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 華嚴宗團의 展開過程과 그 歷史的 性格 高麗時 崔 柄 憲* 머 릿 말 高麗初期 華嚴宗團의 統合과 均如의 華嚴學 羅末麗初 華嚴宗圍의 諸問題 2. 華嚴宗團의 統合과 均如의 華嚴學 Ⅱ. 高麗中期 華嚴宗團의 隆盛과 義天의 華嚴學 1. 門閥貴族社會와 敎宗敎團의 隆盛 2. 均如에 대한 義天의 비판과 敎觀並修 3. 義天의 天台宗 개창과 華厳宗 4. 義天의 華嚴學 Ⅲ. 武人執權期 華嚴宗團의 改編과 새로운 傾向 1. 武人執權期 佛敎界의 改編 2. 華嚴宗의 새로운 경향과 知訥의 禪敎一致 Ⅰ. 1. 머 릿 말 신라불교의 기본적인 과제가 대승불교의 양대 조류인 中觀派 唯識派 사 이의 空 有 대립을 극복하는 문제였다고 한다면, 고려불교의 그것은 敎宗 과 禪宗 사이의 理論과 實踐의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불교사는 한마디로 敎宗과 禪宗의 統合過程이라고 하여도 무
韓國史論 20 니 런 필요도 없이 華 嚴宗이었기 때문에 敎宗과 禪宗의 통합은 바로 華嚴宗과 禪宗의 통합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불교에서의 敎禪 통합과정을 이해하려 고 한다면 禪宗에 대한 것 못지않게 華嚴宗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사학계에서의 고려시대 華嚴 宗에 대한 연구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어서 체계적인 이해는 먼 훗날에 나 기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고려 화엄종에 대한 문제로써 주목된 것은 均如와 義天 2인에 국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일대의 화엄종의 전개과정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시도로써는 필자의 高麗時代 華嚴學의 變遷 韓國史硏 究) 30, 1980)이 유일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문 제들에 대한 연구의 축적이 전연 없는 상태에서 시도된 것이었기 때문에 저절로 그 한계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논문은 문 제의 해결이라는 면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려는 필자 자신에 대한 리가 아 다. 그 데 이때 교종을 대표하는 종파는 두말할 각서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상당한 시 놓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문제의 해결에 밝은 전망을 가지게 하는 노력들이 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써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신라 화엄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 적인 성과가 金知見 高翊晋 金相鉉 등의 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 밖에도 소장신진 학자들에 의해서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문들이 제 출되고 있음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신라화엄 사상사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됨으로써 신라를 뒤이은 고려시대 화엄사상 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조성하여 주고 있는 현상과 아울러 또 하나 지적 할 수 있는 것으로는, 고려시대 敎宗과 禪宗의 통합과정에 대한 문제로써 義天의 天台宗, 知訥의 曹溪宗의 문제를 비롯하여 光宗代의 法眼宗 등의 일이 경과하였으면서도 이 문제에 대한 별다른 구체적인 성과를 내 지
양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敎禪統合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제조건으로써 禪宗과 함께 華嚴宗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더욱 제고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불교사학계의 요청에 따라 고려시대 華嚴宗의 문제를 다 시한번 정리해보려고 하는 바, 그 내용은 3시기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제 1기는 고려초기 光宗代의 均如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 제2기는 고려 중기 義天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제3기는 武人執權 期 大藏經의 간행과 修禪社의 결사를 계기로 한 華嚴宗의 변화내용을 살 펴보려고 하였다. 고려 華嚴宗의 전개과정을 이와 같이 3기로 나눈 것은 禪敎 統合過程과도 대응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제4기로서 蒙古침략 이후 고려말기까지의 華嚴宗의 전개과정을 살 펴보지 않을 수 없으나, 이 시기의 문제는 禪敎統合過程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기회에 따로 살펴보기로 하였다.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 하게 연구가 추진되고 있는 Ⅰ. 신라 高麗初期 華嚴宗團의 統合과 均如의 華嚴學 1. 羅末麗初 華嚴宗團의 諸問題 선종이 새로 대두하자, 불교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종의 대두는 단순히 새로운 종파가 하나 성립되었다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전 불교계를 개편케 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라시대에 성립되었던 기성종파는 전반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를 겪 게 된 것은 기성종파의 주류적인 위치에 있었던 華嚴宗이었다. 원래 화엄종 은 신라통일 초기 義湘(625 702)에 의해서 창립된 이래 말에 1) 울大學校 國史學科 副敎授. 신 華嚴宗에 대하여는 다음의 論著가 참고된다. * 서 1) 라시대
韓國史論 20 신라 말까지 주류적인 위치를 지켜오던 종파였다. 화엄의 敎理는 大乘佛敎 의 2大조류인 中觀派(Màdhyamika)와 唯識派(Vijnapti-vâdin)의 대립 을 극복하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불교교리 발전상 최고 단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華嚴思想은 萬有一切가 그대로 相即相入하며 ー體不離하는 것으로써 一 即多 多即一의 重重無盡한 圓融思想이며, 心에 의해서 萬物을 통섭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개인과 국가, 개인과 우주 사이에 있어야 할 개 성 있는 자유와 조화 속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을 제공하 였다. 그러므로 화엄종은 삼국통일초 신라가 고구려 백제의 귀족과 신라 귀족간의 反目, 그리고 그 遺民의 포섭 등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복잡한 양 상을 나타내고 있었을 때에, 그러한 대립성이나 다원성을 통일하는 이념으 로서, 또한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야기되는 귀족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깨닫게 해주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또한 의상의 불교는 신라 中 古期 圓光이나 慈藏의 지배층 중심의 불교에 머물지 않고, 이를 일반 피지 배층을 포함하는 전 국민적 차원으로 확대시키고 다시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발전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화엄종은 신라 왕실과 중앙 진골귀족 뿐만 아니라, 일반 피지배층으로부터도 광범위한 지 지와 후원을 받으면서 마침내 제1종단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의상은 670년(문무왕 10) 唐에서 귀국한 후 676년 국가의 후원으로 太伯山에 浮 石寺를 창건하고 이를 근본도량으로 삼아, 주로 지방사회에서 화엄학의 홍 포와 문도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는 淨土信仰이나 觀音信仰을 매개로 金仍石, 華嚴學槪論, 東國大學校 出版部, 1960 佛敎史學會 編, 輯國華嚴思想史研究, 民族社, 1988 佛敎文化研究院 編, 韓國華嚴思想研究), 東國大學校 出版部, 1982 金福順, 新羅下代 華嚴宗 研究, 高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88 金相鉉, 新羅華嚴思想史研究, 東國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89 高翊晋, 韓國古代佛敎思想史, 東國大學校 出版部, 1989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통일신라에 있어서 의상의 화엄종은 삼국통일로 인하여 영토가 原新羅에 비하여 3배로 확대됨에 따 른 世界觀의 확대를 보았으며, 武烈王의 직계손에 의한 專制王權이 강화되 고 있었을 때에 그러한 확대된 지배체제를 긍정하는 정신적 기반을 마련 하여 준 것이었다. 당시 이러한 華嚴宗과 대립되어 있던 종파는 法相宗이 었는데, 그의 敎理로서의 唯識學에 있어서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내어 중 국 유식학과 양립할 정도였으나, 교단으로서는 신라 말까지도 화엄종에 비 불교의 대중적 확산에도 하여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런 신라 말에 와서 敎宗佛敎의 지나친 觀念化를 비판하면서 선종이 대두하자, 교종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던 화엄종은 특히 큰 타격을 받지 않 을 수 없었다. 우선 교단으로서는 후원세력이던 왕실을 비롯한 진골귀족이 몰락함으로써 사회경제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대두하던 주체 세력으로서 6두품 및 지방세력은 선종을 지지함으로써, 중앙 진골귀족에 대한 지방세력의 공격은 곧 화엄종에 대한 선종의 비판을 의미하였다. 그 리고 선종이 도입되자 화엄종의 승려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 종파를 버리 고 선종으로 개종하여 감으로써 화엄종단은 더욱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만을 보아도 聖住山派의 개조 無染과 그의 嗣法弟 子인 麗嚴, 曦陽山派의 개조 道憲, 師子山派의 개조 道允과 그의 嗣法弟子 인 折中, 桐裏山派의 개조 惠哲과 그의 嗣法弟子인 道詵, 實相山派의 제2 조 秀澈, 그리고 闍崛山派의 제2조 開淸과 行寂 등은 모두 화엄종 사찰인 浮石寺, 華嚴寺, 海印寺 등에서 화엄학을 수학하다가 도중에 선종으로 개 종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들에 의해서 화엄종에 대한 공격이 신 랄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때문에 화엄종의 타격은 더욱 컸다. 821년(憲德王 13)에 중국의 南宗禪을 처음으로 전하여 온 迦智山派의 개조 道義는 당시 華嚴宗의 대표자격인 智遠僧統과의 問答에서, 화엄의 四 그 데 2) 2) 崔柄憲, 新羅下代 禪宗九山派의 成立 ( 韓國史研究 7, 1972) pp.85 86.
韓國史論 20 種 法界를 拳中法界相이라 하고 文殊, 普賢 등 55善知識의 行布法門을 물 거품에 비유하는 등 화엄학의 이론을 전연 무시하였다. 또한 大藏經이 무 엇을 밝히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다만 주먹만을 들어 보였다는 唐 歸 宗和尙의 說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물론 道義와 智遠僧統과의 問答 내용은 설화적인 것이어서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화엄종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선종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본다. 다음에 聖住山派의 無染은 그의 佛敎敎判論이라고 도 할 無舌土論 을 남겼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敎宗과 禪宗을 준별하여 교종은 應機門 言說門 淨穢門이라 하고, 선종은 正傳門 無舌門 不淨不穢門 이라고 하여 敎劣禪勝의 敎判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교종은 바로 화엄종이었다. 그리고 무염은 또 禪門寶藏錄 에 인용된 無染國師 行狀 에서 無染이 法性禪師에게 선교의 구별이 어떠하냐고 물은 말에 답 하기를 교종과 선종의 관계를 문무백관과 帝王의 그것에 비교하였다. 이로 써 당시 선승들의 화엄종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비판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화엄종으로서는 선종의 비판 공격에 대하여 교리적인 한 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원래 신라의 화엄종은 실천을 강조한 나머지 이론적으로 빈약한 한계를 지녔다. 의상이 남긴 저서를 보더라도 華嚴ー乘法界圖 나 白花道場發願 文 등은 주로 종교실천의 목적에서 씌어졌기 때문에 元曉나 法藏의 방대 한 철학체계에 비길 만한 교학 면에서의 업적은 없는 셈이다. 실천수행에 주력하였던 의상이 이론에 치중하였던 법장과는 확연히 구별되었던 모양 3) 天頌 찬술 禪門寶蔵錄 卷中 용 海東七代錄 엄 선 잘 타 海東 七代錄 늘날 逸失 용 不明 禪門寶藏錄 西山大 師 禪敎釋 용 聖住和尚 梵日和尙 道允和尙 신 선 선 史乘 니 용 道義 智遠僧統 선 곤 선 엄 항쟁 점차 압 사 반 3) 고려시대 의 로 전하는 에 인 된 에 의하면 화 과 종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나 내어 주고 있다. 은 오 되어 그 내 은 이나, 이나 의 에 인 된 것에 등 라의 승 들에 대한 기록만이 보이므로 나말여초의 종 관계 이 아 었는가 한다. 여기에서 인 한 와 과의 문답은 주로 종의 우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 생각되므로 그대로 믿기는 란하지만, 종이 화 과 하면 서 그것을 도해 나가는 정을 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智儼으로 하여금 의상에게는 義持, 법장에게는 文持의 號를 주게 되었다. 의상의 실천수행에 대한 중시는 그의 문도들에게도 계 승되었으며, 균여의 저서나 法界圖記叢髓錄 에 의하면, 의상의 후계자들 에 의한 많은 저술이 보이고 있으나,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의상의 華 嚴ー乘法界圖 를 祖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의상이나 그 문도들 의 실천중시 경향은 문도들의 번성에 의한 이른바 華嚴十刹 의 성립을 가 져오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화엄학의 이론적인 발전에 일 정한 한계가 되었다. 그 결과 신라불교의 주류적인 위치에 있던 화엄종이 나말여초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 는 사이에 새로 대두한 선종의 비판 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정치세력이 분열되자, 화엄종단 내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열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羅末麗初 화 엄종단의 분열 대립에 대하여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 에서는 다 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으로, 그의 스승인 均如 岳 법손 옛날 신 말 伽耶 印 두 華 司 있었 니, 한 분 觀惠公 후 백 괴수 甄萱 福田, 또 한 분 希朗公 福田 었 두 분 信心 받아 香火 願 맺기 청, 소원 미 르거늘 마 어찌 일 수 있었겠 문도 르러 차차 물 불 사 되었 니, 물 法味 있어 랴 각각 시 짠 맛 받아, 폐단 거 기 어렵게 지 미 오래되었 때 상사람 觀惠公 法 岳, 希朗公 法 岳 불렀 매 번 남북 趣 순되어 분별할 수 없 여러 지 막히 많 갈래 지향 바 한 길임 한탄 師( )는 北 의 이다. 라 에 山 海 寺에 嚴 宗이 으 은 으로 ( ) 제의 의 이며 은 으로 우리 太祖大王의 이 다. 은 을 의 을 를 하였으나 이 이 다 음이 하나 는가. 그 에 이 서는 과 의 이가 으 하 며 에 서. 고 을 이 을 제 하 된 가 이 다. 그 세 들은 의 門을 南 이라 하고 의 門을 北 이 라 다. 師는 의 宗 가 서로 모 고 가 고 은 들이 하는 는 을 하였 다.4) 4) 韓國佛敎全書 4册, p.512 上.
韓國史論 20 均如傳 에 의하면 신라 말에 화엄종단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 라 高麗의 王建을 지지하는 希朗 중심의 北岳派와 後百濟의 甄萱을 지지 하는 觀惠 중심의 南岳派로 양분되었으며, 그 문도에 이르러서는 宗趣上의 모순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南 北岳의 분열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5 어쨌든 南岳派 北岳派라는 명칭으로 보아서, 南岳派는 南岳 즉 智異山의 華嚴寺를 근거로 하였고, 北岳派는 北岳 즉 太 伯山의 浮石寺를 근거로 하여 대립되었던 것이다. 화엄종에 있어서의 이러 한 대립은 신라 말에 와서 갑자기 발생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원래부 터 浮石寺와 華嚴寺는 같은 화엄종단에 속하기는 하였지만, 그 입장은 달 랐다고 보여진다. 崔致遠의 法藏和尙傳 이나 三國遺事 義湘傳敎條 등 에는 의상계 화엄종의 十刹 가운데 부석사와 함께 화엄사를 포함시키고 있었으나, 그것은 義湘의 直系法孫이 신라 화엄종의 주류가 된 입장에서 표현된 것이었다. 최근에 景德王代華嚴經寫經 이 발견됨으로써, 그 跋文 에 의하여 緣起가 경덕왕대(742 765)의 실존인물로 밝혀졌거니와, 그 연기는 바로 화엄사의 창건자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그 緣起의 저술로 의 천의 新編諸宗敎藏總錄 卷 1에 華嚴經要決 12卷 或 6卷, 華嚴經眞 流還源樂圖 1卷, 華嚴經開宗決疑 30卷, 大乘起信論珠網 3卷 或 4 卷, 大乘起信論捨繁取妙 1卷 등의 이름은 전하고 있지만, 오늘날 모두 일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명칭으로 보아 연기는 華嚴 經 과 大乘起信論 의 전문학자로서 의상계와는 화엄학의 입장이 다소 달랐던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均如의 저서나 의상의 직계법손들에 의해 서 편집된 法界圖記叢髓錄 에 의하면 의상의 후계자들의 저술이 많이 보이고 있으나 연기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것 위 ) 5) 南 北의 분열에 대해서는, 이를 ① 義湘系와 非義湘系 즉 넓은 의미에서의 法 藏系의 갈등으로 보는 설(金相鉉, 新羅 華嚴學僧의 系谱와 그 活動, 新 羅文化 1, 1984, pp.35 41)과 ②義湘系 내에서의 分派로 보는 설(金杜珍, 均如華嚴思想研究), 一潮閣, 1981, p.54와 金福順, 앞의 논문, p.158)이 있다.
니 鄭彙憲이 집록한 智異山大華嚴寺事 漬 에 의하면 연기의 출생지가 全羅北道 興德縣으로 되어 있는데, 그 事 蹟의 기록 자체는 믿을 수 없는 점이 많다고 하더라도 앞에 들은 跋文에 는 그 寫經 작업에 참여한 사람으로 나오는 인물들의 출신지가 거의 다 그 인근지방이었던 점과 연관시켜 볼 때, 가능성이 큰 것이라고 본다. 만 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연기는 신분상으로도 중앙의 진골출신이었던 의상 과는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7 이로써 볼 때 화엄사와 부석사는 화엄종 내에서 그 입장이 원래부터 달랐으나, 의상계가 주류가 되어 연기계를 압 도하면서 그 대립이 겉으로까지는 나타나지 않다가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정치세력의 분열과 함께 드디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면서 그 대립이 표 면화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그 후 南 北岳 사이에는 교학상 많은 대립적 인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아쉽게도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혀줄 만 도 우연은 아 라고 본다.6) 그리고 ) 8) 한 자료는 현재 까지는 거의 없다.9) 듯 엄 위에서 살펴보았 이 후삼국시대 이후에 있어서 화 종의 과제는, 첫째 선종의 비판 공격에 대하여 그에 대처하는 수단으로서 화엄종의 교리를 강 화하며, 둘째 정치세력의 분열에 조응하여 양분된 화엄종단을 통합하는 일 이었다. 이러한 과제는 그 뒤 고려 光宗代에 와서 균여에 의해 달성되었으 6) 다만 均如의 釋華嚴敎分記圓通鈔 卷 9 ( 韓國佛敎全書 4, p.483 中)에는 南岳靈觀이 등장하는 바, 그는 10세기 전반경에 활약한 인물로서 그의 저술 로 보이는 南岳觀公記 가 法 界圖記叢髓錄 에 2희, 균여 저술에 4회 인용되고 있다(金相鉉, 앞의 논문, 1989, pp.29 30). 7) 智異山華嚴寺事蹟 에 의하면 연기가 창건하였다는 사찰로 興德 烟起寺, 羅 州 雲興寺, 永 隱寺, 昆陽 栖鳳寺, 山清 大源寺 등을 들고 있는데, 그 위치가 모두 지리산 부근이어서, 연기가 직접 창건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연기가 창 건한 華嚴寺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았나 한다. 8) 崔柄憲, 앞의 논문, 1980, pp.65 66. 9) 최근에는 균여가 고쳤다는 先公鈔三十餘義記 의 내용과 南岳觀公記 중의 數錢法을 비교하여, 각각 北岳과 南岳의 교학상의 차이점을 규명하려는 시도 도 있다(金杜珍, 앞의 책, pp.53 55, pp.335 336). 그러나 이 또한 최근 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어서(金相鉉, 앞의 논문, 1989, pp.214 215) 앞으로 의 연구 과제로 남겨 둔다.
韓國史論 20 며, 그 결과 화엄학은 새로운 단계로 전개되었다. 2. 華嚴宗團의 統合과 均如의 華嚴學 中央集權體制의 수립에 상응하여, 난립된 불교교단을 정비하고 사상통일을 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종은 우선 호족세력을 억 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정치개혁을 추진하는 것과 아울러 불교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다. 光宗의 불교정책은 당시의 전 교단을 2원 화시켜서 정리하는 것이었다. 즉 전 교단을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교종 은 교종대로, 선종은 선종대로 정리하여 양립시키는 것이었다. 교종의 경 우 역시 기성종단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던 화엄종을 중심으로 하여 정리 하고, 선종은 새로 중국에서 法眼宗을 수입하여 난립된 선종 각파를 정리 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 광종의 후원을 받으면서 화엄종단의 통합을 담당 한 사람이 均如(923 973)였다. 균여는 均如傳 에 의하면 北岳의 法孫 이요 義湘의 第七身 이라 하였 다. 균여가 의상계 화엄종, 그 중에서도 특히 北岳派를 계승했음을 표 방한 점은 그 사실의 진위 문제 를 떠나서 이미 균여가 활약하는 9세기 중반 무렵에는 北岳派가 화엄종단 내에서 南岳派를 제치고 주도적인 세력 이 되었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북악파의 등장은 希朗代에 이미 이 루어졌다. 希朗이 太祖가 후백제와 접전할 때 군사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그 후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希朗이 있는 海印寺에 재정적 지원을 고려에 들어오자 10) 11) 轉國佛敎全書 4 p 5 上 下 균 출 늘날 黄海道 黃州 점 出家 사 靈通寺 옮긴 개 점 北岳派 직접 필 均如傳 希朗-義順-均如 10),. 12. 11) 여의 생지가 오 의 인, 한 찰이 라는, 그리고 나중 에 로 뒤에도 주로 경 일대를 중심으로 약했다 는 등에서 볼 때, 그가 정말로 를 계승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 다. 그러나 자로서는 일단 의 기록을 받아들여 의 를 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復興寺 점 활 均如 法系
끼 또 希朗의 입적 후에는 시호까지 내려주는 데서도 알 수 있 다. 균여는 953년(光宗 4) 광종의 册封儀禮를 위한 祈晴祭 주관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당시 國師인 謙信의 천거를 받아 비로소 光宗과 연결될 수 있었다. 그 후 균여는 광종의 두터운 후원을 받으며 화엄종단을 장악해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964년(光宗 14) 歸法寺가 창건 되자, 均如는 坦文과 함 께 귀법사에 머무르면서 남 북악파의 통합을 시도 한 것이었다. 坦文(900 975)은 의상계 화엄종 승려로서, 10세기 중반 王師와 國師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당시 불교계의 원로로서 불교교단을 영 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均如는 坦文과 더불어 마침내 후삼국 이래의 남 북 파로 분열되었던 화엄종단을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균여에 의 한 화엄종단의 통합은 결과적으로 의상 직계에 해당되는 北岳派의 입장에 서 緣起系의 南岳派를 포섭 통합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 한편 균여는 화엄종단의 통합과 아울러 화엄교리의 정리에도 많은 노력 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균여는 중국의 화엄학으로서는 智嚴과 法藏 을, 그리고 신라의 화엄학으로서는 義湘의 저서에 대하여 註釋書를 내면서 아 지 않고, 12) 13) 1 ) 崔源植, 新羅 下代의 海印寺와 華嚴宗 ( 韓國史研究 49, 1985) pp.15 17. 13) 균여와 탄문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자료는 없다. 均如傳 에서는 대사(균여)는 매양 남악과 북악의 宗旨가 승패 없이 다루기만 하는 것을 탄 식하고 分派가 생기는 것을 막아 통일된 길로 인도하고자 뜻을 같이 한 수 좌 仁裕와 함께 명산을 찾아다니고 큰 사찰을 방문하여 큰 법고를 울리고 큰 法幢을 세워 불가의 젊은 승려들로 하여금 모두 다 그 뒤를 따르게 하였 다. 라고 하여 균여가 화엄종단을 통합하는데 함께 노력한 사람으로서 仁裕 한 사람만을 들고 있다. 반면 탄문의 탑비문에서는 964년 歸法寺가 창건되 자, 탄문이 광종의 초청으로 그 절에 머물게 된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이고 균여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의상계 화엄종, 특히 北岳派 계통게 속하였고, 또한 귀법사에 함께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23년이나 연장자였던 탄문은 원로로서, 그리고 균여는 직접 화엄종단의 통 합을 추진한 인물로서 이해하고자 하며, 따라서 통합된 화엄종단의 최고의 영수자리는 탄문이 담당하여 法眼宗의 慧炬와 함께 王師 國師에 봉해졌던 것 이 아닌가 한다. 14) 崔柄憲, 앞의 논문, 1980, p.67. 12)
韓國史論 20 엄학에 대한 검토를 시도하였다. 균여의 저서를 열거해 본격적으로 초기 화 보면 다음과 같다. 智嚴 著書에 대한 검토 ① 十句章圓通記 2卷 (存) ② 捜玄方軌記 10卷 (失) ③ 孔目章記 8卷 (失) ④ 五十要問答記 4卷 (失) ⑤ 入法界品抄記 1卷 (失) (2) 法藏 著書에 대한 註釋 ① 釋華嚴敎分記圓通鈔 10卷 (存) ② 釋華嚴旨歸章圓通鈔 2卷 (存) ③ 華嚴經三寶章圓通記 2卷 (存) ④ 探玄記釋 28卷 (失) (3) 義湘 著書에 대한 註釋 ① ー乘法界圖圓通記 7卷 (存) 균여의 이러한 저술 활동은 특색 있는 것으로서 신라시대 華嚴宗 승려 들 사이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신라 말부터 선종이 새 로 대두하면서 화엄종에 대하여 비판 공격하자 화엄종 측으로서도 그에 대 처하는 수단으로서 자체의 敎理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한 시 대적인 요구가 균여로 하여금 화엄학의 저서들에 대한 본격적인 재검토를 하게 하였던 것이다. 균여의 화엄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실천수행을 강조한 나머지 이론면에 약한 신라 화엄학의 한계를 보완하여, 그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 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균여의 저서가 종합적으로 검토되면서 5 그의 저서 가운데 北宗禪 神秀의 저서인 妙理圓成觀 이 인용되고 있다고 하여 균여가 선교일치 사상을 내세웠 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6 그러나 그 실제 내용은 전연 다르다. 金 (1) 1 ) 1 ) 5 金知見 編, 均如大師華嚴學全書 上 下 2册 (海印寺板影印本), 1977. 1 )
煐泰 교수가 그의 논문 均如書에 보인 妙理圓成觀의 著者 ( 韓國佛敎 學 11)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균여의 저서와 義天의 新編諸宗敎蔵總錄 등에 보이는 妙理圓成觀 과 華嚴經疏 30卷은 北宗神秀의 저술이 아 니고, 法藏의 法孫되는 法詵의 제자인 會稽 神秀로 보아야 할 것이며, 따 라서 균여의 화엄학을 선교일치 사상으로까지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 지 않을 수 없다. 균여 화엄학의 주안점은 智儼과 法藏 등 중국의 초기 화엄학에서 문제 가 되었던 性相의 융회였지, 澄觀과 宗密대의 후기 화엄학에서 문제된 禪 敎一致는 아니었다. 중국의 초기 화엄학, 특히 法藏 단계 화엄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唐初에 융성하던 法相宗의 유식학설을 어떻게 화엄학의 체 계 속에 포섭하는가였다. 그리하여 대승불교 가운데 2대 조류인 空觀의 입장과 唯識 입장의 종합, 즉 이른바 性相融會를 기도하게 되었다. 法藏은 이와 같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大乘起信論 의 사유체계를 도입하고 대승기신론 과 법상종의 유식을 매개로 그 독자적인 화엄학을 전개시 켰다. 법장의 화엄학은 극히 이론적 철학적인 반면에 실천경시의 면이 강 하였다. 법장의 화엄학은 華嚴經 을 철저하게 果上現의 法門으로 파악하 고 佛의 입장에서 전개하였으며, 海印三昧에 入住한 佛의 自覺內容을 설 파하였다. 그러므로 깨달음에의 方向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서 眞理에 도 달하고자 하는 수행자의 입장, 즉 실천 신앙적인 입장을 초탈하여 華嚴別 敎의 입장에 선 것이었다. 화엄별교의 사상을 四法界로서 말하면 事事無礙 法界이며, 事事無礙라 함은 現象 하나하나의 個物의 圓融을 설명하는 사고 방법으로서, 이러한 現象圓融論에서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理性의 존재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고, 대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절대화하는 것이다. 그 6 妙理圓成觀 찬 北宗 神秀 鎌田茂雄 金知見 金杜珍 발 켜 妙理圆成觀 선 사 울 웠 석 日本 柳田聖山 견 균 용 억측 1 ) 의 자를 로 보게 된 것은 의 교수에 게서 비롯된 것인데, 교수 등이 그 해를 따르고 있으며, 교수는 그것을 전시 을 여가 인 하고 있다고 하여 교일치 상 내세 던 것으로 해 하고 있으나 에 지나지 않는 다.
韓國史論 20 런데 이러한 事事無礙인 現象圓融論, 現象絕對論은 性起觀, 즉 海印三昧인 根本的 直覺에 의해서 체득되는 眞理, 즉 종교적 세계관인 것인데,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을 망각하고 현실 문제를 凡夫의 分別知로부터 인식하여 설 명하면 實踐의 매개를 부정하고 안이한 절대주의적 세계관이 되어 버림으 로써 현실의 사회체제에 대한 절대적 긍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편 균여는 실천신앙면에 있어서 화엄종의 전통적인 觀行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는 반면에 華嚴經 의 普賢行을 강조하고 있다. 균여는 普賢十願歌 서문에서, 무릇 詞腦(歌)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도구이며, 願王이란 보살이 수행하는 추요이다. 그것 때문에 얕온 물에서 깊은 물로 들어 갈 수 있으며, 가까이서 멀리 이를 수 있다. 세상의 도리에 의하지 않 고서는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인도할 방법이 없고, 속된 말이 아니고 서는 보현보살의 인행을 들어낼 길이 없다. 이제 쉽게 알 수 있는 가 까운 일에 의탁하여 생각하기 어려운 먼 종지를 만나고자 10대願文에 의하여 거친 11首의 노래를 시험하노라. (중략) 원컨대 凡俗한 善根을 낳고자 한다. 웃으며 노래 부르고자 한다면 誓願을 노래하는 因을 맺 게 될 것이고, 헐뜯으려고 한다면 誓願을 생각하는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바라는 바는 비방을 하건 칭찬을 하건 이 노래를 익히라는 점이다.17) 下根機의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俗語로 노래를 지었으니, 널 리 유행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鄕札로 작성된 이 노래는 당시의 知制誥 인 崔行歸가 漢詩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다투어 필사하여 그 중의 한 本이 宋에 전파되어 宋의 君臣들이 眞佛의 出世라고 찬탄하였 라고 하여, 다고 한다.18) 7 韓國佛敎全書 4, p.513 上. 윗책 pp.514 中 516 上 참조. 1 ) 18),
속 방법(鄕歌)을 통한 普賢行의 대중적 확산과 더불어 균여 불교 에서 주복되는 것은 그의 神異한 능력이다. 949년(光宗 即位年) 4월 스승 인 義順公이 大穆王后(光宗의 妃)의 질병을 치료하고 대신 자신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均如가 이를 呪願으로 치료하였으며, 953년 3월에 는 宋使가 光宗의 册封禮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장마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國師 謙信의 천거로 均如가 祈晴祭를 주관하여 비를 멎게 하였다. 또 958년에는 佛日寺 內에 벽력이 있자, 기괴함을 물리치고자 均如가 강 연을 하였으며, 開寶(968 975) 중에는 歸法寺 正秀의 무고를 신이함으 로 물리쳤으며, 靈通寺 白雲房 중수 후에는 노래 1首를 지어 禳災하기도 하였다. 9 균여는 주술적인 뛰어난 능력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光宗과 연결되어 각종 법회를 주관함으로써,年長者 승려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 으나, 이러한 능력은 균여 화엄학의 성격과도 연결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균여의 화엄학은 중국 초기의 화엄학, 즉 智嚴과 法 藏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화엄학의 주안점은 性相融會였던 것이며, 실천수행의 면에서는 華嚴經 의 普賢行의 강조와 巫現 信仰과 관련된 주술적인 요소를 들 수 있다. 세 적인 1 ) Ⅱ. 高麗中期 華嚴宗團의 隆盛과 義天의 華嚴學 閥貴族社會와 敎宗敎團의 隆盛 1. 門 고려 顯宗(1009 1031)대 이후에 와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일단 성 9 윗책, p.512 中 下, p.516 上 中. 1 )
韓國史論 20 운영하는 支配勢力으로서 門閥貴族勢力이 대두하 자, 지배세력과 밀착되어 있던 불교계도 그에 상응하여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지방세력의 불교로서 羅末麗初에 성행하던 禪宗이 제 3 종 단으로 밀려나고, 그 대신 문벌귀족의 불교로서 華嚴宗과 아울러 法相宗이 대두하여 고려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교계는 고려 초기의 華厳宗과 禪宗의 2원체제에서 이제는 같은 교종 계통의 화엄종과 법상종이 양립하는 2원체제로 바뀌었다. 이 두 종파는 모두 학파적 성격 이 강한 學問 佛敎이며, 체제적 성격이 강한 貴族佛敎였다. 나아가 두 종 파는 敎理的으로 대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이나 문벌귀족과 연결되어 그들의 정치싸움에 직접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당시 華嚴宗은 興王寺를 본거로 하여 왕실과 연결되었으며, 法相宗은 玄化寺를 본거로 하여 외척인 仁州李氏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두 종파간의 대립을 더욱 심각 하게 한 것은 義天에 의한 天台宗 창립이었다. 義天이 仁睿太后와 肅宗의 후원을 받아 화엄종의 입장에서 제3종단인 선종을 포섭하여 天台宗을 창 립하는 것은 법상종단으로서는 커다란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天台宗의 본거인 國淸寺의 창건 문제를 놓고 파란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 중기 화엄종을 둘러싼 제문제에 대한 이해는 佛敎史 뿐만 아니라 政 治史의 이해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고려 중기 화 엄종의 대표적인 승려로서 당시 화엄종의 본거였던 흥왕사에 주지하면서 그 교단을 영도하고 있던 인물은 大覺國師 義天(1055 1101)이었기 때 문에 우선 의천의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義天의 불교에 대한 이해 폭은 대단히 넓어 당시 유행하던 불교의 각파 를 거의 망라하고 있었다. 그는 賢首敎觀을 비롯하여 漸頓 大小乘의 經律 論章 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불교 이외에도 儒學 과 老莊 思想 나아가 子史集錄 百家之說의 精華를 심도 있게 탐색하였다. 립되고, 그 지배체제를 20) 20) 崔柄憲, 韓國華嚴思想史上에 究, 1982) 참조. 있어서의 義天의 位置 ( 韓國華嚴思想研
宋에 가서도 1년여 동안에 華嚴 天台 律 唯識 禪 西天梵學 등을 일 시에 섭렵하고 있었다. 의천 자신도 圓宗文類 序에서 자신의 法階를, 화엄을 비롯하여 天台 律 因明論 등의 兼學의 실천자로 자임하고 있었다. 그는 23세 때에 이미 貞元新譯 華嚴經并疏 50권을 강론하기 시작하여 일생 동안 廢한 적이 없었다고도 하였다. 실제 그가 강론한 것은 華嚴 經 을 비롯하여 南本 涅槃經, 智顗의 法華玄義 등 실로 거의 모든 종파의 경전 300여 권에 미쳤다. 또한 刊定成唯識論單科 3권을 저술 4 하여 性相兼學을 강조하였으며, 선종에 대해서는 敎를 떠난 당시의 선 을 비판하면서 楞伽經 起信論 등 경론 공부를 권하고 있었다. 5 이 밖에도 戒律도 강론하고 있었으며, 6 淨土思想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 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 디까지나 의천에게 있어서 중심이 된 종파는 화엄 종과 천태종이었다. 7 실제로 新編諸宗敎藏總錄 에서도 가장 다수의 佛 典은 大華嚴經 의 章疏로서 77部 1,242卷에 이르고 있으며, 그 다음이 法華經 으로 60部 229卷이다. 그 뿐만 아니라 천태종의 扶疏인 大涅 槃經 도 30部 202卷에 달하여 그 양에 있어서 법화경 의 다음을 점하 그리고 21) 22) 23) 2 ) 2 ) 2 ) 2 ) 고 있다.28) 義天이 宋에서 직접 만났거나 관계를 맺은 50여 승려 가운데, 화엄종의 승 려로서는 淨源 有誠 希仲 善聰 慧清 智生 道亭 道璘 淨因 希俊 등이 있으며, 천태종의 승려로서는 從諫 惟勤 元淨 可久 등이 있으며, 律宗의 승려로서는 元照 擇其 冲羽가 있고, 선종의 승려로서는 雲門宗의 宗本 了元 懷璉 慧圓, 法相宗(唯識學)의 승려로서는 慧琳 善淵이, 그리고 梵學에는 西天三藏 天吉 祥 紹德 등이 있었다. 22) 大覺國師文集 卷 20, 庚辰六月四日 國清寺講徹天台妙玄之後言志示徒. 23) 위와 같음. 24) 大覺國師文集 卷1, 刊定成唯識論單科序. 25) 靈通寺大覺國師碑文 ( 朝鮮金石總覽 卷上, p.310). 26) 大覺國師文集 卷 18, 講南山律抄. 27) 僊鳳寺天台始祖大覺國師碑文 ( 朝鮮金石總覽 卷 上, p.332). 其於諸宗之學 靡不刳心 而自許以爲己任者 在於賢首天台兩宗者. 28) 李永子, 義天의 新編睹宗敎藏의 獨自性 佛敎學報;, 19, 1982) pp.182 191 참조. 21)
韓國史論 20 런 운 그 데 의천의 불교 가 데서 더욱 비중이 컸고 중심적인 것은 화엄종 이었으며, 천태종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65년(文宗 19) 王子로서 11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景德國師 爛圓(999 1066)의 문하에서 처음 수업하기 시작한 곳이 화엄종의 靈通 寺이었으며, 그의 塔碑가 세워진 곳도 이 사찰이었다. 영통사에서 처음 공 부한 것도 화엄경 이었으며, 23세 때 처음 강론한 경전도 貞元 新譯의 화엄경 및 그 疏였다. 그가 머무른 興王寺, 海印寺, 洪圓寺도 모두 화 엄종 사찰이었다. 1097년(肅宗 2) 천태종의 본거로서 국청사가 새로 창건 되고 의천이 제1세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그에게는 흥왕사의 주지직이 의 연히 본직이었으며 국청사 주지직은 겸직에 불과하였다. 또한 의천이 宋에 서 만난 50여 승려 가운데 가장 오래 접촉하고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은 화엄종의 晋水淨源(1011 1088)이었다. 의천이 서신과 불교전적의 교환 을 통하여 淨源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송에 가기 전인 文宗 말년경 부터였으며, 의천이 송에 갈 것을 권유한 사람도 淨源이었다. 그리고 淨源 은 의천이 송에 갔을 때에는 의천을 위하여 慧因院이라는 절에서 화엄을 특별히 講하여 주었고, 그 강의가 끝난 다음에는 傳法의 표징으로 의천에 게 手爐와 拂子를 주었다. 이로 인하여 淨源은 의천을 화엄승통이라고 불 렀다. 그리고 정원에 의해서 정립된 華嚴七祖의 像이 안치된 慧因院도 의 천이 머물렀던 사찰로서 의천은 이 혜인원에 經論疏鈔 7,500여 권을 印造 하여 기부하고 또한 많은 재정적인 지원을 하여 원래 禪院이던 혜인원을 敎院으로 고쳐 高麗寺로 불려지게까지 하였다. 9 의천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중심이 된 것은 화엄종이었으며, 그 자신도 화엄종 승려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의천은 新編諸宗敎藏總錄 을 편찬함에 있어서 卷1의 제일 앞에 화엄경 을 배당하였으며, 그 序文에 서 자신을 '海東傳華嚴大敎沙門 이라 자서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가 편 의천은 10 2 ) 9 靈通寺大覺國師碑 ( 朝鮮金石總覽 卷上, pp.307 308 및 敕賜杭州慧 因敎院記 玉岑山 慧因高麗華嚴教寺志, p.72). 2 )
찬한 新集圓宗文類 의 圓宗은 바로 화엄종을 말한다. 의천이 圆宗文 類 를 편찬한 의도는 화엄종의 승려로서 화엄종의 여러 가지 異說을 종 합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2. 均如에 대한 義天의 비판과 敎觀並修 엄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시한 것은 화엄교학의 중심요지가 되 는 法界緣起論이었고, 그것을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내세운 것이 三觀五敎 였다. 화엄의 법계연기에 관한 여러 학설 가운데서도 특히 澄觀(738 839)의 학설을 가장 중시하고 전적인 공감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방법 으로서 의천이 말한 三觀五敎는 화엄종에 있어서의 실천수행과 이론적인 교리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즉 三觀은 法界三觀의 약어로 화엄종에서 法界 의 진리를 증득하기 위하여 닦는 三重의 觀界인 眞空觀, 理事無礙觀, 周遍 含容觀을 말하며, 五敎는 화엄종의 佛敎敎判論으로서 小乘敎(阿含經) 大乘 始敎(解深密經) 大乘終敎(楞伽經 勝蔓經) 頓敎(維摩經) 圓敎(華嚴經)를 말 하는 것이어서, 결국 三觀五敎의 兼修는 화엄종의 학문과 실천, 즉 敎觀을 兼修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義天이 보기에는 당시 고려 화엄종은 末法闘爭의 시기를 당하여 모순이 격화되어 道 자체가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천은 특히 자신이 화엄종의 승려이면서도 고려 초기의 화엄학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 판을 가하였다. 의천이 新參의 학도인 緇秀에게 내린 글에서, 의천이 화 30) 내가 항상 한탄하는 것은 海東의 先代 여러 스님들의 남긴 기록은 학문이 정치하거나 폭넓지 못한데다가 억설이 너무 많아서 몽매한 후생들을 지도할 만한 것은 백에 하나도 없기 때문에, 聖敎를 밝은 그 30) 崔柄憲, 앞의 논문, 1982, pp.185 186.
韓國史論 20 거울로 삼아 제 마음을 비춰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구구히 남의 보배 만 세 고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均如 梵雲 眞派 靈潤 등 여러 사람들 의 책은 잘못되었다. 말은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이치는 변통이 없어 祖道를 어지럽게 하므로, 후생을 미혹시키는 것으로서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31) 균여와 함께 梵雲 眞派 靈潤 등의 저서들을 비판하고 있었다. 의 천은 이와 같이 균여 등에 대해서 직접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편제 종교장총록 을 편찬할 때에도 신라인의 저술뿐만 아니라 宋 遼의 목록까 지 망라하면서, 오히려 균여의 11部 67卷이나 되는 저서는 일체 언급하지 라 하여, 않았다. 법맥상 均如系일 가능성이 높은 점 을 염두에 둘 때, 의천에 의한 균여 비판은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 의천이 균여의 저서를 비판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 만, 역시 근본적인 이유는 균여 화엄학과 의천 화엄학의 차이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차이는 고려 초기 화엄학의 사상적 과제와 고려 중기의 그것 이 달랐던 데 있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균여는 선종의 대두에 대응하 여 화엄학의 교리를 재정비할 필요성에서 주로 唐代의 智儼과 法藏, 그리 고 신라의 義湘 등 초기 화엄학자들의 저술을 주석하는 데 치중하였으며, 의천이 32) 33) 大覺國師文集 卷 16, 示新參學徒緇秀. 74년 1075년경 赫連挺이 均如傳 을 지을 때, 균여에 관한 기록인 實 錄舊藁 1권을 보여주며 균여전기의 집필을 의뢰한 사람은 바로 等觀僧統 昶 雲(1031 1104)이었다. 그는 다름아니라 靈通寺大覺國師碑 陰記에 나 오는 昶元과 동일 인물로 보이는 바, 창원은 원래 報景德國師 爛圆(999 1066)의 문도로서 의천의 法兄이며, 실제로 난원의 입적 후에는 고려 왕실 의 요청으로 대권에서 의천에게 經論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弘護寺等觀僧統 昶雲墓話 韓國金石全文 中世 上 참조). 33) 유력한 설 중의 하나는 균여 저서의 문장이 이두체였기 때문에 한문학에 조 예가 깊었던 의천이 비판하였다는 설, 균여 화엄학에 있어서 性相融會 的 성 향을 비판하였다는 설, 균여 불교의 토착성 신비성을 비판하였다는 설 등이 31) 32) 10 그것이다.
실천신앙면에서는 기존의 화엄종의 觀行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는 반 면 화엄경 의 普賢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4 화엄학에 대한 균여의 본 격적인 연구는, 실천수행을 강조한 나머지 이론면에 약한 신라 화엄학의 한계를 보완하여 그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려 주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이론적, 철학적인 면이 강조되는 만큼 觀行에 관한 실천수행의 면 이 심화되지는 않았다. 이는 智儼과 法蔵 등에 의해서 중국의 초기 화엄학 이 조직될 당시의 과제는 性相의 융회였기 때문이다. 반면 고려 중기 의천 의 사상사적 과제는 法相宗과의 구별을 명확히 하며(性相決判) 대신 화엄 학과 선종 및 화엄학과 천태학의 조화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특히 의천은 敎에 치중하고 觀이 결여된 균여 이래의 고려 화엄학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敎觀幷修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新參學徒 緇秀에게 내린 글에서, 3 ) 만히 생각하면 성인이 敎를 편 목적은 行을 일으키는 데 있는 것 므 입으로만 말할 것이 아니라, 실은 몸으로 행동하게 하려는 것 니, 어찌 한 쪽에만 매달린 박처럼 실용이 없어서야 되겠는가.35) 가 이 로 이 실천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의천이 균여를 비판하면서 敎觀並 修를 주장하게 된 계기는 晋水淨源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라고 하여, 觀을 배우지 않고 經만 배우면 비록 五周의 因果(所信因果 差別因 果 平等因果 成行因果 證入因果)를 들었더라도 三重의 性德(敎重 行 重 證重)은 통하지 못하며, 經은 배우지 않고 觀만 배우면 비록 三重 의 性德은 깨쳤으나 五周의 因果는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經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36) 4 崔柄憲 東洋佛敎史上의 韓國佛敎 ( 韓國史 市民講座 4, 1989) p.33. 5 大覺國師文集 卷 16. 示新參學徒緇秀. 6 3 ), 3 ) 3 ) 위와 같음.
韓國史論 20 淨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나아가 의천은 정원을 매개로 敎觀 並修의 화엄조사로서 淸凉澄觀을 발견하게 되었다. 7 의천은 결론적으로 라고 하는 3 ) 징관의, 마음을 비춰보지 않고 性靈을 저버린다.38) 용 觀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華嚴을 받으면서 觀門을 공부하지 않는 이는 아무리 講主라 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는다고 못박았 라는 말을 인 하여, 다. 얼마나 높이 평가하였는가는, 의천이 화엄경 을 강론 할 때 오직 징관의 淸凉疏(華嚴經隨疏演義鈔) 만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데 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징관의 화엄학은 법장의 그것과는 크게 달랐다. 법장은 事事無 礙를 중시하여 果上現의 法門의 입장에서 화엄교리를 전개함으로써 수행 자의 현실을 결과적으로 소홀히 하였다. 반면 수행자의 현실을 의식한 징 관은 理事無礙를 중시하여, 화엄경 을 行門實踐的으로 해석하였던 李通 玄 화엄의 영향을 받아들여 行門의 입장에서 화엄교리를 조직하려고 하였 다. 이리하여 징관은 실천을 소홀히 한 법장 화엄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징관의 화엄학은 敎禪一致的인 영향을 나타나게 하였 다. 그는 화엄 우위의 입장에서 남북양종의 선종을 모두 비판하면서도 그 선을 포섭하여 화엄 가운데 융회시키려고 하였는데, 9 이는 화엄과 선을 의천이 징관을 3 ) 7 宋代 華嚴宗의 中興敎主로 칭하여진 晋水淨源과 그의 스승인 五台承遷은 모 두 唐代 화엄승려 가운데 智儼이나 法藏의 화엄보다도 澄觀과 宗密의 화엄 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고 있으며, 특히 징관의 영향이 가장 강하였다(鎌田 茂雄, 中國華嚴思想史の研究, 1965 pp.594 604). 그런데 정원이나 승 천 등 송대 화엄승려들의 징관 화엄에 대한 높은 평가는 송의 불교사조에 특히 민감하였던 의천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8) 大覺國師文集 卷 16, 示新參學徒緇秀. 3 )
합 대등하게 통 시키려고 한 宗密의 敎禪一致說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 였다. 3. 義天의 天台宗 개창과 華厳宗 敎觀並修를 실현하려는 의천의 이상은 천태종 개창으로 나타났다. 의천 으로서는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과 대립하는 한편, 선종을 포섭하여 천 태종을 개창하는 문제가 현실적인 과제였던 것이다. 의천은 바로 이러한 사상사적 과제를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서 중국 화 엄학에서는 다시한번 징관을 높이 평가하고 신라의 화엄학에서는 元曉의 불교철학을 재발견하였다. 그런데 의천이 선종을 포섭하여 교학과 선종을 회통시키려 함에 있어서 근거한 것은 화엄의 敎禪一致說이 아니라 천태의 敎觀ー致思想이었다.4 따라서 천태종 개창에 앞서 우선 화엄과 천태의 조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의천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宋에 가자마자 먼저 화엄종의 승려인 有誠 淨源 등과 그 가능성을 문답하게 되 었다. 의천이 有誠 淨源 등과 더불어 화엄과 천태 사이에 있어서 敎判 및 觀門의 同異 문제에 관하여 토론한 결과 마침내 화엄종과 천태종의 조화 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는바, 그 근거는 징관의 주장이었다. 즉 징관은 당시 부흥하고 있던 천태종의 제6조 荊溪湛然의 영향을 받아, 천 태학의 性具說을 취입하여 圓頓ー乘을 주장하였으며, 자신의 화엄경소 에서는 敎類有五 即賢首 所立 廣有別章大同天台 但加頓敎 라고 하여 華嚴 의 五敎와 天台의 化法四敎 참배하고 發願한 글 가운데서 우리 조사 華嚴 0) 9 엄 운 선 포섭함 二法門 起信論 絶言眞如 4 李永子 신 신 天台實踐法門 저술 敎觀一致思想 선 앞 논 참 선 五敎 운 維摩經 不 4 大乘頓敎 포함 켰 총 선 저술 유 학 회 3 ) 징관은 화 가 데 을 에 있어서 종을 가 데 의 이나 의 등과 같은 제 의 에 시 다. 0) 교수도, 의천이 자 의 편제종교장 록 에서 종 관계 을 수 록하지 않고 의 을 많이 수록하고 있는 이 에 대하여, 천 태의 에 근거하여 종과 교 을 통시키려고 한 것이라고 주 장하였다( 의 문 조).
韓國史論 20 疏主(澄觀)께서도 賢首의 五의 내용이 같다고 하였다. 또한 의천이 智者大 師의 탑에 敎는 대체로 天台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이어 귀국한 뒤 천태종 개창을 誓願하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징관은 원효의 四 敎를 평하는 가운데 元曉의 四敎는 天台와 대동한데, 다만 別 圓을 합치 고 一乘을 나누었다 4 라고 하여 천태의 교판은 화엄의 5교와도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효의 4교와도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의천이 천태종을 창립하겠다는 의지를 품은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였다. 즉 의천은 渡宋 이전부터 생모인 仁睿太后 및 肅宗과 함께 天台三觀은 最上의 眞乘이지만, 이 땅에 아직 그것을 開立하지 못한 것은 상당히 유감스럽다 4 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인예태후와 숙종은 그 후원을 약속하였는데,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의 강약이 천태종 창립 의 성사 여부를 좌우하였다. 그 후 앞서 살폈듯이 宋에 가서 화엄과 천태 의 조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존의 화엄종을 그대로 유지한 채 천 태종을 새로이 창립하려 한 의천의 의도는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여기에 확신을 품은 의천은 드디어 천태종의 慈辯從諫을 찾아가서 天台敎觀을 전 수받아 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화엄종의 승려인 의천이 종간에게서 천태 를 전수받은 것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송의 천태종에서는 山家와 山外 의 두 파로 분열되어 그 사이에 화엄과의 관계를 놓고 唯心論과 實相論의 대립 항쟁이 전개되었는데, 종간은 바로 화엄의 영향을 반대하는 山家派의 인물이었기 때 문이다. 여기에서 의천 천태종의 독특한 입장이 나타나는 데, 표면적으로는 山家派의 계승을 표방하면서도 내용면에서는 山外派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이다. 의천이 교류한 송의 천태종 승려는 從諫 이 외에도 元淨 中立 法隣 仁岳 可久 惟勤 辯眞 등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仁岳과 可久는 山外派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신편제종교장총록 에 수록 된 宋代 천태종 승려의 저술목록을 발췌해 보면, 山家派에 속하는 저술이 1) 2) 41) 澄觀, 華嚴經疏 卷 2 ( 大正新修大藏經 卷 35, p.510 上). 42) 僊鳳寺天台始祖大覺國師碑 ( 朝鮮金石總覽 卷 上, p.330).
9 58권인 데 비하여, 山外派의 저술이 5인 59종 184권이나 되어 山外派의 저술이 양적으로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의천의 표방과 는 관계없이 실제로는 자신의 입장에서 천태종의 내용을 자유롭게 취사선 택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결과 고려의 천태종은 고려 중기의 실정에 맞는, 宋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의천 천태종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로서 선종적인 경향을 들 수 있다. 의천은 송에서 돌아온 뒤 國淸寺를 창건하고 천태종 교단을 조직하게 되 었는데, 자신의 종파인 화엄종에서는 한 명도 끌어 들이지 않고 오로지 선 종 승려만을 포섭하여 구성하였다. 그 결과 고려의 선종은 중국 천태종과 는 달리 선종적인 면이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당시 천태종 교단의 구성원 은 약 1,300여 명으로 추측되는데, 이를 다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居頓寺, 靈嚴寺, 高達寺, 智谷寺 등 5개 사찰의 승려 1,000여 명 으로, 이들은 모두 고려 초기에 수입된 法眼宗 계통의 선승들이었음이 주 목된다. 또 하나의 집단은 의천에게 직접 제자로 들어온 선승 약 300여 명이다. 德麟, 翼宗, 景蘭, 連妙 등 4인이 각각 문도를 거느리고 참여하 였던 것이다. 이들이 천태종 개창 당시 핵심적인 세력이었으며, 그 중에서 도 翼宗의 문도가 가장 융성하여 翼宗-敎雄-德素로 이어져 武臣亂 초기까 지 천태종의 주류를 이루었다. 의천에 의한 천태종의 개창은 하나의 새로운 종파의 추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당시 불교계의 전면적인 개편을 초래하였다. 의천 자신으로 서는 선종 승려를 포섭하여 천태종 교단을 새로이 조직하고, 재래 화엄종 교단과 함께 두개의 종단을 영도하는 것이 목표이었겠지만, 그 외의 종파 에 미친 영향이 심각하였다. 우선 화엄종과 경쟁 관계에 있던 법상종은 일시적이나마 화엄종보다 약 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李資謙이 專權을 장악할 때 재차 대두할 기미를 보였지만, 그 후 열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태종의 개 창에 의해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은 선종이었다. 의천이 천태종을 8인 2 종
韓國史論 20 개창하여 선종 승려를 억압하면서 포괄하자 선종 교단은 양분될 수밖에 없었다. 즉 雲門寺圓應國師碑文 에 의하면 당시 선종 승려의 6, 70%가 천태종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이 수치는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선 종 교단에 미친 타격과 양분된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러나 의천의 사후 闍崛山派의 曇眞과 迦智山派의 學ー 등에 의해 선종은 부흥하였다. 그래서 선종 교단에 남은 잔여 선승들은 천태종에 대항하여 교단의 명칭을 禪門九山에서 曹溪宗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태종이 개창된 뒤의 종단은 4대종단체제로 개편되어, 교종 인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인 천태종과 조계종의 4개 종단으로 분열 경쟁 하게 되었다.43) 4. 義天의 華嚴學 활 엄 함 써법 상종에 대한 우위성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처음부터 강하게 내포된 것이었 다. 의천은 우선 교학면에서 性相兼學을 내세워 법상종에 대해 우위성을 주장하였고, 실천면에서는 敎觀並修를 주장하면서 고려초의 균여의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의천은 觀行이 결여된 기존의 화엄종의 개 혁을 시도하는 한편, 經典을 무시하는 선종에 대하여 맹렬한 비판을 가하 면서44 억압하여 포섭하려고 하였다. 의천은 불교계 개편의 방법으로, 제 의천의 불교 동을 한마디로 말하면 화 종의 입장을 강화 으로 ) 43) 崔柄憲, 大覺國師義天の天台宗創立と佛敎界の改編 ( 朝鮮學報 118, 1986) 참조. 44) 의천의 선종에 대한 비판은 戒珠 撰 別傳心法議 에 붙인 그의 跋文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근자의 禪을 離敎說禪 이라 하고, 說禪者는 그 이름에만 집착해서 실질을 놓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遼의 道宗이 선종사에서 중시하는 六祖壇經 과 寶林傳 을 불태워 僞妄을 제거하였다고 평가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崔柄憲, 앞의 논문, 1982, pp,198 199).
선종을 억압하여 포섭함으로써 천태종을 개창하고, 자신은 화엄 종에 의연히 머물면서 천태종을 아울러 영도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의천은 宋代 불교와 교류함으로써 晋水淨源과 그를 매개로 하 여 澄觀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되는 국제성을 띠었으면서도 그 내용이나 성 격에 있어서 독자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의천 화엄학의 입장을 말하여 주는 자료로서 들 수 있는 것에 華嚴九祖 說이 있다. 1101년(肅宗 6) 2월 의천은 화엄종의 사찰이었던 洪圓寺에 九祖堂을 세우고 그때까지 통일되지 않았던 화엄종의 祖譜를 새로 정하여 馬鳴, 龍樹, 天親(世親), 佛陀(三蔵), 光統(慧光), 帝心(杜順), 雲華(智 儼), 賢首(法藏), 淸凉(澄觀) 등을 九祖로 모시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義 天이 내세운 九祖說은 상당히 독특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원래 전통적인 화엄종으로서는 三祖說과 五祖說 및 七祖說이 있었다. 三祖說은 澄觀의 제 자 宗密의 注華嚴法界觀門 에 나오는데, 杜順-智儼-法藏을 들고 있다. 五祖說은 志盤의 佛祖統紀 卷 2 에 나오는 것으로서 杜順-智儼-法藏-澄 觀-宗密 등 중국인으로 실제 화엄종을 개창하고 계승한 사람을 주로 선정 하여 들고 있다. 그리고 七祖說은 宋代의 淨源이 中國의 五祖에 다시 印度 의 馬鳴 龍樹를 첨가하여 주장하였는데, 그 뒤 이 七祖說이 가장 유력한 祖師說로 유행하였다. 그런데 淨源은 宋의 승려 가운데서 의천과 가장 가 까운 사이로서 화엄학에 있어서 의천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친 사람이 었다. 그런데도 의천은 祖師說에 있어서는 정원과 상당히 다른 說을 내세 우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는 두 사람의 화엄학의 입장이 상당히 달랐음을 의미한다. 의천의 9조설은 정원의 7조설과 비교할 때 크게 세 가지 차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印度 祖師로 馬鳴, 龍樹 외에 天親을 추가하 고 있는데, 이는 天親이 十地經論 을 저술하여 華嚴經 十地品을 해석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大乘佛敎의 2대 조류 가운데 하나인 中觀派의 馬鳴 龍樹와 함께 瑜伽派에 속하는 天親을 넣은 것은 단순한 十地經論 의 저자로서만이 아니라 화엄학이 중관파와 유가파의 통합된 불교로서 성 3종단인
韓國史論 20 식 측 또한 중관과 유 식의 교리적인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元曉佛敎 전통의 재확인 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地論宗의 승려인 佛陀와 光統을 화엄 학의 조사로서 전통적인 화엄조사 위에 새로이 추가하고 있었다. 이는 전 통적인 화엄종의 조사 위에 地論宗의 승려 2人을 새로 추가한 것으로서, 화엄종의 성립이 이론에 입각한 註釋的 敎學의 입장과 실천에 입각한 體 驗的 信仰的 종교의 입장이 智儼과 法藏代에 와서 종합됨실로써 이루어졌 음을 인식한 결과였다. 즉 화엄종의 성립은 두 계통의 종합인 바, 그 하나 는 지론종 계통의 교학이며, 또 다른 하나는 杜順의 실천이다. 그런데 唐 代에 들어와 그 두 입장이 智儼에 의해서 종합됨으로써 敎相 觀行이 겸비 된 화엄종의 敎義가 성립되기에 이르렀고, 그것이 다시 法藏에게 계승되어 五敎三觀으로 집대성된 것이었다.45 셋째는 전통적으로 존숭되던 중국의 五祖 가운데서 圭峰宗密(780 841)을 제외시킨 것이었다. 이는 의천의 화엄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천이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징관은 크게 평가하여 그의 불교를 祖述하는데 주력하였음에 비하여, 징관 의 제자인 종밀을 정통조사 가운데서 제외시켜 버린 것은, 의천이 종밀의 불교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은 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의천의 文集을 보 면 敎觀并修의 대표자로 종밀을 여러 곳에서 들고 있으며, 또한 종밀의 略 疏에 의해서 圓覺經 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천은 종밀이 敎와 禪을 동등한 입장에서 통합하려 한 것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았다. 즉 의 천에 의해 이루어진 敎禪統合은 결코 대등한 통합이 아니라 화엄의 입장 립되었던 것에 대한 인 에서 나온 것으로 추 된다. 이는 ) 45) 張元圭, 中國初期 華嚴敎學思想의 研究 ( 佛敎學報) 10, 1973) 참조. 같은 논문 p.236에 의해 그 과정을 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선을 억압하여 포섭하는 것이었다. 그의 문집에 의하면 여러 곳에서 經論을 무시하는 고려 당시의 선승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편제종교장총록 에서도 선종 관계 의 저술은 거의 채록하지 않았으 며, 종밀의 저술 가운데서도 諸宗의 禪言을 모은 禪源諸詮集 같은 것은 제외시켰다. 이로 보아 의천의 입장은 철저하게 화엄 위주이며 그의 敎禪 一致思想은 징관과 같은 단계인 과도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종밀의 교선일치사상 같은 것은 그뒤 知訥의 조계종에서 에서 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신라 화엄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그가 신라 화엄 의 조사로 존숭한 사람은 3인이었다. 의천은 新集圓宗文類序 에서, 다음으로 의천의 우리 海東에서는 浮石尊者가 그 法을 구한 뒤로부터는 圓頓敎가 다 른 여러 宗의 우두머리로서 4백여 년을 지냈다. 엄 류 라고 하여, 의상 이후에 화 종이 한국 불교의 주 적인 위치에 있어 왔음 엄 찬양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 으로 의천은 화엄사에 들렀을 때에 화엄사의 창건자인 緣起의 影에 예배 하면서 지은 詩에서는, 화엄학에 있어서의 연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천이 가장 크게 감명을 받고 숭배한 사람은 元曉였다. 의천의 원효에 대한 숭배의 念은 대단하여 원효와 인연이 깊은 芬皇寺에 찾아가 원효의 像 앞에서 茶菓의 祭奠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때 의천 자신 이 지은 祭文에 의하면 그는 원효를 海東敎主 元曉菩薩 또는 海東菩薩 聖 師라는 최고의 존칭을 사용하였다. 나아가 의천이 어릴 때부터 佛乘을 사 모하여 先哲들 사이를 歷觀하였으나 聖師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고도 하였 다. 의천은 일찍이 金剛經 을 원효의 海東疏 에 의하여 講하고 나서 원효의 업적이야말로 깊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찬탄하면서 지금까지 외로이 어둠속을 헤매다가 이제야 비로소 琥珀이 티끌을 끌어 을 말하고, 한국 화 종의 시조로서 의상을
韓國史論 20 올리고 자석이 철편을 끌어당기듯이 참으로 心服할 수 있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원효의 불교에 공감하고 있었던가 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의천은 원효의 여러 論著들을 읽고 나서는 원효의 위대한 업적은 옛날 天竺의 馬鳴이나 龍樹의 그것에 대등할 만한 것이라 고도 하였다, 실로 의천은 원효의 재발견자였다. 의천이 원효불교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 것은 많은 경전의 섭렵과 宋 승려들과의 폭넓은 交遊를 통한 新思潮의 수입, 그리고 나아가 당시 고려 불교계의 모순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런데 특히 의천이 원효불교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澄觀의 원효에 대한 인식이었다. 흔히 원효 불교의 특성으로서 중관과 유식의 대립을 화 쟁시킨 것을 들고 있는데,46 그 결과 원효의 불교는 국제성을 띠게 되어 중국 화엄종 승려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징관 은 특히 원효의 화엄에 관한 학설을 중시하여 慧苑이 元曉의 四敎判을 논 박한 데 대하여 오히려 원효의 설을 지지하였으며, 그리고 大乘起信論 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는 원효의 疏가 다른 모든 疏에 비해서 훨씬 뛰어 나기 때문에 海東疏 를 지침으로 삼아 연구하여야 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천이 징관과 원효를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은 그 궤를 같 ) 이하는 것이다. 性과 相의 관계는 하늘의 해와 달과 같고, 周易의 乾坤과 같으 므로 그 性相 두 가지를 겸해 공부하여야 비로소 통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한 징관의 말을 인용하여, 性相兼學을 주장하였다. 이는 교종 내의 性相의 대립이 의천 당시로서는 禪敎의 대립에 못지않게 심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性相의 대립을 性宗의 입장에서 會通하려고 하였던 것 은 이미 신라시대에 원효가 내세웠던 것을 祖述한 데 말미암은 것이었다. 의천은 당시 화엄종의 입장에서의 교종 특히 법상종의 유식 사상을 종합 의천은 46) 高翊晋, 元曉의 起信論別記를 통해 ( 佛敎學報 10, 1973) 참조. 본 眞俗圓融無碍觀과 그 成立理論
충함으로써 고려불교의 모순을 극복하는 사상체계로서 원효불교 전통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47 그런데 의천은 원효불교학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하여 종파간의 대립이 격화된 고려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宋 遼 日本 등의 승려들과의 交流를 통하여 원효불교의 국제적인 선양에도 남 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의천은 그의 신편제종교장총록 에 원효 등의 章疏는 극력으로 구하여 편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의천은 이 목록이 완성된 다음 그 목록에 따라 간행해 나갔는데, 그는 그 가운데 원효의 章疏를 비롯한 신라인의 저서들을 宋이나 遼 및 日本에도 보내 줌 으로써, 안으로 원효사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불교의 전통을 재확인하는 동 시에 밖으로는 국제적으로 그것을 선양하여 고려불교의 국제적인 위치를 높였다. 그 예를 들면 의천은 宋의 화엄승 淨源에게 원효를 비롯한 憬興 太賢의 章疏를, 선승 元照宗本에게 원효의 楞伽經疏 8권을, 정원의 제자 善聰에게 자신의 唯識單科 및 기타 저서를, 辯眞에게 敎藏總錄 2册과 唯識單科 3 册 등을 보내주고 있었으며, 遼의 天佑帝에게는 원효의 章 疏 등을 보내주고 있었다. 그외 일본에도 일찍부터 신편제종교장총록 이 전해져서 義天錄이 란 이름으로 珍重視되어 왔으며, 의천에게 寄日本國 諸師求集敎藏疏 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와 일본간에도 章疏의 교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절 ) Ⅲ. 7 武人執權期 華嚴宗團의 改編과 새로운 傾向 1. 武人執權期 佛敎界의 改編 신 11 0년 무 란을 계기로 종래 門閥貴族體制가 붕괴되고 武臣들이 정권 47) 崔柄憲, 앞의 논문, 1982, pp.206 207.
韓國史論 20 악 개편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화엄종과 법상종은 무인세력과 항쟁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교단의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화엄종에서는 義天 직계의 법손인 興 王寺 寥ー과 靈通寺 覺訓 등에서 均如의 계통인 開泰寺의 守其와 天其 등 으로 그 법계가 교체되면서 화엄학의 내용이나 성격이 바뀌어 의천에게서 비판받았던 균여의 화엄학이 재평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천태종에서도 역 시 의천 직계의 德素(義天-翼宗-敎雄-德素) 등에서 白蓮社의 了世로 법계 가 바뀌면서 禪과 구분되어 法華의 實踐信仰이 강조되고 있었다. 그 다음 선종교단은 의천의 천태종 창립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고 한 때 위축되었으나 睿宗代 이후 중앙 불교계에 다시 대두하면서 천태종과 구분되어 조계종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조계종 가운데서는 闍崛山派와 迦 智山派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사굴산파에서는 慧照 (炤) 國師 曇眞 坦然-淵湛으로 이어지면서 선종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 었다. 그러나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淵湛 등이 제일 먼저 지방으로 축출되 고 이 계통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崔忠獻이 교종 을 억압하고 선종만을 후원한 것으로 이해하여 왔으나, 선종이라 하더라도 왕실이나 문인 귀족과 연결되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선승들은 과감하게 제거하였다. 조계종에서는 淵湛이 밀려나는 대신 修禪社의 知調 계통이 등 장하였는바, 지눌은 사굴산파에 속하였다고는 하나, 일정한 스승에게 배 우지 않고 오직 道만을 따랐다 4 고 하는 것으로 보아 조계종에서도 법계 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慧照國師의 직계인 淵 湛의 후퇴와 방계라 할 수 있는 지눌의 등장은 단순한 법계상의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선사상의 내용과 그 성격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어 서 주목된다. 즉 淵湛 이전의 선은 개인적 수업형태를 중시하고, 고답적이 며 귀족적인 경향을 가졌던 데 비하여 지눌 이후의 선은 집단적 수행과 대중에의 포교를 강조하면서 강렬한 대 사회의식을 나타내주고 있었던 점 을 장 하면서, 불교계도 전면적인 8) 48) 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 ( 東文選)) 卷 117).
양자는 커다란 차이가 난다. 한편 무인집권기(1171 1270) 가운데 그 전반기 50여 년간은 무인들 사이에 정권쟁탈전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과거 王 室 文人貴族과 연결되었던 불교계는 무인정권과의 항쟁을 계속하면서 문인 귀족 중심의 문화관의 붕괴에 직면하여 어찌할 수 없는 고민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崔瑀가 집권하는 1219년(高宗 6) 이후에는 정권의 안정 과 함께 불교계의 전면적인 개편이 추구되고 있었다. 1230년 최우가 五道 按察使로 하여금 각 道의 禪致寺院의 創始年月과 形止(實態)를 일제히 조 사하여 成籍케 한 것은 불교계의 조직적인 개편을 위한 시책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러한 개편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된 것은 1232년(高宗 19) 강화도 천도였다. 강화도로의 천도는 王室, 文人貴族과 연결되어 있던 開 京의 사찰들의 위치를 크게 약화시키는 대신에 지방의 사찰들이 새로운 중심 무대로서 부각된 것이었다. 불교의 중심 무대가 개경에서 지방으로 옮겨졌다고 하는 사실은 단순한 지역적인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 교의 내용이나 성격에도 변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에서도 이러한 외적인 상황의 변화와는 다른 차원에 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즉 지방에 있어서의 새로운 신앙 단체로서의 結社의 유행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結社는 고려 중기부터 귀족불교가 공허화하여 가는 것에 대한 비판적 운동으로서 佛子의 각성을 촉구하려는 末法思想에 입각한 강렬한 비판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 대 표적인 것이 조계종에서의 修禪社와 천태종에서의 白蓮社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교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화엄종에서는 寥一의 盤龍 社 (1100년대말 1200년대초)와 大孤의 水嵓社(1200년대 초), 法相宗 에서는 津億의 水精社(1123 1129) 등의 결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같 은 지방에서의 결사라 하더라도 교종과 선종 사이에는 적지않은 차이가 났다. 우선 결사의 주도자나 그 후원세력의 성격에 있어서 화엄종이나 법 상종의 경우는 文人貴族(仁州李氏 등)이나 武將勢力(朴文備)이었던 데 비 에서
韓國史論 20 방 鄕吏知識層(戶長層이나 下級 하여 조계종이나 천태종의 경우에는 지 의 官吏)과 新武人勢力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불교의 성격에 있어서 도 실천적이며 대사회적인 인식,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의식 등의 면에 서 강약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도 특히 수선사는 그 철 학체계의 독자성, 실천적이며 대사회적인 인식의 강렬함, 그리고 후세에 미친 커다란 영향 등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華嚴宗의 새로운 경향과 知訥의 禪敎一致 신 폭발로 인하여 귀족불교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의 천계의 화엄종은 문신귀족의 몰락과 그 운명을 함께 하고, 대신 의천代에 그 억압을 받아 지방으로 밀려나 있던 均如系가 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海東高僧傳 을 찬술한 覺訓은 의천의 직계로 보인다. 이는 그가 의천의 碑가 있는 靈通寺의 주지를 역임한 점, 해동고승전 流通篇 서문에서 의천의 入宋 유학을 높이 평가한 점 등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 러나 그의 자세한 전기는 미상이다. 고종代의 화엄종 승려로서 五冠山 靈 通寺의 주지를 지냈다. 自號는 高陽醉髡이며 一名 覺月이라고도 불렀다. 李仁老-李奎報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詩集이 士林에 전할 만큼 文名이 높았다.49 따라서 각훈의 불교는 문인적이며, 학문적인 성격이 짙었을 것 으로 보이며, 이는 그의 불교가 중기 문별귀족 체제하의 귀족적 고립적인 불교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각운은 무신 집권기 결사운동과 같은 개혁적 성격을 띠지 못한 채, 의천계통 불교의 마 지막 인물로서 이인로 등의 문인들과 함께 점차 쇠퇴해갔던 것으로 보인 무 란의 ) 다. 엄 신 균여계가 대두하기 시작 화 종단 내부에서 의천계가 도태되면서 대 49) 崔滋, 補閑集 卷 下, pp.154 156.
최씨 무신집권기의 再雕大藏經 간행에 있어서 校正의 총책임을 맡 았던 守其는 開泰寺의 승려로서 균여의 직계법손이었다. 그리하여 守其는 의천의 續藏經 간행시에 하나도 채택이 되지 않았던 균여 저서들의 원고 를 균여와 인연이 깊은 사찰인 開泰寺 法水寺 岬寺 등에서 수습하게 하여 大藏經의 補板으로 편입 간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도 의천에 의해서 크게 평가를 받았던 芬皇宗 측의 반발은 적지 않았던 모양으로 守 其가 편집한 高麗新雕大藏校正別錄 卷 1에 의하면 守其가 大集經 가 운데서 착오를 발견하고도, 수백 년 동안 이를 崇奉하여 온 芬皇宗(元曉 系) 승려 들의 반대를 염려하여 감히 정정하지를 못하고 다만 그 착오된 것을 別錄 가운데 기록하여 둔다는 것을 보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또 守其와 함께 활약한 天其는 균여의 저서들을 재발굴하여 大藏經 補遺板에 수록하였다. 즉 釋華嚴敎分記圓通鈔 釋華嚴旨歸章圓通鈔 華嚴三寶章圓通記 十句章圆通記 一乘法界圖圓通記 등의 方言本 을 찾아서, 이를 교정한 다음, 그 제자들이 1248년(高宗 35) 1251년(高 宗 38) 무렵 江華京에서 開板하였으며, 이것이 대장경 보유판에 수록되기 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기에 法界圖記叢髓錄 이 편찬되어 역 시 대장경 보유판에 수록되는바, 天其에 의해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 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5 이와 같이 13세기 중반 무렵 균여 화엄학이 재인식되는 새로운 경향을 보이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현재까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나서 대몽항쟁이 격렬해 지는 125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각종 道場이 집중적으로 개최되는데, 특 히 몽고병을 격퇴하기 위한 華嚴神衆道場이 빈번하게 열리고 있었다는 사 실이다. 均如는 어려서 神衆經 을 익혔으며, 그의 전기를 찬술하는데 관여 한 昶雲 역시 神衆經注主 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고려 화엄학에서의 神衆 經을 중심으로 한 밀교적, 주술적 성격이 13세기 중반의 잦은 華嚴神衆道 하였다. 0) 50) 金相鉉, 앞의 논문, 1989, pp.24 26 참조.
韓國史論 20 場의 개최와 연관되지 않았을까 한다. 한편 화엄종단 내부에서의 균여 화엄학의 재발견과는 별도로 이 시기 등장한 修禪社의 知訥(1158 1210)의 화엄학 연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知訥의 제2차 깨달음은, 1185년(明宗 15) 28세 때 下柯山 普門寺에서 李通玄(635 730)의 新華嚴經論 을 볼 때였다.5 그 후 지눌의 자신의 선의 실천체계를 수립할 때 다시 화엄사상을 도입하 여 圓頓信解門을 조직 하고, 화엄과 선이 근본에 있어서는 둘이 아님을 밝 혔다. 지눌은 이 원돈신해문에서 자기 마음의 無明 分別이 곧 諸佛의 不動 明智임을 信解하여 수행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자기 마음 속의 諸沸 普光明智로 일체 중생을 비춰보면 중생의 언어, 동작, 治生產業이 그대로 諸佛普光明智의 활동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엄관은 전통적인 화엄 학에서 도입한 것이 아니라, 중국 화엄종에서는 방계로 간주되는 이통현의 신화엄경론 에 의거한 것이다. 法藏이나 澄觀 계통의 修證的 단계를 설 하는 화엄보다는 방계로 치는 이통현의 圓頓的인 화엄이 선에는 보다 더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그가 선사상에서도 慧能의 嫡子가 아닌 荷澤神會와 그를 계승한 圭峰宗密의 선을 과감히 도입한 점과 더불어 지 눌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5 그 결과 앞서의 의천이 징관의 화엄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그것을 그대로 祖述하고 있음에 비하여, 지눌은 징관 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 대신 이통현의 화엄을 그의 선체계 속에 원용 하여 크게 선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宋代 臨濟宗의 大慧宗果(1089 1163)의 看話禪을 받아 들여 전통적인 선사상을 펼치고 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지눌의 선은 중국 임제종의 간화선을 최고의 경지로서 받아들였지만, 이통현의 화엄사상을 받아들여 그 간화선의 철학 적 기초를 확립시켰다는 점에서 중국 임제종의 그것과는 의미가 다르다고 아니할 수 없다. 지눌의 선에 와서 비로소 敎 禪의 절충적 단계를 뛰어넘 1) 2) 51) 주 29) 참조. 52) 崔柄憲. 修禪社의 思想的 意義 ( 普照思想 1, 198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