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게 읽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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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맛있게 읽은 시 권순진

2 소개글

3 목차 1 친정 / 조정숙 8 2 흐린 눈으로 보네/ 김재성 10 3 토끼에게로의 추억/ 신현정 12 4 가로등/ 전향 14 5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17 6 사일못/ 서하 20 7 늙은 애인/ 문모근 23 8 그 여름의 끝/ 이성복 26 9 칠성동 저녁노을/ 류상덕 그리운 남풍 2/ 도광의 버리긴 아깝고/ 박철 어려운 숙제 / 김현숙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이규리 가을 기차여행/ 윤현식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삭는다는 것/ 김필영 / 이시영 반야월/ 안용태 연적들/ 차승호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한옥순 결혼 십계명/ 최일도 접속/ 황수아 멋진 결론 / 김상미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원재훈 마지막 본 얼굴 / 함동선 72

4 26 담요 한 장 속에/ 권영상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신현림 가시연꽃/ 김봉용 그래도 / 마더 테레사 개별 경제학/ 권순진 이제 가면/ 김대중 감쪽같은 연인/ 황명자 나를 벼리다/ 정종명 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이윤학 일상 日 常 / 이신남 쌀과 살/ 손일수 그 남자의 손톱/ 정수자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단층/ 박찬일 산산조각/ 정호승 그대를 사랑하는/ 서정윤 구층암 모과나무/ 권갑하 모든 것을 사랑하라/ 도스토예프스키 초장이 싱겁다/ 김환식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참, 좆같은 풍경/ 송경동 뜨거운 돌/ 나희덕 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다 아는 이야기/ 박노해 145

5 51 혹등고래/ 문혜진 음악/ 김현옥 이 바쁜데 웬 설사/ 김용택 아버지의 부동산/ 김현희 문단속/ 조용숙 아버지의 팔자/ 김나영 진실로 좋다/ 천양희 문학시간/ 김은숙 첫사랑/ 전승룡 개 두 마리/ 이동순 시인 앨범 3/ 김상미 누에/ 이명순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약해지지 마 / 시바다 도요 기다리는 사람 없는데/ 오금자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함민복 초여름 양동/ 신순임 참 사랑/ 톨스토이 호수/ 고운기 산다는 것은/ 이영춘 흙발/ 손남주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다부원( 多 富 院 )에서/ 조지훈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하지( 夏 至 )/ 고영민 218

6 76 식당의자 / 문인수 친구를 위한 기도/ 박인희 해연이 날아온다/ 이기형 詩 法 / 권기호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용접/ 이석현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기차는 간다/ 허수경 시학 강의/ 임영조 조각보/ 정정지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나해철 노호 김기홍 1,2/ 윤효 월의 시/ 김남조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해질녘 탱고/ 장대송 연꽃 기도/ 류경화 폐교/ 전홍준 베스트셀러 시인/ 노향림 세탁소에서/ 이상국 기다림/ 이성복 섬진강 나들이/ 안용태 타인(부부)/ 정덕희 그 날/ 정민경 선생님은/ 케빈 윌리엄 허프 292

7 친정 / 조정숙 :46 친정 / 조정숙 나 가끔 친정으로 돌아가면 금세 엄마의 어린 딸이 되어 먼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몸도 마음도 녹신녹신해져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한 일들 그만 가마득해지고 길을 가다 지나쳐 만난 사람처럼 남편 얼굴도 서먹서먹해져서 엄마 손에서 익은 물김치 호록호록 떠먹어가며 밤새도록 친구 같은 수다를 떨었네. 엄마도 참, 고생이 많수 서로 마음을 만지작거리다가 니,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 한 줄 아나 좀 더 살아봐라 내 맘 알끼다 엄마를 관통한 바람이 친정 / 조정숙 7

8 목적도 없으면서 천천히 나에게 불어오는 내 속엔 작은 엄마가 있어서 가는 허리가 자꾸 허청거린다. - 다음카페 '시와시와' 게시판... 주부들은 명절에 시어머니로부터 가장 듣기 좋은 말이 어서 친정 가봐라! 인 반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벌써 가려고? 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도 몇 년 전까지 말이지 지금은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요즘 세상에 친정 가는 걸 갖고 시댁 눈치 살피는 며느리 별로 보지 못했다. 설걷이 등을 잔뜩 쌓아놓고 싸가지 없이 내뺄 궁리만 하지 않는 다면 명절 당일이라도 꼭 친정 가야겠다고 하면 막을 시어머니는 많지 않을 것 같다. 한동안은 시어머니로 부터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용돈 좀 올려줘라 로 바뀌었다지만 이 또한 용돈을 꼬박꼬박 챙겨주는 며느리가 그다지 많아 보 이지 않은 현실에서 보편적인 양상은 아니지 싶다. 지금 세상은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지위와 유세가 예전에 비해 엄청시리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여 전히 껄끄러운 관계임은 분명하다. 봄볕엔 며느리 밖에 내보내고 가을볕엔 딸년 내보낸다. 는 말이 있고, 동지 팥죽그릇은 딸한테 설거지 시키고 대보름 찰밥그릇은 며느리한테 시킨다. 는 말도 있는 걸 보면 친정엄마와 시어머 니의 정서가 따로 작동하기는 하나보다. 이런 점만 보면 여자는 참으로 복잡 미묘한 존재다. 딸, 며느리, 시누이, 올 케, 친정엄마, 시어머니가 한 몸의 역할일 수 있겠는데, 이토록 서로 상반되고 대립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니 말이다. 그럼에도 가장 순연하고 뜨거운 사랑의 관계가 친정엄마와 딸의 사이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시집간 딸에게 친 정엄마만큼 애틋한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아낌없이 주고도 더 못 줘서 안달이고 한이다.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 친정엄마인데 딸은 가장 사랑하는 이가 엄마는 아니라며 미안해하는 어느 연극 대사가 있다. 좀 더 살아봐라 내 맘 알끼다 란 말은 이 세상 모든 엄마가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건 바로 새끼 나서 키워봐. 그때 엄마 생각 날끼다 란 말의 은유일 텐데, 내 속엔 작은 엄마가 있어서 가는 허리가 자꾸 허 청 거릴 때는 서로를 관통한 바람 도 생겨난다. 때로 친정엄마 앞에서 딸은 버릇없고 고약하다. 하지만 딸과 친정엄마는 그저 마음으로 다 안다. 그리고 뒤돌아서 서로에게 미안해서 운다. 딸들은 종종 엄마 땜에 못살아 란 말을 입에 담고 살지만 늘 맘속으로는 엄마 때문에 산다 는 걸 안다. 혹시라도 이번 추석에 시어머니가 친정 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긴 연휴임에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곧장 자식 챙기는 일상으로 되돌아갈 처지일 수밖에 없다면, 오늘 밤, 친정엄마에게 전화로 그저 별 일 없지? 그냥 엄마 생각이 나서. 이번 추석에 어쩌면 못 갈지 몰라, 다음 달 엄마 생일엔 꼭 갈께, 미안해 엄마 라 하면 다 되는 것이다. 뿔의 싹도 안 날 것이다. 권순진 The Look of Love - 로라 피기 친정 / 조정숙 8

9 흐린 눈으로 보네/ 김재성 :53 흐린 눈으로 보네/ 김재성 닿을 곳 알지 못한 채 걸어 들을 지나고 걸어 마을과 숲을 지났네 때로 강을 만나고 저물녘 붉은 하늘을 만났네 무른 땅에 서서 오래 바라보는 동안 날 선 이를 가진 짐승들 발끝 할퀴고 내 몸은 더뎌 시간 쉬 흘렀네 이제 눈 흐리고 귀 어두워 어눌한 입 닫고 고개만 끄덕이네 걸어온 길 조금씩 지워져 가네 세상 조금씩 멀어져 가네 - 다음카페 '시와시와' 게시판... 이 시를 읽으면서 곧장 영화 라이언 킹 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오래전 만화영화일 뿐이고 어린이용이란 선입견 을 갖고 보았던 영화가 뜻밖의 진한 감동으로 오랫동안 뇌리에 기억된 탓에 자연스레 인화된 까닭이리라. 게다가 한 때 자폐를 앓았던 시인의 작은아이와 시인이 시간만 나면 둘이서 배낭을 메고 훌쩍 목적지 없이 여행 다니는 모습을 흐린 눈으로 보네/ 김재성 9

10 드문드문 보았던 터라 그 대목도 환기되었으리라. 라이언 킹 은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서사구조와 성우역할을 한 배우들의 대사가 애니메이션의 취약점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 영화였다. 그런데 이 시는 아기사자 심바 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 아빠 사자 무파사 에 환유된 영상이다. 아기사자가 말했다 아빠는 항상 용감한데 저는 항상 이 모양 이 꼴이에요? 무파사가 말했다. 나는 필요할 때만 용감해진다 그렇게 용감무쌍하던 아빠사자도 세월을 이기지 못해 이제 눈 흐리고 귀 어두워 어눌한 입 닫고 고개만 끄덕이 는 신세가 되었다. 사실 누구의 인생인들 무파사와 같은 용맹스러울 때가 없었겠냐만, 들과 마을과 숲을 지나면서 강과 하늘을 만나고 전투를 치루고 노을을 바라보는 동안 주어진 시간의 마모와 함께 쇠약해진 자신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시에서의 화자가 김재성 시인 자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엄살이거나 적지 않게 과장된 비약이 섞여 들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꾸벅꾸벅 졸면서 탄식할 시기는 절대 아닐뿐더러 실제로 그런 분위기와는 한참 거리가 먼 명민한 눈을 가진 시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 라이언 킹의 신화적 모델이 성서의 출애굽기를 원용한 서사구조로 읽힐 수 있듯이, 인간의 현대적 존재 방식을 흐린 눈 을 통해 둥글게 인식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면 조금 과장되고 성급한 설정이라 해도 그리 어색하진 않다. 권순진 흐린 눈으로 보네/ 김재성 10

11 토끼에게로의 추억/ 신현정 :25 토끼에게로의 추억/ 신현정 토끼에게서는 달의 향기가 난다 분홍 눈은 단추 같다 앞이빨이 착하게 났다 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 몽실했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보았다 토끼와 시소를 타고 싶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토끼에게로의 추억/ 신현정 11

12 - 시집 바보사막 (랜덤하우스중앙, 2008)... 국민학교2학년 겨울방학 때 아버지는 어디서 얻어온 새끼 토끼 한 마리를 가죽점퍼 속에서 꺼내셨다. 그때부터 애완 용인지 가축용인지 용도가 모호한 토끼사육이 시작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 몫의 갓일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 은 대구의 한 적산가옥을 빌려 살았었고 마당구석에 송판으로 대충 엮은 토끼집이 내 놀이터의 중심이 되었다. 몇 주 일이 지나자 토끼의 으뜸 부끄러운 부위가 발갛게 부어올랐고 아버지는 시장에서 샀다며 수토끼 한 마리를 추가로 입양시켰다. 어린 마음에도 둘이서 정답게 지내는 모습이 흐뭇했다.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아 그들의 은밀한 놀이를 지켜보았다. 어른들 가운데는 보지도 못했으면서 함부로 말하는 토끼씹 의 그 찰나도 나는 그무렵 관측할 수 있었 다. 몇 달 뒤 5마리의 새끼가 태어났다. 내겐 분명 애완이었지만 토끼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 석한 일이었다. 이름이 있었다면 '토순이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식이 되었을텐데... 그런데 희한하게 그 뒤로 토 끼들의 행방을 모르겠다. 기억에 없다. 토끼집이 없어져버렸고 새끼를 낳고서 어미가 제 몸의 털을 뽑아 깔아놓은 새 끼들의 보금자리 흔적도 지워졌다. 어떻게 처분되었는지 도통 기억이 희미하다. 국민학교3학년 겨울 부드럽고 따스한 토끼털 감촉의 귀 가리개 하나가 내게 얻어걸렸고 우리 집은 이사를 갔다. 세 월이 한참 흐르고 흘러 어느 정치인에 의해 처음 들었던 토사구팽 이란 말의 뜻을 알아차렸을 때 아주 잠깐 그 토끼를 생각했었다. 단추 같은 분홍 눈도 떠올렸다. 착한 앞이빨을 기억해 내려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 그림 에 나오는 절구통 찧는 토끼를 생각했다. 하지만 토끼가 달나라에서 쫓겨 내려온 지도 한참 되었다. 계수나무아래서 박자에 맞추어 순하게 절구 찧어대던 모 습은 선한데 왠지 달의 향기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마르티즈보다 예쁘게 생긴 토끼도 있고 안방에서 토끼를 키우는 집도 많이 있다고 들었다. 토끼띠 내 어머니의 누운 모습을 뒤돌아본다. 다시 그 토끼가 생각난다. 그녀석의 두 귀 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 놀아보고 싶다. 시소를 몇 번 타는 척 하다가 이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도 싶다. 신현정 시인이 먼저 간 그곳 말고 이 세상 그 어디에라도 토끼고 싶다. 권순진 토끼에게로의 추억/ 신현정 12

13 가로등/ 전향 :52 가로등/ 전향 가로등 불빛 가득한 한밤의 거리는 붉은 피 흐르는 어둠의 혈관이다 그 거리를 혼자 걸어가는 사람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쓰레기통 뒤지는 고양이 그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강물 되어 흐르는 혈관 속 풍경들이 캄캄할수록 환하다 한 길도 안 되는 우리들 혈관 속엔 그리움이 소용돌이치는지 서러움이 고여 있는지 낮이나 밤이나 서로 알 수 없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검게 출렁이는 어둠 속이 수족관처럼 투명하다 가로등/ 전향 13

14 강기슭 샛강 같은 수많은 가로등 그런 어둠에게 오늘도 수혈중이다 - 시집 그 빛을 찾아간 적 있다 (한국문연, 2012)... 어제 시노래패 '울림'의 투어콘서트가 대구에서 있었다. 200여 명의 유료 관객 앞에서 20여 곡의 시노래가 불렸다. 그 가운데 전향 시인의 시 '9월, 하고 부르면'과 '빗방울, 그 둥근 꽃' 두 편이 포함되어 새롭게 선보였다. '9월, 하고 부르 면'은 솔직히 다소 늘어진 듯한 곡조로 대중 어필하기는 쉽지않아 보였으나 '빗방울, 그 둥근 꽃'은 시와 리듬이 잘 어우러지고 보컬의 생기발랄함이 더해져 그야말로 시에 날개를 달고 공연장을 날아올랐다. 잘 전파만 된다면 대중의 사랑도 받을만한 노래였다. 영남대학교병원에서 오랜기간 간호사를 했고 수간호사를 거쳐 지금은 팀장으로 있는 전향 시인에게 진행자가 물었 다. '간호사와 시인이라 어째 좀 섞이지 않는 느낌이 드는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원에서의 간호사 생활을 통해 시인의 눈으로 좀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을까요?' 전향 시인은 병원이란 곳에서도 요즘 인문학이 강조되고 있고... 뭐라 뭐라 대꾸했지만 사실 삶의 터전이 병원이라고 해서 시와 무관할 것이란 생각은 말도 안되는 편견이고 진행자 역시 시를 쓰는 사람이라 이를 모를 리 없다. 오히려 병원에서 일을 하는 시인이기에 어느 직업군 보다 삶의 대한 성찰이 깊고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시를 쓰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로등'도 그런 '유리한' 시선과 사유로 빚어진 시라 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도시 야경을 찍은 어떤 사진을 보면 자동차 불빛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붉은 궤적이 마치 붉은 피 흐르는 어둠의 혈 관 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시인의 사유의 폭은 보다 더 확장되어 가로등 불빛 가득한 한밤의 거리 를 그 렇게 보았다. 촘촘하게 가로등 사이를 당겨놓기도 하고 클로즈업 시켜 취객과 도둑고양이 그리고 상관없다는 듯 그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까지 포착하여 그 혈관 속 풍경으로 배치하였다. 그 가운데 우리들 각각의 혈맥을 슬며시 들여다본 다. 한 길도 안 되는 우리들 혈관 속 인데도 애매모호하다. '그리움'인지 '서러움'인지 '낮'인지 '밤'인지 몽롱하다. 그에 비해 가로등이 이어주는 혈관은 환하고 투명하다. 사실 환하거나 투명하다는 시어는 시인의 심성과 밀접한 관련 이 있다. '긍정의 힘'이 습관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여의치 않은 표현이다. 이시영 시인의 '가로등'은 '어렵게 한 세계를 놓고 떠나는 자의 그림자가 뒤에서 한없이 자유롭다'며 공원을 가로 질 러가는 한 행인을 짧게 조명했다. 세상을 한참 살고 난 다음에는 이런 쿵 소리 무거운 직관의 언어가 가능할까? 물론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링거처럼 걸려 어떤 어둠도 수혈 가능한 저 가로등처럼, 불특정 다수를 위한 등불처럼, 흰옷의 천사처럼, 그처럼 전향 시인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 총명한 밤 고양이가 가로등 불빛을 받고 훌쩍 담을 넘는다. 권순진 가로등/ 전향 14

15 가로등/ 전향 15

16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33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16

17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 시집 아득하면 되리라 (정음사,1984) 년 무인우주선 보이저1호가 태양계 행성을 탐사할 목적으로 우주를 향해 발사되었다. 보이저는 태양계 행성의 많은 사진들을 지구로 송신했다. 그 덕에 우리는 토성의 고리가 얇은 얼음조각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구를 떠난 지 13년이 흐른 뒤인 1990년 2월 초, 보이저는 태양의 가장 바깥쪽 행성의 궤도를 넘어선 공간을 초속 18km의 속력 (서울에서 부산을 20초만에 갈 수 있는 속도)으로 달리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미 배터리는 다 닳고 관성으로만 진행하고 있을 보이저 호에 광속으로 신호를 보내 '카메라를 지구로 돌려 사진을 찍어 전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신호는 5시간 후에 60억km 떨어져 있는 보이저에 도달했다. 몇 달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실현가능성을 기대치 않았던 이 명령에 따라 보이저는 90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태양계의 가족별과 우주공간에 외롭게 빛나는 '창백한 푸른 점' 지구 등을 찍은 수 십장의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태 양계 행성 탐사 임무를 마치고 아무런 에너지도 없이 관성으로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보이저호의 충실한 명령수행은 많은 과학자들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 보이저1호가 이제 태양계를 완전히 벗어나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을 외롭게 질주하고 있다는 NASA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이 외로운 우주여행은 예상대로라면 앞으로도 이백만년 동안은 계속 되리라. 보이저에는 다른 항성의 외계인과 조우할 상황에 대비하여 지구 정보를 담은 골든디스크가 탑재되어 있다. 디스크에 는 '안녕하세요?'라는 한국어 인삿말을 비롯해 54개 언어와 고래의 울음소리 등이 수록되었으며, 지구인의 다양한 모 습을 기록한 사진, 피그미족 소녀들이 성인식에서 부르는 노래, 모짜르트 음악도 담겨있다. 칼 세이건은 보이저가 보 낸 그 한 장의 사진에 영감을 받아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주공간에 외로이 떠있 는 한 점을 보라. 우리는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성자와 죄인 등 모든 인류가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티끌과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우주에는 천억 개의 은하가 있다고 한다. 은하간의 거리는 너무나 멀어 우리 은하와 가장 가까운 은하인 안드로메다 은하만 하더라도 이백만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단다. 그 시공의 상상만으로도 아득함을 넘어 어질하다. 그렇게 견 주어보면 이승에서의 삶 전부가 아주 짧은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별들을 인도양 모래알처럼 쪼개어 생각하 니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가 다시 아득해진다. 다만 달과 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까지 함께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볼 수는 없는 것. 그러니 그 우주의 한 귀퉁이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어른거리는 냉수사발을 그냥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으라. 권순진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17

18 Oliver Shanti & Friends - Nuurelarb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18

19 사일못/ 서하 :22 사일못/ 서하 들고 다닐 수 없는 못물이 거기 있어 내 마음 들고 내가 가네 물의 낯바닥 간지르는 햇살과 늙은 산은 일부러 흘림체로 누운 채 발 담그고 살고 있네 사람들이 흩어져 살 때 갈대꽃처럼 모여 사는 게 아름답다고 못물은 모인 만큼 젖어 있네 모난 데 하나 없는 저 고요 사일못/ 서하 19

20 바람은 잘게 부서져 쌓이고 햇살은 물속 뒤지다가 그냥 가네 못물 움켜잡은 둑에 앉아 생각하네 잔물결처럼 그렁그렁한 내 마음도 낮은 산들 벌거벗고 사는 이곳 주소 옮기면 저 물고기로 살 수 있을까 - 시집 아주 작은 아침 (시안, 2010)... 대구에서 영천 방향으로 가다보면 금호읍 지나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청통면 방향으로 좌회전해서 조금만 더 가 면 사일못이 보인다. 시인의 자란 곳이 그 동네이고 집과 학교를 오갈 때는 언제나 이 못을 옆으로 끼고 걸어야 했 다. 어린 시절 서하 시인은 이 사일못의 광활한 큰물을 바다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큰물이 세상에 있으리란 상상 을 하지 못했다. 1932년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사일못은 면적이 약18만평, 수심은 1~4m인 큰 저수지에 속한다. 경관 이 수려하고 어종이 풍부해 강태공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사일못은 2015년 3월까지 수질과 생태계 보호를 위해 낚시 를 금지해 오고 있다. 대신 여름철엔 물놀이 수상레저 시설이 설치되어 바다에서처럼 아이들이 까르륵거리며 첨벙대 고 논다. 전국에서 강수량이 가장 적은 곳으로 알려진 영천에는 크고 작은 농사용 저수지가 천 개가 넘는다. 이는 강원도 전 체의 세 배에 해당하는 숫자로 전국최다이다. 춘천을 호반의 도시라고 부르는데 비해 어감은 뭣 하지만 영천은 저수 지의 도시다.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친수환경이 조성된 셈인데, 그로 인해 맑은 날이 많아 별을 관측하 기에 적합하다 해서 동양 최대의 천문대가 영천 보현산에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영천에서 생산되는 과일은 햇볕을 많이 받아 당도가 높다. 영천은 적은 강우량과 풍부한 일조량으로 과일 생산에 최적의 기후 환경을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결혼하고서부터 대구로 나와 살고 있지만 모난 데 하나 없는 저 고요, 바람은 잘게 부서져 쌓이고 햇살은 물속 뒤지다가 그냥 가 는 그 사일못이 가슴 안에서 떠나질 않는다. 못물 움켜잡은 둑에 앉아 너른 금호평야 바 라보며 가득 고향을 담는다. 이맘때면 부모님 생각과 실루엣같은 추억들로 더욱 홍건해진다. 기어이 잔물결처럼 그 렁그렁한 내 마음 이곳으로 주소 옮길 궁리를 한다. 하지만 마음의 주소지는 굳이 이전할 필요가 없다. 멀쩡한 이 름의 사일못 을 영천시에서 풍락지 로 고쳐 부르는 연유를 잘 모르듯이. 예전 그대로 사일못은 물고기 잘 살고 고요하며 평화롭다. 권순진 사일못/ 서하 20

21 Peace Afterwards - Shannon Janssen 사일못/ 서하 21

22 늙은 애인/ 문모근 :23 늙은 애인/ 문모근 81세 된 할머니가 호계장 칼국수 집 아주머니에게 조심조심 낮은 목소리로 넥타이 가게를 묻는다 할매, 영감님 안계시잖소 넥타이 가게는 신천에 가믄 있는데요 할매는 힘들어 못가요 다음 장에 사소 근데 누 줄라꼬예? 말하지 마라 애인 줄끼요? 늙은 애인/ 문모근 22

23 어허, 말하지 말라카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 할머니가 눈을 흘기며 문을 나선다 가을 하늘이 파랗다 - 시집 새벽비 (이웃, 2010)... 사회생활 하는 남자는 신체의 두 곳을 묶고 산다. 혁대로 허리를 묶고 넥타이로 목을 묶는다. 혁대는 남자로 하여금 허리띠를 조여 가며 가족을 부양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따라서 고단한 삶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론 삶에 대한 자세를 다잡고 각오를 새롭게 한다는 뜻도 있다. 넥타이는 화이트 컬러의 징표이고 남성의 품위로 기능하지만, 이것 을 선물할 때에는 또 다른 의미로 그 뜻이 확장된다.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넥타이는 그 순간 사랑의 상징물이 된 다. 오래전 백악관 스캔들의 르윈스키가 넥타이를 클린턴에게 선물하면서 당신이 이 넥타이를 매고 있는 동안은 내 가 당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려고 넥타이 파는 가게를 묻는 할머니, 재래시장 칼국수 집 아주머니로서는 충분히 놀려 먹을 만하다. 허긴 요즘 같은 백세 운운하는 시대에 이제 겨우(?) 80줄에 들어선 할머니인데 연애하지 말란 법은 없 다. 그 감정 밭의 지력이 쇠해서 연정의 풀 한포기 돋지 않을 것으로 여기지만 마음만은 청춘인 어르신들이다. 마음 만이 아니라 온기 남은 그 밭에 청춘의 영롱한 씨앗이 숨어있어서 싹을 틔울 기회만 기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숱 하게 계신다. 어쨌거나 몸은 늙어도 사랑의 감정은 마르지 않아, 이는 곧 사람에게 있어 희망이자 고통이라 하겠다. 하지만 양로원에서 고랑고랑 혼자 살다 죽는 것 보다 얼마나 벅찬 희망인가. 황혼의 연애감정을 다룬 마른 꽃 이라는 박완서의 단편소설이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주인공이 우연히 고속버스에서 한 노신사와 나란히 앉게 된다. 두 사람은 흘러간 영화, 좋아하는 배우나 음악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년 배로서의 진한 연대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대화가 통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이 싹트 고, 여성은 남자 앞에서 소녀처럼 들떠 재잘거리고 깔깔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잃어버 렸다고 생각했던 여성성이 되살아 난 것이다. 흑백화면 같던 여성의 삶은 총천연색시네마스코프로 빛나고 마른 꽃 같 던 여성의 존재에는 생기가 넘친다. 고령화 시대에 사별이나 이별 후 홀로 사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홀로 사는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긴 세월 하루하루 살아갈 뿐인 삶에 이런 연애감정이 찾아온다면 일약 활기를 띄고 생기가 돌 것은 명약관화한 이치다. 황혼의 연애는 단순히 외로움을 덜어주는 이상의 효과가 있다. 넥타이를 고르면서 어떤 색이 어울릴까 가슴 두근거리는 행복감은 분 명 뇌에서 좋은 화학물질을 분비시켜 신체기능도 향상시킬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할머니의 넥타이를 맬 주인공은 늙 늙은 애인/ 문모근 23

24 은 애인 이 아니라 첫 출근하는 젊은 손자일지도 모른다. 그 반응의 양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느 경우이 든 할머니의 마음 밭은 가을하늘처럼 파랗다. 권순진 Joshua Bell, violin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orch. 늙은 애인/ 문모근 24

25 그 여름의 끝/ 이성복 :52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푹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시집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그 여름의 끝/ 이성복 25

26 한용운의 연시를 연상케 하는 이성복 시인의 1980년대 작품이다. 다만 사랑의 부재와 상실감이 더 강열하게 표현되 어 있고 동시에 무거워보인다. 상상력의 모던함 때문일까. 배반과 장미의 서로 이질적인 요소가 묘하게 어울리는 것 처럼 여름과 백일홍은 장난과 절망에 명징하게 엮여있다. 서로 악수를 청하지도 등져있지도 않다. 그 여름은 뜨거웠 으므로 따라서 폭풍이 몰아쳤으며, 붉은 꽃들을 피웠기에 나른하진 않았으리라. 그때 진실과 상관없이 사랑은 작동되 었는데, 장난처럼 허술하게 조립된 것 치고는 꽤나 견고했고 오래도록 무사했다.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 던 것은 기실 그 붉은 기운 때문이었으리라.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사랑은 그 체위를 바꿔가며 약속된 자전과 공전의 궤적처럼 관성으로 내달렸다. 돌고 돌아도 어질하지 않았고 지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꽃들은 지고 마는 법. 유효하지 않은 것은 지난 밤 마신 뒤 뒹구는 술병만이 아니었다. 그 여름 의 끝 여관방 시트카버처럼 사랑은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했고 찢긴 잔해는 하나씩 쌓여가며 방관되었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곧 절정에 도달함이고, 그 절정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는 의미다. 비단 같은 꽃이 노을빛에 곱게 물들어 사람의 혼을 오래도록 빼앗으며 피었으나 계절이 필연으로 바뀌듯 그해 여름의 배롱나무 꽃도 그렇게 지고 말았으며, 어느 해 여름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전설처럼 다시 필 것이다.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 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 도 끝을 보았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뜨거운 태양을 온 몸으로 빨아들이면서 백 일동안 세 번씩이나 피보다 진한 정열의 꽃을 피우는 동안 치유의 과정도 함께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벽까지 기승했던 고뿔이 눈뜬 아침 거짓처럼 뚝 떨어지듯 절망은 그렇게 느닷없이 끝이 난 것처럼 보였 던 것이다. 여름 내내 그 처연한 붉은 빛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80년대 어느 해 그 여름날의 절망은 어쩌란 말이냐. 절망과의 싸움이 끝장나고 그 절망을 통해 희망을 간구받기라도 한 것일까. 하기사 권세도 십년을 넘지 못하 고 꽃의 붉음도 백일을 넘지 못하며 사람도 늘 좋기로 천일이 갈 수 없거늘. 그 붉은 기억만 한결 같고 끝이 없기를. 권순진 그 여름의 끝/ 이성복 26

27 칠성동 저녁노을/ 류상덕 :55 칠성동 저녁노을/ 류상덕 눈을 감고 귀 열었다. 얘야 문 두드려라. 은행나무 받쳐 든 그 너머에 저녁노을 처마에 걸어 놓았다 자죽자죽 밟고 오렴. 저 빛살 지려나보다 어스름이 내리는데 이 산 저 산 실을 걸어 그리운 말 다 풀어도 가슴엔 고운 빛깔이 너를 밝혀 떠 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어느새 속이 삭은 논고동 같은 몸에 여기저기 금이 갈 뿐 채워도 바람만 부는 칠성동은 쓸쓸하다. - 제8회 이호우 시조문학상 수상작(1998)... 칠성동 저녁노을/ 류상덕 27

28 류상덕 시인은 65년 공보부 신인문학상에 당선, 69년 매일신문 71년 서울신문에 신춘문예 당선한 원로 시조시인이 다. 평범한 도심에서 노을이 유달리 아름답거나 놀라울 만큼 차별화된 풍경을 보여주는 특별한 공간이 있을까. 회색 빌딩과 아파트 숲 사이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대동소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칠성동은 대구 북구에 위치한 동네로 먼저 재래시장인 칠성시장이 떠오르고 야구장을 포함한 시립운동장이 있으며 근래엔 아파트 단지가 밀집된 주거지역으로 부상된 곳이라 사실 노을에 관한 한 특별할 게 없는 동네이긴 하다. 그런데 조선 초기 학자 서거정이 당시 대구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10수의 시로 남긴 대구 십경 에는 이 노을에 관 한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맨 마지막 제10경이 침산만조( 砧 山 晩 照 )인데 바로 칠성동과 인접한 침산의 저녁노을을 예찬한 시다. 물은 서쪽으로 흘러 산머리에 다다르고, 푸르른 침산에 맑은 가을빛이 드리우네. 해질녘 바람에 어디 서 다듬이소리 급하게 들리는가. 사양에 물든 나그네 시름만 더하네. 침산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느끼는 나그네의 감흥을 그대로 펼쳐 보인 매우 서정적인 시다. 시상을 띄우는 소재로 강 물(지금의 신천), 해질녘 바람, 다듬이소리, 석양, 나그네 시름 등으로 쓸쓸하게 느껴지면서도 노을이 주는 미학을 짧 게 잘 드러낸 시어들이다. 류상덕 시인의 시조 작품 역시 비슷한 느낌으로 전이되어 온다. 그리고 추측컨대 이 무렵 의 시인에겐 막 얻은 손자가 있었지 싶은데 그 혈육에 대한 사랑이 '처마에 걸어 놓았다 자즉자즉 밟고 오렴'이란 동 시 풍의 표현으로 저릿하게 배어들었다. 스스로는 '어느새 속이 삭은 논고동 으로 묘사하며 채워도 바람만 부는 칠성동은 쓸쓸하다 고 했지만 칠성동의 유래가 선사시대 지석묘인 칠성바위에 연유하였고, 그 후 바위에 얽힌 일곱 아들의 성공실화로 인해 근래까지 자식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부귀다남의 소원을 빌었던 곳임을 환기한다면 헌신의 내리사랑이 읽혀진다. 시인의 수심 은 쓸쓸하지만 그리운 사람을 끈끈하게 그리워하며 살아갈 나날에 대한 마음의 염려와 다스림이 아니었을까. 다정다 감하면서도 강단이 느껴지는 노시인의 모습이 노을을 배경으로 어른거린다. 권순진 칠성동 저녁노을/ 류상덕 28

29 그리운 남풍 2/ 도광의 :25 그리운 남풍 2/ 도광의 잔치가 끝나도 큰방에 둘러앉아 밤늦도록 놀았다. 잠잘 데가 모자라 마루에서 베개 없이 서로 머리 거꾸로 박고 자면 서도 소고기국에 이밥 말아 먹는 게 좋았다 "언니야, 엊저녁 남의 입에 구린내 나는 발 대고 잤는 거 알기나 아나?" "야가 뭐라카노, 니 코 고는 소리 땜에 한숨도 못 잤데이" 주고받는 말이 소쿠리에 쓸어담을 수 없는 헌것이 돼버린 지금, 등 너머 흙담집 등잔마다 정담은 밤비에 젖어가고 있 었다 멀리 시집가서 사는 누님을 하룻밤이라도 더 자고 가라고 이 방 저 방 따라다니며 붙잡던 솔잎 냄새 나는 인정을 어 디서 볼 수 있겠는가 해산한 딸 구안( 苟 安 )하고 돌아오는 동리 앞 냇가에 눈물 흔적 말끔히 씻고 가없이 펼쳐진 하늘 쳐다보고는 마음 안 에 갇힌 막막한 울음을 걷어내고 마을 안으로 발걸음 옮기는 뼈아픈 가난의 설움을 저승의 번답( 反 畓 )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것인가 - 시집 그리운 남풍 (문학동네,2003)... 그리운 남풍 2/ 도광의 29

30 김상용의 시조 남으로 창을 내겠소 끝 부분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란 대 목이 얼른 떠오른다. 소박한 전원생활을 노래한 작품이지만 그보다 '남'쪽의 따뜻하고 밝은 이미지와 삶의 긍정은 도 광의 시인이 그리워하는 남풍 과 닮아 있어 낙천적 삶의 태도, 훈훈한 인정, 달관의 모습을 넉넉히 보여주기 때문 이다. 그들 시에는 모두 인간에 대한 순정한 마음이 가득 깃들어있다. 우리 사는 세상이 얼핏 아름답고 편리하며 풍요로워 보이지만 정신세계의 가치들을 소홀히 생각하고, 지적 오만에 사로잡혀 예전의 귀한 서정들을 점차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시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대개의 사람들이 '물질만이 전 부는 아니며 정신적인 풍요가 더욱 소중하다'고 말들은 그리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길들여진 물질의 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오히려 지금보다 덜 발달되고 더 가난했을 때는 이웃끼리 훈훈한 인정을 전하며 가족처럼 지냈고, 부모형제지간에도 자신의 생명을 던져 효도하고 우애하는 뜨거운 정이 있었다. 물질과 허명을 얻기 위해 인간 본연의 덕성마저 팔아넘 기는 오늘날의 각박하고 까칠한 세상 보다는 차라리 인성의 본향에서 조금은 배고프고 등이 시려도 서로들 애휼하며 살아가던 그날이 훨씬 더 가치있는 건 아닐까. 박용래와 김종삼의 계보를 잇는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도광의 시인의 봉놋방 같은 따뜻한 정통 서정시에서 지 구 한 바퀴 돌아도 좋을 한 자락 훈풍을 맛본다. 원추리 꽃밭에 실잠자리 날고 텃밭에 꼬부라진 오이가지에 수세미나 잘 익으면 그만이어라. 황하의 물이 천 년을 흘러온 것도 한 줄기 푸른 물 때문이듯, 세상은 한 가닥 따스한 마음으 로 데워지는 것이다. 권순진 고향집 가세 - 정태춘 그리운 남풍 2/ 도광의 30

31 버리긴 아깝고/ 박철 :15 버리긴 아깝고/ 박철 일면식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박철 31

32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 계간 시에 2009년 겨울호... 시집을 내본 경험이 있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씁쓸함을 겪었음직하다. 시집을 내는 방 식에는 자신이 소요경비를 모두 부담하는 자비출판과 상업적 판매를 염두에 둔 기획출판이 있다. 그런데 기획출판은 전체 시집의 5% 안팎이고 나머지는 거의 자비로 출판하는 것이 문단의 현실이자 비애이기도 하다. 시집을 내고선 일면식도 없는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낼까 말까 망설였던 시인의 대부분은 자비출판의 경우라 짐작된 다. 아마 보내고 싶어도 주소를 몰라 보내지 못한 시인도 있을 것이며, 보내봐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팽겨질 게 빤 하다며 지레 짐작하고선 보내지 않는 시인도 있겠다. 하지만 박철 시인 정도의 역량과 비중으로 주목받는 시인이라면 기획과 자비출판을 불문하고 어떤 평론가라도 그냥 흘깃하고 밀쳐내진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처럼 공연히 평론가에게 알랑 방구나 끼려는 수작도 아닐 것이며, 공연히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불쑥 면지를 북 찢어낸 까닭은 무얼까. 내 시집에 관심 가 져주고 문단 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은 얄팍한 기대감으로 시집을 보내는 여느 시인들과 다르지 않게 평 론가에게 읽히는 것이 싫었던 게다. 다른 이들의 그런 의도를 굳이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시인은 자존감 훼손이라 생각되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낙장 되어 버리긴 아까운 시집을 시인은 이웃 식당 여주인에게 줘버렸는데, 나중에 뜻밖의 아귀찜 대접을 받았다. 물론 식당 여주인이 버리긴 아깝고 라고 말한 것은 시인이 책을 건네며 민망함을 덜 요량으로 덧 붙였던 말과는 사뭇 다르다. 시집이라는 특별한 선물을 받고 그 고마움을 따뜻이 감싸 표현한 특수 용어였던 것이다.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시인으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평론가에게 보내기 보다 백번 잘 한 짓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매콤한 아귀찜이 되어 돌아오는 시를 쓰기만 해도 시인은 참 행복 하겠다. 버리긴 아깝고/ 박철 32

33 권순진 버리긴 아깝고/ 박철 33

34 어려운 숙제 / 김현숙 :33 어려운 숙제 / 김현숙 학교에 학생 수 점점 줄어든다고 시훈이, 도현이, 요한이, 상대 정인이, 주은이, 윤지, 지수, 나 한 자녀뿐인 우리 불러 놓고 선생님은 특별한 숙제를 내주셨다 엄마한테 동생 낳아 준다는 확답 받아 오기! 그런데 숙제 해 온 친구 어려운 숙제 / 김현숙 34

35 한 명도 없다 - 제8회 푸른문학상 동시집(푸른책들, 2010)... 이 동시는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 부문에서 94명의 응모자 작품 가운데 수상자 5명의 작품으로 엮은 동 시집 가운데 한 편이다. 동시란 어린이다운 정서와 감각으로 어른과 어린이 모두가 공감하면서 함께 읽고 즐길 수 있 는 시를 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동시를 어린이만을 위한 시이거나 어린이가 쓴 시로 잘 못 이해하고 있다. 어 른들이 읽을 만한 동시는 따로 어른을 위한 동시 라고 명시되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 다. 어려운 숙제 는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시로 아이들에게도 난해한 숙제지만 실은 어른들에게 더 난감 한 숙제다. 2012년 출산율이 1.3명으로 2010년의 1.2명, 2005년의 1.1명에 비해 조금씩 증가추세에 있긴 하지만 이는 2001년의 출산율을 회복한 수준이다. 아직은 그 증가세가 미약하고 불투명하여 여전히 OECD국가 중 최저다. 일 단 감소추세가 멈추었다는 게 다행이고 위안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이고 효율적인 대책과 가치관의 변화 없이는 언 제 또 감소로 돌아설지 모를 일이다. 아이 하나 더 낳아 키우고 교육시키는데 드는 노고와 비용에 비해 독립하여 사회로 진출하기 까지는 취업이나 주거 등 어려운 난관이 너무나 많고 미래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게다가 핵가족화와 부부 중심 의 가정,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 등 여러 요인들로 결혼과 출산의 기피현상이 심화 확산되었다. 지금의 저 출산현상 은 우려의 수준을 넘어 국가적으로 대재앙을 몰고 올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란 게 정부와 국민 모두의 공통된 인식 이다. 사정이 이토록 급했기에 몇 년 전부터 정부와 지자체들은 앞다투어 출산장려금을 주는가 하면 보육비 지원정책을 펴 오고 있다. 별의 별 인센티브가 다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왠만한 출산 유인책으론 약발이 잘 받질 않는다. 그 가운데 구미를 확 돋게 하는 것도 있다. 충북 영동군에서는 셋째를 낳으면 740만원, 넷째 아이를 낳으면 1,240만원의 출산 장려금을 지원해 다자녀 출산율을 높여 나가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출산장려 슬로건이 가가호호 아이둘셋 하 하호호 희망한국 이라는데, 예전의 순진했던 시절처럼 구호가 잘 먹혀들지는 의문이다. 그러니 선생님의 깜찍하고 순진한 숙제 아이디어도 통할 리 없다. 몇년 전엔 보건복지부에서 아이를 낳으면 승진 혜 택을 준다는 대책을 실제로 내놓은 바 있다. 그런 식이라면 상급학교 입학 시 가산점을 준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셋 째 아이가 남자면 군 면제를 시켜주겠다는 아이디어도 나오게 생겼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아이를 낳진 않겠으나 아무 리 다급해도 이런 황당한 대책을 사려없이 남발하다보면 나라꼴이 누더기가 될 건 뻔하다. 어쨌거나 나도 별 탈 없으 면 내년엔 손주 하나를 얻지 싶은데, 아들 내외가 최소한 기본숙제는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려운 숙제 / 김현숙 35

36 권순진 어려운 숙제 / 김현숙 36

37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이규리 :40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이규리 여섯 살 때 내 남자친구, 소꿉놀이 하다가 쭈르르 달려가 함석판 위로 기세 좋게 갈기던 오줌발에서 예쁜 타악기 소리가 났다 셈여림이 있고 박자가 있고 늘임표까지 있던, 그 소리가 좋아, 그 소릴 내고 싶어 그 아이 것 빤히 들여다보며 흉내 냈지만 어떤 방법, 어떤 자세로도 불가능했던 나의 서서 오줌 누기는 목내의를 다섯 번 적시고 난 뒤 축축하고 허망하게 끝났다 도구나 장애를 한번 거쳐야 가능한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이규리 37

38 앉아서 오줌 누기는 몸에 난 길이 서로 다른 때문이라 해도 젖은 사타구니처럼 녹녹한 열등 스며있었을까 그 아득한 날의 타악기 소리는 지금도 간혹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듣지만 비는 오줌보다 따습지 않다 서서 오줌 누는 사람들 뒷모습 구부정하고 텅 비어있지만,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선득한 한 방울까지 탈탈 털고 싶다 - 시집 뒷모습 (랜덤하우스, 2006)... 고체 형상의 배설물인 똥은 대변이라 하고 액상인 오줌은 소변이라고 한다. 대변을 볼 때는 남녀가 같은 체위인데 소변의 자세는 영 딴 판이다. 시인은 어린 시절, 이 차이에서 야릇한 선망 혹은 모종의 열등감으로 몇 번 서서 쏴 를 시도해 보는데 낭패감만 맛보고 만다. 자라면서 인체 구조적 차이일 뿐이지 차별적 기능은 아니라고 애써 위 안해보지만 젖은 사타구니처럼 녹녹한 열등 에서 흔쾌히 벗어나진 못한다. 하지만 서서 오줌 누는 사람들 뒷모습 구부정하고 텅 빈 허세라 부러워할 일은 못 된다. 오줌 누는 절차가 상대 적으로 간소하다는 장점 말고는 주변 환경을 지저분하게 할 개연성이 높아 비위생적이기만 하다. 요즘은 남성도 앉아 서 오줌 눌 것을 권고 받으면서 실제로 여성과 같은 자세로 오줌 누는 남자들이 많이 늘었다. 일견 남성의 여성화를 통한 남녀평등의 모색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보다 더 인간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성 정체성 해석에서 여자애들은 어릴 때 사내애들과 성기가 다른 점을 알게 되는 순간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마음속 응어리가 되어 마침내 여성으로 하여금 열등의식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서도 일부 여성들은 남성보다 열등한 것을 감수하고 있을 수는 없다며, 오히려 남성보다 우월해야 되겠다는 감정이 마음속에 솟구쳐 기어이 '목내의를 다섯 번 적시'는 '축축하고 허망'한 일을 내고만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가만히 주저앉아있지 않고 '서서 오줌 누고 싶은' 여성들에 의해 주도된 오랜 동안의 여성운동이 괄목할 성과를 거두어 과거와는 비교안될 만큼 여성 지위는 향상되었다. 오히려 얼마 전 남성연 대 성재기 대표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의 이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약화되고 위축된 남성들의 수가 늘고있는 상황이 다. 양성 공히 '선득한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낼 때 운동이니 연대니 하는 말도 사라질 것이다.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이규리 38

39 권순진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이규리 39

40 가을 기차여행/ 윤현식 :31 가을 기차여행/ 윤현식 해거름을 태우고 도심을 벗어나고 있는 기차 왠지 맘이 짠해지는 것은 결코 누군가를 떼 놓고 가는 것이 아닌데 혹여 만나고 가야 할 사람이 있었던 건가 생각해보는 차창을 스치는 가을빛 순간들을 모두 모아두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아니 혹시 그 사람 얼굴도 섞일까 가을 맛만 날까 자꾸 되풀이되는 헛 생각을 하면서 비스듬한 그림자 속에 든 몸짓을 가을 기차여행/ 윤현식 40

41 당겨 와 곁에 앉히고 심심하지 않게 토닥거리다 보면 떠날 때 그 짠했던 맘이 다소나마 희미해지겠는데 해는 벌써 그림자 길게 드리운듯하더니 멈칫하고 퐁당 빠지려 한다 다 끝내지 못한 내 이야기는 긴 그림자 속에 감춰 뒀다가 내일 다시 하면 어떻겠냐고. - 다음카페 시와시와 자작시 게시판... 한발 성큼 다가온 가을로 공연히 마음은 싱숭생숭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기차여행 가기 딱 좋은 계절이다. 스 쳐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이 편안해지는 가을이 왔다. 빠르게 패스하는 풍경이 아니라 실은 추억 을 환기해내거나 그 추억에 잠겨있게 하는 것이지만. 그렇듯 가을 기차여행은 단순히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이동하는 교통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옛일을, 지나간 사람을 배달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가끔은 근사한 바깥 풍경이 추억의 밀도를 증폭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의 테마열차는 기관사의 재량으로 바다가 보이는 구간에서는 천천히 운행하기도 하고, 그 바다에서 해가 뜨거나 지거나 기가 막힌 순간에 이르러서는 달리는 기차를 덜컥 세우기도 한다. 당연히 속도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 기차여행이다. 소요시간이 교통수단 선택의 유일한 이유라면 서울에서 강릉까지 6시간이나 걸리는 영동선 열차 등은 이미 사라졌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제천-영월-태백-정동진을 거쳐 강릉까지 가는 열차는 주말과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많은 승객이 이용하고 있다. 기차가 주는 여유와 낭만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 여유와 낭만에 진한 햇볕과 소슬한 바람이 더해지면 마음 한쪽 그 리움으로 남아 있던 아련한 옛 추억이 절로 넘실거린다. 꼭 테마열차나 특정구간의 열차만이 창밖 추억을 불러 세우 는 건 아니다. 어떤 열차의 창에도 그 추억은 달라붙을 수 있다. 누구나 불꽃의 시절은 거쳤을 것이고, 생의 전속력으 로 기차는 지나갔겠고, 아리고 짠한 추억의 그림자는 훗날 창밖을 어른거릴 것이다. 비스듬한 그림자 속에 깃든 몸 짓을 바싹 당겨 곁에 앉히고 심심하지 않게 토닥거릴 뿐.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뒤를 힐끔힐끔 돌아본다.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을 쓰다듬으며 지리멸렬한 기억에 서 빠져나온다. 해는 지는데, 다 끝내지 못한 내 이야기는 의미 없이 지나가려 한다. 오늘 나는 누구를 기다려 차 창 밖을 서성이는가. 하지만 가슴 구석구석 무성하게 돋은 추억의 그 사람은 다시 호명되리라. 긴 그림자 드리우듯 우리의 살아있음도 매일의 떠남의 연속 아니랴. 신음하면서 짠해하며 사는 일 아닌가. 그런데 참, 나는 또 누군가의 가을 기차여행/ 윤현식 41

42 스쳐가는 풍경일까. 풍경이 되기는 할까. 권순진 The way we were - Barbra Streisand 가을 기차여행/ 윤현식 42

43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31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내 친구 재운이 마누라 정문순 씨가 낀 여성문화 동인 살류쥬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동국대 학교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어이쿠, 했다 나도 앉아서 오줌 눈지 벌써 몇 년, 제발 변기 밖으 로 소변 좀 떨구지 말아요 아내의 지청구에, 제기럴 앉아서 오줌 싸는 거 습관이 된 지 벌써 수삼 년, 날마다 변기에 걸터앉아서 나는 진화론을 곱씹는다. 이게 퇴화인가 진화인가 퇴행인가 진행인가 언젠가 여자들이 더 많은 모임에 가 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서영은 배를 잡고 웃고 강현덕은 그것이야말로 진화라고 웃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되받았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43

44 다 역시 여자는 새침데기들이 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강정구 교수 전화번호라도 알아내어서 수다 좀 떨까 난 앉아서 오줌 싸니까 방귀가 잘 뀌어지던데, 낄낄낄 캑캑캑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끼리 - 시집 喪 家 에 모인 구두들 (실천문학사,2004)... 대개의 일반가정엔 공공화장실과는 달리 남성용 소변기가 따로 없다. 그렇다보니 오줌을 눌 때 조준이 잘 못되거나 조금만 자세가 흐트러져도 변기와 바닥에 지저분하게 오줌을 묻혀 지린내를 풍긴다. 집 식구들로부터 타박을 듣게 되 고 종래는 남자도 변기에 앉아서 일을 볼 것을 권고 받는다. 여성이 수적으로 우위인 집안에서는 그 압박의 강도가 더 심해질 수 있다. 얼핏 남자의 기를 죽이는 처사처럼 여겨지지만 못할 말은 아닌 것이다. 오래전 직장생활 할 때 프랑크푸르트의 한 가정집에서 짧게 머문 일이 있다.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남성의 앉아 소변 보기를 권장하고 있었다. 그 집 욕실에도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어 그렇게 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으며 또 그게 그 사 람들의 에티켓임을 알았다. 나도 큰 볼일 없이 몇 번 앉아서 작은 볼일을 본 경험이 있다. 처음엔 습관대로 서서 쏴 를 시도했었지만 정확한 조준의 담보도 어렵거니와 설령 제대로 꽂혔다하더라도 낙수한 오줌 방울들이 변기 주 위로 튀어나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다소곳이 앉아서 볼 일을 보는 사내가 우리나라에도 한 둘이 아닌 모양이다. 시에서는 시인이 그동안 앉아 볼일을 보면서 매양 퇴화인가 진화인가 홀로 진화론을 곱씹 던 참이었는데 마침 우연한 기회에 한 진보사회학자가 같은 체위로 오줌을 눈다고 하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하이파이브는 몰라도 그 교수 전화번호라도 알아내어서 수다 좀 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색을 했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 시대 대표적 터프가이 이며 아내 말 잘 듣기로 소문난 최민수도 앉아 누기 를 실천하고 있 다지 않은가. 하지만 물론 이런 일부의 현상과 조짐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내들이 여전히 절대다수이고, 대세를 쉽사리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은 본디 편한 쪽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그보다 서서 오줌을 찍찍 갈기는 게 사내들의 고유권한이고 체통이며 넘보지 못할 위엄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재고해 보면 체통이고 위엄일 것 까진 없다. 다만 자신의 편의로 인해 누군가 찡그리며 수고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앉아서 오줌 누기 는 그 배려차원에서 일단 시도해 볼만하다. 권순진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44

45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45

46 삭는다는 것/ 김필영 :05 삭는다는 것/ 김필영 잘 삭은 술은 사랑 받는다 포도가 잘 삭아야 좋은 술이된다 견디기 힘든 고난도 따뜻이 위로하면 아픔이 삭는다 삭은 눈물이 강이 될 때 물 흐르듯 슬픔이 씻겨 일어설 수 있다 항아리에서 잘 삭은 김치는 밥도둑이다 잘 삭은 홍어를 가운데 두고 응어리진 마음도 잘 삭히면 삭는다는 것/ 김필영 46

47 서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삭는다는 것 상처받은 사람만이 삭을 줄 안다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잘 삭은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있다 쓴잔을 앞에 두고 눈물 흘려본 사람만이 잘 삭은 술을 마실 수 있다 - 월간 시문학 2011년 1월호... 술은 단술과는 달리 익는다고 하지 삭는다고는 잘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화학적 변화 과정은 동일하다. '삭히 다'는 주로 음식물과 관련되어 쓰이는 말이다. 그리고 썩다 나 부패하다 와 유사한 뜻의 '삭다'는 사물이 오래 되어 본래의 형체가 변해 퍼석거리거나 얼굴의 상태가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일 때 표현하는 말이다. 삭은 나무 토막 밧줄이 삭아 끊여졌다 담배를 많이 피면 뼈가 삭는다 고생만 하더니 얼굴이 팍 삭았다 등 표현 이 있다. 그런데 음식물이 익어서 맛이 든 경우나 밥이나 죽 따위가 걸쭉하고 뻑뻑하던 것이 침의 효소작용으로 묽어질 때도 삭다 라고 한다. 삭다 의 사동사인 삭히다 는 김치나 젓갈 따위가 발효되어 맛이 든 숙성상태를 말하는데 곰삭히다 는 말과 함께 사용된다. 김치를 삭히다 홍어를 삭히다 따위로 쓰인다. 삭아서 골골한 냄새가 나 는 흑산도 홍어. 대표적 남도의 삭힌 음식이지만 사실 맛을 아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난해한 음식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상처와 세월이 결합하여 까닥 잘 못하면 썩어문드러지지만, 그 상처와 풍파를 견디고 울분과 응 어리를 삭혀 마침내 용해되고 대동 화해케도 한다. 상처도 잘 숙성시키면 진국이 되는 것이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 으며, 인간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상처의 눈물이 한 알의 밀알로 썩어서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로 잘 삭힌 술을 나눠 마실 수 있다.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잘 삭은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쓴잔을 앞에 두고 눈물 흘려본 사람만이 잘 삭은 술을 마실 수 있다 잘 삭으려면 스스로를 완전히 녹 여 발효지점의 최대치까지 견뎌야 한다. 그 또한 능력이고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소양이다. 사랑도 그러할 것이 다. 노산 이은상의 사랑 이란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말진 부디 마오. 타고 다시 타서 재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반 타고 꺼질진댄 아예 타지 마시오. 삭는다는 것/ 김필영 47

48 권순진 삭는다는 것/ 김필영 48

49 1974/ 이시영 : / 이시영 항구 남쪽에서도 귀신이 나왔다고 한다 해안통 쪽에서 나타나 시내 복판으로 들어가는 더벅머리 셋을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을 향하여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볼일이 있다고 재빨리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없다 광주( 光 州 )에서도 대낮에 여우가 나왔다고 한다 온몸에 불을 켜고 충장로를 달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여우는 사람들 다리 사이로 빠져 달아나면서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무도 그 말을 소리낸 사람은 없다 영등포( 永 登 浦 )에서도 여자 둘이 나왔다고 한다 야근을 하고 돌아가는 새벽 철둑길에서 1974/ 이시영 49

50 여자 둘을 본 여자들은 집에 와 문을 걸어닫고 사흘 낮밤을 숨어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은 없다 용산( 龍 山 )우체국 옆길에서도 붕대를 감은 대머리들이 나왔다고 한다 어깨들을 끼고 돌아가는 삼각지를 불러제끼며 돌아갔는데 아무도 그들을 기다린 사람은 없다 삼각지를 따라 부른 용산 술꾼들은 땅을 치며 하룻밤을 새우고 왔는데 이튿날부터 술을 끊었다고 술꾼 중의 1인이 쉬쉬하며 내게 전해왔다 - 시집 만월 (창작과비평,1976) 년 유신시대에 선포된 긴급조치 1호 위반죄로 구속되었다가 면소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국 가가 형사 보상해주어야 한다는 법원의 결정이 2년 전 있었다. 이는 긴급조치 1호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의해 위헌 무효가 된 것에 근거하였다.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도 같은 판결을 받았다. 즉 일부 경제와 관련된 조항 외에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인권을 억압하는 긴급조치 자체가 사실상 위헌이라는 판결이다. 긴급조치 4호에는 학생 의 출석거부,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그 외의 모든 개별적 행위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반한 학생은 퇴학, 정학처분을 받고 해당학교는 폐교처분을 받는다. 는 조항도 있다. 학교를 며칠 땡땡이쳐도 강제퇴학을 당할 수 있었던 당시 분위기였고, 술집에서 유신을 비판하고 국가원수를 씹었다 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갔던 시절이었다. 교회 사찰 언론사에도 사복 이 들락거렸으며, 집에서조차 자식이 유 신을 비방할라치면 아버지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누가 갑자기 사라져도, 실어증에 걸려 되돌아와도 아무도 그들 을 본 사람이 없고 말을 들은 사람도 없다. 이시영 시인은 1974년 당시 25세의 젊은 나이에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지지 문인 61인 선언 에 서명하고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적이 있으며, 이후 문인들의 민주화운동 조직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 성에 참여하면서 암혹의 시대와 맞서는 문인의 길을 걸었다. 참고로 작가회의 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 회 가 1974년 창립된 것은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옥에 갇힌 김지하 시인의 구명운동을 위해서였다. 그 후 1989년 창작과비평 주간으로 있을 때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를 잡지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 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유신 철폐를 위해, 구속 문인과 양심수 석방을 위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노동자의 살 권리를 위해 국가 폭력에 맞서고 분연히 일어나 싸웠다. 1974/ 이시영 50

51 시대의 암울함을 고발한 이 시를 읽으면서 사법적 판단에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 될 한 사람의 국회 체포동의안 처리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동시에 휴대폰 을 북에서 쓰는 용어인 손전화 라고 표현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명백한 빨갱이임을 알 수 있다고 입에 침을 튀기는 공안검사 출신 한 여당 의원의 어이없는 모습도 목 격했다. 이런저런 정치 상황에 화딱지가 난다. 기우겠으나 이 어지러운 상황이 40년 전으로 회귀되는 빌미와 조짐으 로 삐딱하게 발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권순진 1974/ 이시영 51

52 반야월/ 안용태 :23 반야월/ 안용태 하늘이 내려앉았다 별들이 모두 아파트 창에 매달려 아우성을 친다 경산에서 바라보는 반야월의 밤, 반월이 무색하게 가늠하지 못할 거대한 은하가 금호강에 실려 끝없이 흘러간다 손 내밀어 잡을 수 있다면 함께 휩쓸려 가는 데까지 가봤으면 좋겠다. - 시집 몽돌 (학이사,2012)... 반야월/ 안용태 52

53 반야월은 행정구역상으로 대구광역시 동구 안심동과 그 인근을 지칭한다. 예전엔 경북 경산군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지금까지도 대구 사람에겐 '안심' 대신 '반야월'이란 지명으로 더 친근하게 불린다. 그리고 이 지명들에 대한 유래가 꽤 설득력 있게 전해져오고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와 경산시 와촌면 그리고 군위군에 걸쳐있는 팔공산은 왕건의 여덟 장수(공신)가 전사한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여기서 후백제 견훤 군사와의 대접전이 벌어졌는데, 신숭겸이 왕건대신 전사하는 등 대패하자 왕건은 군대를 해산하고(파군제) 얼굴이 하얗게 질려(백안동) 계속 정신없이 도망가다 어느 지점에 와서야 본래의 혈색을 찾았고(해 안동) 적의 기척이 감지되지 않아 안도할 즈음에(안심동) 반월의 빛이 어두운 길을 밝혀준 곳이라고 해서 반야월이 되었다고 한다. 시쳇말로 좆나게 도망쳐 내려오다 이쯤에서 얼굴도 펴지고 안심하여 달도 쳐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달아나려면 북쪽으로 가야하는데 똥오줌 가릴 겨를 없이 반대편인 동남쪽으로 냅다 달렸던 것이다. 그때 왕건은 달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시인은 어쩌면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때 왕건의 심정이 되어 반야월을 바라보았던 건 아닐까. 적에게 패하고 도주하다 숨을 고르는 사이 자신을 비추어주는 반달. 도시에서 살아가는 중년 사내의 삶이란 게 문득 되돌아보면 대개 그렇지 않을까. 안용태 시인은 예전 같으면 중년이 라 하기엔 좀 송구스러운 나이지만 여전히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고 도시에서 나름의 생존전략도 터득하며 살아 가는 사람이다. 경산은 그의 일터인 사무실이 위치한 곳이다. 그곳 창 너머로 보면 멀리 반야월이 보인다. 잠깐의 상 념으로 전망을 소묘하였다. 퇴근 무렵 어둠이 스며든 아파트 창문들이 하나둘씩 불을 밝힌다. 하늘에 떠 있어야할 별들이 모두 아파트의 창에 매달려있는 듯하다. 그리고 거대한 은하가 금호강에 실려 끝없이 흘러간다. 일상에 쫓기듯 지지 않으려 기를 쓴 삶이 지만 늘 제자리걸음으로 느껴진다. 손 내밀어 잡을 수 있다면 그 은하와 함께 휩쓸려 떠내려가는 대로 가 는 데 까지 가봤으면 좋겠다. 는 상념에 왜 아니 젖어들까. 올 여름 휴가다운 휴가 한 번 제대로 가본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명색이 시인으로써... 권순진 North Country Blues - Joan Baez 반야월/ 안용태 53

54 연적들/ 차승호 :49 연적들/ 차승호 자식들 십시일반 건축비 모아 고향 노인네 집수리를 해드렸다, 어리보기 나야 문짝 하나 달은 것밖엔 없지만 아담하게 양철집 개보수하고 돼지 잡아 집들이 하는 날 세류리 슈퍼를 나온 동네 노인네 서넛 가루비누 상자 같은 걸 한 개씩 들고 오는 것이었다 노인네 불알친구들 늘그막엔 떡줄 사람 생각도 않는, 그래서 쌍화차만 들이켜는 연적들/ 차승호 54

55 그래서 쌍화차만 들이켜는 양지다방 양마담 문고리들 뭐 사올 게 있어야지, 축하 드리네 마루 끝에 한 상자씩 놓여서 더도 덜도 아닌 마음들 돼지껍데기처럼 쫀득쫀득한 마음들을 나는 무엇이라 해야 하나 평생지기 우정이라 하면 될까 곁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도 마음 기꺼워 해바라기처럼 웃으시는데, 양마담 안 불렀는감, 워째 안 뵈능 거 같은디? 어허 이 사람, 대체 양마담이 누구여? 양지다방 간판만 질색팔색 십 리는 돌아댕기는 사람보구 - 시집 소주 한 잔 (애지, 2009)... 농촌에서의 노후생활도 이만하면 '라 돌체 비타'(달콤한 인생) 아닌가. 도회 사는 착한 자식들 십시일반 건축비 모아 아담하게 집수리 해주지를. 집들이는 뭐 아무나 하남. 팍팍한 인심으로는 생각도 못할 일이고 살림도 어지간해야 돼 지도 잡는 것이려니. 한편 가루비누 제각기 사들고 찾아온 노인 하객이 서넛이면 적막강산은 아닐 것이고, 읍내 '양지 다방' 문지방깨나 넘나들며 쌍화차 들이킬 정도면 신간은 꽤 편한 듯 뵌다. 게다가 그 노인네들, 옛날식다방에서 구식낭만을 모락모락 풍기면서 립스틱 짙게 바른 '양 마담'을 두고 '연적'사이라 니 물심양면으로 기운이 단단히 뻗쳤다. 앞뒤 사정으로 봐서 실속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이 꼭지만 똑 따서 보면 평생 흙 속에 파묻혀 씨 뿌리고 거두는 걸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늙은 농부들만 고스란한 농촌 의 풍경도, 그 농부들의 애환과 소외가 녹아있는 현실의 모습도 온데간데없다. 하지만 마루 끝에 한 상자씩 놓인 가루비누와 더도 덜도 아닌 돼지껍데기처럼 쫀득쫀득한 마음들 그 정 분들, 그게 전부이고 정점이다. 도약해 봤자 '양지다방 양마담 문고리들'이다. 등골 빠지게 일하고 허리 굽어 이제야 누려보는 호사이고 농담 따먹기이며 능청이다. 그래도 일탈이라며 눈살 짜부라트리는 신사숙녀분이 계실라나. 하지만 어느 드라마처럼 며느리의 친구를 놓고 아들과 연적관계인 한 도시영감의 엽기적인 사랑에 비하겠나. 야동 순재 를 따라잡을 수 있겠나. 나잇값 못하는 주책들이라고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자. 민망하다며 입 가리고 킥킥 웃 지도 말자. 그 달콤한 인생 에 대한 비웃음은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언젠가는 되돌아 가야할 근원에다 대고 재를 뿌리는 처사일지도 모를 일. 연적들/ 차승호 55

56 권순진 연적들/ 차승호 56

57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한옥순 :38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한옥순 이마트 앞에만 가도 왠지 주눅이 든다 백화점에 들어가는 일은 상상도 못한다 언젠가 체크무늬 가방을 스쳐가듯 본 적 있다 그 물건은 나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본다는 듯 우아하고 거만하게 내 앞을 지나갔다 어쩐 일인지 나는 숨이 컥, 막히는 것 같았고 바보처럼 부스럭 소리도 못 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열등감을 가르쳤을까 아니다 타고난 본성이다 스스로 터득한 싸구려 본능이다 검고 질긴 비닐봉지의 태생이다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한옥순 57

58 내 속엔 대체적으로 싸구려가 들어간다 지저분한 것, 질척한 것들도 들어가곤 한다 종종 만 원에 세 장짜리 꽃무늬 팬티도 들어간다 어떤 것은 내 속에서 죽어가거나 썩어가는 것들도 있다 그럴 땐 내 몸도 함께 가차 없이 버려진다 얼마나 한이 많으면 나는 생전 죽지 않는다 죽어도 죽어서도 녹지 않는다 미리부터 새까맣게 질려 태어난 이 몸뚱이로는 구멍 난 데로 한을 쏟아내는 일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 아가리를 있는 대로 턱 벌려 숨 한번 쉬고 꺼지는 수밖에 별 도리 없다 젠장, 세상에 무슨 이런 인생이 다 있는지... - 월간 우리시 2010년 9월호... 시를 웬만큼 골고루 접해본 독자라면 폐타이어라든지 바람에 풀풀 날리는 검정비닐봉지 따위가 시의 소재로 심심찮 게 애용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도시문명의 구석과 그늘을 상징적으로 고발할 때, 현대문명에서 풍요와 편익의 불편 한 뒷감당을 말할 때 그 기재로 대개 활용된다. 패드 병이나 녹슨 못, 깨진 벽돌조각이나 유리조각도 마찬가지다. 영 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용된 깨진 거울도 같은 의미겠는데, 그나마 그 대목은 희망의 빛을 중첩시켜 보여준 것 같았다. 이 시는 검정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들을 모아놓았다. 그 쓰임새는 백화점 봉투나 별다를 게 없는데 내용물은 천양지차다. 그 속엔 대체로 싸구려 지저분한 질척한 감추고 싶은 것들이 들어가곤 한다. 문성해의 검 은 비닐봉지들의 도시 에서처럼 반쯤 썩은 고양이와 음식 쓰레기들과 세상에서 가장 물컹하고 가장 불결한 어떤 것을 품기도 한다. 백화점이 상류층이라면 이마트는 중산층에 비유된다. 재래시장 좌판에서 산 만원에 세 장짜리 꽃무늬 팬티가 든 검정비닐 봉지를 흔들고는 쪽 팔려서 그 앞을 얼쩡거리지도 못한다. 때로 성질이 나면 내용물과 함께 가차 없이 버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나 한이 많으면 생전 죽지 않는 다. 쉽사리 흙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풀들의 자양분이 되지도 못한다. 아가리를 있는 대로 턱 벌려 숨 한번 쉬 고 꺼지는 수밖에 없는데, 그조차도 구겨진 물개 가죽처럼 하수구에 처박혀 있는 놈 이 있는가 하면, 차도 한 가운데로 무법자인양 뛰어든 놈 도 있다. 날다가 덜컥 나뭇가지에 걸리면 마른잎사귀 시늉을 하는 놈도 있다지만 젠장, 세상에 무슨 이런 인생이 다 있는지... 시인은 필시 이런 과 인생 사이에 상투어이긴 하지만 개 같은 이란 말을 넣으려다가 점잖은 체면에 참았던 것 같다.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한옥순 58

59 권순진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한옥순 59

60 결혼 십계명/ 최일도 :08 결혼 십계명/ 최일도 1. 두 사람이 동시에 화내지 말라 -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던지면 받을 손이 없다. 2. 집에 불이 났을 때 외에는 고함지르지 말라. - 당신이 소프라노로 나오면 나는 베이스로 화음을 내고, 당신이 테 너로 나오면 나는 낮은 알토로 하모니를 이룬다. 3. 눈이 있어도 흠은 보지 말며, 입은 있어도 실수를 말하지 말라. - 장점만을 바라보고 결혼한 사람보다 서로의 단 점까지 모두 알고 결혼한 부부라야 지혜롭다. 사랑의 안경으로 보면 상대의 흠은 매력이고 실수는 구수하다. 결혼 십계명/ 최일도 60

61 4. 아내나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 아내를 어머니와 비교한다든지 남편을 친정아버지나 오빠와 비교하 지 않는다. 결혼 전 이성친구와 비교하는 것은 유령을 끌어들이는 푸닥거리일 뿐이다. 김연수가 최고의 아내이고, 최 일도가 최상의 남편이라는 기쁨과 긍지로 살아간다. 5. 아픈 곳을 긁지 말라. - 기왕 긁으려면 가려운 곳을 긁어라. 상처는 긁을수록 더 심해지는 법. 함께 산다는 것은 등 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상처를 감싸주는 관계다. 6. 분을 품고 침상에 들지 말라. - 모든 분노는 솔직하면서도 부드럽게 이야기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푼다. 하루 를 넘기면 이틀 가고 이틀을 넘기면 나흘간 지속되는 것이니 그날 그날 잠들기 전에 모든 원망을 풀어버린다. 7. 처음 사랑을 잊지 말라. - 결혼식을 마친다는 것은 이제부터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쁘든 슬 프든 영원히 함께 하기를 비는 기원이다. 고통을 이겨낸 지난 시절의 사랑을 언제나 기억하고 달콤한 일들을 자주 회 상하자. 8. 결코 단념하지 말라. -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속담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산다. 복잡하게 얽힌 것마저도 쉽게 풀 수 있는 사이가 바로 부부다. 기다리는 것은 금물. 서로가 먼저 웃으며 손을 내민다. 9. 숨기지 말라. - 우리 사이엔 어떤 비밀도 없다. 숨기다 보면 버릇된다. 별 것 아니라고 비밀로 하였다가는 불씨가 된다. 서로에게 진실하자. 10. 본래의 중매자를 따돌리지 말자. - 우리 부부를 짝지어준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리 사이에서 그분을 따돌 릴 때 애정의 반석엔 금이 간다. 우리 부부는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함께 손을 잡고 그분께 기도하는 믿음의 가정 이다. - 밥 짓는 시인 퍼 주는 사랑 (동아일보, 1995)... 밥퍼 목사로 널리 알려진 최일도 목사는 그 명성 탓에 자주 주례를 서는데, 결혼 십계명은 그의 단골 주례사 내 용이다. 이는 사실 최일도 목사 자신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준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리해둔 것이다. 밥 짓는 시인 퍼 주는 사랑 은 섬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의 역정을 진솔하게 기록한 책으로 120만부 넘게 팔려나가면서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책은 신학생 시절, 결혼생활, 다일공동체를 설립하여 소외된 사람들의 슬프고 아름다운 사연들과 그들을 대변해온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가운데도 특히 부인과의 감동적인 러브스토리가 눈길을 끈다. 주님께 평생을 바치겠노라 서원한 가톨릭 수녀와 하나님께 바칠 평생의 삶을 고민하던 개신교 신학생 간의 사랑은 시대의 불문과 금기를 깨는 일대 사건이었다. 편견 결혼 십계명/ 최일도 61

62 과 따가운 시선 속에 그들의 사랑은 시작됐다. 목사와 수녀라는 이름표를 떼고 두 무릎 맞대어 꿇어앉아 참사랑을 위 해 동행하겠노라고 신께 기도했다. 신학대학을 다니며 참다운 믿음을 찾아 헤매던 최일도 앞에 나타난 구원의 여인은 그보다 다섯 살이 많은 김연수였다. 운명처럼 다가온 수녀 를 처음 본 순간 그는 평생의 반려자임을 직감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장점들이 이상적으로 융합된 다일공동체처럼 그들의 성공적인 결합에는 이 십계명의 실천이 있 었고, 또 시가 있었다. 대학 국문과를 나온 김연수는 1978년 일찌감치 시문학 으로 등단하였으며, 최일도도 서정주, 함동선 시인의 추천으로 한국시 를 통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둘은 여러 권의 시집 외에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 께 걸어온 구도의 세월을 노래한 부부시집도 내었고, 재작년엔 '밥 心 ', '꽃 心 '이란 제목의 시집을 나란히 펴내기도 하 였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꽃의 마음만으로도 살 수 없다. 밥심과 꽃심이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 한다. 밥의 마음과 꽃의 마음으로 그들 부부는 동행해왔다. 그리고 시적 교감이 그들 사이를 더욱 결속시켰다. 권순진 Love Is All Around -- Wet Wet Wet 결혼 십계명/ 최일도 62

63 접속/ 황수아 :50 접속/ 황수아 나는 탄타로스의 굶주림을 닮은 곳으로 접속할 것이다. 아편굴처럼 흰 접속의 동굴에서 내 눈이 지워질 때까지 연기 를 피워 올릴 것이다. 필생의 익명을 얻고 싶다. 배가 고파 손톱이 사나워지기 전까지는 단 한 번의 해킹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디를 사기 위해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르지도 않을 것이다. 캔을 따고, 맥주거품을 입술로 헤집어 아물어가는 접속의 흔적을 찾지도 않을 것이다. 오래 전 잃어버린 몽상을 미행하는 일도 너와 스쳐갔던 일순의 일순 간을 주소 창에 찍는 일도 없을 것이다. 줄곧 자라나던 내 속눈썹이 데시벨을 휘감을 때쯤 찬바람은 경쾌한 바이러스 를 몰고 올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붉은 무덤을 닮은 메신저 안에서 서서히 독살될 것이다. 그 순간 낯선 행성의 언 어로 유언할지 모른다. 패스워드가 사라지고 로그아웃을 할 수 없는 자멸의 접속을 바라던 삶이었다고. 월간 현대시 2010년 2월호... 황수아 시인은 1980년 서울출생 젊은 여성시인으로 2008년 <문학수첩>을 통해 등단하였고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박 사과정을 마쳤다. 그러니까 대뜸 나는 탄타로스의 굶주림을 닮은 곳으로 접속할 것이다 라고 시작되는 이 시는 얼 마간의 난독을 예고하고 있으며, 시단의 꽤 안정적인 시류의 형태로 자리잡은 좀 있어 보이게 하려는 장치 같은 접속/ 황수아 63

64 것도 엿보인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탄타로스는 시지포스와 함께 지옥에서 개고생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흔히 손에 닿지 않는 젊은 이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와 갈등을 탄타로스의 갈증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탄타로스의 영원한 목마름은 형벌 치 고도 아주 엿 같은 형벌이다. 빤히 발아래 보이는데도 물을 떠 마실 수 없으니 말이다. 이 시에서 탄타로스 는 무슨 인터넷 게임의 주인공 같기도 하고, 게임에 푹 빠져 중독이 된 시적 화자를 지칭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아편굴처럼 흰 접속의 동굴에서 내 눈이 지워질 때까지 연기를 피워 올리는 행위는 영락 없이 인터넷 게임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폐인 의 모습 그대로다. 폐인 은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사람 이란 뜻이다. 세상과 단절한 채 병적인 몰입 상태에 놓여 있어 이해 못할 일도 흔히 발생한다. 인터넷 게임에 빠진 부부가 자기 아이를 지하 단칸방에 방치해 굶어죽게 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고, 노상 컴퓨터 앞에 붙어있다고 나무라는 노모를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도 과거에 있었다. 또 다른 문제의 심각성은 그 가학성과 폭 력성이 가상공간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종 전산망 해킹사건에서 보았듯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사회시스 템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1997년 영화<접속>에서 온라인상에서는 절친 인 두 사람이 정작 실제로 마주쳤을 때는 영 모르는 사람으로 스쳐 지나치는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무한한 정보와 자극,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통신망에 촘촘히 연결 접속 된 상태에서 필생의 익명 으로 살아가는 건 과연 해피하기만 할까. 인터넷은 우리의 삶을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 는데 많은 긍정적이고 혁신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고 장래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상의 보편적 환경이 순기능으로만 작동한다면야 무슨 걱정일까. 하지만 어질어질한 정보통신의 발전 속도에서 불길한 역기능의 예감도 동시에 어른거리니 그게 문제다. 탄타로스 처럼 욕구와 가능성의 상극에서 허우 적대며 자멸 하고 서서히 독살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한 구석도 아주 없지는 않다. 별 용도 없이 갖고 다니는 '탭'을 들여다 보다가 미확인 '카톡' 메시지가 무려 2,367개인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얼마전 이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인간성을 의심받은 적이 있는데, 이 정도면 나와 아무런 상관없이 자칫 재앙 수준의 인격파산자가 되는 건 아닌지 모 르겠다. 권순진 Pale Blue Eyes - Velvet Underground 접속/ 황수아 64

65 멋진 결론 / 김상미 :39 멋진 결론 / 김상미 서부에서 한 사나이가 왔다 누구나 다 갖고 다니는 칼이나 총 대신 커다란 지우개를 가진 한 사나이가 나는 첫눈에 그에게 반해 버렸다 한 번만 문지르면 모든 게 다 지워지는 지우개 지우개를 갖고 다니는 사나이, 얼마나 멋진가! 나는 매일매일 그 사나이를 기다렸다 오늘이 다 가기 전에 나를 지워 줄 사나이 척추 깊이 찍힌 내 존재의 바코드까지 흔적도 없이 지워 줄 사나이 멋진 결론 / 김상미 65

66 지우고 싶다는 건 삶을 바꾸고 싶다는 것 근본으로부터 아주 더 멀리 나가겠다는 것 세월이 키워 준 근사한 이빨들을 다 뽑아 버리겠다는 것 1인칭도 2인칭도 아닌 비인칭이 되어 점점 더 자신을 백지화시키겠다는 것 나는 매일매일 그 사나이를 기다리며 커다란 지우개가 내 몸을 핥고 지나갈 꿈에 부풀어 내 몸 속 동사 하나하나 부사 하나하나 형용사 하나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그 사나이를 기다렸다 커다란 지우개를 기다렸다 나의 없어짐이 비로소 나의 있음이 되고 나의 있음이 비로소 나의 없어짐이 될 투명한 반사광, 거울 속 내 사랑을! - 시집 잡히지 않는 나비 (천년의 시작,2003)... '오늘이 다 가기 전에 나를 지워줄' 멋진 지우개의 사나이를 기다리는 여심 앞에 공연히 내 몸이 후들거린다. '척추 깊이 찍힌 내 존재의 바코드까지 흔적도 없이 지워 줄 사나이'는 혁명적 터닝 포인트를 찍고 삶의 대전환을 꿈꾸는 여인에게 감히 신이라 불려도 좋을 사내이자 사랑의 종결자다. 그런 사나이라면 과거의 시시한 유치들을 다 뽑아버리고 멀리 내빼보자는 심산이 절로 들기도 하겠다. 자신의 존재 를 완전 연소케 하여도 끽소리 못할, 비음으로 흥얼대는 1인칭과 2인칭을 말끔히 지워 백지화 시켜도 순백의 꿈은 더 부풀어 있을. 총알 한방으로는 온몸 세포까지 기별 닿지 않아 융단폭격의 초토화로 깔끔한 소멸에 이르게 하는 사 랑. 그 신의 한 수. 그는 기실 나의 세포를 속속들이 간파하고 '내 몸 속 동사 하나하나 부사 하나하나 형용사 하나하나까지 빼놓지 않 고' 내 몸보다 먼저 읽어내고 내 의지보다 더 빨리 누울 자리를 정돈하는 완독자일 것이다. '투명한 반사광' '거울 속 내 사랑'의'멋진 결론'에서 잠시 긴장했던 다리의 힘이 스르르 풀어진다. 멋진 결론 / 김상미 66

67 살면서 과거를 깡그리 지울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게 멋진 결론 이라 싶을 때가 있다.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근본에 묶인 발목의 사슬을 끊고 더 멀리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 왜 아니 들겠어. 그럴 때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고 온전히 용인하는 큰 지우개 같은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티끌만한 허물마저 흔적 없이 지워줄 것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어쩌면 평생을 걸쳐 고대하는 사랑의 종결자란 그런 사람을 일컫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권순진 Davino / ERA 멋진 결론 / 김상미 67

68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원재훈 :56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원재훈 한때 나는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았다. 새가 날개를 가지듯 꽃이 향기를 품고 살아가듯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별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생의 비밀을 적었다. 아이의 미소를, 여인의 체취를, 여행에 깨우침을, 우체통은 간이역이었다. 삶의 열차가 열정으로 출발한다. 나의 편지를 싣고 가는 작은 역이었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원재훈 68

69 그래 그런 날들이 분명 있었다. 낙엽에 놀라 하늘을 본 어느 날이었다. 찬바람 몰려왔다 갑자기 거친 바람에 창문이 열리듯, 낙엽은 하늘을 듬성듬성 비어 놓았다. 그것은 상처였다.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종착역이 되었다. 모두들 바삐 서둘러 떠나고 있다. 나의 우체통에는 낙엽만 쌓여 가고 하늘은 상처투성이의 어둠이었다. 밤엔 별들이 애써 하늘의 아픔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데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주소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을 볼 수가 없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 시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하네 (하늘연못,1998)...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황동규 시인의 유명한 조그만 사랑노래 의 첫 소절이다. 1972년 선포된 긴급 조치 로 말미암아 나라의 민주주의는 뒷걸음질 쳤고, 국민은 분노와 허탈감에 젖어 있었던 시기에 현실의 슬픔과 안타까움 을 노래한 시이지만 연애편지의 형식에 그 마음을 실었다. 실제로 당시엔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열어 보이며 주고받 았던 편지 인심이 후했던 시절이었다.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아' '별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횡횡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내 생의 비밀을 적어'넣었고 밀실을 상대에게 드러내 보였다.' 나의 편지를 싣고 가 는 작은 역이' 있었으며, '그래 그런 날들이' 내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종착역이 되었'으며, 그 사정은 너도 마찬가지다.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주소를 알 수가 없 다. 그들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을 볼 수가 없었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어지면서 우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원재훈 69

70 체통도 사라졌다. 우체통이 사라지자 고전적 연애도 폐기되었다. 편지를 입에 문 제비가 간간이 날아드는 곳은 담벼 락이 높은 교도소와 병영뿐이었다. 편지를 쓰고 받는 자체가 통신 약자임을 자임하는 꼴이 되었다. 손가락만 곰지락거리면 실시간으로 대화하고 의사소 통이 가능한데 궁색 맞게 편지를 쓰는 수고를 왜 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편지는 사라져도 좋을 고루한 통신수단에 불 과할까. 사실 사람들은 편지 한 통에 첨단통신시대의 문명이기들이 대신해 주지 못하는 사람의 훈기와 인정이 담겨있 음을 잘 안다. 그 편지 한 장이 막힌 인정을 터주는 물꼬가 될 수 있음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쁘다 는 이유 말고도 본의 아닌 조심성으로 편지 쓰기를 주저한다. 그런 편지를 써 보냈다가 무슨 저의가 있는 양 공연히 오해를 사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감상적인 사람이나 알랑 거리는 사람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두렵다. 사람의 진정을 의심하고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팍팍한 세상 풍토 탓이겠다. 그 고약한 현상은 실리만을 앞세운 과도한 경쟁심이 불러온 불신 때문은 아닐까. 마음에 혼란이 행동의 불안을 잉태 하여 그 결과로 믿음이 고갈되고 대화가 부족하고 인정이 메마른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그 건조함이 인간경 시 풍조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적이 염려되는 것이다. 모두들 바삐 서둘러 떠나고 있다. 이래저래 우체통 에 넣을 편지가 없다. 권순진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원재훈 70

71 마지막 본 얼굴 / 함동선 :03 마지막 본 얼굴 / 함동선 물방앗간 이엉 사이로 이가 시려 오는 새벽 달빛으로 피난길 떠나는 막동이 허리춤에 부적을 꿰매시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어떻게나 자세하시던지 마치 한 장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한 시오리 길이나 산과 들판과 또랑물따라 단숨에 나룻터까지 달렸는데 달은 산과 들판을 지나 또랑물에 먼저 와 있었다 마지막 본 얼굴 / 함동선 71

72 어른이 된 후 그 부적은 땀에 젖어 다 떨어져 나갔지만 그 자리엔 어머니의 얼굴이 늘 보여 두 손으로 뜨면 달이 먼저 잘 있느냐 손짓을 한다 - 시집 마지막 본 얼굴 (1987)... 함동선 시인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이다. 연백은 38선 남쪽이면서 휴전선 북쪽에 속한 땅이다. 강화도에서 직선거리 로 15km 정도라 하니 맑은 날 보면 빤히 보이는 그야말로 지척의 거리다. 그 길로 곧장 달려가면 어릴 때 문지방에 서 키 재던 눈금과 안방 문고리가 그대로 남아있는 고향집에 다다를 것 같다. 그곳 고향에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휑하니 갔다가 다시 온다는 것이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시인은 지금 여든을 훌쩍 넘긴 연세시다. 5남1여 6 남매 중 막둥이를 떠나보내면서 어머니께서 하신 잠깐일 게다. 네들이나 휑하니 다녀오너라. 그 말씀 눈에 선하 고 귀에 쟁쟁하여 시인은 그때마다 목이 멘다. 떠나올 때 어머니께서 허리춤에 부적 하나를 지니게 해 주셨다. 잠깐 이 그렇게 긴 이별이 될 줄은 몰랐겠으나 어머니의 손길을 대신하는 방도였던 셈이다. 이별 뒤의 고할 수도 없는 긴 이야기는 어깨를 짓누르는 아픔이 되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아픔이 개인의 아픔뿐만 아니라 고향에 가지 못하는 모든 이의 아픔이고 우리 역사의 아픔이라고 말씀 하신다. 그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 평단의 일각에서는 그의 시를 그냥 실향민의 시 정도로 이해하고 일축해 버리는 경향도 있으나 근년엔 보편성을 지닌 실향의식, 분단의 아픔 그리고 그리움의 시로 꾸준히 재평가되고 있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 합의는 남과 북 모두에게 정국 운영상 필요했기 때문에 성사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상 봉 제의를 두고 일부의 시각처럼 부정선거 물타기 용이니 뭐니 이러쿵 저러쿵 토를 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 다. 생각해보면 남쪽이건 북쪽이건 이산가족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자체가 온당치 않은 노릇 아닐까. 오히 려 정례화하여 이어오던 이산가족 상봉이 어떤 이유로든 몇 년간 끊어진 것은 참으로 애통하고 비난받아 마땅한 일 이다. 검버섯은 나날이 번져가고 이마에 주름은 깊어만 가는데, 타의에 의해 찢어진 내 가족 만나는 것이 어디 정치 적 유불리를 따지고 협상카드용으로 만지작거릴 일인가. 권순진 마지막 본 얼굴 / 함동선 72

73 마지막 본 얼굴 / 함동선 73

74 담요 한 장 속에/ 권영상 :18 담요 한 장 속에/ 권영상 담요 한 장 속에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꿈쩍이며 뒤척이신다. 혼자 잠드는 게 미안해 나도 꼼지락 돌아눕는다. 밤이 깊어 가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내 발을 덮어주시고 다시 조용히 누우신다. 그냥 누워 있는 게 뭣해 나는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 순간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 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담요 한 장 속에/ 권영상 74

75 - 우리나라 대표동시 100선 (지경사, 2010)...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처음부터 순연치 않은 관계로 설정 전개되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시종 평 탄치 않게 엉켜있다가 막판에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리가 된다. 그때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고 관계개 선을 위해 애쓰는 쪽은 항상 아버지였으며, 아들은 원망과 분노를 쉬 내려놓지 못하다가 오랜 주저 뒤에야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비록 아버지가 무능하고 가정을 원만히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시기에 가서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포즈를 취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같은 남자로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품이 생겼기에 가능한 노릇일지도 모르겠다.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요즘의 젊은 아빠 들과는 달리 우리가 통과한 시대에는 별 파란이 없는 평범 한 아버지라 할지라도 소통이 쉽지 않았고 늘 어렵기만 했다. 내게도 아버지가 계셨으나 5분 이상 진득하게 대화를 나눠 본 기억이 평생토록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부끄러운 토로지만 나도 내 자식들과의 대화에는 엄청 인색했 다.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 본게 언제였던가 싶다. 시에서 그려진 아버지와 아들이 한 담요 속에 누워 아무 말 없이 서로 꼼지락거리며 나누는 무언의 대화가 정겹고 따습다. 가난이 배경으로 깔린 듯하지만 한밤중에 내 발을 덮어주시는 아버지는 참으로 자애롭다.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 에는 진득한 사랑이 배어있고, 아버지의 대수로울 것 없는 몸짓과 음성이 바로 사랑이란 것을 어린 아들도 가슴으로 듬뿍 느끼고 있다. 진정 순연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렇게 출발해서 이어지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현실은 자주 그렇지 못하다. 과 거엔 공연한 권위가 작동되어 그렇다지만 지금 시대는 각자의 세계로 관심이 기울면서 벌어지는 대화 단절이고 소통 의 부재가 주 원인이다. 언젠가 통계청의 한 발표를 보면 성적이 좋은 학생일수록 아버지와 자주 대화하는 것으로 나 타났다. 중학생의 경우 대화를 자주하는 편이라고 응답한 학생이 절반 정도는 되는데, 그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성적 이 좋았다는 것이다. 결국 자식이 공부 잘하기를 바란다면 자식과의 대화에 신경 쓰고 대화 분위기를 먼저 조성하라는 조언이다. 성적뿐 아니라 순탄한 부자지간을 위해서 특히 아들과의 대화는 절실하다. 필요하다면 담요 한 장 속에 함께 누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내겐 참으로 야속하고 덤덤하기만 했던 그 아버지가 요즘 많이 생각난다. 그리고 25년 전 임종도 지 켜드리지 못한 불효의 손이지만 당신 손을 꼭 한번 잡아보고 싶다. 꿈속 국방색 담요 한 장 속에서라도. 권순진 담요 한 장 속에/ 권영상 75

76 Mandy - Westlife 담요 한 장 속에/ 권영상 76

77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신현림 :26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신현림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폴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신현림 77

78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사,2004)... 영화 빠삐용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주인공의 꿈에 재판관이 나타나 너의 죄는 인생을 낭비한 것 이라고 말한 다. 함부로 허송한 시간들, 개념 없이 몽롱했고 허투루 비뚤비뚤 사악했던 시간들, 미래를 대비하지 못했던 삶에 대 한 뒤늦은 회한이 몰아닥칠 때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이란 말이 목구멍에 탁 걸린다. 개인의 삶이든 한 집단의 운명이든 현재의 상태는 지금까지 행한 태도의 결과이자 총합이다. 미세한 생각의 차이로 태도가 결정되고 그 태도들이 모여 중대한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 은 누가 봐도 명백한 객관적 과오뿐 아니라, 당시엔 인식 못하고 예상치 못했던 사소한 실수나 판단 착오의 경우도 포함한다. 지난 시간을 촘촘히 피드백해보면 누구나 허점투성이의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의 실패 뒤 유럽연합군에 체포되어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을 때 과거를 되돌아보며 했던 말로 알려진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은 일종의 반성적 자기고백인 셈이다. 비록 워털루전투에서 패하여 백일천하로 끝났지만 엘바 섬 을 탈출,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끔 스스로를 자극했던 말이기도 하다. 신현림 하면 시인이며 사진작가라는 신분과 함께 싱글맘이란 이미지가 병치되어 떠오른다. 그래서 그가 이 시를 쓴 시점에서 거슬러 '10년 동안' 그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의 충고가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이 었고,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나 아픔을 겪을 때마다 남편과의 이혼이라는 실패를 떠올렸던 건 아닐까 추측되어 지는 것이다. 이혼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이도 있긴 하지만, 사실 그 말을 뒤집으면 그 결 혼이 인생에서 가장 잘 못되었다는 반성적 자기고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불쑥 생모가 나타난대도 골 아픈 노릇이지만 큰아이의 혼례를 제 에미 없이 치런다는 자체만으로 내겐 잘못 보낸 시 간의 보복이란 혐의를 벗지 못함을. 하지만 어쩌랴. 이유의 자초지종은 모두 무의미한 지난 일들. 찔릴만큼 찔린 이제 는 언젠가 잘 보낸 눈곱만큼의 시간이 내게도 있다면, 염치없지만 그 보상으로 소소한 행복을 꿈꾸며 '바다처럼 밀어 갈' 도리밖에. 권순진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신현림 78

79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신현림 79

80 가시연꽃/ 김봉용 :55 가시연꽃/ 김봉용 오늘 하루만이라도 짙은 물음표로 살고 싶어 이른 아침 우포늪에 가본다 늪 한 복판 물안개 깔린 잎 방석 위 가시연이 홀로 아침을 먹는다 고전으로 한복 차려입은 그녀는 이슬 먹고 꽃을 피운다 한번 묻고 싶다 무엇이 세상 속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지 사랑은 선 線 을 이어서 길 찾아 가는 것 가시연꽃/ 김봉용 80

81 마음이 와글와글 복잡할 때 한 자리에서 기다려주면 문 열어 줄까 - 계간 스토리문학 2011년 봄호... 우포늪은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늪지로 억겁의 세월을 간직한 생태계의 고문서 이자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현재 이 일대에는 43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수는 우리나라 전체 식물종류의 10%에 해 당된다. 특히 수생식물은 국내 서식하는 종류의 60%에 달할 정도로 다양하다. 모두 그 자체로도 귀한 생명체이지만 늪의 수질을 정화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우포늪의 물빛이 의외로 맑고 깨끗한 것은 이 식물들 덕 택이며, 아직은 이곳의 수생 생태계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징표일 것이다. 그 가운데 물풀의 왕인 가시연꽃은 급속히 사라져가는 멸종위기 희귀식물로 보호받고 있다. 가시연은 오염에 아주 민감하다. 물이 깨끗한 연못에서만 자라며 물이 더러워지면 한포기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순결하고도 도도한 식물이 다. 사람들이 마구 뿌려대는 농약, 특히 제초제에 오염된 곳에서는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다. 예전에 넓게 분포 서식 하던 가시연을 볼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리 많지 않다. 그마저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위협에 처해 있으니 자연생태 보 존을 위한 고민과 노력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가시연꽃은 1년 초이다. 이듬해 봄에 종자에서 싹이 나야 또다시 꽃을 볼 수 있다. 가시연꽃의 종자에서 나온 새잎 은 늦은 봄이나 돼야 볼 수 있다. 그렇게 늦장을 부려서 언제 잎을 키우고 꽃을 낼까 싶은데도 여름 볕을 받으며 한 두 달 사이에 커다란 잎으로 쑥쑥 자라 수면을 덮는다. 늦은 여름 수면 위 무성한 가시로 무장한 꽃대가 슬그머니 얼 굴을 내밀면서 예쁜 보랏빛으로 수줍게 꽃이 피어난다. 지금 우포늪에는 작은 자라풀이며 마름이 무성하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단연 이 가시연꽃이다. 그 자태는 시인의 표현처럼 고전으로 한복 차려입은 모습 그대로다. 그 고귀한 꽃이 세상 속으로 돌아가 맵 시를 뽐내지 않고 아득한 태고의 적막 속에 스스로를 가둔 까닭은 무얼까. 그나마 살짝 열린 꽃잎도 밤이 되면 다시 닫혀 시원의 꿈속에 빠져든다. 어쩌면 마음이 와글와글 복잡할 때 짙은 물음표 하나를 물고 그곳을 찾는 사 람들에게 자기구원을 모색케 하거나, 가시연꽃의 꽃말이기도 한 그대에게 소중한 행운 을 하나씩 안겨주려는 그 윽한 자비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닦달 않고 한 자리에서 기다리면 스르르 문이 열릴 수도 있는 일. 권순진 가시연꽃/ 김봉용 81

82 Gypsy Melodies 가시연꽃/ 김봉용 82

83 그래도 / 마더 테레사 :20 그래도 / 마더 테레사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그래도 / 마더 테레사 83

84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래도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래도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래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 캘커타 어린이 집 '쉬슈 브라반' 벽에 있는 표지판... 마케도니아 출신 테레사 수녀는 1950년 인도 켈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 를 설립하여 50년 가까이 기도조차 스 스로 할 수 없는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끝없는 사랑을 베풀고 헌신하면서 우리에게 진 정한 사랑의 의미, 실천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글로 미뤄보면 수녀님께서 행한 사랑도 결코 순탄치 않았음 그래도 / 마더 테레사 84

85 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앙과 기도의 힘, 평생 옷 세벌과 밥 그릇 하나가 전 재산이었던 무욕의 자유로운 신분이었 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수녀님은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는다. 고 말씀하셨다. 그런 믿음으 로 주변의 비딱한 시선에 초연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시기하는 자들 앞에 서도 정직하고 솔직했으며, 굴하지 않고 위대한 생각을 실천하였다. 아낌없이 나누었으며, 진정한 사랑을 위해 이것 저것 재지 않았다. 그래서 평화롭고 행복했던 수녀님이셨다. 이글은 세상 온갖 문제의 궁극적 해답임에도 불구하 고 여전히 평범한 우리들에겐 먼 메아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사랑은 큰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옆 사람을 배려하며 따뜻한 미소 한번 지어보이는 것도 사랑이다. 마음에서 미움을 털어버리고 둘레의 사람과 화해하는 것도 아름다운 사랑이다. 그렇 지만 그것은 참으로 힘 들고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통감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고 보잘 것 없다할지 라도 최고의 것 이라 여기며 세상과 나누는 것 또한 큰 사랑이리라. 각자 사랑의 등불을 켜서 어두워가는 이 세상 을 밝혀야겠지만 등불의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권순진 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드려요 )- Mercedes Sosa 그래도 / 마더 테레사 85

86 개별 경제학/ 권순진 :26 개별 경제학/ 권순진 입맛 당기고 호기심도 당기는 점심특선 웰빙비빔밥 정가가 육천 원이라 잠시 망설이다 사천 원짜리 그냥 비빔밥으로 낙찰을 본다 문자 받고 가야 하나 말아도 되나 머리 굴리다가 찾은 고등학교 동창 초상집에 미리 준비해간 부의금 삼만 원 다른 녀석은 대개 오만 원이고 십만 원도 한다는데 잠시 머뭇거리다 슬그머니 돌아서서 봉투에 입김 후 불어넣고 이만 원을 더 보탰다 이천 원의 내핍과 이만 원의 체면 개별 경제학/ 권순진 86

87 스스로 쩨쩨해지지 않을 만큼의 경제적 자유 아직도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아 그래서 늘 부자가 부럽기는 부럽다 -시집 낙법 (문학공원, 2011)... 이 졸시가 인터넷에선 한 행이 더 늘어나 이런 개별적인 고심 한두 번 안 해 보신 분 있을까 로 마무리된 것을 몇 곳에서 보았다. 2011년 당시 매일신문 이규리의 시와 함께 를 연재하던 이규리 시인이 시를 소개하면서 붙인 시 평의 첫줄이 신문사 편집자의 착오로 본시에 따라붙은 탓이었다. 감춰진 주제를 친절하게도 드러내준 셈이다. 하지만 이런 개별적인 고심 은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넣었다 뺐다 하는 우리네 일상의 모습이지 않을까. 이규리 시인의 말마따나 부자라고 해서 그 갈등에서 예외가 아니며, 그것까지 포함하여 삶이고 인생이므로 겸연쩍은 일이지만 그러 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그런데 이번에 자식 혼례를 앞두고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양상의 개별적 번민에 봉착하게 되었다. 25년 전 아버지 초상 치룰 땐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던 터라 경황없는 중에도 대충 직장동료와 학교친구 친척 등이 알 아서 연락해주고 도와주었기에 후다닥 일을 치룰 수 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형제는 원래 없었고 변변한 직장도 아 이 엄마도 없는 지금 가까운 친척 어른도 다 돌아가신 마당에 열심히 다른 사람의 길흉사에 쫒아 다녔다고 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누구에게 청첩장을 보낼 것인가에서 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선 친밀도를 떠나 그간 경조사에서 부조를 해온 사람을 먼저 주소록에 넣었다. 기억을 짜내는 일도 괴로운 일이지 만 상당수는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새삼스레 일부러 주소를 파악하는 일이 멋쩍어 관두기로 했다. 다음은 이 혼사를 알리지 않으면 섭섭하다할 사람의 주소를 포함했다. 이 또한 나 혼자만의 생각과 기준이지 당사자 로서는 생뚱맞은 초대일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많이 헷갈리는 경우인데 만약 그 상대방이 내게 경조사를 알렸다면 기꺼이 참석하거나 부조를 할 생각이 있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가장 부담되는 경우가 서로 축하하고 위로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관계이지만 어쩌다 내가 그 댁의 경조사를 모르고 지나쳤거나 게으른 탓에 그냥 넘겨버렸거나 아니면 경제적 궁핍으로 생을 깠거나 간에 나 자신은 품앗이 노릇을 제 대로 못했으면서 상대에게 알릴 수 있냐 하는 문제다. 하지만 그로인해 소원한 관계를 고착화시켜서는 안 되겠다 싶 은 일부에게는 눈 찔끔 감고 소식을 알리기로 했다. 이 말고도 고려사항은 의외로 많았다. 바락바락 정밀하게 따져 들어가는 그 자체가 가련한 소시민적 발상이고 번뇌였다. 나도 축의금 일체 사양하고 초대한 손님들 이삼십만 원짜리 식사 대접하면서 품위 있고 우아한 명문가 자녀의 폼 나 는 결혼식이 부럽긴 부럽다. 보잘 것 없는 자식에 더 볼 품 없는 아비가 치루는 결혼예식 그저 그 시간이 후다닥 지 나갔으면 좋겠다. 개별 경제학/ 권순진 87

88 권순진 The Cuckoo Waltz - J.E. Jonasson 개별 경제학/ 권순진 88

89 이제 가면/ 김대중 :59 이제 가면/ 김대중 잘있거라 내강산아 사랑하는 겨레여 몸은 비록 가지마는 마음은 두고 간다. 이국땅 낯설어도 그대 위해 살리라. 이제가면 언제올까 기약 없는 길이지만 반드시 돌아오리 새벽처럼 돌아오리 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잘있거라 내강산아 사랑하는 겨레여 믿음으로 굳게 뭉쳐 민주회복 이룩하자. 사랑으로 굳게 뭉쳐 조국통일 이룩하자 년 12월 23일 미국행 출발을 앞두고 년 5월 17일, 소위 김대중 내란 음모' 혐의로 신군부에 의해 연행된 김대중 선생은 빨갱이로 광주항쟁의 배후 조정자로 구속되어 1980년 9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사형수로서 4개월여 육군교도소 독방에 수감된 뒤, 무기수로 감형된 선생은 1982년 12월 16일 석방될 때까지 청주교도소에서 한 달에 단 한번 가족에게만 봉함편지를 쓸 수 있었다. 이때 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보낸 옥중서신 29통을 모아 엮은 것이 '김대중 옥중서 신'이란 책이다. 이 책의 글들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온갖 수단에 꿋꿋하게 맞서는 한 인간의 뛰어난 의지력을 보여주 이제 가면/ 김대중 89

90 고 있다. 선생의 깊은 인류애에 뿌리를 둔 종교적, 정치적 원칙들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느낄 수 있으며, 가족 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역사의식과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도 엿볼 수 있다. 내용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다. 돈, 권력, 명예는 하나다. 이 중 하나만 가지면 그것이 순환하여 돈이 되든 명예가 되든 권력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의 집중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사람은 가난하게 되지도 말고 지나 치게 부유하게 되지도 말 일이다. 우리는 가난해도 부유해도 다 같이 돈의 노예가 된다. 알맞게 갖고 자유인이 될 일 이다. 라고 하였다. 그 자신 권력의 정점에서 그 신념을 제대로 실천했냐는 평가는 좀 더 뒤로 미뤄야겠지만 그 의 뛰어난 통찰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삶 자체가 한국의 현대사이고, 삶의 궤적이 곧 우리의 정치사이기도 한 인동초 김대중 선생께서 고난의 역사 를 살다 가신지 어언 4년이 흘렀다. 그의 인생 역정은 좌절과 희망, 투쟁과 피의 역사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민주주 의의 역사 그 자체였다. 독재정권의 핍박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나 살해의 위협을 받았을 때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민주화에 대한 일관된 신념은 결코 변한 적이 없었다. 그런 선생이 딱 한번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쓰고 풀려났던 게 이 시를 쓰기 일주일 전 일이었다. 이 사실을 두고 말들이 있지만 선생의 살아서 반드시 자유의 종을 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였고 잡초와 같은 승부근성의 발휘가 아니었던가 싶다. 억압의 시대에 희망의 빛이었으며, 인동초의 삶이 훗날 증거가 되어 보편적 민주주의로 민주회복은 이뤘으나, 지금 안타깝게도 일부 민주주의가 후퇴한 조짐을 목격하고 있으며 동서남북이 하나가 되는 대업도 아직 요 원한 상태다. 선생과 같은 야성의 구심점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에 지금 야당에는 그게 없다는 점도 아쉽다. 몸은 비록 가셨지만 그 김대중 정신은 새벽처럼 반드시 다시 돌아와 우리들 답답한 가슴을 종매로 힘껏 쳐주시길... 권순진 이제 가면/ 김대중 90

91 감쪽같은 연인/ 황명자 :58 감쪽같은 연인/ 황명자 한적한 커피숍, 남자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닌 듯, 여자의 눈길은 자꾸만 창밖으로 간다 그도 어색한지 높은 하늘만 하염없이 기웃거리다가 한마디 던진다 -저기, 구름 좀 봐요 남녀 한 쌍이 엉거주춤 누운 모습이다 감쪽같은 연인/ 황명자 91

92 순식간에 하나가 되었다가 오입질하다 들킨 듯 휑하니 내빼는 구름들 감쪽같다 - 시집 절대고수 (시와 사람, 2011)... 아직도 남자는 사랑 없이도 연애가 가능한가요? 라고 묻는 여자들이 많다. 여기서 사랑 은 둘만의 정신적 교 류와 배려 그리고 신뢰를 담보하는 감정이고, 연애 란 물론 섹스를 포함한 성적 접촉을 의미한다. 별종 이 없 는 건 아니지만 남자는 거의 그렇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이 질문의 이면에 그 전제가 깔려있듯 대개의 여자 들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여자들은 섹스 자체보다 섹스를 통해 느끼는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 렇다고들 말한다. 따라서 연애 는 자신이 상대에게 그런 사랑을 느껴야 하고, 상대로부터도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 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여태까지는 그게 정설이고 보편적 진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절의 변천에 따라 지금은 그 양상이 조금 바뀐 듯 하다.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없이 오로지 상대의 성적 본능에 기인한 육체적 관계라면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아 수용할 수 없었던 연애였다. 하지만 두루뭉술 확장된 사랑의 정의, 순결에 대한 의식변화로 굳이 아주 친한 사이 가 아니라 도 연애가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한적한 커피숍 에 마주앉은 남녀에게도 그런 혐의 가 엿보이고 냄새가 솔솔 난다. 식당에서 부부와 연인의 변별법도 있다지만 커피숍은 아예 부부들이 기피하는 장소이다. 감쪽같은 세상의 환경도 많이 돕고 있다. 감쪽같이 속이고 감쪽같이 숨어버리는 무인모텔 등의 숙박업소, 개량된 피임도구, 표시나지 않는 접착제처럼 완벽하게 복원해내는 처녀막재생수술,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게 아니므로 긴요할 때 핏자국만 살짝 비치게 해도 감쪽같은 저렴한 처녀막최소혈흔시술. 그 말고도 세상은 사방 감쪽같은 것들 천지다. 원래 감쪽같다 는 말은 감접 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생명력 강한 고욤나무의 윗부분을 쪼개어 그곳에 감나 무 가지를 접붙여두면 아래둥치는 고욤나무이지만 위는 감나무가 되어 결국에는 감이 열리고 나무가 자라나면서 접 붙인 흔적은 사라진다. 그래서 감접같다 는 말이 나왔고 감쩍같다 로 되었다가 감쪽같다 란 말로 바뀌게 된 것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에서 남자가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앞둔 애인에게 물었다. '한 남자를 평생 사 랑할 자신이 있냐?'고. '자신 있어' '평생 들키지 않을 자신' 여자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아무런 흔적 없이 깔끔하게 감 접붙이듯 감쪽같은 연애를 꿈꾸어 보기도 하는 것이지만 세상과 둘레에 들통 나지 않을 연애는 물론이고, 상대에게 티 나지 않는 감쪽같은 연애조차 실은 여의치 않다. 권순진 감쪽같은 연인/ 황명자 92

93 Come Vorrei Sung (내가 얼마나 원하는지) - Samy Goz < FONT> 감쪽같은 연인/ 황명자 93

94 나를 벼리다/ 정종명 :18 나를 벼리다/ 정종명 길이 끊겼다 벼랑이다 매듭을 푼다 헝클어진 마음을 갈아 끼운다 길 속에 내가 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 듯 글 文 을 자아 옷을 짜 낸다 절박한 초침소리 나를 벼리다/ 정종명 94

95 요동치는 맥박 나를 바꾼다 나를 만든다 글 속에 나를 녹인다 - 계간 스토리문학 2013 봄호... 우리가 글을 쓰는 근원적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과 자기 존재의 상승 욕구 때문일 것이다. 우리 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했을 때 대개 그에 관한 개념적인 정보만이지 그 사람의 내면세계까지 속속들이 알기란 어렵 다.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거니와 친한 친구 사이라 해도 대화를 통해 상대방 심리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느낌과 분위기만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나를 적극적으로 알리긴 위한 방편일 수 있고, 내 존재의 가치를 인정 받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길이 끊겨 벼랑 에서 매듭을 풀 고 헝클어진 마음을 갈아 끼우 는 것은 문학의 궁극 목적인 자 아실현의 전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 듯 글 文 을 자아 옷을 짜 내 는 행위는 다름 아닌 존재론적 글쓰기를 통해 인간의 최상위 욕망인 자아실현을 모색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 구체적 방도가 나를 바 꾸 고 만들 고 글 속에 나를 녹이 는 것이다. 그것을 아우르는 말로 시인은 나를 벼리다 라고 했다. 벼 리다 는 날이 무딘 연장을 불에 달구어서 두드려 날카롭게 만든다는 뜻인데, 시인은 절박한 초침소리 를 들어야 하는 늦은 세월에 요동치는 맥박 의 열정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섰다. 정종명 시인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지내다 은퇴하신 분으로 한국문인협회 정종명 이사장과는 동명이인이다. 올 봄 늦깎이로 등단했지만 문학을 통한 자아실현 의지와 기개는 남다르다. 시인은 문학이 인간에 대한 사유이고 존재에 대한 탐구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 사실 한 편의 시에서 인간의 삶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면 문학성이 결핍된 것이 고, 따라서 자아실현의 길과도 거리가 멀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지만 미사여구만 잔뜩 부려놓은 시를 문학이라고 하진 않는다. 자신의 시가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시인의 인간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이 따라야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자 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으며, 자아실현의 길도 묘연할 수밖에 없다. 가슴의 언어로 시를 쓸 때만이 글 속에 서 자신을 녹일 수 있다. 인간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키 위 해 노력하지만 진정한 자아의 실현은 어렵기만 하다. 그 과정의 지난함이 곧 문학의 길인데, 절박함과 열정 그리고 진실한 언어가 시인을 벼리게 할 것이다. 나를 벼리다/ 정종명 95

96 권순진 나를 벼리다/ 정종명 96

97 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이윤학 :45 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이윤학 점심 무렵, 쇠줄을 끌고나온 개가 곁눈질로 걸어간다. 얼마나 단내 나게 뛰어왔는지 힘이 빠지고 풀이 죽은 개 더러운 꼬랑지로 똥짜바리를 가린 개 벌건 눈으로 도로 쪽을 곁눈질로 걸어간다. 도로 쪽에는 골목길이 나오지 않는다. 쇠줄은 사려지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치는 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밀려가듯 개가 걸어간다. 늘어진 젖무덤 불어터진 젖꼭지 쇠줄을 끌고 걸어가는 어미 개 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이윤학 97

98 도로 쪽에 붙어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다. 하염없이 꽃가루가 날린다. - 시집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8)... 이 시의 제목은 발레리의 '제쳐놓은 노래'에서 인용되었다. 발레리는 스무 살에 이미 빼어난 시를 발표했으나 20년간 시를 놓아버리고 침묵했다.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곳에 머물며 그는 혼자서 오랜 기간 산책만 했다. 첫사랑에 실패한 것도 큰 이유였다. 그는 그곳에서 홀로 고독과 적막에 잠겨 의식의 끝까지 가기위해 몸부림쳤다. 그가 꿈꾼 것은 의 식의 명료함이었다.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일 뿐 언어에 기대어 삶을 해석하려는 짓은 멍청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했고 시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발레리의 말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획하고 연출 하는 필연으로 이끌지 않으면, 파도에 속절없이 나뒹구는 바닷가 돌멩이처럼 우연에 이리저리 휘둘리든가 쇠줄에 끌 려나온 개와 다름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발레리는 개 같은 팔자로 더 이상 되돌아가지 않 는 방법으로 이런저런 궁리 끝에 어디로 가지? 끝장내러 간다. 무얼 할 것인가? 죽음 이라고 했다. 그 대목에서 꼭 10년 전 이맘때 스스로 죽은 한 친구와 그가 남긴 메모가 퍼뜩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폴 발레리는 죽지 않았다. 해변의 묘지 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고 했다. 살면서 누구나 더러 운 꼬랑지로 똥짜바리를 가린 개 같은 인생일 때가 있다. 벌건 눈으로 도로 쪽을 곁눈질로 걸어 가는 꼬락서니로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멸감과 수모를 견뎌내면서도 살아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살아야 한다. 늘어 진 젖무덤 불어터진 젖꼭지 도 그 중 하나다. 타자에 의한 예속뿐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불편의 삶조차 상처 속에 맺힌 막연한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걸 다른 이름으로 희망 이라고도 하지만 너무나 진부하고 헐겁지 않은 가. 차라리 꽃가루 바람에 날리는 길을 하염없이 축복인양 걸어가는 것은 어떠한가. 권순진 I Want To Know What Love Is - Foreigner 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이윤학 98

99 일상 日 常 / 이신남 :28 일상 日 常 / 이신남 대구막창 집에서 하나 둘 제 창자를 꺼내 놓았다 작은 거품이 엉켜 붙어 노릇노릇 잘 익어간다 맑은 물이 잔으로 부딪히면서 낮 동안 쌓인 먼지를 씻어 내린다 스르르 늘어지고 부르터 집게로 이리 뒤집고 저리 엎었다 몇 번의 주저를 견디고서야 말라 있을 내 창자 속이 요구하는 대로 일상 日 常 / 이신남 99

100 적당히 익은 하나를 집어 넣는다 혀끝 제대로 놀리며 먹을 수 있을까 우중충한 빛깔 안은 채 토막토막 늘어진 막창을 눌리고는 한때 온갖 욕정 다 채웠을 젖은 목숨 껍질이 벗겨져 녹아내릴 때까지 자꾸만 자꾸만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 스토리문학 2009년 9월호... 대구의 전통적인 대표음식으로 따로 와 양푼이 찜갈비 가 있다. 맵고 짜고 뜨거운 화끈한 경상도 음식들인데 요즘은 건강을 생각하면서 손님의 기호도 바뀌어 점차 맛이 유순해져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뭉티기(생고기) 와 막창구이 는 술안주로서 대구는 물론 타지 사람들에게도 꾸준히 사랑받는 지역음식이다. 생고기는 육회와는 달라 소를 잡는 날이 아니면 식당에서 맛볼 수 없을만큼 신선한 날것을 모토로 한다. 막창구이는 본래 소의 네 번째 위장인 소막창의 구수한 맛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부드러운 돼지막창이 대세 라 막창하면 돼지막창을 말할 정도다. 대구에는 십여 년 전부터 막창전성시대를 구가하며 곳곳에 막창촌과 막창골목 이 형성되어 성업 중이다. 사실 돼지막창은 항문에서부터 가까운 약30센티 구간의 부위다. 요즘은 생막창을 찾는 사 람도 꽤 있지만 역시 막창은 잘 손질해 잡냄새를 잡고 잘 삶아야 본래의 쫀득하고 고소한 맛이 산다. 소주안주로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도 드물지 싶다. 노릇노릇 잘 익은 막창 한 점을 특유의 된장소스에 찍어 먹어 보면 먹기 전의 편견은 어느새 그 부드럽고 고소한 맛에 스르르 녹아내리고 만다. 속아지에 특별히 문제가 없다면 여 성이라고 해서 완강히 저항하진 못할 것이다. 혀끝 제대로 놀리며 먹을 수 있을까 는 기우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 고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음식 많이 가리고 깨작거리는 사람치고 까탈스럽지 않은 성격 보지 못했다. 우리가 음식을 두고 별난 상상력으로 그 동물과 사체의 형상을 매번 추적하고 환기한다면 먹을 수 있는 게 어디 있 겠으며 햄버거조차 혐오식품이 되고 말 것이다. 간장게장의 게딱지에 밥을 맛있게 비벼먹는 사람도 원숭이 골을 파먹 는 것처럼 비쳐질 것이다. 다행히 시인은 온갖 상상력과 연민이 풀가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입에서 좀 머뭇거리긴 했어도 막창을 맛나게 먹었던 것 같다. 일상이란 이렇게 먹으면서 견디고 먹으면서 즐거워져야 하는 것이다. 권순진 일상 日 常 / 이신남 100

101 일상 日 常 / 이신남 101

102 쌀과 살/ 손일수 :38 쌀과 살/ 손일수 나는 쌀이라 하는데 포항 사시는 할머니는 살이라고 해요 할머니, 살이 아니고 쌀. 그래, 살이 아니고 살. 아무리 말해도 할머니는 쌀을 살이라 해요 쌀밥을 많이 먹어 밥심으로 쌀과 살/ 손일수 102

103 농사짓는다는 할머니 할머니가 말하는 살 은 쌀도 되고 살도 되고 힘도 되지요 - 동시집 힘센 엄마 (푸른사상, 2013)... 지난해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 대상에 선정되어 지원금 1천만 원을 받아 최근 출간한 동시집이 힘센 엄마 이다. 문학적 성과에 대해 시상하는 일반 문학상과는 달리 문학적 잠재역량을 보고 등을 밀어주는 제도이므로 등단 10년 이내의 문인들에겐 선망의 제도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지원금 1천만 원은 어느 문학상의 상금 못지않은 수준이다. 단 종전과는 달리 최근 5년간의 활동 증거자료를 요구하고 있어 작품 발표 등 활발한 문학 활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작품 발표를 아예 기피하면서까지 이를 겨냥해서는 안 될 일이다. 동시를 어린이들이 쓴 어린이시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현대의 동시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즐기며 읽는 장르 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시라고 해서 꼭 어린이를 화자로 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요즘의 동시는 동심이 바탕에 깔린 현대시 한 편이라 해도 무방할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 시도 친숙하면서도 기발한 소재를 동시적 화법으 로 시화하여 독자와의 소통을 넓혀나간 작품이라 하겠다. 흔히 경상도 사람들의 사투리습관을 희화하는 용례로서 이 쌀과 살 을 들먹거리지만 경상도 사람이라고 해서 쌀 을 발음 못해 살 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구강구조가 잘 못되어 쌍시옷 발음을 못하는 걸 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포항출신 이병석 국회부의장이 국회 본회의 진행도중 '쌀'을 '살'로 발음한 것을 두고 의원들이 장난스럽게 이를 호통하자 본회의장이 웃음바다가 됐다는 얘길 들었는데, 빵 터진 것은 이 부의장이 웃음을 머금으며 단호하게 저는 죽을 때까지 이 발음을 구분할 수 없다 고 한 대목이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그냥 오래전부터 쌀을 살이라고 발음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쌀 의 어 원이 사람의 살( 肉 ) 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쌀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므로 쌀을 먹으면 살이 되기 때문에 살 이 쌀 이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쌀이기 이전에 살이어서 하나도 우스울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쌀은 우리 민족에게 살과 피, 그리고 정신 그 자체이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고 한다. 농경문화를 이어온 우리 조상들은 쌀에도 생명과 영혼이 담겨 있다고 믿어 왔 다. 볍씨에서 나락으로 가을에 열매를 거둬들이는 과정은 곧 사람의 일평생 과정이며, 쌀을 먹는 사람은 쌀의 영혼과 쌀과 살/ 손일수 103

104 힘을 받아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여겼다. 앞으론 할머니, 살이 아니고 쌀. 이라고 채근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시 이후로 쌀 을 살 로 발음한다고 해서 히쭉히쭉 웃거나 실실 쪼개는 일은 없기를 희망한다. 권순진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쌀과 살/ 손일수 104

105 그 남자의 손톱/ 정수자 :52 그 남자의 손톱/ 정수자 당신의 손톱 속엔 바다가 들어 있지 고픈 청춘을 기타로 휘달릴 때마다 무상의 달빛 박수만 어헝어헝 포식한 듯 개떡 같은 칠십년대 어둠을 짖어대며 별을 불러 내릴 듯 줄을 튕길 때마다 심해도 포효했던지 수평선이 웅웅 울고 그 남자의 손톱/ 정수자 105

106 허기뿐인 공명통에 파도를 기르면서 동해쯤은 쥐락펴락 당신의 손톱에는 한 마리 천둥이 살지 으라차차 생을 뿜는 - 시집 탐하다 (서정시학, 2013)... 윤형주가 무명의 트윈 폴리오 시절 친구들과 대천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낯선 여학생들을 만나 함께 모래사장에서 어울려 놀 때 즉석에서 지어 불렀던 노래가 바로 라라라 (일명 조개껍질 묶어)다. 이를 기념해 대천해수욕장 분수 광장에는 이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70년대 여름 바캉스 시즌이면 완행열차는 기타를 둘러맨 젊은이들로 미여 터졌 고, 그들은 전국의 이름난 해수욕장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이름난 해수욕장으로는 해운대, 대천, 경포대, 그리고 포항 송도 등이었다. 그 시대의 기타는 젊음의 상징이며 특권이었으며, 유일한 낭만이었고 시대의 극복 기재였다. 기타 못 치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개떡 같은 칠십년대 였지만 어둠을 짖어대며 기타 줄을 튕기며 우렁우 렁 노래를 불렀다. 기타는 스페인이 원조이며 민중들의 질박한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스페인의 영혼이다. 하지만 그 영혼들은 이 땅에 서 더욱 융기했다. 기타는 그 크기와 무게부터 가지고 다니기 적당하며 친근할 수 있는 악기이다. 그리고 다른 악기 의 도움 없이 선율과 화음과 리듬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악기이다. 휴대할 수 있는 악기 중 이런 특성 을 고루 갖춘 악기로 기타가 거의 유일하지 싶다. 기타는 바이올린처럼 소리 높여 외치지도 않고, 피아노처럼 제왕적 인 풍모를 갖추지도 못했으며, 첼로처럼 애상적이고 처연하지도 않다. 기타는 음악을 잘 몰라도 손톱으로 줄을 튕기 면 그대로 아름다운 화음이 되어 별을 불러 내릴 것만 같은 주술적 낭만이 있다. 그래서 바닷가에서는 이 기타의 선율을 따라 수평선이 웅웅 운다. 손톱 속에 들어앉은 바다가 으라차차 생을 뿜는 다. 기타는 피크라는 플라스틱 조각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손톱과 손가락으로 줄을 튕긴다. 손톱으로 줄을 튕기면 부드러움은 다소 희생되지만 명징한 소리와 음량의 증대를 가져오는 이점이 있다. 특히 클래식 기타를 치는 사람들은 대개 오른손의 손톱은 길고 왼손은 짧게 깎는다. 소리를 더욱 맑고 크게 내기 위해서이다. 허기뿐인 공명통에 파도를 기르면서 손톱으로 동해쯤은 쥐락펴락 하기 위해서다. 그러 나 요즘은 동해건 어디에서건 이 기타소리를 듣지 못한다. 지난 주 경포대 밤 풍경을 텔레비전 뉴스로 봤는데 음주와 괴성만 있고 가무는 없었다. 지랄발광의 가무가 간혹 목격되었으나 기타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방구석에 쳐박혀 있든 해변에서건 스마트폰만 쪼물딱대고 있다. 고프지 않은 청춘인 까닭일까. 그 누구의 손톱에도 바다는 들어있지 않았다. 손톱 밑에 살고 있다는 한 마리 천둥 은 어디로 갔을까. 현대화된 그 남자의 손톱/ 정수자 106

107 시조 세 수로 다만 지난 70년대를 추억할 뿐이다. 권순진 그 남자의 손톱/ 정수자 107

108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53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108

109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 시집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천년의 시작, 2008)... 이 시는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울타리 나무판자에서 옹이가 빠져나간 구멍으로 물끄러미 밖을 내 다보는 아이를 통해 '코로 쭉 숨을 들이켰'던 가난했던 골목을 거쳐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보는 중년 여성 시인의 매력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자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치밀한 구도 위에 사소하고 범상한 것들을 통찰하여 배치하는 시인의 솜씨에 새삼 감탄한다. 옹이는 나무 가지끼리 서로 치대며 자라는 동안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가지가 제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 분을 만들지 못해 결국 쇠약해져 죽은 그루터기를 말한다. 나무 전체의 균형을 위해 스스로 도태한 결과일 수도 있겠 는데, 그렇게 죽은 옹이가 나무 몸속으로 들어가 박혀 나무를 자를 때 단면으로 흔적이 나타난다. 하지만 옹이부분은 나무향이 가장 깊은 곳이고, 나무의 가장 단단한 부분이기도 하다. 고난 뒤에 생긴 상처의 아문 흔적이 옹이인 셈이니,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을 통과하면 서 단단해졌을 것이고, 그 시간 속에 생의 가장 깊은 향이 배어든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이 절망 쪽으로 기우뚱할 때 얼른 희망의 방향으로 균형을 잡아주는 옹이 같은 사랑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과 자아의 극렬한 싸움 끝에, 한때 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을 그 참담의 자리가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서야 무욕의 맑은 눈으로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 것이다. 권순진 Pathfinder - Medwyn Goodall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109

110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110

111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16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111

112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작가,2013) 작가 가 선정한 오늘의 시 는 지난해 문예지에 발표된 많은 신작시들 가운데 120명의 시인,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이 좋은 시로 가려 뽑은 80여 편을 묶은 책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이 창작과비 평 가을호에 발표한 공광규 시인의 담장을 허물다 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동료문인들로부터 지지받은 2012년의 가장 좋은 작품인 셈이다. 시가 비교적 조금 길다 싶은데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한 감동을 자아내면서 읽는 사람을 덩달아 신나게 하는 작품이다. 자본주의 체계 아래 늘 문제를 야기했던 소유 개념에 대해 담장 허물기 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한 성찰로써 내 것 만을 소중히 여기는 배타적 소유욕을 시원하게 전복시키고 있다. 인위적인 소유의 경계를 허물었더니 새로운 소유의 영역이 기분 좋게 확대되어 펼쳐진다는 유머와 위트, 시적 낙관들로 가득하다. 담장을 허무는 행위는 스스로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나의 소유를 내려놓고 비우고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실로 옹졸하고 협량한 소유욕에서 벗 어나 통 큰 우주적 자아로 거듭나고 있음을 본다.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112

113 박노해 시인은 나쁜 사람 을 나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라고 정의했다. 적어도 세상을 나쁜 놈으로 살아가 지 않으려면 제 것만 알고 제 것만 귀하게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기심만은 버려야겠다. 이 시는 좋은 시 읽기의 미적 쾌감과 여운을 배가시키면서 그 대목을 명랑한 화법으로 가르치고 있다. 권순진 What A Wonderful World - Eva Cassidy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113

114 단층/ 박찬일 :43 단층/ 박찬일 누가 위에서 너를 깔고 앉더라도 밑에 누가 깔려 있더라도 슬퍼하거나 괴로워 말 것. 간혹 퇴적토 속의 한 줄 띠 같은 너일 뿐이더라도 네 위에 누군가 또 하나의 갈잎을 깔고 누워 오더라도 고요하고 정심한 마음으로 살아 가도록할 것. 단층/ 박찬일 114

115 시간의 줄을 풀며 걸어온 굴레의 마지막이 내일일지라도 너라는 생명이 세월의 먼지 속 한 겹 띠로 남겨질지라도. - 계간 시와시와 2013 여름(학이사)...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인간의 보편적 평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유와 더불어 평등은 예로 부터 인류가 연면히 추구해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정의개념과 결 부되어 발달하였고 중세에는 평등이란 '신 앞에 평등'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다가 근세에 와서 신 앞의 평등은 법 앞의 평등, 즉 국가권력에 대한 만인의 평등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우리헌법 제11조에도 모든 국민 은 법 앞에 평등하다. 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며 사회적 특수계급은 인정되지 않는다지만 신뢰해도 좋은 말일까. 아쉽게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그리 많 지 않아 보인다. 사람이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살아남는 무한경쟁 시대에 의도적이든 아니든 사람 사이의 층은 꾸준히 형성되었고 현실에서의 계급도 엄연히 존재한다. 반상의 계급이나 카스트 제도보다 은근히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보이지 않는 계급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다만 형태가 변형되어 우리가 무심히 지나가고 애써 외면해서 그렇지 그 모습은 꽤 구체화된 모습으로 뚜렷이 존재 한다. 그리고 위계질서 가 반란과 음모를 차단하고 있다. 위계란 위와 아래, 앞과 뒤, 먼저와 다음과 같은 차례를 말하고, 질서란 그 위계를 원만하게 지켜서 대우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으로 견고한 층이 만들어지고, 그 층은 퇴적토 속의 한 줄 띠 같은 단층처럼 보인다. 이리 밟히고 저리 차이는 동안 자신도 감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비집고 들어가 자리잡은 틈이 만들어져 세월의 먼지 속 한 겹 띠 가 되는 것이다. 가끔은 발밑을 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밟고 있지 않나 하는 염려에서다. 물론 이렇다할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어서 그런 경우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세상은 의도한 일보다 의 도하지 않은 일이 더 많이 발생한다. 나도 모르게 행여 남에게 상처주고 누군가를 깔고 앉아있는 건 아닌지 살펴야하 는 이유다. 천박한 자본주의 물결 속에 가뭇없이 휩쓸려간 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가치와 자유의지를 지켜 줄 수 있는 체제는 어떤 것일까. 시인은 서로 밟고 밟히는 일들에 대하여 슬퍼하거나 괴로워 말 것이며, 고요하고 정심한 마음으로 살아 가도 록할 것이라고 마치 푸쉬킨 어조의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하긴 어차피 자신의 자유와 평등 단층/ 박찬일 115

116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세상이므로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유용한 잠언일 수는 있겠다. 권순진 Good In Blues / Tony Joe White 단층/ 박찬일 116

117 산산조각/ 정호승 :47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산산조각/ 정호승 117

118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04)...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최근 11번째 시집 여행 을 내고 올해 등단 40년을 맞은 정호승 시인의 말 이다. 40년 동안 쓴 자신의 시 가운데 가장 소중히 여기며 늘 가슴 속에 담고 다니는 시가 시인이 50세 무렵에 쓴 산산조각 이라고 한다. 룸비니 동산은 싯다르타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은 네팔 남동부에 위치해 있는데 시인은 그 곳에 여행을 가서 기념으로 부처님 조각상을 하나 사왔나 보다. 그런데 그만 바닥에 떨어뜨려 깨트리고 말았다. 반사 적으로 서랍에 넣어둔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이려고 할 때 불쑥 부처님 말씀이 생각났고, 그 지점에서 이 시가 태어났 던 것이다. 법정스님은 종이 깨어져서 종소리가 깨어져도 종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깨진 종일지라도 종소리를 울리는 한 종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못나도 못난 그대로 나 자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의 희망과 꿈을 종에 비유 한다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받은 상처나 좌절로 그 종은 수시로 깨어졌고 깨어지고 있고 또 깨어질 것이다. 종이 깨져 조각날 때마다 끝장이라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다. 그런데 금이 가고 깨어진 종을 종매로 치면 깨진 종소리 가 나지만, 완전히 깨진 종의 파편을 치면 종의 형체는 산산조각 났을망정 그 조각조각에서 작지만 나름의 맑고 아름 다운 소리가 난다. 깨어진 종이든 산산조각난 종이든 종이 지닌 본래의 속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꿈이 산산조각나고 삶 자체가 파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각 난 절망의 파편을 꿰맞추어 다시 꿈을 복원시킬 수도 있겠지만, 조각난 꿈 의 파편을 수습하여 새로운 삶을 부여안기도 하는 것이다. 절망과 남루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견디어도 좋을 일이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 고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 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이 말씀을 평생 가슴에 품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꺼내보며 위로와 용기의 거울로 삼았다고 한다. 삶에서 불행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산산조각 난 절망적 상황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건 또 다른 삶 의 방식으로 나를 이끈다. 솔직히 문학적인 관점에서는 썩 빼어난 작품이라 하긴 어렵겠지만, 이 한 편의 시가 삶의 지침이 되고 위안이 되고 다시 살아가는 힘을 준다면, 어찌 늙을 것이며 누구에겐들 좋은 시라 아니할 수 있으랴. 산산조각/ 정호승 118

119 권순진 영화 '길'(La Strada) 중에서 젤소미나(Gelsomina) 산산조각/ 정호승 119

120 그대를 사랑하는/ 서정윤 :45 그대를 사랑하는/ 서정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빛나는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따스한 가슴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지와 잎, 뿌리까지 모아서 살아있는 나무라는 말이 생깁니다. 그대 뒤에 서있는 우울한 그림자, 쓸쓸한 고통까지 모두 보았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서정윤 120

121 그대는 나에게 전부로 와 닿았습니다. 나는 그대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그대가 완벽하게 베풀기만 했다면 나는 그대를 좋은 친구로 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대는 나에게 즐겨 할 수 있는 부분을 남겨 두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무엇이 될 수 있겠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 홀로서기 시선집 (문학수첩,2004)...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의 모자람과 상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무 수히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사랑 앞에선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처음 사랑을 할 땐 그의 빛나 는 눈 과 따스한 가슴 과 고운 미소만이 눈에 들어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점은 새롭게 감각되지 않고 아 름답지 못하거나 못마땅하고 거슬리는 부분이 눈에 더 크게 들어옵니다. 이때부터 사랑이 흔들리고 소위 통박 도 굴리게 되는데요.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 좋은 점만 떼내어 사랑할 수는 도무지 불가능한 노릇일진데, 자기 자신을 포 함해 이 세상엔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무가 열매와 꽃만으로 된 것이 아니듯이 그대 뒤에 서있는 우울한 그림자, 쓸쓸한 고통까지 모두 보았 기에 시인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상대의 결점과 그늘까지를 다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랑을 참사 랑이라 말합니다. 그렇게 그대가 나에게 전부로 와 닿을 때, 바로 참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의 장 점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오스카와일드도 사랑을 할 때는 상대의 연약함이나 과오, 불완전 함을 다 알고 난 뒤에 사랑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사랑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 는 내 역할과 그대의 빈구석이 있기에 사랑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함께 가야할 곳도 불태울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때로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의지 가 요구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이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즐겁게 기꺼이 채워주리라는. 그 의지가 사랑을 굳세게 견인합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서정윤 121

122 권순진 You will always on my mind / Chris De Burgh 그대를 사랑하는/ 서정윤 122

123 구층암 모과나무/ 권갑하 :15 구층암 모과나무/ 권갑하 -시상에 뭐 볼끼 있다고 이리 가는교? -아주 기맥힌 것이 시상에 있어라우! 동서 東 西 간 붉은 화답에 산도 활활 타오른다 -기둥 좀 보아, 저 생불 좀 보랑께요! -몸보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마이! 한 생애 굴곡진 옹이 구층암 모과나무/ 권갑하 123

124 맑고 고운 흰 가슴 -득도한 고승대덕의 뼈마디가 저럴까요!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 안 한다요! 내 마음 천불 뜨락 가득 모과향이 짠하다 - 격월간 유심 /8월호... 구층암은 구례 화엄사 대웅전 옆으로 난 호젓한 산길을 천천히 십여 분 걸으면 만나게 되는 아담한 암자다. 이 암자 엔 깨어진 구층탑 이 있고 천불전 이란 법당이 있다. 이 법당 앞 요사채의 기둥이 특이하게도 자연 상태 그대 로 다듬지 않고 사용한 굵은 모과나무이다. 전라도 동서가 경상도 동서의 손을 이끌어 보여주려 한 기맥힌 구경 이 바로 그것이다. 산 수령으로 약 이백년 된 이 나무기둥들은 백여 년 전 요사를 새로 지을 때 암자 마당에 자라던 모과나무를 베어 썼다고 한다. 생불의 몸보시 였던 셈이다. 절집 요사는 스님들의 생활공간이자 공부방으로 대개 매우 조용하면서도 검소하다. 삶이 요란 떨지 않고 죽음의 음 영조차 삶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다. 화엄의 본질은 만물을 같은 뿌리로 이해한다. 하나 가운데 모든 게 있고, 모든 것이 곧 하나라는 일체의 우주사상. 또한 모든 생명체들이 같은 존재가치를 지니고 그 역할이 평등하 다는 뜻이다. 모과나무기둥을 보며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 는 것을 깨달으며, 우주 만물과 우리 모두는 영원 과 무한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도 알게 된다. 그 상념으로 기둥을 보노라면 한 생애 굴곡진 옹이 맑고 고운 흰 가 슴 이 그대로 득도한 고승대덕의 뼈마디 다. 6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외형적 정형의 틀을 가진 3수의 현대시조이다. 시조 한 수는 보통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 다. 하지만 현대시조는 대개 종장 첫 구 3자만 변함없고 나머지는 한두 자씩 파격이 허용되는데 이 시도 그렇다. 그 래서 현대시와 현대시조를 변별하기란 쉽지 않고, 정형성 말고 내용적으로는 시와 시조의 차이점을 발견하기란 더욱 어렵다. 현실적으로 시조시인이 쓴 시면 시조로 분류하는 정도인데, 요즘은 문예지 등에서 동시까지를 포함해 <시>의 카테고리 안에 함께 묶어두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는 만큼 장르 구분은 많이 퇴색되었다. 그런 추세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조는 현대시와의 변별성을 갖고 장르의 위상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 다. 그 노력의 핵심이 어찌하면 초,중,종장의 짧은 내용 속에 현대시 한 편에 버금가는 의미구조와 내적율격을 담아 내느냐이다. 시조는 장과 장 사이, 구와 구 사이의 내적 의미의 연결성이 현대시에 비해 매우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조도 그런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작품이라 여겨진다. 물론 소비자(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구분의 필요성을 구층암 모과나무/ 권갑하 124

125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권순진 구층암 모과나무/ 권갑하 125

126 모든 것을 사랑하라/ 도스토예프스키 :42 모든 것을 사랑하라/ 도스토예프스키 모든 잎사귀를 사랑하라 모든 동물과 풀들을 사랑하라 그대 앞에 떨어지는 한 가닥 빗줄기조차도 그대가 모든 것을 사랑하면 모든 것 속에 담긴 신비도 보리라 그대가 모든 것 속에 담긴 신비를 보면 날마다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하리라 마침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대 자신과 세상전체를 사랑하리라 - 신현림 엮음 이 세상 모든 사랑의 시 (갤리온. 2007)... 마음바탕이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따스함과 다정스러움은 사랑의 충만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사물의 아름 다움을 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스스로가 행복함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 기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 람이야말로 이미 행복의 반은 얻은 셈이며, 나머지 반은 주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면 얻게 되리라. 그런데 도스토 옙스키가 권유한 사랑에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운 시선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모든 것을 사랑하라/ 도스토예프스키 126

127 을 무턱대고 사랑하라는 잠언도 아닐 것이다. 사랑의 반경이 넓을수록 행복한 사람이며 훌륭한 삶이라 하더라도 사람 이기에 그 폭을 마냥 넓힐 수만은 없는 것이다. 사랑은커녕 미움과 시기로 변주될 대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지 하진 않더라도 상대를 이해하고 관용하는 똘레랑스 의 정신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를테면 어떤 이의 독특한 취향은 이구아나와 뱀 등 파충류를 애완하는 것인데, 자신이 혐오한다고 해서 그 사람 에게까지 못된 표정을 지으며 증오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지지하고 덩달아 좋아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인데, 내 스타일이나 관심의 테두리 밖이라 해서 몰이해로 일관하며 빈정거리거나 비하하는 경우 를 본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어야 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획일화의 획책은 인류에 대한 범죄이다. 다양한 의견과 개성을 서로 존중하는 것이 인류라는 종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저마다의 개성을 존중하 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행복과 번영을 이루는 삶이다. 사상의 자유, 취향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래서 자 신의 의사를 개진하고 이견을 말할 수는 있어도 근거 없는 비난은 안 된다. 인터넷 카페에서 글을 갖고 시비하는 경 우의 대개는 놀랍게도 단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다. 그 느낌으로 편견을 갖거나 상대를 달가워하지 않는 분 위기를 드러내며 급기야는 상대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글이 짜증나고 사람이 싫은 이유는 그를 잘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보듬고 이해한다면 자기 몫의 행복도 그만큼 늘어날 터인데, 괜히 그를 기피함으로서 내 몫의 행복이 줄어들 수 있다. 행복이 줄뿐 아니라 자 칫 불행과 주름만 늘게 된다. 인터넷에선 어떤 사람이 나에게 호의적인지 아닌지를 판독하고 변별하는데 온통 수고를 다 바치는 경향이 있다. 흔히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한다. 상대에게 관심을 받는 만큼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 원리로 사랑이 작동하긴 한다. 이때의 사랑이란 투자의 개념과도 비슷하다. 인터넷에선 선한 댓글 이 그 기능을 감당한다. 그러나 상대의 표정과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 끝없는 신뢰와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깨닫는다. 모든 잎사귀를 사랑하라 를 모든 글을 사랑하라 로 변용해 취득한다. 권순진 Tonight I Celebrate My Love - Roberta Flack 모든 것을 사랑하라/ 도스토예프스키 127

128 초장이 싱겁다/ 김환식 :46 초장이 싱겁다/ 김환식 살다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깨물린 입술이 또 입술을 깨물어야 한다 사람의 속도 빙어처럼 투명할 수 있다면 답답할 땐 속을 훤히 보여주면 좋을 것이다 빙어도 속 터지는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때 마다 속을 뒤집어 보이자니 답답했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속을 훤히 보여주며 살려고 날마다 투명하게 진화했을 것이다 그런 빙어가 술상에 안주로 나와 앉았다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초장이 싱겁다/ 김환식 128

129 제법 단정하고 편안한 모습이다 나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다 뒤집은 속을 툭툭 털어 보이고 싶지만 그렇게 보여줄 대안이 없는 것이다 빙어가 부럽다 통째로 빙어 한 마리를 입안에 넣는다 죽은 줄만 알았던 놈이 꿈틀거린다 초장이 싱겁다 - 계간 시와시와 2013년 여름호... 사람이 살면서 제일 답답할 때가 남이 나를 몰라주고 무시하거나, 진심을 왜곡하여 받아들일 때다. 그럴 때는 화가 난다. 팔짝 뛰며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버선목이라서 까 보일 수도 없다. 더욱이 애먼 누명이라도 쓰게 되어 마땅히 보여줄 증거도 없는 상황이라면 속이 터질 지경이다. 지난 윤 창중 사건 때 대통령께서 한 말씀이 생각난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 니라고 했던가. 당시 윤창중씨의 경우 대변인 임명과정에서부터 많은 지적과 염려가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사람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을 인상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 양과 평소 언행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세계를 진단하기도 하는데, 불행히도 그 예단이 딱 들어맞은 케이스였다. 사람을 겉모습과 몇 개의 정보만으로 쉽게 판단해서도 안 될 일이지만 때로는 그 선입견이 예방효과를 가져다 줄 경 우가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예방적 차원에 그쳐야지 그것으로 사람을 규정하고 단정 지어서는 곤란하다. 그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당사자로서는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대가 내 마음을 몰라주고 곡해할 때는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고 싶을 때가 왜 없을까. 빙어도 속 터지는 일이 얼마나 많 았 으면 그때 마다 속을 뒤집어 보이자니 답답했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속을 훤히 보여주며 살려고 날마 다 투명하게 진화했을 것이다 시인은 빙어를 먹다가 문득 그런 빙어가 부러웠다. 뒤집은 속을 툭툭 털어 보이고 싶지만 그렇게 보여줄 대안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얼마 전 끝난 너의 목소리가 들려 란 드라마의 남자주인공은 상대의 눈을 보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 다. 답답할 땐 차라리 상대가 그런 능력이라도 가져주길 바라겠지만, 막상 그런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할까. 서로의 마음속을 훤히 보지 못함이 한편으론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내가 너를 잘 모르듯 네가 나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알 리가 없다. 나는 상대를 속속들이 모르면서 나만 알아 달라는 것은 몰염치다. 다만 우리는 남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남을 많이 알아가도록 노 력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다음 어쩌면 아주 조금씩 나를 이해받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입이 싱거워졌는지, 죽 초장이 싱겁다/ 김환식 129

130 은줄 알았던 빙어가 입안에서 꿈틀거려서인지 초장이 싱겁다. 권순진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 Elton John 초장이 싱겁다/ 김환식 130

131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01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131

132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2012)... 올해는 장마가 길어서인지 매미의 울음이 늦다. 햇빛이 쨍쨍 내려쫴야 매미의 울음도 활기를 띄는데 비가 오면 우렁 찬 소리를 낼 수 없다. 매미의 발음 근육이 실룩거리며 만들어낸 소리를 공명실에서 증폭시킴으로써 쩌렁쩌렁 소리가 나오는데 비가 오면 이 활동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매미울음의 위축은 그들 애정 전선에도 이상을 초래한다. 수컷 의 울음은 암컷을 유혹하는 수단이며, 그들에겐 일생일대의 가장 화려하고 장렬한 과정이다. 사랑을 위해 온 열정을 쏟아 부을 때에 그동안 비로 인해 유보되었던 것이다. 이제 지루한 장마도 끝이 난 것 같다. 본격 무더위가 시작될 테지만 매미로서는 비로소 살판이 났다. 단단히 나무 의 멱살을 잡고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 라 반드시 들키려고 마구 울어재낄 것이다. 평균 7년간 굼벵이 유충 으로 은둔생활을 하다 지상에 올라와 우화한 뒤 매미로서 길어봐야 4주밖에 살지 못하는데, 이 때 대를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암컷을 부르는 수컷의 울음이 처절할 수밖에 없다. 밤이고 낮이고 구분도 없다. 그러니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그래봤자 교미가 끝나면 암컷은 나무에 알을 깐 뒤 죽고, 곧이어 수컷도 따라죽는다. 그러므로 매미에게 그 울음은 지고지순한 사랑의 시그널이다. 어차피 이 매미울음과 더불어 8월의 여름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울음의 속 사정을 이해한다면, 온 힘을 다해 짝을 찾는 매미의 열정을 오히려 응원하거나 혹은 연민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최소 한 그러려니 해야지 오만상 찡그리며 신경쇄약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겠다. 시인은 매미가 운다고 했다가 나중엔 매미가 읽는다고 했다. 나무의 멱살을 잡고 목을 걸고 읽는 다고 했다. 그렇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누가 이토록 겁나게 치열하게 바락바락 생을 읽겠는가. 그렇게 울어쌓는데 나무가 절판되지 않고 어이 배기랴. 그 불씨 일단 나무에 붙었다 하면 기어이 다 읽고 다 태우고 만다. 이 8월에 이만한 흥행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절판은 되어도 결코 절단이 나진 않을 것이다.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132

133 권순진 L'Italiano / Toto Cutugno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133

134 참, 좆같은 풍경/ 송경동 :10 참, 좆같은 풍경/ 송경동 새벽 대포항 밤샘 물질 마친 저인망 어선들이 줄지어 포구로 들어선다 대여섯 명이 타고 오는 배에 선장은 하나같이 사십대고 사람들을 부리는 이는 삼십대 새파란 치들이다 그들 아래에서 바삐 닻줄을 내리고 참, 좆같은 풍경/ 송경동 134

135 고기상자를 나르는 이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석회처럼 센 노인네들뿐 그 짭짤한 풍경에 어디 사진기자들인지 부지런히 찰칵거리는 소리들 그런데 말이에요 이거 참, 좆같은 풍경 아닙니까 부자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시인들은 나이 먹을수록 대접받는데 우리 노동자들은 왜 늙을수록 더 천대받는 것입니까 -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10)... 지금 세상은 이미 장유유서 를 윤리의 덕목으로 받드는 시대는 아니다. 더구나 근력만을 요구하는 블루컬러의 노 동시장에서는 오로지 그 힘에 의해 서열이 정해질 뿐 나이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장유유서 의 질서란 늙은 사람 이 일찍 죽는다는 그 농담 그대로의 순서가 되었다. 그런데 그게 뱃전이나 노동판에서만 볼 수 있는 참, 좆같은 풍 경 일까? 얼마 전 50대 고용률이 30대를 앞질렀다는 보도가 있었다. 전통적으로는 대의 순으로 고용률 순위가 이 어져왔으나 미세한 통계수치 차이로 역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베이비붐 세대의 상당수가 50대로 편입이동하면 서 나타난 인구구조의 변화에 의한 것이지, 달리 50대가 신규 일자리를 꿰차기 해서 늘어난 현상은 아닐 것이다. 희망근로사업 등이 50대 고용률 상승에 어느 정도 영향은 미쳤을 것이나, 정부 관계자의 견해처럼 사회복지부문을 중심으로 정년퇴직 이후의 일자리가 늘어난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 새로 취업한 이들이 얻은 일자 리가 변변할 리가 없다. 희망근로의 대부분은 환경정화와 지역공공시설개선에 투입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거나 그 보수로는 가족부양이 힘든 사람이 배를 타고 공사장 막노동판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런 사정임에도 마치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노인네 들이 잠식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되는 일부의 분위기가 있다. 물론 산업현장에서의 고령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도 건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천대받아가며 허접한 일이나마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근로하는 5,60대 노인네들 때문에 삼십대 새파란 치들 의 일자리 찾기가 고단해지는 것도 아닌데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내막을 들여다보면 고용구조의 어두운 면은 부자나 정치인이나 학자 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 참, 좆같은 풍경/ 송경동 135

136 까. 결국 직업에 대한 가치관과 노동생산성의 문제일 텐데, '시인'도 그 그룹에 끼어들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문학판 에서 나이 먹을수록 대접받는다고 시인이 말한 부분 만큼은 아무래도 관찰의 오류인 것 같다. 권순진 참, 좆같은 풍경/ 송경동 136

137 뜨거운 돌/ 나희덕 :40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 있네 그러면 내 스무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火 傷 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뜨거운 돌/ 나희덕 137

138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 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 -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2004)... 세상은 자꾸만 좋아져야 하고, 그 개선은 때리면 울리고 울리면 변하여 그 변함에서 더 좋은 것을 찾아내리라는 변 증법을 확신한 적이 있었다. 누굴 향해 차마 던지지 못했던 돌멩이 하나 이미 바스라지고 식어버려 나 또한 이젠 몇 개의 가는 손금만이 그 쥐어 들었던 돌을 화석처럼 추억하노니. 나희덕의 시는 사진에서 보는 느낌과 다르지 않아 늘 착하고 얌전하여 읽기 쉽다. 절제와 단정함이 조화를 이루어 '외유내강' 무르지 않고 단단한 질그릇 같지만, 아닌 것은 끝내 아니라 말하는 강단도 느껴진다. 그는 지나간 날들에 대해 결코 '잔치는 끝났다'며 허탈해 하지 않는다.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손에 박혀있네'라며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과거를 오늘의 것으로 부여안는다. 돌을 쥐고 거리로 나서기란 당연히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무리에 섞인 다음의 돌 던지기는 던질까 말까 사이의 망 설임 보다 오히려 용이할 수 있다. 순전히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거나 후환이 두려워 몸을 도사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번뇌에는 또 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감정의 즉각적인 분출과 과잉이 반드시 '뜨거운 사람'을 형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돌을 던졌던 사람들만으로 세상 이 이만큼 좋아진 것도 물론 아니다. 식어가는 돌이지만 내 손안에 있다는 것, 그보다 뜨겁고 위협적인 힘이 어디 있 을까. 돌이 쓩쑹 나르고 마빡이 깨지고 피를 질질 흘려야 하는 상황을 통과하기보다는 손아귀에 움켜쥔 그 힘만으 뜨거운 돌/ 나희덕 138

139 로 정돈되는 편이 지극하고도 당연히 소망스럽다. 하지만 피가 끓지 않고서는 손에 돌멩이를 쥐어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던지지 않고는 지켜야할 가치들 이 다 무너져버릴만큼의 위급한 상황이어서 돌을 투척했다면 제대로 목표물을 겨냥해야 하리라. 던지는 것도 팔운동 도 아닌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제 발등에나 돌을 흘리고 만다면 쥐고 있느니만 못할 것이다. 권순진 뜨거운 돌/ 나희덕 139

140 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11 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나의 캔버스엔 눈과 입과 코가 얼버무려진 얼굴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140

141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 계간 시향 2010년 봄호... 파리의 한 공동묘지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묘석엔 이탈리아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1884년 7월12일 리보르 노(이탈리아)생. 1920년 1월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 밑 에는 만삭의 몸으로 그를 뒤쫓아 아파트 6층에서 투신자살한 모딜리아니의 아내 쟌느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1889년 4월6일 생. 1920년 1월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자 두 사람의 끔찍한 사랑 외에도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미술사에 등장하는 화가 가운데서 가장 미 남이었다든가 최후의 방랑가적인 화가라는 등속의 것들이다. 술에 취하면 옷을 홀라당 모두 벗어버리거나 길에 쓰러 져 자곤 했다. 그는 가난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때로는 마약에 중독되기도 했지만 우수에 찬 파리 생활의 표정들을 그 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필치로 그려낸 금세기의 빼어난 화가라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 그의 그림은 긴 얼굴, 긴 코, 긴 목 그리고 작은 입술, 아몬드 모양의 눈, 아래로 약간 처진 작은 어깨를 가진 인물 묘사가 특징이다. 그는 처음 조각을 했으나 작업환경으로 인한 육체적 피로 때문에 그림으로 방향을 틀어 독특한 그 림세계를 일궜다. 조각적인 요소들을 2차원 공간인 캔버스의 평면 화면에 적용시켰기에 그의 작품은 마치 평면 조각 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141

142 그가 파리로 온 후부터 그린 그림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대부분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대체로 슬픈 표정이 다. 표정이 얼버무려지고 지워졌기 때문에 그리 보일 것이다. 15도쯤 갸우뚱하게 기울어진 긴 목의 단순화된 여인상 은 무한한 애수를 품고 있다.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고,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 에서 관능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아니, 그 또한 광기의 눈으로 바라봐야만 가능한 미학이다.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기 직전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쟌느의 초상 을 그렸다. 이 그림에는 전과 달 리 눈동자가 또렷이 그려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말한다. 이젠 광기를 멈출 때가 됐어 너의 영혼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너의 눈동자를 그릴 수 있지 그는 쟌느의 아름다운 영혼의 눈동자를 그려 넣으며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쟌느 에뷔테른 역시 천국에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 드릴께요 라며 영원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몸을 기울 였다. '꼿꼿하게' 창가에 앉아서 '갸우뚱하게' 권순진 Rare Bird - Sympathy 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142

143 다 아는 이야기/ 박노해 :08 다 아는 이야기/ 박노해 바닷가 마을 백사장을 산책하던 젊은 사업가들이 두런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인데 사람들이 너무 게을러 탈이죠 고깃배 옆에 느긋하게 누워서 담배를 물고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는 어부들에게 한심하다는 듯 사업가 한 명이 물었다 왜 고기를 안 잡는 거요? "오늘 잡을 만큼은 다 잡았소" 날씨도 좋은데 왜 더 열심히 잡지 않나요? 다 아는 이야기/ 박노해 143

144 "열심히 더 잡아서 뭘 하게요?" 돈을 벌어야지요, 그래야 모터 달린 배를 사서 더 먼 바다로 나가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잖소 그러면 당신은 돈을 모아 큰 배를 두 척, 세 척, 열 척, 선단을 거느리는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요 "그런 다음엔 뭘 하죠?" 우리처럼 비행기를 타고 이렇게 멋진 곳을 찾아 인생을 즐기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 조금씩 각색되어 유통되는 이야기 가운데 내가 아는 것도 시의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미국의 한 사업가가 남미의 한적한 어촌마을로 휴가를 갔다. 낮인데도 고기는 잡지 않고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어부를 보았다. 한참 일할 시 간인데도 빈둥빈둥 노는 꼬락서니를 본 이 사업가는 속으로 이렇게 게으르니 요 모양으로 밖에 살지 못하지 라며 혼 자 생각했다. 그리고선 어부에게 다가가 자기의 사업 경험을 들려주기로 했다. 당신은 좀 더 노력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소! 지금 고기만 잡아서 먹고 살지 말고 더 많이 잡아서 돈을 벌면 큰 배를 살 수 있잖소. 통조림공장을 만들어 전 세계로 팔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되고 큰 사업가가 되어 도회로 나길 수도 있소! 이 말을 가만 듣고 있던 어부는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고 뭘 하죠? 라고 물었다. 사업가는 양양 하게 그렇게 하면 지금 나처럼 이렇게 한적한 시골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늦잠도 실컷 자고 매일 저녁 친구들과 놀 면 되지요 어부가 말했다. 별것 아니네요, 지금 내가 그걸 하고 있는뎁쇼. 비슷한 내용이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에도 나온다. 아프리카 오지에 서양인들이 찾아왔다. 서양인들은 부족민들 이 나무를 베어 하루하루 먹고 사는 걸 보고 부족에게 도끼를 선물해 주었다. 이듬해 서양인들이 다시 부락을 찾아갔 더니 부족민들은 그 전보다 더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서양인들은 의아하여 왜 더 많은 나무를 베지 않으냐고 물었 다. 부족장은 당신네들 덕분에 쉬고 즐길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생산성의 향상은 자본주의가 남겨준 최고의 선물이었으나 그 잉여의 시간을 어디에 바쳐야 잘 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완전한 자유인을 꿈꾸는 부르주아의 이상이 곳곳에서 치명적인 문제들을 일으키며 종말을 고하는 있는 지금, '인간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해서 산다'고 말한 칼 마르크스의 말이 얼마나 유효하고 정확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로 삶은 하나의 여정이며, 여정의 다 아는 이야기/ 박노해 144

145 모든 순간은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도시 현대인들이 생의 의미를 외면한 채 돈만 벌면 장땡인양 죽어라고 일하는 이유가 무엇인 가를 이 시는 생각토록 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권순진 다 아는 이야기/ 박노해 145

146 혹등고래/ 문혜진 :13 혹등고래/ 문혜진 눈을 떴을 때, 바다의 아가미로 사라진 잠수부 이야기가 스크린 가득 펼쳐지고 짙은 코발트블루 위로 쏟아지는 폭 설, 바다의 독백, 왜 하필 그랑블루의 마지막일까 남자와 여자는 처음 만나 할 말도 없이 쭈뼛대다 대충 취해 이토록 낯선 대학가 DVD방, 막막한 푸른색 속에 서로를 밀어 넣은 채, 축축한 알코올 냄새, 허리에 감은 팔은 문어의 빨판 처럼 난데없고 젠장할! 뭉텅 끊어진 필름 봅슬레이 속도로 엄습하는 물살, 무지개송어 빛 오라, 사방에서 물이 차오르고 심해의 비밀을 발설하듯 여자가 숨을 참으며 겨우 입을 달싹인다 넌 누구냐? 분자처럼 반짝이는 발광해파리 떼, 천장에서 황급히 꼬리를 감추는 풍선뱀장 어 넌 범고래에게 찢긴 채 쫓기던 혹등고래였잖아,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리로 바다를 매만지는 너의 울음을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지 오늘은 내가 어깨를 빌려 줄게 몸속 유전자 그 오랜 기억의 유랑, 뗏목 위에서 물을 따라 흐르다가 자고 일어나 바다 한가운데서 맞는 첫 표류의 태양처럼 이토록 낯선, 푸른 스크린 아래 눈물로 가득 채운 혹을 깔고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주거니 받거니 코를 고 혹등고래/ 문혜진 146

147 는 혹등고래들 - 시집 검은 표범 여인 (민음사, 2007)... 영화 '그랑블루'에 돌고래 말고 혹등고래가 막판에 등장했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다. 엄청 큰 체구에 생김새 도 독특한 혹등고래에 대한 사전지식을 구비해 보았다면 모를까 설령 잠깐 나왔다한들 기억에 남아있을 리 만무다. 그래서 이 고래에 대해 조금 공부해 보았다. 혹등고래는 모든 고래 가운데 재주를 가장 잘 부리는 놈으로 알려져 있 다. 물속에서 배를 위로 하고 솟구쳐 올라 등짝을 활 모양으로 구부린 후 머리를 먼저 물속으로 처박기도 하고, 깊이 잠수할 때는 등을 둥글게 구부리고 앞으로 회전하여 꼬리부터 수직으로 다이빙해 들어가는 쇼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재주넘을 때 내는 큰 마찰음은 물론 놈의 다양한 소리는 장난이 아니다. 그 소리들을 이어 노래로 배열한다 치면 30분 가까이나 계속되고 160km까지 퍼져나간다. 신음과 울음에서부터 윙윙거리는 소리, 코고는 소리에 이르기 까지 레퍼토리가 다양한데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리로 바다를 매만지 고 있다. 특히 번식시기에 내는 수컷의 소리는 애잔함을 가득 담고서 암컷을 유혹한다.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이 내는 소리가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그 혹 등고래 한 마리가 짝짓기를 위해 수천km를 이동하는 것 또한 같은 포유동물인 우리 인간의 시선으로도 경이롭다. 대학가 DVD방 의 축축한 청춘과 고래사냥 그리고 낯선, 푸른 스크린 그랑블루의 사방에서 물이 차오 르는 장면이 신세대 시인의 경쾌하지만 조금 아리송한 언어로 묘하게 조합되어 뒤엉켜있다. '푸른 스크린 아래 눈 물로 가득 채운 혹을 깔고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주거니 받거니 코를 고는 혹등고래들'은 어제도 홍대입구 DVD방에 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지금 '그랑블루'의 감독판 영화가 20년 만에 재개봉되어 상영중이다. 코발트블루의 바다, 그 바다 아래가 더 좋다며 사라져버린 잠수부, 그리고 그의 가족인 돌고래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영화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물속 깊이 내려가면 바다는 더이상 푸른 빛이 아니다. 하늘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남은 것은 오직 고요, 고요 속에 머물게 되 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주거니 받거니 코를 고는 혹등고래들의 꿈도 그 고요가 아니었을까. 권순진 혹등고래/ 문혜진 147

148 영화 '그랑 블루'에는 아름다운 주제음악이 따로 있지만 나는 왜 이 노래가 먼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바다 그 고요한 곳에 무겁게 내려가 생각나면 나를 바라보네.. 난 이리 어리석은가 한치도 자라지 않았나... 혹등고래/ 문혜진 148

149 음악/ 김현옥 :24 음악/ 김현옥 어떤 음악은 내 속에 들어와 떠날 줄 모르고 어떤 음악은 내 밖에서 머뭇대고 어떤 음악은 아예 내 곁으로 오지 않는다 어떤 음악은 애인처럼 잠드는 순간까지 듣고 어떤 음악은 잊혀졌다 문득 생각나면 듣고 어떤 음악은 우연히 거리에서 스치듯 듣고 잊어버린다 어떤 음악은 기억의 물감을 풀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음악은 마음의 빛바랜 사진들을 들춰보게 하고 어떤 음악은 가슴의 수화기를 내리게 한다 어떤 음악은 마음으로 듣고 어떤 음악은 온몸으로 듣고 어떤 음악은 귀로만 듣는다 어떤 음악은 햇빛이고 어떤 음악은 소낙비고 어떤 음악은 바람이다 음악/ 김현옥 149

150 어떤 음악은 내 속으로 흘러와 그리운 길이 되고 꿈꾸는 산이 되고 건널 수 없는 강이 된다 어떤 음악은 내 밖으로 흘러가 기도하는 나무가 되고 침묵하는 섬이 되고 떠도는 구름이 된다 어느 순간, 내가 음악이 되는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대에게 나를 들려주고 싶어진다 - 시집 그랑 블루 (문학세계사, 2013)... 음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시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시 없이는 살아도 음악을 삶에서 도려내고는 삶 이 온전히 지탱될 것 같지 않다. 음악 없는 인생은 니체의 말마따나 착오 그 자체로 고장 난 인생이다. 음악은 인류 공통의 언어이면서 광장 의 작가 최인훈의 말처럼 가장 순수한 영혼의 데생 이며, 그것으로 듬뿍 마음의 힘을 얻는다. 다양한 음악을 통해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고 고통과 슬픔을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다. 음악은 단순한 소리나 리듬이 아니다. 미국의 한 연구팀이 시공간 추리력과 음악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주 었던 그룹 학생들 간의 시공간 추리력은 단 10분 만에 8~9점이나 향상되었다. 이 현상을 모차르트 이펙트 라 부른 다. 그리고 음악의 힘은 치료의 역할도 해낸다. 한국음악치료 학회에서는 음악치료는 음악활동을 체계적으로 사용 하여 사람의 신체와 정신기능을 향상시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음악의 전문 분야 라고 정의를 내렸다. 어떤 음악은 기억의 물감을 풀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음악은 마음의 빛바랜 사진들을 들춰보게 하고, 어떤 음악은 가슴의 수화기를 내리게 한다 어떤 음악은 햇빛이고 어떤 음악은 소낙비고 어떤 음악은 바람이다 음악에 따라 사람의 정서반응이 달라지고 감정도 다양해진다. 그때그때의 감정과 어울리는 음악이 있고, 그 감정을 바꾸어 줄 수 있는 음악이 있다. 음악은 야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힘이 있다. 암석을 연하게 하고, 떡갈나무를 휘 게 하는 힘이 있다. 어떤 음악은 으로 반복되는 이 시의 나열적 질서는 시도 음악임을 암시하고 있다. 박용래의 저녁눈 이란 시가 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 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이렇게 시가 음악이 되어 내 가슴 한구석에서 저미어올 때, 그때 나는 그대에게 나를 들려주고 싶어지 기도 할 것이다. 권순진 음악/ 김현옥 150

151 시를 위한 시/ 이문세 음악/ 김현옥 151

152 이 바쁜데 웬 설사/ 김용택 :02 이 바쁜데 웬 설사/ 김용택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 시집 강 같은 세월 (창작과 비평사, 1995)... 살다보면 누구나 한두 번쯤 이런 긴박한 최악의 처지에 몰릴 때가 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도 주위에서 이 같은 상 이 바쁜데 웬 설사/ 김용택 152

153 황을 목격할 경우도 있는 것이고. 실제로 이 시는 시인의 어머니가 저 광경을 목격하고선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시인 말마따나 고스란히 받아쓴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바쁜 농사철 논두렁에서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깔짐 지게를 지고 소를 몰고 오는데 갑자기 똥이 마려운 폼이었단다. 소를 묶고 지게를 받쳐야 하는데, 지게를 받치자 깔짐이 넘 어가버려 풀이 그만 허물어졌던 것이다. 그때 소가 펄떡펄떡 뛰는 광경을 보았다. 깔짐은 넘어가지, 소는 뛰지, 받치 기는 힘들지. 설사는 나오려고 하지, 보아하니 삼베옷 허리띠는 잘 풀어지지 않는 것 같고 들판엔 사람들도 많았단 다. 시인은 이 상황을 전해 듣고 그대로 베껴 썼다는 것이다. 어쩌면 소나기 부분은 각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튼 긴밀하게 가공 재구성한 것이 더욱 구체성을 띄고 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산문적 사고에 머물렀다면 시가 되진 못했으리라. 소나기가 오는데다가 소도 뛰고 풀은 허물어졌다. 게다가 설사도 나고 허리끈도 안 풀어진다. 그리고 보는 사람도 많다. 정도가 되겠는데 재미와 감흥이 팍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받혀주고 있는 것은 반복해서 서술하고 있는 지요 라는 나열적 질서가 되겠는데, 시적 운율을 느끼게 하여 시를 시답게 하고 있다. 이런 형식의 리듬은 사실 특별할 건 없고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써먹는 말이다. 비는 오지요 갈 길은 멀지요 배는 고프지요... 따위의 익숙한 리듬이다. 이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이 정도면 요즘 아이들에게도 먹혀드는 개그 수준이 될까. 전유성은 시집을 즐겨 읽는 개그맨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이런 시를 만나면 반색하며 소재로 써먹으려고 할 것이고 그리해도 손색은 없을 것이다. 여섯 행에 불과한 이 짧은 시에서 어느 한 행이라도 빠져있다면 긴장감의 밀도가 떨어져 재미도 덜했을 것이다. 특히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 란 대목이 누락된다면 아예 시의 꼬락서니가 안 되겠다. 바작 이란 낯선 농촌 물건도 살짝 시의 품격을 거들고 있다. 바작은 지게에 짐을 싣기 좋도록 하기위하여 대나 싸리로 조개모양의 걸 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물건이다. 아무튼 시가 재미나긴 한데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시에서의 설사 만난 이는 저 극도의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였을까. 내 지난날의 어느 순간처럼 그냥 눈 감고 철퍼득 주저앉아버리고 말았을까. 권순진 The Way We Were/ Barbra Streisand 이 바쁜데 웬 설사/ 김용택 153

154 아버지의 부동산/ 김현희 :56 아버지의 부동산/ 김현희 아버지 달성공원 아직 안 팔렸어? 좀만 기다려 보라카이, 그게 모타리가 커서 팔기 수월치 않네 얼른 팔리야 너덜 한 모가지씩 딱딱 떼 줄낀데 일본서 부잣집 막내로 태어나 유복하게 사셨던 아버지 어머니 만나 결혼 후 한국으로 돌아오셨지만 세상 물정 어두워 가진 재산 지키지 못한 걸 면구스러워 하셨고 당신의 끔찍한 딸들에게 물려줄 게 없는 것이 늘 짠하셨던 게다 쪼매 손해 보더라도 어서 팔아 아버지 아버지의 부동산/ 김현희 154

155 난 날마다 그거만 기다리고 있는데, 내겐 더 챙겨줘야 해?" 알았다, 네 언니들 안 삐지게 몰래 더 주꾸마 난 패리스힐튼 처럼 위대한 상속녀가 되어 턱이 치켜 올라가고 아버지는 하워드 휴즈의 모자를 당겨쓰고선 우리는 함께 유쾌한 웃음을 섞을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한동네에 살아 만만한 형부 홍소를 가로질러가며 초치는 소리 어이 처제, 그 달성공원 혼자 다 무라, 언니들은 귀퉁이도 손 안 댄다 카이 덧붙여 기어이 저만치 혼자서 중얼중얼 참 장인어른도, 달성공원이 어디 개인 끼가, 걸핏하면...허허 - 대구MBC문화센타 시 창작교실에서... 이 작품은 여태껏 시를 읽기만 했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한 중년여성이 생애 처음으로 쓴 시다. 시 창작수업을 통 해 얻어들은 시를 어렵고 두렵게 생각하지 말자 자신의 둘레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이야기도 충분히 시의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는 말에 큰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시적 수사에 관한 약간의 조언을 참고하긴 했어도 이 정도면 초보자치고 썩 괜찮은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 시인에게 있었던 에피소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것이기에 충분히 정직하고 독창성도 갖췄다. 글의 정직성은 사람 과 닮기 마련이다. 사람의 표정과 말씨에서 억지로 꾸며낸 듯한 가식을 느꼈다면 호감을 갖지 못할뿐더러 그 말을 챙 겨듣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듣는 이도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주저되어 더 이상 말을 이어가고 싶 은 생각이 싹 가시게 된다. 글도 이와 같아서 진솔한 내용과 표현이 그만큼 중요하다. 글이 정직하지 못하면 공감을 얻기 어렵고, 공감이 안 되는 시에서 감동을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있었던 일 을 시로 쓰고자할 경우 얼마간 시적 각색은 필요하겠으나 추억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상상적 사건으로 확대시켜서 는 곤란하다. 억지로 좋게 보이려는 것도 어설프게 감추려드는 것도 좋아뵈진 않는다. 자신의 체험에 들어 있는 감동 의 입자가 살아있어야 비로소 정직한 글이 될 수 있는데 급조된 비약으로는 그걸 얻지 못한다. 또한 무엇이 절실하게 글을 쓰도록 했는지를 항상 기억하고 염두에 둬야할 것이다. 좋은 시인은 자기 내면의 상처와 그늘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제 혼자 감상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울고 웃는 신파조로는 독자의 공감 을 얻기 어렵다. 이 시에서의 공감은 시인의 아버지가 유머러스하고 참 낙천적이라는 것과 신기루 같은 아버지의 옛 재산에 애닮아 하기보다는 농담 따먹기 로 충분히 여유있고 유쾌할 수 있는 통 크게 화기애애한 가족간의 분위기 다. 아버지의 부동산/ 김현희 155

156 시에서 비유한 패리스 힐튼 은 힐튼가의 상속녀로 젊고 예쁘고 돈 많은 현역 허리우드 스타이며, 하워드 휴 즈 는 1977년 사망 당시 2조 4천억 원이란 거액의 유산을 남긴 대부호였다. 그리고 휴즈가 남긴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Nothing. Nothing.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 말을 반복하며 그는 숨을 거두었다. 돈도, 미녀도, 명예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권순진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나는 대리석 궁전에사는 꿈을 꾸었네) - 조수미 아버지의 부동산/ 김현희 156

157 문단속/ 조용숙 :29 문단속/ 조용숙 오래 살아야 두 달 산다는 아버지를 노인병원에 모시던 날 보호자는 있을 곳 없으니 이제 그만 다들 돌아가라는 수간호사 말에 한순간도 엄마와 떨어져 살아본 일 없던 아버지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린다 하는 수 없이 엄마까지 입원 수속을 밟고 돌아서는데 어머니 내 귀에 대고 살짝 속삭인다 글쎄 동네 홀아비 김씨가 한밤에 건넛마을 팔순 과부를 겁탈했다는 소문이 동사무소에 파다하단다 니 아버지 먼저 가면 나 무서워서 어떻게 산다냐 문단속/ 조용숙 157

158 대문 없는 집에서도 평생 맘 편히 잘 살았는디 니 아버지 가면 얼마 안 있다 바로 따라가든지 아니면 제일 먼저 대문부터 해 달아야쓰겄다 제삿날 받아 놓은 아버지 곁에 새색시처럼 바싹 달라붙어 있는 칠순 엄마가 처음으로 여자로 보였다 - 시집 모서리를 접다 (시로여는세상, 2013)... 시인의 아버지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서 노인요양병원으로 모셔진 뒤 실제로 두 달 남짓 더 사시고서는 세상을 떠 나셨다. 그때가 2년 전 2011년이니 시도 그 무렵에 쓴 것으로 봐야겠다. 시인은 그 아버지를 생각하며 어머니 말씀에 아이디어를 얻어 단 5분 만에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시가 술술 읽혀지듯 그렇게 술술 시가 써졌던 것이다. 따라서 깊 은 사색이 서성거렸던 흔적도, 어렵게 읽히는 대목도 없다.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확실한 정보는 시인의 어머니가 시 인의 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는 정도다. 하지만 그 사랑을 활성화시키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어머니가 귀엣말로 전한 흉측한 동네 소문으로부터다. 그 소문 에 반응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좀 생뚱맞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하여서 어쩌면 시인 자신도 그 상황에서 속으로는 풋 하고 웃었을지 모르겠다. 사실 이 시가 시다워진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제목에서도 시사하고 있지만 그 대목 을 도려내고나면 시가 될 것 같지가 않다. 제삿날 받아 놓은 아버지 곁에 아무리 새색시처럼 바싹 달라붙어 있 는 칠순 엄마 의 순정이라 해도 먹혀들질 않을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내 어머니의 나이 겨우 예순 둘, 헛헛한 마음을 추스르려고 인근공원으로 매일 운동을 나가셨 다. 운동이라야 걸어서 왔다리갔다리하면서 나무둥치에 등짝을 툭툭 부딪는 게 다였다. 그런데 어느 날 졸업했다며 아침운동을 나가시지 않는 거였다. 이유인즉슨 웬 영감이 혼자인 걸 알고는 자꾸만 히야까시 를 건다는 것이다. 그게 꼴 보기 싫고 추해 보여서 운동을 포기했다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당시엔 오버도 이런 오버가 없다싶어 속으로 까르르 웃었다. 누가 이런 할머니에게 이성적 관심을 가진담. 지금 생각하면 폭삭 시든 꽃은 아니라 웬 영감 으로서는 충분히 진지한 작업 일 수 있겠고, 어머니 역시 속 시끄러운 부담이기도 했으리라 이해가 된다. 시에서 칠순 엄마 의 결기에 찬 문단속 도 딸을 웃기려고 한 소리 만은 아닐 것이다. 시인도 25년 전의 나처럼 그 소문 에 가당찮은 과민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 만, 어머니의 그 해학 을 경건하게 받들어 처음으로 여자로 보였다 며 여성성과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진정성 을 확인하고 있다. 시인의 보듬고 끌어안는 반전이 참 예쁘다. 문단속/ 조용숙 158

159 권순진 If You Go Away / Dusty Springfield 문단속/ 조용숙 159

160 아버지의 팔자/ 김나영 :39 아버지의 팔자/ 김나영 야들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테레비나 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팔자가 상팔자다 던 아버지 그 좋은 팔자 2년도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네 온 식구들 불러 모아 놓고 사돈에 육촌아재까지 불러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놓고 큰 홀 빌려서 사흘 밤낮 잔치를 베푸시네 배포 큰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새 옷도 한 벌씩 척척 사주고 아버지도 백만 원이 넘는 비싼 옷으로 쫘-악 빼 입으시고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리무진까지 타시고 온 식구들 대절버스에 줄줄이 태우고 아버지의 팔자/ 김나영 160

161 수원 찍고 이천으로 꽃구경까지 시켜주시네 간도 크셔라 우리 아버지 이천 만원이 넘는 큰돈을 삼일 만에 펑펑 다 써버리고 우리들 볼 낯이 없었던지 돌아오시질 않네 잔치는 끝났는데 아마도 우리 아버지 팔자 다시 고쳤나 보네 - 계간 문예 2011년 여름호... 우리나라의 100세 이상 고령자가 최근 5년 만에 갑절 이상 늘어나 2천명을 훌쩍 넘어섰다는 통계청 조사결과를 본 일이 있다. 특히 전북 장 수군은 2만 명도 채 안 되는 인구 가운데 백세 이상이 열 명이나 된다니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장수 비결로는 가장 먼저 절제된 식 생활 습관을 꼽았고, 다음으로 낙천적인 성격과 규칙적인 생활 등을 내세웠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욕망을 줄여 안빈낙도하는 삶이 장수에는 최고라는 말씀이다.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테레비나 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팔자가 상팔자 란 생각을 가진 아버지 역시 낙천적인 성격만큼은 분 명하신 듯한데, 왜 그렇게 서둘러 가셨을까. 시에서 보여준 정보만으론 연세는 물론 그 어느 사정도 소상히 파악되지 않지만 정황으로 보아 외로움은 좀 타신 것 같다. 사실 나이 들면 외로움과 쓸쓸함만큼 고약한 건 없다. 고독을 잘근잘근 씹기엔 치아가 너무 허술하고 세상은 빡 세게 돌아가고 있다. 외로움이 치매와 혈압 등 많은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즉 외로움이 인체의 면역기능을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특히 타 인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의 뇌의 반응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육체적인 고통과 버금간다고 한다. 외로움이 질병을 불러올 수 있다 는 연구결과는 그동안 꽤 보고되었다. 중년 이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 보다 혈압도 높고 심혈관 질환으로 발전할 가 능성도 높다고 한다. 그 좋은 팔자 2년도 지긋지긋했던 모양 이라는 화자의 진술로 미뤄봐서, 아버지 는 그리 쪼달리지 않는 경제 형편임에도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오히려 두렵게 생각하고 계셨던 분 같다. '테레비'만 갖고는 그 외로움이 극복되지 않아, 외로워서 사돈에 육촌아재까지 불러 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놓고 잔치 한판 거시게 벌였던 것이다. 골골하고 외롭게 너무 오래 사느니 차라리 팔자를 고쳐 살고 싶으셨던 게다. 권순진 아버지의 팔자/ 김나영 161

162 아버지의 팔자/ 김나영 162

163 진실로 좋다/ 천양희 :23 진실로 좋다/ 천양희 노을에 물든 서쪽을 보다 든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든다는 말이 진실로 좋다 진실한 사람이 좋은 것처럼 좋다 눈으로 든다는 말보다 마음으로 든다는 말이 좋고 단풍 든다는 말이 시퍼런 진실이란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노을에 물든 것처럼 좋다 오래된 나무를 보다 진실이란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진실이란 말이 진실로 좋다 정이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진실을 안다는 말보다 진실하게 진실로 좋다/ 천양희 163

164 산다는 말이 좋고 절망해봐야 진실한 삶을 안다는 말이 산에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나무그늘에 든 것처럼 좋다 나는 세상에 든 것이 좋아 진실을 무릎 위에 길게 뉘었다 -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2011)... 천양희 시인은 시를 40년 이상 써온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시인이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는 6년 만에 낸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이다. 시인의 시는 대개 담백함 가운데 물 흐르듯 자연스런 달관이 느껴지는데 이 시도 그렇 다. 그 달관은 물론 격정과 고통을 통과하고 긴 사색과 응시를 거쳐 발효된 경지이다. 오히려 섣부른 기교나 수사가 없기에 곧장 대상의 핵심에 가닿고 진정성이 더 또렷이 부각된다. 그래서 그의 삶과 사람과 자연에 대한 고뇌는 더욱 깊어지고 묵직해졌지만 표현은 한결 더 투명하고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든다 라는 말의 쓰임새는 참 많으나, 시에서처럼 하나같이 좋은 의미거나 좋은 용처에 쓰이는 것만은 아 니다. 볕이 들면 그늘도 들겠고, 풍년이 들면 가뭄이 들어 흉년도 든다. 미운 정 고운 정은 다 정든 임에게 스며든 정 분이라지만,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 누군가에게 친근감이 들면 불길한 예감도 들고, 주눅이 드는가 하면 멍이 들기도 한다. 번쩍 정신이 들 때도 있지만 헛바람과 잡념도 든다. 속이 들고 철이 드는 건 좋은 일지만 겉멋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세상엔 눈에 드는 물건이나 마음에 드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든 다 는 말에도 이처럼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시인은 곁가지 구차함 다 털어내고 노을에 물든 서녘하늘, 단풍든 가을 산, 한여름에 드는 나무그늘, 그리고 오래된 나무 와 산 을 진실로 마음에 들어 한다. 요즘 들어 든다는 말이 진실로 좋다 고 한다. 진실을 아는 것보다 진실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한 것임을 알고 좋아한다. 든다 는 말이 그저 드는 게 아니고, 좋다 도 단순 히 좋다가 아니다. 오랜 고독을 견딘 뒤 고뇌 속에서 제대로 간이 든 장처럼, 뜸이 잘 든 밥 같은 시가 진실로 좋 다. 시인 특유의 삶을 관찰하는 날카로운 예각과 시적 촉기로 벼려내는 삶에 대한 통찰이 무릎 위에 길게 뉘었 다. 권순진 진실로 좋다/ 천양희 164

165 진실로 좋다/ 천양희 165

166 문학시간/ 김은숙 :14 문학시간/ 김은숙 며칠 후로 2 학기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공부는 하지 않겠다던 일민이까지 '선생님 규장전이 뭐예요?' 하며 질문을 해오는 문학 시간 곧이어 장난처럼 해온 질문 '선생님 문학이 뭐예요?' 아 문학이 뭐냐고 물었구나 문학을 가르치는 시간 문학을 배우는 시간 갑자기 나는 그 질문이 날카롭구나 예리하게 파고들어 내 말문을 막는구나 그래 너희들과 나 이렇게 함께 문학시간/ 김은숙 166

167 우리네 삶의 모습 담긴 작품들 기웃거리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 내 살아가고 있는 모습도 한 번 되짚어 보는 것 다양한 사람살이 속 담긴 빛과 어두움, 설움과 즐거움 온갖 감정의 양면의 언저리나마 함께 느끼며 따라가보고 내게 드는 느낌과 생각들 마음 한 귀퉁이에 갈무리해 보는 것 여러 모습의 사람살이 모두 진지하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세상 바라보는 것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내 안의 강한 울림 들으려 하는 것 다른 이들의 삶의 애환 들여다보며 내 살아온 길 제대로 짚어보고 내 살아갈 길 마음 속 깊이 새겨보는 것 혹 그것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되는구나 아니 흡족하지 못한 내 대답이 부끄럽구나 문학이 무엇인가 다시 내게 되묻는 시간 고등학교 2학년의 문학( 文 學 ) 시간 - 시집 아름다운 소멸 (천년의시작, 2003)... 시집을 사서 읽지 않고 인터넷으로 쉽게 찾아 읽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인터넷을 통한 시 읽기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 다양한 시를 광범위하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엄밀히 보면 시집이 안 팔리는 것과 시가 팔리지 않는 것은 좀 다른 양상이 아닐까. 물론 시도 시집도 안 팔리는 현실이긴 하지만 인터넷에 부려진 시편들의 수를 보면 시 의 공급과 수요를 저평가할 수만은 없다. 장기적으로 선순환구조에 기대를 걸자면 나쁘지 않은데, 인터넷이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 가져다준 디지털 환경이 시집의 매출을 줄이는데 당장 한몫 거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불법다운로드로 인한 음반시장의 위축과도 같은 현상이다. 그러나 음원시장은 인터넷 상의 불법복제와 유통을 적절히 통제한다면 음원 매출에 상당한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 전망되지만, 시의 경우는 비슷한 조 치를 강구하더라도 시집의 매상고가 크게 변할 것 같진 않다. 이 시 역시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품 가운데 하 나다. 수많은 문학 카페가 있지만 다음카페 시와시와'도 그런 창구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나 자신 무상 취득한 시에 단상을 붙여 무상으로 유통시키는데 한몫 거들고 있는 형국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란 도대체 무얼까? 따위의 원론적인 물음에 예나 지금이나 머뭇거리기는 마찬가지다. 문학 의 이유가 약하고 부족해서가 아니다. 결핍과 외로움 그리고 상실감이 문학의 토양이라면 우리 삶에서 문학에 대한 문학시간/ 김은숙 167

168 물음은 고등학교 2학년생보다도 인생의 4학년 8반이나 5학년 5반쯤에 있는 사람에게 더욱 유용할 수도 있겠다. 그런 물음에 비교적 성실한 답변을 하였음에도 스스로 대답이 흡족하지 못해 부끄럽다는 김은숙 시인. 문학이란 그렇게 설 명하고도 고개 가로 저어지고 모자란 그 무엇인 모양이다. 사람이 본능적 욕구만 챙긴다면 세상에 쓸모로 남을 일이 얼마나 될까. 지성과 감성이 부화뇌동하여 조작한 결과물 치고는 꽤 즐길만하지 않느냐고 문학을 두둔해 보지만 일이만원에 책 한 두 권 사는 것도 아까워하는 형편이라면 더 말해야 무슨 소용이랴. 다른 이들의 삶의 애환 들여다보며 내 살아온 길 제대로 짚어보고 내 살아갈 길 마음 속 깊 이 새겨보는 자아실현의 길이 문학에 있다고 백번을 말해도 그래도 그렇지 밥이 나와 술이 나와? 한다면 속절 없이 쓸모없는 짓거리가 되고 마는 게 또한 문학임을 어쩌랴. 권순진 Jungle Palace - Chamras Saewataporn 문학시간/ 김은숙 168

169 첫사랑/ 전승룡 :18 첫사랑/ 전승룡 떠도는 상념으로 달빛에 서성이면 빛 바랜 그날들이 하 그리도 고운지 가슴에 별 내리고 그날로 잠기운다. 손끝만 닿아도 저려오던 가슴으로 누군가 집어갈까 감춰두던 이름 석자 밤마다 꿈길마다 은하 위를 걸었다. 때로는 꺼내보고 또다시 가슴으로 색 바랜 이야기들 채색하다 지워버린 억겁을 참고 도는 미완성 사랑일래. 첫사랑/ 전승룡 169

170 - 대구MBC문화센타 시 창작 교실에서... 사람은 누구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이 있다. 그땐 너무 어렸고 처음이기에 서툴렀지만 소중한 시간들. 그렇 게 첫사랑은 스쳐지나가고 만다. 먼 훗날 문득 그 풋풋한 시간들을 추억하면 가슴이 짠해오고 콧등이 시큰해진다. 그 첫사랑이 누구는 아쉬움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여전한 설렘으로 다가온다. 영화 건축학 개론 의 에필로그에는 우 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고 말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추억은 각기 다른 시간 속에서 진행된 개별적인 산물 이다. 나에겐 그때 그 사람이 소중한 첫 사랑이었지만 상대는 아닐 수도 있다. 아니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 만 처음과 처음이 만나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신화로 남을 첫사랑이란 얼마나 가슴 떨리는지 아름다운지. 내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다. 긴 생머리, 까무잡잡한 피부, 환한 미소. 상냥했던 말투, 커피잔 두 개만으로도 행복하 리란 무욕의 주관. 그러나 아름답기만 한 사랑은 아니었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가졌고 그녀는 부산의 한 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시건방진 말로 내 방종을 위장했으며 그녀를 쓸데없이 긴장시키곤 했다. 꽤 길게 갔지만 결국 상처로 마무리된 첫사랑이었다. 전적으로 찌질한 내 탓이었다. 훗날 슬며시 꺼 내보고 가슴으로 색바랜 이야기를 채색하다 지워버린 일이 내게도 있다. 한번은 그녀의 이름을 인터넷 검색창에 쳐 넣어보기도 했다. 흐릿한 흔적 하나를 발견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다만 그녀도 가끔 나를 꺼내볼까, 내 이름을 네모 칸에 넣어보았을까 잠시 생각했을 뿐. 건축학 개론에서 납득이가 승민에게 말했다. 첫사랑이 잘 안되니까 첫 사랑이지, 잘 되면 그게 마지막 사랑이지 첫사랑이냐? 내게도 첫사랑은 억겁을 참고 도는 미완성 사랑 이지만 이제 중요한 것은 마지막 사랑임을. 3장 6구 세 수의 정형시조 형식을 띈 이 시는 아직 등단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분의 작품으로 시 창작 교실에서 개 인의 수준을 가늠해보기 위해 과제물로 제출받은 것 가운데 한 편이다. 시인되기보다 시 쓰기가 더 힘들다는 말이 있 다. 전승룡 시인은 소싯적부터 시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그야말로 첫사랑 같은 시를 가슴 속으로만 부여안고 있다 가 지난해 공직에서 은퇴한 뒤 본격적으로 시와의 열애를 가동한 분이다. 시조는 고루하고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현대시조는 전혀 그렇지 않다. 표현형식의 틀이 옛것이라고 해서 문제되지도 않는다. 시조를 통해 탄탄한 기초를 쌓은 저명한 시인도 많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이만한 시인의 감수성과 역량이라면 충분히 기대를 가져 도 좋을 듯하다. 권순진 첫사랑/ 전승룡 170

171 첫사랑/ 전승룡 171

172 개 두 마리/ 이동순 :40 개 두 마리/ 이동순 지난 여름 장에 가서 암수 강아지 한쌍을 사왔다 이놈들이 커서 이젠 제법 개 구실을 한다 어느날 과자 하나씩을 주었더니 제각기 자기 과자 앞에서 과자를 지키며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한다 두 시간이 지나고 오전이 다 가도록 서로 눈치만 보며 먹지를 못한다 등털 곤두세우고 침만 질질 흘리는 이 어이없는 긴장! 개 두 마리/ 이동순 172

173 나는 늦게사 그걸 알고 가서 과자를 멀리 던져버림으로써 팽팽한 긴장을 깨뜨렸다 이놈들은 그제사 고개 들고 하늘도 보고 또 서로 핥아주기도 한다 - 시집 가시연꽃 (창비,1999)... 우리가 일상에서 겪은 일을 누군가에게 말할 때는 그 일이 전개된 시간 순서에 따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 이 시도 시인이 생활 속에서 발견한 에피소드를 자초지종 진술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개 두 마리'를 사다 키우면서 뜻 밖에 맞닥뜨린 상황이 묘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사와 견주어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가 담겨있으리란 느낌을 준 다. 시인이 던져준 과자로 인해 촉발된 이 어이없는 긴장! 이 우리네 삶을 살피게 하는 것이다. 남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평범한 수다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그 가운데 깨달음의 감흥이 배어들어야 하고 흥미와 긴장감을 유지할 정 도의 재구성 능력도 요구된다. 따라서 자기의 체험이 생의 한 국면을 환기하는 의미를 불러일으키는데서 출발하지 않 으면 안 된다. 사람의 세상에도 이 같은 일들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데 쉽게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상속 재산을 둘러싸고 형제간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과 다툼이다. 과자 가 상징하는 것은 재물뿐 아니라 명예와 권력, 심지어 사랑까지도 포함한다. 지키고자 하고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모든 것을 망라한다. 인간의 빗나간 욕망과 탐욕은 언제나 화를 불러일으킨다. 욕구의 세기가 클수록 스트레스의 압력도 커진다. 문득 최근의 남북관계와 오래된 영화 웰컴투 동막 골 이 연출한 느슨한 평화가 교차되어 읽힌다. 그 가운데 어떤 해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도 순진한 생각도 해본다. 멀쩡하게 잘 지내던 친구 사이가 느닷없이 끼어든 이성 한 사람으로 인해 긴장하고 견제하고 질투하고 다투 다가 결국은 멀어져버리는 사례를 종종 본다. 내가 겪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 한 토막이 이렇듯 우리 삶에 대한 우화적 성찰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갑작스레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어이없는 긴장 관계로 악화되는 경우 가 왕왕 있다. 그 작은 이익이란 멀찌감치 객관적 위치에서 바라보면 정말 하찮은 것들, 가령 알량한 자존감이거나 체면 위신 남의 시선 따위의 티끌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일로 열을 받고 노여워하고 공 연히 남을 미워하는 것이다. 눈앞의 과자를 냅다 던져버리기만 하면 평화로운 것을.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나. 그리고 누구를 향해 이빨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는가. 권순진 개 두 마리/ 이동순 173

174 Tonight My Love, Tonight / Paul Anka 개 두 마리/ 이동순 174

175 시인 앨범 3/ 김상미 :46 시인 앨범 3/ 김상미 시를 우습게 보는 시인도 싫고, 시가 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시인도 싫고, 취미(장난)삼아 시를 쓴다는 시인도 싫고, 남의 시에 대해 핏대 올리는 시인도 싫고, 발표지면에 따라 시 계급을 매기며 으쓱해하는 시인도 싫다. 남의 시를 훔쳐와 제것처럼 쓰는 시인도 싫고, 조금씩 마주보고 싶지 않은 시인이 생기는 것도 싫고, 文 化 林 의 나뭇 가지 위에서 원숭이처럼 재주 피우는 시인도 싫고, 밥먹듯 약속을 어기는 시인도 싫고, 말끝마다 한숨이 걸려 있는 시인도 싫다. 성질은 못돼 먹어도 시만 잘 쓰면 된다는 시인도 싫고, 시는 못 쓰는 데 마음씨는 기차게 좋은 시인도 싫고, 학연, 지연을 후광처럼 업고 다니며 나풀대는 시인도 싫고, 앉았다 하면 거짓말만 해대는 시인도 싫고, 독버섯을 그냥 버섯 이라고 우기는 시인도 싫고, 싫어 시인 앨범 3/ 김상미 175

176 2004년 마지막 달, 시인들만 모이는 송년회장에서 가장 못난 시인이 되어 시야 침을 뱉든 말든 술잔만 내리 꺾다 바 람 쌩쌩한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싫다, 싫다한 시인들 차례로 게워내고 나니 니체란 사나이, 내 뒤통수를 탁 치며, 그래서 내가 경고했잖아. 같은 동류끼리는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고! 벌써 그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까르르 웃어 제치더군. 바람 쌩쌩 부는 골목길에서 - 시집 잡히지 않는 나비 (천년의 시작, 2009)... 시를 어마어마하게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고, 시인을 엄청나게 고매한 사람으로 여겼던 때가 있었다. 여전히 시는 잘 모르지만 시인에 대해서는 직간접으로 경험한 바에 근거하여 나도 조금은 그 느낌을 고쳐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관둘 란다. 여기서 언급한 보기 싫은 시인, 게워내고 싶은 시인, 남의 시를 훔쳐와 제것처럼 쓰는 시인에 보태어 시인을 싸잡아 더 욕보이고 싶지는 않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시인도 이 저주에서 온전히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 며, 이 시를 쓴 시인마저도 열외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시인과 엄격히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효용성과 수용성 측면에서 온당하며 독자의 심신에도 이롭지 싶 다. 때로 시는 시인의 광기이며 황홀경이고 로고스이기도 하는 것인데, 독자로서는 다만 취할 것만 삼키고 버릴 것은 간도 보지 말고 내뱉으면 되리라. 시는 시인의 경험이며 감정이고 직관이며 방향성 없는 사유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 인만큼 사물과 현상을 광폭으로 미세하게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을 터. 우리는 그런 시인의 겹눈과 시의 통로를 통해 세상과 폭넓게 사귀는 재미만 구가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시의 효용과 폐악에 대해서는 따로 논할 기회가 있으리라. '니체란 사나이'가 시인의 '뒤통수를 탁 치며' 경고했던 '같 은 동류끼리는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고'한 말에도 덧붙이고 싶은 생각이 없진 않지만 그 또한 나중으로 미룬다. 그동안 시 읽기를 통해 나자신 삶을 가다듬고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재미와 교양으로서의 기능도 솔찮을 것이란 생각으로 꽉찬 지난 5년간 거의 매일 독자와 함께 시를 읽어왔다. '바람 쌩쌩 부는 골목길에서' 이젠 슬슬 몸이 비틀리고 힘도 부치는데다가 옆에서 쌀독을 빡빡 긁어대는 소리도 들려 이 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맛이 있든 없든 그동안 변변찮은 단상을 붙여 소개한 시들을 아껴 읽어주신 독자들께는 머리 깊게 숙여 감사 를 드린다. 권순진 시인 앨범 3/ 김상미 176

177 시인 앨범 3/ 김상미 177

178 누에/ 이명순 :54 누에/ 이명순 하안거에 들어간 스님은 묵언수행중이시다 한번 단 한 번도 일탈을 꿈꾸진 않았다 차박 차박 쌓여진 경전을 읽고 결제에 들어선 화두에 빠져 사그락 사그락 좌선으로 쪼그라든 형액을 풀며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참선을 한다 누에/ 이명순 178

179 감은 두 눈 뜨이는 시간의 간격 사이로 새하얀 말이 되어 한 켜 한 켜 집을 짓는 것이다 제 입에서 토해낸 한 가닥의 희망들이 씨실과 날실로 짜여져 넓게 펼친 영혼의 일광욕을 시키는 오후 훌 훌 만행 길 떠나시는 스님의 뒷모습이 초연하다 - 대구MBC문화센타 시 창작교실에서... 누구나 시를 쓰기에 앞서 무엇을 쓰지, 글감을 어디서 구할까, 어떻게 써야 잘 썼다는 소리를 듣지 하는 고민에 빠 지게 된다. 시는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쓰기도 하고 느끼거나 생각한 것을 쓸 수도 있다. 보는 것도 그저 목격에 그 치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관찰한 연후라야 겨우 시의 실마리 하나가 잡힌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은 감수성이다. 감수성은 사물을 대할 때 이미 알고 있는 고정관념의 잣대로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난생 처음 보듯 낯설고 생뚱맞게 보는 시선도 가당하다. 그래야 신선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데 시의 종자, 즉 사물의 이미 지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관찰에 있어서도 덮어놓고 눈알을 굴리고 들이댈 게 아니라 몇 가지 관점은 있다. 예를 들면 누에 를 봤 을 때 처음엔 누에를 있는 그대로 본다. 무심히 보는 가운데도 느낌이 올 수 있다. 다음엔 그 모양과 움직임을 개별 적인 것과 집단을 구분해 관찰한다. 그리고 누에의 왕성한 식욕을 보고 뽕잎을 먹으면서 내는 소리를 듣는다. 뽕잎에 도 관심을 갖는다. 그런 다음 누에 속에 내재된 생명력을 본다. 한 생명체에 대한 지긋한 사랑의 신호를 보낸다. 고치 에서 나비까지 누에의 전후 변천과정을 살핀다. 누에의 효능이라든가 누에가 뽑아내는 명주실과 실을 짜는 물레를 생 각한다. 누에나 비단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과 경험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러한 관찰들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서는 개성 있는 좋은 시를 얻긴 어렵다. 깊은 사유에 의해 관찰이 심화되고 언어의 변별력을 높여가는 노력이 따를 때만이 가능하다. 여기서 시적 성공 여부가 갈리고 시인이 나눠진 다. 이를테면 누에의 뽕잎 갉는 소리가 지루한 빗소리 같다는 느낌은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뽕잎 먹는 모습에서 사각 사각 시간을 갉아먹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용이한 편에 속한다. 그리고 누에의 잠 누에의 집 누에의 꿈 등도 쉽사리 떠올릴 수 있는 주제여서 어쩌면 이미 출시된 품목일 것이다. 누에/ 이명순 179

180 이명순 시인의 누에 는 그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가 하안거에 든 묵언수행 중인 스님의 이미지로 구체화된 비 교적 참신하면서도 단정하고 모범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일탈 없이 일념으로 사각대는 아득한 적 막의 그 모습을 스님의 참선에 대비시켜 평소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시인의 내면까지 엿보게 한다. 사물이 가진 이미 지는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이 곧 시인의 개성이 된다. 또한 그것은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정보여야 하고, 이 미지의 흐름에 대한 견고함이 유지되어야 한다. 다만 이 시에서는 모범적인 반전에 대한 배려라든가 파격이 하나 쯤 눈에 띈다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은 있다. 권순진 누에/ 이명순 180

181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30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181

182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가지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받는다 죽 한그릇 얻어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안도현 시인이 자신의 트위트에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 고 한 것을 두고 언론에선 그가 절필을 선언했다 고 과장해서 알리고 있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그 가치를 눈속임 하는 일들이 매일 터져 나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 그 자체 라면서 현실을 타개해나갈 능 력이 없는 시, 나 하나도 감동시키지 못하는 시를 오래 붙들고 앉아 있는 것이 괴롭다 고 절필선언 의 이유를 설 명했다. 그는 불의가 횡행하는 참담한 시절에는 쓰지 않는 행위도 현실에 참여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을 것 이라며 시를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을 뿐, 나는 오래 시를 바라볼 것 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다른 산문이나 칼럼은 중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182

183 단치 않겠다고 덧붙였다. 무엇이 안도현 시인을 열받게 하고 분노케 했을까. 그리고 그 같은 선언은 왜 했던 걸까.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많이 닮은 이 시에서는 정작 열받을 일에는 그저 시무룩해져 있다가 무고한 가족들에 대한 사소한 불만에 짜증을 내는 것으로 그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지금 시인은 이 시의 상황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열 받아있음이 확실한 것 같다. 물이라고 하면 불이라 하고, 하늘이라고 하면 땅이라 하고, 진실이라고 하면 거짓이라 하고, 된장이라고 하면 똥이라 하는 사람들 의 실수와 패착이 궁핍의 증 거 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더구나 지난 대선정국에서 안중근 의사 유묵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 허위사실 공표 및 후보자 비방 혐의로 기 소된 사건이 내일 첫 공판을 앞두고 있다. 이 사건의 기소 역시 박선규 대변인의 차갑고 까칠한 대응의 결과물로만 봐지지 않는다. 실제로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보여준 일연의 얍삽하고 쩨쩨하고 어리석은 짓들을 떠올리면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그렇다고 안도현 시인의 진단처럼 박근혜 정부가 한꺼번에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 아니 그렇게 될 수 도, 되어서도 안 된다. 양심을 가진 자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에 설령 도움이 되지 못한 세상이라 하더 라도 양심은 지켜져야 하고, 양심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 말문이 막혀서도 안 된다. 어쩌면 안도현 시인의 분노는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 것에 기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 다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체면과 탐색과 평론과 의견과 주장과 침묵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야 할 때 가 지 금 인가 하는 점에는 이견이 있고 온도차가 있다. 더구나 펜을 집어던지자고 선창하는 데에 그를 따라나설 시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자칫 그의 절필선언 이 일반인들의 문인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염려된다. 우매한 국민의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절필을 하려면 아예 아무 것도 쓰지 말든지, 산문은 쓰고 운문은 쓰지 않겠다는 소리는 도대체 무언지, 아니면 양심상 시를 쓰지 못하겠다면 조용히 안 쓰면 될 일을 독자를 볼모로 선언까지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선이다. 시인은 시대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고민해야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문단 말석에도 끼지 못하는 나 같은 시인으로서도 조금은 불편하고 열 받는 느낌을 떨치지 못함은 왜일까. 권순진 Stay with me till the morning(아웃오브아프리카주제곡) - Dana Winner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183

184 약해지지 마 / 시바다 도요 :45 약해지지 마 / 시바다 도요 저기, 불행하다며 한숨 쉬지 마 돈 있고 권력 있고 그럴 듯해 보여도 외롭고 힘들긴 다 마찬가지야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 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 시집 약해지지 마(くじけないで) (2010)... 약해지지 마 / 시바다 도요 184

185 92세에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해 99세가 되던 2010년 첫 시집을 펴내고, 이듬해인 2011년 백세를 기념한 두번 째 시 집 ' 百 歲 '를 출판하여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했던 '시바다 도요'. 1911년 생인 할머니가 금년 1월 102세, 우리나이 103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에겐 '약해지지 마'로 번역된 첫 시집 제목 'くじけないで(구지게나이데)'는 '꺾이지 말 아요'란 뜻에 더 가까운 말이다. 나이 먹을수록 외롭고 우울해져 몸도 마음도 다 약해지긴 했지만, 도요 할머니는 시 를 통해 용기가 생기고 나약한 마음이 사라지면서 삶의 지혜와 기쁨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시를 읽고 쓰는 동안 사람들 사이의 관계, 자연과의 교감, 모든 자연의 순리적인 이치, 인간의 도리 등을 발견하고 깨달아 갈 수 있었단다. 그렇기 때문에 뇌의 퇴화를 막고 사소함 가운데서 고마움과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요는 자신의 장례비용에 쓰려고 모아둔 100만 엔으로 시집을 출판하였는데, 이 시집이 당시 일본 열도를 감동시키 면서 150만부가 넘게 팔려나갔고 이웃나라인 우리에게까지 화제가 되었다. 원래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난 도요 는 열 살 무렵 가세가 기울면서 중도에 학교를 그만 두고, 전통 료칸 공장과 요리점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어렵 게 살았다. 그런 가운데 20대에 결혼과 이혼의 아픔을 한차례 겪고 33세에 일하던 가게의 요리사와 재혼하여 외아들 을 낳았다. 그 후 재봉일 등 부업을 해가며 정직하게 살아오다가 1992년 남편과 사별하고는 20년 가까이 홀로 생활해 왔다. 아흔이 넘어서면서 거동도 불편해졌다. 그런 세월을 살아가다가 문득 시를 만났던 것이다. 사실 문득은 아니고 시인인 아들이 그런 어머니를 안타까이 지켜 보다가 시를 한번 써보는 게 어떻겠냐며 습작을 권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시가 되는지 어떤지도 모르고(물론 아들에 게는 보여줬겠지만) 시 한 편을 써서 일간지에 투고했는데, 그 시가 놀랍게도 6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산케이 신 문' 1면에 실렸다. 평생 문학 수업 한 번 받지 못한 노인의 글이었지만, 솔직 담백한 할머니의 시에 심사위원들이 끌 렸던 것이다. 2011년 3월 일본 전역이 동북부 대지진과 쓰나미 피해로 침울해 있을 때, 도요의 첫 시집에 실린 시들 은 일본인의 마음을 다독이고 용기를 북돋우기에 충분했다. 정치도 종교도 우왕좌왕하며 하지 못한 일을 할머니 시인 한 사람이 해낸 것이다.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었지 그랬더니 햇살까지 들어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 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인간은 어차피 다 혼자야 나는 대답 했네.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는 도요 할머니. 질곡의 인생을 헤쳐 백년을 살아오면서 그녀가 잔잔하게 들려주는 얘기에 사람들은 감동 을 먹고 저마다의 삶을 추스르는 힘을 얻었다. 푸른 혈관이 다 비치는 주름지고 앙상한 손으로 써낸 평범한 이야기가 초 고령사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일본인들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나이 아흔 을 넘기며 맞는 하루하루 너무 사랑스러워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친구에게 걸려온 안부... 인생이란 늘 지금부터 야. 그리고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 그러니 약해지지 마. 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권순진 약해지지 마 / 시바다 도요 185

186 약해지지 마 / 시바다 도요 186

187 기다리는 사람 없는데/ 오금자 :12 기다리는 사람 없는데/ 오금자 별도 달도 없는 캄캄한 숲 눈도 오지 않는 산은 더욱 적막해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외로움에 수화기 매만지다 놓아버렸네 기다리는 사람 없는데 누군가 전화 한 통 주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은 어둠 속으로 그대 무덤에 전화기 하나 묻어놓았다면 이렇게 외롭지 않았을 것을 기다리는 사람 없는데/ 오금자 187

188 이렇게 외롭지 않았을 것을 집 안팍 등불 모두 밝혀도 소리 없이 스며드는 검은 그림자 - 다음 카페 시와시와 게시판... 정부는 매년 10월2일 노인의 날에 그해 100세가 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청려장( 靑 藜 杖 ) 수여식을 갖는다. 청려 장 이란 명아주 풀로 만든 가볍고 단단한 지팡이로, 건강과 장수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시 대까지 장수노인에게 지팡이를 선물했다. 나이 50이 되어 자식이 부모에게 바치는 지팡이를 가장( 家 杖 ), 60세에 마을 에서 주는 것을 향장( 鄕 杖 ), 70세 때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주는 것을 국장( 國 杖 )이라 했으며, 80세가 된 노인에게 임 금이 직접 하사한 지팡이를 조장( 朝 杖 )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지난해까지 청려장을 받은 어르신은 1201명(남성 192명, 여성 1,009명)이다. 장수의 상징인 백세 이상 인구가 해마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5,60대의 평균기대수명이 90세를 육박하는 현실에서 90세는 괄목할 장수의 나이 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수명이 아니라 얼마나 건강하고 초롱초롱하게 사회적 관계를 맺어가 며 사느냐이다. 심신의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 속에 있다면 장수의 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가 91세 된 할머니께서 펜으로 꼭꼭 눌러 쓴 시라고 하면 사정은 달라지리라. 오금자 할머니는 강원도 춘천의 외곽에 사시는 분으로 그 지역 이영춘 시인으로부터 시를 배운 인연의 고리로 지난 봄 계간 시와시 와 창간호를 보내드렸는데, 책을 받고 꼼꼼히 잘 읽었다며 시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며 현금 1만원을 동봉한 감사 의 편지를 편집실로 보내와 편집위원들을 감동시켰다. 이 경이로운 사건은 카페회원들 사이에도 큰 화제가 되어 몇몇 은 정성으로 답장을 보냈고, 두어 명은 할머니 댁을 직접 방문하였다. 그렇게 해서 할머님이 쓰신 시 두 편을 적어왔는데, 이 시는 그 가운데 한 편이다. 오금자 시인은 시뿐 아니라 그림 도 배워 상당한 수준이고 작년엔 손자의 도움으로 마라톤에도 참가하셨다고 한다. 정년 없는 인생이란 바로 이런 삶 이 아닐까. 시인은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이 들수록 존재감이 가벼워지 기 마련이지만 할머니는 전혀 아니었다. 올해는 그동안 쓴 시를 시집으로 묶을 계획이라고 한다. 오금자 시인은 적어 도 10년 이상 세상과 의미 있는 접속을 계속할 것이다. 다만 환부 없는 통증이라고 하는 외로움만 잘 이겨내신다면, 청려장 을 받으심은 물론 시바다 도요 의 신화를 능가하고도 남으리라. 다음은 오금자 시인의 '메밀꽃 순정'이란 제목의 다른 시다. 하얀 달빛 부서져 기다리는 사람 없는데/ 오금자 188

189 하얀 꽃이 피었나 물레방아 물보라가 메밀꽃이 되었나 돌고 도는 물레방아 하룻밤 풋사랑 한 많은 그 세월 피 맺힌 붉은 꽃대 그래도 가슴 속 깊은 곳에 고이 간직한 영원한 내 사랑 메밀꽃 순정 권순진 You Are So Beautiful / Joe Cocker 기다리는 사람 없는데/ 오금자 189

190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함민복 :03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함민복 여보시오 누구시유 예, 저예요 누구시유, 누구시유 아들, 막내아들 잘 안 들려유 잘. 저라구요, 민보기 예, 잘 안 들려유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당최 안 들려서 어머니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예, 죄송합니다. 안 들려서 털컥.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함민복 190

191 어머니 저예요 전화 끊지 마세요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예, 저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어머니. 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안어들머려니서 털컥. 달포 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네 어머니가 자동응답기처럼 전화를 받았네 전화를 받으시며 쇠귀에 경을 읽어주시네 내 슬픔이 맑게 깨어나네 -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 (세계사, 1994)... 함민복의 시에는 몇 년 전 별세한 그의 어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거의 살아생전 어머니와 얽힌 사연들이다. 시인이 시골에 계신 귀가 어두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화가 도무지 이뤄지지 않는다. 달포 만에 집에 전화를 걸긴 걸었는데 보시다시피 끝끝내 통화다운 통화는 못해보고 덜컥 전화를 끊고 만 것이다. 물론 나이든 어머니의 청력 때 문에 빚어진 에피소드지만 그야말로 모자간 동문서답이다. 시인도 큰 볼 일이 있어 전화한 것 같지는 않고 아무튼 어 머니의 목소리는 들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그리고 시인은 그걸 소처럼 무심한 자신에게 귀 어두운 어머니가 경을 읽어주신 것으로 이해한다. 만약 신경질이라도 버럭 내고 말았다면 이런 시가 나올 리 없다. 이 시는 전혀 거창하지도 비장하지도 않다. 그리고 시인이 자주 써먹는 수법이지만 어머니와의 통화내용을 고스란히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유머가 은근히 재미나다. 마지막 연에서 쇠귀에 경 읽 기 라는 속담도 적절히 기용되어 시의 완성도를 높이면서 감동을 배가시킨다. 오히려 자신을 소로 어머니가 경을 읽 어주는 현인으로 환치시켰다. 썩 가슴 찡한 감동은 아닐지라도 이 시를 읽으면 누구라도 마음속으로 내 어머니를 떠 올리게 된다. 내 어머니도 이런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요즘 부쩍 전화 받는 것을 겁나하신다. 집으로 전화 오는 일 자 체가 드문데다 어머니가 직접 받으실 경우도 적은데 가족 말고는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일상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그대로 시로 옮긴 작품들이 꽤 많이 있다. 재미와 유머, 위트를 동반하여 잔잔 한 감동을 챙겨주는데, 얼핏 특별할 게 없다 싶은데도 독자의 지지를 얻고 마음을 움직이게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러한 소재들은 일상에서 널려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발견하고 포착하여 시 안으로 끌어오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이런 현장감 넘치는 대화체 시를 건지려면 헐렁한 여유 가운데서도 마음이 먼저 따뜻해야 하 고, 유머를 감각해내고 이해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싶다.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함민복 191

192 권순진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함민복 192

193 초여름 양동/ 신순임 :17 초여름 양동/ 신순임 곰삭은 열무김치에 식은 밥 한 덩이 말아 먹은 경운기 소리 탕 탕 탕 탕 첫 새벽 촌락의 아침을 연다 살 오른 해 중천까지 건너와 호미질 지친 팔뚝 아래로 둥글둥글 타박감자 세상 구경 나오고 무논마다 갓 태어난 개구리 소리 안락천 넓적한 연초록 물결의 키를 쑥쑥 키운다 초여름 양동/ 신순임 193

194 노곤한 몸 창모자 사이로 노을빛이 돌고 하루치 행복 덜커덩거리는 언덕배기도 신명이로세 - 시집 무첨당의 5월 (조선문학사, 2011)... 아름답고도 정겨운 농촌의 여름 풍경이다. 하지만 양동은 여느 농촌마을과는 많이 다르다. 양동은 경주(월성)손씨와 여주(여강)이씨가 조선전기 이후에 터를 잡은 전형적인 반촌으로 현재 150여 가구가 살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 통마을이다.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이며 한국건축의 메카라고도 불리는 양동마을은 명당의 입지조건인 전형적인 배산임수 터에다가 설창산에서 네 줄기로 뻗어 나온 말물( 勿 )자 지형이라, 그야말로 마을 앞을 흐르는 안락천( 安 樂 川 ) 의 이름처럼 물 좋고 산과 골이 편안한 곳이다. 이러한 곳에서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가 오늘날까지 5백년간 견제와 협조 속에서 공존해 왔다. 하촌, 내곡, 물봉, 거림 네 줄기 가운데 내곡의 중심에는 경주 손씨 종택 서백당( 書 百 堂 )이 있고, 물봉골의 중심에는 여주이씨 종택 무첨당( 無 添 堂 )이 자리하고 있다. 무첨당 은 1460년경 회재 이언적의 부친이 지은 여주 이씨 종갓 집으로 보물 제411호에 지정된 건물이다. 無 添 이란 조상에게 누가 되는 행동을 삼간다는 의미다. 그리고 흥선대 원군이 파락호 시절 이곳을 방문하여 썼다는 좌해금서( 左 海 琴 書 ) 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좌해 는 서울의 왼편 인 영남지방을 칭하며, '금서'는 선비들이 가까이 두고 즐겨야 할 거문고와 서책을 말한다. 대원군은 당시 여주이씨 문중으로부터 왕손 대접을 톡톡히 받아 집권 뒤 여주이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였으며 양동마을이 지금까지 보존이 잘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한다. 신순임 시인은 바로 그 양동 무첨당 의 종부이다. 나랏님도 살지 못하는 국가 보물에 살고 있으니 전생의 무슨 복을 지었는지 너른 뜰에 자연이 빚은 조화로 움 무첨당 파련대공과 맞장을 두는 봄날 비탈진 언덕에 금방이라도 곤두박질칠 것 같은 봉두 밥사발이 일렁인다 며 무첨당의 5월 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무시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무첨당의 사계를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 이라 했지만, 그 자신 청송의 평산 신 씨 종갓집 딸로 태어나 태생적 DNA가 몸 깊숙이 배었기에 보기만 해도 배부른 밥상을 차리는 유서 깊은 집 에서 매일매일 하루치의 행복 으로 살아가며 받아쓰기로 시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양동은 아직도 유교색이 짙게 남은 곳이다. 탐방객들이 때도 없이 마당 구석구석에서 찰칵 찰칵 사진을 찍어대고, 가려진 내당의 중문까지 열려하며 장 독뚜껑을 재낄 때는 혹여 무첨당의 무게를 줄이지는 않을까 맘이 쓰이지만 못내 흐뭇하게 신명으로 지켜보는 그 마 음 또한 뼈대 있는 양반집 종부의 넉넉한 마음임을 어쩌랴. 초여름 양동/ 신순임 194

195 권순진 초여름 양동/ 신순임 195

196 참 사랑/ 톨스토이 :59 참 사랑/ 톨스토이 모든 사람을 다, 그리고 한결같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큰 행복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지극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향락을 사랑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그와의 관계를 끊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참 사랑/ 톨스토이 196

197 자문해 보십시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 톨스토이 문학전집 (한국톨스토이,2012)... 톨스토이는 금욕과 사유재산 철폐를 외쳤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끊임없는 방탕의 삶이었고 많은 노예를 거느린 대지 주였던 시절도 있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참회록 에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솔로몬의 전도서 를 길게 인용하고 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만 살아간다면서, 사랑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축복을 베푸 는데 있다고 했다. 세상에는 많은 선행이 있지만 진정한 선행은 타인을 사랑하라는 것, 그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이 유를 가진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대가를 바라는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가 진정 바랐던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사이에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사랑을 인간이 성취해야할 최고의 목표로 여겼다. 그걸 위해 글을 썼고 그 정신들을 하나씩 글에다 담았다. 그는 1일 1선 과 최후의 저서 인생의 길 을 통해 모든 인간이 사랑으로 맺어지는 세계를 하루속히 이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훗날 사람들은 그의 글이 지나치게 계몽적이라고 했지만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애써 반감을 갖지 않는 이상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대문호이자 위대한 사상가요 종교가인 그의 모든 면모가 배어 있는 작품 '부활'은 톨스토이가 노년을 불사른 세계문 학사에 영원히 빛날 불후의 명작이다. 그런데 부활 뿐 아니라 그의 작품 대부분이 두말할 나위 없는 걸작의 반열 에 든 반면, 그의 인물됨은 예나 지금이나 의문에 싸여 있다. 대중이 생각하듯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으며, 한때 소수 가 떠받들듯 예언자나 성인은 더욱 아니었다. 톨스토이의 생애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엇갈린다. 로망롤랑은 그에게 서 예술과 인간 모두의 완성을 보았다고 했지만, 예술가로서는 긍정하되 사상가로서는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인격파탄자라며 비난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톨스토이는 40대 후반에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의 문제를 깊이 숙고했다. 한동안 문학을 거 의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신학과 성서 연구에 전념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적 아나키즘으로 평가되는 톨스토이 즘 을 낳기도 했다. 그의 활동 영역이 점차 종교 쪽으로 옮겨가면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부인 소피아와의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즈음의 그는 청빈과 금욕을 예찬하면서도 정작 안락한 삶을 떨치지 못해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 었다. 말하자면 접근-회피 의 깊은 갈등 상황에 놓여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그와의 관계를 끊을 각오 역시 같은 양상인데, 톨스토이는 이성적 사랑만이 참사랑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참 사랑/ 톨스토이 197

198 권순진 참 사랑/ 톨스토이 198

199 호수/ 고운기 :19 호수/ 고운기 호수 앞에 앉으면 안경을 벗는다 그리고 크게 숨쉬기 열 번 네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싶다 미간을 찌푸리듯 물 속 깊숙한 데서 일어난 네가 지닌 고민과 갈등을 전해 주는 波 紋 강아지풀 형제가 가만히 흔들리는데 바람이 분다고만 물결이 일지 않음을 호수는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 시집 섬강 그늘 (고려원,1995)... 호수/ 고운기 199

200 참된 마음의 평안은 어디서 오며 어떻게 얻어질까. 잔잔한 호수 앞에 앉으면 구차한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 음이 흔들려 평정을 잃어버리면 일을 그르치기 쉽다. 중요한 결단을 앞두고 흥분상태에 있거나 욕심이 앞서면 바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 시합에 임하는 선수가 오만가지 잡념에 빠져있고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단전호흡과 명상을 하는 것도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리고 잡념을 떨치기 위함이다. 원래 사람들 마음의 원단은 호수와 같은데 고 민과 갈등, 욕망의 바람으로 인해 물결이 일고 파문을 일으킨다. 갈등이 깊어지고 욕망의 세찬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의 마음은 수천 가닥의 파도가 일기 시작하면서 의식과 이성은 흩어져 버린다. 욕망에서 벗어나고 갈등에서 빠져나올 때 우리들 마음의 호수에는 잔잔한 평화가 깃든다. 욕망의 바 람이 존재의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음이 산만하면 본질을 보는 능력을 잃고 만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나 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깊은 샘물이 가뭄에 마르지 않듯 깊은 호수에는 바람이 분다고만 물결이 일지 않 는 다. 깊은 호수는 평상시 내면 깊숙이 다져진 원칙과 소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실 원칙과 소신만으로 고민과 갈등에서 온전히 해방될 수는 없다. 인간의 갈등 양상은 워낙 복잡 미묘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갈등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런 경우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갑과 을이란 회사에 서 동시에 채용통지를 받았을 때, 소개팅을 통해 만난 A와 B가 다 같이 마음에 들 때, 둘 다 바람직하지만 양립할 수 없는 접근-접근 의 행복한(?) 갈등이다. 반면에 회피-회피 의 나쁜 갈등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할 때도 있다. 이를테면 칼을 들고 쫓아오는 강도와 맞서느냐 아니면 막다른 길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느냐 하는 기로에서의 갈 등이다. 접근-회피 갈등이란 유형도 있는데 이는 우리를 더욱 난처하게 한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오지근무 발령을 받았 다. 승진에 필요한 고과를 생각하면 가야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피하고 싶다.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대개의 갈 등이 이런 식이다. 흔히 치명적인 유혹 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그렇다. 맛난 음식 앞에서 너무 먹고 싶지만 바로 살로 가서 먹기가 주저되는 경우부터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다든지, 한쪽 면은 이끌리는데 다른 면은 부정적 인,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사이의 고민들이다. 이런 양가감정의 경험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고 난감하게 한다. 호수 앞에서 크게 숨쉬기 열 번하면 도움이 좀 될까. 권순진 내 마음은 호수 - SOP 김인혜 호수/ 고운기 200

201 산다는 것은/ 이영춘 :46 산다는 것은/ 이영춘 산다는 것은, 만나는 일이다 사랑하는 일이다 헤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빈 가슴 털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이다 먼 산 바라보며 그 안에 내 얼굴, 내 발자욱, 내 그림자 그려 넣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다 갈등하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이영춘 201

202 매일매일 육중한 시간에 눌려 실타래 풀어 가듯 그렇게 인생을 풀어가는 일이다 수틀에 수( 繡 )를 놓듯 그렇게 인생을 짜 가는 일이다 가다가 큰 바다에 이르면 거기서 내 얼굴 찾아 물기를 닦아 내고 또 가다가 큰 산에 이르면 거기서 한 숨 돌려 휘파람 부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일 이것이 인생의 주제다 오늘도 우리는 그 주제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 다음 카페 이영춘 시 창작 교실... 산다는 게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님에도 마치 그것만이 생의 전부인 것처럼 부각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말하나마나 우리 모두는 세상을 홀로 살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살다 보면 부모형제, 연인, 친구, 가까운 사람들과의 이별을 반드시 겪게 되는데요.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져 헤어져야하는 아픔뿐 아니라, 이승에서의 뜻하지 않는 헤어짐도 겪습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 그 가운데 사랑이 있고 갈등이 있 고 사람이 있습니다. 불가항력의 헤어짐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나의 소홀이나 잘못으로, 본의 아니게 내가 준 상처로, 서로의 오해로 내가 사랑한 사람들, 혹은 사랑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없을까요. 누구의 생엔들 그런 안타까움으로 멀어져간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우리는 사람 때문에 아파하고 사람 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의 일로 빈 가슴 털면서 먼 산을 바라 볼 줄 아는 사람조차 귀한 세상입니다. 먼 산 바라보며, 그 안에 내 얼굴, 내 발자욱, 내 그림자 그려 넣는 멜랑콜리는 알아주지 않는 세상인 듯합니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일 이고 갈등하는 일 임을 모르지 않는데 피하려고만 합니다.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고 뇌의 연속이며, 고뇌하므로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는 것임에도 골 때리는 일이라 여기고 기피하려 합니다. 엉 킨 실타래를 풀어가기 보다는 아예 싹둑 잘라버리려고 합니다. 나도 돌이켜보면 너 아니면 내가 못살 것도 아닌 데 식으로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말로 상처주고, 그로 인해 풀리지 않는 상태에서 관계를 산다는 것은/ 이영춘 202

203 변하게 하여 결국은 멀어져버린 일이 세상에는 다반사입니다. 하지만 실수를 알고 있다면, 용기만 낸다면 엉킨 실타래는 얼마든지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이 담긴 마음 의 말 한마디면 됩니다. 진실은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얼음장 같던 마음의 빗장도 녹일 수 있습니다. 사실 실수를 흔 쾌히 인정하고 사과 하는 것보다 더 멋지고 용기 있는 모습도 드뭅니다. 그렇게 인생을 풀어가는 일 이어야 마땅 하고 수틀에 수를 놓듯 그렇게 인생을 짜 가는 일 이 인생이거늘, 늘 휘청거리기만 했지 나 자신 그러질 못했습니 다. 그래야만 큰 산에 이르러 한 숨 돌려 휘파람 도 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권순진 Giovanni Marradi 피아노 연주 모음 산다는 것은/ 이영춘 203

204 흙발/ 손남주 :19 흙발/ 손남주 변두리 비탈밭이 가뭄에 탄다 아프게 껍질을 깨는 씨앗, 물조로의 물도 목이 마르고 덮었던 마른 풀 걷어내자, 후끈 숨막히는 흙냄새 사이 노란 떡잎, 무거운 흙덩이 이고 푸른 뜻 굽히지 않는다 힘겨운 고개, 세상이 아무리 짓눌러 와도 하늘 보고 꼿꼿이 일어서는 흙발/ 손남주 204

205 흙발 지그시 디디고 섰다. - 시집 민들레꽃씨가 날아가는 곳 (그루,2012)...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거나 대수롭잖게 생각해서 그렇지, 둘러보면 세상에는 경탄의 대상으로 가득합니다. 인생은 매순간 그 경이로움을 만나 는 여정입니다. 겨울엔 식물이 다 죽은 듯 보이지만 씨앗으로 겨울을 나고, 뿌리로도 겨울을 견딥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삭정가지를 긁어 모으기 위해 찾은 뒷산에서 문득 작고 푸른 것들이 발에 채이기도 하며, 말라죽어 뽑아내 버린 아파트 베란다의 난화분에서 배시시 푸른 기 운으로 새끼가 올라 온 걸 볼 때도 있습니다. 하물며 봄 가뭄 정도에 못 견딜 콩이나 수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봄 가뭄을 잘 넘긴 것 같아 다행입니다. 또한 벌써 한해의 반이 지났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은 반년의 생을 살아왔습니다. 아무리 목이 말랐다한들 스스로 푸른 뜻 굽힐 만큼 연약한 생명체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의지라기보다는 자연 의 순연한 응답일 따름이 아닐까요? 다만 애당초 세상이란 그리 연약하지도 말랑하지도 않기에 그만한 분량의 대응이 발휘될 뿐이라 생각합 니다. 본능이라 해도 되겠고 응전을 통한 적응이라 해도 상관없겠습니다. 노란떡잎이 보일 때면 숨 막히고 무거웠던 기억들은 강화된 대응력 으로 이미 유전자에 켜켜이 입력된 상태일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좋지 않은 환경과 소망스럽지 못한 여건이 힘겨운 고개 고, 세상이 아무리 짓눌러 와도 흙발 지그시 디 디고 설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겠는지요. 때로 희망 이란 이렇게 꼿꼿이 일어서서 견디는 것 말고 달리 품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노라면 이란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꼭 젊은이가 아니라도 쩨쩨하게 굴 일은 없겠지요. 라즈니쉬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그대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나기 위해 그대가 어떤 노력을 했는가? 그대는 성장했다. 성장하기 위해 그대가 어떤 노력을 했는가? 그대는 숨을 쉰다. 숨쉬기 위해 그대가 어떤 노력을 하는가? 삶이 그자체로 흘러가게 하라. 삶을 지그시 디디 고 서 있는 것만큼 마땅히 형통한 노릇이 더 있겠는지요. 권순진 Lesiem - Humilitas (인류애) 흙발/ 손남주 205

206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28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들어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206

207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 無 主 空 山 )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 北 )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砲 聲 )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 恩 怨 )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 시집 초토의 시 (청구문화사, 1956)... 이 시는 한국전쟁 당시 종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연작시 초토의 시 15편 가운데 8번 째 작품이다. 시인은 동족 상잔의 비극적 전쟁으로 생겨난 적군 묘지 앞에서 이데올로기의 허울 아래 희생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가톨릭 시인으로서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민족 동질성의 회복과 평화통일에의 염원 을 노래하였다. 특히 시에는 시인의 분단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생존의 극한 상황인 전쟁 중에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던 원수사이었지만, 가로막힌 휴전선으로 인해 넋마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은 이미 저주와 원한의 적이 아니라 동족으로서 연민의 정이 느껴질 뿐이다. 적에 대 한 적대 의식이나 증오보다는 동포애와 인간애로부터 우러나오는 관용과 연민이 짙게 깔려있다. 인간의 생명은 무엇 보다도 존엄한 것이기에 적군의 시체를 양지 바른 곳에 묻는 인도주의적 인간애가 발휘된 것이다. 적군 묘지에 묻힌 그들과 마찬가지로 북쪽 땅이 고향인 시인은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바라보면서 민족 분단의 고 통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군 병사들의 풀지 못한 원한 을 그들만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받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207

208 아들여 동일시하고 있다. 분단으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의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통해 하루빨리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시인의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다. 그리고 시인이 시를 쓸 당시의 '적군 묘지'는 전쟁 직후 전국토에 산재하고 있었으나, 사망한 적군이라도 정중히 매 장해 분묘로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1996년 7월 우리 정부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5 현재의 위치에 모아져 '북한, 중국군 묘지'로 조성하였다. 무덤 앞에는 비석 대신 1미터 높이의 흰색 각목으로 된 묘비가 세 워져 있으며, 계급과 이름이 적힌 것은 20여기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명인'으로 적혀있다. 연작시 초토의 시 에서 초토( 焦 土 ) 란 불타서 없어진 자리란 뜻으로, 여기서는 민족의 비극인 6.25동란의 흔적 을 말한다. 구상 시인의 시는 전쟁의 비극과 참회, 형제애와 인류애를 내포하면서 분단의 아픔과 통일염원을 주요 테 마로 하고 있다. 그 배경엔 크리스트교 신앙이 바탕 되어 늘 자기 참회로 귀결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 안주하기보다는 교회 현실에 고뇌하고 때로는 노여워하면서 사셨던 번뇌와 은총의 시인이었다. 권순진 King Crimson - Epitaph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208

209 다부원( 多 富 院 )에서/ 조지훈 :32 다부원( 多 富 院 )에서/ 조지훈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다부원( 多 富 院 )에서/ 조지훈 209

210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 무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 시집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1959)...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당시 종군작가였던 시인이 보고 느낀 그대로의 참혹함과 허무함의 탄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 다. 지금은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들어선 이곳 낙동강 방어선은 한국전쟁 당시 9번의 탈환전이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 중의 격전지였다. 이곳은 대구 방어의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로 만일 다부동이 적진에 떨어졌다면 대구가 지상포 다부원( 多 富 院 )에서/ 조지훈 210

211 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 함락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이 시는 북한군의 총공세에 맞서 국군이 학도병과 함께 죽음으 로 방어선을 지켰던 전설적인 낙동강 전투가 벌어진 직후에 쓴 작품이다. 조지훈 시인도 다른 종군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상과 폐허를 시로 노래하면서 승전과 반공의식을 고취 앙양 하는 데 일조할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다부원에서 는 단순히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목적시와는 다르다. 피 아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전쟁이 주는 참혹함과 생명말살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차원 높은 휴머니즘 을 담고 있다. 초목조차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 한 초토화의 전쟁은 인간성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말살하 고 있어 그 절망감은 극에 달한다. 그 참혹한 전쟁의 발발이 북의 남침에 기인한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얼마 전 대통령이 교사들의 역사왜 곡 교육에 대해 공개적으로 호통을 쳤다. 호통의 근거는 서울신문 의 고교생 69%, 한국전쟁은 북침 이란 기사 였다. 관련 뉴스를 접한 나는 설마 그럴 리가, 분명 무슨 오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 라는 설문에 69% 학생이 북침 을 북한이 남한을 침략 했다는 뜻으로 용어를 착오한 결 과였던 것이다. 질문지를 명확하게 설계하지 않아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호들갑이었다. 말하자면 대통령도 낚였고 국민도 낚인 것이 다. 결국 박 대통령의 호통은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사자성어 '견문발검( 見 蚊 拔 劍 -사소한 일에 크게 화를 내며 덤빈다)에 딱 들어맞는 경우가 돼 버렸다. 그리고 마치 교육현장에서 진실과 역사를 왜곡해 가르치는 양 야단치며 새 정부가 반드시 바로 잡겠다고 강조했다. 다시는 이 땅에 6.25와 같은 절망의 바람이 불어서는 안 되겠기에 국민을 공 연히 걱정시킨 새 정부의 도를 넘은 우국 이 오히려 염려스러운 대목이다. 권순진 다부원( 多 富 院 )에서/ 조지훈 211

212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54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버릴까 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 사류로 오염될까 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 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212

213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라고 - 시집 봄비 한 주머니 (창작과 비평사, 2000)... 시인은 '사랑한다'는 말의 값어치를 따져보면 도무지 쉽게 말해버릴 수 없다 한다. 또 헤프게 보일까봐 아끼고 참아 내고 싶다고 했다. 그 달콤한 말은 백번 천번 들어도 좋다 했지만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쉽게 말해버려 그 말의 제값 이 인플레 된 세상에서 살아온 지 오래다. 그 원인을 시대의 가벼움, 젊은이의 경박 탓으로 돌릴 것만도 아니다. 생각 해보면 진실 되고 고귀한 사랑이 그만큼 귀해진 탓이거나, 도처에 사랑에 목마른 사람이 널려 있어 내남없이 외롭고 쓸쓸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그 수요가 많다보니 소품종 소량 생산으로 은밀하게 유통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고 현주소가 아닐까. 이성간 매력에 이끌려 강력하고 육체적인 자극을 원하는 감정이 남녀간 좁은 의미의 사랑이라면 언젠가 마광수 교수가 말했 던 관능적 경탄 으로부터 사랑의 시동이 걸린다는 주장에 일정부분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하지만 그런 상대를 만나 덜컥 첫 눈에 반했다고 해서 곧장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는 노릇이다. 끌리는 감정만으로 쉽게 사랑한다 말할 수는 도무지 없을진데 선행조건 단계에서 망설임 없이 사랑 을 뱉어내는 사람을 종종 본다. 재바른 고백의 하자를 탓하는 게 아니라 숙성을 거치지 않은 사랑은 자칫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 락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단숨에 사랑의 계단을 다 뛰어 올라 단 하루에 초고속 성장을 이룩한 운명 적 사랑이 없으란 법은 없다. 단박에 망설임 없이 함몰되는 사랑도 가능한 게 사랑의 다른 모습임을 어쩌랴. 문학과 영화에서 곧잘 만나는 그런 사랑을 한번쯤 동경하며 설레기도 하는 것인데,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정서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는 좋아하는 것에는 책임이란 게 없지만 사랑하는 것에는 책임이 따른다. 서로 좋아하는 것은 그냥 싫어지면 그걸로 그만이지만 사랑은 싫어지는 것으로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픔과 상처가 남는 법이며, 쉬 뱉어낸 무책임한 그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유린된 사랑도 부지기수이다. 반면에 반드시 말해야할 때 말하지 못하고 꼭 듣고 싶을 때 듣지 못한 비대칭으로 인하여 평생을 회한과 추억 안에 서만 맴돌고 묻혀버린 사랑도 허다하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는 간담 서늘한 판결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끝내 사랑한다 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해 영원히 가슴속에 사랑했었다 로 유배되어서는 안 될 말이기에 그 말 사랑한다 오늘 그대에게 낮은 목소리로 전하고 싶은 것이다. 권순진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213

214 사랑한다는 말 - 김동률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214

215 하지( 夏 至 )/ 고영민 :04 하지( 夏 至 )/ 고영민 까치가 짖고 고양이가 올려다보는 저녁이다 고양이는 이내 등뼈의 긴장을 푼다 너무 높다 너에게 가기에는 어린 사과나무엔 푸른 사과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어둠이 오고 하지( 夏 至 )/ 고영민 215

216 사과나무의 까치가 가고 사과의 둘레가 가고 고양이가 사라진다 다 추억이다 이렇게 너랑 둘이 마주 앉아서 말을 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어둠에 묻힌 사과나무의 지붕에서 오금저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 시집 사슴공원에서 (창비, 2012)... 옛날, 임금이 성 밖에서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를 교사( 郊 社 )라고 했다. 교 는 동지에 하늘을 보고 지내는 제사 이고, 사 는 하지에 땅에다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절기상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망종 이후 보름째 되는 날이 하지 다. 작고한 이문구 작가의 오뉴월 이란 동시가 있다. 엄마는 아침부터 밭에서 살고/ 아빠는 저녁까지 논에서 살 고/ 아기는 저물도록 나가서 놀고/ 오뉴월 긴긴 해에 집이 비어서/ 더부살이 제비가 집을 봐주네 보리를 베고 모내기가 시작되는 망종 이후 하지까지가 농촌에서는 가장 바쁜 때다. 장마와 가뭄 둘 다 대비해야 하 는 이때는 일 년 가운데 추수철 이상으로 정신없이 분주한 시기이다. 메밀 파종, 감자 수확, 고추밭 매기, 마늘 수확 과 건조, 보리 수확 및 타작, 모내기, 그루갈이용 늦콩 심기, 병충해 방재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이뤄진다. 특히 하지 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는 속담도 있듯이 모심기의 적기로 여겼다. 하지가 지나면 적기를 놓치기 때문에 서둘러 모내기를 마쳐야 했다. 그리고 한해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비였 으므로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다. 하지만 올해는 장마가 일찍 찾아와 그럴 염려는 없 을 것 같다. 하지에 비가 오면 오히려 풍년이 든다는 속설도 있는데, 오늘이 연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 가 길다는 하지다. 일사시간과 일사량도 가장 많은 날이다. 그러나 북극지방에서는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지만 남극에서는 아예 수평선 위에 해가 나타나지 않는다. 태양숭배 풍습이 있던 동유럽에선 하짓날을 사람과 동물이 대화할 수 있는 날로 여겼다. 그리고 이날 야생화 일곱 가지를 꺾어 베개 밑에 깔고 자면 꿈속에서 미래의 연인을 만난다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원래는 지금 한창인 밤꽃이 질 때쯤이라 하지( 夏 至 )/ 고영민 216

217 야 장마가 시작되었다. 원추리꽃이 피면 장마가 오고, 그 꽃이 지면 장마도 간다. 이 시는 연약한 것들을 향한 애잔한 시선 속에 유머와 해학이 녹아든 개성적 시세계를 펼쳐온 시인의 또 다른 분위 기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왜 하필 하짓날 야행성동물로 알려진 고양이를 등장시켰을까. 고양이는 감각이 매우 발 달해 있고 특히 야간 시력은 사람보다 월등히 우수하다. 하지만 낮의 시력은 사람보다 못하다. 줄어든 밤 시간 때문 에 오금이 저려온 것일까. 태생적으로 고양이는 높은 곳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지만, 이날은 유독 그 습성 때문에 물 건을 떨어트리는 사고를 칠 개연성도 높은 날이다. 권순진 하지( 夏 至 )/ 고영민 217

218 식당의자 / 문인수 :08 식당의자 / 문인수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 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 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 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이 몸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 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 시집 배꼽 (창비, 2008) 식당의자 / 문인수 218

219 ... 요즘에도 한쪽 팔걸이만 있는 의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7~80년대의 사무실에는 그런 의자가 있었다. 나도 한동안 오른 쪽 팔걸이만 있는 그런 의자에 앉아 사무를 본 적이 있다. 그 의자를 차지하기 전에는 그냥 직각의 맨 의자였 고, 그 의자 다음으로 겸손하게 돌아가는 양쪽 팔걸이가 붙은 의자에도 앉아 보았지 싶다. 등받이가 제법 깊숙하고 끽끽 회전하는 차장님의 검은 색 의자가 한때 부러웠고, 그보다 좀 더 높은 등받이에 몸을 푹 맡긴 채 양 다리를 꼬 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사색인지 졸음인지 삼매경에 돌입한 부장님의 의자를 투기하기도 하였다. 한 때 생맥주를 전문으로 파는 프랜차이즈 호프집이 창궐했던 적이 있었다. 테이블 회전율을 높이고 객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구실로 손님들이 앉는 의자는 등받이도 없고 겨우 엉덩이와의 접점 면적만을 고려한 좁은 이동식 동글 의자가 있다. 그 의자엔 얼른 마시고 다음 손님을 위해 자리를 비워 달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요즘엔 그런 의자를 객장에 두고서 의도한 대로 몇 회전씩 굴리며 호황을 누리는 호프집은 거의 없다. 의자를 소재로 쓴 시는 많다. 그만큼 의자가 상징하는 바가 적지 않아 관찰과 사유의 응시도 빈번했다는 이야기 다. 문인수 시인이 보았던 식당 의자는 야외용 간이의자다. 보송보송한 햇빛이 내려앉는 해변이나 평수 넓은 잔디밭, 물빛 고운 수영장 같은 장소와 잘 어울리며, 실제로 그런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의자다. 그러나 시에 등장한 의자는 같은 재질이지만 돼지창자를 구워 파는 막창집이거나 삶은 오징어 숭숭 썰어 초고추창에 버무린 안주와 함께 소주를 파는 천막 식당의 흰색 간이 의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식당의자는 아무런 계급이 없다. 누구나 먼저 엉덩이를 들이대기만 하면 임자다. 한때 덜거덕거리며 부산하 게 끌려 다녔던 이력은 이제 오간 데 없다. 속을 다 파내고 뼈만 남아 앙상한 네 다리가 비로소 또렷하게 보인다. 몇 날 며칠 비를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도 않는다. 오래된 충복 같기도 하고 인도의 요가승 같기도 한 그 의자에게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란 별칭이 조용히 씻긴 굿 한 판 홀로 치룬 전문가 에 의해 주어진다. 플라스틱 성형으로 단순하게 찍어낸 저 식당의자를 저토록 환한 여백의 결 무늬로 다시 찍어내다니 참 대단한 관찰 과 사유의 깊이다. 시퍼렇게 날선 시선과 스스로 요가 수행승의 몸처럼 숭고한 동작을 복제하는 능력이 없다면 제7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인 이 시는 아마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권순진 Good In Blues - Tony Joe White 식당의자 / 문인수 219

220 식당의자 / 문인수 220

221 친구를 위한 기도/ 박인희 :39 친구를 위한 기도/ 박인희 주여 쓸데없이 남의 얘기 하지 않게 하소서 친구의 아픔을 붕대로 싸매어 주지는 못할 망정 잘 모르면서도 아는척 남에게까지 옮기지 않게 하여 주소서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도 친구를 위한 기도/ 박인희 221

222 속으론 철 철 피를 흘리는 사람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사람 차마 울 수도 없는 사람 모든 것을 잊고싶어하는 사람 사람에겐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가슴 속 얘기 털어 내 놓지 못하는 사람 가엾은 사람 어디하나 성한데 없이 찢기운 상처에 저마다 두팔 벌려 위로받고 싶어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는 말에서 뿜어나오는 독으로 남을 찌르지 않게 하소서 움추리고 기죽어 행여 남이 알까 두려워 떨고있는 친구의 아픈 심장에 한번 더 화살을 당기지 않게 하여 주소서 - 기도시집 기도하면 열리리라 (율도국, 2010)... 이 기도 시는 1970년대 초 '뚜와에 무와'로 가수 활동을 시작한 박인희가 쓴 것으로 우리에겐 이해인 수녀와의 두터 운 우정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박인환의 시를 노래한 목마와 숙녀 그리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 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로 시작되는 얼굴 이란 그녀의 자작시 낭송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해인 수녀와는 풍문여중 때부터 단짝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들의 우정은 보통사람의 경우와 달리 주로 편지 로써 서로의 생각과 우정을 교환하는 좀 특이한 관계였는데, 이해인이 수녀가 된 뒤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 친구를 위한 기도/ 박인희 222

223 년 때부터 정작 학교에선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다가 집에 가서야 서로 편지를 끊임없이 써댔다고 합니다. 이 시 역시 박인희가 이해인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 사람의 우정이 남다르게 무르익은 건 사실이지만 둘 다 성격이 안으로 꽉 들어차 글로서 깊은 교류가 이루어지다 보니 더러는 우리가 상상되지 않는 영적 다툼이 벌 어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보통사람 이상의 섬세하고 민감한 성격을 가졌기에 예기치 않은 감정 마찰도 있었을 것입 니다. 하지만 이 시가 이해인 수녀를 직접 겨냥한 글은 아니지 싶습니다. 주위의 친구가 겪은 아픔을 대신 말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자신이 다른 친구에게 받은 상처의 이야기일 수도 있 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남의 불행이나 잘못을 은밀히 즐기는 심리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들은 수다와 뒷담화의 유혹을 참지 못하는 성향이 농후하다고 하더군요. 자신의 커뮤니티를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심리의 반영 정도 면 넘어가겠는데, 문제는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악의적인 가십의 유포일 것입니다. 명색이 친목을 위한 동아리나 동호회 등에서도 별 생각 없이 내뱉은 쓸데없는 남의 얘기로 당사자에게 상처가 됨은 물론이고 둘레까지 불편하게 하는 사례를 가끔 봅니다. 더욱이 공연한 시기와 질투가 작동되어 빚어진 경우 그 폐해 는 더욱 심각해져 결국 친목이 아닌 반목과 분열로 치닫게 됩니다. 이럴 때 자기반성과 성찰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 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치러야할 심리적 대가는 열섬이고 단체의 내홍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권순진 친구를 위한 기도/ 박인희 223

224 해연이 날아온다/ 이기형 :35 해연이 날아온다/ 이기형 한과 눈물로 살거냐 긴긴 세월을 허탕 치고도 못 말려 달구벌 멋은 잦아들고 만경벌 흥은 사위어가고 퍼지는 영어 열풍 어디로 가나 불야성 저 광란하는 나체춤의 의미는 뭐냐 나운규는 아리랑고개를 울고 넘었건만 분단고개를 울고 넘는 사람은 없다 국록 먹는 어른들은 말잔치로 밤을 지새우고 청바지들은 할아버지가 울고 넘은 박달재를 촐랑대며 넘는다 가쓰라.태프트와 을사오적의 후예들은 맥아더 동상을 사수하며 분단선에 쇠말뚝을 박는다 해연이 날아온다/ 이기형 224

225 망국의 치욕 을사늑약 백 년에도 정신을 못 차려 고구려 넋은 어디로 갔나 백두산 신단수 큰할아버님이 내려다보신다 선열들의 피맺힌 목소리가 들린다 슬픈 사연 하도 많아 누선도 말랐느니 피 마르는 지겨움 가슴이 빠개진다 임 따라 어라연엘 가랴 임 맞으러 삼지연엘 가랴 지는 해야 빨리 져다오 솟는 해야 퍼뜩 솟아주렴 폭풍우 천 길 만파를 뚫고 바다제비 날아온다 - 시집 해연이 날아온다 (실천문학사, 2007)... 현재 우리나라의 최고령 현역시인은 황금찬 시인이다. 그런데 지난 주 까지만 해도 황금찬 시인보다 한 살 위의 시 인이 따로 계셨다. 지난 6월12일 이기형 시인이 96세의 나이로 별세하신 것이다.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7년 민주조선 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이어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거함에 따라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 생활에 드셨다. 그러다가 1980년에야 신경림 시인, 백낙청 문학평론가 등을 만나 분단 조국 하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 꿔 시작 활동을 재개했다. 작고 전까지 10권의 시집을 낸 선생은 재야 민주화통일운동에 참여하면서 분단과 통일 문 제를 다룬 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이기형 시의 주제는 고스란히 민족의 안타까운 현실을 담은 통일에의 열망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민족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슴 속에서 녹이지 않았다. 북한에 어머니와 처자식을 남겨둔 채 월남한 고인은 2003년과 2005년 평양을 방문, 딸을 만났지만 어머니와 아내를 다시 보지 못한 그리움을 시에 담아 표현하기도 했다. 이 시를 포함한 시집 속의 시들은 경색된 남북관계와 자본주의 의 위기에 대한 날선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2년 후 2009년, 자주 민족통일을 훼방 놓는 모든 걸림돌을 단숨에 깨뜨리는 쇠망치 같은 <절정의 노래>를 펴냈다. 선생의 10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었다. 선생은 요즘 젊은 시인들이 통일을 비롯한 사회문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사실 민족의 통일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과제임에도 그런 주제를 다룬 시편들을 현실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젊은 시인 들은 내 시를 보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요즘 시인들이 문학적 재주가 뛰어나면서도 역사, 사회문 제에 무관심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고통의 분단시대를 살아온 시인이 시들지 않는 불꽃의 삶 해연이 날아온다/ 이기형 225

226 으로 염원해온 통일이 바다제비처럼 날아올 날은 언제인지, 해연이 오긴 오겠는지... 권순진 광야에서- 노찾사 해연이 날아온다/ 이기형 226

227 詩 法 / 권기호 :17 詩 法 / 권기호 그 산정은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일이 없다 노련한 알피니스트들도 그 발밑에서 점심이나 먹고 돌아올 뿐이다. 그 미립자의 얼굴은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죽은 나의 발톱에서나 뛰는 심장에 이르기까지 움직이고 있는 그 무엇이란 것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詩 法 / 권기호 227

228 더구나 그 우주의 벽은 어디쯤에서 닿을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금 보내고 있는 가장 강한 전파로도 다만 은하계와 은하계가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만 추측할 뿐이다 년 대구의 시 (대구시인협회,1999)...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게 된다고 괴테는 말했다. 알면 알수록 더 어렵다는 말과도 통하며, 그 방황은 더 소중한 것과 높은 곳을 향한 모색의 의미로도 읽혀진다. 그러나 끊임없는 수련과 탐구를 통해서도 결코 올라설 수 없는 산마루가 있다. 오르지 못함은 물론 그 진면목은 볼 수도 없어 다만 그 무릎 아래에서 잠시 노닐다 돌아올 뿐이 다. 하지만 시가 감당해야할 용량은 '짐작하고 추측할' 뿐이지만 무궁무진이고, 시의 영역은 우주를 넘볼 만큼 광활하다. 우리들은 내일을 꿈꾸는 자이지만 내일은 오지 않는다. 고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말했듯이, 시인은 은하계와 은하계가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만 추측 하면서도 끊임없이 주파수를 맞추고 전파를 쏘아 올리며 꿈을 보탤 따름이다. 詩 가 아무리 저 높은 곳을 지향하더라도 그 음역에는 한계가 있다. 권기호 시인의 詩 法 은 단순한 시의 정의나 방법 론이 아니다. 시의 율법을 넌지시 일러주며 금을 그어놓았다. 그래서 정상의 시란 없는 것이며, 정상에 올라선 시인 도 당연히 없다. 원로 시인은 '장자와 플라톤의 안경을 훔쳐 끼고 밖에 나와 마음대로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일부 겸 손 모르는 시인을 향해 '기저귀나 채워줘야 할 놈'이라고 꾸짖는다. 권기호 시인은 김춘수 시인의 직계 제자로서 경북대학교에서 문리대학장을 지내셨고 현재 명예교수로 계신 분이다. 공식적으로는 1970년에 5백부를 찍은 <서쪽의 풍경>이 작품집의 전부이지만, 그렇다고 작품 활동을 소홀히 하시는 분 은 절대 아니다. 당신의 작품에 새로움이 없다면 구태여 시집을 낼 필요가 없다는 평소의 소신 때문이다. 오래 전 계간 대구문학 의 편집 일을 볼 때였다. 인터넷 메일이 아닌 육필 원고를 받았는데, 그 후 두 차례나 사 무실로 직접 와서 퇴고한 원고를 건네주고 가신 일이 있다. 이름이 좀 알려진 시인들은 기관지 성격의 지역잡지에 원 고를 주는 일조차 인색한 경향이 있지만 권기호 시인은 어떤 잡지든 청탁받은 원고에 대해서는 성심과 전력으로 최 선을 다 하는 분이었다. 퇴고를 거듭하는 그 모습이 마치 산정 을 향한 알피니스트 를 연상케 하였다. 詩 法 / 권기호 228

229 권순진 나무, 하늘, 바람, 비, 구름 의 노래 詩 法 / 권기호 229

230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23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 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 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 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 시집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문학세계사, 1990)... 꽃이 피고 비가 오는 날이 있으면 바람 부는 날도 있다. 낙엽 지고 눈 오는 날이 있으면 모진 바람 차가운 날도 있 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바람 부는 날. 일기예보에도 없는 그저 나뭇잎 조금 흔들리고, 길에 버려진 껌종이조차 몸을 뒤집기는 어려운 날. 대충 남실바람 부는 날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내 안에서 부는 소슬바람.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어떤 이는 압구정동으로 차를 몰아가고, 어떤 이는 언덕으로 뛰어 올라가지만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간다. 날마다 가고 또 가 는 길을 간다.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230

231 그래서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가는 길 험하더라도 내 사랑의 오지인 그곳으로 나는 갈 수 밖에 없으므로.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들고 당신을 향해 가는 그 길은 숙명의 외길.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길. 바람으로 인한 미세한 떨림, 진동, 너울 다 홀로 감당하며 혼자 외롭고 힘들지만 행복해 하며 가는 길. 그 길. 지 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간다. 사방 어두워 눈에 보이는 것 없어도 막무가내로 간다. 오체투지로 달려간다. 가면서 시름 다 잊고, 원망의 기울기도 낮추고, 그저 내 마음의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당신을 향해 간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나 숨어버리듯 가고야 말리라. 그 역에 당도하면 나 혼자만 내려 층계를 탕탕탕 뛰어올라 갈 것이다. 그때쯤이면 숨이 벅찬 만큼 가슴도 벅차오를 것이다. 이제 곧 당신의 가슴 깊은 곳 핵심에서 불타오를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괴로움 다 불살라 버릴 것이다. 영원 으로 치솟아 오를 것이다. 권순진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231

232 용접/ 이석현 :53 용접/ 이석현 온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 있지 보안경 너머로 삼천도 불꽃물의 길을 터주면 두툼한 방열복 속으로 후끈 스며들던 고열의 마음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 기억을 가로지르는 고압선에서 나온 수많은 불티들을 용접/ 이석현 232

233 온 가슴으로 막아내다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 균열을 살핀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이 얼마나 뜨거운 일인지 시뻘겋게 달아 온 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가 있지. - 시집 둥근 소리의 힘 (문학만, 2010)... 금속재료를 접합하기 위해 접합부에 금속을 가열 용융시켜 서로 다른 두 재료의 원자결합을 재배열 결합시키는 것을 용접이라 하고, 용접결과의 좋고 나쁨을 용접성 이라고 한다. 오래 전 성수대교 붕괴의 주원인이 공기를 무리하게 줄이고 터무니없이 단가를 낮추려 마구 땜질한 용접성 불량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 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 이 이뤄지는 법인데, 서툰 땜질은 용접이라 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 생명을 위 협하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래 전 70년대 모 헌병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할 당시 한 사건의 조사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두 철판 사이에 용접봉 을 대고 용접기로 불을 뿜어내어 그 셋을 동시에 녹여 하나로 완전히 엉겨 붙게 해야 하는데, 어설프게 쇳물을 녹여 붙인 탓에 셋의 쇳물방울들이 따로따로 굳어져 그 부위를 망치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져 버리는 부실한 용접이 인명사고를 불렀던 것이다. 쇳물이 녹았다가 식었다고 해서 다 용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 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 이어야 하는데 그 수고와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다. 쇠판과 용접봉을 녹여낸 후 적절한 타이밍에 확 끌어안게 하는 기술. 그런 과정을 균일하게 이끌고 가야하는 인내심 과 손끝의 감각이 용접성을 높이는 최선이다. 잘 된 용접 부분은 식고 난 다음에 보면 아주 작은 파도가 화석처럼 굳 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파도 모양의 일정함으로 기술자의 기량을 평가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잘 된 용접부위는 원래의 몸체보다 훨씬 강해 떨어질 줄 모른다. 오랜 시간이 흘러 몸체가 녹슬어 망가져도 용접 부위는 그 대로이다. 견고한 결합이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 또한 그렇겠다. 불량한 용접이 판치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용접과 같은 사랑과 우정이란 수많은 불티들을 온 가슴으로 막아내 야 하고, 뜨거워져야 하고, 또 그 뜨거움을 견뎌야 하는 것. 보안경 너머 로 이글거리는 쇳물을 정확하게 읽고 판단해야 하는 것. 내 쇳물방울이 터지지 않고 상대와 섞일 수 없으며, 온몸 으로 시뻘겋게 달아 젖어 보지 않고는 덜컥 용접이 되지 않는다는 것. 어제 이석현 시인의 초대로 월포 포스코 수련원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이 시가 실린 포스코 신문을 보게 되었는데, 다시 내 삶의 용융 온도를 생각해보는 것이 다. 용접/ 이석현 233

234 권순진 Follow Your Heart 용접/ 이석현 234

235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57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235

236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비, 1998)... 카프카는 나의 모든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씌어졌다. 글 속에서 나는 평소 직접 아버지의 가슴에다 대고 토로할 수 없는 것만을 토해냈다.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다. 고 고백했다. 따 라서 카프카 문학은 본질적으로 아버지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다. 아버지란 존재 안에 도사린 상징성 을 해독하지 않고는 무엇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며 미궁이다. 법과 권위의 표상이며, 가족 내 모든 권력 의 실체이며 몸통이었던 아버지는 성장하며 카프카를 억압한다. 그의 아버지는 카프카를 막대한 영향력으로 포획하고 일방적으로 가문의 DNA를 주입시키려 했다. 카프카는 이런 아버지의 권력에 저항하는데, 문학은 그 저항의 한 방법 이며 응전이었다. 이런 아버지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가부장적 질서 아래 있었던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신경림 시인은 과거 우리 현실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교적 소상히 그렸는데, 마치 카프카처럼 저항하며 문학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모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236

237 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시인의 아버지는 그 시대 아버지의 전형인 동시에 내 아버지의 모습 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의 아버지는 그 사회가 나에게 스며드는 하나의 방식이며, 내가 사회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까지는 아니었으나, 나와 아버지의 관계도 늘 두려움과 적개 심으로 가득한 불화였다. 세상 떠신지 어언 이십사 년. 내게 심심하면 쏘아붙였던 머저리 란 함경도 사투리가 귀 에 쟁쟁하다. 지금도 그때 드리워졌던 그늘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권순진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237

238 기차는 간다/ 허수경 :40 기차는 간다/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 지성사, 1992)... 지금도 서울역 앞에는 떠나고 오지 않은 그리움을 기다리며 출구 앞을 서성이는 여인이 있다. 오래전 먼 곳으로 날 아간 사람이 오늘 올지도 몰라 매일 꽃가루를 만지작거리는 공항의 여인도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 꽃을 꽂고서 도로 기차는 간다/ 허수경 238

239 중앙분리대를 줄타기하듯 분홍치마자락 치켜 올리며 걷는 여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옷은 계절과는 관계없이 가볍거나 너무 무거웠고 얼굴빛은 창백하거나 붉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정거장에서 자의든 타의든, 혹은 반반 이든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리움의 화석을 하나씩 새긴다. 그 떠남과 기다림의 현장이 역 대합실이든 눈에 보이지 않 는 마음의 정거장이든 중요한 것은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 한다는 것. 가족이 그렇고 연인이 그러하며 친구 또한 그렇다. 이 시에는 그 추억들이 기차와 밤꽃과 밤꽃이 진 꽃자리를 들쑤신다. 그것들을 소리 없이 흔들면서 서로를 끈끈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기차가 지나간 레일 위는 모든 '지나가는 것들' 즉 시간의 다른 이름이 놓여있고, 시인은 그 위로 그 '지나가는 것들'을 보며 밤꽃의 시간을 추억한다. 이제 곧 밤꽃 향기 짓무르겠다. 아니 향기라 하기엔 좀 거시기 해서 아무래도 냄새라 해야겠다. 술자리 농담 중에 밤꽃 필 때 여자를 밤나무 아래로 데려가면 처녀인지 아닌지 구분 이 된다는 말이 있다. 밤꽃 냄새가 남자의 정액냄새와 흡사해 얼굴이 붉어지면 처녀가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는 밤꽃이 필 무렵이면 부녀자들이 외출을 삼갔다고 하고 과부들은 이맘때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속설도 전해온다. 실제로 밤꽃 향기는 정액냄새와 화학적 성분이 같다는 말도 있다. 소설가 이병주는 그의 행복어 사전 인가에서 쿵 짜자자 쿵 하는 단조로운 박자가 계속되면서 차츰 곡조가 고조되는 볼레로 를 들으면 성신경이 자극 받는 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고급한 성 신경에 비해 밤꽃 냄새의 자극은 다분히 직설적이다. 시에서도 후룩 흡입된 밤꽃냄 새가 모든 성적 메타포를 지원하고 있다. 기차와 터널(레일)로 상징된 성적 은유에는 '그리움'이라는 낱말의 원형적 이미지가 잘 드러나 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그리움은 자신을 향한 것. 그런데 나 아닌 어떤 것이 나보다 더 그리 운 것 이 될 경우가 있다면 오직 사랑할 때 뿐. 사람은 사랑 속에 있을 때 아주 잠깐 '에고'를 버리고 진정으로 자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먼저 닮아 있 는 그리움의 부재 상황에서 더러 꼭지가 핑그르르 돌고 정신줄을 놓아버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권순진 Saddle the Wind(바람에 실려) - Lou Christie 기차는 간다/ 허수경 239

240 시학 강의/ 임영조 :27 시학 강의/ 임영조 대학에 출강한 지 세 학기째다 강의라니! 내가 무얼 안다고? '시창작기초' 두 시간 '시전공연습' 두 시간 나의 주업은 돈 안 되는 시업( 詩 業 )이지만 강사는 호사스런 부업이다 매양 혀 짧은 소리로 자식 또래 후학들 앞에 선다는 자책이 수시로 나를 찌른다 시란 무엇인가? 생이 무엇인지는 알고? 나도 아직 잘은 모른다, 다만 삼십년 남짓 내가 겪은 황홀한 자학 시학 강의/ 임영조 240

241 그 아픈 체험을 솔직히 들려줄 뿐이다 누가 보면 딱하고 어림없는 짝사랑 설명하기 무엇한 상사몽 같은 그 내밀한 시학을 가르쳐줄 뿐이다 시란 무엇인가?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게 정 알고 싶으면 너 혼자 열심히 쓰면서 터득하라! 그게 바로 답이니 오늘 강의 이만 끝. - 시집 귀로 웃는 집 (창작과 비평사, 1999)... 문학의 위기니 시의 위기니 하는 담론은 늘 있어왔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눈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거나 시가 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학의 문창과는 인기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 용케 살아있고, 문예대학이나 시 창작 교실 도 도처에 부지기수로 개설되어 시인의 배출 창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외견상으론 아직 건재한 듯 보인다. 시인은 대학에 출강하여 시학 강의를 하는 것이 호사스런 부업 이라고 했지만, 대개는 시인이 대학에서 강의를 할 경우 그게 주업이고 간판이고 명함이라고 여긴다. 돈 안 되는 시업( 詩 業 ) 이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라 새로울 것이 없으며,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도 생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처럼 언제나 진부하면서도 난감한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 에서 예술은 이( 利 )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돈이나 명예나 지위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만들거나 쓰고 싶은 것을 사심 없이 만들어 내거나 쓰는 것을 예술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했다. 그는 또한 인간을 모방적 동 물 로 보면서, 모방을 통해 쾌락을 느끼고 진실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도 했다. 진실을 향한 대책 없는 모방이 어쩌면 황홀한 자학 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보면 딱하고 어림없는 짝사랑, 설명 하기 무엇한 상사몽 같은 그 내밀한 시학 이라지만 무작정 사랑만으로 시가 쓰지는 것은 아니다. 시의 집을 짓기 위 해서는 우선 좋은 자재가 필요한데, 시에서의 재료는 폭넓은 체험과 관찰, 독서와 사색을 통해 구해진다. 릴케가 시는 체험 이라고 정의했듯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에다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경험하는 정신적인 산물 이 망라되며, 그것은 열심히 스스로 체득할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유를 통해 양질의 상상력이 빚어진다. 결국 상상력의 원천은 체험이고 관찰이며 독서이다. 그 상상력 의 나래가 활짝 펼쳐질 때 진실에의 접근이 가능하고, 시가 쓰지는 것이며 시 쓰는 즐거움도 얻을 수 있으리라. 시학 시학 강의/ 임영조 241

242 이나 창작 교실에서의 강의는 이러한 것들을 즐겁고 기꺼이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의 다름 아니리라. 그렇다면 그 강의는 꼭 시를 잘 쓰는 유명 시인이 할 필요는 없다. 노래교실에서의 노래를 나훈아와 조용필이 가르치지 않는 것처 럼.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배우는 사람의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강사가 말아먹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권순진 시학 강의/ 임영조 242

243 조각보/ 정정지 :57 조각보/ 정정지 엄마는 밤늦도록 반짇고리에 모아두었던 형형색색의 헝겊조각을 꺼내 한 장의 조각보를 만들고 있다 이혼하고 사내애 둘 키우던 남자와 사별하고 남매를 기르던 여자가 둥지를 틀고 아빠와 엄마가 되었다 남자의 아이 여자의 아이 머잖아 태어날 그들의 아이 조각보/ 정정지 243

244 모양도 색깔도 다른 헝겊들 완성된 조각보 펴들고 환하게 웃을 날이 불면의 강 건너 깊은 골짜기에서 눈 뜨고 있다 - 시집 방파제 (만인사,2013)... 조각보는 바느질하다가 남은 자투리 천으로 만든 보자기를 일컫는다. 한 조각씩 떨어져 있으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들을 모아 기우니 일상에서 요긴하게 쓰일 뿐 아니라 그 조화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예술작품의 경지에까지 이르기 도 한다.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서로 보완하고 꾸며주어 완성된 조각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각 보 같은 세상이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이 아닌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화로운 세상을 뜻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다시 거대한 하나가 완성된다는 창조적 대동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시인은 이런 조각보를 통해 재혼가정의 밝고 긍정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각자 딸린 자식이 둘씩 있는 남자 와 여자가 둥지를 틀고 아빠와 엄마가 되 는 일이 결코 수월할 리가 없다. 이혼이 늘어남에 따라 재혼가정도 급증 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에 비해 사회적 편견은 많이 엷어졌지만 여전히 현실적 어려움과 장해가 따르는 것은 사실 이다. 재혼가정 갈등구조의 핵은 자녀문제이다. 양쪽의 아이들이 차라리 어리다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감수성이 예민 한 시기엔 갈등의 소지가 없지 않다. 계부모에 대한 오랜 전통적 편견이 있어 팥쥐 엄마 콤플렉스 와 장화홍련 콤플렉스 를 온전히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재혼을 고려해보겠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음은 변함없이 젊은데 몸은 늙어 서 매력을 잃어버려 그때는 이미 황혼이다. 오히려 첫 결혼보다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고 싶은 욕구는 더 커진 상태 다. 여기서 또 다시 만나는 복병이 상속과 재산 등의 경제적인 문제이다. 황혼재혼은 자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의 행복을 위한 것임에도 이 걸림돌 앞에 주저하게 된다. 이래저래 호락호락하지 않은 재혼이지만 최근 모양도 색 깔도 다른 헝겊들 을 이어 완성된 조각보 펴들고 환하게 웃 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본다. 과거엔 남자는 밥 해주고 수발 잘해줄 참한 여자 를 찾는 경향이 많았고, 여자는 경제적으로 의지할 남자를 찾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남녀 공히 취미와 여가를 함께 즐기며 여생의 동반자로 지낼 사람을 찾는 경향이 강해졌 다. 따라서 요즘의 재혼 희망자들은 상대방의 경제적인 능력보다 정서적인 소통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배우 자 선택 시 재산 과 외모 가 아닌 성격 과 매력 을 최우선으로 꼽는다고 한다. 재혼은 비교적 정서적인 성숙상태에서의 결합이므로 인생과 사람에 대한 바른 이해만 있다면, 누구든 얼마든지 조각보를 들고 환하게 웃을 수 조각보/ 정정지 244

245 있으리라. 권순진 Over And Over / Erin Bode 조각보/ 정정지 245

246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18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246

247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 시집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광주문예회관 원형무대 앞에는 고정희 시인의 시비 상한 영혼을 위하여 가 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거리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로 시작해서,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 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라고 다독인 다음,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로 마무리되어있다. 검은 돌 에 하얀 글씨로 또박또박 각인된 이 시가 어느 상심한 40대 실직자에게 읽혀져 그래서 희망을 꺾지 않았다면 그 사람 에게 고정희 시인은 살아있는 우리보다 낫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슬픔의 강을 헤매고 있었을 그 실직자의 가슴에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는 말이 꽂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고정희는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다. '해남의 딸' '광주의 언니' 고정희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22년이다.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도중 피아골 의 급류에 휩싸여 43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해마다 이맘때면 그녀의 생가가 있는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는 고 정희를 좋아하는 독자들과 그를 추억하며 뒷동산 묘에 국화 한 송이 바치려는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짧았던 고정희 의 삶이 치열했던 만큼 사후 그녀에 대한 관심도 깊었다. 전라도의 질펀한 황토 흙에 4 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역사의 물줄기를 내기도 하고 사랑, 눈물, 그리움 같은 삶의 감동도 담아냈다. 그의 지성은 곧 전라도의 자부심 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인'이라는 푯말에 가려진 그의 다른 업적, 시민운동과 여성운동가로서의 족적도 매우 크다. 사실 우리는 물기 촉촉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고정희 같은 시인이 여성운동가로 나서 목청을 높일 필요가 없는 세상 을 바란다. 그의 지성을 대물림 받아 싸워야하는 불우한 상황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날선 전투력으로 무장하기보다 는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남자를 가진 여자. 그런 네가 그리우면 울기도 하는 여자. 그래서 향기와 온기를 더 많이 가슴에 품은 여자가 가득한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매우 위협적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247

248 이어서 늦은 밤 안전한 귀가조차 보장되지 않으니, 그대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밤'은 계속되고, '너에게로 가까이 가 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린' 날들의 연속이다. '네가 그리우면' 울고 있을 고정희 시혼의 힘은 오늘도 그것 을 힘껏 떠받치고 있건만. 권순진 정목일 작시 연가 - Sop.이지영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248

249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나해철 :03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나해철 잊고 살기로 하면야 까맣게 잊을 수도 있는데 불현듯 가슴에 불쑥 나타나 화들짝 놀라게 하는 건 아프게 하는 건 날보고 그래 짐승처럼 살지 말고 사람으로 살라는 걸거야 가끔은 생각하며 살아야지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했던 일들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듯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나해철 249

250 한동안만이라도 고요히 어루만져야지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내일도 오늘같이 살 수는 있는데 - 시집 긴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2)... 사람을 흔히 망각의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사람만큼이나 지난 일을 못 잊어하고 진저리치거나 그리워하는 동물 도 없을 것이다. 엊그제까지 죽고 못 사는 사이처럼 지내다가도 어느 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린다 든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대 없이는 못 살아 했던 부부가 사별 후 신속한 망각의 힘으로 다른 이성을 향해 제법 짙은 웃음도 흘리는 걸 보면 사람으로 어찌 그러나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만큼 지난 일을 생각하고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는 지적 생명체도 없는 것이다. 잊고 살기로 하면야 까맣게 잊을 수도 있는데 불현듯 가슴에 불쑥 나타나 화들짝 놀라게 하는 건 아프게 하는 건 지난 일들이 뼛속 골골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쉬 잊지 못하는 능력과 잊히어지는 능력을 동 시에 갖고 있다. 문제는 잊어 버려야 할 것은 안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리는데 있다. 지난날을 잊지 못해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 꼼짝달싹 못할 경우엔 과거를 잊고 털어버리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이나 실 패일지라도 그걸 반면교사로 삼아 현재와 미래를 살릴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야기가 좀 샐 것 같은데 오래 전 최선을 다해 목청껏 불렀던 노래 하나가 문득 생각난다. 박두진 작사 6.25의 노 래 이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 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노래는 강도를 더해 3절까지 이어지며 매절마다 붙는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장엄하 고 우렁찬 후렴으로 마무리된다. 매년 6월 불렀던 노래가 지난 국민의 정부이후 10년 동안 사라졌다가 이명박 정부 때 부활하였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아이들의 입에서 그 노래가 불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북관계와 정치적인 고려를 떠나 초중고생들이 부르기에는 너 무나 섬뜩한 극단적인 가사내용이거니와 북의 작태와도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대 분위기에 맞지 않는 이런 노래를 다 시 부활시켜 강요하기 보다는 기분 좋게 그저 하루 노는 날이 아닌 1분간 묵념의 시간만이라도 제대로 그 의미 를 새기도록 계도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잊고 살기로 하면야 못 잊을 것도 없겠지만. 권순진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나해철 250

251 밤하늘의 트럼펫-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에서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나해철 251

252 노호 김기홍 1,2/ 윤효 :12 노호 김기홍 1/ 윤효 전교생이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그들은 불을 질러 버렸지만 이제 우리가 다시 일으켜 세워야하지 않겠느냐고 스물세 살 청년이 찾아와 거금을 내놓았다. 할아버지 몰래 땅문서 맡기고 빌린 돈이었다. 1919년 오산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호 김기홍 2/ 윤효 그의 이름 기홍( 起 鴻 ) 을 한자로 새기면 날아오르는 큰 기러기 인데 도무지 날아오를 수 없었다 한다. 노호 김기홍 1,2/ 윤효 252

253 어느 날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노호(노호), 곧 갈대 그윽이 우거진 호수 란 호를 받고서야 비로소 늪푸른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다 한다. - 시집 햇살 방석 (시학, 2008)... 남강 이승훈 선생이 1907년에 설립한 오산학교는 수많은 민족인사와 인재를 배출한 명문 사학이다. 고당 조만식 선 생이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는 동안에 학교의 틀이 잡히고 기독교 학교로서 그 명성도 날렸다. 배출된 인재들 중에 주 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김홍일 장군, 함석헌 선생 같은 분들이 있다. 그리고 춘원 이광수가 약관 19세의 나이에 교 사로 부임하여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시키고 문학의 바람을 일으켜, 안서 김억, 소월 김정식, 백석으로 이어지는 오산 문인의 맥을 이루기도 하였다. 화가 이중섭도 오산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이란 마을에 예전 서당으로 쓰던 집을 빌려 그대로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으 나, 학교의 건학 정신은 구한말의 썩고 병든 사회를 새롭게 하여 새 세상을 건설하고 민중혁명의 보금자리가 되자는 높은 뜻을 품고 시작한 학교였다. '네 손이 솔갑고 힘도 크구나. 불길도 만지고 돌도 주물러 새로운 누리를 짓고 말련 다. 네가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 춘원이 작사한 오산학교의 교가 가운데 일부다. 오산학교 출신은 이렇듯 그저 평 범한 졸업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구국 인재의 양성을 통하여 국운개척을 열망하는 겨레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창립되었기에 조국의 근대사와 그 명운을 함께 하였으며, 그에 따른 핍박과 수난도 예상 못할 바는 아니었다. 남강선생은 105인 사건으로 투옥된 후 출 옥하면서 새로운 교사를 짓고 교육에 전심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또다시 투옥되고 학교 교사는 일본 헌병들이 석유를 뿌려 불살라 버렸다. 폐교의 운명에 놓인 학교를 살려낸 이가 바로 당시 23세의 이 학교 출신 김기홍이었는데, 할아버지 땅문서를 몰래 잡혀서 마련한 거금 7천원을 쾌척하여 폐허가 된 학교를 다시 일으켰다. 그는 이후 오산학교의 교장과 이사장을 지내고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함석헌 선생, 주기용 선생과 함께 교정에 그의 흉상이 동상으로 세워졌다. 비로소 높푸른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평북 정주에 있던 오 산학교는 한국전쟁 때 제2 재건운동을 펼친 김기홍과 주기용 등에 의거 부산 동대신동에 재건됐다가 이후 서울 용산 구 원효로 2가를 거쳐 1956년부터 한강이 내려다뵈는 언덕배기 지금의 보광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 시를 쓴 윤효 시인(본명 윤창식)은 현재 이 학교의 교장으로 계신 분이다. 노호 김기홍도 이 시대 다시 그리워지 는 오산인 가운데 한 분이다. 이곳 출신 인재들을 열거하자면 열 손가락으로는 어림 턱도 없다. 현직 교장으로서 학 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당연한 노릇이겠다. 얼마 전 만나 뵌 그의 눈빛이 참 선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았다 노호 김기홍 1,2/ 윤효 253

254 권순진 노호 김기홍 1,2/ 윤효 254

255 6월의 시/ 김남조 :07 6월의 시/ 김남조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6월의 시/ 김남조 255

256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단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 시인수첩 2011년 여름호(창간호)... 보리밭의 여름은 황금물결이다.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근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는 다 익어 뻐꾸기 울음 정겹다. 바람결에 묻어오는 잘 익은 보리 냄새 까칠하고 구수하다. 눈감으면 삼베 덮은 소쿠리에 담긴 삶은 보리가 더 구수히 다가온다. 보리를 소재로 한 유명한 수필로 한흑구의 1955년 작품 보리 가 있다.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덥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고진감래, 고난 을 견디며 끈질기게 살아가는 보리의 강한 생명력을 예찬한 수필이다. 보리의 일생을 통해서 성실과 끈질김으로 고난 을 견뎌내면 환희와 보람이 반드시 따른다는 생의 교훈을 암시하고 있다. 보리는 다른 농작물과는 달리 늦가을에 씨를 뿌려서 초여름에 수확한다. 지금부터 보리 수확철이다. 보리농사는 이 미 예전에 비해 많이 위축된 상황이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밀과 함께 정부수매도 폐지되었다. 수입곡물과 가격 경쟁 이 안 된다는 게 주된 이유일 것이다. 고진감래라는 말도 다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망할 것들, 얼매나 뒹굴었시마 이리 자빠뜨려 놓노, 차라리 말을 하지, 내 방이라도 내줄낀데 누운 청보리 일으 켜 세우며 하시던 할머니의 푸념도 이젠 평화롭게 추억된다.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 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 만 눈에 차누나 박화목 시인의 보리밭이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다 가 되어 귀에 찰랑인다. 노랫소리는 하늘로 퍼지고 초여름의 상념은 그리움의 강을 건너고 있다. 이 제 보리와 보리밭은 그저 추억과 그리움을 파는 상품일 뿐이다. 그러려니 하고 추억이 일렁이고 낭만이 넘실거리는 이 계절에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6월의 시/ 김남조 256

257 권순진 6월의 시/ 김남조 257

258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46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식빵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인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 둘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258

259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달콤한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올랐다. - 시집 생년월일 (창비, 2011)... Small is beautiful 즉 작은 것이 아름답다 는 영국 주류경제학의 못마땅함에 맞섰던 E. F. 슈마허가 성장지상 주의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근거를 제공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 대표적 경제학 저서의 제목이다. 그는 경제학을 위한 경제학의 상투성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안하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했다면서 상식에 근거한 실천적 경제학으로 인간답 게 살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를테면 지치지 않는 자연개발은 고갈을 초래할 것이고, 끊임없이 공급되는 양 적 생산은 머지않아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이미 반세기전에 예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편리하고 신속한 개발만이 인간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에 환경오염의 위험에 늘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또한 그 개발은 도시와 농촌의 균형발전과는 거리가 멀기에 빈부의 차는 갈수록 커진다. 대량생산은 인간의 풍요를 가져다주어야 마땅한데 이 무슨 딜레마인가? 결국 대량 생산과 소비로 인 간이 품위 있게 살아가는 것과는 점점 멀어지고, 인간을 소외시키며 그 삶의 터전마저 앗아가 버릴 수 있다고 그는 기존 경제학의 모순을 지적했다. 이장욱의 소규모 인생 계획 이 보여주는 메시지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슈마허가 주장하는 꼭 필요한 만큼 개발 하고 인간이 요구하는 한도에서 개척하는 것이 오히려 더 풍성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울 것이란 불교경제학의 내용과 왠지 닮아 보인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은 제 할 도리를 다하고 있다.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그래서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259

260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 는 말은 부드럽게 태어난 아기 들의 먼 미래를 생각하는 휴머니스트 다운 발상으로도 이해된다. 작금의 우리는 크다고 무조건 좋은 세상을 살고 있진 않다. 과거 큰 것에 약하고 오므라들었던 사이즈 콤플렉 스 경향은 어느 정도 벗었다고 봐진다. 그동안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으며, 거시적 사 회에 충분히 지쳐있었다. 그렇다고 축소지향의 작은 게 아름다운 세상이 온전히 도래한 건 아니지만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달콤한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 오른 간략한 생도 아주 작은 비석 처럼 군데군데 피고 있음을 본다. 권순진 Only Our Rivers Run Free / James Last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260

261 해질녘 탱고/ 장대송 :19 해질녘 탱고/ 장대송 산 넘어가는 해를 보는 노인의 눈 속에, 지난해 옮겨 심은 대추나무가, 늙은 대추나무가 대추 하나 달지 못하고 몸살을 않는다 대추나무 가지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거기 매달린 잠자리 앞에서 거미가 탱고를 추고 있다 노을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노을을 잡기 위해 구절초 꽃을 바라본다. 이 자리에 내년에도 노을은 무성할까 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에, 저녁 햇볕을 주체할 수 없어, 젖가슴이 한쪽만 있거나, 애꾸눈인 과부의 허벅다리를 생각하다가 술취한 어부가 썰어준 회를 집으려는데, 젓가락이, 주책없는 젓가락이, 뽀얀 속살을 보더니, 탱고를 추고 있다 - 시집 스스로 웃는 매미 (문학동네, 2011)... 해질녘 탱고/ 장대송 261

262 시는 가장 낮고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높은 신음을 자아내는 고통의 목소리이다. 그 소리는 즐거운 고통이면서 괴 로운 기쁨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사실이 왜 이다지 외롭고 힘겨울까. 끊임없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세상 과 불화하고, 산 넘어가는 해를 보는 노인의 눈 을 연민하고, 대추나무의 몸살을 함께 애닮아 하고, 거미줄에 매 달린 잠자리를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거미의 탱고를 의젓한 자세로 감상하는 다중인격자. 그러면서 흔들리는 노을 을 잡기 위해 구절초 꽃을 바라 보는 물기 어린 감성. 내년에도 노을은 무성할까 노인의 염려를 떠받드는 척 하더니 이런, 젖가슴이 한쪽만 있거나, 애꾸눈인 과부 의 허벅다리를 생각하다가 주책없는 젓가락이, 뽀얀 속살을 보더니 뭐 어쨌다고, 탱고를 춘다고? 허리를 팍 꺾 었다는 의미일까. 하지만 여기에 탱고를 갖다 붙인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다. 탱고가 무엇인가. 19세기 말 부에노스아 이레스의 한 항구에서 고향을 등진 가난한 유럽 이민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춤 아닌가. 밤만 되면 땀에 전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화려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부두 노동자들이 반도네온에 맞춰 춤을 추며 여인을 유혹했던 탱고. 탱고는 시작부터 그렇게 유혹의 춤이었다. 남자에 비해 여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이민 초기, 탱고는 남성다움을 과시 하는 수단이었다. 지금은 남미 문화의 상징이 된 탱고는 영화 여인의 향기 에서 알 파치노가 멋진 탱고를 선보인 후 그 인기가 더욱 증폭됐다. 잠깐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엔 제목과 달리 여인의 향기는 없다. 부유한 퇴역장 교지만 앞을 보지 못해 자살여행을 떠나는 남자와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삶의 참다운 가치는 돈도 명예도 사회적 명성도 아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간의 순수와 용기이며 그것이 곧 사람의 향기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말이 나온다. "탱고를 추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인생과는 달리 탱고에는 실수가 없고 설령 실수를 하여 발이 엉킨다 해도 다시 추면되니까. 눈을 감고 춰도 되는 춤이 바로 탱고랍니다" 하지만 남녀 간의 호흡이 중요 해 탱고를 하나의 심장과 네 개의 다리 라고도 표현한다. 또한 탱고는 춤추기 전 미리 눈빛으로 의사를 주고받는 것이 기본 매너이다. 그러기 위해 강열한 눈빛이 필요하고, 그 눈빛은 붉은 노을을 닮았다. 매혹의 색, 붉음이 저만치 타오르고 있다. 그러고 보면 탱고는 노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춤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노을을 볼 수가 없다. 해가 지자마 자 곧장 캄캄해져 노을이 아예 생기지 않는다. 가끔 여행자들의 사진에서 배경으로 얇은 노을을 보기도 하는데 사람 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노을을 카메라의 예민한 눈이 감각한 결과일 뿐이다. 그렇게 노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 히려 탱고가 기승했는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에는 어느 나라보다도 노을에 대한 시와 노래가 많듯이. 그것은 아마도 노을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결핍과 그리움 때문이리라. 해질녘 탱고 는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노인의 눈 속에 비 친 노을이 장엄해지려면 탱고 음악 하나는 깔려야겠다. 권순진 해질녘 탱고/ 장대송 262

263 여인의 향기 OST 'Por Una Cabeza'간발의 차이 해질녘 탱고/ 장대송 263

264 연꽃 기도/ 류경화 :48 연꽃 기도/ 류경화 도솔천 내원궁 오르는 길 만발한 연등이 기도로 피어난다 합장한 마음따라 하늘문이 열리는 곳 무량한 불심 연꽃줄기 하나에 모으고 오른다 목탁소리, 염불소리 멈추기 전에 한 송이 연꽃 기도 간절히 올려보고 불심 한 자락 먼 산 돌계단에 걸어도 놓고 여기가 천상인가, 마음 놓아 쉬어가는 곳 오롯이 기도로 드리는 연꽃 한 송이! 연꽃 기도/ 류경화 264

265 - 계간 시와시와 2013 봄호(학이사, 2013)...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시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초보시인 혹은 시인지망생들이 흔히 갖는 시 쓰기에 대한 고민이다. 여기서 남들이란 대체로 많은 이로부터 시를 잘 쓰는 시인이란 정평을 받는, 이 름도 좀 알려진 그런 사람일 게다. 그러나 남들처럼 이란 말은 그저 시를 잘 쓰고 싶다는 소박하고 막연한 바람 이라면 몰라도 정말로 남과 같은 시를 써가지고서는 결코 좋은 시인이 되지 못한다. 돌직구로 말을 던지자면 어떻 게 하면 남과 다른 시를 쓸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의 방향을 선회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가령 꽃을 보고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시를 쓰고 싶을 때 대개의 초보 시인들은 기왕의 정서에 얕은 감상을 덧칠하 는 수준에 머물 개연성이 크다. 꽃의 아름다움은 문학이라는 형식이 존재한 이래 수많은 문장가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찬탄한 품목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투적 언술이 끼어들기 쉽고, 여간해서는 그 수준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 또 꽃이 아름답다는 발견은 이미 다 아는 보편적 사실이어서 전혀 새롭지 않다. 그리고 새롭지 않은 것에 흥미를 느끼고 주목할 진정한 독자란 없다. 같은 소재라도 다른 이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쓰는 것이 관건인데, 시가 어렵다면 바로 그 대목일 것이다. 시 쓰기를 좋은 말로 그럴 듯하게 매끈한 문장을 만들어 적당히 행과 연을 갈라놓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 외로 많은데, 초보자의 경우 일면 그런 미학적인 훈련이 필요도 하겠으나 무엇보다 생각 이 빠져서는 시가 될 수 가 없다. 그것도 남과 다르게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과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 염려할 일은 아 니다. 기실 사람이란 누구나 살아온 체험이 다르고 품성도 제각각이라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름을 발견하고 끄집어내면 되는데, 이는 시 쓰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글, 남과 다른 글쓰기가 가능해질 때 비로소 시가 살고 한 사람의 생명력 있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 만 덮어놓고 자기 생각과 넋두리를 풀어놓는다 해서 다 시가 되는 건 물론 아니다. 시를 건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형 식요건의 숙지와 더불어 꾸준히 그 생각을 정제하고 생각의 질을 높여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막 시업의 길로 들어선 류경화 시인의 경우 시의 기본기는 어느 정도 갖췄다고 봐지지만, 스스로 고뇌하는 시인으로써 자신만의 가열 찬 채찍을 아끼지 말아야겠다. 감성을 잘 다듬으면 좋은 시인이 될 것 같은 예감도 있다. 그러나 연꽃 한 송이! 에 서! 는 넘치는 자기 감정의 몽둥이지 채찍은 아닐 것이다. 권순진 연꽃 기도/ 류경화 265

266 연꽃 기도/ 류경화 266

267 폐교/ 전홍준 :06 폐교/ 전홍준 이제 약도 소용없는 치매 걸린 교사에서 삼십여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볼을 차다 날아간 내 고무신에 뺨을 맞고도 선생님에게 고자질 하지 않았던 이순신장군이 화단에서 손을 흔든다 숨어서 완두콩을 따먹던 운동장 옆 논에는 노란염색을 한 보리가 여태 자라고 타작마당 같이 반질반질했던 운동장에는 폐교/ 전홍준 267

268 민들레, 엉겅퀴, 망초들의 봉두난발! 인생은 화려한 한 컷의 장면을 기다리다 끝없이 필름을 소진하다 마는 것은 아닐까 장엄하게 이미자를 열창하는 동창생 등 뒤로 봄날은 간다. - 시집 당신은 행복합니까 (전망, 2004)...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에서 30여년 만에 열린 동창회라니 말을 덧붙이나 마나 감개무량했겠다. 시인의 고향이 경남 의령 어디쯤이라고 들었는데, 그 초등학교도 그곳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행히도 폐교된 처지라, 타작마당 같이 반질반질했던 운동장 은 민들레, 엉겅퀴, 망초들의 봉두난발 이 되어있어 쭉정이처럼 여겼던 스 스로의 지난 삶이 더욱 신산스러워졌다. 볼을 차다 날아간 내 고무신에 뺨을 맞고도 선생님에게 고자질 하지 않았 던 이순신장군이 화단에서 손을 흔 들고 있었지만, 그 위엄과 늠름함은 온데간데없고 자애로운 온기마저 사라진지 오래다. 그리고 장엄하게 이미자를 열창하는 동창생 등 뒤로 봄날은 간다. 노래의 가락과 가락사이, 돌아가는 필름과 필 름 사이,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사이에 봄날은 간다. 노랗게 파도로 넘실대는 보리밭 사이 길로 저만치 봄날은 줄 행랑치고 있었다. 나눠 마신 낮술 탓이 아니다. 꽃 진 자리에서 뜨는 오두방정도 아니다. 연분홍 졸음 속,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낭창하게 일 없이 가고 있었다. 기형도의 시에서처럼 햇 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있는데, 화려한 한 컷의 장면을 기다리 는 너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이냐. 필름은 소진되어가고 날은 곧 어두워질 것이다. 세상의 학교도 머지않아 문이 닫힐 전망이며, 눈은 흐릿해져 보이는 것만 보일 뿐이다. 내게도 가는 봄날은 좀 거시기하다. 뜯어보고 싶지 않은 고지서 봉투만 수북하게 남긴 채 봄날은 간다. 난데없이 마빡에 솟은 뾰루찌며 편두통과 치주질환도 고스란히 두고 봄날은 간다. 늦은 새벽 귀가한 작은아들 놈의 술 취해 비틀거리는 가랑이 사이로 봄날은 간다. 새로 만난 여자와 혼인에 관한 협의차 다음 주 다녀가시겠다는 큰아들 녀석의 유선통보, 끊긴 전화에 이어지는 뚜뚜뚜뚜 몹쓸 기계음 뒤로 봄날은 간다. 그러나 이건 천만 다행이지 싶은데, 부식된 시간들을 잠시 붙들어 매고서 지금 비가 내린다. 봄날이 가면 그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면 되는 것을. 폐교/ 전홍준 268

269 권순진 폐교/ 전홍준 269

270 베스트셀러 시인/ 노향림 :06 베스트셀러 시인/ 노향림 나무의 수사학 을 펴낸 손택수 시인이 한국시인협회가 주는 젊은 시인상을 받을 때 밝힌 수상 소감이다. 시집이 나오고 일주일 동안 책이 하도 잘 나가서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는 꿈을 꾸었단다. 알고 보니 그것은 순전히 가짜였다고, 어머니가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 한 권 한 권 사다가 쌀독 속에 쌓아 두었던 것. 가끔 노친네 친구들에게 팔기도 했다는데 시집 외상, 5000원 시집 외상, 8000원 어머니 글씨가 선명했고 시인이 시인 자신의 시집을 사는 것 같아 얼굴을 화끈 붉혔다 한다. 그 뒤 한 달을 기다렸다가 서점에 들러 보니 베스트셀러 시인/ 노향림 270

271 딱 한 권 팔렸다고. 그 말을 들은 시인은 처음엔 실망했지만 그 한 권을 사간 사람은 혹시 시인일지 모른다고 그 한 권을 산 독자를 위해 계속 쓰겠노라 했다. 시인은 시밖에 몰라서 늘 목말라해도 투명한 영혼의 젖줄은 계속 풀어내야 한다고. 독자 한 사람의 가슴을 울리기 위해 쓰는 오, 진정한 베스트셀러 시인. - 격월간 유심 2011년 5-6월호... 국내에서 유일하게 세계 베스트셀러 100위에 이름을 올린 책은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이다. 지금까지 4천만 권 이상 팔렸고 지금도 팔려나가는 스테디셀러이다. 시의 시대 였던 80년대 한때 수백 만부가 팔렸다는 시집들은 잽 도 안 된다. 이후에도 고만고만한 베스트셀러 반열의 시집이 있었지만 대개는 낯간지러운 연애편지 모음집 같 은 것이었다. 작품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그 내막을 알면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다. 언젠가 TV시사프로에서 베스트셀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파헤쳐 보여준 바 있지만, 출판사의 치졸한 편법 사재기가 역시 주원인이었다. 몇몇 주요 서점만 집중공략해도 주간단위로 평가되는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바로 진입할 수 있는데, 더구나 시집의 경우는 진입장벽이 낮아 이딴 식이면 베스트셀러 되는 건 일도 아니다. 결국 저급한 마케팅에 독자들만 휘둘리는 꼴이었다. 최근 황석영 작가도 밝혔듯이 사재기가 도를 넘고 나날이 진화하여 대행업체까지 버젓 이 등장했다고 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이다. 시가 여름철 매미소리만큼이나 흔하고 시집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도 시의 시대는 종쳤다는 자조 섞인 탄식이 들린 다. 그 현실의 한 모서리에는 정통 문학의 범주에선 쳐주지 않는 시집이 출판사의 왜곡된 마케팅에 의해 악화가 양화 를 구축하는 양상으로 독자의 입맛을 자극해 베스트셀러 시집이 되고 있다. 이는 시의 몰락의 결과이기도 하고, 시의 몰락을 더욱 재촉하는 조짐이기도 하지만 문화 일반의 저급화현상이라고 본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손택수 시인의 어머니께서 써먹은 마케팅 전략은 참으로 유효한 감동이며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또 시인은 어떤가. 한 달간 서점에서 딱 한권 팔린 그 시집을 사간 독자를 위해 계속 쓰겠노라 다짐하지 않는가. 시 집 한 권은 불과 '스타벅스'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이다. 그 돈이면 한 시인의 투명한 영혼의 젖줄 을 통째로 사는 셈이고, 그 시인은 독자의 고양된 정신을 수호해갈 진정한 베스트셀러 시인 이 되는 것이다. 권순진 베스트셀러 시인/ 노향림 271

272 This Little Bird- Marianne Faithfull 베스트셀러 시인/ 노향림 272

273 세탁소에서/ 이상국 :51 세탁소에서/ 이상국 아끼던 골덴 재킷의 소매가 너무 닳았다 털이 빠지고 오래되긴 했으나 사실은 내가 왼손잡이어서 그렇다 다른 데는 다 멀쩡한데 하며 세탁소 여자는 뜨악하게 수선한들 별로 돈이 안된다는 표정이다 왼손이 불편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왼손잡이여서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을 때 불쌍해서 눈이 붓도록 울거나 언젠가 평양 만경대 갔다가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안내원에게 세탁소에서/ 이상국 273

274 악수를 청하고는 누가 봤을까봐 아직도 꺼림칙해하는 정도다 그러나 요즘은 자식이 취직을 하거나 군대에 가게 되면 그 애비가 어느 손을 주로 쓰는지도 알아본다고 해서 나는 할 수 없이 좌우를 다 잘라달라고 했다 소매사 불구처럼 댕공했지만 아무도 눈여겨볼 것 같지는 않았다 -시집 뿔을 적시며 (창비, 2012)... 왼손잡이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고난 것이거늘 예전엔 이에 대한 편견이 적지 않았다. 억지 훈련을 통해 자식 을 오른손잡이로 바꾸려 했던 부모들도 꽤 있었다. 물론 왼손잡이라 해서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여럿이 밥 먹을 때 왼 편에 있는 사람과 부딪힐 수 있고, 글씨 쓸 때 조금 불안정해 뵈는 정도다. 오른손잡이도 습관 한 두 개쯤은 왼손 사용이 자연스럽고 편할 경우가 있다. 왼손잡이도 마찬가지다. 나도 다른 건 다 오른 손인데 돈을 셀 때와 화투 를 섞을 때 꼭 왼손을 사용한다. 그래서 돈이 안 붙는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왼손과 오른 손을 함께 사용한다. 야구에서도 한 손에 글로버를 끼고 공을 받으며 다른 한 손으 로 공을 던진다. 한쪽에 포크를 쥐면 다른 쪽은 나이프를 쥔다. 지금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데 양손을 다 쓰고 있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양손잡이다. 작고한 이영희 선생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 리고 왼손잡이라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다. 그런데 왼손 왼편 좌측 좌파 등을 싸잡아 한통속으로 착시해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우측보행 법제화만 해도 사유가 없지 않다고는 하나 그런 착시현상에 의한 레드컴 플렉스의 발로라는 지적이 많다. 공권력을 이용해 국민을 통제하려는 소수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의 파시즘적 발상이라 는 것이다.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좌측통행이고 복잡한 곳에서나 좁은 산길에서는 시민의식을 발휘해 양보하며 자연 스럽게 걸으면 될 것을 같잖은 이유로 국세낭비와 혼란을 초래할 일은 무언가. 좋은 규범은 자율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편하게 걸을 권리마저 빼앗긴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을 때 불쌍해서 눈이 붓도록 운 것 갖고도 좌빨 이란 소리를 들 어야 하고, 평양 만경대 갔다가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안내원에게 악수를 청한 일도 들키면 종북 이 되는 세상 이다. 국익을 먼저 생각하고 스스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진정한 보수는 그러지 않는다. 그럴 리 없다. 꼭 보면 그런 식의 매도를 일삼는 이들은 정녕 지켜야할 가치는 지키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희생하거나 양보해 본적도 없는 사 세탁소에서/ 이상국 274

275 람들이 대부분이다. 지금이 정부수립을 앞둔 해방공간의 군정시절도 아니고 이념대립과 갈등이 다 무엇이냐. 내 오른 손은 왼손을 관용하면서 이렇게 공존하는데... 권순진 세탁소에서/ 이상국 275

276 기다림/ 이성복 :23 기다림/ 이성복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기다림/ 이성복 276

277 - 시집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남해 금산>에 이은 이성복의 제3시집 <그 여름의 끝>을 두고 평론가 남진우는 소월과 만해의 시적 계보를 잇는 연 애시의 새 진경이라고 했다. 시집에는 당신 을 향한 사랑노래가 빼곡하여 독자들도 그를 연애시인으로 자리매김하 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남해 금산>의 편지 1 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라고 이 미 토로한 바 있지만, 이 시집의 서시 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 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 러내리고 어두워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처럼 사 유는 더 심화되었고 감정은 더욱 절절해졌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기본적으로 나 와 당신 의 관계가 바탕 되어 당신 의 실재와 부재 사이에 내재한 삶 의 비밀을 캐물어 가는 사랑노래였다. 나의 삶에는 부재하는 당신이라는 그리움의 존재, 그리고 이 같은 그리움이 삶 을 흐르게 한다는 사실, 흐르는 삶의 길 위에서 내가 당신을 향해 부르는 사랑노래. 숨길 수 없는 노래 2 에서도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 이며,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 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고 했다. 사랑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며, 그 그리움은 기다림 으로, 기다림은 때때로 서러움의 봉분이 된다.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기다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혹독한 기다림으로 망부석이 될 도 리밖에. 당신의 사랑이 없는 나는 정처 없으므로 의미 없는 삶의 강물 위로 그저 흐를 뿐. 당신 오기만을 기다리며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는 큰 소리로 말했다. 사랑이 그대들에 게 따라오라 손짓하면 주저 말고 그를 따라가라 그 길이 비록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 싸 안을 때면 모든 것을 맡기라 사랑은 사랑으로 충분하며 완전하리라. 그래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사랑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였기에 상처받게 되기를 상처로 피 흘리면서도 사랑을 위하여 마음은 늘 기쁨에 차 있기를 권순진 May it be / Enya (반지의 제왕 OST) 기다림/ 이성복 277

278 기다림/ 이성복 278

279 섬진강 나들이/ 안용태 :37 섬진강 나들이/ 안용태 소풍간다 벽진국민학교 40회 동기생들, 졸업하고 40년만의 나들이다 자식새끼 키운다고 남해고속도로 들머리 산불처럼 벗겨지거나 숯이 된 가슴, 번데기 된 누에처럼 반백 년 지어 놓은 고치를 풀어 한이던가 눈물이던가 쌍계사 가는 길 섬진강에 풀어 본다 늦봄, 꽃은 지고 꽃 진 자리가 아파 섬진강 나들이/ 안용태 279

280 피멍든 벚꽃나무 바라보며 전라도와 경상도 아우르는 화개 장터를 피 토하듯 겨워낸들 어디 한번 간 청춘 다시 오겠냐만 시샘할라치면 명줄 긴 향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저리 푸른데 반백년 비바람에 순이야, 질호야 우린 이기 뭐꼬 골 깊은 참외처럼 주름진 얼굴 분장으로 지우려 변장하지만 낙망 말아라 저기 저 쌍계사 앞뜰 삼나무처럼 우리네 자식들 사철 푸르지 않으냐 오늘은 다 벗어 두고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부르자 여적 고생 많이 했다 아이가. - 시집 몽돌 (학이사, 2012)... 시를 조목조목 관공서 문건이나 법조문처럼 따져 읽을 필요는 없다. 설령 시인이 적지 않은 시간과 공을 들여 언어 를 조탁하고 정신의 지문을 잔뜩 묻혀가며 시를 어렵게 빚었다 하더라도 독자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지는 못한다. 다 만 지적 사유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길 교양적 태도가 유지되는 경우는 예외라 하겠다. 사실 시를 읽는데 필요한 시 간이라야 기껏 20초 이내이고 길어도 1분 넘어 걸리는 시란 거의 없다. 하지만 시가 쉬 읽히든 그렇지 않든 후딱 10 여초의 시간으로 의미 있는 시 읽기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행간을 빠끔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연과 연 사이의 공간 에 퍼질러 앉아 잠시 쉬어가기도 하면서 때로는 더듬더듬 말더듬이처럼 입 안에 낱말이나 문장을 머금고 공굴려도 좋을 일이다. 현대인은 인터넷과 디지털기기의 홍수 속 범람하는 정보를 빠르게 훑어보고 이내 던져버리지 않으면 또 다른 정보를 소화해낼 수가 없다. 하지만 정보 과잉 환경이 한편으론 우리의 사고습관을 얕고 가볍게 만든 것은 아닐까. 윤동주의 서시가 결코 여려운 시는 아니지만 10초 만에 읽고서 시 읽는 묘미를 느끼고 그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 다. 그렇게 읽은 시를 쉽네 어렵네 하는데, 사고 능력의 퇴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치유는 모름지기 독서를 통 한 사색으로 가능하며, 지름길이 있다면 시를 제대로 읽고 감상하는 태도에 달렸다. 쉬 읽혀지는 시일지라도 읽는 동 안 자신의 개인사와 추억이 접목되고 상상력으로 그린 그림이 포개어져야 바른 시 읽기라 할 수 있겠다. 안용태 시인의 섬진강 나들이도 참 쉽고 유순하게 읽혀진다. 쉽다는 것은 그만큼 익숙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섬진강 나들이/ 안용태 280

281 는 의미이고 누구나 공감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시적 수사가 부족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곳곳에 요긴하게 감싸 도는 서정의 빛깔들로 인해 공감의 파문은 더없이 넓어지고 울림은 더욱 깊어져 시를 시답게 건사하는 굳건한 틀 위 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지만 서사 구조는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앞부분 '벽진국민학교 40회 동기생들 졸업하고 40 년만의 나들이'와 마지막 연 '오늘은 다 벗어 두고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부르자'가 이 시의 주어와 술어이며 줄거리 의 모두이다. '여적 고생 많이 했다 아이가'는 '마이뭇다 아이가'란 영화 대사를 연상시킬 만큼 훌륭한 정점이자 마무 리다. 따라서 이 시에서 섬진강이라든가 늦봄, 꽃은 보조기재일 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세상으로 향하는 바퀴가 굴러가 지 전의 추억을 공유했던 친구들과 그 바퀴가 굴러간 길은 다 달랐겠지만 너나없이 닳아빠진 발통 잠시 멈추고 술이 나 마시자는 거다. 노래나 부르자는 거다. 시인 자신은 물론이고 안 봐도 빤한 친구들 삶의 질곡에 위로주를 높이 들 자는 거다. 여왕이 슬거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는 이즈음 시가 펼쳐 놓은 정경에 우리 모두 빈 술잔 하나씩 들고 끼어 앉도록 깔아놓은 멍석이 이 시가 갖는 최대의 매력이면서 미덕이다. 권순진 섬진강 나들이/ 안용태 281

282 타인(부부)/ 정덕희 :37 타인(부부)/ 정덕희 어제 멀리 떠난 당신 오늘 내 몸속 혈관 곳곳에 번져 있습니다. 하나일 수 없음에도 내 안의 당신이 되어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려 강요할 때면 당신은 언제나 나 아닌 당신이었습니다. 영원한 타인처럼 멀어지다가 다시금 내 속으로 파고드는 타인(부부)/ 정덕희 282

283 당신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나인가 봅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호흡소리마저 잠재울 고요속에서 천둥번개 치는 예측키 어려운 추리극 속의 주인공인양 당신과 난 타인일 수 없는 또 다른 타인입니다. 멀어져 버린 시간에도 호흡, 느낌, 감각으로 만질 수 있는 당신은 진정 타인일 수 없는 나의 한 부분입니다 - 에세이집 나는 나에게 목숨은 건다 (이다, 2001)... 행복 전도사로 한때 이름을 날렸던 방송인 정덕희 씨의 이력엔 시인 이라는 직함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문학적 인 견지에서 주목받진 않았지만 두 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가 방송을 타면서 주부독자층의 인기를 얻은 비결에 는 자신이 겪어온 인생유전의 썰 이 4~50대 주부들에게 공감으로 먹혀들었고, 그들에게서 지지를 이끌어냈기 때 문이다. 한남동 2백 평 저택 마님인 시어머니한테 반기를 들고 홀로서기위해 안전한 가정주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등 결코 평탄치 않았던 결혼생활과 35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 그 고난의 이야기에 특유의 입담과 보 이스톤이 덧칠되었으니 부부생활이 조금씩 시큰둥해지고 몸과 마음이 나른한 여성들에게는 마치 자신을 일깨우는 구 원의 말씀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런 정덕희 씨로부터 듣는 부부의 의미는 특별한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당연히 새로운 것은 없다. 다른 시인의 부부론 도 마찬가진데, 표현만 조금씩 달리 했을 뿐 이미 다 아는 규정이고 지침들이다. 문정희 시인은 부부를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 라며,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 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 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 이 라고 결론지었다. 몇 해 전 늦장가 든 함민복 시인은 결혼 전 쓴 시에서 부부를 긴 상을 함께 들고 조심조심 문 지방을 넘는 그런 사이라고 하였다. 타인(부부)/ 정덕희 283

284 서로 사랑은 하되 사랑으로 얽어매지는 말라는 칼릴 지브란의 잠언을 바탕으로 요리조리 변용한 말씀도 숱하게 많 다. 하나일 수 없음에도/ 내 안의 당신이 되어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려 강요할 때면/ 당신은 언제나/ 나 아닌 당신 이었다. 는 고백 또한 그 시행착오의 다름 아니다. 하지만 영원한 타인처럼 멀어지다가/ 다시금 내 속으로 파고드 는/ 당신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나 임을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사이가 부부인 것이다. 인생은 채워 지지 않는 잔이다. 따라서 부부가 같이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서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살자 이것이 숱 한 시행착오를 겪은 정덕희 씨의 싱거운 부부관계 노하우다. 둘(2)이 만나 하나(1)가 되는 것이 부부이고, 5월21일을 부부의 날 로 제정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러구러 빚을 갚고 일수 찍듯 살아가는 것이 부부관계의 최선일지 모르겠 다. 권순진 You Need Me / The King's Singers 타인(부부)/ 정덕희 284

285 그 날/ 정민경 :06 그 날/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 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 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 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 날/ 정민경 285

286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민중항쟁 27주년기념 백일장 시 부문 대상작... 이웃집 아저씨가 단숨에 내뱉은 그때 그날 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쓴 것 같은 이 시가 18세 소녀의 시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라는 찬사를 받았다. 5 18민중항쟁기념사업회가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와 공동체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자는 취지로 2007년 개최한 백일장에서 대상을 차지한 당시 경기여고 3학년 학생 의 작품을 보고 심사를 맡은 정희성 시인은 경악했다고 한다. 30년 전 그날 의 일을 요즘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싶었는데, 항쟁을 겪은 사람도 이렇게는 쓸 수 없을 것을 어린 학생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그날'의 현장을 이토록 놀 라운 솜씨로 몸 떨리게 재현해놓았으니 말이다. 그날 은 한 아저씨의 자전거에 올라탄 학생이 진압군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도움 을 청하는 학생을 진압군에게 내주고, 평생을 후회와 슬픔으로 살아야 했던 '나'에 대한 고해성사인 것이다. 산문형식 의 이 시에는 5 18에 대한 모든 것을 망라하였다. 학살당한 어린 시민군의 슬픈 얼굴,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소시민의 비애,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진압군의 총구, 제 나라 국민에게 등을 돌린 비겁한 언론사들, 여 기에 살아남은 자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까지. 5월의 아픔과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5.18도 4.19나 6.25와 마찬가지로 역사 속으로 깊숙이 숨어 교과서 안에서 밑줄 그어준 대로 관념으로만 이해될 만큼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를 겪는 그날 그 사람들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5.18이었다. 며칠 전 한 종편채널에서는 탈북군인이란 자와 한 대학교수가 출연해 북한군 투입설을 사실인양 양양하 게 말하고 있었다. 이들은 5.18을 6백 명 규모의 북한군 대대 병력이 침투해 벌인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그들의 주 장대로라면 이들에 대한 무력진압과 학살은 정당하고 희생된 영령들에 대한 대우나 추모도 가당찮다는 논리다. 이를 은근히 부추기고 근거 없는 루머를 확산시키는 야비한 언론의 태도는 또 무언가. 일부 극단적 우익세력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도 종북 세력의 음모라고 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낯 뜨겁고 한심한 일들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입으로 아베 정권에서 자행되고 있는 망언망동을 비난할 수 있는지도 의심 스럽다. 5.18을 민주화운동이 아닌 북한군의 책동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입이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위안부의 정당성 을 말하는 저들의 입과 다를 게 무언가. 이는 역사왜곡을 넘은 반문명적 역사인식인 동시에 30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희생자와 가족들의 상처에 또 다시 식초를 들이붓는 격이다. 그들의 눈과 가슴에는 '그 날' 희생된 이들의 뒷모습이 아른거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 날/ 정민경 286

287 권순진 그 날/ 정민경 287

288 선생님은/ 케빈 윌리엄 허프 :34 Teachers/ Kevin William Huff Teachers Paint their minds and guide their thoughts Share their achievements and advise thier faults Inspire a Love of knowledge and truth As you light the path which leads our youth For our future brightens with each lesson you teach each smile you lengthen... For the dawn of each poet, each philosopher and king Begins with a Teacher and the wisdom they bring. 선생님은/ 케빈 윌리엄 허프 선생님은 선생님은/ 케빈 윌리엄 허프 288

289 학생들 마음에 색깔을 칠하고 생각의 길잡이가 되고 학생들과 함께 성취하고 실수를 바로잡아주고 길을 밝혀 젊은이들을 인도하며 지식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당신이 가르치고 미소 지을 때마다 우리의 미래는 밝아집니다. 시인, 철학자, 왕의 탄생은 선생님과 그가 가르치는 지혜로부터 시작하니까요. -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 생일 (비채, 2006)... 이 시는 미국의 웹디자이너인 시인이 교사인 아내를 위하여 쓴 영시 Teachers 를 고 장영희 교수가 번역한 것 이다. 영문학자 장왕록 교수의 따님이며 수필가이기도 한 장영희 교수는 4년 전 어버이날에 홀로 남은 어머님께 마지 막 편지를 남기고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를 찾아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도 속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당시 장 교수의 바로 아래 동생 장영주씨는 언니는 걷고 뛰는 것 빼곤 뭐든지 잘 하는 사람이었다. 고 회고했다. 장 교수는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글쓰기, 그림, 공기놀이에서는 경쟁자가 없을 정도라며, 내 언니라는 게 자랑스러워서 목발을 짚고 걷는 언니의 옷자락을 꼭 쥐고 다녔다. 고 추억했다. 나도 그의 칼럼을 애독하면서 누구 못지않은 폭넓은 통찰력과 예리한 직관의 눈을 지닌 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 지만 늘 세상을 낙관하고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눈을 가진 분이었다. 암 투병 중에도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으며, 중학교 영어 교재 집필과 수필집을 내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자 들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 자신 학생들 마음에 색깔을 칠하고 생각의 길잡이가 되고, 학생들 과 함께 성취하고 실수를 바로잡아주고, 길을 밝혀 젊은이들을 인도하며, 지식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운 참스 승의 길을 걸어왔다. 나쁜 운명, 좋은 운명을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 한 그 의 각오대로 한 점 후회 없이 57년의 삶을 당당히 살다 갔다. 당신이 가르치고 미소 지을 때마다 우리의 미래는 밝아 졌고, 그가 가르치는 지혜로부터 우리는 '당당한 희 망'을 얻었다. 전이된 척추암이 심각해져 신문연재를 끝내면서 쓴 마지막 글의 제목이 <문학의 힘>이었다. "문학은 인 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 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당신은 스스로의 삶 전 반을 통해 문학의 힘을 충분히 입증해 보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사랑을 잃지 않고 참으로 우아했고 당당했으 선생님은/ 케빈 윌리엄 허프 289

290 며 유쾌했던 그녀는 내게도 마음의 선생님이었다. 권순진 선생님은/ 케빈 윌리엄 허프 290

291 맛있게 읽은 시 블로그 저자 詩 하늘 통신 권순진 발행일 :47:22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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