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 李 熙 濬*53) Ⅰ. Ⅱ. Ⅲ. Ⅳ. Ⅴ. 서언 경주 용강동 6호분 출토 바둑알 비교 및 참고 자료 약간의 고찰 후언 국문초록 1991년 발굴되어 2010년 정식 보고된 경주 용강동 6호분(횡혈식석실분) 에서 나온 유물 중에 보고서에 자갈돌로 기술된 일단의 유물(253점)이 석실 바닥에서 두 무더기로 나뉘어 출토된 정황과 형태 및 크기 등으로 보았을 때 분명하게 바둑알로 여겨졌기에 실사를 한 결과 바둑알로 판정되었다. 이 바둑알의 비교 검토 자료로 기왕에 바둑돌 모양 돌들이 출토되었다고 보고 된 황남대총 남분과 천마총의 해당 유물 또한 실사하였는데 그 가운데 후자 는 바둑알일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 이 실사 성과들을 보고하면서 용강 동 6호분 출토 바둑알의 의미에 관해 신라에서 바둑 문화가 발전한 과정에 *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교수 / 전자우편: leehj@knu.ac.kr 127
제24호(2013) 결부지어 약간의 고찰을 하였다. 바둑알이 출토된 고분의 축조 연대는 공반 토기로 볼 때 7세기 초이다. 그러므로 이 바둑알은 신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바둑 관련 실물일 뿐만 아 니라 효성왕대에만 보이는 신라의 바둑 관련 기록을 대략 150년 정도 끌어 올리는 유물이다. 또 이 바둑알은 공반 출토된 묘지석 등 다수의 중국풍 혹 은 중국계 유물로 보건대 그 무덤의 주인공이 중국에 일정 기간 체류한 경 험으로 평소 그 문화에 경도되었던 까닭에 부장품으로 무덤에 넣어졌다고 판단된다. 그는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6세기 후반에 중국 과 활발할 교류를 벌이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중국에 다녀온 귀족이었을 것 이다. 그런 면에서 이 바둑알 발견 사실은 당시 귀족의 생활문화를 연구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의의를 지닌다. 주제어 -----------------------------------------------------------------------------------바둑알, 7세기 초 신라 고분, 효성왕, 중국, 귀족 생활문화 128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Ⅰ. 서언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대의 기사에 따를 때 개로왕은 위장 망명을 한 고구려 승려 도림이 바둑을 잘 두는 데 혹해 그를 신임하고 그 꾐에 빠 져 결국 국력을 헛되이 쓰는 등 정사를 크게 그르친 상태에서 고구려의 공 격을 받아 죽음을 맞았다. 이로써 한성 백제의 멸망은 어떤 의미에서는 경국 지색이 아니라 경국지기(傾國之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사는 한편으로 바둑 문화가 6세기이면 백제 지배층의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 음을 증언한다. 그를 실제로 보여주는 유물로는 현재 일본 정창원에 전해지 는 바둑 관련 유물들 가운데 백제 의자왕이 보냈다고 하는 아주 훌륭한 바 둑판 및 바둑알 일습을 들 수 있겠다. 또 백제본기의 위 기사는 고구려에도 백제에 못지않게 일찍부터 바둑을 두는 문화가 들어가 있었음을 일러준다. 반면에 신라에서는 바둑 관련 기록이 통일기에 가서야 비로소 나오는데 모 두 34대 효성왕(737~742년) 어간의 이야기이다. 본문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삼국유사 에는 효성왕이 즉위하기 전에 신충(信忠)과 바둑을 둔 이야기가, 삼국사기 와 구당서 신당서 에는 효성왕대를 배경으로 한 동일한 내 용의 기사 속에 신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왜 신라에서는 바둑 관련 기사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할 때 거의 3세기나 늦게 나오는 것일까? 물론 일찍이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바둑 문화가 전해 졌어도 그간에 기사화될 만한 관련 사건이 없었기에 그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때문에 중국과 직접 교류할 기회를 고구 려나 백제에 비해 훨씬 늦게야 가졌던 탓에 바둑 문화도 그만큼 늦게 들어 간 때문일까? 아니면 신라에 바둑이 본격 유행한 것은 통일기에 들어서였을 까? 문헌 기록에서는 더 이상 이를 궁구할 단서가 없는 형편이다. 이런 가운데 필자는 1991년 발굴되어 2010년에 정식 보고된 경주 시내의 7세기 횡혈식 석실분 한 기에서 바둑알이 출토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문제의 고분은 경주 시내 평지 주변의 야산에 축조된 여러 고분군 가운데 하나인 129
제24호(2013) 용강동고분군에 속하면서 근화여중고 신축부지에 해당되어 발굴된 제1구간 의 제6호분1)이다. 이 고분은 실은 발굴 당시부터 아주 많은 주목을 끌었다. 그에서 주서(朱書)한 묘지석이 처음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안타 깝게도 그 글자가 거의 다 지워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떻든 발굴 직후 간략한 보고문2)이 나왔을 뿐 정식 발굴 보고서 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이 고분을 포함한 발굴 고분들의 자세한 내용은 근 20년간 알려지지 않았다. 2012년에 늦게야 보고서를 접한 필자는 이를 훑어보다가 그 6호분에서 자갈돌이라 보고된 것들이 두 무더기로 나뉘어 출토된 사진과 해당 유물의 사진 및 도면을 보고는 이건 바둑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실사를 나가려고 하였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기왕에 바둑알 모양 돌이 출 토되었다고 보고된 황남대총 남분과 천마총의 해당 유물을 국립경주박물관 에서 먼저 조사하였다. 당연히 흑백 등으로 어떻든 대(對)를 이루면서 구분 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기대하였으나 보고서의 언급대로 크게 흑 백 회색으 로 나뉘되 뒤섞이면 분간이 잘 안 되는 양태라서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그 뒤 용강동 제6호분 유물을 실사하고는 과연 바둑알임을 확인하였다. 그 과정 에서 흰 돌의 대(對)가 되는 돌들이 황남대총 및 천마총 출토 돌들과 아주 유사하였기에 두 고분 출토품을 다시 실사하였다. 여기서는 그간의 조사 결과를 보고하면서 약간의 고찰을 덧붙이기로 한다. 먼저, 용강동 6호분의 개요와 바둑알에 대해 서술하고 공반 토기를 토대로 고분의 축조 연대를 7세기 초로 비정한다. 다음으로 비교 자료 및 참고 자료 로 황남대총 남분 및 천마총 출토 바둑알 모양 돌을 검토하고 분황사지 출 토 바둑판 모양 전(塼)도 살피기로 한다. 끝으로 용강동 6호분 출토 바둑알 의 의미를 신라에서 바둑 문화가 융성하게 된 과정을 중심으로 해서 간략히 논의한다. 1) 강유신, 2010, 경주 근화여중고 신축부지내 慶州 龍江洞 古墳群Ⅰ(第1區間), 대구가톨릭대학교 박물관. 2) 李殷昌 姜裕信, 1992, 慶州 龍江洞 古墳의 硏究 용강동 고분의 발굴조사를 중 심으로 古文化 40 41. 130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Ⅱ. 경주 용강동 6호분 출토 바둑알 1. 고분의 개요와 바둑알 잘 알려져 있듯이 경주 시가지의 평지에 는 마립간 시기 무덤 인 적석목곽분들이 주 로 조영되어 있는 반 면 그 주변의 산지 곳 곳에는 6세기 중엽 이 후의 횡혈식 석실분들 이 무리를 이루고 조 영되어 있다. 그 가운 데 북천 북쪽 평지에 접해 남북으로 자리 잡은 소금강산(해발 고도 142.6m)에는 거 의 전역에 걸쳐 고분 이 분포하고 있으며3) 그 중 대략 남쪽 1/3 은 일대의 행정 지명 에 따라 동천동고분군 으로 불리고 나머지 <그림 1> 경주 용강동고분군의 위치 북쪽 2/3는 용강동고 분군으로 불린다. 3) 國立慶州博物館 慶州市, 1997, 慶州遺蹟地圖. 131
제24호(2013) 용강동고분군 가운데 북서 산록에 소재한 일부(<그림 1> 의 위쪽 한가운데)가 1991년 근화여중고 신축부지로 선정되 어 건설공사를 하기 전에 발굴 이 되었다. 남쪽의 제1구간과 북쪽의 제2구간으로 나누어 조사를 하였는데 바둑알로 판 단되는 유물이 출토된 고분은 제1구간의 6호분으로 산록 말 단부에 입지하였다. 고분의 봉 분은 밑지름 14m 정도이며 그 내부 구조는 대략 남북으로 긴 장방형 평면의 석실 남 단 벽(短壁) 가운데에 연도가 붙 <그림 2> 은 횡혈식 석실이다(그림 2). 현실은 동서 260cm, 남북 320cm이며 천장석은 판상석 2매가 내부로 함몰되어 있었다. 연도는 너비 110cm, 길이 160cm로 길이가 짧다. 5cm 내외의 부정형 천석을 전면에 깐 현 실 바닥에는 특이하게 북벽 중앙부에 붙여 <그림 3> 금동제 대구 남으로 연도를 향해 장방형 벽돌 모양인 가 로 16cm, 세로 36cm, 두께 5~6cm 내외의 전(塼)을 가로로 5매, 세로로 7~8매씩 모두 40매 가까운 수를 연접시켜 깔아 시대(屍臺)를 마련하였다. 이 시설은 주위에서 관재로 추정되는 목재편과 더불어 관못이 여러 개 출토 되어서 관대(棺臺)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라 횡혈식 석실에서 전을 관대로 132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그림 4> 바둑알 출토 상태(동쪽에서) <그림 5> 바둑알 출토 상태(북쪽에서) 사용한 예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가 거의 없으며 시대를 단벽 한 가운데에 배치한 것도 통상의 횡혈식 석실분에서는 보이지 않는 현상이다. 현실의 전벽(前壁)에 해당하는 남 단벽과 동 장벽이 만나는 지점의 모서리 부근 바닥에서 상하로 포개진 2매의 화강암제 판상석으로 된 묘지석이 나왔 는데 윗면에 주서한 아랫돌 묘지석과 그 덮개돌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로 부터 북쪽으로 현실의 동 장벽과 관대 사이에 각종 토기, 녹갈색 연유 양이 호 1세트, 금동제 대구(그림 3) 등 대부분의 유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둑알은 보고서에서 자갈돌로 보고 되었으되 도면에 출토 위치가 표시되지 않았고 또 그에 관한 언급도 없다. 다만, 출토 사진으 로 보건대 토기 등 유물이 주로 놓인 동 장벽 쪽이 아니라 관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서 장벽과 관대 사이의 한 가운데쯤(<그림 2>의 검은색 둥근 점)에서 따로 출토되었다. 관대로 <그림 6> 바둑알 출토 상태 근경 부터는 대략 60~70cm쯤 떨어진 위치이다. 바 둑알 동쪽 관대 가까운 쪽에는 보고서에서 지 석(砥石)이라 한 것이 놓여 있다(그림 4 및 그 림 5). 바둑알은 두 무더기로 둥그스름하게 모여 출토된 것(그림 6)으로 보 133
제24호(2013) <그림 7> 회백색 회청색 흑색 돌 <그림 8> 회백색 회청색 흑색 돌 근접 사진 아 나무통 같은 것에 담겨 있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지석이라 한 유물은 전 혀 사용흔이 없는데다 형태만 마립간 시기 숫돌과 유사할 뿐 그와 달리 크 고 두꺼운데다 재질이 그 용도에 적합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직 근거 를 제시하기는 어려우나 혹시 문진(文鎭)과 같은 것이 아니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바둑알 통과 더불어 바둑판 위에 놓였을 가능성이 있다. 바둑알 한 무더기 가운데 회백색 회청색 흑색 돌이 섞인 것들(그림 7 및 그림 8)은 길이 1.0~1.8cm, 두께 0.3~0.8cm 정도로4) 170점이 출토되었으 며 평면 형태는 전체적으로 원형 또는 타원형이고 단면은 얇은 타원형이다. 이 돌들은 크기와 형태의 변이가 다소 큰 점으로 보아 자연돌을 채취한 것 으로 판단된다. 다른 한 무더기는 길이 1.7~0.8cm, 두께 1cm 내외에 색조가 붉은 색을 약간 띤 담백색 한 가지로 통일되기에 전자와는 명확하게 대비되며(그림 9 및 그림 10) 모두 83점이 출토되었다. 평면 형태는 거의 대부분 타원형이다. 단면은 보고서에서 평면보다는 세장하다고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통통한 편 이다. 이는 자연돌은 아니고 석영 혹은 규암을 인공적으로 갈아 만들어낸 것 4) 바둑알 253점 각각의 실측 도면이 보고서에 실려 있으므로 크기와 형태에 관한 자세한 분석은 생략한다. 134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그림 9> 담백색 돌 <그림 10> 담백색 돌 근접 사진 으로 추정된다. 이 흰 돌들은 보고서의 서술은 물론 다른 돌들과 대비해 찍 어 게재한 사진 그리고 출토 사진을 참고하더라도 전체적으로 통통한데다 전반적으로 크다. 그래서 양자는 섞어 놓더라도 서로 뚜렷하게 구분이 되면 서 완전히 대(對)를 이루기에 바둑알로서의 조건을 갖추었다. 2. 용강동 6호분의 축조 연대 이 고분의 축조 연대를 고찰하는 데서는 석실의 구조와 출토 유물을 참고 할 수 있다. 석실은 평면이 이른바 종장방형이고 그 천장석은 2매로 추정되 는데, 이런 석실 구조는 6세기 중엽 이후 7세기 전반까지의 횡혈식 석실 도 입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5). 다만, 이것만으로 연대를 구체적 연대 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유물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유물 중에 가장 안정적으로 연대를 추찰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래도 토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마침 이 고분에서는 아주 많은 양의 토기가 출토되었기에 그런 작업에 아주 적합하다. 6세기 중엽에서 8~9세기에 걸친 시기의 이른바 통일 양식 토기 혹은 신 5) 李熙濬, 1989, 統一新羅時代 韓國の考古學, 講談社, pp. 244~246. 135
제24호(2013) 라 후기 양식 토기에 대해서는 그간 몇몇 연구자가 종합 편년을 내놓았는 데6) 그것들 사이에 사실 상대 편년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으며 분기와 절대 연대에서 차이가 좀 난다. 그런 차이는 이 기간의 이른 시기 신라 토기와 공 반됨으로써 중요 교차연대 기준 가운데 하나를 제공하는 복천동 65호 횡구 식석실 출토 중국자기 완의 연대관 차이에 기인하는 바 크다. 복천동 65호 무덤에서 출토된 중국자기 완에 대해서는 애초에 풍선명(馮先銘)의 수대 청 자 Ⅲ형 완7)에 해당한다고 보아 7세기 초로 본 견해가 제시되었다.8) 그러 나 최근에 그보다는 동위(東魏) 이희종(李希宗; 544년 몰) 묘 출토 자기와 한층 유사함을 지적하면서 좀 더 이른 연대로 본 견해들9)이 제시되었다. 현 재로서는 이 견해들이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좀 더 이른 연대관을 제시한 이 견해 둘 다 중국자기의 부장 연대 및 제작의 하한연대와 관련되는 이희종 부인 최씨의 몰년 577년을 557년으 로 잘못 파악하는 바람에 연대 비정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10) 어떻든 그 가운데 비정 연대 폭에 미리 약간의 신축성을 둔 윤상덕은 복천동 65호 출 토 자기와 공반된 신라 토기(그의 중기양식 1a기)의 연대를 6세기 중엽으로 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하한 연대를 고려하면 엄밀히 말해 그보다는 10년 정도 늦추어 보아야 할 터이다. 그렇더라도 사실 대차는 없다. 그래서 여기 서는 그의 분기 및 연대관을 원용해 용강동 6호분의 축조 연대를 검토하기 로 한다. 용강동 6호분 출토 토기 도면 25-1 대부병(그림 11)에는 찍은 문양과 그 6) 최병현, 2011, 신라후기양식토기의 편년 嶺南考古學 59, 111-173.; 윤상 덕, 2011, 6~7세기 경주지역 신라토기 편년 한반도 고대문화속의 울릉도토기문화-, 동북아역사재단, 102-157.; 홍보식, 2003, 新羅 後期 古墳文化 硏究, 춘추각. 7) 馮先銘, 1959 河北磁縣買壁村隋靑瓷窯址初探 考古 1959年 10期. 8) 洪潽植, 1995, 考古資料로 본 6~7世紀代 社會變化 嶺南地域을 中心으로 韓國古代史論叢 7, 韓國古代社會硏究所. 9) 최병현, 앞의 논문과 윤상덕 앞의 논문. 10) 이에 관해서는 이희준, 2012, 연구 주제 다변화의 모색: 2011~12년 역사고 고학 연구의 동향 역사학보 215, pp.382~383을 참조. 136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은 문양이 함께 나타나 있는데 목이 짧고 목 가운데에 침선이 없다. 이는 윤상덕의 C형식으로 오도리7호 석실 출토품과 유사 해서 그의 중기양식 IIb기(7세기 1/4분기) 에 해당한다. 또 뚜껑 18점 중 15점은 그 의 입(入)자형 뚜껑에 해당하는 반구형 개 신에 안 턱이 돌출한 1형식, 즉 입자형 초 <그림 11> 용강동 6호분 출토 기 형태이다. 그 가운데 보고서 도면 대부병 22-7 뚜껑의 문양은 그은 삼각집선문+찍 은 원이다(그림 12). 그리고 몇 점은 모두 인화문이다. 그래서 일부는 그의 중기 IIa기(6세기 말)까지도 올릴 수 있으나 대부분은 인화문이 정착된 모습인 점을 고려하면 역시 중기 IIb기(7세기 1/4)로 추정된다. 무개식고배, 즉 대부완은 구연부가 동체부와 구분되는 그 의 C형이 대부분이고 약간 외반되는 D형도 일부 보이는데 전자는 중기 Ib~ 중기 IIa기, D형은 중기 IIb기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이상의 검토로 용강동 6호분에서 출토 된 대부분의 토기는 윤상덕의 중기양식 IIb기(7세기 1/4분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그보다 이른 형식의 유물이 일부 보이나 이를 추가장의 적극 적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 다만, 무개식 고배의 경우 6세기 말에 해당하는 C형이 <그림 12> 용강동 6호분 출토 많이 보여서 혹시 6세기 말에 무덤이 만 뚜껑 들어진 이후 7세기 1/4분기에 추가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토기들이 두 무더기로 모여 있으나 보고서의 내용으로는 어떤 유물이 어떤 토기군에 속하는지 알 수 없는 점, 7세기 1/4분기에 속하는 유물이 대부분인 점, 보고서에서 추가 137
제24호(2013) 장의 흔적이 있는지 면밀히 조사하였으나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한 점, 관대 도 중앙에 하나만 있는 점으로 보아 추가장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는 어렵 다. 그러므로 이 고분은 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Ⅲ. 비교 및 참고 자료 1. 황남대총 및 천마총 출토 바둑돌 모양 잔돌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관련 유물은 바둑돌 모양 잔돌이라고 보고되었 는데 부곽에서 주로 고배 안에 담긴 채 출토되었다. 모두 243개로 보통 직 경이 1.0cm 내외, 두께가 0.5cm 내외로 지금의 바둑돌 크기보다 작은 소형 의 냇돌이다. 색상은 흑색, 백색, 회색 등 세 종류를 띠는데 실제로 바둑돌의 <그림 13> 황남대총 남분 출토 바둑돌 모양 잔돌 분류 <그림 14> 황남대총 남분 출토 바둑돌 모양 잔돌 부류별 크기 및 색깔 대비 역할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인공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두 채취한 것으로 보인다. 고 하였다11). 11) 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94, 皇南大塚(慶州市 皇南洞 第98號古墳) 南墳 發掘調査報告書(本文), p.214. 138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보고서의 내용대로 전체적으로 굳이 나눈다면 흑색 회색 백색의 세 무리 돌로 나눌 수 있는데(그림 13) 그 가운데서 임의로 각각 크고 작은 것(그림 14)을 골라 계측한 결과를 가로 세로 두께(cm)로 제시하면 흑색(소): 1.43 1.19 0.38, 흑 색(대): 2.04 1.81 0.58, 백색(소): 1.39 1.27 0.35, 백색(대): 2.20 1.77 0.72, 회색(소):1.40 1.38 0.34, 회색(대):1.93 1.74 0.41이다. 흑색 돌은 모두 50개 정도이다. 그런데 돌들을 모두 섞어 놓았을 때 아무리 분류를 해도 크게 두 무리로 나뉘어 대(對)를 이루지는 않는다. 이 황남대총 남분의 돌들은 후술할 천마총 출토품에 비해서는 전체적으로 크기가 고른 편이다. 천마총 출토품은 碁石形小礫이라는 제하에 모두 350개가 나온 것으로 보 고하였는데 표면이 자연적으로 곱게 마연된 대개 타원형의 잔자갈로서 크 <그림 15> 천마총 출토 바둑돌 모양 잔돌 분류 <그림 16> 천마총 출토 바둑돌 모양 잔돌 부류별 크기 및 색깔 대비 기는 지름 1cm 되는 작은 것에서부터 지름 2.5cm의 큰 것까지 여러 가지이다. 색깔도 순백색이나 흑색 이외에 흑색이 불규칙하게 얼룩진 것도 있어 바둑알처럼 서로 대(對)를 이루는 오락구로서는 생각되지 않는다. 부장품수장궤 내 서편 중앙 의 호형칠기(壺形漆器) 밑의 토기군 위에서 출토되었다. 고 하였다.12) 이 또한 색깔과 크기로 보면 3대별된다(그림 15). 역시 임의로 각각 크고 작은 것(그림 12)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5, 天馬塚(慶州市皇南洞 第155號古墳) 發掘調査 報告書, p.161. 139
제24호(2013) 16)을 골라 계측한 결과를 가로 세로 두께(cm)로 제시하면 그림 왼쪽부터 약간 길쭉하게 둥글면서 통통하고 갈색기가 약간 도는데다 윤기가 나는 부류(대 형):1.98 1.69 1.43, 그보다 납작한 백색(대):2.15 1.76 0.74, 백색 (소):1.22 0.99 0.38, 흑색(대):1.74 1.50 0.75, 흑색(소):1.27 0.98 0.46 이다. 그런데 흑색과 백색으로 나누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그처럼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회색계도 많다. 그러나 만약 이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황남대총과 달리 흑색 돌 과 백색 돌 이외에 독특하게 윤 기가 나고 갈색기가 도는 돌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뚜렷이 구분되 는 점에 주목하면 사정은 달라진 다. 전체적으로 크기가 큰 윤기 나는 이것들을 한 데 모아 같은 수의 납작하고 작은 것들과 대비 해 찍은 사진(그림 17)을 보면 <그림 17> 천마총 출토 바둑돌 모양 잔돌 2대별 대비 두 종류가 확연하게 구분이 됨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들의 개 수가 60개로 다소 적고 나머지가 290개라는 불균형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 고 크기로만 보면 여전히 흑백의 대형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두께가 두 꺼워 만약 바둑판 위에 놓았다면 다른 돌들과 달리 도드라져 보이면서 명확 히 구분되었을 것이다. 물론 색깔로도 그랬을 터이다. 이상과 같은 관찰 결과로 보건대 황남대총 남분 출토 바둑돌 모양 잔돌들 은 혹시 그에다 지금은 지워진 다른 표시, 이를테면 색칠 같은 것을 해서 사 용하였다면 몰라도 현재의 모습 그대로는 바둑알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극 히 작다. 반면에 천마총 출토품은 혹시 사용한 바둑판의 줄 수가 15줄이나 그 이하였다면 대(對)를 이루는 바둑알로서 충분히 쓰였을 수 있으므로 그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140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2. 분황사지 출토 바둑판 모양 전(塼) 2006년 5월10일 국립경주문화재 연구소 분황사지 발굴단에서는 통일 신라시대 바둑판을 발굴했다고 발표 하였다. 이 유물은 2004~2005년 세 차례에 걸쳐 유적 내 이곳저곳에서 떨어져 발굴된 세 조각의 전(塼)을 붙여 복원했다고 한다. 크기는 가로 <그림 18> 분황사지 출토 바둑판 모양 전 42, 세로 43 로 현대 바둑판 규 격(가로 세로 약 42 45 )과 거의 일치한다. 한쪽 면에 가로 세로 각 15줄이 바둑판 모양으로 규칙적으로 그 어져 있는데 각 칸의 너비도 평균 2.8 로 현대 바둑판(2.3 )과 비슷하다. 다만, 화점은 나타나 있지 않다(그림 18). 이 바둑판 모양 전은 그 후 발굴 층위 등을 확인해 본 결과 고려시대 층 위에서 나왔다고 하므로 반드시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 다. 이 유물에 대해서는 2006년 10월에 열린 제4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 에서 바둑 전문가 남치형이 논고를 발표13)하였으나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15 줄 바둑판이 나온 유례가 없어 바둑판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유보하였다. 그러나 수(隋) 장성(張盛)의 묘(595년)에서 19줄 백자 바둑판14)이 나왔고 당 시절에도 19줄 바둑판이 성행하였음에도 17줄 바둑판이 여전히 공존하고 있었음은 중국 신장성 아스타나고분 발굴에서 확인된 사실15)이다. 그렇기에 15줄 바둑판 또한 공존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본다. 어쩌면 바둑을 두는 13) 남치형, 2006, 분황사지 출토 바둑판형 전(塼-brick)에 관한 소고, 제4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 전주교육대학교. 14) 河南省文物管理局 編, 1999, 河南文物精髓 藏品卷, 文心出版社, p.137. 15) 李承雨, 2000, 4000년 바둑의 역사와 문화: 이승우 바둑이야기, 전원문화 사, p.159. 141
제24호(2013) 사람의 수준에 따라 바둑판의 줄 수를 달리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6). Ⅳ. 약간의 고찰 여기서는 용강동 6호분 출토 바둑알의 의미를 중심으로 약간 논의를 하기 로 하겠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미는 삼국시대 바둑알이라는 실물이 처음 으로 발굴 자료로서 확인된 점을 꼽을 수 있다. 사실 이런 생활용품은 주거 관련 유적에서든 고분에서든 출토될 가능성이 극히 작다. 그런데도 정말 이 례적으로 바둑알이라는 유물이 실제로 인지, 확보되었으니 그 자체로 큰 성 과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더해 이 유물의 존재로써 말하자면 신라 의 최초 바둑 역사 기록을 기왕보다 1세기 이상 끌어올리게 된 점도 의의로 꼽을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용강동 6호분 출토품이 바둑알임에 틀림은 없으나 그러면서도 약간 문제가 되는 점이 있다. 다름 아니라 흰 돌의 수가 83점으로 그 대(對) 가 되는 돌의 수가 170점인 것과 맞지 않고 전체 바둑알 수가 오늘날 19줄 바둑알 수(361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점이다. 중국에서는 4세기 초(301년) 산동성 추성(鄒城)에 묻힌 서진(西晉) 유보(劉寶)의 묘에서 키가 낮은 원통형 도제 통에 담겨 출토된 바둑알이 모두 310개로 검은 돌 145개, 흰 돌 165 개였다17). 이는 17줄 바둑판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는데18) 그것을 참고 로 하면서 두 가지 경우로 생각을 해볼 수 있겠다. 첫째로, 흰 돌의 원래 수는 170점 정도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가운데 16) 꼭이 당시 여성의 바둑 수준이 하수(下手)라는 뜻은 아니지만 당나라 시절에 이 미 19줄 바둑이 성행하였는데도 아스타나 187호 고분에서 출토된 이른바 귀녀 혁기도(貴女奕棋圖) 에 17줄 바둑판이 그려진 점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된다. 17) 山東鄒城市文物局, 2005, 山東鄒城西晋劉寶墓 文物 2005年 第1期. 18) 何江 張文江, 2012, 古體博大 精彩紛呈 江西出土古代陶瓷體育文物賞析 南 方文物 2012年 第4期, p.198. 142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83개만 부장된 경우이다. 이는 사실 확인할 길이 없다. 어떻든 만약 이 경우 라면 당시 사용된 바둑판의 줄 수는 가로세로 17줄 정도가 되겠다. 둘째로, 무덤에 부장된 것이 묘주가 생전에 쓰던 그대로인 경우이다. 그러면 83점 정도로 둘 수 있는 바둑판의 줄 수는 당시의 바둑 두는 방식이 오늘날과 달 리 이를테면 죽은 돌을 계가에 넣지 않고 바꾸기도 하는 순장(順丈) 바둑 같 은 다른 방식이었다면 17줄 혹은 15줄이었을 것이다. 전자라면 필요한 최대 바둑알 수가 289개(각 144개 및 145개)이고 후자라면 225개(각 112개 및 123개)라서 아무래도 안전하게 후자 쪽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이 바둑알들은 어떻게 해서 용강동 6호분에 부장되었을까? 이를 생각하는 데서는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그 석실에서 특이하게 관을 사용 하고 또 전으로 구성된 관대를 사용한 점과 더불어 묘지석 등 유별난 유물 들이 출토된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그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다른 기회 로 미루어야 하겠지만 특히 묘지석은 당시 신라의 장송의례에서는 극히 이 례적인 현상이다. 이는 아무래도 당시 중국의 장묘문화와 직결되는 현상이 다.19) 그렇게 보면 관의 사용과 전(塼)으로 구성된 관대의 사용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관 못의 대가리를 금동으로 처리한 점은 그의 신분이 결코 범상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 외에도 녹갈색 연유 양이호, 이른바 수금(水禽)형 혹은 비파형 금동 대구20) 등 또한 중국계 유물이다. 이런 제반 고고학적 현상은 피장자가 어떤 연유로 중국과 깊은 관계를 지 녔으며 중국 문화에 경도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무덤에 부장된 바둑알 역시 그런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추정하건대 중국에 아마도 다년간 머 무른 경험이 있고 평소 바둑을 애호한 귀족이었을 피장자가 사망하자 그 무 덤에 바둑판과 바둑알을 부장한 것이다. 물론 나무로 되었을 바둑판은 썩어 버려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지만 바둑알은 생생히 남아 그를 증언하고 있다 19) 朱甫暾, 2012, 통일신라의 (陵)墓碑에 대한 몇 가지 논의 木簡과 文字 9, 한국목간학회, p.61. 20) 王仁湘, 1985, 帶鉤槪論 考古學報 1985年 第3期. 143
제24호(2013) 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그 인물이 주로 활동했을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 에 걸친 시기에 활발했던 신라의 대 중국 교류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그에 관해서는 아래의 문헌 기사 검토에서 함께 이야기하기로 한다. 모두에서 말했듯이 문헌 기록에 나오는 신라의 바둑 관련 기사는 삼국 사기 와 삼국유사 에 각 한 건, 모두 두 건이 있고 그에 더해 당 희종 (僖宗)의 기대조(棋待詔)를 역임했던 헌강왕(875-886년) 때 신라 사람 박구 (朴球)에 관한 정보가 당나라 시인 장교(張喬)가 지은 送棋待詔朴球歸新羅 라는 제목의 전별시21)에 남아 있다. 삼국유사 에는 권 제5, 피은(避隱) 제8 신충괘관(信忠掛冠) 조에 효성 왕이 왕위에 오르기 몇 달 전에 신충과 바둑을 둔 이야기가 나온다. 즉 효성 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과 대궐 뜰의 잣나무 아래에서 바 둑을 두었는데 언젠가 신충에게 뒷날 내가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 무가 (증거로) 있다. 고 하였다. 신충은 일어나 절하였다. 몇 달 뒤에 효성왕 이 즉위해 공신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은 잊고 등급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문득 말랐다. 왕이 이상히 여 겨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했더니 (그가) 노래를 갖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 라며 정무가 번잡해서 공신을 거의 잊을 뻔 했구나. 하고는 신충을 불러 벼 슬을 주니 잣나무가 그제야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효성왕이 즉위한 이후의 상황을 전하는 기록은 삼국사기 제9 신라본기 효성왕 2년조에 나온다. 이를 보면 당나라 현종이 성덕왕의 승하 소식에 좌 찬선대부 형숙(邢璹)을 대표로 하는 조문 사절을 보내면서 형숙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 일컬어지고 자못 글을 잘 알아 중국과 비슷한 바가 있다. 그 대는 독실한 선비인 까닭에 신임표를 주어 보내는 것이니, 마땅히 경서(經 書)의 뜻을 강연해 그들에게 대국(大國)에 유교(儒敎)가 성함을 알게 하라! 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신라 사람들은 바둑을 잘 두므로 조칙을 내려 솔부병조참군 양계응(楊季膺)을 부사로 삼았다고 하는 문장 뒤에 國高奕皆 21) 이충양, 2010, 고대 한 중 교유시, 고려대학교출판부. 144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出其下, 於是 王厚贈璹等金寶藥物 이라 하였다. 여기서 한문으로 표기한 부분 가운데 앞부분은 신당서 신라전 해당 부분을 그대로 따왔고 뒷부분은 구당서 신라전의 해당 부분을 더 많이 참조한 듯하다. 구당서 에는 앞부분을 其國棋者皆季鷹之下 라 하고 뒷부분은 於是 王厚賂璹等金寶及藥物 等 이라 한 반면 신당서 에는 뒷부분을 於是 厚遣使者金寶 라 하였기 때 문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의 이 기사 가운데 그 앞부분은 그간 해석에서 약간 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병도 역주본(을유문화사)에서는 신라 의 고수들이 다 그 밑에 들었었다. 로 한 반면 이를테면 정구복 외 역주본2 번역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우리나라 바둑의 고수는 모두 그 밑에서 나왔다 고 해석하였다. 후자와 같이 해석하면 문장 흐름에 갑작스런 비약이 일어나고 또 뒤의 於是라는 표현과도 순조롭게 연결되지 않는다. 이런 해석 은 아무래도 出 자 때문에 빚어진 착오라 하겠다. 문장의 뜻이 명확하게 표 현된 구당서 를 참조하면 이는 분명히 신라의 바둑 고수들이 모두 양계 응보다 하수(下手)였다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이 부분은 곧이곧대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현재로 서는 달리 알아볼 길이 없기에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다. 그러나 잠시 한 번 더 생각을 해서 혹시 중국 황제가 알 정도로 바둑을 잘 두었다는 신라 사람 들이 외교적 대응을 잘 하였던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 즉 대국 사절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리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 게 일부러 져 준 것이라면 정말로 바둑을 잘 두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보다 1세기 남짓 뒤의 일이지만 신라 사람 박구가 황제의 바둑 담당 비서 같은 벼슬을 한 사실을 보면 불가능한 해석은 아니라고 본다. 어떻든 8세기 신라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바둑을 잘 두게 되었고 또 그 사실이 당나라에까지 소문이 났을까? 그러려면 무엇보다 신라에서의 바둑 문화의 시작이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의 기록에 나오는 효성왕 대보다는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할 터이다. 이와 관련해서 떠올릴 수 있는 145
제24호(2013) 정황은 우선 삼국통일로 고구려 및 백제의 뛰어난 바둑 문화가 들어온 덕으 로 볼 수 있다. 이는 충분히 상정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에다 상상을 좀 더 보탠다면 통일과 더불어 어쩌면 북조 계통의 전통을 지녔을 고구려의 바둑 문화와 남조 계통의 전통을 지녔을 백제의 바둑 문화가 융합됨으로써 신라인의 바둑 실력이 더욱 격상되는 계기를 맞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바둑 문화가 그 이전에 들어와 있었음을 전제로 한 것인데 과연 용강동 6호분 출토 바둑알은 그 점을 웅변한다. 용강동 6호분의 주인공이 사망할 당시 몇 살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의 주된 활동 시기는 6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출토 된 바둑알은 신라 바둑 문화의 역사를 적어도 약 150년 끌어올리는 의미를 가진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만약 천마총 출토 바둑돌 모양 유물이 바둑알이라면 그 무덤의 연대는 논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개 5세 기 말 즈음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는 효성왕대로부터 약 250년 전으로 다시 끌어올리는 셈이어서 신라인이 바둑 실력을 쌓을 기간은 충분히 주어진다 하겠다. 만약 그렇다면 마립간기 신라의 대외관계를 고려할 때 4~5세기에 이미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각각 다른 계통의 바둑 문화가 들어와 자연스럽 게 융합됨으로써 신라인의 바둑 실력이 착실하게 쌓였을 것으로 볼 수도 있 다. 그러다가 다시 6세기 중반 이후 오랫동안 목말라 하던 선진 중국 문화의 세례를 일차 집중적으로 받는 계기를 맞이해 신라인의 바둑 실력은 급성장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천마총 출토 유물이 아무래도 바둑알이라고 확 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므로 일단 7세기 초 용강동 6호분 유물을 기준으로 그 배경에 대해 약간 논의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의 기록에 의거하면 용강동 6호분의 피장자가 주로 활동하였 을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초에 걸친 시기 동안에 신라가 중국에 사신을 자 주 보내고 또 승려를 중심으로 하는 유학생도 중국에 많이 간 사실은 잘 알 려져 있다. 이는 신라가 6세기 중반 한강 하류역을 차지하였기에 비로소 가 능했던 일이다. 그런 외교 및 유학은 진흥왕 25년(564)에 북조의 북제에 사 146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본격화하였다. 27년(566)부터 29년(568)에 걸쳐서는 매년 남조의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또 31년-32년에도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그리고 다시 33년(572)에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진지왕도 3년(578) 진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수나 라가 북중국을 통일한 581년 이후 한동안 뜸하다가 진평왕 18년(596)에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낸 이후 24년(602), 26년(604), 31년(611)에도 보냈다. 그 리고 43년(621)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45년(623), 47년(625)~49년 (627), 51년(629), 53년(631)에도 보냈다. 이런 기록으로 추정하건대 6세기 후반~7세기 초 당시 신라에는 중국의 각종 선진 문화가 물밀 듯이 들어왔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남 북조 혹은 그에 후속하는 수당의 발달한 바둑 문화 또한 중국에 머물다 온 승려나 여타 유학생들을 통해 들어 왔을 것이다. 용강동 6호분의 주인공은 이 시대에 어떤 계기로 중국에 한동안 머물면서 그런 문화에 푹 빠진 인물 이었을 가능성이 크기에 바둑알을 비롯한 갖가지 중국 문화의 잔적을 그 무 덤 속에 남기게 되었을 터이다. 그가 중국에 머문 때와 그 대상국이 구체적 으로 어디였는지는 중국계 유물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므로 다음 기 회로 미룬다. 다만, 일단 이에서 출토된 신라 토기의 연대로 생각하면 6세기 대 남조의 진과 북조의 북제, 그리고 7세기 초의 수나라가 그 후보가 된다. 그런데 용강동 6호분에서 출토된 허리띠의 장식인 대구는 수나라에서 유행 한 교구를 가진 과대 장식22)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6세기대에 남 조 혹은 북조의 어떤 나라에 다녀왔던 인물로 보는 쪽이 순조로울 듯하다. 22) 하한연대 610년인 희위(姬威)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대표로 들 수 있겠다(陝西 省文物管理委員會, 1959, 西安郭家灘隋姬威墓淸理簡報 文物 1959年 第8 期.). 이에 관한 설명과 도면은 李漢祥, 1999, 7世紀 前半의 新羅 帶金具에 대한 認識 皇m寺型 帶金具 의 설정 古代硏究 7, 古代硏究會, p.30을 참조. 147
제24호(2013) Ⅴ. 후언 고고학에서는 고분 자체와 그 출토 유물에 관련된 제반 현상을 고분문화 라고 흔히 말하지만 대개 장송문화와 연관된 것이라서 그런 고분문화 가운 데서 당시의 생활 문화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아주 드물다. 앞서 말한 복천동 65호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 완 같은 것이 어쩌면 차 문화의 존재를 암시하는 예가 될 지도 모르는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강동 6호분에서 출토된 바둑알은 바둑 문화라는 생활 문화의 존재를 바로 말해주기에 특별 한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나 그 무덤 주인공을 위해 부장한 다른 물건 중에 묘지석 등 중국계 유물이 적지 않은 점을 보면 그 바둑 문화는 외따로 존재 한 것이 아니라 당시 귀족의 총체적 이국풍 문화 속에서 한 부분을 이루었 다고 추정되는 점이 또한 주목된다. 이 논문을 기초한 원래 목적은 일차적으로 7세기 초 신라 무덤에서의 바 둑알 부장 사실 확인을 보고하고 그와 더불어 문헌 기록으로는 거의 알 길 이 없는 중고기 이후 귀족들의 생활문화 풍경에다 바둑 문화라는 중요한 한 요소를 보탬으로써 그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풍부히 하려는 데 있었다. 그리 고 그에 더해 무엇보다도 고고학자들이 발굴시 유적의 제반 현상에 특히 주 의를 기울여야 함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데 있었다. 이 짧은 글로써 소기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되지는 않겠지만 생활문화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 키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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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李熙濬) Abstract The Baduk(Go) stones from an early 7th century Silla tomb and their implications Lee, Hee-joon The description in the excavation report of the Yonggangdong tombs site at Kyeongju published in 2010 that small oval or flat round pebbles(253 in total) of 1-1.5cm in diameter were found as two heaps on the floor of the chamber of Tomb No. 6 was noted, and the context of these finds together with the size, opposable colour and form of them was suspected by the author as hinting the possibility of the Baduk stones unearthed. The examination of those artifacts revealed the suspicion to be true as expected. Further examinations of artifacts hitherto reported as Baduk stone-like materials in the reports of Tomb Nos. 98 and 155 of Kyeongju plain followed, but the result brought about only the partial possibility of the materials of the latter tomb to be real Baduk stones. The date of construction of the Yonggangdong Tomb No. 6 is estimated as the early 7th century AD based on the chronology of Silla potteries accompanied. Thus the Baduk stones from it are the first and only ones of their kind ever unearthed and, considered the period of actual use by the person buried in that tomb, push back the history of the Baduk playing in Silla by about 150 years from the time of Silla King Hyoseong(737~742) about whom the only stories of Baduk play 151
제24호(2013) in Silla recorded in Samgusagi and Samgukyusa. These Baduk stones are thought to be an item reflecting an aspect of the chinese life style of the time having been enjoyed during his lifetime by the buried aristocrat of Silla. Such a life style might have been brought in through active relationship between Silla and China in the latter half of the 6th century, made possible by the annexation of the lower basin of the Han river into Silla's territory in the middle of the century. Taken into consideration the imported Chinese artifacts such as a porcelain, a buckle and the memorial inscription stone of chinese style accompanied in the tomb, the buried person is thought to have stayed for some time in China during that period and have been deeply indulged in Chinese culture. Key words: Baduk stones, early 7th century Silla tomb, King Hyoseong, China, life style of the aristocrat 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