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제 5 차광주정신포럼 5 18 민중항쟁진상규명과쟁점 5 18 민주화운동의재구성 - 계엄군의사격행위를중심으로 김희송 ( 전남대학교 5 18 연구소 ) 5 [ 토론문 ] 안진 ( 전남대학교법학전문대학원 ) 37 5 18 진상규명법제정의필요성과방향 민병로 ( 전남대학교법학전문대학원 ) 39 [ 토론문 ] 김재윤 ( 전남대학교법학전문대학원 ) 55 5 18 진상규명과행정의역할 나의갑 ( 광주시 5 18 진실규명지원단 ) 59 [ 토론문 ] 김태종 ( 광주시 5 18 민주화운동기록관 ) 69
5 18 민주화운동의재구성 - 계엄군의사격행위를중심으로 김희송 ( 전남대학교 5 18 연구소 ) Ⅰ. 문제제기 헬리콥터의기체성능이나특성을잘몰라서하는얘기이거나아니면계엄군의진압활동을고의적으로왜곡하려는사람들의악의적인주장일뿐이다. 그가제시한사진도가짜였다. 그는목사가아니라가면을쓴사탄이었다는생각인든다. 미국인목사라는피터슨이나조비오신부나 성직자 라는말이무색한파렴치한거짓말쟁이일뿐이다 ( 전두환회고록. 2017:484). 헬기기총소사가만약있었다면저희로서는명령에따라일어난일일터인데감출이유가없습니다. 그와관련하여서는저희항공관계자들이정말억울하게생각하고있는부분이니과학적인조사를통하여사안의진상을제대로밝혀주시고광주시민의억울한심정은충분히이해와아픔을같이하지만거짓말이있어서는안된다고말씀을드리고싶습니다 (5 18민주화운동당시 1항공여단장 ). 5 18민주화운동당시계엄군의헬기사격을비롯한사격행위에대한진실규명의과정은거짓이진실을어떻게호도하는지잘보여주고있다. 헬기사격의가해자로지목받고있는당사자들이과학적인조사운운하면서피해자인광주시민을짐짓위로하는척조롱하고, 종교인의양심과용기로헬기사격의문제를공론화했던신부님과목사님을파렴치한거짓말쟁이로규정하는전두환의당당함에서역사의정의가과연존재하는것인지묻지않을수없다. 1980년 5 18민주화운동기간동안신군부가자행한국가폭력은이후 5월운동과민주화운동을통해진실규명과책임자처벌이일부이루어졌지만계엄군의사격행위를비롯한핵심쟁점들은여전히규명되지못한상황이다. 특히계엄군의헬기사격은故조비오신부를비롯한다수의광주시민들이그광경을목격하였다고증언하였으나군관계자들은이러한증언을한조비오신부님을명예훼손으로고소하는등강경하게그사실을부정하여왔다. 1980년 5 18민주화운동당시헬기사격이있었다는많은증언과주장에도불구하고헬기사격을부정하는군의주장을뒤집을만한결정적인증거를발견하지못하면서미완의과제로남아있었다. 군관계자들이헬기사격문제에대하여직접당사자로나서서고소를하는등완강하게그사실을부정하였던것은헬기를이용한사격은 5 18민주화운동기간동안자행되었던계엄군의폭력과는질적성격을달리하는야만적인범죄행위로서자위권적차원에서불가피하게폭력적인진압을선택할수밖에없었다는신군부진압논리의허구를드러내는결정적증거가되기때문이다. 신군부는 5 18민주화운동기간발생한계엄군의사격을비롯한제반의진압행위는국민과출동병력의생명과안전을지키기위한자위권적차원의불가피한선택이었다고주장했다. 자위권 5
은 국가의안전과국민의생명및자산을보호함에있어급박, 부당한위해를제거하기위하여부득이실력을행사하여방위하는권리 ( 제5공화국전사, 1654) 로서이희성계엄사령관은 1980년 5월 21일오후 7시 30분생방송으로 자위권보유를천명하는경고문 을발표하고계엄군의발포를공식화했다. 5월 21일자위권보유천명이후신군부는 5 18민주화운동과정에서발생한계엄군의사격행위의대부분을급박한상황에서국민을보호하기위한불가피한조치였다고주장해왔다. 반면에헬기사격은자위권차원과는거리가먼살상행위이기때문에 1980년당시의군관계자까지도 외국목사가무슨근거로그런주장을제기하는지모르지만적과의교전상태도아닌데자국민간인을상대로기총소사를했다는것은도저히납득하기어려운일이다 라고진술했다 ( 한 **, 보안사 * 과장 ). 이렇듯헬기사격은헬기사격의주체로지목되었던항공관계자들은물론신군부당사자들모두가이구동성으로있을수없는작전이라는입장이었다. 그런데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6년전일빌딩리모델링과정에서발견된총탄흔적을헬기사격에의한탄흔으로판정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공식제출한감정서에서전일빌딩에나타난탄흔은헬기가호버링 (hovering, 공중에정지해있는기동형태 ) 상태에서고도만상하로변화하면서사격한것으로추정하면서, 탄흔의밀집형태로봤을때사격에이용된무기종류는 500MD의 M134 미니건이나 UH-1H헬기에거치된 M60기관총일수있다고감정했다. 전두환이회고록에서헬기사격의존재를세상에알린성직자들을사탄이라고까지비난하면서부정했던헬기사격이실재했다는역사적사실이 36년만에확인된것이다. 헬기사격이명백한사실로드러났음에도불구하고군은여전히헬기사격자체를부정하면서진실규명의단초가될수있는당시의군작전기록에대한존재유무조차도확인해주지않고있다. 이러한상황에서본연구는단절적이고파편적이지만과거 5 18민주화운동진상규명과정에서확인된군자료와관계자들의진술등을종합하여헬기사격을비롯한계엄군의사격행위를총체적으로분석하여재구성하고자한다. 분석시기는계엄군의자위권보유천명이전의시기인 1980년 5월 20일과 21일에중심을두고자한다. 분석의시기를 5 18민주화운동초기로한정한것은이희성계엄사령관의자위권보유천명이후에는계엄군의사격이공개적으로자행되면서사실관계가상당부분규명되었지만, 이전의사격행위는아직까지도미완의영역으로남아있기때문이다. 특히어느정도규명되었다고인지된사실조차도잘못된해석이많기때문에이번연구에서는계엄군의사격행위에대한사회과학적접근을모색하고자한다. 여기서사회과학적접근은사회학의질문인 why와 so what 의문제를계엄군의사격행위에적용하여분석하는과정을의미한다. 기존의 5 18연구가당시에무슨일이발생했는지에대하여천착했다면이번연구는사실관계의규명에기반하되사격행위에다다르게된과정과원인은물론그러한행위가무엇을의도했는지? 사격행위의의미와영향까지함께파악하고자한다. 이연구는 5 18민주화운동진상규명과정에서파악된군자료들을활용하여진행되는관계로군자료의신뢰성문제가제기될수있다. 1980년당시작성된군자료의계엄군의일방적입장과유리한내용으로작성되거나불리한내용은작성이후변조되거나누락되었을수있다는점에서신뢰성의한계를갖고있다. 김희송 (2013) 의연구에따르면계엄군의가장기본적인동정을수 6
록하고있는 계엄상황일지 의경우 5 18민주화운동관련부분이기존의상황일지작성패턴과상이하고, 심지어는일련번호의일부가누락된사실이확인되었다. 이렇듯군자료의신뢰성문제는군자료를통한연구의치명적한계로작용할수있기때문에철저한검증절차를통해신중하게인용할필요가있다. 따라서이번연구에서는다양한군자료에대한교차검증과함께 1995년 12 12 및 5 18사건수사과정에서확보된군관계자들의진술내용을활용하여군이드러내지않고자했던 5 18민주화운동의실체적진실을규명하고자한다. Ⅱ. 계엄군의사격행위분석 1. 5 월 20 일밤광주역앞사격 1) 기존의주장과시각 1980년 5월 20일밤광주역앞에서의집단발포는부대단위의본격적인발포행위의시작이었다. 5월 20일광주역앞발포이전인 5월 19일오후 5시경광주고등학교부근에서작전을수행중이던특전사의장갑차가방향을잃고인도에걸쳐정차하자, 시위대가장갑차를공격했고이에장갑차에타고있던차 ** 대위가사격을하여김영찬군이총상을입은사건은조직적차원의사격이라기보다는개인차원의우발적인사격행위라고할수있다. 그러나 5월 20일밤 10시 30분부터새벽 1시사이에전개된 3특전여단의사격은개인적차원이아닌부대차원의조직적사격행위였다. 당시의상황은자료에따라조금씩상이한데 1995년부터발족한 12 12 및 5 18 사건특별수사본부 ( 이하특검 ) 에제출한고발장에서시민단체는광주역사건을자정무렵시위대에의해시청과광주역이점거위기에직면한상황에서고립된공수부대가지원부대와의연결을시도하였으나여의치않자광주역병력은발포를시작했다고기록하고있다. 이상황과관련하여여전히알려지지않고있는계엄군의무차별한발포및시위진압도중화염방사기등의살상무기사용사실이밝혀져야한다고주장했다. 특검조사에따르면집결지확보를위하여광주역앞도로를차단한 3공수여단은수천명의시위대와대치공방을벌이는과정에서차량돌진등시위대의강력한공격에위협을느낀대대장들이실탄지급등지원을요청하자 22:30경경계용실탄을대대에갖다주도록지시하여, 장교들의권총, M16 발포와 E-8발사기 ( 이른바휴대용지랄탄발사기 ) 발포로시위대의차량돌진을저지하고시위대를해산시킨다음, 5월 21일새벽 2시경 KBS방송국에배치되었던 31사단경계병력장교 4명, 사병 35명과함께전남대학교로철수한것으로확인했다. 2) 5월 20일광주역앞사격의재구성 (1) 광주에투입된군부대현황및작전내역 5월 20일발생한광주역앞사격사건을제대로분석하기위해서는 5 18민주화운동의진압을위해투입된군부대의현황과정확한작전내역을파악할필요가있다. 왜냐하면 3특전여단의 7
5월 20일광주역에서의사격행위는 3특전여단의독자적인작전수행과정이나시위대를해산시키기위한과정에서발생한사건이아니라 20사단의파견을지원하기위한작전과밀접한관련이있기때문이다. 5 18민주화운동기간동안광주에파견된부대는특전사령부산하 3개여단, 20사단전체, 1항공여단 2개항공단등으로알려져있다. 1) 5 17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에따라처음제7특전여단이파견되었고이어서 11특전여단, 3특전여단, 보병 20사단등의부대가순차적으로투입되었다. 또한육군의지상활동을지원하기위하여 1항공여단의항공기들이대거투입되었다. 광주에파견된부대의작전통제는계엄사령부 ( 이하계엄사 )-2군사령부- 전투교육사령부 ( 이하전교사 )-31사단-파견부대순으로이뤄졌으며 5월 22일이후는 31사단이배제되고전교사가직접통제하였다. 이들부대의규모와파견시기를정리하면아래 < 표 1>, < 표 2> 와같다. < 표 1> 5 18 민주화운동기간광주에파견된지상군현황 2) ( 단위 : 명 ( 장교 / 사병 )) 일시부대명 5 월 18 일 5 월 19 일 5 월 20 일 5 월 21 일 27 일 7 특전여단 3) 11 특전여단 4) 3 특전여단 5) 33대대 45/321 - - - 35대대 39/283 - - - 본부 10/76 - - - 소계 774(94/680) 774(94/680) 774(94/680) 774(94/680) 61대대 43/277 - - - 62대대 43/306 - - 63대대 42/275 - - 본부 34/180 - - 소계 320(43/277) 1,200(162/1,038) 1,200(162/1,038) 1,200(162/1,038) 11대대 40/198-12대대 47/192-13대대 45/205-15대대 45/206-16대대 44/220 - 직할 34/116 - 소계 1,392(255/1,137) 1,392(255/1,137) 60연대 88/1,514 61연대 82/1,413 20사단 6) 62연대 84/1,450 본부 30/105 소계 4,766(284/4,482) 총계 1,094(137/957) 1,974(256/1,718) 3,366(511/2,855) 8,132(795/7,337) 1) 5 18 민주화운동기간광주에파견된부대의현황도진상규명이이루어지지않은영역이라고할수있다. 보안사나육군본부에서도광주에직접지원인력을파견하였는데이들의규모와역할이잘알려져있지않다. 특히보안사첩보내용으로기록된 노장호국단도착예정 ( 선무활동 ): 워커힐버스 8 대 300 명 과같이선무공작목적으로파견된부대의규모와역할에대한진상규명도절실한상황이다. 2) 기존의 5 18 연구에서광주에투입된군부대의현황은 10 일동안동원된전체가용병력중심으로언급되면 8
< 표 2> 5 18민주화운동기간광주에파견된 1항공여단출동병력및장비현황 7) 장비 대별 인원 기종 대수 31항공단 49 AH-1J 2 500MD 12 61항공단 53 UH-1 11 U-6 1 기타 6 O-1 5 계 108 5 31 당시광주에지상군의작전지원이라는목적으로투입된항공기는당시군의전체항공전력규모로봤을때결코적지않은규모였다. 1980년 5월 20일당시육군의가동가능한헬기가 500MD 90대, UH-1H 32대, AH-IJ 6대였다는점에서광주에파견된공중지원장비가결코적은숫자는아니었다. 군이보유하고있던가장강력한공격헬기인 AH-1J( 이른바코브라헬기 ) 의경우작전운영이가능한숫자가전체 6대에불과했는데광주에 5월 22일 2대가파견되어항쟁이종결될때까지상주했다. 1항공여단의경우당시상당한장비와병력이광주에출동하고작전에참여했음에도불구하고 1항공여단이수행한작전내용은거의알려져있지않다. 항공여단을제외하고광주에파견된모든부대들은각부대차원에서전투상보나작전상보를제작했다. 그런데유일하게 1항공여단은전투상보를작성했는지조차확인이되지않고있다. 당시의법령에따르면전투상보를작성하지않으면반드시부대사를작성하고영구보존해야한다는규정이있었음에도불구하고아직까지부대사의존재유무도모르는상황이다. 작성이되지않은것인지작성이후폐기된것인지확인이필요한지점이다. 광주에파견된각부대의전투 ( 작전 ) 상보에따른 5월 20일과 21일의작전내역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서각일자별상황이잘드러나지않는않는다. 이번연구에서는보병 20 사단의 충정작전상보 와특전사령부의 광주지역소요사태진압작전 보고서에기초하여각일자별파견부대현황을파악하고, 전교사작전일지를검증자료로활용했다 ( 김희송, 2015). 그런데계엄상황일지, 보안사의충정상황보고에기록된부대원의숫자와상이한경우가있는데단순한숫자의오기인지파견인원의은폐인지추후확인이필요한상황이다. 3) 제 2 군의작전통제에배속된제 7 특전여단의 31 대대는전북대, 32 대대는충남대에배치되었으며, 33 대대는전남대와전남교대, 35 대대와본부병력은조선대와전남대의대 ( 학동소재 ) 에배치되었다. 4) 제 11 특전여단의지휘부와 61 대대는 C-123 항공기를이용해 5 월 18 일서울을출발해 (16:30) 조선대에진주하였고 (18:30), 여단본부및 62, 63 대대는열차편으로 19 일광주역에도착하여 (00:50) 작전을수행했다. 5) 제 3 특전여단은 5 월 20 일청량리역을출발해 (01:00) 광주역에 07:00(1 제대 ), 07:35(2 제대 ) 도착하여전남대에집결, 기동타격부대로운영되었다. 6) 20 사단은 61 연대를선발대로하여 5 월 20 일용산역을출발하여 (22:30) 5 월 21 일송정리역에도착해 (04:40) 작전을수행했다. 62 연대와사단본부는 5 월 21 일오전송정리역에각각도착했으며 (08:35, 08:50), 60 연대는 5 월 21 일군의도청철수이후 5 월 22 일항공편으로광주에증파되었다. 7) 1 항공여단의지원일시와규모를파악할수있는전투 ( 작전 ) 상보의존재유무가확인되지않는관계로군사연구실이발간한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 에기록된항공관련현황을인용하였다. 9
< 표 3> 광주에파견된부대의전투 ( 작전 ) 상보종합 (5 월 20 일, 21 일 ) 7 공수 11 공수 3 공수 20 사단 1 항공여단 05.19 21:00 33 대대광주역점령 21:20 35 대대광주종합터미널 16:10 500MD 2 대즉각출동준비출발지 : 광주 의명 에출동 점령 23:10 부대출발 18:50 UH-1H ysp-cac 0/0 22:50 33 대대전남대복귀 ( 청량리역도착 24:00) 예비역장성 4 명 05.20 01:10 11 여단작전회의개최중요지역에대한거점배치광주대교 : 17 지역대, 광주공원 : 12 지역대, 충장로 : 11 지역대 01:02 청량리역출발 04:00 33 대대광주역점령 04:40 33 대대 4 중대교육대점령 광주역합류 07:00 08:00 도청, 상업은행, 광주은행, 07:35 한일은행, 계림파출소에 11:20 01:10 작전결과거점배치각 1 개대대씩배치방호완료 12:00 광주역도착 (1 제대 : 0700, 2 제대 : 0735) 12:15 조선대경비임무 11 여단에인계 (35 대대 ) 15:05 사령관방문 15:40 33 대대계림동출동 13:00 16:00 도청지역으로군중집결 (2~3 만명 ) 12:30 각대대별배치완료 15:00 광주시청 (13), 광주역 (12,15), 금남로 (11), 전남대입구 (16, 본부 ) 에서작전 10
7 공수 11 공수 3 공수 20 사단 1 항공여단 16:00 33 대대숙영지로복귀 ( 전 11 대대 : 약 10 만명이금남 남대 ) 로봉쇄, 고립상태하에자 17:20 택시 70~80, 버스 30~40 체방호 대도청앞집결 12 대대 : 광주시청에서광 주역전으로중원, 15 대대 18:10 33 대대숙영지를조선대 와합류, 2 만여명과대치 로이동명령 19:00 15 대대 : KBS 확보, 도로봉 쇄및 12 대대와합류, 폭도 100 여명학생 ( 특수임무대 이동저지 20:00 : 폭약제조 ) 도청앞군중 16 대대 : 전남대입구 100 과합세, 열렬한환영을받 여대차량및폭도와대치 음 13 대대 : 광주시청으로이 20:30 25,000~30,000 명도청앞 22:00 동, 폭도만여명과대치 집결 22:10 이후완전포위상태로폭도와 21:20 33 대대조선대무사히도 대치 착 ( 이동중 2 명부상 : 투석 ) 21:50 35 대대통합집결 ( 도청앞 ) 62, 63 대대중원. 조선대정문 (9 지역대 ), 각 1 개지역대로봉쇄, 7 지역대는예비 05.21 00:00 조선대 200 미터전방폭도와대치 00:30 정문 (2 중으로 2 개 ), 후문 (1 개 ) 에차단기설치 00:36 조선대정문, 3,000 명이차량 3 대로정문돌파시도. 그중 1 대는담을들이받고 야간에폭도들이흉기및차량탈취, 도청공격조선대에서도 4 회에걸쳐약 3000 여명의폭도가공격 23:00 광주역전 2 개대대 (12,15 대대 ) 구출작전실시 ( 본부 2 개팀으로특공팀조직 ) 00:30 02:00 11 대대소요진중돌파, 광주시청의 13 대대와합류, 광주역전의 12, 15 대대와연결작전시 12, 15 대대광주역전에서폭도와대치. 11,13 대대와의연결작전지원 20:00 광주지역일원소요군종 10 만명으로치안마비지역에군, 경찰력으로치안유지불가 20 사단 1 개연대병력투입지시접수 22:30 61 연대용산역출발 송정리익일 04:00 도착 20 사단 (-) 병력추가투입지시접수 02:30 사단사령부및 62 연대용산역출발 송정리 08:58 도착 ( 상무대 10:00 도착작전준비 ) 05:10 500MD: 5 대광주로출발 (502 항공대 M-5 장착 ) 0510 출발 0625 도착 11
12 7 공수 11 공수 3 공수 20 사단 1 항공여단 04:40 정지. 고속버스 1 대수류탄의저지로민가를들이받고정지, 폭도 3 명검거 조선대폭도해산 35 대대, 도청에서법원으로가는로터리에서대기중임 03:00 02:10 4 개대대광주역전에서합류. KBS 기술자 5 명, 보병 5/35 명구출, 무기고의화기를가지고 16 대대의엄호하에전남대학교로복귀 08:30 조선대 500 여명집결 09:00 33 대대 11 여단에배속 (04:00) 07:00 13:00 여단 3 개대대및 7 여단 35 대대도청으로집결, 방호임무수행 폭도들이소총으로계엄군위협 08:00 광주시공단입구일원으로소요진압차 61 연대출동했으나소요군중의과열된소요로진압작전불가복귀 ( 인원 82/1413, 차량 40 대 ) 13:00 폭도, 도청에방어중인군경쪽으로 APC 로돌입, 11 여단 1 명압사 14:00 전남계엄분소장호소문살포 10:00 전남대정문 : 4 만, 전남대후문 : 1 만과대치, 일단폭도들의차량화 폭도들에의해정문이돌파당했으나 3 개대대의역습으로격퇴 08:10 지휘차량육로이동광주시공단입구도착지차량 1/4 톤 14 대피탈, 인원 2 명부상, 1 명실종잔류 25 명, 12:00 시경탈취복귀 10:53 UH-1H 10 대출동대기 ( 감실장중령 ) 10:56 UH-1H 10 대출동지시 11:15 출발 (K-16:2 대, 203 항공대 :8 대 ) 13:10 10 대도착 ( 연료보급 ) 14:15 UH-1H:2 대 ysp 광주출발 ( 통신장비및통신장교 ) 15:57 500MD 2 대 (506 항공대 ) 광주출발 16:30 전남대철수, 교도소로이동 파기 : 소방차 1 대, 경찰가스차 1 대, 1/4 톤 2 대 16:00 폭도들의광주시진입및타지역으로의이동을봉쇄하기위한최초부대배치명령수행 16:00 진돗개 2 발령 (16:16 접수 ) ( 국방부장관 )
7 공수 11 공수 3 공수 20 사단 1 항공여단 16:50 35 대대도청에서조선대로철수개시 (63,62,35 대대순 ) 사격을피하여이동, 피해무 17:00 조선대에서주답으로철수명령 (33,35 대대, 11 여단 ) 17:00 여단병력조선대로철수완료 17:20 이동중폭도의저격에의해 1 명부상 도청 1 개연대, 상무대지역 1 개연대 16:30 61 연대장및대대장 3 명헬기항공정찰중도청일원에서산발적인폭도들의저격으로병력의공중기동작전이불가함을판단보고 17:50 35 대대조선대로이동완료 17:00 부대봉쇄배치조정 1 번도로차단 : 1 개대대 톨게이트 : 1 개대대 송광도로차단 : 1 개대대 18:30 정상전제 68 호제목 : 데모군중발포행위내용 : 80.5.21 1500 경 UH-1H 1 대가광주시내상공비행중데모군중의대공사격을받은바있음피해 : 피해무조치 : 광주일원상공에저공비행금지요망 13
(2) 군자료가은폐하고있는진실계엄군의전투 ( 작전 ) 상보에따르면광주에파견된부대들은독자적인작전을수행한것처럼보인다. 그런데 5 18민주화운동시기계엄군은작전은독자적으로도진행되었지만다른부대와연계한작전이적지않았다. 이런이유로개별부대의작전결과로는잘이해되지않는사건이나드러나지않았던상황이다른부대의작전과연계하여살펴봤을때제대로파악되는경우가발생한다. 대표적인사건이 5월 20일광주역앞에서의사격이라고할수있다. 3특전여단의광주역앞사격은아직계엄당국차원의자위권관련논의가시작되지도않는시점에서개인차원의우발적사격이아닌왜부대단위의사격까지감행했는지잘이해가되지않는사건이다. 더구나사격행위를수반한강력한폭압으로광주역주변의시위를진압하였음에도불구하고 3특전여단은 5월 21일오전 2시경광주역을떠나전남대로복귀해버린다. 3특전여단의복귀이후오전 5시광주역인근 KBS방송국은시위대의방화에의해소실된다. < 표 3> 에서확인되듯이 3특전여단의최초의부대배치목적의하나가 KBS방송국의확보였다는점에서납득이되지않는복귀라고할수있다. 반면에같은시각도청앞광장에주둔한 11특전여단 3개대대와 7특전여단 35대대는도청앞광장에서비박을하면서까지도청앞광장을사수하고있었다. 이처럼 3특전여단의광주역앞사격과이후의진행과정은사격을해서라도관철하고자했던작전의목적이무엇이었는지가잘드러나지않았다. 그러나 3특전여단의광주역집결, 사격, 철수라는일련의과정을 20사단의광주이동과연계하여살펴보면광주역앞사격이갖는작전의실체를총체적으로파악할수있다. 3특전여단의 5월 20일사격은지금까지알려진것과는달리시위대와의공방이라는급박한상황에서발생한것이아니라 20사단의광주투입을지원하기위한작전과정에서발생하였다. 이러한사실은 < 표 3> 에서 3특전여단과 20사단의작전시간을교차하여살펴보면더욱명확해진다. 5월 20일밤 3특전여단은기차를이용하여광주로출동하고있었던 20사단 61연대의집결지확보작전을전개하고있었다. 20사단 61연대의최초집결지는지금껏알려진것과는달리광주역이었다. 물론군의공식기록어디에도이러한사실을확인할수는없다. 20사단의광주이동을 군자료 1. 20 사단출동관련육군본부의작전조치사항 14
명령한육군작전명령 21-80 및 23-80호는 61연대의도착지를아래그림과같이송정리역으로명기하고있다. 또한계엄사의상황일지에서도 61연대의도착예정시각을보고하면서도착지를송정리역으로기록하고있다. 그러나아래의 5월 21일오전 0시 26분전교사의작전일지는 20사단병력광주역도착을송정리역으로변경도착 이라고기록하고있다. 전교사작전일지에기록된내용은전교사의상급부대인 2군사령부로부터수령한내용인데, 변경도착 은실제도착이아닌도착지변경에관한정보내용을기록하는과정의오기로보인다. 그리고바로 0시 58분의내용에서확인되듯이동운동건널목과백운동건널목에장애물이적치되어있다는철도선로의안전문제와관련한내용을보고하고있다. 이와유사한보고는이전시간대인 5월 20일오후 11시 40분에 수송을방해하기위해서동운동 ( 공설운동장 ) 철로광주 3km지점에방범초소를파괴철로위에돌을놓아두었음 이라는내용이먼저보고되었다. 이러한일련의작전일지내용은계엄당국이군의이동수단인광주지역철도의안전문제를심각하게고려하고있었다는반증이다. 따라서이시각을전후하여 20사단의이동경로를광주역에서안전이확보되는송정리역으로변경했다는추론이가능하다. 이러한추론을확실하게보증할수있는군자료를통해서는더이상확인할수는없었다. 그러나 20사단관계자들의진술을통해애초의도착지인광주역에서송정리역으로변경되었다는사실을확인할수있었다. 이내용은다음소절인군관계자의진술에서확인하도록하자. 군자료 2. 전교사작전일지 : 5 월 21 일 20 사단도착지변경내용 한편 20사단의도착지가광주역에서송정리역으로변경되었다할지라도 3특전여단은 20사단의이동과무관하게처음부터광주역에서작전을전개하고있었다는주장을할수있다. 그리고실제로 3특전여단의전투상보는 < 표 3> 에서확인되듯이광주역에 2개대대가배치되어있었던것으로나타난다. 당시 3특전여단을비롯한특전사령부산하의부대들은각대대별로작전을전개하고있었으며각대대는지역대별로병력을배치, 운영하였다. 8) 15
3특전여단의전투상보는 5월 20일부대배치를 11대대 ( 금남로 ), 12대대 ( 광주역 ), 13대대 ( 광주시청 ), 15대대 ( 광주역 ), 16대대 ( 전남대입구 ) 로기록하고있다. 그러나아래의전교사작전일지는 3 특전여단전투상보의내용과는다르게 5월 20일오후 3시 3특전여단의부대배치상황을 11대대 ( 황금동주변 ), 12대대 ( 광주시청 ), 13대대 ( 광주일고 ), 15대대 ( 누문동 ), 16대대 ( 광주역로타리 ) 로기록하고있다. 군자료 3. 전교사작전일지 : 5 월 20 일병력배치현황 앞서살펴본두개의군기록은 11대대의배치지역을제외하고는부대별배치지역이전혀다르게기술되어있다. 특히 5 18민주화운동기간동안부대단위의첫집단발포로기록될광주역의경우처음광주역에배치된부대가서로다르게나타난다. 전교사작전일지는 16대대의배치지역으로 광주역로타리 로명기되어있는데, 16대대부대원의진술에따르면 16대대는예비기동대로전남대학교에주둔하였다고한다. 따라서 5월 20일오후 3시이후에는전교사의작전일지와는다르게광주역에배치된부대는없었다. 이러한사실은당시시위에참여했던시민의진술에서도확인된다. 5월 20일차량시위대에참여했던이창준씨는 오후 1시 40분경에는신역앞에서계엄군에막혀돌아갔는데, 무등경기장에 5시경에모여재차대열을정비해같은코스로광주신역에도착했는데계엄군이이번에는철수를하고없어유동로터리에서광남로사거리를타고금남로쪽으로올라갔다 고증언했다 ( 정사5 18 특별취재반, 1995:265). 이렇듯군기록에는가장기초적인정보인부대의배치지역과작전내용이서로다르게기록되어있다. 이것은단순한내용상의오류라기보다는실제로진행된작전내용과다르게전투상보를기록했거나, 지휘체계상의문제로일선부대의작전이전교사에제대로보고가되지않았던것으로보인다. 이러한추론이가능한것은 3특전여단이수행한작전내용이 5월 20일오후 3시이후부터 12시까지의전교사작전일지에서는잘드러나지않지만, 계엄사의상황일지에는 3특전여단이전교사를거치지않고계엄사에직접보고한내용들이아래자료와같이자주나타나기때문이다. 8) 3 특전여단의부대편제는 11 대대, 12 대대, 13 대대, 15 대대, 16 대대의 5 개대대및본부직할대가있었고, 대대밑에는 4 개의지역대, 지역대밑에는 4 개씩의중대로편성되어있었다. 16
군자료 4. 계엄사계엄상황일지 : 5 월 21 일 3특전여단은당시지휘체계상 31사단에배속되어있었기때문에 3특전여단의작전은 31사단과전교사를거쳐 2군에보고되고, 2군이그내용을계엄사에보고했어야했는데특전사는군의지휘계통을무시하고자료과같이직접보고를하였다. 계엄사의상황일지에따르면 5월 21일오전 1시 15분접수된 광주시소요 23:15분현재 3특전여단 의작전내용을보면 11대대는공용터미널, 12대대광주역, 13대대시청앞, 15대대광주 KBS, 16대대전남대입구사거리의대치상황을담고있다. 그런데 3특전여단이직접계엄사에보고한오후 11시 15분의상황보고는 3특전여단의전투상보에기록된내용 - 22:10 이후완전포위상태로폭도와대치중이며, 23:00 광주역전 2개대대 (12, 15대대 ) 구출작전실시- 과도상이하다. 군작전보고의가장기본적인정보가되는부대의배치지역과작전내용이군기록마다다르게나타나고있는것이다. 자신들이계엄사에직접보고한내용과도다른작전내역에도불구하고왜 3특전여단은 5월 20일오후내내광주역에서작전을진행한것처럼전투상보를왜곡한것일까? 이러한왜곡은 3특전여단이자행한광주역앞사격의원래목적을은폐하기위한의도이외의다른목적을찾기는어려웠다. 왜냐하면군관계자의진술에서는 3특전여단의전투상보와는전혀다른증언들이쏟아졌기때문이다. (3) 군관계자의진술로드러난사실 1995년발족한 12 12 및 5 18 사건특별수사본부 의조사에따르면 5월 20일제3특전여단의최초부대배치는 본부대 : 전남대, 11대대 : 금남로, 12대대 : 광주시청, 13대대 : 공용터미널및광주일고인근, 15대대 : 양동사거리및누문동인근, 16대대 : 전남대입구에배치되었다. 전교사의작전일지에서광주역로터리에배치된것으로기록된 16대대는예비기동대로전남대학교에주둔하다가전남대학교정문사거리및굴다리인근으로출동한것으로나타난다. 출동목적또한 3특전여단장이전교사회의를가기위해전남대학교를나서다가시위대에막혀돌아오는사건이발생하여전남대학교입구에모인시위대를해산하기위한목적이었다고한다. 3특전여단은광주역에처음부터배치되지않았으며광주역으로이동을시작한시각은각대대에따라달랐으며, 같은대대의경우에도지역대에따라차이가많았다. 이는앞서언급했듯이특 17
전사의작전이지역대에기반한대대별작전으로진행된상황을반영한것이다. 처음광주역으로이동을시작한 15대대의경우오후 6시경광주역으로이동, 집결지를확보하라는여단장의지시에따라이동을시작하였다. 처음광주역에도착한 15대대부대원들은광주역에도착했을때는시위대가없었다고진술하였다. 부대출동의목적이시위대의해산은아니었다는것이다. 15대대장의진술에따르면 광주역에도착후여단장에게보고를하고집결지를확보하라는지시에따라도로를차단하였는데처음에는광주역으로통하는모든도로를차단하고있다가 21:00경 12대대가합류해서도로를양분해서차단했다 고증언했다. 본인들이처음광주역에도착했을때는시위대가없었지만, 12대대가합류하면서부터시위대가숫자가늘고공격횟수가늘었다는것이다. 한편 15대대를지원하기위한목적으로두번째로출동한 12대대는기동타격대의임무를수행하기위해시청에대기하고있었다. 12대대 5지역대장은 시청에대기당시에는특별한상황이없는과정에저녁식사무렵광주역으로이동명령이내려와광주역으로이동하였으며, 이동하는동안별다른상황은없었으며, 대대도착후 30분후부터차량의돌진이시작되었다 고진술했다. 최초출동대대부대원들의증언을종합하면 3특전여단의최초이동시간은오후 6 7시경으로, 처음광주역으로출동한 15대대는물론 15대대를지원하기위한목적으로출동한 12대대가광주역에도착할당시에는시위대와의본격적인충돌이없었다. 이것은처음출동한 2개대대의출동목적이시위대해산의목적이아니라집결지확보를위한작전의수행이었다는반증이다. 물론이집결지의용도가무엇인지를특검조사에서는특정하지못했지만 9) 3특전여단의작전이시작된시각이 20사단의출동을결정했던시각과상당부분일치한다는점에서 3특전여단장으로부터지시받은집결지의확보가 3특전여단부대원들을위한집결지가아니라 20사단의집결지라는해석이가능할것이다. 왜냐하면그시각열차를이용하여광주로이동하고있었던 20사단 61연대관계자들은이구동성으로출동당시부대의도착지는광주역이었다고증언하고있기때문이다. 20사단 61연대의최초도착지역이광주역이었다는증언은모든관계자의진술에서일치했다. 그러한도착지역이변경되었다는사실을인지한시기와그이유에대해서는일부다르게증언했지만최초도착지가광주역이라는데에대해서는이견이없었다. 먼저부대의이동을통솔했던 61연대장김 ** 대령은 5.21 04:00경송정리역에도착, 원래는광주역까지가기로되어있었는데그시각에송정리역에도착하였을때상무대에서나온장교가지금광주역으로더이상들어갈수없으니여기서내려주차되어있는차량에탑승하라고하여송정리역에서내리게되었다 고진술했다. 또한 61연대의선임대대장인제1대대장정 ** 중령은 서울에서광주로가던도중에열차가대전역에잠시정차하였는데, 그때대전보안부대요원이열차로올라와서하는말이송정리에서광주로가는철길을시위대들이폭파하여열차가시내로진입하는것을막으려고한다는첩보가있다는이야기를하는것을들은적이있다 고증언했다. 이처럼 20사단 61연대의지휘부들은광 9) 특검은 3 특전여단에대한조사과정에서 20 사단의출동과관련된질문을하지않았다. 20 사단의투입과 3 특전여단의작전의연관성을미처고려하지못한것이다. 특검의조사는많은사실을새롭게확인하는성과를거뒀지만일부내용에있어서는아예질문을하지않거나잘못된질문을하여답을얻지못했다. 정답에다가가려면제대로된질문을해야한다는사실을확인한조사라고할수있다. 18
주역이자신들의최초도착지역이었다고증언하고있지만군기록은전교사의작전일지한곳을제외하고는모두송정리역으로명기하고있다. (4) 소결군기록과관계자들의진술을종합하면 5월 20일 3특전여단의광주역앞발포행위는 20사단의광주투입과밀접한연관이있다는사실이확인되었다. 20사단 61연대의처음도착지는광주역이었다. 또한 5월 20일 3특전여단의최초작전배치지역에서광주역은빠져있었다. 3특전여단의병력이광주역으로이동을시작한시각은 20사단의광주투입이결정된시각과거의일치한다. 3특전여단이광주역으로이동하여집결지를확보하기위해도로를차단하고있는상황을목격한시민들이차량을이용한돌파를시도하는등강력한시위를전개하였고그과정에서집결지확보실패와고립위기에빠진군은사격을감행하여시위대의해산을시도했다. 전남대학교에머물고있었던본부대대의장교들까지참여한폭압적인진압으로시위대를해산시켜결국은광주역을확보했다. 그러나육군본부차원에서선로의안전문제등을고려하여 20사단의도착지역을송정리역으로변경함에따라 3특전여단은오전 2시경전남대학교복귀한다. 만약처음부터 3특전여단의출동목적이 KBS방송국의보호나광주역확보차원이었다면시위대를해산시켰기때문에전남대학교주둔지로복귀할이유는없었을것이다. 3특전여단의철수이후 5시경에 KBS는불길에휩싸였다. 이러한상황을종합하면결국 5월 20일밤광주역앞사격은광주로이동하고있었던 20사단의집결지를확보하기위한작전수행과정에서발생한사격이었다는결론에다다른다. 그럼에도불구하고군기록에서는 20사단의도착예정지를송정리역으로명기하고있으며, 3특전여단은광주역에서지속적으로작전을수행한것처럼사실을은폐하고있다. 이러한왜곡과은폐는 3특전여단이자행한사격행위를애초의작전지역에서우발적으로발생한시위대와의공방과정중에자위권적차원의불가피한사격이었다는주장을펼치기위한목적으로보인다. 그리고신군부는이러한 3특전여단의작전을성공적인것으로평가했다. 만약 3특전여단의작전을실패로간주했다면 5 18민주화운동이종료된직후인 1980년 6월 20일수여된훈포장에서 정호용특전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최세창 3특전여단장 등 3명만이유일하게충무무공훈장을받은사실이설명되지않는다. 충무무공훈장은 1980년당시수여된훈장중의최고등급의훈장으로추천기준은다시 5등급으로분류되는데 전시또는이에준하는비상사태하에서전투에참가하여뚜렷한공적을세운자에게수여하는 3번째등급의훈장 에해당한다. 이들 3인보다높은등급의훈장을받은사람은 1등급인태극무공훈장을받은전두환이유일하다. 신군부는자국의국민을상대로무차별사격행위를한부대의책임자에게뚜렷한공적을세운것으로간주하여사건직후최고등급의훈장으로치하했다. 사격행위를정당방위적또는공격적자위수단을간주한것으로긍정적으로평가하였다. 전두환당시보안사령관이 5월 23일정호용특전사령관을통해소준열전교사사령관에게 소선배귀하, 공수부대를너무기죽이지마십시오, 희생이따르더라도광주사태를조기에수습해주십시오 라는메모를보낸것도이러한평가의연장이었을것이다. 이처럼진압작전을위해서는계엄군의사격행위조차도치하하는신군 19
부의태도가 5월 20일밤광주역앞사격을가능하게했으며, 3특전여단의사격은 5 18민주화운동과정에서다른부대의사격에도큰영향을주었다. 5월 21일의도청앞사격과도청주변상공에서의헬기사격이대표적이라고할수있다. 2. 5 월 21 일오후도청인근헬기사격 1) 기존의주장과시각 1980년 5월 21일은계엄군의사격이공식화된날로기록되고있다. 오후 1시도청앞광장에서의집단발포를시작으로도청주변상공에서의헬기사격까지시민들을대상으로한무차별적인사격이전개되었다. 이러한계엄군의사격에맞서시민들이무장을갖추기시작하면서 5 18민주화운동은본격적인무장투쟁으로전환되었다. 5월 20일의광주역앞발포가야간에돌진하는차량을대상으로전개되었다면 5월 21일도청주변에서의사격은백주대낮에수많은불특정다수의시민들을대상으로공개적으로자행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5월 21일의사격도어떤작전목적으로, 누구의명령에의해전개되었는지에대한진실은드러나지않고있다. 신군부는도청앞사격에대해시위대의위협에맞서위급한상황에서일선부대원들이자위권적차원의사격을한것이라고강변하고있다. 특히 5월 21일의헬기사격에대해서는이러한사실자체를지금까지도부정하고있다. 5월 21일오후에헬기사격을목격했다고증언한조비오신부와아놀트피터슨목사는 1995년특검조사에서사격을자행한헬기로 500MD를지목했다. 헬기사격을목격한구체적시각을특정하지는못했지만대체로오후 1시 30분부터 5시사이로는한정할수있다. 조비오신부는헬기가도청쪽에서광주공원쪽으로가면서불로교인근에서사격을하고백운동방향, 잣고개쪽으로날아갔다고진술했다. 그리고시간은오후 1시 30분부터오후 3시사이로추정했다. 아놀드피터슨목사는호남신학대학교와기독교병원인근에서오후 3시 15분부터 5시사이에헬기사격을목격했다고진술하면서당시촬영한 500MD 사진을증거로제출했다. 헬기사격의당사자로지목되었던 1항공단관계자들은헬기사격을주장한조비오신부를 1989 년검찰에고발하면서단 1발의헬기사격도없었다고단언했다. 당시고발장에따르면 5 18기간에 헬기등항공전력을투입하여위력시위, 지휘및정찰비행, 공중방송및전단살포등과아울러 2817명의작전병력공수, 93명의환자후송및 187톤의보급품수송등의임무를수행하였는데문제의 5월 21일오전중에는비무장 500MD가 M5최루가스살포를위하여광주시내상공을비행한바있고, 오후 2시경에는수송용헬기인 UH-1H 2대가도청상공을정찰및선무방송목적으로비행한사실은있으나문제의무장헬기는 2시경비행한사실이없고, 오히려 UH-1H헬기가시위대의대공사격을받고기체의손상을입은채로회항한사실이있을뿐이다 라고주장했다. 그리고피탄지역에대한탄환흔적조사, 부상자나사망자에대한부검결과를검토한다면사격설은허무맹랑한주장이라는사실이바로확인될수있다고목소리를높였다. 그렇다면 5 18민주화운동기간동안헬기사격이없었으며, 시민들이헬기사격을목격했다고주장하는 5월 21일광주에는무장헬기자체가없었다는항공단관계자들의주장은진실일까? 항 20
공단관계자들은헬기사격의진실을규명하기위해서는피탄지역에대한탄환흔적조사를해보면된다고했는데, 전일빌딩의탄흔은이들의주장이거짓임을증명했다. 전일빌딩의탄흔으로사격행위의존재는확인되었지만여전히왜무슨목적으로언제사격을했는지에대한사실이제대로밝혀진것은없다. 군기록과관계자의진술을통해그사실을하나하나추적해보자. 2) 5월 21일오후도청인근헬기사격의재구성 (1) 군자료가은폐하고있는진실군자료를통해서는 5 18민주화운동기간동안의헬기사격에대한직접적정보는물론헬기를이용한작전내역조차확인하기가힘든상황이다. 5 18민주화운동진압을위해투입되었던모든부대들이전투 ( 작전 ) 상보를남겼는데항공여단만유일하게관련자료가확인되지않고있다. 이처럼항공여단에대한군기록의확인이힘든연유를추론해보면우선헬기사격의사실자체를 37년동안완강하게부정했듯이철저하게자료를은폐했던결과라고볼수있다. 또다른측면에서는항공여단의작전이갖는특징에기인한것으로보인다. 항공여단의작전은대체로독자적인작전의수행이아니라지원작전이나협동작전의개념으로진행되었기때문에관련자료가적을수도있다. 따라서항공여단의활동을총체적으로파악하기위해서는지원작전의내역까지함께살펴보는것이필요하다. 신군부는 5 18민주화운동시기이전부터헬기를이용한소요진압방법을다각적으로검토해왔다. 육본의작전참모부가 1980년 5월마련한 소요진압공중지원방안연구 에따르면 공중협동작전으로조기에소요군중을무력화하여병력및장비의피해를방지하고조속한작전종결을보장하는등소요진압작전능률극대화 를위하여헬기 (500MD, UH-1H) 에깨스살포기 (M5), 화학탄및조작병을탑승시켜지상소요진압부대를지원하는방안을모색했다. 육본은실제로 1항공여단 502대대에 M5를장착한중앙기동부대를편성운영했으며, 502대대가운영하던가스살포헬기는 5월 21일새벽광주에투입되어작전을수행했다. 군자료 5. 소요진압공중지원방안연구 21
5 18민주화운동당시전개되었던헬기지원작전의윤곽을파악하고향후헬기사격진상규명의기초자료로활용할수있는자료가새롭게확인되었는데, 육군본부가 1981년발간한 소요진압과그교훈 : 국내외민란, 폭동의역사적고찰, 광주사태의종합분석 의소책자이다. 신군부는 5 18민주화운동을폭력적으로진압한이후육본산하군사연구실의주도하에 5 18민주화운동에대한종합적인분석을시도하고그결과를보고서에담았는데, 자료집의부록에는광주에투입된헬기작전지원내역을각항공기별출동횟수와시간으로기록하고있다. 육본이발간한 소요진압과그교훈 에따르면당시헬기가주로수행한임무는 화물공수, 환자수송, 병력수송, 정찰, 가스살포, 엄호, 공중방송, 전단살포 였으며, 이들작전을종합하면총출동횟수는 774회, 작전시간은 711시간이었다. 이자료가헬기사격의진상규명을밝혀주는기초자료로어떻게활용가능한것인지는다음절에서살펴보도록하자. 군자료 6. 5 18 민주화운동기간헬기작전지원내역 아래군자료는많은시민들이헬기사격을목격했다고증언하고있는 5월 21일육본작전처의작전조치사항으로서광주지역에 UH-1H헬기 10대를긴급지원했다고기록되어있다. UH-1H 헬기의긴급지원내용은 < 표 3> 의항공여단작전일지에서도확인할수있는내용이지만육본의자료에서는휴이헬기 10대가긴급파견된구체적인목적을확인할수있다. 5월 21일광주에긴급지원된 UH-1H헬기 10대는 병력투입및보급수송용 으로파견되었다. 그렇다면긴급지원으로전개했어야할병력투입작전은무엇일까? 앞서언급했듯이항공여단의작전은다른부대에대한지원이나협동작전으로전개되는경우가많기때문에항공여단의활동내역은지원을받은부대의작전을통해서도확인이가능하다. 22
군자료 7. 육본작전참모부작전조치사항 (5 월 21 일 ) 5월 21일항공여단의긴급작전전개는 21일새벽 4시광주역투입이좌절되고상무대로이동한 20사단의작전을지원하기위한목적이었다. 왜냐하면 5월 21일병력투입목적으로항공여단이기동했던그시각광주지역에서투입가능한병력은 20사단병력뿐이었기때문이다. UH-1H 헬기가도착했을당시 7특전여단과 11특전여단병력은도청앞광장에서, 3특전여단은전남대학교정문앞에서시위대와공방을벌이고있었다. 반면에광주지역소요진압을위해사단전체가투입된 20사단의경우 5월 21일오전 8시차량을이용하여시내진입을시도하다가시위대에막혀다시상무대로돌아와아무런역할을하지못하고있는상황이었다. 항공여단에긴급출동을위한대기지시가하달되고성남과용인에주둔하고있던 202, 203대대의헬기가출동을위해분주하게움직이던시각은공교롭게도철로이동에이어도로이동까지좌절된 20사단이상무대로되돌아왔던시간과일치한다. 따라서 2번에걸친육로이동이좌절된 20사단의공중기동지원을위해항공여단이출동한것으로추론할수있다. 그런데정작지원부대인 20사단의전투상보나작전일지에관련내용을구체적으로확인할수가없다. 오히려아무런연관이없을것같은특전사령부와 11특전여단의작전경과와전투상보에관련내용이들어있다. 특전사령부작전경과는 오후 3시 20사단병력헬기로도청투입실패 라고구체적인 20사단의투입예정지역까지기록하고있다. 군자료 8. 특전사령부작전경과 (5 월 21 일 ) 23
5월 21일도청앞광장을지키고있었던 11특전여단의전투상보에는당시의정황이구체적으로기록되어있다. 아래와같이 11특전여단의전투상보에따르면 15:00시사이보병제20사단을헬기로공중침투시켜임무교대를계속하였으나당시상황으로서현지에도저히헬기로투입이불가능하였으며계속적인쌍방간의접전이계속되다가조선대학교로철수하라는지시를받고상호엄호하에철수를개시, 17:00사이에전대대조선대학교로철수완료 하였다는것이다. 군자료 9. 11 특전여단전투상보 (5 월 21 일상황 ) 5월 21일도청투입작전의당사자였던 20사단은당시의상황을아주간략하게충정작전상보에만담고있다. 충정작전상보에 5월 21일오후 4시 30분 61연대장및대대장 3명헬기항공정찰중도청일원에서산발적인폭도들의저격으로병력의공중기동작전이불가함을판단보고 하였다고기록하였다. 그러나 20사단의전투상보에는이와관련된내용이아예빠져있다. 계엄상황일지에서도 20사단의도청투입작전에대한내용은찾을수가없었다. 군자료 10. 20 사단충정작전상보 (5 월 21 일 ) 24
이상으로제1항공여단, 20사단, 특전사령부와 11특전여단의자료를종합하면 5월 21일도청앞집단발포가있었던시각을전후하여 UH-1H 헬기등을이용한 20사단의도청투입작전이시도되었다는사실을확인할수있다. 좀더구체적인당시의정황과헬기사격을둘러싼쟁점은군관계자의진술을통해확인하도록하자. (2) 군관계자의진술로드러난사실 5월 21일광장에서의집단발포와공중에서의헬기사격이연달아발생하는혼란스러운도청앞의상황을 11특전여단 63대대장조 ** 중령은아래자료와같은상황도로표현했다. 특검조사과정에서각대대의배치와작전내역을설명하기위해제출한당시의상황도에는 H로표기된헬기장이포함되어있다. 조 ** 중령은도청앞광장을사수하라는여단본부의명령에는헬기장을확보하라는내용도포함된것으로인식하고있었다. 61대대의안 ** 중령도 63대대장과마찬가지로헬기장을확보하라는명령을받은사실이있다고언급했다. 11특전여단참모장은오후 1시경여단본부로부터 20사단병력이공수될수있도록헬기가착륙할수있는공간을확보하라는명령을받았다고진술했다. 참모장은오후 1시경의사격때문에헬기의착륙이곤란할것같다는보고를받았는지의유무에대해서는기억을못했지만당시특전여단의주된작전이병력배치를위한헬기장확보가중요했으며, 일련의사격은우발적이거나자위권적차원의사격이아니라작전의완수를위해선택한수단의하나였음을시사하고있다. 군자료 11. 5 월 21 일도청상황 (11 특전여단 63 대대장 ) 5월 21일헬기를이용한공수작전을수행할부대로지목된 20사단 61연대대대장급장교들은도청투입작전이진행되었다는사실을인정했다. 20사단전투상보에는기록되지않았지만 20사단장교들은도청투입작전을중요한작전의하나로인지하고있었다. 20사단 61연대장김 ** 대령은전교사로부터헬기를이용한도청투입명령을받고 1개대대병력을투입하기로하고도청상황을파악하기위해대대장들을대동하고정찰을하였다고진술했다. 정찰결과도청에병력을투입하는것은별다른문제가없을것으로판단하고 3개제대로공수하겠다는구체적결정까지내리고돌아왔는데, 정찰과정에는인지를하지못했는데전교사에도착한이후헬기피격사실 25
이발견되어안전문제로작전을취소한것이라고구체적과정을설명했다. 20사단의기록에서는찾을수없었던 20사단도청투입작전의구체적내용이특검조사과정에서확인된것이다. 그런데특검은오후 1시경의도청앞광장에서의집단발포이후발생한헬기사격등 5월 21일오후발생한사격의문제를 20사단도청투입작전과연계하여추가질문을하지않고조사를마무리해버렸다. 20사단 61연대장김 ** 은전교사로부터작전명령을받은구체적시간은적시하지않았지만헬기 10대가오니즉시교대하라는지시를받고급하지만사전정찰을통해이동계획을수립하는것이필요하다고판단되어정찰을나갔다고진술했다. < 표 3> 의 1항공여단작전일지와육본의긴급지원내역에따르면 UH-1H 헬기는오후 1시 15분경에전교사에도착하고연료보급을한것으로확인된다. 따라서전교사로부터의투입명령은오후 1시 15분이전에받았으며, 명령을받고급하게정찰을나간것으로봤을때연료보급을하자마자바로정찰을실시한것으로보인다. 만약헬기의연료보급을송정리비행장까지이동하지않고전교사에서해결했다면김 ** 대령이탑승한정찰용헬기는늦어도 2시경에는출발을했을것이다. 헬기가총에맞은시간을전교사작전처일지는오후 3시 20분경으로기록하고있는데, 이시각은헬기가피격된시각이아니라전교사에돌아와확인한시간으로간주한다면정찰은오후 2시부터 3시 20분사이에실시한것으로추론이가능하다. 조비오신부에대한고발장에서항공단관계자들이오후 2시경에는수송용헬기인 UH-1H 2대가도청상공을정찰및선무방송목적으로비행했다고주장한시간과비슷한시간대이다. 김 ** 대령이탑승한헬기의정찰시간을추산한것은헬기정찰이후에바로헬기를이용한작전이진행된것은아닌지그가능성을확인해보기위한이유에서다. 20사단충정작전상보에따르면 항공정찰중폭도들의저격으로병력의공중기동작전이불가함을판단보고 한시간은 4시 30분이다. 김 ** 대령은헬기가피격된것을확인한이후바로기동작전이불가하다고보고했다고특검에서진술했기때문에실제보고시간과는약 1시간 10분정도의공백이발생한다. 이시간을이용하여헬기이동경로를확보하기위한작전을실시한이후판단보고를했을수도있다는합리적의심이가능하다. 왜냐하면도청이절체절명의위기에처한상황에서무려 10 대의헬기를동원하여오전내내준비한작전이정찰헬기가 5-6발의총을맞았다고아무런추가대응없이바로작전을취소한다는것은당시의급박한정황으로는이해할수없는결정이기때문이다. 또한이러한정찰과작전중지의판단이이뤄지는시간이공교롭게도시민들이헬기에의한사격을목격했다고주장하는시간과일치하기때문이다. 조비오신부와아놀드피터슨목사는 5월 21일오후 1시 30분부터 5시사이에 500MD의기총소사를목격했다고진술했다. 1항공여단관계자들은조비오신부를고발했던 1989년은물론 1995 년특검조사과정에서도헬기사격을목격했다고주장하는그시각에는무장한 500MD가출동한사실이없으며, 그기간에는광주에무장헬기가파견되지않았다고일관되게주장했다. 이들의주장이진실인지는군관계자들의진술과군자료에서확인되는헬기의출동일시와장비를부대별로정리해가며살펴보자. 5 18민주화운동기간에광주에파견된헬기의특징을간략하게살펴보면 500MD는조종사와부조종사겸사수가횡으로나란히탑승하고뒷공간에는 5명까지탑승가능하고무장은 7.62mm 26
기관총 2,000발을기본무장으로하여운영되었다. 31항공단장은 7.62밀리기관총은분당발사속도가 2,000-400발정도이고한번당기면아무리빨리당겼다놓아도최소한 70-80발이상은나가는특징을갖고있다고설명했다. AH-1J헬기는조종사와부종사겸사수가일렬로앉아서조종을하는데 1980년당시에는 20밀리발칸포로만 500발을무장하고광주로출동하였다. UH-1H헬기는수송용으로조종사와부종사외에정비사등승무원 2명이타고그외의공간에 9명까지탑승가능하고무장을위해서는출입문이있는위치의마운트라는부품에 M60기관총 ( 도어건 ) 을부착하여사격한다. 61항공단장은특검진술에서당시교리상무장헬기가발전된이후로는수송용헬기인 UH-1H헬기에도어건을장착하여사용한것이아니라필요시에는무장헬기의지원을받도록되어있다고설명했다. 여기서무장헬기는 500엠디나코브라헬기를의미한다. 다음 < 그림 1> 은 5 18민주화운동시기광주에파견된항공여단의부대와출동장비를일자별로정리한것이다. < 그림 1> 에서시기별파견된헬기의종류와대수는먼저 1항공여단의상황일지에기록된내용을토대로작성하였다. 다음으로는상황일지에는내용이없지만항공여단관계자들의진술에서두사람이상이파견사실을진술한경우는광주에파견된헬기로분류했다. 그림에서밑줄이그어지지않는사례는두가지의경우에해당하는사례이다. 반면에밑줄이그어진사례의헬기는앞서언급한두가지의경우에는해당되지않지만헬기조종사가시기를구체적으로명시하면서파견사실을진술한경우이거나항공여단상황일지이외의군기록에명확하게언급된경우는신뢰할만하다고판단되어파견헬기로분류하였다. 예를들어 1항공여단의상황일지에서는확인이되지않지만 5월 21일보안사의상황보고 광주헬기지원동정 에는 506항공대소속 MD500헬기 2대가 2군구두지시에의거광주소요사태진압차 5.21 10:00에출발함 (5.21. 10:15, 510) 이라고기록되어있다. 보안사가시간과장소, 명령주체까지명확하게언급한군기록을헬기파견사례로분류하지않을이유가없었다. 보안사의상황보고에등장하는 2군구두지시에의한헬기출동은아래 < 자료 12> 와같이 5월 21일오전 9시전교사가무장헬기를긴급건의한것에대한조치로파악된다. 무슨연유인지는파악할수는없지만 1항공여단의상황일지에는이러한내용이실려있지않다. 군자료 12. 5 월 21 일전교사조치사항 27
항공감 ( 최갑석소장 ) 1 항공여단 ( 송진원준장 ) 31 항공단 ( 방영제대령 ) 61 항공단 ( 손승열대령 ) 103 대대 ( 이정부중령 ) 501 502 506 ( 김 ** 중령 ) 202 대대 203 대대 206 항공대대 5 월 15 일 1 중대 (4 대 ) 전 ** 소령 2 중대 (3 대 ) 차 ** 소령 전주파견대이 ** 소령 대구달성대대본부 지휘용 500MD 1 대 31 사단장 UH-1H 1 대전교사령관 5 월 18 일 5 월 19 일 무장 500MD 2 대 출동준비 UH-1H 1 대방송용 5 월 20 일 5 월 21 일지휘용 500MD 1 대 무장 500MD 1 대 김 ** 대위 + 서 ** 중위 무장 500MD 2 대 10:00 출발 UH-1H 5 대 13:10 도착 UH-1H 5 대 13:10 도착 가스살포 500MD 4 대 무장 500MD 2 대 특전사령관 15:57 출발 UH-1H 1 대외 2 명 10:20 도착 UH-1H 1 대헌병감외 5 명 11:50 도착 5월 22일 AH-1J 2 대이정부중령 + 이 ** 대위차 ** 소령 + 구 ** 대위 무장 500MD 4 대 < 그림 1> 광주에파견된항공여단부대편제및일자별파견헬기 28
그러나한사람의목격이나출처가명확하지않는정보는출동장비로분류하지않았다. 이 ** 중령의경우 506대대의전주파견대에서중대규모의헬기가광주에출동했다고언급했지만앞서의기준에따라일자별파견장비로추산하지않았다. 다만동일한사안에대해개인의진술과군기록이상이한경우는군관계자의진술을우선했다. 가령 5월 21일출동한 UH-1H헬기의경우 1항공단의작전일지에는 202항공대 2대, 203항공대 8대로기록되어있지만당시헬기를인솔했던항공단장은특검진술에서각각 5대씩출동했다고진술했다. 이런경우는군관계자의진술을우선하였으나상이한내용은추후확인이필요한부분이다. < 그림 1> 에서확인되듯이헬기의파견을일자별로분류해보면지금까지신군부가주장했던것과는 5월 21일광주에는무장헬기가이미파견되어있었다. 많은시민들이헬기사격을목격했다고주장하는그시각에광주에는헬기사격이가능한무장헬기 3대가배치되어운영중이었다. 물론이숫자에는군이주장하는지휘용 500MD는제외한숫자이다. 군은당시지휘용헬기는무장하지않았다고주장해왔기때문에무장헬기로는분류하지않았다. 만약 5월 19일항공여단작전상황일지에출동준비라고기록된 2대의헬기가파견된것으로간주한다면광주에주둔하고있던헬기숫자는더늘어나게된다. 앞서헬기의특징에서살펴봤듯이 61항공단장의설명처럼 5월 21일도청정찰을나간 UH-1H 헬기가자체무장을하지않았다면당시교리상으로는 500MD 무장헬기가지원비행을했어야한다. 따라서 5월 21일도청주변에대한정찰과정에는무장헬기의출동은고사하고광주에파견도되지않았기때문에원천적으로사격자체가불가능했다는항공여단관계자들의주장은거짓주장에불과하다. 특히비무장의근거로강조해왔던 M5를장착한헬기의경우 5월 21일새벽광주에도착했는데, 5월 21일헬기운영결과를살펴보면아래 < 자료 13> 과같이단한차례 40 분의가스살포에불과했다. 군자료 13. 헬기업무지원현황 (5 월 21 22 일 ) 29
가스살포를위해 4대의헬기가출동하여단 1회만출동했다면나머지 3대의헬기는무엇을하고있었던것인지군의해명이필요한부분이다. 이런요구에대해군은오래된일이라정확한내용을확인할수가없다고설명할것이다. 오랜시간이흘렀기때문에정확한내용을파악할수없다는주장은일면타당한설명처럼들린다. 1989년조비오신부에대한고발에참여한조종사들은이런기억의문제를악용했다. 이들은검찰에제출한진술서에서아래자료와같이이구동성으로작전내용을기억할수없다고주장했다. 특히작전시간은추측임으로정확성이없을수있으며, 정확한비행시간과출격횟수는기억이없다고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자신들은제출한내용은진실임을확인한다고주장하면서간인까지해서제출했다. 군자료 14. 조비오신부고발참가조종사진술서 이러한형태는군인으로서갖추어야할최소한의양심도저버린비열한거짓말이다. 왜냐하면항공기조종사들은개인별로개인비행기록표를갖고있기때문에아무리시간이흐르더라도본인의출동시기와횟수를언제든지확인할수있기때문이다. 조종사들은비행시간환산을위하여개인의비행시간에관한기록표를작성하고있는데이것을 개인비행기록표 라고한다. 아래 < 자료 15> 와같이개인비행기록표에는조종사가출동한 연월일과항공기종, 임무기호, 착륙회수, 역할 등을구분하여기록하게되어있다. 개인비행기록표는군이관리보관하지만개인에게도관련자료를보관하도록편의를제공하고있다고한다. 따라서출동날짜와쏘티는본인이확인하려고만하면기억의유무와는상관없이언제든지자료로확인가능한내용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80년당시광주에파견되었던헬기조종사들은 < 자료 14> 처럼기억이나지않는다고주장했다. 30
군자료 15. 헬기조종사의개인비행기록표양식 헬기조종사의개인비행기록표는항공여단운영의기본메뉴얼이기때문에시간이흘러서기억이나지않는다는조종사들의진술들이거짓이라는것을 1항공여단관계자들은이미알고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한명도아니고대부분의조종사들이대동소이하게자신의활동에대해기억이나지않는다는진술서가항공여단을통해검찰에제출되었다. 이러한행태는항공여단의묵인이없이는불가능한일이기때문에조종사들의단순한실수가아니라항공여단의조직적은폐라고보는것이타당하다. 향후헬기사격의진상규명과정에서는헬기조종사뿐만아니라항공여단을은폐의주체로의심하고접근해야할것이다. (3) 소결군기록과관계자들의진술, 시민들의목격을종합하면 5월 21일도청인근헬기사격은실제로발생한사건이었다. 사격에동원된헬기는 500MD헬기로추정된다. 신군부는 5월 21일헬기사격을목격했다고주장하는그시각에는공격용헬기가광주에존재하지않았다고주장했다. 공격을할수단이없었기때문에헬기사격자체가발생할수없다는논리였다. 그러나군기록을종합하면그시각광주에서는 < 그림 1> 에서확인했듯이적어도 3대의공격용헬기가운영가능했던것으로보인다. 20사단병력을수송하기위해파견된 UH-1H 헬기가자체무장을하고대응사격의차원에서헬기사격을했을수도있지만헬기운영교리와당시의정황에서는가능성이떨어지는것으로보인다. 왜냐하면당시의정황은급박하게 20사단의대대병력을도청에투입하는것이목표였기때문에사격장비를거치하고운영병력이탑승하면그만큼수송인원이줄어들기때문에이런선택보다는당시의교리에서도권장하는무장헬기의경호를받아가면서작전을수행하는것이더합리적인선택일것이다. 더더구나광주에는기동가능한무장헬기가이미파견된상태였다. 다만 20사단 61연대장이탑승한헬기의경우는무장의가능성을열어둘필요가있다. 203대대장이조종한정찰헬기는탑승인원에대한특검진술에서탑승했던장교들이모두다르게진술했 31
는데, 제3대대장은탑승인원이너무많아서본인은탑승하지못하고남아서부대원들에게헬기탑승훈련을시켰다고주장했다. 약간의차이는존재하지만탑승한장교들의인적사항은대체로비슷하게진술한상황에서 9명에서 11명까지탑승할수있는헬기에정원문제로 61연대의제3대대장이탑승하지못해다는것은정황상헬기운영병력이탑승했다는것을의미한다. 따라서무장의가능성을열어둘필요가있다. 5월 21일오후도청앞광장에서의사격으로부터도청인근상공에서의사격까지일련의모든사격은계엄군의우발적이거나자위권차원의사격이아닌군의작전수행과정에서발생한사격행위라는공통점을갖고있다. 5월 21일도청을중심으로군이전개한핵심적인작전은 20사단병력을도청에투입하는일이었다. 도청앞광장을지키고있었던 11특전여단이수행했던중요한작전의하나는 20사단병력이투입될수있도록헬기장을사수하는것이었다. 그러나이러한군작전에대한내용은군기록어디에도존재하지않는다. 5월 21일은계엄군이사격을공식화하고자위권보유를천명한날이다. 자위권보유천명의사유가도청앞광장에서의집단발포였다는점에서군이수행한작전은은폐하고당시의위험한정황을부각시키기위한의도라는것은충분히짐작할수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20사단을둘러싼작전의내용이감춰져있는것은의아한점이다. 5월 20일의광주역앞사격도 20사단과밀접한연관이있다는것은이미앞에서확인했던내용이다. 계엄군의도청재진입작전이처음수립되었을때진압부대의선봉으로결정되었던부대도 20사단이었다. 나중에특전여단으로변경되기는했지만모든작전에중심적인역할을수행한부대의하나가 20사단이다. 이런공로를인정받아 5 18민주화운동이종료되고나서일선부대원들까지수여된훈포장에서가장많은훈포장을받은부대가 20사단이었다. 앞서살펴봤듯이 5 18민주화운동과정에서출동한헬기의작전을종합한쏘티 ( 출격횟수 ) 와시간이명기된자료는향후헬기사격의진상을규명하는핵심열쇠로활용될수있을것이다. 5 18 민주화운동기간에출동한헬기조종사들의개인비행기록표의쏘티와군이최종집계했던쏘티와시간들을하나하나추산하고대조하면쟁점이되고있는일시에출격한헬기조종사가누구였는지특정이가능할것이다. 이러한작업의중요성은지난 1995년특검과정에서확인되었다. 특전여단관계자들은특검조사에서일사분란하게일치된논리로자신들의책임을부정했다. 그러나지속되는조사과정에서로의진술은어긋나기시작했으며나중에는서로를지목하기시작했다. 그과정에서도청앞광장사격에사용된실탄이 20일저녁미리분배된것이라는중요한사실이확인되었다. 마찬가지로항공여단의특성상조종사나정비사들은전역을하더라도동일업종에서만나야하는처지이기때문에 37년동안침묵의카르텔이유지될수있었다. 그러나각자의비행시각과출동횟수를확인해가면서사격에대한여죄를추궁해가면거짓에기반한침묵의카르텔은깨질수밖에없을것이다. 32
Ⅲ. 맺음말 이글은 5 18민주화운동가해자들의당당함을진실규명을통해응징하지못하는연구자의부끄러움으로부터출발했다. 억울함이라는단어는, 파렴치한이라는규정은가해자들의언어가아닐텐데도진실이규명되지못한현실이가해자들의당당함의근거가되었다는점에서 5 18민주화운동을연구하고있다는연구자로서부끄러움과자괴감이들었다. 그러나다른한편으로는이들의거짓을규명하고말겠다는책임감도커졌다. 우선계엄군의시각에서사격행위는어떤의미였을까를고려하면서가설을설정하고그가설을증명할수있는관련자료를하나하나검토해나갔다. 생각과달리별다른성과가드러나지않는지난한과정이었지만포기할수는없었다. 특히과거군의자료를읽어나가다보니 101연구위원회라는보안사조직이 5 18민주화운동에대한전체적인논리를개발하고자신들에게유리한방향으로조작해왔다는것이확인되면서그들이설계했던논리의허점을찾아야하는또다른이유가생겼다. 신군부는 5 18민주화운동이종료된직후이광로장군를단장으로이른바정부합동조사단을구성하여광주현지조사를비롯하여군, 경찰, 행정기관, 시민등다방면의조사를진행했다. 이들의조사는 5 18의진실을규명하는것이아니라신군부의진압논리를개발하고그에맞춰군대내상황을조정하는역할을수행한것으로보인다. 이들의목표는사태재발방지라는미명하에다방면의조사와협의를통해진실을은폐하는방안을강구했던것이다. 5 18민주화운동이후 37년의시간이흐르는동안진상규명이더디게만진행되었던이유의하나는신군부가장기간에거쳐자신의논리에맞게 1980년당시의상황들을한편으로는조작하고다른한편으로는은폐해왔기때문일것이다. 거짓의장벽에맞서진실의문에다다르는방법은결국제대로된질문을통해가려져있던진실의흔적을찾아야한다. 질문이틀리면올바른답을만날수없다는사실은 20사단의역할에대한문제에서도확인되고있다. 5 18민주화운동초기항쟁의성격을규정짓는중요한사건의하나인 5월 20일광주역앞사격, 21일도청앞광장과인근의헬기사격은모두 20사단과관련된사건들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20사단의역할을둘러싸고는질문자체가제기되지않았다. 예를들어 1995년특검당시 5 18학살자재판회부를위한광주전남대책위원회 는대법원에제출한자료에서공수부대의잔혹성을비교하기위한목적이컸지만 20사단의역할에대해 광주에도착한 20사단병력은도착과동시에통합병원확보작전만시내에서전개하고, 이후에는줄곧광주시의외곽을차단하는임무에그쳤다 며제한적으로해석했다. 그러나이러한예단은 5 18민주화운동에지대한영향을끼쳤던 20사단이라는변수를사라지게하면서제대로된답을찾는데난관으로작용했다. 따라서향후진행된헬기사격을비롯한진실규명의과정은모든가능성을열어두고다양한방면에서조사를심층적인조사를진행할필요가있다. 미리단정하지말고다양한측면에서열린질문을했을때진실에한걸음더다가갈수있을것이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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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문 ] 5 18민주화운동의재구성 : 계엄군의사격행위를중심으로 ( 김희송 ) 의토론문 안진 ( 전남대학교법학전문대학원 ) 토론자는토론에서 1980년 5월 10일간의상황을규정하는데있어정치적합의의산물인 민주화운동 이라는표현보다 광주항쟁 혹은 5월항쟁이라는표현을쓰고자한다. 사격행위의분석과시민의저항을설명하는데있어서는운동이라는표현은부족하고도부적절하기때문이다. 이글이분석시기를광주항쟁의진실규명에서 ( 특히국가폭력의가해사실의규명의측면에서 ) 아직까지공백으로남아있는시기인 1980년 5월 20일과 21일 ( 계엄군의자위권보유천명이전의시기 ) 동안의계엄군의사격행위에초점을맞춘것은진실규명을위한연구에서큰의의를갖는다고생각한다. 먼저방대한자료를재구성하여사회학적인분석을시도한김희송교수님의노고에 5 18항쟁의연구자의한사람으로써감사드린다. 사실 ( 진실 ) 은스스로를드러내는것도아니고그자체로존재하는것이아니라사람들의인지를통해서비로소존재를드러내기때문에 5월항쟁 ( 토론자는민주화운동으로표현한필자의개념에서해방되고자함 ) 의사실의재구성을위한연구는새로운사료를발견한역사학자의역할못지않게중요하다고생각하기때문이다. 연구내용의핵심인 무엇을, 왜 를제대로설명하기위해서는, 연구자료와연구방법이중요한데신뢰성의문제가제기되는 < 계엄군상황일지 > 등공식적인군자료를활용하면서도 1995년말특검에서수집된 12 12 및 5 18사건수사자료 ( 특히, 군관계자들의진술 ) 를교차자료로활용한점은가해연구의문제점을보완할수있는적절한연구방법이라고생각된다. 왜 에대한설명은사건의단순한서술이아니고인과적상관성을밝혀야하기때문에특히그러하다. 이논문에서 5월항쟁당시계엄군의사격행위중재구성하고있는일련의사건은두가지이다. 하나는 1) 5월 20일밤광주역앞사격이며, 2) 다른하나는 5월 21일오후도청인근의헬기사격이다. 이글은군자료가은폐하고있는진실과군관계자의진술로드러난사실을재구성하여 5월 20 일 3특전여단의광주역앞발포행위는광주로이동하고있었던 20사단의집결지를확보하기위한작전수행과정에서발생한사격이었다는결론짓고있다. 이것은 20사단의도착예정지를송정리역으로공식적으로기록하고, 3특전여단은광주역에서지속적으로작전을수행한것처럼사실을은폐한군기록과는다른해석이다. 3특전여단의광주역주둔은시위대해산이목적이아니라군집결지확보가목적이라는것이연구자의주장의핵심이다. 토론자는이러한왜곡과은폐는 3특전여단이자행한사격행위를작전지역에서우발적으로발생한시위대와의공방과정중에발생한자위권적차원의불가피한방어사격이었다는주장을펼치기위한의도에서나온것이 37
라는필자의해석에전적으로공감한다. 3특전여단의작전에대한공로인정으로진압후인 1980. 6/20 3인-특전사령관, 20사단장, 3특전여단장-인에대한훈장수여가이를증명한다는것도예리하게지적하였다. 발표자가주장하였듯이 3특전여단의사격은광주항쟁과정에서도청앞사격과도청주변상공에서의헬기사격등다른부대의사격에도큰영향을주었기때문에이에대한진실의재구성을다른것보다더중요하다고생각된다. 5월 21일오후도청인근의헬기사격에대한진실규명에대해서는전일빌딩탄흔자국에대한지난 12월의국과수의검증에도불구하고그당시항공여단조종사들에의한조비오신부의검찰고발사건이래진실규명을둘러싸고군관계자들과항쟁의주역들사이에여전히논쟁아닌논쟁이진행중이다. 전두환의회고록이나온금년 4월이후이논쟁은더욱격렬해지고있다. 논쟁의핵심은군의공식기록에서조차무려 700회이상, 700시간이상출동했다는헬기의활동에대해서군은정찰, 수송등등이목적인수송용헬기라는것이고, 헬기의사격사실을뚜렷이목격한조비오신부를비롯한시민들은그것이작전수행용무장헬기라는것이다. 특검의수사자료에있는군관계자들의진술을재구성하여발표자는그것이무장헬기라는것을주장한다. 20사단을도청에수송하는것뿐만아니라지상소요를진압하기위한공중지원을효율적으로수행하기위해무장헬기로작전을수행했을것이라는논리적인추론은당시의공격적이고잔혹했던초기학살로비추어볼때더욱설득력을갖는다. 구체적인사실의완전한재구성은가해자들의진실규명에대한협조없이는불가능하다. 더구나국가폭력의경우에는가해자들이가해사실에대한정보를통제하고체계적으로은폐할수있는위치에있기때문에더욱그렇다. 민주주의로의이행과정에서진실을얻기위해가해자들을불처벌하고사면해주었지만그렇게하고도우리는진실을얻어내는데는실패했다. 어떻게가해의진실을밝혀낼것인가가앞으로의과제라고생각한다. 1995년말 5월운동세력들이검찰의성공한쿠데타불기소방침에대항하여 518특별법을제정하여국가폭력의주범들을법정에세웠던것처럼제2차로라도진실규명을위한특별법을제정하여이제발포명령을내린책임자, 헬기사격의책임자를밝혀내는것을비롯한가해의전모를밝힐수있어야할것이다. 문재인정부를총체적진실규명을위한또한번의역사적기회라고생각되지만진실규명을추동하는힘은시민사회에서나온다. 38
5 18 진상규명법제정의필요성과방향 민병로 ( 전남대학교법학전문대학원 ) Ⅰ. 들어가는말 5 18민주화운동 1) 이란전두환을중심으로한신군부세력이 12 12군사쿠데타를일으켜군부를장악한뒤, 정권찬탈을위한내란행위의일환으로비상계엄을전국으로확대한 1980년 5 월 17일자정에서 27일새벽까지광주를중심으로한전라남도시민들이저항한사건을말한다 ( 위키백과사전 ). 2017년 5 18민중항쟁 37주년 : 아직도 5 18의진상규명은미진한채로남아있으며, 관련피해자들의명예회복과신체적희생에대한실질적보상도제대로이루어지지못하고있음. 또한 5 18정신의계승과전국화 세계화를위한제반노력도내부적 외부적요인등에의해빛을발휘하지못하고있으며, 오히려그정신이폄하되거나관련자들이비난의대상이되는경우도발생하고있음. 전두환회고록 ( 자작나무숲, 2017) : 사실과역사왜곡 ᐨ 광주에서국군의무차별살상행위는일어나지않았고, 무엇보다도발포명령이라는것도아예없었다. ᐨ 헬기사격은없었다. ᐨ 5 18에북한군이개입됐다는지만원의주장을인용 ᐨ 광주에투입된공수부대는대검살상을저지른바없다. 등 지만원등에왜곡사례 : 일반적으로과거사청산이란 과거의공권력의불법행사에의해발생한각종인적물적피해의진상을규명하고가해자를처벌하고, 피해자의명예를회복시키고, 책임주체가사과하고, 피해자에대한적절한보상 ( 배상 ) 을실시하는일련의조치 를말함 ( 김동춘, 2005, 12면 ). 지금까지과거사관련법률 16가지 1) 5 18 에대해서는 광주시민전쟁, 무장봉기, 민주화운동, 항쟁, 혁명 등의다양한개념으로사용되고있는데, 본고에서는 5 18 이갖는역사적의미와그주체를명확히나타낼수있는 5 18 민중항쟁 이라는용어를사용하기로한다. 최장집에따르면, 1980 년 5 18 민중항쟁은민주적가치와이상을담지하고, 그실현을통해시민권의획득쟁취를지향하면서민주화투쟁에참여하는사회집단을대변하는 민중 이주체인반면, 1960 년 4 19 는민주화운동의주역인대학생과도시의교육받은중산층이주체였다는점에서구분된다고한다. 따라서 5 18 민중항쟁에의해프랑스혁명과더불어역사상처음으로정치무대에등장한제 3 신분으로서의인민내지는시민에비견되는사회집단인 민중 의등장은한국사회에서도민주주의를지지하고실행하는주체가등장하게됨으로써비로소한국민주주의의미래를전망할수있게되었다는것이다. 최장집, 한국민주주의와광주항쟁의세가지의미, 아세안연구 제 50 권 2 호, 2007 년, 150 면. 39
5 18 관련단체나관계자들이주장하는광주문제해결 5대원칙은 1진상규명, 2책임자처벌, 3명예회복, 4배상, 5기념사업임 ᐨ 진상규명 : 89년 5 18청문회, 1997년전두환 노태우등법원의판결 최초와집단발포책임자미규명, 주남마을과송암동양민학살사건규명, 암매장등. ᐨ 책임자처벌 : 대법원판결 ( 유죄판결확정 15명 ) 신군부주요세력들에대한면책특히박준병무죄, 현장지위책임자및병사미처벌 ᐨ 명예회복 : 왜곡과폄훼 지만원씨와일베등을중심으로한북한의특수군개입설 2) 등 ᐨ 배상 : 치유와보상중심 희생과공헌의정도에상응한합당한보상과예우가다른국가유공자와형평성차원에서재검토가필요함. ᐨ 기념사업 : 님을위한행진곡 5 18 행사기념곡으로지정필요 헬기기총소사진상규명필요 3) ᐨ 5 18 당시광주에투입됐던헬기가계엄군상부로부터벌컨포사격명령을받았다는사실은고조비오신부등이 계엄군헬기가광주금남로상공에서사격했다 고여러차례증언했지만, 이를뒷받침할만한물증이없어군당국은이를부인해옴. ᐨ 광주시금남로 1-1번지전일빌딩 10층내부에서헬기사격으로추정되는 185개의총단흔적과관련하여 헬기사격에의한흔적가능성이매우높다 ( 광주일보, 2016.12.16.) 는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감정결과나시민들로부터제보된벌컨포탄피등의발견 ( 광주일보, 2017.2.17.) 은정지비행상태의헬기에서기총소사된것으로추정됨으로진상규명이필요함. 5 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을위한특별위원회설치와, 518왜곡과폄훼를방지하기위한국가보고서발간과처벌규정도입필요 5월 10일취임한문재인대통령의공약 : 5 18헌법전문수록, 진상규명위설치등 본고의목적 : 그동안 5 18관련법의성과와한계를분석하고, 5 18진상규명법의제정의필요성과담아야내용을검토 기존의과거사진상규명법, 제주4 3특별법, 세월호참사특별법참조. Ⅱ. 5 18 관련법과그경과 1. 5 18 민주화운동에관한특별법 제 5 공화국출범이후광주학살의진상규명과책임자처벌이끊임없이요구되었고, 1987 년 6 월 2) 역사적사실로서 5 18 민주화운동에대한부인행위는권위주의적통치에항거해국민의자유와권리를회복 신장시킨민주화운동을부정, 왜곡, 날조하는것으로표현의자유의한계를넘어선명백한범죄행위이므로명예훼손죄의법리가아닌또다른방식의형법적규제가필요하다는국회의원들의형법조항의신설이나독자적인특별법의제정까지다양한안이있다. 이에대해현실적인안으로 5 18 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에처벌조항을두자는주장이있다. 김재윤, 5 18 민주화운동부인에대한형법적규제방안, 법학논총 35 권 2 호, 2015 년, 14-17 면참조. 3) 국민의당김동철의원이대표발의한 5 18 진상규명법안이있다. 40
시민항쟁에의해직선제개헌안이통과됨 4). 노태우는집권에성공하였지만 1988년 4월 26일총선에서여소야대국회가탄생하여, 야당의주도로그해 11월부터국회내에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제5공화국에있어서의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위 등이설치됨. 그리하여 광주학살진상규명청문회 가개최됨. 그뒤 12 12 쿠데타로체포되었던당시계엄사령관이었던정승화등이 1993년에전두환등을반란혐의등으로고소함. 1993년김영삼의문민정부가출범하였고, 검찰은 1994년말에 12 12쿠데타에대해서는군형법상반란죄를인정하면서도성공한쿠데타는처벌할수없다는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1995년에는 5 18민주화운동에대한진압세력에대해서는내란적요소를인정하면서도공소시효가완료되었음을이유로 공소권없음 처분을하였다. 5) 검찰의위불기소처분에대하여국민들은전국적으로집회와시위, 성명서발표를통해기소를촉구하였다. 이후전두환과노태우의비자금사건이폭로됨으로써김영삼정부는특별법의제정과재수사및기소를명함 6). 1995년 12월 21일 : 외환죄, 반란죄, 이적죄와같은헌정질서파괴범죄에관한공소시효를배제하는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 7) 과, 5 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8) ( 이하 5 18특별법 이라함 ) 을제정 공포함. 4) 80 년대민족민주운동의추동력이된 5 18 민주화운동은전두환군사정권의폭압하에서도전두환정권에대한민주적정통성부정과반미의식을확산시킴으로써민족민주운동의조직화와전국민적연대투쟁을가능하게하여 87 년민주세력의종국적인승리를가져오게한다. 민병로, 헌법전문과 5 18 정신, 헌법학연구제 14 권제 3 호, 2008. 224. 5) 정치적문제에대한국회의결정이이루어지기전에사법부가미리정치적결정을내리는사법부정책결정 (Judicial policymaking) 의대표적사례라는지적이있다. 검찰의이같은결정은대중운동을통해고조되고있던 5 공청산요구와국회를중심으로논의되고있던 5 18 특별법제정움직임을사법부결정으로봉쇄하는효과를가져왔다는것이다. 오승용, 한국민주주의의위기와법의지배 ᐨ 정치의사법화를중심으로 ᐨ, 민주주의와인권제 10 권제 3 호, 2010. 6) 한인섭, 518 재판과과거청산의과제, 법과사회제 15 권, 1997 년, 3-4 면참조. 7)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 (1995. 12. 21. 제정 ) 제 1 조 ( 목적 ) 이법은헌법의존립을해하거나헌정질서의파괴를목적으로하는헌정질서파괴범죄에대한공소시효의배제등에관한사항을규정함으로써헌법상자유민주적기본질서를수호함을목적으로한다. 제 2 조 ( 정의 ) 이법에서 헌정질서파괴범죄 란 형법 제 2 편제 1 장내란의죄, 제 2 장외환의죄와 군형법 제 2 편제 1 장반란의죄, 제 2 장이적 ( 利敵 ) 의죄를말한다. 제 3 조 ( 공소시효의적용배제 ) 다음각호의범죄에대해서는형사소송법제 249 조내지제 253 조및군사법원법제 291 조내지제 295 조에규정된공소시효를적용하지아니한다. 1. 제 2 조의헌정질서파괴범죄 2. 형법제 250 조의죄로서집단살해죄의방지와처벌에관한협약에규정된집단살해에해당하는범죄 8) 5 18 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1995. 12. 21. 제정 ) 제 1 조 ( 목적 ) 이법은 1979. 12. 12. 과 1980. 5. 18. 을전후하여발생한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에대한공소시효정지등에관한사항등을규정함으로써국가기강을바로잡고민주화를정착시키며민족정기를함양함을목적으로한다. 제 2 조 ( 공소시효의정지 ) 1 1979. 12. 12. 과 1980. 5. 18. 을전후하여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 제 2 조의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에대하여국가의소추권행사에장애사유가존재한기간은공소시효의진행이정지된것으로본다. 2 제 1 항에서국가의소추권행사에장애사유가존재한기간 41
5 18특별법제2조 ( 공소시효의정지 ): 1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전후하여발생한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과한특별법제2조의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에대하여국가의소추권행사에장애사유가존재한기간은공소시효의진행이정지된것으로본다. 2 제1항에서 국가의소추권행사에장애사유가존재한기간 이라함은당해범죄행위의종료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기간을말한다. 5 18 특별법에대한헌법재판소 ( 헌재 1996.2.16. 96 헌가 2, 96 헌마 7 13) 의판단 청구인측 : 공소시효의완성으로그소추나처벌이불가능하게된사안에대하여새로이공소시효의정지사유를설정하고, 임의의기간동안그정지사유가있었던것으로보도록하여사후입법으로형사소추와처벌이가능하게한특별법은형벌법규의이념에반할뿐만아니라실정법에도반하는초법적억지에지나지아니하므로, 이법률조항은헌법제13조제1항 ( 죄형법정주의 ) 에위반하는것임이명백함. 헌법재판소측 : 헌법 ( 제13조제1항 ) 이규정한형벌불소급의원칙은형사소추가 언제부터어떠한조건하에서 가능한가의문제에관한것이고, 얼마동안 가능한가의문제에관한것은아니다. 다시말하면헌법의규정은 행위의가벌성 에관한것이기때문에소추가능성에만연관될뿐, 가벌성에서는영향을미치지않는공소시효에관한규정은원칙적으로그효력범위에포함되지않는다. 행위의가벌성은행위에대한소추가능성의전제조건이지만소추가능성은가벌성의조건이아니므로공소시효의정지규정을과거에이미행한범죄에대하여적용하도록하는법률이라하더라도그사유만으로죄형법정주의의파생원칙인형벌불소급의원칙에언제나위배되는것으로단정할수없다. [ 이런입장에서 ] 공소시효제도가죄형법정주의의보호범위에바로속하지않는다면소급입법의헌법적한계는법적안정성과신뢰보호원칙을포함하는법치주의의원칙에따른기준으로판단하여야함. 법적안정성과신뢰보호원칙있어서특히중요한것은시간적요소이므로특별법조항이이미종료된사실관계 ( 이른바진정소급효 ) 에관련된것인지, 아니면현재진행중인사실관계 ( 이른바부진정소급효 ) 에관련되었는지의여부에따라밝혀야할사안임. 헌재는당해사건을재판하는법원에의하여특별법시행당시공소시효가완성된것인지의여부가아직확정되지아니한것이므로두가지경우를가정하여판단하고있음. 공소시효가완성되지않았다고보는경우 ( 재판관전원이합헌 ) 헌법제 13 조제 1 항에서의가벌성을결정하는범죄구성요건과형벌의영역 ( 이에관한한절대 이라함은당해범죄행위의종료일부터 1993. 2. 24. 까지의기간을말한다. 42
적소급효의금지 ) 을제외한다면소급효력을갖는법률이헌법상절대적으로허용되지않는것은아니다. 다만소급입법은법치주의원칙의중요한요소인법적안정성의요청에따른제한을받을뿐임. 따라서공소시효제도에근거한개인의신뢰와공소시효의연장을통하여달성하려는공익을비교형량하여판단하여야함. 특별법의경우에는왜곡된한국반세기헌정사의흐름을바로잡아야하는시대적당위성과아울러집권과정에서의헌정질서파괴범죄를범한자들을응징하여정의를회복하여야한다는중대한공익이있음. 또한특별법은모든범죄의공소시효를일정시간동안포괄적으로정지시키는일반적인법률이아니고, 그대상범위를헌정질서파괴범죄에만한정함으로예외적인성격을강조하고있음. 이에비하면아직공소시효가완성되지않는이상예상된시기에이르러반드시시효가완성되리라는것에대한보장이없는불확실한기대일뿐이므로공소시효에의하여보호될수있는신뢰보호이익은상대적으로미약하다할것이다. 공소시효가완성되었다고보는경우 (4인합헌, 5인이한정위헌 ) [4인의합헌의견 ] 진정소급입법이허용되는예외적인경우로는일반적으로, 국민이소급입법을예상할수있었거나, 법적상태가불확실하고혼란스러웠거나하여보호할만한신뢰의이익이적은경우와소급입법에의한당사자의손실이없거나아주경미한경우, 그리고신뢰보호의요청에우선하는심히중대한공익상의사유가소급입법을정당화될수있음. 이사건반란행위및내란행위자들은우리헌법질서의근간을이루고있는자유민주적기본질서를파괴하였고, 그로인하여우리의민주주의가장기간후퇴한것은말할것도없고, 많은국민의그생명과신체가침해되었으며, 전국민의자유가장기간억압되는등국민에게끼친고통과해악이너무도심대하여공소시효의완성으로인한이익은단순한법률적차원의이익이고, 헌법상보장된기본권적법익에속하지않는반면, 집권과정에서헌정질서파괴범죄를범한자들을응징하여정의를회복하여왜곡된우리헌정사의흐름을바로잡아야할뿐만아니라, 앞으로는우리헌정사에다시는그와같은불행한사태가반복되지않도록자유민주적기본질서의확립을위한헌정사적이정표를마련하여야할공익적필요는매우중대한반면, 이사건반란행위자들및내란행위자들의군사반란죄나내란죄의공소시효완성으로인한법적지위에대한신뢰이익이보호받을가치가별로크지않다는점에서, 이법률조항은위행위자들의신뢰이익이나법적안정성을물리치고도남을만큼월등히중대한공익을추구하고있다고평가할수있어, 이법률조항이위행위자들의공소시효완성에따르는법적지위를소급적으로박탈하고, 그들에대한형사소추를가능하게하는결과를초래하여그합헌성인정에있어서엄격한심사기준이적용되어야한다고하더라도, 이법률조항은헌법적으로정당화된다고할것임. 43
[5인의한정위헌 ] 형사실체법의영역에서형벌은바로신체의자유와직결되기때문에적어도범죄구성요건과형벌에관한한, 어떠한공익상의이유도, 국가적인이익도개인의신뢰보호의요청과법적안정성에우선할수없고, 공소시효가이미완성되어소추할수없는상태에이른뒤에뒤늦게소추가가능하도록하는새로운법률을제정하는것은결과적으로형벌에미치는사실적영향에서는형벌을사후적으로가능하게하는새로운범죄구성요건의제정과실질에있어서는마찬가지이므로, 공소시효가이미완성된경우에그뒤다시소추할수있도록법률로써규정하는것은헌법제12 조제1항후단의적법절차의원칙과제13조제1항의형벌불소급의원칙정신에비추어헌법적으로받아들일수없는위헌적인것임. [ 고등법원 ] 내란죄를계속범으로보았다. 기존의권력집단의굴복만으로내란이종료하는것이아니라주권자이며헌법제정권력자인국민이내란집단에굴복하지않고저항하는때에는종료된것이아니라고판단하였다. 결국대통령직선제요구가받아들여진 1987년 6 29선언시에비로소종료된것이고, 이시점을내란죄공소시효기산점으로보았음. [1심/ 대법원 ] 내란죄는상태범으로보았다. 비상계엄의전국확대는일종의협박행위로서내란죄의구성요건인폭동에해당하므로, 그비상계엄자체가해제되지아니하는한전국계엄에서지역계엄으로변경되었다하더라도그최초의협박이계속되고있다할수있으므로계엄이해제된 1981년 1월 24일에내란행위가종료되었다고보았다. 결국 1981년 1월 25일이내란죄공소시효기산점으로보았음. 9) 5 18특별법제2조는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제2조의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에대하여는해당범죄행위의종료일부터노태우의대통령재임기간의종료시점인 1993년 2월 24일까지는그공소시효의진행이정지된것으로본다. 따라서이사건헌정질서파괴범죄에대하여는 1993년 2월 25일부터그공소시효가진행한다고할것임. 대법원은 이사건헌정질서파괴범죄는모두형사소송법제249조제1항제1호에서규정하고있는사형에해당하는범죄로서그공소시효의기간이 15년임. 그중이른바 12 12군사반란에관련된부분의공소는 1996년 2월 28일에, 이른바 5 18내란에관련된부분의공소는 1996년 1월 23일과 1996년 2월 7일에각각제기되었음이기록상분명하므로, 모두그공소시효가완성되기전에공소가제기되었음이역수상명백하다. 10) 고판시하였음. 반면, 3인의대법관반대의견은 5 18특별법제2조의규정은행위시의법률상인정되던공소시효정지사유를확인한것이아니라, 새로운공소시효정지사유를형성적으로설정한것으로서소 9) 민병로 김남진, 76 면참조. 10) 특별법에의하지않더라도 1 심, 2 심, 3 심이비상계엄이지속되어정상적인국정활동이마비되었던기간 (1980. 5. 17~1981. 1. 24) 까지는적어도내란행위의진행된것으로보고, 비상계엄이해제된 1981 년 1 월 24 일부터공소시효가진행된것으로본다. 그렇다면검찰의기소시점인 1996 년 1 월 18 일로부터공소시효만 15 년에 6 일못미친다는견해가있다. 한인섭, 국가폭력에대한법적책임및피해회복, 서울대학교법학제 43 권제 2 호, 2002. 204-205 면. 이사건에서대법원도비상계엄이해제된 1981 년 1 월 24 일에내란행위가종료된것으로보아 1981 년 1 월 25 일이내란죄공소시효기산점으로보았다. 44
급효를갖는것이므로, 5 18특별법시행당시공소시효가완성되지않은범죄에대하여만한정하여적용되고, 이미공소시효가완성된범죄에대해서까지적용되는것은아니라고본다. 즉피고인들의내란목적살인죄의범죄행위는모두 1980년 5월 27일까지종료하였음이명백하므로공소시효는그종료일로부터진행된다고보아야하기때문에위법률시행이전에이미공소시효가완성되었다는것임. 결국이견해에의하면, 5 18특별법은소급입법에해당하기때문에헌법제12조제1항의죄형법정주의와제13조제1항의형법불소급의원칙에위반된다는것임. 그러나헌법재판소는 5 18특별법위헌확인사건 11) 에서형벌불소급의원칙과관련하여 행위의가벌성 즉형사소추가 언제부터어떠한조건하에서 가능한가의문제에관한것이고, 얼마동안 가능한가의문제에관한것은아니다하였음. 다시말하면헌법의규정은 행위의가벌성 에관한것이기때문에소추가능성에만연관될뿐, 가벌성에는영향을미치지않는공소시효에관한규정은원칙적으로그효력범위에포함되지않음. 행위의가벌성은행위에대한소추가능성의전제조건이지만소추가능성은가벌성의조건이아니므로공소시효의정지규정을과거에이미행한범죄에대하여적용하도록하는법률이라하더라도그사유만으로헌법제12조제1항및제13조제1항에규정한죄형법정주의의파생원칙인형벌불소급의원칙에언제나위배되는것으로단정할수는없다는것임. 2. 5 18 보상법의시행과과제 5 18민주유공자에대한보상은법률제정당시 5 18민중항쟁의역사적평가나진상규명등이제대로이루어지지못한상황하에서 1980년당시의국헌문란세력이잔존하고있던 1990년노태우정권하에서시행되었음. 즉 1990년 7월제13대국회에서당시야당인평화민주당이제안했던 5 18광주의거희생자의명예회복과배상등에관한법률안 이폐기되고, 여당인민주자유당의김동영의원외 215명이제안한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등에관한법률 ( 이하, 5 18민주화보상법 이라함 ) 안이법제사법위원회에상정되지도않은채본회의에서여당단독으로수정통과되었음. 12) 일반적으로국가보훈제도는국가와민족을위하여공헌하거나희생한국가유공자와그유족들에게국가가응분의보상을함으로써안정된생활을보장하고, 그분들의공헌과희생과애국정신의귀감으로우리들은물론자손들에게까지항구적으로존중되도록하는데그목적이있음. 13) 11) 헌법재판소 1996. 2. 16. 선고 96 헌가 2, 96 헌마 7, 13 결정. 헌법재판소결정에서는특별법시행당시공소시효가아직완성되지않았다고보는경우에는재판관전원이헌법에위반되지아니한다는의견이었고, 공소시효가이미완성된것으로보는경우에는헌법재판관 4 명이헌법에위반되지아니하는의견이고, 헌법재판관 5 명이한정위헌의견이었으나, 헌법재판소법제 23 조제 2 항제 1 호에정한위헌결정 ( 헌법소원의경우도같음 ) 의정족수에이르지못하여합헌이라판시하였다. 12) 국회는 2006 년 3 월 24 일법제명을 5 18 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 로변경하였다. 13) 국가보훈처, 보훈 30 년사, 국가보훈처, 1992 년, 87 면. 국가유공자등예우및지원에관한법률제 1 조 ( 목적 ) 참조. 국가보훈의기본이념은대한민국은국가를위하여희생하거나공헌한분들의숭고한정신위에이룩 45
이에비추어볼때 5 18민주화보상법은제정당시 5공세력들이집권하고있던정치적상황하에서 5 18에대한치유와화합의차원에서 희생 에대한금전적 보상 에중점을둔것이라할수있을것임. 즉 5 18민주화보상법은군부세력의정권찬탈기도에맞서민주주의를수호하고자했던 5 18의숭고한가치가전혀평가 반영되지못하였으며, 더욱이이러한 희생 에대한 보상 도 5 18민주유공자의희생과공헌의정도에상응한실질적이고합리적인보상으로보기힘들다는것임. 14) 또한다른국가유공자에비해보상금이일시적으로지불되는장점은있었지만, 보상금산정방법이교통사고피해자와마찬가지로호프만식으로만이루어짐으로써국가의존립과유지를위해공헌하거나희생한국가유공자의영예로운생활이보장되도록실질적인보상조치를취함으로써생활안정과복지향상을도모하고, 그들이국민으로부터존경과예우를받을수있도록한다는 국가유공자 로서의보훈의측면이결여된것이라할수있음. 그럼에도불구하고, 1990년 8월 5 18민주화보상법이한시적법률로서제정 시행된이후수차례에걸쳐 518민주화운동관련자추가구제의필요성에따라신청기간을연장하는법률개정을통해보상이이루어져왔고, 2002년 5 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에의해국가유공자로지정되었지만, 5 18민주유공자에대한보상및예우제도의문제점에대한총체적인검토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다. 15) 그러다가, 5 18특별법이제정되면서동법제6조 ( 배상의제 ) 에의하여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의규정에의한보상은배상으로본다 는규정을포함시킴. 즉피해자들이받는금액이공권력의적법한행사에따라개인이입은특별한희생을보전하는보상이아니라, 위법한공권력행사에따른개인이입은손해를전보하는배상으로바뀐것이다. 이는국가에의한불법행위의존재를법적으로도인정하는효과를지닌다 ( 한인섭, 1997, 189-190) 3. 5 18 민주유공자예우법개정의문제 5 18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희생되거나공헌한자와그유족또는가족에게합당한예우를함으로써민주주의의숭고한가치를널리알려민주사회의발전에이바지함을목적으로 5 18 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16) 이 2002년 1월 26일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로제 된것이므로우리와우리의후손들이그정신을기억하고선양하며, 이를정신적토대로삼아국민통합과국가발전에기여하는데있다. 국가보훈기본법제 2 조 ( 기본이념 ) 참조. 14) 5 18 희생자에대한 1990 년보상법에의한보상의성격이 보상 인가 배상 인가에대해서는논쟁이있지만, 1995 년의 5 18 특별법은제 6 조에서 1990 년법에의한보상을 배상 으로본다는규정을두었다. 전광석에의하면, 5 18 희생이엄격한의미에서불법책임에기초한국가배상의사안은아니기때문에희생자들의요건충족에대한부담을경감시키기위해상징적으로이러한의제조항을둔것으로본다. 전광석, 국가유공자보상의범위결정및보상의원칙, 5 18 민주유공자의보훈현황과과제 [ 학술대회자료집 ], 2009 년 4 월, 11 면. 15) 5 18 민주유공자보상에관한선행연구로는신일섭, 광주민주화운동보상법의정치 사회적의미, 민주주의와인권 5 권 2 호, 2005 년, 본고에서의인용은 5 18 기념재단엮음, 5 18 민중항쟁과법학, 2006 년, 도서출판심미안 ; 이희성, 5 18 광주민주화운동피해자의보상에대한사회법적고찰, 법학연구 27 집 ( 한국법학회 ), 2007 년, 399-432 면 ; 김재균, 5 18 과한국정치 - 광주보상법과 5 18 특별법결정과정연구, 도서출판한울, 2000 년이있다. 46
정 시행되었고, 2004년 1월 20일현재의명칭으로개칭됨. 이법률에의해 5 18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희생하거나공헌한자가 민주유공자 로지정됨으로써명예를회복하였지만, 민주유공자로서의합당한예우조치가뒷받침되지못함으로써 5 18민주화보상법이안고있던미진한보상내용은그대로존치된채단지민주유공자로서예우와간접적인지원을받을수있도록한것에불과하다 ( 표 1 참조 ) 이러한점은어떤측면에서보면폭도에서민주유공자로바뀌었으니획기적인전환으로높이평가될수있겠지만, 5 18민중항쟁이한국근현대사에서차지하고있는위상에서본다면미진하게실시된보상의측면이개선되지못한점은문제라하지않을수없음. 대부분의 5 18민주유공자들이곤궁하고열악한생활환경속에서민주유공자로서의최소한의품위유지도하기어려운실정임. < 표 1> 5 18 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상혜택 구분내용 5 18 민주유공자증서수여 사망시예우 교육지원 ( 제 11 조 ) 취업지원 ( 제 19 조 ) 의료지원 ( 제 33 조 ) 대부지원 ( 제 39 조 ) 국립묘지안장 기타지원 ( 제 55 조 ) 출처 : 국가보훈처 대통령명의로수여다만, 수여는별도계획에의함 영구용태극기및묘비제작비지원다만, 국립 5 18 묘지에안장되는경우묘비제작비미지원 본인, 유족, 자녀에대한중 고 대학교수업료등면제다만, 기타 5 18민주화운동희생자와그유족또는가족의교육지원은생활등급6등급이하인자에한함자녀 3인 ( 유공자본인및배우자, 부모는제외 ) 에대하여고용명령및가점에의한취업지원 5 18 민주화운동부상자 ( 장해등급 1 급 14 급 ) : 국비진료 5 18 민주화운동사망자 행방불명자의유족, 5 18 민주화운동부상자 ( 장해등급 1-14 급 ) 의가족또는유족 : 보훈병원진료시본인부담진료비의 60% 감면진료기타 5 18 민주화운동희생자 : 보훈병원진료시본인부담진료비의 50% 감면진료기타 5 18 민주화운동희생자의유족또는가족 : 보훈병원진료시본인부담진료비의 30% 감면진료 주택및농토구입, 사업, 생활안정대부단, 기타 5 18민주화운동희생자와그유족은생활등급 4등급 (5인가족은 5등급 ) 이하자로서전년도도시근로자가구당월평균소득액이하인자에한함국립5 18묘지안장시배우자합장가능양로지원, 양육지원, 수송시설의이용지원, 고궁고궁 공원등이용보호 ), 주택의우선분양 (47조) 등 16) 5 18 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제 2 조 ( 예우이념 ) 에의하면, 우리대한민국의민주주의와인권의발전에이바지한 5 18 민주화운동은우리와우리의자손들에게숭고한애국 애족의귀감으로서항구적으로존중되고, 그희생과공헌의정도에상응하여민주유공자와그유족또는가족의영예로운생활이유지 보장되도록실질적인지원이이루어져야한다. 고규정하고있다. 47
< 표 2> 5 18 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지급기준 구분사망및행불자상이후사망자 내용 - 보상금 : 5 18보상법제5조의규정대로계산지급 - 생활지원금 : 7,000만원일률지급 - 위로금 : 2,100만원일률지급 - 유족보상금 : 사망익일부터보상결정시까지계산지급 - 휴업보상금 : 상이발생일익일부터사망시까지계산지급 - 생활지원금 : 7,000만원일률지급 - 위로금 : 2,100만원일률지급 상이자 등급상이자 기타상이자 - 보상금 : 5 18 보상법제 5 조의규정대로계산지급 - 생활지원금 : 3,000 만원부터 5,000 만원까지 6 단계차등지급 - 위로금 : 450 만원부터 1,950 만원까지 4 단계차등지급 - 의료지원금 : 향후치료비, 개호비, 보장구구입비 - 기타상이 1 급 : 생활지원금 1,000 만원 / 위로금 200 만원 - 기타상이 2 급 : 생활지원비 700 만원 / 위로금 100 만원 기소및불기소자연행후훈방자 - 연행 구금 수형일수보상금 형사보상 1일최고액 (2007년 139,200원 ) 연행등일수 - 생활지원금 최저 : 1,000만원은기타상이1급수준 최고 : 5,000만원은상이자최고지급액 - 위로금 최저 : 200만원은기타상이1급수준 최고 : 1,950만원은상이자최고지급액 - 연행 구금일수보상금 형사보상 1일최고액 (2007년 139,200원 ) 연행 구금일수 - 생활지원금 800만원씩일률지급 연행 구금 수형사실이있는상이자 상이자보상금과연행 구금 수형자보상금 ( 생활지원금, 위로금, 연행등일수보상금 ) 중지급액이많은보상금적용 상이자보상금을수령할경우연행 구금 수형자일수보상금더해지급 대안으로 5 18민주유공자예우법을개정하여 65세이상의기수령자중에서사망자및행불자의유가족, 단순피해자가아닌공헌의직접성이인정되는희생자를대상으로등급별로연금및수당의방법을통해매월지급하는방식이있을것임. 5 18보상법에보상이상당부분마무리되었고, 나아가이미당사자들이보상금을수령하였기때문에 5 18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입은피해에대하여민사소송법의규정에의한재판상의화해가성립된것이므로 ( 법제16조 ), 새로운기준을설정하여재보상을실시하는것은그자체가어렵기때문임. 48
따라서연금및수당등의방법으로기수령액을감안하여다른국가유공자들과의현격한보상금의차이를보전해주는것이합리적일것임. 다만그지급금액을어느정도로할것인가는노령연금등을감안하여국민적정서를바탕으로한입법자의형성권이넓게인정되겠지만, 가능한한치밀하게고안하여다른국가유공자와의형평성에문제가발생하지않도록설정되어야할것임. 17) 5 18민주화운동부인행위는 5 18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희생하거나공헌한자와그유족또는가족에게국가가합당한예우를함으로써민주주의의숭고한가치를널리알려민주사회의발전에이바지함을목적으로하는 5 18유공자법제1조에정면으로배치되는행위이므로, 5 18유공자법제8장벌칙에제70조의1과제70조의2를신설함이타당하다고보는주장. 18) 5 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제8장벌칙제70조의1( 벌칙 ) 신문, 잡지또는라디오기타출판물에의하여, 그리고정보통신망을통하여 5 18민주화운동을부인, 왜곡, 날조한자는 7년이하의징역, 10년이하의자격정지또는 5천만원이하의벌금에처한다. 제70조의2( 위법성조각사유 ) 전조의행위가예술 학문, 연구 학설, 시사사건이나역사의진행과정에관한보도, 기타이와유사한목적에기여하는경우에는처벌하지아니한다. Ⅲ. 전두환 노태우등재판의의의와한계 1997년대법원판결을통해 5 18관련단체나관계자들이주장하는광주문제해결 5대원칙인 1진상규명, 2책임자처벌, 3명예회복, 4피해배상, 5정신계승중에서진상규명과책임자처벌에있어많은진실이밝혀졌다할것임. 대법원판결의의의와한계 19) 5 18이단절적인것이아니라신군부세력이정권을찬탈하기위해 12 12군사반란에서시작하여비상계엄을전국으로확대하고그러한목적이없는계엄군을이용하여광주시민의시위를난폭하게진압한내란행위였다고밝혀냈지만, 최초의발포와집단발포가내란의와중에수반된것으로보고, 발포책임자를특정하지못함으로써진상규명을제대로했다할수없을것임. 전체적으로대법원판결의의의와한계를재정리해보면다음과같다. 1 헌법이정한민주적절차에의하지않고폭력에의하여정권을장악한성공한쿠데타라하 17) 5 18 민주화운동의관련자들을다른민주화운동관련자들이나국가유공자에비하여현격히우대하는것은국민전체의정성에반하여국민통합을해칠수있기때문에, 5 18 민주화운동관련자에대한보상이나처우도국민의의식수준에부합되게점진적인방법으로행하는것이이행기적현실에서는불가피하다는주장이있다. 이희성, 전게주 (6), 413 면. 18) 김재윤, 17 면. 19) 5 18 에대한사법부의 1, 2, 3 심판결에대한선행연구로한인섭 5 18 재판과과거청산의과제, 법과사회제 15 권, 법과사회이론학회, 1997. 160-199 면. 49
더라도그자체의범죄성으로인해처벌될수있다는점, 2 헌정질서파괴범죄에대해서는국가의소추권행사에장애사유가존재한기간에는그공소시효의진행이정지된다는점, 3 비상계엄의전국확대와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설치및시위진압행위가국헌문란의목적에해당하고, 비상계엄전국확대및시위진압의폭동성이인정되어간접정범의법리에의해내란죄가성립한다는점, 4 5월 27일재진입작전명령에는발포명령이포함되어있는것이분명하여내란죄와별개로내란목적살인죄가성립한다는점을밝힌점. 한계로는, 1 대법원이국민이헌법의수호자로서의지위를가진다는것만으로헌법에의하여설치된국가기관이라할수는없다고한점은국민주권주의의의미가 국가기관으로서의국민 을인정하는것은아니라할지라도통치권력의정당화원리로서작동한다는점을감안하면헌법파괴행위를막기위한시민의집단에헌법기관에준하는보호를해주는것은이론적으로어렵지않았을것임. 항소심도국민이주권자의입장에서서헌법을수호하는가장중요한소임을갖는것이므로, 이러한국민이집단이나집단유사의결집을이루어헌법을수호하는역할을일정한시점에서담당할경우에는헌법기관보다더중요한헌법수호기관으로보았음. 2 발포행위와관련하여광주재진입작전에한하여내란목적살인죄를인정하였으나, 5월 21일도청앞집단발포와자위권보유천명에는발포명령이포함되어있었던것으로보지않고, 내란의실행과정에서폭동행위에수반하여이루어진살인행위로내란죄에흡수하여판단하고있는점 3 전두환등 5인을내란목적살인죄의간접정범으로보고 20), 그외신군부의주요세력 ( 특히박준병에대한무죄 ) 들에대해면책으로귀결된점이나현장지휘자와병사들에대한처벌이이루어지지않은점 4 5 18부분과관련하여군형법상반란죄를인정하지않은것은이용훈대법관의반대의견에서볼수있듯이 21), 12 12와동일한논리로강압상태하의대통령재가의적법성을인정할수없다는점 5 최근 5 18민중항쟁의의미를왜곡하는일부세력이있어문제가되고있는데, 이사건판결에서사법부재판관들이 15만장이넘는수사기록을검토하여내린결론은 5 18민주화운동은신군부세력의국헌문란의내란행위에맞서헌정질서를수호하기위한정당한행위 였다는것임 20) 이에대해피고인들의병력동원행위, 대통령등에대한강압 외포행위만으로도내란죄의폭동에해당한다고할수있고, 그렇다면이사건에서피고인들의행위를내란죄의간접정범이아니라직접정범으로문의하는것이더간명하다는의견이있다. 오영근, 내란죄의간접정범과간접정범의본질, 형사판례연구 (10), 박영사, 2002, 289 면. 21) 이용훈대법관은반대의견에서 대통령의재가나승인혹은묵인은대통령이정상적인국정을수행하는상황에서이루어진것이라야하는것이지대통령자신이내란행위를한자들에의해정상적인권능행사가불가능한상태에서내려진것을최고통수권자의승인이라고할수없을것이다. 대통령최규하마저도피고인들과공모하여내란죄를저지른것이라면모르되, 오로지피고인들에의하여대통령최규하의적법한권능행사가불가능하게되었다는점을내란죄로인정하면서도반란죄에관한한피고인들의위일련의행위에대통령최규하의적법한재가또는승인이있었다고한다수의견은납득하기어렵다 고밝히고있다. 50
사법부의이러한결론은그의미가결코가볍지않다할것임. 과거의불행했던역사가되풀이되지않게하기위해서는헌법질서파괴행위에대한국민들의굳은 헌법에의의지와실천 이필요하며, 1987년개헌당시누락된 5 18정신의계승과저항권조항의헌법규범화가이루어져야할것임. 22) 2017년 5월 10일취임한문재인대통령은선거공약을통해 5 18민주화운동정신을헌법전문에수록하겠다 고하였다. 이는 5 18정신을헌법에명기함으로써 5 18민중항쟁의헌정사적의미와가치를명확히하겠다는의미 ( 광주일보, 2017. 5.10.) 라설명함. Ⅳ. 5 18 진상규명법안에담아야할내용 국내의과거와현재진행중인진실 화해를위한위한과거사진상규명이나제주 4 3사건진상규명, 나아가현재진행중인 4 16 세월호참사진상규명의사례와경험속에서쟁점들을검토하면서 5 18진상규명법안의기본방향을설정함. 국민의당 5 18민주화운동당시계엄군의민간민에대한헬기사격의혹등진상규명을위한특별법안 ( 이하, 51 8진상규명법안 이라함 ) 의주된내용 ᐨ 5 18민주화운동당시계엄군의민간인에대한헬기사격의혹에대한진상을밝히고당시최초발포명령자및행방불명자와관련된진실을규명하려는것임 ( 안제1조 ) ᐨ 5 18민주화운동당시에있었던계엄군의헬기사격의혹, 최초발포명령자및경위, 행방불명자의규모및소재등 5 18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진상규명이필요하다고인정한사건의규명을위해 5 18계엄군헬기사격진상규명위원회를두도록함 ( 안제4조 ) ᐨ 5 18진상규명법안의진상규명범위 : 1. 계엄군의헬기사격의혹 2. 최초발포명령자및경위 3. 행방불명자의규모및소재 진상규명의범위가제한적임. ᐨ 5 18진상규명을위해정부기관의미공개자료의수집및분석에관한사항 ᐨ 최초발포명령자뿐만아니라집단발포명령자도포함. ᐨ 주남마을, 송암동등민간인학살에관한사항 ᐨ 집단학살지, 암매장지조사및유골의발굴수습등에관한사항 ( 제주4 3) 22) 근대시민혁명을경험하지못한우리헌정사에서장기간의권위주의체제를종식시키고민주주의로의이행을가능케한원동력이된 5 18 민중항쟁정신을헌법전문에담는것은자유롭고평등한사회에대한열망을자율적이고주체적으로축적 형성해온시민들이신군부의정권찬탈과인권유린에정면으로저항하여인간으로서의존엄성을회복하고민주주의를쟁취한주권자의의지를나타내는것이며, 민주주의에대한국민적의지를보다강하게천명하는것이된다. 민병로, 헌법전문과 5 18 정신, 헌법학연구제 14 권제 3 호, 2008 년 9 월, 219-243 면. 51
ᐨ 진상조사보고서작성에관한사항 ᐨ 그밖에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하여대통령령으로정하는사항 진상규명의방법을둘러싼쟁점, 특히위원회구성과위상및독립성, 피해자유족의참여와주도문제, 조사권한과수사 기소권, 조사기간. < 진상규명관련사건쟁점비교 > 5 18 진상규명법안제주 4 3 사건진실 화해과거사 4 16 세월호 위원회구성 8 인 ( 상임 3 인 ) 20인이내실무위원회 15인 15 인 ( 상임 4 인 ) 17 인 ( 상임 5 인 ) 유족참여없음유족대표 선출권 3 명 ( 상임 1 인 ) 없음 조사기간 1 년 (1 년연장 ) 2 년 4 년 (2 년연장 ) 1 년 (6 개월연장 ) 동행명령제 28 조없음동행명령장발부제 27 조 수사 기소권 영장청구의뢰권고발 수사의뢰 없음 없음 고발수사요청감사원감사요구 공무원파견 제 15 조 ( 사무처 ) 제 18 조 ( 파견 ) 없음제 29 조제 21 조 과태료제 57 조없음 허위진술, 허위자료제출한자등 제 51 조 ( 벌칙 ) 제 53 조 ( 과태료 ) 청문회 국회에서의증언 감정법준용 없음 없음 국회증언감정법준용 ( 제 31 조 ) 제주 4 3 : 처벌이아니라 국민화합 이라는목적을위한것이었는데, 가해자를드러내지않은방식으로진행되었기때문에, 피해자의명예회복과기념만이국민화합의방법으로허용됨. 노무현정부의진실 화해위법 : 진상규명을통해 가해자의참회와피해자 유족의용서가이루어지도록화해를적극권유 ( 제39조 ) 한다는내용을담고있었지만, 이를실현시킬장치는형식적이어서사실상공백이나다름없었다.(69면) 23) 진실 화해위는피해자확인진상규명을넘어서학살사건에대한역사적 구조적진상규명을보고서에담아내고자했다. 더나아가가해주체와지휘명령계통을통해국가의법적책임성을확인하는사법적진상규명도시도하였음.(69면) 세월호 : 진상규명과보상모델에입각. 상설특검법상의특검을전제로하고있음. 구조적진상규명과사법적진상규명을종합하고자시도함. 피해자의배 보상문제가뒤로미루어짐. 사건-진상규명 처벌프레임. 23) 강성현, 과거사와세월호참사진상규명을둘러싼쟁점과평가, 역사비평 109 호, 2014. 52
진상규명의방법을둘러싼쟁점과평가 1. 위원회구성과위상, 독립성 ( 정부부처의지원과협조없이는활동이힘듬 ) 2. 피해자유족의참여와주도문제 : 위원회운영의감시자이자참여의주체로만들것이냐에대한고민 3. 조사권한과수사권과기소권부여의문제 의문사위와진실화해위의활동경험속에서이모든협조의무가사실상단지자료제출과출석을요구하는도덕적강제력에불과했고, 실제이를거부할경우강제할방법이없다는것이판명되었다. 과태료처분방식의벌칙조항은있으나마나한것이었음.(81면) 사실상가해자이거나또는직간접적으로책임이있는조사대상자나관계기관의협조는자발적으로나오는것이아니다. 막강한조사권한으로강제적으로이끌어내야한다. 그런의미에서조사권한은과거청산작업에서진상규명의성공여부를가늠할수있는가장중요한척도라할수있다. 그런데의문사위와진실화해위의조사권은늘어놓으면많아보이지만현실에서는상당히무기력했다.(80-81면) 수사 기소권의의미는하나는철저한진상규명을위한조사권한강화의도구적수단으로서, 다른하나는진상규명후 ( 형사 ) 사법적정의를실현하기위한수단으로서수사 기소권이다. 피해자 유족안은특별조사위원회가수사 기소권을행사하는방법도구체적으로제시했다. 진상규명소위원회상임위원에게독립적인검사의지위와권한을, 조사관에게특별사법경찰관리의지위와권한을부여하는것이다. 그래서사건의조사과정에서조사대상자나중요참고인에게긴급을요하는경우압수수색, 검증, 증거보전할수있는권한을보장하려는것이다.(81면) 의문사위와진실화해위실지조사과정에서중요참고인들이갖고있는핵심자료들을보고도눈앞에서소실되는상황이여러차례있었다는것을감안할때이권한은성역없는조사를위해반드시필요하다.(82면) 이와별도로특별조사위원회가청문회를개최할수있도록요구한것도주목된다. 청문회는증인, 참고인, 감정인등의출석을강제하고신뢰성있는증언및진술청취를증거로채택할수있는방법이다. 청문회진행의방해에대한벌칙조항이강력하다는점도특별조사위원회조사권한의실효성을확보해준다.(83면) 수사 기소권 ( 논란의여지가있음 ) 이문제가된다면조사권한을강력하게부여해야함. Ⅴ. 맺음말 진상규명의범위를어디까지할것인지? 조사기간의설정? 5 18의왜곡과폄훼를처벌할근거규정? 진상규명위원회의조사권한을어디까지부여할것인지? 암매장, 양민학살사건등에대한제보를실효적으로확보하기위한수단으로제보자에대한 53
금전적보상과신변안전보장등 역사적 사실적왜곡방지를위한국가적차원의 진상보고서 작성의과제? 참고문헌 강성현, 과거사와세월호참사진상규명을둘러싼쟁점과평가, 역사비평 109호, 2014. 11. 안병욱, 전두환 노태우사법판결의역사적의미와한계, 전두환 노태우대법원판결 20주년학술대회자료집, 2017. 4. 김성천, 1 2 3심에서의주요쟁점과대법원판결의요지. 서중석, 과거사진상규명의점검과향후과제, 역사비평 80호, 2007. 8. 박한용, 과거사청산의역사적의의와필요성, 과거청산포럼자료집, 2006. 3. 김민철, 과거청산관련법의현황과과제, 과거청산포럼자료집, 2006. 3. 강성현, 과거사와세월호참사진상규명을둘러싼쟁점과평가, 역사비평 109, 2014. 11. 정병준, 한국의과거사유산과진상규명작업의역사적의미, 민주주의와인권, 제5권제2호, 2005. 10. 54
[ 토론문 ] 5 18 진상규명법제정의필요성과방향 : 5 18 진상규명조사의실효성을어떻게제고할수있는가? ( 민병로 ) 의토론문 김재윤 ( 전남대학교법학전문대학원 ) 끝나지않은 5 18 진상규명 5 18민주화운동당시계엄군이시민들을향해헬기에서공중사격을했다는구체적인정황이국립과학수사연구원조사에서밝혀졌습니다. 2016년 9월광주시의의뢰로광주동구금남로전일빌딩에대해조사를벌인국과수는 2017년 1월 12일금남로전일빌딩 10층에서발견된 185 개의총탄흔적을발견 분석한결과 헬기에서사격한것이유력하다 는결론을내고감정서를광주시에보냈습니다. 특히국과수는감정서에서 수평또는하향각도로사격이이뤄진만큼최소 10층이상의높이에서사격한것으로판된되며당시전일빌딩전면에는 10층이상의건물이존재하지않았으므로헬기와같은비행체에서발사가능성이매우높다 고판단하였습니다. 그동안군은현장을목격한시민들의여러증언에도불구하고 헬기사격은없었다 고일축해왔지만이번조사로인해재조사가불가피해졌습니다. 특히광주시가추가발굴을국과수에의뢰키로함에따라헬기에장착된기관총에서발사된탄환이나올가능성도배제할수없습니다. 기관총탄이발견된다면 5 18당시계엄군이시민들을적으로간주하고대량살상을위한작전을감행했다는점을밝힐수있게됩니다. 1) 전일빌딩에서총탄흔적이발견된위치 ( 빨간색지점 ) 1980 년 5 18 민주화운동당시전일빌딩주변을낮게날고있는헬기 <5 18 기념재단제공 > 1) 경향신문 2017 년 1 월 16 일자기사 ( 헐릴뻔한빌딩에감춰진 37 년전진실 ) 참조.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