 평당지가는 18.88 錢이었다. 그러나 삼례면은 봉동면과 더불어 고산천을 끼고 있어 관개농업이 수월 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평당지가가 비교적 낮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후정리 와 어전리의 평당지가가 상당히 저렴하여 나타난 결과이다. 伊藤農場이 소유한 삼 례면 토지가운데 면적이 가장 넒은 곳은 석전리(124,278坪)이며, 평당지가가 가장 높은 지역은 삼례리(24.88錢)였다. 925

초포면에는 금당리 하리 송전리 등 3개 里에 5,122坪을 소유하였다. 이 지역의 총 지가는 1,020,18円이지만 평당지가는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높은 23.10錢이었다. 상대적으로 초포면의 평당지가가 가장 높게 나타난 이유는 송전리의 지가가 높았기 때문인데, 송전리의 경우 토지소유에 비해 지가가 높아 결과적으로 평당지가가 높 게 나타난 것이었다. 조촌면에는 고량지 장동리 여의리 반월리 용정리 성덕리 화전리 등 7개 里에 213,136 坪을 소유하였다. 이곳의 총 지가는 42,394,03円이었고, 평당지가는 19.05錢이었다. 조촌면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지역과 평당지가가 가장 높은 지역은 각각 반월리와 용 정리였다. 춘포면에는 쌍정리 인수리 오산리 천서리 천동리 신동리 등 6개 里에 144,525坪을 소유하였는데, 총 지가 42,394,03円, 평당지가 15.31錢임을 알 수 있다. 춘포면의 평당지가가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낮았는데, 그 이유는 저당유실로 편입된 쌍정 리와 인수리의 地價가 매우 저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봉면(336坪) 인봉면(528坪) 백구면(2,327坪) 왕궁면(7,064坪)에도 각 각 1개 里의 토지를 소유했으며, 이들 지역의 지가는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편이 었다. 다음으로 밭에 대한 토지소유 현황을 살펴보자. <표 5>는 伊藤農場이 소유했던 田의 분포 및 地價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표 5> 里별 토지분포 및 地價 현황(田) <표 5>에서 알 수 있듯이 伊藤農場이 소유한 밭은 주로 삼례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수계리 석전리 신탁리 구와리 신금지 삼례리 후정리 등 7 개 里 에 50,018평을 소유했으며, 평당지가 10.68錢, 총 지가 5,207.17円이었다. 토지소유 지역이 가장 넒은 곳은 삼례리, 평당지가가 가장 높은 곳은 신금리로 나 타났다. 926

봉동면에 구만리 율소리 장기리 낙평리 고천리 성덕리 구미리 구암리 둔산리 등 9개 里에 총 16,785평의 토지를 소유하였는데, 이 지역의 총지가는 5,207,17円 이었 다. 또한 봉동면 일대는 각 里마다 심한 편차를 보였는데, 이 가운데 구암리가 가장 낮았고, 성덕리가 가장 높았다. 기타 용진면 신지리, 초포면 하리, 왕궁면 온수리, 조촌면 반월리에도 밭이 일부 있었고, 단일 里에 伊藤農場의 토지가 가장 많이 분포된 지역은 왕궁면 온수리였다. 마지막으로 垈에 대한 토지 소유현황을 살펴보겠다. <표 6>는 伊藤農場이 소유했 던 垈의 분포 및 地價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표 6> 里별 토지분포 및 地價 현황(垈) <표 6>에 따르면 垈에 대한 토지소유는 삼례면(9,403坪)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 타났고, 그 중 삼례리에 대부분의 대지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는 농장의 사무소와 창고 등 농장관련 시설들이 이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평당지가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삼례면 삼례리와 후정리, 조촌면 반월리가 가장 비싼 것으로 나 타났다. Ⅳ. 이등농장의 지주경영 1906년에 설립된 伊藤農場은 1930년대 중후반 사무실, 사택, 가옥, 창고 등 수 십 동의 건물과 부속시설을 갖추고, 농림학교 출신 직원28) 4~6명을 배치하여 소작 지와 소작인에 대해 체계적인 관리를 시작했다. 당시 농장주는 일본 滋賀縣에 거주 하며 토지매입과 같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한국에 건너왔다.29) 평상시에는 농장 의 주임으로부터 月報나 보고서를 통해 현황을 보고 받고, 주요 현안에 대해서는 편지를 이용해 지시하는 형태로 농장을 운영했다. 앞서 밝힌 대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들은 품종개량과 토지개량 등을 통해 한국내 토지의 미곡증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은 한국 내 미곡증산을 위해 거액 927

의 자본을 투자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얻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경주했 고, 伊藤農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위해 수리시설 개선을 중심으로 深耕을 활용한 토지개량, 품종개량을 통해 품종의 선정부터 종자의 생육발달을 하나하나 파악했다. 또한 苗垈를 개선, 綠肥 장 려 등 일련의 증산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30)d 뿐만 아니라 농장운영을 위해 중 단기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물론 그에 따른 조직 과 인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농장의 확대에 따라 재무 인사 구매 판매 업무를 총 괄하는 수뇌부와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을 지도할 농감을 고용하게 된다. 伊藤農場에서는 主任-事務員-農監-小作人으로 연결되는 농장관리체계를 구축해 영농을 꾀하는 한편 한 해의 행사계획을 미리 수립하여 계획적인 사업을 진행해 나 갔다. 농장의 주임은 자금조달과 운용, 예산편성, 결산 등의 업무를 총괄했을 뿐만 아니 라 직원에 대한 인사권과 직원의 업무를 지시 감독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직책이 었다.31) 농장의 사무원들은 정기적으로 파종에서부터 이앙, 시비, 추수, 소작료 수납에 이 르는 모든 영농과정을 관리 감독하였다. 이들이 담당한 업무 중에는 재고량이나 도 작량, 지적이동에 대한 조사 보고업무 외에도 소작인 가정상황에 대해 수시로 파악 보고하는 업무도 있었다. 이등농장은 농업현장에서 소작지와 소작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그 지역 출신 대표자를 뽑아 관리 감독하게 했다. 또한 농감은 주로 우수한 소작인들 가운데 선발하였는데, 이는 농장으로서는 농사경영의 모범을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장 에 대한 명망과 영향력을 이용하려는 목적이었다.32) 이 가운데 농감은 직원들을 도 와 주요 농사일정에 따라 소작지와 소작인을 관리한 직책으로 각 지역별 농감 배치 현황을 보면 <표 8>과 같다. 32) 農場一覽, 연혁, 1934년. 928

<표 8> 伊藤農場 內 農監 배치현황 (단위 : 坪) <표 9> 面별 小作人 분포현황 <표 9>를 보면 소작인이 가장 많았던 곳은 봉동면(38.6%)과 삼례면(36.8%)이 고, 조촌면(8.4%)과 춘포면(4.6%)에 다수의 소작인이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봉동면과 삼례면은 伊藤農場에서 집중적으로 토지를 매입한 지역인 까닭에 소 작인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던 것이다. 아래의 <표 10>은 伊藤農場에 속하였던 소작인들이 1인당 소작면적을 산출한 것이다. <표 10> 소작인 1인당 평균 토지소유현황 단위 : (坪) 929

소작인 1인당 소작규모는 평균적으로, 논은 대략 1,100평, 밭은 900평, 대지는 170평 정도였다. 1인당 논에 대한 소작규모가 많았던 지역은 익산군 춘포면과 전 주군 조촌면, 밭은 전주군 초포면이었고, 대지의 소작규모편차는 거의 없었다. 당시 전라북도 100정보 이상 토지를 소유한 농장들의 소작인 1인당 소유 면적은 대략 2,600여 평이었다. 이를 비교해 볼 때 이등농장의 소작인 1인당 소유면적은 2배 정도 적은 것으로 나타난다. 伊藤農場은 농사경영과 부동산 저당 및 대부업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주 수입 원은 소작료였다.33) <표 11>은 伊藤農場의 연도별 소작료 수납상황을 정리한 것이 다. 伊藤農場의 수입은 1915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증가하여 점차 안정적인 소작료 수입을 올리고 있다. <표 1>과 대조해 볼 때 토지의 소유면적은 일정하게 감소하지 만 소작료 수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함을 알 수 있다. 이는 伊藤農場의 농업수입이 주로 논에 대한 소작료 수취로 이루어져 소작인에 대한 철저한 통제에서 기인한 것 으로 보인다. 1924년과 1928년에는 소작료 수입이 일시적으로 감소하는데, 이는 수해로 인해 소작료의 수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표 11> 연도별 소작료 수납 상황 (단위 : 石) 다음으로 伊藤農場의 면별 1인당 소작료 납부현황을 살펴보겠다. <표 12>는 면 별 1인당 소작료 납부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930

<표 12> 면별 1인당 소작료 납부현황(1939년) 자료 : 定租臺帳, 1939년. 1. 定租臺帳 에서 소작료 면별 소작료 납부현황을 정리한 후 면별 소작인 수로 나누어 평균 소작료를 산출함. 2. 伊藤農場의 소작인 수는 1,133명이나 익산군 이리면의 소작료 납부현황을 파악할 수 없어 서 익산군 이리면 소작인 9명을 빼고 산출함. 3. 定租臺帳 대장은 1939년의 수치이고, 소작인의 수의 수치는 1934년 수치임. <표 12>를 보면 1939년에 伊藤農場의 소작인이 납부한 소작료 총 4,756.80石 이고, 1인당 납부한 소작료는 평균 4.05石이다. 이는 당시 전라북도 평균 소작료가 4.50石34)임을 감안할 때 평균치에 해당한다. 하지만 전국평균은 3.20石으로 伊藤 農場에서 수취한 소작료가 비교적 높은 편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수취한 소작료는 전년도에 거두어들인 소작료를 농장의 창고에 보관하였 다가 다음 해부터 1년에 1~2차례 많게는 5~6차례에 걸쳐서 매각하였다. 여기에서 얻은 이익금으로 농장운영에 필요한 각종 세금과 관리비, 토지수선비 등을 지출하 였다. 많은 일본인 농장주는 토지개량비, 공과금, 농업자재비용 등을 소작인에게 전가시 켜 소작인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착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伊藤農場에서는 소작 료=지대 였기 때문에 상당히 합리적인 농장운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소작료 매 각을 통한 수입과 각종세금 등 지출을 정리하여 伊藤農場의 연도별 수입의 변화를 살펴보면 <표 13>과 같다. 931

<표 13> 伊藤農場의 연도별 수입 지출 현황 (단위 : 円) <표 13>에서 농업의 풍흉에 따라 소작료 수입의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이익금이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1919년과 1930년은 획기적으로 이익 금이 늘어나는데 이는 흉작으로 소작료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표 1>과 대조 해 볼 때 1916년 이후 토지의 증가량은 정체되어 있는데, 이익금은 계속 늘어났으 며, 이는 농업생산력 증대와 미곡급등으로 토지변화가 없다하더라도 이익금의 인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지주들은 소작관계법에 소작료 수탈에 대한 제한규정이 거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소작료 수탈방식을 교묘하게 함으로써 실질적 인상을 꾀하였다. 즉 이모 작에 대하여 소작료를 징수하기 시작한 점, 소작료 징수 때 표준중량 이상으로 거 둔 점, 소작료 납부기한을 지체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소작료의 품질검사비 용의 전가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 이익금이 인상되었던 것이다.35) Ⅴ. 맺음말 이상에서 伊藤農場의 설립과 토지매입과정, 토지 소유현황, 농장운영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伊藤長兵衛가 설립한 伊藤農場은 소작경영을 통해 고율의 소작료 수입 을 올리려고 했던 일본인 지주의 전형적인 농장경영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伊藤長兵衛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6년에 고율의 소작료 수취를 목적으로 한 국에 진출했다. 그는 많은 자본을 이용해 전라북도 전주군 삼례면 일대에 농장을 설립하고, 봉동면까지 토지매입 대상지역을 확대했다. 삼례면과 봉동면 일대의 토지 를 매입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지역이 수리안정성이 높아 농장경영에 있어 위험부 담이 적었고, 농장사무소와 근거리에 있어 소작인의 영농을 점검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932

伊藤農場의 토지는 농장설립 4년 만에 100정보의 대규모 토지를 확보하게 되는 데, 이는 당시 경기침체로 심한 자금압박을 받고 있었던 많은 수의 소규모 농장을 인수함으로써 가능했다. 伊藤農場의 1평당 평균매입 가격이 전라북도내 하등지 매매가격보다 낮음을 알 수 있었다. 하등지보다 관개농업이 유리한 지역의 토지를 더 낮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일본인 농장주처럼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으로 생각 된다. 이렇게 해서 매입한 토지는 1915~1916년에 이르러 농장설립 후 최대 규모 인 440정보에 달하게 된다. 또한 伊藤農場의 토지분포를 보면, 논은 10개 面 42개 里, 밭은 6개 面 20개 里, 대지는 3개 面 8개 里에 걸쳐 있었다. 이처럼 토지를 여러 곳에 분산시켰던 이유는 水害와 旱害를 최소화하고, 토지가 농장사무소와 비교적 근거리에 수시로 소작인의 영농상황을 점검하기에 유리했으 며, 관개농업 조건이 좋은 고산천 주변 지역에 토지를 집중하여 수확의 안정을 도 모하기 위해서였다. 伊藤農場은 1930년대 중후반 사무실, 사택, 가옥, 창고 등 수십 동의 건물과 부 속시설을 갖추고, 농림학교 출신 직원 4~6명을 배치하여 소작지와 소작인에 대해 체계적인 관리를 시작했다. 당시 농장주는 일본 滋賀縣에 거주하며 토지매입과 같 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한국에 건너왔다. 평상시에는 농장의 주임으로부터 月報 나 보고서를 통해 현황을 보고 받고, 주요 현안에 대해서는 편지를 이용해 지시하 는 형태로 농장을 운영했다. 농장주가 일본에 거주했기 때문에 한국내 농장운영을 위해서 체계적인 관리조직 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중 단기 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따른 재무, 인사, 구매, 판매 업무를 총괄하는 수뇌부가 필요했고, 또 농장의 확대에 따라 일선에서 미곡증산을 위한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을 지도할 농감도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등농장에서 는 主任 - 事務員 - 農監 - 小作人으로 연결되는 농장관리체계를 만들어 운영하 였다. 농장의 주임은 자금조달과 운용, 예산편성, 결산업무 등을 총괄하였다. 사무원들 은 농장의 방침에 따라 정기적으로 파종에서부터 이앙, 시비, 추수, 소작료 수납에 이르는 모든 영농과정을 관리 감독하게 하였다. 伊藤農場은 소작지와 소작인을 관리하기 위해 8명의 농감을 두었다. 이들은 우수 소작인으로 많게는 27만 평, 적게는 10만 평을 관리하였다. 당시 일본인 농장의 관 리인들이 관리하였던 면적과 비교해 볼 때 평균 수준이었다. 1934년에 伊藤農場에 속해 있었던 소작인의 수는 1,133명이었다. 이들은 주로 삼례면과 봉동면에서 소작활동을 하였으며, 1인당 논은 대략 1,100평, 밭은 900평, 대지는 170평의 농지를 소작하였다. 이들이 1인당 납부한 소작료는 4.05石인데, 이는 당시 전라북도 평균 소작료 4.50石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전국평균이 3.20石임을 감안할 때 伊藤農場에서 수취한 소작료는 높았음을 알 수 있었다. 소작인들은 매년 소작계약에 의거하여 소작료를 납부하도록 했는데, 이렇게 납부 933

된 소작료는 농장의 주 수입원이었다. 伊藤農場은 이러한 수입원인 소작료를 증수 하기 위해 소작인의 통제를 가한다. 이러한 伊藤農場의 농업경영 방식은 소작인들 의 경제적 파탄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확인할 수 없 었다. 참고문헌 1. 伊藤農場 자료 農場一覽, 1934. 不動産目錄 定租臺帳 甲, 乙, 1939. 伊藤農場 土地臺帳, 1935. 昭和拾貳年度小作料査定簿, 1937. 大正拾四年~昭和四年作柄及年貢調定高報告書 朝鮮伊藤農場の員家族簿 2. 단행본 김민영, 일제하 군산 옥구지역의 민족사회운동사, 군산문화원, 1996. 김용섭, 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92. 유제헌, 한국근대화와 역사지리학 - 호남평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주봉규 소순열, 근대 지역농업사연구, 서울대출판부, 1996. 홍성찬 최원규 이준식 우대형 이경란, 일제하 만경강 유역의 사회사, 혜안, 2006. 丸紅株式會社 社社編纂室, 丸紅前史, 丸紅株式會社, 1977. 3. 논문 강길원, 일제하 한국 농촌의 실태 - 소위 농촌진흥운동기의 전라북도 지방을 중심으로 - 전라문화논총 1,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1986. 김성보, 日帝下 禮山 成氏家의 자본축적과 정치활동, 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86. 김용달, 不二西鮮農場 소작쟁의 조사보고, 한국근현대사연구 25, 한국근현대사 학회, 2003. 남궁봉, 萬頃江流域 水利地域의 水利慣行과 1975. 934 農村, 地理學과 地理敎育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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