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발표 新羅의衰退에대하여 이기동 ( 인문 사회제 3 분과 )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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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新羅의衰退에대하여 이기동 ( 인문 사회제 3 분과 ) - 1 -

新羅의衰退에대하여 李基東 ( 人文 社會第 3 分科 ) 머리말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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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의諸說에대한검토 : 6 개命題의문제점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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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伐州농민반란의분석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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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격화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호족은 대토지 소유자로서 국가로부터 何等 탄압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긴 국 가가 지주의 토지 소유를 엄격히 제한하는 限田制를 강행하여 호족의 이익을 크게 침해할 경우라면 호족들도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겠지만, 9세기 신라의 약화된 국 가권력으로써는 이같은 과감한 조치를 취할 만한 형편이 못되었다. 실제로 그 부작용도 만 만치 않았다. 한전제가 실시되면 자연히 토지 매매가 금지되어 빈궁한 농민은 토지를 兼倂 하는 호족들보다도 더 큰 불편을 겪게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빈농인 처지에서 그나마 토지 를 처분하지 않고서는 당장 배를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족들은 국가의 탄압을 받 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 대다수는 국가권력과 타협하여 그 庇護를 받게 됨으로써 在地사회 에서의 세력을 溫存 내지 확대시킬 수 있었다. 또한 국가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회유 조종 함으로써 지방사회 末端에까지 국가의 의지를 침투시킬 수 있는 利點이 있었다. 농민반란과 호족의 반란은 이론적으로 截然히 구별되지 않으나, 兩漢 交替期의 中國史의 事例 검토 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차이를 抽出할 수 있다. 신라 통일기에 각종 災害로 농사를 망쳐 식량 기근이 들 때마다 농민들은 살던 지역을 떠나 유민이 되어 민란을 일으 켰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단 지역에서 遊離된 만큼 더 이상 생산집단 이 아니었고 더욱이 郡ㆍ縣과 연계를 도모할 수 있는 정치집단도 아니었으므로, 결국 각지 를 떠돌며 약탈하는 이상의 것을 이루어 낼 수 없었다. 그들이 다른 반란세력과 연대를 꾀 하여 비교적 큰 세력집단을 이룬 것이 889년 尙州의 농민반란이었지만, 그들은 곧 반란의 주도권을 호족들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비해 여러 촌락을 직접 장악한 호 족들은 군ㆍ현의 생산집단인 동시에 지방권력과 일정한 수준으로 결합관계에 있는 정치집 단이었다. 실제로 호족들의 일족은 胥吏로서 州ㆍ군ㆍ현의 통치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 다. 그런 까닭으로 호족들은 조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면서도 지방민으로부터 안정적으로 稅役을 수탈함으로써 장기간 반란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최초 농민반란이 일어난 직후부 터 반세기 가까이 호족세력의 동란이 계속될 수 있었던 근본원인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대 이 49) Ⅳ 지방 豪族세력의 대두와 국가권력에 대한 도전 앞 章에서 살펴보았듯이 농민반란이나 지방호족들의 離叛 自立 현상은 국가권력에 대한 49) 木村正雄 中國古代農民叛亂の研究 (東京大學出版會 1979), pp.219-221, p.303(각주 (각주 118). - 24-66),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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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촌주를 頂點으로 한 지방 촌락사회의 상층부는 모처럼 경위 관등을 받았음 에도 불구하고 律令官制에 규정된 官位相當官, 즉 정식 관원이 되는 길이 계속 봉쇄되었 다. 그들은 기껏해야 州ㆍ郡ㆍ縣의 吏屬이 되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 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는 8~9세기 日本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난다. 즉 일본 에서는 율령국가시대에 들어와 在地首長層이 外位制에 포섭되어 있으면서도 國 아래 군의 장관직인 郡司로 임명되어 임기 연한에 구애받지 않는 終身職의 특혜를 누렸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지방 세력가들의 位階가 외위인 까닭에 官位相當官職을 받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직을 주는 개방적인 정책을 편 반면 신라는 이들에게 관위상당관이 될 수 있는 京位를 주면서도 실제로는 州ㆍ郡ㆍ縣의 하급직인 吏屬職으로 제한한 것이다. 이는 신라가 통일기에 들어와 骨品제도에 입각한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도 허용하 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世界史를 보면 로마 공화정 시기의 역사가 평민들의 참정권(시민 권) 획득을 위한 신분투쟁사였고, 그것이 단계적으로 실현되어 정복전쟁에 본격적으로 돌 입하기 직전의 B.C.4세기 경에는 마침내 귀족과 평민 간의 차별이 사라지게 되었을 뿐아 니라 지방 屬州 출신자인 경우에도 일정한 군복무를 마치면 시민권을 부여했으나,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에서 큰 軍功을 세운 지방민에게 관등제도에 있어서만은 왕경인과 지방민의 차별을 폐지하면서도 정작 긴요한 참정권문제에 있어서는 차별이 여전히 존속하는 모순이 랄까 불철저함을 보였다. 골품제도의 정치적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관등 및 관직 에 대한 規制였음을 想起할 때 그 모순은 차라리 의도적인 欺瞞策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 다. 이같은 골품제도의 모순이야말로 9세기에 들어와 唐에서 유학하고 돌어온 六頭品 출신 의 신지식인 뿐아니라 지방 호족세력들에게 불만의 최대 요인이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된 뒤 唐이 어제의 동맹국가인 신라마저 羈縻州체제로 간접통치하 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文武王은 감연히 당과의 一戰을 각오하고 항쟁을 전개했다. 다행히 이때 吐蕃의 침략 위협에 직면한 당이 평양성에서 군대를 철수함에 따라 나ㆍ당전쟁은 신 라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오랜 전란이 그치고 小康상태에 접어들었지만 다만 신 라가 昇平의 盛世를 이룩하는 데는 그로부터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聖德王 (702~737) 말경에 이르러 비로소 국내적으로 안정되고 唐과의 우호 친선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역대 국왕이 治世에 쏟은 열정은 주목할 만하다. 문무왕은 고구 려를 멸망시킨 이듬해인 669년 2월 대대적인 赦免을 단행하는 한편 모든 채무자에게 利息 을 탕감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특히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친 지역의 농민들에게는 元金(本穀)마저 면제해 주는 일대 德政令을 반포했다. 문무왕이 681년 7월 1일 내린 遺詔 무 보다도 - 26 -

병기를 녹이어 농기구를 만들었고, 賦稅와 徭役을 가볍게 한 결과 집안이 넉넉 해지고 인구가 증가하며 창고가 넘치게 되었다고 자랑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정이 장기간 의 약탈적인 戰時경제에서 평상시의 경제체제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한 것을 어느 정도 인 정할 수 있다. 문무왕이 세심하게 民情을 보살펴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면, 그의 야심만만한 후계자 인 神文王(681~692)은 통일에 따른 집권체제의 정비작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왕은 685년까지 지방행정 구역을 9州로 나누었고, 5 小京제도를 정비했다. 신라는 6세기 영토 확장과정에서 주요 지방사회에 대한 지배권 확립을 목표로 소경을 설치, 경주 6부민을 집 단적으로 徙民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558년 國原(충주)에 설치된 소경이 바로 그것이었 는데, 통일 후 685년까지 5개의 소경을 두어 전국적인 규모로 이를 확대시켰다. 이에 앞서 674년 六徒 진골을 소경과 주에 出居시킨 바 있다. 또한 본래의 신라인 외에 고구려ㆍ백제 ㆍ말갈 등 피정복민까지 차출하여 중앙군으로 9 誓幢을 편성했다. 이밖에도 왕은 종래 진 골귀족 관료들에게 일종의 특권으로 묵인해 왔던 祿邑을 689년 폐지하고 그 대신 年俸(혹 은 月俸)에 해당하는 歲租를 지급하여 국가의 토지 및 농민에 대한 지배를 한 층 강화하 에서 그 간 였다. 문 차남으로 형 孝昭王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덕왕은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제 도를 정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민생문제에 주력한 점이 다, 왕의 재위 시대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난리와 가뭄이 마치 전염병처럼 발생했다. 이 때문에 농사를 망치게 되어 식량기근이 만연했다. 조정은 그때마다 창고를 열어 貧民을 救恤했는데, 707년에는 7개월 동안 한 사람 당 粟 3升씩을 지급하여 모두 30만 500石을 방 출하는 전무후무한 시책을 폈다. 그러나 왕은 이같은 임시 방편의 구제책으로써는 농민의 궁핍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고 판단하여 근본대책으로 722년 8월 백성에게 처음으로 丁 田을 지급했다. 하긴 관련 기록이 너무나 단편적이어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고, 이 점 唐의 均田制를 받아들여 丁男에게 口分田을 지급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농민들이 그 전부터 보유하고 있던 私有地를 국가가 班給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일 정한 법적 절차를 밟아 그 소유권을 인정한 것이거나 혹은 그 간 삼국통일전쟁으로 황폐 해 진 농경지를 給田형식으로 농민들에게 분배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무난하다고 생 각된다. 한편 일본 正倉院에 있는 신라 帳籍에 보이는 烟受有田畓을 이 丁田과 같은 것으 신 왕의 50) 50) 姜晋哲 韓國土地制度史ㆍ上 韓國文化史大系 Ⅱ 政治ㆍ經濟史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65), pp.1202-1220. 林建相 신라의 정전제 에 대하여 력사과학 1977-4호, 1978-1호; 임건상전집 (혜안, 2001), pp.402-407. - 27 -

데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성덕왕 때 이르러 정전제를 시행한 일반적인 배경으로 농법의 발전, 철제 농기구의 보급 확대, 水田 및 牛耕의 확대 실시 등으로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졌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 는데, 국가는 이로써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농민에게 地稅인 田租를 부과했을 것이 틀림없 다. 하긴 정전이 완전한 사유지였다면 그 소유에 대한 재산세를 부과해야 마땅할 것이 고 토지 사용에 대한 用益稅라고 할 전조는 부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 정 전의 복잡한 성격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쨌든 정전이 公田이 아닌 사유지에 속하는 한에 있어 토지의 兼倂 혹은 상실의 계기를 내포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촌락공동체 내부에서 차츰 부농층과 빈농층으로 양극화되는 계 층분화 현상의 가장 주요한 動因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8세기 전반경에 이미 지방사회에는 대토지소유자가 상당수 등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소경제도에 따라 지방에 정착했거나 혹은 녹읍제도나 관직을 매개로 특정지역과 연고를 맺게 된 진골귀족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현지의 토착세력과 私的인 결합을 꾀했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당시만 해도 이들의 토지 획득은 농업경영이나 토지시장을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시 정치적 특권에 의해서 賜田ㆍ食邑을 받거나 혹은 陳田 개간에 의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 무렵에는 아직 在地세력 출신의 대토지 소유자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중앙귀족의 지 방 진출에 따라 지역사회의 재편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전제주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景 德王(742~765)의 개혁정치가 추진되었다. 특히 757년 3월 녹읍제도를 부활하고 그해 12월 군현제도를 개편한 것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때 부활한 녹읍을 68년 전에 폐지한 그 녹읍(이른바 前期 녹읍)과 똑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 전기 녹읍과 후기 녹읍 사이에 사회경제적 與件의 차이를 충분히 감안한다면 양자 간에는 뚜렷한 질적 차이를 想定할 수도 있겠으나, 근본성격에 있어서 는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또한 녹읍이 부활된 지 9개월 뒤 실시된 모든 郡 ㆍ縣 명칭의 漢式 二字로의 통일도 단순히 명칭의 변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녹읍제도 부활의 의미를 실질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일부 군ㆍ현에 대한 昇降 조치를 취하는 등 실 로 보는 51) 52) 53) 李喜寬 統一新羅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99), pp.155-162. 다만 9등호제에 의한 토지면적이 아니라 結負制에 의해서 田租를 수취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金基興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 (역사비평사, 1991), p.165. 52) 중국 고대의 田租를 토지소유와 관계 없이 직접생산자가 그 생산에 대해 납부했다는 의미에서 生産稅라고 命名하기도 한다. 木村正雄 中國古代專制主義の基礎條件 中國古代農民叛亂の 研究 pp.62-63 참조. 53) 金基興 앞의책 pp.144-145. 51) - 28 -

미 편 었 地理志에 반영되어 있는 757년의 군ㆍ현제 개편에서는 州ㆍ군ㆍ현 간의 지배 領有관계에서 후대의 이른바 飛地(越境地)와 같은 交差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정치적 통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利害관계를 내포하는 것으로, 국가권력과 在地세력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관계를 암시하 제로 중대한 의 를 내포하는 개 이 다. 三國史記 는 것으로 생각된다.54) 혁 치 진골귀족들의 저항이 최고조에 달했던 경덕왕대 말기는 국제정세도 왕 에게 크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755년 11월에 일어난 安ㆍ史의 대반란은 당과 긴밀한 관계 를 맺고 있던 신라 朝野를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다. 반란은 763년까지 중국대륙 을 휩쓸었다. 경덕왕은 권력투쟁에 지친 데다가 믿고 의지하던 唐제국마저 크게 흔들리자 정치의 의욕을 잃고 宴樂에 탐닉하다가 765년 세상을 떠났다. 이에 8세의 어린 아들 惠恭 王이 즉위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으나, 768년 7월 一吉湌 大恭과 그 아우 阿湌 大 廉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33일 간이나 포위하기까지 했다. 三國遺事 권2 혜공왕 조에 는 대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를 비롯한 5개 道에 걸친 주ㆍ군에서 96명의 角干(진골만 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 관등으로 진골신분에 대한 通稱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 고 한 것을 보면 전국적인 내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新唐書 권220 신라전에는 이 때의 내란이 3년만에 진정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770년 8월에 일어난 대아찬 金 融의 반란을 대공 형제의 난에 연속하는 것으로 파악한 때문인 듯하다. 이 768년의 반란 때 중앙귀족과 지방의 호족세력이 서로 뒤엉켜 싸운 것이 분명한데, 이 를 계기로 하여 호족세력의 큰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즉 삼국통일 후 그 간 지방에서 성장해 온 진골귀족 출신의 호족들이 대거 반란에 가담했다가 큰 타격을 입 게 되자 토착세력 출신의 지주들이 그 공백을 메우면서 깊숙이 파고 들었을 것으로 생각 되기 때문이다. 다만 8세기 후반은 780년의 역사적인 왕실 교체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에 는 이렇다 할 동요 현상을 보이지 않았다. 혜공왕 정권을 타도한 汎진골 연합세력의 최고 지도자였던 上大等 金良相은 宣德王이 되어 782~783년 그 간의 浿江鎭 설치작업을 완료 하여 서북지방의 개척에 巨步를 내디뎠다. 또한 그의 협조자인 상대등 金敬信이 뒤를 이어 元聖王으로 즉위, 뛰어난 정치 능력을 발휘했다. 왕은 788년 國學의 졸업시험으로 讀書三 品科를 제정하여 인재를 뽑았는데, 이는 골품제에 입각한 권력구조면에서 볼 때 매우 前向 的인 조치였다. 무엇보다도 왕이 사회의 재생산을 확고히 보장하는 기제인 勸農에 힘쓴 것 은 성덕왕의 그것과 비교할 만했다. 즉 왕은 790년 全州 등 7개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한 개 정 에 대한 54) 木村誠 新羅郡縣制の確立過程と村主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조선사연구회, の國家と社會 (吉川弘文館, 2004), pp.58-60. - 29 - ; 古代朝鮮 1976)

반도 제일의 곡창지대에 위치한 碧骨堤를 증축했고, 죽기 직전인 798년 4월에는 농민들로 조직된 작업부대인 法幢 소속의 法功夫 1만4천여 명과 같은 숫자의 농민을 切火郡(영천) ㆍ押梁郡(경산)에서 징발하여 永川의 洑 둑을 수축하도록 했다. 治水ㆍ灌漑공사야말로 국 가의 기반이 되는 소농민을 유지하고 나아가 새롭게 創出하기 위한 으뜸가는 수단임을 상 기할 때 원성왕의 권농정책은 크게 주목되어 마땅할 것이다. 원성왕이 798년 12월 고령으로 죽은 뒤 그의 후계자들은 극단적인 왕실 친족 곧 宗室 중심의 권력구조를 지향했다. 그 결과 汎진골귀족세력의 정치적 단결은 깨어지고 각기 家 系 단위로 분열 독립하여 정치적 행동을 취하려는 경향이 차츰 농후해졌다. 더욱이 憲德王 (809~826) 때는 사회경제적으로도 혹독한 시련기였다. 814년 여름 國西지방에 홍수가 발 생한 이래 매년 흉년이 들어 기근이 만성화되었다. 조정에서는 처음 일년 간 조세와 貢物 을 면제한다거나 일부 救恤策을 쓰기도 했으나, 815년 이래 각지에서 草賊이 일어나 국내 가 매우 소란해졌다. 自活의 길을 찾아 중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속출했고, 심 지어 자식을 팔아 생계를 꾀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른바 新羅奴가 중국의 沿海 일대에서 매매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바로 이같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서 822년 3월 熊州都督 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7대손으로, 아버지 金周元이 785년 선덕왕의 후계자로 최초 群臣회의에서 추 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등 김경신이 책략을 써서 왕위를 가로챘다고 거사의 구실을 내세웠다. 그는 반란 직전 4개 州의 도독과 3개 小京의 仕臣(장관), 그리고 여러 군ㆍ현의 守令을 위협하여 지지를 강요하는 등 자못 기세가 등등했지만 결국 지지를 약속한 일부 도독들이 이탈한 결과 고립되어 관군에 의해 비교적 쉽사리 진압되고 말았다. 이처럼 김헌 창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것이 앞으로 닥쳐올 사태의 전개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 다. 그것은 첫째로 이 반란이 지방호족의 割據的 경향을 크게 촉진시켰다는 의미에서 그러 하며, 둘째로 830년대의 왕위계승 쟁탈전의 先聲을 지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현재 일본 奈良 正倉院에 남아 있는 신라 통일기 촌락 帳籍은 바로 이 시기 西原京 지 방 4개 촌락의 실태를 잘 보여주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이 장적의 작성연대인 乙未年을 둘 러싸고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서기 695년, 755년, 815년으로 比定하는 등 견해가 엇갈리고 있으나, 장적에 보이는 戶口의 현저한 이동현상으로 미루어 볼 때 사회경제적 疲弊현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9세기 초 곧 815년으로 볼 수 있는 개연성이 가장 크다고 짐 작된다. 8세기를 통해서 律令制에 입각한 收取행정이 차츰 강화됨에 따라 각종 납세와 課 役에 시달리게 된 농민층은 9세기에 들어와 참으로 피폐해진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 30 -

촌 중 일부 缺落이 있는 C村을 제외한 3개 촌을 보면 총 36개의 孔烟 가운데 20개가 토지재산을 기준으로 等級化한 9等戶制 가운데 최말단에 해당하는 下下烟이고, 여섯 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仲下烟 이상은 찾아볼 수 없다. 이 하하연이 아주 가난한 自然戶나 혹은 다른 곳에서 移入해 온 戶를 인위적으로 2~3개씩 묶어 만든 編成戶임을 생각할 때 거의 無田농민에 가까운 존재들이 촌락 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장적에는 戶等 구분에서 제외된 호도 있는데, 이는 어쩌면 唐에서의 경우처럼 遊離 乞食하는 극빈자들에게 촌락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 면세 조치를 취한 호구가 아닐 까 짐작된다. 한편 4개 촌 전체 인구 462명 가운데 노비는 25명으로 5.4 퍼센트에 불과 하여 생각보다 많지 않은 편이다. 이같은 사태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중앙귀족들이 권력쟁탈에 몰두한 결과 지방사회의 변 화에 副應한 적절한 시책을 소홀히 한 데 있었다.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村主를 매개 로 하여 굳게 結束했던 중앙과 지방사회와의 긴밀한 연결망은 촌주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대토지소유자의 대두로 말미암아 차츰 파괴되어 갔고, 그 만큼 조정의 지방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減退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일반 농민들이 농촌 高利貸자본에 희생되어 負債 노비로 전락된다거나 혹은 조세 부담에 견디지 못하고 촌락공동체에서 이탈하여 유민이 되는 데도 제대로 보호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또한 국가는 촌락에 잔류하고 있는 대다수의 소농민들이 자기 토지를 잃고 지방 유력자의 비호 아래 들어가 대토지소유제에 포섭되는 것을 放置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대토지소유자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농민의 경우 그 농 업경영 방식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으로 자기 경영을 했으므로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처럼 소농민들이 국가의 요구와 지주의 요구라는 二重의 압박 속에서 더욱 貧窮化되어 간 것이 889년 농민반란의 근본원인이 되었다. 이밖에 9세기에 들어와 민간의 상업부문이 차츰 성장하고 더욱이 張保皐가 828년 설치 한 淸海鎭의 눈부신 번영이 말해주듯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교역이 매우 활발해진 결 과 왕경은 물론 농촌사회에까지 상업적 요소가 침투되어 촌락구조 재편성의 추가적인 요 인으로 작용했다. 통일기 신라의 귀족들은 여전히 토지에 자산을 쏟아붓고 있었으나, 그 중 일부는 毛氈 생산 등에 투자하여 8세기 중엽 使行무역의 형태로 일본에 수출하기까지 했다. 하긴 고급 수공업 제품은 宮中에 설치된 30여 개 전문 工房에서 생산을 독점하고 있 었으나, 기술자(匠人)들은 工價를 租로 받아 작업에 종사한다거나 업종별로 분화되는 등 그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또한 9세기 경의 유통경제는 아직 금속화폐가 주조 4개 55) 56) 57) 55) 56) 金基興 앞의책 p.130. 李仁哲 新羅村落社會史硏究, pp.185-192. - 31 -

않은 劣惡한 상태에서 布와 곡물을 주축으로 한 현물교환경제에 머물고 있는 등 크 게 未熟性을 띠고 있었으나, 가난한 농민 중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 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청해진이 설치되던 828년 4월 漢山州 瓢川縣의 어떤 妖 術人이 빨리 부자가 되는 법 (速富之術)을 가졌다고 사람들을 속이다가 먼 섬으로 귀양갔 다는 三國史記 新羅本紀의 기사는 당시 빈곤으로 불안해 진 농촌사회에서 미신과 갖가 지 예언이 성행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왕위계승 쟁탈전이 일어난 뒤 신라 조정은 약체화된 왕권으로 지방세력의 성장에 대처 하기 어려워진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방어의 태세를 갖추기 위한 방 법으로 지역차별을 강화하는 동시에 극단적인 수도 중심체제를 固守했다. 이처럼 국가권력 이 급속히 쇠퇴해 가는 시대적 배경하에서 지방사회의 구조는 한 층 더 力動的으로 개편 되어 마침내 토착세력 출신의 대토지소유자들이 신라 全域에서 대두한 것으로 보인다. 興 德王이 834년 만연한 사치풍조를 금지하고자 내린 敎書에 의하면 色服ㆍ車騎ㆍ器用ㆍ屋舍 등에 대한 신분별 규정에 있어서 眞村主는 5두품, 次村主는 4두품과 같은 적용을 받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조정은 지방 촌주를 왕경 6부의 平人ㆍ百姓(3~1두품)보다 높은 5두품 ㆍ4두품에 準하는 신분으로 대우하는 한편 이들을 上ㆍ下 두 계층으로 분류했음을 알 수 가 있다. 하긴 이보다 1년 전에 만들어진 菁州(진주) 蓮池寺鐘의 명문에는 2명의 卿村主의 관등이 及干과 大奈末(麻)로 되어 있어 본인들은 각각 6두품과 5두품 신분을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856년에 만들어진 竅興寺鐘의 명문에도 촌주가 上촌주ㆍ제2촌주ㆍ제3촌 주의 세 계층으로 分化되어 있으며, 아울러 三重沙干ㆍ沙干ㆍ及干 등 모두 6두품만이 차지 할 수 있는 관등을 과시하고 있다. 요컨대 9세기에 들어와 시간이 흐를수록 촌주의 계층분 화가 복잡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촌주들이 공공연히 조정의 규정을 무시하면서 보다 높은 신분을 주장하고 있던 점에서 그들의 한껏 鷹揚해 진 자세를 엿볼 수 있다. 호족은 대체로 군ㆍ현 단위의 최상급 촌주에 해당하는 존재였거니와, 지방사회 구조의 가장 현저한 변화 가 발생한 9세기 격동과 전환 시기의 역사적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9세기 초부터 신라에 流入되기 시작한 禪宗은 흔히 호족불교의 성격을 띠고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九山禪門의 성립사를 연구한 어떤 論者에 의하면 이른바 民의 성장을 배경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선종 또한 민의 성장과 함께, 그리고 민의 힘에 의 해서 세력을 키워갔다고 한다. 다만 농민반란 이후 선종이 王政 및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의탁함으로써 민의 반감을 유발하여 일시적으로 침체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민 되지 58) 59) 57) 58) 朴南守 新羅手工業史 (新書苑, 1996), pp.299-309. 金昌錫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 (일조각, 2004), pp.202-212. - 32 -

란 일반 농민층을 지칭하고 있는데, 이들이 신라 말기에 성장하고 있었다는 견해는 朝鮮 후기 민 의 세력이 꾸준히 성장하여 19세기 反권력 투쟁을 줄기차게 이끌었다는 견해와 軌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의 민중항쟁들은 봉건사회 내부에서 새롭게 성장한 신흥 富民層과 일부 상공업세력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었고, 민중의 절대 다수를 차 지하고 있던 窮民(貧農)들은 이들 농촌 엘리트계층의 야심과 憤懣에 의해서 동원된 병사 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신라 말의 경우도 변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정치 참여의 길이 막혀 있던 지방호족세력이었지 결코 소농민은 아니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후기나 신라 말 변혁운동에 대한 파악은 계급투쟁론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자 렌스키 (Gerhard E. Lenski)가 제시한 지위의 一致ㆍ不一致 에 관한 이론이 보다 적합한 것이 아 닐까 생각한다. 주지하듯이 이 이론에 의하면, 사회적 변동으로 말미암아 上昇한 사람들 은 富를 얻지만 지위와 권력이 이에 隨伴하지 않고, 반면 사회적으로 몰락한 사람들은 지 위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나 富와 권력을 잃고 말아 결국 그 괴리가 불안을, 불안이 분노 를, 그리고 분노가 공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 60) Ⅴ 맺는말 東아시아 국제관계가 크게 안정된 번영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이 같은 국제평화를 基調로 하여 문화의 교류와 국제교역에 눈부신 진전이 있었다. 무엇보다 도 이 시기 韓國 古典文化가 滿開하여 황금시대를 謳歌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국 제평화의 어두운 면도 작용했다. 즉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할 때까지 적에 대항할 필요에 서 국내의 정치적 대립을 최대한 自制하고 緩和시켜 오로지 전쟁의 수행에 모든 노력을 집중시켰다. 그 결과 정치적 대립을 잠재우고 국민통합면에서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 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 장기간의 고난과 긴장된 생활에서 해방되자 그 간 어렵게 봉합되 어 온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모순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통일기의 역 사 속에서 쇠퇴의 징후를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된다. 종래 신라 衰亡의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거론한 것이 귀족ㆍ사찰 ㆍ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와 이로 인한 소농민의 몰락이라는 문제였다. 조정이 889년에 일 신라통일기는 59) 60) 秋萬鎬 나말려초 선종사상사 연구 (이론과 실천, 1992), pp.132-133 및 pp.148-150. 李基東 民衆史學論 現代 韓國史學과 史觀 (翰林科學院叢書 Ⅰ, 1991) ; 전환기의 韓國史學 (일조각, 1999), pp.88-90. - 33 -

농민반란을 初場에 진압하지 못하여 半世紀 간에 걸친 지방호족의 自立 및 후삼국의 동란 끝에 신라가 멸망했으므로, 소농민과 호족의 관계, 나아가 양자의 국가권력과의 모순 을 추구하는 것이 긴요한 연구 과제가 된다고 믿는다. 소농민은 대토지소유제에 포섭된 경 우라도 개별적인 자기경영 방식을 취했으므로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까 닭으로 그들은 국가와 지주로부터 二重의 압박을 받아 窮乏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반면 대토지소유자로서의 호족들은 국가권력과 타협하 여 오히려 그 庇護를 받았으나 骨品제도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胥吏職 이상의 정치참여가 봉쇄되었던 까닭에 조정에 대해 憤懣을 품고 있었다. 流民집단의 형태를 띠고 蜂起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소농민세력은 889년 반란을 일으켜 緖戰에 관군을 격파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지역과 遊離되어 생산집단도 아니었고 더욱이 郡ㆍ縣과 연계를 꾀할 수 있는 정치집단도 아니었으므로, 각지를 떠돌며 약탈 이상의 것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반해 호족들은 조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면서도 지방민에게서 안정 적으로 稅役을 징발함으로써 반란집단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조정이 삼국통일 직후 지방민에게 京位 관등을 부여할 때 王京人에 準하는 참정권을 주지 않은 것이 큰 失策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편 지방호족들이 중앙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 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이 쇠퇴한 데 연유하고 있는 만큼 汎眞骨연합세력이 家系 단위의 族黨으로 분열하여 왕위계승 쟁탈전을 벌임으로써 국가권력을 결정적으로 弱體化 시킨 것도 호족의 성장에 못지 않게 주목되어 마땅하다고 보인다. 어난 - 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