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略하고 특히 下代의 경우 더욱 그러한 만큼 쉽사리 단 정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사실 下代 150여 년간이 비록 정치적으로는 混沌의 시기였다고 하더라도 翰林臺(880년 경 瑞書院으로 改稱) 崇文臺 등 文翰機構가 크게 확대, 강화되던 때였으므로 혹 唐制의 영향을 받아 史舘 및 史官 제도가 채용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또한 三 國史記나 三國遺事 혹은 金石文 자료를 갖고 신라 金氏 始祖의 傳承이 역 사적으로 변천했다는 것을 立證하려고 한 어떤 연구에 의하면, 中古時代의 소위 星漢一奈勿 型 시조전승은 中代 專制王權時代에 이르러 그 왕권 의 偉嚴을 粉飾하기 위하여 소위 閼智一味鄒 型 시조전승으로 변화했 다고 한다. 즉 강력한 시조신화의 확립을 목적으로 奈勿王의 위에 味鄒를, 星漢의 위에 閼智를 각각 溯及, 加上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妥當性 여부는 문제이지만, 어떻든 삼국통일에 의해 그 基盤이 크게 강화 된 中代王權이 780년의 沒落에 이르기까지 백 년 이상의 기간 중에 국사 를 편찬했을 가능성은 큰 것이다. 어떻든 통일신라시대에 官撰史書가 편찬되었다는 確證은 없다. 그러나 한편 이 시기에 개인에 의한 역사서가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고, 이 점은 특히 주목을 요하는 사실이다. 즉 中代 초기의 金 大問과 下代 말기의 崔致遠의 저술이 그것이다. 이들의 역사서도 물론 현 의 기사가 본래 32) 33) 34) 재 남아 있지 않으나 다만 삼국사기에는 이들 저서의 성격이나 혹은 내용 케 하는 것이 비교적 풍부하게 註記로서 인용되어 있다. 이 점은 을 추측 拙稿 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 (歷史學報, 77, 1978, pp.32 49). 33) 麗州 高達寺元宗大師惠眞塔碑는 高麗 光宗 26년(975)에 建立된 것이지만 그 撰者인 金廷彦의 官等 및 官職이 光祿大夫 太丞 翰林學士 內奉令 前禮部使 였던 것으로 보아(朝鮮金石總覽 上, p.207) 이미 고려 參知政事 監修國史 초에 史官제도가 실재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신라 말기 제도의 遺制 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34) 木下禮仁 新羅始租系譜の構成-金氏始祖を中心として- (朝鮮史硏究會論文 集, 2, 1966 pp.42 59). 32) 첨 <자> 첨 </ 자> - 13 -
金大問의 여러 저서의 경우 그러하며, 따라서 최근 李基白씨는 그의 저서의 내용과 史學의 특징, 나아가 그 저술의 사회적, 정치적 배경 등을 논한 전문적인 論文을 발표한 바 있다. 金大問에 대하여는 三國史記(卷46) 薛聰傳 끝에 崔承祐, 崔彥撝 등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특히 35) 金大問, 本新羅貴門子弟, 聖德王三年爲漢山州都督, 作傳記若干卷, 其 高僧傳, 花郎世記, 樂本, 漢山記猶存. <q> </q> 貴族출신으로 聖德王 3년(704)에 漢山州都督 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三國史記(卷40) 職官志(下) 外官 都督條에 의하면 도독은 州의 장관으로 元聖王 元년(785)에 종래 摠管이라 부르던 것을 도 독이라 개칭하였다고 하므로 金大問이 漢山州 장관에 재임할 당시에는 摠 管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시 同 都督條에 의하면, 이 州의 장관에는 級 伐飡으로부터 伊飡까지의 관등 소유자로서 補任하였다고 한다. 이 규정에 는 眞骨출신만이 할 수 있다는 但書는 없으나 실제로 州의 장관은 眞骨만 이 한 듯하며 역시 그는 진골출신이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의 이 小傳에 보이는 그의 저서는 高僧傳, 花郞世記, 樂本, 漢 山記 등 4種이지만, 한편 삼국사기(卷4) 法興王本紀 同 15년(528) 조의 註記에는 그의 저서로 雞林雜傳이 인용되어 있다. 이것을 그의 저서 目錄 에 추가한다면 그의 저서는 모두 5種이 된다. 그러나 이는 현재 우리가 삼국사기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도 내의 것뿐이며, 그의 저서를 總 5種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떻든 그가 8세기 초를 前後한 시 기에 이처럼 數種의 저술을 한 것은 特記할만한 사실임에 틀림없다. 따라 서 일찍이 崔南善씨도 그를 著述家라 한 바 있으며, 최근 李基白씨는 이에 의하면 그는 신라의 36) 35) 36) 李基白 金大問과 그의 史學 (歷史學報, 77, 1978, pp.1 16). 崔南善 著 朝鲜常識問答 總編 第十三 圖書(六堂 崔南善全集, 3, 1973, - 14 -
最大의 歷史家라고 해도 좋을만하다고 하였다. 金大問의 여러 저서 가운데 먼저 주목되는 것이 雞林雜傳이거니와, 삼국사 기 撰者는 신라에 처음 佛敎가 전래되어 마침내 異次頓의 殉敎를 거쳐 그것 이 公認되기까지의 일련의 사실을 이 책에 의해서 쓰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나는 次次雄, 尼師今, 麻立干 등의 초기 王號에 대한 그의 해 설이라는 것도 이 책에서 인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생각할 때, 雞林 雜傳은 신라 역사상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저술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花郞世記는 삼국사기(卷4) 眞興王本紀 同 37년(576) 조에 源花 制의 始末과 花郞의 制定에 대한 일련의 기사 끝에 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이라 하듯 직접 그 一句가 인 용되어 있다. 또한 同(卷47) 金歆運傳 끝의 史論에도 역시 이 귀절이 인 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뒤이어 三代花郞, 無慮二百餘人, 而芳名 라 되어 있는 바 이 傳記는 곧 花郞世記를 가리키는 것 美事, 具如 傳記 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列傳에 오른 金歆運을 비롯한 斯多含(同 卷44), 金令胤(卷47), 官昌(卷47) 등 花郞의 이야기도 이 책에 근거했을 것임이 확실하다 하겠다. 高僧傳은 현재 그 逸文마저 남아 있지 않다. 비록 三國遺事에는 이 책 이 두 번 註記로 인용되어 있으나 이것이 과연 그의 책을 가리키는 것인 지 어떤지는 의문이다. 삼국유사(卷3) 興法 阿道基羅 조에는 阿道和尙 에 대해 기술한 다음 註記로 又高僧傳云, 西竺人, 或云 從吳來 라 하였 거니와, 일찍이 崔南善씨는 이 귀절을 覺訓의 海東高僧傳 기사와 비교, 同 書(卷 1)에 因한 것임이 의심없다고 하였는데, 李基白씨도 이 견해를 지 지하고 있다. 다만 崔南善씨는 삼국유사(卷5) 避隱 信忠掛冠 조에 그를 신라 37) 38) 첨 첨 <자> </자> 39) 40) p.126). 37) 38) 39) 40) 李基白 前揭論文(p.1). 李基白 前揭論文(p.4). 李基白 前揭論文(pp.5 6). 李基白 前揭論文(p.7). - 15 -
高僧傳은 看過하고 말았지만, 同 조에는 別記를 인용하여 景德王代 의 충신인 直長 李俊이 斷俗寺를 짓고 隱退한 이야기를 쓰면서 李俊에 대 해 註記로 高僧傳作 李純 이라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高僧傳이 金大問 의 그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李俊은 50세가 되던 景德王 7년 (748)에 槽淵小寺를 斷俗寺로 改創하였으므로 김대문보다 몇 십 년 뒤의 사람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김대문이 漢山州 장관이 된 것은 704년의 일로, 이보다는 半世紀 정도나 앞서고 있는 것이다. 이 처럼 삼국유사에 보이는 高僧傳이 海東高僧傳을 가리킨다고 해도, 海東高 僧傳 자체가 그의 高僧傳을 참고했을 가능성은 排除할 수 없다. 기타 漢山 記는 그가 漢山州 장관으로 재직했던 인연으로 저술한 地理誌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樂本은 그 책 이름으로 보아 音樂에 관한 책이었을 것이다. 이상 소개한 바 金大問의 저서들이 갖는 특징에 대하여 李基白씨는 다 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즉, 그의 관심은 신라사, 특히 그중에서도 王京 중심, 眞骨 귀족 중심의 역사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서술은 비교적 客觀 性을 띄고 있으면서도 단순한 사실의 설명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사실에 대한 그 자신의 해석이 포함되어 있었던 점이 주목된다는 것이다. 나아 가 씨에 의하면, 김대문이 이처럼 여러 저서를 남긴 것은 신라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에 말미암은 것이며, 한편으로는 眞骨귀족 의 입장에서 그 絕頂에 도달한 국왕의 專制主義에 반대한다는 의식도 내 포되어 있다고 한다. 끝으로, 씨는 김대문이 王室의 이야기보다는 眞骨 귀족이라는 보다 광범한 계층의 역사를 보다 客觀的이고 合理的인 입장에 서 서술하고 해석했다는 점에서 史學史的으로 살펴볼 때 종전의 역사인식 수준에서 일단의 발전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그의 史學을 儒敎史觀 확립 이전 단계에 위치시키고 있다. 보이는 41) 42) 43) 41) 42) 43) 李基白 前揭論文(pp.8 11). 李基白 前揭論文(pp.12 14). 李基白 前揭論文(p.15). - 16 -
주로 李基白씨의 연구에 의존하여 金大問史學의 특징과 그 위치를 알아보았거니와 신라 말 崔致遠史學은 실로 김대문의 그것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對照되는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은 국왕 중심의 改革政治에 密着 해 보려는 六頭品출신이었고, 그 사상적 입장은 신라의 전통을 固守하려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中國(唐)文化의 절대적인 優位를 인정하는 입장이었 으며, 따라서 신라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中國的인 역사 개념에 입각하려 하였다. 崔致遠의 저서에는 四六集 1권, 中山覆簣集 5권, 桂苑筆耕 20권, 기타 詩文集 몇 권이 있어 고려 초에 文集 30권으로 集大成된 것은 다 아는 사 실이거니와 다만 오늘날 桂苑筆耕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전해지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그가 지은 역사서인 帝王年代曆도 이 文集 속에 수록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三國史記 편 찬 당시에 세상에 전해져서 金富軾도 삼국사기(卷4) 智證麻立干本紀 同 元년(500) 조에서 다음과 같이 이 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상 論曰, 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 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q> </q> 치원이 帝王年代曆에서 王이란 칭호가 생기기 이전의 居西干 등 신라 王號를 一律로 王이라 칭한 것을 알 수 있는바, 한편 金富 軾은 이러한 최치원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帝王年代曆에 대해서 이에 의하면, 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이상의 것이 그 전부이다. 이 책은 그 이름 年表類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李基白씨는 최치원이 신라 固有의 王號를 王이라 一括 지칭한 것은 그가 中國的인 지식을 갖고, 즉 唐에서 배운 새로운 槪念을 갖고서 신라의 역사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로 보았다. 나아가 이러한 점에서 그가 金大問과는 對照的인 입장을 취한 역 사가로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김대문의 저술이 中代 專制主義 王權을 다 으로 보아 - 17 -
뒷받침해 주고 있던 儒敎에 대항하여 傳統文化에 대한 認識을 새롭 게 한 것이라면 최치원의 그것은 儒敎的, 中國文化 중심의 입장을 闡明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이러한 씨의 견해에 대해 李佑成씨는 帝王年代 曆이 종전부터 있어 온 신라의 年代記를 정리, 편찬한 것으로 생각했다. 즉, 이것은 우리나라 固有한 것에 바탕을 둔 年代史家的 유작이라는 것이 다. 이처럼 이 책의 성격에 대하여는 異說이 제출되고 있거니와 한편 高柄翊씨는 최치원의 배경이나 그 書名이 帝王인 점에 주목, 이는 中國의 帝와 新羅의 王을 모두 가리킨 것으로서, 그 자체 중국과 신라의 연대기가 아닐까 추측했다. 씨는 그 근거로서 李承休의 帝王韻記에 중국과 우리의 것이 둘 다 취급된 사실을 지적했다. 이러한 씨의 지적은 帝王年代曆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기로서 주목된다 할 것이다. 帝王年代曆의 성격이나 그 저작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저자인 최치원의 生涯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三國史記(卷46)에 수록된 그의 전기 나 桂苑筆耕, 東文選, 金石文資料 등에는 그에 관한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나타나거니와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는 文聖王 19년 憲安王 元년 (857) 慶州 沙梁部에서 출생했고, 12세가 되던 해에 唐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으며, 18세가 되던 874년에는 唐帝國이 외국인을 위해서 실시하던 科 擧 시험인 賓貢科에 합격하여 宣州 漂水縣尉가 되었다. 그후 다시 博學宏 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縣尉를 사직하고 淮南지방에서 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그는 880년 경 黃巢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諸道行營兵馬都统職 에 임명된 淮南節度使 高騈의 從事官이 되어 文筆을 장악하게 된다. 그가 바야흐로 文名을 떨치게 된 討黃巢激文을 지은 것이 881년 여름의 일이었 다. 그는 高都統의 주선으로 承務郞 殿中侍御史 內供奉 紫金魚袋의 官爵을 받았고, 당시 唐 정부의 高位 인사들과도 書信을 통해 교제했다. 이처럼 소간 44) 45) 46) 歷史 前揭書 前揭書 韓國史大討論, 1, 1976, pp.28 29) 44) 우리 를 어떻게 볼 것인가( 45) (p.28). 46) (p.29). - 18 -
활약한 그는 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여 侍讀兼翰林學士 守兵 部侍郎 知瑞書監에 임명되었다. 신라의 翰林學士院인 瑞書院 장관으로 그 의 포부도 컸을 것이며, 또한 일반으로부터 그 활동이 기대되기도 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조국 신라는 바야흐로 大破局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의 귀국 후 몇 해 지나지 않은 889년에 농민 반란이 터지면서 신라는 급격히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국내에는 그의 名聲 을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 그는 大山郡, 富城郡 등 忠淸道 沿海지방의 太守 로 轉轉할 수밖에 없었다. 眞聖女王 8년(894)에 그는 時局의 혼란을 匡正 하기 위한 그의 포부를 담은 時務策 10여 조를 國王에게 올려 阿飡의 高 位 官等을 받기도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또 한 두 차례나 使命을 띠고 唐으로 가려던 그의 노력도 농민반란군의 창궐 로 길이 막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뜻을 얻지 못함을 한탄한 끝에 897년 경 그는 마침내 벼슬을 사직하고 山林 속으로 隱退하고 말았다. 그는 최후 로 거처를 伽耶山 海印寺로 옮기고 兄 賢俊과 定玄師를 道友로 삼아 起居 를 같이 하다가 餘生을 마쳤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에는 晚年의 그의 은퇴 생활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중국에서 嘯詠風月. 逍遙自放, 山林之下, 江海之濱, 營臺樹植松竹, 枕 藉書史 <첨자> <q> 공 요컨대 帝王年代曆은 </첨자> 퇴 활 </q> 이에 의하면 그가 역사 부를 한 것은 이 은 생 중의 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900년을 전후한 시기, 즉 唐의 멸망 눈앞에 둔 暗擔한 시기의 저작일 것으 로 추측된다. 중국의 國學에서 공부하고, 또 거기서 관료생활을 하고, 그 들과 사귀면서 文名까지 날려 同時代 신라의 누구보다도 중국을 잘 이해 하였던 최치원은 中國的인 역사개념을 갖고, 나아가 중국의 역사까지를 포 함시켜 신라의 興亡史를 年代記的으로 摘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끝으로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兩書에 인용되어 있는 古記, 古史, 古傳記, (907)과 조국의 멸망(935)을 바로 - 19 -
古典記, 新羅古記, 海東古記, 新羅傳記 등 소위 古記類, 기타 傳記, 雜著 등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으나, 다만 이들 史書의 성격이나 저자, 편찬연 대 등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이들 古記類가 각각 다른 책인지, 혹은 같 은 책을 異稱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역시 이들을 固有한 書名으로 볼 것인 지, 어떤지도 알 수 없다. 다만 三國史記(卷43) 金庚信傳(下)에 김유신의 玄孫 金長淸 이 김유신의 行錄 10권을 지었다거나, 혹은 三國遺事(卷2) 紀異 後百濟 甄萱 조에 견훤의 家系를 적은 듯한 李磾家記가 인용되 고 있는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귀족들의 傳記類가 널리 편찬된 듯 하다. 이 점은 金大問의 여러 저서를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 만 三國遺事(卷3) 塔像 皇龍寺九層塔 조에 보이는 安弘 撰 東都成立記 에 대하여는 의문이 없지 않다. 이 安弘에 대하여 일찌기 前間恭作씨는 海 東高僧傳의 安含, 崔致遠 撰 義湘傳의 安弘, 경주 興輪寺 十聖 가운데 한 사람인 安弘으로 보면서 眞平王代에 隋에 들어가 佛法을 求하다가 귀국한 安弘(三國史記 卷4 眞興王 37년조 參照) 바로 그 인물로 推定했다. 그러 나 한편 씨는 신라 王都에 東京의 이름을 붙인 것은 9세기 초 憲德王代의 神行碑가 初見이기 때문에 이 책은 安弘法師所撰의 것이 아니라 고려 초 기의 僞作을 安弘에 假托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처럼 東都成立記 에 대하여는 釋然치 않은 점도 있어 이를 고려 이전의 작품으로 단정하기 47) 48) 는 어려운 실정이다. Ⅳ. 結 語 史書類 崔南善 三國遺事解題 啓明 六堂 崔南善全集 引用書 古記 僧傳 鄕歌 크 참 末松保和 古記 古本類 史書 雜著 類 류 三國遺事O經籍關 係記事 靑丘史草 古記類 末松保 和 檢出 三國史記の經籍關係記事 靑丘史草 前間恭作 新羅王の世次とその名について 東洋學報 47) 삼국유사에 보이는 에 대하여는 씨의 (, 18, 1927. 8, 1973, pp.18 43) 가운데 부분이 게 고가 되며, 씨도 이 를 와 로 분 한 바 있다(, 2, 1966, pp.55 59). 한편 삼국사기에 보이는 에 대하여는 역사 씨가 이를 한 바 있다(,2, 1966, p.39). 48), (, 15 2, 1925, p.206). -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