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북 정책 민주당 정권과 자민당 정권은 차이점이 있는가? 진 창 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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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1970 ~ 1980 년대 많은 일본인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행방불명이 됨 1991년 ~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측에 납치문제를 제기. 북한 측은 완강히 부인. 2002년 9 월 제1차 일북정상회담(장소:평양), 일조평양선언에 서명 김정일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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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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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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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언어와 상관없이 시국적 내용이다. 발표매체별 집필 수(K=조선어 N=일본어) 1939년 기사 등 K 文 章 3 三 千 里 2(좌담2포함) 女 性 1 作 品 1 東 亜 日 報 1 N 国 民 新 報 2 소설 K 文 章 년 기사 등 K 三 千 里 10(좌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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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북 정책 민주당 정권과 자민당 정권은 차이점이 있는가? 진 창 수 지음

차 례 Ⅰ. 문제제기_5 Ⅱ. 자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_8 1. 2002년까지의 자민당 정권의 대북 정책 2. 아베 정권이후의 대북 정책의 변화 3. 후쿠다 총리의 등장과 대일 유화 정책의 실패 4. 아소 정권하에서 대북 강경정책의 회귀 Ⅲ.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_19 1. 하토야마 정권 초기의 북일관계 2. 민주당 정권하에서 대북 강경 정책의 변화 Ⅳ. 일본 정치권의 변화: 전후 정치가의 보수화_26 Ⅴ. 아베 정권하에서의 대북 독자 외교_30 Ⅵ. 결론: 일본 대북정책에서 변화?_33 참고 문헌_35 요약문_39

일본의 대북 정책 민주당 정권과 자민당 정권은 차이점이 있는가? Ⅰ. 문제제기 본 연구에서는 민주당 정권과 자민당 정권의 북일관계에 대한 정책을 비교하면서 일본의 대북정책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목표 로 하고 있다. 북일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세 변수는 국제정치(북미관계 의 변화), 국내정치, 협상 전략의 다이나믹스로 볼 수 있으며 시기별로 영향력의 차이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북일관계의 진전과 침체의 사이 클을 이해하기 위해서 특정 변수가 어떤 조건하에서 영향력을 미치는지 를 분석할 것이다. 특히 자민당 정권 말기와 민주당 정권의 대북정책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세 변수가 각각 어떤 역학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대북정책에 있어서 두 정권의 공통점 과 차이점을 분석하면서 일본 대북정책의 지속과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 다. 일본과 북한에 관한 기존연구는 양국관계의 역사적인 서술을 중심으 로 이루어져 왔다(신정화 2006). 한국내에서 북일관계에 대한 논의는 1990년 자민, 사회 양당의 방문에서 시작하여 주로 2002년 고이즈미 총 리의 방북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들 논의의 초점 은 주로 양국의 전략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대표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압력)가 북일관계에 미친영향, 북일양국의 협상정치, 그리고 일본 국내 정치에 있으며 어느 측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설명도 달라지고 있다. 우선 국제정치 수준의 변수를 중시하는 입장은 국제시스템의 변화와 성

6 일본의 대북 정책 격이 북일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에 논의의 중점을 두 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한국이나 미국이 일본정부와 북한정부에 어떤 압력을 행사하고 또 일본정부와 북한정부는 그러한 외압을 어떻게 수용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일본 및 북한과의 국교교섭이 가능하 게 된 이유를 국제정치의 변화에서 찾고 있으며, 일본과 북한이 이를 이 용하여 국교정상화 교섭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小 此 木 政 夫 2002, 김규 륜 전동진 2004, 이숙종 이면우 1997). 특히 이 시각에 따르면 일본 의 대북한 접근은 한국의 북방외교의 성과와 고립 상황을 탈피하려는 북한의 전략으로 인해 국교정상화의 환경이 조성됨으로써 가능하게 되 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국제정치적인 분석은 국내정치적인 요인을 블 랙박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국내정치의 측면을 강조하는 분석은 일반적인 외교정책에 서 보여지듯이 국내적인 요인을 주요한 변수로 하여 그것이 북일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설명하고 있다(강태훈 1992, 이즈미 하지메 1997, 진창수 2000, 박홍영 2008). 국내적인 분석은 대북정책과 대일정 책을 둘러싼 국내세력간의 갈등을 면밀하게 추적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접근방법은 주로 국내 정치상황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 개하기 때문에 국제정치분석과 유사한 일면적인 분석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면에 이 두 가지 분석의 이론적인 약점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북일 양국의 협상정치를 분석한 투레벨 게임론은 국내 정치와 국제정치의 다 이나미즘을 설명하고자 하였다(양기웅 2006). 이러한 입장하에 협상정 치 분석은 주로 협상자의 전략적인 차원에서 일본정부와 북한정부의 협 상과정을 분석한다. 즉 협상정치 분석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다국적 이 슈 연계 전략 및 협상 참가 확대전략과 북한이 가지고 있는 以 夷 制 夷 전략, 북미일괄 타결 전략을 통하여 북일교섭을 분석하였다. 그러나 북 일국교 정상화 문제는 당사국인 북한과 일본 사이의 단순한 게임 이상 의 보다 다차원적인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협상정치 분석은 일정한

Ⅰ. 문제제기 7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본 논문이 중점으로 다루고자 하는 자민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의 대 북정책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는 신정화의 논문이 주목할 만하다. 신정화는 일본의 대북정책의 지속과 변화-자민당정권에서 민주당정권 으로- 논문에서 자민당 정권은 북한위협론을 배경으로 자국의 안보력 강화에 초점을 맞춰온 반면 민주당 정권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 확대를 목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제재보다는 대화중심의 대북정책 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즉 자민당 정권의 대북정책은 국내 정치변수(국내 정치기반 강화, 여론)를 중시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으며 민주당 정권은 국제정치의 변화에 따른 일본의 외교 전략으로서 동아시 아 공동체 구축을 주장하는 가운데 아시아 외교를 강화시키는 것을 목 표로 두었다. 즉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북한 문제를 해결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은 민주당이 출범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민주당 정권이 공약으로 내 건 대북 정책을 분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북정책에 있어서 민주당의 이상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이 추진한 정책은 이와 달랐다. 야심찬 민주당 정권의 대북정책은 겉보기에 자민 당 정권의 대북정책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민주당 정권의 대북정책을 실증적으로 추적하면서 왜 민주당 정권의 대북정책이 자민 당 정권의 대북정책과 유사하게 나타났는지 그 원인을 분석한다면 일본 의 대북정책이 가진 구조적 조건을 밝히는데 유리할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북일관계에 영향 을 미쳐온 세 변수가 자민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하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면서 탈 냉전이후의 북일관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해 보고자 한다.

8 일본의 대북 정책 Ⅱ. 자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1. 2002년까지의 자민당 정권의 대북 정책 자민당 정권 시기의 북일관계는 국제정치적인 변수가 국내정치를 제 약하면서 북일관계의 진전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국제 정치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내정치의 요인에 의해 진전을 가지기 도 하고, 오히려 더욱더 북일관계를 경색시키는 국면도 나타난 것이 사 실이다. 북일관계의 진전을 촉진시키는 상황을 살펴보면 일본 자민당의 유력 의원(총리 또는 파벌 영수)인 1990년 가네마루. 다나베의 방북단, 1995 년 와타나베 미찌오를 단장으로 한 자민당. 사회당. 신진당의 3당 대표 에 의한 북한 방문, 1997년 자민당. 사회민주. 신진당의 3당 대표단의 북한방문, 1999년 무라야마 전 총리를 단장으로 한 초당파의 평양 방문, 2002년, 2004년 고이즈미와 김정일의 정상회담, 2008년의 후쿠다 수상 의 납치문제 재조사의 합의 등을 들 수 있다. 이점에서 본다면 일본의 유력 정치가(가네마루, 와타나베, 무라야마, 고이즈미) 들이 그들 나름 의 역사적인 사명과 전후 청산을 하려는 노력이 북일교섭을 진전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와 동시에 북한은 미국과의 교섭 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일본이란 카드를 이용하여 일본의 정치적인 자금과 미국과 한국을 압박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점에 서 북일 교섭이 추진할 수 있는 요인이 양국의 전략과 맞아떨어진 측면 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내의 외무성과 유력의원간의 전략적인 갈등은 국제적인 여유 공간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전을 방해하는 현상 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90년대 초기 일본 외무성은 북한이 붕괴할 가능성을 고려한 나머지 정치가 주도로 북한과의 타협이 이루지

Ⅱ. 자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9 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외무성의 정세 판단은 미국과의 보조, 한국과의 관계 등 국제관계를 고려하는 측면이 강하였 기 때문에 국내정치에 경도되어 있는 유력 정치가들의 생각과는 서로 충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2002년 북일정상회담은 외무성의 대북 유화론자 와 함께 북일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 여론의 악화는 오히려 아베와 같은 매파 정치가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대북 유화론자의 영향력을 약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동시에 2006년 7월의 북한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와 10월 북한의 핵 실험으로 인해 대북문제는 유엔 안보리 에서 대북제재결의 1718호를 채택하기에 이르면서 북일 양국간의 관계 에서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은 점차 줄어들고 국제적인 흐름(미국의 대북 정책 6자 회담의 추이)에 따라 좌우되는 측면이 강해졌던 것이다. 점차 북한도 일본을 통한 경제적인 지원과 대미 압박 전략이 실효성 을 가지지 못한다고 판단하면서 일본과의 교섭에는 소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아베 총리이후의 일본 정치의 흐름은 대북 강경론 자가 주도권을 가지면서 대북 정책은 압박정책이 주도하게 되었다. 2. 아베 정권이후의 대북 정책의 변화 2006년 9월에 취임한 아베신조 총리는 취임 전부터 고이즈미 총리의 대화와 압력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압력 을 중시하는 대응으로 납치문제 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였다. 특히, 북한이 2006년 10월 핵실험을 감행하자 1북한선박의 입항 전면금지 2북한으로부터의 수입 전면금지 3북한국적 보유자의 입국을 원칙적으로 금지 한다는 독자적인 제재장 치를 표명하여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 1). 하지만 2007년 2월 13일, 초기단계 조치 로 평양선언에 따라 국교정 상화를 위한 현안 해결을 위해 양자 간 회의를 개시 할 것에 합의하였 1) 2007년 4월과 10월, 각각 6개월간 제재연장 조치 실시를 하였음.

10 일본의 대북 정책 다. 아베수상은 2월 14일 오전의 중원예산위원회에서 납치문제의 해결 없이 북일국교정상화는 없다. 앞으로도 대화와 압력 의 기본적인 국교 자세 하에서 문제해결을 목표로 하고 싶다 라며 어디까지나 납치문제가 최우선사항이라고 강조했다. 2007년 3월 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일국교정상화 워킹 그룹회의가 열려 납치문제에 관한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아무런 진전 없이 끝나고 말았다. 1년 1개월만의 북일회의에서 일본측은 북측에 대해 납치에 관 한 재조사 외에 1납치생존자의 조기귀국, 2진상규명, 3납치실행범의 인도를 촉구했다. 그러나 북한이 납치문제는 해결완료 라는 종래의 주 장을 바꾸지 않아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이틀간의 회의에서 양국은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시종일관 원칙론의 응수가 이어졌다. 일본측은 북 한이 에너지와 식량이 부족하여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필요로 하고 있 다는 인식 하에서 이것을 지렛대로 삼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입장 을 취하고 있어, 적어도 납치문제의 해결을 북핵문제의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음에는 변함 없음이 확인 되었다. 그 당시 북일관계의 주요 쟁점을 살펴보면 첫째 과거청산 문제에 대 해서 북한측은 과거청산 을 위한 4가지 기본문제의 우선적 해결을 요구 하였다. 1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2과거의 인적 물적 피해에 대 한 보상, 3약탈 문화재의 반환, 4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확립을 요구 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보상에는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한 일 국교정상화와 같이 재산청구권 및 경협방식 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2002년 북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일본측의 입장을 수용하여 과거의 보상 방식으로 타결하고 구체 적인 규모는 향후 수교교섭을 통해 협의하기로 하는 한편, 일본측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수준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하기로 하였 다. 둘째 미사일 문제에 대해서 일본측은 대포동은 물론 노동미사일도 일 본 안보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인식하에 미사일 발사 유예조치 유지는

Ⅱ. 자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11 물론, 미사일의 개발, 배치 및 수출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측은 북 일 정상회담에서 미사일 발사유예 연장에는 합의하였으나, 미사일 개발 과 수출은 어느 국가에서도 인정되는 자주적 권리임을 주장하며, 양국 간의 수교가 실현되면 일본의 우려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는 입장 을 가지고 있다. 셋째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 일본측은 1990년 초반부터 자국에 대한 심각한 안보위협으로 인식하고, 수교회담과 연계하면서 핵문제의 포괄 적 해결을 위한 모든 국제합의의 준수 및 CVID에 입각한 핵포기를 촉구 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핵문제가 원칙적으로 미 북간에 협의할 사 안이며 일본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면서, 북한 체제의 안전보장 등에 미국이 성실히 대응하면 해결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넷째 일본인 납치문제에서 일본측은 납치문제 해결 없이 수교의 교섭 재개가 불가하다는 입장 하에, 납치피해자의 귀환, 안부불명자, 피랍의 혹자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북한측은 2002년 북일정상회담 시 김정일이 납치사실을 전면 인정하였지만, 사태 재발 방지 약속으로 납치문제가 해결된 것이라는 입장하에 동 문제를 6자회담에서 거론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2004년 북일정상회담시 납치피해자 가족 8명 중 5명 의 일본 송환실현 및 소가 씨 가족의 제3국에서의 재회와 안부불명자 10명에 대한 재조사를 약속하였다. 일본 정부는 2002년 12월 제정된 북 한당국에 의해 납치된 피해자 등의 지원에 관한 법률 에 의거하여, 총 17명을 납치피해자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2002년 12월 당시 15명, 2005년 4월 및 2006년 11월에 각각 1명씩을 추가로 인정하고 있다. 2) 따라서 2002년 10월 일본에 귀국한 생존자 5명 이외에 북한측이 주장하 는 사망자 8명 및 비입국자 4명은 안부불명자 로 간주하고 있다. 북한 정부는 2002년 9월 인정한 대로 납치피해자는 13명이 전부이며, 일본 귀환 생존자 5명 이외의 8명은 사망했다는 입장이다(참고 1). 2) 2002년 10월 15일 일본에 일시 귀국한 생존 납치피해자 5명은 일본 정부의 영주 귀국 조치(10.24)로 일본에 정착하고 있으며, 2004년 5월 및 7월, 생존자 5명의 잔류가족 8명이 일본에 귀국하였다.

12 일본의 대북 정책 <참고 1> 일본 정부 인정 납치피해자 (총 12건 17명) 성 명 [납치 당시 나이, 실종장소] 요코타 메구미 (13,세 니가타현) 다구치 야에코 (22세, 불명) 치무라 야스시 (23세, 후쿠이현) 치무라 후키에 (23세, 후쿠이현) 하스이케 가오루 (20세, 니가타현) 하스이케 유키코 (22세, 니가타현) 소가 히토미 (19세, 니가타현) 소가 미요시 (46세, 니가타현) 납치일시 및 사건 77.11.15 소녀 납치용의사건 78.6월경 리은혜 납치용의사안 78.7.7 아베크 납치용의사안 78.7.31 아베크 납치용의사안 78.8.12 모녀 납치용의사안 이시카와 슈이치 (23세, 가고시마현) 78.8.12 아베크 마스모토 루미코 (24세, 가고시마현) 이시오카 도오루 (22세, 유럽) 마쓰키 가오루 (26세, 가고시마현) 납치용의사안 80.5월경 유럽에서의 일본인 남성 납치용의사안 북한측 주장 비 고 94.4월, 자살 - 북한에 딸 김혜경 생존 - 06.4월, 일본 정부 04.11월, 는 유골 DNA 검 북한측이 유골 전달 사 결과, 78년 납 치된 한국인 김영 남이 남편일 가능 성이 높다고 발표 84년, 하라 다다아키와 결혼 86년, 하라 病 死 직후 사고사 (자동차 사고) 02.10월, 일본귀국 02.10월, 일본귀국 02.10월 일본 귀국 북한측은 입국 부인 79.7월, 마스모토와 결혼 79.9월, 심장마비로 사망 79.7월, 이시카와와 결혼 81년, 심장마비로 사망 88.11월, 가스사고로 사망 96.8월, 교통사고로 사망 김현회 사건과 관련된 리은혜 와 동일인물로 추정 04.5월, 딸1,아들2명 일본귀국 04.5월, 딸1, 아들 1명 일본귀 국 04.7월, 남편 젠킨스와 딸 2명 일본 입국 04.11월, 북한측이 유골 전달

Ⅱ. 자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13 아리모토 게이코 (23세, 유럽) 하라 다다아키 (43세, 미야자키현) 구메 유타카 (52세, 이시가와현) 마츠모토 교코 (29세, 돗토리현) 다나카 미노루 (28세, 효고현) 83.7월경 유럽에서의 일본인 여성 납치용의사안 80.6월 중순경 신광수 사건 77.9.19 우시쓰 사건 77.10월 돗토리현 여성실종사안 78.6월경 前 음식점 종업 원 납치용의사안 88.11월, 가스사고로 사망 요도호 납치범의 前 부 인이 납치에 관여,동사 건 관련, 일측은 02.9월 요도호 납치범 우오모 토 를 국제수배 84년, 다구치 북한공직원 신광수가 야에코와 결혼 한국 당국에 하라 납치 86년, 간경변으로 를 인정하는 증언실시 사망 북한측은 입국 부인 북한측은 입국 부인 북한측은 입국 부인 06.11월, 일본 정부가 납치피해자로 추가 인 정 05.4월, 일본 정부가 납치피해자로추가인정 다섯째 요도호 납치범 인도문제에 대해서 일본측은 1970년 3월 요도 호 납치범을 사법처리한다는 방침하에 조속한 신병 인도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측은 정치적 망명으로 인도적 견지에서 수용한 것이므로, 송환문제는 당사자들이 결정할 문제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결국 북일간에 발목을 잡고 있는 쟁점은 국내정치 문제의 납치문제였 으며, 다른 쟁점은 서로 협의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2007년 2월 13일 이후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간 회의 개최에 합의하였으며, 나 아가 테러지원국가지정의 해제 및 대적국 통상법의 적용완료를 추진할 것에 합의하면서 일본은 미북관계의 진전으로 인해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게 되었다. 특히 테러지원국가지정의 해제에 대해서 일본은 납치문제의 해결 없이 지정을 해제하지 않도록 미국측에게 촉구하고 있어 이러한 미국의 태도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 졌다. 이에 2007년 4월 27일에 행해진 미일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부시 대통령에게 납치문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부시 대통령도 아베 수상에 대해 납치문제를 고려하겠다 고 약속하였 다. 이에 앞선 4월 25일에도 미국가안전보장회의의 데니스 와일더 아시

14 일본의 대북 정책 아담당 선임보좌관이 기자단에게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일본인 납치문제와 분리하지는 않겠다 고 언급하여 납치문 제의 진전이 없는 한 미국이 테러국가지정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아베 총리 시절에는 일본이 국내정치의 측면이 강한 납치문제 에 집착하면서 유화적인 국면을 잘 이용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즉 국제정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내정치가 대북관계의 발목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 3. 후쿠다 총리의 등장과 대일 유화 정책의 실패 후쿠다 총리의 등장은 아베 총리의 납치문제에 대한 집착에서 일본의 강경 입장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 7월 29일의 중원선거에 서 자민당은 역사적인 참패를 겪었으며, 9월에는 대북강경파인 아베수 상이 퇴진함과 동시에 과거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했던 후쿠다 야 스오 관방장관(당시)이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3). 후쿠다 정권은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북한과의 관계를 타개할 길을 모색하는 데 의욕을 보 였으며, 압력을 중시한 아베 내각과는 달리, 북한 당국과의 대화를 중시 하는 변화를 보였다. 2007년 9월 21일 자민당 총재선 당시 일본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아소 타로와의 공개토론회에서는 납치피해자를 하루라 도 빨리 귀국시킬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잉 요구를 앞세워서는 안된다, 교섭은 상황에 따라 압력을 활용해야 하지 만 대화도 필요하다, 일본은 대화를 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다 등의 견해를 나타냈다. 후쿠다의 대북 유화노선이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그 당시 일본 정치권 내에서도 미북관계가 진전되는 상황에서 납치 문제에 진전 이 없을 경우 외교가 어려워진다는 문제제기도 있어, 납치문제 해결을 3) 아베는 납치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넘을 수 없는 장애물 로 설정하였으나, 이것이 북일관계의 교착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 도 하였다.

Ⅱ. 자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15 위해서는 아베식의 대북 압력 일변도에서 접근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주 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4) 이러한 일본의 정치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2007년 9월 5일과 6일 몽고 에서 개최된 북일국교정상화 워킹그룹 회의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전개 되었다. 양측은 회의 첫날 납치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국교정상화의 기초 다지기 작업으로서 과거사 청산 문제만을 논의하였다. 물론 북한 은 식민지 시기에 대한 배상금 지불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일본측은 한국이나 여타 국가와의 국교정상화 과정처럼 배상금이 아닌 청구권 자 금 명목의 대북 지원을 거론하였다. 양측은 2002년 평양선언 에 따른 일괄적 경제협력 방식의 과거사 청산 원칙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첫째 날 회의 종료 이후에 일본측은 북한측 대표단을 만찬에 초대하여 양국 간 국교정상화 교섭의 계기를 살리려는 노력을 하였다. 5) 회의 둘째날에 납치문제가 쟁점화 되면서 일본측은 납치문제 관련 기본입장(생존자 전 원 귀환, 진상규명, 용의자 인도)을 재강조를 하였는데, 북한측은 납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는 종래의 언급을 자제하고, 북한측이 일정한 조치를 취해왔다 고 대응하면서 나름대로의 변화를 나타냈다. 다시 말 해 북한측이 태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태도 의 변화는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국면 전환용이었지만, 일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납치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시기다. 따라서 후쿠다 정권은 납치문제에 대해 표면적으로 강 경조치를 동원하면서도, 이와는 별도로 비공식 채널을 통해 대북 비밀 교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북미협상 정도에 따라서 북한문제를 진전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4) 이와 관련, 일본 자민당의 야마사키 다쿠 전 부총재가 2007년 1월 일본 정부의 대응이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일본이 국제사회의 흐름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며 올해 안에 전혀 진전이 없을 경우 정부의 책임이 문제될 수 있다 고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5) 朝 日 新 聞 2007년 9월7일. 2007년 두차례에 걸친 일북 국교정상화 교섭과정에 대해서는 9월21일 일본대사관에서 하토리 일등서기관과 가진 면담이 많은 도움 이 되었다.

16 일본의 대북 정책 2008년 6월 회담에서 납치문제에 대해 북한 측은 납치문제는 해결완 료 란 종래의 입장을 변경하여 향후 납치문제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기 위한 재조사의 실시를 약속하였다. 단, 구체적인 조사방 법 및 시기, 기한은 정해지지 않았다. 북한 단독인지, 일본측과의 공동 조사인지도 미정으로 남겨두었다. 향후 재조사의 구체적인 틀 등에 대 해서는 북일 간에 조정해 가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요도호 문제에 대해 서도 북한 측은 요도호 관계자(납치범 및 부인 2명)문제의 해결을 위해 협력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참고 3). 6) 이에 일본은 1 인적왕래 의 규제 해제, 2 항공편의 규제 해제, 또한 북한으로부터의 수입 금지 조치 및 북한적선의 입항금지조치는 유지하지만, 인도적인 관점으로부 터 민간의 인도지원 물자운송을 위해 북한국적선박의 경우에는 인도지 원물자의 선적에 한해 인정하기로 하였다. 7) 물론 일본은 북한이 핵프로 그램에 대한 신고 대가로 요구하고 있는 중유제공에는 동참하지 않겠다 는 입장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중국선양( 瀋 陽 )에서 가진 2008년 8월 11일 6자회담 국교정상화 북일 실무자 협의에서 일본인 납치피해자 문 제를 재조사하는데 합의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양국은 납치피해자 문제 재조사 위원회를 조기에 만들어 올 가을까지는 조사를 끝내기로 하고, 일본은 북한이 재조사위원회를 설치한 시점부터 즉각 대북 인적왕래와 북한발 전세기 취항 제재 등을 해제하기로 했다. 북한 측은 조사내용 확인 등을 위해 일본 측과 북한 관계자의 접촉 등을 허용 하기로 했다. 후쿠다 정권의 대북 대화정책의 결과, 북일 국교정상화 실 무회의에서 납치자 피해자의 전면적인 재조사, 일본의 대북제재의 일부 해제 등이 합의되었지만, 후쿠다 총리의 전격 사임, 김정일 국방위원장 의 와병 등으로 인해 합의 내용은 실행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6) 5명 중 1명과 부인 2명은 납치사안의 용의자이다. 또한 5명 중 1명에 대해서는 사망정보가 있다. 7) 적선된 물자는 민간의 인도 지원물자에 한하며, 현시점에서 일본정부로써 인도 지원을 행할 예정은 없다. 입항 시, 승객의 승하선, 화물의 싣고 내림, 인도지원 물자 이외의 화물의 적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음을 엄격히 체 크한다.

Ⅱ. 자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17 4. 아소 정권하에서 대북 강경정책의 회귀 후쿠다 정권 당시의 대북 유화국면은 아소 정권이 들어서자 북한의 미사일 실험 발사로 다시 대북 강경정책으로 회귀하였다. 2009년 3월에 접어들어 북한이 위성발사체의 실험발사를 예고하면서 북일관계는 한층 악화되었다. 오바마 행정부와 아소 정권은 북한의 장거리 로켓 실험발 사를 저지하기 위해 대북 압박 공세를 강화하였고, 특히 일본은 북한의 로켓이 자국의 영토나 영해에 떨어질 경우를 우려하여 대북 압박에 매 우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가세하였다. 북한의 로켓 시험발사(2009.4.5) 이후, 일본은 대북 제재의 논의를 위 한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소집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미국과 함께 기 존 제재의 엄격한 이행을 요구하는 새로운 결의안의 채택을 주장하였 다. 아울러, 일본은 UN 안전보장이사회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추가 제 재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북한이 제2차 핵실험(2009.5.25)과 더불어 지 대공 미사일을 동해안으로 발사하자, 일본내에서는 북한 위협론의 증대 에 따른 적 기지 공격론 이 재차 부각되었고, 일본 정부는 1 UN 안전 보장이사회를 통한 제재 2 독자적 제재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즉, 아소 정권은 북한의 핵 미사일 실험후,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1874호 에 적극동참하면서, 대북 수출 전면금지 등 독자적인 제재의 강화에 의 한 압박전략을 추구하였다. 예컨대, 아소 정권은 대북 수출금지 품목인 미사일 운반 등에 전용될 수 있는 대형 탱크로리를 북한의 조선백호7무 역회사 에 불법 수출한 업자를 체포하였고, 장거리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정밀기기인 자기측정장치를 미얀마를 경유하여 북한에 수출하려 한 조 총련계 무역업체 사장을 외환 및 외국무역법 위반혐의로 체포하였다. 나아가, UN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위원회가 2009년 7월 16일(현지시간) <표 1>과 같은 대북 제재를 결정함에 따라, 아소 정권은 2009년 7월 24 일부터 북한의 핵관련 기업 등 5개 단체의 자산 동결 및 북한 고위관리 5명에 대한 출입국 금지 조치를 실시하였다.

18 일본의 대북 정책 <표 1> UN안전보장이사회 제재위원회의 북한 핵 미사일 발사와 관련된 제재대상(2009.7.16) 제재대상 이 유 남천강 무역회사 원자력 총국 산하, 핵관련 장비구입 홍콩일렉트릭(이란 기업 5개 소재) 핵관련 자금 거래통로 단체 조선혁신무역회사 WMD 개발 관련 조선원자력총국 핵프로그램 주관 조선단군무역회사 제2과학원 산하, WMD관련 거래 윤호진 남천강 무역회사 책임자 이제선 원자력총국장, 핵프로그램 총괄 개인 5명 황석하 원자력총국 핵프로그램 책임국장 이홍섭 전 영변 원자력연구소장, 핵심시설 관장 한유로 련각산 수출조합 책임자, 미사일 개발 품목 2개 EDM(방전가공) 사용 탄소화합물 아리미드 섬유 필라 멘트 미사일 제조 등에 사용 출처: 讀 賣 新 聞, 2009.7.17( 夕 刊 )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민당 정권 시기에는 대북 강경정책이 주 류를 이루었다. 그 이유는 국제적인 유화국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납 치문제에 집착하면서 성공적인 대북 교섭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일 본의 대북 교섭이 성과를 내기에는 국제적인 공간이 열려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경한 대북 재제를 원하는 국내 여론과 이를 통해 정권의 지지를 얻는 흐름이 일본 정치에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Ⅲ.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19 Ⅲ.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1. 하토야마 정권 초기의 북일관계 2009년 8월 30일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함에 따라, 9월 16일에 민주당정권이 출범하였다.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장은 9월 10일 일본의 민주당 정권 출범과 관련해 2002년 북일 평양 선언을 존중해 알맹이 있는 관계 를 만들어 나가자며 북일 관계 개선에 대한 희망을 밝혔다.김 위원장은 이날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에서 <교도 통신>과 한 회견에서 관계개선의 전망은 어디까지나 일본 당국의 태도 에 달려 있다 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일본이 평화선언을 중시하고 선 언에 기초해 불행한 과거를 성실히 청산하려고 한다면 양국간에 해결되 지 못 할 문제는 없다 며 관계개선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냈다( 한 겨레 2009.09.11). 또한 2009년 9월17일, 북한 <평양방송> 논설은 북 일 양국이 평양선언을 존중하고, 그를 준수. 이행해 간다면 양국 간의 현안은 지체 없이 해결되고 관계 정상화를 향한 긍정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제안하였다. 하토야마 정권은 초기에 자민당과는 달리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하 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선거 시기 민주당이 제시한 정권공약 (Manifesto 2009) 및 정책집 INDEX 2009와 하토야마 총리를 비롯한 당 주요 인사들의 발언을 미루어보아 알 수 있다. 민주당의 간사장( 幹 事 長 )이었던 2006년 11월, 하토야마 총리는 요미 우리 신문의 대북정책에 관한 취재에 대하여 북한 국내의 실정을 이해 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식량과 에너지공급을 줄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북한에 대하여 독자적인 경제 제재를 실시하는 것은 좋으나, 경제제재가 얼마나 효과 있는지 고찰해야만 한

20 일본의 대북 정책 다 는 입장을 밝히는 등, 중국의 북한지원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경제 제재의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보였다. 2009년 선거 전에 발표된 민주당의 정권공약(manifesto)에 따르면 북 한정책에 있어서는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고 납치문 제 해결에 최선을 다 한다 고 한다. 또한 북한이 계속 실시하는 핵실험 과 미사일발사는 우리나라 및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기 때문에 절대 용인할 수 없다. 핵 화학 생물무기와 미사일의 개발 보유 수출을 포기시키기 위해 미국 중국 한국 러시아 등 국 제사회와 협력하면서 화물검사 실시를 포함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 납치문제는 우리나라에 대한 주권침해 및 중대한 인권침해이기 때문에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고 명기되어 있지만, 납치문제를 핵과 미 사일을 병행한다는 점은 자민당과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지도자들의 생각을 보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9년 정권 교체 전만 하더라도 민주당의 오 카다 간사장은 제재를 위한 제재이어서는 안 되며 북한을 대화의 장으 로 불러내 현실적인 타협을 하도록 만드는 제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카다 간사장은 또 대북정책에 대해 납치문제와 북핵, 미사일 문제를 함께 확실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는 이루어질 수 없 다 며 6자회담의 틀에서 이를 해결해야 하며, 대북 제재도 제재를 위한 제재가 아니라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서 타협을 하기 위한 제재 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당시 하토야마 대표는 (우리도) 북한 이 우리 말을 듣지 않더라도 대화와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중대 조치를 검토할 것 이라고 말했다. 집권 가능성이 높은 하토야마 대표의 발언은 현 정부의 대북강경책에서 보다 유화적인 정책으로 전환할 것임을 시사 하는 것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즉 그 당시 하토야마 대표는 기본적으로 는 그렇게(대화와 협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강조한 것이다. 오자와 이치로 일본 민주당 간사장이 9월 12일 북일 관계 문제와 관련해 내가 내각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으로 말하자면, (북한에 의

Ⅲ.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21 한 일본인) 납치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일북 관계 개선 문제에 대해 결론 을 내야 한다 고 말했다. 2009년 정권교체를 이룬 하토야마총리는 9월 24일 유엔의 총회 연설 에서 평양선언에 입각해서 납치, 핵, 미사일 등 현안을 해결하고 불행 한 과거를 성의있게 청산함으로써 국교 정상화를 도모하겠다 는 방침을 천명하면서, 북한이 전향적이고 성의 있는 행동을 취한다면 일본으로 서도 전향적으로 대응할 용의가 있다 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작년에 합의한 납치문제 재조사의 개시 가 북-일 관계 진전의 실마리 가 될 것 이라고 지적하면서 거듭 북한의 구체적이고 성의 있는 행동을 촉구했 다. 또한 2009년 9월 25일 한일 뉴욕 정상회담에서 하토야마 총리는 한 반도 비핵화가 아시아 비핵화는 물론 나아가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세 계 전체 핵 없는 세상으로 만드는 출발점이 되도록 노력하자 며 북한의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이웃나라로서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 바람직하지만 필요하다면 국제공조를 통 한 제재와 압박도 불가피하다 고 강조했다. 또한 10월 4일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 후 북한 측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했을 뿐 아니라 일본, 한국과도 관계를 개선하려고 한다 고 전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원자바오 중국 총리를 통해 미국 외 에도 한국 및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한다 고 언급했다. 중국 쪽으로 부터 김 위원장의 좀 더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하토야마 총리는 김 위원장의 말을 믿고자 한다 며 두 가지 점을 분명 히 했다. 하나는 총리가 직접 선 북미 협상, 후 6자회담 개최 를 명시적 으로 밝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자민당 정권의 납치자 문제 우선 해결 접근법과 달리 핵 미사일과 병행해 납치자 문제를 거론했다는 점 이다. 또한 하토야마 총리는 10월 9일의 한일( 韓 日 )정상회담을 통하여 핵무기, 미사일문제, 납치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 명하여,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자민당정권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 다.

22 일본의 대북 정책 신정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민주당과 자민당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과 납치문제의 해결을 중시하고 있 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문제해결방식에 있어서 양당은 차별성 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민주당은 북한의 핵 미사일을 해결하 기 위해 6자 회담 당사국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특히 미국과 한국, 중국 등의 협력을 중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자민당은 북한의 핵문제를 일본 의 군사력 강화에 연결하고 있다. 또한 하토야마 수상의 북한과 같이 가치관이 상이한 국가체제를 존중해야 한다 는 기존의 발언은 자민당에 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를 보더라도 체제보다는 대화에 중 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하토야마 정권은 북핵문제 해 결과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을 연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6자 회 담의 틀 안에서 미국과의 협조를 포함하여 한국과 중국과의 대북협력을 강화시키려는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민당은 주로 납치문제의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국제공조를 강조하였지만, 민주당 특히 하토야마 총리는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라는 넓은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보았을 자민당 민주당 <표 2> 자민당과 민주당의 대북정책 노선 o 제재강화와 압박의 정책 o 납치문제의 진전이 없으면 북한 경제지원은 일절 없음을 전제로 적극 대응 o 국가의 위신을 걸고 납치피해자 전원의 조기 귀국 실현 추구 o 북한이 핵개발 및 탄도미사일 관련 활동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수출금지 등 대북조치를 지속 o 국회에서 폐기된 화물검사특별조치법안 을 차기 국회에서 제정 o 대화와 압박의 병행 o 북한의 반복되는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일본 및 세계의 평화 와 안정에 명백한 위협이므로 결코 용인할 수 없음 o 북한이 WMD와 미사일의 개발 보유 배치를 포기하도록 국제 사회와 협력 o 납치문제는 주권침해이자 인권문제이므로 국가가 책임지고 해결 o 집권하면, 화물검사특별조치법안 을 조기에 성립 출처: 동아일보 2009.8.3. 중앙일보 2009.8.18. 東 京 新 聞 2009.7.24. 朝 日 新 聞 2009.7.28, 7.29, 7.30, 8.1, 8.4. 등 참조.

Ⅲ.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23 가능성이 존재한다. 셋째 민주당 정권은 북한이 요구하는 과거 청산문제와 관련하여 자민 당 보다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 정권은 부상하 는 중국에 대비하기 위해 아시아 외교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하였 다. 이를 위해서는 아시아 국가들의 신뢰 회복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민당 보다는 과거사문제에 대한 유연하고 전향적인 정책을 가 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넷째 문제에서 우선순위가 병행으로 바뀌 었다는 점이다. 자민당은 납치문제의 해결없이는 북일관계의 진전이 없 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이에 비에 민주당은 핵 미사일문제와 함께 보조를 맞추는 것으로 병행하게 된 것이다. 2.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대북 강경 정책의 변화 역사적인 정권교체의 여세를 몰아 민주당 정권의 하토야마 총리와 오 자와 간사장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모색하려는 전략적 움직 임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토야마 정권은 납치문제 대책본부 의 예산과 인원을 대폭 늘리고, 정보수집과 국제공조 활동을 강화함으 로써 납치문제 해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북한이 일본과의 관계개선 의향을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국내에서도 납치문제에 대 한 돌파구를 요구하는 여론이 커지는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10월 13 일 대책본부 조직을 대폭 개편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를 본부장으 로 하고, 관방장관과 외무상, 납치담당상 등 3인을 부본부장으로 임명해 의사결정 과정을 대폭 간소화했다. 내각에 납치문제 담당의 특명( 特 命 ) 담당대신을 설치하여 납치문제를 중시하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또한 나 카이 히로시( 中 井 )를 경찰청 감독 역할을 하는 국가공안위원장을 겸무 하는 형식으로 납치문제 담당대신에 임명하였다. 2009년 10월 17일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하토야마 정권은 납치문제 대책본부의 2010년도 예산으로 2009년 보다 3.5배 늘어난 약 20억엔(약 260억원)을 배정키로 했다. 2006년 설치된 대책본부는 그동안 피해자

24 일본의 대북 정책 가족에 대한 지원이나 홍보 활동에 치중했지만 앞으로는 해외 정보수집 과 국제공조 강화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고 신문은 설 명했다. 그러나 정치자금 의혹으로 민주당 지도부가 수세에 몰리면서, 정주 외국인의 지방참정권 문제에서 보듯이, 대내외 정책도 후퇴를 거듭했 다. 북일간의 물밑접촉은 계속되었지만, 정치적 추동력을 얻지 못한 채 나카이 히로시 납치문제담당과 같은 정부 내 강경론자가 대북정책 전반 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을 초래했다(한겨레 2009년 11월 13일). 나카이는 민주당의 납치문제대책 본부장, 납치의연( 議 連 ) 회장 대행( 代 行 )을 한 적이 있는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이다. 그는 2006년 12월, 동경에서 열린 납치문제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김정일체제를 타도하여 북한을 자유가 있는 나라로 만들어 납치문제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이 인사를 통해 판단하자면 하토야마 정권은 종래 자민당 정권의 압력중시 납치문제 대책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나카이 납치문제 담당은 취임 후, 산케이신문 의 취재에 대하여 납치문제 정책에 있어 서는 채찍정책부터 시작한다 고 하며 일본에는 그것밖에 없다 고 주장 하였다. 그리고 미한( 美 韓 )을 중심으로 일본은 납치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어떤 요청에도 NO이다. 라고 세계를 향해 철저히 주장해야 한 다 고 말하였다. 외상( 外 相 )에 취임한 오카다 카츠야도 2009년 9월 17일의 인터뷰를 통하여 북한은 납치문제의 재조사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과 가 없다. 미사일과 핵실험을 실시하는 가운데 일본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할 리가 없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제재를 강화하면서 북한의 정책전환을 기다리겠다 고 말하였다. 그리고 유엔 안보리의 결 의를 받아 북한관련 선박에 대한 화물검사를 가능하게 하는 화물검사 특별조치법안 에 대해 오카다는 다음 임시국회에 법안제출 및 성립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밝혀 강경정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후 하토야마 정권을 이어받은 민주당의 간정권은 2010년 4월 천안

Ⅲ.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북일관계 25 함 사건, 연평도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북 강경정책을 지속하게 되었다. 결국 정권교체를 통한 민주당 정권의 외교정책 변화에 대한 시도는 국 제정치의 압력으로 인해 무산될 수 밖에 없었다. 이점에서 민주당 정권 도 자민당 정권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26 일본의 대북 정책 Ⅳ. 일본 정치권의 변화: 전후 정치가의 보수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주당 정권은 자민당 정권과의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북 강경노선이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배경으로 일본 정치권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일본 정치권에서 좌파인 사회당이 쇠퇴하면서 대북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정치세력은 약화되었 다. 이와 함께 일본 정치권의 중요한 변화는 전후세대가 정치권의 전면 에 등장한 점이다. 전후 세대는 전전 세대와 비교하여 전전의 군국주의 경험이 없는 세대이다. 이들은 과거 군국주의 일본에 대해 자신이 경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거사로 인한 부채의식에서 해방되어 있다. 따 라서 이들은 외교정책에서 자국이익중심의 원칙을 강조하며, 일본 국내 적으로는 전후에 터부시 되어 왔던 유사입법의 개정과 헌법 개정까지 추진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북일관계에서도 강경 노선이 정 착하게 된 것이다. 중의원 당선자들의 연령분포를 보면 확연하게 일본 정치권에서 세대 교체가 진행되어 전후 세대가 중심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 년을 기점으로 50대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 30대와 40대가 증가하고 있

Ⅳ. 일본 정치권의 변화: 전후 정치가의 보수화 27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점을 통해 일본의 정치권에서 세대교체가 진행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전후 세대들은 자민당의 보수 본류 노선이 취하였던 경제성장 중심과 평화외교정책에 대한 새로운 재평가를 원하는 측면이 강하다. 자민당 정권의 보수 본류 노선은 헌법 개정에는 반대하였으며,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었다. 또한 역사문제에서도 주변국과의 관 계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역사문제에 대해 타협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 다. 이에 비해 전후세대는 납치문제와 헌법개정문제,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는 이전 세대에 비해 강경하고 적극적인 측면을 띠고 있다. 전후 세대의 정치가들은 역사문제에서 적극적이기 때문에 이전 세대들과 달 리 역사문제에서 주변국과의 타협적인 정책을 취할 가능성은 매우 적 다. 북일관계에서도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정책을 고수하면서 북 한을 압박하려는 생각이 우선시 되었다. 전후 세대의 국익중심주의 주장은 영토문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으 며, 그들의 주장은 국익적인 관점에서 강한 주장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전에 수면하에 잠겨있었던 영토문제가 최근 들어 점차 표면으로 올라 오며 정치적으로 쟁점화되는 이유는 일본 정치권의 세대교체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동북아 국가들과 장기적인 협조관계 에서 국익을 계산하기 보다는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강하 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지금까지 일본의 외교는 관용과 인내를 견지하며 잘못된 점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영토문제에 대해서 도 지금까지 침묵하는 외교에서 탈피하여 일본의 주장을 과감하게 표명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이들은 역사문제를 회피해 왔던 이른바 전후 정치인보다 역사에 민감하며 근본주의적이 다. 또한 이들은 일본의 아이덴티티를 중요시하며, 전통가치와 전통문 화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천황제의 여 자 계승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었으며, 교육 개혁법에는 찬성하 고 있다. 이에 비해 자민당과는 달리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에 찬성하고

28 일본의 대북 정책 있어 새로운 보수의 측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일본 정치권의 변화는 북일관계에 투영되어 전향적인 대북 정 책을 어렵게 하였다. 북일관계에서 일본은 이전과는 달리 상대방에 대 한 문제점과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게 됨으로써 북일관계를 압박해야 한 다는 생각이 대세를 점하게 되었다. 게다가 2010년 3월 북일관계 개선 흐름과 역행하는 강력한 국제적인 요인으로써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면서 대북 강경정책은 정착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 정권은 한국과의 공조를 강조하면서 한국의 대북강경정 책에 편승하게 되어 전향적인 대북정책은 제대로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렸다. 민주당 정권이 이렇게 대북정책의 방향을 바꾸게 된 배경 으로는 민주당 정권의 외교정책에서 북일관계 개선하려는 국내적인 상 황보다 국제적인 상황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고 한국정부가 이를 북한의 어뢰에 의한 공격이 라고 결론지으면서 일본은 한국의 대북강경정책을 지지하게 되었다. 일 본정부는 천안함 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독자적인 대북제재 조치와 대북 무역규제를 강화했고 화물검사특별조치법, 특정선박입항금지 승인조건 을 통과시키는 등 대북강경책을 추진하면서 하면서 결국 자민당의 대북 정책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5월 20일 오전 관계내각회의를 총리관저에서 열고, 천안 함 침몰 사건에 대해 한국 측이 북한의 어뢰에 의한 공격이라고 결론지 은 것에 대해 한국을 강력히 지지한다. 북한의 행동은 용서하기 힘든 것으로, 국제사회와 함께 강력히 비난한다 고 밝혔다. 또한 하토야마 유 키오( 鳩 山 由 紀 夫 ) 일본 총리는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독자적으로 대북 제재 조치를 실시했다. 북한으로 송금할 때 재무상에게 의무적으로 보 고해야 하는 기준액을 1000만 엔에서 300만 엔(약 3914만 원)으로 대폭 낮췄다.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이 당국에 신고해야 하는 현금 한도도 30 만 엔 이상에서 10만 엔 이상으로 강화됐다. 이는 북한으로의 자금 유입 을 엄격히 차단하려는 목적이다. 그리고 일본은 당시 실시하는 대북무

Ⅳ. 일본 정치권의 변화: 전후 정치가의 보수화 29 역 규제도 더 엄격하게 하기로 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鳩 山 由 紀 夫 ) 총리 는 이날 각료회의에서 제3국을 경유한 우회적 (대북) 수출입을 방지하 기 위해 관계 부처는 한층 긴밀히 연계해 엄격히 대응하라 고 지시했다. 영해는 물론 공해에서도 북한을 드나드는 선박을 검사할 수 있는 화물 검사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 2011년 4월까지 북한 선박의 입항금지 조치를 연장한다는 내용의 특정선박 입항금지 승인조건 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이다. 결국 하토야마 정권은 초기 지향했던 대북정책의 방 향과 달리 결국 자민당의 대북정책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정책은 2010년 6월부터 시작된 간 나오토 민주당 정권에도 이 어졌다. 6월 11일 간 나오토 총리는 북한에 대해서 천안함 침몰은 결코 용인하기 어렵다 며 한국을 전면 지지하면서 국제사회에서 확실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그러면서 납치, 핵, 미사일 등 제반 현 안의 포괄적인 해결을 꾀하고 불행한 과거를 청산해 국교정상화를 추진 하겠다 고 말했다. 국회에서의 취임후 첫 소신 표명 연설을 통해 정권의 3대 정책과제 중 하나로 책임감에 입각한 외교 안보를 거론한 뒤 미 일동맹을 외교의 기축으로 하고,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 해 나가겠다 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나 6월 11일 간 나오토( 菅 直 人 ) 일 본 총리가 소신 표명 선언을 통해 북한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겠다 고 밝힌데 대해 북한이 비난하고 나서는 분위기에서는 북일간의 관계는 일 절 움직임이 없어졌다. 특히 2010년 11월에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나 면서 더욱더 냉각될 수밖에 없었다.

30 일본의 대북 정책 Ⅴ. 아베 정권하에서의 대북 독자 외교 일본의 대북강경 정책은 정권교체를 이룬 제 2기 아베 수상하에서도 계속 지속되고 있다. 그렇지만, 민주당 정권과는 달리 아베 총리의 외교 적 특징은 기존의 자민당 정권의 중국 견제와 더불어 일본이 국제사회 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 다. 아베가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미일동맹을 강화 시키고, 가치관 외교를 통해 중국을 견제해야만 한다. 여기에 일본 외교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북한과의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고, 당장의 중일관계를 안정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국내적인 지지와 연관된 과제로 생각했다. 특히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는 아베가 국내적으로 해결해야 할 쟁점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납치자 문제를 통해 성장한 아베로서는 납치자 문제가 국내적인 지지와 연관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중국과의 타협도 아베의 경험에서 할 수 있는 외교적인 실험이다. 제 1기 아베 정권하에서도 중일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취임후 처음으로 선택한 방문지가 중국이었으며, 중국과의 관계를 타협으로 이 끌어내었던 경험이 있다. 이를 생각하면 제 2기 아베정권은 장기적으로 는 중국을 견제하는 외교를 실시하면서 단기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에 서 타협을 모색하는 다면적인 전략으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외교전략은 대북관계에서도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 가 되었다. 2013년 5월 14일 전격 방북한 일본의 이지마 이사오( 飯 島 勳 ) 내각관방 참여(총리의 자문역)가 북한을 방문하여 납치문제에 대한 북 일 교섭의 물고를 트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이지마 참여는 재일본조 선인총연합회(재일 총련)의 인맥을 이용하여 방북했으며 그가 북한에서 총련 본부 토지 건물 경매 문제를 교섭 카드 로 삼아 일본인 납치 문제 에서 모종의 진전을 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지마 참여가 북한의 명목

Ⅴ. 아베 정권하에서의 대북 독자 외교 31 상 서열 2위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난 것을 미루어보 아 납북자 문제와 관련한 아베 총리의 담판 의지가 북한 최고위 층에 전달됐다고 봐야할 상황이다. 8) 아베가 이지마 방북을 추인하게 된 이유는 1 아베는 납치문제를 통 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납치문제 해결을 자신의 정치적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 납치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어 한다. 2 납치자 가족의 고령화로 인하여 조기에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납치자 가족들도 북한과의 교섭을 요구하고 있었다. 3 한 미 중이 핵 미사일문제를 중시하고, 납치문제에 는 별로 비중을 두지 않기 때문에 납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 이 독자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4 아베수상은 납치문제에 대한 해결의지를 보임으로써 이를 7월 참의원선거에서의 득표로 연결시 켜 아베내각을 안정화시켜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분명하다. 이번 이지마 방북은 아베 총리가 납치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국민 에게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나름의 국내정치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지마 참여가 5월 14 17일 방북 일정을 마치고 귀환한 뒤 일본 정부는 이런 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던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 다.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菅 義 偉 ) 관방장관은 20일 기자회견에서 아베 정권은 납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강한 책임감과 결의를 가 지고 있다 고 밝혔다. 또 납치자 문제와 관련해 북한에 납북자 생환, 진 상 규명, 실행범 인도 등 세가지를 요구하는 강경한 입장임을 강조했다. 더불어 아베 정권과 김정은 정권 사이의 대화채널을 만든 것도 성과라 고 할 수 있다. 이지마 참여의 방북을 통해 북한이 향후 대화국면에서 일본 변수 를 무시할 수 없도록 하는 주의환기 효과를 거둔 것이다. 8) 이지마 참여는 지난 2004년 제2차 북일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허종만 당시 총련 책임부의장과의 교섭을 중시, 북일 외교당국간 접촉을 우선시하는 후쿠다 야스 오( 福 田 康 夫 ) 관방장관, 다나카 히토시( 田 中 均 )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국장과 충 돌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 泉 純 一 郞 ) 총리가 이지마의 편 을 들자 후쿠다 관방장관이 여기에 반발해 사임하기도 했다.

32 일본의 대북 정책 일단 아베 총리도 2013년 5월 19일 북한과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스가 관방장관도 이튿날 대화와 압 력 정책 속에서 대화의 문을 항상 열어두고 있다 고 언급한데서 보이듯 이 일본은 후속 대화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했다. 북한으로서는 어렵게 잡은 외부세계와의 대화 끈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이지마 참여에 게 납치문제 진전의 여지를 시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앞으로 예상되는 북일관계의 제1시나리오는 이지마의 방북 결과를 토대로 제14차 북일정부간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다. 제2시나리오는 이 지마의 방북 결과를 토대로 아베수상과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간의 정상 회담을 개최할 수 있다. 만약 앞으로의 북일관계가 정상적인 외교협상 의 진행순서에 가까운 제1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된다면, 협상의 주도권 은 일본외무성이 장악하게 되고 의제에 핵 미사일문제가 더 해지질 것이 다. 그렇게 되면 조기 국교정상화는 어렵게 될 것이다. 만약 제2시나리 오에 따라 북일관계가 전개된다면 북일 정상은 정치적 결단의 형식으로 북일국교정상화를 2002년의 평양선언에 따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9) 이번 이지마 방북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아베 총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각 부분을 총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일본의 북한에 대한 독자적 인 접근의 움직임은 강화될 가능성이 높으며, 지속적으로 독자적인 길 을 모색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북일교섭으로 성 사되어 일본의 대북정책을 변화시키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9) 납치피해자 중 관심이 집중되어 온 요코다 메구미의 딸인 김혜경을 일본으로 귀 국시켜 납치문제가족협의회의 대표인 조부 조모와 상봉을 시키는 등의 깜짝 이 벤트를 통해 납치문제가 일단락되었다고 국민들을 설득할 가능성이 크다.

Ⅵ. 결론: 일본 대북정책에서 변화? 33 Ⅵ. 결론: 일본 대북정책에서 변화? 본 연구는 자민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한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아내면서 일본의 북일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을 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일본의 유력정치가(수상 등), 일반 정치가, 여론이 국제 정치와 협상 전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북일관계 의 정치적인 다이나믹스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대북 정책은 국내정치의 변화에 의해 대북 정책을 적극화하려 는 요인은 항상 있었다. 특히 자민당 정권에서 민주당 정권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자민당 정권보다는 민주당 정권이 보다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전개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대북 강경의 흐름 속에서 정권교체를 이룩한 민주당 정권은 처음에는 대북 유화적인 태도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의 발생, 그리고 11월의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 되면서 일본 민주당 정권의 의도대로 대북교섭을 촉진할 수 있는 실마 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점차 민주당 정권도 대북 유화적인 태도는 없어 지고 자민당 정권때와 마찬가지 강경정책을 지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자민당 정권내에서도 유력정치가들은 자신이 북일국교정상화를 통 해 역사적인 과업을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이익이 항상 존재하였 다. 특히 아베 총리의 경우 납치문제를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고, 이 러한 인상이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납치문제를 해결하고 자 하는 동인은 강하게 나타났다. 그렇지만, 국제정치의 흐름과 함께 대 북 적극파의 움직임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내 강경한 여 론과 정치권의 세대교체로 인해 일본의 대북 정책은 강경 정책이 지속 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러한 일본 정치권의 강경기류는 점차 국제정 치의 제약과는 별도로 일본의 대북 정책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34 일본의 대북 정책 본 연구를 통하여 시기에 따라 일본, 북한의 북일수교의 전략이 변화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기존의 연구에서 설명하였던 국제 정치에서 대북 해빙기를 맞이하면 일본은 북일교섭을 적극적으로 한다 는 가정은 점차 설득력이 약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내에서 북일교 섭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이 일본내에서 대북 강경파들이 득세하면서 북한의 핵 실험이후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은 국제 정치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독자적으로 북일교섭을 추진하려 는 동인이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북한의 정책도 일본을 카드로 이용하면서 미국이나 한국을 압박하려고 했다는 가정은 변화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본내에서 납치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일본 정 치가들이 북한의 요구에 선뜻 응할 수 없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 이다. 2002년 북일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의도했던 것은 납치문제를 인정 하는 대신 경제적인 지원을 받는 것이었으나, 일본 국내의 역풍으로 인 해 실현되지 못하였다. 또한 2004년의 북일정상회담에서도 결국 일본은 북한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본내에서 강경파들이 득세하는 경향마저 나타났다. 앞으로 북일교섭이 더욱더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사실이다. 민 주당 정권하에서도 납치문제를 풀면서 정치적인 이익을 생각하는 유력 정치가(예를 들면 하토야마 총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아베 정권하 에서도 이지마의 방북과 같은 유사한 시도가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결 국 국내 여론과 국제적인 흐름에 따라 강경정책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북관계에서 국제적인 해빙기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일본이 얼마만큼 북일 교섭에 적극적으로 임할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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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39 요약문 본 연구는 자민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한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아내면서 일본의 북일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을 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일본의 유력정치가(수상 등), 일반 정치가, 여론이 국제 정치와 협상 전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북일관계의 정 치적인 다이나믹스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대북 정책은 국내정치의 변화에 의해 대북 정책을 적극화하려 는 요인은 항상 있어왔다. 특히 자민당 정권에서 민주당 정권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자민당 정권보다는 민주당 정권이 보다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전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의 대북 강경의 흐름 속에서 정권교체를 이룩한 민주당 정권은 처음에는 대북 유화적인 태도 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의 발생, 그리고 11월 의 연평도 포격 사건의 발생으로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되면서 일본 민주당 정권 의도대로 대북교섭을 촉진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점차 민주당 정권도 대북 유화적인 태도는 없어지고 자민당 정 권때와 마찬가지 강경정책을 지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자민당 정 권내에서도 유력정치가들은 자신이 북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역사적인 과 업을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이익은 항상 존재하였다. 특히 아베 총 리의 경우는 납치문제를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고, 이러한 인상이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납치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동인 은 강하게 나타났다. 그렇지만, 국제정치의 흐름과 함께 대북 적극파의 움직임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내 강경한 여론과 정치권 의 세대교체로 인해 일본의 대북 정책은 강경 정책이 지속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러한 일본 정치권의 강경기류는 점차 국제정치의 제약과는 별도로 일본의 대북 정책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저자약력 진 창 수 도쿄대학 정치학 박사 現 세종연구소 국제정치경제연구실 수석연구위원 일본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 : 전개, 쟁점, 그리고 한국의 대응 외 다수 일본의 대북 정책 민주당 정권과 자민당 정권은 차이점이 있는가? 2014년 2월 5일 초판 인쇄 값 5,000원 2014년 2월 10일 초판 발행 지 음 I 진창수 발행인 I 송대성 발행처 I 세종연구소 주소 I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대왕판교로 851번길 20 ( 461-370) 전화 I (031) 750-7614 팩스 I (031) 754-0100 홈페이지 I www.sejong.org 등 록 I 2001년 1월 19일 제 1-26호 ISBN 978-89-7429-723-7 94340 본 자료는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세종연구소의 공식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