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2
1896 10 26 9 20 1894 1895 1896 2 1896 2 041 3 1906 1907
042 31 1914 1919 31 2 1903 1903 1
6 4 8 30 6 2 4 1904 1896 56 043 4 1910 1912 1913 45 17
8 6 1914 1916 2 3 20 044 1918 9 2 31
1 1919 2 31 31 1920 045 31 7 9
1919 9 1921 046 1922 1923 2 5 2 1918
들은 이승우, 김지건, 김한섭, 김용무, 김병우 등 다섯 명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조 선인의 법조계 진출은 까다로웠다. 이인이 시험을 치르던 해에는 전국에서 4천명이 응 시했는데 불과 70명만 합격을 했으며, 그 가운데 조선인은 이인 하나뿐이었다. 한편 특변(特辯) 이라고 해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시보(試補)를 거쳐서 변호 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변호사시험에 합격하면 즉시 개업을 할 수가 있었지만, 고등 문관시험에 합격한 이들은 법원이나 검찰청 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정 기간 수습을 거쳐야 개업을 할 수 있었다. 최초의 독립운동 변론 : 2차 의열단사건 1923년 7월 이인은 처음으로 독립운동 관계자들을 변호하는 일을 맡았다. 2차 의열 단사건 이라고 불린 황옥(黃鈺) 경부(警部)사건 이 그것이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 등이 조직한 비밀결 사로, 암살과 파괴 테러라는 직접적인 폭력 수단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 047 다. 의열단은 국내에 요원들을 파견해 밀양경찰서 습격(1920.11), 조선총독부 습격 (1921.9), 종 로 경 찰 서 습 격 (1923.1) 등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 늘케 하였다. 뒤이어 의열단은 상 해에 비밀 폭탄제조공장을 두어 다량으로 고성능 폭탄을 제조하 고,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 언서 와 총독부관리에게 라는 글 과 함께 이를 국내에 반입하기로 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종로 경찰서 습격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중국 천진(天津)에 왔다가 단원으 조선변호사회 회장 취임 기념(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사람이 이인) 이 인
5 36 1923 3 7 12 20 50 12 9 048 4 12 1 6 10 1925 12 1928 5 1929 2 2
1920 1930 610 3 049 1929 12 1929
대구 조선은행금고 폭파미수사건과 나체재판 상해 임시정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 출신인 최윤동(崔允東, 해방 후 제헌국회의 원)은 1922년 9월 입국하여 상해 임시정부 의 독립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이수영(李遂 榮) 송두환(宋斗煥) 등과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대구 조선은행금 고를 깨트리기로 했다. 이들은 대구 동화사 에 아지트를 두고 계획을 세워, 폭파용 전선 을 10리 가량 매설하였으나 거사 직전인 1923년 말 발각되고 말았다. 1924년 여름 050 에 공판이 열렸는데, 당시 언론에는 경북 중대 음모사건 으로만 보도되었다. 이인은 대구지역 변호사 4인과 함께 이들 의 변론을 맡았다. 이인이 재판정에서 피고 인들을 살펴보니 피고들 손가락 사이가 모 두 반질반질하니 딱지가 앉았다 떼 어진 것 같고 얇은 옷으로 가린 목덜미는 구렁이가 법정에서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 논란이 되었던 이른바 경북 중대 음모사건 보도기사( 동아일보, 1924.10.18) 지나간 것처럼 반점이 있었다. 필경 고문에 의한 상처라고 확신한 이인은 법정에서 이들을 설득해 고문의 증거로 제시하도록 했다. 대 구 의 문 화 인 물 2 마침내 이들은 법정에서 모두 옷을 벗었는데, 온 몸이 상처자리와 흉터로 얼룩져 있었 다. 어떤 사람은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진물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이인이 조사과정에 서 가혹한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공박하자 당황한 검사는 2 7년형으로 구형량을 낮 추어 그나마 최윤동 등은 형량을 줄일 수 있었다.
1924 6 2 14 5 10 051 2 200 4 9 1909 12 2211 30 2 1910 15 12
10 31 3 37 1924 12 20 10 30 1925 2 12 052 3 5 1926 4 26 7 15 1927 2 610 200
송학선 의사의 금호문 의거 현장사진 및 사건 보도기사( 동아일보, 1926.5.2) 가 라며 열렬하게 변론하였다. 053 장안의 화제가 된 벙어리 미녀재판 1925년 초가을 이인은 특이한 사건을 맡았다. 함경도 명천에 김정필이란 여인이 시 집간 지 몇 달만에 밥그릇에 독약을 넣어 남편을 독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미 청진지방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하였고, 복심법원에서도 사건심리가 끝나고 선고기일만 남긴 상 태였다. 그런데 변호사사무실 사무원의 말에 따르면, 여인의 사투리가 심해 사람들이 알아듣 지 못하는데다가 일본말로 옮기는 통역이 시원찮아 벙어리재판 이 되고 있다는 것이 었다. 이인은 의사소통이 안 되어서 여인이 억울하게 당하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변 론 재개를 신청하였다. 공판일은 1925년 10월 10일로 정해졌는데, 그동안 언론에 의해 김정필 여인이 절세 의 미인으로 과장 소개되어 벙어리재판은 미녀재판 으로 둔갑하였다. 사람들은 절세 미녀 의 얼굴을 보고자 공판일자만 기다리고 있는 판이었다. 여론은 여론대로 그동안 이 인
9 1928 054 1927 12 16 2
1932 1936 1929 1932 15 055 192627
1927 9 19 056 9 29 10 15 1930 2
변호사 정직처분을 당하다 1927년 12월 9일 이인은 김병로와 함께 신의주법원 공판정에서 고려혁명단사건을 변론하다가, 변론과정 중에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란을 겪기도 했다. 고려혁명단 사건이란 만주의 정의부와 국내의 천도교청년연합회 그리고 특수신분인 백정의 신분해 방을 목적으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가 합쳐서 독립운동단체를 이루려다 적발된 사건 이다. 이 재판에서 이인은 일본은 동양평화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한국을 합병하였으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은 양두구육(羊頭狗肉)에 흡사 라고 말하다가, 모도지마(本島) 검사가 변론이 자못 불온하다고 문제를 삼아 곤경에 빠질 뻔했다. 필화사건도 있었다. 1927년 12월 31일과 다음 날에 걸쳐 이인은 조선중앙일보 에 송년사(送年辭)와 영년사(迎年辭)를 기고했다. 이 글이 조선독립사상 고취와 민중 궐기 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보안법(保安法)에 위배된다 하여, 이인은 총독부 경무국에서 오 랫 동안 문초를 받았다. 마침내 1930년 5월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계림흥농사(鷄林興農社)사건을 변호 057 하다가, 변론내용이 불온 하다 하여 이인은 6개월 동안 정직(停職)처분을 받 았다. 1928년 9월 수원고 등농업학교 안에서 학생 들이 농산물품평회를 겸 한 학예회가 열렸는데, 이 때 출품한 습자(習字)작품 중에 민족, 자유, 독립 등 의 문자가 말썽이 되어 일 본 경찰이 무려 220여 명 이인은 조선인변호사로서는 최초로 정직처분을 받았다. 조선총독부의 정직이유서 보도기사 중외일보 (, 1930.5.10) 의 학생을 무더기로 잡아 이 인
2 5 058 2 6
1924 3 1926 1929 1938 059 1920 6 31 70 180 2 1925 3 1926
2 5 3 1902 5430 060 2 6 1930 4 1922 9 1923 1 1920 2 5
1 1932 10 1924 1933 1933 10 18 50 1937 061 10 1941 1921 12 3 1931
1926 3 1926 11 4 9 29 480 1 1932 10 291934 10 281940 10 9 1927 2 1929 198 1935 062 6 1938 2 1 8
1941 10 12 063 1942 2 1939 1940 1
10 1 11 21 11 10 064 1928 11 2 1 1
에 굴리면서 엉금엉금 1km를 기어서 형무소까지 가야만 했다. 홍원경찰서로 끌려갔던 조선어학회 관계자들도 모두 반주검이 되어 이 형무소로 들어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제는 3 1운동의 33인과 맞추어 33명을 검거 대상으로 찍었 다. 그런데 권덕규, 안호상은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서 화를 면했고, 김종철과 신윤국은 홍원까지 끌려갔다 풀려나 결국 29명이 구속되었다. 이 가운데 장지영과 정열모는 예심 에서 면소가 되었고, 정인섭, 안재홍, 서민호, 서승효, 권승욱, 이석림, 김선기, 이병기, 이강래, 김윤경, 이만규, 이은상, 윤병호 등 13명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이윤재, 한징 은 감옥에서 죽었고, 이인,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 이극로, 김도연, 김양수, 정태진, 이 중화, 김법린, 장현, 이우식 등 12명이 공판에 넘겨졌다. 1943년 9월에 예심이 시작되어 1944년 9월 30일 예심이 종결되었다. 이인은 이 해 10월 학질과 폐침윤으로 병보석으로 나와 함흥 도립병원에 입원한 채 11월 첫 공판을 받았고, 이듬해 1월 18일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일제의 조작 사 건으로 이인은 반폐인이 되다시피 해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일제가 자신을 흑표(黑票) 065 4호 로 지목하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일제의 항복이 임박하면서 항일 조선인 지도자들 을 학살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경기도 양주시 은봉면 덕정리 농막으로 피신하여 요양 에 전념하였다. 한편 실형을 받은 5명 가운데 정태진을 제외한 이극로, 최현 배, 이희승, 정인승 4인은 서울 고등법원에 항소를 했다. 그러 나 선고공판이 나기 전에 8 15 해방이 되어 관계자 전원이 석 방되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 이랄까, 고등법원 항소 때문에 서울로 보내진 조선어사전 원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 원고 이 인
뭉치 등 조선어학회 관련 자료는 통운창고에 묵혀져 보관되어 있다가 해방 후 극적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면 사전 사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인은 해방 후 검찰총장으로 재직할 때 이 조선어학회사건 관 련 수만 페이지의 기록물을 금고 속에 잘 보관했으나, 6 25 때 그만 소실되고 말았다. 건국의 기반을 다지고 야당통합운동을 주도 대한민국 건국과 이인의 활동 해방이 되자 이인은 다시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는 해방 직후 여운형과 안재홍 등 중 도 좌우파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민주당을 창당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에는 명망이 높은 인물들도 있었으 066 나 보수적인 자본가나 지주계층 그리고 친일전력자들이 많이 가담하고 있어 한민당에 대한 일반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인은 미군정의 요청으로 10월 11일 수석 대법관 겸 특별범죄심사위원장에 취임하 고, 이후 7개월간 대법원장 서리로서 활동하였다. 또 10월 22일자로 특별검찰위원회 위 원장으로 임명되자, 10월 21일 연합군환영대회를 주관한 후 한민당을 탈당하였다. 그 리고 1946년 5월 16일 검찰총장에 취임 해 미군정 아래서 수사기관의 최고책임 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이인은 경무국 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과 함께 대 구 의 문 화 인 물 2 좌익척결 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7월 이인은 조선공산당이 운영하는 조선정 판사(朝鮮精版社 )의 위폐(僞幣, 위조화 폐) 사건을 수사하고 공산당을 불법단체 임시정부 환국 전국 환영대회에서 환영사를 하는 이인
1947 7 1946 6 3 1947 5 2 7 19 1947 11 1948 1 2 067 1949 6 1
7 15 2 1948 9 8 1949 6 6 068 1950 6 20 1949 8 31 2 9 5 9 21 682221 40 14 1
1 1950 5 302 625 1959 419 3 516 1967 2 6 069 6 1976 3
1979 1979 4 5 9 070 2
071
072 2
073
074 2
075
076 2
077
078 2
079
08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