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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 19세기 화폭에 실린 화가들의 울분 이선옥 (전남대) 차 례 1. 머리말 2. 차별과 배제의 슬픔 3. 화폭에 실은 분노 4. 공명 : 결론을 대신하여 1. 머리말 조선시대 양반의 위세에 분개해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화가가 있다. 조선 후기 산수화로 유명한 호생관 최북( 崔 北, 1712~1786년경)이다. 그런가 하면 은둔하며 억누른 감정을 절제된 붓질로 화폭에 펼 치기도 하였고, 울분을 쓸쓸한 분위기의 산수화와 빠른 붓질로 툭툭 쳐내려간 묵죽에 풀어낸 경우도 있 다. 18세기 문인화가 이인상( 李 麟 祥, 1710~1760)과 19세기 여항화가 우봉 조희룡( 趙 熙 龍, 1797~1859) 이 그들이다. 엄격했던 신분제가 조금씩 와해되어가기 시작하는 18 19세기에 그 사회에서는 소수자라 할 수 있는 중서층( 中 庶 層 ) 화가들이 자신의 울분을 표출하는 방법이었다. 1) 반상의 구별이 엄존하던 조선시대에는 신분이 낮은 계층이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서출인 경우, 이 들은 여러 형태로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과 멸시를 견디며 평생을 살아야 했다. 반상과 적서, 남녀의 차별 등 차별의 종류도 많겠지만 직업화가들은 신분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은 말기 ( 末 技 )라 하여 그다지 존경받는 일은 아니었다. 시서화일률( 詩 書 畵 一 律 ) 을 내세우며 회화의 가치를 주장 하는 문인화가들 조차도 자신은 문인이며 그림은 그야말로 여기( 餘 技 )임을 강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 다. 2) 문인화가라 할지라도 서출이거나 어떤 연유로든 양반이 아닌 경우 여러 형태의 차별대우를 감수해 가. 1) 중서층은 조선시대 서얼, 역관 등 양반 이하의 정치세력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 용된다. 이 글에서는 사대부 집안의 서출, 직업화가, 여항화가들까지를 포괄하는 용어 로 사용하겠다. 중서층에 대해서는 정진영, 향촌사회에서 본 조선후기 신분과 신분변 화, 역사와 현실 48, 한국역사연구회, 2003, p. 53~80 참조. 나. 2) 조선시대에는 그림 그리는 일 자체가 학문의 길을 해치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중인 신분이었던 직업화가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인화가들 중에도 자신의 그림재주를 한사코 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화를 말기라 했던 대표적인 예로 조선 초기 문인화가 강희안이 아들들이 서화를 얻고자 하자 서화는 천기이니,

2 야만 하였다. 조선시대 신분제도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조금씩 동요하면서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 변화의 핵 심에 중서층의 성장이 있었다. 3) 17세기 후반 무렵 4~5% 정도였던 호적상의 양반은 19세기 후반에는 60~70%에 이르렀다. 4) 이러한 변화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상민들이 있었고, 박지 원이 양반전 에서 넌지시 보여주고 있듯이 양반신분을 매입하여 명목상의 양반이 되기도 하였다. 양반의 숫자는 많아졌지만 실제적으로는 극소수의 지배양반 들이 사회 정점에 서서 절대 다수의 상민층을 지배 하는 사회였다. 5) 제도적으로는 신분의 구별이 없어진 20세기 전반까지도 향촌사회에 그 유습이 잔존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의 정황은 충분히 짐작이 된다. 몹시 우울하고 분한 마음이 가득한 상태 인 울분 은 억울한 마음과 그로 인한 분노라는 두 가지 감정 이 복합된 것이다. 사람들은 울분이 생기면 화를 내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기도 하는 등 각자의 품성, 기질 등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를 표출한다. 이러한 일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화풀이라 할 수 있다. 몸으로 행하는 울분의 표출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해소방법이지만 화가들의 경우 그와 함께 특별히 자신의 작품 을 통해 이를 표현하기도 한다.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는 은연중에라도 자신의 감정이 담기게 마련 이 지 만 유교적 신분사회에서 자신의 분노를 함부로 드러내는 것이 미덕은 아니었기 때문에 시나 그림과 같은 예술작품에는 감정을 직접 표현하기보다 억제하고 이를 승화시켜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임진왜란과 정 유 재 란, 정묘호란 등 전란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벼슬을 하였던 조익( 趙 翼, 1579~1655)은 곧은 성질을 가진 대나무를 90도 구부려 화면 안에 구겨 넣 음으로써 부끄러움을 표현하였다(그림 1). 같은 시기 곧은 줄기가 부 러 진 채 그려진 묵매나 묵죽이 유행한 것도 시련의 은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 다. 6) 예술의 효용과 가치를 비슷하게 인식을 했고, 이민족에게 여러 차 를 빼앗긴 중국화가들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몽고족이 그림 1) 조익, <묵죽>, 종이에 채 색, 120.9x53cm, 고려대학 교박물관 례 나라 지배했던 후세에 전해지면 욕이 된다( 書 畵 賤 技, 流 傳 後 世, 秪 以 辱 名 耳.) 라 했던 일화가 전한다. 仁 齋 姜 公 行 狀, 晉 山 世 稿 권3, 진홍섭, 韓 國 美 術 史 資 料 集 成 2(일지사, 1991), p 조선 후기에 가서 차차 그림이 道 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매체로 인식되고 修 己 의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의 회화 가치관에 대해서는 홍선표, 조선후기 의 회화관, 산수화 下, 한국의 미 12(중앙일보사, 1986), pp. 221~226. 다. 3) 정진영, 향촌사회에서 본 조선후기 신분과 신분변화, 역사와 현실 48, 한국역 사연구회, 2003, p. 53~80. 77~80. 라. 4) 김성우, 18~19세기 지배양반 되기의 다양한 조건들, 대동문화연구 49(대동문 화연구소, 2005), pp. 173~174. 마. 5) 김성우, 위 논문, p 바. 6) 이선옥, 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 (돌베개, 2011), pp. 106~123

3 원나라 초기, 송 유민이었던 정사초( 鄭 思 肖,?~1332)는 나라 잃은 울 분 을 뿌리내릴 곳 없어 잎만 표현된 난을 그림으로써 표출하였다. 명나 라가 만 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청이 나라를 세우자 명 황실의 황족이었 던 주답 ( 朱 耷, 1626~1705)의 그림은 당시 서화계에 충격을 줄 만큼 파격 적 이 었 다. 어딘지 모를 쓸쓸함을 안고 있는 그의 그림은 고뇌에 빠진 듯 눈을 내 리깔고 고개를 푹 숙인 새, 눈을 흘기는 듯한 물고기 등 그가 대상 으로 삼 은 경물들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 표현하였다(그림 2). 나라를 잃고 가 족 을 잃어 미치광이가 될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가 그림에 드러낸 것은 몇 번의 붓질로 절제된 상징적인 형상이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대 극적인 저항으로 보이지만 중국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들어오 지는 그림이란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림 2) 팔대산인, <팔팔조도>, 종이에 수묵. 29.7x31.8cm, 일본경도천옥박고관 단히 소 기 전까 이 글에서는 18 19세기에 중서층 화가들이 어떻게 자신의 울분을 표현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조선시 대에 서출이거나 직업화가들이 차별을 받는 것은 이 시기에 국한된 것은 아님에도 조선후기 화가를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전 시기에 비해 그 숫자가 많고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였고 그러한 결집된 힘들이 사회변화의 한 축이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신분의 한계라는 공통의 원인은 있었지만 이들은 각자 성품도 달랐을 뿐 아니라 경제적 기반이나 출신 배경 등 처한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 또한 차이가 있었다. 이들이 울분을 표출하는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고, 이들의 행동과 작품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또 당시 사회변화와 어떤 관련 성을 갖는지 살펴보겠다. 2. 차별과 배제의 슬픔 13세기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노의 원인을 경시에 두고 있고, 약점이 많은 사람은 탁 월한 사람에 비해 경시당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상처를 쉽게 받아 더 크게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고 하였 다. 7) 사회적 약자인 서자나 신분이 낮은 직업화가들의 경우 벼슬길에 제한이 있었고, 자연히 경제적 빈 곤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대와 멸시 또한 감수해야만 하였다. 딱히 화가들에 국한된 것 은 아니지만 몇몇 화가의 예를 통해 당시 신분과 그들에 대한 대우 그리고 각자가 그 슬픔을 견디는 모 습들을 보기로 한다. 1) 벼슬길의 제한 사. 7) 서병창,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노 개념, 인간연구 제19호(카톨릭대학교 인간학 연구소, 2010), pp.58~60.

4 조선시대 신분이 낮은 화원화가나 직업 화가들은 말 그대로 환쟁이 라 불리며 천대받기 일쑤였다. 조선 시대 잡직에 속한 도화서 화원은 중인들이 응시하였고, 대부분의 화원들은 종5품의 한계를 넘기는 어려웠 다. 8) 조선 초기 일부 화원들이 화명을 얻어 정3품 당상관까지 파격적으로 승급된 예가 있기는 하나 그러 한 과정에서 양반관료들의 반발은 극심하였다. 9) 애당초 중인들이었던 화원화가들의 경우만이 아니라 양반의 자제이지만 서출인 경우에도 자신의 능력 에 걸맞게 쓰일 수 없는 신분상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공부를 하여 학식과 교양을 갖추어도 출세할 수 없는 벼슬길의 제한 에 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다만 서자( 庶 子 )나 신분이 낮은 사람 또는 죄를 지어 면관( 免 官 )된 사람은 경국대전 의 물허부시( 勿 許 赴 試 ) 조항에 묶여 문 무과는 물론 생원, 진사시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간혹 특혜를 받아 임용된다고 하 더라도 한품서용( 限 品 叙 用 ) 조항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10) 소수의 양반을 제외하고는 정도의 차이는 있 으나 불평등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였다. 조선시대 문인화가들 중 문기( 文 氣 )있는 그림으로 심의( 心 意 )에 가득 찬 명품을 남긴 작가 11) 라는 극 찬을 받은 문인화가였음에도 능호관( 凌 壺 館 ) 이인상은 서출이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벼슬길에도 제한 이 있었고 그로 인해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전주이씨 밀성군파로 당대 명문집안의 후손이었던 이인상은 노론이 전권을 휘두르던 당시 사대부사회 에서 높이 추앙받던 이경여( 李 敬 輿, 1585~1657)의 현손이었다. 하지만 증조부인 민계( 敏 啓, 1637~1695)가 이경여의 서자였기 때문에 그의 신분은 명문가의 서출이라는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12) 더구나 아홉 살 때 부친을 여의여 생활 또한 곤란하였다. 삼촌인 이최지의 문하에서 성장한 그는 그럼에 도 어려서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곧바로 글에 힘쓰며 기억력이 뛰어나 26세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13) 서출이었지만 진사시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노론 권세 하에서 명문가 출신이었으며, 서얼허통에 점점 관대해지는 당시의 추세 때문이었다. 14) 아. 8) 조선시대 화원들의 신분에 대해서는 안휘준, 한국회화사 연구 (시공사, 2000), p 자. 9) 성종은 소헌왕후( 昭 憲 王 后 )와 세조대왕, 예종대왕, 의경왕( 懿 敬 王 )의 영정을 그린 별제 최경( 崔 涇 ), 안귀생( 安 貴 生 )과 화원들의 자급( 資 級 )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이 로써 최경과 안귀생은 당상관에 제수되었고, 이 일은 성종 재위기간 내내 신료들과 마 찰의 빌미가 되었다. 成 宗 實 錄 卷 18,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編, 朝 鮮 王 朝 實 錄 美 術 記 事 資 料 集 書 畵 篇 1(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2001), pp. 330~331. 차. 10) 박인수, 조선시대의 규범과 신분제도, 영남법학 vol.7, no. 1-2, 영남대학교 법학연구소, 2001, pp. 79~95 카. 11) 이동주, 韓 國 繪 畵 小 史 (서문당, 1982), pp. 224~225. 타. 12) 이인상의 생애와 학문사상 등에 대해서는, 유홍준, 문인화가 이인상의 작가상 연 구, 정신문화연구 1983년 겨울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pp. 137~153. 파. 13) 幼 而 不 好 弄 便 能 劬 書 强 記, 凌 壺 李 公 行 狀, 吳 熙 常, 老 洲 集. 하. 14) 유홍준, 앞 논문, p. 137.

5 진사시에 합격한 이인상은 고조부인 이경여의 선음( 先 蔭 )으로 종9품인 한성의 북부참봉에 보직되었고, 1747년 38세까지 만 12년간 중앙관리 생활을 하였다. 중앙관리를 지내는 동안 그는 많은 사대부 벗들과 교유하며 시화를 논하였다. 말직이었고 경제적으로 궁핍하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신분적 비애나 현실도피 를 생각할 만큼 쓸쓸한 생활은 아니었다. 그러나 40대에 외직으로 발령받아 사근현( 沙 斤 縣 ) 찰방과 음죽 현감 등을 지낸 3년여와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며 은거하던 시절은 그의 심정 상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종6품인 찰방과 현감은 서출인 그가 할 수 있는 벼슬의 한계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단 지방관으로서 상 급기관이나 상사와 일으키는 갈등, 그리고 지조를 중시하는 사대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부조리를 직면 하고서는 크게 상심하였으며 급기야 43세 때인 1752년 관직을 버렸다. 이인상은 고고하고 결백하며 학문에 힘써 출중한 재주를 보였지만 가슴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하는 마 음 이 있었다는 기록처럼 그의 내면에는 늘 우울한 정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15) 타고난 성격일 수도 있으 나 우울함의 근저에는 서출이라는 신분의 벽이 주는 답답함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처지가 그러다 보니 그의 성격 또한 강직하고 곧으며, 남과 마음이 잘 맞지 않으며, 아첨해서 세상에 출세하는 것을 허 락하지 않았다. 고도 한다. 16) 벼슬을 그만 둘 무렵 그 울적함은 더하여 외직에 있던 1748년 그가 사촌동 생인 욱상( 旭 祥 )에게 보낸 편지글에 말세에 태어나 하급관리를 하는 것은 생명을 단축시키거나 정신이상 을 일으키기 알맞은 일 이라는 푸념을 하곤 하였다. 17)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는 동안 절친한 벗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1757년에는 아내 덕수 장씨마저 세상을 떠나는 등 개인적인 불행이 이어지면서 이인상의 삶은 더욱 우울한 나날이었다. 이어지는 우환에 그는 1753년 막내아들을 낳고는 복 없는 사람은 자식을 많이 두는 것도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닐세. 라 며 탄식할 정도에 이르렀다. 18) 1760년 이인상도 여덟 살 어린 아들을 두고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 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예 부흥기에 남종문인화풍의 담박한 회화로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였지만, 이인상은 가슴속에 서출이라는 신분으로 인한 우울함을 안고 살아갔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합리성을 사회 적 차원에서 찾아보며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는 사대부 그 누구보다도 더 사대부다운 학식과 교양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면서 그 설움의 피해를 보상받고자 하였다. 19) 2) 경제적 빈곤 거. 15) 子 之 平 生 孤 高 潔 白 操 躬 希 古 立 心 違 俗 玄 通 之 識 壹 鬱 之 氣, 祭 李 元 靈 文, 黃 景 源, 江 漢 集 제22권. 너. 16) 君 爲 人 剛 介 寡 合 不 肯 媚 世 爲 進 取. 李 元 靈 墓 誌 銘, 黃 景 源, 위의 책, 더. 17) 이인상의 편지는 임창순, 李 麟 祥 의 手 簡, 미술자료 제14호(국립중앙박물관, 1970), 4, p. 29. 러. 18) 임창순, 위 논문, p. 31. 머. 19) 유홍준, 앞 논문(1983), p 그러한 예는 그가 명의 유민으로서 의리를 지켜 야 한다는 고민 속에 평생을 살았던 것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다.

6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재물을 모으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보니 시서화에 빼어난 경우라도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었던 문인화가들은 부유한 집안의 후손이 아닌 이상 경제적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예단의 총수로 불리는 문인화가 강세황조차도 60세 이후 벼슬길에 나가기까지 가난하여 처가가 있는 안 산에 초라한 고옥을 마련하였고, 집안 살림이 형편없어 채소와 식량을 이어대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나 개 의치 않고 책과 필묵으로 스스로 즐겼다. 고 할 만큼 양반일지언정 벼슬하지 않은 선비들의 곤궁한 이야 기는 수없이 전한다. 20) 비록 서출이나 고관대작의 자손이었고 낮은 직급이지만 12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였음에도 이인상이 가 난하여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자 친구 송문흠( 宋 文 欽, 1710~1752)과 신소( 申 韶, 1715~1755)가 돈을 모 아 남산 기슭에 단칸집을 사주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문인서화가들의 형편을 짐작케 한다. 21) 그런 상황이다 보니 그림으로 연명을 하던 직업화가들의 삶은 더욱 곤궁하기 그지없었다. 그림을 팔아 생활을 하였던 여항출신 직업화가 최북의 모습을 다 쓰러진 초가집에 네 벽에는 찬바람이 나는구나. 유 리안경, 나무필통 종일 문을 닫고 산수를 그린다. 아침에 한 폭을 팔아 아침끼니, 저녁에 한 폭을 팔아 저 녁끼니. 22) 라고 그렸던 신광수의 표현대로 그림 한 폭으로 겨우 한 끼 식량을 해결하였으며 그나마 팔리 지 않으면 닷새고 열흘이고 굶기 일쑤였다. 최북을 가까이에서 본 정범조는 그가 가난이 뼈에 사무쳐 머 리가 허옇도록 장안에서 기예를 팔아 연명하였다 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23) 문인들과 교유하고 화가로서 인정을 받았음에도 최북은 신분의 열세와 함께 가난이라는 현실적 어려움 이 더하면서 양반의 횡포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기행을 일삼아 그에 관한 일화가 수없이 전한다. 어느 날 구룡연에 들어갔는데 그 경치가 사뭇 즐거워 술을 잔뜩 마시고 울다 웃다 하더니 이윽고 소리를 지르 며 천하명인 최북이는 천하명산에서 죽어야 한다 하고는 못에 뛰어들어 거의 구할 수 없을 뻔하였다고 전한다. 24)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던 그는 급기야 그림을 요구하는 귀인의 협박에 분노하여 남이 나 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 구나! 라 외치며 자신의 한 쪽 눈을 찌르는 자해까지 하 고야 만다. 25) 여러 일화를 남기며 거침없는 행동을 하였던 최북은 천성이 오만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 다 거나, 26) 사람 됨됨이가 격앙( 激 仰 )하고 밀쳐도 꿈쩍하지 않으며[ 排 兀 ], 작은 규범에 스스로 구속되는 버. 20) 강세황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는 변영섭, 표암 강세황 회화연구 (일지사, 1988), p. 15. 서. 21) 公 素 家 貧 不 自 治 生 僦 屋 而 居 宋 申 諸 公 倣 康 節 天 津 故 事 集 錢 買 宅 於 漢 師 南 山 之 阿 扁 其 觀 曰 凌 壺, 凌 壺 李 公 行 狀, 吳 熙 常, 老 洲 集 제 20권. 어. 22) 崔 北 賣 畵 長 安 中, 生 涯 草 屋 四 壁, 閉 門 終 日 畵 山 水. 琉 璃 眼 鏡 木 筆 筒, 朝 賣 一 幅 得 朝 暮 賣 一 幅 得 暮 飯. 崔 北 雪 江 圖 歌, 申 光 洙, 石 北 文 集 卷 6. 저. 23) 丁 範 祖, 海 左 先 生 文 集. 처. 24) 嗜 酒 喜 出 遊 入 九 龍 淵 樂 之 甚 飮 劇 醉 或 哭 或 笑 已 又 叫 號 曰 天 下 名 人 崔 北 當 死 於 天 下 名 山 遂 翻 身 躍 至 淵 旁 有 救 者 得 不 墮, 조희룡, 壺 山 外 記, 조희룡 전집 6(한길아트, 1998), pp. 59~60. 커. 25) 一 貴 人 要 畵 於 北 而 不 能 致 將 脅 之 北 怒 曰 人 不 負 吾 吾 目 負 吾 乃 刺 一 目 而 眇 老 挂 靉 靆 一 圈 而 已 趙 熙 龍, 壺 山 外 記, pp. 59~60.

7 일이 없었다. 27) 는 등 보는 시각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성격은 오만하고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면은 호생관 이라는 그의 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여러 개의 호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호생관 에 대해 그 뜻을 묻는 자가 있으면, 문득 비 웃으며 말하길, 나는 붓끝으로 먹고 산다 라고 하였다 는 것이다 28). 호생관이라는 호는 37세 때의 작품 에도 사용하고 있어서 중년에도 썼던 것으로 보이나 특히 후반기에 주로 사용하였다. 29) 그림으로 명성을 얻어 활발히 활동하던 30대 때 보다는 그림을 팔아 연명하던 50대 이후 작품에 더 많아진 것을 보면 붓 끝에서 태어난다 는 예술가의 창조적 능력을 가리키는 긍정적 의미 보다 가난한 직업화가로서의 자조적 의미로 더 자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0)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외눈 이었지만 술 석 잔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 던 그는 그 옛날 대가라던 안견 이징 작품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술에 취해 미친 듯 붓을 휘두를 요량이면 큰 집 대 낮에 산수풍경 생겼다 고 할 만큼 당대 산수화로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그림 한 폭 팔고는 열흘을 굶더 니 어느 날 크게 취해 한밤 중 돌아오던 길 성곽 모퉁이에 쓰러졌다 는 신광하의 노래처럼 만년에는 언제 어떻게 살았는지 확실치 않은 가운데 눈 속에 얼어 죽었다는 소문만이 전한다. 31) 비록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화가였지만 예술에 대한 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던 최북은 계급사회 체제의 모순에 저항하고 좌절하면서 자기의 울분을 엉뚱하고 파격적인 시를 쓰고 기이한 행동 을 함으로써 풀었다. 32) 그는 신분은 낮고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하여 하루하루 붓으로 먹고 살아야 하였 터. 26) 七 七 性 亢 傲 不 循 人, 崔 七 七 傳, 南 公 轍, 金 陵 集 十 三, 한국문집총간 272,(민 족문화추진회, 2001); 같은 내용이 李 慶 民 (1814~1883), 熙 朝 軼 事 (서강대학교 인 문과학연구소, 1990), p. 121에도 실려 있다. 퍼. 27) 爲 人 激 仰 排 兀 不 以 小 節 自 束, 조희룡, 호산외기, 조희룡전집 6(한길아트, 1998), pp. 59~60. 허. 28) 晩 以 毫 生 銘 其 館, 人 有 問 者, 輒 謬 應 曰 吾 以 毫 端 作 生 涯 也. 이 내용은 석농 김광국 이 최북의 그림 < 雲 山 村 舍 圖 >에 쓴 발 중에 쓰여 있다. 황정연, 석농 김광국이 애장 한 그림들, 문헌과 해석 20호,(문헌과 해석사, 2002), p 고. 29) 변혜원, 毫 生 館 崔 北 (1712~1786)의 生 涯 와 繪 畫 世 界 硏 究, 고려대학교대학원 문화재협동과정 미술사학전공 석사학위논문, , pp. 6~7. 노. 30) 毫 生 館 이라는 의미를 李 奎 景 (1788~?)이 詩 家 点 燈 의 畵 名 毫 生 에서 동기창 의 容 台 集 의 내용을 차인하여 붓으로 태어나게 한다 는 뜻으로 본 바가 있음을 예 로 들며 시서화일치와 사의성을 중시하는 남종문인화의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 아 닌가 보기도 한다. 홍선표, 최북의 생애와 의식세계, 미술사연구 5(미술사연구회, 1991), p. 26. 도. 31) 君 不 見 崔 北 雪 中 死, 貂 裘 白 馬 誰 家 子 汝 曹 飛 揚 不 憐 死. 北 也 卑 微 眞 可 哀, 北 也 爲 人 甚 精 悍 自 稱 畵 師 毫 生 館. 軀 幹 短 小 眇 一 目, 酒 過 三 酌 無 忌 憚. 北 窮 肅 愼 經 黑 朔, 東 入 日 本 過 赤 岸. 貴 家 屛 幢 山 水 圖, 安 堅 李 澄 一 掃 無, 索 酒 狂 呼 始 放 筆. 高 堂 白 日 生 江 湖, 賣 畵 一 幅 十 日 餞, 大 醉 夜 歸 城 隅 臥, 借 問, 北 邙 塵 土 萬 人 骨, 何 如, 北 也 理 却 三 丈 雪. 嗚 呼 北 也, 身 雖 凍 死, 名 不 減., 申 光 河, 崔 北 歌, 震 澤 先 生 文 集 二 (경인문화사, 1994), pp. 110~111. 로. 32) 그의 시 중 놀기 좋아하는 사람을 읊은 冶 遊 郞 이라는 시를 보면 그의 엉뚱한 성

8 다. 술에 취해 미친 듯 붓을 휘둘렀다는 그에게 있어서 술은 힘겨운 현실을 버티게 하는 일종의 마약 같 은 것이었으며, 술로 인한 기행은 세상에 대한 분풀이였다. 33) 3) 편견과 멸시 부귀와 가난은 어쩌면 신분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최북은 팔아 연명할 그림재주라도 있지만 그도 없이 양반이라는 허울만 가졌을 뿐 글만 읽는 선비들도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분이 낮으면 으레 인격도 낮다는 편견과 멸시는 문인의 소양을 두루 갖춘 여항문인화가들에게는 더 참기 어려운 일이 었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다방면의 저술을 남긴 저술가, 평론가, 서화가로서 두루 인정을 받았고 경제적 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던 조희룡이었지만 평소 신분 때문에 받는 부당한 대우도 적지 않았다. 조희룡과는 스승과 제자로 알려지기까지 할 정도로 가까웠으나 김정희는 아들 상우에게 난 법에 대해 적어 보낸 편지에서 조희룡 같은 무리는 나에게서 난초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그의 가슴속에 문자의 향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34) 조희룡에 대해 조희룡배( 趙 熙 龍 輩 ) 라는 용어를 쓴 것이나 가슴 속에 문자기가 없다 라고 한 것은, 조희룡의 학식이 자 신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조희룡의 신분에 대한 비난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 다. 김정희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처지였음에도 조희룡은 김정희의 심복이라는 명목으로 1851년 전남 신안 군 임자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헌종의 묘천문제에서 비롯되어 양사에서 김정희와 그의 형제들을 절도 안치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희룡이 김정희의 복심( 腹 心 )으로 심엄( 深 嚴 )한 곳을 출입하면서 사찰( 伺 察 )하 여 무슨 계획을 긴밀하게 준비하였다는 죄목이다. 35) 격을 볼 수 있다. 백마교 다리 위에 서니, 미풍에 버들 꽃 떨어지네. 채찍을 들어 동 쪽 길로 오르노니, 어디에 창녀촌이 있는고( 白 馬 橋 頭 立, 微 風 落 柳 花. 揚 鞭 東 陌 上, 何 處 是 娼 家 ), 冶 遊 郞, 風 謠 續 選. 모. 33) 최북에게 있어서 술은 예술적 영감의 촉매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연담 김명국이나 오원 장승업의 술과는 질을 달리 한다고 보기도 한다. 최북에 관한 유홍준, 호생관 최북-붓으로 먹고 살다간 칠칠이의 이야기, 역사비평 vol. 14(역사문제연구소, 1991), p 보. 34) 如 趙 熙 龍 輩, 學 作 吾 蘭, 而 終 未 免 畵 法 一 路, 此 其 胸 中, 無 文 字 氣 故 也 金 正 喜, 阮 堂 全 集, 민족문화추진회 편역, 국역 완당전집 1(솔, 1995) p 소. 35) 실록에 적힌 조희룡의 유배 죄목은 다음과 같다. 또 그가 이른바 체결했다고 하는 액속( 掖 屬 )은 바로 오규일( 吳 圭 一 )과 조희룡( 趙 熙 龍 ) 부자( 父 子 )가 그들입니다. 하나는 권돈인의 수족( 手 足 )이 되고 하나는 김정희의 복심( 腹 心 )이 되어 심엄( 深 嚴 )한 곳을 출입하면서 사찰( 伺 察 )한 것은 무슨 일이겠으며, 어두운 밤에 왕래하면서 긴밀하 게 준비한 것은 무슨 계획이겠습니까? 빚어낼 근심이 거의 수풀에 숨은 도둑과 같아 장래의 화( 禍 )가 반드시 요원( 燎 原 )을 이룰 것이니 어찌 미천한 기슬( 蟣 虱 )의 유( 類 )라 하여 미세한 때에 방지하여 조짐을 막는 도리를 소홀히 하겠습니까? 청컨대 김정희는

9 더구나 그를 칭하여 미천한 기슬( 蟣 虱 )의 유( 類 ) 라 하여 천시하였으며, 그럼에도 빚어낼 근심이 거의 수풀에 숨은 도둑과 같아 장래의 화( 禍 )가 반드시 요원( 燎 原 )을 이룰 것이니 미세한 때에 방지하여 조 짐을 막는 도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대신들의 상소는 여항인으로서의 그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설 명해주고 있다. 그가 당시 어떤 일을 직접 도모하지는 않았음에도 신분이 낮았고, 그럼에도 문인과 다름 없는 식견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김정희와 엮어 유배를 보 낸 것은 당시 날로 성장해가는 여항인의 세를 제거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36) 그러한 혐의는 북청으로 유배를 갔던 김정희가 1년 만에 해배되었던 것과는 달리 조희룡은 3년에 걸쳐 19개월의 유배생활을 했다 는 데서 분명해진다. 이렇게 해서 가게 된 유배지에서의 고독과 고통을 조희룡은 친구 이기복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도소리 도 우는 것 으로 들리고, 자신의 처지도 울지 않고 견딜 수 없다 고 쓰고 있다. 37) 어의를 지낸 의역중 인으로 헌종에게 올린 약이 효험이 없었다는 이유로 그보다 먼저 강진 고금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던 이 기복에게 보낸 편지였기에 동병상련의 아픔을 전하는 그 내용은 더 절절하였다. 비록 여항인이었지만 개국공신이었던 무반 집안에서 태어나 시서화삼절이라 불렸던 조희룡도 그런 대 접을 받았다면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하며 협박을 했던 양반의 태도는 당시 사회에서는 어쩌면 자연스러 운 것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8) 신분사회에서 낮은 신분 때문에 받은 멸시와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18세기 최고의 화원화가로 알려진 김홍도였지만 그의 몰년이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을 만큼 만년은 쓸쓸하였고, 생활 형 편도 좋지 않아서 아들의 수업료조차 마련하기 어려웠으며, 그 때문에 크게 낙담을 하고 있었던 정황이 확인된다. 39)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임에도 화원이라는 신분의 한계, 그로 인해 시대가 바뀌자 더 이상 알 빨리 절도( 絶 島 )에 안치( 安 置 )를 시행하고, 그의 아우 김명희( 金 命 喜 ) 김상희( 金 相 喜 ) 에게는 아울러 나누어 정배하는 벌을 시행하며, 오규일( 吳 圭 一 )과 조희룡( 趙 熙 龍 ) 부 자 역시 해조로 하여금 우선 엄히 형문( 刑 問 )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쾌히 해당되는 율 을 시행하소서. 철종 2년 신해(1851, 함풍 1) 7월 21일(을사). 한국고전번역원, 조선 왕조실록 번역 검색. 오. 36) 이처럼 무리와는 차이 를 보이는 타인 이 갖고 있는 잠재적 징후를 문제 삼아 추 방하거나 제거하려했던 것은 지라르가 박해의 상투적 전형으로 보았던 것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르네 지라르, 김진식 옮김, 희생양 (민음사, 1998), pp. 25~42. 조. 37) 저는 날마다 바닷가에 가서 물 구경을 합니다. 맑고 넓은 것은 그 본성이요, 용 솟음치고 급하게 흐르며 파도치는 것은 우는 것으로 그 지형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 인가 봅니다. 저의 사정은 이 막다른 지점에 이르러서 어찌 울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 니까( 第 日 臨 海 岸, 得 水 觀 焉, 澄 澹 汪 洸 其 性 也. 湧 湍 灂 激 其 鳴 也, 其 地 使 然. 吾 事 到 此 地 頭, 豈 能 不 鳴 已 乎?), 壽 鏡 齋 海 外 赤 牘 42항, 조희룡 전집 5, p. 64. 초. 38) 一 貴 人 要 畵 於 北 而 不 能 致 將 脅 之 北 怒 曰 人 不 負 吾 吾 目 負 吾 乃 刺 一 目 而 眇 老 挂 靉 靆 一 圈 而 已 趙 熙 龍, 壺 山 外 記, 조희룡전집 6(한길아트, 1998), pp. 59~60. 코. 39) 檀 園 遺 墨 帖 의 1805년 11월 29일자 김생원에게 보낸 편지에 못난 아우는 가 을부터 위독한 지경을 여러 차례 겪고 생사 간에 오락가락하였으니 오랫동안 신음하 고 괴로워하는 중에 한 해의 끝이 다가오매 온갖 근심을 마음에 느껴 스스로 가련해

10 아주는 이도 쓰임도 없는 한 인간이 된 그의 고독한 독백은 몇 개의 편지글과 함께 만년에 그린 <추성부 도( 秋 聲 賦 圖 )>를 통해서 읽혀지기도 한다. 40) 3. 화폭에 실은 분노 신분에 따른 불평등을 겪은 화가들이 그림으로 불만을 표현하고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 다. 각자의 성격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그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첫째, 울 분을 억누르고 자신을 다스려 작품을 탈속한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 간 유형이다. 여러 문인화가들이 있었 지만 스스로 고고한 문인이고자 했고 또 그렇게 평가받는 조선 후기 이인상이 대표적이다. 둘째, 취광( 醉 狂 ), 즉 대취하여 미친 듯 하며 그런 가운데 작품을 완성한 유형이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조선 중기에 김명국이 있었고, 후기의 최북, 그리고 말기에는 장승업 같은 화가가 그들이다. 셋째,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켜 새로운 화풍을 선도해 나간 유형이다. 속종 대 실세한 남인 윤두서가 풍속화와 사실주의 적 묘사력으로 조선 후기를 열었던 것처럼 19세기에는 여항화가 조희룡을 꼽을 수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작가가 처한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현실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인상, 최북, 조희룡을 중심으로 슬프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화가들은 이를 어떻 게 표출하며 극복하였는지 살펴보겠다. 1) 탈속한 예술의 경지 서출이라는 설움을 안고 살았지만 이인상은 당대 누구보다도 높은 이상을 지닌 문인화가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 41) 문인화가로서의 순수한 예술성을 간직한 이인상의 서화는 대교약졸의 고졸미, 탈속한 담백미, 은일적 청절미 등으로 특징 지워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특 징은 삶의 여정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보인다. 42) 그의 화풍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붓질을 최소화한 담박한 화풍이나 소재 면에서 소나무를 즐겨 그리는 경향은 20대 초반부터도 나타난다. 이는 그의 타고난 강직한 성품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25세 때 작품 한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라 쓰고 있다. 區 區 弟 自 秋 至 屢 經 危 毒, 出 沒 生 死 長 事 叫 苦 中 歲 色 垂 窮 百 憂 感 心, 自 憐 奈 何. 檀 園 遺 墨 帖 33쪽. 토. 40) 이선옥, 비상의 공명-구양수와 김홍도의 추성, 감성연구 제4집(호남학연구 원, ), pp. 187~215. 포. 41) 유홍준, 李 麟 祥 繪 畫 의 形 成 과 變 遷, 미술사학연구 vol. 161(한국미술사학회, 1984), p. 32 호. 42) 신은숙, 凌 壺 觀 李 麟 祥 의 藝 術 精 神 硏 究,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동양사상문 화학과 석사학위논문, pp. 64~95.

11 인 <한거도( 閑 居 圖 )>를 보면 그의 전반적인 특징과 함께 당시 문인화가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중국 에서 발간된 수많은 화보들을 보며 이에서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구성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30대 중앙관리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이윤영, 송문흠, 오찬 등 학식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며 시회를 가 졌고, 때때로 산수를 찾아 여행하며 비록 궁핍하지만 낭만적인 면도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작품은 초기의 화본 풍에서 벗어나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메마르고 정갈한 분위기의 작품들에서 삼엄한 인상과 함께 문인다운 기품이 느껴지며, 주제에 역점을 두고 배경을 생략하거나 소흘히 다루는 그의 특징이 엿보 인다. 그럼에도 설채법이나 화면전체의 분위기가 맑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점이 40대 은거시절과는 확 연한 차이를 보인다. 43) 그가 편지를 통해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를 드러냈던 40대 작품은 외 직생활과 은거시절의 심회가 가탁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관직에서 물러나 설 성 에 은거하였던 이인상은 그곳에 지은 종강모루( 鍾 崗 茅 樓 ) 라는 조그만 정 자에 이 곳에 은거하여 세속에 들지 않고 두문불출하여 경서나 읽겠노라 는 좌 우 명 을 새겨놓기도 하였다. 44) 은일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새긴 것으 로, 이러 한 태도는 그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이 시기에 제작한 <추강묘연도 ( 秋 江 渺 然 圖 )>, <남간추색도( 南 澗 秋 色 圖 )>, <누하관폭( 樓 下 觀 瀑 )> 등은 성 긴 나무 들과 빈 정자가 주는 쓸쓸한 시정을 드러낸다. 특히 1754년의 관지가 있는 <송하독좌도( 松 下 獨 坐 圖 )>는 소나무 아 앉아 있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세상에 초연한 고결함과 처연함의 정서를 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검선도( 劍 仙 圖 )>는 검과 관련 신선 여동빈( 呂 東 賓 )의 도상을 차용한 것임에도 근엄한 선인의 자세나 분위기는 이 시기 그의 자화상 같은 느낌을 준다(그림 3). 이 무렵 그는 특히 원대 문인화가 예찬( 倪 瓚, 1301~1374)식 갈필을 용하고 있는데, 갈필은 단순히 기법상의 용어가 아니라 예찬을 의미하 로 문인화가들에게 그것은 우울하고 쓸쓸한 감정을 드러내는 주된 상 현이었다. 45) 이인상 회화에 있어서 그러한 갈필의 효과가 극대화된 작품이 <병 할 수 있다(그림 4). 마른 붓으로 고개 숙인 국화 한 그루를 끊어질 그림 3) 이인상, <검선도>, 지 본담채, 96.7x61.8cm, 국립중앙박물관 래 홀로 함께 보 이 있는 쓸 쓸 한 주로 사 는 것으 징적 표 국도>라 듯 이어 구. 43) 유홍준, 위 논문, p. 40. 누. 44) 小 樓 容 吾 潛 居 有 銘 文 不 浮 實 行 不 狥 名 語 不 入 俗 그림 讀 4) 不 이인상, 出 經, <병국도>, 茅 樓 銘, 李 종이에 먹, 28.6x15cm, 麟 祥, 凌 壺 集 卷 之 四. 국립중앙박물관 두. 45) 명말 유민화가 작품에서 갈필의 사용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Fu Shen, An Aspect of Mid-seventeenth Century Chinese Painting: The Dry Linear Style and the early Work of Tao-chi 明 遺 民 書 畵 硏 討 會 記 錄 ( 香 港 中 文 大 學 文 化 硏 究 所 學 報 ), 1976, p 김수진, 능호관 이인상의 문학과 회화에 대한 일고찰, 고전문 학연구 (한국고전문학회, 2004), p. 307에서 재인용.

12 지게 그린 것으로 그림 한편에 병든 국화를 겨울날 그렸다 고 써놓았듯이 철지나 시든 국화를 그린 것이 다. 이 그림에서 말라빠진 국화 한 그루가 주는 처량한 느낌은 그가 국화를 심어놓고도 공무에 시달려 다 시든 다음에야 한 송이 꺾어본다 던 찰방시절의 하소연이나, 쓸쓸히 보내던 그의 말년의 처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46) 더구나 국화는 진나라의 은일시인 도연명을 상징하는 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80일 만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도연명과 관찰사와의 불화로 관직에서 물러난 그의 행동을 연결 그림 5) 이인상, <설송도>, 종 이에 수묵, 17.2x52.4cm, 개인 시켜주는 상징성 또한 갖고 있어 더욱 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인상의 만년작으로 생각되는 <설송도( 雪 松 圖 )>에서 눈 덮인 바위의 예 리한 각이나 눈보라에 휘어진 소나무 가지, 거기에 아예 90도로 굽은 소나무 한 그루는 이상과 현실의 자신을 한 폭에 그린 듯하다(그림 5). 그는 평소에 변치 않는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의 이미지를 좋아하여 자주 그렸고, 벗 송 문흠의 올곧은 태도를 소나무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47) 이에 표현된 굽은 소 나무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송하관폭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하 늘을 향해 곧게 자랄 수 없는 힘든 현실에 대한 항변으로 보인다. 그는 문인으로서 암울한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괴로워하면서 또 한편으로 는 소외되고 고립되는 이중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였다. 48) 눈은 날로 냉소 적으로 되고 마음은 날로 쓸쓸해진다. 고 토로하는 글로 인해 이인상을 문인 으로서의 도의를 지키려는 강개한 인물로 보려는 시각도 있다. 49) 현실과 타 협을 거부하던 그의 강개함의 이면에는 세상에 대한 격리감과 고독함이 감추 어져 있다. 문인들과 교유하고 낮은 벼슬을 얻었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의 이상과는 달리 세상에서 크게 쓰일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미친 듯 붓을 휘둘러 쏟아낸 울분 날카롭고 강한 성격으로 기행을 일삼았던 최북은 시서화를 겸비한 최초의 조선 후기 여항출신 직업 화 가이다. 50) 그는 당시 새롭게 수용된 남종화풍을 자기화하여 독특하고 개성있는 화풍을 이룩한 화가이다. 루. 46) 1748년 종형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내용이다. 임창순, 위 논문, p.29. 무. 47) 貞 吉 如 松 柏, 宋 士 行 歸 去 來 館 雜 詠, 凌 壺 集 卷 之 二. 부. 48)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그가 지식인으로서 가졌던 울분은 명나라가 망하고 중화와 오랑캐가 뒤섞여버려 옛 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문집 중에 그의 벗들 과 나눈 여러 글 중에서 읽혀진다. 이에 대해서는 김수진, 앞 논문, pp. 294~299. 수. 49) 自 覺 眼 日 日 冷, 志 意 日 孤, 答 李 子 胤 之 書, 凌 壺 集 卷 3 ; 김수진, 앞 논문, p 우. 50) 최북은 당대의 기록에도 경성여항인( 京 城 閭 巷 人 ) 으로 알려져 있다. 崔 北 字 七

13 산수화뿐만 아니라 매화를 비롯한 사군자화나 화조나 등에서도 이름을 얻어 37세 때는 일본에 간 통신사 를 수행하였는데 그림을 청하는 자가 줄을 이었고, 그의 화풍이 일본의 남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도 하였다. 51) 일본을 다녀 온 이후부터 50대 초반까지에 해당하는 중년에는 단양, 금강산 등 조선의 산 천을 다니며 진경산수화를 제작하였고, 중국의 문인화가 황공망이나 예찬 등의 필의를 따라 갈필을 사용 한 남종문인화풍을 추구하였다. 50대 중반부터는 문인의식을 표방하며 사의적 남종화풍을 추구함과 동시 에 최북의 개성이 한껏 드러난다. 이 시기에 그는 탈속적인 소재를 선택하고 사대부문화를 지향하기도 하 였다. 52) 이미 그림실력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앞서 괴팍하고 거친 성격 때문에 빚어진 여러 일화에서 본 것 처럼 최북의 그러한 기행은 예술가로서 자부심의 소산이었다. 그로써 그림과 관련된 일화도 수없이 남기 고 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줄 것을 청하자 그는 화면 가득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 그림 6) 최북, <풍설야귀인>, 지 본담채, 66.3x42.9cm, 개인 았다. 그 사람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일단 붓을 놓고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아 화 면 밖이 모두 물이 아니겠소 라 하였다고 전한다. 53) 어떤 때는 그림이 잘 되어 득의작인데 주는 값이 적으면 문득 화를 내고 욕하 고는 그 그림을 찢어 없앴고, 반대로 잘못 되었는데도 그림 값을 많이 주면 껄껄 웃으면서 주먹으로 그 사람을 밀며 도로 주어 문밖으로 내보내고는 손가락질을 하 며 저 녀석은 그림 값도 모르네 라고 비웃기도 하였다. 54) 그림에 대한 자부심은 매우 강하였지만 그의 그림은 화보를 통한 남종문인화풍 을 반복적으로 그려 당대 추구하던 실경산수의 감동은 적었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 다. 최북과 가까웠던 신광수는 날이 차갑고 손님은 헌 방석에 앉았는데, 문 앞 작 은 다리에는 눈이 세 치나 쌓였네. 여보게 내가 올 때 본 설강도를 그려주게(중 략), 어찌 패교라 고산이라 풍설 속에 맹처사 임처사만 그려야 하는가(하략). 라 하였다. 55) 최북이 당나라 때의 은일시인 맹호연이나 북송대의 은일시인 임포 같 七 號 毫 生 館 又 號 三 奇 齋 生 寒 微 或 曰 京 城 閭 巷 人 이규상, 幷 世 才 彦 錄, 一 夢 先 生 文 集 (경인문화사, 1993) p 주. 51) 변혜원, 앞 논문, p. 69. 추. 52) 사대부 문화를 지향하였던 것은 당시 여항문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대체로 여항문인들은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직분도 궁궐이나 중앙각 사를 출입하며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목도한 고급문화에 대한 선망이 있 었다. 엄격한 신분제하에서는 어려웠던 상층문화에 대한 욕망을 신분제가 해체되어 가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는 표출해 낼 수 있었다. 쿠. 53) 人 有 求 爲 山 水, 畵 山 不 畵 水. 人 愧 詰 之, 七 七 擲 筆 起 曰, 喉 紙 以 外 皆 水 也 南 公 轍, 앞의 책. 투. 54) 畵 得 意 而 得 錢 少 則 七 七 輒 怒 罵 裂 其 幅 不 留 或 不 得 意 而 過 輸 其 直 則 呵 呵 笑 拳 其 人 還 負 出 門 復 指 而 笑 彼 竪 子 不 知 價., 崔 七 七 傳, 金 陵 集 권13. 푸. 55) 天 寒 坐 客 破 毾 上, 門 外 小 橋 雪 三 寸. 請 君 寫 我 來 時 雪 江 圖.(중략) 何 必 霸 橋 孤 山 雪 理, 但 畵 孟 處 士 林 處 士,, 崔 北 雪 江 圖 歌, 申 光 洙, 石 北 文 集 卷 6.

14 은 중국의 고사( 故 事 )나 그리면서 지금 창 밖에 내린 눈을 보면서 받은 감동적인 풍경은 좀처럼 그릴 줄 모른다며 힐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처럼 기골찬 성격과는 달리 최북의 산수화는 실경산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화본을 따른 남종 화풍의 부드러운 작품이다. 당시 남종문인화풍을 따른다는 것은 대체로 고씨화보 나 당시화보 등을 보고 이를 베끼거나 변형시켜 그린 것이다. 그림을 팔아 먹 고살아야 하는 형편에서 아침저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면 다작을 하였을 것이 고, 그러다 보면 한 폭 한 폭에 감정을 실은 훌륭한 작 품을 기대하기 란 어렵기도 하다. 그렇지만 간혹 그의 작품 중에는 그가 행한 기행처럼 강한 작가적 정서가 반영된 작품이 눈에 띤다. 그의 만년작으로 생 각되는 <풍설 야귀인( 風 雪 夜 歸 人 )>과 <공산무인도( 空 山 無 人 圖 )>는 그의 다른 작 품들과는 달리 분위기는 암울하면서도 필치는 호방하여 그의 기이한 일생을 보는 듯하다. 56) 그림 7) 최북, <공산무인도>, 종이에 담채, 33.5 x 38.5cm, 개인 <풍설야귀인>은 제목 그대로 눈보라 치는 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동자를 데리고 방 한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먼 길을 다녀온 듯 무척이나 무거워 보인다. 산은 눈에 덮여 꽁꽁 얼어 있는 듯 굵은 윤곽선으로 추상적으로 처리한 후 거친 붓질로 빼죽이 나온 나무들을 표현 하였다. 오두막 옆에는 눈보라에 한쪽으로 쏠린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이 서있고, 싸리문에서는 검정 강 아지 한 마리가 나와 지나는 이들을 반긴다. 적막한 산골에 눈까지 내려 사람이 얼마나 귀했는지 짐작이 간다. 매우 빠르고 스스럼없는 붓놀림의 동세는 겨울바람의 삼엄함을 실감나게 한다. 눈 쌓인 산이나 집 모양, 인물 등 각각의 경물은 익숙한 남종화의 소재이다. 그럼에도 눈길을 걷는 이에서 눈 속에 쓰러져 죽은 최북을 연상한 것은 좀 과장일지 모르지만 겨울 산수의 분위기는 신광수가 최북에게 요구했던 것 같은 눈 쌓인 풍경을 자신의 느낌대로 그렸음직한 독특함이 있다. 50대 이후 그의 작품에 설경( 雪 景 )이 유난히 많은 것도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공산무인도>는 절묘한 먹빛의 구사로 쓸쓸한 분위기 묘사에 성공한 작품이다(그 림 7). 화면 오른쪽으로는 키 큰 나무와 초가 정자를 담묵의 필선으로 소략하게 묘사하였고, 왼편에는 작 은 폭포를 이룬 계곡을 두었다. 계곡의 겹쳐 바른 농묵과 그 위에 덧칠한 담청의 흔연한 조화는 여름날 계류에서 일어나는 물안개의 느낌까지 전해준다. 왼편 상단에는 북송대 시인 소식의 빈 산엔 사람이 없 으나,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空 山 無 人 水 流 花 開 ) 라는 화제가 화면을 압도하듯 크게 적혀있다. 물 흐르 고 꽃이 피는 평화로운 정경일 수 있으나 빈 정자에 쓸쓸함이 더 느껴지는 것은 습윤하면서도 차분한 먹빛이 주는 분위기 때문이다. 어두운 먹빛의 스산한 분위기는 그의 내면의 우울함을 풀어낸 듯하다. 그 후. 56) 유홍준은 앞 논문(1991) pp. 399~400에서 이 두 작품을 그의 명작으로 꼽고 있 으며, 변혜원 또한 앞 논문(2007) p. 92에서 후기의 방일한 특징이 잘 나타난 작품으 로 보고 있다.

15 에 더하여 큼직하게 써내려간 화제는 그의 호방한 성품을 보여준다. 최북은 미천한 신분과 그로 인한 지독한 가난, 멸시 등을 술을 마시고, 자신의 눈을 찌르거나, 구룡연에 뛰어드는 것 같은 미치광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풀어나갔다고 할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 당시 유행하는 화풍을 밤낮으로 그려 당대 이름을 날렸지 만, 여러 평론가들이 <풍설야귀인>이나 <공산무인도> 같은 작품을 그의 득의작으로 보는 것은 그가 취한 광적인 행동과 부합하며 그의 억눌린 울분을 쏟아놓은 것 같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3) 예술로 승화시킨 울분 그림 8) 조희룡 <황산냉운 도> 지본수묵, 124x26cm, 개인 여항화가 이면서 동시에 적지 않은 저술을 남긴 문인 이었던 조희룡 또한 대대로 높 은 벼슬을 한 집안의 서인계열( 庶 人 系 列 ) 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그의 예술 감성 또한 이러한 특수성에 기인하여 문인소양을 갖춘 예술가로서의 자부심 과 함께 여항인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울분 이라는 양면성을 보였다. 57) 그러한 면에서 그 의 작품 또한 문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표현한 문인화 계열과 함께 자신의 감성 을 강하 게 드러낸 작품이 있다. 양면을 모두 갖고 있음에도 그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후자에 방 점을 두는 것은 그러한 작품이 그만의 개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화가로서 조희룡은 힘차고 화려한 매화도로 19세기 화단을 새롭게 열어간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58) 1851년 전남 신안군 임자도로 유배를 가게 된 조희룡은 그의 가슴 속 근심과 답답 함을 떨치는 수단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고 수차에 걸쳐 말한다. 그러한 심경을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가) 손 가는 대로 이리저리 그리노라면 먹 기운이 무르녹아 가슴속의 불편한 기운을 쏟아내니, 문득 소슬하고 높은 뜻이 있음을 깨닫는다. 오직 이 한 가지 일이 일체 의 고액을 극복해가는 법이다. 59) 유배지에서의 가슴 속 울분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는 평소에도 성난 기운으로 대나무를 그리고, 기쁜 기운으로 난을 그린다 60) 는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묵죽에 쓰곤 하였는데, 유배 시에 유난히 묵죽을 그. 57) 이선옥, 조희룡의 감성과 작품에 표현된 미감, 호남문화연구 제45집(호남학 연구원, ), pp. 205~241. 느. 58) 이선옥, 19세기 여항화가들의 매화도, 전남사학 제25집(전남사학회, 2005), pp. 145~185. 드. 59) 信 手 塗 抹, 墨 氣 淋 漓, 以 瀉 胸 中 磈 磊, 輒 覺 有 蕭 瑟 崢 嶸 之 意. 惟 此 一 事, 是 可 度 一 切 苦 厄 法 也., 畵 鷗 盦 讕 墨 22항, 전집 2, p. 43. 르. 60) 漢 瓦 軒 題 畵 雜 存 180항, 조희룡전집 3, 134쪽. 이 말은 원나라 승려 觉 隐 의 妙

16 많이 그렸다고도 하였다. 61) 성난 기운이 묵죽을 그리게 했고, 그 묵죽에 울분을 실어 자신을 다스린 것이 다. 그가 유배지에서 그린 <황산냉운도( 荒 山 冷 雲 圖 )>에 적은 발문에는 종횡으로 휘둘러[ 橫 途 竪 抹 ] 울적 한 마음을 쏟아놓는다[ 以 寫 臺 鬱 之 氣 ] 라는 표현을 써 더 적극적으로 그림에 자신의 심정을 담았다(그림 8). 가) 지금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살며 눈에 보이는 것이란 거친 산, 기분 나쁜 안개, 차 가운 공기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필묵을 종횡으로 휘둘러 울적한 마음 을 쏟아놓으니 화가의 육법이라는 것이 어찌 우리를 위해 생긴 것이랴. 62) 외로운 섬에서의 우울한 심경을 그리다보니 화가의 법식은 무시한 채 붓을 가로 세로로 휘둘러 쏟아놓는 다고 한 것이다. 산과 물이 있고 물가에는 대나무 몇 그루를 의지한 채 오두막이 서있는 전형적인 산수화 지만 산과 나무에 쓴 거친 필치가 보여주는 황량한 분위기만큼은 그의 참 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조희룡은 횡도난말 이라는 표현과 함께 미친 듯이 휘두른다는 뜻으로 광 塗 亂 沫 ) 이라고도 하였다. 63) 60대 후반에 그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려대 관 소장 <매화도> 에는 그가 말한 바 광도난말 이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그림 9) 조희룡, <매 화도> 지본담채, 113.1x41.8cm, 고려대학교박물관 담한 심경 도난말( 狂 학 교 박 물 있다(그림 9). 이에 구사된 자유자재의 거침없는 필의 운용은 매화를 그린다기보다는 마음 내키 는 대로 붓질을 가하여 화폭에 매화를 피웠다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다. 이 러한 필치 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개인소장 <홍매도대련>에서도 볼 수 있고, 성난 기 운으로 그린다 고 했던 묵죽에서도 유사한 기세를 느낄 수 있다. 64) 조희룡은 격동의 회오리가 불어 닥치는 것 같은 강렬한 필치의 매화 그 태사공( 太 史 公 ; 사마천)의 사기( 史 記 ) 를 읽는 것과 같다. 는 비유적인 리는 일을 표현을 썼 다. 65) 사기 는 황제( 黃 帝 ) 때부터 전한의 무제( 武 帝 ) 천한연간( 天 漢 年 間 : B C 语 중에 있는 말로 佩 文 齋 書 畵 譜 卷 十 六 引 紫 桃 轩 杂 缀 에 실려 있다. 므. 61) 내 평소에 대를 그린 것이 매화나 난초 그림의 열에 하나를 차지할 뿐이었다. 그 런데 바다 밖에 살면서부터 대 그림이 매우 많아져 매화나 난초 그림이 도리어 열에 하나가 되었다( 生 平 畵 竹, 居 梅 蘭 十 之 一. 而 自 居 海 外, 得 竹 極 多, 梅 蘭 反 居 其 一 ). 畵 鷗 盦 讕 墨 8, 조희룡전집 2, p. 34. 브. 62) 孤 寄 海 島, 目 所 覩 者, 荒 山 瘴 煙 冷 雲 而 已 也. 乃 拓 目 所 覩 處, 橫 途 竪 抹 以 寫 臺 鬱 之 氣, 畵 家 六 法 豈 爲 我 輩 設 耶. 스. 63) 檢 一 變, 至 于 歡, 歡 一 變, 至 于 醉, 醉 一 變, 至 于 書, 書 一 變, 至 于 畵, 畵 一 變, 至 于 石, 至 于 蘭, 至 于 狂 塗 亂 沫, 至 于 倦, 至 于 眠, 至 于 夢, 至 于 蝴 蝶 栩 栩. 조희룡, 한와헌제 화잡존, 113, 조희룡전집 1, p. 29. 으. 64) 조희룡, <홍매대련>, 지본담채 cm, 개인소장; 趙 熙 龍, <묵죽병풍( 墨 竹 屛 風 )>, 紙 本 水 墨, 126.8x44.7cm, 국립중앙박물관. 즈. 65) 寫 梅, 如 讀 太 史 公 史 記, 漢 瓦 軒 題 畵 雜 存 60항, 조희룡전집 3, p. 68.

17 100~97)에 이르기까지 약 3,000여 년의 역사를 서술한 방대한 역사서이다. 수 천 년 전개된 격동의 역 사를 생동감 있는 문장으로 엮은 사기( 史 記 ) 를 읽는 격한 감동을 매화그림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사 기 와의 비교는 그가 여항인의 전기집 호산외기 의 서문에서 이에 든 인물들을 사기 열전 에 등장하 는 협객이나 뒷골목 인물들과 비교함으로써 사기 처럼 그의 글도 길이 전해질 것을 염원하고 있던 것을 연상케 한다. 조희룡 회화의 격동적인 아름다움은 그의 회화사상 60대 이후에 주로 발현된 것이다. 여항인으로서의 잠재된 아픔이 유배 라는 고난을 겪음으로써 더욱 강렬하게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희룡에서 비롯된 화려하면서도 힘찬 매화도는 같은 시기 이공우( 李 公 愚, 1805~1877)를 비롯한 문인 화가들의 매화도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 서로간의 미감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유 숙, 오경석 등 당대 여항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구한말 장승업을 통해 근대화단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조희룡의 회화는 화단을 풍미하며 변혁의 기운을 가진 새로운 화풍으로서 19세기 화단을 이끌었다. 66) 4. 공명 : 결론을 대신하여 화가이면서 신분에 있어서 열세에 있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들이 자신의 처지 때문에 느낀 불편한 심사를 어떻게 표출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이인상, 최북, 조희룡을 그 대표적 인물로 설정한 것은 이들이 각자 18 19세기를 대표할 만한 화가들임에도 서출이거나 미천한 직업화가라는 한계로 인해 가슴 속 울분 을 간직하고 있었던 공통점이 있으며, 그럼에도 각자가 처한 환경과 성향에 따라 울분을 표출하는 양상과 화풍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인상은 서출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은둔이라는 어쩌면 소극적인 행동양식을 선택함으로써 견뎌내었다. 이러한 이인상의 행동은 그가 비록 불우한 처지에 있지만 당대를 호령하는 핵심 노론계 집안의 후손이자 나라를 걱정하는 지식인으로서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는 완고하면서도 고매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 문에 취할 수 있는 태도였다. 반면 괴팍한 성격의 최북은 술과 그로 인한 기이한 행동으로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최북의 기행이나 예술가로서의 우월감은 단순히 기이한 행적을 남긴 화가 이상의 적극적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 다. 또한 이러한 적극적인 행동은 신분제가 더 엄격했던 이전 시기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18세기 이 후 점차 신분제가 완화되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행동은 예술가적 자의식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근대적 성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67) 츠. 66) 19세기 매화도의 특징 및 조희룡 매화도의 영향에 대해서는, 이선옥, 앞 논문 (2005), pp. 145~185. 크. 67) 그러나 홍선표는 앞 논문(1991), p. 23에서 기행 모두가 반봉건으로 이해 될 수 없으며 반 봉건성이 곧 근대성의 추구로 간주될 수는 없는 입장을 보인다.

18 한 세대 뒤에 활동하였던 조희룡에게 있어서 여항인으로서의 울분 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분노 야말로 실제의 삶 속에서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조희룡 의 울분은 그의 예술의 원동력이었다. 68) 그는 여항인으로서, 혹은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유배생활 또한 예 술로 승화시켜 그의 회화일생을 대표하는 역작을 유배 중에 창작해내었다. 뿐만 아니라 조희룡은 김정희 가 서울에 있던 어느 해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여항의 서예가 8명[ 墨 陣 8 人 ]과 화가 8명[ 畵 疊 8 人 ]의 작 품을 가지고 김정희를 찾아가 평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일을 적은 기록이 예림갑을록( 藝 林 甲 乙 錄 ) 이 라는 이름으로 전하는데, 69) 이 사건은 조희룡의 위치가 어떠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이 화첩에 훗날 오세창이 조희룡을 일컬어 문장을 잘 짓고 서화에 능하여 한 시대 묵장의 영수 가 되었다 라 적었 듯이 그가 여항화가들의 우두머리로서 당대 화단을 이끌어 나갔던 정황을 살필 수 있다. 70) 조희룡이 활동하던 때는 이인상이나 최북의 시대보다는 사회적으로도 중서층의 역할이 더욱 확대되었던 시 기이다. 중서층의 확대는 단순히 수적인 증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서층 지식인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그들의 목소리도 더 커졌기 때문이다. 여항인들의 전기를 모은 조희룡의 호산외기, 유재건( 劉 在 建, 1793~1880)의 이향견문록, 이경민( 李 慶 民, 1814~1883)의 희조일사 등이 편집되거나 간행되었다. 그 런 점에서 후대이지만 조희룡이 활동하던 19세기 여항인들의 서화활동의 장을 묵장 墨 場 이라 본 오세창( 吳 世 昌, 1484~1953)의 견해는 주목해 볼 만 하다. 이들이 어떤 그룹을 형성하였고, 그 힘이 한 시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에 더하여 18세기 후반 박지원이 호질 을 통해 양반사회의 부패를 꾸짖었던 것처럼 양반층에서 일었던 자성의 목소리도 간과할 수 없다. 울분을 느끼는 주체는 각 개인이기 때문에 이는 개인적 감정이지만 한 시대 사회적 가치로부터 소외된 일부 계층에게 있어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감정이라면 이는 사회적 분노가 될 것이다. 당시 중서층 화가들 중에는 불평등을 겪으면서도 소극적인 자기표현에 그친 이도 있었고, 적극적으로 드러낸 경우도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현실에 저항했던 화가들의 행동은 소극적이나마 당대 사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고, 함 께 느끼는 분노에 공명하여 결집된 힘들이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한 축을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트. 68) 권혁남, 분노에 대한 인간학적 고찰, 인간학 연구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 소, 2010), p. 88~89. 프. 69) 예림갑을록( 藝 林 甲 乙 錄 ) 에 대해서는 안휘준, 朝 鮮 王 朝 末 期 (약 1850~1910)의 繪 畫, 한국근대회화백년 (국립중앙박물관, 1987), pp. 205~206 참조. 흐. 70) 조희룡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한영규, 조희룡과 추사파 중인의 시대 (학자원, 2012), pp. 209~215에서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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