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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독립정신표지 2010.4.30 3:16 PM 페이지2 mac2 오선지에 쓴 항일과 친일 사진으로 보는 독립정신 7월의 습한 날 항일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여러 시간이 지나고, 많은 것들이 변하였지만, 그곳을 기억하게는 만드는 것은 우리의 선열이, 우리의 선배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2009.7 유주 대한민국임시정부항일투쟁활동진열관 친일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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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51호_1도 2010.4.30 3:20 PM 페이지22 mac2 독립운동 역사에 모든 것을 내던진 민종식 (閔宗植) 선생 선생은 철종 12년(1861) 3월 경기도 여주에서 민영상(閔泳商)과 기계(杞溪) 유(兪)씨 사이 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명성황후의 조카뻘로 문과에 급제하고 충청도관찰사를 비롯하여 이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광무황제의 신임을 받은 관료였다. 선생 역시 약관 20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체구가 비대하고 얼굴이 크며 성긴 구레나룻 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문신이면서도 동시에 무인의 풍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이조참판을 역임하는 등 종2품에까지 올라 탄탄대로의 벼슬길이 보 장되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배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선 생의 인생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 사건은 국가의 운명을 바꿔놓은 치욕의 사건이면서 선생 개인으로서도 묵과할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어려서 살던 충청도 정산으로 낙 향하였다. 그러나 낙향 후 1년 만인 1896년에 모친을, 1899년에는 부인과 사별하였으며, 이 어서 1901년에는 부친마저 떠나보내고 말았다. 선생은 1904년 한산 이씨 이은식(李殷植)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선생은 편안한 생활을 거부하고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 서게 되었다. 이때 처남인 이용규와 이남규는 의병의 동지가 되었다. 홍주 을미의병의 총수 였던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 )이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상 경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하인을 데리고 상경하였다. 서울 전동의 여인숙에 투숙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설에게 상소문의 초안을 의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영익과 민영휘 등 여흥 22 독립정신
독립정신51호_1도 2010.4.30 3:20 PM 페이지23 mac2 민씨의 당대 고관들을 만나 상소의 일을 의논하였다. 하지 만 그들로부터 상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그만 두라 는 권유만 받았다. 게다가 이설과 김복한이 체포, 구금되 고 이설이 작성한 상소문마저 압수당하자 충남 정산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의 봉기를 계획하였다. 마 침 홍주 을미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교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安炳瓚)이 홍성 청양 일대의 재지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 생은 의병의 총수 자리에 올랐다. 의병장에 오른 선생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원을 마련하여 군수품으로 제공하 민종식 의병장 였다. 선생은 의진의 근거지를 자신이 거주하는 정산군 천장리로 삼고 의진의 편제를 정비하였 다. 이때의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용규 홍순대 박윤식 정재호 이 만직 성재한 등이 있다. 의진 편성을 마치고 선생은 1906년 3월 15일(음, 2월 21일) 광수장 터 (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의 첫 깃발을 들었다. 이때 참석한 의병은 600여명에 달했 다. 우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이튿날 바로 홍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 (일명 하고개)에 진을 쳤다. 선생은 홍주성 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잡아오면 머리하나에 1 천냥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하면서 홍주성 공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게 되어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다음날 이세영(李世永)이 의진 에 당도하였다. 홍주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가 군대에 들어가 계급이 부위에까지 오른 그의 참여는 의진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선생은 회의를 개최한 후 다시 광수장터에서 군세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관 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선두부대가 묵방(일명 먹고개, 현재 청양군 비봉면 중묵리)에 이르 렀을 때 공주 병력과 경병 300여명이 청양읍에서 휴식중이라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의병은 진로를 화성으로 옮겨 합천 일대에 진을 쳤다. 이날 관군과 일본군은 오후 6시 먹고 개에 도착하여 탐문하고 10시경 합천 인근으로 쳐들어와 잠복하였다. 다음날(3월 17일) 오 전 5시 의병진은 이들로부터 기습을 받아 안병찬과 박창로 등 23명이 체포되었다. 안병찬은 이남규 등의 노력으로 선생이 홍산에서 재기하기 4일전인 5월 5일(음, 4월 12일) 석방되어 5월 6월호 23
독립정신51호_1도 2010.4.30 3:20 PM 페이지25 mac2 입성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은 총 멘 자 600여명, 창 가진 자 300여명, 유회군 300여명 등 모두 1,200여명에 달했다. 홍주성을 점령한 뒤 선생은 의진을 새롭게 편제하였다. 의병 지휘부는 충남의 서북부 지 역 인사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선생이 거주하는 청양 출신의 인사가 많았다. 정산면의 박윤 식 이식, 화성면의 안병찬 안병림 형제, 안항식 채광묵, 임한주 임승주 형제, 장평면의 이세영 김덕진, 한태석 한훈 형제 등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도 예산의 이남규 남규진, 보령의 유준근 신보균 신현두, 부여의 이용규 이상두, 해미의 박두표, 온양의 곽한일 등 이 있다. 선생은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알선하도록 명 령하였다. 이때 해미 군수만이 포군 10명과 약간의 군자를 보냈다.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선생은 광무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리고자 하였음이 밝혀졌다. 즉 선생은 상주문을 작성하여 이민학(李敏學)에게 주어 광무황제에게 올리게 하였던 것이다. 상주문의 내용은 을사오적과 이등박문의 처단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거기에다 거병(擧 兵)한 이유를 들면서 의병을 일으킨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 나 이민학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홍주성이 일본군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이 계획은 중지되 고 말았다. 홍주성에서 패주한 일본군은 공주병력을 지원 받아 20일부터 홍주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를 격퇴하였다. 21일은 수원 헌병부대로부터 파견된 헌 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패주시키자 22일에는 서울 경무고문부의 배원(排原)경시와 조선 경 무관 및 그 부하 20명이 증파되어 왔다. 이들은 24일 공주 진위대에서 파견한 57명의 관군 과 함께 의병을 공격하였다. 27일 동원(桐原)경시는 토방(土坊)경부와 한국인 경찰 송총순에 게 순사 5명을 딸려 서문 밖을 정찰하도록 시켰으나 이들은 오히려 의병에게 체포되었다. 선생은 29일 밤에 선봉장에 명하여 체포한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을 총살하였다. 이와 같이 몇 차례의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등박문은 한국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장곡천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전중(田中)소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 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30일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5월 6월호 25
독립정신51호_1도 2010.4.30 3:20 PM 페이지26 mac2 독립운동 충남 청양군에 위치한 민종식 의병장 유허비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과 전투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전중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의 숲 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새벽 2시 반 기마 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총을 쏘며 성문 안으로 침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31일 새벽 4시경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기마병을 시켜 의병을 추격 사살케 하 였다. 이때 양민들 역시 다수가 희생되었다. 이와 같이 의병과 양민 수백 명을 학살한 일본 군은 홍주지역에 일본인을 이주시킬 것을 계획하였었다. 이때 선생은 홍주성을 탈출하게 되 는데, 피체된 후 진술한 공초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 9일(31일) 미시(未時) 동문에 폭파 소리를 듣고 적정을 정찰토록 할 때 이미 일본군이 진격 한다는 급보를 접하였다. 탄환이 비오듯 떨어지고 어떻게 할 술책이 다하여 남문과 서문 사이 의 성벽을 넘어 창의대장의 인장과 기록 등을 모두 버리고 도주했다. 위에서 우리는 홍주성 전투의 치열함과 그 와중에 선생이 남문과 서문 사이의 담을 넘어 탈출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의병장의 인장과 모든 기록도 버리고 탈출하기 바빴던 선생의 모습은 홍주성 전투의 처절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이 10여 명 사살된 반면 의병 측은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과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 26 독립정신
독립정신51호_1도 2010.4.30 3:20 PM 페이지27 mac2 를 비롯, 여기에 학살된 양민의 수를 합하면 300여명에 이른다. 붙잡힌 의병 수도 145명에 달한다. 그 중에 김상덕 등 78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일본군 사령부의 심문을 받 은 뒤 윤석봉 등 70명은 7월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준근 안항식 이상구 신현두 이 식 남규진 최상집 문석환 등 9의사는 대마도로 유배되어 감금생활을 하였다. 이세영은 6월 붙잡힌 뒤 겨울에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황주의 철도에 유배되었다. 홍주성전투에서 패퇴한 선생은 성을 빠져 나와 재기를 도모하였다. 처남인 이남규의 도움 을 받아 11월 20일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 근거지를 확보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 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헌병 10여명과 지방병 40여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 의 습격을 받아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 포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선생은 다행히 미리 공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으나, 결국 11 월 20일 붙잡히고 말았다. 붙잡힌 뒤 선생은 12월 7일과 25일에 모두 4차례의 심문을 받았는데 일본 경찰은 계속하 여 궁중과의 관련을 추궁하였다. 이에 대하여 선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이때 심문한 일본 경찰이 완미(頑迷) 과묵(寡 ) 침착(沈着)한 태도로 진술하면서도 타인에 누를 끼치는 것을 피하였다 고 선생의 진술 태도를 알려주고 있어 비록 옥에 갇혀 있는 형편 이지만 의병장으로서 의연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1907년 7월 3일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 형되어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12월에는 융희황제의 즉위를 맞아 특사로 석방되었다. 풀려난 후 선생은 1911년 여주 영릉에 있는 수 만평의 토지를 개간할 계획을 세우다가 처남인 이용 규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 1917년 6월 26일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총독부에서 폭 도대장(暴徒大將) 이라 하여 선영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3개월 만에야 간신히 여주 군 강천면 가야리의 선영에 묻혔다. 선생은 명문가의 후예로 모든 영달이 보장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시해를 계기 로 항일투쟁의 길에 나서 1906년 홍주의병의 의병장으로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을 처단 하는 등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5월 6월호 27
독립정신51호_1도 2010.4.30 3:20 PM 페이지29 mac2 레지스탕스 영화 읽기 영화 <황토지>와 <붉은 수수밭>, 중국 대륙의 풍광과 민족영화 이두희 자유기고가 중국, 1937년. 대장정을 마친 이듬해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함께 항일전쟁을 위한 두번 째 국공합작을 맺었다. 이제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칭한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는 산 시성의 옌안을 거점으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곳에서 다 시 수백킬로가 떨어진 어느 벽지 마을로 한 병사가 찾아온다. 해방을 위한 전쟁에서 자신들 의 부대가 부를 수 있는 군가를 만들고자 구전민요를 수집하기 위해 온 것이다. 1939년 이 른 봄, 영화 <황토지>의 시작은 이렇게 어느 가난한 농가에 머물게 된 한 군인의 이야기로부 터 시작한다. 5월 6월호 29
Whos 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