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요약 한국 중 근세사회의 농법과 수리시설의 변화, 발달과정 등을 문헌 자료 검토와 발굴 보고서 분석을 통해 정리하였다. 고려시대의 경지이용방식은 文宗代 田品 규정에서 볼 때 1년 또는 2년 休閑法이었다. 벼 경작법이 고려말에 이르러 休閑法에서 連作法으로 변화 발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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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The Agricultural Techniques and Irrigation Facilities in the Medieval Age Early Modern Age 염정섭 한림대학교 Ⅰ. 머리말 Ⅱ. 고려시대의 농법과 수리시설 1. 고려시대 농법의 변화 2. 고려의 수리시설 활용 Ⅲ. 조선 전기의 농법과 수리시설 1. 조선 전기 수전농법과 한전 농법 2. 조선 전기의 수리시설 Ⅳ. 조선 후기의 농법과 수리시설 1. 조선후기 농법의 발달과 경작유구 2. 조선후기의 수리시설 Ⅴ. 맺음말 이 논문은 (재)중앙문화재연구원의 2012년도 상반기 기획논문으로 선정되어 연구비를 지원받아 이루어졌음.

2 국문요약 한국 중 근세사회의 농법과 수리시설의 변화, 발달과정 등을 문헌 자료 검토와 발굴 보고서 분석을 통해 정리하였다. 고려시대의 경지이용방식은 文宗代 田品 규정에서 볼 때 1년 또는 2년 休閑法이었다. 벼 경작법이 고려말에 이르러 休閑法에서 連作法으로 변화 발전하였다. 고려후기 한전경작법은 1년 1작의 연작법이었다. 고려시대 경작유구의 사례 에서 여러가지 밭작물을 두둑을 중심으로 경작하고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수리시설 관련 기록은 12세기부터 집중적으로 나오는데, 新田 開墾과 벼 재배 비중이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수리시설은 洑, 堤堰, 河渠, 防潮堤 등으로 구 성되어 있었다. 경상도 양산 지역의 黃山堰의 경우 황산역 주변에 대한 治水 사업과 田畓 의 보호를 위해 만든 제방이었다. 尙州 恭儉池의 경우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제 방의 增築, 補築, 改築이 계속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벼 재배법은 水耕과 乾耕, 그리고 挿種 즉 移秧이었다. 이앙법은 16세기 를 거치면서 경상도 전역과 전라도 충청도의 일부 지역으로 보급되었다. 그리고 15세기 에 밭에서 여러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1년 1작 방식이었다. 조선시대 자기 편, 도기편과 함께 출토된 밭유구에서 밭의 구조와 조성방식의 특색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수전의 경우 경지 표면의 水平을 잘 유지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었고, 습지의 개간은 토양의 개선, 토양의 첨입 등이 필요하였다. 조선 전기의 水利 정책은 堤堰, 川防 등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水田이 크게 증대하면서 수리시설의 필요성이 커졌다. 김제 碧骨堤의 경우 방조제일 가능 성이 제기되었지만, 石柱와 木板으로 貯水하는 제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밀양 守山堤 의 경우 水沈, 沈沒과 같이 강물이 넘쳐 물에 잠기는 피해를 막기 위한 용도의 제방이었다. 조선 후기 농법 발달의 대표적인 것은 水田 移秧法의 보급 확산이었다. 숙종 초반 17세 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삼남지역에서 이앙법이 전면적으로 채택되고 있었다. 그리고 16세 100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3 기 후반을 거치면서 밭작물을 1년에 두 번 경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7세기 이후로 추 정되는 水田 유적에서 농경활동의 흔적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밭유구에서 두 둑, 고랑, 식재흔적 등을 세밀하게 밝힐 수 있다. 조선 후기에도 堤堰과 川防을 수리시설로 이용하였는데, 조정은 새로운 堤堰과 川防의 축조, 그리고 기존 수리시설의 관리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洑의 중요성이 강조되여 開洑 (洑의 개설 축조)를 강조하였다. 華城城役과 관련된 萬石渠의 경우 水口를 만들고, 남쪽 水路 입구에 水閘을 설치하였다. 앞으로 여러 지역의 많은 수리시설에 대한 발굴조사와 현 황 파악이 필요하다. 주제어 : 농법, 이앙법, 수리시설, 제언, 천방, 경작유구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01

4 Ⅰ. 머리말 한국의 중 근세사회에서 농업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요소였다(김 용섭 1988). 농업 생산을 통하여 여러 신분층의 경제생활과 국가의 경제활동 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중 근세사회의 농업생산에서 중요한 부문은 농업생산력과 토지소유관계이다. 2가지 가운데 農 業 生 産 力 은 노동력, 노동 수단, 노동대상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중 근세사회의 농업생산력은 특 히 농업생산활동에 활용하는 農 法 의 변화, 발전과정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 다. 한편 중 근세사회의 농업생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요소 가운데 하나 가 水 利 施 設 이었다(이광린 1961).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는 특히 水 田 에서 벼농사를 짓는 데 중요한 부분이었다. 중 근세사회의 농법과 수리시설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文 獻 史 料 의 분 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경우 農 事 直 說 을 비롯한 여러 農 書 와 朝 鮮 王 朝 實 錄, 文 集 자료 등을 활용하는 연구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고 려시대의 경우는 農 書 로 전해지는 것이 지금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농법에 대한 연구가 극히 미미한 형편이다. 農 法 과 水 利 施 設 등의 변화가 직 접적인 농업생산에만 한정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제세력의 변천, 나아가서는 전체 사회의 구조적 변화까지 야기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고 할 수 있다(이태진 1986). 1990년대 이후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과정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비 정되는 耕 作 遺 構 (논, 밭)의 발굴조사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발굴 조사 보고자료를 활용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농법과 수리시설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2012년 현재까지 중 근세 사회의 농법과 수리 시설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文 獻 조사 분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고 고학적 발굴성과를 활용한 연구성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 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 근세 사회의 農 法 과 水 利 施 設 를 정리하는 연구 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본 연구에서 고고학적 발굴조사에서 확인한 경작유구 가운데 논밭유구와 수리시설 관련된 부분을 몇몇 사례를 중심으로 검토하고, 문헌자료를 통해 정 102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5 리한 중 근세 사회의 農 法 의 변화, 수리시설의 변동을 결부시켜 보다 종합 적으로 정리하려고 하였다. 고고학 발굴자료인 경작유구(논, 밭)의 연구성과 를 기초로 경종법 등 農 法 의 전체적인 모습을 좀더 다채롭게 설명하고, 수리 관련 발굴 성과를 토대로 水 利 施 設 의 축조 방식과 운영 등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을 정리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크게 고 려시대, 조선전기, 조선후기로 시기를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중 근세의 農 法 과 水 利 施 設 의 구체적인 실체와 변화양상을 전체적으로 정 리하기 때문에 개괄적이고 개설적인 설명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중 근세 사회의 경작유구, 수리관련 유구의 경우에도 몇몇 사례 정도만 검토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앞으로 중 근세 사회의 農 法 과 수리시설의 전체적인 흐름을 개괄적이고 계몽적으로 정리한 본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삼아 구체적이고 세밀한 중 근 세 사회의 농법과 수리시설에 대한 연구가 수행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본 연구는 발굴조사 현장의 성과에 비해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에 대한 연 구는 그다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을 앞으로 타파해나갈 디딤 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방대한 시기에 걸친 농법과 수리시설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이 문제에 관한 여러 가 지 다양한 견해를 충실하게 소개하지 못한 점은 아쉽게 생각한다. Ⅱ. 고려시대의 농법과 수리시설 1. 고려시대 농법의 변화 고려왕조에서 고려의 독자적인 農 法 을 정리하여 農 書 로 편찬하는 작업이 실행되었는지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하지만 아직 고려시대에 편찬된 농서 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중국에서 편찬된 농서를 수입하여 이용하는 모습은 사료에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농업기술이나 농업생산력을 해명하기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 정 섭 103

6 위해 일부 제한된 사료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경지이용방식과 穀種, 施肥, 벼 경작법의 발달, 지역적인 생산력 격차 등의 문 제에 대해 여러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1). 고려시대 경지이용방식에 관하여 휴한법과 연작법 여부에 대해 살펴보려 면2), 먼저 문종대인 11세기에 정리된 田品에 대한 규정3)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고려의 전품 규정을 해석할 때 가장 주안점을 두어 야 할 부분은 이 규정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田品 규정이 들어 있는 高麗史 食貨志 田制 經理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기사들은 무엇보다 量田에 관한 것이었다. 뒤에 등장하는 量田步數4)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田品을 설명하 는 규정 전후좌우에 배치된 食貨志 의 기사는 모두 量田에 관련된 규정이다. 게다가 田品은 田土面積과 더불어 양전과정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어야 될 조 사항목의 하나였다(金容燮 1975). 따라서 田品 규정 불역하는 땅을 上으로 삼고 一易하는 땅을 中으로 삼으 며, 再易하는 땅을 下로 삼는다(不易之地爲上 一易之地爲中 再易之地爲下) 라는 上中下 전품 규정은 平田, 山田, 水田, 旱田을 막론하고 모든 耕地에 적 용되는 일반원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連作地(不易之地)는 上等 田, 1년 휴한지(一易之地)는 中等田, 2년 휴한지(再易之地)는 下等田이라고 量田과 관련해서 규정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아야 뒤에 나오는 不易하는 山 田 1결은 平田 1결에 準하고, 一易하는 山田 2결은 平田 1결에 準하고, 再易 하는 山田 1결은 平田 1결에 準한다(其不易山田一結 准平田一結 一易田二 結 准平田一結 再易田三結 准平田一結) 라는 규정도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다. 平田과 山田의 생산력의 격차를 미리 상정할 필요 없이, 산전과 평전이 모두 不易田, 一易田, 再易田으로 구성되어 있고, 따라서 山田을 打量할 때 平田과 다름없이 結負를 산정하라는 부가적인 주의사항을 표현한 것으로 보 1) 고려시대 農法을 비롯한 農業生産力에 대한 연구사 정리로 다음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안병우 1995, 권영국 1999 : 58~159, 李正浩 ) 고려시대 토지이용방식에 대한 여러 주장에 대해서는 李正浩(2002)의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3) 高麗史 卷78, 食貨志 1 田制 經理 文宗 8年 3月; 判凡田品 不易之地爲上 一易之地爲中 再易之地 爲下 其不易山田一結 准平田一結 一易田二結 准平田一結 再易田三結 准平田一結. 4) 高麗史 卷78, 食貨志 1 田制 經理 文宗 23年; 二十三年 定量田步數田一結方三十三步. 104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7 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문종대 전품 규정이 平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水 田, 旱田을 막론하고 매겨진 上中下 등급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따 라서 당시 上中下 등급이 휴한의 빈도, 경지이용방식과 관련해서 매겨지고 있 었다. 이는 곧 당대의 주요한 경작방식이 휴한법이었음을 알려준다. 다음으로 穀種과 관련된 자료 가운데 9세기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전 남 담양의 開仙寺趾 石燈의 記文을 주목할 수 있다. 여기에는 業租와 京租라 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를 貢稅로 바치는 上等의 쌀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벼 의 품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 그리고 李奎報의 시문에 蟬鳴稻 라는 벼품종 이름이 들어 있다5). 선명도는 매미가 울 무렵에 수확을 할 수 있 다는 올벼로, 원산지는 중국의 강남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규보가 소개한 선명도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인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매미가 울 때 수확할 수 있는 올벼가 고려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3세기말에 중국에서 강남미가 고려에 수입되었다. 1291년(충렬왕 17년) 에 큰 기근이 돌자 元에서 진휼미를 보냈는데, 이때 고려에 들어온 중국벼가 바로 江南米로 불리는 것이었다6). 중국에서 들어온 강남미가 구체적으로 어 떠한 품종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선 전기 15세기 후반에 姜希孟이 지은 衿陽雜錄 에 이미 다수의 벼품종, 그리고 다수의 밭작물 품종이 소개되고 있 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품종의 개발, 그리고 지역적인 품종의 순화작 업이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의 품종 정리와 농서 기재는 곧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시기부터 품종의 개발과 보급 등이 이루어졌음을 미 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施肥, 糞田이란 田地의 地力을 상승시키고 作物의 성장을 도와 충실히 자라나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축적한 분전 재료를 田沓에 넣어 주는 작업이다. 농지의 지력 회복과 지력 증강을 위해서는 시비 가 필요했다(위은숙 1998). 이 때 중요한 것은 분전을 실시하는 데 사용하는 5)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14, 古律詩 得蟬鳴稻; 不欲負其名 趁得蟬鳴日 眼見新穀升 今年事亦畢. 6) 高麗史 卷80, 志34 食貨 賑恤 水旱疫癘賑貸之制; 忠烈王 十七年 六月 元遣海道萬戶 黃興 張侑 千戶 殷實 唐世雄 以船四十七艘 載江南米十萬石 來賑飢.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05

8 재료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분전을 어느 시기에 하는가 라는 점이다. 분전을 하는 데에 소가 여러 가지로 많이 이용되었다7). 糞田을 실시하는 시기에 따라서 基肥와 追肥를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 말에 이미 追 肥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8). 고려의 농법발달과 관련해서 지역적인 생산력의 격차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기에 통용된 田品制의 원리 가운데 하나가 道를 3等으로, 官을 3等으로, 그리고 하나의 官 안에서 다시 田을 3等으로 나누는 것이었다9). 이러한 전품 구별 방식은 곧 지역에 따라 생산력이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곧 道라는 광범위한 지역 범위를 3등으로 나누고 다 시 道內의 郡縣을 3등으로 나누는 田品制의 구분 방식은 道別 郡縣別 田品의 차이를 분명하게 파악한 토대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김용섭 2000). 고려말에 李齊賢의 언급은 沿海지역의 비옥함이 다른 지역과 다르다는 점 을 지적한 것이었다. 沿海지역의 土質이 다른 곳에 비해서 월등 우수하다는 지역적 특성의 차이를 파악한 것이었다. 그는 田品의 지역적인 차이를 鴨綠 以 南은 대개 모두 山이고, 비옥하고 기름져서 不易하는 田은 濱海에 있다 라고 지 적하였다10). 고려말 이후 沿海지역이 水田으로 개발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위의 기사에서 지역적인 田品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한 발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역별 田品의 차이에 대한 지적이 고려시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 다. 田品이 지역 사이에 격차가 벌어져 있고, 이를 국가에서 파악하는 것은 결국 농업생산의 지역적 특성을 감안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후기 14세기 후반에 벼 경종법 가운데 이앙법이 이미 부분적으로 실 행되고 있었다(이종봉 1993). 공민왕대에 白文寶(? 1374)는 백성들이 水 車를 이용하면 가뭄에 대비하고 開墾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한 다음 더 7) 世宗實錄 卷51, 世宗 13年 正月 癸巳; 且濟州人民 皆厭友隻出陸 高得宗亦言 濟州馬多牛少 民 家專賴牛以糞田 不可出陸 儻勒令出陸則未可也. 8) 鄭道傳, 三峯集 卷4, 行狀 高麗國奉翊大夫檢校密直提學寶文刻提學上護軍榮綠大夫刑部尙書鄭 先生行狀(鄭云敬); 僧正曰 予齎布若干疋 入某人家 見糞田役人飮酒 到某處見人耘田. 9) 度支志 外編 권4, 版籍司 田制部 二 量田 傳敎; (世宗 25년, 1443年) 其二 向者 分道爲三等 分官 爲三等 分田爲三等 實爲未精. 10) 高麗史 卷82, 兵志2, 屯田 禑王 14年 8月; 自鴨綠以南 大抵皆山 肥膏不易之田 在於濱海. 106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9 불어 揷秧하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1). 그는 水車를 이용하 는 것과 더불어 下種揷秧을 하면 가뭄을 대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곡물의 종자도 허비하지 않을 것이라 설명하였다. 그리고 고려말의 인물인 元天錫은 남쪽에 위치한 水田에 揷秧하는 작업이 아직 끝마치지 못했다는 詩句를 남겨 놓고 있었다12). 또한 李簷( )은 喜雨를 맞이하면서 移秧이 비록 늦었지만 오히려 西成의 가망이 있다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13). 이와 같이 고 려 말 수전농법으로 移秧法이 시행되고 일부 유학자는 이를 널리 보급시키자 는 주장을 펴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보급되어 실행하고 있었는지는 불 확실하다. 14세기를 전후하여 나타난 벼 경작법의 발전은 휴한법에서 연작법으로 변 화였다. 여러 연구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지만(안병우 1995), 여기에 서는 조선 초기 태종대에 만들어진 農書인 農書輯要 의 水稻 耕作法에 주목 하려고 한다. 農書輯要 가 태종대에 편찬되었지만 그 내용은 사실상 고려말 의 농법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農書輯要 는 農桑輯要 에 인 용된 齊民要術 의 水稻 耕作法을 인용하고 조선의 실정을 감안하여 吏讀를 활용하여 번안하였다. 農書輯要 에 2가지 水田農法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 데 하나는 齊民要術 에 수록된 淮河유역의 歲易農法 즉 休閑法을 번안한 것 이었다14). 다른 하나는 마찬가지로 齊民要術 에 보이는 北土高原의 移植法 을 移秧法으로 번역한 것이었다15). 결국 農書輯要 의 벼 재배법은 休閑法과 11) 白文寶, 淡庵逸集 卷2, 論農桑 (韓國文集叢刊 3輯); 又民得兼務於下種揷秧 則可以備旱不失穀種. 12) 元天錫, 耘谷行錄 卷5, 復次李居士所贈詩 (韓國文集叢刊 6輯); 南畝揷秧猶未盡. 13) 李簷, 雙梅堂莢藏集 권1, 喜雨 (韓國文集叢刊 6輯); 移秧雖已晩 猶加望西成. 14) 賈思勰, 齊民要術 卷2, 水稻第十一; 稻無所緣 唯歲易爲良 選地欲近上流 地無良薄 水淸則稻美 也 三月種者爲上時 四月上旬爲中時 中旬爲下時. 農書輯要, 水稻; 色吐連處田地亦 或田或畓 互相耕作爲良 量地品一樣田地乙良 每年回換水稻 耕作爲乎矣 三月內耕種不得爲去等 四月上中旬乙 不違耕種. 賈思勰, 齊民要術 卷2, 水稻第十一; 北土高原 本無陂澤 隨逐隈曲而田者 二月 冰解地乾 燒而 耕之 仍卽下水 十日 塊旣散液 持木斫平之 納種如前法 旣生七八寸 拔而栽之 旣非歲易 草稗俱生 芟亦不死 故須栽而薅之 漑灌 收刈 一如前法. 農書輯要 水稻; 陂澤無在 山谷段 地窄歲易不得 作畓限當庫以 每年耕作爲臥事乎是良㫆 二月 解氷地乾爲去等 火燒起耕後入水 十日第 土塊解散爲去等 所訖羅以 平正令是遣 落種 苗長七八寸 是去等 右例以 起耕平正爲乎 他畓庫良中 疎密得中爲只爲 移苗栽種爲乎矣 須只移苗栽種爲臥乎 事段 畓庫乙 每年回換耕作不得爲在如中 雜草茂盛爲臥乎等用良 移栽爲良沙 易亦除草.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07

10 移 秧 法 을 같이 수록한 것이었다. 農 書 輯 要 에서 水 稻 作 法 으로 서술한 每 年 回 換 水 稻 耕 作 이라는 구절에 대해서 水 稻 와 旱 田 作 物 을 或 田 或 畓 하는 방식으로 파악하고 이를 회환농 법 이라 이름붙이고 작물교대법으로 파악하기도 한다(김용섭 1987). 그런데 農 書 輯 要 의 水 稻 作 法 가운데 齊 民 要 術 의 稻 無 所 緣 으로 시작되는 부분 에 대한 번역문은 회환농법 즉 작물교대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休 閑 농법으 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新 墾 地 의 개간에서 숙전화과정의 어느 기간에 적용되는 제한적인 농법으로서 休 閑 의 歲 易 즉 一 易 농법으로 보는 것 (김기흥 1996)도 일정 부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農 書 輯 要 의 水 稻 作 法 가운데 齊 民 要 術 의 稻 無 所 緣 으로 시작되는 부분에 대한 번역문을 일정 기간에서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농법으로 보는 것은 農 書 輯 要 가 당시의 조 선의 사정을 반영한 일반적인 농법을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에서 수긍하기 어렵다. 農 書 輯 要 의 水 稻 作 法 에 대한 吏 讀 文 은 2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제방과 이어진 田 地 를 논이나 밭으로 경작하라는( 色 吐 連 處 田 地 亦 或 田 或 畓 互 相 耕 作 爲 良 ) 지시 부분과 地 品 이 한결같은 곳을 每 年 回 換 하여 水 稻 를 경작하라 고( 量 地 品 一 樣 田 地 乙 良 每 年 回 換 水 稻 耕 作 爲 乎 矣 ) 지시하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두 부분은 각각 독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앞부분은 제방과 이어진 곳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진 곳은 논이나 밭으로 활용하라는 경작지 관리에 관 련된 것이고, 뒷부분은 地 品 이 일정하다는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진 곳에서 每 年 水 稻 를 回 換 경작하라는 경작법 제시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뒤에 나오 는 每 年 回 換 水 稻 耕 作 이라는 설명을 앞에 나오는 或 田 或 畓 이라는 구절과 직접 연관시키기 어렵다고 생각된다(염정섭 2007). 農 書 輯 要 에 보이는 回 換 의 용례를 조사하면, 麻 의 경우 齊 民 要 術 에 歲 易 으로 서술한 것을 回 換 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農 書 輯 要 에 수 록된 두번째 水 稻 作 法 의 설명은 齊 民 要 術 의 北 土 高 原 수도경작법인데, 논 을 매년 回 換 耕 作 하지 않아 雜 草 가 무성하여 移 栽 (즉 移 秧 )해야 쉽게 제초 할 수 있다( 畓 庫 乙 每 年 回 換 耕 作 不 得 爲 在 如 中 雜 草 茂 盛 爲 臥 乎 等 用 良 移 栽 爲 良 沙 易 亦 除 草 ) 고 서술한 부분에 들어 있는 回 換 도 歲 易 을 가리키는 말이 108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11 었다. 또한 農書輯要 의 每年回換水稻耕作 라는 구절에 水稻만 서술하고 旱田 작물에 대한 지적이 없다는 점에서도 回換을 작물교대로 보는 것은 어색 한 해석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農書輯要 의 수도작법 가운데 齊民 要術 의 稻無所緣 으로 시작되는 부분에 대한 번역문은 歲易法, 즉 休閑法으 로 생각된다. 15세기에 편찬된 農事直說 에 정리된 벼 재배법이 水耕 直播法 중심의 連作法인 것을 감안하고, 위와 같이 農書輯要 의 水稻作法 가운데 休閑法 에 해당하는 것이 들어 있다고 파악할 수 있다면, 14세기 후반 무렵 水稻 耕作 法이 休閑法에서 連作法으로 변화 발달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벌어진 휴한법에서 연작법으로의 전환은 농업기술의 측면에 서 뿐만아니라 量田法의 전환도 불러일으킨 커다란 경제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사건이었다(김태영 1983). 고려 후기 旱田 耕作法이 휴한법과 연작법 가운데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 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때 먼저 農書輯要 의 경지항목의 서술 내용을 주목 할 수 있다. 農書輯要 는 農桑輯要 에서 春秋의 起耕法과 陳田이나 陳荒地 의 기경법을 인용하여 서술하고 있다(오인택 2006). 春耕과 秋耕의 경우 작 물의 재배방식, 특히 경지이용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된 작업이다. 農書輯要 에 따르면 春耕은 작은 고무래(推介)를 써서 흙덩이가 없게 평탄하게 만드는 (摩平) 것이었고, 秋耕은 기경한 뒤에 흙 색깔이 하얗게 되도록 건조하게 된 뒤에 춘경과 마찬가지로 작은 고무래로 摩平하는 것이었다16). 그리고 추경은 깊게 하고 춘경은 깊지 않게 하는 것도 권장되었다17). 農書輯要 의 기경 관련 서술에서 農桑輯要 에 보이는 기경법 내용과 고려 말 조선초의 기경법이 같은 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따라서 경작법도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農桑輯要 에 보이는 한전 관련 기경법 은 다름 아니라 旱田에 여러 작물을 1년 1작의 방식으로 경작하는 것이었다. 16) 農書輯要 耕地; 大抵 春耕乙良 起耕爲乎 追于 小推介木以 土塊無只爲 摩平爲齊 秋耕乙良 起耕 後 土色乾白爲去沙 同推介以 如前使內. 17) 農書輯要 耕地; 凡秋耕乙良 深厚起耕爲齊 春耕乙良 不深亦 使內乎矣.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09

12 農書輯要 이외의 문헌자료에서 고려말 조선초의 경작법 관련 내용을 찾 아 보면, 추경과 춘경은 곧 秋播와 春播와 동일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 양왕에게 備荒하는 방법을 올린 許應은 秋耕을 곧 농사 작업의 하나로 파악 하고 있었다18). 그리고 1398년 청주목사 金自粹가 올린 글을 보면 秋耕之種 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김자수는 大小麥의 세금을 미리 내는 것(先納)이 전례 이지만 금년의 경우 가뭄으로 거둔 것이 없으니 先納을 蠲免해 달라고 하면 서, 특히 굶주린 백성들이 秋耕하여 파종하는 것을 기대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하였다19). 위의 기록에서 처럼 추경하고 파종하는 것이 연계 되어 있는 경우라면, 秋耕하여 秋播하는 작물인 大小麥의 경우 1년 1작의 방 식, 즉 휴한법이 아닌 연작법의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農書輯要 에 綠肥法을 소개한 부분이 있는데 菉豆, 小豆, 胡麻 등을 5, 6월에 散種하였다가 무성하게 되면 反耕하는 것이었다20). 反耕은 녹두 등 이 자라나 줄기와 잎이 무성하게 되었을 때 갈아 엎어 田地 속에 묻어버리는 작업이다. 작물을 시비재료로 이용하는 綠肥를 실제 경지에서 수행하는 방식 이 反耕이었다. 계속해서 다음해 봄이 되면 雜穀을 耕種하는데, 이렇게 하면 所出이 무척 많아진다고 하였다. 農書輯要 의 녹비법은 원리적으로 보아 첫 해는 綠肥 작물의 재배, 다음해는 본래 경작하려고 했던 雜穀의 경종으로 이 어지는 것이었다. 이 연관관계에서 綠肥 작물을 反耕하지 않고 그대로 수확한 다면 1년 1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綠肥가 불필요한 단계, 즉 여타의 시비 재료를 활용하는 시비가 이루어진 단계라면 한전에서 잡곡을 1년 1작으로 재 배하는 상황임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실제 農書輯要 는 다양한 시비방식 을 소개하면서21), 특히 대소맥의 경우 시비를 많이 해주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18) 高麗史 卷46, 世家46 恭讓王 3年 9月 甲辰; 諫官 許應等上䟽曰...중략...伏惟殿下 哀此民生 及 時放遣 則秋耕拾栗 備荒之計 未爲晩也 願殿下留意焉 命下都堂 擬議施行. 19) 太祖實錄 卷14, 太祖 7年 閏5月 6日 辛巳 (1-124); 淸州牧使 金自粹 以年饑 陳書于監司 請免 今年麥稅 其書曰...중략...國家收租 每當六月之初 小麥告熟 便卽收之 以輸京倉 謂之先納 年例也 今年則自三月不雨 以至今月 雖間月一雨 入土未及數寸 尋卽開霽 亢陽之烈 日甚一日 以故大小麥 實 悉爲損耗 卽今飢民 嗷嗷待哺 尙不能充其腹 況望其秋耕之種乎. 20) 農書輯要 耕地; 凡矣 田地乙 品好爲只爲 使內向事段 第一菉豆 之次 小豆胡麻等乙用良 幷只 五 六月時 田地良中 散種茂盛爲而叱 反耕爲有如可 開春爲去等 雜穀耕種爲在如中 所出倍倍. 21) 農書輯要 耕地; 田地瘠薄庫乙良 須只入糞爲乎矣 糞收貯法段 秋收打作後 場上不用塵滓 及山野 雜草乙 春夏節始叱 數多刈取一處積上爲有如可 每日牛馬廏良中 三寸厚式以 入置每日朝間 牛馬 糞乙 取出積上爲乎矣 式爲使內如加 十二月始叱 正月至 向前牛馬糞乙 田地良中 入置. 110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13 있었다22). 이렇게 살펴볼 때 고려말 한전 경작법은 1년 1작의 방식으로 이루 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 남아 있는 문제는 한전의 연작법 이 언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수용되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인데 아직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고려시대 농법의 변화와 관련된 앞으로의 연구에서 보다 중요하게 확인해 나갈 부분이 토지이용방식의 변화, 휴한법과 연작법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보고된 고려시대 경작유구의 사례에 대한 검토과정만으 로 이러한 토지이용방식의 변화 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아직 곤란한 상황이다. 하지만 앞으로 고려시대 논밭유구에 대한 발굴조사가 좀더 많이 이루어진다 면 휴한법에서 연작법으로 변화발전하는 시기와 구체적인 기술적인 발전 내 용 등에 대한 설명이 세밀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고려시대 경 작유구에 관한 발굴보고서를 중심으로 논밭유구의 특색을 몇 가지 검토한다. 고려시대 경작유구의 발굴사례 가운데 진주 평거 3-1지구 유적에서 나온 밭유구를 주목할 수 있다(경남발전연구원 2011). 진주 평거 3-1지구 유적에 서 발굴된 고려시대의 밭은 2개층이 확인되는데, 자연제방대의 상면을 중심 으로 분포하고 있다. 여러 번에 걸쳐 밭으로 이용한 흔적이 보이는 한편 홍수 의 범람으로 유실과 교란이 반복되는 상태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두둑 간격 과 폭, 고랑의 폭 등이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과 주로 두둑에 식재 흔으로 보이는 소형 수혈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밭작물을 두둑을 중 심으로 경작하고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농업사연구에서 두둑을 활용하 는 경작법과 고랑을 활용하는 경작법의 차이를 작물의 성질에서 비롯하는 것 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위의 발굴사례가 작물에 관계 없이 두둑을 播種處, 耕 作處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다면 새로운 설명방식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밭유구가 출토된 나주 진포동 포 두유적을 검토할 수 있다. 1구역에서 찾은 Ⅰ, Ⅱ층의 밭 두둑과 고랑 구조를 보면 두둑 폭 40cm 내외, 고랑 폭 40cm 내외로 일정하게 확인되며, 두둑과 22) 農書輯要 大小麥; 兩麥段加于 新舊間㝡要穀食是乎等用良 須只 數多入糞.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11

14 고랑을 포함한 이랑에서 부정형의 小 穴 ( 株 跡 )들과 사람과 소의 발자국( 足 跡 ) 등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되었다(동북아지석묘연구소 2010). 진포동 포 두유적 발굴조사에서 足 跡 이 대량으로 확인된 것은 앞으로의 발굴조사 작업 에 결정적인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경작유구가 매몰되기 직전 에 수행하였던 농작업의 구체적인 실제모습을 경작유구 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때 起 耕, 播 種, 除 草, 收 穫 등으로 이어지는 농작업의 어 느 시기에 해당되는지 이 문제를 발굴조사 과정에서 깊이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기경하는 도중에 발생한 문제로 경작지가 매몰된 경우와 실제 작물이 자라는 도중에 일어난 경작지의 매몰은 분명하게 구별될 것으로 보이고 이를 확인하는 고고학적 발굴조사의 심화작업이 요구된다고 생각된다. 또한 앞으로 하천변 충적지에서 밭유구가 대량으로 발굴조사될 수 있을 것 으로 기대된다. 본문에서 검토한 고려시대 논밭 유구를 비롯하여 하천변 충적 지에서 다량의 경작유구가 발굴된 것은 한편으로 경작지가 하천변에 자리하 면서 반복되는 범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밭으로 되살리는 작업이 꾸준히 지속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4대강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발굴 조사가 주로 대하천변에서 이루어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검 토한 몇몇 사례 이외에 더욱 많은 고려시대 논밭유구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 면 고려시대 논농사와 밭농사 기술의 실체를 찾아내는 연구가 보다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2. 고려의 수리시설 활용 고려의 수리시설 관련 기록은 12세기부터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 무 렵 본격적인 新 田 開 墾 과 벼 재배 비중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수리시설의 중요 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수리시설 축조가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수 리시설은 洑, 堤 堰, 河 渠, 防 潮 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륙의 陳 田 이나 沿 海 지역의 개간, 島 嶼 지역의 개발이 활발하게 추진되면서 堤 堰, 防 潮 堤 를 축조하는 것이 필요하였다(위은숙 1998, 이정호 2002). 112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15 먼저 제언의 경우 새로운 자리를 잡아서 새롭게 축조한 경우가 있었고, 이 전에 축조하였던 자리에 증축하거나 보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있 었다. 고종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풍덕군의 重房堤는 남북수문을 열어, 길이 8리, 너비 3리에 해당되는 지역에 관개하는 시설이었다23). 그리고 1160 년(의종 14)에 靈光郡에 파견된 吳元卿은 유망민을 끌어들이고, 堤堰을 축조 하여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두 사례는 새로운 자 리에 제언을 축조한 것으로 보여진다24). 한편 두 가지 경우 이외에 예전에 축조한 제언을 잘 유지하면서 수리 혜택 을 누리는 경우도 있었다. 12세기 후반 1170년(의종 24)에 毅宗은 延福亭의 南川堤가 무너지자, 보수하라는 왕명을 내렸고, 그리하여 水門 4, 5개소를 만 들고 뚝 위에는 奇花 異木을 심었다25). 1195년(명종 25년) 낙동강 인근에 恭 儉池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옛 제방터를 따라 축조한 것이었다26). 또한 밀양 에 자리잡은 守山堤의 경우 고려말 金方慶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를 할 때 여기에 주둔하면서 이전에 만들어진 제방을 增築長堤 하려고 하였지 만 실패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27). 이때 공사 내역을 增築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당시 자연제방이나 또는 그 이전 어느 시기에 만든 제방이 존재하고 있 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제의 벽골제는 고려시대의 增修과정을 거쳐 조선 태종 대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 경우였다28). 李奎報가 지방관으로 나아갔을 때 지은 詩文에 언급한 古堰 은 오래전부터 활용하던 제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29). 23)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3, 豊德郡 古蹟; 每春秋 班主率府兵修築 開南北水門 漑田長八里廣三里. 24) 高麗墓誌銘集成 吳元卿; 防築提堰 田壤肥沃. 25) 高麗史 卷19卷, 世家19 毅宗 24년; 六月 庚戌朔 延福亭南川堤決 命復塞之 戊午詔曰 軍卒力竭 不能堤防 宜發丁坊里築之 開水門四五所創亭 堤上植以奇花異木. 26) 高麗史 卷57, 志11 地理2; 尙州牧...중략...又有大堤 名曰恭檢(明宗二十五年 司錄 崔正份 因舊 址而築之). 27) 密州舊誌, 守山堤 縣北二里許 俗稱國農所 周二十里 芰荷菱芡 彌望於其中 有竹島 又有鰲山 世 傳 羅王遊行離宮 泛舟遊賞之處也 後高麗金方慶 以元朝之命 征日本時 留陳此 增築長堤 以爲軍 需 闕沙壞 竟不就. 28)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3, 全羅道 金堤郡 古跡條; 碧骨堤...至高麗顯宗時修完舊制 及仁宗 二十一年癸亥 又增修 復而終至廢棄: 太宗實錄 卷16, 太宗 8年 9月 17日 壬戌 (1-451); 全羅 道兵馬都節制使姜思德 上便宜數條...一 金堤郡碧骨堤 堤下漫漫 廣逈沃饒 堤堰古基 堅實如山 乞 依舊修築 以革去寺社奴婢屯田 以補國用 從之. 29)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10, 古律詩, 二月復指扶寧郡馬上讀小畜詩用茶園詩韻記所見; 湖天春 霧暗 蠻店瘴雲溫 苔活添新暈 潮狂過舊㾗 入村逢燕社 望海問鼇番 古堰晨開閘 空城晝掩門 郡胥 迎導路 邑宰出開樽.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13

16 다음으로 河渠는 河川의 정비와 水路의 축조를 통해 전답에 물을 끌어들 이는 시설물이다. 그런데 水路만 조성하는 것으로 물을 조달할 수 없기 때문 에 河渠는 堤堰, 洑와 연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고려후기에 축조된 하 거의 경우도 제언이나 보와 연관된 것이었다. 1135년(인종 12년)에 知樹州 張文緯는 개간을 통해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많이 확보하였다. 또한 그는 東 郊의 저습지에 제방을 쌓고 수로를 만들어 홍수의 피해를 면하게 하였다30). 그리고 溟州의 수령 林民庇도 하천에서 이어진 渠를 준설하여 관개를 원활 하게 되도록 힘을 기울였다31). 또한 1150년(의종 4) 洪州에 부임한 李文著는 渠를 준설하여 물을 끌어 5, 6千頃에 달하는 방대한 토지에 灌漑하였다. 이상 과 같은 사례들은 하천의 준설, 수로의 축조 등을 통해서 수리관개의 혜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32). 그리고 防潮堤는 조수의 침범을 막는 수리시설로 沿海 지역의 개간에 필 수적인 것이었다. 몽고와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강화지역에서 만들어진 左右 屯田은 연해안 지역의 개간을 통해 설치된 것이었고, 이는 곧 방조제의 축조 였다. 구체적으로 梯浦, 瓦浦에 제방을 수축하여 이로써 획득한 간척지를 左 屯田으로 삼았고, 狸浦, 草浦의 제방을 수축하여 만든 간척지를 右屯田으로 삼은 것이었다33). 그리고 金方慶의 일화 가운데 葦島에 들어가 둑을 쌓은 것 도 방조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34). 둑을 쌓은 이유가 海潮를 근심하여 개간하 지 못하는 것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방조제 축조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사에서 눈여겨 볼 것은 김방경이 둑을 쌓고 파종하게 하였더니, 가을 에 크게 곡식이 익었다(方慶令築堰播種 民始苦之 及秋大熟) 라고 서술한 부 분이다. 김방경의 방조제 축조가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면 파종하자마자 수확 30) 高麗墓誌銘集成 張文緯; 州之東郊厥土泉濕 江水或決 農失歲功 公乃掘地二千五百許步 以等水 行 民不受其害矣. 31) 高麗史 卷99, 列傳12 林民庇; 毅宗朝 擢第 出守溟州 浚渠漑田. 32) 高麗墓誌銘集成 李文著; 渠引水 漑田五六千頃. 33) 高麗史 卷79, 志33 食貨2 農桑; 高宗 四十三年 二月制 諸道被兵凋殘 租賦耗少 其令州縣其人 耕閑地 收租補經費 又令文武三品以下 權務以上 出丁夫有差 防築梯浦瓦浦 爲左屯田 狸浦草浦 爲右屯田. 34) 高麗史 卷104, 列傳17 金方慶; 後爲西北面兵馬判官 蒙兵來攻諸城 入保葦島 島有十餘里平衍可 耕 患海潮不得墾 方慶令築堰播種 民始苦之 及秋大熟 人賴以活. 114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17 을 거둔다는 것은 소금기때문에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김방경은 이 전에 축조되어 있던 방조제를 보수하는 작업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점에서 방조제가 군데군데 들어서 있던 고려말 연해 지역의 경관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활용하던 제언 가운데 역사문헌자료에서 존재를 찾을 수 있고, 또한 발굴조사 등으로 현재 그 실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2개의 제언을 살펴본다. 양산 지역의 黃山堰과 상주의 恭儉池가 바로 그것이다. 황산언과 공검지는 그 규모나 중요성 때문에 역사문헌자료에서 분명하게 실체를 파악 할 수 있다. 하지만 농업생산 현장에서 농민들이 활용하던 규모가 작은 제언 과 천방의 경우는 좀더 면밀한 문헌자료 조사와 더불어 발굴조사 등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양산 황산언의 경우 正祖實錄 의 기사에서 위치와 성격에 대해서 상당한 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 1792년의 正祖實錄 기사에 따르면 黃山堰은 黃山 驛의 좌우에 자리한 長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당시 梁山 군수 成種仁이 上 疏하여 큰 비로 말미암아 郡內의 3개 大堤가 무너진 정황을 보고하고 이를 다 시 복구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성종인에 따르면 읍내에 있는 여러 제언들이 무너졌다가 다시 복구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황산언 은 郵館 소재지의 좌우에 자리잡고 있던 堤堰이고, 제언 내부의 토지는 모두 馬位田이었다35). 즉 황산언은 황산역을 보호하는 기능보다 마위전 즉 田土를 확보하기 위해 강물의 침범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이었다. 황산언의 위치와 성격에 대한 正祖實錄 기사의 내용은 嶺南邑誌 에 실 린 黃山驛圖 (1832년)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0 : 20). 아래 黃山驛圖 를 보면 서쪽과 동쪽에 西大堤와 東大堤가 분명 하게 표시되어 있고, 또한 堤內의 토지에 대해 馬位畓이라 기재되어 있다(그 림 1). 이와 같이 양산 황산역 좌우측에 大堤가 축조되어 제방으로 둘러싸인 안쪽 부분이 田畓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35) 正祖實錄 卷35, 正祖 16年 9月 15日 辛亥 (46-335); 梁山郡守 成種仁 上疏曰...중략...本郡有 三大堰 其一 卽邑坪二十里堰也 其一 卽郡南巨島三十里東西堰也 其一 卽黃山驛左右長堰也...중 략...所謂黃山堰 卽郵館所在之地 堰內田土 皆是馬位 而全坪所賴 亦自不少 今夏大水 家舍漂沒 不知其幾 堰下水旱田 瀦而爲澤 驛民又何以保存乎.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15

18 [그림 1] 嶺南邑誌 에 실린 黃山驛圖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0) 2010년 이후 양산 물금읍 증산리 유물산포지에 대한 문화유적 발굴조사에 서 황산언으로 비정할 수 있는 土石混築 堤堰이 조사되었다(동아세아문화재 연구원 2010a). 보고에 따르면 제언 정지층에서 12세기 초로 편년 가능한 청 자해무리굽 완편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에 따라 황산언 이라 이름 붙여진 제언의 축조시기를 고려시대인 12세기초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앞선 조사 보고에서 조선시대 전기에 처음 축조한 것으로 보고되었던 것에서 시대가 더 올라가 최소한 12세기 초반 고려시대까지 비정할 수 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 다. 이와같이 낙동강변의 725m 구간에 걸쳐 폭 5m, 높이 2m가량의 제방을 확인하고 있다. 조사자들은 黃山驛이 驛站시설로 조선시대는 물론 고려시대 에도 존재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조사한 제방을 교통 통신 군 사의 중심지인 역참을 수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治水사업의 일환이었다고 짐작하였다. 이와 같이 발굴조사자는 황산언을 황산역 주변에 대한 治水 사업 이 불가피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황산언의 성격과 관련해서 위의 正祖實錄 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황산언 116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19 은 馬位畓 등 田畓의 보호를 위해 만든 제방이었음이 분명할 것으로 생각된 다. 이와 관련해서 14세기 초반 양산 지역의 습지를 개간하는 데 큰 공로를 세 운 元尹 李某의 행적을 참고할 수 있다. 崔瀣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36), 그는 토지를 살펴 도랑을 깊게 파서 개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荒田을 개 간하는 데 여러 가지 보상책과 더불어 대쪽(簡)을 이용하는 벌칙을 수행하여 개간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돌아가게 되어 그 성과가 제 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양산지역은 저습지, 저지를 개간해야 경지를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이었고, 또한 하루 저녁의 비가 내리는 정도로도 하천이 넘쳐서 數日 동안 건너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37). 이렇게 볼 때 양산의 황산역 주변에 축조된 황산언은 강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막아 습지를 경지로 개간할 수 있게 해주는 제방, 방수제였다고 생각된다. 이 점은 黃山驛圖 (1832년)에 보이는 東大堤와 西大堤의 존재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또 하나의 수리시설로 尙州 恭儉池를 꼽을 수 있다. 공검지의 경우 2009년 8월부터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발굴조사 결과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발굴조사 결과와 문헌조사 결과를 비교 검토하 는 과정에서 보다 분명한 수리시설의 연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상주 공검지는 高麗史 기록에 처음 보이는데, (상주에) 큰 제방이 있는 데 이름을 恭儉이라 한다 고 서술된 부분이다. 위 구절에 대한 細註로 1195 년(明宗 25년)에 司錄 崔正份이 옛 터를 바탕으로 축조하였다 는 설명이 붙 어 있다38). 이에 따르면 1195년 이전에 공검지를 저수지로 활용하고 있었고, 이때 補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공검지는 상주지역의 수리관개에 큰 영향 36) 崔瀣, 拙藁千百 卷1, 送安梁州序; 及李元尹之貶守于此也 公知其弊 先相土田 深其溝洫 而使人 必治荒田幾畝 仍出力轉償 又以故俗不閑於農 皆晚出早罷 隨其地分差人勸課 每人十爲保 每保作 一簡 先至者受之 授次至者 次次相授 㝡後者無所授 帶簡而作 至罷 出帶簡者罰之以後至之罪 方 其時也 日未辨色 公已在田間 如是十日 人爭爲之先 梁之荒田 闢之幾盡 而簡亦不用之矣 未及半 年而公召還 此時公惠未甚著 而人安舊習 向之耕者便不種 而種者亦不樹也. 37) 崔瀣, 拙藁千百 卷1, 送安梁州序; 欲宿梁 時方盛暑 天且雨 路人言若雨一夕 梁河漲 數日不可濟. 38) 高麗史 卷57, 志11 地理2; 尙州牧...중략...又有大堤 名曰恭檢(明宗二十五年 司錄 崔正份 因舊 址而築之).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17

20 을 끼쳤다. 世宗實錄地理志 에 따르면 몽리 면적이 260結에 달할 정도였다39).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상주 공검지의 경우 때에 따라 많은 補築, 決潰, 改築 등이 이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간접적인 정황을 알려주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1799년(정조 22년) 正祖에게 應旨農書 를 올린 大邱 幼學 柳東範이 영남지역에 대한 자신의 견문을 소개하는 부분에 상주 공검지에 대 해 설명하였다. 유동범은 상주 공검지에 예로부터 아주 가물어도 마르는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몇 달만 가물어도 물이 말라버린다고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렇게 공검지가 마르는 이유는 다만 제 방만 쌓고 저수지 내부를 浚渫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반드시 내부를 준설하 고 그 준설토로 제방을 增築하는 것이 필 요하다고 지적하였다40). 유동범의 언급에 서 상주 공검지가 때에 따라 제방의 증축 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필요에 따른 저수지 제방의 증축은 다른 제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2009년 이후 진행된 상주 공검지 발 굴조사 결과 공검지 1차제방이 고려시 대 이전부터 현재까지 수차례 수축 또는 보축되었음을 확인하였다(그림 2). 제방 의 기반토는 뻘층이며, 점토와 뻘을 반복 적으로 수평 또는 제방 외면으로 경사지 [그림 2] 상주 공검지 제방 동쪽 단면 양상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0) 게 조밀히 판축한 것으로 조사되었다(경 39) 世宗實錄 地理志 慶尙道 尙州牧 (5-645); 大堤一 恭儉池 在州北 咸昌界中(明宗二十五年乙卯 司錄崔正份 因舊址而築之 長八百六十步 廣八百步 灌漑二百六十結). 40) 承政院日記 1802책, 正祖 22년 12월 16일 乙巳 (95-542나) 大邱 幼學 柳東範 上疏; 柳東範疏 曰...중략...恭儉池 自古極無之歲 未見其涸 今則旱未數月 水已告竭 此無他 只築其外 不濬其內也 濬之當如何 一堤仰漑之戶 力或不給 則官調他堤之民 合力共濬 此堤旣濬 他堤又濬 歲必一濬 以 深爲準 所濬之土 增築其防 則堤安得不深 水安得不多 旱安得爲災乎 所謂深濬堤澤者此也. 118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21 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0). 이와 같이 1차제방에 10개의 토층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유동범이 언급한 바와 같이 공검지 제방의 경우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 대에 걸쳐 많은 增 築, 補 築, 改 築 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Ⅲ. 조선 전기의 농법과 수리시설 1. 조선 전기 水 田 農 法 과 旱 田 農 法 조선 전기의 벼 재배법은 3가지 耕 種 法 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김용섭 1991). 경종법이란 농사의 시작에 해당하는 起 耕 부터 播 種 과 파종 직후의 작 업까지 포함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수전의 전토 상태에 따라서 起 耕 하는 방식 이 달라지고, 기경한 이후의 熟 治, 摩 平 의 형태도 달라지게 되고, 파종 직전의 상태로 정리된 전토의 특성에 따라서 파종법도 또한 변하였다. 따라서 수전의 경종법은 벼를 경작하는 여러 가지 경작방식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독자적인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농업기술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염정섭 2002). 農 事 直 說 에 기록된 경종법은 水 耕 과 乾 耕, 그리고 挿 種 ( 移 秧 )이었다. 水 耕 과 乾 耕 은 곧 수경직파와 건경직파를 가리킨다. 15세기 수전농법에서 일반 적으로 채택하고 있던 경종법은 바로 수경직파법이었다. 수경직파법은 早 稻 와 晩 稻 양자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벼 경종법 가운데 오늘날 모 내기법, 이앙법으로 알려져 있는 삽종법도 農 事 直 說 에 잘 소개되어 있었다. 農 事 直 說 의 편찬자는 이앙법을 설명하는 항목 맨끝 부분에 제초에는 편하 지만 큰 가뭄이 들면 실수하게 되어 농가의 위험한 일이라고 단서를 붙여 놓 았다. 태종대에는 이앙법에 대한 禁 令 까지 내려져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 인지 15세기 무렵에 이앙법은 강원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채택되는 정도 에 불과하였다. 수경직파법과 이앙법 이외에 乾 耕 法, 즉 건경직파법도 활용되 었다. 하지만 때이른 가뭄으로 말미암아 水 耕 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移 秧 하 기 위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 때 보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이앙법은 16세기를 거치면서 경상도 전역과 전라도 충청도의 일부 선진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 정 섭 119

22 지역까지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초반 경상도의 상당 지역과 영동 지역 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에서는 이앙법을 채택하고 있었다41). 이와 같이 이앙법 이 경상도 강원도 지역으로 확산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이를 적 극적으로 제한하거나 금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6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게 되면 이앙법은 경상도 지역 여러 곳으로 보급되어 나갔다. 또한 전라 도 충청도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15세기에 밭에서 잡곡을 재배하는 방법은 農事直說 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旱田을 起耕할 때 경지의 상황에 맞추어 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봄 작물, 가을작물에 연결되는 기경작업에 얕고 깊은 차별을 두어서 갈기의 깊이 를 각각 규정한 것은 봄철과 가을철의 토양의 조건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었다 (민성기 1990). 農事直說 에 보이는 밭작물 사이의 연결관계를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에서 兩麥의 後作으로 占勿谷粟, 姜稷, 大豆, 小豆, 胡麻 등을 찾 아볼 수 있다. 점물곡속과 강직은 둘 다 晩種하여도 早熟하는 품종이었다. 양 맥근의 후작으로 일반적인 속성을 지닌 粟과 稷을 경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두와 소두를 麥根田에 경작하는 경우 대두와 소두의 晩種에 해당하 는 품종을 재배하는 것만 가능하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따라서 早種하는 대두와 소두는 도저히 맥근전에 키울 수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胡麻는 애초에 荒地에 재배하는 것이 적당한 작물이었다. 그런데 비옥한 밭일 경우라 야만 4월에 맥근의 후작으로 호마를 경작할 수 있었다. 호마를 맥근전에 경작 하는 것은 상당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볼 때 農事直說 의 경우 兩麥을 중심으로 설정된 작물 사이의 연계관계 를 1년 2작이나 2년 3작의 경작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15세기 조선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채택하던 한전작물 경작방식 은 각 작물을 1년 1작식으로 경작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1) 成宗實錄 卷6, 成宗 元年 6月 15日 壬戌 (8 510); 道內(慶尙道)水田 多未播種 又未得移秧. 中宗實錄 卷65, 中宗 24年 5月 25日 己未 (17 123); 順孫(領事 張順孫)曰 慶尙左道則 苗種 之地 因旱不移苗云 120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23 [표 1] 農事直說 에 보이는 한전작물의 前作과 後作의 연결 관계 前作 後作 비 고 근거조목 麥根 占勿谷粟 晩種하여도 早熟한다. 種黍粟 兩麥底 姜稷 晩種하여도 早熟한다. 六月 上旬에 파종할 수 있다. 種稷 兩麥根 大豆小豆 晩種은 鄕名을 根耕이라하고, 早種은 鄕名을 春耕이라 한다. 種大豆小豆 黍豆粟木麥根 大小麥 풀을 펼치고 불로 태운다. 種大小麥 麥根 大小麥 (1年 1作이다) 種大小麥 胡麻 기름진 땅이면 四月 上旬에 糞灰와 섞어서 드물게 파종한다. 種胡麻 麥根 현재의 발굴조사에서 지표조사나 시굴조사만으로 조선시대 논밭 경작유구 를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특정하게 나누어 살피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 다. 또한 논밭유구 등 경작유구를 지표조사만으로 찾아낸다는 것도 아주 곤란 한 일로 생각된다42). 여기에서는 조선전기로 비정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경작유구 사례를 살펴보면서 경작유구를 통한 농업기술 검토의 가능성을 따 져본다. 먼저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된 발굴조사 가운데 여주2지구(삼합지구) 의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경작유구가 발굴되었다(경기 문화재연구원 2010a). 발굴보고에 따르면 1구역에 상층 2개군, 하층 2개군 총 4개군의 경작유구가 확인되었고, 2구역에서 1개의 경작유구가 확인되었 다. 또한 3구역에서 상층, 하층 2개의 경작유구가 나왔고, 1-1구역과 3-1구역 에서 각각 1개의 경작유구가 나왔다. 보고자들은 경작유구를 조선시대로 비 정하지 않았지만, 1구역 고랑 내부에 조선시대 자기, 도기편 등이 출토되고 있 어 조선시대 경작유구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여주 2지구(가야지구)에서도 조선시대 경작유구가 출토되었는 데, 상층과 하층으로 확인되었다. 상층과 하층이 조선후기, 조선전기로 비정할 수 있는지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상층 경작유구는 32열의 고랑이 확인되었 는데, 고랑 내부에서 조선시대 자기, 도기편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하층 경작 42) 조선 전기의 경작유구를 조선후기의 그것과 분명하게 나누는 것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발굴 조사 실시기준에서 조선후기를 제외하면 이후 발굴조사는 주로 고대 이전의 경작유구만 다루게 될 것 이라는 우려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21

24 유구의 경우 조사지역 북서측에서는 최소 3~4번에 걸쳐 동시기에 조성되고 다른 시점에서 경작된 것으로 보이는 고랑 열이 서로 교차하여 확인되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 2010b). 이 점은 밭의 구조와 조성이 작물이나, 경작시기, 경작자의 차이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이상 여주 지역의 발굴보고 2건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경작유구는 밭으로 활용된 경작지이다. 아직 필자는 이 지역 고랑과 두둑의 크기가 보여주는 상 관관계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먼저 밭으로 조성된 지역이 지속적으 로 경작에 활용되고 있었다는 점, 또한 중첩되는 시기에 밭유구를 경작지로 조성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다음으로 2008년 이후에 시행된 동부산관광단지 조성사업부지내 문화유 적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습지층과 조선시대의 수전이 발굴된 것을 살펴본다. [그림 3]에서 보듯 고려시대 습지층과 연결되 어 있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수전유구로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사자 는 이질토의 혼입이 빈번한 점, 논둑으로 추정되는 계단상의 단차가 확인되는 점, 산화철의 분리 및 집적이 진행된 점 등을 지적하였고, 조선시대 자기 저부 편이 출토된 점도 기록하였다(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09). 동부산관광단지 조성사업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수 전이 동서방향으로 7면이 조사되었는데, 너비는 2.5m 3.5m 정도이고 각각 2cm의 단차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계단상의 단차가 있다는 것에서 물을 담아 두는 시기가 상당 기간에 달하는 水 田 의 존재조건 가운데 하나가 논 표면의 水 平 의 유지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고 려시대 습지층 위에 자리한 조선시대 수전층이 계단상의 단차를 보이는 점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앞으로 확인작업을 거쳐야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추정해 본다면, 고려시대 의 습지층 위에 새로운 경작지를 조성하는 개간작업이 고려말 조선초에 이루 어지면서 이 지역이 조선전기에 수전층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림 3]에서 주목할 부분은 습지층 자체를 경작지의 토층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습지층 위에 새로운 경작지로 활용할 토층이 두텁게 형성되고 있다는 122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25 점이다. 즉 저지, 저습지의 개 간이 새로운 토양의 添入, 客土 등의 작업을 거쳐야 가능하다 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저지, 저습지 개간이 防水, 排水 작업 뿐만 아니라 토양 개선, 토양 첨 입 등을 포함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알려준다고 생각된다. [그림 3] 18-1지구 시굴 3트렌치 토층상태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09)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전기로 비정해볼 수 있는 경작유구의 검토를 통해 잦은 경작방식의 변 동을 고랑열의 교차에서 찾아볼 수 있기도 하고, 수전의 존재조건의 하나가 수평유지라는 점을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었다. 문제는 경작유구의 시기 비 정에서 고려시대의 층위와 連接해 있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로 비정해 볼 수 도 있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전기, 조선후기의 경작층이 항상 연속적으로 등장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경작지의 상태와 주변환경의 차이에 따라 어 느 한 시기가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을 점유하는 경우도 생기고, 때에 따라서 는 어느 한 시기를 건너뛰는 경우도 상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발굴조사에서 고려, 조선전기, 조선후기를 단순하게 시간순서에 따라 토층을 비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농업환경, 사회경제적 배경 등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말할 필 요도 없이 조선후기의 경작유구라 하여 발굴조사에서 탈락시키는 일은 절대 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2. 조선 전기의 수리시설 조선 전기의 水利 정책은 堤堰, 川防 등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를 중심으 로 펼쳐졌다. 여러 가지 수리시설 가운데 특히 제언과 천방에 관심이 집중되 고 있었다. 특히 태종대에 권농사업의 일환으로 수리정책이 활발하게 시행되 었다(이광린 1961).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水田이 크게 증대하면서 수리 시설의 필요성이 커졌다. 특히 저지, 저습지와 해안의 陳荒田이 개간되면서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23

26 앞서 산곡간에도 많이 존재하였던 수전의 위치는 평지에 주로 자리잡게 되었 다(이태진 1989). 수리시설로 활용된 것은 주로 堤堰이었다. 旱害와 水害를 대비하는 것이 주요한 용도였다. 제언이 허물어지게 되면 제언 아래에 자리한 전지가 모두 함몰되어 큰 손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전라도 고부에 위치한 訥堤가 무너졌을 때 제언 아래에 있던 전지 600여결이 침수되기도 하였다43). 제언을 다시 수축 하는 작업은 농민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일이었고, 지배층에게 있어서도 긴요 한 일이었다. 농민의 力役을 동원하여 농한기인 겨울철을 이용하여 제언 축조 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태조대인 1395년 도평의사사에서 제언 관련 규정을 만들었다44). 이에 따 르면 제언의 구성 요소에서 특히 水口를 강조하고 있었다. 돌로 만든 石溝를 설치하는데, 石溝 안쪽에는 나무로 만든 水桶을 설치하고, 바깥쪽에는 나무로 만든 木槽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언 구조는 제언에 가두어 둔 물을 잘 활용하는 데 적합한 것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제언 수축에서 水口와 같은 구조물과 더불어 중요한 요소는 오래도록 제언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 다는 점과 제언으로 혜택을 볼 수 있는 몽리면적이 넓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팔도 군현에 산재해 있는 제언의 관리는 군현의 牧民을 맡아서 수행하고 있는 守令이 담당하였다. 양기석(2009)의 글에서 인용한 [그림 4]는 이러한 조선 전기 제언의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제언 구조는 제언에 가두어둔 물을 잘 활용하는 데 적합한 것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제언을 수축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내는 일도 중요한 일이었다45). 각도와 43) 世宗實錄 卷9, 世宗 2年 8月 21日 丁巳 (2-392); 全羅道觀察使報 大雨 古阜郡訥堤決 堤下田 六百餘結沈水. 44) 太祖實錄 卷8, 太祖 4年 7月 30日 辛酉 (1-82); 使司據前郞將鄭芬陳言以聞 其略曰 勸農之要 在築堤堰 守令皆帶勸農之職 而不急乎此 堤堰者 所以備旱潦也 乞下都觀察使 令州府郡縣 擇其鄕 閑良品官廉幹者 定爲勸農官 當秋冬交 修築堤堰 以瀦雪水 務要堅緻 無或漏洩 又於水口 置石溝 築其上 與堤等 溝內面立木桶 桶之內面 作三五穴 隨水之高下而通塞之 溝之外面 橫置木槽 虛其 兩端 其下左右開渠引水 別於堤堰一邊 低築若干尺 比桶之上穴差高 排之以石 以備霖潦之溢 置守 者若干戶 勸農官監封其穴 及春將耕 則佃者告于勸農官 以次開穴分水 使灌漑有節 無致費用 勸農 官之能否 守令之勤怠 都觀察使親自點檢 褒貶申聞 以憑黜陟. 45) 太宗實錄 卷27, 太宗 14年 6月 9日 庚戌 (2-21); 戶曹啓可興水利事宜 啓曰 各道內可興水利 以作良田之地及古堤堰修築可耕處 備細訪問 開具結卜數以聞事 移文各道何如 從之. 124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27 군현에 명령을 내려 제언을 만들어 활용 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내어 보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조선 전기 수리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특히 몇 명의 관료들이 수리 관련 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한 것으 로 보인다. 태종대에 활약한 禹希烈과 李慇은 堤堰의 일을 전담하면서 많은 성 과를 거두었다46). 하지만 팔도 군현에 산 [그림 4] 堤堰 구조도-단면 평면 (양기석 2009) 재해 있는 제언의 관리는 결국 수령에게 부과된 책무였다. 태종대에 만들어진 수령 褒貶 규정을 보면 農桑을 권장하는 것과 더불어 제언 수축 여부도, 수령 군현 통치 성적을 매기는 주요한 기준으 로 포함시키고 있었다47). 16세기 중종대에 이르게 되면 삼남지방의 堤堰 숫자가 파악되고 있었다. 1523년(중종 18년)에 堤堰司 郎官이 下三道의 제언수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 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경상도의 제언수가 800여 처, 전라도가 900여 처, 충 청도가 500여 처로 한사람이 전부 맡아서 조사할 수 없다는 보고를 먼저 올렸다48). 조선 전기에 제언과 더불어 川防이 주요한 수리시설이었다. 천방은 하천에 흐르는 물을 관개수로 활용하는 수리시설이었다(이태진 1986). 천방은 洑라 고도 불리는 수리시설로 소규모 공사로 축조할 수 있었다. 산골짜기를 흐르는 계곡의 하천물도 川防을 통해 관개수로 활용할 수 있었다49). 천방 축조에 대 46) 世宗實錄 卷125, 世宗 31년 7월 29日 丁未 (5-140); 領議政黃喜 右贊成金宗瑞等啓 川防堤堰 王政之急務 肆我太宗朝 以李慇 禹希烈掌之. 47) 太宗實錄 卷12, 太宗 6年 12月 20日 乙巳 (1-381); 司憲府...又啓 守令褒貶 汎稱德行等第 不論 實效有無 以故守令務求虛譽 行媚於使臣過客 取悅於品官鄕吏 未有力行實效者 今後以狀後七事 考察 分爲等第實效事目 各於名下 具錄申聞 以憑黜陟...一 勸課農桑 境內堤堰幾所內 修築幾所. 48) 中宗實錄 卷46, 中宗 18年 正月 8日 庚戌 (16-183); 堤堰司郞官啓曰 堤堰 每年例遣郞官摘奸 而近以年險 久廢不爲耳 辛巳年 令災傷敬差官兼審 則多有盜耕處 若因循不改正經界 則無儲水之 地 而民不得其利矣 不得已如元案尺量之數 退築立標 儲水廣 而民利大矣 故欲遣郞官于三道(忠 淸全羅慶尙道也) 使之畢看審於耕農前矣 但慶尙全羅兩道 則堤堰甚多 慶尙則八百 全羅則九百餘 處 皆非一員所能踏驗 故欲分遣二員 令速畢事也 忠淸則只五百餘處 故欲遣一員耳. 49) 文宗實錄 卷4, 文宗 卽位年 10月 10日 庚辰 (6-302); 至若一面山谷一面平野 則山谷之地 猶可 川防引水 而備旱嘆 平野之民 非雨澤 固無備旱之策 雖曰一邑倻 而禾穀之損實 從以賴殊今也.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25

28 한 논의는 특히 文宗대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문종이 1450년에 경기 충 청 강원 황해 경상 전라 함길도 관찰사에게 제언 수축에 대해서 내린 諭示를 보면, 제언뿐만 아니라 천방을 강조하면서 水利에 활용하지 못하고 버 려지는 이로움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었다50). 국왕의 관심 속 에 천방은 세조대에 이르러 제언 축조와 더불어 수리사업의 양대 중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양상은 성종 대에 이르러 더욱더 가속화되었다. 천방은 15세기 후반부터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내륙의 소규모 수리시설로 서 활발히 개발되고 있었다. 천방 개발은 14세기 후반부터 시도되기 시작하여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본격적 발전을 보게 되었다. 천방은 지형에 따라 하천 을 막아 물을 끌어 올려서 하천보다 높은 지대에 물을 대거나 범람하기 쉬운 지역에 방축을 쌓고 구멍을 뚫어서 저습지를 농토로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었 다. 이 방법으로 새 농토를 확보해 간 것은 대부분 노비노동력을 다소 보유하 고 있던 留鄕品官 등 재지지배층이었다(이태진 1986a). 15세기 관찬 地理誌 에 堤堰만 기재되어 있는 반면에 17세기초에 편찬된 地方誌에서는 천방이 기 재되기 시작하였다(이태진 1986b). 조선 전기의 수리시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碧骨堤와 守山堤를 꼽을 수 있다. 벽골제와 수산제는 발굴조사가 일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문헌자료 와 더불어 발굴조사를 같이 살펴볼 수 있는 수리시설이다. 벽골제는 현재 그 수리시설의 성격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논란 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옛 모습의 일부가 상당부분 남아 있어 고고학 적 발굴조사의 훌륭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벽골제의 성격은 조만간 밝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벽골제가 방조제일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2007년 대하소설 아리랑 에 대한 이영훈의 비판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이전시기에도 水理學的인 연 구와 토목공학적인 고찰에서 방조제설이 나타나고 있었다. 수리학적인 접근 50) 文宗實錄 卷4, 文宗 卽位年 10月 3日 癸酉 (6-293); 諭京畿忠淸江原黃海慶尙全羅咸吉道觀察 使曰 堤堰修築之法 具載元續六典 且今守令褒貶時 川防堤堰 幷在七事之中 其立法節目 至爲詳密 然堤堰 則水源淺露 功役爲多 川防則水有源流 功小利多 故川防最好 而堤堰次之 仄聞 諸邑可爲 川防之處頗多 而水有遺利 卿巡行廣問以啓. 126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29 을 시도한 박성현 등은 벽골제를 시축할 당시부터 약 3m 이하의 낮은 둑으로 축조하여 조수의 침입을 막으려는 방조제였다고 보았다(박성현 등 2003). 방 조제인 벽골제 설치 이후에 제방 바깥쪽에 더욱 풍부한 간석지가 형성되는 데 일조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벽골제를 토목공학적인 입장에서 고찰한 김환기는 특히 세종대 기사 를 재해석하여 방조제설을 제기하였다(김환기 2008). 김환기는 세종대 기사 에서 비가 내리면 제당문을 열어 물을 빼고, 날이 가물면 이를 막는다는 설명 에 주목하면서, 농업용저수지라면 홍수기에 물을 가두고, 농번기에 물을 빼쓰 는 것이 일반적인데, 세종대 기사는 정반대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벽골제 가 저수지 제방이 아니라 조수를 막는 방수제, 방조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데 그가 일반적인 것이라며 제시한 홍수기에 물을 가두고, 농번기에 물을 빼 쓰는 것은 현재 한국의 농업용수용 댐의 기능임에는 분명하지만, 조선시대의 제언의 기능이 이와 동일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 된다. 조선의 제언은 현재의 댐에 비해 훨씬 소규모이고 따라서 홍수기에 물 을 가두려 하면 제방이 무너질 위험이 높아지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되 고, 농사일에 물을 쓰기 위해서는 그리고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수문을 막아 물을 가두워두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을 것이다51). 벽골제의 성격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검토해 본다. 태종이 세종 에게 국왕자리를 물려준 직후인 1418년 9월 우희열은 김제 벽골제의 石柱만 좌우에 나란히 서 있을 뿐이고, 제언의 뚝이 무너져 있다고 지적하였다52). 그 에 따르면 벽골제는 좌우에 서 있는 石柱 사이에 木板으로 막아 貯水하는 구 조의 제언이었다. 따라서 벽골제 제방 안쪽, 즉 堤內 지역은 물이 저수되어 있 는 상태의 저수지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420년에 큰 풍우가 있어 벽골제 51) 世宗實錄 卷11卷, 世宗 3年 1月 16日 己卯 (2-421); 金堤郡人 朴礎 時爲全羅道水軍都節制使 上 書于上王曰...중략...若令雨則開渠以泄之 旱則防塞以貯之 得其通塞之方 又何慮乎汎濫激岸 乾燥防 農之患哉...중략...堤之形 上窄如周道 下廣如丘陵 水不溢於上 則必無潰岸之害 何汲汲乎補築哉. 52) 世宗實錄 卷1, 世宗 卽位年 9月 27日 甲戌 (2-271); 判淸州牧事 禹希烈啓曰...臣嘗觀金堤碧骨 堤 用十六尺石柱 左右對立 以木板遮障貯水 以故 雖年久 堤岸盡頹 而石柱屹然如舊 古人爲民深 遠之意 可見也...今薦可監築者數十人 乞今年農隙 發丁夫役之 毋過二十日 每於一處 以臣所薦人 員 分督監築 臣巡行考察 上令戶曹酌其所上條件行移.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27

30 가 무너지는 바람에 제방 아래의 田 2,098결이 손실을 입었다는 기사53)를 다 시 살펴보자. 이 기사에서 堤下의 田이 손실을 본다고 했는데, 이 경우 堤內와 堤下가 서로 대비되는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2,098결에 달하는 토 지를 방조제 안쪽에 개척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벽골제와 관련된 문헌자료에 대한 해석이 서로 상이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 은 앞으로 벽골제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가 나오게 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앞서 1975년에 벽골제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된 적 이 있었다. 제방구축토가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을 밝히고 제방 축조 공사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보았다(윤무병 1976). 그런데 水門 石 柱와 연결된 取水口 구조를 밝히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따 라서 앞으로 이루어질 벽골제 발굴조사 결과에 거는 기대가 높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조선 전기의 수리시설 가운데 밀양 守山堤는 15세기 중반에 새 로 만들어지다시피 하였다(염정섭 2006). 1463년에 이전의 제방을 다시 쌓 아 國農所, 즉 國屯田을 만들었다. 그리고 國農所가 해마다 江水의 침범을 받 아 수확이 적었는데, 1467년(丁亥年, 세조 13년)에 曺錫文이 그 제방을 증축 하였다. 이때 內外에 閘 즉 水門을 설치하였고, 제방에 山竹과 楊柳를 심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주변 軍丁을 동원하여 제방 증축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54). 세조대에 증축된 수산제는 물을 貯水하는 용도의 제방이 아니라 水沈, 沈 沒과 같은 물에 잠기는 피해를 막기 위한 防水 용도의 제방이었다. 수산제 國 屯田의 地勢가 낮아서 비가 많이 내리면 沈沒한다는 지적55), 수산제 국둔전의 禾穀이 물에 잠겨 손상을 입어 農軍들에게 곡식을 거두게 하였다는 기사 등을 53) 世宗實錄 卷9, 世宗 2年 9月 13日 戊寅 (2-398); 全羅道觀察使啓 大風雨 金堤郡碧骨堤決 損堤 下田二千九十八結. 54) 密州舊誌, 守山堤 縣北二里許 俗稱國農所 周二十里 芰荷菱芡 彌望於其中 有竹島 又有鰲山 世 傳 羅王遊行離宮 泛舟遊賞之處也 後高麗金方慶 以元朝之命 征日本時 留陳此 增築長堤 以爲軍 需 闕沙壞 竟不就 天順七年癸未(1463년) 世祖九年 戶曹獻議 決(築의 誤記)其堤爲國農所 歲爲 江水所沈 其收頗小 丁亥(1467년)春 二相曺錫文 奉旨巡視 增築其堤 仍開閘內外 種山竹及楊柳 副使卽 刑曹參判鄭蘭宗 從事官 卽訓練僉正 權健 戶曹正郞金順命也 本府守令 及 附近八邑守令 等 各領其邑軍丁來築 都事成俶 與金順命 亦監其役 十日而畢 公輩仍修稧 名之曰 守山會. 55) 成宗實錄 卷232, 成宗 20年 9月 21日 丙子 (11-519); 密陽 守山堤 自丁未年始屬國屯田 其地 勢卑下 若有雨水 輒沈沒. 128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31 찾아볼 수 있다56). 이런 점에서 볼 때 수산제는 낙동강의 河水가 넘쳐흐르는 것을 방비하는 防水 기능에 충실한 堤堰이었다. 그런데 수산제 수문에 대한 발굴조사에 따르면 조사지역의 水門은 낙동강 물을 끌어들이는 入水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서편마을의 양배수장은 낙동강 이 범람하였을 때 넘쳐온 물을 효과적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이동주 2006). 앞서 문헌 자료에서 설명한 수산제의 기능, 역 할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해석이 엇갈리는 부분은 사실 수산제에 대 한 발굴조사가 水門址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수산 제의 제방과 다른 수문의 흔적을 확인하고, 수산제뿐만 아니라 國農所가 설치 되었던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 럴 경우 수리시설로서의 수산제뿐만 아니라 국둔전의 구조와 운영특징을 설 명하는 데에도 커다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Ⅳ. 조선 후기의 농법과 수리시설 1. 조선 후기 農法의 발달과 경작유구 조선 후기 농법 발달의 대표적인 것은 水田 移秧法의 보급 확산이었다. 16 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이앙법은 三南으로 특히 전라도 충청도지역으로 확 산되었다. 앞선 시기부터 보급되었던 이앙법은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풍속이 될 만한 벼 경종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金堉( )이 남긴 글 가운데 三南의 民은 移秧을 業으로 삼는데, 苗가 이미 말랐다. 지금 비록 비 가 내렸지만 충분히 미치지 못하였다 라는 것이 바로 이앙법이 三南의 거의 모든 지역에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고 생각된다57). 숙종 초반 17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조선 농민은 수전경종법으로 이앙법 56) 明宗實錄 卷6, 明宗 2年 7月 20日 己巳 (19-520); 傳曰 今見慶尙監司任虎臣啓本 則密陽 守山 堤國屯田 禾穀水沈損傷 徵穀於耕治軍人 今方失農之時 如是徵之 則殊乖救荒之意 令大臣議啓. 57) 金堉, 潛谷遺稿 卷4, 應旨陳言箚; 三南之民 業於移秧 而苗已枯矣 今雖得雨 無可及矣.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29

32 을 전면적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 이미 이앙법이 풍속이 되어 버렸기 때 문에 갑자기 금지하기 어렵다는 조정의 평가가 내려지고 있었다. 1687년에 중앙정부가 이앙법이 거의 고착화된 풍속으로 성립되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갑자기 중앙정부에서 금령을 내려도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었다. 즉 1687년(숙종 13년) 무렵이면 移 秧 法 은 보편적인 水 田 耕 種 法 으로 채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앙법의 채택으로 일어나는 노동력의 집중적인 투입, 즉 이앙기에 필요 한 대규모 노동력의 동원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동노동 조직으로서 두레의 형 성이라는 농업여건의 변화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요인이 장기간에 걸 쳐 등장하면서 삼남지방 전역에 이앙법이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주강현 1995). 17세기 중반에 당시 공주목사로 재직하던 申 洬 이 農 事 直 說 衿 陽 雜 錄 四 時 纂 要 抄, 世 宗 의 勸 農 敎 文, 朱 子 의 勸 農 文 등을 묶어서 편찬한 農 家 集 成 은 특히 이앙법에 관련된 기록이 많이 증보되어 있었다. 이앙법이 보급되어 나간 배경 가운데에는 수전의 위치, 토질 등 전토의 주 변조건이 이앙법을 채택하는 데 적절한 지역에서 水 田 이 증대하고 있었다는 점이 있었다. 16세기를 경과하면서 수전결수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는 수전이 많이 개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이재룡 1988). 또한 18세기 를 중심으로 크게 나타난 旱 田 을 水 田 으로 바꾸는 反 畓 (또는 反 田 )의 성행이 야말로 수전의 증대를 가져온 가장 커다란 요인이었다 세기 이앙법의 확대 보급은 旱 田 2모작 경작방식의 고도화와 연결되어 稻 麥 二 毛 作 이라는 경작방식을 산출하였다. 旱 田 에서 작물을 경작하기 위하여 田 地 를 정리정돈하는 田 畝 制 度 에서 변 화가 나타났다. 農 事 直 說 을 보면, 治 田 과정에서 作 畝 작업을 분명하게 수행 하면서 畎 畝 를 구별하여 田 地 에 조성하였고, 畝 와 畎 을 가리켜 畝 와 畝 間 ( 兩 畝 間 )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파종한 지 일정기간이 지난 이후에 작물이 한창 성장하고 있을 때가 되면 旱 田 은 畝 와 畎, 즉 畝 와 畝 間 ( 兩 畝 間 ) 이 본래 가지고 있던 전토의 高 低 부분이라는 형태상의 차이가 거의 사라지 면서 작물의 成 長 處 인가 아닌가의 여부로 畝 와 畝 間 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었 다. 17세기 이후 조선후기 作 畝 방식의 변화는 作 畝 를 이전에 비해 보다 심화 130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33 된 방식으로 수행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作畝작업이 더 정제되고 심화된 방 식으로 수행되어 나갔다는 것은 기경작업이 보다 세밀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하영이 정리한 바와 같이 18세기 作畝法은 토양의 비 옥도에 따라서 畎畝의 크기와 깊이를 조절하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러 한 심화된 수준의 作畝法에 근거하여 旱田의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방식이 수립되어 있었다. 16세기를 거쳐 17세기초에 이르면 한전에서 작물을 경작하는 방식은 15세 기 조선전기에 1年 1作이 지배적이던 단계에서 1年 2作을 일반적으로 수행하 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조선 전기에 1年 1作이 주된 경작방식이면서 여기에 병행하여 晩種의 黍粟과 兩麥을 이어짓는 2年 3作 방식이 약간 곁들여 있었 다. 그러한 상황이 16세기 후반을 거쳐 17세기에 이르면 根耕法의 일반적인 채택, 間種法의 확대 적용 등을 배경으로 1年 2作 방식 즉 旱田二毛作이 보편 화된 것이었다. 조선후기의 旱田 耕作方式에서 1年 2作 형태가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상 황이었다는 것을 田土에 대한 조정의 給災 원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는 국가적인 조세체계에서도 한전의 이모작 관행을 당연시하여 旱田에 給災 하지 않는 원칙을 세우고 강력하게 수행하고 있었다(김용섭 1990). 숙종대에 旱田 給灾가 실행에 옮겨진 사례를 보면 한전에 給灾를 내리는 것은 水災가 아주 참혹하거나 災害가 아주 심각한 경우에 한정되어 있었다. 1711년 강원, 함경도에 水田과 旱田에 모두 급재를 내렸는데, 이는 당시 旱災와 水災가 겹 쳤기 때문이었다58). 한전에 給災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한전에서 1년에 두 번 경작하기 때문 이었다. 정조 初半에 편찬된 度支田賦考 에 실린 年分條目에 旱田은 1年 에 再耕하기 때문에 본래 給灾事目에 應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綿田은 예로 부터 給灾한 예가 많이 있다 라는 규정도 이러한 관행을 잘 보여준다59). 나아 58) 肅宗實錄 卷50, 肅宗 37年 8月 23日 庚辰 (40-409); 初 戶曹爲年分事目也 以湖南沿海旱災特 甚處 許給全災 江原咸鏡道 川飜浦落處 勿論水田旱田 竝許給災 後 又以嶺東水災非常 廟堂陳啓 特給七分災 至是 宇杭又以諫院之啓 覆奏請湖南嶺南水災尤甚處 竝給水田旱田災 從之. 59) 度支田賦考 年分. 旱田 一年再耕 故本無應給灾事目 而綿田 則自古多有給灾之例.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31

34 가 19세기 후반에 정리된 六典條例 에서도 旱田은 給灾하지 않는 것을 收稅 조항의 원칙으로 세워놓고 있었다60). 조선 후기에 정부는 旱田에 水田과 달리 給災하지 않았고, 나아가 旱田에서는 起耕 여부에 관계없이 田稅를 징수하였 다. 그러한 근거는 바로 旱田耕作이 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수행된다는 점에 있었다. 조선 후기로 시기를 비정해볼 수 있는 몇 건의 경작유구 발굴성과를 토대 로 조선후기 농업사연구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 볼 수 있다는 점을 살펴본다 (염정섭 2011). 조선 후기 경작유구를 발굴조사한 연구성과를 찾아볼 수 있 다. 2008년 한국고환경연구소는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종촌리 일원에서 실시 한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심행정타운 증축에 따른 문화재 발굴조사 에서 17세 기 이후로 추정되는 水田 유적을 확인하였다. 당시 발굴조사팀은 13개의 水 田面을 확인하고 조선 중기 이후 수전농업기술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판단하였다(한국고고환경연구소 2008). 특히 각 수전면에서는 둑 수구 경작흔 식재흔 족적과 牛족적 등의 시설 및 농경활동의 흔적 등이 양호한 상태로 확인되었다는 점과 조선 중기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이용 되어 왔는데 끊임없는 개 보수와 새로운 수전의 조성 등이 확인되며, 또한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 의해 수전이 폐기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주목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水田의 구조와 水稻의 경작방식 등의 측 면에서 많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음으로 조선시대 밭유구와 관련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표 2]는 2009년에 실시된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유물산포지 A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고려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경작관련 문화층으로 확인된 것을 정리 한 것이다(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2009). [표 2] 철목리 유물산포지 A 1~3문화층 현황표 1문화층 2문화층 3문화층 밭고랑 방향 북동 - 남서 동-서 북서 - 남동 북동 - 남서 북서 - 남동 남동 - 북서 고랑 두둑 너비 고랑 : 28~40cm내외 두둑 : 30cm내외 고랑 : 18~50cm내외 두둑 : 30~43cm내외 고랑 : 35~40cm내외 두둑 : 30~40cm내외 60) 六典條例 卷3, 戶典 考驗豊凶. 旱田及反畓 不許給災 而緜田 則有海西給災(他道 或啓聞稟處). 132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35 발굴조사 약보고서를 볼 때 경작층과 관련해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고랑과 두둑의 너비에 대한 부분과, 밭고랑의 방향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토대로 입 지여건에서 볼 때 주변에 소하천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하천 퇴적지형인 범 람원에 해당된다는 점, 밭유구의 두둑과 고랑의 조성 방향을 살펴볼 때 하천 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정리된 것은 무엇보다도 하천의 범람이라는 자연환경 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점, 조선 후기 밭유구의 두둑, 고랑의 크기에 관한 부분 을 살펴보면 두둑과 고랑의 너비가 대체로 1:1에 가깝다는 점 등을 주요한 특 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철목리유물산포지A에서 출토된 조선 후기 밭유구의 두둑, 고랑의 크기에 관한 부분과 관련해서 최근에 경작체계에 따른 밭의 형태를 정리한 [그림 5] 를 참조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을 보면 경작체계에 따른 밭의 형태를 정리할 때 밭의 두둑과 고랑 사이의 播 幅 비율을 주요한 준거로 삼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철목리 유물산포지A에서 출토된 조선 후기의 밭은 平 畦 法 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평휴법은 고랑의 높이와 두둑의 높이가 동일한 것이 특징 이다. 평휴법 이외에 휴립법 등도 있는데, 작물의 성격에 따라 파종하여 재배 하는 부분이 두둑이거나 또는 고랑으로 나뉜다. 밭작물의 재배에서 특히 두둑 과 고랑을 정밀하게 만들어야 하는 작물은 보리이다. 두둑과 고랑을 세밀하게 만들어 이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보리경작법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조재 영 1986 : 93~96). 조선 후기 農 書 를 통해서 밭에서의 作 畝 法 이 세밀하고 치밀하게 정립되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밭의 표면을 평탄하게 정리한 상태 그대로 경 작하지 않고 高 低 차이가 있는 두 부분으로 나누는 작업이 바로 作 畝 작업이 다. 그런데 農 書 의 경우 구체적으로 밭의 두둑과 고랑의 크기를 어떻게 만들 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부분이 없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연 구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되는 밭유구의 실제 모습을 주요한 자료로 활용 하는 방향으로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경작유구의 발굴조사는 두둑, 고랑, 식 재흔적 등을 세밀하게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연구자료에 해당한다고 생각된 다. 따라서 이러한 경작유구를 시대순으로 배치하고 정리하여 따져볼 경우 밭 작물의 재배방식의 커다란 흐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 정 섭 133

36 명칭 모식도 고랑과 두둑의 형태 재배작물 및 특징 평휴법 ( 平 畦 法 ) 두둑 高 =고랑 高 채소 벼 재배 건조해 습해 동시 완화. 휴립법 ( 畦 立 法 ) 휴립휴파법 ( 畦 立 畦 播 法 ) 휴립구파법 ( 畦 立 溝 播 法 ) 두둑 高 >고랑 高 두둑에 파종 두둑 高 >고랑 高 낮은 고랑에 파종 조 콩 재배, 배수와 토양 통기 양호. 맥류 재배. 寒 害 凍 害 방지. 성휴법 ( 盛 畦 法 ) 두둑을 보통보다 크고 넓게 만듦 중부지방에서 맥후작콩의 파종에 유리. 답리작 맥류 재배. 건조해 장마철 습해 방지. [그림 5] 경작체계에 따른 밭형태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0b) 바와 같이 조선시대 경작유구의 발굴조사 결과물을 토대로 조선시대 농업기술 ( 農 法 )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밝혀나가는 연구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곽종철(2002 : 25~93)은 우리나라의 선사 고대의 논밭유구 라는 글에 서 2002년 무렵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 조사된 논밭유구를 집성하고 그 조사 성과를 기초로 현시점에서 알 수 있거나 추정되는 사항을 정리하였다. 곽종철 이 정리하고 있는 내용의 큰 틀을 재정리하면 경작유구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앞으로 진행할 수 있는 연구방향, 연구과제로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 다. 그는 논밭유구의 위치, 논밭의 형태, 특히 밭의 이랑과 고랑, 논밭에서 재 배하는 작물, 논밭의 경지전환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연구내용은 거의 그 대로 경작유구와 관련된 조선시대 농업사연구에서 제기할 수 있는 연구분야 이자 연구과제라고 할 수 있다. 2. 조선 후기의 수리시설 조선 후기에도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田 畓 에 물을 공급하는 주된 수리시 설로 堤 堰 과 川 防 을 이용하였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중앙정부는 수리 문제 에 대한 기본 자세, 즉 새로운 堤 堰 과 川 防 의 축조, 그리고 이미 축조된 수리 134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37 시설의 관리라는 정책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현종대에 堤堰司를 새로 설치하면서 만든 賑恤廳堤堰事目 은 堤堰과 川 防(洑)의 축조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61). 堤堰司를 다시 설치하면서 제언 등 의 관리 책무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事目의 내용 은 주로 제언과 천방의 축조를 독려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堤 堰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人力을 동원하는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차원에서 자세한 안내를 덧붙이고 있었다. 用水路의 확보도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면서 결국 감사와 수령에게 제언 축조와 관리의 책임을 지우고 있었다. 현종대에 제언의 축조에 더 중점을 둔 방책이 실행되었고, 그러한 기조가 그대로 계승되어 영조대에 만든 堤堰別單 에서도 유지되고 있었다62). 그런 데 正祖代에 이르게 되면 제언의 신축이라는 과제보다는 기존의 제언 등 수 리시설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측면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중양 2000). 정조대의 경우 조선의 전역에 堤 洑 堰을 축조할 만한 곳에는 모두 축조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평가되고 있었다. 정조대에 이르면 수리시설 중에서도 洑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開洑(洑의 개설 축조)를 독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田畓의 두 둑을 잘 갖추어 雨雪을 굳게 가두어 흘려 버리지 않는 것도 훌륭한 방법의 하 나로 적극 권장되고 있었다. 소규모 수리시설을 축조하는 것이 수리 조건을 개선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라는 주장 또한 제기되고 있었다. 무엇보 다도 堤 洑 堰이라는 각각의 수리시설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각별 한 관심이 수리시설의 관리와 보수에 투하되어야만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었다. 18세기말에 조선 팔도의 堤堰 현황을 보면, 중앙정부와 여러 인사들이 관 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正祖와 應旨人들이 우려하면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과거에 축조되었던 것들이 제대로 모두 이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놓여져 있었다. 제언이 무너지고 그 기능을 상실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은 일단 자연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堤堰의 기능 상실은 인위적인 요소에 근거하여 발단이 마련 61) 備邊司謄錄 顯宗 3년 1월 26일 賑恤廳堤堰事目 (2 729). 62) 度支志 外篇 권3, 版籍司 田制部一 堤堰 節目. 英宗 8년 壬子(1732년) 正月 備局堤堰別單.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35

38 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발생하여 많은 堤 堰 의 기능을 무위 로 돌려버린 것이 宮 房, 富 豪, 農 民 등이 자행한 堤 堰 冒 耕 이었다. 宮 房 등은 일부 무너진 堤 堰 을 折 受 받아 立 案 을 작성하고 田 畓 으로 만들어 경작의 이득 을 취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제대로 기능하는 堤 堰 마저 함부로 절수 받아 堤 堰 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였다. 그리고 농민들은 제언 내의 경작가능지의 일부를 말 그대로 몰래 冒 耕 하였다. 이러한 堤 堰 冒 耕 은 제언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요인이었다. 한편 하천수를 관개수로 이용하는 수리 도구인 水 車 는 조선 전기에 도입이 추진되다가 실패로 돌아갔다. 수차가 중국의 강남지역에서는 이앙법의 보급 과 관련된 중요한 수리 도구였지만 조선의 토질에 적합하지 않아 도입이 무산 된 것이었다(이태진 1986 : 340). 17세기 중반 조선에서 상세한 수리 지식을 축적하면서 水 利 學 의 체계가 세워지고, 龍 尾 車 玉 衡 恒 升 과 같은 서양식 수차를 보급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전통적인 중국식 龍 骨 車 와 일본식 倭 水 車 의 보급 논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실제 농사에 채용되 지 못하고 논의의 차원에 그치고 말았다(문중양 2000). 수리시설의 이용을 제한적인 것으로 만드는 인위적인 요인 중의 하나가 火 田 의 성행이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開 墾 의 진전, 그리고 田 土 의 증대 속에는 山 火 田 증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전국의 山 이 火 田 의 성행이라는 급류에 휩쓸 리면서 山 腰 이상 즉 산허리 이상의 비탈지역까지 開 墾 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 다. 山 火 田 은 山 麓 의 草 木 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수리시설이 제대로 기능 할 수 없게 만드는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 몇몇 자료에 등장하는 堤 堰 數 를 정리한 [표 3]를 보면 경상도 지역에 많은 堤 堰 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全 羅 道 와 忠 淸 道 지역의 제언수는 16세기 이래 20세기 초까지 이르도록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宮 嶋 博 史 1983). 18세기 후반에 조사된 各 道 의 堤 堰 의 숫자는 공식적인 조사과정을 거쳐서 확인된 것만 기록한 것이었다. 실제로 농업생산 현장에서 蒙 利 의 혜택을 주던 堤 堰 의 숫자가 모두 그대로 파악된 수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점을 萬 機 要 覽 에 기록된 제언 숫자 가운데 다수의 廢 堤 堰 숫자가 포함되어 136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39 [표 3] 조선시대 下三道 지역 堤堰數의 변천 (宮嶋博史, 度支志) 15세기후반(1) 1518년(2) 1782년(3) 19세기초(4) 1908년(5) 1910년경(6) 경상도 ,522 1,666(99) 1,317 1,752 전라도 900여 (24) 충청도 500여 (17) (1) 慶尙道續撰地理誌 1470년 경 : (2) 中宗實錄 권46, 중종 18년 정월 庚戌 (3) 增補文獻備考 권146, 田賦考6 : 度支志 外篇 권3, 版籍司 田制部一 堤堰 各道堤堰總數 (4) 萬機要覽 財用篇 5, 堤堰 ()는 廢堤堰 (5) 堤堰調査書(1909년 간행) : (6) 朝鮮農務彙報(1912년 간행)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1848년(헌종 14)에 京畿 監營이 조사하여 보고한 道內 30개 郡의 堤堰數를 찾아볼 수 있다. 총 233곳의 堤堰을 기록하고 있는데 廢棄된 堤堰 이 30곳, 作畓處로 되어 버린 곳이 8곳, 形止가 없는 곳이 1곳이다. 결국 당시 조사결과 現存하면서 기능을 유지하는 堤堰은 총 194개였다63). 따라서 18세 기 후반에 조사된 각 도의 제언수가 폐제언을 포함한 것일 수 있다. 경상도의 경우 조선 전기에 비해서 18세기에 조사된 제언의 현황을 보면 많은 堤堰이 축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상도 지역 堤堰의 증대는 특 히 上道 지역, 즉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에서 많은 堤堰이 축조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수리시설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華城城役과 연관된 만석거이다(염정섭 1999). 화성 성역을 한창 진행하던 1794년(정조 18년) 전국적인 극심한 旱災가 발생하였다. 정조는 제신과 논의한 10월 19일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1일 諭華城城役董工諸臣綸音 을 통해 화성의 축성공 사를 일시 중지하도록 왕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안문 북쪽 지역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둔전을 조성하고 안정된 둔전의 경영을 위해 거대한 수리사업이 진행되 었다. 같은 날 정조는 수원 유수에게 이 사업을 착실하게 조치하도록 당부하 였다64). 63) 京畿各邑堤堰都結成冊 (奎章閣, 奎19377) 64) 華城城役儀軌 권 1, 筵說, 甲寅 11월 1일; 上曰 (전략)至於解凍後 後托役事 其在重民食之道 不 可少緩 差待十年之後 將收萬石之利 亦其非守成之一助乎 留守 須着念措置; 正祖實錄 권 41, 正祖 18년 11월 1일 (을유)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37

40 정조가 내려준 內下錢 2만냥으로 둔전으로 개발하고, 남은 餘錢 가운데 5,960냥으로 1795년(정조 19년) 봄에 만석거의 축조공사가 진행되었다. 구 체적으로 1795년 3월 1일 공사가 시작되어 5월 18일 완성을 보게 되었다65). 완성된 만석거의 크기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둘레가 1,022보(1步=周尺6尺 (20.8cm 6)=1.25m, 1,275.5m), 上深이 7척(布帛尺이므로 3.27m), 下深이 11 척(5.14m), 堤長이 725척(338.6m), 下厚가 52척(24.3m), 上收廣이 17척여(약 8m)의 크기였다. 뚝은 남쪽 土岸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石崖로 이어졌다. 만석거에 모인 관개수를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두가지 형태의 水門이 설치되었다66). 하나는 북쪽 바위층(北崖)을 파서 만든 水口로 만석거 내부의 水位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수위가 올라갈 때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나갈 수 있 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만석거의 남단 水路 입구에 설치 한 水閘이었다. 조선 후기 18세기 이후에 수리시설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던 것이 洑였 다. 지역 주민들이 연합하여 洑를 만들기도 하고, 국가가 권세가, 왕실 세력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洑를 축조하기도 하였다. [그림 6]은 정치영이 정리한 洑 의 구조도인데, 보둑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洑의 水路를 만드는 것 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후반의 경우 公州生員 柳鎭穆에 따르면 山野마다 防川하여 開洑 하거나, 引溝하여 通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67). 防川하여 開洑하는 것은 결국 河川을 가로 막아 川防, 즉 洑를 축조한다는 것이고, 引溝하여 通水한다는 것 은 水路를 개착하여 물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결국 川防을 의미하는 洑와 水路를 의미하는 渠를 결합시킨 洑渠가 주된 수리시설로 활용 하고 있는 형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水利施設을 새롭게 축조하였음에도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지 못 65) 華城城役儀軌 卷首, 各項日字 66) 渠 는 본래 引川水爲渠 以資沃灌 (王毓瑚 校 王禎農書 農器圖譜 集之十三, 341쪽 北京 農業 出版社)라고 하여 물을 끌어들이는 水道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다. 그런데 萬石渠는 물길을 만들면 서 貯水하기 위해 築堤하였기 때문에 정확히 渠 를 갖춘 堤 라고 할 것이다( 華城誌 卷 2, 堤堰). 67) 日省錄 正祖 23년 2월 11일 己亥 (27권 388쪽-399쪽) 公州生員 柳鎭穆 疏陳冊子中 條件. 138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41 하는 경우의 하나로 新舊洑의 水利 다툼이 있었다. 川防(洑)는 堤堰과 달리 河川의 흐 름을 가로막고 설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河 川이 흘러가는 하나의 郡縣 내에도 여러 곳 에 축조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있을 수 있었 다. 그리고 河川 兩岸의 여건, 水中의 조건, 주변 民人의 관심 등에 따라서 築洑가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본래 築造된 洑 [그림 6] 洑의 구조 (정치영 2000 : 231) 가 있는 인근지역에서 특히 상류지역에 新 洑를 築造할 경우 예전의 洑의 혜택을 받고 있던 住民과 새로 築洑한 주민 사 이에 수리시설의 효용성을 놓고 분쟁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新舊洑 사이의 간 격이 水量의 상호 영향관계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을 정도로 멀 경우에도 舊 洑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新洑를 훼설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고 있었다68). 그 리하여 舊洑가 독점적으로 水利를 專有하는 것이 山地를 廣占하는 것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수리시설의 효용성을 저해하는 경우였다. 조선 후기의 수리시설은 그 이름과 위치에 대한 정보를 문헌 속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위에서 검토한 것은 수원 만석거의 역사적 현황에 대한 것과 開 洑와 관련된 당대의 현실이었다. 만석거의 경우 그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고 할 수 없지만 이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만석거의 축조방식 등 역사적 해석이 보다 면밀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開洑의 시대라 불린 당대에 하천 여기저기에 만들어진 洑에 대한 정보 축적도 꼭 필요한 부분이라 고 할 수 있다. 68) 承政院日記 1802책, 正祖 22년 12월 23일 壬子 (95-582가) 前 參奉 李尙熙 上疏; 且或於有水 之處 鳩財開洑 而民各務勝 專事爭利 甚至於十里之地萬步之間 稱以舊洑 必欲毁破 故坊坊曲曲 非無開洑貯水之所 而新築之民 每每見敗.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정섭 139

42 Ⅴ. 맺음말 한국 중근세 사회의 농법과 수리시설의 변화, 발달과정을 문헌 자료 검토 와 발굴보고서 분석을 통해 개괄적이고 계몽적인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고려 시대와 조선시대 연대기와 農 書, 文 集 등을 검토하는 문헌자료의 분석작업을 통해 농법과 수리시설의 전체적인 변화와 발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해당 시기 논밭유구와 수리시설 관련 발굴조사보고서를 몇몇 사례를 중 심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같이 수행하였다. 앞으로 본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고고학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경작유구를 조 사할 때 여러가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경지이용방식은 11세기 文 宗 代 田 品 규정에서 볼 때 田 品 규 정은 平 田, 山 田, 水 田, 旱 田 을 막론하고 모든 耕 地 에 적용되는 커다란 일반원 칙이었다. 이때 連 作 地 ( 不 易 之 地 )는 上 等 田, 1년 휴한지( 一 易 之 地 )는 中 等 田, 2년 휴한지( 再 易 之 地 )는 下 等 田 이라고 규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대의 주요한 경작방식은 1년 또는 2년 휴한법이었다. 業 租 와 京 租 라는 용어에서 곡종을 찾아볼 수 있고, 蟬 鳴 稻 와 같은 올벼도 고려에 존재하고 있었다. 지력 을 상승시키고 水 稻 의 성장을 돕기 위해 糞 田 작업을 수행하였다. 당시 지역적 인 생산력의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고려 후기 농법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벼 경종법 가운데 하나인 이앙법이 14세기 후반에 부분적으로 실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벼 경작법이 고려말에 이르러 휴한법에서 연작법으로 변화 발전하였다는 것이 다. 水 稻 耕 作 法 이 休 閑 法 에서 連 作 法 으로, 그리고 直 播 法 에서 移 秧 法 으로 변화 발달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한전경작법의 경우도 고려말 連 作 法 으 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시대 경작유구의 사례에 대한 검토과정에서 이러한 토지이용방식의 변화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곤란한 상황이다. 다만 경작법 관련 부분을 정리할 수 있다. 진주 평거 3-1지구 유적에서 발굴된 고려시대의 밭에 서 여러가지 밭작물을 두둑을 중심으로 경작하고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 다. 또한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밭유구가 출토된 나주 진포동 포두유 140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43 적의 경우 두둑과 고랑을 포함한 이랑에서 부정형의 小 穴 ( 株 跡 )들과 사람과 소의 발자국( 足 跡 ) 등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되었다. 앞으로 경작유구가 매몰되기 직전에 수행하였던 농작업의 구체적인 실제모습을 경작유구 발굴조 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또한 앞으로 하천변 충적 지에서 고려시대를 비롯한 앞뒤 시기의 경작유구가 대량으로 발굴조사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고려의 수리시설 관련 기록은 12세기부터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 무 렵 본격적인 新 田 開 墾 과 벼 재배 비중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수리시설의 중요 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수리시설 축조가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수 리시설은 洑, 堤 堰, 河 渠, 防 潮 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륙의 陳 田 이나 沿 海 지역의 개간, 島 嶼 지역의 개발이 활발하게 추진되면서 堤 堰, 防 潮 堤 를 축조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제언의 경우 새로운 자리를 잡아서 새롭게 축조한 경우가 있었고, 이전에 축조하였던 자리에 증축하거나 보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있었다. 밀양 守 山 堤 나 김제 碧 骨 堤 는 그 이전 어느 시기에 만든 제방을 증축한 것이 었다. 河 川 의 정비와 水 路 의 축조를 통해 전답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河 渠 를 굴착하였다. 조수의 침범을 막는 수리시설로 沿 海 지역의 개간에 필수적인 防 潮 堤 도 수축되었다. 고려시대의 제언 가운데 역사문헌자료에서 존재를 찾을 수 있고, 또한 발 굴조사 등으로 현재 그 실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양산 지역의 黃 山 堰 과 상주의 恭 儉 池 를 검토하였다. 양산 지역의 황산언의 경우 黃 山 驛 의 좌우에 자리한 長 堰 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헌자료에서 확인하였다. 그런데 양산 물금 읍 증산리 유물산포지에 대한 문화유적 발굴조사에서 황산언으로 비정할 수 있는 土 石 混 築 堤 堰 이 조사되었다. 그리하여 황산언이 황산역 주변에 조성된 馬 位 畓 등 田 畓 의 보호를 위해 만든 제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黃 山 驛 圖 (1832년)에 보이는 東 大 堤 에 대한 발굴조사 역시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尙 州 恭 儉 池 의 경우 문헌조사에서 고려시대 補 築 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후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때에 따라 많은 補 築, 決 潰, 改 築 등이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 정 섭 141

44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상주 공검지 발굴조사 결과 공검지 1차제방이 고려 시대 이전부터 현재까지 수차례 수축 또는 보축되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발굴 조사에 따르면 1차제방에 10개의 토층이 확인되는데, 이는 고려시대 이후 조 선시대에 걸쳐 많은 增 築, 補 築, 改 築 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 된다. 조선 전기의 벼 재배법은 3가지 耕 種 法 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水 耕 과 乾 耕, 그리고 挿 種, 즉 移 秧 이었다. 15세기 수전농법에서 일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던 경종법은 바로 수경직파법이었다. 이앙법도 農 事 直 說 에 잘 소개되어 있었다. 수경직파법과 이앙법 이외에 乾 耕 法, 즉 건경직파법도 활용되었다. 이앙법은 16세기를 거치면서 경상도 전역과 전라도 충청도의 일부 선진 지 역까지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農 事 直 說 에 따르면 15세기에 밭에서 잡곡을 재배하는 방법은 기경에서 시작되어 수확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작업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農 事 直 說 에 보이는 밭작물 사이의 연결관계를 정리하여 살펴보면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農 事 直 說 의 경우 兩 麥 을 중심 으로 설정된 작물 사이의 연계관계를 1년 2작이나 2년 3작의 경작방식이 아 니었고, 각 작물을 1년 1작식으로 경작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논밭 경작유구를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나누어 살피기 어렵다. 또한 논밭유구 등 경작유구를 지표조사를 통해서 찾아 낸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따라서 기존에 조사된 논밭유구의 입지 를 검토하여 경작유구와 주거구역의 관계에 의거하여 논밭을 인지하여 발굴 하는 것이 필요하다.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된 발굴조사 가운데 여주2지구 (삼합지구)와 여주 2지구(가야지구)에서 출토된 경작유구는 조선시대 자기 편 도기편으로 볼 때 조선시대로 비정할 수 있다. 특히 여주 2지구(가야지구) 의 경우 하층 경작유구에서 최소 3-4번에 걸쳐 동시기에 조성되고 다른 시점 에서 경작된 것으로 보이는 고랑 열이 서로 교차하여 확인되고 있는데, 이 점 은 밭의 구조와 조성이 작물이나, 경작시기, 경작자의 차이에 따라 크게 달라 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부산관광단지 조성사업부지내에서 발굴조사된 조선시대의 수전의 경우 142 중앙고고연구 제 10호

45 동서방향으로 7면이 조사되었는데, 너비는 2.5m 3.5m 정도이고 각각 2cm 의 단차가 확인되었다. 계단상의 단차가 있다는 것에서 水 田 의 존재조건 가운 데 하나가 水 平 의 유지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의 습지 층 위에 새로운 경작층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저지와 저습지의 개간이 토양 개선, 새로운 토양의 첨입 등을 포함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발굴조사에서 고려, 조선전기, 조선후기의 경작유구를 단순하게 시 간순서에 따라 토층을 비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농업환경, 사회경제적 배경 등을 고려하여 시간적 범위가 달라지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의 水 利 정책은 堤 堰, 川 防 등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를 중심으 로 펼쳐졌다. 水 田 이 크게 증대하면서 수리시설의 필요성이 커졌다. 특히 저 지, 저습지와 해안의 陳 荒 田 이 개간되면서 앞서 산곡간에도 많이 존재하였던 수전의 위치는 평지에 주로 자리잡게 되었다. 수리시설로 활용된 것은 주로 堤 堰 이었다. 旱 害 와 水 害 를 대비하는 것이 주요한 용도였다. 제언이 허물어지게 되면 제언 아래에 자리한 전지가 모두 함몰되어 큰 손해를 끼쳤다. 농민의 力 役 을 동원하여 농한기인 겨울철을 이용 하여 제언 축조가 이루어졌다. 팔도 군현에 산재해 있는 제언의 관리는 군현 의 牧 民 을 맡아서 수행하고 있는 守 令 이 담당하였다. 川 防 은 하천에 흐르는 물을 이용하는 수리시설이었다. 산골짜기를 흐르는 계곡의 하천물도 川 防 을 통해 관개수로 활용할 수 있었다. 천방 개발은 14세 기 후반부터 시도되기 시작하여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본격적 발전을 보게 되 었다. 조선 전기의 수리시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碧 骨 堤 와 守 山 堤 이다. 벽골제 가 방조제일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水 理 學 的 인 연구와 토목공학적인 고 찰에서 나왔다. 애초에 조수의 침입을 막으려는 방조제로 축조되었다고 설명 하기도 하고, 홍수기에 물을 가두고, 농번기에 물을 빼쓰는 점에서 저수지 제 방이 아니라 조수를 막는 방수제, 방조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 제 벽골제에 남아 있는 石 柱 의 경우 그 사이에 木 板 으로 막아 貯 水 하는 구조 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1420년에 큰 풍우가 있어 벽골제가 무너지 는 바람에 제방 아래의 田 2,098결이 손실을 입었다는 기사로 볼 때 벽골제를 중 근세의 농법과 수리시설 염 정 섭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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