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7C1B7CEBDC3B5F92D3128B1B9B9AE292E687770>



Similar documents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µ¶µµºÎ·Ï1~64

µ¶¸³Á¤½Å45È£

- 2 -

(중등용1)1~27

(012~031)223교과(교)2-1

<3034BFEDC0CFBDC2C3B5C7CFB4C2C1DFB1B9BFECB8AEC0C7BCF6C3E2BDC3C0E52E687770>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pdf..

allinpdf.com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나하나로 5호

단양군지

152*220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5 291

CC hwp

연구노트

* pb61۲õðÀÚÀ̳ʸ

04 Çмú_±â¼ú±â»ç

현안과과제_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_ hwp

- 2 -

º»ÀÛ¾÷-1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C7D1C0CFC8B8B4E3B9AEBCADB0F8B0B3C7F6C8B2B0FAB0FAB0C5BBE7C3BBBBEA2E687770>


년 2 월 1 1일에 모 스 크 바 에 서 서명된 북 태 평양 소하 성어족자 원보존협약 (이하 협약 이라 한다) 제8조 1항에는 북태평양소하성어류위원회 (이하 위원회 라 한다)를 설립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제8조 16항에는 위원회가 을 채택해야 한다고 규정

±³À°È°µ¿Áö


11+12¿ùÈ£-ÃÖÁ¾

1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수일고등학교 윤 상 2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구성고등학교 류 우 3 [2]2018개방실험-학생2기[

<BFA9BCBABFACB1B8BAB8B0EDBCAD28C6EDC1FD292E687770>

CR hwp

120~151역사지도서3


<312E20C0AFC0CFC4B3B5E55F C0FCC0DAB1E2C6C720B1B8B8C5BBE7BEE7BCAD2E687770>

ITFGc03ÖÁ¾š

¾Æµ¿ÇÐ´ë º»¹®.hwp

<C1DF29BCF6C7D02031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아를 향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의 뜻을 밝혔고, 2010년 8월 간 총리는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에 즈음해 한국만을 대상으로 병합과정의 강제성을 우회적 으로 시인한 간 담화 를 발표했다. 하지만 미야자와 담화 에서 밝힌 근린제국 조항

2저널(11월호).ok :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트렌드29호가제본용.hwp

ad hwp

³»Áö_10-6

0.筌≪럩??袁ⓓ?紐껋젾 筌


Çѹ̿ìÈ£-197È£

#7단원 1(252~269)교

**09콘텐츠산업백서_1 2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¾ç¼ºÄÀ-2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갈등관리 리더십 연구결과 보고서.hwp

문제지 제시문 2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관측된 다른 정보를 분석하여 역으로 미 관측 영역 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가령 주어진 영역에 장애물이 있는 경우 한 끝 점에서 출발하여 다른 끝 점에 도달하는 최단 경로의 개수를 분석하여 장애물의

041~084 ¹®È�Çö»óÀбâ

내지(교사용) 4-6부


소식지수정본-1

2014_조석표 변경사항.hwp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141018_m

KINU 연구총서 Ⅰ 중국의 G2 부상과 한반도 평화통일 추진전략 제1부 황병덕ㆍ김규륜ㆍ박형중ㆍ임강택ㆍ조한범ㆍ김종욱 신상진ㆍ이동률ㆍ이창형ㆍ이홍규ㆍ주재우ㆍ최 강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B3B2C0E7C7F62E687770>

ÃѼŁ1-ÃÖÁ¾Ãâ·Â¿ë2

<B0B3BFE42E687770>

Jkafm093.hwp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È޴ϵåA4±â¼Û

178È£pdf


4-Ç×°ø¿ìÁÖÀ̾߱â¨ç(30-39)

<4D F736F F D20C7C1B7CEBDC3B5F92D325FB3EBBEEE5F>

ºñ»óÀå±â¾÷ ¿ì¸®»çÁÖÁ¦µµ °³¼±¹æ¾È.hwp

2003report hwp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

<C7D1B1B9C7FC20B3EBBBE7B0FCB0E82DC3D6C1BE612E687770>

표지안 0731


Issue Report Vol 지역이슈 -07 ( ) 해외경제연구소 러시아극동개발추진현황과한 러경제협력방안 : ( ) : ( )

01¸é¼öÁ¤

°¨Á¤Æò°¡

2009_KEEI_연차보고서

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hwp

¹é¹üȸº¸ 24È£ Ãâ·Â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1. 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해왔던 한반도 비핵 평화 프로세스는 년을 거치면서 중대 고비를 맞이했다. 2009년 북한의 로켓 발사와 한-미-일의 과잉대응으로 촉 발된 위기는 북한의 2차 핵실험과 이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

에스디엘팜플렛-최종.cdr

Transcription:

제20차 한러 국제학술회의 (2008.10.6-7, 서울) 아태지역연구센터(한양대학교)-극동문제연구소(러시아과학원) 08-3 APRC Proceeding pp. 31-51 ( 南 ) 홍 완 석* 13) (한국외대) 최근, 특히 2005년을 기점으로 독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영토침탈 야욕이 갈수록 노골화되 고 있다. 그런 현상은 2005년 3월 시마네현( 縣 ) 의회가 중앙정부와의 유기적인 정치적 교감 하에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 로 지정한 조례안을 통과시켰다는 사실에서 명확히 확인된 다. 이밖에 동해의 일본해 단일 표기 시도, 일본 순시선 및 대잠초계기(P3C)의 잦은 독도수역 출몰, 우익단체들의 독도 상륙시도, 2006년 4월 한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인 독도 근해에 서 일본 해양 탐사선의 수로 측량, 2008년 7월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학교 사회교과서 새 학 습지도요령 해설서에 처음으로 독도의 일본 영유권을 주장하는 내용 기술, 2005년 이후 4년 연속 방위백서에 독도를 자국령으로 명기한 사실 등도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한국인들의 민 족주의를 자극해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치밀한 기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억지 주장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일본 정부의 독도문제 제 기 방식에서 과거와 다른 한 가지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한국 내 반일 감정의 격화와 한 일관계의 경색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독도 영유권 주장이 점차 강경해지고 도발적 성 격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일본정부는 독도 영유권 문제 제기 시 우회적이고, 신중하며,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접근태도를 보여 왔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되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가급적 갈등의 확산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런 외교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중앙정부가 직접 나서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전략 하에 물리적 방식을 동원해 독도 영유권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령 독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러시아령 영토에 대해서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현재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는 남( 南 )쿠릴 열도 상의 네 개 섬(four southern Kuril Islands), 즉 하보마이( 齒 舞 ), 시코탄( 色 丹 ), 쿠나시리( 國 後 ), 에토로후( 擇 捉 )를 반환받아 야할 북방영토 로 규정하고 줄곧 영유권 문제를 제기해왔다. 1) 러시아가 1945년 태평양전쟁 - 31 -

종료 이후부터 자국 영토인 북방영토(남쿠릴 4도)를 불법 점거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토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북방영토 반환 없이는 러시아가 요구하는 평 화조약 체결도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가운데 집요하게 공세적 영토반환 요구 운동을 전개하 고 있다. 문제는 독도와 남쿠릴 4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억지 주장이 전후 동아시아 영토질 서를 전면 부정한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일본정부가 한국과 러시아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독도와 남쿠릴 4도 영유권 문 제는 표면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양 영토문제의 역사적 연원과 본 질을 주의 깊게 분석해보면 적지 않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억지 요구에 대한 불법성을 지적하고 효율적인 대응논리 개발 및 그 전략의 강구를 위해서는 많은 점에서 닮은꼴인 독도와 남쿠릴 4도 분쟁을 입체적으로 비교 분석하는 연구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상술한 문제의식에 기초해 이 글의 목적은 러시아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토공세가 현저히 강화되는 시점에서 러 일간 남쿠릴 4도 분쟁과 한 일간 독도 분쟁의 연원과 성격을 역사적 맥 락에서 살펴보는 가운데 양 영토분쟁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통시적, 공시적 접근방법을 통해 비교 분석한 후, 이를 토대로 일본의 영토야욕을 차단하는 대응전략을 제시하는데 있다. 본 연구는 한 일 및 러 일간 영토논쟁에 대한 단선적이고 일차원적인 분석을 지양한다. 이를 테면 독도와 남쿠릴 4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 일 및 러 일간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일면적 현황 파악을 넘어서 연구 범위의 외연확장 즉, 독도문제와 남쿠릴 4도 문제를 동북아 영토분쟁이라 는 큰 그림 속에서 파악하고, 역내 전략환경과 주요 지정학적 행위자들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관찰함으로써 연구대상에 대한 포괄적, 종합적, 심층적 이해를 시도한다. 이를 위해 제Ⅱ장에 서 동북아 영토분쟁의 현황과 특징을 우선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음 제Ⅲ장 에서는 남쿠릴 4도와 독도분쟁의 시공간적 응축과정을 압축적으로 정리해볼 것이다. 이어서 제Ⅳ장에서는 양 영토분쟁의 유사성과 대비성을 비교 분석한 후, 결론 제Ⅴ장에서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도전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영토사수 전략을 제시할 것이다. 본 연구는 한 일간 독도문제와 러 일간 북방영토문제의 원인 및 발단을 처음으로 비교 분석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독도분쟁과 남쿠릴 4도 분쟁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 한 일 또는 러 일 양자적 틀에서만 조망하는 미시적 접근법에서 벗어나 동북아라는 좀 더 큰 틀의 지정학적 환 경 속에서 파악했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독도와 남쿠릴 4도를 둘러싼 영유권 논쟁은 외견상 한 일 또는 러 일 양국간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독도와 남쿠릴 4도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은 동북아 역내 국가 간에 얽히고 설킨 다수의 영토분쟁들 가운데 일부이고, 중국, 러시아 심지어 미국 등 주변국들의 이해관계 - 32 -

와 전략적 고려가 직간접적으로 개입된 다자적 게임의 속성을 지닌다. 또 주변국들에 대한 일 본의 집요한 영토문제 제기는 요즘 동북아를 배회하고 있는 역사왜곡, 민족주의, 패권경쟁 등 과도 분리해서 설명하기 힘들다. 이렇게 볼 때 독도와 남쿠릴 4도 영유권 문제는 단순히 한 일 또는 러 일 양자만의 사안이 아닌 동북아 영토분쟁과 전략환경이라는 보다 큰 틀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하고, 일본의 영토 공세에 대한 대처도 그런 맥락 속에서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1. 동북아 영토분쟁 현황과 배경 현하 동북아는 전 세계에서 국가 간 크고 작은 영토분쟁이 가장 밀도 높게 전개되고 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동북아의 주요 국제관계 행위자인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네 나라 모두 가 예외 없이 서로 교차하여 공식 비공식적으로 영토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중 일 러 동북아 4국이 상호 중층적으로 연루된 영토문제 현황을 도표로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면 다 음과 같다. [표 1] 동북아 영토문제 현황 동북아 영토분쟁은 역내 국가 간 복잡다단한 근현대사가 깊게 얽혀 있다. 청나라가 쇠락할 때 제정러시아가 강압에 의해 연해주를 할양받았던 1860년의 러 중 북경조약, 그리고 일본이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부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청 일전쟁과 러 일전쟁이 밀접히 관련되 어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미 소 냉전의 고조와 한국전쟁의 와중에 체결된 1951년 샌프란 시스코 조약의 영토 조항들이 분쟁의 불씨를 제공했다. 과거 냉전체계는 약소국의 민족, 종교, 인종, 문화, 역사와 무관하게 미 소의 지정학적 고려 와 세계전략에 의해 구조화되었다. 2) 그래서 냉전시기에는 미 소 양극적 대립구조가 개별국가 간 영토 분쟁을 막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냉전구조가 허물어지고 동북아 국가들의 국익추구 - 33 -

와 정체성 찾기가 본격화되면서 영유권 분쟁이 수면위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미 소 양극구도의 종식이 전후 국제질서를 지배했던 가지런한 이열종대를 해체시키면서 민족단위 국 가이기주의를 촉발시킨 것이다. 국가이기주의의 출현은 진영간의 대립을 개별국가들간의 대립 으로 전이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는데, 이는 동북아에서 동시다발적인 영토분쟁으로 나타났 다. 성공회대 이남주 교수는 이것을 제국주의와 냉전대립에 의해 규정된 국민국가 경계에 대 한 불만 을 해소하고 국민국가를 완성해 가는 과정 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결과로 분석한다. 3) 이밖에 동북아에서 복잡다기한 영토분쟁이 분출한 배경으로 역내 국가간 상호 역사불신, 어 족 및 지하자원의 확보,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확대, 민족주의 열풍, 패권경쟁 등을 열거할 수 있다. 탈냉전시대 동북아 영토분쟁은 역사논쟁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으며 특히 민족주의라 는 자양분 속에서 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 한국과 중국, 일본 사이에 영토문제와 역 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하고 있는데, 한 중 일 3국간 역사논쟁과 영토분쟁이 폭발력을 갖 는 것은 그 밑바탕에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민족주의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영토분쟁, 역사논쟁 형식으로 노정된 동북아 민족주의는 그 이면에 패권주의적 야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지역패권 경쟁은 이런 민족주의적 대치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아시아의 중심으로 재등장한 중국과 이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확대하려는 일 본의 전략적 경쟁은 역사논쟁과 영토분쟁에 대한 합리적 해법을 찾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2. 동북아 영토분쟁의 성격과 동학 탈냉전이후 동북아 지역에 노정된 일련의 영토마찰이 대규모 군사적 충돌로까지는 비화되지 않고 있으나, 긴장의 주기적 고저( 高 低 )를 반복하면서 잠복성 분쟁의 뇌관을 형성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동북아 영토마찰에 현미경을 들이대 보면 다음 네 가지 특징적인 성격이 발견된다. 첫째, 동북아가 러 중, 러 일, 일 중 등 강대국간 영토분쟁이 존재하는 유일한 국제적 공간이 라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세계적 권력보유자들이 연루된 동북아 영토분쟁은 현재 경제적 번 영과 협력 추세에 의해 은폐되어 있으나, 제어력을 상실한 국가적 야망이나 민족주의적 감정 에 의해 점화될 경우 높은 휘발성과 폭발력을 지닐 수 있다. 둘째, 동북아 영토분규의 대상이 [표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주로 하천 또는 해상의 도서 ( 島 嶼 )라는 점이다. 영토분쟁 지역이 직접적인 국경선을 마주하지 않은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이 역내 국가간 대규모 군사적 충돌의 우발성과 민감성을 일정수준 완충시켜주고 있다. 셋째, 동아시아 영토분쟁 핵심 연루국가가 암묵리에 세력권 확대를 모색하는 중국과 일본이 라는 점이다. 이는 중 일의 영토 집착력을 반영하는 한편, 향후 양국의 팽창주의적 권력욕이 발동될 경우 그 첫 총성은 영유권 사수를 명분으로 한 영토분쟁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음을 암 시한다. 넷째, 동북아에서 영토분쟁은 과도한 군비경쟁과 밀접한 친화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특히 - 34 -

영유권 분쟁과 해상교통로 확보를 위한 해군력 증강 추세가 현저하다. 강력한 대양해군화를 모색하기 위한 한국의 지속적인 전력증강 사업;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힘의 외부투 사 능력 (power projection capability)과 연장능력 (power extension capability)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국; 중국의 무력 흡수통일 가능성 차단을 위한 대만의 자위력 강화; 경제 대국 정치 난쟁이 4) 라는 조소( 嘲 笑 )에서 벗어나 자신의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 군사적 대국화를 희구하는 일본의 재무장 등은 모두 동북아 군비경쟁의 현주소를 웅변하고, 영토마찰 이 이를 중요하게 추동하고 있다. 위의 분석으로부터 동북아가 민족단위의 국가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역내 국 가들간에 상호 역사적 반목과 안보적 불신이 팽배해 있으며, 그래서 국익과 힘에 기초한 현실 주의적 국제관계 기제가 강하게 지배하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또 동북아에서는 상대적으로 지리 영토적 이해관계가 역내 국제관계를 규율하는 중요한 상수( 常 數 )로 작용한다는 점이 특징 적이다. 이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영토를 그 어떤 가치에 우선하는, 지켜야할 핵심적인 국가 이익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도널드 자고리아(Donald S. Zagoria)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동북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지리 영토적 이해관계가 이데올로기보다 더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요 소 (permanent and constant element)로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5) 그는 과거 냉전시절 동북아지역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사회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을 수반한 영토분쟁, 즉 중 소간, 베트남 중국간, 캄보디아 베트남간의 국경충돌을 그 실증적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이들 상호 인접한 공산국가들간의 영토분쟁의 역사는 수세기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깊은 역사적인 연원을 갖는 것으로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에 의해서도 완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 소 국경분쟁의 경우, 양국이 지고한 가치로 간주했던 이데올로기적 유대가 영토적 국익 앞에서는 한낱 허상에 불과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1969년 우수리강 상 진보도( 珍 寶 島 )에서의 국경 무력충돌은 급기야 철의 단결을 과시했던 동맹적 양국관계를 해체하면서 숙 적관계로까지 돌변시켰고, 그런 앙숙관계를 근 30 년 동안 지속시켰다. 남쿠릴 4도서를 둘러싼 러 일 영토분쟁의 지속도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지난 냉 전시절 남쿠릴 4도 영유권 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으로 러 일관계는 국제적 환경변화로부 터 격리되어 마치 화석처럼 오랫동안 정체되었다. 6) 그런 현상은 냉전구조 해체 이후에도 마찬 가지이다. 소련의 붕괴로 이념의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사라졌고, 양국간 상호 군사적 위협인식 이 현저히 해소되었으며, 더욱이 러시아가 일본과 동일한 서구적 가치체계의 시장민주국가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토문제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로 인해 양국관계는 여전히 파행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7) 伊 藤 憲 一 - 35 -

한 일관계를 한순간에 경색시키는 독도 신경전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데, 이런 일련의 사례는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지리 영토적 팩터(factor)가 차지하는 비중을 여실히 반영하고, 오늘날까 지도 영토문제가 동북아 국제관계의 동학 ( 動 學 )을 일정하게 규정하고 있다. 1. 남쿠릴 4도 영유권 논쟁의 역사적 연원과 경과 남쿠릴 4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은 러 일 양국의 제국주의적 세력팽창에 따른 치열한 권력투 쟁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19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49년 동쪽 끝 태평양 연안 오호츠크 에 도달한 제정러시아는 극동 남동부로 팽창의 방향을 틀어 끊임없이 영토확장 을 계속해 나갔다. 19세기 초 러시아 탐험대는 이미 사할린과 쿠릴열도까지 진출해 있었는데, 이들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과의 크고 작은 충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명확한 국경 선의 부재에서 비롯된 양 국민간 마찰의 빈발은 자연스럽게 양국 정부를 국경협상 테이블로 인도하였다. 그 결과 1855년 러 일간 국경선 획정에 관한 최초의 조약인 시모다 조약 ( 下 田 條 約 ; Симодский трактат)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러 일은 양국간 국경을 사할린 섬 우 측을 화살형으로 감싸고 있는 쿠릴 열도상의 에토로후 섬과 우루프( 得 撫 ; Urup)섬 사이로 정 함과 동시에, 사할린에 대해서는 잠정적으로 섬 전체를 양 국민이 혼거( 混 居 )하는 공유지 로 확정하였다. 8) 요컨대 우루프 섬 이남의 도서, 즉 현재 러 일간 영토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에토로후, 쿠나시리, 시코탄, 하보마이 4개 도서는 일본령으로 하고, 우루프 섬 이북의 쿠릴열 도는 러시아 영토로, 그리고 사할린은 양국의 공유지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사할린에 대한 불분명한 영유권 공유는 러 일 양 국민간 끊임없는 갈등의 원천이 되 었다. 따라서 양국 정부는 재차 사할린의 국경선 획정을 놓고 협상을 진행하였다. 러시아는 북위 48도선 분할을 고집했고 일본은 50도선을 주장함으로써 양국간 담판은 결렬되었다. 이 러한 상황에서 제정러시아는 사할린 섬 전체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데, 그 수단은 일 본보다 근대화된 군사력의 시위였다. 9) 사할린을 포기하라는 러시아의 군사 외교적 압력에 힘의 열세를 느낀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하는 타협점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타협의 결과는 1875년 사할린과 쿠릴( 千 島 ) 열도를 맞바꾸기로 하는 이른바 쿠릴 사할린 교환조약 ( 千 島 樺 太 交 換 條 約 ; Петербургский трактат)으로 나타났다. 10) 이 조약의 핵심 골자는 러 일 양국의 공유지였던 사할린 전체를 제 8) Э. Д. Гримм, Сборник договоров и других документов по истории международных отношений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1842-1925). -М.: СПБ. 1927. С. 52. 9) 伊 藤 憲 一 12) Сборник пограничных договоров, заключенных Россией с соседними государствами. - 36 -

정러시아에 넘겨주고, 그 대신 제정러시아령( 領 )이었던 우루프 섬 이북의 쿠릴열도상의 18개 도서는 일본령으로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 결과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둘러싼 양국간 국경 문제는 재조정되었고 법적으로 일단락되었다. 영토의 규모와 지정학적인 가치 면에서 사할린이 쿠릴열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 고 있었다는 점을 두고 볼 때, 1875년의 사할린 천도 교환조약 은 일본의 입장에서 결코 평화 적이고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 아닌, 러시아의 힘의 우위에 압도된 일종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렇기에 러 일간 힘의 균형이 역전될 경우 국경선은 언제든지 다시 조정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1905년 노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곧 양국간 국경선의 재 획정을 의미했다. 노일전쟁은 20세기 벽두 양 제국주의 세력간 동북아에서의 패권 장악을 위한 전초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러 일 국경선은 힘에 법칙에 따라 변경되었다. 즉, 승전국 일본은 러시아와 1905년 9월 포오츠머드 강화조약 을 체결하고, 그 전리품으로 과거에 주장 했던 북위 50도 이남의 남부 사할린을 러시아로부터 강제 할양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북방영토는 기존의 쿠릴열도 이외에 사할린 남부까지 확대되었다. 1905년 포오츠머드 조약이 결과한 국경선의 재조정은 일본에게는 영광스러운 고토회복 ( 故 土 回 復 )이었고, 러시아에게는 수모적인 약취 ( 略 取 )로 받아들여졌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은 재차 소 일간 국경문제의 반전을 가져다준 전환점이 었다. 제2차 대전 말기 미국과 영국은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끝없는 세력팽 창을 종식시키기 위해 대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소련의 참전을 간절히 희망했다. 그러나 서 부 유럽전선에서 독일과의 어려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던 스탈린은 동부전선의 확대에 미온 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 영은 소련의 대일 전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의 하 나로 소 일간 존재하는 역사적 앙금, 즉 영토카드를 이용하였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독일이 항복한 후 3개월 이내에 소련이 대일 전에 참전한다면 1905년 포오츠머드 조약의 결과로 약취 당한 북위 50도 이남 의 남 사할린 및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의 영토권을 인정하겠다 라고 약속하였고 11), 동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도 이를 재차 확인하였다. 대일 전쟁이 장기화 될 것으로 판단한 미 영이 크 레믈린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마련한 이 제안은 소련에 있어 1905년 일본에 의해 탈취된 영 토를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재 귀속시킬 수 있는 명분과 기회를 제공해 주 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1941년 체결된 소 일 중립조약 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일 전 참전 을 결정한다. 소련은 1945년 8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남부 사할린 및 쿠릴열도 전체를 점령하였고, 태평양전쟁을 공식적으로 결산하는 강화조약을 체결 하기도 전에 곧바로 이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М.: СПВ. 1891. С. 292-299. 11) В. К. Зиланов, Русские курилы - история и современность. -М.: Сампо. 1995. С. 17. - 37 -

<그림 1> 러 일 북방영토 관할의 시대적 변천도 (출처) 블라디미르 예레민, 북방영토 양도할 것인가 말것인가? 소련연구 제 15호(한소문제연구소, 1991), p. 44. 북방영토 분쟁의 발단은 외연적으로 러 일간 역사적 앙금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따른 쿠 릴열도 점령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분쟁의 성격을 유심히 분석해보면 2차 대전후 새롭게 전개 된 미 소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에서 기인한 바 크다. 연합국에 의해 1945년 얄타협정 에서 약속되고 포츠담회담 에서 확인된 밀약에 따라 소련은 승전국으로서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를 합법적으로 할양 받을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를 위해 1951년 태평양전쟁의 전후 문 제를 처리하는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회담 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 회담은 동 서 냉전을 전 세계적인 수준으로 확산시킨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개최되었다. 2차 대전의 연합국이었던 미 소 가 전후 양극적 냉전의 첨예한 대립으로 적대국으로 돌변하면서 태평양전쟁 종식 후 6년 만 에 열린 샌프란시스코 회담은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이 교전 상대국이 었던 일본을 전후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봉쇄 거점으로 삼고 일본의 후견세력으로 자임함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회담은 이미 그 파행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미 소는 샌프란시스코조약 안( 案 )의 북방영토문제 처리와 관련하여 날카로운 견해 차를 드러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진영이 마련한 북방영토문제 처리 안(2조 c항)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일본국은 쿠릴열도 및 일본국이 1905년 포오츠머드 조약의 결과로서 주권을 획득한 사할 - 38 -

린 남부 및 이에 근접하는 제도( 諸 島 )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權 原 )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2) 소련 측에서 볼 때 이 조항의 내용은 북방영토의 주권소재가 불명료한 것으로서 매우 불만 족스런 것이었다. 즉, 북방영토에 대한 일본의 주권 포기만 적시되었을 뿐 구체적으로 소련의 주권을 명확히 인정하는 문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레믈린 지도부는 이를 최초의 얄타협정 내용을 변질시킨 서방진영의 음모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소련은 2조 c항 내용을 다음과 같이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국은 남부 사할린과 이에 근접한 제도( 諸 島 ) 및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의 완전한 주권 을 인정하고, 이들 지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3) 그러나 미국이 크레믈린의 요구를 묵살하고 2조 c항을 원안대로 통과시키려 하자 소련은 자국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았고, 일본과의 교전당사국인 중국, 인도 등 일련의 아시아 국가들 이 회의에 초청되지 않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샌프란시스코조약 안( 案 )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 였다. 14) 따라서 전후 소련과 일본은 평화조약 미 체결국으로 남게 되는데, 이는 양국간 남쿠 릴 4도 영유권 분쟁의 단초를 제공해 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후 소 일간 북방영토분쟁은 쿠릴열도의 개념과 범위,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 그리 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포함한 과거의 여러 조약의 유효성에 대한 양국간 상이한 해석에서 출발한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했다. 첫째, 에토로후, 쿠나시리, 시 코탄, 하보마이 등 북방 4도서는 최초의 러 일 국경조약인 1855년 시모다 조약 이래 한번도 타국에 귀속 된 적이 없는 일본 고유의 영토였다. 따라서 북방 4도는 일본 북해도의 일부이지 샌프란시스코 조약 2조 c항에서 포기했던 쿠릴열도에 포함되지 않는다. 둘째, 동 조약 2조 c 항은 일본이 쿠릴열도의 권리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하였을 뿐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에 인도할 것인가에 관한 귀속선 ( 歸 屬 先 )이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이 북방 4도를 영유( 領 有 )할 이유가 없다. 15) 더욱이 소련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도 않았다. 셋째, 쿠릴열도의 합법적 영토화 논거로 소련 측이 제시하는 얄타협정은 당사국 일본이 참여하지 않은 비밀협정이었기 에 법적으로 무효다 16). 전기( 前 記 )한 일본의 주장에 대해 소련은 다음과 같은 반박논리를 제시하였다. 첫째, 쿠릴열 도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제정러시아로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보아 명백한 소련의 영토이다. 둘째, 얄타협정, 포츠담선언,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등 일련의 국제협정에 의해 쿠릴열도는 합법적으로 소련이 취득한 영토가 되었고, 북방 4도서도 쿠릴열도의 일부임으로 소련의 영토 12) 13) 伊 藤 憲 一 14) А. В. Иванов, Внешняя политика и дипломатия Японии. Внешняя политика и ди пломатия стран Азитско-Тихоокеанского реиона. -М.: Научная книга. 1998. С. 102. 15) 16) - 39 -

이다. 따라서 일본과의 미 해결된 영토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북방 4도를 둘러싼 소 일 양측의 주장은 역사적인 대립만이 아니라 법률적으로도 극 과 극으로 치달아 접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특히 양국간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각인된 상호 부 정적인 사고의 타력( 惰 力 ), 변할 줄 모르는 확고부동한 역사적 불신의 항상성( 恒 常 性 )이 영토 문제에 대한 자폐적 국수주의를 강화시켜주었다. 그런 연유로 전후 시대적 상황에 따라 순환 기적 주기성을 띠고 교착과 재개를 반복한 영토반환 교섭과정에서 양국은 각기 자국의 국가이 익과 내쇼널리즘에 근거를 두고 상호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으며 주관적 논리를 갖고 상대방의 양보만을 요구하였다. 여기에 냉전 이라는 국제 정치적 요인이 오버랩(overlap) 되면서 전후 영토협상은 팽팽한 평행선을 그었고, 양국관계는 상호 지리하고 소모적인 갈등관계로 일관하 였다. 그런 현상은 냉전구조 해체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1991년 소연방 붕괴 이후 러 일 관계는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갈등적 대립관계에서 벗어나 전략적, 지정학적 이익에 합치하는 창조적 동반자관계 17) 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는 외교적 수사 차원에 불과할 뿐 내포적으로는 북방영토문제라는 밀폐된 폐쇄회로 속에 갇혀 여전히 탈냉전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실제로 냉전종식이후 수십 차례의 러 일 정상간 공식 비공식 회동에도 18)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영토협 상은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독도 영유권 논쟁의 역사적 연원과 경과 한 일간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핵심 쟁점은 두 가지로 모아진다. 하나는 누가 먼저 독도를 지배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영토를 지속적으로 관리해왔는가라는 독도에 대한 역사적 선점 논 쟁이고, 다른 하나는 1951년 태평양전쟁을 결산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영토조항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먼저 독도를 역사적으로 선점 취득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각기 자국의 역사적 문헌과 사료 제시를 통해 그 정당성의 논거를 찾는다. 일본 정부는 도쿠가와 막부( 德 川 幕 府 )가 어업가 오오다니( 大 谷 甚 吉 )와 무라가와( 村 川 市 兵 衛 ) 두 가문에게 각각 1618년과 1661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 竹 島 渡 海 免 許 )'와 '송도도해면허( 松 島 渡 海 免 許 )'를 역사적으로 독 도가 자국의 고유 영토임을 입증하는 주요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도해면허 ( 渡 海 免 許 )를 근거로 일본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 점유했다고 주장한다. 19) 일본 측 견해에 의하면 한국이 6세기의 신라시대부터 울릉도를 지배했으나 1438년부터는 도민을 조선본토로 철수시켰고, 1696년 이후부터 1884년까지 약 300년간 섬을 비우는 공도 17) Московская декларация об установлении созидательного партнерства между Рос 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ей и Японией. Дипломатический вестник, No. 12(декабрь), 1998. http://www.ln.mid.ru/website/dip_vest.nsf? 18) Хронология встреч на высшем уровне между премиер-министрами Японии и руководителями России(СССР). http://www.embjapan.ru/jrr/hronovstrech.html. - 40 -

( 空 島 )정책을 펴는 가운데 3년마다 순찰사만을 파견했다는 것이다. 20) 반면 일본은 이미 17세 기부터 울릉도를 경영하면서 독도를 중계지로 활용해왔고 계속 내왕 영유했다는 점을 강조한 다. 또 일본정부가 독도를 국제법상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1905년 2월 22일자 시마 네현의 고시( 告 示 )다. 당시 일본정부는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 입하는 각의결정( 閣 議 決 定 )을 내렸고, 시마네현( 島 根 縣 )은 1905년 2월 22일 현 고시 제40호 로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했으며, 1906년 4월 대한제국 정부에 이를 통보했다는 것이다. 21) 일본 정부는 독도 취득의 국제법적 정당성을 1905년 독도 편입 고시와 상대국에 대한 통지에 서 찾는다. 한편 한국 정부도 독도를 국제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 이래 자국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그 증거로 삼국사기 (1145), 세종실록 지리지 (1454), 신증 동국여지승 람 (1530), 동국문헌비고 (1770), 증보문헌비고 (1908) 등 많은 관찬문헌과 지도를 제 시한다. 22) 이런 일련의 고문헌에 의하면 독도는 신라 지증왕 13년(512)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한 이래 고려 및 조선 시대를 거쳐 한국의 영토에 속해왔고, 시대적 변천에 따라 우산도 또는 삼봉도로 불리면서 울릉도와 함께 한국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통제 관리해 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독도 선점취득과 국제법적 정당성 주장에 대해 한국정부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일본이 17세기부터 어민들에게 도항 면허를 내주는 등 울릉도와 독도를 자신의 어로수역으로 관리하면서 계속 영유해 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 시기는 조선정부가 점증하는 왜구의 노 략질 자행으로부터 울릉도 섬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의 섬 거주를 금하고 거주민을 육지 로 나오게 하는 소위 쇄출( 刷 出 )정책 23), 즉 공도( 空 島 )정책을 실시한 기간이기 때문에 일본인 의 독도 및 울릉도 영유는 불법이라고 지적한다. 요컨대 일본은 한국이 울릉도, 독도에 대한 공도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사실상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포기했다고 주장하는데, 조선의 공도정책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의 포기가 아나라 섬주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통치 방법의 하나라는 점을 강조한다. 24) 또 17세기 울릉도와 독도에서 어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21) 22)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연구센터, - 41 -

도해면허를 발급했다고 주장하지만, 일본정부가 발행한 도해면허란 국내용이 아닌 해외용이기 에, 이는 사실상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는 의미로 해석한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를 국제법상의 합당한 절차에 따라 일본 영토 로 편입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한국정부는 그 논리적 허구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25) 첫째, 편입 이라는 것은 스스로 독도가 이전에 일본영토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일본의 결정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독도가 무주지( 無 主 地 )였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 만, 독도는 무주지가 아니라 이미 신라시대 이래 울릉도와 같이 한국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한국의 많은 관찬 문헌에 의해 밝혀져 있으며, 더욱이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 보다 앞서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 를 통해 근대국가차원에서 독도의 영유권을 재확인한바 있다. 26) 셋째, 국제법상 독도 영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영토편입에 관한 충분한 절 차를 밟아야 하지만, 일본은 일개 지방자치단체의 고시로 독도 편입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였으 며, 이해당사국인 한국에게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906년 3월에서야 공식 문서가 아닌 서한형 식으로 당시 울릉군수에게 통고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선점 의사는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밝혀야 하나 일본정부는 이를 대외적으로 표시한 바가 없다. 넷째, 1905년의 독도 편입조치는 1904년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일본이 한국의 실질적인 외교권을 박탈하고 있 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원천 무효다. 한 일간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또 다른 핵심 쟁점은 1951년 '대일강화조약( 對 日 講 和 條 約 )'이 라고도 불리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영토조항에 대한 상반된 해석이다.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되고 1952년 4월 28일 발효한 이 평화조약은 전문( 前 文 )과 본문 7장으 로 구성되며 영토조항은 제2장에 적시되어 있다. 한국 영토 관련 조항인 제2조 (a)항은 이렇 게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 원 청구권을 포기한다. 27) 독도에 대한 명료한 귀속선을 명시하지 않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항이 한 일간 독도 영유권 논쟁의 단초를 제공한다. 일본은 이 조항에서 한국에 대하여 권리 권원을 포기하 는 도서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음으로 연합국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한 것이고, 따라 서 독도는 여전히 일본영토라고 주장한다. 28) 이와 정반대로 이 조항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정부의 반박 논거로도 사용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직전인 1952년 1월 18일 한국은 6 25전쟁의 와중에 일본과의 해 양 평화선을 그은 이승만 라인, 즉 인접 해양 주권에 관한 선언 을 발표하고 그 범위 안에 - 42 -

독도와 주변 영해를 포함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그러자 일본은 열흘 뒤인 1월 28일 평화선 선포에 항의함과 동시에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외교문서(구술서)를 발송하 면서 한국과 일본 간 독도 영유권 논쟁이 공식 시작된다. 이후 독도는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 배해 왔고, 일본의 독도 문제 제기는 주기적으로 한 일 양국관계를 경색시키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영토문제의 본질을 거슬러 추적해볼 때, 작금의 한 일간 독도 영유권 마찰은 러 일간 남쿠릴 4도 분쟁과 마찬가지로 전후 국제적 상황에 따른 미국의 입장 수정에서 비롯된바 크다. 요컨 대 1945년 2차 대전 종전 이후부터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까지 미국의 변화 무쌍하고 모호한 태도가 독도분쟁 분출의 토대를 제공했다. 29) 이점은 미국이 주도한 한국관련 영토조항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은 평화조약의 1차 초안 (1947년 3월)에서 5차 초안(49년 11월)까지는 독도를 다음과 같이 한국영토로 분명하게 표시 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와 독도(리앙쿠르 록, 다케시마)를 포함하여 한국 연안 의 모든 섬들에 대한 권리 및 권원을 포기한다. 30) 5차 초안에는 동경 132도 40, 북위 37도 30분을 기점으로 독도가 한국영토에 포함된 쪽에 한 일 경계선을 그은 지도까지 첨부했다. 그러나 1949년 12월 29일 작성된 6차 초안부터 미 국무부는 갑자기 독도를 일본영토에 포함시켰다. 독도가 일본 영토로 둔갑한 것이다. 일본영토 를 표시한 6차 초안 2장 제3조엔 이렇게 적시되어 있다. 일본 영토는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4개 주요 섬에 쓰시마, 다케시마(리앙쿠르 록-독도를 뜻함), 오키리토, 사도 등을 포괄해 이뤄진다. 그러나 연합국의 대일강화조약은 미국만이 담당한 것이 아니라 다른 연합국의 동의가 필요 한 것이었으며, 연합국 48개국의 동의 서명을 받아야 성립 될 수 있었다. 31) 미국의 수정안을 받아 본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다른 연합국들은 독도의 일본 영토를 규정한 미국의 6차 초 안에 동의하지 않았고, 영국의 경우 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시키는 독자 초안을 세 차례나 만들어 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제7차 초안(1950년 8월 9일)부터는 독도 명칭을 아 예 초안에서 삭제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이 작성한 제7차 초안, 제8차 초안(1950년 9월 14일) 및 제9차 초안 (1951년 3월 23일)에서 독도(죽도)는 영토조항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결국 미 국과 영국은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독도를 명시하지 않은 합동 초안(1951년 5월 3일)을 만들 어 합의 서명한다. 이것이 뒷날 한 일간 독도 영유권 분쟁의 불씨를 제공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1 5차 초안까지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했던 미국이 왜 29) - 43 -

6차 초안부터는 갑자기 일본 영토로 수정하였 는가라는 점이다. 독도 영유권 표기에 대한 미 국의 태도 변화에는 일본의 적극적 대미 로비 와 월리암 시볼드(William J. Sebald)로 대표되 는 친일적 미국 관리의 보고서가 중요하게 영 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도 냉전기 일본을 대소 반공망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크게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1차 초안이 성안된 1947년 3월부터 최종적 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된 1951년 9월 까지의 기간은, 2차대전 당시까지 연합국이었 던 미국과 소련이 전후 적대관계로 돌변하고 유럽과 아시아에서 냉전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 어가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당시 동북아에 서는 소련이 지원한 모택동이 중국 본토를 공 산화하는데 성공하였고, 한반도에서는 소련이 미국 텍사스 주립대 도서관 홈페이지에 실린 동북아시아 지역 사진. 독도를 '리앙쿠르 북한을 사주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으며, 베트 록스'라고 표기해 놓았다. 텍사스 주립대는 이 남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서도 친 공산계열의 지도의 자료를 미 CIA에서 얻었다고 밝혔다. 민족해방 전쟁이 크게 번지고 있었다. c민중의소리 이렇게 볼 때, 소련 세력권의 급속한 확산에 당황한 미국이 소련 함대의 태평양 진출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독도의 전략적 가치에 새롭게 주목하였고, 바로 이점을 강조하면서 줄기차게 로비를 전개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여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켰을 것이라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러시아 및 한국 등과 관련 된 영토조항에서 일본의 이익을 적지 않게 배려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1951년 9 월 8일은 미 일방위조약 체결일과 동일하다는 사실은 많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장에서 남쿠릴 영유권 논쟁과 독도 영유권 논쟁의 발단 및 역사적 전개과정을 압축적으로 살펴보았다. 일본이 제기하고 있는 양 영유권 문제가 서로 다른 국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영토마찰의 연혁과 성격을 비교해 보면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독도와 남쿠릴 4도를 각기 한국과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점, 하지만 일본은 두 해상 영토에 대한 한국과 러시아의 실효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양국이 불법 점거한 일본 고유영토로 명시하고 있다는 점, 일본이 치밀한 계획 하에 양 도서에 대한 영유권 문제 - 44 -

를 지속적으로 제기함으로써 국제적으로 분쟁지역화하려 한다는 점, 지역분쟁화 기도를 통해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시켜 궁극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려 한다는 점 등에서 유사성을 띈다. 두 번째 공통점은 공식적으로 한 일 및 러 일간 영토분쟁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대일전 당사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에 초대받지 못했다. 반면 소련은 전승국으로서 회담에 당당히 참여하였다. 그러나 소 련은 애초 대일전의 참전 조건으로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들이 얄타에서 제시한 합의사항이 샌 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일본과의 영토조항 성안( 成 案 )과정에서 왜곡되어 자국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점에 이의를 제기했고, 결국 소련은 자신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대일강화조 약에 서명을 거부했다. 이처럼 한국과 소련(러시아)이 제외된 상태에서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영토조항은 초기단계의 성안과정과는 다르게 결국 일본에게 유리하게 명시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한 일간 및 러 일간 영토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 셋째는 일본이 남쿠릴 4도와 독도를 반드시 반환받아야 할 영토로 간주하고 이를 관철시키 기 위해 범국가적 차원의 국민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1981년 일본 내각 회의가 러 일간 최초의 국경선 획정 조약인 1855년 시모다( 下 田 )조약 체결일인 2월 7일을 북 방영토의 날 로 지정하였고, 이어서 2005년 시마네현 의회가 정확히 100년 전인 1905년 독 도를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한 2월 22일을 이른바 다케시마의 날 로 제정한 사실에서 잘 확 인된다. 이렇듯 일본은 전 국민적 관심과 이해를 제고시키기 위해 특정일을 고토( 故 土 )회복의 비원 담은 영토일로 지정해 내쇼날리즘을 자극하고 있고, 이런 방식을 동원해 영토반환 요구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네 번째 유사점은 일본정부가 북방영토의 날, 다케시마의 날 을 제정해 거국적 차원의 영 토반환 요구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일본의 영토 공세가 역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 정당성 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주변국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주권 침탈과 함 께 스스로 체결한 각종 조약들을 훼손하거나 무효화시키면서 힘으로 영토 병합을 자행해왔다. 실제로 일본은 러 일전쟁으로 조선이 일본 군대의 점령 하에 있었던 시기에 독도를 편입하였 고, 이후 한국을 강제로 합방하여 36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하였으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당시에는 한국이 6.25전쟁으로 경황이 없는 틈을 타서 해방으로 회복한 독도 를 다시 자국 영토로 되돌리려고 치열한 대미 로비를 전개하였다. 32) 러시아에 대해서도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북위 50도 이남의 남부 사 할린을 강제 할양받았으며, 또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반혁명세력의 준동과 내전의 소용 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신생 소비에트 정권의 취약성을 틈타 러시아 동부 영토까지 유린하 였다. 일본은 1918년 동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감행하여 4년여 동안 자바이칼 지역 및 연해주를 점령 통치하였고, 1920-1925년 사이에는 사할린 섬 전체를 불법으로 강점 한바 있다. 32) - 45 -

다섯째는 양 영토마찰에는 러 일 및 한 일간 역사적 앙금에 따른 강한 민족감정과 내쇼널리 즘이 짙게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가 1905년 노일전쟁의 패배와 1920년대 일본 군 국주의세력의 동시베리아 및 사할린 강점을 잊지 않는다면, 일본은 1895년 러시아의 삼국간 섭, 1945년 소련의 일 소 중립조약 의 일방적 파기와 대일전( 對 日 戰 ) 참전 그리고 전후 약 60만 일본 포로의 시베리아 유배를 기억한다. 33)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한 한국의 강경한 입 장에는 역사적으로 한국 국민들 의식의 심연 속에 깊게 내재된 일본에 대한 민족적 불신의 침 전이 크게 작동한다. 과거 수세기에 걸쳐 한국은 잦은 왜구의 출몰과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일본의 침탈에 시달렸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 36년의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치욕을 경험했 다. 이렇듯 러 일 및 한 일간 상호 상대방에 대한 역사적 반감과 불신의 축적이 국제법적 법리 의 타당성과는 상관없이 각기 영유권 주장의 애국주의적 행위를 견인하는 강한 추동력으로 작 용하고 있다. 여섯 번째 공통점은 영토문제가 러 일간 및 한 일간 안정적인 우호관계발전의 최대 장애물이 라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 러시아와 일본은 각기 독도와 남쿠릴 4도 영유권을 그 어떤 가치 에 우선하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활적 국익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영토문제가 양자관계 발 전을 가로막는 급소 로 작용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 수호는 한 일관계보다 훨씬 상위개념이자 중요가치" 34) 라고 강하게 천명한 반기문 전 외무부 장관의 발언은 한 일 양국관계에서 영토문 제가 갖는 파괴력을 잘 반영한다. 그런 점은 러 일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날 러시아와 일본은 양국 간 적대관계가 공식적으로 해소되지 못한, 모호한 평화공존 상태에 있다. 보다 엄밀히 말해 국제법상 러 일 관계는 현재까지 전쟁의 지속 상태에 놓여있 다. 이는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교전 당사국인 소련과 일본이 전쟁의 종식을 공식 적으로 결산하는 강화(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음에 원인한다. 여기서 양국간 평화조약 체결 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다름 아닌 남쿠릴 4도 영유권 분쟁이다. 정체상태의 현 러 일 관계를 획기적으로 타개하는데 있어 영토문제 와 평화조약 체결 은 동 전의 앞뒷면을 형성한다. 러 일 양국은 평화조약 체결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일찍부터 동 의해왔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조약 체결에 대한 양국의 접근법이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먼저 일본은 영토문제와 평화조약 체결을 철저히 연계시킨다. 즉, 북방 4도의 일괄 반환 을 평화조약 체결의 양보할 수 없는 선결조건으로 내세운다. 반면, 러시아는 남쿠릴 4도를 모스 코바주( 州 )나 뜨베리주처럼 러시아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 35) 로 간주하는 가운데 일본의 영토 반환 요구를 근거 없는 억지논리라고 주장하고, 영토문제가 양국간 최우선적 현안으로 간주되 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먼저 조건 없이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 상호 신뢰와 우호적인 분위 기 속에서 양국의 이익이 존재하는 방향으로 영토 문제의 점진적인 해결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렇듯 영토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이 러 일 양국관계를 오늘날까지 파행의 연속으로 내몰고 있다. 35) И. Латышев, Кто и как продает Россию. -М.:Палея, 1994, стр. 3. - 46 -

마지막 공통점으로 독도와 남쿠릴 4도 영유권 분쟁이 촉발되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데 에는 배후에서 미국의 힘이 짙게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성안과 체결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해볼 때, 미국이 독도분쟁과 북방영토분쟁의 원인제공자라해 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후 양 영토분쟁의 분출과 그 전개과정을 지켜볼 때도, 영토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미국이라는 보이지 않은 손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영토분쟁의 지 속이 동북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수익을 크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 일간 및 러 일간 영토분쟁은 미국이 장기적으로 동북아에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동원할 수 있는 중요한 지렛대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미국은 1946년 연합군 사령관 포고령으로 독도를 일본이 한국으로 반 환할 것을 명시했으나, 1951년 미 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반환목록에서 누락시 켜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36) 이후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하면서 노정된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미국은 독도를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것에 대해 한번도 이의를 제기하 고 않고 묵인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을 의식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한 일 양국이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외교적으로는 불개입과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그 리고 미국은 한 미 일 남방삼각협력체제의 유기적 작동을 위해서는 한일관계의 악화가 전혀 도 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하에 가급적 양국에서 영토문제가 확산되는 것을 자제시켜왔다. 미국의 독도문제에 대한 불개입과 중립 표명은 동맹관계에 있는 한국과 일본 어느 한편을 지지할 수 없는 외교적 딜레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독도문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 로나 민족적으로 화해가 쉽지 않은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경쟁적으로 충성심을 이끌어 내기 위 한, 동시에 한국과 일본을 미국의 의도대로 순치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고도의 전략적 고려도 강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본의 강경한 독도 영유권 공세 추세와 이와 밀접한 친화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독도 지명 표기를 둘러싼 미국정부의 해 프닝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과거와 달리 최근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독도문제를 강경하게 제기하는 데에는 미국의 암 묵적 용인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2008년 7월 25일 미연방 지명위원회(Board on Geographic Names)는 독도의 귀속 국가에 대해 종래 괄호를 사용하여 한국 및 공해로 표기해 오던 것을 주권 미지정 (undesignated sovereignty) 지역으로 기록함으로써 이른바 분쟁지역으로 명기했다. 이에 한국이 강력 이의를 제기하자 미국정부는 일주일 만에 부시대통 령의 지시로 다시 원상복구 시켰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도발에 이은 미국의 지명표기 변경 및 정정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워싱턴이 단순한 실수라고 치부하지만, 미국 지명위 원회의 표기 변경이 우발적이라기보다는 그동안 한국에 쌓인 불편한 심기,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이 위계적인 한 미동맹구조에서 벗어나 독자성을 강화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다분히 의도성 경고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김대중 정부이후 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부에 이르는 동안 한국에서 주한 미군 철수 압력이 높아지고 미국 광우병 소 수입에 대한 촛불시위가 확산되는 등 반미 분위기가 고조되 36) - 47 -

어 왔던 게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미국이 요구하는 국가미사일방어체제(MD) 참여를 거부했고, 미국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러시아, 중국 등 북방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가운데 과거와 달리 남북한 관계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으며 한반도 및 동북아에서 서서히 독자 적인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모습 - 동북아 균형자론 - 을 보였다. 이렇게 볼 때 미국 지명위원회의 독도 명기 시정 사건은 일련의 탈미적 움직임을 보인 한국에 대한 워싱턴 의 우회적 불만 표출로 보는 게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과거처럼 미국에 순응하지 않으면 언 제든지 독도문제에서 일본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시그널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보수인사와 우익들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고성 시그널에 편승한 측면이 있다. 독도문제에 대한 미국의 이런 접근방식은 일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에게 독도문제 는 일본의 대외적 운신을 제약하는 가운데 주일 미군의 철수 압력을 약화시키는 훌륭한 외교 적 자원이 된다. 친미를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중립에서 한국의 손을 공식적으로 들어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러시아와의 북방영토 문제에서도 미국의 그런 정책은 동일하게 관찰된다. 미 국은 일본이 워싱턴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여 전략적 경쟁자인 러시아와 중국에 다가갈 경우, 언제든지 역풍을 가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곤 했다. 이점은 일본과 러시아가 전후 영토협상 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분석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37) 냉전시절 미국은 일본을 미 일 동맹체제 내에 묶어두기 위해 소 일 영토협상의 진전을 배후 에서 교묘히 저지하였던, 러시아 학자 발레리 키스타노프(Valery Kistanov)의 표현을 빌리면 막후 연출자 (a director behind the curtain)였다. 38) 195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은 세계정치 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미 소 평화공존 이라는 국제적 화해조류에 밴드웨곤닝 (bandwegoning)하여 소련과의 영토문제를 타결하고자 하였다. 1955년 일본은 실리적 차원에 서 소련이 제의한 2도(하보마이, 시코탄) 반환을 우선적으로 실현하고, 차후 나머지 2도(쿠나 시리, 에토로후)를 반환 받는다는 전략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39)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2도 반환이라는 영토 지렛대 를 통해 일본 을 미국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크레믈린의 의도를 간파한 미국은 소련의 영토카드에 역( 逆 ) 영토카드 로 맞섰다.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거하여 자국이 관할하고 있었던 오키나와( 沖 繩 ) 섬의 반환 문제와 연계하여 일본의 대소 접근을 제한하였다. 40) 즉, 미국은 일 본이 시코탄 및 하보마이 2도 반환으로 소련과 평화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에토로후와 쿠나 시리를 포기한다는 것과 연관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미국으로서도 오키나와 В. О. Кистанов, Япония в АТР. -М.: Восто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95, С. 231. - 48 -

의 병합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라며 강경한 반대론을 폈다. 41) 그 결과 대소 영토교섭 개시 당 시 외교적 자주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일본 정부는 미국의 개입으로 2도 반환의 실리론 에서 4도 일괄 반환이라는 강경론 으로 방향 선회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영토협상 타결과 평화조약 체결은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었다. 미국은 러 일 갈등관계가 지속되면 될수록 그것에 비례해 동북아에서 지정학적 운신의 폭을 확대할 수 있고, 항구적인 전략적 이익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전략적 사고 하에 러 일 접근을 예의주시하면서 일본이 자국의 품안에서 이탈하는 것을 치밀하게 경계하였고, 견고한 미 일 관계에 러시아가 틈입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히 차단해 왔다. 1960년 미 일 신 안보조 약 체결, 1970년대 후반 미 중 일 반소 전략적 삼각체제 의 형성, 1996년 4월 미 일 신안보 공동선언 - 21세기를 향한 동맹, 1997년 9월의 미 일 방위협력지침 (미 일 신 가이드라인), 미국주도 MD체제에 일본의 편입 등은 - 논리의 비약측면이 없지 않으나 - 러시아의 반작용 을 계산하여 영토반환에 대한 경직성을 유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일본을 미국의 세력권 내에 묶어두려는 정치( 精 緻 )한 노력을 반영한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러 일 영토분쟁을 당사자문제로 간주하고 그 조속한 해결을 지지하고 있으나, 내포적으로는 미 일 안보체제의 강화를 통해 러시아를 자극하면서 영토협상을 방해하 고 있다. 42) 러 일이 영토문제를 극복하고 양국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내지는 밀월관계로 전환 될 경우, 이는 미국의 아시아전략의 근본적인 수정을 요하는 지정학적 세력균형 파괴를 의미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그런 최악의 시나리오는 좌시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그래서 미국 은 쿠릴열도가 러시아 영토인 줄 알면서도 오키나와 미군주둔을 위해 일본의 배후에서 러시아 와의 영토분쟁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고 러시아 외교아카데미 부원장 예브게니 바자노프 (Evgeny Vazhanov) 교수는 강조한다. 43)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독도와 남쿠릴 4도 영유권 문제는 한 일 또는 러 일 양자만의 사안이 아니고, 좁게는 한 미 일 또는 미 일 러 삼국간의 세력방정식 속에서 넓게는 동북아 전략환경이 라는 보다 큰 틀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는 영토문제 해결이 결코 쉽지 않고 주기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장기화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독도 영유권 논쟁은 한 일간의 문제이지만 러시아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어찌보면 러시 아는 한 일간 독도 분쟁의 빌미를 제공한 또 다른 원인제공자에 해당한다. 그 이유는 한국과 일본 사이 동해 한가운데에 위치한 독도가 20세기 초에는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 세력 간의 권력투쟁에서, 20세기 중반에는 미소 냉전의 대립 과정에서 각기 일본과 미 일동맹체제에 의 42) С. Л. ТихвинскийТихвински, Россия - Япония: обречены на добрососедство. -М.: Памятни ки исторической мысли, 1996, C. 220-231. - 49 -

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를 향한 러시아의 세력팽창으로 말미암아 20세기 초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 침탈을 기도했고 44), 냉전 시기에는 일본을 동북아에서 소련 사회주의 세력권 확산 저지를 위한 거점으로 활용코자 했던 미국이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독도의 소유권을 일본에게 넘기려 했다는 점에서 러시아도 독도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한편 냉전시기부터 오늘날까지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배경 에는 미국의 세계전략의 한 축인 미일동맹체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 한국과도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는 가운데 독도 문제에 균형자 역할을 하면서 한국과 일본을 전략적으 로 통제하고 양국으로부터 충성심 경쟁을 이끌어 내고 있지만, 최근 일본이 의기양양하게 독 도 영유권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배경은 미국의 암묵적 묵인에서 기인하바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러시아의 남하 봉쇄 이외에 점증하는 중국의 영향력을 제어할 자기 의 대리인으로 일본을 상정하고, 일본의 재무장과 함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 등을 전폭 지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일본이 과거와 달리 독도 영유권 공세를 강화하고 이에 대해 미 국이 침묵하고 있는 배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이 개입된 최근의 독도문제 는 거대 중국의 부상과 러시아의 부활 그리고 한 미 일 3국 관계의 변화에 따른 구조적인 문제 이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분석이 성립된다. 45) 이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방안의 하나로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 균형자론 을 한때 한국의 대 외전략으로 채택했지만, 국내외의 커다란 반발로 인해 곧 용도 폐기되었다. 그렇다면 미 일 밀 월관계에 따라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공세가 현저히 강화되는 시점에서 한국은 과연 어 떤 대응전략을 강구해야할 것인가가 시급한 외교적 과제로 제기된다.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논쟁은 외연적으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만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논쟁의 발단과 지속에 대한 원인을 깊이 있게 분석해보면 독도 문제는 단지 한 일 양자만의 사안이 아니라, 미국 심지어 러시아 및 중국의 이해도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는 점을 알 수 있다. 독도문제의 복잡성과 그 해결 전망을 어렵게 하는 요인은 한일 양국에서 의 극단적 민족주의 이외에 독도문제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 중 러가 포함된 다자게임이라는 데 있다. 세계사를 관통해 볼 때 지구상에 고정된 영토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한 국가의 공간적 규모를 구성하는 영토는 영구불변의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해당 국가의 흥망성쇠의 부산물이었 45) - 50 -

다. 요컨대 세계사는 전쟁을 통한 지속적인 국경 변동의 역사였고, 전쟁을 결산하는 강화조약 ( 講 和 條 約 )은 승자의 논리를 패자에게 강요하여 승자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는 외교적 안 전장치에 불과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경우 영토는 할양 (cession)이라는 이름으로 승자 의 전리품이 되었다. 따라서 한 국가의 영토 지리적 범위는 힘의 법칙에 의해 크게 좌우되어 시대적 흐름에 따라 팽창과 축소를 반복하였다. 그렇기에 국가간 영토분쟁은 법리적인 측면으 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직 힘의 법칙만이 정의였고, 강자만이 자국에 유리 한 영토보전의 원칙 (principle of territorial integrity)을 내세울 수 있었다. 이런 영토보전의 속성을 명료하게 인식한다면, 한국은 자신의 영토를 스스로 사수할 수 있 는 국력의 신장과 국가안보 능력을 최우선적으로 강화해 나가야한다. 독도 사수를 위한 다양 한 세부적인 대응전략은 이것이 전제되었을 때 그 효과를 발할 수 있다고 본다. - 51 -

- 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