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40 년대인천지역의행정구역확장과시가지계획의전개 염복규 * 1) Ⅰ. 서론 Ⅱ. 인천의도시적위상변화와도시계획문제의대두 Ⅲ. 제1차행정구역확장과시가지계획안의입안 시행 Ⅳ. 제2차행정구역확장과공업용지 주택지사업 Ⅴ. 결론 염 복 규 Ⅰ. 서론 개항과더불어형성의맹아를본한국근대도시는일제시기급속한 발달 과 변화 를겪었다. 물론그내용을결정한결정적인변수는각시기별로일제식민통치의기조가어디에있느냐였다. 이점과도시내부의자생적인발달지향이길항을일으키며한국근대도시는 형성 되었던것이다. 이것이자랑스러운역사가아님은물론이겠으나, 그렇다고이를망각해버린다면오늘날한국도시의기원을찾는작업은불가능할것이다. 일제시기도시사연구의의미는바로여기에있다고하겠다. 특히인천은한국최초의개항장으로서, 식민통치의중심인경성 ( 京城 ) 의인접도시로서, 일제말기대륙침략의거점으로서그의미가더욱각별하다. 그러나이러한중요성에비해일제시기인천에대한도시사적연구는소략한편이다. 또한대부분의기존연구들은개항기에집중되었다. 이는최초의개항장으로서의인천의역사적위상을생각할때일면당연하다고도할수있겠지만, 다른한편일제시기인천에대한어느정도의 의도적무관심 의결과라고도할수있겠다. 만일그렇다면이것이바람직한현상이아님은 * 국사편찬위원회편사연구사 - 83 -
인천학연구 6(2007. 2) 분명하다. 이글에서는이러한문제의식에기반하여 1930-40년대인천에서시행된법정도시계획인 인천시가지계획 1) 의전개과정을그와긴밀한연관하에서시행된인천행정구역의확장과더불어살펴보고자한다. 이에대한선행연구로는먼저인천광역시의기본적인정리 2) 와심재만, 손정목, 이안등의통사적연구를들수있다. 3) 이연구들을통해 1910-45 년인천의도시계획과도시공간형성에대한기초적인사항의정리가이루어졌다. 그러나이연구들은공통적으로한정된자료를이용하여일제시기를통시기적으로분석했기때문에각소시기에대한세밀한고찰에는미치지못했다고여겨진다. 한편 1930-40년대인천시가지계획과보다밀접하게관련된연구로는노상주, 배성준의연구를들수있다. 4) 노상주는 1940년대전반인천지역에서조선주택영단의주택건설과건설된영단주택을분석했다. 배성준은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발발한전시기 ( 戰時期 ) 일제전쟁동원정책의일환으로조성된 경인공업지대 의형성과정을분석했다. 두연구는인천시가지계획을직접다룬것은아니지만, 그에대한중요한참조항을제공해준다. 아상에서살펴보았듯이 1930-40년대인천시가지계획에대해서는그전개과정에대한사실의축적이충분히이루어져있지않은상태이다. 이글에서도여기에초점을맞추어추후분석적연구의기반을마련하고자한다. 본론에앞서이글에서이용한주요자료들을밝혀두면다음과같다. 우선공식계획안인 인천시가지계획결정이유서 ( 조선총독부, 1937, 이하 결정이유서 로줄임.), 국가기록원소장공문서 5), 조선총독부관보 등을통해일차적인사실관계를파악했으며, 매일신보, 동아일보, 신문절발 ( 新聞切拔 ) 6) 등신문자료를통해여러논의와사업전개의구체상을파악하고자했다. 1) 1934 년제정된한국최초의도시계획법령의명칭은 조선시가지계획령 이었으며, 그에따라시행된인천도시계획의명칭은 인천시가지계획 이었다. 도시계획 이아니라 시가지계획 이라는명칭을붙힌총독부의 의도 에대해서는여러가지설이있으나확정할만한견해는없다. 이글에서는일단이문제를더이상추구하지는않을것이며, 경우에따라도시계획과시가지계획을병용하여사용하겠다. 2)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사 ( 서울 : 인천광역시, 2002) ; 이글에서는서울시스템주식회사에서제작한 CD-ROM 을이용했기때문에, 구체적인인용에서쪽수를밝히기않았음을부기해둔다. 3) 심재만, 인천시가지의성장과변천에관한연구 (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6) ; 손정목, 일제강점기도시계획연구 ( 서울 : 일지사, 1990) ; 이안, 인천근대도시형성과건축 ( 인천 : 다인아트, 2005) 4) 노상주 조선주택영단의주택지형성및변화에관한연구 ( 인천시내 5 개주택지를중심으로 ) (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2) ; 배성준, 전시 (1937-45) 통제하경인공업지대의형성, 기술과역사 ( 제 1 집, 2000) 5) 이글에서이용한문서철들은 第三回市街地計劃委員會關係書綴 (1936-37) (CJA0014430), 第五回市街地計劃委員會關係綴 (1939) (CJA0015675), 仁川市街地計劃工業用地造成及住宅關係書類 (1940-43) (CJA0016086) 등으로각각 제삼회철, 제오회철, 공업주택서류 로줄임. 6) 신문절발 은 1928-40 년경성제국대학법문학부에서수집 정리한신문스크랩자료이다. 현재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고문헌실에소장되어있으며, 중앙도서관홈페이지의전자도서관 - 조선근대신문카테고리를통해원문이미지로도열람할수있다. 동아일보, 매일신보 를제외하고이글에서인용한일본어신문들이 신문절발 에속해있는것이다. - 84 -
Ⅱ. 인천의도시적위상변화와도시계획문제의대두 주지하듯이인천은최초의개항장으로서한국에서근대문물유입의창구의위상을가지고있었다. 그러나이러한위상은강제병합이후상당히축소되었다. 일제초기인천의위상은전국최대의미곡집산지이자미곡이출항이라는것으로집약되었다. 따라서 1910-20년대인천공업은정미업으로대표되었으며, 인천은대부분의공산품을경성에의존하는공업의후진지역이었다. 7) 이와더불어인천은총독부가전략적으로육성한 관광도시 이기도했다. 1918년이미월미도가풍치지구로지정되었으며, 월미산중턱에는순환도로가건설되었다. 월미도북쪽해안에해수욕장이개장되고, 수족관이건설된것이 1920년이었는데, 이후월미도에는공설운동장, 야외극장, 조탕 ( 潮湯 ), 호텔, 사슴농장등위락시설이차례로건설되었다. 8) 이상과같은인천의위상에서인천도시계획에대한논의도대단히미미했다. 산발적으로 세계적무역의관문으로장래크게발전할소질을가진인천항 에 금후대지 ( 對支 ) 무역, 상공업방면의적극적헌책 필요하다는논의가있기도했지만 9), 1930년대이전까지인천에서는 1926년인천부가한차례도시계획기본조사를시행했을뿐이며 10), 시구개수조차 1928년에가서야계획되었다 11). 그런데이러한인천의위상은만주사변 (1931) 에서중일전쟁발발 (1937) 로이어지는일제의대륙침략정책과더불어변화했다. 인천은지리적으로만주와일본을연결하는중심에위치하여병참기지로서의중요성이부각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일제의대륙침략은인천에 병력과장비가송출되는주요창구로다시기형적인활력을주었 12) 던것이다. 한편 1930년대들어그동안제정되지않았던조선의도시계획법령제정의가능성이비로소열리기시작했다. 원래 1920년대조선각도시에서는 1919년일본도시계획법의제정, 재조선일본인유산층의도시개발에대한요구등이맞물려이른바 도시계획운동 이전개되었다. 그러나이시기총독부는이에대해부정적입장으로일관했다. 당시총독부는도시계획에소요되는재정적부담을감당할여력도없었으며, 식민통치의기조도도시의개발에있지않았다. 7) 배성준, 앞의논문, 160-162 쪽. 8) 이안, 앞의책, 62 쪽. 9) 松南生, 大仁川建設論, 朝鮮及滿洲 ( 제 160 호, 1920 년 10 월 ) 10) 동아일보 1926 년 9 월 26 일 인천부도시계획기본조사 11) 동아일보 1928 년 6 월 11 일 인천부시구개수계획발표 12) 이안, 앞의책, 124 쪽. - 85 -
인천학연구 6(2007. 2) 따라서공식적으로표방하고있던조선과일본의 동화 라는이념을훼손하면서까지민간일본인측의이해관계가노골적으로반영된도시계획을시행할만한동인 ( 動因 ) 은없었던것이다. 13) 그런데이러한상황은 1930년대에접어들어몇가지요인에의해변화했다. 우선이른바조선공업화정책의추진에따라일본자본의유치와공업화의기반조성차원에서도시발달을도모해야할필요성이생겼다. 다음으로대륙침략정책의거점을개발해야할필요가생겼다. 두가지요인은결국맞물리는것이었는데, 이러한요인에따라재정적부담을최소화하면서도시를개발하기위해서는결국법령이필요하다는인식에도달했던것이다. 한편이시기일본에는개별도시의정비가아니라, 그것을중심으로외곽지역을일원적으로개발 통제하고, 궁극적으로전국적범위에서자원과인구를효율적으로배치 활용한다는서구의지방계획론 ( 국토계획론 ) 이도입되었다. 원래서구에서제1차세계대전이후의경제재건책과 1920년대말의대공황타개책의결합으로등장한지방계획론은독일, 일본등에서는사회전체의파시즘화와맞물려군사적 국가주의적으로전개되었다. 또한이이론은조선인의이해관계와는무관한 대일본제국 전체의국책수행을위한수단으로서의식민지도시계획의길을열어주는것이기도했다. 이상의배경하에서 1930년대초부터조선의도시계획법령제정논의가시작되어, 마침내 1934년 7월조선시가지계획령 ( 이하 시가지계획령 으로줄임.) 이제정되었다. 시가지계획령은조선에서는최초로제정된오늘날과유사한형태의종합적도시계획법령이었다. 시가지계획령은일본-조선-만주를연결하는최단거리루트 ( 이른바 북선 ( 北鮮 ) 루트 ) 의조선측종단항으로 1930년대갑자기그중요성이부각된함경북도나진 ( 羅津 ) 에같은해 8월최초적용된이래 1936년 4월경성을필두로전국주요도시들에차례로적용되었다. 그러나개별도시의시가지계획안을총독부에서모두입안한것은아니었다. 대부분시가지계획안은개별도시별로독자적으로입안하여총독부의인가를받는형식으로결정되었다. 대개개별도시에서는시가지계획령제정이확실해진 1933-34년각자나름대로조사활동을벌이고시가지계획안을준비하기시작했다. 이는물론인천도마찬가지였다. 13) 이하조선시가지계획령의제정배경과내용은염복규, 근대서울의도시계획과도시공간구조의변화, 서울, 베이징, 상하이, 도쿄의대도시로의성장과정연구 Ⅰ( 서울 : 서울시립대학교서울학연구소, 2006), 14-18 쪽을재정리한것이다. - 86 -
Ⅲ. 제 1 차행정구역확장과시가지계획안의입안 시행 1. 행정구역확장과시가지계획안의입안 현재확인되는바에따르면인천에서는 1934년 2월부회에서 도시계획자금보조운동의건 이논의된것이시가지계획을염두에둔최초의움직임이었다. 14) 같은해 3월부회에서는나가이 ( 永井照雄 ) 인천부윤이 30년후인천부인구 17만명을예상하고 공장가, 상업가, 거주가, 미정가를확연히구별하는현대상공도시를조성 하는시가지계획을위해 3개년간 500여명을동원하여기본조사를할것이며, 그를위한예산 13,597원을계상하겠다는의안을제기했다. 이내용만보더라도나가이부윤이제기한의안은즉흥적인것은아님을알수있다. 이무렵인천부는이미시가지계획안의대강을준비하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여하튼이의안은일부의원들이 빈약한인천부로서는일장의꿈을꾸는듯하다 라든가 도시계획은다년의현안으로가장필요한것이지만비용은어떻게할것인가? 는등의문제를제기했지만, 무난히원안가결되었다. 15) 이후시가지계획안입안을위한조사활동에서가장먼저제기된사항은행정구역의확장문제였다. 앞에서언급했듯이시가지계획령의법리는도시의확장을지향하는것이었다. 또한위의나가이부윤의발언에서도알수있듯이시가지계획은계획안입안시점에서최소 20-30년이후의장래인구를예측하고그에대한수용계획을세우는것이었다. 한편당시조선의주요도시들은 1920년대이래도시인구증가에따라행정구역내인구수용이포화상태에이르고있었기때문에시가지계획구역은행정구역을 넘어서 설정될필요가있었다. 그런데당시총독부는여러가지행정상의편의를도모하기위해시가지계획구역과행정구역을일치시키려는방침을가지고있었다. 따라서행정구역확장문제는시가지계획안입안에서첫번째로해결해야할사안이되었던것이다. 1935년 8월의한좌담회의기록에따르면인천부는그무렵행정구역확장을전제하고토목과에서편입예상지역에대한시설계획에착수하고있었 14) 동아일보 1934 년 2 월 24 일 도시계획등십대안토의 15) 조선매일신문 1934 년 3 월 22 일 대인천건설의근간도시계획의내용 ; 3 월 27 일 永井부윤의포부도계안통과 ; 동아일보 1934 년 3 월 24 일 인천부에서일만삼천원으로금년부터기본조사 ; 3 월 27 일 대상공도시기본조사실시 - 87 -
인천학연구 6(2007. 2) 다. 16) 그해연말에는나가이부윤이부천군다주면도화리, 장의리, 용정리, 문학면학의리, 청학리, 옥련리등 2면 6리의인천부편입문제를직접총독부에청원했다. 17) 적어도이시기인천부는행정구역확장을위한자체준비를거의끝내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인천부행정구역은근 1년이지난 1936년 10월에가서야공식적으로확장되었다. 그해 4월경성부의행정구역확장이있었던관계로다른도시들은후순위로밀렸기때문이다. 18) < 그림 1> 인천부의행정구역확장 * 출전 : 심재만, 인천시가지의성장과변천에관한연구 (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6), 2쪽. * 비고 : 필자가약간의수정을가했음. 이하모두같음. 16) 조선매일신문 1935 년 8 월 21 일 인천의당면문제를말하는지상좌담회三 17) 동아일보 1936 년 1 월 10 일 대도시의부세확장안 : 인천부 18) 매일신보 1936 년 12 월 5 일 확장인천현재인구십만돌파도在邇 - 88 -
행정구역확장의기준은시가지계획의전체계획에따라첫째, 시가지계획목표연도의예상인구를기준으로 1인당 30평 19) 의거주가능면적확보가가능할것, 둘째, 인천부의중심점인인천우편국 20) 부근에서 1시간교통시간대인반경 6km의원안에들어올것, 제반행정 시설면에서인천부와관계가밀접할것 21) 등이었다. 이러한기준에따라앞에서언급한나가이부윤의청원과거의유사한부천군다주면사충리, 도화리, 장의리, 용정리전부및간석리일부 ( 전면적의 9%) 와문학면학익리, 옥련리전부및승기리, 관교리일부 ( 각각전면적의 54, 43%) 가인천부에편입되었다. 이상의행정구역확장을통해인천부는원래면적의 3.6배로확장되었다. 22) 행정구역확장과더불어인천부는시가지계획안의입안작업도계속했다. 인천부의기초작업을토대로총독부가입안한시가지계획안자문안이 1936 년 10월 27일인천부회로송부되었다. 부회는 11월 2일그에대한답신서를총독부로송부했다. 23) 계획안의핵심적인내용은계획목표연도 1965년, 예상인구 20만명 24), 합계 84선의가로망부설, 전체주거가능면적의약 70% 인 5,445,000평의구획정리등이었다. 이시기총독부는인천외에부산, 대구, 평양, 신의주등에대해서도동일한절차를진행하고있었다. 원래는이상 5개도시의답신서를수합하여 1936년 12월제3회시가지계획위원회를개최하고 5개도시에대한시가지계획령적용을확정할예정이었다. 25) 그러나실제총독부는 1937년 1월시가지계획위원회를개최하여위에서언급한 5개도시외에목포, 함흥을포함한 7 개도시의시가지계획구역, 가로망, 토지구획정리 ( 이하 구획정리 로줄임.) 를결정했다. 시가지계획위원회석상에서는회의체의특성상대부분의시가지계획안이별논란없이가결되었다. 다만부분적으로염두에둘만한질의, 응답이오 19) 자료에따라단위가m2와평이혼재되어있는데, 이글에서는평으로통일해서쓴다. 1 m2 =0.3025 평으로계산했다. 20) 현재인천광역시중구항동의인천중동우체국. 21) 당시다주면과문학면의대부분지역은이미인천경찰서, 인천우편국의관내에속해있었다. 22) 결정이유서, 4-6 쪽. 23) 1936 년 11 월 2 일, 答申書, 仁川府尹 朝鮮總督 제삼회철 ; 당시시가지계획안결정의과정을보면 [ 해당도시의기초작업 작업결과물총독부에상신 총독부의자문안입안 해당도시부회로자문안송부 부회의검토 가결 총독부로결과답신서송부 총독부시가지계획위원회개최 최종안확정 ] 의과정을거쳤다. 24) 예상인구는뒤에 1923-34 년인구증가율에근거한보다정밀한계산과정을거쳐구인천부역은 1934 년 75,558 명에서 1965 년 162,674 명으로증가하며, 여기에다주면과문학면의증가인구를합하면 184,570 명으로증가하는것으로추정되었다. 25) 평양매일신문 1936 년 11 월 9 일 시가지계획령명년도오도시에적용 - 89 -
인천학연구 6(2007. 2) 가기도했는데, 인천시가지계획에대해서는재계의거물한상룡 ( 韓相龍 ) 이 경성과인천의교통관계상인천에도 ( 두도시를연결하는 ; 필자 ) 대로 ( 大路 ) 제1류를시설할필요가있다 고한것과조선상공회의소회두카다 ( 賀田直治 ) 가경인철도의복선화계획을묻자, 총독부철도국장이바로실시할계획은없다고답한것등을들수있다. 26) 여기에서적어도인천시가지계획이시작되는 1936-37년단계에서이것을경성, 인천을연결시키는쪽으로사고하고있었던쪽은총독부보다민간경제계였음을엿볼수있다. 2. 시가지계획가로망부설과토지구획정리사업의전개 인천시가지계획은시가지계획위원회의결정이내려지고넉달이지난 1937년 5월 1일정식으로공포되었다. 27) 앞에서보았듯이시가지계획의구체적인내용은시가지계획구역, 가로망, 구획정리의세가지였다. 이중시가지계획구역은행정구역의확장으로결정된것이었고, 결국시행해야할시가지계획사업은가로망부설과구획정리의두가지였던셈이다. 먼저가로망부설에대해살펴보자. 결정이유서 에따르면당시인천부의가로면적은거주가능면적의 9% 에불과하여심히과소한상태였다. 이에시가지계획안에서는시가지계획구역전체를몇개의교통구역으로나누어교통계통을수립했다. 그방법은다른도시에서도거의동일한것이었는데, 먼저교통계통전체의중심 ( 주심 ) 을정하고그주변을몇개의교통구역로나누어각각의중심 ( 부심 ) 을정해주심과부심, 부심상호간의연결을우선도모하는것이었다. 인천시가지계획에서는앞에서언급한대로인천우편국부근을주심으로정하고, 구인천부역은중앙의구릉을중심으로이분하여남측의선거 ( 船渠 ) 를중심으로하나의구역, 북측의상인천역을중심으로하나의구역을정했다. 다음으로외곽지역은주안역을중심으로사충리, 도화리, 승기리등을하나의구역으로하고, 학익리, 옥련리는고봉 ( 高峰 ) 으로구분되는양측을각각하나의구역으로정했다. 이상의교통구역구분을전제로대로 ( 大路 ) 제2류 (30) 28) 5선, 제3류 (25) 15선, 중로 ( 中路 ) 제1류 (20) 8선, 제2류 (15) 30선, 제3류 (12) 26선등합계 84선이계획되었다. 29) 26) 1937 년 1 월 19-20 일, 第三回市街地計劃委員會會議錄 제삼회철 27) 관보 1937 년 4 월 12 일. 28) 괄호안의숫자는도로의폭원이며단위는 m 이다. 이하모두같음. 29) 결정이유서, 23-29 쪽. ; 여기에서제 3 회시가지계획위원회에서한상룡이주장했던대로제 1 류를경성 - 인천의연결노선으로신설해달라는요구는받아들여지지않았음을알수있다. - 90 -
< 그림 2> 인천시가지계획구역 가로망 * 출전 : 朝鮮總督府, 都市計劃槪要 ( 京城 : 朝鮮總督府, 1938), 1쪽 시가지계획가로망부설은그것이공식적으로결정 공포되기이전인 1937년초부터추진되고있었다. 인천부에서는 1937년국고보조 59,400원을받는등총공사비 17만원을들여북부송현정시장북측의연장 600m의중로제1류노선을제일먼저신설하기로결정했다. 30) 이지역은조선인중심지로서그동안 하등시설이없어일반의원성 이많았던곳으로인천부는시가지계획을기회로국고보조를받아도로를신설하고자했던것이다. 31) 이도로는그해 9월부터공사에들어가원래는 1938년 6월개통예정이었지만, 도로부지거주민 2백여호의철거 이전이지연되어도로개통도연말로지연되었다. 32) 30) 매일신보 1937 년 1 월 19 일 북부인천의대동맥간선도로를신설 31) 매일신보 1937 년 3 월 16 일 북부인천의도로개수 32) 관보 1937 년 9 월 18 일 ; 매일신보 1938 년 6 월 28 일 북부인천의간선도로금년내로완료예정 ; 도로부지거주민들의이전이지연된것은이전지로예정되었던대화정, 학익정, 일출정일대의구획정리사업이지연되었기때문이다. 인천뿐아니라당시조선의시가지계획은가로망부설이나구획정리등계획사업이시작되자마자전시기로들어감에따라심각한재정난 자재난으로상시적인공사지연상태를벗어나지못했다. 또한여기에서보듯이, 각각의계획사업들은상호연결되어있었기때문에한사업의재정난은다른사업에도결정적인영향을미쳤던것이다. - 91 -
인천학연구 6(2007. 2) 시가지계획가로망이공식적으로공포된이후인천부는첫사업으로 60만원의예산을계상하여 월미도, 혈문 ( 穴門 ), 해안정, 궁정, 화정, 인천로, 정 등 7노선을 1937년 6월초에착공하고자계획했다. 33) 도로의착공을앞두고는, 토지브로커들의발호와지가등귀의현상도나타났다. 34) 그러나이듬해 3월부회에서 도로시설은하시 ( 何時 ) 에나시작할것이냐 는의원들의추궁에인천부에서 예산관계 운운하는정황 35) 을보면, 계획은예정대로추진되지않은것으로보인다. 이후시가지계획가로망부설이어떻게추진되었는지를알려주는자료는없다. 다만 1939년인천부가 14만원의예산으로욱 ( 旭 ) 소학교앞-부도정유곽, 신정통일대, 빈정내, 인천역옆등의노선의개수및포장계획을연말완공예정으로세우고있었음을알수있다. 36) 이는 1937년계획에비하면상당히축소된것으로이후에도시가지계획가로망부설은만성적인재정난속에서원래의계획보다축소된형태로지속될수밖에없었던것으로여겨진다. 한편가로망부설과더불어구획정리사업도추진되었다. 그에대해최초로확인되는기록은 1936년 11월인천부윤이총독부내무국에송부한욱정, 화수정, 화평정내일부지역을구획정리지구로추가지정해달라는내용의신청서이다. 37) 이는적어도행정구역확장을전후한시점에인천부에서시가지계획구획정리에대해상당히구체적인계획안을수립했음을알려준다. 그러나정식공포된시가지계획안은다만어느정도의면적을구획정리하겠다는것외에는어떤내용도포함하고있지않다. 38) 이러한구획정리에서의 비밀주의 역시당시일반적인현상이었다. 어떤지역을구획정리지구에포함한다고발표하는순간, 총독부측의경고에도불구하고, 그지역의지가는폭등했기때문이다. 33) 매일신보 1937 년 5 월 22 일 금년엔총공비육십만원으로위선칠개선시공 34) 매일신보 1937 년 6 월 4 일 악덕 쁘로커 발호, 인천부서주의환기 35) 매일신보 1938 년 3 월 18 일 인천부회제사일 36) 동아일보 1939 년 5 월 11 일 노면포장유월상순일제착공 37) 1936 년 11 월 30 일, 區劃整理區域ニ關スル件, 仁川府尹 朝鮮總督府內務局長 제삼회철 38) 결정이유서, 52 쪽. - 92 -
< 그림 3> 인천시가지계획토지구획정리지구 * 출전 : 심재만, 인천시가지의성장과변천에관한연구 (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6), 68쪽. 인천시가지계획구획정리사업으로제일먼저추진된지구는대화정, 도산정, 화원정, 일출정일부를포함하는대화지구였는데, 이지구에대해서는 1938년 2월인천에서최초로토지소유자가시행인가를신청해야할기한이발표되었다. 39) 대화지구구획정리계획은총면적 36만여평에 4개년계속사업으로공사를하며시가지계획가로망을포함하여폭원 6-30m의도로 70여노선을시설한다는것 40) 으로, 1938년 7월 27일부로총독부의공사시행명령이내려졌다. 공사완료기한은 1941년 3월 31일까지였다. 41) 그러나대화지구의구획정리공사가즉시시작된것은아니었다. 인천부의구체적인공사계획수립이늦어졌기때문이다. 인천부는 1938년말에가서야대화지구구획정리에대한구체안을수립한것으로보인다. 42) 1939년초공 39) 관보 1938 년 2 월 16 일. 40) 매일신보 1938 년 5 월 26 일 인천신시가지구획정리계획 41) 관보 1938 년 7 월 30 일. 42) 매일신보 1938 년 12 월 9 일 대화정구획정리오십삼만여원으로사년계획, 인천부서설계완료 - 93 -
인천학연구 6(2007. 2) 개된대화지구구획정리계획의구체안을보면이지구는 인천의긴자 ( 銀座 ) 라는표현이말해주듯이중심상업지역으로계획되었다. 또가로망의부설외에 4개소의공원을설치하여주거지역의기능도부가했다. 특히이지구에는도산정을중심으로부영주택을건설할계획이었다. 공사비는총액 53 만여원으로추산되었는데, 1939년에는우선 15만원정도가계상될예정으로, 이금액은토지소유자로부터연 2회에걸쳐징수할계획이었다. 실제공사는대략 3, 4월부터시작할예정이었다. 43) 대화지구의공사계획안수립이지연된것은공사완료기한에도영향을미쳐, 1939년 3월총독부는대화지구구획정리의실시계획인가와더불어그완료기한을 1942년 3월 31일까지로 1년연장했다. 44) 또한구획정리공사는공사비조달방식에대한지주들의불만으로처음부터난관에부딪쳤다. 45) 이후대화지구의구획정리공사가어떻게진척되었는지를정확히알수는없다. 그러나 1943년 3월 31일부로공사완료기한을 1948년 3월 31일로연장한것을보면 46), 1942년까지공사가완료되지않았음은물론, 공사의지연정도가상당했음을알수있다. 47) 그러나구획정리가전혀아무런성과도남기지않은것은아니었다. 최소한확인할수있는것은일부지역에조선주택영단 ( 이하 주택영단 으로줄임.) 의주택이건설되었다는사실이다. 48) 주택영단은 1942년대화구획정리지 43) 매일신보 1939 년 1 월 10 일 인천부의신편입구신시가지로조성, 금춘삼월경에착공 ; 2 월 17 일 인천부의시가지계획사월부터실시예정 ; 동아일보 1939 년 1 월 26 일 오십삼만원공비로대화정지구를정리 44) 관보 1939 년 3 월 11 일. 45) 매일신보 1939 년 4 월 14 일 인천구획정리공비염출에난관, 지주측의반대의견 ; 원래시가지계획구획정리의재정운용은기채 ( 起債 ) 를통해공사비를조달하고, 완공과토지분양후토지소유자들로부터그지가상승분을수익자부담금으로징수하여충당하는방식이었다. 그러나구획정리사업이시작되고얼마지나지않아전시재정난에빠진총독부는 1938 년부터토지소유자들에게바로부담금을징수하여공사비를조달하는이른바 공사비현금주의 방침을세웠다. 위에서보았듯이, 인천대화지구의공사비조달방식도바로이현금주의였다. 이에따르면토지소유자들은아직아무런수익도없고, 사유지의이용만제한당한상태에서거액의공사비까지부담해야했다. 따라서토지소유자들의부담금체납율은높을수밖에없었고, 이는구획정리공사지연의중요한원인이되었다 ( 염복규, 앞의논문, 28-29 쪽.). 46) 관보 1943 년 4 월 7 일. 47) 1947 년일본대장성관리국에서발간한 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 에서는 1945 년 8 월 패전 당시대화지구의공사진척도를 70% 라고기록하고있다. 손정목은여기에서공사진척도란구획정리지에대한환지등의모든절차를포함한개념이아니라대지조성공사정도만을포함한것이라고추정했다 ( 손정목, 앞의책, 291 쪽 ). 48) 총독부는전시기노동자생활불안정의결정적인요인이었던도시지역의주택난을타개하고자 1941 년공영주택건설기구인조선주택영단을설립했다. 주택영단에서는전국각도시에서시가지계획으로조성은했으나, 매각 분양이이루어지지않은대지를매입하여주택을건설했다. 주택영단은공사기간을단축하고자미리갑 (20 평 ) 을 (15 평 ) 병 (10 평 ) 정 (8 평 ) 무 (6 평 ) 의 5 개주택형을정해개별주택을그에맞춰건설하는 형 ( 形 ) 건축 을한국에서최초로시도했다. 주택영단의사업과재산은해방후대한주택영단 ( 대한주택공사 ) 으로승계되었다 [ 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 20 년사 ( 서울 : 대한주택공사, 1979), 162-175 쪽.]. - 94 -
구에서어느정도공사가마무리된 15,959평의토지를매입하여 4개주택지 ( 현재용현동, 현재숭의동구인천교대뒤, 숭의로터리, 남구보건소앞등 ) 를조성했다. 4개주택지에서의주택건설공사는 1943년 3월시작되어연말까지준공되었다. 건설된주택수는숭의로터리갑형 을형 56호, 구인천교대뒤갑형 을형 25호, 병형 정형 70호등합계 95호, 용현동및남구보건소앞병형 정형각각 98호, 30호등총계 279호규모였다. 건설된주택의용도는위 4개지구모두제물포역과남인천역사이에위치한입지적특성상철도관련노동자사택으로계획되었으며, 숭의로터리만은일반회사원을대상으로한것이었는데, 준공후대개삼천리자전거, 경성화학, 동양전선등기업체의사택으로사용되었다. 49) < 그림 4> 대화지구영단주택지 * 출전 : 노상주 조선주택영단의주택지형성및변화에관한연구 ( 인천시내 5 개주택지를중심으로 ) (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2), 24 쪽. 49) 노상주, 앞의논문, 19-25 쪽. ; 1992 년현재 279 호의주택중상당수가현존해있었는데, 숭의로터리에건설되었던 56 호만은현존율이낮다. 이는처음부터숭의로터리에건설된주택이영단주택으로서가장큰규모의 고급주택 이었기때문에훗날용이하게철거 신축이이루어질수있었기때문이다 ( 노상주, 위의논문, 44 쪽.). - 95 -
인천학연구 6(2007. 2) 대화지구에이어그에연접 ( 連接 ) 해있는송림정, 금곡정, 창영정, 대화정, 앵정, 송현정일부를포함하는송림지구에대해토지소유자가시행인가를신청해야할기한이발표된것은 1938년 8월이었다. 50) 1939년들어서는 22,300 원의예산으로송림지구에대한구체적인조사와계획안수립이진행되었다. 51) 여기에상당한시간이소요되어실제송림지구의구획정리공사실시계획은 1940년 8월에가서야총독부의인가가내려졌다. 52) 송림지구에서이후공사의진척상황은거의알수없다. 그러나 1940년대전반의여러가지상황을고려할때, 송림지구가특별히상황이나았을리는없을것이다. 더구나주택영단의대지매입도이루어지지않을것으로보아대화지구보다공사의진척이늦었을것으로추정할수있다. 53) Ⅳ. 제 2 차행정구역확장과공업용지 주택지사업 1. 제 2 차행정구역확장 인천부의행정구역확장과시가지계획이시작된지약 1년여가지난 1938 년초부터는이른바제2차행정구역확장에대한논의가제기되기시작했다. 54) 이는기실갑작스러운논의는아니었으며인천의유산층을중심으로오랫동안내연해오던 경인일체 = 경성지향 요구가일제의대륙침략으로인한인천의중요성부각, 시가지계획시행등의계기를맞아표면화된것이었다. 55) 50) 관보 1938 년 8 월 20 일 51) 동아일보 1939 년 3 월 21 일 대공업도시건설보 52) 관보 1940 년 8 월 8 일 53) 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 는 1945 년 8 월의송림지구의공사진척도를 50% 라고기록하고있다. 54) 매일신보 1938 년 4 월 21 일 인천부의행정구역제이차확장계획 55) 이안은인천이 1930 년대후반일제대륙침략의전형적인 병참기지 가됨에따라오랫동안인천을위성성으로흔들던경성과의관계보다대외적인관계의비중이높아졌다고하면서도, 결국일제시기인천의개발및발전방향은경성쪽을향하고있었다고했다 ( 이안, 앞의책, 46-48 쪽 ). 필자도일제시기만놓고보자면인천의 개발 에대한모든논의들은 경성 을향하고있었으며, 황해 쪽을바라보는논의조차도결국에는 경성 으로돌아가기위한 우회로 였다고생각한다. 물론예컨대 제이부구확장으로서인천은장래경성중심을떠난인천중심의경성, 수원, 개성을일원으로삼백만인구포용의산업지대형성의백년대계를수립할것 ( 매일신보 1939 년 1 월 25 일 경인일체구현과북인천항구의개발 ) 이라는등의 인천중심주의 적인논변이없었던것은아니나, 이는어디까지나주관적인언설이었다. - 96 -
민간유산층단체인인천부세진흥회에서는이미 1937년부터 부구역제이확장의필요를절규 하기시작했으며, 1920-30년대초줄기차게 경인일체론 을제기하고있던인천상공회의소에서도 1938년 5월 인천부의구역확장은아 ( 我 ) 일본제국의대륙정책상그병참기지로될조선의중심항으로서경인일여의구현을위하야 필요하다는의견을제기했다. 인천부회도 제이확장문제를만장일치가결하여부천군문학면, 서관면, 부내면, 계양면, 소사면등을인천부에편입시켜달라는긴급요망서를총독부에제출 했다. 여기에서제 2차행정구역확장의 의의 로 인천이또한부구역을확장한다면경성과인천의부계는즉연하게되는관계상구역적으로경인일체를보게될것 이라고한것에서도제2차행정구역확장요구의내적의미가무엇인지알수있다. 56) 1939년들어제2차행정구역확장을위한인천부의활동은구체적으로진전되어, 2월말경에는문학면, 서관면, 남면, 남동면등에대한조사를완료하는한편, 늦어도 4월에는행정구역확장을하겠다는계획을수립했다. 57) 그러나이는어디까지나인천부의주관적인희망에불과한것이었다. 1939년 10월총독부는부천군소사면, 오정면, 계양면, 부내면, 서관면, 시흥군동면, 서면, 김포군양동면, 양서면, 고촌면등의거대지역을대상으로한경인시가지계획 ( 京仁市街地計劃 ) 을발표하면서 58), 계획구역에대한행정조치로서 소부분을인천부에포함하는외에대부분은대경성부역에편입할 것이라고발표했다. 59) 즉경성과인천의중간지대에대한개발은어디까지나 대경성부계획 이었던셈이다. 60) 56) 매일신보 1938 년 5 월 13 일 부역확장안에인천부회대긴장 ; 24 일 인천부역의확장촉진을진정 ; 25-31 일 인천부구제이확장편입지역순방기 연재기사. 57) 매일신보 1939 년 2 월 17 일 인천의제이구역확장사월에실현예정 58) 1939 년 11 월발포된경인시가지계획은경성과인천사이의광대한지역을하나의지방계획구역으로포괄하여개발하겠다는계획이었다. 경인시가지계획은경성시가지계획혹은인천시가지계획이 진화 한것이라고볼수있는한편, 그것들과상대적으로독립된계획이기도했다. 또한실제자료를살펴보면경인시가지계획은어떤 개발 계획이라기보다아직지가가폭등하지않은기성도시의외곽지역의지가를고정시켜두기위한행정조치의측면도적지않았다. 59) 동아일보 1939 년 10 월 2 일 경인공업지의대부분경성에편입 60) 매일신보 1939 년 10 월 3 일 경성중심신계획도장차수립 - 97 -
인천학연구 6(2007. 2) < 그림 5> 경인시가지계획구역 * 출전 : 京仁市街地計畫決定案, 朝鮮 ( 제 294 호, 1939 년 11 월 ) 그런데이러한총독부의계획은예정대로진척되지않았다. 1939년총독부의방침에따라중단되었던인천부의제2차행정구역확장이 1940년 4월부천군문학면, 남동면, 부내면, 서관면일부를편입함으로써실현된반면 61) 경성부의행정구역확장은결국실현되지않았기때문이다. 이로써원래의계획보다는축소된것이었지만인천부는 1936년행정구역확장당시보다도약 6배가량확장되어 1914년행정정리이전의구인천부면적을거의회복했다. 62) 제2차행정구역확장에즈음한인천부의움직임은상당히활기찼던것으로보인다. 즉시신부역관할의출장소를부평역전에설치하는가하면, 경제경찰과협조하여악덕부로커단속에나서고, 경성전기와의버스노선연장협상도발빠르게시작했다. 63) 이러한신속한움직임은인천부가제2차행정구역확장을오랜기간준비해왔음을보여주는측면이라고할수있겠다. 인천부의제2차행정구역확장은비록전시기라는특수한시기에전쟁동원정책속에서이루어진것이었지만, 다른한편식민권력의인위적인행정정리가 61) 동아일보 1940 년 3 월 1 일 대인천건설명랑보 ; 확장의개요는 < 그림 1> 참고. 62) 심재만, 앞의논문, 71 쪽. 63) 매일신보 1940 년 3 월 3 일 인천구역확장으로부평에부출장소 ; 8 일 대인천건설에암 ; 9 일 인천부신편입지에교통망정비급무 - 98 -
도시의자생적인내적추세를끝내거스를수없음을보여준것이기도했다. 2. 일단의공업용지조성및주택지경영사업 1938년시가지계획계획사업의하나로 일단의공업용지조성 및 일단의주택지경영 ( 이하 공업용지조성 및 택지경영 으로줄임.) 을가능하게하는시가지계획령의일부개정이이루어졌다. 개정의핵심은종래구획정리지구등으로결정되면지가가폭등하여사업의추진및공장유치가어려워지는폐해를막고자일단의공업용지혹은일단의주택지로지정한곳에대해서는토지수용령을발포할수있게한것이었다. 이를통해시가지계획이대륙병참기지건설책으로서원활하게기능할수있도록하겠다는것이개정취지였던것이다. 64) 이에따라인천시가지계획에서도공업용지조성및택지경영에대한논의가제기되었다. 인천부에서는 1939년초예산부회를앞두고 무리한지주의억지와브로커의발호 를막고자 부에서학익정, 일출정내부지를매수하여정리한후공정가격으로분양 하겠다는계획을발표했다. 65) 인천부의계획은그해 10월제5회시가지계획위원회에의안으로제출되었다. 그에따르면저렴한공장부지를공급하여공장을유치하고, 그에인접한구릉지대를주택지로하고자일출정, 학익정, 송현정, 송림정일부 4,185,500평을공업용지조성지구로, 일출정, 학익정, 주안정일부 326,400평을택지경영지구로계획했다. 66) 인천부의계획은 1939년 10월 21일개최된시가지계획위원회에서경인시가지계획과더불어심의 결정되었다. 67) 시가지계획위원회가개최된시점에서인천부는이미공업용지조성및택지경영에대해구체적인계획안을입안하고있었다. 인천부의계획안은 1939-41 년 3개년을사업기간으로하여공업용지와주택지를분양하되, 분양전에가로망및수로등을구획정리를통해정비한다는것으로일출정, 학익정, 주안정의주택지는장래인구 1만명의수용을목표로한것이었다. 이계획안은 11-12월경기도를거쳐총독부에상신되었다. 68) 64) 동아일보 1938 년 10 월 22 일 이상적工都건설所期 65) 매일신보 1939 년 2 월 17 일 인천의시가지계획구토지매수, 부에서지가폭등을억제 66) 1939 년 9 월 28 일, 第五回市街地計劃委員會開催ノ件 제오회철 67) 매일신보 1939 년 10 월 22 일 금일본부에서시계위원회개최 68) 1939 년 12 월 12 일, 一團ノ工業用地造成並ニ一團ノ住宅地經營事業實施計劃承認申請ノ件, 京畿道知事 朝鮮總督 제오회철 - 99 -
인천학연구 6(2007. 2) 1940년 4월인천부의계획안중공업용지 384,434평, 주택지 326,253평, 사업비 560만원에대해총독부의인가가내려졌다. 69) 그중일부지역은 6월까지매각준비가끝나인천부는그에대한매각승인신청을상신했다. 그런데이에대해총독부는제국제마 ( 製麻 ) 주식회사, 조선중화학연구소, 경성화학공업주식회사등을매수자로지정하여인천부의신청을인가했다. 70) 이것을볼때, 공업용지조성이나택지경영사업은개별도시의시가지계획차원이아니라이미총독부전체차원에서철저히병참기지건설의일환으로수행되고있었음을알수있다. 한편인천부에서는이미 1940년초부터지주들과의토지매수교섭에서무리한호가를부르거나매점을해놓은지주에대해토지수용령을발포할의사를가지고총독부에이를신청했다. 토지수용령은즉시인가되지는않았지만, 이른바 비협조적인 지주들이수차의교섭에도불구하고 완강한행위 를그치지않자, 1940년 9월 30일부로인가되었다. 71) 이렇게총독부와인천부가상당히의욕적으로추진하고있던공업용지조성및택지경영사업은그러나원활하게진척되지않았다. 원래사업완료가예정되어있던 1941년의사업실적은확인되지않으나, 인천부가 1942년 3월공사기간연장을총독부에신청했음이확인된다. 기간연장의이유는 공사착수후자재, 노은등의앙등에따라기정예산액으로는도저히원계획대로공사를시행하는것이곤란 한사정과더불어 본공사는공장용지및주택지의수요자로부터예상되는토지매각대금을징수하여그재원으로하려던것인데, 기왕의실적으로징수한대금이적어서재원의일부를기채 해야하는사정을들었다. 72) 물가의폭등, 공사지연, 재정난의악순환이공사의발목을잡고있음을엿볼수있다. 이러한사정은인천뿐아니라당시모든도시의시가지계획에서공통된문제였다. 이상에대해총독부는공사시행연도는 3개년연장하여 1939-44년 6개년계속사업으로하며, 급시 ( 急施 ) 를요하는구역을제1기로정해기정예산액범위내에서시행하고나머지구역은제2기공사로장래에고려 하는내용으로인천부의신청을승인했다. 이에따라사업집행면적도공업용지는 69) 1940 년 4 월 6 일, 仁川市街地計劃一團ノ工業用地造成並一團ノ住宅地經營事業實施計劃認可ノ件 공업주택서류 70) 1940 년 10 월 22 일, 仁川市街地計劃一團ノ工業用地造成並ニ一團ノ住宅地賣却價格承認ノ件 공업주택서류 71) 매일신보 1940 년 2 월 25 일 인천부학익정일대의구역정리진척곤란 ; 10 월 25 일 인천부내공장지구에토지수용령적용 72) 1942 년 3 월 20 일, 仁川市街地計劃一團ノ工業用地造成並一團ノ住宅地經營事業實施計劃變更認可申請 공업주택서류 - 100 -
327,617평으로, 주택지는 240,638평으로축소되었다. 73) 1942년 9월총독부는다시 주택지의 토량을최소한도로하여공사비를절약할것, 사업비범위내에서간선도로를완성할것, 잡비를절약할것 등을지시했다. 이시기모든사업이그러했지만, 시간이흐르면서공사환경은점점어려워지고있었던것이다. 학익정, 일출정외에공업용지조성및택지경영사업이있었던지역은거의확인되지않는다. 다만 1942년 1월부평지구의서정, 천상정의소규모토지가공업용지로수용되었음은확인할수있다. 74) 그러나이토지에도별다른공사의진척은없었던것으로보인다. 한편 1944년에는택지조성지구로지정된후방치되어있던백마정의 33,253평을주택영단이매입하여 1944년 7월-45년 6월인천조병창사택및합숙소 984호를건설했다. 백마정주택지에는대개정형 무형의주택이건설되었는데, 실측조사에따르면영단주택의형과무관한ㄱ자형의한옥식주택도다수건설되었다. 75) 백마정주택지의사업은주택영단사업의 군사적 성격을여실히보여주는것임과동시에당시군수기업체의노동자대부분이조선인이라는어쩌면당연한사실을반영하는것이었다. 마지막으로 1945년 4월에는 1944년 1월 8일부로 경인시가지계획구역 에서 인천시가지계획구역 으로포함된 76) 소화정, 백마정, 천상정, 서정, 작전정, 삼립정, 길야정의일부를포함한소화지구에대한구획정리공사시행이인가되었다. 77) 원래이사업은 1941년 11월경인시가지계획구획정리사업으로인가된것이었는데, 별다른공사의진척이없다가인천시가지계획구역으로포함된것이었다. 그러나 1945년 4월이라는시점에서어떤의미있는공사의진척은없었을것으로짐작할수있다. Ⅴ. 결론 1930년대이전인천의도시적위상은주로일본으로의미곡이출항, 경성부근의관광지의성격이강했다. 이러한위상은 1930년대일제의대륙침략이 73) 1942 년 4 월 28 일, 仁川市街地計劃一團ノ工業用地造成並ニ一團ノ住宅地經營事業實施計劃變更認可ノ件 공업주택서류 74) 관보 1942 년 1 월 8 일 ( 배성준, 앞의논문, 165 쪽에서재인용.). 75) 노상주, 앞의논문, 52 쪽. 76) 총독부는 1944 년 1 월 8 일부로부천군부내면전역과문학면, 서관면의일부에걸친 39,276,600 평을경인시가지계획구역에서분리시켜인천시가지계획구역에편입시켰다. 이는원래경인시가지계획구역의약 60% 정도의면적으로서, 어떤의미에서이러한조치는총독부스스로경인시가지계획이라는 지방계획 의실패를자인한것이었다. 77) 관보 1945 년 4 월 4 일 ; 소화지구의위치는 < 그림 3> 참고. - 101 -
인천학연구 6(2007. 2) 본격화되면서변화했다. 대륙침략의기지로서인천의 중요성 이역설적으로부각되었던것이다. 이러한인천의도시적위상변화는인천시가지계획의전개및행정구역의확장에대전제가되는것이었다. 한편 1930년대제정된시가지계획령의적용으로인천에도최초의법정도시계획이시행되었다. 1934년시가지계획령제정에즈음하여시작된인천시가지계획논의는처음부터행정구역의확장을전제로한것이었다. 1936년 10월행정구역의확장과더불어시작된시가지계획사업은가로망부설과구획정리사업을두축으로한것이었다. 그러나대부분의다른도시에서도그러했듯이, 인천시가지계획역시전시기재정난 자재난때문에원활하게진척되지못했다. 1940년이전에부설이시작된몇개의도로및두개의구획정리지구에서의미완의대지조성공사가시가지계획의성과였다고할수있다. 그러나대화지구에서는 1943년영단주택이건설되어택지조성과주택건설이연동 ( 連動 ) 한하나의사례를남길수있었다. 한편인천시가지계획이시작되자마자제2차행정구역확장논의가제기되었다. 이는시가지계획상의필요때문이기도했지만, 그기저에는강제병합초기인위적으로축소된행정구역의복원을지향하는역사적관성이깔려있는것이기도했다. 1940년제2차행정구역확장을전후한시기시가지계획은주로공업용지조성및주택지경영사업을중심으로추진되었다. 이는분명히인천의공업도시화를촉진하는것이었지만, 거기에서일제의대륙침략을위한병참기지건설이라는군사적목적을지울수는없다. 인천에서가장중요한공장중하나가육군조병창이었다는사실은이를상징적으로보여준다. 이상과같이전개된인천시가지계획은이시기다른도시의시가지계획이많이그러했듯이재정난 자재난에발목을잡혀만성적인공사지연상태를벗어나지못하고계획에훨씬못미치는진척을보였다. 그러나몇가지계획사업의추진및두차례에걸친인천부의행정구역확장은해방후인천의도시적전개의대전제가되는것이었다는점에서그의의가적지않다고여겨진다. 그런데이를보다입체적으로살펴보는것은그것만으로완결될수없으며, 경성시가지계획 경인시가지계획에대한연구와동시에상호관련하에서진행되어야할것이다. 이는추후연구를기하고자한다. 최종원고제출일 : 2006. 11. 15 원고심사일 : 2006. 12. 11 주제어 : 조선시가지계획령, 인천시가지계획, 행정구역확장, 가로망, 토지구획정리, 조선주택영단, 영단주택, 일단의공업용지조성, 일단의주택지경영 - 102 -
< 참고문헌 > 朝鮮總督府, 仁川市街地計劃決定理由書 ( 京城 : 朝鮮總督府, 1937) 第三回市街地計劃委員會關係書綴(1936-37) (CJA0014430) 第五回市街地計劃委員會關係綴(1939) (CJA0015675) 仁川市街地計劃工業用地造成及住宅關係書類(1940-43) (CJA0016086) 朝鮮總督府官報 每日申報 東亞日報 新聞切拔松南生, 大仁川建設論, 朝鮮及滿洲 ( 제160호, 1920년 10월 ) 노상주, 조선주택영단의주택지형성및변화에관한연구 ( 인천시내 5개주택지를중심으로 ) (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2) 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20년사 ( 서울 : 대한주택공사, 1979) 배성준, 전시(1937-45) 통제하경인공업지대의형성, 기술과역사 ( 제1 집, 2000) 손정목, 일제강점기도시계획연구 ( 서울 : 일지사, 1990) 심재만, 인천시가지의성장과변천에관한연구 (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6) 염복규, 근대서울의도시계획과도시공간구조의변화, 서울, 베이징, 상하이, 도쿄의대도시로의성장과정연구 Ⅰ( 서울 : 서울시립대학교서울학연구소, 2006) 이안, 인천근대도시형성과건축 ( 인천 : 다인아트, 2005)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사 ( 서울 : 인천광역시, 2002) - 103 -
인천학연구 6(2007. 2) <ABSTRACT> The Expansion of Administrative Districts and Urban Planning in Incheon in the 1930 s-1940's Yum, Bok-Kyu The municipal status of Incheon faced a change in the early 1930's, as it acquired significance as a strategic stronghold for the Japanese invasion into China. The newly-gained importance affected the expansion of administrative districts and urban planning of the city. In October, 1936, the project for expanding administrative districts in Incheon launched simultaneously with the start of town planning: the latter comprised building road networks and land readjustment. However, just like in many other cities in Korea during this time, the project in Incheon soon met a stumbling block, which was shortage in financing and materials due to the war. The urban planning managed to finish building several roads before 1940 and left the clearing of two lots in readjusted land unfinished. However, houses were built in these lots by the Choseon Housing Corporation in 1943. In 1938, the call for the district expansion in Incheon arose for the second time. The call was initiated with the intension to restore the artificially shrunken districts, as well as with practical necessity. Around 1940's, the industrial lots and housing plots were created according to the urban planning of the second district expansion in Incheon. This helped to promote Incheon as an industrial city, but the motive of this development was the colonialists' military ambition. During 1930's-1940's, the urban planning of Incheon suffered a chronic delays of construction and fell far behind the initial goal. On the other hand, the two times of expansion of districts and progress of some projects laid a groundwork for Incheon urban planning after the - 104 -
independence of Korea. Therefore, it can be called as a vestige of colonization in Incheon. Key Words : Choseon Town Planning Act, Incheon Town Plan, expansion of administrative districts, road network, land readjustment, Choseon Housing Corporation, Corporation housing, building industrial lots, managing building lots - 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