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유럽의통합과정과독일의정치체제및발전을중심으로독일과유럽의다양한쟁점들을소개함으로써해당주제의다양성과상호관련성을부각시키고, 정책대안에대한논의를촉진할목적으로발간한다. FES-Information-Series 는특정정치노선을지지하지않으며, 개별주제들은독일이나유럽의발전추세를관찰하고평가할능력을갖춘전문가가집필한다. 여기에수록된내용은필자들의개인의견이며, 프리드리히에베르트재단의공식견해가아님을밝힌다. FES-Information-Series는부정기간행물로프리드리히에베르트재단홈페이지(http://www.fes.or.kr) 에서전문을내려받을수있다. Copyright 1998-2007 C by Friedrich-Ebert-Stiftung, Korea Cooperation Office 발행처: 프리드리히에베르트재단주한협력사무소편집인: 베르너캄페터, 박상희편집위원: 김영희, 안두순, 안석교, 양민석, 이삼열, 정범구, 정현백, 최연혜( 가나다순) 주소: 서울시종로구운니동 98-5 삼환빌딩 1101호 110-742 Tel: (02) 745-2648/9, Fax: (02) 745-6684 e-mail: feskorea@fes.or.kr & fesrok@fes.or.kr http://www.fes.or.kr
머릿말 제가한국에부임해온지벌써일년이되어갑니다. 부임초제게깊은인상을주었던 FES-Information-Series가발간된지도벌써 10 여년이되었습니다. 무엇보다흥미로운 것은이시리즈가간략하고분석적인형태로다양한주제를다루었다는점입니다. FES-Information-Series 는독일과유럽의쟁점에대한진행과정과문제점을다루며, 유럽의경험을한국독자들에게전달하려고합니다. 독일과 지난날몇몇사람들이생각했던것과는 달리경제, 사회, 정치전반에걸친문제점들을해결하기위한왕도는없을뿐더러결국은 받아들여야만하는정책결정에대한토론과논쟁의여지는여전히남아있습니다. 이런 과정은다양한이해관계와입장을표현하고결국에는서로절충해야만하는민주적인 사회에서도예외는아닙니다. 이런과정을통해우리가사는세상이조금씩변화하며, 특히 타협을통한해결안이최상의해결책인경우는드물기때문에, 이로인해우리는항상새로운 도전에직면하게됩니다. 다시말해, 이타협안들은항상새로운토론과의사결정과정의 출발점이됩니다. 이런의미에서 1998년부터 2006년까지발간된총 83개주제중이번 CD에담긴 33개는 다양한모자이크를만들고있습니다. 물론이내용들이독일이나유럽의전반적인상황을알려 주지는못하지만독자들에게독일과유럽의다양한색채와형태의몇몇모자이크조각들을 보여줍니다. 이시리즈는독일과유럽의정확한모습을전달하는것이아니라자극제역할을 하려고합니다. 독자들은자신의시각으로각각의조각에색깔과명암을주고그것으로자신의 세계와연결하는다리를만들수있습니다. FES-Information-Series가오프라인과인터넷에서많은독자들의호응을얻고있는것에대해무엇보다먼저편집위원들과저자들에게저와제전임자들의이름으로감사드립니다. 이분들모두독일과유럽이직면하고있는문제들뿐만아니라이들국가의현황을잘알고계십니다. 이분들의지식과경험없이는이처럼다양한시리즈가결코나올수없었을것입니다.
편집위원들에게는이시리즈기획에참여했던것을좋은기억으로, 독자들에게는여기모아놓은다양한글을읽으면서이주제들에대해다시한번생각해볼수있는기회를가지셨으면하는바람입니다. 2007년 6월 베르너캄페터 Werner Kamppeter
목차 독일의분단과통일 1989/90년격변기동독내서독정당의전략과정책송태수 2006-01 공산주의국가를위한자금 Dr. Gey 2005-07 통일독일의수도이전이상준 2004-07 동독이탈주민에대한구서독정부의정책김영윤 2003-07 분단기동서독간교통교류실태와서독의대동독교통부문지원정책최연혜 2002-06 70 년대사민/ 자민연정의신동방 독일정책과정치논쟁박형중 2001-01 독일통일후동독지역의통신망구축 안두순/ 노영곤 2000-11 통일전서독의대동독정책김영윤 1998-04 경제와사회보장 독일의한부모가족취업모를위한사회정책적지원박명선 2006-05 독일공적연금제도의개혁추이와기업연금김상호 2005-04 독일의 실제 실업자수에관한논쟁과실업대책선한승 2005-02 독일의료보험개혁(2003) 의동향과쟁점이준영 2004-03 독일의장기요양보험권순만 2004-02 독일의고령화추세와사회경제적문제안두순 2003-08 독일의신교통정책, 21세기지속가능한성장을위한해법최연혜 2002-03 정치 최근독일총선의주요논점인단일세율(Flat rate) 개혁안김유찬 2005-10 폴머사건을계기로본독일연방의원의부업규정에관한논란조현옥 2005-05 독일내국제이주노동자현황과정책강수돌 2005-01 독일의개인정보보호제도한재각 2004-05 독일정치교육의의미 과제 실행체계박병석 2004-04 독일주둔외국군구성원의법적지위한스위르겐카악 2003-04 독일의과거극복과역사교과서김유경 2002-04 통일독일의과거청산 독일의선거제도 정현백/ 송충기 2000-06 박병석/ 정범구 1998-03 환경독일의환경교육 이무춘 2005-08 독일의재생가능에너지 이필렬 2003-02 교육유럽연합의대학교육현대화개혁정책 김숙원 2006-03 독일의학교개혁 이병준 2001-06 독일의직업교육 박덕규 1999-02 사회난자제공에관한독일의입장 신동일 2006-02 독일의저출산과지속가능한가족정책 김은영 2005-09 독일동물보호법령을중심으로본동물보호 김수진 2005-06 독일의생명윤리논의 신동일 2003-01
1989/1990 격변기동독내서독정당의전략과정책 송태수, 한국노동교육원교수 2006년 1월 1989/90 년격변기의서독정당은구체적인통일정책방안을가지고있지못했다. 동독정당도급변하는상황에대해자주적으로대응하지못했고비판세력도마찬가지로전혀준비가안된상태에있었다. 1989년 12월말까지서독정당들은동독정당발전과정에적극적인영향을주었다기보다는상대적으로거리를두고있었다. 그러나 1989년 12월중순부터 1990년 1월말사이에수많은양자또는다자간회담이진행되면서 1월말 2+4 회담이구상되어통일문제가급속히대두되고, 1990 년 3월 18 일인민의회선거가조기에실시되는등, 구동독의상황이숨가쁘게진행되면서서독정당들은동독에서형성되는정당체계에대한영향력을직접강화하였다. 1990년 7월 1일화폐 경제 사회통합을계기로실질적인통일이이루어진상태에서 1990년 10월 3일공식적인통일과 1990년 12월 2일통일후처음실시되는연방의회일정을앞둔상태에 서동서독의두정당체계는이미단일정당체계로통합되어, 1990년가을각정당은통합을위한 특별전당대회를연다. 이과정은동독정당체계가서독체계로흡수되는시기였다. 그결과, 구 동독주민의특수한이해관계를대변할정치조직의부재가문제로되어, 이후양지역주민의사 회적통합에서제역할을다하지못하였다. 구동독주민의 2등국민이라는집단의식의형상화는 부분적으로이에근거를두고있다.
1. 들어가는말 1989/90 년격변기의서독정당은구체적통일정책방안을가지고있지못했다. 동독정당도급변하는상황에대해자주적으로대응하지못했고비판세력도마찬가지로전혀준비가안된상태에있었다.1989년여름부터 1 년간의상황은그야말로숨가쁘게진행되었다. 1990년 3월중순의인민의회선거를앞두고서독정당들은동독내에서매우적극적으로활동하기시작, 동서독정당체계는통합의첫걸음을내딛는다. 동독정당들은통일정책을중심으로다원화된후, 서독정당체계와균등화된다.1990년가을동서독정당들은통합하여 12월 2일첫통일연방의회선거를치렀다. 아래에서는 1989년말부터 1년간의격변기동안서독정당들이동독에서실행한전략과정책을살펴본다. 먼저동독내정당체계의발전과정을검토한후, 1990년 3월 18일동독인민의회선거에서서독정당이구체적으로어떤전략으로대응하면서정치적영향력확보와강화의계기를만들었는지살펴본다. 2. 1989/90 년격변기동독내정당체계의발전 1989년가을부터 1990년통일에이르기까지짧은기간에동독정당체계는비경쟁적일당지배체계가민주적인다원주의체계로전환하는과정과동시에통일된독일의정당체계로단일화하는과정이라하겠다. 이과정은양극화-다원화-균등화- 통일독일의정당체계완성이라는네단계를거친다. 제 1단계는 1989년 11 월까지로동독에서사회주의통일당(SED) 의일당지배체제의위기가전면에드러나고, 이에대항하는국민적저항과함께제반저항운동이조직되거나새로운정당이등장하는시기이다. 정치조직들은민주주의적사회주의건설과정에서제기된제반문제를어떻게해결할것인가에전념하고있었다. 1989 년중반 SED가지방선거를조작한이후미약하기만하던시민운동이정치력을확보하여대중동원이가능해지기시작했다. 이들저항적시민운동과정당들은 SED의일당지배를극복한다는동일한목적을가지고무제한적인연합전선을시도, 1989년 12월 7일원탁회의를구성하였다.5개블록정당과반체제단체및정부대표가참가하는원탁회의의소집은사실상 2 중권력구조의형성을의미했다. 제 2단계는정당과정치조직이급변하는정세속에서새롭게제기된통일문제에입장차이를보이면서다원화되는시기이다. 1989년 12월초부터동독지역의대중시위에서는우리는한민족이라는구호가등장하고, 통일과정에서가장해결하기어려울것으로예상되던국제관계의매듭이풀리고있었다.1989년 12월중순부터 90년 1월말사이에승전 4 국인미 소 영 불과동서독간에는수많은양자또는다자간회담이이루어졌으며, 이를통해서로상이한입장이조율되었다. 마침내 1월말워싱턴에서제안된 2+4 회담구상은독일의
통일행보에결정적인돌파구를마련해주었다. 외교정책상의난제가해결의실마리를보임과동시에동독국민들은점점통일을원했고, 제도권정치권력의불안정성이가시화되었다. 조사에따르면,1989년 11월하순통일찬성(48%) 반대(52%) 여론은 1990년 1 월하순찬성(79%) 반대(21%) 로급변하였다. 1990년 1월 28일의원탁회의에서는 5월 6일로예정되었던인민의회선거를 3월 18 일로앞당겨치르기로결의할수밖에없었고, 정당정치는새로운국면에접어들었다. 제 3단계는선거일정이 3월 18일로앞당겨짐과동시에서독의정당이동독에서형성되는정당체계에영향력을강화하기위한전략과정책실현을위해매우적극적으로의회선거에직접개입하면서부터이다. 동독의민주화라는과제가통일문제와융합되면서정당과시민운동조직들은정치적입장과조직의목적및활동방식에서점차다원화하기시작하였다. 그러나역설적으로다원화된동독의정당과저항운동조직들은점차정치력을상실하고서독정당들의영향아래재편 집중화되기시작했다.3월의인민의회선거에서독의정당들이개입함으로써동독의내부정치가사실상서독의정당정치로변한것이다. 동독의인민의회선거는서독정당들의자금과조직력, 캠페인전략과유명정치인들의명성에의해지배되었다. 서독정당들이동독의상황진전에적극적인자세를취하게된것은동독주민들의통일에대한의지가강해지기시작한것도한요인으로작용했다. 동독시민들의통일에대한입장은더욱분명해져서 3월 18일인민의회선거는내용면에서서독마르크를동독으로유입하는, 즉화폐통합이주요이슈가되었는데, 지지도에서열세를면하지못하던기민 기사련의콜수상은선거5 주전화폐통합의필요성을적극주장하고, 선거사흘전화폐통합시동서독마르크의교환율1:1 을발표하여선거에결정적역할을하였다. 2월초약과반의지지를받던사민당은 21.9% 를득표한반면, 보수연합세력인독일연합(Allianz für Deutschland: AfD) 은 48% 의지지를얻어이 후기민 기사련은통일정책에서주도권을확보했다. 이선거에서민주사회당(PDS) 16.4%, 자유민주동맹 (BDF) 5.3%, 동맹90 2.9%, 독일민주농민당 2.0% 를득표했다. 마지막 4단계는 1990년통일후처음맞는연방의회선거를앞두고구서독정당체계가구동독의정당체계를흡수, 통합하여단일한통일정당체계가만들어진시기이다. 인민의회선거후구성된대연정정부가 4월 12일의연정합의에서서독기본법 23조에따라동독이서독으로편입되는방식으로통일하기로합의하고 5월 21 일화폐 경제 사회통합조약을체결한이후, 동서독정당들의통합을위한작업은빠르게진행되었다. 1990년 8~ 10 월사이에자민당, 사민당, 기민 기사련의순서로통합당대회가열렸으며, 구동독의당조직은구서독정당에흡수되는방식으로통합되었다. 통일되기전에녹색당을제외한동서독정당의통일이완결되었다. 3. 동독인민의회선거 - 정당별선거전술과통일정책
3월인민의회선거에서독정당들이적극개입함으로써통일과정에서동독의내부정치는서독화되었고 서독의정당정치로되었다. 서독의기민 기사련, 사민당과자민당등주요정당들은각각동독정당의선거캠페인에참여하고물적, 인적자원을적극지원하였다. 서독정당출신의유명정치인들이동독에와서대중에게지지를호소하기도하였다. 인민의회선거는 동독땅에서치러진서독의선거 가된셈이다. 이러한동독의서독정당정치화는통일이후동독의정당들이서독의정당들로흡수, 통합되는결과를가져왔다. 서독의정당들이인민의회선거에직접개입하게된배경으로동독내에정치적공백이생긴상태에서구지배세력과체제개혁세력의지도력부재문제나동독정당의지원요청을들수있으나, 서독정당들자신의이익과정당정치의논리가더주요하게작용하였다. 1) 사회민주주의당(SPD) 1989년 8월 26 일동독에서사회민주주의정당을창당하기위한계획이발표되었다. 그러나아래로부터이전의사회주의통일당(SED) 과의대화정책에대한공개적비판이나오기시작했다. SED와의대화정책을고수하던사민당지도부는기존의통일정책과파트너에변화를줄것을요청받았다. 다른한편, 9월 13일시민운동의주도권을장악한신포럼(Neues Forum) 이많은동독시민의참여로창설되자, 동독사민당 (SDP) 이대중의지지도없이세워지는것아니냐는비관적인식도생겨났다. 이런조건에서 10월 7일동독사민당의창당대회가열렸음에도불구하고서독사민당은유보적자세를견지하면서환영인사를파견하지도않았다가, 이틀뒤에야당대표포겔(Vogel) 이동독사회의도덕적발전에기여하기를바란다는연대사를발표하면서조심스런접근을시작하였다. 서독의당지도부는동독에서여전히음모적인활동이일어날지도모른다면서유보적인태도를견지하였다. 그렇지만연방의회차원에서는주로서독으로망명한저항운동단체출신인사들을매개로, 그리고주의회차원에서는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를통해서점진적인관계개선과이질성극복을위해노력하였다. SED 가동 서독사민당에대해공격적인적대감을보이자서독사민당은오랫동안지속해오던교류의우선권 을동독사민당으로전환하였다. 이는 SED가헤게모니정당으로서의지도적위상을상실함으로써정치적다원화추세가대세로되면서정치권력획득의기회가높아졌기때문이다. 동독사민당은, 몇달되지않는짧은기간이나마 SED에대한저항과평화혁명을이끌어가는과정에서형성된시민운동적기반에서나온가치를토대로, 자신의독자성을형성하고있었다. 이에근거해동독사민당은서독사민당을위계적구조를가진구식정당(old-party) 이라규정하는반면, 자신들은풀뿌리민주주의구조와가치를지향하는신식정당(new-party) 이라는점과구성원들이 1968년혁명정신과좌파-녹색당적인성향을가지고있다는점을들어서독사민당과구분하려하였다. 빌리브란트와헬무트슈미트의노력으로동독사민당이동독내에서가장안정된정당조직을갖추게되고, 1989년 12월 22일동서독국경의상징이던브란덴부르크문이열려국가적통일의가능성이한층고조되자
동서독두정당간공동작업의수준은한층높아졌고전체독일을포괄하는정책수립을위한협의가활발해지기시작했다. 마침내 1990년 1월동독사민당이당명을서독과동일하게 SPD로개칭함으로써동서독사민당의관계는새로운단계에돌입하고, 서독측 3인과동독측 1인으로구성된교류위원회를서베를린에설치하였다. 이위원회에서서독측은동독인민의회선거에직접개입하는방향으로위원회를강화해나가려했고, 동독측은독자성유지를위하여서독의원조를자립을위한원조로규정하고기술적수단, 이데올로기와홍보전략을독자적으로마련해나갔다. 이러한힘겨루기는서독측의자제로갈등으로까지발전하지는않았다. 2) 자유민주주의당(FDP) 인민의회선거를앞둔자민당지도부는동독의변화에서두가지정책을구사하였다. 하나는동독 SED의블록정당이던자민당(LDPD) 과의접촉을강화하는것으로, 주로호네커정권말기비판적성향이강했던당하부조직과의대화를중심으로이루어졌다. 동독자민당과지속적으로좋은관계를유지할수있었던이유는그내부에개혁잠재력이있었기때문이지만, 동시에 SED 블록정당이던 LDPD와의연합으로 3월 18일인민의회선거에서자유민주주의세력이패배하지않을까고민하고있었다. 다른하나는새롭게구성된운동단체가정당으로전환하는것을지원하는것이었다. 1989년 11월에동독자민당(LDPD) 과서독자민당의정당대표회담이결렬되고동독에서경쟁정당으로 1990년 2월 4일동독-자유민주당(DDR-FDP) 이출현하자, 서독자민당은 LDPD 를더욱압박하기위해서신포럼(NF) 에참가한일부과학자, 대학교수및학생을중심으로한독일포럼당(Deutsche Forum Partei: DFP) 의창당을주도하였다. 이로써동독에서는블록정당의결함은 LDPD의지도부만제거하면세정당을연계해서해결할수있으리란의식이확산되었다. 서독의자민당은 1990년 2월 10일예정된 LDPD의전당대회를겨냥하여신생정당인동독-자민당과독일포럼당에대한막대한지원계획을발표하며 LDPD 지도부를압박하였다. 튀링엔지역의 LDPD 산하단체들이동독-자민당으로전환하자 LDPD 당수게르라흐(Gerlach) 는당개혁안을발표하고전당대회에서당명을자유민주당(LDP) 으로개칭하였다. 새로이정비된자유민주주의세정당들(DDR-FDP, LDP, DFP) 은 1990년 2월 11일새로운정책방향을위한모임을갖고전체독일의통합된자유주의정당건설을목표로자유민주동맹(Bund Freier Demokraten: BFD) 이라는선거연합체를결성하였다. 서독자민당은자유민주동맹의창설과함께조화롭고통일적인선거운동을위해공동선거전술을확고히하고베를린에핵심적선거전문가들을배치하였다. 그러나세정당사이에는차이점이있었고, 특히 LDP는독자운영을강조하는등자주일탈적인행동을하기도했다. 이에따라좀더강력한통일적선거운동을위해세정당대표들과서독자민당지도급인사들이참여하는공동조정위원회를결성하여결속을도모하였다. 서독자민당의자유민주동맹에대한지원은자립을위한원조이상의것이었는데, 특히서독자민당의대표적정 치인인겐셔(Genscher) 서독외무장관과람스도르프(Lamsdorf) 당수의선거지원이동독유권자들에게서독의
지원에대한확신을심어줌으로써선거연합에대한신뢰도를높이는데크게기여했다. 3) 기민 기사련(CDU/CSU) 서독기민 기사련의경우, 기존통일정책의연장선에서연방의회수준으로기존의동독정치단체들과접촉을시도하는것은용이하지않았으나, 동독의개혁성향단체들과교류를해왔던헤센주와서베를린당차원에서는활발한교류를가질수있었다. 이들주 시차원의서독기민련(CDU) 은동독내다양한지역조직과의회동을통해서동독자매정당의성향을파악하고있었다. 다른한편으로, 이들에게서독측의지원을받는다면인민의회선거에서승리할것이며, 자유 인권 개혁운동에서큰성과를거둘수있으리라고선전해나갔다. 점차 SED의독점적권력이약화되고통치구조에균열이생기자기존의정보파악과순수한도덕적지원의차원을뛰어넘어권력구도변화의전망속에서동독자매정당을정치적영향력강화의파트너로받아들였다. 1989년 11 월동베를린의기민련대표가된드메지에르(de Maiziere) 는서베를린기민련과의협력으로당의실질적인개혁을주도할수있었다. 동서베를린중심의기독민주주의자들은통일독일의건설과두정당의통합에대한입장을접근시키고, 상호차별성을줄일수있는기제(Adapter) 의설립을추구하였다. 본(Bonn) 에있는서독기민련수뇌부도동독기민련이 40여년간 SED 블록정당으로서연대책임을져야한다는입장과자매정당과협력하는것이선거에서오히려부정적인결과를가져올수있다는생각을버리고동독기민련을자매정당으로인정하게된다. 여기에는동독내새로등장한정치단체들이서독기민련의보수적정치성향을비판하고나선것과동독기민련이당내개혁을추진한것이배경으로작용했다. 또한, 서독기민련은연합가능한신흥정당 단체를물색하면서다른세력과연대하기위한모든조건을열어놓았는데, 당지도부가단하나의정당과의접촉을고집하는것이변화에유동적으로대처하지못한다는입장이었기때문이다. 서독기민련은선거연합체구성을위해기사련의동독자매정당인독일사회연합 (Deutsche Soziale Union: DSU) 과민주혁신(DA) 을상대로적극적인설득작업을병행하였다. 1990년 2월 5일서독기민련이지원하는동독기민련과민주혁신, 그리고서독기사련이지원하는동독기사련은콜수상이직접참여한가운데인민의회선거를위한연합체독일연합 (AfD) 을창설하였다. 결국기민 기사련은 40년간 SED의블록정당이라는역사로인해대중적신뢰를잃은동독기민련이가져올피해를최소화하면서도조직력과정치적경험을짧은시일내에흡수하여선거전략과전술을유리하게구사할수있었다. 선거운동기간은짧지만총력으로라는모토아래모든선거구에서독의선거전문가들을파견해동독각주의선거운동본부의핵심지위를차지하고선거운동을진두지휘하여선거에서압승하였다. 4) 녹색당(Die Grünen)
서독녹색당은통일정국의제한적인첨예한정치사안보다는환경 인권 평화와관련된문제를가지고조심스럽게동독시민단체들과대화를전개했고, 이들의견해를존중하면서조화를모색하였기에많은단체들이녹색당과협력하려고했다. 녹색당내에서는어떤단체들을지원할것인가를놓고근본주의자(Fundis) 와현실론자(Realos) 사이에논쟁이벌어져당내갈등으로나타나기도했다. 시민운동단체중서독녹색당에긍정적인입장을취했던신포럼(NF), 민주주의지금(Demokratie Jetzt: DJ), 평화 인권발의(Initiative Frieden und Menschenrechte: IFM) 와동독녹색당은정강( 政綱 ) 논의의강화와새로운정책대안마련을위해노력하였다. 이들동독정치조직들은서독에자매정당을가지고있는정당 단체들에비해선거준비가미약함을깨닫고이를극복하기위하여서독녹색당으로빠른행보를하였으나, 정강논의에서는주춤하기시작했다. 왜냐하면동독정당 단체의조속한통일에대한기대와달리, 서독녹색당은기본입장인두개의독일국가를일정기간유지하고, 대등한권리를가진동서독두국가의유럽내공동발전을목표로하는독일정책을추구하고있었기때문이다. 서독녹색당은이들동독정당 단체들의민주주의적요구에는동의하였으나무비판적자본주의도입에는문제를제기하였다. 서독정당들이동독정당 단체들과선거연합체를만들어적극적으로선거에개입하자, 서독녹색당내에서 는동독인민의회선거가서독의정치기류에직접적인영향을미칠것이라는인식이확산되었다. 게다가동독환경 인권 평화단체와의단절로서독녹색당의위상이위협받으면서서둘러동독녹색당과독립여성단체 < 표> 정당별통일 평화정책및경제체제에대한입장 구분기민 기사련자민당 (FDP) 사민당 (SPD) 녹색당 (Grüne) 정치적입장 기독교적휴머니즘의가치 경제적으로는자유주의적 사회민주주의및유럽사 토대민주주의, 사회성강 ( 동독의우호 관; 정치적보수주의 시장경제; 정치적자유주 회주의운동의전통계승 화, 생태주의지향 정당 ) ( 독일연합: AfD) 의 ( 자유민주동맹: BFD) ( 사회민주당) ( 동맹 90; 녹색당; 독립 여성연합 ) 통일문제서독기본법 23조에따라서독이동독을흡수하는방법으로조속한통일실현 통일에원칙적찬성; 기본법 23조나 146조와무관 서독기본법 146조에따르며, 흡수통합반대. 즉, 통일헌법제정국민투표후연방국가로통일; 동독사회안정유지 발전 두개의독일국가일정기간유지; 양독의유럽내공동발전이후유럽공동체에통합 유럽및 동독의 NATO 가입; 동독 양독일의비군사화; 유럽 유럽안보협력회의 (OSCE) 동독의 NATO 가입반대; 통일독일의 지역내 NATO군배치반 의신평화질서옹호 를축으로새로운안전보 NATO 와바르샤바조약기 안보 대( 특수지역화) 장기구창설; 전승 4국군 구군사부문동시해체 ; 주둔최소화 유럽평화체제구축 경제체제 신속한화폐통합으로서독 신속한사유화와자유주 사회보장제도확립후서 민주적, 사회적, 생태적 마르크유통; 국영기업민 의적시장경제; 조기의화 독과의화폐 경제통합 경제체제 영화로시장경제기반구축 폐 경제통합반대 등에따른경제통합실현
(Unabhängiger Frauenverband: UFV) 와시민단체를모두지원하기로결정하였다. 서독녹색당은이들의선거운동지원을위해동베를린에대안연대지원사무실을설치하여 21 만마르크( 약 1 억원) 를지원하기로하였다. 그러나서독녹색당은동독정당 단체의자주성에근거한선거를원칙으로하여내용적개입도피한채, 간 접지원방침고수와예산배분에서유보적인태도를취하였다. 특히예산배분에대해동독측의불만이고조되었다. 서베를린녹색당이이를돌파하기위해재정및선거기술적지원을서둘렀지만, 결국신포럼, 민주주의지금(DJ) 및평화 인권발의(IFM) 는녹색당과의협력을거부하고동맹 90 을통해독자적인선거참여를결정하였다. 결국녹색당은동맹 90 과결별하고, 동독녹색당및독립여성연합(UFV) 에대한부분적지원으로선거에임하게되었다. 4. 정당통합과통일독일정당체계의형성 1) 동서독간정당통합 1990년 3월 18일인민의회선거를치르면서동독정당체계는서독정당체계의영향권에들어가게되었고, 인민의회가구성된이후동독정당체계는서독정당체계의주변부로기능했다. 결국서독정당들은통일이라는극히예외적인특수상황에서사회적갈등의핵심내용인통일전략 정책의실질적추동체로기능하였고, 동시에결정적인영향력을가진정치행위자로등장하여동독의정당체계를통합하게되었다. 형식적, 법적으로통일된날은 1990년 10월 3 일이지만, 실질적통일은이미 7월 1 일의화폐 경제 사회통합 (Währungs-, Wirtschafts- und Sozialunion: WWSU) 에따라이루어졌다고할수있다. 12월 2일에는통일독일의첫총선이예정되어있었던만큼, 이미여름휴가가끝난 8월초부터각정당은이일정에맞춰정당별통합전당대회를시작으로선거운동에돌입하였다. 자민당의 1990년 8 월, 사민당의 9 월말, 기민당 10월초통합전당대회를통해동서독정당들은모두통합되었다. 동서독정당별통합은특별전당대회를열고당대표를새로이선출하였는데, 대개당규변경을통하여당대표수를늘이는것에지나지않았다. 사민당(SPD) 의경우, 동서독간정당통합에따라전체당원수는서독지역 90만명에동독지역의 3만명이추가되는정도로미미한변화를보였다. 1989년말약 10만명에이르던당원이당통합과정에서매우적은수만이당원으로유지된것은이후당지도부구성에서동독출신의대표성이약화되는결정적요인이되었다. 기민당의경우, 서독지역의당원 66만명에동독지역의 12만 8 천명이추가로확보되었으며, 이에따라약 20% 의대표자와당지도부가이들동독출신정치인에게배정되었다.
자민당은사민당이나기민당과는다르게당세를크게확장한경우에속한다. 기존의서독지역당원 6만5 천명은통합을통하여17만 8천명으로약세배나증가했음에도불구하고단지 3명의동독출신인사가당지도부에소속되어 10% 에도미치지못하는지분만보장받았다. 서독정당에일방적으로편입되었으나미미한당내지분확보라는일반적추세와구분되는조직통합의모습을보인유일한정당은녹색당이다. 녹색당은최대한동독지역정당의독자성을인정해주는방식으로 12월 2 일총선이후에통합하였으며, 4만명의구서독당원에구동독지역동맹 90 당원 3000명이추가되었음에도불구하고구동독조직에게통일관련문제에서비토권을행사할수있도록하여구동독조직의자주성을인정하였으며, 당명도동맹 90/ 녹색당으로정하였다. 2) 통일독일정당체계의이념적경향 동독정당과의통합을통해독일의정당체계는극히제한적인영향을받았을뿐이다. 단지통일이라는특수상황으로인해몇가지특이점들이나타나기는했지만, 이후정당의이념적 정책적부분에커다란영향을미치지는않았다. 1990년인민의회선거에서정당들이지나칠정도로빈번하게정치이념적인수사를활용하여, 특히자유나민주주의의가치들에대해많이언급한반면, 대외정치적주제들을상당히경시하는경향을보였다. 기민련은과도하리만큼자주보수적가치를내세웠던태도를바꾸어통일연방의회선거에서는통일에따라발생하는구동독주민들의실질적인이해를대변하는데중점을두었다. 사민당은복지국가의필요성에무게중심을두고선거강령내용의약 1/4 을사회국가건설에할애하였다. 통일과정에서나타난새로운정치적, 경제적및사회적문제에대한대응으로각정당들은사회국가건설이나환경문제에대해더욱많은관심을보이는쪽으로변화하였다. 동독의기민련, 사민당, 민사당(PDS) 및녹색당등이새로이드러난경제문제들에대해좀더강한국가개입방식으로대응하려하였다면, 자민당(FDP) 만이연방차원의정치정당으로유일하게분명한시장주의적입장을취하였다. 자유주의정당들은시장의힘을공공연히강조하였다. 1990년연방의회선거에서다른정당들은당강령의 1% 정도만시장경제건설에할애하고있던반면, 유독자민당만이 12.5% 나이를다루었다. 다른한편, 녹색당, 시민운동및민사당등은당강령의무게중심을환경보호, 복지국가, 집단정책및평화 군비축소등에두고있었다. 이영역에서각정당들의입장차이는근소한반면, 민주주의에대한이해에서이들정당은서로커다란차이가있었다. 즉, 녹색당과시민운동단체들은직접참여의의미를강조하는반면, 민사당은민주주의구축외에자유와경제문제의해결에서국가의개입을당강령에추가하고있었다.
5. 나가는말 격변기서독정당의지원은민주주의와다원주의의경험이없었던동독정당체계의안정적전환 (soft landing) 에기여하였다. 동독의경우, 격변상황에서주도권을잡고사회의안정성을유지할수있던세력은없었다. 왜냐하면블록정당들은사회주의통일당 (SED) 의구속에서벗어나는데급급했기때문에당내개혁조차도미미한상태였고, 저항단체들은 SED에대한비판에는능했지만대안제시가부족했으며정치적경험도없었기때문이다. 이런조건에서동독주민들의요구는제대로수용되지않았고서로괴리감이생기기시작했다. 이때서독정당들은자매정당이나저항단체들에게정치적노하우를전수하거나물적지원을함으로써동독국정운영의체계화를도와주었다. 그러나서독정당들의안정자로서의역할은동시에그만큼의비용을요구하는것이어서, 동독정당들의자주성훼손을의미했다. 동서독정당체계의통합은전반적으로서독정당체계가동독정당체계를흡수한것으로평가된다. 이는동독의필요에따른것이기도하지만, 서독정당들자신의이익과정당정치의논리가주요하게작용하였다. 흡수통합의결과는이후구동독주민의특수한이해관계를대변할자주적정치조직부재의문제를초래했다. 통일이후수년동안구동독주민들사이에 2등국민이라는집단의식이형성된것은부분적으로여기에도그원인이있다.
공산주의국가를위한자금 - 서독은동독재정에왜그리고얼마나지불했나? - 페터가이, 프리드리히에베르트재단한국사무소소장 2005년 7월 서독의모든주요정당들은 1949년두독일국가가설립된이후구동독과의경제교류가동 서독간교량역할을한것으로평가했다. 1961년장벽이세워진후에곤바르는자신의구 상안인접근을통한변화를개발했다. 빌리브란트가이끌던사민당이자민당과연정으로정 권을잡으면서바르는 70 년대초이안을정책으로추진했다. 이정책의목표는상품과서비스 뿐만아니라분단된동서독의사람들도장벽을통과하게함으로써장벽을조금더여는것이었 다. 매번힘든협상을거친후수많은협약과합의가이루어졌으며, 그내용은서독이동독정부 에대한재정지불규모와이에대한반대급부로, 특히서신교환, 전화통화, 여행자의교통 왕래등동독의양보에관한것이었다. 이글에서는서독이동독재정에현금을직접지불한 내용과그것을통해얻은장벽의통과에관한것을수치로알아보고자한다. 끝으로, 에곤바 르의접근을통한변화정책때문에동독정권의수명이더연장되었다는비판에대한반박 과동독정부가왜장벽을비교적용이하게통과할수있게했는가에대한의문을다루고자 한다.
1. 들어가는말 독일연방공화국은 70 년대초부터동독의재정에엄청난금액을지불했으며, 80년대에는더집중적으로지불했다. 하지만이것은내독교역의무이자대월제도인스윙이나,1983년과 1984년두차례동독에주었던 10 억마르크의차관과는무관하다. 1950년대와 60년대모스크바가임명한동독의국가원수와당지도부들은그당시위와같은경제적이익을상상하지못했다. 어떤일이일어났나? 1961 년의장벽설치는독일의전후역사에서가장결정적인사건이었다. 60년대초가장격렬하게적대시되었던독일정책을개발했으며, 후에빌리브란트(Willy Brandt) 와함께접근을통한변화정책을실행했던사민주의자인에곤바르(Egon Bahr) 는 2005년 4월 29일자일간지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자이퉁인터뷰에서이에대해다음과같이말했다. 사고를전환하는데결정적인요소는이장벽이었다. 1961 년당시우리모두는만족하며, 누구도현재의상태가바뀌는것을원하지않는다고확신했다. 어느누구도우리가장벽에구멍을내거나장벽을통과하도록돕지않을것이다. 그래서시작했다. 더구나사람들이독일의본이나미국, 모스크바그어느곳에서도통행증을받을수없기때문에통행증발급에대해전권을갖고있는그들과협상을해야만했다. 양국간의긴장완화와협력분위기가조성되면서독일연방공화국이동독의재정에지불한대가로동독의정치적양보와관련된조약과합의가이루어졌다. 하지만동서독간거래중에는1963 년부터이루어진정치범의지불석방과같이법적토대없이이루어진것도있었다. 이글에서는독일정부, 즉 1969년부터 1982 년까지의사민당(SPD) 과자민당(FDP) 의연정에이어자민련/ 기사련(CDU/CSU) 과자민당(FDP) 의연정이얼마나그리고무엇을위해동독에돈을지불했는가를볼수있다. 2. 접근을통한변화 모든연방정부와연방하원의주요정당들은 1940년대말과 50년대의동서독경제교류가동서독간의교량역할을한것으로보았다. 특히내독교역이동독경제가사회주의국가들의
분업시스템에동화되는것을늦추는데기여했다고여겼다. 또한, 내독교역은필요할경우동독에대한공급을중단하겠다고위협할수있다는점에서베를린자유왕래를보장하는효과적인수단으로간주되기도했다. 장벽이세워짐으로써동독과서독의경제지역이완전히단절되었지만, 내독교역은 60년대에도독일의동질성의상징이자베를린의특수한지위를보장해주는수단으로간주되어계속되었다. 1969년빌리브란트가이끌던독일사회민주당이자유민주당과의연정으로정권을잡으면서 접근을통한변화라는정책안이도입되었다. 에곤바르가고안한이정책안은에곤바르와빌리브란트가 1963년 7 월투칭(Tutzing) 기독아카데미연설에서처음발표했다. 이것은 70년대와 80 년대사민당동방정책의주요모티브가되었다. 에곤바르는장벽구축에따른당연한결과라며이에대해이렇게말했다. 내가장벽을무력으로제거할수없기때문에, 사람들의유익을위해서는적어도장벽을통과할수있게만들어야한다. 새로운구상안인접근을통한변화정책은베를린통행증협정이공시된바로그해에처음으로적용되었다. 크리스마스시기에동베를린의친척을방문하려는서베를린주민들을위한통행증관련첫번째협상이 1963년 12 월에이루어졌다. 베를린시장이었던빌리브란트를필두로한베를린시정부의협상목적은베를린주민들과모든독일국민들의상황을개선시키는것이었다. 이는구체적으로다음과같은점들을의미했다. - - - - 서베를린주민의동베를린및동독방문기회증가정보및출판물교류철도연결개선내독교역확장 방문허가가크리스마스시기에만국한된까닭에협상결과가다소미흡하긴했지만, 에곤바르의정책안이처음으로시행된것임을감안하면, 에곤바르와빌리브란트모두에게성공적인결과였다. 그래도 1963년크리스마스연휴동안서독과서베를린에서 120만명의시민들이 동베를린을방문할수있게되었다. 이것은장벽이세워진후겨우2년반만에일어난대사건
이었다. 하지만 1972년기본조약에서명하기까지는거의 10 년이나걸렸다. 또한, 빌리브란트와에곤바르는, 사민당-자민당연정에서기민당-자민당연정으로정권이교체된 1982년이후에도접근을통한변화정책이추가협상이나재협상없이존속될수있도록여건을조성했다. 이는동서독접근정책에야당을포함시켰기때문에가능한일이었다. 에곤바르는 2001년 9 월서울을방문했을때이와관련해서다음과같이말했다. 야당과의협력은정부의의무입니다. 우리는동독에관한정보를야당에게넘겨주었으며, 의회에여야의원들로구성된특별위원회를만들어정보를교환하고, 야당의의견에귀를기울였습니다. 물론야당이우리의동방정책을비판했지만, 그래도이들한테는자신의의견을말할수있는기구가있었습니다. 기민/ 기사당이정권을인수한후헬무트콜(Helmut Kohl) 총리는사민당의동방정책을계속이어갔을뿐아니라, 교류를더확장시켰다. 연방정부는동독에두차례 10억마르크의차관을제공해주었는데, 이기간은바로 1983 년, 1984 년으로콜총리의임기중이었다. 3. 긴장완화정책의계약적토대 앞서언급한 1963 년에있었던베를린시정부와동독내각평의회간의통행증협정, 잘레강을잇는고속도로교각건설협정, 만일의경우를대비한통행증교부소재개관련합의외에사민당과자민당의연정이시작될때까지동서독간에는내독교역이외의다른협정이나합의가이루어지지않았다. 브란트총리는이미 1969년 10월 28일의정부성명에서동독내각평의회에정부차원의협상을제안했다. 이협상을통해서독일내에존재하는두국가간의계약을토대로협력관계를이루고자한것이다.1 년후에야이에대해진지한논의가이루어지기시작했고,1972년 12 월 21일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관계의기본조약, 즉기본조약에서명하기까지는 1 년이더걸렸다. 기본조약의서문에는특히두독일국민들의이익을위해협력관계가이루어지기를바란다는내용이강조되었다. 평등한원칙아래정상적인선린국가로서의관계를맺고자한것이 다. 또, 내용을보충하는서신교환에는동독이가족의재결합을촉진하고여행이나방문등
동서독국민의상호교류를개선하겠다는의사를명백히밝혔다. 기본조약에관한사전대화와협상에서이미베를린으로가는길과동서베를린간의교통정상화에초점을맞춘여러가지합의가이루어졌다. 1971년 1월 31일에는동서베를린간의전화통신이재개되었으며, 얼마후에는서베를린과서독간의자유로운인적, 물적통행에관한협정을체결했다. 1971년말에는베를린시정부와동독간에서베를린을오가는여행과방문에관해서도합의를이룰수있었다. 기본조약서명후에는특히교통통신부문의개선을촉구하는여러가지협정과합의가잇따랐다. 서독은 70년대중반부터베를린의교통부문건설에많은재정을지원해줌으로써동독의교통프로젝트에적극적으로참여했다. 4. 서독이동독에지원한현금과물자 서독이동독재정에지불한내역중에서가장중요한세가지부문은일괄통행료, 베를린을잇는도로건설을위한자금, 그리고일괄적인우편및통신료였다. 서독과 베를린을오가는통행의안전확보를위해서독은 1972년에처음으로 2억 3490만마르크를동독에지불했다. 1973년부터 1975 년까지도같은금액을지불했으며, 1976년부터 1979년까지는일괄통행료가연간 4억마르크에서 5억 2500 만마르크까지늘어났다. 서독은장벽이붕괴될때까지이금액을지불했으며, 장벽이붕괴될때까지지불한총액은 77 억마르크에달했다. 동독이일괄통행료를중요하게생각한것은금액이높았기때문만은아니었다. 청산형태로지불되는내독교역이나일괄우편료와는달리일괄통행료는현금으로지불되었기때문에동독은이엄청난금액을자유롭게사용할수있었다. 동독은베를린으로이어지는도로연결에대해서는거의관심이없었다.1976년서독은처음으로동독의베를린도로건설에참여하여4600 만마르크를지불했다. 1979년에 5억 6600만마르크로가장많은투자를했으며, 80년대에는약 4 억마르크선에서투자가이루어졌다. 우편과통신료는국제적으로금액을맞추게되어있다. 이를빌미로동독은 1966년서독에 게 1948년부터계산해서 18 억마르크를지급해달라고요구했다. 오랜협상끝에 1969년에연
방정부는 1967년부터계산해서매년 3 천만마르크의우편료를지불하기로했다. 1983년부터장벽붕괴때까지는매년지불된금액이 2 억마르크에달했다. 서독에서동독을통과하거나동독내의도로사용에지불해야하는비용은이보다는훨씬저렴했다. 서독과서베를린의여행자들은이전에는동독에들어갈때개인적으로도로사용료를지불해야했다. 그러나 1979 년연방정부가일괄지불하기로합의했으며, 1989년까지매년 5 천만마르크를동독에지불했다. 5. 장벽을통과한수치 50년대와 60년대에는서베를린을오가는여행자들은동독관청으로부터방해를많이받았다.1961년장벽이세워진후동독국민들은개별적으로서독이나서베를린으로가는것이금지되었으며, 동독정부는서독에서동독으로의여행역시최소한으로제한했다. 그렇다면서독이동독에매년지불하는일괄통행료와일괄우편료그리고포괄적인투자참여가동서독국민들에게는어떻게작용했을까? 다시말해서, 장벽을얼마나통과할수있었을까? 몇몇수치들을살펴보면이에대해어느정도알수있을것이다. 통행협정이발효된첫해에이미베를린을오가는여행자의수가 1971년 760만명에서 1973년 1370 만명으로늘어났다. 1985년에는 2380 만명이육로를통해베를린으로오갔다. 1970년에 125만명만이서독에서동독으로여행했으나 1975년에는그수가 312만명에달했다. 80년대중반까지동독방문자수가 260만명으로서서히줄어들다가 1986년에는다시 390 만명으로늘어났다. 동독에서서독으로가는여행자수도 1970년 100만명에서 1975년 140 만명, 그리고 1985 년에는 170 만명으로늘어났다. 그러나이중 6만 6000 명만이연금수급자가아니었다. 서독에서동독으로건전화통화회수는 1970년 70만회에서 1975년 970 만회, 1983년 2320 만회로증가했다.
1980년에는약 7500만통의편지와 2700 만개의소포를서독에서동독으로보냈으며, 동독에서는약 7000만통의편지와 900 만개의소포를서독으로보냈다. 장벽이세워지기전까지는약 310 만명의사람들이동독에서서독으로넘어왔다. 그러나 1961 년 8월 13 일이후에는동독을떠나려는사람은목숨을걸어야했으며, 실제로약 1000명이상의이주민들이국경을넘으려고시도하다가목숨을잃었다. 서독연방정부는가능한한많은사람들이동독을떠날수있게하려고노력했으며, 로 55만 5천명이동독관청으로부터서독으로영주이주승인을받았다. 실제 합법적으로서독으로이주하는것은보통연금을받는나이가되어야만허용되었다. 1975년헬싱키에서열린유럽안보협력회의(OSCE) 의폐회성명에서명한후에도동독은소위가족재결합을위해서연금나이가안된사람들의이주를허락하는데 8 년이나걸렸다. 그래도이러한방식으로 1989년까지 25 만명이동독을떠날수있었다. 연방정부는이에대한보상으로동독에물자를제공해주었으며, 그규모는경우에따라달랐다. 연방정부는 1963 년부터정치적이유로동독에수감된사람들을지불석방하려고시도했다. 이때에도연방정부는동독에현물을교부해야했다. 처음에는수감자당 4 만마르크, 그리고 1977년부터는약 9만 6 천마르크를동독에지불했으며, 이자금은서독의연방내독관계부재정에서충당되었다. 1963년부터 1989년까지총 31,755 명의정치범들이석방되었다. 6. 독일연방공화국의재정지원이동독정부의존립을연장시켰나? 중동부유럽에서공산주의가몰락하고소련연방이해체된이후에비평가들은동방정책때문에동독정부가안정되었고, 그결과동독정부의수명이불필요하게연장되었다며이정책의고안자들을비난했다. 또한, 그들은동독에대한재정지불이없었다면, 동독경제가더급격하게무너졌을것이며, 공산주의의정치적위기가더빨리왔을것이라고비난했다. 독일의다른부분인공산주의국가와의협력사업에관한논쟁에서에곤바르는다시한번말했다. 1993년 9월프리드리히에베르트재단의 1982-1989 야당인사민당의동방및독일정책학술회의에서에곤바르는유럽의실질적권력관계에대해다음과같이지적했다.
아데나우어, 브란트, 콜그누구도소련의 20개사단과바르샤바조약보다울브리히트나호네커정부를더안정시킬수는없었습니다. 접근을통한변화란, 그럼에도불구하고변화를일으키고자하는정책안이었습니다. 또다른지적은동독경제규모에대한서독의재정지원규모였다. 80 년대에일괄통행료, 투자참여, 일괄우편료와도로사용료형태로서독이동독에직접지불한금액은연평균 11억 7500 만마르크에달했다. 서독의평가에따르면, 이금액은 80년대초동독의국민총생산액의 1% 도안됐다. 돌이켜보면, 구동독에더많은자금을지원했더라도동독경제의몰락을막지못했을것이다. 이는경영실패의결과를메우기위해천문학적규모의자금지원을해야할만큼사회주의계획경제가비경제적이었고, 또한편으로는소련모델 - 즉, 경제활동을계획하고조정하는시스템 - 을도입한동독과여타사회주의국가에서이를진지하게개혁하려는모든시도가수포로돌아갔기때문이다. 7. 왜동독지도층은내독관계개선을허용했나? 동서독양방향의여행교류의완화나동서독간의높은전화통화회수도, 더구나여행허가의증가도동독사람들의여행욕구를누를수없었다. 반대로, 서독에서들어오는정보로인해동독주민들은동독체제보다서구민주주의와시장경제가우수하다는것을명확히알게되었고, 그결과동독체제를점점거부하게되었다. 그럼왜동독지도층은서독의재정지불에대한대가로동서독간의분단상태가느슨해지는것을허용했나? 여러가지이유중다음두가지이유를들수있다. 첫째, 동독지도부는1953년 6월 17일의봉기이후동독국민들의불만에대한우려를한번도떨쳐버린적이없었다. 그때문에내독관계의개선은우선동독주민들에대한일종의양보였다. 둘째, 동독의지도자들은 ( 서독의지도자들과별차이없이) 소련연방이있는한유럽과독일의분단이지속될것이라고믿었다. 그리고소련은 1968년체코슬로바키아를침공함으로써소련이아직도여전히공산주의국가정권의권력상실을막을것이고, 그럴수있다는것을동서독교류를시작하기바로전에명확히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중요한한가지는, 나중에가서야사람들은좀더잘할수있는방법을깨닫는다.
통일독일의수도이전 이상준, 국토연구원연구위원 2004년 12월 신행정수도건설위헌결정이후국토의균형발전을위한새로운대안들이활발하게모색되 고있다. 현재유력한대안가운데하나로거론되고있는행정부기능일부의지방이전과관련 해서통일독일의행정기능분담사례가주목받고있다. 통일이후베를린/ 본-법 (Berlin/Bonn-Gesetz) 에따라 10개의연방부처는본에서베를린으로이전하고본에는 6개부 처가남았다. 베를린으로옮기는연방부처들은 1999년 8 월말까지이전을완료하였다. 이들 연방부처외에연방의회상하원과연방대통령실도베를린으로이전하였다. 독일의경우형식 적으로는베를린과본에연방부처들이분산되어있지만, 내용적으로는베를린으로의완벽한 수도이전이이루어진것이다. 본에서베를린으로이전한부처들은제1 청사를베를린에, 그 리고제2 청사는본에설치하였다. 본에남은부처들은베를린에제2 청사를두었다. 베를린 과본의업무협조는인터넷, 비디오회의등을통해처리되고있으며, 본과베를린간셔틀 항공편도운행되고있다. 그러나직장을따라이주하지못한 900명의연방정부직원들이주 말에본과베를린을이동하는것으로나타났다. 이것은전체연방공무원수에비해높은비 율은아니지만, 행정기능분산이정부차원의비용측면뿐만아니라직원들의개인적인가 정생활측면에서도적지않은비용을요구하고있음을알수있다. 다만독일의사례에서는 베를린으로이전하는부처들이새로운청사들을건설하기보다는기존시설들을최대한활용 함으로써이전비용을최소화하기위해노력하였다는점을평가할필요가있다. 이러한독일 의사례는우리에게정부부처기능의분산과관련된비용최소화의중요성을보여주고있다.
1. 통일독일사례의의미 2004년가을행정수도이전을둘러싸고극심한국론분열양상을보였던우리의모습은 15년 전베를린장벽이붕괴된이후통일수도의입지문제를놓고국론이분열되었던독일의모습을 연상케한다. 독일의경우본(Bonn) 과베를린(Berlin) 을둘러싼수도이전논쟁은결국연방의회 의결정을통해종식되었다. 이러한연방의회의결정은다행스럽게도국민의여론을제대로반영 한것이었다. 우리도결국독일처럼국민적합의를통해신행정수도건설위헌결정이후의문제 를치유할수밖에없을것으로보인다. 현재국토의균형발전을위한새로운대안들을모색하 고있는데, 청와대와국회를제외한행정부기능의이전또는일부부처의이전과같은대안들이 논의되고있다. 현재유력한대안가운데하나로거론되고있는행정부기능의지방이전과관 련한외국의사례로서통일독일의사례가자주언급되고있다. 알려진바와같이독일은통일 이후수도를본에서베를린으로이전하면서행정부처의일부를본에잔류시켰다. 물론독일의 사례는사실상행정부처가운데주요부처를포함해서상당부분이본에서베를린으로이전하였 고, 총리와대통령의관저가베를린으로이전하는등완전한수도이전사례라고할수있다. 현 재우리나라에서논의되고있는행정부처만의이전과는근본적으로차이가있는것이다. 전세 계적으로수도를이전하면서독일의경우처럼수도의일부기능을분산시킨경우는말레이시아를 들수있다. 말레이시아는의회를수도인쿠알라룸푸르에잔존시키는대신대부분의부처와연방 재판소를행정수도인푸트라자야로이전시키는계획을추진중이다. 그러나말레이시아의경우에 는완전히수도가이전한독일과는달리기존수도가수도로서의지위를그대로유지하며새로운 행정수도를건설하는것으로서근본적인차이가있다. 특히말레이시아의경우에는쿠알라룸푸르와 새로운행정수도인푸트라자야간의거리가 20km에 불과해본과베를린간의직선거리가 500km 에가까운독일과는단순비교하기어려운경우이다. 말레이시아의사례는세종로와과천으로분 산되어있는우리의정부부처입지사례와가깝다고할수있다. 때문에말레이시아의사례는독 일과같이행정기능의분산에따른업무비효율문제는발생할여지가없는것이다. 독일의사례는일부정부부처가본에남으면서통일수도인베를린과과거수도였던본간에일부연방정부기능을분담했다는점에서우리의관심을끈다. 헌법재판소의위헌판결이전에신행정수도건설과관련한논의과정에서통일수도문제도제기된바있다. 통일에대비해서신행정수도건설을유보해야한다는주장에서부터통일이될경우신행정수도와북한지역간의수도기능분담을고려해야한다는주장에이르기까지다양한주장들이제기된바있다. 이러한 2
측면에서통일독일의사례는통일시대를대비한다는측면에서도우리에게의미하는바가크 다고할수있다. 이글에서는통일독일의수도이전사례에서행정부의본-베를린분산배치가갖는의미와구 체적인내용을소개하였다. 2. 통일독일의수도이전결정과추진과정 1) 수도이전결정과정 독일은제2 차세계대전이후동서독으로분단되면서두개의수도를갖게되는운명을맞았다. 서독은 1949 년의회에서본을임시수도로동독은동베를린을수도로결정하였다. 본이임시수 도로결정되었지만당시서독국민들간에는향후통일이될경우베를린으로환도( 還都 ) 한다는 합의가있었다. 본은서독국민들에게는어디까지나 임시수도 였던것이다. 본이서독의수도 가된지 40년이되던 1989년베를린장벽이붕괴되면서통일수도에대한논의가활발하게시작 되었다. 동독주민들은서독정부와맺게되는통일조약(Einigungsvertrag 1990) 의조건으로연방 수도를베를린으로이전할것을요구한반면, 서독주민들간에는베를린으로환도하자는주장과 본을통일수도로해야한다는주장이맞섰다. 1990년당시설문조사에서독일국민의 51% 가베 를린을, 23% 가본을지지하였다. 베를린지지세력의 70% 가동독국민이었고, 서독국민가운데 베를린지지세력은 46% 였다( 김인희 2003). 베를린으로의환도를주장하는측은베를린이수도로 서의정통성을갖고있다는점과중부유럽의중심지라는지경학적강점, 그리고무엇보다도 1949 년본을임시수도로결정할당시의국민적합의등을환도의근거로내세웠다. 반면, 본을 통일수도로하자는측에서는중앙집권적이고도독재적인히틀러정권의부정적이미지를강조 하면서베를린으로의환도를반대하였다. 이러한본-베를린수도이전논쟁은 1991년 6월연방의 회선거에서 337:320 의근소한차이로베를린이통일수도로서결정되면서종식되었다. 종전이 후동서베를린으로분단되었던시련에도불구하고독일역사에서베를린이차지했던위상과정체 성그리고통일이라는국가적전환점이이러한결정에커다란영향을미친것으로볼수있다. 그 리고무엇보다도중요한것은이러한의회의결정이국민여론과배치되지않았다는점이다. 만 약국민여론다수가통일수도로베를린을선호하지않았음에도불구하고국회의원들이베를린 으로의천도를결정했다면, 그러한결정이실제로집행되기는어려웠을것이다. 이것은국민적합 의가수도이전과정에서필수적이라는것을우리에게강하게시사하고있다. 3
독일이통일이후베를린으로환도하게된것은우리에게도의미하는바가크다. 그것은수도라 는것이역사적, 민족적, 정치경제적으로복합적인의미를가질수밖에없음을보여주기때문이 다. 표 1. 통일독일의수도이전경위 시기내용 1990.8.31 동서독간통일조약체결 통일독일의수도로서베를린명시 정부및의회소재지는통일이후결정하기로명시( 본-베를린수도이전논쟁본격화계기 ) 1991.6.20 연방의회에서베를린으로수도이전결의 1992.8.25 수도조약체결 연방정부- 베를린, 연방정부-브란덴부르크주의협력계약 1994.5.6 베를린/ 본- 법(Berlin/Bonn-Gesetz) 공포 1999.8.31 연방의회및정부베를린으로이전완료 자료: 한국토지공사. 2004. 해외의수도이전과관련된논쟁및시사점. 12쪽 2) 수도이전과정 수도를베를린으로이전하기로결정한후연방정부는수도이전계획을수립하였고, 1994년 4 월에확정된베를린/ 본- 법(Berlin/Bonn-Gesetz) 에는 2000년까지실행할정부이전계획이명시되 었다.1999년까지최종적으로총리실과홍보처를포함한 10개연방부처는베를린으로이전하고 본에는 6 개의연방부처가남게되었다. 베를린/ 본-법에따라이전하거나남는부처들은각각본 과베를린에부속사무소를두도록하였다. 즉베를린으로이전하는부처는본에제2 청사를, 그 리고본에남는부처들은베를린에제2 청사를설치한것이다. 이로써사실상모든부처가본과 베를린에서일부기능이나마유지하게되었다. 베를린으로이전한부처는총리실, 홍보처외에내 무부, 법무부, 노동사회부, 재무부, 경제기술부, 건설교통부, 여성가족부, 외무부등이며, 본에남 는부처는국방부, 교육연구부, 식품및농림부, 보건부, 환경부, 경제협력부등이다. 전체적으로볼 때베를린으로이전하는연방부처들은행정부내에서도핵심적인부처들이라할수있으며, 이것 은사실상베를린을중심으로정부기능이작동된다는것을의미하고있다. 베를린으로이전하는 부처들은 1992년부터시작해서 1999년 8 월말까지이전을완료하였다. 한편이들연방행정부처 외에연방의회상하원과연방대통령실이각각베를린으로이전하였다. 1999년 9월 1일부터연방 4
하원과연방정부는베를린에서공식적인업무를시작하였다. 수도이전과정을통해총 8,300개의연방정부일자리를포함해약 11,400개의일자리가본에 서베를린으로이동하였다. 그리고본의급격한경제위축을막기위해베를린과라인-마인지역 에서연방기능과관련된약 6,550 개의일자리가본으로이동하였다. 2002년 10월기준으로 13,000 명이베를린의연방정부, 연방의회, 연방대통령실에서근무하고있고, 본에서는 8,500명이 근무하고있다. 3) 본과베를린간의이전부처업무활동 여기에서는베를린으로이전하거나본에남은 16 개연방부처가운데건설교통부, 환경부와 국방부의사례를통해본과베를린간에어떻게업무협조가이루어지는지를살펴보았다. 본 에서베를린으로이전한부처가운데 표 2. 연방정부기능의본-베를린분산배치 베를린 총리실, 홍보처, 내무부, 법무부, 노동사회부, 재무부, 경제기술부, 건설교통부, 가족여성부, 외무부 10 개 본국방부, 교육연구부, 식품및농림부, 보건부, 환경부, 경제협력부 6개 주: 1) 베를린과본에있는부처들은각각본과베를린에제2 사무소를두도록되어있음 2) 부처의명칭은필자가편의상축약하였음 건설교통부는제1 청사를베를린에, 제2 청사는본에두었다. 베를린에있는제1 청사에는장 관실, 총무국, 홍보부서와내각및의회협의관련부서, 주택및건설국등이, 본의제2 청사 에는도로철도국, 수운국, 항공국등이배치되었다. 베를린의제1 청사에는전체일자리(1,650여 개 ) 의약 33%( 약 550 개) 가, 본의제2 청사에 67% 가배치되어있는데, 이러한직원배분비율 은 2002년기준자료로서 2004 년현재에는다소변동이있을것으로예상된다. 당초본의건 설교통부청사는현재건설교통부산하기관인연방건설청(BBR) 이사용하고있다. 의회활동 과관련해서건설교통부장관은주로베를린에머물고있으며, 베를린과본의업무협조는인 터넷, 비디오회의등을통해처리되고있다. 본에남은환경부의경우, 제1 청사에는부처의예산담당, 인사, 기타내부행정관리등일반 5
행정관련부서와 WA( 수질, 쓰레기, 토양), IG( 보건, 공해방지, 시설보호및교통, 화학물질안 전), N( 자연보호), RS( 원자력시설의안전, 방사선보호, 핵처리관련) 등 4 개부서가, 베를린의 제2 청사에는홍보부서와내각및의회협의관련부서등환경부의수뇌부와관련된핵심기능 과환경법관련부서, 환경정책관련주요부서( 환경정책의경제적문제관련등) 와국제협력 부서가배치되어있다. 베를린제2 청사에는전체일자리(742 개) 의 25% 가, 본제1 청사에 75% 가 배치되어있는데, 이역시 2002년기준자료로서현재에는다소변동이있을것으로예상된다. 환경부장관은주로베를린에머물고있고, 보통 2주에한번정도본으로이동해서 1-2일정도 집무한다고한다. 연방건설교통부와마찬가지로베를린과본의업무는기본적으로인터넷과비 디오회의등으로처리하고있다. 환경부와마찬가지로본에제1 청사를두고있는국방부의경우제1 청사에는군사전력국, 총 무국, 군사행정국, 육 해 공군국등이, 베를린제2 청사에는홍보부서와내각및의회협의관 련부서, 국방정책국, 무기국등이배치되어있다. 본의제1청사에는2002년기준으로전체일자 리(3,300 여개) 의 90%( 약 3,000 개) 가, 베를린제2 청사에는 10% 가배치되어있는데, 국방부장관은 주로베를린에머물고있다고한다. 베를린과본의업무협력은타부처들과마찬가지로인터넷( 국 방부인트라넷), 이메일, 비디오회의등을통해처리하고있다. 현재본과베를린간에는정부업 무와관련한정기항공노선도운영되고있는데, 2003년 10월부터는 Hapag-Lloyd-Express와 Deutsche BA 가이노선을공동으로운영하고있다. 표 3. 본과베를린간일자리이동과이주 구분이전한일자리( 개) 이주자수( 명) 본에서베를린으로 ( 연방정부, 연방상원, 연방하원, 연방대통령) 약 11,400 약 7,500 베를린에서본으로 약 4,350 약 1,900 라인-마인지역에서본으로약 2,200 약 1,200 주: 이외에본에약 3,900 개, 베를린에약 2,450개그리고라인-마인지역에약 1,000개의기존일자리가그대로남게되었음. 자료: 독일연방건설교통부홈페이지자료. 2003. http://www.bmvbw.de/cms-aussen-speziel/ 4) 수도이전에따른베를린의청사건설과본의경제기능보강 6
새로운수도를건설한다른나라들의사례와는달리독일의경우에는기존수도로환도하는형식 으로수도이전이진행되었기때문에수도이전에따른건설비용이많이소요되지는않았다. 연방 정부는수도이전에따른재정부담을줄이기위해가급적새로운청사를건설하기보다는기존건 물을개보수하여활용하는경우가많았다. 베를린/ 본- 법(Berlin/Bonn-Ges etz) 에서는수도이전비용 의상한선을 200 억마르크( 약 12 조원, 1990 년기준) 로명시하였는데, 이전비용에는청사건 표 4. 연방기관의건설비용 항목비용( 마르크) 연방의회의사당개보수 6억 연방하원관련신축 19억 2800만 연방총리관저신축 4억 6500만 연방정부청사개보수또는신축 29억 1600만 연방상원관련개보수또는신축 2억 자료: 독일연방건설교통부홈페이지자료. 2003. http://www.bmvbw.de/cms-aussen-speziel/ 설비, 토지구입비, 주택공급비, 본에대한보상비등이포함되었다. 법에정한이전비용의상 한선은대체로지켜진것으로평가받고있다. 수도이전과관련하여일반건설공사에약 61억 마르크( 표 4 참조), 베를린과브란덴부르크지역의주택건설에 16 억마르크, 수도이전과관련한 교통인프라건설에 10 억마르크가각각소요되었다. 이러한투자금액외에도추가적으로 90억 마르크가기타인프라건설에투자되었다. 본에서이주하는직원들을위해 9,100호의주택이필 요하게되었는데, 이는베를린에위치한군사시설이전지의기숙사개조, 베를린과근교지역의 주택신축등을통해주택을공급하였다. 베를린이동서베를린으로분단되었을당시서베를린지 역에주둔하였던미군이통일이후철수하면서많은군숙소들이남게되었는데, 이러한숙소들이 개보수를통해이주직원들을위한주택으로서제공되는경우가많았다. 수도가베를린으로이전함으로써기존수도였던본의도시경제에대한경제침체가우려되었다. 1993 년본에서발간된한보고서에따르면, 본전체일자리가운데약 1/3에해당하는 45,000개가 수도기능과관련되어있으며, 이중절반에해당하는 22,600개의일자리가수도이전으로인하여 줄어들것이라는예측도있었다 ( 김인희 2003). 그러나이것은기우에지나지않았다. 베를린/ 본- 법(Berlin/Bonn-Gesetz) 에따라연방정부부처가운데 6개가본에남은것외에도다수의연방 7
기관및연방에속한각종단체와협회들이전부혹은부분적으로본으로이전하였기때문이다. 본보상에관한협정 에따라연방정부는 행정기관및국제기구의본유치, 본에 1995 년부터 2004년까지연방정부가 28 억마르크지원 등을추진하였다. 이에따라약 24개의연방 기구와행정기관들이베를린과라인-마인지역에서본으로이전을하면서약 6,550개의일자리가 창출되었다. 또한공기업과민간기업들도다수본에입주하기시작하였고, 1996년부터는 10개의 국제연합(UN) 관련기관들도본으로이주하였다. 본은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Nordrhein-Westfalen) 의대도시권과도시경제가긴밀히연계되어있어서수도기능의이전에따 른충격을자체적으로흡수해낼수있는잠재력을갖고있었다. 본은이전의연방수도에서이제 는보다경쟁력을갖춘국제도시로서변모하고있는것이다. 3. 수도이전의성과 독일의수도이전은통일이라는국가적전환기를거쳐오면서당초계획했던시간과비용의범 위안에서비교적순탄하게이루어졌다고할수있다. 연방건설교통부장관만프레드스톨페 (Manfred Stolpe) 는베를린/ 본- 법(Berlin/Bonn-Gesetz) 10주년기념일을맞아 2004년 4월 25일수 도이전이법에따라만족할만한성과를거두었다는촌평을한바있다. 이것은수도이전이국민 적합의를바탕으로이루어졌으며, 비용을최소화하기위한노력을기울임으로써재정적부담도 크지않았기때문에가능한일이었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의통일과정에서연방정부가이 른바통일비용으로공식적으로구동독에투입한전체비용이약 1 조마르크에이르는데, 이가 운데수도이전비용은 200 억마르크(2%) 에불과했다. 이것이가능했던것은앞에서도언급한 바와같이독일의수도이전이새로운수도를건설하는방식이아니라이미기본적인인프라가 확보된도시로이전하는것이었기때문이다. 그리고통일수도가된베를린에서는수도이전에 따른과도한인구집중과같은부작용이발생하지않았다. 1990년통일당시베를린의인구는 346 만명이었는데, 수도이전이종료된지 5년이지난 2004년 3월현재베를린의인구는 339만 명으로통일당시보다도오히려감소하였다. 물론이것은도시의광역화, 교외화에따른결과이 기도하다. 4. 수도이전에따른문제점 독일의수도이전이성과만을나타내고있는것은아니다. 무엇보다도가장커다란문제점은행 8
정기능의분산에따른정부와의회간업무협력의비효율성이다.50년동안수도였던본에대 한배려측면에서 6 개정부부처가본에남게되었지만, 결과적으로이것은긍정적인평가를받기 어렵게되었다. 왜냐하면잔류기관에따른고용유지효과는그다지크지않은반면에본과베를 린을오가야하는업무상의시간적, 금전적비용지출이컸기때문이다. 본에는독일내타지역 에있던연방기관들이이전해온것외에도도이체텔레콤(DT) 등대기업들의본사가이전해옴으 로써새로운활력을얻게되었다. 결국시장이정부의빈자리를메우게된것이다. 반면에잔류한 연방부서들은베를린과의업무협의를위해많은비용을지출하게되었다. 인터넷등첨단통신 매체가발달해서과거와같이거리의문제가커다란장애요인은아니지만의원내각제국가에서 의회와장거리에위치한곳에일부나마정부부처가위치하고있다는것은업무의비효율이라는 문제를야기할수밖에없는것이다. 2001년 5월기준으로 900명의연방정부직원들이주말에본 과베를린을이동하는것으로나타났는데, 이것은정부기능의분산이정부차원의비용지출문 제뿐만아니라직원들의개인적인가정생활측면에서도많은비용을요구하고있음을의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독일의행정기능분산은우리에게분산에따른비용의문제에대한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있다. 이미본은잔류한정부부처보다는민간기업들의진출과기타공공기관의입 주를통해수도이전의충격을흡수해내고있다. 이러한측면에서연방정부부처들이앞으로도 계속본에남는것은큰의미가없을수도있는것이다. 정부부처의분산배치가한시적으로는 지역경제에도움이되겠지만, 결국중요한것은정부부처의배치는정부업무의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바라볼필요가있는것이다. 정부부처보다는공공기관의이전이나기업유치와같은 다른수단을통해서도본의경제활력이유지될수있었다는점을우리는주목할필요가있다. 9
동독이탈주민에대한구서독정부의정책 김영윤, 통일연구원선임연구위원 2003년 7월 구서독정부는독일통일이전의동독이탈주민에대한정책을인도적, 동포애적차원에서추진하였다. 동독의이탈주민을신분과관계없이독일국민으로간주하여수용하였으며, 서독주민에상응하는대우를했다. 이탈주민의자립정착을위해구서독정부는재외국민연금법에따라연금제공및의료보호, 실업보호, 재해보호, 공공부조등사회보장제도를이들에게적용하였다. 주거지원, 정착금지급, 교육지원을비롯하여, 동독에서취득한각종자격이나증명서도인정해줌으로써이탈주민들의생활이안정될수있도록함은물론, 이들이서독사회에자연스럽게동화할수있도록했다. 서독의민간단체들도이탈주민의사회적응력을높이기위한독자적인프로그램을마련, 연방및주정부정치교육센터등을통해교육프로그램을실시하였고이탈주민들이자주적노력과자기책임하에사회생활을영위할수있도록지원했다. 이탈주민에대한구서독의정책은생존이뒷받침된상황에서누구든지자신의능력을최대한발휘할수있도록하는사회적환경속에서추진되었다는점에서, 또한이탈주민에대한법과제도가누구에게나동등하게적용되고사회보장제도를통해그들을보호했다는점에서많은시사점을제공하고있다.
1. 이탈주민의형태와시기구분 통일전구서독지역으로이주한주민들은그형태에따라 1 합법이주민 ( Übersiedler) 탈출이주민(Flüchtlinge) 3 해외에서온귀향자(Aussiedler) 등으로구분된다. 2 합법이주민은구동독정부의허가를받고서독으로이주한자들이다. 이들은구서독에 가족이있는경우로극히제한된허가를받을수있었던사람이거나나이가많은동독인들 로더이상구동독경제에이바지할수없다고판단된사람들이다. 그외에도정치범으로 동독에구금되어있다가서독정부가일정액의석방료를지불하고구서독으로이주시킨사 람들도있다. 탈출이주민은구동독정부의허가를받지않고구동독을탈출한사람들이다. 베를린장벽 설치(1961.8.12) 이후이들의수는급격히줄어들었으나, 통일전까지매년평균 2만명에가 까운동독주민이동독을탈출했다. 이들중에는구서독여행허가를받아방문한후, 구동독 으로돌아가지않고서독에머문사람들의수도포함된다. 해외에서온귀향자는구소련지역을포함해동유럽지역에흩어져살다가독일로귀 환한독일국적자들을가리킨다. 여기에는독일민족이라는이유로구금, 억류또는강제 납치되었다가제2차세계대전이끝난 1945년 5월 8일이후석방되었거나독일군인출 신의전쟁포로로서 1946년 12월 31 일석방된자및그들의자녀들도포함된다. 동독지역주민의서독지역이주는역사적배경과탈출환경에따라세단계로나눌수 있다. 첫번째단계는독일패망이후 1961년 8월베를린장벽이설치되기전까지의기간으 로대규모탈출이발생한시기다. 이기간초기에는구소련점령지역에살던주민들이소련 의강압통치를견디지못해서방지역으로이주또는탈출한사람들도많았다. 두번째단 계는베를린장벽설치이후 1989년 8월동독주민의대규모탈출이발생하기이전까지의기 간이다. 이기간에는동독정부로부터합법적으로이주할수있는요건이완화됨으로써이탈 주민의수가크게늘어나기도했다. 세번째단계는 1989년동독의국경개방조치가이루어 지고동서독간화폐 경제 사회통합이발효된 1990년 7월 1일이전까지의기간으로동독 주민의자유의사에따라서독지역에대규모이주가발생한시기를말한다.
2. 동독이탈주민의규모 베를린장벽설치이전(1961) 까지구동독정부는내독간국경통행제한조치(1953) 및국 경차단조치를시행했으며탈출자에게발포했다. 당시동독주민들은 4대국합의에따라왕 래가비교적자유로웠던베를린을이용하여탈출했다. 탈출의주요동기는기본권제한과정 치활동금지에대한저항과동독내강제집단화및국유화에대한반발등의요인이대부분 이었다. 당시동독을탈출한사람은약 340 만명에달했다. 베를린장벽설치이후구동독정부는내독간국경에더많은월경차단장치인전자감 응자동발사기를설치하고지뢰를매설함으로써동독에서탈출하는것을어렵게했다. 1982 년에는국경법을제정, 탈출자에대한총기사용을법제화했다. 그렇지만내독국경및베를 린장벽을통해죽음을무릅쓰고탈출하는자들이많았다. 1989년 11월 9 일베를린장벽이붕괴될때까지동독을탈출, 목숨을잃은동독주민들은 957 명에달했다. 동독주민들은비교적여행이용이했던동구권국가소재서독공관을통해 탈출하기도했으며, 서독의공연에초청을받거나국제경기에참가하기위해동독당국에서 정식여행허가를받은예술가나운동선수들이공연이나경기후동독으로돌아가지않은사 람들도많았다. 또한당시구동독정부가베를린장벽설치등내독간국경차단에대한국 제적인비난을고려, 제한적이나마합법이주정책을취함에따라정식허가를받아서독으 로이주한사람들도있었다. 이에따라수십만명의동독주민들이이주허가를신청했으나 1984년의경우약 35,000 명만허가되었다. 허가를받지못한사람들중에는제3국및동베를 린주재서독상주대표부를점거, 농성하여동독탈출을시도하기도했다. 합법적이주가허용 된사람중에는연금을수령( 여: 60 세, 남: 65 세) 하는경제적무능력자와서독정부와비밀거 래로석방되는정치범들이주를이루었다. 1964년부터 1989년까지합법적인절차에따라서독으로이주한동독주민은정치범 33,755 명, 부모와결합한어린이 2,000 명, 그외 215,019건의가족결합등 1988년 12월까지 총약 38 만명에달했다. 정치범석방과가족결합등을위해서독은총 34억 3,600만마르크 를동독측에지불했다. 합법적이주에는주로정치적인억압이나표현자유의억제, 여행제 한, 생필품부족, 미래에대한불확실성에대한대안마련을포함, 연고관계에따른가족결
합이중요한동기로작용했다. 1989년여름이후동서독간화폐 경제 사회통합조약이발효(1990.7.1) 되기이전까지동 독주민의서독이주는유리한국제환경을이용한대규모탈출과피난이주를이루었다. 동 독이탈주민들은 1984 년의경우와같이당시동유럽국가인체코 폴란드 헝가리주재서독 대사관을점거하고서독으로이주시켜줄것을요구하거나동베를린주재서독상주대표부를 점거하여서독으로의이주를요망하기도했다. 이들은주로동독지도부의개혁 개방거부에 대한집단적저항을비롯하여동서독지역간신속한생활수준의평준화에대한기대로서 독이주를결행했다. 총탈출 이주자는 1989년 1월부터 1990년 6월 30일까지합법적이주를 포함총 58 만명에달했다. 동서독이통일된지 13년이된현재에도구동독주민의구서독 이주는계속되고있다. 그러나이는국내거주지변경이라고보아야할것이다. 종합하면, 종전이후 1990년 6월 30일까지대략 460만명의동독주민이서독으로이주해 왔으며, 이는연평균 10 만명의수준에달하는것이었다. 이기간에동독정부의허가를받지 구동독지역이탈주민의시기별구분 기 간 이주현황( 명) 합법이주탈주민계 연평균규모 종전이후 ~1961.8.12-3,419,042 3,419,042 201,120 1961.8.13~1988.12 381,376 234,684 616,060 22,002 1989.1~1990.6.30 101,947 480,291 582,238 388,159 계 483,323 4,134,017 4,617,340 100,377 않은무단탈주민은 413만명으로전체동독지역이주자의약 90% 를기록했다. 한편, 동서 독분단기간에동구권지역을포함해서동독지역에서온이주민은약 1,500만명으로연평 균 33 만명에달했다. 특히구소련의붕괴와동구사회주의국가들의변화에따라매년 20만 명이상의실향민들이독일로이주하고있어독일정부가당면한큰문제중의하나로부각 되어있는실정이다.
3. 이탈주민에대한서독정부의수용조치 동독이탈주민에대한서독의정책은기본적으로동독주민의재사회화와서독과의통합 차원에서추진되었다. 동독주민들을서독사회로받아들이는문제는서독사회에서한번도 사회전체의문제로부각되지않았다. 이는개인차원의문제로인식하여, 정부차원의사회 이슈로바라보지않았기때문이다. 동독주민을서독사회로통합하는것은두가지차원, 즉제도적차원과사회적차원에서실행되었다. 제도적차원은비교적단기간인 3~10일안에 해결되었던반면, 사회적통합은장기간에걸쳐이루어졌다. 사회적통합은개인의생활과 관련, 새로운사회의틀에적응하기위한학습과정이필요했기때문이었다. 아래에서는부 문별로동독주민에대한서독정부의조치를제시하고있다. 1) 독일국적취득 1949 년동서독이각각헌법을제정하고정부를구성한이후에도동독주민의탈출이계속 되자, 서독정부는서독으로피난오는자들의수용여부에관한국내법제정이필요하게되 었다. 1950년 8월 22 일서독정부는 긴급수용법 및그시행령(1951년 1 월제정) 을마련 했다. 긴급수용법제정의배경은첫째, 탈출주민문제가양독간정치쟁점임을고려하여동 독지역에서오는지나친피난민의유입을법적장치를통해적절하게통제하고, 둘째, 각지 역주정부의경제적여건을고려하여수용피난민을적절히배분하고, 이들이새로운체제에 조속히동화될수있도록하는데있었다. 당시동독지역을포함하여구독일제국의영토에 서서독으로쫓겨오거나이주한독일난민의수는 1,000만여명으로서독정부에게는엄청난 부담으로작용했다. 따라서, 서독정부는본법을제정하여피난민문제를법적으로제도화하 고이주민들의정착을지원하려했다. 그러나서독정부의이와같은의도는실현되지못했 다. 서독은동독주민을자국민으로간주, 이들이서독의영토에들어오거나제3국의서독대 사관과영사관에보호를신청할경우, 서독시민과동등한기본권의보호를받을수있도록 했기때문이다. 즉, 서독정부는 1949 년제정한기본법에서이탈주민의거주이전의자유( 제 11 조) 와함께구동독지역주민도독일국적을소지한다고규정( 제116 조) 했다. 그리고서독 은동독이 동독국적법 을제정(1967.2.20) 한이후에도이를인정하지않았다. 또한, 동서 독이기본조약을체결(1972.12.21), 사실상 1국가 2체제를인정했음에도불구하고동독주민 의국적법적용문제에는변화를보이지않았다. 다시말해, 기본조약이동독인의국적문제
에관여할수없도록했다. 이는서독이기본조약에첨부된외교문서를통해 동서독간체 결된기본조약이동독주민의국적권과관련된문제를규제할수없다 라고명백하게밝히 고있는데서도잘드러나고있다. 이와같은국적법적용은동독이탈주민들의서독정착 에정당성을부여하는중요한법적기반으로작용했다. 긴급수용법이제정될당시동독이탈주민들은서독의거주허가를받기위해그들의이 주가 1 직계존 비속간의이산가족상봉을위한피난, 2 서독에서주택과직장을보장받을 수있다는확실한증명을제시할수있는피난,3특별한정치적인이유로긴급한상황에처 했기때문에시도한피난,4수용되지않을경우당해자가심한어려움을겪게되는피난등 에해당됨을서독정부에증명해야했다. 이를증명하지못하는사람들은거주허가를받지 못했지만, 그렇다고해서이들을동독지역으로강제송환하지는않았다. 거주허가를받지 못한사람들도계속체류하면서피난민담당관청이아닌사회보장청이나종교계통의구호 기관에서구호를받을수있었다. 정치적인측면에서도서독지역에일단이주한이후부터는기본법상보장된권리를차별없 이보장해야한다는국민적합의가조성되어있었다. 이로써, 서독내구동독피난민들의수용절차는해당요건충족여하에따라허가를내 렸던선별허가제에서단순등록으로끝나는등록수용제로바뀌었다. 특히, 구동독공산정 권이점차독자적인국가임을강조하며, 국경선을봉쇄하고베를린장벽을구축한이후부터 는피난민의거주허가신청이기각되는사례가없었다. 그결과, 허가증발급자체가무의 미했다. 수용허가신청을하지않아도동독에서온모든이탈주민은기본법이정한국민 의권리를당연히누릴수있었다. 2) 동독이탈주민수용과정 이탈주민에대한구서독정부의정책은기본적으로이탈주민들이단순히난민차원이아 닌동포로서서독생활에적응할수있게하는데중점을두었다. 이탈주민의수용은연방 내무부산하연방행정청이맡았다. 연방행정청은이주자심사및허가서발급, 이주민의입국 절차결정, 수용소( 임시숙소) 건립및관리를비롯하여이탈주민의지역별분할등을관장
했다. 임시숙소는기센, 프리드란트, 뉘른베르크, 우나-마센등국경부근에총 4개가건립되 었다. 이곳에서동독이탈주민들은신원확인( 개인신상서작성, 휴대서류기록, 이주사유, 국경출입일자와장소, 직업, 최후거주지및일자리등) 을거친뒤, 이탈주민으로등록을 했다. 이어간이건강검진과함께정착지로향하는일정및지역조정, 실업및연금자녀양 육등에대한사항의자문을받을수있었다. 이과정에서보안담당전문가들은이탈자들이 동독의정보기관요원이나비밀경찰, 군인, 경찰등동독기관의요원여부를가리기도했다. 서독의연방정보기관요원들이동독탈출자들에대한조사작업을수행했으며, 이들의업무 는대외적으로공개되지않았다. 일정조정과지역할당은해당도시의거주자숫자와규모에따라결정되었으며, 노동력 부족으로특별히이탈자수용을원하는지역은규모와상관없이수용할수있도록했다. 지 역을할당받을때이탈주민은자신의의견을진술할수있는권리를가지고있었다. 만약 서독의어느특정지역에친척이있음을증명하고그곳에거주자와일자리가주어질경우자 신이원하는지역으로할당될수있도록했다. 이탈주민으로등록된자에게는등록증발급과 함께환영금으로일인당 200 마르크(1 마르크 = 약 600 원) 가지급됐으며, 별도주정부재원으로임시 숙소에서지낸후사회보장차원의혜택을받기시작할때까지가장에게는일당 30 마르크, 피부양 자 1인당 15 마르크씩이지급했다. 이와는별도로기독교나가톨릭단체에서일인당일괄적으로 50 마르크를지급했다. 이탈주민중에는긴급수용시설을이용하지않는부류도있었다. 동독을이탈한사람모 두가임시숙소를거쳐야하는의무는없었기때문에친척이나친구들을찾아직접여행을 한사람들은서독정부의직접적인수용조치를받지않을수도있었다. 다만, 새거주지에 도착한이탈자들은일주일이내주민등록을관할하는관청에가서주민등록신고를해야했 다. 이와같은신고는신분증명과여권발급및사회보험가입을위한기본의무의하나로 반드시필요했다. 일반적으로이탈주민들은입국후처음 2~3일간은연방수용소에서체류한후주정부수 용소로분산되었으며, 주정부수용소에서다시 2~3일간체류한후최종정착지로분산되었 다. 연방수용소에서주정부수용소까지의여행비와이삿짐운송비는연방정부에서지급했으 며, 개별주택이마련되기전까지는임시거주지에서생활했다. 임시거주지는공동취사장이
있는기숙사에서부터개별부엌이딸린개인또는다세대주택에이르기까지각주나지방자 치단체의사정에따라다양했다. 수용자가갑자기많아질경우호텔또는기타유료숙박시 설에투숙시키기도했다. 각주정부수용소에서등록절차및임시거주지결정시까지약 2 주정도, 정식주택이공급될때까지는 2~3 년이소요되기도했다. 1989 년후반동서독장벽붕괴전후동독에서온탈출 이주자수가급증함에따라이탈주 민의체계적인등록, 신체검사, 상담지원등이더이상이루어지기어려웠다. 베를린장벽 붕괴이후한꺼번에밀어닥친동독주민들을수용하기위해연방정부는연방군시설, 국경 수비대시설, 경찰서, 학교, 호텔, 천막시설등을임시수용소로사용하기도했다. 이기간에 는많은이탈주민들이긴급수용법의지원혜택을제대로받지못하는상황이발생하기도했 다. 이에서독정부는1989년 7월임시거주지확보에관한법률을제정하여대규모탈출자 들의수용시설을확보하는대응책을마련했다. 동독주민의대규모입국으로서독의사회 경제적불안이점차증가할수있다고판단한서독정부는탈출자문제의조속한해결과함 께동독내부의개혁을촉구, 사회적안정을기하는방향에정책적주안점을두었다. 이어 1990년 7월 1일에는이주민의임시수용에관한재정지원법과수용법폐지에관한 법률을제정, 발효시켜긴급수용법에근거한서독이주동독주민에대한특별수용절차의 적용을종료하고이들의정착을위한모든종류의정부지원을중단했다. 4. 동독이탈주민에대한정착지원제도 이탈주민에대한구서독정부의정착지원은동독과서독사회가지난 40년동안이질적 인사회발전을거듭하여왔기때문에실제로이들이서독사회에적응하는데에는많은어 려움이있을것이라는문제의식에서출발하고있다. 이탈주민에대한구서독정부의지원 은서독사회에대한적응력제고와보상이라는포괄적인정착지원방법을통해이루어졌 다. 그목표는첫째, 재외국민연금법에따른연금제공및의료보호, 실업보호, 재해보호, 공공부조등사회보장제도의법적규정을통해서독으로이주후생활안정을얻을수있 도록하는것과둘째, 서독사회에자연스럽게동화될수있도록함으로써재사회화가이루 어지도록하는것이다.
1) 주거지원및정착금지급 이탈주민이각주로분산된이후주거가결정되지않을경우에는앞서언급한바와같이 관할주정부가이주자를위해임시수용소나호텔또는민간임대주택등임시거처를마련 하여일정기간거처할수있도록했다. 각주정부는공공임대주택인복지주택 (Sozialwohnung) 을이탈주민을위한주거공간으로건설하여우선거주할수있도록했으 며, 이탈주민들이서독으로이주한후일정기간소득에비해제반지출요인이많은점을 감안하여일반영세민에게제공하는월세보조금특례규정을적용, 임대주택월세보조금 (Wohngeld) 신청자격을부여했다. 또한, 이탈주민이주택을신축또는구매하고자할경우 에는부담조정법에따라연방정부재정에서장기저리융자금을제공했다. 주택문제이외에 도가재도구마련을위한비용부담을완화하기위해서독정부는이탈주민의가구규모를 감안, 장기저리의융자금을제공했다. 서독도착 6 개월이내가계생활및주거와관련, 저 리의융자를받을수있도록했는데, 융자금은 2년거치 10년상환의조건으로독신자에게는 3,000 마르크, 가족일경우가족당 4,000마르크외가족일인당 1,000마르크로최고 10,000마 르크까지지원했다. 한편, 이주로인한소득단절을보상하기위해서독정부는정착금과실업부조금을지급 했다. 정착금은독일이주 1년전기존거주지역에서최소한 150일간임금노동자로서종사 한경력이있는이주민에게제공되었다. 정치범또는정치적이유로취업활동에지장이있 었을경우이에해당되는기간을취업기간으로인정해주었다. 정착금은개별이주민의종 전소득을서독임금으로재평가한후이를 5등급으로나누어각해당등급의 63% 를, 최고 312 일까지지급했다. 실업부조금은자영업자와가족종사자에게제공되었는데, 정착금의경우와같이독일이주 1년전최소 150 일간취업활동에종사한경력을지급요건으로두었다. 여기에도이주민과유 사한교육수준및직업능력을가진서독근로자의임금을기준으로독신자의경우이의 56%, 부양가족이있을경우 58% 를매월지급했으며, 지급기간에는제한을두지않았다. 정착금또 는실업부조금을받는기간은수혜액을기준으로하는연금보험료를당사자와연방노동청이 반씩부담하는조건으로연금가입기간으로인정해주었다. 그외에도이탈주민에게취업상 담, 직장알선, 구직활동비보조, 이사비용보조, 취업장비구입비를대부해주었다.
한편, 전쟁포로혹은정치범의경우에는본인이신청할경우귀향자재단이나정치원호 재단에서일시금형태의보상금을받았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당시부상자혹은희생자의 가족은연방전쟁보상법및연방원호법에따라원호금을받았으며, 이주이전거주지에서재 산의압류나손괴등의피해를입었을경우부담조정법에의거손해배상을청구할수있도 록했다. 2) 사회보장혜택 동독이탈주민들에게연방사회보장법에따라서독주민에준하는의료보험, 연금보험, 실 업보험및산재보험혜택을주었다. 연금보험과관련해서는서독이주전취업기간, 전쟁또 는정치적사유로인한구속, 교육, 실업, 질병기간등을모두연금기간으로산입했다. 그러 나 1990년 5월 18일동서독화폐 경제 사회통합조약이체결된이후이주한동독주민의경 우에는동서독통합경과규정에따라동독의연금규정을적용했다. 산재보험의경우, 동독에서발생했던산재도보험급여대상으로인정했으며, 의료보험은 출신지역을떠나 2개월이내에입국한자로서정식거주허가를받은이후 3개월이경과한 질병에대해서는급여를받을수있도록했다. 또한, 실업부조를받는이탈주민에대해서는 실업부조를받는동안당사자의의료보험료를연방정부가부담했다. 이와함께출신지역 에서근로활동중산업재해를당한후장애상태로이주한이탈주민에대해서는서독산재 보험의수혜자격을부여했다. 그리고산재보험당사자의종사업종이출신지역산재보험 적용대상에서제외되어급여혜택을받지못했을경우라도서독제도에상응하는보험급여 를지급했다. 그밖에도생계가어렵거나기타질병, 장해등특수상황에처한이탈주민에게는일반 서독주민과동등한조건으로생계비및거주비, 의료보호를비롯한공공부조차원의지원 을제공했다. 특히, 전거주지에서신체적또는경제적으로막대한불이익을당한이탈주민 ( 전쟁포로, 정치범등) 에대해서는사회보장차원의지원외에도별도의피해보상을해주었 다. 그밖에도정착초기일자리를찾지못한이탈자들은서독의사의진단을통해이탈자 신분을 병가 상태로두어, 이기간에국가에서질병보조금을받을수있게함으로써단기 재정적인어려움을극복할수있도록했다.
3) 교육지원과자격인정조치 서독정부는이주민의학교교육, 직업훈련교육을위해이들이일반학교및직업학교의 교육과정을이수할수있도록함은물론, 각종연수교육, 직업전환교육, 언어, 직업관련 세미나, 대학입학준비세미나등에참가할수있도록지원했다. 교육관련지원금에는교육 비외생계비, 기타비용, 보험비용등이있었으며, 지원금신청은서독도착즉시부터24개 월이내에하도록했다. 지원기간은원칙적으로 36 개월, 예외적인경우에한해 48개월까지 연장해주었다. 한편, 연방교육훈련촉진법에따라통상 30 세미만이주민에게대학교육비를지급했으며, 학자들을위해경력에도움이될수있는프로그램을계획, 추진했다. 이탈주민이취득한각종자격은주정부가서독의자격시험과내용면에서동등하다고전 제할경우그대로인정했다. 동등성여부는관계인정기관이결정했다. 이는동독의자격증 을그대로인정하는것이아니라서독의자격증으로 전환 하는것을의미했다. 이와같은 기존교육내용에대한인정은이탈주민으로하여금노동시장에서균등한취업기회를가질 수있게하며, 실업수당및실업보조금수령액뿐만아니라, 연금산정기간결정에도도움 을주었다. 물론, 학력과경력을동서독간의변화된노동력수요나기술력차이로그대로인 정하기에는제한적이었기때문에실제로이주민이직업을갖고정착하는데어려움이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동독에서취득한자격증에상응하는직업을가질수있도록하기위해필 요한경우보충교육을실시했다. 또한, 서독교육기관이동독의대학교수와학자들을수용 할의사를보일경우, 2 년동안연방정부에서일체의인건비를부담했다. 이들교육기관은 2 년후채용여부를결정할수있도록했다. 4) 취업상담및주선 이탈주민에대한취업상담, 직업교육및취업알선등은거주지의노동기관에서전담했다. 연방노동청은이들의취업촉진을위해소요되는비용, 예를들어직업교육기간중생계비보 조, 여비, 장비구입에소요되는비용을무상지원하거나대부해주었다. 자영업을원하는자는 유리한조건의융자를제공했으며, 자산형성장려금을지급했다. 농업에종사하고자할경우
보조금과함께 10만마르크에서 15 만마르크에이르는장기저리의융자금을지원했다. 서독정부가동독주민의정착을위해지원한내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5. 이탈주민의서독사회통합프로그램 동독이탈주민들은사회보장차원의지원을통해생활의안정을꾀할수는있었으나, 체제및문화적이질성으로인한사회적응에는문제가많았다. 새로운세계관과가치의식에적응하는데시간이필요하였으며, 적응과정에서심리적불안을겪을수밖에없었다. 이와같은점을고려하여서독정부는, 이탈주민이서독사회에동화하는것을돕기위해현지주민과이탈주민이파트너라는관계를설정하고, 그들스스로체제에자연스럽게적응해나갈수있는방안을마련했다. 예를들어, 시민대학(Volkshochschule) 프로그램에서이탈주민들 동독이탈주민정착지원내용 거주지마련 임시수용소주택소개복지주택우선입주권제공 친인척이나기타연고를통한주택구입이불가능할경우, 주택건설법제25조에따라동독출신이주민에게 5년동안주택입주혜택 생활상담과후견 생활용품, 가구구입을위한저리융자 새로운생활환경소개 독신자, 2인이상가족기본금기타가족 1인당 학력인정동독취득학교졸업증명서나직업교육자격증명서인정 3,000DM 4,000DM 1,000DM 최고액연방실향민법 10,000DM 교육촉진금지원교육기간에생활비보조연방교육촉진법 대졸자사회진출보조직업정착지원학업추가이수시장학금지원 자녀수당자녀수에따라양육비지급연방자녀수당법 사회복지지원의료보호, 질병급부연금보험 실업보험 실업수당산재보험전쟁희생자원호사회부조 의료보험법에따른보험급부금수혜 연금법에다른개별적급부금수혜( 동독, 동베를 린에서의기여금불입기간포함산정, 자영업 자의기여금추가납입시연금대상에포함 ) 동독에서의실직기간, 정치범으로서구류기간, 자영업기간도취업기간에포함산정 단체협약임금의 63% 서독보험법에따른급부제공 연방원호법에따라원호 생계비지원, 주택임대료지원, 난방비보조금, 의복과가구에대한보조금
이현지주민과만나서로대화할수있도록했다. 즉, 시민대학수강자들을대상으로저녁시간초등학교나고등학교강의실을이용, 현지주민들도참석한가운데대화의광장을열어이주동기및상황, 독일현지생활등에대해토론할수있는기회를가질수있도록했다. 여기에서는먼저주제발표를한후서로질문을하거나일정주제에대한영화나비디오를함께보고토론할수있도록했다. 또한, 시민대학에참가한현지주민들과이탈주민들이같이야외로소풍을가거나, 연방의회, 박물관등을방문하면서자연스럽게대화할수있도록했다. 그밖에도이탈주민들이체육동호인단체에가입하여활동할수있게함으로써공동체의식을함양하고접촉을통해자기발전과성취욕을북돋울수있도록했다. 연방및주정치교육센터와동화대책담당단체들은이탈주민들의참가신청을받아주말세미나를마련했다. 세미나의주제는일반적으로시민사회의기능과역할, 학교와교육, 직장생활, 법률과경제문제, 보건, 교회와종교, 휴가와여가선용을비롯하여교육과문화등다양했다. 그러나정치교육과관련해서는사회주의이데올로기를버리고새로운자유민주주의사상을주입시키기위한, 다시말해소위사상전환교육은실시하지않았다. 이는이데올로기가중요하지않았기때문이아니라, 이탈주민들이민주시민으로서모든것을자체적으로판단, 결정하고직접해결할수있게하는데역점을두었기때문이었다. 서독의정치, 경제, 사회의작동원칙과기능을설명해주고, 각자가직접보고경험함으로써스스로판단할수있는기회를제공하려고했기때문이었다. 또한, 동독이탈주민들이서독의매스미디어와동서독간친지방문, 전화, 우편교류등을통해서독체제와사회에대해이미상당한정도알고있었기때문에정치사상교육이불필요하다고판단한측면도있었다. 그렇지만연방주의정치행정기구및그기능등에대해서는학습이필요할것으로판단하여정치 교육에참가할수있도록했다. 이탈주민을위한사회동화프로그램은민간단체가독자적으로자문, 세미나및기타동화프로그램을마련, 운용하고, 정부는이들단체를재정적으로지원하는방법을취했다. 동화프로그램을운용한민간단체로는카리타스(Karitasverband), 디아코니재단(Diakonisches Werk), 근로자복지단체, 독일교회협회(Deutsche Kirchen Gemeinde), 독일가톨릭난민협의회및아커만협회(Ackermann Gemeinde) 등이있었다. 이들비정부단체들가운데기독교와가톨릭단체는독일사회관계협회 (Deutsche Gesellschaft für Sozialbeziehungen) 를만들어동독의군인, 경찰과기타무력단체에속했던자들을대상으로그들의정착을지원했다. 이들이서독에서일자리를찾아정착하기가비교적어렵다는점을감안했기때문이었다. 본단체의운영책임은퇴역장교가맡았으며, 자원봉사자들이이를뒷받침했다.
6. 맺음말 이탈주민에대한서독정부의정책은, 이탈주민이가능한한빠른시일내서독주민과동등한생활을영위할수있게했다는측면에서볼때성공한정책이라고할수있다. 물론, 이탈주민들에게는차별화된이주동기, 체제의상이성, 이탈주민의적응력을비롯하여서독주민의동독주민이주에대한차별적반응등에따라서독사회에정착하는데겪는일반적어려움이없었던것은아니다. 그러나직업과삶의질, 장래에대한불확실성으로생명을건탈출을한사람들이나정치적박해와불이익을감수하면서동독당국에이주신청을하고장기간을기다린결과이주허가를받은사람들은새로운체제에대한적응력이컸다. 또한, 대부분의이탈주민들도서독체제에무난하게적응하는경향을보였다. 그렇지만일상생활의각영역에서다양하게경험하게되는이질적인면을완전히극복하는데는어려움이많았다. 그러나앞서언급한바와같이서독정부의이탈주민에대한제반정책은그와같은변화된환경에서발생하는어려움을극복하는데크게기여했다. 합법이주민이나탈출이주민에관계없이모두독일국민으로간주하여수용했던정책은, 이들이서독사회에적응하는데큰도움이되었으며, 서독의사회보장제도또한이들에게서독주민과다름없이경제적인안정을이룰수있는바탕을제공해줌으로써서독사회에의적응을가속화시켰던것으로판단된다. 서독의이탈주민에대한정책은생존이뒷받침된상황에서누구든지자신의능력을최대한발휘할수있도록하는사회적환경속에서추진되었다는점에서우리의관심을불러일으키기에충분하다. 이탈주민의효율적정책추진은바로이탈주민에적용하는법과제도가누구에게나동등하게적용되어야함과동시에사회보장제도를통한자연스러운정착지원이이루어질수있게하는데있음을일깨우고있는것이다.
분단기동서독간교통교류실태와서독의대동독교통부문지원정책 최연혜, 한국철도대학운수경영학과교수 2002년 11월 지난 9월 18 일경의선과동해선의철도및도로연결공사가착공되었다. 실로반세기가넘게지속되어온분단과단절의역사를극복한다는감회와더불어, 철도및도로의연결이한반도와주변국가들에게가져올다양한파급효과들에대한기대를모으고있다. 이러한기대에부응하기위해서는교통인프라의연결과이의효율적이고경제적인운용에대해확고한정치적의지와더불어실용적인차원에서현안문제들을사전에검토하고, 대처방안을강구함으로써시간과시행착오를줄여야한다. 여기서는분단기간의동서독간교통교류실태와서독의대동독교통부문지원정책을연구하였으며, 이를토대로다음과같은결론을도출하였다. 동서독은 40여년의분단기간에베를린봉쇄등동독의방해로실질적인교류가미미했던때는있었지만교통교 류가완전히단절된적은없었다. 서독정부는한결같이동서교통로연결을통한인적교류활성화를위해노력했다. 1960년대말부터통일정책으 로추진된소위동방정책의가장중요한목적도적절한교통정책적합의점을도출함으로써동서독간의인적교류를확대하는데있었다. 서독의대동독교통부문지원정책은첫째, 일명통행료일괄부담금과둘째, 교통인프라시설에대한투자등두 가지형태로구체화된다. 통행료일괄부담금은서독정부가매년동독에지불한금액으로특정목적과무관하게유입된반면, 교통인프라건설투자는특정사업과관련하여지불되었고, 동독으로부터반드시상응하는경제적및경제외적대가내지는반대급부를받아냈다. 동독의교통인프라에대한막대한투자에대해서독에서도야당과언론을중심으로퍼주기라는비난이비등하였다. 그러나서베를린이동독내에위치하는특수한상황은서베를린으로가는연결통로확보라는명분을만들어줌으로써국민의합의를이끌어내는데상대적으로유리하였다. 교통부문에대한서독의대동독지원은동독정부의재정난해소에결정적역할을하였다. 통일이되고난후의 시점에서평가할때, 교통인프라건설이막대한투자액과장시간을요한다는점, 그리고타분야교류와발전의전제조건이라는점등에서결국독일의통일에기여한바가크다고평가받고있다.
1. 서론 독일과한국은제차세계대전이후지구상에몇안되는분단국가의운명을함께해왔다 2. 그러나독일은 1990 년통일을이루었고, 철의장막, 죽의장막이라불리던러시아나중국과도자유로운왕래가가능한이시대에 남북한의교류관계는여전히극도로제한된상황을벗어나지못하고있다. 이런의미에서지난 9월 18일착공된 경의선과동해선의철도와도로연결공사는실로반세기가넘게지속되어온분단과단절의역사를극복한다는 감회와더불어, 철도와도로연결이한반도와주변국가들에게가져올다양한파급효과들에대한기대를모으고 있다. 그동안국토분단으로인해, 섬아닌섬으로고립되어있던우리나라가동북아물류의기 종착지로서아시 아와유럽을잇는철의실크로드시대의주역으로발돋움할수있을뿐아니라, 갈등과대치국면으로치닫던남북 관계도화해와상생의새로운관계로발전할수있을것이다. 철도와도로연결이야말로어느한쪽이다른한쪽에 일방적으로퍼주기만하는것이아니라, 양국모두에게실질적인이익을가져올수있으며, 인프라의연결을통한 물리적통합은다른분야교류의전제조건이된다는점에서도큰의미가있다. 이러한기대에부응하기위해서는 앞으로남북한양측이모두연결된철도와도로가효율적, 경제적으로이용될수있도록최선의노력을다하여야 한다. 또한, 확고한정치적의지와더불어실용적인차원에서현안문제들을사전에검토하고, 대처방안을강구함 으로써시간과시행착오를줄여야할것이다. 이런의미에서분단기간의동서독간교통교류실태와서독의대 동독교통부문지원정책을살펴보기로한다. 2. 동서독교통조약체결과정 1944년 9월 12일전승 4 대국간체결된런던협정의합의사항에는동서독통행에관한교통, 통신에대한공동 정책도포함되었으나, 서방연합국과소련의상이한정치노선으로인해백지화되었다. 또한동협정에는베를린 분단원칙이합의된반면, 서방연합국의점령지였던서독으로부터서베를린에접근하는방법은제시되지않았기 때문에, 이후서독과서베를린의연결문제는갈등의불씨로남게되었다. 실제로 1945년연합군사령관이서베를 린에진입하려고했을때, 그때까지단독으로베를린을점령하고있던소련군사령관은철도, 도로, 항공에서각 각 1 개씩의노선만을허용하였다. 이러한분쟁은결국 1948년 6월 24 일베를린봉쇄로이어진다. 1949년 5월의뉴 욕협정은소련측이거의일년동안단행했던베를린봉쇄와연합국의베를린공수작전을종식시켰다. 연이어 개최된파리외무장관회담에서는뉴욕협정을준수하고,1948년 3 월이후교통장애제거에대해합의했다. 그렇 지만동독은 1952년총 12개소의도로통과소중 8개소를철폐하는등억제정책으로일관해동서간교통장애는 지속되었다. 반면동독주민의서독으로향한탈주는줄을이어, 1949년~1961년사이에 270 만명을넘어섰다. 소
련은이문제의원인이베를린의분단상황에있다고보고, 1958년의소위베를린최후통첩에이어 1961년 8월 13 일베를린장벽을설치하기에이른다. 이로써독일의분단은고착화되었고, 동서독간교류및베를린의교통 장애와긴장이고조되었다. 시간이지나면서서독정부의끈질긴노력으로동독의연금수급자에한해서독행개 인여행이허용되는등교류장애를완화하는조처들이부분적으로이루어진다. 그러나동독의억압과동구권중심 의경제관계로인해 극히제한적으로만허용되었다. 1970년대이전까지는동서독간실질적인교류는미미한수준에머물렀고, 인적교류역시 동서독간교통교류는 1970년대에들어서면서서독브란트수상의동방정책 (Ostpolitik) 과냉전과긴장관계를 완화하려는국제정세에힘입어급진전했다. 무엇보다동서독간에중요한교통관련협약들을체결함으로써향후 교통교류의법적토대를마련하였다. 우선, 서독은러시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동구조약 으로불리는 일련의조약을맺는다. 이조약들은거의비슷한내용으로, 유럽정세의정상화와평화정착, 현재의국경선인정 과불가침, 무력사용포기등이골자다. 동구조약은그자체로는교통문제와직접적인연관성이없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잔재를청산하고, 독일내의냉전상태를실질적으로종식시킴으로써동서독간교통협약이
가능하도록만들었다는데의의가있다.1971년 9월의 4대국협정 에서는 4대승전국이여전히독일문제에관 해책임과권한을가지고있음을확인하면서도, 동서독이스스로문제해결을위해노력할수있다는것과구체적 으로민간인의동독통과교통을용이하게할의무가있다고명시해동서교통교류의기반을제공하였다. 위의 [ 그림 1] 에서볼수있듯이, 1971년 12월 20 일동서독간에 통과교통조약 이체결되었고, 같은시기에동독과 서베를린사이에 여행및방문협정 이맺어졌다. 통과교통조약 은서베를린이동독내에위치한다는특수한 상황에서비롯된조약으로서특히, 교통부문에서동서독이당사자자격으로체결한최초의협정이라는점, 그리고 독일이통일될때까지약 18 년동안매일적용되었다는점에서특기할만하다. 총 21항으로구성된조약의내용은 [ 표 1] 에정리되어있다. 4 대승전국의지원하에 통과교통조약 과 여행및방문협정 이조인됨으로써서독과서베를린간의연결 교통로가확보되자, 다음단계로는양국가간에일반적인교통협정이추진되었다. 즉, 1972년 6 월의 교통조약 과같은해 12 월의 기본조약 은양독간인적교류를제도화함으로써가족및친지방문의생활화와연간수백 만명에달하는상호방문의길을열어놓았다. 1974년이후부터통일이되기까지체결된 20여개의후속조약이나 보완협약들도동서독교통교류를원활하게하는데기여했다. 그러나사민당-자민당연립내각의 2차연도에접어들면서야당과언론을중심으로브란트수상의동방정책에 대한비판이끊임없이제기되었다. 특히, 1972년 12 월조인된 기본조약 은상주대표부교환, 제3국의양독공 동승인인정, 양독의제국공동승인 3, 양독의유엔동시가입, 양독의직교역과교류합의, 상호불가침등의내 용을포함하고있어, 서독내에서많은비판과논쟁을불러일으켰다. 심지어바이에른주정부는서독연방헌법재 판소에동조약의위헌성여부를제소하였는데, 헌재는적법하다는판결을내리면서도, 동독이외국이아니라서독 과마찬가지로독일제국(Deutsches Reich) 의일부임을천명하였다. 동방정책에대한서독내의논쟁이계속되면서 양독간교통교류에도영향을미쳤다고할수있지만, 1970년대초에체결된일련의교통관련협정들은양독간 의인적교류를활성화하고, 나아가내독무역거래, 비상업적물품과이전거래, 우편, 전신 전화분야의협력, 교 통및여행등의협력, 경계선확정, 법제 문화 과학기술, 교회, 청소년, 스포츠, 보건위생과환경보호, 수의학, 언 론 정보부문등사실상사회전반에걸친광범위한분야의교류 협력증진에기여하였으며, 궁극적으로민족의동 질성확보를통해 1990 년독일이통일을이루는데기여했다고평가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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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단기간중동서독간교통교류현황 1949 년이래집권한모든서독정부는동서독간인적교류를추진하기위해다각적인노력을기울였다. 동독 정부와끈질긴협상을해서인적교류의제도화를꾀하는한편, 어려운수속과절차를거친후서독을방문하는 동독인에대해서는여러가지우대정책을제공하였다. 비행장, 역, 접경도시, 항구등에서적십자사, 종교단체 및일반구호기관등에서영접과안내를비롯한편의를제공하고정부에서는 1인당연 1회에한해 100 마르크(DM) 의보조금을지급하였다. 또한, 동독인에대한비자면제조치와더불어본인이원하는경우서독주민증을발급해 주었다. 반면, 동독은인적교류에상당히소극적으로대처하거나억제하는정책으로일관하였으며, 서독의재정지 원등에대한대가성으로마지못해제한적으로허용하는경우가많았다. [ 그림2] 에서볼수있듯이동서독간교통교류의유형은합법적인것과비합법적인것으로구분할수있다. 가. 통과교통교류실태 1) 여객 서독과서베를린간교통로확보는 1949 년이래집권한모든서독정부의주요관심사였을뿐아니라, 서방 3개
연합국들이적극지원한 베를린정책 의핵심사안이었다. 통과교통조약 이발효된이래서독과서베를린 ( 인구 200 만명) 을왕래하는여객의통과교통량은급격히증가하였다. 위의그림에서볼수있듯이교통수단별로 보면, 여객의통과교통에서는철도보다는승용차나버스의수송분담률이현저히높았다. 항공교통에대한권한 은여전히4 대전승국의관할하에있었기때문에, 통과교통조약 에서는제외되었다. 그림에서볼수있듯이 통일직전인 1988년약 2,600 만명의여행자들이서베를린을왕래하였다. 2) 화물 1949 년뉴욕협정에서베를린봉쇄해제가합의되면서, 서독과서베를린간화물열차의 1일 13편성통과운행이 결정되었다.6편성은소위흑색열차로석탄, 석유등에너지관련화물을수송하였고, 나머지 7편성은유색열 차로우편물, 컨테이너등을수송하는열차였다. 그리고이와는별도로 1일 3편성의군사용철도운행도협상되 었다.1972년통과교통조약이체결된후철도의수송수요가큰폭으로감소한뒤에도동독은위의협약내용을 준수하였다. 철도화물수요가계속감소하면서열차다이아( 운행계획) 에정해진화물열차들이운행하지않는경 우에도그다이아를비워놓았기때문에동독철도청에수입결손이발생하였다. 1972 년~1990년사이에장거리도 로화물수송량이 2 배이상증가한반면, 철도를이용한통과화물은 1979년까지는답보상태로유지되다그이후 에는소폭으로감소하였다. 내륙수로를통한통과화물량은같은기간에거의반이하로감소되었다.
나. 1) 내독간교통교류 인적교류 우선, 동독주민의서독방문현황을살펴보면, 동독은 1953 년부터연금수급자( 남자: 65 세, 여자: 60 세) 들에한 해제한된범위에서서독방문을허용하기시작했으며, 1972 년부터는서독거주가족의생일, 영세, 결혼, 사망및 금은혼식참석등소위긴급가사사유로인한서독방문을허용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동독의국가안전원이 동독주민의서독방문신청에대해까다롭게심사했기때문에, 1982년이전까지는실제로서독을방문한동독인 숫자는연간 50 만명수준에머물렀다. 1986년부터연금수급자로제한되었던긴급가사사유로인한여행이연금 수급자이하연령층에도허용됨으로써동독인의서독방문이급증하였다. 서독통계청의자료에따르면, 1986년 중복여행횟수까지포함한연간방문객숫자는평균 140 만명으로추산되었고, 1987~1989년사이에이숫자는 연 200 만명까지증가하였다. 1987년서독을방문한동독인의숫자는모두 340 만명에달하였는데, 이중연금 수급자 220 만명, 긴급가사사유자가 120 만명이었다. 통일직전인 1989년에는서독을방문한후서독에눌러앉 은동독의연금수급자가 6 만명에달하였다. 통일전서독인의동독방문은이보다훨씬많았다.1963년까지연 1회로제한되어있던동독방문횟수제한이 완화되면서동독을방문하는서독인의숫자가크게늘어, 이미 1964년에 180 만명에달했다. 그러나동독정부가 여러가지제약을가하면서 1969년에는 110 만명으로줄었는데, 이숫자가최저기록이다. 1972년통과교통조약은 직접적으로는통과교통교류를대상으로하는것이지만, 내독교류에도많은제약을완화하는결과를가져왔다. 예컨대, 연간방문횟수나연30 일로제한되어있던방문일수등이증가되었고, 친척방문으로만한정되었던방문 목적도스포츠, 문화, 종교교류등의다양한분야로확대되었다. 1987 년~1989년사이에서독인으로서동독의가 족및친지방문, 관광여행, 경계선부근주민의수시방문, 동베를린에 1 일체류(1988년 3월부터는 2 일로연장),
박람회참관및사업여행등을목적으로동독을방문한숫자는 550 만명으로집계되었다. 동서독주민간교통 교류를교통수단별로구분해보면, 서독주민이동독방문시약 75% 가승용차를, 그리고 23% 정도가철도를이 용하였다면, 동독주민이서독을방문하는경우에는거의정확하게반대로, 즉 75% 정도는철도로, 23% 정도는승 용차를이용한것으로나타났다. 동서독주민교류와관련하여또한가지언급할사항은최소의무환전금제도이다. 이는동독이외국인의동 독출입국을관리한다는명분으로동독을방문하는외국인들에게부과하던의무조항으로일정금액을동독마르 크로환전해야하는제도였다. 서독인의경우, 처음에는일인당일일 6.50 마르크를의무적으로환전해야했는데, 이금액은통과교통조약, 교통조약, 기본조약등일련의조약들이체결된후인 1973년 11 월부터는두배, 즉일 인당일일 13 마르크로인상되었다. 이는 1980년다시 25 마르크로큰폭으로인상되었는데, 이로인해동독을방문 하는서독인의숫자가 30% 이상감소되어, 동독의수입은오히려감소되었다. 동독은어린이와연금수급자들에 대해서는 15 마르크로할인하는정책을시행하였다. 동독을방문하는서독인의 90% 이상이상점이문을닫는주말 에친척을방문하는경우라서, 환전한돈을동독의친척에게주고오기마련이었다. 더구나, 재환전도되지않았 고, 또한반출도금지되었기때문이다. 따라서최소의무환전금제도는동독이아무런대가나의무없이외화를 벌어들이는또하나의수입원이라고할수있는데, 이를통해연간 15 억~30억마르크의수입을확보한것으로추 산된다. 반대로, 동독에서서독을방문할때는일일최고 15 마르크로환전금액이제한되어있었기때문에서독을 방문하는동독인들은서독의친척이나친지의재정적인도움에의존할수밖에없었다. 동서독간인적교류형태중합법적이주가가능했다.1961년부터실시된이제도는동독주민들이동독정부 에제출한이주신청서가심사를거쳐승인될경우서독으로합법적으로이주할수있는제도였다. 몇년씩걸리 는긴심사기간, 그동안의직업적불이익과국가안전원의처벌위협, 감시등에도불구하고, 이주신청자의숫자 는상당히많았다. Rehlinger 보고서에따르면, 1965 년~1989년사이에 25만명이이런방법으로동독에서서독으로이주하였다고 한다. 서독으로이주한동독주민들은자동적으로서독시민권을획득하였다. 한편, 1973년조인된기본조약에는 일정범위의접경지역주민들간의방문교류를허용하는조항이들어있었는데, 해당주민의약 10% 정도만이 이조항을이용한것으로나타나현실적의미는적었던것으로평가된다. 동서독간교류는비합법적형태, 또는비공식적합의에따른유형도있었다. 동독탈주자, 정치범의인도, 체제
반대자의추방등을들수있다. 우선, 동독탈주는양독이분단된직후부터지속된현상으로서동독이 1961년베 를린장벽을설치하는직접적인원인이되기도하였다. 탈주도중목숨을잃는경우도있었고, 탈주에실패하거나 탈주를방조하는경우엄중한처벌을받게됨에도탈주자의숫자는줄어들지않았다. 동독정부가발표한탈주자 숫자는연간 200~400 명정도지만, 서독의시민단체들은 1970 년~1990년사이에탈주자의숫자를 25,000명으로추 산하였다. 또한, 서독정부는 1963 년부터동독에수감되어있는정치범을일정보상금을지불하고인도받았다. 연방정부뿐 아니라, 교회, 시민단체, 베를린주정부등이정치범인도를위해노력했으며, 일인당보상금은 4만마르크에서 1989년무렵에는 9만 6 천마르크까지도지불하였다. 외환부족에시달리던동독정부가단순범죄자등을정치범 으로위장하여인도하는등이제도를악용한다는루머가끊이지않았다. 인도과정은동독의국가안전원이정치 범을통과고속도로인헤름스도르프- 로베다사이의휴게소에서서독측담당자에게인도하면, 버스등을통해통관 절차없이국경연결지점을거쳐헤센( 서독) 으로이송되었다. 1982 년부터는바르타근처의폐쇄된도로에서인도절차가진행되었고, 1987년이후에는동독측이해당정치범 을일단석방시키고나서곧바로이주허가증을발급하여서독으로추방하는방식으로이루어졌다. 서독정부의 이러한인도적노력을통해인도된정치범의숫자는 33,755 명으로집계되고있다. 2) 내독간화물운송 독일의항복으로인한 2차대전종결이후 1949 년양독의분단이고착화되고, 1970년대에이르기까지정치적으 로동서독은각각냉전체제의최전방에서대치상태에있었음에도불구하고내독물동량은꾸준히증가되었다. 초 창기에는서독의 내독무역신탁관리청 (Treuhandstelle für den innerdeutschen Handel) 과동독의무역부 (DIA: Deutscher Innen- und Aussenhandel) 간의합의가내독무역의법적토대로작용하였다. 1972년이후서독정부는 내독무역에대해어떠한통제나관리도하지않았기때문에서독측에서는매우자유롭게이루어졌다. 서독은내독무역을국내상거래와대외무역의중간형태로간주하였고, 따라서수입과수출이라는용어대신 구입과납품이라는용어를사용하였다. 분단기내내동독에서서독으로보내는물동량은서독에서동독으로보내 는물동량의 2 배가넘는수준이유지되었다. 그이유는, 동독은서독으로부터정밀기계, 기계, 생산설비, 전자기기 등값비싼상품들을구입하였고, 대신서독으로보내는상품들은부피가많이나가는대량소비제품인경우가 많았기때문이다. 실제로무역액과중량사이에큰차이가있었다. 내독무역이각각의국민경제에서차지하는 의미도달랐다. 동독의경우, 전체무역의 7.3% 로서독은소련다음으로중요한무역파트너였지만, 서독의경우 에는내독무역이차지하는비중이 1.3% 에불과하였고, 이는 1985 년이후에는더욱감소했다. 연간수출입액수
는각각 70 억마르크정도였다. 4. 서독의대동독교통부문지원정책 서독의대동독교통부문지원정책은두가지형태로구체화되는데첫째, 일명통행료일괄부담금과둘째, 교통 인프라시설에대한투자가그것이다. 통행료일괄부담금은특정목적과무관하게매년서독정부가동독에게지불 한금액으로서독통화로유입되었다면, 인프라건설투자는특정사업과연관되어지불되었고, 동독에게상응하는 경제적및경제외적반대급부를받아냈다는특징이있다. 가. 통행료일괄부담금 서베를린출입을위한통과교통에대한일괄지불금은 1970년까지동독측이동독으로여행하는서독주민들에 게받던징수료를 1971년 12 월 통과교통조약 의체결과함께서독정부가일괄적으로부담하게된것이다. 통행 료일괄부담금의규모는 1972 년~1975년에는연 2억3,490 만마르크로정해졌으나, 1976 년~1979년에는연 4억마르 크, 1980~1989년에는 5억 2,500 만마르크로계속상향조정되었다. 여기에는내독관계의발전에따른정치적배 려도있었겠지만, 통과교통로이용객의숫자가계속증가한것도원인으로작용하였다. 서독의입장에서는통행료 일괄지불금을상당히관대하게지불하였는데, 이는동독여행을촉진하는효과, 동독경제를지원하고, 동독주민 들에게경제적혜택을가져다줌으로써동포의고통을경감시킨다는인도적의지도반영되었기때문이다. 통과교통 로이용객의입장에서는여행자개개인이도로사용료에해당하는통과료를지불할필요가없게되어금전및시 간상의편의를얻게되었고, 그만큼서베를린여행이편리해졌다. 따라서통행료일괄부담금의도입은베를린교 통이급속히증가하는결과를가져왔다. 동독의입장에서통행료일괄지불금은가장중요한고정수입원이라는의미와함께, 특히서독마르크로지불되 었기때문에항상외환부족에시달리던동독의외환계정측면에서도매우중요한역할을하였다. 1972~1989년 사이에동독은통행료일괄부담금명목으로총 78 억마르크를, 1980~1989년사이에는이와별도로도로사용료일 괄지불금명목으로 5 억마르크를수령하였다. 동독은통행료일괄부담금에대한반대급부로통과교통로의정비 및시설물설치등을제공하기로하였지만, 실제로는일괄지불금대부분에대해어떠한경제적반대급부도제공 한적이없었다. 위의 [ 표 3] 에는 1971 년부터통일직전까지서독의대동독지원내역이요약되어있는데, 각연도 별로통행료일괄지불금이전체지원금의 50% 에육박하는큰비중을차지하고있음을보여준다.
FES-Information-Series 나. 동독의 교통 인프라에 대한 투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양독의 교통 인프라 상황을 살펴보면, 전쟁 중 독일의 교통 시설은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 다. 특히, 독일의 항복 직전 대규모로 감행된 연합군의 폭격은 산업 시설보다는 터널, 교량, 도로에 집중되었기 때 문에 교통 인프라 시설의 피해는 매우 컸다. 그러나 교통 시설의 복구에 관해 서독과 동독은 매우 큰 차이가 있었 다. 영토 면에서 서독이 동독의 2배 가량 되었다는 점 외에도 서독은 마샬 플랜의 지원(총 130억 달러 ) 하에 적극 적인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벌써 1959년에 전쟁 중에 파괴되었던 모든 시설이 복구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반면, 동독의 경우에는 소련 측에 오히려 전쟁에 대한 피해 보상을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예컨대, 동독은 당시 복선화되어 있던 주요 철도 간선을 단선화하여 걷어낸 자재를 소련의 철도 복구를 위해 제공해야만 했다. 동 독은 1970년까지도 전쟁으로 파괴된 철도 시설의 복구를 완료하지 못한 것으로 자체 평가하였으며, 통일 이후 동 독의 교통 인프라 시설은 서독이 지원했던 몇몇 도로나 철도를 제외하고는 전쟁 전의 낙후되고 노후한 상태인 것 으로 드러났다.
FES-Information-Series 서독 정부는 1975년 이래 베를린과 연결되는 통과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동독의 교통 인프라의 신설 및 보수, 확 장에 상당한 투자를 해 왔다. 통과교통조약 제18조에 따르면, 서독이 동독에게 매년 지불하는 통행료 일괄부 담금에는 통과교통로의 유지, 보수 비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70년대부터 지속적인 재정 악화로 교통 인프라에 대 한 투자 여력이 전혀 없었던 동독은 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서독 정부는 동독 교통시설의 투자 지원에 대해서는 통행료 일괄부담금과는 달리 동독 측의 경제적 경제외적 반대 급부를 엄격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거의 전 구간이 동독 내에 위치한 교통로였고, 실제로 통과교통보다는 동독 주민 들의 이용률이 더 높은 사업들이었으며, 또한 서독 측이 사업비의 거의 전부 또는 60%~70% 이상을 분담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동독이 제공하는 대가는 대부분 즉각적인 가시화나 계량화가 어려운 것들이어서 대부분의 서독 국민들 은 이 역시 전적으로 정치적 고려에 따른 무상 지원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서독 내에서는 퍼주기 라는 비난을 잠재울 수 없었다. 투자 지원 절차를 보면, 동독은 1974년부터 양독 간의 정례 회담 등에서 서독 측에 대해 개 량 및 신설이 필요한 통과교통로의 리스트를 건설 비용, 건설 계획 등 상세한 내역과 함께 제시하고, 이에 대한 투자를 요청하면 서독 측이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 ~1989년 사이에 약 3차례에 걸쳐 이러 한 투자 요청과 지원이 있었는데, 서독이 동독의 교통 인프라 부문에 투자한 액수는 약 24억 마르크로 추정된 다. 구체적인 투자 내역은 [표 4]와 같이 요약된 다.
이밖에도 1980년대말부터베를린- 함부르크간고속철도건설사업에대한논의가진행되었으나, 1990년통일이됨으로써이사업은통일독일교통계획으로이월되었다. 이런준비덕분에베를린-하노버간고속철도는 1996 년에조기개통될수있었다. 이처럼통일을이룩한시점에서볼때, 서독측이제공한동독지역에대한교통인프라투자지원은통일독일을위한선행투자였으며, 통일후동독지역의개발을앞당기는결과를가져온유익한투자로평가되고있다. 5. 결 론 분단기동서독교통교류실태와서독의대동독교통부문지원정책의가장중요한특징은바로서베를린이동독내부에위치하고있다는특수한상황에서비롯한다. 서독정부는물론, 베를린의전략적지위를고려한서방연합국들도서독과서베를린간의통과교통로확보를절대적인정책과제로인식했기때문이다. 이런배경에서약 1,400 Km에이르는동서독국경을따라국경통과를위한 10개의연결도로와 7 개연결철도가설치되었고, 동서베를린간에도 8 개의교통연결지점이유지되었다. 따라서동독의억제정책에도불구하고실질적으로동서독간교통교류가완전히단절된적이없었다. 서독정부가교통인프라의연결을양독간긴장완화를위한매개체로활용하였다는것은여러가지사실에서나타난다. 우선, 1971년까지는서베를린을방문하는개인이지불하던통행료를서독정부가일괄적으로부담한다는협상을이끌어내고, 동독정부가동협상에포함된교통로유지, 보수의무를이행하지않았음에도불구하고관대한수준의통행료를매년지불하였고, 통과교통로의신설, 개량, 확대사업등에대한동독의요청에대해서도비교적관대하게수용하였기때문이다. 교통인프라와관련하여서독이동독측에지원한금액은, 통행료일괄부담금으로총 83 억마르크, 교통인프라투자로약 24 억마르크가유입된셈이다. 전자의경우, 통행료명분이었기때문에서독의마르크화로아무런대가없이지불되었고, 교통인프라투자의경우에도교통부문의통행장애완화, 접경지역의무기제거등의구체적인조건하에서서독이건설투자비를분담하는형식이기는하였지만, 국민들의시각에서는이역시무상지원의성격에가까웠다. 따라서 1990년 10월통일이이루어지던당시까지도무조건퍼주기만한다는비난이서독국민들사이에광범위하게퍼져있었다. 이러한비난에도불구하고서독정부가동서독간교통교류활성화를지속적으로적극추진한것은교통교류가다른분야의교류와발전을위한전제조건이라는확신이있었기때문으로해석된다. 서독정부의이러한정책은교통교류를통해동서독국민간민족적동질성이유지될수있었기때문에통일이가능했다는시각외에, 통일이되고난현재의시점에서도교통인프라의수준이구동독지역의복구와경제발전에큰영향을미친다는점에서긍정적으로평가된다.
70 년대사민/ 자민연정의 신동방 독일정책과정치논쟁 박형중, 통일연구원연구위원 2001년 3월 1969 년이후사민당/ 자민당연정은새로운독일정책을추진했다. 야당인기민/ 기사연은냉전적반공산주의의입장에서이를격렬히비판했다. 당시야당이제기했던주요논쟁점은다음과같았다. 첫째, 정부/ 여당이안보현실을너무 낙관적으로보고있다. 둘째, 정부/ 여당의정책때문에, 대내적으로반공산주의가붕괴하고, 자유민주주의적정체성이훼손되고있다. 셋째, 정부/ 여당은동독의의도, 합의이행및변 화여부를너무안이하고낙관적으로판단한다, 넷째, 정부/ 여당은동독과협상에서대내정 치적이유로너무조급하게협상하며, 상호주의원칙을지키지않는다. 다섯째, 정부/ 여당이 동서독국가의통일을포기하고있다는등이다. 그러나야당의입장은서독국민의다수와주변국가의지지를받지못하였다. 70년대야 당시절, 기민/ 기사연은이념적보수성을기초로사민당/ 자민당연정의독일정책을수용했으 며, 1982 년재집권했다. 그리하여실용주의적차원에서볼때, 서독의독일정책은 1969년부 터 1989 년까지지속성을가질수있었다.
1969 년브란트수상이이끄는사민당/ 자민당연정이집권했다. 사민/ 자민연정은동서긴장완화추세에맞추어소련 동유럽에대한새로운차원의신동방정책을추진했다. 그틀내에서동서독문제와관련한독일정책방향도새로이설정되었다. 사민/ 자민연정이집권하게된중요한이유는신동방 독일정책때문이었다. 그런데신동방 독일정책은서독의대외정책에서중요한전환을의미했다. 이전환을둘러싸고 70년대초서독에서격렬한정치적대립이발생했다. 서독의전체역사에서독일정책을둘러싸고국내정치논쟁이이만큼격화된적은없었다. 그러나사민당은동서독기본조약이체결된 10 일후실시되었던 1972년 11 월의조기총선거에서압승했다. 야당인기민/ 기사연은결국당론을바꿀수밖에없었다. 당시야당의격렬한반대는다수의서독국민들로부터지지를받지못했으며, 미 소를비롯한동서방의주변국가들도일치하여사민/ 자민연정의긴장완화정책을지지하고있었기때문이다. 70년대야당은당내논쟁을거치면서, 자신의전통적, 보수적관점에사민/ 자민연정의독일정책을통합시키고자노력했다. 이는 5년에서 10 여년의오랜세월이걸렸다. 수정된독일정책당론을확정한직후인 1982년기민/ 기사연은재집권했다. 정권교체에따라서독정부의독일정책은이데올로기적으로보수화되었으나, 실용주의적차원에서는거의변화가없었다. 이때문에사민당이시작한신동방 독일정책은정권의변화에도불구하고 20 여년동안지속적으로추진될수있었다. 1. 70 년대초새로운독일정책의기본개념 독일연방공화국( 서독) 과독일민주공화국( 동독) 은미 소간냉전구도의정착과병행하여 1949 년성립했다. 그후 1969 년사민/ 자민연정의집권직전까지서독의동방 독일정책의핵심은두가지였으며, 이에대하여대체로국내의정치적합의가존재했다. 첫째, 동독을국가로서승인하지않는다는것이며, 둘째, 2 차대전패전의결과로발생한 ( 동유럽지역에서의) 독일영토의축소를인정하지못한다는것 ( 즉, 2차대전이후동독과폴란드의경계로서획정된오데르- 나이세국경의불인정) 이었다. 독일통일은명시적목표로추구되었다. 통일방안으로는동독지역의자유선거를통한사실상의흡수합병, 또는 ' 힘의정책' 을통해소련이동독을일방적으로포기하도록하는정책이추진되었다. 냉전이지속되었던동안서독의이러한정책은서방진영의대소봉쇄정책과모순되지않았다. 그러나이미 1955 년부터미국과소련사이에유럽에서정치적, 영토적현상인정을기초로한긴장완화경향이나타나기시작했다. 즉, 미 소는동독국가의인정, 오데르-나이세국경인정등을추진하는정책방향을드러내기시작했다. 이는서독의전통적입장과모순되었 2
다. 당시서독은독일문제가유럽에서의긴장의핵심원인이기때문에, 이문제를해결해야 ( 즉, 서독주도하에독일통일이이루어지고, 패전이전의구독일영토가완전히회복되어야) 유럽의긴장완화가진행될수있다는연계정책을주장했다. 이러한정책은동서방양측으로부터지지를받지못했다. 60년대초동서방국가들사이의긴장완화가심화되면서부터서독은점차로동서방주요국가들로부터외교적으로고립되었다. 서독은현상변경적정책을추진하고있었음에비해, 서방국가는현상고착화에기초한긴장완화를추구하고있었다. 동방국가는특히동유럽과관련된서독의현상변경적대외정책이동방진영의불안정화와동방에의대결을지향하는것으로판단했다. 1960년대동서방양측으로부터서독동방 독일정책이동서긴장완화에순응해야한다는압력이높아갔다. 그러나 60 년대서독의에어하르트정부(1963-1966) 와대연정(1966-1969) 은과거아데나우어정부의핵심정책인동독의불인정과국제적고립화추구정책그리고오데르-나이세국경선인정거부정책을수정하지못했다. 1969 년서독에서는최초의여야간정권교체가있었다. 서독의대외정책은유럽의긴장완화과정에완전히적응하고활용하는방향을취했다. 서독은동유럽의정치적 영토적현실을인정하는것을기초로, 동유럽여러국가와화해 협력정책을추진했다. 그것이이른바신동방정책이며, 이틀내에서서독의독일정책도변화했다. 동유럽및동독에대한서독의정책방향과관련하여서독정부는소련과직접협상했다. 브란트정부를대표한에곤바르는소련수상코시긴및외무장관그로미코와모스크바에서비밀리에협상을진행했다. 그결과가 1969 년서독과소련사이에작성된 바르합의문 이다. 바르합의문 은첫째, 오데르 - 나이세국경을비롯한유럽에기존하는국경은 불가침 이라는것, 둘째, 서독과동독은완전한동등성과비차별, 내정문제의독립성과자주성의인정을기초로한새로운관계형성을목표로통상적인국가간조약을맺는다는것, 셋째, 이러한합의에기초, 서독은소련, 그리고동독, 폴란드, 체코등과조약을체결한다고천명했다. 이러한합의는 1970년모스크바조약과바르샤바조약, 1971년 4 대국간베를린협정과동서독간베를린통행협정, 1972년동서독간기본조약, 1973 년프라하조약체결로이어졌다. 서독의신동방 독일정책은과거의봉쇄정책을반성하면서, 긴장완화를통해열리는공간을적극적으로활용하고자하는 공세적긴장완화 정책이었다. 그기본개념은에곤바르의이른바 접근을통한변화 에잘나타나있다. 이는동독정권의안정화를통해동독정권을변화시킨다는전략구상을명확히밝히고있다. 에곤바르는 냉전 과 공산주의철거 와관련되었던기존의봉쇄정책은독일의통일을진전시키기는커녕분단을더욱심화시키며, 과 거의압력과반압력정책이현상의고착화만을초래했다고판단했다. 그대안으로서, 1963년 3
에곤바르는미국의평화정책을독일에적용할것을주장하면서, 장기적긴장완화정책의일부로독일정책을추진할것을주장했다. 바르의정책개념을보면다음과같다. 독일통일은단한번의조치로서가아니라, 수많은작은조치들과단계들을거치는과정을통해서이루어져야한다. 케네디가말하는바와같이상대방의이익을인정하고고려해야만한다. 따라서서방의잠재력을강화할목적으로동독지역을소련으로부터뺏어내려고하는것은불가능하다. 동독지역은소련의동의하에변화되어야한다. 이러한목적에서동독지역을지배하는증오스러운정권과 - 그정권을법적으로는인정하지않지만 - 협상하고협약을맺어야한다. 새로운독일정책은상당한기간현상(status quo) 을인정해야하는데, 그목적은 ( 장기적으로) 현상을변경시키기위해서이다. 다시말해, 동독지역에자유가보장되는것은새로운정책의전제가아니라, 새로운정책이기대하는결과이다. 또한, 동베를린공산주의정권은 ( 동서독) 의경계와장벽을완화시키지못하고있는바, 그이유는완화시킬경우, 자신의존망이위태로워질것이라걱정하고있기때문이다. 따라서경계와장벽을완화해도동독이존망을걱정하지않아도될만큼, 서독이 점차적으로동독의우려를 받아주는것이가능할수도있지않겠느냐하는것이다. 유일하게가능한방도는동독정권의붕괴가아니라, 그와의협력이다. 동독사람들의인간적처지를개선해야하는데, 이는동독에서혁명적변화가일어나지않는한계내에서추진되어야한다. 혁명적변화의경우, 소련은자신의이익을수호하기위하여불가피하게개입할수밖에없을것이기때문이다. 애초에곤바르의이러한구상은 너무급진적인것 이라고사민당의공식경고를받았었다. 그러나 60 년대중반을거치면서, 이는사민당의공식당론이되었다. 그후, 사회민주당정책의목표는공산주의를제거하는것이아니라, 그것을변화시키는것이었다. 접근을통한변화 정책은동방의변화를목표로동방의정치적관심을일정하게수용한다는것( 접근 ) 을뜻했다. 변화를목표로한 접근 개념에기초하여, 사민당은오랫동안동독이요구하던것을수용했다. 즉, 동독국가의불인정과고립화정책을포기하고, 동독을서독과특별한관계의동등한국가로승인했다. 그러나이는동독의내부개혁, 동독체제의 인간화 를목표로한것이었다. 사민당은, 외부의강요를통해동독체제를변화시키는것은불가능하다는것, 공산주의지배체제를불안정화시키면, 체제의경직화만초래될뿐, 체제내부의개혁이불가능하다는것을인정했다. 즉, 동독의개혁은공산주의지배자의의지를거슬러서는달성될수없다는것이었다. 따라서서독은동독공산당의지배를인정하면서도, 동독을점진적으로변화 개혁시키고자하는정책방향을취했다. 서독체제의우월성은동독의개혁을불가피하도록만들것이라고상정되었다. 4
접근 은서독의우월성이동독에영향을끼칠수있는공간을만들어내야했다. 동독이불안정하면, 동독정권의방어적조치때문에동독체제가경직화되고, 동서독교류 협력은중단될것이지만, 동독이내부적으로안정되면, 서독과의협력이증대될수있으며, 내부개혁압력이강화될것으로상정되었다. 독일민주공화국이일정하게안정화될때만이연방공화국의우월성이동독내부에작용할수있는여지를만들수있다 는것이었다. 이러한공세적협력정책은동방을평화적으로변화시켜서방체제에다가오도록만들수있다고상정되었다. 2. 기민/ 기사연의독일정책에대한비판 신동방 독일정책은 1970년대초국제정치의대세인긴장완화를서독이수용하고활용하는정책이었다. 그러나서독내부적으로는아직도냉전적반공산주의입장에서, 서독정부의새로운정책에대한강력한반대가존재했다. 특히, 새로이야당이된기민/ 기사연은브란트연정의신동방 독일정책에대해격렬히반 대했다. 이때문에, 1971/1972년경브란트정권은연방의회에서다수의지위를상실할수도있 는상황에도달해있었다. 이러한정권의위기에는사회개혁에대한문제, 사민당내부의좌 파급진세력의강화, 경제및재정정책에관한문제그리고동방정책에대한내외적분란이 작용하고있었다. 이러한상황에서기민/ 기사연은연방의회에서브란트총리에대한불신임결 의안통과를시도했다. 그시도는 1972년 4월 27일절대다수인 249표에서 2표가모자라실패 로끝났다. 브란트정부는 1972년 5월로예정된모스크바조약및바르샤바조약에대한의회비준이거부될가능성에대해우려해야했다. 사민/ 자민당은조약비준을위해야당인기민/ 기사연의협조를구했으며, 그결과로여야간조약에대한의회차원의공동결의가탄생했다. 물론, 여야공동결의는서독과소련및폴란드간에이미성립한국가간조약내용을수정하지는않았다. 그러나그조약에대한서독측해석과관련하여야당의입장이반영될수있도록하는타협이이루어졌다. 그주요내용은모스크바및바르샤바조약에서기존하는국경을사실상인정하지만최종적결정은평화조약체결시에내려져야한다는것과, 독일민족의자결권은이조약들로인해침해받지않는다는것, 독일문제는아직미해결이며, 연방정부는이조약체결이후에도유럽적차원에서민족통일의재달성을위해서노력해야한다는것이었다. 이러한여/ 야간타협을기초로, 당시기민련의당수바젤은기민/ 기사연이이두개의동방조약에대한의회비준에찬성할것을종용했다. 여전히거부적조류가강하여당내분란이있 5
었지만, 기민/ 기사연의대다수는비준여부를묻는투표에서기권함으로써조약이비준되도록했다. 그이유는국제여건상조약에반대하는것은불가능했기때문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등서방동맹국들은사민/ 자민연정의동방정책조약들에긍정적태도를취하고있었다. 또한, 동방정책은동서방에공히중요한여러사안들( 헬싱키협상, Salt 회담, 상호균형군축, 동서간의일반적긴장완화등) 과연계되어있었다. 만약, 동방정책이실패한다면이는동서방의정책에심각한영향을끼칠수밖에없었다. 서독정부가동방국가들과추진하던조약체계를붕괴시킬경우, 기민/ 기사연은동서방대외정책의핵심적목표를방해했다는책임을질수밖에없었다. 동방조약들에대한야당의부정적태도가국민의지지를받지못하고있다는것이곧바로 드러났다. 동서독기본조약체결 10일후인 1972년 11월에치러진선거는동유럽국가와의 화해그리고두독일국가의접근을상징하는인물인브란트에대한신임투표의성격을띠었 다. 이선거에서 사민당은압승을거두었다. 사민당은서독의역사에서처음으로원내제1당 이되었다. 11월선거실시이전의원내제1 당이던기민/ 기사연은연방의회에서반대세력을 결집하여동방정책및사민/ 자민연정의존속여부를위협해왔었다. 그러나 11월선거는국 민다수가동방정책과사민/ 자민연정을지지한다는것을확인했으며, 연방의회에서동방정 책과사민/ 자민연정에게안정된정치기반을마련해주었다. 이선거에서기민/ 기사연은공산주의세력확대에대한냉전적공포를동원하여사민/ 자민연정의동방국가들과의화해정책에반대하고자했었다. 이선거직전까지만하더라도과거만년여당이었고, 원내제1 당이었던기민/ 기사연은곧바로재집권하리라고판단하고있었다. 그러나서독은내부적으로이미크게변해있었다. 이선거에서사민당이압승하게되자, 기민/ 기사연이이제상당히오랜기간야당으로남아있어야한다는것이너무도명백해졌다. 선거패배충격의결과로, 야당의입장은한동안더욱경직되었다. 야당은사민/ 자민연정의동방정책및독일정책과관련된모든것에대해서결단코반대하는입장을취했다. 야당은동서독간기본조약, 프라하조약뿐만아니라 1975년의헬싱키유럽안보협력최종결의안도반대했다. 유럽에서헬싱키결의안에반대했던정치세력은서독의기민/ 기사연과알바니아공산당뿐이었다. 70 년대기민/ 기사연이신동방 독일정책에대해전개했던반대논리의주요논점은다음과같았다. 가. 냉전적전통에의집착 6
사실기민/ 기사연은냉전시대의전통고수와긴장완화라는대세에의적응불가피성사이의모순속에끼어있었다. 기민/ 기사연의정체성은냉전적사고방식이었지만, 긴장완화의대세를거부하는경우, 국내외적으로완전히고립될수밖에없었다. 우선, 사민당의외교정책은동서간긴장완화라는당시의국제정세와너무도잘부합했기때문에, 사실상그에대한어떤근본적대안도있을수없었다. 나아가사민당의신동방 독일정책이서독국민과조야여론의지지를받고있다는것이분명했다. 기민/ 기사연은과거서독의냉전적대외정책목표와냉전적반공산주의를기준으로, 사민/ 자민연정의신동방 독일정책에대해강력한비판을전개했다. 그러나설득력있는정책대안을발전시킬수없었다. 따라서격렬히비판하면서도, 완전히거부하지못하는모순적태도를보였다. 이러한모순은당내부에서대외정책적입장에대한분열로나타났다. 기민/ 기사연당내에는사민/ 자민연정의신동방 독일정책에대한첫째, 찬성파, 둘째, 무소신파, 셋째, 소극적거부파, 넷째, 적극적거부파등 4 개의집단이존재했다. 기민/ 기사연은사민/ 자민연방정부정책의목표그자체가아니라주로정책추진의방법과 전략에대해서비판했다. 또한, 공동여당과의의회에서공동결의등을통해, 정부/ 여당의정 책에자신의전통적입장들이고려되고반영되도록노력했다. 그입장의주요요소는독일통 일( 독일인의자결권 ) 과오데르-나이세국경불승인등현상변경을함축하는독일문제에 대한기존의국제법적주장의고수및냉전적, 도덕적반공산주의등이었다. 이러한기민/ 기사 연의태도는사민/ 자민연정의정책방향에영향을주었다. 또한, 협상결과들이비교적기민/ 기사연이만족할만한수준에서이루어지게할수있었다. 나. 사민/ 자민연정의협상전략에대한비판 앞서언급했던것처럼, 기민/ 기사연의비판은정책방향그자체보다는추진방법과전략에 집중되었다. 물론, 야당이정부정책에비판하고대안을제시함으로써자기주장을내세우는 것은의회정치상정상적인일이었다. 그런데거의 20년동안여당역할만을해왔던기민련이 아직야당의정체성과역할을찾지못하고있었기때문에여당의정책에대한비판이부적절 하리만큼첨예화되었고절대화된측면이있었다. 기민/ 기사연은협상에서의비밀외교적측면 과불필요한조급성, 야당과의불충분한협의, 국내선거를의식한협상의도구화등을비판했 다. 특히, 기민/ 기사연은사민/ 자민연정의협상태도와전략을비판했다. 야당은, 연방정부가 ( 동독과협상시작이전에동독의핵심요구사항중하나인동독을동등한국가로인정할것 을밝히는등) 협상을시작하면서불필요한선제양보를했다는것, 또한 1972년동서독기본 7
조약의경우, 서독정부가총선 10일을앞두고동독과기본조약에대해서명했다는것등에대해강력히비판했다. 이러한협상전략때문에, 서독측의협상력이약화되었고, 협상과정에서도주는것과받는것의균형성을지키지못했다고비판했다. 결과적으로사민/ 자민연정이 국가이익을팔아먹었다 는것이다. 기민/ 기사연은 하는만큼해주겠다 는것을조약원칙으로확실하게지킬것을요구했다. 또한, 동독과조약을체결할때는 제한적또는이중적으로해석할여지가없는명확한규정 을고집함으로써, 나중에동독이마음먹기에따라해도되고안해도되는상황을막아야했다는것이다. 기민/ 기사연이특히상호주의, 합의조항의명확성등에대해서강조한이유는, 사민/ 자민연정과는달리, 기본조약체결이후실시과정에서동독이합의를제대로지키지않을것이라는견해를가지고있었기때문이었다. 기민/ 기사연이보기에, 사민/ 자민연정은동독의합의이행과동독의변화에대하여, 기본조약체결과정및의회비준과정에서너무도낙관적인기대를하고있었다. 당시사민/ 자민연정은기본조약을통해동독을국가로인정하는경우, 동독은인적교류와접촉의증대로화답할것이며, 이는궁극적으로동독정권을자유화하는데이바지할것이라고보고있었다. 그러나기민/ 기사연은현실주의적입장에서기본조약이체결되더라도, 동독의서독에대한 차단정책 때문에, 동서독간관계가급속하게정상화되지않을것이라는비관론적입장에서있었다. 기민/ 기사연은동독은사민/ 자민연정과는다른목표를추구하고있다고보았다. 기민/ 기사연이보기에동독이기본조약을체결한이유는서독과의자유왕래나의사소통을증대시키기위한것이아니라, 동독의국제적지위향상과국제법적승인이었다. 따라서동독은서독과의자유왕래및의사소통에관련한기본조약조문들을제한적으로해석하고자할것인데, 기본조약에 할수도있다 는식의조문은바로동독의그러한의도를사실상합법적으로인정해주는꼴이라는것이었다. 이러한기민/ 기사연의입장은사민/ 자민연정이지나친낙관론에빠지는것을일정하게막는데성공했다고볼수있다. 다. 서독의자유민주주의질서위협론사민/ 자민연정의신동방 독일정책은곧바로서독의자유민주주의적정체성훼손논쟁과연계되었다. 기민/ 기사연은신동방 독일정책은대외정책상패배일뿐아니라, 연방공화국의자유민주질서를위협한다고주장했다. 특히, 동서독기본조약에서동독을 동등한국가로승인 한다고할때, 그 승인 의개념함축이문제로등장했다. 사민/ 자민연정은서독이동독을국제법적인의미에서국가로 승인 하는것과그정권을정치적도덕적으로승인하는것은별개문제라고주장했다. 그러나야당은기본조약에나타난 승인 개념을포괄적으로해석하여, 사민/ 자민연정이동독을단순히법적차원을넘어서서정치적이고도덕적차원에서승인해버렸다고주장하면서, 이에대해비판했 8
다. 이와관련한야당의주장을보다구체적으로보면, 다음과같았다. 1. 연방정부의동방및독일정책은대내정치적으로가치중립성을초래한다. 서방민주주의의자유가치가과소평가되는한편, 사회주의이데올로기, 소련의서방정책과동독의독일정책의위험성에대한경각심이줄어든다. 2. 연방정부의동방및독일정책은유럽긴장완화의현실을오판하고있다. 이때문에국가방위에대한노력이줄어들어연방공화국의위기취약성이커지고있다. 3. 순진한긴장완화개념때문에마르크스주의이념이부활하고있다. 이때문에, 국가와사회의의회정치적질서에대한불만이커지고있다. 이때문에정부기관, 기업및정당들내에서정치선동이먹혀들어가고있으며, 증대하고있다. 4. 마르크스주의사고체계가널리유포됨으로써연방공화국내의정치논쟁이양극화, 독단화하고있으며, 이때문에민주주의에대한지지가위협받고있다. 5. 동방의서방에대한일방적침투가능성이높아졌다. 연방정부는국가간의상호성원칙을지키지못함으로써, 서방의동방에로의, 특히동독내부에대한영향력확대가능성을관철시키는데실패했다는것이다. 그러나사민/ 자민연정은자유민주주의적국가및사회질서의우월성에대한신념에근거 하여, 동방국가들과의이데올로기-정치적대결뿐만아니라연방공화국내의반민주적추세와의 대결과관련해서도낙관론을표명했다. 기민/ 기사연의관념에따르면, 연방공화국의자유민주주 의는동독의전체주의체제라는적대적대립물이존재할때만서독의대중들에게광범한설득 력을가질수있었다. 그러나사민/ 자민연정은전체주의대립물이존재해야연방공화국의자 유민주주의적정체성이형성되는것은아니라고주장했다. 자유민주주의적정체성은 용기있 는시민 의이성과합리성속에그자체로서존재하며, 또한시민의주권적자유의지, 그리 고민주주의질서자체때문에존재한다는것이다. 연방정부의대외정책을자유민주주의체제에대한위협이라간주했던야당의전략은 1972 년 11 월의선거에서여당인사민/ 자민연정이압승함으로써, 서독주민의지지를받지못하고있다는것이명백해졌다. 선거결과를보면, 다음과같은것이드러났다. 1. 소련이연방공화국을직접적으로위협하고있다는식의주장은불과몇년전과비교해보아도설득력이없다. 2. 동방및독일정책이긴장완화에긍정적이고건설적으로기여한다는평가가압도적이었으며, 위협감이줄어드는대신에동유럽국가와의협력, 정보및의사소통의증대를기대하고있었다. 3. 사회정치적대결에서이데올로기적대립이심화되고있는것은동방및독일정책과관계가없는것은아니지만그것이직접적원인을제공한것은아니라고판단되었다. 라. 국가통일론과민족통일론의대결 9
기본조약을둘러싼논쟁의주요주제중하나는 민족 과 통일 개념의내용이었다. 야당은상당히어감이다른 민족 과 통일 개념에서출발했다. 여당과 기민/ 기사연은모든민족은자결권과민족국가를형성할권리를가진다는일반원칙에서출발했다. 또한, 기민/ 기사연은정치적자유의실현을민족국가형성의전제로보았다. 이러한논리에서보았을때, 독일민족의민족국가형성즉, 독일통일이이루어지지못한원인은, 동독주민에게자결권행사즉, 자유선거를통해자신의자유의사를표시할권리가박탈되어있기때문이었다. 따라서독일통일은 ( 동) 독일주민이자유선거를통해자결권을행사하는것을통해성취되어야했다. 이는다시말해, 자유선거를통한동독의해체, 즉동독의서독합병을뜻하는동서독의국가통일을의미했다. 그러나동서진영대결의상황에서이러한방식의두독일의국가통일을정치적으로어떻게현실화시킬가에대해서는해답이없었다. 사민/ 자민연정은 국가적통일 대신에 민족적통일 을독일정책의핵심과제로설정했다. 민족통일 론은 통일적독일국가 를현실정치적으로추구하는것은불가능하며먼미래의일일수밖에없다는인식에서출발했다. 따라서 민족통일 의목표는두독일국가를하나의영토적민족국가로재결합시키는것이아니라, 독일이두국가로분단되어있음에도불구하고두독일에서독일민족에의소속감이유지될수있도록하는것이었다. 두국가로의분단때문에, 독일민족에의소속감, 다시말해독일민족자체가소멸될위험이존재하는데, 이것이방지되어야했다. 민족통일 즉 민족에의소속감 은만남과실제경험속에서만존속하고유지될수있다고간주되었다. 따라서동서독간접촉을확대하여가족과친지들사이의연계를강화함으로써, 민족적공통성이유지 발전되어야했다. 마. 기본조약의기본법합치성의문제동서독기본조약에대해서가장철저한반대입장을취했던것은기사연이었다. 기사연이집권하던바이에른주정부는 1973년 7 월연방헌법재판소에헌법소원을내었다. 기본조약은서독의기본법과합치하지않으며따라서무효라는것이었다. 그주요내용은기본조약이독일민주공화국을두번째독일국가로인정한것은독일재통일고수요구와어긋나며, 독일민주공화국의국가주권을인정한것은연방공화국이동독의독일인편을들어간섭할수없게만들고있기때문에, 기본법상의독일인에대한보호의무와상충한다는것등이었다. 연방헌법재판소는기본조약이서독의기본법과합치한다는결정을내렸다. 그러나판결내용은연방정부의독일정책적행동공간을한층좁게만들었다. 헌법재판소는판결에서, 연방정부를포함하여헌법기관들은독일의국가적통일을재건하는데노력해야하며, 이러한요 구를내부적으로유지하며, 대외적으로대표해야한다고주장했다. 이밖에도, 헌법재판소는 ( 두 10
개의독일국가가존재하지만두독일국가는서로외국이아니기때문에) 단한개의독일국적만이존재하며, 두국가의경계( 국경) 는연방주간의경계와같은성격이라고판시했다. 3. 70 년대중반기민/ 기사연의적응과정 기민/ 기사연의신동방 독일정책에대한격렬한반대는사민/ 자민연정의지나친낙관론을견제하고또한그추진력을일정하게약화시키는데는성공했지만, 결국전략적실패를향하고있었다. 그이유는, 첫째, 기민/ 기사연은긴장완화라는국제조류를거부할수없었으며, 둘째, 서독국민의다수가사민/ 자민연정의정책에대해분명한찬성을보여주었기때문이다. 기민 / 기사연에게야당시절인 70년대는독일정책과관련하여당내보수파와온건파의타협과재통합을위한시간이었다. 그결과로, 특히기민련은보수적이데올로기를고수하는한편, 실제정책차원에서는사민/ 자민연정의독일정책기본개념을수용할수있었다. 동서독기본조약체결다음해인, 1973년 6 월, 당내개혁파의지지를받은헬무트콜이새로이기민련의당수로선출되었다. 이로써, 동방조약및독일조약에원칙적으로찬성하던집단이기민련의주류가되었다. 그러나당내다수의연방의회의원들은여전히거부하는입장을취하고있었다. 콜을중심으로한당지도부는당내독일정책적보수파의저항을점차적으로극복해나갔지만, 기민/ 기사연은 1975년에도유럽안보협력회의최종결의서의비준을거부했다. 그후기민/ 기사연은최종결의서의인권조항을동방및독일정책의핵심으로내세웠다. 기민/ 기사연은동독이인권을준수해야한다고강력히반복하여요구했다. 이러한요구의정치적목표는기민련과기사연이달랐다. 기민련은동독의대내적자유화를촉진시키고자한반면, 보다보수적인기사연은동독을불안정화시키고자했었다. 기민련은동서독기본조약체결후 5년이지난 1977년의뒤셀도르프당대회에서야기본조약을현실로인정했다. 이당대회에서는기민련의독일정책을새롭게정립했다. 이는당내온건파와보수파간의타협과통일의산물이었다. 즉, 첫째, 이미체결된동서독간조약은지킬것이지만, 둘째, 이데올로기적차원에서는동독에대하여공세적인대결정책을취한다는것이었다. 이로써, 기민련은사민/ 자민연정의독일정책을수용하면서도, 그것에독일문제에관한법적입장의관철, 독일의국가적통일요구의고수, 공산주의와의이데올로기적대결고수등기민련의전통적관심사를결합시켜보다공세적입장에서재해석하고추진하는해법을찾을수있었다. 이러한기본방향은 1980년연방의회선거에서다시한번패배한이후에최종적으로다시한번확인되었다. 1981년의함부르크당대회에나타난독일정책에관련한기민련의입장은 11
이랬다. 즉, 독일통일이될때까지, 독일정책의주요과제는독일인들이분단때문에겪고있는고통을줄여야한다. 두독일국가간사람들의접촉, 의견과정보의교류가최대한늘어나도록노력해야한다. 이렇게되면, 분단상태에서도민족통일이유지될수있을것이다. 기민련은독일정책의핵심은통일이아니라, 동독지역에사는사람들의생활이개선되는방향에서동독과협력한다는것이라선언하였다. 또한기민련은동독을불안정화시키는정책을취하지않을것을밝혔다. 동독이일정하게안정되어있을때에만, 협상이성사될수있고또한지켜질수있다는것이었다. 즉, 동독과의협상및조약을기초로한양독관계를발전시키는기본목적은동독사람들이인간존엄성에걸맞은자유권을가질수있도록하는것이다, 서독은이를촉진하기위해서동독에물질적원조를기꺼이제공할것이지만, 그경우에동독사회주의통일당이직면하게되는민감한내부정치적문제도배려해주어야한다는것이었다. 이로써, 기민련은사민/ 자민연정의독일정책과조약들을조건없이받아들였지만, 여전히독일문제에관한전통적인법리적입장을고수하면서인권문제를동시에내세웠다. 기민련은이제사민/ 자민연정의독일정책자체에대해서반대하는것이아니라, 사민/ 자민연정이그정책과조약의가능성을완전히활용하지못하고있다는입장에서독일정책상의야당역할을수행했다. 그러나기민련의온건파가관철시킨이러한입장에대해서기민련내보수파와기사연은반 대입장을취했다. 보수파의입장은 1978년에공표된기사연연방의회의원독일정책의기본 방향에서나타났다. 기사연의독일정책적핵심은동독주민에게인권과자결권을확보해주는 것이며, 이를통해서독일통일을실현한다는것이었다. 이는인권과자결권요구를수단으로 하여, 동독의국가로서의존재정당성을부정하며, 동독사회주의통일당의권력지위를불안에 빠뜨리며, 결국이를통해통일을이루자는정책이었다. 이는동독에살고있는사람들의상황 을사소하더라도조약으로확정된조치들을통해서개선하는것을목표로하며, 그러기위해서 는협상상대방이대내외적으로안정되어있어야하며그로써예측가능해야한다는사민/ 자민 연정그리고 ( 바로위에서서술한대로 1977 년이후) 기민당의정책방향과대치되는것이었 다. 4. 결 론 독일의분단과서독국가의탄생은동서냉전의산물이었다. 1960년대초부터동서냉전이이완되기시작하면서, 서독국가의냉전적정체성과외교정책은모순에빠지기시작했다. 서독은 1970 년대초에들어서야사민/ 자민연정에의해외교정책상으로긴장완화에적응할수있었다. 신동방 독일정책이그것이다. 그러나기민/ 기사연을중심으로한서독의보수세력은 냉전적반공산주의를고수하고자했다. 이문제를두고, 70 년대전반에걸쳐, 사민/ 자민연정과 12
야당인기민/ 기사연이국내정치적인대결을벌였다. 결국, 기민/ 기사연의주류는보수적이데올로기를고수하면서도, 사민/ 자민연정의독일정책상의기본개념을적극적으로수용했다. 70 년대의대결이본논문의주제였지만, 마지막으로간략하게 80년대의상황에대해서언급한다. 1970년대말 80 년대초미 소간신냉전이뚜렷해짐으로써, 두독일간관계도더불어악화될수있는위험이발생했다. 그러나이러한가능성은현실화되지않았다. 신냉전과함께서독에서는 1982 년보수적인기민/ 기사연과자민당연정이들어섰고, 헬무트콜이새로운총리로선출되었다. 콜정부는서방동맹에의충실성을분명하게선언했으며, 동독에대한이데올로기적이며, 규범적공세를전개했다. 이러한입장은분명히과거사민/ 자민연정의브란트및슈미트정권과는다른것이었다. 그러나콜정부는동독과기존에맺어온협력관계를실용주의적인차원에서계속확대해나갔다. 콜정부의이데올로기적공세의대상은동독도, 야당인사민당도아니었다. 그것은기민/ 기사연의보수파를연정노선에통합시키기위한당내용이었다. 80 년대전기간에걸쳐, 여당인기민/ 기사연내부의온건파와보수파의대립은독일정책을둘러싼서독내국내정치대결축의하나였다. 1989년 11월경까지도콜정부는동독국가를인정하면서교류 협력확대를추진하는전통적정책에충실했다. 그러나이즈음동독국가의위기가심화됨에따라, 콜정부는전통적독일정책을포기하고, 말그대로의의미에서통 일정책으로방향을전환했다. 그리고 1990년 10월 3 일동서독통일조약이체결되었다. 13
독일통일후동독지역의통신망구축 안두순, 노영곤, 서울시립대학교교수독일보쿰대학교박사과정 2000년 11월 통일후동서독의경제력격차해소를위해서동독사회간접자본확충이중요한과제로떠올랐으며, 독의건전한경제발전을위해통신망의연결이시급한실정이었다. 양 통일이전동독의전화보급률은 10.6% 로서독의 45.9% 보다훨씬뒤져있었으며이러한격차를해소 하기위해서통일전에도양독간의노력이있었지만본격적인작업은 전자통신망현대화종합계획 이발표된이후부터이다. 1990년의 Telekom 2000 이라는 집중적이고실용주의적인사업추진에따라동독지역의통신여건은획기적으로개선되었다. 1997년에는동독주민의두명중한명이전화회선을가지게되었고, 광케이블설치와디지털화작업으로독일전지역이이동통신으로연결되었다. 이러한성과의이면에는많은난관도있었지만임기응변적접근과기술문제의실용주의적해결로난관을극복했다. 대표적사례로공기( 工期 ) 단축을위해서먼저통신관로( 通信管路 ) 를설치, 구리선을연결한다음점차동일통신관로내에서광케이블로대체하는등효율성문제도동시에해결하였다. 중앙집중식으로조직된구동독체신체계를분권화하고사업단위별로분할하여매각, 민영화함으로써연방정부의재정부담을덜고경쟁체제를도입, 통신서비스시장의활성화를도모하였다. 적극적인남북경협을통해서북한경제의현대화를유도해야하는현실에서구동독지역통신망의현대화경험이우리에게주는시사점은지대하다고할수있다.
1. 체제통합과사회간접자본확충의중요성 남북간경협에대한논의가본격화되면서남북간사회간접자본연결에대한과제가관심의초점으로떠오 르고있다. 그중에는도로와철도망의연결과함께통신망의확충도포함되어있다. 이와관련하여통일 10년 을맞는독일이양독간에존재했던질과양적인통신망격차를어떻게극복하였으며그과정중에나타났던 난관은어떠한것들이있었는지, 또이를해결하는정책적대안은무엇이었는지등에대한연구는우리에게많 은시사점을줄것이다. 동서독의통신망연결에많은애로가존재함은 1990년 10 월에있었던통일이전에이미널리인식되었다. 이는통일십년전인 수있다. 1980년대초부터양독간통신시설개선을위한공동노력이시작되었음을보아도알 통일이되기도전에통신망확충사업을이처럼서두른것은동독의빠른경제재건을통한동서독의경제 통합을위해서통신망확충이그처럼중요한위치를점하기때문이었다. 당시동독에는산업입지조건의중요 요소중하나인통신망시설이낙후해서서독이나외국인투자가들도동독지역의산업에투자하기를꺼렸다. 2. 통일당시구동독지역의통신시설현황 몇가지지표만보아도동독지역의통신시설이서독에비하여현저히뒤떨어져있음을알수있다. 통일 당시전화회선확보율은서독이 100명당 45.9명인반면동독이 100명당 10.6 명이었다. 당시서독에는 40만대 이상의전송기( 팩시밀리) 가보급되었는데동독에는팩스기가단지 2,500 대뿐이었고, 서독에이미널리보급되 기시작하였던현대적기술인 BTX( 영상문자전환기), 무선전화선그리고디지털화된광케이블망들은전혀 찾아볼수가없었다. 다만텔렉스의보급만은양독이비슷하여서독은 18,192 선을가지고있었고, 동독은 18,000 선을가지고있었다(1989 년). 동독은통신망의미비외에통신기기역시기술의후진성으로서독과커다란격차를보이고있었다. 통신 기기들은일부 1920 년대것을포함, 72% 가 1970 년이전부터사용했던기계들이었다. 또한, 지역간연결도 23% 가 1930 년대에사용하던낡은기술에의존했다. 이러한기기나기술로서독이나서방세계와원활한통신 을기대하는것자체가무리였다. 그나마기존의정보통신망이특정지역, 즉동베를린에만집중된것도문제였다. 통신망이경제행위를위 해서쓰인것이아니라오히려군사적목적이나행정처리를위해서중점적으로사용되었기때문에동독의수
도였고모든중요한행정기관이위치해있던동베를린에밀집된것은어쩌면당연한결과였을것이다. 그럼에 도불구하고통일직후에동서베를린을합친통신망의수준은유럽의낙후지역인크레타섬이나북아일랜드 수준밖에되지않았다. 동서독을연결했던정보통신망도미약하기는마찬가지였다. 서독에서동독으로연결하는전화선은 690회선 인데비하여동독에서서독으로연결하는선은단지 111 회선밖에되지않았다. 그중에서 513회선과 95회선이 베를린지역을연결하는선이었다. 즉, 동서독을연결하는정보통신선의 70% 이상이동서베를린을연결하는 선이었다. 그러면왜구동독체제하에서통신망시설이미비되었는가? 그원인으로는먼저투자부족을들수있다. 구동독체신청은통신사업에서매년흑자를보았지만그중 3분의 1만이통신분야에투자되고나머지는정부 의다른예산사업에전용되었다. 매년통신분야의투자는전투자액의0.7% 에서1.3% 밖에안되었다. 둘째, 통신시설투자의비효율성을들수있다. 구동독정부는민간활동이나경제적목적을위한투자외에군사적인목적이나행정을위해서특별선을 깔정도로투자액을낭비했다. 셋째, 통신시설에대한기술이부족했다. 이미 2차대전이전의기술로만들어 진기기들을계속해서썼고새로운기술투자에소홀했다. 넷째, 설사신기술이개발되어도전자산업분야의 기업들이새로운기술의활용을등한시했다. 3. Telekom 2000" 의사업계획안 통일과동시에양독의체신부는하나로통합되었고동독지역의통신체계현대화와동서독간통신망확충 이체신부의주요정책과제로떠올랐다. 이과제수행의일환으로나온것이 Telekom 2000 이라는전자통신 망현대화종합계획이었다. 1990 년에발표된이계획안은통신망, 통신기기및통신기술등통신체계에필 요한모든분야를그상호연관성을감안하여한꺼번에현대화하는통합적인종합계획이었다. 통신선이깔려 도통신기기가불량하면정보유통이원활하지못할것이고, 인공위성의발달없이는정보가공간을초월해서 빠른시간안에전달되는것은불가능할것이다. 다. Telekom 2000 계획은 1989 년을기점으로삼아, 1997년에완료되는것으로다음과같은목표치를설정하였 - 전화선을 190만회선에서 900만회선으로확장 - 전송기( 팩시밀리) 를 5천대에서 36만대로확장
- 이동통신기기를거의무에서 30만대로설치 -ISDN선을 5천선에서 10만 6천선으로확장 - 영상문자전환기(BTX) 를 500대에서 10만대로확장 - 공중전화기를 2만5천대에서 8만5천대로확장 - 유선방송선을무의상태에서 5백만선으로확장 그외에정보통신망과통신기기들을현대화하고디지털화하는내용도포함되어있다. 4. 통신망확충과정의난관과해결방안 일반적으로독일인들은어떤사업을수행함에있어계획이치밀하고, 의사결정을신중하게하며, 실천도착 실하게하는것으로알려졌다. 따라서 Telekom 2000 같은대규모국책사업을짧은계획기간, 신속한의사결 정, 그리고다양한설비공사를순차적이아닌동시적인시공으로수행한다는것은평시같으면상상하기힘든 일이다. 그러나 Telekom 2000 의사업은통일이라는특수상황에서양독간경제통합의초석을놓는다는화급 한과제를감안, 유례없이큰사업을역시유례없이짧은기간에입안, 수행에들어갔다. 4.1. 기술적인문제점과해결방안 동독지역의통신시설확충을위한기술적인문제점은시간과효율성문제등두가지로볼수있다. 독일 에서통신분야의시설계획은정상적인경우일차로 15년에서 25년간의장기적인통신분야발전계획을작성 한다. 통신분야의장기발전계획은장기적인수요예측, 최상의통신시설계획등을담고있다. 다음으로 통신시설시공 5년내지 2년전에 1 차계획에대한검토와수정을거친구상계획(concept plan) 이만들어진 다. 이계획에서는계획된공급량이수요의발전추이와일치하는지조사하며, 시공기간중필요한물자와재 정수요를추정한다. 공사가시작되기 1 년전에세번째단계인구체적공사진행계획이작성된다. 그러나이러한일반적인공사계획단계를동독지역의통신시설을확충하는곳에적용하기에는상황이급 박했다. Telekom 2000 의계획에따르면, 이사업이 1997년에끝나게되어있었지만통일직후동독주민들이 신청한전화가입만도 130만건이상적체되어있었고동독의경제재건을위해서는새로설립된생산업체나 서비스업체에게통신시설을보급해야했기때문이다. 이러한시급성을감안하여 Telekom 2000 은하나의비상계획으로간주, 시간적문제를극복하기위해서다 음과같은방법을사용하였다.
첫째, 수요량계산의간편화. 1997년까지추정되는동독지역의통신시설수요량예상을과거동독의추세 가아니라서독의경험을토대로해서더높게책정했다. 둘째, 장기적인발전계획생략. 일상적으로만들던통신분야장기발전계획을생략하고구체적인통신망 구조계획으로대체했으며, 통신구조망의다양한계획을비교, 검토한후선택하는과정을생략하여시간을 절약했다. 셋째, 임기응변적접근. 궁극적목표는동독전지역의디지털화였지만초기의공급부족상태에서는기존 의아날로그식여러통신선을함께연계시켜사용하면서점진적으로디지털화된광케이블로대체했다. 넷째, 공사시행주체의다양화. 일반적으로통신망을설치하는것은공공기업인통신시설업체의독점사 업이지만, 대기업체나행정기관의통신선설치를어느특정기업에일괄발주하는대신예외적으로일반민간 기업에분산, 발주하였다. 다섯째, 통신선의지상설치. 통신선은보통지하에설치하지만, 시간제약을극복하기위하여지형상지하 설치가어려운곳은일단지상에설치했다. 여섯째, 무선통신망사용. 통신망의지속확충에도불구하고시설용량의부족이해소되지않자무선통신 기기나인공위성의공급확충을병행하여공급부족문제를우회했다. 통신망확충계획에서대두된효율성문제는통신선을어떻게짧은기간에가장효율적으로설치하는가에 있었다. 즉, 좋은성능의기기를적은비용으로설치하는것이었다. 다음은독일에서통신망을설치할때효율 성을제고하기위하여취한몇가지사례이다. 첫째, 디지털화된광케이블과구리선을병행하여활용했다. 통신량이많은지역간의통신망은디지털화된 광케이블선을이용한반면통신량이적은각가정이나직장에연결은구리선을이용했다. 둘째, 빠른통신망구축을위해서초기에는기존의구리선을사용하였다. 이구리선은먼저케이블관을매 설한후그안에설치, 사용하다가차츰광케이블로대체하였지만광케이블선은이미매설된케이블관을활 용하였다. 이렇게함으로써구리선을광케이블로교체할때이중의공사를방지하였다. 4.2. 조직상의문제와해결방안 중앙집권체제하에서구동독의체신부는대체로중앙집권적으로방대하게조직되어있었다. 체신부산하에 중앙에 12개사업부서와지방에 15개지방관리국이있었고총종업원은 12만 9 천명에이르렀다. 그중에서 통신국산하에근무하는인력이총 4 만명이었고, 관리및행정부서에근무한인력이총 1만 8 천명이었다. 그들은풍부한경험과재교육등으로구체제하에서의직무수행에는별다른지장이없었으나, 서독의새로운 기술을다룰수있는기술자는상대적으로부족했다. 또한조직자체가관료주의적이고비효율적이어서개방
체제하에서더이상경쟁력을갖추지못했다. 동서독의체신부가통합되면서동독체신부의 12개중앙관리부서들은 1990년 6월 5 일통신총관리국, 우 편총관리국그리고우편은행및기업재정담당총관리국등 3 개로, 그리고지방의 15개지역관리국은 5개 주의관리국으로개편되었다. 이러한편제의개편과함께관료주의적인비효율적운영체제가효율적인기업식 경영조직으로개편되었다. 즉, 통신시장의자유화에맞게경쟁체제로개편되고새로운기술을소화할수있 는인사정책이도입되었다. 연방차원의조직개편은어려운문제가아니었다. 오히려통신부산하하부기관들을관료주의적분위기에 서기업의경영체제로바꾸는작업이더어려웠다. 그이유는통신업무의특성상하부기관에서정부의통제 와기업적경영과제가동시에수행되어야하는데과거통신부산하조직은행정일변도로길들여져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경쟁기업들을상대로치열한경쟁을해야하는독일의체신인력들에게소비자들의욕구를 충족시키는경영마인드를불어넣는데에는상당한노력과기간이필요했다. 새로운조직개편및과제수행을위해서모든인력들이그들의작업능력에따라경영체제로재배치되었 고, 서독의새로운기술이나경영방법을익히기위해서재교육을받아야했다. 기업의경쟁력과비용을감소 시키기위해서감원도동반되었다. 이와반대로새로운조직에따라일자리를창출하는기관도있었다. 예를 들어연방총관리국산하에 20 개의참모국이새롭게형성되었다. 4.3. 재정적인문제와해결방안 당초 Telekom 2000 계획을실행하기위해서서독의통신부는 550억마르크의투자계획을세웠으나이금 액으로는부족하다는것이사후에판명되었다. 통신부산하의건물이나통신설비가노후해서개보수수요가증 대하였기때문이다. 투자금액의증가로인하여통신국의자기자본비율이 5% 로현저하게떨어진것도부담으 로작용하였다. 더욱이동독통신국의자산은서독통신국자산의 4% 밖에안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동독스 스로가투자할수있는능력이없었다. 그러므로통신시설재건에대한모든비용은독일의정부와연방통신청 이책임을져야했다. 투자문제가해결된다고하더라도동독지역에서예상되는장기적자재정을어떻게해결 할것인지도큰과제로등장하였다. 결국민영화를통해서만돌파구가마련될것이라는것이결론이었다. 5. 통신시설의민영화 5.1. 민영화를위한제도및조직개혁 통신분야의민영화는이미미국(1982), 영국(1984) 그리고일본(1985) 에서실시되었다. 유럽연합은통신시 장개방을지원함으로써민간기업들이통신시장에참여할수있는기회를주었으며, 시장내에경쟁을불러일
으켰다. 이런시장자유화의흐름이유럽연합내에새로운기업법을제정하는기회를만들었다. 독일의통신분야개혁은 1990년 1월 1일에실행된우편개혁 1 호의체신구조법에서부터시작되었다. 국영 기업이었던연방체신청(Bundespost) 은법령에따라서기존의체신업무를우편, 통신그리고우편은행으로나 누어각기독립된공기업으로변환되었다. 지금까지연방체신청은두가지의과제, 즉행정적, 경영적과제를 동시에수행하였으나이제는독립된공기업하에서업무가분할되었다. 국제간협약그리고통신시장의공정 성을이룩하기위한행정적인과제는체신부가관리를하고, 경영적인책임은통신공기업이넘겨받았다. 이러 한자율적인독립경영은동독지역의통신망구축을위한투자프로그램을다양하게했다. 즉, 민간기업들의 통신망구축에참여할수있는기회가주어졌다. 1994년 6월 29일에제정된우편개혁 2호의법령은통신공기업이주식회사로바뀌게되는법적인기반을 형성했다. 이법에따라서 1995년 1월 1 일에통신국영기업이독일통신주식회사(Deutsche Telekom AG) 로바 뀌었다. 주식회사로바뀌면서기존의공기업이가지고있던재산을넘겨받음과동시에공공기업이가지고있 던채무인 1천 250 억마르크를책임져야했다. 1996년 11 월에는독일통신주식회사의주식이상장되었다. 그 러나 1997년 12월 31일까지는아직도독일통신주식회사가통신시장을독점하고있었는데 1992년유럽연합 이제정한규칙에따라독일의통신시장도 1998년 1월 1일부터민간기업이시장에참여할수있도록통신 시장이자유화되었다. 그러므로독일의통신시장이완벽하게경쟁의체계로돌입하였다. 이러한통신분야의질서정책적변화는국가가독점하였던통신서비스가통신개혁을통하여시장경제적 경쟁체제로변하도록만들었다. 기존의독일통신주식회사도새롭게변화하는통신시장의환경에맞게기업 내부의구조를조정하지않으면안되었다. 즉, 행정과제수행외에기업의이윤을추구하기위하여소비자의 구매성향을따르는판매정책을실시하여야했다. 다른한편 동독의통신망확충을위해투자했던채무를주 식시장을통하여자기자본으로전환함으로써독일통신주식회사의자기자본비율이높아졌다. 5.2. 민영화에따른통신시장의변화 1998년 1월 1일을기점으로하여민간기업들이통신시장에참여할수있는기회가주어짐에따라통신시 장은새로운변모를보여주었다. < 표1> 은1998년 1월 1일통신시장이개방된후통신시장에참여한기업수 의변화추이를보여준다.< 표 1> 에나타난 인가수 는독일체신청으로부터통신망사용허가를얻은회사 의수를나타내고, 신고수는통신시장에참여한기업으로서허가없이단지체신청에신고만한회사를의미 한다. < 표 1> 에서보는바와같이시장이개방됨과동시에이미총 1,103개회사가통신서비스시장에참여했 고불과3년도채안되어서1,823 개회사로증가했다. 이것은통신시장내에기업간의경쟁이증가했음을보 여준다.
< 표 1> 통신시장에참여한민간기업수 98년 2월 4일 98년 7월22일 99년 2월 3일 99년 9월22일 00년 2월23일 00년중간 인가수 269 395 491 554 611 681 신고수 1,066 1,222 1,355 1,593 1,629 1,747 총기업수 1,103 1,276 1,458 1,707 1,723 1,823 참고: 체신부로부터인가를받은기업이자신의소유를다른기업으로이전함으로발생한중복된기업수 를뺐음. 이동통신시장을보면, 오히려민간기업에서이동통신시장에참여한기업들이공기업이었던 독일통신주 식회사 보다더높은시장점유율을가지고있다. < 표 2> 는 2000년 6월현재독일이동통신시장의점유율을 보여주고있다. 독일통신주식회사 의자회사인 독일텔레콤이동통신유한회사 가이동통신시장의 39.4% 를점유한반면, 민간기업인 만네스만이동통신유한회사 의점유율 40.6% 를포함, 민간기업들의 시장의점유율이 60.6% 에이른다. 이는이동통신시장에서는민간기업들이정부산하에있었던 독일통신주 식회사 보다도더경쟁력을갖추었음을의미한다. < 표 2> 독일이동통신시장의시장점유율(2000년 6 월) 이동통신회사시장점유율 (%) 독일텔레콤이동통신유한회사 39.4 Mannesmann 이동통신유한회사 40.6 E-플러스이동통신유한회사 14.7 Viag 인터콤유한회사 5.3 통신시장의자유화는민간기업이통신시장에참여하는기회를주었을뿐만아니라수요자에게도좋은영 향을끼쳤다. 자료에의하면 1997년낮시간에 1분당전화사용료가 60 페니히(1 마르크=100 페니히) 이던것이 2000년 6월에는 6.6 페니히로떨어졌다. 이러한결과로서일반전화의판매를통한수입은줄어들었지만, 다른 통신시장의확대로, 이동통신, 캐리어- 사업, 유선방송등, 다른여러시장에서수입이증가하였다 (< 표 3> 참 조). 그러므로통신시장의총수입은 1998년 864억마르크에서 1999년에 955 억마르크로증가했다. 이사실로 미루어, 통신시장의자유화는수요자나공급자에게모두득이되었음을알수있다.
< 표 3> 독일통신시장의판매액 ( 단위: 십억마르크) 1998년 1999년 일반전화선 45.8 41.9 이동통신 18.6 24.9 대여수입 2.1 2.1 Carrier-사업 3.5 7.1 유선방송 4.5 4.6 기타( 인터넷, 정보서비스등) 11.9 14.9 합계 86.4 95.5 6. 동독지역의통신망발전추세 < 표4> 에는 1990년부터 1995 년까지동독지역전화회선수의발전추이가나타나있다. 동독지역에 1991년 에 50 만회선, 1992년에 7 십만회선, 1993년에 100 만회선, 1994년에 120만회선그리고 1995년에 160만회선 이각각증가하여 1995년에동독지역의전화회선은총 690 만에달하였다. 1991년증가된 50만회선중에서 3분의 1 이상이영업을위주로하는기업이나서비스업체에우선적으로연결 되었다. 이로써동독지역의총사업체중 98% 정도가적어도한대의전화를가질수있었다. 1990년에동독 지역에인구 100명당 10.9 명이전화회선을가지고있었는데, 1995년에는 41.4 명으로늘었다. 이는서독보급 률의 77% 에해당된다. 1997년에상황이더욱개선되어전화회선이 760만으로늘어동독주민두명중하나 는전화회선을가지게되었다. < 표 5> 에는독일전지역의전화회선수가나타나있다. 독일총전화회선은 1990년 3천200만회선에서 1999년 6월까지 4천720 만회선으로증가했다. 10년동안에 1천520만회선이증가하여근 50% 의성장세를보 였다. 전화회선외에도전화나정보를전달할수있는 ISDN선이 1997년까지 110 만선이놓여졌으며, 유선방송선 은 460 만가정에연결되었다. 그외에동독지역에 1997년까지 14만킬로미터의광케이블선과 200만킬로미터 의구리선이깔렸는데이는지구를 250 바퀴나돌수있는길이이다. 모든도시를연결하는전화선과장거리 전화선이디지털화되었고이로써동독지역내의통신망현대화작업은일단락지어졌다.
< 표 4> 동독지역전화회선수의발전과정 국가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영국전화회선수 ( 백만) 24.91 25.36 25.59 26.09 26.60 27.07 백명당전화회선수 43.30 44.00 44.30 45.00 45.70 46.60 프랑스전화회선수 ( 백만) 28.10 29.00 30.10 30.90 31.60 32.40 백명당전화회선수 49.40 50.80 52.40 53.60 54.50 55.80 독일전화회선수 ( 백만) 31.90 33.60 35.40 37.00 39.20 40.40 백명당전화회선수 39.38 41.48 43.87 46.02 49.01 50.96 서독지역전화회선수 ( 백만) 30.00 31.20 32.30 32.90 33.90 33.50 (A) 백명당전화회선수 47.24 49.13 50.87 51.81 53.85 53.70 동독지역전화회선수 ( 백만) 1.90 2.40 3.10 4.10 5.30 6.90 (B) 백명당전화회선수 10.86 13.71 17.71 23.43 31.42 41.40 B/A % 22.90 27.80 34.80 45.20 50.30 77.00 < 표 5> 독일의전화회선수의증가량 ( 단위: 백만회선)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6월 ISDN 0.1 0.2 0.4 0.8 1.7 2.8 5.2 7.4 10.1 11.7 아날로그방식 31.9 33.5 35.2 36.7 38.2 39.2 39.0 37.8 36.4 35.5 합계 32.0 33.7 35.6 37.5 39.9 42.0 44.2 45.2 46.5 47.2 1990년라이프치히의춘계박람회에서처음으로소개되었던 C-선이라고불리는아날로그방식의이동통신 이동독지역에보급되어 1990년에는동독주민의 80% 가, 그리고 1993년에는전동독주민이이동통신 C-선 을통하여무선통신을가능하게했다. 아날로그방식인 C-선은2000년 12월말로폐쇄되고모든이동통신은 디지털방식으로대체될예정이다. 다시 1994년에는디지털화된이동통신 D1 이전동독지역에보급되었다. 이러한이동통신망은초기에전화회선의연결안된곳에대체용으로사용하게되었으며, 이동통신 D1 은 중소기업회사들의업무능력을높이는데중요한역할을했다. 이동통신가입자수는 1992년부터 2000년 6월 까지기하급수적으로증가하여 2000년 12월말에는 4천8 백만에도달, 2명중 1명이이동통신을사용할것으로 예측된다. 7. 결 론
구동독지역의낙후된통신시설은통일후동독지역의경제발전을저해하는요소중의하나였다. 동독 지역을서독의경제수준으로올리기위한정책수단중의하나로추진된것이 Telekom 2000 이라는종합정보 망구축사업이었다. 이사업은독일체신사상규모가가장방대하고복잡한, 그리고기술적인임기응변과 변화된여건에신속한적응을요하는작업이었다. 이사업의일환으로독일의통신체계는대대적으로기술적, 조직적그리고제도적인개혁을단행했다. 1997 년 12월 10일 Telekom 2000 사업에대한최종보고에서 독일통신주식회사 회장은사업이계획보다더 좋은성과를거두었으며, 전동독지역의통신망이디지털화되었고, 전화가입신청후 10년이상을기다려야 했던구동독시절과달리이제는동독지역주민들이신청후 다고자평했다. 5일이면전화를이용할수있을정도로발전되었 통신시장의민영화가동독지역의통신망구축을위해재정적으로중요한역할을했을뿐만아니라, 비효율 적인공기업에서효율적인기업경영체제로전환되는데일조를했다. 경쟁체제의도입으로통신시설이용 료가대폭인하되어소비자의이익이도모되었을뿐만아니라통신시설사용빈도의대폭증가로통신사업자 의수익성도따라서제고되었다. 북한의정보통신분야도동독못지않게낙후된것으로알려졌다. 본격적인남북경협시대에진입하는상황 에서북한의통신시설을효율적으로확충하기위해독일의경험을좀더심도있게연구하는작업이필요하다 고보인다.
통일전서독의대동독정책 김영윤, 민족통일연구원선임연구위원 1998년 11월 1. 서독은분단 40년간한결같이동독을외국으로보지않고하나의특수관계에두고통일에대비하는정책을추진하였다. 동독은하나의개별국가로서서독에서분리하려고시도하였지만서독은시종일관동서독관계를미해결상태에두고독일의장래에대해동독주민들이스스로자유로운선택을할수있도록하였다. 2. 서독은자유, 평화, 통일이라는가치에최우선순위를두고대동독정책을추진하였다. 자유와평화가 언제나통일보다도우선순위에있게함으로써통일을위해자유와평화를포기하는통일지상주의의자 세가아니라동독주민들이자유롭게살아가는것을더중요시하였다. 이를위해서독은항상인도주의적 차원의지원과협력을통해대동독접근을이루어나갔다. 3. 독일통일을가능하게했던서독의대동독정책기조는접근을통한변화라는작은걸음의정책에있 었으며, 이와같은정책은동서독간의여러갈등요인과서독내의정권교체에도불구하고일관성을유지 하였다. 4. 서독의대동독정책은동서독간합의를통한협정에도달하고체결한협정을철저히이행함으로써실천되었다. 동서독간에체결된협정은서독의대동독정책을실현시키는충실한수단으로기능하였다.
1. 서 론 대동독정책이란, 일반적으로서독의 ' 통일정책' 이라고할수있는동방정책을의미하는것이다. 동방 정책은구소련을비롯한동구권에대한정책을말하며, 독일정책은동서독관계에대한정책을뜻한다. 동 방정책은독일정책에큰영향을미치고독일정책속에포함되어있었다고볼수있는데, 이는서독정부 가독일문제와관련하여동독과의관계개선및이를위한소련의이해를고려해야했으며, 폴란드와체코 같은동유럽국가들과의화해를비롯하여미국을포함한프랑스, 영국등서방국가들의협력이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글은통일전서독의대동독정책이어떻게전개되었으며, 그변화배경과함께동독에대 한기본적인관계설정이어떠하였는가를제시하는데그목적이있다. 2. 대동독정책의전개과정 1) 힘의우위에의한정책 1945년 5월 8일독일군이연합군에무조건항복한후전승 4개국은같은해 6월 5일베를린에서연합국 통제위원회를설치하여독일을분할통치하고베를린을공동관리한다는공동선언을발표하였다. 이어 7월 에는다시포츠담에서독일의무장해제, 비무장화, 탈나찌및민주화라는네가지원칙을수립하고독일 중앙정부의수립은당분간보류하되, 점령기간중독일전체를하나의경제단위로취급하는데합의했다. 독일내중앙정부수립은비로소서방 3개점령국이 1948년 7월 1일서독지역의주수상들에게헌법제 정권을허용하는 [ 프랑크푸르트문서] 를전달, 서독지역에적용될새로운헌법을제정하도록허용하면서가 능해졌다. 서독지역의주수상들은서독에수립되는국가는헌법이아닌 [ 기본법] 을제정하여통일될때까 지효력을발휘할수있도록한뒤, 통일이되면독일국민전체의자유로운의사에따라새로운헌법을제 정하기로결의하였다. 그리고기본법은국회가아닌의회위원회에서제정하고, 이의확정도국민투표를거치지않고주의회를 통하기로하였다. 기본법전문은 전독일민족은자유로운자결권으로독일의통일과자유를달성해야한다. 고규정함으로 써통일문제에관한서독정부의기본원칙을제시하고, 제23조에는독일의다른주가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면그가입한주에도기본법이적용된다. 고명시하여동독지역의주들이독일연방공화국에가입할 수있는길을열어두었다. 나아가서제146조에는이기본법은독일국민의자유로운결정으로제정된헌 법이발효되는날그효력을잃는다. 고밝힘으로써통일이후새로운헌법을제정할수있는가능성도마 련해두었다.
기본법이공포된후 1949년 8 월최초로연방의회총선이치러졌으며, 여기에서기민 기사당이자민당과 연정을하는정부가구성되었다. 기민당의아데나워가초대수상이되고자민당의호이스는초대대통령이 되었다.9월 20 일아데나워는조각을완료하고연방정부를공식출범시켰다. 한편, 동독지역에서는 1945년 6 월소련군사행정청(SMAD) 이설치되면서소련에의한공산화작업이곧바 로시작되었는데, 1945년 9 월부터토지개혁이실시되고주요기간산업이국유화되었다. 그리고그이전 1945년 6-7 월에이미공산당, 사민당, 기민당, 자민당등여러정당이창당되고, 중앙행정기관이설립되었다. 1946년 4 월에는공산당(KPD) 과소련점령지역내사민당을합쳐독일사회통일당(SED) 이결성되었다. 그 후 1949년 10월 7 일임시인민회의에서독일민주공화국헌법이선포되었다. 1955 년파리조약이발효되면서서독은서유럽동맹과북대서양조약기구에가입하게되었으며, 기존의점령 규약도폐지되었다. 이로써서독은주권국가로서의면모를갖추게되었다. 아데나워정부는서독의서구편입에는주력하였으나, 동독에대해서는냉담한태도를보였다. 취임초 그는동독지역의정부수립에대해 동독정권은주민의자유의사에따라수립되지않았기때문에불법이 며, 따라서독일연방공화국만이독일국민을대변할권한이있다고밝힌바있다. 이에따라아데나워정부 는동독정부와의어떠한접촉도거부했으며, 이에한걸음더나아가다른나라들까지도동독과외교관계 를단절하게하는소위할슈타인원칙(Hallstein-Doktrin) 을채택하였다. 아데나워수상에게대동독정책은실질적인힘의우위를바탕으로하는것이었다고할수있다. 그는서 구의결속과힘을바탕으로대동유럽정책을추진하여야하며, 이과정에서세력균형이서방측에유리하게 전개될경우, 동서독의통일을포함하여독일문제가서독과서유럽의주도아래이루어질것이라고인식했 다. 다시말해, 대동독힘의우위정책을견지했던것이다. " 통일은자유로운가운데평화적으로이루어져야 한다" 는입장을표면적으로내세우면서도이를동독과의협상이아닌소련과직접협상을통해이루려고했 다. 그후 1950년대중반이후 1960년대말서독이동방정책을추진할때까지서독정부의대동독정책은 큰변화를보이지않았다. 즉서독의힘의우위에바탕을둔단일국가와단독대표권그리고자유총선을 통한대동독정책은큰변화를보이지않고 10 년간지속되었다. 그러나 1961년베를린장벽이구축되고동 서베를린간통행이단절됨으로써주민들의고통과불만은높아가면서아데나워의친서방정책과힘의 우위를바탕으로한대동독정책은그한계에부딪히게되었다. 2) 접근을통한변화 1963년 10월물러난아데나워수상의뒤를이어들어선에르하르트정권이보다융통성있는외교정책 을추진함으로써서독은동독을제외한동유럽국가들과의관계개선을시도하였다. 1966년 3월서독은동
유럽국가들에게무력사용포기, 군비통제및긴장완화를내용으로하는평화공안을보내는동시에같 은해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와 1964 년에는불가리아와각각무역대표부를설치 교환하였다. 이와때를같이하여야당인사민당에서는보다적극적인독일정책의추진을주장하였는데, 베를린시정 부대변인이었던에곤바르는 1963 년투찡어기독아카데미연설에서처음으로동독과의관계를 " 접근을 통한변화" 에맞출것을주장했다. 그리고당시베를린시장으로있던빌리브란트는베를린장벽으로인해 주민들이큰고통을받고있음을인식하여, 동독을향한실질적인접근정책을시도하였는바, 그는 1963년 12 월동독과베를린통과사증협정을체결함으로써서베를린주민들의동베를린방문을가능케했다. 이통 과사증협정체결은대동독정책의대전환을향한첫걸음으로서동독을국가로서인정하지않으려던종전의 태도에서한걸음나아간변화를의미하는것이었다. 다시말해, 동독이주장하는국제법상의국가인정이 라는목표에한걸음가까워지게된셈이었다. 1966 년불경기에대한대책을둘러싸고자민당이연정에서탈퇴함으로써서독에는기민당과사민당의대 연정이구성되었다. 수상에는기민당의키징어, 외무장관겸부수상에는사민당당수빌리브란트가취임하 였다. 키징어-브란트정부는동유럽국가들과의관계개선에서한걸음더나아가동독과의관계를진전시 키고자하였는데, 여기에서사민당은오데르- 나이세국경선인정, 할슈타인원칙의완화, 동독의사실상승 인문제등동독관련핵심문제에서기민 기사당보다훨씬진보적인자세를보였다. 키징어수상은 1966년 12월정부성명을통해동독을국가로승인하지는않지만관계증진을추진할의 사가있다고천명하면서이전에에르하르트수상이주장한바있는무력행사포기를다시한번제의하였 다. 이어서동독에인적. 물적교류를증진시키고분단으로인한고통을해소하며긴장을완화하기위한방 안에대해상호협력할것을제의했다. 또한, 키징어는연방의회시정연설에서동독불승인정책을지속할 것임을재선언하면서도서독의인간적 정신적및경제적관계개선을위한양독관리의접촉을제의하였으 며, 동독승인문제를부각시키지않으면서도동서독의접촉을강화함으로써동독주민의생활증진을추구 할것임을밝혔다. 그외에도 1 소련을비롯한동구제국과의외교관계수립, 2 핵무기의생산및보유 포기, 3 ' 뮌헨협정' 무효선언( 국경선문제), 4 나토및미국과의동맹관계유지, 5 독일과프랑스관계 증진과양국협조의필요성, 6 민족자결에의한독일의재통일등을강조하였다. 1967년 1월 31일서독이루마니아와외교관계를수립한이후사민당당수브란트는곧이어 4월 12일에 는서독의평화협정과긴장완화정책을발표하였으며, 4월 20 일에는 ' 할슈타인원칙' 폐기가능성과동독 인정가능성을발표함으로써기존의정책에일대변혁을가했다. 1969년 9월연방의회선거에서사민당과자민당이연정을구성함으로써수상이된브란트는대연정당시 제기했던신동방정책을적극적으로추진할수있게되었다. 브란트는 1969년 10 월독일문제, 베를린문제, 소련및동구와의관계그리고유럽평화문제에관한연
방하원연설및 1970년 1월의회에제출한국가현실에관한보고서에서동서독관계의특수성하에두개 독일국가의인정, 정부당국간교섭, 동서독간무력행사금지협정체결, 교역과인적접촉등을추진할 것을제시했다. 베를린과유럽문제에관련해서는베를린의안전보장, 베를린상황개선을위한전승 4개 국의동서베를린교통및서독과서베를린간왕복교통보장등을요구하였으며, 소련과동구의관계에 대해상대국의영토보전과국경을존중하는무력불행사협정체결등을언급하였다. 특히, 대동독정책과관련하여브란트는지금까지동독정부의사실상의승인을피하기위한정책에서탈 피하여 1 정부차원에서동독과협상하며, 2 동독을포함하여동유럽국가들과무력불행사에관한조약 체결을제안하고, 3 동독과의무역확대를추진하며, 4 전독성을내독성으로개칭하는것을밝혔다. 이후 서독은한편으로는동독과, 다른한편으로는소련및기타동구권과관계개선을위해활발한협상을전개 함으로써동서독정상회담, 소련과무력행사포기에관한조약, 폴란드와의관계개선에관한조약, 베를 린지위에관한전승 4 개국의협정그리고동서독기본조약등을체결하게되었다. 3) 기본조약체결과동서독교류 협력 동서독간교류협력의확대 발전이가능했던것은 1972년 12월에체결된동서독기본조약체결에서 출발한다. 기본조약은유럽모든국가들의국경선불가침과영토보전, 무력위협이나무력사용의포기를 규정하고있는조약본문과양독간관계설정및상호간자주 독립존중을비롯하여각분야별교류협 력등을규정하고있는 10 개의부속문서로구성되어있는데, 기본조약이체결됨으로써그이듬해인 1973 년 9 월에는서독통신사특파원이비로소동베를린에상주, 파견될수있었다. 또한같은해동서독은나란 히유엔에가입하게되었다. 한편, 동독도서독과기본조약을체결함으로써서방세계와의관계개선에본격적으로임하게되었으며, 앞서언급한 UN 등국제기구에가입한것은물론, 프랑스, 영국, 미국등서방국들과외교관계도수립하여 국제사회의동등한일원으로등장할수있었다. 그러나정작동서독관계개선에는소극적이었다. 이와같은동독의태도로기본조약에서합의한상주대표부의설치는기본조약체결후약 1년반이 지난 1974년 5 월에가서야비로소양측대표를교환할수있는상황이되었다. 당시브란트수상은독일에 두개의국가가존재한다는사실을인정하면서도동서독은언어, 문화, 역사, 가족관계등에서공통성을갖 는단일민족이라는양국간관계를견지한반면, 동독수상인호네커는사회주의민족국가인동독과자본 주의민족국가인서독은별개의국가로서양국사이에는어떠한특별한관계도없으며, 민족까지도다르다 는주장을계속견지하였던것이다. 1974년 4 월연방수상실보좌관귄터기윰간첩혐의사건을기화로브란트는수상직에서물러났으며, 그뒤를헬무트슈미트가이었지만슈미트는대동독정책관련, 브란트의업적을관리하는수준에머물렀
다. 슈미트수상은독일문제를주로모스크바와의협상을통해해결하려는자세를취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974년 10월슈미트의소련방문이후동서독간에는 1974년에서 1980년까지총 17개 의조약적성격을갖는협정이체결되었다. 여기에는예를들어 1974년 4 월건강 보건분야협정과비상업적지불청산에관한협정, 1975년 12월베 를린과마리엔보른간고속도로건설협정, 1976년 3 월우편및통신협정, 1976년 5월상대편국경을넘어 선갈탄채취에관한협정, 1978년 11월베를린과함부르크간고속도로및베를린텔토프운하건설에관 한협정, 1979년 12 월수의사협정, 1980 년바르타와헬레스하우전간고속도로연결협정, 1982년 6월상 호지불거래협정, 서베를린시민의동베를린과동독일일방문에관한협정, 1982년 9월청소년여행및 상호교류에관한협정등여러가지협정이있었다. 1982년 9월자민당의사민당과의연정탈퇴에따라헬무트콜을수상으로하는연립정부가들어선이후 서독정부는기본법전문에명시된통일명제를다시한번강조하고독일통일은자유로운자결권행사를 통해이룩되어야한다는의지를재확인했다. 콜수상은자유가통일의전제조건이며자유를희생하면서까 지통일을이룩할수없음을밝히면서취임직후부터동서독간유효한협정들에근거하여동서독주민들 의편의를도모하는포괄적이고장기적인해결책을마련함으로써동독과의협력관계를지속할것을선언했 다. 그럼에도불구하고양독관계에는별다른성과가나타나지않았다. 양독관계의돌파구가마련된것은 1983년 6월서독정부가동독정부에대한 10억마르크차관제공보 증이이루어지면서였다. 서독은차관보증의대가로동독에내독간경계선의자동발사장치를제거하고 동서독주민들의상호방문을통제하지말것을요구하였다. 그결과, 1984년 11월마지막자동발사장치 가철거되었으며, 이어동독은같은해 4 만명의동독주민들의서독합법적이주를허용했다. 그밖에도 여행및방문시수속절차와검문검색절차를간소화하였다. 또한문화와환경분야를비롯하여수질제 거, 산림피해방지, 핵시설안전문제에대한회담과협상이이루어졌다. 1984년 7월서독정부는동독에추가로 9억 5 천만마르크의은행차관에대한보증을섰으며, 그결과 동독정부는연금수령자의최소의무환전액을낮추고국경지역의방문에한해 장하는등상응한조치를취했다. 2일까지체류기간을연 1985년 3월 12일소련공산당서기장체르넨코의장례식에참석한콜수상은호네커와장시간의대담을 통해동서독관계개선을촉구하는동시에동서양진영간의군축협상재개를위해노력했다. 이어 1987 년 9월 7 일에는동독의국가원수로서는최초로호네커가서독을공식방문할수있게되었다. 서독은호네 커를국가원수로예우함으로써동독을하나의국가로인정하는뜻을표하기도했다. 당시콜수상은체제 근본적인문제에대한양독간차이가동서독주민들에게불편을끼쳐서는안될것이라고강조한데대해 호네커는이에호응하여비록자본주의와사회주의가서로상극이지만구체적인협력관계는지속되어야한
다고강조했다. 호네커의방문기간중동서독간에는환경, 방사선보호, 과학기술협력확대에관한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양독국경에서의여행, 방문과소포우송문제에대한완화조치가발표되었다. 1988년 3월 에는베를린지역을포함하여동독지역에대한장기적인전력공급협정이체결되었으며, 문화교류도활 발히추진되었다. 1987년에는 11,500 명의동독주민이서독으로이주하였으며, 1988년에는 25,000명을넘었 다. 1989 년여름에는동유럽의개혁과함께헝가리, 오스트리아국경의철조망이해제되자동독주민들이 서독으로물밀듯이몰려오기시작했으며이는독일이통일로향해가는시발점이되기도했다. 3. 대동독정책의특징과효과 1) 대동독특수관계 통일전까지서독은어떠한기조위에서대동독정책을추진하였는가? 서독이견지했던대동독정책의 핵심을알기위해서는서독이설정한대동독기본관계를아는것이중요하다. 1949년동독이수립되면서동독은헌법에독일은분리할수없는공화국이며, 독일국적은하나만있을 뿐이다라고밝히면서하나의독일을주장하였다. 그러나 1953년스탈린이사망하고동독의경제사정이계 속악화되는가운데 6월 17 일동베를린에서인민봉기가일어나자, 동독정부는 1953년 9월제16차당대 회에서독일에두개의국가가존재한다는것을선언하고, 서독에국제법적으로동독을인정할것을촉구 했다. 이는동독이기존에주장해오던단일국가개념에서탈피한것으로서독에비해힘의열세를인식한 동독의기존노선전환을의미하는것이었다. 동서독관계는기본조약에명시된표현과이를해석하는쌍방의상이한입장에서잘알수있는데, 기본 조약제1조에는동서독의관계를상호동등성에기초한정상적인선린관계로표시하고있다. 그러나이를 해석하는데동서독은큰차이를나타내었다. 동독은 정상적인선린관계를상호국제법적승인을포함한동등한주권을가진외국이라는관계로파 악하여동서독관계를내독관계라고표현하는것을거부했던반면, 서독은정상적이라는표현이국제법 적 ' 승인또는인정' 을의미하는것이아닌단순한실체존중을말하며, 선린이란단지밀접한, 공간적인, 인간적인관계를지칭하는것으로해석했다. 다시말해, 서독은동독과의관계를우방국이나동맹국의주 민들간에존재하는것과같은관계가아닌, 특수한형태속의관계라고규정하고정상적인선린관계가 동독에대한국제법적승인을의미하는것이아니라는입장을견지했다. 그리고이와같은입장을사실상 통일달성시까지일관성있게유지했다. 서독이견지한이와같은대동독특수관계는동독을국가로인정하는문제, 미해결독일문제를비롯하 여독일민족의존속과동일한역사, 2차대전패전국으로서겪어야하는공동운명을내포하는관계를나
타내는것으로서법적차원이아닌정치적인의미로만파악할수있는개념이다. 1973년 6월 18일연방헌법재판소는동서독간기본조약을어떤법질서에귀속시켜야하는가라는판결 에서양독간관계는가깝고도, 특수한관계로포기할수없는법적지위를부여받은관계라고규정한 바있다. 또한기본조약이갖는성격과관련해서는같은해 7월 31일동독은국제법상으로는국가인동시 에국제법주체이기는하나, 서독은이를국제법상으로승인하지않는다... 동시에기본조약체결은양독 관계의특수한성격을실질적으로인정하는것으로간주할수있다. 라고판결함으로써기본조약을형식적 으로는국제법상의조약으로, 내용상으로는내독관계를규정짓는이중성격의조약으로평가한바있다. 또한, 기본조약의내용이기본법의통일명제조항에위배되지않느냐는논란에대해서도서독헌법재판소 는 기본조약이평화보장과분단고통완화를통한인도적측면에서전민족의이해를고려하고있으므로 기본법전문에규정된재통일명제에위배되는것은아니며, 이조약에도불구하고독일민족의단일성과 단일독일국적은고수되며, 동독은국제법상으로인정되지않으므로합헌이라고판결하였다. 이상과같이동서독관계는기본조약을통해정상화되고국제적으로공식화되었지만 1 양독간의성격 규정, 즉국가간평화공존이냐, 민족내부의특수관계인가하는문제와함께, 2 관계정상화의목표, 즉 동독은서독으로부터의현상유지인정을통한자국의독자적인국가인정쪽에, 서독은조약의도구적, 잠 정적성격을강조하며분단고통완화를통한궁극적인통일쪽에, 그밖에도 3 민족문제, 4 국적문제 등에서동서독은근본적인입장차이를보였다. 이와관련 1974 년유엔총회연설에서양독의외무장관은 ' 민족문제' 와관련하여다음과같은상이한입 장을표명한바있는데, 서독외무장관겐셔는우리측은현분단상태를민족문제해결의마지막단계로 받아들일수없으며, 독일민족의자유로운자결권행사를통해분단국가는재통일되어야한다라고말하 면서하나의독일민족에서파생되는양독간의관계는특수관계라고재차천명했다. 이에대해, 동독의 외무장관피셔는 이러한서독의민족자결권강조는현유럽의상태를바꾸려는위험한발상이라고경고 하고이미동독국민들은자결권행사를통해사회주의를선택했다. 고주장하면서오늘날독일땅에는두 개의국가와두개의민족, 즉사회주의와자본주의민족이존재한다. 고밝혔다. 그러나기본조약이체결된이후동독은국가관계의특수성을부인하면서도, 다른한편으로는이를사실 상인정하는상반된태도를견지했다. 이는동독이양독관계의특수성을인정하지않으면내독관계로부터 얻은혜택이없어지는딜레마에기인하였기때문이었다. 따라서위와같은특수성이성립되어야하는양독 관계에서서독은경제적희생을, 동독은정치적희생을감수해야만했다. 2) 신동방정책과통일브란트의신동방정책은의도적인통일, 제도적인통일이아닌동독주민의힘에의해스스로서독과하
나가됨으로써자발적으로통일을원하는상황을만들수있었던시발점이었다. 다음에서는신동방정책추 진의배경과그것이통일에미친영향에대해기술하고자한다. 포츠담협정에따른전쟁손해배상처리와관련하여소련은자신의점령지역인동독에대해그배상을 청구하였으며, 서방측연합국들은동독지역의경제를소련에위임해버림으로써동서독은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사회적 정치적으로도분할되는결과를초래했다. 이와함께연합국들과서독정부는동서독점령 지역내에서여러가지까다로운행정절차를마련하여내독교역이이루어지는것을어렵게만들었다. 동 독으로의물품반출이나서독으로의반입을언제라도차단시킬수있는행정적장치를마련하였으며, 행정 지도권한을필요이상으로확대, 사용하는방법을통해동독에대한선별적 한시적경제제재조처를취 할수있도록하였다. 이와같은조치를서독과서방연합국들은소련과동독이베를린으로의통행을봉쇄 할때마다맞서는정치적, 경제적수단으로이용하였다. 다시말해, 서독은내독교역을베를린으로의통행 로가항시열려있도록보장하는수단으로이용하였다. 뿐만아니라동독공산당을몰락시키는정치적압력 수단으로사용하려고하였다. 사실당시동독으로서는동독경제가소련에대한전쟁보상으로인해크게 악화되었기때문에동독경제를위해내독교역은절실한사안이었다. 일부동독제품의경우에는서독시 장만큼유리한조건을갖춘곳이없었으며, 내독교역이국가의내부거래형식을띠었기때문에동독으로 서는큰경제적혜택을누리는셈이었다. 그러나서방의수출규제가동독의경제계획달성에큰차질을 주고있었기때문에동독은 까지했다. 1960년대에이르기까지내독교역의확대와무역규제완화를서독에요청하기 그러나당시실제취해졌던서방국가를위시한서독의동유럽국가를포함한대동독정책은동독의경 제발전에지장을주었다. 그와같은봉쇄정책은결과적으로동서독간생활수준격차를심화시키는요인 이되었으며, 이는동독주민들로하여금서독으로의탈출을결심하게만들었다. 그리고동독정부에대해 서는동서독간인적왕래를차단하는조치로작용하였기때문에궁극적으로양독간의대립을심화시키고 동독경제를사회주의경제진영으로더욱통합시키는결과를가져왔다. 이에동독정부가상호통신은물 론, 가족방문마저어렵게함으로써서독주민들에게동독은그야말로머나먼이웃나라로전락하는상태 가되었다. 이과정에서 1958 년이후수차례에걸친베를린봉쇄가대두되었으며, 1960년 9월에는내독협 정이파기되는상황에직면하기도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미국의요청에따른서독정부의대동독경제적 고립화정책은지속되었다. 1961년 8월베를린에장벽이설치되자서독정치가들은비로소과거에품었던통일의환상으로부터깨어 나독일민족문제를새로운시각에서고찰하게되었다. 독일통일은결코무력으로해결될수있는문제가아니며, 강대국들사이의화해가이루어져야만그가 능성이높아질것이라는판단과함께전세계적으로자원및원자재부족현상을겪고있는상황에서쌍방
의노력과협력확대는양측에모두도움이될것이라는인식이자리잡기시작하였다. 그리고동독의체 제변화는외부의직접적간섭을통해서보다는내부의점진적인변화를통해서만가능할수있다는정치 적인신념으로발전하였다. 바꾸어말해, 서독정부는기존에취했던정책, 즉서방의지원을받아서독이 잘살게되면경제난에허덕이는동독주민들은자연적으로소련체제에대항하게될것이며, 이로써소련 군들은어쩔수없이점령지역을통합의전단계로내어놓지않으면안될것이라는판단에서벗어나동 독과의교류를동독에대한국가인정문제와결부시켜서는안된다는입장을견지하게되었으며, 이를바 탕으로내독관계개선을저해하는요인들을제거시키는노력을하기시작했다. 서독은첫째, 동서유럽간갈등의근본적쟁점사항이었던독일문제를서독정부가주도적으로해결함 으로써유럽의안보에기여하고, 둘째, 동서독의제도화된병존을인정하며, 셋째, 이데올로기를초월한실 질적협력관계에바탕을둠으로써동독체제의변화를유도하고자하였다. 이에따라추진된 접근을통한변화라는에곤바르의개념에입각한신동방정책은현상유지 (status quo) 상황에서역동화를겨냥하고 1950년대아데나우어의힘에의한우위정책에대응하는분단유럽극 복의정책으로발전하였다. 또한인적접촉의강화와더불어유럽이라는틀속에서독일의단일성회복을 추구하였다. 여기에서중요한것은이와같은신동방정책에의한내독관계정립이독일통일에긍정적인역할을하 였는가하는점이다. 신동방정책은그것이추진되었을당시다음과같은점에서비판의대상이되었다. 첫째, 동독체제의궁 극적인변화를겨냥하고있으면서도, 동독체제를인정하고안정화시켜주었다는것이다. 따라서비록신동 방정책의장기적인목표와단기적인정책수행간에는직접적인모순이드러나지않았지만, 많은사람들에 게신동방정책은모순을내포하고있는것처럼보였다는것이다. 둘째, 신동방정책은동서독교류협력기간에동독주민을담보로협상을벌이는동독지도부에게많은 것을양보하고동독정권을안정시켜줌으로써독재체제의생명을연장시켰을뿐만아니라서독정부가 정부차원의접촉, 즉동독지도층과의대화를동독반체제인사들과의대화 접촉보다더중요시함으로써 동독내의개혁세력이성장할수있는여지를없앴다는점을지적하고있다. 셋째, 신동방정책은공산주의체제가오래존속할것이라는가정하에현상유지일변도의역사인식을 전제로하고있다는데서근본적인오류를범하고있다는것이었다. 그러나신동방정책은통독이후그역할이크게긍정적으로재평가되었다. 긍정적인평가의근거는첫 째, 공산체제는외부의압력으로는결코극복할수없으므로서독정부가접근을통한변화의정책을추진 하였기때문에소련에서의고르바초프출현과동구권의개혁, 동독의평화혁명이가능할수있었다는점이 다. 다시말해, 소련의대동구지배질서와내부체제의붕괴과정은서독의신동방정책추진및그에따
른서구진영의대동구화해정책과불가분의관계가있으며, 독일통일에중요한역할을했음을부인할수 없다는것이다. 둘째, 신동방정책의추진으로이루어낸많은인적, 물적교류가동독주민에게자유민주주의와부유한 서독의실체를확인시켜주는기회를안겨줌으로써민주화와자유화의식을높이는데기여하였으며, 이것 이궁극적으로는통일당시서독체제로통일을추진하는데결정적인역할을하였다는것이다. 4. 결 론 서독의대동독정책을통해알수있는것은다음과같은사실이다. 첫째, 동서독관계가모든분야에서상호융화하고조화롭게이루어진것은아니라는사실이다. 경쟁과 갈등이나타나면서도협력이이루어질수밖에없는관계를인식할수있다. 동서독은그와같은불가분의 연계가이어질수밖에없는역사적, 지리적, 환경적조건을가지고상호관계를유지하였음을알수있다. 둘째, 동서독간교류와협력이어떤과정과형태를통해이루어졌다고하더라도궁극적으로는동서독주 민들이접촉하게하였고, 이를통해상대방을알수있는계기를만들었다는사실이다. 다시말해, 동서독 간교류와협력은서로상대방을인식하게하고상대방이처한상황을알수있게하였다는것이다. 이는 곧통일이라는것이, 또한동일민족의동질성회복이비록그것이어떤형태로나타날수있을지는알수 없으며, 시간적으로도언제이루어질지는예측할수없어도반드시상대방을알아야만가능할수있다는 사실을우리에게깨우치고있다. 상대방을잘알수있을때비로소동질화가가능하며동질화를향한염원 이체제의단일화로연결될수있다는사실이다. 이런의미에서독일통일은우연의산물이아니다. 그것은서독의일관적인대동독정책, 그가운데서도 실질적인교류협력을가능하게했던정책과이를통한동독주민의서독실상에대한인식변화가있었기 때문에가능한것이었다. 동유럽의정치적변화에따른국제적상황변화는동서독을통일과정으로인도했 던중요한도화선이되었지만동독주민이통일을이루려는의지와힘을갖게한것은이미그이전오랜 기간의동서독간접촉과접촉을통한동독의내적변화를가능케한서독의정책에있었다. 이런관점에서 통일을가능하게끔한서독의대동독정책은큰의미를가지고있다고할것이다.
독일한부모가족취업모를위한 사회정책적지원 박명선, 전주대학교사회과학대학교수 2006년 8월 독일에서빠르게증가한한부모가족은더이상비전형적인가족유형으로여기지않는다. 더구나출산율감소로인한복지국가의축소위기가논의되는가운데자녀를출산하여양육하는한부모가족의사회적중요성은더욱주목받고있다. 그러나여전히핵가족을모델로구조화된가부장적복지국가에서, 특히한부모가족취업모는자녀양육으로인한미취업의위험과아버지의역할결여로인한문제상황에봉착하고있다. 따라서자녀양육을뒷받침하려는가족정책, 이들가족의빈곤위험, 양육의어려움및심리적불안을극복하기위한사회정책적지원, 가정과직장의양립을가능하게하는노동시장정책적지원이제공되고있다. 2005년부터시행되는하르츠제4 법(Hartz IV) 은노동시장정책과사회정책을결합하여실업상황에있는젊은한부모가족여성의취업을위한수요자중심의통합적구직서비스를제공하고, 어린자녀를양육하면서직업훈련을받을수있도록교육- 실습이중구조의파트타임교육을실시한다. 한부모가족의여성들은이제독신모의상황을더이상위기가아니라기회라고말한다. 그러나이러한낙관적인평가가일반화되려면여전히사회적통합의대상인한부모가족의당면한위험에대한공동체적인해결의지가결집되어야한다.
1. 한부모가족의증가와가족정책 독일의복지국가적발전이정체되었다거나이미쇠퇴하였다고보는학자들은그원인의하나를고령화보다는출생률저하에서찾아야한다고주장한다. 출생률저하는소위정상가족으로서의핵가족이감소한결과인데, 독일에서는가족유형이급격하게다양해지고있다. 2005년현재독일에서자녀를키우는전체가구수는 1,260 만으로, 이중 73% 에해당하는 930만가구가전통적인핵가족이고, 한부모가족이 21%, 자녀를키우는동거가족이 6% 를구성한다. 가족정책의표적집단은특히 18 세미만의자녀를키우는가족으로, 이는 890 만가구에이른다. 가구유형별로보면, 혼인부부가족의 68%, 동거부부가족의 90%, 한부모가족의 60% 가미성년자녀를양육하고있다. 2003 년통계에따르면, 파트너와동거하는경우까지포함하여한부모가족이양육하는미성년자녀의수가 280 만명이며, 이는전체미성년인구의 10% 에해당한다. 따라서전통적인핵가족중심의가족정책은이제대안가족의안정적인자녀양육에대한지원도강화하고있다. 동거파트너없이자녀를양육하는한부모는 2003년현재 153만 7 천명이며, 이중 87% 인 134만명이여성이다. 이들의 7.3% 는사별로인해혼자자녀를양육하는경우이며, 별거인경우가 18.4%, 이혼의경우가 41.9% 로조사되었다. 나머지 32.4% 는비혼여성으로서이들의비율은빠르게증가하고있다. 한부모가족은현재모든계층에서나타나고있으며, 대도시의경우더욱빈번하다. 또한사회주의를경험한후과도기전환과정을겪고있는구동독지역의비율은상당히높다. 출생률증가를목표로하는인구및가족정책은출생뿐아니라양육의중요성을강조한다. 따라서양육자로서의여성의역할수행을강조하여이를뒷받침하기위한정책을실행한다. 한편대표적인빈곤위험집단으로꼽히는여성한부모가족이사회부조에장기적으로의존하지않고노동시장에기여하면서안정적으로자녀를양육하도록지원하는노동시장정책을실시하고있다. 여성취업을늘리면서자녀양육의역할을가능하도록유도하는가정과직장의양립지원을통해한부모가족여성의취업률을높이려는것이다. 한부모가족여성가구주의취업상황과이에대한사회정책적지원은한부모가족의특징적인가족기능에대한이해를바탕으로설명될수있다. 다음장에서는한부모가족의위험상황과일반적인사회정책적지원을먼저살펴본다. 2. 한부모가족의위험과사회정책적지원
한부모가족, 특히여성한부모가족은대표적인빈곤위험집단이지만, 자발적비혼모를포함하여한부모가족이더이상동질적인집단으로특징지어지지않는다. 미성년자녀를키우는여성한부모가족의 25% 가사회부조를받고있으며, 수급자는특히어린자녀를키우는 40세미만의젊은여성이많다. 한편구서독지역에서는 18세이상의자녀를키우는한부모가족의 50% 가부동산을소유하고있다. 6-17세사이의자녀를키우는한부모가족도 30% 이상이부동산을소유하고있다. 그러나구동독지역의경우는그비율이현저히낮아서각각 16%, 10% 정도이다. 이렇게한부모가족은계층, 연령대, 삶의경로가다양한집단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전통적인핵가족유형에서기대하는가족기능을기반으로작동하는사회구조안에서한부모가족은여전히결여된또는제한된가족기능으로유지된다. 특히여성한부모가족은가부장적복지국가의중심행위자인남성배우자의부재로인한빈곤의위험, 사회보장및보호에서제외되는취약한사회적지위, 아버지역할의결여에따른자녀양육의실패, 파트너부재로인한심리적불안을경험하고있다. 또한자녀양육때문에미취업상태가지속되고, 교육및직업경력이단절되는등, 자립적인사회생활을하는데어려움을겪는다. 1) 빈곤지원 빈곤위험에있는한부모가족은생계와자녀양육을지속하기위해아동수당, 양육비및양육비세금공제, 생계비대부, 사회부조와추가소요비용을받을수있다. 본인의집에서자녀를키우고있는한부모에게자녀의최저생계를보장하기위한아동수당이지급된다. 한편아동수당대신자녀양육을위한세금공제를선택할수있다. 1,824유로의최저생계비와 1,080 유로의자녀양육비와교육비에대해세금공제를받을수있다. 자녀가본인의가족으로만등록되어있다면, 자녀를직접키우고있는한부모는자녀의다른한쪽부모가자녀양육비및교육비로인해받는세금공제를자신이받게할수있다. 이러한대안은소득이중간계급에속하는한부모에게더욱유리하다. 다른한쪽부모에게자녀양육비를전혀받지못하거나최소한의비용도받지못할경우, 자녀를 직접키우는한부모는생계비대부를받을수있다. 자녀의연령이 12세까지최장 72 개월을받으며, 첫자녀가받은아동지원금의반에해당하는금액을받는다. 불가피한자녀양육으로인해취업하지못하거나취업기회가없는한부모가족여성은다른생계
수단이충분하지못할경우에사회부조수급자가된다. 2001년의여성한부모가족조사에따르면이들의 27% 가사회부조를받고있다. 7세미만의자녀가있거나 16세미만의자녀가둘또는세명이있는경우는사회부조규정금액의 40% 에해당하는추가소요비용을, 자녀가 4명이상일경우는 60% 를받는다. 추가소요비용을받으면서한정적인취업활동을할경우는이비용에취업자세금공제로결정되는기준액의 3분의 2 에해당하는금액을더청구할수있다. 이때취업소득액은수급자격을결정하는기준생계비에포함되지않는다. 조세법에는독신부모를위한특별규정이있고, 양육비관련법률이개정되면서한부모가족은더유리한조건으로양육비를청구할수있게되었다. 2) 자녀보육및심리적 정서적지원 독일아동및청소년지원법은아동과청소년의개인적이며사회적인발전을도모하기위한사회적보호와지원의책임을규정하고있다. 그러므로한부모가족의자녀보육에대한관심은청소년청의주요업무이다. 우선, 한부모가족의중요한양육조건으로서자녀들이다닐수있는보육시설연계와가정보육사파견을지원한다. 구서독지역은 3세미만의자녀와초등학교에다니는자녀를위한보육시설이충분하지않다. 재정이부족한지역공동체에서는보육시설의유지와개선에대한요구때문에보육료가인상되고있고, 한부모가족의경우에소득이낮으면청소년청에보육비를청구할수있지만, 취업모의경우는소득으로인하여보육비청구가쉽지않다. 또한종일제보육은제공되지않기때문에취업모는직장의근무시간을조절해야하는어려움이있다. 구동독지역은보육시설사정이나은편으로거의수요에따른보육시설공급이이루어지고있다. 한부모가족은가족교육및이혼, 별거등의상황에서가족관계에대한법적, 심리적조언을받을수있으며, 가족생활의물질적, 심리적문제에대한상담, 임신 출산등의가족구성, 출산휴가, 육아휴직, 간병휴가, 가족회복등에대한지원도받을수있다. 청소년청은한부모가족의위기상황에개입하는데,6 세미만의자녀를키우는경우, 자녀에대한보호와양육이불충분하다고판단되면가족회복을위해지원요청이없어도개입한다. 청소년의불안정한보호와교육에도개입하여정보와상담을제공한다. 한부모가족의결여된가족기능과이들 에대한사회적편견및배제와관련하여발생하는독특한장애상황, 즉빚을지거나실업으로인한
물질적빈곤, 불량한주거환경, 자녀양육이과도하게부담이되는경우, 장애아동을키우는경우, 가정폭력이나약물중독등의문제가발생하면, 청소년청은이들에대해물질적지원과함께사회사업적지원을한다. 청소년청은호적사무소와연계하여혼외자녀가출생할때부터자동적으로행정지원을실시하나후견지원은 1998년 7월 1 일부터자발적인요청이있어야가능하며친부확인과생계지원을한다. 연방정부차원의지원뿐만아니라주정부와지역사회차원에서도카리타스나종교적인사회봉사단체, 사회복지단체, 한부모자조집단등과같은자원조직에대해가족지원, 자녀양육및교육지원, 이혼문제등에관한상담과정보제공을해야할의무가있다. 3. 한부모가족취업모의취업상황과요구 1) 취업실태와문제점 2000년현재 15-64세여성의경제활동참여율은 58% 에달한다. 이들중 18세미만의자녀를키우는여성의경제활동참여율은 63% 이고, 자녀의연령이높아질수록그비율은높아진다. 18세미만의자녀를키우는한부모가족여성의경제활동참여율은 67.2% 로, 혼인하여 18세미만의자녀를키우는여성의참여율인 62.5% 보다높다. 취업소득은안정적인가족경제를가능하게하는가장중요한원천이지만여성한부모가족은자녀양육으로인해취업경쟁에적극적으로참여하고, 취업경력을지속적으로쌓을수있는기회가제한되어있다. 따라서전체가구평균순소득1,904유로와비교하여여성한부모가족의평균순소득은1,534 유로로평균이하이며, 남성한부모가족의평균순소득 1,960 유로와도크게차이가난다. 핵가족의평균순소득 2,835 유로, 자녀를키우는동거가족의평균순소득 2,516 유로와는더욱크게차이가난다. 연령에따른가중치를부과하여계산한결과, 여성한부모가족의가족구성원 1인당소득은모든가족유형의가족구성원 1인당소득의 76% 밖에되지않는다. 한부모가족여성의취업에대한요구는상당히강해서 1997년전일제취업자의비율은 29% 로핵가족취업모의전일제취업자비율보다두배가높다. 한편이들의실업관련조사결과를보면, 실업률이가장높은집단은낮은구직자격과돌봄이필요한자녀를가진경우로나타났다. 반면노동시장에서높은구직자격을갖추고, 자녀의연령이높은한부모가족여성은직장을구하는데거의장애를받지않는것으로나타났다.
가정과직장의양립에따른이중부담은여성의높은파트타임취업률을통해살펴볼수있다. 2000 년통계에따르면, 미성년자녀를가진취업모의 5분의 3 이파트타임취업을하고있다. 이때자녀가한명인경우는취업모의 2분의 1 이파트타임취업을하지만, 자녀가 4명이상인경우는취업모의 3분의 2 이상이파트타임직에종사하고있어자녀수에따른양육부담이여성의불안정한취업과밀접한관련이있음을알수있다.6-15 세자녀를키우는한부모가족취업모가미취업인경우, 가족구성원의 1인당소득은 1인당평균소득의 45% 에해당한다. 그러나파트타임취업을할경우, 1인당소득은 64%, 전일제취업을할경우는 80% 까지상승한다. 한편소득빈곤은미취업의경우는 56%, 파트타임취업의경우는 26%, 전일제취업의경우는 11% 로감소한다. 그러나전일제취업을함으로써빈곤선에서벗어난약 90% 의여성한부모가족이경제적으로어려움없이사는것은아니다. 베른트에겐(Bernd Eggen) 이지적하듯이이들은근로빈민의상태에있으므로언제든지빈곤위험에처할가능성이있다. 한부모가족미취업여성에대한설문조사에따르면, 이들은미취업의원인이노동시장에있는것으로보고있었다. 자신들이적극적으로구직을하지않았거나자녀를돌봐야하므로직장에서의유연성이떨어지기때문에미취업상태에있는것이아니라고한다. 이들은대부분비전형적이거나조건이나쁜직장에도취업할준비가되어있다고말한다. 실제로한부모가족취업모들은핵가족취업모보다훨씬빈번하게조건이나쁜직장에취업하고있다. 노동시장에서관찰되는상황을살펴보면, 한부모가족취업모들의 9% 는한시적인노동계약을하는데, 이는핵가족취업모의 4% 가하는것과크게차이가난다. 한편, 한부모가족취업모들은한시적노동계약으로인해, 또한더나은고용조건을위해이직하는경우가핵가족취업모보다두배더많았다. 한부모가족취업모들은주말이나저녁, 밤근무또는교대근무를하는경우가빈번한것으로나타났으며, 전일제직장을구하고있음에도불구하고, 파트타임근무를더많이하고있었다. 2) 한부모가족여성의취업을위한요구 직업상황을향상시킬수있는가능성으로한부모가족여성들은우선기업에서가정과직장을양립할수있는방안들을지원해야한다고지적하였다. 첫째로한부모가족취업모의상황에대한인식과직장인으로서의수용, 가족휴가출산휴가 (, 육아휴직, 간병휴가) 이후의재취업프로그램제공, 해고보호, 자녀보육보장등을원했다. 둘째로는자녀양육비를감당할수있고나아가보장할수있을정도의재정적인뒷받침을원하고있었다. 노동환경으로는높은주당노동시간과초과노동시간을지적하면서가정과직장의양립을위해, 생계를보장할수있는보수가주어지는파트타임일자리가필요하다고지적했다. 취업전망과관련해서는숙련향상프로그램을강하게원하고있었다.
한부모가족취업모들은어린자녀뿐만아니라보육원이나초등학교에다니는자녀들의생활시간과일치하는노동시간을원하고있었다. 기업차원에서노동시간과작업장선택의유연성을제공하면이는한부모가족취업모가자녀를돌볼수있는가능성을향상시키는효과뿐만아니라이를통해기업에도긍정적인효과를미치게된다. 가족문제로인한한부모가족취업모의결근위험을줄일수있고, 덜긴장하면서높은생산성을발휘할한부모가족취업모를동료로활용할수있게되기때문이다. 제도적차원에서포괄적인보육서비스를받을수있도록보육시설을신설, 개선할것과한부모가족취업모들에대한추가적인자녀보육비제공도요구하였다. 한편한부모가족취업모에대한부당한편견을불식시키는것도중요한과제로지적되었다. 4. 가정과직장양립을위한사회정책적지원 한부모가족의여성은핵가족의여성보다경제활동참가율이높지만실업률도높다. 1993년부터사회법(SGB) III 은자녀를보육하는경우, 이를감안하여실업수당을다른실업자들보다높게책정하도록하였다. 한부모가족의실업여성이이에해당한다. 한부모가족의취업모는자녀보육으로인해파트타임취업의비율이높다. 그러나파트타임취업에대한법적인보호가미흡해서불안정한취업상황에놓여있었다. 그러나 2001년부터효력을발생한파트타임및한시적노동법에따라법적인보호를받을수있게되었다. 또한이법은 15인이상의피고용인이있는기업의경우에, 불가피한경영상의이유가없고, 같은업무를하는일자리가비어있을때는이미 6 개월이상종사한파트타임취업자의노동시간연장요구를수용하도록하였다. 개정된연방양육비법에따라 2000년부터는자녀연령이 3 세까지의부모기간(Elternzeit) 에부모가주당 30 시간까지노동시간을단축하고자할때이를수용하도록하였다. 또한자녀의연령이 8세까지고용주의동의하에 12 개월까지노동시간을단축할수있다. 그러나이법은피고용인 15인미만의소기업에는해당되지않아서파트타임취업자가부모기간에노동시간단축을요구한기업의 68% 는제외되었다. 연방가족ㆍ노인ㆍ여성ㆍ청소년부의지원한 2002년의빈곤예방을위한뉘른베르크설문조사에서여성한부모가족의빈곤상황을구체적으로연구하였는데, 특히 3세미만의자녀를가진여성한부모가족의취업상황이매우불안정하다고지적하였다. 또한 3세미만의자녀를키우는한부모가족취업모의 5분의 4 는직업지향적이며, 자녀양육과동시에가능한빠른취업과직업복귀를원하고있는것으로조사되었다. 이연구는불안정한복지한계집단의빈곤탈출을위해서는구직을위
한지역사회중심의통합정책이필요하다는논의를제공하였고, 인 Hartz IV 를뒷받침하였다. 대대적인노동시장개혁프로젝트 2005년부터실시된하르츠제4 법(Hartz IV) 는이전의단순한노동시장정책적프로그램에사회정책적특성을결합하여취업의안정성, 지속성및경로적합성을목표로한다. 이는우선실업집단에대한적극적인수요자중심의구직서비스를전개하기위해담당행정부서를통합, 개편하였다. 특히젊은구직자의안정적인취업을위해직업훈련을강화하고, 기업으로하여금적극적인일자리창출과유동적인실습훈련과정을제공하도록유도하며, 이를사례담당자(Fallmanager) 가적극적으로개발, 연계하도록하였다. 노동능력이있는빈곤집단의빈곤탈출을위해, 이들에게사회부조와실업부조를통합한실업수당 II 를제공하고, 직업훈련의기회를제공하도록하였는데그구체적인방안이연방가족ㆍ노인ㆍ여성ㆍ청소년부에서제안한파트타임취업교육이다. 사회부조또는실업부조수급자로서노동능력이있는여성한부모가족은 2005년부터는실업수당 II 의수급자(2005년 4월현재 457,000 명) 가되었는데, 이들중 205,000명이직업교육을이수하지않은상태이다. 특히 25 세미만의젊은여성한부모가족과, 빠르게증가하고있는이민여성한부모가족이이에해당한다. 한편급속하게진행되는산업합리화로자녀양육후재취업하려는여성한부모가족도취업을위한재훈련또는향상훈련을받아야하는실정이다. 이를위해여성한부모가족을위한특별직업훈련이실시되었으나성과를거두지못하고, 한부모가족의취업모는불안정하고임금이낮은일자리에취업하는경우가빈번하였다. 따라서전면적인직업훈련제도개선이요구되었고, 헤센주에서실시된젊은한부모가족취업모를위한직업훈련프로그램 (JAMBA) 이성공을거두면서 2005년 4월부터연방직업교육법에의하여교육-실습이중체계의파트타임취업교육을실시하고있다. 피교육자인한부모가족취업모가이미고정되어있는전일제직업교육제도에따라교육받는것이아니라, 자녀보육을함께할수있도록유동적으로교육및실습시간을조정하면서교육받을수있게한것이다. 이는기업의적극적인협조없이는불가능하며, 취업과자녀보육을연계하기위한지역사회의네트워크구성, 이를구체적이고유동적으로연계하여조정하는조직없이는불가능하다. 또한심리사회적, 재정적, 물리적시간배분의어려움을겪는한부모가족취업모의복합적인문제를수요자중심의교육으로해결하기위해교육방법등의소프트웨어의변화와함께조직적인환경변화, 즉시간구조, 자녀보육및사회사업적조언이뒷받침되어야한다. 이를위해사회법 (SGB) II에의해구성된지역공동체- 노동사무소협의회(ARGEn) 가한부모가족의다양한가족및취업조건에대한구체적인개별사정을통해자녀보육, 취업및직업교육등에관한적합한정보와상담을제공하도
록하였다. 또한고용증진을위해지역사회의전문가풀을구성하여한계집단의지역사회통합을꾀하도록하였다. 지역사회의지원과이들을통합하기위한조직적네트워크의중요성도부각되어한부모가족과지역주민이함께하는공동체모임을정기적으로만드는등, 잦은접촉을통해이들에대한편견을극복하는방법이실시되고있다. 하르츠제4법은수요자중심의친가족적프로그램을운영하여여성한부모가족에게보다유리한프로그램으로평가받고있다. 또한이프로젝트는이미미국에서신자유적인복지국가조정으로서실시된노동연계복지프로그램들처럼근로빈민을양산하는상황이나유럽에서현저히나타나는이민집단에대한사회적배제가나타나지않도록계획된것으로평가받고있다. 그러나현재까지여성한부모집단과관련하여지적된문제점을보면, 그대상이한정적이다. 노동능력이있고, 가정과의연계때문에취업하지않은, 3 세미만의자녀를키우는경우에만제공되기때문이다. 5. 사회정책적지원에대한평가 한부모가족여성들의사회정책적지원에대한평가를설문조사를통해살펴보면, 이들은공식적이며자발적인지원을요구하면서도다른한편으로는개인적인상황이변화하기를바라고있었다. 또한문제집단으로다루어지는것을거부하는경향이강했다. 응답자의거의절반정도가공식적인지원없이자신의생활상황을극복하고자했고, 극복할수있었다고응답했다. 공적기관을통해받은지원은재정지원( 자녀탁아비, 생계비, 일시적부조), 별거, 이혼및파트너관계에관한상담서비스, 자녀양육관련상담, 어린이집입소, 일반적정보및조언의순으로나타났다. 상황개선을위한제안으로는다양한보육시설과프로그램, 가정과직장의양립가능성을위한구조적인환경조건의개선을들었다. 대부분의한부모가족연구에서도여성한부모가족의일상생활을중심으로자녀보육에대한사회적지원이중요하다고확인하면서, 부모요구에따른탁아시간을중심으로자녀보육이원활하게되어야한다고제안하였다. 또한이들의제안은경제적인개선에만있는것이아니라사회적부담의균등화및한부모가족이라는가족유형에대한인정과평가를포함하고있었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여성한부모가족유형은빠르게확대되어왔고, 계속확대될전망이 다. 따라서전통적핵가족과는차별적인사회정책적전망으로이에대응하는것이필요하다. 축소되
는복지국가의국가과제로서자녀출산과양육을담당하는여성한부모가족에대해이제는비정상적가족유형이라는낙인과이들이처한위험에대한근심보다는이들의삶의방식이새로운도전과기회획득이라는낙관적인전망이나타나고있다. 물론이들의낙관적인삶의전망은현재여성한부모가족이당면하고있는문제상황을사회적으로극복하면서가능해질것이다.
독일공적연금제도의개혁추이와기업연금 김상호, 관동대학교경영학부교수 2005년 6월 신중도기치를걸고등장한사민당/ 녹색당연합정권은공적연금제도개혁을중요한목표로 설정하고연금제도개혁을단행하였다. 연금법개혁 2001 은 1957년의연금법대개정이후가 장의미있고포괄적이며혁신적인법률로평가받고있다. 연금법개혁 2001 의핵심내용은 공적연금제도의개선과사적연금활성화를위한정부지원의확대에있다. 연금법개혁 2001 의가장큰특징은부과방식으로운영되는공적연금에만의존하던기존의 정책에서탈피하여, 적립방식으로운영되는사적연금제도( 기업연금및개인연금) 역시노후소 득을보장하는중요한구성요소로인정하고, 정부가다양한형태의정부보조금과세제혜택 을주어사적연금제도를적극지원하는점이다. 이는공적연금에만의존하여노후소득을보 장하던기존정책과큰차이가있다.
1. 서론 노후소득을정부가제도적으로보장하기시작한것은산업화이후의새로운현상이다.19세기 말까지근로자들은일반적으로근로능력을상실할때까지취업했으며, 근로능력을완전히상실 할때에는일반적으로가족의도움(family insurance) 에의존했다. 19세기말부터도입되기시작 한공적연금제도는연금지급을통하여은퇴할수있다는근로자의꿈이이루어지게하였으며, 노 후의빈곤완화에도기여하였다. 독일의공적연금제도는, 비스마르크(Bismarck) 가법률을제정함으로써 1889년세계최초로 도입되었으며, 이후서구선진국들이공적연금제도를도입하는데기여하였다. 공적연금을구성 하는중요한제도로생산직근로자연금제도(1889 년도입), 사무직근로자연금제도(1911 년도입) 및광부연금제도(1923 년도입) 가있다. 또한공적연금제도에는직업별연금제도의특수직종에 속하는공무원연금제도, 농민노령부조및수공업종사자연금제도가있지만이들의비중은낮았 다. 보험원칙을중시하는비스마르크의독일식제도는부조원칙을중시하는베버리지의영국 식제도와함께공적연금제도의중요한두축을구성하고있다. 독일의공적연금제도는우리나 라가공적연금제도( 공무원연금제도; 1960 년, 군인연금제도; 1963 년, 사학연금제도; 1975 년, 국 민연금제도; 1988 년) 를도입할때모범제도의역할을하였다. 따라서독일공적연금제도의변 화는우리에게중요한의미를갖는다. 공적연금제도를개혁하기위한중요한법개정은 1957 년, 1972 년, 1992년및 2001 년에있었다. 초기의법개정이급여확대를목적으로진행된것과달리 1990년이후의법개정은재정안정화 에초점을맞추고있다. 첫째, 1957 년의연금법대개정( 大改正 ) 에서재원조달방식이적립방식 에서부과방식( 적립금을축적하지않고현재의근로세대가납부하는보험료로은퇴세대를부 양하는방법) 으로전환하였다. 또한기초부분과소득비례부분으로이원화되었던연금산식을 소득비례방식으로일원화하였고, 임금상승률에비례하여연금을인상하는제도로전환하였다. 그러나이러한저부담-고급여구조로의제도변경은과도한세대간소득재분배를통하여형평 성문제를야기했다. 둘째, 1972년법개정에서는가입대상자가확대되었으며, 연금급여수준이추가로인상되었 고, 조기노령연금( 여성, 실업자및장애근로자는 60 세에, 그리고 35년이상의장기가입자는 63 세에수급가능) 과최저임금에맞춘연금을신설하였다. 그러나이러한과도한급여확대는 70년
대의석유파동으로발생한장기경기침체때문에재정을악화시켰고, 이에따라시행된지얼마 되지않아원상복귀되었다. 셋째, 1992 년법개정은당면한문제인재정안정화에중점을두었다. 80년대이후의낮은경 제성장률과고령화추세의가속화는부과방식으로운영되는연금재정을위협하였다. 우선재정 안정화를위하여 1972년의법개정에서낮추어진연금수급개시연령을점진적으로이전의 65세 로연장하였다. 또한단기재정위기를극복하기위하여가입자는보험료인상을통하여, 연금수급 자는급여수준의인하를통하여, 그리고정부는국가보조금비율을인상해서재정을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재정악화가예상했던것보다빨리발생하자재정안정화방안의실시시기를1992 년의법개정에서계획했던것보다앞당겨실시하였다. 아울러 1997년에보험료율이 18.7% 에서심 리적한계선으로간주되던 20% 를초과하여 20.3% 가되자, 독일의정치가들은부가가치세인상을통 하여연금재원을조달하는데합의하였다. 이에따라 1997년 12월에부가가치세를 15% 에서 16% 로 인상하였고, 이렇게조달된재원의일부를활용하여연금재정을지원하고있다. 높은재원조달비용이기업의국제경쟁력을약화시키고, 가처분소득을축소시켜근로의욕 을상실케하는요인이라는비판이제기되었다. 새로집권한사민당/ 녹색당(SPD/Grüne) 연립정 권은이러한비판을수용하여법을개정하였다. 이에따라유류소비억제를통한생태계보호를 위하여신설한환경세재원의일부를연금재정을지원하는데사용하여 2000년 1월에 19.3% 로, 그리고 2001년 1월에는 19.1% 로보험료율을소폭인하했다. 그러나이러한방안역시공적연금 제도가직면한수급불균형문제를근본적으로해결할수는없었다. 독일공적연금제도에서발생한재정위기의근본적인원인은고령화의진전과장기경기침체이 다. 다양한출산장려정책에도불구하고출생률은낮은반면, 보건의료수준의발달로수명은 지속적으로늘어나고있다. 2003년에는 20 세~ 64세의취업자 3.6명이 65세이상의연금수령자 1 명을지원하지만, 2030년에는 20 세~64세의취업자 2.2명이 65세이상의연금수령자 1명을지원 해야하는인구구조로변하게된다. 이러한고령화사회의진전은인구구조변화에민감한부과 방식으로운영되는공적연금의재원조달에직접적인영향을주고있다. 2. 연금법개혁 2001 의개요 신중도기치를걸고등장한사민당/ 녹색당연합정권은공적연금제도개혁을중요한목표로설
정하고연금제도개혁을단행하였다. 이를주무부처인보건사회부장관의이름(Walter Riester) 을 따리스터개혁으로, 또한정부가지원하는사적연금을리스터연금이라부르기도한다. 공적연 금제도, 사적연금제도및개인연금제도로이루어진 3층보장망을활용한노후보장을주요내용 으로하는연금법개혁 2001 은 1957년의연금법대개정이후가장의미있고포괄적이며혁신 적인법률로평가받고있다. 연금법개혁 2001 의핵심내용은공적연금제도내에서의제도개선과사적연금활성화를위한 정부지원의확대에있다. 먼저공적연금제도의개선내용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첫째, 보험료 율의인상을억제하기위하여급여수준을단계적으로인하하였다. 이에따라급여수준이 2010 년에약 5%, 그리고 2030년에약 7% 인하될전망이다. 둘째, 유족연금인배우자연금을축소하는 반면, 육아기간을연금산정에서높게평가하여자녀를양육한여성에게유리하도록하였다.1992 년이후출생한자녀에대해 3년간보험료를납부한것으로인정해주는인정육아기간에취업하 여보험료를납부한가입자에게는실제로납부한보험료에추가하여연금에서인정하는소득( 전체 가입자평균소득) 을합산하여보험료를납부한것으로인정토록하였다. 셋째, 이혼한사람에게 제공되는분할연금과는별도로, 혼인기간중에취업하여획득한연금수급을위한최소가입기 간역시부부가희망하면분할할수있도록하였다. 이에따라이혼하지않은부부역시본인들이 희망하면배우자의연금수급을위한인정기간을분할하여본인의최소가입기간을충족시키는 데사용할수있게되었다. 한편사적연금제도의활성화를지원하는방안은연금법개혁 2001 에서매우중요하다. 연금법 개혁 2001 의가장큰특징은완전부과방식으로운영되는공적연금에만의존하던기존의정책 에서탈피하여, 적립방식으로운영되는사적연금제도( 기업연금및개인연금) 역시노후소득을 보장하는중요한구성요소로인정하고정부가다양한형태의정부보조금과세제혜택을주어 사적연금제도를적극지원하는점이다. 이는공적연금에만의존하여노후소득을보장하던기존 정책과큰차이가있다. 연금법개정으로더많은기업연금과개인연금을수급하기위하여임금중의일부를보험료로 납부하는근로자에게제공되는정부보조금과세제혜택은저소득근로자와자녀가많은가정에 유리하다. 또한정부가근로자에게제공하는지원규모가 2002년부터 2008년까지단계적으로늘 어나도록설계하였다. 연금법개혁 2001 은보험료율의안정에중점을두어보험료율이 2020년까 지최대 20% 를, 그리고 2030년까지최대 22% 를초과하지않도록규정하고있다. 이를위하여
2020년까지보험료율이 20% 를상회할것으로, 그리고 2030년까지 22% 를상회할것으로전망되 면연방정부가국회에보험료율의인상을억제할수있는적절한방안을제시하도록규정하고있 다. 3. 연금법개혁 2001 과기업연금제도 연금법개혁 2001 이전의기업연금제도의중요한문제점은근로자가전직하여다른기업에취 업할때이전기업에서받은기업연금수급권을잃을수있다는것이다. 이는한기업에 10년이 상근무하고동시에 35세이상인근로자가전직한경우에만이전기업에서확보된기업연금수급 권을인정하였기때문이다. 독일은이러한최소근무기간과최소연령규정을통하여장기근속 을유도하였지만, 이는평생직장개념에서벗어나전직이자주일어나는최근의취업패턴에는맞 지않았다. 이엄격한규정때문에결혼후자녀양육등으로휴직을하는여성근로자들은기업 연금수급권을상실하는경우가많았다. 이를반영하여독일은연금법개혁 2001에서기업연금 수급권과관련된규정을다음과같이변경하였다. 첫째, 근로자가납부한기업연금보험료는전직 하더라도그대로유지하여연금또는일시금으로돌려받는다. 둘째, 2001년이후기업의비용으 로조성된기업연금의경우이전기업에서확보된기업연금수급권인정을위한최소근무기간 을 10년에서 5 년으로, 그리고최소연령을 35세에서 30 세로하향조정하였다. 또한경과규정으 로 2005년까지수급권이확보되는기업연금에대해서는 30세이상이기만하면전직하더라도이전 기업에서의연금수급권을그대로보장하기로하였다. 또한잦은전직으로여러회사에서기업연 금을수급하는근로자를위해연금수급권을희망하는회사로옮겨합산하여받을수있도록하였 다. 독일의기업연금에는다음의 5 가지종류가있다. 이는직접보장과지원금고로구성되는내 부적실행방법과직접보험, 연금금고, 연금기금으로구성되는외부적실행방법으로양분된 다. 전통적인내부적실행방법과외부적실행방법의중요한차이는외부적실행방법에더많은 정부지원이제공되는데있다. 한편, 독일의기업연금에서는보험료를납입할때세제상의혜택 등다양한지원이제공되지만, 근로자가기업연금을수급할때에는소득세가부과된다( 이는우리 나라의국민연금과유사함 ). 4. 기업연금의종류와내용
1) 직접보장 < 표 1> 은사용자가자발적으로근로자에게약속하고연금지급을책임지는직접보장이독일 에서가장많이사용되는기업연금임을보여준다(2002년말기준으로 650 만명가입). 직접보 장은대부분의대기업에서활용되고있는데우리나라의퇴직금제도와유사하게사용자가전적으 로소요재원을조달하며, 적립된기금이사내에유보되어기업의운영자금으로사용되기도한 다. 또한적립금운용방법에제한이없기때문에다양한형태의금융자산에투자하기도한다. 이처럼적립금운용에대한정부규제가없는것이직접보장의특징이다. 직접보장의재원조 달을위한충당금에는세제혜택이주어지며, 근로자가기업에대해연금지급청구권을가진다. 표 1. 독일기업연금의운영규모(2002 년말기준) ( 단위: 억유로) 기업연금의종류직접보장지원금고직접보험연금금고연금기금 운영규모 2,096 (59.2%) 248 (7.0%) 450 (12.7%) 745 (21.0%) 2 (0.1%) 연금법개혁 2001 에따라기업이보장하는기업연금외에추가로직접보장에가입하기를희 망하는근로자는임금중의일부를기업연금보험료로사용할수있으며, 이목적으로사용되는 임금에는세제혜택이주어진다. 이를구체적으로살펴보면, 근로자는공적연금제도보험료납부 상한선의 4% 에해당하는금액( 이는 2003년의경우연 2,448 유로임) 까지소득세를면제받고기업 연금보험료로납입할수있다. 또한 2008년까지한시적으로기업연금보험료로사용되는소득 에대해서사회보험료납부대상에서도제외되는혜택이주어진다. 한편, 사용자의부도에대비 하기위해사용자는연금보장조합에가입하여야하며, 사용자가파산하여지급능력이없을때 에는연금보장조합이대신지급하게된다. 2) 지원금고 지원금고는 19 세기중반에시작된가장오래된기업연금으로직접보장과비슷하다. 다만여 기서는연금지급을위한적립금이사내에유보될뿐만아니라동시에일정한규모의적립금을 외부의독립기관이운영하는점에서차이가있다. 이운영기관은단일기업또는여러기업에 의해설립되며, 운영기금을회원기업에대출해주기도한다. 여기서도근로자가기업에대해연
금지급청구권을가지며, 연금보장조합을통하여기업의파산위험에대비하는것역시직접보 장에서와동일하다. 직접보장과지원금고로구성되는내부적실행방법에서사용자가부담하는 보험료는모두법인세납부대상에서제외된다. 사용자부담으로제공되는기업연금에추가하여근로자가더많은기업연금을받기위해임금의 일부를기업연금보험료로사용할때주어지는소득세와사회보험료면제의혜택은직접보장에서 와동일하다. 그러나근로자가본인임금의일부를직접보장과지원금고에보험료로납부하여도 뒤에서설명하는리스터지원금이제공되지는않는다. 다만사용자가근로자와합의하에직접보 장과지원금고에있는기업연금적립금을다음에서설명하는연금기금으로전환하고, 여기에본 인임금의일부를기업연금보험료로납입하여야리스터지원금이제공된다. 3) 직접보험 직접보험은사용자가피용자를위하여민영보험회사와생명보험이나연금보험계약을체결하 는형태로이루어진다. 피보험자수가많은보험회사와계약을체결하여위험이분산되기때문에 직접보험은소규모기업에적합하며, 근로자는보험회사에대하여연금지급청구권을갖는다. 직접보험에서도사용자가전적으로보험료를지불하였지만연금법개혁 2001 에따라근로자가 더많은기업연금을수급하기위하여본인소득의일부를기업연금보험료로납부하면, 이보험료 에대해정부지원이제공된다. 4) 연금금고 독립법인인외부기관( 예: 주식회사형태) 이운영하는연금금고는보험과동일한원리로작동하며, 원칙적으로사용자가전적으로보험료를부담한다. 보험사고가발생하면납부한보험료와이의운용수익으로연금을지급한다. 연금금고에서는운용자산에대하여일정한수준의수익률을안정적으로확보하는것이중요하기때문에운용자금의 35% 까지만주식에투자할수있도록제한하고있다. 여기서도근로자가연금금고에대하여연금지급청구권을갖는다. 5) 연금기금 연금기금은연금법개혁 2001 로새로이도입된기업연금이다. 연금기금에서는외부의독립
기업연금 내부적실행방법 ( 내부적립, 리스터지원금없음 ) 외부적실행방법 ( 외부적립, 리스터지원금제공 ) 표 2. 직접보장지원금고직접보험연금금고연금기금 기업연금제도의요약 가장많이활용되며, 적립금사내유보, 기업에대해청구권을가짐, 우리나라의퇴직금제도와유사가장오래된제도, 직접보장과유사, 적립금의사내유보뿐만아니라외부운용가능민영보험회사와계약체결, 소규모기업에적합, 보험회사에대해청구권가짐외부기관이운영, 주식투자제한, 연금금고에대해청구권가짐새로도입된제도, 외부독립기관이적립금운용, 연금형태로만지급, 연금기금에대한청구권가짐 기관인연금기금운영기관이적립된기금을독자적으로자본시장에서운용하여얻은수익과원금으로보험사고가발생한피보험자에게사망할때까지연금형태로지급한다. 연금기금은주식투자에대한제한이없기때문에자본시장을적극적으로활용할수있는장점이있다. 여기서도원칙적으로사용자가전적으로보험료를부담하지만, 더많은기업연금을수급하기위해근로자가희망하면소득의일부를보험료로납부할수있다. 연금기금에보험료를납부하는근로자에게제공되는정부지원내용은연금금고에서와동일하며, 근로자가연금기금에대하여연금지급청구권을갖는다. 한편자본시장에서의높은투자위험에따른파산을예방하기위해연금기금운영기관은연방보험감독청의감독을받을뿐만아니라연금보장조합에가입하여야한다. 5. 기업연금에대한정부지원의내용 1) 개요 5가지의기업연금중에서리스터지원금이근로자에게제공되는기업연금은직접보험, 연금금고, 연금기금으로구성되는외부적실행방법뿐이다. 또한일시금으로지급되는기업연금에도정부지원이없으며, 오직연금형태로지급되는기업연금에만근로자에게정부지원이제공된다. 이를통하여독일은사내유보가아닌외부기관이운영하는외부적실행방법의기업연금이활성화되어기업파산으로기업연금을지급할수없는사태가발생하는것을예방하며, 동시에기업연금이연금형태로지급되어안정적인노후보장이제공될수있도록유도하고있다. 2) 정부보조금및특별소득공제( 리스터지원금)
직접보험, 연금금고및연금기금에임금의일부를보험료로납부하는근로자는 2002년부터 리스터지원금이라불리는정부보조금이나특별소득공제혜택중의하나를선택할수있다. 자 격요건을충족시키는근로자가신청할때지원되는정부보조금은본인의연금보험통장으로지 급되기때문에근로자는본래의보험료에서이지원금을차감한액만납입하면된다. 근로자가 사회보험료납부대상의본인소득중에서 2002년부터소득의 1% 를, 2004년부터 2% 를, 2006년부 터 3% 를, 그리고 2008년부터 4% 를기업연금보험료로납부하면최대의정부보조금을지급받는 다. 보험료가이기준에미달하면리스터지원금은미달된금액에비례하여감소하는데, 이규정 은정부보조금과특별소득공제에적용한다. 정부보조금액수는혼인관계, 자녀수및본인소득에서차지하는납입보험료의비중에따라 차등적으로결정된다. 예를들면 2008년연소득이 30,000유로이면서두명의자녀가있는근로자 가소득의 4% 에해당하는 1,200유로를기업연금보험료로납부하면정부가지원하는최대정부 보조금인 678 유로를지급받는다( 표 3 참조). 이는기혼자에게주어지는보조금 308유로와두명 의자녀에게주어지는자녀보조금 370 유로를합산한금액이다. 따라서이근로자가기업연금을 위하여실제로부담하는보험료는 522 유로이다. 이처럼소득수준에관계없이혼인관계와자녀 표 3. 기업연금에대한정부보조금의확대추이(1 년기준) ( 단위: 유로) 기간미혼기혼자녀보조금(1 인당) 2002-2003년 38 76 46 2004-2005년 75 152 92 2006-2007년 114 228 138 2008년이후 154 308 185 기간 표 4. 기간별특별소득공제상한액(1 년기준) 특별소득공제상한액 2002-2003년 525 2004-2005년 1,050 2006-2007년 1,575 2008년이후 2,100 ( 단위: 유로)
수에따라동일한금액의정부보조금이제공되어저소득층일수록본인이부담하는보험료가적 어진다. 이러한정부보조금대신근로자는특별소득공제혜택을받을수도있다. 연금보험료납부상 한선이내의본인소득중에서 2002년부터소득의 1% 를, 2004년부터 2% 를, 2006년부터 3% 를, 그 리고 2008년부터 4% 를기업연금보험료로납부한근로자는본인의소득수준에관계없이일정한 금액을소득세에서공제받을수있다( 표 4 참조). 따라서높은세율이적용되는고소득근로자일 수록, 그리고자녀가없는근로자일수록특별소득공제를선택하는것이유리하다. 정부보조금또 는특별소득공제중에서본인에게유리한것을선택할수있는데, 일반적으로소득이높지않으면 서가족수가많은근로자의경우정부보조금을선택하는것이유리하다.
독일의실제실업자수에관한논쟁과실업대책 선한승, 한국노동연구원선임연구위원 2005년 4월 올해초독일의실업자수가 500만명을넘어서자이에대한논쟁이뜨겁게일어나고있다. 이에대해실업자수의급증은단기적인요인에의해촉발되었다는의견과 500만명의실업자수는축소발표된것이라는주장이있다. 단기적인현상으로보는쪽은지난겨울의강추위로인한계절적요인과사회보장제도개혁에따른실업통계기법의변화로기인되었다고보는반면, 후자의축소론에따르면, 직업훈련자, 실망실업자등으로반실업상태에있는자를포함하면 6~7백만 명이넘을것이라고주장한다. 본고는이러한 5 백만명실업자시대를맞이하여시작된실업자수의논쟁을분석하고, 슈뢰더 정부가단행하고있는노동시장개혁안의구체적내용을살펴본다. 슈뢰더정부가역점을두고있 는실업대책의핵심은세가지로압축된다. 첫째, 공공고용안정기관의개혁을통해실업대책 프로그램을효율적으로추진한다. 둘째, 장기실업자에게지급하는사회보장비를축소하여적극적 으로일자리를찾도록유도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시장유연화를위해파견노동제를활성화하는 대책이다. 슈뢰더정부가강구하고있는경제회복에대한여러조치가성과를나타내고최근의고유가추세가꺾이는하반기에가서는세계경제의호전으로독일실업률도낮아질것이라는낙관적전망이우세하다.
1. 실업실태와국제비교 지난 2월2일연방고용공단의실업동향발표에서계절적요인을고려한실업자수가 5백3 만7 천명을기록하자논쟁이분분하다. 1930년대공황이후역사적으로처음실업자수가 5백 만명을넘어섰다. 표 1. EU 국가의경제성장률과실업률추이 구 EU 15개국 GDP 성장률 실업률 2000 2001 2002 2003 2004 2000 2001 2002 2003 2004 독일 2.9 0.8 0.2-0.1 1.5 7.8 7.8 8.6 9.3 9.1 프랑스 3.8 2.1 1.2 0.2 1.7 9.3 8.5 8.8 9.4 9.6 영국 3.8 2.1 1.6 2.2 3.0 5.4 5.0 5.1 5.0 5.0 아일랜드 10.1 6.2 6.9 1.2 3.7 4.3 3.9 4.3 4.6 5.0 이탈리아 3.0 1.8 0.4 0.3 1.2 10.4 9.4 9.0 8.7 8.6 네덜란드 3.5 1.2 0.2-0.8 1.0 2.9 2.5 2.7 3.8 5.3 스웨덴 4.3 0.9 2.1 1.6 2.3 5.6 4.9 4.9 5.6 6.1 스페인 4.2 2.8 2.0 2.4 2.8 11.3 10.6 11.3 11.3 10.9 구EU 15개국 3.6 1.7 1.1 0.8 2.0 7.8 7.4 7.7 8.0 8.1 자료 : WSI Mitteilungen 7/2004 이를두고여야, 학계그리고노사단체사이에논쟁이격렬하게일어나고있다. 야당인 기민당(CDU) 은슈뢰더정부의경제정책의실패로인해오늘의대량실업사태를맞이했 다고주장하고공급자위주의경제정책을주창하였다. 슈토이버(Edmund Stoiber) 기사련 (CSU) 총재는실업자수신기록을세운슈뢰더정부의경제정책이문제에직면했다고비난 했다. 노동계는노동자의사회보장제도확충을위한수요정책을밀고나가야하는데정 부는보수주의적경제정책을쓰고있다고문제를제기했다. 학계에서는대체로독일노동시 장의경직성에문제를제기하는지적이많다.
슈뢰더정부는실업대책을위해소위하르츠(Hartz) 개혁안을단행했다. 노동시장개혁을 위해노사정및학계대표들이참여하는위원회가만들어졌는데폭스바겐자동차노무담당이사 인페터하르츠(Peter Hartz) 의이름을따서하르츠위원회가 2002년 8 월출범했다. 이후하르 츠위원회는강도높은노동시장개혁안을만들었다. 독일의실업률은 2004년까지만해도 EU 국가중에서여건이비슷한프랑스보다도오히려 낮았다. < 표1> 에서보는바와같이독일은2004년도에구EU 15개국의평균실업률8.1% 보 다도높은 9.1% 를기록했다. 이는프랑스의 9.6% 보다낮고이탈리아와는큰차이가없다. 그 러던독일실업자수가 2004년말부터가파르게상승하여실업자수 500만명대이고실업률도 12% 대로두자리를기록한이유로독일경제의경기침체라는구조적인요인이외에다른단 기적인요인이가세했을것이라는추론이가능하다. 독일의실업률이영국, 아일랜드, 네덜란 드등에비해상대적으로높은데에는낮은경제성장률에기인한것으로서 GDP 성장률은 1.5% 로서구EU 국가의평균 2.0% 에못미쳤다. 2004년독일의 2. 실업증가의원인분석과논쟁 지난 3월1일에발표된 2 월실업동향을보면, 신규로 177천명의실업자가증가하여총실 업자수가 521만6 천명에달했다. 이를실업률로환산하면 12.6% 로서 2월한달동안 0.5% 가 증가하였다. 이러한실업자수를동독지역과구분하여보면, 서독지역이 15만4천명이증가 하여 342만1 천명이고, 동독지역은 2만3천명이증가한 179만5 천명으로각각나타났다. 우선독일의노동시장개혁안을보면, 이들개혁조치가실업자수의증가를초래했다는분 석이가능하다. 독일은노동시장개혁안을통해서실업문제를해결하려는정책을펴고있 다. 이러한정책의핵심에는하르츠개혁안이자리잡고있다. 하르츠개혁안은사회보장제 도개혁을통해서실업자의구직활동을강화하고조기에실업상태에서탈출하도록하는데 있다. 슈뢰더정부는종전의사회부조와실업부조를통합하고실업자가사회보장혜택을받 기위해서는실업자로등록해야하는법을통과시켰다. 사민당정부는이에따라단기적으로 는실업자수가증가하는문제를감수하고서라도이들장기실업자를적극적구직노동자로 끌어들이려는대책을사용했다. 즉, 이러한개혁안이시행되기이전에는사회부조혜택을받 는사람중에일할능력이있는사람들은실업자로계산되지않고비경제활동인구 (Stille
Reserve) 로간주되어실업자통계에서제외되었다. 하지만앞으로는실업부조와사회부조를 통합하여 실업수당 II 로개념화하고이들수혜자는모두실업자로등록을유도하게된다. 연방고용연구소(IAB) 는이들숫자가 2005년에는줄잡아 30만명으로추산하고이만큼은실 업자가증가할수밖에없다고본다. 또한, 지난 1월실업자수가급증했던이유로서계절적인요인을고려해야한다는주장이 설득력을얻고있다. 지난겨울유난히도많은눈과살인적추위가독일을엄습하여겨울휴 무(Winterpause) 가장기간계속되었다는점도간과할수없다. 이는주로건설현장직종에 서나타나는현상인데날씨때문에일을할수없는날짜가늘어나서자연히일자리가감소 하게된다. 따라서계절적인요인이가세하게되면그만큼실업자수는증가하게된다. 이러 한계절적요인으로인해실업자수가지난 1월중 1만6천명증가했다고연방고용공단은추 산하였다. 따라서 1월중실업자수는 17만7 천명증가했으며, 이중계절적인요인을배제한 이른바계절조정실업자수는 16만1 천명이다. 한편, 1 월중에증가된실업자를내용별로보면, 과거에취업한적이있었던전직실업자 가 8 천명에불과하고, 나머지신규실업자가 16만9천명으로절대다수를차지하는것으로 나타났다. 이는학교졸업철에맞추어졸업자가대거구직활동에나선것으로풀이된다. 독일의실업자수가단기적으로급증하게된이유로새로운사회법조항 (Sozialgesetzbuch II, SGB II) 으로인한통계조사방식의변화를들고있다. 연방고용공단은종전의실업통계는연방고용청통계만으로추계되었으나이제는각주정부와합동으로조사하게되어통계의정확성이높아졌으며, 지역단위에서과거에는제외되었던실업자수가이제는모두포함될수밖에없다는점도고려해야한다고주장한다. 그러나실업통계의정확성에대한논쟁은계속되고있다. 게다가국제노동기구(ILO) 와독 일사회법전기준(SGB) 중어느것으로산출하는가에따라차이가난다. 즉, 지난 1월중에 기록된실업률은 ILO 기준으로는 9.4% 에실업자수 3백9십8만8 천명으로, SGB 기준실업률 12.1% 인 5백3만7 천명보다도월등히낮다. 그렇지만연방고용공단이발표한실업통계에대해, 학계와야당은실질실업자수는훨씬많
을것이라고문제를제기하고나섰다. 독일자민당(FDP) 의노동시장전문가인딕니벨(Dirk Niebel) 은정부가발표한실업자 5백만명은허수이고실제로는실업상태에있는직업훈련 자, 구조조정프로그램참가자, 전직훈련자등을포함하면 6백만명에서 7백만명은될것이 라고주장하였다. 이러한주장을뒷받침하는학계의주장도이어졌다. 예컨대, 뉘른베르그대 학의헤르만쉐를(Hermann Scherl) 교수는실업통계의문제점을다음과같이지적하였다. 쉐를교수는 90 만명이적극적노동시장조치에참여하고있고, 장기휴직상태에있으나다 시일하기를원하고있는여성노동자와노동청에구직신청을하지않는노동자등이 180만 명이나된다. 여기에다고용공단에서제공하는일자리알선기회를기피하고있는 58세이상 중고령노동자가 40 만명이되는데이들모두가실업통계에서빠져있다고주장하고있다. 이러한주장에대해언론도동조했는데디벨트(Die Welt) 지는지난 2월3일자기사에서 실제독일의실업자수가 직신청을하지않는노동자가 6백만명을넘어섰다고주장하면서일할의사가있으나노동청에구 2 백만명이라고보도했다. 3. 실업대책 슈뢰더수상은재집권에성공하자최우선적으로실업문제를해결하기위해노동사회제도의개혁에주력했다. 기존의노동사회부를경제부와통합하여경제노동부로정부조직을개편하고경제와노동을결합하여실업문제를강력대처하도록시도했다. 또한연방노동청 (Bundesanstalt für Arbeit) 을연방고용공단(Bundesagentur für Arbeit) 으로개편하여공공고용안정기관의혁신을단행했다. 이와함께적극적노동시장정책을실시하여실업자가적극적으로구직에나서도록유도하 는개혁안을내놓았다. 즉, 구직자는가급적빠른시기에모든희생을감수하고서라도일자리 를빨리구하도록강제성을부여하는적극화노동시장정책으로패러다임변화를시도하고 있다. 이러한맥락으로만들어진하르츠법(Hartz I, II, III, IV) 이시차를두고발효되었다. 2005년 1월부터발효된하르츠 IV 는독일노동시장개혁의핵심이다. 본개혁안의원칙은 독일의만성적인재정적자를줄이고실업자가조기에실업상태를탈출하도록유도하는데 있다. 실업수당지급기간을종전의실업보험가입기간과연령에따라최장 32개월까지가
능하던것을 55세미만실업자 12 개월, 55세이상실업자 18 개월로단축하였다( 실업수당 I). 여기에다노동능력이있는장기실업자의경우실업부조와사회부조를통합하여실업수당 II 로통칭하고, 그지급수준은종전의사회부조수준으로하향조정하였다. 예컨대, 실업자가 실업수당 II 를받을경우, 한명에게는345 유로동독지역 ( 331 유로를지급하지만가족중에 ) 한명의실업자가추가되면각각 311 유로( 동독지역 298 유로) 로감소하게된다. 그리고또 한명의실업자가추가되면더욱감소되어 276 유로( 동독지역 265 유로) 로줄어든다. 이는최 소한의생활수준유지를위해보조함으로써적극적인구직활동을전개하라는압력을행사한 다고볼수있다. 다른한편으로, 노동능력이없는실업자에게는기존의사회부조에해당하는사회부조 수당만지급하도록했다. 하지만이러한조치는당초에실업수당 II 를받기위해실업자등 록을촉진하게될것이라는예상과는반대로실업자등록을하지않고사회부조수당만을 받는것이유리하다는방향으로나타나실업자수가축소되었다는반론도제기되었다. 그리 고월보수 400유로미만의이른바미니- 직업(Mini-Job) 의경우, 노동자의사회보험료를면 제해주고사용자에게는사회보험료를포함한임금의 25% 만을부담토록하여저임금일자리 촉진정책을시행하는등공급자를위한획기적인실업대책도내놓았다. 여기에공공고용안정기관의개혁도단행했다. 종전의직업알선업무를강화하고, 구직자 의상담과보호업무를추가하는구직센터(Job Center) 를설치하여공공고용안정업무를 혁신하도록하는방안을내놓았다.
독일의료보험개혁(2003) 의동향과쟁점 이준영, 서울시립대학교사회복지학과교수 2004년 6월 독일은최근사민당(SPD) 이기민당(CDU), 기사당(CSU) 과연합하여다섯번째의료보험개혁을단행하였다. 최근의의료보험개혁은보험료상승으로인한인건비부담이국가경쟁력과고용에미치는영향을줄이기위한것이다. 그래서환자들의본인부담증가와의료공급자들에대한대책을통해의료비절감을추진하는한편, 보험료를중심으로하는전통적재원조달방식을일부수정하여근로자와국가의재정적책임을강화하는방향으로전환하였다. 지금까지의개혁들에서는의료수요억제를위한대책이중심이었지만, 2003년의의료보험개혁은비용억제대책뿐만아니라새로운재정방식을도입하여재정안정을모색하고있다는점이특색이다. 본고에서는 2004 년부터시행되는의료보험개혁의목표와주요내용을살펴보고, 이것이기대한절감효과를거둘수있을것인지를검토하였다. 독일연방정부는의료보험개혁을통해약 130 억유로의의료비절감효과를기대하고있으나, 환자들은물론, 의료공급자들까지도개혁방안에불만을표시하였다. 따라서의료보험개혁이기대한효과를거두기위해서는의료보험가입자들과의료공급자들의협조가전제되어야할것이다.
1. 독일의료보험개혁(2003) 의개혁 1.1 개요 최근독일은전반적사회개혁프로그램인 Agenda 2010 의주요분야로제시된의료보험의개 혁을위해의료보험현대화법을마련하였다. 지금까지독일의의료보험개혁은 < 표 1> 에서와같이 크게다섯차례에걸쳐이루어졌다. 이러한독일의료보험개혁들의배후에는이른바의료비의폭발적상승이주요한원인으로작용하였다. 다른나라들과마찬가지로독일의의료비상승역시주로의료기술의진보와인구노령화로인해초래되었다. 의료비의과도한상승은의료보험의재정적자로연결되었는데 2002년을기준으로의료보험의총수입은 1,402 억유로인데비해, 총지출은 1,436억유로로 34 억유로의적자를기록하였다. 그리하여의료보험의보험요율도지속적으로상승하여 1907년 8.2% 에서 10.5%(1975 년), 13.5%(1995 년) 그리고 2002년에는 14% 에이르렀다. 이같은상승추세는심각한우려를낳고있는데, 보험요율이 2040 년에는 20% 에달할것이며최악의경우에는 30% 를넘어설가능성도있다는연구결과가있을정도이다. 현실적으로는큰폭의재정적자에도불구하고보험료를무한정으로인상할수도없었다. 왜냐하면독일의의료비지출은 GDP의 10.8% 로영국(6.7%), 오스트리아(8.2%) 그리고네덜란드(8.6%) 등다른유럽국가들보다높은편이기때문이다. 보험료의인상은인건비를상승시켜실업의증가를초래한다는견해가있는데, 독일정부는사회보험요율을 1% 인상하게되면첫해에 2만개의일자리가, 2년후에는 10 만개에달하는일자리가없어지는것으로추산하였다. 그런데보험료인상이용이하지않다고해서의료보험의급여를축소하여환자들에게만부담을전가시킬수도없었다. 왜냐하면이는독일의료보험에서가장중요한원칙중하나로지켜져온사회연대의원칙에배치되는것이기때문이다. 이러한상황에서의료보험의재정을근로자와사용자만부담하는보험료를위주로하는방식이과연적절한것인가하는근본적인의문이제기되었다. 사용자의보험료는일정액으로제한하고근로자
< 표 1> 독일의료보험개혁 제1 단계 (1989) 의료개혁법의료비상승억제대책 제2 단계 (1992) 의료구조법의료비상승억제대책 제3 단계 (1997) 신질서법질병금고간의경쟁도입 제4 단계 (2000) 의료보험개혁법 의료전달체계의강화병원진료비지불개편 (DRG) 제5 단계 (2003) 의료보험현대화법의료보험재정개혁 의보험료만소득에비례하도록하자는의견과보험료를가입자당일정액으로하자는등의다양한의견들도제시되었다. 그결과, 최근의개혁에서는의료보험급여중일부에대해조세를재원으로하는방안이도입되었다. 결국, 과거의의료보험개혁들이의료비의상승을억제하기위해주로의료의공급과이용에대한통제를위주로하였던것에비해, 최근의다섯번째개혁에서는의료이용및의료비상승억제대책외에도의료보험의전통적재정방식의수정을시도한다는점이주목할만하다. 1.2. 의료보험재정방식에관한논쟁 1) 의료분야협력전문위원회의재정방식개혁안의료보험의재정방식과관련하여이미 1997년에독일의의료분야의협력을위한전문위원회 (SVRKAiG: 이하전문위원회) 는특별보고서를통해의료보험에서의사회적연대실현을위한비용들을분담하기위한새로운방안을제시하였다. 전문위원회는질병으로인한손실은병에걸린사람과걸리지않은사람간에분담이이루어지는것이므로, 공적의료보험뿐만아니라민간의료보험에서도상당히중요한기능을하며향후에도이원리는계속적용되어야하는것으로보았다. 보험료부담은공적의료보험에서질병률과무관하게결정되는데, 전문위원회는보험료산정에질병률을반영하는이른바수지상응의원칙으로전환하도록권고했다.
< 표 2> 사회적연대비용분담방식의개선 분야현재의규정개선안 질병으로인한손실의료보험내에서분산현행대로유지 보험료부담 질병률과무관 ( 사회적연대의원칙) 질병률을고려 ( 수지상응의원칙) 노령화위험의분산 부과방식 인구변화를고려한사회기금 개인저축과적립방식 소득의재분배 능력에따른보험료부담 위험에따른보험료부담 가족부양부담피부양자의보험료납입면제 인두제보험료 자료: SVRKAiG. 1997. p. 340에서재정리 노령화로인한위험은연령에상관없이보험료가결정되는이른바세대간계약을통해그비용이분담된다. 세대간계약은부과방식에기초하고있는데, 이것이효과적으로운영되기위해서는생산인구와부양을받는노령인구의비율이안정적으로유지된다는것이전제되어야한다. 그러나현실적으로여러가지원인에의해그것이불가능하기때문에심각한문제가발생되는것이다. 전문위원회는그러한인구구조변화에따른위험을방지하기위해서인구변동을고려한사회기금을마련해야한다고제안하였다. 즉, 인구변동에따른위험을별도로분리하여특별한재원을마련하여운용하자는것이다. 한편, 그기금의재정운용방식은적립방식으로하고, 그기금의재원조달을위해추가적인보험료또는조세를징수해야하지만국민들의거부감때문에실현하기어렵고, 그기금의여유자금이다른사회보험의재원으로활용되는문제점도배제할수없다고보았다. 따라서이러한문제를극복하기위한대안으로개별적인저축으로적립하는방식을제안하였다. 이방식은최근우리나라에서도논의되었던의료저축계정과유사한것으로볼수있다. 소득의재분배는보험료산정기준등을통해이루어지며보험료납입의면제, 실업자, 사회부조수급권자, 연금자, 학생, 인턴사원그리고예술가등특수한계층을위한특별규정이있다. 전문위원회는그러한계층에대해위험에따른보험료를부과하지못하게되었기때문에보험자들이이들의가입을꺼려할것인데, 그와같은시도가차별금지와같은규제를통해과연효과적으로억제될수있을지의문을제기했다. 아울러그에대한해결책으로서이른바 " 모든사람들에게의료보험을" 이라는원칙하에위험에따라보험료를부과하고, 특수한계층으로인해보험료수입이적어지는경우국가의보조를통해이를보완하는방안을제시했다.
< 표 3> 의료보험장기재정의모형(Y- 모델) 근로자사회보험방식 ( 노 사공동부담) 카알라우터바흐 (Karl Lauterbach) 경제적능력에따른부담원칙 임금수준비례보험료 사회적형평은의료보험내에서수행 보험가입의무경계소득수준인상 보험가입자및부과할재원의확대 의료보험료방식 ( 근로자부담) 베르트뤼럽 (Bert Rürup) 위험에따라부담하는수지상응원칙 임금과무관한보험료부과 사회적형평은조세제도나소득이전제도로 민간보험의활용 민간보험간, 공공과민간간의경쟁강화 자료 : Weller, M. & Haas, A.-K., Gesundheit und Gesellschaft. 2003. 6. p. 24 출산율저하와여성의직업활동증가로피부양가족의수가지속적으로감소하고있어서가족부양으로인한재정부담은점차감소할것이다. 가족부양의문제는보험료납입면제제도에의해비용이분담된다. 의료보험에서피부양가족에대한배려는조세나사회보장급여를통한사회전체의소득재분배제도와중복된다고보는견해가있었기에, 뤼럽위원회는재정적자해소를위해피부양자제도를폐지하자고제안하였다. 그러나이제도는독일의료보험의핵심적제도라는주장이더많아그대로유지하기로하였다. 전문위원회는가족부양의지원으로인한의료보험의부담을감소시키려면가족부양의비용을근로자와사용자만부담하는의료보험에서분리하여조세를통한소득재분배제도로전환시키는것이효율적이며, 보험료도개인별로각각일정액을납부하는인두제로전환하는것이적절하다고보았다. 2) 뤼럽위원회의논의의료보험개혁과관련하여기업들의경쟁력을높이고고용을늘리기위한노력으로기업들의임금비용을절감할수있는방안들이논의되었다. 뤼럽위원회에서라우터바흐교수는현재와같은근로자사회보험을유지, 강화하자는의견을제시하였으며, 뤼럽교수는민간의료보험과같이위험에따른보험료를중심으로의료보험의재원을조달하고사회적형평의달성을위한지출은조세를통해조달하자고제안하였다. 울라슈미트(SPD) 연방보건부장관은이러한의견들을반영하여 2단계로구성된의료보험개혁안 (2003) 을마련하였다. 개혁안의제1단계에서는라우터바흐교수의의견이주로반영되었다고볼수있다. 상병수당을가입자단독부담으로전환하고, 경제전반에걸쳐혜택이돌아가는급여는조세로부담하며, 본인부담및개원의수수료를높이고그리고연금에대한보험료부과등단기적절감 조치들이포함되었고, 제2단계는장기적인대책인데뤼럽교수의제안을반영하여보험료의재원자
체를변경하려는계획이포함되었다. 2. 의료보험현대화법의주요내용 2.1. 의료서비스의개혁 의료보험현대화법(2003) 은높은의료서비스를유지하되의료보험의가입자도질병의비용을적절한보험료수준에서부담하는것이사회적으로타당하다는전제하에평균보험요율을 13% 이하로낮추는것을목표하였다. 이와같은목적을달성하기위해새로운개혁방안이마련된것이며, 독일연방정부는이개혁을통해약 150억유로가절감될것으로기대하였다. 의료서비스분야에서의료보험현대화법이추구하는개혁의목표는크게가입자의참여확대, 료서비스의질향상그리고효율성제고라는세가지로나누어볼수있다. 의 1) 가입자의참여확대최근의료보험개혁의주요내용중하나는의료보험에서투명성을제고하여가입자들의참여를확대하는것이다. 진료의투명성을확보하고가입자들에게진료비용에대한인식을고취시키기위해의사들이의무적으로환자에게진료영수증을발급하도록하였다. 2006년부터는전자식으로제작된보건증을도입하여중복검사를방지하고응급의료시필요한정보를신속하게제공하도록하였다. 질병예방을위한노력이확인되는경우치과진료등에서본인부담금을면제하는등의방법을통해보상함으로써질병치료에따른비용을억제하려하고있다. 의료보험관련정책결정에가입자들의의견이좀더적극적으로반영되도록하기위해 2004년부터모든위원회에가입자의대표자들이참여하는것을의무화하였다. 연방차원에서환자들의고충처리를담당하는기관을설치하도록하였다. 2) 의료서비스의질향상
세계보건기구 (WHO) 의 2000 년보고서(World Health Report) 에따르면, 독일의의료서비스수준은세계 22 위에머물고있다. 따라서독일에서는의료서비스의질을제고하는것이중요한과제였다. 1 주치의제도의무화전문의들의중복검사등을방지하기위해의료보험개혁법(2000) 에서부터강조되어왔던주치의제도를의무화하였다. 2 병원의외래진료허용당뇨병, 심장병, 유방암등의만성질환에대해서는질병관리프로그램(DMP) 의일환으로실시하도록하였다. 3 합동진료센터의료보험현대화법(2003) 에서는의사와기타치료관련전문가가합동으로개원한형태를허용하였다. 젊은의사는고용형태로근무할수있어개원에따른위험부담을감소시킬수있으며, 의약품에대한효율적관리가가능하고중복검사를방지하는효과가기대되고있다. 4 개별진료계약허용기존에는지역단위로질병금고연합회와보험의사협회가진료계약을체결하였으나, 향후에는개별의사들이질병금고( 의료보험조합) 와별도의개별진료계약을체결할수있도록허용하였다. 5 의사들에대한정기적인교육과자질검증의료서비스의질을향상하기위해의사들에대해정기적인교육과검증제도를도입하기로하였다. 특히, 향상교육이나세미나에참석하지않는의사들은진료비를삭감하거나보험의사자격이박탈될수있도록하였다. 6 의료의질과경제성전담기구의설치의료의질과경제성제고를위해이른바독일의료질센터(DZQM) 를설립하여 ( 의료) 급여의효과와질에대하여평가하고, 의료보험급여항목을새로운의학지식과의료기술의발전에부응하도록변경하며, 의약품의비용편익분석등을실시하도록하였다. 3) 효율성제고
1 의약품에대한새로운참조가격제시행특허의약품중명확한치료효과가있는약품들에대해서는참조가격제가적용되지않으나, 특허의약품이라도치료효과가미미한경우는참조가격제를적용하도록하고있다. 참조가격제의약제비절감효과는경험적으로입증되었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참조가격제가적용된약품들에대한약제비는약 90 억유로로안정적인반면, 비적용약품들의경우는 80억유로에서 150억유로로증가하였다. 참조가격이적용되지않는약품을 6% 할인된가격으로의료보험에납품하던것의할인율을 16% 로높였다. 2 약사들에대한새로운보상제도의실시를통한약제비절감 약제비절감에대한약사들의협조를유도하기위해약품한상자당 8 또는 10유로와약국구매 가격의 3% 를지급하기로결정하였다. 또한약국에납품되는의약품은상자 1개당 2유로를할인해 주도록하였다. 3 일반의약품에대한자유가격제도의사의처방을필요로하지않는약품들의경우약국에서가격을자유롭게결정하도록하였으며, 이는약국간의가격경쟁을유도하고환자들의선택가능성을높이려는것이다. 이러한조치들을통해약 5 억유로의약제비가절감될것으로예측된다. 4 약국판매약품에대한우편판매허용이것은만성질환자나약국이문을닫은시간에약을필요로하는사람들의편의를증진시키기위한조치이다. 5 의료서비스의오 남용신고센터설치환자들의불필요한의료이용과의사들의과다한진료를억제하기위해보험의사협회와질병금고등에신고센터의설치를의무화하였다. 6 관리운영비상승의억제관리운영비를 2007 년까지기본임금에따라변화하도록개정하였으며, 가입자 1인당관리운영비가전체질병금고의평균보다 10% 이상상승하지못하도록제한하였다. 2.2 본인부담및급여의개혁
1) 본인부담의변화 1 본인부담제도의단순화 지금까지의본인부담제도는다양하고복잡하였다. 최근의의료보험현대화법은일반적으로본 인부담을 5~10 유로로단순화하였으며, 가격이 5유로이하인경우는실제가격을부담하도록한 다. 2 본인부담의면제및상한선변경사회조항에따라월소득이일정액(2003년 952 유로) 이하인사람의경우는본인부담이면제된다. 18 세이하의아동도종전과같이원칙적으로본인부담이면제된다. 본인부담으로인해환자들에게지나친경제적부담이가해지지않도록본인부담의상한선을새로이결정하였다. 외래의경우분기당 10 유로, 입원진료의경우매일 10유로씩 1년에 28일까지로제한하였다. 또한본인부담의한계는소득수준과연계되는데연간총소득의 2% 까지이며( 사회조항), 만성질환자의경우는본인부담액이 1% 를초과할수없도록하였다( 과부담방지조항). 피부양자가있는경우이들에대한경감조치로본인부담상한선이낮아지도록하였다. 3 보너스제도예방을통한의료비절감효과를높이기위해, 질병예방을위한환자의적극적인노력이확인되 < 표 4> 본인부담의변화 개원의진료 급여항목본인부담경감조치 개원의수수료 ( 분기별로 10 유로) 주치의를거쳐다른전문의에게의뢰될경우, 만성질환자, 아동, 사고, 예방을위한정기적인검진, 예방접종을위한방문등은면제 의약품및붕대개당가격의 10%, 주치의를통한의뢰는일부경감 ( 최소 5유로에서최대 10 유로까지) 보조치료서비스 / 비용의 10% 및 10유로의처방료 1년에 28일까지로제한재가요양보조기구건당가격의 10% ( 최소 5유로에서최대 10 유로까지) 의료사회사업 / 가사보조 일일비용의 10% ( 최소 5유로에서최대 10 유로까지) 입원요양및재활일일 10유로 1년에 28일까지로제한 보모의의료재활일일 10유로
는경우에재정적보상을제공하기로하였다. 그래서주치의제도, 만성질환자프로그램(DMP) 그리고통합진료체계등에적극적으로참여한경우에는본인부담의면제나부분적인보험료를경감해주도록하였다. 통합진료는병원, 개원의그리고약국간의긴밀한협조를의미한다. 이를적극적으로유도하기위해총진료비의 1% 를별도로할애하여통합진료체계를구축하는데지원하도록했다. 보상의구체적인내용은질병금고에서자율적으로결정할수있다. 이와같은보너스제도의실시에소요되는재원은비용절감과효율성제고를통해조달하도록하였다. 2) 급여와관련된변화의료보험개혁(2003) 으로일부급여가의료보험에서제외되었기때문에정관수술, 안경그리고일반의약품은의료보험에서급여할수없게되었다. 또한일부급여는아예폐지되기도하였는데장제비의경우가그렇다. 아울러급여의범위가축소되는경우도있었는데인공수정시술횟수가축소된것이여기에해당된다. 급여보상방식에도부분적인변화가있었는데, 보조치아는지금까지는무료로진료를받은후질병금고에서진료비를치과의사에게지불해주는현물급여방식을유지해왔으나향후에는일정액을지원하는상환방식으로전환하기로하였다. < 표 5> 급여의변화 급여항목변경내용비고 장제비및출산수당정관수술인공수정안경및콘택트렌즈 급여항목에서제외의학적으로불가피하지않은경우제외 50% 급여인정, 3번시도로제한여성 25-40 세, 남성 50세로제한급여항목에서제외 시각장애인과 18세이하의아동에게급여인정 교통비개원의방문교통비는비급여특수한경우에는급여인정 약제비 예외적급여 보조치 일반의약품비급여 조세를통해재원을조달 2005년부터임의급여 2005년부터매월 10유로이내의추가적부담정률제에서정액제로전환 12 세이하의아동, 발달장애아동, 중증질환자의경우는급여인정산모수당, 피임, 임신중절, 아동의질병시상병수당 피부양가족본인부담면제
2.3. 의료보험재정방식의개혁 1) 예외적급여에대한조세활용독일의료보험의경우, 이른바예외적인급여라고하여산모수당, 피임, 임신중절, 아동의질병시상병수당의지급등을제공하였다. 지금까지는이러한급여와관련된사회적연대와그에따른부담을제한적으로의료보험제도내에서만분담하도록하였다. 그러나그와같은급여들은수혜자들에게직접적인혜택이되는것은물론이고, 출산율을높여생산인구의수를증가시키므로국민경제전반에혜택이돌아간다고보았다. 즉, 그러한급여들에대하여긍정적인외부효과가있다고인정한것으로볼수있다. 따라서2003년의료보험현대화법에따른개혁에서는이러한급여가국가경제전반에영향을줄수있다고보고향후에는조세를통해재원을조달하도록변경하였다. 지급은과거와같이질병금고에서수행하도록하였다. 그리하여, 독일사회법전에따라연방정부는예외적급여로인한비용을분담하기위해 5월 1일과 11월 1 일매년두번에걸쳐연방사회보험청을통해의료보험에분담금을지급하도록규정했다. 2004년에는 10 억유로, 2005년에는 25억유로그리고 2006년에는 42 억유로를지급하도록하였다. 질병금고 ( 의료보험조합) 들의상급단체들은공동으로하나의질병금고또는하나의질병금고연합회를센터로정해서연방사회보험청과정산을하도록한다. 연방사회보험청은연방의분담금을이센터에지불하여관련된질병금고들에게분배하도록하였다. 연방보건부는연방정부의동의를얻어시행령을통해이분담금의분배에관한세부사항을정한다. 분배는예외적급여로인한지출비율을기준으로이루어진다. 2) 연금급여에대한보험료징수독일은 1960년대에연금수급자진료비의 90% 이상을연금수급자의료보험의보험료수입으로충당했으나, 최근에는이충당비율이 40% 에도못미치고있기때문에의료보험재정적자의주요요인으로작용하고있다. 따라서이러한재정적자폭을줄이기위한대책의일환으로연금수급자가연금이외의기타소득이있는경우는그것에대해서도보험료를납부하도록하였다. 보험료는보험료산정상한선까지의소득에대해서만납부할의무가있는데,2003년에는월소득 3,450유로가상한선이었다. 3) 상병수당의재원변경
독일에서는근로자가질병으로일을못하게되면 6주까지는사용자가임금을계속지불하지만, 그이후에는의료보험에서상병수당을지불하여질병으로인한소득의결손을보상하게된다. 상병수당제도를법정급여에서제외하고민간보험으로전환하자는의견은질병금고들의반대로채택되지않았다. 최근의개혁에서는상병수당을받으려면사전에가입자가 0.5% 의보험료를별도로부담하도록하였다. 이로써그동안노사가공동으로납부했던일반보험료에서상병수당의비용을부담했던것이, 향후에는가입자가단독으로부담하게되었다. 2.4. 의료보험의구조개혁 1) 질병금고구조의개혁의료보험현대화법(2003) 에는질병금고의구조를변경하는내용을포함하고있는데, 이는서로다른종류의질병금고간경쟁을강화하여가입자구조등을균등화하는데그목적이있다. 질병금고간합병도허용하였으며, 직장질병금고에서는인건비를보험요율에고려하도록했다. 1970 년이후독일의료보험의비용억제를위해사용자, 가입자, 정치가등이모여정책에대한논의를해왔던의료제도협의회 (KAiG) 는더이상필요하지않다고보아해체하기로결정하였다. 2) 민간의료보험의인정월소득이 3,825 유로(2003 년) 이상인사람은공적의료보험가입의무가면제되기때문에민간보험에가입하거나공적의료보험의임의가입자가될수있다. 그외에도해외로부터이송, 의치, 고액의상병수당그리고안경등을급여로받기위해민간보험에가입할수있다. 이와같은보완적민간보험의가입을위해질병금고는 ( 의료) 보험회사들과협조할수있도록하였다. 3) 진료비지불방식의변경의사들에게지불되는총진료비의산정은 2007 년부터전문의집단별법정급여량방식( 합의된진료량 환산지수) 으로전환된다. 법정급여량의변화에가입자의질병률을반영함으로써질병금고는질병률증가로인한재정적위험은부담하지만, 의사의수가증가하여초래되는재정적위험은피하도록하였다. 법정급여량의연도별책정에서보험요율안정이라는기본원칙을고려하도록하였다. 그리하여정해진진료량이상의진료는상당히낮은수가( 환산지수) 로보상받게된다. 개별적으로질병금고와계약을맺어총액예산진료비지불방식의적용을받지않는개별의사에대한진료비는주로포괄수가제방식으로지불한다.
4) 병원재정방식의변경 지금까지는병원의시설투자는주정부가하고운영비는일일입원비의형태로질병금고가보험 료수입에서지불하는 2 원재정방식으로유지되어왔다. 2004년부터는병원에필요한총경비를 질병금고가지불하는단독재정방식으로전환하게된다. 질병금고가병원에지불하는총액예산은 가입자들의기본임금을고려하여주단위로정해진다. 3. 의료보험개혁(2003) 의절감효과와전망 3.1. 재정절감효과 독일은의료보험현대화법(2003) 의제정과 2004년부터시행되는의료보험개혁으로지출면에서 는본인부담및급여내용의변경, 그리고수입면에서는비용부담및재원조달방식의변경을 통해상당한액수의의료비절감효과를기대하고있다. 1) 상병수당의재원변경으로인한절감효과 상병수당에소요되는비용을근로자가단독으로부담하게되는경우, 사용자는 71억유로를절 감할수있을것으로기대하고있다. 그러나이는근로자와사용자부담의재분배일뿐이며의료보 험의실제적인절감효과는기대할수없다는주장도있다. 2) 예외적급여의재원변경으로인한절감효과 질병금고들은예외적급여비용에대하여조세를재원으로한국고지원을받게되었다. 예외적인 급여비용을담배세수입을통한국고보조로전환함으로써 45 억유로가절감될것이며, 그결과보험 요율이 0.4% 인하될수있을것으로기대된다. 예외적급여를위한재원마련을위해담배세를 2004 년 1월에 1갑당 40 센트, 2004년 10월에 30 센트, 그리고 9개월에 30 센트를인상하기로계획하였다. 담배세는보험재정의확충뿐만아니라건강증진효과도있어일석이조의효과를기대할수있다고 보았다. 문제는담배세만으로원하는재원이충분히마련될수있을것인가하는점과가격경쟁에 서유리해진외국산담배의판매량이증가할수있다는점이다. 3) 급여항목의변경으로인한절감효과 정관수술및안경등의급여가의료보험에서제외되고인공수정횟수가축소됨으로써 7억유로 가절감될것으로기대되고있다. 이른바일반의약품은의료보험에서급여하지않기로함으로써
10 억유로가절감될것으로전망되고있다. 또한장제비의폐지로예상되는절감액은 4억유로이 다. 4) 본인부담의변경으로인한절감효과 개원의수수료징수를통해약 17 억유로가절감될것으로기대하고있다. 그러나이는수수료 를분기별로 15유로로가정한것이었고개혁안에서는 10유로로결정되었기때문에실제절감효 과는적을수있다. 해 5) 추가적소득에대한보험료부과로인한재정확충 연금수급자들도연금이외의추가적소득이있는경우보험료를납부하도록하였는데이를통 18 억유로의재정수입이증가할것으로기대된다. < 표 6> 개혁으로예상되는절감액 ( 단위: 억유로) 개혁조치연방보건부추계 AOK 추계 상병수당비용부담의전환 0 0 사회부조수급자의의료보험혜택 0 0 일반의약품의급여제외 10 13 지출측면 인공수정및정관수술의제외 2 2 장제비제외 4 3 안경제외 5 5 주치의제도강화 30 10 본인부담( 입원, 의약품, 전문의) 17 11 수입측면 예외적급여에대한조세활용 45 45 기타소득및자영소득에대한부과 18 18 전체절감효과 131 107 자료 : AOK-Bundesverband. 2003.
6) 전체재정절감효과 < 표 6> 에나타나듯이독일연방보건부는의료보험개혁(2003) 을통해약 131억유로가절감될 것이라고예측하고있는반면, 지역의료보험연합회는의료보험개혁의절감효과가 107억유로정 도에그칠것이라고전망하고있다. 비록정확한절감효과에대한다소간의견해차이는존재하 나최근의개혁으로상당한절감효과를거둘것이라는점에서는논란의여지가없다. 3.2. 의료보험개혁(2003) 의전망 의료보험개혁(2003) 에서기대되는절감액의절반에해당되는만큼보험요율을인하하도록규정 하였기때문에독일연방보건부는보험료를 2004년에는 13.6% 그리고 2005년에는 12.5% 로안정시 키는목표를무난히달성할것이라고기대하고있다. 그러나독일정부의그와같은낙관적전망과는달리, 의료보험에관련된여러집단들은다양한불 만을표시하고있다. 보험의사들은개원의수수료가너무많은사무처리를필요로하며실제로의 사방문을억제하는효과가있을수있다는것에대해회의적이었다. 또한개원의수수료로인해저 소득층의의료이용을억제하는효과만을갖게될것이라고보았다. 제약협회는의료보험개혁 (2003) 으로약제비를절감하려면환자들이더많은본인부담금을지불하고, 제약회사들은약값을 16% 나할인하는희생을치러야한다고주장하였다. 특히심각한문제는그로인해제약회사들의 신약개발의지가현저하게저하되는것이라고보았다. 병원협회는병원예산을질병금고가총액 예산으로지불하는단독재정방식으로전환하게되면질병금고의통제력이강화되고병원들의 경영은압박을받게될것이라고하였다. 이와같이보험의사, 제약업체그리고병원등의의료공급자들은물론가입자나환자들도본 인부담의증가와의료이용의제한을이유로의료보험현대화법(2003) 에대해부정적인견해를 가지고있다. 결국 2004년 1월부터시행되고있는의료보험개혁시도가기대한효과를통해의 도된목표를달성할것인가는가입자, 환자들그리고의료공급자들의수용적자세와적극적인 협조를얻어내는데달려있다.
독일의장기요양보험 권순만, 서울대학교보건대학원교수 2004년 4월 독일은가난한사람들을대상으로지방정부가사회부조제도를운영하였으나, 노령화와가족의역할변화로장기요양대상인구와비용이증가함에따라세계최초로사회보험제도를통해전국민을대상으로장기요양비용을조달하기시작하였다. 독일장기요양보험의특징으로는급여수급자가현금급여를선택하여그현금을자신에게요양을제공한가족, 친지등과같은비공식적서비스제공자에게줄수있도록함으로써가족의기능을유지하기위해노력한다는점, 요양시설과같은요양기관보다는가정과지역사회중심의서비스제공이이루어지도록유도한다는점, 의료보험과는달리급여수급자의실제서비스이용량에상관없이세가지요양등급분류안에서는동일한정액급여액을제공함으로최소급여의성격이강하다는점등을들수있다.
1. 장기요양제도: 특성과유형 평균수명의증가로노령인구가증가하고, 이에더하여출산율의감소로인하여노령인 구의부양문제가큰사회적부담을야기하고있다. 나아가여성의노동참여증가와가족 의역할변화로전통적으로장기요양을담당해온비공식적서비스제공자의역할이감소함 에따라노인에대한간병과일상생활의보조같은장기요양서비스가큰사회적부담으로 대두되었다. 이에따라선진국들은그동안개인의책임에맡기던장기요양에대해서도사회 적책임이강조되는공적재원조달제도를도입하기시작했다. 공적재원조달체계는위험분산과사회적연대를동시에추구하는제도로서, 그재원을조세혹은보험료에기반을두느냐, 그리고국민전체혹은일부계층만을대상으로하느냐라는두가지차원에서제도를분류할수있다. 장기요양비용을조달하기위해사회보험을도입한나라로는독일과일본을들수있다. 사회보험은일반적으로소득에비례하여보험료를납부하고거의모든국민을포괄하므로가입자가장기요양서비스를필요로할경우재산상태와관계없이급여를받는제도이다. 조세로장기요양비용을조달하는경우는크게둘로나누는데, 자산조사를통해가난한사람만을대상으로사회부조적성격을가진미국과같은제도와, 모든국민을대상으로장기요양서비스가필요한사람에게급여를제공하는북구유럽식제도가잇다. 일반적으로의료보다는장기요양의급여범위가더제한적이다. 또전국민에대해의료 비용을조세로조달하는국가보건서비스를가진영국에서도장기요양에대해서는최근까지 가난한사람만을대상으로사회부조제도의형태를운영해왔다. 즉, 대부분의나라에서는의 료비용과장기요양비용을서로약간다른사회적위험으로간주한다고볼수있다. 우선 의료비용에비해장기요양비용은노령화와함께진행되는만큼그예측가능성이더높다. 따라서개인이준비할수있는여력이상대적으로더많고개인의책임으로대처할가능성이 더높다. 또젊은층의생산가능인력에게의료문제가생겼을때는그비용을부담하기위 해자산( 예, 주택) 을소진하거나여타소비를희생하는데따른기회비용이매우크다. 따라 서재난성의료비용에대한사회적위험분산의중요성은매우크다. 반면, 노령인구에게는 장기요양비용을조달하기위해본인의자산을처분하는것을 ( 재산상속자를제외하고는) 사
회적으로용인할수있다. 나아가젊은층의의료문제는그들의건강을회복시킴으로써사회적생산활동에재투입할수있지만노령인구의장기요양은신체기능의회복을통한사회적생산을증진시킬수있는기회가매우낮으므로공적재원의투자효과가상대적으로낮다고보는것이다. 2. 독일장기요양보험1) 도입배경 독일은 1994년 5 월장기요양법이통과되고, 1995년 1월부터보험료를징수하기시작하여 1995년 4 월부터재가요양에대해, 그리고 1996년 7 월부터요양시설(nursing home) 에서의 장기요양에대해급여를제공하기시작했다. 그이전에는독일에서장기요양서비스에따른 비용은개인이직접지불하였다. 다만대부분의선진국과마찬가지로지방정부는자산조사 를통해가난한사람이나자신의재산을장기요양을위해다소진하여가난해진사람들을 대상으로사회부조를운영하고있었고, 종교단체, 사회복지단체등과같은비영리민간조 직들도지역사회차원에서장기요양서비스를제공하고있었다. 그러나노령화와가족의 역할변화에따른장기요양대상인구와비용의증가는가난한계층이외의일반국민들 그리고지방정부에게심각한재정부담을안겨주게되었다. 또한, 장기요양을위한사회적 재원조달체계가미비함에따라장기요양제공체계도자리가잡히지않아제공되는서비 스의질이낮고서비스공급자의수역시제한적이었다. 따라서공적인재원으로대다수의 국민을포괄하는장기요양재원체계의필요성이강하게대두되었다. 공적재원조달체계를조세로운영할지혹은사회보험체계로운영할지에대한논의가있 었다. 통독이후정부의재정부담이상당한상황에서조세체계로장기요양서비스의재원 을마련하는것은비현실적이었다. 또이미의료에대한사회보험제도가도입되어있었으므 로장기요양에대해서도비슷한제도를도입하는데대한사회적공감대가쉽게형성되었을 것이다. 나아가사회보험체계를도입함으로써, 장기요양서비스에대한별도의관리운영체 계를도입할필요없이기존의의료보험( 질병금고) 조직과인력을이용하여비용을절감할 수있다는장점이있었으므로조세체계보다는사회보험체계를도입하는것이많은장점을 1) 간병보험 으로번역되기도하나필자는우리나라에서좀더보편적으로사용되는장기요양보험이라는용어를사용하 고자합니다.
가지고있었다. 의료와장기요양서비스를구분하는것은쉽지않고대부분의환자의경우두가지가모두 필요하다. 따라서환자의효과적인치료와요양을위해서는의료와장기요양을하나의제도 로묶음으로써두기능간의통합과연계를도모하는것이이론적으로더바람직한접근일 것이다. 하지만독일의경우현실적으로비용절감에있어많은한계를보이고있는기존 의료보험체계내에장기요양요소를추가해서는그비용상승을감당하기어려울것이라는 우려가있었다. 예를들어, 의료보험은환자가받는진료수준에따라거의상한선없이급 여를제공하고있는데, 만일장기요양부문을의료보험에추가한다면이러한장기요양부 문에서도거의제한없는급여를제공해야할것이다. 따라서비용절감을위한혁신적인 장치들을도입하기위해서는기존의제도와는다른별도의새로운제도를설계하여도입할 필요가있었다. 하지만장기요양과의료의경계가불분명하기때문에생긴문제가두분야 에대한지불자( 보험조합) 가다르기때문에더욱증폭되는양상을띠고있다고볼수있다. 나아가이러한별도의제도운영은의료와장기요양서비스간적절한조화와조정을더욱 어렵게한다는비판에도직면하고있다. 3. 독일장기요양보험재원조달과급여 1) 재원조달 사회보험중하나인의료보험에가입하는모든국민은사회장기요양보험의가입자가된 다. 다만자영자나소득이높은일부피용자계층은사회장기요양보험에강제로가입해야하 는의무가없으며, 사회장기요양보험을선택하지않은경우민간장기요양보험에의무적으로 가입해야한다. 현재약 90% 에가까운국민들이사회장기요양보험에가입하고있다. 사회장 기요양보험의보험료부과소득상한선은 2002년까지가입해있던사람은월소득 3,487유로 이하로, 2003년도부터가입자는월소득 3,862 유로이하로각각다르게적용하고있다. 장기 요양보험은나이에관계 없이젊은층도보험료를납부하고급여역시노인뿐아니라장기요 양을필요로하는모든사람( 예를들어, 장애로장기요양을필요로하는젊은계층) 에게제공 된다. 하지만장기요양보험급여수혜자의 80% 는 65 세이상의노인들이다. 독일장기요양보 험의대상인구는 2000년에시작된일본의장기요양보험과다른데일본에서는 40세이상인 구만이보험료를납부하고급여역시노령화와관련된장기요양에국한된다.
의료보험과마찬가지로장기요양보험의보험료도고용자와피고용자가반반씩부담한다. 단 고용자의부담을줄이기위해법정공휴일을하루감소시켰다( 예외: 작센주). 이러한변화는고 용자의사회보험료부담을더이상높이지않음으로서산업의경쟁력을높이기위한목적도있 지만, 질병에비해장기요양은직장이나고용에의해영향을받는정도가상대적으로덜하다는 논리에기인했다고도볼수있다. 연금수급자의경우연금에서보험료의반을부담하고실업자의 경우실업보험에서보험료를전액부담해준다. 보험료는현재총소득의 1.7% 인데, 보험료율을 인상시키기위해서는의회에서법안이통과하여야한다는규정을만듦으로서비용억제의의지 를보이고있다. 재원조달에서도독일은재원의전액을보험료에의존한다는점에서재원의 50% 를보험료로부터그리고나머지 50% 는조세에의해조달하는일본의장기요양보험제도와도차별화된다. 2) 장기요양보험급여 장기요양보험의급여는나이나노령화와상관없이신체적혹은정신적장애(disability) 로 인해일상생활(ADL: Activities of Daily Living) 을수행하는데있어서적어도 6개월이상타 인의도움을필요로하는모든사람을대상으로한다. 급여의대상자가되기위해서는의료보 험소속의료진(MDK) 에의한검진( 사정, 평가) 을받아야한다. 급여대상자는일상생활에서개 인위생, 영양그리고이동과관련된활동들( 예, 목욕, 화장실이용, 식사등) 을수행하는데있어 서얼마나자주그리고얼마나오랫동안타인의도움에의존하느냐와가사노동에도움을필요 로하는정도에따라세가지요양등급으로분류된다. 타인에대한의존도가가장낮은 1등급 은하루에적어도한번이상그리고총 90분-180 분동안타인의도움을필요로하는경우이고, 2등급은하루에적어도세번이상총 180분-300분동안타인의도움에의존해야하는경우이 다. 마지막으로타인의도움이필요한정도가가장큰 3등급은적어도두가지이상의일상활 동을수행하는데있어매일총 5 시간이상타인의도움에의존하는경우이다. 표 1. 장기요양보험급여액 ( 단위: 월, 유로) 요양등급재가요양주간/ 야간요양요양시설 현금급여 요양급여 요양급여 요양급여 1 205 384 384 1,023 2 410 921 921 1,279 3 665 1,432 1,432 1,432 출처: 독일보건복지부(Bundesministerium für Gesundheit und Soziale Sicherung)
급여는크게가정에서하는요양과요양시설의요양으로분류될수있다( 표 1). 재가요양의 경우수혜자가현금급여와서비스급여중선택할수있다( 둘중한가지만선택해도되고, 두 가지급여를혼합할수도있음). 재가요양에대한서비스급여는지역사회의방문요양서비스제 공자( 즉, 공식적서비스제공자) 에의해제공된다. 재가요양의현금급여는그사용처( 방법) 에 대한제한이없으며, 현금급여를선택한급여대상자는그현금을자신에게요양을제공한가 족, 친지등과같은비공식적서비스제공자에게줄수있다. 요양시설의경우서비스급여만 가능하고, 숙박과식사는급여대상이아닌데이는재가요양급여수급자에비교해더유리한 급여는제공하지않겠다는의도이다. 요양등급 3의경우재가요양과요양시설간동일한급여 액을지급함으로써요양시설과같은기관화된장기요양서비스제공을감소시키기위한경제적 유인을제공하고자하는노력도엿볼수있다. 그외주간요양과야간요양에대해급여를제공 하고그리고요양시설에서하는단기요양( 예를들어, 환자를돌보던가족구성원이휴가를가 는기간) 에대해서도급여를제공한다. 이러한현금급여는소비자의선택권을보장하여서비스제공자간경쟁을촉진할수있고, 또비공식서비스제공자에대한금전적보상을통해가족에의한요양서비스제공을촉진시 키고자하는의도를가지고있다. 물론, 동일한요양등급이라하더라도현금급여액을요양급 여액의절반수준으로제한함으로써현금급여의남용을막으려고하고있다. 이러한독일의 현금급여는, 공식적서비스제공자에대해요양급여만을지급할뿐현금급여를지급하지않 음으로써가족과같은비공식서비스제공자에대한금전적보상의가능성을없앤일본의장 기요양보험제도와크게대조된다. 장기요양보험은급여에서의료보험과큰차이를보인다. 의료보험에서는환자가의료혜택 을받은만큼거의제한없이급여를받을수있으나, 장기요양보험에서는급여수급자의실 제서비스이용량에상관없이세가지요양등급내에서는동일한 ( 정액) 급여액이주어진다. 장기요양보험이도입된이후지금까지급여액은전혀인상되지않았으며( 물가상승과도연동 되지않음), 예를들어장기요양보험의급여액은 2000년현재평균적인요양시설비용의 60% 밖에포괄하지못하는것으로나타났다. 즉, 의료보험과는달리장기요양보험은기본적인장 기요양요구에대한최소한의급여제공의성격이강하다. 이러한획기적인차이점은장기요 양보험을기존의의료보험과는별도의새로운제도로설계하고도입했기에가능했으리라생각 된다. 그러나이러한제한적인급여로인해, 요양등급이높아서장기간많은양의장기요양서
비스를필요로하는사람들에게는급여량이매우불충분하고결과적으로가난한사람들은사회 보험이도입되었어도 ( 지방) 정부의사회부조프로그램에여전히의존하게되는실정이다. 급여 가제한적임에따라장기요양보험의도입이후에도비공식적인서비스제공자의역할이여전히 중요한실정이다. 독일장기요양보험의제한적인급여는비용의 10% 만을본인이부담하므로급 여수준이훨씬높은일본의장기요양보험제도와도대조된다. 4. 독일장기요양이용과제공체계 1) 장기요양이용과비용지출 2000년현재서비스이용자의약 30% 가요양시설에입원하여서비스를받고있고나머지 70% 는재가요양급여를받고있다. 그리고재가요양급여를받는사람의약 75% 가현금급 여만을선택하고있으므로( 나머지 25% 중절반은서비스급여만을, 절반은서비스와현금급여 를혼합하여받고있음) 전체급여수급자의 50% 를조금넘는사람들이서비스급여대신현 금급여만을선택한것이다. 현금급여의액수가서비스급여에비해훨씬적음에도불구하고 이렇게현금급여를선호하는경향은장기요양서비스를필요로하는사람들이전문적인서비 스제공자보다는가족/ 친지와같은비전문적이고비공식적인서비스제공자를선호한다는것 을보여주는것이다. 동일한요양등급에대해현금급여의액수는서비스급여의절반에그 치므로이러한현금급여선호는장기요양보험재정에는긍정적인영향을미치고있다. 하지만전반적인급여의추세를보면요양시설입원자의비중이증가하고, 또재가급여 수급자중현금급여보다는서비스급여를선택하는사람의비중이조금씩증가하고있다. 장기적으로도노령인구의평균연령이더욱증가하고, 여성의노동참가와핵가족화의경향 이가속화될것이므로가족구성원에의한서비스제공의가능성이더욱감소하고공식적, 전문적서비스제공자의역할이더욱확대될것이고이는장기요양보험의재정을더욱압박 할것이다. 독일의장기요양보험은1999년부터당기적자가발생했고2000년에는그적자폭 이증가하였다. 현재는누적적립금을통해적자를보전하고있기는하지만장기적으로재정 건실화가큰과제임에는틀림없다. 나아가장기요양보험의경우적자발생에대해연방정부 가전혀책임을지지않으므로재정건실화의필요성이더높다고하겠다. 한편으로는급여 가정액으로고정되어있으므로의료보험에비해서는비용증가의예측가능성이높은편이
어서경제상황에따른보험료수입이장기요양보험의재정에핵심적인영향을미칠것이다. 2) 장기요양제공체계 장기요양보험이도입된후장기요양서비스제공기관의수가대폭증가하였다.1992년약 5,000 여개였던지역사회중심 ( 재가) 장기요양서비스제공자가 1997년에는 11,700여개로증 가하였다. 요양시설은동일기간중약 4,300개에서 8,000 여개로증가하였다. 하지만그이 후의증가추세는감소하여 2000년말현재지역사회중심장기요양서비스제공자는 13,000여 개, 그리고요양시설은 8,700 여개에이르고있다. 이렇게급격하게증가한장기요양서비스 제공기관들의서비스질관리는만족할만한수준은아니다. 현실적으로법에서정하는장기 요양공급기관의설립요건이최소한의서비스질기준을반영하지못하고있다는비판도높 다. 1999년말기준으로재가요양서비스제공자의법적소유주체를보면 50.9% 가민간영리, 47.2% 가민간비영리그리고 2.0% 가공공이었다. 요양시설의경우는 34.9% 가민간영리, 56.6% 가민간비영리그리고 8.5% 가공공이었다. 따라서병원산업과는달리장기요양서비스 제공자의경우민간영리제공자의비중이상당히높은편임을알수있다. 장기요양보험의 도입은장기요양서비스와관련된많은일자리를창출함으로써인력노동시장에도많은영향 을미쳤는데필요인력의공급은여전히부족한상황이다. 장기요양금고는법에서정한최소한의기준을충족한모든장기요양서비스제공자에게요 양기관의자격을인정해준다( 조건을충족한공급자와의계약을거부할수없음). 장기요양 서비스제공기관이책정하는가격은의료부문과비슷하게주요지불자인장기요양금고와 지방정부( 사회부조프로그램지불자) 가공급자들과협상을통해결정한다. 하지만의사협 회와보험자협회가집단적인협상을하는의료보험과는달리장기요양금고협회및지방정 부가개별공급자와협상을한다. 요양시설에대해서는예산에대한협상을통해궁극적으 로는요양일당가격을결정하고, 재가중심장기요양공급자에대해서는서비스항목의가 격을결정한다. 장기요양서비스공급자에대한소비자선택과경쟁을촉진하기위해장기 요양금고는여러공급자들에대한가격정보를소비자들에게알려주도록했다.
독일의고령화추세와사회경제적문제 안두순, 서울시립대학교경제학부교수 2003년 7월 - 독일은 1932년에이미고령화사회에진입한다음 1972년선진국중가장빠르게 고령사회에진입한바 있다. 그리고 2012 년이면초고령사회에도달할것으로예측된다. 독일은일본을제외하고는 OECD 국가중 가장높은고령화지수를보이고있다. - 고령화추세못지않게심각한문제가출산율저하와인구감소이다. 독일의가임여성 1인당평균출산율이 2.0 명(1970 년) 에서 1.3 명(1996 년) 으로떨어졌으며, 이는 OECD 국가중에서도일본다음으로가장낮은것 이다. - 1998년독일의인구는 82.1백만명이었으나 2030년에현재보다 6.6% 감소한 77.0 백만명으로, 그리고 2050 년에는이민자를제외하면 6 천만명까지감소할것으로예측된다. - 현재독일의남성근로자들은평생 36 년동안고용되고, 38년동안비경제활동인구로생활하는데 2030년 이되면고용기간은 34년으로짧아지고경제활동에서배제되는기간은 44 년으로늘어난다. 반면, 여성들 의경우, 현재29년대52년인고용기간과비경제활동기간비율이2030년에는39년대45년으로변하여 남성보다오히려길어질것으로예측된다. 그만큼여성의역할이커진다는얘기다. - 독일에서현재연금수급자비중( 취업자대비) 은약 55% 이지만, 2035년에는최소한 90% 로상승하여이부분 의재정부담이막중할것이다. - 독일은고령화가진전됨에따라 2000년부터 2050년사이의연평균성장률이 1.6~1.8% 에머무를것이며, 선 진국중일본과함께성장률과노동생산성이가장낮은국가에속한다. - 이에따라, 현재의생활수준을유지하기위해서는매년 15% 정도의생산성증가가필요한데이격차를어떻 게줄이는지가과제이며, 여기에는연금보험, 의료보험, 실업보험체계의개혁이포함된다. - 또한, 고령인구의경제활동촉진이중요한과제인데여기에는노인층취업제고, 분담금과세금의증가억 제를통한노동공급증가유도, 교육, 연구활동과고령자를위한평생교육, 향상교육및재교육등을통한 노동생산성제고등의방안이모색되고있다.
1. 고령화의정의와원인 오늘날세계는과다한인구문제로골머리를앓고있으나다른한편 20년후에는세계의인구수가절대적으로감소하리란예측이나오고있다. 특히 21세기에접어들어서 OECD 국가들의인구감소세는노인문제와함께노동력부족문제를어떻게해결하느냐가생존전략의핵을이룰것이라는주장도나오고있다. 인구구조를논할때, 노인의기준은만 65 세이상인사람을말한다. 국제연합(UN) 은전체인구에서 65세이상인구의비율이 7% 이상이면고령화사회(ageing society), 그비율이 14% 이상이면고령사회(aged society), 그리고 21% 이상이면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 라고한다. 고령화의원인은크게출산율저하와사망률의감소에따른평균연령의증가에있다.WHO에의하면, 세계인류의수명이 1997년의 66세에서 2025년에는 73세로높아지고 65세이상노년층비율은 7% 에서 10% 로증가한다고한다. 고령화현상은이제범세계적추세가되었다. 고령화와동반된문제는수없이많지만그중특히 첫째, 노동력부족과인적자원확보, 둘째, 사회보장체계의부담과국가경쟁력, 셋째, 노인문제, 성장의한계과삶의질 등이핵심으로떠오르고있으며이러한문제들을해결하는것이고령화와초고령화에대비하 는대책일것이다. 2. 세계적으로빠른독일의고령화추세와출산율저하 독일은 2012 년이면초고령사회에도달할것으로예측된다. 독일은표 1에서볼수있듯이 1932년에이미고령화사회에진입한다음 1972년선진국중가장빠르게고령사회에진입 한바있다. 2000년현재독일의고령인구비중은16.4% 로서OECD 평균인13.0% 보다3.4 % 포인트높으며 17.2% 를기록한일본을제외하고는 OECD 국가중가장높은고령화지수 를보이고있다.
표 1. 주요 OECD국의고령화및초고령화도달연도 도달연도증가속도 7% 14% 20% 7% 14% 14% 20% 일 본 1970 1994 2006 24 12 프랑스 1864 1979 2020 115 41 독 일 1932 1972 2012 40 40 영 국 1929 1976 2021 47 45 이태리 1927 1988 2007 61 19 미 국 1942 2013 2028 71 15 출처 : OECD(2000). Reforms for an Ageing Society. Social Issues 고령화의또다른지표로 14세이하인구대비 65 세인구비중이이용된다. 표 2에서보듯 이독일은현재뿐만아니라 2050 년에가서도이태리, 일본과함께세계에서노인비중이가 장높은나라로머물것임을확인시켜주고있다. 독일인들의평균수명은 1960년에여자와남자각각 72세와 67세였는데 2000년에는 81세 와 75 세로증가했다. 그런데 2050년에는다시최소한 84.5세와 78.1세로각각연장될것이 며, 이에따라평균연령도 2000년도의 41.1세에서 2045년에는48.2 세로상승할것이다. 표 2. 주요 OECD국의고령화지수에대한예측 ( 단위: %) 고령화지수 2000 2025 2050 세 계 23.0 42.8 74.3 선진국 50.5 142.0 171.8 일 본 117.0 238.8 291.2 미 국 56.7 99.5 113.4 영 국 83.6 144.0 183.2 독 일 105.1 201.6 250.0 프랑스 85.6 134.5 166.9 이태리 126.6 235.8 314.9 스웨덴 95.6 186.8 217.1 고령화지수 = 65 세이상인구/14세이하인구 출처 : Deutscher Bundestag 14. Wahlperiode; Drucksache 14/8800, Schlussbericht der Enquete-Kommission
독일에서 65세이상인구비중은 1960년에 12%, 2000년에는 16% 였으나 2030년에는 25% 에달할것으로예측된다. 80세이상노인의인구비중은더욱가파르게상승하여 1960년 1.5% 에서 2000년에 3.7%, 그리고 2030년에는무려 6.5% 에달할것이다. 이러한수치는 OECD 평균치보다월등히높아서독일의초고령화현상의심각성을보여주고있다. 고령화추세못지않게심각한문제가출산율저하와인구감소이다. 독일의가임여성 1 인당평균출산율이 2.0 명(1970 년) 에서 1.3 명(1996 년) 으로떨어졌으며, 이는 OECD 국가중 에서도일본다음으로가장낮은것이다( 표 3 참조). 이는한사회가인구구조를유지하기 위해필요한대체출산율(2.1%) 에크게미달하며, 이러한추세는특단의대책이강구되지 않는한지속될전망이다. 1998년독일인구는 82.1백만명이었으나비교적중립적인예측을보더라도 2030년에현 재보다 6.6% 감소한 77.0 백만으로, 그리고 2050년에는이민자를제외하면 6천만까지감소할 것으로예측된다. 이는 1년동안의출생자와사망자수의차이가 2010년에는 30 만명, 그리 고 2030년에는 50 만명에달하기때문이다. 전체적으로출산율감소, 평균수명연장등의추세는시간이갈수록늙은세대의비중이커져서사회경제적으로심각한문제를야기시킬것이다. 3. 독일인구구조변화와여성및고령층근로자의중요성 고령화사회에서문제가되는것은노인수가많아서생산활동인구보다비생산활동인구가많아지는것외에노령화의속도가가속화될수있다는데있다. 연방통계청의예측에 표 3. 국가별출산율추이 국가한국독일일본스웨덴캐나다프랑스미국 1970년 4.5명 2.0명 2.1명 1.9명 2.3명 2.5명 2.5명 최근연도 최근연도 1.4명 1.3명 1.4명 1.6명 1.6명 1.7명 2.0명 2000년 1996년 1998년 1996년 1995년 1996년 1997년 출처: 삼성경제연구소(2002), 고령화사회의도래에따른기회와위협. Issue Paper 2002.6.17
따르면, 매년 120,000명의이민순유입이있다고하더라도독일의가용노동력은앞으로 50년 동안 40% 이상감소할수있다고한다. 이는여성의경제활동참가율이남성과비슷해지고 연금수급연령을상향조정한다고해도 2050년에는 2000년에비해 8백만명정도의생산활 동인구가감소하여독일경제는심각한노동력부족현상에직면할것임을의미한다(36백 만에서 28 백만명으로). 이로써경제활동인구는 2035년에현재보다 15% 감소하는데, 이는 경제활동인구 1인당현재보다약 15% 정도더많이생산해야만현재의생활수준을유지 할수있다는얘기다. 이는또한 GDP 실질성장률의 1/3정도를인구구조및취업자수감 소가상쇄함을뜻한다. 고령화사회에서여성근로자들이노동공급의중요한부분을차지할수밖에없는데 1자녀 혹은많아야 2자녀만을둔 25~30세의여성근로자들은경제활동참가율이 85% 수준에있다 가 30~40세가되면양육과자녀교육때문에감소하다가40~45세가되면다시85% 까지증 가한다. 현재독일의남성근로자들은평생 36년동안고용되고 38년동안비경제활동인구로생 활한다. 그런데 2030년이되면고용기간은 34년으로짧아지고경제활동에서배제되는기간 은 44 년으로늘어난다. 반면, 여성들의경우, 현재 29년대 52년인고용기간과비경제활동 기간비율이 2030년에는 39년대 45 년으로변하여남성보다오히려길어질것으로예측된다. 그만큼여성의역할이커진다는얘기다. 표 4. 독일의연령층별근로자비중변화추이 ( 단위: %) 연령층 1998년 2020년 2050년 15세이상 30세미만 22.8 20.4 20.8 30세이상 45세미만 43.3 32.5 31.6 45세이상 60세미만 30.5 37.5 35.6 60세이상 3.4 9.6 12.0 출처 : Deutscher Bundestag 14. Wahlperiode; Drucksache 14/8800, Schlussbericht der Enquete-Kommission
또다른노동공급원은노인층인구이다. 출산율감소와수명연장으로 2020년부터 2050년 까지노령층인구의경제활동참가율은높게유지될것이다. 이는특히여성의경우두드러질 것이다. 즉, 남성의경우 60~65세연령군의경제활동참가율은 2020년경 75% 까지상승한 후안정세를유지하겠지만 60~65세여성의경우 2020년까지 25% 로상승한뒤 2050년까지지 속적으로상승하여남성수준에접근할것이다. 이렇게되는결정적이유는퇴직연령을현 60세에서 65 세로상향조정하였기때문이다. 표 4는 2050 년까지노동공급자의연령구조변화추이를정리한것이다. 이를보면, 15~ 30세미만과 30세이상 45 세미만의젊은노동력의비중은점차하락하는반면, 45세이상 60세미만과 60 세이상의노령층근로자비중은증가함을알수있다. 특히 60세이상노인 층근로자의비중은 1998년 3.4% 에서 2050년에는 12.0% 로크게증가하여고령화사회에서 노인층노동력의상대적중요성을입증하고있다. 고령화추세에따라취업자평균연령은 현재의 39세에서 20년후에는 42.5 세로상승한다음변화없이유지될것이다. 4. 연금보험과퇴직제도개혁의필요성 수명이연장된다는것은비경제활동기간이연장된다는의미이기도하다. 여기에는교육기 간도포함되지만그보다는실업기간과함께퇴직이후여생이길어진다는것을의미한다. 특히 수명은연장되고퇴직은더빨라지는 OECD 여러나라에서의현상은퇴직이후비경제활동기 간이길어짐을뜻한다. 노동시장이고령화추세로부터받는압력을재는척도로보통고령자부 양률이라는것이이용된다. 이는가용노동력(16-64 세인구) 대비노인인구(65 세이상인구) 의비 중으로측정된다. 그러나이지표는실제고용상태를반영하지못하는취약점이있기때문에 [ 취 업자대비부양률(support ratio) = 노인인구(65 세이상인구) / 취업자수] 라는지표가더유용한 것으로파악되며독일은현재 0.4(1:2.5) 이지만 2030년에가면 0.67(1:1.5) 로대폭악화될것으로 보인다. 독일의현재연금수급자비중( 취업자대비) 은약 55% 이지만 2035년에는최소한 90% 로 상승하여이부분의재정부담이막중할것이다. 이는 1972년 65세였던퇴직연령이지속적 으로단축되어이제는가장많은근로자가 60세에퇴직하고 1992년의연금제도개혁에따라 조기퇴직자수가 2004 년에정점에도달하는사실도연금재원에부담을주기때문이다.
연금제도개혁은크게첫째, 공적연금의보험료인상이나부과대상의확대등세입원확 대와둘째, 공적연금총지출의억제및셋째, 사적연금의확대유도등으로압축된다. 그중 에서공적연금의지출억제책으로 이미 1992년에가입기간 1년당급여상승률을 1.5% 에서 1% 로하향조정하여소득대 체율이인하되도록급여산정공식을변경한바있으며, 역시같은해에연금급여를각종조세및사회보장기여금을제외한순소득성장률과연 동시킴으로써지출증가를억제한것외에, 노령연금수급개시연령을 2001년과 2012년사이에 63세에서 65세로점차연장하는등 의조치가취해졌다. 5. 성장촉진의필요성과한계 표 5에는몇몇 OECD 국가의예상되는평균성장률이표시되어있다. 대부분 OECD 국가의경 우고령화가진전됨에따라 2000년부터 2050년사이의연평균성장률이 1.6~1.8% 에머무를것 으로전망되고있다. 선진국들중독일은일본과함께성장률과노동생산성이가장낮은국가에 속한다. 표 5. 국가별 2000년에서 2050년사이의 GDP 성장률과노동생산성 ( 단위: %) 국가한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미국 GDP 성장률 2.90 1.04 1.40 1.62 1.69 2.28 노동생산성 2.73 1.66 1.72 1.72 1.82 1.83 출처 : OECD(2000). Reforms for an Ageing Society. Social Issues 독일에서감소하는노동력은자본집약도를높일것이며, 이에따라약 6-7% 의노동생산성 향상이예상된다. 현재 36.8% 인독일의노인부양률(Altersquotient = 60 세이상인구/20-60 세미만인구비율은 ) 35년후그2.13배에달하는82.3% 로상승하기때문에현재의생활수 준을유지하기위해서는 15% 정도의생산성증가가필요하다. 그러나 6-7% 의생산성향상은 그절반에도못미치는수준이기때문에그격차를어떻게줄이는지가경제와사회정책의 과제로남아있다.
한가지방안으로출산율장려정책이있다. 그러나많은연구결과를보면, 이정책의인 센티브효과는매우미미할뿐만아니라 2040년에나노동시장에그효과가일부나올것으로 예측되기때문에큰기대는어렵다. 또다른방안은이민을통한노동력확보이다. 이또한 독일의고령화추세를상쇄하려면 2035년까지매년 750,000명의순이민유입이있어야하는 데이는현실성이희박하다. 또다른해결책중하나는노인인구의경제활동참여율증대를통한성장촉진이다. 이 는늘어나는재정수요의충족과동시에노인인구의생산활동참여를통한삶의질개선과 연계시키는목적이동시에추구될수있기때문이다. 즉, 개인차원에서보면길어진수명을 어떻게생산적으로보내느냐가중요한데사회전체로보면장래노동시장에서수급상의문제 를어떻게해결하느냐역시심각한문제이다. 따라서고령인구의경제활동을어떻게촉진 시키는가하는데귀결된다. 여기에는 특히조기퇴직을장려하는대신오히려정년이후까지근무를장려하여노인층의취업률 을증가시키고, 명목임금증가에도불구하고분담금과세금의증가로인한총임금과순임금간의격차가 증대되는현제도에서탈피, 노동공급의증가를유도하는장치를마련하며, 자본집중도제고외에교육, 연구활동과고령자를위한평생교육, 향상교육및재교육 등인적자본축적을통한노동생산성을높이고, 구조조정을통한산업분야별이동성을높이는등의대안이추천되고있다. 참고로 OECD 국가들의경험을보면, 교육비지출은연금과의료비와함께고령화가진전 됨에따라증가하는 3 대지출중의하나로, 이는고령근로자를재교육시킬필요성이증가 하고평생교육의개념으로전환되기때문인것으로분석된다. 6. 사회경제분야의개혁과제 고령사회가진전됨에따라근로시기연장및이에상응하는고용능력및고용기회의 창출을위해노력해야할것이다. 네덜란드, 미국, 뉴질랜드에서는신규채용, 배치, 승진, 교 육, 퇴직시연령차별을금지하고기업이부담하는고령자에대한교육비의세금을면제해주 고있다. 또한, 오스트리아는고령근로자고용에보조금을지급하는반면, 50세이상의근로
자해고에대해서는불이익주고있다. 이태리, 노르웨이, 네덜란드등에서는 1997년에서 1999 년에걸쳐학교교육개혁및평생교육시스템을구축하였다. 독일의경우보조금지급요건을 55세이상근로자가고용되어있는기업으로대폭완화하 였으며, 덴마크의경우고령장기실업자를채용하는기업에보조금을지급하고있다. 캐나다 의경우고령의해고근로자에게지급되던임금보조를폐지하고비영리부문에고령근로자 를알선하고있으며, 프랑스의경우주당평균근로시간을 40시간에서 35시간으로단축하였 다. 최근독일총리슈뢰더는자신이마련한 아젠다 2010 이라는사회개혁프로그램을자 신의집권당인사민당이채택하지않으면총리직을사임하겠다고까지할정도로개혁의필요 성을강조한바있다. 이프로그램은실업수당지급기간을 18개월에서 12 개월로단축, 채용 과해고장벽제고를통한노동시장유연화등을포함하고있다. 2001년의소득세인하와퇴직연금제개혁에이어 2003년 1월부터발효된노동시장개혁 조치는이미파견근로자들의중계기능을수행하는 Personal Service Agency (PSA) 라는 기구의설치와개인창업과자영업촉진을위한 1 인주식회사(Ich AG) 제도를도입하였다. 또한월 400유로이하의소득자는소득세와사회보장분담금을일체면제해줌으로써청소 년이나고령자들의비정규직일자리를활성화하는데초점이맞추어졌다. 이번의개혁프로 그램역시점점줄어가는독일경제의역동성을되살려보고자하는의지에서나온것으로 고령화와동반된많은도전에대비하자는의지가담겨있다.
독일의신교통정책, 21 세기 지속가능한성장 을위한해법 최연혜, 한국철도대학운수경영학과교수 2002년 8월 21세기에접어들면서교통정책의중요성이부각되고있다. 교통인프라는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다방면에걸친교류의전제조건으로서한국가의경쟁력을좌우하는동시에환경오염과직결되는산업으로서인류의삶의질을좌우하기때문이다. 온실가스배출감축의무를골자로하는교토선언과지속가능한성장의모색등 21 세기의변화된환경은교통정책의패러다임변화를가져오고있다. 독일연방교통정책의새틀역시미래사회의폭증하는교통수요를소화해내면서, 동시에친환경적교통대안을통한삶의질확보라는두마리의토끼를잡는데초점을맞추고있다. 독일신기본조약의중요한특징은다음과같이요약할수있다. 첫째, 혁신적신교통정책의필요성에대한공감대형성을통해교통정책의패러다임변화를유도하고, 교통정책의위상을재정립하였다. 둘째, 교통정책을국토개발계획및도시계획과통합 운영함으로써교통증가의원인과파급효과를정책 의사결정과정에서충분히고려하고, 교통수요와수단의선택행동을정책적으로유도한다. 셋째, 독일연방정부의신교통정책은개별교통수단의차원보다는교통시스템의최적화를목표로한다.20 세기, 산업의고도성장기에만연하였던도로와자동차중심에서탈피하여, 환경친화성이뛰어난철도나내륙해운의역할을강화하는한편, 각교통수단이가진장점을살린복합운송시스템구축을통해교통시스템의최적화를꾀한다는것이다. 넷째, 교통인프라투자계획의안정성을보장하기위하여 10 년단위의 연방교통인프라계획 을법제화하였다. 모든교통인프라프로젝트들에대해동일한평가지침에따라투자우선순위를정하는일종의투자기본계획으로, 실제투자는확보된재원범위에맞춰정해진우선순위에따라실현된다. 철도와도로부문에 50:50 의재원배분을원칙으로하며, 독일연방정부는연방예산에만의존하던관행을벗어나다양한재정조달방안을모색하고있다.
1. 교통정책의패러다임변화 새천년에접어들면서교통정책은각국정부의중요정책분야로부상하고있다.21 세기의경제 사회변혁과 함께수송수요의급격한증가가전망됨에따라수송능력의확보는산업의입지장소로서한국가의경쟁력을좌 우할뿐더러국민경제의성장과고용을위한전제조건이기때문이다. 또한, 교통분야는인적 문화적교류의출 발점으로서사회의발전형태에도영향을미치며, 환경오염과직결되는산업으로서 21세기인류의삶의질은환경 적으로 지속가능한 교통수단의선택에달려있다해도과언이아니다. 전세계적으로교통혼잡과교통사고 가큰폭으로증가하고있으며, 공기오염의주범으로간주되는이산화탄소배출의경우, 교통분야가차지하는비 중은전체배출량의 25%, 도심권에서는 75% 에달하고있어, 교통정책의근본적인개혁이촉구되고있다. 또한, 온실가스를매년평균 5.2% 씩감축키로한교토선언 (1997.12) 에따라이제환경친화적인교통시스템의구축은 단순히도덕적인요구에그치지않고, 각국의교통정책에실제적인구속력을가하고있다. 선진국을중심으로재편되고있는교통정책의새틀은미래사회의폭증하는교통수요를소화해내면서동시 에친환경적교통대안을통한삶의질확보라는두마리의토끼를잡는데초점이맞추어져있으며, 한정된재원 과국토면적, 그리고환경측면을고려한교통시스템의최적화로요약된다. 이는결국 20 세기, 산업의고도성장 기에만연하였던도로와자동차중심에서탈피하여, 환경친화성이뛰어난철도나내륙해운의역할을강화함으로 써각교통수단간균형적인수송분담을추구하는것으로나타난다. 예컨대, 프랑스, 오스트리아는교통인프라 투자에철도와도로의비중을 7:3 으로유지하고있으며, 국토면적이작은스위스는자국의고속도로에외국의 대형화물트럭이통행하는것을금지하는정책을시행함으로써국제화물을철도로유도하고있다. 독일의경우 에도동서독통일을계기로국토개발종합계획의틀속에서개혁적인교통정책을추진하고있다. 최근에는연 방정부가화물운송업계의거센반발에도불구하고대형화물트럭에대한고속도로이용료징수법안을관철시 켰다. 우리나라역시 21 세기의변화된경제 사회 정치환경에부응하는새로운교통정책의구상이절실히요청되는 시점이다. 교토선언의의무부담을준수하기위해서는에너지절약과온실가스배출에직접적인영향을미치는 교통정책의개혁이불가피하다. 우리나라는개도국으로분류되어당장은의무부담에서제외되었으나, 온실가 스배출규모가크고( 세계 11 위) OECD 가입국인우리나라에대해의무부담이부과될것이분명하다. 이밖에 도교통개발연구원에따르면, 우리나라에서현재의수송분담구조가그대로답습될경우 2020년에는교통사고 사망자, 에너지소모, 도로혼잡등이현재의 2 배이상으로증가되어삶의질저하가우려되고있다.
그러나교통인프라의구축은장기간의계획및실행과정을요하는국가전략에속하기때문에교통정책을단시간에선회하기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경제개발계획이시행된이래도로중심의교통정책을추진한결과, 여타교통수단의발전이한계에부딪쳐있어균형적인교통정책을추진하기어려운실정이다. 철도의경우일 부지선을제외하고식민통치하의병참선내지는 1차산업위주로건설된간선골격이그대로유지되어도시 및산업기지개발에따른통행과물류의다변화에부응하지못하였다. 또한, 해방이후철도영업킬로미터가 거의증설되지못해선로용량이포화상태에이르다보니추가수요를감당할수없어교통수단간적정한수 송분담률을유도하는정책을추진할수없었다. 그러나 2004년 4월로예정된고속철도의운행개시는우리나라 철도역사 100여년이래시속 300Km의초고속대중교통시대를개막하는동시에선로용량측면에서도막대 한변화를가져온다. 여객의경우3 배, 화물은8배가까이용량이확대됨으로써국가는교통정책의새틀을짤 수있게된것이다. 이런시점에서 1990년통일직후부터 21 세기의경제적, 사회적변혁을고려한새로운패러 다임의교통정책을수립추진하고 있는독일의사례는많은시사점을줄수있으리라생각된다. 2. 독일연방신교통정책의주요컨셉트 가. 교통정책개혁의필요성 현연방정부의교통정책에대한중간평가와향후방향을제시하고있는 교통보고서 2000 에따르면, 향 후물류환경변화중가장특기할사항은수송수요의증가이다. 2015년독일의인구는현재 8,000만에서 8,500 만으로증가하고, 연평균 2% 의경제성장률을유지할수있을 것으로전망되는데, 이는결국교통수요의증가로이어진다. 유럽단일시장, 유럽연합의확대, 유럽시장의개 방과세계화추세등도교통량증가를가져올것이며, 개인의이동욕구에따른수송수요역시계속증가추세 에있다. 따라서 2015년에는 1997년대비여객은 20%, 화물은 64% 증가할것으로예측되었다. 또한, 이보고서는적정한교통정책및투자정책이시행되지않을경우독일의교통시스템, 나아가서전 반적인국가시스템이붕괴될수도있다는경고를포함하고있다. 화물부문수송량은 2015년까지약 6,000억 톤 / km에달할것이며, 현상태를그대로방치한다면공로화물수송량은 2,360 억톤/ km에서 4,220 억톤/ km로증가 하는반면, 철도화물수송은730 억톤/ km에서990 억톤/ km로소폭의증가에그칠것이다. 이경우도로화물장거 리수송분담률은현재의 64% 에서 70% 로증가하고, 철도의수송분담률은 20% 에서 16% 로오히려감소한다.
[ 그림 1] 독일의신교통정책컨셉트 이러한전망은교통정책의패러다임전환의필요성을더욱절실하게보여준다. 도로교통의무절제한증가에따른경제적 사회적환경적 파급효과를차치하더라도독일처럼인구밀도가높고, 국토면적이한정적인나라에서는공간적인차원에서도 6차선내지 8 차선규모의고속도로를무제한건설할수는없다. 그리고무제한적인교통인프라건설은한정된자원인국가 재정의측면에서도불가능하기때문에, 보다효율적인네트워킹과새로운물류컨셉트를골자로하는교통의혁명, 교통정책 의개혁이불가피하다는인식이다. 나. 신교통정책의목표 미래사회의수송수요에대응한수송능력의확보 슈뢰더현정부가제시하는새천년을위한교통정책의목표는폭증하는미래의교통수요를감당할수있는 충분한수송능력을확보하는동시에누적되어온교통문제들을해결하는데있다. 기존의교통정책하에서 누적되어온교통문제들은교통인프라의건설만으로해결될수없으며, 무제한적인교통인프라건설은가능하 지도, 바람직하지도않다는인식에서출발한다. 그런데교통량과교통수단의선택행동은교통정책을통해유
도될수있기때문에연방인프라계획은수송능력의확보만큼이나교통유발요인을억제하는방안에비중을 두고있다. 즉, 교통정책을국토개발계획및도시계획과통합운영하여, 교통증가의원인과파급효과를정책의사결 정과정에서충분히고려함으로써불필요한교통수요를원초적으로억제한다는것이다. 그리고나서각교통수 단의균형적인발전을토대로미래사회의수송수요에부응할수있는수송능력을확보하는것이교통정책의 최우선목표다. 우선소량화, 고가화, 다빈도화되고있는수송수요의특성상미래사회에서도도로교통의중 요성은매우높을것으로예상되므로공로수송능력은유지, 확대되어야하며, 항공교통분야의경쟁력역시 유지되어야한다는게연방교통정책의기본입장이다. 다만현재와같은수송분담구조가유지된다면특히환경의관점에서사회전반의붕괴로이어질우려가높 기때문에철도나내륙해운의역할증대가불가피하다는인식하에각교통수단의장점들을통합하여교통시스 템의최적화를꾀하는데정책목표를두고있는것이다. 환경적으로지속가능한교통정책 독일의경우에도교통분야는대기오염의주범으로지목되고있다. 일산화탄소(CO), 산화질소(NOx), 탄화수 소(HC) 및소립자등기타공기오염원의배출양은최근들어상당부분감소되었고, 앞으로더욱감소될수 있을것으로보이지만, 이산화탄소(CO 2 ) 배출은매우우려되는부분이다. 독일전체 CO 2 배출의 20% 정도가교 통분야에서유발된다고추산되며, CO 2 배출양은 1990년부터 1998년사이에교통량의증가와더불어약 11% 증가되었다. 더욱이교통부문의 CO 2 배출은계속증가될것으로예측되고있어, 신교통정책의최대목표는 환경보호에있으며, 이중에서도 CO 2 억제정책에큰비중을두고있다. 예컨대, 토지및도시계획시교통량을원초적으로억제할수있는방안, 교통정보시스템의도입으로교통망 이용의효율성제고, 환경친화적인교통수단으로의전환, 주민에게친환경적교통이용에관한정보제공, 교통 수단과에너지기술의최적화, 자원절약적인수송수단에대한인센티브제고등이정책내용에포함되어있다. 보다적극적인 CO 2 절감정책으로는각교통수단에대한투자재원의배분원칙을조정하는것이다. 1998년 10월 20일자연립내각계약에는철도와도로에대한투자를 50:50의동일수준으로배분한다는원칙이포함되어있 으며, 이원칙은 1999 년부터지켜지고있다.
3. 독일신교통정책의주요내용 가. 공정한경쟁환경의조성: 대형화물차량에대한고속도로이용료부과 독일은 1995년 1 월부터일명 유로비네트(Euro Vignette) 를시행해왔는데, 이는독일이네덜란드, 벨기 에, 룩셈부르크, 덴마크, 스웨덴등과함께자국및외국의 12톤이상대형화물차량에대해부과하던시간제 고속도로이용료를말한다. 독일정부는이를보완하여 2003년부터는주행거리와배기량을고려한고속도로이 용료제도를시행키로결정하였다. 연방정부는새로운제도의시행목적을다음의 3 가지로밝혔다. 첫째, 공로건설및유지 보수비용에대한원인자부담원칙강화: 예컨대, 축중 40톤의대형화물차량이유 발하는비용은승용차의 6 만배이상으로조사되며, 타교통수단과의형평성을위해서라도배기량과통행거리 에따라대형화물차량에대해고속도로이용료를부과하는것이정당하다는논리다. 이러한원칙은, 도로이용 료는실질적인도로사용비용을기초로산정되어야한다는(EU 지침 1999/62/EG) 유럽연합의교통정책이나, 독일연방정부의환경정책에도부합한다. 둘째, 교통수단간공정한경쟁환경의조성: 현재의교통시장구조는각교통수단이유발하는환경비용등 외부효과가제대로반영되지못한결과라는인식에서, 특히화물분야에서각교통수단 간에공정한경쟁환 경을조성함으로써경쟁의왜곡으로인한희소자원의과소비를막는다는것이다. 이는화물수송분담률을공 로로부터, 특히철도와내륙해운으로이전시키려는것으로구체화된다. 셋째, 고속도로이용료의자동징수기술시장선점: 독일은세계최초의첨단기술을이용한징수시스템을 개발 도입함으로써이분야의선두주자지위를선점할뿐아니라, 다른 IT 분야의혁신을자극하려는목적을 가지고있다. 화물차량고속도로이용료제도를통해예상되는수입은연간 34 억유로이며, 이중절반이상이교통인프라 건설및유지보수에쓰인다. 나머지는관련세금이나유로비네트제도가없어짐으로써발생하는수입결손금 의충당과전자동이용료징수시스템의구축및운영을위해사용된다. 재원이교통인프라에투자되는것을보 장하기위해현재교통인프라펀드회사가설립준비중이며, 이용료수입은 교통체증완화프로그램 (2003~2007 년) 에투자되기로확정되었다. 병목구간을해소하고, 교통인프라의용량확대를위해마련된이프로그램의실 행계획에서볼수있듯이재원은공로뿐아니라, 철도와내륙해운에도투입되는것이특징이다.
도로이용료는주행km당평균 0.15 유로이며, 축중과배기량에따라0.10~0.17유로사이에서차별화된다. 화물 차량고속도로이용료가철도의수송분담률제고에기여하는규모는, km당 0.15 유로라고보았을때 60 억톤/ km 정도가도로에서철도로전환되어, 철도의수송분담률은 6.7% 가량증가하고, 공로의수송분담률은 2.1% 정도감소할것으로예측되었다. 한편, 고속도로이용료제도도입시이용료가부과되지않는국도등으로우회할가능성에대비하여국도전 체에대한이용료부과는 대해도로이용료를부과할계획이다. EU 법상금지되어있기때문에, 우회차량이증가할위험성이높은일부국도구간에 본제도도입에대한화물업계의거센반발에도불구하고, 고속도로이용료도입에따른화물업계의실질부 담은매우미미한것으로조사된다. 예컨대, 40톤화물트럭이 10 만km주행할때, km당평균 0.15유로로계산하 면 15,000 유로를부담해야하는데, 이는화물차량운영비용이약 10% 증가하는것을의미한다. 그러나업계는 이추가비용을최종소비자에게전가하게될것이므로, 고속도로이용료부과로인한업계의부담은없다고볼 수있으며, 고속도로이용료가최종소비자가격에미치는효과도 0.15% 로매우미미한수준으로나타났다. 그 럼에도화물업계의반발을막기위해연방정부는세금경감이나보조금제도등여러가지경제적및경제외적 혜택을마련하고있다. 나. 복합운송시스템의구축 국제상공회의소 (ICC: International Chamber ofcommerce) 의정의에따르면, 복합운송이란, 적어도 2종 류이상의다른운송수단을이용한화물운송을말하는데, EEC지침 92/106은이중에서도공로상의연계수송 거리가최단거리일경우만을복합운송으로간주하고, 다양한특혜를부여한다. 즉, 전후방단계의공로연계 수송은선적시에는화물이적재되는장소로부터가장가까운거리에있는물류기지까지의연계수송이거나하 적시에는가장가까운거리에있는물류기지로부터화물이하적되는장소까지의연계수송이어야하며, 또는 내륙항만또는항만의물류기지까지직선반경 150Km 이내인경우에한한다. 복합운송의최우선목적은, 각교통매체의장점을살려교통시스템의최적화를꾀하는데있다. 즉, 철도와 해운을통해장거리대량화물을보다효율적이고, 환경친화적으로수송하고, 수송시간과문전수송 (door to door) 의장점을가진트럭을이용해복합운송터미널까지화물을연계수송하는것이다. 전문가조사에따르
면, 복합운송시스템하에서철도및내륙해운의성장잠재력이가장큰것으로나타났기때문에, 현슈뢰더 정부는미래사회의폭증하는수송수요에능동적으로대처하면서동시에환경보호를강화하기위해서는복합 운송시스템의구축이가장적합하다는판단하에이를교통정책의핵심으로추진하고있다. 그러나지금까지복합운송정책의실적은기대이하이다. 1999년철도와내륙해운의수송분담률은각각 14.3% 와 4.5% 로복합운송이차지하는비중은매우낮은실정이고, 오히려전년대비명백한감소를나타냈다. 이러한추세는반전되었지만, 철도화물수송량을현재의 730 억톤/ km에서 2015년에는 1480 억톤/ km로 2배이상증대한다는목표를달성하려면현재의실적이매우부진하다. 연방정부의노력에도불구하고복합운송시스템추진실적이부진한이유중의하나는, 복합운송이공로등 단일수송수단을이용하는경우보다복잡하고, 보다수준높은물류노하우를필요로하기때문이다. 즉, 복합 운송에는해운업자, 철도회사, 철도인프라회사, 터미널운영자, 운수업자, 트럭업자, 하적및서비스업체등다양 한주체들이관여하는데, 이들개개의능력뿐아니라각주체들의조율및협력이전체수송품질에영향을미 친다. 따라서연방정부는복합운송의역할증대를위해하드웨어뿐아니라소프트웨어차원에서도보다적극적 이고분명한지원책을시행할계획이다. 연방정부는복합운송의향후전망에대해매우긍정적인평가를하고있다. 특히, 국제운송부문에서복합 운송의경쟁력이높으며, 독일내에서도향후괄목할성과가나타날것으로기대하고있다. 통계에따르면, 공로 -철도수송은 1999 년이후상승세를보이며, 향후 5년동안복합운송의증가율은과거에비해서매우큰폭인 30% 이상에달할것으로예측되어, 2005년복합운송형태의철도수송량은 4,610 만톤으로추정된다. 또한, 2015년에는철도-공로를이용하는복합운송이연간 8천 970 만톤에이를것으로조사되었다. 공로-내 륙해운부문도 1996 년~2000년의 4년동안거의두배로향상되어 2000년에는 1,050만톤을기록하는등고무적 인추세이다. 다. 철도산업의경쟁력강화: 연방철도청의구조개혁 독일정부의신교통정책의성패는철도산업의역할증대여하에달려있다. 연방건교부의조사에따르면, 2015 년까지의사용자비용추세를살펴보면, 타교통수단에비해철도분야가가장큰생산성향상잠재력을가 지고있는것으로분석된다. 그러므로이러한잠재능력을활용할수있는방법을모색하여야하며철도의경제
성제고가지속적으로추진되어야한다. 연방정부는다양한정책을통해철도의수송분담률제고를유도하되, 그정책들은철저히시장경제원리에부 합하는것으로서, 철도시스템의경쟁력향상을통해이루어져야한다는원칙이다. 이런의미에서무엇보다중요 한역할을하는것이바로연방철도청의구조개혁이라고하겠다. 철도청구조개혁은 3단계로추진되었으며주 요골자는정부기업으로운영되던철도청을민간기업형태(DB AG) 로전환하고, 철도운영회사에경쟁원칙을 도입함으로써철도산업의경쟁력을높이는것이다. 통일직후인 1990 년독일연방철도청, 동독제국철도및서베를린철도를통합하는 1단계에서시작하여기업 부문과공공부문을분리하는소위상하분리와기업부문을 5개의사업본부로구성된주식회사로전환하는 2단계를 1994 년에, 그리고이들각사업본부를독일철도지주회사의지붕아래독립된자회사로개편하는 3단계 를 1999 년에끝마쳤다. 현재독일철도주식회사의주식은연방정부가 100% 소유한공사형태를유지하고있다. 철도구조개혁이진행되어온지난 10년동안단거리철도여객부문의수송분담률이 40% 이상증가하였 고, 특히인구조밀지역의교통난해소에많은성과를거두었다. 그러나전반적으로철도구조개혁은소기의 목적을달성하지못했다는것이일반적인평가이다. 장거리여객부문에서성과가나타나지않았고, 화물부문 의수송분담률은 1991 년~1999 년사이에오히려감소하였기때문이다. 원인은여러가지로추정될수있지만, 한가지중요한원인은,1993년철도구조개혁 2단계추진시제시된바와같이철도의현대화및구조조정을 지속하기위해서는최소한매년 90~100억마르크가철도인프라에투자되어야한다는요구가지켜지지않았기 때문으로분석된다. 철도인프라에대한투자는 1998년에는57억마르크에불과하는등1995년이래오히려현 저하게감축되었으며, 그결과현재독일의철도네트워크수준은미래의수요를기대하는품질로소화해낼수 없는상황이라는진단이내려지고있다. 따라서, 신교통정책이성공적으로수행되려면, 향후상당기간동안철도망, 특히기간철도망강화를위한 투자가불가피하다는공감대가형성되었다. 연방정부와독일철도주식회사는다양한장기투자프로그램을마련 하고있는데, 2000년 10 월발표된 미래투자프로그램 에는철도부문의투자계획도포함되어있다. 이에따르 면, 선로건설을위해 2001년에추가로 20 억마르크가투자되며, 2003년까지는 60억마르크로증가되어연간총 90 억마르크가선로에투자된다. 이러한추가재원은선로망의재건과병목구간이나정체구간해소를위해쓰 이거나, 선로망을유럽의변화된교통흐름에적합하도록수정하는데도쓰인다.
[ 그림 2] 독일연방철도청의구조개혁과정 철도인프라에대한투자확대는독일철도주식회사가경영합리화를위한자구노력을한층강화하는것을전제 한다. 이를위해, 연방정부는철도사업의구조개혁이지속되어야하며, 철도운영부문의경쟁도입도가속해야 한다는인식을가지고독일철도주식회사와협의하에철도운영과철도인프라부문의분리를더욱강화하고있 다. 철도구조개혁과더불어독일정부가추진하고있는철도경쟁력제고방안에는다음과같은것들이있다. 철도와타교통수단사이에공정한경쟁환경을조성하기위해유류세율을인상 조정하고, 대형화물자동차에대해고속도로이용료를부과하며, 이용료수입의일부는철도인프라구축에투자한다. 철도의경쟁력향상을위해유럽통합선로망구축과관련한기술적, 행정적장애요인을극복하기위해노력한다. 4. 독일연방교통정책의도구및재정도달 교통인프라투자는장기간의사전계획이필요로하며, 교통정책을제대로수행하기위해서는교통인프라
투자계획의안정성과재정확보를해야한다. 가. 연방교통인프라계획 대형투자사업들은한정된예산을두고경쟁을하기때문에 1970년대중반연방정부는각교통수단의상위 에설치된투자정책도구로 연방교통인프라계획 을법제화하였으며, 각교통수단사이의관계를고려하고 수단별장점을최대한살린다는데최우선목적을두었다. 보통 10년단위의계획기간을가진교통인프라계획의주요내용은시나리오기법을이용하여여객및화 물교통량을예측하고, 각프로젝트들을국민경제적관점에서평가하여객관적이고공정한투자우선순위를 마련하는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연방교통인프라계획은어디까지나투자우선순위를포함한계획에 불과하며재정조달방법이나정확한투자실현시기는확정되지않다. 각투자프로젝트는해마다배정되는 예산범위에따라실행에옮겨진다. 금년말까지적용되는현행 연방교통인프라계획 1992 는발효된지오래되다보니재원조달방법이나프 로젝트비용규모의비현실성, 교통수요예측의오류나프로젝트평가방법상여러가지문제점들이지적되 고있다. 따라서연방정부는최근 연방교통인프라계획 1992 을수정 보완하였다. 예컨대, 프로젝트평가방 법의기본원칙은그대로두되환경, 국토이용, 도시계획등의새로운시각을반영할수있는지표들을포함시켰 다. 또한, 교통인프라계획의출발점이라할수있는미래예측시나리오와교통수요예측등도새로운조사를 통해업데이트하였다. 연방교통인프라계획은연방정부의교통정책이안정적으로추진될수있는중요한법적기반이며, 현정부 의통합교통정책이성공적으로추진되어각교통수단의균형적인발전을통해미래사회가요구하는수송수 요를감당하여국가경쟁력을보장하면서동시에환경적요구를충족시키는신교통정책이안정적으로추진될 수있는배경이되고있다. 나. 연방교통인프라계획의재정조달: 재원확보와새로운투자방안모색 신교통정책의성패를좌우하는또하나의요소는교통인프라투자재원의확보이다. 연방정부는 연방교통
인프라계획 1992 에포함된투자계획중투자규모가비현실적인일부프로젝트의투자규모를현실적인수 준으로수정하는한편, 이에대한재정조달계획을수립하였다. 신설, 확장및유지 보수를포괄하여 2015년까 지교통인프라부문에총 2,600 억마르크가투자될계획이다. 교통인프라투자에서중요한정책수행의원칙은철도와공로에대한투자규모를 50:50 동일한수준으로유지한다는것이다. 실제로연방정부의투자프로그램외에전철, 철도건널목또는소음완화공사등을포함하면투자규모는거의같다. 현재시행중이거나이미확정된교통부문의재정계획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우선연방교통인프라계 획에따라 1999 년~2002년사이에투자된총액은 647 억마르크, 약 900 개사업이추진되었다. 그리고 2002 년~2004년에도약 500 억마르크가확보되어장기계획들이실현될수있도록보장해준다. 연방도로와내륙 수로는연방소유이므로신축이나확대, 유지 보수를모두연방이책임진다. 그러나선로망과철도시설의소유 권은독일철도주식회사(DB AG) 에이관되므로, 철도인프라의신규및확장투자는연방이담당하고유지 보수 비용은 100% 연방정부가주식을소유하고있는독일철도주식회사가부담한다. 미래투자프로그램 은유럽의차세대이동통신인 UMTS-라이센스매각대금의이자수입을재원으로 2001 년~2003년사이에 40 억마르크를교통, 연구, 교육및에너지분야에투자하였고이중 29억마르크가교통분 야에배정되었다. 그런데이자지급절감으로 87 억마르크가추가확보되어, 60억마르크는철도망의확대를위 해, 나머지 27 억마르크는도로에배정되었다. 교통체증해소프로그램 은 2003~2007년사이에총 74 억마르크가배정되어있다. 이중 37억마르크는연 방도로, 28 억마르크는철도, 그리고 9 억마르크는내륙수로에투자될계획이다. 투자재원은 2003년부터징수 하는대형화물차량의고속도로이용료로충당되는데, 심각한병목구간과교통체증을해소하기위해쓰인다. 지난 2000 년부터는유럽연합지방발전기금의재원도유치되었는데, 이는주로구동독지역의교통인프라 건설에투입되고있다. 이기금은특히범유럽교통망(TEN: Trans European Network) 구축과도심과부도심의연계망구축사업에 투자우선순위를두고있다. 유럽연합지방발전기금에의거한연방교통인프라투자계획 2000~2006의내역 은 [ 표 2] 와같다.
구 [ 표 1] 교통인프라투자내역(1999 년~2002 년) ( 단위: 10 억마르크) 분 연방철도 [ 이중 DB AG 자체투자 ] 유럽연합재원연방장거리도로유럽연합재원연방내륙수로유럽연합재원 최우선시행사업 신규및확장사업 13.4 0.24 17.9 0.68 1.2 0.02 유지보 수 우선시행사업 총투자규모 14.7 1.3 29.4 (3.6) 0.24 13.8 1.3 33.0 0.68 2.6 0.25 4.05 0.02 총액 33.44 31.10 2.85 67.39 주 : 유럽연합의재원은유럽연합지방발전기금 (EFRE: Europ äischer Fonds für regionale Entwicklung) 에서출연됨. 자료: 연방건설교통부: Verkehrsbericht 2000, 52쪽 독일의경우, 연방교통인프라에대한투자는거의전적으로연방예산으로조달하는것이관행이었다. 그러 나특히통독이후교통인프라구축의재정조달을전적으로공공예산에의존하는것은한계가있음이분명해 졌다. 따라서연방정부는이문제를해결하기위해 교통인프라재정위원회 를구성하였으며, 동위원회가제 안하는새로운재정조달방안들을적극수용한다는방침이다. [ 표 2] 유럽연합지방발전기금에의거한연방교통인프라투자계획 (2000~2006) ( 단위: 10 억마르크) 구 분 총투자규모유럽연합지방발전기금 연방철도 연방장거리도로 연방내륙수로 2665.93 3481.67 25.00 6172.60 1060.53 2036.33 16.82 3113.68 총 액 자료: 연방건설교통부: Verkehrsbericht 2000, 53쪽 특히, 구동독지역의프로젝트에유럽연합이제공하고있는교통인프라구축을위한재원을적극유치할계획 이며, 민간투자방안도확대할계획이다.
최근독일총선의주요논점인단일세율(Flat Rate) 개혁안 김유찬, 계명대학교경영대학세무학과교수 2005년 10월 지난 9 월중순에있었던독일의조기총선에서주요논점으로단일세율안이부각되었다. 이는전헌법재판소재판관인키르히호프교수가주도한것으로, 그는 2001년독일소득세제 도의근본적인변화를지향하는개혁안을발표한바있다. 감면조항을삭제하여증가한조세수입은세율을 25% 이세제개혁안은소득세의모든 수준으로낮추어납세자들에게돌려주 자는것이다. 또가족과자녀양육을위한최저생계비는소득세에서더큰폭으로공제하여 가족형성에더우호적인조세정책을제시한다. 독일사회에서는키르히호프교수의제안이 구체적으로어떻게실현되고, 경제에어떤영향을미칠지제대로진단하지못하고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이개혁안에대하여, 혹은최소한개혁이필요하다는것에는공감하는분위기이다. 그러나조세감면규정의삭제에대한우려의목소리도크다. 이세제개혁안에대한독일학 계의기대는이것을통하여조세제도가경제주체의활동에중립적으로작용하면, 이로인해 추가적인성장동력이발생하지않겠느냐는것과세율이낮아지면탈세가줄지않겠느냐것이 다. 물론이효과가어느정도로나타날지현재로서는예측하기어렵다. 종합해보면, 독일의 단일세율안은조세의형평성문제와적정세수확보의문제, 그리고투자에비우호적으로작 용할우려때문에세제개혁에서대안으로삼기에는아직부족해보인다.
1. 단일세율안의제안 2005년 9월 18 일에치러진독일의조기총선에서기민/ 기사련(CDU/CSU) 연합의수상후보앙 겔라메르켈(Angela Merkel) 총재는재무부장관후보로헌법재판소재판관을역임한하이델베르 그대학법학부의파울키르히호프(Paul Kirchhof) 교수를지명하면서선거전에서조세개혁을핵 심주제의하나로선택하였다. 키르히호프교수는수년전부터경제학자, 세무자문가, 세무공무 원등으로구성된조세전문가그룹을이끌며독일의소득세제도의근본적인변화를지향하는 개혁안을 2001 년 칼스루헤안 이라는이름으로발표하였다. 2002년당시칼스루헤안은소득세 의누진구조를대폭완화하여 15% 의최저세율에서시작하여 35% 의최고세율로끝나는세율 구조를제안하였다. 그러나그는이안을더발전시켜기업과개인에대한 25% 의단일세율을제 시하였다. 현재의소득세최고세율 40% 와비교하면이단일세율안은정부의재정적자를심각 하게악화시킬수있는것이나키르히호프교수는동조세개혁안에서세율인하와병행하여자 가주택구입보조금, 통근비용공제등 418가지에달하는소득세법상의여러가지조세혜택을 삭제하여재정적인문제를해결하려고한다. 독일총선의결과는어느정당도승리하였다고보기어려운백중지세를보여주었다. 선거과정에서유권자들은단일세율안을그다지긍정적으로받아들이지못하였고, 이를프로그램으로내세운기민/ 기사련연합에게감표의요인으로작용한것으로보인다. 따라서기민/ 기사련연합이향후의연정협상에서주도권을잡고연방수상의자리를차지한다하더라도단일세율안이현재의기본구조를유지하며실현되기는어려울것같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동단일세율안은향후의조세정책에지속적인영향을미칠수있는내용을담고있다고보이며따라서주의깊게살펴볼필요가있다. 2. 단일세율안의배경 가. 경제의글로벌화와조세경쟁의추세 경제의글로벌화추세에서자본이동에대한제약이사라지면서자본은수익에매우민감하게 반응하게되고, 결과적으로전세계에서자원의배분이효율적으로이루어지게된다. 글로벌화 시대에는자본이라는생산요소뿐만아니라노동력, 특히고급인력에대한수요도국제적으로 동질화되면서인력의국제적이동도과거보다훨씬활발해진다. 결국자본과노동력이라는근본 적인과세원천이국가들간과세부담의차이에더예민하게반응하면서낮은세율을찾아빠
르게국경을넘나들므로개별국가들은이들을유인하기위하여경쟁적으로세율을인하할수 밖에없는실정이다. 개별국가들간의세제경쟁은 EU 회원국들간의법인세및소득세분야 의최고세율인하추세에서가장뚜렷하게드러난다. 글로벌화된세계에서이동이자유로운 세원에대해높은한계세율로과세하는것은더이상불가능하다. 나. OECD 회원국들의소득세제도개혁안중단일세율안의위치자본과이동이자유로운인력에대한고율의과세가어려워지면서개별국가들은일자리를창출할수있는자본의해외유출을우려하여우선자본과관련된법인세율과이자소득세율을그리고점차고급인력과관련된소득세의최고세율을낮추게되었다. 이로인해학자들이전통적으로이상적인소득세체계라고생각하던누진적종합소득과세의체계가흔들리게되었다. 소득세야말로전체조세에서가장핵심적인세목이므로이는많은나라에서조세체계전체의틀을바꾸는일이되었다. 종합소득세의대안으로가장먼저부각되어채택된것은현재북유럽국가들을비롯하여오스트 리아, 벨기에, 이탈리아등에서시행하고있는자본과근로소득의분리과세(Dual Income Tax) 제 도이다. 이제도는이동성이강한이자등과같은자본소득에대하여는저율의단일세율로과세하 고이동성이약한근로소득에대하여는누진율구조를가진상대적으로고율의소득세체계를적용 하자는것이다. 이제도가과연향후에실현될수있는지에대하여는의문이지만미국에서는그보다더근본적 인소득세개혁안이제시되고있다. 즉, 자본의이동성때문만아니라극단적으로복잡한미국의소 득세제도에비추어소득세를아주폐지하거나정부의재정을전적으로소비세에의존할정도로소 비세를강화하여소득세의의미를약화시키자는것이다. 이는과거에도학자들간에많은논란을일 으키면서좋은반응을받았으나결코실현된적이없는칼도르(Kaldor) 라는학자의지출세 (Expenditure Tax) 와같은맥락의제안이다. 소비에대해서는창출된소득중소비부분만과세하 고저축부분은비과세하는것과동일한것이므로소비를억제하고사회의자본축적을장려하여 경제성장에도움이된다는것이다. 이제도가실현되지않은것은이것이가져올수있는분배의 역진성때문이라고보인다. 즉고소득층은소득중작은부분만소비하므로세부담이가벼워지게 되고, 역으로저소득층의세부담은가중될것이다. 기존의누진적종합소득세에대한세번째의대안이단일세율개혁안이다. 이개혁안은키르
히호프교수가제안하기전에이미미국에서제안, 실현된적이있다. 그러나미국은단일세안을도입한지얼마되지않아누진세율구조를재도입하였다. 세율구조가단일세로되어있어도기초공제의수준이나기타의다른요소때문에미국에서실현된단일세안과이번에독일에서제안된단일세안의성격은상당히다르다. 독일의단일세율안은상당한수준의기초소득공제를제공하는단일세율안이지만어느정도간접적인누진율구조를가지는제도이다. 여하튼단일세안은, 미국의소비세를지향하는근본적조세개혁안이나북구국가들의자본과근로소득에대한분리과세제도에비하면, 전통적의미의누진적종합소득세에상대적으로가장근접하는개혁안으로평가받고있다. 3. 단일세율안의주요내용 가. 조세감면의대폭적폐지를통한과세기반확대와세율인하 키르히호프교수의 칼스루헤안 은소득세법및법인세법에규정된여러가지조세감면혜택을 기본적으로경제주체의자율적인의사결정에정부가비중립적으로개입하는통로로파악한다. 이러한 조세혜택을세법에서모두제거하면경제전체에서자원배분의효율성이높아질뿐만아니라과세기 반이크게향상되면서정부의조세수입이줄지않으면서세율을낮게할수있는큰여력이생긴다고 보는것이다. 키르히호프교수는여러차례납세자들의사유재산에과도하게개입하여소득및재산상태 에근본적인변화가야기될정도로심하게과세하는것은부당하다고판결한헌법재판소의사례 를상기시키며, 칼스루헤안은과도한과세금지와조세평등주의원칙을같이실현하는방안으 로, 과세기반에서제외하는모든예외조항을삭제하여증가한조세수입은세율을 25% 수준으 로낮춤으로서납세자들에게돌려준다는것이다. 이러한변화는투자자들에게독일의산업입지 를상대적으로강화시켜주며, 아울러개별경제주체에게조세의중립성을보장하여경제의효율 성이전체적으로증가한다는것이다. 현재의개별종류의조세혜택이사회적으로꼭필요한것 이라면, 향후에는이를조세혜택으로서가아니라예산확정이라는의회의민주적절차를거쳐서 결정하여보조금으로지급하는것이바람직하다는것이다. 칼스루헤안은소득세법제3조의 69개항목과 3b조에서규정된수많은비과세및조세혜택항목 뿐만아니라사업자가당연하게인정받는감가상각비용중에서도정율법감가상각은정액법에비 하여그자체에조세혜택이내재되어있다고보고이러한정율법의감가상각도허용하지않아야
한다고주장한다. 이안은삭제하려는조세혜택중특정한저축이자에대한비과세도당연히포 함시키고있으나예외로개인이지출( 혹은저축) 하는노후생활을위한연금보험료는소득공제 를하도록제안하고있다. 나. 소득종류의단일화 칼스루헤안은현재의소득세법에서구분하는 7 가지소득의종류를단일화한다. 이를통해소득 의구별과함께발생하던세부담의차이를제거할수있다는것이다. 이와같이소득의종류를 나열하는규정을없애면서하나의과세대상을상태적, 행위적그리고결과적사실로만규정한다. 따라서과세대상은모두수입을위해노동이나자본을투입한취업활동( 행위적사실) 의소득일 뿐이다. 또시장과연결되어지속적으로유지되는, 예를들어사업체나근로자의직장과같은, 취 업활동의기반( 상태적사실) 을통해소득이있는사람에게만과세된다( 결과적사실). 영업활동과기타소득창출활동의구분이없다면영업세도존재할수없게된다. 독일기초 지방자치단체(Gemeinde) 의가장큰세수입인영업세가사라지는경우, 칼스루헤안은각기초지 방자치단체가구역내주민에대한소득세의기초지방자치단체분에대하여징수율을자율적으 로결정하는방안을제시하고있다. 다. 최저생계비용에대한소득공제와자녀공제 최저생계비에해당하는소득은납세의무자와그가족이기초생활비로써야하는부분이므로 기초공제로서과세에서제외해야한다. 최저생계비수준은일반적인경제상황과공동체에서인 정하는최소한의필요에따라결정되는데칼스루헤안에서는 1인당연간 10,000유로정도를최저 생계비로보고기초공제를하고있다. 또개인의질병이나장애로인한추가생계비는조세분야 에서반영되는것보다예산지출면에서고려되는것이바람직하다고보고있다. 그러나이러한수 준의기초공제는독일내에거주하는무제한납세의무자에게만허용해야하며, 해외에거주하며 독일의원천과세대상인제한적납세의무자에게는허용하지않는다. 최저생계비는납세의무자 의필요만을고려하는것이아니라배우자와자녀도포함된다. 특히부모는자녀양육의의무가있 으며, 이에대한지출필요성도최저생계비에서인정된다. 칼스루헤안은자녀 1인당 8,000유로의 기초소득공제를적절한수준으로인정함으로서 4인가족의경우총 36,000유로를공제해준다. 라. 법적형태에대한중립적과세현재는법적형태별로기업에대한과세가구별된다. 개인기업의소득은개인에게귀속시켜과
세하고, 법인에대한과세는별도로상대적으로낮은법인세율로과세한다음배당에대하여는주주단계에서추가적으로과세한다. 이러한구별은결과적으로기업의법적형태에따른세부담의차이를야기한다. 칼스루헤안은모든자연인이나법인을단일세율로과세하고법인체에서받는배당은이미과세된것이므로이중과세를피하기위하여더이상과세하지않는것을제안한다. 4. 독일학계와사회의반응 가. 전반적인평가 독일의기업계는키르히호프교수의칼스루헤안이구체적으로어떻게실현되고, 어떤경제적영 향을미칠지제대로진단하지못하고있으면서도전반적으로동개혁안에대하여, 혹은최소한개 혁이필요하다는것에는공감하는분위기이다. 세부담이같은수준에머무르더라도조세제도가 단순해진다는것, 그자체가기업에게는부담을크게줄여주는것이라고기업계의한인사는말하 고있다. 함브르그경제연구소(HWWA) 소장인슈트라웁하르(Straubhaar) 교수는이세제개혁안을 극찬하며, 이세제개혁을통하여정부는본연의과제에집중하고민간의성장동력을풀어줄수 있다고주장한다. 소득세최고세율을 EU 의회원국들과비교할때, 독일의위치는이안이실현 된다면최고높은세율수준의그룹에서하루아침에중간수준으로내려간다. 이와같은변화는 동세제개혁안이수반할다른측면( 예를들어, 조세감면의삭제, 감가상각규정의변화등) 으로 인한효과를무시하고보면기업이나개인납세자모두가매우환영할만한일이다. 그러나이러 한개별규정들의변화에대한우려의목소리도크다. 가장중요한문제는, 이세제개혁안이실 현되면소득분배에역진적으로작용하지않겠느냐하는것이며, 또정부활동에필요한충분한 조세수입을확보할수있느냐는것이다. 나. 투자및경기에미치는효과 은행의한경제분석가는자녀를둔가족에게소득공제를큰폭으로허용하는것이경기회복에 매우유용할것으로판단한다. 이는자녀가많은가족은소비성향이높기때문이다. 반면에고소득 층의세부담을줄여주는것은경제에도움이되지않는다고보았다. 그러나가장중요한문제인 경제성장의동력이라고보는투자재수요에대해키르히호프교수의제안이어떠한영향을미칠지 평가하기어려우나, 그가제안하는정율법적감가상각을허용하지않으면직접적으로는설비투자가 많은기업에게는불리하게작용하고투자에해롭다고보는시각도있다. 이는슈뢰더정부가투자 를촉진하기위해법인세율을낮추는대신에감가상각규정을어렵게하여세수를충당한것이투자
에전혀이롭지않았다는것을보면명확해진다. 기업에적용되는세율은법인의이익에모두적용되는것에비하여감가상각규정은기업의설비투자규모에비례하여영향을주므로세율인하로인한세수손실을감각상각규정을죄어서충당한다면결국설비투자를적게하는기업이유리하고설비투자를많이하는기업에게불리하게작용한다. 설비투자가경제전체에주는파급효과를감안하면, 동세제개혁안은결국정부가일반적으로지향하는경제활성화라는정책목표와는반대의결과에도달할수도있다. 다. 세수효과에대한평가칼스루헤안이정부재정에어떻게작용할지는불확실하다. 조세감면을줄이고세율을낮추는것이세수에서어떤숫자로나타날지모르는것은이안자체가아직미완성이기때문이기도하다. 특히기업에대한과세분야에서는아직많은부분에최종내용이제시되지않았다. 이단일세율안이기업과개인납세자들에게전체적으로세부담을경감해줄것인지도분명하지않다. 그러한결과가나온다면정부의재정적자폭을더확대하는것이므로독일정부의현재입장에서지향하는방향도아닐것이다. 라. 소득분배의문제 칼스루헤안이독일사회의여러계층에미치는세수경감효과및소득분배를생각해보자. 자 녀가있는가족에게는이안이경제적으로유리하게작용할것으로보인다. 이들은현재의자녀 1 인당소득공제액이나자녀보조금( 자녀 1인당연 1,848 유로) 에비하여훨씬높은수준인 8,000 유 로를소득공제받는다. 반면에이안에따라저축에대한이자소득공제가삭제되면소액저축자에 게불리하게된다. 또소액투자자가장기간보유한주식의양도차익에대한비과세가삭제되면 이또한소액투자자에게불리하게작용한다. 고소득계층은우선세율면에서경제적으로유리하 다. 그러나고소득계층중현재여러가지의조세혜택을잘이용하던납세의무자의경우이혜 택이사라지면서경제적으로불리하게되는경우도있을수있다. 중요한것은세제개혁안이기 업에게어떻게작용할것인가하는것이다. 법인세율은현재의 25% 가그대로유지되어도동개혁 안에따라영업세가없어지면세율면에서는기업에매우유리하다. 그러나이경우도여러가지 조세감면이삭제되고감가상각규정이엄격해지면최종결과가기업에게세금부담을줄여주게 될지혹은그반대의결과가나타날지는두고보아야한다. 킬의세계경제연구소소장인데니스스노우어(Dennis Snower) 교수는칼스루헤안이실현된다면
기초소득공제를소득상황을고려한보조금으로대체해야할것으로보고있다. 극빈층의경우공제될소득이부족하다면기초소득공제는도움이되지않으며, 이는극빈층에대한보조금없이는적정한수준의소득재분배가이루어지지못하기때문이다. 종합적으로그리고소득계층별로보면, 단일세율안은 4인가족에대한 36,000유로의인적공 제를함으로서소득세로서갖추어야특징인누진성을간접적으로확보하고있다. 이수준의인적 공제가허용되는경우, 독일의저소득층은현재보다과세상유리해진다. 그러나단일세율안이실 현되는경우중간계층과고소득층사이의조세형평성은더악화될것이다. 마. 과세소득의정의 일반적으로공정한과세는어느나라에서나개인의경제능력에입각하여과세하여야한다는입 장(Leistungsfähigkeitsprinzip) 을취한다. 칼스루헤안을보면, 공정한과세는시장소득을과세하는것 이라는어느나라에서도택하지않은과세소득을제한하고있다. 이안은나아가지속적으로취 득하는시장소득이과세대상소득이라는더제한적입장을취하는데시장에일회성소득( 예를 들어, 부동산양도차익) 도흔하다는것은자명하다. 또칼스루헤안은시장소득이아닌정부의 보조금도과세소득에포함시킴으로써시장소득이론을스스로지키지못하고있다. 그러나이 러한논리적정당화의실패에도불구하고이안이지향하는과세소득의범주는전체적으로적 절하다고보는시각도있다. 바. 세제간편화와징수비용의문제 이개혁안은현소득세법의 78개조를단지 21 개의조로간편화했다. 또그중 20개조는단 지 4 개항으로구성되어있다. 그러나세법의적용에서납세자나세무공무원이힘들어하는것 은그세법이길고체계가없을경우뿐만아니라세법이짧은추상적인개념으로채워져있는 경우도마찬가지이다. 세법이추상적인경우그하위법령이구체적인내용을채워야하므로결 국관료들의재량권에권한이위임되면서세법과하위법령을통틀어서는결국간편화의목표도 도달하지못하게된다. 오히려불명확한법령으로인하여더높은징수비용을초래하는결과가 생기게될것이다. 사. 연금에대한과세취급연금보험료에대해서는소득공제를해주고향후연금을받을때과세소득에포함시키도록되
어있다. 이는소득이애초에발생했을때과세하지않고미루는것이므로연금가입자에게이기간에발생한이자만큼비과세혜택을주는것과동일하며이는모든소득에대하여예외없이과세한다는칼스루헤안의원칙에모순된다. 5. 맺으며 독일사회가칼스루헤안에갖는기대는이개혁안을통하여조세제도가경제주체의활동에중립적으로작용하면서여기서추가적인성장동력이발생하지않겠느냐하는것과세율이낮아지면탈세가줄지않겠느냐하는것이다. 탈세이론에서볼때세율이낮으면탈세로인한기대효용이감소하므로탈세는줄어든다. 물론이효과가어느정도로나타날것인지도현재로서는예측하기어렵다. 결론적으로종합해보면, 독일의단일세율안은조세의형평성문제와적정세수확보의문제, 그 리고투자에비우호적으로작용할우려때문에세제개혁에서대안으로삼기에는아직부족해보인 다.
폴머사건을계기로본 독일연방의원의부업규정에관한논란 조현옥,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대표 2005년 6월 지난 1월독일에서는당시녹색당외교정책대변인이었던루드거폴머의부업사건이터지면서연방의원들의겸업및부업문제가논란의주제로떠올랐다. 당내외무통으로알려진폴머가연방인쇄소국제업무의자문을맡고있었으며해외여행중이회사를위해일을한것이밝혀지면서정치인들의부업이어디까지정당한가, 다른형태의불법로비는아닌가, 현재허용되어있는겸업, 부업, 그소득액을어느선까지밝혀야될것인가를놓고각당별로, 의원별로다양한의견을피력했다. 정치인도한개인이기때문에그들의개인정보를보호해야하고의원들도사적인영역을가질권리가있다는주장과연방의원들이누구를위해얼마나수입을올리고있는가를아는것은유권자들의권리이며, 나아가서는정치인의잘못된영향력을사전에방지할수있다는주장이맞섰다. 그후폴머는당직을사임하였고, 연방의원의직업에관한규정은의원들의겸업과부업의수입을당의장에게보고하는것으로합의를이끌어냈으며결정을앞두고있다. 이로써독일연방의원들의부업에관한규정은더욱강화된셈이다. 정치인들의재산상태나수입, 또는정치후원금등은정치인들의영향력이개인의경제적이익과어떻게잘못연결될수있는가를알아보는잣대들이기때문에언제나민감한사안이며, 이는독일뿐만아니라한국에도시사하는바가크다.
들어가는말 정치인들의재산상태나수입, 또는정치후원금등은정치인들의영향력으로인해그들이부당한이득을얻을수있는지를알아보는잣대이므로언제나민감한사안이다. 특히정치인이의회업무가아닌다른직업을갖고있으며, 그일이자신의정치직과관련있는일이라면그수입은과연정당한노동에대한대가인가아니면부당한로비자금인가라는논란을불러일으킨다. 이는한국에서도정치인들의재산이얼마인가, 축적과정은어떻게되는가, 출처를알수없는수입이있는가등이매우중요한사안이며, 이것이불투명할때는여론의저항에부딪혀낙마하기도일쑤다. 물론, 사안이나조건으로볼때한국과다르지만이문제는독일에서도한참논란의대상이되고있다. 지난 1 월당시녹색당외교정책대변인이며, 전주장관이던루드거폴머(Ludger Volmer) 의원의부업스캔들을놓고연방의원들의겸업과부업에대한문제가제기되었다. 이는주업과부업의 경계가모호하다는문제제기와연방의원직외의종사하는일에대해서만공개할것인가, 아니면그 수입까지공개해야하는가, 더나아가비자사건과함께녹색당에대한공격으로까지비화되어한바 탕논란을불러일으키고규정을강화하는것으로끝맺음되고있다. 여기서는폴머사건을계기로불 거진의원들의겸업문제를중심으로이를둘러싼공방을살펴보고자한다. 겸업, 부업, 수입공개, 애매한규정들 - 사건의발단 독일연방의원들의겸업이나부업은법적으로허용된다. 그러나겸업과부업의경계가명확하 지는않다. 예를들어, 한연방의원이과거에변호사였다가의원직과동시에변호사업무를계속 하면겸업이되는것이고, 폴머의경우에는의원이된후에국영기업체였다가현재는민영화된 연방인쇄소의국제업무에대한자문을하고있었으니부업으로볼수있다. 그런데겸업일경우에 는자신의수입을국회에신고하지않아도되지만부업일경우에는수입을신고해야하는의무가있다. 하지만현실적으로겸업과부업의개념이명확하지않아논란이일고있고, 이두가지를모두신고해야하는것이아닌가라는주장도있다. 폴머의경우, 공무여행중자신의부업업무를같이본것이문제가되었다. 폴머는신테시스 (Synthesis) 라는자문회사의대표로, 이회사의주요고객은연방인쇄소다. 그는외국에서독일여권을만드는업무에관해자문하는일을맡고있었다. 독일연방인쇄소는여러업무와함께비자문서 를찍어내는일도맡고있다. 폴머는의원재임중이회사의일로 2년간두번이나남아프리카와
베트남에갔다는사실을털어놓았는데이말도질문이여러번반복된후에나온것이어서의심을가중시켰다. 신테시스사에서폴머가했던일은의회의규정을어기는불법은아니어도문제가있다는것이중론이다. 폴머의원에게주로가해지는비판은주장관직을맡았었고, 현재당의외교정책대변인을맡은연방의원이민영화된인쇄소를위해외국에서계약을체결하는것이정당한가라는것이다. 그는옛날주정부에서일할때만난사람들을연방인쇄소의자문업무를할때도만났다고밝히고있다. 이는과거의연줄을그대로이용했다는것을의미한다. 이에더해진또하나의의문은폴머의회사가연방인쇄소를위해서실은아무일도안했다는주장에서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는계약조건이완료되었을때로비를담당했던사람들이그에상응하는보수를받지만폴머의경우에는해결한일도없이우선돈부터받았다는것이다. 이름을밝히 지않은인쇄소직원에따르면, 폴머의회사는 40 만유로(Euro) 를받았지만로비를통해성사시킨 것은별로없다고한다. 이주장은사실폴머의입장을더욱곤란하게만들고있다. 돈을받은대가 로아무일도안하는것은의회의규정에따라불법이고녹색당의외교정책대변인자리에서물러 설충분한근거가되기때문이다. 이에대해폴머는입을다물고있었지만그의회사동업자인부카르트호프마이스터 (Buchkard Hoffmeister) 는강력하게반박했다. 그는우리는연방인쇄소를위해모든프로젝트에서열심히일 했고, 여러번외국에서그쪽의기업들과거래를준비하러나갔으며이런일을한대가로신테시 스는통례적인수입을얻은것이라는주장이다. 외국에서성사시킬만한거래를찾아내고그들의 고객에게그일이알맞은지분석하며외국기업의거래담당자를찾아서거래가가능하도록만드 는것이이회사의주요업무라는것이다. 신테시스사는남아프리카, 베트남과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와비슷한업무를하였으며, 이세나라는앞으로시민들의새신분증명서발급에몇백만유로를투자할계획이라고한다. 호프마이스터는신테시스의업무는대부분의자문회사가통상적으로하는일이며양심에거리낄것은없고보수도보통의수준이었다고주장하고있다. 게다가연방인쇄소도자기들이신테시스에게준보수는통례적인것이며, 자문과외국활동에대한사례라고진술하고있다. 큰프로젝트에대해자문받을경우몇주내에결과가나타나지는않기때문에수행한업무가없다는의심이나왔을것이라는추측이다. 물론, 폴머사건이불거진것도폴머의신테시스를위한몇차례외국여행때문이므로, 아무한일도없이대가를받았다는주장은신뢰도가떨어진다. 폴머측에서는이사건이이처럼불거진이유는보수당의정치적전략때문이라고주장하
고있다. 그러나위의여러가지주장들만보아도폴머의행위가과연로비가아니었는가에대해서는많은부분의심의여지가있다. 이사건으로제기되는문제는두가지이다. 첫번째는폴머뿐아니라의원들의겸업이나부업이가끔씩문제가되는경우가있는데이를어떻게보아야할것인가이고, 두번째는녹색당에대한비판이다. 그동안가장도덕적인정당으로인식되어왔던녹색당이폴머사건과또이사건이밝혀진계기가된비자스캔들로인해내부갈등을일으키고위기에처했기때문이다. 녹색당은통독이후당의주요이념중하나인여행의자유화를그들이외무장관직을맡게되면서현실화해왔다. 폴머도 2000 년외무부재직시절, 독일은세계를향해서더넓게문을열어야한다고주장하며, 확실하지않은경우비자를불허하기보다는허락하는것을권했다. 그결과, 불법입국자들을독일내로들여보내는사기꾼들의활동이왕성해졌고비자발급이쉬워짐에따라불법노동력이유입되었다. 이에대해자민당이나기민당은폴머및녹색당, 더나아가녹색당과연정을하고있는집권당인사민당이책임을져야한다고요구했으며폴머의부업사건도사실은이맥락에서불거진것이다. 폴머를보호할것인가, 희생시킬것인가 - 녹색당의대처 폴머의스캔들에대해녹색당지도부는처음에는단결을과시하면서폴머의연방인쇄소자문으로서의부업은더이상논란의여지가없다는의견을공식적으로표명하였다. 그러나더이상이라는말뜻에숨은함의는우리가지금까지아는바에의하면이라는뜻이더강하다. 녹색당지도부는밖으로는폴머를변호했지만당내회의에서는폴머에게신테시스회사에대해추궁했었다. 이에폴머는인쇄소의외국진출을위해서연방의원으로서의권한을이용하지않았다고단언했고당에서는일단폴머를옹호하기로결정했다. 그러나문제는지도부가아니라녹색당원들사이에서폴머나그자문회사가정말무죄인가에대해의심하고있는것이다. 물론그스캔들이확실한근거를가지고있지는않지만이러한의혹자체가녹색당의도덕성에많은피해를입히기때문에당원들은폴머가이처럼문제를일으킬수있는부업을선택한것이문제라는인식을하고있다. 폴머사건에대해가장불만을나타낸이는동료의원인빈프리드헤르만(Winfried Hermann) 이었다. 그는폴머의부업이정치적으로위험한측면이있다는것은분명하므로폴머는자신이결백하다는것을다시한번설명해야한다고주장했다. 만약지금이문제를깨끗하게해명하지못하고넘어가면국민들의당에대한신뢰가떨어질수있다는위기의식이녹색당내에짙게깔려있다는것이다.
헤르만의원은이전에있었던녹색당내의유사한사건들을떠올리면서폴머가책임을져야한다고추궁했다. 우선 1999 년에연방의원이었던쳄외쯔데미르(Cem Oezdemir) 가후원자로부터 8만마르크를빌렸고, 공무상얻은마일리지로사적인비행기표를구매하는데이용했다는것을고백하고당직을떠났던것을상기시키면서폴머도당직을내어놓아야한다고요구하고있다. 즉당내에서의원의부적절한행동이밝혀졌을때그에대응하는태도에일관성이있어야한다는말이다. 물론헤르만외에도초창기에는폴머사건을다시조사해야한다는의견들이당지도부에서나왔으나대부분은당내에서고민하고해결하자는쪽으로기울어졌다. 폴머에대한질의와추궁은당내에서비공개로이루어지고공개석상에서는부정적인말은흘리지않는쪽으로기선을잡은것이다. 이후당내에서의원들의부업에관한법개정을어떻게할것인가에대한토론은계속되었지만폴머를구체적으로거론하지는않았다. 하지만이사건을통해폴머는이미정치적타격을크게입었다. 그에대한사임설이끊임없이떠돌았고당원들은그를비판하였다. 특히자신이과거주장관이었다는것을이용해서사기업이이익을취하도록도왔다는것을폴머가감추지도않고오히려당당하게내세우고있다는것에대해서당원들은분노를참지못하였다. 특히, 폴머에대한비판은그의지역구인뒤셀도르프에서더욱심했다. 2006년선거에서의회에입성하기위해서는뒤셀도르프의주비례대표리스트에그의이름이올라야하는데이스캔들로올라갈확률이거의없게되었다. 주장관까지지냈던폴머의정치적생명은끝났다고보아도무리가없을것이다. 녹색당이초기에이사건을축소시키려한이유는우선폴머의행동이법적으로문제가없다는것이었다. 도덕적으로논란의여지는있지만그가형식상으로부업을제대로신고하였기때문에규정을어긴것은아니라는것이다. 두번째이유는좀더심각한데있었다. 폴머사건이외무부장관인요시카피셔에게번져서비자발급을둘러싼사건이점점더확대되고있었기때문이다. 이염려는사실로나타나기민당에서는폴머사건을피셔사건이라는명칭으로부르고있다. 이처럼폴머개인의문제가아니라피셔로까지사건이확대되면이는녹색당의존립에매우위험한계기가되기때문이다. 부업규정강화찬반논란
폴머는정부부서에서일하던연줄이신테시스에서일하는데도움이되었는가라는질문에대해분명하게답하지않았다. 그는자신이주장관이었기때문에독일이나외국에자신이많이알려져있지만, 신테시스일을할때는의회의규정을항상지켰다고강조했다. 즉그는부업에관한보수당의공격이사실에바탕을둔것이기보다는정치적전술에불과하다고생각하고있다. 물론기민당(CDU) 은신테시스사건이있기전부터현집권정부인사민당과녹색당의적녹연정을공격할준비를해왔고이사건이기민당에게좋은빌미를준것은사실이다. 하지만정치적논란을떠나폴머외에도부업과관련된스캔들을일으킨의원들이많았기때문에이를계기로좀더명확하고새로운규정을만들어야한다는의견들이의회안팎에서제기되었다. 이문제의본질은무엇보다연방의회의원들의부업에관한규정을어떻게할것인가에있다. 기민당당수인안겔라메르켈(Angela Merkel) 은적녹연정정부에서의원의부업에대해더욱엄밀하 게규정해야한다고주장하고있으며기민당도이의견을지지하고있다. 그러나사민당(SPD) 의 2 인자인슈티글러의원(Ludwig Stiegler) 은이에반대하면서 완벽하게투명한의원이가능한지묻고 있다. 역시연방의회의원인페터라우엔(Peter Rauen) 은규정을어긴의원을징계해야하지만당이 나의원을완전히투명하게공개하는것에는한계가있다고주장한다. 부업규정을강화하는여러 가지제안들이의도는좋지만현실성이없다는것이다. 예를들어, 개인회사를운영하는사람들은 소득세를신고하는연말에나자신의수입이얼마인지를알게되기때문에신고하기어렵다는것이 다. 연방의회의원의수입신고에관한여러가지반대의견이있다. 사민당의당수뮌터페링(Franz Münterfering) 은의회가폐쇄적집단이어서는안되며우리들중에는변호사, 사업가, 기업의경영 자, 노동조합원들이있다. 그들의수입공개에관한규정은더검토되어야한다라고한인터뷰에서 밝히고있다. 슈티글러는한방송프로그램에서투명한의원프로젝트를만든다고해서정치인들이잠재적으로영향력을행사하는것이사라지거나부정부패가의회에서없어지지는않을것이라고말하고있다. 즉, 투명성이갑자기확대된다고평화와안도가찾아온다고믿는것은착각이라는것이다. 의회는각각다른이익을대변하는사람들이모여있는곳이지맑은주체들이모여있는곳이아니라는것이다. 그러면서그는에너지기업인바텐팔(Vattenfall) 에서돈을받으며환경세법에관해서기업의입장을지지하는라인하르드슐츠(Reinhard Schulz) 사민당의원을보호하는발언을하고있다. 우리는그가어디출신인지알기때문에그것을참고로그의주장을평가하면되며, 이익대변을한다고보면점점더힘들어진다 고강조한다. 사민당의원이며폭스바겐의노동자
평의회위원인한스유르겐울 (Hans-Jürgen Uhl) 도부업과수입에대한공개에반대하고있다. 개인 정보를보호해야하며, 연방의원들도사적인영역을가질권리가있다는것이그이유이며, 독일에서는모든수입을드러내는것이관례가아니라는점을강조하고있다. 즉, 의원들의부업규정을좀더철저하게하자는의견에대한반대논리는의회는결코아주깨끗한사람들만모여있는집합체는아니며의원들자신의사적인영역을보호해야한다는것이다. 그러나이에대한반대도만만찮게나오고있다. 과거사민당소속이었던노베르트간젤(Nobert Gansel) 은정치인들이남몰래영향력을행사하는것을막기위해서는의원들의부업과그로부터나오는수입을공개해야만한다고강조하고있다. 기민당연방위원장인크리스티안불프 (Christian Wulff) 는 니더작센주의규정을표본으로하여 연방의회에서규정을바꾸면된다고주장한다. 니더작센주에서는부업의종류와규모에관해주의 회의장에게신고할의무가있으며, 신고내용은유권자들이누가누구로부터무엇을위해서돈을받 는지알수있도록공개하는것이다. 독일금속노조(IG-Metall) 위원장인유르겐페터 (Jürgen Peter) 는노동자평의회위원이면서의원으로활동하는사람들은두가지일에대해적절한보상을받아야 하지만그수입은밝히는것이정당하다고이야기하고있다. 즉자문인과감정인으로서의업무도공 개해야한다는주장이다. 바이에른주의장인알로이스글뤽 (Alois Glück 기사당) 은규정을더욱엄격하게만들어야한다 고생각하고있다. 그는한신문과의인터뷰에서연방의회의장에게의원들이자신의부수입에대해잘못된정보를주거나아예정보를주지않는경우에는엄하게처벌해야한다고말했다. 수입에대한대가로아무일도하지않는, 즉로비수입은엄격히금지해야한다는것이다. 그는한사람이두가지일을동시에수행하는것은거의불가능하다는의견을개진하고있다. 프랑크푸르트의검사장볼프강샤우펜슈타이너(Wolfgang Schaupensteiner) 는부업인것처럼해서뇌물을받은의원들의처벌을요구하고있다. 부정부패전문가인그는일간지인쥐드도이체짜이퉁에서모든시민들은의원들이누구에게서무엇을위해얼마만큼의돈을받는지알아야한다고말하고있다. 즉, 의원의겸업수입도공개해야하며, 부업을겸업인양마냥속이고수입을숨기는것또한앞으로밝혀야한다는것이다.
다른부업의원들의경우 연방의원의부업에대한논란은녹색당의폴머에서시작되었지만사실다른당의의원들에게도해당되는이야기이다. 자민당(FDP) 의원인플라흐(Ulrike Flach) 는그녀가하고있던부업에대한비판이커지자결국원내직과당직을포기했다. 그녀는 2005년 1월 24일맡고있던연방의회의교육위원회위원장직과자민당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지구당의부대표직을사임한다고발표했다. 이는자신의가족과위원회, 그리고자민당과일하고있던지멘스회사에피해를입히지않게하려는의도였다. 플라흐는지멘스사에서몇십년간통역으로일했고의원직을맡으면서도이일을계속했다. 그녀는통역일과보수(6 만유로정도) 에대해서는언제나투명하게의심의여지를남기지않았다고주장하며나의정치적결정에회사와관련된사항이절대로영향력을미치지않았다는점을강조하고싶다고이야기하고있다. 그러나여론에서이러한생각을관철시키기어려웠고선거를앞두고있는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자민당사정을고려해서자리를내어놓게되었 다고말했다. 그러나의원직은계속유지하고있다. 기민당의원내부대표인메르쯔(Friedrich Merz) 와전연구부장관인리젠후버(Heinz Riesenhuber) 는자신들의부업이정당하다고옹호하고있는정치인들이다. 메르쯔는빌트지와의인 터뷰에서의회와선거구에서하는일은 ( 내부업때문에) 아무타격도받지않는다. 왜냐하면다른 일과의회업무가겹치면항상의회업무를우선으로여기기때문이다라고말하며자신의겸업인변 호사업무와여러기업의감독위원회위원과고문직에대해변명하고있다. 메르쯔는연방의원들이 수상, 장관이나당대표의일을동시에맡을수있는것처럼의원을하면서제한된범위내에서직업 을갖는것은가능하다고주장한다. 리젠후버도자신이맡고있는기업자문과여러감독위원회와 관리위원회의업무를의회업무와조화시킬수있다는생각이다. 또한, 그는의회가열리는기간에는 베를린에있고나머지시간에는선거구의주민들과대화를할수있으며, 지역에서자신이다수의표 를얻어당선된것도결국유권자들이이러한사실을인정했기때문이라고해석하고있다. 겸업과부업규정강화로 - 해결책모색 의회의원들의주업과부업의수입을어디까지밝혀야하는가에대해서는아직도논란이많다. 적녹연정정부의실무연구팀에서는센트의끝자리까지는정확하게맞추지않는신고양식을제안하였다. 녹색당지도부는겸업과부업의수입을완벽하게신고하자고하지만사민당은이에반대하 고있다. 시사주간지인슈피겔지에따르면, 사민당은의원들이부업으로얻은수입을수입액에따
라그룹으로나누어서국회책자와인터넷에공개하는것을계획하고있다. 그러나슈티글러사민당의원은수입공개는하지말고직업과관련된일만공개하자고말하고있다. 완벽히투명한의원에대한규정을내어놓았을때의회에서다수표를얻기힘들기때문이다. 기민당과기사당내에서도정확한수입을공개하는것이가능하고의미있는일인가에대해의심하는의원들이있다. 기민당의폴커카우더의원은수입공개에반대하면서변호사들이현재와같은경쟁의장에서그렇게간단히수입을밝힐수없다고설명하고있다. 그러나그는의장에게신고하는것에는찬성하면서규정을지키지않을때수입의두배를벌금으로내는것을제안했다. 이러한제안은다수의찬성을얻을수있다는것이카우더의의견이다. 초기에는반대입장을표명했던유르겐코펠린 (Jürgen Koppelin) 자민당대표는다른당의추진 안들에대해고려해볼만하다고의견을밝히면서대신이논의에추기경칼레만(Karl Lehmann) 을 위원장으로하는독립적인위원회가만들어져야한다고제안하고있다. 정치가들이스스로자신들 의신상과관련된일에대해결정하는것은이제그만두어야한다는의견이다. 기민당은좀더강경한입장을취하면서폴머의행위가정신적으로부패했고규정에어긋나는행동이라고주장하고있다. 물론독일정치인이외국에서조국의경제를위해노력하는것은당연하나폴머처럼이를통해사적인수입을올리는행위는규정에어긋난다는것이다. 비자조사위원장은이런식으로의원이의원직외에부업이나겸업을하는것은의회의행동규정에금지되어있다고말하고있다. 기민당은이사건을비자사건과연계하여적녹연정을공격하는수단으로삼고자하는의도가엿보인다. 위와같은논쟁과다양한제안들이나오면서독일의원들의겸업과부업, 그리고그수입에관한 논란은점차규정이강화되는쪽으로의견이모아지고있다. 우선의회의법전문가들이부수입의공개가의원의자유를직접적으로방해하지않는다는결론을냈으며, 대부분의의원들도모든겸업과부업의수입을연방의회의장에게신고해야한다는것에동의하였다. 연방의회의장인볼프강티어제 (Wolfgang Thierse) 도이번정책을지지하고있다. 국민들은의원들이어느쪽에서일하는지알권리가있으며, 이는정치의투명성을위해서매우중요한일이라는것이다. 부업에관한정보는앞으로매년나오는의회보고서에공개할예정이다. 이로써, 의원의겸업과부업에대한신고규정은이제까지부업의수입만을신고하던것에서더욱
강화되게되었다. 또한, 잘못된정보를주었을경우벌금도가능하다. 적녹연정은다양한안을바탕으로여름휴가기간이전에명확한규정을만들기로합의하였다. 폴머는이사건에대해책임을지고 2월 11 일자로그의모든당직, 즉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당대표, 중앙당의외교정책대변인자리와신테시스대표직에서사임했다. 녹색당지도부에서는끝까지폴머를보호하려했으나쏟아지는비판과곧다가올선거전에서이문제가걸림돌이될것이두려워이같이결정하였다. 폴머의사임과함께이문제는여론에서거의사라졌다. 많은의원들이부업문제와연결되어있기때문에이문제를오랫동안거론하는것은모두에게부담이되기때문이다. 폴머사건으로인해불거진의원의겸직과부업에관한논란은정치인의영향력과그들의사적인행동범주를어디까지인정해야할것인가에대해생각할계기가되었다. 정치인들의개인정보보호 가어디까지적용되어야하는가, 특히정치인들의경제활동을투명하게공개, 제한해야하는것아 닌가라는논의는자칫잘못하면부정부패에연루되거나잘못된로비대상이되기쉬운정치인들에 게경각심을불러일으켰다할수있다. 의회의원을비롯한정치인들의겸직에관한논란은독일에 서뿐만아니라다른나라에도시사하는바가크다. 정치인들은다른직업인들과달리그들의정치 적영향력이잘못쓰이면, 국민들에게피해를줄뿐만아니라국가적손실과도연관되기때문이다.
독일내국제이주노동자현황과정책 강수돌, 고려대학교경상대학경영학과교수 2005년 1월 전세계적으로국제이민자의수는 1억 2 천만명정도이며, 그중 130만명이매년유럽연합으로들어간다. 독일은유럽연합회원국중에서도정치적, 경제적이유로이주하는사람들이가장선호하는국가다. 독일은지금까지, 특히보수기민당(CDU) 정권 16 년동안, 보트는꽉찼다, 독일은이민국이아니다라는슬로건만되풀이하며엄격한노동허가제를실시해왔다. 하지만독일은역사적으로볼때대표적이민국이었다. 1970년대까지만해도독일은상당수의국제이주노동자를취업이민자로받아들였으나, 1980 년대들어그수가눈에띄게줄었다. 현재독일이처해있는지속적인구감소와전문인력의부족현상앞에서기민당의낡은정책은더이상유효하지않음이드러났다. 특히컴퓨터산업분야에많은전문가가부족하여 2000 년부터해외에서전문인력을유입하기시작했다. 또여야는오랜논란끝에해외전문인력( 특히, 정보기술분야) 의취업체류를쉽게하고이민을허용하는새이민법개정에합의했다. 이로써매년 20~30 만명의국제이주자가발생할것으로예상된다. 그간특히전문인력분야에서노동인구감소로위협받던독일경제계가새법안덕에활기를되찾을것이다. 이러한이주노동자정책에대해여러가지평가가가능하지만, 독일사례를노동허가제의실패사례로보기보다는, 오히려노동시장의조심스런문호개방과체계적인사회통합정책을조화롭게만들려고노력하는하나의선진사례라고보는것이더올바를것이다.
1. 독일내이주노동자유입약사1) 전세계적으로국제이민자의수는 1억 2 천만명정도이며, 그중 130만명이매년유럽연합으 로들어간다. 영국과독일은유럽연합회원국중에서도정치적, 경제적이유로이주하는사람들 이가장선호하는국가들이다. 독일은지금까지, 특히보수기민당(CDU) 정권 16 년동안, 보트는꽉찼다, 독일은이민국 이아니다라는슬로건만되풀이해왔다. 하지만독일은역사적으로볼때대표적이민국이었 다. 2차대전패전후동유럽에서구서독으로 1949년까지피난온 800만명의독일인을제외하 더라도, 1950년부터 1997 년까지취업이민자와그가족, 정치망명자, 동구권와해후구소련과 동유럽에서넘어온사람들을합해약 2,900 만명이독일로이주했다. 1970년대까지만해도독일은상당수의국제이주노동자를취업이민자로받아들였으나, 1980 년대들어그수가눈에띄게줄기시작했다. 1982년부터 1998년까지기민당콜총리의 집권동안독일정부는고실업률과빈부격차에따른사회불만, 사회저변에깔려있는외국 인에대한적대감등을들어반( 反 ) 이민정책을고수했다. 그러나현재독일이처해있는지속적인인구감소와전문인력의부족현상앞에서기민당의 낡은정책은더이상유효하지않음이드러나고있다. 인구학자들은 1970년대부터시작된독일 의출산율저하현상이해소될전망이보이지않는다는점에서이민수용의당위성을찾고있다. 현재독일인구는약 8,200만명인데이중 15~64세까지의노동연령인구가약 5,600 만명이 며, 65세이상의노년층은 1,300 만명으로, 노년층대노동연령층의비율은 1: 4.3 명이다. 유엔이발표한인구예측상황보고서는, 독일의경우현재의출산율을기준으로해외에서이 주민을전혀받아들이지않을경우 2050년에는인구가 5,800만명수준으로감소할것이라경고 한다. 따라서노년층과노동연령층의비율도 1: 1.8 명수준까지떨어진다. 독일의현연금체제상 노동인구 1.8명이연금생활자 1 명의생계를책임지는꼴이다. 실업에의한비노동인구까지포 함하면노동인구가담당해야할사회적부담은더욱커지는것이다. 1) 외국인과내국인이라는표현이인종차별주의적인색채를띠는경향이있기에필자는꼭필요한경우가 아니라면외국인노동자대신국제이주노동자라는표현을쓴다.
이런예측들은독일이인구구조의변화에현실적으로대응하기위해선이민자정책의전환이절대적으로필요함을보여준다. 이미그구체적징후로고실업에도불구하고전문인력의부족현상이나타나기때문이다. 이런점에서독일정부의국제이주민과이주노동자정책을살펴보는것은한국사회의미래 정책형성에많은시사점을줄것이다. 우선, 독일사회에국제이주노동자들이유입된역사를간략히살펴보자. 1955년에약 8만명정도에불과하던독일의이주노동자는 1950년대후반부터많은노동자의 유입으로 1964년에 100 만명을넘어섰다( 독일은 1955 년이태리, 1960 년스페인과그리스, 1961 년터키, 1965 년튀니지와각기인력송출관련양국간협정체결). 그뒤수가급증, 1971년엔 220만명이되어드디어전체노동자의 10% 를넘어서기시작했다. 1973년들어 260 만명이들어와독일노동시장이거의포화상태에이르자독일정부는 모 집중지 조치를내린다. 그리하여새로운이주노동자의공식유입은줄었지만기존노동자들 이고국으로부터가족들을불러들임으로써국제이주민의수는여전히증가한다. 1980년엔 450만 명으로독일인구의 7% 를넘게된다. 이에 1983년귀국촉진법이제정되어보조금등으로외국인의귀국을장려했으나귀국자는 5% 정도에불과했다. 게다가 1989년전후로동유럽이나구소련으로부터난민이대거유입되어 이주자가꾸준히증가하여 90년대중반경약 700 만명에육박한다. 한편,1993년들어졸링엔에서는신나찌세력들이난민신청자임시숙소와터키인거주지를 방화한사건이발생했다. 이를계기로통일독일기민당정부는외국인의난민신청권에제한을 두려했다.1998년선거로사민당-녹색당이다시정권을잡은뒤미국식의이중국적제를도입하 려했으나기민당이반대운동을벌이는바람에무산되고만다. 2000년세계컴퓨터박람회를계 기로사민당(SPD) 의총리슈뢰더는 2 만명에이르는해외, 특히인도의컴퓨터전문가들에게그 린카드미국식 ( 영주권) 를주는구상을발표한다. 이로써 1973년의모집중지정책은전환점을 맞고독일이주에관한논쟁이첨예화한다.2002년에연방상원에서새이민법이통과되자정치 적논란이확산되었다. 특히이법이적법한절차를거쳐통과되었는지가초미의관심사였다. 연
방헌법재판소가이에 ' 아니다' 라는판결을내림으로써이법은유예된다. 2004년 3월에스페인의마드리드에서폭탄테러가일어난것을계기로야당인기민당은새로 운이민법에국가안전의문제를고려하는조항을추가삽입할것을촉구한다. 드디어 2004년 5 월, 새이민법이하원을, 7월에는상원을통과함으로써 2005년 1 월부터새이민법이발효된다. 특히기술전문인력에대한개방폭이확대되었다. 앞서간단히본대로독일은고실업상황에서도저출산율과전문기술인력부족으로미래 사회에적절히대처하기가어려운상태였는데, 1999년부터집권한사민당의슈뢰더총리가이 에대한대책의일환으로일명그린카드구상이나온것이다. 기업들의요구에따라해외에 서정보통신분야전문인력을받아들이는것이다. 보수기민당은그직후연방주선거에서 인도인(IT 분야전문인력) 대신우리어린이들이라는외국인적대구호를내세우며반대했 다. 일부노동조합도이렇게실업자가많은데왜외국에서노동인력을데려오려하는가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결국은독일경제를위해한걸음씩양보한셈이다. 실제로현재등록된실업자는 400 만명정도이나, 채워지지않은일자리도 40 만개나있으며, 실제노동력이필요한일자리는 3 배이상이될것으로추정된다. 모자라는인력은컴퓨터분야뿐 아니라기계공학과항공공학, 생명공학분야와서비스업에도해당된다. 앞으로는양로원, 병원, 간병업무나실버산업에도노동력부족현상이나올것으로예측된다. 문제는이분야에필요 한인력을현재의실업자로는채울수가없다는것이다. 독일의빈일자리는새로운직업적자질 을요구하기때문이다. 그런점에서독일은자체적으로필요한교육훈련체제를재정비해야하며그러한자립능력 이공고해질때까지는시급한전문인력에대한개방의문을열필요가있다. 또한제도적개방과더불어외국인에대한사회심리적적대감을해소하는노력도필요하다. 즉외국인들은독일인에게서일자리를뺏고망명자수용법과사회복지제도를악용하는범죄집단이라는피해의식이사라지지않는한, 독일인과소수민족들사이의상호존중과사회평화는이루어지기어려울것이다.
2. 독일내이주노동자구성과현황 2004년현재독일에는약730만명의국제이주민이살고있어전체인구중비율은약9% 에 이르러유럽여러나라중에서도비교적높은편이다. 이러한추세는1996년이후큰변화없이 대체로일관되게유지되어왔다( 표 1 참조). 이와같이 1950년대이래독일은수많은외국인들에게새로운삶터와일터를제공하는나라로 통해왔다. 물론독일에서해외로나간외국인도많지만대체로해외에서독일로들어오는외국인 이더많은추세를보였다( 표 2 참조). ( 단위: 명) < 표 1> 독일인구와외국인비중 기준시점총인구 G 외국인 A 외국인중 EU 국민 A/G 비중 1996년말 2000년말 2002년말 82,012,162 82,259,530 82,536,700 7,314,046 7,296,817 7,335,592 1,836,570 1,870,062 1,859,742 8.9% 8.9% 8.9% * 자료: 연방통계청 < 표 2> 독일로들어간외국인과떠난외국인의수(1996-2002) ( 단위: 명) 연 도 입국외국인 출국외국인 차 이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707,974 615,298 605,500 673,873 648,846 685,259 658,341 559,064 637,066 638,955 555,638 562,380 496,987 505,572 148,890-21,768-33,455 118,235 86,466 188,272 152,769 * 자료: 연방통계청. 독일의총8천2백만명의인구중외국인이730만명정도살고있지만그들의국적별분포 를보면상당한편차를보인다. 우선터키인이 187 만명으로전통적으로최다수를차지해왔고,
그다음으로유럽연합국출신자가 180 만명을조금넘는수준이다( 그중이태리 60 만명, 그리스 35 만명, 오스트리아 19 만명, 포르투갈 13 만명, 스페인 12 만명, 네덜란드 11 만명). 다음으로 는구유고연방사람들이모두 100 만명가까이된다( 세르비아및몬테니그로 57 만명, 크로아티 아 23 만명,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16 만명)( 표 3 참조). 국적 터키 < 표 3> 독일내국제이주민의국적별분포(2003 년말기준) 세르비아 / 몬테니그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수 1,877,661 568,240 236,570 167,081 61,019 ( 단위: 명) 국적 유럽연합총계 이태리 그리스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수 1,847,712 601,258 354,630 189,466 130,623 125,977 * 자료: AZR( 외국인중앙등록소, Ausländischer Zentralregister). 독일내국제이주노동자로일하는사람의수는약 200 만명내외로, 독일취업자중약 7-8% 를차지한다( 표 4 참조). 예전에 10% 이상을차지하던시기를생각하면갈수록외국인취업자 비중이줄었음을알수있다. 그것은지금도현재진행형이다. 그러면과연독일내국제이주노동자의국적별분포는어떠한가. 1992년엔터키출신이 63만 명, 유고 32만 5 천명, 이태리 17 만명, 그리스 11만5 천명, 스페인 6 만명, 포르투갈 4만7천명 기타 56만 2 천명순이었다. 10년이지난 2002년 6 월기준으로보면, 터키출신이여전히최다수 인 53 만을차지하나꽤많이줄었음을알수있고, 다음으로구유고연방 28 만명, 이태리 19만 명, 그리스 10 만명, 포르투갈 4만 6 천명, 스페인 3만 9 천명으로나타났다( 표 5 참조). 산업별분포를보면, 제조업부문에 94만명이취업하고있어전체이주노동자의절반이상을 차지하고있다. 다음이서비스업( 식당, 호텔, 청소등), 상업, 건설업순이다. 국제이주노동자의노조가입률은 33.8% 로국적별로보면터키인이 44.9%, 그리스인이 45%, 이태리인이 41.0%, 스페인이 41% 등이다. 특이하게도국제이주여성노동자들의경우노조가입 률이 53% 로남성들보다더높게나타나고있다.
< 표 4> 독일취업자와외국인노동자비중 ( 단위: 명) 기준연월전체취업자수취업자중외국인의수외국인중유럽연합국민 1999년 6월 2000년 6월 2002년 6월 2003년 6월 27,361,444 27,824,486 27,571,147 26,954,686 * 자료: 연방직업소개소(Bundesagentur für Arbeit) 2,033,590 1,963,620 1,959,953 1,873,939 648,007 645,513 618,212 585,160 < 표 5> 독일내국제이주노동자의국적분포( 사회보장적용받는피용자기준) 국적 터키구유고연방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나머지유고 * 유럽연합 15개국 * 유럽연합 25개국이태리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 * 자료: 연방직업소개소(Bundesagentur für Arbeit) 노동자수 2002년 6월말 2003년 6월말 534,521 33,497 66,099 183,488 618,212 758,239 197,575 107,339 46,713 39,636 502,303 34,350 66,485 181,725 611,364 754,175 195,245 106,141 46,114 39,162 ( 단위: 명) 독일노동조합은국제이주노동자를초기부터조합원의완전한권리를부여하면서통합해왔 다. 독일노동조합연맹(DGB) 의지도부가모든국제이주노동자에대한평등대우에찬성하는근 본적인결정을한것은 1954 년이었다. 이결정으로국제이주노동자들이직장평의회(Betriebsrat) 선거에참여하기도하고평의원으로선출되기도하였다. 예컨대, 쾰른에위치한포드공장의 경우터키출신노동자의 80% 가금속노조(IG Metall) 조합원이고, 이는독일인조합원에비해 2 배이상높다. 광산노조(IG Bergbau) 의경우 70% 가량이국제이주노동자로구성되기도했 다.
독일은복지사회원칙에따라모든국민이사회안전망의보호를받는다. 국제이주자들도의 료보험, 실업보험, 사회복지보조금, 연금, 자녀들의의무교육등기본혜택을받고이민자들또 한사회의복지유지에큰기여를한다. 즉, 독일 GNP의약 10% 는국제이주민이창출하고, 독일 산업의일정부문은이주노동자에의존한다( 특히음식업, 건설업, 병원, 양로원등). 그러나 50 년가까운이주생활에도불구하고여러구조적문제로인해경제적, 사회적, 문화 적으로그들이독일사회에동화되어동등위치에있다고할수없다. 대부분이민자들은단순 노동자로서교육수준이낮고출발에서부터한계를갖고있으며고질적인저소득, 고실업률( 독 일평균보다약 2.5 배가높다), 자녀교육문제등많은문제를겪는다. 물론노동허가를취득하고정식고용된이주노동자는원칙적으로독일노동자와동일한노 동조건( 특히시간당임금이나주당노동시간, 복리혜택등) 을얻는다. 그러나소득향상에대한 열망이높은이주노동자들의경우노동시간은대체로길거나독일노동자가꺼리는시간대( 야간 이나주말) 에일하기도한다. 1993년이후 EU 차원에서노동력이동의자유가확대되자상황은 많이변했는데, 독일로들어오는외국계하청회사에고용된이주노동자의경우독일노동자임 금의절반에이르기도했다. 이에대해독일노조는예의 동일노동동일임금 요구를내세 우기도했다. 이것은인간적측면의요구이기도하나, 동시에저임노동력유입으로인한일자리 상실을두려워한결과이기도하다. 국제이주자들이독일사회에서거부, 배척을당하면서동화되는데제일큰걸림돌은사회전 체에직 간접으로나타나는인종차별주의와극우주의이다. 그동안독일사회의밑바닥에깔 려있던것이통일후이민자에대한과격한폭력행위의형태로표면화되기시작했다. 극우파의 폭력행위는 1982년에 80 건에서, 1990년에 309 건, 2000년에 998건으로지난 20년간 12배이상으 로증가하였다. 최근의동향을보면, 독일등일부 OECD 국가에서는이주노동자를새로이모집하려한다. 인구고령화및노동시장의지속적불균형( 특히, 정보기술분야의첨단인력부족현상) 은이동 향의일부를대변한다. 다수 OECD 국가는숙련및고숙련이주노동자를끌기위해노력하고 있으며, 학위취득후외국인학생의노동시장진입을원활하게만들고있다. 노동이주에관한 신규법률제정은노동시장의새로운요구에부응하려는노력의일환이다.
한편, OECD 국가들의 2002년노동인력에서외국인및이주자들이차지하는비중은상당한 편차를보인다. 이민국가인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에서외국인노동력은 15% 에서 20% 사이의비중을보이고스위스에선 22%, 룩셈부르크에선 43.2% 를차지하는데비해, 독일은 9% 정도로, 오스트리아 9.9%, 벨기에 8.2% 와비슷한수준이다. 3. 독일정부의이주노동자정책 독일정부는 EU 회원국출신이아닌여타국제이주민의취업에대해서는체류허가와노동허가를통하여규제해왔다. 국제이주민은체류허가를얻은후에노동허가를취득할수있으며, 노동허가를받지않고취업한사람은미등록( 불법취업) 노동자로간주된다. 독일정부는국내노동시장의구조적상황변동에따라노동허가제를통해필요노동력의수 급조절을해왔다. 예컨대, 노동허가제를실시한 1955년실업률은 5.2% 였으며, 해외인력고용 을확대하던 73년까지연평균실업률은 1.7% 였다. 약 20년간독일노동시장은인력난에시달릴 만큼거의완전고용이었다. 외국인이독일에서취업하려면체류와노동허가를받아야한다. 먼저노동허가를받기위해 서는체류허가를취득해야한다. 고용촉진법(Arbeitsförderungsgesetz) 은노동허가에대한법적 근거를규정하고있으며, 체류허가는외국인취업을위한체류허가에관한규정에근거를두고 있다. 전통적으로노동허가제는일반노동허가와특별노동허가로나누어졌다. 일반노동허가는 이주민본인이신청하면해당지역의직업안정소가노동시장상황을고려하여허가를한다. 노동 허가의유효기간은최고 2년이지만이기간에계속고용된경우에는 3 년까지연장할수있다. 특별노동허가는이미독일에고용되어있는이주민에게노동시장상황에관계없이본인의 신청에따라허가하는것이다. 지역이나직종에제한을받지않고관할노동청에신고한다. 특별 노동허가에는기한부특별노동허가와무기한특별노동허가가있다.5년간독일에서합법적 으로고용되었거나독일인배우자를얻거나, 난민여행증명서를소지한자나 18세이전에입국한 합법적부모를가진이주민자녀거나특별한사정이있는경우,5 년간특별노동허가를받는다.
한편,8년간합법적으로계속고용된국제이주노동자에대해서는무기한특별노동허가가발급된다. 독일이특별노동허가제도를채택한이유는고용주들의요구때문이다. 고용주들이숙련노동자를귀국시키고미숙련노동자를새로받아들이는교체순환원칙 (Rotationsprinzip) 에반발했기때문이다. 그뒤독일은 1997년고용촉진법을개정하여과거의일반노동허가와특별노동허가를노동 허가 (Arbeitsgenehmigung) 와취업권 (Arbeitsberechtigung) 으로대체했다. 한편, 독일정부의이주노동자정책의특징은독일의노동시장상황에따라노동력유입을적 절히규제하면서도인력부족산업에기여하는이주민을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통합하려는 정책을병행하는, 규제와통합의양동작전이다. 즉, 1973년 11 월, 국제이주노동자모집을중 지한이후로도이주자수가증가하자 1983년에이주민귀국촉진법을제정하는등이주민을규 제하였다. 그후에도불법취업자를고용하는사용자에대한벌칙을강화하고이주노동자가귀 국하는경우귀국후의주택자금을원조하는등규제정책을폈다. 그러나규제정책과더불어 이미독일에정착한이주민에대해서는교육및사회보장등, 이주노동자와그가족을사회로 통합하려는제도를실시해왔다. 독일이이런정책을사용하는이유는, 일단외국인이독일사회 에정착하고나면현실적으로귀국시키기어렵고이들이독일사회에통합되지않는한더큰사 회문제를야기하기때문이다. 요컨대, 라인강의기적으로불리는경제의고도성장기에일시적노동력부족현상을타개하기 위해시작했던독일의노동력수입개방정책은유입제한정책이나귀국촉진정책과같은규제 정책과더불어사회통합정책이결합되는형태로나타났다. 참고로, 독일의정당들은이주노동자정책과관련, 상당한차이를보인다. 기민당은독일은 이주의나라가아니다를기본기치로손님노동자라는말이의미하듯, 엄격한노동허가제를적 용하려했다. 사민당은기민당과유사하면서도외국인도같은인간이라는입장위에일단이주한 노동자에대해선동등한권리를보장하고자했다. 녹색당은좀더근본적으로지구촌시민은동 일하다는입장에서노동권뿐만아니라시민권까지보장하고자했다. 한편, 노조는처음부터사 민당과거의견해를같이하고, 이주노동자에대한동일노동동일임금원칙을고수했다.
그런데이러한규제와통합정책도 21 세기에들어일정한변화를겪는다. 특히독일은컴퓨터 산업분야에많은전문가가부족하여 2000 년부터해외에서전문인력을초대하기시작했다. 또 여야는오랜논란끝에해외전문인력특히컴퓨터분야의취업체류를쉽게하고이민을허용 ( ) 하는한편, 정황증거만으로도종교적극단주의자나테러가능성이있는외국인을추방하는내용 을골자로한새이민법개정에합의했다. 지난 3년간의회내여야간협상절차를거쳐 2004년확정되고 2005년부터발효되는새이 민법(Zuwanderungsgesetz) 의주요내용은다음과같다. 노동이민:EU비회원국가의노동자들에게도처음부터영주권을줄수있도록하며이민을 허용한다. 독일기업은엔지니어나컴퓨터기술자, 연구원이나학자, 기업간부등수준높은외 국인노동자들을채용할수있다. 유학생의체류와취업: 독일에유학온외국인들은종전에는학업을종료하면즉시출국해 야했으나앞으로는학위를마친학생들이일자리를찾기위해 1 년간체류하는것을허용한다. 다만전문능력이있고독일내의시급한수요와외국으로두뇌유출가능성이있는경우에한해 노동청동의를거쳐체류허가를내준다. 사업이민: 독일경제와고용시장에긍정적효과를줄것으로예상되는자영업자의이민에 관한법적근거를마련한다. 중요한경제적이해나특별한지역적수요가있을경우등으로전제 조건을규정해허가한다. 잠재적테러용의자추방: 독일내에서범죄를저지른일이없더라도의심스러운인물에대 해서는내무장관이실질적증거에입각한위협판단에근거해추방할수있다. 체류허가: 영주권을얻거나독일국적을취득하려는외국인에대해서는방첩기관인헌법 수호청이사전조사하도록한다. 기존에도헌법수호청의조사는가능했으나실제조사한경우는 매우드물었다. 그러나앞으로는조사가의무화된다. 독일사회적응교육: 독일사회에통합시키기위한언어와문화, 역사, 법규등에관한프 로그램에체류자들의참여를법으로의무화한다. 관련비용은정부가지원하되불참자나미이수 자에대해선체류연장불허등의불이익을준다. 종교적극단주의자와인신매매범추방: 극단적이슬람주의를설교하는등의종교적극단주 의자를추방하는일을더손쉽게한다. 현행법은다른사람들에게폭력을공개적으로교사, 옹호 하는경우에만추방토록하고있으나, 증오를부추기는행위등을포함해추방대상행위를확대
하고더구체적으로규정한다. 인신매매와관련해 1년이상의형을받은경우추방할수있도록 한다. 인권차원의난민허용: 강제로할례를받을위험에처한여성등성적인특수성때문에박 해를받거나비국가기관의박해를받을수있는외국인들에게난민을인정을한다. 이경우제 네바인권협약의기준을충족해야한다. 이러한내용의새이민법이 2004년 7월 8일상원에서통과됨으로써그간순수혈통을고집해 왔던독일이다인종국가로전환하는전기를맞았다고볼수있다. 특히전문기술인력이나전 문학술인력의취업체류와이민에대해합법적기반이마련되었다. 독일은그동안유럽연합 (EU) 회원국이아닌국제이주노동자들의취업이민을엄격규제했다. 그러나새로운이민법안 이 2004년 5월하원을통과한데이어 7 월에상원에서가결되었다. 이법은시행령과규칙등 하위규정보완작업을거쳐 2005년 1 월부터시행된다. 이번이민법안의개정으로매년 20~30 만명의국제이주자가발생할것으로예상된다. 그간 특히전문인력분야에서노동인구감소로위협받던독일경제계가새법안덕에활기를되찾 을것이다. 사실독일은인구고령화와출산율저하등으로 2030년노동인구가현재의 4천2백만명에서 3 천만명으로감소할것으로예상되었다. 이런절대적노동력감소를이번이민법개정으로인 해상당부분보충할수있을것이다. 그러나앞으로 20~30년의앞일을내다보며독일의노동 시장문제를순조로이해결할것이라확신할수는없다. 독일에는현재 7백30만명의외국인이거주하고있어전체인구중외국인이차지하는비율 (9%) 이유럽국가중가장높으면서도유럽에서가장보수적인이민정책을고수해온나라였다. 물론새이민법이외국인의독일이민을미국이나캐나다수준으로만든것은아니나전문인력 들에게문이많이열린것만은분명하다. 한편, 이민규정이여전히다른나라에비해까다로울뿐아니라고급외국노동인력을실질적으로끌어들일수있는세부적장치가미비하다는지적도있다. 더욱이이법은범죄혐의가없는외국인이라도범죄를저지를개연성이있다고판단되면추방할수있도록규정하고있어
인권침해의요소가강하다는비판도있다. 국제이주민의독일내통합과관련추가적으로중요한움직임들이있었다. 우선은국적취득법 인데, 1999년이후사민-녹색연정이이중국적허용을추진하다가보수기민당의반대로다음의 합의가도출되었다. 즉 2000년 1월 1일부터독일에서태어나는이주민아이들은부모중한쪽이 적어도 8년이상합법거주를하였고무기한체류허가나영주권을소유하고있으면자동으로독 일인이된다. 또이주민자녀들은원칙적으로만 24세전에독일과부모국적중하나만선택해야 한다. 이로써기존의속인주의원칙이속지주의원칙으로바뀌었다. 법개혁후에독일국적을신 청하는이주민의수는점차늘고있으나정보부족과고령층의원국적포기가어려워예상보다는 적다. 또반차별대우법(Antidiskriminierungsgesetz) 제정도있는데, 그것은독일국적을취득해도피 부색과문화가다른이민자들은사회생활에서많은차별을느끼기때문이다. 가령, 택시운전기 사로일할때, 식당이나유흥장을이용할때, 주택을구할때, 은행이나보험거래시차별대우 를받는다. 이런무시및차별대우는현존하는공법으로다루어질수없기에반차별대우법을통 해해결하고자한다. 4. 독일의이주노동자정책에대한평가 1999년이후새독일을이끄는사민당과녹색당은 16 년간장기집권했던보수기민당(CDU) 과는달리, 독일이 50년가까운이민사회라는엄연한사실에입각하여이민자들을독일사회 의일원으로인정하고그들이정착, 동화할수있는합리적이고인간적인정책을수립하고자 한다. 나아가기존의모집중지정책을중단하고새로운전문인력을공급하기위한문호개방 정책도펴고자한다. 1950년대부터약 20년간계속된해외인력도입정책은경제난과노동시장악화로인해 1970 년대중반이후유입규제정책, 그리고 1983년이후귀국촉진책등으로방향전환이되었다가 이제또다시 20년이흐른지금정보기술분야의부족한전문인력을대거유입하기위해새로운 개방정책이나온것이다.
그러면서도독일경제의필요에따른국내노동시장문제나치안과관련한사항들에만초점을 맞추었던이전의이민자동화정책과는달리, 현재는이민자들이독일사회에서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독일인들과동등하게균등기회를누릴수있게체계적동화정책을수립하려한다. 요컨대새연합정부는이민자를부족한존재로보고독일사회, 문화에흡수적응을요구했던 종래정책을비판하고, 이민자들의고유한정체성을인정하여이민자를보살피는게아니고파 트너로삼자는기치를내세우고있다. 대개노동허가제로상징되는독일의이주노동자정책은많은이주민의귀국거부및독일내정착, 인종갈등등을근거로하나의대표적실패사례로지적되기일쑤다. 그러나이러한평가는지극히자국민중심적이며심지어인종주의적이기까지하다. 오히려노동력부족을타개하기위해해외인력을도입했다면독일처럼이주노동자들도동일 한노동 3 권과사회보장권을누려야하며, 본인이원하는경우일정한조건속에서시민으로정 착해서거주하는것도허용해야한다. 물론독일정책이결코완벽하거나최선의사례라고보기 는어렵다. 하지만다양한사회적견해차를해소하려노력하면서도인종주의에대해경계를게을 리하지않는노력은높이평가할만하다. 이런점에서독일사례를노동허가제의실패사례로보기보다는, 오히려노동시장에서의조심스런문호개방과체계적인사회통합정책을조화롭게만들려고노력하는선진사례의하나로보는것이더올바를것이다.
독일의개인정보보호제도 한재각, 민주노동당연구원 2004년 8월 독일은 70 년대초부터개인정보를보호하기위한법제도를발전시켜왔다. 우선일부주에서시작된개인정보보호법제도들이발전하여, 나중에는연방차원의개인정보보호법제도가운영되기시작했다. 그후, 이법은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확립하는연방재판소의판결을통해서보다강화되었으며, 1995년마련된 EU 차원의개인정보보호준칙에맞추어서한단계더발전하게되었다. 연방국가인독일은연방과주차원에서각각역할을분담하여개인정보보호체계를구축하고있으며, 연방과주차원의개인정보보호법이마련되어있다.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개인정보보호에관한연방차원의일반법으로서공공과민간부문에모두적용된다. 다만, 연방개인정보보호관은원칙적으로연방의공공부문에한정하여감독을하며, 주의공공과민간부문의감독은각주의개인정보보호관이담당하게된다. 한편,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질의권, 통지받을권리, 정정권과삭제권, 이의제기권및문의권등정보주체의권리를명확히보장하고있다. 주개인정보보호관의임무는공공기관및민간에서이루어지는정보처리가연방및주의개인정보보호법률에부합되도록감독하는역할을수행한다. 독일의민간부문에서는자율적규제방식인, 소위 독일모델인개인정보보호관제도를활발히 운영하고있다. 개인정보보호관제도는연방혹은주정부에개인정보보호와관련된신고의무를면 제하는대신에, 기업내부에개인정보보호를책임지는담당자를지정하여운영하는제도다. 개인정보 보호관은일정기준이상의기업에는의무화되어있으며, 업무수행과관련하여해고할수없는등 높은수준의독립성을보장받는다. 또한, 이들은기업의내부활동이연방법등의개인정보보호법률 과일치하도록감독하는책임과, 이것이지켜지지않아발생하는손해배상에대한책임을함께진다. 도이췌텔레콤의경우, 그룹차원에서 50 여명의개인정보보호담당직원을두고, 연간 600~700만유 로( 약 84~8 억원) 의예산을지출하고있을정도다.
1. 들어가며 교육부가추진한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가사회적쟁점이되면서, 시민사회가오래전 부터주장해온개인정보보호법을제정해야한다는주장에대한사회적관심이높아지고있다. 가 상(on-line) 과현실세계(off-line) 의구별없이공공과민간영역의개인정보의수집 이용에대해 행정지침이아닌일관된원칙과법체계를통해서규율하고, 이를독립된감독기구를통해감시 하도록하자는주장이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몇십년앞서개인정보보호법을제정하고운영 해온서구의사례, 특히, 독일의제도에대한관심이높아지는것은이런배경때문일것이다. 이글에서는독일의개인정보보호법제도의발달역사와특징을개략적으로살펴본후, 독일 개인정보보호법제도의골간이라고할수있는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주요내용을소개하고자한 다. 또한, 주별로마련하여운영하는개인정보보호제도도언급할것이다. 민간부문의실질적인 개인정보보호는주법의운영에크게의존하기때문에그실질적인의의는크다고볼수있다. 또한민간영역의제도도집중적으로살펴볼예정이다. 현재우리나라에서도민간영역에적용되는개인정보보호일반법이제정되어야한다는필요성이제기되고있기때문에이는시의적절하다고본다. 이를위해서민간영역을규율하는연방과각주의개인정보보호법의규정과독일전문가들이강조하는독일식모델인개인정보보호관제도를소개하려고한다. 2. 독일개인정보보호법제도의발달과특징 1) 독일개인정보보호법제도의발달 개인정보보호에관한법률은 1970 년헤센주에서처음제정되었다. 이어서 1974년에라인란트- 팔츠주가개인정보남용금지법을제정하였다. 주차원에서개인정보보호법제도가먼저수립된 후,1977 년연방차원의연방개인정보보호법이제정되었다. 당시에는개인정보보호의측면보다는 행정의효율성이강조되었던초기정보화사회였기때문에, 현재와같이보호와활용의조화를강 조하던시기와는차이가있는선도적인조치였다.
한편,1983년연방헌법재판소는인구조사판결에서수집한데이터를단순히통계목적을넘 어행정적인목적으로이용하고자한사건에대해위헌결정을하면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확 립하였다. 당시언론에서는이결정을 20세기의판결이라고부르기도했다. 이판결결과를수 용하기위해서 1986년에 1 차, 1990년에 2 차연방개인정보보호법개정이있었다. 이어 1995년에 유럽연합(EU) 의개인정보보호준칙(Directive 95/46/EC) 이제정되면서, 독일정부는이유럽연합 개인정보보호준칙과연방개인정보보호법이조화되도록 2001년 1월에광범위한 3차법개정을하 였다. 유럽연합의준칙이개정을요구한시기인 1998 년을넘겨개정된것이다. 그러나이와같은 법개정에도불구하고, 유럽연합개인정보보호준칙이요구하고있는공공과민간부문의실질적 인통합이이루어지지않은점과독립성이완벽히보장되는감독관청의설립이미흡했다는점에 대해서비판이제기되었다. 독일연방정부는현대화된기술과세계화추세에맞추어이법을현대화시키기위해법률개정 을준비하고있다. 그중에는독일연방정부가정보통신분야의개인정보보호를위해서별도로제 정한법률등을통합하는과제도있다. 1997년 7 월에제정된 < 통신서비스정보보호법> 과통신법 제85조와제 89 조, 통신서비스업정보보호규칙등이그대상이다. 2) 연방국가의특징 연방과주의권력분립원칙에따라연방개인정보보호법에근거한연방개인정보보호관청의감 독범위는연방의공공부문에만한정되고, 각주의개인정보보호법에근거하여설치된개인정보 보호관청의감독범위는각주의공공과민간부문모두를포함한다. 다만, 주의공공기관일지라 도어느한주의개인정보보호관청에만감독권을주기가부적절한부분에는연방개인정보보호관 청의감독권이미치도록하였다. 연방과주정부개인정보보호관청은직무상상호독립적이지만, 업무협의를위해연 2 회합동회의를갖으면서협력하고있다. 3) 역사적배경으로인한특징 나치정권의유태인색출과학살이정부의과도한개인정보의수집과용이한접근에기인했다 는반성과구동독지역에서주민에의한주민통제와정보유출로인해발생할수있는사회적 불안감때문에독일은아직까지연방차원의정보공개법을마련하지않고있다( 다만, 몇몇주에서
주정부개인정보보호관이정보공개에관한업무까지수행하고있다). 공공기관이발행하는신분 증은각주의가장아래단계의관공서가발급하는데, 수집된개인정보는전산화하지않고서류 형태로보관하고있으며, 원칙적으로상급관청에넘기지도, 다른기관과공유하지도않는다. 다 만외국인에대한통제는각주를벗어나연방차원에서실시하려고하기때문에이와관련된 전산화작업이확대되고있다. 3. 연방차원의개인정보보호법제: 연방개인정보보호법 가.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적용범위 (1) 개인정보의범위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개인정보를특정한또는특정인을유추할수있는개인에관한일체의 ( 진술) 정보라고정의하고있다. 따라서개인정보에는컴퓨터등정보처리장치를이용하여처리하는자동화된개인정보뿐만아니라비자동화된개인정보도모두포함된다. 여기에서자동화된개인정보란정보처리장치를이용하여처리되는정보를말하고, 비자동 화된개인정보란동일한방법으로작성되고특정한표시에따라접근할수있고활용할수있 는개인정보의모음을말한다( 위법제3 조). 다만, 공공과민간부문에적용상의차이를두어, 공공기관이처리하는정보는자동화된개인정보와비자동화된개인정보모두를, 민간정보는 자동화된개인정보만을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적용대상인개인정보로규정하였다. (2) 법률적용대상자의범위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개인정보보호에관한연방차원의일반법으로서공공과민간부문에모 두적용되고, 민간영역인경우는자연인은물론법인이나기타단체에이르기까지모든개인정보 취급자를법률적용대상자로정하고있다( 위법제1조제2 항). 일반법의지위를갖고있으므로특정한영역에개별법이있는경우에는그개별법이특별법으 로서연방개인정보보호법에우선하여적용되고( 위법제1조제3 항), 감독기관의감독권이미치는 범위에서연방개인정보보호관의감독범위는원칙적으로연방의공공부문에한정된다( 위법제 24조 1 항).
나. 연방개인정보보호관 (1) 법적지위 연방개인정보보호관은행정조직상연방내무부소속이고, 장관의감독을받는독임제관청이 며, 현재약 70 명의전문가들로구성되어있다. 연방개인정보보호관은공무원신분으로임기 5 년에중임이가능하며, 연방의회에서선출하고대통령이임명한다. 또한유럽연합의개인정보보 호회의에국가를대표하여참가하기도하는데, 유럽연합의실질적인개인정보보호대책은각국의 연방개인정보보호관이수행하고있다고평가된다. 연방개인정보보호관은조직상연방내무부소속이지만직무상으로는독립성을완전히보장 받고있다. 예를들어, 연방내무부장관은연방개인정보보호관의직무에대한감독권도, 업무 보고를받을권한도없다. 연방개인정보보호관은연방의회에대해서만업무보고를할뿐이 다. 예산의경우에도, 연방내무부에서지원을받지만연방개인정보보호관이매년의회에직접 출석하여필요예산에대하여의견을진술하고예산을할당받고있다. 감독범위는원칙적으로 연방의공공부문에한정되며, 다음과같다. 1 연방정부와연방법원 2 연방정부의감독하에 있는법인, 공공시설, 재단. 이들중우리나라의공사와같은공기업은시장에서경쟁에참여하지 않는경우( 즉, 독점인경우) 에연방의감독범위에속한다. 다만, 도이췌텔레콤은민영화되었고 독점도아니지만관례적으로연방개인정보보호관의감독권에속한다.3주정부가설립했으나 수행하는업무범위가해당주를넘어서는공공기관. (2) 직무와권한 연방개인정보보호관은개인정보보호에관하여법적인정보보호, 기술적인측면에서필요 한교육과자문을하고, 개인정보와관련된법이나제도의도입에대한의견을제시한다. 둘 째, 개인정보처리에대한각종불만과고충사항을접수하고이에대한상담이나기술지원 및분쟁을조정하는옴부즈맨의역할을수행한다. 셋째, 정보주체의개인정보침해신고가 있거나감독관이필요하다고인정하는경우에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준수여부에대한감 독을위해해당사항을조사한다. 넷째, 조사한기관에법위반행위나개인정보처리에서부 적절한점이발견되는경우해당기관에자료제출과함께시정계획을포함한진술서를요구 하고, 상급기관에통보하는권한이있다. 하지만시정명령권등강제력은없다. 다섯째, 정보 주체의질의에대해해당기관이거부한경우이에관한이의신청에관련된업무를담당한다. 여섯째, 개인정보를처리하는연방공공기관의개인정보담당관은개인정보를생산( 저장, 변
경, 전송, 차단, 삭제를포함하는개념) 하기전에개인정보처리기관, 개인정보의수집생산 이용의목적, 개인정보의삭제를위한기간, 제3국으로의전송계획등을보고할의무가있는 데, 이러한보고를받고감독하는업무를수행한다. 다. 정보주체의권리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정보주체의권리를명확히규정하고있다. 우선질의권이보장된다( 연방 개인정보보호법제19 조). 정보주체는개인정보를처리하는기관에개인정보의출처, 수집된정보 의내용, 수집의목적, 개인정보가계속적으로전달되고있는경우그수신처등을질의할수있다. 질의를받은기관은법정거부사유가없는한질의에응답을해야하고, 응답을거부한경우정보 주체는연방개인정보보호관에게이의를제기할수있다. 또한통지받을권리가있다( 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19a 조). 정보주체의동의없이개인정보를 수집한경우그기관은수집기관의명칭, 수집 저장 생산 이용의목적등을정보주체에게 통지해야한다. 이외에잘못된개인정보보호에대해서정정을요구할수있는권리, 삭제를요구 할수있는권리가보장되며, 이의를제기할수도있다( 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20 조). 그리고문의 권도보장되는데, 모든사람은연방의공공부문에서개인정보의수집, 생산, 이용을통해자기의 권리가침해되었다는확신이있을경우연방개인정보보호관에게문의할수있다( 연방개인정보 보호법제21 조). 라. 개인정보침해에대한구제수단 우선개인정보보호기관을통해서위에서열거한질의권, 정정요구권, 삭제요구권, 이의제 기권등을이용하여구제받을수있는수단이있다. 또한, 연방개인정보보호관은연방공공기 관에대한강제권은없으나개인정보침해에관련된피해신고를접수하고해당기관과분쟁을 중재하는옴부즈맨의역할을수행한다. 마지막으로, 사법절차를통한구제수단이있다. 개인정보처리기관이법을위반하거나부적 절한정보처리로인해개인에게손해를입힌때에는해당기관은물론그기관의개인정보보호 관도손해배상책임이있다. 재산상손해가없는경우에도인격권에대한중대한침해가있는경 우는손해배상책임이있다. 손해배상액은 130,000 유로( 약 1억8 천원) 를상한으로법률에정해 두었다.
4. 주차원의개인정보보호법제 가. 개설 각주의특성에따라다양한형태의개인정보보호법이존재한다. 공통되는점은연방정부와 마찬가지로독임제관청으로서명칭은다르지만임무가유사한개인정보보호관을두고있으며, 주정부개인정보보호관의감독권의범위는주의공공부문뿐만아니라민간부문에까지미친다. 특이하게도연방정부와는달리개인정보보호관이개인정보보호업무와더불어정보자유업무 ( 우리나라의행정기관의정보공개업무에해당) 까지수행하도록규정하고있는주도있다( 노르 트라인- 베스트팔렌, 슐레스비히-홀스타인등 4개주 ). 나. 주정부개인정보보호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정부의예를간략히살펴보자. 이들주는독자 적인개인정보보호법을갖고있다. 이들모두주의회에서선출하는개인정보보호관을두고있으 며, 개인정보보호관은개인정보보호업무와함께정보자유( 정보공개) 업무도수행할수있는권한 이있다. 여기서정보자유는우리나라의정보공개청구와관련된업무에해당한다. 정보공개는우 리나라처럼공공기관이보유하는정보에대해일반적인공개청구권이인정되는것이아니라정 보주체자신과관련된정보만그공개대상으로하고있다. 한편, 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의개인정보보호관은현재비정부기구인독일정보보호연합 (DVD) 의협회장의직위를함께갖고있다. 이는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의개인정보보호관이 정부기구로서감독관청이지만실제로는 NGO 의역할을하고있다는점을보여준다. 이주의개 인정보보호관은예방적보호활동, 교육, 계몽, 자문활동에주력하고있으며, 국제적행사인개 인정보보호아카데미를연 1회개최하는등국제협력사업도수행하고있다. 5. 민간부문의개인정보보호제도 5-1. EU 개인정보보호준칙의관련규정 1995년에제정되어독일을비롯한유럽국가의개인정보보호법률개정의가이드라인을제시하고 있는 EU 개인정보보호준칙은개인정보보호관을임명하고역할을부여할수있는근거조항을제 시하고있다. 개인정보를 ( 자동화) 처리하기전, 감독관청에이를신고하도록규정하고있는데, 개
인정보처리자가국내법에따라개인정보보호관을임명할경우에는신고의의무를면제할수있다 고규정하고있다(EU 개인정보보호준칙제18조 2 항). 또한개인정보를처리하기전에정보주체의 자유와권리를침해하지않는지를통제하도록규정하고있으며( 위준칙제20조 1 항), 감독관청혹 은기업의내부에서임명된개인정보보호관이그것을통제하도록규정하고있다( 위준칙제20조 2 항). 5-2.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관련규정 공공과민간영역에공통으로적용되는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제1장일반및공통규정을보 면, 이법의목적과적용범위, 개인정보보호의원칙과개인정보처리에부과되는의무내용및 개인정보보호관등에대해서규정하고있다. 특히이절에서중심적으로살펴보고자하는규정 은개인정보보호관의임명에관한제4f조와개인정보보호관의임무에관한제4g 조가있다. 현 재이조항들은민간부문뿐만아니라공공부문에도적용되고있으나, 원래이조항은민간영 역에만적용되는것으로민간부문에대해서규율하는이법의제3 장에포함되어있었다. 2001 년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개정시공공부문에대해서도개인정보보호관제도를도입하기위 해서제1 장으로옮겨왔다. 프랑스가양자부문을실질적으로통합운영하고있는점이이런변 화의동기로작용한것이다. 개인정보보호관의임명, 역할과권한등에대한보다자세한내용 은제6 절에서살펴보기로한다. 한편, 기업등이개인정보보호관을임명함으로써면제받는신고의의무와사전통제의의무에 대해서개략적으로살펴볼필요가있다. 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4d 조에의하면, 민간부문의자 동화된개인정보의생산절차는해당감독관청에신고하도록되어있으며(1 항), 개인정보보호 관을임명할경우에그러한의무를면제해주고있다(2 항). 또한자동화된개인정보생산이정보 주체의권리와자유에특별한위험가능성이있을경우개인정보생산전에검사( 사전통제) 해야 한다(5 항). 사전통제는일차적으로개인정보보호관이행하며, 필요한경우에해당감독관청과 협의하도록하고있다(6 항). 의무화된신고내용은제 4e 조에서규정하고있다. 공통적인규정이외에민간부문에대해서특별히규율하는내용은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3장 ( 민간부문과공법상의경쟁기업의개인정보생산) 에서규정하고있다. 위법제3장의 1절에서는 개인정보생산의법적근거에대해서, 제장제절은 3 2 관련인의권리를다루고있다. 또한제3장
제절은 3 감독관청에대한내용을담고있다. 특히제장제절의 3 3 감독관청은민간부문의기업등이임명하는개인정보보호관을감독할 책임과권한을부여하고있다. 제38조 5 항에따라, 감독관청은기업등이임명한개인정보보호관 이임무수행을위해자격이부족하고신뢰성이없다고판단하면해당개인정보보호관의해임을 요구할수있다. 그리고위법제38조6항에의하면민간부문의개인정보보호에관한실행의통 제를담당하는감독관청은주정부또는그로부터위임받은기관이지정하도록되어있다. 5-3. 주개인정보보호법과주개인정보보호관에관한법률규정 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경우 대개의경우민간영역의개인정보보호에대한감독은주의회에서선출되는주개인정보보 호관이담당하게된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주의공공기관이개인정보처리과정에서 정보주체의자기결정권을보호하기위한목적으로주차원의개인정보보호법을제정하고있 다. 이주의개인정보보호법은정보보호의일반적사항을제시한 1 부에이어서, 2부에서는개인 정보보호및정보자유업무를담당하는주담당관( 이하, 주개인정보보호관) 에대해서규정하고 있다. 명칭에서도보듯이개인정보보호관은우리나라식으로표현하자면정보공개에관한업 무도감독하도록하고있으며, 주의회에서선출되어업무를위탁받고있어독립성을가지고있다. 개인정보보호관의주요임무는주의공공기관에서하는정보처리가연방과주의개인정보보 호법률에부합되도록감독하며, 이에대해상담, 교육을하는것이다. 또한개인정보보호의문제 점을발견하였을경우담당기관에이에대한이의를제기하고시정을요구할수있고, 주의회 에정기적으로보고하는의무도가지고있다. 한편이글에서관심을가지고있는민간부문의 개인정보보호와관련하여, 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38조에서규정한민간부문의감독관청은노 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개인정보보호법상의개인정보보호및정보자유업무를담당하는주 담당관으로정하고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개인정보보호법 22조 6 항). 이에따라서주 개인정보보호관은주영역내에있는기업등의민간부문의개인정보보호에관한감독관청의 역할을수행하게된다.
나. 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의경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와함께독자적이고선진적인개인정보보호제도를발전시키고있다고 평가받고있는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의개인정보보호법은주개인정보보호관및감독기구설 치에서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와는조금다른모습을가지고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는주의회에서한명의주개인정보보호관을선임하지만주의내무부소속이며, 그의업무를주 내무부소속공무원들이지원하도록하고있다. 그러나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개인정보보호법 은 4 절에의거하여독립적인감독기구를별도로설치하도록규정하고있으며, 주의회를통해서 선출된주개인정보보호관이독립적인감독기구를이끌도록하고있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개인정보보호법에서도개인정보보호주독립센터는연방개인정보보호 법 38 조가정한주의민간부문의개인정보보호를감독하는감독관청으로지정되어있다. 6. 민간부문개인정보보호의독일식모델 : 개인정보보호관 6-1. 독일식모델의개요 독일식모델이란, 기업내부에연방개인정보보호법등의개인정보보호법률을준수하도록감 독하는개인정보보호관을임명하는대신, 정부감독관청등에관련된사항에대한신고의무 등을면제해주는자율규제의체계를의미한다. 이는앞서 EU 개인정보보호준칙을통해서확립 된접근방식으로, 독일이외에몇몇유럽국가들도이미수용하고있다. 그러나독일은연방개 인정보보호법을통해서일정조건이상의기업등에게개인정보보호관을임명하도록하는의 무를강제하고있다는점( 의무적인자율규제) 에서, 국내법을통해서개인정보보호관개념을 적용하고있기는하나선택적으로개인정보보호관의임명을할수있는네덜란드와스웨덴과 는구별된다. 가. 개인정보보호관의임명의무화 앞서언급하였듯이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4f조는일정한조건이상의기업은개인정보보호관 의임명을의무화하고있으며, 서면으로임명하도록규정하고있다. 자동화된수단을통해개인정 보를수집, 처리, 이용하는기업들로서그러한활동에 4명이상의직원을고용한경우에개인정보
보호관임명의의무가있다. 또한비자동화된수단으로개인정보를수집, 처리, 이용하더라도 20 명이상의직원을정규직형태로고용하는기업도역시개인정보보호관을임명해야한다. 또한 사전평가가필요한자동화된개인정보처리를수행하는기업등은직원의수와상관없이개인정 보보호관을임명할의무가있다. 한편개인정보보호관임명의의무를가진기업등은업무를시 작한후한달이내에개인정보보호관을임명하여야한다. 이를위반할경우 25,000 유로( 약 3천5 백만원) 의벌금형에처해진다. 나. 개인정보보호관의주요임무 개인정보보호관의주요업무는고객과피고용인의개인정보가포함된정보처리과정에서연방 개인정보보호법을포함한개인정보보호와관련된법률조항들을잘준수하도록독립적으로점검 하는것이다. 이를위해서관련기업의해당감독관청과협의하도록규정되어있다( 연방개인정보 보호법제4g 조). 특히, 개인정보보호관은개인정보를처리하는프로그램의적절한사용을모니터 링하며, 기업은이를위해서개인정보의자동처리에앞서적절한시기에이에대해서통보하도록 규정하고있다. 또한기업에서개인정보를다루는직원들이각종개인정보보호법률조항을숙지 하고지킬수있도록교육하는임무도담당하고있다( 적법성의보장 ). 그리고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4f조에서자동화된개인정보처리절차에대해서해당감독관 청에게의무적으로신고하도록규정한것과관련하여, 기업은제4e조에서명시한의무신고내 용을개인정보보호관에게제공해야한다. 또한신고의무가면제된기업의경우, 개인정보보 호관은해당의무신고내용에대해서원하는사람이라면누구든지적절한방법으로열람할수 있도록보장해야만한다( 투명성보장). 또다른주요임무중하나는정보주체의권리와자유를침해할가능성이있는개인정보생 산에대해서사전통제를하는것이다. 앞서지적했듯이, 사전통제에대해서는연방개인정보보 호법제4d조제항과제항이규정하고있다 5 6. 특히사전통제를실행해야하는경우를구체적 으로규정하고있는데, 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3조제9항의특별한개인정보의생산, 능력과업 적, 행동을포함하여관련인의인격을평가하는개인정보의생산에대해서적용한다. 여기서특 별한개인정보란인종적 윤리적출처, 정치적의견, 종교적또는철학적신념, 노동조합가입 유무, 건강또는성생활에대한개인정보를의미한다. 독일정보보호및정보안전협회에따르
면, 개인정보보호관의사전통제결과, 합법성이보장되지않는개인정보처리는허용되지않 는다고밝히고있다( 사전통제). 다. 개인정보보호관의독립적지위및업무조건보장 기업의개인정보보호관은법률( 민법제626 조) 에따라보호되며, 임의로해고되지않는다. 다 만감독관청은개인정보보호관이그의임무수행을위한필요한자격과신뢰성을잃었다고판단 이되면, 해당개인정보보호관의해임을요구할수있도록규정하고있다( 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 38조제5 항아래). 한편, 개인정보보호관은기업의최고경영자에게직접복종하도록하고있어 독립성을보장받고있으나, 개인정보보호관의의견에대해서기업의최고경영자가의견을달리 할경우에이를관철시킬수있는권한은없다. 다만, 그러한이유로개인정보보호관이불이익을 받지않도록보장하여, 독립적인활동을보장해준다는것이다. 또한, 개인정보보호관은업무수행에필요한권한과수단, 직원, 사무실, 기기와장비, 재원 을제공받도록규정하고있다. 업무수행에필요하다고판단할경우, 개인정보보호관은기업의 개인정보처리에관한자료와정보에접근할수있도록보장하고있다( 도이췌텔레콤의사례는 다음소절을참조할것 ). 라. 개인정보보호관의자격조건과의무 개인정보보호관의자격에대해서법률은자세히규정하고있지는않다. 다만연방개인정보 보호관은임무수행에필요한전문자격과신뢰할수있는사람만이될수있다는규정만이있 으며( 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4f조 2 항), 이로부터유추할수있다. 독일정보보호및정보안전협회 는자신들의연구를통해서보다자세한자격조건을제시하고있다. 개인정보보호법에대한전문 적지식, 기술표준에대한충분한지식, 경제관련사업에대한기초지식, 기업구조와활동에 대한전문적지식등이그것이다. 개인정보보호관은정보주체로부터허락을받지않는한, 정보 주체의신분과정보주체를유출할수있는정보에대해서비밀을지켜야할의무가있다. 마. 개인정보보호관을포함한민간영역의개인정보보호에대한감독앞서언급하였듯이, 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38조는민간영역의개인정보보호에대한감독관청에대해서규정하고있다. 민간영역의감독관청은주로각주의개인정보보호법에의해서규정
된주개인정보보호관청으로지정되어있으며, 감독관청은개인정보보호관이업무수행에문제 가있을경우에해당개인정보보호관을해임하도록요구할권한을가지고있다. 이외에감독관 청에대한규정을좀더살펴보도록하자. 감독관청은연방개인정보보호법등을포함한개인정보보호법률의실행을통제한다. 감독관청은 개인정보에관한법규위반을인지하였을경우, 정보주체에게이를알리고수사기관에이를신고 할권한을가진다. 심각한경우에는상업에관한감독을책임지고있는관청에게산업법아래에 규제수단을도입하도록통보할권한을가진다. 또한감독관청은최소한 2년에한번활동보고서 를발간하여야한다. 그리고연방개인정보보호법제4d조에따라감독관청은신고할의무가있는개인정보의자동처리절차 에대한기록을보관, 유지할책임을지고있다. 또한감독관청은임무수행을위해서기업및기업의 개인정보보호관에게정보제공을요구할수있으며, 기업등은다른법에의해서제외되는것외에는 이에응해야한다. 감독관청이위임한직원이업무수행을위해서기업의시설등에출입하고감독할 권한을가진다. 또한감독관청은개인정보보호를위한기술적이고조직적인대책을수립하는규칙을 제정할수있는권한도가진다. 중대한문제가발생할경우, 특히인격권에큰침해가발생하였을경우 에는개인정보처리절차를중지시킬수있다. 6-2. 도이췌텔레콤의사례 도이췌텔레콤은개인정보보호와관련하여크게통신법의제89 장, 통신서비스업정보보호규 칙, 서비스정보보호법, 미디어서비스주협정, 연방개인정보보호법등에의해규율받고있다. 이기업이최근에민영화되기는했지만, 연방정보보호담당관의감독을받고있다. 도이췌텔레콤은 기업가치를생산하는요소로서개인정보보호문제를인식하고개인정보보 호제도를발전시키고있다고밝히고있다. 즉, 개인정보보호제도를발전시킴으로써, 고객과직원, 그리고주주사이에장기적인신뢰를구축할수있으며, 내외부적인프로젝트를위해효과적이고 경제적인문제해결책을제시할수있다. 또한조직내외부에서집중적이고투명한협력및통제 절차를얻을수있다. 한편, 도이췌텔레콤은정보보호의노하우를가지고있기때문에다른분야 에서도이를활용할수있으므로, 개인정보보호를전문으로하는자회사를설립해서공공기관등
도이췌텔레콤그룹개인정보보호담당관 (KDSB) ( 개인정보보호) 그룹조정회의 부문 부문 부문 부문 개인정보보호책임자 개인정보보호책임자 개인정보보호책임자 개인정보보호책임자 (LDS) (LDS) (LDS) (LDS) T-Mobile T-Online T-Systems T-Com 도이체텔레콤의개인정보보호담당조직개관( 울머박사의발표자료) 에자문을제공하는등의새로운사업분야로확장하고있다. 도이췌텔레콤의개인정보보호제도의핵심은기업내부의자율적규제를위한개인정보보호 담당조직의운영이다. 도이췌텔레콤은 1977 년부터개인정보보호담당자제도를도입, 운영하고 있으며, 그룹차원에서 50 여명의개인정보보호담당직원을두고, 연간 600~700 만유로( 약 84~98 억원) 정도의예산을지출하고있다. 이런조직의운영을통해서 20여만명의내부직원과수천 만명고객의개인정보를보호하고있다. 도이췌텔레콤은그룹전체의개인정보보호를책임지기위한그룹개인정보보호담당관과, 각 사업부문별로각각부문개인정보보호책임자를임명하고있다. 그룹개인정보보호담당관은 도이췌텔레콤경영진에게직접보고를하며, 그룹전체의개인정보보호의조정과개인정보보호 조직에대해서책임을진다. 또한개인정보보호의기술적측면을지휘하며, 개인정보보호정책의 원칙을결정한다. 한편, 부문개인정보보호책임자는법에따라하부조직을가진각각의부문을 위해서임명되는데, 경영진혹은부문의경영진과그룹개인정보보호담당관에게직접보고를 한다. 그리고그룹개인정보보호담당관이전체조직에서하듯이부문개인정보보호책임자도
해당부문의조정과개인정보보호조직에대해서책임을진다. 그외상근개인정보보호자문인, 비상근개인정보보호자문인, 그리고프라이버시지역관리자가이들을지원한다. 한편, 각부문별로운영되는개인정보보호활동에관한정보를공유, 조정하기위해서 6-8주마 다 ( 개인정보보호) 그룹조정회의가진행된다. 그룹개인정보보호담당관은매월경영진의개인정 보보호에책임을지고있는임원에게기업전체차원의개인정보보호사항을보고하며, 경영진전 체에게연례감사결과를보고한다. 이어서그룹개인정보보호담당관은부문개인정보보호책임 자로부터매월보고를받으며, 그룹차원의작업반으로부터 4개월에한번씩보고를받는다. 그 룹차원의작업반은상설운영되며모든부문에서파견된직원으로구성된다. 이작업반은그룹 전체와관련된중심적과제를다루며, 법적인요구조건( 예를들어, 훈련개발, 감사, 처리절차의 개발) 을충족될수있도록한다. 또한그룹조정회의와정기적으로의견을교환한다. 그룹차원에서진행하는개인정보보호활동으로는첫째, 도이췌텔레콤그룹이법적으로요구되 는조건을충족시키도록지원하는역할을담당하고있다. 그룹개인정보보호담당관은직원들이개 인정보보호에대해서이해하도록도와주며( 의무사항공지, 훈련과정및정보제공), 영향받는사람 들의권리를보장하고( 신고및정보제공, 정보의정정및삭제), 그룹차원에서높은수준의개인 정보보호를일관되게보장( 행동강령, 개인정보보호개념과규제수단제공, 보고, 감사및처리절 차목록제공) 할수있도록한다. 둘째, 도이췌텔레콤그룹에내 외부프로젝트및상품개발을 지원하고자문하고있다. 직원과관련된프로젝트를진행하거나도입할경우에중앙부서를, 가격 을산출하거나계약과관련된조정에대하여, 또고객으로부터민원이제기되었을경우에실행부 서를지원하고자문한다. 7. 결론을대신하여 이상에서독일의개인정보보호제도를연방개인정보보호법과일부주별개인정보보호법을중 심으로개략적으로살펴보았다. 또한민간영역의개인정보보호제도를소개하면서, 도이췌텔레 콤의구체적인실례를함께검토해보았다. 그러나독일의개인정보보호제도내용및운영현황 에대해보다완전한이해를위해서는, 이글에서다루지못한내용들도함께검토되어야할것이 다. 이에대해서몇가지지적하면서글을마무리하겠다. 첫째, 통신서비스정보보호법등과같은 개별적목적으로제정된법률의구체적인내용도함께살펴보아야할것이다. 둘째, 독일의개인
정보보호법을현대화하기위한준비작업을검토하면서, 현재독일개인정보보호제도가안고있 는문제가무엇이며어떻게개선하려고하는지도살펴볼필요가있을것이다.
독일정치교육의의미 과제 실행체계 박병석박사, 한국민주시민교육원원장 2004년 7월 민주주의는제도적발전과함께이를뒷받침할수있는사회경제적토대와실질적참여자 가존재할때에만완성될수있다. 과거반세기이상독일에서실시되어온정치교육은민 주주의의식의형성과정치문화발달에중요한기여를했다. 시대적변화에따라정치교육 의중심과제도변화해왔지만, 이것도보편과제인민주주의에대한기본질서와가치속에 서추구되어왔다. 독일정치교육의실행체계는모든교육체제, 즉학교, 대학, 성인교육 시설, 학교외청소년교육시설, 직업교육시설등과연계된다원적구조를지니고있다. 여 기서연방정치교육원은주정치교육원과함께대표적지원자역할을수행하고, 정치재단, 시 민사회단체, 종교단체, 노동조합, 시민대학등은핵심적으로교육을담당한다. 오늘날동서 독통일과유럽통합에따른하부체제의새로운변화에직면하여사회적통합을달성해야하 는과제를안고있다는점에서정치교육의중요성은한층더높아졌다.
1. 정치교육의의미 민주주의국가와사회는시민의적극적참여와실천력위에지탱되고있다. 아무리자유주의헌법이라할지라도사람들이그것을생활속에서실천하지않는다면공허한형식으로그치게된다. 정치교육의중요성이바로여기에있다. 왜냐하면정치교육의목적과과제는민주주의의식의전달뿐만아니라, 정치과정에적극적으로참여하도록유도하는데있기때문이다. 이러한이유로고유의미의정치교육은오직자유주의국가에서만가능하다. 과거반세기이상독일에서실시해온정치교육은민주주의의식의형성과정치문화발달에중요한기여를했다. 정치교육은 1952 년연방정치교육원의설립으로보다체계화된후, 정치교육의기본원칙에관한 1970 년대의격렬한논의, 독일통일로인한변화를고려한 1992년의연방정부보고서와지식정보사회로의사회적변화속에단행된 2001 년초의내부개혁등을통해내용, 방법, 교수법등에서크게달라졌다. 그결과, 시민들에게다양한주제의세미나, 출판물, 온라인프로그램등폭넓은교육기회를제공하고있다. 정치교육은개념상여러가지의미로이해할수있다. 일반적으로는시민교육과같은넓은의미로쓰이지만, 좁게는국민개개인의정치성배양을위한시민교육으로이해된다. 이러한측면은독일연방정치교육원설립규정(Erlass, 2001) 에서명확히나타나고있다. 국민의민주시민의식을고양하여, 성숙하고비판적이며적극적으로정치일상에참여하도록유도하는데 있다고규정한다. 이전의설립규정에서도 정치적사안에대한국민의이해증진과민주주의의식의공고화그리고정치적협력자세의강화 에교육목적을두었다. 민주주의사회에서정치교육의주체는국민이며, 그대상도국민이다. 여기서국가는지원자의역할에머무른다. 반대로전체주의나독재체제의교육주체는정부이며, 그대상은국민이다. 왜냐하면, 전자의정치교육은상호의사소통(interactive communication, discourse) 의성격을지니는반면, 후자의교육은주로일방적교화(indoctrination, manipulation) 의성격을띠기때문이다. 그래서정치교육은시스템과일상생활의상호연계속에서사회구성원들간의원활한의사소통을통해진행된다. 이런요소들을고려하여정치교육의개념을정리한다면, 정치교육이란 국민이국가의주권자로서정치현상에관한객관적지식을갖추고, 정치적상황을올바로판단하며, 아울러비판의식을갖고정치과정에참여하여권리와의무를적극적으로수행하도록하는의사소통적교육이다. 한편, 한국에서는과거권위주의체제에서실시되었던관치교육에대한이미지때문에정치교육이란용어대신
민주시민교육으로대체하여쓰고있다. 2. 정치교육의과제 2.1. 시대적과제 정치교육은물론정치사회화의여러요소들가운데하나이며, 그효과도정치상황에크게의존한다. 그래서독일의정치교육은시대적변화에따라교육의중점사업을달리해왔으며, 그내용은연방정치교육원의시대적역점주제의변화에서찾아볼수있다. 50 년대: 독일연방의건설과운용 60 년대: 전체주의체제에대한계몽, 과거사에대한역사정리, 사회변혁 70 년대: 경제문제, 동방정책(Ostpolitik), 당시로서는새로운현상이었던테러리즘, 정치교육의교과목및교수법개발 80 년대: 환경문제, 평화 안보정책그리고신사회운동 90 년대이래: 동독인의자유주의체제적응, 동서독주민의사회심리적화합, 극우주의, 유럽통합, 환경의식, 신기술로인한사회변화, 세계화 2000 년: 지식정보사회, 다문화사회, 뉴테러리즘등 통일후지금까지이어지는정치교육의중점과제는동서독시민간의사회심리적통합과다문화간융화에있다. 특히 40 년간의사회주의와공산국가체제를비판적으로정리하고, 민주주의적사고와형태를지향하도록하며, 이질문화권간갈등을극복하고공존할수있는다문화사회의정착에기여코자한다. 이들과제와연관된모든해결방안을찾기위해서정치교육은전독일인이개방적으로대화하는전진기지인동시에대화와교통을심화시키는역할을수행하고있다. 2.2. 보편적과제 오늘날의중점과제인통일후내적통합도물론민주주의에대한기본질서와가치속에서추구된 다. 그러므로과거와무관하게이루어지는것이아니라, 이전의내용과연속성을가지면서행해진다.
정치교육의보편적과제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과정의요소와기능관계에대해가능한한객관적으로알려준다.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적민주주의기본가치들을 - 물론구체적실현방법에대한비판은막지않으면서 - 수용케하는데기여한다.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적민주주의가유일한정치질서임을분명히하며, 이질서체제속에서만독자적, 합리적자기책임의행위가가능하고, 또개개인의자기발전을위해최대의기회를제공한다는점을강조한다. 민주주의게임규칙의본질을인식시키고, 민주주의절차를습득하게하며, 비판력과합의자세를동시에갖도록한다. 정치적대안속에서고려할수있는능력과자세를기르며, 정치적문제의식과판단력을기른다. 정치적행위능력을발전시키고, 정치적, 사회적영향력행사의기회를적극활용하도록한다. 언어적, 상징적의사소통을이데올로기적배경위에서관찰할수있도록한다. 자신의권익을타인과의상호관계에서인식하는능력을기른다. 자신의이익을다원주의적민주주의규칙의범위내에서인식하는능력을기른다. 민족적이기주의의타파와함께타문화권 타인종의사람들과상호이해하며, 평화롭게생활할 수있도록하는능력과자세를기른다. 성찰된참여와책임자세를갖도록한다. 정치교육의핵심은결국민주주의공동체의기본지식 가치관 행태의전달에있다. 민주주의는절차에관한규정만을내용으로하는것이아니라, 특정한인간상과일정한행태및가치관을전제로하고있다. 그러므로규칙만을익히게하는것으로충분한것이아니라, 기본가치들을전달하고, 그에부합하는행태를습득하도록해야한다. 그렇지만정치교육은민주주의의한계에대해서도지적할수있어야한다. 3. 정치교육의실행체계 정치교육은오늘날모든교육체제와연계되어있다. 학교, 대학, 일반성인교육시설, 학교외청소년교육시설, 직업교육시설에서저마다의교육과정을통해정치교육을실시한다. 연방및주정치교육원과같은국가기관과사회교육시설들의병립은교육내용과정치적입장의다양성을반영해준다. 이는독일정치교육체제의다원주의적구조를나타내는것이다.
정치교육은매우다양한형태로, 즉스스로혹은학교에서공부하거나각종교육시설의행사혹은세미나에참여함으로써이루어진다. 이러한토대위에서정치교육은독일의정치문화형성에상당한기여를했으며, 이를통해민주주의의정착과강화에크게이바지하였다. 이와같이다양한정치교육실행체계의구축은동독지역에서도추진되어상당한진전을이루었다. 3.1. 학교내정치교육 초 중등학교의정치교육은각주정부의업무에속한다. 정치교육의기본내용은학교강의에포함된다. 여기서는확고한지식전달과민주주의적태도의훈련에만신경쓰는것이아니라, 정치참여의능력과자세를기르는것에도노력한다. 따라서학교강의는시민의정치의식및행태형성의기초가된다. 정치교육의실시초기에제기되었던전문교과서 교육자의부족현상은그동안많이개선되었다. 학에는관련된전공분야가있으며, 교과서시장에도교재들이충분히준비되어있다. 대 연방정치교육원은지난수십년동안다양한교재들을공급해왔다. 학교의요구가있을때는포스터와필름도제공해주었다. 그외에도교사들을대상으로재교육세미나를자주개최해왔다. 특히통일후에는동독지역의교사들을이러한방법으로재교육시킬수있었다. 정치교육의협력체계도 연방교육연구부 연방가족 노인 여성 청소년부 연방보건복지부 연방경제협력부 연방경제노동부 연방환경부 연방내무부 연방정치교육원 주정치교육원 연방하원 연방상원 연방공보처정치교육국 연방법무부 연방외무부문화국 1) 연방사회단체 4) 청년학생복지단체 7) 여성단체 2) 정치재단 5) 노조및직능단체 8) 교육학술예술단체 3) 언론출판단체 6) 종교단체
3.2. 학교외정치교육 3.2.1. 연방정부부처 연방내무부와이에소속된연방정치교육원외에도또다른종류의연방기관이정치교육을실시하거나지원한다. 예로서, 연방가족 노인 여성 청소년부는젊은이들로하여금현재의생활환경에대해신뢰를갖도록하고, 다원적문화를지향하도록교육한다. 청소년지원책은청소년들이사회생활에보다적극적으로참여하도록노력한다. 청소년교육계획을통해젊은이들이자신의개성을자유롭게계발하고, 자신의권리를인식하며, 사회와국가에서의자기책임을당당히감당하도록한다. 그러므로정치교육은청소년교육계획의중점사항이다. 연방국방부도다수의정치교육대상을가지고있다. 연방군대는성년의정치교육을법적으로정해놓은유일한조직체이다. 군인법제8조규정에따라군인은자유민주주의질서를기본법적의미에서인정, 보호하는의무가있음을인식시킨다. 통일후동독지역에서는정치교육이당분간학교나직장을막론하고어느곳에서든충분히행해질수없는상황이었으므로연방군대는정치교육을통해이지역의젊은세대에게자유민주주의의가치들을전달해주는역할을담당했다. 이밖에도연방교육부는정치교육을프로젝트별로지원하고있다. 여기서는정치적, 시사적재교육의지원에치중한다. 연방경제협력부는개발도상국의지원정책관련교육에힘쓰는데, 특히개발도상국 연방정치교육원조직 Z 부총무행정 ( / ) 인사/ 조직 예산 내부업무( 관리) 연방정치교육원분과총괄부내규, 법무행사, 학술회의특수집단, 교류학습인쇄, 출판멀티매체 /IT 외부단체지원 공보및조정부베를린프로젝트매체통신센터극우주의프로젝트이주민/EU 프로젝트세계화프로젝트 출처: 연방정치교육원홈페이지(http://www.bpb.de/die_bpb/87WJSR,0,0,Organigramm.html)
의상황과제3 세계에대한상호관계를위해국민의이해를촉진시킨다. 이를위해연방경제협력부는각주의필름공사와독일필름센타를통해계몽용필름과비디오를배포한다. 3.2.2. 연방정치교육원연방정부는학교외적인정치교육의분야에서내무부소속의연방정치교육원을통해정치교육을실시한다. 교육원은지난수십년에걸쳐민주주의의기본가치를독일국민들의의식속에심어주는데상당한기여를해오고있다. 가. 구성과조직교육원은원장과사무처외에 9명의분야별전문가로구성된학술고문단과 22명의연방하원의원으로이루어진 22 명의감독위원회를두고있다. 특히감독위원회는교육원업무의정치적중립성에관해감시하는기구로서매년원장으로부터예산안, 계획서, 활동보고서등을제출받으며, 학술고문단의의견이나주요사업에대해수시로보고받는다. 사무처의구성과조직은도표에서보는바와같다. 나. 주요교육사업 1 대중매체를통한교육사업언론인, 희곡작가, 대중매체교육자들과협력하여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의편집자들에게정치교육의기회를제공하며, 이를통해대중매체의정치교육프로그램에대해관심을기울이게한다. 2 출판간행물을통한교육사업사회, 정치, 경제문제등에관한출판물을총서시리즈로, 또한시사주간지와청소년대상정간물도발간하며, 이들출판물은모두무료로배포된다. 그종류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주간신문 의회, 전문가시사진단지주간 시사논단, 정치교육정보, 유럽속의우리, 시사확대경 시리즈단행본, 정치교육총서 정치교육교수자료, 논점, 정치교육도서목록, 학교수업의주제, 강의주제, 정치교육관련영화평론, 주제별시청각자료목록, 학생용정치교육수첩 3 학교외정치교육및학술회의지원 토론및실습형태의포럼과같은성인정치교육행사 학교외성인교육의교육자를위한재교육세미나 성인정치교육세미나에활용하기위한학습자료의출간 성인교육의역사유적및그의미에대한홍보
정치교육적차원에서이스라엘수학여행주최 4 학교내정치교육지원학교강의에서활용할수있는출판물과학습자료를개발, 배분하는업무를수행한다. 정치교육정보 지는주교육부장관회의의심의를거쳐모든학교에배포된다. 연례학생정치교육경시대회 개최 정치교육교수법세미나 는교사들을위한것으로전연방주를포괄하는교류프로그램이 다. 발전된통신매체( 인터넷등) 를정치교육수단으로활용하며, 그범위를급격히넓혀가고있다. 5 자체주관교육사업 전문가세미나( 정치교육방법론, 학교외정치교육) 지방언론인재교육 동서문제연구부( 동유럽권재건관련) 세미나 해외연수및세미나 다. 외부정치교육단체에대한지원연방정치교육원은민간자원단체에도재정을지원한다. 매년평균 300 여개의단체에지원하는데, 이비용을포함한연방정치교육원의예산은연방내무부를통해연방예산에책정된다. 지출에관한회계보고는연방회계청에제출된다. 라. 예산규모모든정당이정치교육원의활동을긍정적으로평가하고있기때문에예산확보의어려움은없다. 예산의집행과운용에서도연방정치교육원이완전히자율적으로시행한다. 활동예산의지출은 자체활동을위한부분 과 민간단체활동에대한지원부분 으로양분된다. 이예산을연방정치교육원과주정치교육원모두자체활동에 40%, 민간단체지원에 60% 씩사용한다. 연방정치교육원의예산규모는 1990년이래로매년평균약 1 천억원에달한다. 3.2.3. 주정치교육원각주의정치교육원은특히장벽붕괴후동독지역의사람들을위해정치교육을시작함으로써자신의중요성을증명했다. 통일후서독의각주들은동독지역의자매주에서저마다정치교육을위한회의를개최하고또많은양의자료들을제공하였다. 1991년중반에는서독지역의주정치교육원들이
모든신연방주에서활동하게되었다. 이러한자문과지원은몇년간지속되었다. 주정치교육원은연방정치교육원의업무를주수준에서수행하는것이지만, 예산, 인사, 업무등은주정부에의해결정된다. 이교육기구는주수상실소속이며, 주의회로부터감독을받는다. 3.2.4. 정치재단 독일에는 2 차대전전후에정당별로정치재단이설립되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실패가 일차적인동기이다. 이로인해독일최초의공화국이었던바이마르공화국은붕괴되었고, 종국에는국 가사회주의자들( 나치즘) 의폭압적독재속으로빠져들어갔다. 정치가들은자유민주주의로써대다수 시민들을설득하는데성공하지못했다. 바이마르는결국 민주주의자가없는민주주의를보여주었 다. 이에각정당들은저마다정치재단을건립하여정치교육을행함으로써독일민주주의의재건과공고화에이바지하고자했다. 이는권위주의적혹은전체주의적지배형태가더이상독일의정치적, 사회적생활을틀지우지않도록하기위함이다. 그래서정치재단의중심과업은다양한정치교육활동을통해공동체의자유민주주의적기본질서를공고히하고, 협동과아량의덕목을함양하는데있다. 이러한과업을세분하면다음과같다: 정치교육을통해정치적사안에대한시민의관심과참여촉진 연구지원과상담활동등을통한정치적행위능력향상 학문, 정치, 국가, 경제영역간의대화와연구 정당, 정치운동, 사회운동의역사적발전과정연구 장학프로그램을통한젊은우수인력의학업 연구활동지원 각종문화행사및장학 후견활동을통한예술 문화발전에기여 국제적정보및인적교류를통한유럽통합과국가간이해에기여 다양한프로그램및프로젝트를통한개도국의자유민주주의및법치국가건설에공헌 정치재단의이런과업은 1986년 7월 14 일의연방헌법재판소판결에서도다음과같이강조되었다: 정치재단은시민들로하여금정치적사안들에대해관심을갖게하고, 정치문제에대해모든시민들이참여할수있도록공개토론의장을마련해주어야한다. 이를통해사회적, 정치적생활에시민들이적극적으로참여토록관심을불러일으키며, 그에필요한갖가지수단들을제공해주어야한다. 현재독일에는프리드리히에베르트재단( 사민당), 콘라드아데나우어재단( 기민당), 프리드리히나
우만재단( 자민당), 한스자이델재단( 기사당), 하인리히뵐재단( 녹색당), 로자룩셈부르트재단( 민사당) 등의정치재단이있는데, 이들은모두자매정당과정책적으로는공유성을갖지만, 법적으로나재정적으로는독립된법인체들이다. 3.2.5. 시민대학독일정치교육에서또하나의중요한담당자는시민대학이다. 시민대학의교과들은모든분야의학습과정에서통합적요소로발전했다. 정치적 사회적문제와환경 경제의테마는외국어와외국문화의소개, 건강교육, 기술문제, 역사와사회교육학, 철학등에서중요한교육소재의역할을한다. 동독지역에서정치교육의필요성이매우높아감에따라시민대학은이분야를크게확대하였다. 시민대학은중소단위의행정구역마다설치되어있어주민들의대화와만남의장소로인기가높으며, 청소년직업훈련과학생과외학습, 성인취미강좌등도제공한다. 3.2.6. 자원교육단체( 시민 사회 교회단체 ) 청소년과성인에대한학교밖의정치교육은기본적으로다수의자원봉사자에의해발전되어왔다. 연방정부도자원교육자의활동을적극지원한다. 여기서연방정부는이들자원교육자의자율성을존중한다. 정부의지원조건은자원교육자가헌법의범위내에서활동하는데있다. 연방차원에서는각부처( 부) 와연방정치교육원이자율적사회교육자의활동을지원한다. 2000년도를기준으로연방정치교육원의파트너로인정받거나위임받은단체로는 300여개의교육센터혹은연합체들이있다. 그러나동독지역의정치교육에서자원교육자가겪어야하는어려움은무척많다. 참가자의관심, 비판력, 대화능력등은사람에따라크게차이가난다. 그러나참가자들이공통으로갖는관심사는구조변화에직면한실생활의문제와법적문제그리고구체적인경제정보이다. 왜냐하면, 변화된상황에가능한한유동적으로또신속히적응하고자하기때문이다. 초기정치교육의경험은그리긍정적인결과를가져오지못했다. 동독지역참가자들은정치교육자체에깊은불신을갖고있었다. 이는수십년동안과거동독에서행해져온이념과선전술등에시달려온탓이다. 이러한교육행사에서정치교육담당자의대화자세와대화력에문제가발생하기도했다. 동서독주민의화합을위한노력의성과는무엇보다도교회의노력에힘입은바가크다. 동서독교회간혹은마을간자매결연을통해세미나등과같은교육행사를개최하여서로교류할기회를갖는
다. 여기에는홈스테이와같은친목프로그램도상당포함되어있어서그효과가매우크다. 3.3. 전망 독일에서도정치교육의정당성, 과제, 목적, 접근법을두고수많은논의가전개되어왔다. 이러한논의들은물론시대정신의범주에서행해지고, 평가되었다. 이는정치교육의이론발달에기여하기보다는실제적과제와요구들에대한주의를환기시켜통일독일에서뿐만아니라, 앞으로유럽과세계에서의공존에기여하기위한것이었다. 아울러, 정치교육은하나의정치학전공분야로설치되어다양하게연구되고있다. 독일은동서독통일과유럽통합에따른하부체제의새로운변화에직면하여사회적통합을달성해야하는과제를안고있으므로정치교육에대한더많은연구가필요하다. 이러한맥락에서정치교육은동서독주민간그리고다문화 다인종간의대화와접촉을위한전방기지역할을수행하여공동의정치문화를조성하기위해더욱노력할것으로보인다.
독일주둔외국군구성원의법적지위 한스- 위르겐카악, 전독일연방내무부통일분석과과장, 현재베를린시민재단이사 2003년 4월 1945년 5월유럽에서제2차세계대전이종식된이래여러국가의군대들이끊임없이독일에주둔해오고있다. 정치사적으로고찰해볼때, 이러한군사동맹의본질은지속적으로변화해왔다. 다시말해, 이들군사동맹은해방군에서점령군으로, 또한냉전기간중에는점령군에서소련의호전적정책에대항하는방위군으로그성격이바뀌었다. 현재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미국에서파견된이들군대는나토동맹군이다. 법적관점에서보면, 이들군대가구연방주에주둔하기위한근거는변하지않았다. 그러나독일통일을준비했던 2+4 조약에근거하여, 외국군대는신연방주와베를린시에주둔할수도없고, 또그곳으로이전할수도없다. 하지만연방정부의사전승인이있는경우에는일시적인주둔이가능하다. 형사재판권은파견국과독일연방공화국이나눠갖고있다. 나토군지위협정은이를전속적재판권과경합적재판권( 어떤행위가양국의법에모두저촉되는경우) 으로구분하고있다. 경합적재판권의경우그행위가직무수행중에일어났다면, 특히형사소추의우선권은파견국이갖는다. 독일연방공화국은경합적형사재판권의행사권한이자국에있는사안에도파견국의요청이있는경우형사소추를포기하고있다.
1. 시작상황 1945년 5월 8 일독일군이항복하자독일을나치주의자들의지배에서해방시킨연합군은점령군이되었다. 하룻밤사이에해방군에서점령군이된것이다. 그리고불과몇년이지난후동서진영간의냉전은유럽대 륙을갈라놓았고, 이에따라독일에주둔하던외국군의성격도다시달라졌다. 다시말해이들은점령군에서 방위군으로, 그리고결국에는바르샤바조약에대항하는나토군소속의동맹군이되었다. 중부와동부유럽에 서공산주의정권들이몰락하고 1990년 10 월독일통일이후독일은우방들로둘러싸여있다. 이러한상황속 에서불과몇몇외국군부대들만이독일영토내에주둔하고있다. 이들은오늘날다른이유못지않게경제적 이유에서환영받는손님들이다. 이들의철수가거론되면철수에반대하는대중시위가일어나곤한다. 베를린 에서발행되는일간지 타게스슈피겔 은 2003 년초에이러한실태를다음과같이설명하고있다. 그들은 호감이가는점령군병사들이었고, 게다가돈벌이가되기도하였다. 구독일연방공화국의전지역은미군이라는 경제요인으로생계를유지했다. 예전에는 30 만명의미군병사들이주둔했지만, 지금은그수가 7만여명에 달할뿐이다. 독일전역에걸쳐만오천명에달하는독일민간인직원들과그밖에병원과유원지, 요식업소들 이미군병사들에의존하고있다. 1) 2. 법적근거 외국군의독일주둔에대해현재유효한법적인근거는다음과같다. 주둔조약(1954 년) 2) 이조약은벨기에,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덴마크, 그리고룩셈부르크에대해자국군부대 의구독일연방공화국상시주둔권한을부여하고있다. 캐나다와덴마크, 룩셈부르크는현재독일에부대를 주둔시키지않고있다. 나토군지위협정(1951 년) 3) 1)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 베를린, 2003년 3월 5 일자. 2) 1954년 2월 23 일에체결되고, 1955년 5월 5 일에비준된외국군의독일연방공화국주둔에관한조약, 연방법률관보 1995년판 2권 253 쪽. 3) 주둔군의법적지위에관한북대서양조약회원국간의협정, 연방법률관보 1961년판 2권 1190쪽
이협정은비준국가들에대해주둔기간의부대와군속, 그리고그가족들의법적지위를규정하고있다. 그내용은특히입국규정과운행허가, 재판권, 손해배상의무, 세금, 그리고관세에관한것이다. 이규약은 신연방주에적용되지않는다. 나토군지위협정에대한보충협정(1959 년) 4) 이보충협정은벨기에, 프랑스, 캐나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미국이구연방주에주둔하는동안부대와 군속, 5) 그리고그가족들의권리와의무에대해상세히규정하고있다. 이규정들은훈련과작전의실행, 세 제상의혜택, 그리고건축법, 도로교통법, 노동법부문에서독일규정을어떻게적용할것인가에관한것이 다. 2+4 조약6) 의결과로 1990년 9월 25 일에처음만들어졌고, 1994년 9월 12일에개정된외교문서교환7) 독일통일을가능하게했던 2+4 조약의 5조 3 항을보면, 외국군은신연방주나베를린시에주둔할수없을 뿐만아니라그곳으로이전할수도없다. 뿐만아니라통일조약8) 은나토군지위협정과독일보충협정의적용 지역을구연방주로제한하고있다. 그때문에벨기에, 프랑스,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그리고미국군부대 의일시적인주둔을위해이외교문서교환을합의했다. 이에따라, 주둔을위해그때마다연방정부의사전 승인을받은경우, 이들국가의부대는베를린시와신연방주에서도구연방주에서와같은법적지위를갖는 다. 3. 조약의구분과내용 이상의개관으로부터독일내에서의주둔법은근본적으로다음두가지법에근거하고있음을알수있다. 4) 독일연방공화국에주둔하고있는외국군대와관련하여 1959년 8월 3 일에체결된, 주둔군법적지위에관한북대서양조약회원국간의협정에대한보충협정, 연방법률관보 1961년판 2권 1218 쪽; 1973년판 2권 1022 쪽; 1994년판 2권 2594쪽 5) 나토군규약 1조 1항 b 에서는 군속 에대해다음과같이규정하고있다: 군속 은나토회원국군대에근무하고있는자로서부대를수행하는민간인직원들을의미하며, 이들은국적이없거나, 북대서양조약회원국이아닌국가의국민이거나, 혹은부대가주둔하고있는국가의국민이어서도안되며, 주둔국에주거주지를두지않은자를말한다. 6) 2+4 조약, 1990년 9월 12 일에체결된독일관련종결규정에관한조약, 독일통일을위한조약들 ( 뮌헨: 1990). 7) 베를린시와신연방주들에주둔하는군대의법적지위를위해 1990년 9월 25 일에있었던외교문서교환. 그내용은 1994년 9월 12일자외교문서교환을통해개정됨, 연방법률관보 1994년판 2권 3716 쪽. 8) 독일통일수립에관한 1990년 8월 31 일자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간의조약, 독일통일을위한조약들 ( 뮌헨: 1990)
주둔을위한법(ius ad praesentiam): 주둔조약 주둔기간의법(ius in praesentia): 나토군지위협정 위조약들에대한추가협정과, 2+4 조약에따라신연방주들에대해유보적인규정들도있다. 중요한점은 통일된독일에서구연방주냐신연방주냐에따라상이한형태의주둔법이존재한다는것이다. 주둔을위한법 제2차세계대전의종식부터독일의주권회복때까지외국군대는오로지독일영토에대한점령권만을근 거로주둔하고있었다. 파리의정서9) 의발효로독일연방공화국은 1955년 5 월에주권국가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벨기에, 프랑스, 캐나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미국군대의주둔은무엇보다공산주의치하의동구권 군대들에맞서는군사적경고라는이유에서그이전과똑같은병력을유지해야했다. 이를위해국제법상조약 이필요하게되었는데, 이조약이바로 1955년 5월 5일에비준된주둔조약 10) 이다. 독일통일을위한협상중에주둔조약이새로편입되는연방주들, 다시말해구동독지역에대해유효성을 갖는지, 갖는다면어느정도의범위내에서유효한지에대한질문이제기되었다. 당시구소련은나토군주둔 지역의실제적인확대를받아들이지않을것으로예상되었다. 하지만독일통일로나아가는역동성에제동이 걸려서도안되었다. 이런이유에서기존주둔조약의유효성은구연방주들즉, 구서독지역에국한되어야한다 는점에합의를보았다. 신연방주들과베를린시에대해서 2+4 조약은 이지역에는외국군부대가주둔할수도, 이전할수도없 다 11) 라고규정하고있다. 합의된의정서의표현에따르면, 이전 개념의내용에관해서 통일독일정 부는각조약회원국의안보이익을고려하는가운데합리적이고책임감있게결정할것이다. 12) 이는신연 방주들에서외국군부대의지속적인주둔은허용되지않지만, 통과나군사훈련참여목적을포함한일시적인 주둔은독일정부의사전승인을통해가능하다는것을의미한다. 주둔기간의법 현재독일에주둔하고있는 5 개국(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군대의법적지위는나토군지위협 9) 1954년 9월 23 일에체결된파리의정서, 연방법률관보 1955년판 2권 213 쪽. 10) 각주 2 참조. 11) 각주 7 참조. 12) 각주 5 참조.
정과독일보충협정에규정되어있다. 13) 독일보충협정은 1993년 3월 18일자개정협정을통해작전과상이한훈련 들, 토지, 교통, 법률문제, 기타와결론규정부문에서개정되었다. 14) 새규정들은무엇보다도소송문제에 관한것이었다. 주둔군의실질적법지위는바뀌지않았다. 파견국군대는독일연방공화국의법질서를준수해야한다는점을나토군지위협정뿐만아니라독일보충협 정도명기하고있다. 이들국가의군대는건축규정이나자동차의모델과기술설비에관한규정들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외환규정은지켜야한다. 동맹주둔군은일반적으로독일재판권으로부터자유롭지못하다. 주둔 군부대로인한손해발생시파견국가에대한독일연방공화국의배상요구에대해의견이상이한경우, 그 손해가비군사적인독일연방정부소유물에대한것일때한하여, 양측의합의하에지명된중재재판관이판 결한다. 군사적으로사용되는재산손실에관해나토군지위협정 8조는조약회원국들이일반적으로손해배 상요구를포기할것을내용으로하고있다. 주둔군의불법행위로인한제3자의배상요구는파견국이아닌 주둔국을상대로주둔국의법정에서다뤄진다. 이경우, 부대의기록보관소나문서, 인식가능한관용우편물 과재산은조사나몰수할수없다. 이에반해, 반입이나반출이전적으로자유롭지만은않은데특히국가관세 규정에대한일반적인면제는허용되지않는다. 파견국의군당국은자국군구성원에대한형사및징계재판 권을가지며, 자신의소유지에서치안권을행사한다. 군구성원들과그가족들은원칙적으로독일연방공화국의법지배하에있다. 하지만이들은외국인특별법 규정을적용받지않는다. 형사재판권은파견국과독일연방공화국이나눠갖고있다. 나토군지위협정은이를전속적형사재판권과경합적형사재판권으로구분하고있다. 파견국은독일연방공화국법에는저촉되지않지만자국법에따라유죄인행위들에대해서전속적형사재 판권을갖고있다. 그행위가오로지독일연방공화국법에의거해서만유죄인경우, 독일연방공화국은 전속적형사재판권을 갖는다. 13) 각주 3과 4 참조. 14) 프랑크부르크하르트와하인리히그라노프, 나토군지위협정에대한독일보충협정의개정을위한협정, 새로운법률주간지 (Neue Juristische Wochenschrift: NJW) (1995), 424쪽이하
그행위가양국의법에의거하여모두유죄인경우경합적형사재판권이성립한다. 직무수행중에이뤄진행위나단지파견국의이익에반하는행위, 행위를추적할때우선권은파견국이갖고있다. 군의다른구성원들을상대로이뤄진 그외의모든경우들에서는독일연방공화국이접수국으로서형사재판권과관련하여우선권을갖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독일연방공화국은독일보충협정제19 조에서, 파견국이그에대한요청을하는경우자신 이갖고있는경합적형사재판권의실행특권을포기하고있다. 그러나독일의관할관청들이개별사건의특 수한상황을근거로독일법집행의본질적이익을위해독일의재판권실행이필요하다고생각되면, 관청들은 성명을통해위의특권포기를철회할수있다. 나토군지위협정과독일보충협정은구소련이지배했던바르샤바조약의와해로독일주둔군의규모를포함 한유럽안보상황에대한새로운정의가불가피했을당시에이미시험을거쳤다. 독일통일을위한 2+4 회담 과, 베를린시와독일의통일에따라제2차세계대전의 4대전승국들의권리와책임이종결됨과관련하여주 둔군의권리와의무도새롭게평가되어야했다. 이를위해독일보충협정에대한개정협정이협의되었고, 이 개정협정은 1993년 3월 18 일에비준되었다. 15) 중요한개정내용을독일보충협정의조항과관련하여살펴보면, 45 조: 전속사용을위해제공된토지이외지역에서훈련과작전을수행하려면독일당국의승인을받아 야한다. 46 조: 영공상의작전과상이한훈련을하려면정해진훈련조건들을참작해서독일군사당국의승인을 받아야한다. 49 조: 건축조치들을취할때, 독일법을준수해야한다는점이이조항에명시되어있다. 필요한허가를 얻기위해주둔군당국은독일관할관청과협력한다. 기존시설과설비를지속적으로가동하기위해서 는기존물보호가필요하며, 가동상의중대한변화가있을경우에는개정허가를얻어야한다. 53 조: 훈련을목적으로독일로이동한부대들의토지( 군훈련장이나, 공중및지상사격훈련장, 주둔군 연병장, 주둔군사격시설) 이용을위해사전에독일관청에통보하고승인을받아야한다. 15) 연방법률관보 1994년판 2권 2594 쪽.
53조 A: 제공된토지의사용에대해서는원칙적으로독일법을적용한다. 토지사용허가나승인, 그밖 에공법상의인가가필요한경우독일관청은필요한신청을하며, 부대를위해행정절차나소송절차 를밟는다. 57 조: 사고장소에서의행동과위험물의운송에관한규정을포함한독일교통규칙을준수해야한다. 위험물의운송을위한특별허가나예외적허가와면제는이것들이필요한경우에한하여독일연방군의 관할부서에서발급된다. 치수와차축중량, 총중량의통용한도를초과하는자동차와연결차량을정해 진도로망이외의도로에서운행하는경우에는그를관할하는독일관청의허가를받아야한다. 60 조: 전신전화설비는독일관청과합의된절차에따라설치, 운영, 유지되어야한다. 주둔비용 나토군지위협정과독일보충협정에따라외국군대는자국부대의독일주둔비용을원칙적으로자체부담 한다. 주둔비용에는병사들과군속의봉급과급료뿐만아니라기본적으로그들의숙소와복지, 필요한건축 조치를위한비용과독일민간인력의임금, 급료도포함된다. 독일연방공화국은자국에외국군대가주둔하고 있는여느나라들과마찬가지로정해진주둔초래비용만을부담하며, 따라서파견국에대해아무것도직접적 으로지불하지않는다. 독일연방공화국재정상의이러한지출은지난몇년간주둔군부대감축으로인해감소 하였다. 이비용은 1996년 1억 3천3백5십만유로에서 2000년에는 8천8백4 십만유로로감소하였다. 주둔초래비용중주요지출은 사회적보장 이라는임금협약에따라, 부대감축으로일자리를잃은주둔군의민간실직자에대해지급하는생활안정보조금, 작전수행과관련한피해와이전에군사적으로이용한토지의환경피해나숙영으로인한피해복구를 위한비용, 주둔군이현재반환한토지에대해자체자금으로지불했던가치상승에대한보상이있다. 손해배상규모는나토군지위협정 8조 5 항에확정되어있다. 이조항은직무수행중에제3자에게끼친 손해에대한배상비율을다음과같이규정하고있다.
손해에대한책임이주둔군에게만있는경우, 주둔군은손해배상의 75% 를, 독일연방공화국은나머지 25% 를부담한다. 손해에대한책임이여러주둔군들에있는경우, 이들은동등한비율로손해배상의책임을진다. 이에 반해, 독일연방공화국은각주둔군이부담하는액수의반만지불한다. 이규정은주둔군들사이의책임 소재를명확하게밝힐수없는경우에도유효하다. 독일연방정부는외국군이독일주둔을위해자체부담하는지출액에관한지료를갖고있지않다. 하지만파견국들이자국군의독일주둔을위해드는비용은, 독일연방정부가그들의주둔을위해부담하는총액의몇배에달하는것이확실하다. 나토군지위협정 11 조에의하면, 공무수행뿐만아니라병사들과그들가족, 그리고군속의사적인소비에서 도주둔군에게광범위한특전이, 특히면세의형태로주어진다. 이때에도접수국의관세법은원칙적으로유효 하다. 하지만주둔군은특히기술설비와양식, 공급품, 그리고부대뿐만아니라군속과그가족들을위해서도 허가된그밖의물품들을면세로반입, 반출할수있다. 부대구성원과군속은그들의개인소유물과가재도구, 승용차를면세로반입할수있다. 나토군지위협정에제시되어있는특권부여요건들은나토회원국에주둔하 고있는독일부대들에도같은규모로적용된다. 독일내의나토군사령부들 나토군의국제군사사령부 16) 에대해서는사령부협정 17) 과독일내에서만유효한이에대한보충협정이사령부와그구성원의법적지위를규정하고있다. 통일조약에따르면, 이두협정들은구연방주에서만유효하다. 사령부협정은나토군지위협정의규정들을가능한범위내에서국제사령부들에적용하고있다. 사령부협정제4조는나토군지위협정에따라주둔군에주어지는권리및의무와관련하여군사사령부도파 16) 독일내의나토군사령부들 : - 라인달렌시소재유럽연합군신속대응부대(ACE Rapid Reaction Corps) - 람슈타인시소재북부동맹부대사령부(Headquarters Allied Forces North) - 하이델베르그시소재통합사령부센터(Joint Headquarters Centre) - 칼카르시소재공군대응부대스태프(The Reaction Forces (Air) Staff) ( 자료: http://www.nato.int / structure / struc-mcs.htm) 17) 1952년 8월 28 일자북대서양조약을토대로세워진국제군사사령부들의법적지위에관한의정서, 연방법률관보 1969년판 2권 2000 쪽.
견국가와동일시되어야한다고규정하고있다. 주둔국들과독일연방공화국사이에보충적으로체결된지위협정 18) 은사령부의구성원들도부대내에주둔하고있는병사들과같은권리와세제상의특전을누려야한다고규정하고있다. 사령부에는주둔군국가의병사들뿐만아니라그밖의나토회원국병사들도근무하고있으므로, 그에상응한협정들을통해사령부의모든구성원들이동등한권리를누릴수있게되었다. 번역: 최용호( 외국어대학교통역번역연구소연구원) 18) 독일연방공화국내의나토국제군사사령부에배속된파견국구성원들의법적지위에관한협정, 연방법률관보 1969년판 2권 2044 쪽.
독일의과거극복과역사교과서 : 홀로코스트의서술을중심으로 김유경, 경북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교수 2002년 9월 2차세계대전이끝난뒤 50 여년동안독일사회는과거의역사, 특히나치스체제가남긴부담을비교적 성공적으로극복했다는평을받고있다. 실로나치스의범죄행위는오늘에까지국가, 사회, 국민에게끊임없 는정신적고통을주는역사의부담이었다. 독일의정치와문화는지난날의과오를정직하게시인하고, 피해 자에대한보상, 주변국가와화해를지속적으로추구해왔다. 그리하여오늘날독일의역사교과서는과거에 저지른잘못에대한속죄, 책임의통감을 2 세국민에게정직하게전달하고, 유사한비극을방지하고자하는 노력을숨김없이드러내고있다. 그러나이러한과거극복의성과가모범적이라는평을받는수준에도달하는 데는역시적지않은시간이필요했고, 나름대로의우여곡절도있었다. 이글에서는독일의역사교과서가오늘과같이모범적인수준에도달하게되었던외부환경과논의 의변화를고려하면서, 나치스가저지른범죄의대명사인홀로코스트가역사교육, 역사교과서에서어 떻게다루고있는지를본보기로살펴보았다. 역사교과서는전문역사가의학문탐구와달리일정한시 기에해당국가에서일어난광범한사회적합의를반영하고있다. 따라서, 독일의역사교과서가제시하 는과거에대한정직한대결은일단독일사회의표준적인견해를대변한다고볼수있다. 또한, 우리는 역사교과서로실천되는독일의과거극복이갈등없이순조롭게진행된과정이아니었고, 그나름대로 의역사를갖고있음을이해할필요가있다.
1. 학교와교과서는오늘날의사회가시민정신을비롯하여, 이상적인과거의모습과미래의전망을전달하는중요 한통로이며도구다. 특히, 역사교과서는한국민의과거와현재의모습에대하여권위있는이야기를제공하며, 시민이취해야할적절한행동의모델을제시하여국민적일체감을형성하는데중요한기여를하게마련이다. 그 러나한민족이나국민의경험을교과서형태로정리하는역사적서사( 敍事 ) 는늘미완성의과업으로남아있으며, 항상변동하는시대에부응하도록지속적인개정과재해석을요구한다. 그리하여국민적일체감에대한기존의지 배적인전제가동요하거나, 국제관계가급격히변동할때는국내외적으로교과서에서술한내용에대한분쟁이 자주야기되기도한다. 대개의국가에서역사및사회과교과서일반은당시의국민적정체성과애국주의를형성하는데기여한경험을 조명하는 공식적인이야기 를제시한다. 동시에국가와사회의관계에일정한질서를부여하고, 국가공민으로 서시민의자격에대한테두리를설정해준다. 많은사람들이교과서에관심을갖고, 이의를제기하는이유는바로 이점때문이다. 어느나라에서나교육및교과서는기본적으로미래를지향하고있으며, 사회구성원의심성내부 에깊숙이작용하고, 더욱이이것이국가권력을통해지도되거나관리되기때문이다. 교과서는작성과배포에서 개별국가마다무수한제도적차이를보이고있으나, 직 간접적으로국가의인 그내용이각별한권위를지니게마련이다. 허가라는절차에종속되어있어 한사회의구성원은과거에대한기억을다른종류의자료, 즉기념물, 문화재, 박물관, 기념행사, 각종의 비공식적인매체나예술적창작품을통해서도얻을수있으나, 가장권위있고밀도가높은내용의체계적인 전수는제도교육을통해서이루어진다. 그리하여그수단인역사교과서는특별한기억의장 ( 場 ) 이아닐수 없다. 이러한이유에서역사교육과역사교과서는국가와개인의요구가교차하는일정한갈등상황속에처 해있고, 현실적으로드러나는그제도적발현형태와실천양상은여러욕구의갈등이조정된합의와균형의 결과라고할수있다. 한편, 어디에서나국가와국민의자화상( 自畵像 ) 을그려내는작업에서는통상적으로과거에대한긍정적기억, 위대한유산과시대에대한회상이건설적인역할을하게마련이다. 그러나이와같은통상적인형태가독일연 방공화국에서는자연스럽게적용될수없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스스로의정체성을확립하는과업에서건국당 시부터극도로부정적으로평가되는국가사회주의독일및제3 제국, 그리고이체제의해악을압권으로대표하 는 유태인절멸정책홀로코스트 ( ) 의유산과스스로를단절해야하면서도그보다오랜역사구성체로서의독일을 이어가야하는힘겨운과제에봉착했다.
소위과거극복 (Vergangenheitsbew ältigung) 이라고알려진독일사회의특유한개념은 2차세계대전이후독 일연방공화국이과거가물려준부담과대결하는과정과경험을상징적으로드러내고있다. 이개념은 1950년대독 일연방공화국( 서독) 에서형성되어, 60 년대부터정치적, 사회적으로널리통용되는의미심장한어휘가되었다. 물 론여기에서말하는과거는나치스시대(1933~45) 12 년간을의미하고, 극복이라고편의적으로지칭되는행위는 나치스체제의파국적인귀결과대면하는일체의노력을가리킨다. 전후에전개된독일의분단상황에서이개념 으로파악되는일련의과업은서독사회에서지속적으로논의, 추진되었고, 동독에서는나치스의과거와대면하는 방식에서서독과구별되는다른길을갔기에이자리에서우리의논의는서독사회에집중된다.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로대표되는부정적유산의극복은전후독일사회의정신적갱생에만한정되는것이아 니라정치적, 사회적실천까지포함하는총체적인과제로서지금까지공공여론에서지속적으로, 또현대독일사 회가봉착한과제상황의중요한계기에따라더욱격렬하게논쟁되어왔다. 특히, 1989~1990년의급작스러운통 일이후사회적부작용현상으로불거져나온극우적운동의대두, 동독공산체제( 독일민주공화국) 가남긴또하 나의불편한유산을정리하는문제와겹쳐지면서독일의과거극복은다시금주목을받는현안문제가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에서홀로코스트를역사교육에서처리하는방향설정을둘러싸고전개된논의와실천, 그리고그가시적인수단인역사교과서는이와같은포괄적인과거극복과정의정신적측면을반영하는하나의중요한지표이면서동시에과거극복을둘러싼독일사회내부의여러가지모색과논쟁에서하나의중심에놓여있는문제이기도했다. 독일에서역사교육과역사교과서로실천되는과거극복의정신적측면은한국사회의여론에상대적으로그렇지못한것으로비치는일본의경우와비교되어매우모범적인사례로알려지고있다. 적어도최근에발행되어사용하는독일의역사교과서몇종을표본적으로살펴보기만해도그러한인상은충분 히받을수있다. 그러나 1945년나치스의패망이후부터오늘에까지이른독일의과거극복과정전체가그나름 의역사를갖는우여곡절을보여주고있듯이, 역사교육, 역사교과서로실천되는정신적인과거극복역시순조롭 게만이루어지지않았으며, 사회기능을담당하는주체세력의교체와적절한계기를만나면서지속적인논란과 함께심화되어온과정이었다. 2. 최근까지도독일에서는제3 제국의유산과대결하는문제, 즉과거극복의성과에대해서는극단적으로상반하 는평가가병존하고있다. 한편에서는부정적인유산을침묵하고, 기만하고, 거부하며, 기억에서지워버림으로써 독일인은심지어두번째의책임과범죄를안게되었다고보기도하며( 랄프지오르다노), 다른한편에서는독일
연방공화국의민주주의가과거나치스의죄악을솔직하게인정하고그책임을철저하게추궁했으며, 현실적인피 해보상과복구까지실천하여유례가드물게성공적인것이었다고평가한다( 알프레트그로서). 오늘날의시점에서정리할때, 독일연방공화국의과거극복이추구하는목표는나치스체제의범죄적유산과 단절하고, 이러한과거의과오가재발하는것을방지하는데있다고할수있다. 그리고그실천적과제는패망 한체제의범죄적인조직을제거하고, 정치체제의민주화, 범죄행위자의처벌, 희생자의보상그리고민주적 정치문화를수립하기위한과거사의비판적성찰에있었다. 이는매우거대하고다양한과제로서여러차원에 서, 여러주체가추진해야할사항이었다. 동시에이과업은다시금정치의공식적측면, 즉제도적규제와법률의 차원에서, 다양한사회적집단의이해관계가마주치는공공여론의차원에서, 나아가인간의태도와의견, 행위양 식에서발견되는정치적, 문화적심성의차원등, 모든면에서장기적으로추진해야할과제였다. 과거극복의과제 가내용적으로이렇게복합적이어서그성과는포괄적으로간단히평가될성질이아니었으며, 전후의각시기와 부문마다그과제가한결같지도않았다. 그리하여과거극복과정자체가섬세한고찰이요구되는하나의역사학적과제가되었다. 전후서부독일에서 제기된과거극복의과업은 1945년부터 1949 년까지지속된전승국의점령기라는특수한상황에서시작되었다. 잘 알려진바와같이미국으로대표되는전승국은제3 제국의조직을제거하고독일의정치체제를민주적으로개편하 려고했다. 그리하여과거의정치 사회엘리트를교체하는탈나치화작업을추진하고, 독일인에게민주주의적가 치를내면화하는광범한재교육사업을시도했다. 1945년 10월 18 일부터개최된뉘른베르크전범재판은탈나치화작업의개시를알리는상징이었다. 프랑스나 영국의점령지역에서도탈나치화작업은광범위하게추진되었다. 재판절차를통해서만도수천명의인사들이전 범으로판결을받았다. 그러나이시기독일인들의정치적여론은심정적으로수동적이거나, 체념하는편에기울 어져있었다. 다수의독일인들은나치스의패망이후에야홀로코스트를비롯한엄청난반인륜적범죄의전모를알 게되었지만, 이사태에대해서자책감을느끼기보다는스스로가히틀러와전승연합국의희생자로느끼고있 었다. 그리고반유태주의적사고방식도여전히높은수준으로남아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의건국과함께 나치스의범죄자에대한형사적소추가가라앉기시작하면서독특한과거정책이형성되었다. 말하자면, 정 치적차원에서나치스독재의제도적, 인적유산을어떻게처리하는가라는문제가독일인의과업으로넘겨지 면서, 법률적형태로이루어지는현실정치적수단이새로이조정되었다. 격화되는냉전상황에직면하여콘 라드아데나워정부는아직도미약한독일연방공화국민주주의의안정과사회적통합이냐, 아니면나치스범 죄자의유보없는처벌과정리냐? 라는과업에서선택의기로에놓이게되었다.
아데나워정부의선택은전자로기울어졌다. 물론야당인사회민주당(SPD) 의당수쿠르트슈마허와같이나치 스의범죄, 특히 600 만명의유태인학살을공공연히발언하며과거의공포를일깨우는정치가도있었다. 그러나 그는이미 1952 년에사망했다. 아데나워정권의과거정책은일부의저항이있었지만, 거의모든정치세력의연 대와당시서부독일인의심리적욕구에기초한것으로결국전승국이촉발한탈나치화작업의소용돌이를신속히 종결하자는것이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초에는전승국점령시기에해임되었던관료및각종전문기능요원이 지나칠정도로관대하게재임용되었다. 이들중에는나치스시대의과오에심각한부담을안고있던인사들도수 만명에달했다. 나치스의고위인사는정치적으로생존하지못했으나, 중견의간부요원다수는새로운국가에서 신속히제자리를찾았다. 유명한사례로유태인에대한갖가지차별을규정한 1935년뉘른베르크의인종법에권위있는주석을가한한 스글로프케가아데나워의총리실에차관급의고위직으로재등용된일도있어, 새로운민주주의의장래를우려하 게할정도였다. 아데나워정부가추진한서독의서방편입에따라연합국이심판한전범자도석방되었고, 과거 정규군의고위장교들도복권되어서독의재무장에동원되었다. 정규군의전시행동은정상적인전쟁에서취해진애국적행동으로까지평가되었고, 한국전쟁으로인하여냉전 이험악해진상황까지가세하여대전기독일의대소전쟁은반공산주의적서유럽의통합에기여한것으로까지해석 되기도했다. 이러한분위기에서서독사람들의기억과회상은갑자기스탈린그라드에집중되었다. 이를테마로하 는대중소설, 회고록, 영화가발표되고사람들은무의식적으로패배한전쟁을사후적으로다시승리한것으로만 들고싶어했다 ( 에리히쿠비, 1959). 1950 년대말까지홀로코스트와같은문제는공공여론에서거의언급도되지않았다. 서독의역사학도이 문제에대한연구를회피했다. 서독인의잠재의식과심성에는아직도민주주의이전의사고방식과태도가 지배하고있었고, 반유태주의적정서도여전히살아있었다. 여론에서는제3 제국에대한침묵이지배하고있 었다. 단지소수의지식인들만이이러한분위기를흔들어보려했을뿐이고, 대세는과거의거부, 책임의식의 망각이지배하고있었다. 당시의역사관에서국가사회주의( 나치즘) 는악마와같은지도자의탄생으로말미암 은것으로설명이불가능한비합리성의우발적폭발이며저주로비쳐졌다. 일반대중이보기에나치스의독재와동독공산주의의독재는별로차이가없어보였다. 이와같은대중여론의 자세는어쨌든나치스와공산동독의체제를분명히거부하도록했으며신생독일연방공화국의민주주의를안정시 키는데일조했다. 나치스의인적요소처리에대한아데나워정부의애매한조치에도불구하고, 정부는원칙적으
로연방공화국의정치, 사회제도가나치스체제를부정하는것으로천명하여, 헌정체제의지속적인원칙은분명 히했다. 초창기독일연방공화국이처해있던국내외의여러악조건 패전국국민의저하된사기, 경제적궁핍, 냉전체 제의압박등 때문에이와같은정치적선택은불가피한것으로여겨졌다. 이러한정치적고려와선택은나치 스의희생자에대한보상조치에서도오랫동안같은양상을보이고있었다. 아데나워정부가시행한이스라엘에 대한보상금지불의배후에는서방진영의압력이작용했다. 피해보상에는도덕적확신보다정치적, 외교적득실 이더많이고려되었다. 세계적인냉전구도와관련되어서방진영에거주하는피해자에게는보상받을기회가제 공되었으나, 동구권의피해자에게는대개돌아갈몫이없었다. 그러면서도서독정부의피해보상은독일국민의 여론에서그다지환영받지못했으며때에따라서는저항을받기도했다. 과거극복을둘러싼정신적분위기는 1960 년대에들어서변화되었다. 하나의계기로 1959년에일부지역의유태 인회당과묘지가나치스의상징인하켄크로이츠( 나치스의갈고리십자휘장, 특히깃발에대표적으로사용) 로도 배되어국내외여론에충격을주었던사건이있었다. 학교교육과국민일반을위한민주주의정치교육에서연방 공화국초기의과거정책에내재된결함이분명히인식되기에이르렀다. 한편, 1960년경부터라인강의기적으로불리는경제회복의성과가안착되면서서독인들은한숨돌리고 과거를돌아볼여유를회복하여, 이미전후부터간간히제기되던비판적지식인들의견해를받아들이는사 람들이더많아졌다. 마침내이시기에등장한세대갈등은나치스시대와의대결에새로운동력을제공하 기에이르렀다. 아데나워정권이종료되고새로이수립된대연정에대한항의로시작된 1968년의학생운 동, 원외저항이한계기를마련하였다. 68년의세대들은부모세대의경험을논쟁의대상으로설정하고 비판적으로고찰할수있었다. 1967년에발표된사회학자미쳘리히부부의애도하지않는독일인은나치스시대의범죄에대한독일인의침 묵을비판하여새로이격렬한논쟁의장을열었다. 이시기에연방의회에서는나치스의범죄, 특히학살범죄에 대한공소시효를사실상폐지하도록결의했다. 1969년부터빌리브란트의사민당정부가들어서면서제3 제국이 저지른범죄의시인과이에대한사죄의발언이공공연해졌다. 나아가 1970년 5월 8 일( 종전기념일) 에는전후최 초로연방정부가 2 차세계대전의종료에대한공식적입장을표명하면서, 특히동유럽의희생자에대한화해를 요청했다. 정치적실천을비롯하여과거극복에대한공공논의가이시기부터본격화되었다.
1970년대중반부터서독에서는독일인의정체성에대한논쟁이터져나왔다. 이는 10여년뒤인 1980년 대후반의 역사가논쟁에까지이어지면서독일인의자의식에서나치스체제와시대를어떻게자리매김할 것인가라는고민을제기한것이었다. 사민당- 자민당(FDP) 연정의붕괴이후낙관적인정치적기대가냉각된분위기에서보수적인정치가와지식인들 은독일인의정체성위기를말하게되었다. 이들은서독이달성한민주주의의성과에확고한역사적근거와전통 이결여되어있음을염려했다. 이들이보기에좌파적인경향에서제기되고추진된과거극복은궁극적인과거의 정리를저해하고긍정적인역사상과기억에기초를두어야마땅한국민의정체성수립을불가능하게한다는것이 었다. 헤센주기독교민주당(CDU) 수반인알프레트드레거는 1981 년에이렇게말했다. 우리의역사는 12년이아니라 1200 년에달한다. 그리고나머지 1188 년에는다른민족의역사만큼이나좋은면도있었다. 갈색의 12년동안에저 질러진범죄는모두가아니라일부의뜻이었다. 그러나이 12년간의역사에대한기억은대다수국민들에게는여 전히거북한것이었다.1979년미국에서제작된텔레비젼연작극홀로코스트가제1 국영방송국(ARD) 의전파를타 고독일전역에방영되었다. 허다한비평가들과전문역사가들이이프로그램에서유태인탄압과절멸의스토리를 부정하지는않는다해도, 미흡함, 과장, 다소의위작을지적했다. 그러나시청자들의반응은매우센세이셔널한것 이었다. 수백만명의시청자들에게이방송극은엄청난계몽의효과를발휘했다. 당시의설문조사에따르면, 65% 의시청자들이충격을받았으며, 45% 는수치심을느꼈고, 81% 는방송에대해토론을벌였다고한다. 역사학은대중의욕구와빗나간전문적인연구에매몰된자신의모습을반성하는계기가되었다.60년대후반부 터오랫동안나치스과거는더욱더전문적인학문적관심사가되었고, 고도로전문화된세부연구속에매몰되는 경향조차나타났다. 그러나 1980 년대초부터는전문역사가들도가담하여전쟁기념일, 유력한정치인들의기념연설, 기념물( 특히 과거의비극적과오에대한경고의뜻으로세운다는독일적상황특유의산물인경고의기념물 (Mahnmal), 박물 관건립등을둘러싼역사정책적논쟁이활발하게제기되었다. 통일을이룬헬무트콜총리의집정기간내내과 거극복의역할과기능에대한논쟁이따라다녔다. 1985년종전 40 주년을기념하는바이체커대통령의연설은나치스과거의범죄를정직하게인정하고, 독일인 이이에대하여반성하며, 그기억을영구히간직할것을역설하여세계적인칭송을받았으나, 과거극복을둘러
싼독일인의정체성에대한논쟁은여전히지속되었다. 1986~1987년에제기된역사가논쟁은공공의논쟁이 절정에이른것이었다. 일군의보수적역사가, 특히에른스트놀테가히틀러와나치스의범죄를인류역사상에 수없이존재한정복전쟁, 야만적학살행위와동일시하여특수한독일적의미를희석하려고하자, 이에대하여 하버마스의비판을필두로다수의현대사전문가들과지식인들이참여한격렬한논쟁이벌어졌다. 이논쟁은단 순한역사파악의문제만이아니었다. 40 여년간의성공적인민주주의끝에서독이획득한역사적 정치적자의식의본질을어떻게볼것인가의문제였 다. 동시에서독내의문화적, 정신적헤게모니를둘러싼투쟁이기도하였다. 나아가전후 3세대가등장하는시대 적조건에서나치스과거에대한기억에어떤의미를부여함으로써자신의정체성을기초할것인가의문제이기도 했다. 보수적인입장에서는 70년대부터지배적인과거극복의정체성에서벗어나다른나라의국민과같이긍정 적인역사상에의거한정상화된국민적정체성을회복하기를원했는데, 이제스스로에게고통을가하는죄의식, 상처입은국민의자의식이극복되어야한다는것이다. 그리고자신의역사를계속악운의역사로전달하지말 고, 더순조롭게합의할수있는역사상( 歷史像 ) 으로대체해야한다고주장했다. 이는대외적으로서독이서방적 국제질서에서지난세월의민주적성취에걸맞게더큰비중을획득하려는것을의미했다. 비판적지식인들, 특히그대표격인하버마스와같은이는이러한보수적노선에대하여서독시민의기억에서 나치스와아우슈비츠에대한수치심을몰아냄으로써독일을서방에연계해주는유일하게신뢰할수있는토대를 파괴하려는가? 라고반문했다. 이들이보기에서독의민주적법치국가성과국제질서, 특히통합된유럽으로대 표되는정신적가치지향으로의연계를담보하는것은나치스시대에대한기억과반성이었다. 전후의지체와 우여곡절, 논쟁끝에적어도독일사회가도달한합의는이렇게정리할수있다. 나아가통일이후에도과거의기 억은독일인의자의식에서여전히중심을차지하고있는것으로보이며, 한편이와다른견해가존재하는현실에 서이기억은여전히긴장을안고있는것이다. 3. 역사교과서에투영된과거극복의노력은이러한정치적실천과공공의논쟁으로전개된전체적인과거극 복의문맥과긴밀히연결되어있다. 또한, 교과서는국가-사회-개인의욕구가합의점에도달한결과인점에서 교육및교과서제작을둘러싼제도적조건의직접적인영향을받으며, 각시기의지도적인역사의식, 교육관을 반영하고있었다. 1945 년나치스체제의패망과함께전승연합국, 특히미국은전범의처벌과함께, 독일국민 에대한광범위한재교육정책을기획하고시행했다. 역사교과서의개편은재교육프로그램에서중요한몫을차 지하는문제의하나였다. 나치스의과거에심각하게연루되어있지않았던독일의역사가와역사교육자들, 교사
단체성원들도이문제에관해진지하게대안을모색했다. 점령당국, 특히미국은독일의교육체제일반을근본적으로개편하려는의도를갖고있었고, 독일의교육정책 가들도불운한독일의과거로부터의결별을강조하며민주주의를향한의지와나치스의폭력적통치로부터의급 격한단절을지향할것을천명했다. 그리하여점령당국과의협의속에서전반적인교육체제, 교육내용과방식의 개혁에대해논의하기시작했다. 그러나독일연방공화국의건국과함께냉전상황이격화되기시작하는 1950년대 초부터이러한움직임은오히려후퇴하였다. 종전직후미국이주도한교육체제의개편은이루어지지못했다. 독일특유의복선형교육체제, 즉초등과정이후에대학진학을목적으로하는중등학교( 김나지움 Gymnasium), 직업진출및직업교육단계로의진학을목표로하는중등학교( 기본학교 Hauptschule 및실용학교 Realschule) 로갈라지는전통적인학교체제도그대로유지되었다. 미군점령당국은이복선형교육체제가독일의 민주화를저해하는요인으로보고, 그개편을집요하게추구했으나결국좌절하였던것이다. 교육의운영에서는원래의지방분권적인교육자치제가복구되어주정부가최고의책임을지는체제가수립되 었다. 주정부의교육부는각급학교에대한재정과행정지원을담당하며, 각교과목의기본학습내용의요소를 규정하는교과이수지침을제정한다. 복선형학제로인하여중등학교의역사교과만하더라도, 4 년제기본학교, 6 년제실용학교,7~9 년제김나지움의유형에따라학습내용의분량과수준이상이한교과이수지침이공포된다. 이지침의갱신기간은주마다다르지만평균 10~15 년이며, 하나의교과이수지침이확정되는데착수부터확 정 공포까지최소 2~3 년정도가걸린다. 출판사들은공포된지침에따라, 여러가지학교형태에부합하는다양한 종류의교과서를제작하고, 해당주정부교육부에검정을신청한다. 그리고이검정을통과하면각출판사가자유 시장의경쟁원칙에따라각급학교에판매한다. 실제로각급의개별학교가사용하는교과서는해당교과목담 당교사가결정하며, 채택된교과서의구입에필요한예산은전액국고가부담한다. 이러한제도적조건으로인하여독일의역사교과서 - 다른모든과목의교과서도 - 는어느한시점에서라도 손쉽게일별하고, 수집하기어려울정도로많은다양성을자랑하고있다. 그러나잊어서는안될사항은이다 양한교과서도앞서말한대로역사교육을둘러싼여러교육주체및관련당사자 - 즉, 국가, 사회, 개인의 요구 - 의긴장과갈등끝에도달한합의로생성된것이라는점이다. 특히, 우리의주목을끄는부분은국가, 즉 정부의간여이다.
각주정부는교과이수지침의편수를관장하며, 개별출판사가제작한교과서를검정한다. 그리고교과서의 구입과배포에재정지원을한다. 국가를비롯한교육관련당사자의이해관계는이수지침의작성과정 - 최소 2~3년정도가걸린다는점에주목하자 - 에가장집중적으로개입한다고볼수있다. 물론이이수지침의작 성은완전공개리에이루어지며, 그시안은해당교과와관련된전문연구자, 현직교사, 교사단체에수백부 가발송되어의견을수렴한뒤에확정된다. 특히, 독일의역사교육전문학술지, 학문과교육속의역사 (Geschichte in Wissenschaft und Unterricht) 에는 각주정부가작성하는교과지침에대한평가와비판이논고의형태로자주게재되고있다. 각출판사는이교과 이수지침에다르거나나름대로의자금과아이디어를투자하여교과서를개발하는데, 주교육부가별도의상세한 규제를가하지않기때문에한국이나일본의교과서제작과정과는비교하기어려울정도의자유로운재량과창의 적인역량발휘의여지가주어진다. 또제작된교과서의내용편성이주교육부의교과이수지침에부합하기만하 면, 대개인가되고그채택여부는각급학교의과목담당교사의판단, 즉일종의시장기능에맡겨진다. 오늘날독일의교과서제도에서는한국의교육체제와같은국정교과서의형태를찾아볼수없고, 서술내용에 대한국가권력의직접적인간여도찾아보기어렵다. 물론이러한제도적틀속에서교과서의내용조직과형태, 디자인도지난 50 여년간에많은변천을겪었다. 시간이흘러가면서교육의방법론과자료제시방법을비롯한 교과서관, 역사학의연구중점과방법론에서이루어진변화와경험의축적이실현되기에는많은시간이필요했기 때문이다. 4. 그러면홀로코스트에대한기억을둘러싸고전개된과거극복의노력은역사교과서에어떻게정리되었을까? 종 전직후점령당국의요구와내적인요구에서추진된반성적성찰을구현하는교과서는당장현실화되기어려웠 다.1950 년초까지일종의응급조치로서바이마르공화국시대의교과서가부분적으로수정, 배포되었으며, 점령 당국의요구에따라나치스시대의역사, 특히유태인탄압의서술이일종의별책으로제작되어배포되기도했 다. 물론이렇게부과된나치스과거에대한비판적인식은순조롭게수용될수없었다. 독일인들은스스로를 나치스와점령당국모두에의한희생자로생각하는자기연민의체념속에빠져있었고, 점령당국이공개하는 나치스의만행을외면하고싶어했다. 1950 년초아데나워정권의타협적인과거정책이추진되면서부터는한동안퇴행적인경향이지배했다. 새로운교과서에서는독일사를유럽사의문맥에서파악하고서술하려는노력은다소의진전을보았으나, 1933년나치스집권이후의반유태주의적책동은부차적으로만다루어졌고대량학살조차도매우축소되어서술되었다.
사태의책임자로서도오직히틀러만이언급되었고, 경찰이나정규군은커녕나치스친위대(SS) 조차도언급되지 않았다. 이에반하여전시에독일인이겪은고통, 제3 제국에대한교회의저항, 전후난민의참상에대해서는 동정적으로서술되었다. 전체적으로역사교과서에서 2 차대전과나치스에관련되는시기는희생자의관점에서서술되지않았고, 오히려 독일인일반을제3 제국의테러와집단수용소에저항할능력이없던무죄한희생자로보고있었다. 일부의교과서 에서는뉘른베르크의전범재판과점령당국에의한탈나치화작업조차언급을회피했다. 실제의학교수업에서는 1 차세계대전의발발까지나겨우다루어지는형편이었다. 10여년전에끝난전쟁에대해서보다 2천수백년전 에있었다고하는호메로스의트로이전쟁이야기를희랍어원전으로읽는데더많은수업시간이할애되었다. ( 소설가페터슈나이더의회고) 말하자면, 애매한과거정책과함께역사교과서에도나치스과거에대한침묵, 기 억에서의방출이지배하고있었던 50 년대였다. 이미 1955 년부터교육에서나치스과거를다루는태도에결함이있다는비판이제기되기시작했다. 1960년대 에들어다시금높아진반유태주의의물결로지난전후의 10여년간에이루어진역사및정치교육의성과에 대한격렬한논쟁이야기되었다. 각주의교육부장관이모여개별주의교육정책을연방차원에서조율하는 협의회는교과이수지침을개편하여현대사교육의강화를권고했다. 전국적인대학생조직연합체도교사양성 과정과학교교육에서다루는유태인문제에관한학술회의를개최하기도했다.1960년대초에는교과과정과 교과서서술에서유태인탄압과홀로코스트를다루는방식에서일대전기를마련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다수의교과서에서이문제의서술은양적, 질적으로이전의교과서보다현저히개선된모 습을보여주지는못했다. 일부의교과서, 예컨대시간과인간 (Zeiten und Menschen, 1970) 의자료학습과제 에서나치스와홀로코스트에관한본보기자료가 5 면에걸쳐제시한것과같은개선된모습을보여주었다. 60년대후반과 70년대초에는일부교과서가이와같이나치스의과거에대해사진과사료표본을제시하여축 소하지않고공개적으로언급하는태도가나타나기시작했으나, 기본적인서술시점에서희생자의관점은여전히 결여되어있었다. 유태인공동체내부의삶과이들의저항은매우소략하게다루어졌고, 뉘른베르크전범재판과 탈나치화작업도여전히간략하게, 그리고긍정적이지만은아닌어조로다루어졌다. 68 학생운동으로촉발된과거의비판적반성과역사학에서의새로운모색, 특히 60년대중반부터활발해진나치스시대의연구성과와사회구조의변천을중시하는역사학풍이교과서서술에반영되기에는좀더시간이걸렸다.1970 년대에는역사학과역사교육에대한회의와위기의식이팽배해지면서, 역사학의역할과기능에대한논
의가학계에서활발하게이루어졌다. 한편,68 학생운동의지도이념이기도했던프랑크푸르트학파의비판이론이풍미하면서, 나치스과거에대한 성찰이제고되었다. 그리하여특히 1978~79년부터제3 제국시대유태인의처지와홀로코스트는교과이수지침 과교과서서술에서양적, 질적으로더욱고양된위치를차지하게되었다. 홀로코스트는교과서에자각적이며의 미심장하게들어오게되었으며, 역사적으로드러났던현상의차원에서일반적으로매우상세하고사실적으로정 확하게서술되었고, 관련자료가매우생생하게제시되기에이르렀다. 한편, 이시기에는역사교육에서학문중 심적방법이교과서의서술과내용조직, 교육방식에관철되기시작했다. 즉, 역사교육의목표는역사지식이나역사연구의성과를단순하게습득( 즉, 암기) 하는것이아니라, 과거를다룰 줄아는지적역량의함양에있다는것이다. 그리하여역사교육은여러가지상이한사회사상과이론에대하여개방적인입장을취해야하고, 학습자가 스스로역사지식의생산과정을체험하도록수업자료를조직하고제시해야한다는것이다. 그리하여역사를배 우는학생은자료( 사료및 2 차자료) 를비판적으로분석하고, 나름대로의역사상을구축하는연습을통해하나 의작은역사가가되도록한다는것이다. 홀로코스트의서술이풍부하고정확하게이루어지고, 학습자에게역 사적책임감을갖도록호소하였으나, 현상의원인을설명하는방식에서는여전히책임을회피하는듯한논거가 나타나고있었다. 즉, 나치스시대의범죄행위와홀로코스트의원인을히틀러에게, 그리고소수의광신적나치 스분자에서찾는방식이었다. 1980년대에들어독일의유태인중앙위원회와교원노조의공동권고, 그리고독일-이스라엘교과서 협의회에서나온교과서개선권고안에따라홀로코스트의서술은더욱개선되기에이르렀다. 그리고 1989~90 년이후, 통일된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교과이수지침과교과서의대대적인개편이이루어졌다. 이 는독일통일에따라등장한새로운과거극복의과제가교육과정과교과서에고려되어야하기때문이었다. 새교과서는 1990 년대중반부터순차적으로등장했다. 공교롭게 1996년에발표된미국의정치학자골드하겐의저서히틀러의자발적인사형집행인 (Hitler's Willing Executioners) 은과거극복과관련하여독일사회에또격렬한논쟁의불을지폈다. 학계의울타리를넘어서일반 여론에까지널리비화된이논쟁의핵심은나치스의범죄와홀로코스트에서평범한독일인의역할과책임에대한 의문을제기하는것이었다.
전문역사가들이이저작의결함을여러방면에서지적했음에도불구하고, 이저작이야기한논쟁은독일인들 에게끊임없이과거의부담을상기시켰다. 이러한논쟁으로일깨워진의식이여러종류의역사교과서에널리 수용되었음은물론이다.1998 년에출판된중등학교( 김나지움) 용의어느역사교과서( 모두 4 권으로구성)- 오늘 날가장많은판매부수를자랑하고있는데, 우리가만드는역사 (Wir machen Geschichte) 라는표제를달고있 다.-에서는홀로코스트에관하여전문연구에서축적된성과를충분히반영하는심층적인서술을보여주고있 다. 나치스의폴란드점령정책, 유태인의학살에서나타난잔혹행위에대해서나치스핵심성분, 친위대만이 아니라경찰, 정규군의가담과책임을분명히서술하고있는것은물론, 평범한독일인의책임에대한성찰과 숙고를학습과제로제기하는방식으로가차없는역사적진실과직면하도록편성되어있다. 5. 독일의교과서, 역사교과서는제도적유연성과여유로인하여경직된교육체제와교과서제도를취하고있는나라에서발견할수있는일관된정책을쉽게드러내기어렵다. 그럼에도불구하고오히려이와같은제도적유연성으로인하여각시기마다독일사회의구성원이도달한의식수준과합의를다소의시각차이는있지만더욱정직하게반영하고있다고할수있다. 교과서에표출되는독일인의과거극복은지난세월동안에정치적실천과여론의논쟁으로전개된과거극복의정신을불충분한면에서나, 충분한면에서나남김없이반영하고있었다. 그런면에서독일의교과서는독일사회의정치적리더십 - 전문연구 - 교육관련종사자 - 교육수혜자등 교육과관련된모든이해당사자의합의가충실하게드러내고있다. 역사교과서에정리된나치스과거의이해와 성찰은최근까지더욱깊이내면화되어왔던바, 여기에서적어도과거의과오를감추려하지않고, 끈질기게상기 함으로써과거의부담을극복하려는태도가독일사회의주류임을확인할수있다. 물론모든교육이그러하듯이이 와같은교육적의도와노력이현실에서남김없이효과적인성과를거두었는지또거두고있는지는별도의검증과 고찰이필요할것이다. 크게보아이과거극복의지속적인성과는독일의지난 50여년간의역사가그러했듯이 앞으로나타날독일사회의미래가입증할문제라고하겠다.
통일독일의과거청산 : 강제징용된외국인노동자에대한배상 정현백, 송충기, 성균관대사학과교수독일보쿰대사학과박사과정 2000년 9월 최근독일의회에서는역사적으로아주뜻깊은법안하나가통과되었다. 독일정부와기업이공동으로기금을 출연하여 < 기억, 책임그리고미래>(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 라는이름의재단을설치하려는법안이 바로그것이다. 이것이역사적인의미를띠는까닭은이로써제2차세계대전당시독일에강제징용된외국인노동 자들이반세기를넘기는기나긴투쟁끝에드디어독일로부터보상받는길이열렸기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독일은일본과는달리, 히틀러정권하에서자행된참혹한비인간적인범죄에대한속죄에대해적 극적이었다. 전후일본정치가들이불행했던과거에아직사과의수준에도못미치는애매한유감표명을하는데 그치고있는반면, 독일정치가들은잘못된과거를청산하려는노력을줄곧보여왔다. 과거브란트수상이홀로코 스트희생자들의영령앞에참배하면서무릎을꿇은것이나, 1985년제2차세계대전종결 40주년을맞아당시대통 령이던바이체커대통령이국회에서과거에대한반성을촉구한연설을한것이그사례라하겠다. 게다가독일은 역사교육이나역사교과서, 그리고일반대중들에대한정치교육에서도히틀러정권의잔학성을고발하는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러나과거청산에대한이러한독일정부의전향적인자세에도불구하고강제징용된외국인들에대한보상문 제만큼은지금껏외면당해왔던것이사실이다. 독일정부는이제까지나치정권의피해자에게는약 1400 억마르크( 일 부강제노동자에대한보상금포함라는적지않은액수를보상해왔다 ). 그러나유독강제징용된외국인노동자들 이요구하는체불된임금과강제징용에대한보상문제에대해서는법적근거가부재하다는이유를들어이를거부 해왔었다. 그래서외국인강제노동자들이어떤과정을통해전후보상에서누락되어왔으며, 그리고예전에는논 의조차금기시되던이들에대한보상문제가, 특히통일이후, 어떻게정치적인타결에이르게되었는지살펴보는 것은참으로의미있는일이라하겠다.
1. 강제노동자란누구를말하는가? 제2 차세계대전때히틀러정권은전쟁이장기화되면서군수물자생산에노동력부족이심화되자, 독일 점령하에있던지역에서수백만명에달하는외국인노동자들을강제로동원했다. 여기에는아주다양한 국적과신분의사람들이포함되어있고강제동원한방식, 상황, 시기도각각달랐다. 이렇게강제노동에 징용된사람들을여러부류로나눌수있지만, 일반적으로는다음네가지로분류된다. 첫째로, 1939년부터 1945 년까지독일로동원된외국인민간노동자로서, 소위외국인노동자로불린사 람들이다. 폴란드와소련지역에서온동유럽노동자들을제외한다른서유럽민간노동자들은, 맡은역할 에따라적어도명목상으로는, 독일노동자들과똑같은임금을받는것으로규정되어있었다. 폴란드노동 자들은독일노동자수준의임금에서 - 이들은독일인과달리군대에가지않는다는괴상한명목으로 - 15 퍼센트를세금으로공제당했다. 그반면, 소련지역에서온민간노동자들은따로규정된임금을받았는데, 그명목임금의수준은독일노동자나다른외국인노동자들에비해서약 40 퍼센트정도가낮았으며, 실질임 금은더낮았을것으로추정된다. 그렇지만이것은어디까지나규정상의일이고, 실제로임금을아예받지 못하는경우도있었고아예 민간인포로 처럼취급당하기일쑤였다. 여기에는또한인종주의적인차별도 한몫했다. 곧동유럽노동자들은그외에도다른외국인노동자들과구분되도록, P ( 폴란드노동자) 나 Ost ( 동부: 소련지역에서온노동자) 라는표찰을붙이고다녀야했고, 수용소에거주하면서특히엄한감독과 일상적으로자행되는부당행위에시달렸다. 이들노동자들의절반이상이여성들이었으며, 그평균나이는 20 살도채못되었다. 그배후에는이들동유럽노동자가운데절반이상을여성으로채우게함으로써, 이들 동유럽남성노동자들이독일여성에게접근하는것을미연에방지하여독일인의피를보호해야한다는인 종주의적인의도가다분히숨겨있었다. 두번째부류는전쟁포로들이다. 1939년전쟁개시이후폴란드에서만 30만명이상의전쟁포로가독 일군수산업에투입되었는데, 이들가운데많은사람들은나중에민간인신분으로전환되었다. 여기에다가 1940 년프랑스전선에서독일의계속적인승리로백만명이상되는프랑스전쟁포로가추가로동원되었 다. 또소련과의전투에서는이보다훨씬더많은수의전쟁포로가독일인수중에떨어졌는데, 그중많은 사람들이독일인들의학대로말미암아굶어죽었고, 나머지는강제노동에시달렸다. 여기에서또빠뜨릴 수없는집단은 60 만명에달하는이탈리아군인들이었다. 이들은 1943년이탈리아가추축국에서제외되자 독일군감시하에놓이게되었는데, 나치정권은이들조차독일로끌어와강제노동에동원시켰다.
세번째는나치의특수군대인 SS 의관할하에있던독일내강제수용소에갇혀있던사람들이다. 1944 년전쟁이더욱치열해지고소련과의전투에서상황이날로악화되면서전선에투입해야할사람들이더욱 많아지게되자, 그자리를메울노동자들의부족이심각해졌다. 그래서강제수용소에있는사람들의노동력 을이용하는방안이대두되었다. 나치의강제수용소는원래정치범을대상으로한것이었으나, 점차일반 범죄자, 반( 反 ) 사회범, 동성연애자, 유대인, 집시, 그리고전쟁때에는적대적인외국인들까지수용하고 있었다. 전쟁초기에는 2만명정도에그치던수감자수가전쟁말기에는 60 만명에육박했고, 그가운데 외국인의수도크게증가했다( 전쟁말기에독일인비율은약 8 퍼센트였다). 이들을경제적으로이용하려는 생각은 SS 가자체적으로운영하는기업들이생겨나면서그이전부터현실화되고있었으나, 적어도 1942년 중반까지는주로이들을교화시켜야한다는정치적목적에치중되어있었다. 그러다가전쟁상황이날로 악화되자, SS는이들을사기업에게대여하는원칙으로방침을바꾸었다. 곧수감자들이노동력을제공해야 할기업의근처에임시수용소가설치되어그들의숙소로사용되었고, 이노동력을이용하는사기업은 SS에 그대가를지불했다. 이부류의강제노동자에게는임금이전혀지불되지않았다. 마지막부류는유대인들로서, 특히동유럽지역의유대인들이강제노동에이용되었다. 독일지역내에 있던유대인가운데실업자로서실업생계보호를요청한사람은이미 1939년전쟁이전부터부분적으로강 제노동에이용되었다. 그러나 1941년초반에유대인들을멸종시키려는정치적프로그램이대두하자, 히틀 러정권은유대인을계속경제적으로이용할것인가, 아니면아우슈비츠와같은학살수용소로끌고가서 일단독일내에서만이라도유대인을없애도록할것인가하는정치적선택의기로에서게되었다. 실제진 행된결과는후자였다. 곧 1943년여름까지몇몇예외를제외하고는군수산업에중요한노동자로판단된 유대인들까지모두독일지역에서동유럽점령지로추방되었다. 그곳독일점령지내의유대인들도이와비 슷한운명에처해있었는데, 이곳에서는 1939년 10월에이미 14살에서 60살까지의모든유대인남성이강제 노동의의무를지게되었고, 몇주후에는여성에게도이규정이확대적용되었다. 그렇지만이들의노동력 도죽음의운명을모면시켜주지는못했다. 이들동유럽유대인들은죽음의수용소로끌려가기전에노동 능력자로판정을받으면게토나강제노동수용소에거주하면서일정기간강제노동에종사했다. 폴란드 유대인가운데절반정도가그런판정을받았으며, 다른지역에서그곳으로추방된유대인들가운데서는노 동능력자로판단된사람의비율이더낮았다. 곧이들가운데많은사람이잠시중간집결지를거쳐곧바 로죽음의수용소로끌려갔던것이다. 1944년에들어유대인들을다시노동력으로이용하려는움직임이있 긴했었지만, 전반적으로나치정권은심각한노동자부족에시달리면서도노동자로이용할수있는수많은 유대인들을학살하는쪽을택했다.
이런강제노동에종사한외국인수는 1944년당시를기준으로하면대략 8 백만명으로추산되는데, 그 가운데민간강제노역자는 570 만명, 전쟁포로 190 만명, 강제수용소수감자 50 만명정도였다. 따라서 이당시외국인강제노동자의수는전체독일경제종사자의약 4분의 1 을차지했다. 육체노동을많이 필요로하는기업체나군수산업에서는외국인강제노동자의비중이더욱컸다. 혹사, 영양부족, 열악한 시설및위생환경으로말미암아이들이사망에이른경우도부지기수였으며, 그렇지않다고해도이후고 질병에시달려야했다. 이들은산업분야에한정되지않고농업, 숙박업, 일반공공관청에까지투입되었으 며, 심지어가정에서보모로서일한경우도있었다. 최근가톨릭계는가톨릭교회도역시강제노동자들을 고용했었다고밝히고, 이제어떤방식으로보상에참여할것인가에대한논의를진행시키고있는중이다. 2. 강제노동자에대한보상누락 - 또하나의정신적강제노동의시작 히틀러정권의주요전범을다룬뉘른베르크재판에서노예노동자프로그램 (Sklavenarbeiterprogramm) 이 핵심죄목가운데하나였다. 강제노동자동원에직접책임이있는자우켈(Sauckel) 및군비책임자였던스 페어(Speer), 강제노동자들을이용한크룹(Krupp) 및이게파르벤(I.G. Farben) 등을위시한많은기업가들 이이죄목으로유죄판결을받았다. 그렇지만이문제가그당시에크게부각되지않았다. 그것은홀로코 스트라는역사상유례없는인종말살이라는죄악에가려 외국인의강제노동 은상대적으로가볍게취급 되었기때문이다. 게다가전쟁직후의경제적어려움이제대로된과거청산을어렵게만들었다. 또한, 일반독일인들의과 거청산의지도대단히약했다. 모두직간접으로전쟁당사자였던이들은미군이독재의그늘에서자신들 을구해낸해방군이라는점에대해여전히의문부호를달고있었다. 전쟁의종결에대해서는이들이환 호했을지모르지만, 전쟁의패배에대해서는쉽사리승복하지못했다. 이런상황에서이들독일일반대중 에게는과거란망각해야할대상이었지, 과거를다시들추어내어그상처를다시하나하나직시해야한다는 것은고통그자체였다. 이들에게는다행히도유대인의살상행위는나치즘의보도지침때문에일반독 일대중들에게널리알려지고있지않았다. 그러므로유대인살상행위에대해일반대중은집단적인 죄의식에크게시달리지않아도되었다. 곧이들은이모든행위를나치정권자체의잘못으로넘기 고, 자신들의행위를정당화할수있었다. 그렇지만강제노동자문제는크게달랐다. 왜냐하면강제 노동자들은이들주변에항상존재하던것이었기때문이다. 따라서일반대중들에게는강제노동의비 인간적행위를들추어내어집단적인죄의식에시달리기보다는그것을기억에서일찍지워버리려는경
향이강하게박혀있었다. 이로써전후보상문제의원칙은자연스럽게정해진것이나다름없었다. 유대인의박해는나치정권의죄 악으로크게부각되고, 그희생자들에게대해서는적극적인보상책이강구되었다. 그렇지만나치정권, 기업 그리고일반개인들까지연루된문제인외국인강제노동자문제를들춰내는일은금기사항이되다시피 했다. 실제로나치즘의피해자들을보상하기위해 1956 년에제정된독일연방보상법(Bundesentschädigungs- gesetz: BEG) 의내용이그것을아주잘보여준다. 이에따르면, 그보상의대상이독일국민이거나독일이 점령한지역의주민으로제한됨으로써전쟁당시독일과적대적이었던국가의국민이여기에서제외되었고, 따라서대다수의외국인강제노동자들( 민간인노동자와강제수용소에있던외국인들) 은애초부터그보상 의근거를박탈당했다. 만약, 외국인강제노동자가서독당국이제정한나치즘피해자에대한보상원칙에서제외된다면, 외국 인강제노동자는전쟁배상을통해서그보상을받아야했다. 그렇지만전쟁배상에서도외국인강제노동 자는배제되었다. 서독은국가간의전후배상문제를 1953년런던채무협약 (Londoner Schuldenabkommen) 을통해일괄타결했다. 여기에서서독측은미국측의도움으로피해국의배상요구액에훨씬못미치는 73억마르크를 12 년상환으로지불한다는유리한결정을얻어냈다. 주요채무국인미국이당시냉전의위협 하에서서독을빨리부흥시키고반공산주의의보루로만들어야한다는세계전략을구사하고있었기때문 에, 연합국쪽으로서는배상문제의신속한해결이급선무였던것이다. 이런배경속에서체결된이협약의규정에따라, 강제노동자에대한보상문제는사실상영구히유예되 었다. 이협약제5조 2 항에는다음과같은내용이규정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중독일과전쟁상태에있 었거나독일의점령지였던국가나국민이독일제국이나그로부터위임을받은당국이나사람들에게전쟁으 로인한보상을청구할경우, 이에대한검토는 이배상문제의최종적인규정이확정될때까지유예한 다. 곧더이상의배상요구가나오면서독의배상능력을넘어서게되어원래이조약의목적에위배되기 때문에, 더이상의배상논의는최종규정, 곧평화조약이체결될때까지유예한다는것이다. 이후독일은예정보다앞당겨요구받은채무를이행했지만, 이조항에따라강제노동자에대한보상문 제는더이상제기되지않았다. 잠정적인보류가영원한보류로둔갑했던것이다. 이로써제2차세계대전 으로인한모든배상문제는해결되었으며외국인강제수용소수감자와외국인강제노동자들의보상요
구를막는법적인근거가마련되었다. 더욱이서방측에서뿐만아니라소련의영향권내에있던동유럽국가들에대해서도개인적인보상권리가점차배제되었다. 1953년소련당국은폴란드정부와의합의에따라동독에대한더이상의배상요구를포기한다고선언했다. 이로써서독과외교관계를맺고있지않던국가들, 곧주로런던채무협약에참여하지않은구공산권국가의구성원들의보상문제도사실상매듭지어졌다. 이문제가현실적인국제적상황논리에밀려논의조차되지않음으로써, 강제노동자당사자들은역사적 인청산이라는또다른정신적강제노동까지스스로떠맡은꼴이었다. 이문제에대해대기업들(AEG, Krupp, Volkswagen, Bayer, Siemens) 은법적으로나도덕적으로보상해야할이유가없다고버텼다. 이들은 런던채무조약으로법적인근거를갖고있다고굳게믿고있었을뿐만아니라, 소송비라는현실적인요소까 지계산에넣고있었다. 곧강제노동자개개인이엄청난소송비를감수하면서까지승산이보장되지않은 법정투쟁을벌일수없다는것을감안했던것이다. 한마디로골리앗에대한다윗의싸움이었다. 이런골 리앗을그나마약간움직이게한것은유대인조직들이었다. 이들은강제수용소에감금되었던많은유대인 들이강제노동에시달렸는데도불구하고이에대한보상이전혀지급되지않자, 이들당사자들의이해를 대변하여보상문제에나서게되었다. 이들의법정투쟁은그다지순탄하지않았다. 강제수용소에수감되었던한폴란드인이 1963년강제노 역에대한임금을추후보상하라는요구를제기했는데, 서독연방재판소는이를기각했다. 여기서눈길을 끄는것은그기각사유이다. 런던채무협약제5 조에따르면, 국가인서독정부만이아니라그정부의경제 및환율까지배상청구권으로부터보호되어야한다라고규정되어있다. 그렇다면강제수용소에수감중이 던사람을고용한사기업은그보호의대상인가아닌가? 여기서문제는사기업들이소위독일제국으로부터 위임을받은당국으로간주될수있는가아닌가하는것이다. 강제노동자의보상청구권을기각한사유에 따르면, 이들기업주들도국가적인수감자를관장하는보조기구였다고판단된것이다. 그러나역사연구를통해서이강제노동자를고용한사기업들의책임소재가다시논란거리로부상했다. 왜냐하면역사연구결과에따르면, 국가가강제노동자들을사기업에강제적으로할당시킨것이아니라, 기업가들이그값싼노동력을탐내그들을고용하기를자청했던경우도적지않았기때문이다. 따라서이에 대한결론을내리기에는아직섣부르다. 그러나어찌되었건, 전쟁중에외국인노동자비율이전체고용원 수의절반을넘었던많은대기업들에게는이법적논란은대단한효력을발휘했다. 연방재판소가강제노동자들에대한보상요구를기각시킨또하나의법적사유는이들외국인노동자들
이나치의전형적인박해를받았다고보기가어렵다는데있었다. 가령한폴란드노동자가전쟁중에체 포되어독일에끌려와강제노역에종사했다고하더라도, 이과정에서강제로끌어온부당한행위의핵심적 인원인은나치의전형적인박해가아니라, 단지노동력부족에있었다는것이다. 또 SS가강제수용소에 있었던수감자들을일터로내보낸행위는, 그를수감자로서가아니라군수산업에필요한숙련노동자로 간주했기때문이며, 따라서그것을나치정권의부당한박해행위의하나로보기어렵다고연방재판소는 밝혔다. 이들이어려운노동조건에처했던것은전쟁으로인한불가피한결과였다는지적이다. 따라서강 제노동에동원되었던사람들은독일연방보상법을통해보상받을수있는길에서조차차단된것이다. 이런 시각역시역사연구를통해부분적으로수정되고있다. 왜냐하면강제노동자나강제수용소수감자가사 기업에서일하면서수많은피해를입었다는것이증명되고있기때문이다. 이문제에대해자발적으로나서서보상에적극적이었던한중소기업의사례가없는것은아니지만, 대부 분의기업은이보상을완강히거부했다. 이들의입장은다음과같은한기업변호인의말에서단적으로드 러난다. 강제수용소에있다가강제노동에동원된사람들이특별히많이죽었다는주장을나는결코받아 들일수없다. 아니그반대이다. 이들은강제수용소에서빠져나왔다는것을기뻐했다. 왜냐하면알다시피 기업에서그들은죽음의강제수용소에서는갖지못할생존의가능성과합리적인보살핌을받았기때문이 다. 이논조에따르면, 강제수용소수감자들은무일푼으로강제노동에종사할수있게해준기업에대해 오히려감사해야할처지라는것이다. 이들기업가들은기업윤리를망각한악독한자본가가아니라온정 있는생명의은인이었다는것이다. 그렇지만기업들은유대인조직의끈질긴법정소송에시달리게되고계속여론에서문제시되자, 협상에 응할뜻을비쳤다. 끈질긴협상끝에몇몇대기업( 예를들어, 크룹, 지멘스, AEG 등) 은최소한의보상을내 놓았다. 이때기업들은이보상이법적인의무때문이아니라인도적인차원에서자발적으로배려하는것이 라는점을누누이강조했다. 그뿐만아니라이보상은강제수용소수감자출신의노동자들에게만주어졌 다. 노동자수용소에있던민간인강제노동자는철저히배제되었다. 물론 1980년이후노동조합의주도로민간인강제노동자에대한보상과과거청산에나선대기업도있 다. 가령풍뎅이차로유명한자동차회사인폴크스바겐은 1937/8년에나치의주도로세워진그야말로나치 정권을대표하는기업이다. 신생기업으로서노동자수급에적잖은어려움이있던이회사는, 전체종업원 가운데강제노동자가차지하는비율이 ⅔가될정도로, 강제노동자에게크게의존했다. 이회사가나치에
협력했던어두웠던과거사를제대로조명하는등과거청산작업을진행할수있었던것은, 이회사노동자 대표들이 1985 년기업이사회에강제노동자문제를정식으로제기했었기때문이다. 그과거청산작업의일 환으로, 이회사에서일했던강제노동자들은일회적인금전적인보상을받게되었다. 이런예외를제외하면, 민간인강제노동자들은이후역사에서그존재가완전히잊혀졌다. 특히구소련 에서는이들강제노동자들이보상대상자가되기는커녕, 대부분나치에협력한배반자라는따가운의심의 눈초리를받아야했다. 나치독일에서문자그대로인간이하의존재 (Untermensch) 로취급당했던이들이 드디어소련땅에발을내딛었을때, 이들을기다리고있었던것은따뜻한환대가아니라소련비밀경찰의 소위여과수용소였다. 또여기에서누구나집으로갈수있었던것이아니었다. 이들가운데에는다시소 련의강제수용소로끌려간사람도있었다. 1953년스탈린의사망때까지이들은비밀경찰의감시하에있 었으며, 직업상차별을당하기도했다. 1970 년대에들어와동유럽과서독의외교관계가진전되면서강제노동자의문제가다시현안으로대두 되었다. 동유럽가운데특히폴란드는이에대한보상문제를강력하게요구했다. 양국은명목과실리를둘 러싼줄다리기를계속하다가, 결국 1975년서독이폴란드에경제차관이란명목으로 10 억마르크를, 그리고 폴란드출신강제노동자들의연금청구를상쇄하는대가로 13 억마르크를제공하기로합의를보았다. 이 액수는여러면에서보더라도 희생자들이보상받는것에비하면 약소한것이었다. 서독노동자들의연금수준과비교하거나서독연방보상법에의해나치 3. 통일후새로운법적인해결노력 이처럼법적근거에밀려, 강제노동에대한보상이해결되지않은채독일은통일을맞이하게되었다. 물론통일이전에이들강제노동자들에게보상을해주려는정치적인노력이전혀없었던것이아니다. 1986 년에유럽의회는녹색당의발의로독일기업들에게보상기금을설치하도록하는요구안을통과시켰 다. 또한서독내에서도 1989 년에녹색당과사민당이, 강제노동자의보상을위해, 재단을설치하려는목적 의법률안을제출하기도했다. 그와중에서이루어진독일통일은이보상문제에새로운법적인근거와정치적인해결에활력을가져 다주었다. 왜냐하면 1990 년독일통일을위해동독과서독그리고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2+4 협약
(Zwei-plus-Vier-Vertrag) 에조인함으로써, 소위평화협정에준하는규정이생겨났기때문이다. 이로인해런 던채무조약의전제조건이사라지게되었다는해석이가능해졌다. 따라서그에따른심각한결과를우려한 통일정부는구소련국가및폴란드와협정을체결하여 15 억마르크를일시불로지불하고, 그기금가운데 5 억마르크를나치정권의희생자들을위한보상에쓰도록함으로써모든문제를해결하고자했다. 이렇게 해서배상문제는전쟁종결 50 년이후에물질적으로해결된것으로보고, 대신이평화조약에준하는 2+4 협약에는 - 런던채무협약 5조 2항에명기된것과는달리 - 배상문제가최종적으로규정되지않았다. 따라 서구체적인배상규정을기대했던많은강제노동자들은이에실망을금치못한것은당연한것이었다. 그런데이배상문제에대한최종적인규정이누락됨으로써, 역설적인법률해석이가능하게되었다. 암 묵적으로배상규정을빠뜨린것은배상요구권이사라진것으로해석될수도있지만, 다른한편으로는나 치희생자에대한배상근거에따라그배상요구를들어주도록 ( 말하자면, 암묵적으로) 인정하고있는것 은아닌가? 후자의해석을따른다면, 개인적인법적청구권이다시허용되고있는셈이다. 독일법정도이 문제에대해엇갈린판결을내렸다. 여러독일법정에서는이보상청구권의소멸을인정하지않았다( 하지 만다른이유로그청구권을기각시켰다). 하지만미국법정에서는국제법상의협상을우선함으로써그에 관련된집단소송을허용하지않았다. 그다음문제가되는것은보상청구권의법적시효였다. 여기에는두가지논란거리가있다. 첫째는그 법적시효가얼마인가하는것이고, 또다른하나는발효시점을언제라고보느냐하는것이다. 이미 1967 년에서독연방법정은독일인강제수용소에있던한사람이제기한소송에대해민법 196조 9 항( 임금청 구) 에의거하며법적시효기간이 2 년이라는판결을내렸다. 임금청구만이아니라부당한범법행위에관 한규정을적용해도독일민법상시효기간은 2 년이다. 이에대해여론의비난이쏟아지자, 부당이익취득 죄를적용해서 3 년을적용할수있다는새로운해석이나왔다. 지금까지의판결사례로보면, 대체로이에 대한시효는짧은것으로결론지워지고있다. 이보상청구권의시효가짧은관계로그시효의시작이언제인가하는것이아주중요한쟁점으로등장 했다. 일각에서는 2+4 협약을그시작으로보는시각이많은데, 그렇다면그시효는그로부터 3년이지난 1994년 3월 15 일에말소되었다. 이를근거로청구권의기각을판결한선례가최근에도있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의판례가나왔다. 그러나소송담당자들의시각은이와다르다. 1996년독일헌법재판소가내린 결정( 기존의법적인근거로는청구권을받아들일수없지만, 독일정부가나름의권리에따라외국인강제
노동자들의청구를허용한다고해도그것이헌법에저촉되지않는다) 에따라비로소피해자들은이소송이 가능한지에대한근거를갖게되었기때문에, 그이전까지독일법정들이내린판결이소송담당자들이청 구할수있는길을방해했다고한다. 따라서그시효의시작은이판결이내려지고난이후부터라는주장이 다. 그러나이에대한법적인반론도또한만만치않아서현실적으로는소송자들이법적으로상당히불리한 입장에처해있었다. 특히손해배상에대한집단소송이독일에서는불가능하고미국에서나그것이가능한 데, 미국의집단소송이법정에서이런시효나국제법상의규정을들어이미기각된상태에서, 법적처리는 다소비관적인전망에놓이게되었다. 4. 법적인해결에서정치적, 윤리적, 역사적해결로 강제노동자보상문제는이렇듯통일이후에도여전히법적으로해결될수있는전망이적어졌지만, 그 만큼여론의공세는오히려거세졌다. 게다가나치시대때기업가들의윤리적인문제가계속여론에흘러 나와그정치적공세를자극시켰다. 그가운데하나는바로 1997년에불거진스위스은행의문서유출사 건이다. 많은독일기업들이계속소송에시달리고있는것을본이은행은스스로갖고있던문서를파기 함으로써그소송의소용돌이에서아예벗어나려고했다. 이것을그은행의한경비원이알아내고문서를 빼내어공개했다. 이로써소위주인없는홀로코스트희생자들의구좌에대한실체가드러나게되었다. 여 론에서는이사건으로인해그동안소문과추측으로만나돌던스위스은행의나치범죄행위가다시도마 위에올려졌다. 이에대해뉴욕에서집단소송이준비되었고, 스위스산물건에대한보이코트가연일여론 에서거론되었다. 그러자이은행은 1998년들어이에굴복하여 22억마르크로정의기금을만들어보상하 기로결정하기에이르렀다. 이에자극을받아독일은행과대기업에대해서도강제노동자보상에관한집단소송이미국에서제기 되었는데, 여기에서는강제노동자문제뿐만아니라, 유대인들로부터재산을불법적으로빼앗거나, 홀로코스 트희생자들의금붙이를모아서이득을챙긴죄목이주로거론되었다. 이과정에서논쟁은법적인문제를 떠나점차정치적인문제로비화되었다. 이문제가정치적으로해결될기미를보인것은, 1998년에 16 년간정권을잡고있던콜수상의기민당/ 기 사연및자민당연립정부가무너지고사민당과녹색당의연립정부가들어서면서부터였다. 기민당/ 기사연과 달리, 그동안이문제에전향적인자세를보였던양정당은연립정부를출범시키면서연방정부와기업들이
강제노동자들의보상을위한재단을세워야한다는데쉽게합의를보았다. 슈뢰더(Schröder) 수상은이 문제를직접관장하여주요대기업의경영자들에게정치적으로해결할것을종용하고나섰다. 대기업이이에대해전향적인자세를보이게된것은독일대기업에대한반대여론이거세졌기때문이 다. 예컨대, 독일은행인도이치방크가미국뱅커스트러스터회사를인수하려고했을때, 뉴욕시의회는그 에대한허가를내주지말도록하려는움직임을보였다. 벤츠와, 베르텔스만과같이미국계기업과합작하 거나기업을인수한독일기업들은미국에서의기업이미지를고려하지않을수없게되었다. 나치와관련 된소송이일단제기되면, 그결과에관계없이좋지않은이미지를얻게될뿐만아니라, 그에대한보도가 계속되는만큼이로울것이없다는판단도여기에한몫작용했다. 그뿐만아니라수출주력기업들은직접 적인보이코트움직임에신경을곤두세우지않을수없었다. 그들은미국시장의규모가작지않은데다가 그여파가다시유럽전역으로퍼질가능성을염두에두었던것이다. 이런정치적압력속에서 1999년 2 월독일굴지의보험회사, 은행및대기업들( 도이치방크, 드레스드너방 크, 알리안츠, 다이믈러크라이스- 벤츠, 지멘스, 바이어, BMW, 폴크스바겐, 티센- 크룹, 베르텔스만, BASF 등) 은강제노동자들에대한보상에참여하기로결정하고, 재단건립을위한발기회의를개최했다. 이와동시 에, 독일정부, 미국정부, 동유럽및유대인희생자그리고경제계대표들이모여재단건립에관한협상 을개시했다. 이협상은재단기금의액수때문에번번이난관에부딪치기도했으나, 1999년 12월에최종 액수를 100 억마르크로최종합의했고, 올해 3월에는약 1년간에걸친끈질긴과정끝에분배문제까지마 무리되었다. 여기서또한신속한해결을부추겼던한요인은바로보상금을받을당사자들의노령화문제였다. 그들의 사망률은매년 10 퍼센트로추정되고있다. 사실상보상합의가늦어지면서 생물학적인자연사해결방 법 을기대하고있는것은아닌가하는비난의목소리또한적지않았다. 그때문에 어떻게든올해(2000 년) 안에보상금지불이시작되어야한다 는부담이협상관계자들의어깨를짓누르고있다. 그밖에도독일경제계는더이상의소송이제기되지않는다는법적인안전장치를요구하고나섰다. 미 국정부측으로서도이에대한완전한법적인보장을할수없는입장이어서, 협상이다시제자리를맴돌았 다. 그런데 6 월에들어서면서미국정부가이문제에대한입장을밝히는것에양자가합의를함으로써, 드 디어협상의마무리를보게되었다.( 이법안의내용및그에관련된자세한사항은인터넷을통해찾아볼수 있다. http://www.ns-zwangsarbeiterlohn.de/, 2000년 8월 26 일자)
강제노동에대한보상기금내역 ( 단위: 마르크) 이번협상과정에서보듯이, 문제제기와협상의주역은유대인피해자들과그대변인들이다. 비록이들 이동유럽강제노동자들의이해관계까지를대변하긴했지만, 역시전후에미국으로이주한유대인들이미 국지역에서집단소송을제기했고, 여론의공세를취했던것이다. 그래서이미협상과정부터, 보상문제가 타결될경우, 유대인에게더많은혜택이돌아가는것은아닌가하는의구심이적지않게일었다. 동유럽 강제노동자들이수적으로다수일뿐만아니라물질적인보상이절대적으로필요한사람들이기때문이다. 이번에통과된법률안의대체적인윤곽에따르면, 전체액수로보아동유럽지역의노동자들에게더 많은금액이배당되었다. 그렇지만 1인당보상액수에서관건이되는문제는이지급당사자가운데지 금까지살아남은생존자가몇명이나되는가하는것이다. 유감스럽게도지금껏정확한통계가나와있 는것이없기때문에, 이법률안의대체적인분배원칙은추정된수치에따른것이다. 강제수용소및 유대인게토의강제노동자들의경우에일시금으로 1만 5 천마르크가책정되어있는반면, 민간강제 노동자들의경우에는몇가지부류로더세분화하여보상금을차등지급할예정이긴하지만 해서는일정한증빙서류를제시해야하는과제가남아있다 지급될것인지그과정이주목된다. - - 이를위 어쨌든추후실제로보상금이어떻게 5. 맺음말
망각하려는것은유랑( 流浪 ) 을연장시키고, 기억이야말로구원의열쇠이다 - 동유럽유대운동의신비주 의자인발셈토브(Baal Shem Tov) 가했다는이말은전후독일정치가들이과거청산을언급할때자주 인용되는문구이다. 이것은바이체커대통령의연설에서도언급되었고, 요시카피셔현독일외무부장관이 최근이스라엘을방문하여홀로코스트희생자의추모지인야드바셈(Yad Vashem) 의방명록에이말을남기 기도했다. 과거를청산하려는것이아니라그저망각시키려고만하는사람들에게는이번강제노동자보상 문제가중요한성찰의계기를제공하고있다. 이러한물질적인보상이, 강제노동자들이나치정권의가혹한탄압과전쟁의소용돌이속에서겪은정신 적인고통까지치유할수없으리라는것은자명하다. 게다가이들은전후에도현실적인법적논리만앞세우 는독일정부와이문제를금기시하는여론에가로막혀, 반세기가넘도록그것을보상받기위한기나긴또 다른정신적강제노동에시달려왔다. 그렇지만이제이중의강제노동을역사화하는노력이시작되고 있다. 이런맥락에서귀추가주목되는것은최근미국캘리포니아주에서중국인강제노동자들이일본기업들 ( 미쓰이, 미쓰비시) 을상대로제기한소송이다. 주지하다시피그동안한국인을포함한많은외국인강제노 동자들이일본에서법정소송을벌였지만, 그결과는아주실망스러운것이었다. 따라서이번미국법정의 공방이이문제에새로운전환점이될것인지, 그리고그과정에서이번독일의정치적해결이어떻게작용 할지커다란관심사가아닐수없다.
독일의선거제도 박병석, 정범구, 성균관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시사평론가 1998년 6월 1. 독일의의원내각제는협의제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 의한유형으로서다수제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 로분류되는영미계통의내각제나대통령제와는확연히구분된다. 2. 협의제민주주의는연방과지방에서서로다른정파간의연정구성을통해이질적사회집단간정치적타협을이룩하고, 궁극적으로는고도의국민통합을실현한다. 3. 연방대통령, 연방정부, 연방의회, 연방상원, 연방헌법재판소간의적절한역할분담과상호견제를통해권력의횡적, 종적분산을도모함과동시에연방주의원칙을준수한다. 4. 사회와정치영역간의균형적, 안정적매개를위해인물과정당을분리 선택하는 1인 2 표의인물본위비례선거제와 5% 봉쇄조항그리고헤어/ 니마이어식의의석산출법을적용한다. 5. 정당후보자선출은철저한당내민주주의절차에따라행해진다. 6. 선거비용은자체조달외에도득표수에비례한국고보조로충당되며, 선거구는독립된선거구획정위원회를통해신속히조사 변경케하며, 선거일은선거마다다르게정해져있다.
1. 독일의정치체제 1.1. 협의제민주주의의구조 1) 독일의정치체제는연방주의, 다당제, 인물본위비례선거제도, 내각책임제의제도위에서 연립정부의운영을기반으로삼고있다. 2) 독일의내각책임제는협의제민주주의의한유형으로다수제민주주의로분류되는영 미 계통의정부형태와확연히구분된다. 다수제민주주의는 ' 다수자의지배' 를당연시하고있는반면, 협의제민주주의는 " 다수자의 지배는배제의원칙이기때문에비민주적인것으로해석할수있다" 고보고, 민주주의의일 차적의미를 " 정치적결정의형성에직 간접으로참여해야한다" 는데서찾는다. 이익과가치관이크게이질화된사회에서다수자의지배원칙을적용한다면, 권력에의접근 이계속불가능한소수자는소외와차등의심리를갖게될것이고, 그에따라체제에대한 불만도점차커질것이다. 최대화, 곧협의제민주주의다. 이런사회가필요로하는것은근소한과반수보다지배자수의 협의제민주주의의실제도지역, 계층, 문화, 인종, 가치관등의다양한갈등을안고있는 유럽대륙국가들에서예외없이발견된다. 복잡한사회균열을안고있는이들국가는협 의제민주주의를통해높은국민통합력을유지하고있다. 3) 독일의정치체제에내재된협의제민주주의의요소는다음과같다. 연정( 聯政 ) 을통한행정부권력의분점 정부와의회간권력관계의공식내지는비공식적분산 양원제와소수대표권 다당제 비례선거제 연방제 1.2. 연립정부의운용 2
1) 협의제민주주의는현실에서대부분연립정부의형태로운용되며, 그유형은독일이나이태리등유럽의대다수국가들이수용하고있는대륙형내각책임제, 프랑스의이원집정제그리고스위스의합의제등이있다. 2) 독일의연정은경험적으로높은정치안정도를보여주고있다. 독일의정당체제는다당제로서정당체제의스팩트럼상동류에속하는정당들끼리연립정 부를구성하여통치하는것이관례화되어있다. 원내정당은기민련, 기사당, 자민당, 사민당, 녹색당, 민사당등평균 5-6 개정도이다. 기사 당은기민련을대신해독일남동부바이에른주를대표하는지역정당이며, 공산당의후계당으로독일정당체제에새로편입된정당이다. 민사당은동독 지역정당인기사당은기민련과의제휴를통해끊임없이중앙정부에참여할수있었다 경제정책과외교정책을주도해온자민당은거의빠지지않고연정에참여해왔으며, 불과 6-11% 의지지에기반을둔소정당이지만자신의고유한정당정책을펼칠수있었고, 이 를통해독일은외교와경제분야에서정책적일관성을유지해올수있었다. 기민련과사민당혹은사민당과자민당의연정은국가위기시사회적갈등계층간의협 력과동조를끌어낼수있었다. 연정의장점은연방정부뿐만아니라지방정부차원에서도나타난다. 환경과생태계보호 를강조하는녹색당은주정부의내각에직접참여함으로써자신의고유한환경중심정책 을펼쳐나갈수있었다. 이처럼연립정부는사회적으로분리된이익과가치들을서로결합시키거나타협하여균형 잡힌정책의실시를가능케하고있다. 이를통해정치적결정과재화의분배에있어가능 한한소외계층을적게만들고, 그결과높은국민통합을이루어왔다. 3) 연정의정치안정도를높이기위한별도의제도적장치로는 건설적불신임투표제' 를 들수있다. 정부의안정적통치를보장하는장치로서현수상의불신임이바로의회해산으로이어지 는게아니라, 다음수상을의회에서먼저선출하여현재의수상을해임하고국정의공백을 없애는역할을한다. 건설적불신임투표가실제적용된사례는두번있다. 첫번째는 1972년당시야당이던 기민련의바르쩰(R. Warzel) 이연방수상이던사민당의브란트(W. Brandt) 를상대로행해졌 3
으나의회과반수를획득하지못해실패했고, 두번째는 1981년당시야당이던기민련의 콜(H. Kohl) 이연방수상이었던사민당의슈미트(H. Schmidt) 를상대로실시되어콜은의 회다수로후임수상으로선출되고슈미트는불신임을당했다. 이어 1981년말의회가해 산되고 1982 년초총선을실시하여콜은재선되었다. 4) 정치안정의유지와관련한이러한특징을제한적의원내각제로부르기도한다. 이는정부가의회에대해우월성을지닐뿐만아니라, 연방수상에대한불신임안도의회의과반수찬성이있어야한다는점에서비롯된다. 1.3. 주요헌법기구 * 도표 임명 연방정부연방장관연방수상 연방대통령 임명 제청 선출견제 연방헌법재판소 선출연방연석회의 연방수상제청 연방의회 재판관선출 법률안견제 재판관선출 법률안견제 연방상원 주의회 구성 주정부 대표자파견 선거 선거 국 민 4
1) 연방대통령 연방국가의내외적대표 연방법률의심의 서명 공표, 입법비상사태의선언 연방수상의제청 임명 해임, 연방장관의임명 해임 연방재판관 연방공무원 연방장교및하사관임명 해임 사면권행사 연방의회와모든주의회의원들이연방연석회의에서대통령후보자를제안, 연방연석회 의정족수의과반이상의지지표를얻은후보자가대통령으로당선된다. 대통령선거는 5 년마다실시되며, 적어도임기만료 30 일전까지실시되어야한다. 2) 연방상원(Bundesrat) 입법에참여 중재위원회구성: 연방의회와의법률안조정 연방법령, 연방행정규정의승인 타헌법기관에대한연방헌법재판소의헌법소원 국가비상사태시국방 안보의특별조치시행에참여 연방기구의주요인사임명에대한승인 주정부참여자( 주수상, 주장관등) 로구성 각주의투표권은크기에관계없이 3 표를가지며, 인구수가 2백만이상은 4 표, 6백만이 상은 5 표, 7백만이상은 6 표를각각가진다. 1명의의장과 3 명의부의장을두며, 의장은 1년임기로주의인구수가많은순서대로해당 주의수상이맡는다. 약 3 주마다한차례개회된다. 연방의회와마찬가지로분야별로상임위원회를둔다. 3) 연방의회 의장단, 원로자문회의, 사무처 상임위원회: 운영, 청원, 외무, 내무, 체육, 법무, 재무, 예산, 경제, 식량 농림, 노동 복 지, 국방, 가정 노인 여성 청소년, 보건, 교통, 환경 자연보호 방사능안전, 체신 통 신, 조경 건설 도시계획, 교육 과학 연구 기술 기술영향평가, 경제협력, 국외교 5
통 관광, 유럽연합위원회 조사위원회: 플루토늄, 구동독몰수재산조사위원회 앙케트위원회: " 인간자연보호". " 구동독공산통치의유산극복", " 인구변화", " 대중매체의 미래", " 이단종파및사이코집단" 중재위원회: 연방상원과법률안조정 양원공동위원회: 연방의회의원 32명과연방상원구성원 16 명으로구성하고, 위원장은연 방의회의장이맡는다. 특별위원회 원내교섭단체: 기민/ 기사당, 사민당, 동맹90/ 녹색당, 자민당, 민사당등 5개교섭단체 4) 연방정부 연방수상 : 정책방향의설정, 연방정부업무의지휘, 특히내무 외교정책의전체목표설 정, 정부정책의제안 실천, 비서실(Bundeskanzleramt) 에는 1 명비서실장( 장관급) 과 2명의 비서( 차관급) 를둔다. 연방장관: 외무, 내무, 법무, 재무, 경제, 식량, 노동 복지, 국방, 가족 노인 여성 청소년, 보건, 교통, 환경 자연보호 방사능안전, 조경 건설 도시계획, 교육 과학 연구 기술, 경제협력및개발등의부서가있다. 각장관은연방수상의정책노선내에서 자신의책임아래고유업무를수행 5) 연방헌법재판소 연방정부와주정부, 연방기관과주기관, 연방법률과주법률, 연방정당과주정당간 의충돌등연방국가보호에위배된사안이발생할경우, 이에대한사법적판결을내린다. 연방헌법기구의권리와의무에대한이의발생시헌법에기초하여유권해석을내린다. 2. 독일의선거제도 * 도표 6
연방정부 (Bundesregierung) 기초단체 (Stadt,Kreis,Gemeinde) 주정부 (Landesregierung) 연방의회 (Bundestag) 기초의회 (Stadtrat, Kreistag, Gemeinderat) 주의회 (Landtag) 기민련 CDU 기사연 CSU 자민당 FDP 사민당 SPD 녹색당 Grüne 민사당 PDS 기타 Reps. DVU 인물본위비례선거제혹은단순비례선거제 인물본위비례선거제 인물본위비례선거제혹은단순비례선거제 국 민 시 민 사 회 2.1. 연방의회의선거 * 도표 1 2 인 표 인물선거( 선거구선거) 비례선거( 명부선거) 선거구의원 직선의석: 328 개선거구에서. 328명의의원을상대다수선거제를통해선출 주명부의원 정당별배당의석산정: 총의석수 656석으로부터선거구의석수를뺀나머지수만큼주명부후보자에게의석을배분( 약 328 석) 연방의회 656석 7
1) 인물본위비례선거제 독일의연방의회는 656 명의의원들로구성되며, 의원은후보자개인에대한인물선거와 정당에대한비례선거가결합된방식으로유권자의보통선거에의해선출된다. 이러한 특징때문에인물본위비례선거제라고부른다. 따라서유권자는 2 개의투표권을가진다. 제1 표는선거구의원의선출을위하여, 제2표는 주명부의선출을위하여행사된다. 의석의정당별분할은제2 투표에의해결정되며, 의원개개인의선출은선거구후보자추천 명부와주후보자추천명부( 주명부) 로부터각각절반씩이루어진다. 선거구선거에서는각선거구별로 1 인의의원이선출되며, 최다득표를한후보자가당선 된다. 동수의최다득표자가발생할경우, 선거구선거위원장이추첨을통하여결정한다. 선거구에서직접선출된후보자는주명부에서고려되지않지만, 선거구에서낙선한후보자 는그가주명부에기재된경우, 주명부에서고려된다. 2) 후보자선정 후보자선정에서도제1 표후보자( 선거구후보자) 와제2 표후보자( 주명부후보자) 에따라상이한조건이붙는다. 이들후보자추천서는공히선거일전 34일 18시까지제출되어야하지만, 선거구후보자추천서는선거구선거위원장에게그리고주후보자추천명부는주선거위원장에게각각제출된다. 선거구후보자추천 - 이는주당대표자의서명으로이뤄지며, 만약정당이연방의회나주의회에 5개이상의의석을보유하고있지못한때에는해당선거구내유권자 200 명이상의서명을필요로한다. - 정당의선거구후보자는당원총회나전체대의원회의에서비밀투표로선출된자만이지명 될수있다. 이를증명하기위해선거구후보자추천서제출시장소, 시간, 소집형식, 참석 당원수등을포함한회의과정과투표결과등이기록된의사록사본을함께제출해야한 다. 아울러회의의장과회의에서선정한 2인의참여자가후보자선출이비밀투표에의해 - 이루어진것임을선거구선거위원장에게선서로써보증해야한다. 이렇게제출된선거구후보자추천서에대해서는선거구선거위원회가선거일전 30일까지 승인여부를결정, 통보하고, 이를선거일전 20 일까지공고한다. 주명부후보자추천 - 이는정당만이제출할수있는것으로반드시주당대표자의서명이있어야한다. 만약정당 이연방의회나주의회에 5개이상의의석을보유하고있지못한경우에는해당주내유권 자총수의 1/1,000 이상의서명이있어야하며, 그상한선은 2,000 명이하이다. - 주명부후보자의성명은순위대로기재되어야하며, 후보자는 1 개주에한하여, 1부의주명 8
부추천서에만추천될수있다. - 주명부후보자도선거구후보자의경우와마찬가지로당원총회나전체대의원회의에서비밀투표로선출된자만이지명될수있다. 이를증명하기위해주명부후보자추천서의제출시장소, 시간, 소집형식, 참석당원수등을포함한회의과정과투표결과등이기록된의사록사본을함께제출해야한다. 아울러회의의장과회의에서선정한 2인의참여자가후보자선출이비밀투표에의해이루어진것임을선거구선거위원장에게선서로써보증해야한다. - 이렇게제출된주명부후보자추천서에대해서는선거구선거위원회가선거일전 30일까지승인여부를결정 통보하고, 이를선거일전 20 일까지공고한다. 3) 의석산출 정당별및주별배분의석수는제2 표( 주명부선거) 의득표율에따라결정된다. 여기에는헤 어/ 니마이어식(Hare/Niemeyer) 의의석산정방식이적용된다. 실제산정과정을 1987 년연방의회선거의결과로써나타내면다음과같다( 당시베를린의 특별의석 22명을제외하면총의석은 496 석, 통일후현재의총의석은 656 석). - 제1 단계: 헤어/ 니마이어식에따라각정당에배분될의석수를결정한다. - 제2 단계: 다시헤어/ 니마이어식에따라각정당의주별배정( 선거구의석과주명부의석을 모두포함한) 의석수가정해진다. - 제3 단계: 각주의선거구들에서획득한선거구( 직선) 의석수를정당별로합산한다음, 이를위에서정해진정당별총배분의석수로부터감산한다. < 제 1 단계도표> 정당 총의석 정당별제2 득표수 제2 득표수최다과잉 # 기본의석수합계투표수법 ## 배분의석 사민당 14,025,763 186.236 186 기민련 13,045,745 173.223 173 기사당 496 x 3,715,827 x 1/37,354,502 = 49.339 49 자민당 3,440,911 45.689 + 1 46 녹색당 3,216,256 41.511 + 1 42 합 계 37,354,502 494 + 2 496 # 이수치는 5% 이상의득표율이나 3개이상의선거구직선의석을획득한정당들의제2 표득표수를합한것이다. ## 소수점이하의크기에따라모자라는의석수만큼의석을배정해서얻어지는의석을균형의석이라고한다. 9
< 제단계도표 2 > 주 슐레스비히홀슈타인함부르크니더작센브레멘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186 X 헤센라인라드팔쯔바덴뷔템베르크바이에른자알란트 정당별제2 득표수 679,229 427,872 1,967,443 198,920 3,216,256 1,370,454 912,175 1,643,202 1,816,885 316,502 제2 득표수합계 x 1/14,025,763 = 기본의석수 9.007 5.674 26.090 2.637 62.236 18.174 12.096 21.791 24.094 4.197 최다과잉투표수법 배분의석 합계 14,025,763 183 + 3 186 +1 +1 +1 9 6 26 3 62 18 12 22 24 4 - 제4 단계: 감산되고남은수치만큼주명부에기재된후보순서대로주명부의원들이정해진다. 만약제4 단계에서감산된수치가마이너스일경우, 즉선거구의직선의석수가제2표에의해배정받은의석수보다더많을경우, 이를초과의석( Überhangmandate) 이라고부르며, 아울러일반의석과동일하게인정한다. 의석결정에적용되는또다른조항은정당의집중효과가있기위한봉쇄조항이다. 이는의회체제의기능을제고시키고정치안정을도모하기위해도입되었다. 그내용은정당이전체적으로최소한 5% 의득표를차지했을때혹은최소 3개의직선의석을획득했을때에만의석이배분되도록규정하고있다. 4) 선거일 연방의회선거일은연방대통령이정하며, 반드시일요일이나법정공휴일을택한다. 독일의선거일은연방의회선거, 주의회선거, 기초단체선거, 유럽의회선거마다서로다를뿐만아니라, 주의회와기초단체선거의경우는지역마다선거시기가또다르다. 물론, 이들선거가시기상중첩되는경우도있지만, 이는결코의도적인것이아니다. 예로서, 1998년에는 4월 26일에작센- 안할트주의회선거, 9월 13일에바이에른주의주의회선거, 9월 27 일에연방의회선거가있고, 가을에는멕크렌부르크-포오포먼주의회선거와브란덴부르크주의기초단체선거가있다. 5) 선거구획정 선거구획정은선거구획정위원회에의해이루어지며, 이위원회는상설기구로서연방통계청장, 연방행정재판소판사 1명과 5명의위원등 7 명으로구성된다. 10
이위원회는각선거구의인구변동을주시하여필요할경우, 선거구를변경할수있다. 선거구변경시에는다음사항을준수해야한다. 각주의경계선은지켜야하며, 가능한한지방행정구역을지켜야한다. 선거구확정시, 한선거구의인구수가모든선거구의평균인구수와 25% 이상의차이가나지않도록해야하며, 인구수가 33.3% 이상차이가나면선거구가새로획정되어야한다. 각주의선거구수는가능한한인구비례에따라할당되는수와부합되어야한다. 인구수의산정시외국인의수는제외된다. 선거구는서로연관된지역으로구성되어야한다. 시, 읍, 면(Gemeinde), 군(Kreis), 소도시(Kreisfreie Stadte) 의경계도가능한한유지되어야한다. 선거구획정위원회의 현선거구의문제점과변경필요성등에관한보고서 는연방의회의새로운임기개시후 15 개월이내에연방내무부장관에게제출해야하며, 연방내무부장관은이를즉시연방의회에제출하고연방공보에공표해야한다. 6) 선거비용 연방의회선거나유럽의회선거에서 0.5% 혹은주의회선거에서 1% 이상의득표를기록한 정당은선거비용을국고에서보상받는다. 득표수의처음 500만표까지는 1표당 1마르크 30 페니히를, 그이상의득표부터는 1표당 1 마르크를보상해준다. 주명부가없이직선선거구에만후보자를낸군소정치집단들은해당선거구에서최소한 10% 의득표를해야위와같은보상을받는다. 기초단체선거에서는지금까지국고로부터의선거비보상이없었다. 선거와관계없이국고로부터정당에지급되는것으로는각정당이연차회계보고를통해 공개하는당비및기부금의 1마르크마다 0.5 마르크(50 페니히) 씩붙여지는보조금이있다. 그러나선거비보상과정당에대한국고보조의총액은정당의자체수입총액을넘어서도, 연방헌법재판소가판시한상한액 2억3 천만마르크를넘어서도안된다. 2.2. 주의회선거제도 11
도표 1 1 1 인 표 비례선거 ( 명부선거) 주명부의원 정당별배당의석산정 주의회 51석 ( 자알란트주의경우) 도표 2 2 표 인물선거 ( 선거구선거) 선거구의원 직선의석 (51 석) 비례선거 ( 명부선거) 주명부의원 명부의석 (50 석) 주의회 101석 ( 라인란드- 팔쯔주의경우) 12
1) 독일의주의회선거제도는각주에따라크게두가지유형으로나누어지지만, 주에서는연방의회선거제도와마찬가지의방식을따른다. 대부분의 2) 인물본위비례선거제 구속명부식: 연방의회선거와마찬가지로의원은후보자개인에대한인물선거( 선거구선 거) 와정당에대한비례선거( 주명부혹은소구역명부) 가결합된방식으로유권자의보통 선거에의해선출된다. 13 개주( 바덴- 뷔텐베르크, 바이에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헤쎈, 멕 클렌브르크- 포폼머른, 니더작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라인란드- 팔쯔, 작센, 작센- 안할트,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튀링엔) 에서적용하고있다. 자유명부식: 바이에른주에서는구속명부식대신, 투표자가명부순위를바꿀수있는자 유명부식을택하고있다. 3) 단순비례선거제 구속명부식: 주의회의원을모두명부를통해서만선출하며, 위의 13개주를제외한나머 지 3 개주( 브레멘, 함부르크, 자알란트) 주의회선거에사용하고있다. 2.3. 기초단체선거제도 도표 1 2 표 인물선거 선거구의원 직선의석 명부선거 명부의원 정당별배당의석산정 기초의회 13
도표 2 1 표혹은다수의표 비례선거 ( 명부선거) 명부의원 정당별배당의석산정 기초의회 1) 기초단체선거제도는크게두가지유형으로나눠지지만, 로나눠진다. 세분하면다시네가지유형으 2) 인물본위비례선거제 구속명부식: 연방의회선거와같은방식으로투표자는선거구선거와명부선거를위해 2 개의투표권을행사하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사용하고있다. 3) 단순비례선거제 구속명부식: 투표자는명부에 1 개의투표권만행사하며, 헤쎈과자아란트주의기초단체선 거에서사용하고있다. 이완명부식: 기초의회의원의정수만큼의투표권을가지고명부상의후보자에게중복투표 를할수있으며( 집적투표제: Kumulieren), 또한후보자순위를원하는대로조합할수있 다.( 배합투표제: Panaschieren). 이러한투표법은바덴- 뷔텐베르크, 바이에른, 라인란트-팔쯔 주에서사용되고있으며, 브란덴부르크주를비롯한구동독에서는투표자에게 3개의투표권 이부여된다. 4) 5%( 혹은 3 석) 봉쇄조항은대부분의기초단체선거에서적용되고있지만, 니더작센주와구동독주에서는적용하지않고있다. 14
독일의환경교육 이무춘, 연세대학교환경공학부교수 2005년 8월 독일환경교육은산업화와관련이있으며특히현대사회에서의환경교육은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실시되고있다. 1970년대새롭게추진된환경정책은환경교육발전의토대가되 었다. 초기환경교육이자연보호분야에중점을두었다면 70년부터는환경오염문제를중심 으로전환되었다. 1990년대부터는환경교육의범위가자연및환경보전분야에서지속가능 한발전모델을위한방향으로바뀌고있다. 연방과주정부는지속성환경교육을위해재정 을지원하고각부처가협력하여계획적이며체계적으로일을추진하고있다. 독일환경교육 의특징은정규교육과정외에환경단체를중심으로사회환경교육의활동이매우활발하게 진행되고있다는점이다.
1. 서론 현대사회의대표적과제인환경문제의해결을효율적으로추진하기위해서는국민의자발적인 협조와실천이우선적으로요구되고, 환경에대한의식과태도변화에크게영향을주는환경교육 의비중이더욱높아지고있다. 어느나라보다도이부분에서앞장서가는나라가독일이다. 독일에서환경교육은독일의산업화와깊은관련이있다. 산업화과정에서자연을파헤치는일이광범위하게발생하자자연보호를위한시민운동이시작되었고이와함께환경교육도실시되었다. 우선환경교육의개념변화, 환경교육정책및관련기관을살펴보고, 다음으로환경교육의 발전단계와사회환경교육을포함한독일의환경교육실태를다룬다. 2. 환경교육의개념 UNESCO 보고서에의하면, 환경교육은인류로하여금생물적, 지리적, 사회적, 경제적및문화 적제요소들간의복잡한상호관련성을이해하게하고, 동시에환경문제를발견하고해결하며 환경의질을관리할수있는지식, 가치관, 태도및기능을습득하게하는것으로이해할수있다. 독일환경교육과관련하여사용되는환경교육에는독일어로 Umweltbildung과 Umwelt- erziehung이란용어가있는데이들을환경교육으로번역하여사용하고있다. 그러나이들은환 경교육의방향과관련이있어내용적으로는다른의미를가지고있고서로구분할필요가있겠 다. 인간의이기적인사고와행동이환경파괴로이어지고이는생태적위기를초래하고있다. 그러 므로이러한문제를해결하기위해서는궁극적으로교육에의존하지않을수없다. 어떤방식으로 교육을실시하여야하는지 1970 년대에많은논의가있었다. 환경교육의방향은다음과같이크게 세가지로분류된다. 첫째, 무분별한인간의활동에민감한자연을이해하고인간과의관계를설명할수있는생태 적학습,
둘째, 자연환경을지나치게이용하고훼손하는경제적발전과기술개발을환경파괴의근본 적인원인으로간주하여이의계몽을목적으로하는교육, 셋째, 환경문제는발전된과학과기술을통해해결가능하다고보고이에대한전문지식과복잡한생태시스템관계를수업을통해전달하는교육 (Umwelterziehung). 이러한세가지형태의환경교육방법들은이론적이어서실제로서로명확한구분이어렵고환경 교육현장에서도별의미가없다고할수있다. 따라서독일에서는세가지용어를통합한 Umweltbildung( 환경교육) 이라는용어를보편적으로사용하고있다. 최근독일에서는환경교육외에지속성교육이라는용어도사용하고있다. 이는 1992년리우 환경정상회의에서논의된 Agenda 21의취지에걸맞은새로운방향의교육철학으로서선진국과 후진국의평등문제와인간과자연의관계는경제적, 사회적요인을고려하여교육을실시하여야 환경교육 전통적으로녹색에초점이맞추어져있음 지속성교육 새로운문화적관점에초점이맞추어져있음 자연환경 유기농법 자원낭비의감소( 에너지, 폐기물, 물) 세계적평등 경제적효율성과견고성위주의경제활동추구 환경친화적생활양식 해결방안 민감성을키워준다. 자연을보호, 보전, 관리한다. 두려움에서벗어나게한다. 반대의사를표명한다. 체계적접근성이미약하고단편적이다. 구조적능력배양 예견할수있는능력 지속성전략 참여와연대실증적, 복합적통찰하에과제를도출하고대안을제시한다.
한다는내용을담고있다. 이러한방향전환은자연또는환경분야외에사회적, 경제적구조요 인과국내외적관점이함께고려된다는것을의미한다. 3. 환경교육정책및교육기관 1953 년자연및경관보호교육은생물과지리교육분야에서학교교과과정의일부로실시하 였다. 1971년에독일정부는연방환경프로그램이란명칭아래환경정책기본원칙을채택하였는데 그내용은아래와같다. 지속성교육은환경교육과비교하면다음과같은차이가있다. 환경오염의예방원칙 오염원인자부담의원칙 공동책무와협력의원칙 국제협력의원칙 이원칙은독일환경정책의출발점이되었고, 지금도적용하고있다. 이원칙으로환경정책및환경교육분야에중요한변화가생겼으며, 학교교과과정에환경교육을도입하는계기가되었다. 그러나초기에는교사들이환경교육을받지않아환경교육을실시하는데어려움이있었다. 1974 년에설립된연방환경청(Umweltbundesamt) 은부분적으로독일유네스코사무소와공동으로환경교육에관한논문, 연구보고서등을발간하는환경교육관련기관이라할수있으나그역할은그리크지않다. 1978년에는독일뮌헨에서유네스코환경교육심포지엄이개최되었고여기서티빌리시 (Tibilisi) 의환경교육헌장을채택하였다. 그이후주정부의환경및교육부장관들이환경 교육위원회를 설립하여 1980 년에교육부장관회의(KMK) 에서환경과학교에관한결의사항을발표하였다. 그리 고 1987 년에연방교육과학부장관은환경교육백서를발간하였다.
1987년에교육계획및연구촉진연방과주정부위원회는환경문제와교육체계의연계기준에관한목록을작성하였다. 그이후연방교육부와연방과학부장관은유치원, 학교, 직업훈련소, 고등교육기관등에서 115개에달하는시범프로그램을실시할수있도록재정지원을하였다. 이와더불어연방교육부및과학부장관은독일의환경교육의실태를평가하기위해약 5천만마르크에달하는연구과제를지원하였다. 그외에고있다. 1990 년에설립된 독일연방환경재단 은환경교육과관련된연구과제를재정지원하 환경교육관련기관으로는정부기관, 대학교와 NGO 등이있으며이들은서로협력체계를이루어환경교육의발전에기여하고있다. 환경교육관련정부기관은연방교육부와환경부, 연방환경청(http://Umweltbundesamt.de) 이있다. 대학교에서환경교육을주로연구하는기관은킬대학교의자연과학라이프니쯔연구소 (IPN, http://www.ipn.uni-kiel.de/) 와에센대학교의환경교육센터 (ZUE, http://www.uni-essen.de/zue/sitemap.htm), 베를린자유대학교의교육학적미래연구소 (http://www. institutfutur.de) 가있다. 킬대학교의자연과학라이프니쯔연구소(IPN) 는환경교육분야에서선도적연구를수행하고있다. IPN은 1977년에개최된티빌리시의환경교육회의에서독파견단의일원으로참여하였고그후속회의를개최하고독일연방정부에환경교육정책을건의하는주요한연구기관으로자리를잡고있다. 에센대학교의환경교육센터(ZUE) 는 1977년유네스코환경교육프로그램의지원을받아설립되었고, 독일대학에서는최초로환경교육분야만을전문으로연구하는기관이며, 베를린자유대학교의교육학미래연구소는구환경교육연구소로서최근의동향, 즉환경교육을지속적발전과연계해서보는환경교육패러다임을연구하는기관이다. 1996 년환경교육연합회에따르면, 독일전국에약 570개환경교육관련단체가활동하는것으로나타났다 (http://www.umweltbildung.de/nachhaltigkeit/pdf/anu.pdf). 이들은회비, 자체사업또는정부기관의지원을받아운영되고있다. 이들중전국을대상으로활동하는주요단체몇개를소개하면우선독일환경교육연맹(DGU, http://lbs. hh.schule.de/umwelterz/dgu) 이있다. 이단체는 1986 년학교에종사하는교육자들이설립하였다. 독일주요도시에지부를설립하여활발하게환경교육관련행사를진행하는중요한단체중하나이다.
그외에자연교육및환경교육연합회 (ANU, http://www.umweltbildung.de/) 는사회교육을대상으로 1988년설립되어 1990년부터 14개연방주에지부를운영하여환경교육관련기관과네트워크를구축하여지원하고있다. 오랜역사를가진독일자연보호연합회(DNR, http://www.dnr.de/) 는 1950년에 15개의자연및환경보호단체의연합회로출발한단체로서현재 94 개단체가소속되어있다. 환경교육은이단체활동중하나로중요한부분을차지하고있다. 또한 1975 년에설립된분트(BUND, http://www.bund.net) 는 365,000명의회원을거느린독일최대의환경 NGO 이다. 분트는독일환경자연보전연맹(Bund für Umwelt- und Naturschutz) 의약자로서 16개연방주에지부와지방자치단체별로총 2,200개의하위조직을갖춘방대한환경 NGO 이다. 또한분트는청소년과국제분트로구분되어활동하고있다. 4. 환경교육의발전단계 독일의환경교육은크게 3 개의발전단계로구분된다. 1970년대를기준으로이전의자연보호및향토문화보호에대한환경교육을주로실시하던 1단계와근대환경교육을실시하는 2단계와, 1990년대부터의 3 단계로또다른형태의환경교육이논의되는데, 바로지속가능한교육의개념이다. 1단계환경교육 1단계의환경교육은 19 세기말부터시작된것으로, 산업화로인한반대급부, 인구증가, 도시팽창등으로자연환경훼손과향토문화손실이심각하게나타나자, 자연보호의필요성이사회적요구로등장하게되었다. 이미 200년전부터자연보호활동이시작되었고 100년전에자연보호단체가설립되어오늘날 100 만명정도의국민이회원으로가입하고있다. 당시에는생산과정에서배출되는오염물로인한환경오염보다는자연및향토사랑으로, 자연보호에더많은관심을가지고있었다. 독일최초의자연보호법은 1935 년에제정되었다. 자연보호정책은제2차세계대전후분단독일에도이어졌다. 당시동독은 1954 년에, 서독에서는 1976 년에새자연보전법이제정되었다. 1960년대이후국가환경교육전략은연방및주정부의각부서간에, 그리고사범대학과자
연및환경보호관련, 연구기관비정부기구등에서다소독립적으로진행되면서도연방과주정부의각부서와협력하에상호영향을미치는체제를유지하고있다. 2단계환경교육독일정부의현대적환경정책은 1972년환경프로그램에의해천명되었고이를기점으로 2단 계의환경교육이시작되었다고할수있다. 이환경프로그램은국가와사회의안녕을위한과 제인환경교육이모든교육과정에서실시되어야한다고설정하고있다. 생활기반인자연환경 을보전하기위해기존의반자연적사고를바꾸는환경교육이필요하다는기본방침에따라모 든학교에서환경교육을시작했다. 독일환경교육의목적, 주제와내용등은스톡홀름및베오그라드헌장과티빌리시선언등을근거로하고있다. 1977년티빌리시에서열린환경교육세계회의에즈음해서독일에서는현재의환경교육상황보고서가작성되었다. 이보고서에따르면, 환경교육이란, 수업대상으로서의환경보호라는차원을넘어광범위하고복합적인주제와그상호관계를다루는것으로규정하고있다. 1978년뮌헨에서열린유네스코환경교육회의에서는구소련티빌리시에서채택한환경교육에관한권장사항을환경정책에반영하기위한건의사항으로채택하였다. 1980년대부터는연방이나주차원에서환경교육에관한관심이높아졌고법적근거를마련하게 되었다. 바이에른주는주헌법 131조에따라자연과환경을보호하는책임의식을심어주는데주 안점을두고학교환경교육을실시하고있다. 이를토대로 1990년에 바이에른주학교환경교육 지침을마련하여학교환경교육을효율적으로하고있다. 표 1. 독일사회환경교육기관의유형및구성비율 기관구성비율 (%) 기관구성비율 (%) 환경단체 /NGO 20.9 관청 8.8 환경/ 자연보호센터 13.6 기업 6.3 일반사회단체 10.6 연구기관 4.0 시민대학 10.5 박물관 4.0 출처 : Giesel, de Haan and Rode(2000)
라인란드-팔쯔주는헌법 33 조에자연과환경보호의식을명문화하였고, 1995년에학교환경교육의주정책방향과초등학교환경교육지침을마련하였다. 3단계환경교육 3단계의특징은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를통해학생과시민들이주체가되어사회운동이 사회환경교육으로발전하고있고, 학교환경교육은지속성에입각하여실시되고있다는데있 다. 독일사회환경교육기관에대한평가라는연구보고서(2000) 에따르면, 독일에는 4,600개이상의사회환경교육기관이있다. 사회환경교육의주체기관은환경단체, 자연보호/ 환경센터, 시민대학, 유치원, 기업, 박물관, 동물원, 정당, 교회, 관청, 환경부등이다. 표 1 에서보면, 환경단체의수가사회환경교육기관의 20% 로독일사회환경교육에서큰비중을차지하고있음을알수있다. 사회환경교육기관에서는총 80,000 명이종사하고있는데, 그중약 10,000-12,000명이환경교육을주업무로하고있다. 환경교육담당자의약 90% 가대학을졸업하였고, 그중 10% 가박사학위소지자이다. 교육담당자의 3/4은다른업무를처리하면서환경교육을부분적으로담당하고있었다. 사회환경교육기관의교육활동은환경현황에대한생물학적인관점에서시작되었다. 사회환경교육기관의가장중요한역할은자연을배우고총체적인자연경험의기회를제공하는것이다. 독일사회환경교육기관의 70% 이상이자연보호, 농업, 임업등자연과관련된녹색주제를교육내용으로선택하고있다. 3단계환경교육의또다른특징은환경교육을지속가능한발전과연계해보려는정책적변화라할수있겠다. 1992년브라질리오의환경정상회의에서채택된지속가능한발전의개념을환경교육과접목하여새로운개념으로환경교육을인식하게되었다. 새로운개념의환경교육은전통적인자연보호및환경교육에서탈피하여 Agenda 21에따라지속적발전이가능한사회를구축하는교육을의미한다. 이를위해독일정부는아래와같이여러과정을거쳐 1998년에지속적발전을위한교육정책의기본골격을결의하였다. 이를토대로연방과주정부위원회(BLK) 는연방과주정부위원회프로그램 21 을수립하였고, Agenda 21의토대위에지속적발전을위한교육 을위한목적으로새로운교육정책의방향을제시하고있다.
예를들어, 지속적교육을실현하기위해지속가능한회계감사, 지속가능한학교회사운영과생태감사제도(Eco-Audit) 등세가지방법을학교에서가르치고있다. 5. 연방과주정부위원회프로그램 21 연방과주정부의긴밀한협조하에수립된연방과주정부위원회프로그램 21 은기본적으로 1 간학문적인지식, 2 참여학습, 3 혁신구조등세가지주요교수법과조직적원칙에기초를두고있으며그핵심은지속적발전을위한지원체계를구축하는데있다. 연방과주정부위원회프로그램 21 에 16개주총 200개학교가참가하였고 27개네트워크를구축해서협력하였다. 여기에참가한학생수는 65,000 명이넘는다. 학교를개방하고교내외적활동을통해지방자치단체와기타시민단체및국립또는민간연구소와의협력은중요한역할을할수있었다. 연방과주정부위원회프로그램 21 을통해 56 가지의지속성교육자료가개발되었다. 그외학교의지속가능한교육을실시할수있는관련단체에도움을줄수있는방법들을마련하였으며 교사교육프로그램및지속적발전을위한교육지침도개발하였다. 이러한방대한교육자료를학교와관련단체에적용, 확산하기위한과제는 Transfer 21 이라는프로그램으로추진하고지속가능한발전을위한교육을확산하여뿌리를내리기위해서다음과같은정책을추진하고있다. 이프로그램을위해연방 주정부교육계획및연구지원위원회(KMK) 는 1000만유로를지원하 고있다. 연방과주정부위원회프로그램 21 에서개발한연구결과가연방주전체학교의 10% 에해당하는 4,500 개의학교에서정규교과과정에반영되도록한다. 이목표의달성은개발된자료를광범위하게확산시키고, 인터넷과이미참여한핵심학교를이용하거나, 캠페인( 환경학교, 아젠다학교, GLOBE 등) 을통해가능하도록한다. 환경전문가또는지속성전문가를체계적으로육성하여지속성교육에관한상담과지원을 받도록한다. 고도의전문성을가진전문가를육성하여신개념의지속적발전을위한교육정책을배가시 킨다. 배가자의역할을담당할수있는기관은연구기관, 환경교육센터, 지역아젠다단체
등이될수있다. 1999년부터시작하여 2004년까지실시된시범단계서는중학교가대상이었으나이제는초등학교까지확대적용한다. 대학교및교육기관등을 Transfer 21 과연계시켜교사양성을지원한다. 6. 종합 독일의환경교육은이미 200 년전에시작된자연보호역사를통해발전해왔으며, 특히 1970년대이후의현대적환경정책과맥을같이하고있다. 학교환경교육의개념은과학과생물분야중심에서환경적, 사회적, 경제적요인을고려한지속성의관점으로확대되고교육의대상인학생과함께진행하는형태로변화하고있다. 또한학교환경교육외에사회환경교육이환경교육의중요한축으로작용하고있음을알수있다.
독일의재생가능에너지 이필렬, 에너지대안센터대표, 한국방송통신대학교교수 2003년 2월 재생가능에너지의이용은독일에서해마다크게늘어나고있다. 이는독일국민, 정부와기업이긴밀히협력한결과이다. 정부에서는재생가능에너지의확산을북돋울수있는전력매입법, 10 만태양지붕계획, 재생가능에너지법 등의정책을수립하여시행했거나시행하고있다. 이는많은시민들이호응하여태양에너지, 풍력등의이용시설을건설하는데적극참여하고있으며, 기업체들은연구와개발에주력하여뛰어난제품들을내놓음으로써재생가능에너지확산을위한기술적조건을충족시키고있기때문이다. 독일에서이용가능한재생가능에너지의양은전기의경우수력 30TWh( 테라와트시), 풍력 320TWh, 태양광발전 166TWh, 바이오매스 46TWh, 열에너지의경우태양열 593TWh, 바이오매스 121TWh, 지열 350TWh 로추정된다. 전기는연간 526TWh, 열은 1003TWh 를생산할수있는것이다. 이양은 1997년독일의전력및열에너지수요와비교할때전기는 103% 에해당하고, 열은 70% 에해당하는것이다. 2002년 12월 31일현재독일의풍력발전용량은 12,001MW( 메가와트) 로, 독일전체발전용량의약 5% 를차지하고있다. 2010년풍력발전의발전용량은 22,500MW로증가하고독일전체전력의약 10% 를공급할것으로예상된다. 2000년현재태양열집열판에서얻어지는열은독일의가정용열에너지의 0.2% 에도못미치지만, 연방환경부의에너지시나리오에따르면 2050년까지전체열에너지수요에서태양열이차지하는비율은약 20% 에달할것으로예측된다. 태양광발전은생산원가가매우높음에도불구하고사민-녹색연립정권이들어선 1990 년대말부터급속히증가했다. 1990 년전선망에연결된태양광발전시설의용량은 1MW였던것이 2001년에는 176MW 에달했다. 그러나 2000년에태양광발전시설에서생산된전기는 9,000만 kwh로전체전력의 0.02% 밖에안된다. 연방환경부의에너지시나리오에따르면, 2050년전력수요중에서태양광전기가차지하는비율은약 6% 에달할것으로예측된다. 수력발전의용량은 2000년현재약 4,500MW 이고, 전력생산에서수력이차지하는비율은 4.4% 이다. 1999년독일에서바이오매스로부터얻은에너지는모두 477억 kwh였는데이중에서거의 90% 가대부분열생산에투입되었다. 바이오매스는독일에서소비된전체일차에너지의 1.4% 를, 지열은 2000년독일전체열소비의약 0.1% 를공급했다. 독일에서재생가능에너지는앞으로도크게증가할것으로예측된다. 연방환경부의시나리오에따르면, 2050년에전체에너지소비중에서재생가능에너지가차지하는비율은 60% 로늘어날것이다.
1. 머리글 2002년 2월 26일독일북부의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서는독일의재생가능에너지이용면에서역사상가장주목할만한사건이일어났다. 그날이지역에서필요한전기가모두그곳에서돌아가는풍력발전기로부터생산, 공급되었다. 이사건은독일재생가능에너지의현황과미래를잘보여주는것이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는북해에면한바람이많은지역으로재생가능에너지중에서풍력을적극적으로개발해서이용하고있다. 이러한개발의결과잠시나마전력을 100% 풍력으로공급할수있었다는사실은재생가능에너지의확대를위해서힘을쏟고있는독일의노력과앞으로의목표점을분명하게드러내주고있다. 독일의재생가능에너지이용은해마다빠른속도로증가하고있다. 풍력의경우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 년간풍력발전기의용량이 100 배가량증가했고, 발전량도 100 배이상증가했다. 태양에너지의이용도지난 10 년간가파른증가세를보여왔으며, 바이오매스( 생물자원) 도난방및자동차연료자원으로퍼져가고있다. 그밖에지열개발도조금씩이루어지고있고, 수력이용도소규모발전시설을중심으로조금씩증가하고있다. 현재독일에서일어나고있는재생가능에너지의대대적인확산은독일의국민, 정부, 기업의긴밀한협력의결과로볼수있다. 정부에서는재생가능에너지의확산을북돋울수있는전력매입법, 10만태양지붕계획, 재생가능에너지법등의정책을수립하여시행했거나시행하고있고, 이에많은시민들이호응하여태양에너지, 풍력등을이용하는시설의건설에적극참여하고있으며, 기업체들은연구와개발에주력하여뛰어난제품들을내놓음으로써재생가능에너지확산을위한기술적조건을충족시키고있기때문이다. 그러나초기에상황이열악했음에도불구하고솔선해서구체적인시설의건설을통해시범을보임으로써재생가능에너지에대한관심을촉발하고그가능성을시험해보였던사람들은핵발전에서벗어나기를열망한일반시민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초부터일어난대대적인원자력발전반대운동을거쳐원자력을대신할에너지대안을찾았고, 이들대안을재생가능에너지시설의건설을통해스스로실천함으로써재생가능에너지가가능하다는것을직접보여주었던것이다. 재생가능에너지에기반을둔대안의가능성은 70년대말에너지전환이라는말로표현되었고, 이를위한초기연구가생태연구소를중심으로이루어지기시작했는데, 이러한노력으로 1990년대에에너지전환이라는말이언론과에너지전문가들사이에정착되었고전환에대한믿음이퍼져나갔다. 에너지전환을달성하기위해서는얼마만한기간에어떤방법으로어떤경로를거쳐야만하는가를보여주는에너지시나리오에대한연구도활발하게이루어졌고, 그동안재생가능에너지로의전환을위한다양한에너지시나리오가작성되었다. 시민들의원자력발전반대운동과그후의에너지전환운동이활발하게전개되었던것에비해독일연방
정부의정책은특별한변화를보이지않았다. 1970년대의슈미트를수반으로하는사민당정부는원자력발전을유지, 확대하는정책을고수했고, 1980 년대기민/ 기사연합의콜정부도이기조에서조금도벗어나지않았다. 그러나 1986년 4월체르노빌사고가발생하여독일전역을뒤흔들고원자력에대한반대여론이거세게일어남에따라사민당은원자력발전포기를당론으로결정했고, 콜정부도원자력발전에대한감독을강화하고환경부를신설하는등의조처를취하지않을수없었다. 또한일부사민당이정권을잡은주정부에서는시민들의요구에부응하여재생가능에너지에대해관심을보이고지원정책을시행하기시작했다. 이에따라 1980년대말부터서서히퍼져가던재생가능에너지는 1990 년대로들어와정부, 국민, 기업의원활한협력에힘입어빠른속도로퍼지게된다. 이에따라 1990년에는전체에너지중에서재생가능에너지가차지하는비율이 1.7% 였던것이 1995년에 2.1% 로, 1999년에는 2.9% 로증가했다. 현재독일은전세계에서재생가능에너지정책의시행과일반국민들의관심과호응면에서세계에서가장모범적인나라로평가된다. 2. 자연적 사회적조건 기술적으로이용가능한재생가능에너지잠재량및경제성 독일에서재생가능에너지에대한인식은 1980년대부터조금씩긍정적인방향으로변화하여 1990대말에들어오면이에대한믿음이상당히견고하게자리잡게된다. 사실 1980년대말까지도원자력이에너지문제와기후변화문제해결에어느정도기여할수있다는생각이꽤많이남아있었고, 재생가능에너지에대한회의적인시각이우세했다. 재생가능에너지에기반을둔에너지전환을주장하는사람들은전과다름없이몽상가정도로치부되었고, 재생가능에너지는아무리잘해야전체에너지의일부분만을공급할수있는것으로폄하되었다. 또한화석연료나원자력과는경제성측면에서도경쟁이안될정도로값이비싼것으로여겼다. 그러나재생가능에너지의지지자들은재생가능에너지로는에너지수요를절대충족시킬수없고경제성이없다는반대자들의두가지주장을구체적인연구. 분석을통해서반박하는시도를했고, 이러한시도의결과가국민들사이에서설득력을얻으면서재생가능에너지에기반을둔에너지전환의현실성이점차받아들여지기시작했다. 이들은독일전역에서개발하여이용할수있는재생가능에너지의잠재량을조사하여그수치로반대자들의주장을논박했고, 원자력이나화석연료를이용할경우환경오염, 기후변화로인해서발생하는사회적비용을재생가능에너지를이용했을경우의사회적이익과비교함으로써단순한경제성비교의맹점을공격했다. 재생가능에너지의잠재량은이론적, 기술적, 경제적, 이용할만한잠재량으로나눌수있다. 이론적잠재량
이란그지역에존재하는재생가능에너지의총량을말하는것으로, 그곳으로들어오는태양에너지의총량과거의같은양이다. 일년간지구전체에들어오는태양에너지의양이인류의연간에너지소비량의 15,000배가량된다는점을고려하면이론적잠재량은어느지역에서나풍부하게존재한다고말할수있다. 문제는기술적으로이용가능한잠재량인데, 이러한잠재량은이론적잠재량에비해크게줄어든다. 독일의재생가능에너지잠재량에대한추정은바젤의프로그노스연구소, 연방의회기후보호앙케트위원회, 생태연구소, 연방환경부등여러기관에서수행했고, 이들기관에서내놓은수치는추정에사용한파라미터에따라상당한편차를보인다. 가장최근에나온잠재량연구는연방환경부의위탁을받아부퍼탈연구소 (Wuppertal Institut für Klima, Umwelt, Energie), 독일항공우주센터(Deutsches Zentrum für Luft- und Raumfahrt) 등에서수행한 < 재생가능에너지를이용한기후보호>(Klimaschutz durch Nutzung erneuerbarer Energien) 라는광범위한연구보고서에실린것으로여기서는재생가능에너지로부터일년동안얻을수있는전력잠재량을수력 30TWh( 테라와트시), 풍력 320TWh, 태양광발전 166TWh, 바이오매스 46TWh 로, 열에너지잠재량을태양열 593TWh, 바이오매스 121TWh, 지열 350TWh 로추정하고있다. 즉, 전기는연간총 526TWh 를생산할수있고, 열은총1,003TWh를생산할수있다는것이다. 이양은 1997년독일의전력및열에너지수요와비교할때전기는 103% 에해당하고, 열은 70% 에해당하는것이다. 연방환경부의이러한잠재량조사결과는, 전기는현재의소비수준을유지하고, 열은 30% 가량절약하면재생가능에너지에기반한완전한에너지전환이가능함을보여준다. 재생가능에너지의경제성을화석연료와단순비교하면, 태양광발전의경우는경제성이전혀없다는결과가나온다. 태양광발전으로전기를생산할경우 1kWh를생산하는데약 0.5~0.8유로의비용이투입되는반면, 화석연료의경우는그것의 7분의 1 가량의비용이면생산할수있기때문이다. 태양열로온수나난방열을생산하는경우에도석유를사용할때보다 5 배이상더많은비용이든다. 화석연료의발전단가에가장근접하는재생가능전기생산방식은수력과풍력이다. 수력은 1kWh의전기를생산하는데 0.1~0.2유로의비용이들고, 풍력은대형발전기의경우 0.1 유로미만이다. 이와같이생산비용이높다는이유로기존의에너지시스템을옹호하는사람들은태양에너지이용에대해회의적인견해를보이지만, 기후변화와환경문제를크게중시하는환경주의자들은단순한생산비보다에너지의사용으로인한사회적비용( 외부비용) 또는환경훼손을방지함으로써오는외부이득을반드시고려해야한다고말한다. 외부비용이나이득은정확하게추정하기어렵기때문에연구기관에따라크게편차를보이는데, 풍력발전의경우 1kWh에대략 10 페니히, 태양광발전의경우 1kWh에 20페니히가까이될것으로추정된다. 화석연료와원자력발전의경우, 프로그노스연구소와프라운호퍼연구소의연구결과에따르면, 화석연 료는외부비용이 1kWh에 70 페니히, 원자력은 1kWh에 3.6 마르크로추정된다. 재생가능에너지지지자들은
경제성을비교할때이러한외부비용까지고려해야하며, 성이떨어질것이없다는견해를보인다. 그럴경우재생가능에너지가화석연료보다경제 이들은또한재생가능에너지를이용할경우지역경제에미칠긍정적인영향에대해서도주목해야한다고주장한다. 석유, 석탄, 원자력은거대한에너지생산시설을필요로하고이는자동적으로거대한중앙집중적인규모로이용될수밖에없지만, 재생가능에너지는각지역에골고루분포되어있고작고분산적인규모로이용되기때문에지역민의참여를보장하고지역의경제에커다란도움을줄수있다는것이다. 3. 정책적조건 독일정부에서재생가능에너지의확산을위한정책을시행하는근본적인이유는두가지로요약할수있다. 하나는기후변화를일으키는온실가스배출량을줄이기위한것이고, 또하나는국내지역경제의활성화를꾀하기위한것이다. 이는 2000년 4월 1일부터발효된재생가능에너지법 (Gesetz für den Vorrang erneuerbarer Energien) 의입법취지에자세하게소개되어있다. 여기에서독일정부는기민/ 기사연합집권시약속한 2005년까지의이산화탄소배출량을 1990년을기준으로 25% 감축하기위해서는소위새로운재생가능에너지를동원하는것이필요하고, 또한재생가능에너지원의확대는일자리창출에기여하고지역의발전을지속적으로지원하며, 산업적 상업적측면에서도특별한의미를지니고있다고주장한다. 독일정부는재생가능에너지의확산이환경적, 산업적측면에서모두긍정적인결과를가져올것으로보고, 시민과기업이함께힘을합쳐재생가능에너지확대를위해노력하고있는것이다. 독일의재생가능에너지정책중에서가장중요한정책은재생가능전기매입정책과 10만태양지붕프로그램 이다. 재생가능전기매입정책은 1991년 1월 1일에발효된전력매입법 (Stromeinspeisungsgesetz) 의제정으로시작되었다. 재생가능에너지로생산한전기를지역전기회사가소비자가격의 80~90% 로구매해야한다고규정한이법을통해재생가능에너지를이용한발전시설이확대되었다. 이법에따라풍력전기와태양전기의가격이 kwh당 17 페니히로책정되었다. 이가격은풍력발전의발전원가를충분히충족시키는것이었기때문에풍력발전이화석연료와경쟁력을갖게되었고, 따라서이법의발효후풍력발전기의건설이크게늘어났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풍력발전기의용량이 100 배가량늘어난것은이법의제정덕분이다. 그러나 kwh당 17페니히라는구매가격은태양광발전의경우에는발전원가의 5분의 1에도못미치는것으로태양광발전시설의확산에는별로기여하지못했다. 그러나지역에따라서는시민단체들의요구를받아들여지방정부소유의전력공사에서태양광전기생산원가를보장하는 2마르크정도의높은가격으로태양전기를구매하도록조례를제정한곳이늘어났고, 그결과태양광발전시설도조금씩늘어났다. 이러한제도는 1992년아헨에서처음시행되었기때문에총비용보장구매제도또는아헨모델로불리는데, 이모델을채택한지자체에서
는다른지자체보다태양광발전시설의성장이훨씬빨랐다. 아헨모델은아헨의 SFV(Solarenergie-Förderverein) 라는시민단체에서처음고안한것으로, 그후다른시민단체에서도받아들여 자신들이활동하는지자체에시행을요구하여점차퍼져나갔다. 2000년 4 월부터는전력매입법을보완, 발전시킨재생가능에너지법이시행되어재생가능전기중에서도특히태양광발전의광범위한확산을가져왔다. 이법은전력매입법의단점들을보완하고재생가능에너지의확산을더욱적극적으로추진하는내용을담고있는데, 가장주목할만한것은태양광발전으로생산한전기를 kwh당 99 페니히( 약 600 원) 로매입하도록규정한것이다. 매입가격은 2002년 1월부터설치된것은해마다 5% 씩감소하는데, 그이유는시간이지날수록기술개발과시장확대로발전원가가떨어질것으로예측되기때문이다. 태양광전기의구매가격은다섯배이상올랐고, kwh당 99페니히로되어서이제실제전기생산비에거의근접하게되었다. 그러나새로운설비에대해서는구매가격을해마다내리도록되어있는데, 풍력발전기의경우에는해마다 1.5%, 태양광발전기의경우에는해마다 5% 씩내린다. 이는 2005년에설치된태양광발전기의경우에는 kwh 당 77 페니히밖에주어지지않지만, 2000년에설치된설비로부터생산된전기는 99페니히로매입되는것을의미한다. 태양광전기의구매가격은다른설비에서생산된전기보다훨씬높게책정되어있기때문에, 이법에따라구매대상이되는태양광발전기의전체용량은 350MW 로제한된다. 태양광발전시설이늘어나서용량이 350MW가넘으면 99 페니히로매입하는것이중단되는것이다. 그후의규정은 350MW가넘은후바로제정되는것으로정해져있다. 그밖에다른재생가능에너지원에대해서는용량에대한한계가없다. 태양광발전기에서생산된전기의매입가격은아헨모델에서주장하는발전원가에는미치지못하는것이지만,10만태양지붕정책의지원제도와결합하여태양광발전을독일전역에서급속히증가시키는결과를가져왔다. 재생가능에너지법에서태양광전기를 kwh당 99페니히로구매하는것은독일정부의태양광발전설비지원을위한 10 만태양지붕프로그램과연계되어있다. 이프로그램은 1999년 4 월에시작되었는데, 그기본내용은주택이나공공건물의태양광발전설비설치비용을연방정부에서전액무이자로대여해주고, 빌린돈의거의 90퍼센트만 7 년동안상환하도록한다( 나머지는 8년째에도발전설비에서전기를생산하고있으면탕감된다). 이프로그램의목표는평균최대용량이 3kW인 10만개의태양광발전시설을 5년안에독일전역에설치하려는것이다. 이계획이제대로진행되면 1998년에 50kW이었던태양광발전설비의용량은 2003년말에총 350MW 로증가하고, 이로써전선망을통한전기공급에서의태양광전기의비율은 10 배증가하게된다. 10만태양지붕프로그램에는거의 10 억마르크가투입될것이고, 총 25억마르크의투자를유발할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액수를고려하면이프로그램은지금까지시행된전세계의태양광발전지원프로그램중에서가장규모가큰것이다. 이프로그램에서또한기대하는효과는독일의안정된시장을창출해서환경보호에기여하고에너지전환을앞당기는것만은아니다. 이를통해독일내의시장이형성되면태양광발전관련기업들이이를기반으로급속히성장하는세계시장에서도성공적으로자기위치를확립할수있는것이다.10만지붕프로그램에서지원하는대상은설비용량 1kW 이상의새로운태양광발전설비또는그이상으로확장한설비이다. 그밖에전력매입정책이나 10만태양지붕프로그램보다는주목받지못하지만재생가능에너지확대에도움을주는정책으로재생가능에너지시장활성화프로그램이있다. 이프로그램은 1999 년에시작되었고, 연간예산은 2억마르크로그이전의여러유사한프로그램에비해서 10 배나증액된상당히많은액수이다. 그런데이프로그램은재생가능에너지의좀더바람직한장려계획의관철에반대하는주로보수당의원들과의타협의산물이었다는한계가있다. 생태적세제개혁에따르면, 화석연료에대해서는세금을높이올리지만재생가능에너지로얻은전기에대해서는본래세금을면제해주는것이당연하다. 그렇게되면재생가능에너지가점차가격경쟁력을갖게되어재생가능에너지의시장활성화가자동적으로되지만, 재생가능전기에대해세금을면제하는것이의회에서통과되지못했기때문에하나의타협책으로나온것이다. 즉, 재생가능전기에대해서세금을거둘수밖에없다면, 그일부를가지고재생가능에너지의이용시이득이되도록지원하자는것이이프로그램인것이다. 이프로그램의총지원금액은 2003년까지 5년동안 10 억마르크로책정되어있다. 지원을받는것은태양열집열판, 고형바이오매스를연소하는중앙집중난방시설, 전기생산을위한바이오가스설비, 바이오가스열병합발전설비, 소수력및재생가능전기로가동되는전기열펌프등이다. 또한, 지역이용설비도지원을받는다. 지원금은적용된기술과가동에따라투자비의 10~30% 정도가주어진다. 매년 2억마르크씩지원금이주어지면연간최대 20 억마르크까지투자가이루어질것으로추정되는데, 1999년초부터말까지 1년동안지출된지원금의액수는 5 천만마르크에달했다. 4. 4.1 재생가능에너지현황 풍력 2002년 9월 30일현재독일의풍력발전용량은 10,639MW로독일전체발전용량의약 5% 이며, 가동률을고려했을때전체발전용량의약 4% 를차지하고있다. 이는 1990년의발전용량 68MW와비교할때 150배증가한수치이다. 용량이크게증가한것에비해풍력발전기의숫자는 1990년의 548개에서 2002년 12,810개 로약 20 배밖에증가하지않았는데, 이는풍력발전기하나의발전용량이계속대형화되어왔음을말해준다.
풍력발전기는풍력발전이급속히보급되면서발전기한개의용량도급속히증가하여, 1990년에는새로건설된풍력발전기의평균발전용량이 160kW이었던것이 1996년에는 560kW, 2000년에 1,000kW(1 메가와트) 를넘어섰고, 2002년에는거의 1,400kW 에달했다. 현재풍력발전기는 2MW 급이상용화되고있고, 3MW, 5MW 급도곧개발되어상용화될것이다. 현재독일에서가장많이건설되고있는 1.5MW급풍력발전기의크기는발전기까지의높이가 70~90 미터, 날개지름이 70~80 미터에달한다. 풍력발전기에서생산된전기의양은 2002년에약 20TWh( 테라와트시, 1TWh는 100억kWh) 에달할것으로예측되는데, 이것은 500TWh 가량되는독일전체전력생산량의 4% 에해당하는양이다. 생산량은 1995년에 2.5TWh였던것이 1998년 5TWh로전체의 1% 를넘었고, 2000년 10TWh로 2%, 2001년에는 15TWh로 3% 에달했다. 2 년마다두배씩증가한셈인데, 이러한급속한증가추세가앞으로도계속되지는않겠지만, 2010년까지풍력발전의발전용량은 22,500MW로증가하고독일전체전력의약 10% 를공급할것으로예상된다. 이값은독일연방환경부의시나리오에서는 2020년에야도달가능한것으로예측한것이지만, 풍력발전의확대속도가예상보다빨라서목표치가 10 년이나앞당겨져서도달하게되는셈이다. 연방환경부의장기에너지시나리오에따르면, 2050년에풍력발전으로생산되는전기는전체전기의 18% 를공급하게되는데, 해양풍력발전단지가예정대로건설되면이목표도 2050 년전에달성될가능성이높다. 현재재생가능에너지법은풍력전기를전력회사에서 kwh당 13.5~17.8페니히로구입하도록규정하고있다. 구매가격은고정되어있는것이아니라표준입지모델을정해서표준입지보다바람이잘부는지역의
풍력발전기에대해서는낮은구매가격을적용하고, 표준입지보다바람이덜부는지역의풍력발전기에대해서는높은구매가격을적용한다. 이에따라전에는바람이잘부는해안지역에풍력발전기가집중되어건설되었지만, 재생가능에너지법의시행후에는내륙지역에도상대적으로많은풍력발전기가건설되었다. 그래도전체적으로는해안지역에풍력발전기가집중되어있다. 2002년 9월 30일현재풍력발전기가가장많은곳은니더작센주로전체용량이 2,981MW 이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가전체용량 1,702MW로그뒤를따르고있다. 가장낮은지역은내륙의바이에른주와바덴-뷔르템베르크주로풍력발전기의용량은각각니더작센주의 20분의 1 정도밖에안되는 139MW와 157MW 이다. 소비전력을기준으로할때풍력발전의비율이가장높은지역은인구가상대적으로적은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로 2000년현재전체전력의 16.5% 가풍력발전으로공급되었다. 독일의풍력발전관계자들은앞으로육지에서는풍력발전의확대가완만하게진행될것으로예상한다. 왜냐하면, 바람이웬만큼부는지역은상당부분풍력발전단지가들어섰고, 따라서입지를찾는일이점점어려워지고있기때문이다. 육지에풍력발전단지를건설하는것이어려워지면서사업자들은눈을바다로돌리고있다. 바다는육지보다바람이훨씬잘불고풍력발전단지를건설할만한곳은많기때문이다. 문제는건설비가육지의경우보다높고기술적인면에서건설이어렵다는것이지만, 사업자들은바다에서바람이더잘불기때문에이러한문제가상쇄된다고말한다. 바다는접근이쉽지않고따라서풍력발전기의숫자가많으면점검이나수리에많은시간이걸리기때문에, 바다에는보통초대형풍력발전기를건설한다. 바다에건설될예정인풍력발전기의용량은보통 2~5MW 이다. 독일북해와동해에건설될풍력발전단지로심사중이거나승인난곳은모두 25개이고예정된전체발전용량은약 18,000MW 이다. 이것은 2002년 9월현재육지에건설된풍력발전기의용량 10,000여 MW 의거의두배에달하는양이다. 풍력발전관계자들은 2030년까지북해와동해에건설될풍력발전단지의전체발전용량은약 25,000MW 에달할것이고, 여기서약 100TWh의전기가생산될것으로전망한다. 이것은독일전체전력생산량의 20% 에달하는것으로, 육지에서생산되는것까지합하면풍력발전으로 25% 이상의전력을공급하게되는셈이다.
풍력발전의생산원가는 1990년이래계속떨어지고있지만 1995년을넘어서서는떨어지는속도가그전에비해크게느려졌다. 1995년의생산원가는 1990년의 60% 였지만, 2002년현재의생산원가는그것보다 10% 낮은 50% 이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5년동안발전원가가 80% 가량떨어졌지만, 1995년부터 2002년까지는생산원가가 1995년을기준으로할때는 20% 밖에떨어지지않은것이다. 앞으로는생산원가가더욱완만하게떨어질것으로예상된다. 연방의회의지속가능한에너지수급앙케트위원회의보고서에따르면, 2010년해양풍력발전기의생산원가는 kwh당 3.6~7. 5 센트에달할것으로예상된다. 풍력발전의급속한확대는관련일자리도크게증가시키는결과를낳았는데, 1990년풍력발전관련업종의종사자가수천명이었던것이 1995 년에는만명으로증가했고, 2001년에는 43, 000 명으로증가했다. 2000년현재풍력발전관련업체의매출액은 36 억마르크에달했다. 4.2 태양에너지 태양에너지의이용은태양열을이용해서온수 난방용에너지를생산하는것과태양광을이용해서전기를생 산하는것으로나눌수있다. 온수 난방용에너지는태양열집열판을이용해서생산하고, 전기는태양광발전 기를이용해서생산한다. 집열판의보급은 1990 년경부터꾸준히증가했는데, 1990년에는새로설치된집열판의면적이 5만제곱미터였던것이 1995년에는 20 만제곱미터를넘어섰고, 2000년에는 60만제곱미터, 2001년에는 90 만제곱미터를넘어섰다. 2001년말현재독일전체에설치되어있는집열판면적은거의 380만제곱미터에달한다. 이것은유럽에서가장높은수치이다. 태양열집열판은지붕부착형, 지붕일체형, 벽체부착형등다양한형태로적용되고있고, 가정온수용, 가정난방 온수용, 계간축열조를이용한집단난방용등으로이용되고있지만, 설치되는집열판의대다수는가정온수용이다. 2000년에설치된가정온수용집열판의 수는 75, 000 개에달했다. 집열판으로온수를만들어쓰는경우화석연료를이용하는경우보다경제성은크게
떨어진다. 집열판을이용해서 1kWh의열을생산할때드는비용은거의 50 페니히에달하는데, 이것은석유나가스의경우보다 5 배가넘는액수다. 대용량의집열판시스템을이용해서열을생산하면 20페니히로떨어지지만, 이경우도여전히석유, 가스의경우보다 2 배가넘는다. 지방정부에따라설치비의 15~20% 가량지원금을주기도하지만, 이것은생산원가를거의낮추지못하는미미한액수다. 그럼에도불구하고 2000년에 75,000개의온수용집열판이설치되었다는것은독일시민들의재생가능에너지에대한의식이크게높아졌음을보여준다. 독일의전체집열판면적은절대면적으로는유럽에서가장많지만, 인구 1,000명당집열판면적은 2000년말현재약 40 제곱미터로, 유럽에서는오스트리아, 그리스, 스위스, 덴마크에이어다섯번째밖에안된다. 2000년말현재오스트리아는인구 1,000명당 265제곱미터로독일의 4 배에달한다. 2000년현재태양열집열판에서얻어지는열은독일의가정용열에너지의 0.2% 에도못미치지만, 독일연방환경부의에너지시나리오에따르면 2050년까지전체열에너지수요에서태양열이차지하는비율은약 20% 에달할것으로예측된다. 2000년태양열설비의매출액은 10억마르크로 1999년의 7억마르크에비해거의 50% 나증가했다. 태양열산업에직, 간접적으로종사하는노동자의수는거의 1 만명에이른다. 태양광발전도생산원가가매우높음에도불구하고 1990 년대, 특히사민-녹색연립정권이들어선 199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