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관논총_26집_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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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高麗士族의 形成 發展과 階層構造 朴 天 植* Ⅰ. 緖 論 Ⅱ. 太祖期 兩京 官僚와 地方士族 1. 開城府 關內道의 兩班官僚 2. 高麗政治勢力으로서의 在地士族의 充員 推移 Ⅲ. 附元期 官人階層의 擴張과 在地士族의 進出 1. 武人執政의 終息과 政治勢力의 整備 2. 高麗後期 門閥世家의 變移와 累代功臣 宰相之宗 Ⅳ. 士族階層에 대한 官身分 維持의 諸施策 1. 官僚의 體制化와 專制政治의 權力構造 2. 高麗時代 門蔭制度와 官人身分 保障의 諸施策 3. 散官體制의 運用과 士族官僚의 位相 V. 結 論 附錄 (Ⅳ.이하는 29輯에 수록) Ⅰ. 緖 論 歷史發展段階說에 입각하여 高麗國家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는 중요한 영역으로, 그 중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高麗前期는 門閥貴族國家 說이 가시화되어 있다. 이는 三國時代 와 南北國時代를 古代時代 로 전제한 正論에서 고려시대의 역사발전의 내용을 특징지우 려는 요청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의 역사발전을 西歐式 中世時代 로 단순 화한 개념을 代入 比較하는 방법론으로 규정하는 데는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에, 韓國史 의 特殊性을 인식한 바탕 위에 歷史의 實體를 總體化된 槪念 으로 파악하려는 의지를 표 출한 내용인 것이다. 주지하는 바 高麗王朝(統合 년)와 朝鮮王朝( 년)는 君主専制國家이 다. 즉 國體는 君主(王)國家요, 政體는 専制政治體制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조직과 기능 및 사회구성과 역할기능 등등의 문제에서 基盤構造의 體制가 정형화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의 변용과 時代轉換의 推移에 따른 경제 생산력의 변화, 사상 문화 내용의 질적향상과 * 全北大學校 史學科 敎授.

2 변화에 좇아, 제 요소들이 맞물리어 역사적 탄력성을 포용한 社會的 發展을 이룩하게 되 는 것이다. 이의 특성과 한계에 대한 관심사의 하나는 高麗專制國家體制에서 정치력의 발 휘에 王權과 臣權의 작용과 기능의 실체를 사실적으로 파악하여, 정치권력의 추이를 구명 하는 일이 된다. 이때의 정치지배세력을 포괄하는 개념은 官人階層全般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高麗士族(官人階層)의 形成 發展推移와 아울러 관인계층의 外延과 內的 構造를 구명하는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官人階層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 연구의 현황과 아울러 문제점을 제시하여 보는 일 이 필요한 것이다. 첫째, 고려건국의 역사적 의미의 정립 문제로, 假說 1 고려형성의 주 도정치세력의 성격은 在鄕氏族勢力을 배경한 鄕豪의 結集禮로 특징되는가의 검증 범위는 매우 다양한 부문에 걸쳐 개진되어야 한다. 檢證 1. 高麗 國家形成의 주역으로 간주되는 三韓壁上功臣 3,200여 명의 실체의 구명과 그들의 성격 유형화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檢證 2. 高麗 貴族國家說을 수용할 때 門閥貴族은 累代功臣 宰相之宗 으로 압축되는데, 이의 개념화를 도출한 연구내용들이 타당한 것이며, 만족할 수준에 도달하였는가? 檢證 3. 太祖功臣(三韓壁上功臣) 家門 중 지방에 산재한 가족집단의 위상은 그 대다수 가 中間階層(이것도 가설임) 鄕吏化된 支配階層의 下部構造로 轉落한 것인가? 鄕職에 수 임되지 않은 在地官人階層과 그 가족원은 신분계층의 분류에서 士族 의 범주에 포함하여 야 타당한가? 또 散官職制에 편성된 實職文武官人의 최소한 4배 이상을 점유한(이의 태 반은 在鄕人) 관인의 정치 사회적 처지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檢證 4. 앞의 문제와 관련하여 鄕吏 는 高麗身分構造에서 한 階層 으로 분류되어 좋은 가? 이를 階層 으로 인식한다면 이는 成就身分의 요소를 내포한 면이 배제되어도 좋은 것인가? 나아가 고려 475년 기간을 정치 사회적 성격의 발전적 변천을 감안한 假說的 시기구분, 1기 貴族國家形成 定立期, 2기 貴族勢力의 相剋 改編期, 3기 武人執政체제에서의 在地士族 의 發興期, 4기 附元禮制下의 葛藤期, 5기 全般官人階層의 膨脹化와 體制轉換期로 대별한 시기구분이 가능하다면, 각 시기상황과 관련한 정치 사회 현상의 구명을 수반한 全般官人 階層의 실상의 파악과 해석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위의 검증 1 4의 문제는 후대에 미친 영향과 제도면에서의 移行推移까지를 결부시킨 論究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고려의 政體 가 專制體制인 점에서 그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와 이의 질적 변화 의 구명을 요한다. 이에 관한 高麗貴族制說의 입론 중의 하나는 臣權 구성의 제 특성을 밝혀 貴族合議體의 발달을 고려의 중요한 특성으로 성격지운 것이다. 이는 邊太燮敎授의 高麗政治制度史硏究 朴龍雲敎授의 高麗時代 臺諫制度硏究 등에서 部門的인 검증 을 통하여 正論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귀족제설을 官府體制에서 검증한 내용 중에

3 國史館論叢 第26輯 中書門下省의 실체와 연혁에 관해서 필자는 三省과 別設된 國王主宰下의 宮庭에 설치된 政府임을 논구한 바 있으며 이는 전자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高麗 門閥貴族家門의 여러 실상을 검토한 초기의 연구는 藤田亮策의 李子淵と其の家 系 ( 靑丘學叢 13 15, )이다. 이는 일제 皇國史觀에 입각한 한국사의 정체성론 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본고는 1933년대 일제의 필요에 부응한 작품인 점에서) 논문이 라 할 수 있다. 主論은 ① 고려의 정체는 實이 없는 君主制로 安山金氏에 이어 慶源李氏 의 外戚政權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역사발전의 기본체계와는 유리된 구도로 파악 함으로써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의 요소를 亡失케 한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 것이었 다. ②高麗前期에 있어 정치권력을 주도한 귀족세력의 성격을 慶源李氏의 정치력에 기생 한 連婚族으로 규정함으로써 ①의 논지에 대한 검증을 동시에 수행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累代功臣世家 의 기본 개념도 모르거나, 高麗期 功臣制度의 특성을 알지 못한 미 숙한 시대의 한계성의 표출이거나, 의도적인 조작으로 취급하여 무가치한 것으로 일축하 면 되겠지만, 문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이를 원용하거나 인용 보완한 입론들이 상존하여 문제의 심각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한 두가지 예를 지적하여 보면, ① 고려전기는 귀족국가로 성격지워지기 때문에 中世的 전환이 유예 차단되었다는 견해가 도출되고 있는 것, ② 在京 중앙귀족에 권력이 독점된 사회구조로 在鄕士族의 존재를 망실케 한 論據로 비약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③ 재향 사족의 중심을 이루는 戶長階層에 대한 연구에서 國初의 鄕豪로 紫衫服 官人層은 鄕吏로 전락되었고, 이를 중간계층으로 규정하게 되는 가설이 제시되었는 바, 이 역시 藤田 연구 의 간접적인 영향인 고려귀족의 폐쇄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일련의 주장에 경도되어 나타 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셋째, 고려에서 신분적 질서를 확립한 名分論을 채용한 門閥觀은 累代功臣 宰相之宗 으 로 압축되어 있다. 功臣世家가 門閥을 논하는 絕對條件인 점에서 高麗 功臣制度의 구명은 필수적 연구에 해당한다. 이에 대하여 拙稿 三韓壁上功臣의 硏究 (1988), 高麗配享功 臣의 制度的 性格과 그 特性 (1989), 高麗史 食貨志 功蔭田柴의 檢討 (1983), 高麗禑 王代 政治勢力의 性格과 그 推移 (1980), 戊辰回軍功臣의 册封과 그 顚末 (1979) 등 일련의 연구는 이에 대응한 글들이다. 이의 과정에서 쓴 朝鮮建國의 政治勢力硏究 上 下( ), 開國原從功臣의 硏究 (1978), 開國原從功臣 張寬錄券의 硏究 (1984)는 功臣 制度의 연구에 주안한 글로 아울러 각 시대의 정치지배세력의 실체를 구명하고자 시 도한 것이다. 위의 글들은 高麗 功臣制度의 형성기반과 전개상의 이행을 추출하였으며, 高麗 門閥貴 族社會의 성격을 다각적으로 검증한 내용에 해당한다. 신분제 운용에 있어 거의 유일한 準法制的 기능을 담당한 공신제도와 이의 유지를 위한 功臣 과 動勞 포상책의 내용이

4 되는 문음의 시혜와 집행이 專制君主政治의 고유 特長制度인 赦肆策의 일환 내용에 포함 되어 이루어지는 점 등, 고대를 지양한 고려 정치 사회의 성장내용을 전반적으로 조명하 여 본 연구라 할 수 있다. 넷째, 高麗時代의 貴族制社會의 이해에 있어 朴龍雲( 高麗時代史 上, p. 75)의 貴族 槪念의 정의를 간추려 보면, 귀족은 특권적 신분층에서 출생하여 지위를 세습케 한 존 재, 3 代를 연하여 門地를 세우면 貴族的 家格을 확보하며, 이에 걸맞는 정치 경제 사회적 위세를 누리고, 貴族間의 폐쇄적 通婚圈을 형성하는 등 특징을 가지며, 이는 5品官 以上 線에서 뚜렷하고, 貴族層이 要職을 점유하고, 정책결정 배분을 귀족제적으로 운영한 사 회 라 하였다. 이는 요령을 얻은 진술로 개념화된 일반적 정의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러 나 진술 용어 내용에 特權的 身分層 의 개념의 준거가 분명치 못한 부문이 산적하여 있 고, 5品 以上線 에서 뚜렷하다는 근거로서 제시한 蔭敍制 와 功蔭田 의 해석과 내용의 검 증에는 문제가 많다. 功臣의 賞典과 官僚褒勳制의 한 내용에 門蔭制度가 있다. 문음제도의 범위는 다양한데, 世間의 논의는 이중의 二大特長的 기능으로 음서제 와 공음전 이 주목되고 있어 상대적 으로 가설이 분분하여 문제가 된다. 問題點 1; 門蔭入仕制의 실체에 대한 파악은 그 연구 내용이 어느 수준에 와 있으며 기왕의 검증적 연구의 결과는 어느 만큼 타당성을 갖는가의 문제이다. 필자는 전게한 일 련의 高麗功臣硏究 에서 문음의 유형과 제 개념을 도출, 설명한 바 있다. 항용 五品 以上官가족의 門蔭入仕制 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한 諸家의 旣硏究에서 문 제점을 제시 하면, ① 門蔭入仕의 대종을 이루는 許初入仕 는 官身分의 최소한의 유지책 으로써 散官體制에 편입하는 入仕制이다. ② 이 중 祖宗苗裔의 蔭敍 와 功臣後孫의 蔭敍 는 全直孫戶에 문음이 주어진 경우가 많은 반면, 官勞의 門蔭으로 주어진 蔭敍는 子 孫 중 1인이 원칙인 점은 다 아는 바 같이 諸家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는데, 高麗史 官勞 의 蔭敍항에 18歲 以上者로 제한 규정 이 명시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高麗貴族國家說의 立論으로서 문음제도는 고려의 特長的 運用策으로 설명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 이의 기능 면에 있어 제설이 분분한 중에도 기이하게도 귀족국가론을 도출한 결론적 성격 규정에서 만은 견해가 합일되어 있는 것이다. ③ 門蔭入仕制는 功臣 勳勞賞與制度의 내용을 이루는 末流의 한 부면인데, 이의 주종을 이루는 집단문음의 경우의 시혜는 許初入仕로 散職에 進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제도면에서 官入體制의 골격을 이루는 고려 散官制度 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初入仕의 개념을 혼돈하고 있는 것이다. 問題點 2; 功臣과 勳勞에 대한 門蔭制에서 근간을 이루는 경제적 給付로서 수행된 내 용의 하나인 功蔭田 에 관한 이해의 문제이다. 필자는 앞의 高麗史 食貨志 功蔭田柴의 檢討 에서 ① 본 編目의 내용은 功臣田 연

5 國史館論叢 第26輯 혁기로서 光宗代의 功役歲租, 景宗代의 勳田, 成宗代의 功蔭田, 文宗代의 兩班功蔭田 柴科, 功臣田 定着期의 功臣田 으로 이행 되는 사실내용을 단편적으로 소개 기록한 모음 이며, 위 각 田種은 제 나름의 의미 내용이 상이한 점을 논구한 바 있다. ② 文宗 3년 5 월의 兩班功蔭田柴 는 기본적으로는 이전의 공음전에 양반 參知政事 이상관을 受給對象 에 추가한 것으로, 2품관 基準職인 參知政事 이상의 관직자에게 왕의 特旨에 의존하여 수 여한 官勞勳에 의한 功臣號 賜與制度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며, 功蔭田 受給等次 2품 1품 에 兩班顯官을 포함하여 개정한 사실을 밝힌 것이다. ③ 고려중기 이후는 공신제도가 더 욱 강화되어 功臣田으로 합일되었으며, 그 연원을 의식한 표현에서 공신전을 후대에 있어 서도 功蔭田이라 표기한 사례를 제시한 바 있다. 문제는 參知政事(從2品)官 이상의 職官과 檢校官을 공음전 수급대상에 포함하여 兩班 功蔭田柴 로 改定한 이유를 규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기이하게도 李佑成氏의 功蔭田 5品 官 以上에 分給說 은 閑人과 閑人口分田 연구에서 閑人 6品官 子弟說 이 아닐까 하는 가 설이 제시되고, 이의 대전제는 功蔭田이 5品 以上官의 永業田 이라 한다면, 閑人永業田은 6품관 이하에게 해당할 것이란 입론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동안의 蔭敍연구는 후자 功蔭田은 5품 이상관에게 부여한 영업전을 絕對信俸하고 이에 궤적을 맞추기에 급급한 논의인 감이 없지 않다. 본고 Ⅳ장 1절 官僚의 體制化와 專制政治의 權力 은 參知政事의 실체를 구명하여, 고려 관료의 位階를 집단화한 단위 및 영역설정의 실상과 아울러 政府 기능의 실체를 조감하여 보는 데 중요 목적이 있다. 아울 러 2절에서 散官을 분석하고 이의 부분 내용인 閑人의 실체와 개념상의 시대적 변환을 검토하게 될 것이다. 관인계층의 구성문제에 있어 다음의 命題 高麗는 古代社會의 構造的 모순을 해결 극 복하는 정책으로 지방세력을 국가력의 확충에 충원하거나, 정치권력의 재편 세력으로 공 급원이 되게 한 특성을 갖는다 를 수용하고 논의를 개진하고자 한다. 고려 귀족국가 성격 을 입안한 이론의 대표적인 檢證說이 功蔭田과 蔭敍制에 관한 제설이다. 이를 5품 이상관 료의 특혜설을 고집하다보니 이에 더하여 불안하기 짝이 없는 5품 이상 관료면 貴族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엉뚱한 주장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에 기초하여 고려의 사회성격과 특징의 규정을 다음 몇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주 지하는 바 高麗統合期의 정치 사회정책은 지방에 산재하여 地緣集團을 이루어 막강한 힘 을 발휘하게 된 유력한 씨족세력을 지배계층으로 융화하는 사회제도를 채용하고 추진한 특성을 갖는다. ① 고려는 地方社會의 문화적 連帶性과 개성을 구축하고 이를 발휘한 역 사적 발전을 이루어갔다. ② 이의 구조는 일원화된 中部圏域(關內道 京畿)을 확장 편성하 고, 地方(初期는 9道, 中期는 兩界 下三道) 개념을 형성하여 君主國家의 체제를 탄력적으 로 운영하고자 꾀하였다. ③ 政權運用勢力을 육성하는 장치로써 太祖功臣(三韓壁上功臣)

6 을 擬制化하여 고려공신제도를 확립하고, 정치권력의 주체인 왕의 고유권한인 儀典의 嚴 守와 赦肆策의 발휘를 통하여 功臣世家와 宰樞, 功臣과 宰樞를 특정 세력화하고, 4품관 致仕 檢校職 2품관 이상을 그 배경 세력에 포함하는 顯官家를 육성하는 명분론에 근거한 신분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위에서 제시한 제설의 檢證事項들은 본고의 논제인 高麗官人階層의 形成과 展開 상황 을 풀어가는 직접적인 내용들이다. 따라서 본 주제에 대한 논의의 범위는 매우 광범한 것 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본고는 제한된 범위에서 제문제들의 내용을 검토하게 될 것이다. 기왕에 諸家의 논고에서 피력된 견해 중에 필자와의 異見 부문에 있어서는, 앞서 제시한 본인 연구의 논거를 요약 설명하거나 재인용하는 번잡을 피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으 므로 읽는 이의 양해를 빌어 마지 않는다. Ⅱ. 太祖期 兩京 官僚와 地方士族 1. 開城府 關內道의 兩班官僚 1) 朝臣 軍士 와 이의 變換 推移 太祖代 官僚의 일차적 대상은 役分田 수혜자인 統合時 朝臣 軍士 로 압축할 수 있다.1) 이때의 朝臣은 兩京의 文 武官僚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겠지만 후술하는 바 公卿將相 食祿 之人 을 일단 이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한편, 이의 重層構造는 役分田 제정 배경과 관 련되는 三韓壁上功臣 3,200여 명을 중심으로 한 개념으로 파악된다. 軍士의 실상은 사서에 빈번하게 軍團 규모로서 등장하는 開定軍 등 정부군에 편속된 군인으로, 위 朝臣의 범주 에 미치지 못하는 군인 일반을 지칭한 면을 갖는다.2) 景宗代의 始定職 散官 各品田柴科 1) 高麗史 권32, 食貨志 田柴科 役分田항. 2) 高麗史 권92, 庾黔弼전. ①의 내용에서 開定軍은 政府直屬軍으로 편제되었으며 그 규모는 출동시에 3천명 규모로 나타난 경우도 있다. 또 地方鎭의 鎭戍軍 파견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들의 軍額은 開 定軍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들 開定軍을 豪族의 私兵集團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며, 다음 ②,③의 守城 軍 遠征軍도 政府軍(開定軍)에 해당할 것이다. ① 高麗史節要 권1, 太祖 3년 3월, 以北界鶻岩鎭 數 爲北狄所侵 黔弼 卽日率開定軍二千以行至鶻岩 於是 諸部相率來附者千五百餘人 又歸被虜二千餘人 由是北方晏然. ② 高麗史 권92, 庾黔弼전(太祖 16년), 爲征南大將軍 守義城府. ③ (17年) 太祖 自 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 三十餘城 聞風自降. ④ 高麗 將征運州 黔弼爲右將軍 以勁騎數千 七百 史 권82, 兵志2 鎭戍, 太祖 十一年 二月 遣大相廉卿 能康等 城安北府 以元尹朴權爲鎭頭 領開定軍 軍. 李基白, 高麗兵制史硏究 에서 太祖 親軍 動員軍을 政府軍이라 하 人 戍之 四月 城運州玉山 置戍 였고, 한편 통일전쟁기 兵團의 구성을 諸城軍 등의 경우는 豪族의 私兵集團으로 서술하기도 하였다.

7 國史館論叢 第26輯 에 武班 丹衫以上作五品 한 대상원에 유사한 太祖代의 軍士로 보아 무리가 없겠다.3) 먼 저 관료의 중핵을 이루는 兩京의 文武官僚의 실체를 검토하여 보고, 종국적으로 三韓壁上 功臣으로 이행되는 바로써 이의 구성원을 이루는 在鄕士族의 변환을 알아보고자 한다. 太祖 즉위년 6日次 人事에 十個官府에 (侍中 1 令 9 侍郎 1 卿 13 郞中 4 員外郞 1 其 他 3) 32명의 官府職任者를 임용하였다.4) 이는 10官府의 요직을 補任 交替한 인명의 제시 이고 其餘司省에 모두 郞職과 史職을 빠짐없이 충용하였다고 하였다. 三國史記 弓裔 전을 참조하면 泰封의 官府는 20여 司省에 달하였다. 태조 23년 三韓功臣을 정한 시점에 서 보면 태조대의 정부관서에 충원된 현직문관의 수는 400여 명을 상회하였던 것으로 추 산된다.5) 그런데 高麗創業期의 官人體系는 文武의 分을 초월한 16관등제를 채용하여 관료화한 특성을 갖는다. 뒤에 다시 상술하겠지만 중국에서는 隋代 宋代까지 專制政治體制下의 관 3) 下級軍卒은 役分田이 아닌 별단의 지급규정이 적용되었다고 보겠다. 다음 景宗代의 職散官田柴科에 서 軍卒은 其未及此年科等者 一切給田十五結 에 해당될 것이다. 軍將相 將校 중에 紫衫에 들지 않은 자는 丹衫服에 편성되어 五品等次別 田柴를 받았다. 다음 文 武班 丹衫層과 紫衫層 田柴額을 대비하 면 다음과 같다. 武班丹衫 一品 二品 三品 四品 五品 作五品 田 柴 田65柴55結 田60柴50結 田55柴45結 田50柴42結 田45柴39結 元尹以上紫衫 十品 十二品 十三品 十四品 十五品 作十八品 田60柴60結 田55柴55結 田50柴50結 田45柴45結 田42柴40結 文班丹衫 一品 二品 二品 四品 五品 作十品 田65柴55結 田60柴50結 田55柴45結 田50柴42結 田45柴39結 武班將校 最下額 84結은 文班丹衫 五品額과 동일하고, 元尹 이상의 紫衫 十五品에 유사하여, 非功臣 系 將校의 경우에도 처우가 돈독한 내용으로 이해되며, 저들은 鄕職階와 무관한 文散階 등의 官等次 序의 官銜을 받았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한편, 軍職體制의 미숙성을 고려하여야겠지만 將 校와 士卒과의 구분이 엄격하였던 실상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紫衫階層의 武班功臣 將相 將校와 丹衫 이상을 하한으로 설정한 武班貴族階層의 성립 근거를 상정하여 볼 수 있다. 高麗 太祖 代 官等階 大匡 元尹의 수급자는 職 散官 구분이 없이 모두 紫衫階層에 편입되었다. 그렇다면 그 외의 官職者는 文 武 雜業의 丹衫以下에 편속되어 正朝以下의 하위 향직계를 받은 부류이거나 鄕職 階를 받지 못한 官職人도 다수한 형편이라고 보아야 한다. 武班貴族家門에 대한 試論은 朴龍雲, 高麗前期文班과 武班의 身分問題 ( 韓國史硏究 21 22) 참조. 4) 高麗史 권1, 太祖世家 원년 辛酉人事. 5) 高麗史 권76, 百官志 太祖朝의 官府는 소수만이 적출되는데, 國初稱 內議省을 비롯하여 內議令 內議舍人 廣評省 侍中 侍郞 郞中 內奉省 三司 選官 民官 刑官 禮官 工官(有御事 令 侍郞 郞中 員外郞) 司績 兵部令(卿 郞中) 徇軍部令(郞中) 兵禁官(郞中 史) 司憲臺 元鳳省(學士院) 史館 內書省 內軍卿 禮賓 省 物藏省(有令卿) 掖庭院 등의 官署와 해당 관직이 등재되어 있다. 이 외에도 史書 金石文에서 太祖 代의 관부 관직이 적출되는 예도 20여관서와 직명을 얻을 수 있다. 또 武班에 太祖 2년 置六衛로 文 班職의 4 5倍에 해당한 軍職品官이 존재하였다고 보겠다. 六衛의 실체는 미상하나, 太祖代 軍額의 단위로는 親軍 開定軍 杆天軍 補天軍 右天軍 天武軍 등과 그 대부분이 中央軍으로 分遣된 諸城軍(太 祖 19년 동원에는 14,700餘임)을 통솔한 軍官 將相은 兩班官僚를 구성하고 있다.

8 료로 現官의 位階는 文散階에 의하여 官位의 서열을 규정하고, 散官의 一部에게 武散階를 부여하여 官秩化한 것이 기본제도가 되었다.6) 이의 과정에서 五代의 戰亂期를 당하여 軍 將一邊度의 정권체제로 국가가 운영되고, 이들 武將의 대우를 강화한 것이 권위로운 勳官 으로의 격을 부여한 조처로 京官職 겸대가 여행되고, 散官制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것이 다.7) 中國 五代의 상황과 방불한 戰亂期에 처한 泰封의 경우도 軍事政權體制를 영위하였으 며 내용에서는 新羅式 京位官等體制를 적용하고, 명칭을 새롭게 마련하여 신라 관등명칭 을 상황에 따라 겸용하였던 것이다. 고려는 창업 후 泰封의 관등체제를 채용하다가 신라 의 官等稱을 참용한 2원적 관등체계를 운영하고 있었다.8) 이에서 太祖代의 兩京 文武官 僚와 在地勢力(重層官班?)을 흡수하여 국가권력의 질서를 갖추기 위한 上部構造로서 元 尹 이상 紫衫階層을 편성하여 일원적 관위체계를 적용하는 방향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 다.9) 현실적으로 泰封이나 태조 전반기의 고려는 某某의 將軍職에 權力이 부여된 현상이 었으며, 이에 상응한 관위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형식면에 있어서는 전제 왕권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政務 御典관서를 太祖 期로부터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10) 이의 실수를 추론할 수 있는 내용으로 태조 즉위 2 月次에 太祖翊戴功으로 거명된 11명의 建國有勳者 1等 4인, 2等 7인과 3等 勳으로 褒物이 주어진 2,000여 명을 포상하였는데, 이는 태봉의 重層官僚를 영입한 인물과 군사쿠데타에 6) 舊唐書 百官志와 舊唐書 권42, 職官의 편술은 먼저 官銜體制를 서술하였는 바 正從品階別 해당 官職을 명시 나열하고, 이들 品官 해당직이 대유할 수 있는 文散階 武散階 爵 勳官을 서술하고 있다. 勳官者 凡九品已上職事 皆帶散位 謂之本品 職事則隨才錄用 或從閑入劇 或去高就卑 遷從出入參差不定 切以門蔭結品 然後勞考進敍 武德令 職事高者解散官 次一階不至爲兼 職事卑者不解散官 貞觀令 以 散位則 職事高者爲守 職事卑者爲行 仍各帶散位 其欠一階 依舊爲兼 與當階者 皆解散官 永徽已來 缼一階者 或爲 兼 或帶散官 或爲守 參而用之 其兩職事者亦爲兼 頗相錯亂 咸亨二年 始一切爲守. 職事官資 則淸濁區分 以次補授 又以二品已上官 左右庶子 秘書少監 國子司業爲淸望官 太子左右諭德 太子左右衛率府中郞將 已上四品 諫議大夫 御史中丞 給事中 中書舍人 太子中允 中舍人 左右贊善大夫 國子博士 尙書諸司郞中 秘富丞 著作郎 太常丞 左右衛郞將 已上五品 起居郎 起居舍人 太子司議郎 尙書諸司員外郎 太子舍人 侍 御史 秘書郞 著作佐郞 太學博士 詹事丞 太子文學國子助敎 已上六品 左右補闕 殿中侍御史 太常博士 太 學助敎 已上七品 左右拾遺 監察御史 四門助敎 已上八品 爲淸官 外各以資次遷授. 武散官 舊謂之散位 不 理職務 加官而已 以門資出身者 諸嗣王郡王出身從四品下 一品子正七品上 二品子正七品下 三品子從 七品上 從三品子從七品下 正四品子正八品上 從四品子正八品下 正五品子從八品上 從五品及國公子從八品 下 二品以上蔭曾孫五品以上蔭孫 孫降子一等 曾孫降孫一等. 7) 韓㳓劤, 勳官檢校考 ( 震檀學報 29 30, 1966). 申採湜, 宋代官僚制硏究 (三英社, 1981) 宋 의 寄祿官制 참조. 8) 末松保和, 高麗初期の兩班について ( 東洋學報 )에서 태조 2년 정월에는 최소한 고려식 官階가 확립되었다고 보았다. 9) 주 8)의 論文과 朴龍雲, 高麗時代의 文散階 ( 震檀學報 52, 1981). 그리고 高麗史 권76, 百官志 序 光宗色服 규정 참조. 10) 朴天植, 高麗前期의 寺 監 沿革考 ( 全北史學 5, 1981) p. 2 참조(이후 본고에서는 寺 監 考 로 略記하기로 한다).

9 國史館論叢 第26輯 동원된 중핵을 이룬 자를 포함한 인원이다.11) 위 辛酉 人事에 補任된 31명도 3等 포상의 대상원으로 파악하여 볼 수 있다. 단 이 자체가 공신을 책봉한 조처는 전혀 아니니 오해 가 없기를 바란다. 직접적인 翊戴功을 첨기한 경우는 高麗史 의 세가와 열전 등 문헌을 통털어 30명 내외의 명열을 얻을 수 있다. 개별 기록에서 확인되는 추대유훈자는 太祖六功臣을 비롯하 여 立傳人物의 일부와 단편기록이 전하는 桓宣吉 桓香寔형제 (俔事太祖有翊戴功 史太祖 世家),(金)勤謙 寬駿 金言規(皆有宣力扶衛之功), 泰評(鹽州人 太祖開國之際有力), 柳陟良(以 珍閣省卿 當革命之際不離本省) 등이 있고, 太祖 總序의 사건 내용에서 태조 즉위 당시의 居京 官僚의 일단의 모습을 추찰할 수 있으며 이들 일부세력에 의하여 태조는 추대되었 다고 봄이 온당할 것이다. 위의 3등 포상대상 2,000여 명 중에 상당인원이 직접 정변에 참여했겠는데 그 성명을 알 수 없다. 이들이 이후 20여년 기간에 고려의 重鎭官僚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지, 나아가 高麗支配階層의 주도집단이 되어 向後 貴族化의 體制化에 어떤 비율로 포함되는 지 그 개연성을 인정하면서도 단정적 규정은 不可한 것이다. 이 밖에도 태조대에 관력과 역할을 통하여 거명된 경우도 200여 명이 있다. 이들 중 태조의 宗族과 家族員은 대체로 쿠데타에 직접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있겠으나,12) 즉위 6 日次 인사에 거명된 31명의 경우 中核官府의 首長官에 보임된 侍中 이하 10명의 令만이 佐命之勳을 이룬 자라 서술되어 있다. 태조가 등극 후 명목상의 翊戴의 勳을 칭하여 2,000여 명에 달한 泰封의 重鎭官僚를 포상한 것은 前朝臣僚를 회유하기 위한 목적이 깔 려 있는 바, 이를 論功行賞의 성격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항차 이들 2,000여 명을 開國功 臣 云云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으며 功臣法制와 이의 시행전말에 관한 沒理解를 나타낼 뿐이다.13) 太祖 23년대에 册勳된 三韓功臣 3,200여 명의 경우를 開國功臣으로 칭하는 것 도 역시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이는 학술적 개념으로나 역사적 용어로서 三韓壁上功臣 으로 命名함이 가하다.14) 太祖는 고려 창업 후 10여년은 泰封의 舊王領地(卽 中部圈)를 확보 관리하는데 전력을 경주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의 군사력의 충원과 확보지역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여야 하는 당면과제의 해결에 우선적으로 국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15) 11) 朴天植, 三韓壁上功臣의 硏究 I ( 全羅文化論叢 )(이후 본고에서는 壁上功臣硏 究 로 略記하기로 한다). 12) 宗族 三韓功臣은 王式廉 王萬歲 등의 立傳記가 있다.申瀅植, 太祖功臣의 在地分布 ( 新羅史硏 究, 1989)는 王建의 族的 기반을 고구려 유민계 西海道分居族團으로 추론한 立論이다. 13) 金光洙, 高麗 太祖의 三韓功臣 ( 史學志 7, 1973). 14) 朴天植, 앞의 논문 참조. 15) 河炫綱, 高麗 西京考 ( 歷史學報 35 36, 1967).

10 後百濟의 경우도 태봉과의 占有競爭地였던 熊州地域의 30여 읍이 弓裔의 실각으로 來 附하여 오고, 京山方面의 공략에 주력하는 등 당면한 旣得境域의 관리와 체제안주에 주력 하며 고려 후백제 간의 직접 충돌은 고려건국 후 10여년 동안 유보되고 있었다. 태조 13년 이후 본격적으로 후백제와의 충돌과 각축전이 전개되었다. 이후 16,17년 경 에는 사태가 반전되어 王建은 熊州 尙州方面에서 전승을 거두어 영유지가 확장되었다. 이 와 같은 상황에 대처하고자 17년 5월 禮山鎭에 행차하여 群邑에 반포한 詔書는 兩方面에 서의 領有地를 확장한 기반 위에 群邑을 통할하기 위한 조처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太祖 十七年 五月 乙巳 幸禮山鎭 詔曰 宜爾公卿將相 食祿之人 矜爾祿邑編戶之氓 若以 家臣無知之輩 若不改過 追其祿俸 以至終身不齒 若志切奉公 後稱名家 至於子孫 優加旌 賞 此則非但今日 傳之萬世 以爲令範( 高麗史 권2, 太祖世家). ① 위 조서는 새로이 高麗 統治圏으로 편입된 熊州地域 30여 읍과 尙州 安東地域의 群 邑의 효율적 통할을 기하기 위한 조처인 것이며, 왕의 권위를 선양한 儀典的 면을 표출한 것이다. ② 본 國領地 밖의 新編入地는 재지세력에 위임통치의 형식을 취한 것으로 이의 邑帥들을 公卿將相 食祿之人 이라 호칭 한 것이다. 이들 鉅邑은 그 나름의 官班體制를 갖 춘 경우도 있어 이들 邑帥의 官人을 家臣 으로 표현하고 있다.16) ③ 이들은 成宗 10道 行政地域圏의 편성에서 本國領地 개념이 내포된 關內道에 대하여 外方 地方槪念으로 地 方九道를 확정할 때 河南道와 嶺南道지방에 해당한다. 여기의 地方人으로 公卿將相의 대 다수와 그들의 家臣의 일부는 태조조 관료로 편입되며, 이의 中核人物은 三韓壁上功臣에 載名되고 이후 紫衫服官僚로서 士族階層의 상부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보겠다.17) 太祖 十九年 十月 王至自百濟 御威鳳樓 受文武官及百姓朝賀( 高麗史節要 권1). 여기에서 文武百官은 開京과 西京의 官府 職制에 편속되어 진 官僚 모두를 칭하는 내 용이 되겠다. 한편, 태조 후반의 시점에서 관료는 태조의 신료로서 편속된 官階가 부여된 모든 官人을 포함한다. 그런데 위의 국가의 중요 儀典에 참집한 居京人 백성의 실체는 무 엇일까? 이들은 居京人으로서 京都姓氏附籍者를 주로 지칭한 것이라 본다.18) 百姓은 뒤 16) 金光洙, 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 ( 韓國史硏究 23, 1979). 17) 본고의 처음 계획은 中部圈 地方道 編成의 내용과 전개 와 이에서 배출된 太祖功臣과 地方士 族 을 두 장으로 엮었던 것이나, 이를 分하여 별고로 작성하게 되었다. 별고는 근간 발표 예정임. 18) 高麗史 권82, 兵志 2 鎭戍, (忠肅王 5年 4月) 判 鎭邊別抄 本以前銜散職 及在京兩班 輪番赴防 近年以來 以人吏百姓代之 復以前銜散職 在京兩班 窮推輪番赴防 에서 在京兩班은 前銜官 散職官 등을 칭하고 있는데, 이는 국초 居京人 百姓의 예우로서 散官職을 널리 부여한 兩班階層化를 이룬 사정과 연계될 것이다. 따라서 忠肅王代의 居京人중의 非兩班인 百姓과 國初 居京人으로 대우가 각별했던 百姓과는 성격면에서 판이한 것이다.

11 國史館論叢 第26輯 에 다시 검토하게 된다. 2) 三韓壁上功臣과 在地勢力 필자는 고려창업의 勳勞집단인 三韓壁上功臣은 統一聖業을 완수한 기념비적 국가시책 의 일환으로 태조 23년대 에 兩京政府의 重鎭 文武官僚와 在外(地方) 散官(地方鄕豪로서 政權 形成에 영입된 官人層으로 이후 元尹 이상의 紫衫階層에 편입되는 非實職人)을 망 라한 포훈 대상자의 명열의 작성에 근거한 고려식 공신제도의 창출임을 확인한 바 있 다.19) 이들 三韓壁上功臣 3,200여 명 중 최소한의 개별 이해 자료를 제공하는 사료는 100 명 내외가 있으며, 총체적으로는 200여 명의 太祖代 官僚의 성명을 확보하고 있다. 태조조 관료군의 실체로서 三韓壁上功臣의 在地分布와 관료로서의 위상을 대체적으로 검토한 결과, 中部(關內道中心)圏域을 기반으로 하여 太祖朝 官人階層이 조성되고, 이를 주류로 하여 被征服地人인 下三道의 鄕豪와 신라의 관료(王室 측근세력 중심)를 영입하여 지배사족화를 이루게 된 내용을 확인한 바 있었다.20) 이로써 고려는 중앙에 貴族家門이 형성 발전되고, 이들의 鄕貫地에 版籍을 두어 그들의 私有地 위에 田柴科額을 分定받고 다수의 外居奴婢를 확보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가장 극명하 게 고려 사회를 貴族制的 性格 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이를 부록 I에 제시하여 참고하도록 하였다). 三韓壁上功臣을 出身地 鄕貫에 의 한 10도별 분포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표> 圈域別 太祖功臣의 名單 </표> 19) 朴天植, 앞의 논문 참조. 20) 高麗史 권121, 良吏列傳, 成宗始分十道 定郡縣置守令 自是厥後遣廉問黜陟之使 若良吏輩出而 今見於史者 惟庾碩以下 數人豈 여기서 良吏는 제시된 바 郡縣守令 廉問黜陟使 등 外官職 일반 을 칭한 것이다. 成宗이 十道를 分定한 시점에서 外官의 종류는 留守使 節度使 都護府使 都督府使 都團鍊使 團鍊使 防御使 刺使 鎭使 등이 있어 守令의 수만도 80餘에 달하였다. 이 밖에 위 守令에 좇은 副使 判官 등의 職도 京官職을 갖고 外任에 나간 外吏임을 주목하여야 한다.

12 위의 지역별 태조공신 명단에서 ① 高麗 功臣世家를 이룬 門閥貴族家門의 문헌자료와 後孫記에 태조공신으로 직접적인 표현을 확인한 명열은 1 46의 46가문을 지목할 수 있 다.21) 반면 저들은 世族을 이룬 까닭에 상대적으로 祖先인 太祖功臣의 事實記를 남겼다 고 할 수도 있다. ② 여타의 80여 인은 統合期의 功勞者로 三韓壁上功臣이 되었다고 추정 되는 인물인데, 이 중에 호족적 권능을 발휘했다고 인정 할 수 있는 자가 심히 적을 뿐 아니라 이들 가문이 고려기에 지배세력으로 위치를 확보했는지의 자료를 갖지 못하고 있 다. 이는 太祖 政權의 성격을 豪族聯合政權으로 규정하는 데 저들의 경우는 부정의 결과 가 되는 셈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시점에서 태조정권에 불복세력이 잔존하거나 회유의 대상이 될 수 있 는 鄕豪勢力이 존재하였다면, 河南道 江南道 山南道에 국한하여 이의 실체를 검토할 의의 21) 朴天植, 앞의 논문 附錄 I 太祖功臣의 出身地 及血緣系譜總覽 참조.

13 國史館論叢 第26輯 가 있을 것이다. 본 자료의 내용을 일별하여 보면 太祖功臣은 開京과 關內道圏域에 집중 되어 있으며 湖方 中原 海陽道에 다수가 보이는데, 이들은 역시 태봉 이래 30여 년 동안 國家의 中核基地로 역할을 동행한 지역인 점에서 전자와 요건이 같다. 즉 이를 弓裔 太祖 期의 國領地에서 有力豪族의 존재를 太祖末期의 시점에서 실세로 운위하거나 이를 豪族 의 독자 세력으로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無用한 것이라 판단된다. 위 표 1 은 史書에 太祖功臣으로 표기되었거나 太祖代 활동과 立傳 인물로 三韓壁 上功臣에 해당한 것으로 간주한 出身地域別 명열인 바 고려기 大地緣圈 개념을 적용한 분포이다. 그 특징은 ① 地域別 편차가 매우 크게 배분되어 있다. 泰封의 國領地로 확정되었던 浿西道(初期에는 黃州圈 16餘 邑이 西京圈과 함께 浿西道를 형성하였다) (西海道와 楊廣 道가 합쳐진)關內道 朔方道 中原道에 해당한 中部圈 지역에 太祖功臣이 집중적으로 배출 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태조등장기에 동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태조 23년의 시점에 서 소급하여 보면 30여 년간 동일국가의 결속체를 경험한 세력으로 고려초기의 實權利益 집단이라 할 수 있다. ② 後三國 分立期에 반신라적 土着氏族勢力이 비교적 강하게 대두 된 河南道 江南道 嶺南道 山南道의 경우 在鄕勢力의 고려에 편입, 이후의 정치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불리하였을 것이다. 2. 高麗政治勢力으로서의 在地士族의 充員 推移 1) 光宗代 政治勢力과 專制體制化 徐弼은 光宗 初期의 重臣으로 宰臣 王咸敏 皇甫光謙과 더불어 광종기 국가체제의 劃期 的인 정돈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22) 서필의 아들 徐熙도 光宗 後期의 重臣으로 要 務를 장악하였다. 三韓壁上功臣 徐弼에 기반한 利川徐氏系는 고려 창업의 공훈집단에 속 하며 宰相家로서 가문이 번성한 전형적인 문벌귀족화를 이룩하였다.23) 광종 후기의 대대적인 國家體制整備도 新進官僚의 대확충을 보게 되었다.24) 특히 羅末 에 入唐留學者와 中國居留民의 귀환 入仕를 특징으로 하는 바,25) 張儒는 다음의 열전에 제시되어 있듯이 在中國 韓人으로 文名을 갖춘 인물로 귀국하여 고려관인으로 활동한 예 이다. 아들 張延祐가 顯宗衛社功臣이 되어 고려의 世臣大族으로 대두한 非太祖功臣家의 예라 할 수 있다. 22) 高麗史 권93, 徐弼전. 23) 高麗史 권94, 徐熙전. 24) 朴天植, 寺 監考 참조. 25) 申瀅植, 宿衛學生考 ( 歷史敎育 11 12, 1969).

14 - 53 後還國 光宗 以解華語 累授客省 每中國使至 必使 延祐 瀛州尙質縣人 新羅末 父儒 避難吳越 儒擯接之 延祐 長於吏事 以幹能稱 後以戶部尙書 卒贈尙書右僕射( 高麗史 권94, 張延祐전). 위에서 관향을 영주 상질현인 으로 표기한 것은 고려전기의 지방개념을 단적으로 나타 내고 있어 주목된다.26) 영주는 地理志의 표기에서 광종 때 瀛州觀察使邑으로 인접한 群 邑을 領管하는 界首邑이었다(顯宗制에서는 屬郡 1, 屬縣 6을 통할). 고려의 지방제도는 中 核圈域을 편제로 한 특성을 가지며, 이는 지방의 정치 사회 문화 단위로서 이의 기능과 實勢化를 발휘한 사회체제임을 방증한다. 張儒의 後孫 興德張氏는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湖南望族 으로 고려 조선에 걸쳐 鉅門 을 이어온 점이 강조되고 있다.27) 光宗代 정치 활동에 있어 崔承老가 지적한 南北庸人 新進之輩 의 부류의 한 유형은 下 三道 在鄕勢力의 현저한 중앙관료로의 진출현상을 지목한 것으로, 예로는 翰林院令 平章 事 太子師傅를 역임 한 崔彥撝와 네 아들 光胤 行歸 光遠 行宗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이 들은 광종의 총신으로 지목된다. 특히 光胤 行歸는 入唐留學人으로 귀환하여 활동하였고, 光遠의 아들 崔沆은 顯宗配享功臣으로 高麗의 鉅門貴族家의 典型을 이루게 되었다.28) 光宗代의 文風의 진흥에 대한 후대의 예찬은 끊이지 않았다. 破閑集 序에 高麗文 運와 진흥을 광종대에서 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我本朝以人文化成 賢儁間出 賛揚風化 光宗顯德五年(985 : 光宗 9) 始關春衛 擧賢良文 學之士玄鶴來儀 時則王融 趙翼 徐熙 金策 才之椎者也. 위의 王融 趙翼 徐熙 金策 등은 太祖功臣계열로 보겠으며 光宗朝의 重臣으로 文柄을 장 악한 인물들이다. 地方士族출신의 科擧官僚로서 韓彥恭 柳邦憲은 宰輔에 현달하여 전형적 26) 出身地 鄕貫을 표기 할 때 首都邑名稱을 병기하여 中核 권역개념을 표출한 예는 列傳에 산재한다. 예컨대 金審言 및 田拱之(靜州 靈光縣人), 劉瑨(忠州 大原縣人), 張延祐(瀛州 尙質縣人), 郭元(淸州 上黨縣人), 姜民瞻(晋州 晋康人), 金猛(梁州 宜春縣人), 尹徵古(樹州 守安縣人), 康宗配亨功臣 鄭克 溫(全州 尙質縣人)이다. 27) 朴天植, 高麗時代 地方人의 中央進出과 全北士族의 編成 ( 全羅文化論叢 4, 1990). 28) 高麗史 권93, 崔沆전, 祖 平章事 彥撝(及太祖開國契家以來) 成宗 年二十 登甲科右拾遺知制誥 內史舍人(請仍復設八關會) 穆宗 再知貢擧 吏部侍郎 中樞院使 與蔡忠順等 定策迎立顯宗(顯宗)敎曰 具官 崔沆 明識高才 可授政堂文學 以爲寡人師傅 三年 遷吏部尙書 參知政事 監修國史 七年 拜內 史侍郞 十-年 賜 推忠盡節衛社功臣號 十二年 檢校太傅 守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淸河縣開國子 食邑五百戶 加守正功臣號 十五年 王親臨問疾 授子有字 校書郞 壻李作忠 服 及卒贈諡節義 賻緝 三百匹 布五百匹 麥各 千石 計月請俸 家無擔石之儲 配顯宗廟庭 德宗 二年 贈正匡靖宗 加贈侍 中 値沆忌日 令設場玄化寺 文宗 十四年 以忌祭 內史門下奏 請授有孚三品職勿令補外 二一年 又加贈 守太師 兼中書令.

15 國史館論叢 第26輯 인 문벌귀족가로 대두한 예라 하겠다. 한편, 崔承老의 五朝政績評은 景宗政權의 파행상을 지목하고 專制王權의 體制整備의 방향을 수립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온 의도적 비판론인 면이 짙다. 관념적 진술이 아닌 정치 사회적 실상에 대응한 실질 내용을 음미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29) 이는 뒤에 光宗期 政治 政局 에서 재론하기로 한다. 2) 成宗 顯宗期에 있어 功臣世家의 造成과 在地士族의 대두 成宗期에 있어 太廟의 조성과 아울러 配享功臣에 택정된 11位는 太祖功臣 중 五朝에 功效를 이룩한 인물이었고, 이 중 成宗配享功臣은 崔亮 崔承老 2人이 穆宗 1년 4월에 성 종의 太廟祔祭와 때를 같이 하여 配位되고, 顯宗 18년 太廟가 소실된 후 이의 복구 再造 營을 성대하게 이루면서 成宗配享功臣으로 李夢游 徐弼 李知白 등 3인을 추가하여 五位가 봉안되었다. 이는 성종대 정치세력의 형성과 실세를 반영한 한 경향을 표출한 것이다.30) 崔承老 父子는 太祖의 각별한 恩寵을 입은 創業功臣家門으로 자손들도 宰相名門이 되 어 高麗典型의 문벌귀족으로 군림하였다. 崔承老( )는 12세 때 太祖가 召見하여 元鳳省學生에 예속시킨 바 文柄을 委任하였다. 光宗朝에도 文翰官을 역임한 寵臣이었 다.31) 景宗 6년(981) 3월 眞鑑禪師碑의 비문이 만들어 질 당시 崔承老는 한림학사로 光宗 의 寵臣임을 알 수 있다. 成宗 원년(982) 正匡 行選官御事, 이듬해 에는 門下侍郞平章事, 同王 7년(988)에는 門下守侍中이 되고 그 이듬해에 사망했다.32) 한편 徐熙系와 崔承老系 의 兩大政治勢力이 對立競爭하여 成宗政治, 즉 高麗의 體制確立의 주역이 된다는 견해가 있을 만큼 兩勢力은 고려의 權門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33) 이들 兩家는 太祖功臣家門 으로 발흥하여 거듭 配享功臣을 배출한, 공히 고려전기의 功臣世家의 모델이 된다. 李夢游는 光宗 16년(965) 당시 翰林學士 前兵部卿으로서 聞慶 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의 비문을 製撰한 인물이다. 成宗 2년(983)의 관직은 左執政이었는데, 이것은 成宗代 宮庭 政府機構로 강화된 內史門下省의 總帥職인 左右執政이다. 그는 제 12회 과거의 知貢擧로, 986년 3월과 987년 3월에 실시된 제 15회, 제 16회 과거의 지공거로도 활동했다. 또한 그 는 987년 8월에 왕명을 받들어 中外 奏狀과 行移 公文의 式을 詳定했던 총신으로 후에 成宗配享功臣이 되었다.34) 政府기구인 內史門下省은 절을 바꾸어 논구하겠다. 29) 朴天植, 寺 監考 p. 27 참조. 30) 朴天植, 高麗 配享功臣의 制度的 性格과 그 特性 ( 全羅文化論叢 3, 1989)(이후 본고에서는 配享功臣의 特性 으로 略記함) p. 42 참조. 31) 高麗史 권93, 崔承老전. 32) 朝鮮金石總覽 上, 眞鑑禪師碑. 33) 李基白, 高麗 成宗代의 政治的 支配勢力 ( 한국사 4, 1974). 34) 朴天植, 配享功臣의 特性 참조.

16 德宗 1년에 顯宗配享功臣에 配位된 姜邯贊 崔沆은 兩人 列傳에서 소상히 행적을 알 수 있거니와 顯宗代의 兩寵臣으로 三韓壁上功臣 姜弓珍 崔彥撝에 기반한 世家출신이다. 반면 文宗 6년에 현종配享功臣에 追配된 崔士威 王可道는 太祖功臣家의 출신이 아니나,35) 재지 사족으로 과거를 통하여 현달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功臣世家를 이루어 고려전기의 문 벌귀족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유형에 해당한 재지사족의 진출에 의한 세족의 형성 예로는 成宗配享功臣 李知白, 穆宗配享功臣 韓彥恭 金承祥 등이 해당한다고 보겠다.36) 3) 文宗政權의 體制整頓과 世族의 육성 文宗朝에는 太祖 이래 宿願이던 北方問題가 安定的으로 해결되었고, 나아가 對外問題 에 있어서도 宋 遼를 調整하는 等距離 外交를 구사하는 등 역사상 드문 平安時代가 정착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문제에 있어서도 이른바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시대상이 도래한 것이니, 그 단적인 예로서 玄化寺 등의 大刹造營과 大蔵經再造事業, 義天을 내세운 王室 主導下의 사상의 統合化 등등, 가히 문화의 창성함은 宋 高麗 遼 竝立時代를 맞아 東北亞 文化의 隆興期를 맞은 것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王朝政權이 極盛期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이에 편승한 事大政策의 표방은 高麗專制王權의 체제를 강화하는 유리한 정책의 하나로 채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37) 兩班功蔭田柴科 에 관한 필자의 연구 내용을 요약하면 : ① 1 品功蔭田柴(合田40結 田 50結을 줄인 것)의 지급대 상을 功勳一等級者와 官職序列 門下侍郞 이상관으로 적용하였 다. ② 2품공음전시액(合田 34결 田40결을 줄인 것)의 수혜는 功勳二等級者에 더하여 參 知政事 이상관에게 혜택을 줄 뿐 아니라, ③ 序例 同級 이상의 散官, 즉 檢校職官까지도 減5結한 田柴額을 받도록 하였다. ④ 한편 공음전을 5품으로 나눈 것은 太祖代의 褒勳 4 35) 朴龍雲, 高麗時代 水州崔氏家門 分析 ( 史叢 26, 1982) 참조. 淸州 李可道에 대해서는 앞의 配享功臣의 特性 p. 42 참조. 36) 朴天植, 配享功臣의 特性 pp 참조. 37) 高麗史節要 文宗代 기사 중 공신대우책 관계 사료로 다음의 내용이 주목된다. ① 文宗 卽位 11月 制曰 楊規 金叔興 等 俱沒陳下 追念其功 合行褒獎 可圈形功臣閣 以權後來. ②文宗 9년 8월 吏部奏 檢校將作少監庾恭義 大匡黔弼之曾孫 前有所犯 久滞散秩 曾降制旨 太祖配享 功臣之後 雖有罪犯幷須敍用 今恭義 宜授肅州防禦使 門下省奏 恭義 曾犯諂諛 名載罪籍不可敍用 從之. ③ 文宗 10년 정월 禮官言 大朝祭器 年久破缺 不堪陳用 命御史臺焚埋 ④ 文宗 10년 2월 有司奏 沒蕃人廉可稱 三韓功臣邢明之孫 淸寧元年正月(文宗 9) 携子亡來其父祖永 業田 舍 幷宜還給 從之. ⑤ 文宗 12년 5월 制 工部尙書庾逵 子仲卿降等授蔭職 門下侍中李子淵等 駁曰 仲卿母 是平章事李襲 奸兄女所生 仲卿 不宜齒於朝列 平章事金元鼎等議 此乃李襲之罪 非仲卿父子所犯 旦功臣黔弼之裔 不 宜防塞仕塗 請依前制 降授蔭職 王從元鼎等議 子淵等又奏 製述業康師厚 十擧不中 例依甲午年 赦 (1054 : 文宗 8) 當脫麻 然師厚儒林郎堂引上貴之曾孫 堂引是驅史之官 戊子年(1048, 文宗 2) 制旨 電 吏所由 注膳幕士 驅史 門僕子孫 工於製述 明經 律 書 算 醫 卜 地理業登科 或兵陣之下 成大功者 許陞 朝行 又准丙申年 別制(1956, 文宗 10) 上項人子孫蒙恩入仕者 合依父祖仕路量授.

17 國史館論叢 第26輯 等制의 관행을 변경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싶다. 문종대에는 功臣 褒勳制度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제도적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38) 고려 공신제도의 발전 정비과정을 체제적인 면에서 ① 太祖의 立案期 ② 成宗의 規制 內容의 정돈기 ③ 顯宗의 準法制化 확충기로 전개되었다고 보며 ④ 文宗期의 완성기에 짝하여 功臣制度의 질적 확립기가 출현 전개된 것이라 하겠다. 文宗代의 공신제도의 질적 전환은 일차적으로 國初 以來의 正功臣에 관한 위상을 정립한 면을 보여준다. 그 단적인 조처는 三韓功臣 千明 등 3,200명의 관작을 추증한 내용으로, 이것은 三韓壁上功臣 을 法 制的 의미의 正功臣 의 체계를 정립한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39) 文宗代의 포훈책을 몇 가지 소개하면, ① 顯宗代의 對契丹戰 首勳功臣인 楊規와 金叔 與을 壁上功臣으로 格上한 조처를 취하였으며, ② 太廟儀를 융숭하게 한 노력의 한 면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配享功臣체제의 강화와 무관치 않다. 同 6년에 崔士威를 顯宗配享功 臣에 추가하고, 太祖 6功臣의 全子孫에게 初授 또는 增給의 施惠를 주는 등 공신우대책을 강화하고 있다.40) ③ 人事행정에 있어 太祖配享功臣 庾黔弼의 曾孫 庾恭義는 罪案에 등 재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肅州防禦使에 임용되고 庾仲卿은 先系의 法制的 혼구가 지적 되어 蔭職敍用의 논의가 발생하였는데, 전래의 功臣家系라도 결함이 있으면 인사에 막대 한 지장이 있었던 관행을 완화하여 공신후손인 점을 들어 門蔭敍用의 혜택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文宗政權이 安定化된 바탕 위에 保守體制를 강화한 일면 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④ 이의 일환으로 功勳者에 대한 子孫永業田인 功蔭田柴科 의 개정과 功臣册封의 확대, 上級官僚(參知政事 以上官)에 대한 勳 勞에 대한 응분의 대 우강화, 先代功臣과 配享功臣에 대한 追贈官爵의 여행 등으로 門閥貴族體制의 획기적인 정비를 이루었다고 하겠다.41) 4) 肅宗朝 政治勢力의 改編 補强의 推移 肅宗은 조카 睿宗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하였다. 그 수종집단으로서 前代의 主導勢力과 는 이질성을 보이는 대립세력으로 간주되는 江陵金氏의 兩系派인(肅宗 1년) 參知政事 왕 국모系와(이와 연관성을 갖는지 미상함) 金上琦系가 부상되었다.42) 또 尹灌 吳延寵으로 대표되는 關內 京畿出身人으로 舊家勢力이 보강되고 있다. 38) 朴天植, 高麗史 食貨志 功蔭田柴 의 檢討 ( 全北史學 7, 1983)(이후 본고에서는 功蔭田柴 의 檢討 로 略記함). 39) 朴天植, 壁上功臣 硏究 참조. 40) 高麗史 권7, 文宗世家. 41) 朴天植, 功蔭田柴 의 檢討 참조. 42) 朴天植, 配享功臣의 特性 pp 참조.

18 肅宗朝 權臣家로는 江陵金氏의 한 派系에 宣宗配享功臣 金上琦와 睿宗配享功臣 金仁存 을 배출한 名家가 형성되고 閥族하였다. 金仁存 열전에 의하면 祖先을 金周元(新羅代 溟 州郡王)에 연원하고 있는데, 金周元 後孫 중 國初에는 三韓壁上功臣이 배출된 功臣世家로 太祖 妃父 內史令 王乂의 家閥이 떨치었다.43) 또 江陵 金順式(改名 王景)은 太祖의 後百 濟 攻滅에 막강한 군사력으로 補功한 三韓壁上功臣이니,44) 적어도 金周元의 후손 系派 중 위의 셋은 고려의 유수한 문벌귀족가문이 된다. 그러나 이들 3자 간의 盛勢는 시대에 따라 부침이 있기 마련이었다. 또 同種 중의 肅宗配享功臣 왕국모는 麗初의 三韓壁上功臣 으로 宰相家를 이룬 王乂나 王景의 直孫이 아닌 다른 系派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王國 髦는 肅宗의 탈권과 維新政治를 주도한 병권의 장악자로 대두한 것이었다.45) 숙종기 정치세력이 兵權强化와 이의 확보를 통하여 對女眞征伐의 戰况을 유발하면서 왕권의 안정화를 도모한 경향을 띠어 武功勢力은 그 나름의 확장을 보이고 있었다. 이의 표본이 尹瓘系 坡平尹氏의 벌족화를 이루게 된다. 肅宗代의 庭臣職인 參知政事나 同平章事의 관력을 지닌 이들 중에 新進勢力의 非門閥 관료가 중용되었던 현상을 보게 되는데, 康拯 許慶 文冠 등의 高麗史 에 立傳된 인물 의 경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康拯 西海永康縣人 家世微 無技能 然操心勤謹 祖仁祐死國事 例補良醞史 爲吏投十年 加軍 器注簿同正 出爲寧仁鎭判官 與女眞戰 累有功 肅宗初 除監察御史 睿宗 (討) 女眞 以左軍 十二年以中書侍郞平章事致 知兵馬事從之有功 歷御史大夫 刑戶二部尙書左僕射 進參知政事 仕 十五年卒(年 72 ( 高麗史 권97, 康拯전). 許慶 中第 以文學顯 肅宗在潛邸 引爲府寮 及卽位 拜承宣 出入禁中恩渥殊異 睿宗初 歷二 八年 加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 仍令致仕 十年卒 終始一節爲朝廷所重 部尙書參知政事 子曰說 曰開先曰謙( 高麗史 권97, 許慶전). 文冠 旌善縣人 父林幹 太子少傅 冠 文宗朝 中第 與女眞戰于草堤有功 肅宗初 拜禮部員 外郎(歷 諫議大夫 睿宗 從尹瓘征女眞 遷吏部尙書 又從吳廷寵 以功王諭之擢用 六年 守 以老致仕 明年卒(年 71)( 高麗史 권97, 文冠전. 司空 參知政事 43) 高麗史 권26, 元宗 11 年 5 月 甲子 柳璥 平章事金佺 自江華來謁. 高麗史 권27, 元宗 12 年 正月 庚午 門下侍中李藏用 參知政事崔瑛 坐與謀林衍廢立免 丁亥 流前平章事柳璥于哀島(丙甲 璥爲命議侍郞贊成事 監修國史 判版圖司事) 3月 癸巳 召還柳璥 兪千遇 高麗史 권27, 元宗 丁亥 門下侍中李藏用卒 高麗史 권28, 忠烈王卽位 10月 乙巳 金侁爲左軍使 潘阜爲副使 號三翼軍 征日本 多敗 金侁溺死 戊申 李汾成 知御史臺事. 高麗史 권30, 忠烈王 卽位 庚戌 以宋松禮 爲忠淸道指揮使. 44) 朴天植, 壁上功臣 硏究 p. 47 참조. 45) 高麗史 권95, 邵台輔 附王國髦전

19 國史館論叢 第26輯 康拯은 그의 祖 仁祐가 衛社의 勳을 이룬 門蔭으로 入仕의 은택을 입어 例補되었으나, 혜택을 십분 누리지 못하다가 肅宗의 등극기에 당하여 女眞討伐의 功力이 인정되어 탁용 된 경우였다. 같은 경우로 旌善人 文冠의 행로 또한 비슷하며 尹瓘 吳延寵과 더불어 女眞 討伐의 首勳者로서 宰輔에 현달하였다. 위 두 사람의 출신성분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門閥貴族勢力의 극성기에 肅宗政權은 왕권강화의 획기적인 정책 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정권을 주도한 총신이나 康拯 文冠 등의 경우에서 재지사족의 대 두로 중앙귀족세력의 개편 확충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許慶은 潛邸時의 府僚로 발신 하여 총신으로 왕이 親臨하는 政府의 議決을 주장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肅宗朝 政治勢力이 그대로 이행된 睿宗朝에 있어 太廟配享功臣을 일별하여 보면, 崔冲 의 子인 肅宗配享功臣 崔思諏를 제외한 睿宗室의 李靖恭, 宣宗室의 文正 柳洪 金上琦, 肅 宗室의 邵台輔 王國髦 등은 門閥이 알려진 家門出身이 아니었다. 예종에 의해서 숙종배향 공신에 택정된 이들의 정치적 역할은 왕실에의 勳勞를 무엇보다 우선에 둔 배려였다고 생각된다.46) 팽배한 귀족세력을 견제 조정하고 왕실의 忠僕勢力을 육성하려는 시책은 睿 宗政治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魏繼廷은 睿宗配享功臣이 된 당대의 대표적 權臣인데, 非門閥貴族系로 新進在鄕士族의 대두현상에 좇은 면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로 지목할 수 있다. 故門下侍中 魏繼廷 配享睿宗 敎書; ① 三重大匡 ② 檢校太師 ③ 守太保 ④ 開府儀同三 司 ⑤ 門下侍中 ⑥ 上柱國 某는 英陵이 승하하고 睿考가 즉위 하던 날을 당하여 큰 基 사이에는 風節을 회상하는 자가 많다. 從祀하는 儀禮를 행 業을 도왔으니, 지금까지 搢紳 하고 이름을 바꾸는 ⑦ (筆者 : 贈諡) 은전을 행한다( 東文選 권23, 郭東珣 奉撰 敎書). 위 사료에서 官銜體系는 ① 鄕職階 三重大匡 ② 散官 檢校太師 ③ 職階 守太保 ④ 文 散階 從一品階에 해당한 開府儀同三司 ⑤ (本 實職) 門下侍中 ⑥ 勳은 上柱國으로 표식되 어 있다. 여기에 빠진 것은 ⑦ 贈謚 忠烈이 사후 책정된 때문이고, 다른 사람의 경우 功 臣號를 받으면 첫번째에 공신호가 제시되며 爵을 받을 수가 있다. 高麗 散官銜體系에 대 하여는 Ⅳ장 Ⅲ절에서 다루게 되는 바 鄕職階 16階 중 上位 三重大匡 重大匡 佐丞 등은 이 때에 勳 爵의 기능을 갖는다. 仁宗代에는 貴族亂과 西京叛亂을 치루고 일련의 국가체계의 정비강화정책이 추진되었 다. 그 하나는 新進地方士族의 중앙관료로의 진출문호가 보다 개방적이게 하였다.47) 이의 46) 朴天植, 配享功臣의 特性 pp 참조. 47) 朴性鳳, 高麗仁宗期의 兩亂과 貴族社會의 推移 ( 高麗史의 諸問題, 1986) 참조. 朴天植, 高 麗時代 地方人의 中央進出과 全北士族의 編成 pp Ⅲ장 明宗代 政治勢力과 地方勢力의 대두 참조. 본고에서 (2) 全州崔氏 崔均派의 대두, (3) 全州崔氏 崔群玉家系를 분석 검토하였다.

20 典範으로 볼 수 있는 全州崔氏 중 派系를 달리하는 完山三崔 의 경우를 보자 崔陟卿 完山吏 登第 毅宗初補京山府判官 秩滿還京 十餘年 崔允儀聞其淸直 欲授耽羅 令 及還允嫌已死 陟卿貧甚無以自存 將還鄕 會全羅按察使馳奏 王曰 有賢如此何不用之 召 賜綾絹 卽除耽羅令 明宗元年 召還轉監察御史 拜左正言知制誥 出爲二道按察使 累歷禮部 侍郎 秘書監 淸名勁節 老而不衰 十六年卒 初侍郎朴椿齡守完山 以聯句選群童 得陟卿 崔均 崔松年 及遞還與之偕勸令就學 後三人皆爲名士 時號完山三崔( 高麗史 권99, 崔陟卿전). 위 사료의 초두에 최척경은 出身을 完山吏로 파악하고 登科하여 관직을 역임한 내력을 적었다. 한편 말미의 내용은 소시에 全州府使 박춘령이 아동을 試選할 때 崔陟卿 崔均 崔 松年을 뽑은 바 있더니, 뒤에 京師國學에 취학케 하여 이들이 모두 과거에 등과하여 文名 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앞에 쓴 完山吏는 최척경 본인이 鄕吏란 표현은 아니고 그의 家(父 祖)가 鄕吏役을 受任한 家統임을 표기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崔陟卿의 後代는 그 族勢를 알 수 없다. 반면 崔均 崔松年의 경우는 全州의 兩 代名門家에 해당한 閥族을 이룩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들은 엄연한 在鄕士族의 출신에서 起身하여 중앙의 門閥貴族家門을 이룩한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 것이다 崔均은 明宗 4년 東蕃亂(趙位寵의 西京亂)에 宣諭使로서 적도에게 被禍된 衛社功臣이 다.48) 아들 최보순은 要職인 政府(中書)의 인사권을 담당한 보직에 임용되어 탁월하게 임 무를 수행한 일이 예찬되고 있다. 한편, 崔忠獻執政期에 있은 만연된 지방란을 진압하는 데 擢異한 공을 세운 바, 이후 특진의 연속으로 정권의 幾要職을 累遷하고 있다. 崔瑀執 政期에는 政府의 實務要職인 參知政事에 임용되고 그간 네차례에 걸쳐 知貢擧로서 春場 을 관장하기도 하였다.49) 다음의 立傳記를 통하여 高麗後期의 累代功臣 宰相之宗 家閥의 실상을 극명하게 볼 수 있다. 崔誠之 字純夫 凡五易名阜璫琇實 平章事甫淳四世孫也 父毗一官至賛成事 誠之未弱冠登 第 入補史翰選爲春宮屬 從忠宣如元 定內亂擁立武宗 誠之居左右多所賛襄 拜知監察司事 奉策命還國 忠宜卽位 常與權漢功等召見無時 及葬慶陵 是日執義 李彥冲辭王命(在封陵 者不吉故) 誠之押封 遷 同知密直司事大司憲 轉僉議評理 進賛成事 賜推誠亮節功臣號 封 光陽君 忠肅七年 元流忠宜于吐蕃 時誠之從 唯直寶文閣朴仁幹 大護軍張元祉等 十八人從 至流所 時人以爲誠之大臣也 時國人分黨相訴朝廷議立省 誠之與金廷美 李齊賢等 不肯署 48) 朴天植, 앞의 논문 pp 참조. 衛社功臣 崔均을 始祖로 삼은 全州崔氏는 二世 崔瑀 집정 체 제에서 首相을 역임한 甫淳代에 명실상부한 功臣宰相家門 으로서의 立地를 확립하게 된다. 49) 高麗史 권99, 崔均附 崔甫淳전. 崔甫淳派 完山崔氏家門의 分析에 대하여 筆者의 앞의 논문 pp (2) 全州崔氏 崔均派의 대두 참조.

21 國史館論叢 第26輯 名(저지) 忠肅十一年 乞退 居七年卒 年六十六 謚文簡(得授時曆術東還 其學至今遵用之) 子文度字羲民 以世家子 宿衛元朝 樂觀濂洛 性理之書 事親孝性溫良 人未嘗見 官至命議 參理 謚良敬 子思儉( 高麗史 권108, 崔誠之전 附崔文度전). 明宗朝 衛社功臣 崔均에 기반한 閥族化의 모습은 高麗史 에서 崔均과 忠宣王代 寵 臣인 僉議評理 光陽君 崔誠之의 열전에서 확인된 이후, 역대에 재상을 배출한 完山君 門 下贊成 崔思儉과 그 자 손의 계보에서도 貴族家門의 번성한 모습이 완연하다. 麗末의 世 臣大族들은 상당한 수의 가문이 朝鮮建國期에도 朝鮮開國功臣 開國原從功臣의 반열에 올 라 명가의 위세를 유지하였다. 종래 조선건국세력에 대한 麗末의 新興武家와 新興士大夫 에 의한 朝鮮의 創業 설이 전면 재검토되었거니와 高麗後期의 世家의 실상을 극명하게 알 수 있는 사례의 하나로 주목된다.50) 5) 武人執政期 政治勢力의 擴充 仁宗後半에서 毅宗代에 이어지는 정치세력은 귀족세력의 安定化 현상(慶州 金富軾 金 仁存의 후손, 鐵原崔氏 一門, 水原崔氏 一門, 坡平 尹彥頤系의 閥族化, 淸州李氏의 지속적 번성, 여러 三韓壁上功臣家의 부상 등등)과 왕실측근의 定安任氏 南平文氏와 그(全羅道人) 姻戚 政治人의 확장, 이에 못지않은 地方士族의 中央官僚化가 활기를 띠고 있다. 무엇보 다도 顯宗期를 통하여 戰功武人勢力이 확대되어 多數한 功, 즉 力 勳을 이룬 功蔭田 수 혜자가 늘게 되었던 것이며, 이들 武班에 대한 실질적 대우향상은 文宗 更定 田柴科 의 중 요한 특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51) 明宗 27년 기간은 武斷政權의 自己抗爭으로 점철된다. ① 李義方 文克謙 庾資諒 등이 武人政權의 성립을 주도하더니, ② 鄭仲夫의 重房政治현상으로 이행되고, ③慶大升의 숙 청작업과 文臣連帶정책이 일시적으로 재흥 모색되기도 하였으며, ④ 이러한 과정에서 무 인의 총망을 모아 주도권을 집중하게 된 杜景升 등의 武人聯政이 펼쳐지고, ⑤ 이의 취약 성과 통치력의 강화모색으로 출현한 李義旼 杜景升 二人執政이 형성되며, ⑧ 崔忠獻의 李義旼 타도정변 의 성공으로 新舊功臣世家의 연결과 新興 地方士族의 居京勢力 규합의 50) 朴天植, 高麗建國의 政治勢力硏究 上 下 ( 全北史學 8 9, 1985). 開國原從功臣 張寬錄券의 檢討 ( 史學硏究 38, 韓國史學會, 1986) 참조. 韓永愚, 朝鮮社會史硏究 (改定本, 1988). 氏는 朝鮮建國 주체가 武將 新興士大夫라는 대표적 立論家이었다. 본서 개정판을 내면서 朝鮮開國功臣 의 분석을 추가한 論稿에서 이전의 한국사 에 개진한 종래 立論을 전면 수정하였다. 麗末의 武 將勢力의 분석과 이들의 政治的 向背에 대하여는 필자의 다음 논문 高麗 禑王代의 政治勢力과 그 推移 ( 全北史學 4, 1980), 戊辰回軍功臣의 册封顚末과 그 性格 全北史學 3, 1979) 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51) 朴天植, 功蔭田柴의 檢討 참조.

22 구도로써 명종기 정치세력은 이행되었다.52) 武人執政 初期의 文臣 文克謙 庾資諒의 역할을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다. 무인집정을 疾視한 史筆의 내용과 실제 상황과는 상당한 견해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李仁老는 破閑集 에 文克謙을 찬양하여 毅宗은 모두 泰平의 業이 泰山같이 편안하다 하여 敢 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文克謙만이 잘못을 탄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고 서술하였다. 무인집정기의 활동인물은 明宗 世家만으로도 3품 이상관의 행적과 任免記는 連人員 280여 명, 實人名 120여 명이 확인되며 官僚勢力의 大擴張을 이룬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 고 있다.53) 한편, 武人執政期 諸王의 配享功臣은 全羅道 貫鄕人인 庾弼(茂松人), 文公元 文克謙(南 平人), 任濡(定安人), 鄭克溫(全州 尙質人), 李杭(全州?) 등이 配享功臣의 半數를 점유한 것도 武人執政體制가 全羅道 士族의 현저한 대두와 궤를 같이 한 현상이라 하겠다.54) 이 밖에 尹麟瞻(坡平人), 崔詵(鐵原人), 崔允儀(海州人) 등의 전형적인 문벌귀족가문이 있는가 하면, 趙永仁 趙冲(橫城人), 金就礪(彥陽人), 李世材(未詳?), 蔡湞(平康人) 등의 경우는 무 인정권의 戰力功臣家 에 근거한 신흥 문벌가문의 형성을 보이고 있다. 무인집정기에 전대 문벌귀족의 몰락과 在地勢力의 대두현상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55) 그러나 明宗 元宗 期間의 政治支配勢力의 경향을 武人의 독주현상으로 단순화하기 보다는 前記한 地方士族 의 充員 狀况에 부합한 해석이 가능하다. 6) 中央貴族家와 版籍鄕貫地의 在地士族 高麗 國初 이래 統合戰爭의 공로집단은 정치권력의 부침에 따라 성쇠가 무상하였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이의 가문은 국가로부터 준법제적인 지배신분으로서 士族 을 보장받 았고, 이미 그 사례를 풍부하게 접할 수 있었듯이, 이들 중 累世功臣 宰相之宗 을 형성한 경우가 많다. 太祖配享功臣 庾黔弼의 家는 이의 표본적인 門閥貴族으로 毅宗配享功臣 侍 中 庾弼에 이어 庾資諒은 明宗朝 武人執政體制에서 宰輔에 현달하여 정국을 운영한 저문 된 문벌귀족의 사례가 된다.56) 茂松을 貫鄕으로 하는 이들의 지방기반을 주목해 보고자 한다. 52) 邊太燮, 武臣亂과 崔氏政權의 成立 ( 한국사 7, 1973). 53) 高麗史 권19 20, 明宗世家. 54) 朴天植, 配享功臣의 特性 pp 참조. 55) 邊太燮, 앞의 논문. 高麗史 권27, 元宗 14년 정월 壬午 馬絳與大將軍宋玢 巡視近道戰艦. 3월 庚午 馬絳還 以大將軍宋玢伴行. 14년 정월 甲子 以元傅 張佶 竝爲中書侍郞平章事 金鍊 知門下 省事(忠烈 4년 6월 參知政事 卒)(同 9월 辛巳 張佶卒). 6월 辛酉 王至元帝 王上書中書省 辨韋得 儒 盧進義 誣罔 王還. 56) 高麗史 권99, 庾應圭 附庾資諒전.

23 國史館論叢 第26輯 銀靑光祿大夫 左僕射致仕 庾(資諒) 庚午(1150, 毅宗 4) 庾氏源于錦城之茂松在版籍爲甲 而 公其出也 曾祖某 檢校太子詹事 祖某 檢校太子大師 考諱某(弼 配享功臣) 門下侍中 修文殿大 公欲引虎官御 牽龍行首 學士效判部事 贈恭肅公 毅廟時山東寢盛 年十六與貴門子弟約爲契 吳光戚 李光等與焉 累歷 以宰相子 直補守宮署丞 癸酉(1213, 康宗 2) 引年 以銀靑光祿大夫 左僕射 得謝家居己丑(1229, 高宗 16) 卒年 八十 娶左承金存中女 生三子 學諭早卒 次今爲判 大僕事 知御史臺史寶文直學士知制誥( 李相國集 권36, 庾(資諒)公墓誌). 고려 名門에 해당하는 庾資諒家는 묘지에 적시한 바 錦城之茂松人 으로 在版籍爲甲 이 라 했다. 이는 茂松의 유력한 사족으로서 명망을 유지해 오고 있으며, 별단의 사족으로서 戶口籍을 茂松에 두고 있는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鄕貫地에 版籍을 두어 地方有力士族으 로 행세하던 중앙귀족세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제시 설명하고 있다. 한편, 庾資諒은 16세에 貴門子弟와(뒤에 樞密宰相으로서 무인집정의 실력자가 되는) 吳 光戚 李光 등의 武班人들과 契를 맺었던 일이 특기되어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文 武家 의 交結이 보편적 현상임을 볼 수 있는 점과,57) 앞에서 검토하였듯이 戰力功勳家에 기반 한 武班世家의 대두를 상정하여 볼 수 있으며, 실제 武斷執政權을 이룬 李義方 慶大升 崔 忠獻 등이 유수한 武班家 출신임을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후 유자량은 明宗 康宗 기간에 막강한 정치권력을 유지한 행적을 갖고 있다. 정치실권의 주도세력의 鄕人故舊와 그 親族이 顯達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현상이다. 東國輿地勝覽 권36, 茂長縣 高麗人物項에 유자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庾資諒 高宗時人 官至尙書左僕射 得謝家居 與當時鄕之退逸者爲耆老會 凡優遊養性者七十年. 위의 庾資諒이 棄官致仕後에는 鄕貫에 落鄕하여 여생을 보냈고 在鄕生活에서 鄕人故舊 와 의 耆老會를 이루어 優遊養性의 넉넉함을 향유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高麗前 期에 있어 名家와 出身鄕貫地의 緣故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실로 祿崇 弼 應圭에 이어 지는 一門은 京師와 在鄕茂長에 이중적 家門基盤을 구축하고 발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墓誌에 적시되어 있는 바 毅廟時 山東寢盛이라 했듯이, 江南道(山東)의 사족이 매우 발흥하여 성세를 떨쳤던 모습에서 고려기 지방사족의 정치 사회적 기능을 긍정적으 로도 평가하게 되는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 武人執政時代에 地方士族의 현저한 京職으로의 진출과 신흥閥族이 적지 않게 배출된 57) 朴龍雲, 高麗前期 文班과 武班의 身分問題 -高麗貴族家門硏究(3)- ( 韓國史硏究 21 22, 1978) 에서 중앙의 文武貴族을 다루었다. 우리의 관심은 在地兩班의 실상이 궁금하다. 이의 존재는 다음 의 내용이 있다. 高麗史 권78, 食貨2 戶口 仁宗 13年 2月判 居京大小人員子弟 謀避徭役 各於 本貫親戚戶籍類付 以致名實混淆 自今京人付外籍者 痛禁, 忠肅王 12年 10月 下敎 開城府五部 及 外方州縣 以百姓爲兩班 以賤人爲良人 僞造戶口者 據法斷罪.

24 현상은 저문된 사실이다. 또 前期의 功臣世族의 경우도 再興하여 門閥이 떨친 名家로 의 연히 발전을 지속한 경우도 매우 많다. (庾應圭) 茂松縣人也 曾祖諱吿成 檢校太子詹事 祖諱彥卿 檢校太子太師 考諱弼門下侍郞 平章事 判吏部事(恭肅公) 以蔭始命良醞丞同正 (毅宗) 至年二十有蔭拜權知閤門祇候 (明 宗卽位) 遣使吿奏北朝 北界兵馬副使 (丙)申終於 (私)第 春秋(四)十五( 金石文追補 65, 庾應圭墓誌).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문벌세족출신인 유응규가 李義方이 주도한 武人執政期 明宗政 權의 중핵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점이다. 이에 대한 이해의 시각은, 첫째 무인에 의한 文臣의 타도는 그 나름의 제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면을 드러내고 있다. 明宗朝 宰樞官僚의 명열에 世族家 出身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증할 수 있다. 둘째 李義 方과의 출신지 연고가 유응규의 정치적 위치를 보장받을 수 있고, 나아가 金에 入朝하여 新王 明宗의 즉위를 승인받는 중책을 성공리에 수행하는 적극적인 武人政權體制의 僚臣 이라고 지목할 수 있다.58) 또 庾碩 列傳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우집정체제에서 유석이 禮賓卿의 요직을 띠고, 崔沆이 집정관이 되어서는 人望을 거두고자 世臣大族을 예우하는 명목으로 유석을 知刑部事에 발탁하고 있음을 보면, 고려사회의 통념상 손꼽히는 功臣世 家에 대한 신분 관직상의 예우전통이 엄존하였던 면모를 반영한 현상으로 풀이 할 수 있 다.59) 우리는 중앙의 名望世族의 연면히 閥族的 官僚를 배출하고 武人執政期에 있어도 그 名望을 유지한 사례를 확인하였다. 功臣世家와 宰相之宗은 이와 같이 상보적 개념으로 인식 될 수 있음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또 이들 世族은 版籍鄕貫地에 族的基盤을 확보 유 지하고 있어 郷人士族과의 通婚과 유대를 지속함으로써 鄕貫地의 사회 문화의 진흥에 일 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高麗時代의 면모를 십분 추찰할 수 있겠다. Ⅲ. 附元期 官人階層의 擴張과 在地士族의 進出 58) 高麗史 권99, 庾應圭전, 茂松人 父弼 以文行顯質直不阿 毅宗朝累官至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 士 判吏部事 鎰恭肅 配享毅宗廟庭 有子五人應圭其長也 性穎悟美風儀 時稱玉人 善屬文 遷閣門祗 侯 再轉考功員外郞 立明宗 明宗素聞應圭名 復召入內侍 授工部郎中 使賷表如金吿奏 不食七日 帝 益憐之授回詔 賜御饌幣帛 厚慰而送之 及還 以功擢軍器監 兼太子中舍人 賜金紫 宰相又請 錄應圭子孫 以勸後來從之 轉殿中監年四 以應圭素有名望 命宣諭諸城 拜工部侍郞 明年又與給事中 史正儒 往 西京宣諭 位寵卽上表請降 是年卒年四十五 子禧春坊公子 世謙戶部侍郎(子 碩自有傳), 資諒 應圭之 弟也 高宗時累拜 尙書左僕射 與致仕宰相爲耆老會 十六年卒年八十 子靖 敬玄 珪 皆登第 敬玄 累遷至諫議大夫 嘗掌監試. 李益柱, 高麗 忠烈王代의 政治狀况과 政治勢力의 性格 ( 韓國史論 18, 서울대 국사학과, 1988)은 忠烈王代의 政治勢力의 연구로 새로운 관점과 신해석을 시도하였다. 59) 高麗史 권121, 庾碩전.

25 國史館論叢 第26輯 1. 武人執政의 終息과 政治勢力의 整備 1) 王政復古의 政策方向과 新銳勢力의 擡頭 한 世紀에 걸친 武人執政體制( )는 元宗 10년 執政權臣 金俊을 주살한 후 그 의 추종세력마저 제거됨으로써, 정치권력의 정상화를 기하는 전환의 방향을 취하게 된 다.60) 그러나 王政復古의 추진과정은 舊態를 불식하는 진통과 새로이 대두하는 附元勢力 및 武斷的 體質을 지닌 官僚群과의 조화를 꾀하는 단계적 조치를 취하면서, 忠烈王 5년 까지 진행되었다. 이의 추진방향은 첫째, 政治勢力의 調整과 再編, 둘째, 王權의 강화와 왕의 고유권의 수행을 통한 專制國家體制의 回復, 셋째, 공전절후의 世界帝國의 출현인 원과의 외교적 갈등을 무난하게 대응해 가는 특성을 갖는다. 위 첫째 문제에 해당한 왕 권복고와 新銳勢力의 推移에 관한 중요 내용을 순차적으로 검토하여 보자. ① 元宗 十年 正月 誅金俊黨 別將金昌世 許仁世 流李得材 吉宣甫等 遣將軍康允紹如蒙 二月 乙酉 將軍金保宜 林惟茂 趙允藩 崔宗紹等 以後壁 賜紅改銜 四月 壬辰 流 平章事 柳璥于黑山島 籍其家 又流璥子行首陞 及侍郞朱悅 將軍金珽于島 乙未 世子 諶入朝 參政 蔡楨 承宣 林惟幹 大將軍 鄭子璵 郞將 印公綬 牽龍行首 羅裕 書狀官 金應文等 從行. ② 元宗 十年六月 壬辰 林衍謀不軌 奉汩爲王 七月 辛亥 遺舍人郭汝弼如蒙古 進王遜位 表略曰 乙卯 汩尊王爲太上王 立府號曰崇寧 以崔瑛爲御史大夫 趙㻻同知樞院事 李昌慶 爲右僕射 丁卯 世子自燕京 還至婆娑府 靜州官奴伍孚 潜渡江吿變 還入蒙古 十月 癸酉 衍 釋柳璥 樞副張 季烈 大將奇蘊 未至 流于他島 辛巳(北道人叛) 崔坦 殺西京及五州守 歸于蒙古 十一月 庚申 令三四品 各以無名實封 陳荅詔便宜 壬戌 林衍宴黑的(元使)言王 復位事 宰樞會議 廢汩後立王. 元宗 十年 十一月 甲子 王復位 汩還私第 十二月 甲申 以 兪千遇 知門下 金方慶 同知御史大夫 金鍊 元傅 李昌慶 竝爲樞副 金坵 尹君正 爲左右僕射 林惟幹 爲右承宣 許珙爲右副承宜 金軌 金祿延 爲左右諫議. 元宗 十一年 二月 辛未 王謁于燕都 甲戌 王上書都堂請婚 丙戌 世子發燕都 乙未 衍憂死 順安侯 以衍子惟茂 爲敎定別監. ③ 元宗 十一年 五月 癸丑 御史中丞洪文系 直門下省事宋松禮 誅惟茂 罷書房 三番 乙 卯 王次龍泉驛 是曰 中丞洪文係 將軍宋玢 內園令郭預等 與李汾禧 赴行在. 元宗 十二年 二月 癸卯 都兵馬使言 近因兵興 百官祿俸不給 請於京畿八縣 品給祿科田 從之. 元宗 十四年 十二月 庚申 下制曰 今屬兵糧之田 元是諸宮 寺院所屬 及兩班 軍 閑人之世傳 而爲權臣所取者也(元宗 壬辰侍從入元臣僚竝加 限品者許通). ④ 忠烈王 四年 十月 甲寅 李汾禧于白翎島 弟知申事李 (木+罒+目)于祖忽島 籍其家 己未 流洪茶丘黨十 于海島 辛酉宥二罪以下 隨從官吏有世累者 及內僚皆許通 辛未 新 置必闍赤 以朴恒 金周鼎 康承益 李之底等爲之 內僚鄭承伍等五人 爲申聞色 自是恒等常會禁 60) 高麗史 권26, 元宗世家 9년 12월 丁酉 誅金俊 妻其族 10년 정월 癸丑 誅金俊黨 別將 金 昌世 許仁世 流李得林 吉宣甫等六人

26 - 65 中 參決機務時號別廳宰樞(이상 高麗史 世家). ①항의 정황을 보면 武人執政 實權者인 金俊과 그 추종세력을 축멸한 元宗 10년(1170) 의 정국은 對蒙講和策의 추진이 급선무였다. 본래 金俊 柳璥 등이 崔氏執政을 종식하고 왕정복고를 표방한 戊午擧事는 전대에 비하면 훨씬 나약한 것이지만, 執政權臣 金俊 등 의 발호를 낳고, 이의 黨流도 元宗 10년 정월에 林惟茂 金保宜 趙允藩 崔宗紹 등에 의한 반정이 야기되어 金俊黨이 주살되고 元勳大臣 柳璥 柳陞 父子와 朱悅 등이 축출당하였 다.61) 이 때의 당면과제는 대몽강화정책의 추진이 급선무로 世子와 수종신료의 入朝가 실현되고 있었다. ②항의 林衍系에 의한 권력장악의 시도는 여의하지 못한 터로 元宗의 廢出 復立이 있 고 西北面人에게 叛逆의 名分만을 제공하여 정국을 더욱 어렵게 하였을 뿐,62) 元과의 밀 착을 강화하면서 왕정의 정상화를 취해 간다. ③항의 洪文系 宋松禮 등의 거사로 林衍系의 武人執政制는 종식되고, 王室復正의 조처 로서 權臣인 侍中 李藏用, 參知政事 崔瑛, 前代首相 柳璥 등이 廢出당하였는 바,63) 이때 의 세 權臣이 仁州李氏家, 文化柳氏家의 대표적 인물이었음은 매우 흥미있는 현상이다. 政局은 宋松禮와 아들 宋玢 洪文系 郭預 李汾禧 등의 戊午擧事에서 대두한 세력 중 中道 的 인물이 주도한 면을 보이며, 金俊의 親黨勢力을 주멸한 외에 숙청은 극히 소폭적인 것으로, 이는 政變의 사후처리책으로 관료의 동요를 극소화한 배려였다고 보겠으며,64) 온건한 重臣으로서 親王體制를 정비하고 한편 官僚體制의 강화 회복을 꾀하여 무인집정 의 상징기구인 書房三番을 폐지하고 祿科田制를 채용하였다.65) 한편, 국내정국은 三別抄의 난이 접종하고 이의 토벌에 진력한 결과 종군 軍將이 정치 실권세력으로 부상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다음 해에도 土地制度의 개선시책이 촉구 되어 兵糧之田을 복구하는 대책을 취하고 있는데, 이때의 兵員은 兩班 軍人 閑人을 대상 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兵에 충원대상인 兩班은 在鄕散職官을 지칭한 61) 이들은 林惟茂 除去後 復官된다. 62) 北道人의 이탈은 심각한 것이었다. 丁酉조에 왕의 행차가 元을 향해 갈때 遣人巡檢各驛 驛吏皆 逃匿 投于崔坦 한 지경이 되었다. 63) 高麗史 권27, 元宗世家 11년 5월 癸丑. 64) 高麗史 권27, 忠烈 5년 2월 丙午 人事 : 金方慶 世子傅, 許珙 知僉議, 洪子藩 判密直, 韓康 密 直, 奇洪碩 同知 監察提憲, 任翊 宋玢 李尊庇 密直副使. 본 人事에 등장한 慶州 金方慶系 陽川 許 珙系 淸州 韓康系 忠州 奇洪碩系 礪山 宋松禮系는 崔氏執政權에 편승한 發興家로 高麗後期의 著聞 된 門閥貴族家門, 즉 累代功臣 宰相之宗의 典型에 해당하며, 아울러 朝鮮 太祖功臣 家門으로 移行 되는 朝鮮의 鉅門閥族으로 발전하였다. 但 唐城 洪子藩系 長興 任翊系 固城李尊庇系는 前述한 肅 宗朝 이후 權門을 이룩한 高麗前期의 門閥貴族家門에 해당하며 또한 이들은 著聞된 累代功臣 宰 相之宗임은 물론 前者와 성향을 같이 한 정치세력에 해당한다. 65) 閔賢九, 高麗의 祿科田 ( 歷史學報 53 54, 1972).

27 國史館論叢 第26輯 것이며, 역시 閑人田 수급자는 명목상의 士族의 下部構造를 이루거나, 在鄕士族 중의 未 入仕者를 주로 지칭한 내용으로 파악된다. 즉 본문 사료가 시사하는 내용은 王政復古策 의 중요 내용으로써 在鄕士族을 보호하려는 前代의 基本政策을 복구하려는 정책의 표방 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④항에서 주지하는 바 武人執政期에는 정치권력이 重房에 집중되었으며, 崔瑀執政權은 政房體制를 통하여 權力이 行使되어 王權은 허실한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왕 정복고의 급선무는 왕의 親政體制의 回復으로, 前代의 전통적 방식인 왕의 직속하에 政府 機能을 복구하는 일이 되는 것이니 홍다구계의 親元的 政治勢力을 숙청하는 쾌거를 단행 하여66) 內宰樞 라 불린 必闍赤制度를 도입하여 前代의 宮庭政府기능을 회복한 것이다. 여기에서 內宰樞의 개념에 대한 문제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 忠烈王 원년 의 官制改編에 보이는 僉議府體制는 이전의 高麗政府構造와는 근본적으로 기본 골격이 변질된 것이다. 종래의 고려 政務機構는 名分上으로 왕의 親政體制를 채용하여 宮庭政府 를 개설하여 政事堂議政을 수행한 것이니, 이것이 宰樞會議 兩府會議 이었다.67) 이의 주관 부서가 中書門下(別稱中書) 인데 武人執政制에서 허실화되었으며, 附元體制에서 이 러한 根本的인 高麗專制體制가 폐기되었던 것이니, 왕정복고의 代行機能으로서 必闍赤制 가 요청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必闍赤의 구성원은 宰樞가 아닌 王의 側近官僚를 充差 하여 內密機構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高麗前期에 있은 왕 親臨의 宮庭政府인 中書門下 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政治的 意味를 생각할 수 있다. 첫 째, 別廳宰樞 라 불리운 내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의 親政機構로서의 기능을 최소한 확보한 장치를 복구한 것이다. 둘째, 武人執政制에서 喪失하였던 國家權力의 出處를 王 에게 回復한 意味를 갖는다. 셋째, 원의 中書省 丞相體制가 權臣政治를 유발할 소지를 갖 는 것으로, 이의 職制에 연계되는 高麗 僉議府劃一體制의 모순을 어느 정도 견제 對備하 는 제도를 도출해 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넷째, 이후 政務統割기능을 증대 확보케 되 는 都評議使司機能의68) 교두보적 역할을 別廳宰樞 必闍赤 申聞色制에서 찾을 수 있겠다. 한편 왕정복고의 대전환기를 맞아 정권주도세력의 실세와 이들의 입지가 고려후기의 정치세력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元宗 十一年 六月 己巳 裵仲孫叛 十二年 五月 丁丑 金方慶 忻都 茶丘等 討珍島 十 月 丙戌 方慶 還 以功加守太尉 中書侍郎 十二月 辛丑 命 樞密院副使宋松禮 上將軍徐裕 點兵. (忠烈王 卽位年) 九月 乙亥 以金鍊參知政事 李汾禧 金侁 竝爲樞密院副使 66) 王權 직예의 政府인 中書門下 體制의 회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67) 朴龍雲, 高麗의 中樞院 硏究 ( 韓國史硏究 12, 1976). 68) 邊太燮, 高麗政治制度硏究 都兵馬使 硏究 참조.

28 - 67 (忠烈王 四年 丁亥 人事案) 柳璥 判典理司事 金坵 參文學士 康守衡 知僉議府事 許珙 判 密直司事 奇洪碩 張暐爲密直副使 右承旨薛公儉 承旨宋玢 賛成事 元傅(四年 九月 丁未 金坵 卒) 十月 癸丑 (柳璥辭職) 以金方慶爲僉議中賛上將軍 判監察司事 朴恒參文學事 薛公儉 爲密直副使( 高麗史節要 ). 宋松禮는 元宗 12년 고질적인 武斷政權을 종식시킨 首勳을 세우고 最高權臣의 위상을 굳히게 된다. 官은 忠烈王代 관제개편으로 僉議中贊이 되고, 推誠翼戴輔理同德佐命功臣 의 八字功臣號를 받았으며 食邑 1천戶 食實封 3백戶에 封爵되어 首勳者로서 극상의 위 치를 확보하게 되고, 이후 명실상부한 世臣大族으로 군림하여 그의 一族은 附元期體制에 서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세력의 중핵을 담당하였다. 安東 金方慶家의 權門化 내력은 金方慶의 숙부 金敞이 崔怡政權의 요신으로 수상에 오른 이후 崔氏政權과의 共生的 연대로서 거문을 이루고 고려후기에 族勢를 떨치게 되 었다고 보겠다.69) 또 長沙命氏(今 高敞郡 茂長面)의 대두가 이와 궤를 같이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兪千遇는 金敞의 비호리에 崔怡執政期에 榮達하게 되고, 金方慶의 安東金氏 가 權富를 확점하여 大族으로 군림하는 정황에 당하여 忠烈王代의 宰相을 역임하였던 것이다.70) 金坵는 이른바 崔怡執政期의 安定化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文士탁용책에서 표본적 인물로 지목 될 수 있다. 미미한 시골 출신으로 家系上의 결함을 딛고 崔怡의 寵 臣으로 탁용되어 저문된 名家를 이루어 낸 것이다. 羅州羅氏 一門은 본래 三韓壁上功臣 大匡 羅聰禮에 근거한 羅州의 유력한 士族으로 武人執政期에 당하여 全羅道 士族의 대 대적인 중앙진출의 아류로 보겠다. 羅裕 羅益禧 戰功을 쌓아 元의 爵인 管軍上萬戶를 襲 封하는 宰相家門을 이루게 되었다. 扶寧金氏의 발흥은 고려적 신분개념에서 볼 때 미미 한 지방사족에서 발신하여 거문세족을 이룩한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71) 在地土族 발흥의 고려후기 世臣大族을 이룬 전형적 사례로 恭愍王配享功臣 李公遂家 의 예를 보자. 69) 高麗史 권102, 金敞전, 安東人 崔怡召置政房掌銓選 高宗朝 轉樞密副使 門下平章事 附權門 久典政柄 四十三年 以守太師 門下平章 判吏部事卒 無子 臨歿其姪方慶等辭 鎰文簡. 70) 高麗史 권105, 兪千遇전, (初名亮 又改證) 長沙縣人 高宗朝 登第 籍內侍 尙書金敞器之 薦于晋陽 公崔怡 置之政房 遂爲門客 累遷吏部侍郞(崔沆時) 以事又配島 其母賂金承俊 復入政房爲兵部侍郞 元宗 尋加知奏事掌銓選 衛社諸功臣 以爲千遇擢所親置臺省 欲以相援 於是始構隙功臣 千遇弟將軍 元勣 與郎將鄭守卿 謀去仁俊 事覺仁俊囚元勣 歷知門下省事 參知政事 時林衍議廢立 千遇曰 請 公反復思之 況今世子在上國 待其還亦未晚也 惟茂大不悅會不及禍 後忤達魯花赤 流仁勿島 未機召還 爲中書平章事 忠烈 授參文學事 判版圖司事 卒年六十八鎰文度 無子外孫朴顓登第 官至 質成事. 71) 高麗史 권106, 金坵전, 扶寧縣人 善屬詩文 每夏課 無居右者皆以狀元 高宗朝擢第二人及 第 同縣人 黃閣寶 挾憾摘世累訴有司 權臣崔怡重其才營救 元宗四年 拜右諫議 坵之祖僧也 不 宜在臺諫 然以坵有才乃署吿身 累遷左僕射 歷樞密副使 政堂文學 吏部尙書 陞參知政事 建言 宜試 參外文臣 所製賞其能者 忠烈卽位改知僉議 尋參文學事 判版圖司事 獻議置通文館 四年卒年 六十八 鎰文貞 嘗撰 神熙康三朝實錄 掌詞命 撰表章 皆中於理 回詔至云辭語 懇實理當兪允 : 子汝盂 官至奉翊 叔盂 丞郎 庶子承印 大司成 皆登第.

29 國史館論叢 第26輯 李湊 金馬郡人 高宗時 登第 元宗朝 歷兵禮二部侍郎 祭酒 諫議 左僕射 致仕 忠烈四年卒 年七十八 : 子行儉 中第 三別抄之亂 賊使掌選法 及金方慶破賊 以行儉爲其父孝印 門生活 之 忠烈時爲司諫 王命督署之(應坊人) 不從 王怒流行儉 其族李尊庇言於上將軍廉承益 以吿王 釋之 累官至國學典酒 寶文閣直學士 致仕又加讞部典書忠宣二年卒 年八十六 子 稷 崖稷登科 官至成均大司成( 高麗史 권106, 李湊전). 李公遂 益州人 讞部典書 行儉之孫 以監察糾正擢魁 忠穆朝 歷知申事 監察大夫 元廢王 立德興君公遂適奉使如元(公遂奇后內兄也) 德興已敗 謹備之本國始知得春妄 拜公遂領都僉 議 賜推忠守義同德賛化功臣號 以旌之 帝降詔復王位 公遂亦辭職東還 辛禑二年配享恭愍 廟庭( 高麗史 권112, 李公遂전). 위는 金馬(益山)李氏의 발흥하는 근거를 제시한 사료에 해당한다. 李行儉家는 高宗朝 로 부터 恭愍王配享功臣 李公遂에 이르는 한 世紀 半에 걸쳐 最高의 權門을 발현하고, 이에 인연한 益州(金馬郡 以奇皇后外鄕 陞益州)圈域의 在地土族 諸家의 융성한 면모를 보게 된다. 2) 太廟의 再建 事業과 王의 頒赦令의 强化 高麗 專制王權체제를 유지하는 특징은 국가와 국권을 유지해 가는 중요한 儀制를 수 행하는 일이다. 이중 太廟經營과 列聖祖를 받들어 제사하는 일은 막중한 일이며, 왕의 고유권한이고 국가운용의 중요 수단으로 정착된 赦肆策도 이와 연계하여 집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왕실의 권위를 확보하여 간 특성이었다. ① 元宗 十二年 十月 丁酉 赦曰 欲以恩宥 斬絞二罪以下咸赦除之 戍濟州戰死將軍高汝 霖 靈光副使金須及 從討 別抄之子 超資賞職 無子者復其父母及妻 其自賊中歸順人 有職 者還職田 軍人還田丁. ② 元宗 十三年 三月 丙戌 太廟成 奉安九室主. 十五年 六月 己酉 王不豫 大赦 癸亥 薨 在十五年 再五十六 甲子 上諡曰順孝 廟號 元宗 九月 乙酉 葬韶陵 忠宜 二年 七月 元贈諡 忠敬. 忠烈 二年 七月 乙未 祔元宗 以平章李世材 蔡楨配享 九月 復葬世祖梓宮于昌陵 太 祖梓宮于顯陵 丁未 謁顯陵. 旣行祫禮 ③ 忠烈 二年 十月 己巳 謁昭陵 乙亥 親祫于太廟上謚册 戊寅 敎曰 先代君王 必肆大恩 近以天子之詔 已赦一切罪犯 然其後有犯者 皆可除之 國內山川神祗 宜加德號 ( 高麗史 世家). 高麗 專制政治의 실현 諸政策에서 肆赦 中心의 왕권의 실현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 다. 필자는 앞의 高麗配享功臣의 制度的 性格과 그 特性 에서 赦의 恩澤이 功臣과 官 人層 보호에 집중되었던 전모를 상술한 바 있다.

30 무인집정기의 상황을 종식하고 王權專制體制를 복구하는 여러 정책의 수행 중에 太廟 儀制의 권위와 禘祫功臣을 비롯한 功臣政策의 강화 官人階層 전반에 대한 우대 강화 등 이 활성화되었다. 3) 高麗王室의 復政과 元皇室과의 紐帶强化 元宗 十四年 七月 乙未 侍中金方慶 被召如元 帝賜金鞍綵服金銀 忠烈王 四年 二月 王會忻 都茶丘 鞠方慶 流方慶 于大靑島 欣于白翎島. 元宗 十二年 六月 己亥 遣世子諶 入質于蒙古 尙書左丞 宋玢(忠烈王 三年 正月 爲太 子右庶尹) 軍器監 薛公儉(忠烈王 三年 正月 薛公儉爲太子右賛德 餘官皆置) 戶部郎中 金㥠 等二十人從之. 十三年 正月 甲申 遣齊安侯 淑 樞密副使 宋松禮 如元賀建國號 表曰. 二月 己亥 世子諶 至自元 來中書省牒曰 國人見世子辮髮胡服 皆歎息. 丁未 世子如元. 十四年 癸亥 遣帶方侯瀓 諫議郭汝弼 如元謝許世子婚. 十四年 六月 己未 遣順安侯悰 同知宋松禮 如元 賀册封 七月 庚子 遣上將軍金侁如 元 賀節曰. 十五年 五月 丙戌 世子諶尙 忽都魯揭里迷失公主(己丑 元征東兵五千人來). 忠烈 一. 改官制 二月 癸未 遣僉議賛成事兪千遇如元賀正 二年 閏二月 帝賜 金鞍綵丹 皮金銀)( 元宗 十五年 六月 壬辰 兪千遇 參文學士卒). 元宗 十五年 五月 丙申 命知樞 宋松禮 樞副 奇蘊 鷹揚上將軍 金光遠 加僉征東軍(奇蘊 九月 己丑如元). 辛酉 幸而北面迎公主 平章事兪千遇 知將隊 從行( 高麗史 世家). 대몽전쟁 기간 동안 전쟁의 강화기에 따른 국토의 황폐화, 국민의식의 이완현상과 국 토의 손실현상이 노출되었다. 崔坦 등이 平壤 이북의 郡縣民을 회동하여 元에 이속함으 로써 元의 直轄領으로 東寧府가 설치되고, 趙暉 棹淸 등의 주도로 영흥 이북지역은 이반 하여 雙城摠官府가 설치되어 總管을 세습한 漢陽趙氏 趙暉家의 발흥과 永興萬戶職을 세 습한 全州李氏 李璘家의 벌족화를 이루어 高麗後期政治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 다.72) 특히 瀋陽王을 세워 在滿高麗人 大居留集團體을 다스리는 政府機構인 高麗軍民總 管府가 설치됨으로써, 이후 쌍성총관부는 고려정치권력의 향배에 압력과 정략적 수단을 행사케 하는 모순을 낳게 되었다.73) 이의 초기현상에서 國權을 지탱하고, 형식면에서 高麗王權體制를 안정화하는 일련의 72) 高麗史 권27, 元宗 12년 3월 己巳 趙暉 請兵四百餘人 入州 驅掠知州 及吏民千餘人 分載三航而去. 73) 高麗史 권27, 元宗 12년 정월 辛未 以茶丘叔父 僕射致仕洪百壽 爲樞密院副使 致仕 己卯 洪茶丘 等 四十人來詔曰 王 迎詔于郊 中書省牒曰 父福源 欽奉累朝聖旨 親屬 曾敎取發 今 有叔父洪百壽等五戶 竝取發來. 高麗史節要 권21, 忠烈王 21년 7월 僉議中賛致仕 張暐卒 暐 無他功能 以妻之兄弟洪君祥等 仕于元朝 有功本國 故凡遣使入朝 多以暐副之.

31 國史館論叢 第26輯 사건과 조치는 高麗後期社會의 향배를 결정하는 중요 내용이기도 하다. 4) 忠宣王의 改革과 忠烈王의 權臣 이른바 忠宣王의 改革政治의 실상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비등하여 있는 바, 忠宣王 初 期 改革試圖로 채용한 士林院 學士制와 忠烈王 34년 再卽位時 王權을 대행하여 官制改 革을 수행한 李混 崔均 金元具 權準 등의 정치세력의 개편 문제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① 1 趙仁規 侍中 參知光政院事 2 洪子藩 左僕射 參知光政院事 3 洪奎 領景靈宮事 4 鄭 可臣 右僕射參知光政院事 5 印侯 光政使參知機務 6 金揮 檢校守司徒 領奉常寺事 7 車 信 8 李之氐 竝資政院使 9 金之叔 同知光政院使參知機務 10 安珦 參知機務 鷄林府尹 11 柳庇 光政副使 12 崔有渰 司憲大夫 13 李混 爲密直司使 檢校司空 西京留守 平壤府 尹 14 鄭瑎 南京留守廣陵府尹 15 崔冲紹 同知資政院事 行中京留守 開元府尹 果毅軍都 指揮使 16 閔漬 光政院事 17 元卿 中京留守 18 閔宗儒 銓曹尙書 19 許評 民曹尙書 20 尹珤 弘文館學士 儀曹尙書 21 崔旵 詞林學士承旨 刑曹尙書 22 全昇 兵曹尙書 23 柳栯 兵曹尙書 鷹揚上將軍 24 吳漢卿 詞林學士 試左散騎侍 25 李瑱 詞林學士 試右散騎常侍 26 洪子翰 金吾衛攝將軍 司憲中丞 27 張碩 光政都承旨 奉常卿 28 金恂 光政副使承旨 成均祭酒 29 趙瑞 光政承旨 典客卿 30 李承休 詞林侍讀學士 試秘書監 31 沈逢吉 司憲 中丞 32 權永 詞林侍講學士 試衛尉卿 33 趙簡 刑部侍郞 右諫議大夫( 高麗史 권33, 忠烈王 34년 5월 辛卯 人事). ② 六月 丁巳 元遣右丞阿里灰 來 凡乘傳者百餘 鞠趙仁規 遂與元卿 往監祭司改新定官制 癸亥 復置承旨房 以前承旨 張碩 洪詵 全昇爲之( 高麗史 권33, 忠烈王 34년). ③ 七月 丁亥 徹里還自元 帝命國王公主 以八月 入朝 戊戌復改官制 金琿爲僉議侍郞賛 成事 判民曹事 韓希愈 開城府尹 商議都僉議會議都監事 車信 僉議賛成 判儀曹事 李混 爲密直司使 銓曹判書 集賢殿大學士 修國史 閑漬 爲同知密直 詞林學士承旨 金賆 同知 資政院事 儀曹判書 薛景成爲資政院副使 判大僕寺事( 高麗史 권33, 忠烈王 34년). ④ 丙戌 李混 崔鈞 金元具 與承旨權準 賚忠宣王所定官制及批判 還自元 超資越序者 皆近 幸權勢 世臣舊官俱退閑( 高麗史 권32, 忠烈王 34년 5월) 일찍이 忠烈王 初期에 武人執權體制를 극복하고, 專制王權體制를 강화하는 政策의 내 용에 申聞色을 채용하여 近臣集團의 政治勢力을 운용하고자 꾀한 바 있었다. 위 사료 ③ 항의 충선왕 관제개혁을 무산시킨 官制復舊에서 被執된 趙仁規와 그의 婿인 崔忠紹 등 을 제외하고 서열의 변동은 있었지만 전원이 관직에 재임용되고 있었다. 이는 忠烈王朝 의 復政體制에서 門閥世族의 포용화로서 國政을 安定化하려는 시도가 매우 성공적이었 음을 반영한다. 또 忠烈王이 도입한 士林院制度는 光政院體制가 白紙化되고 僉議府體制 로 원상복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속하고 있다. 士林院은 親政權을 강화하기 위한 近侍 機構인 점에서 申聞色制度와는 일면 兩者의 기능이 상통한 면이 있다. 2. 高麗後期 門閥世家의 變移와 累代功臣 宰相之宗

32 - 71 우리는 元宗 忠烈王 기간에 王政復古의 제 과정에서 명실상부한 왕정복고는 忠烈王 5년에 성취되며, 이로써 宰樞官僚의 安定化를 이룩해 가는 정치세력의 변모를 이해하게 되었다. 忠烈王 이후 고려후기의 정치세력의 성격을 구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른 바 權門勢族의 實體와 累代功臣 宰相之宗은 동일한 성격으로 볼 수 있는 지 궁금하다. 忠烈王代의 집권세력의 실세에 해당한 인물로 同 3월 丙午 人事의 내용에 다음 8명의 재상이 임용되었다. 한편 후술하는 名門宰相家의 子弟를 禿魯花로 선발한 내용과 忠烈王 4년과 5년 兩次의 고위관직 임명기사에 보이는 초기의 實權宰相家를 첨가한 명단은 다 음과 같다( 禿魯花). ① 金方慶 安東人 世子傅(太子大傅) 子欣 都僉議 上洛君(孫永煦 左政丞 永煦孫 士衡 開國功臣). ②許珙 陽川人 知僉議 忠烈 配享功臣 僉議中賛. 子評(嵩) 忠宣 二 封陽川君 僉議中賛 孫 猷 忠惠侍從功 恭愍扈從一等. ③ 洪子藩 唐城人 判密直 僉議中賛 忠宣配享功臣. 子 順(五代祖 觀 仁宗推誠功臣 左僕射). ④韓康 淸州人 密直使(子 渥 右政丞 忠惠配享功臣 子 謝奇). ⑤ 奇洪碩 華城人 同知密直 密直副使. ⑥任翊 長興人 密直副使(祖 濡 門下平章 熙宗配享功臣 父 景議 工尙). ⑦宋玢 礪山人 密直副使(父 松禮 中賛 佐命功臣). ⑧ 李尊庇 固城人 密直副使 判密 監察大夫. 子 瑀 牧使(孫 癌 侍中 忠定配享功臣). ⑨ 蔡仁平 平康人 執義(父 蔡湞 侍中 元宗配享功臣). ⑩ 元傳 原州人 賛成事 子貞 瓘(九世祖 克猷 三韓功臣 兵部令). ⑪ 薛公儉 淳昌人 右承旨 密直副使 子 之冲 弟 薛仁儉. ⑫ 金周鼎 光州人 忠烈 左副承旨 同知密直. 子 深 忠烈 29 與洪子藩 執吳祁以功爲賛成 忠肅功臣 守僉議. ⑬ 朴恒 密陽人 爲中閭 同知密 子 元宏. ⑭ 柳璥 文化人 元宗 10 貶平章事 忠烈 4 判典理事 子 陞. ⑮ 崔瑛 海州人 元宗 12 貶參知政事 元皇室에 宿衛하는 명분하에 高麗는 世子와 그의 扈從臣을 선별하여 禿魯花(인질의 뜻)를 삼았다. 이의 발달의 내용은 다음 사료가 참고된다. 遺帶方公 徵 寧禿魯花如元 金方慶子 欣 元傅子 貞 朴恒子 元宏 許珙子 評 洪子藩子 順 韓康子謝奇 薛公儉子 之冲 李尊庇子 瑀 金周鼎子 深 等 衣冠子弟 凡二十五人 皆超三等授 職送之 ( 謝奇 年未 十二 超八品職 時議 幾).

33 國史館論叢 第26輯 위에서 名門子弟 25명을 최초의 禿魯花로 삼았다고 하고, 그 중 9명의 당대 宰相과 그 아들의 명열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韓謝奇의 예에서 보듯이 超三等 이상의 昇職 特 惠를 주는 관행이 채용되고 있어 名門子弟에게 관직의 특혜를 주는 한 유형이 되었다.74) 위 충렬왕 초기의 名宰家門 중 許珙 洪子藩 韓康 任翊 蔡仁平 元傅 柳璥 崔瑛 등의 가 문은 前代로부터 門閥貴族으로 지목되는 당대의 世族이다. 또한 본 내용에서 安東 金方 慶家 奇洪硬家 碼山 宋玢家 淳昌 薛公儉家 光山 金周鼎家 文化 柳璥家 등은 武人執權期에 대두한 新興世族으로 高麗後期 累代에 宰相을 배출하는 鉅族으로 발전하며 나아가 조선 왕조의 勢族으로 移行되는 것이다.75) 忠宣王이 즉위하여 일련의 시책을 선포한 내용에 문벌귀족가문을 선별하여 宗室婚을 이루겠다는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76) 忠宣王은 宗室婚家로서 累世功臣 宰相之宗 15家門 을 類別化하여 例示하였다. 國初의 三韓壁上功臣을 배출한 명가로는 ⑥ 鐵原崔氏 ⑩ 淸 州李氏와 肅宗期 대표적인 功臣 尹瓘에 근거한 ⑭ 坡平尹氏의 세 門閥世族을 먼저 제시 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론으로써 典範的 門閥世族을 예시한 것으로 보겠다. 門閥貴族再 編期에 대두한 ⑤ 安山金氏 金殷傅系 ④ 慶源李氏 李子淵家系 ⑦ 海州 崔冲家系 셋이 지목된 셈이다. 이는 外戚家門을 드러내고자 한 의도를 반영 한 것으로 일차로 지목한 왕의 外家인 順敬太后 叔伯之宗을 추켜세운 입장을 드러낸 의미가 있다. 그런데 나머지 9가문은 崔瑀武斷政權의 안정기 이후에 대두한 가문임이 특색이다. 즉 ① (忠烈王母)順 敬太后 (崔瑀婿)金琿一家 ② 彥陽(高宗配享功臣)金就礪의 家 ③ 定安任太后一家(熙宗配 享 任濡家系) ⑬ 橫川(神宗配享功臣) 趙永仁(高宗配享功臣) 趙冲의 가계가 지목된 내용에 서, 이들은 崔氏政權에서 協補的 紐帶를 맺어 閥族을 이루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元宗期 王政復古와 附元體制에서 相宰家門은 ⑧ 孔岩許氏(忠烈王配享功臣) 許珙家系 ⑨ 平康蔡 氏(衛社功臣) 蔡松年, (元宗配享功臣) 蔡湞家系 ⑪ 唐城洪氏(忠烈王配享功臣) 洪子藩一族 등 셋이 된다. 이상의 13가문은 가장 전형적인 功臣世家와 外戚家門인 것이다. 끝으로 충선왕의 개혁정치를 추진한 兩寵臣이며 忠宣王侍從功臣으로 최고의 권문세가로 대두한 閔漬의 ⑭ 驪興閔氏家系와 충선왕의 妻族 ⑮ 平壤趙氏를 첨가한 총 15가문을 지목한 것 이다.77)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대 전제조건이 명시되어 있다. ① 自今 若宗親娶同姓者 以違背聖旨諭 宜娶累世宰相之女爲室 宰相之男 可聽娶宗世之女 74) 蔭叙制의 변질과 파행상에 대해서는 朴天植, 功蔭田柴의 檢討 참조. 75) 朴天植, 配享功臣의 特性 참조. 76) 高麗史 권33, 忠宣王 卽位敎書 참조. 77) 朴天植, 全義李氏 門閥化 推移와 木山의 家門認識 ( 木山 李基敬 硏究 1991; 全北史學 12) p. 77 참조.

34 - 73 若家世卑微 不在此限. ② 竝累代功臣 宰相之宗 可世爲婚構 男尙宗女 女爲宗妃. 宗室婚의 대상을 서술한 敎書에 ①항의 若家世卑微 不在此限의 단서와 ②항의 竝累代 功臣 宰相之宗을 지목한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전자는 15가문을 포함하여 宰相 家라도 신분적 결함이 있는 계통은 배제하는 금지사항이며, 후자는 大前提的 신분개념으 로서 功臣世家를 우선한 지적인 것이니 고려의 鉅門은 다수한 문벌이 떨친 功臣世族이 엄존하여 있었던 것이다. 또 본 門閥的 身分觀의 표현은 一世紀에 걸친 武人執權時代를 극복하고 附元體制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王權復政時代의 지배세력의 안정을 지향하는 高麗貴族國家 體制의ᅵ 기본 입장을 재천명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1) 順敬太后 叔伯之宗 金鳳毛는 崔忠獻執政의 표본적인 협조자로 政府를 부조하는 권좌에 군림하여, 그의 一 門이 재상가로 대두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家系表 參照). 아들 完山君 金台瑞 역시 崔瑀政權의 중핵적 인물로 崔瑀의 女를 子婦로 맞고 孫女 淑妃는 忠烈王을 낳아 이후 王室外家로 鉅門을 이룬다.78) 完山君 金台瑞의 墓는 全北 完州郡 九耳面 母岳山 南측에 소재하며, 후대의 撰이지만 墓 碣이 현존하여 있다. 金台瑞家는 崔瑀 崔沆代에 수난을 당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敉 拜司空 司空唯諸五爲之 敉娶襄陽公女 故授之系出新羅宗姓 父鳳毛 累官至門下侍郞 平章事 台瑞 登第 事明 神 熙 康 高五朝 位至守太保 門下侍郞平章事大 性貪鄙 豪奪人土 田 其子若先爲崔怡女壻 故有司莫敢劾 坐吳承績事 籍其家( 高麗史 권101, 金台瑞전). 完山君 金台瑞 家系 金台瑞전은 간략하여 封君記와 全州에 住居한 배경이 미상이다. 崔沆執政에 당하여 高 宗 38년 吳承績 叛謀事件에 연루하여 子 慶孫이 죽임을 당하고 家產이 籍沒되는 때에 78) 東文選 권37, 知奏事金若先謝東宮嘉禮表, 婚書를 보오매 꿈이요 사실이 아니라 의심하였삽더 니 아내를 맞는 데는 同族을 피하는 것이요, 혼처를 가리는 데는 異姓에서 취하는 것이라. 이것이 예법인데 누군들 이에 따르지 아니하리까 本朝에 있어서는 金氏 任氏가 后가 되었나이다 신은 천 박하여 재능이 없고 駑鈍하여 배움이 없나이다. 다만 인척이라는 특수한 처지에 의탁되어 일찍이 조 정의 빛나는 반열에 참여하였나이다. 잔악한 여식으로 하여금 元良(太子)의 높은 덕에 짝이 되게 올 려주시니, 사대부와 백성의 기대에는 부끄러우나, 간절히 가문의 일어남을 스스로 비옵니다. 못난 여 식이 功臣(필자 : 崔誼)의 외손인 것을 생각하시어, 功德을 한 시대에 높여주시고, 은혜로운 영화를 만대에 맺어주심이라, 東宮에게 羽翼되는 정성을 바치지 아니하오며, 만년 동안 陛下에게 股肱의 힘 을 더욱 다하지 아니하오리까. 본 사료에서 확인되는 바 忠宣王 卽位敎書에 제시된 累代功臣 宰相 之宗 의 서열 1번 金若先家의 世族을 칭하게 된 실상을 알 수 있다.

35 國史館論叢 第26輯 낙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던 것이 金琿에 와서 충렬왕의 外戚重臣으로 영광을 누리 며 의연히 충선왕의 寵臣家로서 면모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2) 光山 金周鼎家 三韓壁上功臣 金吉을 始祖로 하는 光山金氏는 고려후기에 권문을 형성한 전형적 예가 된다. 이의 발원은 충렬왕대 체제확립의 주역을 담당한 金周鼎(同 10년 至知都僉議事)으 로부터이다. 그의 열전에 의하면, ① 光州人 蔭으로 富城尉가 되었는데 巡問使 韓就가 천거하여 權知都兵馬錄事가 되었다. 元宗 五年 魁科에 뽑혀 典을 加하고 海陽公 金俊儀가 중히 여겨 內侍에 소속시켜 政 房에 들어 累遷, 吏部侍郎에 이르렀다. ② (忠烈王) 4年 王이 元에 갈 새 周鼎이 行從都監使가 되어 獻議하니 功이 컸다. 左副 承旨가 되어 請하여 必闍赤 申聞色을 두었다. ③ 周鼎 及參文學事朴恒 密直副使薛公儉 左承旨李尊庇 判禮賓事廉承益 大將軍印公秀 趙仁 規 秘書 尹鄭興 內侍將軍李之氐 寶文署待制郭預 大府少尹安戩 千牛衛錄事李子芬 詹事府 錄事尹文玉大常府錄事鄭玄繼 爲必闍赤 內僚郎將鄭承伍 金義光.姜碩 李恕 河汭爲甲聞色 時號別廳宰樞( 高麗史 권104, 金周鼎전) 라고 하여, 金周鼎은 元宗期 金俊執政體制에서 銓選任을 맡아 累遷하였고 충렬왕에 의해 寵臣으로 必闍赤(필도치). 申聞色制를 도입하여 王權强化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들 金深은 忠烈王朝에 禿魯花로 元朝와 인연을 가졌으며, 딸 達麻實里가 元宰의 총애를 받아 이를 고려한 충선왕이 贊成事에 승진시킨 바 되었으며, 이어 딸이 황 후로 봉해져서 그 위록이 지극하게 되고 갑자기 密直使 化平君을 封하였다. 忠肅朝에 守 僉議政丞 判摠部事 都僉議中贊을 역임하고 三次의 功臣號를 加給하고 化平府院君에 이른

36 다. 忠肅이 被執되는 때에는 洪緩과 더불어 權征東行省事로 국정을 총괄하는 등 洪 金兩 門은 元皇室의 막중한 신임과 지원하에 후기정치에서 주도적 입지를 확립하게 되었던 것 이다.79) 한편 金周鼎의 조카인 金台鉉의 열전에는 太祖功臣 金吉의 後孫이며 父 須는 登第하여 靈光郡事로 大將軍 高汝霖을 따라 三別抄 토벌에 종군하여 沒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金台鉉은 年 15에 壯元으로 촉망된 관력을 밟아 忠烈朝에 閔 權과 더불어 銓注를 관 장하였고, 충렬왕 즉위에 前臣 중 오직 台鉉만은 密直에 復職한 寵臣으로 對元關係에서 왕실을 전력수호한 역할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아들 대에 三子登科의 名門 宰相家로서 鉅門의 위세를 확대하여 갔다.80) 三韓壁上功臣의 후손가로서 在地士族의 명망을 유지해 온 가문이 중앙귀족으로 대두한 전형적 사례라 하겠다. 3) 慶州金氏 三韓壁上功臣 禮謙派의 例 우리 역사에서 고려 조선의 시대는 中世社會로 규정되며, 政體는 君主專制政治로 國體 는 王朝體制로 영위되었다. 이는 法定的 신분제도를 통하여 국권을 수호하는 중요한 특 성을 내포한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官人 배출의 기반으로서 士族과 門閥을 중요시하 는 귀족체제임을 전제로 한 역사 사실의 이해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고려기에 사회 발전의 일반적 상황을 검증하는 일로, 한 家系를 예로써 검토하여 일반화 를 도출하고자 한다. 慶州金氏 중 永芬을 一世祖로 삼은 파계는 成俔撰 族譜序에 그 世系를 소개한 내용이 있다. 文獻備考 帝系考에 禮謙은 慶州金氏 一世 永芬의 5世孫 內史令 三韓壁上功臣 이라 적었다. 한편 사료적 가치가 공인되는 高麗史 의 金仁鏡전에는 平章事 良愼公 義珍의 4世孫으로 소개하여 이전 세계는 생략한 내용이 있다. 高麗史 열전에서 先系 를 三韓壁上功臣으로 표기한 경우는 이의 후손이 立傳된 경우에 30% 정도이다. 成俔은 金仁鏡의 계보를 1. 永芬, 2. 林興, 3. 疑宗, 4. 李邕, 5. 阿盖公, 6. 禮謙, 7. 周鼎, 8. 義珍, 9. 侯德, 10. 舊之, 11. 永固, 12. (初名)良鏡, 13. 鍊成으로 적고 있어, 81) 宗譜의 내용과 일치한다. 단 문벌을 논하는 일반적 기준에 고려기의 관행은 功臣世家를 중시하였는데, 成俔이 三韓壁上功臣 內史令 禮謙의 경우 贈爵인 內史令을 표시하면서 보다 권위로운 三韓壁上功臣을 쓰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82) 위에 제시한 文獻備考 帝系考의 내용 은 朝鮮 純祖代에 追入된 기록이 많아 상대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멸한 데도 永芬의 관 79) 朴天植, 全義李氏 門閥化 推移와 木山의 家門認識 p. 79 참조. 80) 高麗史 권110, 金台鉉전. 81) 成俔 撰, 慶州金氏 族譜 序. 82) 成俔을 포함해서 朝鮮 成宗代의 사람들 중에 癸酉靖難의 악몽으로 功臣의 권위에 대하여 일부 식 상한 인식을 가졌던 탓인지 알 수 없다.

37 國史館論叢 第26輯 함 표기는 상밀하다. 譜記에 一世祖 永芬公이 개경에 세거하였고 신라가 멸한 후 25년에(光宗 11년으로 비 정됨) 慶州君의 封號를 받았다고 적었는데, 이 당시에 封君制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이 세전된 문헌사료에 근거한 표시라면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앞에서 三韓壁上功臣 禮謙의 爵을 內史令으로 표기한 것이 贈職으로 보이는데, 문종대에 三韓功臣 3,200여 명에게 爵秩을 더하여 후손 承重者에게 功臣錄券을 頒給한 일을 비롯하 여, 後代王들이 3 4차에 걸쳐 先代 功臣 모두에게 贈加爵의 追恩을 행하고 있어 이와 유 관한 모종의 追崇혜택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金義珍의 경우 宰相職에 보임된 이후의 기록만으로도 高麗史節要 문종대에 15년 11월, 同知中樞院事, 29년 7월 爲戶部尙書參知政事 權判三司使 太子少保 등 任命記와 同 36년 12월 中書侍郞平章事로 卒記가 있다. 또 文治主義를 확립한 高麗前期에 있어 私 學十二徒 중의 한 맥인 金義珍의 良愼公徒는 학통을 이루고 있었음에서 고려전기의 저문 된 귀족가문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이른바 三韓壁上功臣 金禮謙에서 비롯하여 實權最高宰 相인 中書平章事에 달한 金義珍에 연결된 일문은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세족에 해당한다. 논자에 따라서는 사회구조상의 특성을 武人執政期 이전을 門閥貴族社會로 규정하고, 이후에는 전대의 귀족가문이 대거 몰락하게 되었다는 論議를 강조한다. 그러나 본고에서 예시하였는 바, 후기세가는 양적 변화를 보이고 있으면서도 그 중추세력은 累代功臣 宰相 家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니 심도있는 검증을 요하는 문제이다. 武人執政體制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名門 賢臣들은 어떠한 처지에 있었으며, 국가사회 의 필요와 요청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의 실상은 金仁鏡의 열전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金仁鏡의 初名은 良鏡이요 慶州人이니 平章事 良愼公 義珍의 四世孫이다. ① 父 永固는 興郊道館驛使가 되어 公淸慈惠하여 한 사람도 매질하지 아니하였다. 後에 龜州甲仗이 되었는데 金甫當이 軍士를 일으켜 敗北하매 永固가 잡혀 寧州獄에 갇히어 죽 음을 당하게 되매, 興郊吏民들이 處置使에게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니 處置使가 차마 베지 못하고 쇠고랑 을 채워 서울에 보내니, 承宣 李俊儀가 本來 永固와 좋아하므로 營救하여 免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이 이미 官에 籍沒되고 妻子가 飢寒하여 依托할 곳이 없으매 興郊의 吏가 또 米帛을 거두어 厚히 보내었고 벼슬이 閤門祗侯에 이르렀다. ② 仁鏡은 才識이 精敏하고 隷書에 能하였으며 明宗 때 乙科 第二人에 合格하여 直史館이 되고 累轉하여 起居舍人이 되었다. ③ 高宗 初에 趙冲이 契丹兵을 江東城에서 討伐할 새 仁鏡을 불러 判官을 삼으니 이때 蒙 古元帥 哈眞과 東眞元帥 完顔子淵이 軍粮을 請하거늘 冲이 이를 察코자 곧 仁鏡으로 하 여금 精兵 一千을 거느리고 米一千石을 실어다 주게 하였다. 마침 哈眞과 完顏子淵이 契 丹兵을 岱州에서 攻擊할 새 州의 西 秀山에 떨치고 있거늘 仁鏡이 兵士를 거느리고가 뵈 오니 두 元帥가 風樂을 베풀고 잔치를 열어 慰勞하여 歡樂을 다하고 罷하거늘 仁鏡이 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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