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8F1C2F77EB3A12E687770>
|
|
|
- 소미 도
- 9 years ago
- Views:
Transcription
1
2
3 - 目 次 - 백제 후원영역의 기능 및 역할 5 - 익산 왕궁리유적의 導 水 施 設 을 중심으로 최문정_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日 本 飛 鳥 時 代 の 庭 園 硏 究 の 現 況 と 課 題 23 卜 部 行 弘 _일본 카시하라고고학연구소 백제사찰의 구성요소와 부속건물지 35 한나래_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7 世 紀 における 日 本 の 古 代 寺 院 53 大 林 潤 _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 삼국시대 벽구조 건물에 대한 고찰 75 조은경_국립문화재연구소 隋 唐 時 期 佛 敎 寺 院 槪 覽 85 王 貴 祥 _중국 청화대학교 백제 사비기 사찰과 도성의 관계 147 민경선_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비기 기와 생산시설과 생산체계 165 문옥현_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3 -
4
5 백제 후원영역의 기능 및 역할 -익산 왕궁리유적 도수시설( 導 水 施 設 )을 중심으로- 최문정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Ⅰ. 머리말 Ⅱ. 도수시설( 導 水 施 設 ) 조사 현황 1. 환수구( 環 水 構 ) 2. 곡수로( 曲 水 路 ) 3. 배수시설( 排 水 施 設 ) Ⅲ. 도수시설의 기능 및 역할 1. 각 시설간의 관계 및 기능 2. 후원영역의 역할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정원( 庭 園 )은 흙 돌 물 나무 등의 자연재료와 인공물 및 건축물에 의해 미적이고 기능 적으로 구성된 특정한 구역을 말하는데, 그 구성 요소로는 계단, 담과 울타리, 테라스, 벤치, 잔디와 지피류, 조명, 조각, 기타 장식품 등이 있다(두산백과사전). 정원은 古 代 부터 도성과 궁궐 내, 사원, 읍성, 민가 등 다양한 곳에 여러 형태로 조성되어왔다. 후원( 後 苑 )은 외조( 外 朝 ) 혹은 전조( 前 朝 ), 내조( 內 朝 ) 및 후궁구( 後 宮 區 ) 혹은 후침( 後 寢 )과 함께 고대 궁성( 宮 城 )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이며(박순발 2010), 중국 고대 왕조의 전 조후침( 前 朝 後 寢 )의 예제를 따라 궁궐의 뒤쪽에 위치하게 한다( 龔 國 强 2009). 현재 중국에 서 주로 원림( 園 林 )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과도 일정 부분 통하고 있다고 생각되 며 원림 내에는 정원, 원지( 苑 池 )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박경자ᆞ양병이 2000; 전용호 2009)
6 정원 후원 등의 축조에서 공통적인 것은,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조경의 경관을 구성 하는 주요한 요소로 물 이 이용된다는 것이며, 정원의 조경은 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건축공간이나 조경공간에서 도입된 물은 단순히 물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상징적인 경관을 조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져 왔다 는 사실은 전통조경공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수경관조성( 水 景 觀 造 成 )의 사례에서 확인해 왔다(권태철 1998).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조사되어진 정원유구 및 후원영역에서 현재까지 조사된 유구들 또한 모두 물의 이용과 큰 관련을 가진다. 정원유구는 동서석축4의 동편의 남측에서 확인되었는 데 대형건물지를 비롯한 다수의 건물지들이 밀집해 있는 전각구역과 구릉 뒤 편 후원영역과 경계를 이 루는 지점에 축조된 것으 로 볼 수 있다. 왕궁리유적 의 정원유구는 거의 전면 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크게 중심시설과 주변시설 로 구분된다. 화려한 괴석 등으로 조성된 중심부와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 수 량을 공급하고 조절하기 위한 소조시설, 암거시설, 출입시설, 전각건물 등의 주변시설로 나누어 볼 수 있게 되었다(국립부여문화 재연구소, 2010). 정원유 구는 정원 중심시설, 집수 시설, 출수 입수시설, 암거 시설 등 다양한 方 池 양식 의 구조물들에 의하여 정 교하게 물의 흐름이 구연 되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특히 물이 부족한 여건 하에 용수를 효율적 으로 활용하면서 조경을 고려하였는데 물을 모아서 <도면 1> 익산 왕궁리유적 공간 구획 일정 높이에서 물을 중심 부로 유입시키며 수량을 조절하였고, 암거시설로 물을 출수부로 이어지도록 유수체계를 구 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외부에서 정원으로 들어오는 물의 경로가 雨 水 외 의 다른 안정적인 수원지가 조사되지 않았다. 후원영역이라 분류하고 있는 공간인 동북측 - 6 -
7 구릉부 역시 물과 관련된 도수시설(導水施設)들이 다수 조사되어졌고 현재까지 건물지 1~2 개소를 제외하면 후원영역 전체가 물을 이용, 활용하는 유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후원영역의 곡수로(曲水路), 환수구(環水構) 등의 유구가 조사되어지면서 정원 관련 시설 들에 곡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하였을 가능성과 남조에서 유래한 유상곡수연의 가능성(김낙 중 2010), 환수구의 용수공급, 조경역할 등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언급되었다(김낙중, 2009;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이러한 후원영역에서 최근 조사되어진 각 수로(水路) 의 성격, 현황 등을 살펴보고 물의 흐름을 통해 후원영역의 기능과 역할을 복원해보고자 한 다. Ⅱ. 도수시설(導水施設) 조사 현황 도수(導水)는 물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는 물길 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진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서편 환수구의 일부가 처음 발굴되었을 때, 도수시설로 명명 하였으며(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김낙중(2011)은 물을 모아 전각구역 혹은 동남 쪽 조경공간으로 보내는 것을 주요한 역할로 생각하여 해당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도수시설은 일본의 고대정원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인데, 주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시설의 하나로 보고 있다. 정원유구 내에서 물을 모으고, 물을 흘려보내는 장치1)이며 제사와 관련된 행위가 이루어진 장소2)로의 가능성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다(奈良文化財 硏究所 2006). 왕궁리유적의 후원영역 내에서 조사되어진 환수구(環水構), 곡수로(曲水路) 등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물길을 유도하기 위한 인위적인 축조시설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를 모두 포함하여 물을 흘려보내는 시설 및 장치를 도수시설 로 통칭하고자 한 다.3) 왕궁리유적의 후원영역에서 물과 관련된 도수시설인 환수구(環水構) 곡수로(曲水路) 기타 배수시설(排水施設)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환수구(環水構) 환수구는 2009년 구릉 서사면에서 처음 조사되었다. 곡수로1과 2사이를 지나며 궁성 전 각구역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시설로 보아 도수시설로 명명하였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 소 2009). 이후 2010년 북성벽과 북-동성벽 내측에 둥글게 말각형으로 돌려져 있는 형태 로 확인되었다. 2009년 조사부분과 연결되는 유구로 판단됨에 따라, 왕궁리유적의 후원영 역에서 큰 경계가 되는 시설로서 환수구라는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하게 되었다.4) 이후 구 1) 사카후네이시유적(酒船石遺跡) 미야노마에유적(宮ノ前遺跡) 난고우오오히가시유적(南鄕大東遺跡) 헤이 죠궁(平城宮) 사쿄우산죠니보우 12평(左京三条二坊十二坪) 등 2) 미야노마에유적(宮ノ前遺跡) 등 3) 앞서 언급하였듯이, 인위적인 의도가 포함된 물길 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제사 혹은 그와 관련된 행위에 대한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4) 이 용어는 적이나 맹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거나 일정한 장소를 외부와 분리시키는 상징적인 의미 를 가진 공간인 환호(環豪)와 성벽 내부의 물을 배수하면서 이용하기 위한 용도를 포함하는 수구 (水構)라는 용어를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실제로 중국에서도 한 나라 장안성의 남쪽 외곽의 예제건축인명당(明堂)의 위장(圍牆) 외부에 있는 둥근 수구를 환수구 - 7 -
8 릉 동사면에서도 북성벽 쪽의 환수구와 이어질 것으로 추정되는 환수구가 연결되어 조사되 었고 환수구에서 시작하여 동성벽을 관통하여 지나는 암거시설을 포함한 배수시설이 조사되 기도 하였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2012년도 상반기 조사에서는 이미 확인되었던 서사면의 남북방향 환수구의 내부 정밀조사를 실시하였고, 북쪽으로 연장되는 구간에서는 서성벽 방면으로 ᅥ 자형을 이루며 갈라지는 별도의 출수구도 새로이 확인하였다(국립부 여문화재연구소 2012). 환수구의 바닥면은 원 지층인 역석층을 일부 정지하여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사진4) 환수구의 단면은 기본적으로 완만한 U'자형이며(사진1,3) 구간에 따라 바닥이 완만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조성된 곳도 있다(사진2). 바닥면에는 흑갈색점질토가 얇게 퇴적되어 있고 (사진6), 기와 및 토기편이 일부 수습되었다. 환수구 내부의 곳곳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 의 석재들이 주로 환수구의 경계부 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치석( 治 石 )되지 않은 돌들이 정 형성 없이 노출되었다(사진2). 구릉 서편의 서측 환수구의 시작부는 2009년 처음 확인, 조사되었다. 당시 석축도수로 (도수시설1-1)와 생토도수로(도수시설1)로 보고된 구간이 환수구로서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2012년 조사에서 내부 정밀조사와 더불어 북쪽으로 진행되는 양상을 조사하였다. 환수구의 폭은 약 3.8m, 잔존 깊이는 50~85cm 정도를 이루고 있다. 서편 환수구의 단면 은 북편, 동편의 환수구에 비해 바닥면이 직선적이다. 북측, 동측 환수구는 각각 북성벽, 동 성벽과 나란히 조성되었다. 북측 환수구는 동 서 모서리가 말각 형태로 휘어져 있어 각각 서, 동측에서 북측으로 뻗어오는 환수구의 전체적인 형태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동서너 비가 약 71m이며 폭은 약 2.4m, 깊이는 1~1.6m정도로 깊었다. 동측 환수구는 시작되는 지점에 (장)방형의 석재를 환수구의 폭만큼 2단 이상 쌓았다(사진4,5). 이 석축시설은 환수 구와 말각장방형시설 사이의 판축시설과 맞닿아 있다. 판축된 이음부와 연결되는 석축 뒤편 의 뒷채움석 및 점질토 보강 시설은 환수구 석축을 지지하는 역할과 물이 지면으로 스며들 지 않도록 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환수구가 시작되는 구간은 환수구 안쪽으로 물이 흘러 내리도록 바닥을 경사지게 처리하였고 이 부분의 바닥은 고운 마사토로 덮여 있으며, 물에 의해 생긴 흑갈색토가 일부 확인된다. 석축의 북편에 괴석 1매가 노출되었는데, 후원 공간 내에 조경의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이 집수되는 환수구 시작부의 가장 낮은 레벨의 지점에서 특별한 돋움시설 없이 자연 자갈면 위에 그대로 놓인 점, 그리 고 환수구 석축보다 낮은 면에 설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괴석의 원래 위치는 주변의 다른 곳으로 추정된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라고 지칭하고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05) - 8 -
9 <사진 1> 북측 환수구 단면(서에서) <사진 2> 서측 환수구 단면(남에서) <사진 3> 동측 환수구 단면(북에서) <사진 4> 동측 환수구 시작부(북에서) <사진 5> 동측 환수구 시작부 석축 및 괴석 <사진 6> 동성벽 환수구 조사 전(북에서) - 9 -
10 <도면2> 년도 후원영역 내 환수구 조사현황 현재까지 조사된 환수구의 양상을 살펴보면 폭은 대략 2.5m~3.5m 정도이며, 양측에는 다양한 크기, 형태의 석재가 부정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유구의 경계부에 근접하게 석재 들이 산재되어 있고 원 위치에서 이탈, 이동되었다고 추정되나, 현재의 양상만으로는 열석 ( 列 石 )으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환수구의 깊이는 구간마다 차이가 있는데, 특히 북측은 최 대 1.6m, 서측은 최대 85cm이다. 이후 내부조사가 완료된 후, 환수구의 깊이 차이와 각 구 간별 기능과의 관련성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곡수로( 曲 水 路 ) 곡수로는 2009년 구릉 서사면에서 조사된 구불구불한 수로를 직선형태의 수로에 대한 상 대적인 개념으로 명명하였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정원 북편의 구릉 정상부에서 서 남쪽의 경사면을 따라 곡수로1 2와 두 수로를 동서방향으로 연결하는 곡수로3 4 및 집수 시설들을 확인하였고, 2010년에는 곡수로5 6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2009년 확인되었던 곡 수로1 2가 북쪽으로 연결되는 양상이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년에 유 구 확인과 부분적인 트렌치조사만 이루어졌던 곡수로의 내부를 최근 전면적으로 조사하였는 데, 이를 통해 곡수로의 축조상태 확인 및 바닥깊이를 통한 물의 흐름 방향, 바닥면시설(자 갈돌)의 유무 확인 등을 확인하였다. 곡수로의 바닥과 벽면은 부분적으로 원 지반인 역석층 을 굴착한 뒤 정지하여 조성한 구간도 있지만, 대부분이 생토면을 U자 혹은 V자형으로 굴 광하고 특별한 시설 혹은 보강 없이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가는 모래가 다량 혼입된 갈색 사질점토가 확인되었다
11 곡수로1은 서측 환수구의 동편인 구릉 정상부 가까이에 조성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현 재까지 끝부분이 확인되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L"자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바닥면 바로 위에 비교적 굵은 모래가 퇴적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곡수로의 동서방향 구간에서는 중간 지점에서 각각 동 서로 물이 흘러가는 것으로 바닥 레벨을 통해 확인하였다. 남북방향으로 이어지 곡수로1에서의 물의 방향도 한쪽으로 일정한 것이 아니라 N25E3지점과 그 30여 m 아래의 N21E3지점에서 각각 남쪽과 북쪽으로 레벨이 낮아지는 것을 확인하였다(도면 3). 곡수로2는 환수구 서편 경사면에 조성되어 있으며, 2009년 조사된 최남단에서 북쪽으 로 약 80m 정도 조사되었다. 곡수로2는 곡수로3을 통해 곡수로1과 이어져 있다. 곡수로2 에서도 곡수로1과 같이 N23E0지점을 중심으로 바닥레벨이 남 북 양쪽으로 모두 낮아지는 양상이 확인되었다. 곡수로2는 N25E1지점에서 동서방향의 환수구(출수구)와 접하는데, 토 층조사 결과 환수구의 내부가 퇴적된 후에 그 면을 굴광하고 곡수로를 설치한 것으로 보이 는 토층의 중복관계가 조사되었다. 곡수로3은 곡수로1과 2를 동서방향으로 연결하는 역할 을 하며 그 사이에 위치한 환수구를 통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중 환수구 동쪽과 접하 는 지점(N20E1)에서도 역시 토층 상의 중복관계가 확인된다. 곡수로5는 곡수로1과 접하는 부분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향하는데, 다른 동서방향의 곡수로와는 달리 호선을 그리며 물 길이 조성되어 내려가다, N24E2지점에서 환수구와 만난다. 역시 곡수로2, 3과 환수구 접점 의 경우와 동일한 양상의 중복관계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를 통해, 환수구와 곡수로가 만나는 위의 세 지점은 환수구의 내부가 퇴적된 후, 그 면을 굴광하고 곡수로가 설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곡수로의 전 구간이 환수 구와 동시기성을 가진 후원 영역의 배수체계라고는 단정할 수 없으며, 곡수로 간의 시기 차 환수구와 곡수로의 시기차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곡수로 내부조사를 통해 물의 흐름이 북 남으로 일정한 것이 아니라 각 구간마다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12 <도면3> 후원 영역 내 곡수로 및 서측 환수구 현황 및 해발고도 <사진7> 곡수로 바닥면 노출현황 <사진8> V자형 곡수로 단면(서에서) <사진9> 환수구 곡수로5 중복관계(N25E2,북에서) <사진10> 환수구 곡수로3 중복관계(N21E1,남에서)
13 3. 배수시설( 排 水 施 設 ) 환수구와 직교하는 방향으로 동-서측 동일한 지점에서 배수시설이 조사되었다. 서편 환수구 남 쪽 경계에서 약 60m 떨어진 지점에서 서성벽 쪽 을 향하여 환수구가 갈라지는 구간이 확인되었고, 동편 환수구에서는 환수구의 시작지점에서 북쪽으 로 39m지점에서는 환수구의 물을 성 밖으로 배 출하기 위한 동서방향의 배수시설이 확인되었다. 이 두 배수시설 모두 환수구와 연결되어 직교하는 방향으로 축조되었다. 동편 환수구에서 이어지는 배수시설은 환수구에 서 성벽까지의 입수부, 성벽 하부를 관통하는 암거 구간, 성벽 바깥으로 연결된 출수부로 구성되어 있 다. 입수부는 환수구 동쪽의 경사면 바닥을 환수구 와 직교하게 1.2m 폭으로 굴착하여 설치하였으며, 별도의 석재 사용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단면 <도면 4> 왕궁리유적 배수시설 위치 U자형으로 굴착한 뒤 점토를 피복한 것으로 조사 되었다(사진11,12). 암거구간과 출수부는 성벽을 관통하는 다른 배수구들과 유사하다. <사진 11> 암거시설 입수부(서에서) <사진 12> 암거시설 입수부단면(동에서) <사진13> 동편 암거시설 전경(항공사진) <사진14> 동편 암거시설 연결부(동에서)
14 서측 환수구에서는 남북방향으로 진행하는 환수구의 N25E1지점에서 서성벽 쪽으로 물길 이 연결되면서 평면 'ᅥ'자형의 접속구간을 이룬다. 환수구와의 접속구간에서 서쪽 아래로 연결되는 출수구 부분은 기존 환수구 바닥면의 중앙부를 단면 U 자상으로 깊고 오목하게 재굴착하여 물이 서쪽으로 잘 흐르도록 처리하였다. 출수구의 바닥과 벽면은 남북방향의 환 수구와 유사하게 원 지층인 역석층을 굴착한 뒤 정지한 부분도 일부 확인된다. 남북방향의 환수구가 단면 역사다리꼴로 굴광하여 바닥면을 비교적 편평하게 조성한 것에 비해, 접속지 점부터 서쪽으로 향하는 환수구(출수구)는 단면형태가 'U'자상으로 급격하게 깊어지며 폭도 넓어지는 양상을 보인다(사진17). 출수구는 생토를 거의 수직에 가깝게 굴착하였으며 시작지점의 경우 너비 460cm, 깊이 120cm 가량이며 최대 너비 550cm, 깊이 180cm를 이루다가 서사면 아래로 향하며 그 규 모가 줄어드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부분적인 트렌치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는 접속지점부 터 서쪽으로 약 50m 떨어진 동서방향의 도수로(2004년 조사)와 연결될 것으로 보이며, 최 종적으로는 서성벽의 암거시설로 접속되는 석축배수로(2004년 조사)와 이어질 것으로 추정 된다. <사진15> 환수구 접속구간(남서에서) <사진16> 환수구(출수구) 세부전경 (항공사진) <사진17> 서편 출수구 단면 토층(서에서) <사진18> 출수구-도수로(2004년조사)연결부 왕궁리유적에서 성벽 밖으로 이어지는 배수시설은 현재까지 모두 5기가 조사되었다. 서성 벽 북측의 수구가 조사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4기는 각각 동일선상의 대칭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환수구와 관련된 2기 배수시설은 환수구의 기능이 물을 저장하거나, 조경을 위해 항상 물을 채워두는 등의 기능보다는 왕궁리유적 후원영역에서 모여진 물을 성 밖으로 배수하는 역할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5 <사진19> 후원 영역 서편 내 곡수로 및 환수구 Ⅲ. 도수시설의 기능 및 역할 1. 각 시설간의 관계 및 기능 후원영역의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가 밀집되어진 동서석축4의 남측 전각구역과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건물지의 수는 극히 적으며 곡수로와 환수구 등 도수시설들이 밀집 하고 있으며 이러한 도수시설 가운데 괴석 등의 조경을 위한 시설을 배치하고 있다. 환수구는 후원영역에서 가장 큰 도수시설이며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환수구는 다 른 도수시설을 설치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환수구는 아직 전체 조사가 끝나 지 않았으므로 그 기능에 대해 몇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었는데, 궁성 전각건물과 서북편 공 방구역에 용수를 공급하는 기능(김낙중 2011), 후원영역 전체의 치수( 治 水 )의 기능(국립부 여문화재연구소 2010) 및 물의 저수, 운반(정원, 전각구역 등), 경관조성의 복합적 기능(전 용호 2011)등이 있다. 이러한 가능성과 함께 후원영역은 중국의 원림( 園 林 )과의 유사성을 이유로 중국 남조시대, 일본 나라시대의 정원과 비교되기도 하였고, 구릉 정상부를 포함한 북편영역은 확실히 물을 매개로 하는 시설들이 다채롭게 조성되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현 재까지의 조사로 보아 환수구는 북측 환수구의 말각 모서리가 조사되었을 때 추정했던 것과 같이 크게는 ' ' 형태이며, 후원영역 전체를 경계짓는 중심적 유구임이 확실시 되고 있다. 그러나 언급되었던 용수공급, 치수, 저수, 경관조성이라는 역할 모두 가능성이 있지만, 발굴 조사성과를 근거로 한 각각의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과 내용 구명이 요구되어 진다. 먼저, 환수구와 연결된 양측의 배수시설은 환수구의 물( 水 量 )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던
16 것으로 추정된다. 동측 환수구 위에 동서방향으로 설치된 배수시설은 환수구의 자갈층을 굴 착하고 조성되었으며, 환수구 내부에 일정 높이의 물이 차 올랐을 때 배수시설로 빠져나가 도록 되어 있다. 서측은 석축시설 없이 생토면을 굴착하여 조성하였고, 배수시설의 깊이가 훨씬 깊으며 폭이 넓다. 환수구와 배수시설의 연결지점에서도 동측은 1.2m의 폭으로 낮게 굴착한 것에 비해 서측은 배수로 쪽을 향해 급격히 경사지게 조성되어진 점 등 양측에도 차 이를 보인다. 이는 서사면이 동사면에 비해 구릉 정사부에서 환수구까지의 면적이 더 넓고, 경사가 더 크기 때문에 그에 따른 유량이 많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이를 통해 후원영역의 물을 배수시설을 통해 성벽 밖으로 빼내는 환수구의 치수기능을 확인할 수 있 다. 이후, 후원영역 전체적인 치수, 배수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조사지역인 북성벽 쪽과 함께 별도의 배수시설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환수구의 바닥면 레벨 측정 과 함께 별도의 배수시설 존재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북측 환수구는 왕궁리유적의 자 연 구릉상 현재 환수구 배수로의 위치보다 저지대에 해당하고 북측 환수구의 깊이가 가장 깊으므로 전체적인 물의 배수 및 이동이 양측 배수시설로 향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서측 환수구 북편에 위치하고 있는 괴석이 밀집되어진 공간으로 환수구가 동쪽으로 휘 어져 들어가는 등의 양상이 노출되었는데 조경을 위한 공간이라 추정한다면 적어도 이 부분 에서는 효과적인 배수 보다 물을 이동시키고, 조경을 위한 담수, 저수 등을 통해 안정적이 고 일정한 수량 확보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해당 공간이 후원 영역에서 의 중요한 조경시설로 가정한다면, 수량의 과도한 유입 혹은 피해를 막기 위해서 서성벽으 로 향하는 배수시설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치수의 기능 뿐 아니라 조 경시설의 유지 및 관리를 위한 복합적인 기능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은 환수구와 곡수로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고대 한일 정원은 지역적, 시기적으 로 일반성과 특수성을 가지며 이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김낙중 2011). 그리고 백제 의 대표적인 패턴인 방형의 연지에서, 통일 신라가 되는 이후 시기로 가면서 곡지가 되는, 즉 방형의 연지에서 곡지로 변해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 되고 있다. 이는 왕궁리유적의 정 원유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백제의 방지 패턴이 적용되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면5> 國 유배거 도면 <도면6> 風 유배거 도면 그러다 처음 곡수로가 조사되었을 당시, 중국 동진( 東 晋 ) 남조시대와 일본 평성궁 동원정원 과 비교하며 백제 왕궁에서의 유상곡수연이 행해진 장소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곡수로의 기능 은 고대의 곡수연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곡수연의 기원은 고대 중국에 있으며 원래 자연하천에서 행해지는 목욕재계와 관련된 행사였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송대( 宋 代 )의 건축 기술서인 營 造 法 式 5) 에는 유배거( 流 盃 渠 )에 관한 기술이 있는데 전체 크기(4.5m), 구 ( 構 )의 폭(30.3cm), 깊이(27cm)로 구조가 기재되어 있는데 평면은 風, 國 자와 유사하다고
17 기술한다. 유배거의 기능에 대한 서술은 없으므로 곡수연을 위한 시설이라 단정할 수는 없 지만 명칭을 통해 잔을 물에 흘려보냈다는 의미이므로 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즉 이 러한 이유로 왕궁리유적은 방형과 곡지형의 연지가 공존하는 독특한 양식의 정원이며 방지 에서 곡지로 변화는 과도기적 양상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왕궁리유적의 곡수로가 백제의 후원 시설의 하나로써 그 내부에서 실제 유상곡수가 이루어 졌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몇 가지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적인 문제제기 중 하나였던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원( 水 源 )의 유무를 차치하고라도, 환수구와 곡 수로가 만나는 지점의 조사를 통해 곡수로의 시기가 환수구와 모두 동시기로 추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환수구의 내부와 바닥시설에서 출토되는 백제 토기, 수막새 의 출토 양상, 성벽과 환수구와의 축조 층위 및 관계를 통해 볼 때, 백제시대의 유구라고 판단되는 환수구가 기능을 상실하고 내부에 퇴적이 이루어진 뒤, 다시 곡수로의 축조가 이 루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두 유구간의 시기차의 정도가 짧다고 하더라도 분명 동시기에 존재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곡수로 자체의 축조 상태를 보았을 때, 營 造 法 式 의 기술이 비록 송나라로 왕궁리유적의 조영보다 시기가 늦지만, 말 그대로 잔( 盃 )이 흘러 도착하게 하는 도랑( 渠 )이 가장 효율적으로 축조되는 통상적인 방법이라 생각할 수 있 다. 그러나 왕궁리유적의 곡수로는 폭 30.3cm, 깊이 27cm에서 크게 벗어나며 잔을 흘려보 내기에 각 곡수로가 일정하지 않고, 너무 깊고 넓게 조성된 구간이 많다. 곡수거의 전체적 인 크기는 유상곡수연에 참가하는 사람들, 조성 계획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기능 적으로 술잔과 물이 완만하게 흐르도록 하는 경사도(1.3~6.0%)에 따라 유속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심상섭 1997). 또 곡수로 내부의 레벨차이를 통해 볼 때, 물의 흐름이 여러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오히려 물의 흐름을 늦추는 등의 유속을 조절하는 기능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곡수로가 환수구와 같이 유속 조절하고 치수하는 등의 기능을 주로 하였다면 환수구의 기능이 폐기된 후, 필요성을 위해 비슷한 지역에 환수구의 방향, 위치등과 동일하게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환수구는 현재 가장 북측에서 말각형으로 조성된 구간과 동, 서쪽에서 시작되어져 만나는 중간지점의 조사만을 남겨 두고 있다. 환수구의 기능은 후원영역을 조경하기 위해 물을 담 아두는 수조의 역할이라는 단편적인 의미부여에서 벗어나 왕궁성을 운영하기 위한 가장 주 요한 배수체계의 治 水 시설이며, 구간별로 조성 입지, 위치에 따라 저수, 조경 등의 기능도 함께 하도록 조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곡수로는 현재까지 추정되어 왔던 연회를 위한 유상곡수연의 기능보다는 도수시설로써의 배수기능이 더욱 적절하다고 판 단된다. 현재 곡수로1은 환수구와의 중복관계룰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곡수로와 동일 한 시기로 볼 것인지, 환수구와 동시기 조성 여부는 미조사구간에 대한 조사를 통해 밝혀질 것으로 생각한다. 조사되어진 각 도수시설 간의 관계 및 기능에 대한 초보적인 검토를 해보았다. 추후 조사 에서 전체 형태가 복원이 되고 각 도수시설 간 중복관계 및 정확한 레벨 측정을 통해 바닥 면의 높이를 복원하여 물의 흐름을 파악할 경우 의미있는 결과가 도출될 것으로 생각된다. 5) 북송의 원부( 元 符 ) 3년(1100)에 이명중이 편찬한 건축기술서로 자세한 시간, 방법, 재료등에 대한 서술이 상석하게 기술되어 있다
18 2. 후원영역의 역할 왕궁리유적에서는 정원유구와 후원영역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백제의 정원 혹은 후원이 조사된 예는 처음이며, 따라서 고대 궁내원(宮內苑)으로서의 정원, 후원의 역할을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고대의 조경시설은 원지(園池)로 대표되며 중국에서 발달한 조 원(造園)에 대한 사상적인 배경 및 조성 방법6)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그에 따라 원지 내에 三山을 상징하는 중도(中島)를 설계하고 경석, 괴석 등을 설치하였으며 교각, 누각등 을 주변에 배치하였다. 6~7세기의 중국 궁중 원림의 설계사상은 도가사상이 주도하였고 위 에 언급한 삼산은 일지삼산(一池三山:봉래(蓬萊) 영주(瀛州) 방호(方壺) 혹은 방장(方丈)의 도가 원림 설계사상을 따르고 제왕들의 신선으로의 혹은 장수의 바램을 만족시키고자 하였 다(龔國强 2009)). 이것은 三國史記 百濟本紀 에서 634년(무왕 35) 춘3월조에 나 타난 [연못을 궁남에 파고 물을 20여 리에서 끌어들였으며 못의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 고 못 속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였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 서도 삼신산을 조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대 백제 역시 중국의 도가사상을 반 영한 궁원지 및 원지를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왕(특정개인) 혹은 왕족(특정집단) 의 공간으로서 향연, 유흥, 감상 뿐 아니라 왕이 필요로 하는 과실 등을 생산, 진귀한 동물, 새 등의 사육이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간은 전술한 역할 뿐 아니라 왕이 점 유하는 폐쇄적인 공간에 신선(혹은 불교)사상으로 원하는 세계상을 꾸미며 점유한다는 상징 적인 역할도 더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적인 사상, 배경 아래에서 백제, 신라, 중국, 일본 은 각기 고유성을 가지며 각국의 궁원지 혹은 원지를 축조하였다. 또한 당시의 국제관계에 따라 영향관계도 정원, 후원 영역 등을 축조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왕궁리유적의 후원영역에서도 기왕에 조사되어진 신라, 통일신라, 일본, 중국의 유적들과 는 차이점이 보인다. 가장 큰 차이점은, 왕궁리유적의 후원 영역에는 정원의 중심시설, 수조 시설 등을 제외하고, 물을 가두어 두고 조경하는 큰 중심시설로서의 원지가 아직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동 시대의 다른 원지, 후원과는 다른 양상이다. 물론 궁내원으로서 경 관 관상용으로써의 역할은 앞서 조사가 완료된 정원유구 및 환수구 내외에 괴석의 설치, 정 연한 시석의 석축단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조사성과를 통해 볼 때는, 왕궁성의 후원 영역은 연회용, 유흥의 장소로서의 결과는 적은 편이며, 곡수로를 통한 유상 곡수연 등의 놀이 혹은 제의의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한 역할보다 기능적인 측면 즉, 왕 궁성 경영을 위한 배수, 치수의 역할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다고 생각된다. 물론 환수구는 치수라는 단일 기능보다는 동편 환수구 시작부의 괴석 배치, 서측 환수구의 조경석 등 감상 을 위한 조경적인 역할7), 조경을 위한 장소에 물을 이동시키는 역할, 또한 안정적인 수원 확보를 위한 저장시설 등의 복합적인 역할을 각 구간별로 입지와 위치, 주변 시설 조성에 따라 달리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 민묘의 이장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원 북편, 즉 환수구 서편 시작부에 미조사 구간이 남아있고, 서측 환수구 서편에서 노출된 자갈돌이 넓 게 펼쳐진 구간과 그 서편에 2012년 환수구 구간 주변 정리를 통해 노출된 치석되어진 2 단 정도의 석축렬의 관계, 서측 환수구가 꺾어져 들어가는 괴석 밀집 구간 등은 후원영역의 6) 周禮, 考工記 의 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7) 환수구 중간부에 괴석을 10기 이상 배치한 공간이 조사되었다. 물이 고였을 것으로 추정된 퇴적양 상과 환수구의 물길이 급격히 안쪽으로 꺾어지는 양상과 함께 노출되어 후원영역의 환수구의 조경 과 관련한 기능을 증명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19 또 다른 역할, 기능 등이 드러나는 주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제대로 조사되 지 않은 생산관련시설과 후원 영역 사이의 공간의 결과에 따라, 서측 환수구에서 배수시설 로 빠져나가는 물의 또 다른 이용처 혹은 배수방향 등이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사되지 않은 서편 환수구가 시작되는 서쪽 공간에서 이후 조사 결과를 통해 각 구간별 물 의 흐름과 기능 등에 따라 후원영역의 역할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경을 위한 공 간의 조사 이후 그 경관을 위해 가장 조화로운 시점이 모여지는 곳 즉 조망경관이 가장 양 호한 지역에 관련된 중심 건물지 및 도수시설 외의 구성요소에 대한 조사 및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Ⅳ. 맺음말 익산 왕궁성의 후원에 대한 조사를 통해 후원을 구성하는 시설들과 종류, 배치, 기능 등 을 알 수 있게 되었고, 백제 왕궁의 후원에 대한 연구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향후 후원영 역의 북편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마무리 된다면 전반에 걸친 연구가 기대된다. 정원유구의 조사로 인해 정원 중심시설, 집수시설, 출수 입수시설, 암거시설 등 다양한 方 池 양식의 구조물들에 의하여 정교하게 물의 흐름이 구연되어진 백제 정원의 양식을 확인하 였다. 백제 정원유구 북편의 구릉지대에는 후원영역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고대 왕 조의 전조후침( 前 朝 後 寢 )의 예제를 따라 궁궐의 뒤쪽에 위치하게 하는 일반적인 궁의 후원 배치와 일치한다. 하지만 후원영역 내부 구조 및 시설 조성은 오락, 연회를 중심으로 하여 사냥, 재배(약초 등)의 공간으로 전용하는 중국 원림, 후원에서 보다는 배수 치수등의 기능 적인 측면이 반영되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조사된 주요 시설은 환수구, 곡수 로, 배수시설 등 물과 관련된 도수시설이며 특히 환수구는 물의 흐름에 따라 치수의 역할이 확인 되었으며, 북편의 조사 성과에 따라 담수, 관상(경관)을 위한 공간과 그에 관련된 교 각, 누각 등의 시설도 추가적으로 조사될 것이라 기대된다. 현재 왕궁리유적 후원영역에서 조사된 환수구는 다른 도수시설과 연계되어 치수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조사되지 않은 서편 환수구가 시작되는 서 쪽 공간에서 더불어, 물을 가두어 모으고 부분적으로 조경을 위한 공간을 조성하였던 것으 로 생각된다. 후원영역 조사 초반에 환수구 및 곡수로의 기능 중 전각구역과 공방지로의 용 수공급의 가능성은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서편 환수구에 서 서성벽에 설치된 동서석축배수로를 향해 나 있는 도수시설과 그 주변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질 수 있다. 후원 영역의 연회와 유흥을 위한 장소로써 가능성이 언급되었던 곡수로에 대한 조사를 완 료한 후, 전체적인 양상과 중복관계 및 토층양상 살펴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조사양상 을 통해서 볼 때, 곡수로1을 제외한 5개의 곡수로는 환수구와 곡수로, 혹은 곡수로 끼리의 중복관계를 통해 환수구와 동일한 시기에 조성, 운영된 것이 아니라, 일정 시기차를 가지고 환수구의 기능이 폐기된 후에 그 위에 다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곡수로의 기능은 환수 구가 폐기된 후, 후원영역의 치수를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유상곡수연을 위한 시설로 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후, 후원 영역에 대한 현재까지의 조사성과와 함께 조사 발견되는 연지 혹은 조경시설의 석재 산지 분석, 수생식물 등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 및 수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20 당시의 경관을 더욱 잘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안정적인 수원에 대한 실마 리를 풀 수 있도록 왕궁성 내부 뿐 아니라 주변 저지대에 대한 조사의 병행을 기대해 본다
21 참고문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8, 왕궁리Ⅵ. 2010, 왕궁리Ⅶ.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7, 2007년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자문위원회자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2009년도 익산 왕궁리유적 정비예정지역 제 6차 정밀발굴조 사 자문위원회자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2010년도 익산 왕궁리유적 정밀발굴조사 자문위원회자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2, 익산 왕궁리유적 정비예정지역 제 8차 정밀발굴조사 자문회 의 회의자료. 권태철, 1998, 韓 國 傳 統 寺 刹 에서 나타나는 人 工 池 에 관한 硏 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공국강, 2009, 6~7세기 중국 황궁 원림 약론,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20주년 기념. 김낙중, 2011, 백제 궁성의 원지와 후원, 백제연구 53. 김용기ᆞ최종희, 2004, 한국의 궁궐조경, 한국전통조경학회지 22. 奈 良 文 化 財 硏 究 所, 2006, 고대정원연구Ⅰ 奈 良 文 化 財 硏 究 所 學 報 74. 박윤정, 2007, 한일 고대 원지의 변화를 통해 본 구황동원지의 성격 연구, 한일문화재 논집Ⅰ. 박경자, 2002, 고대 한ᆞ중ᆞ일 원지의 비교연구, 한국조경학회지 , 신라 정원조경의 정수 안압지, 문화강좌 37기-조경과 정원, 영남대학교 박물관 박경자, 2010, 중국의 정원. 박경자ᆞ이관규ᆞ양병이, 2001, 안압지 호안 건물지의 조망 경관구조 분석, 한국조경학 회지 29. 박순발, 2010, 北 魏 平 城 斷 想, 백제학보. 박순발, 2010, 백제의 도성, 충남대학교 편. 小 野 健 吉, 2011, 고대 일본의 궁원, 백제연구 53. 신상섭, 1997, 우리나라의 유상곡수연 유구(곡수거)에 관한 기초연구, 한국조경학회지 15. 오승연, 2002, 한국 고대 궁원지에 관한 연구,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한국 고대 궁원지의 전개양상과 이념적 배경에 관한 연구, 문화재 제37호. 오승연, 2011, 신라의 궁원지-구황동원지의 성격을 중심으로, 백제연구 제53집, 충남대학 교 백제연구소. 李 珠 魯, 1997, 중국원림과 궁국문화-원림의 개념과 종류를 중심으로, 중국문학 제33집. 전용호, 2009, 왕궁리유적의 최근 발굴성과-공간구획 및 활용방식을 중심으로,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전용호, 2008, 익산 왕궁성 정원의 구성 및 조영원리에 대한 일고찰-6~8세기 고대 한일의 정원 유구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백제연구 공개강좌 발표요지, 충남대학교 백제연구 소. 전용호, 2011, 익산 왕궁리유적의 궁원에 대한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 정재훈, 2008, 한국조경의 특징과 정원문화, 문화강좌 37기-조경과 정원, 영남대학교 박물관
22
23 일본 아스카시대 정원연구의 현황과 과제 卜 部 行 弘 일본 카시하라 고고학연구소 1. 머리말 2. 資 料 의 抽 出 3. 飛 鳥 時 代 苑 池 의 特 徵 4. 맺는말 1. 머리말 奈 良 県 南 部 의 飛 鳥 [아스카] 地 域 ( 高 市 郡 明 日 香 村 부근)내에 天 皇 의 宮 과 豪 族 의 저택 에 수반된 정원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日 本 書 紀 와 萬 葉 集 의 기술에 의하여 이미 江 戶 [에도] 時 代 부터 알려져 왔다. 이러한 인식은 근대에도 계속 이어져, 1940년대에 이르기까 지의 일본 庭 園 硏 究 에 대한 서술은 飛 鳥 時 代 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小 沢 1890, 横 井 1940, 重 森 1943). 다만, 현지의 지표면에는 정원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기 때 문에, 정원의 意 匠 과 構 造 등 구체적인 검토는 불가능하였다. 실제로 발굴조사에서 飛 鳥 地 域 의 정원이 검출된 것은 근년에 이르러서이며, 1970년의 古 宮 [후루미야] 遺 蹟 이 최초로 확인된 정원유적이다. 이후 1972년의 島 庄 [시마노쇼오] 遺 蹟 부 터 1983년의 石 神 [이시가미] 遺 蹟, 1999년의 飛 鳥 [아스카] 京 蹟 苑 池, 2003년의 飛 鳥 京 蹟 內 廓 내의 池 狀 遺 構 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그 유례가 증가해왔다. 地 方 의 유적을 비롯하여 平 城 [헤이죠] 宮 平 城 [헤이죠] 京 에서도 정원유적이 연이어 검출되면서, 藤 原 [후지와라] 宮 期 의 정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나, 飛 鳥 時 代 와 奈 良 時 代 의 정원을 비교 하여 일본 고대정원문화를 검토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가고 있다 특히 연지( 池 )에 대해서는, 飛 鳥 [아스카] 時 代 의 工 人 的 조형으로부터 奈 良 [나라] 時 代 의 自 然 的 조형으로의 변화양상이 이미 일치된 견해이기는 하나, 그 변화의 원인에 대한 검토 가 이루어지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小 野 2002, 2003). 또한 飛 鳥 地 域 의 정원은 단독의 존재에 그치지 않고 다른 유구와 연계되어 일체의 宮 都 空 間 을 형성하고 있다. 한편, 정원은 역대 都 城 내에서 王 權 과 깊이 연결된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렇듯 고고학, 문 헌사학, 정원학으로부터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여 기에서는 飛 鳥 時 代 의 정원, 특히 苑 池 에 대하여, 고고학으로부터 바라본 현시점에 있어서의 문제점의 재정리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덧붙여, 여기에서 말하는 苑 池 란 연지( 池 )를 중심 으로 하는 정원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한다
24 2. 資 料 의 抽 出 현재, 飛 鳥 時 代 의 苑 池 는 飛 鳥 地 域 에 10개소의 유적( 飛 鳥 [아스카] 京 蹟 內 廓 内, 飛 鳥 京 蹟 苑 池, 雷 内 畑 [이카즈치우치바다케] 遺 蹟, 雷 丘 [이카즈치노오카] 東 方 遺 蹟, 平 吉 [헤키치] 遺 蹟, 古 宮 遺 蹟, 石 神 遺 蹟, 平 田 キタガワ[기타가와] 遺 蹟, 島 庄 遺 蹟, 坂 田 [사카타] 寺 蹟 ), 奈 良 県 내의 3개소 유적( 桜 井 市 上 之 宮 [우에노미야] 遺 蹟, 吉 野 町 宮 滝 [미야타키] 遺 蹟, 宇 陀 市 中 之 庄 [나카노쇼오] 遺 蹟 ), 奈 良 県 외에 1개소 유적( 仙 台 市 郡 山 [코오리야마] 遺 蹟 )의 합계 14 개소의 遺 蹟 이 확인되었다. 3. 飛 鳥 時 代 苑 池 의 特 徵 이러한 유적은 연지( 池 )의 존재에 따라 苑 池 로 인식되고 있으며, 飛 鳥 時 代 의 연지는 규모 의 크고 작음은 있으나 직선적인 조형을 특징으로 하는 方 形 池 가 주체를 이룬다. 이에 비하 여 曲 池 의 경우, 飛 鳥 地 域 에서는 7세기초두의 古 宮 遺 跡 한 예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으나, 근년 중추부의 飛 鳥 [아스카] 京 蹟 內 廓 내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內 廓 正 殿 SB0301의 서측에서 검출된 池 状 遺 構 SX0303는 第 Ⅲ-A 期 의 건물을 파괴시키 고 축조되었으며, 天 武 [텐무] 朝 期 의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높다. 즉 曲 池 는 方 形 池 와 함께 飛 鳥 時 代 전반에 걸쳐 두 가지의 디자인 계통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한편, 飛 鳥 時 代 의 方 形 池 에 대해서는 백제로부터 전해진 외래적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강 하다( 小 野 2009). 확실히 石 神 遺 蹟 SX1010과 王 宮 里 遺 蹟 의 사례와 같이, 극도로 유사한 方 形 池 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견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제 의 方 形 池 와 飛 鳥 時 代 의 方 形 池 간에 底 石 의 유무 등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方 形 池 에 나타나는 직선적인 경향( 直 線 基 調 )은 飛 鳥 京 蹟 內 廓 에서 보이는 부석( 石 敷 ) 및 자 연석을 배치한 구( 石 組 溝 )와 공통되는 일련의 디자인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方 形 池 디 자인의 연원은 백제에서 구할 수 있지만, 우선 飛 鳥 地 域 의 궁전 설계시에 만들어진 전체적 인 디자인(total design)이 있었기에, 그것을 기초로 백제의 方 形 池 디자인을 飛 鳥 의 方 形 池 디자인으로 변환시켜 苑 池 의 조영에 적용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飛 鳥 時 代 의 苑 池 를 구성하는 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성요소로서는 연지 ( 池 ), 연지 내 시설, 도수시설( 導 水 施 設 ), 수로( 水 路 ), 구( 溝 ), 건물( 建 物 ), 공한지( 空 閑 地 ), 구화( 區 畵 ), 차폐시설( 遮 蔽 施 設 ) 등이 있다. 연지 내 시설에는 석조물 등의 장식품, 연못 내 섬( 中 島 ), 간이구조물, 수중식물을 식재하 기 위한 도구( 植 え 枡 )가 있다. 모두 외부 또는 내부로부터 연지를 觀 賞 하기 위하여 설계된 시설, 내지는 보조시설이다. 또한 池 水 를 관리하기 위한 목제 수로( 木 樋 )와 園 路 의 일부로 서 다리( 橋 )가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導 水 施 設 은 땅의 높은 쪽으로부터 연지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시설이다. 도중에 물을 어 느 정도 모아두는 부분도 있는데, 이 시설만으로 연지로 보내는 給 水 를 댈 수 있었는지의
25 문제와는 상관없다. 給 水 量 을 기대할 수 없는 導 水 施 設 은 貯 水 부분을 포함하여 흐르는 물을 観 賞 하기 위한 장치가 된다. 이는 땅을 파서 만든 溝 ( 素 掘 り 溝 ), 자연석을 배치한 溝 ( 石 組 み 溝 ), 石 造 物 과 土 管 의 등으로부터 구성된다. 木 樋 등 有 機 物 의 架 構 도 물론 상정할 수 있 으나, 실제로 검출된 예는 없다. 飛 鳥 時 代 의 苑 池 에서 검출된 도수( 導 水 )시설에는 세가지 예가 있다. 宮 滝 遺 蹟 에서는 연지 의 북쪽에 장방형의 土 坑 이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연못으로 통하는 溝 가 파생되는 것으로 보 아, 연지로의 도수를 위해 일단 土 坑 에 貯 水 한 시설로 상정되고 있다. 上 之 宮 遺 蹟 에서는 石 組 遺 構 로부터 石 組 溝 로 물을 내려보내고 있는데, 최근의 조사에서 그보다 100m 앞선 지점 에 池 状 遺 構 가 존재하는 것이 판명되었다. 飛 鳥 京 蹟 苑 池 의 南 池 護 岸 에는 石 造 物 을 조합한 流 水 施 設 이 있어, 물이 흐름이 변화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취향을 보인다. 이처럼 소수의 예 이지만, 연지의 형태에 상관없이 그 첫머리에는 물을 담아두거나 물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등의 장치가 설치되며, 그러한 장치와 연못은 일체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치의 형 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땅을 파두거나 石 組 遺 構, 그리고 석조물의 조합 등 일정하지 않다. 한국 雁 鴨 池 의 石 槽 또한 같은 장치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島 庄 遺 蹟 의 小 池 SX8703의 下 流 에도 연지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水 路 溝 는 연지로부터 넘친 물을 배수하기 위한 시설이다. 구조는 땅을 파서 만든 溝 및 石 組 溝 로 이루어진다. 연지는 소규모인 경우에는 필요하지 않은 시설이다. 그 가운데에는 곡선을 그리는 石 組 水 路 가 있어, 시각적 효과를 의도하기도 하였다. 건물은 연지를 観 賞 하기 위한 시설인데, 유적의 가운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경 우와 연지 주변에 부속하여 종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의 두 가지가 있다. 후자는 확실한 검출 예가 없으나, 飛 鳥 京 蹟 苑 池 내에 위치한 차양이 있는 굴립주건물 SB7107( 飛 鳥 京 蹟 第 26 次 調 査 )이 苑 池 전체를 관상하는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奈 良 時 代 의 平 城 宮 東 院 庭 園 에서는 상층유구 하층유구 모두 연지의 둔치 밖으로 튀어나온 굴립주건물이 확인되고 있다. 空 閑 地 는 연지의 주위에 설정된 구조물이 없는 공간으로, 자의적인 해석이 수반되기 때문 에 인정하기 어려운 요소이다. 공한지의 용도로는 향연, 연중행사, 제사, 園 遊, 植 栽, 園 路 등이 추정된다. 지표면에 부석( 石 敷 )한 舗 装 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구획( 區 畵 ) 遮 蔽 施 設 의 대부분은 굴립주의 담( 掘 立 柱 塀 )에 의해 구성된다. 구획시설은 苑 池 전체를 둘러싸고, 차폐시설은 연지, 공한지 등 작은 범위를 둘러싼다. 전자에 대해서는 실제로 검출된 예가 없다. 후자의 경우, 島 庄 遺 蹟 에서 方 形 池 의 제방 위( 堤 上 )와 그 주변에 서 굴립주의 담이 검출되고 있다. 또한 石 神 遺 蹟 과 같이 건물이 冂 形 으로 배치되어 중앙에 마련된 공한지에 연지를 구축하는 경우, 주위의 건물이 차폐시설로 파악된다. 飛 鳥 時 代 의 苑 池 는 그 성격에 따라, 1 苑 池 로서 독립된 전용타입, 2중심이 되는 건물에 부속되는 타입, 3사원의 경내에 만들어진 蓮 池 타입의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卜 部 2006). 연지 형태의 두 계통인 曲 池 와 方 形 池 는 각각의 타입에 다양하게 채용되어 유적마 다의 지형과 경과에 맞는 디자인과 사이즈로 설계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세가지 타입이 그대로 奈 良 時 代 의 苑 池 로 계승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중심이 되는 연지의 형태와 의장 에 대해서는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어 奈 良 時 代 의 양식을 완성시키면서도, 苑 池 의 성격에 대 한 原 型 은 飛 鳥 時 代 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飛 鳥 京 蹟 苑 池 와 같이 독립된 타입의 苑 池 로는 島 庄 遺 蹟 을 들 수 있다. 島 庄 遺 蹟 의 실태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태이지만, 한 변 42m의 方 形 池 는 9세기대에 매몰이 시작되었으며, 遺
26 蹟 이 폐기된 것은 飛 鳥 京 蹟 苑 池 와 그 시기를 같이한다. 또한 島 庄 遺 蹟 으로 비적되는 嶋 宮 [시마노미야]은 문헌을 통해 奈 良 時 代 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광대한 田 地 과 수많 은 노비를 소유하면서 경영된 것이 판명되었다. 이러한 유적이 천도 후에도 유지된 것은 어 떠한 이유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같은 苑 池 이면서도 飛 鳥 京 蹟 苑 池 와 島 庄 遺 蹟 가 병존하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河 上 邦 彦 씨가 지적한 바와 같이 飛 鳥 京 蹟 苑 池 가 宮 廷 의 內 苑 的 인 기능을, 島 庄 遺 蹟 이 東 宮 的 인 성격에 더하여 배후에 광대한 생산지 를 갖춘 禁 苑 的 인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飛 鳥 時 代 에 있어서도 이러한 구분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河 上 2003). 5. 맺는말 飛 鳥 京 蹟 苑 池 는 宮 都 의 後 方 ( 北 方 )에 전개되는 後 苑 에 해당된다. 궁도에 후원이 부속되 는 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諸 國 에서 넓게 나타나는 都 城 制 의 한 모습이며, 飛 鳥 京 蹟 苑 池 도 이 연장선산에서 평가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前 漢 長 安 城 의 上 林 苑, 唐 長 安 城 의 禁 苑 등, 도성의 북쪽에 광대한 外 苑 을 배치하고 있다. 飛 鳥 京 의 경우, 공간적으로 한정된 구릉 지구에 内 苑 과 外 苑 을 배치하는 것은 무리였음에 틀림없다. 飛 鳥 京 蹟 苑 池 가 조영되었을 시점에 嶋 宮 [시마노미야]이 外 苑 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天 武 [텐무] 朝 에는 嶋 宮 자체의 改 変 과 함께 外 苑 으로서 기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飛 鳥 時 代 의 飛 鳥 京 蹟 苑 池 와 島 庄 遺 蹟 에 보이는 内 苑 과 外 苑 의 세트 관계는 奈 良 時 代 이 후, 外 苑 의 위치가 도성의 북방으로 수정되면서 유지되고 있다. 즉, 平 城 宮 에서는 東 院 [토오 인] 庭 園, 西 池 宮 [니시노이케노미야]과 松 林 [쇼오린] 苑, 平 安 宮 에서는 神 泉 [신센] 苑 과 北 野 [기타노]이다. 이처럼 飛 鳥 京 蹟 苑 池 는 중국의 사상을 확실하게 받아들여 재현한 일본 後 苑 의 原 形 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
27 日 本 飛 鳥 時 代 の 庭 園 研 究 の 現 況 と 課 題 卜 部 行 弘 日 本 橿 原 考 古 學 硏 究 所 1. はじめに 2. 資 料 の 抽 出 3. 飛 鳥 時 代 の 苑 池 の 特 徴 4.まとめ 1. はじめに 奈 良 県 南 部 の 飛 鳥 地 域 ( 高 市 郡 明 日 香 村 周 辺 )のなかで 天 皇 の 宮 や 豪 族 の 邸 宅 に 伴 って 庭 園 が 存 在 していたことは 日 本 書 紀 や 万 葉 集 の 記 述 によって 既 に 江 戸 時 代 から 知 られ ていた この 認 識 は 近 代 に 入 っても 続 き 1940 年 代 に 至 るまで 日 本 の 庭 園 研 究 においては 飛 鳥 時 代 から 筆 を 起 こしているのが 一 般 的 である( 小 沢 1890 横 井 1940 重 森 1943) ただ し 現 地 の 地 表 面 には 庭 園 として 遺 存 していないため 庭 園 の 意 匠 や 構 成 など 具 体 的 な 検 討 は 出 来 なかった 実 際 に 発 掘 調 査 によって 飛 鳥 地 域 の 庭 園 が 検 出 されたのは 近 年 になってからで 1970 年 の 古 宮 遺 跡 が 最 初 である 以 後 1972 年 の 島 庄 遺 跡 から1983 年 の 石 神 遺 跡 1999 年 の 飛 鳥 京 跡 苑 池 2003 年 の 飛 鳥 京 跡 内 郭 内 の 池 状 遺 構 まで 徐 々にではあるが 類 例 が 増 えてきている 他 方 平 城 宮 平 城 京 においても 庭 園 遺 構 の 検 出 例 があいつぎ 藤 原 宮 期 が 依 然 として 不 明 ではある ものの 飛 鳥 時 代 と 奈 良 時 代 の 庭 園 を 比 較 して 日 本 における 古 代 庭 園 文 化 を 検 討 できる 環 境 が 整 いつつある 特 に 池 については 飛 鳥 時 代 の 人 工 的 造 形 から 奈 良 時 代 の 自 然 的 造 形 への 変 化 は かねてよ り 衆 目 の 一 致 するところであるが その 淵 源 や 変 化 の 原 因 についての 検 討 は 途 についたばかり である( 小 野 ) また 飛 鳥 地 域 にあっては 庭 園 は 単 独 での 存 在 にとどまらず 他 の 遺 構 と 連 携 して 一 体 の 宮 都 空 間 を 形 成 している さらに 庭 園 は 歴 代 都 城 のなかでは 深 く 王 権 と 結 びついた 装 置 として 機 能 している このように 考 古 学 文 献 史 学 庭 園 学 から 多 様 な 議 論 がなされているが 問 題 は 多 岐 にわたり 複 雑 である ここでは 飛 鳥 時 代 の 庭 園 特 に 苑 池 につ いて 考 古 学 からみた 現 時 点 における 問 題 点 の 再 整 理 を 試 みたい なおここに 言 う 苑 池 とは 池 を 中 心 とした 庭 園 全 体 を 指 す 語 として 使 用 する
28 2. 資 料 の 抽 出 現 在 飛 鳥 時 代 の 苑 池 は 飛 鳥 地 域 に10 遺 跡 ( 飛 鳥 京 跡 内 郭 内 飛 鳥 京 跡 苑 池 雷 内 畑 遺 跡 雷 丘 東 方 遺 跡 平 吉 遺 跡 古 宮 遺 跡 石 神 遺 跡 平 田 キタガワ 遺 跡 島 庄 遺 跡 坂 田 寺 跡 ) 奈 良 県 内 に3 遺 跡 ( 桜 井 市 上 之 宮 遺 跡 吉 野 町 宮 滝 遺 跡 宇 陀 市 中 之 庄 遺 跡 ) 奈 良 県 外 に1 遺 跡 ( 仙 台 市 郡 山 遺 跡 )の 計 14 遺 跡 が 確 認 されている 3. 飛 鳥 時 代 の 苑 池 の 特 徴 これらの 遺 跡 は 池 の 存 在 によって 苑 池 として 認 識 されているが 飛 鳥 時 代 の 池 は 規 模 の 大 小 はあるものの 直 線 的 な 造 形 を 特 徴 とする 方 形 池 が 主 体 である これに 対 して 曲 池 は 飛 鳥 地 域 では7 世 紀 初 頭 の 古 宮 遺 跡 の 一 例 が 知 られているだけであったが 近 年 中 枢 部 の 飛 鳥 京 跡 内 郭 内 においてもその 存 在 が 明 らかとなった 内 郭 正 殿 SB0301の 西 脇 から 検 出 された 池 状 遺 構 SX0303は 第 Ⅲ-A 期 の 建 物 を 取 り 壊 して 造 られており 天 武 朝 期 の 造 作 である 可 能 性 が 高 い したがって 曲 池 は 方 形 池 とともに 飛 鳥 時 代 全 般 にわたって 二 つのデザイン 系 統 として 存 在 していたことになる 一 方 飛 鳥 時 代 の 方 形 池 については 百 済 からもたらされた 外 来 的 影 響 とする 見 方 が 強 い( 小 野 2009) 確 かに 石 神 遺 跡 SX1010と 王 宮 里 遺 跡 のような きわめて 類 似 した 方 形 池 が 存 在 し ており それを 否 定 するものではない しかしその 一 方 で 百 済 の 方 形 池 と 飛 鳥 時 代 の 方 形 池 に 底 石 の 有 無 など 差 異 があるのも 事 実 である むしろ 方 形 池 に 表 された 直 線 基 調 は 飛 鳥 京 跡 内 郭 にみられる 石 敷 や 石 組 溝 と 共 通 する 一 連 のデザインと 解 釈 すべきである 方 形 池 のデザイン の 淵 源 は 百 済 に 求 められるところではあるが まず 飛 鳥 地 域 の 宮 殿 設 計 に 際 して 作 られたトー タルデザインがあり それを 基 に 百 済 の 方 形 池 デザインを 飛 鳥 の 方 形 池 デザインに 変 換 させた うえで 苑 池 の 造 営 に 当 たったと 考 えたい 次 に 飛 鳥 時 代 の 苑 池 を 構 成 する 要 素 を 見 ていきたい 構 成 要 素 としては 池 池 中 施 設 導 水 施 設 水 路 溝 建 物 空 閑 地 区 画 遮 蔽 施 設 などがある 池 中 施 設 には 石 造 物 などの 装 飾 品 中 島 簡 易 構 造 物 水 中 植 物 を 植 栽 するための 植 え 枡 があ る いずれも 外 部 または 内 部 から 池 を 観 賞 するために 設 けられた 施 設 ないしは 補 助 施 設 であ る また 池 水 を 管 理 するための 木 樋 や 園 路 の 一 部 としての 橋 が 設 置 される 場 合 がある 導 水 施 設 は 上 手 側 より 池 に 水 を 導 き 入 れるための 施 設 である 途 中 で 水 をある 程 度 貯 める 部 分 もある 池 への 給 水 をこの 施 設 だけで 賄 っていたかは 関 わらない 給 水 量 が 期 待 できない 導 水 施 設 は 貯 水 部 分 も 含 めて 流 水 を 観 賞 するための 装 置 となる 素 掘 り 溝 石 組 み 溝 石 造 物 や 土 管 の 連 結 などから 構 成 される 木 樋 などの 有 機 物 を 構 架 することも 当 然 想 定 されるが 実 際 の 検 出 例 は 無 い 飛 鳥 時 代 の 苑 池 で 導 水 施 設 が 検 出 されているのは3 例 ある 宮 滝 遺 跡 では 池 の 北 方 に 長 方 形 の 土 坑 があり そこから 池 に 通 じる 溝 が 派 生 していることから 池 への 導 水 にあたってはいった ん 土 坑 に 貯 水 したものと 想 定 されている 上 之 宮 遺 跡 では 水 は 石 組 み 遺 構 から 石 組 み 溝 伝 いに
29 流 下 するが 最 近 の 調 査 によりその100m 先 には 池 状 遺 構 があることが 判 明 した 飛 鳥 京 跡 苑 池 の 南 池 護 岸 には 石 造 物 を 組 み 合 わせた 流 水 施 設 があり 流 れの 変 化 の 様 を 見 る 趣 向 となって いる このようにわずかな 例 であるが 池 の 形 態 にかかわらずその 取 り 付 き 部 分 には 水 を 貯 め たり 流 水 を 変 化 させたりする 装 置 が 備 わり 池 と 装 置 は 一 体 化 していることがわかる 装 置 の 形 態 は 前 述 したように 素 掘 りのままや 石 組 み 遺 構 石 造 物 の 組 み 合 わせなど 一 定 していない 韓 国 雁 鴨 池 の 石 槽 も 同 様 の 装 置 として 理 解 できるだろう また 島 庄 遺 跡 の 小 池 SX8703の 下 流 にも 池 の 存 在 が 想 定 できる 水 路 溝 は 池 から 溢 れ 出 た 水 を 排 水 するための 施 設 である 構 造 は 素 掘 り 溝 や 石 組 み 溝 から なる 池 が 小 規 模 の 場 合 は 必 要 としない なかには 曲 線 を 描 く 石 組 み 水 路 があり 視 覚 的 効 果 を 意 図 している 建 物 は 池 を 観 賞 するための 施 設 であるが 遺 跡 の 中 で 主 的 な 位 置 を 占 める 場 合 と 池 の 周 囲 に 付 随 して 従 的 な 位 置 を 占 める 二 者 がある 後 者 は 確 実 な 検 出 例 はないが 飛 鳥 京 跡 苑 池 内 に あって 庇 付 掘 立 柱 建 物 SB7107( 飛 鳥 京 跡 第 26 次 調 査 )が 苑 池 全 体 を 観 賞 する 建 物 であった 可 能 性 が 高 い 奈 良 時 代 の 平 城 宮 東 院 庭 園 では 上 層 遺 構 下 層 遺 構 ともに 池 の 汀 に 張 り 出 す 掘 立 柱 建 物 が 確 認 されている 空 閑 地 は 池 の 周 囲 に 設 定 された 構 造 物 のない 空 間 であるが 恣 意 的 な 解 釈 が 伴 うため 認 定 し にくい 要 素 である 空 閑 地 の 用 途 としては 饗 宴 年 中 行 事 祭 祀 園 遊 植 栽 園 路 などが 考 えられる 地 表 面 に 石 敷 き 舗 装 を 伴 う 場 合 が 多 い 区 画 遮 蔽 施 設 の 多 くは 掘 立 柱 塀 によって 構 成 される 区 画 施 設 は 苑 池 全 体 を 囲 繞 し 遮 蔽 施 設 は 池 空 閑 地 など 小 範 囲 に 囲 繞 する 前 者 で 実 際 の 検 出 例 はない 後 者 では 島 庄 遺 跡 で 方 形 池 の 堤 上 と 近 辺 で 掘 立 柱 塀 が 検 出 されている また 石 神 遺 跡 のように 建 物 が 冂 形 配 置 を 取 り 中 央 にできた 空 閑 地 に 池 を 構 築 する 場 合 周 囲 の 建 物 が 遮 蔽 施 設 とも 捉 えられる 飛 鳥 時 代 の 苑 池 は その 性 格 から 1 苑 池 として 独 立 した 専 用 タイプ 2 中 心 となる 建 物 に 付 随 するタイプ 3 寺 院 の 境 内 につくられた 蓮 池 タイプの3つに 分 類 できる( 卜 部 2006) 池 の 形 態 の 二 系 統 である 曲 池 と 方 形 池 は それぞれのタイプに 汎 用 的 に 採 用 され 遺 跡 ごとに 地 形 や 景 観 に 合 うデザインとサイズに 設 計 されたのが 実 情 であろう また この3つのタイプがそ のまま 奈 良 時 代 の 苑 池 に 継 承 されている 点 は 注 目 すべきである 中 心 となる 池 の 形 態 や 意 匠 に ついては 新 しい 要 素 を 取 り 入 れて 奈 良 時 代 の 様 式 を 完 成 させているが 苑 池 の 性 格 についての 原 型 は 飛 鳥 時 代 で 出 来 上 がっている 飛 鳥 京 跡 苑 池 のような 独 立 タイプの 苑 池 として 島 庄 遺 跡 があげられる 島 庄 遺 跡 の 実 態 は いまだ 不 明 ながら 一 辺 42mの 方 形 池 は9 世 紀 に 埋 没 が 始 まっており 遺 跡 の 廃 絶 は 飛 鳥 京 跡 苑 池 と 期 を 一 にしている また 島 庄 遺 跡 に 比 定 される 嶋 宮 は 文 献 から 奈 良 時 代 まで 維 持 さ れ 広 大 な 田 地 と 多 数 の 奴 婢 を 所 有 して 経 営 されていたことが 判 明 している これらの 遺 跡 が 遷 都 後 も 維 持 されるには 当 然 何 らかの 理 由 があるはずである そうした 場 合 同 じ 苑 池 であ りながら 飛 鳥 京 跡 苑 池 と 島 庄 遺 跡 が 並 存 することは 注 目 に 値 する おそらくはかつて 河 上 邦 彦 氏 が 指 摘 したように 飛 鳥 京 跡 苑 池 が 宮 廷 の 内 苑 的 な 機 能 を 島 庄 遺 跡 が 東 宮 的 な 性 格 に 加 えて 背 後 に 広 大 な 生 産 地 を 占 める 禁 苑 的 な 機 能 を 担 い 飛 鳥 時 代 においても 区 別 されていたものと 思 われる( 河 上 2003) 4.まとめ
30 飛 鳥 京 跡 苑 池 は 宮 都 の 後 方 ( 北 方 )に 展 開 する 後 苑 に 該 当 する 宮 都 に 後 苑 が 付 属 することは 中 国 を 中 心 とした 東 アジア 諸 国 に 広 く 見 られる 都 城 制 の 事 象 であり 飛 鳥 京 跡 苑 池 もこの 延 長 上 に 位 置 付 けられる 中 国 では 前 漢 長 安 城 の 上 林 苑 唐 長 安 城 の 禁 苑 など 都 城 の 北 方 に 広 大 な 外 苑 を 配 置 している 飛 鳥 京 の 場 合 スペース 的 に 限 定 された 岡 地 区 に 内 苑 と 外 苑 を 配 する のは 無 理 であったに 違 いない 飛 鳥 京 跡 苑 池 が 造 営 された 時 点 で 嶋 宮 が 外 苑 として 機 能 して いたかは 不 明 であるが 天 武 朝 には 嶋 宮 自 体 の 改 変 とともに 外 苑 として 機 能 したと 考 えられ る 飛 鳥 時 代 の 飛 鳥 京 跡 苑 池 と 島 庄 遺 跡 にみられる 内 苑 と 外 苑 のセット 関 係 は 奈 良 時 代 以 降 外 苑 の 位 置 が 都 城 の 北 方 に 修 正 されたうえで 維 持 されている すなわち 平 城 宮 では 東 院 庭 園 西 池 宮 と 松 林 苑 平 安 宮 では 神 泉 苑 と 北 野 である このように 飛 鳥 京 跡 苑 池 は 中 国 思 想 を 確 実 に 受 け 入 れて 体 現 した 我 が 国 の 後 苑 の 原 形 として 評 価 できる
31 도판 1. 飛 鳥 地 域 の 苑 池
32 文 獻 卜 部 行 弘 2006 飛 鳥 の 苑 池 続 明 日 香 村 史 上 巻 明 日 香 村 小 沢 圭 次 郎 1890 園 苑 源 流 考 國 華 第 1 編 第 6 号 國 華 社 小 野 健 吉 2002 飛 鳥 奈 良 時 代 の 庭 園 遺 構 と 東 院 庭 園 平 城 宮 跡 発 掘 調 査 報 告 ⅩⅤ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学 報 第 69 冊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小 野 健 吉 2003 インド 起 源 の 飛 鳥 時 代 デザイン( 試 論 ) 平 成 15 年 度 日 本 庭 園 学 会 研 究 大 会 発 表 要 旨 集 日 本 庭 園 学 会 小 野 健 吉 2009 日 本 庭 園 - 空 間 の 美 の 歴 史 岩 波 新 書 1177 岩 波 書 店 河 上 邦 彦 2003 あとがき 飛 鳥 京 跡 苑 池 遺 構 調 査 概 報 学 生 社 重 森 三 玲 1943 大 和 の 庭 園 天 理 時 報 社 横 井 時 冬 1940 日 本 庭 園 発 達 史 創 元 社
33
34
35 백제사찰의 구성요소와 부속건물지 한나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Ⅰ. 머리말 Ⅱ. 백제사찰의 구성요소와 부속건물지 Ⅲ. 백제사찰 부속건물지의 유형분석 Ⅳ. 맺음말 Ⅰ. 머리말 고대의 寺 刹 은 불도를 닦고 교리를 설파하는 공간으로서 탑, 금당, 강당, 회랑, 문지 등의 개별 건축물로 구성된다. 사찰의 공간은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부처의 공간과 사람의 공간이다. 부처의 공간으로는 금당과 탑이 있다. 금당과 탑은 예불( 禮 佛 ) 이라는 불사( 佛 事 )를 행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사찰의 가장 중심이 되며, 이들 건축물을 중심으로 사람의 공간인 강당, 중문 등 기타 건물군이 배치되고 1탑 3금당, 1탑 1금당 등 가람배치와 양식 구분의 결정적 기준이 되어 왔다. 이는 금당과 탑이 사찰 건립목적에 직결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조사가 금당과 탑이라는 중심사역에 치중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에 강당, 승방, 중문 등의 공간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빈약한 자료에 의해 이들 자체 에 대한 연구는 물론 가람배치의 유형분류라는 관점에서도 소략히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찰 발굴조사가 지속되면서 중심사역 외에도 발굴자료가 매년 축적되었고, 이들 의 용도 및 기능, 또한 이들을 고려한 가람배치의 유형분류가 필요한 시점이다. 8) 본고에서 는 이러한 사찰 연구의 경향을 고려하고 백제 사찰의 구성요소 중에서도 부속건물 에 대 한 최근의 조사성과와 향후 논의해야할 부분에 대해 소략히 언급하겠다. 8) 중심사역 외 부속건물에 대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朴 彦 坤 李 珢 姃, 2001, 韓 國 古 代 伽 藍 의 回 廊 에 關 한 硏 究, 환경개발연구논문집 6 ; 박대성 고영훈, 2004, 伽 藍 의 시기별 經, 鐘 樓 配 置 特 性 에 관한 연구, 大 韓 建 築 學 會 聯 合 論 文 集 6-2 ; 정자영, 2010, 6~7세기 백제 사찰 내 강당 좌우 건물지의 변천과정 고찰, 건축역사연구 19-6 ; 주동훈, 2011, 百 濟 泗 沘 期 寺 刹 의 修 道 生 活 空 間 에 대한 고 고학적 硏 究, 전북대학교석사학위논문 ; 한주성, 2012, 백제 미륵사 中 門 평면과 구조, 大 韓 建 築 學 會 論 文 集 計 劃 系
36 Ⅱ. 백제사찰의 구성요소와 부속건물지 백제사찰 중 사역이 전체적으로 조사된 사례는 많지 않으며, 백제사찰을 구성하는 건물군 의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조사사례로 볼 때, 최소한 다음의 건물군 으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 대체로 1탑1금당 형식인 백제사찰은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금당, 탑, 강당, 중문 외에도 동서방향에 대칭적 구도로 위치하는 건물지, 강당 후면의 건물지, 그 리고 이들 전체를 연결하는 회랑으로 구성된다.9) 연 유적명 번 군수리사 지 능산리사 지 왕흥사지 동남리사 지 강당 부속건물 강당좌우 강당북 금당좌우 ㅇ ㅇ ㅇ ㅇ ㅇ ㅇ ㅇ ㅇ ㅇ ㅇ 5 제석사지 ㅇ 6 금강사지 ㅇ 부소산폐 사지 정림사지 미륵사지 ㅇ ㅇ ㅇ ㅇ ㅇ 기타 중문 시대 6세기 중반 ㅇ ㅇ ㅇ 567년 ㅇ 577년 ㅇ ㅇ ㅇ ㅇ ㅇ 강 당 서 편 (후 면 ) ㅇ ㅇ ㅇ ㅇ ㅇ ㅇ ㅇ ㅇ ㅇ ㅇ ㅇ 회랑 동서 남 서회랑지 외곽 ㅇ ㅇ ㅇ 6세기말~7 세기초 7세기 전반 7세기 전중반 7세기 전중반 7세기 전중반 무왕대(600~ 640) 표 1. 백제사찰 개별건물 구성요소(중심사역 제외) 1) 탑-금당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건축물로서 초기 가람에서는 가장 중요한 경배의 대상이었으나 대승불교의 전개와 더불어 불탑에서 불전(금당)으로 예배의 대상이 변화하면 서, 사찰의 중심도 함께 이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사찰에서는 577년에 축조된 왕흥사 를 비롯하여 목탑이 유행하였으나 점차 탑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7세기 전 중반으로 추정되 는 정림사에서는 석탑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이며, 동남리사지와 같이 무탑식 가람도 확인된 다. 9) 國立博物館, 1969, 金剛寺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89, 彌勒寺Ⅰ ; 忠南大學校博物館, 1993, 東南里遺蹟 發掘調査 略報告書 ; 國立扶餘博物館, 2007, 陵寺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王興寺址Ⅲ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帝釋寺址 발굴조사보고서Ⅰ
37 2) 강당 강당은 승려 및 신도를 위한 공간이다. 문헌기록에는 4세기경 불사에 관한 기록부터 강당 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으며 설법, 강의, 집회, 연회 등도 강당에서 했다고 전한다. 10) 사찰 내 승려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규모가 크고 보통 금당의 후면에 같은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백제사찰에서는 대체로 강당지가 확인되고 있으며 금강사지와 동남리사지와 같이 회랑을 통해 중문과 연결되는 배치가 있고, 왕흥사지, 능산리사지와 같이 좌우에 부속 건물이 배치된 사찰도 있다. 3) 중문 남문은 절의 입구이며, 중문은 예불의 공간인 당탑과 외부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배치상으로는 회랑의 기점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중문이 확인된 경우는 능산리사 지, 동남리사지, 제석사지, 미륵사지가 있다. 4) 회랑 회랑은 랑무, 무랑 이라고도 하였다고 하며 1칸 내지 2칸으로 추정된다. 강당, 금 당, 중문 등 사찰을 구성하는 여러 건물군은 회랑에 의해 그 영역이 한정되고 또 연결된다. 회랑의 주 기능은 공간의 연결 로서 여러 건물들을 엮어 하나의 공간을 형성해야하는 궁 궐건축과 사찰건축에서는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11) 남, 동, 서, 북 회랑이 각각 확인되고 있 으며 왕흥사지의 경우는 부속건물지와 직접 연결된 형태로 나타난다. 5) 종루 및 경루 종루는 범종을 걸었던 곳이며, 경루는 경전을 수장하기 위한 경장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樓 건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루와 경루는 함께 강당에 부속된 건물로서 강당 좌우에 배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져, 군수리사지와 동남리사지 강당의 좌우 건물을 종루 및 경루로 보기도 한다. 12) 6) 승방 승방은 승려들이 주거하는 공간으로 원래 1~2인의 승려가 기거하는 단실이었다가 여러개 의 방이 배치된다고 알려져 왔다. 따라서 대체로 세장한 형태로 내부에 방이 나눠져 있고 중심사역의 외곽에 있을 경우 승방이라고 보고 있다. 강당 후면에 위치한 경우가 있으며 강 당 및 금당 좌우에 대칭적 형태로 위치한 경우도 내부구조 및 출토유물에 근거하여 승방지 로 보는 사례가 있으나 현재까지 명확하게 승방지라고 규명할 수 있는 특징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경우는 드물다. 7) 부속건물 10) 法 師 (법사) 惠 亮 (혜량)이 講 堂 (강당)을 열고 經 (경)을 講 說 (강설)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나아가 (그 의) 講 經 (강경)을 들었다. 三 國 史 記 권 제44, 열전 제4, 거칠부 11) 朴 彦 坤 李 珢 姃, 2001, 韓 國 古 代 伽 藍 의 回 廊 에 關 한 硏 究, 환경개발연구논문집 6, pp.32~33. 12) 경루는 우리나라에서는 三 國 遺 事 에서도 기록이 남아있으며(... 영묘사에 들어가서 금당과 좌우에 있는 경루와 남문의 낭무를 묶어놓고 三 國 遺 事 4권, 義 解 5, 二 惠 同 塵 ) 중국 수당대 돈황석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대성 고영훈, 2004, 伽 藍 의 시기별 經, 鐘 樓 配 置 特 性 에 관한 연구, 大 韓 建 築 學 會 聯 合 論 文 集 6-2, pp.40~
38 사역 내에 확인된 건물지 중 부속건물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부속건물 은 탑, 금당, 강당 등 중심 건물에 딸려 보완적인 기능을 하는 모든 건물을 의미한다. 대부 분 배치된 위치 및 구조, 규모가 명확히 다른 회랑과 중문, 강당을 제외한 건물지를 대상으 로 부속건물 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으며, 승방 및 경루, 종루 등의 가능 성은 있으나 명확한 근거가 없어 용도에 대한 추정만 제기되는 경향이 있다. 건물지1, 건물 지2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Ⅲ. 백제사찰 부속건물지의 유형분석 백제사찰에서 부속건물지 라는 용어는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부속건물의 뜻은 탑 -금당-강당이란 중심건물에 부속되어 있다는 의미로, 대체로 강당과 중문, 회랑과 같이 위 치 및 규모 등에서 명확한 특징이 있는 건물지를 제외한 나머지를 부속건물 이라고 부른 다. 최근의 조사자료에서 회랑에 연결되면서도 회랑과는 다른 구조의 건물지들이 확인되면 서 부속건물이라고 불리는 건물지의 유형도 다양해졌고, 이들 중 일부는 내부에 방시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승방 으로 정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부속건물지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며, 부속건물지의 기능과 용도를 판 단할 수 있는 근거로는 사역 내의 배치, 내부구조 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배치에 따라 유형을 분류해 보기로 한다. 1. 중심사역과의 배치 현재까지 조사된 백제사찰의 부속건물지의 유형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금당지의 좌우에 위치한 것으로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지에서 확인된다. 둘째, 강당지 좌우에 위치한 것으로 역시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일제강점기 조사된 군수리사지에서 확인 되었다. 셋째, 금당지 좌우에 위치한 부속건물지가 강당지 남측기단의 북단까지 이어지는 형태로서, 제석사지와 정림사지에서 확인된다. 이 외 강당지 북편 등 사역의 외곽에 위치한 기타유형이 있다. 1) 금당지 좌우 부속건물지 금당지 좌우에 위치한 부속건물지는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에서 확인된다. 두 사찰은 567 년과 577년이라는 창건연대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확인된 사찰로서, 가람배치도 유사하 다. 13) 능산리사지는 회랑지 북단에 건물지가 이어진 형태로 동서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건물지의 북편기단석렬은 강당지의 남편기단석렬과 거의 같은 선상에 위치한다. 또한 강당 지의 남측기단과 이어지는 석렬이 동서부속건물지 북단으로 이어지면서 배수로의 역할을 하 고 있다. 왕흥사지는 능산리사지와 전체적으로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형태를 띤다. 회랑지와 부속 13) 國 立 扶 餘 博 物 館, 2007, 陵 寺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2009 백제문화를 찾아서
39 건물지가 배수로를 경계로 이어지고 있으며, 건물지도 회랑과 같은 5.6m의 폭으로 북쪽으 로 올라오다가 ᆨ 자 형태로 꺾여 동서 12.7m의 폭으로 북편까지 올라오는 형태이다. 능산리사지와 마찬가지로 부속건물지의 북편기단은 강당지의 남편기단석과 거의 같은 선상 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지 북단에 동서방향의 석렬이 배수로의 역할을 하여 사역 내의 유 수의 방향을 외곽으로 돌리고 있는 것도 유사하다. 2012년도 왕흥사지 서건물지 조사에서 는 내부구조도 능산리사지와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도 1. 왕흥사지 가람배치도 도 2. 능산리사지 가람배치도 2) 강당지 좌우 부속건물지 도 3. 군수리사지 가람배치도 도 4. 동남리사지 가람배치도 강당지 좌우에서 부속건물지가 확인되는 경우는 능산리사지와 왕흥사, 미륵사, 군수리사 지, 동남리사지가 있다. 능산리사지와 왕흥사는 금당 좌우에 위치한 부속건물지와 마주보는
40 형태로 위치한다. 왕흥사는 2009년도 트렌치 조사를 통해 금당 서편 건물지 북단이자 강당 지 서편에 위치한 건물지의 남, 동, 북편 기단석 일부를 확인하였으나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다. 능산리사지의 강당 좌우 부속건물은 금당 서편 건물지에서 4.8m 북편에 위치하고 있으 며, 각 건물지의 동편기단석렬이 왕흥사는 일치하나, 능산리사지는 강당지 서편 건물지의 동편기단석에서 서쪽으로 들어간 지점에 금당지 서편 건물지의 동편기단석렬이 위치한다. 미륵사지의 경우 금당과 탑이 3개씩 위치하는 3원병렬식 가람배치이나 삼원을 에워싸고 있는 동서회랑지와 연결되어 동서건물지가 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능산리사지 및 왕흥사와 배치면에서는 비슷한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회랑지는 ᆨ 자형으로 사역 안쪽으로 꺾여 들어가며, 이 회랑지와 연결되어 강당지의 북편기단석렬과 같은 라인까지 건물지가 연 결되고 있다. 군수리사지와 동남리사지에서도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지가 확인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러나 일제강점기 조사된 기록으로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충남대학교에서 재조사시에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조사기록에서도 외곽 기단석렬과 규모를 확인한 정도였으며,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위치상으로 보아 경장지(서), 종루지(동)으로 추정하였다. 군수리 사지의 경우 능산리사지의 강당 서편에 위치한 부속건물지와 비슷한 규모로 와적기단이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3) 강당-금당 좌우 부속건물지 도 5. 정림사지 가람배치도 도 6. 제석사지 가람배치도 금당지 좌우에 위치한 부속건물지가 강당지 남측기단의 북단까지 이어지는 형태로서, 제 석사지와 정림사지에서 확인된다. 정림사는 회랑과 연결된 부속건물의 북편기단석이 강당지 북편기단석보다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제석사지도 비슷한 구조이며 북측기단은 조사되지 않았으나 강당지 중심선까지 동측기단이 연결되는 것으로 확인되엇다. 이러한 배치를 관련 논문에서는 14) 1, 2의 부속건물지를 갖고 있는 능산리사지나 왕흥사보다 후대의 유형으로
41 파악하였다. 4) 기타 부속건물지 앞에서 살펴본 유형 외에도 강당 북편과 회랑의 외곽에 위치한 부속건물지 등이 있다. 강 당 북편의 경우 정림사와 제석사, 미륵사가 있다. 정림사의 경우 건물의 남, 동, 북편 기단 석의 일부만 확인되었다. 군수리사지에서는 2011년도 조사에서 서회랑지 북편에서 1동의 건물이 확인되었다. 위치 상으로 볼 때 강당지의 북서편에 위치하고 있으나 서편 일부만 확인되어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다. 이 외 동향인 금강사지의 경우 강당지의 후면과 북편에 세장한 형태의 건물지 가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사지는 서회랑에 붙은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왕흥사에서는 금당 서편 건물지의 서편 으로 또다른 건물지의 동편기단석렬이 확인되었다. 아직 이 건물지의 전체적인 규모 등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기존 능산리사지에서 확인된 건물배치 외에 다른 부속건물지가 배치되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 7. 금강사지 가람배치도(북, 서승방지) 도 8. 능산리사지 서회랑지 부속 건물지 도 9. 군수리사지 강당 북편 건물지 도 10. 왕흥사지 금당 서편 건물지 서측기단석렬 및 외곽 건물지 동측기단석렬 14) 정자영, 2010, 6~7세기 백제 사찰 내 강당 좌우 건물지의 변천과정 고찰, 건축역사연구
42 2. 축조유형 부속건물지의 기단구축방법은 정리하면 표2와 같다. 15) 연 번 1 2 유적명 군수리사 지 능산리사 지 3 왕흥사지 규모(m) 위치 기단구 비교 축 외장 정면 측면 금당 탑 연구소 지상성토 강당좌우(서) 조사시 와적(추정) 지상판축 미확인 와적 전조적층 강당 북편 약3 이중기단 금당좌우(서) 11.28~ 금당좌우(동) 강당좌우(서) 강당좌우(동) 서회랑지 외곽 8.8(추 정) 금당좌우(서) 금당좌우(동) 와적+석조 지상성 토 지상성 토(추정) 지상성 토(추정) 와적+석조 석조적층식 석조적층식 4.2 석조적층식 지상성 토 지상성 토 와적+석조 와적+석조 강당좌우(서) 성토 석조+와적 굴광판축 석조가구식 이층 지상성토 석조 굴광판축 석조가구식 이층 굴광판축 석조 단층(추정) 동남리사 4 지 5 제석사지 6 금강사지 7 정림사지 금당 동서편 11.4 지상성 건물지 외곽 이상 토(추정) 석조적층식 충남대 강당좌우 조사시 미확인 금-강당 지상성 13.2 좌우(동) 토 석조적층식 강당 북편 13.8 석조적층식 강당 서편(후면) 기타(회랑 및 강당 북편) 금-강당 좌우(동) 금-강당 좌우(서) 292척 43척 46척 400척(추 정) 강당북편 70? 11.8 지상성 토(추정) 와적 와적 지상성 토(추정) 와적+석조 굴광판축 석조가구식 이층 굴광판축 석조가구식 단층 굴광판축 석조가구식 이층 굴광판축 석조가구식 이층 8 미륵사지 강당좌우(동) 65.5 약37 가구식 강당좌우(서) 가구식 강당북편 (잔존) 굴광판축 석조가구식 이층 굴광판축 석조가구식 이층 표 2. 부속건물지 규모 및 기단구축방법 15) 기단의 구축방법 및 외장의 유형은 다음책자의 분류방법에 따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동아시아 고대사지 비교연구(Ⅱ)-금당지편-, pp.259~
43 부속건물지는 중심사역에 비해 잔존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기단도 남아있지 않 다. 현재 기단구축방법이 확인가능한 유적은 왕흥사, 정림사, 제석사이다. 정림사지 북승방 지는 적갈색사질점토층으로 성토한 후 잔돌과 점토가 섞인 황갈색사질점토층을 다져올렸다. 금당-강당 동편 건물지는 적갈색사질토와 황갈색사질점토(40~60cm)가 동승방지 구역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건물 조성과 관련된 성토층으로 보이고, 서편 건물지는 삭평이 심 하지만 지상성토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흥사지 금당 좌우 건물지는 대지조성한 위에 소할석이 포함된 적갈색 또는 황갈색사질 점토를 성토다짐하였고, 강당 좌우 건물지는 강당을 먼저 조성한 후 강당지 기단 외곽으로 황갈색사질점토를 성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외 금당 좌우 건물지 외곽의 건물지는 아 직 조사가 덜 진행되었으나 소할석이 혼입된 황갈색사질점토 또는 적갈색 및 흑갈색사질점 토로 성토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도 11. 정림사지 강당 북편 건물지(북승방지) 토층양상 도 12. 왕흥사지 금당 동편 건물지 토층양상 도 13. 왕흥사지 강당 서편 건물지 토층양상 도 14. 군수리사지 강당 북편 건물지 토층양상 제석사지 금당-강당 동편 건물지는 생토면 위에 20~30cm 회황색사질점토를, 일부구간에 서는 회황색사질점토 상면에서 적갈색사질점토가 확인된 것으로 보아 지상삭토 및 성토기법 을 함께 사용하고 적갈색사질점토로 기단토의 상면을 정지한 것으로 보인다. 군수리사지는 일제강점기 조사된 강당 좌우 건물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2011년 조사된 강 당 북편의 건물지는 북편은 생토면을 70cm 이상, 남편은 30cm 이하로 굴착하고 적갈색점 질토와 황갈색점질토를 교차로 쌓아 축조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능산리사지의 부속건물지 역시 사진자료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지상성토식으로 축조한 것 으로 보여진다
44 이로보아 금당과 강당을 중심으로 동서 혹은 북편에 배치된 부속건물지는 확인이 어려우 나 대체로 지상성토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중심사역의 축조기법과 다소 차이를 보인 다. 제석사지 금당지는 대지를 조성한 후 최대 50cm정도 굴광하여 판축하고 지상으로도 최 대 57cm정도 성토하여 기단을 구축하였다. 같은 지형 내에서 굴광판축을 활용하였고 또한 판축의 깊이도 차이가 크다. 기단의 깊이는 대략 30cm 정도로 중심사역에 비해 얕다. 다만 왕흥사지 강당 서편 건물지는 강당을 먼저 조성한 후 외곽으로 성토하여 단을 높게 축조한 것으로 미루어 건물의 특수한 기능적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능산리사지 역시 부속건물지는 지상성토식으로 축조한데 반해 탑 및 금당은 굴광판축으로 조성하였으며 왕흥사도 탑은 굴광판축으로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부속건물지와는 기단구축방 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기단의 외장은 재료 및 시공법에 따라 와적기단과 석조적층식기단, 석조가구식기단으로 구분된다. 기단 외장의 특징은 관련책자의 유형을 기준으로 분류하였다. 16) 먼저 기와를 사용한 와적기단이 나타난 사례이다. 일제강점기 조사된 군수리사지 강당지 서편 건물지는 와적기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림사지는 금당-강당 동편 건물지는 적석 와 적기단으로 기단토를 U 자형으로 굴광한 후 바닥에 기와를 2열로 시설하고 부분적으로 는 기와 아래 할석을 쌓기도 하였다. 금당-강당 서편 건물지는 동측기단에서 합장식 와적 기단이 확인되었다. 석재를 사용하여 적층하는 방식으로 시공한 석조적층식 기단이 나타난 사례로는 능산리사 지 강당 좌우 건물지와 서회랑지에 붙은 부속건물지이다. 제석사지 금당-강당 동편 건물지 는 23~50 11~32 22~46cm 크기의 석재가 1단만 확인되었으며 강당 북편 건물지도 유 사한 형태로 확인되었다. 석재를 사용하여 결구하는 방식으로 시공한 석조가구식기단은 미륵사지에서 확인된다. 하나의 건물지에 두가지 외장형태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정림사지 강당 북편 건물지는 남, 동측 기단은 평적식 와적기단, 북측은 소형 석재를 세워박은 석조적층식기단으로 확인 된다. 능산리사지의 경우 금당 좌우 부속건물지는 적석과 와적을 같이 병용하였다. 왕흥사 금당 동서편 건물지는 금당을 향하는 방향과 남측은 할석 위에 와적을 하였고, 외곽 및 북 쪽 기단은 석재만 확인되었다. 동편 건물지는 40cm 내외의 판상석으로 바깥면을 맞추어 쌓 았다. 기단 외장의 차이는 표3과 같이 정리할 수 있으나 정형화된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능산리사지의 경우 와적과 적석이 같이 나타나는 것은 건물 보수에 따른 일부 구간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축조기법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흥사지의 경우 금당 좌우 건 물지는 금당을 향하는 부분과 남측만 와적한 것으로 미루어 장식적인 측면을 고려할 수 있 다. 16)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동아시아 고대사지 비교연구(Ⅱ)-금당지편-, pp.259~
45 유적명 위치 동 서 남 북 금당 서편 와적+적석 적석 금당 동편 와적+적석 적석 능산리사지 강당 서편 적석 강당 동편 적석 서회랑 부속건물 적석 금당 서편 와적 적석 와적 적석 금당 동편 적석 와적 적석 왕흥사지 강당 서편 적석 와적 적석 금당 서편 외곽 적석 금당 동편 외곽 적석 제석사지 금-강당 동편 적석 강당 북편 적석 금-강당 동편 와적 정림사지 금-강당 서편 와적 강당 북편 와적 적석 와적 표 3. 백제사찰 부속건물지 기단외장유형 도 15. 제석사지 강당 북편 건물지(북승방지) 북측기단 도 16. 정림사지 강당 북편 건물지(북승방지) 남측기단 도 17. 능산리사지 금당 서편 건물지(공방지Ⅰ) 서측기단 확장부분 도 18. 능산리사지 금당 서편 건물지(공방지Ⅰ) 동측기단
46 도 19. 왕흥사지 금당 동편 건물지 동측기단 도 20. 왕흥사지 금당 동편 건물지 서측기단 도 21. 왕흥사지 금당 서편 건물지 서측기단 도 22. 왕흥사지 금당 서편 건물지 동측기단 도 23. 왕흥사지 강당 서편 건물지 남측기단 도 24. 왕흥사지 강당 서편 건물지 서측기단 기단의 재료는 중심사역과 구분되는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왕흥사의 경우 금당과 목탑을 석조적층식기단으로만 조성한 것에 비해 부속건물지에서 와적기단이 일부 확인된다 는 특징이 있다. 또한 부속건물지의 경우 모두 단층기단으로 추정이 되는데, 예불의 공간인 금당과 목탑은 이중기단을 사용하였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3. 내부구조 부속건물지의 내부구조가 조사된 경우는 드물다. 제대로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간혹 초석 렬이나 적심토가 잔존해도 건물지 일부에 국한되어 전체적인 양상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능산리사지 금당 서편 건물지는 동서기단에서 각각 50cm 들어간 지점에 남북 일렬로 원
47 형의 퇴칸초석을 배치하고, 동서기단에서 각각 260cm 정도 들어간 지점에 약 5m 너비의 방 세 개로 구성되어 있는 본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채는 벽주식건물이며 퇴칸초 석의 주칸거리는 약 5m이다. 금당 동편 건물지는 잔존양상이 좋지 않으나 서편 건물지와 유사하게 퇴칸이 있고 3개의 방으로 구성된 본채가 있는 구조로 보인다. 도 25. 능산리사지 강당 동편 건물지(불명건물지Ⅰ) 도 26. 능산리사지 강당 서편 건물지(공방지Ⅱ) 도 27. 왕흥사지 금당 서편 건물지 내부 도 28. 왕흥사지 강당 서편 건물지 도 29. 정림사지 강당 북편 건물지(북승방지) 도 30. 정림사지 강당-금당 동편 건물지(동승방지)
48 강당 서편 건물지는 퇴칸이 있고 내부에 본채가 있는 구조는 같으나 본채가 m 규모의 2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 사이에는 통로형 공간이 있다. 강당지 동측기단 중앙부와 연결되어 있는 건물지는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으나 퇴칸이 4 1칸, 본채가 1실 1방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강당 서편 건물지보다 훨씬 작은 규모이다. 왕흥사의 강당지 서편 부속건물지도 능산리사지와 유사한 구조로 확인되었다. 내부가 후 대 건물지가 들어서면서 상당부분 교란되어 초석이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확인된 유구로 통 해 볼 때, 기단석 바로 안쪽으로 84~98cm 떨어진 지점에 원형 초석이 주칸거리 510cm으 로 남북 9개, 동서 3개, 총 27개가 배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내부로 길이 약 50cm 크기의 방형의 줄기초가 놓여진 구조로 보인다. 능산리사지와 퇴칸초석과 줄기초의 이중구조, 퇴칸초석의 주칸거리 등의 유사성으로 보아 내부구조도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서측기단에서 약 370m, 북측기단에서 106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방형의 초석의 위치와 능산리사지에서 방의 규모가 5m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본채는 8개의 방의 구조 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림사지 금당-강당 동편에 위치한 건물지는 고려시대 사찰유구 등으로 인하여 잔존상태 가 좋지 않으나 초석으로 추정되는 소형 석재가 8매 확인되었다. 약 40~50cm 크기의 소 형 석재로 상면을 편평하게 다듬었으며, 이들 열로 볼 때, 부속건물지 내부에 동서 6m 정 도의 방시설이 있는 승방일 것으로 추정되었다.17) 서측기단석에서의 거리도 대략 3m 정도 로 능산리사지와 비슷하나 퇴칸초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동측기단에서 약 1m 안쪽에 불규칙하게 기둥구멍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도 주목된다. 금당-강당 서편의 건물지에서 도 내부에 말각방형의 적심토가 7개, 초석이 1매 확인되었다. 강당 북편에 위치한 건물지 역시 적심시설로 추정되는 유구가 일부 확인이 되었다. 초석렬 및 주칸거리 등을 고려하여 방의 구조가 파악되는 건물지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유적명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위치 규모 -거리 본채 주칸거리 규모 5.24*5.44m 기단-거리 3 1칸 약0.6m 약5m 1실3방 m 금당 동편 강당 서편 3 1칸 3 1칸 m m 약0.9m 약0.4m 약5m 4.42~4.46m 1실2방 (서실) m 강당 동편 1*4칸 m 약0.8m 1.24~2.96m 1실1방 m 2.3~3m 약0.8~0.9m 5.1m 1실8방(추정) 약5m 약2.8m 1실6방(추정) 6m 추정 약3m 금당 서편 8*1칸(추 정) 동편 금-강당 1실6방(추정) 서편 표 4. 백제사찰 부속건물지 내부구조 17)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扶餘 定林寺址 방 규모 금당 서편 금-강당 정림사지 퇴칸 동서기단 6*6m 추정 2.8~3.8m 3.5m 약3m
49 Ⅳ. 맺음말 백제사찰 부속건물지의 특징을 중심사역과의 위치관계, 축조유형, 내부구조에 따라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부속건물지는 백제사찰의 기본 유형인 일탑일금당형식에서 남북 중심축선을 기준으 로 하여 동서방향에 대칭되는 구조로 위치하고 있다. 이 중 567년과 577년이라는 절대연 도가 확인된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그리고 출토유물 및 건물배치 등으로 보아 6세기로 추 정되는 군수리사지의 공통점은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의 존재이다. 또한 능산리사지에서 금 당 좌우 건물지의 너비는 왕흥사와 동일하나 길이가 약 18m에서 왕흥사의 48m로 건물의 규모가 커졌으며, 제석사지, 정림사지, 미륵사지에서는 금당 좌우의 건물이 강당까지 이어지 고 있다. 이로 보아 금당 좌우, 강당 좌우의 구분된 부속건물지는 금당 좌우의 건물이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합쳐지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부속건물지는 잔존상태가 좋지 않아 사례가 많지 않지만 금당지 및 탑지가 이 중기단을 사용한데 반해, 단층기단으로 구성하였으며 대체로 지상성토로 기단을 구축하였고 성토의 깊이는 중심사역보다 낮은 것으로 파악된다. 기단의 외장은 와적기단과 석조적층식, 석조가구식 기단이 고루 나타나는데 건물 배치별, 시기별 특징은 파악하기 어렵다. 하나의 건물지에 방향별로 기단축조방법을 다르게 하는 경우도 확인되는데, 왕흥사지는 금당을 향 하는 방향을 장식적 기능이 있다고 판단되는 와적기단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왕흥사의 경우 탑과 금당이 모두 석조적층식기단이었으나 금당 좌우의 건물에만 와 적기단을 사용하였다는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와적이 장식적인 의도로 알려져 있으 나, 장식성 이 금당지 등 위계가 높은 건물이 아닌, 기단조성단계부터 공력을 적게 들이 는 부속건물지에서 사용하였다는 점은 중심사역 조성에 있어서 보여지는 측면에 대한 인식 보다는 재료의 내구적 측면을 더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부속건물지의 내부시설도 잘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나 능산리사지의 부 속건물지 사례와 동서 기단에서의 거리와 초석간 주칸거리 등을 기준으로 내부구조를 추정 할 때, 왕흥사와 능산리사지, 정림사지의 강당 및 금당 동서편 건물지는 모두 방시설이 있 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는 1실 1방에서 8방까지 다양할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는 중심사역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건물지의 용도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군수리 사지 및 동남리사지의 경우 경루와 종루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나 오는 경루를 금당 좌우에 두었다는 기록은 군수리사지나 동남리사지에서 경루와 종루가 대 칭적으로 배치된 구도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종루의 백제시기의 명확한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는 현재까지 없어, 이들 용도에 대해서는 좀 더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 외 강당 후면에 위치하거나 강당 및 금당 좌우에 위치한 건물을 승방 으로 인식하 는 경우가 있다. 승방은 승려들의 거처공간으로서 대체로 세장한 형태로 내부에 방이 나눠 져 있고 중심사역의 외곽에 있을 경우 승방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강당 후면에 위치한 경우는 사역의 바깥쪽에 위치한 위치적 특성 때문에 승방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지고, 강 당 및 금당 좌우에 대칭적 형태로 위치한 경우도 방시설이 있다는 점에서는 가능성이 있다 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림사 동서승방지에서 확인된 내부시설은 극히 일부로서 추정에 가까 우며, 방시설이 비교적 명확히 확인된 능산리사지는 내부에서 금동대향로 등이 나오면서 공
50 방지로 부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왕흥사지의 경우, 능산리사지와 구조 및 위치는 유사하나 금당과의 거리로 보아 부처에게 공양하는 음식물을 준비하는 공간일 가 능성도 있으며, 승려들이 주거하는 공간이 아닌 사무를 보는 업무공간 등 여러 가지 가능성 을 두고 판단해야할 문제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이번 논고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부속건물지의 내부 구조 외에 출입시설 및 기타 시설물도 확인된 사례가 있다. 능산리사지의 디딤돌 등 출입시 설이 어느 방향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며, 왕흥사지에서 확인된 낙수시설 (추정), 내부 집와시설 등의 기타 시설물에 대해서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또한 회랑과 부속건물의 배치관계도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동남리사지는 가운데 금당을 중심으로 두고 중문, 경장, 종루, 강당지가 모두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금강사 지도 가운데 중심사역인 금당과 탑을 두고, 그 주위를 중문, 강당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둘 러싸는 구조이며, 강당 후면의 건물지(승방지)도 강당지와 행각지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왕흥사, 능산리사지는 회랑과 이어진 동서건물지 외에는, 동서건물지 외곽 부속건물 지, 동서건물지 북단 부속건물지는 회랑과 연결된 구조를 확인하지 못하였으며, 정림사지는 회랑과 이어진 동서건물지가 있는 형태이고, 강당 북편 건물지는 회랑과의 연결관계가 확인 되지 않았다. 회랑이 사역 내에서 영역을 구분하는 의미라는 점에서 회랑과의 연결관계는 부속건물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필수적일 것으로 사료된다
51 <참고문헌> 朴 彦 坤 李 珢 姃, 2001, 韓 國 古 代 伽 藍 의 回 廊 에 關 한 硏 究, 환경개발연구논문집 6. 박대성 고영훈, 2004, 伽 藍 의 시기별 經, 鐘 樓 配 置 特 性 에 관한 연구, 大 韓 建 築 學 會 聯 合 論 文 集 6-2. 정자영, 2007, 한국 고대 목탑지 기단 및 심초부 축조기법 연구 : 부여 군수리사지를 중 심으로, 숭실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문옥현, 2010, 백제 사비기 1탑1금당식 가람의 등장과 전개, 충남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정자영, 2010, 6~7세기 백제 사찰 내 강당 좌우 건물지의 변천과정 고찰, 건축역사 연구 주동훈, 2011, 百 濟 泗 沘 期 寺 刹 의 修 道 生 活 空 間 에 대한 고고학적 硏 究, 전북대학교석사 학위논문. 한주성, 2012, 백제 미륵사 中 門 평면과 구조, 大 韓 建 築 學 會 論 文 集 計 劃 系 28-1 國 立 博 物 館, 1969, 金 剛 寺.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89, 彌 勒 寺 Ⅰ.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1993, 東 南 里 遺 蹟 發 掘 調 査 略 報 告 書. 國 立 扶 餘 博 物 館, 2007, 陵 寺.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王 興 寺 址 Ⅲ.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한중일 고대사지 비교연구(Ⅰ)-목탑지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동아시아 고대사지 비교연구(Ⅱ)-금당지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帝 釋 寺 址 발굴조사보고서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扶 餘 定 林 寺 址
52
53 7 世 紀 日 本 의 古 代 寺 院 大 林 潤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 Ⅰ. 머리말 Ⅱ. 佛 敎 傳 來 와 渡 來 人 의 影 響 Ⅲ. 主 要 伽 藍 配 置 와 古 代 寺 院 Ⅳ. 7 世 紀 特 有 의 技 法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欽 明 [킨메이] 7년(538년), 백제 聖 明 王 이 불교과 경전을 大 和 [야마토] 朝 廷 에 가져온 시점이다. 이것은 百 濟 王 으로부터 大 和 의 大 王 에게, 즉 國 에서 國 으로의 공식적인 전래이며, 실제로는 이외에도 中 國 과 朝 鮮 半 島 로부터 건너온 渡 來 人 을 통 해 이미 앞선 시기부터 불교가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4~5세기에 이루어진 조선반도의 불교 확산과 비교해보면, 일본에서는 불교의 보 급이 보다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며, 일본 최초의 本 格 伽 藍 을 구비한 사원이라 일컬어지는 飛 鳥 [아스카] 寺 의 건설은 590년에 개시된다. 이번 테마인 백제 사원과의 비교를 고려할 때, 일본의 寺 院 가운데 같은 시대에 대응되는 것은 주로 7세기의 사원유적으로 한정된다. 이 시기의 불교사원은 조선반도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가람배치에 대해서는 고구려 및 백제 사원과의 공통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초기불교사원을 기본으 로 삼아, 7세기 후반에는 일본열도 전역에서 사원건축의 조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발굴 성과의 축적을 통해 畿 內 ( 中 央 ) 뿐 아니라 地 方 의 불교사원에 대해서도 그 양상이 보다 명 확해져 가고 있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飛 鳥 寺 이후 平 城 [헤이죠] 京 으로 천도하기 이전까 지 飛 鳥 지역의 7세기 사원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平 城 京 에 만들어진 8세기 이후의 사원에 대해서는 필요한 부분에 한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Ⅱ. 佛 敎 傳 來 와 渡 來 人 의 影 響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가람을 갖춘 불교사원인 飛 鳥 寺 는 大 王 에 의한 사원이 아니라, 大 豪
54 族 인 蘇 我 [소가] 氏 의 氏 寺 였다. 崇 峻 [스슌]3년(590년)에 조영이 개시되었으나, 이에 앞서 崇 峻 元 年 에 백제로부터 造 寺 工, 鑄 造 工, 瓦 工, 畵 工 의 기술자집단이 도래하였으며, 이러한 공인들을 중심으로 飛 鳥 寺 의 造 營 工 事 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만든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출토된 기와는 백제의 瓦 當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 사한 것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또한 조영기술에 관해서도 掘 込 地 業 版 築 地 下 式 心 礎 이 층기단( 二 重 基 壇 ) 등이 유구로부터 확인되고 있어, 백제의 기술이 飛 鳥 寺 의 조영에 큰 역할 을 담당하였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飛 鳥 寺 의 가람배치는 塔 을 중심으로 그 北 東 西 쪽에 金 堂 을 배치하는 一 塔 三 金 堂 型 으로, 예부터 고구려의 淸 岩 里 廢 寺 와의 유사성이 지적되고 있다. 주요 가람의 건설이 거의 끝난 것으로 추정되는 推 古 [스이코]4년(596년), 飛 鳥 寺 에는 고구려의 승려인 慧 慈 와 백제의 승려인 慧 聡 두 사람이 거주하였으므로,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와도 깊은 관계가 있 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도래인을 통하여, 고구려의 기술과 문화도 도입되었을 것이다. 飛 鳥 寺 외에도 檜 隈 [히노쿠마] 寺 坂 田 [사카타] 寺 등, 渡 來 系 氏 族 의 氏 寺 도 조영된다. 이 때에도 도래인이 활약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Ⅲ. 主 要 伽 藍 配 置 와 古 代 寺 院 일본 고대사원의 가람배치는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들은 조영연대 조영배경 입지 등의 조건들에 따라 세부적으로는 보다 다양한 변화양상이 인식되며, 대략 7가지로 분류되 고 있다. 즉, 飛 鳥 寺 川 原 [가와하라] 寺 四 天 王 [시텐노오] 寺 法 隆 [호오류우] 寺 法 起 [호 오키] 寺 薬 師 [야쿠시] 寺 大 安 [다이안] 寺 등이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金 堂 과 塔 의 위치와 수에 따라 분류되며, 그 외에도 講 堂 과 回 廊 의 위치까지 감안한다면 가람배치 형식의 수는 더욱 증가한다. 발굴성과의 축적에 따라, 고대사원유적의 양상은 점차 명확해져가고 있지만, 아직 전모가 해명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塔 金 堂 講 堂 등의 중심건물 외에는 판명되지 않은 것도 많지만, 가람배치에 의한 분류를 기초로 하여 일본 고대사원의 사례에 대하여 개관하고자 한다( 圖 1, 2). 1. 飛 鳥 寺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飛 鳥 [아스카] 寺 는 소위 一 塔 三 金 堂 式 으로, 고구려의 淸 岩 里 廢 寺 와 유사성이 지적되고 있으나, 그 조영의 중심은 백제의 공인이었다. 飛 鳥 寺 의 조영시에는 당시 朝 鮮 諸 國 의 최신 造 寺 技 術 이 복합적으로 채용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森 1998, 加 藤 1999 등). 조영과정은 日 本 書 紀 에 따르면, 地 域 의 造 成 工 事 金 堂 과 回 廊 의 건설 塔 의 건설 佛 像 의 조영의 순서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과 금당은 壇 上 積 基 壇 의 일층기단이지만, 동서금당은 이중기단으로 확인되었다. 상층기단 위에는 남북방향으로 용마루를 얹은 건물을 세우고, 하층기단에도 초석을 설치하는 점으로 부터 처마를 받치는 기둥( 軒 支 柱 ) 내지는 부연( 裳 階 )의 존재가 상정되고 있다
55 2. 四 天 王 寺 四 天 王 [시텐노오] 寺 의 가람배치는 中 門 塔 金 堂 講 堂 이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一 塔 一 堂 式 이다. 백제의 사원에서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 일반적으로도 백제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단순히 飛 鳥 寺 式 가람배치의 東 西 金 堂 을 생략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 다. 日 本 書 紀 에 따르면, 四 天 王 寺 는 推 古 [스이코] 元 年 (593년)에 현재의 難 波 [나니와] 지역에 조영되었다고 한다. 우선 塔 과 金 堂 을 만들고, 후에 南 大 門 中 門 回 廊 講 堂 이 7 세기후반에 조영되었다. 四 天 王 寺 式 가람배치를 채용한 지방사원의 수는 적지만, 北 野 [기타노] 廢 寺 ( 愛 知 [아이치] 県 :7세기 후반)와 服 部 (핫토리) 廢 寺 ( 岡 山 [오카야마] 県 :7세기 후반) 등이 확인되고 있다. 3. 山 田 寺 山 田 [야마다] 寺 는 발굴조사에 의해 回 廊 이 도괴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7세기의 건축양 식을 알 수 있는 유구로 유명하다. 가람배치는 四 天 王 寺 와 마찬가지로 탑과 금당이 南 北 방 향으로 늘어서는 형식이나, 회랑이 금당과 강당의 사이에서 막혀있다. 山 田 寺 는 건물 상부 목부( 木 部 )의 건축기술로 종종 주목받고 있으며, 금당 서계단의 이석 ( 耳 石 ) 외측에서 동물의 다리 부분( 脚 部 )으로 보이는 부조( 浮 彫 )가 확인되었는데 일본의 다 른 사원에서는 확인된 바 없다. 또한 금당의 초석에는 극히 일부분이기는 하나 연화문의 부 조가 확인되어, 山 田 寺 가 상당히 공을 들어 조영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상세한 내용은 뒤에서 설명하겠으나, 금당에서 확인된 放 射 狀 의 기둥배치를 가지는 평면형태는 玉 虫 厨 子 에 서 法 隆 寺 金 堂 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이미 잃어버린 7세기의 금당건축의 양식을 전해주는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4. 川 原 寺 川 原 [가와하라] 寺 의 창건은 66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천황의 칙명에 의해 조 영되었다. 川 原 寺 의 가람배치는 동쪽에 탑을 세우고 서쪽에 남북방향으로 용마루를 얹은 서 금당이 탑과 마주보도록 두었으며, 이들의 북측에 남쪽을 향하는 중금당이 위치한다. 가람 의 중심축상에서 탑이 벗어난 배치는 飛 鳥 寺 와 四 天 王 寺 와 같이 탑이 중심을 이루는 가람배 치로부터 변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川 原 寺 와 동일한 가람배치의 유구는 아니지만, 금당이 남북방향으로 자리잡고 탑과 대면 하는 배치를 채용한 예를 川 原 寺 式 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觀 世 音 [칸세온] 寺 ( 福 岡 [후쿠 오카] 県 :8세기초두)과 多 賀 城 [타가죠] 廢 寺 ( 宮 城 [미야기] 県 ) 등이 그것이다( 觀 世 音 寺 式 으로 독립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한 穴 太 [아노오] 廢 寺 ( 滋 賀 県 :630년경)도 川 原 寺 式 가람배치 로 여겨지고 있는데, 7세기 전반에는 성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 法 隆 寺
56 法 隆 [호오류우] 寺 式 가람배치는 동쪽으로 금당, 서쪽으로 탑을 나란히 두는 一 塔 一 堂 式 이 다. 금당과 탑이 병렬하는 가람배치는 이때까지 탑이 중심이 되는 가람배치로부터 진전된 양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현재의 法 隆 寺 西 院 伽 藍 은 7세기말경에 재건( 再 建 )되었으나, 그에 앞서 건립된 若 草 [와카쿠사] 伽 藍 은 7세기초두에 조영되었으며 그 가람배치는 四 天 王 寺 式 이 었음이 확인되었다. 法 隆 寺 式 가람배치와 같은 배치인 法 輪 [호오린] 寺 는 발굴조사의 결과 창건연대가 650년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과 금당을 병렬시킨 가람배치가 7세기 중반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근년 확인된 吉 備 池 [키비이케] 廢 寺 ( 百 濟 大 寺 )의 가 람배치도 法 隆 寺 式 이나, 중문이 탑과 금당 각각의 남쪽에 위치하여, 일반적인 법륭사식 가 람배치와는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창건연대가 639년인 점으로부터 보아 이 가람배치가 7 세기 전반에는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륭사식 가람배치에서 탑과 금당의 위치가 역전 된 것이 法 起 [호오키] 寺 이며, 이 두 가지를 나누어 논하는 경우도 있다. 6. 藥 師 寺 와 大 安 寺 藥 師 [야쿠시] 寺 式 가람배치와 大 安 [다이안] 寺 式 가람배치는 모두 탑을 2기 배치하는 雙 塔 式 이지만, 藥 師 寺 에서는 회랑 내에 탑을 두는 것에 반하여, 大 安 寺 式 은 회랑 밖에 탑을 배치한다. 藥 師 寺 는 7세기후반에 조영되며, 8세기에 藤 原 京 에서 平 城 京 으로 천도할 당시 平 城 京 안 으로 옮겨진다. 현재의 藥 師 寺 는 바로 平 城 藥 師 寺 이며, 본래의 藤 原 藥 師 寺 는 本 藥 師 [혼야쿠 시] 寺 로서 조사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에 따르면, 本 藥 師 寺 의 가람배치는 회랑이 單 廊 인 점 및 중문의 규모 등에서 차이를 보이는 점 등에서 本 藥 師 寺 와 기본적으로 동일하여, 平 城 藥 師 寺 가 本 藥 師 寺 의 가람을 그대로 답습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藥 師 寺 式 가람배 치는 7세기 후반에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藥 師 寺 式 가람배치와 통일신라시대의 초기사원 가람배치와의 관련성은 예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感 恩 寺 와 공통점이 많아서, 藥 師 寺 계획시에 참고하였을 가능 성이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大 安 寺 式 가람배치는 平 城 京 내에 조영된 큰 사원에서 많이 채용되고 있다. 東 大 [도오다 이] 寺, 西 大 [사이다이] 寺, 法 華 [홋케] 寺 등에 보이며, 모두 金 堂 院 의 남측으로 떨어진 위치 에 탑을 배치한다. 그 성립은 역시나 大 安 寺 가 상한( 上 限 )으로 생각되며, 8세기초두에 해당 된다. 이상의 대표적인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6세기의 飛 鳥 寺, 이보다 조금 늦은 四 天 王 寺, 7세 기전반의 川 原 寺 式 法 隆 寺 式, 7세기 후반의 薬 師 寺 式, 8세기의 大 安 寺 式 이라는 흐름이 확 인되며, 각각 금당과 탑의 위치관계 및 수에서 진전을 보인다. 이러한 가람배치의 변화 요 인에 대해서는, 기술적인 문제 뿐 아니라, 불교사상의 변화, 정치적 요인, 諸 外 國 과의 관계 가 복잡하게 얽혀있으므로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또한, 입지조건과 여러가지 경제적 요인 등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개별적인 사례에 대하여 진중하게 검토할 필요 가 있을 것이다. 특히 백제와의 관계를 시사하는 경우로는 飛 鳥 寺 건립에 따른 공인의 관계 및 四 天 王 寺 式 가람배치를 들 수 있으나, 적어도 7세기의 일본 불교사원에 대해서는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 및 신라와의 관계도 중시해야 할 것이다
57 7세기전반까지의 사원은 大 和 [야마토] 河 内 [가와치] 등 주로 畿 内 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대략 45~55개소의 조영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7세기후반이 되면, 사원 수는 급증하고, 그 분포도 전국각지로 확대된다. 이 시기의 사원으로 확인된 유적은 700개 소 이상으로, 이것은 扶 桑 略 記 에 기록된 545개소의 수를 넘어서고 있으며, 私 的 인 절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질 것이라 생각된다. Ⅳ. 7 世 紀 特 有 의 技 法 이상과 같이, 6세기부터 7세기전반에 大 和 [야마토]를 중심으로 조영이 시작된 사원은, 7 세기후반이 되면 전국적으로 전파되기에 이르다. 7세기 사원의 검출사례가 축척됨에 따라, 7세기 특유의 기법이라 할 수 있는 몇가지가 확인된다. 1. 이층기단( 二 重 基 壇 ) 첫 번째는 이층기단이다( 島 田 이상, 이층기단에 관한 고찰은 島 田 의 논고를 기초로 한다). 일본에서 이층기단의 현존사례로는 法 隆 寺 금당과 5층탑을 들 수 있다( 圖 3). 현재의 모습은 17세기말 수리된 이후의 것이지만 昭 和 [쇼와]기의 해체수리 당시에 기단의 조사도 이루짐에 따라 본래 하층기단( 下 成 基 壇 )이 낮고 상층기단( 上 成 基 壇 )이 높은 상태임이 확인 되었으며, 응회암의 切 石 으로 쌓은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발굴사례로는 飛 鳥 寺 의 東 西 金 堂 에서 확인된 것이 유명하다. 飛 鳥 寺 는 금당과 탑은 자연 석을 이용한 일층기단이지만, 동서금당은 하층기단의 높이가 약 13cm로 낮고 하층기단 上 面 의 폭은 73cm인 이층기단이다. 이 경우, 하층기단의 상면에도 초석을 안치하고 있는데, 그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논의되고 있다. 飛 鳥 寺 의 동서금당과 같이 하층기단에 초석을 안치한 경우를 이층기단의 조건으로 삼는다 면, 일본에서는 이 사례 밖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하층기단이 자연석 1매분 정도의 상 당히 낮은 것이 대부분인데, 그러한 경우를 이층기단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좁은 통로와 같은 공간( 犬 走 り) 내지는 기단주위에 돌을 깔아놓은 박석 시설( 石 敷 )로 보아야 할지, 그 구분에 있어 선을 긋기 어렵다. 본 글에서는 보고서에 이층기단으로 구분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여 그 형태를 정리한 후에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이중기단의 축조연대에 있어서는, 8세기에도 몇몇 사례가 확인되지만 대부분은 7세 기대 집중되고 있다. 다음으로 기단형식을 살펴보면, 상층기단에는 切 石 과 기와, 전돌이 사 용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 하층기단에는 자연석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기단 의 높이에 있어서도, 상층기단은 삭평으로 인하여 그 높이가 확인되지 않으나, 하층기단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자연석 1 段 에 해당되는 10~30cm 정도의 경우가 많으며, 상당이 낮다. 山 田 寺 금당의 경우 낙수받이로 보고되어 있지만, 切 石 을 쌓아 조성한 기단의 주위에 약간 높게 切 石 을 全 面 에 빈틈없이 깔아놓은 부석시설( 石 敷 )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이층기단의 목적을 검토하는 데 참고할 자료로서, 大 鳳 [타이호오] 寺 ( 京 都 [교오토] 府 :7세기후반)와 上 淀 [카미요도] 廢 寺 ( 鳥 取 県 :7세기후반)에 보이는 와적기단 ( 瓦 積 基 壇 )의 구축방법이 주목된다. 기단 단면도를 보면, 외관에서는 상층기단으로 보이는
58 와적기단을 정지층보다 높게 쌓아올렸으며, 하층기단이 되는 적석의 높이는 와적기단의 기 저부 주위까지 쌓아올린 것을 알 수 있다. 즉, 와적의 기단을 우선적으로 구축한 뒤에 바깥 둘레의 하층기단부분을 부가하였으며, 하층기단은 와적기단 기저부의 보강을 위해 구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빗물의 낙수받이 기능과 하층기단과의 관계도 주목되고 있다. 飛 鳥 寺 東 西 金 堂 에서 는 하층기단의 外 周 에 부석면( 石 敷 面 )이 있어서, 이것을 낙수면으로 생각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山 田 寺 금당에서는 切 石 의 부석면 바깥쪽에 낙수구( 落 水 構, 雨 落 構 ) 등을 마련하지 않았으며, 지붕 처마의 범위가 부석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7세기대 의 유구에서는 폭이 좁은 낙수구를 별도로 설치하지 않고, 소위 산수( 散 水 )상의 포장( 鋪 裝 ) 을 마련하여 낙수받이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8세기가 되면, 本 薬 師 [모토야쿠시] 寺 의 동탑과 興 福 [코오후쿠] 寺 의 중금당 등과 같이, 낙수구는 기단으로부터 약간 떨어져 설치 되고, 기단과 낙수구의 사이를 부석으로 포장하는 사례가 확인된다. 이처럼 기단 외주의 부 석시설은 낙수받이의 기능을 가진 산수( 散 水 )상의 포장면과 기단과 낙수구 사이에 좁은 통 로( 犬 走 り)가 되는 포장면의 두 가지의 기능이 있으며, 전자가 보다 古 式 으로 여겨진다. 한 편, 고대의 낙수구 구축방법에 대하여, 연대가 내려갈수록 구( 構 )의 폭이 좁아지는 점이 지 적된 바 있다( 青 木 2011). 이와 같은 시점으로 다시 한 번 이층기단의 사례를 살펴보면, 낙수받이가 검출되지 않는 사례가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하층기단을 낙수받이로 판단하기 위해 서는 각 건물 지붕의 처마 위치와 주변의 배수환경 등을 종합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겠지만, 일본에서 이층기단의 성질을 검토하는 데 있어 중요한 관점으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에서 확인되는 이층기단에는 상층기단의 높이에 비하여 하층기단이 낮은 경우가 많으 며, 하층기단에 초석이 안치되는 사례도 많다. 한편, 중국의 궁전건축에서는 복수의 단으로 구성된 기단 각각에 높은 난간( 高 欄 )이 돌아가며, 건물을 장엄하기 위하여 높이를 의식하고 있음이 명확히 보인다. 이러한 점과 일본의 사례를 비교해 보면, 일본의 이층기단은 한국의 예에 가깝고, 飛 鳥 寺 동서금당은 확실히 조선반도의 기술을 도입하여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8세기 이후가 되면서 서서히 이층기단은 감소하게 된다. 2. 放 射 狀 기둥배치의 發 展 과 消 滅 7세기 건축구조에 보이는 또 한가지의 특징적인 현상으로, 평면 放 射 狀 의 기둥배치( 放 射 狀 柱 配 置 )가 있다. 8세기이후의 일반적인 금당에서 확인되는 사면외주건물( 四 面 庇 建 物 )과 그 이전 양식의 건물구조 간에 구조상의 차이점이 보인다는 점은 예로부터 지적되어왔다. 사면외진건물의 경우, 내주열의 기둥에서 외주열의 기둥까지는 건물에 직각으로 공포를 얹어 각 지점간의 거리를 동일하게 하여 도리을 받치며, 모서리는 45도의 방향으로 연장하여 모서리의 기둥 위에서는 3방향으로 組 物 이 튀어나오도록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 있어 모서리 기둥 위에서 45도 방향만으로 組 物 을 배치한 경우가 法 隆 寺 금당으로, 지점 간의 거리를 동일하 게 하기 위하여 측칸을 좁게 하여, 모서리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있다. 이것에 선행하는 것이 山 田 寺 의 금당, 그리고 玉 虫 厨 子 이다. 山 田 寺 의 금당은 내주열과 외주열 모두 도리칸 3칸 보칸 3칸으로 외주열과 내주열이 대응하며, 모서리를 제외한 건물이 직각으로 繫 梁 을 얹어, 모서리기준으로부터 45도의 방향으로만 繫 梁 가 연장되는 구 조를 이룬다. 같은 구조의 건물은 穴 太 廢 寺 ( 滋 賀 県 :8세기), 夏 見 [나츠미] 廢 寺 ( 三 重 県 :8세기)
59 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玉 虫 厨 子 는 法 隆 寺 에 전해지는 厨 子 로, 제작연대는 7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규 모이면서도 건축적 표현이 정밀하며, 종종 法 隆 寺 이전의 건축기술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로 서 소개된다. 玉 虫 厨 子 는 건물에 대하여 모든 공포를 방사상으로 배치하는 특징을 가지며, 山 田 寺 금당 전 단계의 평면형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외에, 正 家 [쇼우게] 廢 寺 금당( 岐 阜 [기후] 県 :8세기전반)에서는 玉 虫 厨 子 의 평면과 매우 닮은 기둥배치가 확인되고 있다. 즉, 박공면의 외주 기둥수가 1개 더 많고 玉 虫 厨 子 에서 평 면과 박공면의 기둥 사이가 다르다는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박공면의 들보도 방사상으로 걸 쳐 지점간의 거리를 같게 하기 위한 고안이 보인다. 正 家 廢 寺 의 경우, 연대적으로도 지역적 으로도 玉 虫 厨 子 로부터 法 隆 寺 金 堂 으로의 계보에 위치를 두는 데에는 신중해야하지만, 이 러한 흐름 가운데에서 처마를 어떻게 받쳤는가 하는 구조상의 발전형태의 하나로서 이해하 는 것이 가능하다. 이상과 같이, 방사상으로 기둥을 배치한 건물은 금당건축에 한정되며, 같은 사원에서도 강당에서는 일반전인 사면외진건물의 구조를 보인다. 즉, 방사상 기둥배치는 금당 특유의 평면배치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法 隆 寺 금당만 보더라도, 이러한 구조에서는 깊은 처마를 받쳐내기에 충분한 강도를 얻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薬 師 寺 동탑과 唐 招 提 (토우쇼우다이) 寺 금당 등과 같이 8세기의 건축에서는 三 手 先 공포로 발전하게 된다. 位 置 付 けるには 慎 重 であるべきだが Ⅴ. 맺음말 이상, 두서없지만 일본의 7세기 사원유적과 그 특징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서술하였다. 7 세기의 발굴유구에 대해서는 근년 많은 新 知 見 이 일본 각지에서 제기되고 있으며, 사원의 가람에 대해서도 많은 사례가 축적되고 있다. 특히, 七 堂 伽 藍 을 갖춘 다수의 본격적인 사원 과 더불어 금당과 탑만을 갖춘 一 堂 型 伽 藍 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지방에서는 사원의 조영 시에 어떠한 이유에서 애당초 칠당가람을 조영할 예정이 아니었거나, 도중에 조영이 중단되 었을 가능성도 있어, 결과적으로는 변칙적인 가람배치 및 일당형의 사원이 조영되었던 것으 로 보인다( 亀 田 2005). 또는 각 지방에서 보다 독자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경우가 다수 존재 하였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후에도 발굴조사의 진전과 더불어 새로운 사례의 축적을 통해 많은 연구성과가 있을 것 이다. 그러한 가운데에도, 조선반도로부터의 영향은 간과할 수 없는 관점이며, 넓게는 동아 시아 전체에서 어떠한 기술의 전파와 발전이 있었는지에 대한 금후 연구의 진전이 기대된 다
60
61 7 世 紀 における 日 本 の 古 代 寺 院 大 林 潤 日 本 奈 良 文 化 財 硏 究 所 Ⅰ.はじめに Ⅱ. 仏 教 伝 来 と 渡 来 人 の 影 響 Ⅲ. 主 要 伽 藍 配 置 と 古 代 寺 院 Ⅳ.7 世 紀 特 有 の 技 法 Ⅴ.おわりに Ⅰ.はじめに 日 本 に 仏 教 が 伝 来 したのは 欽 明 7 年 ( 西 暦 538 年 ) 百 済 聖 明 王 が 仏 像 や 経 典 を 大 和 朝 廷 にもたらした 時 点 とされる これは 百 済 王 から 大 和 の 大 王 へ すなわち 国 から 国 への 公 式 な 伝 来 であり 実 際 にはこれ 以 外 にも 中 国 や 朝 鮮 半 島 からの 渡 来 人 を 通 じてはやくから 仏 教 が 受 容 されていた 可 能 性 が 高 い しかし 4~5 世 紀 の 朝 鮮 半 島 での 仏 教 の 広 がりと 比 較 すると 日 本 における 仏 教 の 普 及 は 遅 れ 日 本 最 初 の 本 格 伽 藍 をもつ 寺 院 といわれる 飛 鳥 寺 の 建 設 は590 年 に 開 始 されている 今 回 のテーマである 百 済 の 寺 院 との 比 較 を 考 えると 日 本 の 寺 院 でこの 時 代 に 対 応 するのは 主 に7 世 紀 の 寺 院 遺 跡 に 限 定 される この 時 期 の 仏 教 寺 院 は 朝 鮮 半 島 の 影 響 を 多 大 に 受 けていたと 考 えられ 特 に 伽 藍 配 置 については 高 句 麗 や 百 済 の 寺 院 との 共 通 点 が 指 摘 されている これら の 初 期 仏 教 寺 院 を 基 本 とし 7 世 紀 後 半 は 日 本 列 島 全 域 で 寺 院 建 築 の 造 営 が 活 発 化 し 発 掘 成 果 の 蓄 積 から 畿 内 ( 中 央 )だけではなく 地 方 の 仏 教 寺 院 についてもその 様 相 が 明 らかになり つつある したがって 本 論 では 飛 鳥 寺 以 降 平 城 京 遷 都 以 前 の 飛 鳥 地 域 の7 世 紀 の 寺 院 を 中 心 に 紹 介 し 平 城 京 に 造 られた8 世 紀 以 降 の 寺 院 については 必 要 最 低 限 の 部 分 にとどめて 言 及 していきたい Ⅱ. 仏 教 伝 来 と 渡 来 人 の 影 響 日 本 最 初 の 本 格 的 伽 藍 を 持 つ 仏 教 寺 院 とされる 飛 鳥 寺 は 大 王 によるものではなく 大 豪
62 族 蘇 我 氏 の 氏 寺 であった 崇 峻 3 年 ( 西 暦 590 年 )に 造 営 が 開 始 されるが これに 先 立 ち 崇 峻 元 年 に 百 済 より 造 寺 工 鋳 造 工 瓦 工 画 工 の 技 術 者 集 団 が 渡 来 し これらの 工 人 を 中 心 に して 飛 鳥 寺 の 造 営 工 事 がはじめられた 彼 らが 造 ったものが 具 体 的 に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 かは 不 明 であるが 出 土 瓦 には 百 済 の 瓦 当 そのものといえるものが 数 多 く 確 認 されている ま た 造 営 技 術 に 関 しても 掘 込 地 業 版 築 地 下 式 心 礎 二 重 基 壇 などが 遺 構 から 確 認 されて おり 百 済 の 技 術 が 飛 鳥 寺 の 造 営 に 大 きな 役 割 を 果 たしたことは 言 うまでもない 一 方 で 飛 鳥 寺 の 伽 藍 配 置 は 塔 を 中 心 にその 北 東 西 に 金 堂 を 配 置 する 一 塔 三 金 堂 型 で 古 くから 高 句 麗 の 清 岩 里 廃 寺 との 類 似 が 指 摘 されている 主 要 伽 藍 の 建 設 がほぼ 終 了 したとみら れる 推 古 4 年 ( 西 暦 596 年 ) 飛 鳥 寺 には 高 句 麗 僧 慧 慈 と 百 済 僧 慧 聡 の 二 人 の 僧 が 居 住 しており 百 済 だけではなく 高 句 麗 との 深 い 関 係 が 認 められる 渡 来 人 を 通 じて 高 句 麗 の 技 術 文 化 も 導 入 されていたわけである 飛 鳥 寺 のほかにも 檜 隈 寺 坂 田 寺 など 渡 来 系 氏 族 の 氏 寺 も 造 営 されている これらの 寺 院 の 造 営 においても 渡 来 人 が 活 躍 していたと 考 えられる Ⅲ. 主 要 伽 藍 配 置 と 古 代 寺 院 日 本 における 古 代 寺 院 の 伽 藍 配 置 は いろいろな 形 状 が 認 められている これらは 造 営 年 代 造 営 背 景 立 地 等 の 条 件 などによって 細 部 にはいろいろなヴァリエーションが 認 められ るものの おおむね7 通 りの 形 状 に 分 類 されている すなわち 飛 鳥 寺 川 原 寺 四 天 王 寺 法 隆 寺 法 起 寺 薬 師 寺 大 安 寺 などである これは 金 堂 と 塔 の 位 置 と 数 による 分 類 であ り このほか 講 堂 や 回 廊 の 位 置 を 勘 案 すると その 数 はさらに 増 える 発 掘 成 果 の 蓄 積 により 古 代 寺 院 遺 跡 の 様 相 は 徐 々に 明 らかになりつつあるものの いまだ 全 貌 が 解 明 されたとは 言 い 難 い 塔 金 堂 講 堂 などの 中 心 建 物 以 外 については 全 く 判 明 して いないものも 数 多 いが 伽 藍 配 置 による 分 類 をもとに 日 本 の 古 代 寺 院 の 事 例 について 概 観 する ( 図 1 2) 1. 飛 鳥 寺 前 述 したとおり 飛 鳥 寺 はいわゆる 一 塔 三 金 堂 式 で 高 句 麗 の 清 岩 里 廃 寺 との 類 似 が 指 摘 さ れているが その 造 営 の 中 心 は 百 済 の 工 人 であった 飛 鳥 寺 の 造 営 にあたっては 当 時 の 朝 鮮 諸 国 の 最 新 の 造 寺 技 術 が 複 合 的 に 採 用 された 可 能 性 が 指 摘 されている( 森 1998 加 藤 1999な ど) 造 営 過 程 は 日 本 書 紀 によると 地 域 の 造 成 工 事 木 材 の 調 達 金 堂 と 回 廊 の 建 設 塔 の 建 設 仏 像 の 造 営 の 順 であったことがわかる 塔 と 金 堂 は 壇 上 積 基 壇 の 一 重 基 壇 であるが 東 西 金 堂 は 二 重 基 壇 であることが 確 認 されてい る 上 成 基 壇 上 に 南 北 棟 の 建 物 を 建 て 下 成 基 壇 上 にも 礎 石 を 据 えていることから 軒 支 柱 や 裳 階 の 存 在 が 想 定 されている 2. 四 天 王 寺
63 四 天 王 寺 式 伽 藍 配 置 は 中 門 塔 金 堂 講 堂 が 一 直 線 上 に 並 ぶもので 一 塔 一 堂 式 であ る 百 済 の 寺 院 に 多 く 見 られる 形 式 であり 通 常 は 百 済 の 影 響 よるものと 考 えられるが 単 に 飛 鳥 寺 式 伽 藍 配 置 の 東 西 金 堂 を 省 略 したものという 見 方 もある 四 天 王 寺 は 日 本 書 紀 によ ると 推 古 元 年 (593)に 現 在 の 難 波 の 地 に 造 営 されたとされる 先 に 塔 と 金 堂 が 造 られ 後 に 南 大 門 中 門 回 廊 講 堂 が7 世 紀 後 半 に 造 営 された 四 天 王 寺 式 伽 藍 配 置 を 採 る 地 方 寺 院 の 数 は 少 ないが 北 野 廃 寺 ( 愛 知 県 :7 世 紀 後 半 )や 服 部 廃 寺 ( 岡 山 県 :7 世 紀 末 )などが 確 認 されている 3. 山 田 寺 山 田 寺 は 発 掘 調 査 によって 回 廊 が 倒 壊 した 状 態 で 発 見 され 7 世 紀 の 建 築 様 式 を 伝 える 遺 構 として 有 名 である 伽 藍 配 置 は 四 天 王 寺 と 同 じく 塔 と 金 堂 が 南 北 に 並 ぶ 形 式 であるが 回 廊 が 金 堂 と 講 堂 の 間 で 閉 じている 山 田 寺 は 建 物 上 部 の 木 部 の 建 築 技 術 が 注 目 されがちであるが 金 堂 西 階 段 の 耳 石 の 外 側 で 動 物 の 脚 部 とみられる 浮 彫 りが 確 認 されており これは 日 本 の 他 の 寺 院 では 確 認 されていない また 金 堂 礎 石 にはわずかながら 蓮 華 文 の 浮 彫 りが 確 認 されており 山 田 寺 が 非 常 に 丁 寧 に 造 営 されたことを 物 語 っている また 詳 細 は 後 述 するが 金 堂 で 確 認 された 放 射 状 の 柱 配 置 をも つ 平 面 形 式 は 玉 虫 厨 子 から 法 隆 寺 金 堂 への 発 展 の 経 過 を 示 す 重 要 な 事 例 であり すでに 失 わ れた7 世 紀 の 金 堂 建 築 の 様 式 を 伝 えていると 考 えられている 4. 川 原 寺 川 原 寺 の 創 建 は660 年 代 後 半 と 考 えられており 天 皇 の 勅 願 により 造 営 された 川 原 寺 の 伽 藍 配 置 は 東 に 塔 が 建 ち 西 に 南 北 棟 の 西 金 堂 が 相 対 して 建 ち それらの 北 側 に 南 面 する 中 金 堂 が 位 置 する 伽 藍 の 中 軸 上 がら 塔 が 外 れた 配 置 は 飛 鳥 寺 や 四 天 王 寺 での 塔 を 中 心 とした 伽 藍 配 置 からの 変 化 の 過 程 を 示 す 川 原 寺 と 同 じ 伽 藍 配 置 の 遺 構 はないが 金 堂 が 南 北 棟 で 塔 と 相 対 する 伽 藍 配 置 を 採 るものを 川 原 寺 式 に 含 める 場 合 もある 観 世 音 寺 ( 福 岡 県 :8 世 紀 初 頭 )や 多 賀 城 廃 寺 ( 宮 城 県 :8 世 紀 )などがある( 独 立 して 観 世 音 寺 式 とされることもある) また 穴 太 廃 寺 ( 滋 賀 県 :630 年 ごろ)も 川 原 寺 式 伽 藍 配 置 と 考 えられており 7 世 紀 前 半 には 成 立 していたと 考 えられる 5. 法 隆 寺 法 隆 寺 式 伽 藍 配 置 は 東 に 金 堂 西 に 塔 を 並 べる 一 塔 一 堂 式 である 金 堂 と 塔 が 並 列 する 伽 藍 配 置 は それまでの 塔 が 中 心 であった 伽 藍 配 置 から 進 展 したものと 理 解 されている 現 在 の 法 隆 寺 西 院 伽 藍 は7 世 紀 末 ごろの 再 建 であるが これに 先 立 つ 若 草 伽 藍 は7 世 紀 初 頭 に 造 営 さ れ その 伽 藍 配 置 は 四 天 王 寺 式 であったことが 明 らかとなっている 法 隆 寺 式 伽 藍 配 置 と 同 じ 配 置 を 持 つ 法 輪 寺 では 発 掘 調 査 の 結 果 創 建 年 代 が650 年 代 と 推 定 されており 塔 と 金 堂 を 並 列 させる 伽 藍 配 置 が7 世 紀 半 ばにはすでに 成 立 していたこととなる 近 年 確 認 された 吉 備 池 廃 寺 ( 百 済 大 寺 )の 伽 藍 配 置 も 法 隆 寺 式 であるが 中 門 が 塔 と 金 堂 それぞれの 南 にあり 一 般 的 な 法 隆 寺 式 伽 藍 配 置 ではない しかし 創 建 が639 年 とすることから この 伽 藍 配 置 が7 世 紀 前
64 半 には 成 立 していたことを 示 している 法 隆 寺 式 伽 藍 配 置 での 塔 と 金 堂 の 位 置 が 逆 転 したもの が 法 起 寺 であり この 二 つを 分 けて 論 ずることもある 6. 薬 師 寺 と 大 安 寺 薬 師 寺 式 伽 藍 配 置 と 大 安 寺 式 伽 藍 配 置 は ともに 塔 を2 基 配 置 する 双 塔 式 であるが 薬 師 寺 では 回 廊 内 に 塔 を 据 えるのに 対 し 大 安 寺 式 は 回 廊 の 外 に 塔 を 配 置 する 薬 師 寺 は 7 世 紀 後 半 に 造 営 され 8 世 紀 に 藤 原 京 から 平 城 京 へ 遷 都 した 際 に 平 城 京 内 へ 移 さ れた 現 在 の 薬 師 寺 はこの 平 城 薬 師 寺 であり 元 の 藤 原 の 薬 師 寺 は 本 薬 師 寺 として 調 査 研 究 が おこなわれた それによると 本 薬 師 寺 の 伽 藍 配 置 は 回 廊 が 単 廊 であることや 中 門 の 規 模 な どに 違 いがあるものの 基 本 的 には 平 城 薬 師 寺 と 同 じであり 平 城 薬 師 寺 が 本 薬 師 寺 の 伽 藍 を そのまま 踏 襲 していることを 示 していた つまり 薬 師 寺 式 伽 藍 配 置 は7 世 紀 後 半 に 成 立 して いたことなる 薬 師 寺 式 伽 藍 配 置 と 統 一 新 羅 時 代 初 期 の 寺 院 の 伽 藍 配 置 の 関 連 は 古 くより 指 摘 されている ( 奈 文 研 1987) そのなかでも 特 に 感 恩 寺 と 共 通 点 が 多 く 同 寺 を 計 画 の 参 考 にした 可 能 性 が 高 いとみられている 大 安 寺 式 伽 藍 配 置 は 平 城 京 内 に 造 営 された 大 寺 で 多 く 採 用 されている 東 大 寺 西 大 寺 法 華 寺 などにみられ いずれも 金 堂 院 の 南 側 の 離 れた 位 置 に 塔 を 据 える その 成 立 はやはり 大 安 寺 が 上 限 と 考 えられ 8 世 紀 初 頭 とする 以 上 の 代 表 的 な 伽 藍 配 置 を 見 ていくと 6 世 紀 の 飛 鳥 寺 やや 遅 れて 四 天 王 寺 7 世 紀 前 半 の 川 原 寺 式 法 隆 寺 式 7 世 紀 後 半 の 薬 師 寺 式 8 世 紀 の 大 安 寺 式 という 流 れがあり それぞれ 金 堂 と 塔 の 位 置 関 係 と 数 の 発 展 がみられる この 伽 藍 配 置 の 変 化 の 要 因 については 技 術 的 な 問 題 だけではなく 仏 教 思 想 の 変 化 政 治 的 要 因 諸 外 国 との 関 係 などが 複 雑 に 絡 み 合 ってお り 一 言 で 整 理 できるものではない さらに 立 地 条 件 や 諸 々の 経 済 的 要 因 なども 考 えられ 個 々の 事 例 に 対 して 慎 重 に 検 討 する 必 要 があるだろう 特 に 百 済 との 関 係 を 示 唆 するものとし ては 飛 鳥 寺 における 工 人 の 関 与 や 四 天 王 寺 式 伽 藍 配 置 があるが 少 なくとも7 世 紀 の 日 本 の 仏 教 寺 院 においては 百 済 だけではなく 高 句 麗 や 新 羅 との 関 係 も 重 視 すべきであろう 7 世 紀 前 半 までの 寺 院 は 大 和 河 内 など 畿 内 を 中 心 に 分 布 しており およそ45~55か 所 程 度 が 全 国 に 造 営 されていたとされる これが7 世 紀 後 半 になると 寺 院 数 は 急 増 し 全 国 各 地 に 分 布 するようになる この 時 代 の 寺 院 として 確 認 されている 遺 跡 は700 以 上 あり これは 扶 桑 略 記 に 記 された545ヵ 所 という 数 字 を 超 えており 私 的 な 寺 を 含 めるとその 数 はさらに 多 かったと 考 えられる Ⅳ.7 世 紀 特 有 の 技 法 以 上 のように 6 世 紀 から7 世 紀 前 半 に 大 和 を 中 心 に 造 営 が 始 まった 寺 院 は 7 世 紀 後 半 には 全 国 的 に 伝 播 することとなる これら7 世 紀 の 検 出 事 例 の 蓄 積 から いくつか7 世 紀 特 有 の 技 法 といえるものが 見 いだせる
65 1. 二 重 基 壇 一 つ 目 は 二 重 基 壇 である( 島 田 2009 以 下 二 重 基 壇 に 関 する 考 察 は 島 田 の 論 考 を 基 とす る) 日 本 における 二 重 基 壇 の 現 存 事 例 としては 法 隆 寺 金 堂 五 重 塔 が 挙 げられる( 図 3) 現 在 の 姿 は17 世 紀 末 の 修 理 時 のものであるが 昭 和 の 解 体 修 理 の 際 に 基 壇 の 調 査 もおこなわ れ 当 初 は 下 成 基 壇 が 低 く 上 成 基 壇 が 高 い 形 状 で 凝 灰 岩 切 石 積 であったと 推 定 されてい る 発 掘 事 例 としては 飛 鳥 寺 東 西 金 堂 で 確 認 されたものが 有 名 である 飛 鳥 寺 は 金 堂 と 塔 は 自 然 石 積 の 一 重 基 壇 であるが 東 西 金 堂 は 下 成 基 壇 の 高 さが 約 13cmの 低 いもので 下 成 基 壇 上 面 の 幅 は73cmである この 下 成 基 壇 の 上 面 にも 礎 石 が 据 えられており その 性 格 について 諸 説 議 論 されている 飛 鳥 寺 東 西 金 堂 のように 下 成 基 壇 に 礎 石 を 据 えることを 二 重 基 壇 の 条 件 とすると 日 本 で はこの 事 例 しか 存 在 しない また 下 成 基 壇 が 自 然 石 1 石 分 の 非 常 に 低 いものである 事 例 が 多 く それを 二 重 基 壇 とするか いわゆる 犬 走 り もしくは 基 壇 周 囲 の 石 敷 とするか そ の 線 引 きはむずかしい 報 告 書 では 二 重 基 壇 としていないものも 含 めて まずはその 形 状 を 整 理 した 上 でその 特 徴 をまとめたい まずは 年 代 であるが 8 世 紀 にもいくつかの 事 例 が 認 められるものの ほとんどは7 世 紀 に 集 中 している 次 に 基 壇 形 式 であるが 上 成 基 壇 に 切 石 や 瓦 磚 が 多 く 使 用 されているのに 対 し 下 成 基 壇 は 自 然 石 がほとんどである また 基 壇 の 高 さも 上 成 基 壇 は 削 平 のため 高 さが 判 明 しないが 下 成 基 壇 を 見 ると 基 本 的 には 自 然 石 1 段 分 10~30cm 程 度 のものが 多 く 非 常 に 低 い 山 田 寺 金 堂 では 犬 走 りとして 報 告 されているが 切 石 積 基 壇 の 周 囲 にやや 高 く 切 石 を 敷 き 詰 めた 石 敷 が 確 認 されている これらの 事 例 から 二 重 基 壇 の 目 的 を 検 討 する 参 考 として 大 鳳 寺 ( 京 都 府 :7 世 紀 後 半 )や 上 淀 廃 寺 ( 鳥 取 県 :7 世 紀 後 半 )にみられる 瓦 積 基 壇 の 構 築 方 法 が 注 目 される 基 壇 断 面 図 を 見 ると 外 観 では 上 成 基 壇 とみられる 瓦 積 基 壇 が 整 地 層 より 積 み 上 げられており 下 成 基 壇 と される 石 積 の 高 まりはその 瓦 積 基 壇 の 基 底 部 の 周 囲 に 積 み 上 げられていることがわかる つま り 先 に 瓦 積 の 基 壇 を 構 築 したのちに 外 周 の 下 成 基 壇 部 分 を 付 加 しており 下 成 基 壇 は 瓦 積 基 壇 の 足 元 の 補 強 のために 築 かれたとみることができる また 雨 落 の 機 能 と 下 成 基 壇 との 関 係 も 指 摘 されている 飛 鳥 寺 東 西 金 堂 では 下 成 基 壇 の 外 周 に 石 敷 面 があり ここを 雨 落 と 考 えている 先 に 見 た 山 田 寺 金 堂 では 切 石 の 石 敷 面 の 外 に 雨 落 溝 などはなく この 石 敷 の 範 囲 に 軒 の 出 がおさまるとみられている このように 7 世 紀 の 遺 構 では 幅 の 狭 い 雨 落 溝 を 設 けず いわゆる 散 水 状 の 舗 装 を 施 して 雨 落 としていたと みられる 8 世 紀 になると 元 薬 師 寺 東 塔 や 興 福 寺 中 金 堂 など 雨 落 溝 は 基 壇 からやや 離 れて 設 置 され 基 壇 と 雨 落 溝 の 間 を 石 敷 の 舗 装 とする 事 例 がみられる このように 基 壇 外 周 の 石 敷 には 雨 落 の 機 能 を 持 った 散 水 状 のものと 基 壇 と 雨 落 溝 の 間 の 犬 走 りの 舗 装 面 の 二 つ の 機 能 があり 前 者 がより 古 式 を 示 すとみられる なお 古 代 における 雨 落 溝 の 構 築 方 法 につ いては 年 代 が 降 ると 溝 幅 が 狭 くなることが 指 摘 されている( 青 木 2011) この 様 な 視 点 であらためて 二 重 基 壇 の 事 例 を 見 ると 雨 落 溝 を 検 出 していない 事 例 が 多 く 含 まれている この 場 合 の 下 成 基 壇 を 雨 落 と 判 断 するには 個 々の 建 物 の 軒 先 の 位 置 や 周 辺 の 排 水 環 境 などを 総 合 して 検 討 する 必 要 があるが 日 本 における 二 重 基 壇 の 性 質 を 検 討 する 上 で
66 は 重 要 な 観 点 となるであろう 韓 国 でみられる 二 重 基 壇 には 上 成 基 壇 に 比 して 下 成 基 壇 が 低 いものが 多 くみられる また 下 成 基 壇 に 礎 石 が 据 える 事 例 も 多 い 一 方 中 国 の 宮 殿 建 築 では 複 数 段 の 基 壇 それぞれに 高 欄 が めぐり 明 らかに 建 物 を 荘 厳 するために 高 さを 意 識 している これらと 日 本 の 事 例 を 比 較 する と 日 本 でみられる 二 重 基 壇 は 韓 国 でみられる 例 に 近 く 飛 鳥 寺 東 西 金 堂 はまさに 朝 鮮 半 島 の 技 術 を 取 り 入 れたものである その 後 8 世 紀 以 降 徐 々に 二 重 基 壇 は 減 少 していくこととな る 2. 放 射 状 柱 配 置 の 発 展 と 消 滅 もう 一 点 7 世 紀 の 建 築 遺 構 にみられる 特 徴 的 な 事 象 として 平 面 における 放 射 状 の 柱 配 置 がある 8 世 紀 以 降 の 一 般 的 な 金 堂 にみられる 四 面 庇 建 物 と それ 以 前 の 様 式 を 持 つ 建 物 遺 構 には 構 造 上 の 相 違 点 がみられることは 古 くから 指 摘 されていた 四 面 庇 建 物 の 場 合 身 舎 柱 から 庇 柱 へ は 建 物 に 対 して 直 角 に 組 物 を 乗 せ 各 支 点 間 の 距 離 を 同 じにして 出 桁 を 受 け 隅 は45 度 の 方 向 に 伸 ばし 隅 柱 上 では3 方 向 に 組 物 が 出 るように 計 画 されている これを 隅 柱 上 で45 度 の 方 向 のみ に 組 物 を 配 したのが 法 隆 寺 金 堂 で 支 点 間 の 距 離 を 同 じくするために 脇 の 間 を 狭 くし 隅 にか かる 負 担 を 軽 減 している これにさかのぼるのが 山 田 寺 金 堂 さらには 玉 虫 厨 子 である 山 田 寺 金 堂 は 身 舎 庇 ともに 桁 行 3 間 梁 間 3 間 で 身 舎 柱 と 庇 柱 が 対 応 し 隅 を 除 いて 建 物 に 直 角 に 繋 梁 を 乗 せ 隅 柱 からは 45 度 の 方 向 にのみ 繋 梁 が 伸 びる 構 造 となる 同 じ 構 造 の 建 物 は 穴 太 廃 寺 金 堂 ( 滋 賀 県 :8 世 紀 ) 夏 見 廃 寺 金 堂 ( 三 重 県 :8 世 紀 )でも 確 認 されている 玉 虫 厨 子 は 法 隆 寺 に 伝 わる 厨 子 で 製 作 年 代 は7 世 紀 以 前 にさかのぼると 推 定 されている 小 規 模 ながら 建 築 的 表 現 が 精 緻 であり しばしば 法 隆 寺 以 前 の 建 築 技 術 を 伝 える 貴 重 な 資 料 とし て 紹 介 される 玉 虫 厨 子 は 建 物 に 対 して 放 射 状 にすべての 組 物 を 配 するという 特 徴 を 持 ち 山 田 寺 金 堂 の 前 段 階 の 平 面 形 式 と 考 えられている この 他 正 家 廃 寺 金 堂 ( 岐 阜 県 :8 世 紀 前 半 )では 玉 虫 厨 子 の 平 面 とよく 似 た 柱 配 置 が 確 認 されている すなわち 妻 面 の 庇 の 柱 本 数 が1 本 多 く 玉 虫 厨 子 で 平 面 と 妻 面 の 柱 間 が 異 なる という 欠 点 を 補 うように 妻 面 の 繋 梁 も 放 射 状 に 架 け 支 点 間 の 距 離 を 同 じにする 工 夫 がみられ る 正 家 廃 寺 の 場 合 年 代 的 にも 地 域 的 にも 玉 虫 厨 子 から 法 隆 寺 金 堂 への 系 譜 に 位 置 付 ける には 慎 重 であるべきだが これらの 流 れの 中 で 軒 をどう 支 えるかという 構 造 上 の 発 展 形 態 の 一 つとしてとらえることができる 以 上 のような 放 射 状 に 柱 配 置 を 持 つ 建 物 は 金 堂 建 築 に 限 られ 同 寺 院 でも 講 堂 では 一 般 的 な 四 面 庇 建 物 の 構 造 である つまり 金 堂 特 有 の 平 面 配 置 であった 可 能 性 が 高 い しかし 法 隆 寺 金 堂 以 後 この 放 射 状 平 面 の 系 譜 に 続 く 建 築 は 確 認 されていない 法 隆 寺 金 堂 をみるだけで も この 構 造 では 深 い 軒 を 支 えるのに 十 分 な 強 度 が 得 られないことがうかがえる これ 以 後 薬 師 寺 東 塔 や 唐 招 提 寺 金 堂 など8 世 紀 の 建 築 では 三 手 先 組 物 へと 発 達 していくこととなる Ⅴ.おわりに
67 以 上 雑 多 ではあるが 日 本 における7 世 紀 の 寺 院 遺 跡 とその 特 徴 について 概 略 を 述 べた 7 世 紀 の 発 掘 遺 構 については 近 年 多 くの 新 知 見 が 日 本 各 地 で 確 認 されており 寺 院 の 伽 藍 につい ても 多 くの 事 例 が 蓄 積 されている いわゆる 七 堂 伽 藍 を 備 えた 本 格 的 な 寺 院 が 多 く 存 在 してい たのと 同 時 に 金 堂 や 塔 のみを 備 えた 一 堂 型 伽 藍 も 多 く 確 認 されている 地 方 では 造 営 の 際 に 何 らかの 理 由 で 当 初 より 七 堂 伽 藍 を 造 営 する 予 定 ではなかったり 途 中 で 造 営 が 中 断 された 可 能 性 があり 結 果 的 に 変 則 的 な 伽 藍 配 置 を 持 つものや 一 堂 型 の 寺 院 が 造 営 されたとみられ る( 亀 田 2005) もしくは 各 地 方 により 独 自 の 発 展 をしたものも 多 く 存 在 したと 考 えられよ う 今 後 も 発 掘 調 査 の 進 展 とともに 新 たな 事 例 が 蓄 積 され 多 くの 成 果 が 上 がることであろう その 中 で 朝 鮮 半 島 からの 影 響 は 見 逃 せない 観 点 であり 広 くは 東 アジア 全 体 でどのような 技 術 の 伝 播 と 発 展 があったのか 今 後 の 研 究 の 進 展 が 期 待 される
68 図 1 古 代 寺 院 伽 藍 配 置 1
69 図 2 古 代 寺 院 伽 藍 配 置
70 図 3 法 隆 寺 金 堂 基 壇 復 元 図 図 4 飛 鳥 寺 東 金 堂 下 成 基 壇 図 5 山 田 寺 金 堂 基 壇 周 囲 の 犬 走 り
71 表 1 二 二 重 基 壇 および 犬 走 り 石 敷 を 持 つ 基 壇 一 覧
72 図 6 大 鳳 寺 基 壇 断 面 模 式 図 図 7 放 射 状 柱 配 置 模 式 図
73 文 献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1987 薬 師 寺 発 掘 調 査 報 告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学 報 第 45 冊 島 田 敏 男 2000 正 家 廃 寺 金 堂 の 建 築 的 特 徴 正 家 廃 寺 跡 Ⅱ 寺 平 遺 跡 恵 那 市 教 育 委 員 会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2002 山 田 寺 発 掘 調 査 報 告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学 報 第 63 冊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2003 吉 備 池 廃 寺 発 掘 調 査 報 告 - 百 済 大 寺 跡 の 調 査 -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学 報 第 68 冊 亀 田 修 一 2005 地 方 寺 院 の 伽 藍 配 置 と 造 営 過 程 飛 鳥 文 化 財 論 攷 納 谷 守 幸 氏 追 悼 論 文 集 刊 行 会 島 田 敏 男 二 重 基 壇 の 事 例 と 形 式 平 城 宮 第 一 次 大 極 殿 の 復 原 に 関 する 研 究 1 基 壇 礎 石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学 報 第 79 冊 青 木 敬 2010 乱 石 組 雨 落 溝 の 構 造 と 変 遷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紀 要 2010 奈 良 文 化 財 研 究 所 その 他 各 遺 跡 発 掘 調 査 報 告 書 による
74
75 삼국시대 벽구조 건물에 대한 고찰 조은경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1. 머리말 2. 벽구조 건물지 사례 분석 3. 벽체 구성에 따른 구조와 가구 4. 맺음말 1. 머리말 최근 백제시대 사지(寺址)를 중심으로 발굴조사 성과가 축적되면서 새로이 발견되는 사실 들 중의 하나는 정림사지를 비롯하여 왕흥사지, 제석사지 등에서 강당 좌우에 건물이 종방 향으로 위치하고 회랑과 연결되고 있다는 배치의 특성을 들 수 있다. 또 하나는 앞서 언급 한 강당 좌우의 건물지 등에서 나타나는 건축유구가 가구식 구조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구조를 나타내는 건물지로는 미륵사지 강당지의 서쪽 부분과 동 서 승방지, 능 산리사지 강당지의 소위 서실(西室)과 공방지, 왕궁리유적의 건물지1 등 백제시대의 건축유 적에서 뿐 아니라 집안(集安) 동대자유적(東臺子遺蹟), 감은사지 공방지, 발해(渤海)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궁전지 등에서도 볼 수 있어 시공간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8) 그러나 이러한 건물지의 유구 해석과 상부 구조의 추정 등은 아직 시작 단계라 할 수 있 으며 이와 같은 구조 형식이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어떻게 발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의되 지 않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가구식 구조가 아닌 벽구조의 가능성이 있다는 관점에서 이들 건물지에 대한 18)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배병선( 왕궁리유적 백제건물지의 구조 분석, 익산 왕궁리유적의 조사 성과와 의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시대적으로 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또 공간적으로는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나 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형식의 건물지는 고구려 동대자유적과 평양 정릉사지의 승방지부터 나타 나기 시작하여 6~7세기 경주 황룡사 초창가람의 승방지, 부여 정림사지의 회랑과 연결된 추정 승 방지, 능산리사지 강당지와 공방지, 후편의 부속건물들, 왕흥사지의 회랑과 연결된 추정 승방지, 익 산 미륵사지의 승방지와 강당지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통일 후에는 신라 감은사지의 공방 지와 발해 상경용천부의 제4궁전터, 제5궁전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 형식의 건물지를 백제건물지만의 특성이라 하기 어렵다
76 유구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건축유구의 해석에 대한 폭넓은 시각의 제공 과 고대 건축 구조의 다양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 접근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건물지의 특 성에 따른 복원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는데 의의가 있다. 2. 벽구조 건물지 사례 분석 건축물의 구조 형식을 구분한다면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면(面) 자체가 구조체를 조성하는 방식과 다른 하나는 골조(骨組), 즉 구조 부재가 뼈대를 형성하는 방식 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인 건축 구조는 오히려 현대 건축물에 있어서 비교적 명확하 게 적용되는 반면, 고대 건축유적의 구조 형식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밀집한 기둥으로 구성된 벽체나 촘촘한 서까래로 조성되는 지붕면은 결국 면이 구조체를 조성하는 방식과 골 조를 형성하는 방식, 두 가지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벽체의 존재는 중국의 경우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지만 구조적 역할 을 수행하였는지 단순히 외피(外皮)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비교적 최 근까지도 주요 건축유적은 가구식(架構式)으로 추정되었으며 벽체는 구조적 역할을 하지 않 는 비내력벽(非耐力壁)으로 간주되었다.19) 1974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호북성(湖北省) 황피현(黃陂縣) 반룡성(盤龍城)의 상대(商 代) 궁전 유지(遺址)는 하남(河南) 언사(偃師) 이리두(二里頭) 상대 초기 궁전 유지와 정주 (鄭州) 이리강(二里岡) 상대 중기 궁전 유지보다 비교적 완전한 궁전건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양홍훈(楊鴻勛)20)은 공간 구성과 소위 사아중 옥(四阿重屋) 의 지붕, 초기 공포의 형태 등을 주요하게 다루면서 고대 건축의 구조를 추 정하고 복원도를 제시하였지만 벽체 내부에 기둥이 삽입되어 있는 벽체의 구조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전체적인 구조를 벽체 바깥의 첨주(檐柱)와 경첨주(擎檐柱), 즉 1개의 직경이 큰 기둥과 2개의 작은 기둥이 삼각형으로 배치되어 지붕을 받치는 구조체 를 추정하였다.21) 그러나 이윤화(李允鉌)는 발굴도면을 토대로 내부에 기둥이 있는 벽체의 바깥으로 기둥이 매우 촘촘하게 배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뒤의 수량이 다르고 기둥이 동일 직선상에 배열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이것이 첨랑(檐廊)을 구성하기 위해 설치되었을 뿐 지붕면의 도리나 보를 지탱하기 위해서 사용된 구조체가 아니며 따라서 지붕의 구조는 내부에 기둥이 배열된 벽체가 받쳐주었을 것으로 보았다.22) 집안(集安)의 동대자(東臺子) 유적은 고구려 유적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평면과 공간 구성 이 독특하여 주목되어 왔다. 동대자 유적의 중심건물은 전체 장방형 평면으로 2개의 공간, 즉 실(室)이 가운데 통로를 두고 구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퇴칸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 李允鉌 저, 이상해 한동수 이주행 조인숙 역, 중국 고대건축의 원리, 시공사, 2003, 237쪽 참 조. 20) 楊鴻勛, 從盤龍城商代遺址談中國宮廷建築發展的幾個問題, 建築考古學論文集, 文物出版社, 1987, 81쪽 참조. 21) 복원도를 보았을 때 실제 기둥들은 상부에 추정된 이중의 지붕을 형성하기 위해 첨주는 첨주끼리, 경첨주는 경첨주끼리 하나의 프레임을 형성하고 있어 이것이 유구에서 드러난 삼각의 기둥 배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구조 추정이라 보기 곤란하고 더욱이 경첨주의 경우 간격이 일정하지 않게 되어 지붕을 받치는 합리적인 배치로 보기 어렵다. 22) 李允鉌 저, 이상해 한동수 이주행 조인숙 역, 앞 책, 2003, 237~238쪽 참조
77 건축구조를 고려하여 남아있는 유구를 보았을 때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이 2개의 실이 서 로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김도경 23) 은 동 서실 기초구조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 은 동 서실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독립기초를 지닌 서실과 퇴칸은 목조가구식 구조인 반면 연속줄기초를 지닌 동실은 조적식 구조로 추정하였다. 특히 동실의 경우 기초 부에 초석렬을 따라 비교적 넓고 긴 석렬이 조적식 구조의 지대석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파 악하였다. 또한 동대자 유적에서 전돌이 거의 출토되지 않은 것은 동실의 벽체구조가 조적 식이지만 전벽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귀틀집 구조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발굴조사 도면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동대자유적의 중심건물은 2개의 구조가 다른 실이 구성되고 이를 기둥이 에워싸면서 퇴칸을 구성하고 있는 평면을 가지고 있다. 서실은 유구 의 훼손이 심한 반면 동실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였는데, 폭이 넓은 석렬과 위에 놓인 초석 은 가구식의 구조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발굴조사 내용과 도 면 24) 을 살펴보면 석렬의 폭과 깊이, 초석의 간격은 주목할 만하다. 동실을 구성하는 초석의 간격은 1.2~1.5m 정도로 3.5m 내외의 주칸을 갖는 퇴칸의 기둥 간격의 절반에 못미치는 크기이다. 또한 초석 하부의 석렬은 폭이 1.5~2m에 달하는 반면 깊이는 0.3~0.5m에 불과 하다. 가구식 구조가 상부의 하중이 기둥으로 집중되고 이의 지지와 지반으로 하중이 전달 되도록 깊이가 있는 기초구조를 갖는 것에 비하여 동실의 구조는 상부의 하중이 비교적 균 등하게 하부로 전달되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지면의 깊이보다 지면과 맞닿는 면적에 의하여 지지되는 구조로 추정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김도경은 이를 조적식의 귀틀구조로 추정하였는데 초석의 배열과 석렬의 폭을 감안할 때 흙을 주로 사용한 토축벽이었을 가능성 도 제시할 수 있다. 백제 능산리사지 강당지는 금당의 북쪽에 위치하며 기단의 규모가 동서 37.4m, 남북 18.0m에 이르며 구조가 다른 2개의 실과 그 사이의 좁은 통로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서쪽 에는 측면에 퇴칸이 형성되는 것에 비하여 동쪽의 측면에는 퇴칸이 형성되지 않고 동측면은 공방지Ⅱ건물과 기단을 공유하고 있다. 벽체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서실( 西 室 )의 경우 퇴칸을 제외한 부분을 살펴보면 전면 13.7m, 측면 9.7m의 방형을 이루면서 크기 60cm 50cm 내외의 초석이 1.5~1.8m 정도로 배열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다시 부정형의 할석들이 초석 사이를 메우고 있다. 측면의 초석 들이 비교적 규칙적인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잔존한 전후면의 초석들은 이보다 넓은 3m 정도의 거리를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서실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초석과 초석 사이에는 초석상면보다 위에 석렬이 다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초석과 초석 사이의 석렬이 고막이석에 해당한다 면 이 위에 배열된 석렬은 기둥의 하인방, 또는 벽체의 하부에 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 다. 23) 김도경, 한국 고대 목조건축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217 쪽. 동실( 東 室 )은 자갈과 황토를 다진 연속줄기초로 기초의 중심을 연결하는 선상에 다시 비교적 넓고 길쭉한 돌을 줄지어 깔아놓았다. 서실( 西 室 )은 퇴칸을 형성하는 기초와 마찬가지로 막돌을 깔아 다 진 독립기초를 이루고 있다. 동실의 벽체는 고구려시대 조적식 구조로 비교적 많이 사용되었던 귀틀집 구조였을 가능성이 높 다. 또한 연속 줄기초의 초석렬이 끊어진 곳이 없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귀틀집 벽체의 최하단 횡 목( 橫 木 )은 동실 전체에 걸쳐 놓여 있었을 것이며, 이 위에 출입을 위한 시설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4) 吉 林 省 博 物 館, 吉 林 輯 安 高 句 麗 建 築 遺 址 的 淸 理, 文 物, 1961, 제1기, 50~55쪽
78 또한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서벽과 북벽의 초석 위에는 기둥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 는 지름 18cm 내외의 원형목이 탄화된 채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 서실의 경우 초석 위에 기둥이 사용되고 초석과 초석사이에 석렬이 고막이석의 역할과 동시에 벽체의 하중을 받아 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북동쪽 모서리 부분에서 발견된 석렬은 벽체 의 하부에 석재가 사용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서실의 후면에 시설되어있는 온돌로 인 하여 다른 3면의 것과 다르게 구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초석과 석렬을 중심으로 한 단면 토층조사가 상세하기 이루어지지 않아 강당의 기단 토를 조성하면서 초석과 석렬 하부에 다시 굴광하고 기초부를 형성하였는지에 대하여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강당지의 기단토 조사내용 25) 을 살펴보면 초석과 석렬하부에 특별한 기초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초석과 초석 사이의 석렬이 일렬로 형성되 면서 이것이 벽체의 기초부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능산리사지 강당지의 평면 구성상 특이한 것은 퇴칸을 포함한 전체 건물의 전면 중심축이 동실과 서실 사이에 있는 통로에 중심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즉 벽체를 구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실은 그 서쪽의 퇴칸이 있기 때문에 기둥과 보의 일반적인 가구식 구조였을 것 으로 추정되는 동실의 전면크기 15.75m보다 작은 13.72m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쪽의 퇴 칸 통로와 중심통로는 모두 같은 2.42m에 해당한다. 이는 서실을 4면에서 에워싸는 퇴칸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심 통로는 서실의 동쪽 퇴칸에 해당될 수 있는 것 이다. 발굴조사 당시 서실의 지붕을 추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즉 퇴칸 지붕의 기와가 통째로 떨어져 기왓골과 기왓등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26) 특히 주목할 점 은 모서리의 추녀 부분이 확인된다는 점과 기와 바깥열로부터 1.7m 들여서 연화문와당이 1열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1.7m는 기단으로부터 퇴칸 초석까지의 거리와 일치한다. 즉 퇴 칸의 처마가 기단 끝선 정도까지 27) 형성된다고 본다면 서실 벽체 상부에 형성되는 지붕의 처마선은 이 퇴칸 초석렬 정도까지 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5) 강당지 기단토를 알아보기 위하여 남쪽기단 중앙부, 중앙통로 및 북쪽기단 중앙부에 각각 트렌치 를 설치하였다. 북쪽기단 중앙부는 기단토 하부에 작은 잡석을 깔고 그 위에 풍화암반토와 점질토 를 섞어 깔았다. 이는 강당지 북쪽기단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수압과 같은 물의 침투로 인하여 지반 이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강당지 통로, 동실 중앙 방형석 주변과 남쪽기 단에 나타난 토층상황은 북쪽기단부와 다르게 나타났다. 즉 북쪽보다 낮은 기단의 남반부는 밑바닥 에 4~5cm의 잔돌이 섞인 모래층을 25cm 두께로 깔고, 그 위에 흑색사질+풍화암반토가 모래의 함 유가 가감되면서 3개층(15cm, 23cm, 30cm), 황갈색점토+풍화암반토+소토+숯(10cm), 황갈색점토 (5cm)로 이루어지고 마지막으로 황갈색점토+풍화암반토를 5~12cm 두께로 깔아 마감하였다. 국립부여박물관 부여군, 陵 寺, 2005, 30쪽. 26) 이 퇴칸은 남쪽부분은 기단 상부와 함께 유실되었으나 다른 부분은 잘 남아있는데, 특히 퇴칸 지 붕의 기와가 일그러지지 않고 통째로 떨어져 기왓골과 기왓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수 키와는 토수기와와 언강이 있는 미구기와를 동시에 사용하였고 기왓등 사이의 거리는 20cm 전후였 다. 그리고 암키와 끝선과의 거리는 28~30cm인데 평기와 길이가 40~45cm인 점을 감안하면 평기 와는 덮을 때 약 1/3가량은 중첩되게 덮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왓골과 기왓등에는 연꽃 무늬수막새가 대체로 2줄을 이루고 떨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지붕 끝에 사용되었던 것으 로 보이는 바깥열은 기단의 끝선 약간 바깥쪽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들에서 동쪽으로 약 1.7m 떨어 진, 기왓골과 기왓등 위에서 연화문와당이 1열로 나타났다. 이로 볼 때 이 건물의 지붕은 중층을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립부여박물관 부여군, 陵 寺, 2005, 31쪽. 27) 발굴조사보고서에서는 전면기단으로부터 60cm 지점에서 확인된 낙수받이를 근거로 전면 퇴칸초석 으로부터 처마끝까지의 거리를 220cm로 추정하였다. 국립부여박물관 부여군, 앞 책, 2005, 30쪽
79 그런데 서쪽 퇴칸 부분에서 확인된 추녀부분은 지붕의 형태가 맞배가 아닌 우진각, 합각, 사모지붕의 경우를 추정케하고 있는데 동실의 경우 전후면의 퇴칸만 구성되고 있어 동일한 형태의 지붕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하기는 곤란하다. 서실을 중심으로 퇴칸이 4면에 구성되어 지붕이 형성되고 이 서실의 퇴칸이 통로의 역할을 겸하면서 동실의 경우 독립적으로 지붕이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 있다. 한편 이 능산리사지 강당지의 동편에 위치한 공방지Ⅱ는 상면만 편평하게 다듬은 부정형 초석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고 역시 원형의 기둥 흔적이 발견되었다. 강당지와 다른 점은 초 석 사이에 석렬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들 초석의 간격이 0.6~0.8m로 강당지에 비하여 더 좁다는 점이다. 따라서 공방지Ⅱ의 벽체 구성은 강당지의 서실과 다르게 구성되었을 가능성 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이와 같은 소규모의 건물에서는 기둥을 촘촘하게 박고 기둥 사이를 목판벽을 세워 벽체를 형성하여 실제적으로 벽체가 힘을 받는 구조로 보기 어렵다. 다만 상 부의 가구가 보다 간단하고 원시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소위 벽주건물( 壁 柱 建 物 )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판단된다. 왕궁리유적의 건물지1은 사찰의 구성 건물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나 건축유구와 기단토의 축조 특성에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이 건물지의 기단 규모는 17.7m 12.2m 정도이며 기단 바로 안쪽으로 퇴칸을 형성하는 초석이 위치하고 동서 길이 6.8m, 남북 폭 6.3m인 실( 室 )이 2개가 통로를 가운데 두고 구 성되어 있는 평면이 확인되었다. 2개의 실은 크기가 38~40cm 30~40cm인 상면이 편평하 게 가공된 부정형의 초석을 놓았는데 그 간격은 150cm로 동일하게 나타났으며 이 초석들 사이에는 와편이 깔려있었다. 이 와편은 초석 상면보다 높이 쌓여져 있는 부분은 확인되지 않았고 초석과 거의 같은 레벨에서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에 대해서는 기단 조성토에 대한 자세한 토층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조사자는 이 건물지를 형성하기 위해 뒤쪽 석축의 높은 지대를 삭토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성토가 이루어졌으며 이 성토층 상면에 건물지 기단토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건물지 규모에 맞추어 사다리꼴 형태로 굴광하여 다진 후 내외부를 다시 되파기하여 2개의 실을 만들기 위한 굴광선을 형성하고 방의 내 외부를 다른 성질의 흙으로 채운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 고 다시 실을 구성하는 초석의 하부를 되파기 한 후 기초부를 조성한 것으로 보았다. 28) 그 러나 기단토층 단면도를 보았을 때 건물 기단토를 성토한 후 실의 벽체를 구성하는 하부를 남기고 나머지 부분의 기단토를 제거한 후 다른 성질의 흙으로 채웠다기보다는 벽체의 기초 부분을 좁게 판축하고 난 뒤 나머지 부분의 기단토를 성토한 것으로 판단되며 특히 초석이 놓이는 부분의 하부는 되파기하여 기초부를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건물지의 경우 실의 벽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흙을 사용하여 연속된 기초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초석이 놓이는 부분, 즉 기둥이 세워지는 부분에 대한 기초부가 다시 한 번 축조된 것으로 보아 이 기둥에 상부 가구 구조의 하중이 보다 집중되는 구조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 28) 건물지1의 기단 내부퇴적토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확인되었다. 건물지1이 조성되기 이전의 구지표면은 동서석축2에서부터 완만하게 경사져 있었다. 따라서 동서석축2의 전 면은 주변에 비교적 높은 지대를 삭토하는 과정에서 산출된 적색 점토와 진한 암갈색 점토로 전체 적으로 성토되어야만 했다. 기단 내부는 이 성토층 상면에 다음과 같은 단계를 통하여 조성되었다. 첫째, 기단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은 사다리꼴 형태로 단단하게 다진다. 둘째 이 사다리꼴 형태의 다짐층의 내 외부를 다시 되파기하여 기단 내부의 2개의 방의 굴광선을 형성한다. 셋째, 방의 내 외 부를 다른 성질 및 색조의 흙으로 단단하게 판축한다. 마지막으로 기단, 내진주초석이 자리잡고 있 는 지점을 다시 되파기를 하여 설치한 후 메꿔 놓는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왕궁리Ⅵ, 2008, 135쪽
80 된다. 또한 초석 사이에 채워져 있는 와편 역시 능산리사지 강당지의 초석 사이 석렬에 비 하여 하중을 지지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라는 점에서 구조적인 역할보다는 초석사이의 고막 이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왕궁리유적 건물지1의 경우 2개의 실을 구성하기 위해 기단에 토축으로 이루어진 연속기초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부에 벽체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초석 의 간격이 규칙적으로 되어 있고 초석 하부는 기초가 형성된 뒤 다시 굴광하여 다짐이 이루 어졌다는 점에서 가구식 구조에 보다 가까운 구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이 건물지에 대하여 배병선 29) 은 외곽의 퇴칸 구조는 개방된 주열로서 내부의 방과는 무 관하게 자립할 수 있는 구조이고 2개의 실은 천두식 또는 골가벽조의 결구를 이용하여 벽 체를 축조하고 도리를 연결하여 내부 공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결구방식이 혼용된 구조로 추정하였다. 미륵사지에서는 강당지와 승방지에서 이와 유사한 건축유구가 확인되었다. 미륵사지 강당 지는 능산리사지 강당지와 같이 건물 중앙의 어칸을 중심으로 동 서가 다른 구조를 나타내 고 있었는데 서실에 해당하는 부분은 역시 퇴칸을 바깥에 두르고 안쪽에 석렬이 하나의 커 다란 공간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당의 전후면 퇴칸과 동실( 東 室 )의 본채를 이루는 부분은 원형 주좌를 갖는 방형 초석이 있는 것에 비하여 동서측면에는 원형주좌를 갖는 원 형의 초석이 배치되어 이것이 보다 늦은 시기에 놓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남측면 에 위치한 3개의 계단시설도 이 양측의 퇴칸을 제외하였을 때 건물 전면을 3등분하고 있음 도 이러한 추정의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런데 서실의 유구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대형 공간 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좌측에 초석이, 우측에는 초석 흔적이 대칭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초석은 서실의 전면 길이를 3등분, 측면 폭을 2등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실의 크기는 25.57m 10.13m의 대 규모이고 고대건축에서 하나의 부재가 단일부재로 사용하기 위한 최대 길이의 한계를 약 10m 정도로 추정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30) 지붕을 구성하는 도리 등의 상부 가구재를 지 지하기 위한 내부기둥의 설치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능산리사지 강당지에 비하 여 미륵사지 강당지의 발전적인 측면은 이것이 평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동실과 서실이 하 나의 지붕으로 연결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능산리사지 강당지의 경우 전체 평면의 비대칭성으로 인하여 벽체를 형성하는 서실과 동실이 2개의 다른 지붕형태가 조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에 비하여 미륵사지의 경우는 동일한 형태의 지붕이 연결되는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제시될 수 있다. 이보다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감은사지 공방지의 경우 역시 전체 평면과 가구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감은사지 공방지의 경우는 외부에 퇴칸이 있고 내부에 2개의 실이 1조를 이루는 것이 2조가 구성된 평면으로 발굴조사 당시에는 퇴칸의 유구와 내부의 그것 이 시대를 달리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였지만 백제지역에서 이와 같은 건물지들이 지속적으로 발견되자 이와 관련하여 새롭게 분석된 경우라 할 수 있다. 감은사지 공방지는 외부에 전후면으로만 퇴칸이 구성되고 내부에 2개 1조의 실이 2조가 구성되는데 이들 초석의 간격이 전후면은 1.3m, 측면은 1.2m로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29) 배병선, 왕궁리유적 백제건물지의 구조 분석, 왕궁리유적의 조사성과와 의의, 국립부여문화재 연구소, 2009, 30) 村 田 健 一 저 김철주 역, 일본 전통 건축 기술의 이해, 한국학술정보(주), 2009, 45~52쪽 참 조
81 각각의 초석 하부는 적심석이 기초부를 형성하고 있어 일종의 독립기초로 볼 수 있다. 초석 사이에는 석렬이나 와편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건물지는 앞서 언급하였던 왕궁 리유적 건물지1보다도 더 가구식 구조에 가까운 방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퇴 칸의 기둥열과 실을 구성하는 기둥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기둥의 상부에 퇴 칸 상부의 보가 결구되기 위한 구조적 역할을 하는 횡재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벽체 구성에 따른 구조와 가구 위에 언급한 몇 기의 건물지들은 기둥과 보를 주요 구조체로 하는 가구식 목구조와는 다 른 구조로서 주로 벽체를 구성하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벽체가 그 자 체로 하중을 갖게 되면서 소위 토목혼합구조로 대별될 가능성이 있다. 토목혼합구조의 보편 적인 사용에 대해서는 중국에서도 당 장안(長安) 서시(西市)의 발굴조사를 통해 대부분의 시내 민간건축에서 벽체가 하중을 받고 상부 가구를 목구조로 하여 서까래를 얹는 소의 硬山擱檁 을 사용하였음이 밝혀져 당대(唐代)에도 토목혼합구조가 북방지역에서는 지속 적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송대 이후가 되어서야 목조의 가구식 구조가 보편화되었을 것으 로 추정되고 있다.31) 동대자 유적의 경우와 같이 하부의 석렬이 깊이에 비하여 폭이 넓게 축조되는 경우 벽체 자체가 구조적 역할을 하는 토목혼합구조였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실제 토축벽을 갖는 건축유적으로 발굴조사된 예로서는 남한 행궁 하궐 부지의 통일신라시 대 건물지가 있다.32) 이 건물지는 벽체의 바깥쪽으로 석렬이 하부에 시설되고 벽체가 하부 2m 정도의 폭으로 축조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초석과 기둥이 반 정도 외부로 노출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토벽은 5~10 정도 되는 산자갈을 1~2벌 깔고, 그 위에 목탄을 두께 5 정도로 깔아서 방습 방충의 효과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산자갈과 목탄의 범위는 동서 방 향으로 너비 130~150 로 일정하다. 목탄층 위에는 적갈색 점토를 5~10 두께로 한 벌 깔고, 그 위에는 명갈색 사질점토, 갈색점토, 황갈색 점토를 비슷한 두께로 겹겹이 판축하여 쌓아올렸다.33) 이러한 토목혼합구조가 하부에 폭이 큰 석렬과 같은 벽체의 지지부가 필요한 것에 비하여 살펴본 백제의 몇몇 건물지들에서는 이와 같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았다. 왕궁리유적의 경우 기단토의 조성에 있어서 벽체 하부의 축조가 다르게 구성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큰 폭을 갖지는 않는다. 능산리사지와 왕궁리유적 모두 초석 사이를 연결하는 정도의 석렬, 또는 와 편이 확인된 정도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경우는 벽체의 하중 부담을 적게 하면서도 기둥과 보가 대부분의 상부하중을 감당하는 대량식(大樑式) 구조와는 다른 상부 가구구조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배병선은 왕궁리유적 건물지, 정림사지 승방지, 미륵사지 강당 31) 馬曉, 中國古代木樓閣, 中華書局, 2007, 53쪽. 32) 이 건물지는 조선시대 남한 행궁에 대한 제6차 발굴조사( ~ ) 중 하궐 마 당지에서 통일신라시대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이것이 三國史記 신라본기의 문무왕 12년(672) 조 기사에 언급된 주장성 관련기사와 연관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통일신라시대 문화 층에 대해서는 제7차 발굴조사( ~ ) 결과 5개의 기와포함층을 포함, 건물 지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였다. 한국토지주택공사 토지주택박물관 경기문화재단, 南漢行宮址 제7 8차조사보고서, 2010, 47~48 쪽 참조. 33) 한국토지주택공사 토지주택박물관 경기문화재단, 남한행궁지, 2010, 73쪽
82 지 등이 가늘고 긴 기둥을 촘촘히 세워 도리를 받치고 기둥 머리를 천방(穿枋)으로 꿰어 공 간을 구성하는 천두식(穿斗式)으로서 이것이 남방계통의 법식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 다.34) 한편 비교적 늦은 시기에는 목재 기둥과 흙벽돌을 이용한 조적식의 벽체 축조의 가능성 또한 제시할 수 있다. 흙벽돌이 출토된 예로서 미륵사지 출토 흙벽돌은 높이 12, 길이 31 의 점토에 모래가 많이 섞인 태토가 매우 거친 것이었으며 제석사지 폐기장에서는 4점 정도가 완형에 가까운 상태로 출토되었는데35) 결실된 부분이 없는 긴 장방형 형태의 것은 크기가 ~11.6 정도였다. 4. 맺음말 많지 않은 사례를 통하여 고대건축의 구조에 대한 추정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이며 또한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매우 시론 (試論)적이며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구식 구조로는 해석되기 어려운 건물지들 에 대해 사례별로 보다 자세한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비록 상식적이지만 몇 가지 추정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첫째, 실제 토축벽의 경우 하부의 폭이 초석의 폭보다 크게 축조될 것이라는 추정이다. 동대자유적과 남한행궁의 대형건물지와 같이 실제 흙을 위주로 벽체를 구성하고 하중을 지 지하는 구조의 경우 하부의 폭은 2m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능산리사지와 왕궁리유적, 미륵사지 등 백제시대 사지의 강당지, 승방지 등의 건물 지들이 벽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벽체의 폭이 초석의 그것보다 크지 않으며 이들 초석의 간격은 거의 1.0~1.5m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초석과 초석 사이에서 보이는 유구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여 이에 따른 벽체의 구성이 각각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건물의 평면 대칭구성, 흙벽돌과 같은 조적식 벽체와 목구조 의 병용은 목구조가 갖는 합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우 현존하는 전통건축이 고려시대 이후의 것이고 따라서 현존 유구와의 비교분 석을 통해 해석이 어려운 고대건축에 대한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고대건축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며, 이것은 보다 보편적인 건축 의 조영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개별적인 유구에 대한 세심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에 있어서 상세한 발굴조사와 유구 분석의 선행은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다. 예를 들면 초석이나 석렬의 하부 기초 구조가 기단토의 축조 방식과 차이가 있는지의 여부, 이들 부재들 간의 수평 층위, 주변 와편이나 바닥마감재로 추정되는 것들에 대한 조 사, 능산리사지의 경우와 같이 지붕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경우 기와의 크기와 중량, 출 34) 배병선, 부여지역 백제 건물지의 구조, 정림사:역사문화적 가치와 연구현황, 국립문화재연구 소, 2008, 35) 제석사지 폐기장에서 발견된 흙벽돌은 정확한 규격을 가지고 있지 않고 표면처리가 정연하지 못 하여 소조상들을 설치하기 위한 기단 부재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으나 굵은 사립 과 짚 등이 섞인 적색점토를 사용하여 성형 후 굽지 않고 건조시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원광대학교박물관 익산시, 益山王宮里傳瓦窯址(帝釋寺廢棄場) 試掘調査報告書, 2006, 224쪽
83 토 현황 등에 대한 상세한 조사, 기타 건축부재, 특히 목재나 목재의 결구를 확인할 수 있 는 경우 그 위치와 구성 등 건축유구에 대한 발굴조사 방법론의 발달은 고대건축 복원 연구 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84
85 수당시기 불교사원 개관 王 貴 祥 청화대학 건축학원 교수 번역 현승욱 청화대학 건축학원 박사과정 Ⅰ. 수당시기 불사건립 1. 국가차원의 불사건립 2. 수대의 불사건립 3. 당대의 불사건립 4. 당대 불사의 표준모델 Ⅱ. 수대 불사의 평면 배치 1. 불탑중심 배치 2. 전탑후전 前 塔 後 殿 배치 3. 전전후당 前 殿 後 堂 배치 4. 전탑후당 前 塔 後 堂 배치 5. 탑-전-당 배치 6. 일정이배 一 正 二 配 배치 7. 일각이루 一 閣 二 樓 배치 8. 남각북탑 南 閣 北 塔 배치 9. 일전쌍탑 一 殿 雙 塔 배치 10. 삼문양중 三 門 兩 重, 사방오중 寺 房 五 重 에 대하여 Ⅲ. 당대 불사의 기본배치 1. 당대 불사규모와 공간구성 방식 2. 당대 불사건축의 기본배치 중국불교는 동한( 東 漢 )시기 중국에 전래된 이후, 수백 년이 지난 4세기말, 5세기초에 이 르러 한차례 큰 발전을 이루었다. 북방 16국 지역에 많은 불사들이 건립되었는데, 예를 들 면 후조( 後 趙 ) 지역에 서역 고승 불도징( 佛 圖 澄 )의 영향 아래 사원 893개소가 세워졌다
86 불도징의 제자 석도안( 釋 道 安 )은 잦은 전쟁과 사회불안으로 인하여, 분장도중( 分 張 徒 衆 ) 의 방법을 취하고, 불교 교단을 위한 일련의 기본규정을 제정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승려들이 중원지역에 널리 진출하였고, 이는 그 후 남북조시기 불교사원들이 중원지역 여러 곳에 대규모로 건립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남북조시기 중국불교의 첫 번째 절정기이자, 중국불교건축의 첫 번째 고조기였다. 남조와 북조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5세기초부터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6세기말까지, 남조의 송, 제, 양, 진, 그리고 북조의 북위, 북제 등의 통치자들은 불교 전파와 대규모 사원건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남북조시기에는 전체 사원 규모뿐만 아니라 개별 건축물의 크기와 비례 또한 이전에 없었던 수준이었다. 예를 들면, 남조 건강성의 동태사( 同 泰 寺 )는 36개의 원락 이 있었고, 북위 낙양성 영녕사탑( 永 寧 寺 塔 )은 높이가 49장으로, 이를 환산하면 약 100여 미터 높이이다. 남북조시기 사원은 이미 기본적인 배치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탑을 가운데 세우고 회랑으로 주위를 둘렀던 삼국시대 작융( 笮 融 )의 불사배치에서 시작하여, 남북조시기 불전 앞에 탑을 세우고 주위에 회랑을 두른 다음 사방에 문을 낸 배치형태, 또는 불전 뒤에 강당을 더하는 배치형태까지 생겨났다. 이로써 문, 불탑, 불전, 강당으로 이어지는 불사 중 축선이 최초로 형성되었으며, 남조 불사에서는 쌍탑배치도 출현하였다. 이러한 배치방법은 당대 불사건축 평면배치의 발전 및 정형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Ⅰ. 수당시기 불사건립 581년에 세워진 수나라는 589년에 통일을 완성하여 3세기초에서 6세기말까지 이어진 수 백 년간의 분열과 혼란을 종식시켰다. 그 후 수문제, 양제가 적극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한 37년 동안은 중국불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수나라 개국과 동시 에 이들은 조서를 내려 전국의 수많은 주와 군에 같은 시기, 같은 이름으로 불사를 짓게 하 고, 각지에 사리탑을 세우게 하였다. 불사 및 탑의 건립이 국가차원의 행사가 된 것이다. 또 수대에는 불경의 수집, 정리, 번역, 보관 방면에도 큰 기여를 하였는데, 분열과 전란으로 인 해 각지에 흩어져있던 불경들을 수집하고 보존함은 물론이고, 불경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국가급 기관인 번경원( 飜 經 院 )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동시에, 수대 불사는 남북조 불 사의 기초 위에서 더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배치가 정연하고 공간이 웅장한 대규모 사찰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는 당대( 唐 代 ) 불사배치의 기본 정형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당대 통치자들, 특히 초당( 初 唐 )시기 고조와 태종은 불교 보호와 장려 측면에서 보면 수 문제, 양제와 같이 적극적이지 못하였고 오히려 불교 제한정책을 시행하였다. 태종 정관년 간의 간승( 簡 僧 )', 도선석후( 道 先 釋 後 ) 정책 등이 그것인데, 이는 초당시기 불사 건립 에 일정한 억제작용을 하였다. 하지만 고종 이후의 역대 통치자들, 특히 측천무후 시기에는 불교 및 불교건축에 매우 열정적이었고, 이로 인해 당대 불교 및 불교건축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성당( 盛 唐 )시기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남북조이래 수백 년간의 축척과 발전으로 인 하여, 당대 불교는 일시에 큰 발전을 이루었고, 천태종, 화엄종, 유식종, 법상종, 삼륜종, 정 토종, 율종, 선종, 밀종, 삼계종 등의 10여개에 이르는 불교종파가 탄생하였다. 이와 동시에, 신역 불경의 보급으로 신앙 면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났는데, 이는 당대 불교 및 불교건축 발전에 적극적으로 작용하였다. 당대 불교가 중국불교사의 최정점에 있듯이, 당대 불교건축 역시 중국불교건축사의 최고 점에 해당한다. 사원의 수량, 규모뿐만 아니라 개별 건축의 웅장함과 화려함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최고 수준이었다
87 1. 국가차원의 불사건립 수당시기 통치자들이 국가명의로 전국 각지에 사찰과 탑을 세운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수문제는 오악 명산에 각각 불사를 세웠고, 그가 이전에 다스렸던 45 개 주에 각각 대흥국사( 大 興 國 寺 )를 세웠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전국 각 주와 군에 사리 를 나누고 각지에 100여개의 사리탑을 세웠다. 당대에도 국가명의로 사탑( 寺 塔 )을 세우는 일은 계속되었고, 이 방법은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 예로 태종 정관년간 출정지역에 불사를 세운 일을 들 수 있다. 법원주림 에 따르면, 정관3년(629년) 겨울에 태종이, 경성 승려들을 7일간 수행하게 하였는데, 의복은 모두 보시 받은 것을 사용하였다. 선인( 善 因 )에 의 거하여 정성을 다해 참회하고, 전쟁터에 가람을 세웠는데, 소인( 昭 仁 ), 등각( 等 覺 ) 등 10여 개소였 다. 광홍명집 당태종어행진소입칠사조( 唐 太 宗 於 行 陣 所 立 七 寺 詔 ) 에는 태종이 이 해 에 세운 7개소 사원이 나오는데, 이는 빈주 소인사( 昭 仁 寺 ), 대주 보제사( 普 濟 寺 ), 진주 자 운사( 慈 雲 寺 ), 분부 홍제사( 弘 濟 寺 ), 낙양 망산 소각사( 昭 覺 寺 ), 정주 등자사( 等 慈 寺 ), 낙주 소복사( 昭 福 寺 )이다. 이 사원들은 나라에서 세운 것으로, 가인( 家 人 ), 수레, 소, 전장( 田 莊 )이 제공되었으며, 비석을 세워 덕을 찬양하였다. 또 이 사원들은 태종이 전쟁터에 세웠던 10개 사 원 중의 일부이다. 태종은 이를 통해 전쟁터에서 전사한 병사를 구휼하고 명복을 기원하였 을 뿐만 아니라 옛 무리를 위로하는 정치적인 동기도 있었다. 그 후, 측천무후는 정권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여왕이 세상에 내려와 염부제( 閻 浮 提 )의 주인이 된다는 내용의 대운경 을 근거로 하여, 전국 각주에 대운경사( 大 雲 經 寺 ) 를 짓게 하였다. 송대 장안지 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회원방( 懷 遠 坊 )) 동남쪽의 대운경사. 원래 이름은 광명사( 光 明 寺 )로, 수 개황4년에 문제가 승려 법경( 法 經 )을 위해 세웠다. 연흥사( 延 興 寺 )에 담연( 曇 延 )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수문제가 하사한 촛 불이 저절로 켜졌다. 수문제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 절을 광명사로 개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담연이 다시 절을 세워 불교를 전파하기를 요청하니, 이때는 절 이름이 없던터라 (광명사라) 이름 지은 것이 었다. 측천무후가 처음 이절에 행차하였을 때, 승려 선정( 宣 政 )이 대운경을 바치고 불경에 여왕의 징 조가 있다하여 대운경사로 바뀌었다. 마침내 천하 각 주마다 각각 대운경사를 세웠다. 당 중종 이현( 李 顯 )은 그 모친을 이어받아, 즉위한 후 천하에 명하여, 모든 주에 절과 관 을 세우고, 중흥( 中 興 ) 이라 명하라."고 하였다. 이후 신하들이 중흥 을 용흥( 龍 興 ) 으로 고칠 것을 간언하여, 신룡3년(705년) 2월 조서를 내려, 중흥사, 관을 용흥'으로 고치고 중흥 이라 말하여서는 아니된다. 라고 했다. 따라서 당대 각 주와 군에는 모두 용흥사( 龍 興 寺 )가 세워졌다. 현존하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는 북송사원 정정 융흥사( 隆 興 寺 )는 바로 당 용흥사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 현종 개원시기에도 전국적으로 개원사( 開 元 寺 ) 를 세웠다. 당회요 에 따르면, 천 수원년 10월29일, 장안과 낙양 및 천하 모든 주에 각각 대운사를 세웠다. 개원26년 6월1일, 모두 개원사로 고쳤다." 이때 전국적으로 세워진 개원사는 측천무후의 대운사를 기초로 하여 성립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해 각지에 사찰을 새로 짓지 않고, 이전에 있던 대운사의 현판 만을 바꾸어 단 것이었다. 이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전국 각주에 개원사를 건립한,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라 하겠다. 2. 수대의 불사건립
88 수당시기 불사건립의 전반적인 상황을 서술하기 위해, 문헌 중에 이들을 총괄하는 내용들 을 골라 인용하여 이 시기의 불사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당 석법림( 釋 法 琳 )의 변정론 에는 수문제 때의 불사건립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황제에 오르자 옛집을 회상하였다. 개황4년에 태조무원황제와 원명황태후를 공양하였다. 반야사( 般 若 寺 ) 옛터에 대흥국사( 大 興 國 寺 )를 지었다. 반야사는 예전 건덕( 健 德 )년간에 모두 황폐화되어, 평고 대와 서까래가 땅에 떨어져 남은 것이 없었다. 이에 절을 계획하여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하였다. 7 중으로 담을 둘렀고, 수많은 공포가 결구되어 있었다. 감실은 우뚝 솟았고, 난간과 건물이 길게 이어 졌다. 금반은 구름에 닿았고, 풍경은 바람에 흔들렸다. 태조가 예전에 수주( 隋 州 )에 머물 때에, 또 대흥국사를 지었다. 경사( 京 師 )에 대흥선사( 大 興 善 寺 )를 지었다. 영탑과 천궁을 크게 세웠다. 불상은 높이 세웠고, 대들 보는 길게 놓였다. 옥으로 장식한 와당은 광채를 내었다. 채색한 공포가 구름을 떠받고, 붉은 공포는 태양을 받들었다. 바람이 풍경을 울리고, 비가 주번( 珠 幡 )을 적셨다. 숲에는 칠각( 七 覺 )의 꽃이 피었 고, 못에는 팔공( 八 功 )의 물이 넘쳤다. 여섯 고승과 사해명승을 소집하였다. 3백여 명이 상주하였고, 사사공양( 四 事 供 養 )하였다. 박주( 亳 州 )에 천거사( 天 居 寺 )를 지었고, 병주( 幷 州 )에 무덕사( 武 德 寺 )를 지었다. 각각 12개 원락이 있었고, 사방에 여사( 閭 舍 ) 1000여칸을 둘렀으며, 300여명의 승려를 공양하였다. 수문제가 즉위하기 이전에, 다스렸던 45개 주에 모두 대흥국사를 세웠다. 인수궁( 仁 壽 宮 )에 삼선사( 三 善 寺 )를 지었고, 황후에 바칠 동선정사( 東 禪 定 寺 )를 지었다. 5악 및 모든 주의 명산 아래에 각각 승사( 僧 寺 )와 전장( 田 莊 )을 세웠다. 인수원년에 수문제, 헌후 및 궁인( 宮 人 ) 등이 모두 사리가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침석에 놓고 쳐도 깨어짐이 없었다. 40개의 주에 보탑을 세웠는데, 빛이 비추는 신비한 변화가 평소와는 달랐다. 이는 모두 왕소( 王 劭 )가 기록한 바와 같다. 위와 같이, 수문제가 여러 해 동안 건립한 불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반야사는 대흥국사이며, 절은 7중으로 담을 둘렀고, 수많은 공포가 결구되어 있었 다. 또 절 내 사리탑이 있었는데, 탑의 금반은 구름에 닿을 만큼 높았고, 풍경은 바람이 흔 들렸다. 둘째, 부친이 수주를 다스릴 때, 수주 대흥국사를 세웠다. 이는 상양, 강릉, 진양의 사원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셋째, 경성에 세워진 대흥선사에는 탑이 있었다. 넷째, 고승 담숭( 曇 崇 )의 요청으로 개황초에 사찰 9개소를 세웠다. 다섯째, 박주에 천거사를, 병주에 무덕사를 세웠다. 절에는 12개 원락이 있었고, 사방으로 승사 僧 舍 1000여칸을 둘렀다. 여섯째, 수문제 즉위 이전에 다스렸던 45개 주에 대흥국사를 세웠다. 일곱째, 인수궁에 삼선사를 세우고, 황후를 위한 동선정사도 세웠다. 여덟째, 5악 및 모든 주의 명산 아래에 절 1개소씩 세웠다. 앞에 기재된 5악 이 5악 및 모든 주 명산 으로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절의 수량도 더 이상 5개소가 아니었다. 아홉째, 40개 주에 사리탑을 세웠다. 광홍명집 에는 인수원년에 30개 주에 동시에 사 리탑을 세웠다고 하였고, 법원주림 에는 인수2년에 53개(또는 54개) 주에 사리탑을 세웠
89 다고 하였다. 앞서 말한 40개 주는 어느 때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속고승전 에서 사리로 앞뒤 100여개 탑을 세웠다고 하였으니, 여기의 40개 주는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수문제 때의 사리탑 총수는 110여개였다. 법림의 변정론 에는, 수문제의 24년 재위기간 동안의 영조공덕( 營 造 功 德 )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개황초에서 인수말까지, 도승은 23만명이었고, 전국 모든 절은 3792개소였다. 경장과 논장을 베 낀 것이 46장( 藏 ), 13만 2086권이었고, 옛 불경을 고친 것이 3853부였다. 금동, 단향목, 협저( 挾 紵 ), 아석( 牙 石 ) 등으로 만든 크고 작은 불상이 10만 6580구였고, 옛 불상을 고친 것이 150만 8940여구 였다. 궁궐 내에서는 수를 놓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린 불상화가 있었고, 오색찬란한 주번( 珠 幡 )과 화 번( 畵 幡 )은 셀 수가 없었다. 24년 동안의 영조공덕은 홍양( 弘 羊 )이 기록할 수도, 예수( 隷 首 )가 셀 수 도 없을 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수문제 때 전국에는 3792개소의 절이 있었다. 이에 비해 수양제 때에는 새로 지은 절은 많지 않으나, 수양제의 불교 보호 및 육성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당 석도선( 釋 道 宣 )은 속고승전 에서 특별히 수양제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수양제가 낙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성대하고 장중함을 중시하여 불법( 佛 法 )에까지 숭고함을 보태 었다. 칙령을 내려 낙수( 洛 水 ) 남쪽 상림원( 上 林 園 ) 내에 번경관( 飜 經 館 )을 설치하고, 인재를 천거받 아 오래토록 불법을 전하게 하였다. 즉위한 후, 명을 내려 많은 서적과 학사를 소집하여 참여케 하였 다. (이들에게) 사사공양하고 일정한 법도를 유지하게 하여, 번역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고, 번역된 것 은 때에 따라 바뀌지 않게 하였다. 수문제, 양제의 불사건립에 관한 기록은 아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 보육가( 普 六 茄 ) 양씨( 楊 氏 ) 두 황제의 37년동안 절은 3985개소였고, 도승은 23만 6200명이 었다. 역경은 26인, 82부였다. 수 건국이래 불교가 창성하여, 문제는 영의( 靈 儀 )를 창시하여 길조가 끊이지 않았고, 양제는 문제를 이어받아 더욱 많이 흥건( 興 建 )하였다. 위에서 보육가( 普 六 茄 ) 는 보육여( 普 六 茹 ) 의 오기이다. 또 수서 에는 수문제가 "주 태조가 관서에서 봉기한 이래, 보육여씨를 하사하여 주국( 柱 國 ), 대사공( 大 司 空 ), 수국공( 隋 國 公 )을 세웠다." 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수문제, 양제시기 전국에 3985개소의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수문제 때의 불사가 3792개소였으니, 수양제의 14년동안 전국 적으로 겨우 193개소만이 늘어난 것인데, 이는 사탑건립을 중시했던 수문제와 경전수집을 중시했던 수양제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3. 당대의 불사건립 당대( 唐 代 ) 불교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하여, 간단하게 그 시기를 나누어 볼 수 있다. 당대 불교발전은 대략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초당( 初 唐 )시기로 고조( 高 祖 ), 태종( 太 宗 ), 고종( 高 宗 ) 때이다. (약 618년
90 -683년) 둘째 시기는 측천무후, 중종( 中 宗 ), 예종( 睿 宗 ) 때로 고종말년부터 예종까지이다. (약 684년-711년) 셋째 시기는 성당( 盛 唐 )시기로 현종( 玄 宗 ) 개원, 천보년간 및 숙종( 肅 宗 ), 대종( 代 宗 )을 포함하는 시기이다. (약 712년-779년) 넷째 시기는 덕종( 德 宗 )부터 헌종( 憲 宗 ), 목종( 穆 宗 ), 경종( 敬 宗 ), 문종( 文 宗 )을 거쳐 무 종( 武 宗 ) 초에 이르는 시기이다. (약 780년-840년) 회창년간의 법난( 法 難 )은 하나의 전환점으로, 회창이후 당대불교의 심하게 훼손되었다. 회창년간은 841년에서 846년까지이다. 다섯째 시기는 선종( 宣 宗 ) 대중년간의 복법( 復 法 )부터 당말까지이다. (약 847년-907년) 대중복법에서 당말까지는 의종( 懿 宗 ), 희종( 僖 宗 ), 소종( 昭 宗 ), 애종( 哀 宗 ) 시기인데, 국 세가 점차 기울어 대규모로 불법을 일으킬 만한 국력이 없었다. 따라서 불교는 자연히 쇠퇴 기에 접어들었고, 다만 오대( 五 代 ) 지방정권들이 쇠약한 당말 불교에 조금이나마 활력을 불 어넣고 있었다. 오대이후의 불교와 불교건축은 송, 요, 금 통치자들의 불교제창에 의존하였 다. 현존하는 불교건축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중요건축은 대부분 송, 요, 금 때의 것 이다. 첫째 시기는 주로 고조, 태종, 고종 3대에 걸쳐있었는데, 고조와 태종은 불교에 대한 열정 이 부족하여 간승( 簡 僧 ) 과 같은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현장( 玄 獎 )이 귀국한 후, 태종 은 변하기 시작하여 결국 태종 말년에 이르러 불교에 대한 태도가 크게 변하였다. 태종은 현장의 요청으로 도승( 度 僧 )을 허락하고, 정관22년(648년) 9월에 조서를 내려, 경성 및 천 하 모든 주에 도승 5인을, 홍복사( 弘 福 寺 )에는 도승 50인을 두어야 한다. 전국에 절은 3716개소, 도 승은 1만8천5백여명이다. 이를 통해, 태종의 불교에 대한 태도변화와 더불어, 정관시기 전국 적으로 3716개소의 사찰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이를 수문제 때 3792개소, 수양제 때 3985개소와 비교해보면, 수말 혼란 및 초당시기 간승태사( 簡 僧 汰 寺 ) 정책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불사가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덕 초에서 정관말까지의 32년 동안 전국적으로 약 3716개소 사찰을 유지하였다. 이는 수말에 비해 270여개가 줄어든 것으로, 어느 정도 현상유지를 한 셈인데, 이는 고조와 태종의 불교 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고종 때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은 호전되었다. 법원주림 에 따르면, (고조, 태종, 고종) 3대 이래로 전국에는 절이 4천여개소, 승려는 6만여 명이 있었다. 경전과 불상은 셀 수 없었으며, 역 경은 1500여권이 있었다. 앞서 말한 정관말년의 3716개소가 고종말년에 4천여개소로 늘어 난 것이다. 당회요 에 따르면, 천하의 절은 5358개소였고, 비구는 75524명, 비구니는 명이었다. 신라, 일본 승려들이 당에 와서 학문하였는데, 9년 동안 돌아가지 않는 자는 당 국적으 로 편입되었다. 회창5년 사부( 祠 部 )에 명하여 천하의 절과 승려 수를 조사하였는데, 절은 4600개소, 난야( 蘭 若 )는 4만개소, 승려는 26만 5백 명이었다. 여기에는 2가지 중요한 숫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5358로, 성당 개원천보시기의 사찰 수이고, 다른 하나는 4600으로, 회창법난 이전 의 사찰 수이다. 성당에서 만당( 晩 唐 )까지 사찰 수는 현저하게 감소하는데, 이는 천보말에 일어난 안사의 난 때문이다. 물론, 회창법난으로 불교건축은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안사의 난보다 더욱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당말이후, 중국불교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사회생활 전반에서 차지하던 중심위치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대형 불교사원도 더 이상 건립되
91 지 못하였다. 4. 당대 불사의 표준모델 당대 불사는 성숙되고, 통합되며, 정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점은 도선( 道 宣 )이 차례로 편찬한 2가지 도경 에서 잘 나타나는데, 하나는 천축사위국기원사도경 (이하 기원 사도경 )이고, 다른 하나는 관중창립계단도경 (이하 계단도경 )이다. 기원사도 경 은 중원에 전래된 천축 사위국 기원사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나, 사실은 남북조이후 중 원지역 불사형태를 종합한 것으로, 중원지역 궁전건축의 공간형식도 찾아 볼 수 있다. 계 단도경 에도 역시 불사를 언급하고 있는데, 문헌을 검토해보면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불사 역시 기원사를 가리킨다. 두 문헌에 나타난 사원배치 및 공간형식은 거의 비슷하나, 계단 도경 은 간단한 서술위주인데 반해, 기원사도경 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 요한 점은 이들 도경 의 불사배치가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나 세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인 데, 그 이유는, 필자의 견해로는, 그 편찬시기 및 저술을 위한 불사에 관한 사전 준비자료 가 다르기 때문으로 풀이되며, 이는 곧 당대 초기 불사 평면배치상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 로 사료된다. 따라서 이들 도경 은 서로 다른 당대 불사건축의 전형적인 평면배치와 공간 구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 특별히 언급할 것은, 이들 도경 은 저자의 전혀 근 거없는 생각이나, 천축 승려들로부터 전해들은 간단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 아니고, 전대( 前 代 ) 승려가 가지고 있었던 문자와 구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 예로 도경 에 계속 나오 는, 수나라 초기 영유( 靈 裕 )법사가 지은 사고( 寺 誥 )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대성( 大 聖 ) 입적이래로 1600년이 지났다. 기원( 祇 園 )의 성쇠가 20차례 있었는데, 쇠하였을 때마 다 보충하였고, 일에 직면할 때마다 해결하였다. 그러므로 그림을 전하여 여러 가지를 이에 의거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그림 가운데 높은 건물은 3가지 다른 척도였고, 나머지는 말할 만큼 뛰어나지 않다. 수나라 초 위군 영유법사는 명성이 본래 뛰어나고, 인품이 고상하였다. 사고 를 찬술하였는데, 모 두 기원( 祇 洹 )을 인용한 것이다. 또한 성적기( 聖 迹 記 ) 에도 영유법사가 등장하는데, 영유법사가 성적기 를 총 집성하 였는데, 법현( 法 顯 )을 본으로 삼았다. 고 하였다. 이는 영유법사가 참고한 자료는 동진( 東 晋 ) 승려 법현(334년-420년)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도선에 따르면, 그의 기록 중에는 인용한 내용 뿐 아니라 상상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많은 책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기술하였다. 다만 기재가 서로 달라 아직 쓰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순간 깨달음을 얻으니, 이 신령함에 감동하였다. 이를 통해, 도선은 당시 중원 각지의 불사나 심지어 궁전건축까지도 참고하였고, 여기에 상상력을 더하여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환상적인 불국세계를 묘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Ⅱ. 수대 불사의 평면배치 수대 불교건축은 비록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이 특징이나, 불사배치 측면에서 볼 때, 37 여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남북조 시기와 완전히 구별되는 형식을 보여주기에는 무리가 있었 다. 따라서, 수대 불사배치는 남북조 불사배치의 종착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본 장에서는 남북조와 수대 문헌자료를 종합하여, 남북조에서 수대에 이르는 불사 평면배치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92 1. 불탑중심 배치 사원 중앙에 불탑을 배치하는 형식은 아마 중국 불사배치의 최초 형식일 것이다. 문헌을 종합하면, 이러한 불탑중심 배치는 최소한 2가지 형태가 있었다. 1) 불탑중심, 사방에 회랑을 두른 형식 이 형식은 사원 중앙에 불탑을 세우고, 그 사방으로 회랑을 두른 것이다. 잘 알려진 2가 지 예가 있다. 하나는 삼국시대 작융( 笮 融 )이 세운 부도사( 浮 圖 祠 )로, 동( 銅 )으로 사람을 만 들어 황금을 몸에 칠하고 채색비단을 입혔다. 동반( 銅 盤 )이 9겹으로 내려오고, 아래는 중루( 重 樓 )와 각도( 閣 道 )인데, 3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전한다. 다른 하나는 위명제( 魏 明 帝 )가 궁전 동쪽 에 세운 불도( 佛 圖 )로, 위명제가 일찍이 궁전 서쪽의 불도를 허물고자 하였다. 이에 외국 승려가 금반( 金 盤 )에 물을 담아 불전 앞에 놓고 불사리를 물에 던졌다. 이에 오색 빛이 발하니, 황제가 감탄 하여 말하기를, 만일 영험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러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내 (불도 를) 길의 동편으로 옮기고, 주각( 周 閣 ) 백칸을 지었다. 라고 전한다. 여기의 주각백칸 은 중 앙의 탑 주위로 지은 100칸의 회랑으로, 평면은 아마 방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평면은 중 국 초기 제사건축과 매우 유사하다. 즉, 명당을 중앙에 배치하고, 주위에 회랑을 둘러 방형 원락을 구성하며, 사방에 문을 낸 형식이다.<그림1> 이미 발굴된 서한( 西 漢 ) 남쪽외곽 예제 건축도 이와 비슷하다. 따라서 상술한 불사에서 사방의 회랑 중앙에 문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림1. 불탑중심, 사방에 회랑을 두른 형식 2) 불탑 및 불상중심, 사방에 작은탑 및 불상을 세운 형식 앞서 말한 북주 北 周 무제 우문옹( 宇 文 邕 )은 무성2년(560년)에, 문황제를 위하여 화려한 석 가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1장 6척이었다. 그리고 보살, 성승, 금강, 사자 및 주위에 보탑 220구를 둘렀다. (탑의 장식이) 구름과 용이 없는 것이 없었고, 순식간에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사원 중앙에 불탑을 세우고, 탑내 불상을 안치하며, 탑 주위에 수많은 보살, 성승, 금강, 사자 및 220개 소형탑을 빽빽하게 배치한 형식이다. 이러한 평면은 소승불교 위주의 동남아시아 불 사와 매우 유사한데, 이는 이 시기 중국불교가 부분적으로 성문도( 聲 聞 道 ) 위주의 소승불 교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알려준다. 물론, 보살도( 菩 薩 道 ) 대승불교의 흔적도 이미 있었 으나, 그 불사배치는 여전히 천축, 서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그림2>
93 그림2. 불탑 및 불상중심, 사방에 작은탑 및 불상을 세운 형식 또한 이 시기 중국불교가 소승 성문승( 聲 聞 僧 )의 사체법( 四 諦 法 ) 수행의 영향을 아직도 받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자료도 있다. 북조( 北 朝 )에서 수대에 이르는 시기, 소승불교의 사면불 과 유사한 불상이 있는 사원도 있었다. 형주( 邢 州 ) 사하현 사면동불( 四 面 銅 佛 )은 길이가 약 4척이다. 수나라 초 어떤 이가 산에 들어가, 승려가 이 불상을 지키고 있는 보고, 공양을 청하자 승려가 갑자기 사라졌다. 후대 사람이 절 옆 에서 금 한 덩어리를 주웠는데, 위에 2마리 까마귀 모양이 있었고 명문에는 사면불을 도금하려 한 것으로 인하여 도금하였다.' 라고 쓰여 있었다. 부처형상 위에는 까마귀 그림자가 퍼져 있었다. 새모양이 조각된 사면불상은 아마 소승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북 주 황제가 지은 배치수법과 매우 유사한데, 이들은 모두 성문도 소승불교 영향을 받은 흔적 이 잘 나타나 있다. 숙백( 宿 白 ) 선생은, 수대 불사는 여전히 앞선시기 불탑중심의 전통적인 배치방법을 따르고 있 다. 고 하였는데, 실제로 수문제 때에는 탑의 건립을 매우 중시하여, 인수년간을 전후한 몇 년 동안 전국110여개 주에 동시에 탑을 세웠다. 아마도 그 중에서 적지 않은 불사가 수문 제가 세운 사리탑을 중심으로 하는 불탑중심 배치였을 것이다. 2. 전탑후전( 前 塔 後 殿 ) 배치 숙백 선생은 동한위진남북조 불사평면배치 초탐 에서 동진남북조시기 불사평면을 5세 기를 경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였다. 전기에는 동한이래 계속된, 불탑을 중앙에 두 고 사방에 회랑을 두른 배치방법이 여전히 우세하였고, 후기에는 여러 배치형태가 혼재하 나, 전탑후전 배치가 가장 전형적인 형식이었다. 전탑후전 배치의 대표적인 예로 북위 낙양 영녕사( 永 寧 寺 )를 들 수 있다. 전체 평면은 장 방형으로 남북길이 약 305미터, 동서길이 약 215미터이었다. 사방에 문을 세웠는데, 남문 은 3층으로 3개의 통로가 있었다. 동문과 서문은 2층이었고, 북문은 간단한 형태의 오두문 ( 烏 頭 門 )이었다. 그리고 중앙에 9층 부도( 浮 圖 ) 하나가 있는데, 목구조이다., 부도 북쪽에 불 전 하나가 있는데, 형태가 태극전( 太 極 展 )과 같다. 승방( 僧 房 )과 누관( 樓 觀 )이 1000여칸이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는 분명히 전탑후전 배치의 사원이었다.<그림 3>
94 그림3. 북위 낙양 영녕사( 永 寧 寺 ) 유적 법원주림 에는 석도안( 釋 道 安 )의 제자 담익( 曇 翼 )이 형주( 荊 州 ) 장강 남쪽에 사원을 창건한 기록이 있다. 가장 먼저 지은 주전( 主 殿 )은 정면 13칸이고 대들보 길이가 55척인 거대한 불전이었다. 남조 송( 宋 )시기, 대전 앞에 불탑을 세웠는데, 대전 앞의 탑은 송 초왕 ( 譙 王 ) 의계( 義 季 )가 세웠는데, 탑 안의 흙으로 빚은 불상은 도리천( 忉 利 天 )의 장인이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전탑후전 배치가 남북조시기에 점차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숙백 선생은 전탑후전 배치를 설명하기 위해, 남조 사원 2개소를 예로 들었다. 첫째는 광 주 보장엄사( 寶 莊 嚴 寺 )로 다음과 같다. 보장엄사 사리탑은, 양( 梁 ) 대동3년(537년) 내도량 승려 담속( 曇 俗 ) 법사가 세웠다. 대동3 년에 이 지역에 이르렀다. 이 절은 예전 송나라 때부터 일찍이 명성을 얻었다. 법사가 신비한 영 험을 얻어 절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에 전 앞의 수미지탑( 須 彌 之 塔 )을 고치니, 성력( 盛 力 )으로 인하 여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둘째는 형주 도인사( 導 因 寺 )이며 다음과 같다. 옛날 도인사는 오늘날의 천황사( 天 皇 寺 )이다. 백전( 柏 殿 ) 5칸과 협전이 있다. 양나라 우군장군 장 승요( 張 僧 繇 )가 벽화를 그렸다. 불전 정북쪽의 노사나( 盧 舍 那 )는 위엄 있었고, 밝은 빛을 내었다. 전 앞에 오층탑 역시 빛이 났다. 영험한 길조는 자세히 서술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이한 감응으로 인하여 간단히 이 책에 덧붙인다. 위의 두 사원은 모두 불전 앞에 불탑을 세웠는데, 이 형식은 당시 널리 퍼져있었다. 남조 에는 광주 보장엄사, 형주 도인사가 이 형식이었고, 북조에는 낙양 영녕사가 이에 속하였다. 숙백 선생은 남조 불사배치의 영향을 받았던 백제사찰도 언급하였다. 위덕왕( 威 德 王, 재 위 년) 때의 부여 정림사, 성왕( 聖 王, 재위 년) 때의 공주 반죽동 대 통사지, 부여 금강사지, 능산리사지 등은 모두 전탑후전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다. 숙백 선생은 수대에도 여전히 전탑후전 배치가 계속되었다고 하며, 2가지 예를 들었다
95 하나는 수 경읍( 京 邑 ) 청선사( 淸 禪 寺 )이고, 다른 하나는 1973년 중국과학원 고고연구 소가 발굴한 당 장안 청룡사( 靑 龍 寺 ) 유적 서쪽 발굴지이다.<그림4> 절 주위에는 회랑( 廊 廡 )을 둘렀는데, 서쪽과 북쪽 회랑은 보존이 양호하나, 남쪽과 동쪽 회랑은 아직 덜 발굴되었다. 회랑유적을 근거로 하여 청룡사의 모습을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남북 140미 터, 동서 100미터의 장방형 평면이다. 남회랑지의 정중앙은 문지( 門 址 )이고, 그 뒤에는 너비 15미 터의 방형 탑지가 있다. 탑지 가운데에는 너비 4.4미터, 깊이 1.8미터의 지궁( 地 宮 ) 자리가 있다. 탑지에서 뒤로 50여미터 위치한 지점에는 가로 50미터, 세로 30미터의 장방형 불전지가 있고, 그 양 측에는 복랑지( 復 廊 址 )와 동서랑지가 이어져있다. 그림4. 당 장안 청룡사( 靑 龍 寺 ) 유적 서쪽 발굴지 수대 비석에서도 전탑후전 배치를 살펴볼 수 있다. 영찰( 靈 刹 )에 노을이 비치고, 보방( 寶 坊 )이 구름 아래 있다. 다양하게 얽혀있는 건축물이 높 이 솟아있다. 구중일주지전( 九 重 壹 柱 之 殿 )과 삼휴칠보지궁( 三 休 七 寶 之 宮 )이 있고, 보와 서까래에 는 기이한 조각이 있으며, 여러 가지 구름문양이 있었다. 백은 白 銀 으로 지면을 이루었고, 황금으로 난 간에 새겼다. 그 안에 조용한 방실( 房 室 )에는 창이 있었다. 둥근 조정( 藻 井 )에는 연꽃 내려오고, 네모진 창에는 해가 지나갔다. 붉은 문에는 와당이 빛났고, 자색 뜰에는 향기로운 풀을 심었다. 밤 시각이 다하면 절 안에서 종소리가 들리고, 새벽이 찾아오면 구름 아래 승로반이 보인다. 이는 불탑, 불전, 종루(또는 종대)가 있는 사원이다. 구중일주지전( 九 重 壹 柱 之 殿 )과 삼휴 칠보지궁( 三 休 七 寶 之 宮 )에서 알 수 있듯이, 전탑후전 배치를 하고 있다. 이른바 구중일주 지전 은 노을이 비치고, 승로반이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은 불탑으로, 9층 높이이고 탑 안에 중심주를 세운 탑이다. 삼휴칠보지궁 은 높고 커다란 기단 위에 세워진 불전을 가리 킨다. 돈황석굴 수대굴 제302굴(584년)의 복두형( 覆 斗 形 ) 천장 서쪽벽화에 불사가 하나 그려 져 있는데<그림5>, 여기에는 단첨 우진각지붕의 불전과 그 앞에 놓인 방형 불탑이 있다. 탑 은 단층으로 옥개석 위에는 방형의 찰주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복발과 탑찰이 있다. 탑 앞 에는 나무를 베어 나르는 사람이 보이는데, 아마 불사건설이 한창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 다. 불전 뒤로는 담을 두른 원락이 있고, 원락 가운데에 나무와 승려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절 뒤편 승사구역일 것이다. 이 벽화는 수대 전탑후전 배치의 불사가 있었음을 증명하 는 중요한 자료이다
96 그림5. 돈황석굴 수대굴 제302굴 천장 서쪽벽화 3. 전전후당( 前 殿 後 堂 ) 배치 북위( 北 魏 ) 시기에는 불전과 강당을 전후로 배치하는 형식도 나타났다. 북위 낙양가람 기 에 나오는 낙양 건중사( 建 中 寺 )는, 건의원년, 상서령 낙평왕 이주세륭( 爾 朱 世 隆 )이 숙부 이 주영( 爾 朱 榮 )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로 삼은 것이다. 붉은 문과 노란 전각은 이른바 신선이 머무는 곳이었다. 전청( 前 廳 )은 불전으로 삼고, 후당( 後 堂 )은 강당으로 삼았으며, 금화보개( 金 花 寶 蓋 )가 그 가운데를 두루 덮었다." 이 사원은 원래 중축선을 따라 전청과 후당이 차례로 놓인 주택이었 다. 이를 불사로 개조한 이후, 이전의 건물들을 활용하여 전청을 불전으로 후당을 강당으로 개조하였고, 따라서 전전후당 배치가 생겨난 것이다.<그림6> 그림6. 전전후당 배치 강당은 반야당( 般 若 堂 )으로도 불리는데, 남진( 南 陳 ) 석혜용( 釋 慧 勇 )이, "대선중사( 大 禪 衆 寺 )에서 18년 머물었을 때, 강당을 지었는데, 제자와 신도들이 며칠 만에 세웠다. 처마가 높았고, 널 찍하게 만들었으며, 반야지당이라 하였다." 부처의 지혜를 대표하는 반야가 불교교리를 전파하 는 강당의 별칭이 된 것이다. 그 후, 다른 초기 불사에서도 보이는데, 동진( 東 晋 ) 혜원( 慧 遠 )이 창건한 여산 동림사( 東 林 寺 )는, 이로 인해 동림사라 하였다. 혜원이 반야와 불영( 佛 影 ) 2 대( 臺 )를 만들고, 사령운이 3개의 못을 팠다. 양나라 효원( 孝 元 )이 중각을 지어서, 장엄한 건물이 완 성되었다. 혜원의 초창시기에는 단 2동의 건축물만 있었는데, 하나는 반야대로 강당의 뜻이 고, 다른 하나는 불영대로 불전의 뜻이다. 속고승전 에는 수대 및 초당시기 소주( 蘇 州 ) 승려 법공( 法 恭 )이 나온다. (법공은) 그
97 덕을 널리 심어, 여러 절의 주지를 두루 거쳤다. 보전( 寶 殿 )은 구름에 닿고, 불상은 햇빛에 비친다. 강 의를 처음 열자, 많은 이들이 책을 메고 따랐고, 모두 말씀을 기록하니 도성의 종이가 귀해졌다. 그는 불교를 널리 알렸다. 학문의 바다는 그 파도를 끊었고, 문장의 정원은 그 숲을 개척하였다. 여기에 서 그가 머무는 사원이 불전과 강당 위주였기 때문에, 당시 전전후당 배치였을 가능성도 있 다. 또 석혜주( 釋 慧 主 )도 나오는데, 대업( 大 業 )년간에 칙령을 내려 본주의 향림사( 香 林 寺 )로 돌아 오게 하여, 사분( 四 分 ) 넓히는 일을 주로 하였다. 무덕 초에 능양공( 陵 陽 公 )이 익주( 益 州 )에 부임하였 는데 원래 신심이 적었다. 짐을 실은 100여 마리 말을 이끌고 시주에 와서, 절 안의 강당, 불전, 승방 에 두었는데, 감히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사원 내 주요 건축은 강당, 불전, 승방이었고, 이들은 아마도 앞에 불전, 뒤에 강당, 그리고 강당 뒤나 옆에 승방을 두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4. 전탑후당( 前 塔 後 堂 ) 배치 문헌을 살펴보면, 남조 사원에서는 한때 강당의 지위가 불전보다 더 높아서, 그 위치가 매우 두드러졌다. 예를 들면, 남조 대장엄사( 大 莊 嚴 寺 )는, 장엄강당은 송세조( 宋 世 祖 )가 세웠다. 공포가 층층이 겹쳐 길게 이어질 만큼 컸으나, 그날에는 청 중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집사가 상소하니, 조서가 내려와 5일동안 강의를 멈추고, 모든 창호를 사 방의 처마 아래로 옮기게 하였다. 또 평상 50개를 전내에 들이니, 매우 협소하였다. 또 간정사 ( 簡 淨 寺 )에서 십지경( 十 地 經 )을 강의하였다. 당우( 堂 宇 )는 원래 5칸이었는데, 협소할까 염려하여 당 앞에 임시로 5칸을 더 세워서 하나로 합쳤다. 장엄사와 간정사의 강당은 매우 특별하였다. 장엄사 강당은 청중이 많아 사방의 창문을 처마 아래로 옮겨야 했다. 진서( 陳 書 ) 에는, 6월 정묘( 丁 卯 ) 일에 큰비가 내려 대황사찰( 大 皇 寺 刹 ), 장엄사 노반( 露 盤 ), 중양각( 重 陽 閣 ) 동루( 東 樓 ), 천추문( 千 秋 門 ) 내 홰나무, 홍려부문( 鴻 臚 府 門 )을 흔들었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써 장엄사에 불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속 고승전 의, 장엄사의 문과 장우( 牆 宇 )는 오래되어 정교하지 못하고, 또 오군( 吳 郡 ) 호구산( 虎 丘 山 ) 서사( 西 寺 )는 썩은지 오래되니, 모두 크고 아름답게 고쳤다." 라는 문장을 통해, 장엄사에 문과 장 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원에 문과 장우를 세워 원락을 이루고, 원락 중심에 불탑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또 불탑 뒤에 강당이 있어야 조리 있는 배치가 될 것 이다. 전탑후당의 몇 가지 예를 더 찾을 수 있다. 우선, 사령운( 謝 靈 運 )이 산 속에 머물렀을 때, 그 옆에 사원을 세웠다. 사방의 산이 사원을 감싸고, 쌍류가 굽이쳐 흐른다. 남쪽 고개를 마주하여 경대( 經 臺 )를 세우고, 북쪽 언덕에 기대어 강당을 세웠다. 험한 봉우리 옆에 선실( 禪 室 )을 세우고, 깊은 계곡 가에 승방을 나란히 세웠다. 나무와 풀이 백년 만대에 걸쳐있고, 영원한 샘물은 맑고 길다. 아름다운 탑은 교외로 물러서있고, 인간 세상은 성 옆 세상과는 다르다. 이 사원에는 탑, 강당, 선당, 경대는 있으나 오직 불전만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치 와 현학을 중시하는 남조불사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남조불사는 불탑, 경 대, 강당, 승방을 주요 배치요소로 삼고 있다. 강당을 중시하였고 또 불탑도 세웠기 때문 에, 전탑후전 배치를 참고하여 전탑후당 배치를 만든 것이다
98 광홍명집 에는 남조 때에 씌여진, 종산( 鐘 山 ) 명경사( 明 慶 寺 )에 대한 오언시가 있는 데, 그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취령( 鷲 嶺 )에는 3층탑이 있고, 암원( 庵 園 )에는 강당이 있네. 길들여 진 날짐승이 반반( 飯 磐 )을 쫓아오고, 길들여진 들짐승이 선상( 禪 床 )을 둘러싸네." 이 시에서는 주로 불탑과 강당을 말하고 있는데, 아마 명경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이었을 것이다. 그 배치는 전탑후당 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전당후탑 또는 탑당병렬 배치보다는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는 다음과 같다. 석명달( 釋 明 達 )이 부도 및 정사( 精 舍 )를 짓고자 하였는데, 그 재료를 찾지 않고 장인을 먼 저 찾으니, 도속( 道 俗 )들은 그 말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 해 2월 물이 말라, 물을 구하러 내려갔다. 이에 물에서 큰 목재를 발견하였는데, 바로 찰주였다. 길이도 적당하여 선뜻 쓰기로 하고, 줄로 끌어 올려 세웠다. 처음에 당우( 堂 宇 )를 짓고, 9층탑을 세웠는데, 멀리서 가까이서 서로 협력하여 순 식간에 다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가 모두 마무리 되었다. 수 시흥왕( 始 興 王 )이 형주( 荊 州 )로 돌아와서 12월에 강릉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 절의 주요 건축은 부처를 대표하는 9층탑과 승려를 대표하는 정사이다. 9층탑과 강당 (당우)에 승사(정사)를 더하였는데, 이와 같이 강당과 불탑을 주요 건축으로 하는 사원은 주로 남조불사에 많다. 이 시기의 탑은 분명히 사찰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만일 탑 앞에 문이, 탑 뒤에 정사가 놓이게 된다면, 자연히 강당은 정사 가까이에 세워질 것이고, 이는 전 탑후당 배치로 볼 수 있다.<그림7> 그림7. 전탑후당 배치 수대 사원에서도 이 배치형식은 나타난다. 그 예로, 포주( 蒲 州 ) 서암사( 栖 岩 寺 )에는 인수 년간에 세운 탑이 있었다. 사리는 강당 안에 있는데, 그 밤에 앞의 부도 위에서 크게 빛났다. 이에 당 안에까지 빛이 퍼져,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사리를 동함( 銅 函 )에 넣으려 하자, 향로 모양과 같은 빛이 하늘로 올라갔 다. 또 부도 보병( 寶 甁 )에 넣으려 하자, 자색 불꽃이 일어나 흩어졌다 합쳐졌다 하더니 모두 연꽃이 되었다. 여기서는 분명히 강당 앞에 부도가 있고, 부도 위에서 큰 빛이 발하여 강당 안까지 환해
99 졌다고 말한다. 불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서암사는 분명히 전탑후당 형식이었다. 5. 탑-전-당 배치 위서 석로지 에 따르면, 북위 천흥원년(398년)에 불탑, 강당, 선당 및 초기 불전형식 인 수미산전을 한 사원에 모두 세우는 배치형식이 이미 있었다. 이 해에 5층 불도( 佛 圖 ), 기도굴산( 耆 闍 崛 山 ) 및 수미산전( 須 彌 山 殿 )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채색 장식을 더하였다. 그 밖에 강당, 선당 및 사문좌( 沙 門 座 )를 지었는데 장엄하게 갖추지 않은 데가 없었 다. 기도굴산은 인도 영취산( 靈 鷲 山 )을 가리키는데, 부처가 설법하던 장소이다. 수미산은 불 교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산이며, 여기에선 부처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 다. 기도굴산 또는 수미산이란 전각명은 불전명칭의 하나로 보이는데, 청 건륭26년(1761 년)에 지어진 승덕 피서산장( 避 暑 山 莊 ) 주원사( 珠 源 寺 )의 중심전각이 대수미산전( 大 須 彌 山 殿 ) 이란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기도굴산 및 수미산전은 불전의 별칭으로 볼 수 있다. 위의 북위 불사는 처음에는 전탑후전 형식이었다가, 후에 강당, 선당 및 승방을 상징하는 사문좌를 더한 것이다. 그 배치는 전탑후전을 기본으로 하고, 불전 뒤 에 강당, 선당, 승방을 세운 형식이다.<그림8> 그림8. 탑-전-당 배치 남북조에서 수대에 이르는 불사배치는 몇 가지 형식들을 찾을 수는 있으나, 이들을 한마 디로 요약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 하면,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불탑중심, 전탑후전, 전탑 후당, 전전후당, 강당 또는 불전만 있는 경우, 강당 또는 불전 주위에 승방, 선사가 있는 경 우 등의 여러 형식이 있기 때문이다. 남조 때에 편찬된 비구니전 에도 이러한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는데, 영화10년(354년)에 황후가 정음리( 定 陰 里 )에 절을 세우고, 영안사( 永 安 寺 )라 하였다.(오늘날은 하후사( 何 後 寺 )이다) 태원21년(396년)에 세상을 떠났다. 제자 담라( 曇 羅 )는 경률에 박식하고, 재주가 많아, 스승의 임무를 이어받도록 명을 받았다. 4층탑과 강당방우( 講 堂 房 宇 )를 다시 세우고, 또 와불 및 칠불 감당( 龕 堂 )을 만들었다
100 이 니사 尼 寺 는 주로 불탑, 강당, 그리고 와불과 칠불이 있는 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 술 순으로 보면, 이 불사는 탑-강당-불당의 배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불당을 불전의 초 기형식으로 본다면 탑-당-전 배치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탑-전-당 배치에서 강당 과 불전의 순서를 바꾼 것이다. 불탑, 불전, 강당을 동시에 갖춘 사찰로는 수대 소주( 蘇 州 ) 중현사( 重 玄 寺 )를 들 수 있다. 석혜암( 釋 慧 岩 )은 소주 중현사에 거하는데, 미친 사람처럼 생긴데다 불법을 닦지 않아서 당시 사 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주로 방안에 앉아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갑자기 혼자 기쁘게 웃으며, 절 안에서 놀았다. 손에 든 물건으로 여기저기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에는 전을 짓고, 이곳 에는 당을 짓고, 낭무( 廊 廡 )와 주고( 廚 庫 )까지 모두 갖추었다. 한달여가 지나 다른 승려에게 말하기 를, 나를 알려고 하는 자는 탑의 방울이 떨어지면 곧 사라질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때가 되니 과 연 그러하였다. 적어도 정신 나간 이 승려의 눈에는 하나의 사찰에는 불전, 강당, 낭무, 주고 등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원래 이 절에는 불탑도 있었다. 따라서 승려 마음속에 그 리는 사원의 모습은, 중심축에 탑-전-당을 배치하고 주위를 낭무로 두른 다음, 측면에 주 고와 승방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강당과 부속건축(주고, 창름( 倉 廩 ) 등)의 배치관계는 속고승전 중에서 수대 양주( 襄 州 ) 선거사( 禪 居 寺 )에 관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절이 궁핍해져, 강당 동북쪽 백마천( 白 馬 泉 ) 아래 호수 한가운데로 옮겼다. 어떤 곳은 주 고( 廚 庫 ), 어떤 곳은 창름으로 정하였더니, 사람들이 비웃었다. 하루 저녁이 지나 호수 물이 줄어들고 땅이 드러났다. 이에 말한 대로 짓고 두텁게 하였다. 또 예언하기를, 16년 후에 어리석은 자가 절 남 쪽에 중각을 세울 것인데, 절의 터가 부족하지 않음에도 굳이 정면에 세우려고 하여, 송사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영휘년간에 어떤 자가 중각을 세우고 이로 인해 서로 송사를 벌이니 그 말대로 되었다. 승려 잠사리( 岑 闍 利 )는 부속건축인 주고와 창름을 강당의 동북쪽에 배치하고, 예언하기를 장래에 어떤 이가 절 남쪽에 중각을 지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송사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절은 남면하고 있어, 정면에 중각이 들어설 경우 사원 전체를 가리게 된다. 이 때문에 송사까지 벌이는 것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강당이 전체 사원의 북쪽에 있고, 강당의 동북쪽에 주고와 창름 을 배치했다는 것이다. 강당 남쪽에는 당연히 불전이 있을 것이고, 사원의 남쪽에는 문이 있을 것이다. 법원주림 에는 선거사 승려 잠사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절 에 있던 승려 지효( 智 曉 )는, 스스로 죽을 날을 알고, 급히 태선사( 汰 禪 寺 )를 불러 부촉( 咐 囑 )하 고, 불전에 올라 예배하고 하직하면서 온 절 승려들이 기뻐하기를 두루 빌었다. 선거사에 큰 재가 끝 나려고 할 때, 잠사리에게 말하기를, 도솔천에 가서 반야경을 듣겠도다. " 이를 통해, 선거사에 불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문과 불전 사이에 불탑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 만, 이 시기의 불사들이 대부분 불탑을 세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 사원 역시 탑-전 -당 배치를 기본으로 하여, 여기에 승방, 주고, 창름 등의 부속건축을 더하였을 것이다
101 6. 일정이배( 一 正 二 配 ) 배치 중앙에 정전( 正 殿 ), 그 좌우에 각각 배전( 配 殿 )을 세우는 이 형식은 수대에 이미 출현하 였다. 법원주림 에 따르면, 개황 15년에 금주자사( 黔 州 刺 史 ) 전종현( 田 宗 顯 )이 절에 와서 예배드릴 때, 불상이 빛을 내었다. 그는 마음을 일으켜 정북쪽에 대전 13칸과 동서협전 9칸을 지었다. 운송해야 할 목재는 형주 상류 5 천여 리에 있었는데, 목재를 베어 옮겨 강에 마구 던졌더니 형주까지 흘러와서 저절로 언덕에 닿았다. 풍파가 쳐도 끝내 멀리 가지 않았다. 이를 끌어 올려 절을 세웠는데, 기둥 직경은 3척, 주초 너비는 8 척이었다. 이 역시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다. 대전은 침향의 휘장을 두르고 가운데는 13개의 보장( 寶 帳 )을 쳤는데, 모두 금보( 金 寶 )로 장엄하였다. 서까래, 도리, 조정( 藻 井 )에까지 보화( 寶 華 )를 나열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동서의 두 전각에는 불상이 있었는데, 모두 단향 휘장을 사용하였다. 가운데는 보 장과 꽃모양 횃불이 있었는데, 모두 순금으로 되어 있었다. 웅장하고 화려함이 천하제일이었다. 수대 형주사( 荊 州 寺 ) 정전은 정면 13칸으로 불전 내 13개의 불장을 설치하였고, 정전 앞 에는 동서협전이 각각 9칸씩 있었는데, 이는 후대에 나타나는 일정이배 배치의 초기형식 이다. 다만 정전이 13칸, 배전이 9칸이므로 정전 앞에는 상당히 큰 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림9> 그림9. 일정이배 一 正 二 配 배치 현재 성도( 成 都 )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성도 만년사( 萬 年 寺 ) 유적 중의 6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있는데, 그 뒷면에는 불사 배치도가 조각되어 있다.<그림10> 이는 일점투시도법을 사용하였다. 절은 높은 기단 위에 있고, 넓은 경사로가 기단까지 이어져있 다. 중축선을 따라 좌우대칭으로 수목들이 늘어서있고, 그 아래에는 승려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중축선의 끝에는 거대한 불좌가 있는데, 불좌는 높은 기단 위에 있다. 불좌는 수미좌 ( 須 彌 座 )식이고 아래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수미좌 위에는 불상 및 광배가 있고, 불 상 앞 양측에는 승려가 시립( 侍 立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축선 좌우대칭으로 세 워진 2층 불각이다. 불각과 중축선 통로 사이에는 물이 있고 물 안에는 연꽃이 있다. 불각 앞에는 다리가 있어 중앙과 연결된다. 여기에 나타난 것은 좌우 누각이지만 기본배치는 후 대에 자주 나타나는 일정이배식 사원과 매우 유사하다
102 그림10. 성도 만년사( 萬 年 寺 ) 유적 비석 맥적산 석굴 제127굴 안에 그려진 서위( 西 魏 )( 년) 벽화에도 이러한 모습이 표 현되어 있다.<그림11> 중축선 끝에는 단첨 불전이 있고, 그 안에는 불좌 및 불상, 보살상, 불제자상들이 있다. 불전 앞에는 2층 누각이 좌우대칭으로 서있는데, 우진각 지붕이고, 벽돌 을 쌓아 올린 모양이다. 평좌( 平 坐 )가 있고 그 위에 문이 있다. 좌우 누각 앞에는 4그루의 큰 나무가 있고, 그 아래 무릎을 꿇거나 서있는 승려와 신도들이 줄지어 있다. 이는 확실한 일정이배 배치형태이지만, 단 배전이 아니고 누각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림11. 맥적산 석굴 제127굴 서위( 西 魏, 년) 벽화 또 다른 예로, 향당산 북제( 北 齊 ) 석굴( 년) 부조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불 좌 양옆에 좌우대칭으로 세워진 고대( 高 臺 )가 있다.<그림12> 부처는 2층으로 된 앙련좌( 仰 蓮 座 ) 위에 있고, 그 위에는 화개( 華 蓋 )가 있다. 부처 좌우에는 보살과 천인이 빽빽하게 둘 러싸고 있다. 양옆의 건축은 기둥을 세워 지지하고 있는 고대인데 지면에는 사방에 석난간 을 둘렀다. 2층 평좌아래에 공포가 있고, 평좌에는 목난간을 둘렀다. 평좌 위에는 정면 3칸 의 단첨 팔작지붕 전각이 있다. 이상한 점은 전각 정면이 사원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인 데, 즉 팔작지붕의 합각면이 서로 마주하고 있어서 마치 병렬 대칭배치처럼 보인다는 것이 다. 이 고대는 문헌 중에 자주 보이는 경대( 經 臺 ) 일 가능성이 높다. 법림의 변정론 에 따르면, 당초 태종이 세운 홍복사에는 화려한 기둥과 공포 위에 구름 문양을 새겼고, 높은 처마
103 와 난간 아래에는 홍예( 虹 霓 )가 있었다. 영탑( 影 塔 )은 근엄하게 서로 마주하였고, 경대는 빽빽하게 ( 郁 ) 줄지어 있었다. 라고 전하는데, 여기의 욱( 郁 ) 자는 기둥이 숲과 같이 울창하며 대좌 가 크고 높다는 의미이다. 여기의 경대가 바로 불전 앞 대칭으로 나란히 세워진 고대일 것 이다. 수많은 기둥이 받치고 있는 고대 위에 불경을 보관하는 것은, 불경을 안전하게 지킨 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불법( 佛 法 )의 상징인 불경이 사원 중심에 우뚝 솟아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림12. 향당산 북제( 北 齊 ) 석굴 부조 7. 일각이루( 一 閣 二 樓 ) 배치 일전이배 배치 외에도 수나라 초에 나타난 일각이루 배치도 있다. 이는 중축선 위에 고각 ( 高 閣 )이 있고, 그 좌우로 2루( 樓 )가 있는 형식이다. 이는 속고승전 에 나오는 단양( 丹 陽 ) 용광사( 龍 光 寺 )에서 보인다. 단양의 용광사 및 진국( 陳 國 )이 사라지고 도량이 불탔다. 전우( 殿 宇 )가 좁아 장엄하지 않았 다. 사부( 四 部 )를 왕공, 백성에게 인도하고, 고각과 좌우 2동의 루( 樓 )를 세웠다. 절에는 3백여 승려 가 있었는데, 모두 기쁘게 시사( 施 舍 )하여 건물이 완성되기를 원하였다. 이에 석주력( 釋 住 力 )이 권면 하여 2백여 승려들을 거느리고 예장( 豫 章 )으로 가서 벌목하였다. 이는 원래의 사원을 확장한 것이다. 처음에는 불전, 강당, 승방 등이 있었는데, 원래의 전 우가 좁아서 좌우에 2동의 루를 세운 것이다. 후대의 송, 금 사원에서 정전 앞에 좌우대칭 인 누각을 세우는 수법이 많았는데, 이 수법이 용광사에서 기원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수대 남방사원 중에는 누각 앞에 좌우로 2동의 누각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드문 경우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대업습유기( 大 業 拾 遺 記 ). 상원현 남조 때의 옛 도성에 양나라때 와관사 각( 瓦 棺 寺 閣 )을 세웠고, 그 남쪽 쌍각이 있었는데, 건립 년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와관사는 남조사 원이었지만, 절 내에 각이 있고, 각 남쪽에 또 다른 쌍각이 있었는데, 이때는 수 대업년간이 었다. 좌우대칭으로 누각을 세우는 배치는 수당시기에 점차 발전하였다. 사원뿐만 아니라, 궁전, 관아건축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당 장경2년(822년) 한림학사원( 翰 林 學 士 院 )에서, 작은 집을 헐어 넓은 집을 세우니. 층층의 결구에 보를 높이 올리고, 우뚝 솟은 누각에 기둥을 높이 올리 네. 이중 처마가 날개를 펴고, 빈 창문에는 빛이 찬란하네. 용마루는 높고 화려하고, 난간은 견고하게 둘렀네. 삼문( 三 門 )을 내었고, 쌍각이 문을 마주하고 서있네. 맑은 바람은 북문으로 들어오고, 밝은 달
104 은 남쪽 처마에 걸려있네." 여기에 나오는 삼문은 불교사원의 삼문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그 리고 쌍각이 문을 마주하고 있는 배치는 수당시기 불사건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 수도 있 다. 속자치통감 에 따르면, 요( 遼 ) 중희6년(1037년)에 북방의 흔주( 忻 州 ), 대주( 代 州 ), 병 주( 竝 州 )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예전에 흥국사( 興 國 寺 ) 쌍각에 화재가 나서, 처음에 조전( 祖 殿 )에 번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재만 남았다. 여기의 흥국사는 병주 흥국사인데, 수나라 초에 문제 가 즉위하기 전에 다스렸던 45개 주에 지었던 대흥국사 중의 하나이다. 절 내 쌍각배치는 당, 요대 첨가된 것인지 수대에 이미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당의 제도를 계승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숙백 선생은 돈황 수대벽화에 나오는 불사를 근거로 하여, 일전쌍각( 一 殿 雙 閣 ) 배치를 언급하였다.<그림13> 제 419, 423 양 굴의 천장 앞쪽 경사벽에 5칸 대전이 그려져 있는데, 대전 뒤 양측에 3, 4층의 고각( 高 閣 )이 있다. 이러한 배치는 쌍각 뒤에 또 다른 전당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좌우대칭인 쌍각 뒤편의 건물은 전( 殿 )일까? 당( 堂 )일까? 아니면 각( 閣 )일까? 비 록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수대에는 이러한 쌍각의 공간형식이 이미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13. 돈황 막고굴 수대벽화 일전쌍각( 一 殿 雙 閣 ) 배치 8. 남각북탑( 南 閣 北 塔 ) 배치 수대에는 불탑 남쪽에 불각( 佛 閣 )을 설치한 사원도 있었다. 인수2년 사리를 각 주에 나누 어 사리탑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 배치가 나타난다. 전수문( 全 隋 文 ) 에 따르면, 안주( 安 州 ) 관원이 보고하기를, 탑 남쪽에 먼저 불각이 있었는데, 당시 사리는 닫혀있었다. 이에 그 아래에 도량을 세우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 갑자기 불각 위에서 무리가 지나가 는 소리가 났는데, 문을 보니 여전히 닫혀 있었다. 이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105 당연히 우선 불각이 있었고, 사리가 온 다음 그 북쪽에 탑을 세웠을 것이다. 만일 원래 불전과 강당이 있었다면, 남쪽에 있는 불각은 아마도 불전 앞, 즉 중축선의 남쪽이었을 것 이고, 인수년간에 불전과 불각 사이에 탑을 세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는 남각북전( 南 閣 北 殿 ) 이었는데, 사리탑 건립이후 남각, 중탑, 북전의 형식이 된 것이다.<그림14> 그림14. 남각북탑( 南 閣 北 塔 ) 배치 중축선 상에 중각( 重 閣 )을 세우는 수법은 남조시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동진( 東 晋 ) 여산 ( 廬 山 )에 혜원이 세운 동림사( 東 林 寺 )에는 원래 반야(강당), 불영(불전)이 있었는데, 후에 양 효원이 건물을 장엄하게 하려고 중각을 지었다. 즉, 사원 내 중각의 건립은 사원을 장엄 하고 웅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법원주림 에는 동림사와 서로 이웃하는 서림사( 西 林 寺 ) 도 나온다. 서림사 역시 중각 7칸이 있었다. 수 천태산( 天 台 山 ) 폭포사( 瀑 布 寺 ) 승려 혜달 ( 慧 達 )은 사원 건립을 결심하여, 인수년간 양주( 揚 州 ) 백탑사( 白 塔 寺 )에 7층 목탑을 지었 다. 후에 승려 혜운( 惠 雲 )의 요청으로 마침내 여산에 올라 서림사를 세웠다. 중각은 7칸이고 공 포를 층층이 쌓았는데, 화려하게 빛났다." 수대시기 서림사는 동림사를 모방하여 정면 7칸의 중 각을 세웠는데, 이는 중축선상에 대형 불각을 배치한 것이다. 이 불각의 위치는 속고승 전 에는 나타난다. 승려 혜운이 요청하여 여산에 올라 서림사를 지었다. 만각( 晩 閣 ) 7칸이고 공포를 층층이 쌓았다. 밝은 빛이 산을 비추었다. 공사 첫날에 황남목을 다 써버렸다. 한 골짜기 전체에 황남목이 있음 을 영감으로 깨달았다. 중각은 드디어 완성되었고, 그 구조가 웅장했다. 그 후 갑자기 남쪽으로 3척이 기울어졌는데, 장인들이 아무리 해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석문간( 石 門 澗 )이 중각 남쪽에 있었 는데, 갑자기 북으로 센 바람이 불어 중각을 바로 세웠다. 또 서림각( 西 林 閣 )을 지을 때, 그 존 귀한 모습이 궐( 闕 )과 같았다. 이에 전체 각이 완비되어 공을 달성하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각은 황남목( 黃 楠 木 )으로 지 었다. 둘째, 각 이름은 서림각 이다. 셋째, 서림각은 사원 남쪽 앞에 위치한다. 넷째, 서림 각은 처음에 남쪽으로 조금 기울었는데, 그 남쪽에 석문간이 있어 강한 남풍이 서림각을 바 로 서게 하였다. 이로써 서림각 앞에 대형 건축물이 없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106 있다. 서림사에 7층 불각이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동림사 중각 역시 전체 사원의 남쪽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림사에는 먼저 강당(반야), 불전(불영)이 있었고 그 다음에 남 쪽에 중각이 지어져, 전각후전( 前 閣 後 殿 ) 평면을 이루었다. 안주 인수년간에 세운 탑은 중각이 먼저 세워진 후에 그 북쪽에 세운 것으로, 남각북탑 배치를 보인 것이고, 더 나아 가 탑 뒤에 불전, 불전 뒤에 강당, 강당 뒤에 승방, 주고, 창름을 세우고, 각 앞에는 문을 세 워, 완전한 사원배치를 이루었다. 사원에서 중각은 대형 불상을 안치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생겨났다. 예를 들면, 수 개황년간에 승려 징공( 澄 空 ) 20세에 진양( 晉 陽 ) 분수( 汾 水 ) 서쪽에 높이 70척의 불상을 주조 하고자 하였다. 거대한 불상 제작을 원만하게 실현하기 위해, 15년 후에는 반드시 중각을 지어 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부터 형주 사람들은 모두 불상을 덮을 각을 세우기를 원하였으나, 불상이 거대하여 공사가 매우 컸다. 특수한 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방법이 없었다. 개원 초에 이고( 李 暠 )가 천평군 절도사로 있을 때, 이곳을 지나다가 거대한 불상을 보고 감탄하여, 이대로가 좋 은데, 비바람을 맞으니 통재로다! 라고 하고, 즉시 돈 7만 꿰미를 보시하여 1년 안에 중각을 완성하 였다. 오늘날 북도( 北 都 )의 평등각( 平 等 閣 )이 이것이다. 불상의 높이는 70척으로, 1척을 0.294미터로 계산하면 약 20.58미터이고, 불상을 안치 할 전각은 적어도 30미터 높이는 될 것이다. 이 불각은 사원의 중축선 상에 세워졌을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 불각이 불전을 대신하였는지, 그리고 전체 사원의 중앙에 배치되었는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러한 부처가 실내공간의 주체가 되는 불각은 앞서 말한 좌우대칭 의 쌍루, 쌍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남조에서 수당시기까지 주전 앞에 쌍각을 세우는 형식 뿐만 아니라, 중축선 상에 거대한 불각을 세우는 형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후의 불사 공간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9. 일전쌍탑( 一 殿 雙 塔 ) 배치 숙백 선생은 쌍탑배치의 사원을 언급하면서 양경신기 3권에 나오는 장안 대운경사를 예로 들었다. 다음 남쪽은 회원방인데, 그 동남쪽에 대운경사가 있다. 개황4년(584년)에 문제가 승려 법경( 法 經 )을 위해 세웠다. 절 안에는 2개의 부도가 동서로 서있는데, 이는 수문제가 세운 것이다. 탑 안에는 정법륜( 鄭 法 輪 士 ), 전승량( 田 僧 亮 ), 양계단( 楊 契 丹 )의 그림이 있다. 또 뛰어난 장인 한백통( 韓 伯 通 )이 예전에 만든 불상이 있다. 이 삼절( 三 絶 )로 유명하다. 대운경사는 측천무후 때에 이름이 바뀌었는데, 원래 이름은 광명사였다. 사찰 내에는 수 문제 때 세운 쌍탑이 있는데, 변정론 4권에 따르면, 광명사에는 불전(흥상전( 興 像 殿 )), 종대(기종대( 起 鐘 臺 )), 칠보지당( 七 寶 之 堂 ), 구층지탑( 九 層 之 塔 ) 이 있었다. 즉, 탑은 9층이었고, 절 안에는 불전, 강당, 종대가 있었다. 이는 전전후당( 前 殿 後 堂 ) 평면을 기초 로 하여 불전 앞에 좌우대칭의 쌍탑을 세운 것이다. 쌍탑배치의 가장 빠른 예는 남제서( 南 齊 書 ) 에 나온다. 황제가 옛 주택에 상궁사( 湘 宮 寺 )를 세웠는데, 많은 비용을 낭비하였다. 효무( 孝 武 )가 탑을 7층으로 세우자, 황제는 10층으로 세우 고자 하였는데 세울 수가 없어 두 탑으로 나누어 각각 5층이 되었다. 이렇듯, 최초의 쌍탑은 기술
107 적인 한계로 인해 탄생되었다. 또 다른 예로, 남조 진( 陳 )나라 때 서로 다른 지역에 동시에 지은 쌍탑을 들 수 있다. 남 진 태건원년(569년)에 동양( 東 陽 ) 쌍림사( 雙 林 寺 ) 부대사( 傅 大 士 )는, 쌍림산 정상에서 소신 공양하기를 유언하였다. 사리 일부로 묘에 탑을 세웠고, 사리 일부로 산에 탑을 세웠다. 미륵상 2존을 만들어 이 쌍탑에 안치하였다. 이 쌍탑은 사원배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북조 불사 중에서 쌍탑배치가 보이는데, 법원주림 에는 오대산 중대 위에 북위 효문제가 건립한 사원이 나온다. 정상에는 큰 못이 있는데, 태화천( 太 華 泉 )이라 한다. 또 작은 샘 물들이 서로 이어져 있다. 샘물을 끼고 2개의 부도( 浮 圖 )가 있는데, 그 가운데 문수사리상이 있다. 이렇듯, 못을 중심으로 그 양옆에 쌍탑을 세운 배치는, 신성한 산지( 山 池 )를 숭상하기 위해 고심하여 창조해낸 공간형식일 것이다. 돈황 막고굴 제257굴의 북위 벽화에는 성벽과 성가퀴로 둘러싼 사원이 묘사되어 있다. 사원 중앙에는 대형 전당이 있고, 전당 양측에는 쌍탑이 있다. 전의 우측에는 4층 방형탑이 있고, 좌측에는 문을 겸한 3층탑이 있다. 하지만 두 탑이 대칭이 아니고, 하나는 불전 앞쪽 에, 하나 불전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쌍탑이 불전 앞에서 불전 양 옆으로 이동 하는, 쌍탑배치의 과도기적 단계의 산물로도 볼 수 있다.<그림15> 그림15. 돈황 막고굴 제257굴의 북위 벽화 중 불사 수대에 이르러, 고층 목탑을 세우는 기술은 거의 성숙단계에 들어섰다. 수대 문헌에는 고 층 목탑의 건립에 관한 언급이 여러차례 나온다. 따라서, 불전 앞 좌우대칭의 쌍탑배치는 수대에는 이미 계획적인 공간 설계수법이었다. 수문제 때 신언지( 辛 彦 之 )는, 노주칙사( 潞 州 勅 使 )로 천거되었는데, 전후에 모두 선정을 베풀었다. 신언지는 또 불교를 숭상하여 성내에 부도 2개 를 세웠는데 모두 15층이었다." 이는 지방관이 자기의 통치구역 안에 동시에 쌍탑을 세운 것인 데, 이는 불사의 쌍탑배치를 대규모의 성시( 城 市 )로 확대한 것이다. 당대에 이르러 사원 앞의 쌍탑배치는 이미 흔한 일이었다. 항주( 杭 州 ) 개원사는 원래 남 조 양나라 천감4년(505년)에 지은 방흥사( 方 興 寺 )인데, 개원26년(738년)에 개원사로 고쳤 다. 담을 두른 원락은 방형이었고 쌍탑이 서있었는데, 시간이 흘러 썩어 무너지려 하였다. 광덕3년 (765년) 3월, 서탑이 무너졌는데, 흉년이 든 이후로는, 사람들이 다시 세우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 쌍탑은 비록 당대 사원에서 나타나지만, 개원년간 개원사로 개명할 때에 생겨난 것은 아 니라, 그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주( 魏 州 ) 개원사는 원래 중종 때 세운 중흥사이다. 대종 보응원년(762년), 얻은 사리 를, 절 안에 탑 2개를 세워 나누어 묻었다. 매년 일체경( 一 切 經 ) 2본( 本 )을 써서, 2개 루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오! 삼문을 지은 것은 은혜이고, 쌍탑을 세운 것은 정성이다. 모든 경을 고친
108 것은 지혜이고, 어린이를 제도하는 것은 자비이다. 이 쌍탑은 분명하게 한번에 세워졌고, 사원 내 양 측면에 배치되었고, 쌍각, 삼문 등이 함께 세워졌다. 이렇듯, 당대 사원 내에 쌍탑, 쌍 각, 삼문 등을 배치한 것은 매우 성숙한 사원공간의 처리방식이었다. 10. 삼문양중( 三 門 兩 重 ), 사방오중( 寺 房 五 重 ) 에 대하여 법원주림 에는 서진( 西 晉 ) 말엽에 이름을 날렸던, 석도안( 釋 道 安 )의 제자 익법사( 翼 法 師 )가 전란을 피해 형주( 荊 州 ) 남쪽에 서사( 西 寺 )와 동사( 東 寺 )를 지었다. 서사에는 사층사 ( 四 層 寺 ) 승려들을, 동사에는 장사사( 長 沙 寺 ) 승려들을 두었다. 또 그 절에는, 사방( 寺 房 )은 5중( 五 重 )이고, 모두 측면 7가( 七 架 )이다. 크고 작은 별원( 別 院 )이 있었는데, 오늘 날은 10개 원락만 있다. 반주( 般 舟 ), 방등( 方 等 )의 두 원이 가장 장엄하다. 여름 안거 때는 항상 천명 이 있고, 사방은 낭무( 廊 廡 )를 둘렀는데 만칸이 조금 못된다. 절은 삼문( 三 門 )을 내었는데 2중[ 兩 重 ] 이고, 정면 7칸이며 양하( 兩 厦 )가 있다. 전우( 殿 宇 )는 가로로 배치되었고, 모두 중층이 아니니, 대략 지수( 地 數 )를 기준하여, 그 오래감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우( 殿 宇 )는 오늘날 3백여 년이 되었으나, 훼손된 곳이 없다. 동천( 東 川 )의 큰 절 중에 오로지 이것이 가장 높다." 위의 사원배치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체 사원중앙에 중심원락[ 主 院 ]이 있고, 주위에 반주원, 방등원 등의 별원 10개소가 있다. 사원 앞에는 삼문이 2중[ 兩 重 ]으로 설치 되어 있었는데, 이는 2층 문루( 門 樓 )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면 7칸에, 양 옆으로 협옥( 挾 屋 )을 둔 형식인데, 이는 바로 영조법식 에 나오는 전협옥( 殿 挾 屋 ) 형식이다. 또 2중 [ 兩 重 ] 을 내외 2겹의 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가지 모두 삼문 이라 칭하 고 있다. 삼문 안쪽의 중축선에는 아마 중심원락이 있었을테고, 그 안에는 사방( 寺 房 )이 5중( 五 重 ) 이었다. 이 5중 도 2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오중탑( 五 重 塔 ) 에서와 같은 의미 로, 그 건물이 5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가능성이 매우 낮아 보이는데, 당시 목구조 기술은 높은 수준이 아니어서, 크지 않은 방형목탑에도 중심주를 세워야 했다. 따라 서 측면 7가량 규모의 전당을 5층 높이로 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5중 을 5개소의 원락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 경우에는, 중축 선을 따라 5개의 원락이 있고, 그 양옆으로 각각 5개 원락이 덧붙어, 문헌기재와 같이 별원 10개소가 된다.<그림16> 그림16. 사방오중( 寺 房 五 重 ) 의 특수 불사배치
109 이러한 특수한 사원배치를 통하여, 중축선을 따라 삼문, 불탑, 불전, 강당을 세우고 회랑 을 두른 배치 이외에도, 5진 원락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 별원을 두르고, 앞에 2층 문루 를 세우며, 가로로 건물들을 배치하는 등의 다양하고 복잡한 불사공간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Ⅲ. 당대 불사의 기본배치 당나라 시기는 중국불교의 전성기였다. 수많은 종파가 출현하였고, 불경번역 작업도 왕성 하였다. 당은 그 역사가 비교적 길었기 때문에, 평화와 번영의 시기도 많이 나타났고, 이에 성시( 城 市 ), 궁전( 宮 殿 ), 원유( 苑 囿 ), 능침( 陵 寢 ) 건축들은 모두 웅장하고 정교하였다. 이는 틀림없이 당대 불교건축에도 일정부분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보말년의 안사의 난, 당말의 회창법난( 會 昌 法 難 ), 당말 오대시기의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화려했던 장 안과 낙양의 성시와 궁전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불사( 佛 寺 ), 도관( 道 觀 ), 민사( 民 舍 ) 등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때문에, 남아있는 당대 사원건축은 매우 드물고, 이에 관 련된 문헌기록조차 많지 않다. 따라서 당대 불교사원의 건립상황에 대한 완벽하고 자세한 분석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시기는 중국불교의 정점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불교건축 역시 이전에 없었 던, 가장 휘황찬란한 시기를 맞이한다. 만약 중국 불교건축사를 쇠퇴기에 접어든 요송시기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본다면, 이는 분명한 오해일 것이다. 그러면 본 장에서는, 자료의 한 계에도 불구하고, 당대 불교사원 및 그 건축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1. 당대 불사규모와 공간구성 방식 당대 사원은 넓은 면적에 수많은 원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장안 동남 쪽에 있는 대자은사( 大 慈 恩 寺 )는, 본래 정각고가람( 淨 覺 故 伽 藍 ) 에 의거하여 세운 것이 다. 10여개의 원락에 모두 1897칸의 건물이 있고, 도승( 度 僧 )이 300명이 있다." 1897칸의 건축물로 구성된 10여개 원락은, 평균을 내어 계산하여도 원락 하나에 최소 150칸 정도는 있는 셈이다. 원락의 크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큰 규모의 원락에는 아마 수백칸이 지어 졌을 것이다. 또 자료에 따르면, 자은사의 면적은 당시 1방( 坊 ) 크기의 절반이었는데, 이를 통해 자은사의 주요 원락 공간도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장안 장경사( 章 敬 寺 )는 원락의 수가 꽤 많았는데, 송대 유성남기 에는, 장경사는 장안지 에서 말하기를, 통화문( 通 化 門 ) 밖에 있는데, 본래 어조은( 魚 朝 恩 )의 장전이 었다. 후에 장경황후( 章 敬 皇 后 )를 위해 절을 세웠으므로, 장경사라 지은 것이다. 전우( 殿 宇 )는 모두 4130칸으로 48개 원락에 나누었다. 곡강정관( 曲 江 亭 館 ), 화청궁( 華 淸 宮 ) 관풍루( 觀 風 樓 )에서 백관 ( 百 官 )이 행해( 行 解 )하였고, 또 몰수되는 관리의 저택을 그 용도로 주었다. 라고 전한다 칸의 건물을 48개 원락에 나누면, 원락마다 100여칸에 조금 못미치게 들어간다. 그렇다면 규모가 큰 중심원락에는 아마 수백칸을 세웠을 것이다. 원락의 수가 많았던 사원으로 성도( 成 都 ) 대성자사( 大 聖 慈 寺 )도 있었다. 송대 성도문류 ( 成 都 文 類 ) 에는 대성자사화기( 大 聖 慈 寺 畵 記 ) 가 수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천하에서 당대( 唐 代 ) 그림은 성도처럼 많은 곳이 없고, 성도에서 비교해보면 대성자사처럼 흥성 한 곳이 없다. 지금 이 고을을 지키러 왔는데, 승사( 僧 司 )를 시켜 사우( 寺 宇 )의 수를 세도록 하 였다. 이에 회화( 繪 畫 )도 함께 세어, 자세한 결과를 얻었다. 모두 96개 원락에, 각( 閣 ), 전( 殿 ), 탑 ( 塔 ), 청( 廳 ), 당( 堂 ), 방( 房 ), 랑( 廊 )이 대략 8524칸 있었다. 그림 중에서는 부처여래 그림은
110 개, 보살 그림은 1만 488개, 제석, 범왕 그림은 68개, 나한, 조승 그림은 1785개, 천왕, 명왕, 대신장 그림은 262개, 불회경험변상( 佛 會 經 驗 變 相 )은 158개였다. 협저( 夾 紵 ), 조소( 雕 塑 )는 세지 않았다. 불 상이 빽빽하게 서있는데 금빛으로 가득하니, 어찌 이보다 더 장엄하고 화려겠는가. 이는 만당( 晩 唐 )시기 사원을 개괄한 것인데, 이를 통해 당대 사원의 웅장함, 화려함, 성대 함, 정교함을 엿볼수 있다. 사원공간을 보면, 건물 8524칸을 96개 원락에 지었는데, 원락 하나에 평균 90여칸 정도 들어가며, 아마 규모가 큰 원락에는 100여칸 이상 지어졌을 것이 다. 이러한 초대형 사원의 규모와 형제는 틀림없이 도선의 기원사도경 과 계단도경 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두가지 도경 은 당대 이전자료를 기초로 하고, 당대 궁전 및 불 사의 상황을 종합하여, 천축 사위국 기원사( 祇 洹 寺 )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이는 이상적인 불교사원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고, 당대 불교사원 건축의 총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기원사 역시 수많은 원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전체 사원면적은 80경 ( 頃 )이고, 120개의 원락이 있다. 동서 약 10리(약 3000보( 步 )), 남북 700여보의 규모로, 가로세로비가 약 4:1이다. 여기서 당대사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왜냐 하면, 장안성 안의 사원은 리방( 里 坊 )에 배치되는데, 리방은 위와 같이 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기 때문이다. 사원이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 반방( 半 坊 )면적의 자은사( 慈 恩 寺 )처럼, 동서 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사원공간이 되고, 같은 방법으로, 1/4방만큼을 차지하는 경우에는, 도선이 지은 서명사( 西 明 寺 )처럼, 여전히 동서는 길고 남북은 짧은 사원공간을 가진다. 도 선은 이러한 사원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는 이상적인 사원도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공간을 가진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적인 사원의 중심 에 위치한 불원( 佛 院 ) 은 오히려 중국 전통건축의 공간형식과 매우 유사한,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형태이다. 도선은 기원사도경 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가로로 긴 불사공간에 120개의 원락을 배 치하였다. 그중에는 수로, 골목, 문과 다리, 그리고 규모과 방위가 서로 다른 다양한 원락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 제왕궁전에 비길만한 대형 건축군에 속한다. 그 중에는 동서 또는 남 북으로 이어지는 원락군과 남북방향을 중축으로 이어지는 중앙불원이 있다. 아마도 도선이 이상적으로 묘사한 기원사( 祇 洹 寺 )와 계단사( 戒 壇 寺 )는, 회랑을 겹겹이 둘러서 공간을 구성 하는 당대 불교사원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송대에 씌여진 대송고승전 에 따르면, 천주( 泉 州 ) 개원사( 開 元 寺 )는 바로 기원사도 경 과 같은 120개의 원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주 사원, 개원사(천주 서쪽에 있다. 당 무 후 수공2년에 황수공( 黃 守 恭 )이 사는 주택에 정원 가운데 뽕나무가 갑자기 연꽃을 피워, 이에 주택을 불사로 삼았다. 또 계단( 戒 壇 )은 전 뒤에 있었는데, 1천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당우( 堂 宇 )는 고요했 고, 골목은 구불구불했으며, 낭무( 廊 廡 )는 길고 넓었다. 120개 원락이 있어, 천하의 개원사 중에 으뜸 이었다. 동탑은 함통년간에 승려 문칭( 文 偁 )이 지었고, 서탑은 양 정명년간 왕심지( 王 審 知 )가 지었 다.) 송대는 당대와 가깝기 때문에, 사원에 120개 원락이 있었다는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다. 현재 천주 개원사의 쌍탑, 회랑, 대전 등의 배치관계를 보면 여전히 당대 대사원의 흔적 을 볼 수 있다. 이 개원사는 아마도 도경 의 이상사원의 영항을 받았을 것이다. 또 다른 자료를 보면, 도경 의 영향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당나라 사람이 대형 사 원을 묘사할 때 원락 수가 많다는 것을 자주 언급하곤 하였는데, 대송고승전 에 따르면, 당나라 승려 법조( 法 照 )가 오대산에서 한 절을 보았다. 절 앞에는 커다란 금빛 편액에 대성죽 림사( 大 聖 竹 林 寺 )라 적혀있었는데, 사발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한변이 약 20리인 정방형 평면에
111 개 원락이 있었는데, 모두 보탑이 있어 장엄하였다. 이러한 영험한 이야기는 그대로 믿기는 어 렵지만, 이를 통하여 도경 이상사원의 개념이 당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미 깊게 자리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대 사원에서 원락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였다. 일상 및 수행과 관련된 원락 이외에도, 당시 황제와 관련된 원락도 있었는데, 성용원( 聖 容 院 )이 대표적인 예이다. 장안 숭의방 초 복사( 招 福 寺 )에는, 경룡2년에 다시 진용좌상( 眞 容 坐 像 )을 내리고, 조서를 내려 사찰 안에 성용원을 따로 건립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현종이 왕자로 있을 때의 진용이 있었다. 선천2년 칙령을 내려 내고 ( 內 庫 )에서 돈 2천만을 내어 장인 1천명을 불러 중수( 重 修 )하였다. 예종의 성용원에 문 밖 귀신을 그 린 몇 개의 벽은 원래 안에 있는 것을 옮긴 것인데, 그림의 필적이 매우 특이하였다. 이외에도, 이 사원에는 고원( 庫 院 )도 있었다. 유양잡조 에는 당대 장안 사원 원락들의 다양한 명칭들이 나온다. 정선방 대흥선사에 는 행향원, 동랑의 남쪽에는 소화상원이 있었고, 장락방 안국사에는 동선원(동탑원이라고도 함), 성용원이 있었다. 광명사에는 산정원, 상좌린공원이 있었고, 상락방 조경공사에는 삼계 원, 화엄원, 약공원 등이 있었다. 안읍방 현법사에는 동랑 남쪽에 관음원 및 만수원, 서북각 원 등이 있었고, 광택방 광택사에는 만수원이 있었다. 선양방 정역사에는 삼계원, 선원이 있 었고, 숭인방 자성사에는 정토원, 단탑원, 관음원 등이 있었다. 당대 사원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회랑( 回 廊 )의 대량 사용을 꼽을 수 있다. 백거이( 白 居 易 )의 시 남용흥사잔설( 南 龍 興 寺 殘 雪 ) 에는, 남용흥사 맑게 갠 봄날에, 천천히 걸으며 시를 읊으니 사방의 회랑을 감싸네. 라는 구절이 있다. 이 사원은 사방에 두른 회랑과 전당을 기본 구성요소로 하였을 것이다. 한편, 원락 규모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주요 정원에 두른 회랑 이외에 작은 규모의 낭원( 廊 院 )도 있었다. 예를 들면, 대흥선사, 동랑의 남쪽에 소화상원이 있 다. ; 현법사, 동랑의 남쪽에 관음원이 있다. ; 정역사, 불전과 동랑에는 오래된 불당이 있다. ; 숭제사, 동랑 남쪽에서 두 번째 원락에는 선율사가 가사를 만들던 당이 있다. ; 자성사, 관음원 양쪽 회랑에 42성현은 한간( 韓 幹 )이 그린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대원( 大 院 )과 소원( 小 院 )의 구분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동랑( 東 廊 ) 은 당시 대원의 동쪽 회랑이다. 어떤 때에는 불 전서랑, 불전 동서편 차일과 기둥 위의 그림은 바로 이 절 동랑의 옛 흔적이다., 불전동랑에는 작은 불당이 있다. 라는 표현에서도 보이듯이, 불전이 있는 원락은 보통 규모가 큰 중심원락 이다. 이 중심원락의 좌우의 동, 서랑 측면에 또 다른 소원( 小 院 )을 배치하기도 하는데, 여 기에도 보통 회랑이 있었다. 규모가 작은 사원에서는 측면의 소원은 보통 편원( 偏 院 ) 이 라 부르는데, 성도 보상사( 寶 相 寺 )편원의 소전에는 보리상이 있다. 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 다. 편원 과 동랑 남쪽에서 두 번째 원락 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이 두 사찰의 규모 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당대 사원에서 중심정원( 庭 院 )은 한 두 개의 원락이 전후로 이어져서 口 자 또는 曰 자 모양을 형성하고, 이 중심정원에 양 옆으로 작은 원락들이 전후로 이어진 目 자와 같은 원락군이 덧붙는다. 이렇게 하여, 중심정원과 양 옆의 작은 원락들 사이에 주차( 主 次 )가 생기고, 크고 작은 원락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공간구성을 보인 다. 한편, 반듯하게 구획된 원락 이외에, 자연환경을 끌어들여 자유롭게 구성한 불교사원도 있다. 속고승전 에 나오는 남조 남간사( 南 澗 寺 )는 원림과 같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장엄한 절을 세우지 않고, 원( 園 )에 남쪽 골짜기를 연결하고, 이에 건물을 지었는데, 마치 물고기 비늘과 같았다. 비각( 飛 閣 )은 높이 솟아 운무가 자욱하였다. 벽지( 碧 池 )를 파서 물고기와 연꽃을 기르 고, 청산( 靑 山 )을 세워 날짐승을 쉬게 하였다. 대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어 사면이 그늘이 되었다. 나무
112 와 돌로 새와 짐승이 여기저기 뒤엉켜 나타났다 사라졌다. 사원은 대자연과 서로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사원 내 건축물 사이에도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어 물고기와 새를 기르고, 물에 연 꽃을 심고, 대나무와 과일나무도 심었다. 이는 엄격한 대칭의 종교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으로, 당대 장안사원에 있던 산지원( 山 池 院 ) 도 이러한 개념의 연속이었다. 2. 당대 불사건축의 기본배치 도경 의 이상사원에서 그 핵심공간은 기원사도경 에서는 자세하게 서술하였고, 계단도경 에서는 간단하게 불원 佛 院 이라 언급하였다. 이 불원은 대형 당대 불사의 전 형적인 모델로 볼 수 있는데, 그 기본적인 배치특징은 다음과 같다.<그림 17, 18> 1) 사원 앞에는 삼문루( 三 門 樓 )가 있고, 문 앞에는 오두문( 烏 頭 門 ), 수로, 석교( 石 橋 )가 있으며, 그 앞에는 단문( 端 門 )이 있다. 2) 삼문 안에는 방형연지( 方 形 蓮 池 )가 있고, 연지 양쪽에는 동쪽으로 비구계단( 比 丘 戒 壇 ), 서쪽으로 비구니계단( 比 丘 尼 戒 壇 )이 있다. 3) 방형연지 북쪽에는 7층 불탑이 있다. ( 계단도경 에는 탑이 불전 뒤에, 불설법대전 ( 佛 說 法 大 殿 ) 앞에 있음) 불탑 양측에는 동쪽으로 종대( 鐘 臺 ), 서쪽으로 경대( 經 臺 )가 있는 데, 그 근거가 확실하다. 수대 사원에서는 불전 앞에 불탑을 세우는 수법이 이미 있었는데, 당대 사원에서는 대전 앞에 종루와 경루를 세운다. 후대에 사원에 세워진 종루와 고루가 아 니다. 4) 불탑 북쪽에는 대불전( 大 佛 殿 )이 있다. ( 계단도경 에는 이곳에 전불전( 前 佛 殿 )이 있음) 탑 뒤에 전이 있는 것은, 수대 이전 사원에서 주로 보이던 전탑후전 과 일치한다. 대전에서 좌우대칭으로 3층의 동, 서루가 있다. 5) 전불전 뒤에는 불설법대전이 있다. ( 기원사도경 에는 이곳에 전불전이 있음) 사원 중의 법당이나 강당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설법대전 양측에는 5층의 동서 배루( 配 樓 )가 있 다. 6) 불설법대전 뒤에는 삼중루( 三 重 樓 )가 있다. ( 기원사도경 에는 이곳에 제2대복전 ( 第 二 大 復 殿 )이 있고, 복전 양측에는 동서 누관( 樓 觀 )이 있음) 7) 삼중루(제2대복전)의 북쪽에는 삼중각( 三 重 閣 )이 있다. ( 기원사도경 에는 극북중 각( 極 北 重 閣 )임) 삼중각 양측에는 5층의 동서 보루( 寶 樓 )가 있다. 8) 삼중각의 후벽 담장 양측 구석에는 각각 동, 서 불고( 佛 庫 )가 있다
113 그림17. 기원사도경 의 불사배치 그림18. 계단도경 의 불사배치 만약 기원사도경 과 계단도경 의 미세한 차이를 무시한다면, 이 불원 은 당나라 사람들의 이상불사(理想佛寺)로 볼 수 있다. 전형적인 당대사원은 오두문, 수로, 석교, 삼문, 방지, 좌우계단, 불탑 및 좌우대칭의 경루와 종루, 불전, 법당, 후전(제2복전 또는 삼중각), 삼중각이 전후로 6진 원락을 구성하는 형식이다. 대전 양측에 대칭으로 세워진 누각, 전 앞 의 종루와 경루, 사원 북단에 세운 누각, 누각과 양측 배루를 비랑(飛廊)으로 연결 등등 이 러한 사원공간의 처리방식은 송, 요대의 남아있는 사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돈황 벽화에 그려진 수많은 불사에서도 나타난다.<그림19>
114 그림19. 돈황 막고굴 벽화 불사배치 당 고종 영휘4년(653년)에 정혜사( 淨 慧 寺 ) 승려 석혜관( 釋 惠 寬 )이 입적하였는데, 절 안 에 삼교( 三 橋 )가 있는데, 그 하나가 갑자기 넓어졌다. 밤에 방당( 房 堂 )의 보가 부러졌는데, 그 소리가 절 안에 진동하였다. 날이 밝자, 관인과 도사가 모두 와서 슬피 울었다. 절 안에 연지에는 갑자기 물 이 말라 붉은 연꽃이 하얗게 되었다. 절 안에 세 네명이 에워쌀 정도로 큰 녹나무가 있는데 갑자기 피가 나와 골짜기로 흘러 들어가, 골짜기 물이 모두 붉게 변하였다. 한 달동안 계속 되었다. 또 벽돌 로 쌓은 높이 수십 장( 丈 )의 17층 부도( 浮 圖 )가 수 촌( 寸 )으로 쪼개졌다. 이를 통해, 절 앞에 수 로와 삼교( 三 橋 )가 있고, 절 안에 연지와 전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간 구성을 간략히 말하면, 절 앞에 다리가 있고, 삼문 안에 방지가 있으며, 방지 북쪽에 불탑이 있었다. 수 용개사( 龍 蓋 寺 )에서는 탑을 세워 사리를 넣었더니, 한 마리 거위가 사리함에 날아왔다. 매장을 마치자, 혼자 탑을 지키며 빙빙 하늘을 돌았다. 또 탑 앞에 못에 물고기와 자라가 많았는 데 모두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어 북쪽의 사리를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절 안에는 탑이 하나있 고, 탑 남쪽에 못이 있는 공간구성을 보이는데, 이는 앞서 말한 이상사원의 배치와 일치한 다. 당 장안 대자은사( 大 慈 恩 寺 )는, 그 땅은 높은 담으로 성곽이 두르고, 100치( 雉 ) 길이로 구부렸 으며, 층층이 쌓아 귀퉁이를 잇고, 9중( 重 )으로 길게 이어졌다. 널리 보방( 寶 坊 )이 즐비한데, 장대함 을 두루 갖추었다. 별과 경치를 보고, 말뚝을 박고 줄을 쳤다. 옥으로 된 신은 빛을 드리우고, 금으로 된 문고리는 밝게 비치었다. 긴 회랑에서 머물며 하늘을 지붕 삼았다. 화려한 기둥과 공포 위에 구름 문양을 새겼고, 높은 처마와 난간 아래에는 홍예( 虹 霓 )가 있었다. 영탑( 影 塔 )은 근엄하게 서로 마주하 였고, 경대는 빽빽하게[ 郁 ] 줄지어 있었다. 단청( 丹 靑 )에는 큰 가마솥을 다하였고 수초( 水 草 )로 수놓 은 장식은 기이함을 다하였다. 보탁( 寶 鐸 )은 바람에 울려 소리나고, 금반( 金 盤 )은 이슬을 받았으며, 드문드문 치는 종은 밤하늘에 흩어지고 청아한 범성( 梵 聲 )은 아침에 들렸다. 또 장안지 에 따 르면, (진창방) 반의 동편은 대자은사이다. (수 무루사( 無 漏 寺 )가 있던 곳으로 무덕 초에 없어졌다. 정관22년에 고종이 춘궁에 있을 때 문덕황후를 위해 절을 세우고, 자은사라 하였다. 10여개 원 락에 모두 1897칸의 건물이 있고, 도승은 300명이었다. ) 절 서원에는 6층 부도( 浮 圖 )가 있는데 높이는 300척이다. 이를 통하여, 당시 대자은사는 규모가 매우 큰 사원이었고, 사원 내에 중 심축 양옆으로 경대를 세우고, 불탑과 종루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장안지 절 서원에 6층 부도( 浮 圖 )가 있다. 라는 구절에서, 탑이 사원 중축선 상에 놓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위의 법원주림 영탑( 影 塔 )은 근엄하게 서로 마주하였 다. 라는 구절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2개의 탑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자세 한 사항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대자은사는 원락이 주요 공간을 구성하고 있 는 건축군이며, 9중( 重 )으로 길게 이어진 궁전과 같이, 원락이 전후로 중첩되었다는 사실이 다. 원락의 주위에는, 성시에서 성벽을 둘러싸듯, 담장을 둘렀고, 절 안에는 긴 회랑을 서로 이었다. 또 중축선 좌우대칭으로 경대가 있었고, 불탑도 2개 있었다. 이는 도선이 묘사했던, 축선이 명확하고 원락이 서로 관통하며 공간이 중첩되는 사원형식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데, 다만, 2개의 불탑이 서로 마주하는 형식은 조금 다르다. 당말 오대시기의 동경 대상국사( 大 相 國 寺 )도 도선의 이상사원에 가까웠다. 대순2년에 상 국사에 화재가 나서 중층으로 된 삼문( 三 門 ), 칠보가 있는 불전( 佛 殿 ), 구름을 가를 만큼 높이 솟은 보각( 寶 閣 ), 문수전( 文 殊 殿 ) 내의 회랑, 약 400여칸이 모두 잿더미로 변하였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삼문, 불전, 보각은 모두 도선의 이상사원 중축선 위에 놓였던 삼문루, 대불전(또는 전 불전), 극북중각(삼중각)과 일치한다. 중축선 위의 건물 중에서 불탑과 법당이 없는데, 송대
115 때는 대상국사 앞에 쌍탑을 세웠으므로, 중축선 위의 탑은 생략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송대 때에 이미 사원배치의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당의 경우에 는, 위의 문헌에서 언급되지 않았으나, 당시 법당이 없었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또한 당 시 문수전이 있었다는 것은 이 사원이 당대 밀종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재 실물 중에서 송대 건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정정 융흥사( 隆 興 寺 )는, 공간형식 면에 서 도선의 이상사원과 가장 가깝다. 사원 앞에는 수로와 석교가 있고, 산문 안쪽으로 대전 (육사전( 六 師 殿 )이었는데, 현재 건물지만 있음)이 있는데, 이는 이상사원의 전불전과 같다. 전 뒤에는 전체 사원의 중심건물인 마니전( 摩 尼 殿 )이 있는데, 이는 이상사원의 제2복전(또 는 불설법대전)과 같다. 마니전 뒤에는 계단( 戒 壇 )이 있고, 계단 뒤에는 좌우대칭의 누각 있는데, 동쪽은 경루(전륜장전( 轉 輪 藏 殿 ))이고, 서쪽은 자씨각( 慈 氏 閣 )이다. 그 뒤편으로는 대비각( 大 悲 閣 )이 있고, 그 양쪽에 좌우대칭의 누각이 있는데, 비랑( 飛 廊 )으로 연결되어 있 다. 대비각 및 좌우 누각은 도선 이상사원의 삼중각 및 좌우 배루와 거의 같으며, 비랑으로 연결된 것도 일치한다. 오늘날 대비각 뒤편 원락에도 송대 사원의 흔적이 남아있는지는 모 르겠으나, 만일 그 뒤로 원락이 있었다면, 융흥사는 6진 원락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융흥사 내의 건축은 주로 송대 이후의 것들인데,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 唐 代 )에 지어졌던 용흥사( 龍 興 寺 )를 기초로 하여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당대 사원건축의 배치요소도 일부 포 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116
117 隋 唐 时 期 佛 教 寺 院 概 览 王 贵 祥 清 华 大 学 建 筑 学 院 一. 隋 唐 时 期 的 佛 寺 建 造 1. 国 家 参 与 佛 寺 建 造 2. 隋 代 佛 寺 建 造 简 述 3. 隋 代 佛 寺 建 造 简 述 4. 唐 代 佛 寺 建 造 简 述 5. 唐 代 佛 寺 的 标 准 图 式 二. 隋 代 佛 教 寺 院 的 平 面 布 局 1. 以 塔 为 中 心 式 格 局 2. 前 塔 后 殿 式 格 局 3. 前 殿 后 堂 式 格 局 4. 前 塔 后 堂 式 格 局 5. 前 塔 后 殿, 殿 后 为 堂 式 格 局 6. 一 正 二 配 式 格 局 7. 一 阁 二 楼 式 布 局 8. 南 阁 北 塔 式 格 局 9. 一 殿 双 塔 式 格 局 10. 关 于 三 门 两 重, 寺 房 五 重 的 讨 论 三. 唐 代 寺 院 基 本 格 局 及 其 建 筑 类 型 1) 唐 代 寺 院 规 模 与 空 间 组 织 方 式 2) 唐 代 寺 院 建 筑 的 基 本 格 局 中 国 佛 教 自 公 元 初 东 汉 时 期 传 入 中 国, 历 数 百 年 缓 慢 积 累, 到 4 世 纪 末 至 5 世 纪 初, 出 现 了
118 一 次 迸 发 式 发 展 : 一 是 北 方 十 六 国 地 区 大 量 佛 寺 的 建 造, 如 仅 在 石 赵 地 区 西 域 高 僧 佛 图 澄 的 影 响 下, 就 建 造 了 893 座 寺 院 佛 图 澄 的 弟 子 释 道 安, 更 是 在 战 乱 频 仍, 动 荡 不 安 的 历 史 背 景 下, 采 取 了 分 张 徒 众 的 做 法, 并 为 佛 教 僧 团 制 定 了 一 系 列 基 本 仪 轨 使 佛 教 僧 侣 得 以 在 中 土 汉 地 得 到 广 泛 分 布, 从 而 为 其 后 南 北 朝 时 期, 佛 教 寺 院 在 中 土 地 区 较 为 宽 广 范 围 内 的 大 规 模 建 造, 奠 定 了 基 础 南 北 朝 是 中 国 佛 教 发 展 的 第 一 个 高 潮 期, 也 是 佛 教 建 筑 发 展 的 一 个 高 峰 自 5 世 纪 初 南 北 朝 格 局 初 步 形 成, 至 6 世 纪 末 隋 代 统 一, 其 间 南 朝 宋 齐 梁 陈, 及 北 朝 北 魏 北 齐 等 朝 代 的 统 治 者, 都 对 佛 教 传 播 与 佛 寺 建 筑 的 建 造, 起 到 推 波 助 澜 作 用 无 论 从 寺 院 规 模, 还 是 单 座 建 筑 物 体 量 尺 度, 在 南 北 朝 时, 都 达 到 前 所 未 有 水 平 如 南 朝 建 康 城 同 泰 寺, 有 36 个 院 落 之 多 ; 北 魏 洛 阳 城 永 宁 寺 塔, 其 高 度 自 露 盘 以 下, 达 到 了 49 丈, 折 合 今 尺 约 百 余 米 南 北 朝 时 期 寺 院 建 筑 基 本 格 局 亦 已 初 步 形 成, 如 从 三 国 时 期 笮 融 以 塔 为 中 心, 周 围 环 绕 廊 庑 的 早 期 做 法, 至 南 北 朝 时 期, 在 佛 殿 前 置 塔, 四 周 设 庑 房, 并 在 四 个 方 向 设 门, 后 来 又 有 了 在 佛 殿 后 设 讲 堂, 从 而 初 步 形 成 寺 门 佛 塔 佛 殿 讲 堂 这 一 最 初 的 寺 院 建 筑 中 轴 线 南 朝 寺 院 中, 还 出 现 了 最 早 的 双 塔 式 布 局 方 式 这 些 都 为 唐 代 佛 寺 建 筑 平 面 格 局 发 展 与 定 型, 奠 定 了 基 础 一. 隋 唐 时 期 的 佛 寺 建 造 公 元 581 年 隋 代 建 立, 以 及 589 年 隋 完 成 南 北 方 统 一, 结 束 了 自 3 世 纪 初 至 6 世 纪 末 3 个 世 纪 的 分 裂 与 动 荡 之 后 的 37 年, 是 中 国 佛 教 史 上 的 重 要 时 期, 隋 代 文 炀 二 帝, 对 于 佛 教 表 现 出 积 极 护 持 与 鼓 励 的 态 度 正 是 从 隋 代 开 始, 由 帝 王 下 达 敕 诏, 在 全 国 范 围 内 许 多 州 郡, 同 时 建 立 同 样 名 称 的 寺 院, 并 且 同 时 在 各 地 建 造 舍 利 塔, 使 佛 教 寺 塔 建 造, 成 为 了 一 种 国 家 行 为 隋 代 还 在 佛 经 的 搜 集 整 理 翻 译 保 藏 方 面, 起 到 关 键 性 历 史 作 用 因 数 百 年 分 裂 与 战 乱 而 分 散 各 地 的 佛 经, 在 隋 代 初 年, 被 搜 集 保 存 在 专 门 寺 院 中, 并 设 置 了 国 家 级 佛 经 翻 译 机 构 翻 经 院 同 时, 隋 代 寺 院, 在 南 北 朝 寺 院 基 础 上, 进 一 步 发 展 完 善, 开 始 出 现 建 筑 布 局 较 为 完 整, 建 筑 空 间 较 为 宏 大 的 大 寺 院 格 局, 为 中 国 佛 教 寺 院 建 筑 格 局 在 唐 代 的 初 步 定 型, 打 下 了 一 个 基 础 尽 管 有 唐 一 代 统 治 者, 特 别 是 初 唐 高 祖 与 太 宗, 在 对 佛 教 的 护 持 与 鼓 励 方 面, 缺 乏 隋 代 文 炀 二 帝 的 热 情, 同 时, 对 于 佛 教 采 取 了 一 定 的 限 制 措 施, 如 太 宗 贞 观 年 间 的 简 僧 政 策 等, 以 及, 明 确 提 出 道 先 释 后 政 策, 因 而, 多 少 对 初 唐 佛 教 寺 塔 建 造, 起 到 一 些 遏 制 作 用, 但 由 于 唐 代 国 祚 久 远, 自 高 宗 以 后 的 历 代 统 治 者, 特 别 是 武 后 时 期, 对 佛 教 及 其 建 筑, 投 入 极 大 热 情, 从 而 将 唐 代 佛 教 及 其 寺 院 建 筑 推 向 了 高 潮 盛 唐 时 期 的 稳 定 与 繁 荣, 以 及 自 南 北 朝 以 来 数 百 年 的 积 淀 与 发 展, 使 唐 代 佛 教 涌 现 出 一 种 迸 发 性 效 果, 出 现 十 余 个 佛 教 宗 系, 如 天 台 宗 华 严 宗 唯 识 宗 法 相 宗 三 论 宗 净 土 宗 律 宗 禅 宗 密 宗 三 阶 宗 等 同 时, 随 新 译 佛 经 的 传 播, 也 出 现 了 诸 多 信 仰 上 的 变 化, 这 些 都 对 唐 代 佛 教, 及 寺 院 建 筑 发 展, 起 到 积 极 推 动 作 用 唐 代 佛 教, 臻 于 中 国 佛 教 史 高 峰, 唐 代 佛 寺 建 筑 也 达 到 了 佛 教 建 筑 史 上 的 高 峰, 无 论 从 寺 的 数 量, 还 是 规 模, 及 寺 院 建 筑 的 庄 严 与 华 美 程 度, 都 达 到 了 前 所 未 有 水 平 1. 国 家 参 与 佛 寺 建 造 特 别 值 得 一 提 的 是, 隋 唐 两 代 统 治 者, 多 次 以 国 家 名 义, 在 全 国 范 围 内, 广 泛 建 造 寺 塔 隋 文 帝 在 五 岳 名 山 各 建 立 一 座 佛 寺, 并 在 其 龙 潜 的 45 个 州 各 建 立 一 座 大 兴 国 寺, 之 后, 又 多 次 向 全 国 各 州 郡 分 发 舍 利, 在 各 地 同 时 建 造 百 余 座 舍 利 塔 唐 代 延 续 了 隋 代 这 种 以 国 家 名 义 在 全 国 范 围 内 大
119 规 模 建 造 佛 教 寺 塔 的 做 法, 并 将 这 一 做 法 推 向 极 致 如 太 宗 贞 观 年 间, 曾 在 其 征 战 过 的 地 方 建 造 寺 院 据 法 苑 珠 林, 贞 观 三 年 (629 年 ) 冬, 太 宗 曾 令 京 城 僧 尼 七 日 行 道, 所 有 衣 服 悉 用 檀 那 藉 此 胜 因, 竭 诚 忏 荡 战 场 之 处, 并 置 伽 蓝, 昭 仁 等 觉, 十 有 余 寺 1 广 弘 明 集 中 所 收 唐 太 宗 于 行 阵 所 立 七 寺 诏 列 出 了 太 宗 在 这 一 年 所 建 的 7 座 寺 院, 分 别 是 豳 州 昭 仁 寺 ( 破 薛 举 处 ), 台 州 普 济 寺 ( 破 宋 老 生 处 ), 晋 州 慈 云 寺 ( 破 宋 金 刚 处 ), 汾 州 弘 济 寺 ( 破 刘 武 周 处 ), 洛 阳 邙 山 昭 觉 寺 ( 破 王 世 充 处 ), 郑 州 等 慈 寺 ( 破 窦 建 德 处 ), 洛 州 昭 福 寺 ( 破 刘 黑 闼 处 ) 这 七 座 寺 院 并 官 造, 又 给 家 人 车 牛 田 庄, 并 立 碑 颂 德 2 这 还 仅 是 太 宗 为 在 战 场 之 处, 并 置 伽 蓝 而 建 的 10 余 所 寺 院 中 的 一 部 分 太 宗 此 举 既 有 抚 恤 战 死 疆 场 的 将 士, 以 期 追 福 之 意, 也 有 安 抚 旧 属 的 政 治 动 机 此 后, 武 则 天 为 了 表 现 其 统 治 合 法 性, 并 彰 显 内 容 中 包 含 女 王 下 世 为 阎 浮 提 主 内 容 的 大 云 经, 诏 令 天 下 各 州 建 大 云 经 寺 宋 人 所 撰 长 安 志 中 描 述 了 这 一 过 程 : ( 怀 远 坊 ) 东 南 隅 大 云 经 寺 本 名 光 明 寺, 隋 开 皇 四 年, 文 帝 为 沙 门 法 经 所 立 时 有 延 兴 寺 僧 昙 延, 因 隋 文 赐 以 蜡 烛 自 然 发 焰, 隋 文 帝 奇 之, 将 改 所 住 寺 为 光 明 寺 昙 延 请 更 立 寺, 以 广 其 教 时 此 寺 未 制 名, 因 以 名 焉 武 太 后 初 幸 此 寺, 沙 门 宣 政, 进 大 云 经, 经 中 有 女 王 之 符, 因 改 为 大 云 经 寺 遂 令 天 下 每 州 置 一 大 云 经 寺 3 唐 中 宗 李 显 继 承 了 其 母 这 一 做 法, 中 宗 继 位 后, 诏 令 天 下 : 诸 州 置 寺 观 一 所, 以 中 兴 为 名 4 后 来 由 于 臣 下 劝 谏, 认 为 中 兴 不 妥, 应 称 龙 兴, 遂 于 神 龙 三 年 (705 年 ) 二 月 下 诏 : 改 中 兴 寺 观 为 龙 兴, 内 外 不 得 言 中 兴 5 唐 代 各 州 郡 都 曾 建 有 龙 兴 寺, 现 存 保 存 较 为 完 整 的 北 宋 寺 院 正 定 隆 兴 寺, 就 是 在 唐 龙 兴 寺 基 础 上 建 造 的 唐 玄 宗 开 元 时 期, 又 一 次 以 国 家 名 义, 在 全 国 范 围 内 设 开 元 寺 据 唐 会 要 : 天 授 元 年 十 月 二 十 九 日, 两 京 及 天 下 诸 州, 各 置 大 云 寺 一 所 至 开 元 二 十 六 年 六 月 一 日, 并 改 为 开 元 寺 6 这 一 次 天 下 普 置 开 元 寺, 是 在 武 则 天 所 置 大 云 寺 的 基 础 上, 将 大 云 寺 改 为 开 元 寺 而 实 现 的 也 就 是 说, 这 一 年 并 非 都 在 各 地 建 造 了 新 寺, 而 是 将 旧 有 大 云 寺 改 换 了 寺 额 这 当 然 是 一 个 聪 明 方 法 : 既 不 大 动 干 戈, 又 达 到 了 在 全 国 各 州 置 开 元 寺 的 目 的 从 后 世 文 献 中, 我 们 知 道 仍 有 一 些 地 方 的 大 云 寺 保 持 了 大 云 寺 额, 而 一 些 开 元 寺, 也 可 能 是 开 元 年 间 首 创 的 但 是, 至 少 在 唐 代 有 过 三 次 以 帝 王 敕 诏 名 义, 在 全 国 范 围 内 先 后 设 置 大 云 ( 经 ) 寺 龙 兴 寺 开 元 寺 的 做 法, 其 寺 院 建 造 与 设 置, 遍 及 天 下 各 州 郡 这 一 作 法, 在 唐 以 前, 或 唐 以 后, 十 分 罕 见 说 明 佛 教 寺 塔 的 大 规 模 建 造, 在 唐 代 成 为 了 国 家 建 造 行 为 的 一 个 组 成 部 分 2. 隋 代 佛 寺 建 造 简 述 为 对 隋 唐 两 代 佛 寺 建 造 的 总 体 情 况 加 以 描 述, 我 们 不 妨 借 用 史 料 中 一 些 总 结 性 文 字, 对 这 一 时 期 佛 寺 做 一 整 体 性 概 览 1 [ 唐 ] 释 道 世. 法 苑 珠 林. 卷 一 百. 传 记 灾 第 一 百. 兴 福 部 第 五 2 [ 唐 ] 释 道 宣. 广 弘 明 集. 卷 二 十 八. 启 福 篇 第 八. 唐 太 宗 于 行 阵 所 立 七 寺 诏 3 钦 定 四 库 全 书. 史 部. 地 理 类. 古 迹 之 属.[ 宋 ] 宋 敏 求. 长 安 志. 卷 十. 唐 京 城 四 4 [ 后 晋 ] 刘 昫. 旧 唐 书. 卷 七. 本 纪 第 七. 中 宗 睿 宗 5 [ 后 晋 ] 刘 昫. 旧 唐 书. 卷 七. 本 纪 第 七. 中 宗 睿 宗 6 [ 宋 ] 王 溥. 唐 会 要. 卷 四 十 八. 议 释 教 下. 寺
120 唐 释 法 琳 所 撰 辩 正 论, 对 隋 文 帝 时 期 所 建 佛 寺, 做 了 一 个 概 略 性 描 述 : 及 登 大 位 爰 忆 旧 居 开 皇 四 年 奉 为 太 祖 武 元 皇 帝 元 明 皇 太 后 以 般 若 故 基 造 大 兴 国 寺 焉 般 若 寺 往 遭 建 德 内 外 荒 凉 寸 梠 尺 椽 扫 地 皆 尽 乃 开 拓 规 摹 备 加 轮 焕 七 重 周 亘 百 栱 相 持 龛 室 高 竦 栏 宇 连 袤 金 盘 捧 云 表 之 露 宝 铎 摇 天 上 之 风 又 以 太 祖 往 任 隋 州 亦 造 大 兴 国 寺 京 师 造 大 兴 善 寺 大 启 灵 塔 广 置 天 宫 像 设 凭 虚 梅 梁 架 迥 璧 珰 曜 彩 玉 题 含 晖 画 栱 承 云 丹 栌 捧 日 风 和 宝 铎 雨 润 珠 幡 林 开 七 觉 之 花 池 漾 八 功 之 水 召 六 大 德 及 四 海 名 僧 常 有 三 百 许 人 四 事 供 养 又 于 亳 州 造 天 居 寺 并 州 造 武 德 寺 前 后 各 一 十 二 院 四 周 闾 舍 一 千 余 间 供 养 三 百 许 僧 始 龙 潜 之 日 所 经 行 处 四 十 五 州 皆 造 大 兴 国 寺 于 仁 寿 宫 造 三 善 寺 为 献 皇 后 造 东 禅 定 寺 其 五 岳 及 诸 州 名 山 之 下 各 置 僧 寺 一 所 并 田 庄 仁 寿 元 年 文 帝 献 后 及 宫 人 等 咸 感 舍 利 普 放 光 明 砧 捶 试 之 宛 然 无 损 于 四 十 州 各 造 宝 塔 光 曜 显 发 神 变 殊 常 具 如 王 劭 所 纪 7 如 上 历 数 文 帝 所 建 寺 院 : 1 将 同 州 般 若 寺 该 为 大 兴 国 寺, 寺 为 七 重 周 亘, 百 栱 相 持, 寺 内 建 有 舍 利 塔, 其 塔 金 盘 捧 云 表 之 露 宝 铎 摇 天 上 之 风 2 因 其 父 曾 任 隋 州, 乃 建 隋 州 大 兴 国 寺 其 寺 当 与 襄 阳 江 陵 晋 阳 各 立 一 寺 为 同 时 所 建 3 在 京 城 建 大 兴 善 寺, 寺 内 有 塔 4 为 副 僧 人 昙 崇 所 愿, 在 开 皇 初 建 寺 9 所 5 于 亳 州 建 天 居 寺, 并 州 建 武 德 寺 寺 有 12 座 院 落, 院 四 周 僧 舍 1000 余 间 6 在 龙 潜 所 经 45 州, 造 大 兴 国 寺, 总 有 45 座 寺 院 7 在 仁 寿 宫 造 三 善 寺, 并 为 皇 后 造 东 禅 定 寺 8 于 五 岳 及 诸 州 名 山 下 各 置 僧 寺 一 所 将 前 文 所 载 在 五 岳 下 各 立 一 寺, 扩 大 到 诸 州 名 山 之 下, 其 数 量 不 再 是 5 座 9 于 40 州 造 舍 利 塔 广 弘 明 集 云, 仁 寿 元 年 于 30 州 同 时 起 造 舍 利 塔 ; 法 苑 珠 林 云, 仁 寿 二 年 于 53( 疑 为 54) 州 造 舍 利 塔 这 里 所 云 为 40 州, 不 知 是 指 哪 一 次, 但 从 续 高 僧 传, 因 舍 利 之 缘, 前 后 建 塔 百 有 余 所, 这 里 的 40 州, 似 也 无 大 矛 盾 文 帝 时 造 舍 利 塔 总 数 约 为 110 余 座 法 琳 在 辩 正 论 中, 对 隋 文 帝 在 其 在 位 24 年 的 营 造 功 德, 及 写 经 造 像 诸 功, 做 了 一 个 总 结 : 自 开 皇 之 初 终 于 仁 寿 之 末 所 度 僧 尼 二 十 三 万 人 海 内 诸 寺 三 千 七 百 九 十 二 所 凡 写 经 论 四 十 六 藏 一 十 三 万 二 千 八 十 六 卷 修 治 故 经 三 千 八 百 五 十 三 部 造 金 铜 檀 香 夹 纻 牙 石 像 7 [ 唐 ] 释 法 琳. 辩 正 论. 卷 三. 十 代 奉 佛 上 篇 第 三
121 等 大 小 一 十 万 六 千 五 百 八 十 躯 修 治 故 像 一 百 五 十 万 八 千 九 百 四 十 许 躯 宫 内 常 造 刺 绣 织 成 像 及 画 像 五 色 珠 幡 五 彩 画 幡 等 不 可 称 计 二 十 四 年 营 造 功 德 弘 羊 莫 能 纪 隶 首 无 以 知 8 由 此 可 知 隋 文 帝 时 期, 全 国 有 寺 3792 所 相 比 较 之, 炀 帝 时 期 新 建 寺 院 并 不 很 多, 但 炀 帝 对 佛 教 的 护 持 与 扶 植, 也 得 到 了 佛 教 史 传 作 者 的 肯 定 唐 释 道 宣 在 续 高 僧 传 中 特 别 赞 扬 了 隋 炀 帝 弘 传 佛 法 的 功 绩 : 炀 帝 定 鼎 东 都, 敬 重 隆 厚, 至 于 佛 法 弥 增 崇 树 乃 下 敕 于 洛 水 南 滨 上 林 园 内, 置 翻 经 馆, 搜 举 翘 秀, 永 镇 传 法 登 即 下 征 笈 多 并 诸 学 士, 并 预 集 焉 四 事 供 承 复 恒 常 度, 致 使 译 人 不 坠 其 绪, 成 简 无 替 于 时 9 关 于 隋 代 文 炀 二 帝 在 佛 教 寺 院 营 造 方 面 的 事 迹, 可 以 用 如 下 两 条 史 料 加 以 概 括 : 右 隋 普 六 茄 杨 氏 二 君 三 十 七 年, 寺 有 三 千 九 百 八 十 五 所 度 僧 尼 二 十 三 万 六 千 二 百 人 译 经 二 十 六 人 八 十 二 部 然 有 隋 建 国 佛 教 会 昌, 文 帝 创 启 灵 仪 祯 瑞 重 沓, 炀 帝 嗣 膺 宝 历 兴 建 弥 多 10 上 文 中 普 六 茄 为 普 六 茹 之 误 据 隋 书, 隋 文 帝 杨 坚 : 从 周 太 祖 起 义 关 西, 赐 姓 普 六 茹 氏, 位 至 柱 国 大 司 空 隋 国 公 11 从 行 文 中 可 知, 隋 之 文 炀 两 代 全 国 有 寺 3985 所 唐 释 法 琳, 在 其 前 有 关 文 帝 建 寺 总 结 中, 提 到 了 海 内 诸 寺 三 千 七 百 九 十 二 所 也 就 是 说, 在 炀 帝 当 政 14 年 中, 全 国 范 围 仅 增 加 寺 院 193 所 这 一 点 或 更 加 凸 显 了 文 帝 重 视 构 塔 建 寺, 炀 帝 重 视 佛 典 搜 集 二 者 间 的 差 别 3. 唐 代 佛 寺 建 造 简 述 为 对 唐 代 佛 教 有 更 为 深 入 的 认 识, 不 妨 将 唐 代 佛 教 史 作 一 个 简 单 分 期 粗 略 地 说, 唐 代 佛 教 发 展 大 约 可 分 为 五 个 较 明 显 的 时 期 第 一 个 时 期, 初 唐 高 祖 太 宗 高 宗 时 期, 约 自 618 年 至 683 年 ; 第 二 个 时 期, 武 后 中 宗 睿 宗 时 期, 从 高 宗 晚 年 至 中 宗 睿 宗, 约 自 684 年 至 711 年 ; 第 三 个 时 期, 盛 唐 时 期, 包 括 玄 宗 开 元 天 宝 年 间, 及 肃 代 时 期, 约 自 712 年 至 779 年 ; 第 四 个 时 期, 自 德 宗, 经 宪 穆 敬 文, 至 武 宗 初 年 约 自 780 年 至 840 年 ; 会 昌 法 难 为 一 个 转 折 点, 会 昌 以 后 唐 代 佛 教 的 鼎 沸 状 态 遭 到 重 挫 会 昌 一 朝, 始 自 841 年, 迄 至 846 年 第 五 个 时 期, 自 宣 宗 大 中 复 法, 迄 至 唐 末 约 自 847 年 至 907 年 从 大 中 复 法, 直 至 唐 末, 经 懿 僖 昭 宗, 至 哀 帝, 其 国 势 渐 弱, 国 家 已 无 力 大 规 模 提 倡 佛 法, 佛 教 进 入 其 衰 败 期, 唯 有 等 待 五 代 时 期 一 些 地 方 割 据 政 权, 再 给 疲 弱 的 唐 末 佛 教 多 少 注 入 一 点 活 力 五 代 之 后 的 佛 教 及 其 建 筑, 有 赖 辽 宋 金 统 治 者 的 提 倡 与 振 兴 现 存 佛 教 建 筑 中, 时 代 较 早 且 较 8 [ 唐 ] 释 法 琳. 辩 正 论. 卷 三. 十 代 奉 佛 上 篇 第 三 9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二. 隋 东 都 雒 滨 上 林 园 翻 经 馆 南 贤 豆 沙 门 达 摩 笈 多 传 10 [ 唐 ] 释 法 琳. 辩 正 论. 卷 三. 十 代 奉 佛 上 篇 第 三 11 [ 唐 ] 魏 徵 等. 隋 书. 卷 一. 帝 纪 第 一. 高 祖 上
122 重 要 者, 多 数 为 两 宋 辽 金 时 代 遗 存 第 一 个 时 期, 为 初 唐 时 期, 主 要 是 高 祖 太 宗 与 高 宗 三 代 高 祖 与 太 宗, 对 于 佛 教 热 情 并 不 很 高, 甚 至 采 取 过 简 僧 政 策 及 玄 奘 归 来, 太 宗 初 改 对 佛 教 态 度 太 宗 晚 年, 其 对 佛 教 态 度 大 变, 在 玄 奘 请 求 下, 太 宗 允 诺 度 僧, 贞 观 二 十 二 年 (648 年 ) 九 月 下 诏 : 京 城 及 天 下 诸 州 宜 各 度 五 人 弘 福 寺 宜 度 五 十 人 计 海 内 寺 三 千 七 百 一 十 六 所, 计 度 僧 尼 一 万 八 千 五 百 余 人 12 这 里 不 仅 看 出 太 宗 对 佛 教 在 态 度 上 的 转 变, 也 给 出 了 贞 观 时 期 全 国 寺 院 总 体 情 况 : 贞 观 末 年, 全 国 有 寺 3716 所 比 较 隋 文 帝 时 全 国 有 寺 3792 所, 炀 帝 大 业 末 年, 有 寺 3985 所 因 隋 末 战 乱, 及 初 唐 简 僧 汰 寺, 寺 庙 遭 毁 不 在 少 数, 则 武 德 初 至 贞 观 末 32 年 间, 寺 庙 总 数 大 致 维 持 在 3716 所 左 右, 比 隋 末 大 约 减 少 了 270 所, 这 还 应 该 算 是 一 种 持 平 状 态, 显 然 是 初 唐 二 帝 对 佛 教 采 取 的 不 抑 不 扬 态 度 所 致 高 宗 时 期, 情 况 有 了 一 些 好 转, 据 法 苑 珠 林 统 计, 历 高 祖 太 宗 高 宗, 三 代 以 来, 一 国 寺 有 四 千 余 所, 僧 尼 六 万 余 人, 经 像 莫 知 亿 载, 译 经 一 千 五 百 余 卷 13 以 前 述 贞 观 末 年 寺 有 3716 所, 到 高 宗 之 末, 寺 有 4000 余 所 据 唐 会 要 : 天 下 寺 五 千 三 百 五 十 八, 僧 七 万 五 千 五 百 二 十 四, 尼 五 万 五 百 七 十 六 新 罗 日 本 僧 入 朝 学 问, 九 年 不 还 者, 编 诸 籍 会 昌 五 年, 敕 祠 部 检 括 天 下 寺 及 僧 尼 人 数, 凡 寺 四 千 六 百, 兰 若 四 万, 僧 尼 二 十 六 万 五 百 人 14 这 里 的 两 个 数 字, 一 是 有 寺 5358 所, 应 是 盛 唐 开 元 天 宝 的 寺 院 总 数, 二 是 会 昌 灭 法 前, 有 寺 4600 所 自 盛 唐 至 晚 唐, 佛 寺 数 量 明 显 减 少, 显 然 由 于 天 宝 末 安 史 之 乱 所 造 成 当 然, 会 昌 灭 法 对 佛 寺 建 筑 的 摧 残, 造 成 比 安 史 之 乱 更 惨 重 后 果 唐 末 之 后, 中 国 佛 教 鼎 盛 期 已 过, 佛 教 居 于 社 会 生 活 中 心 地 位 的 情 势 一 去 不 复 返, 如 唐 代 般 大 规 模, 大 尺 度 佛 教 寺 院 建 造, 再 难 见 于 史 藉 4. 唐 代 佛 寺 的 标 准 图 式 有 唐 一 代, 佛 寺 趋 于 成 熟 化 整 合 化 与 初 步 定 型 化 这 一 点 可 从 道 宣 所 撰 两 部 图 经 中 观 察 出 来 道 宣 先 后 撰 写 两 部 图 经, 一 部 是 天 竺 舍 卫 国 祗 洹 寺 图 经, 一 部 是 关 中 创 立 戒 坛 图 经 祗 洹 寺 图 经, 虽 然 是 在 描 述 中 土 流 传 有 关 天 竺 舍 卫 国 祗 洹 寺 情 况, 但 实 际 却 是 对 中 土 地 区 自 南 北 朝 以 来 佛 寺 的 一 个 总 结, 其 中 也 包 含 对 中 土 帝 王 宫 殿 空 间 形 式 的 借 鉴 戒 坛 图 经 中, 也 提 到 一 座 佛 寺, 从 上 下 文 可 知, 这 部 图 经 中 描 写 的 佛 寺, 仍 是 指 所 谓 的 祗 洹 寺 两 者 的 寺 院 格 局 与 空 间 形 式, 大 略 相 近 但 戒 坛 图 经 只 是 一 个 简 述, 祗 洹 寺 图 经 的 描 述 远 为 细 致 的 多, 重 要 的 是, 两 部 图 经 关 于 中 心 佛 院 建 筑, 在 基 本 相 同 的 建 筑 配 置 上, 有 一 点 些 微 差 异 以 笔 者 的 理 解, 两 部 图 经, 撰 写 于 不 同 时 间, 作 者 对 于 当 时 寺 院 相 关 资 料 的 掌 握, 也 可 能 有 所 不 同, 故 在 两 部 图 经 中, 有 关 中 心 佛 院 空 间 布 局 上 出 现 的 一 些 差 异, 恰 恰 在 一 定 程 度 上, 反 映 了 唐 代 早 期 佛 寺 平 面 布 局 上 的 一 些 不 同 因 此, 仍 可 以 说, 这 两 部 图 经, 提 供 了 两 个 唐 代 佛 寺 建 筑 群 典 型 平 面 与 空 间 模 式 15 特 别 需 要 提 出 的 一 点 是, 这 两 部 图 经, 并 非 作 者 自 己 的 空 穴 来 风, 也 不 是 简 单 地 从 天 竺 僧 人 那 里 传 译 而 来, 其 文 依 据, 是 前 辈 僧 侣 所 留 文 字 或 口 述 资 料, 如 两 部 图 经 中 反 复 提 到 隋 初 僧 人 灵 裕 法 师 所 撰 写 的 寺 诰 : 自 大 圣 入 寂 以 來 千 六 百 岁 祗 园 兴 废 经 二 十 返 增 损 备 缺 事 出 当 机 故 使 图 传 纷 纶 藉 以 12 [ 唐 ] 释 慧 立. 大 唐 大 慈 恩 寺 三 藏 法 师 传. 卷 七 13 [ 唐 ] 释 道 世. 法 苑 珠 林. 卷 一 百. 传 记 灾 第 一 百. 兴 福 部 第 五 14 [ 宋 ] 王 溥. 唐 会 要. 卷 四 十 九. 僧 籍 15 参 见 傅 熹 年. 中 国 古 代 建 筑 史. 第 二 卷. 第 476~480 页. 中 国 建 筑 工 业 出 版 社.2001 年
123 定 断 其 中 高 者 三 度 殊 绝 自 余 缔 构 未 足 称 言 隋 初 魏 郡 灵 裕 法 师 名 行 夙 彰 风 操 贞 远 撰 述 寺 诰, 具 引 祗 洹 16 文 中 还 几 次 提 到 灵 裕 法 师 另 外 一 篇 文 字 : 圣 迹 记 : 裕 师 圣 迹 记 总 集 诸 传, 以 法 显 为 本 17 说 明, 灵 裕 法 师 所 依 据 的 资 料, 是 从 东 晋 僧 人 法 显 (334~420 年 ) 的 相 关 资 料 中 获 得 的 据 道 宣 所 述, 其 文 字 中 虽 有 所 征 引, 也 有 一 定 想 象 成 分 : 由 是 搜 采 群 篇, 特 事 通 叙 但 以 出 没 不 同, 怀 铅 未 即, 忽 于 觉 悟, 感 此 幽 灵 18 由 此 可 知, 他 或 也 参 考 了 当 时 中 土 各 地 寺 院, 甚 至 宫 殿 建 筑, 并 附 之 以 想 象, 才 描 绘 出 他 笔 下 那 宏 大 庞 杂 瑰 丽 奇 幻 的 佛 国 建 筑 群 二. 隋 代 佛 教 寺 院 的 平 面 布 局 隋 代 国 祚 较 短, 尽 管 其 在 佛 教 建 筑 发 展 上 的 表 现 波 澜 壮 阔, 但 就 佛 寺 格 局 来 看, 似 乎 很 难 在 短 短 37 年 中, 出 现 与 南 北 朝 寺 院 格 局 截 然 不 同 的 局 面 因 此, 可 将 隋 代 佛 寺 看 作 对 南 北 朝 寺 院 格 局 发 展 的 一 个 总 结 结 合 南 北 朝 与 隋 代 史 料, 对 从 南 北 朝 到 隋 这 一 时 期 佛 寺 平 面 布 局 做 一 简 单 梳 理 1. 以 塔 为 中 心 式 格 局 以 塔 为 中 心 寺 院 格 局, 可 能 是 中 国 佛 寺 最 早 的 平 面 形 式 从 文 献 中 来 看, 这 种 以 塔 为 中 心 的 寺 院, 至 少 存 在 过 两 种 不 同 建 筑 格 局 : 1 以 塔 为 中 心, 四 周 匝 以 廊 阁 庑 房 其 基 本 的 特 征 是 以 塔 为 中 心, 四 周 匝 以 庑 房 廊 阁 有 两 个 众 所 周 知 的 例 子 一 个 是 三 国 时 人 笮 融 以 铜 为 人, 黄 金 涂 身, 衣 以 锦 彩, 垂 铜 盘 九 重, 下 为 重 楼 阁 道, 可 容 三 千 人 19 的 浮 图 祠 另 一 个 是 魏 明 帝 与 其 宫 之 东 所 设 的 佛 图, 魏 明 帝 曾 欲 坏 宫 西 佛 图 外 国 沙 门 乃 金 盘 盛 水, 置 于 殿 前, 以 佛 舍 利 投 之 于 水, 乃 有 五 色 光 起, 于 是 帝 叹 曰 : 自 非 灵 异, 安 得 尔 乎? 遂 徙 于 道 东, 为 作 周 阁 百 间 20 这 里 的 周 阁 百 间 十 分 形 象 地 描 述 了 这 种 寺 院 的 平 面 形 式 : 中 央 为 塔, 周 匝 百 间 廊 阁, 平 面 很 可 能 是 一 方 形, 建 筑 格 局 很 像 中 国 早 期 的 祭 祀 建 筑, 其 中 央 设 明 堂, 四 周 用 庑 房 围 合 成 一 个 方 形 庭 院, 在 四 个 方 向 上 设 门 ( 图 1) 如 经 考 古 发 现 的 西 汉 南 郊 礼 制 建 筑 亦 即, 这 样 的 寺 院, 在 四 周 廊 阁 中 央 也 应 设 有 门 16 [ 唐 ] 道 宣. 中 天 竺 舍 卫 国 祗 洹 图 经. 序 17 [ 唐 ] 道 宣. 中 天 竺 舍 卫 国 祗 洹 图 经. 卷 下 18 [ 唐 ] 道 宣. 中 天 竺 舍 卫 国 祗 洹 图 经. 卷 上 19 [ 晋 ] 陈 寿. 三 国 志. 卷 四 十 九. 吴 书 四 20 魏 书. 卷 一 百 一 十 四. 志 第 二 十. 释 老 十
124 图 1. 以 塔 为 中 心, 四 周 匝 以 廊 阁 庑 房 的 布 局 2 以 塔 与 佛 像 为 中 心, 周 围 环 以 小 塔 及 造 像 前 文 中 提 到 北 周 武 帝 宇 文 邕 于 武 成 二 年 (560 年 ), 为 文 皇 帝, 造 锦 释 迦 像, 高 一 丈 六 尺 并 菩 萨 圣 僧, 金 刚 师 子, 周 回 宝 塔 二 百 二 十 躯 莫 不 云 图 龙 气, 俄 成 组 织 之 工 21 寺 院 中 心 应 该 是 一 座 佛 塔, 塔 内 有 释 迦 牟 尼 像, 塔 周 围 环 绕 布 置 菩 萨 圣 僧 金 刚 狮 子 等 雕 像 220 躯 以 一 座 大 塔 为 中 心, 塔 内 置 佛, 塔 周 围 密 密 麻 麻 设 置 大 量 菩 萨 圣 僧 金 刚 狮 子, 及 220 座 小 塔 这 种 平 面 形 式, 与 以 小 乘 佛 教 为 主 的 东 南 亚 佛 寺 形 式 十 分 相 似 说 明 这 时 的 中 国 佛 教, 在 部 分 领 域, 尚 处 在 以 声 闻 道 为 主 的 小 乘 佛 教 影 响 下 尽 管, 其 中 可 能 已 开 始 有 菩 萨 道 大 乘 佛 教 影 响 痕 迹, 但 其 寺 院 格 局 仍 较 多 受 到 天 竺 西 域 佛 寺 影 响 ( 图 2) 图 2. 以 塔 与 佛 像 为 中 心, 周 围 环 以 小 塔 及 造 像 的 布 局 还 有 一 条 资 料, 可 以 证 明 这 一 时 期 中 国 佛 教, 受 小 乘 声 闻 乘 修 四 谛 法 影 响 尚 为 明 显 的 例 子, 是 说 在 北 朝 至 隋 代 的 寺 院 中, 曾 经 有 如 小 乘 佛 教 四 面 佛 形 象 的 存 在 : 邢 州 沙 河 县 四 面 铜 佛 者, 长 四 尺 许 隋 初 有 人 入 山, 见 僧 守 护 此 像, 因 请 供 养, 失 僧 所 在 后 人 于 寺 侧, 获 金 一 块, 上 有 二 鸟 形, 铭 云 : 拟 镀 四 面, 佛 因 度 之 佛 形 上 遍 是 21 [ 唐 ] 法 琳. 辩 正 论. 卷 三. 十 代 奉 佛 上 篇. 第 三
125 鸟 影 22 这 种 雕 刻 有 鸟 形 纹 样 的 四 面 佛 造 像 形 式, 很 可 能 受 到 小 乘 佛 教 影 响 其 出 现 与 北 周 皇 帝 所 造 中 央 设 塔, 塔 内 有 佛, 四 周 围 以 大 量 小 塔 菩 萨 圣 僧 金 刚 狮 子 雕 像 做 法 如 出 一 辙, 都 具 有 明 显 受 到 声 闻 道 小 乘 佛 教 影 响 痕 迹 宿 白 先 生 认 为, 隋 代 佛 寺 仍 沿 前 期 以 佛 塔 为 主 要 建 置 的 传 统 布 局 23 隋 文 帝 时 尤 其 重 视 建 塔, 在 仁 寿 年 间 前 后 几 年 时 间, 在 全 国 110 多 个 州 同 时 起 塔 其 中, 很 可 能 有 不 少 州 的 寺 院, 是 以 文 帝 所 立 舍 利 塔 为 中 心 而 构 建 的 2. 前 塔 后 殿 式 格 局 宿 白 先 生 在 东 汉 魏 晋 南 北 朝 佛 寺 平 面 布 局 初 探 中 以 5 世 纪 末 为 界 将 东 晋 南 北 朝 时 期 佛 寺 平 面 发 展 分 为 前 后 两 期 前 期 仍 然 延 续 东 汉 以 来 以 佛 塔 为 中 心, 周 围 环 以 匝 房 寺 院 布 局 形 式 ; 后 期, 寺 院 布 局 趋 于 复 杂, 这 一 时 期 典 型 寺 院 布 局 是 前 塔 后 殿 式 格 局 24 其 中 最 著 名 者, 为 北 魏 洛 阳 永 宁 寺 永 宁 寺 格 局 呈 南 北 略 长 ( 约 305 米 ), 东 西 稍 短 ( 约 2 15 米 ) 的 矩 形 寺 开 四 门, 南 门 为 楼 三 重, 通 三 阁 道, 东 西 两 门 两 重 楼, 北 门 仅 用 简 单 的 乌 头 门 中 心 偏 南 位 置 是 巨 大 的 九 层 木 塔, 所 谓 中 有 九 层 浮 图 一 所, 架 木 为 之 在 浮 图 北 有 佛 殿 一 所, 形 如 太 极 殿 僧 房 楼 观, 一 千 余 间 25 显 然 是 一 座 前 塔 后 殿 布 局 寺 院 ( 图 3) 图 3. 北 魏 洛 阳 永 宁 寺 遗 址 平 面 布 局 法 苑 珠 林 中 记 载 由 释 道 安 弟 子 昙 翼 在 荆 州 长 江 南 岸 所 创 寺 院, 其 最 初 建 造 的 主 殿 为 十 三 间, 通 梁 长 五 十 五 尺, 也 是 一 座 巨 大 佛 殿 南 朝 宋 时, 大 殿 前 加 建 了 一 座 佛 塔 : 殿 前 塔 宋 谯 王 义 22 [ 唐 ] 道 宣. 广 弘 明 集. 卷 十 五. 列 塔 像 神 瑞 并 序 唐 终 南 山 释 氏 23 宿 白. 隋 代 佛 寺 布 局. 魏 晋 南 北 朝 唐 宋 考 古 文 稿 辑 丛. 第 248 页. 文 物 出 版 社.2011 年 24 宿 白. 东 汉 魏 晋 南 北 朝 佛 寺 布 局 初 探. 魏 晋 南 北 朝 唐 宋 考 古 文 稿 辑 丛. 第 230~247 页. 文 物 出 版 社.2011 年 25 [ 北 魏 ] 杨 衒 之. 洛 阳 伽 蓝 记. 卷 一. 城 内
126 季 所 造 塔 内 塐 像, 忉 利 天 工 所 造 26 这 一 记 载 恰 好 印 证 了, 前 塔 后 殿 格 局, 是 一 个 在 南 北 朝 时 逐 渐 形 成 的 过 程 宿 白 先 生 举 出 两 个 南 朝 寺 院 例 子, 来 说 明 这 种 前 塔 后 殿 格 局 一 个 是 广 州 宝 庄 严 寺 : 夫 宝 庄 严 寺 舍 利 塔 者, 梁 大 同 三 年 (537 年 ) 内 道 场 沙 门 昙 俗 法 师 所 立 也 说 大 同 三 岁, 届 于 兹 邑 此 寺 乃 曩 在 宋 朝, 早 延 题 目 法 师 聿 提 神 足, 愿 启 规 模 爰 于 殿 前, 更 须 弥 之 塔, 因 缘 盛 力, 人 以 子 来 27 另 一 个 是 荆 州 导 因 寺 : 昔 日 导 因, 今 天 皇 寺 是 也 见 有 柏 殿 五 间 两 厦 梁 右 军 将 军 张 僧 瑶 自 笔 图 画 殿 其 工 正 北 卢 舍 那 相 好 威 严 光 明 时 发 殿 前 五 级 亦 放 光 明 祥 征 休 咎 故 不 备 述 由 此 奇 感 聊 附 此 焉 28 两 个 例 子, 都 将 佛 塔 布 置 在 佛 殿 之 前, 这 种 布 局 形 式 分 布 范 围 较 广, 南 朝 有 荆 州 导 因 寺 广 州 宝 庄 严 寺, 北 朝 有 洛 阳 永 宁 寺 宿 白 先 生 还 特 别 举 出 受 到 南 北 朝 佛 寺 格 局 影 响 的 百 济 佛 寺 如 建 于 威 德 王 时 (554~597 年 在 位 ) 的 扶 余 邑 中 部 的 定 林 寺 ; 三 记 圣 王 (523~553 年 在 位 ) 所 建 位 于 今 公 州 市 斑 竹 洞 的 大 通 寺, 以 及 扶 余 邑 金 刚 寺 与 陵 山 里 古 寺 等, 都 采 用 了 前 塔 后 殿 式 格 局 29 宿 白 先 生 认 为, 隋 代 仍 然 继 续 了 这 种 前 塔 后 殿 式 寺 院 格 局 他 举 出 两 个 例 子, 一 是 隋 京 邑 清 禅 寺, 二 是 1973 年 中 国 科 学 院 考 古 研 究 所 于 唐 长 安 青 龙 寺 遗 址 范 围 西 部 发 现 的 一 座 早 期 寺 院 遗 址 ( 图 8): 寺 周 绕 廊 庑, 西 北 两 廊 保 存 尚 好, 南 东 两 廊 亦 有 遗 迹 可 寻 据 廊 庑 遗 迹 可 复 原 此 寺 院 的 大 致 情 况 : 南 北 长 约 140 米, 东 西 宽 约 100 米 南 廊 址 正 中 有 门 址 门 址 后 有 长 宽 约 1 5 米 的 方 形 塔 基 址 塔 基 址 中 部 有 长 宽 约 4.4 米 深 1.8 米 的 方 形 地 宫 遗 址 塔 基 后 约 50 米 处, 有 长 50 余 米 宽 30 余 米 的 长 方 形 佛 殿 遗 址 佛 殿 遗 址 两 侧 有 复 廊 址 与 东 西 廊 址 相 接 [ 唐 ] 释 道 世. 法 苑 珠 林. 卷 三 十 九. 感 应 缘. 总 述 中 边 化 迹 降 灵 记 27 [ 唐 ] 王 勃. 广 州 宝 庄 严 寺 舍 利 塔 碑. 全 唐 文. 卷 一 百 八 十 四 28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三 十 三. 荆 州 内 华 寺 释 慧 耀 传 29 宿 白. 东 汉 魏 晋 南 北 朝 佛 寺 布 局 初 探. 魏 晋 南 北 朝 唐 宋 考 古 文 稿 辑 丛. 第 243~244 页. 文 物 出 版 社.2011 年 30 宿 白. 隋 代 佛 寺 布 局. 魏 晋 南 北 朝 唐 宋 考 古 文 稿 辑 丛. 第 248 页. 文 物 出 版 社.2011 年
127 图 4. 唐 长 安 青 龙 寺 西 部 遗 址 布 局 从 隋 代 碑 刻 所 记, 还 可 以 看 到 这 种 前 塔 后 殿 式 寺 院 格 局 痕 迹 : 于 是 灵 刹 霞 舒, 宝 坊 云 构 峥 嵘 醪 葛, 穹 隆 谲 诡 九 重 壹 柱 之 殿, 三 休 七 宝 之 宫, 雕 梁 刻 桷 之 奇, 图 云 画 藻 之 异 白 银 成 地, 有 类 悉 觉 之 谈 ; 黄 金 镂 楯, 非 关 勾 践 之 献 其 内 闲 房 静 室, 阴 牖 阳 窗, 圆 井 垂 莲, 方 疏 度 日 曜 明 珰 于 朱 户, 殖 芳 卉 于 紫 墀 夜 漏 将 竭, 听 鸣 锺 于 寺 内 ; 晓 相 既 分, 见 承 露 于 云 表 31 这 是 一 座 有 佛 塔 佛 殿 钟 楼 ( 钟 台?) 的 寺 院 从 其 上 下 文 : 九 重 壹 柱 之 殿, 三 休 七 宝 之 宫 中 可 只, 这 应 是 一 座 前 塔 后 殿 式 格 局 的 寺 院 所 谓 九 重 壹 柱 之 殿, 实 为 文 中 所 说 的 灵 刹 霞 舒 见 承 露 于 云 表 的 佛 塔, 有 九 重 之 高, 塔 内 有 中 心 柱, 曰 之 壹 柱, 三 休 七 宝 之 宫 指 位 于 高 大 台 基 上 的 佛 殿 敦 煌 莫 高 窟 隋 代 洞 窟 第 302 窟 (584 年 ) 覆 斗 式 天 花 西 侧 斜 面 上 绘 有 一 座 寺 院 ( 图 32 ( 图 5) 寺 中 主 要 建 筑 是 一 座 单 檐 四 阿 顶 大 殿, 殿 前 在 沿 轴 线 位 置 上 有 一 座 方 形 佛 塔 塔 似 为 单 层, 四 坡 塔 顶 上 为 方 形 刹 基, 上 有 覆 钵 塔 刹 塔 前 有 人 在 砍 伐 运 送 树 木, 似 乎 这 是 一 座 建 造 中 的 佛 寺 殿 后 有 一 个 围 墙 围 合 的 院 落, 其 中 有 树 木 僧 人, 似 是 寺 后 僧 舍 区 域 这 幅 壁 画 提 供 了 隋 代 时 前 塔 后 殿 寺 院 格 局 的 一 个 例 证 31 [ 隋 ] 张 公 礼. 龙 藏 寺 碑.[ 清 ] 严 可 均 辑. 全 隋 文. 卷 二 十 二 32 Janet Baker.Flowering of a foreign faith: new studies in Chinese Buddhist art.p32-33.marg publications
128 图 5. 敦 煌 莫 高 窟 隋 代 洞 窟 第 302 窟 天 花 西 侧 斜 面 佛 寺 壁 画 3. 前 殿 后 堂 式 格 局 北 魏 时 代 亦 出 现 一 种 前 为 佛 殿, 后 为 讲 堂 佛 寺 平 面 寺 见 于 北 魏 洛 阳 伽 蓝 记 中 所 载 洛 阳 建 中 寺, 建 义 元 年, 尚 书 令 乐 平 王 尔 朱 世 隆 为 荣 追 福, 题 以 为 寺 朱 门 黄 阁, 所 谓 仙 居 也 以 前 厅 为 佛 殿, 后 堂 为 讲 堂 金 花 宝 盖, 遍 满 其 中 33 寺 院 原 是 一 座 住 宅, 在 住 宅 布 局 中, 应 有 一 主 要 建 筑 轴 线, 沿 轴 线 前 后 布 置 前 厅 后 堂 在 改 造 成 寺 院 后, 人 们 在 保 留 住 宅 旧 有 建 筑 的 同 时, 将 其 纳 入 佛 寺 空 间 模 式, 将 住 宅 前 厅 改 为 佛 殿, 住 宅 后 堂, 改 为 讲 堂, 因 而 形 成 前 殿 后 堂 式 寺 院 ( 图 10) 图 6. 前 殿 后 堂 式 格 局 讲 堂, 有 时 亦 称 般 若 堂, 如 南 陈 释 慧 勇, 住 大 禅 众 寺 十 有 八 载, 及 造 讲 堂 也, 门 人 听 侣 经 营 不 日, 接 溜 飞 轩, 制 置 弘 敞, 题 曰 般 若 之 堂 也 34 显 然, 代 表 了 佛 之 智 慧 的 般 若, 成 为 传 播 佛 教 义 理 之 所 讲 堂 的 代 称 由 此 出 发, 还 可 以 对 一 些 早 期 佛 寺 加 以 观 察, 如 东 晋 高 僧 慧 远 所 创 庐 山 东 林 寺 : 因 以 为 名 东 林 之 寺 远 自 创 般 若 佛 影 二 台, 谢 灵 运 穿 凿 流 池 三 所 梁 孝 元 构 造 重 阁, 庄 严 寺 宇, 即 日 宛 然 35 慧 远 最 早 创 寺 时, 设 置 了 两 座 建 筑, 一 为 般 若 台, 意 为 讲 堂 ; 一 为 佛 影 台, 意 为 佛 殿 续 高 僧 传 谈 及 隋 及 初 唐 苏 州 僧 人 法 恭, 极 力 赞 其 文 才 : 然 其 广 植 德 本 遐 举 胜 幢 宝 殿 临 云 金 容 照 日 讲 筵 初 辟 负 笈 相 趋 谈 疏 才 成 名 都 纸 贵 加 以 博 通 内 外 学 海 截 其 波 涛 鸿 笔 雕 章 33 [ 北 魏 ] 杨 衔 之. 洛 阳 伽 蓝 记. 卷 一. 城 内 34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七. 陈 杨 都 不 禅 众 寺 释 慧 勇 传 35 [ 清 ] 严 可 均 辑. 全 隋 文. 卷 三 十 二.[ 隋 ] 释 智 顗. 与 晋 王 书 请 为 匡 山 两 寺 檀 越
129 文 囿 开 其 林 薮 36 但 从 行 文 中, 可 以 看 出, 他 所 居 止 的 寺 院, 是 以 佛 殿 与 讲 堂 为 主 而 架 构 的, 很 可 能 也 采 取 了 前 殿 后 堂 式 格 局 另 有 释 慧 主, 大 业 中, 敕 还 本 州 香 林 寺 常 弘 四 分 为 业 武 德 之 始, 陵 阳 公 临 益 州, 素 少 信 心, 将 百 余 驮 物 行 至 始 州 令 于 寺 内 讲 堂 佛 殿 僧 房 安 置, 无 敢 违 者 37 寺 内 主 要 建 筑 为 讲 堂 佛 殿 僧 房, 彼 此 关 系, 亦 可 能 遵 循 前 佛 殿, 后 讲 堂, 讲 堂 之 后 或 之 旁, 设 僧 房 的 格 局 4. 前 塔 后 堂 式 格 局 从 史 料 中 观 察, 南 朝 寺 院 中, 讲 堂 一 度 甚 至 有 比 佛 殿 有 更 重 要 地 位 南 朝 寺 院 中 多 突 出 讲 堂 位 置 如 南 朝 大 庄 严 寺 : 庄 严 讲 堂, 宋 世 祖 所 立 栾 栌 增 映 延 袤 遐 远, 至 于 是 日 不 容 听 众 执 事 启 闻, 有 敕 听 停 讲 五 日, 悉 移 窗 户 四 出 檐 溜 又 进 给 床 五 十 张, 犹 为 迫 迮 又 于 简 静 寺 讲 十 地 经 堂 宇 先 有 五 间, 虑 有 迫 迮 又 于 堂 前 权 起 五 间, 合 而 为 一 38 庄 严 寺 与 简 静 寺, 十 分 突 出 讲 堂 地 位 庄 严 寺 讲 堂 因 听 讲 人 多, 不 得 不 将 四 周 窗 子 向 檐 溜 处 移 出 据 陈 书 : 六 月 丁 卯, 大 雨, 震 大 皇 寺 刹 庄 严 寺 露 盘 重 阳 阁 东 楼 千 秋 门 内 槐 树 鸿 胪 府 门 39 说 明 寺 内 另 有 佛 塔 另 据 续 高 僧 传 : 以 庄 严 寺 门 及 诸 墙 宇 古 制 不 工, 又 吴 虎 丘 山 西 寺 朽 坏 日 久, 并 加 缮 改 事 尽 弘 丽 40 知 庄 严 寺 有 寺 门 墙 宇 一 座 寺 院, 有 寺 门 墙 宇 之 设, 应 是 一 组 庭 院, 庭 院 中 心 设 置 佛 塔 的 可 能 性 较 大, 则 塔 后 为 讲 堂, 也 是 一 种 顺 理 成 章 的 布 置 还 可 以 举 出 几 个 例 子 一 是 谢 灵 运 在 其 山 居 之 侧 建 造 的 寺 院 : 四 山 周 回, 双 流 逶 迤 面 南 岭, 建 经 台 ; 倚 北 阜, 筑 讲 堂 傍 危 峰, 立 禅 室 ; 临 浚 流, 列 僧 房 对 百 年 之 高 木, 纳 万 代 之 芬 芳 抱 终 古 之 泉 源, 美 膏 液 之 清 长, 谢 丽 塔 于 郊 郭, 殊 世 间 于 城 傍 41 这 座 寺 院 中 有 塔 有 讲 堂 有 禅 堂, 也 有 经 台, 唯 独 没 有 提 到 佛 殿 这 在 重 义 理 讲 玄 学 的 南 朝 佛 寺, 可 能 是 一 种 常 见 现 象, 即 寺 院 以 佛 塔 经 台 讲 堂 僧 房 为 主 要 构 成 元 素 既 然 南 朝 寺 院 中, 重 视 讲 堂 地 位, 且 有 佛 塔 的 设 置, 可 能 会 参 考 前 塔 后 殿 格 局, 采 用 前 塔 后 堂 式 平 面 广 弘 明 集 收 录 了 一 首 南 朝 人 游 钟 山 明 庆 寺 的 五 言 诗, 其 中 有 : 鹫 岭 三 层 塔, 菴 园 一 讲 堂 驯 鸟 逐 饭 磐, 狎 兽 绕 禅 床 42 诗 中 主 要 提 到 的 就 是 佛 塔 与 讲 堂, 应 是 寺 中 最 重 要 的 两 座 建 筑, 其 取 前 塔 后 堂 式 格 局 的 可 能 性, 应 该 大 于 诸 如 前 堂 后 塔, 或 塔 堂 并 列 等 可 能 性 还 有 一 个 可 能 是 前 塔 后 堂 式 寺 院 的 例 子 : 释 明 达 欲 构 浮 图 及 以 精 舍 不 访 材 石 直 觅 匠 工, 道 俗 莫 不 怪 其 言 也 于 时 二 月 水 竭, 36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十 四. 唐 苏 州 武 丘 山 释 法 恭 传 37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二 十 一. 唐 始 州 香 林 寺 释 慧 主 传 38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五. 梁 杨 都 庄 严 寺 沙 门 释 僧 旻 传 39 [ 唐 ] 姚 思 廉. 陈 书. 卷 五. 本 纪 第 五. 宣 帝 40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五. 梁 杨 都 庄 严 寺 沙 门 释 僧 旻 传 41 [ 南 朝 梁 ] 沈 约. 宋 书. 卷 六 十 七. 列 传 第 二 十 七. 谢 灵 运 传 42 [ 唐 ] 释 道 宣. 广 弘 明 集. 卷 三 十. 同 庾 中 庶 吾 周 处 士 弘 让 游 明 庆 寺
130 即 下 求 水 乃 于 水 中 得 一 长 材, 正 堪 刹 柱, 长 短 合 度, 佥 用 欣 然, 仍 引 而 竖 焉 创 修 堂 宇, 架 塔 九 层 远 近 并 力 一 时 缮 造 役 不 逾 时, 欻 然 成 就 隋 始 兴 王 还 荆 州, 冬 十 二 月 终 于 江 陵 43 寺 中 主 要 有 两 座 建 筑, 一 个 是 代 表 佛 的 九 层 浮 图, 另 一 个 是 代 表 僧 的 精 舍 从 行 文 看, 释 明 架 塔 九 层 创 修 堂 宇, 实 际 上 使 寺 中 包 括 了 一 座 塔, 一 座 讲 堂 ( 堂 宇 ), 以 及 相 应 的 僧 舍 ( 精 舍 ) 这 种 以 讲 堂 佛 塔 为 主 要 构 成 要 素 的 寺 院, 可 能 是 南 朝 佛 寺 较 多 见 的 从 格 局 上, 这 时 的 塔 必 居 于 中 心, 若 前 有 寺 门, 后 有 精 舍, 讲 堂 之 位 置, 亦 应 靠 近 精 舍, 从 而 呈 前 塔 后 堂 式 格 局 ( 图 7) 图 7. 前 塔 后 堂 式 格 局 隋 代 寺 院 中 亦 有 此 格 局, 如 隋 蒲 州 栖 岩 寺, 于 仁 寿 年 间 起 塔 : 舍 利 在 讲 堂 内, 其 夜 前 浮 图 上, 发 大 光 明, 爰 及 堂 里, 流 照 满 室 将 置 舍 利 于 铜 函, 又 有 光 若 香 炉, 乘 空 而 上, 置 浮 图 宝 瓶, 复 起 紫 焰, 或 散 或 聚, 皆 成 莲 华 44 这 里 清 晰 地 说 明 了 讲 堂 之 前 为 浮 图, 浮 图 上 所 发 大 光 明, 爰 及 堂 里, 流 照 满 室 然 其 中 却 未 提 及 佛 殿 显 然, 这 座 栖 岩 寺 是 一 座 前 塔 后 堂 式 寺 院 5. 前 塔 后 殿, 殿 后 为 堂 式 格 局 据 魏 书 释 老 志, 早 在 北 魏 天 兴 元 年 (398 年 ), 已 有 了 将 佛 塔 讲 堂 禅 堂, 及 可 能 是 佛 殿 早 期 形 式 的 须 弥 山 殿 设 置 在 同 一 寺 院 之 中 的 做 法 : 43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二 十 九. 梁 蜀 部 沙 门 释 明 达 传 44 [ 隋 ] 安 德 王 雄 等. 庆 舍 利 感 应 表.[ 清 ] 严 可 均 辑. 全 隋 文. 卷 八
131 是 岁, 始 作 五 级 佛 图, 耆 阇 崛 山 及 须 弥 山 殿, 加 以 缋 饰 别 构 讲 堂 禅 堂 及 沙 门 座, 莫 不 严 具 焉 45 耆 阇 崛 山, 即 印 度 灵 鹫 山, 是 佛 说 法 之 处 须 弥 山 是 佛 教 宇 宙 观 中 的 世 界 中 央 之 山, 这 里 应 是 表 现 佛 的 象 征 故 以 耆 阇 崛 山 或 须 弥 山 为 殿 名, 可 能 是 佛 殿 名 称 的 一 种 形 式 如 建 于 清 乾 隆 二 十 六 年 (1761 年 ) 的 承 德 避 暑 山 庄 珠 源 寺, 寺 中 主 殿 是 大 须 弥 山 殿 所 以, 在 这 里 可 以 将 耆 阇 崛 山 及 须 弥 山 殿 看 作 佛 殿 的 别 称 显 然, 这 座 北 魏 早 期 佛 寺, 最 初 是 一 座 前 塔 后 殿 式 寺 院, 其 后, 又 别 构 讲 堂 禅 堂, 及 象 征 僧 房 的 沙 门 座 可 以 将 这 座 寺 院 看 作 是 前 塔 后 殿, 殿 后 为 讲 堂 禅 堂 僧 房 的 格 局 ( 图 8) 图 8. 前 塔 后 殿, 殿 后 为 堂 式 格 局 由 此 推 测, 自 南 北 朝 至 隋 代 的 佛 寺 发 展, 虽 然 有 一 些 踪 迹 可 寻, 但 难 以 一 言 以 敝 之 或 有 以 塔 为 中 心 者, 或 有 前 塔 后 殿, 或 前 塔 后 堂 者, 或 有 前 殿 后 堂 者, 抑 或 仅 有 讲 堂 或 仅 有 佛 殿, 并 在 讲 堂 或 佛 殿 周 围 环 以 僧 房 禅 舍 的 可 能 南 朝 人 撰 比 丘 尼 传 也 反 映 了 这 种 情 况 : 永 和 十 年 (354 年 ), 后 为 立 寺 于 定 阴 里, 名 永 安 ( 今 何 后 寺 也 ) 泰 元 二 十 一 年 (396 年 ) 卒 弟 子 昙 罗, 博 览 经 律, 机 才 贍 密, 敕 续 师 任, 更 立 四 层 塔 讲 堂 房 宇, 又 造 卧 像 及 七 佛 龛 堂 云 46 这 座 尼 寺, 主 要 是 由 佛 塔 讲 堂, 与 塑 有 卧 佛 与 七 佛 的 佛 堂 组 成 的 从 叙 述 顺 序 上, 可 能 是 一 种 前 为 塔 后 为 堂, 堂 后 有 佛 堂 形 式 的 寺 院 格 局 如 果 将 佛 堂 看 作 是 佛 殿 早 期 形 式, 那 么, 这 也 很 可 能 是 一 座 前 为 塔 后 为 讲 堂 再 后 为 佛 殿 式 寺 院, 只 是 其 将 讲 堂 放 在 佛 殿 之 前 另 一 座 同 时 包 含 佛 塔 佛 殿 与 讲 堂 的 隋 代 寺 院 是 苏 州 重 玄 寺 : 45 北 齐. 魏 书. 卷 一 百 一 十 四. 志 第 二 十. 释 老 十 46 [ 南 朝 梁 ] 宝 唱. 比 丘 尼 传. 卷 一. 北 永 安 寺 昙 备 尼 传 六
132 释 慧 岩, 住 苏 州 重 玄 寺 相 状 如 狂, 不 修 戒 检, 时 人 不 齿 多 坐 房 中, 不 同 物 议 忽 独 欢 笑, 戏 于 寺 中 以 物 指 撝 曰 : 此 处 为 殿, 此 处 为 堂, 乃 至 廊 庑 厨 库, 无 不 毕 备 经 可 月 余, 因 告 僧 曰 : 欲 知 岩 者 浮 图 铃 落, 则 亡 没 矣 至 期 果 然 47 至 少 在 这 位 疯 疯 癫 癫 的 隋 代 僧 人 眼 中, 一 座 寺 院 应 该 包 括 佛 殿 讲 堂 廊 庑 厨 库 等 建 筑 寺 中 原 本 就 有 佛 塔 在 隋 代 僧 人 心 目 中 的 寺 院, 很 可 能 就 是 一 座 前 塔 后 殿, 殿 后 设 堂, 周 环 廊 庑, 旁 设 厨 库 僧 房 的 建 筑 格 局 关 于 讲 堂 与 厨 库 仓 廪 等 附 属 建 筑 的 关 系, 我 们 还 注 意 到 续 高 僧 传 中 另 外 一 条 有 关 隋 代 襄 州 禅 居 寺 资 料 : 今 为 寺 贫, 便 于 讲 堂 东 北 白 马 泉 下 泺 中 迁 记 某 处 为 厨 库, 某 处 为 仓 禀 人 并 笑 之 经 宿 水 缩 地 出, 如 语 便 作, 遂 令 丰 渥 又 遥 记 云, 却 后 十 六 年, 当 有 愚 人 于 寺 南 立 重 阁 者, 然 寺 基 业 不 亏, 斗 讼 不 可 住 耳 永 徽 中 恰 有 人 立 重 阁, 由 此 相 讼, 如 其 语 焉 48 在 这 座 规 模 不 大 的 寺 院 中, 僧 人 岑 阇 梨 将 寺 院 附 属 建 筑 厨 库 仓 廪 布 置 在 讲 堂 东 北, 并 预 言 将 来 有 人 在 寺 南 建 造 重 阁, 并 且 因 而 会 引 起 官 司 诉 讼 显 然, 这 是 一 座 坐 北 朝 南 的 寺 院, 南 面 为 正 面, 故 僧 人 不 希 望 在 正 面 有 重 阁 遮 蔽 寺 院, 故 而 才 有 斗 讼 之 事 关 于 这 件 事 情, 另 有 僧 人 释 道 辩, 在 大 业 年 间 来 游 襄 部 时, 也 有 预 言, 他 行 至 禅 居 寺 南 岭 望 云 此 寺 达 者 所 营 极 尽 山 势 众 侣 繁 盛 清 肃 有 余 如 何 后 锐 于 前 起 阁 寺 僧 非 唯 寡 少 更 增 諠 诤 说 明, 忌 讳 在 寺 之 南 面 建 立 高 阁, 可 能 是 出 于 风 水 方 面 的 考 虑 但 抛 开 这 些 细 节, 至 少 可 以 知 道, 在 这 座 寺 院 中, 讲 堂 是 位 于 寺 内 北 侧 的, 僧 人 岑 阇 梨 又 在 讲 堂 东 北 续 建 厨 库 仓 廪 讲 堂 之 南 当 有 佛 殿, 寺 之 南 当 有 寺 门 法 苑 珠 林 谈 到 禅 居 寺 的 岑 阇 梨, 同 寺 沙 门 智 晓 自 知 终 日, 急 唤 汰 禅 师 付 嘱, 上 佛 殿 礼 辞 遍 寺 众 僧, 咸 乞 欢 喜 于 禅 居 寺 大 斋, 日 将 散, 谓 岑 曰 : 往 兜 率 天 听 般 若 去 49 显 然, 这 座 禅 居 寺 中 是 有 佛 殿 的 只 是, 在 寺 门 与 佛 殿 之 间, 是 否 有 佛 塔, 尚 不 得 而 知 若 以 这 一 时 期 佛 寺 中, 多 有 佛 塔 之 设 来 推 测, 这 仍 可 能 是 一 座 前 塔 后 殿, 殿 后 为 堂, 堂 后 为 僧 房 厨 库 仓 廪 等 附 属 建 筑 的 寺 院 6. 一 正 二 配 式 格 局 晚 期 佛 寺 最 常 见 的, 中 央 设 一 正 殿, 殿 前 左 右 各 设 一 座 配 殿 的 一 正 二 配 式 格 局, 在 隋 代 时 已 出 现 如 法 苑 珠 林 载 : 开 皇 十 五 年, 黔 州 刺 史 田 宗 显 至 寺 礼 拜, 像 即 放 光 公 发 心 造 正 北 大 殿 一 十 三 间, 东 西 夹 殿 九 间, 被 运 材 木, 在 荆 上 流 五 千 余 里, 斫 材 运 之, 至 江 散 放, 出 木 流 至 荆 州, 自 然 泊 岸 虽 风 波 鼓 扇, 终 不 远 去 遂 引 上 营 之, 柱 径 三 尺, 下 础 阔 八 尺, 斯 亦 终 古 无 以 加 也 大 殿 以 沈 香 帖 遍, 中 安 十 三 宝 帐, 并 以 金 宝 庄 严 乃 至 榱 桁 藻 井, 无 非 宝 华 间 列 其 东 西 二 殿, 瑞 像 所 居, 并 用 檀 帖 中 有 宝 帐 华 炬, 并 用 真 金 所 成 穷 极 宏 丽, 天 下 第 一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二 十 五. 隋 苏 州 重 玄 寺 释 慧 岩 传 48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三 十 三. 襄 州 禅 居 寺 岑 阇 梨 传 49 [ 唐 ] 释 道 世. 法 苑 珠 林. 卷 十 八. 感 应 缘. 汉 法 内 经 传. 隋 沙 门 释 慧 意 50 [ 唐 ] 释 道 世. 法 苑 珠 林. 卷 十 三. 感 应 缘. 东 晋 荆 州 金 像 远 降 缘
133 这座隋代荆州寺院正殿总面阔 13 间 殿内设有 13 组佛帐 正殿前东西各有夹殿 9 间 显然 是后世建筑中 一正二配 式建筑格局的早期形式 只是 以正殿 13 间 配殿 9 间 正殿前的庭 院应是相当宏阔的 图 9 图 9. 一正二配式格局 成都博物馆所藏一块发现于成都万佛寺遗址上的据称是六世纪中叶的石碑背面 有一幅石刻寺 图 10 图为一点透视画法 寺位于一高大台基 有宽大坡道引至台基上 沿轴线两侧对 院图51 称植有两排树木 树下是两排打坐的僧人 轴线尽端是一高大佛座 佛座位于一个更高的台基上 佛坐为须弥座式 下有雕刻莲瓣 座上有佛像及佛背光 佛像前两侧有僧人侍立 重要的是 在中 轴线两侧对称布置有两座二层佛阁 佛阁与中轴线通道间有水 水中植荷花 阁前有桥与中轴线部 分相接 尽管这里显示的是两座楼阁 但其基本配置 恰与后世常见一正二配式寺院极其吻合 51 Janet Baker Flowering of a foreign faith: new studies in Chinese Buddhist art P63 图 12 Marg publications
134 图 10. 成都万佛寺遗址中发现的石碑背面佛寺布局 在麦积山石窟第 127 窟的一幅西魏时期 年 的壁画 也表现了类似的场景52 图 11 中轴线尽端是一座单檐大殿 殿内有佛座及佛 菩萨 佛弟子造像 殿前对称布置两座二层 楼阁 阁似为砖筑 在一个平坐之上 二层有门 屋顶为四阿 阁前对称种植有 4 棵高大树木 并绘有对称排列或跪 或立的僧人与信徒 这显然也是一座 一正二配 式格局寺院 只是两侧的 配殿 在这里是楼阁 图 11. 麦积山石窟第 127 窟西魏壁画中佛寺 另外一幅时间稍晚的响堂山北齐石窟 年 的石浮雕 是在佛座两侧对称布置两座 53 图 12 佛坐在双层仰莲座上 上有华盖 佛左右簇拥菩萨 天人 两侧建筑 是用立柱 高台 支撑的高台 地面四周有石栏杆 二层平坐下有斗栱 平坐亦有木栏杆环绕 平坐上是两座三间九 脊顶单檐殿阁 奇怪的是 殿阁正面向着寺之前方 亦即 九脊殿之两山相对 似呈并列式对称布 置 这两座高台建筑 可能是文献中常提到的 经台 据法琳 辩正论 唐初太宗所建京师弘福 寺 有 浮柱绣栭上图云气 飞轩镂槛下带虹霓 影塔俨其相望 经台郁其并架 54的描述 郁者 立柱森郁 台座高大之意 这里所谓 郁其并架 的经台 可能是这种设置在佛殿前对称且并排而 立的高台 将经置于由森郁立柱支撑的高台上 既保证了佛经保藏之安全 也凸显了代表佛法之佛 经在寺院中的隆耸地位 52 Janet Baker Flowering of a foreign faith: new studies in Chinese Buddhist art P62 图 10 Marg publications Janet Baker Flowering of a foreign faith: new studies in Chinese Buddhist art P62 图 11 Marg publications [唐]释法琳 辩正论 卷四 十代奉佛篇下
135 图 12. 响堂山北齐石窟石浮雕中佛寺 7. 一阁二楼式布局 除了一殿二配式格局外 在隋初时 还出现一种 一阁二楼 式寺院 即沿南北轴线上布置有 高阁一座 高阁两侧夹有二楼 这一做法见于 续高僧传 所记丹阳龙光寺 在丹阳之龙光寺 及陈国云亡道场焚毁 而殿宇褊狭未尽庄严 遂宣导四部王公黎 庶 共修高阁并夹二楼 寺众大小三百余僧 咸同喜舍毕愿缔构 力乃励率同侣二百余僧 共往豫章刊山伐木 55 这是在原有寺院基础上的一个扩建 寺内原应有佛殿 讲堂 僧房之属 但因原来的 殿宇褊 狭 才修了这座左右夹有二楼的高阁组群 后世宋 金寺院中 多有在正殿前左右对峙两座楼阁 做法 其滥觞是否起于此 不得而知 在隋代南方寺院中 一座楼阁前 再设两座楼阁的做法 并不罕见 如 右 大业拾遗记 者 上元县南朝故都 梁建瓦棺寺阁 阁南隅有双阁 闭之忘记岁月 56瓦官寺虽是一座南朝寺 院 但文中所提寺内有阁 阁南另有双阁的情况 所指是隋大业间 这种东西夹峙两座楼阁做法 在隋唐时渐呈趋势 不仅在寺院 而且在宫殿 衙署建筑中 多 有应用 唐长庆二年 822 年 所建翰林学士院 乃撤小屋 崇广厦 揭飞梁于层构 耸危楼于 上楹 重檐翼舒 虚牖霞驳 甍栋丰丽 栏槛周固 三门并设 双阁对启 延清风于北户 候朗月 于南荣 57这里用了 三门 这一概念 应是借用佛教寺院 三门 概念 则其双阁对启建筑格 局 也可能是从隋唐佛寺建筑中受到的启发 另据 续资治通鉴 辽重熙六年 1037 年 北方忻 代 并三州地震 乡者兴国寺双阁 灾 延及开先祖殿 不逾数刻 但有遗烬 58这里的兴国寺应指并州兴国寺 系隋初文帝龙潜 45 州所建大兴国寺中的一座 寺中 双阁 格局 究竟是唐辽时所添加 还是隋代既有 我们无从知 [唐]释道宣 续高僧传 卷二十九 唐杨州长乐寺释住力传 [唐]颜师古 隋遗录 卷下 [清]董诰等 全唐文 卷六百三十三 [唐]苏冕 翰林学士院新楼记 [清]毕沅编著 续资治通鉴 卷四十一 卷四十一 宋纪四十一 景祐四年 辽重熙六年
136 道, 但 不 排 除 其 中 可 能 沿 袭 了 部 分 隋 代 制 度 宿 白 先 生 根 据 敦 煌 隋 代 洞 窟 壁 画 中 所 绘 佛 寺, 提 出 一 殿 双 阁 式 平 面 布 局 ( 图 13), 如 宿 先 生 举 出 第 两 窟 窟 顶 前 披 所 绘 五 间 大 殿, 殿 后 两 侧 各 绘 一 座 三 或 四 层 高 阁, 如 此 安 排, 似 在 表 示 两 阁 之 后, 还 有 殿 堂 建 置 59 这 一 布 局, 似 乎 是 在 暗 示, 在 殿 后 另 有 一 组 院 落, 院 两 侧 对 峙 双 阁, 阁 北 是 殿? 是 堂? 抑 或 是 阁? 无 从 所 知 但 至 少 在 隋 代 时, 沿 中 轴 线 两 侧 对 峙 双 阁 的 空 间 形 式 似 已 形 成 图 13. 敦 煌 隋 代 洞 窟 壁 画 中 一 殿 双 阁 式 布 局 8. 南 阁 北 塔 式 格 局 隋 代 还 有 一 种 寺 院, 是 在 佛 塔 南 设 佛 阁, 事 情 所 记 是 仁 寿 二 年 分 送 佛 舍 利 于 各 州 建 塔 的 情 况, 见 全 隋 文 : 安 州 表 云 : 又 塔 南 先 有 佛 阁, 当 时 锁 闭 舍 利, 于 其 下 立 道 场, 遣 二 防 人 看 守 忽 然 阁 上 有 众 人 行 声, 看 阁 门 仍 闭, 又 复 60 当 然, 这 里 应 该 是 先 有 阁, 后 因 敕 送 舍 利 而 于 阁 北 建 塔 若 寺 中 原 有 佛 殿 讲 堂, 则 位 于 南 边 的 佛 阁, 可 能 是 设 在 了 与 佛 殿 相 对 应 位 置, 亦 即 中 轴 线 南 侧 只 是 仁 寿 起 塔 时, 又 在 殿 与 阁 之 间 树 立 起 一 座 佛 塔 那 么 其 原 本 形 式 应 是 南 阁 北 殿 式 格 局, 在 增 设 舍 利 塔 后, 则 成 为 南 阁 中 塔, 北 殿 式 格 局 ( 图 14) 59 宿 白. 隋 代 佛 寺 布 局. 魏 晋 南 北 朝 唐 宋 考 古 文 稿 辑 丛. 第 250 页. 文 物 出 版 社.2011 年. 原 注 参 看 中 国 石 窟. 敦 煌 莫 高 窟 二. 图 板 文 物 出 版 社.1984 年 60 [ 清 ] 严 可 均 辑. 全 隋 文. 卷 二 十 二.[ 隋 ] 王 劭 ( 二 ). 舍 利 感 应 记 别 录
137 图 14. 南 阁 北 塔 式 格 局 在 佛 寺 主 要 轴 线 上 设 重 阁 的 做 法, 可 能 在 南 朝 时 就 已 开 始 东 晋 庐 山 慧 远 所 建 东 林 寺, 原 有 般 若 ( 讲 堂 ) 佛 影 ( 佛 殿 ) 两 座 建 筑, 后 来 梁 孝 元 为 了 庄 严 寺 宇, 而 构 建 重 阁 说 明 在 寺 院 中 建 造 重 阁, 是 为 了 彰 显 寺 院 之 庄 严 宏 伟 法 苑 珠 林 提 到 与 东 林 寺 相 毗 邻 的 西 林 寺, 也 有 重 阁 七 间, 事 记 隋 天 台 山 瀑 布 寺 沙 门 慧 达, 措 心 于 寺 院 营 造, 仁 寿 年 间, 曾 在 扬 州 白 塔 寺 建 造 了 七 层 木 塔, 后 来 受 沙 门 惠 云 邀 请 : 遂 上 庐 岳 造 西 林 寺, 重 阁 七 间, 栾 栌 重 叠, 光 耀 鲜 华 61 也 就 是 说, 隋 代 时, 西 林 寺 仿 东 林 寺, 也 建 了 一 座 重 阁, 且 其 阁 为 七 间 这 显 然 是 一 座 布 置 在 中 轴 线 上 的 大 型 佛 阁 这 座 七 间 佛 阁 的 位 置, 见 于 续 高 僧 传 : 晚 为 沙 门 慧 云 邀 请 遂 上 庐 岳 造 西 林 寺 晚 阁 七 间 栾 栌 重 垒 光 耀 山 势 初 造 之 日 誓 用 黄 楠 感 得 一 谷 并 是 黄 楠 阁 遂 得 成 宏 冠 前 构 后 忽 偏 斜 向 南 三 尺 工 匠 设 计 取 正 无 方 有 石 门 涧 当 于 阁 南 忽 有 猛 风 北 吹 还 正 又 为 西 林 阁 成 尊 容 犹 阙 复 沿 江 投 造 修 建 充 满 故 举 阁 圆 备, 并 达 之 功 62 这 里 透 露 出 几 条 信 息 :1. 佛 阁 是 用 黄 楠 木 建 造 的 ;2. 阁 名 为 西 林 阁 ;3. 阁 位 于 寺 院 南 前 部 ( 宏 冠 前 构 );4. 阁 最 初 向 南 微 倾, 其 南 有 石 门 涧, 在 强 烈 南 风 下, 阁 被 吹 之 还 正 这 也 从 侧 面 证 明, 阁 之 南 再 无 高 大 建 筑 以 西 林 寺 位 于 寺 南 的 七 间 佛 阁, 可 推 知, 东 林 寺 重 阁 可 能 也 位 于 寺 之 南 部 以 东 林 寺, 先 有 讲 堂 ( 般 若 ) 佛 殿 ( 佛 影 ), 再 加 之 其 南 重 阁, 就 造 成 了 前 阁 后 殿 式 平 面 安 州 仁 寿 起 塔, 是 在 先 有 重 阁 之 北 立 塔, 又 形 成 了 前 有 阁, 阁 后 为 塔, 再 推 而 延 之, 塔 后 有 佛 殿, 殿 后 有 讲 堂, 堂 后 有 僧 房 厨 库 仓 廪, 阁 之 前 再 有 寺 门, 则 一 寺 格 局 可 以 大 备 矣! 寺 院 中 建 造 重 阁 的 原 因, 可 能 是 要 为 高 大 佛 像 提 供 遮 风 避 雨 空 间, 如 隋 开 皇 中, 释 子 澄 空 年 甫 二 十, 誓 愿 于 晋 阳 汾 西 铸 铁 像, 高 七 十 尺 焉 偿 大 像 圆 满, 后 五 十 年, 吾 当 为 建 重 阁 耳 自 是 并 州 之 人 咸 思 起 阁 以 覆 之, 而 佛 身 洪 大, 功 用 极 广, 61 [ 唐 ] 释 道 世. 法 苑 珠 林. 卷 三 十 三. 感 应 缘. 隋 沙 门 释 慧 达 62 [ 唐 ] 释 道 宣. 续 高 僧 传. 卷 二 十 九. 隋 天 台 山 瀑 布 寺 释 慧 达 传
138 自 非 殊 力, 无 由 而 致 开 元 初, 李 暠 充 天 平 军 节 度 使, 出 游, 因 仰 大 像 叹 曰 : 如 此 相 好, 而 为 风 日 所 侵, 痛 哉! 即 施 钱 七 万 缗 周 岁 之 内 而 重 阁 成 就, 只 今 北 都 之 平 等 阁 者 是 也 63 佛 高 70 尺, 以 一 尺 为 米 计, 约 高 米, 则 其 阁 至 少 高 30 米 这 座 高 大 佛 阁, 无 疑 应 是 布 置 在 寺 院 中 轴 线 上 是 否 这 座 佛 阁 取 代 了 佛 殿 位 置, 居 于 佛 寺 中 央, 不 得 而 知 但 这 种 以 佛 为 室 内 空 间 主 体 的 楼 阁, 不 同 于 前 述 东 西 夹 峙 的 双 楼 或 双 阁, 则 可 以 确 知 因 此, 可 知 自 南 朝 至 隋 唐 时 代, 不 仅 有 在 主 要 殿 堂 前 对 峙 双 阁 做 法, 也 有 将 形 体 硕 大 的 佛 阁 置 于 寺 院 中 轴 线 上 的 做 法 这 为 后 来 佛 寺 空 间 的 进 一 步 丰 富, 打 下 一 个 基 础 而 以 高 大 的 佛 阁, 加 之 以 佛 塔 佛 殿 讲 堂, 及 寺 门, 则 至 少 到 隋 代 时, 沿 中 轴 线 展 开 的 佛 寺 空 间 进 深 已 十 分 深 邃 了 9. 一 殿 双 塔 式 格 局 宿 白 先 生 文 章 中 提 到 了 一 种 双 塔 式 寺 院 形 式 他 举 出 的 例 子 是 两 京 新 记 卷 三 中 所 载 长 安 大 云 经 寺 : 次 南 曰 怀 远 坊, 东 南 隅 大 云 经 寺 开 皇 四 年 (584 年 ), 文 帝 为 沙 门 法 经 所 立 寺 内 二 浮 图 东 西 相 值, 隋 文 帝 立 塔 内 有 郑 法 轮 田 僧 亮 杨 契 丹 画 迹, 及 巧 工 韩 伯 通 素 作 佛 像, 故 以 三 绝 为 名 64 大 云 经 寺, 寺 名 是 武 则 天 时 所 改, 寺 中 双 塔 却 是 隋 文 帝 时 所 立, 寺 名 原 为 光 明 寺 据 辩 正 论 卷 四, 寺 中 有 佛 殿 ( 兴 像 殿 ) 钟 台 ( 起 钟 台 ) 及 七 宝 之 堂, 九 层 之 塔 说 明 塔 有 9 层 寺 内 有 佛 殿 讲 堂 钟 台 之 属 因 而, 这 应 是 一 座 在 前 殿 后 堂 平 面 基 础 下, 再 在 佛 殿 前 对 峙 两 座 佛 塔 格 局 一 寺 双 塔 的 最 早 例 子, 见 于 南 齐 书 中 所 载 故 事 : 帝 以 故 宅 起 湘 宫 寺, 费 极 奢 侈 以 孝 武 庄 严 刹 七 层, 帝 欲 起 十 层, 不 可 立, 分 为 两 刹, 各 五 层 65 说 明, 最 早 建 双 塔, 是 出 于 技 术 上 的 不 得 已 另 外, 在 南 朝 陈 时, 也 有 因 位 置 不 同, 同 时 建 造 双 塔 的 例 子, 如 南 陈 太 建 元 年 (569 年 ) 东 阳 双 林 寺 傅 大 士, 遗 诫 于 双 林 山 顶 如 法 烧 身, 一 分 舍 利, 起 塔 于 冢, 一 分 舍 利, 起 塔 在 山, 又 造 弥 勒 二 像, 置 此 双 塔 66 这 种 双 塔 设 置, 与 寺 院 格 局 似 乎 并 无 什 么 联 系 然 而, 在 北 朝 佛 寺 中, 却 较 早 出 现 将 双 塔 对 称 布 置 的 例 子, 如 法 苑 珠 林 谈 及 五 台 山 中 台 之 上 由 北 魏 孝 文 帝 所 建 的 一 座 寺 院 : 顶 有 大 池, 名 太 华 泉 又 有 小 泉, 迭 相 延 属 夹 泉 有 二 浮 图, 中 有 文 殊 师 利 像 67 这 种 用 双 塔 夹 峙 一 池 做 法, 应 是 刻 意 创 造 的 空 间 形 式, 以 期 隆 崇 这 座 具 有 神 圣 意 味 的 山 池 在 敦 煌 莫 高 窟 第 257 窟 的 北 魏 壁 画 中, 描 绘 了 一 座 似 用 城 墙 雉 堞 所 环 绕 的 寺 院 寺 中 央 是 一 座 高 大 殿 堂, 殿 堂 两 侧 似 为 双 塔 殿 右 侧 为 四 层 方 塔, 左 侧 似 兼 有 寺 门 作 用 的 三 层 塔 但 从 图 面 上 看, 两 者 并 非 对 称 布 置, 似 为 一 在 殿 侧 前, 另 一 在 殿 侧 后 此 或 也 是 寺 院 中, 将 殿 前 之 塔 移 之 两 侧, 63 [ 唐 ] 薛 用 弱. 集 异 记. 平 等 阁 64 [ 唐 ] 韦 述. 两 京 新 记. 民 国 二 十 五 年 版. 校 正 两 京 新 记. 张 继. 第 14 页 65 [ 南 朝 梁 ] 萧 子 显. 南 齐 书. 卷 五 十 三. 列 传 第 三 十 四. 良 政 66 [ 清 ] 严 可 均 辑. 全 陈 文. 卷 十 一.[ 南 朝 陈 ] 徐 陵. 东 阳 双 林 寺 傅 大 士 碑 67 [ 唐 ] 释 道 世. 法 苑 珠 林. 卷 十 四. 感 应 缘. 唐 代 州 五 台 山 像 变 现 出 声 缘
139 渐成双塔之制的过渡性阶段68 图 15 图 15. 敦煌莫高窟第 257 窟的北魏壁画中佛寺 到了隋代 高层木构佛塔建造技术 似已趋于成熟 隋代文献中多次提到高层木浮图的建造 因此 这种在殿前对峙双塔做法 在隋代已成为一种有意识的空间设计 隋文帝时人辛彦之 迁 潞州刺史 前后俱有惠政 彦之又崇信佛道 于城内立浮图二所 并十五层 69这是地方官在自 己治下城市中 同时建立双塔的做法 大约是将寺中双塔布局 外延到一座城市的大空间格局中 到了唐代双塔对峙于寺前已是一种十分常见的寺院形式 如杭州开元寺 原为梁天监四年 505 年 所建方兴寺 至开元二十六年 738 年 改为开元寺 庭基坦方 双塔树起 日月逝矣 材 朽将倾 广德三年 765 年 三月 西塔坏 凶荒之后 人愿莫展 70尽管这座唐代佛寺中的双 塔 看起来并不像是开元间改名时才有的 魏州开元寺 原是中宗时所立中兴寺 代宗宝应年 762 年 因获舍利 遂于寺内起塔二 所 而分葬焉 年写 一切经 两本 并造二楼以贮之 噫!建三门惠也 制双塔诚也 缮 群经智也 度幼子慈也 71这无疑是一次建成的双塔 并布置在寺内两侧 此外 还有两楼 双 阁 三门等 说明在唐代时 佛寺内置双塔 双阁 三门等 都是一种十分成熟的寺院空间格局 处理方式了 10. 关于 三门两重 寺房五重 的讨论 法苑珠林 中记载西晋末弥天释道安弟子翼法师 因避乱而在荆州南岸所建造的西 东二寺 西寺安排原四层寺僧 东寺安排原长沙寺僧 其寺有 寺房五重 并皆七架 别院大小 今有十所 般舟 方等二院 庄严最胜 夏别常有 千人 四周廊庑 咸一万间 寺开三门两重 七间两厦 殿宇横设 并不重安 约准地数 取其久故 所以殿宇至今三百年余 无忧损败 东川大寺 唯此为高 72 这座寺院的格局耐人寻味 寺中似有一主院 周围 10 座别院 如般舟院 方等院等 寺前设 萧默 敦煌建筑研究 第 141 页 中国文物出版社 1989 年 北京 [唐]魏徵等 隋书 卷七十五 列传第四十 辛彦之传 [清]董诰等 全唐文 卷三百十九 [唐]李华 杭州开元寺新塔碑 [清]董诰等 全唐文 卷四百四十 [唐]封演 魏州开元寺新建三门楼碑 [唐]释道世 法苑珠林 卷三十九 感应缘
140 三 门 两 重 这 可 能 是 一 座 两 层 的 门 楼, 其 形 式 为 七 间 两 厦, 即 两 侧 可 能 有 两 挟 屋, 形 成 营 造 法 式 中 所 谓 殿 挟 屋 的 形 式 也 可 能 是 内 外 两 重 门, 二 者 都 称 作 三 门 三 门 以 内 沿 轴 线 可 能 有 一 个 主 院, 院 内 有 寺 房 五 重 这 里 的 五 重, 也 可 以 有 两 种 理 解, 一 种 如 五 重 塔 式 的 解 释, 即 寺 房 是 叠 而 为 5 层 的 楼 阁 但 这 种 可 能 性 不 是 很 大, 因 为, 就 那 时 的 结 构 技 术 而 言, 将 一 个 空 间 不 是 很 大 的 方 形 塔, 叠 造 若 干 层, 还 需 要 加 中 心 柱 以 作 为 结 构 的 加 强, 则 进 深 七 架 的 殿 堂, 再 叠 为 5 层, 结 构 技 术 上 的 要 求, 在 当 时 似 还 难 达 到 故 而, 这 里 的 寺 房 五 重, 并 皆 七 架, 应 是 有 5 进 院 落 若 以 此 理 解, 则 中 心 5 重 院 落, 两 翼 各 附 5 个 侧 院, 恰 好 有 10 个 别 院 ( 图 16) 而 其 所 谓 殿 宇 横 设, 并 不 重 安, 约 准 地 数, 取 其 久 故 似 指 其 主 殿 主 要 为 单 层 横 置, 不 设 重 层, 如 此 才 能 保 证 其 结 构 长 久 由 这 座 寺 院 的 特 殊 布 置 可 以 知 道, 除 了 沿 轴 线 布 置 三 门 佛 塔 佛 殿 讲 堂, 并 环 以 周 廊 之 外, 还 可 以 有 更 为 复 杂 的 寺 院 空 间 形 式, 如 五 进 院 落, 周 环 别 院, 前 为 重 门, 殿 宇 横 设 等 的 做 法, 还 有 待 做 进 一 步 探 索 图 16. 寺 房 五 重 的 特 殊 格 局 三. 唐 代 寺 院 基 本 格 局 及 其 建 筑 类 型 有 唐 一 代, 中 国 佛 教 趋 于 鼎 盛, 宗 系 林 立, 佛 经 翻 译 事 业 兴 旺 由 于 其 国 祚 长 久, 和 平 繁 荣 时 期 据 多, 城 市 宫 殿 苑 囿 陵 寝 建 筑, 十 分 宏 大 精 美 这 无 疑 会 在 一 定 程 度 上, 刺 激 唐 代 佛 教 寺 院 建 造 但 由 于 天 宝 末 安 史 之 乱 晚 唐 会 昌 灭 法, 及 唐 末 五 代 战 争, 使 曾 盛 极 一 时 的 唐 代 两 京 城 市 宫 殿, 几 乎 全 部 化 为 灰 烬, 遑 论 佛 寺 道 观 民 舍? 因 此, 唐 代 寺 院 建 筑 实 例 遗 存, 几 如 凤 毛 麟 角, 随 着 历 史 文 献 的 遗 失, 与 唐 代 寺 院 建 筑 有 关 的 文 献, 并 不 多 见 因 此, 要 想 对 唐 代 佛 教 寺 院 建 造 情 况, 做 出 一 个 较 为 完 整 而 细 致 的 叙 述, 几 乎 是 不 可 能 的 既 然 说 唐 代 是 中 国 佛 教 发 展 顶 峰, 那 么, 其 佛 教 建 筑 也 应 是 达 到 最 为 宏 大 辉 煌 与 壮 丽 时 期 如 果 将 中 国 佛 教 建 筑 史 仅 仅 建 构 在 佛 教 开 始 趋 于 衰 落 的 辽 宋 以 后 时 期, 无 疑 是 对 中 国 佛 教 建 筑 史 的 一 种 误 解 因 此, 尽 管 是 在 极 其 有 限 的 资 料 条 件 下, 我 们 还 应 尽 可 能 对 唐 代 佛 寺 及 其 建 筑 加 以 探 究
141 1) 唐 代 寺 院 规 模 与 空 间 组 织 方 式 唐 代 寺 院 主 要 特 点, 一 是 基 址 规 模 大, 二 是 寺 内 庭 院 多 如 位 于 长 安 东 南 隅 的 大 慈 恩 寺, 慈 恩 寺, 寺 本 净 觉 故 伽 蓝, 因 而 营 建 焉 凡 十 余 院, 总 一 千 八 百 九 十 七 间, 敕 度 三 百 僧 73 由 1897 间 建 筑 物, 组 成 10 余 座 院 落, 如 果 将 其 想 象 成 一 些 尺 度 较 平 均 的 院 落, 则 每 个 院 落 大 约 有 不 少 于 150 间 房 屋 若 再 分 出 院 落 大 小, 则 大 的 院 落, 有 可 能 有 数 百 间 房 屋 之 多 另 据 相 关 史 料, 慈 恩 寺 基 址 规 模 有 半 坊 之 地, 则 其 主 要 院 落 的 空 间 亦 很 宏 大 长 安 章 敬 寺, 亦 以 其 寺 院 中 的 院 落 多 而 著 称 据 宋 人 撰 游 城 南 记 : 章 敬 寺, 长 安 志 曰 : 在 通 化 门 外, 本 鱼 朝 恩 庄 也, 后 为 章 敬 皇 后 立 寺, 故 以 为 名 殿 宇 总 四 千 一 百 三 十 间, 分 四 十 八 院, 以 曲 江 亭 馆 华 清 宫 观 风 楼, 百 司 行 解, 及 将 相 没 官 宅 舍 给 其 用 74 以 4130 间 房 屋, 分 为 48 座 院 落, 每 一 院 落 平 均 有 房 屋 近 100 间 若 分 出 主 次 院 落, 则 寺 院 中 的 核 心 院 落, 也 应 有 数 百 间 房 屋 另 外 一 个 以 院 落 多 而 著 称 的 寺 院, 是 成 都 大 圣 慈 寺 宋 人 撰 成 都 文 类 所 收 大 圣 慈 寺 画 记 : 举 天 下 之 言 唐 画 者, 莫 如 成 都 之 多, 就 成 都 较 之, 莫 如 大 圣 慈 寺 之 盛 今 来 守 是 邦, 俾 僧 司 会 寺 宇 之 数, 因 及 绘 画, 乃 得 其 详 总 九 十 六 院, 按 阁 殿 塔 厅 堂 房 廊, 无 虑 八 千 五 百 二 十 四 间 画 诸 佛 如 来 一 千 二 百 一 十 五, 菩 萨 一 万 四 百 八 十 八, 帝 释 梵 王 六 十 八, 罗 汉 祖 僧 一 千 七 百 八 十 五, 天 王 明 王 大 神 将 二 百 六 十 二, 佛 会 经 验 变 相 一 百 五 十 八 堵 夹 纻 雕 塑 者, 不 与 焉 像 位 繁 密, 金 彩 华 缛, 何 庄 严 显 饬 之 如 是 75 这 段 文 字 可 以 说 是 对 一 座 晚 唐 寺 院 的 概 述 由 此, 可 以 一 窥 唐 代 寺 院 之 宏 大 华 美 繁 盛 精 丽 从 寺 院 空 间 看, 一 座 有 8524 间 房 屋 的 寺 院, 分 为 96 座 院 落, 每 座 院 落 平 均 也 有 近 90 间 房 屋 若 以 大 小 院 落 区 分, 其 大 院 亦 应 在 百 余 间 房 屋 以 上 这 种 超 大 寺 院 的 规 模 与 形 制, 无 疑 受 到 道 宣 撰 中 天 竺 舍 卫 国 祇 洹 寺 图 经 与 关 中 创 立 戒 坛 图 经 两 篇 文 献 的 影 响, 这 两 部 图 经 是 在 唐 以 前 资 料 基 础 上, 结 合 唐 代 宫 殿 与 寺 院 现 状, 对 天 竺 舍 卫 国 祇 洹 寺 的 一 种 追 述, 亦 是 对 理 想 佛 寺 的 一 种 描 述, 也 是 对 唐 代 佛 教 寺 院 建 筑 的 一 个 总 结 重 要 的 是, 这 座 寺 院 正 是 以 庭 院 繁 多 而 著 称 其 寺 占 地 80 顷, 全 寺 有 120 个 院 落, 布 置 在 一 块 东 西 长 近 10 里 ( 合 约 3000 步 ), 南 北 700 余 步 用 地 长 宽 比 接 近 4 1 仅 从 这 一 点, 似 也 可 看 出 唐 代 寺 院 的 影 响 痕 迹 因 长 安 寺 院, 多 布 置 在 里 坊 之 中, 长 安 里 坊 亦 为 东 西 长, 南 北 狭 的 横 长 形 状 而 若 寺 用 半 坊 之 地, 则 如 占 半 坊 之 地 的 慈 恩 寺, 恰 是 一 个 东 西 长, 南 北 狭 用 地 同 样 的 情 况, 按 1/4 坊 用 地, 如 道 宣 所 在 的 西 明 寺, 依 然 以 东 西 长, 南 北 狭 为 特 点 道 宣 正 是 生 活 在 这 样 的 寺 院 中, 所 以 很 可 能 在 他 心 目 中 的 大 型 理 想 寺 院, 亦 应 是 一 种 东 西 长, 南 北 狭 的 寺 院 格 局 位 于 这 座 理 想 寺 院 中 心 部 位 的 佛 院, 却 是 一 个 与 传 统 中 国 建 筑 空 间 相 吻 合 的 南 北 长, 东 西 狭 的 纵 长 空 间 正 如 道 宣 在 祇 洹 寺 图 经 中 所 描 述 的, 在 这 样 一 个 横 长 型 用 地 上, 布 置 有 120 座 院 落 其 中 要 有 水 渠 永 巷 门 桥, 以 及 各 式 各 样 不 同 规 模 与 方 位 的 庭 院 这 其 实 是 一 座 可 以 与 帝 王 宫 殿 相 比 拟 的 大 型 建 筑 群 其 中 有 东 西 相 对 或 南 北 相 对 的 庭 院, 及 以 南 北 向 为 中 轴 线 的 中 央 佛 院 也 许, 正 是 道 宣 所 描 绘 的 这 两 个 院 落 重 重 的 理 想 寺 院 : 祇 洹 寺 戒 坛 寺, 对 于 以 重 重 叠 叠 的 回 廊 院 为 空 间 73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续 集 卷 六. 寺 塔 记 下 钦 定 四 库 全 书. 史 部. 地 理 类. 游 记 之 属.[ 宋 ] 张 礼. 游 城 南 记 钦 定 四 库 全 书. 集 部. 总 集 类.[ 宋 ] 扈 仲 荣. 成 都 文 类. 卷 四 十 五. 记. 大 圣 慈 寺 画 记
142 主 旨 的 唐 代 寺 院, 奠 定 了 一 个 基 础 据 宋 人 的 描 述, 泉 州 开 元 寺, 就 有 如 祗 洹 寺 图 经 所 描 述 的 有 120 个 院 落 的 规 模 : 泉 州 寺 院, 开 元 寺 ( 在 州 西, 唐 武 后 垂 拱 二 年, 居 民 黄 守 恭 宅, 园 中 桑 树 忽 生 白 莲 花, 因 舍 宅 为 寺 又 戒 坛 居 殿 后, 可 容 千 人, 堂 宇 静 深, 巷 陌 萦 纡, 廊 庑 长 广, 别 为 院 一 百 二 十, 为 天 下 开 元 寺 之 第 一 东 塔 咸 通 间 僧 文 偁 造, 西 塔 梁 正 明 间 王 审 知 造 ) 76 宋 距 唐 未 远, 其 说 寺 有 120 院, 应 与 事 实 相 差 不 远 现 在 观 察 泉 州 开 元 寺, 从 其 中 双 塔 回 廊 大 殿 等 建 筑 的 关 系 上, 还 能 看 出 唐 代 大 寺 院 的 遗 痕 这 种 有 120 院 的 寺 院 做 法, 很 可 能 受 到 道 宣 两 部 图 经 所 描 述 寺 院 的 影 响 从 另 外 一 些 史 料 中 观 察 到, 也 许 正 是 由 于 道 宣 两 部 图 经 的 影 响, 唐 人 在 描 述 一 些 宏 大 寺 院 时, 往 往 尽 言 其 院 落 繁 多 如 大 宋 高 僧 传 描 述 的 五 台 山 唐 释 法 照, 曾 见 到 一 寺 : 寺 前 有 大 金 榜, 题 曰 : 大 圣 竹 林 寺, 一 如 钵 中 所 见 者 方 圆 可 二 十 里, 一 百 二 十 院, 皆 有 宝 塔 庄 严 77 这 种 灵 验 故 事 式 的 描 述, 未 必 是 真 实 存 在 的 寺 院, 但 由 这 一 描 述 也 可 以 知 道, 道 宣 两 部 图 经 中 所 描 绘 的 理 想 寺 院, 在 唐 代 时 已 深 入 人 心 唐 代 寺 院 中 的 庭 院 名 目 繁 多, 除 了 一 般 与 寺 院 修 持 生 活 有 关 的 庭 院 外, 唐 代 寺 院 中, 还 会 添 加 一 些 与 当 朝 皇 帝 有 关 的 庭 院, 如 圣 容 院 长 安 崇 义 坊 招 福 寺, 景 龙 二 年, 又 赐 真 容 坐 像, 诏 寺 中 别 建 圣 容 院, 是 玄 宗 在 春 宫 真 容 也 先 天 二 年, 敕 出 内 库 钱 二 千 万, 巧 匠 一 千 人, 重 修 之 睿 宗 圣 容 院, 门 外 鬼 神 数 壁, 自 内 移 来, 画 迹 甚 异 78 此 外, 这 座 寺 院 中 还 有 库 院 酉 阳 杂 俎 提 到 的 唐 代 长 安 寺 院, 其 中 院 落 名 目 十 分 多, 如 靖 善 坊 大 兴 善 寺 有 行 香 院 东 廊 之 南 素 和 尚 院 长 乐 坊 安 国 寺 有 东 禅 院 ( 亦 称 水 塔 院 ) 圣 容 院 光 明 寺 有 山 庭 院 上 座 璘 公 院 常 乐 坊 赵 景 公 寺 有 三 阶 院 华 严 院 约 公 院 等 安 邑 坊 玄 法 寺 有 东 廊 南 观 音 院, 以 及 曼 殊 院 西 北 角 院 等 光 宅 坊 光 宅 寺 亦 有 曼 殊 院 宣 阳 坊 静 域 寺 中 则 有 三 阶 院 禅 院 崇 仁 坊 资 圣 寺 有 净 土 院 团 塔 院 观 音 院 等 唐 代 寺 院 还 有 一 个 重 要 特 征, 是 回 廊 的 大 量 使 用 白 居 易 诗 南 龙 兴 寺 残 雪, 中 有 : 南 龙 兴 寺 春 晴 后, 缓 步 徐 吟 绕 四 廊 79 说 明 寺 院 基 本 特 征 是 由 四 廊 环 绕 的 院 落 与 殿 堂 构 成 的 由 于 院 落 有 大 小 之 分, 所 以, 在 主 要 庭 院 周 围 廊 外, 会 有 一 些 小 规 模 廊 院 如 大 兴 善 寺, 东 廊 之 南, 素 和 尚 院 80 玄 法 寺, 东 廊 南, 观 音 院 81 静 域 寺, 佛 殿 东 廊 有 古 佛 堂 82 崇 济 寺, 东 廊 从 南 第 二 院, 有 宣 律 师 制 袈 裟 堂 83 资 圣 寺, 观 音 院 两 廊, 四 十 二 贤 圣, 韩 干 画 84 显 然, 这 里 有 大 院 小 院 之 分, 这 里 所 说 的 东 廊, 当 是 大 院 之 东 廊 有 时 或 也 称 佛 殿 西 廊 佛 殿 东 西 障 日 及 诸 柱 上 图 画, 是 东 廊 旧 迹 85 佛 殿 东 廊 有 小 佛 堂 86, 由 此 或 可 以 理 解 成, 佛 殿 院 是 一 规 模 较 大 的 中 心 院 落, 其 东 西 廊 外, 还 会 排 列 布 置 若 干 小 院, 小 院 中 一 般 也 设 回 廊 较 小 寺 院, 则 将 侧 面 小 院 称 作 偏 院, 如 成 都 宝 相 寺 偏 院 小 殿 中 有 菩 提 像 87 这 种 偏 院 的 称 呼, 与 东 廊 从 南 第 二 院 之 说 法, 显 然 是 两 种 不 同 规 模 的 寺 院 描 述 因 此, 可 以 把 唐 代 寺 院 理 解 成, 其 中 央 核 心 庭 院 是 若 干 个 前 后 相 叠 的 口 字, 或 曰 字 格 76 钦 定 四 库 全 书. 史 部. 地 理 类. 总 志 之 属.[ 宋 ] 祝 穆. 方 舆 胜 览. 卷 十 二. 泉 州 77 [ 宋 ] 赞 宁. 大 宋 高 僧 传. 卷 二 十 一. 感 通 篇 第 六 之 四. 唐 五 台 山 竹 林 寺 法 照 传 78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续 集 卷 六. 寺 塔 记 下 79 钦 定 四 库 全 书. 集 部. 别 集 类. 汉 至 五 代. 白 氏 长 庆 集. 卷 二 十 八 80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续 集 卷 五. 寺 塔 记 上 81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续 集 卷 五. 寺 塔 记 上 82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续 集 卷 六. 寺 塔 记 下 83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续 集 卷 六. 寺 塔 记 下 84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续 集 卷 六. 寺 塔 记 下 85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续 集 卷 五. 寺 塔 记 上 86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续 集 卷 六. 寺 塔 记 下 87 [ 唐 ] 段 成 式. 酉 阳 杂 俎. 卷 六. 艺 绝
143 局, 与 中 央 庭 院 紧 邻 的 两 侧 庭 院, 则 是 两 个 由 若 干 前 后 相 叠 的 目 字 组 成 的 空 间 格 局 这 样, 中 心 庭 院 与 两 廊 之 外 的 较 小 庭 院, 就 组 成 一 个 主 次 相 依, 大 小 相 辅 的 有 机 空 间 形 式 此 外, 在 严 谨 整 齐 的 建 筑 庭 院 之 外, 中 国 佛 教 寺 院 还 可 能 将 自 然 景 观 性 园 池 山 林 穿 插 组 织 进 来, 如 续 高 僧 传 提 到 南 朝 南 涧 寺, 是 一 座 具 有 园 林 化 空 间 的 寺 院 : 未 启 庄 严 寺, 园 接 连 南 涧, 因 构 起 重 房, 若 鳞 相 及, 飞 阁 穹 隆, 高 笼 云 雾 通 碧 池 以 养 鱼 莲, 构 青 山 以 栖 羽 族 ; 列 植 竹 果, 四 面 成 阴 ; 木 禽 石 兽, 交 横 入 出 88 寺 院 不 仅 与 自 然 景 观 相 连 接, 而 且 在 寺 宇 建 筑 间, 还 设 有 碧 池, 青 山, 山 中 有 鸟, 池 中 有 鱼, 水 上 有 莲, 寺 院 中 还 列 植 有 竹 子 果 木 这 就 使 得 严 整 对 称 的 宗 教 空 间 中, 增 加 了 一 些 活 泼 因 素 唐 代 长 安 寺 院 中 的 山 池 院 是 这 一 寺 院 理 念 的 一 种 延 续 2) 唐 代 寺 院 建 筑 的 基 本 格 局 两 部 图 经 中 描 绘 的 寺 院, 核 心 空 间 是 那 座 在 祇 洹 寺 图 经 中 详 细 记 述, 在 戒 坛 图 经 中 简 要 提 到 的 佛 院 可 以 将 这 座 佛 院, 看 作 是 一 座 大 型 唐 代 佛 寺 的 典 型 样 板 其 基 本 布 局 特 征 是 ( 图 17, 图 18): 1. 寺 前 三 门 楼 门 前 有 乌 头 门 水 渠 石 桥, 前 方 还 有 端 门 2. 三 门 内 为 方 形 莲 池, 莲 池 两 边, 东 为 比 丘 戒 坛, 西 为 比 丘 尼 戒 坛 莲 池 之 南, 即 三 门 与 方 池 之 间, 有 九 金 镬 3. 方 池 以 北 为 七 层 佛 塔 ( 戒 坛 图 经 中 塔 在 前 佛 殿 之 后, 佛 说 法 大 殿 之 前 ) 佛 塔 两 侧, 东 为 钟 台, 西 为 经 台, 显 然 也 是 有 依 据 的 在 隋 代 寺 院 研 究 中, 已 注 意 到 在 佛 殿 前 设 佛 塔 的 做 法 在 唐 代 寺 院 中, 大 殿 之 前 设 置 的 是 钟 楼 与 经 楼, 而 非 后 世 寺 院 中 的 钟 鼓 楼 对 峙 式 格 局 4. 佛 塔 北 为 大 佛 殿 ( 戒 坛 图 经 中 此 处 为 前 佛 殿 ) 塔 后 为 殿, 正 与 隋 以 前 寺 院 中, 多 有 殿 前 设 塔 格 局 吻 合 大 殿 左 右 对 称 配 置 东 西 楼, 各 为 三 层 5. 前 佛 殿 后 为 佛 说 法 大 殿 ( 祗 洹 寺 图 经 中 此 处 为 前 佛 殿 ), 我 们 或 可 将 其 理 解 为 寺 院 中 的 法 堂, 或 讲 堂 在 大 殿 后 设 讲 堂 ( 或 法 堂 ), 也 是 隋 以 前 寺 院 中 常 有 的 现 象 佛 说 法 大 殿 两 侧 各 有 东 西 配 楼, 分 别 为 五 层 6. 佛 说 法 大 殿 之 后, 为 三 重 楼 ( 祗 洹 寺 图 经 中 此 处 为 第 二 大 复 殿, 复 殿 两 侧 为 东 西 楼 观 ) 7. 三 重 楼 ( 第 二 大 复 殿 ) 之 北 为 三 重 阁 ( 祗 洹 寺 图 经 中 为 极 北 重 阁 ) 三 重 阁 两 侧 为 东 西 宝 楼, 各 五 层 8. 三 重 阁 之 后 墙 垣 两 侧 角 隅, 分 别 为 东 西 佛 库 88 [ 唐 ] 续 高 僧 传. 卷 六. 义 解 篇 二. 梁 大 僧 正 南 涧 寺 沙 门 释 慧 超 传
144 图 17. 祗洹寺图经 中佛寺平面示意图 18. 戒坛图经 中佛寺平面示意图 如果忽略 祗洹寺图经 与 戒坛图经 的一些细微差别 可以将这座 佛院 的格局看作唐 代人的理想佛寺 也就是说 典型唐代寺院是由乌头门 水渠石桥 三门 方池 左右戒坛 佛塔 及左右对峙的钟楼与经楼 佛殿 法堂 后殿 第二复殿或三重楼 三重阁前后六进院落组成的 中轴线上殿阁重叠 轴线两侧对峙钟 经楼 及东西楼阁 既严谨规正 又起伏跌宕 其中许多特 征 如在大殿两侧对称设置楼阁 殿前设钟 经楼 寺院北端设楼阁 阁两侧用连廊 飞桥与两侧 配楼相连 这些寺院空间处理方式 不仅见之于宋辽时代寺院实例 也见之于敦煌壁画所描绘的诸 多寺院 图
145 图 19. 敦煌壁画所描绘的佛寺布局 可以透过史料做一些观察 唐高宗永徽四年 653 年 蜀净慧寺僧释惠宽示寂 寺内三桥 一当宽 房堂夜梁折 声震寺内 明旦官人 道士咸来恸哭 寺中莲池 池水忽干 红莲变白 寺 中大豫樟树 三四人围 忽自流血 血流入涧 涧水皆赤 月余方息 又十七级砖浮图高数十丈 裂开数寸 89由此可知 寺前有渠及三桥 寺内有莲池及砖塔 空间构成 略近前述 寺前有桥 寺三门内为方池 方池北为佛塔 的做法 隋龙盖寺 因寺中起塔瘗舍利 又感一鹅飞至函所 及至埋讫 便独守塔 绕旋而已 又感塔所前池 有诸鱼鳖 并举头出水 北望舍利 90这里的空间关系是 其一 寺中仅一塔 其二 塔前有池 池在塔南 正与前述理想寺院格局相合 唐长安大慈恩寺 其地高墉负郭 百雉纡馀 层城结隅 九重延袤 于是广辟宝坊 备诸轮 奂 瞻星测景 置臬衡绳 玉舄垂晖 金铺曜彩 长廊中宿 反宇干霄 浮柱绣栭 上图云气 飞 轩镂槛 下带虹霓 影塔俨其相望 经台郁其并架 罄丹青之钜艭 殚藻缋之瑰奇 宝铎锵风 金 盘承露 疏钟夜撤 清梵朝闻 91 从文字的描述看 这是一座很大的寺院 所以才会有 百雉纡 馀 层城结隅 九重延袤 的感觉 据 长安志 慈恩寺位于长安进 晋 昌坊 半以东大慈恩 寺 隋无漏寺之地 武德初废 贞观二十二年 高宗在春宫为文德皇后立为寺 故以慈恩为名 凡十余院 总一千八百九十七间 敕度三百僧 寺西院浮图六级 崇三百尺 92更详细地 说明了这座寺院的规模 而从其 瞻星测景 置臬衡绳 可以知道这应该是一座有寺院中轴线 形制端正的建筑群 另从 影塔俨其相望 经台郁其并架 金盘承露 疏钟夜撤 可知 寺院中 有左右并列设置的经台 并设有佛塔 钟楼 另外 长安志 中说到慈恩寺 寺西院浮图六级 说明浮图塔不在寺院建筑中轴线上 法 苑珠林 中说 影塔俨其相望 又暗示可能有两座彼此相望的高塔 我们无法给出结论 可以确 [唐]道宣 续高僧传 卷三十一 习禅六 益州净惠寺释惠宽传 [唐]道宣 续高僧传 卷二 译经篇二 隋东都上林园翻经馆沙门释彦琮传 [唐]释道世 法苑珠林 卷一百 传记灾第一百 兴福部第五 钦定四库全书 史部 地理类 古迹之属 [宋]宋敏求 长安志 卷八
146 知 的 是, 这 是 一 个 以 院 落 为 主 要 空 间 组 织 方 式 的 建 筑 群, 院 落 前 后 相 叠, 如 同 九 重 延 袤 的 宫 殿 院 落 周 围 有 类 似 城 垣 的 围 墙 环 绕, 寺 内 有 长 廊 相 接, 中 轴 线 上 对 称 布 置 两 座 经 台, 两 座 佛 塔 这 与 道 宣 笔 下 轴 线 分 明, 院 落 丛 贯, 空 间 重 叠 的 寺 院 形 式, 有 一 些 相 似 之 处, 只 是 两 座 彼 此 相 望 佛 塔 的 做 法, 稍 稍 有 一 些 不 同 文 献 中 提 到 的 唐 末 五 代 寺 院 东 京 大 相 国 寺, 格 局 也 与 道 宣 理 想 寺 院 接 近 : 当 大 顺 二 年, 灾 相 国 寺, 重 楼 三 门, 七 宝 佛 殿, 排 云 宝 阁, 文 殊 殿 里 廊, 计 四 百 余 间, 都 为 煨 烬 93 这 里 提 到 的 几 座 建 筑 : 重 楼 三 门 七 宝 佛 殿 排 云 宝 阁, 恰 是 可 以 与 道 宣 理 想 寺 院 中 轴 线 上 的 三 门 楼 大 佛 殿 ( 或 前 佛 殿 ) 极 北 重 阁 ( 三 重 阁 ) 相 对 应 的 其 中 在 中 轴 线 上 的 建 筑 物 之 缺 项, 只 是 佛 塔 与 法 堂 而 据 我 们 所 知, 宋 代 时 的 大 相 国 寺 为 寺 前 双 塔 制 度, 故 其 轴 线 上 不 布 置 佛 塔, 也 说 明 寺 院 格 局 这 时 已 发 生 变 化 至 于 法 堂, 这 里 虽 没 有 提 到, 但 并 不 能 证 明 寺 中 没 有 法 堂 而 寺 内 有 文 殊 殿, 也 证 明 寺 院 有 受 到 唐 代 密 宗 影 响 的 痕 迹 现 存 实 例 中, 保 存 较 多 宋 代 建 筑 的 正 定 隆 兴 寺, 在 空 间 形 式 上, 与 这 里 所 说 的 唐 代 寺 院 最 为 接 近 其 寺 院 之 前 有 水 渠 石 桥 之 设 山 门 内 是 一 座 大 殿,( 称 六 师 殿, 现 已 毁, 仅 存 遗 址 ), 如 道 宣 寺 院 中 的 前 佛 殿, 殿 后 是 寺 中 主 殿 摩 尼 殿, 如 道 宣 寺 院 中 第 二 复 殿 ( 或 佛 说 法 大 殿 ) 摩 尼 殿 后 为 戒 坛, 戒 坛 后 为 东 西 对 峙 的 两 座 楼 阁, 东 为 经 楼 ( 转 轮 藏 殿 ), 西 为 慈 氏 阁 再 北 为 大 悲 阁, 阁 两 侧 用 左 右 对 称 的 两 座 楼 阁, 彼 此 间 连 以 飞 廊 渡 桥 大 悲 阁 及 其 两 侧 楼 阁, 最 接 近 道 宣 寺 院 中 在 三 重 阁 两 侧 各 建 配 楼, 联 以 飞 廊 的 做 法 今 日 大 悲 阁 之 后 院 落, 是 否 保 存 宋 代 寺 院 制 度, 不 很 清 楚 若 宋 代 时 大 悲 阁 后 仍 有 一 进 院 落, 则 隆 兴 寺 自 三 门, 至 寺 内 最 北 建 筑, 恰 好 也 是 六 进 院 落 隆 兴 寺 内 建 筑 主 要 是 宋 代 以 后 所 建, 但 从 寺 名 可 知, 这 是 在 唐 代 古 寺 龙 兴 寺 基 础 上 发 展 而 来 的, 其 中 可 能 保 存 了 部 分 唐 代 寺 院 平 面 信 息 93 [ 宋 ] 赞 宁. 大 宋 高 僧 传. 卷 十 六. 明 律 篇 第 四 之 三. 后 唐 东 京 相 国 寺 贞 峻 传
147 백제 사비기 사찰과 도성의 관계 민경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Ⅰ. 머리말 Ⅱ. 사비기 사찰의 분포와 특징 1. 사비기 사찰의 분포 양상 2. 사비기 사찰의 가람배치 양상 및 조영시기 Ⅲ. 사비도성의 운영에 따른 사찰의 역할 1. 사비도성의 건설 및 운영 2. 주요시설의 분포 양상 3. 사비도성에서 사찰의 역할 Ⅳ. 맺음말 Ⅰ. 머리말 고대 불교는 종교적 목적 외에 국가 체제 정비 및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서 호국적 정치적 성격을 띠며 각종 국가적 사업에 사용된다. 백제도 많은 불사가 그러한 정치적 사회적 목적 으로 이용되었을 것인데, 枕 流 王 원년(398) 불교가 처음 전래되지만 크게 이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웅진기를 지나 사비기에 이르러 두드러진 불사의 흔적이 곳곳에서 확 인되고 있다. 이는 국가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사비 천도와 함께 새 도읍 건설, 왕권 강화에 불교가 충분히 활용된 것이며, 이에 따라 이 시기 백제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 다. 이러한 불사 중 사찰 건립은 주로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파 악되는 사찰유적을 중심으로 그 분포 양상과 특징을 살펴보고, 주변의 주요시설과의 관계 등을 통해 도성 운영에 있어서 사찰 조영이 가지는 역할 및 의미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해 보고자 한다
148 Ⅱ. 사비기 사찰의 분포와 특징 1. 사비기 사찰의 분포 양상 사비기는 백제 불교문화의 전성기로 많은 사찰을 조영했다고 전해지는데, 중국 周書 의 僧尼寺塔甚多 라는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백제 사찰로 전해지는 것으로는 웅진기의 大通寺, 水源寺, 興輪寺가 있고 사비기의 王興寺, 虎嵓寺, 漆岳寺, 道讓寺, 資福寺, 白石寺, 天王寺, 帝釋寺, 獅子寺, 彌勒寺, 五金寺, 烏合(含, 會)寺, 北部修德寺, 普光寺 등이 있다. 이 중 부여지역에서는 왕흥사, 천왕사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고, 익산지역에서 제석사, 미륵사, 사자사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또한 오합사는 보령 성주사지에서 성주사 전신 사찰로 확 인되었고, 예산 수덕사를 제외한 다른 사찰들은 그 위치가 불명확하다. 이들 중 사비도성을 중심으로 하여 부여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사찰들을 살펴보면, 기록에 서 확인되지 않았거나 조사된 유적 중 사찰명을 알 수 없는 곳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부여 지역에서 총 25곳이 사비기 사찰터로 전해지고 있다. 도성 내부에 위치한 사찰유적 중 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사찰 건물(또는 사찰로 추정되는 건물지)이 확인된 유적은 부소산사 지, 정림사지, 傳 천왕사지, 가탑리사지,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관음사지 등이 있고, 도성 외부에는 능산리사지, 용정리사지, 밤골사지, 호암사지, 왕흥사지, 임강사지, 금강사지 등이 분포하고 있다(도면 1). 도면 1. 부여지역 사비기 사찰 분포도
149 2. 사비기 사찰의 가람배치 양상 및 조영시기 백제의 가람배치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그 외곽을 회랑이 두 르고 있는 형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최근 백제 사찰에 대한 발굴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 면서 새롭게 확인된 양상으로 중심 예배건물(목탑 금당)의 양옆, 회랑의 북편으로 이어져 있는 부속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에 대하여 능산리사지에서는 서편 건물을 공방지로 명 명한 바 있다. 다른 유적에서는 성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되지 않지만, 최근 승방지로 보는 견해가 많다(이병호 , 부여군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李 裕群 2009, 정자영 2010, 김낙중 2011). 이 건물의 등장은 능사, 왕흥사가 건립된 6세 기 중후반부터 정형화된 것으로 예배공간과 다른 성격의 공간이 들어선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김낙중 2011). 또한 강당의 좌우로도 부속건물이 확인되는데, 이 역시 능산 리사지에서는 서편 건물이 공방지로 확인된 바 있으나 군수리사지와 동남리사지에서는 종 루지, 경장지로 추정되기도 한다(朴大盛 2004). 또 능산리사지의 경우, 예제건축물이었다 가 사찰로 이용되면서 공방으로 변화하였거나(金吉植 2008) 사찰로서의 기능이 약화된 이후 공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李炳鎬 2008)도 있다. 강당의 좌우 건물은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지에서는 더 크게 조성되었다. 이는 입지나 사찰의 성격에 따라 차이 를 보일 수도 있고 시기적인 변화 양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7세기 대에는 회랑 북편에 이어진 건물이 북으로 확장되어 강당 옆으로까지 이어지는 양상으로 변화하면서 강당 좌우 건물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강당 뒤로 장방형 건물이 등장하는데, 이 는 북승방지로 보고 있으며 정림사지,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가람배치의 변화 양상은 익산지역 사찰을 포함하여 크게 5유형으로 세분되는 것으 로 보인다(표 1)36). 표 1. 가람배치 유형별 분류 유형 가람배치 모식도 Ⅰ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36) 용정리사지, 가탑리사지 등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그 기본 구조가 밝혀지지 않은 유적은 제외하였 다
150 Ⅱ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Ⅲ 정림사지 제석사지 Ⅳ 금강사지 부소산사지 Ⅴ
151 미륵사지 범 례 우선 Ⅰ형은 기본적으로 (중문-)목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며 회랑으로 둘러 싸고, 강당 좌우에 소형의 부속건물이 배치된다. 6세기 중반경으로 군수리사지가 속하며, 특 수한 경우인 동남리사지도 이 계열로 포함시키거나 별도의 무탑식 형식을 가질 수도 있다. Ⅱ형은 회랑 북단에 동 서건물이 등장하는데, 이 건물은 예배구역(탑, 금당) 중간지점에서 시작되어 강당 앞단까지만 연결된다. 그리고 강당 좌우로는 부속건물이 확대된다. 이는 6세 기 중후반대로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지가 이에 속하며, 왕흥사지는 회랑 외곽에도 별도의 부 속건물이 확인되고 있다. Ⅲ형은 동 서건물이 예배구역의 북편 끝부분에서 시작되어 강당 양 옆으로 이어지며, 이와 동시에 강당 좌우 건물은 사라지게 된다. 또 강당 뒤로 북승방지가 배치된다. 이는 7세기 전반대로 보이며, 정림사지와 익산의 제석사지가 해당된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존 유형에서 약간 벗어나는 듯한 Ⅳ, Ⅴ형이 확인되는데, Ⅳ형은 금강사지 의 경우로, 부속건물 없이 회랑으로만 둘러싸고 강당 뒤 북승방지가 배치되어 있다. 강당과 북승방이 없지만 부소산사지도 여기에 포함시켰다. Ⅴ형은 미륵사지의 유형으로, Ⅳ형의 기 본세트가 3원으로 구성된 형식이다(민경선 2011). 이러한 가람배치상의 특징은 입지나 규 모에 따라 약간의 변형 또는 조절하기도 한다. 동남리사지는 목탑이 없는데, 중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귀족의 사택을 활용한 경우로 보기도 한다(梁銀景 2009, 김성남 이미현 2009). 부소산사지는 산 사면의 평탄부에 입지하며 규모가 작은 사찰로 강당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위치상 왕궁지와 가까이에 예배공간만 두기 위해 건립한 사찰일 가능성도 있다. 이와 같은 가람배치에 따라 사역의 공간 구획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사찰 건물은 중문, 회랑의 진입과 통로 공간, 탑과 금당으로 구성된 예배 공간, 승방, 강당 등으로 이루어진 생 활과 수행의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예배 공간을 중심에 두고 진입 통로 공간과 생활 수행 공간이 둘러싸는 형태로 구성된다(도면 2, 민경선 2011). 도면 2. 가람배치에 따른 공간 구획 그런데 인도, 중국, 고구려, 일본 등 다른 곳에서는 예배 공간과 강당을 분리 배치한 반면 에 백제 사찰은 강당까지 같은 회랑 내에 배치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예배만큼 수행, 교육의 기능도 중요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찰에서 탑-금당 간 거리
152 에 비해 금당-강당 간 거리가 먼 것(표 2)으로 보아 예배 공간과 수행 교육 공간을 구분 ( 文 玉 賢 2010)한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표 2. 탑-금당과 금당-강당 간격 비교 (단위: m) 유적명 탑-금당 간격(A) 금당-강당 간격(B) 간격비율(B/A) 비고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정림사지 석탑 금강사지 위 사찰유적들은 그 조영시기에 대하여 연구자마다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경우가 많아 발굴 조사단의 의견을 따라 조영시기를 정리해보면, 대부분 6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되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성 밖 용정리사지에서는 하층 건물지에서 고구려계 와당이 출토되 어 6세기 전반 즉, 천도 전 즈음하여 조성된 사찰로 볼 수 있다. 이는 현재까지 사비지역에 서 가장 이른 단계이다. 천도 직후에는 도성 내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가 조성되었을 가능 성이 크며, 위덕왕 즉위 후(6세기 중반 이후)에는 도성 내 도시 재정비와 함께 도성 안팎에 중요 사찰들을 건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 3. 부여지역 사비기 사찰 현황 1 2 유적명 입지 중심축 대지조성 조영시기 조사연도 발굴기관 군수리사 지 동남리사 지 3 정림사지 4 부소산사 지 5 관음사지 傳 천왕사 지 가탑리사 지 용정리사 지 능산리사 지 10 왕흥사지 11 호암사지 12 밤골사지 나 성 내 부 나 성 외 부 남서편 / 낮은 구릉지 남서편 / 낮은 구릉지 N-4 -E N-1 -E 구릉 삭토 저면 성토 6C 중반 1935,1936년 2005~2007년 2011년 구릉 삭토 (?) 6C 중후반 1939년 1993년 중앙부 / 산 계곡 하단부 N-5 -E 저면 성토 7C전반 1942년 1979년 2008~2010년 북편 / 부소산 서남록 평탄지 동편 / 산 하단부 사면 중앙부 / 금성산 남록 평탄지 중앙부 / 금성산 남쪽 구릉지 북동편 /평지 외곽 동편 외곽 / 계곡 하단부 북편 외곽 / 산 계곡 하단부 북편 외곽 / 산 계곡 평탄지 북동편 외곽 /산록평탄지 N-6 -E 북편삭토 남사면성토 N-5 -W 성토다짐 (?) N-30 -E (?) N-31 -E N-3 -E 7C 전중반 1942년 1978년 1980년 石 田 茂 作, 濟 藤 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石 田 茂 作, 濟 藤 忠 충남대학교박물관 藤 澤 一 夫 충남대학교박물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藤 澤 一 夫 등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연구소,충남대학교 박물관,국립부여박물관? 2004년(시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44년 1989년 藤 澤 一 夫 국립부여박물관?? 1938년(시굴) 石 田 茂 作, 濟 藤 忠 성토다짐 (?) 구릉끝삭토 저면 성토 N-4 -E 저면 성토 축대 조성 6C 전중반 / 7C 전반 6C 중후반 (목탑 567 년) 6C 중후반 (목탑 577 년) 1991~1992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2~2002년 2005년 2007년 2000~2012 년 현재 국립부여박물관 한국전통문화학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8년(시굴)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N-6 -E 산사면 성 7C 전중반 2004년(시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53 13 임강사지 14 금강사지 남동편 외곽 / 산 계곡 하단부 북서편 외곽 / 산 하단부 평 탄지 N-74 -E N-90 -E 토다짐 산사면 삭 토 저면 성토 구릉(동) 삭토 7C 전반 6C 후반 ~ 7C 전반 1964년(지표?) 2009년 동국대학교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1964, 1966년 국립중앙박물관 Ⅲ. 사비도성의 운영에 따른 사찰의 역할 1. 사비도성의 건설 및 운영 백제는 고구려 남하로 쫓기듯 웅진으로 천도(475년)한 후, 점차 안정을 찾게 되면서 체 제를 정비하고 왕권 강화 및 국가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사비로 천도(538년)하게 된다. 사 비 천도의 기획 시기에 대해서는 동성왕, 무령왕대 등의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구체적 증거 가 없다 37). 이에 대해 성왕대에 들어와 고구려 침공에 대비하고 국가 체제를 일신하고 남 방 경영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사비 천도를 계획하였다( 森 公 章 2006, 梁 起 錫 2007)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한편 사비도성의 건설은 천도 이전 또는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 가 지배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부소산성 내 출토 웅진기 토기와 大 通 명 기와 등을 통해 527년 무렵 또는 그 이후에 성벽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朴 淳 發 2000). 그리 고 나성의 축조 시점도 부소산성과 거의 같을 것으로 보이는데, 능산리사지와 동나성의 인 접지역에서 그 선후관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사찰 조성 이전층 출토 목간, 성벽 내 출토 삼족기(6세기 전반) 등으로 사찰 조성 이전 나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능산리고분군이 나성 밖에 조영되었다는 것도 당시 도성 내( 京 域 )에는 무덤을 쓰지 않는다 는 북조의 상장령을 참고하여 백제 역시 그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본다면, 554년 이전 이미 나성이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田 中 俊 明 1990). 38) 사비도성의 건설은 자연지형에 대해 분석 후 지형을 완전히 이해한 바탕으로 성벽을 축조 하고 이와 더불어 도성 내부에서도 건축 부지를 마련하고, 공간을 구획하였을 것이다. 사비 지역은 원래 백마강과 그 지천들을 끼고 있어 대부분이 습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도성 건 설을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대지를 조성하였다. 이는 부소산 남록 일대의 관북리유 적 등의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지기도 하였다 39). 사비도성은 內 城 外 郭 의 구조를 하고 있는 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외곽인 나성과 내성에 해당하는 부소산성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곽은 북나성과 동나성을 축조하여 방비하고 서쪽 경계는 백 마강과 그에 따른 제방이 자연적으로 방어시설(나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남쪽 역시 백마 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 자연 경계 및 방비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부는 부소산성을 기 준으로 그 남편 관북리, 구아리 일대에 왕궁이 마련되고 거주지역을 5부 5항으로 구획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0). 그러나 아직 세부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고, 다만 도성 안팎에서 확인되고 있는 건물 및 도로유구를 바탕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37) 이남석, 2010, 考 古 資 料 를 통한 百 濟 泗 沘 遷 都 의 再 認 識, 百 濟 文 化 第 四 十 三 輯, 公 州 大 學 校 百 濟 文 化 硏 究 所. 38) 박순발, 2010, 백제의 도성, p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發 掘 報 告 Ⅲ. 40) 박순발, 2010, 앞의 책, p.272 <도 4-Ⅲ-5> 참고
154 있다(朴淳發 , 李炳鎬 2001, 黃仁鎬 2011). 이렇듯 도성의 건설 시점에 대해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천도 전 성곽이 축조되고 내 부에 관아 및 중요 시설들이 건립되었을 것이라는 부분은 대체로 인정된다. 그리고 도성 내 위치한 사찰은 도성 정비와 관련하여 입지가 정해지고 사역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존에 중앙대로로 인식했던 관북리유적 남북대로가 남쪽으로 연장되지 않고 건물에 막힌 것이 최근 발굴조사된 성왕로 북편 구역에서 확인41)되었다(사진 1). 이에 따라 기존 추정 된 구획 체계가 달라질 수 있으며, 만약 이 도로가 건물 너머 남으로 연장된다고 한다면 정 림사지의 서회랑과 맞닿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정림사지의 경우, 조영 시점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그 시기가 가람배치 양상 및 사역 조성 이전 층의 연대 측정치에 따라 7세기 전 반대로 보여지고 있다. 이와 함께 관북리유적에서 왕궁의 공간 범위를 확장하고 새로운 생 산 및 저장시설을 조성하기 위한 성토대지 공사가 6세기 중후엽 이후에 이루어졌음이 확인 되었다. 이는 천도 전 짧은 시간동안 도성 전반에 걸친 정비작업이 이루어지기 힘들었고 천 도 후 점차 시설을 확충해갔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성토대지 조성이라고 하는 대규모 토목 공사는 사비도성 주요 시설물과 당시 사회정황으로 보아 국력 향상과 왕권 안정에 따른 보 다 발전된 도성 건설을 목적으로 도성 내부의 재정비와 도성 밖으로 이어지는 수도의 공간 범위 확장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하였다42). 정림사지 남북대로 사진 1. 사비 왕궁지구 전경((재)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발굴, 2011) 41) 재단법인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2011, 부여 사비왕궁지구 발굴조사 1차 자문위원회의 자료집. 42) 許眞雅, 2009, 성토대지 조성을 통해 본 사비도성의 공간구조 변화와 운용, 湖西考古學 第22輯, pp.57~
155 2. 주요시설의 분포 양상 도성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찰뿐만 아니라 주요 생산시설, 고분, 산성 등의 제반 시설들 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설물은 그 특성에 따라 군집하거나 또는 복합적으로 구 성된다. 사찰, 가마 등은 사비도성 내부와 외곽 인근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무덤 유적은 도 성 내부와 고산지를 제외한 부여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는 동나성 축조 시기와 관련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도성( 京 域 ) 내 무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짐 작할 수 있다 43). 도성 내부에서 사찰유적은 주로 중심부 일대에 밀집해 있는 편이나, 외부에서는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 부소산성 남편 일대를 왕궁지로 추정한다면 사찰이 왕궁 주변으로 분포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곳은 주거지, 시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지였을 가능성 이 높다. 이는 동시기 고구려, 중국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44) ( 梁 銀 景 2009). 가마터는 기본적으로 대량의 물품을 생산, 운반하기 위해 교통의 요충지에 입지하여야 하 므로 가마터 역시 인구가 집중되는 지역에 위치해야 한다. 따라서 가마터도 사찰터와 유사 한 분포 양상을 보이고 있다 45). 산성은 도성의 동쪽으로 청마산성, 동남쪽으로 석성산성, 남쪽에 성흥산성(가림성), 북쪽 에 울성산성, 서북쪽에는 증산성이 축조하여 도성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도성의 외곽을 이루는 나성은 북나성과 동나성이 확인되며, 서쪽은 백마강이 제방과 함께 자연 경계, 방어 시설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성인 부소산성은 유사 시 피난지 역할을 하고 그 주위로 동 쪽에는 청산성, 서쪽에는 부산성 등 작은 산성들이 배치되었다. 이렇듯 사비도성 안팎으로 교통의 요충지에 사찰이 위치하며 이와 함께 가마가 거의 동일 한 분포 양상을 보인다. 도성 외부의 주요 사찰은 인근에 산성이 자리 잡고 있어 생산시설과 함께 세트관계를 보이고 있다. 특히 왕흥사지-왕흥사지가마터-울성산성(왕흥사 잠성), 밤골 사지-정동리가마터-주장산성, 용정리사지-소룡골가마터-청마산성, 임강사지-현북리가마터 -석성산성은 사찰-생산시설-산성이 동반구조를 이루며 방비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 다. 또 금강사지의 경우는 인근에 관현리가마터와 동반구조를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주변에 증산성, 사자봉산성, 이중산성 등이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도성 부근 사찰들에 비해 이들 산 성과 금강사지와는 거리가 멀어 방비체계의 한 세트로 적용하기 어려워 보인다(도면 4). 43) 隋 書 儀 禮 志 : 在 京 師 葬 者, 去 城 七 里 外 를 참고할 수 있다. 44) 梁 銀 景, 2009, 中 國 佛 敎 寺 刹 의 검토를 통해 본 百 濟 泗 沘 期 佛 敎 寺 刹 의 諸 問 題, 百 濟 硏 究 第 50 輯 고구려도성은 평지 궁성인 안학궁과 북쪽 대성산성, 서쪽 청암리토성, 남쪽의 청호리토성과 고방산성 일대로 비정되는데, 청암리성 내부에 청암리사지(금강사지), 주변에 상오리사지와 다소 거리가 떨어진 남쪽에 정릉사지가 있다. 장안성(586년)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었는데, 북성에는 영명사 지, 중흥사지가 있고, 외성에는 평천리사지, 외부 남쪽에는 토성리사지가 소재한다. 중국의 경우, 북위의 도성인 낙양성 내성 내부에 영녕사, 건중사 등 12여 개소의 사찰이 있다는 기록 이 있으며, 성곽 바깥의 북망산과 숭산 일대에도 사찰이 소재한다. 동진, 남조의 건강성에는 사찰이 480여 개소~700여 개소 등의 수량이 다른 기록들이 있지만, 사찰이 많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대부분 곽성 내부 혹은 鍾 山 에 위치하고 있다. 수대의 대흥성은 사찰의 수와 이름이 도성 계획 속에 이미 있었으며, 주로 중부와 서북부에 집중 분포하는데, 이 지점은 시장과 주거지, 관청구역이 있다. 이처럼 중국은 사찰이 성문 주위 또는 큰 길 주위 교통의 요충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45) 許 眞 雅, 2009, 앞의 논문, p
156 도면 4. 부여지역 백제 주요시설 분포도 3. 사비도성에서 사찰의 역할 앞에서 말하였듯이 천도 전 도성 내 주요 시설들은 일부 마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도성 내 사찰들은 모두 6세기 중후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아직 조사되지 않은 사찰터들이 많지만, 수습된 자료들로 보면 그중 사비기 초기의 사찰이 확인될 가능성 은 적어 보인다. 단 도성 밖에 위치한 용정리사지는 유일하게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2 단계의 건물이 중복된 것으로 사비도성 건설을 위해 웅진기에 건립되었다는 견해(趙源昌 2003)가 있는 반면에, 이 시기 도성 안팎에서 고구려계 유물이 출토되는 점, 국호를 남 부여 로 변경한 점 등을 근거로 도성 건설을 위해 고구려 지배하에 있던 주민들을 사역에 동원하고 선주민이 거의 없던 사비도성에 거주하게 하였다고 보며, 고구려계 와당이 쓰인 건물은 종묘나 사직과 같은 특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보기도 했다(朴淳發 2005). 따 라서 용정리사지 하층 건물에서 출토된 고구려계 와당과 관련하여 이 사찰을 단순한 사원이 아닌 시조의 사당이나 국가적인 사묘와 관련된 건물지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46). 용정리사지를 포함하여 도성 밖 사찰들은 사비도성을 중심으로 그 외곽을 둘러싸는 형태 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도성 건설 계획단계에서부터 적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6세기 중후반대 도성 내 재정비와 함께 기획, 추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찰들은 교통, 관방 등 에 있어 요충지에 입지하고 있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근에 산성 및 생산시설과 동반 구조를 이루어 도성의 1차 방어선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사찰들이 도 46) 박순발, 2010, 앞의 책, p
157 성과 가까이 위치하는 반면에 금강사지는 부여지역에서 확인된 사비기 사찰 중 도성에서 가 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인근에 요지는 갖추고 있으나 동반 관계를 이룰만한 산성과의 거리 도 먼 편이다. 또 유구의 중심축이 다른 모든 유적들이 남북 중심축인 것과 달리 동서 중심 축을 가지며, 가람배치 및 사리장치에서도 독특한 점을 보이고 있어 이 시기 왕실이 관여했 을 여타 사찰과 차별을 둔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능산리사지(능사)는 위덕 왕( 昌 )의 누이가 성왕을 비롯하여 능산리고분군의 매장 주체에 대한 축원의 목적을 가지며, 왕흥사지는 위덕왕( 昌 )이 죽은 왕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왕흥사지는 그 위치와 규모로 보아 기원사찰인 동시에 호국사찰의 역할을 했던 왕실사찰이 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건립 주체가 왕실인 도성 부근 사찰과 달리 금강사지는 그 주체가 되는 세력이 왕실이 아닌 다른 귀족세력이거나, 그 성격이나 용도의 특수성을 가지 는 사찰로 생각된다. 한편 도성 내부에 위치한 사찰유적은 사찰 추정지를 포함한 경우, 부소산 남쪽 추정 왕궁 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바깥으로 돌아가는 듯하지만, 사찰의 정확한 위치와 시기는 물론 사 찰 여부도 명확하지 않은 실정이므로 이를 규명하기는 어렵다. 단 확인된 사찰유적이 6세기 중반 이후부터 7세기대로 이어지고 있어, 위덕왕대 도성 재정비와 함께 확장 공사한 대규모 성토대지에 사찰들을 건립하여 위민 및 왕권 강화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 된다. 이 중 가장 이른 단계로 보이는 군수리사지와 동남리사지는 미구릉지에 입지하고 있 는데, 이는 큰 공력이 필요없는 곳 즉, 대규모 토목공사를 요하지 않을 곳을 선점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성왕 사후(554년)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도모하기기 위해 단시간 내 필요한 불사 47) 로 여겨지며, 성왕릉과 기원사찰인 능사를 기획, 건립 준비 여건을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남리사지는 독특한 배치구조를 보이는데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귀족의 저택을 제공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6세기 중후반 즉, 위덕왕대에 도성 내부로는 왕궁 및 시설을 확충하고 도성 외부 로는 왕실 관련 중요 사찰 등의 건립,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대지 조성을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안정 및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다. 위 덕왕은 외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내부적으로 불교의 힘을 빌려 국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 력한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토대로 무왕대까지 대규모 사찰 조영 및 왕궁성 건설 등이 가능 했을 것이라 사료된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부여지역에서 확인된 사비기 사찰유적의 가람배치, 분포 양상 및 주요 시설과의 관계 등을 살펴보고 도성 운영에 있어서의 사찰이 가지는 역할 등을 검토해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비기 백제의 주요 사건과 기존 연구성과와 함께 사비도 성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표 4). 47) 관산성 패전(554년) 직후 위덕왕은 신라의 보복공세로 珍 城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三 國 遺 事 卷 一, 紀 異 一, 眞 興 王 ),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 기반을 재구축하기 위한 노력으 로 성왕의 유해 송환과 장례의식 준비, 성왕을 추복하기 위한 국가적인 공덕분사 창건 등 성왕의 위 업을 기리는 현창사업, 외침에 대한 군사대비책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梁 起 錫, 2004, 百 濟 威 德 王 代 의 對 外 關 係 - 對 中 關 係 를 중심으로-, 先 史 와 古 代 19, 韓 國 古 代 學 會, p.233.). 시기적으로 군수 리사지가 위덕왕 즉위 초 이러한 성왕을 기리는 일련의 작업과 함께 왕권 강화의 기반을 구축하는 시 발점이 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58 백제가 사비를 신도시로 정하고 도성을 건설하는 시기는 대체로 성왕대로 보고 있다. 웅 진 천도 후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고구려 남하의 위협과 자연 재해로 인한 막심한 피해, 호남 일대 등 남방 경영의 필요성 등의 이유로 도심 이동이 불가 피하였을 것이며 지체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짧은 시간 안에 사비로 천도하게 되 었을 것이다. 저습지대인 사비지역의 옛 지형을 감안한다면, 도성 건설을 위해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기록상 왕흥사의 조영기간(35년)을 참고하면, 천도 당시 도시 전반에 걸쳐 정비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선주민이 거의 없었던 이 지역 에서 초기에는 많은 시설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이에 필수적인 시설만 만들어 놓은 채 천도하여 점차적으로 도시 내부 시설을 확충하여 갔을 것이다. 이는 최근까지의 발굴 성 과에서도 어느 정도 증명이 되고 있다. 관산성 패전으로 성왕 사후, 위덕왕은 즉위 직후부터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의 기 반을 다지기 위한 사업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일환으로 본격적인 도시 건설을 위해 도성 내부의 생활공간 확장 및 도로 등 주요 시설 확충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와 함께 도성 안팎으로 사찰의 조영도 급격히 증가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특히 교통 및 도성 방어의 거점에 대규모 사찰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영하여 당시 위 덕왕이 국가 정책을 펴는 데 불교의 힘을 많이 활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확인되고 있는 부여지역의 백제 사찰이 대부분 위덕왕대 조영되었고 이후 법왕, 무왕대까지 활발한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찰의 조영은 도성의 정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당시 국가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향후 미조사된 사찰터에 대하여 그 실체가 밝혀진다면 도성 정비체계에서 사찰이 가지는 역할 및 의미를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159 표 32. 사비기 주요 연대표 재위 왕 연 도 역사적 사건 김성남 연구성과 이병호 개별 유적 대입 성왕 527 대통사 창건 538 사비 천도 541 임나부흥회의 梁 의 공장, 화사 요청 노리사치계, 왜에 불교 전 552 파 관산성전투 패전, 성왕 전 부소산성, 왕궁, 나성 등 초기 사비도성 건설 왕궁 배후 지원시설 배치 (공방 및 저장시설) 정림사 창건 정림사 창건 부소산성, 나성, 왕궁, 용정리사지 등 위덕 왕 554 사 진성전투 승전 왜에 체류하던 혜왕자 귀 556 국 567 능산리사지 목탑 건립 陳 에 견사 공방, 저장시설 복합화 성토대지 조성 도로 정비 구릉부 한정적 개발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능산리사지 北 齊 에 견사 577 왕흥사지 목탑 건립 北 周 에 견사 588 飛 鳥 寺 창건 왕궁 1차 확장 완료 (석축연못, 기와기단 배치, 마지구 도로 공방 폐기, 구아리사지(?) 건축) 왕흥사지
160 혜왕 598 법왕 599 무왕 600 왕흥사 창건 도성 내부 저습지 적극 개 발 왕궁 2차 확장 완료 612 사비도성 대홍수 관북리유적 마 바지구(매축대지) 의자 왕 630 사비궁 중수 634 왕흥사 낙성, 궁남지 639 제석사지 소실 미륵사지 석탑 건립 태자궁 화려하게 장식 왕궁 3차 확장 완료 도성 외곽 및 규암 일대 개발 미륵사지, 제석사지 정림사지? 660 백제 멸망
161 <참고문헌> 國 立 博 物 館, 1969, 金 剛 寺 - 扶 餘 郡 恩 山 面 琴 公 里 百 濟 寺 址 發 掘 報 告 -.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扶 餘 郡, 1993, 龍 井 里 寺 址.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06, 扶 餘 觀 音 밤골 寺 址 試 掘 調 査 報 告 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8a, 陵 寺 -부여 능산리사지 10차 발굴조사보고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8b, 백제폐사지 학술조사보고서 - 扶 餘 郡 篇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a,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發 掘 報 告 Ⅲ.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b,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發 掘 報 告 Ⅳ.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c, 王 興 寺 址 Ⅲ - 木 塔 址 金 堂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a, 동아시아 고대사지 비교연구Ⅱ -금당지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b, 扶 餘 軍 守 里 寺 址 Ⅰ - 木 塔 址 金 堂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扶 餘 定 林 寺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國 立 扶 餘 博 物 館 扶 餘 郡, 2000, 陵 寺 - 扶 餘 陵 山 里 寺 址 發 掘 調 査 進 展 報 告 書. 국립부여박물관, 2009, 扶 餘 臨 江 寺 址 1차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 金 吉 植, 2008, 百 濟 始 祖 仇 台 廟 와 陵 山 里 寺 址, 韓 國 考 古 學 報 69. 김낙중, 2011, 百 濟 泗 沘 期 寺 刹 의 伽 藍 配 置 와 造 營 의 特 徵 -최근의 발굴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 韓 國 上 古 史 學 報 第 74 號. 김성남, 2007, 백제 사비왕궁의 확대와 변모 과정 시론, 제57회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공개 강좌 발표문. 김성남 이미현, 2009, 2장. 日 帝 强 占 期 의 遺 蹟 發 掘 調 査 와 再 檢 討, 일제강점기의 사비 인 식, 재단법인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文 玉 賢, 2010, 百 濟 泗 沘 期 一 塔 一 金 堂 式 伽 藍 의 登 場 과 展 開, 忠 南 大 學 校 大 學 院 碩 士 學 位 論 文. 민경선, 2011, 백제 사비기 사찰의 가람배치 변화 양상에 대한 일고찰, 古 文 化 第 78 輯, (사)한국대학박물관협회. 朴 大 盛, 2004, 伽 藍 의 시기별 經 鐘 樓 의 配 置 特 性 에 관한 연구, 경상대학교대학원 석사학 위논문. 朴 淳 發, 2000, 泗 沘 都 城 의 構 造 에 대하여, 百 濟 硏 究 31. 朴 淳 發, 2003, 泗 沘 都 城 空 間 區 劃 豫 察, 湖 西 地 方 史 硏 究, 景 仁 文 化 社. 朴 淳 發, 2005, 泗 沘 都 城 의 景 觀 에 對 하여, 古 代 都 市 와 王 權, 서경. 박순발, 2010, 백제의 도성, 충남대학교출반부. 부여군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부여정림사지 정비복원고증 기본조사 1고증연구편. 森 公 章, 2006, 任 那 復 興 會 議 と 倭 國, 東 アジアの 動 亂 と 倭 國, 吉 川 弘 文 館. 梁 起 錫, 2007, 百 濟 의 泗 沘 遷 都 와 그 背 景, 百 濟 와 錦 江, 書 景 文 化 社. 梁 銀 景, 2009, 中 國 佛 敎 寺 刹 의 검토를 통해 본 百 濟 泗 沘 期 佛 敎 寺 刹 의 諸 問 題, 百 濟 硏 究 第 50 輯. 이남석, 2010, 考 古 資 料 를 통한 百 濟 泗 沘 遷 都 의 再 認 識, 百 濟 文 化 第 四 十 三 輯, 公 州 大 學 校 百 濟 文 化 硏 究 所. 李 炳 鎬, 2001, 百 濟 泗 沘 都 城 의 造 營 과 區 劃, 서울 大 學 校 大 學 院 國 史 學 科 文 學 碩 士 學 位 論 文
162 李 炳 鎬, 2008, 扶 餘 陵 山 里 寺 址 伽 藍 中 心 部 의 變 遷 過 程, 韓 國 史 硏 究 143. 李 炳 鎬, 2011, 百 濟 定 林 寺 式 伽 藍 配 置 의 展 開 와 日 本 의 初 期 寺 院, 百 濟 硏 究 54, 충남 대학교백제연구소. 李 裕 群, 2009, 중국 가람배치의 변화 및 백제에 미친 영향,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백제, 한얼문화유산연구원 개원5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재단법인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2011, 부여 사비왕궁지구 발굴조사 1차 자문위원회의 자료집. 田 中 俊 明, 1990, 王 都 로서의 泗 沘 城 에 대한 豫 備 的 考 察, 百 濟 硏 究 21 輯. 정자영, 2010, 6~7세기 백제 사찰 내 강당 좌우 건물지의 변천과정 고찰, 건축역사 연구 제19권 6호(통권73호). 趙 源 昌, 2003, 百 濟 熊 津 期 扶 餘 龍 井 里 下 層 寺 院 의 性 格, 韓 國 上 古 史 學 報 42. 許 眞 雅, 2009, 성토대지 조성을 통해 본 사비도성의 공간구조 변화와 운용, 湖 西 考 古 學 第 22 輯. 黃 仁 鎬, 2011, 泗 沘 都 城 의 市 街 地 區 劃 硏 究, 慶 州 史 學 第 34 輯, 慶 州 史 學 會
163
164
165 사비기 기와 생산시설과 생산체계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터를 중심으로- 문옥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1. 머리말 2.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 현황 3.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 분석 4. 사비기 기와 생산체계의 일단 5. 맺음말 1. 머리말 백제 사비기 기와 생산시설에 대한 연구는 발굴조사에 따른 기초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심 도있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연구는 지표조사에서 수습된 기와와 건물지 출토 기와 의 비교를 통해 생산지와 소비지를 상정하고 수급형태를 추정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48). 정암리가마터와 청양 왕진리가마터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백제 기와 가마의 구조적 특 징이 대략적으로 파악되었으나, 백제시대 가마의 변천과정 이해를 위해 3세기대부터 조영된 토기가마의 변화상을 추적한 통시적 관점의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사비기는 사비도 성 주변에 사찰 등 기와 건물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에 따른 막대한 기와수요가 수반되 는 시기였기 때문에 전 시기와는 다른 생산설비와 생산체계가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고의 목적은 막대한 기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사비기 생산설비의 구조적 특징과 생산체 계의 일단을 추정하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한 작은 시도로서, 단계적인 축조와 폐기가 이루 어진 양상이 확인되는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군을 중심으로 구조적 특징과 변화양상을 추 적하며, 이러한 생산설비를 운영하였던 사비기 생산체계의 특징을 고찰해보도록 한다. 2.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 현황 48) 김성구, 1990, 부여의 백제요지와 출토유물에 대하여 百 濟 硏 究
166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터에서는 16기의 백제시대 기와 가마가 확인되었으며, 구릉 남 쪽지대부터 기와 가마가 축조되기 시작하여 북쪽으로 가면서 축조와 폐기를 반복했던 것으 로 추정된다. 1) 2호 가마 14호 가마 북편에 위치하고 있는 지하식 등요( 登 窯 )로 14호 가마 북편 일부를 파괴하고 조성되었다. 아궁이와 연소실 내부는 석재를 평적하여 시설하였으며, 연소실과 소성실의 경 계에 석재와 기와로 조성된 단이 형성되어 있다. 소성실의 내부 조사 결과, 1차 축조 이후 4차례에 걸친 소성실( 燒 成 室 ) 및 연소실( 燃 燒 室 )의 개 보수 흔적이 확인되었다. 1차 축조 된 소성실은 풍화암반을 굴착하여 무단식으로 조성하였고, 2차 축조시에는 연소실 단을 그 대로 이용하되 1차 조업면 상부에 기와를 적재하여 와단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3차 축 조시에는 40cm가량 조업면을 높여 무단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연소실 단을 1 2차 연소실 단에서 소성실쪽으로 30cm 이동하여 마련하였다. 4차 축조시에는 3차 축조시보다 연소실 단을 20cm 높이고 경사도를 15 로 하여 무단식 조업면을 조성하였다. 5차 축조시에는 3 4차 소성실보다 연소실쪽으로 80cm가량 이동하여 연소실 단을 마련하였다. 조업면에는 깨진 기와를 평적하여 와열을 구축하였으며, 5차 축조가 이루어지면서 연소실 내부 및 아궁 이 양 측면에 석재를 이용한 석축시설이 부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성실 후벽 중앙에는 직 경 30cm 크기의 원형 배연구( 排 煙 口 )가 시설되어 있다. 2) 3호 가마 2개의 아궁이와 2개의 굴뚝, 구들식 소성실로 이루어진 지하식 평요( 平 窯 )로 남편에 위 치한 12호 및 13호 가마가 폐기된 이후 조성되었다. 아궁이는 분리벽으로 나누어진 2개의 연소실과 통하도록 동편과 서편에 조성되어 있는데 서편은 풍화암반을 굴광하여 조성하고 동편은 받침돌과 이맛돌을 이용해 만들었다. 아궁이 안쪽은 분리벽으로 이루어진 연소실이 위치하는데, 분리벽은 30cm까지는 풍화암반이며, 그 위에 2~5단의 석축을 쌓아 조성하였 다. 자연석으로 쌓아 불규칙한 석벽의 바깥면은 짚을 섞은 점토로 발라 마무리한 것으로 보 인다. 소성실은 자연석을 세워 받침돌을 만들고 그 위에 넓은 판석을 평평하게 이어 깔아서 구들식 바닥으로 조성하였는데, 구들 아래는 4개의 고래가 남북방향으로 조성되어 연소실에 서 북쪽으로 경사져 올라가면서 소성실 북벽의 배연구로 연결되는 구조이다. 고래는 일직선 으로 3개의 반원형 배연구와 연결되어 있는데, 서쪽에서 두 번째 고래만이 끝부분에서 휘어 져 첫 번째 고래와 합쳐져 서쪽배연구로 연결되어 있다. 구들장 상면은 점토를 발라 구들장 사이의 틈을 메우면서 정면하여 연기나 불길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북벽 소성실에 반원형으로 뚫린 배연구는 평면 방형인 2개의 굴뚝으로 연결되어 있다. 방형의 굴 뚝의 남편은 풍화암반이며, 북편은 석재를 쌓아 구축하였다. 요전부( 窯 前 部 )는 아궁이 너비 6.5m, 길이 6m로 넓게 장방형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아궁이 앞 약 1m 지점에서 기둥구멍으 로 추정되는 3개의 수혈이 2~2.5m 간격으로 확인되었다. 3) 4호 가마 6호 가마의 서편에 위치해 있는 지하식 등요로 아궁이와 배연구, 소성실 벽체가 결실되어 있다.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60cm의 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장방형 석재는 2~3단 가량 적재하고 그 상부에 기와를 8단 평적하여 조성하였다. 내부 조사 결과, 이 불턱의 40cm 하
167 부에서 또 하나의 연소실 바닥과 풍화암반으로 조성된 불턱이 확인되어 보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소성실은 무단식 구조로, 바닥에는 암키와편이 깔려있었으며 소성실 중앙 에는 분할하지 않은 원통형 암키와가 세워져 있었다. 4) 5호 가마 8호 가마의 동편에 위치한 지하식 등요로 남편의 10호 및 11호 가마가 폐기된 이후 조 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궁이는 석재를 평적하여 축조하였고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석재 와 기와를 평적하여 구축한 40cm높이의 단이 조성되어 있다. 소성실은 계단식구조로, 깨진 기와편을 이용하여 30cm간격으로 8단을 시설하였다. 단의 높이는 15cm이며, 각 단마다 평 기와를 3~4단 정도 평적하여 조성하였다. 소성실 후벽 중앙에는 원형의 배연구가 시설되어 있다. 5) 6호 가마 3호 가마 북편, 4호 가마와 7호 가마 사이에 위치해 있는 지하식 등요이다. 아궁이는 유 실된 상태이며, 연소실에는 소성실과의 사이에 65cm의 단이 조성되어 있다. 불턱은 석재를 평적하여 시설하고 상부 20cm가량은 기와를 평적하여 조성하였다. 연소실 바닥은 평기와편 이 깔려있었는데, 하부 10cm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확인되어 연소실을 2차에 걸쳐 조성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소성실은 무단식의 구조로, 내부에는 평기와가 깔려있었다. 소성실 후벽 중앙에는 직경 40cm의 원형의 배연구가 시설되어 약 2.3m 높이의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었 다. 6호 가마의 재층은 3호 가마의 배연구를 덮고 있고, 6호 가마의 소토층 위에 7호 가마 의 아궁이 바닥면이 한 단 높게 마련되어 있는 양상이기 때문에 3호 가마와 7호 가마보다 먼저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 7호 가마 픙화암반을 굴광하여 조성한 지하식 가마로 3호 가마에서 북편으로 약 1.5m 떨어져 있다. 3 호 가마 폐기 이후 그 북편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마 내부에는 벽체 및 천장편이 무너진 암반층과 함께 두껍게 퇴적되어 있었다. 아궁이에는 60cm 내외의 장방형 석재가 수직으로 설치 되어 있는데 한쪽 벽에만 잔존하고 있다.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단이 형성되어 있는데 1 차 축조시에는 암반을 깎아 약 50cm 높이의 단을 조성하였지만 소성실의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2차 축조시에는 20cm, 3차 축조시에는 40cm가량 높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소성실의 보수와 관 련되어 연소실과 아궁이에도 3개의 재층이 퇴적된 양상을 보인다. 1차 축조시의 조업면은 22 의 경사도를 가지며, 풍화암반을 굴착하여 만든 무단식 구조이 다. 2차 축조시에는 1차 축조한 연소실 단에 석재 1단과 기와를 적재하여 단을 높였으며 조업 면의 경사도를 20 로 조정하였다. 조업면은 무단식으로 다량의 깨진 평기와가 산포되어 있었 다. 3차 축조시에는 연소실 단에 석재를 3단 쌓아 단을 높이고 연소실 단 정면에 짚을 섞은 점토를 발라 정면하였다. 조업면은 경사도를 13 로 완만하게 조정하였으며 바닥에 깨진 평기 와를 가마의 단축방향으로 열을 맞춰 깔아 5열의 와열을 마련하였다. 가마 내부의 벽체에 짚 을 섞은 점토가 발라져 있어 여러 차례 가마 내부를 보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배연구는 암반층 을 뚫어 소성실 뒷벽의 하단 중앙부에 방형으로 1개 마련하였는데, 가마 밖으로 이어지는 부분 은 평면 반원형으로 시설하였다
168 7) 8호 가마 5호 가마의 서편에 위치한 지하식 등요로, 아궁이는 풍화암반을 굴광하고 양쪽에 받침돌과 이맛돌을 올려 조성하였다. 연소실은 소성실과의 사이에 풍화암반을 깎아 만든 50cm가량의 단 이 조성되어 있었다. 소성실은 무단식의 구조로, 바닥에는 평기와를 정연하게 깔아 와열을 조 성하였다. 와열은 20~30cm간격으로 11열이 형성되어 있다. 배연구는 소성실의 후벽 중앙에 방형으로 시설되어 있는데, 풍화암반을 원형으로 굴착한 후 주변을 돌과 기와편으로 메워 시설 한 것으로 보인다. 8) 9호 가마 11호 가마의 서편에 위치한 지하식 등요이다. 아궁이는 유실되어 남아있지 않으며, 연소 실과 소성실 경계에는 풍화암반으로 조성된 단이 약 60cm 높이로 조성되어 있다. 소성실은 무단식으로 바닥에는 몇몇의 기와편이 산재하고 있었다. 소성실 후벽 중앙에는 방형의 배연 구를 시설하였는데, 배연구 상면은 판석이 올려져 있었다. 9호 가마 서편에는 2.4m 크기의 원형구덩이가 조성되어 있었다. 9) 10호 가마 11호 가마의 북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지하식 등요이다. 11호 가마 아궁이의 폐쇄층 상면에 10호 가마의 조업과 관련된 재층이 퇴적되어 있어 11호 가마의 폐기 이후에 조영된 것으로 추 정된다. 가마의 서벽은 서북편에 위치한 2호 및 5호 가마의 조성과정에서 훼손되었다. 아궁이는 대부분 유실되고 바닥면만 확인되는데, 양 측면의 석재시설 유무는 확인할 수 없 다. 연소실과 소성실의 경계에는 65cm 높이의 단이 시설되어 있는데, 기와나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풍화암반을 굴착하여 사용하였다. 소성실은 무단식이며, 바닥에는 다량의 깨진 기와가 흩어 져 있었다. 소성실의 뒷벽 중앙에는 방형의 배연구가 시설되어 있다. 10호 가마와 관련된 재층 이 한 층만 확인되고 가마 내부에 보수 흔적도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짧은 기간 동안 운 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 11호 가마 14호 가마의 서북편에 위치하고 있는 지하식 등요이다. 소성실의 뒷벽 일부가 11호 가마 북편 에 위치한 8호 및 5호 가마의 운영과정에서 파괴된 상태이다. 토층양상으로 보아 14호 가마의 아궁이가 폐쇄된 이후에 11호 가마의 조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궁이는 별다른 시설 없이 반원형으로 조영되어 있는데, 아궁이 앞면에 40cm 내외의 다듬어 진 석재가 놓여있어 아궁이에 석축시설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40cm 높이의 단이 마련되어 있는데 기와나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풍화암반을 깎아 시설하였다. 소성실은 무단식이며 바닥에 깨진 기와가 흩어져 있었다. 10호 가 마와 동일하게 조업과 관련된 재층이 한 층만 확인되고 내부에 보수 흔적이 없어 조업기간이 비 교적 짧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1) 12호 가마 풍화암반을 굴광하여 조성한 지하식 등요이다. 3호 가마의 회구부( 灰 丘 部 ) 제토 시 소성실 일부가 노출되면서 존재가 확인되었다. 소성실 뒷벽의 천장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잔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좌우에 인접한 15호 13호 가마, 그리고 서쪽으로 7m 가량 떨어진 16호 가마
169 와 더불어 가장 이른 단계의 기와 가마로 추정된다. 아궁이는 반원형으로 풍화암반을 굴광하여 별다른 시설 없이 구축하였다. 최초 축조시에는 잔존하는 아궁이보다 약 20cm 가량 더 넓은 반원형이었으나 축소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 출 당시 아궁이는 장방형의 석재와 기와편으로 폐쇄되어 있는 상태로 확인되었는데, 조업이 종 료 된 후 인위적으로 폐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소실은 소성실과의 사이에 단이 형성되어 있는데, 단의 하부 약 37cm 높이까지는 굴착한 풍화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상부 11cm는 기와를 3 4매 정도 쌓아 마무리하였다. 소성실 은 무단식이며 깨진 기와편들이 조업면 상부에 흩어져 있었다. 소성실의 양 벽은 바닥에서 직각으로 올라가다가 한번 꺾여 아치형의 천장으로 이어지는 형 태이다. 뒷벽 중앙에는 배연구가 시설되어 있는데, 평면 형태는 원형이며 배연구 양 옆에 25cm 크기의 석재를 수직으로 세워놓았다. 비슷한 크기와 형태의 석재가 가마 뒷벽 노출시 확인되기 도 하였는데, 소성실 천장이 일부 무너지면서 배연구에 시설되었던 석재들이 탈락된 것으로 추 정된다. 요전부는 아궁이를 중심으로 동서 1m지점에서 직각을 이루며 남편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아궁 이 양 옆의 동서 모서리에는 직경 24cm의 주공( 柱 孔 ) 2개가 확인되어 가마 앞에 지붕시설 등 상부구조물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호 가마는 13호 및 15호 가마 회구부와의 토층조사 결과, 15호 가마 폐기 이후 조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3호 가마와 관련한 재층이 12호 가마의 아궁이를 막은 석재 및 기와 앞면에 퇴적되어 있어 15호 12호 13호 가마의 순으로 폐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 13호 가마 13호 가마는 12호 가마의 동편에 인접한 지하식 등요이며 가마의 벽체 및 천장이 풍화암반 층과 함께 무너져 내린 상태로 확인되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조업면을 가진 소성실의 뒤쪽 부 분은 무너진 벽체 외에도 최종 조업면까지 삭토된 상태인데, 북편에 인접한 3호 가마의 요전부 조영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궁이는 양 측면의 풍화암반을 굴광하고 석재를 평적하여 조성하였는데, 3개의 석재가 잔 존하고 있다. 아궁이의 석재시설은 13호 가마의 최초 조업단계부터 시설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13호 가마의 아궁이는 3개의 재층이 퇴적된 양상으로, 최종 조업단계의 아궁이 바닥 면인 황갈색마사토층에 석재가 시설되어 있어 최종 조업단계에서 그 이전의 아궁이보다 너비가 축소되어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소실은 소성실과의 사이에 풍화암반을 굴착하여 만든 60cm의 단이 마련되어 있다. 노출 당시 소량의 기와가 단 상부에 놓여 있었는데, 조업면과 약 20cm의 높이차가 있어 단이 져 있 는 양상이기 때문에 기와편을 적재하여 조업면과 일정한 각도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성실은 무단식으로 1차 축조 이후 한 차례의 개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축조시의 소성실의 경사도는 22 이며, 2차 축조시에는 경사도를 약 30 로 높인 것으로 보 인다. 연소실 단과 조업면 앞쪽의 높이는 그대로 유지하고 뒷벽쪽으로 갈수록 높게 조정하여 경사도를 높였는데, 13호 가마의 소성실이 다른 기와 가마에 비해 길이가 긴 것을 감안하면 화 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성실의 2차 조업면과 연소실의 최상부 재층 상면에서는 대상파수부호 등이 출토되어 2차 조 업단계에서 기와류 외에 토기류의 소성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요전부는 아궁이 양 측면 약 50cm지점에서 직각을 이루며 남편에 마련되어 있는데 아
170 궁이에서 앞쪽으로 1m 떨어진 곳에 직경 30cm 내외의 주공 2개가 확인되었다. 최종 조업단계 의 재층이 12호 가마 아궁이 폐쇄층 상부에 퇴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적 남편에 위치한 3 기의 가마 중 가장 늦은 시기까지 조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3) 14호 가마 14호 가마는 15호 가마의 북쪽으로 1.5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하식 등요이다. 소성실의 조업면과 동쪽 벽체 일부만 잔존할 뿐 가마 북편에 위치하는 10호 및 2호 가마의 조영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된 상태이다. 14호 가마는 남편에 위치한 15호 가마의 소성실 북편 일부를 파괴하 고 조성되었으며, 가마 내부에는 벽체편, 황갈색마사토층, 11호 가마의 조업과 관련한 재층이 차례로 퇴적되어 있었다. 아궁이는 대부분 파괴되어 정확한 양상을 알 수 없지만 양쪽 측면에 단단하게 소결된 면이 남 아있어 별다른 석축시설 없이 아궁이를 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궁이는 가마 폐기 당시 석재 및 기와 등으로 입구를 폐쇄한 것으로 보인다. 연소실은 소성실과의 경계에 단이 시설되어 있는데, 1차 축조 이후 개 보수 한 것으로 추 정된다. 1차 축조시 연소실의 단은 풍화암반을 굴광하여 조성한 것으로 높이는 약 70cm이다. 이후 1차 축조된 연소실의 단 앞면에 30cm내외의 장방형 석재를 수직으로 세우고 그 안쪽을 황갈색사질점토로 채워 새로운 연소실 단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석재 상면에는 잔존상태가 양 호한 평기와를 평적하고 그 상면과 앞면에 점토를 발라 보강하였다. 하지만 단의 상부와 하부 의 축조기법이 다를 뿐 아니라, 석재 앞면에는 1차 축조시의 연소실 바닥 상면으로 기와편이 다량 혼입된 황갈색사질점토층이 두텁게 쌓여있고 그 상부에 평기와 평적 후 보강한 점토가 소결되어 있어 장방형석재로 이루어진 단의 하부와 평기와가 평적된 단의 상부의 사용시점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단을 구성하는 평기와 중에는 3호 가마에서 출토된 삼각돌기식 연화문수 막새도 있다. 소성실은 무단식으로 조업면의 보수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깨진 기와가 소량 흩어져 있었다. 14호 가마의 회구부에서는 치미, 전 등 다량의 와제품이 확인되어 기와류 외에 다양한 제품을 함께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 15호 가마 12호 가마에서 서쪽으로 약 1.5m 떨어져 위치한 지하식 등요이다. 가마 북쪽에 14호 가마가 조성되면서 소성실의 뒷벽쪽 일부와 배연구가 유실되었다. 가마 내부는 벽체 및 천장이 무너져 연소실의 재층 및 소성실의 조업면 상부에 퇴적된 상태였다. 무너진 벽체 상부에는 15호 가마 폐기시 매립했던 것으로 보이는 암갈색사질토층이 두껍게 퇴적되어 있었으며, 그 상부에는 14 호 가마와 관련된 재층이 퇴적되어 있었다. 아궁이는 입구 양 측면에 31 36cm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쌓았는데 석축은 현재 한 단만 잔존하 고 있다.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단이 마련되어 있다. 연소실 바닥에서 37cm 높이까지는 풍 화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상부 30cm 가량은 깨진 평기와를 평적하여 단을 높였다. 소성실 은 단을 마련하였는데, 풍화암반을 굴광하여 만든 단이 8단 잔존하고 있다. 소성실 남편의 3단 가량은 깨진 기와가 다량 평적되어 있는 양상이지만 그 북편으로는 기와가 거의 남아있지 않 았다. 요전부는 아궁이 양 측면 약 1m지점에 직각을 이루며 남편으로 마련되어 있는데, 아궁 이에서 45cm 앞면에 방형 주공이 확인되었다. 요전부의 활용과 관련한 상부구조물이 설치되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토층양상으로 보아 15호 가마는 동편에 위치한 12호 및 13호 가마 보다 가장 먼저 조업이 완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1 15) 16호 가마 풍화암반을 굴광하여 조성한 지하식 등요로 15호 가마에서 서쪽으로 약 6m 떨어져 아궁이 가 위치해 있다. 연소실 및 아궁이의 재층 상부에는 천장 및 벽체편이 무너진 풍화암반토와 함 께 두껍게 퇴적되어 있었다. 16호 가마의 소성실 내부에는 소성 당시의 평기와가 적재되어 있 었는데 적재된 기와 상면에는 무너져 내린 벽체 일부와 북편에 위치하는 17호 가마의 조업과 관련한 재층이 퇴적되어 있었다. 아궁이는 양 측면에 30cm 크기의 석재를 수직으로 쌓아 시설하였는데, 한쪽 측면만 잔존하 고 있다. 아궁이에는 4개의 재층이 퇴적되어 있었는데, 석재시설은 최종 조업단계에서 시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소실과 소성실의 경계에는 60cm 높이의 단이 시설되어 있다. 최종 조업 단 계의 연소실 바닥에서부터 33cm 높이까지는 풍화암반이며, 그 상부에는 평기와를 7단 가량 평 적하여 단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소성실은 무단식으로 깨진 기와를 깔아 와열을 조성하였다. 소성실은 1번 이상의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최종면에서 완형의 기와가 적재된 상태 로 노출되었다. 적재방법은 소성실 상면에 수키와를 수직으로 세워 적재하되 앞줄과 뒷줄의 적 재방향을 반대로 하여 앞줄과 뒷줄에 교대로 포개어지도록 놓아가며 쌓는 방식이 채용되었다. 수직으로 세워 적재한 후에는 상면의 남은 공간에 수키와를 수평으로 평적하였는데, 아랫줄과 윗줄을 서로 반대방향으로 하여 포개어지도록 쌓았다. 암키와는 한쪽방향으로 포개어 소성실 동벽 빈 공간에 적재하였다. 소성실 내에 적재된 기와는 대부분 소성이 다 이루어지지 못한 상 태였다. 한편 소성실 뒷벽쪽에는 적재된 기와가 존재하지 않고 일부는 조업면이 파괴되고 배수 관이 시설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후술할 17호 가마 조영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전부는 아궁이 양 측면의 1m 지점에서 직각을 이루며 남편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아궁이 앞면에서 약 1m 떨어진 지점에서 직경 30cm의 주공이 확인되어 조업과 관련한 상부시설이 존 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 17호 가마 16호 가마에서 약 1m 북쪽에 위치한 지하식 등요이다. 북편에 위치하는 14호 및 11호 가마의 축조과정에서 가마의 벽체 및 소성실 뒷벽쪽 일부가 파괴되었다. 가마의 내부에는 연소실과 아 궁이 상부에 퇴적된 재층 외에 벽체 및 천장편, 17호 가마 폐기시 매립한 적갈색사질점토층이 두껍게 퇴적되어 있었다. 17호 가마를 조영하기 이전에 남북방향의 배수관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17호 가마 앞면 에 위치한 16호 가마의 소성실 뒷벽쪽 일부를 굴광하고 수키와를 위 아래로 마주보게 하여 시 설하였다. 가마의 아궁이는 양쪽 측면에 석재를 적재하여 만들었는데, 풍화암반을 굴광하여 석 재를 쌓고 채움한 흔적이 확인된다. 아궁이에는 4차례에 걸쳐 재층이 퇴적되어 있었다.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단이 시설되어 있는데, 1차 축조시에는 잔존하고 있는 단의 앞면 35cm 지점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2차 축조시에는 연소실을 확장하면서 소성실 쪽으로 35cm 이동하여 60cm 높이로 마련하였다. 아궁이와 연소실에 시설된 석재는 이 시기에 부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차 축조시에는 20cm 크기의 석재를 2차 축조된 연소실 단 위에 평적하여 연소실 단을 높이고 그 상면과 앞면에 짚이 섞인 점토를 발라 정면한 것으로 보인다. 소성실은 무단식으로 연소실 단이 높아짐에 따라 소성실의 높이와 경사도도 조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전부에는 아궁이의 양 측면 과 앞면에서 3개의 주공이 확인되었다. 직경 40 50cm이며 주칸거리는 동서 및 남북 2m이다. 한편 17호 가마의 동편에는 풍화암반층을 파내 만든 너비 80cm, 높이 70cm의 굴 시설이 확인되 었다. 내부에서는 17호 가마의 조업과 관련된 재층이 퇴적되어 있을 뿐 별다른 흔적이 확인되지
172 않았다. 굴을 뚫는 과정에서 서편에 위치한 15호 가마의 벽체가 일부 뚫리기도 한 것으로 보 아, 새로운 가마를 조성하기 위해 굴착하다가 15호 가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대로 폐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소실 소성실 연도 가 마 명 가 마 형 태 아 궁 이 형태 크기 (cm) 길이 너비 비 단 벽 높 이 (cm) 단 벽 조 성 방 법 형태 크 기 (cm) 길이 너비 비 경 사 도 ( ) 소성 면 시설 연 도 수 형 태 측정 연대 무단식 2호 등요 석재 터널형 165* 285 1: 석재, 기와 장방형 200* 285 1: 유단 식 무단식 1? 원형 와열 3호 평요 암반 석재 터널형 301* 132 1: 석재, 기와 장방형 300* 141 1:0.5 4 구들식 3 2 반원형 원형 610~ 650 4호 등요 - 역제형 136* 288 1: 석재, 기와 장방형 165* 250 1: 무단식 - - 5호 등요 석재 터널형 203* 166 1: 석재, 기와 장방형 236* 295 1: 유단식 와단 1 반원 형 원형 620±30, 660~ 730 6호 등요 - 역제형 156* 193 1: 석재, 기와 장방형 167* 277 1: 무단식 1 반원형 원형 7호 등요 석재 터널형 180*1 80 1:01 80 석재, 기와 장방형 170* 180 1: 무단식 와열 1 방형 원형 650~ 700 8호 등요 석재 터널형 194* 164 1: 암반 장방형 246* 301 1: 무단식 와열 1 방형 원형 9호 등요 - 터널형? 152* 197 1: 암반 제형 172* 212 1: 무단식 1 방형 원형 10호 등요 - 터널형 167*1 98 1: 암반 제형 181* 235 1: 무단식 1? 방형 11호 등요 암반 터널형 158* 153 1:1 60 암반 제형 158* 220 1: 무단식 호 등요 암반 터널형 106* 169 1: 기와 제형 135* 284 1: 무단식 -? 원형 600~ 호 등요 석재 터널형 156*1 63 1:1 43 암반 타원형 177* 465 1: 무단식 호 등요 석재 터널형 178* 163 1: 석재, 기와 제형 또는 타원형 201* 177 이상 1:0.9 이상 20 무단식 호 등요 석재 터널형 185* 230 1: 암반, 기와 제형 또는 타원형 209* 304이 상 1:1.5 이상 24 유단식 암반단 호 등요 석재 터널형 192* 255 1: 암반, 기와 제형 또는 타원형 188* 278 이상 1:1.5 이상 12 무단식 와열 - 580~ 640, 660~ 호 등요 석재 터널형 168* 204 1: 석재 제형 또는 타원형 180* 115 이상 1:0.6 이상? 무단식 - 610~ 650 표 1.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 속성표
173 3.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 분석 1) 관찰속성과 형식분류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는 모두 구릉을 횡혈식으로 굴착하여 축조된 지하식 가마이다. 각각의 규모와 세부적인 구조에는 차이가 있지만, 화구를 통해 전달된 화기가 불턱을 넘어 소성실의 천장을 따라 이동하면서 소성실 후벽 하단 배연구를 통해 굴절되어 밖으로 배출되 는 반도염식( 半 倒 焰 式 )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각 가마의 구조적 속성 은 연소실과 소성실, 연도부로 나 누어 분석할 수 있는데, 연소실의 형태와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의 단 벽 조성방법, 소성실의 형태와 길 이 너비비, 소성면 구축방법, 연도 부의 개수와 형태 등을 관찰속성으 로 하여 표 2와 같이 분류할 수 있 었다.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는 좁은 구릉지대 안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표 2. 기와 가마 관찰속성 모식도 여러 단계에 걸쳐 축조와 폐기가 반복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와 가마의 구조 변화를 추적하는데 더없이 용이한 조건을 갖추고 있 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비기의 짧은 시간 동안에 보이는 변화는 혁신적인 기술의 유입과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그 변화의 폭이 크지 않을 것이며, 변화의 축도 일률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각각의 기와 가마 축조는 기와 수요 등 당시의 사회적 요구와 축조집단의 기술적 전통, 당시의 기와 생산 기술 등이 복합 된 형태로 구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축조된 기와 가마의 구조변화 에 대한 해석에는 위와 같은 다양한 변수가 고려되어야 한다.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에서 단계별 변화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속성으로서 소성실 경 사도와 소성실 형태, 소성실 너비와 길이비, 연소실 형태를 들 수 있는데, 이들 속성을 조합 하여 6가지 형식으로 구분하였다. 먼저 소성실의 경사도에 따라 등요와 평요로 구분하였다. 소성실의 경사도는 10 를 기준으로 그 이상을 등요로, 그 미만을 평요로 구분하였는데, 일 반적으로 평요는 소성실의 너비와 길이비가 1:1.5를 넘지 않고 있어 소성실의 길이가 너비 에 비해 많이 크지 않다. 등요의 소성실의 형태는 타원형(A)과 제형(B), 장방형(C)이 확인 되는데, 제형의 경우 소성실 너비와 길이비에 따라 1:1.5이상(1)과 1:1.5미만(2)으로 분류 가 가능하다. 장방형은 연소실이 터널형인 것(a)과 역제형(b)인 것으로 구분된다. 한편, 왕 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터에서 평요는 1기가 확인되었는데, 장방형(C)의 평면을 취하고 있 으며 소성실의 너비가 길이보다 2배 더 길어 아궁이가 2개 채용되고, 소성실 후벽에는 3개 의 배연공이 뚫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174 소성실 경사도 등요 (Ⅰ) 소성실 형태 타원형 (A) 제형 (B) 소성실 너비:길이비 연소실 형태 형식분류 해당유구 - 터널형 ⅠA 13호 1:1.5이상(1) 터널형 ⅠB1 12호 1:1.5미만(2) 터널형 ⅠB2 9호,10호,11호 장방형 (C) - 터널형(a) ⅠCa 2호, 5호, 7호 역제형(b) ⅠCb 4호, 6호 평요 (Ⅱ) 장방형 (C) - 터널형 ⅡC 3호 표 35.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 형식분류표 2) 구조변화 가마의 여러 속성 중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의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양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소성실의 형태이다. 소성실 형태를 위시하여 마련된 가마의 형식 은 가마 운영시기의 상대적인 순서를 고려하면 ⅠA형 및 ⅠB1형이 가장 먼저 축조되었으 며, 이어서 ⅠB2및 ⅡC형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늦은 단계에는 ⅠC형이 축조된 것 으로 판단된다. 이를 단계적으로 표현하면 다음 표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단계 형식 시기 6세기 7세기 해당유구 1단계 ⅠA, ⅠB1 16호, 15호, 12호, 13호 2단계 ⅠB2, ⅡC 17호, 9호, 10호, 11호, 3호 3단계 ⅠC 2호, 5호, 8호, 4호, 6호, 7호 표 36.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 형식별 단계설정표 왕흥사지 기와 가마 중 가장 이른 단계에는 16호가 운영되었으며, 이어서 15호 및 12호, 13호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16호 가마와 15호 가마는 소성실 후벽쪽이 결실되어 정 확한 형태를 파악할 수 없지만 후벽으로 가면서 점차 너비가 작아지는 것으로 보아 타원형 이나 제형일 가능성이 크다. 소성실의 너비와 길이비도 1:1.5 이상이 되기 때문에 제형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길이가 긴 ⅠB1형일 가능성이 높다. 제형과 타원형간에는 타원형이 보다 이른 시기에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3세기 대부터 조영된 진천 삼룡리 및 산수 리 가마를 비롯하여 6세기대의 사비기 부여 중정리 및 청양 학암리가마 등 이른 시기부터 사비기까지 지속적으로 채용된 형태로 여겨진다 49). 타원형에서 제형으로의 변화는 왕흥사 지 동편 기와 가마군과 사정이 비슷한 정암리가마터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고 있다. 타원형 49) 최경환, 2010, 錦 江 流 域 百 濟 土 器 窯 址 의 構 造 와 生 産 體 制 에 대한 一 硏 究, 韓 國 考 古 學 報
175 의 소성실을 채용하고 있는 9호 가마를 폐기하고 제형으로 축조된 5호 및 6호 가마가 운영 된 양상이 확인된다. 5호 및 6호 가마보다 구릉 남쪽에 위치한 7호 및 8호 가마도 타원형 의 형태를 띠고 있어 단계별 소성실 형태변화를 추정해 볼 수 있다 50). 왕흥사지의 각각의 가마는 독립된 요전부를 마련하기 위해 아궁이 앞 주변공간을 형태로 굴착하고 양 측면에 기둥을 세워 상부구조물을 구축한 양상이 확인된다. 이 때문에 기와 가마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하더라도 정암리 B-2호 및 3호, B-5호 및 6호 가마처럼 각각의 가마가 요전부를 공유하면서 동시에 운영되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각 가마가 어느 정도의 시기차를 두고 운영되었다 하더라도 타원형을 띠는 13호 가마가 제형 을 띠는 12호 가마보다 늦은 시기까지 운영된 양상이 확인되기 때문에 소성실의 형태가 타 원형을 띠는 것과 제형을 띠는 것은 상당기간 공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능산리사 지 서편 기와 가마터에서도 제형 소성실을 가진 가마가 먼저 축조되어 운영된 후 타원형 가 마가 그 상면에 축조된 예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51). 한편, 제형의 소성실을 가진 기와 가마는 가장 이른 단계에 소성실의 길이가 비교적 긴 형태로 조영된 데 반해, 2단계에 축조된 기와 가마에서는 이보다 소성실의 길이가 상대적으 로 짧은 기와 가마가 축조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시간차에 따른 변화 양상이라고 속 단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오히려 기와 수요에 맞는 가마의 규모와 형태가 결정된 것이 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 단계의 기와 가마가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사용되었던 반 면, 이들 가마는 연소실과 소성실 내부의 보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비교적 단기간에 적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운영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ⅡC형은 가장 특징적인 형태로 왕흥사지 기와 가마에서 1기 밖에 확인되지 않아 가마 구 조의 계기적 변화과정을 추적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이와 같은 특징적인 형태의 가마를 반도염식마제요로 칭하기도 하는데 사비기에 부여지역에 이와 같은 형태의 반도염식마제요 가 출현하면서 재래의 횡염혈요에도 영향을 미쳐 반도염의 기술이 일반화된 것으로 이해하 기도 한다 52). 하지만 사비기 부여지역에서 일반화된 반도염의 기술이 마제요라는 형태의 채용과 동시에 유입되어 기존 횡염혈요에 변화를 미친것인지, 가마의 형태보다 반도염이라 는 기술체계가 먼저 유입되어 재래의 가마 소성방식에 영향을 미친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 다. 다만, 부여지역에서 먼저 중국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형태의 기와 가마와 반도염의 기술 체계를 가진 기와 가마가 운영되었고 이러한 반도염식 기술과 소위 마제요라 불리는 평요에 서 확인되는 다공의 형태가 경주 화천리 8호 가마 등 고신라 기와 가마에 채용되기도 하여 삼국시대 후반의 기와 소성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ⅡC형은 소성실의 길이가 짧고 경사도가 작으며, 소성실 후벽에 3개의 배연공이 나란히 뚫려 두 개의 연도로 이어져 연기가 배출되는 구조이다. 길이가 짧은 소성실과 낮은 경사 도, 2개 이상 시설된 배연공의 형태는 정암리 A-1호, B-2호 및 3호, B-5호 및 6호, 왕 진리 강변 4호 가마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소성실 후벽에 2개 이상 시설된 배연공은 화기 를 분산시켜 소성부 좌우측에 치우친 기물도 소성될 수 있도록 한 것 53) 으로, 이런 형태의 평요는 중국에서 秦 始 皇 陵 주변 도요지, 甘 肅 省 酒 泉 下 河 淸 漢 代 窯 址, 四 川 省 嘉 陵 江 漢 代 窯 址 등 진한대부터 출현하여 수 당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54). 50) 국립부여박물관, 1992, 부여 정암리가마터(Ⅱ). 51)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 2009, 제11차 부여 능산리사지 발굴조사 약보고. 52) 이상준, 2010, 한반도 반도염요의 출현과 생산체제의 변화, 경주사학 ) 중국규산염학회 편 오강원 역, 1995, 중국고대도자사, 백산자료원. 54) 국립부여박물관, 1992, 위의 책
176 정암리 가마의 경우 소성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 또는 제형을 띠고, 왕진리 가마의 경우 장방형을 띠고 있다. 정암리 가마의 소성실은 무단식 또는 기와로 축조된 유단식이나, 왕진 리 가마의 경우 구들식으로 구축되어 구들 상부에 기물을 올려놓아 소성하는 방법이 왕흥사 지 기와 가마의 그것과 동일하다. 평요보다 이른 시기에 출현한 등요에서도 무단식이나 유 단식은 일반적인 소성면 구축방법이기 때문에 구들식은 이보다 발전된 형태로 보아도 무방 할 것이다.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군의 가장 늦은 단계에서는 장방형계 소성실을 가진 가마의 축조 가 이루어지는 양상이 확인된다. 이들 중 일부는 소성실의 중앙부가 살짝 볼록한 형태를 띠 는 경우가 있지만 소성실 전면과 후벽의 너비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넓은 범위에서 장방 형으로 분류하였다.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는 연소실의 형태가 대부분 아궁이 쪽으로 터 널이 부가된 경우가 많으나 이 단계에서는 역제형을 띠는 가마가 일부 축조되기도 하였다. 장방형의 소성실 평면형태에 역제형 연소실을 갖는 기와 가마는 7세기 전반 이후에 축조된 청양 관현리 와요지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4. 사비기 기와 생산체계의 일단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는 상술한 바와 같이 단계에 따라 일정한 변화과정을 거치며 여 러차례 축조와 폐기를 반복하며 운영된 양상을 보인다. 구조가 확인된 정암리가마터, 청양 왕진리가마터와 관현리가마터, 능사 서편 가마터 등에서 보이는 반도염식 소성구조와 평면 형태, 불턱의 형태, 유단식이나 무단식, 구들식의 소성면은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에서 대 부분 유사하게 확인되기 때문에,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는 사비기의 비교적 긴 시간동안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각각의 기와 가마마다 가마의 위치와 가마 내부 축조재료, 배연공의 개수와 배열에 차이가 확인되기도 하는데, 이는 가마의 입지, 각 가마에 부여된 생산량과 소성도를 고려한 기와 적재방식 및 화기의 진행방향 등이 가마 설계 당시부터 고려대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즉, 가마마다 갖는 다양한 특징 적 구조와 형태는 위와 같은 고려사항들을 효율적으로 절충하여 구축한 결과물이며, 이들 중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속성들은 기술적 자극이 되어 계속적으로 채용되고 지양해야 할 속성들은 개선되기도 하면서 기와 가마는 큰 틀에서 유사한 방향으로 변화해갔 을 가능성이 크다.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가 다양한 형태를 채용하며 사비기 늦은 시기까지 운영된 양상은 당시의 기와 생산체계를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 는 왕흥사의 건립을 계기로 운영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처음에는 왕흥사로의 기 와 공급을 위한 전용가마의 성격으로 운영되었지만 점차 다른 소비지에 필요한 기와 수요에 대응하게 되면서 왕흥사 건립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운영이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흥 사지 동편 기와 가마의 지속적인 운영은 왕흥사의 보수나 유지에 대응하기 위한 측면도 분 명 존재 55) 하겠지만,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가 생산지로서 갖춘 필요조건은 다른 소비지 55) 왕흥사의 기와에 대한 수요는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서 약 150m 사역 내부에 목탑 금당 강당 등 중심건물지를 비롯하여 동 서회랑지 외곽에도 별도의 대규모 건물이 위치해 있었 던 것으로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동 서회랑 및 동 서건물지, 부속건물지 기단이나 낙수시설 등 을 조성하는 데에 다량의 폐기와가 사용되기도 하여 왕흥사는 대단위 보수나 증 개축이 이루어졌
177 로의 기와 공급도 충분히 가능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터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사비도성 북쪽 방어성인 부소산성과 마 주하고 있으며, 사비도성에서 왕이 행차한 기록이 전하는 왕흥사지와 근접해 있어 왕흥사 출입에 이용된 나루터를 통해 사비도성 내부나 금강을 따라 위치하고 있는 주변지역까지도 수운을 통한 물자공급과 조달이 용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건은 사비도성 내외부 다수의 소비지에 기와를 공급했던 것으로 보이는 정암리가마터나 정동리가마터, 청양 왕진 리가마터와 동일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정암리가마의 경우, 이곳에서 생산된 연화문수막 새가 사비도성 내 다수의 유적에서 확인되어 소비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달리, 왕흥사지 동편 가마는 출토기와 분석이 선행되지 못한 지금 상황에서 왕흥사지 외에 어느 소비지로 기와 공급이 이루어졌는지 상정하기에는 아직 어려운 점이 있다 56). 하지만 대단 위 생산지로서의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사비기 늦은 시기에 조영이 이루어진 가마에서 조차도 여러 번에 걸친 보수 및 개축흔적이 확인되는 양상은 왕흥사 이외의 소비지에서 평 기와의 지속적인 수요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실제 사비기의 기와 수요는 사비천도가 이루어진 시점이 지난 7세기 전후한 무렵에도 지 속적으로 증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비도성의 저습지개발이 이루어지고 부소산 서남편일 대로 성토를 통한 대지조성과 대형건물지 조성 57), 정림사 건립 58) 등이 추진되면서 다량의 기와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정림사지 동편구역이나 쌍북리북가마 등 일부 기와 생산시설이 축조되어 관북리유적이나 정림사지에 기와를 공급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59), 건립시설 근처 에 생산시설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기에는 공간의 확보와 화재 위험성, 경관의 훼손 등에 대 한 부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건물이 유지 보수되는 동안에도 계속적으로 운 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를 반영하듯, 관북리유적이나 정림사지에서는 현북 리가마터나 정암리가마터 등 금강유역에 위치한 공용가마에서 기와를 공급받았던 양상이 확 인되기도 하였다. 한편, 기와의 수요는 사비도성 내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왕궁성의 건설, 도성 외곽의 금강사지나 오합사지 건립과도 맞물려 막대하게 늘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 강사지의 경우, 청양 관현리가마터 출토 수막새의 존재로 보아 근접한 거리에 공용가마를 조성하여 기와를 공급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오합사지는 청양 본의리가마터에서 기와를 공급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60). 왕궁성의 건설에는 사비도성 내외부에서 확인되는 연화문수 막새와 동범인 수막새가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건설 초기에는 사비도성에서 기와 공급을 충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출토된 연화문수막새는 왕흥사지 출토 기와 와 동범 61) 인데,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에서 동일한 형태의 수막새가 확인되지는 않았지 만 왕흥사지에 지속적으로 기와를 공급했던 양상을 감안하면,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에서 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따라 왕흥사의 보수와 유지에도 대규모 기와 수요가 있었을 것이다. 56)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터에서 출토된 연화문수막새는 현재까지 왕흥사지에서만 확인되었기 때 문에 구체적인 소비지 상정을 위해서는 출토 평기와 분석이 전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57)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報 告 書 Ⅳ. 58)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a, 扶 餘 定 林 寺 址. 59) 尹 武 炳, 1982, 扶 餘 雙 北 里 發 掘 調 査 報 告 書, 百 濟 硏 究 13. 국립부여박물관, 2008, 백제의 절터와 가마터 지표조사 보고서. 60) 淸 水 昭 搏, 2003, 백제 大 通 寺 式 수막새의 성립과 전개, 百 濟 硏 究 38. 보령지역의 기와 수급은 근접한 거리의 청양지역 가마터에서 기와를 수급하거나, 보령 천방유적 (공주대학교 박물관,1996, 千 房 遺 蹟 ) 기와 가마터의 존재로 미루어 보아 근방에 소규모 기와 가마를 운영하여 충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61)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b, 백제 사비기 기와 연구 Ⅲ
178 생산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우, 사비도성 외부의 대단위 기와 수요에 금강을 이용한 기와 공급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충분히 인정된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사비기 기와 수급체계는 소비지 입장에서 볼 때, 하나의 소비지만을 위한 전용가마에서 기와를 공급받는 경우(1:1생산체제, 단수생산체제)와 복수의 가마에서 기와를 공급받는 경우(복수생산체제)가 있으며, 생산지(공용가마) 입장에서 다수 의 소비지로 기와를 공급하는 방식(복수공급체제)이 공존했던 것으로 여겨진다62). 하지만 실제 기와가 공급되는 방식을 통시적으로 보았을 경우 매우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로 나 타났을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산지의 성격이 변화하거나 공인집 단의 이동으로 새로운 기와 가마가 구축되는 등 다양한 변수가 투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용가마는 특정 시설 건립을 위한 목적으로 한시적으로 운영된 형태로 소비지와 근접한 거 리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이며, 공용가마는 복수의 소비지에 대한 기와 공급을 목적으로 하 여 전용가마보다 비교적 지속적으로 운영되며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입지하여 복수의 기와 수 요에 효율적으로 대응한다는 특징이 있다. 소비지와 전용가마, 공용가마와의 통시적인 수급 관계는 다음 표 5와 같은 형태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소비지1의 기와 공급방식은 건립 단계에 서 전용가마에서 기와를 공급받다가 건물의 유지 보수 단계에서 공용가마의 기와를 공 급받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예는 능산리사 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건립 초기에는 남 회랑 부근에 전용가마를 운영하여 공급받다 가 그 이후에는 정암리가마터, 서천 금덕리 가마터 등에서 기와를 공급받았던 양상이 확 표 5. 기와 공급방식 모식도 인된다63). 소비지2의 경우, 별도 전용가마가 운영되지 않고 다수의 공용가마에서 기와를 공급받는 형태를 취한 것으로 관북리유적, 동남리유적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소비지3은 하나의 공용가마에서 기와를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방식으로 공용가마가 소비지 와 근접한 거리에 위치해 있으면서 복수의 소비지의 기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운영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왕흥사지가 이러한 기와 공급방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5. 맺음말 본고에서는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터의 구조적 특징과 변화양상을 추적하고 이에 대한 생산체계의 일단을 추정해 보았다.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형태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구조적 변화를 수반하면서 왕흥사의 건립이 완료된 사비 62) 大川 淸, 1980, かわらの美. 龜田修一, 2001, 熊津 泗沘の瓦, 日韓古代瓦の硏究. 淸水昭搏, 2005, 기와의 전래-백제와 일본의 초기 기와생산체제의 비교-, 百濟硏究 ) 이병호, 2008, 扶餘 陵山里寺址 出土 瓦當의 再檢討, 韓國古代史硏究
179 기 말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되는 것에 대하여 사비도성 주변부의 지속적인 기와 수요와 이에 대한 대응의 결과로 이해하였다.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는 왕흥사의 건립을 계기로 축조 되었지만 왕흥사의 건립이 일단락된 이후에는 왕흥사의 유지 보수기와 공급과 더불어 효율 적인 물자조달과 수송조건에 힘입어 정암리가마터, 청양 왕진리가마터, 정동리가마터와 더 불어 지속적인 사비도성 내외부의 기와 생산지로 역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천도가 이루어지고 나서도 왕궁성의 건설 및 사비도성 내외부의 사찰건립, 왕궁지구의 확장과 정비 등 막대한 양의 기와 수요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이에 따른 기와의 지속적 생 산과 공급이 이루어지면서 가마 구조도 효율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을 것으로 생 각된다. 출토 기와의 분석과 비교연구가 선행되지 않은 점은 본고의 한계이지만 앞으로의 분석연구를 통해 보다 적극적이고 논리적인 사비기 생산시설과 생산체계에 대한 해석을 시 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180 <참고문헌> 龜 田 修 一, 2001, 熊 津 泗 沘 の 瓦, 日 韓 古 代 瓦 の 硏 究. 공주대학교박물관, 1996, 千 房 遺 蹟.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7, 王 興 寺 址 Ⅱ-기와 가마터 發 掘 調 査 報 告 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報 告 書 Ⅳ.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a, 扶 餘 定 林 寺 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b, 백제 사비기 기와 연구 Ⅲ.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c, 부여 왕흥사지 동편 기와 가마터 발굴조사 약보고. 국립부여박물관, 1992, 부여 정암리가마터(Ⅱ). 국립부여박물관, 2008, 백제의 절터와 가마터 지표조사 보고서. 김성구, 1990, 부여의 백제요지와 출토유물에 대하여, 百 濟 硏 究 12. 大 川 淸, 1980, かわらの 美. 尹 武 炳, 1982, 扶 餘 雙 北 里 發 掘 調 査 報 告 書 百 濟 硏 究 13. 이병호, 2008, 扶 餘 陵 山 里 寺 址 出 土 瓦 當 의 再 檢 討, 韓 國 古 代 史 硏 究 51. 淸 水 昭 搏, 2003, 백제 大 通 寺 式 수막새의 성립과 전개, 百 濟 硏 究 38. 淸 水 昭 搏, 2005, 기와의 전래-백제와 일본의 초기 기와생산체제의 비교-, 百 濟 硏 究 41. 이상준, 2010, 한반도 반도염요의 출현과 생산체제의 변화, 경주사학 32. 중국규산염학회 편 오강원 역, 1995, 중국고대도자사, 백산자료원. 최경환, 2010, 錦 江 流 域 百 濟 土 器 窯 址 의 構 造 와 生 産 體 制 에 대한 一 硏 究, 韓 國 考 古 學 報 76.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 2009, 제11차 부여 능산리사지 발굴조사 약보고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東 京 大 月 書 店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新 報 關 東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相 互 銀 行 計 數 集 計 ꌞ ꌞꌞ ꌞ ꌞꌞ
¹ßÇ¥¿äÁö229-286
5. 정비계획의 기본구상 5.1 유적 및 유구 정비 복원 사례연구 5.1.1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는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개의 불당과 탑, 회랑 등을 세웠 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륵사의 배치는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으로 동 서
untitled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2) 2호 주거지 주거지는 해발 58.6m의 조사지역 중앙부 북쪽에 3호 주거지와 중복되어 위치하고 있다. 주거지는 현 지표층인 흑갈색사질점토층(10YR 2/3)을 제거하자 상면에 소토와 목탄이
緊 張 冷 戰 體 制 災 難 頻 發 包 括 安 保 復 舊 地 震 人 類 史 大 軍 雷 管 核 禁 忌 對 韓 公 約 ㆍ 大 登 壇 : : : 浮 上 動 因 大 選 前 者 : : : 軸 : : : 對 對 對 對 對 戰 戰 利 害 腹 案 恐 喝 前 述 長 波 大 産 苦 逆 說 利 害 大 選 大 戰 略 豫 斷 後 者 惡 不 在 : : 對 : 軟 崩 壞
¹ßÇ¥¿äÁö1-60
사진 3. 왕흥사지 목탑지 전경 사진 4. 왕흥사지 심초부 굴광선 사진 5. 심초석 상부 적심시설 사진 6. 심초석 하부 판축층 사진 7. 사리함 노출 상태 36 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의 意味 국제학술대회 사진 10. 동서석축과 남북석축 전경 사진 12. 동서석축과 남북석축 동편 연접부 사진 11. 동서석축과 남북석축 서편 연접부 38 扶餘 王興寺址 出土
jichi12_kr
일본의 지방자치 2012 2014개정판 일본의 지방자치 일본의 지방자치의 개요 1 1 지방자치가 법률에서 차지하는 위치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지방자치단체의 계층 수 2 지방자치단체의 성격 2 지방자치단체의 구역 3 지방자치단체의 규모와 수 3 지방자치단체의 획일성 6 지방자치단체의 종류 6 지방자치단체의 조직 9 지방자치단체가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碘 岛 监 结 30km 20km 10km 碘 达 碘 测 时 提 高 后 的 上 限 [250,000 微 西 弗 / 年 ] [10,000 微 西 弗 / 年 ] 巴 西 瓜 拉 帕 里 的 辐 射 (1 年 来 自 地 面 等 ) > 辐 射 量 ( 微 西 弗 ) 250,000 100,000 50,000 10,000 注 : 本 资 料
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210 참고문헌 1. 능묘 1-1. 경주황남리고분군 慶 州 皇 南 里 古 墳 群 경상북도, 文 化 財 大 觀, 1-V, 慶 尙 北 道 編, 2003. 문화재관리국, 天 馬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974. 1-2.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 咸 安 道 項 里 末 山 里 古 墳 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咸 安 道 項 里 古 墳 群 5, 2004.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재입국허가 및 재입국허가로 간주 를 받고 출국하는 분에게 시구정촌에 전출신고를 제출한 후 재입국허가를 받고 출국한 분은 탈퇴일시금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 POINT 1 - 전출신고를 제출하지 않은 경우, 재입국허가기간 내에는 원칙적으로 탈퇴일시금을 청구할 수 없습니
再 入 国 許 可 及 びみなし 再 入 国 許 可 を 受 けて 出 国 する 方 へ 市 区 町 村 に 転 出 届 を 提 出 したうえで 再 入 国 許 可 を 受 けて 出 国 している 方 は 脱 退 一 時 金 を 請 求 す ることができます POINT 1 - 転 出 届 を 提 出 していない 場 合 再 入 国 許 可 期 間 内 は 原 則 として 脱 退 一 時 金 を 請
<B9AEC8ADC0E7C3A2766F6C2E31325FBDCCB1DB2E706466>
2012 44 45 2012 46 47 2012 48 49 추억의 사진 글 사진 최맹식 고고연구실장 죽음을 감지하고 미리 알아서 죽은 미륵사지 느티나무 이야기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 미륵사지는 가장 오랫동안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 미륵사지는 발굴 종료 당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오랫 동 안 발굴했던 유적이다. 1980년 7월 7일 발굴을 시작해 1996년
<BCBAB3E2C8C4B0DFC1A6C0DAB7E1C1FD2E687770>
개 회 사 : 국회의원 이미경 ⅳ 인 사 말 : 국회의원 박은수 ⅷ 축 사 :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ⅻ - 일본 성년후견제 현황 및 문제점과 대안 1 아라이마코토(일본성년후견법학회 회장/츠쿠바대 교수) - 한국의 성년후견제 입법방향과 정책과제 29 이영규(성년후견제추진연대 정책위원장/강릉원주대 교수) - 민법개정을
일본-국문편최종.indd
동북아시아 지석묘 6 일본 지석묘 동북아시아 지석묘 6 일본 지석묘 2011년 10월 26일 초판 1쇄 인쇄 2011년 10월 30일 초판 1쇄 발행 총괄 ㅣ 연 웅 기획자문 ㅣ 김성범,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 편집교정 ㅣ 이규훈, 정성목, 성윤길, 이은선 원고작성 ㅣ 小 池 史 哲 번역 ㅣ 이은선 사진제공 ㅣ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 발행처 디자인 펴낸곳 ㅣ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棄 権 DNS: 欠 場 )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28C6EDC1FD29C0CFC1A6C7C7C7D8C0DAB9AEC1A62DC3D6C1BE2E687770>
일제피해자 문제 이렇게 해결하자! 심포지엄 - 헌법재판소 부작위위헌확인 결정 2주년을 기념하여 - 시 간 일 정 사회: 장완익 변호사 14:00~14:20 14:20~14:50 14:50~15:20 15:20~15:40 개 회 사 : 위철환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 야마기시 켄지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 축 사 : 이석현 국회의원 발 표 : 헌법재판소 결정 및 대법원
ÇÑÀϱ³»ç Æ÷·³-º»¹®-ÆäÀÌÁöÇÕ-¿Ï¼º.PDF
목 차 한국 교육에 관한 강의... 3 최근 한국교육의 개혁 동향(Ⅱ) 윤종혁(한국교육개발원)... 5 지속가능발전교육 한일교사포럼... 35 Ⅰ. 포럼 개요 및 소개... 37 Ⅱ. 강의... 51 위험사회와 지속가능발전교육에 관한 한일 교사 의식 조사 이재영(공주대학교 교수)... 53 Ⅲ. 지속가능발전교육(위험교육과 ESD)... 69 1. 위험교육과
2016 한국특수교육학회 춘계학술대회 The Korean Society of Special Education SPRING 2016 KSSE CONFERENCE 특수교육일반 좌장 : 한경근(단국대학교)
특수교육일반 발표 1. 장애학생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예비특수교사의 인식과 요구 조사 - 김 경(한국국제대학교) 발표 2. Full Inclusion은 한국과 일본에서 실현가능한가? - 落 合 俊 郎 ( 大 和 大 学 ) 발표 3. 북한 장애인의 삶과 특수교육에 대한 북한이탈학생들의 경험과 인식 연구 - 안상권(국립특수교육원), 홍정숙(대구대학교) 발표 4.
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Story Story 2012. 9. 13. Story 1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2 STORY STORY 12 호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2 Korean Wave Story 2012 (2012년 1/4분기) 12 호 12 호 2012. 4. 9. 2 3 4 5 轩 辕 剑 之 天 之 痕 我 的
산케이
산케이 朴 사라진 7시간 사생활 상대는 정윤회?-레임덕 시작 대통령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져 -증권가 정보지에 박근혜 남자관계, 정권 통째로 흔들려 http://thenewspro.org/?p=5987 by 편집부 Posted: August 4, 2014 at 11:54 am Updated: August 8, 2014 at 10:22 am 박근혜의 남자관계에
<C0BDBEC7B0FA2028BEC8B8EDB1E2292E687770>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經 營 史 學 第 20 輯 第 5 號 ( 通 卷 40 號 ) ち 得 たとはいえ 独 立 後 の 政 治 的 主 導 権 をめぐって 混 乱 が 続 いたのみなら ず その 後 勃 発 した 朝 鮮 戦 争 によって 国 土 は 荒 廃 し ようやく 経 済 再 建 に 向 かい 始 めるのは
전후 60년 한 일 기업가 활동의 비교사적 검토 경영사학 제20집 제5호 (통권40호) 2005. 12. 31. 한국경영사학회 第 15 回 國 際 學 術 大 會 : 전전 60년 한한한한한 이이이 온 기기기기 그기그 기기기 정정 基 調 演 說 - 戦 後 60 年 日 韓 企 業 者 活 動 の 比 較 史 的 検 討 - 鳥 羽 欽 一 郎 戦 後 60 年 の 日 本
발간사
REPUBLIC OF KOREA------JAPAN 海 峽 圈 硏 究 第 10 號 2010. 10. 韓 日 海 峽 圈 硏 究 機 關 協 議 會 발 간 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명품들이 만들어져왔습니다. 특히 지역 명품들은 그 시대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반영함으로써 무한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이에 따라 지역마다 지역자원을 활용한 명품을 만드는데 힘을
KOREA - JAPAN Fourm 2013 발표자료집 発表資料集 Korea-Japan Forum 2013 2013 한일 미래의 길을 묻는다 - 국제 포럼 2013 日韓 未来への道を問う - 国際フォーラム 2013. 2. 14 주 최 : 서울신문, 도쿄신문 주니치신문 후 원 : 외교통상부, 대한상공회의소 主 催 : ソウル新聞 東京新聞 中日新聞 後 援 : 外交通商部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제28차 워크숍 2016-04-08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가와이 에이지로의 제국일본 인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용철(한림대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1. 연구의 목적 및 필요성 2. 식민지 인식과 정당화논리 2.1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와 국민적 자유론 2.2 식민지 정당화의 논리 3. 전쟁 인식과 정당화논리 3.1 이상주의적
<3230313020C7D1C0CF20B1B9C1A620BFF6C5A9BCF320C6EDC1FD20C3D6C1BE2E687770>
인권친화적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2010 한 일 국제 워크숍 주관 : 국가인권위원회 일본아동권리협약종합연구소 한국아동권리학회 일 시 2010년 9월 15일 (수) 오후 13:00~18:00 장 소 광주광역시 교육정보원 대강당 초 대 의 글 국가인권위원회는 2008년에 개최되었던 인권친화적 학교문화조성을 위한 한 일 국제워크숍 에 이어서 금년에 일본 아동권리조례
Ministry of Government Legislation Ministry of Government Legislation Ministry of Government Legislation Ministry of Government Legislation Ministry o
vol 2_ 일본 Ministry of Government Legislation Ministry of Government Legislation Ministry of Government Legislation Ministry of Government Legislation Ministry of Governm of rnment LegislationMinistry of
<C3CAC1A12031322DC1DFB1B92E687770>
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30365FC1F6BDC4C0E7BBEA20B9FDC1A6B5B5BFCD20C1A4C3A520B5BFC7E25FB1B9B3BBBFDC20C1F6BDC4C0E7BBEA20B9FDC1A6B5B520BAF1B1B320BAD0BCAE28BACEC1A4B0E6C0EFB9FD5FC3D6C1BE295FC6EDC1FD2E687770>
발 간 등 록 번 호 11-1430000-001471-01 지식재산 법제도와 정책 동향 국내외 지식재산 법제도 비교 분석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Intellectual Property Legal System and Policy Trends 기초연구과제 보고서 지식재산 법제도와 정책 동향 Intellectual Property Legal
國 統 調 9 0-1 2-1 0 7 南 北 韓 社 會 次 化 力 量 綜 출 評 價 統 院 調 査 硏 究 室 책 을 내 면 서 南 北 韓 이 分 斷 以 後 각기 相 反 된 政 治 理 念 과 政 治. 經 濟 的 制 度 에 토대를 둔 體 制 成 立 으로 相 異 한 社 會 文 化 를 形 成 해온 지도 벌써 4 5 年 이 지 났다. 이 기간동안 南 과 北 의 社 會
건강증진 시범보고서 운영을 위한 기술지원 연구
짧활 康 t합샤훌 示 範 띔 健 所 運 營 응 위한 技 術 支 援 웹 JE - 示 範 保 健 所 模 型 開 發 을 中 心 으로l' 鍾 和 李 順 英 鄭 基 뽑 編 著 韓 國 띔 健 社 會 댐 究 院 머 리 말 美 國 이나 日 本 등 先 進 國 의 경우 이미 1970년대 부터 人 口 의 高 敵 化 와 生 活 樣 式 의 變 化 에 기인한 成 人 病 증가와 이에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KR000****4 설 * 환 KR000****4 송 * 애 김 * 수 KR000****4
Microsoft Word - 11jungjilhongKJ.doc
紫 景 降 妊 事 例 発 表 走 蝕 差 走 拭 辞 税 昔 走 装 壱 敬 切 差 走 - 穿 庚 失 薦 壱 人 紫 噺 差 走 紫 税 蝕 拝 - 地 域 福 祉 における 認 知 症 高 齢 者 福 祉 専 門 性 促 進 とソーシャルワーカーの 役 割 舛 掩 畠 鄭 吉 弘 廃 厩 辞 随 左 闇 企 俳 紫 噺 差 走 引 嘘 呪 韓 国 ソウル 保 健 大 学 社 会 福 祉 科
POWERSHELL CONTROLLER + BATTERY Setup Guide English............................... 4 繁 體 中 文.............................. 12 한국어............................... 20 www.logitech.com/support................
레이아웃 1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霊 岩 郡 立 河 正 雄 美 術 館 Yeongam Ha Jung Woong Museum of Art 霊 岩 郡 立 河 正 雄 美 術 館 58434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로 96 全 南 霊 岩 郡 郡 西 面 鳩 林 路 96 T.061)470-6841~3 F.061)470-6844 http://haart.yeongam.go.kr 마음의 여유와
토픽 31호(2016.3.7).hwp
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16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墓 誌 銘 等 創 作 於 高 麗 時 代 與 朝 鮮 朝 時 代, 此 是 實 用 之 文 而 有 藝 術 上 之 美. 相 當 分 量 之 碑 誌 類 在 於 個 人 文 集. 夢 遊 錄 異 於 所 謂 << 九 雲 夢 >> 等 夢 字 類 小 說.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2009 年 12 月 頁 15~36 高 雄 師 範 大 學 經 學 研 究 所 15 韓 國 漢 文 學 硏 究 之 最 近 傾 向 김동협 金 東 協 教 授 / Professor Kim Donghyub 摘 要 我 想 對 於 韓 國 漢 文 學 最 初 之 專 門 著 書 是 金 台 俊 之 >. 此 冊 刊 行 於
산업현장 직무능력수준
1 노동시장분석 산업현장 직무능력수준 류 직 능 수 준 특급기술자(7수준) 고급기술자(6수준) 중급기술자(5수준) 초급기술자(4수준) 숙련기술자(3수준) 세 분 조경설계 조경설계 총괄책임자 조경설계 실무책임자 조경설계 실무관리자 조경설계 실무자 조경설계 실무보조자 조경시공 조경시공 총괄책임자 조경시공 실무책임자 조경시공 실무관리자 조경시공 실무자 조경시공 실무보조자
초대의 글 한국일본언어문화학회 회원여러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오면서 으스스 추위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재직 중인 회원님들께서는 입시철의 업무와 강요받는 대학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신진 회원님들께서는 우리 학계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연구에 박
2015 年 度 秋 季 國 際 學 術 大 會 日 時 : 2015 年 11 月 7 日 ( 土 ) 11:30~20:30 場 所 : 高 麗 大 學 校 國 際 館 主 催 : 韓 國 日 本 言 語 文 化 學 會 主 管 : 韓 國 日 本 言 語 文 化 學 會 高 麗 大 學 校 GLOBAL 日 本 研 究 院 高 麗 大 學 校 BK21PLUS 中 日 言 語 文 化 敎 育
見 積 書
2 한국일본문화학회 회 장 인 사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께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물러가고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높고 파란 하늘이 성 큼 다가와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합니다. 한 여름이 지나고 찾아온 10월은 너무도 아름답습 니다. 파아란 하늘, 빠알간 단풍잎, 노오란 은행잎을 맘껏 즐기고
韓 日 社 會 的 企 業 SYMPOSIUM 한 일 사회적기업의 전망과 과제 일시 2008.8.22(금) PM 2시 ~ 6시 장소 서울지방노동청 컨벤션룸 주최: 실업극복국민재단, 일본 희망제작소, 희망제작소 소기업발전소, 류코쿠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시게모토프로젝트 후원: 노동부 韓 日 社 會 的 企 業 SYMPOSIUM 한 일 사회적기업의 전망과 과제 일시 2008.8.22(금)
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식민지의 목소리 -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刊, 朝 鮮 及 朝 鮮 民 族 (1927)을 중심으로 鄭 鍾 賢 ( 成 均 館 大 ) 1. 伊 藤 韓 堂 과 朝 鮮 思 想 通 信 伊 藤 韓 堂 이 발간한 朝 鮮 思 想 通 信 은 1925 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3 년 그가 죽은 직후에 폐간될 때까지 대략 18 년 동안 간행된 조선문을 번역한 일본어 신문이다.
사천왕사지 20081210 자문회의자료집.hwp
회의자료 慶 州 四 天 王 寺 址 發 掘 調 査 (3 次 ) 2008. 12. 10.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慶 州 四 天 王 寺 址 發 掘 調 査 (3 次 ) Ⅰ. 조사개요 1. 유 적 명 : 경주 사천왕사지(사적 제8호) 2. 소 재 지 : 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일대 3. 조 사 목 적 : 사천왕사의 가람구조와 범위 확인 4. 조 사 기 간 : 2008년
비교일본학32집_최종.hwp
ISSN 2092 5328 第 32 輯 2014. 12. 30 第 32 輯 차 례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1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他 者 >と< 言 葉 > 奈 良 勝 司 23 七 支 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47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67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85 신라화랑
참고자료
(Invited Paper) 목 차 (Contents) 무(Akiba Moo) ( 산업사회학부 교수) 시민사회와 사회적 기업 5 Civil Society and Social Enterprise in Korea and Japan 기획연구 (Planned Papers) 배 한 동(Han Dong Bae)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북한식 개혁 개방의 현황과 전망 39
한류동향보고서 26호.indd
Story Story 2013. 1. 30. Story 2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3 STORY STORY 12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3 Korean Wave Story 2013 (2012년 1/4분기) 12 12 2012. 4. 9. 2 3 4 5 6 乱 世 佳 人 花 絮 合 集 梦 回 唐
전체.indb
동북아역사논총 51호 2016. 3 차 례 논문 김규운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7 정순일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55 김득중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93 조윤수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HWP Document
1. 仲 井 健 治 先 生 の 研 究 活 動 の 再 照 明 2. - 白 湖 林 悌 を 中 心 に - 野 崎 充 彦 ( 大 阪 市 立 大 学 ) 一. はじめに 最 初 にお 詫 びすべき 幾 つかの 点 がございます まず 一 つ 目 は 私 は 韓 国 古 典 文 学 を 専 攻 しているとはい え 白 湖 林 悌 の 研 究 者 ではなく また 漢 詩 に 対 する 造 詣 も
2014년도 만주학회 추계 국제학술회의 관전기( 貫 戰 期 ) 동아시아와 만주 East Asia and Manchuria in Trans-war Period 滿 洲 - 일 정 - 일시: 2014년 9월 27일(토), 09:30-18:00 장소: 국민대학교 경상관 301호 학술대회장 주관: 만주학회,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후원: 동북아역사재단, 국민대학교,
<3429BFC0C1F8BCAE2E687770>
한국경제학보 제18권 제1호 The Korean Journal of Economics Vol. 18, No. 1(Spring 2011)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 吳 鎭 錫 ** 요 약 본고는 1940년대 전반 전력국가관리의 수립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의 주체 에 주목하여 정책의 원안이 등장하여 최종안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면밀하 게 분석한
빈면
j 발ζ틸록번호 1 1 4 0 % 0 2 0 - m O O 4 4 - 이 연 구 보 고 2 0 0 2-0 1 I R 애싱 -대도시 징탄성매때지역 증싱으로 g 김승뀐 조애저 김유곁 손승영 한혀 결 김성아 ~잉 z -ι7 / v / ι ζ a Tι r 鉉 ; ιo t n ι a 톨 상r X a 흥 낀 ~ ~ r - * 서 7 A * r - 엉 뇨려 - r M W
Microsoft Word - km20020132.doc
經 營 學 碩 士 學 位 論 文 韓 國 船 舶 管 理 業 의 競 爭 力 提 高 와 國 際 市 場 進 出 方 案 에 關 한 硏 究 - 國 籍 外 航 船 社 의 船 舶 管 理 部 門 을 中 心 으로 - A Study on Competitiveness Analysis and Entries into International Market of Korean Ship Management
<C1A4C3A530302D31302DBFCFBCBABABB2E687770>
低 所 得 偏 父 母 家 族 의 生 活 實 態 와 政 策 課 題 金 美 淑 朴 敏 妌 李 尙 憲 洪 碩 杓 趙 炳 恩 元 永 憙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머 리 말 배우자의 사별, 별거, 이혼 등으로 초래되는 偏 父 母 家 族 은 産 業 化 의 진전에 따른 개인주의 팽배로 이혼이 증가하였고 經 濟 危 機 로 인한 가 족해체가 확산되어 최근 증가 추세에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目 次 第 1 篇 1995 年 度 水 産 業 動 向 1 第 1 章 世 界 水 産 業 動 向 3 第 1 節 水 産 物 生 産 3 第 2 節 水 産 物 交 易 5 第 2 章 우리나라 水 産 業 動 向 7 第 1 節 漁 業 構 造 7 第 2 節 漁 家 經 濟 22 第 3 節 水 産 物 生 産 30 第 4 節 水 産 物 輸 出 入 40 第 5 節 水 産 物 需 給
- 2 -
-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untitled
용역보고서 2000-22 社 會 脆 弱 階 層 의 健 康 增 進 을 위한 푸드뱅크 事 業 의 活 性 化 方 案 (The Food Bank Activation Programs for Health Promotion of Lower Income Classes) 鄭 基 惠 李 誠 國 金 貞 根 金 聖 卿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保 健 福 祉 部 머 리 말
<4D6963726F736F667420576F7264202D20313030303931302D3242463531B27BA6E6A6D2BBCDA8EEABD72DBEC7BEA7A558AAA9AAC02E646F63>
前 1 前 言 現 行 考 銓 制 度 一 現 行 考 銓 制 度 對 人 事 行 政 的 重 要 性 : 強 烈 建 議 考 人 事 行 政 的 同 學 們, 一 定 要 精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熟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的 好 處, 可 以 從 以 下 幾 個 角 度 來 分 析 : 相 對 重 要 程 度 高 : 現 行 考 銓 制 度 在 人 事 行 政 三 個 主 要 等
한국 시장경제체제의 특질에 관한 비교제도분석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Working Paper Series 韓 國 市 場 經 濟 의 특질 - 地 經 學 的 조건과 社 會 文 化 의 토대에서- 이 영 훈 Working Paper 2014-07 Nov, 2014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31gil 5, Bongcheon-ro,
199-224 서강건치.hwp
국 학 연 구 론 총 제 1 집 택민국학연구원.2008.6.30. 日 本 에 있어서의 韓 國 文 學 의 傳 來 樣 相 江 戸 時 代 때부터1945 年 까지 西 岡 健 治 * 1) 序 言 Ⅰ. 江 戸 時 代 에 읽혀진 作 品 들 Ⅱ. 1868( 明 治 元 ) 年 에서 1918 年 ( 大 正 中 期 )까지 읽혀지고 翻 訳 된 作 品 들 Ⅲ. 三 一 獨
23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貫 井 正 之 씨는 豊 臣 秀 吉 의 대외적 인 정복의도 전반을 검토하고 책 이름에 海 外 侵 略 이라는 문구를 채택했으며( 豊 臣 政 権 의 海 外 侵 略 과 朝 鮮 義 兵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37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나카노 히토시( 中 野 等 ) 머리말 Ⅰ. 근세 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Ⅱ. 근세 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Ⅲ. 근대 일본의 성립과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B0EDBAA3C0C7B2DE32C8A32E687770>
본 책자는 대한민국 교육과학기술부 재외동포교육비(홍보비) 예산을 지원받아 고베한국교육원에서 편집 인쇄하였습니다. この 冊 子 は 大 韓 民 国 教 育 科 学 技 術 部 在 外 同 胞 教 育 費 ( 弘 報 費 ) 予 算 で 神 戸 韓 国 教 育 院 が 編 集 印 刷 しました 4 발간사( 發 刊 辭 ) 사람은 죽어도 꿈은 남는다 人 は 死 んでも 夢 は 残 る
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교육연구 제58집 성신여대 교육문제연구소 2013년 12월 30일 2009 改 定 敎 育 課 程 에 따른 中 學 校 漢 文 敎 科 書 의 多 文 化 敎 育 에 對 한 一 見 이돈석 청주대학교 한문교육과 Ⅰ. 들어가는 말 Ⅱ. 한문 교과 교육과정 목표에 대한 검토 Ⅲ. 중학교 한문 교과서 분석 목 차 1. 재제 출전의 문제 2.. 교육 내용과 제시 방법의 문제
DBPIA-NURIMEDIA
119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역사와 법* 60) 조시현**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개 Ⅲ.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법 적용의 의미 -역사와 법의 관계 1. 법적 책임의 전제로서의 사실에 대한 규범적 평가 2. 법을 둘러싼 진실규명의 필요성 3. 연속된 법의식의 회복과 미래 -피해자의 권리와 공동행동원칙의 정립 4. 국가책임의
12-남가영_조영호.hwp
1) 3.11 이후 영화에 나타난 변화상 * 남가영 ** [email protected] 조영호 *** [email protected] < 目 次 > 1. 연구목적 및 방법 2. 영화를 통해 본 3.11 2.1 3.11의 이미지가 침투한 영화 2.1.1 園 子 温 2.1.2 黒 沢 清 2.1.3 大
1
NEWS LETTER : 300-150 31-1 201 [email protected] : 2 한국일본문화학회 회 장 인 사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께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창밖에는 노란 개나리. 그리고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화사하게 핀 벚꽃들이 바람결에 꽃잎을 날리며 봄의 향연이 한창입니다. 여러 회원님들께서는
......-....4300.~5...03...
덕수리-내지(6장~8장)최종 2007.8.3 5:43 PM 페이지 168 in I 덕수리 민속지 I 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직접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장팡뒤의 구조는 본래적인 형태라 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가 점차 개방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폐쇄적인 안뒤공간에 위치하던 장항 의 위치가 개방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이 아닌가 추론되어진다.
2015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2015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국제학술행사 한일관계의 과거를 넘어 미래로 일 시 : 2015. 06. 17 ~ 06. 19 장 소 : 제주도 하얏트리젠시호텔 - 주 최 - 동북아역사재단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한국국제정치학회 현대일본학회 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 도쿄대 한국학연구부문 일본국제정치학회 현대한국조선학회 - 후 원 - 대한민국 외교부 일본 외무성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學 術 院 소식 3월 임원회 개최 사위원회는 학술원 회원과 교수 등 관련 3월 임원회가 3월 4일(금) 오후 2시 학술 분야 전문가로 구성하여 4월 11일(월) 오 원 중회의실에서 임원 15명 전원이 참석한 후 2시에 제1차 심사위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Monthly Newsletter from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Republic of Korea 발행인:대한민국학술원 회장 / 우 137-044 서울 서초구 반포4동 산94-4 / http://www.nas.go.kr / XXXXX / F XXXXX / 편집:학술진흥과 第 76 次
국사관논총103집(전체화일)
기원 전후 樂 浪 郡 의 支 配 勢 力 에 관한 일연구 吳 永 贊 * Ⅰ. 머 리 말 Ⅴ. 기원 1세기 전반 王 調 亂 과 Ⅱ. 樂 浪 古 墳 의 被 葬 者 에 대한 諸 論 議 支 配 勢 力 의 추이 Ⅲ. 기원전 1세기대 木 槨 墓 와 支 配 勢 力 1. 土 人 의 성장과 王 調 亂 Ⅳ. 기원전 1세기 중후반 墓 制 의 변천 2. 지배세력의 추이 1. 귀틀묘의
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7 논문 5 朝鮮總督府의 臨時資金調整法 운용과 資金統制 박현 연세대학교 1. 머리말 1937 년 7 월에 시작된 中日戰爭은 전쟁 당사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그 식민지인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강화되고 전시 경제통제가
나) 유적 유물현황 <표 121> 포석계 기암곡 유적 유물현황 유적명칭 제1사지 (장구절터) 유적내용 건물지 축대,초석,장대석,문지도리석 불상 탑 및 석등 기타 비고 석조여래좌상 국립경주박물관 탑1 일실 제2사지 (바둑바위아래절터) 대, 초석 다수 탑 2, 석등 1 買
59) 포석계 기암곡 가) 계곡현황 이 계곡은 鮑 石 溪 의 지류로 삼릉계 정상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으로 약 1.3km 흘러내려와 鮑 石 亭 부근에서 본류로 합쳐지는 계곡이다. 黃 臺 와 부엉더미를 형성하여 바위산이 험준하게 계곡의 동면을 막고 솟아 있으므로 절묘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이루는 계곡으로 정상부에 바둑바위가 있어 碁 巖 谷 이라 불리워진다. 東 京
sme_beta[1](류상윤).hwp
1930년대 중소 직물업의 발흥과 그 배경 류상윤(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1. 머리말 1960 년대 이후 한국은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고도성장의 원인 또는 배경이 무엇이었는 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그 중에는 해방 후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조선이 경험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들은 각각 자본주의
1. 2. 3. 4. 5.
1. 2. 3. 4. 5. 1 10 11 12 13 14 부여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 濊 王 之 印 : 예왕의 인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 濊 城 )이라 고 한다. 본래 예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1 15 16 17 18 19 20 1 2 21 2 22 1 2 23 24 1 2 25 26
南 北 體 育 會 談 第 5 次 實 務 代 表 接 觸 會 議 錄 $은 幣 K7를구 淸 를9 를3 는r구# 國 土 統 - Q ( 漆 北 對 話 事 務 局 ) < 目 次 l - 般 事 項 l l l l l l l 3 l l l l l l l l l 3 2 會 議 錄 7 附 錄 : 代 表 團 記 者 會 見 9 7-7 - 린 一 般 事 項 가 日 時 :19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