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우치다 쥰(Uchida, Jun)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I. 서론 최근 들어 한국과 일본에서는 총동원체제기( 總 動 員 体 制 期 : 1937~45년) 의 일본 식민지주의와 조선 민중의 일상 생활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 다. 1) 본 논문에서는 총력전체제 하에서의 재조선 일본인( 在 朝 日 本 人 )에 초점 을 맞추어 그들의 내선일체 ( 內 鮮 一 體 ) 정책에 대한 협력양상을 선행 연구성 과에 바탕해 대략적으로나마 정리해보고자 한다.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의 협력 이라는 개념은 통상적으로 조선인 대 총독 권력 의 구도로 분석된다. 이러한 분석 범주를 사용한 종래의 연구에서는 재조 선 일본인을 단순한 총독권력의 주구 ( 走 狗 )로 보는, 혹은 그것과 동일시하는 1) 대표적인 한국의 최근 연구로는 방기중 편(2004; 2005)을, 일본의 연구로는 倉 沢 愛 子 他 編 (2005-6)을 들 수 있다. 미국에서는 Young(1998)이나 일본과 미국 학자들의 공동 연구 성 과인 Yamanouchi, Koschmann, and Narita(1998) 등을 들 수 있다. 14
경향이 강했다. 2) 그러나 이미 로날드 로빈슨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식민지의 협력자에게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원주민 유력자이고 다른 하나는 본국에서 온 이식민자(settlers)였다(Robinson 1972). 브루스 버만이나 앤 스톨러 등은 이식민자의 공통된 특징으로 평소에는 국 가에 대한 불만이나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국가와 대립하고 있다 하더라도 피식민자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국가 권력과 바로 결탁하는 습성을 들고 있는 데, 이는 재조선 일본인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Berman 1990; Stoler 1992). 그러나 식민지에서도 본국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던 백인 이식민자 의 경우와는 달리(Mamdeni 1996), 재조선 일본인의 경우에는 동화 정책이라 는 명목 하에 형식적이긴 하지만 조선인과 동일한 총독권력 하에 있었고, 또한 식민지 법역 내에서의 시민권 (citizenship) 역시 일본의 내지주민( 內 地 住 民 ) 에 비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합병 직후, 특히 거류민단의 폐지와 더불어 자치권을 빼앗긴 시점부터 총독부의 동화 정책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내선일체, 황민화( 皇 民 化 ) 정책과 같은 새로운 국민통합 체제를 통해 식민지의 조선인까지도 강제적 균질화(=국민화) 의 과 정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총력전체제 하에서는 재조선 일본인의 모호한 법적, 정치적 지위가 더욱 부각되게 되었는데( 雨 宮 昭 一 1995), 이는 재조선 일본인 의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상반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적극적으로 황민화 정책에 협력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것에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한 자, 또 는 정면으로 반대하는 자도 있어 상당히 분열된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의 여러 가지 실태를 밝히면서,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모호성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2) 예를 들면, 高 崎 宗 司 (2002)는 재조선 일본인에 초점을 맞춘 드물게 귀중한 연구 성과의 하 나이지만, 이 연구에서도 재조선 일본인은 풀뿌리 침략자 로서 국가 권력과 한 묶음이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식민지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독특한 지배 형태를 명백히 하는 것 은 지금부터의 과제일 것이라 생각한다.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15
II. 1930년대의 재조선 일본인 20세기의 식민지 중에서 조선은 대영제국의 자치령인 백인 이민국가를 제 외하고는 프랑스령인 알제리 다음 가는 규모 1945년 해방 즈음에는 민간인 약 70만 명과 군인 약 30만 명을 합쳐 100만 명에 달했다( 森 田 芳 夫 1964, 2-23) 의 이식민자 사회였다. 1935년 시점에서 재조선 일본인의 총인구는 일본제국 내의 최대인 583,428명이었는데, 그중 20%가 집중되어 있는 경성에 서는 부내( 府 內 ) 인구의 약 30%(113,321명), 부산에서도 마찬가지로 30%(56,512명)에 달하였고, 또한 지방 도시인 대구나 군산에서도 각각 부내 인 구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었다( 朝 鮮 総 督 府 1935, 22-30). 또한 이 시기에는 청진 및 함흥 등의 공업화와 함께 조선반도 북부의 일본인 인구도 증가하였다. 따라서 식민지시기의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논하는 데 있어서, 특히 이식민자 가 집중되어 있던 도시부의 사회는 조선인, 일본인으로 구성된 다민족사회 (multi-ethnic society)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또한 1930년대 초 재조선 일본인 인구의 약 30%가 조선 태생이고, 남녀 비율도 거의 같아 이러한 모습이 상당히 정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丹 下 郁 太 郎 編 1943, 3-4, 19). 직업구성을 보면 민간에서는 상공업과 자유업이 중심이었고, 1930년대가 되면 서 관공리( 官 公 吏 )의 수가 보다 가파르게 증가해가는 경향이 있었다. 아메미야 쇼이치에 따르면 일본 내지에서는 중간층이 총력전체제의 형성 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雨 宮 昭 一 1995), 외지 주민까지 총 력전체제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의 중상층을 차지하고 있었 던 재조선 일본인들도 조선인 엘리트와 함께 적어도 도시부에 있어서는 마찬가 지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나중에 서술할 국민운동 (국 민정신 총동원운동, 국민총력운동)의 조선연맹( 朝 鮮 聯 盟 ) 본부 지부의 임원, 그리고 그 하부 조직인 애국반장 등이 그 역할에 해당되는데, 이 외에도 지식 인, 문예인, 재계인, 상공업자 등과 같이 조선인 사회 내에 형성되어 가고 있던 16
중간층을 총력전체제 운영으로 끌어들이는 역할 등도 맡았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조선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이 쇠퇴되어가는 과정에서 그 공동 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연이어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혼합 파시즘적 단체가 조직되었는데, 그 중 많은 수가 재조선 일본인(또는 조선인 유력자와 공 동)이 주도하는 것이었다. 3) 예를 들어, 합병 때부터 별개의 조직으로 존재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반목하고 있던 일본인과 조선인 변호사 단체가 1938년에 합병하였다. 4) 마찬가 지로 중일전쟁 발발을 기회로 전향한 윤치호가 이끄는 조선중앙기독청년회가 일본인 기독교청년 으로서 성경을 한 손에, 일본정신의 진작을 전 반도 청년 에게 촉구할 것 을 결의하고, 일본인 측 기독교청년단체에 흡수되는 형태로 합 병되었다. 5) 또한 경성일보 사장인 미타라이 타츠오( 御 手 洗 辰 雄 )는 조선반도 내의 일간신문 전( 全 ) 25사에 호소하여 민론지도 ( 民 論 指 導 )를 목표로 하는 조선춘추회 ( 朝 鮮 春 秋 會 )를 조직하여 정보 통제나 전시( 戰 時 ) 선전(propaganda)에 협력했다. 6) 1939년에는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가라시마 타케시( 辛 島 驍 )와 동대학 예과 교수이며 녹기연맹( 綠 旗 聯 盟 )의 주간인 츠다 카타시( 津 田 剛 ) 등이 문장보국 ( 文 章 報 國 )을 목적으로 250명의 조선인과 일본인을 망 라하는 조선문인협회 ( 朝 鮮 文 人 協 會 )(회장: 이광수, 후에 윤치호) 7) 를 설립했 고, 그 후 1943년에는 조선을 비롯한 대만과 만주의 작가를 망라하는 조선문인 보국회 ( 朝 鮮 文 人 報 國 會 )를 결성하여, 일본어 사용과 일본정신 보급을 강조 하는 국민문학 을 넓히는 데 힘썼다(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1943, 62). 8) 3) 이들 단체의 활동 범위는 대개 경성 등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정동( 精 動 )운동 등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4) 風 聞 駄 語, 朝 鮮 及 満 州 1938년 11월호, 82쪽. 5) 비상시국에 눈뜬 사상단체의 미몽 ( 非 常 時 局 に 醒 めた 思 想 団 体 の 迷 夢 ), 京 城 日 報 1937 년 8월 5일; Clark(2003, 243). 6) 風 聞 駄 語, 朝 鮮 及 満 州 1938년 3월호, 81쪽. 7) 京 城 日 報 1939년 10월 30일. 8) 국민문학과 재조선 일본인의 관련에 대해서는 金 允 植 (1993)을 참조.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17
나아가 조선의 대륙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이 중요시되자 재조선 일본인 경 제계 유력자들(예를 들어, 가시이 겐타로( 香 椎 源 太 郞 ), 사이토 히사타로( 齊 藤 久 太 郞 ), 아리가 미츠토요( 有 賀 光 豊 ), 가다 나오지( 賀 田 直 治 ) 등)은 조선인 엘리트(한상용, 박영철, 김연수)들과 함께 총독 주최인 조선산업경제조사회( 朝 鮮 産 業 經 濟 調 査 會 )(1936년) 9) 및 시국대책조사회( 時 局 對 策 調 査 會 )(1938년) 에 참가하여, 내선일체의 철저한 강화 에서부터 생산력 증강, 노력수급 조 절, 일본 만주 지나( 日 滿 支 ) 블록강화 와 같은 국책 차원의 정치 경제 사항 에 이르기 까지, 총독부 관료나 일본의 재계 유력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협 의하였다. 10) 또한 각지의 재조선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상공업자들도 경제전 사 로서 1939년 말, 일제히 경제보국운동 을 일으켰으며( 朝 鮮 総 督 府 1940, 57), 나아가 1940년에 상공회의소 내에 설치된 경제통제협력회 ( 經 濟 統 制 協 力 會 )를 통해 물가 조정 등 총독부의 경제 통제의 수행과 장려, 그 밖에 관련 법령을 철저히 주지시키는 일 등에 협력하였다( 木 村 健 二 2004, 112-3). III. 조선군사후원연맹( 朝 鮮 軍 事 後 援 聯 盟 ) 이들 재조선 일본인 지도자들은 1931년의 만주사변 시에 관동군에 대한 지 지를 신속하게 표명하고, 군부 및 부내의 조선인 실업가나 공직자와 제휴하여 일반 공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전 조선 시국대회 를 개최하여 만몽( 滿 蒙 ) 권익 옹호 를 외치며 일본의 군사적 대륙진출을 지원하는 위문활동을 이미 적극적으 9) 조선산업 경제조사회 답신의 전모 ( 朝 鮮 産 業 経 済 調 査 会 答 申 の 全 貌 ), 経 済 月 報 250호 (1936년 11월), 16-7쪽. 10) 京 城 日 報 1938년 8월 28일. 18
로 전개하고 있었다( 京 畿 道 京 城 地 方 法 院 検 事 正 宛 1931). 이것이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후의 후방활동의 기반이 된 셈인데, 그 활동의 조직망으로 써 총독부 조선군이 재조선 일본인 지도자를 비롯한 민간 유지와 손을 잡고 설 립한 것이 조선군사후원연맹이었다. 이는 천황으로부터 하사금 을 받아 미나 미( 南 ) 총독이 알선하여 결성된 관민단체로, 조선 내에 존재하는 출정 및 응소 군인 유족과 가족 을 원조하는 것을 그 주된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 각 도, 부, 군, 섬에 약 225개의 지부와 분회를 설치하고 이들을 통해 종적인 연락과 각 가맹단체를 통한 횡적인 연락을 완성 하여 후방 활동망을 조직하였다( 朝 鮮 軍 事 後 援 同 盟 編 1939, 2-3). 경성의 예를 보면,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가맹한 단체는 제국군인후원회( 帝 國 軍 人 後 援 會 ), 제국재향군인회( 帝 國 在 鄕 軍 人 會 ), 애국부인회( 愛 國 婦 人 會 ), 대일본국방부인회( 大 日 本 國 防 婦 人 會 ) 등 일본 내지에 본부를 둔 단체 외에, 시장 사에키 아키라( 佐 伯 顕 )가 회장을 맡은 경성부사회사업협회( 京 城 府 社 會 事 業 協 會 )나 경성교화단체연합회( 京 城 敎 化 團 體 聯 合 會 ) 등의 관민 합성단 체, 그리고재조선 일본인이 이끄는 경성국방의회( 京 城 國 防 議 會 )(아리가 미츠 토요( 有 賀 光 豊 )가 회장), 경성부연합청년단( 京 城 府 聯 合 靑 年 團 )(마에다 노보 루( 前 田 昇 )가 회장), 수양단조선연합회( 修 養 團 朝 鮮 聯 合 會 ) 경성지부, 조선신 직회( 朝 鮮 神 職 會 ), 경성불교각종연합회( 京 城 佛 敎 各 宗 聯 合 會 ), 경성기독교청 년회( 京 城 基 督 敎 靑 年 會 ), 또한 융화 친일 단체인 국민협회( 國 民 協 會 ), 동민 회( 同 民 會 ), 갑자구락부( 甲 子 俱 樂 部 ), 경성상공회의소( 京 城 商 工 會 議 所 )(가 다 나오지( 賀 田 直 治 )가 회장), 경성상공조합연합회( 京 城 商 工 組 合 聯 合 會 )(이 시하라 이소지로( 石 原 磯 次 郞 )가 회장), 경성백화점협회( 京 城 百 貨 店 協 會 ), 조 선공업협회( 朝 鮮 工 業 協 會 ), 조선철도협회( 朝 鮮 鐵 道 協 會 ), 조선토목건축협회 ( 朝 鮮 土 木 建 築 協 會 ), 부내 일본인 유력상인이 이끄는 각종 상공업단체, 신문 사, 동( 町 )총대표회 등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1) 군사후원연맹은 일본 내지의 위문활동과 병행하여 다양한 형태로 일본의 대륙 진출을 지원했다. 그 주된 사업은 일본어와 조선어의 인쇄물 배포 및 강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19
연회, 영화회, 깃발행렬, 기원제, 간담회, 축하회, 위령제, 고별식 등을 통한 일 반인에 대한 황군 원호사상의 철저한 보급, 상이군인 및 군인의 유족, 가족에 대한 부조, 응소군인, 출근군인 또는 개선군인에 대한 송영 및 접대, 출생장 병 및 그 가족에 대한 위문, 격려, 전병( 戰 病 ), 사상( 死 傷 )군인 및 그 가족, 유 족에 대한 조문, 위문 등이었다( 朝 鮮 軍 事 後 援 同 盟 編 1939, 4, 6-13). 이들 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부금은 각 도 지부나 가맹단체를 통하여 일반인 들로부터 모집하였다. 또한 경성부 내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백화점인 미츠코시 ( 三 越 )와 미나카이( 三 中 井 ) 등의 협력으로 전적( 戰 蹟 )전람회를 개최하여 시 국 인식을 보급하는 데 주력하였다( 朝 鮮 軍 事 後 援 同 盟 編 1939, 12). 군사후원연맹은 결성된 지 불과 일년 만에 군사원호를 위해 92만 3,800엔 이나 지출하고 있으며, 그것은 주로 출정군인 유가족의 위문이나 위안금 및 출 정군인의 현지위문 등에 사용되었다( 大 竹 十 郞 1938, 24-25). 또한 군사후원연 맹이나 기타 단체를 포함한 조선 전체의 국방헌금이 1938년 여름에는 약 650 만 엔에 달했는데, 이는 일본 내지에 비해서도 매우 많다고 하여 내지에서 온 사람도 깜짝 놀랐었다. 는 것이었다. 12) 이밖에 현지 파견부대나 부상병들에게 현지에 결핍되어 있는 물자를 위문품으로 증정하기도 하고 연예위문단을 파견 하기도 하였으며, 군사부조법( 軍 事 扶 助 法 )에 따른 부조를 받을 수 없는 자에 대한 원조 등, 나라의 시설로 군사원호가 미치지 않는 부분을 채우고 이로써 장기전에 대한 후방원호에 완벽을 기한다. 고 했다( 朝 鮮 軍 事 後 援 同 盟 編 1939, 6). 1937년 10월에 파견된 제1회 위문단은 예비육군소장인 아베 요시오( 安 倍 良 夫 )를 단장으로 하고 경성부 사회과장, 군의( 軍 醫 ), 보병소위에 재조선 일본 인 회사중역, 도회의원 3인과, 조선인으로는 경기도 회의원인 조병상 1인이 가 11) 경성 군사후원연맹 가맹단체 ( 京 城 軍 事 後 援 連 盟 加 盟 団 体 ), 京 城 彙 報 191호(1937년 8 월), 16-7쪽. 12) 애국조선을 말하는 좌담회(2) ( 愛 国 朝 鮮 を 語 る 座 談 会 (2)), 京 城 日 報 1938년 8월 19일. 20
담하여, 17일간 중국 북부와 만주국의 조선파견 향토부대 및 육군병원 등을 위 문하면서 합계 8,850엔의 위문금을 증정했다( 朝 鮮 軍 事 後 援 同 盟 編 1939, 13-4). 그 2개월 후에 출발한 제2회 위문단은 예비 육군소장으로 동민회와 청 년단 임원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던 마에다 노보루( 前 田 昇 )가 단장이 되 어, 육군보병소위 2명과 오오사까( 大 阪 )에서 온 로오쿄쿠시( 浪 曲 師 )[*번역자 주: 로오쿄쿠 샤미셍을 반주로 하여 보통 의리나 인정을 노래한 대중적인 창을 부르는 사람] 2인, 만담가 남녀 1조가 현지로 가, 16개소, 합계 3만 4,500명에게 로오쿄쿠, 만담, 영화 등의 오락을 통한 위문행사를 가졌다. 마찬가지 형태로 후에 유이가미 나오사부로( 由 上 治 三 郞 )가 이끄는 위문단은 조선인 지원병에 대한 위문도 행하였다( 由 上 治 次 郞 1939, 52-7). 또한 위문단은 귀임 후, 경성에서 현지위문 상황보고를 겸한 강연회 및 라 디오방송 등을 하면서 군사원호사상 보급에 철저를 기했으며, 한 위문단의 보 고서에는 단원이 연예를 즐기고 폭소하는 천진스러운 병정의 모습에 저도 모 르게 가슴이 복받쳐서 눈물을 흘렸다. 는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감 동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일반 주민으로부터 헌금과 위문품을 모아들일 수 있었 던 것으로 생각된다( 朝 鮮 軍 事 後 援 同 盟 編 1939, 12, 18). 또한 군사후원연맹 가맹단체 중에서도, 특히 군사후원연맹과 결부되어 적 극적으로 협력한 것은 애국부인회 조선 본부였다. 애국부인회는 오쿠무라 이오 코( 奧 村 五 百 子 )가 1900년 의화단( 義 和 團 )의 난 발발 즈음에 황군위문사 ( 皇 軍 慰 問 使 )에 가담하여 베이징( 北 京 ), 텐진( 天 津 )을 역방하고 돌아가는 길에 조선반도에 들러 장병위문 유가족 원호를 호소하여, 현지의 일본인 여성에게 서 기부금을 모으고 그것을 일부 자금으로 삼아 1901년에 일본에 설립한 것이 다. 13) 1906년에 통감부내에 한국 지부가 만들어졌고 합병 후에 조선 본부가 되 었으며, 정무총감 부인을 그 본부장으로 하였다. 회원으로는 주로 총독부 관료 13) 三 井 光 三 郎 (1913, 7-11); 愛 国 婦 人 会 編 (1908, 159-160); 朝 鮮 公 論 1996년 4월호, 28쪽.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21
나 재조선 일본인 유력자의 부인 및 조선의 상류계급 부인들이 가담하였다. 1930년대 초기까지는 대다수(70~90%)가 일본인이었지만, 1935년 이후에는 대일본국방부인회 등과의 경쟁으로 인해 중 상층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폭넓 게 회원을 모집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수가 일본인 수를 능가하게 되었다( 河 か おる 2001, 4-6). 애국부인회 회원은 독자적인 위문과 헌금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한편 군사 후원연맹의 의뢰를 받아 조선 내의 여학교와 여자공장 등에 설치된 애국자녀 단 ( 愛 國 子 女 團 ) 2만 명을 동원하여, 중국북부 파견 조선군에게 보내는 위문 봉지 2만 개와 방한면조끼 2만 장을 조제하여 위문 그림 엽서 등과 함께 증정 하였다( 愛 国 婦 人 会 朝 鮮 本 部 1941, 21-2, 40-1; 朝 鮮 軍 事 後 援 同 盟 編 1939, 21). 애국부인회와 국방부인회에는 각각 이번 사변을 계기로 하여 유연 하게 고유의 인습을 타파하고 가두로 진출한 다수의 조선인 여성이 가담하여, 재조선 일본인 여성과 협력하여 위문품 송부와 출정군인의 송영 등, 후방활동 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모습이 내선일체의 결실 을 나타내는 사례로써 현지 의 신문, 잡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14) 한편, 일본 내지와 마찬가지로, 이 두 부인단체의 회원이 쓸데없이 경쟁의식에 빠져서 배타적 행동으로 나가 세 인에게 기이하게 보여지게 되었기 때문에, 오오노( 大 野 ) 정무총감이 각 도에 서 양 단체의 협력, 제휴를 촉구하도록 통첩하기에 이르렀다. 15) 14) 예를 들어, 조선동포의 애국운동 ( 朝 鮮 同 胞 の 愛 国 運 動 ), 朝 鮮 公 論 1938년 4월, 80-1쪽 을 참조. 15) 애국, 국부( 國 婦 ) 양자는 제휴하여 나아가라 ( 愛 国 国 婦 両 者 は 提 携 して 進 め), 朝 鮮 新 聞 1937년 9월 29일. 22
IV. 녹기연맹( 綠 旗 聯 盟 ) 이와 같은 후방활동과 동시에 내선일체 이데올로기를 조선사회 일반에 보 급시키려는 사상운동에 있어서도 재조선 일본인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종래의 식민지정책인 동화 의 논리와 새로운 총력전체제 하의 국민화 의 논리( 雨 宮 昭 一 1995)가 서로 얽히면서 생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쟁기간이었던 1920년대부터 이미 재조선 일본인 지도자 들이 이른바 내선일체 정책의 전신인 내선융화 ( 內 鮮 融 和 ) 운동을 동민회 나 수양단 등의 민간단체를 통해 강행했었다는 사실이다. 16) 특히 동민회는 사이 토( 斉 藤 ) 총독의 문화정치기 에 있어서의 동화정책을 보완하는 역할을 떠맡은 외곽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1930년대에 들어서도 색복장려 ( 色 服 奬 勵 ), 생활개선 등 우가키( 宇 垣 ) 총독의 교화(=조선인 동화) 운동을 풀뿌리 차원에 서 유지시키고 있었다. 17) 그렇다고는 하지만 내선일체 정책이 내선융화의 단 순한 연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정책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민족주의의 대두로 인해 민족주의 운동의 회유 파괴 공작을 목 적으로 한 정책이었다고 한다면, 후자는 전쟁기간에 민족주의 운동이 이미 쇠 퇴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전개되어,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민족말살을 목 적으로 한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선일체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되는 일본 국체 ( 國 體 ) 사상의 보급을 총독부보다도 먼저 제창하고, 총력전 시기에는 그 영향력을 민간단체 중에서 가장 많이 확대시킨 것이 재조선 일본인이 주도하는 녹기연맹이었다. 동민회가 합병 전후기부터 조선에 재주( 在 住 )하였던 일본인 유력자와 조선인 16) 녹기 일본문화연구소는 민간의 내선일체 운동 의 사례로, 1920년대 민족주의운동이 왕성 한 시기에 활동을 개시한 수양단 과 동민회 를 들고 있다( 緑 旗 連 盟 編 1939, 60-1). 17) 상세한 내용은 內 田 じゅん(2003)을 참조.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23
엘리트의 혼성단체였던 것에 반해, 녹기연맹은 젊은 일본인 대학생(즉, 재조선 일본인 2세)과 그들의 교사만으로 구성된 작은 연구회로부터 출발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로 조선에 부임해 온 츠다 사 카에( 津 田 栄, 당시 29세)와 그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주의자( 日 蓮 主 義 者 )의 연구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18), 1933년에 다른 단체와 합동하여 녹기연 맹 으로 재발족하였다. 녹기연맹은 인류낙원 건설, 일본 국체정신에 준한 건국의 이상실현, 각 자의 인격완성 을 강령으로 내세워,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일반사회의 교화, 국 체 일본사상 연구, 재조선 일본인 남녀의 중견인물 양성, 후생시설의 설치를 주 된 사업으로 하고 있었다( 高 崎 宗 司 1982, 65). 정혜경, 이승엽 및 나가시마 히 로키( 永 島 広 紀 )의 연구에 따르면, 그 전신인 녹기동인회( 綠 旗 同 人 會, 1931 년 설립) 시절부터 이미 천황 중심의 일본주의와 국체관념 보급 준비 작업을 시 작했으며, 전시기( 戰 時 期 )에 들어서도 이러한 활동의 초점은 일관되게 유지되 었다(정혜경 이승엽 1999, 366). 총력전체제 하에서는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여, 지원병제도나 창씨개명( 創 氏 改 名 ) 등의 총독부 황민화 정책 을 지원하는 등, 천황제 파시즘단체 의 성격을 강하게 띠어갔다(정혜경 이승엽 1999, 365-7). 19) 그러나 녹기연맹의 간부들이 자신들을 단순한 국수주의자나 파시즘단체와 혼동하지 말 것을 당시부터 강조했었던 것처럼( 玄 永 燮 1938a, 18-9), 그 활동은 대단히 여러 갈래에 걸쳐 있었다. 여기서 녹기연맹의 활동이 념과 실태를 다시 정리해 보고자한다. 18) 녹기연맹의 결성과 활동이념의 형성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永 島 広 紀 (2002, 59-65, 67-75)를 참조. 19) 예를 들어, 1932년에 출판된 녹기 팜플렛 안에서 츠다 카타시는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들의 활동을 일본 내지에 있어서의 일련주의자 동지의 천황 중심의 국체정치 확 립의 정치운동 등과 결부시켜, 신흥국체주의의 봉화는 이윽고 전 일본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 하에 전 일본 사회를 활활 다 태워버릴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津 田 剛 1932, 54-55). 24
녹기연맹이 내세운 천황중심 의 국체주의는 1937년에 발족한 녹색생활운 동 에 의해 체현되었다. 츠다 카타시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녹색 의 정신을 기 반으로 한 생활을 통해서 신조선 을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합문화운 동 으로 20), 여기서 말하는 녹색 이란 생명의 작용 을 상징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신장시키는 원동력 또한 모든 것을 육성시키는 힘 을 가리키는 것이 었다. 이 녹색 의 정신은 일본정신과 불교, 나아가 서양의 사상 및 그 밖의 여 러 것들과 통한다. ( 津 田 剛 1939b, 4-5)라고 설득하는 한편, 남아프리카의 인 종차별을 예로 들어 서양에서는 이교도를 포용하는 것이 어렵다. ( 津 田 剛 1940b, 6)라면서 그 포용력의 차이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혼란한 사상계와 세 계의 문화를 종합통일 하는 데에는, 유일 일본정신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된 다. 면서 일본의 문화적 사명 을 주장하였다( 津 田 剛 1940b, 5-6). 잘 생각해 보면, 이 녹색 정신은 당시 국체( 國 體 )의 본의( 本 義 ) (1937년)나 신민( 臣 民 )의 길 (1941년) 등에서 설명했었던 일본의 국체 정신 그 자체를 일컫는 것 이라 할 수 있다(Bix 2000, 314). 21) 녹기연맹은 녹색생활운동 을 15년 계획이라는 긴 기간으로 책정하였다. 제 1차 3개년에 해당하는 1937년~1939년에는 경성을 거점으로 하여, 전 조선 운 동 전개에 필요한 본부충실, 재정확충, 사상의 정비 및 보급, 경성 모범지 구 건설 등 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데 전념하였다. 22) 이 기간 동안 녹기연맹은 급속도로 그 활동 규모를 확대시켜 나갔다. 본부 인원의 증가와 더불어 조선인 을 연맹원으로 적극 권유한 결과, 결성 시에는 십수 명이었던 연맹 인원수가 1939년에는 약 1,500명이 되었고, 나아가 각지의 지부 결성으로 1941년에는 4,000명으로 증가되었다( 高 崎 宗 司 1982, 65-60). 또한 종합문화운동 을 일상 20) 녹색생활운동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津 田 剛 (1940a, 143-156)를 참조. 21) 그러나 동시에 녹기연맹은 자신들의 국체 이념이 내선일체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 점 에 있어서 일본의 국체론자와 다르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었다. 22) 녹색생활운동 제1차3개년 계획서 ( 緑 の 生 活 運 動 第 一 次 三 ヶ 年 計 画 書 ), 緑 旗 1937년 7 월, 8-13쪽.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25
생활을 통해 추진하기 위해 녹기연맹은 다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강연이나 연간 수 백 회에 이르는 소집회 를 통해 사회 각 층에서 빠질 수 없는 힘 을 유 지함을 목표로 하고, 이를 경영하는 녹기 일본문화 연구소로부터는 조선유일 의 사상잡지인 녹기 를 비롯한 각종 저서 및 팜플렛 등을 출판하여 일본정신 국체사상 보급에 힘썼다. 23) 나아가 중견인물 양성을 위한 학생부, 일본인 여성 을 황국여성 으로 단련하는 1년제 세이와여숙( 淸 和 女 塾 ) 24), 스에모 쿠지로 ( 須 江 杢 二 郞 )를 원장으로 하는 녹기의원( 綠 旗 醫 院 ) 25), 교화회관( 敎 化 會 館 ), 신코카쿠( 晨 光 閣 ), 사상 및 수양에 관한 약 7천 권의 장서를 보유한 녹기 문고( 綠 旗 文 庫 ), 보험증진 의 목적으로 대천( 大 川 )해수욕장에 개설한 바다의 집, 야나기사와 시치로( 柳 沢 論 郞 )를 숙장( 塾 長 )으로 하는 녹기 농장인 오류동 농생숙( 梧 柳 洞 農 生 塾 ) 26) 과 같은 다양한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27) 그리고 녹색생활운동 의 제2차 3개년에 해당하는 1940년~1943년에는 동 아 신질서 건설, 군비의 충실, 생산력의 확충 등, 전시기의 국책에 따른 형태로 자신들의 독자적인 이상(즉 생활공동체 를 우선 일본에서 실현하고 종내, 세 계 전체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일)의 실현을 위해 신 일본문화 건설에의 기 여, 내선일체 완성의 추진력 구성 그리고 전 조선 교화망의 완성 을 주된 목 표로 하여 활동하였다( 津 田 栄 1940, 2-10). 나아가 1943년에 츠다 카타시는 60년 후의 (조선) 사회의 최상층부는 현재 10세 이하의 어린이에 의해 구성될 것이며, 더구나 그들은 순수한 황국신민으로서 생을 누린 부모를 가진 사람들 이다. 라고 예측하여, 신 반도건설 30개년계획 으로서 2세대 60년에 걸친 내 23) 緑 旗 1939년 12월, 9쪽. 24) 1943년 4월, 녹기연맹은 1941년 박인덕( 朴 仁 德 )에 의해 설립된 덕화( 德 和 )여숙 을 흡수하 였다( 高 崎 宗 司 1993, 129, 140-1). 25) 緑 旗 1937년 11월, 46-7. 26) 농생숙( 農 生 塾 )은 1939년부터 야나기사와 시치로가 숙장으로 경영하였다. 27) 녹기연맹의 활동 전반에 대해서는 녹기연맹이란 무엇인가 ( 緑 旗 連 盟 とは 何 か), 緑 旗 1938년 2월, 14-7쪽을 참조. 26
선일체의 완벽한 실현설 을 제창하였다. 28) 즉, 내선일체 정책 의 실행기간을 수정하여 한국 합병 이래, 징병제 시행 및 의무교육 실시에 이르는 30년을 반 도 황국화의 전기 30년 으로 자리매김하고, 그 이후의 30년이야말로 반도 황 민화의 대세 결정의 후기 30개년 이므로 사상적, 문화적, 사회적 제반 정책에 대해 종합적인 30개년 계획을 수립 할 것을 총독부에 촉구하였던 것이다. 29) 녹기연맹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파시즘 단체와도 다르고 총독부의 어용단 체도 아닌, 국가보다 한 발 앞서가는 단체 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러한 의식은 아시아 태평양전쟁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어 간 것 같다. 가령, 1940년 초의 연맹 총회에서 츠다 카타시는 1939년도의 활동내 용을 회고하면서 국가의 총동원이 아직도 생활의 건설 이라는 목표에 도달하 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국가에 대해 모종의 시사를 주는 단체로서의 사명 30) 을 연맹원에게 역설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 고노에( 近 衛 )내각이 신체제 ( 新 體 制 )운동을 표명했을 때에도 츠다 카타시는 연맹원에 대해, 우리들은 민간의 일개 종합적 생활단체로서 국책에 대해서 선구적 역할을 주장해왔다. 쇼와( 昭 和 )유신이 오리라는 것을 일찍이 주장하여, 수 년 전부터 이미 그것이 다가오 고 있음을 믿어 왔으며, 이에 대한 체제를 정리해 왔다. ( 津 田 剛 1940c, 6)고 되풀이 말하였다. 녹색생활운동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신체제 운동의 지도 이념과 우리들의 입장과는 깊은 본질관계가 있으며,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동일한 것 이라고 설명하는 한편, 국가의 통제와 지도를 받으면서도 우리들의 창조적 문화활동은 조금도 저해당해서는 안 된다. 면서 그 자주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 있어서 앞으로 국가가 우리들의 창조적 활 동에 기대하는 바 또한 클 것 ( 津 田 剛 1940c, 8-9)이라며, 국가에 추종하는 것 28) 신 반도건설 30개년 계획의 제창 ( 新 半 島 建 設 30ヶ 年 計 画 の 提 唱 ), 緑 旗 1943년 3월, 16-7쪽. 29) 상동, 18쪽. 30) 녹색생활 연구회 ( 緑 の 生 活 研 究 会 ), 緑 旗 1940년 1월, 75쪽.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27
이 아닌, 그 정책방향을 규정하는 역할까지도 담당한다는 포부를 표명했던 것 이다. 이 운동의 제2차 3개년이 시작된 1940년에 이미 녹색생활운동은 전 조선 으로 그리고 전 일본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고 보고되고 있다. 31) 실제로 이것이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일본에서 전개되었는가는 앞으로의 연구에 기대 하는 수밖에 없으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녹기연맹 운동이 조선반도 상주자뿐 만 아니라 일본 본국 주민도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녹기연맹 의 야심은, 조선이 이미 총독정치 하에서 내지의 그것보다도 앞선 통제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는 생각이나, 지금까지 개혁의 최선단 이 만주에 있고 다음은 조선에 위치하였으며, 내지가 가장 뒤떨어져 있었다. ( 津 田 剛 1940c, 5) 32) 라 고 하는, 당시 조선의 지식층이 공유하고 있던 인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 다. 예를 들어, 소설가인 장혁주( 張 赫 宙 )는 신체제는 실은 조선에서는 수년 전 부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도는 내지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오 히려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정치에서, 문화에서, 그리고 모든 통제에 서 33) 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제국의 주변 에 위치한 식민지 조선이 파시즘 체제의 구축 모델을 일본 본국 에 제공하는 식의, 이른바 당시의 초근 대국가 만주국과 일본과의 사이에 빚어진 것과 같은 제국의 역류 현상이 발견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전을 지닌 녹기연맹이 조선반도를 거점으로 하는 천 황 중심의 국체 운동 그것은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 또한 일본 의 총동원운동보다도 뛰어난 것 을 지향하고자 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다. 34) 실제로 츠다 카타시는 천황을 생활의 중심으로 받들어 모시고 성스러운 31) 녹기연맹의 현상을 말하다 ( 緑 旗 連 盟 の 現 状 を 語 る), 緑 旗 1940년 4월, 42쪽. 32) 나가시마히로키도 전시 체제기의 조선에 있어서는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자칫하면 일본 내지 이상으로 이른바 혁신 세력의 대두가 현저 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永 島 広 紀 2002, 75). 33) 緑 旗 1940년 10월, 14쪽. 34) 녹색생활을 말하는 좌담회 ( 緑 の 生 活 を 語 る 座 談 会 ), 緑 旗 1940년 4월, 36-7쪽. 28
생활공동체 건설을 향해 돌진하는 이 조선에 있어서의 운동이 이윽고는 전 일 본을 뒤덮고 만주와 지나에서 또 나아가 세계 각지에서 녹색의 동지를 발견하 리라. 고 그의 소신을 토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35)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녹기연맹의 국체 사상 보급운동의 골격은 1937년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동민회나 친일 단체와는 달리, 총독부의 기밀 비 혹은 보조금으로 결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녹기연맹은 단순한 어용 단체로 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녹기연맹은 총독부의 황민화 정책을 수년 전 부터 선취하고 있었고, 권력기구측에서 오히려 녹기연맹의 노선에 접근해 갔 었다고 볼 수 있다. ( 永 島 広 紀 2002, 75)라는 나가시마 히로키의 견해가 타당 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나중에 서술할 국민총력운동에 있어서, 녹기연맹 간 부가 이것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녹기연맹이나 동민회를 비롯한 민 간단체는 창씨개명 및 지원병제도 등 총독부의 여러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함 으로써 국가권력 측에도 접근해 갔으며, 국책에 맞는 형태로 조직 개혁이나 활 동 내용을 조정해나갔다. 즉, 이들 민간의 내선일체 추진단체와 총독부 사이에 어느 정도 상호 침투가 작용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V. 재조선 일본인의 역할 녹기연맹은 이미 일본을 떠나온 재조선 일본인의 국체 의식이 약화되어 있 음을 우려하여, 이를 강화할 필요성에 따라 국체 의식을 전 조선으로 확대시켜 나가는 운동으로 발전해 왔다(정혜경 이승엽 1999, 365-7). 1937년 이후, 녹기 35) 녹기연맹의 현상을 말하다 ( 緑 旗 連 盟 の 現 状 を 語 る), 緑 旗 1940년 4월, 46쪽.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29
연맹은 운동의 대상을 조선인 청년에게로 옮겨갔는데, 그 중에서 츠다 카타시 는 원래 반도민을 지도하고 이끌어야 할 일본의 내지인의 내선일체 문제에 대 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반도로부터 내선일체의 외침이 일어났 다고 하는 것은 황국일본 선진분자인 7천만 내지인의 참으로 큰 실책이며, 태 만인 것이다. 라고 비판하면서 섬나라적 일본인관의 박멸 을 주창하고, 그들에 게 통렬하고도 심각한 반성을 촉구 했다( 津 田 剛 1939a, 72-74). 이는 일본 내 지의 국체론자를 대신해서 자신들인 재조선 일본인이 중심이 되어 동아 신질서 구축을 진행하려고 하는 야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조선 태생이고 조선에서 성장했다는 점 때문에 재조선 일본인이 여전히 내선일체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녹기연맹 간부인 모 리타 요시오( 森 田 芳 夫 )는 특히 한탄하고 있다. 모리타는 많은 내지인 가정은 조선인과 접하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지인에게는 식민지 근성과 정 복적 우월감이 남아 있다. 고 지적하고( 緑 旗 連 盟 編 1939, 67-8), 내지와 조 선 사이의 차이를 내지인 측에서 없애도록 노력할 것 이라고 말하면서, 재조선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다가가서 내선일체의 이상을 실현하고 조선 사람들을 진 정한 일본인이 되게 하는, 조선 사람들과 일체가 되어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기 위한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緑 旗 連 盟 編 1939, 68). 특히 모리타는 지식계 급 가운데(내지인 측도 포함해서) 가장 소극적인 것은 경성제국대학 출신자이 다. 라고 모교 졸업생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음과 동시에, 만주의 건국대학이 민족협화 이념의 최고 문화기관인 것처럼 경성제국대학은 내선일체의 최고 문 화기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그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緑 旗 連 盟 編 1939, 65, 68). 이를 위해 모리타는 재조선 일본인도 특히 소학교 때부터 교육에 황국신민 으로서의 기백을 불어 넣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緑 旗 連 盟 編 1939, 68). 즉, 황국신민화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재조선 일본인 자녀도 그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황국신민 서사 제창이나 황국신민 체조 등 식민 지 조선에 고유한 천황중심 의례의 시행에는 재조선 일본인 학생도 포함되어 30
있었다( 伊 藤 勇 1982, 114; 長 田 かな 子 1982, 117). 또한, 재조선 일본인에 대 해서도 황민화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은 총독부 관료 사이에도 퍼 져나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우에다 타츠오( 上 田 龍 男 : 이영근( 李 泳 根 )의 창 씨명)의 국가가 조선 청년에게 바라는 것 이라는 질문에 시오바라 도키사부로 ( 塩 原 時 三 郞 : 국민총력 조선연맹 훈련부장, 조선 청년단장)는 내선일체 교육 을 강화하는 것 이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인 청년에게만 부과할 것 이 아니라 반도에 있어서는 내지인 청년도 마찬가지로 그 점은 강화하지 않으 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 답하고 있다. 36) 또한, 고이소 쿠니아키( 小 磯 国 昭 ) 가 1942년 6월에 총독에 취임했을 때에도 황국신민화에 대해서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내지인의 이에 대한 수양도 결코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고 하면서 내지인 조선인 쌍방의 황민화를 동시에 추진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37) 여기서 츠다 카타시나 모리타 요시오가 재조선 일본인 남성에게 초점을 맞 추고 있었다면, 녹기연맹의 여성 지도자들은 일상생활을 통한 내선일체의 실천 에 있어서 재조선 일본인 여성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했다. 재조선 일본인의 여 학교 졸업생을 황국여성 으로 육성할 목적으로 1934년에 설립된 1년제 세이와 여숙(숙장: 츠다 요시에( 津 田 よし 江 ), 숙감: 츠다 세츠코( 津 田 節 子 ))은 다도, 꽃꽂이 등 이른바 신부수업식 교육이 중심이었는데, 전시기가 되자 내선일체 의 완성을 위해 협조하자. 는 슬로건 아래, 숙생들이 위문봉지를 만들거나 부상 당한 조선인 지원병을 문병하기도 하고( 阿 部 もりえ 1940, 56-7), 여숙 졸업생 들은 보호관찰소가 1941년에 설립한 야먀토숙 ( 大 和 塾 )에서 가난한 조선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국어(일본어) 강습회를 열기도 했다. 38) 또한 녹기연맹 부인부에서는 내선일체의 구현적 실현은 부인의 손으로 36) 시오바라 청년단장과 조선청년 대표회담 ( 塩 原 青 年 団 長 と 朝 鮮 青 年 代 表 会 談 ), 国 民 総 力 1941년 4월, 20쪽. 37) 반도 통치의 근간을 설명하다 ( 半 島 統 治 の 根 幹 を 説 く), 国 民 総 力 1942년 7월, 11쪽. 38) 부인부( 婦 人 部 ) 소식 ( 婦 人 部 だより), 緑 旗 1943년 1월, 173쪽.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31
( 津 田 節 子 1939, 3)라는 모토를 내세워 우리들은 천황폐하의 직속부대이다. 라는 의식 하에 조선인 생활을 조사, 연구하여 좋은 점은 내지인 생활에 수용 할 것을 연구 실행 하는 것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39) 그곳에서는 교사인 츠다 세츠코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 부원이 항상 조선옷을 입고 있다. 는 것이 었다. 이는 세츠코가 조선인의 생활개선 의미를 단지 내지화하자는 것이 아니 라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버려 새로운 일본인의 생활을 낳자. ( 津 田 節 子 1939, 2)라는 설명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조선인의 민족문화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경제적 노동효율적 측면에서 좋아서 착용하고 있었던 것 이며( 任 展 慧 1978, 143), 최종적으로는 조선인의 생활을 일본식으로 개선하 여, 사랑과 힘과 정의의 천황의 이상인, 일본 국체의 길을 이루는 생활인답게 하자. 라는 것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任 展 慧 1978, 143). 츠다 세츠코는 조선인의 무지와 무자각의 혼돈 생활 의 향상을 도모하는 일은 우리들 내지 부인들에게 부과된 하나의 업무 라고 주장하여, 조선 부인의 언니로서의 책임과 자각 을 재조선 일본인 여성에게 촉구하고, 또한 조선 부인 들 가운데 자각한 분들, 선각자, 교육자 와 협력할 필요성을 주창했다( 津 田 節 子 1939, 4).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세츠코는 1938년 7월에 미나미 총독과 면회하는 자리에서 색복장려를 위한 기관의 필요, 조선인 주택 등에 대한 건 설적 계획 의 필요성 등, 조선 사람들의 가정을 개조 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호 소하고, 이를 위해 부인들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점에서 손정규( 孫 貞 圭 )나 조기홍( 趙 圻 烘 ) 등 여성 교원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신여성 을 생활개선 운동에 이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던 39) 緑 旗 連 盟 編 (1939, 49); 녹기연맹 회원층의 활동 ( 緑 旗 連 盟 会 員 層 の 活 動 ), 緑 旗 1940 년 4월, 60쪽. 또한 젊은 부원은 찐빵에 대한 강습이나 대용식에 대한 강습회 등으로 전 조 선 각지를 뛰어다니 며, 조선인 여성과 어린이에게 국어(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임 전혜에 따르면, 세이와여숙은 조선인을 어머니로, 일본인을 아버지로 가진 내선결혼 을 한 자의 딸의 입숙을 거부 하였는데, 조선인 여성과의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일본인의 민족 적 우월감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任 展 慧 1978, 144). 32
것으로 생각된다. 40) 나아가 녹기연맹의 일본인 여성 지도자들은 혼례 때의 의 복이나 교제 등에 관한 좌담회를 개최하는데, 그 수일 후 국민정신동원 조선연 맹이 발표한 개선 혼례 기준 이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거의 같은 것 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츠다 세츠코 등이 여기에도 관여하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41) 나아가 츠다 미요코( 津 田 美 代 子 : 츠다 카타시의 처)는 진정한 고도 국방 국가의 건설은 여성을 무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라며 신체제하에 있어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고노에( 近 衛 ) 신내각의 국책 중에 있는 국민의 자질, 체력 향상 및 인구 증가, 국민생활의 쇄신 은 첫째로 여성의 어깨에 달려 있다. 고 하고, 메이지( 明 治 )유신은 남성의 힘으로 성취되었다. 지금의 쇼와 ( 昭 和 )유신이라고 해야 할 때에 즈음해서는 참으로 일본인다운 여성의 대중적 인 참가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고 주장했다. 이는 신체제 하의 가정생활 건 설 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남성들의 사회적 활동을 진정 발휘시키는 것이며, 또한 제2의 국민을 천황폐하를 위해 길러내는 일 인 동시에 산업력의 충실을 위함 에 여성이 더욱 더 생산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현실을 근거로 한 견해였다. 미요코는 이치카와 후사에( 市 川 房 枝 )의 논문을 기용해서, 주부가 중심이 되어 애국반의 성적을 올리기를 바라고, 또한 일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오쿠무메오 ( 奧 むめお)의 모성을 지키다. 라는 주장을 들어 여성의 특수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 논하고, 국책상 가정과 직장과의 조화를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이나 카페의 여성, 댄서, 게이샤, 창기 등 에 대한 단호한 처치 의 필요성을 호소하 40) 본부 소식 ( 本 部 だより), 緑 旗 1938년 8월호, 60쪽. 임전혜는 세츠코의 제안으로 수개 월 후에 총독부 지시로 조선 부인문제 연구회 가 설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연구회는 생 활 개선에 관한 순회 강연이나 좌담회 등을 열고, 또한 국기게양, 구습타파, 색복장려 추진 등을 통하여 정동( 精 動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 任 展 慧 1978, 140). 41) 이제부터의 여성의 생활을 말하는 좌담회 (これからの 女 の 生 活 を 語 る 座 談 会 ), 緑 旗 1940년 10월, 71쪽. 개선 혼례 기준 은 혼례식장은 신사( 神 社 ), 사당( 神 祠 )을 주 로 하고, 의식은 신사에서도 신사 이외의 장소에서도 궁성요배( 宮 城 遙 拜 ) 및 황국신민의 서사( 誓 詞 )를 제창 할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복장이나 납폐 등의 세세한 지정 도 포함했다.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33
고, 결론적으로 여성이 국책 수행에 하나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부인지도 부 나치의 프라웬샤프트(Frauenschaft)란 것에 상당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라고 요구하고 있다( 津 田 美 代 子 1940, 62-5). 이와 같이 남녀 모두가 국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재조선 일본인이 있기 도 했으나, 실제로 녹기연맹 운동에 동조했던 사람은 재조선 일본인 총인구 중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필자가 인터뷰한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의 대다수가 녹기 연맹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강습회나 토론회에 참가한 자는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았고, 모두 다 권유를 받고 참가했지만 위화감을 느꼈다. 는 등의 이유로 결국 녹기연맹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42) 또한 졸업생 중에는 츠다 사카에 선생이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라든지, 세이와여숙의 10회 수료생인 사와다 마리코( 沢 田 真 純 子 ) 역시 그 당 시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학교였다는 사실은 몰랐다. ( 沢 井 理 恵 1996, 120)고 말하고 있어, 반드시 녹기연맹의 목적이 회원이나 기타 학생들에게 이 해를 받았던 것은 아닌 듯하다. 한편, 녹기연맹은 현영섭이나 이영근 등, 단기간에 일본인보다 훨씬 철저하 고 급진적인 조선인 내선일체 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43) 조선인 청년에게 는 내선일체의 철저함을 강조하는 여러 가지 이유와 동기가 있었지만, 전체적 으로 보아 이 현상은 미야타 세츠코가 지적한 바와 같이 차별로 부터의 탈출 수단으로서 내선의 차이 를 철폐하고 민족평등 동등권리를 구한다는 소망이 극한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宮 田 節 子 1985, 156-164). 42) 경성제국대학 동 예과 동창회 회원 25명에 대한 인터뷰 앙케이트 조사 결과(2002년 12월 5 일 학사회관(도쿄)에서 배포). 43) 이들 조선인 이데올로그에 대해서 高 崎 宗 司 (1993); 이승엽(2001)을 참조. 34
VI. 국민정신 총동원운동 위에 서술한 재조선 일본인 주도단체는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총독부가 주도하는 국민정신 총동원운동 (이하, 정동운동), 국민총력운동 (이 하, 총력운동)이라는 이른바 국민운동 44) 산하에서도 서로 제휴하면서 내선일 체 정책에 협력하였다. 관헌이 주도하는 것이었지만 국민운동의 조선인을 자 발적으로 정책에 협력시킨다. ( 庵 逧 由 香 1995, 2)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는 현지 민간 유력자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이 국민운동의 관민일체의 집행 부로서 1938년에 결성된 정동조선연맹( 精 動 朝 鮮 聯 盟 : 정무총감인 오오노료 쿠이치로( 大 野 綠 一 郞 )가 명예총재, 시오바라 도키사부로가 이사장)의 일본인 임원(이사 평의원)에는 동민회, 조선 상공회의소 및 그 밖의 교화단체 등의 임 원 이름이 줄지어 있으며, 이사에는 고에즈카 쇼타( 肥 塚 正 太 ), 야나베 에이자 부로( 矢 鍋 永 三 郞 ), 마에다 노보루( 前 田 昇 ), 니와키 요지로( 丹 羽 淸 次 郞 ), 가 다 나오지( 賀 田 直 治 )가, 평의원에는 무샤 렌조( 武 者 鍊 三 ), 미야바야 시타이 지( 宮 林 泰 司 ) 등 1920년대부터 동화정책을 민간 차원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재조선 일본인 지도자들이 다수 취임해 있었다. 그들이 조선인 정 재계 유력자 (윤치호, 최린, 박흥식, 박영철, 조병상, 김명준)나 신여성을 대표하는 손정규, 김활란( 金 活 蘭 ) 등과 함께 총독부의 전시정책 수행을 위한 반관적( 半 官 的 ) 역 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45) 또한 전 조선에 영향력을 지닌 단체 가 연맹의 단체 평의원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경성을 거점으로 하는 재조선 일본인이 주도단 체나 조선인 유력자와의 합동단체가 대부분이었다. 46) 44) 국민운동 에 대해서는 庵 逧 由 香 (1995); 최유리(1997)를 참조. 45) 조선 연맹은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는가 ( 朝 鮮 連 盟 は 今 まで 何 をやって 来 たか), 総 動 員 창간호, 1939년 6월, 54-5쪽. 46) 그 중에서 재조선 일본인이 주도한 것은 동민회 본부, 조선 무역협회, 조선 군사후원 연맹, 조선 철도협회, 조선 교화단체 연합회, 조선 금융조합 연합회, 조선 상공회의소, 조선 사회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35
이들 민간인 임원은 정동운동의 기획 실행에 있어서 총독부 학무국장인 시 오바라 도키사부로의 지도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 내지에서 타이세이요쿠 산( 大 政 翼 賛 ) 운동이 발족한 것을 이어받아, 1940년 10월에 정동운동이 총력 운동으로 변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 國 民 總 力 朝 鮮 聯 盟 )으로 개편된 후에는 총독부 관료의 관여가 한층 더 깊어졌으며, 이에 따라 일반인들로부터 관제( 官 製 )운동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森 田 芳 夫 編 1945, 62). 그러나 그저 상부로 부터의 명령으로만 움직이고 있던 것이 아니었음은 앞에서 서술한 바 있는데, 이는 국책을 어느 정도 선취하고 있던 녹기 연맹원이 정동총력운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지위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정동조선연맹 결성 당 시, 현영섭이 조선연맹의 간사에 취임하고, 또한 츠다 사카에가 경성 연맹의 상 담역 및 경기도 연맹의 이사 47) 에 위촉되고 있다. 1942년 11월에는 국민총력연 맹의 기구 개혁에 따라 본부 사무국을 간소 강화시켜 설치한 총무, 연성, 후생, 경제, 선전 등 5부(14과)에 모두 민간인을 등용하기로 하였는데, 츠다 카타시는 선전부장에 임명되었고 48), 모리타 요시오는 선전부 편집과장에 취임하였으며 (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1943, 141), 세츠코도 총무부 기획위원회와 연성부 연성 위원회의 임원이 되었다(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1943, 117, 121). 츠다 카타시는 경성제대의 동료인 오다카 토모오( 尾 高 朝 雄 ) 등과 함께 경 찰국장이 인솔하는 국민총력연맹 방위지도부의 사상계와 협의하여 내선일체 사업협회, 조선 춘추회, 조선 수산회, 경성 토목건축협회, 경성 불교 각종( 宗 ) 연합회, 국민 정신총동원 경성 연맹, 애국 부인회 조선 본부, 재향군인회, 수양단 조선연합회 등이었다 ( 조선 연맹은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는가, 総 動 員 창간호, 1939년 6월, 55쪽). 이후 조 선 연맹 단체 평의원 수는 1940년에 82명으로 늘어났으며, 조선 문인협회 등이 들어 있었 다. 또한 민간의 중견적 유력자 를 포함한 103명의 참사( 参 事 )도 있었다( 국민정신 총동 원 조선 연맹의 조직과 그 활동 ( 国 民 精 神 総 動 員 朝 鮮 連 盟 の 組 織 と 其 の 活 動 ), 조선교육회 출판, 文 教 の 朝 鮮 176호, 1940년 4월, 19, 22쪽). 47) 본부 소식, 緑 旗 1938년 8월, 60쪽. 정동 조선 연맹 결성에 따라 녹기연맹은 본부 직제 를 개정하고 새로이 신설된 주간에는 츠다 카타시가 취임하여 연맹 운영의 중심이 되었 다. ( 高 崎 宗 司 1982, 65). 48) 국민총력 조선 연맹 임원 ( 国 民 総 力 朝 鮮 連 盟 役 員 ),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1943, 133) 36
의 이념 및 그 구현방책 요강( 要 綱 ) 을 작성하고(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防 衛 指 導 部 1941a, 7), 각 도의 국민총력 추진 대원의 연성강습회 등에서 강사로서 직접 그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다. 49) 또한 이 요강 에 따라 츠다 세츠코가 인솔하는 부인부가 강조하고 있었던, 일상생활을 통한 내선일체의 구현이라는 목표가 요강화 ( 要 綱 化 ) 되었다. 즉, 황국신민화를 촉진하는 방법으로서 국어(일본어) 의 보급이나 황민교육을 철저히 함과 동시에, 내선문화의 동질화 및 생활양 식의 단위화( 單 位 化 )나 생활감정의 근사( 近 似 ) (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防 衛 指 導 部 1941a, 47) 과학, 언어, 문예, 취미, 오락, 기타 생활양식 전반에 걸쳐 일본문화의 수미( 秀 美 )한 것을 반도에 우뚝 높이 솟도록 육성, 번무시키는 (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防 衛 指 導 部 1941b, 7) 것 를, 이 요강을 통해 전 조선의 지도자에게도 장려하도록 호소했던 것이다. 모리타 요시오는 정동운동에서 총 력운동으로 옮겨갈 때 국민운동 이 관제운동에서 민의에 의거한 운동으로 그 본부의 진용을 전환했다. 는 견해를 가졌었는데( 森 田 芳 夫 編 1945, 67), 이는 녹기연맹 간부가 국민운동의 조직 내에 포섭되어 감과 동시에, 그 집행부에 연 맹원이 거꾸로 침투해갔다고 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38년 정동운동의 발족에 따라 일본 내지의 토나리구 미 ( 隣 組 )보다 한 발 앞서 조선반도의 거의 전 인구를 가족 단위로 포섭하는 애 국반 ( 愛 國 班 )의 조직망이 조선 연맹의 말단에 조직된 것이었다. 50) 1조가 약 10호로 구성된 애국반을 통해서 전쟁터 후방에서의 활동이나 소비 절약, 저축 장려, 근로 봉사 등 전시색( 戰 時 色 )이 짙은 활동 외에, 황국신민의 서사 의 제 창, 궁성요배( 宮 城 遙 拜 ), 신사참배나 국기게양 등 천황 중심의 국민 의식, 나 아가 일본어 강습, 지원병 제도의 후원, 창씨개명의 장려, 전시 생활개선, 내선 49) 国 民 総 力 1941년 4월, 137쪽. 50) 그러나 실제 애국반 조직의 활동 상황은 1940년대에 들어와서도 철저하지 못한 점이 많았 고, 주민의 참가 상황도 지역 젠더 계급 민족별 등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 같 다( 庵 逧 由 香 1995, 14). 예를 들어, 경기도 내의 상황에 대해서는 京 畿 道 警 察 部 長 警 務 局 長 宛 (1941)을 참조.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37
결혼의 장려 등 총독부의 모든 황민화 정책이 일상생활 차원에서 추진되게 되 었다(최유리 1997, 148-171; 庵 逧 由 香 1995, 14-5; 森 田 芳 夫 編 1945, 102).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안자코 유카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인과 재조선 일본인 이 똑같이 애국반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며( 庵 逧 由 香 1995, 15), 이 로써 일반 재조선 일본인이 황민화를 풀뿌리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동민회 등을 통해서 1920년대부터 융화 운동에 관 여해 온 고에즈카 쇼타(총력연맹이사 경성부연맹 상무이사)는 애국반 상회의 의의 및 목적을 일국의 기초가 되는 가정공동체, 즉 애국반 일가를 만들어 내 는 것 이라 하고, 이것이 진정한 일본인다운 자각에 혼을 집어넣는 것이며, 그 속에 일본정신이 스스로 십분 나타나게 되는 것이므로, 확고히 황국의 국체 의 근본으로 일어서게 하려는 것이 본 상회의 본래의 대( 大 )사명 이라고 설명 하고 있다( 肥 塚 正 太 1941, 117). 즉, 애국반은 가족 단위로 내선일체화를 촉진 하는 이른바 세포 조직으로서, 이 애국반의 조직망이 전 조선 반도를 뒤덮고, 모든 조선인 일본인 가족을 포섭해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가족제 국 51) 을 만들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VII. 내선일체의 실태 그렇다면 애국반 조직을 통해서 일반 재조선 일본인들은 실제로 어느 정도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에 협력했던 것일까. 조선군사연맹이 편집한 반도의 후방진 에는 내선일체의 열매 의 실례로 그 고장의 조선인과 일본인이 나이와 성별에 구애되지 않고 한마음이 되어 후 51) 가족제국 이란 표현은 Young(1998, 366)에서 인용하였다. 38
방활동에 힘쓰고 있는 모습이나, 병정으로 소집되어 가장이 없는 일본인 가정 의 논밭을 근처의 조선인이 거들어주는 등의 미담이 많이 실려 있다( 朝 鮮 軍 事 後 援 同 盟 編 1940, 85-6, 96-7). 또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약 반수가 거주하는 경성 태평로( 太 平 通 )의 신카이 아키오( 新 開 明 雄 )에 따르면, 동내( 町 内 )에서 각 애국반이 내선일체의 실적을 올리는 일 에 특히 힘을 기울이고 있는데 예를 들어, 부모를 잃은 가난한 집의 조선인 어린이를 애국반의 내지인이 중심이 되 어 모든 일을 도와준다. 거나, 또 다른 애국반에서는 내지인과 조선인의 장례식 양쪽에 반원 모두가 돈을 냈다는 것이다. 신카이가 반장 일을 보는 애국반에서 는 동내 공터에 내선일체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친구가 되도 록 내지인과 반도인 어린이들을 모아 함께 놀게 했다. 는 언급도 나온다. 52) 재조선 일본인 중에서도 특히 학교 교사는 황민화정책의 실천에 있어서 대 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민화교육의 일환으로 황국신민의 서사 의 제창, 궁 성요배, 신사참배 등을 조선인 아동 생도 학생에게 매일 강요하고, 문맹퇴치 명 목으로 부락으로 출장을 가서 일본어 지도를 하였으며, 그 중에는 조선인 학생 에게 지원병이 되도록 권유하거나 창씨개명을 강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佐 野 通 夫 1982, 76-80; 伊 藤 勇 1982, 112). 경성제국대학의 한 일본인 졸업생에 따르 면, 그는 재학 중, 지원병 제도가 발표되어 망설이는 조선인 학생이 있으면 각 반별로 같은 반 조선인 학생들의 설득에 나섰다. 53) 고 회고하고 있어 지원병 제도가 사실상 강제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내선일체 정책 중에서도 창씨개명은 너무나도 노골적인 민족 말살 정책이었기 때문에 재조선 일본인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비판이 있었던 것 같 다. 54) 또한, 애국반 활동을 통해 일반 재조선 일본인이 미나미 총독이나 녹기연 52) 쑥쑥자라는 애국반 강화 육성 좌담회 (スクスク 育 つ 愛 国 班 強 化 育 成 座 談 会 ), 国 民 総 會 3:6 (June 1941), 9-10쪽. 53) I. M. 씨로부터 저자에게 온 편지(2003년 8월 2일 부). 54) 경성 제국대학 동 예과, 경기도 공립 상업학교, 경성 공립 공업학교, 기타 부내 전문학교 일 본인 졸업생 합계 58명에 대한 앙케이트 조사 회답(2001년 12월~2003년 7월 실시); H. F.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39
맹 지도자가 바라던 것처럼, 내선일체의 실천자가 되고자 노력했는가 하는 점 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예를 들어, 인천부( 仁 川 府 )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었다. 1939년 7월에, 조선인인 인천부 사회과 교화계주임 부속인 박도언 ( 朴 道 彦 )이 야마테마치( 山 手 町 )에서 부내의 가정방호조합( 家 庭 防 護 組 合 ) 임원 약 150명에 대해 애국반에 대하여 강연을 했는데, 그 가운데 신공( 神 功 ) 황후는 신라에서 내지로 도래한 사람의 자손으로서 내선일체를 오늘날 새삼스 럽게 논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면서 하야시( 林 ) 전 수상, 고노에( 近 衛 ) 전 수상 등은 일본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는 등의 내용의 비판을 가했으며, 또한 내지인이 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인을 접하는 폐습 등도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참석했던 내지인 측은 몹시 불쾌감을 느껴 강연 중에 자리를 뜨는 사람이 속출 하였 으며 조선인이면서 또한 관리인 신분으로 그런 언사를 토로하는 따위는 내지인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비난 하였는데, 이와 반대로 조선인 임원은 박( 朴 )의 강연에 대해 계속해서 박수를 보내는 모습 이었다는 것이다( 京 畿 道 警 察 部 長 警 務 局 長 宛 1939). 박의 강연 내용은 녹기연맹이나 국민운동을 비롯해 미나미 총독 자신이 전 개하고 있던 내선일체론과 거의 다르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일본인 주민이 이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관민의 이데올로거들이 당시 고취하고 있던 일선동조론 ( 日 鮮 同 祖 論 )이나 복합민족론 등이 전혀 받아들 여지지 않고 있었음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는 내선일체를 실천하는 목적으로 신설된 내선공학 ( 內 鮮 共 学 ) 학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완전한 내선공학으로서 1940년에 신설된 경성공립공업학교의 졸업생인 히사마츠 가즈오는 동창회보에서, 내선일체는 당시의 국책으로서 이를 크게 써 붙인 간판이 교사의 정면 현관에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장식문구 일 뿐 그 실태는 추한 차별이었다. 단지 사람 수효만을 일치시켰을 뿐이었다. 씨로부터 필자에게 온 편지(2002년 2월부); 安 藤 豊 禄 (1984, 137). 40
라고 회상하고 있다( 久 末 数 夫 2001, 16). 또한, 당시 아버지가 총독부 관료였 던 어느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역시 고이소 쿠니아키가 1942년 총독에 취임했 을 때에는 독특한 신화에 의거해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동일선조론( 同 一 先 祖 論 )에 입각하여 내선일체를 풀었는데, 이 이치는 뒤에서는 당시부터 웃음거리 가 되어 있었다. 라고 회고하고 있다. 55) 내선일체의 하나의 지표로써 내선결혼( 內 鮮 結 婚 )을 살펴볼 수 있는데, 총 독부의 장려와 1941년부터 총력운동 강령의 하나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56) 전체의 혼인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57) 녹기연맹의 현영섭도 내선결혼 의 방해 이유로 내선인이 서로 경멸하며 반목하는 것, 조선인 남성이 내지인 여 성과 결혼했을 경우에 태어난 아이가 법적으로 조선인이 되고, 그 사회적 정치 적 지위의 향상이 방해되는 것 등을 들고 있다( 玄 永 燮 1938b, 66-7). 21세 때 에 일본으로 귀환하기까지 조선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오사다 카나코( 長 田 か なこ)는 내선일체를 위해서는 조선인과 결혼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하고 진 지하게 생각하여 부모에게 말씀드렸더니 크게 화를 내시어 침울해진 적이 있 다. 라고 회고하고 있듯이, 내선결혼 등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본 인 부모들 쪽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58) 필자가 20대, 30대에 패전을 맞이한, 예전의 조선 재주자에게 실시한 인터뷰 앙케이트 조사에서도 역시 당시의 내선 일체 정책의 한복판에서도 조선인과의 결혼은 생각할 수 없다, 있을 수 없다 등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거의 내실이 동반되지 않은 장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59) 55) I. M.씨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 8월 2일 2003년부. 56) 森 田 芳 夫 編 (1945, 101-2). 1940년에는 137쌍(106쌍은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통혼, 31쌍은 조선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의 통혼)이 총독부로부터 표창 받았고, 미나미 총독 직 필의 내선일체 족자가 증정되었다( 표창받은 내선결혼한 사람들 ( 表 彰 された 内 鮮 結 婚 の 人 々), 国 民 総 力 1941년 4월, 39쪽). 57) 1931년부터 1940년 말까지 10년 동안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혼인 수는 3870쌍이었다( 丹 下 郁 太 郞 1943, 50-1). 58) 45년 8월 15일, 季 刊 三 千 里 31호 (1982년 8월), 117쪽.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41
오히려 재조선 일본인 심리(mentality)의 전형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남대 문시장에서 식료품점을 경영하는 모리카와 요네키치( 森 川 米 吉 )의 내선일체론 이다. 재조선 40년의 경험을 살려 누구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독자적인 내 선일체의 이론과 새로운 상도( 商 道 )의 실천을 전개해 온 모리카와는 내선일체 란, 단지 사이좋게 지내는 것만은 아니다. 오늘의 조선의 기초를 닦은 내지 인의 고심에 대해서, 이를 형님으로서 본받고 조선의 민중은 내지인의 아우로 서 황국신민의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좋다 하더라도, 형제 사이에는 스스로 서열이 있고 도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60) 고 설명하고 있다. 즉, 내선일체란 민족동권( 民 族 同 權 )이나 대등한 관 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부터의 식민자 대 피식민자 사이의 위 계(hierarchy)를 유기화한 형제관계 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는 합병 전 후기의 재조선 일본인의 정신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辛 美 善 1995, 43-62). 한편, 조선인 측의 내선일체 해석은 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는데, 권리 의무 평등론 에서부터 조선의 독립을 내거는 민족협화론 ( 民 族 協 和 論 )까지 실 로 당국이 예기치 못했을 정도로 다양한 것이었다(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防 衛 指 導 部 1941a, 12-43). 61) 특히 당시의 신문 잡지나 경찰 기록에서 눈에 띠는 것 은, 충량( 忠 良 )한 신민 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과 더불어 일본 국민으로서 동 등 권리를 요구한다고 하는 사회적 현상이 엘리트층에 국한되지 않고 조선인 사회 각 층에서 일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와 같이 의무에 더해 권리를 요구하 는 경향은 처음에는 조선인 공직자나 유식( 有 識 )계급 사이에서 볼 수 있었는 데, 그들은 1930년대 중반부터 징병제, 참정권, 의무교육이라는 조선에서의 세 59) 앙케이트 회답자의 대다수(53명)가 아니오 라고 답했고, 있을 수 없다 고 답한 사람은 9명 이었다. 이는 기무라 켄지가 원( 元 ) 신의주 재주자에게 행한 앙케이트 조사 결과와 거의 같 은 내용이다( 木 村 健 二 2001, 87). 60) 명애국반 방문기 ( 名 愛 国 班 訪 問 記 ), 国 民 総 力, 1942. 2, 91-92쪽. 61) 이들 해석을 당국 측은 잘못된 일체관 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배제할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42
가지 시민권 의 시행을 일부 재조선 일본인 공직자와 결탁하여 당국에 청원하 고 있었다( 塩 原 時 三 郎 1939, 10). 62) 이는 1937년에 미나미 총독이 표명한 내 선일체 정책을 내선의 차별철폐, 민족 평등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로 조선인 측 이 받아들이고, 이 해석이 동일한 권리의 요구로 서서히 사회 각 계층으로 퍼져 나간 것이라 생각된다. 1941년 3월 경기도 경찰부장의 국민 총력운동에 따른 민정에 관한 건 이 라는 보고를 보면, 총력운동의 진전에 따라 내선일체를 일반 조선인들은 내선 평등으로 잘못 생각하여, 봉급생활자 같은 사람은 조선인에게 가봉( 加 俸 )을 지 급하는 것에 대한 희망을 품고 집회에서도 동권을 요구하며, 매사에 거수 질문 을 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京 畿 道 警 察 部 長 京 城 地 方 法 院 検 事 正 等 宛 1941). 이듬해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시행이 결정되 었을 때에는 조선 또는 일본재주 조선인은 징병이라는 최대의 의무 를 부담하 는 교환 조건 으로 참정권, 의무교육, 내지 도항( 渡 航 ) 제한 철폐, 내지로의 본 적 이동의 자유 등의 차별 철폐 를 요구하였고, 그 중에는 내선의 차이를 완전 히 없애기 위해 총독정치의 철폐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63) 지배자의 동화 레토릭(rhetoric)을 역이용하여 식민지체제 내에서의 민족 적 권리와 지위 향상을 도모한다고 하는 정치적 방책은 이미 1920년대부터 조 선인 엘리트나 공직자들 사이에서 생겨났지만, 전시기에는 이것이 사회 일반인 들에게까지 퍼져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64) 물론 이와 같은 동권 주장은 이론 62) 예를 들어, 그들은 1933년에 조선에서의 징병제 시행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국의회에 제 출하고있다( 田 中 宏 1975, 86-7). 63)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시행의 각의결정 공표에 관한 반향조사 ( 朝 鮮 に 対 する 徴 兵 制 施 行 の 閣 議 決 定 公 表 に 関 する 反 響 調 査 ), 思 想 月 報 1942년 6월, 12-17, 22-23쪽. 64) 경찰국 보안과장인 후루카와 카네히데( 古 川 兼 秀 )는 조선인의 각 계층에서 내선일체가 곧 무차별 평등으로 만든다는 지적에 대해, 이것의 죄의 대부분은 내선일체라는 용어 자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황국신민운동이라든지 황국신민화라고 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고 인정했으나 명칭을 바꾸면 오해가 생기므로, 소위 내선일체 라는 식으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防 衛 指 導 部 1941. 15-6).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43
적 기반이 지배자측의 언설에 있기 때문에 조직적인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적어도 일본과 조선 양쪽의 조선인 사이에 퍼 져 있었던 사회적 현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내선일체라는 언설의 테두리 안에서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국가 권력 측과 조건 부로 협력한다고 하는 조선인 사이에, 일종의 미묘한 교섭관계가 발생하고 있 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통치권력 측은 이를 조선인의 내선일체 이론에 대한 이해의 불충분함의 표 출이라고 판단하고, 낮은 민도 및 황민화의 불충분 등을 이유로 동권 요구를 부정하였다. 앞에서 서술한 국민총력 연맹운동 방위지도부의 내선일체의 이념 및 그 구현방책 요강 도 조선인 각 계층을 통해 대단히 많은, 차별제도의 철 폐를 내선일체 구현의 선결 조건으로 삼는 순역( 順 逆 )을 그르친 방식 을 일 소 ( 一 掃 )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国 民 総 力 朝 鮮 同 盟 防 衛 指 導 部 1941, 15-6). 또한 미나미 총독이나 시오바라 학무국장 등도 조선인에게 전쟁협력을 요구하면서도, 권리의 요구는 서양적 이며 개인주의적 인 것으로, 그보다 앞 서 충량한 신민 으로서의 완벽을 도모함이 중요하다라는 등의 훈계를 하고 있 다( 塩 原 時 三 郎 1939, 14-5; Eiji 2002, 338의 인용문). 이처럼 관헌 측이 조선인의 동권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던 한편, 일반 재조 선 일본인은 더욱 굴절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경기도 경찰부장의 다른 보고 서에 따르면, 재조선 일본인 사이에서는 내선일체 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이것 이 조선인의 권리 요구나 점점 심해지는 불손한 태도 를 조장한다고 하는 위구 심( 危 惧 心 )이 깊어져, 이 정책을 하부에서 지탱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던 공직 자나 애국반장조차도 내선일체 이데올로기를 실제로는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 이다. 예를 들어, 자산가이며 동( 町 )대표직에 있는 조선재주 30년째인 어느 일본 인은 총력운동은 좋지만 최근에 센진 이 경제적으로 팽창한 까닭인지, 메이지 마치( 明 治 町 ) 등 기타 내지인 거리로 진출하여 내지인을 압박해 오고 있으므 로 내지인은 곤란을 겪고 있다. 라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고( 京 畿 道 警 察 部 長 44
京 城 地 方 法 院 検 事 正 等 宛 1941b), 또 어느 일본인 경성부회의원 등은 총력 운동은 상당히 철저한 모양이지만 근자에 센진이 뻔뻔해진 것은 가관이다. 조 선인은 합병 당시처럼 탄압해야 하며, 식민지에 문화정치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 京 畿 道 警 察 部 長 京 城 地 方 法 院 検 事 正 等 宛 1941c)라고 언급하 고 있다. 또한 실업가겸 신문사 사장이란 엘리트도 내선일체가 사실은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내지인의 것을 절취함으로써 조선을 빼앗긴 복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는 등, 조선인을 도둑놈 취급하면서 지금 상태로는 조선에 안주 할 수 없다. 라고 개탄하였으며, 독일 민족의 순혈( 純 血 )주의를 모방하여 야마 토( 大 和 ) 민족도 순혈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하여 내선결혼을 장려하고 표창하는 것 등은 크게 잘못되었다. ( 京 畿 道 警 察 部 長 京 城 地 方 法 院 検 事 正 等 宛 1941a)라는 등 당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재조선 일본인의 목소리는 수적으로 소수자인 식민자의 파라노이아 (paranoia), 즉 조선인의 지위가 조금이라도 향상되었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곧 자기들의 손실로 이어진다고 하는 제로썸(Zero Sum)적인 식민자의 정신구조 를 반영한 것이었다. 특히 이는 조선인의 동권 요구에 대해 노골적으로 나타났 다. 예를 들면, 재조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지인 조선공론 ( 朝 鮮 公 論 )의 한 논설은 내선일체의 일체 라는 의미가 동권 이라고 해석되고 있는 풍조에 대해, 남성과 여성의 권리 의무가 별개이어서 그 근본에 있어서 남녀가 각각 구별되 어 태어나는 것임을 알고, 이 원리와 마찬가지로 내지인은 내지인으로서 태어 나고, 반도인은 반도인으로서 태어났다. 는 것을 완전하게 하는 것 이 즉, 내 선일체인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65) 다시 말해, 영원히 구별되어야만 한 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1942년에 발표된 징병령 시행에 대한 재조선 일본인의 반응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66) 그들 대다수는 징병제 실시를 시기상조 65) 도청도설 ( 道 聴 途 說 ), 朝 鮮 公 論 1939년 7월호, 55쪽. 66)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시행의 각의결정 공표에 관한 반향조사, 思 想 月 報 1942년 6월; 징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45
로 보고 불손함이 더해가는 조선인의 태도가 더욱 조장되는 것을 위구 하여, 징병 의무의 부담과 동시에 당연 반대 급부 의 권리(참정권, 의무교육, 가봉 문 제 등)를 요구하리라 예측하고, 이들 요구에 대해 정부가 철저한 제압을 가할 것을 요망하고 있었다. 67) 그 중에는 본 제도의 시행이 반도인 재향군인이 다 수가 되면 지도적 입장에 있던 내지인은 한 발자국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다., 조선인의 더해가는 횡포화 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내지인의 앞으로의 생 활이 걱정된다. 는 등 우려하는 자도 있었다. 68) 이와 같은 재조선 일본인의 반응은 내선일체 정책 하에서, 전술한 바와 같 이 동권 해석을 둘러싼 조선인 대 총독권력 이라는 대립과는 또 다른 차원의 조선인 대 재조선 일본인 이라는 시민권 을 둘러싼 조건적 경쟁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재조선 일본인이 식민지에서 사회 적 경제적 우위나 특권을 확보하고 있었던 반면, 제국 의회에의 참정권, 자치 권, 언론 집회의 자유 등과 같은 공민권이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총독정치에 의 해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의 식민지(특히 케냐, 남 로데시아, 남 아프리카 등)에서 이주한 식민자와 현지주민 사이에 모든 법적 차별이 만들 어지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Elkins and Pedersen 2005, Intro.), 조선에 서는 식민자 와 피식민자 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정치범죄의 처벌에 관한 제령( 制 令 )(1919년 제령 7호)이나 치안유지법(1925 년)은 재조선 일본인을 포함한 조선 일반주민의 범죄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浅 野 豊 美 2004, 137). 따라서 이와 같이 총독의 동일권력 하에 놓여 있고, 일본 내지와 식민지 사이의 다른 법체계의 틈새에 위치하고 있던 재조선 일본인의 불안정한 정치적 법적 지위가 조선인의 권리 획득에 대한 과민한 태도로 이어 병령 시행문제 아직도 시기상조임 ( 徴 兵 令 施 行 問 題 ー 未 だ 時 期 尚 早 なり), 朝 鮮 公 論 1937년 9월, 1쪽. 67)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시행의 각의결정 공표에 관한 반향조사, 20-1쪽. 68) 상동, 21쪽. 46
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VIII. 결론 총력전 시기에 있어서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의 형태 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한편에서는, 녹기연맹을 비롯한 재조선 일본인 주도 단체나 학교 교사 등은 총독부의 제반 황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일반 재조선 일본인도 정동운동의 하부조직인 애국반을 통해 일상 차원에서 총독부의 제 정책 수행을 위해 일정한 협력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 국민으로서의 시민권 병역, 참정권, 의무교육 등 을 조선인에게 주는 일에 관해서는 회의적이거나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일부 재조선 일본인 공직자(예를 들어, 갑자구락부 등)는 조선인 동료 와 함께 징병제나 참정권을 조선에서 시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다른 재 조선 일본인 대부분은 조선인의 권리 요구는 물론, 징병 등의 의무 수행에 대해 서도 조선인의 불손한 태도가 더해가는 것을 재촉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감 때문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즉, 재조선 일본인은 총독부의 내선 일체 정책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들임과 동시에 철저한 반대자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일한 충량한 신민 이 되는 것을 강하게 부 르짖는 반면, 동일한 권리를 완고하게 부정한다고 하는,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 일체 정책에 대한 상반된 태도는 실은 일본인으로서의 그들의 모호한 정체성 (identity)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황민화 정책은 그들의 굴 절된 정신구조를 비추어내는 거울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총력전시기 철저한 민족말살 정책 하에서도 조선인이 강한 민족의식을 지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47
속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내선일체 정책이 조선인이 기대한 것처럼 종래의 차별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한 그 구조를 일상생활에서 계속 재생산 해내는 재조선 일본인이 다수 존재하 고 있었음을 들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상 차원에서 내선일체를 매개하는 역할을 맡은 재조선 일본인 협력자가 실제로는 그 이데올로기가 내포하는 모순 을 더욱 심화시키고, 반대로 민족감정을 선동하는 언동으로 결국 총동원 체제 를 불안정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번역: 현순조] 참고문헌 방기중 편. 2004. 일제 파시즘 지배정책과 민중생활. 혜안.. 2005.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 인식과 대응. 혜안. 이승엽. 2001. 조선인 내선일체론자의 전향과 동화의 논리. 20세기연구 제2호. 정혜경 이승엽. 1999. 일제하 녹기연맹의 활동. 한국 근현대사 연구 제10집(6월). 최유리. 1997. 일제말기 식민지 지배정책 연구. 국학자료원. 京 畿 道 京 城 地 方 法 院 検 事 正 宛. 1931. 日 支 衝 突 事 件 に 関 する 管 内 状 況. ( 第 十 報 ) 京 高 ( 秘 ) 第 8402 号 の9(9 月 30 日 ); 同 上 ( 第 十 一 報 ) 京 高 ( 秘 ) 第 8402 号 の10(10 月 2 日 ). 京 畿 道 警 察 部 長 警 務 局 長 宛. 1939. [ 朴 道 彦 ] 仁 川 府 吏 員 の 失 言 問 題 に 関 する 件. 京 高 ( 秘 ) 第 1810 号 (7 月 24 日 ). 1941. 時 局 下 の 民 情 に 関 する 件. 1743 号 (6 月 30 日 ) 京 畿 道 警 察 部 長 京 城 地 方 法 院 検 事 正 等 宛. 1941a. 国 民 総 力 運 動 に 伴 う 民 情 に 関 する 件. 京 高 ( 秘 ) 第 141 号 の3(3 月 25 日 ).. 1941b. 時 局 下 の 民 情 に 関 する 件. 京 高 ( 秘 ) 第 1743 号 (6 月 30 日 ).. 1941c. 時 局 下 の 民 情 に 関 する 件. 京 高 ( 秘 ) 第 2426 号 (8 月 29 日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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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laboration of Japanese Settlers with Naisen Ittai (Japan and Korea as One) Policy in Colonial Korea under Total War Uchida, Jun This paper examines the role and activities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under total war (1937-1945). My aim is to offer an alternative lens through which to probe into the nature of wartime collaboration, which is conventionally understood as a bargain struck between a few Korean elites and the Government-General. Rather than mere lackeys of the regime, however, settlers collaborated but with deep ambivalence. I demonstrate how settlers aggressively promoted the process of making Koreans loyal imperial subjects ( imperialization(kōminka) ) on the one hand, and vehemently opposed the process of extending them partial Japanese citizenship (military service, limited suffrage, and universal education) on the other. I argue that such Janus-faced character of settler collaboration created a new set of contradictions that served to destabilize the structure of wartime mobilization from within. Key Words: Colonial Korea, Japanese Colonialism, Settlers, Collaboration, Total War. abstract 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