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의 역사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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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최근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세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6자회담 재개 대( 對 ) 한 미 일 군사협력 금년 들어 남북관계의 개선 신호는 북측의 적극적인 평화공세에서 시작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에 이 어, 북한 국방위원회는 1월 16일 우리측에게 중대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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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조사목적 본조사는전국민을대상으로대통령국정수행지지도, 정당지지도등을 파악하여, 국민여론을파악하는기초자료수집에그목적을둠. Ⅱ. 조사설계 조사대상 전국거주만 19세이상성인남녀 표본수 총 1,035 명조사후, 지역, 성, 연령별사후보정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최대허용


더바이어102호 01~09

Transcription:

* 이 글은 초고 상태이므로 인용을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북관계의 역사가 주는 교훈 신 종 대(북한대학원대) 1. 머리말 한반도가 분단된 지 어언 70 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그 동안의 남북관계는 냉전시대 적대와 대립 일변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러나 완전한 화해, 협력으 로 이행하지는 못하고 가다 서다 를 반복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이명박 정부 시기 동 안의 남북관계는 그 이전 정부에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례 없이 얼어붙었다. 이명박 정부와는 달리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내세우며 적극적 인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표방한 박근혜 정부에서도 초기부터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있다. 3차 핵실험, 정전협정 무효화 선언, 개성공단 잠정 중단 선언 등 북한에 의한 일련의 위기조성의 수사와 행동으로 남북관계는 마치 과거 적대와 대립의 냉전시대로 재회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돌이켜보면 1972년 7월 남북공동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그리고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10.4선언 등을 통해 남북관계가 큰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전환점 이후 얼마 안가서 남북관계는 다시 냉각 내지 소강상태에 빠지거나, 적대와 반목의 관계로 다시 후퇴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극적인 진전과 역진, 이것이 지금까지 남북관계가 보 여주고 있는 주요 특징이다. 아래에서는 지난 시기의 남북관계로부터 어떠한 시사점과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에 대해 몇 가지 수준과 사항을 중심으로 단편적 예비적으로나마 정리하고, 논의해 보고자 한다. 2. 남북관계 수준 1. 남북 간 제로섬게임과 고립화 시도 - 1 -

- 남북관계의 역사가 주는 교훈의 하나는 제로섬게임에 입각하여 상대방에 대한 절멸 (annihilation)과 고립의 시도가 오히려 상대측의 내부 결속과 상대로부터의 강한 반 발과 반격을 초래하는 등 역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도가 있은 직후 남북 간의 대립과 불신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 우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한의 반공이데올로기는 더욱 강화되었고,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강압체제는 용인되고 안정화될 수 있었다. 그리 고 1960년대 청와대기습사건과 같은 북한의 모험주의적 도발행위 역시 박정희의 장 기 집권을 정당화하고, 향토예비군 제도의 도입과 같은 병영국가화, 그리고 남한의 군 사력을 증강시키는 구실로 활용되었다. 1970년대에는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한은 각기 상대를 국제무대에서 최대한 고립시키기 위해 격렬 한 외교전 을 전개했다. 이는 결국 1970년대 초 남북 간의 짧은 데탕트 를 종식시 키고 다시 긴 대립 의 악순환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 냉전기 남북한이 각기 국제무대에서나 한반도에서 상대방을 고립시키기 위해 결사 적으로 경쟁해 온 목적은 분명했다. 우선 상대 체제의 정당성 부재를 드러내고, 자기 체제의 정당성 획득 및 제고를 통해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리 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의 주도권을 쥐고 자신의 체제와 이념을 상대에게 확장하는 방 식 또는 자신이 선호하는 방안대로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 냉전기 동안 북한은 남한의 정권에 대해서 남한 내부와 국제 수준에서의 고립 전략(isolation policy), 그리고 야당 및 재야인사, 그리고 남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관여 전략(engagement policy)을 구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 반면 남한은 북한 국내 수준에서 정교한 고립전략과 관여전략을 구사했다기 보 다는 주로 외교무대에서 북한을 고립시키는 데 치중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과 남한 그 어느 일방도 상대에 대한 고립에 있어서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 다. 1970년대 초 북한은 남북대화 분위기를 이용하여 적극적인 평화공세(peace offensive)를 전개하여 일부 야당 세력과 학생들로부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전 반적으로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북한에 대한 불신감만 증폭시키 는 결과를 가져 왔다. - 한편 한소, 한중수교 등 남한의 적극적인 외교 공세(diplomacy offensive)의 예에 서 보듯이, 남한이 북한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한 순간에도 그와 같은 고립 전략이 원 래 기대했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환경 기반 조 성을 위해서는 압박과 고립 전략이 적절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요컨대 그 와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다른 비전과 전략이 필요함을 말해 주고 있다. - 1988년 올림픽의 성공과 1990년 한소수고 및 1992년 한중수교의 경우가 보여 주듯이 체제경쟁에서의 남한의 일방적 승리가 곧 남북관계의 개선과 한반도의 평 화, 그리고 통일환경 조성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태는 그 역의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북한에 대한 남한의 압박과 고립 전략이 성과를 거두는 바로 그 지 - 2 -

점에서 북한은 극도의 고립상태와 생존위협을 타파하기 위해 핵을 통한 반격을 모 색했던 것이다. - 이 점에서 정치적, 외교적 의미에서의 1980-90년대 초 북방정책은 절반의 성공 만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남한과 국제사회가 한소수교, 한중수교 등을 통해 북한에 대해 완전 승리와 압박 및 고립을 추구하지 않고, 북한이 느끼는 충격과 좌절을 고려하여 보다 정교한 관여전략을 추진했다면 사태는 어떻게 달라졌 을까? 그랬다면 북한의 핵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되었거나 1994년 나타난 바와 같은 제1차 북핵위기는 물론이고 2002년 2차 북핵위기, 그리고 현재와 3차 북핵위기를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정책 추진 환 경과 남북관계의 현주소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2. 사과의 정치(apology politics) - 2010년 3월 천안함사건 이후 한국 정부가 5.24조치 (북한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 하고 정상적인 남북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남북교류협력과 관련된 인적, 물적 교류의 잠정적인 중단 및 개성공단 외 신규투자 불허 조치)를 취하고, 북한의 천안함사건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남북대화 재개 내지 남북관계 복원의 전제조건으로 내건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와 같은 전제조건은 한편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책임진 정부로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으나, 이로 인해 남북관계를 악화시키거나 남북 대립을 방치하는 것은 사려 깊고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 사실 1968년 1월 청와대기습사건이나 1983년 10월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에 대해 남한 당국은 북한의 사과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지는 않았다. 주지하듯이 청와대 기습사건에 대해서는 사건 발생으로부터 4년이 넘게 지난 1972년 5월 김일성 이 당시 중앙정보부 이후락 부장과 만났을 때, 자신은 사전에 몰랐던 일이고, 일부 강경한 맹동분자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사과했을 뿐이다. - 그리고 그와 같은 사과도 공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평양에 있는 김일성의 집 무실에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남한 당국의 대화록 외에는 공식적으로 확인이나 증명도 되지 않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냉전의 한복판에 있었던 박정희 정부 조차도, 특히 바로 대통령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청와 대 기습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 없이 남북대화에 임했던 것이다. -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대통령도 1985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전에 아웅산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를 받아내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당시 남북비밀회담의 남측 대표였던 박철언은 북한의 사과가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음을 보 고했다. 1) 그리하여 아웅산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를 정상회담 추진과 연계하지 않았 1) 박철언,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 1 (서울: 랜덤하우스중앙, 2005), pp.162-164 참조. - 3 -

다. - 물론 북한이 1976년 판문점사건과 2010년 연평도포격 사건에 대해서는 이례적 으로 사건 직후에, 그리고 1996년 강릉잠수함사건의 경우에는 시간이 좀 지나고 나 서 사과는 아니지만 유감 을 표명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정부가 북한의 도발행위 에 대한 사과는 계속 종용하고 촉구해 나가야 하겠지만, 사과 문제를 선결조건으로 하여 남북대립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3. 대화의 채널 -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북 간의 대화의 채널은 유지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즉, 비단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가 극단적으로 악화되는 것 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남북관계의 관리 수단으로서 남북대화의 채널은 유 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 예컨대 1970년대 초 남북대화가 진행되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아무리 적의 를 가진 상대라도 그의 한쪽 손을 붙잡고 있으면, 그가 나를 공격할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하다 고 했다. 적어도 대화를 하는 동안은 도발 행위 나 전쟁을 막을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위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계산 이었다. - 또한 북한 역시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포에 대한 불신과 북한 권 력 내부에서의 격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남 비방 자제로 남북대화를 계속해 나 가기로 결정했다. 이는 무엇보다 남측이 대화의 문을 닫아걸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서였다. 왜냐하면 대화의 문이 열려 있어야 그 문을 통해 평화공세 를 전개함으로 써 박정희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고,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에 의한 통일 운동 확산과 야당이 집권할 수 있는 기반 조성, 나아가 남조선혁명 을 전개할 수 있는 입지와 공 간을 보존하고 확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 - 두루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 체제역량 면에서 1970년대 초와 비교해 월등 히 우세한 남한의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선변화 와 원칙 을 내세우며 기다림의 정 책 을 폈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40년 전의 남북한의 대화전략으로부터 역 사적 교훈을 도출하는 데 소홀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박근혜 정부는 대화의 필요 성을 강조하고 있어 고무적이다. 다만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 때와 같은 소 극적 의미의 대화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기반 조성이라는 정책목표를 향 해 남북대화를 중심축으로 적극 활용해야 하는 시대과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2) 신종대, 유신체제 수립을 보는 북한과 미국의 시각과 대응, 아세아연구, 제55권 3호(2012 년), pp.192-203. - 4 -

4. 상호위협인식(mutual threat perception) - 냉전기 남북한은 서로 상대가 자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인식(threat perception)가지고 있었다. 즉 어느 일방만 위협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 상호위협인 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 예컨대 1972년 남북대화가 본 궤도에 오르면서 남북한 당국이 가졌던 최고의 관 심사는 서로 상대가 침략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탐색하고 확인하는 일이었다. 남 한 당국자 역시 남북대화의 성과 중의 하나로 대화과정에서 북한이 침략 의사가 없 다는 점을 밝혔으며, 북한측이 남한이 침략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북한 측 역시 남한측에 대해 위협인식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 특히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과 김일성의 베이징 방문에 대해 남한측은 북한이 한반도에서 베트남혁명을 재현하려는 것으로 인식하고 극도의 위협인식을 가졌다. 남한은 이와 같은 위협인식에서 미국에게 대한 방위공약 준수를 요청했고, 미국은 한국의 안보불안을 달래기 위해 대한 안보공약을 재확인하고, 주한 미군의 대비태 세 강화와 군수 지원 및 한국군 현대화 작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 그런데 한국과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이 이번에는 역으로 북한의 위협인식을 자 극하였다. 사실 북한은 사이공 패망에 고무되기 보다는 오히려 안보불안을 느꼈다. 왜냐하면 사이공 패망으로 월남에 집중되었던 미군이 남한으로 이동 배치되면 북한 은 한층 더 경계 태세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1975년 4월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과 회담하면서 지금이야말로 무력통일을 할 수 있는 최고 의 적기 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발언도 무력남침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중국의 연루의 우려(fear of entrapment)를 자극하여, 중국으로 부터 필요한 경제적 지원 확보 및 중국의 안보공약 재확인과 같은 동맹 강화 차원 으로 볼 수 있다. - 이와 같이 남북한은 실제 상호간에 위협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느끼 는 위협 에만 주목하고, 정작 자신이 상대에게 가하는 위협 에는 둔감했던 것이다. 사실 1976년 8월에 발생한 판문점도끼사건도 당시 한반도의 이와 같은 상호위협인 식 구도 속에서 촉발된 측면이 없지 않다. 5. 강압정책과 원교근공의 효과 3) 1972년 5월 2일과 3일, 평양에서 이루어진 이후락과 김영주, 김일성 간의 대화에서 남북은 상호불 신에서 상대에 대한 위협인식(threat perception)을 드러내었다. 즉 북한은 남한이 미국, 일본과 결 탁하여 전쟁을 하려한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이 남침, 적화통일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대화 과정에서 남북 양측은 서로 침략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상호 침 략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양해에 도달하였다. 국토통일원, 남북대화사료집, 제7권, pp.85-93, 108-113. - 5 -

-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의 바탕에 깔려 있었던 북한은 밀어붙여야 고분고분해진다 는 사고는 과연 타당했는 가? - 예컨대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소련과의 급 속한 신뢰관계 구축 시도가 북한의 도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주변의 우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북한측은 우리가 조금 약하게 보이면 먹으려고 덤비고,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절대 도발적인 행동을 못한다. 소련이 미국에 굴복한 것도 레이건 대통령, 부시 대 통령이 한번 해보자 하는 식으로 과감하게 나갔기 때문이다. 나와 부시 미국 대통 령이 북한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결의가 김일성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결의 때문에 김일성이 꼼짝 못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 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1991년 비핵화 선언까지 따라 온 것이다. 4) - 그러나 노 대통령의 말대로 북한에 대한 압박과 고립 전략이 북한의 비핵화 선 언 을 이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비핵화 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압 박과 고립이 북한의 핵보유를 촉진하고 강화하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것 이다. - 한편,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추진된 한국 정부의 북방정 책(Nordpolitik)은 북한을 개방시키고, 통일환경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얼마만큼 기 여했는가? -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한 대치 상태의 해소와 폐쇄적인 북한을 개방시키기 위해 원교근공( 遠 交 近 攻 )의 우회 전략을 구상했다 고 밝혔다. 그래서 1차로 비동맹 국, 그 다음에는 동구권을 비롯하여 소련 및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여 북한을 양파 껍질 벗기듯이 저 둘레에서 벗겨 나가서 완전개방만 시키면 이것이 곧 사실상의 통일이라는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5) 고 말했다. - 그런데 서울올림픽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남한의 공세적인 북방정책은 한소수교 와 한중 수교라는 큰 성과를 가져왔으나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며 통일환경을 조성 한다는 목표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오히려 북미, 북일관계 개선과 병진되지 않는 조 건 속에서 이루어진 한소, 한중수교는 원교근공으로 북한을 개방시키기보다는 핵을 통한 자위책 강구라는 북한의 반격과 남북관계의 긴장을 불러 오고 말았다. 다시 말해 원교가 근공은 물론이고 근린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근린 없는 원교 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계속 미국 등과 같은 원방( 遠 邦 )에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사 실이다. 4) 조갑제, 노태우 육성회고록 (서울: 조갑제닷컴, 2007), p.83. 5) 노태우, 노태우회고록: 전환기의 대전략, 하권 (서울: 조선뉴스프레스, 2011), p.140. - 6 -

3. 동북아지역관계와 남북관계 1. 남북한의 안보구조와 북한의 위기조성전략 - 냉전기부터 현재까지 남한과 북한이 직면하고 있는 안보환경이 다르다는 점이 고려 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냉전시대 남북한은 다 같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 위협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을 비교할 때 북한이 가졌던 위협 인식은 남한에 비해 훨씬 심각했다고 할 수 있다. 한미동맹과 한 미 일 남방삼각동맹 역시 균열과 갈등이 있었지만 북방삼각동맹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 1959년부터 시작된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북한은 방기의 우려(fear of abandonment)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1969년 3월에는 중소 간의 국경분쟁 으로 전바오섬( 珍 寶 島 /러시아명: 다만스키섬) 무력충돌 사건까지 발생했으며, 6) 중국과 북한 국경지대에서도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7) 한미일 남방삼각동맹 내에서도 긴장 과 균열이 있었지만 상호간의 무력충돌이 발생할 정도는 아니었다. - 만약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남방삼각동맹 내의 균열과 갈등이 북방삼 각동맹과 같은 무력충돌까지 발생하는 상황이었다면 남한이 느끼는 위협인식과 방 기의 우려는 과연 어떠하였을까? 이 점에서 냉전기간 동안의 북한의 군사모험주의 또는 위기조성전략을 진영간의 대립을 보다 분명히 하고 소련과 중국의 연루의 우 려(fear of entrapment)를 자극하여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동맹조약 재확인를 비롯 하여 필요한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 지원을 획득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 또한 1990년대 초 한소 및 한중수교 속의 북미, 북일 미수교라는 비대칭 구도 속에서 북한의 위협인식과 방기의 우려는 다시 고조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제는 동맹이 아닌 자력에 의한 안보증진(internal balancing)을 위해 핵개발이라는 모험주의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 이렇게 보면 오늘날 북한의 위기조성전략과 만만찮은 고도의 협상전략은 북한의 국가성격, 지도자의 리더십 스타일, 그리고 오랫동안 동일 분야에서 종사하게 된 협 상 일꾼들의 경험과 전문성 등에 기인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북한이 직면한 안보구조의 산물인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북한의 위기조성 전략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며, 나아가 올바른 해법을 모색하 6) 진보도사건으로 약 900 명 내외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1956 년 소련은 자신의 위성국가인 헝가리를 침공했으며, 1979년 중국은 같은 사회주의국가인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을 침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자는 약 4,000 여명, 그리고 후자는 약 2만 1,000명에서 9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7) 김일성은 1984년 5월 호네커와의 회담에서 진보도사건 발생 당시 중국군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북 한 영토로 진격하고, 북한군이 출동하자 중공군이 퇴각한 바 있었다 고 밝혔다. Memorandum of conversation between Erich Honecker and Kim Il Sung, 31 May!984,"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New Evidence on North Korea, Issue 14/15(Winter 2003-Spring 2004), p.60. - 7 -

기 위해서는 냉전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북한이 직면하고 있는 이와 같은 안 보구조의 역사성을 주목하고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 참고로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도 1953년 휴전 협정시 미국과의 한미동맹을 체결 을 위해 반공포로 석방 및 단독 무력북진과 같은 모험주의전략을 통해 미국과의 동 맹조약을 체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1968년 청와 대 기습사건과 대한 미국의 미지근한 대응에 대해 단독 대북 보복을 주장했고, 이 후 주한미군 철수에 대응하는 카드로 핵개발을 시도한 바 있다. - 북한과 비교하여 방기의 우려나 위협인식이 덜했다고 볼 수 있는 남한도 특정 시기 안보위협을 느낄 때 이와 같은 모험주의전략을 구사했다는 사실이다. 남한이 이와 같았다면 북한의 경우는 어떠하였을까? 따라서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할 때 우리 는 북한의 위기조성전략의 배경과 의도, 그리고 북한의 협상전략의 역사적 맥락을 보 다 더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북한 위기조성전략(crisis diplomacy)의 동기와 목표 - 북한의 위기조성전략의 원인을 단순화하자면 결국 외교동기론과 정치동기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요컨대 외교동기론에 입각할 때 북한의 위기조성전략은 대외상황 이 중대하게 악화될 때 현상 복원 또는 협상의 진전을 위해 대미, 대남대결노선 또 는 중국 등 대동맹국 압박전략을 (병행) 추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정치동 기론에 입각할 때 위기조성전략은 국내상황이 정권의 생존 내지 정당화를 위협하거 나 경제난, 반대세력과의 권력 투쟁 및 후계체제 구축, 정권의 위신 제고 등을 위해 취하는 대외전략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북한은 역사적으로 대미, 대남 대결노선을 통해 정치적 정통성과 내부 결속을 기해왔기 때문에 정치동기론은 일정한 설명력을 지닌다고 할 것이다. 8) - 그러나 북한의 위기조성전략이 국내정치적 문제의 해결 또는 목적을 염두에 둔 것이 비교적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핵심 동기이자 목표였느냐는 문제는 여전 히 남는다. 위기조성전략에 국내정치적 동기가 작용했고, 이를 시사하는 몇몇 정황 증거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핵심 요인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북 한이 선군외교는 말할 것도 없고 선군정치의 주요 명분이나 경제난의 원인을 외부 의 환경 변화에서 찾고 있는 것에서도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 사실 선군정치나 경제난도 북한 대외정책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안 은 이미 밖 이 작용한 안 인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위기조성전략에 외교적 동기와 정치적 동기의 연계 또는 병존, 그리고 동시작용을 감안하더라도 주 8) 북한의 위기조성전략의 배경과 의도에 대해서는 신종대, 북한 위기조성전략의 분석과 전망: 연평 도 포격 사건을 중심으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편, 한반도 정세: 2010년 평가와 2011년 전 망 (서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10) 참조. - 8 -

요 요인은 역시 외교적 동기라고 볼 수 있다. - 북한은 60년대 말 군사모험주의(military adventurism)의 추구 이래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위기조성전략을 구사해 오고 있다. 그런데 북한 위기조성전략의 표적 (targets)과 청중(audiences)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북한의 위기조성전략 또 는 군사모험주의의 표적과 청중이 주로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청중에는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동맹국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사실 1968년 Pueblo호 사건이나 1983년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1987년 KAL 폭파사건, 2006년과 2009년, 그리고 2013년의 1, 2, 3차 북핵실험, 2010년의 연평도포격 사건 과 2012년 12월의 은하3호 발사, 그리고 최근의 일련의 한반도 긴장 고조의 주요 청 중에는 중국이 포함되어 있다. - 말하자면 북한은 냉전기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모험적인 도발행위로 인한 중국의 연루 우려를 자극함으로써 필요한 쌀과 비료, 석유 등 필요한 자원을 지원받고 동 맹 강화를 도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국가생 존에 필요한 자원을 수취하면서도, 북한의 체제안보 확보를 위해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 - 기본적으로 북한은 한국에 흡수통일되는 상황과 함께 중국에 종속되는 상황을 가장 꺼려한다. 따라서 북한은 중국이 북핵문제나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중심국가 로 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에게 북핵문제나 한반도평화문제를 의탁하는 것은 북한으로서는 일종의 정치적 자살행위 이다. 북한의 지도자가 미국과 담판하 여 문제를 해결해야 위신이 서는 것이다. 그래야 북한 정권의 정당성이 유지되고 확보될 수 있다. 때문에 북한은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북핵문제나 한반도문제가 논 의되는 구도를 깨뜨리고 북한과 미국 양자 간의 협상구도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서 위기조성전략을 적절히 활용한다고 볼 수 있다. 3. 북미관계와 북한의 인정투쟁 - 흔히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해서는 남북관계-북미관계-한미관계가 선순 환 관계 9) 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목도할 수 있듯이 남북관계 경색과 북미관계 악화 구도 속에서 한미관계 강화만으로는 한반도의 불안정 성을 제거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과 더 불어 궁극적으로는 북미관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 주지하듯 북한은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와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 문제는 9) 그런데 문제는 경우에 따라 이런 구도가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국 포위구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다. 중국이 포위구도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순항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남북미 관계의 선순환을 넘어 미중협력, 한중협력, 북중협력을 포괄하는 난해한 문 제인지도 모른다. - 9 -

미국과의 직접 담판을 통해 풀고자 한다. 북한은 중국과 우호관계 유지를 통해 국 가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수취하면서도, 한반도 평화협정과 체제안전 보장 문제에 중국이 관여하는 것을 결코 환영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북한의 입장에 서는 북중관계나 남북관계는 기본적으로 북미관계의 종속변수 내지 매개변수임을 부인할 수 없다. - 한편 북미관계와 관련해서, 북한은 미국에 대해 1974년 3월,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한 이래 미국에 대해 일종의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 을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바라는 인정 투쟁의 최소치는 미국의 북한에 대 한 관심 표명과 북미협상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대북체제안전 보장과 북미 국교정상 화라고 할 수 있다. - 북한으로서는 미국으로부터의 인정 획득 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비로소 인민경제 를 위한 개혁, 개방 등 정상국가화를 향한 조치를 제대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와 같은 북한의 인정 투쟁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않는 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 실험, 각종 무력도발 등 인정투쟁을 위한 수단인 위기조성전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또 그에 따라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은 불안전성을 띨 수밖에 없고 한 반도의 위기는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동북아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뿐만 아니라, 북한체제를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북미관계 개선이 핵심이다. 북미관계 개 선이 없거나 병행되지 않고서는 국제사회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북한을 진화시킬 정 책 대안이 거의 없다. 때문에 불원간 북미간의 직접협상 국면의 도래는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국면에 대비한 한국 정부의 대북, 대미, 대중 정책 차원 에서의 대비와 정책 수단 고려가 필요하다. 4. 북한의 양다리 외교 - 북한은 과거 냉전기 중 소분쟁의 와중에서 중 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정치에 서의 자주성 견지와 양국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 지원을 추출하고자 했다. 탈냉전기에도 북한의 양다리 외교 는 지속되고 있는바, 단지 그 대상이 소련에서 미 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북미관계와 북중관계를 어떻게 운용하며,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 또는 양다리 외교 를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 북한의 양다리 외교 는 한반도문제를 둘러싸고 미 중이 협력하는 국면보다는 미 중이 갈등하거나 상호 견제하는 상황에서 그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미 중협 력 구도에서는 북한이 소외 또는 부차적 대상이 되거나 북한의 독자적인 공간이 축 소될 수 있다. 2010년 천안함사태를 계기로 미 중 양국이 부딪히는 상황에서 미국 은 아시아 중시 정책((Pivot to Asia) 과 동맹체제 강화를 시도해 왔다. - 10 -

- 북한은 이와 같은 상황에 우려의 눈초리를 보내는 중국의 전략적 이해와 입장을 누구보다 잘 간파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동북아의 세력 균형 구도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지정학적, 전략적 가치를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으 로부터의 지원을 추출함은 물론, 대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2012년 3월 12일, 미국 뉴욕을 방문한 북한의 리용호 외무성 부상이 시라큐스 대 세미나와 미국외교정책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on American Foreign Policy, NCAFP) 간담회에서 우리의 새 지도자는 미국과 다툼을 원치 않는다. 평 화를 원한다 고 말했다. 심지어 미국이 우리와 동맹을 맺고 핵우산을 제공하면 당 장이라도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용의가 있다 는 파격적(?) 발언을 한 바 있었 다. 10) 북한의 의도는 미중 간의 상호 경쟁 및 견제 심리를 이용하여 미국에의 편승 가능성을 시사, 미국에 적극적인 추파를 보내는 것이다. 동시에 중국에게는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상기시켜 중국으로부터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경제적, 외교적 지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이중전략으로 풀이된다. - 또한 북한은 2012년 5월 22일에 외무성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와의 문 답을 통해 원래 우리는 처음부터 핵실험과 같은 군사적 조치는 예견한 것이 없었다 고 강조했다. 이 역시 대미접근을 적극 희망하는 신호였다. 이어 2012년 7월 6일 모 란봉악단의 시범 공연을 통해 거듭 강한 대미접근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북한은 8월 초 싱가폴에서 미국과 북미대화와 북핵문제 등에 대해 비공식접촉을 가졌 다. 또한 2012년 4월 북한의 로켓 발사 이후 단절되었던 미국과의 비공식 채널도 여 전히 가동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2012년 8월 13일 미 국무부는 클리퍼드 하트 (Clifford Hart) 미국 6자회담 특사와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 차석 대사 간의 채널을 유지 중이며 필요할 때마다 연락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북한은 미국과의 접촉 사실을 공개하며 국제여론의 주목을 끌고자 했다. - 북한이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미국에게 관계개선의 강한 신호를 보 내는 것은 북한이 미국과 중국 간에 존재하는 견제와 경쟁의 측면을 적절하게 활용 하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북한은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여 생 존과 발전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북한이 1960년대 중소분쟁 10) 내일신문, 2012년 3월 13일자. 사실 북한의 대미관계 설정과 관련한 이와 같은 파격적 발언 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고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81년 4월 김일성은 중국 심양 영빈관에서 등소평과 대미관계 개선과 관련하여 대화하면서, 쿠바의 관타나모처럼 통일 후에 진해항을 미국에게 내줄 용의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1992년 1월 미국을 방문했던 김 용순 노동당 비서는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차관에게 주한 미군을 인정하고 미국의 맹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2007년 2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을 만나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전략적 관심이 있는지를 묻고, 미국이 북한과 전략적 관계를 맺고 제한적 핵무 장을 용인한다면 북한도 미국의 대중견제 전략에 협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은 북한을 이 용만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미국이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면서 미 국이 지난 6년간 핵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에 의존했지만 해결된 무엇이 있는지 반문했다. 중국에 의존해서 핵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북한과 직접 담판해서 해결하자는 의사를 피력했던 것이 다. 사실 북한은 1974년 3월 북미 평화협정 체결 제안 이래 적극적인 대미접근 및 미국으로부터의 인정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위에서 예를 든 파격적 발언 역시 돌출적이라기보다는 그 와 같은 맥락에서 위치지우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11 -

시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양다리 외교 를 구사했던 상황을 연상케 한다. 오늘날 북 한은 중국이 우려하는 미북 간의 전략적 담합 가능성을 내비침으로써 중국의 대북지 원을 확보하고, 미국이 우려하는 핵확산에 대한 협력 의지를 내보임으로써 체제안전 보장 및 북미수교를 교환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 여하간 지난 수년 동안 북한의 대중 의존 확대는 북미관계의 장기적 경색 속에 북 한이 부득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지였다고 할 수 있다. 대중 의존 심화는 북한이 대미, 대중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여 자신의 독자적 공간을 확보하고, 양자를 적절히 활용하여 북한의 전략적 가치와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전략과 배치되는 상황이다. 어 쩌면 2012년 북한이 보인 일련의 행보는 지나친 대중 의존을 경계하고, 양자 간의 균 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로 독해하는 것이 합당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보인 대미 유화 제스처에 무게가 실린 11) 2012 년 7월의 모란봉악단 공연을 일부 논자들이 본격적인 대외 개방을 향한 사인으로 본 것은 과도한 해석이었다. 5.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통치주권(de jure sovereignty) - 이미 일어난 과거의 북한 급변사태 였던 한국전쟁 시 북한 점령 경험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통치주권 문제를 사고할 필요가 있다. 1950년 10월 유엔군 이 북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대한민국의 주권은 38선 이남으로 제한되었으며, 유 엔군사령부가 북한 지역에 군정을 실시했다. 12) 왜냐하면 1950년 10월 7일 유엔 총 회와 10월 12일의 유엔 총회 임시위원회가 유엔이 한반도 전역을 합법적으로 통치 할 수 있는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없다 고 하면서 남한 정부의 38선 이북으 로의 통치권 확대 주장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 1950년 10월 이래 지금까지 북한지역에 대한 남한의 합법적 통치주권을 인정하 는 어떠한 조치도 취해진 바 없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급변사태 발생 시 그것이 곧 바로 한국 주도의 통일로 귀결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더욱이 현재의 남북한은 유엔 에 동시 가입하고 있는 별개의 주권 국가이다. 전작권을 한미연합사가 행사하기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북진 하여 북한 지역에 통치권을 행사하기는 최소한 용이하지 않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 따라서 2015년으로 예정되어 있는 전작권 전환 문제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안 보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중요 가치이자 목표인 통일 의 차원에서도 사고 11) 김정은이 2013년 2월 26일, 평양을 방문한 미국프로농구(NBA)의 유명 선수였던 데니스 로드먼 (Denis Roadman)과 함께 농구를 관람한 것도 또다른 대미유화 제스처였다. 12)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한모니까, 유엔군사령부의 수복지구 점령정책과 행정권 이양, 한국역사 연구회 현대사분과 편,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서울: 휴머니스트, 2010), pp.167-195 참조. - 12 -

할 필요가 있다. 안보와 통일의 배타적 주장보다는 중요한 것은 양자 간의 선후 또 는 조화와 균형일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자주국방 과 자주통일 대비의 접점을 찾 아야 할 것이다. 4. 국내정치와 남북관계 1. 남북관계사 회고와 역사적 화해: 사실( 史 實 )과 이념 - 남북관계사를 회고함에 있어서 이념과 의견보다는 사실에 집중 하고, 깊이 박힌 기억을 넘어서는 토의의 공간을 열고, 역사적 앙금을 한번 뒤집어서 생각해보고 (distort historical "baggage"), 역사적 사실 및 복잡한 역사발전 경로에 대한 상이 한 해석을 공유하는 작업을 통한 역사적 카타르시스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보수와 진보를 넘어선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의 역사)에 대한 국내 수준에서의 건설적인 대화의 장을 열고, 이를 영속적인 화해와 남북통합을 위한 남북 수준의 역사화해로 확대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이 역사적 사실에 개입하는 한 남북관계사에 대한 평가는 평행선을 달리는 상반된 신화를 만들어낼 뿐이다. 예컨대 1970년대 초 남북대화를 전후한 시기의 북한의 평화공세는 국제사회에서의 고립 탈피, 주한미군 철수 분위 기 조성, 한미간의 갈등 조장, 남한의 반공체제 약화, 그리고 남한 내의 통일전선 형성 등을 겨냥한 것이었다. - 루마니아의 문서를 통해 밝혀졌듯이, 13) 당시 북한의 평화공세의 이면에는 남한 정 부를 국내외적으로 고립시키고, 남한 내 혁명역량을 길러 남한을 적화통일한다는 목 표가 깔려 있었다. 즉, 평화공세를 통해 남한의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등 북한을 지지하는 민주세력들과의 광범한 접촉을 통해 그들의 혁명역량을 고취시킨다는 것이 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민주인사가 집권할 수 있고, 민주인사가 집권하면 북측과의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북한이 평화공세를 전개한 동기였다. 한마디로 당시 북한의 남북대화 전략은 접근을 통한 박정희 정권 고립 이었다. 13) Minutes of Conversation between Nicolae Ceausescu and economic delegation from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22 September 1972," Christian F. Ostermann and James F. Person eds., The Rise and Fall of Detente on The Korean Peninsula, 1970-1974 (Washington, DC: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2011), pp.188-207 참 조. 참고로 몽고 출신 냉전연구가 Onon Perenlei 박사가 2012년 11월 26일 소개한 한 몽고 외교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이 4.19 직후인 1960년 4월 21일 평양에서 각국 대사들을 불러 남한에서의 4.19사태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을 너무 세게 지원했다고 후회하면서, 만 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승만을 대체할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 이라고 말했다. Jong-Dae Shin, Christian F. Ostermann and James F. Person, "North Korean Perspectives on the Overthrow of Syngman Rhee," NKIDP e-dossier no. 13. - 13 -

-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와 같은 북한의 평화공세 동기에 대해서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평화공세의 이면에서 전쟁 준비를 더 강화하고 있는 북한의 기만 술책을 철저 하게 경계해야 한다 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북한이 국제정세를 교묘하게 이 용하여 무력도발만이 아니라 평화공세라는 연막전술을 쓸 것으로 보기 때문에 1970년대 초반이 한국의 안보상 가장 어려운 시기라고 주장했다. - 당시 박 대통령이 평화공세에 대해 이와 같은 정세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의 평화공세는 별로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야당과 대학생들은 국제정 세와 남북관계가 데탕트로 이행하고 있는데, 박정희 정권이 정권안보를 위해서 북한 의 위협을 유포하고 과장한다고 비판함으로써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균열과 논란이 있었다. - 그러나 결국 1972년 유신체제가 수립됨으로써 평화공세를 통해 야당 등 남한 내 의 반박정희세력들을 남북대화에 가담시켜 북한에게 유리한 2:1의 대화구도를 만든다 는 북한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요컨대 남북대화 국면에서 박정희가 북한의 평화 공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고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인식을 강조한 것이 단순히 정권 안보 차원의 레토릭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환언하면 박정희 정권이 정권안보를 위해 북한의 위협을 과장한다는 당시 야당과 일부 인사들의 비판이 객관적 사실과 올바른 정세판단에 기반하지 못했다고 역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 야당과 일부 비판적 인사들의 대북인식 자체가 박정희의 위협인식을 가중시키는 요소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 다만 박정희의 대북 위협인식이 일정한 실체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 만, 평화공세를 통해 남한사회가 혼란에 빠질 경우 북한이 전면 도발할 가능성이 있 다고 보거나 강조한 것은 당시 박정희가 지닌 인식의 한계 내지 정치적 고려의 측면 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그와 같은 위협인식이 유신체제 수립과 같은 박정희 의 정책적, 제도적 대응 자체를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할 것이다. - 오늘날 대북정책을 둘러싼 논란과 상이한 입장을 발전적으로 수렴시켜 대북정책에 대한 공동분모를 도출하는 데 있어서 위의 사례는 하나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2. 북한의 도발과 위기 대응 - 1976년 8월 18일에 발생한 판문점사건에서 보듯이, 한반도의 위기는 자칫 남북 한 모두가 원하지 않는 대규모 무력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이다. 판문점사건 당시 남측에서는 휴전 이후 처음으로 Defcon 3의 조치가 취해졌 고, 북측에서는 정규군과 비정규군의 전투태세 돌입 명령이 내려졌다. 만약 당시 미 국이 판문점사건에 대한 응징책으로 미루나무 제거나 아닌 보다 강경한 조치를 취 - 14 -

했거나, 김일성의 유감 메시지를 수용하지 않았더라면 이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 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으며 대규모의 무력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 다. - 특히 미루나무 제거를 위한 폴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an)에 참가한 한국 군 공수부대원들이 작전 과정에서 미군의 통제를 벗어나 호전적 태도를 보였다. 박희 도 1공수여단장의 명에 따라 공수부대원들은 원래 작전 계획에 없었던 M16소총을 샌 드백에 숨겨 트럭에 실었으며, 방탄복 안에 수류탄과 권총으로 무장했다. 또한 박희도 는 돌아오지않는다리 북쪽에서 북한군의 공격 조짐이 있을 경우 선제공격하라고 지시 했다. 그런데 이것은 스틸웰(Richard Stilwell)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은 물론, 화력 사 용 엄금을 당부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와도 배치되는 것이었다. - 작전 수행 중 공수부대원들은 애초 작전 계획에 없었던 공동경비구역 내의 북한군 초소들을 부수었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미군은 다급함 목소리로 상황실로 보고하 며 한국군이 미쳤다. 모두 부순다. 미쳤다. 미쳤다....... 한국군 특수부대 미쳤다. 한국군이 수류탄을 가지고 있다 라고 외쳤다. 14) 또한 미루나무 제거 작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돌아오지않는다리 양쪽에서 무력 대치중이던 남북한 양측의 병력이 일촉즉발 의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특히 한국 공수부대원들은 다리 반대편의 북한군을 향해 욕설과 함께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싸는 등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행동을 보였다. 15)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반도의 위기가 최고정책결정자들의 정책적 판단이나 결정에 서만이 아니라 하위 수준의 돌출행동이나 과잉 대응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발생하고 격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남북한의 긴장과 대립이 고조되는 상황에서의 이와 같은 하위 수준에서의 우발 적 행동이나 실수가 의도하지 않는 충돌로 비화되는 사태를 방지토록 해야 할 것이 다. 이와 더불어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여 정책결정 수준에서의 위기관리 방향과 구체 적 정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 현재 한국은 북한의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선조치 후보고 를 윈칙으로 하며, 북 한의 도발 양상에 따라 도발 원점은 물론이고 지원세력과 지휘세력까지 타격한다는 방침을 천명해 놓고 있다. 16)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북이 도발할 때 정치적 고려 없이 초전에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결의로 어떠한 형태의 도발도 용납하지 않겠다 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군통 14) 박희도,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 (서울: 샘터, 1988), pp.170-171. 15) 위의 책, pp.176-177. 16) 2013년 3월 22일 정승조 합참의장과 서먼( James D. Sherman) 한미연합사령관이 서명한 공동 국지 도발 대비계획 은 북한의 국지도발 때 한 미연합 전력으로 응징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특히 이번의 공동 국지 도발 계획 에는 한국군의 작전 개념 계획이 한국과 미국이 공동 수립한 이 계획에 반영되었다. 애초 미국은 지원 지휘 세력까지 응징하는 작전 개념에는 확전을 우려해 난색을 보이다 가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안보 불안이 커지자 전향적인 자세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정승조 합참의장은 이 계획에 서명한 직후 북한이 실제로 도발했을 때 강력히 응 징해 도발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드는 의미가 있다 면서 오늘 계획은 그러한 내용들을 하나의 문 서로서 결정하고 보장하게 된 것 이라고 밝혔다. 중앙일보, 2013년 3월 23일자. - 15 -

수권자의 확고한 의지가 중요하고 필요함은 물론이다. - 그러나 이와 대응 및 억지전략 과 동시에 북한과 한 미의 결기 가 부딪혀 위기 상황이 더 이상 확대 또는 심각한 사태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상황별 단계 별 출구전략'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방침과 의지 표명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도발할 경우에 대비한 적절하고 통제가능한 보복과 위기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출구전략이 있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위기 고조와 또 그 위기 폭발의 일차적이고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 이다. 3. 지속가능한 대북정책과 국내 기반 - 남북관계 발전에 기여하는 지속가능한 대북정책 추진을 위해서는 대북은 물론이 고 대내와 대외를 포괄하는 삼면관여정책(three-level engagement)이 요구된다. 특히 국내 관여(domestic engagement)가 중요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 책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 개최 등 남북관계의 발전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 나 두 정부의 대북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다시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대립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 남북관계의 순항과 발전을 위해서는 1)우호적 국제 환경, 2)북한의 협력과 성의, 그리고 3)국내적 합의 기반 조성이 필요하다.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국내적 합의 기반이다. 왜냐하면 대북정책을 추진하는데 소요되는 재원과 지지의 원천이 바로 국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대북정책에 추진에 있 어서 정치권의 시민사회에서 대북정책에 대한 합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소홀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 다시 말해 대북 관여에 치중한 나머지 정작 대북정책 추진의 동력인 국내 관여 를 등한시했다는 점이다. 대북정책에 대해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는 정당과 집단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설득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정파적 업적에 급급한 나머지 대 북정책 성과의 독점보다는 정파 간의 공유 노력이 필요했다. 대북정책의 성과라는 업적의 독점보다는 공유를 통해서만 대북정책의 정쟁화를 막고 안정적, 효율적 추 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관여 정책을 평가하면서 문제는 안 이야, 바보야 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 압박정책이든 관여정책이든 국민적 합의에 기반하여 지속적으로 추진되기만 하 면 모두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하한 정책이든 국내적 합의 기반이 취약하 거나 정권교체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면 그 성과는 무망할 것이다. 따라서 지속가 능한 대북정책 수립을 위해 이명박 정부에서 거의 사문화된 남북관계발전법과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 16 -

4. 대북정책 목표의 현실적 설정 - 대북정책의 합리적, 현실적 재조정이 필요하다. 사실 김대중 정부의 접근을 통 한 북한 변화 나 노무현 정부의 북핵문제의 우선적 해결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비 핵개방 3000 등은 대북정책을 통해 실현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정책 목표로 설정하 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 역시 불핵 불용 의 확고한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 면서 남북관계 진전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에 기여 17) 한다는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 우선 북한의 변화는 자체 변수에 의해 진행, 촉발되는 것이며, 대외환경이 영향 을 준다고 하더라도 남북관계보다는 북미관계 등 여타 대외관계가 더 큰 영향을 미 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북한의 변화나 비핵화는 한국과 국제사회가 기대하 는 것처럼 조기에 실현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북핵문제는 그 성 격이 남북관계 수준을 벗어나 국제 이슈의 성격을 띠고 있어, 한국이 주도적 역할 을 하기에는 한국의 위상과 역량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 따라서 대북정책의 목표로서 실현이 어려운 과제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분단 관리- 화해협력-변화 대비- 남북통합 추구 등으로 대북정책의 목표를 현실적으로 재설정 또는 운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대북정책의 가 능 영역과 한계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한미관계, 북미관계 등 여타 대외관계가 남북 관계에 미치는 역학과 역할의 공간을 인정할 수 있다. 나아가 대북정책 뿐만 아니 라 대외관계를 통해서도 남북관계 발전을 이루는 지혜와 전략을 얻을 수 있을 것이 다. 결국 북핵문제, 북한문제, 그리고 한반도문제의 해결은 동북아 지역협력의 구도 속에 묻어서 추진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또한 바람직할 것이다. - 결국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기반 조성이라는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북핵문 제해결, 남북관계 진전, 한반도평화협정이라는 세 차원을 선후 관계설정 또는 분리 추진하기보다는, 세 바퀴를 동시에 구동시켜 해결을 모색하는 일종의 3륜정책 이 필요할 것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남북관계의 역사를 남북관계 자체 수준, 동북아지역관계 수준, 그리고 국내정치 수준에서 몇몇 사안을 중심으로 단편적으로 검토하고, 그로부터 여하한 교훈을 도출할 수 있는가를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논의해 보았다. 이 글은 남북관계 17)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기반 구축을 위한 2013 통일부 업무보고 (2013. 3. 27). - 17 -

사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와 교훈 도출 시도라기보다는 하나의 거친 소묘라고 할 것 이다. 앞으로 남북관계사를 시기별, 사건별로 더욱 깊이 천착하고 논구하는 것도 중 요하겠지만, 70 여년을 맞고 있는 남북관계사 전체를 본격적으로 조망하여 교훈을 도출하는 시도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18) 그리고 남북관계에 대한 이해와 교훈 도출을 위해서는 우선 남북관계에 대한 의견 보다는 사실에 집중하여, 이념과 가치가 사실에 개입하고 앞서는 일을 피해야 할 것 이다. 그리하여 실중자료를 통해 남북관계사의 새로운 사실들을 밝히고, 가려졌던 이 면들을 재조명하며, 미결의 쟁점들을 규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은 남북관 계에 대한 학술적, 정책적 논의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남북한의 자 료를 포함한 각국 문서고에 나온 남북관계 관련 자료의 교차적 검토에 기반한 남북관 계 이해는 학계뿐만 아니라 정책결정자들에게도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을 제공할 것이 다. 그리하여 정책결정자들이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에 서 직면하게 될 과제들의 복잡성과 역사성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와 자 료를 가진 상태에서 과제들을 수행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나아가 남북관계의 역사에 서 놓쳐버린 기회와 기념비적 사건, 그리고 남북관계사의 패턴과 북한의 행동 및 사 고방식 등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이를 통 해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실행가능한 정책적 제안을 구상하는 데에도 유용한 참고자 료가 될 것이다. 때문에 학술적, 정책적 의미에서 남북관계의 역사에 대한 문서작업과 데이터베이스화를 서두를 시점이라고 하겠다. 18) 사실 남북관계사 전체에 대한 회고와 교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고사하고, 남북관계에 대한 통사적 연구도 많지 않은 실정이다. 남북관계사에 대한 연구로는 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 남북관계사: 갈등과 화해의 60년 (서울: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9) ; 김형기, 남북관계 변 천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10) 참조. -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