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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갈등관리 리더십 연구결과 보고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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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신호등 4월호 내지A.indd


나하나로 5호

총서12. 프랜차이즈 분쟁사례 연구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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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기본현황 Ⅱ 년도성과평가및시사점 Ⅲ 년도비전및전략목표 Ⅳ. 전략목표별핵심과제 1. 군정성과확산을통한지역경쟁력강화 2. 지역교육환경개선및평생학습활성화 3. 건전재정및합리적예산운용 4. 청렴한공직문화및앞서가는법무행정구현 5. 참여소통을통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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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0-1 호 ) '15 ( 제 20-2 호 ) ''16 '15 년국제개발협력자체평가결과 ( 안 ) 16 년국제개발협력통합평가계획 ( 안 ) 자체평가결과반영계획이행점검결과 ( 제 20-3 호 ) 자체평가결과 국제개발협력평가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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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정당별지방선거투표의향별국정수행평가별국무총리인선평가별정부개각범위의견별사전투표제인지별사전투표참여의향별지방선거성격공감별차기대선후보선호도별성 * 연령별 자영업 (102) 블루칼라 (96) 12.

뉴스95호

- 2 - 고 오로지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한 것이었다는 역사적 평가 가 내려지고 있음. 게다가 이러한 유신헌법에 근거한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을 전제로 제1호부터 제9호까지 내려졌으며 위헌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던 것이 사실임. 최근 대법원

1. 보고서의 목적과 개요 (1) 연구 목적 1) 남광호(2004), 대통령의 사면권에 관한연구, 성균관대 법학과 박사논문, p.1 2) 경제개혁연대 보도자료, 경제개혁연대, 사면심사위원회 위원 명단 정보공개청구 -2-

목 차 Ⅰ. 조사개요 2 1. 조사목적 2 2. 조사대상 2 3. 조사방법 2 4. 조사기간 2 5. 조사사항 2 6. 조사표분류 3 7. 집계방법 3 Ⅱ 년 4/4 분기기업경기전망 4 1. 종합전망 4 2. 창원지역경기전망 5 3. 항목별전망 6 4. 업종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역대국회 5.18 관련법제 개정현황과실태 : : 5 18 민주화운동 에서 5 18 성역화 (?) 로 법활동은꾸준히지속되고있다 년 7 월을기준으로역대국회에서 5 18 과관련하여총 72 건 이법률안이발의되었다. 법안처리현황을보면 72 건중가결이 20 건, 대안반

뉴스평가지수의개발과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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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소이유의 요지 가. 사실오인 및 법리오해 피고인이 피해자와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할 당시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공사대금을 지 급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으므로 피고인에게 사기죄의 유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에는 사 실을 오인하거나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어 부당하다. 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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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지제3 호서식] ( 앞쪽) 2016년제2 차 ( 정기ㆍ임시) 노사협의회회의록 회의일시 ( 월) 10:00 ~ 11:30 회의장소본관 11층제2회의실 안건 1 임금피크대상자의명예퇴직허용및정년잔여기간산정기준변경 ㅇ임금피크제대상자근로조건악화및건강상

단양군지

Ⅰ. 조사목적 본조사는전국민을대상으로대통령국정수행지지도, 정당지지도등을 파악하여, 국민여론을파악하는기초자료수집에그목적을둠. Ⅱ. 조사설계 조사대상 전국거주만 19세이상성인남녀 표본수 총 1,035 명조사후, 지역, 성, 연령별사후보정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최대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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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법률 제944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 이라 한다) 제4조 제1항, 제3항은 시 도지사 또는 대도시의 시장이 정비구 역을 지정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미한 사항을 제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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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대학의발전과사립학교법개정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학교교과교습학원 ( 예능계열 ) 및평생직업교육학원의시설 설비및교구기준적정성연구 A Study on the Curriculum, Facilities, and Equipment Analysis in Private Academy and It's Developmental 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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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정책백서목차(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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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그린홈이용실태및만족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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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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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고안 : 을 권고한다. 의안 분석 : 회사는 2011년부터 작년까지 4년 연속 순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회사는 전년과 마찬가지로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을 예정이다. 재무제표 작성과 이익잉여금의 처분에 특별한 문제점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의안에 대해 을 권고한다

3

1.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 함선주, 김 영은는 삼성에스디아이(SDI)주식회사(이하 삼성SDI'라고 함)의 협력업체인 영 회사 소속 근로자였고, 피고인 강용환는 또 다른 협력업체인 명운전자 주식회사 소 였다. 삼성SDI는 세계 디스플

210 법학논고제 50 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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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청산과민주화운동인명데이터베이스구축 현종철 한국민주주의연구소

6) 송승종길병옥, ' 군용무인기개발의역사와그전략적함의에대한연구,' 군사 제 97 호, ) 최근공개된자료에따르면주한미군은기간중 268 회의무인기비행을수행한것으로알려졌다.

[ 조사개요 ] 구분 내용 모집단 전국에거주하는만 19 세이상성인남녀 표집틀 유무선전화 RDD 표집방법 지역별, 성별, 연령별기준비례할당추출 표본크기 2,000 명 ( 유선 551 명 (27.55%), 무선 1,449 명 (72.45%)) 표본오차 무작위추출을전제할경우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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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soft PowerPoint 지성우, 분쟁조정 및 재정제도 개선방향


중점협력국 대상 국가협력전략 ( 9 개국 ) ᆞ 5 ᆞ 30 관계부처 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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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회보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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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 O N T E N T S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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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관

1111


60

신규투자사업에 대한 타당성조사(최종보고서)_v10_클린아이공시.hwp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 가. 재심대상판결의 확정 피고인들은 부산지방법원 83고합914호 사건에서 국가보안법위반죄, 간 첩죄, 간첩미수죄로 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및 자격정지 2년의 유죄판결을 선고 받았고, 위 판결(

여수신북항(1227)-출판보고서-100부.hwp

- 2 -

1. 조사설계 조사대상 2017 년 2 월현재, 전국만 19 세이상남녀 표본의크기 조사방법 1,021 명 ( 가중전 1,021 명, 가중후 1,000 명 ) - 가중치를 1,000 명기준으로부여했으나, 보도시표본크기는 1,021 명으로보도해야함. 구조화된설문지를이용한전

Special Theme TV SNS 2015 Spring vol

Transcription:

문화체육관광부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발간등록번호 11-1371480-000134-01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2016. 12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차례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 연구개요 > 과제명 주관기관 연구기관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단법인한국정치학회 연구기간 2016.05.13. 2016.12.15 < 연구진 > 구분 성명 소속 책임연구원 강원택 서울대학교교수 공동연구원 이지호 서강대학교전임연구원 공동연구원 서복경 서강대학교전임연구원 공동연구원 강신구 아주대학교부교수 공동연구원 박현석 KAIST 조교수 공동연구원 이용마 서울대학교선임연구원 공동연구원 조희정 서강대학교 공동연구원 김형철 성공회대학교연구교수 공동연구원 강우진 경북대학교부교수 공동연구원 안용흔 대구가톨릭대학교교수 공동연구원 김대순 한국외국어대학교강사 공동연구원 지은주 고려대학교연구교수

차례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총론 : 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 / 1 제1부대한민국민주주의공고화과정과평가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 9 이지호서강대학교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 47 강원택서울대학교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 67 서복경서강대학교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 90 강신구아주대학교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 113 박현석 KAIST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 138 이용마서울대학교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 163 조희정서강대학교 제2부대한민국민주주의발전의세계사적함의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 197 김형철성공회대학교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 221 강우진경북대학교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 240 안용흔대구가톨릭대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 265 지은주고려대학교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 289 김대순한국외국어대학교

총론 : 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 1 총론 : 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 1. 들어가며 : 연구의목적및필요성 2017년은 1987년민주화운동의결과에따라대한민국에대통령직선제개헌이이루어지고, 이에따라국민의손으로직접대통령과국회를선출하고구성하게된지, 즉민주화 ( 民主化 ) 가이뤄진지 30년이되는해이다. 지난약 30년의기간동안에대한민국의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많은변화를경험하였으며, 이러한변화의과정을통하여대한민국의민주주의는체제전환이라는과도기의혼란을극복하고안정화된단계, 즉공고화된민주주의 (consolidated democracy) 의단계에접어든것으로일반적으로평가된다. 이런점에서대한민국은비슷한시기민주화를경험한국가, 이른바전세계에걸쳐진행된 제 3의민주화물결 (the third wave of democratization, Huntington 1991) 의과정속에서권위주의에서민주주의로의전환에성공한국가들중에서매우성공적으로민주주의의공고화를달성한드문사례의하나로평가되고있다. 1987년의민주화이후지난 30년간대한민국은어떤변화를겪었으며, 어떤이유에의해서대한민국의민주주의는세계의다른국가들이쉬이이루지못한안정적인민주주의의공고화를달성할수있었을까? 민주화 30주년을자축하고기념하기에앞서, 보다냉정하고차분한입장에서지난 30년의기간동안대한민국의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겪어온변화의역사를객관적이고실증적인관점과방법으로분석하고, 그결과를다른나라의사례와비교하여우리의민주화와공고화의경험이갖는세계사적함의를밝히는것은매우의미있는작업일것이다. 물론 1987년새롭게부활한대한민국의민주주의에대한연구는그동안정치학과역사학의분야에서매우활발하게이루어져왔다. 그러나대부분의기존연구들은 1987년민주화까지의과정에주목해왔다. 이에비해 1987년이후의변화, 즉어느연구자의표현을빌면, 민주화이후의민주주의 ( 최장집 박상훈 2010) 의발전과공고화에대해서는상대적으로연구가소홀했던것이사실이다. 그나마소수의연구자들에의해이루어진연구들또한시기적으로한정된시대에주목하고있거나 ( 예를들면, 강원택편 2012), 정치라는한정된분야의변화에주목하거나 ( 예를들면, 박경미외 2012), 상대적으로편향적이거나, 엄밀한경험적검증자료보다는저자의주관적평가에의존하고있다는비판으로부터자유롭기어렵다는한계를보이고있다. 더욱이우리의공고화사례를다른국가와의비교를통해서그세계사적함의를탐색하는연구는더욱찾아보기힘들다. 이러한문제의식을갖고우리는이책에서 1987년민주화운동이후부터현재까지의약 30년의기간동안이루어진대한민국민주주의의공고화과정을정치혹은경제라는특정한분야가아닌

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과거사정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제반영역을포함하는종합적분석의틀속에서역사적 경험적자료에기반한균형잡힌시각으로분석하고자한다. 그리고그결과를 제 3의민주화물결 속에서민주화를경험한남유럽, 동유럽, 동아시아, 중남미의사례와비교하여대한민국의민주주의공고화가갖는세계사적함의를밝히고자한다. 2. 연구의구성및개요 앞에서소개한바와같은목적에의하여이책은 민주화 30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 라는대주제아래, 제1부 대한민국민주주의의공고화과정과성과, 제2부 대한민국민주주의발전의세계사적함의 라는두개의부분으로구성된다. 제1부인대한민국민주주의의공고화과정과평가는민주화이후 30년동안겪어온대한민국의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변화과정을역사적으로추적하고, 각영역에서이루어진업적과문제점을객관적이고공정한시각에서재조명하고평가하는것을목적으로한다. 이와같은민주화 30년의공과 ( 功過 ) 에대한구체적이고객관적인평가는지난 30년의시간을넘어앞으로의 30년, 300년의시간을준비하는대한민국이향후의발전을위해필요한과제를인식하고해결책을모색하는의미와목적을아울러가진다. 제2부인대한민국민주주의발전의세계사적함의는민주화이후우리의민주주의공고화과정을다른지역, 국가의사례와비교하고있다. 우리가우리의민주주의공고화만을살펴본다면, 우리는우리의공고화가갖는세계사적가치를온전히평가할수없을것이다. 우리의공고화가갖는의미와한계를온전히평가하기위해서는세계의다른지역, 국가의사례와의비교를통하여우리의민주화및공고화과정이보여주는세계사적보편성과특수성을확인하는작업이필요하다. 이를위해서우리는 제 3의민주화물결 속에서민주주의로의이행을경험한남유럽의스페인과그리스, 동유럽의폴란드와헝가리, 중남미의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동아시아의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과의비교연구를수행하였다. 이들의경험과한국의경험, 이에더하여세계사적으로앞서서민주주의를도입하고현재에도민주주의를굳건히유지하고있는이른바선진민주주의국가의경험을비교함으로써, 우리의민주주의공고화가아직민주주의로의전환을경험하지못하거나전환의과도기를현재겪고있는국가들에게줄수있는함의와우리의공고화된민주주의가더나은민주주의, 더성숙한민주주의로계속변모하고발전하기위해서필요한부분이무엇인지를찾고자하였다. 1970년대중반남유럽세국가의민주화로부터시작되어 1980년대후반 1990년초반냉전의해체에의해절정을기록한 제 3의민주화물결 로인하여세계의정치학계에 민주주의이행론 에대한연구가활발히진행되는과정에서 민주주의공고화 (democratic consolidation) 의개념이처

총론 : 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 3 음한국의정치학계에소개될때에는절차적민주주의의도입을민주주의로의전환 (democratic transition), 실질적민주주의의완성을민주주의의공고화로이해하는약간의개념상의오해, 혼란이존재하였다. 그러나사실일반적인정치학의연구에서민주주의의공고화 (consolidation of democracy) 는지극히정치적이고절차적인개념이라고할수있다. 이들일반적인정치학의입장에서민주주의는 경쟁적선거에의해지배자가교체되는정치체제 이며 (Schumpeter 1942), 민주주의공고화는 이러한권력승계의원칙이권력을두고경쟁하는사회의모든세력에게보편적으로받아들여지는상태 를의미한다. 즉, 자유롭고공정하며경쟁적인선거라는민주적절차만이그사회속에서권력을획득할수있는유일한방법이라는믿음이정치엘리트와대중들에게광범위하게받아들여지는사회가바로공고화된민주주의인것이다 (Linz 1990; Valenzuela 1992; 박경미외 2012). 이는민주주의공고화여부를판단하는지표로널리받아들여지는것이 두번에걸친정권교체 (two turnover test) 라는것을통해서잘알수있다 (Huntington 1991, 266-8쪽 ). 한번의정권교체는다만그선거가경쟁적이었다는것을의미할뿐이다. 경쟁적선거를통해서권력을획득한하나의입장이다음의선거에서그결과에기꺼이승복하고권력을내어놓을때, 우리는비로소민주적선거가그사회에서권력을얻을수있는 유일한게임의규칙 임을확인할수있는것이다. 비록이렇게민주주의의공고화가본연적으로절차적이고정치적인측면에주목하고있는개념이지만, 우리는그와같은정치적인변화는결코정치적인측면에서의변화만으로달성될수있는것이아니며, 또한정치적인측면에그영향이국한되는것도아니라고굳게믿는다. 즉, 경쟁적선거의도입만으로공고화가자연스레이루어지는것은결코아닌것이다. 이는제 3의민주화물결이전에제 1, 제 2의민주화물결속에서민주주의를도입한많은나라들이다시권위주의로의회귀를경험한역사적사실을통해서잘알수있다. 결국경쟁적선거의도입은오랜기간의권위주의통치의과정속에서정치에의해억눌려왔던경제 사회 문화등다른분야의변화를불러올수밖에없으며, 다시이러한정치이외의영역에서의변화는정치의변화로연결될수있다는것, 그리고이과정은결코자동적인연쇄작용이아니라지난한노력을통해서만가능한것으로이해될수있다. 그리고이것이가능했기때문에민주주의는 동네의유일한게임 (the only game in town) 이될수있는것이다 (Linz and Stepan 1996, 5쪽 ). 이것이우리가 1부에서지난 30년간의민주주의공고화과정과변화를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영역으로나누어종합적으로살펴보고자한이유이다. 정치분야에서는특히선거, 정당정치, 입법부-행정부-사법부관계의변화와지방자치제도의정착과정에주목하였으며, 경제분야에서는국가- 시장 ( 기업 ) 관계의변화와경제민주화및복지국가로의지향과정, 사회분야에서는시민사회의성장에주목하여, 시민사회의주춧돌로서시민단체와언론이국가혹은정부와맺는관계의변화양상, 그리고문화분야에서는정보화사회의도래와그로인한한국사회의변화에주목하여, 그변화의과정을객관적이고공정한시각에서통시적으로분석하고자하였다.

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그러나이와같은민주화에따른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변화를살펴보는것만으로대한민국민주주의의공고화과정을온전히이해하고평가하는것은힘들다는판단이다. 어쩌면거의불가능한일인지도모른다. 그것은과거민주화를경험한많은국가들에서급격한변화의과정속에서겪을수밖에없는혼란과과거권위주의정권엘리트의반발, 그리고그에대한일부의향수등에의하여공고화에이르지못하고좌절했던모습을발견할수있기때문이다. 따라서민주화이전권위주의시대의유산과과거사가민주주의로의전환이후어떻게정리되는지는공고화의운명에큰영향을미칠수밖에없다. 특히우리는과거권위주의정권의성격상, 군에대한문민우위의확립이민주주의의공고화과정에서중요한의미를가질수밖에없다. 이에따라 제1부 : 대한민국민주주의의공고화과정과성과 는군의문민화와과거사정리가 1987년의민주화이후어떻게진행되었는가에대한논의로시작된다. 제2부인대한민국민주주의발전의세계사적함의에서는앞에서소개한바와같이다른지역, 국가의사례에대한비교연구를수행하고있다. 이와같은비교에서우리는특히민주적의사결정과정의제도화라는정치제도적차원과민주주의에대한강한믿음과신념의내면화라는행위자적차원에주목하고자하였다. 민주주의공고화에영향을주는요인을추적한정성적 정량적연구들은민주화이행경로, 사회경제적발전의수준, 정치제도의제도화, 그리고민주주의에대한신뢰등다양한요인들이민주주의공고화와민주주의의안정적지속에기여할수있음을밝혀왔다 (Bernhard et al. 2001; Cheibub and Limongi 2002; Mainwaring 1999; Gasiorowski and Power 1998; Linz and Stepan 1996 등 ). 이에따라 2부의연구자들은앞서소개한지역과국가의민주주의공고화과정을분석하는과정에서 1 각국가의민주화이행경로와과정에대해검토하고, 2 각국가의민주화과정에서설계된민주적정치제도의특성과제도화의과정을살펴보고, 3 민주주의가치와규범에대한엘리트와대중의신뢰정도를평가함으로써각국가의민주주의공고화수준및민주주의성격을평가하고있다. 이를위해 2부의첫연구는민주주의공고화의개념, 측정그리고우호조건에대한이론적방법론적검토를수행한다. 그리고나머지연구들은우리연구에서정의한민주주의공고화개념을통해개별적인지역과국가에대한사례연구 (case study) 를수행함으로써 2부전체는하나의거대한교차사례비교연구를구성하게된다. 3. 연구에대한소개를마치며 한국은 1987년 6월민주화운동에의해권위주의체제에서민주주의체제로이행하였다. 이후한국의민주주의는절차적수준에서민주주의가확립되었다는국내외적평가를받아왔다. 즉, 1987년 12 월민주적헌법하에서실시된대통령선거이후 5 차례의대통령선거와 7 차례의국회의원선거가공정

총론 : 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 5 하고자유롭게실시되었으며, 두차례에걸쳐평화로운정권교체가이루어졌다. 그리고한국은 1997 년 IMF 외환위기를겪으면서도국민들이민주주의체제와가치에대한강한신뢰를보여주고있었다는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의또다른차원인민주주의의내면화가이루어졌다고평가할수있다. 이와같은평가는각국가의민주주의수준을측정하여발표하는국제적으로권위를인정받는기관의평가에서도재차확인되고있다. 미국의워싱턴에위치한민간단체인프리덤하우스 (Freedom House) 는민주주의의중요한특성으로정치적권리 (political right) 와시민의자유 (civil liberty) 라는두차원에주목하여매년세계각국민주정치의자유도를평가해왔는데, 이들에의하면한국의민주주의는 1988년부터최근에발표된 2015년까지계속자유국가 (Free Countries) 로분류되고있다. 1 또한영국의 Economist Intelligence Unit(EIU) 은전세계 167개국을대상으로민주주의수준을조사한보고서에서 2014년부터한국의민주주의를완전한민주주의 (Full democracy) 에서결함있는민주주의 (flawed democracy) 로평가하고있다. 2 이외에민주주의의비교평가지수로정치학계에서널리인용되고있는 Polity IV 지표또한대한민국이 1988년이후지속적으로민주주의를유지하고있으며, 그지수를통해서보여지는민주주의의정도또한심화되고있는것으로제시하고있다. 3 이와같은대내외의평가는대한민국의민주주의가지난 30년의기간을통하여체제전환이라는과도기의혼란을극복하고안정화된단계, 공고화된민주주의의단계에접어들었다는것을의미한다. 그러나한국의민주주의공고화에대한체계적이고분석적인연구와역사적가치를가지는자료의축적은연구대상의가치와비교하여상대적으로잘이루어지지않아왔던것으로판단된다. 2017년민주화 30년을자축하기에앞서, 민주화 30년의역사와과정을정리하고그공과를평가하며, 나아가다른국가와의비교를통하여대한민국의민주주의공고화과정이갖는세계사적함의를밝히고, 여전히우리에게부족한부분은무엇일까되새겨보는것은매우중요한시대적과제가될수밖에없다. 이책에수록된우리의연구가이와같은시대적의미를갖는작업의끝이아니라시작이되기를소망한다. 1 <http://www.freedomhouse.org> 2 이단체에서는각국의정치상황을 ⓵선거절차와다원성, ⓶정부기능, ⓷정치참여도, ⓸정치문화, ⓹시민사회자유등 5개범주로분류하여, 각범주마다전문가평가와일반인설문등을종합하여 10점만점으로측정하고, 다시이를종합하여최종적인민주주의지수를제시하였다. 3 Polity IV지수는 10에서 10 사이의정수값을가지며, 일반적으로 6이상의국가를민주주의로분류한다. 한국의경우과도기상황을반영하여결측처리된 1988년을제외하고 1989년이후 6의값을이후 1999년 8의값으로상승하는모습을보여준다 (<http://www.systemicpeace.org/polity/>).

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참고문헌 강원택 ( 편 ). 2012. 노태우시대의재인식 파주 : 나남. 박경미 손병권 임성학 전진영. 2012. 한국의민주주의 : 공고화를넘어심화로 서울 : 오름. 최장집지음. 박상훈개정. 2010. 민주화이후의민주주의 : 한국민주주의의보수적기원과위기 서울 : 후마니타스. Bernhard, Michael,. Timothy Nordstorm, and Christopher Reenock,. 2001. Economic Performance, institutional Intermediation, and Democratic Survival. The Journal of Politics. Vol. 63, No. 3. Anderson, L. 2001. The Implications of Institutional Design for Macroeconomic Performance.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34:4, 429-452. Cheibub, Jose Antonio. and Fernando Limongi,. 2002. Democratic Institutions and Regime Survival: Parliamentary and Presidential Democracies Reconsidered. Annual Review Political Science. Vol. 5. Gasiorowski, Mark J. and Power. Timothy J. 1998. The Structural Determinants of Democratic Consolidation.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31:6, 740-771. Huntington, Samuel P. 1991.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Oklahoma: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Linz, Juan and Alfred Stepan. 1996. Problems of democratic transition and consolidation.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Linz, Juan. 1990. The Perils of Presidentialism. Journal of Democracy 1 (1): 51-69. Mainwaring, Scott. 1999. Democratic Survivability in Latin America. in Handelman, Howard. and Mark Tessler,.(eds). Democracy and Its Limits: Lessons from Asia, Latin America, and the Middle East.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Valenzuela, J. Samuel. 1992. Democratic Consolidation in Post-Transitional Setting: Notion, Process, and Facilitating Conditions. In Scott Mainwaring, Guillermo O Donnell and J. Samuel Valenzuela (Eds.) Issues in Democratic Consolidation: The New South American Democracies in Comparative Perspective. Notre Dame: Notre Dame University Press.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제 1 부대한민국민주주의공고화과정과평가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9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 4 이지호 ( 서강대학교 ) 1. 들어가며 현대국가에서실시된과거청산 1 은제2차대전이후독일정부가유대인학살을비롯한나치체제의과오를반성하고과거의진실을복원하여피해자들을치유한사례와프랑스정부가나찌부역자들에대한조사와처벌을단행한사례로시작하였다. 1980년대를거치면서민주화를이룬후발민주주의국가에서도 진실위원회 의이름으로과거사정리사업이진행되었다. 아르헨티나, 칠레, 엘살바도르,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등많은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국가에서 진실위원회 가설치되어과거의압제정권하에서부당한공권력에의해자행되었던폭력과인권유린사건에대한진상규명과피해자에대한보상과명예회복작업이실시되었다. 한국에서도민주화이후과거사정리사업이정부차원에서실시되었다. 한국의과거사정리사업은 진실위원회 의이름으로진행된다른후발민주주의국가의과거사정리사업과많이달랐다. 예컨대남아프리카공화국의진실위원회는 아라파트헤이트 라는인종차별정책에서비롯된폭력과인권침해사건들을다루어졌고, 칠레나아르헨티나의 진실위원회 는군사독재정권하에서일어난실종사건을중심으로인권침해사건에접근했다. 그러나한국의과거사정리는일제강점기의친일행위, 독립운동, 전쟁동원피해, 6.25전쟁전후민간인집단희생, 그리고권위주의시기의민주화운동과인권침해등을포함하였다. 과거청산작업은그자체가민주주의이행과공고화의과정이다. 권위주의통치하에서성장한반대세력들은투쟁을통해권위주의에서민주주의로정치체제를바꾸어놓았지만, 절차적민주화이후에진행된과거청산의과정은실질적으로권위주의체제를민주주의체제로전환시키고이를공고화하는과정이다. 그렇기때문에한나라의과거청산이어떻게이루어졌는지를살펴보는것은그 * 이글의내용을보완하기위해인터뷰에응해주신전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의대표전문위원송병헌박사와전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인권침해규명위원회의조사관조환준박사께감사의뜻을표합니다. 1 과거청산 은과거권위주의정권하에서벌어진국가폭력과인권침해에대한진실규명과책임자처벌, 피해회복과기억을되살리는사업등을포괄적으로통칭하는용어다. 그러나우리나라에서 과거청산 은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의제정과정에서진상규명에무게를둔다는의미에서 과거사정리 라는용어로사용되기도한다 ( 허상수 2009: 129). 이글에서는책임자처벌이함께이루어진 5공청산 과같은사업을포함한민주화이행기전반의과거청산사업을다루기때문에특정한법률이나공식적인사업명칭을제외하고시민사회든정부차원의이들사업을 과거청산 이라는용어로통일한다.

1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나라의민주주의공고화과정을구체적으로들여다보는것과같다. 과거청산에대한그간의평가는정부주도의과거청산에대한비판에서부터당위성과의미부여에무게를두는글에이르기까지다양하다. 비판중심의평가에는시민사회가주체가되지않는 국가중심의과거사정리 가근본적인과거청산을가로막는다는진보진영의목소리 ( 김성길 2005; 김영수 2009; 2011) 에서부터역사해석의선택과자유를억압한다는뉴라이트의비판 ( 안병직 2004), 그리고북한의대남적화통일전략과연계되었다는수구적인태도 ( 기세주 2006) 에이르기까지이념적성향에따라천차만별이다. 한편, 과거청산작업에직 간접적으로참여한학자및전문가들의대체적인평가는정부차원의과거청산작업에대한의미와성과를인정하면서도한계와문제점을동시에지적하고있다. 그러한평가는세계적으로볼때형편없는수준은아니었지만대중의기대와본연의목적달성에못미쳤다거나 ( 조희연 2002; 서중석 2003), 철저한진실규명과가해자의진정한사과와화해를이끌어내지못한한계에도불구하고인권침해사건들의진실규명을통해재심을이끌어내고명예회복과보상조치를취한점등은괄목할만한성과였다는것이다 ( 김동춘 2013). 한국의민주화이행기에실행된과거청산작업은실로방대하다. 일제강점기부터전체현대사를포괄하고있으며, 주제도관련된법률의성격도다양하다. 그러나그간의연구들은대체로개별사안에한정되어있었다. 따라서한국에서실시된과거청산의전체적인모습을보여주지는못했다. 또한기존연구에는과거청산사업이진행되었던정치과정에대한분석이소홀했다. 관련법률들의결정과정에서나타났던여야간의논란, 관련위원회활동과정에서나타난보수 진보간의정치적갈등이잘드러나지않았다. 이글은민주화이후한국의정부차원에서실시된과거청산의주요내용을종합적으로살펴보고민주주의공고화의관점에서그활동을분석하고자한다. 이를위해서이글은노태우정부이후이명박정부까지실시된과거청산의세가지대표적인사업에주목할것이다. 즉, 5공청산과 5 18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사업, 권위주의시기에일어났던민주화운동에대한명예회복과보상사업, 그리고일제강점기부터권위주의시기까지를포괄하는과거사진실규명과화해사업에초점을둘것이다. 각사안에대해서는관련법률의입법과정을간단히살펴보고, 법률을통해사업의성격과구조를이해하고, 관련위원회의보고서및기타자료를통해사업의성과를파악할것이다.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11 2. 민주화이후진행된한국의과거청산 1) 과거사문제가축적되어온역사 근대이후우리나라는일제강점기의폭압통치를겪었고, 1948년정부수립후에는군사쿠데타가발생하고인권탄압이일어나는등권위주의통치의시대를거쳐왔다. 해방직후에는친일청산이민족적과제로대두되었다. 미군정기인 1947년, 과도입법의원 에서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대한특별법률조례 가제정되었으나미군정당국은이를공포하지않았다. 이승만정부하에서는일제강점기반민족행위자를처벌하기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 (1948년) 이공포되고 반민족행위처벌특별위원회 ( 이하반민특위 ) 가발족되었으나, 결국정부에의해강제해산되었다. 또한 4 19혁명직후 피학살자유족회 의학살진상규명운동도 5.16군사정변으로인해좌절되었다. 이승만정부는초대헌법을만들고나라의기틀을마련하는데기여하였음에도불구하고, 정치적반대세력을탄압했고장기집권과부정선거를기도하여결국 4.19 혁명이라는국민적항거로이어졌다. 민주당장면정부시기에는경찰숙청작업이진행되는등민주화를향한일부진전이있었지만친일청산이나 6 25전쟁당시민간인집단희생등과같은과거청산의문제해결에는소극적이었다. 5.16 군사정변으로집권한박정희정부는산업화와경제발전을추구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반대세력을탄압하고장기집권을기도하는등권위주의적통치를강화시켜갔다. 특히, 유신체제는 1972년 10월 17일에서 1979년 10월 26일까지지속된초헌법적독재체제였다. 이시기에는총 9차례의긴급조치가선포되어학생 지식인등반정부인사들이구금 투옥되었고, 조작으로판명난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들이처형되는등민주화운동에대한탄압이극에달했다. 1980년봄짧은정치적해빙기가도래하였지만이는광주에서의유혈충돌을거쳐곧신군부의집권으로이어졌다. 이렇듯, 과거청산의문제는역사적전환기마다제기되었으나해결되지못한채축적되었다. 2) 역대정부의과거청산사업 (1) 노태우정부우리나라의과거청산사업은아이러니하게도전두환군사정부를계승한노태우정부에서시작되었다. 민주화이후제6공화국이들어서자마자노태우정부가직면한문제는바로 5 18 광주의진상규명과피해자처리였다. 이사안은 13대국회의청문회를통해전국민의폭발적인관심을받았다. 총 17차례의청문회를통해전두환대통령을포함해 67명의증인들이불려나왔으며, 진상을상당히밝힐수있었다. 이후 5 18 광주의진상규명과피해자처리문제는여 야간에뜨거운쟁점이었으나, 3당합당이후, 민주자유당의안으로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 2 이

1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통과되었다. 이후이법은보상의적용대상범위를확대하는방향에서 2000년까지네차례나개정되면서, 5.18민주화운동관련희생자에대한피해보상이이루어졌다. (2) 김영삼정부김영삼정부는 문민정부 의이름으로 하나회척결 등대대적인개혁조치를통해과거군부정권과의단절을이끌었다. 1995년 12월 5 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이국회를통과하였고, 헌정질서를파괴한군부쿠데타세력을사법처리하였다. 검찰은전두환 노태우두전직대통령이체포하였고, 12 12쿠데타와관련한핵심인사 16명을군사반란 내란죄등으로기소하였다. 5공청산 이라고불리는이과거청산작업은당시국민의기억에생생했던광주학살의책임자에대한단죄라는점에서전국민의주목을받았다. 김영삼정부의또다른과거청산사업은 6 25전쟁당시국군이가해자가되었던거창민간인학살사건에대한명예회복을추진한것이었다. 1996년 1월,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 이국회에서통과되었다. 법에따라김대중정부들어서설치된 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는사망자와유족의명예회복에관한사항및묘지단장, 위령제례및위령탑건립이시행되었다. (3) 김대중정부김대중대통령집권이후, 1999년 12월에는두가지주요한과거청산사업이착수되었다. 하나는민주화운동관련자에대한명예회복과보상이었고다른하나는권위주의정권아래서발생한의문사의진상규명이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안 과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이국회를통과했고, 이에따라 2000년 5월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 이하민주화보상위원회 ) 가발족하였고, 동년 10월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 이하의문사위 ) 가출범하였다. 의문사위는세차례특별법개정으로기한이연장되었고세번째연장으로노무현정부로이월되었고, 민주화보상위원회는종료시한없이지금까지활동을지속하고있다. 김대중정부에서의또다른과거사사업은제주4 3사건에대한정리였다. 2000년 1월에 제주4 3 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이제정되었고, 같은해 8월 제주4 3 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가출범하였다. 2 이법은 2006 년 3 월 5 18 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 으로명칭이변경되었다.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13 (4) 노무현정부노무현정부는과거청산사업을더욱더적극적으로추진하였다. 과거청산사업이일제강점기의친일행적이나전쟁동원피해문제로까지확장되었다. 2004년 3월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이국회를통과했고, 이어 17대국회가열리자마자조사범위를확대하는안으로다시개정되었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가 2005년 5월에출범하여 4년간진상규명활동을펼쳤다. 노무현정부의식민지잔재청산작업은친일파재산환수와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으로이어졌다. 2004년 2월에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 이제정되었고, 이에따라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가 2004년 11월출범하였다. 2005년 12월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 이국회를통과했고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가 2006년 8월출범하여 2010년 7월까지활동하였다. 노무현정부에서는군의문사에대한진상규명도다루어졌다. 2005년 6월, 군의문사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 이국회를통과하였고, 2006년 1월에는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가출범하여 2009년 12월까지활동하였다. 노무현정부의과거청산사업중획기적인것은국정원, 경찰청, 국방부등국가기관이자체적으로과거사정리사업을실시했다는것이다. 민간인과해당기관의직원으로구성된 위원회 가의혹으로제기된사건을선정, 진실을규명하고조사결과를발표했다. 노무현정부하과거청산사업의정점은 2005년 5월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을제정하고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를발족하여포괄적과거사정리사업을추진하였다는것이다. 이로써일제강점기독립운동과해외동포사, 6 25전쟁전후민간인집단희생사건, 권위주의시기인권침해사건이하나의위원회틀속에서다루었다. (5) 이명박정부이명박정부는노무현정부에서추진한많은사업을상당부분을부정했다. 과거사정리사업도예외는아니었다. 인수위원회에서부터 14개의과거사관련위원회를대폭폐지하겠다는방침을발표한이후, 국회의결을통해실제로 9개의위원회를폐지했다 ( 김영수 2008: 9). 민주화이행기를통해정부차원에서추진해오던과거청산작업이이명박정부들어서축소된것이다. 그러나이명박정부에들어과거청산사업이축소되기시작한것이반드시정부의성향때문으로만볼수없다. 김영삼정부에서부터본격적으로시작한과거청산작업이그만큼많이진척되었기때문이라고이해할수도있다. 이명박정부가과거청산사업을전면폐기한것은아니다. < 표 1> 에서보는것처럼, 10.27 법난피해자명예회복을시작으로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 그리고 6 25전쟁납북자에대한피해진상규명과명예회복이관련법을제 개정하여다루어졌다. 그러나

1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이명박정부의과거사정리사업은납북피해진상규명및피해자명예회복등 6.25전쟁당시북한군에의한인권유린과학살 의문사사건등북한정권에의한피해에초점을두고있어정권의이념성향을드러냈다. 노무현정부에서야심차게시작된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사업도유지되긴하였으나법률에따른최장연장기한 2년을연장하지못하고 2010년 10월에활동보고서를제출하고활동을종료하였다. (6) 소결 민주화이후한국에서진행된과거청산은친일청산, 6 25전쟁당시민간인집단학살, 군부독재시기의국가폭력과인권침해를대상으로했다. 시기적으로근 현대를포괄하고있었고주제별로도다양했다. < 표 1> 이보여주는것처럼, 노태우정부부터이명박정부까지 25개의관련법안이제정되었고, 22개의위원회가설치되었다. 그만큼한국이일제식민지배, 분단과한국전쟁, 군부독재의역사적질곡을겪으면서청산되지않은과거사문제가누적되어왔기때문이다. 과거청산의형태도다양했다. 책임자처벌을실현한사례도있었고, 피해및민주화운동에대한보상에주력하는사례도있었으며, 진실규명과과거와의화해에초점을두는사례도있었다. 외국에서사용된과거청산의두가지방식 - 사법적정의실현 과 진실위원회방식 - 이 3 한국의정치현실속에서다양한형태가나타난것이다. 과거청산의초기에는책임자처벌의문제를무겁게다루었지만, 곧보상중심의사업으로이어졌고, 노무현정부에와서는 진실위원회 방식이주를이루었다. 표 1 정부별과거청산관련주요법률과위원회 노태우정부 김영삼정부 법률 ( 제정일 ) 위원회 ( 존속기간 )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 ( 90.08.06) 일제하일본군위안보에대한생활안정지원법 ( 93.06.11) 일제하일본국위안부피해자에대한생활안정지원및기념사업등에관한법률 로개정 ( 02.12.11)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지원위원회 ( 90.08~) 일군위안부생활안정지원심의위원회 ( 93.07~)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 ( 95.12.21) 5 18 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 95.12.21) 3 사법적정의실현 은과거청산의전통적인방식으로제2차세계대전이후뉴른베르크재판과독일과프랑스정부의나찌부역자들에대한조사와처벌에서그사례를볼수있다. 그러나 1980-90년대를통해민주화가진행되었던남미와아프리카국가에서는사법적처벌중심의과거청산대신 진실위원회 방식을채택하였다. 구정권세력과의타협적민주화의과정을밟은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는사법적정의실현이어렵다고보았기때문에진실과반성을대가로사면을부여하는 진실위원회 방식을선호했던것이다 (Hayner 저 주혜경역 2008: 47).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15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 이명박정부 법률 ( 제정일 ) 위원회 ( 존속기간 )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 ( 96.01.05) 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 98.02~) 제주4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 00.01.12)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 ( 00.01.12)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 00.01.1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 01.07.24) 5 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 02.01.26) 삼청교육피해자의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 ( 04.01.19) 특수임무수행자보상에관한법률 ( 04.01.29)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및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 04.03.05)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 04.03.05)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 ( 04.03.06)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 04.03.22)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으로개정 ( 05.01.27) 제주 4 3 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 00.08~)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 ( 00.08~)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제1기 ( 00.10~ 02.10) 제2기 ( 03.07~ 04.0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삼청교육피해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 04.08~)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위원회 ( 05.01~)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및명예회복위원회 ( 04.08~)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 04.08~)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 10.03 타위원회에통합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05.05~ 09.11)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 05.05.31)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06.01~ 10.12) 군의문사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 ( 05.07.29)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 ( 05.07.29) 군사정전에관한협정체결이후납북피해자의보상및지원에관한법률 ( 07.04.27) 한센인피해사건의진상규명및피해자생활지원등에관한법률 ( 07.10.17) 태평양전쟁전후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에관한법률 ( 07.12.10) 10 27법난피해자의명예회복등에관한법률 ( 08.03.28)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에관한특별법 ( 10.03.22) 6 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및납북피해자명예회복에관한법률 ( 10.03.26) * 출처 :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 종합보고서 Ⅰ, 표 <1-1>.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 06.01~ 09.12)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 06.01~ 09.12) 납북피해자보상및지원심의위원회 ( 07.11~) 한센인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 ( 08.10~) 태평양전쟁전후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위원회 ( 10.03 타위원회에통합 ) 10 27 법난피해자의명예회복심의위원회 ( 08.12~ 13.06)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 10.03~ 12.12) 6 25 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및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 ( 10.09~)

1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3. 과거청산의대표적인사례 이장에서는민주화이후진행된과거청산사업중대표적인세가지사례를분석한다. 첫째는 5 18민주화운동과관련한과거청산이며, 둘째는권위주의시기민주화운동에대한명예회복과보상이었고, 그리고마지막으로일제강점기부터권위주의시기까지의과거사를포괄하는진실규명중심의과거사정리사업이었다. 5 18민주화운동과관련한과거청산사업에주목하는이유는이사업이민주화이후최초의과거청산사업으로써대중적인관심을불러일으켰으며, 이와관련한법률의제정과정책실현이이후우리나라의과거청산사업에영향을미쳤기때문이다. 민주화운동관련자에대한명예회복과보상사업을대표적인사례의하나로선정한이유는이사업의대상범위가컸을뿐만아니라권위주의통치에저항했던운동에대한국가차원의인정이라는점에서그의의가남달랐기때문이다. 마지막으로포괄적과거사정리사업을선정한이유는이전의사업이진실규명없는보상위주의사업이었다는반성속에서외국의 진실위원회 의활동과맥락을같이하는대표적인사업이었기때문이다. 따라서이세사례에대한분석을통해민주화이후한국에서진행된과거청산의전체적인상을포착할수있을것이다. 1) 5 18 광주 에대한과거청산 5 18 광주에대한과거청산의과제는 진실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피해배상, 정신계승 이라는 < 광주 5원칙 > 으로압축되었다 ( 정근식 1997). 과거청산의제반요소를모두포함하는것이었다. 특히김영삼정부에서추진된 5공청산 은국가장악의과정에서저질러진권력집단의대규모인권침해에대해부분적이고상징적이긴했지만, 책임자처벌이실현되었다는점에서과거청산의전통적인형태인 사법적정의실현 에가까웠다. 이절은 5 18민주화운동의진상규명과책임자처벌, 명예회복과피해보상의과제를따라그성과와문제점을살펴보도록한다. (1) 5 18민주화운동의진상규명과책임자처벌 5 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의제정 1987년 6.29 민주화조치이후신헌법에따라제13대대통령선거가직접선거로실시되었으나, 민주화세력의단일화실패로 5공군부세력이집권에성공하였다. 그러나그들의집권은군부의힘과정치적권위를상당한부분상실한상태에서집권을 5년연장한데지나지않았다. 1988년노태우정부가출범하면서부터광주는사회적쟁점으로불붙었고현실정치의제1의쟁점으로대두되었다. 노태우대통령은당선직후 민주화합추진위원회 라는한시적기구를만들어 5 18의문제를해결하려했다. 민주화합추진위원회 는그동안 폭도들의반란 으로규정했던 5.18민주화운동을 민주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17 화투쟁의일환 으로인정했지만, 책임자처벌과진상규명은 국민화합 을저해한다며, 피해자보상을정부에건의하는데그쳤다. 정부는 5 18민주화운동을 광주의학생 시민들의민주주의를향한노력의일환으로규정하였으며, 재정보조, 의료서비스및기념물건립을약속했다 ( 공보처 1992: 301). 그러나진상규명과책임자처벌에대해서는별다른언급이없었다. 1988년하반기에국회에서 5 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위원회( 이하광주청문회 ) 가개최되었다. 광주청문회는 1999년 2월 24일까지모두 17회개최되었으며그장면은 TV로전국민앞에생중계되었다. 증인은모두 67명이었으며그가운데광주의피해자와가해자들이다수포함되었다. 그러나청문회는여 야당간에치열한공방이오갔지만구체적인결론을내리지못한채종결되었다 (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1997). 전두환은백담사로자진유배의길을떠났다가 1989년연말여 야의광주문제종료합의에따라국회에서마지막으로형식적인증언을함으로써 5공청산이완료되는듯했다. 그러나김영삼정부에들어서상황은바뀌었다. 제14대대선에서새로선출된김영삼대통령은자신의정부가 민주주의정부로서광주민주화운동의연장선상에있다 고표명하면서 5 18민주화운동과관련한과거청산에적극적인태도를보였다. 그러나당시검찰은 12 12쿠데타에대해군형법상반란죄를인정하면서도 기소유예 의처분을내렸고, 5 18에대해내란적인요소를인정하면서도 공소권없음 이란처분을내렸다 ( 서울지방검찰청 1995). 이른바 성공한쿠데타는처벌할수없다 는논리였다. 광주의피해자단체는물론전국의시민사회단체들은즉각검찰의결정에반발했고, 전국곳곳에서검찰결정에항의하는집회와시위, 성명서들이쏟아졌다. 그같은갈등국면에서광주학살의주모자로꼽히던두전직대통령이보유한천문학적비자금사건이폭로되자 5 18에대한정부의소극적정책은일시에바뀌었다 ( 김영명 1999: 297). 시민사회단체에서는그들의처벌을위한특별법제정과특별감사제도입, 헌법파괴적범죄에대한공소시효연장을위한특별한법적조치를촉구했다. 김영삼대통령은 1995년 12월, 역사바로세우기로제2의건국 이라는제목의담화를발표하고특별법제정과반란 / 내란범에대한재수사와기소를지시하였다 ( 공보처 1997: 83). 국회는두개의특별법을제정하였고, 헌법재판소는피고인들이제기한헌법소원을심리한후위헌이아니라고결정하였다. 두개의특별법중하나는 5 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 이하 5 18특별법 ) 이고다른하나는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 이었다. 책임자처벌쿠데타로집권한세력을집권이후에도형사소추가가능하도록한 5 18특별법에따라, 검찰은다시사건을전면적으로수사하였고, 1979년에서 1980년에저질러진집권군부의두쿠데타를 1996년 1월 18일에기소했다. 피고인들은전직대통령 2인, 장성및장관을역임했던군인들이었

1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다. 특히내란죄등의사건은집권이후벌어진권력형부패에대한재판과동시에이루어져재벌총수들도같이재판을받게되었다. 그리하여군과정치권, 기업계의최고위인사들이총집결해 세기의재판 혹은 별들의재판 이라고불렸던이재판은당시전국민의주목을받았다피고인과변호인들은이사건이 1989년국회청문회를통해이미정치적으로종결된것으로이를다시재판하는것은정치보복이라는논리를내세웠고, 형사소송법이보장하고있는갖가지방식, 가령묵비권행사등으로맞섰다. 법원으로서는이사건의복잡성과대규모성으로인해처리가결코쉽지않았다. 정치와법이섞이고증거는이미조작되었거나멸실되었기때문에재판부는상상하기어려울정도로곤란했던사건이라고회고했다 ( 한인섭 2002: 195). 결과적으로 12 12사건에대해서는군형법상의반란, 5 18에대해서는내란및내란목적살인으로단죄했다. 수괴급인전두환에대해서는무기징역, 제2인자인노태우에대해서는징역 17년, 그리고나머지주요역할담당자에대해서는징역 8년부터 3년 6개월의실형이확정되었다. 진상규명 5 18 광주에대해피해당사자와국민이요구한것은민간인살상과내란행위에대한총체적인진실규명이었다. 먼저피해자와광주지역민주화단체들에의해피해사례가수집되었다. 이러한노력에의해, 5 18민주화운동의전과정이 1985년 죽음을넘어, 시대의어둠을넘어 4 에서드러났으며, 주요참여자들의증언이 1990년에이르러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 5 으로모아졌다. 제도적차원에서진실규명은정치권과사법기관에서이루어졌다. 국회는 1988년 5 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 이하광주특위 ) 를구성하고, TV에서생중계된청문회를통해상당량의새로운자료를확보하고증인조사를마쳤다. 그중에는군의작전일지와군부측증언도포함되었다. 그러나광주특위는정부와군부요직을장악하고있던세력들의방해와정치적공방의와중에진실에관한주장이난무했을뿐, 종합적인보고서제출에는실패했다. 그러나검찰은 1994년부터 5 18책임자들에대한수사와심문을통해구체적인진실에접근하게되었다. 검찰수사는처음에불기소를전제로했기때문에제한되었었지만 5 18특별법제정이후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1톤이넘는분량의자료를확보하고주요한증인을모두심문했으며, 피해자조사도광범위하게이루어졌다. 재판과정에서이루어진진실규명작업의한계는세가지로정리될수있었다. 첫째는피고인측에충분한시간이주어져, 주요증거를조직적으로파기 훼손하고, 증거를조작할수있었다는것이며, 둘째는진실규명이법정에올라온개별사안별로다루어졌기때문에총체적진상이밝혀지기어려웠다는것이며, 세번째로는가해자의범죄에집중했기때문에피해자의피해규모나피해정도에 4 이책은소설가황석영의기록으로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편했다. 5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가펴낸이기록물에는직접참여자및피해자 500여명의생생한증언과전사황, 관련자료들이망라되어있다.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19 대한충분한조사는별도로진행될수밖에없었다는것이다 ( 한인섭 2002: 212). 그러나검찰조사와법원판결을통해진실의대강은밝혀졌고, 무엇보다도주목할만한성과는 5 18의성격이 광주 전남일원의폭동 에서 민주화운동 으로승격되었다는점이다. 광주의시민단체와, 검찰, 법원의노력이합쳐져새로운사실들이발굴되었고, 일부는재판자료로사용되었으며, 수집된수많은구술자료와서류들은학계의연구에활용되었다. (2) 5 18민주화운동관련자에대한피해보상과명예회복 5 18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 제정노태우대통령이당선직후만들었던 민주화합추진위원회 는책임자처벌과진상규명은 국민화합 을저해한다며, 피해자보상을정부에건의하였다 ( 신일섭 2005: 178). 1990년 3당합당이후, 국회의석의압도적우위를차지하게된민주자유당은야당과의협상을포기하고, 5 18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 ( 이하 5 18보상법 ) 을통과시켰다. 희생자들과사회단체들은이법을희생자와유가족을돈으로매수하는정책이라고비난했지만, 여 야정당은보상의적용대상범위를확대하는방향에서이법을수차례개정하였으며, 정부로하여금 5.18민주화운동관련희생자에대한피해보상을실시하도록했다. 1990년제정된 5 18보상법에서는광주민주화운동으로인한사망자, 행방불명자, 상이자와그유족에대해국가가명예를회복시켜주고실질적인보상을하기로하였다. 5 18을폭동가아니라민주화운동으로규정하고피해자에게위로금이아니라보상금을지급한다는것이었다 ( 신일섭 2005: 184-187). 이법은국무총리산하에 5 18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지원위원회( 이하보상지원위원회 ) 를설치하도록하였고, 그역할로서관련자와그유족의보상등에관한지원, 관련자의명예회복을위하여필요한조치, 관련자또는그유족을지원하기위한성금의모금및관리, 관련자또는그유족의보상등에관한재원대책의마련, 5 18민주화운동과관련된사업의지원등을규정하였다. 여기서주목해야하는것은 5 18보상법이이특별법의체계안에서보상이이루어지도록고안되었다는것이다. 보상지원위원회가정부의보상금뿐만아니라성금이나다른방식으로마련되는재원을통해자체적으로보상을지급할수있도록규정한것이다. 특별법으로보상을할수있도록한법체계는이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 과같은다른과거청산사안에도적용되었다. 또한이법은광주광역시에 5 18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심의위원회( 보상심의위원회 ) 를설치하도록하였고, 그역할로서관련자또는그유족에해당하는지에대한심사 결정, 관련상이자의장해등급판정, 관련자또는그유족의보상금등의심의 결정및지급등을규정하였다.

2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피해보상 표 2 보상추진상황 (1 차 ~5 차 ) 총계 사망 행불 상이 기타 ( 연행 / 구금 / 수형포함 ) 1차 ( 90) 2차 ( 93) 3차 ( 98) 4차 ( 00) 5차 ( 04) 총계 인원 2,224 1,843 470 469 54 보상액 142,792 39,226 28,047 18,304 13,684 242,053 인원 154 - - - - 보상액 17,042 - - - - 17,042 인원 38 9 17 6-70 보상액 4,914 1,129 2,208 797-9,048 인원 1,971 765 222 235 15 3,208 보상액 120,332 28,410 12,798 10,848 387 172,775 인원 61 1,069 231 228 39 1,628 보상액 504 9,687 13,041 6,659 976 30,867 출처 : 5 18 기념재단, http://www.518.org/ease/menu.es?mid=a10304010000_ 검색일 2016.10.28. < 표 2> 는 1990년부터 2004년까지총 5차에걸친 5 18 민주화운동관련피해보상의추진현황을보여주고있다. 전체적으로사망 154명에대해총 17,042백만원, 행방불명자 70명에대해 9,048 백만원, 상이자 3,208명에게 172,775백만원, 그리고연행 구금 수형된사람 39명에게 976백만원이지금되었다. 5 18 피해자들은처음에보상신청이썩내키지않았다고한다 ( 한인섭 2002: 220). 진상규명과책임자처벌이보장되지않은상태에서오직보상만을받는것은돈놀음이라는인상이있었다. 처벌대신보상이라면거부하는게마땅하다는입장에서보상신청을거부한사람들도적지않았다. 또한당시노태우대통령이 5 18의책임자였던것도피해자들과유족들이거부감을갖게된이유였다. 김영삼대통령은 1993년취임직후, 각종기념사업및피해자에대한추가보상대책을추진하겠다고약속하였다. 이에따라정부는시행령을개정하여이전에보상받지못했던사상자들과함께당시에연행 구금된사람들에게까지보상범위를확대하였다. 이에따라 1,843명이보상을받았으며, 해방불명자 9인에대해서 1,129백만원, 상이자 765명에게 28,410백만원이지급되었다. 1차보상시에인정되지않았던구속기소자와연행훈방자등 1069명에대해서도보상금이지급되었다. 5 18보상법은김대중정부에서또다시개정되어 3차보상신청을받았다. 이에따라사망자 11 인, 행방불명자 17명, 그리고상이자 222명이새롭게보상대상자로추가되었다. 새롭게개정된보상법은 5 18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광주이외의지역에서수감된사람들을처음으로보상대상에포함하였다. 이중에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 그리고전국각처에서 5 18 이전에민주화운동을하다가처벌된인사, 5 18 이후광주의진상을알리다가연행구금된인사들이포함되었다. 그러나 3차보상의심사과정에서가까운사람들과서로맞보증을서거나허위진단서를첨부하는수법으로보상을신청해서거금을타낸, 소위 가짜 5 18보상금 사건이발생하여, 법의허점과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21 도덕적해이양상을드러냈다 ( 이희성 2005: 193) 1995년제정된 5 18특별법에는 광주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지급된보상은배상으로본다 는규정이포함되었다 ( 한인섭 2002: 221). 이를통해광주의보상은배상으로재정의되었으며, 국가의불법행위가분명히선언되었다. 따라서 5 18과관련된제반행위들이이법의취지에따라배상범위에포함되었다. 5 18보상법에따른보상작업의성과로는첫째, 5 18특별법에따른책임자처벌과정에서는파악하기힘들었던피해규모, 피해자의수를정확하게파악할수있게되었다는것이다. 둘째, 피해보상의문제가처음에는위로금으로대충떼워지려했으나, 국가보상법에따른보상으로정식화되었고, 최종적으로는국가배상으로재정의됨으로써지급되는금전의법적성격도바로잡혔다. 셋째로주목할것은 5 18보상법이국가폭력으로인한피해에대한보상의성격만이아니라 5 18을전후로전개된민주화운동이라는적극적행위를탄압한것에대한배상의성격을담고있어, 김대중정부에서시행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 의입법에영향을미쳤다. 명예회복 5 18민주화운동관련법률및재판은그동안전도된가해자와피해자의명예를바로잡았다. 항쟁당시그들의행위는더이상 폭동 이아니며, 헌정을수호한정당한행위 로평가되었고, 대신에법정에선피고인들은헌정을파괴한군사반란과내란및살인을범한범죄자로서판결되었다. 또한 5 18특별법제4조에따라 5 18민주화운동과관련된행위또는헌정질서파괴의범행을저지하거나반대한행위로유죄의확정판결을선고받은자 는다시재심을청구할수있게되었다 ( 한인섭 2002: 224). 군부지도자들이내란죄및내란목적살인죄로기소됨에따라 1980년에내란, 살인, 소요등의혐의로유죄판결을받은광주시민들에게재심판결이불가피하게되었고, 5 18특별법은특별재심규정을두어기존의확정판결자체가정식형사소송절차에의해파기되고, 종국적으로무죄판결이가능하도록했다. 이러한특별재심은 1988년부터개별적청구를진행되었고, 재심결과는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비롯해대부분무죄판결이었다 ( 한인섭 2002: 225). 김대중정부에서는 2002년 1월, 광주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사망하거나행방불명된자또는상이를입은자와그유족에대해교육지원 취업지원 의료지원등을실시하도록함으로써그희생에상응하는예우와지원을행하려는취지에서 5 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 이하 5 18유공자법 ) 을제정하여 2002년 7월부터시행하였다. 5 18유공자법은 5 18보상법에의해 5 18민주화운동관련자로인정을받은사람들에게국가유공자자격을주는명예회복정책이었다. 이법에따라 5 18민주화운동사망자의자녀에게교육지원및취업지원이이루어졌고, 부상자에게는의료지원, 그리고유족들에게는농토구입대부 주택대부등대부혜택이주어졌다. 나아가 5 18유공자가사망

2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하면그업적을기리기위해국립5 18묘지에안장되었다. 그러나 5 18민주화운동관련자들이다른국가유공자에비해월등하게우대를받아국민통합을해친다는우려가있었다. 실제로당시상이군경등은다같이국가를위해희생했는데정치적이유로 5 18민주화운동관련자가더나은보상이나처우를받는다고불만을표시하기도했다 ( 이희성 2009: 60). 정신계승및기념사업 5 18민주화운동에대한정신계승운동은광범위하고도지속적으로전개되었다. 1980년대초 5 18에대한기념은그자체가반군부투쟁이었다 ( 한인섭 2002: 228). 매년 5 18을전후해서광주거리에는긴장이감돌았고, 유족들은망월동묘지에서기념식을가지려했으나추모식은봉쇄당했다. 그러나 1980년대중반부터 5월 18일의망월동은거대한추모인파로뒤덮혔고추모행사이후대규모거리행진이진행되었고통상경찰의과격진압이이어졌다. 광주뿐만아니라전국각처에서추모식과가두시위가갈수록더욱강화되었고, 5월 18일은민주화투쟁의중심적인날짜로자리잡혔다. 1987년이후권력에의한탄압이사라지면서기념행사는제도화되었고의례화된모습을띠었다. 기념행사는방송매체에의해중개되기도했고, 5 18 광주의진실을알리는 TV 다큐멘터리는진실을잘알지못했던일반대중에게엄청난충격을주었다. 5 18 광주를소재로하는영화도수편제작되었다. 피해자의증언을채록하기위한기록사업이진행되어책자로출간되었고, 6 영상기록물작업도진행되었다. 7 1995년 5 18특별법이후정신계승운동은반정부적인집회시위대신문화예술행사및공식적인추모의례위주로변했다. 국가예산의지원을받아광주시산하에기념사업및기록사업이진행되었다. 1997년김대중정부가들어서면서부터 5 18민주화운동은국가기념일로공식지정되었다. 희생자들의묘지는망월동에서이장되어 5 18기념묘지로성역화되었고, 광주항쟁당시계엄군이주둔했던상무대는 5 18기념공원으로조성되었다. 5 18민주화운동에대한이러한기념사업은다른과거사의기념사업의전례를제공한다. 이렇듯제도화된광주의기념사업에대해몇가지비판점이제기되기도한다. 하나는관주도로진행되면서 대량희생 은부각되지만 항쟁의저항성 은거세되고있다는것이며, 다른하나는 5 18 묘지가현충원을모방하는등 국가주의적 성향이나타났다는것이다 ( 한인섭 2002: 230). 그러나무엇보다도정부기관이나서서 5 18 민주화운동의정신계승을훼손시키려한다는불신이확산되고있는점이더큰문제다. 박근혜정부에서국가보훈처가 5 18 민주화운동기념식에서제창되었던 님을위한행진곡 을합창으로바꾸면서논란이야기되었고, 피해유족들과관련단체들은기념식을따로치루고있다. 6 이자료집에는광주항재의참여자및피해자 500 여명의증언이기록되어있다 (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1990). 7 영상작업은 5 18 영상기록특별위원회의주도하에항쟁전후의증언을영상채록했다.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23 (3) 소결 : 성과와한계 5 18 광주에대한과거청산작업은진실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피해배상및정신계승이라는과거청산의주요요소들을모두갖추고있었다. 특히, 책임자처벌이라는사법적정의가중요하게다루어졌다는점에서과거청산의다른사안들과달랐다. 남미나남아공의경우, 사법적처벌이어려워진상규명및화해중심의과거청산작업이이루어지는것이일반적이었는데, 한국의경우 5 18 광주의과거청산은책임자처벌을중요하게다루었다. 광주학살에대한사법적처벌이가능했던것은국민여론이그만큼드높았기때문이다. 1987년민주화투쟁의직접적대상이국민의민주화요구를총칼로억누르고등장한제5공화국의권위주의통치였기때문에, 민주헌정질서를파괴하고무고한광주시민을학살한책임자에대한처벌은민주화이행기에국민적요구였다. 5 18에대한책임자처벌이가능했던또다른이유는역설적이게도김영삼의군부세력과의타협이오히려군부에대한역습의계기를마련할수있었기때문이다. 1990년에이루어진 3당합당 을통해노태우에서김영삼으로대통령직이이동할시점에, 군부세력은자신의연속선상에있던후임정권이전임정권의핵심인물을재판정에세우리라고예상하지못했다. 따라서라틴아메리카국가들에서처럼퇴임후를대비한포괄적자기사면법 (blanket self-amnesty law) 을제정할생각을하지않았고, 했더라도입법화할만한정치적다수를확보할수없었다. 여기에김영삼정부가 하나회척결 을통해문민통제에성공할수있었던것도크게작용했다. 그러나 5 18 과거청산에서이루어진책임자처벌은부분적이고상징적이었을뿐 31년간을집권을통해뿌리내린권위주의세력의정치적토대는여전히남아있었다. 특히권위주의잔존세력은민주화이후부상한지역주의정치구도에서정치적인힘을온존시킬수있었다. 따라서 3당합당으로고립된호남의맹주, 김대중은집권과정에서충청과영남의지지를얻기위해김종필과연합했다. DJP 연합을통해당선된김대중후보는 1997년대선과정에서전두환 노태우등 5 18 책임자들에대한사면을공약했고, 당선인으로서김영삼대통령에게사면을건의하는형식을취해이들의사면 복권을주도했다. 5 18에대한과거청산에서문제점으로지적될수있는것중하나는국가적차원의진상규명이부족했다는것이다. 국회청문회와재판과정에서법적절차에따른진상규명이어느정도이루어졌지만, 국가가책임을인정하는차원에서의적극적인진상규명은이루어지지않았다. 재판을통한진상규명은피고인측이시간을두고증거를조직적으로파기하고조작할수있었으며, 개별사안별로다루어졌기때문에총체적인진상을밝히기힘들었으며, 특히, 가해자의범죄에집중했기때문에피해자의피해에대한조사는보상을위한조사차원에서만이루어졌다. 5 18 희생자와피해자에대한진상규명이보상차원에서만이루어졌다는것은병사들의살상행위에대한책임문제가회피되었던것과연결된다. 상급자의명령에따른병사들의행위를처벌하지는않더라도, 예외적으로잔혹한살상행위를저지른자에대한책임추궁은필요했다. 병사에대한

2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책임추궁은처벌을목적으로하기보다는군에서발생할수있는인권침해가상급자의명령이면면책될수있다는인식을막고유사사건에대한재발방지를위해필요한조치였다. 결과적으로 5 18 민주화운동에대한과거청산작업은진상규명과책임규명이제대로이루어지지않은가운데보상과명예회복에치중함으로써정치권의호남민심다래기에급급했다는비판을면할수없었다. 3) 민주화운동에대한과거청산사업 김대중정부에서는권위주의통치에항거했던민주화운동에대한명예회복과정신계승사업이추진되었다. 정부는민주화운동관련자에대한명예회복과보상사업을실시하였고, 기념재단을설립하여민주화운동에대한정신계승과기념사업을추진하였다. 이절에서는이와관련한법률의제정과정, 법률에서나타난사업의특징, 그리고관련기관의활동을살펴본다. (1) 민주화보상법의제정과정과쟁점김대중정부의출범을전후해서, 민주화운동관련희생자와그유족에대해명예회복과보상등의예우를해주어야한다는주장이본격적으로제기되었다 ( 민주화운동백서 _ 위원회편 2016: 11-12). 1998년 3월 6일, 민주화운동과민족민주열사희생자명예회복에대한 1차학술세미나 가개최된것을시작으로민주화운동관련명예회복과의문사진상규명을위한학술세미나들이연이어열렸다. 이어 1998년 11월 4일에는 민족민주열사명예회복과의문의죽음진상규명특별법제정을위한국회앞천막농성 이시작하여 1999년 12월 30일까지 422일간지속되었다. 이런가운데당시여 야국회의원들은민주화운동관련자들에대한명예회복과보상에관한입법을추진하기시작하였다. 법률안을놓고유가족등관련단체와정부, 여 야정당사이에논란이있었는데, 쟁점은민주화운동의정의, 대상시기, 구제대상및방법등이었다. 한나라당의안은민주화운동을 비민주적군사정권에대한저항과관련한행위 로규정하고, 자유민주적기본질서를부정하거나북한과관련된행위 는민주화운동으로간주하지않음을분명히했다. 이에따르면국가보안법위반자들은대상에서제외될수있었다. 이에대해새정치국민회의의안은 권위주의적통치에항거하여민주헌정질서의확립에기여하고국민의자유와권리를회복 신장시킨활동 으로보다포괄적으로규정하였다. 둘째, 대상시기와관련해서한나라당의안은 1972년 10월 17일 (10월유신 ) 부터 1987년 6월29 일 (6.29선언) 로한정한데반해, 새정치국민회의안은기간을특정하지않았다. 한나라당은시기를제4공화국과제5공화국, 즉민주화이전시기에서도가장억압적인권위주의시기로한정했지만, 새정치국민회의는시기를특정하지않은것이다. 그러나여 야협상과정에서시작시점은박정희집권이후첫대규모항거였던 1964년한일협정반대시위의시점으로결정되었다. 그러나끝나는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25 시점을특정하지않아이후집행과정에서논란이일어난경우가있었다. 셋째, 명예회복과보상의적용대상과방법에관해서도한나라당의안은 민주화운동을이유로유죄의확정판결을받은자, 해직또는학사징계를당한자, 고문등을받아사망하거나신체적 정신적피해를입은자 로하고, 이들에대하여서훈, 불이익행위의금지, 생활지원금및의료보조금등을지급하도록하였다. 이에대해, 새정치국민회의의안은 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사망하거나행방불명된자, 상이를입은자, 질병을앓은자, 특별재심으로무죄의확정판결을받은자 를명예회복과보상대상으로하였다. 민주화운동을이유로유죄판결을선고받은자는특별재심을청구할수있게하고, 재심에서무죄로판결되면민주화운동관련자가되는것으로고안된것이다. 한나라당의안에는서훈이라는형태의명예회복이강조되었는데반해, 새정치국민회의의안에는국가배상의개념이뚜렷했고, 정신계승을위한기념사업이포함되었다. 이법의소관위원회였던행정자치위원회는 1999년 12월, 한나라당안과새정치국민회의안을조정하여위원회대안을만들어본회의에제출했고, 이어본회의에서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안 ( 이하민주화보상법 ) 을의결하였다. 이에따라민주화보상법은다음해인 2000년 1월, 공포되었고 5월부터시행되었다. (2) 민주화보상법의특징민주화보상법은 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희생된자와그유족에대하여국가가명예회복및보상을행함으로써이들의생활안정과복지향상을도모하고, 민주주의의발전과국민화합에기여함 ( 제1 조 ) 을목적으로하였다. 명예회복과보상의대상은 1964년 3월 24일이후자유민주적기본질서를문란하게하고헌법에보장된국민의기본권을침해한권위주의통치에항거하여헌법이지향하는이념및가치의실현과민주헌정질서의확립에기여하고국민의자유와권리를회복 신장시킨활동 ( 제2조제1항 ) 과관련하여 사망하거나행방불명된사람, 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상이를입은사람, 민주화운동으로인해대통령령으로정하는질병을앓거나그후유증으로사망한것으로인정되는사람, 그리고민주화운동을이유로유죄판결을받거나해직되거나학사징계를받은사람 ( 제2 조제2항 ) 이었다. 그리고이법에따른관련자및그유족에대한명예회복과보상금등을심의 결정하기위해국무총리소속으로민주화운동관련자며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 이하민주화보상위원회 ) 를두었다. 민주화보상법의특징중하나는 5 18보상법과마찬가지로이특별법체계내에서보상을지급하도록되어있다는것이다. 따라서보상의주체는행정안전부와같은정부의다른기관이아니라이법에따라설치된민주화보상위원회였다. 이는 5 18보상법이라는과거청산의전례를준용한것이었다. 민주화보상법은또한 5 18보상법보다그대상범위가훨씬넓었다. 5 18민주화보상법의대상이 1980년광주민주화운동기간에집중되어있는반면, 민주화보상법은 1964년부터민주화이행

2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기까지를포괄하고있었다. 다음으로민주화보상법에서주목할만한것은이법이민주화운동이라는 능동적행위 에대해서보상을하고있다는점이다. 이는국가폭력이나인권침해에대한 피해 를정책대상으로하는 5 18 보상법이나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과는성격이다름을의미한다. 다시말해, 민주화보상법은 권위주의통치에항거하여헌법이지향하는이념및가치의실현과민주헌정질서의확립에기여하고국민의자유와권리를회복 신장시킨활동 이권위주의정권에서는사망 행방불명 상이 유죄판결 해직 학사징계등의박해를받았는데이를 복권 시킨다는정신을가지고있었다. 몇몇헌법학자들에따르면 ( 강경선 2003; 이윤환 2007), 권위주의통치에항거한민주화운동에보상하는이법은 헌법상명문규정이없는저항권을법률적차원에서공식화시킨의미를가진다. 즉, 저항권을행사한사람에대한명예회복과정당하게저항권을행사했음도불구하고인신구속등의피해를입은것에대한보상을의미한다. 따라서민주화보상법은권위주의정권의헌정질서파괴행위에맞섰던민주화운동의정당성에대한법적근거를마련했다고볼수있다. 8 (3) 민주화보상위원회의활동 민주화보상위원회의구성민주화보상위원회는대통령지명 3인과국회의장추천 3인, 그리고대법원장추천 3인의위원으로구성되었다. 위원은모두비상임이었고활동을지원하기위해지원단을두었다. 위원들은대체로법조계, 학계, 시민사회단체인사들로구성되었다 ( 민주화운동백서 _ 위원회편, 표6 참조 ). 지원단의직원은관계중앙행정기관또는지방자치단체에서파견한공무원과전문가들중임기제로고용한직원으로구성되었다. 민주화보상법시행령에따라민주화보상위원회는산하에 관련자및유족여부심사분과위원회, 장해등급판정분과위원회, 명예회복추진분과위원회, 생활지원금지급심사분과위원회, 그리고 국가기념사업및추모사업지원분과위원회 를두었다. 입증 조사민주화보상위원회의주요활동은민주화운동관련자의입증과조사, 그리고이들에대한권익구제였다. 민주화보상법에의하면기본적으로신청인이민주화운동과관련한피해를입증하도록되어있었다. 다만, 신청인의입증이부족한경우민주화보상위원회는직권으로조사를행할수있었다. 그러나위원회의자체보고서에따르면 ( 민주화운동백서 _ 위원회편 2016: 28), 시간이많이지난사건의경우행정기관의문서, 병원진료기록또는회사근무기록및증언을해줄참고인을찾기가힘들어, 신청인이민주화운동관련사실을입증하기가어려웠다고한다. 이런경우직권조사가필요 8 이와유사한내용을가진법률로는후기동독에서정치적이유로구속되거나선고를받고재산몰수, 국회추방등의부당한대우를받은희생자들을복권시키고가능한재정적보상을하였던독일의 복권법 을들수있다 ( 이희성 2009).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27 했으나조사인력과조사권한의한계로인해직권조사는제한적이었다. 심의의결민주화보상위원회의가장중요한기능은신청접수된사건에대한심의의결이다. 위원회에신청된민주화운동에대한권익구제의유형은 보상 과 명예회복 으로구분된다. 보상에는 사망 과 상이 가있었고, 명예회복에는 유죄판결, 해직, 학사징계 가포함되었다. 위원회는접수된사건에대한입증 조사자료를검토해신청된권익구제의인정여부를결정한다. 구분 표 3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심의 의결현황 (2015. 12 월말기준 ) 계 보상신청건 소계사망상이소계 명예회복신청건 접수 13369 1761 352 1409 11608 9380 3184 598 심의 (99.4%) 13289 1731 337 1394 11558 7794 3172 592 인정 (73.6%) 9840 826 135 691 9014 6394 2300 320 기각 (25.8%) 3449 905 202 703 2544 1400 872 272 취하건수 (0.6%) 80 30 15 15 50 32 12 6 * 출처 :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 2016, 4 장의표 1. 유죄판결 해직 학사징계 2000년 8월, 민주화보상위원회가설치된이후신청사건은총 5차계에걸쳐총 13,369건이었으며, 신청접수되어민주화운동으로인정된건수는 9,840건이었다. 접수건중 73.6% 가인정되었고, 25.8% 가불인정되었다. 이중사망과상이로인한보상건수는 826건이었고, 대부분이명예회복으로 9014건이었다. 사건분야 피해사건수 인정건수 구호및지향 합계 17811 12219 반독재운동 9842 6979 독재정권반대, 직선제쟁취등 학원자율화 - 교육민주화 표 4 사건분야별분포 (2015 년 12 월말기준 ) 2356 2126 정권통제로부터의자율 ( 교련반대, 학원사찰규탄 ), 참교육 ( 전교조등 ) 학내민주화 144 29 사학민주화, 총장직선제등 노동운동 3233 2247 민주노조결성, 노동3권보장, 노동법개정투쟁등 농민운동 168 87 수입개방반대, 생존권수호 언론출판운동 783 420 언론민주화, 출판의자유 문화예술운동 39 30 독재비판문학, 민중미술등 반외세 자주 164 119 한일회담반대, 반제국주의, 미군철수 통일운동 529 144 남북민간교류, 통일 사회권운동 67 13 철거반대, 노점상투쟁등

2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사건분야 피해사건수 인정건수 구호및지향 진보정치운동 161 25 사민청, 노동자정치연대 기타 216 0 불인정사건들 * 출처 :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 2016, 5장의표7. 민주화보상위원회에신청된피해사건별건수는 17,811건이었다. 9 이중 68.6% 인 12,219건이민주화운동으로인정되었다. 인정된건수중반독재운동이 6,979건으로 57.1% 를차지했다. 민주화보상법에서규정한것처럼민주화운동의주된형태가권위주의통치에항거하는것이었기때문이다. 학원자율화와관련한인정건수도 17.4% 로적지않았는데, 권위주의정권들의학원통제가그만큼심했음을말해주고있다. 그리고위원회는노동운동이나농민운동도민주화운동으로인정하였는데이는이러한운동이노동3권등기본권을억압한권위주의통치에저항한측면이강했기때문이다. 이밖에도언론과사상및표현의자유에대한억압에항거했던언론출판운동과문화예술운동도민주화운동에포함되었다. 여기에반외세자주화운동과통일운동도반공독재체제로인해지속 강화된예속과분단을극복하고자한운동이었다는점에서민주화운동으로인정되었다. 심의 의결과정의논란민주화보상위원회에서는심의 의결과정에서법적용의구체적인대상과관련해서논란이있었다. 먼저, 대상시기와관련해서권위주의통치의종료시점을정하지않아이를언제까지로규정할것인지가쟁점이되었다. 민주화보상법에는항거의대상을 권위주의적정권 으로하지않고 권위주의적통치 로규정하고있기때문에 권위주의통치의잔재가일부남아있었다고볼수있는김영삼정부시기에도법적용을할수있다 는해석이가능했다 (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 2016: 24; 김영수 2008:13). 그리하여위원회는김영삼정부하에서권위주의적통치에항거했다고신청한사건 1320건중 333건을인정했고, 심지어김대중정부에서일어난신청사건중에 11건을인정했다. 보다심각한쟁점은폭력행위가불거지거나급진적이념이앞세워진사건에대한민주화운동의인정여부였다. 이들행위가기본권을침해한권위주의통치에항거했던점은인정되나헌법이지향하는이념및가치실현에위배된다고볼수있기때문이다. 그러나민주화보상위원회는시위과정에화염병이사용되는등폭력이두드러진사건이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 이하남민전 ) 과같이지도부가북한과연계된사건혹은 사회주의노동자연맹 ( 이하사노맹 ) 과같이사회주의국가건설을목표로내세운조직사건의경우에도부분적으로민주화운동으로인정하였다. 9 여기서집계된피해사건수 17811건이라는수치는위원회에명예회복과보상을기준으로신청된건수에관한공식통계수치인 13369건보다크다. 이는 13369건에서는한사람이여러번유죄판결을받은경우에도 1건이신청접수된것으로집계되었지만, 17811건에서는한사람이여러번유죄판결을받은경우나또는다른시기에상이를당한경우를별도의헝거행위또는피해사건으로산정했기때문이다 (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 2016: 5장주8 참조 ).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29 민주화보상위원회에서오랫동안근무한한전문위원은당시위원회의결정에대해다음과같이 증언한다. 관련법을면밀히들여다보면알수있듯이, 민주화운동관련자인정에는자유와기본권억압성의정도가얼마나컸는지가중요한기준으로작용했다. 폭력행위나급진적이념도권위통치에저항을하다보니어쩔수없이나타난측면이강했다. 물리적탄압의정도가심했기때문에화염병등도어쩔수없이사용하게된것으로인식되었고, NL PD와같은급진적이념도사상의자유에대한억압의정도가심해서나타나게된측면이있었다고이해되었다. ( 전민주화보상위원회대표전문위원송병헌의인터뷰에서, 2016. 10. 18.) 이러한원칙이대체로공유되고있었기때문에위원회는크고작은국가보안법사건들을대체로민주화운동으로인정하였다. 민주화보상위원회심의사건중가장큰사회적논란을일으켰던사건은경찰진압과정에서학생이던진화염병으로인한화재로 7명의경찰이사망한 부산동의대사건 이었다. 2002년 4월, 위원회는노태우정부의공안정국하에경찰의물리적탄압에항거해비롯된사건이라는이유로 52건에대해민주화운동관련성을인정하였다. 그러자사망한경찰의유가족과경찰의항의가빗발쳤다. 보수언론에서도 시너뿌리고불질렀는데민주화운동 이라는제하의기사에서위원회의이결정을맹비난했고, 위원회는 3명의심의위원이사퇴하는내홍을겪었다. 결국, 위원회는이명박정부에들어서이사건과관련한잔여건 13건에대해불인정을결정했다. 이결정의후폭풍으로민주화보상위원회는비교적초기부터대외홍보활동이위축되는분위기였다 ( 전민주화보상위원회대표전문위원송병헌의인터뷰에서, 2016. 10. 18.). 보상과명예회복민주화운동관련자로인정된경우, 권익구제에는명예회복과보상금, 생활지원금, 의료지원금의지급이있었다. 또한민주화보상위원회는민주화운동을이유로유죄판결 해직또는학사징계를받은자의명예회복을실질적으로보장하기위한조치로특별사면 복권의건의, 전과기록말소, 복직의권고, 학생징계기록말소등을권고하였다. 그러나기소유예, 수배, 구금, 취업제한, 재산상피해등기타피해는증빙자료가없거나찾기힘들다는이유로권익구제의적용대상에서배제되었다. 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사망한자에대해서는사망보상금을지급하고, 상이를입은자에대해서는장애보상금, 휴업보상금및의료지원금을지급한다. 또한민주화운동을이유로 30일이상구금된자, 민주화운동과관련해서상이를입은자로서민주화보상법제7조제1항제2호나목의규정에따른보상을받지못한자및재직기간 1년이상인해직자에게는생활지원금을지급했다. 그러나생활지원금지급은민주화운동으로인해생활이어려운사람을지원하는개념이었기때문에공무원이나공공기관의일정한직급재직자의소득이일정한수준을넘는사람에게는생활지원금을지급하지않았다.

3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기념사업민주화보상법은입법과정에서새정치국민회의안을받아들여민주화운동에대한기념사업을포함하고있었다 ( 제22조 ). 민주화보상위원회는자체기념사업으로민주화운동관련자로인정된사망자에대하여이들을추모하고정신을계승하는사업의일환으로경기도이천지역에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조성사업을추진하여 2016년 6월 9일개원하였다. 그러나민주화운동에대한기념사업은김대중정부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에따라본격적으로실행되었다. 2001년 6월 28일에국회에서통과된이법에따르면, 민 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이하기념사업회 ) 는민주화보상법에규정하고있는민주화운동과관련하여민주화운동기념관의건립과운영, 역사정리를위한사료수집 보존 전산화 관리 전시 홍보 조사 연구, 민주화운동의유적을보존 관리 조사 홍보및연구, 민주화운동의기념및계승을위한사업및행사, 그리고민주발전을위한지원사업등을실행하는것으로규정하고있다. 이에따라기념사업회는 2001년 11월 12일출범한이래, 민주화운동과관련된문건, 사진, 영상, 박물관의사료를수집하였고, 민주화운동사건과인물에대한구술채록을실시했으며, 수집된자료의데이터베이스를구축했다. 기념사업으로는기념행사와추모행사를개최 지원하고, 민주화운동관련한문화프로그램을제작 보급하며, 민주화운동기념단체들과의협력사업을수행해왔다. 또한민주시민교육을위한조사연구, 교육자료개발및연수프로그램을제공하고, 자체연구소를두고한국민주화운동의조사연구, 민주주의발전을위한연구, 관련학술지발간, 국제교류및협력사업을수행하고있다. (4) 소결민주화운동과관련한과거청산사업은권위주의통치에항거한민주화운동관련자의명예를회복하고그들의피해를보상하는사업이었다. 이는권위주의통치시기에법적처벌의대상이었던민주화운동을복권시키는성격을지닌다. 따라서이사업은민주헌정질서의파괴행위에대한국민의저항권을법률적차원에서공식화시킨데커다란의의가있고, 이런점에서우리나라민주주의공고화의기초를다지는역할을했다고볼수있다. 민주화운동의명예회복사업은권위주의통치에대한항거라는 능동적인행위 에대한명예회복과보상의성격을지니고있었다. 이점에서이사업은은폐되고조작된사실을밝히는진상규명중심의사업과는성격이달랐다. 또한이사업은대상시기가길었고사업의규모도컸던만큼김대중정부하에서는가장주목되는과거청산사업이었다. 이때문에우리나라의과거청산사업이진실규명없이보상위주로이루어진다는비판이제기되기도했다. 그러나이사업은권위주의적통치에대한저항권을국가가공식적으로인정했다는점뿐만아니라, 별도의법률을제정하고기구를두어민주화운동의정신계승사업을활발하게추진했다는점에서도우리나라민주주의의공고화에중요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31 한의의를지닌다. 권위주의통치에저항한운동의복권과정신계승사업은다른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사례를찾아보기힘들만큼독보적이기도하다. 민주화운동관련자의명예회복및보상사업의문제점으로흔히지목되는것은명예회복의적용대상이지나치게제한적이었다는것이다. 유죄판결 해직또는학사징계만명예회복의적용대상이었고, 기소유예, 수배, 구금, 취업제한, 재산상피해등은대상에서제외되었다. 권위주의통치하에서민주화운동가들은공안기관으로부터수배되어길게는수년씩은신해야하는경우가자주있었으며, 불법연행되어강제로구금되었다가훈방되는경우도비일비재하였다. 그러나증빙자료가없거나찾기힘들다는이유로주요한피해사례가권익구제의적용대상에서배제되었다. 또다른문제는법의적용대상인민주화운동에대한내용적정의가명확하지않이논란이되었던점이다. 당시한나라당을중심으로보수진영에서는자유민주주의체제의헌정질서를부정하고파괴하는행위에대해서는민주화운동으로간주할수없다고주장하여, 친북성향의활동뿐만아니라사회주의적이념성향의운동을배제하고자했다. 그러나민주화보상위원회는국가보안법으로처벌받았던사건들중상당부분이공안당국의의해조작되었기때문에이들을가려내민주화운동으로인정했다. 나아가위원회는정부의자유와기본권에대한억압성을중요하게보았기때문에그로부터발생하는어느정도의폭력행위나이념적급진성을불가피했던것으로보았다. 그러나국민의법감정과거리가먼결정을내림으로써여론의공격을받아위원회의활동을위축시키는결과를가져오기도했다. 마지막으로보아야할것은민주주의공고화를위한이사업의대국민홍보활동및교육사업이다. 민주화보상위원회가민주화운동에대한심의결정을국민에게알리고민주의식을고양시키는활동은활발하지못했다. 위원회의최근사업중하나였던 민주공원 조성이대국민홍보및교육활동을위한성과라고할수있다. 그러나민주화운동에대한정신계승사업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가별도로설치되어실행되었다. 기념사업회는과거민주화운동에대한자료수집과보존, 연구 출판활동을수행했고, 기억투쟁을위한다양한문화프로그램을제작해왔다. 그러나이러한활동들이일반시민들의민주의식함양에얼마나기여하는지는미지수다. 오히려최근기념사업회는민주시민교육에대한조사작업을진행하고, 지방교육청및다른교육연구기관과논의를진행하고있어주목된다. 4)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의과거청산사업 노무현정부에서시작된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이하진화위 ) 의과거청산작업은앞의두사례와달리진실규명에초점을두었다. 이는일제강점기의독립운동,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 그리고군사독재정권하에자행된인권침해사안을하나의위원회틀에서체계적으로다룬

3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과거청산사업이었다. 진화위의사업은권위주의통치시기에인정받지못했던독립운동, 은폐되고왜곡되었던국가폭력과인권침해의진실을밝히고피해자의명예회복과과거와의화해에목적을두었다. 이런점에서이사업은칠레, 아르헨티나, 남아공등의 진실위원회 활동과맥락을같이한다. 이장에서는진화위활동의근간이되는관련법안의성격, 진화위의구성과운영, 그리고사업의성과와한계를살펴보기로한다. (1)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기본법 의결정과정 진화위가발족되기이전까지공권력에의한폭력이나인권침해사건의진상규명작업은사안별로전개되고있었다. 거창양민학살, 제주4 3 사건, 의문사진상규명등이그것이었다. 그러나사안별사업에한계를느끼고있던피해자들과관련단체들은 2004년 8월, 과거사청산을위한시민사회단체연석회 준비모임을발족하였다. 노무현정부도기존의과거사관련위원회활동들을통합할필요를느끼고있었다. 이러한상황에서, 노무현대통령은같은해 8 15 경축사에서 반민족친일행위만이진상규명뿐만아니라과거국가권력이저지른인권침해와불법행위도진상을규명해서다시는그런일이없도록해야한다 고강조하면서, 진실규명중심의포괄적인과거청산사업의구상을밝혔다. 대통령의제안은시민사회로부터커다란반향을불러일으켰으며, 과거청산운동을추진하던피해당사자집단들의입법활동을촉발시켰다. 이과정에서시민단체들은 2004년 11월, 과거청산문제의포괄적해결을위해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원회 ( 이하 범국민위원회 ) 를결성하였다. 범국민위원회는국가기구인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해결하지못한의문사사건과군의문사사건및민간인집단희생사건을통합하는포괄적인과거청산입법을추진하면서과거사관련기본법안을준비하였고, 정치권과연계하여입법활동을전개하였다. 노무현정부의과거청산추진에대해보수진영은부정적인편이었지만정면으로반대하지는못했다. 명분이약했고, 국민여론도이사업에동조적이었기때문이다. 10 그러나보수진영은당시여당인열린우리당이과거사청산과함께국가보안법개폐, 신문사법개정, 사학법개정이라는 4대개혁법안 을년내처리한다는방침을세우자전면적인공세를취했다. 법안의이해당사자인언론과사학은연일노무현정부를비난했고, 극렬보수단체는의문사피해유족들의집회나농성장앞에컨테이너박스를실어다놓고대응집회를갖기도했다. 정부 여당의과거사기본법안에대한보수진영은주로 동행명령권 의남발과 연좌제 가능성을거론했다. 입법안에는인권유린사건관련자들의조사거부를막을수있는방안으로진화위에동행명령에대한형사처벌권을부여했는데, 이는법관의영장으로만인신을구속할수있게규정한헌법 10 당시조사자료에의하면, 국민의 66% 가과거사청산에찬성을표시했다. 이는당시참여정부가주도했던 4대개혁입법사안중가장높은지지였다. 참고로국가보안법개 폐는 32%, 사학법개정은 61%, 그리고신문법개정은 53% 였다 (KSOI, 2004 년 10 월 ~11 월정례조사참조 ).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33 에위배된다는것이었다. 친일행적조사는후손들이미처알지못했던할아버지나아버지의행위때문에기본권과명예를침해당하는 연좌제적 상황을초래할가능성이높아, 이또한연좌제를금지하고있는헌법과위배된다는논리였다. 11 정부 여당의제안에대한한나라당의또다른대응은 친북용공활동 도조사대상에포함시켜야한다는것이었고, 북한 좌익세력의테러도포함하여현대사를학술적으로규명하는 현대사기본법 을제안한것이었다. 여야간에입장차이가선명했지만물밑협상은진행되었고, 2004년 10월, 열린우리당은과거사기본법안을제시했다. 이안에는동행명령거부에대한형사처벌은빠지고과태료만부과하기로했으며, 논란이되었던군의문사사안은과거사사안이아니기때문에별도의입법을통해서다루어져야한다고결론내렸다. 이에대해범국민위원회는즉각성명을내고여당이보수세력의공세에후퇴했다고반발했으며, 진보단체들이가세하여정부를비판하고, 의문사유가족대책위는국회앞에집단농성에돌입했다 ( 김성길 2005). 한나라당내부는의원들마다입장이분분했지만, 원내대표를중심으로협상에임했다. 그러나당시박근혜대표는국회교섭단체연설에서 4대입법이 먹고사는것이나개혁과상관없고분열과후퇴를가져오는좌파적정책 이라고맹비난하면서 4대입법에대한협상움직임에쐐기를박았다 ( 조선일보, 2004년 10월 28일자 ). 보수언론은노무현대통령과집권당이아직도 민주화투쟁을진두진휘하듯... 혁명하는기분으로.. 경제를외면한채, 4대법안을밀어붙이고있다 고비난했다 ( 조선일보, 2004년 11월 8일자 ). 여야간협상이난항에봉착하고과거사정리입법이지연되자, 유족들은집회와농성투쟁에나섰다. 전국유가족협의회, 군의문사유족들이한나라당사앞에서집회를열고, 여의도국회앞에서천막농성을벌였고, 보수단체들도바로옆에컨테이너박스를갖다놓고맞불시위를연일벌였다. 이런상황에서연내입법은실현되지못했으나, 여 야는해를넘겨 5월임시국회에서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을통과시켰다. (2) 과거사기본법의주요내용 과거사기본법은 항일독립운동, 반민주적또는반인권적행위에의한인권유린과폭력 학살 의문사사건등을조사하여왜곡되거나은폐된진실을밝혀냄으로써민족의정통성을확립하고과거와의화해를통해미래로나아가기위한국민통합에기여함 을목적으로하였다 ( 제1조 ). 피해보상에무게를두었던 5 18보상법이나민주화보상법과는달리, 과거사기본법은진실을규명하여피해자의명예를회복시키고, 억울한판결에대한재심을권고하여신분을되찾게하는것과국가나가해자의사과를통해과거와의화해를이루는것이목적이었다. 11 이에대해, 언론에서는당시열린우리당을이끌었던지도부중에신기남의원과이미경의원부친의헌병경력을들추어연좌제상황을연출하기도했다.

3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진실규명의주요대상은일제강점기의항일독립운동, 한국전쟁전후의시기에발생한민간인집단학살사건, 그리고권위주의통치시기에부당한공권력의행사로인해발생한인권침해와조작의혹사건이었다 ( 제2조 ). 또한과거사기본법의조사대상에는보수세력의의견을반영하여대한민국의정통성을부정하는적대세력에의한테러 인권유린 학살등도포함하였다. 과거사기본법은진실규명을위해대통령산하에진화위를설치하도록하였는데, 진화위의업무는조사대상의선정과조사의진행, 진상규명의결정및규명불능결정, 그리고화해를위한방안연구활동등이었다 ( 제3조 ). 진화위의진상조사는피해당사자의신청을받는것을기본으로하였다. 진화위는법시행일부터 1년동안진실규명의대상에해당하는피해자와유족및친지들이진실규명과관련된사건을신청을하면위원회가각하여부를심사하였다. 신청방식에의한조사대상의선정은잘알려지지않았던사건에대해조사할수있다는긍정적인면이있었지만, 홍보부족이나두려움등으로인해일어났던사건을낱낱이조사하지못한다는부정적인면도있었다. 이러한점을보완하기위해진화위는신청에의한조사대상의선정이외에도역사적으로중요한사건이나진실규명이중대하다고판단되는경우직권조사를실시하였다. 진화위는조사대상자및참고인에대한진술서제출요구혹은출석요구와진술청취를할수있었고, 관련자료를요청 영치하고조회할수있었다. 또한진화위는왜곡되거나은폐된진실에관한결정적인증거자료를보유하거나정보를가진자가정당한사유없이 3회이상출석요구에응하지않을경우동행명령장을발부할수있었으며, 동행명령을받고도출석을거부하면, 과태료를부여하도록하였다. 동행명령권과관련해서형사처벌을포함하는문제가입법과정에서쟁점이되었지만, 여야간협상과정에서포함하지않기로하였다. 또한과거사기본법은진상규명결과에따라피해자의피해와명예의회복을위해노력하고, 가해자에대한적절한법적 정치적화해조치를취하며, 국민화해와통합을위한필요한조치를해야한다는국가의의무를밝히고있다. 이러한조치로는희생자를위한특별사면과복권을건의할수있는조항을포함하였고, 다른한편, 가해자에대한수사및재판절차에서처벌하지않거나감형할것을관계기관에건의할수있는규정도두었다. 진화위의조사기간은최초의진실규명조사개시결정일인 2006년 4월 25일부터 4년간이었고, 필요하다고판단될경우 2년까지연장할수있었다. 신청받은사건을제대로규명하려면 4년의기간은턱없이부족한것이었다 ( 전진화위인권침해규명위원회조사관조환준의인터뷰에서, 2016. 10. 28.). 따라서진화위는조사기간연장이필요하다고판단하였으나, 2010년 6월 30일까지 2개월연장하는데그쳤다. (3) 진화위의구성 위원회는위원장을비롯한상임위원 4 인을포함한 15 인으로구성하였다. 위원은국회에서선출하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35 는 8인 ( 상임위원 2인포함 ), 대통령이지명하는 4인 ( 상임위원 2인포함 ), 대법원장이지명하는 3인을대통령이임명하였으며, 임기는 2년으로연임할수있도록하였다. 위원장은상임위원중에서대통령이임명하였으며, 위원장및상임위원은정무직으로하였다. 위원은대학전임교수, 판사 검사 군법무관 변호사, 3급이상공무원, 성직자및역사고증 사료편찬등의연구직에서 10년이상종사한사람으로구성되었다. 위원들을분야별로학계가 8인, 법조계가 6인, 그리고종교계혹은정계 1인으로구성되었다. 위원회는진실규명등그밖의위원회업무를수행하기위해산하에 민족독립규명위원회,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인권침해규명위원회 의소위원회를두었다. 위원회는소위원회가심의 의결한내용을위원회 1주일전까지상정안건으로제출하면이를상임위원회가위원회 3일전까지협의 조정한후상정안건으로통보하는방식으로운영되었다. (4) 진실규명의처리결과 표 5 조사의처리결과 진실규명범위총계항일독립운동해외동포사적대세력관련민간인집단희생인권침해기타 배정사건수 진실규명 규명불능 처리완료 각하취하이송중지 11175 8450 528 1729 351 97 20 100.0 75.6 4.7 15.5 3.1 0.9 0.2 274 20 23 221 10 - - 2.5 7.3 8.4 80.7 3.6 - - 16 5-8 1-2 0.1 31.3-50.0 6.3-12.5 1774 1445 10 292 22 1 4 15.9 81.5 0.6 16.5 1.2 0.1 0.2 8206 6742 454 764 242 4-73.4 82.2 5.5 9.3 2.9 0.0 0 768 238 41 373 73 29 14 6.9 31.0 5.3 48.6 9.5 1.8 137 - - 71 3 63-1.2 - - 51.8 2.2 46.0 - 출처 :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 종합보고서 Ⅰ. 표 <3-13> 재구성 < 표 5> 는진화위의진실규명의처리결과를보여주고있다. 진화위는 2010년 6월 30일까지 2005년 12월 1일부터 2006년 11월 30일까지신청기간에신청한 10860건과직권조사사건 15건, 그리고분리 병합처리한사건등을합한총 11175건에대해진상규명작업을실시했다. 이중진실규명으로결정된사건은 75.6% 였고, 진실규명불능으로처리된사건은 4.7% 였다. 조사하지않고각하결정을내린사건은 15.5% 였다. 활동기간중위원회에배정된사건의대다수가진실규

3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명으로결정난것이다. 사안별로보면, 민간인집단희생사건이 8206(73.4%) 건으로가장많이다루어졌고, 그다음으로적대세력사건이 1774건 (15.9%), 세번째로인권침해사건이 768건 (6.9%) 이었다. 민간인집단희생사건의건수가많은이유는집단희생사건이었기때문에한사건에연루된피해자가많았기때문이다. 위원회에배정된사건중진상규명결정이난사건의비중은항일독립운동사안의경우 7.3% 에불과했다. 대부분이조사전에조사대상으로부적합하다고판단되어각하되었기때문이다. 배정된사건중진실규명결정비율이높은사안은민간인집단희생사건 (82.2%) 과적대세력관련사건 (81.5%) 이었다. 인권침해사건은진실규명결정비율이 31.0% 에불과했다. 이는배정된건수의 48.6% 가조사이전에각하되었기때문이다. (5) 진화위의권고와정부의처리현황 진화위의과거사정리는왜곡되고은폐되었던진실을규명하여이를통한반성과화해, 재발방지조치를마련하는일련의과정이다. 진화위는활동을종료하면서대통령과국회에제출하는종합보고서에종합권고사항을제출하였다. 또한진상규명사건별로도국가의사과, 피해자와희생자의피해및명예회복과재발방지를위한조치가실행될수있도록국가에권고하였다. 권고의주요내용은피해자와희생자의명예회복을위한국가의조치, 재발방지를위한국가의조치, 법령 제도 정책 관행의시정과개폐에관한사항, 국민화해와민주발전을위한국가의조치, 역사의식함양을위한교육 홍보에관해국가가해야할조치등이었다. 권고유형별로이행상황을구체적으로살펴보면 < 표 6> 과같다. 진화위가 2010년상반기까지국가기관에권고한건수는사건별로는 289건, 한사건에서도몇가지다른사항을권고하기때문에개별권고수기준으로는 885 건이었다. 12 표 6 권고유형별이행상황 ( 권고수기준, 재심진행 42 건제외 ) 구분내용권고건수이행건수이행율 역사기록반영 141 64 45.4 피해자의명예회복과구제를위한조치 법령, 제도, 관행의시정및개폐 원호사업 10 1 10.0 손해배상피해구제 23 2 8.7 미국협상8 - - 재심 18 18 100.0 법령정비 11 4 36.4 가족등록부정정 158 - 국민화해와민주발전을위한국가사과 179 52 29.1 12 진화위종합보고서에서는위원회의권고수에당시진행되고있던재심 42건을제외하였다. 그러나제외되었던재심진행건도권고가이행되고있던것으로간주할수있기때문에이행율 100% 는사실과다르지않다.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37 구분 내용 권고건수 이행건수 이행율 조치 평화인권교육 125 117 93.6 위령사업지원 138 55 39.9 기타 74 48 64.9 합계 885 361 40.8 * 진화위종합보고서 < 표 7-4> 에서발췌 (2010년 6월 30일현재 ) 진화위는피해자의명예회복을위해국가와지방자치단체가공공기록물에해당사건의내용을보완 추가하여해당사건의진실을정확히알린다는취지의역사기록수정및등재를권고하였다. 이권고사안의이행율은 141건중 45.4% 였다. 예산이수반되는 원호사업 및 손해배상 의이행율은각각 10.0% 와 8.7% 로낮았다. 위원회는한국전쟁전후무차별폭격등미군관련사건의피해자에대한구제방안마련을위해국가가미국측과의외교적노력을기울일것을권고하였는데, 이에대해서는이행된바없었다. 진화위는진실이규명된인권침해사건중확정판결이났던반공법 국가보안법사건, 긴급조치법과포고령위반사건등에대한재심을권고하였다. 재심권고는총 60건이었고 2010년 6월 30일현재 18건이무죄로판결되었으며, 나머지 42건은재심진행중이었기때문에결과와관계없이이행율은 100% 였다. 진화위는국민화해와민주발전을위해국가사과와평화인권교육, 그리고위령사업을권고했다. 국가의공식사과는위법 부상한공권력의행사로인해피해를입은국민의상처를치유하는데크게기여했다. 대표적으로 2008년 1월 24일 울산국민보도연맹사건희생자합동위령제및추모식 에서대통령이영상메시지를통해공식사과를한바있다. 국가사과는 179건이권고되었고그중 52건이이행되었다. 평화인권교육의내용과취지는군, 경찰, 공무원대상으로전쟁중민간인보호에관한내용을담고있는국내법과국제법에관한교육을실시하는것이었고, 전쟁이수많은민간인희생을자져온다는역사적사실을국민에게널리알림으로써평화의식을높인다는것이었다. 진화위는국가가적대사건희생자모두를위령하는지역합동위령제를지원할것을권고하였다. 국방부와경찰청의예산지원에도불구하고이행율이 39.9% 로낮았던것은유족회구성지연으로위령제가개최되지못한곳이많았고, 적대세력피해사건의경우예산지원이없었기때문이었다 ( 진화위 2010: 204). (6) 진화위활동의홍보종합보고서에따르면진화위는자신의활동을활발하게홍보한것으로나타났다 ( 진화위 2010: 156-163). 출범초기에진화위는대외적인인지도를높이기위해진실규명신청절차및방법등을국내외에널리알리는홍보활동을전개했다. 주요일간지와전국 9개지역의방송사, KTV, KTX 내 TV, 연합뉴스등에광고를개제했고, 지방자치단체전광판과홈페이지, 주민반상회보등에도

3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진실규명신청안내를실시했다. 진실규명조사기간중에는조사개시결정사건, 진실규명결정사건, 유해발굴업무등위원회의주요활동을알리기위한소식지, 웹진및뉴스레터등을정기적으로신청인과주요기관, 관련단체, 학계, 언론기관에배포했다. 또한위원회는설립기념식에서위원회활동을담은동영상을제작상영하였고, 활동종료에즈음하여다큐영상을제작했다. 진화위는출범과함께진실규명신청에대한홍보를시작으로조사결과발표, 유해발굴사업, 기타활동을기자회견, 보도자료배포등을통해언론에홍보하였다. 위원회의보고서에따르면언론보도횟수는년평균 1025건이었다 ( 진화위 2010: 161). 이렇게볼때진화위는활발한홍보활동을한것으로보인다. 그러나진화위의대국민홍보활동은진실규명신청당시를제외하고는관련기관에국한되어있었다. 따라서과거청산의활동을국민에게전달하고그의의를공유하는데는한계가있었다. (7) 성과와한계진화위의과거청산사업은제주4 3 사건진상규명, 일제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의문사진상규명등이전의개별적인진상규명중심의사업을이어서우리나라의현대사를관통하는과거청산문제를하나의틀에서체계적으로실행하였다는데커다란의의가있다. 이사업은세계적으로하나의흐름을형성했던 진실위원회 모델과같은맥락에놓여있었다. 그러나남아프리카공화국의진실위원회는인종차별이라는하나의사안을다루었고칠레나아르헨티나등남미의진실위원회는군부독재정권하의실종문제를주로다루었는데비해우리나라의진화위는독립운동과해외동포사, 민간인집단학살, 그리고인권침해사건등다양한주제의과거사문제를분단과전쟁, 그리고이를통해형성된반공권위주의통치라는한국현대사의맥락속에서체계적으로다루었다는점이특징적이다. 진화위의조사활동은 2006년 4월부터 2010년 6월까지 4년 2개월간진행되었다. 권위주의정권하에서자행된민간인집단희생, 사망, 상해, 실종및고문에의한용공조작등인권침해사건들이국가기구를통해조사되었고진실규명이어느정도이루어졌다. 조사한사건이국가폭력과부당한공권력에의해일어난사건으로밝혀지면진화위는국가가희생자및피해자의명예회복을위한조치를취할것을권고하였다. 이러한권고조치로는왜곡되고은폐되었던사실에대한역사기록의수정, 피해자와그가족중후유증으로고통받는사람들에대한의료 상담치료의지원, 국가의손해배상을통한피해구제, 그리고인권침해사건중형의확정판결이난사건에대한재심등이었다. 국민화해와민주발전을위한조치로는민간인집단희생사건의경우국가사과, 평화인권교육사업과위령사업등이어느정도실행되었다. 특히진화위활동중에주목해야할것은진화위가다룬인권침해사건의다수가민주화운동이나정치운동에의식적으로참여하지않은일반인들이피해를입은사건이었다는점이다. 13 그들은대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39 부분납북어부, 남파간첩일가친척, 사업가등일반인이피해를입은사건이었다는점이다. 이들은조업을하다가납북되어귀환한이후간첩활동을했다고혐의를받은어부들과그가족들, 남파간첩을접촉하고지령을받아간첩활동을했다고혐의를받은친인척들, 사업차일본에갔다가조총련인사를만나금품을수수하고지령을받았다고혐의를받은사업가들이었다. 술자리같은장소에서정부를비판하거나김일성을찬양했다는이유로체포되어실형을선고받은소위 막걸리보안법 사건도있었다. 이러한간첩조작사건이나보안법과잉적용의피해사례는권위주의통치하의부당한공권력의횡포가체제에저항한용기있는사람들에게만해당하는것이아니라평범하게살아가는일반인에게도미칠수있다는경각심을일깨워준다는점에서매우의미있는조사활동이었다. 이러한성과에도불구하고진실규명, 피해자들의명예회복과가해자와의화해, 그리고국민의민주의식함양등이만족스럽게이루어지기에는많은한계가있었다. 먼저활동기간에비해처리해야할사건은많았고인력은부족하였다. 선청받은 1만여건수를처리하는데 4년이라는시간은턱없이부족하였고, 특히 민간인집단희생규명위원회 의경우는시간에떠밀려보도연맹사건의조사를충실하게끝내지못했다고한다 ( 전진화위인권침해규명위원회조사관조환준의인터뷰중에서, 2016.10.28.). 따라서진화위의과거청산작업을계속연장해야한다는의견이관련인사들을중심으로제기되고있다. 두번째로, 진화위는신청원칙의조사방침을고수했기때문에희생자나피해자의사망및망각등으로실제피해사건을많이놓쳤을가능성이높다. 특히민간인집단희생사건은피해규모에비해신청수가적었는데, 고령의피해자들이반공콤플렉스로인해신청을꺼려했기때문이라고한다 ( 전진화위인권침해규명위원회조사관조준환의인터뷰에서, 2016. 10. 28.). 이러한경우를감안해서진화위는직권조사를발동할수있었으나, 인력이태부족하여실제조사건은 15건에불과했다. 세번째, 피해자와가해자의화해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다. 6 25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의경우부역자로매도당했던왜곡된사실을바로잡은것과국가사과, 그리고위령사업에대한지원으로그동안입었던마음의상처를부분적으로나치유할수있었다고판단되지만, 공권력에의한인권침해사건의경우는그렇지못했다. 경찰이나공안기관의당시담당자들이진화위에서참고인조사를받아야했는데, 대체로사실을부인하였고, 심지어 왜사람을이런일로오라가라하느냐 고큰소리를치는등고압적인태도로조사에비협조적이었다. 간접조작사건의경우, 진상규명은장기간의불법구금을입증하는기록과피해자와가해자의진술에기초한합리적인추궁으로이루어진것이다. ( 전진화위인권침해규명위원회조사관조환준의인터뷰중에서, 2016.10.28.). 13 진화위에서진상규명으로결정된 134 건의인권침해사건중운동의식을갖고참여한학생 지식인사건은 44 건이었고, 의식없이피해를당한일반인사건은 90 건이었다 ( 부록참조 ).

4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가해자의반성과사과가없는상황에서진정한화해를기대할수없었다. 이런상황에서인적청산이나가해자들의반성과처벌없는진상규명이억압적국가기관에면죄부를부여하는꼴이라는비판의목소리가적지않았다. 네번째로는진화위의진실규명이얼마나일반국민에게알려져과거사에대한반성과애도, 치유의분위기를형성했는가하는것이다. 조사결과, 유해발굴사업등을기자회견, 보도자료의형식으로언론에전달되었으나국민의주목을받지는못했다. 진화위의조사활동이언론에부각되지못했던이유중에하나는진화위가조사중에는조사내용을언론에공개할수없다는법의규정에기인하는바가있다. 소위원회의조사책임자가수시로조사의진행과정을언론에알릴수있었으면조사활동이보다흥미있게국민에게전해졌을것이다. 그러나조사결과는전원위원회의의결에의해서만언론에알리도록되어있었기때문에결정사항에대한형식적인보도자료가언론에전달될뿐이었다 ( 전진화위인권침해규명위원회조사관조환준의인터뷰중에서, 2016.10.28.). 진화위활동의대국민홍보가제대로되지않았다고의심할수밖에없는대목은최종보고서의출간이었다. 보고서는법에따라대통령과국회에제출되었지만한겨레와경향신문에짧은기사가실린것외에별다른반향이없었다. 이는아르헨티나의 진실위원회 사례와매우대조적이다. 아르헨티나의 실종자진상조사국가위원회 가 5만여쪽에달하는최종보고서 눈까마스 (Nunca Mas) 를발간했을때, 세계언론이이보고서에주목했고군사정권하에서납치 고문 살인을자행한책임자처벌의여론이대대적으로조성되었다. 진화위의활동성과와그의미가결코적지않음에도불구하고종합보고서가형식적으로처리된것은당시정권의정치적성향탓도컸을것이다. 마지막으로피해자들의후유증에대한치유를지원하는노력이얼마나이루어졌느냐의문제다. 민간인집단학살과고문등가혹행위로인해피해자들은육체적손상뿐만아니라정신적후유증에장기간고통받아왔다. 특히피해자들의정신적상처는치유되기쉽지않다. 외국의 진실위원회 경험에서는피해자가자신의피해사실을진술하는것이상처의치유에도움이되었다고한다. 진화위조사활동에서도한민간인집단희생의유족할머니가 먼길을찾아와서수십년지난이야기를들어주어너무고맙다 고하는장면처럼 말하기 가치유에도움이되는장면들을목격할수있었다고한다 ( 전진화위인권침해규명위원회조사관조환준의인터뷰중에서, 2016.10.28.). 그러나국가폭력에대한인식이부족한공무원파견조사관들의행정적인일처리는바뀐것이하나도없다는느낌과함께피해자에게또다른상처를주는것이도했다. 피해자의치유를위해진화위에서는원호사업과손해배상피해구제를권고했으나그이행율은매우낮았다. 오히려민간차원에서피해자들에대한치유센터가건립되고있다. 대표적으로서울에 김근태치유센터 와 진실의힘 이민간의후원으로운영되고있다. 그러나이러한치유센터는전국적으로턱없이부족하며정부의지원을필요로한다.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41 4. 나가며 : 요약및함의 (1) 요약민주화이후한국에서도정부차원의과거청산이진행되었다. 한국에서진행된과거청산은친일청산, 6 25전쟁당시민간인집단학살, 군부독재시기의국가폭력과인권침해등을다루어시기적으로광범위했고주제별로도다양했다. 노태우정부부터이명박정부까지 25개의관련법안이제정되었고, 22개의위원회가설치되었다. 그만큼한국이일제식민지배, 분단과한국전쟁, 군부독재의역사적질곡을겪으면서청산되지않은과거사문제가누적되어왔기때문이다. 과거청산의유형도다양했다. 책임자처벌을중시하는사례도있었고, 피해및민주화운동에대한보상에주력하는사례도있었으며, 진실규명과과거와의화해에초점을두는사례도있었다. 이글에서제시한세가지대표적인사례중 5 18에관한과거청산은민주화이후첫과거청산사업으로써국민적관심을받았다. 5 18 청산은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보상과명예회복, 정신계승등과거청산의모든요소를갖추었지만, 그중에서도전두환 노태우두전직대통령및그부하들에대한재판과사법적처벌이주목을받았다. 또한 5 18보상법과 5 18유공자법으로보상과명예회복사업이활발하게전개되었다. 이로써 12 12구데타와광주학살의책임자처벌이이루어졌고, 5천명이상의사망 행방불명 상이 구속등의피해자에대한국가보상과명예회복이실시되었다. 그러나 하나회척결 과 5 18 책임자처벌 등김영삼정부의노력에도불구하고권위주의세력의정치적토대는여전히남아있었고, 영호남지역주의의정치구도에서그정치적인힘을온존 강화시킬수있었다. 따라서 3당합당이후김대중은권위주의세력의한분파인김종필과연대해서집권하였고, 사법적처벌방식의과거청산작업을지양하고보다진상규명방식에더무게를두게되었다. 5 18에대한진상규명은국회청문회와재판을통해어느정도이루어졌지만, 피해자중심의진상규명은부족했다. 5 18기념묘지가성역화되고기념공원이조성되는등정신계승사업이전개되었지만, 문화예술행사및추모의례위주로진행되어 항쟁의저항성 이거세되었다는비판이제기되었다. 민주화운동에대한과거청산사업은보상과명예회복위주로진행되었다. 민주화운동으로인해사망하거나상이를입은사람 (826명) 에대해보상이이루어졌고, 유죄판결, 해직및학사징계를받은사람 (9,014명) 에게는명예회복이이루어졌다. 민주화운동에대한보상및명예회복사업은권위주의통치에대한항거라는 능동적행위 에대한보상과명예회복의성격을지닌다. 이사업은민주헌정질서의파괴행위에대한저항권을법률적차원에서공식화시켰다는데커다란의의가있었다. 그러나이사업의한계는명예회복의적용대상이제한적이었다는것이다. 유죄판결이나해직자중생활이어려운사람에게재심청구를포기한다는조건으로생활지원금이주어진것도문제점으로남아있다. 최근민주화보상위원회에서민주화운동으로인정받은사건 ( 예를들면긴급조치위반

4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사건 ) 들이재심을통해무죄판결을받아국가배상이이루어진상황에서이와유사한사건들에대한재심요청이증가할수있다. 세번째로제시한대표적인과거청산사업은한국의진실위원회라고할수있는진화위의활동이었다. 과거사기본법에서규정하고있는것처럼진화위의목적은과거사에대한진실과책임소재를규명하고, 과거와의화해를이루는것이었다. 진화위는 4년 2개월동안과거폭압적정권하에서일어난국가폭력이나인권침해사건을조사하였다. 신청한사건중 8,450건에대해진실규명판정을내렸고, 국가가희생자및피해자의명예회복을위한조치를취할것을권고하였다. 진화위활동의문제점으로지적되는것은조사기간에비해처리해야할사건은많았고인력도부족했다는점이다. 진화위사업이더지속되어야한다는의견이제기되는이유다. 다음으로는피해자들의사망및망각뿐만아니라피해자들의반공콤플렉스로인해실제피해사건을많이놓쳤을가능성이높았다는것이다. 세번째로는인권침해사건의경우사업의주요목적중하나인화해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다는것이다. 가해자는고압적이었고반성과사과는기대하기힘들었다. 이때문에관련법률이지나치게가해자에관용적이라는비판이제기되었다. 이때문에남아공에서처럼위원회에청문회의권한을주어가해자를불러세워진정성있는반성과사과를공개적으로확인하는절차가필요하다는의견이제시된다. 진화위의조사내용은민주의식함양에좋은꺼리를제공하고있음에도불구하고국민에게거의전달되지않았다. 보도자료가언론매체에제공되었지만전원위원회의결정사항에대한형식적발표여서언론의주목을받기에는역부족이었다. 2) 함의및제언한국의과거청산작업은여러한계와문제점에도불구하고결코낮게평가할수없다. 국가폭력과인권침해사건에대한진실규명과명예회복및피해보상, 그리고기념사업및정신계승을위해민주화이후역대정부들이많은노력을경주하였다. 과거청산이민주주의의공고화를위해서중요하게다가오는것은국민의민주주의의식에영향을미칠수있고또미쳐야하기때문이다. 그러나과거청산작업이국민의 내면의민주주의공고화 에기여하기위해서는과거청산을위한국가기구자체의노력도중요하지만, 정부의의지가결정적으로중요하다. 국가차원의과거청산작업은해당정부가이문제에적극적이면그렇지않은정부에서보다더좋은성과를낼것이다. 또한그러한정부하에서관련기구는산출된성과가국민의민주주의에대한가치와규범의식에긍정적인영향을미치도록노력을경주할것이다. 참여정부에이은두정부는과거사청산의문제에소극적이거나부정적이었고따라서사업의의미도축소되었다. 심지어박근혜정부는역사교과서의국정화를통해민주화이후추진되었던과거청산의성과를되돌려놓으려했다. 보수정부의과거청산에대한부정적태도는그정부안에권위주의잔존세력이여전히정치적힘을가지고수구적담론을형성하고있었기때문이다. 결국, 과거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43 청산의결실이유지되고확산되기위해서는한국의보수진영이권위주의적인사고와행태에서벗어나혁신되어야한다. 최근박근혜-최순실게이트로인해주말마다 100만, 200만의촛불집회가열렸다. 시민들은정치무관심속에부적절한사람을대통령으로뽑았고, 이로인해민주주의의근간이흔들리는지도몰랐다고반성한다. 이를계기로국민의의식속에서민주주의의공고화가압축적으로진행되고있는듯하다. 어쩌면가장강력한과거청산이이사건을통해국민개개인의내면에서일어나고있는지모른다. 그러나정치적스캔들을통해폭발적으로일어난정치관심과민주주의의식은일시적이다. 국민의의식속에권위주의로부터의단절과민주주의의식을함양시키기위해서는과거청산에대한그간의성과와그의의를체계적으로홍보하고교육하는사업이무엇보다더절실하다. 사실각종위원회의진상규명과피해보상및명예회복의작업은부족한점이있지만대부분마무리되었다고보아야한다. 지속되어야할사업은지속해나가되, 앞으로주력해야할과제는민주시민교육의일환으로그간의과거청산의성과 권위주의통치의국가폭력과인권유린, 민주화운동의정당성과의의 - 를국민에게촘촘히전달하는일이다.

4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 참고문헌 > 기세주. 2006. 광장 : 과거사정리위차라리북한에맡기라. 한국논단 2006년 1월호. 김동춘. 2013. 한국전쟁과학살, 그기억과의전쟁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활동을중심으로. 제주4 3연구소학술대회자료집 2013년 10월 : 115-145. 김성길. 2005. 과거사법제정과정과현황, 이후방향에대하여. 전남대학교세계한상문화연구단국제학술회의자료집 2005년 11월 : 121-137. 김영명. 1999. 고쳐쓴한국현대정치사. 서울 : 을유문화사. 김영수. 2008. 이명박정부의과거사정리정책, 민주주의의이행과정인가퇴행과정인가? 과거청산포럼자료집, 7-32.. 2009. 해외사례를통해서본한국의과거사정리. 제노사이드연구 6: 41-18.. 2011. 한국과거사정리와국가의전략. 역사연구 21: 141-167. 서중석. 2003. 한국사회의과거청산. 기억과전망 4: 65-84. 신일섭. 2005. 광주민주화운동보상법의정치 사회적의미. 민주주의와인권 5(2): 173-201. 안병직. 2004. 과거사규명무엇이문제인가? 철학과현실 63: 26-37. 정근식. 1997. 민주화와 5월운동, 집단적망탈리테의변화. 나간채역음, 광주민중항쟁과 5월운동연구. 전남대학교 5 18연구소. 조희연. 2002. 과잉과거청산인가과소과거청산인가 : 문부식씨의 우리안의폭력 논의에대한재성찰. 경제와사회 55: 273-288. 강경선. 2003. 민주화운동보상법과과거청산. 민주법학 24:43-62. 이희성. 2009. 5 18민주유공자보상법의현황과과제. 민주주의와인권 9(2): 27-67. 한인섭. 2002. 국가폭력에대한법적책임및피해회복 : 5 18민주화운동의법적해결을중심으로. 서울대학교법학 43(2): 187-237. 허상수. 2009. 과거청산의위기와과거사정리관련위원회의미래지향적가치. 민주법학 39: 125-159. Hayner, Priscilla B. 저 주혜경역. 2008. 국가폭력과세계의진실위원회. 서울 : 역사비평사. < 자료 > 공보처. 1992. 제6공화국실록 1-3. 서울 : 공보처. 5 18사료편찬위원회. 1997. 5 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10권. 광주 :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5 18기념재단, http://www.518.org/ease/menu.es?mid=a10304010000_ 검색일 2016.10.28.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2016. 민주화운동백서 _ 위원회편 서울 :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서울지방겅찰청. 1995. 12 12군사반란및 5 18내란자처벌과법적쟁점. 대한변호사협회편, 인권보고서 1994( 제9집 ). 서울 : 대한변호사협회.

한국의민주화와과거청산 45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 진실화해위원회종합보고서 Ⅰ: 위원회의연혁과활동, 종합권고. 서울 :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6년하반기조사보고서2. 2006년하반기조사보고서3 2007년상반기조사보고서2 2007년하반기조사보고서4 2008년상반기조사보고서3 2008년하반기조사보고서4 2009년상반기조사보고서5 2009년하반기조사보고서8

4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 부록 > 표 1 대상별진상규명결정된인권침해사안 인권침해유형침해사안학생 / 지식인일반인 징역 / 사형 간첩혐의 납북어부 13 북한간첩 / 조총련접촉 24 재일교포 / 독일유학생 7 학생재야운동 5 이중간첩 2 반국가단체조직 5 특별법 / 긴급조치 / 포고령 2 1 반공법 / 국보법 3 5 기타 2 2 간첩혐의 2 15 강제연행 / 가혹행위 정치적이유 5 4 기타 9 형확정후탄압 좌익수전향공작 2 의문사 2 2 운동탄압 정부동원 대학 2 노동 2 언론 2 종교 1 사회정화 4 국민방위군 1 분배불이익 재산권 3 국가시험면접탈락 2 기타 5 합계 44 90 * 출처 :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6 년 ~2009 년인권침해조사보고서.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47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강원택 ( 서울대학교 ) 1. 들어가며 민주화는과거의비민주적체제로부터의단절과보다자유롭고민주적인새로운정치질서로의전환을의미한다. 새로운정치질서하에서정통성을갖춘권력이등장하고통치의방식역시억압적인과거권위주의체제와는달리사회적동의와합의에기초한다. 그러나민주화가이뤄졌다고해도하루아침에과거시대의관행과힘의관계가완전히바뀔것으로기대하기는쉽지않다. 더욱이한국민주화는동유럽에서볼수있는것과같은기존체제의 전복 이아니라적대적이었던두세력간의타협 ( 임혁백 1994) 에의해이뤄졌다. 즉 6.29 선언으로절정에도달한민주화운동은기존권위주의세력의완전한퇴진을의미하는것이아니었다. 권위주의세력은민주화에대한요구를더이상억누를수가없었으며, 이에비해민주화운동세력은권위주의세력을타도할만큼강력하지못했던것이다. 따라서민주화는두세력의힘이균형을이루면서이뤄지기되었다. 내용적으로한국의민주화는혁명적인변화를의미하는것이아니었다. 민주화는대통령직선제요구가받아들여지면서이뤄졌다. 즉이미승자가결정되어있는 체육관선거 가아니라, 공정하고경쟁적인선거의확립이라는절차적민주주의에대한요구가한국의민주화를이끌었다. 따라서민주화의단계로진행한이후에도이전시대의두적대적세력, 즉군부에기반한권위주의세력과이에저항해온민주화운동세력은모두분명한승자를만들지못한채, 새로운질서속에서경쟁을이어나가게되었다. 권위주의세력이나민주화운동세력역시그내부에상이한입장을가진집단이공존하고있었다. 민주화운동세력은김영삼, 김대중등기존체제내야당이주도해갔지만, 보다근본적이고급격한변화를요구하는학생이나재야세력이존재하고있었다. 권위주의세력내에서도 6.29 선언이라는 타협 을추진한온건파가있었지만, 군의동원을통한강경진압을주장하는과격파도존재하고있었다. 이런조건은한국의민주화가매우불안정한정치적균형에의해이뤄졌다고할수있으며, 그이후에전개될정치적변화에대한불확실성도높았다고할수있다. 헌팅턴 (Huntington 1991: 208-253) 은신생민주주의국가가당면하는두가지어려운과제중하나로군의탈정치화를들었다. 헌팅턴은많은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민주적이행과정에서당면

4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하는두가지어려운문제로근위대의문제 (praetorian problem) 와고문관의문제 (torturer s problem) 을들었다. 전자는곧군부에대한문제로, 민주화이후등장한문민정부가정치에대한군부의영향을줄이고직업주의적민군관계의확립을이루는문제를말한다. 다시말해, 입헌민주주의의작동과양립가능할수있는수준으로군부기득권의특권과권력을축소시키는문제이다. 후자는노골적으로인권을탄압한권위주의시대의억압적공권력에대한처리를말한다. 이들에대한법적, 정치적처벌과피해자의명예회복과보상등의문제를포함한다. 많은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와마찬가지로, 민주화이후의한국역시이와같은쉽지않은두가지과제를지니고있었다. 그런데현실적으로이두가지과제는서로긴밀하게연계되어있는경우가많다. 예컨대, 1980년광주항쟁에대한군의무자비한학살과억압은근위대의문제와고문관의문제가서로얽혀있는사안이라고할수있다. 따라서군부를탈정치화시키지못한다면고문관의문제도제대로해결될수없다고할수있다. 이두가지는매우어려운것이라고해도민주적공고화를위해서는반드시해결하고넘어가야할과제였다. 그러나민주화라는정치상황의변화에도불구하고여전히강력한영향력을지니고있던군을탈정치화시키는일은결코쉬운일이아니었다. 한국에서는특히그때까지권위주의체제유지의기반으로서강한영향력을갖고있던군은민주화이후에도, 직접적지배에서는물러났다고해도, 여전히상당한영향력을유지하고있었던상황이었다. 한국은 1961년 5.16 쿠데타이후 1987년까지 26년동안군이직접통치에개입했다. 민주화이후의첫대통령선거에서군출신인노태우가당선됨으로써군출신의지배는 1993년초까지이어졌다. 30년정도의세월동안군의한국정치를지배해온것이다. 오도넬과슈미터 (O Donnell and Schmitter 1986: 69) 는민주화과정에서군에대한문민지배의어려움을체스게임에비교하여설명한바있다. 민주화를체스게임으로본다면, 군부는여왕이다. 그게임에서여왕인군부를잡아버리는것은금지되어있다. 만약여왕을잡아버리려고한다면그녀는판을뒤엎어상대방을내쫓아버리고자기혼자만의게임을새로이시작하려고할것이다. 민주화이후한국정치는이처럼 정치화되어있는군대 를어떻게문민통제하에둘것인가하는쉽지않은과제를갖고출범했다. 그러나한국에서그해결은민주화초기, 그리고매우전격적이고극적인형태로전개되었고, 그결과도매우확고하고지속적인것이었다. 1961년박정희의군부쿠데타이후 32년만에민간인출신으로처음으로대통령에선출된김영삼은군의탈정치화와군에대한문민통제를확립했다. 민주화이후 10년이채되지않은시간내에한국정치에서군은정치로부터퇴각했고, 그이후정치에더이상개입할수없었다. 이와같이민주화초기에군을탈정치화시키고군에대한문민통제를강화한결과, 한국은보다안정적인형태로민주적공고화의과정을밟아나갈수있게되었고, 1997년에는한국정치사상최초로여야간평화적인정권교체도가능할수있게되었다.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49 군이한세대이상막강한정치적영향력을행사해온한국에서이와같이신속하고완전한형태로탈정치화를이룬것은유사한시기에이른바 민주화의제 3의물결 을타고민주주의를이룬다른나라들과비교할때예외적이라고할만큼특별한경우로볼수있다. 여기서는어떤원인으로한국에서민주화의초기과정에군의탈정치화를이뤄냈는지를분석하고자한다. 이글에서는크게세가지요인으로나눠살펴볼것이다. 하나는정치적행위자요인으로김영삼대통령을중심으로논의할것이다. 두번째는군부의특성에대한것으로군내부의구조와파벌을중심으로살펴볼것이다. 그리고세번째는이글에서가장강조하고자하는요인으로정치맥락적요인으로, 민주화이후전두환-노태우의관계, 그리고 3당합당의정치적결과를중심으로논의할것이다. 2. 이론적논의 2차세계대전이후과거제국주의국가의식민지가독립하였고, 그중많은나라가민주주의를국가통치체제로받아들였다. 헌팅턴은이를두고민주화의제 2의물결이라고불렀다. 그러나적지않은수의국가가그이후군부의정치개입을경험했고민주주의체제는붕괴했다. 지역적으로아시아, 남미, 아프리카지역의신생독립국가를중심으로군부의쿠데타가빈발했으며군은통치의주체가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61년박정희가이끈 5.16 군사쿠데타에의해민주적으로수립된제 2 공화국이붕괴했고, 그이후 18년간독재체제를이어갔다. 그이후에도전두환등신군부가개입하여다시 8년간군부권위주의체제가유지되었다. 우리나라에서군부가정치가개입한데에는여러가지구조적, 상황적요인을들수있을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의한국전쟁으로군의규모와역할이증대되었다. 6.25 전쟁을통해남과북은모두분단군사화국가로변모 되었고 ( 한용원 1993: 154), 분단대치상태에서군이갖는사회적중요성은전쟁이후크게높아질수밖에없었다. 또한전쟁의참화와뒤이은남북간의적대적인군사적대립은반공을명분으로한군의위상과입지를높이는계기가되었다. 실제로 1961년 5.16 쿠데타직후발표된이른바 혁명공약 1조는 반공을국시 ( 國是 ) 의제일의 ( 第一義 ) 로삼고지금까지형식적이고구호에만그친반공태세를재정비강화한다 는것이었다. 또한 5조에서도 민족의숙원인국토통일을위해공산주의와대결할수있는실력배양에전력을집중한다 고선언했다. 반공이매우중요한쿠데타의명분이되었음을알수있다. 더욱이전쟁수행중한국군은미군으로부터무기와장비뿐만아니라, 조직, 훈련등에서선진적인시스템을갖추게되었다. 당시후진적상태에놓여있던한국사회에서군은미군의지원과영향으로상대적으로근대화되고선진적인조직으로성장하게되었다. 파이너 (Finer 2002: 6-13) 는군

5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부가민간조직에비해정치적으로크게유리한세가지점을지적한바있는데, 그것은조직에서탁월한우월성, 대단히감성화된 (emotionalized) 상징적지위, 그리고무기의독점등이다. 미군의지원하에선진적인시스템을갖추게된군은당시우리사회의다른영역에비해보다효율적이고우월한조직적특성을갖추고있었다. 1961년이후한국정치에서군의역할은단순히민간정부에위협이나압력을가하는경우 (blackmail), 혹은일부혹은전체내각구성에대한교체요구 (displace) 가아니라, 군부가직접쿠데타등을통해정치전면에나서는경우 (supplant) 였다 (Finer 1988: 127). 그리고 1961년 5월 16일이후오랫동안한국정치는군부엘리트가국가의거의모든영역에서결정권을행사하는실질적인군정이었다 ( 조현연 2007: 54). 군의지도자가군복을입고통치하거나또군인들이직접내각을구성하는방식은아니었지만, 군은한국정치의가장중요하고영향력있는집단으로남아있었다. 군은군복을입고통치에참여하기보다퇴역후정부의일을맡는방식을취했지만, 정책의방향을결정하고감독하는주요보직을차지했고, 전문적지식과정보를필요로하는실무적자리에는민간인관료를충원했다. 이처럼 1961년쿠데타이후 한국의정치변동에서군부가끼친영향력은거의절대적이었고, 군부의향배에따라정치변동의방향이결정되었다고해도과언이아닐것 ( 김호진 1997: 362) 이다. 즉민주화이전까지한국은전형적인 집정관사회 (praetorian society ) (Croissant 2004: 365) 였다. 따라서민주화가되었다고해도한국정치에깊게개입해있는군의영향력을제거하는것은결코쉽지않은일이었다. 군의탈정치화는개념적으로두가지의미로나눠살펴볼수있다. 하나는외형적인측면에서의군의탈정치화이다. 군부에의존하는정권이민주화를달성하면서퇴진하는것이다. 그리고권력은공정하고민주적인선거절차를통해선출된권력이담당하게되는경우이다. 이런차원에서군의탈정치화를바라본다면, 한국은 1987년 62.9 선언과뒤이은 12월의대통령선거를통해군부퇴진을이뤄냈다고할수있다. 1987년대통령선거에서당선된노태우후보는군장성출신이지만, 절차적인측면에서볼때총칼과같은무력이아니라선거를통해권력을차지했다. 그러나이와같은외형적인차원에서의군의탈정치화에도불구하고, 군은여전히정치적영향력을갖는존재로남아있을수있다. 제도적으로군에게민간정부가간여할수없는별도의독자적인영역 (reserved domain) 을허용하거나혹은헌법적으로군부에게부여된거부권 (constitutionally granted veto power) (Croissant 2004: 375) 이존재한다면, 민주화를통해외형적으로군이정치전면에서물러났다고하더라도실질적으로군의탈정치화로보기어렵다. 군은여전히민주적정통성을갖는민간출신의권력이통제하거나영향을미칠수없는고유의영역이존재하기때문이다. 따라서진정한의미에서군의탈정치화를이뤄내기위해서는군부의정치개입이제도적으로금지될뿐만아니라, 외부에서통제할수없는군과관련된금기의영역이존재하지않아야하는것이다.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51 이런경우가되어야군부에대한문민통제의제도화 (institutionalization of civilian control) 가이뤄질수있는것이다. 이는바로스테판 (Stepan 1973: 52) 이말한대로, 군의정치중립과본연의국가안보기능을담당하는 구직업주의 (old professionalism) 로의복귀를의미하는것이다. 모두에서지적한대로, 한국은 1987년 6월항쟁과뒤이은민주화를통해외형적인차원에서의군의탈정치화를이뤘으며, 1993년취임한김영삼대통령재임기간중보다실질적인두번째차원의군의정치적퇴진을이뤄냈다. 1961년이후긴시간동안한국정치를실제로 지배해온 군부는민주화이후비교적빠른시간내에탈정치화되었다. 군부의정치퇴진의원인은일반적으로는군부지배를둘러싼구조적요인과우연적인인적요인 (human agency) 간의복잡한상호작용의결과 (Mietzner 2011:277) 로볼수있다. 행위자의결정과선택은미리조건지워진구조, 환경속에서이뤄지게되며, 구조적요인으로민주화이전시기의군지배유산의강도, 군부의개입정도, 경제발전수준, 국가에대한대외적, 대내적위협, 제도적요인, 군부의이념적자기인식등을들수있을것이다. 그러나이와함께군부의퇴진을이끈시민사회의성장과사회경제적변화역시주목해야할것이다. 예를들면, 서경교 (1993) 한국, 필리핀, 태국에서의군부퇴진을비교연구하면서, 군부지배에대항하는민간인반대세력의성장이공통적으로나타난특성으로지적했다. 우리의경우라면, 1985년 2.12 총선이후반체제야당의등장과학생, 종교, 재야세력의규합, 그리고 6월항쟁에서의이른바 넥타이부대 의합류를중요한원인으로들수있다. 김영삼정부시기의군의완전한퇴진역시이런연속선에서이해해볼수있다. 시민사회의민주화운동과다양한시민세력의국가에대한분화된압력이군탈정치화의촉진요인이라는것이다. 또한이와같은군부지배에반대하는세력의성장에도움을주는사회경제적요인의중요성역시생각해볼수있다. 산업화, 도시화, 국민교육기회의확대, 매스미디어의발달, 국민소득의증대등사회경제적발전이민주시민의식향상에기여했다는것이다 ( 홍득표 261-264). 이러한지적은경제발전과그에따른근대화가민주주의에유리하다고하는립셋 (Lipset 1959) 의고전적주장과같은맥락속에서이해할수있다. 한편, 민군관계에대한외부적 (extraneous), 내부적 (endogenous) 요인의영향도주목할만하다. 군의이념적일관성, 조직적결집, 경제적이익, 자원등은내부적요인이고, 국내안보 (internal security), 대외안보, 경제발전, 민간행위자 (configuration of civil actors) 등은외부적요인으로본것이다 (Croissant 2004). 이와같은내부적요인과외부적요인을함게고려할때군의탈정치화로이끄는원인을살펴볼수있다는것이다. 때로는군부스스로퇴진을결정할수도있다. 정치적경험을통하여군부지도자들이 군부에대한민간인우위의원칙 을포함하는 민주적질서 의가치를인식할수도있으며, 혹은그들스스로가심각한정치적위기들을해결할능력이없다는것을자각하고정치로부터손을떼기를원할수도있다 ( 서경교 1993: 295) 는것이다. 한국에서군의탈정치화에대한연구는비교적활발하게진행되지않았다. 이런점에서크로이상

5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트 (Croissant 2014: 93-114) 의논문은예외적이다. 이논문에서는한국에서성공적으로군의탈정치화가이뤄진요인으로다음의다섯가지를제시하고있다. 첫째, 민주적전이방식과군부정권의제도적유산에대한것이다. 즉민주화이후첫선거에서군출신인노태우가당선되어민주화이후에도군부의제도적이해관계가나름대로보장되었다는것이다. 두번째로는한국정치체제에서대통령의압도적으로우월한지위 (extraordinary position) 를들었다. 대통령이제왕적이라고할만큼강력한권력을갖고있기때문에일방적조치가가능했다는것이다. 셋째는, 군부내부의파벌주의이다. 정치화된군이전두환을정점으로하는하나회중심이었기때문에, 문민정부의군탈정치화시도에비하나회가동조하지않았다는것이다. 사실우리나라의군부정치에서나타나는이런특성은다른연구에서도찾아볼수있다 (Woo 2010; Moon and Rhyu 2011). 1961년박정희쿠데타역시전체군부의입장을대표하는것이기보다는군부내일부세력이주도한것이었다. 이런점은 1980년대신군부의경우에도마찬가지였다. 이런특성을한용원 (1993: 15) 은다음과같이적절하게정리하고있다. 한국에서군부는 제도로서의군부 가정치에개입한것이아니라, 파벌로서의군부 가정치에개입하여군부의헤게모니와통치권을장악, 도당적 ( 도당적 ) 이익을추구하면서제도로서의군부를하수인으로활용해왔다 네번째로든것은민주화이후한국민주주의가점진적으로안정화되었다는점이다. 특히민주주의에대한국민적지지높았다는사실을꼽았다. 다섯번째로는북한으로부터의위협을둘러싼환경의변화를지적했다. 북한위협은여전히실재하지만, 동시에냉전의완화로인해민간인정치지도자가대담한결정을내릴수있는환경이마련되었다는것이다. 이러한요인들은한국의탈정치화를설명하는데상당한적실성을갖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이러한설명은패권적지위를갖던군부가왜그렇게무기력하게물러나게되었는지충분하게분석하고있지못하다. 무엇보다민주화이후진행된한국정치의구체적맥락 (context) 에대한충분한고려가반영되지못하고있다는단점을지닌다. 국민이민주주의를강하게지지하고대통령이제왕적이라고할만큼강한권력을갖고있다면, 과연김대중이대통령인경우에도군의탈정치화조치가가능했을까하는의문을제기해볼수있다. 당시의현실적인여건을고려할때군으로부터강한비토를받고있던김대중대통령이김영삼대통령과같은방식으로군퇴진을과감하게행하기는쉽지않았을것이다. 또한군출신인노태우가민주화이후대통령으로당선되어군의이해관계가보장받게되었다고하지만, 민주적선거로당선된노태우는전두환의파벌과는차별성을두고싶어했다. 따라서노태우의당선과집권에대한해석역시군부전체를대상으로일반화해서설명하는것은적절해보이지않는다. 따라서보다종합적인차원에서의대안적설명이필요하다. 여기서는크게세가지측면에서한국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53 정치에서의성공적인군의탈정치화의요인에대해살펴보고자한다. 첫째, 정치적행위자에대한것이다. 앞서잠깐언급한대로, 김대중의집권기가아니라김영삼의집권하에군의탈정치화가이뤄졌을까, 김영삼대통령을제외하고한국민주화과정에서군의탈정치화를설명하기는어렵다. 그의의지, 정치력, 정치적전략이중요했다는점을간과해서는안된다. 한국대통령이민주화이후에도강한권력을유지했다고하더라도, 그것을효과적으로발휘할수있는정치적행위자가없었다는성공적인군의정치적퇴진은이뤄지기어려웠을것이다. 두번째로여기서주목하는것은김영삼의그러한정치력이발휘될수있게한정치적맥락에대한고려이다. 김영삼대통령의군탈정치화에대해군부가저항하기어려웠던것은그당시의김영삼대통령의집권세력내의정치적입지와깊은관련이있다. 따라서그러한상황을이끈정치적맥락에대한이해가매우중요하다. 세번째는군부내부의상황이다. 그동안많이지적된것은, 앞서언급한대로, 군부내파벌의문제이다. 제도로서의군부가아니라일부파벌이군사지배를주도했다는것이다. 그러나동시에민주화이후에발생한또다른군부내부의분열에도주목해야한다. 특히군출신으로민주화된선거에서당선된노태우대통령의역할과그로인한군부내의변화에대해서도주목해야한다. 이런세가지점은각각행위자요인, 정치맥락적요인, 그리고군내부의조직적요인을대표한다. 여기서강조하고자하는것은이세가지요인이서로분리되어있는것이아니라긴밀하게연계되어있다는것이다. 즉정치지도자의의지라는행위자측면, 민주화의진전과국민의높은기대감이라는환경적측면, 그리고군부내부의파벌정치라는요인이존재하더라도, 민주화이후의한국정치의전개와변화라는구체적인정치적맥락에대한이해없이는어떻게상호작용하면서신속하고전면적인군의탈정치화로이어졌는지에대해적절하게설명할수없다는것이다. 말하자면이런요인들이존재하더라도그것이군의탈정치화로이어지기위해서는세요인간의상호작용이정치적결과로이어지도록하는구체적인역사적, 상황적요인이함께작용하고있었다는것이다. 이제한국의성공적인군의탈정치화를가능하게한세가지요인에대해서보다상세하게살펴보기로한다. 3. 한국정치에서군의탈정치화과정 군의탈정치화와관련하여다른신생민주주의국가와비교할때한국의경우가흥미로운것은민주화초기에군의탈정치화가실현되었다는점이다. 특히긴세월동안의군정치개입의역사, 그리고사회여러영역에대한군출신과군사문화의침투를고려할때이러한신속한군부의퇴진은매우경이로운결과이다. 더욱이놀라운점은군의정치적퇴진이짧은시간동안급격하고도철저하게이뤄졌다는것이다. 즉군의정치개입은 민간정치엘리트에의한혁명적개혁을통한

5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탈정치화 ( 홍득표 1995: 264-266) 라는급격함을가질뿐만아니라, 그이후의결과역시 해체의전격성에도불구하고그이후군부의반발등방해의파장이예상외로부재했다는사실 ( 조현연 2007: 62) 이다. 이러한전격적이고철저한군의탈정치화는무엇보다김영삼대통령의정치력에서부터그논의를시작해야한다. 1) 행위자요인 : 김영삼대통령의정치력 민주화이후두번째실시된 1992년대통령선거에서김영삼후보가대통령으로당선되었다. 김영삼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로인해장면내각이붕괴한이후민간인출신으로최초로선출된권력자였다. 김영삼대통령은취임식연설에서추상적인표현으로에둘러말했지만, 분명하게군부권위주의시대를비판했다. 국민여러분. 흐트러지고있는국가기강을다시세워야합니다. 부정한수단으로권력이생길때, 국가의정통성이유린되고법질서가무너지게됩니다. 목적을위해서절차가무시되는편법주의가판을치게됩니다. 이땅에다시는정치적밤은없을것입니다. 또우리사회에있어야할권위를다시찾아야합니다. 우리의자유는공동체를위한자유여야합니다. 백범선생의말처럼공원의꽃을꺾는자유가아니라꽃을심는자유여야합니다. 1 부정한수단으로권력이생길때국가의정통성이유린되고법질서가무너지게 된다는것은군사쿠데타를통한권력의찬탈을지적한것이다. 그리고그시대를 정치적밤 으로묘사했다. 이런인식하에서김영삼대통령은군부에대한문민통제의확립을자신의집권의의미와시대적환경의변화를극적으로보여줄수있는과제로삼았던것이다. 문민정부를자임하면서출범한김영삼정부는집권초기핵심개혁대상으로군부를택하였다. 그것은군부에대한문민통제작업을, 새로운민간정부의정통성과민주주의의진전을담보할수있는가장중요한작업으로인식했기때문이다. 이는군의정치개입소지를원천적으로봉쇄시켜군을국가기구의일부분으로제도화하여군이더이상정치에직접적으로재개입하지않도록관리하고자하는민간정부의강한의지의표출이었고, 문민정부의도덕적우월성을국민들에게인식시킬수있는상징성높은고도의정치작업이었다 ( 조현연 2007: 66-67). 김영삼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취임했다. 취임직후인 3월 5일김영삼대통령은육군사관학교졸업식에서참석하여치사를통해 올바른길을걸어온대다수군인에게당연히돌아가야할영예가상처를입은불행한시절이있었다... 이렇게잘못된것을다시제자리에올려놓아야한다 고군의대폭적인개편을시사한바있다. 그런데취임후채열흘이지난무렵인 3월 8일전격적으로 1 http://15cwd.pa.go.kr/korean/data/expresident/kys/speech.html ( 검색일 2016. 10. 15).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55 육군참모총장과기무사령관을경질하는조치를취했다. 김진영육군참모총장과서완수기무사령관은모두이른바정치군인들의군맥인 하나회 의핵심인물이며, 김진영총장은 1979년 12.12 사태의주역중하나였다. 이들의임기는 1993년말까지였다. 육사졸업식에서의치사내용은원론적인수준에서의언급이아니라, 정치군부의퇴진에대한선언문이었던셈이다. 이러한전격적인정치군인에대한 숙청 은, 아래의신문기사에서보듯이, 당연히군내에서매우충격적으로받아들였다. 김진영육군참모총장과서완수기무사령관의전격경질은김영삼대통령의군부장악을위한 신호탄 으로풀이된다. 또 30여연만의문민통치시대에맞춰, 과거군사정권시절부터지금까지군부에뿌리깊게박혀있는정치군인들의제거작업이시작됐음을예고하는것으로받아들여진다... 군부에서는육참총장과기무사령관의경질이이렇듯빨리올줄은예견하지못한것같다...8일오전의전격적인인사에군내부는충격과경악을금치못하는모습이다. ( 한겨레신문 1993. 3. 9. 3면기사 ). 더욱이기무사령관의계급을중장에서소장으로격하시켰고대통령과기무사령관과의정례적인독대제도를폐지했다. 실제로그이전취임후기무사령관의네차례면담요청을모두거절했다. 기무사의악명높은정치사찰을폐지하고, 군본연의임무에충실하도록기무사의개혁도시도되었다 ( 김영삼 2001: 95). 군에서큰충격을받은것과달리, 군개혁에대한여론의지지는매우높았다. 아래의글은 문민시대와군의자리 라는제목의한신문사설이다. 새정부가들어서기가무섭게대대적인개혁의회오리바람이몰아치고있다. 대통령스스로앞장선이번개혁은구정권에서흔히보아온단순한정화운동과는차원이다르다... 그렇다면지금새정부가명운을건개혁에는군이라고해서예외적일수는없다, 국군도새시대가추구하는 신한국 건설에적극적으로동참하여거듭나지않으면안된다. 육군참모총장과기무사령관등군수뇌부의전격경질은이런취지에서이루어진것이다.... 우리군은 6.25 동란과해외파병등을거쳐많은발전과성장을이룩한것이사실이다. 병력규모에서뿐만아니라전술전략전기 ( 戰機 ) 면에서선진국과맞먹는수준이라고우리는자부한다. 그러나 60년이후한세대동안군의정치참여는우리의정치사회모든영역에숱한문제를파생시켰다. 민주주의의후퇴는말할것도없고온갖분야에뿌리내린군사문화는사회발전의저해요인이됐던것은부인할수없다. 이러한군사문화의침식이일부 정치군인 들의탈선에의해주도됐던것은더말할것도없다. 따라서앞으로군개혁의초점은정치탈색과엄정한정치중립성의확립이다 ( 경향신문 1993. 3. 10 사설 ). 군의정치개입이민주주의후퇴와군사문화의확산을가져왔다고비판하고, 정치탈색, 엄정한정치중립성의확립이중요하다는점을강조하고있다. 언론뿐만아니라국민사이에서도김영삼대통령의과감한군개혁조치는높은평가를받았다. < 표 1> 에서볼수있듯이, 김영삼대통령에대한여론의지지는취임첫달인 3월에는 70% 였지만, 그이후 80% 수준으로급격하게높아졌다는사실을알수있다.

5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표 1 김영삼대통령에대한지지도 (1993년 )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 70.0 83.2 82.4 82.4 81.5 79.3 82.0 81.5 87.3 63.3 자료 : 리서치앤리서치 2 김영삼이육군참모총장과기무사령관을전격조치한이후얼마지나지않은 1993년 4월 2일서울용산구동빙고동군인아파트에 하나회명단 이살포됐다. 유인물에는현역중장급인육사 20기부터중령급인 36기까지각기대표를비롯해기별로 7~11명씩모두 142명의이름이적혀있었다. 이유인물의내용은곧군내에퍼져나갔다. 그리고 4월 13일신문을통해일반인들에게도보도되었다. 이와관련하여수도방위사령관, 특전사령관, 2군사령관, 3군사령관, 합참 1차장등고위장성급을교체했고, 이후에는하나회소속영관급장교들도정리되었다. 정치적영향력을갖던고위장성들의경질그리고하나회해체는군에대한문민통제와한국민주주의발전에크게기여했다 (Woo 2010; Moon and Rhyu 2011). 이처럼군의탈정치화가성공적으로이뤄진첫번째요인은김영삼의정치력에서찾을수있다. 그는이사안을풀어야한다는강한의지를가지고있었으며, 매우치밀하게군의탈정치화를위한전략을마련해두었다. 김영삼은두가지정치적기회혹은정치적상징성을적절하게활용했다. 하나는임기초신임대통령에대한기대감이높은시점을최대한활용했다. 김대중, 정주영과의치열한 1992년대통령선거경쟁을통해김영삼은 42.0% 를얻어, 33.8% 를득표한김대중, 16.3% 를얻은정주영을누르고대통령으로당선됐다. 취임초는신임대통령에대한국민적기대가매우높은정치적밀월기 (honeymoon period) 이다. 이전시기에해결되지못한난제를풀고새로운변화와희망을가져다줄것을기대하는시기가바로임기초이다. 사실 1987년대통령선거결과가문민지배에대한국민의높은기대감을보여준바있다. 야권의분열로권력은노태우후보에게돌아갔지만, 김영삼 28%, 김대중 27% 로두후보의득표율은합치면 55% 로절반을크게넘었다. 김영삼은선거승리로인한민주적정통성과임기초신임대통령에대한높은기대감이라는정치적자산을적절하게활용할줄알았다. 대통령취임이전부터김영삼은군의탈정치화에대한의지를가지고있었고, 하나회라는군내의파벌의존재에대해서도잘알고있었다. 한달도안된상황인데... 대통령이되시기이전부터,.. 이상하게저군인들이파벌이많다. 그리고그파벌들이결국은인제신군부라는것을통해더강화가됐다. 저와같은파벌들을없애야된다하는생각을갖고계셨던것, 첫번째가. 두번째로는, 구체적으로하나회가어떤짓을했고어떻게어떻게됐다하는것을이미다알고계시더라구요. ( 권영해 2002). 당시하나회는매우막강한영향력을행사하고있었다. 2 http://w3.randr.co.kr/include/r_frame.asp?tactionurl=../info2013/infopage.asp ( 검색일 2016.10.5.).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57 하나회는 1992년까지 2명의대통령과 5명의안기부장 ( 정보부장서리 1명포함 ) 과 4명의경호실장등을배출하였으며, 육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특전사령관등군부의핵심요직을장악하였는데역대육군참모총장의경우 5명전원이, 보안사령관의경우 10명전원이, 수도방위사령관도 8명전원이하나회회원이었다. 그리고하나회는 1사단, 9사단같은수도권부대요직을독차지하다시피했으며, 육군본부인사참모부장을맡은 15명중 12명이하나회회원이었다 ( 조연현 2007: 57). 정치화된군을개혁하기위해서는임기초에전격적으로단행하지않으면안된다고판단했고, 그대로실행했다. 2월 25일취임식부터 3월 8일육군참모총장과기무사령관경질까지는채두주가지나지않았다. 김영삼대통령은군개혁을자신의임기시작후제일먼저처리해야할최우선순위의일로생각했던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은하나회를해체했고, 이들에게인사상의불이익을주었다. 또한과거정권하에서민간인사찰을포함하여광범위하게정치에개입해온기무사조직의재편과정치적역할을축소했다. 또한군수뇌부의대대적인교체와함께군내의각종비리척결등군의탈정치화를이뤄냈다. 나는군개혁이야말로전광석화처럼전격적으로단행하지않으면성공하기힘들다고판단했다. 모든개혁에는필연적으로저항이따르기마련이며, 특히군대내에서특수한사조직으로똘똘뭉쳐있는하나회의경우, 언제라도세력을규합해저항해올개연성이높았다. 따라서그들이세력을규합할시간적여유를주지않고전격적으로숙정을단행하는길만이최선의선택이었다 ( 김영삼 2001: 94-95). 이와같은전격적인군개혁으로김영삼정부는출범초기에이미군사령관급은 100%, 군단장은 60% 이상, 사단장은 40% 이상윽교체하는데성공하였다 ( 조현연 2007: 68). 또한최초로공군출신을합참의장에임명했고, 기무사령관에비육사출신을임명했으며, 국방부대변인도문민화했다. 예전과는전혀다른군인사가이뤄진것이다. 이처럼 전광석화와같이추진한깜짝놀 ( 랄 ) 만한군의개혁 은군의정치적중립을확보, 군에대한문민통제와우위확립, 군수조달비리척결등의효과를가져왔다 ( 홍득표 1995: 269). 김영삼대통령의또다른정치적자원은명분이었다. 김영삼대통령은자신이 1961년이후첫민간인출신대통령이라는역사적의미를잘이해하고있었으며, 그로인해자신의정부를 문민정부 라고칭했다. 민간인출신이이끄는민주주의의중요성을그는자신의대통령취임사의앞부분에서다음과같이강조했다. 친애하는 7 천만국내외동포여러분, 노태우대통령을비롯한전직대통령, 그리고이자리에참석하신내외귀빈여러분. 오늘우리는그렇게도애타게바라던문민민주주의의시대를열기위하여이자리에모였습니다. 오늘을맞이하기위해 30년의세월을기다려야했습니다. 마침내국민에의한, 국민의정부를이땅에세웠습니다. 오늘탄생되는정부는민주주의에대한국민의불타는열망과거룩한희생으로이루어졌습니다. 민주주의에대한저자신의열정과고난이배어있는이국회의사당앞에서오늘저는벅찬감회를억누를길이없습니다. 우리국민은참으로위대합니다. 저는국민여러분들에게뜨거운감사와영광을드립니다.

5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또한험난했던민주화의도정에서오늘을보지못하고, 애석하게먼저가신분들의숭고한희생앞에국민과더불어머리를숙입니다. 1961년이후민주화운동은군부권위주의체제에대한저항이었다. 김영삼자신이바로군부권위주의체제에저항한민주화운동의지도자중하나였다. 1987년민주화이후첫대통령선거에서김영삼후보의구호는 군정종식 이었다. 그리고 군정종식 의상징으로 12.12 사태당시계엄사령관으로신군부에피해를입은정승화를선거운동때내세운적이있다. 따라서김영삼대통령으로서는군을정치에서배제하고진정한의미의문민통제를이뤄내는것은그의정치적역정으로보나, 문민정부라는명칭에서볼때매우적절하고의미있는과업이었던것이다. 임기초군에대한전광석화와같은조치는김영삼이말하는 문민정부 의의미, 신한국 의의미를국민들에게매우극적인형태로깨닫게해주었고, 이는김영삼정부에대한기대감과새로운정치체제에대한신뢰를높이게해주었다. 군개혁에대한일반국민의높은지지는정치화된일부군의반발을억누르는데도움을주었고, 김영삼대통령의권위와리더십을강화하는데기여했다. 이는또다시군에대한문민통제를강화시키는효과를낳았다. 이처럼김영삼대통령이군부개혁에성공할수있었던또다른정치적자원은군부권위주의에저항해온그의정치적역정과 30년만의첫문민정부라는명분과기대감이었다. 2) 정치적맥락 : 3 당합당과김영삼 일부기존연구에서지적한대로, 군부의조속한정치적퇴진이이뤄진데에는민주화이후에도유지되어온강한권력을행사하는대통령이라는변수가중요하게작용했을것이다. 또한앞에서지적한대로, 문민대통령이갖는정통성과기대감, 그리고정치적의지와전략역시군의탈정치화를가능하게한요인이었다. 하지만이런요인을지나치게일반화하기는쉽지않아보인다. 김영삼대통령의정치력이나정치적권력의행사가정치군인들에게그다지큰반발없이수용하게만든정치적맥락을고려해야한다는것이다. 예컨대, 김영삼이아니라김대중이대통령이었다면민주화의초기에군에대한그와같은과감한개혁작업이가능할수있었을까? 김대중은과거군부권위주의시대에군부로부터의거부감이컸던인물이다. 1980년 5.18 계엄확대이후가택연금에처해졌던김영삼과달리, 김대중은신군부로부터 광주사태 의주동자로사형선고를받았다. 또한아래의글에서보듯이민주화이후에도여전히김대중에대한군부의거부감은컸다. 김대중과의만남몇주전, 육군참모총장박희도는김대중의대통령출마가능성에대한군부의반대를공개적으로밝혔다. 김대중이설사선거에서당선된다고해도군지도부가그를대통령으로받아들일것인가에대한매우심각한우려가존재했으며, 그를살해할수도있다고생각하는사람들이적지않았다. (Oberdorfer 2001: 177).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59 김영삼보다더한김대중에대한거부감은군부가바라보는그의이념적지향이나혹은출신지역등개인적요소와관련이있을수있다. 그러나여기서관심을갖는 1993년의상황이다. 그상황에서는김대중보다는덜하겠지만김영삼역시군부로서는환영할만한대상은아니었을것이다. 기왕이면군출신인박태준이나이종찬이더바람직한선택이었을것이다. 김대중못지않게김영삼역시군부권위주의체제에집요하게저항해왔다. 하지만 1993년상황에서김대중과김영삼은정치적으로매우상이한입장에놓여있었다. 과거에군부에저항하는민주화운동의동지였던김대중과김영삼의정치적입장을당시다르게만든것은 3당합당이었다. 1988년민주화이후첫국회의원선거에서는여소야대의 4당체제가만들어졌다. 야 3당은공조를통해정국을주도해갔고노태우정부는이로인해상당한어려움을겪었다. 이런열세를모면하기위해노태우정부는비밀리에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협의를통해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합당하여민주자유당을창당하기로했다. 전격적으로이뤄진 3당합당은당시정치적으로많은논란을일으켰였며, 유일한야당으로남게된평민당으로부터강력한저항을불러왔다. 그러나과거적대적이었던두세력, 즉권위주의체제의정당이었던민정당과민주화운동을이끌어온김영삼의통일민주당의합당은더이상 권위주의대민주화운동 이라는이전의대립축이민주화이후상당히모호해지게되었음을의미하는것이었다. 3당합당과함께민주화운동을이끌던과거야당세력은분화되었다. 이에비해 3당합당에서소외된김대중은군의시각에서볼때여전히외부자였고, 민주화이전에바라보던시각에서근본적인변화를만들기어려웠다. 그런데이와함께주목해야하는것은구권위주의체제내부의변화이다. 노태우는 3당합당으로더이상전두환으로대표되는구권위주의세력과차별화할수있는정치적기반을확립하게된것이다. 전두환이 12.12 사건이나 5.18 계엄확대와같은군사력에의존해권력을유지해왔다면, 노태우는민주적경쟁선거를통해권력을잡았고또민주화운동세력의일부가자신의정치적기반이되었던것이다. 이로인해민주화이전군부권위주의세력은구주류와신주류로분명하게구분될수있게되었다. 다시말해, 3당합당이노태우에게중요했던이유는일차적으로는여소야대의구도를깨트리고국회내안정적다수를확보함으로써정국운영의주도권을갖게되었다는것이지만, 또한편으로는더이상구권위주의체제구주류세력에게정치적으로의지하지않아도되는상황을만들어냈다는것이다. 특히과거민주화운동의한축이었던김영삼과연대하게됨으로써과거권위주의의일부라는부담에서벗어나민주화된정치환경에적합한새로운정체성을확립할수있게되었다. 김영삼과같은정파에속하게됨으로써민주대반민주구도에노태우정부나민자당을자리매김하기는어렵게되었다 ( 강원택 2012). 이와같이변화된상황에서김영삼은군부에게이제정파적으로 내부자혹은한편 이된것이다. 3당합당으로민주대반민주구도가흐트러진상황에서김영삼은더이상이전시대의적대적존재가아니게된것이다. 따라서김영삼의대통령당선은정치화된군의입장에서볼때는민자당

6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을통한 정권재창출 이이뤄진것이다. 이런상황에서군에대한김영삼의개혁은, 그들이거부감을갖는외부자나적대세력에의한것이아니라, 정치화된군이함께속해있는동일한정파적집단집내부에서이뤄지는일이된것이다. 군으로서는김영삼의군개혁조치에대한거부감이있더라도그것이김대중에대한지지나심지어옹립으로이어질수는없는일이었다. 이와같이 3당합당으로인해김영삼과군과의관계는변화되었고, 이러한정치적맥락속에서김영삼의전격적인군개혁에정치화된군은속절없이그결정을받아들여야했던것이다. 3) 조직적요인 : 군내부의갈등 앞에서언급한대로, 한국군부권위주의체제의특징은그것이조직으로서의군의지배가아니라, 군의한파벌에의한지배라는점이다. 1961년박정희나 1980년전두환모두군대내일부파벌에의존했다. 이는라틴아메리카등외국에서나타나는군의정치적개입의사례와구분되는것이다. 남미의경우군부권위주의정권의태동은 제도로서의군부 가일치단결하여정치에개입함으로써시작되었다. 예컨대그들은육해공군참모총장이군복을입고국가평의회를구성하여스스로대통령직을맡거나지명했고정치를주도했다... 그러나한국의경우는보스를중심으로결속된 파벌로서의군부 가정치에개입하였고, 제도로서의군부는군부정권의수립과정이나정권유지에도구적역할을수행하는배경막을형성하였다 ( 조현연 2007: 54). 따라서군의개혁이이뤄지더라도그것은군전체를대상으로하는것이아니라, 정치에적극개입한일부파벌의문제가된다. 그런만큼군부의탈정치화가성사될가능성이크다는것이다. 한국에서군부개입은소수의정치화된장교들의위험을감수한모험의산물이다. 군사쿠데타의전리품은이러한모험에개입한이들이독점하게된다. 병영에머물러있던이들은어떠한혜택도가질수없다. 그러나이들은정치화된장교들과똑같이대중들의격렬한비판의희생물이된다. 장교들간에이와같은혜택의불균등한배분은군부내에내부적갈등을촉발했다. 더욱이, 민주정치체제하에서정치화된장교들을처벌하는반면비정치화된장교들을승진함으로써혜택을부여하는관행은한국군부의정치적중립성을촉진시켰다 (Jun 2001: 40). 그런데군부내일부파벌의독주와배파적혜택은군전체로서는갈등과분열의원인이된다. 전두환시기에하나회에속하지않은군장교들로서는이러한상황에매우불만을지닐수밖에없다. 외형적으로강력한군부지배로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상당한수준의잠재적균일내재되어있던것이다.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61 하나회라는정치군부는자신들의이해관계와군부정권의존립을위해군내요직을독점하고단합된결사조직을유지해왔다. 이들이획득한파이의분배역시제도로서의군부가아닌파벌로서의정치군부에집중될수밖에없었다. 이처럼정치군부로서하나회의파벌적득세는제도로서의군부가군내에서공정한경쟁에의한진급과보직을보장받지못하게하는핵심적장애요인이었으며, 따라서그것은군내부의잠재적인균열과갈등요인이기도했다 ( 조현연 2007: 58) 그런데 1993년상황에서보다주목해야하는것은정치화된군내부에서전두환세력과노태우세력간의갈등과분열이다. 즉, 군부내부의갈등은중첩적이었던셈이다. 하나회와비하나회의갈등뿐만아니라, 하나회내부에서도전두환쪽과노태우쪽간의갈등이나타났다. 권력과관련된군내의파벌은더욱분열된형태로존재하고있었다. 앞서언급한대로, 민주적선거경쟁을통해당선된노태우는전두환과자신을차별화하고싶어했다. 더욱이권력의위임이대통령 1인에게집중되는대통령제하에서후임대통령은전임자와자신을구분하고싶어한다. 그러나전두환은헌법에국가원로자문회의규정을포함했고, 이를통해퇴임후에도국정에일정한영향력을행사하고싶어했다. 더욱이새대통령의취임을눈앞에두고군인사에도개입했다. 전두환은임기퇴임직전인 1987년 12월군인사를단행했다. 육군참모총장박희도를 1년유임했고, 합참의장에최세창, 3군사령관에고명승, 기무사령관에최평욱, 수방사령관에김진영등자신의직계들을군부핵심요직에등용했다. 두달뒤대통령으로취임할노태우입장에서볼때, 전두환의이와같은조치는신임대통령인자신의권력에대한도전이었다. 사실노태우대통령은취임후과거의민군관계로부터의변화를도모했다. 노태우는취임후민군관계의변화를추진했으며, 제 2 창군선언및추진, 군의민주화와정치적중립, 그리고국방행정의공개등을천명했다. 아래의인용문은노태우대통령의제 2 창군에대한신문사설이다. 노태우대통령이지난 (6월) 22일군의권위주의의식에서의탈피를당부하면서 각군은제2의창군이라는자세로최강의새국군건설에노력해달라 고강조한것은민주화시대에요청되는새국군의바람직한위상을군통수권자가제시한것으로큰의미를지닌다. 군의민주화는이제불가피한시대적요청이다. 국민으로부터지지와신뢰를받기위해서는경직된군대상이아닌친근감을주는민주적군대여야한다. ( 경향신문 1988. 7. 25. 사설 ) 노태우대통령은그스스로군출신이었기때문에이러한시도에도불구하고군의탈정치화, 군의문민통제를이루기에는그한계가분명했다. 하지만민주화시대에맞게군을바꾸려고한시도는그이전의군부권위주의정권에서와는뚜렷한차이를보인다. 군출신이라고해도민주화된시대에대통령이된노태우로서는민군관계에있어과거와는상당히차별화되는접근을시도한것이다. 이런점에서노태우하의군부는박정희나전두환시절의군부와는매우다른민군관계를권력으로부터요구받았다. 전두환정권과의차별화는이와함께실질적인군인사개편을통해이뤄졌다.

6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노태우정권은출범과동시에전두환이퇴임직전에만들어놓은군인사체계를조심스럽게그러나단계적으로허물기시작했다. 그것은퇴임직전전두환의육군수뇌부인사에대한노태우의거부표시이자 5공군부와 6공군부간의차별성을부각시키기위한조치였다. 취임 4개월후인 1988년 6월임기 6개월을남겨놓은육참총장박희도를경질하고자신의경북고후배인이종구를임명했다. 전두환의백담사은둔후에는보안사령관최평욱을교육사령관으로좌천시키고그자리에조남풍을임명했다. 이런상황에서육사교장민병돈의직접적인대정부비판은부분적개편에도불구하고골격이유지되었던전두환계열의 1.1 인맥의군수뇌체계를완전히바꾸는계기가되었다. 그결과육사교장에는민병돈대신에이필섭이, 수방사령관에는김진영대신에구창회가차지했다. 이러한군인사체계개편의핵심은하나회전두환인맥의퇴진과노태우의 9.9 인맥의부각이라할수있다... 그리고그것은그동안전두환을중심으로견고하게응집되어있던하나회가전두환계보와노태우계보로분열되는것이가시화되는계기가되었다 ( 조현연 2007: 64-65). 이처럼노태우정부에들어서면서신군부혹은하나회로불리던정치화된군세력은분열되었다. 노태우의군부는전두환의군부와구분되었다. 노태우의군수뇌부는이른바 9.9 인맥이주종을이뤘다. 9 9인맥이란하나회출신중에서도특히노대통령이 9공수여단장 (74년 10월 ~77년말 ) 과 9사단장 (79년 1 월 ~79년말 ) 이던시절그휘하에서근무했던사람들을가리키는말이다. 여기에는노대통령이수도경비사령관 (79년말 ~80년 8월 ) 과보안사령관 (80년 8월 ~81년 7월 ) 으로재직하던때의참모들도포함된다... 9 9인맥으로는이필섭합참의장구창회군사령관김진선육참차장안병호수방사령관최기홍국방부정책기획관등이군내에포진해있다. 이진삼전육참총장이문석전총무처장관 장성득전육본인사운영감등은최근예편한 9 9인맥이다. 결국하나회출신 9 9인맥이군수뇌부를장악한가운데일반하나회원장성들이그아래군의모든분야에서중추를이루는형국에서김영삼정부를맞은것이다. 이처럼신군부는전두환계와노태우계로나뉘어있었고, 김영삼대통령이취임했던당시에는노태우관련인맥이군수뇌부를차지하고있었다. 하나회로결속되어있었다고하지만결속력은이전에비해상대적으로약화되어있었다고볼수있다. 더욱이제한된형태라고는하지만노태우정부시기에군을민주화된환경에적응시키려는시도역시과거군부권위주의시대에비해정치화된군파벌의내적응집력을상대적으로약화시키는결과를낳았다. 전두환의군파벌이전두환 1인을중심으로뭉친형태였다면, 노태우대통령하에서의군파벌은외부적상황의변화를의식해야하는보다느슨한형태의결집이었던것이다. 그만큼김영삼대통령이군개혁을단행할때, 이에대한조직적저항은쉽지않은상태에이미놓여있었던것이다.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63 4. 나가며 군에대한문민통제는민주적공고화를위해서는필수불가결의조건 (conditio sine qua non) 이다 (Croissant and Kuehn 2009: 189). 신생민주주의가안정적으로유지하기위해서는군의탈정치화는반드시해결해야할첫과제라고할수있다. 한국은 1961년이후 30년가까이지속된군의정치개입의긴역사에도불구하고민주화의초기단계에서성공적으로군의탈정치화와군에대한문민통제를성공적으로이뤄냈다. 이제한국정치에서군이쿠데타등을통한정권찬탈을시도하거나정치에부적절한영향력을행사하는것은불가능한일이되었다. 민주화의초기에이뤄진군의탈정치화는그자체로도커다란의미를가졌을뿐만아니라, 이후정권교체등으로이어지면서한국민주주의의공고화를위해매우중요한기반을닦았다. 하나회척결은대한민국이군사쿠데타의악순환으로부터완전히탈피해서문민민주정부가안착하는계기가되었다... 김대중씨가대통령이될수있었던것은김영삼대통령이하나회를척결하지않았더라면가능한일이아니었다고생각한다. 당시 DJ 측도자기비토세력중에군의비토가제일강하다고알고있었고, 그당시김대중씨가대통령이되면군사쿠데타가있을것이라는것이거의정설처럼떠돌던시기였다. 김영삼대통령이하나회를척결하지않았다면과연김대중대통령이나올수있고그리고노무현대통령이당선될수있었겠느냐하는역사적사실은인정해야한다 ( 김덕룡 2012). 이처럼민주화초기에성공적으로군의탈정치화를이룰수있었던원인에대해서살펴보았다. 역시가장중요한요인은문민지배에대한우리국민의높은지지가가장중요한요인이라고할수있다. 야권단일화실패로집권에는실패했지만이미민주화직후인 1987년대선당시김영삼, 김대중두후보의득표율은 55% 에달했다. 이러한국민적여망은정치지도자의의지와정치력, 치밀한전략에의해임기초매우극적인형태로실현되었고, 성공적인군의탈정치화는김영삼정부뿐만아니라신생민주주의체제의안정성과신뢰를높이는계기를마련했다. 그렇지만김영삼대통령의성공적인군개혁을정치적행위자의요인만으로설명될수는없다. 김영삼이라는정치지도자가당시의정치적맥락속에서차지했던위치역시매우중요한요인이었다. 민주화이전김영삼은군부권위주의체제에대한반체제운동의지도자였다. 군으로서는, 김대중보다는덜적대적이었을지모르지만, 그렇다고해도반대파의지도자였다. 하지만 1990년의 3당합당과함께김영삼은이제정치화된군을포함한집권세력의중요한한축을이루게되었다. 1992년대선에서김영삼의당선은신군부로서도 권력재창출 로받아들여야하는상황이된것이다. 따라서김영삼의군개혁은그들에게적대적인외부자로부터의공세가아니라, 내부세력, 아군으로부터의지시와명령이었던것이다. 그만큼이러한대담한군개혁에대해노골적으로저항하기란어려웠던것이다. 그리고또한가지들수있는중요한요인은군내부의분열이다. 기존연구에서는하나회와

6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비하나회간의분열과갈등을제시했지만, 이에못지않게중요한것은전두환계와노태우계간의분열이다. 하나회자체도노태우의당선이후분열된것이다. 이와같이정치화된군의응집력약화는김영삼의군개혁에유리한환경을마련했다. 이와동시에지적되어야할중요한점은노태우대통령이전두환정권과차별화를모색했고, 군문제에대해서도민주화라는변화된환경에적응하기위한노력을행했다는점이다. 본질적인한계에도불구하고, 노태우대통령의제 2 의창군등군의변화를이끌기위한노력은노태우계의군수뇌부들이새로운차원에서민군관계를바라보도록하는데영향을미쳤다. 이처럼한국에서군의탈정치화는정치적행위자, 정치적맥락, 그리고군부내부의분열등여러가지요인이맞물리면서성공적으로이뤄지게된것이다. 이와같은군개혁은신생민주주의국가의안정성과민주적공고화에도움을주었을뿐만아니라, 군부에대한국민의신뢰회복에도커다란도움을주었다. 군의탈정치화에대한완결은김영삼정부후반기에이뤄진 12.12 사태, 5.18 계엄확대와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군개입등과관련하여전두환, 노태우두군출신대통령을사법처리한것이다. 이로인해한국정치에서, 헌팅턴이말한, 근위대의문제와고문관의문제가모두해결되었다. 사실군개혁이성공할수있었던내재된원인중하나는광주에서의군의역할에서도찾을수있다. 광주민주화운동에대한군의무력진압이후군전반에대한불신과거부감이국민들사이에확산되었고, 군의위신과명예가크게실추했다. 이런사건이발생한것은정치화된일부군세력때문이었으며, 정치중립을핵심으로하는구직업주의를중시하는대다수군에는매우부정적인영향을미쳤다. 이처럼 광주항쟁의무력진압은민-군관계를악화시키는결과를초래하였고, 군의정치개입에반대하는국민들의감정을더욱공고하게만들었으며, 동시에한국에서군부의정치개입은더이상불가능하게될것이라는역사적인교훈을알려주는계기가되었다 ( 홍득표 1995: 267). 민주화의제 3의물결이 30년전전세계적으로거세게몰아쳤지만, 오늘날각국의정치현실을살펴보면그당시의장및빛희망이민주주의의제도화와공고화라는결실로이어진사례는생각보다많지않다. 그만큼한국의사례는예외적이고특별하다. 한국이비교정치적으로안정적인민주적공고화를이루게된데에는이른시기에군의탈정치화를이뤄냈다는사실과깊은관련이있다. 이글에서그것을가능하게한여러가지요인을제시했지만, 결국가장중요한요인은군의탈정치화와문민통제에대한우리국민의강렬한열망이라고할것이다.

군의탈정치화와한국의민주화 65 참고문헌 강원택. 2012. 3당합당과한국정당정치. 한국정당학회보 11권 1호, 171-193. 권영해. 2012. 김영삼대통령국내인사구술사업 : 권영해구술산출물. 서울 : 김영삼민주센터. 김덕룡. 2012. 김영삼대통령국내인사구술사업 : 김덕룡구술산출물. 서울 : 김영삼민주센터. 김영삼. 2001. 김영삼회고록 : 민주주의를위한나의투쟁 ( 상 ). 서울 : 조선일보사. 김호진, 1997. 한국정치체제론. 수정7판. 서울 : 박영사. 서경교. 1993. 군부의정치퇴진에관한비교연구 : 태국, 필리핀, 한국의경우. 한국정치학회보 27집 2호, 291-313. 임혁백. 1994. 시장 국가 민주주의 : 한국민주화와정치경제이론. 파주 : 나남. 조현연. 2007. 한국민주주의와군부독점의해체과정연구. 동향과전망 69호, 51-81. 한용원. 1993. 한국의군부정치. 서울 : 대왕사. 홍득표. 1995. 한국의정치변동 : 군의탈정치화를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9집 2호, 253-274. Croissant, Aurel. 2014. Democratic Change and Civil-Military Relation in South Korea: Re-evaluation and Implications for Developing Countries. 대한민국역사박물관개간 2주년국제학술대회 한국과세계 : 현대사와함의. (2014.12.5.), 93-114. Croissant, Aurel. 2004. Riding the Tiger: Civilian Control and the Military in Democratizing Korea. Armed Forces and Society 30(3), 357-381. Croissant, Aurel and David Kuehn. 2009. Patterns of 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 in East Asia s New Democracies.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9, 187-217. Finer, Samuel. 2002. The Man on Horseback: The Role of the Military in Politics. New Brunswick: Transaction Publishers. Huntington, Samuel. 1991. The Third Wave: Decentral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Jun, Jin-sok. 2001. South Korea: consolidating democratic civilian control, in M. Alagappa (ed.), Coercion and Governance: The Declining Political Role of the Military in Asi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21-142. Lipset, Seymour Martin. 1959. Some Social Requisites of Democracy: Economic Development and Political Legitimacy.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53 (1), 69-105. Mietzner, Marcus. 2011. Overcoming Path Dependence: The Quality of 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 in Post-Authoritarian Indonesia. Asi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19(3), 270-289. Moon, Chung-in and Rhyu Sang-young. 2011. Democratic Transition, Persistent Civilian Control over the Military, and the South Korean Anomaly. Asian Journal of Political

6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Science 19(3), 250-269. Oberdofer, Don. 2001.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 Revised and Updated. Indianapolis: Basic Books. O Donnell, G. and P. Schmitter. 1986. Transition from Authoritarian Rule: Tentative Conclusion about Uncertain Democracies.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Saxer, Carl. 2004. Generals and Presidents: Establishing Civilian and Democratic Control in South Korea. Armed Forces & Society 30(3), 383-408. Stepan, Alfred. 1973. The New Professionalism of Internal Warfare and Military Role Expansion, in A. Stepan (ed.). Authoritarian Brazil: Origins, Policies and Futur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47-65. Woo, Jongseok. 2010. Crafting democratic control of the military in South Korea and the Philippines: the problem of military factions. Contemporary Politics 16(4), 369-382. 한겨레신문 1993. 3. 9. 일자.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67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서복경 ( 서강대학교 ) 1. 들어가며 그림 1 민주화이후역대정부와국회 1987년헌법개정으로한국사회는주기적인선거를통해행정부권력과입법부권력을교체하는민주주의정치체제를채택했다. 그리고 2016년현재한국정치는민주화이후 6번째행정부와 8번째입법부를경험하고있다. 한국민주주의질에대해서는바라보는관점에따라여러견해가존재하지만, 최소한정부구성의원리로서민주주의는정착되었다고말할수있다 (Hahm 2008; Dimond 2008). 선거를통한 2번의정권교체를성공적으로지나면민주주의체제의정착을말할수있다 (Huntingtion 1991, 267) 고보았던헌팅턴의견해에따른다면, 한국은 1997년김대중정부의출현과 2008년이명박정부의출현으로 2번의정권교체시험을무사히통과한것이다. 또한전례없는경제위기의파고를넘어시장민주주의로전환했으며 (Shin 2006, 8), 권위주의시기관료와군부가선거를통해정당으로제도화되는 퇴행적제도화 (perverse institutionalization, Olavarria 2003) 가발생하지도않았다. 이런경험은한국민주주의가성공적인공고화단계에이르렀다는평가를가능하게했다. 이과정에서시민들의민주주의정치체제에대한인식도변화를거듭했다. 민주주의공고화에대한한연구에따르면, 권위주의에서민주주의로체제이행을경험한국가에서민주정체가공고화되기위해서는다수대중들에의한민주주의원칙과가치의수용이중요하며적어도 70% 이상의대중이민주주의가다른정치체제보다우월하다는믿음을지속할수있어야한다고주장한다 (Diamond 1999, 69). 민주주의원칙과가치에대한대중적지지는독재나권위주의체제등다른형태의정치체제와의비교속에서민주정체의우월성에대한지지정도로측정이가능하다 (Klinggemann, 1999). 1990년

6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대이후유로바로미터 (Eurobarometer), 아시아바로미터 (Asiabarometer: AB), 아프로바로미터 (Afrobarometer), 라티노바로미터 (Latino Barometer) 등의조사에서는유사문항을통해각지역국가들의민주정체지지도를측정해왔으며, 한국민주주의바로미터 (Korea Democracy Barometer: KDB) 는한국유권자들의인식만을주기적으로조사해왔다. 조사문항은 1) 민주주의는다른어떤형태의정부 ( 제도 ) 보다항상더낫다, 2) 상황에따라서는독재체제가더낫다, 3) 나같은사람에게는독재나민주주의나상관없다 는 3종류진술가운데자신의의견과가장가까운진술을선택하도록구성되어있다. < 그림 2> 은 1996년부터 2015년까지조사결과로, 조사문항중 1) 을선택한비율만을나타낸것이다. 그림 2 한국유권자들의민주주의인식 (1996 2015) 출처 : KDB(1996, 1997, 1998, 1999, 2001, 2004, 2010);AB(2003); SK 좋은정부연구단 (2014, 2015) KDB 조사에동문항이포함된것이 1996년부터이므로그이전의민주주의지지인식에대해서는알수없다. 그러나 1996년과 1997년의지지도가큰차이가없으며 1998년이후큰변동이발견되는것으로보아 1987년민주화이후 10여년간의인식은체제이행에대한높은기대를반영한상태였을것으로추정된다. 반면 1998년부터 2000년대초반까지지지는지속적인하락을보이고있는데, 이는 IMF 외환위기와정권교체효과로추론해볼수있다. 신생민주주의국가들에서민주정체지지는상당부분경제적수행력 (economic performance) 에달려있으며새로운체제가국민들이요구하는정책적성과를제공할수있는가가중요한기준이라는기존연구 (Brraton and Mattes 2001) 의발견처럼, IMF 외환위기의발발과수습과정에서한국의민주정부가보여준수행력은민주정체지지하락으로이어진것으로보인다. 또한 1997년의정권교체는민주주의에대한기대현실화효과를가져온것으로추정된다. 한국의민주화는권위주의집권세력과야당들의협약에의한방식으로이루어졌다. 민주화직후집권한노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69 태우정부는 5공화국집권당정부였고뒤이은김영삼정부는 3당합당으로만들어진민자당정부였기때문에, 권위주의시절야당을지지했던유권자들의입장에서는권위주의야당계열정당의집권에대한높은기대수준을유지했을가능성이높다. 그러나정권교체로김대중정부가현실화되면서이런기대는일정한조정기를거친것이다. 우리나라처럼권위주의를경험하고민주화를진행한다른나라의사례를보더라도민주화이후민주정부에대한기대현실화과정은보편적인현상으로발견된다 (Diamond, 2001). 아직오지않은민주주의체제에대한높은기대가현실화된민주주의체제의수행능력을보면서조정되는과정을불가피하게겪게되는것이다. 노무현정부출범이후한국유권자들의민주주의에대한승인은다시높아졌고 2015년까지그추세를유지하고있다. 이글은과거와현재, 그리고나아가야할미래에대한과정적관점을유지하면서, 지난 30년의제도정치변화를정리하고자한다. 이글에서사용하는 제도정치 의범위는입법부-행정부의제도적관계를기본으로, 입법-행정부가시민사회와맺는관계영역인정당및선거정치를포괄한다. 지난 30년의변천과정은헌법의해석과적용, 국회법, 정당법, 선거법, 정치자금법등개별법률의변화를주소재로하되, 제도및실천의변화기점마다발생했던주요사건사 ( 史 ) 의흐름과맥락위에서변화의궤적을정리하는접근방식을택한다. 2. 입법부 - 행정부관계 민주화이후입법부-행정부관계는과거행정부압도적우위형체제를상호견제형체제로전환시키기위해노력해온과정으로정리할수있다. 헌법과법률에따라입법부가행정부를견제할수있는권한은입법권, 예 결산심의를통한재정감독권, 국정감사나조사를통한행정부업무감독권, 조약체결및비준에대한동의권, 국무위원에대한해임건의권이나인사청문회등고위공직자인사견제권으로그영역을나누어볼수있다. 1) 입법영역 민주주의정치체제에서국가주요정책의일차적투입경로는법률안의발의혹은제출 1 이다. 1987 년헌법에따르면국회에법률안을제안할수있는주체는국회의원과정부다. 권위주의시대였던 11대국회에서는총접수법률안가운데 58% 가정부제출법률안이었고 12대국회에서도정부제출법률안이 44% 를차지했다. 민주화이후첫번째국회였던 13대국회접수법률안 938건가운데 1 우리헌법은정부와의원에게법률안제출권을보장하고있는데, 주체를구분하기위하여정부가법률안을내는행위를 제출 로, 의원이내는행위를 발의 로구분하고있다.

7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39% 인 368건도정부가제출한것이었다. 그러나국회구성이거듭되면서점차정부제출법률안의비중은낮아졌고, 19대국회에이르면접수법률안가운데정부제출법률안의비중은 6% 에그쳐, 점차정부제출법률안의비중이낮아지는걸확인할수있다. 정부제출법률안의경우도 13대국회에비해 19대에 3배늘어났지만, 입법부구성원들이발의한법률안의증가추세가훨씬가팔랐기때문에전체에서차지하는비중은줄어든것이다. 국회에접수된모든법률안이 법률 이되지는못하지만, 법률 이되지못한법률안이라고해서의미를갖지않는것은아니다. 법률안의접수는그자체로특정한입법수요가국회안으로들어와 의제 가된다는것으로, 위결과는입법부의입법의제설정권한이점차커진것으로해석할수있겠다. 표 1 역대국회접수및처리법률안현황 (13 대 19 대 ) 접수 처리 의원 위원장 정부 합계 심의처리 임기만료폐기 13대 462 108 368 938 806 132 14대 252 69 581 902 763 139 15대 806 338 807 1,951 1,561 390 16대 1,651 261 595 2,507 1,753 754 17대 5,728 659 1,102 7,489 4,335 3,154 18대 11,191 1,029 1,693 13,913 7,612 6,301 19대 15,444 1,285 1,093 17,822 8,011 9,811 국회 [ 의안정보시스템 ] 2016 년 11 월 30 일확인. 13대국회에접수된총법률안수는 938건이었던데반해 2016년임기가종료된 19대국회에제출된법률안수는 17,822건으로, 지난 30여년간 19배가증가했다. 이가운데국회가심의하여처리한법률안의수 2 는 13대 806건에서 19대 8,011건으로 10배가늘어났다. 19대국회는 13대국회에비해 19배의정책의제를접수했고 10배에이르는심의와결정을내림으로써그제도적기능을확장한것이다. 권위주의시대입법부가 통법부 라는오명을쓰게된데에는, 행정부가마련한법안에대해심의권을제대로행사하지못한채그대로통과시킬수밖에없었던역사가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민주화이후국회대수가거듭될수록정부제출법률안에대한입법부의심의권행사도강화되었다. 2 국회가심의 처리한모든법률안이 법률 로성립되는것은아니다. 법률안의처리방식은원안가결, 수정가결, 대안반영, 부결, 일반폐기, 철회, 임기만료폐기등으로나뉜다. 이가운데발의된법률안이원안이나수정안형태로가결되면이경우는곧바로법률이된다. 대안반영 의경우는 2개이상의법률안이함께심의되어위원회대안형태로성안되는것으로, 법률안의내용이법률로반영되기는하지만한개의법률안이그자체로법률이되는것은아니라는점에서차이가있다. 국회가심의한결과로부결되거나폐기, 철회되기도한다. 위원회심의이전에발의 ( 제출 ) 자가스스로 철회 하기도하고, 위원회심의를거쳤지만법률로반영하지않고 폐기 하기도하며본회의에상정되었으나 부결 되기도한다. 이글에서는이모든과정을 심의 처리된것으로본다. 단, 임기만료폐기 는상정조차되지못했거나상정은되었으나심의가종료되지않은상태에서임기가끝난경우안건의처리방식을말한다.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71 13대국회에서는정부가제출한법률안의 38% 가원안그대로가결처리된반면, 19대국회에서그비율은 12% 로줄어들었고나머지법률안에대해서는수정가결, 대안반영등의방식으로심의권을행사한것으로확인된다. 또한지난 30여년행정부와입법부는법안심의를보다계획적으로할수있도록제도를정비함으로써, 심의의질을담보하려는노력을진행해왔다. 우선정부는연단위로법률안제출계획을마련하고이를연초에국회에통지함으로써, 국회가보다체계적으로법안심의스케줄을작성할수있도록제도를마련했다. 2000년 국회법 개정으로매년 3월 31일까지정부의연단위법률안제출계획을국회에제출하도록했고, 2011년다시법을개정하여매년 1월 31일까지통지하도록그일정을앞당겼다. 또한국회는 2000년 국회법 개정으로 9월부터시작되는정기회외에임시회를매년 2월, 4월, 6월에개최하도록하였으며 2016년법개정으로 8월에도임시회를정례화하도록하였다. 국회의연간일정제도화로, 헌법에명시된 100일의정기회는예산안과예산부수법안심의에집중하고, 그외임시회에는정부제출법률안및의원발의법률안의심의를진행하도록한것이다. 이처럼과거행정부주도형관행이점차개선되고헌법이부여한배타적입법권을입법부가제대로행사하는방향으로개선된것이변화의한축이라면, 입법영역제도변화의다른한축은 위임입법 을둘러싼제도변화였다. 위임입법이란입법부가위임한범위내에서행정기관이입법권을대리행사하는것으로,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등이있다. 2016년현재우리나라의법률총개수는 1,541개인반면대통령령은그보다더많은 1,644개, 총리령과부령은 763개에이른다. 표 2 우리나라법령현황 법률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 1,541 1,644 763 법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 2016년 12월 05일확인. 점점더복잡해지는사회변화속에서입법의탄력성을확보하고행정기관이가진집행전문성을반영하기위한장치로서 위임입법 은불가피한면이있다. 그런데이처럼광범위하게입법위임이이루어지다보니, 어느나라에서나위임입법에대한입법부의통제문제가발생하고있다. 행정기관의위임입법내용이당초입법부가법률을통해위임한범위의한계를지키고있는지여부를입법부가감독하고, 한계를이탈한위임입법에대해서는정정할권한을가짐으로써법률과위임입법의경계를분명히할필요가대두되는것이다. 1997년까지우리법률체계에서는국회의위임입법통제에대한제도적관념이존재하지않았고, 이는권위주의시기포괄적위임에의한행정부입법관행을그대로승인해온결과였다. 1997년에서야 국회법 에 행정기관의장이위임입법을제정하거나개정하면 7일이내에국회에송부 하도록하여보고의무를명시했다. 2000년 국회법 개정에서는행정기관에서제출받은위임입법에대

7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해상임위원회가정기적으로검토하고법률의취지나내용에합치되지않는다고판단할경우그내용을통보할수있도록하였고, 2005년에는국회의검토내용을통보받은행정기관의장이처리계획과결과를소관상임위원회에보고하도록하여, 위임한계를벗어난위임입법이정정될수있는근거를마련했다. 2015년에는, 보고된위임입법에대해소관상임위가검토를한후법률의위임범위를넘었다고판단하면위임입법의수정과변경을요구할수있도록하는 국회법 개정안이본회의를통과했으나, 이를입법부의월권으로판단한대통령의재의요구로입법에이르지는못했다. 영국이나독일, 미국등의선진국입법례를보면, 위임입법이위임한계를넘었을때할수있는조치들은훨씬다양하다. 위임입법의경중을분류하여, 국회의승인이없으면자동적으로효력을상실하게하거나, 국회의승인이있어야만효력이발휘될수있게하거나, 국회의수정요구가있을경우행정기관의수정절차에국회가직접개입할수있게해놓는등의다양한조치를두기도하고, 이런조치들을법률제 개정과정에서미리삽입해두기도한다. 우리보다오랜민주헌정체제운영경험을가진나라들에서고안된이런장치들은위임입법과의회입법의법적일관성을갖추기위한오랜고민들을반영한것으로, 향후우리나라제도개선과정에참조사례가될수있을것이다. 그런데입법부의위임입법통제는이러한제도개선의노력도필요하지만, 국회의실천적노력도중요한문제로남아있다. 19대국회의경우 4년동안시행령과시행규칙을단 1회라도심의했던위원회는환경노동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단 3개밖에없는것으로확인되었다 3. 법률의숫자보다훨씬많은시행령, 시행규칙이법률과일관성을갖추게하는것은헌법에명시된입법권을실질화하는문제일뿐만아니라, 그법규범아래에서살아가야할정치공동체구성원전체의복리를위해서도중요한문제가아닐수없다. 2) 재정운용영역 민주주의정치체제에서국가재정운용은입법부와행정부의긴밀한협조와함께상호견제원리가작동되어야하는핵심제도영역이며예산심의와결산심사를기본으로한다. 1987년헌법은회계연도개시 90일전까지 정부가편성한예산안을국회에제출하고국회는회계연도개시 30일전까지 이를의결하도록하고있으며, 감사원은매년결산심사를하여차년도국회에이를보고하도록해놓았다. 2007년이전까지우리나라입법부와행정부의예산및결산심사관련기본일정은 예산회계법 을근거로했다. 1988년부터 2006년까지정부는이법에따라예산편성안을회계연도개시 90일전까지국회에제출하고, 결산안은다음다음연도회계연도개시 120일전까지국회에제출하도록되어있었다. 이일정에따르면정부는매년 9월초에결산안을제출하고 10월초에예산안을제출하 3 각위원회홈페이지에나온위원회일정및안건을확인한결과다 (2016 년 5 월 30 일확인 ).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73 게되기때문에, 국회는 9월한달동안결산심사를완료한후곧바로다음회계연도예산안심사를개시해 60일의기간내에예산심의를완료해야만헌법이정한일정을완료할수있었다. 그런데문제는이시기가국정감사일정과겹친다는점이었다. 2012년 국정감사및조사에관한법률 ( 이하국감국조법 ) 개정이있기전까지, 국회는매년 9월에 20일동안국정감사를진행하도록되어있었다. 예산회계법 과 국감국조법, 국회법 에따른결산심사, 국정감사, 예산심의일정이이렇게겹치다보니결산심사는부실해지고국정감사일정에밀려예산심의도부실해지는상황이지속된것이다. 2001년의경우, 국회는 8월 31일에 2000회계년도결산안을제출받았지만국정감사일정에밀려 11월 13일에서야결산심사를완료할수있었고, 9월 28일제출받은예산안심의는 12월 27일에야마칠수있었다. 표 3 국회의예산 결산심의일정 (2001 2015) 예산 ( 안 ) 결산 정부제출일 국회의결일 정부제출일 국회의결일 2017회계년도 2016-09-02 2016-12-03 2015회계년도 2016-5-31 2016-09-02 2016회계년도 2015-09-11 2015-12-03 2014회계년도 2015-05-29 2015-09-08 2015회계년도 2014-09-22 2014-12-02 2013회계년도 2014-05-30 2014-10-02 2014회계년도 2013-10-02 2014-01-01 2012회계년도 2013-05-31 2013-11-28 2013회계년도 2012-09-28 2013-01-01 2011회계년도 2012-05-31 2012-09-01 2012회계년도 2011-09-30 2011-12-30 2010회계년도 2011-05-30 2011-08-31 2011회계년도 2010-10-01 2010-12-08 2009회계년도 2010-05-28 2010-10-01 2010회계년도 2009-10-01 2009-12-31 2008회계년도 2009-05-28 2009-09-29 2009회계년도 2008-10-02 2008-12-13 2007회계년도 2008-05-30 2008-11-24 2008회계년도 2007-10-01 2007-12-28 2006회계년도 2007-05-31 2007-10-08 2007회계년도 2006-09-29 2006-12-27 2005회계년도 2006-06-09 2006-09-29 2006회계년도 2005-09-30 2005-12-30 2004회계년도 2005-07-27 2005-09-14 2005회계년도 2004-10-02 2004-12-30 2003회계년도 2004-08-06 2004-12-08 2004회계년도 2003-09-30 2003-12-30 2002회계년도 2003-08-29 2003-11-10 2003회계년도 2002-10-01 2002-11-08 2001회계년도 2002-09-10 2002-10-30 2002회계년도 2001-09-28 2001-12-27 2000회계년도 2001-08-31 2001-11-13 제도정비는우선 국회법 상결산안제출일정을조정하는것에서부터시작되었다. 국회는 2003 년법을개정하여, 정부가매년 5월 31일까지전년도결산안을국회에제출하도록하고국회의결산안심의는정기회개회이전까지완료하도록했다. 그러나 예산회계법 상정부의결산안국회제출일정은 2007년까지 다음다음회계연도 120일전 규정을그대로유지하고있어, 2003년부터 2007년까지의과도기를거쳐야했다. 결산안제출및심의일정이 2003년 국회법 개정이후곧바로효력을발휘하지못한데에는, 정부의결산안작성일정전반을재조정해야하는현실적인문제가있었기때문이다. 중앙부처의결산안이우선마련되고행정부전체의결산안으로집결된후국무회

7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의를거친다음감사원감사를완료해야만국회에제출될수있었기때문에, 국회제출일정을앞당기려면행정부와감사원결산일정전반이조정되어야했던것이다. 정부는 2004년 8월 6일, 2005 년 7월 27일, 2006년 6월 9일로점차결산안제출일정을앞당길수있었고, 2007년에이르면 5월 31일제출일정을충족할수있게되었다. 국가재정운용을둘러싼다음단계제도정비는 국가재정법 의제정이었다. 2007년 1월 1일부터시행된 국가재정법 은중장기적비전하에서국가재정을운용할수있도록제도화하고예산편성단계에서부터행정부와입법부의긴밀한협조와견제가가능한시스템을마련했다. 우선정부는매년예산안을제출할때당해회계연도부터 5회계년도이상의기간에대한재정운용계획 ( 국가재정운용계획 ) 을함께제출하도록함으로써, 정부의예산편성과국회의예산심의에서연단위를넘어선중장기시야를갖도록제도화했다. 또한재정담당장관이중앙관서의장에게통보하는 예산안편성지침 을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도보고하게함으로써, 국회가이미편성이완료된예산안을받아심의에들어가는것이아니라, 행정부예산안편성첫단계에서부터정보를교류하면서심의를위한준비를할수있도록제도를마련했다. 그리고 2003년 국회법 개정으로도입된결산안제출기한 5월 31일규정을명시하였다. 2013년에는 국가재정법 을개정하여 회계년도개시 120일전 까지예산안을국회에제출하게함으로써, 국회예산심의기간을 30일더확장하였다. 2012년 국감국조법 개정으로국정감사를정기회개회이전에완료하도록함으로써, 제도적으로만보면국회는 90여일동안온전히예산심의에만집중할수있게된것이다. 그러나예산관련일정역시제도의마련과현실화사이에는과도기가존재했다. 정부는 2013년 10월 2일, 2014년 9월 22일, 2015년 9월 11일로점차제출일정을앞당겼고 2016년에이르러서야법적일정을준수할수있게되었다. 한편국회는예결산심의일정만이아니라심의의형식과내용에대한제도개선을통해국가재정통제권을실질적으로행사하려는노력을진행해왔다. 우선국가재정심의전담위원회의제도화가진행되었다. 13대이후우리나라국회의재정심의전담위원회는예산결산특별위원회였다. 1994년이전까지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일반특별위원회와마찬가지로구성시기, 정원, 위원의임기등이제도화되지않은한시위원회로운영되었다. 국회는 1994년법개정을통해매년결산안제출시점에맞춰예산결산위원회가자동구성되도록하는제도를마련했으며, 2000년에는 50명정원의 1년임기상설특별위원회체제를제도화했다. 국회의국가재정심의및감독이결산및예산안심의시기에만국한되는것이아니라, 연중상시체제로작동되어야한다는제도적인식이최초로도입된것이다. 이후 1년임기상설특별위원회체제를넘어안정적인상임위원회체제로전환시켜야한다는제도개선안이꾸준히제기되고있으며, 향후제도개선과제로남아있는상황이다. 다음으로국회는심의대상이되는국가재정의범위를점차확장함으로써과거행정부에일방적으로맡겨져있던재정운용영역에견제와균형의원리를제도화해왔다. 2001년에는정부로하여금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75 예산안과별도의기금운용계획안을제출토록하고심의, 확정권을제도로명시했으며, 2010년에는임대형민자사업한도액에대해서도심의권을명시했다. 그리고 2005년에는정부제출예산안, 결산, 기금운용계획안에대한심의를위해공청회를의무화했는데, 이것은국가재정운영이더이상행정부와입법부관계를넘어국민의알권리를보장하고이해관계자의참여를보장하는영역이되어야한다는제도적인식의출발로해석할수있다. 민주화첫해인 1988년대한민국정부의예산은 18조로출발했다. 2016년국회를통과한 2017 년도정부예산은 1988년예산의 22배가넘는 400조 7천억에이른다. 앞으로국가재정을둘러싼입법부, 행정부관계는편성권과심의, 확정권을나누는기계적이분법이아니라, 예산편성과심의 확정, 재정집행, 결산의전과정에서긴밀한정보공유와상호견제체제를구축하는방향으로나아가야할것이다. 3) 정책집행영역 지난 30년입법부-행정부관계의제도변화를살펴볼수있는세번째영역은정책집행을둘러싼정보공유와상호견제체제다. 현대의민주정부들은방대한정책영역과국가재정운용의필요때문에불가피하게정책의결정단계와집행단계를나누어운용하게된다. 입법과예산심의, 확정이입법부가행사하는정책결정의주요영역이라면, 행정부는입법부와의협의로결정된큰범위내에서중범위, 소범위의일상적정책결정을담당하고관련정책에대한집행책임을진다. 그러나이것은법적책임의구분일뿐, 현실에서대부분의민주정부들은긴밀한상호협조체제를구축하면서동시에상호견제를통해일상의국정운영을함께해나가고있으며, 지난 30여년간우리나라입법부와행정부도이방향에서제도를개선하고경험을축적해왔다. 행정부의정책집행에관한정보는국정감사와일상적인청문회, 대정부질의등을통해입법부에전달되며, 입법부는이러한제도적공간속에서견제와감독을통해국정운영의책임을공유한다. 민주화직후구성된 13대국회는개원직후인 1988년 8월 국정감사및조사에관한법률 을제정했고, 국회에서의증언 감정등에관한법률 에대한전문개정을단행했다. 13대국회가국정감사와국정조사에대해이렇듯민감하게반응한것은, 권위주의체제에서국회의권한제한이가장표면적으로드러난영역이었기때문이다. 제헌헌법에서부터제3공화국헌법에이르기까지입법부의국정감독권은 국회는국정을감사하기위하여필요한서류를제출케하며증인의출석과증언또는의견의진술을요구할수있다 는조문으로보장되어있었다. 그런데 1972년유신헌법에서는이조항이사라졌고, 1980년제5공화국헌법에서는 국회는특정한국정사안에관하여조사할수있으며, 그에직접관련된서류의제출, 증인의출석과증언이나의견의진술을요구할수있다. 다만, 재판과진행중인범죄수사 소추에간섭할수없다 는제한적인조항만이명시되었다.

7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제4 5공화국에서국회는국정감사의유명무실화와일상적인정보교환의차단으로정책집행과정에서온전히소외되어있었으며, 현안에대한국정조사역시작동되지않았다. 제4공화국시기였던 9대국회에제출된국정조사요구서는단 1건이었지만이조차임기만료로폐기되었고, 제5공화국전반기 11대국회에는 7건의국정조사요구서가제출되었지만모두부결되거나폐기되었다. 12대국회에서도모두 11건이제출되었지만모두임기만료로폐기되었다. 이런조건에서국회의원들은행정부의일상활동에대한정보접근과견제권행사에대한강력한의지를갖게되었고, 이것이현행헌법의조문으로구체화된것으로보인다. 현행헌법은국정감사와국정조사권을함께명시했고, 13대국회는국정감사와조사에관한법률적근거를마련한것이다. 그런데이과정에서 국정감사 와 국정조사 의의미가작위적으로이원화되는문제가발생했고이문제는앞으로제도개선의과제로남아있다. 3공화국이전까지헌법에명시된국정감사는행정부국정운영전반에대한입법부의감독권을명시한것으로, 이조항하에서일반국정감사, 특별국정감사만이아니라국정조사까지입법부의필요에따라시행된바있었다. 그러나현행헌법에서국정조사와병렬적으로국정감사가명시되면서국정조사와구별되는국정감사에대한제도적절차가마련되어야했고그결과연중일정기간을정해진행하는국정감사와현안에대한국정조사제도가정착된것이다. 13대국회이후국정감사제도는정기회개회이후 20일동안진행되는집중감사형식을유지하다가 2012년법개정으로정기회개회이전까지 30일동안의국정감사를완료하는것으로제도가변경되었지만, 아직실행단계로정착은제대로되지않고있다. 2016년의경우도각위원회의국정감사는제도적가이드라인인 8월이전이아닌대개 10월에시행되었다. 각소관위원회가관할정부부처에대해일괄감사를진행하는형식을채택하다보니, 행정부처의감사준비일정과위원회일정을조율해야하는문제에직면해있는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국회전체차원혹은위원회차원의상시적인청문회와일상적인국정조사로국정전반에대한정보를행정부처와국회가공유해나가면서상호견제하는제도가정착되는것이입법부의국정감독권행사에더적합한방안이될것이다. 13대국회이후이러한일상적인정보교환과견제제도도점진적인발전을이루어오고있다. 1994년 국회법 개정으로, 국회는본회의결의로회기중국정전반이나특정국정분야에대한대정부질의제도를도입했으며, 의원 20인이상의찬성이있으면긴급현안질문을의장에게요구할수있고의장은운영위원회와협의하여의장의결정이나본회의의결로이를추진할수있게되었다. 또한 13대국회는위원회의결로중요안건의심사에필요한경우증인, 감정인, 참고인으로부터증언, 진술을청취하고증거를채택하기위한청문회를개최할수있는제도를도입하였으며, 2011 년에는법개정으로소위원회의의결로도청문회를개최할수있도록하여상시적으로국정전반에대한감독권을행사할수있는제도적기반을마련하였다.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77 한편국회는 1988년 국감국조법 으로국정조사제도의토대를마련했다. 재적의원 1/3의요구가있으면특별위원회나상임위원회를통한국정조사를개시할수있으나, 국정조사의실재적시행은조사담당위원회가조사의목적, 조사할사안의범위와조사방법, 조사에필요한기간및소요경비등을기재한 국정조사계획서 를본회의에제출하여승인을얻어야만가능했다. 위원회의조사가종료되면 국정조사결과보고서 를제출하고본회의에서의결로보고서가채택되는절차로국정조사는마무리된다. 13대국회에서는 4건의조사요구서제출이있었고그중 2건의조사계획서가승인되었으며결과보고서채택도이루어졌다. 14대국회에는 5건의조사요구서가제출되었고모두조사계획서승인이있었지만결과보고서는 2건만채택되었다. 13대에이어 14대에서도 평화의댐건설 국정조사나 12.12 군사쿠데타적사건 국정조사는민주화이전시기발생한사건을대상으로하였으며, 공직자세금부정사건 이나 삼풍백화점붕괴사건 은당대발생한사건을대상으로한것이다. 15대국회에는 14대국회의 4배가넘는 23건의조사요구서가제출되었다. 15대국회임기는민주화이후최초의정권교체가일어난시기와겹치며, 이와관련하여선거공정성을둘러싼국정조사요구와정보기관의활동관련국정조사요구등이있었다. 또한 15대국회는 IMF 외환위기 의발발과수습과정을함께했기에위기관련국정조사요구도겹쳐졌다. 그러나실재조사계획서가채택된건은 23건가운데 4건에불과했고결과보고서가채택된건 IMF환란원인규명과경제위기진상조사 를위한국정조사 1건이었다. 표 4 역대국회국정조사진행현황 (13 대 19 대 ) 대수 조사요구서제출 13 대 4 14 대 5 15 대 23 16 대 20 17 대 12 조사계획서채택 결과보고서채택 1990 제5공화국에있어서의정치권력형비리국정조사 1990 조선대생이철규군변사사건국정조사 1993 평화의댐건설국정조사 1993 12 12 군사쿠데타적사건및율곡사업국정조사 1994 상무대공사대금일부정치자금유입의혹사건의진상조사를위한국정조사 1994 공직자세금부정사건국정조사 1995 삼풍백화점붕괴사건국정조사 1996 제15대국회의원총선거에있어서공정성시비가있는사안에대한국정조사 1997 한보사건국정조사 1999 IMF환란원인규명과경제위기진상조사를위한국정조사 1999 한국조폐공사파업유도진상조사를위한국정조사 2000 공적자금의운용실태규명을위한국정조사 2002 공적자금국정조사 2004 이라크내테러집단에의한한국인피살사건관련진상조사를위한국정조사 2005 쌀관세화유예연장협상의실태규명을위한국정조사

7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대수 조사요구서제출 18 대 17 19 대 10 조사계획서채택 결과보고서채택 2008 미국산쇠고기수입위생조건개정관련한 미기술협의의과정및협정내용의실태규명을위한국정조사 2008 쌀소득보전직접지불금불법수령사건실태규명을위한국정조사 2011 저축은행비리의혹진상규명을위한국정조사 2013 공공의료정상화를위한국정조사 2013 국가정보원댓글의혹사건등의진상규명을위한국정조사 2014 개인정보대량유출관련실태조사및재발방지를위한국정조사 2014 세월호침몰사고의진상규명을위한국정조사 2015 정부및공공기관등의해외자원개발진상규명을위한국정조사 15대국회에서폭증한국정조사요구는 1988년법제정당시마련된국정조사요구요건 재적의원 1/3 이너무엄격한제한이며제도개선이필요하다는주장에힘을실었으며, 국회는 2000년법을개정하여요건을 재적의원 1/4 로완화하였다. 이후 16대국회에 20건의국정조사요구서가제출되었지만, 국정조사계획서승인이본회의의결을요건으로하는규정은변화하지않은조건에서 2건의조사계획서승인만이루어졌고그나마결과보고서채택은단한건도이루어지지못했다. 17 대국회에서도 12건의조사요구가운데 2건만조사계획서가승인되었고결과보고서채택은 1건에그쳤으며, 18대국회역시 17건의조사요구가운데 3건의조사계획서승인과 1건의결과보고서채택이이루어졌다. 19대국회는 10건의조사요구중 5건의조사계획서가승인되어이전보다비율이높아지긴했지만, 결과보고서채택은 2건에그쳤다. 역대국회에서결과보고서채택에까지이른것은 2014년 개인정보대량유출사건 이나 2013년 공공의료정상화 관련국정조사, 2011년 저축은행비리 국정조사처럼정부기관과직접관련성이작은사회적사건을대상으로한국정조사들이었다. 반면 2013년 국가정보원댓글의혹사건 이나 미국산쇠고기수입위생조건 관련국정조사처럼행정부처의활동이직접적인대상이되는경우에는결과보고서채택이무산되는경우가많았다. 국회의국정감사나국정조사, 위원회차원의상시적인청문회와본회의대정부질문제도등은, 관련정보를국회를통해일반유권자들에게공개되도록함으로써정책집행의투명성을높여행정부와입법부전체에대한유권자들의신뢰를재고할수있으며, 국가정책집행과정에서행정부와입법부의상시적인협업구조를가능하게하여비효율성을제거하고보다신중한국정운영을가능할수있게하는장치다. 점점더가속화되는현대국가의정책다변화와재정규모확장추세속에서, 앞으로의국정운영은빠른결정과집행효율성측면만이아니라다차원적인교차견제를통한신중한결정과섬세한집행측면에대한제도적고려가중요하게고려되어야할것이다.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79 4) 통상조약체결및비준영역 지난 30여년동안의제도정치변화를가져온네번째영역은, 우리정부가외국과맺는조약에관한헌법적권한경계에관한것이었다. 현행헌법제60조는국회가상호원조또는안전보장에관한조약, 중요한국제조직에관한조약, 우호통상항해조약, 주권의제약에관한조약, 강화조약, 국가나국민에게중대한재정적부담을지우는조약또는입법사항에관한조약의 체결 비준에대한동의권 을갖는다고명시하고있다. 정부수립이후오랫동안조약의체결은행정부의권한으로, 비준은입법부의권한으로간주된것이오랜관행이었으나, 노무현정부에서추진된한-미자유무역협정 (FTA) 은헌법제60조의해석에전환적계기를마련했다. 제헌헌법은대한민국정부가다른국가와맺는조약에대한국회권한으로 비준권 만인정했으며선전포고에한해동의권을인정하고있었다. 제헌헌법의이조항은제2공화국헌법까지그대로유지되었고, 제3공화국헌법에서 조약의체결 비준에대한동의권 으로그내용이변경되어현행헌법에까지이르고있다. 제3공화국이후이헌법조항의내용은변경없이유지되었으나, 실재정부의조약체결과정에서입법부의권한은제1 2공화국과마찬가지로행사된적이없었고제6공화국에서도노태우정부, 김영삼정부, 김대중정부에이르기까지그관행은그대로지속되었다. 그런데노무현정부집권시기였던 2006년, 국회에는정부의통상조약체결절차를규율하는법률안 3건이역사상최초로제출되었다 4. 그이전까지국회는정부가조약의협상개시부터체결에이르기까지전과정을종료한후비준안을제출하면비준안에대한가, 부만을결정했다. 따라서조약체결절차를규율하는법률의수요자체가등장하지않았던것이다. 그런데이시기통상조약체결절차를규율하는법률수요가등장한것은 2006년부터노무현정부가추진하기시작한한-미 FTA 때문이었다. 2005년정부가한-미 FTA 추진을위한사전실무점검회의를진행했다는사실이알려지면서국회와시민단체를중심으로찬반논란이격렬해졌다. 2006년 2월정부는협상추진을공식발표했으며, 2007년 3월까지 8차례의공식협상을거쳐 2007년 4월협상타결을발표했다. 정부의협상일정이진행되는동안스크린쿼터제축소에대한문화계의반발, 농업시장개방에대한농민들의반대가확산되었고관련전문가들도찬반의견을둘러싸고격돌을했다. 이과정에서헌법제60조는재해석되었으며, 입법부가외국과의조약에대한비준권만이아니라 체결에대한동의권 을갖는다는사실이새롭게 발견 된것이다. 2006년제출된 3종의통상절차관련법률은이런과정을통해탄생되었다. 노무현정부는 2007년 9월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17대국회에제출했지만 17대국회는이를 4 당시제출된법안은 통상협정의체결절차에관한법률안 ( 권영길의원대표발의, 의안번호 173849), 통상조약의체결절 차등에관한법률안 ( 이상경의원대표발의, 의안번호 174996), 통상협상절차에관한법률 ( 송영길의원대표발의, 의안번호 175227) 3 종이었다.

8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처리하지않고임기를종료했다. 2008년 2월부터임기를시작한이명박정부는집권직후한-미쇠고기수입협상의건으로대규모시민저항에직면했고, 정부의대외협상절차및과정에대한사회적불신이더욱강력해졌다. 2008년 10월정부는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18대국회에다시제출했지만국회는 2011년 11월까지비준동의안을처리하지못했고, 2011년 2 3월에는협정안의번역오류까지발견되면서다시한번행정부주도의통상조약체결절차에대한불신이확산되었다. 17대국회에이어 18대국회에도의원발의법률안으로통상절차관련법률이 7건이나제출되었다. 2011년 11월국회는결국한-미 FTA 비준동의안을가결처리했지만, 그해 12월 통상조약의체결절차및이행에관한법률 ( 이하 통상조약법 ) 을제정함으로써이후조약체결과정에서입법부의권한행사가가능한제도적기반을마련하게되었다. 통상조약법 은정부가헌법제60조제1항에따른조약체결을추진하려고할때계획수립단계에서부터국회에이를보고하도록하였고, 협상진행과정에중대한변화가발생할경우에도이를국회에보고하도록하였으며, 조약체결절차및이행에대한정보공개청구가있을시공개의무를부과하여과거협상개시이후체결에이르기까지의과정을사실상독점했던행정부의권한을약화시키는대신국회와일반시민들의견제가가능하도록제도를마련하였다. 또한행정부의판단으로 통상조약법 적용대상이아니라고판단해독자적으로협상을진행한경우에라도사후에국회가이를 통상조약법 적용대상으로판단하면비준동의안을제출하도록함으로써, 사후적견제장치도마련하였다. 2016년현재까지 통상조약법 이제대로실천되고있지는못하다. 예컨대 2014년정부는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Trans-Pacific Strategic Economic Partnership, TPP) 을위한예비회담을개시한이후에도국회에이를제대로보고하지않아, 계획단계에서부터보고하도록되어있는법절차위반논란에휘말린바있었다. 제도를만들었다고해서곧바로이것이행위자들의오래된관행을규율할수있는것은아니다. 특히조약에관한한정부수립이후최근까지행정부독점적영역으로인지되어왔고입법부역시이를승인했었기때문에, 앞으로도 통상조약법 이현실적규범으로자리잡기까지는상당한시간이필요할것으로보인다. 그럼에도 통상조약법 은가장마지막까지행정부독점영역으로남아있던조약의체결과정에입법부와행정부의협업구조를창출했다는점에서, 현행헌정질서운용에갖는의미가크다하겠다. 국가간조약은점점더국내적영향력을크게미치고있으며, 그자체로국내법적효력을가질뿐아니라유관법률의효력을무효화시키거나새로운법질서를창출하기도한다는점에서대한민국정치공동체구성원모두에게크나큰영향을미치고있다. 통상조약의계획단계에서부터정보를공유하고공동의심의를진행하는과정은당연히필요하며, 이를통해국익에더도움이되는방향으로협상을진행해나갈수있는중요한제도적수단을마련할수있을것이다.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81 5) 고위공직자인사검증영역 입법부-행정부관계에서마지막으로살펴볼것은고위공직자인사검증에관한것이다. 현행헌법은국회에국무총리와감사원장, 대법원장및대법관, 헌법재판소장에대한임명동의권, 헌법재판소재판관 3인과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 3인의선출권을부여하고있다. 13 14대국회는헌법에규정된공직자에대한임명동의권및선출권만을행사했으나, 2000년인사청문제도를도입하여국회의최종판단이전에청문회를통한인사검증을제도화했고, 헌법에명시된공직이아닌공직후보자들에대해서도대통령이나대법원장의인사청문요청에따라검증절차를진행하는범위를점차확장해오고있다. 법개정시점 2000 2003 표 5 국회인사청문대상자범위의확장과정 인사청문회확대적용직위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원장및대법관, 헌법재판소장, 헌법재판소재판관 3 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후보자 3 인 대통령당선자지명국무총리후보자대통령임명국가정보원장, 국세청창, 검찰총창, 경찰청장후보자 청문회단위 인사청문특위 인사청문특위 상임위 2005 대통령임명헌법재판소재판관 (3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 (3인), 국무위원후보자대법원장지명헌법재판소재판관 (3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 (3인) 후보자 상임위 2006 대통령임명합동참모의장후보자 상임위 2007 대통령당선인지명국무위원후보자 상임위 2008 대통령임명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후보자 상임위 2012 대통령임명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금융위원회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한국은행총재후보자 상임위 2014 대통령임명특별감찰관, 한국방송공사사장후보자 상임위 인사청문회제도는미국에서고위공직자인사검증을위해발전되어온제도로, 미국과우리나라는헌법적맥락이크게다르다. 미국연방헌법은고위공직자의범위를열거, 명시하시하거나제한을두지않은채 연방상원의조언과동의를얻어 대통령이임명하도록해놓았고, 상원은헌법취지를구현하는제도로서인사청문회제도를발전시켜왔다. 반면우리나라인사청문회제도는헌법에국회의임명동의권과선출권이명시된공직에제한받지않고대통령이나대법원장이임명하거나지명하는법률상의공직후보자들까지그범위로포괄하고있다는점에서차이가있다. 미국의인사청문회제도가헌법때문에발전된것이라면, 우리나라의제도발전은현실적필요에따른결과라고볼수있다. 민주화이후대통령이나대법원장이임명하거나지명한고위공직자들의도덕성문제나비리사건이빈발하면서, 공직후보자들에대한사전검증을강화함으로써국가기관에대한신뢰를제고하려는제도적필요가대두되었기때문이다. 우리나라고위공직자인사검증의특

8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성은직위적합성이나능력검증보다병역, 교육, 납세, 재산축적등의도덕성검증이더중요하게고려되는것인데, 이런현상은민주주의정치체제운영경험이상당기간더축적되어야변화가가능할것으로보인다. 이상에서지난 30여년우리나라입법부-행정부관계의제도적, 실천적변화들을개괄해보았다. 각각의발전과정은서로다른동인과과정을통해이루어졌지만, 종합적으로는선출된대통령과국회가서로를견제하면서도동시에협업하는제도적구조를마련하는방향으로움직여온것으로정리할수있다. 삼권분립의원리는서로다른권력기관들이상호견제하면서하나의독점적권력을창출하지못하게하는원리일뿐만아니라, 견제과정을통해정보를투명하게공유하고국정운영의중대결정들이교차적심의를통해이루어질수있도록함으로써주권자인국민에대해보다책임있는정부를구성하게하는원리에토대를두고있는것이다. 한세대동안한국민주주의의제도적운영경험또한이러한방향으로움직여온것으로볼수있다. 3. 민주화 30 년과정당및선거정치 민주주의정치체제에서입법부와행정부는선출된대표들에의해운영되며, 대표의선출은선거를통해이루어지고, 선거경쟁과선거와선거사이집권경쟁의기본단위는정당체제가된다. 정당체제는경쟁하는정당들의시스템으로서사회를대표하는민주주의정치체제핵심메커니즘을구성한다. 정당을결성하고활동하는건시민들의자발적선택에의한결사이지만, 일단선거경쟁을통해선출공직자를배출하게되면시민사회와민주주의제도정치를매개하면서시민적요구를제도정치에투입하고제도정치의의제와방향을시민들에게설득하는제도적기능을수행하게되는것이다. 시민들은경쟁하는정당들의스펙트럼속에서자신들의정치선호를투영하고지지와정책을교환하기때문에, 정당체제가불안정한민주주의에서는선출된정부와시민사회의관계도불안정해질수밖에없다. 지난 30여년동안선거를통해구성된역대국회의원내정당들은아직짧은한국민주주의경험을드러내주는중요한지표가된다. 앞서살펴본입법부-행정부관계가제도적으로는상당한진전을이루어왔음에도여전히실천적으로는많은과제를안고있는것의중요한원인으로, 이러한정당체제불안정을꼽을수있다. 민주주의에서입법부와행정부라는제도를운영하는핵심주체는정당이기때문이다. 이하에서는민주화이후정당과선거정치의역사를개괄한다. 1987년 6.29 선언 과헌법개정, 대통령직접선거로이어진일련의과정은권위주의집권정치세력과권위주의시기야당의정치적, 제도적타협으로진행되었다. 1988년 13대국회의원선거로만들어진원내정당구조는이러한역사의명료한산물이었다. 13대국회제1당이자제6공화국첫정부의집권당은제5공화국집권당민주정의당이었고, 제1 2야당은권위주의야당의계보를이었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83 으며, 신민주공화당은그명칭에서보이듯이제3공화국집권당의부활을표방했다. 권위주의시기제도정치와단절된정치세력중원내정당이된집단은 1석을얻은한겨레민주당하나였다. 여소야대 로출발했던 13대국회는구성 2년만에 여대야소 체제로변경되었다. 원내 5당가운데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세당이민주자유당으로통합되었기때문이다. 선거를통해구성된대표들이선거와선거사이대의메커니즘으로국정을운영하는체제에서, 유권자들이선거를통해구성해준원내의석분포를선거가아닌방식으로변경하는것은대의제원리와충돌하는측면이있었다. 예컨대 13대총선에서유권자들은다수의석의야당들을만들어놓음으로써원내소수당인집권당을견제하고자하는집합적의지를표명한것인데, 집권당과야당일부가합당을통해과반이넘는다수집권당을만든것이 13대총선민의를제대로대의했다고볼수있는가의문제다. 1990년 3당합당 이후 1991년에이르는시기동안시민사회일각에서는대중적저항이조직되었는데, 그이면에는이러한대의제원리와정당정치현실사이의충돌이있었던것이다. 표 6 역대국회원내정당과의석수 (13 20 대, 선거종료시점기준 ) 대수 원내정당 ( 의석수 ) 무소속 ( 의석수 ) 총의석수 13 대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한겨레민주당 무소속 합계 1988 125 70 59 35 1 9 299 14 대민주자유당민주당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무소속 1992 149 97 31 1 21 299 15 대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통합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무소속 1996 139 79 15 50 16 299 16 대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민주국민당 자유민주연합 한국신당 무소속 2000 133 115 2 17 1 5 273 17 대한나라당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민주노동당국민통합 21 무소속 2004 121 152 9 4 10 1 2 299 18 대한나라당통합민주당창조한국당자유선진당민주노동당친박연대무소속 2008 153 81 3 18 5 13 26 299 19 대새누리당민주통합당자유선진당통합진보당무소속 2012 152 127 5 13 3 300

8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대수 원내정당 ( 의석수 ) 무소속 ( 의석수 ) 총의석수 20 대새누리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무소속 2016 122 123 38 6 11 300 1992년은현행헌법에따른대통령 5년임기와국회의원 4년임기가만나는첫해였다. 봄에총선으로 14대국회가구성되었으며겨울에는 14대대선으로새로운정부가구성되었다. 14대총선시점집권민주자유당은, 13대국회의원내의석분포를기준으로볼때 3개의원내정당의석총수에훨씬미치지못하는 149석을얻었지만대선을통해새로운정부를구성해낼수있었다. 14대총선에서는 통일국민당 이원내정당으로새롭게등장했다. 통일국민당 현상은지난 30여년한국정당정치와선거정치에서반복된한패턴의출발을알렸다. 14대대선이후 대선후보중심신생정당의출현과소멸 현상이반복되었기때문이다. 통일국민당은당시 14대대선출마를계획했던정주영후보를중심으로결성되었고 14대대선이전에시행된 14대총선에서일약 31석을얻어원내제3당이되었다. 통일국민당은지난 30여년대선후보중심으로생겨난신생정당들에게하나의원형을제공했던것으로보인다. 하지만대선직후후보였던정주영이통일국민당을탈당한후 31명의의원들중상당수가이탈하면서정당으로서의수명을다했다. 1996년 15대총선은 1997년대선을한해앞두고실시되었다. 15대총선으로원내정당된 4개정당은 14대국회원내제1당과제2당이각각분화한세력들을주축으로구성되었다는점에서, 신생민주주의국가정당정치의불안정을보여주는사례였다. 1992년대선직후정계은퇴를선언했던김대중전대통령이 1995년정계복귀를했고, 14대국회제1야당이었던민주당은새정치국민회의와통합민주당으로나뉘었다. 한편 14대국회원내제1당이자집권당이었던민자당의일부세력들이이탈하여자유민주연합을결성했고잔류세력들을중심으로신한국당이결성되었다. 1996년과 1997년, 한국정당정치에는연합정치라는새로운실험이등장했다. 소위 DJP연합 이라불렸던자유민주연합과새정치국민회의의선거연합이그것이다. 한편통합민주당은신한국당과통합했고그결과로한나라당이출범했다. 15대총선으로만들어진원내 4개의정당이한편에선선거연합을추진하고한편에선정당통합을이룬것이다. 1997년대선을앞두고한국사회는 IMF외환위기 라는전대미문의경제위기를경험했기때문에, 김대중정부의출범에선거연합실험이어떤기여를했는지를정확히분석해내기는어렵다. 하지만이후정당정치에서선거연합정치의한원형을제공하게되었다. 한편 1997년대선을앞두고도 1992년대선에서처럼대선후보중심신생정당이등장했다. 신한국당소속이었다가탈당하면서대선출마를알렸던이인제후보를중심으로결성된국민신당이다. 이인제후보는 1997년대선에서 19.2% 로 3위의득표를얻었지만, 국민신당이정당으로생존하지는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85 못했다. 1998년당시집권당이던새정치국민회의와통합이추진되었고, 국민신당은해산된것이다. 16대총선은김대중정부임기중에실시되었고, 집권당이던새정치국민회의는총선직전새천년민주당이되었다. 16대총선을앞두고는민주국민당이라는정당이새롭게출현했다. 이당은한나라당과새천년민주당총선공천과정에서탈락한중진의원들이탈당하여만든당으로 2석의원내의석을얻었지만, 2004년 17대총선에서는의석을얻지못하면서정당해산에이르렀다. 16대총선민주국민당은또다른의미에서한국정당정치의한원형이되었다. 공천탈락자들의이탈과정당결성은이후 친박연대 등의출현으로반복되었기때문이다. 긴시각에서보자면, 이또한신생민주주의체제의한특성으로볼수있다. 정당의당내민주화, 제도화가채이루어지지못한조건에서당헌, 당규등으로규정된공천절차조차제대로지켜지지않았고공천신청자들의공천결과에대한승복을이끌어내지못한결과이기때문이다. 이후로도오랫동안우리나라정당들의공천절차제도화는문제가되었다. 2002년대선과 2004년총선은여러의미로이후정당정치에긴영향을남겼다. 우선 2002년대선에서승자가된새천년민주당노무현후보의대선캠페인과정에서등장한 노사모 ( 노무현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 ) 현상은학계와언론의뜨거운주목을받았다. 정당의당원이나지지자모임형식이아닌개별정치인지지자모임이그이전에도없었던것은아니었다. 그러나 노사모 는당시까지출현했던정치인지지자모임가운데가장전국적이며조직적인양상을나타냈고, 이후등장한 박사모 ( 박근혜를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 ) 등정치인펜클럽의한원형을제공했다. 노사모 현상은한편으로민주화이후새롭게등장한시민적정치참여유형으로주목을받았지만, 다른한편으로정당정치와시민적참여욕구사이에괴리와간극을보여주는사례가지목되기도했다. 정당이제도와시민을연계하는채널로제대로작동하고있었다면, 새천년민주당대선후보를지지하는사람들의참여형태는당원이나지지자방식이었을것이기때문이다. 그러나이들은정당이라는제도적틀로들어가는대신독자적인외부조직화방식을선택했고, 이것이한국정당정치에서갖는의미는중요한정치적관심의대상이되었다. 2016년의관점에서보면, 당시상황역시신생민주주의정치의한특성으로볼수있다. 오랜권위주의시기동안정당은시민적의사를제도로대의하는것이아니라집권세력의의사를시민들에게전달하는틀로기능했고, 그결과로민주화초기정당에대한시민적불신은팽배해있었다. 권위주의하에서정당이했던기능이민주주의에서도제도로서정당기능으로등치되었기때문에, 정당이아닌다른방식의참여가더선호되었던것이다. 그러나민주주의제도운영의경험이쌓이면서최근에는점차별도의펜클럽방식이아닌정당을수단으로하는제도적참여에대한긍정적인식전환이일어나고있다. 한편 17대총선은국회의대통령탄핵소추라는초유의사태가선거결과를좌우했다. 대통령탄핵에반대하는시민적의사가일약원내과반이넘는집권당을탄생시켰기때문이다. 대통령에대한

8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탄핵소추권은헌법이국회에부여한적법한권한이다. 그러나우리나라최초의대통령탄핵소추경험은, 헌법적권한의행사라하더라도시민적동의가뒷받침되지않으면안된다는정치적교훈을남기게되었다. 17대총선결과로과반집권당이된열린우리당은다양한사회적의제를국회로투입하는새로운실험을하기도했지만, 결국정당으로생존하는데에는실패했다. 대통령재임기간동안집권당이공중분해되는초유의역사적경험을남긴것이다. 집권당이자원내제1당이다음선거까지수명을유지하지못한이사건은한국정당정치의취약성을확인시켜주었고, 이후로도오랫동안정당민주주의에대한여러화두를던져주었다. 17대총선이한국정당정치에서갖는또다른의미는민주노동당의원내진출이었다. 민주화이후 17대총선이전까지원내에진출했던정당들은합당과분당이반복되었음에도모두권위주의시기정치적경험을공유한내생정당의성격을가졌다. 그러나민주노동당은민주화이후최초로원외부에서생성된정치세력의원내진입을만들어냈다는점에서, 주목을받았다. 특히민주노동당은 1995 년결성된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1999년합법화되면서정당결성의일주체로들어온사례로, 한국민주주의정당정치에노동의정치화경로를열수있을것인지에국내외적인주목을받게되었다. 17대국회에서민주노동당은그이전에없었던여러사회경제적의제들을제기함으로써원내의제지형을변화시키는데영향을미쳤다. 그러나민주노동당의실험은 2007년대선직후스스로분당의길로나아감으로써실패로기록되게되었다. 2007년대선과 2008년총선도우리나라정당정치에서는새로운의미를부여했다. 우선 2007년대선은민주주의공고화에중요한의미를갖는 선거를통한두번째정권교체의완료 라는의미가있었다. 또한후보중심선거캠페인에서벗어나정당소속후보의당선이라는새로운경로를개척했다. 1992년대선민주자유당, 1997년대선새정치국민회의, 2004년열린우리당등그이전역대집권당들은대통령후보나대통령을중심으로한정당이라는특성을공유했다. 그러나 2007년대선으로집권당이된한나라당은후보중심으로새롭게결성된정당이아니라 2000년이후안정된정당정치를지속해온정당으로서대선후보를내고당선자를배출하여집권당이된것이다. 한나라당이명박후보의당선은오랫동안대선후보를중심으로이합집산을계속해왔던한국정당정치의안정화가능성을보여주었다는점에서의미를가졌다. 그러나 2007년대선과 2008년총선에서도대선후보중심급조된정당의출현과뒤이은소멸현상은공존했다. 1997년과 2002년신한국당과한나라당대선후보였던이회창은 2007년대선에도무소속으로출마했으며그를중심으로결성된자유선진당은 18대총선에서 18석을얻어원내정당으로진출했다. 하지만자유선진당역시독자생존에는실패했고, 2012년 19대총선이끝난후새누리당과합당의길을걸었다. 또한 2007년대선후보였던문국현을중심으로결성된창조한국당은 18 대총선에후보를냈지만, 2012년 19대총선에서의석획득에실패하면서해산되었다. 2012년은 1992년에이어 20년만에대선과총선이겹쳐진해였다. 19대총선은집권새누리당에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87 게과반의석원내 1당의자리를만들어주었고, 2012년대선에서새누리당은다시대통령당선자를냄으로써집권당의지위를유지할수있었다. 정당의명칭이한나라당에서새누리당으로바뀌긴했지만, 동일정당이집권당으로있으면서대통령을당선시키고다시집권당으로국회임기를마친최초의사례가된것이다. 그이전에김대중정부의집권당출신노무현후보가당선된경험이있긴했지만대통령당선이후탄핵파동을겪으면서극적인집권당변경의역사가전개되었기때문에, 박근혜정부의출범과 19대국회새누리당의유지는최초의경험이되는것이다. 그러나 2016년 4월 20대총선과이후전개된일련의정치과정은다시한번한국정당정치의극적인변화를만들어내고있다. 2O대총선결과집권당은 30석의의석감소와원내소수당의지위를얻은반면, 야당의석이과반을넘는 여소야대 원내구성이만들어졌다. 또한선거직전결성된국민의당은 38석을얻어원내제3당이됨으로써, 정당체제전반의변화가능성을보여주었다. 더하여 2016년말역사상두번째국회의대통령탄핵소추안가결은정당정치의체제변동의가능성을더욱높이고있다. 4. 민주화 30 년과제도정치의변화 1987년한국정치는, 권위주의체제가남긴구조와제도, 정치실천의관습이라는유산을안은채민주정체의실험을시작해야했다. 입법부는최고권력자를정점으로하는행정부권력으로부터제도적독립성을갖지못했을뿐아니라, 권위주의와의인적, 관습적연속성으로인해제도실천의자율성또한심각하게제약되어있었다. 시민사회는최고권력자가관료조직을통해포섭하고있던극히부분적인 정치연계시민사회 와광범위한 정치소외시민사회 로분할되어있었으며, 제도로서정부-선출된대통령이통솔하는행정부와선출된의회-와시민사회를매개해야할정당정치는 정치소외시민사회 와연계채널을갖지못한상태였다. 이런조건에서선거와선거사이일상적으로작동되어야할제도정치는시민들의일상과유리되어있었고, 주기적으로실시되는선거는일상적제도정치의작동을평가하는연속적선택이되지못한채캠페인기간동안만작동되는단절적인정치의례의성격을지니고있었다.

8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그림 3 민주화이후제도정치의변화 1987년이후지난 30여년은오랜권위주의적정치실천이남긴유산을헌법에맞게제도적으로, 그리고실천적으로정정해온과정이었다. 입법부는과거최고권력자가운용하는집행기관의하나로존재했던지위에서행정부에대한견제권력을행사하는대의기관으로변모를거듭했다. 성문헌법에는있었지만휴지 ( 休止 ) 되어있던조항들이입법부의제도변화와입법자들의실천을통해생명력을얻기시작했고, 국가재정과관료조직의일상업무에대한입법부의제도적견제장치가가동되었다. 또한과거최고권력자가관료조직을통해온전히포섭하고있던 정치연계시민사회 는, 반복된선거와경쟁적정당정치의과정을경과하면서다원화되었고포괄범위또한점차넓어졌다. 민주화초기 관변단체 와 ( 민주적 ) 시민단체 로명료하게구분되어이해되었던시민사회는, 다양한이익집단과공익집단들이경쟁하는장으로변화해왔고, 정당들은이들을매개로시민들의지지를얻기위해경쟁했다. 지난 30년한국의제도정치는헌법이정한범위내에서점진적으로발전을거듭해왔고, 시민들의민주주의정치체제수용도도조정기를거쳐안정기에들어서고있다. 그러나다른한편에서보면이제겨우 30년이지난한국의제도정치는여전히과거로부터의제약과다양한제도적한계들에직면해있기도하다. 1987년헌법은행정부를견제할수있는제도적권한을입법부에부여함으로써민주정체의기본틀을제공했지만, 권위주의체제에서배태된행정부우위형, 국가주의적제도질서는아직도상당부분온존한상태다. 여전히 87년헌법은현실에서 100% 실천되고있지못하며, 국제적제도규범에비추어민주제도의실천이가야할길이먼것도사실이다. 하지만지나온제도정치경험은당대를살아가는정당, 정치인, 유권자들에게민주주의정치에관한학습기회가되었고, 한국사회는이제민주주의제도정치를성문헌법이나법률이아닌현실세계의규범으로받아들이는단계로나아가고있는것으로보인다. 제도로서민주주의는부단한성찰과참여, 제도의개선과실천의과정을통해서만퇴행하지않고유지될수있다는경험적인식이확산되고있으며, 이것은앞으로의제도정치발전에중요한토대가될수있을것이다.

민주화 30 년의제도정치 89 참고문헌및자료 Bratton, Michael and Robert Mattes. 2001. Support for Democracy in Africa: Intrinsic or Instrumental? British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31(3). 447-474. Diamond, Larry. 1999. Developing Democracy. Johns Hopkins University.. 2001. How People View Democracy: Findings from Public Opinion Surveys in Four Regions. presentation to the Standford Seminar on Democratization. https://democracy.standford.edu/seminar/diamond2001.htm. 2008. The Democratic Rollback: The Resurgence of the Predatory State. Foreign Affairs. 36-48. Hahm, Chai-bong. 2008. Korea s Miraculous Democracy. Journal of Democracy. 19(3). 128-142. Huntington, Samuel P. 1991.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Klinggemann, H. 1999. Mapping Political Support in the 1990 s: A Global Analysis. in Pippa Norris ed. Critical Citizens. Global Support for Democratic Governance. Oxford University Press. 31-56. Olavarria, Margot. 2003. Protected Neoliberalism Perverse Institutionalization and the Crisis of Representation in Postdictatorship Chile. LATIN AMERICAN PERSPECTIVES, 30(6), 10-38. Przeworski, A. 1991. Democracy and Marke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Shin Doh Chull. 2006. The Korea Democracy Barometer Surveys: Unraveling the Cultural and Institutional Dynamics of Democratization, 1997-2004. paper at the 20th 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World Congress, Fukuoka, Japan. Korea Democracy Barometer. 1996, 1997, 1998, 1999, 2001, 2004, 2010 Asiabarometer. 2003. SSK좋은정부연구단좋은정부조사자료. 2014. 2015. 법제처국가법령정보센터국회의안정보시스템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거통계정보시스템 헌법 국회법 국가재정법 예산회계법 국정감사및조사에관한법률 인사청문회법 통상조약의체결절차및이행에관한법률 국회에서의증언 감정등에관한법률

9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강신구 ( 아주대학교 ) 1. 들어가며 지방자치를지방시민의삶에중요한영향을미치는정책을결정하고집행하는권한을가지는지방정부를지방을구성하는시민의손에의해직접선출하고교체하는제도로서절차적으로정의한다면, 한국의지방자치는 1961년군사혁명위원회의포고령제4호에의해지방의회가전격적으로해산된이후오랜동면의시간을거쳐야만했다. 이후민주화의흐름속에서 1991년해산된지 30 년만에, 지방정부의한축에해당하는지방의회선거가실시됨으로써한국의지방자치는절반의부활을이루게되고, 이후다시 4년의시간을경과한 1995년에이르러서야나머지반쪽에해당하는지방자치단체장을선거를통해서선출하게됨에따라비로소온전한부활이 최소한의절차적의미 에서나마이루어졌다고할수있다. 현재한국의민주주의가 1987년 6월의민주항쟁으로부터비롯되고시작되었다고할때, 한국의민주주의는이제막서른살에접어들게된것이고, 한국의지방자치는이제성년을갓넘긴셈이다. 이는달리보면, 한국의지방자치가부활하기위해서는한국민주주의의부활보다도 8년의시간을더필요로했던것을의미한다. 이글에서우리는이렇게지난한과정을거쳐서부활한한국지방자치의지난약 20여년의발자취를되짚어보고자한다. 지난역사의공과 ( 功過 ) 에대한온전한평가와반성이뒷받침된후에야새로운미래에대한구상과계획이보다건설적으로이루어질수있기때문이다. 그러나우리의분석이지방정부를구성하는두축인단체장과의회가주민의선거에의해서선출된 1995년부터출발해서그이후부터현재까지의기간에한정되는것은아니다. 그것은대통령직선제로대표되는중앙정부차원의민주화가지방정부차원의민주화로확대되기까지필요로했던약 8년의시간이, 이후의변화를이해하는데중요한실마리를제공하기때문이다. 실제로지방자치의실시는대통령직선제개헌안과더불어, 아니어쩌면그보다더긴역사를가지고있는민주화운동세력의주된요구사항이었으며, 이에따라한국민주화의과정에서중요한분수령의역할을수행한 6 29 선언안에, 노태우당시민주정의당대표이자대통령후보가전두환당시대통령에게건의하는형태로담겨있던 8개항의사안중의하나이기도했다. 그러나그럼에도불구하고우리의지방자치는중앙정부차원의민주화와함께시작되지못하고, 8년의시간을더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91 기다려야했던것이다. 우리는이글에서그근본적인이유가지방자치가이른바 풀뿌리민주주의 (grassroot democracy) 의기제로서이해되지못하고, 구 ( 舊 ) 권위주의세력 민주화운동세력모두에게, 모든것이불확실한중앙정치의혼돈스러운전개상황속에서일종의보험용, 혹은중앙권력에대한견제용으로서, 즉지방자치를순수한지방적차원의행사로이해하지않고, 항상중앙정부와의관계속에서중앙권력을위한경쟁의부수적 전략적도구로이해한때문이라는것을밝히고자한다. 이와같이중앙권력을추구하는세력들의정치적셈법을앞세운경쟁속에서, 지방자치는우여곡절의과정을겪으며도입될수있었지만, 혼란의상황을끝내고집권한세력은중앙권력의지방으로의실질적이양에소극적일수밖에없었다. 따라서어렵게도입된지방자치는과거중앙정부의재정적, 행정적통제력을그대로유지한채, 단체장과의회만을주민의선거로구성하는정도의변화를도입하는데그쳤다는평가를받는다. 제한된권력만을행사할수있고, 이에따라주민의삶에미치는영향력또한제한적일수밖에없는지방선거가그자체로주민들의관심을끌기는쉽지않았다. 그러나다른한편으로 4년의임기를가지는지방자치단체의장과의회를동시에구성하는형태로재편된동시지방선거는국회의원선거의중간해에실시되는것으로계획되었다. 이에따라지방선거는지방정부를구성하는선거라는것에 1차적인중요성이있기보다는, 중앙정부의실적에대한공과를평가하는중간선거 (midterm election) 의성격을강하게나타나게되었다. 이렇게지방선거가지방정부의구성과지방주민들의삶의질향상을위한정책의경쟁이이루어지는장 ( 場 ) 이라기보다는중앙정부의권력을얻기위한대리전 ( 代理戰 ) 의양상으로전개됨에따라, 지방선거의결과는중앙정부를구성하기위한전국선거의지방형복사판과같은모습을보여주었다. 즉한국정치의고질적인병폐라지적받는지역주의투표의모습이지방별로그대로복사되어나타난것이다. 좀더구체적으로표현한다면, 영남지역의지방정부를구성하는선거에서는우리사회의보수를대표하는정당이, 그리고호남지역의지방정부를구성하는선거에서는우리사회의진보를대표하는정당이광역 기초자치단체의장과의회를거의싹쓸이하다시피하는결과가반복적으로나타난것이다. 광역과기초자치단체로구분되는우리나라의지방정부는모두, 동시에치러지지만구분되는별개의선거를통해서구성되는단체장과의회가, 각각행정과입법을주된역할로수행하면서, 단체장은의회를해산할수없고, 의회는단체장을불신임할수없는, 중앙정부차원의대통령제 (presidentialism) 정부형태와운영원리가일치하는기관대립형으로설계되어있다. 이러한정부형태는행정과입법을책임지는두세력이견제와균형 (checks and balances) 의묘 ( 妙 ) 를발휘한다는조건속에서성공적인운영을기대할수있다. 그러나한정당이단체장과의회를모두장악하는상황속에서이와같은견제와균형을기대하기는힘들었다. 중앙정부의재정적 행정적통제의지속, 중앙정치의대리전양상으로전개되는선거, 견제와균

9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형의상실등과같은구조적악조건속에서우리의지방자치는많은혼란을경험할수밖에없었다. 주민들의실질적인삶의질향상에는크게기여하지못하는보여주기식전시행정및홍보성이벤트, 그로인한방만한재정운용과파탄등은일부에게지방자치를비효율과무능의상징으로만들기도하였다. 각종비위와연관되어임기를마치지못하는단체장과의원은지방정부에대한시민들의신뢰를거둬들이게만드는요인이되기도하였다. 그러나모든지방자치단체가같은모습을보이고있는것은아니다. 일부의지방자치단체는이러한척박한환경속에서도조금씩, 조금씩지방정치의차원에서시민의참여를확대해가는모습을보이고있다. 특히지방자치의원래의도입취지에맞게주민의삶에밀접한연관을가지는복지정책의영역에서지역의실정에맞는새로운혁신적인실험들이지방자치단체들에의하여시도되는모습들도발견된다. 일부지역에나타난변화가주변지역으로확산되면서지방자치단체가중요하고혁신적인정책의실험장으로역할하는모습을보이기도한다. 이러한변화의모습들은비록아직은성급한판단일수있지만, 이제갓성년을넘긴우리의지방자치가초기의혼란을뒤로하고서서히풀뿌리민주주의의확대라는제도도입의본연의취지에맞게변모하는가능성을시사하는것이다. 물론여전히갈길은멀고, 곳곳에수많은난관이도사리고있을것이다. 어쩌면우리의지방자치는지금중대한기로에있는지도모른다. 지금의긍정적인변화를조심스레발전시키고확산시켜서성숙한민주주의를지탱하는굳건한버팀목이되느냐, 아니면긍정과부정의양상이혼재하는지금의지지부진한모습을크게벗어나지못하고, 중앙정치의들러리역할을하는데만족하는지방자치에머무르고마는가하는기로말이다. 이글은이와같은문제의식속에서 1987년민주화이후한국지방자치의지난역사를뒤짚어보면서그공과를평가하고, 공과과의원인에대한보다면밀한진단을수행하고자한다. 이러한진단을통해서우리의지방자치가다음단계로의발전과성숙을위한제안을제시하고자한다. 이를위해서아래에서는먼저지방자치의갑작스런중단과그이후부활에이르기까지의과정을살펴볼것이다. 2. 지방자치의갑작스런중단과긴동면, 그리고힘겨운부활의과정 1948년 7월에제정된제헌헌법은제8장의 96조와 97조에각각 지방자치단체는법령의범위내에서그자치에관한행정사무와국가가위임한행정사무를처리하며재산을관리한다, 지방자치단체의조직과운영에관한사항은법률로써정한다 고규정함으로써지방자치를실시할수있는헌법적근거를마련하였으며, 이에근거하여최초의지방자치법은 1949년 7월 4일에제정되었다. 하지만 7월의지방자치법은국회의본회의를통과한최초의지방자치에관한법안은아니었다. 그보다앞선 3월 9일 도지사는도 시 읍 면의원이선거하고, 서울특별시와시 읍 면장은각기지방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93 주민이직접선거한다 는내용을담은지방자치법안이국회의본회의를통과했지만, 이최초의법안은이승만대통령에의하여거부되었다. 거부의사유는부칙 1조에 본법은공포한후 10일을경과한후에시행한다 고규정되어있지만, 이는현실적으로불가능하기에시행일을대통령령에위임해줄것을요구한다는것이었다. 이에국회는다시 공포후 90일이경과한후에실시한다 는수정안을마련하여정부에이송하였지만, 대통령은다시재의를요구하였고, 결국이러한과정속에서최초의지방자치법안은국회가폐회함으로써자동폐기되었다. 이와같은시행일을둘러싼대립의배후에는이최초의지방자치법안이지방자치단체에대한대통령의사정 감독권을규정하지않았고, 도지사의임명권이대통령에게주어지지않았다는점에서지방자치에대한통제권을확보하려는대통령과지방자치를통해서중앙권력을견제하고자했던의회의입장차이가존재했던것으로풀이된다 ( 소진광외 2008, 57-8). 이처럼한국의지방자치는도입초기부터풀뿌리민주주의의기제라는그자체의가치로서보다는중앙권력을둘러싼경쟁의수단이라는차원에서쟁점화되는모습을보였다. 우여곡절의과정을거치면서 7월에제정된최초의지방자치법은도지사와서울특별시장에대한대통령의임명권을규정하는등, 대통령의의사가대폭가미된내용을담고있었지만, 정작지방자치는제대로시행되지못했다. 그것은정부수립후계속되는정치적불안을구실로정부가지방자치의기초가되는지방의회의구성을위한선거를연기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정작최초의지방의회선거는전쟁의와중인 1952년 4월 25일전격적으로실시된다. 1 갑작스러운지방의회선거의실시는대통령직선제개헌을위해급조된자유당의전국조직을강화하고시험하기위한전략의일환으로해석된다 ( 손봉숙 1986; 강원택 2014). 그후 1공화국하에서만 4차례의지방자치법개정이이루어진다. 1958년 12월에이루어진제4차지방자치법개정은시 읍 면 동 리장을직선제에서임명제로바꾸는것을핵심내용으로하는개정안으로이승만정권에대해고조되는국민의불만에대응하여관권으로지방행정조직을장악하려는의도를가진것으로평가된다. 이처럼 1공화국의지방자치는이승만을중심으로하는중앙권력의정권유지를위한전략적인도구로이용되는모습을보였으며, 이는자치의식의결함, 제도와운영상의결함, 지방재정력의빈약과함께, 1공화국지방자치실패의중요한원인으로지목된다 ( 손봉숙 1985; 소정광외 2008) 자유당의장기집권이 4 19 혁명과함께무너지고, 다시개정된 (1960년 11월 ) 지방자치법에의거하여 1960년 12월서울특별시및도의회의원선거 (12일), 시 읍 면의회의원선거 (19일), 시 읍 면장선거 (26일), 서울특별시장및도지사선거 (29일) 가순차적으로실시됨으로써 2공화국의지방자치가재시동되는모습을보였지만, 이는미처제대로운영되기도전에갑작스런중단을맞게된다. 그것은 5 16 군사쿠데타를통해권력을장악한세력이군사혁명위원회의포고령제4호를통해서지방의회를전격적으로해산시켰기때문이다. 이후 3공화국을탄생시킨제5차헌법개정안은 지방 1 4 월 25 일에는시 읍 면의회의원, 5 월 10 일에는서울시 도의회의원선거가순차적으로실시되었다.

9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자치단체의조직과운영에관한사항은법률로정한다 ( 제110조제2항 ) 고규정했지만, 이를위한법제화의노력은발견되지않았다. 뒤이은유신헌법 (1972년) 은아예부칙제10조에 이헌법에의한지방의회는조국통일이이루어질때까지구성하지아니한다 고규정함으로써지방자치에대한명백한거부의사를밝혔다. 경제성장과국가안보라는목적을전면에내세우면서, 중앙정부의행정력에의한강력한통제와전국적인동원을지향하는집권세력에게있어서주민의자율과참여, 지방의실정에맞는탄력적정책운용등과같은분권적가치를지향하는지방자치는거추장스러운것일뿐이었을것이다. 제 3 4 공화국의약 20년의기간동안한국의정치는중앙정부의권력엘리트와행정조직에의해획일적으로통제 운영되었다. 지방관청의행정업무는중앙정부의명령과위임사무를수행하는일에치중되었으며자치권한은극히제한되는모습을보였다. 지방자치단체의각종엘리트는중앙에서임명하는관료로채워졌으며, 지방행정체계는주민의요구와지방의실정보다는국가적요구에일차적으로부응하는기관으로전락해갔으며, 지역사회의발전이나행정에대한주민들의참여권과감독권은더욱제한될수밖에없었다 ( 안청시 1985). 지방자치의이와같은동면의상황은이어지는제5공화국에서도대체로지속된다. 비록 1980년에제정된제5공화국의헌법은부칙제10조에서 이헌법에의한지방의회는지방자치단체의재정자립도를감안하여순차적으로구성하되, 그구성시기는법률로정한다 고규정함으로써 1961년이후중단되어온지방자치의부활에상당한기대가모아지기도했으며, 이에따라지방자치의실시를위한관련법률의제 개정이시도되었지만, 실제로이루어진것은없었다. 권위주의적정권하에서집권당이과반수를차지하는상황에서지방자치의실시에관한법제화가성공하지못했다는것은집권세력이권력의분산을함의하는지방자치의실시에소극적이었다는것을보여준다. 오랜동면의과정을거치는동안에지방의자율성을신장하고분권적자치제도를수립하고자하는노력은억제되고약화되는듯했다. 하지만 1980년대중반이후권위주의정권에대한국민적저항이증가하고민주화운동이다시부흥하기시작하면서지방자치의부활은다시첨예한정치의제로부상하는모습을보였다 ( 안청시편 2002). 즉, 민주화투쟁운동세력은중앙정치의영역에서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지방정치의영역에서는 지방자치의부활 을정치의제의전면에내세운것이다. 이와같은국민적압력과이에대응하는권위주의정권의일련의자유화 (liberalization) 조치가시도되는과정에서실시된 1985년의제12대국회의원선거에서는선거에참여하는주요정당중민주한국당을제외한정당들이모두, 심지어는집권여당인민주정의당을포함하여 지방자치제실시 를공약으로내세우기도하였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9). 그러나선거가끝난후공약사항이었던지방자치제를실시하기위한법제화의노력은중앙정치의장에서는찾아볼수없었다. 마침내 1987년 6월항쟁의결과권위주의정권이붕괴되고민주화가시작되면서지방자치는긴동면을끝내고부활할것으로기대되었다. 앞에서도잠시밝혔듯이지방자치의실시는흔히권위주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95 의정권의항복선언이라고받아들여지는노태우당시민주정의당대표이자대통령후보의 6 29선언속에대통령직선제개헌안과함께포함된 8개항의제안사항중의하나였으며, 지방자치실시유예의근거를제공하였던헌법상의부칙이개정된민주화헌법에서는삭제되었으며, 이어국민의직접선거로실시된 1987년 12월의대통령선거에서는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후보모두지방자치의전면혹은즉각실시를공약으로내세웠기때문이다. 그러나노태우의대통령당선이확정된후그의지방자치에대한입장은유보적이며미온적인입장으로바뀐다. 당선이확정된후취임에이르기까지여야는지방자치제실시와관련한정치적협상을전개하였지만, 여야는끝내합의에이르지못했고, 마침내민정당은새헌법에의한국회의원선거가실시되기직전인 1988년 3월 8일임시국회본회의에서지방자치법과지방의회의원선거법을단독으로변칙처리했다. 같은해 4월공포된지방자치법부칙은법시행일 1년이내에 (1989년 4월 30일까지 ) 시 군 구의회를, 그리고시 도의회는시 군 구의회구성이후 2년이내에구성하기로하였으나지방자치단체장과관련해서는따로법률로정할때까지정부에서임명한다고규정하며, 선출시기에대해서는명확히밝히지않았다. 그러나 1988년 4월 26일실시된제13대국회의원선거의결과헌정사상최초로대통령의정당이의회과반을확보하지못하는이른바 여소야대 국회가등장하게되었고, 이는지방자치의부활 실시를위한새로운추동력을제공하였다. 야3당은지방자치실시를위한공조체제를구축하였고, 마침내 1989년 3월지방선거의실시에대한내용을담은야권단일안을만들어 3월 15일임시국회에서통과시켰다. 하지만노태우대통령은이에대해거부권을행사하였으며, 1988년 4월공포된지방자치법에서법시행일 1년이내에시 군 구의회선거를실시한다는실정법의규정을대통령스스로위반하는결과를가져왔다. 야당이이에크게반발하고, 대통령또한실정법의위반이라는비판으로부터자유롭지못했기에, 여당을포함한 4당은지방자치문제를원점에서재협상하기로하고, 마침내 1989년 12월 19일새로운지방자치법개정안을정기국회폐회일오전중 2 에극적으로여야합의로타협안을통과시켰다. 1990년 6월 30일이내에시 도및시 군 구의의회선거를실시한다는내용을부칙으로담은지방자치법개정안이여야합의로통과되었기에, 지방자치제도는이제시행만을남겨둔것처럼여겨졌으나, 1990년 1월민정당과통일민주당, 그리고신민주공화당이이른바 3당합당을통하여민주자유당을출범시킴으로써지방자치의부활은다시금좌초하게된다. 국회의석 3분의 2 이상을차지하는거대여당이 1989년 12월에합의한지방자치제법안에대해서경제안정을명분으로전면적재검토를선언한때문이다. 이로써정부와여당은 1990년이전에지방의회의원선거를실시한다는실정법의규정을다시한번위반하게된것이다. 2 노태우대통령의거부권행사이후야3당은 1989년 10월 19일의총재회담을통하여 공동노력하여정기국회에서지방자치법 을통과시키기도합의한바있다.

9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이에반발한김대중당시평화민주당대표는 1990년 10월 8일부터 29일까지지방자치제실시관철을목표로단식투쟁을펼쳤다. 이와같은야당대표의극한투쟁과지방자치제관철을위한천만인서명운동과같은시민운동의압력, 합의사항의일방적파기와그로인한실정법위반이라는부담 3 속에서마침내여당은야당의요구를일부수용하여 1990년 12월 31일지방의회선거를 1961 년 6월 30일이내에실시하고지방자치단체장에대한선거를 1992년 6월 30일이내에실시한다는내용을담은지방자치법개정안을여야합의로통과시켰다. 그리고이법에따라마침내 1991년 3월 26일시 군 구 ( 기초 ) 의회선거가, 그리고 6월 20일시 도 ( 광역 ) 의회선거가실시되었다. 비록자치단체장의선거를포함하지않은반쪽짜리지방자치제이기는하지만, 1961년지방의회가전격적으로해산된지 30년만의일이며, 민주화에의해직선대통령이선출된후로도다시약 4년이지난시점의일이다. 그러나여전히반쪽은반쪽. 정부와여당은예정되어있는 1992년의지방자치단체장선거는준비하지않는모습을보이면서지방자치의전면적실시에는미온적이며유보적인모습을보였다. 그러다마침내 1992년 1월 10일, 임기를 1년남긴시점에서행해진연두기자회견에서노태우대통령은예정대로 1992년에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실시하게되면 1992년한해에 4개의선거 ( 제14대국회의원선거, 제14대대통령선거, 기초 광역단체장선거 ) 를치르게되어경제적 사회적안정을이룰수없다며, 광역과기초지방자치단체장선거의연기 를일방적으로발표한다. 이는예정되어있는지방자치단체장의선거를대안입법없이다시한번연기했다는점에서정부 여당에의한세번째실정법위반이되는셈이다. 이때, 야당은이와같은대통령의일방적연기발표가제14대대통령선거를임명된지방자치단체장에의한체제로치름으로써관권선거를획책하려는음모라고정부 여당을비난하였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9c). 이와같은우여곡절의과정을거친끝에마침내 1994년 3월 16일지방자치법개정이이루어지고, 이에따라 1995년 6월 27일, 임기만료에의한지방의회의원선거와함께광역과기초자치단체장의선거를포함한제1회전국동시지방선거가실시되었다. 1961년지방자치가동면에들어간지 34년만에, 그리고민주화가시작된지 8년만에야비로소 온전한지방자치 가최소한의절차적의미에서나마이루어지게된것이다. 1994년 3월에개정된지방자치법과관련하여특이한규정중의하나는지방자치단체장과지방의회의원의임기를 4년으로규정하면서도, 부칙을통하여 1995년에선출된이에한해서는그임기가 1998년 6월 30일에만료되는것으로정했다는점이다. 이로써광역과기초지방자치단체를구성하는단체장과지방의회의의원들은 1998년이후매 4년마다, 국회의원선거의중간해에, 전국동시지방선거에의해선출되게되었다. 위에서우리는한국지방자치의갑작스런중단과긴동면, 그리고힘겨운부활의과정을살펴보았다. 이러한분석을통해서발견되는한가지의특징적인모습은지방자치가중앙정부와구분되는 3 또한당시에내각제합의각서유출, 수서사건등도함께터져나와여당의입장은매우난처한상황에처해있었다.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97 민주주의의기초단위로서주민들의삶의질과직접적으로연결되는문제들에대해서지방적차원의해결을모색하는풀뿌리민주주의 (grassroot democracy) 의장으로서이해되기보다는중앙정부의권력을얻기위한경쟁의수단이자도구의차원으로이해되어왔으며, 이에따라지방자치의재도입혹은부활과관련한논의는철저히중앙정치세력들의정치적이해관계에따라전개되어왔다는점이다. 전쟁중에지방의회선거를전격적으로도입한이승만대통령이그러했으며, 민주화이전 이후에치러진선거에서도정당및후보자들은선거전에는지방자치의실시를공약하다가선거이후에권력을잡은이후에는실천에소극적인모습을보인것이다. 힘으로모든것을억누를수있었던제3 4공화국의시기에는지방자치에대한논의를아예찾아보기조차힘들다. 이와같은모습은그러나야당이라고다르지않다. 노태우의지방자치단체장선거의일방적연기선언에대해서관권선거를꾀하려고하는속셈으로비난하고있는것에서알수있는것처럼, 야당역시지방자치를중앙권력과의관계, 그리고그에대한견제의수단으로그일차적중요성을두고있다는것을알수있다. 4 3. 지방자치 22 년의변화 위에서살펴본바와같이지방자치는 국가민주화의일환으로요구되고추진되었으며, 중앙의정치세력들이정치적흥정을통해서 위로부터결정한 정치적산물로부활되었다. 중앙의정치세력들은종종지방자치를정파적이해관계를극대화하기위한수단으로활용했다. 그들은자신의권력과지위보전을위해필요하면자치제도를자의적으로걔폐하거나그실행을유보하는것도서슴지않았다 ( 안청시 이광희 2002, 17). 강한중앙집권적전통, 지역주의에기반한위계적인정당체계의환경속에서한국의지방자치는 정치 가아닌 행정 의분권화수준정도로이해되는것이상의의미를갖기어려웠다. 즉지방의주민들이자신들의삶에중요한영향을미칠수있는문제에대해서스스로결정하는것이라기보다는정해진중앙의결정을성실히, 효율적으로수행하는것에더많은방점을두는것으로이해되어왔던것이다. 어렵게부활한지방자치가이러한한계를극복할수있었을까? 이제부터는힘겨운부활의과정을거친지난 22년의지방자치의변화를살펴보고자한다. 우선최소한의절차적의미로지방자치를규정하는조건인선거의과정과변화를살펴보자. 다음 4 김대중의다음의말도지방자치를중앙정치적시각으로평가하는것으로이해할수있다 : 현정권은세법개정기타조치로서얼마든지개선할수있는지방재정의자립문제를명분으로내세워헌법이규정한지방자치를거부하고있으나이것은어디까지나밖으로내세운명분에불과하다. 그들의진정한의도는국민의정치의식의성장을억압하고행정만능과부정선거의자유를계속확보하는동시에야당정치세력이야당다운야당으로발전할전초기지를말살하는데있는것이다 ( 이상환 2011; 강원택 2014에서재인용. 밑줄은저자에의한강조 ).

9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의 < 표1> 은민주화이후 1991년부터실시된역대지방선거의선출직지방공직자수의변화를보여주고있다. 표를통해서 1998년이후부터는매 4년마다주기적으로실시되어오고있는것을확인할수있고, 선거의내용과는별도로지방자치가최소한의제도적안정성을확보해오고있는것으로이해될수있다. 지방자치를구성하는선출직지방공직자의다양화도확인할수있다. 2006년의제4회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는광역의회와기초의회를구성하는의원선거에서 1인2표제도를도입하여지역을대표하는의원과보다넓은지역에걸쳐서존재하는이해를대표하는비례대표의원이같은날, 별도로선출되기시작하였다. 5 2010년제5회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교육자치의확대라는차원에서교육감과교육위원회의교육의원또한선출되기도하였다. 이에따라제5회선거에서는제주도를제외한 6 전국에서유권자들은총 8개의투표용지에기표해야했다. 하지만교육의원은선출의법적근거를제공하고있는 지방교육자치에관한법률 에서일몰규정을둠에따라 2014년의제6회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제주도를제외한지역에서는선출되지않았다. 표 1 1987 년민주화이후역대지방선거의선출직지방공직자수변화 1991 1995 1998 2002 2006 2010 2014 선거일 3.26 6.20 6.27 6.4 6.13 5.31 6.2 6.4 광역단체장 15 16 16 16 16 17 광역의원 866 875 616 682 733 (=655+78) 761 (=680+81) 789 (=705+84) 기초단체장 230 232 232 230 228 226 기초의원 * 4,304 4,541 3,489 3,485 2,888 (=2,513+3 75) 2,888 (=2,512+3 76) 2.898 (=2,519+3 79) 교육감 16 17 교육의원 82 5 투표율 55.0 58.9 68.4 52.7 48.9 51.6 54.5 56.8 주 : * 제3회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기초의원에대한정당공천은실시되지않았다. 제4회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광역및기초의원선거는 1인2표제를통하여지역구와비례대표의원을별도로뽑기시작하였다. 그러면이처럼 1995년이후주기적으로실시된지방선거의결과는어떤특징적인양상을보여줄까? 다음의 < 표2> 는 1995년이후실시된 6번의전국동시지방선거의결과를우선시 도차원에서구성되는광역자치단체의장과광역자치단체의장이소속되어있는정당이광역의회에서차지한의석률, 그리고광역자치단체에포함된기초자치단체의단체장중에서광역자치단체장과소속정당이일치하는비율을보여주고있다. 또한 < 표2> 는중앙정치와지방자치의관계를보여주기위하여선거가치러진당시의대통령과소속정당을아울러보여주고있다. 5 비례대표의석은 1991년부터배정되었지만, 이전의비례대표는지역구의원선거에서얻은정당의득표율에따라배분되었다. 6 제주도는제주특별자치도법에따라기초자치단체장과기초자치단체의회를선출하지않았다.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99 표 2 역대전국동시지방선거의결과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울산세종 현직대통령 1995 1998 2002 2006 2010 2014 김영삼 ( 자 ) 김대중 ( 국 ) 김대중 ( 민 ) 노무현 ( 열 ) 이명박 ( 한 ) 박근혜 ( 새 ) 단체장 조순 ( 민 ) 고건 ( 국 ) 이명박 ( 한 ) 오세훈 ( 한 ) 오세훈 ( 한 ) 박원순 ( 민 ) 단체장의석 (%) 92.48 82.98 85.29 96.23 25.47 72.64 기초단체장 * 23/25 19/25 22/25 25/25 4/25 20/25 단체장 문정수 ( 자 ) 안상영 ( 한 ) 안상영 ( 한 ) 허남식 ( 한 ) 허남식 ( 한 ) 서병수 ( 새 ) 단체장의석 (%) 89.09 97.73 95.45 95.74 85.11 95.74 기초단체장 * 14/16 11/16 13/16 15/16 13/16 15/16 단체장 문희갑 ( 자 ) 문희갑 ( 한 ) 조해녕 ( 한 ) 김범일 ( 한 ) 김범일 ( 한 ) 권영진 ( 새 ) 단체장의석 (%) 21.62 100.00 96.30 96.55 93.10 96.67 기초단체장 * 2/8 7/8 8/8 8/8 6/8 8/8 단체장 최기선 ( 자 ) 최기선 ( 련 ) 안상수 ( 한 ) 안상수 ( 한 ) 송영길 ( 민 ) 유정복 ( 새 ) 단체장의석 (%) 40.63 3.85 86.21 96.97 69.70 65.71 기초단체장 * 5/10 1/10 8/10 9/10 6/10 6/10 단체장 송언종 ( 민 ) 고재유 ( 국 ) 박광태 ( 민 ) 박광태 ( 민 ) 강운태 ( 민 ) 윤장현 ( 민 ) 단체장의석 (%) 100.00 100.00 94.74 94.74 90.91 95.45 기초단체장 * 5/5 5/5 4/5 5/5 4/5 5/5 단체장 홍선기 ( 련 ) 홍선기 ( 련 ) 염홍철 ( 한 ) 박성효 ( 한 ) 염홍철 ( 선 ) 권선택 ( 민 ) 단체장의석 (%) 100.00 100.00 47.37 89.47 72.73 72.73 기초단체장 * 4/5 4/5 0/5 5/5 3/5 4/5 단체장 심완구 ( 한 ) 박맹우 ( 한 ) 박맹우 ( 한 ) 박맹우 ( 한 ) 김기현 ( 새 ) 단체장의석 (%) 64.29 78.95 78.95 59.09 95.45 기초단체장 * 3/5 3/5 4/5 3/5 5/5 단체장이춘희 ( 민 ) 단체장 60 의석 (%) 기초단체장 *

10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경기강원충북충남전북전남경북경남제주 1995 1998 2002 2006 2010 2014 단체장 이인제 ( 자 ) 임창열 ( 국 ) 손학규 ( 한 ) 김문수 ( 한 ) 김문수 ( 한 ) 남경필 ( 새 ) 단체장의석 (%) 42.28 69.32 86.54 96.64 33.87 39.06 기초단체장 * 13/31 20/31 24/31 27/31 10/31 13/31 단체장 최각규 ( 련 ) 김진선 ( 한 ) 김진선 ( 한 ) 김진선 ( 한 ) 이광재 ( 민 ) 최문순 ( 민 ) 단체장의석 (%) 1.92 50.00 76.74 90.00 33.33 13.64 기초단체장 * 1/18 13/18 15/18 18/18 4/18 1/18 단체장 주병덕 ( 련 ) 이원종 ( 련 ) 이원종 ( 한 ) 정우택 ( 한 ) 이시종 ( 민 ) 이시종 ( 민 ) 단체장의석 (%) 11.11 70.83 77.78 87.10 70.97 32.26 기초단체장 * 2/11 6/11 5/11 5/12 5/12 3/11 단체장 심대평 ( 련 ) 심대평 ( 련 ) 심대평 ( 한 ) 이완구 ( 한 ) 안희정 ( 민 ) 안희정 ( 민 ) 단체장의석 (%) 89.09 93.75 21.88 55.26 32.50 25.00 기초단체장 * 15/15 11/15 4/15 6/16 3/16 5/15 단체장 유종근 ( 민 ) 유종근 ( 국 ) 강현욱 ( 민 ) 김완주 ( 열 ) 김완주 ( 민 ) 송하진 ( 민 ) 단체장의석 (%) 94.23 94.12 80.56 57.89 92.11 89.47 기초단체장 * 13/14 9/14 9/14 4/14 13/14 7/14 단체장 허경만 ( 민 ) 허경만 ( 국 ) 박태영 ( 민 ) 박준영 ( 민 ) 박준영 ( 민 ) 이낙연 ( 민 ) 단체장의석 (%) 91.18 84.00 92.16 90.20 85.96 89.66 기초단체장 * 22/24 15/22 16/22 10/22 15/22 14/22 단체장 이의근 ( 자 ) 이의근 ( 한 ) 이의근 ( 한 ) 김관용 ( 한 ) 김관용 ( 한 ) 김관용 ( 새 ) 단체장의석 (%) 59.52 81.48 89.47 92.73 82.76 86.67 기초단체장 * 8/23 14/23 21/23 19/23 16/23 20/23 단체장 김혁규 ( 자 ) 김혁규 ( 한 ) 김혁규 ( 한 ) 김태호 ( 한 ) 김두관 ( 무 ) 홍준표 ( 새 ) 단체장의석 (%) 61.18 89.13 94.00 88.68 90.91 기초단체장 * 10/21 14/20 16/20 14/20 14/18 단체장 신구범 ( 무 ) 우근민 ( 국 ) 우근민 ( 민 ) 김태환 ( 무 ) 우근민 ( 무 ) 원희룡 ( 새 ) 단체장의석 (%). 57.14 31.58 47.22 기초단체장 * 2/4 1/4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101 주 : * 광역지방자체단체의구역안에포함된기초자치단체장의총수에서광역자치단체장과소속정당이일치하는자치단체장의수가차지하는비율을보여준다. 광역자치단체장이무소속인경우, 광역의회에서단체장의소속정당과일치하는의원의비율과기초자치단체장의비율은공란으로남겨두었다. 정당명의약식표현과관련하여, 1995년제1회지방선거의경우에 자 는 민주자유당, 민 은 민주당, 련 은 자유민주연합, 무 는 무소속 을의미하고, 1998년의경우 국 은 새정치국민회의, 련 은 자유민주연합, 한 은 한나라당, 2002년의경우 민 은 새천년민주당, 한 은 한나라당, 2006 년의경우 열 은 열린우리당, 한 은 한나라당, 민 은 민주당, 무 는 무소속, 2010 년의경우 한 은 한나라당, 민 은 민주당, 선 은 자유선진당, 2014년의경우 새 는 새누리당, 민 은 새정치민주연합 을의미한다. 위의표를통해서민주화이후우리나라의지방자치선거에서두가지의특징적인모습이지배적으로나타나고있다는것을발견할수있다. 그중의첫째는지방자치선거에서발견되는중앙정치의모습이라는것이다. 즉지방자치선거는지방주민의삶에직접적인영향을미치는지방정부를지방주민의손으로구성하는것에일차적인중요성이있음에도불구하고, 우리의지방자치선거는중앙정치와의관계속에서더잘이해되는양상을보이는것이다. 6번의동시지방선거를치르는동안, 지방선거의결과가대통령혹은집권여당에게유리한결과로나타난것은 1998년한번밖에없다. 그외의모든경우에여당은지방선거에서큰손실을경험해야했다. 1995년의지방선거에서여당이었던민주자유당은 15개의광역단체장중 6개를얻는데에만족해야했다. 2002년의선거에서는 16개의광역단체장중넷 2006년의선거에서는 16개중오직하나, 2010년의선거에서는 16개중여섯, 2014년의선거에서는 17개중 8개를얻는데만족해야했다. 유일한예외는 1998년의지방선거로, 이때는이른바 DJP 연합이작동하는상황에서중앙정부의권력을공유하는새정치국민회의와자유민주연합이함께 16개의광역자치단체장중 10명의당선자를얻은경우이다. 즉, 이경우를제외하고광역자치단체장중과반수이상을얻은경우는없었던것이다. 이와같은결과는우리의지방선거가지방정부를구성하는데에일차적인목적이있는것으로받아들여지기보다는중앙정부에대한중간평가 (midterm evaluation) 의성격을가지는것에대해더중요한의미를가지는것으로인식되는때문으로해석될수있다. 즉, 선거때마다중앙권력을둘러싼경쟁의차원에서야당은대통령, 정부, 여당에대해단호한심판을유권자에게호소해왔던것이며, 여당은여당대로대통령과정부가추진하고계획한업무를흔들림없이원활하게수행할수있는지지를보내달라고호소하는모습을보여왔던것이다. 1998년이유일한예외가되는이유는이시기가대통령선거가치러진지채 6개월이지나지않은, 이른바대통령의밀월 (honeymoon) 시기에실시된선거라는점이크게작용한것으로보인다 ( 가상준 2014). 애시당초 1998년이후로지방선거를국회의원선거의중간해에치르기로한이유중의하나가, 정확히이시기가그나마중앙정치의영향을가장덜받을수있는시기라는것이었지만, 중앙집권적전통에따라중앙정부가지방정부에대해강력한재정적 행정적인통제력을유지하는상황속에서, 선거의주기성은오히려지방선거가가지는중앙정부에대한중간평가로서의성격을강화해온것으로보인다. 지방선거가지방의현안및쟁점이중심이되는선거가되지못하고, 대통령과정부여당에대한중간평가로이해된다는것은주민자치와이를통한풀뿌리민주주의의활성화라는지방자치의원래

10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의도입취지와는어긋나는것이다. 그러나앞에서도언급했듯이, 우리의지방자치는중앙정치세력의정파적이해관계에따라도입된일종의정치적타협물로서부활되었다. 이에따라선거를통해서지방자치단체를구성하는데에는합의를이룰수있었는지몰라도, 이렇게구성된지방자치단체에실제로주민의뜻에부응하는일을할수있는권한과능력을배분하는데에는지극히인색한모습을보인것이다. 이에따라지방자치의부활 실시이후에도중앙정부는지방정부에대해서여전히강력한재정적 행정적인통제력을유지해왔다. 중앙부처의주무장관은지방자치단체의명령이나처분에대해서법령에위반되든지혹은부당하여공익을해한다고판단할때, 이에대한시정을명하고, 시정명령에응하지않을때, 취소하거나정지할수있는권한을가지고있다. 지방의회의결정에대해서도주무장관은재의를요구하거나, 대법원에집행정지신청을할수있다. 7 비록중앙과지방이하나의국가내에서수직적인관계를구성하는것은맞지만, 선출되지않은권력이선출된권력에대한통제를너무쉽게할수있는것이다. 현재한국의지방자치와관련하여, 지방정부가중앙정부의할일을위임받아처리하는국가사무와지방정부가자체적인의결을통하여실행하는지방사무의비율, 그리고이러한업무를수행하기위한재원으로서의국세와지방세의비율은대략 8:2의수준을보여주고있으며, 이와같은비율은지난 22년간의지방자치에서큰변화를보이지않는다고한다 ( 가상준 2014). 이처럼지방정부의권한이중앙정부에의해서강력히통제되는상황속에서지방선거가지방이중심이되는선거가되지못하고, 중앙정부에대한평가의장이되는것은어쩌면너무나당연한결과일것이다. 역대지방자치선거의결과와관련하여나타나는두번째특징은, 민주화이후의거의모든한국의선거에서발견되는지역주의투표의경향이지방선거에서도발견된다는점이다. 즉, 특정한정당이지역연고를주장할수있는지역에서전국평균을훨씬상회하는높은지지를기록한다는점이다. < 표2> 에서이러한양상이잘발견되는데, 예를들어부산시의경우에역대 6번의지방선거에서한번도예외없이, 이른바우리사회의보수를대표하는정당인민주자유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의후보가광역자치단체장인부산시장선거에서승리하는동시에, 이들정당들이 90 퍼센트이상의의석을부산시의회에서차지하는모습을발견할수있다. 또한광역단체인부산시안에포함되는 16개의기초자치단체의장들도거의독식하는모습을보여주고있다. 이와같은모습은광주, 울산, 7 실제로 2014년의제6회지방선거를통해서구성된성남시와서울시는각각청년배당과청년수당정책을실행하고자하였다. 성남시의청년배당사업은성남시에 3년이상주민등록을두고거주하는만 19~24세남녀에게 1인당분기별 25만원이내의배당금을지원한다는내용을담고있고, 서울시의청년수당사업은정기소득이없는미취업자이면서사회활동의지를가진청년 3000명을선발해 2~6개월간월 50만원가량을취업활동보조비용의명목으로지급한다는내용을담고있는것이다. 그러나이와같은지방자치단체의사업에대해중앙정부의복지관련주무부처인복지부는 신설되는사회보장제도인만큼복지부와의협의를거쳐야한다 는입장에따라수용불가의입장을밝혔다. 그러나서울시와성남시가해당사업을계속추진하자복지부는광역단체인서울시에대해서는직접대법원에집행정지신청을제소하는한편, 기초단체인경기도에대해서는관련사업에대한예산안을통과시킨성남시의회에대해재의요구권한을 가지고있는경기도에재의를요구하게끔하였다. 물론서울시와성남시의사업내용과관련해서는논쟁의여지가많지만, 이는다른한편으로지방자치단체에대한중앙정부의통제력을보여주는사례라고할수있다.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103 전북, 전남, 경북등지에서도지방자치 22년의전기간에걸쳐서발견된다. 또한 1998년이후의대구, 1998년부터 2006년까지의충북, 그리고 2010년을제외한경북에서도유사하게발견된다. 즉, 정당은달리하고있지만, 특정정당이특정지역에서압도적인지지를받는지역주의투표현상이확인되는것이다. 비록이와같은지역주의투표경향은한편으로앞서의첫번째특징과같이, 중앙정치의영향에해당하는모습이라고할수있지만, 이와같은지역주의투표경향은지방자치의실시와관련해서는또다른중요한함의를가지고있다. 현재우리나라의지방자치단체는광역과기초로그수준을달리하여구성되어있지만, 수준에관계없이, 그리고지방의고유한특성에관계없이그구조적인모습은획일화되어있다. 즉, 자치단체장과자치의회가별도의선거를통해서구성되며, 단체장은의회를해산할수없고, 의회는단체장을정치적이유에의해서불신임할수없는구조적특성을가지고있다. 8 이와같은지방자치단체의구성유형에대해서행정학에서는이를 기관대립형 이라고부르고있지만, 기실이는우리에게익숙한 대통령제 의정부형태를의미하는것이다. 잘알려져있는것처럼, 대통령제 정부형태는 ( 혹은지방차원의 기관대렵형정부형태 는 ) 별도의선거를통해구성되는두기관사이에 견제와균형 (checks and balances) 의 묘 ( 妙 ) 가발휘될때, 그성공적인운영을기대할수있다. 하지만특정정당이지역주의투표에힘입어, 자치단체장과자치의회를독식하는상황에서이러한견제와균형을기대하기는힘들다. 또한광역자치단체와기초자치단체가역시하나의정당에의해서장악이되는상황은지방자치를구성하는수직적차원에서의두수준의정부사이에서역시견제와균형은기대하기힘들다. 견제와균형, 그로부터비롯되는건전한긴장감을상실한지방자치단체에서자연스레뒤따라나오는것은보여주기식전시행정과방만한재정운용, 그리고각종부정부패 비리와관련한추문 (scandal) 과사법처리이다. 하남시는 1999년국제환경박람회를개최하였다. 애초중앙정부가사업의타당성문제를들어박람회개최를만류하였고, 민자유치계획도좌절되었지만, 하남시는시장의중점사업이라하여이를강행하였고, 사업은결국 130억의적자를기록하였다. 이를보전하기위한비용을포함하여, 결국하남시는 186억 5천만원에달하는세금을이사업에쓰게되었다. 이사건을계기로한시민단체는이권이나치적을위하여무리하게사업을추진하여예산을낭비한정부부처나공기업, 그리고지방정부에게 밑빠진독상 을제정하여수여하기시작하였다. 2009년까지총 36차례수여된이불명예스러운상의단골수상자는지방자치단체였다 ( 안청시 이광희 2002). 9 8 다만우리의지방자치는 2006년 5월제정되고, 2007년 5월부터시행된 주민소환제에관한법률 을통하여지방자치단체의장및투표로선출된지방의회의원과같은선출직지방공직자에대해서 주민소환 이라는투표의방식으로그직을박탈하는제도를채택하고있다. 이법에따라 2007년 12월주민들의동의를얻지않은광역화장장유치를지역단체장이추진했다는이유에서기초자치단체인하남시의시장과시의회의장에대한주민소환투표가실시되었으나, 투표율미달로주민소환은성사되지못했다. 2009년에는 제주해군기지건설 의일방적추진과관련하여제주특별자치도지사에대한소환투표가실시됨으로써광역자치단체장에대한최초의주민소환투표가시도되었으나이역시투표율미달로 성사되지못했다. 9 역대 밑빠진독상 의수상자에대해서는 <http://goodbudget.kr/pot_archive/2213> 참조 ( 검색일 :2016 년 11 월 30 일 ).

10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지방자치단체의방만한재정운용과관련하여또하나빼놓을수없는것이 신청사 의건립일것이다. 2010년감사원의한보고서에의하면, 1995년이후지방자치단체는경쟁적으로청사를건립하기시작하여 2010년 4월까지 65개자치단체 ( 광역 6, 기초 59) 가청사를신축하였고, 그외 12개자치단체는당시에청사를신축중이었다. 하지만, 청사를신축완료한 65개의지방자치단체중 78.5 퍼센트에달하는 51개단체는재정자립도가채 50퍼센트에미치지못하였다 ( 감사원 2010). 이와같은방만한재정운용의결과, 그리고지방사무의증가에도불구하고고정된국세와지방세의배분비율 ( 최병대 2013) 등과같은복합적인요인에의하여전국지방자치단체의평균재정자립도는 1995년의 63.5 퍼센트에서 2015년에는 45.1 퍼센트로하락하였다. 지방자치 20년만에 18.4 퍼센트포인트의하락을경험한것이다. 지방재정에관련한행정자치부의보고를바탕으로작성된이기사에의하면, 전국 243개지방자치단체 ( 광역 17, 기초 226) 가운데지방세수입으로공무원인건비를해결하지못하는수준의지방재정자립도를보여주는단체가절반이넘는 126곳 (52 퍼센트 ) 에달한다고한다 ( 연합뉴스 2015). 이와같은지방자치단체의무리한사업추진, 방만한재정운용등은각종부정부패 비리와관련한추문 (scandal) 과사법처리로이어졌다. 대검찰청의내부자료를분석한한국지방행정연구원의 2000 년보고서에의하면, 1995년 5월부터 2000년 3월까지부패행위로인하여광역자치단체장 5명, 기초자치단체장 53명, 광역의원 54명, 기초의원 134명등모두 246명이사법처리되었다 ( 안청시 이광희 2002). 또한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2000년이후재 보궐선거현황 자료에의하면, 2000년이후 2015년말까지 884건의재 보궐선거가단체장이나지방의원의중도하차에의하여실시되었다. 이들중일부는국회의원선거출마등을위해사직한경우도있지만, 대부분은선거법위반이확정되어당선무효가된경우거나비리혐의로중도에사직한경우이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16). 2006년에선출된민선 4기의경우기초단체장의 18.3 퍼센트가뇌물수수등으로직위를상실했으며, 전라북도임실의경우는 1995년이후선출된군수중, 현직군수를제외한모두가허위서류작성, 인사비리, 뇌물수수, 정치자금법위반등의혐의및확정등으로임기를채우지못하고중도하차함으로써 군수의무덤 이라는오명을쓰기도하였다. 현직군수또한선거법위반으로기소되었다가벌금 80만원을선고받고간신히군수직을유지하는상태이다 ( 경향신문 2016). 요약컨대, 중앙정부의재정적 행정적통제의지속, 중앙정치의대리전양상으로전개되는선거, 견제와균형의상실등과같은구조적악조건속에서우리의지방자치는지난 22년간많은혼란을경험할수밖에없었다. 주민들의실질적인삶의질향상에는크게기여하지못하는보여주기식전시행정및홍보성이벤트, 그로인한방만한재정운용과파탄등은일부에게지방자치를비효율과무능의상징으로만들기도하였다. 각종비위와연관되어임기를마치지못하는단체장과의원은지방정부에대한시민들의신뢰를거둬들이게만드는요인이되어온것이다.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105 4. 새로운희망의씨앗 그러나모든지방자치단체가위와같은암울한모습만을보여왔던것은아니다. 일부의지방자치단체는이러한척박한환경속에서도조금씩, 조금씩지방정치의차원에서시민의참여를확대해가는모습을보이고있다. 특히지방자치의원래의도입취지에맞게주민의삶에밀접한연관을가지는복지정책의영역에서지역의실정에맞는새로운혁신적인실험들이지방자치단체들에의하여시도되는모습들도발견된다. 일부지역에나타난변화가주변지역으로확산되면서지방자치단체가중요하고혁신적인정책의실험장으로역할하는모습을보이기도한다. 우리의지방자치가진정한의미의주민자치, 풀뿌리민주주의의현장으로변모하게되는가능성을보여주는아주작은희망의씨앗들이조금씩움터오는모습을발견할수있는것이다. 다소역설적이긴하지만, 이와같은변화의출발점은중앙정부로부터발견된다. 1991년민주화이후최초로지방의회를주민선거를통해서구성하게됨에따라중앙정부와지방자치단체간의권한및사무재배분에대한논의가시작되게된것이다. 여론의압력과정치적상황의변화에의해어쩔수없이지방의회를구성하게된마당에선출된지방의회에아무런역할을부여하지않을수는없는노릇이었을것이다. 이에따라정부는 1991년국무총리훈령으로총무처에 지방이양합동심의회 를설치하게된다. 이기구는지방자치단체및중앙부처의과장급이상공무원으로구성되는비상설협의체로서중앙부처로부터지방자치단체에권한을이양할사무를연 1회조사발굴하고합동으로심의하는역할을하였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활동한이심의회는총 3,701건의사무를심의하여, 이중 2,008건에대해지방이양을확정하고, 1,639건에대하여기간중에이양을완료하였다. 절대적인숫자는많아보이지만, 1991년기준법정상의사무수가 1만 6천건에달하고, 이중중앙정부가단독으로처리하는사무가 1만건이상, 그리고비록지방자치단체가담당할지라도, 중앙정부가강력한통제권을행사하는지방위임사무가 2천건이상임을감안할때, 지방에권한을이양하려는노력은매우소극적인것이었다고할수있다 ( 한국행정학회 2002; 최병대 2013). 사무의이양과관련하여특기할사항중의하나는 1994년과 1998년의시기에상당히많은권한이집중적으로이양되었다는것이다. 이두해에전체 8년의기간동안에이루어진 3,701건중 2,044건 (55.2%) 에대한심의가이루어졌고, 실제이양이완료된 1,639건중 970건 (59.2%) 에대한이양이이루어졌다. 이두해는모두선거를앞두고있던시기이고, 특히 1998년은김영삼정부에서김대중정부로권력이교체되는시기이다. 결국이는지방으로의권한이양이중앙정치세력간의경쟁의결과로이루어진성격이강하다는것을보여준다. 김대중정부는지방으로의권한이양에보다적극적인모습을보여주었다. 물론지방분권과주민자치에대한대통령의소신도작용했겠지만, 그이면에는오랜기간동안권력을장악해온과정에서자신에게그다지우호적이지않은모습을보인중앙정부의관료조직에대한견제의의도도있었을

10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것이다. 김대중정부는 1999년 1월 중앙행정권한의지방이양촉진등에관한법률 을제정하고, 이에의거하여대통령직속의 지방이양추진위원회 를구성하였다. 특기할만한사항은관료가아닌민간인을위원장으로임명하고, 민간전문가 12명과관계부처장관과자치단체장을포함하는총 20명으로위원회가구성되었다는점이다. 이위원회는이후대통령의후원에힘입어지방분권에관한실질적인성과를이룬것으로평가된다. 또한이과정에서참여연대와경실련등시민단체를중심으로한주민참여의기회가확대되고, 지방자치단체의참여가양적으로확대되는계기를마련하였다는평가를받는다. 이어지는노무현정부는 참여정부 를정부의공식적인명칭으로내세웠던만큼, 지방분권과주민자치에대해더적극적인모습을보였다. 노무현정부는 2003년 4월기존의지방이양추진위원회와는별도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를대통령직속으로신설하고, 지방분권의큰틀과과제를설정하는역할을맡겼다. 이에따라위원회는지방분권의기본방향을 통치에서협치로, 관에서민 으로, 중앙에서지방으로, 소외에서참여로 설정하고, 지방정부와시민사회에대한신뢰를기반으로먼저지방분권을추진하고여기서발생되는문제는추후에보완한다는 선분권후보완의원칙, 지역주민에가장가까운지방자치단체에게우선적으로기능을이양하는 보충성의원칙, 개별사무이양보다는포괄적인대단위및기능별사무이양을추진한다는 포괄성의원칙 을지방분권의추진원칙으로제시하고, 이에기반하여 지방분권로드맵 을작성하였다 ( 소순창 2011; 최병대 2013). 2003년부터 2007년사이의기간동안에총 902건의업무가중앙에서지방으로이양되는데합의가이루어졌고, 987건의업무가실제적으로이양완료되었다. 이양완료건수가이양확정건수보다많은것은이전에이양확정된업무중에이양이이루어지지않은업무의상당수가이시기이양완료되었기때문이다. 이는노무현정부의지방분권에대한강력한실천의지를보여주는지표라고할수있다. 또한노무현정부시기인 2006년에는제주특별자치도법을제정하여여타의광역자치단체에비교하여행정 재정등에있어서더많은자치권한을제주도에부여하기도하였다. 이명박정부는노무현정부시기에추진되던지방분권의의지를이어받아계속추진하는모습을보였다. 지방분권을 100대국정과제로선정하고, 별도로운영해오던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의분권기능과 지방이양추진위원회 의지방이양기능을통합하여 지방분권촉직위원회 를출범시켜지방분권정책의체계적인추진을도모하고자한것이다. 하지만이명박정부시기에지방이양이확정된사무는 1,587건이지만, 실제로이양이완료된것은 763건으로실질적인성과는기대에미치지못하는것으로나타난다. 박근혜정부들어서도지방분권을향한흐름은지속되는모습을보인다. 박근혜정부는 2013년 5월성숙한지방자치제도구현및지방분권의종합적 체계적 계획적추진에관한사항을심의하기위한목적으로, 기존의지방분권촉진위원회와이명박정부시설행정체제개편을위해설립된지방챙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를하나로통합하여지방자치발전위원회를대통령소속으로신설하였다. 하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107 지만박근혜정부시기에이루어진지방자치및분권의실질적인성과에대한평가는아직은더기다려봐야할것이다. 이상에서민주화이후지방자치의변화와관련하여특히지방분권의측면에서중앙정부가담당하던국가사무의지방으로의위임을중심으로살펴보았다. 민주화에대한열망과국민적압력속에지방자치를부활시킨배경속에서지방자치단체가담당해야할역할을재조정하는것은너무나당연한과정이었을것이다. 그래서민주화이후등장한모든중앙정부는각각별도의위원회를구성하여이작업을담당시켰다. 하지만그와같이목적으로설립된위원회의실질적성과는편차를보인다. 특히우리사회에서일반적으로진보를대표한다고평가되는세력이중앙정부를통제하였을때, 더가시적인성과가나타나는모습을보이는것은, 이들진보의입장이지방분권및주민자치의이념과선택적으로친화적인탓도있겠지만, 다른한편으로우리사회의오랜권위주의경험과그과정에서상당한보수화가진척된중앙정부의관료조직의성격을감안할때, 지방분권역시중앙권력을둘러싼경쟁의과정속에서확대되어온측면이있음을부정하기는어렵다. 이와같은심증과가설을뒷받침해줄수있는지표의하나가지방자치단체의역할과재정의불일치라고할수있다. 한연구에따르면, 그간약 20년간의지방자치의과정속에서지방자치단체가수행하는국가사무와지방사무의비율은지방자치출범초기약 8:2의수준에서 7:3의수준으로변모해왔다고한다. 약 20,000건정도에달하는법정사무의양을생각할때, 작지않은변화라고도할수있지만, 그렇다고중앙정부와지방정부사이의역관계에근본적인큰변화가일어났다고하기는어려운변화이다. 그러나더큰문제는이러한사무를처리하는재정과관련하여국세와지방세의비율은여전히 8:2의구조를벗어나지못하고있다는점이다. 쉽게말하면, 지방자치단체는더많은업무를더적은재원으로수행해야한다는점이다. 이와같은불일치는열악한지방자치단체의재정적여건을악화시키는한원인으로작용해왔다. 또한지방자치단체는부족한부분을메우기위하여교부금이라는중앙정부의재정지원에의존해야한다. 결국이는지방분권의흐름에도불구하고중앙정부가여전히지방정부에대해강력한통제력을유지하는수단이된다. 이와같은구조적한계와배경에대한의혹에도불구하고, 지방자치단체는꾸준히그역할을확대해왔다. 한번주어진권한을다시회수하는것은정치적으로큰부담을감수해야만하는일이라는중앙정치세력의판단도작용했을것이다. 아무리지방선거에서중앙정치에대한고려가크게작용한다하더라도여전히선거는선거이다. 또한선출직공직자의수와많아지고다양해짐에따라더많은권한을행사할수있는공직으로진출하려는유인도존재할것이다. 이러한유인들에따라지방자치단체는여전히척박한환경에도불구하고높아진자율성을바탕으로기존의중앙정부차원에서시도되지못했던창의적이고혁신적인정책들을계발 실행하는모습을보이게된다. 또한지방자치단체들간의경쟁에의하여효과가검증된정책들은이웃하는지방자치단체로확산되고, 마침내중앙정부가이를법제화하여전국에도입하는양상도나타나게된다.

10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이와관련한대표적인사례가 주민참여예산제도 이다. 지방차지단체의예산편성에주민들이참여하여의견을개진하고집행의우선순위를결정하는주민참여예산제도는 2002년제3회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민주노동당이선거공약으로도입을주장하면서사람들의관심을처음끌게되었으며, 이후광주북구가 2004년 3월예산참여시민위원회를구성하여시민들이예산편성에참여하는것을제도화하는운영조례를제정함으로써처음도입되었다. 이어서유사한내용을담은조례가울산동구를비롯한다른지방자치단체에서채택됨으로써확산되는모습을보였고, 마침내 2006년행정자치부는 주민참여예산제도표준조례안 을제시하게되었고, 2011년에는지방재정법개정을통해서모든지방자치단체의예산편성에주민이참여하는것이의무화되었다 ( 권오성 배인명 2015). 이는지방정부에서시작된정책된정책적혁신이중앙정부를통해서전국으로확산되는상향식정책결정의양상이나타나게된것을보여준다. 또다른유사한사례는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대한청구에대한사례이다. 1991년충북청주시의의회는일반인들도정해진절차에따라공무원만열람할수있었던행정정보를공개하도록청구할수있고, 특별한사유가없는한이는공개되어야한다는내용을담은 청주시행정정보공개에관한조례 를의결하였고, 비록청주시는이에대해 취소청구소송 을냈지만, 대법원은이를기각했다. 이후국회는 1996년 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법률 을제정함으로써현재중앙과지방을포함한거의모든공공기관은특별한사유가없는한정보공개청구에응해야한다. 이와유사하게행정실명제, 민원모니터제, 직소민원실, 일일명예공무원, 공무원친절평가단등주민의참여를보장하면서행정서비스의질을높이는창의적인정책실험들이지방자치단체들에의하여앞다퉈도입되는모습을보였다. 행정서비스의변화뿐만아니라특히주민들의일상적인생활과관련한문화 복지분야에서지방자치단체는많은변화를선도적으로이끄는모습을보여주고있다. 1998년전국에 290개에불과하던공공도서관은 2013년 865개로늘어났으며, 사회복지시설수는 2003년인구 10만명당 3.3개에불과했으나 2012년에는 15.6개로증가했다. 사회복지담당공무원수는 2006년 1만 8,500명수준에서 2014년 3만여명으로늘어났으며, 이수는계속증가추세를보이는것으로나타나고있다 ( 경향신문 2016b). 위에서주민참여예산제도와정보공개청구와같이지방정부에서시작된정책적혁신이중앙정부로확산된사례를살펴봤지만, 이와같은사례는더있다. 현재한국사회를뜨겁게달구고있는경제민주화에대한관심은 2010년지방선거에서진보세력이무상급식을선거의쟁점으로부각시키는과정에서전국적인의제로확산되었음을부인하기어렵다. 일상의삶과직결되는경제민주화에대한쟁점은재벌개혁을제외하고는이전의전국선거에서찾아보기어려웠던쟁점이다. 하지만 2010 년지방선거이후무상급식, 무상보육과같은쟁점은이후의전국선거에서가장뜨거운관심을받는쟁점중의하나가되었다. 협치 및 연정 에대한관심도빼놓을수없을것이다. 2014년의지방선거를앞두고제주도의원희룡, 경기도의남경필후보는여 야의대립과갈등을한국정치의고질적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109 인해악으로규정을하면서도지사에당선되면권력을적극적으로나누겠다는공약을제시한후, 당선된후상대당의후보를자신의인수위원장으로임명하고 ( 제주도 ), 상대당에서추천한인사를사회통합부지사의자리에임명하는등 ( 경기도 ), 각자의 협치 와 연정 을추진하는파격적인모습을보인것이다. 아직현재진행형인모습이기에그성과를평가하는것은시기상조이지만, 이러한파격적인모습이중앙정치에하나의 화두 를제시한것은부인하기어렵다. 이러한모습은상명하달식의위계적인모습을보이던중앙정부와지방정부의관계가지방이적극적으로중앙정치의 의제 를설정할수있는역할을수행할수있을정도의관계로중앙정부와지방정부의관계가변모해왔다는것을보이는상징적인것이다. 이러한변화가가능하게된데에, 역설적으로중앙권력을둘러싼중앙정치세력의정치적이해관계에따른전략적상호작용이있었다는것을부인하기는어렵다. 즉권력을장악하지못한쪽은중앙권력을견제하기위해서지방분권의확대를주장한것이고, 권력을장악한쪽은중간평가의성격으로진행되는불확실한선거의환경속에서지방분권의확대에타협할수있었던것이다. 그러나어렵게찾아온기회를소중히살려서희망의씨앗을키운것은무엇보다도시민의힘이다. 시민의힘은지방자치를부활시키는데있어서중요한사회적압력을제공했으며, 비록지역주의라는왜곡된선거환경으로부터자유롭기힘들었지만, 그와같은어려운환경에서도더나은지역의대표자를선출하려는노력을보여왔으며, 선출된대표자에대한감시의눈초리도거두지않은것이다. 10 비록여전히많은지방자치단체가많은문제점을노출하고있지만, 일부의지방자치단체에서시작된작은변화는다시이웃하는다른지방자치단체의시민들로하여금그들이지방자치단체에변화를요구하게하는준거를제공하였다. 5. 맺으며 이제까지우리는 1987년의민주화이후지방자치제도가부활하기까지의힘겨웠던과정을시간의흐름을따라역사적으로살펴본후, 1995년이후현재까지약 22년간의지방자치의경험을성과와한계의측면으로살펴보았다. 지방자치가지방에대한분권과주민자치와참여의확대를통한풀뿌리민주주의의심화라는본연의목적보다는중앙권력을둘러싼중앙정치세력의정치적이해관계에따른타협의결과물로서부활했기에, 우리의지방자치는많은문제와한계를보여왔다는것을부인하기는어렵다. 즉현재의지방자치가과거중앙정부의재정적, 행정적통제력을그대로유지한채, 10 시민들의참여를보여주는지표로 2000년 2,524개에불과했던비정부기구 (NGO) 의수가 2014년에는 1만 2,252개에달하는것을들수있다. 이중지방자치단체에등록한단체는중앙정부에등록한단체의 7배이상에달한다. 주민들의청원을비롯한각종지방자치단체에대한정책제안의수도 2005년 6,094건에서 2014년 11만 6,188건으로폭발적으로증가한양상을보인다.

11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단체장과의회만을주민의선거로구성하는정도의변화를도입하는데그쳤기때문에, 지방자치는중앙정치의강력한영향속에서벗어나기어려웠으며, 지방의현안과쟁점은뒷전으로밀려날수밖에없었다. 지역주의의영향속에서지방자치를구성하는단체장과의회는일당에의해장악되는것이다반사였으며, 견제와균형이상실된지방자치는무능과부패, 비효율의상징처럼되어버렸고, 지방자치에대한시민의불만과불신또한증가되어오는모습을보였다. 그러나모든지방자치단체가위와같은암울한모습만을보여왔던것은아니다. 일부의지방자치단체는이러한척박한환경속에서도조금씩, 조금씩지방정치의차원에서시민의참여를확대해가는모습을보이고있다. 특히지방자치의원래의도입취지에맞게주민의삶에밀접한연관을가지는복지정책의영역에서지역의실정에맞는새로운혁신적인실험들이지방자치단체들에의하여시도되는모습들도발견되었다. 일부지역에나타난변화가주변지역으로확산되면서지방자치단체가중요하고혁신적인정책의실험장으로역할하는모습을보이기도한다. 이러한변화의모습들은비록아직은성급한판단일수있지만, 이제갓성년을넘긴우리의지방자치가초기의혼란을뒤로하고서서히풀뿌리민주주의의확대라는제도도입의본연의취지에맞게변모하는가능성을시사하는것이다. 이러한변화가가능하게된데에, 역설적으로중앙권력을둘러싼중앙정치세력의정치적이해관계에따른전략적상호작용이있었다는것을부인하기는어렵다. 즉권력을장악하지못한쪽은중앙권력을견제하기위해서지방분권의확대를주장한것이고, 권력을장악한쪽은중간평가의성격으로진행되는불확실한선거의환경속에서지방분권의확대에타협할수있었던것이다. 한번주어진권한을다시회수하는것은정치적으로큰부담을감수해야만하는일이라는중앙정치세력의판단도작용했을것이다. 아무리지방선거에서중앙정치에대한고려가크게작용한다하더라도여전히선거는선거이다. 또한선출직공직자의수와많아지고다양해짐에따라더많은권한을행사할수있는공직으로진출하려는유인도존재할것이다. 이러한유인들에따라지방자치단체는여전히척박한환경에도불구하고높아진자율성을바탕으로기존의중앙정부차원에서시도되지못했던창의적이고혁신적인정책들을계발 실행하는모습을보이게된것이다. 그러나어렵게찾아온기회를소중히살려서희망의씨앗을키운것은무엇보다도시민의힘이다. 시민의힘은지방자치를부활시키는데있어서중요한사회적압력을제공했으며, 비록지역주의라는왜곡된선거환경으로부터자유롭기힘들었지만, 그와같은어려운환경에서도더나은지역의대표자를선출하려는노력을보여왔으며, 선출된대표자에대한감시의눈초리도거두지않은것이다. 그러나여전히우리의지방자치가주민들의삶에중요한영향을미치는정책에대해서주민들이직접참여하고결정하는진정한의미에서의성숙한지방자치라고하기는어렵다. 현재발견되고있는긍정적인변화의모습들은본문에서표현한대로희망의씨앗이고가능성일뿐이라는것이우리의솔직한심정이다. 우리의지방자치는지금현재의긍정적인변화를조심스레발전시키고확산시

민주화 30 년 : 지방자치의성숙과과제 111 켜서성숙한민주주의를지탱하는굳건한버팀목이되느냐, 아니면긍정과부정의양상이혼재하는지금의지지부진한모습을크게벗어나지못하고, 중앙정치의들러리역할을하는데만족하는지방자치에머무르고마는가하는선택의기로에놓여있다. 어떤선택이이루어지는가는이제부터우리가하기나름일것이다. 다만이제까지척박한환경에서지방자치의씨앗을움트게한것이시민의힘이었다면, 이제부터는조금더적극적으로중앙정부가나서야할것으로판단된다. 현재와같이지방자치단체의역할과재정적권한이불일치되는환경속에서지방자치가성장하기에는구조적한계가있기때문이다. 물론중앙정부를움직이는것은역시시민의힘밖에는없을것이다.

11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참고문헌 가상준. 2014. 중앙정치중심의지방선거 : 국회의원, 광역의원, 기초의원먹이사슬공천... 경쟁없는선거. 강원택편. 한국지방자치의현실과개혁과제 서울 : 사회평론아카데미. 57-72. 강원택. 2014. 총론 : 지방자치를보는새로운시각. 강원택편. 한국지방자치의현실과개혁과제 서울 : 사회평론아카데미. 13-39. 경향신문. 2016a. 지방자치 25년 (3): 4명이옷벗은 군수무덤 임실... 비리에풀뿌리정치병든다. (2016/2/4). 경향신문. 2016b. 지방자치 25년 (5): 자치시대가일군성과 (2016/4/18). 권오성 배인명. 2015. 주민참여예산제도의효과성평가에관한연구 한국행정연구원 (KIPA) 연구보고서 2015-26. 소순창. 2011. 역대정부의지방분권정책의평가. 한국지방자치학회보 제23권제3호. 39-68. 소정광외 7인. 2008. 한국지방자치의이해 ( 한국지방자치학회 ) 서울 : 박영사. 손봉숙. 1985. 한국지방자치연구 서울 : 삼영사. 손봉숙. 1986. 제1공화국과자유당. 한국정치학회편. 현대한국정치론 서울 : 법문사. 133-166. 안청시. 1985. 우리나라지방자치제도의발전과정과그특징. 김경동 안청시편. 한국의지방자치와지역사회발전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47-76. 안청시 이광희. 2002. 한국민주주의와지방정치 10년의성과와과제. 안청시외. 한국지방자치와민주주의 : 10년의성과와과제 파주 : 나남. 13-51. 연합뉴스. 2015. 민선자치 20년 : ⓷지방세로직원월급도못주는지자체절반 (2015/6/1). 이상환. 2011. 미스터지방자치, 김대중. http://www.presian.com/news/article.html?no =3797.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9a. 대한민국선거사제4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9b. 대한민국선거사제5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9c. 대한민국선거사제6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16. 2000년이후재 보궐선거현황 최병대. 2013. 중앙과지방의상생을위한지방분권. 의정연구 제19권제1호. 5-38. 한국행정학회. 2002. 중앙-지방간사무재배분원칙의정립과지방이양대상권한및사무발굴을위한연구 1,2 서울 : 한국행정학회.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13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박현석 (KAIST) 1. 정치민주화와경제민주화 대한민국은 1987년 6월항쟁을통해대통령직선제를주요내용으로하는정치적민주화를달성하였다. 정치적민주화는미성년자를제외한전국민이 1인 1표의원리에따라대표선출에참여하는민주적의사결정을통한자치의실현을핵심으로한다. 6월항쟁 30주년을맞이하는현시점에서한국의민주화의성과와한계를평가한다면절차적민주주의의안정화를달성하였으나이른바실질적민주화를달성하지못하였다는비판이지속적으로제기되어왔다는점을부인할수없다. 절차적민주화를달성하였음에도불구하고재벌중심의경제구조에서비롯되는경제력의집중현상이지속되고있으며소득의불평등이확대되면서경제적양극화가심화되고있다는것이다. 소득양극화로인한경제력의집중은장기적으로볼때사회통합과안정을저해한다는점에서부정적외부효과가크다. 뿐만아니라경제력의집중이결국정치권력의집중으로귀결될수있다는점에서민주주의의지속성에위협이될수있다. 1997년동아시아외환위기이후긴축정책과구조조정의결과경제적양극화가심화되면서경제민주화에대한국민들의요구가확산되고있다. 본장은 1987년 6월항쟁이후한국에서경제민주화가전개되어온과정을분석하고, 한국의경제민주화가갖는독특성과한계에대해평가하는것을목적으로한다. 한국은산업화시기이른바발전국가 (Johnson 1982; Amsden 1992) 모델에따라국가주도의산업정책을통해대기업을육성하여고도의경제성장을달성하였다. 립셋 (Lipset 1960) 이주장했듯이경제성장은민주주의의지속가능성을높여주는데기여하는바가크다고알려져있다. 한국의민주화또한고도의경제성장의결과로나타난중산층과노동계급의성장이라는구조적변화속에서설명할수있다. 1987년 6월항쟁으로직선제쟁취등절차적민주주의를달성한이후민주화의열망은경제영역으로확산되었다. 동등한참여의권리를정치의영역에서기업및경제영역으로확산하고자하는경제민주화에대한요구는기업내에서, 그리고국가정책의영역에서다양한방식으로분출되었다. 정부의산업정책과함께임금인상억제를통해국제시장에서가격경쟁력을확보하는노동억제전략은한국의고도경제성장에기여하였다. 억눌렸던노동세력은 6월항쟁이후민주화의원칙을

11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정치영역에서기업등경제영역으로확대할것을요구하였다. 이른바노동자대투쟁과그이후민주노조운동은고도성장시기억제되었던임금인상, 작업장민주화등을요구하며대규모파업을전개하였다. 이들의주장은민주주의의원리를경제공동체로확산시키기위한경제민주주의의일환이었다. 김영삼대통령은냉전종식과함께전세계로확산되던신자유주의경제정책을받아들여경제자유화정책을강력히추진하였다. 김영삼정부의정책기조는탈규제, 자유화를통해정부의역할을축소하고시장의기능을강화하는것을목적으로하였다. 김영삼정부의신자유주의적경제개혁은시장경쟁의촉진을통해재벌중심의경제구조를개혁하고자하였으나결과적으로재벌의경제력집중도는유지강화되었다. 김영삼정부에서급격하게추진했던자본시장의개방은동아시아외환위기가한국으로확산되는원인을제공하였다. 외환위기극복을위해 IMF의구제금융을받은한국은 IMF의처방에따라긴축정책과구조조정을추진하는과정에서노동시장의유연화, 재벌개혁등신자유주의적경제정책이전격적으로시행되었다. 구조조정과정에서실업자가양산되고노동시장이정규직과비정규직으로양분되면서소득양극화가심화되었다. 미완의경제민주주의에대한논의가외환위기와구조조정과정에서재점화되면서재벌중심의경제구조와소득불평등의심화, 이로인한기회의평등의박탈에대한국민들의비판의식고조되었다. 그결과 2002년대통령선거부터복지정책의확대, 부자증세론등경제민주주의논의가중요한정치적의제로등장하기시작하였다. 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경제력집중의완화와소득양극화의해소를주된의제로한다는점에서서구의경제민주주의의흐름과맞닿아있다. 하지만산업화시기후발국으로서국가주도의경제성장이라는동아시아형경제발전경로를겪어왔기때문에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서구의복지국가에서전개되는경제민주주의논의와는다른특징을보여준다. 주로누진적소득세와간접세를통해복지정책에소요되는재원을확보해온서구의복지국가들과달리한국은재벌기업으로부터거둬들이는법인세를통해소득격차해소를위한재원을확보하려는경향을보여준다. 재벌의고통분담및비용부담을전제로하는경제민주주의논의는정부의정책적배려와낮은임금을배경으로달성한재벌기업의성장의과실을공유한다는점에서의미가있지만한국형경제민주주의모델은지속가능성의측면에서반성적성찰이필요한시점이다. 재벌기업으로부터거둬들이는법인세를중심으로복지재원을확보하면서동시에재벌의경제력집중을완화하기위해재벌중심의경제구조개혁을추진한다면복지재원의안정성에의문을제기할수밖에없다. 재벌중심의경제구조와법인세중심의복지재원확충은장기적으로양립하기어렵기때문에경제민주주의의심화를위해서는한국경제의발전전략과양극화해소방안에대한포괄적인고민이필요하다.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15 2. 경제민주주의란무엇인가? 가. 경제민주주의의정의 경제민주주의의출발점은정치적민주주의의원리를경제영역에적용하는것이다. 정치공동체내에서민주주의원리의핵심은모든구성원이동등한권리로의사결정에참여하는자치이다. 공동체에적용될규칙이정해지면이규칙은공동체의구성원모두에게동일하게적용되며, 모든시민들이공동체의결정에의해영향을받는다. 따라서누구나정치참여의권리를보장받아야하며, 1인 1표로대표되는동일한참정권을부여받는다. 정치공동체의의사결정에민주주의의원리를적용하는것이바람직하다면, 경제공동체에도민주주의의원리를적용하는것이마찬가지로바람직할것이다 (Dahl 1985). 각국은자신의역사적전통과경제발전의경로, 문화적배경등에따라독자적인정치적민주주의를구축해왔다. 예를들어미국은역사적으로연방주의를채택해왔으며, 독일은조합주의의전통을가지고있다. 정치적민주주의의원리가개별국가들의역사적맥락에따라다르게나타나기때문에, 경제민주주의의개념또한국가별로맥락에따라서로다른의미로사용된다 (Drew 1984; 조우현 1994). 정치적다원주의와자유주의적시장경제의전통이강한영미권국가의경우경제민주주의는기업내부의민주주의 (democracy within firms) 를의미한다 (Dahl 1985; Brenkert 1992; O Neill 2008). 전통적으로기업은사유재산에속하며현대의기업자본주의 (corporate capitalism) 의주요기업형태는주식회사이다. 주식회사는회사의소유주인주주 (shareholder) 의이익을극대화하는것을목적으로한다. 하지만기업내에는주주뿐만아니라관리자를포함한종업원등다수의이해당사자 (stakeholder) 들이존재한다. 기업내부의민주주의라는맥락에서볼때경제민주주의는다양한형태로이해당사자들이기업의소유와경제적보상의배분에참여하는것을의미한다. 집단소유, 자본공유, 협동조합, 직원주주제및다양한이윤공유제도가이에해당한다 (Pontusson and Kuruvilla 1992). 소유와보상의차원과달리민주적의사결정방식을기업에적용하여노동자들이경영상의중요한의사결정에적극적으로참여하는경우는산업민주주의 (industrial democracy) 라고분류되며, 이는기업내부의민주주의와구분된다 (Poole 1989). 미국의민주주의이론가로버트달 (Dahl 1985) 은이윤공유보다는민주주의적의사결정원리를기업에적용하는산업민주주의가경제민주주의의본령에더욱충실하다고보았으나, 이윤공유제와산업민주주의모두협의의경제민주주의의개념으로포괄된다고보는편이적절하다고생각된다. 다원주의전통에서본경제민주주의는기업민주주의 (corporate democracy) 또는작업장민주주의 (workplace democracy) 와동의어로사용된다. 다원주의적전통에서볼때분권화 (decentralization) 가정치적민주주의의주요원리의하나이므로경제민주주의또한분권화의원리에기초해야한다. 다원주의적경제민주주의는기업내부의민주주의라는개념에내포되어있듯

11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이개별기업은외부의결정의영향을받지않고기업내에서민주적으로주요의사결정을하는것을중요전제조건으로하고있다 (Dahl 1985). 기업내의민주주의는개별기업을독립적인단위로하는분권화된민주주의인것이다. 조합주의 (corporatism) 의전통이강한독일의경우경제민주주의는민주적조합주의 (democratic corporatism) 를의미한다. 독일은 2차대전이후조합주의를민주적원리에입각해재구성하여민주적조합주의를확립하였다. 조합주의는자본과노동의갈등을조절하기위한타협의방식으로, 정부의중재하에서임금, 고용, 투자등중요한경제적문제에대해자본과노동이상호협의를통해결정을내린다 (Katzenstein 1984). 민주적조합주의는민주적으로선출된정부가자발적으로조직된자본과노동의타협을중재한다는점에서파시즘적국가조합주의와는구분된다. 하지만 2차대전이후독일에서나찌의국가조합주의에대한반감이강하게남아있었기때문에민주적조합주의대신경제민주주의라는용어를사용하였다 (Prowe 1985: 461). 독일식경제민주주의는조합주의를전제로하기때문에국가또는산업수준에서기업과노동을대표하는조합을필요로한다. 독일식경제민주주의에서는기업들과노동자들을대표하는상위조직이임금, 고용, 투자등중요한경제문제에대한결정을하기때문에분권화된다원주의적모형과달리중앙집권적인성격이강하다. 중앙에서이루어지는결정이자본과노동양자가참여하여민주적정부의중재를통해이루어진다는점에서민주적이지만, 주요경제적결정이기업외부에서이루어진다는점에서앞서기술한기업내부의민주주의와는차이가크다. 나. 한국의경제민주주의 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서구에서주로사용되는경제민주주의에비해폭넓은의미를포괄하는개념으로통용되고있다 ( 신용옥 2007). 통상적으로경제민주주의논의의출발점으로간주되는 1987년개정헌법의 119조 2항, 이른바경제민주화조항은 국가는균형있는국민경제의성장및안정과적정한소득의분배를유지하고, 시장의지배와경제력의남용을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조화를통한경제의민주화를위하여경제에관한규제와조정을할수있다 고되어있다. 헌법의경제민주화조항에따르면경제민주주의는재벌위주의성장을견제하고, 자본과노동의조화를추구하며, 소득불평등을완화하는것이다. 서구에서통용되는경제민주주의의개념이노동자들의참여에중점을두고있다면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재벌등에의한경제력집중해소 ( 전성인 2012) 를강조하는경향을보여준다. 다원주의적경제민주주의와조합주의적경제민주주의는서로간의차별성을갖지만노동자의참여를강조한다는점에서공통점을갖는다. 다원주의적경제민주주의는기업내부에서노동자의참여를강조하며, 조합주의적경제민주주의는국가수준또는산업수준의노사정합의에노동자들이참여하는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17 것을전제로한다. 하지만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재벌등지배적경제세력에대한통제와소득불평등의완화등을강조하고있으며, 이문제를해결하기위한국가의역할이중요하게고려된다. 1987년 6월항쟁이후전개된노동자대투쟁은전국단위의민주노총과산별노조건설을추구하였다는점에서조합주의적경제민주주의를추구하였고, 노동자의참여를강조하였다. 하지만동아시아외환위기이후기업및노동시장구조조정을거치면서비정규직노동자의비중이급증하여노동시장의내부자와외부자간의갈등이사회적문제로대두되었다. 노동시장의내부자인정규직노조는조직화된정치적영향력을확보하고있으나, 노동시장의외부자인비정규직의숫자가늘어나고노동조합이비정규직을포괄하는데실패하여노동조합중심의경제민주주의는활력을상실하였다. 시민단체들을중심으로전개된경제민주화운동의내용은주로재벌문제에집중되어있다. 1989 년창립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 이하경실련 ) 은재벌과부유층의부동산투기문제를제기했고, 금융실명제도입에주도적인역할을하였다. 경실련은경제정의실천의핵심과제로토지문제에주목하였고, 재벌과부유층으로집중된부의재분배를위해서는부동산문제를해결해야한다고보았던것이다. 1994년에창립한참여민주사회와인권을위한시민연대 ( 이하참여연대 ) 는 1996년경제민주화위원회를설치하고재벌의경제력집중과계열사들간의부당한거래의문제를제기하였고, 재벌총수들과가족들이불법과편법으로가져간회사의재산을되돌리기위해주주총회에적극참여하고소송을제기하는등의소액주주운동을전개하였다. 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정치적민주주의의원리를경제영역에적용한다는점에서서구의경제민주주의와궤를같이한다. 하지만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서구의경제민주주의와비교할때중요한차이점을보인다. 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성장의역사적맥락의영향속에서형성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을통해쟁취한정치적민주주의의핵심가치는군사쿠데타를통해군부세력이독점한정치권력과주권을국민들에게되돌려주었다는점이다. 따라서권력독점의해체라는민주주의의가치를경제영역에적용하면한국의경제민주주의의특징은독점적경제구조의개혁으로정식화할수있다. 경제적측면에서볼때한국의경제성장은 발전국가 에의해견인되었다 (Amsden 1992). 발전국가주도의경제성장의중요한특징은국가가전략산업을선정하여산업정책을통해자원과금융지원을집중시키고노동의성장을억제하여대기업집단이성장할수있는여건을제공하고, 정부의지원을바탕으로성장한대기업집단은친기업적정권의정치적지지기반을강화하기위해정치자금을제공하는국가와재벌의연합이다. 따라서경제민주주의의실현을위해서는정부의강력한후원과노동자로대변되는국민들의희생을통해축적된재벌의독점적경제력이국민들에게환원되어야한다. 요약하면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발전국가가주도한경제성장의결과재벌에게집중된독점적경제력을국민들에게환원하여경제적양극화를해소하는것이다. 경제민주주의를실현하기위해서는재벌중심의경제구조를개혁하고재벌

11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위주의성장으로야기된소득불평등을해소해야한다. 미국의경제민주주의는종업원들이소유및경영에참여하는기업내부의민주주의를의미한다. 개별기업은분권화된독립적단위로간주된다. 독일의경제민주주의는조합주의의전통을민주적으로재구성한민주적조합주의를뜻한다. 미국과독일의경제민주주의가두나라의상이한역사적맥락속에서다른의미로개념화되었듯이, 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발전국가주도의경제성장이라는한국의맥락속에서재벌중심의독점적경제구조개혁과소득양극화해소라는한국적의미를가지게되었다. 3. 경제민주화담론등장의배경 한국은후발민주주의국가로서모범적으로민주화를성취하고민주주의를공고화하였다. 1987 년대통령직선제개헌이후 30년간국민들의투표를통해정권을교체하여왔다는점에서절차적민주주의는성숙단계에접어들었다. 정치적민주화이후 30년의시간동안경제영역에서도양적, 질적으로큰변화를겪어왔다. 그림경-1에서확인할수있듯이한국경제의변화과정은 1960년대이후크게 3개의시기로나누어서살펴볼수있다. 첫번째시기는 1960년대중반이후경제성장의시기로 5.16 군사쿠데타로집권한박정희대통령이국가주도의경제성장을이끌었고 1987년이전까지발전국가시스템의기본적인골격이유지된다. 이시기에는명목국민소득이꾸준히증가하였으며총소득대비노동소득분배율은낮은수준에서유지되는가운데꾸준히성장하였다. 1974년과 1979년에는 1차와 2차오일쇼크라는대외적충격으로인해한국경제또한어려움을겪던시기이며두차례의오일쇼크이후에는증가하던노동소득분배율이감소하는경향을발견할수있다. 국제경제의쇼크로인한경제위기국면에서한국경제가받은충격을노동계층이흡수하였음을추론할수있다. 1980년대중반으로접어들면서한국의명목소득은빠른속도로증가하는반면노동소득분배율은정체되거나오히려감소하고있음을발견할수있다. 명목소득의증가에도불구하고임금인상을강력히억제하였음을보여준다.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19 그림경 -1 한국경제의주요지표 (1953-2015). 통계청 (kosis.kr) 1 두번째시기는 1987년부터 1997년동아시아금융위기직전까지의기간이다. 1987년이후노동소득분배율이급속히호전되었고 1인당명목국민소득또한가파르게증가하였다. 6월항쟁을통해정치적민주화를달성한이후경제민주주의에대한열망이노동자대투쟁으로이어졌고, 민주노조운동이괄목할만한성장을거두었다. < 그림경-1> 에나타난바와같이이시기민주노조운동의성과는노동소득분배율의증가에반영되어있다. 하지만이시기민주노조운동의고양은민주적조합주의의형성이라는목표를달성하는데실패하였고, 대기업사업장중심의노동조합은합법화 / 제도화되면서보수화하기시작하였다 ( 김동춘 1997). 이시기의또다른특징으로국가주도의경제성장기제가서서히쇠퇴하기시작했다는점을들수있다. 6월항쟁이후국가의사회에대한통제력이약화되기시작하였다. 노동운동의성장은국가의통제력약화로부터기인한것이지만, 동시에발전국가의쇠퇴를촉진시켰다. 노태우정부이후등장한김영삼정부는탈규제와개방화로대표되는신자유주의정책을전면에내세우고발전국가의상징인경제기획원을해체하였다. 하지만김영삼정권의 세계화 정책의결과단기투자를노린해외자본이급속히유입되면서거품이형성되었고, 1997년태국에서외환위기가동아시아로확산되면서한국은국제통화기금 (IMF) 의구제금융을받아야하는처지가되었다. 1997년동아시아금융위기이후시기를세번째시기로분류할수있다. 1997년대선에서승리한김대중정부는외환위기를극복하기위하여국제통화기금의구제금융을받아들였고, 구제금융의 1 노동소득분배율은노동소득이총소득에서차지하는비율을계산한것이다. 실제로노동소득분배율을계산하는데있어서노동소득과총소득을계산하는방식에따라분배율이큰차이를보여준다. 그림경-1의노동소득분배율은자영업자의소득을노동소득에서제외한통계청의자료를사용하였으나, 다른계산법에따르면 1997년이후노동소득분배율이급격히줄어들었음을관찰할수있다 ( 홍장표 2014; 이병희 2015). 노동소득분배율의측정방식에대한논의는본장의 주제를넘어서는것이므로생략한다. 지표에따라서시기에따라분배율이변화하는속도와정도는큰차이를보이지만, 어떤지표를사용하더라도시기에따라변화하는추세는유사하게나타난다는점을밝힌다.

12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조건을충족시키기위해긴축정책과기업구조조정을실행하였다. 이시기기업구조조정을통해비정규직이양산되었으며긴축정책의고통을감내해야했다. < 그림경-1> 에나타난바와같이 1997년외환위기의충격이후명목 GDP가회복되기위해서는상당한기간이소요되었으며, 이후위기이전수준의명목 GDP를회복하고성장하는상황에서노동소득분배율은제자리걸음을하거나퇴보하였다. 긴축을통한구조조정의고통이상당부분노동소득의감소를통해흡수되었음을시사하는대목이다. 외환위기이후구조조정과정에서한국의노동시장이유연화되면서실업자와비정규직노동자가양산되었다. 노동시장이내부자 ( 정규직 ) 와외부자 ( 비정규직 ) 으로분할되면서대기업사업장중심의노조는내부자의이해관계를대변하게되었고, 노동조합을통해경제민주주의를달성한다는기대는약화되었다. 구조개혁의결과소득양극화가심화되면서김대중대통령은사회안전망을확보하기위해복지정책을강화하였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2000년 10월 ) 을실시하였고, 국민연금을전국민을대상으로확대하였다 (99년 4월 ). 외환위기이후경제민주주의에대한논의는기업내의작업장민주주의에대한논의보다는경제력의집중을막고소득불평등을완화하는포괄적의미의경제민주주의로초점이맞춰지기시작했다. 법인세인상등이른바부자증세논의는동아시아금융위기와국제통화기금구제금융으로인해기업구조조정이진행된이후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 부자증세논의는 2000년원내주도권을확보한한나라당이법인세감세정책을추진하고, 김대중대통령과새천년민주당이세수확보를명분으로이에반대하면서정치쟁점으로부상하기시작하였다 ( 박현석 2016). 재벌중심의경제력집중과소득양극화를해소하기위한재분배정책의재원확보수단으로법인세인상이대두되기시작한것이다. 법인세인상은대다수의선진민주주의국가에서중요한정치적쟁점이지만, 한국에서법인세가갖는의미는남다르다. 소득의양극화가문제라면고소득자의조세부담을늘리는것이상식이지만, 한국에서는고소득자의소득세보다는법인세가초미의관심사이다. 발전국가의틀에서볼때국가의정책적특혜와저임금을감수하는국민들의희생속에서재벌기업들이고속성장을거둔만큼소득양극화가심화되는상황에서재벌이경제민주화에기여할시점이라는보상논리가작동하기때문이다. 따라서법인세인상논의는재벌중심의고도성장이라는한국의역사적맥락속에서분석할때그의미를찾을수있다. 4. 1987 년이후경제민주주의논의의전개과정 가. 87 년노동자대투쟁과경제민주주의 1987 년 7 월에서 9 월에걸친이른바노동자대투쟁은 6 월항쟁이후형성된정치적공간에서분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21 출된경제민주화의요구였다. 1980년군사쿠데타로집권한전두환의신군부는노동운동을강도높게탄압하였다. 1980년대의노동관계법개정은그이전의유신시대의노동관계법과비교할때에도정상적인노동운동을억합하는것이었다 ( 이승욱 2007). < 그림경-2> 에서확인할수있듯이 1980년도에접어들면서노조조직율은 1979년 16.8% 였으나 1986년에는 12.3% 로낮아진다. 하지만 6월항쟁으로인해국가의사회통제력이약화되면서 7월부터노사분규가대규모로벌어지기시작한다. < 표경-1> 에나타난노사분규발생건수에따르면 1987년한해에만 3,749건의노사분규가발생했다. 노동자대투쟁기간인 7월초부터 9월중순까지약두달반의기간동안만따지면 3,311건의쟁의가발생하였다 ( 노중기 2012). 쟁의건수와참가자수의규모로볼때 1987년노동자대투쟁은그동안억압되었던산업화발전과정의모순이폭발한것으로볼수있다. 당시노동자들이내걸었던요구사항은임금인상과노동조건및복지개선에집중되었으며, 사무직원과의차별철폐, 관리자들의생산직노동자에대한반말금지, 두발자유화, 공해환경방지시설설치등작업현장을민주적으로바꾸기위한요구사항도제시하였다 ( 김동춘 1997). 이와같은맥락에서볼때노동자대투쟁은 6월항쟁으로시작된정치적민주화를기업으로확산시키는경제민주주의운동의일환이었다. 표경 -1 연도별노사분규지표의추이 발생건수 ( 건수 ) 참가자수 ( 천명 ) 손실일수 ( 천일 ) 1980 206 49 61 1985 265 29 64 1986 276 47 72 1987 3,749 1,262 6,947 1988 1,873 293 5,401 1989 1,616 409 6,351 1990 322 134 4,487 1991 234 175 3,271 1992 235 105 1,528 1993 144 109 1,308 1994 121 104 1,484 1995 88 50 393 1996 85 79 893 1997 78 44 445 자료 : KLI 노동통계 2016. 노동자대투쟁기간동안나타난한국의노동조합운동의특징은정치색이옅은탈정치화된운동이었다는점이다. 6월항쟁이후폭발적으로분출했다는점에서노동자대투쟁은 6월항쟁과밀접하게연관되어있으나, 그행위주체의측면에서는차이가있다. 6월항쟁이중산층시민과학생운동이중심이되었다면노동자대투쟁은현장의노동자들에의해서주도되었다. 1987년 12월에는

12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개헌에따른대통령직접선거가실시되었고, 이듬해인 1988년 2월에는총선거가치러졌다. 하지만이두선거에서강력한지역주의투표가나타났음은널리알려진사실이며노동자들의역할은미미하였다. 유신시대에는구로, 부천지역의여공들이중심이되어노동쟁의를이끌었다면, 노동자대투쟁은울산, 창원등경남지역중공업분야의대기업에서근무하는노동자들이주도하였다.( 구해근 2002, 233). 이시기노동운동은임금인상및작업장민주화문제를둘러싼기업단위의노사교섭에사활을걸었다. 1987년에발생한총 3,749건의노동쟁의가운데 2,613건이임금인상문제가주요한쟁의발생의원인이었다 (KLI 노동통계-노사관계표 V-6). 교섭력이큰대기업노조는사용자로부터많은양보를얻어내는등기업별노조체제에입각한이익집단의성격을보여주었다 ( 노중기 2012). < 그림경-1> 에서신군부가집권한 1980년이후명목소득의급격한증가에도불구하고노동소득분배율은하락하는추세를보였으나, 1987년이후증가세로바뀌었다는점은노동자대투쟁과이후노동조합운동의성과를보여준다. 그림경 -2 연도별노조조직율 (%) 자료 : OECD.Stat. 노동자대투쟁이후한국의노동조합운동은조직적기반을확대하였다. < 그림경-2> 에서볼수있듯이 1980년이후신군부의억압적노동정책으로급속히하락하던노조조직율은 1986년 12.3% 에서 1989년에는 18.6% 로 3년사이급속히증가하였다. 1980년에제정된노동관계법에따르면 1987년노동자대투쟁기간동안동시다발적으로진행된노동쟁의는대부분불법이었다. 노동자대투쟁기간동안대부분의노동쟁의는 선파업후협상 의형태로나타났는데, 당시법률에따르면노동쟁의이전에냉각기간을필수적으로가져야하기때문이다 ( 이승욱 2007). 노동자대투쟁의결과같은해에헌법및관련법령이개정되었다. 법개정으로노조의단체행동권이확장되었다. 복수노조금지규정이강화되고, 제3자개입금지조항이존치하는등당시노동계의요구가모두받아들여진것은아니지만, 사업장내에서노동조합을결성하고활동하는것을봉쇄할수있는제도적장치가사라진셈이다. 그결과개별기업수준에서노사관계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23 는합법적이고안정적으로제도화되는기반을마련하였다 ( 노중기 2006). 6월항쟁이후진행된노동운동은경제민주주의의관점에서볼때다원주의적전통에입각한기업내부의민주주의를도모하였다. 노동조합운동은기업단위노조의활동기반을마련하는데에역량을투입하였다. 1987년노동법개정의결과여전히복수노조와제3자개입이허용되지않았다는점에서볼때에도기업단위의노조운동의제도적기반을마련하기시작한것이다. 하지만, 1987년의성과를바탕으로산업별노동조합과민주노총등상위의노조연합체를구축하기위한시도가지속되었고, 그결과는 1997년의노동법개정으로이어진다. 1992년대통령선거에서승리한김영삼대통령은 세계화 를주요국정과제로내걸고신자유주의적경제개혁을추진하였다. 규제를완화하고무역및자본시장을해외에개방하였으며, 이에발맞춰서영미식노동시장을유연화하기위해 1996년노사대표, 학계대표, 공익대표등으로구성된노사관계개혁위원회 ( 이하노개위 ) 를출범시켰다. 노개위는노조설립제한을완화하고노조의정치활동금지규정을삭제하는등노동자측의입장을반영하였다. 노개위의최종안은노동자들의노동기본권을저해하는법적제약요소를대폭제거하였으나, 정리해고의제도화등노동시장유연화를위한경영계의주장을수용하였다 ( 이승욱 2007). 당시여당인신한국당은 1996년 12월 26일에변칙적으로노동법개정안을통과시켰다. 하지만상급단체복수노조유예조항과정리해고제도입은노동계의거센반발을불러왔다. 민주노총과산별노조등상급단체를복수노조조항에해당한다고해석하여불법화하고, 노동시장유연화를위한정리해고제를도입한것이다. 1997년겨울민주노총과한국노총의양노총이연대하여 1월부터 2월까지총파업을진행하였다. 결국김영삼대통령과신한국당은여야합의를통해 3월 10일노동법을재개정하였다. 그결과복수노조허용 3년유예대상에서상부노조를제외하였고, 정리해고제의시행을 2년유예하였다. 1997년의노동법개정으로민주노총은불법단체에서합법단체로전환되어시민권을획득하였다. 노동자대투쟁으로촉발된노동조합운동은다원주의적기업내부의민주주의를확보한데이어서전국단위의민주노총과산업별노조를구축하는등서구의계급적노동운동을모형으로하여조합주의적경제민주주의를추구하는전환을시도하고있었다. 하지만 1997년연말에동아시아외환위기가확산되면서한국은국제통화기금 (IMF) 의구제금융을제공받는데동의한다. 1997년선거에서당선된김대중당선자는 12월 26일 IMF 극복을위한노사정협의회 의구성을제안한다 ( 이병훈 유범상 2001). 경제위기의한가운데에서 20일에불과했던기간동안협상은급속히진행되었다. 협상결과노사정협의회는정리해고와파견근무를법제화하고, 전교조합법화, 실업자의노조가입을허용하는타협안을통과시켰다 ( 노중기 2007). IMF 구제금융의조건으로제시된기업구조조정을실시하기위해서정리해고와파견근로제가전격시행되었고, 그결과대규모실업자가양산되었고이후비정규직이고용에서차지하는비중이빠른속도로증가하였다 (< 그림경-3> 참조 ).

12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그림경 -3 실업율과비정규직고용비율 (%) 출처 :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 실업율 ), OECD Labor Statistics( 시간제및임시직비율 ) 외환위기와구조조정을거치면서노동시장은내부자 ( 정규직 ) 와외부자 ( 비정규직 ) 간의갈등이깊어졌다. < 그림경-3> 에따르면시간제와임시직근로자가전체고용에서 1/3 이상을차지한다. 기존의민주노조운동은전국단위에서민주노총을결성하고제조업분야에서산별노조를건설하였으나, 이들상위노조는비정규직을포괄하지않고있다. 한국의노동조합은 1987년에형성된대기업사업장중심의기업별노동조합의형태를주로하고있으며기업별노동조합은정규직노동자들을중심으로조직되어있기때문이다 ( 노중기 2006). 게다가노조조직율은 1989년이후감소하여현재 10% 안팎에서유지되고있는상황이다. 비정규직등노동시장의외부자입장에서볼때에는현행기업별노동조합은정규직의이해관계를대변하는기득권자들의이익집단으로비춰지는실정이다. 현재의노동조합운동은경제민주주의의실현이라는관점에서볼때경제민주화의추진세력으로서의입지가약화되고있는상황이다. 1987년노동자대투쟁으로고양된한국의노동조합운동은정치적민주화를경제영역으로확산하는경제민주주의의중요한축으로존재해왔다. 권위주의정권시기정부는노동기본권의제한을통해임금인상을억제하였고노동자들은열악한노동조건을감수해야했다. 6월항쟁으로국가권력의사회장악력이약화된조건속에서노동자대투쟁이전개되었다. 당시노동쟁의의주요목적은임금인상과작업장민주화였다. 민주노조운동을통해기업단위에서회사의이익을사용자와노동자가공유하고, 노동자의인권을증진시켰다는점에서기업내부의민주주의를증진시켰다고평가할수있다. 로버트달이주장했던노동자들이기업의소유권을획득하고경영에참가하는적극적인경제민주주의 (Dahl 1985) 의관점에서볼때노동자대투쟁과그이후노동조합운동은기초적인수준의경제민주주의를확보하는데에성공하였다. 당시노동자들의요구가기업수준에서논의되었다는점에서다원주의적경제민주주의에부합하지만, 노동자들이경영에참가하는수준에이르지는못했기때문이다. 이후산별노조와민주노총을건설하는과정에서노동조합운동세력은중요한경제문제에대한결정과정에실효적으로참여하기위해서민주노총과산별노조건설을통해기업내의민주주의를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25 넘어서는폭넓은의미의조합주의적경제민주주의를추구하였다. 하지만 1997년겨울의총파업이후노동법개정을통해민주노총과산별노조가합법화되고본격적인활동을시작할무렵외부에서시작된동아시아외환위기가한국으로확산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의계획은좌절되고만다. 외환위기극복을위한구조조정과정에서노동시장의유연성을높이기위해정리해고제와파견근로제가제도화되었다. 그결과노동시장은노동조합에의해대표되는정규직노동자와고용안정성이낮은비정규직노동자로양분되었고, 민주노총산하기업별노동조합들은정규직중심으로운영되며비정규직은대표되지않고있는실정이다. 기업내부의민주주의를넘어서폭넓은개념의조합주의적경제민주주의를실현하고자하였던민주노조운동의동력은외환위기이후노동시장개편을거치면서상실되었다. 노조조직율은 10% 대로하락하였고전체노동시장에서 30% 이상을차지하는시간제및임시직등비정규직을대표하지못하는상황에서민주노조운동이경제민주주의의주요행위자로자리잡기위해서는새로운진로를고민해야하는상황이다. 나. 세계화, 신자유주의와경제민주주의 1970년대말시작된신자유주의의확산은 1980년대후반냉전이종식되면서전세계적으로확산되기시작하였다. 한국또한 1987년 6월항쟁을통해민주화의확산에동참하였고, 1992년선거에서승리한김영삼대통령은집권이후개혁과개방을강조하면서과거권위주의시절정부가국가경제에강력하게개입하던관행을수정하고시장기능을강화한다는세계적흐름을받아들였다. 민주화와경제자유화, 또는세계화의확산은경제적영역에서대기업이자율성을높일수있는공간을넓혀주었다. 민주화로인해과거권위주의시절에비해정부의통제력이약화되고, 경제자유화와세계화의결과자본의국제적이동이자유로워지면서정부는투자를장려하기위해시장개입을자제하고기업친화적인정책을채택하였다. 이와같은변화는국내경제의시각에서볼때정부와기업간의관계에서기업의자율성을높이는방향으로전개되었다. 하지만국제적으로시야의폭을넓힐경우재벌기업은과거와같은정부의전폭적지원과보호를기대할수없게되었으며국내외에서치열한경쟁에직면하게되었다. 경제민주주의의시각에서볼때시장의자율성확대는경제력집중을통한재벌의국민경제지배력을약화시킬수있는기회가될수있었다. 재벌위주성장의배경에는산업정책과정책금융등정부의전략적지원을통한발전국가식국가주도성장모형이자리잡고있다. 민주화와세계화가강력한국가주도의성장모델의쇠퇴로이어진다면시장으로새로운국내외의경제행위자들이진입하여재벌의경제력집중을완화할것으로기대할수있기때문이다. 실제로김영삼정부는세계화정책을통해국가의경제개입을축소하는방향으로개혁을추진하였고, 권위주의적발전국가모형에서기업중심의신자유주의경제모형으로전환을이루는것을목표로삼았다. 김영삼대통령이추진했던경제자유화는개방적경제환경을조성하여기업들에게

12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기회를제공하였다. 하지만결과적으로볼때자본시장이개방되자재벌기업들이외자도입을통해사업규모를급속히확장하였고, 거품이붕괴되면서외환위기를겪게되었다. 재벌의경제력집중해소라는경제민주주의논의는차후외환위기의극복과정에서다시등장하게된다. 재벌집단의도덕적해이가외환위기의주요원인의하나로지목되었기때문이다. 김영삼대통령은집권이후 신경제 5개년계획 을발표하여국가의경제개입을축소하고시장기능을강화하는방향으로정책기조를설정하고있음을천명하였다. 1993년말에는농민들의반대에도불구하고쌀시장을개방하면서우루과이라운드에동참했고, WTO에가입하였다. 1995년에는세계화를주요한국정지표로내세우면서시장개방및자율화정책을추진하였다. 김영삼정부는무역자유화와함께금융자유화를적극적으로추진하였다. 선진국클럽인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에가입하려는한국정부는 OECD의가입조건에맞춰자본시장개방을적극추진하였고, 상위재벌그룹은해외은행에서자본을조달하기위해국제금융거래의자유화를원하였다. 금융시장개방정책에대해김영삼정부와재벌의이해관계가부합하였으며, 한국의금융시장에진입하려던국제금융자본의개방압력과도일치하였다 ( 국민호 2011). 한국의금융시장이개방되자재벌은제2금융권을통해해외에서자본을대규모로조달하였다. 1990년에총외채가 317억달러, 그중단기외채가 43억달러였으나, 외환위기직전인 1996년에는총외채 1천635달러, 단기외채 933억달러로증가하였고, 종합금융사들은단기자금을조달하여상당부분을장기로운용하여심각한차입대출의기간불일치를보였다 ( 최두열 1998). 과거개발연대에관행으로자리잡은은행과재벌간의유착관계가해소되지않은상황에서금융시장이급속히개방되자재벌들의외화차입은급속히증가한반면부채를갚을만큼충분한수익을올리지못했다. 1997년한해동안한보, 삼미, 진로, 기아, 해태, 뉴코아, 한라등상위 30대재벌에속하는대기업들에서연쇄적으로부도가발생하면서동아시아외환위기가한국에서도본격화되었다. 1997년외환위기가발생하자그원인을둘러싸고국가주도로경제성장을일궈낸발전국가모형에대해비판이제기되었다. 국가-재벌 -은행으로연결되는정실자본주의로인한도덕적해이가한국에외환위기를불러온주된원인중하나라는것이다 (Fischer 1998). 발전국가모형은한국경제의고도성장기에는성공적으로작동하였으나, 정부와기업, 관치금융의유착관계로인해기업이고위험을무릅쓰고사업을확장하였고금융권또한과거의관행대로부도위험에대한체계적조사없이방만하게대출을늘린결과거품이발생하고외환위기에봉착했다는것이다. 따라서외환위기발발직후인 1997년 12월대통령선거를통해출범한김대중정부에게재벌개혁은최우선적인정치적, 경제적과제였다. 위기의충격으로인해재벌개혁에대한국내정치적지지가확보되었으며, IMF와의계약은재벌개혁을추진할수있는기회를제공하였다. 김대중정부는기업구조조정촉진을위한 5대핵심과제와 3원칙을설정하여재벌개혁을진행하였다. 5대과제는재벌의경영투명성확보, 계열사간상호채무보증해소, 기업재무구조개선, 핵심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27 사업선정및중소기업과의협력강화, 지배주주와경영진의책임강화등이며 3대원칙은산업자본의금융지배차단, 순환출자와부당한내부거래억제, 변칙상속차단등이다 (Mo and Moon 2003). 5대핵심과제는주로투명성의확보와과잉투자해소등경영효율화에초점을맞추고있으며, 3대원칙은독점적지위를활용한시장지배행위를개선하는것을목적으로하고있음을알수있다. 5대핵심과제와 3대원칙에따라진행된김대중정부의재벌개혁은투명성제고및효율화의측면에서성과를거두었다. 하지만, 기업지배구조개혁, 재벌기업의시장지배해소라는두가지측면에서는미진하였다. IMF 구제금융을상환하고경기침체를극복하는데집중한결과기업규모로볼때상위에속해있는재벌기업들의경제력집중도는높은상태로유지되었고향후지속적으로증가하였다. 또한대규모기업군의구성으로볼때에도상위에속하는기업들은그지위를지속적으로유지하였다. 표경-2 50대기업의경제집중도 1987 1992 1997 2002 2007 2012 50대기업자산 / GDP (%) 52.17 52.64 70.71 57.80 63.06 84.44 50대기업총매출 / GDP (%) 45.77 41.51 50.86 49.42 52.97 73.78 30대재7 계열사 ( 개수 ) 68 71 76 91 99 118 자료 : 위평량 (2014) 표 1, 표 2, 표 7의자료를재구성하였음. 표경-2를보면외환위기이전인 1987년과 1992년에 50대기업의자산을 GDP와비교할때약 50% 를상회하였고, 이들의비중은점차증가하였다. 1997년에닥친금융위기이후자산가치하락으로 2002년에는 70.71% 에서 57.8% 로하락하였으나외환위기이전에비해높은수준이며, 이후꾸준히증가하여이명박정부말기인 2012년에는 84.44% 에이르게되었다. 50대기업의총매출또한유사한패턴을보여주고있다. 30대기업의계열사개수는 1997년 76개에서 2002년 91개로증가하였으며, 이후꾸준히증가추세에있음을확인할수있다. 상위 50대기업이 5년뒤에도 50대기업에속한경우를확인해보면 1987년에상위 50대기업에속했던기업들중에서 38개가 5년뒤에도 50대기업에속해있어 76% 가유지되었다. 1997년에서 2002년사이에는 27개기업이 50 대기업에포함되어 54% 가지위를유지하였다. 구조조정의결과유지비율이상대적으로낮아졌다. 하지만 2002년이후에는이비율이다시외환위기이전으로돌아가고, 이명박정부시기에는 82% 로증가하였다 ( 표경-3). 표경-3 상위 50대기업의구성변화 1987-1992 1992-1997 1997-2002 2002-2007 2007-2012 개수 38 38 27 38 41 비율 (%) 76 76 54 76 82 자료 : 위평량 (2014) 표 9의자료를재구성.

12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한국은 6월항쟁으로민주화를성취한이후신자유주의경제정책을받아들였다. 김영삼대통령이집권하면서본격화된경제자유화정책은기존이국가주도의경제성장모델을시장중심의성장모델로대체할것으로기대되었다. 이과정에서시장경쟁의활성화로재벌의경제력독점현상이완화될것으로예상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재벌의경제력집중현상이강화되었다. 1997년외환위기이후 IMF의처방에따라노동시장의유연화와재벌구조의개혁이추진되었으나, 위기극복이후재벌의경제적지위는더욱강화되었다. 노무현대통령은시장경쟁을활성화하여재벌의경제력집중을해소하고경제민주주의를촉진시키려는시도를하였다. 이시기이른바 좌파신자유주의 라는신조어가등장한것에서도알수있듯이노무현대통령은한미자유무역협정등경제개방정책을통해시장경쟁을촉진하여재벌집단등이른바기득권세력을개혁하려고시도하였다. 하지만결과적으로볼때재벌집단의경제력집중현상은지속되었고, 노무현정부이후이명박, 박근혜대통령시기를거치면서더욱심화되었다. 김영삼대통령이본격추진하였고,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에따른계약조건을이행하는과정에서본격적으로도입된신자유주의적경쟁촉진정책은국가-재벌연합체의경제분야주도권을약화시키는데에는성공하였으나, 대기업중심의경제구조를변화시키는데에는실패하였고이후보수정당의집권과함께재벌의경제력집중은더욱심화되고있는상황이다. 다. 저성장 양극화시대의경제민주화 1997년의외환위기를극복하는과정에서한국경제는큰변화를겪었다. 개발연대이후지속되던고도경제성장시대가마감되고저성장시대로접어들었다. 위기극복을위한구조조정과정에서노동시장이개편되어임시직과시간제근무등비정규직의비중이급속히늘어났다. 2000년이후임시직과시간제근무자를합하면총노동인구의약 30% 를차지한다 (< 그림경-3> 참조 ). 비정규직의증가와재벌의경제력집중현상의지속으로취업률및소득불평등문제가심각한정치, 사회문제로등장하였고 ( 강신욱외 2006), 양극화문제의해결에대한시민들의요구가심화되고있다. 정부가부의재분배에적극적역할을하는포괄적의미의경제민주주의에대한요구가상승하고있는것이다 ( 장승진 2013). 외환위기극복을위한구조조정이후정부의복지정책확대가경제적양극화심화문제를해결할수있는유력한방안으로부상하였다. 경제민주주의의관점에서볼때기업내부의민주주의실현을통한경제적평등과정치적민주주의의확대라는목표는 1990년대후반이후민주노조운동의퇴조와함께추진력을상실하였다. 시장개혁을통한재벌의경제력집중해소역시재벌의경제력집중현상의심화로귀결되었다. 게다가한국경제는고도의경제성장의시기가마감되고잠재적인구감소와저성장의시기로접어들었다. 따라서정부의복지정책확대에대한시민들의요구가강화되는것은자연스러운결과라고생각된다.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29 역대대통령선거의주요공약을살펴보면재분배문제가주요공약에반영되기시작한시점은 2002년대통령선거이다. 물론매선거에서선심성복지공약은찾아볼수있지만정부의복지제도를체계적으로확충하고복지정책을실시하는데필요한장기적인복지재원의확보문제는선거에서중요한공약으로다뤄지지않았다 ( 박현석 2015). 실제로 1987년민주화이후양김으로대표되는야당세력은재분배문제를선거에서주요이슈로제기한바가없으며, 1992년대선의경우보수적집권당의김영삼후보와야당의김대중후보모두법인세등세금부담감면을통한경제성장촉진을주요공약으로내걸었다. 1997년대통령선거에서도김대중후보는이회창후보와마찬가지로법인세감면을공약으로제시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이집권한이후외환위기를극복하는과정에서정부주도의사회안전망확보문제가정치권과시민들의관심을모으기시작하였다. 1997년연말김대중대통령당선자는노사정협의회의구성을공식적으로제안하였다. IMF와의계약조건에의하면위기극복을위한구조조정을위해노동과자본의사회적합의를도출해내면 100억불을조기에지원받을수있었기때문이다. 1998 년 1월발족한노사정위원회는논의끝에정리해고제한의완화와파견근로제도의도입을결정하였다. 그대신정부는교원과공무원의단결권을보장하고노조의정치활동을허용하는등노동조합활동에대한노동계의요구사항을수용하였다. 이와동시에정부는노동시장유연화로인한사회적충격을흡수하기위해실업재원확충, 의료보험통합및국민연금운영개선등사회안전망을강화할것을약속하였다. 뒤이어김대중대통령은경로연금도입, 전국민을대상으로국민연금확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실시, 산재 / 고용보험확대등복지정책을적극적으로확대하였다 ( 최병호 2014). 복지예산이국민총생산에서차지하는비중을살펴보면완만히증가해오다가 1998년도와 1999년도에복지예산지출이크게늘어난것을확인할수있다. 이후조정기를거쳐복지예산이국민경제에서차지하는비중은지속적으로늘어나고있다. 그림경 -4 복지예산 / GDP (%) 자료 : 통계청, 국가통계포털. 한국의사회복지지출

13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한국의복지정책논의에서중요한부분은복지예산을뒷받침할수있는재원을확보하는방안을마련하는것이다. 한국은조세부담율이 2014년현재 24.6% 로 OECD 회원국중에서가장낮은그룹에속한다. 정부재정의규모가작으면서재정건전성이상대적으로높은편이지만, 복지재원의확보없이복지정책이확대된다면정부의재정적자가누적될것이다. 양극화와함께복지예산을확보하는방안으로이른바부자증세론이힘을얻고있다. 재분배예산을부자들에게거둔세금으로충당하는방안은서구의복지국가들이강력한누진소득세율을적용한다는점에서볼때보편성을갖는주장이다. 하지만, 한국의부자증세논의는북미나서유럽과는다른특징을가지고있다. 소득과자산의양극화가문제라면재분배에소요되는재원을고소득층으로부터거둬서사용하는것이타당하나, 한국의부자증세논의의중심에는법인세가자리잡고있다. 소득세와법인세, 그리고부가가치세또는소비세등간접세는현대국가의 3대주요조세원이다. 국가마다경제구조와정치제도가차이가있으므로세가지조세원의상대적중요성또한나라마다다르다. 한국은미국이나서구의복지국가와비교할때상대적으로법인세가갖는비중이크다. < 그림경-5> 에의하면미국의경우총조세중소득세로거둬들인조세수입의비중이약 50% 에달한다. 독일의경우또한소득세가가장중요한조세원으로, 평균적으로 40% 에이른다. 미국과독일의총조세에서법인세가차지하는비중은유사하게약 20% 안팎이다. 독일은미국에비해소득세의비중이낮은대신간접세가차지하는비중이크다. 하지만한국은 < 그림경-5> ( 라 ) 에나타난바와같이소득세와법인세가총조세에서차지하는비중이유사하게나타난다. 미국, 독일등과비교할때소득세가차지하는비중이작고법인세의중요성이상대적으로크다. 한국이북미와유럽국가들과비교할때조세원의구성에서차이점을보이는원인은여러가지가있겠지만, 발전국가모형에따라국가주도로재벌기업을육성하여고도의경제성장을달성해온경험과연관되어있다고추론할수있다. 권위주의시기경제개발정책은국가주도의성장을우선적인목표로상정하였다. 정부는가용자원을산업정책과정책금융을통해동원하고, 노동임금의성장을억제하는등경제성장을최우선의정책목표로삼았다. 경제적효율성을극대화하기위해정부의복지및재분배기능을억제하고저부담조세국가를유지하였다 ( 권순미 2014). 낮은노동비용을통해비교우위를유지하는생산구조하에서급여수준이낮고, 복지기여금또한낮은수준으로유지되었고, 공공부조와사회복지서비스부문에서국가의역할은제한적이었다 ( 문병주 2005; 신동면 2006). 복지제도가생산구조의영향을받는것과마찬가지로조세부담을배분하는유형또한생산구조로부터자유로울수없다. 임금수준이낮은여건에서는정부가소득세를통해거둬들일수있는재원의크기가제한될수밖에없다. 따라서총조세에서법인세가차지하는비중이상대적으로커서조세수입에서법인세의존도가상대적으로높게나타났다.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31 그림경 -5 각국의조세부담배분방식 ( 총조세에서차지하는비율, %) ( 가 ) 미국 ( 나 ) 독일 ( 다 ) 일본 ( 라 ) 한국 자료 : OECD Tax Database. 참고 : 법인세는법인소득세와법인의사회보장기여분을, 소득세는개인소득세와개인의사회보장기여분을합산하여계산하였다. 간접세는부가가치세또는소비세가총조세에서차지하는비중을의미한다. 1987년민주화이후에도법인세의존도가높은조세부담구조가지속된원인은과거의저임금경제구조의유산이라고볼수있으나, 조세정의의측면에서도설명이가능하다. 과거산업화시기재벌기업군은정부의특혜성정책지원과저임금을감수해야했던노동자들의희생을통해성장의토대를닦았다. 양극화가심화되면서사회안전망을비롯한복지정책을위한재원확보가필요한상황에서국민들은그동안정부와국민의후원속에서성장해온재벌기업이기여할차례라고생각하는것이다. 유럽과북미의조세정책에대한최근의연구는보상이론 (compensatory theory) 을통해부자증세가채택된배경을설명하고있다. 고소득층또는자산가들이중산층및저소득층국민들에비해특혜를누리고있다고생각될때부자증세정책이채택된다는것이다 (Scheve and Stasavage 2016). 보상이론에따르면국민들은재벌기업들이정부의특별한정책적배려속에서성장했기때문에증세를통해복지정책의재원확보에기여해야한다는논리가성립된다. 복지재원을확보하는방안은유럽의복지국가들이채택하고있는간접세의확충등다양한방법이있지만, 권위주의적국가주도의경제성장경험을가지고있는한국에서는법인세인상이중요한재원확보방안의하나로논의되고있는것이다. 법인세율변경을둘러싼국회의논의를살펴보면법인세인하의혜택이국민경제로확산되지않고재벌기업에게만집중적으로돌아기때문에법인세감세에반대한다는논리가근거로사용되고있으며, 이명박대통령의법인세감세정책을견제하면서여당

13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내소장파와야당에서사용한논리는양극화해소를위해부자감세를반대한다는점이었다 ( 박현석 2016). 부자증세의대상에고소득층뿐만아니라대기업이중요한부분으로포함되어있는것이다. 광의의경제민주주의의관점에서볼때경제적양극화의해소는중요한정책목표중하나이다. 외환위기이후노동시장에서내부자와외부자간의갈등이심화되면서노동의참여를통한기업내민주주의의확산에대한기대가높지않은상황에서정부의적극적역할을통한경제적양극화의해소의중요성은더욱증대되고있다. 주로소비세와간접세를통해복지재원을마련하고있는북미와유럽의복지국가들과달리한국은법인세의존도가높게나타났다는점에서한국의경제민주주의는차별성을갖는다. 본장에서는한국에서나타나는높은법인세의존도는과거개발연대의권위주의적발전국가의유산이라고주장하였다. 흥미로운점은 < 그림경-5> 의 ( 다 ) 와 ( 라 ) 를비교할경우일본또한한국과유사하게법인세의존도가높게나타나고있음을발견할수있다. 한국에서채택하였던국가주도의경제성장모델은고도성장기일본의발전국가모형을받아들인것이라는점을감안할때 (Haggard 2004), 한국과일본모두에서법인세의존도가높게나타나고있다는사실은양국공통의발전국가의경험을통해양국의조세부담배분양상을설명할수있다는방증이다. 5. 나가며 : 한국의경제민주주의의딜레마 1987년 6월항쟁을통해대통령직선제등정치적민주화를달성한이후민주주의의원리를경제영역으로확산시켜야한다는경제민주화논의가부상하였다. 실제로 6월항쟁직후노동자대투쟁이벌어지면서민주노조운동이확산되고작업장민주화등기업내부의민주주의의확산이진행되었다. 이어 1990년대로접어들면서신자유주의담론의확산과함께시장의역할이확대되면서정부의경제정책주도권이약화되었다. 하지만김영삼정부의경제개방화정책은결국동아시아외환위기로귀결되었다. 외환위기극복과정에서비정규직이양산되었고, 민주노조운동은비정규직의요구를포괄하는데에한계를드러내었다. 김영삼정부의신자유주의시장개혁과김대중정부의구조개혁은시장경쟁을심화시켜재벌의경제력집중을완화시킬것으로기대되었으나, 한국경제의재벌의존도는오히려높아지고있는상황이다. 1990년대후반이후소득불평등이심화되고있는상황에서민주노조운동의동력은약화되었기때문에정부의적극적개입을통한재벌의경제력집중완화및소득양극화해소에대한국민들의기대가증대되고있다. 민주화 30년을맞이하는현시점에서한국의경제민주주의의과제는재벌의경제력집중완화와소득양극화의해소라고요약할수있다. 정부의산업화정책은고도의경제성장을일궈냈으나재벌기업에부와자산이집중되는부작용을가져왔다. 저임금정책과재벌중심의경제구조는정부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33 재정의법인세의존성을심화시켜왔으며, 재벌중심의경제성장의부작용으로양극화가심화된만큼법인세를중심으로복지재원을확보하고자하는것이한국의경제민주주의논의의현단계이다. 하지만, 재벌의경제력집중완화와법인세를통한소득양극화해소는동시에달성하기어렵기때문에지금까지의경제민주주의의한계에대해성찰할필요가있으며앞으로경제민주주의를실현하기위한방향에대해고민이필요하다. 앞서검토한바와같이노동조합의활성화를통한경제민주주의의실현가능성이현실적으로높지않은상황에서정부의적극적역할이중요하다. OECD 조세데이터베이스에따르면한국은 2014년현재 35개 OECD 회원국중 GDP 대비조세부담율 ( 사회보장비포함 ) 이멕시코와칠레에이어세번째로작은 24.6% 이다. OECD 평균인 34.3% 에크게못미치는수치로, 정부의역할확대를위해서는복지및재분배를위한정부재정의확충이필요하다. 하지만정부재정의법인세의존도를높게유지하는한재벌중심의경제구조개혁과복지국가를동시에달성하는데어려움이따른다. 아래그림경-6은한국의경제민주주의가처한딜레마를도식화한것이다. 그림경 -6 한국의경제민주주의의삼중딜레마 법인세인상 대기업중심경제 2 1 작은정부 복지국가건설 3 보편적세원확보 재벌독점완화 그림경-6에나타난재벌독점완화, 복지국가건설, 법인세인상은한국에서경제민주주의를실현하는데필요한세가지정책이다. 하지만문제는이세가지정책은동시에실현할수없거나, 동시에실현하더라도실효성이사라지는딜레마에직면해있다는점이다. 법인세인상을통해복지재원을확보하고, 재벌의경제력집중을완화하는정책을추진하는경우를상정해보자. 그림경-6 의 1에해당한다. 재벌중심의경제구조가개혁된다면법인세를인상하더라도복지국가건설에필요한재원을확보하는데에어려움을겪게된다. 법인세는누진세율이적용되어규모가큰대기업에서주로부담해왔는데대기업중심의경제구조가해체되면법인세수의증가폭이줄어들것이기때문이다. 이에더해정부의재벌에대한정책적지원이사라지고시장경쟁을활성화하여재벌의독점구조를개혁할경우국제조세인하경쟁을감안할때법인세인상의폭이제한적일수밖에없다. 정부가정책적으로재벌기업들을뒷받침하는경우재벌이조세부담을감내할여력을확보할수

13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있으나, 정부가경제개입을자제하고새로운기업의신규진입을활성화하여재벌중심의경제구조가해체된상황에서는기업이감내할수있는법인세부담의폭이제한적일수밖에없다. 따라서재벌의독점완화를추진하면서동시에법인세인상을중심으로복지재원을확보하는정책을추진한다면양극화를해소할수있는역량과규모를갖출정도로정부의규모를확대하기어려우며, 작은정부를통한효율적경제성장을상정하는편이현실적이다. 두번째로법인세인상을통해재원을확보하여복지정책을확대하는상황을가정해보자 ( 경로 2). 이경우양극화를해소할만큼의복지정책확대에필요한충분한재원을법인세인상을통해마련하기위해서는대기업중심의경제구조가유지될필요가있다. 경로 2를따를경우정부가재벌기업의경제활동을정책적으로지원하고, 재벌기업은정부의후원하에서성장해서법인세부담을통해사회안전망확충에기여하는구조가될것이다. 세번째로복지국가건설과재벌독점의완화에방점을찍는다면법인세인상을주요재원으로삼는조세정책의전면수정이필요하다 ( 경로 3). 재벌중심의경제구조를개혁할경우법인세를중심으로복지국가건설에필요한재원을충당할수없다. 따라서서구의조세부담배분구조와유사하게누진적소득세를강화하고보편적인조세원인간접세의비중을늘려복지재원을확보하는정책을추진해야한다. 세가지경로중경로 1의경우재벌의경제집중도를완화할수있으나, 작은정부-낮은수준의복지국가를유지할경우정부의양극화문제해결능력이제한될수밖에없다. 따라서경로 1을선택할경우, 소득불평등을완화할수있는대안을강구해야한다. 경로 2의경우는대기업으로의경제력집중이계속될경우복지국가와건전한민주주의의지속가능성에영향을미칠수있다. 달 (Dahl 1985) 이지적한바와같이경제력의집중은정치권력의집중으로이어져서장기적으로민주주의에대한위협이될수있기때문이다. 경로 2를채택한다면대기업의자유로운경제활동을지원하면서동시에재벌기업에집중된자원을민주적으로통제할수있는방안에대해고민해야할것이다. 경로 3은법인세이외의재원확보를전제로한다. 이경우강력한조세저항을극복하는것이관건이다. 2015년초에벌어진연말정산파동 2 에서유추해본다면소득세인상에대해서는강력한조세저항이있을것으로예상된다. 부가가치세등간접세인상의경우역시정치적반대에직면할가능성이크다. 이웃일본의경우아베총리가국민들의전폭적인지지하에연속해서집권하였지만, 정치적반대를우려하여소비세인상을연기하였다 ( 이정환 2016). 한국은유신정권하에서강력한리더십을바탕으로 1977년부터부가가치세를도입하였다. 하지만이에대한여론의저항이심각하여부가세도입이유신체제몰락의한가지원인으로지목되기도한다 ( 김정진 2005). 복지정책을확대하기위해서는조세부담의증가가불가피하기때문에, 복지국가건설에대한국민들 2 2014년 2013년세법개정으로연말정산시환급금이줄어들고추가세부담이발생하자정부와여당에대한지지율이폭락했다. 결국 2014년소득세중일부를환급해주는세법개정안이통과되었다.

한국의정치적민주화와경제민주주의 135 의지지를이끌어내고정부의징세및예산집행의신뢰도를높이는것이필요하다. 지금까지논의한바와같이민주화이후 30년간한국에서는다양한형태의경제민주주의논의가진행되어왔다. 그결과현재제기되는경제민주주의의과제는재벌중심의독점적경제구조개혁과소득양극화의해소이다. 한국경제민주주의의삼각딜레마에대한논의에서살펴본바와같이발전국가의유산과과거의관행에따라서법인세의존적인조세구조를유지한다면, 이두가지목표를모두달성하는데어려움이따를것으로예상된다. 기업내부의민주주의의관점에서볼때, 아직개선의여지가많이남아있으나민주화이전과비교할때작업장의민주주의가진전되었고, 사회안전망확충에대한공감대가확산되어복지국가를건설하기위한사회적논의가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 이두가지는지난 30년간달성한경제민주주의의성과이다. 하지만, 앞으로경제민주주의를더욱심화시키기위해서는한국경제의구조, 복지재원확보방안, 복지정책의내용등을서로연계하여종합적시각에서한국의경제발전과경제민주주의의방향을모색해야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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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이용마 ( 서울대학교 ) 1. 들어가며 한국사회에서민주화가시작된지어느덧 30년이되었다. 민주화의가장큰성과는절차적민주주의의회복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 1972년유신체제가들어선이후전면부정되었던대통령직선제가부활했고, 국회의원선거제도역시여야합의하에민의를제대로대표할수있는방식으로바뀌었다. 그결과국민의대의기관인국회가활성화되면서행정부에대한견제가이뤄지는등정당정치가제기능을회복하기시작했다. 한국의정치사회가점차제자리를찾아가면서시민사회에도큰변화가발생했다. 가장먼저자율적인사적결사체라고할수있는시민단체가크게활성화되었다. 권위주의정부하에서시민단체의조직은사실상불가능했다. 노동조합을비롯한사적결사체의결성은국가에의해일상적으로억압되었고, 국가가시민사회를통제하고동원하기위해만든관변단체만유지되었다. 이에따라시민단체들은비합법적혹은반합법적형태를띠며민주화를요구하고 국가에반하는시민사회 ( 최장집 2002) 의역할을수행할수밖에없었다. 하지만민주화이후시민단체의결성은폭발적으로이루어졌고, 그위상또한크게증가했다. 시민단체에대한국민들의신뢰는때로는정부에대한신뢰보다높아우리사회여론을좌우하는중요한역할을수행했다. 이에따라정부와국회역시시민단체의높아진위상을인정하고시민단체가제기한의제를적극적으로정책에반영하거나시민단체인사들을영입하는등공동거버넌스를추진했을정도이다. 최근에는정보통신기술의발달을배경으로 2008년광우병촛불시위처럼아래로부터의시민운동이활발해지면서기존시민단체의위상에또다른변화가발생하고있다. 시민단체의발달과함께언론의자유역시크게확대되었다. 그결과언론의위상과역할도민주화를전후해크게변화되었다. 권위주의정부하에서언론은정부정책의홍보를담당하는준국가기관의역할을하며지배권력의하위동반자로서기능했다. 권위주의정부는언론을통제하기쉽게언론을임의로통폐합해수를제한하고비판적인성향의언론인을해직하는등억압적인조치를취했다. 물론정부에순응하는소수언론에게는독과점적인지위를보장하고온갖경제적특혜를제공함으로써준재벌적지위로성장할수있도록지원했다. 하지만민주화이후언론의자유가신장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39 되면서기존 제도언론 혹은 관제언론 에대한비판이고조되었다. 언론사노동조합이설립되어편집권독립을요구하고, 한겨레신문과같은대항언론이제도권에진출했으며, 시청자운동 신문개혁운동이전개되는등언론의민주화를위한운동이언론계안팎에서활발하게전개되었다. 이와함께언론은민주화이후지배권력의하위동반자에서지배권력의대등한동반자로그위상을높이게된다. 민주정부가들어선뒤정치개혁을추진하면서지배권력내부의균열이발생하고기득권세력의지배력은상대적으로감소한반면, 여론에미치는언론의영향력이무엇보다중요해졌기때문이다. 시민단체와언론은민주화이후한국의공론장을형성하며시민사회를구성하는가장핵심적인요소이다. 권위주의시기여론은국가에의해주조되어강압적인방식을통해국민들에게일방적으로주입되었다. 국가가자발적결사체로서시민단체의결성을억압하고, 언론을준국가기구로만들어통제한이유이다. 이에따라민주적공론장은사실상존재하기어려웠다. 하지만민주화이후여론은아래로부터형성되어국가를압박하고추동하는상향식견제기능을수행하고있다. 즉자발적결사체로서시민단체와자율적인기구로서언론등이시민사회를형성하고, 이들이국가와사적개인을연결하는일종의매개체이자공론장으로서의기능을수행하고있다. 적어도서구에서형성되었던 부르주아공론장 ( 하버마스 ) 에가깝게국가를견제하는기능을할수있는토대를형성한것이다. 이글은이런관점에서한국에서시민사회의형성과전화과정을분석한다. 특히 1987년민주화를전후해공론장의주된담당자로서시민단체와언론의역할과기능이어떻게변화했는지를추적한다. 이를위해 2장에서는먼저시민사회를어떻게보아야할지, 기존의이론적관점을정리한다. 3장에서는시민단체, 4장에서는언론의변화과정을분석한다. 5장은분석결과를종합하고향후변화의전망에대해논의해본다. 2. 시민사회에대한기존논의 1) 근대초기의시민사회론 서구에서시민사회에대한논의가이루어진것은꽤오래되었다 ( 배동인 1992; 한배호 1992; 김호기 1995a; 신광영 1995; 박희 1996; 김호기 2007; Kumar 1993; Edwards 2004). 길게는고대그리스의아리스토텔레스까지거슬러올라간다. 하지만시민사회에대한본격적인논의는근대자유주의시대의개막과함께이루어졌다. 초기사회계약론자들을중심으로자연상태 (state of nature) 와구분되는개념으로서시민사회론이처음등장하기시작했다 (Kumar 1993, 376). 자연상태가만

14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인에대한만인의투쟁이지배하는약육강식의사회라면, 시민사회는자유로운개인들로부터권한을양도받은국가에의한법률적지배가이루어지는일종의문명사회 (civilized society) 이다. 여기서시민사회는자연상태의야만성에서벗어난입헌국가와사실상동일한의미를띠게된다 (Keane 1988, 35-36). 그런데근대자유주의가발달하면서국가와시민사회를구분하는논의가등장했다 ( 박희 1996). 자본주의발달과부르주아혁명, 근대국가의등장에발맞춰국가로부터자율적인시민사회의중요성을강조하는정통자유주의적흐름이다. 이흐름은근대자본주의경제가발달하면서절대주의국가의통제에반대하는부르주아계급의이해와합치하면서널리확산되었다. 로크와몽테스키외, 볼테르, 토마스페인등고전적자유주의사상가들을중심으로형성되었으며토크빌에이르러완결성을갖추게된다. 토크빌의경우아래로부터통제받는국가권력, 즉민주주의정치질서의형성과정에시민사회의활성화가무엇보다중요함을강조한다 (Tocqueville 1968/1983). 토크빌에따르면시민사회는국가와개인사이에존재하는다양한자유로운결사체들로구성된다. 프랑스의경우이시민사회가활성화되지못함에따라혁명이후에도국가권력이비대화되고국가주의가만연했다. 반면미국의경우분권화된자치제도와함께자유로운결사체들이발달함으로써국가권력을견제하고민주주의가정착하게되었다는것이다. 1 따라서민주주의가유지되기위해서는자유로운사적결사체들로이루어진시민사회가발달해국가를견제할수있도록해야한다. 시민사회가곧민주주의발전의요체인셈이다. 이후국가로부터상대적으로자유로운시민사회에대한논의는자유주의시민사회론의핵심으로자리잡게된다. 자유주의이론이국가를견제하는시민사회의문제를제기했다면, 역으로시민사회의문제점을국가를중심으로해결해야한다는주장도제기되었다. 대표적인논자가루소이다. 루소는시민사회에서사유재산제도가발달하면서불평등관계가확대되고인간은자유를상실하는것으로파악한다. 따라서시민사회를바람직한상태로복귀시킬수있는것은자유로운개인간의계약관계로탄생한국가뿐이다. 루소와마찬가지로시민사회에대해부정적인관점에서접근을하면서국가와시민사회를구분한사상가는헤겔이다. 헤겔에게시민사회는기본적으로사적개인들이소유관계에기초해각자의이익을추구하는욕망의체계이다. 따라서 이성을갖춘자유의현실태 ( 박희 1996, 255) 이자절대정신의구현체로서국가를통해서무절제와탐욕이판치는시민사회를해소함으로써그한계를극복할수있다. 마르크스와엥겔스는헤겔사상에서출발했지만국가와시민사회에대해서는전혀다른입장을취한다. 마르크스에게시민사회는헤겔과마찬가지로욕망의체계로서, 본질적으로계급간의불평등구조와지배및피지배관계를재생산하는곳이다. 하지만헤겔과달리 1 민주국가에서정부에대한국민의저항이나타날수있는길은오직결사에의한방법뿐이다. 동업조합이나귀족으로부터빼앗은모든행정권력을정부에만맡기지아니하고, 그일부를개인자격의시민으로구성된잠정적인하위공공집단에맡길수있을것이다. 이렇게함으로써개인의독립은보다안정된상태에서보장될수있을것이며, 평등도후퇴하지않을것이다. ( 토크빌 1983, 679)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41 국가는 부르주아계급의집행위원회 로서지배계급의이해를일방적으로대변하는기구이다. 마르크스에게국가는시민사회를반영한결과일뿐이고, 시민사회는경제와동일시된다. 따라서시민사회의문제를극복하려면궁극적으로국가를변혁해야한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근대초기에제기된시민사회론은일종의문명국가론에서출발해자본주의경제와근대국가가점차발달하자국가와시민사회를구별해서파악하는 2분모델의방향으로발전했다. 이과정에서시민사회개념은논자에따라경제와혼합되어사용되거나동일시되는등다소불명확한모습을띠고있다. 다만이시기의시민사회론은국가혹은시민사회에서발생하는문제를각각의대당을통해해결하려는차원에서전개된것으로파악된다. 물론논자에따라시민사회에대한논의시점이나쟁점에차이가있는만큼, 시민사회를어떻게보아야할것이냐는관점의차이가분명하게드러나고있다. 2) 20 세기의시민사회론 근대초기등장했던시민사회론은자유주의시민사회론이기본적인우위를보이는가운데소강국면에빠져들었다가 20세기들어몇번의계기를거치면서다시활성화된다. 가장먼저시민사회론이등장한계기는그람시이다 ( 김성국 1992; 김호기 1995b; 한완상 1992). 그람시는러시아에서프롤레타리아혁명이성공한반면서구에서혁명이발생하지않는근본적인원인을시민사회에서찾았다. 그람시는토대와상부구조라는토픽으로사회를분석하는마르크스주의의기본적인관점을견지하면서도상부구조를다시국가와시민사회로구분하여파악하였다. 근대초기의 2분모델과달리국가-시민사회-토대 ( 혹은경제 ) 라는일종의 3분모델이등장한것이다. 그람시에따르면한사회는국가의정치적강제와억압에의해서만유지되는것이아니라피지배계급의자발적동의를얻어냄으로써유지가된다. 국가는자발적동의를얻기위해학교와정당, 노동조합, 교회등국가에서상대적으로자율적인기구들로구성된시민사회를형성한다. 이시민사회에서유기적지식인들을중심으로계급지배의도덕적, 지적지도력을확보하기위한헤게모니쟁취투쟁이전개된다. 선진국으로불리는자본주의사회에서프롤레타리아혁명이발생하지않는이유는바로이시민사회내의진지전에서지배계급의헤게모니가관철되고있기때문이다. 토크빌의마르크스주의화 ( 신광영 1995) 라는평가를받는그람시의시민사회내헤게모니이론은알튀세르에게이르러이데올로기적국가장치이론으로발전한다 (Althusser 1971). 알튀세르에따르면국가는군대와경찰등의사법수단으로구성된억압적국가장치와가족과학교, 교회등으로이루어진이데올로기적국가장치를갖추고있다. 이데올로기적국가장치는지배계급의지배이데올로기를생산및재생산하는기능을담당한다. 알튀세르가시민사회라는표현을직접사용하지는않았지만그람시의시민사회론, 특히진지전과헤게모니이론을상당부분수용한것으로평가된다.

14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그람시에이어시민사회론이다시주목받게된계기는 1990년대동구공산권의붕괴이다. 소련을비롯한동구공산권의급격한몰락은서구시민사회의강력함을다시부각시켰다. 특히이시기에이르러 1962년출판된하버마스의 공론장의구조변동 : 부르주아사회의한범주에관한연구 가영어로번역되어새롭게주목을받으면서공론장에대한논의가활성화되었다 ( 하버마스 1962/1991/2001; 박홍원 2012; 장명학 2003). 하버마스에따르면근대사회의출범은부르주아공론장의출발과그궤를같이한다. 자본주의경제의발달에따라급속히성장한부르주아계급은초기에클럽이나카페등의장소에모여시나소설, 음악등에대한의견을나누며일종의문예적공론장을형성하였다. 문예적공론장은점차정치적인문제를다루며자연스럽게정치적공론장으로발달하게된다. 부르주아공론장은부르주아계급누구나참여할수있는보편적참여와함께비판적이성과공적담론을통해공권력에대항하는여론을형성하게된다. 부르주아계급은이여론을바탕으로국가를압박하고견제하면서혁명을통해근대국가를건설하게된다. 하버마스에게공론장은공권력의영역으로표현되는국가와상품교환및사회적노동의영역으로이루어진시민사회를매개하는공간이다 ( 하버마스 2001, 98). 이대목에서하버마스는국가-공론장 -시민사회( 혹은경제 ) 라는일종의 3분모델을취하고있다. 여기서공론장은시민사회와함께사적부문으로분류된다. 하지만공론장은경제와사실상동일시되는시민사회와달리공중으로결집한개인들로구성되어정치적의지를표현하는공적성격을띠는것으로파악된다. 즉하버마스가말하는공론장은토크빌이나그람시가말하는시민사회와유사한성격을띤다. 사적결사체들로이루어졌지만국가로부터상대적으로자율적인영역으로서국가공권력에대항해여론즉일반의지를모아가는영역인것이다. 하지만 20세기들어시장기능이확대되고국가권력의영역이발달하면서부르주아공론장의정치적기능은점차줄어들게된다. 대중매체와문화산업의확산등대중사회의발달은비판적, 합리적사고를하는공중이아니라무비판적이고수동적인대중을양산함으로써부르주아공론장의쇠퇴를가져온다. 또복지국가의확산은행정체계의확산을통해국가가사적영역에침투해들어옴으로써점차사회를 재봉건화 하는현상이발생한다. 국가가사회화되고역으로사회가국가화되는상호침투현상이발생하면서국가와사회의구분이모호해지는것이다. 이에따라국가와시민사회를매개하는공론장역시기능을상실하게된다. 하버마스는이후공론장에대한논의를체계와생활세계로구분해재구성한다 ( 하버마스 1981/2006). 생활세계는한사회구성원들의사회적삶을재생산하는영역으로기본적으로언어라는매체를통해작동된다. 그런데이생활세계에서화폐를조정매체로하는사적인경제체계와권력을매체로하는공적인행정체계가각각분화되어독자적인영역을구축한다. 생활세계역시사회화를담당하는사적영역과담론을통해공론을형성하는공공영역, 즉공론장으로분화한다. 하지만체계의과도한발달과체계의매체인화폐와권력의논리가생활세계로침투하면서생활세계내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43 매체인언어, 즉의사소통행위가위축되면서공론장이붕괴된다. 체계에의한생활세계의식민화 가이루어지는것이다. 하버마스가부르주아공론장을제기하면서 3분모델을제시했다면의사소통행위이론을내세운후기이론에서는일종의 4분모델이등장했다. 하지만하버마스의후기모델에서시민사회개념이모호하다는비판이제기되면서하버마스는다시공론장개념을일부수정한다. 하버마스의공론장개념은코헨과아라토에의해수정, 보완되어시민사회개념으로다시정립된다 (Cohen & Arato 1989/1991; 1992/2013; Fraser 1992). 코헨과아라토는하버마스의체계와생활세계개념을적극수용하되, 하버마스와달리생활세계를사적영역과공적영역으로구분하지않고시민사회개념으로통합한다. 시민사회는 무엇보다도친밀한영역 ( 특히가족 ), 결사체들의영역 ( 특히자발적결사체들 ), 사회운동들, 그리고공공의사소통형태들로구성된경제와국가의사회적상호작용의영역 (Cohen & Arato 1992: ix) 으로구성된다. 즉코헨과아라토는정치행정체계 ( 국가 )-경제체계( 시장체계 )-시민사회로구분되는 3분모델을제시하고, 시민사회로묘사되는생활세계의식민화를극복하기위해국가와시민사회를끊임없이민주화하는이중적프로젝트를제시한다. 또공론장에서의비판적, 합리적이성의회복을위해사상과언론의자유의중요성을강조한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 20세기들어시민사회론은그람시에서출발해하버마스와코헨 아라토등주로비판철학을중심으로형성되어왔다. 비판철학에서시민사회론은자유주의적시민사회론을어느정도수용해사회개혁의관점에서시민사회논의를한다는점이독특하다. 특히코헨과아라토는자신들논의의출발점이하버마스에있지만근본적으로는토크빌에뿌리를두고있음을분명히하고있다. 2 3) 한국의시민사회론 한국에서시민사회에대한논의가본격적으로이루어지기시작한것은 1990년대이후이다. 1987 년민주화이후우리나라에서노동조합을비롯한대중조직과다양한시민단체가결성되고노동운동과시민운동이활성화되면서나타난현상이다. 물론이즈음소련을비롯한동구공산권이붕괴되면서서구에서시민사회에대한관심이다시부각된것도한국에서시민사회에대한논의를점화시키는데큰역할을한것이사실이다. 3 한국에서시민사회에대한초기논의는우리사회의민주적변혁이라는관점에서그람시의이론 2 우리는다원주의적접근방식의가장중요한선조들가운데한사람인토크빌의테제에의지한다. 그의주장에따르면, 정치관련조직들뿐만아니라평등주의적인제도와시민적결사체들에시민들이적극적으로참여하지않는다면, 정치문화또는사회 정치제도들의민주적성격을유지할수있는방법은존재하지않는다. 정치적의지를분명히표현하는경험과집합적의사결정의경험이민주주의를재생산하는데결정적인까닭은바로근대시민사회가평등주의적인 원리와보편적포함 (universal inclusion) 에기초하기때문이다. (Cohen & Arato 1992, 105-106) 3 이시기한국에서진행된시민사회에대한논의는유팔무 김호기 (1995) 와유팔무 김정한 (2001) 을참고바람.

14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에대한영유를목적으로소개되면서시작되었다 ( 최장집 1989). 하지만 1987년민주화이후자유주의적시민사회론즉국가와시민사회의 2분모델을중심으로우리사회의민주화를분석하려는시도가등장하면서확산되었다 ( 김성국 1992; 2001; 배동인 1992; 한배호 1992; 한완상 1992; 이시재 1997 등 ). 이들에따르면한국에서는일제강점기의억압적인국가체제를반영한강력한권위주의국가체제가해방이후지속되면서시민사회가제대로형성될수없었다. 하지만 1960년대이후자본주의산업화과정을거치면서시민사회형성의물적토대를점차이루어왔다. 서구에서시민사회가자본주의의발전과함께부르주아계급이등장하고이들을중심으로형성된것이라면, 한국에서도자본주의적경제발전이이뤄지면서근대적의미의부르주아계급이등장하고노동조합을비롯한사적결사체들이조직되는등시민사회의기본적인토대를갖추기시작했다는의미이다. 1960-70 년대민주화투쟁은이와같은시민사회등장의결과로해석된다. 특히 1980년대전두환정권에서전개된강력한민주화투쟁과그결과이루어진 1987년 6월항쟁을거치면서시민사회는그발전을위한중대한계기를맞게된다. 자유주의시민사회론의입장을취하는논자들은민주화과정에서중간층의역할을과도하게강조하고, 이들중심의시민운동은한국사회의특권층뿐만아니라계급주의세력과도대립하고있다고설명한다. 자유주의적시민사회개념에대해서는다양한논란이제기되었다. 우선 1980년대부터우리사회에풍미했던마르크스주의적입장에서시민사회보다는민중사회라는관점에서접근해야한다는반박이다 ( 김세균 1992; 손호철 2001 등 ). 이들에따르면한국의국가는강력한억압국가이면서소수재벌을기반으로한종속적파시즘의형태를띠고있고, 1970-80년대민주화투쟁은소수재벌을제외한대다수민중들이중심이된저항이다. 특히한국에서부르주아계급의경우민주화운동에대한기여라는측면에서는이중적인성격을띠고있는것이사실이다. 따라서한국사회의분석과민주적변혁전망의제시는부르주아계급을중심으로한서구식자유주의시민사회보다는민중사회라는관점에서접근하는것이보다바람직하다는해석이다. 자유주의시민사회론에대한또다른비판은비판철학적관점에서제기되었다. 그람시에이어하버마스, 킨등서구에서각광을받은시민사회론이적극적으로유입되면서새로운대안으로인식되기시작한것이다 ( 임혁백 1993; 김호기 1995a; 1995b; 유팔무 1995a; 1995b 등 ). 이들은기존의자유주의적관점의국가-시민사회의 2분모델에서는벗어났지만, 자유주의적관점을비판적으로수용하면서사회개혁을논의하는점에서유사한성향을보이고있다. 물론자유주의처럼시민사회를그저다양한결사조직으로구성된다원적조직이아니라각계급관계와계급투쟁을중시하는점에서는큰차이를보이고있다. 또민주주의이론을적극적으로확대해국가에대한적극적인견제와통제를시도하고있는점역시주목되는지점이다. 이런식으로한국사회에서시민사회에대한논의는서구의이론을어떻게수용하느냐에따라제각각이루어지면서, 시민사회를어떻게정의할것인지에대해논자마다서로다른입장을보이고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45 있는것이현실이다. 그결과시민사회에대한논의는시민사회론을수용하는사람들을중심으로각자의입장에서 한국에도시민사회가형성되었는가, 그렇다면그시기는언제인가, 민주화이후시민사회는얼마나발전했는가, 국가와시민사회의관계는민주화를전후해변화했는가 등에초점을맞추어전개되었다. 물론이과정에서적어도한국에서시민사회가제대로된모양을갖추기시작한것은 1987년민주화이후라는점에서는일종의합의가이루어졌다. 한국에서시민사회내지시민개념의형성과관련한논의는일관성을갖기보다는간헐적으로등장했다. 진덕규 (1992) 는미군정시대시민사회의기반은부재했지만시민사회적문제의식을지닌운동이존재했고, 이운동과시민의식이미군정에의해억압된상황을분석했다. 김동춘 (2000; 2006) 은전쟁과분단국가의형성을거치면서시민개념이왜곡되고한국사회에서국민대비국민혹은 이등국민 이형성되어끊임없이소외되는과정을보여주었다. 고성국 (1994) 은한국에서자본주의발전의단계에따라시민사회의맹아가출현하고곧바로억압되는과정, 산업화에따라시민사회의주된기반이형성되는과정을분석했다. 한홍구 (2002) 는시민혁명이부재한상태로근대국가가수립되면서국가주의가만연할수밖에없었던배경에대해역사학자의관점에서분석을시도하기도했다. 정상호 (2013) 와장은주외 (2014) 는시민개념에초점을맞추어해방이전에시민개념이도입되기시작해자본주의발전과함께역사적발달과정을거치면서변화된과정과배경을추적했다. 시민 에대한논의가 2000년대이후간헐적으로이루어진배경은시민운동의발전과그맥락을같이한다. 1989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 경실련 ) 을필두로시민단체들이우후죽순처럼등장하고, 이들을중심으로한 개혁 운동이진행되면서, 시민사회자체에대한논의는사실상자취를감추다시피했다. 민주화가진전됨에따라사회운동의주력이었던민중운동과학생운동이급속히쇠퇴하고사회개혁에초점을둔시민운동이이를대체하면서, 논쟁적인시민사회에대한논의보다는시민혹은시민운동에대한관심이부각된분위기이다 ( 유팔무 김호기 1995; 유팔무 김정한 2001 등 ). 2000년대이후시민사회에대한논의는여론정치의중요성이부각되면서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수용한공론장구조변동에대한논의로바뀌기시작했다 ( 손석춘 2005; 최장집 2009; 김정훈 2010; 송호근 2011; 주선미 2010; 박홍원 2012 등 ). 이논의에따르면조선후기자본주의발전의맹아가나타나기시작하면서한국에서도서구와같은공론장이형성되기시작했다. 하지만일제와미군정, 권위주의정부체제를거치면서공론장이제대로형성되지못하고 위로부터 혹은 외부로부터 지속적으로왜곡되어왔다. 그결과한국에서공론장은시민사회와마찬가지로제대로형성되지못하다가 1987년민주화이후자리를잡기시작했다. 하지만권위주의정부시절왜곡된형태의공론장은위로부터의민주화즉수동혁명과정을거치면서그영향력을여전히상당부분유지하고있는실정이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한국사회에서시민사회에대한논의는그람시적문제의식에기초한

14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시민사회론에서시작해국가를견제하는자유주의시민사회개념의도입, 비판철학적관점에서다양한민주주의의발전을모색하는시민사회론, 시민과시민운동에대한재고의과정을거쳐하버마스의공론장개념에이르고있다. 전체논의과정을볼때시민사회개념과관련해한가지공통점을발견할수있다. 2분모델이든 3분모델이든시민사회는국가의억압적장치혹은행정체계와구분이되고, 시민사회가국가를견제하는기능을수행함으로써민주주의의발전에기여할수있다는점이다. 나아가시민사회는시민들의자발적결사체를중심으로구성되어국가가나아가야할방향에대한일반여론을조성하는장으로서의기능을수행한다는점이다. 이러한관점에서이글에서는시민사회의가장중요한구성요소이자여론형성에결정적인영향을미치는자발적결사조직으로서시민단체와언론의문제에대해검토해보고자한다. 시민단체와언론을중심으로권위주의정부시절과민주화이후이들의변화상에대한분석을통해민주화 30년의역사를검토해볼것이다. 3. 민주화전후시민단체와시민운동 1) 권위주의정부와억압된시민단체 시민사회를국가와구분되며, 국가와건전한긴장과견제관계를형성함으로써개인의자유와민주주의의유지 보호 발전에기여할수있는영역으로이해하는입장에서, 한국의시민사회는권위주의정부의기간동안에철저히억압되고통제될수밖에없었다. 근대의대의민주주의체제가자본주의적산업화를통해서힘을축적한이른바부르조아지들의적극적인투쟁과노력에의해서성취될수있었던것이며, 그와같은체제가유지될수있었던배경에는국가와시민사회의힘의균형이존재했던것이라고한다면, 한국의시민사회는미처그역량을성숙하지못한상태에서해방과군정, 그리고전쟁을경험했던것이며, 이런상황에서민주주의를지켜내고유지하기에는턱없이그역량이부족했기때문이다. 즉국가와시민사회의힘이균형을이루지못하고, 국가의힘이압도적인우위를점했던상황이지속되었던것이며, 국가와그국가의권력을사유화한지배세력은잠재적인경쟁자인시민사회의성장을철저히억압하고통제하려했기때문이다. 그러나권위주의의시기는또한국가가스스로의권력을정당화하고유지하기위한목적으로강력하게추진한근대화 산업화에의해결국에는국가와권위주의정권에대한도전을제기한시민사회의발전을의도치않게이끈시기이도하다. 역사의아이러니이며, 거대한사회변동의흐름을개인이, 혹은하나의정권이거스르기는힘듦을보여주는과정이기도하다. 세계의어느사례에서도찾아보기힘들정도로억압적인지배를행했던일제의식민지배하에서한국의시민사회는철저히억압받을수밖에없었다. 그러나이렇게억눌려오기만했던한국의시민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47 사회는한문학평론가의은유적표현과같이 도적처럼찾아온 찾아온해방을맞아서폭발적으로분출하는모습을보였다 ( 김윤식 1985; 최장집 1989, 116쪽에서재인용 ). 해방후채두달이지나지않은시점에서미군정청에등록된정당수는 54개였고, 1년이내에그수는 300여개로증가한다. 전국곳곳에조선인민공화국 ( 인공 ) 의지방조직에해당하는인민위원회가농민조직과대응하면서경쟁적으로형성되었다. 전국적인노동조합으로서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 전평 ) 도등장하게되었는데, 1945년 11월결성된전평은설립된지불과 3개월이내에가맹조합수 1,194개와조합원 20만명을기록하는모습을보였다. 그렇다고하여당시에이미산업화가상당히진척되어있었던것도아니다. 당시의산업구조를보면 80 퍼센트에해당하는인구가농업에종사하고있었으며, 단지인구의 2 퍼센트정도만이제조업과광업에종사하고있었을뿐이다. 이는당시의한국사회가여전히농업중심의전기산업사회였다는것을의미한다. 당시 5인이상사업장에고용된노동자수가대략 20만명전후라는것을감안하면, 이와같은조직화는가히시민사회의폭발적분출이라고할수있으며, 당시한국사회의물적기반이이와같은규모의시민사회를지탱할만큼충분히성숙하지못했다는것을감안하면, 이는역설적으로일제의식민지배가그만큼철저히한국시민사회의요구를압살해왔다는것을의미한다. 그러나이렇게폭발적으로분출된시민사회는격렬한이데올로기적분열을보였으며, 일제하에서체제순응적인모습을보였던우파에비해, 꾸준히지하에서저항운동을수행해왔던좌파의조직력이더우세한양상을보이고있었다. 이와같이좌로경도된시민사회의모습은국제적인냉전이시작되고심화되는과정속에서한국에주둔하게된미군정당국에게결코달가운것이될수없었다. 이에따라동북아지역에서팽창하는공산세력을제어할반공의보루를구축한다는전략적목표를수행하기위하여폭발적으로분출하는시민사회와의연계를단절한채, 일본총독부관료조직의부활, 일제하한국인관료와경찰의재임용등을통하여거대하고강력한국가기구를수립하고, 이를통하여시민사회의급격한해체를추진하게된다. 특히노동운동에대한미군정의억압은매우신속하게전개되어 1946년의총파업을기점으로노동조합은급격히해체되어 1947년후반에이르러전평은급격한조합원수의감소로거의소멸되는지경에이른다. 이와같은과정은미군정에의한시민사회의급격하고완벽한해체를보여주는사례이다. 이어지는단정의수립, 그리고무엇보다한국전쟁은시민사회가자생적으로발전할수있는기반을철저히파괴하였다. 전쟁전에이미강력했던관료 경찰조직과더불어전쟁을통하여급속히팽창한군조직은이미강력한국가를더욱강력하게만들었으며, 시민사회는국가에대해더욱예속적인모습을보일수밖에없었다. 또한전쟁을통하여시민들의의식속에깊이뿌리내리게된반공이데올로기는국가에저항하는어떠한목소리도내기힘든환경을만들었다. 이시기활동이가능했던시민사회의조직은조금은더효율적인통치를위해국가에의해조직되고후원된이른바관변단체만들뿐이었다. 비록이승만과자유당의권위주의정권은 3 15 부정선거에의해촉발된 4 19

14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혁명에의해무너지게되었지만, 4 19 혁명의중심세력은지배구조의중심에위치한보수적인정치, 행정엘리트집단에대항한대학과언론세력으로대표되는도시중산층지식인집단이다. 이들은시민사회에기반을둔어떠한직업적, 지역적, 부문적이해또는조직과연결되어있지않았으며, 이에따라이들도전세력역시소수의엘리트집단이었으며, 시민사회의기반은여전히미약했다고할수있다. 비록국가는강고했지만, 이승만정권을지탱한관료집단, 자유당간부집단, 군부의고급장교집단, 특혜받은기업집단등은강한결속력을갖춘지배집단은되지못했기에, 작은충격에도불구하고허무하게무너지는모습을보인것이다. 즉국가기구의균열에의해무너진것이지, 시민사회의압력에무너진것이라고보기는힘든것이다. 4 19 혁명이후시민사회는다시활력을찾는모습을보이기도했지만, 이기간은오래가지못했다. 5 16 군사쿠데타를통해권력을장악한박정희정권이보다강력한결속력과조직력을갖춘배타적군부중심의지배엘리트를구성하면서, 시민사회에보다강력한통제력을행사하는군부-관료적권위주의지배체제를확립해나갔기때문이다. 그러나박정희정권이취약한권력의정당성을보완하기위하여적극적으로수출지향형산업화를추진하게되면서우리의시민사회는전기 ( 轉機 ) 를맞이하게된다. 그것은권위주의정권이적극적으로추진한근대화 산업화의과정속에서시민사회의필요조건 (necessary condition) 이라고할수있는 시장, 개인주의, 다원주의, 다계급 등이비록미숙한수준이지만, 나름의형태를갖추기시작했기때문이다 ( 고성국 1994, 187). 60-70년대의경제성장과정에서시민사회의두주체라고할수있는산업노동자층과신중간계층은크게확대되어우리사회의계층질서에변화를주면서시민사회가성장할수있는물적기반에큰변화를가져왔다. 그러나국가는여전히강력했고, 이강력한힘을바탕으로시민사회를통제하려했다. 박정희정권에서시민사회를통제하는방식은 조합주의 (corporatism), 그중에서도특히국가조합주의의시각으로이해하는것이용이하다. 조합주의는이익대표체계의한유형으로서사회를구성하는다양한이해들이기능적범주에따라단일하며, 강압적이며, 비경쟁적이며, 위계적으로조직되어, 지도자의선정및요구등에대한국가의통제를받아들이는댓가로각각의범주에서구성원의이익을대표할독점적인권리를부여받는이익대표체계이다. 북유럽의작은국가들에서널리발견되는조합주의는사회경제체제의변화에순응하려는이익집단의자발적시도로부터생성된 사회조합주의 (societal corporatism) 의성격을가지고있다면, 우리의조합주의는국가가이러한제도적장치를위로부터강압적으로부과하는 국가조합주의 (state corporatism) 의성격을갖는다. 1961년같은해에설립된전국경제인연합회 4 와한국노동조합총연맹 ( 한국노총 ) 은이와같은국가조합주의적이익대표체계에서자본과노동의이익을대표하는조직체이다. 그러나권위주의정권에서한국노총 4 출범당시의명칭은 한국경제인협회 였지만, 이후 1968년금융기관, 국책회사등을대상으로하여회원수를크게확장하면서명칭또한 전국경제인연합회 로개칭하였다.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49 은노동자들의이익을국가기구에전달하기보다는국가기구가보다효율적으로노동을장악하기위한도구로활용되었다. 이처럼시민사회의물적기반은권위주의산업화의과정속에서점점성장해갔지만, 그안에서목소리를낼수있는시만단체는오직정부의인가를받고, 정부가허용하는한도내에서만활동할수있는관변단체뿐이었다. 자연히시민사회와국가의긴장과갈등의관계는심화될수밖에없었다. 70년대초반부터국가기구에대항하여시민사회의세력들은다양한재야 ( 在野 ) 집단을구성하며스스로를조직화하기시작했으며, 이들의움직임은점차중간계층의자유권적기본권운동, 노동자들의생존투쟁과결합하여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변모하게된다. 시민사회의성장을억압하려는국가의통제는더욱권위주의적으로강화되어가지만, 이에비례해시민사회의힘또한더욱강화되어간다. 80년대연평균 10 퍼센트대의고도성장, 산업구조의변화등은노동운동내에서사무전문직과지식노동자의중요성을크게부각시켰다. 80년대중반대량생산-대량소비의축적체제가마련되면서비롯된사회관계및생활상의변화는시민운동의객관적환경과조건을크게변화시켰다. 특히주목할것은과거 30년간의압축성장과정을통해양적으로엄청나게성장한도시중산층이다. 결국이들의힘이학생운동과결합하면서, 국가와시민사회의정면충돌의양상으로전개된 1987년 6월의민주화항쟁은권위주의에서민주주의로의전환을이끌게되었다. 2) 민주화이후시민단체의변화 1987년의민주화이후국가와시민사회의관계는크게변화하기시작한다. 노태우정권하에서국가의역할과위상은이전의권위주의정권에비해약해졌지만, 시민사회가그에비례해즉각적으로강화되거나활성화되지는않았다. 그이유는무엇보다도시민사회의분열이다. 6월민주화운동을주도한중심세력은대학생과지식인, 노동자, 그리고흔히 넥타이부대 라고불리는도시중산층이었다. 이들은권위주의정권의퇴진이라는공동의목표아래하나로뭉칠수있었지만, 이와같은목표가대통령직선이라는절차적민주주의의도입으로부분적으로달성된후, 각자의이해를추구하며, 분화하는모습을보이게된다. 또한 1987년의대통령선거에서야권의후보단일화가이루어지지못하면서재야의운동세력들은크게셋으로분열되었다. 이와같은분열로재야정치인들과시민운동단체들의조직적연계는상당한수준으로약화되었다. 이와같은분열은 1990년의 3당합당이후시민사회를더욱침체하게만든다. 특히이과정에서노동운동은경제의불안정을걱정하는도시중산층의지지를받지못하면서급속히약화되는모습을보인다. 6월민주화운동이후노동자, 농민, 빈민등은각각대중운동을활성화하는조직을결성하는등시민운동의새로운주체로부상한다. 이전시민운동의주도세력을이룬재야정치인과종교인, 교수, 학생등지식인층을대신해대중이새로운시민운동의주도세력을형성한것이다. 1986년말 2,700

15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여개에불과했던노동조합의수는 87년말 4,086개, 88년말 5,598개, 89년말 7,861개로급속히증가했으며, 마침내 1990년 1월에는 18만명의조합원을포함하는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출범시킨다. 89년 3월에는가톨릭농민회와기독교농민회가통합해전국농민운동연합을결성하였으며, 5월에는전국교직원노동조합, 11월에는전국빈민연합이차례로결성되었다. 그러나이러한계급적성격을갖는시민운동은도시중산층과의연계를강화하지못했으며, 이러한분열을적극적으로이용한정부와때마침발생한사회주의권의붕괴로인하여급속히침체되는모습을보인다. 반정부적성격을강하게나타내는기존의시민운동이침체를경험하는동안새로운성격의사회운동단체들이활성화되기시작한다. 1989년 7월 500명의회원으로출범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 경실련 ) 이대표적인사례로서이들은급진적인사회변혁보다는합법적 비폭력적인평화운동의형태로경제적민주주의를실현한다는목표를설정하였다. 이처럼이들은스스로를 시민운동 이라칭하며기존의반정부적사회운동에대한비판을통해계급관계를넘어서전사회를아우르는공공의목표를온건한운동방법을통하여추구할것을천명하였다. 1990년대초반환경운동연합, 한국여성단체연합등비슷한성격을갖는신사회운동단체들이다수등장하게된다. 노태우, 김영삼정권하에서기존의계급적성격을갖는사회운동은배척 탄압받았지만이들새로운유형의시민운동은이로부터자유로왔다. 시민사회의리더에속하는언론기관들, 그중에서도특히자유주의적언론들은이들시민운동을적극지지, 후원하는모습을보였다. 이런호응과지지는과거운동에대한호응과지지로부터이전해간것이아니라새롭게생겨난것이었다. 과거사회운동에대해비판적태도를취하며거리를유지했던온건개혁적혹은자유주의적성향의지식인, 전문가, 시민과언론, 심지어자본가들과보수정치인들도이들새로운성격의사회운동단체들을다각도로지원하는모습을보였다. 1990년초반김영삼문민정부가등장하면서이들새로운유형의시민사회운동과단체들은더욱활력을띠게되었다. 500명의발기인으로출발한경실련은불과 4년만인 93년회원이 8,500명으로증가하는모습을보였으며, 환경운동연합의회원수도 1만명을넘어섰다.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흥사단, 녹색교통운동등 54개단체는 1994년시민단체협의회라는연대기구를구성하였으며, 또한이시기에는참여연대가결성되어기존의시민운동단체들과의연대를적극적으로모색하기도하였다. 새로운시민운동단체들에의하여사회운동의저변이확대되고, 다양한사회구성원들이다양한방식으로사회운동에나서는여건이조성되는모습을보인것이다. 이과정에서기존의저항적성격의시민운동은더욱침체되는모습을보인다. 문민정부가등장하면서과거의군부독재타도등의쟁점과이슈는하나회청산과같은문민정부의개혁정책에의해서더이상시민들의관심을끄는쟁점이되지못하는모습을보였다. 시민사회와관련한논쟁을제기하는입장에서는이와같은모습을기존의저항적성격을가지는시민운동을약화시키고해체시키려는보수적자유주의의패권적기획이라고까지비판하기도한다 ( 유팔무 1998). 그러나다른한편으로저항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51 적시민운동의약화는변화하는시민사회의요구를대변해내지못한기존의계급적 저항적시민운동자체의한계로부터비롯된것이라는비판도제기된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기간에압축적으로진행된자본주의산업화와고도성장으로인해서 80년대후반절대빈곤의시대를넘어서면서환경, 소비, 복지등삶의질에대한관심이시민사회속에증대되었음에도불구하고, 기존의저항적시민운동은이러한요구를운동속에서담아내지못하는모습을보였다는것이다. 1997년말의외환위기이후집권한김대중정부는시민사회의모습에또다른변화의계기를마련하였다. 정권교체라는상황은오랜세월동안권력으로부터소외되었던이들에게변화의향한욕구를강하게불러일으켰으며, 이런점에서개혁적성격의시민운동과정권교체를통해서권력을새로이획득한김대중 ( 그리고이후의노무현 ) 정부의이해는일치하는모습을보였다. 그리하여이들진보적입장의정부는적극적으로시민운동을지원하는모습을보이게된다. 1998년 8월김대중정부는민간운동지원에관한법률을마련하여, 국무총리산하에민간운동지원위원회를설치하고시민운동을후원한다. 이들정부는시민운동단체의지도층인사들을정부의요직에발탁하기도하고, 새로운정책을만드는과정에서시민운동단체의의견을적극적으로수용하는모습을보였다. 이러한시민운동과진보정부의연대가가장극명하게드러난사례의하나가 2000년제20대국회의원선거를앞두고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여성단체연합이주축이되어구성된총선시민연대가주로보수정치인들의대상으로포함한낙천 낙선운동을벌인것이다. 이영향은굉장히크게나타나서낙선운동의대상이되었던인사들의 68.6 퍼센트가실제로당선되지못했으며, 수도권에서는거의전원이낙선되었다. 이러한과정을통하여시민운동단체의정치적영향력은증대되는모습을보였지만, 이는또다른종류의시민사회의분화를만들어낸다. 그것은일부시민운동단체의정치적영향력이증대되는과정에서이들이또다른권력집단으로등장하게되었기때문이다. 시민운동단체들이사회적신뢰와영향력을확보하게된중요한근거가기성정치권에대한감시와통제, 저항이라고하는상징적힘이라고할수있는데, 시민운동단체가스스로정치의주체가됨으로써, 이와같은상징적힘이축소될수밖에없었기때문이다. 또한이과정에서보수진영은김대중, 노무현정권의실정을비판하지못하는시민운동에대해비난하며정체성논쟁을제기하기도한다. 이들은낙선운동을조직한시민운동단체를당시의여당을위한 2중대, 혹은홍위병이라는비난을제기하기도하였다. 진보정권이 협치 란이름으로추진한시민사회와정치의파트너쉽은한편으로는시민운동의영향력을확대했다는긍정적인효과를가져오기도했지만, 다른한편으로시민단체에대한사회적신뢰의기반이었던비판과견제역할을약화시킴으로써시민단체의정체성에위협을제기하는부정적인효과를가져오기도했던것이다. 국가와시민사회의경계선이무너짐으로써국가로부터자율적인공간으로서의시민사회와국가밖에서국가의변혁을시도하는시민운동의정체성은심각하게흔들리게되었다. 2000년이후시민사회와단체는또다른변화를보이게된다. 이러한변화는구체적으로 2002년

15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미군장갑차여중생피살사건을계기로주한미군지위협정 (SOFA) 의개정을요구하는촛불시위로부터나타난다. 이때의촛불시위는그기획을주도하고적극적으로참여를동원한사람들이기존의시민운동에서보아왔던것과같이특정한시민운동단체가아니라, 누구인지를특정하기어려운일반적인시민들이인터넷과사회관계망서비스 (SNS) 와같은새로운정보통신기술의힘을빌어자발적으로참여해서발생했다는점에서기존의시민운동과그성격을크게달리한다. 이와같은자발적시민운동은이후 2004년대통령탄핵반대운동, 2008년광우병촛불시위등에서도나타난다. 또한자발적시민운동은이와같은국가적인쟁점에대해서도나타나기도하지만, 소비조합운동, 불매운동, 소규모공동체운동같이시민의일상생활과보다밀접한삶의질과관련된문제들에대해서도활발하게나타나는모습을보이게된다. 이와같은자발적시민운동은예전처럼고정된조직의구성원이아니라불특정다수의유동적참여자가운동을주도하는경향을보인다. 인터넷등을통한시민운동이활성화되면서쟁점에따라수시로이합집산하는형태로아주느슨하게결합된 집단 (crowd) 이시민운동의새로운주체를형성하는모습을보이는것이다. 그러나이와같은자발적시민운동은기존의시민운동을대체하는것이아니라, 새롭게등장한하나의변화라고보는것이맞을것이다. 2007년이명박대통령의당선으로다시한번의정권교체가등장하면서시민운동의정체성논쟁은또다른전기를맞게된다. 그것은이명박정부또한시민운동을일방적으로억압하는것이아니라, 진보적인성격을갖는시민운동단체는억압하고, 보수적인성격을갖는시민운동은적극적으로지원하는선별적정책을추진한때문이다. 한경찰청자료에의하면 2008년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참가한 1,840개단체와한국진보연대소속 50개단체, 그리고참여연대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을비롯한시민사회단체와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한국 YMCA, 한국기자협회같은단체를불법폭력시위관련단체로분류하여감시와규제를하는한편, 새마을운동중앙회,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 한국자유총연맹과같은보수관변단체에게는 2010 년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에의한정부보조금가운데 80 퍼센트를지원하는모습을보이는것이다. 또한이시기뉴라이트, 어버이연합과같은보수시민단체가등장한다. 이명박정부이후정부의지원하에기존의보수적인성격을갖는관변단체와시민단체가활성화되면서, 시민사회의모습이진보와보수의이념적경쟁구도를형성하게된것이다. 이와같은변화에의하여 2000년대중반이후시민사회는정치세력화된시민사회와시대와상황의변화에따라유동적으로, 국가적인쟁점들뿐아니라개인적이고미시적인생활정치와밀접한쟁점까지폭넓은쟁점에대해서자발적으로결집하고해체되는보다부정형적인성격을갖는시민사회가혼재하는모습을보이고있다. 정치세력화된시민사회는진보와보수의이념경쟁이라는진영논리에갇혀국가와정부의역할과활동에대한비판, 견제, 감시라는본연의역할을수행하지못함으로써그역할이주변화되고있는반면에, 후자의시민사회는그영역과활동반경이점차확대되어가는모습을보이고있는것으로보인다. 그러나이렇게다른유형의시민사회간의역학관계가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53 어떤변화의모습을보이게될지에대해서는아직은예단하기힘들지만, 시민사회가이렇게다양한모습으로표출되고있다는점, 그리고어떤성격의정부가등장하던지간에관계없이, 이전의권위주의정권에서처럼시민사회를일방적으로억압하고배제하지못하고, 시민사회가또그것을허용하지도않는다는점은분명지난 30년의민주화과정에서발견되는시민사회의변화를보여준다. 4. 민주화전후언론의공론장기능 시민사회가국가를견제하고건전한긴장관계를형성하기위해서는사적개인, 혹은그들로구성된자발적결사체들이하버마스의표현과도같이하나의거대한공론장을구성해야한다. 이와같은공론장이제기능을하기위해서는시민사회간의, 그리고시민사회와국가의소통을담당하는언론의역할이매우중요하다. 그러나민주화이전권위주의의시기민주적공론장으로서의시민사회는사실상존재하기어려웠다. 국가가언론을준국가기구로만들어통제하며, 여론을주조하여강압적으로시민들에게주입하는일방향적인소통만이가능했기때문이다. 그러나 1987년민주화이후이러한관계는변화하고있다. 언론이권위주의정부정책의홍보역할을담당하던지배권력의하위동반자로서의역할을벗어나권력의대등한동반자, 경우에따라서는권력의감시자, 견제자로서의역할을수행하고있기때문이다. 이에따라시민사회의여론은아래로부터형성되어국가를압박하고추동하는상향식견제기능을수행하는모습을보이고있다. 아래에서는이와같은변화의과정을살펴보고자한다. 1) 권위주의정부시절언론 해방직후사회경제적인여건이미성숙했음에도시민사회가폭발적으로분출했던것과같이, 다양한시민사회의목소리들이급작스럽게주어진언론의자유속에서표현될수있었다. 그러나미군정은신탁통치를미국이주도했다는것이알려진이후부터, 포고령을통하여신문을허가제로바꾸는등, 이러한언론의자유를억압하기시작하였다. 이승만정부또한출범직후인 1948년 9월소위 언론지침 이라고불리는 언론정책 7개항을발표하여, 단정수립에비판적이었던신문들을정 폐간조치하는등, 언론을적극적으로통제하기시작하였다. 이과정에서이승만정부는일제하매일신보의후신인서울신문을정간조치하고정부기관지로바꾸기도하였다. 서울신문전체주식의절반가까이를적산으로정부가관리하고있었기때문에가능한일이었다. 한국전쟁이후이승만정부의언론탄압시도는더욱적극적으로변모한다. 이시기정부는 1955년 1면오식사건 5 을계기로 5 당시는활판에활자를하나하나골라꽂아서신문이제작되던시기로활자가잘못꽂히는오식사건이자주발생하였다.

15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동아일보를무기정간처분하기도했으며, 1959년에는 여적 칼럼의필화사건을계기로경향신문을폐간하기도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일화들에도불구하고이승만정부의언론탄압은상대적으로유약했으며, 이시기언론은이후의박정희권위주의정부의시기와비교하여상대적으로자유롭게정부를견제하고비판할수있었다. 예를들어이승만정부는새로운언론을보다공고히통제하려는목적하에 1948년 문지법, 1952년에 신문등정기간행물법, 1955년 출판물에관한임시조치법 등을제정하려고하였으나, 언론계의반발로모두실패하고만다. 이와같은언론의상대적인자율성은 4 19 혁명의성공을가능하게한하나의요인으로작용하기도한다. 4 19 혁명으로출범한장면정부는거의절대적인언론의자유를보장하였다. 언론통제를담당하던대통령직속공보실을폐지하고국무원사무처로통합시켰으며, 1960년 7월에공포된 신문등정당등의등록에관한법률 을통하여누구든등록을통하여자유롭게신문을발행할수있게하였다. 그결과 4 19직후 41개일간지였던것이 1961년 2월 124개로증가하는등공론장은폭발적으로팽창하는모습을보였다. 그러나이와같은언론의자유는오래가지못했다. 5 16을통해서등장한박정희권위주의정부가쿠데타를통한권력장악의정당성을언론의협조를통해서확보한다는목표아래 억압과특혜 를통한이중적언론정책을추진하였기때문이다. 박정희는 5 16 직후계엄령을선포하여 9개항목의보도금지사항을발표하고, 포고령 11호를통하여일정한시설기준을갖추지못한정기간행물의등록을취소하였다. 그결과전국언론기관의 91 퍼센트가폐간되었다. 다른한편으로박정희는 1962년 6월 건전신문기업육성 이라는명분하에 언론정책 을발표하여증면, 재정자금저리융자등을허용하고언론인후생복지를확대하는등, 정부에협조적인언론에대해경제적인특혜를제공하였다. 이와같은이중적언론정책에의해언론의비판적기능은무력화되고, 언론은권위주의정부의하위동반자로편입되는모습을보이게된다 ( 박승관 정경섭 2001). 하지만 1972년의유신이전까지만하더라도권위주의정부의언론통제는과거의자유주의적전통을기억하고있던언론의조직적저항에의하여완전하지는못한모습을보인다. 3공헌법은언론출판에대한국가의허가나검열을인정하지않았으며, 1964년한일국교정상화반대시위가거세지자언론보도를통제하고자신문윤리위원회법을만들었지만, 기자협회를중심으로한언론계의거센반발에부딪혀결국그시행을유보하기도했다. 그러나 1972년유신헌법의제정을기점으로국가와언론의관계는질적으로변화한다. 유신헌법은언론출판에대한허가제를허용하지않던헌법규정을삭제했으며, 유신헌법에서허용하는긴급조치권은헌법에대한비판및개정논의자체를금하는등, 언론의자유를극도로제한하였다. 프레스카드제를도입하여언론인을준국가공무원으로변질시켜이들에대한통제를강화하였다. 이와 1955 년의동아일보오식사건은 고위층재가대기중 이라는기사의제목앞에다른기사의제목을구성하던 괴뢰 ( 傀儡 ) 라는단어가들어가서 괴뢰고위층재가대기중 이라는제목으로인쇄된사건이다.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55 같은유신정권의언론탄압을상징적으로보여준사건이동아일보광고탄압사건이다. 유신체제수립에반대하여언론계에서자유언론수호운동이전국적으로거세게일어나자유신정권은이를분쇄하기위한목적으로본보기삼아, 자유언론수호운동에앞장섰던동아일보의광고주들에게압력을넣어광고계약을일방적으로철회하게한것이다. 이로인해 1974년 12월 26일부터동아일보는광고면이비워진백지상태로제작되게되었다. 결국이러한광고탄압사태가장기화되자동아일보경영진은정부에굴복하여농성하던기자들을강제로해산시키고, 끝내이들은해고되었다. 12 12와 5 17을통해서권력을장악한전두환신군부정권은이미유신을통하여약화된언론에대하여더욱억압적이고극단적인통제를시도하였다. 1980년 5월다수의비판적정기간행물을등록취소하는한편, 언론사에압력을넣어수백명의언론인을해직시키게끔하였다. 급기야 1980년 12월에는언론통폐합을단행하고, 이러한언론체제를제도화하기위하여언론기본법을제정하였다. 문화공보부내에홍보조정실을신설하여언론사에보도지침을하달하여, 기사의내용과크기, 제목, 배열등을직접지시하기도하였다. 한편, 이러한과정에서정부에협조적이었던언론들은살아남아언론시장의독과점체제를형성함으로써언론의상업화를가속화하게되며, 역시정부에협조적이었던언론인들은정 관계로진출할수있는기회를폭넓게부여받았다. 박정희정권시기에시작되었던규제와보상이결합된이중적통제정책을더욱극단적인형태로추진한것이다. 이를통하여언론은거대언론자본으로성장하게되었다. 제도언론, 관제언론으로재편된준국가기구로서의언론은더이상공론장형성의주체로서의기능을수행할수없었다. 2) 민주화이후언론 1987년의민주화는다른많은사회부문과마찬가지로국가와언론의관계에변화를가져왔다. 민주화의중요한단계가되었던 6 29 선언에 자유언론의창달 이포함되었던만큼, 당선후노태우대통령은물리적힘과강압에의한권위주의적언론통제를외형적으로포기하고, 약한억압과강한유인을통해서언론을통제하려는시도를보였다. 5공시절형성된보수재벌언론과상호이익교환모형에근거한새로운연대의관계를모색한것이다 ( 박승관 장경섭 2001). 언론은이전의권위주의정권동안에지배권력의하위파트너로역할하였다. 그러나정치적민주화의과정에서국가와자본등전통적주요지배분파들의지도력과정통성이약화되자, 언론은국가와자본에대한관계에서상대적자율성을강화함으로써그자체가지배권력과의대등한동반자로서의지위를확보하고자하는모습을보인것이다. 노태우정부는언론기본법, 프레스카드제를폐지하였으며, 보도지침을완화하고, 신문발행을자율화하였다. 그결과신문의창 복간이활발하게이루어져신문수가급증하는등언론시장의엄청난양적팽창을가져왔다. 이과정에서 1988년 5월에는과거권위주의정권시기에해직된언론인들을

15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발기인으로하여국민주형식으로창간기금 50억을모은한겨레신문이창간되었으며, 종교계의국민일보, 세계일보, 재벌에의한문화일보등도이시기에창간되었다. 방송또한 1991년의서울방송 (SBS) 설립에이어, 평화방송, 불교방송, 교통방송등이차례로등장하게되었다. 이로써언론시장의독과점체제가무너지고, 기존언론사대신생언론사의새로운대립구도가형성되는모습을보였다. 한편다른부문의시민사회가활력을찾은것과마찬가지로언론인들도억눌려왔던언론의자유를확대하려는시도를활발하게수행하였다. 우선노동조합결성이활발하게이루어져서 1987년 10월에는한국일보, 11월에는동아일보에서노조가결성되었으며, 1988년 11월에는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 언론노련 ) 이출범하였으며, 다음으로는이와같은조직된힘을바탕으로기사의편집권과방송의편성권을얻으려는노력을활발하게전개하였다. 1988년부산일보는파업을통하여편집국장추천제도를얻었으며, 1989년문화방송 (MBC) 역시파업을통하여편성, 보도, TV기술국장추천제를얻었다. 그뒤서울신문, 연합통신, 제주신문등도유사한목적의파업에동참하였다. 이러한노력에대해사주를중심으로구성된신문협회는 편집권침해, 인사권 경영권간섭 이라며강하게반발하였다. 그러나이와같은언론인들의자유화노력에대한, 5공시기에성장한보수언론재벌과여전히정부의강한통제하에있던방송의반격도만만치않았다. 1987년 7, 8월의노동자대투쟁에대해서는이를색깔론으로채색하여중산층시민의불안과위기감을자극하였으며, 1노3김의구도로진행된 13대대선에서는노태우후보에대한호의적인보도를주도하였으며, 1989년이후에는정부가공안정국을조성하는것에대하여앞장서지원하였다. 하지만이와같은모습은과거의권위주의정권시기의국가와언론의관계와는크게차이가나는것이다. 권위주의정권시기에언론은공론장으로서의시민사회의의사형성과정을주도할능력도없었지만, 그것도불필요했다. 국가가공권력으로이를강제하거나억압할수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민주화로국가가약화되어기득권의이해를일방적으로보장할수없게되자, 권위주의정권의특혜를통해성장한보수재벌언론들은물적토대와압도적인시장점유율을바탕으로기득권과스스로의이익을보호하는데적극적으로나서게된것이다. 이와같은보수언론의주체적성장은민주화이후이른바진보정권이라고할수있는김대중, 노무현정부가들어서면서극명하게나타난다. 기득권의이해관계에변화를추구한이들정권의정책에대해서보수언론들이극렬하게저항하는모습을보이고, 여기에민주화이후성장한다른매체들이가세하면서합리적인토론은사라지고제로섬게임과같은언론전쟁이벌어지게된것이다. 이시기에언론은정권지지매체와정권비판매체의두영역으로분리된극명한양극화의모습을보이게되었다. 그리고이렇게형성된보수언론에의한보수적공론장과민주화이후등장하고성장한진보적공론장의대립과경쟁은이후다시보수정권에의한정권교체가이루어진상황에도그대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57 로유지된다. 이제언론은그입장이진보던보수던더이상국가에종속적인존재가아니라, 높은수준의자율성을바탕으로스스로의이해를적극적으로추구하는존재로변모했다. 위와같은변화가민주화이후발생한제도권언론에서 그것이민주화이전부터존재했던기존의보수적성격의신문 방송이던, 아니면민주화를계기로새롭게등장한보다진보적성격의신문 방송이던 발견되는변화라고한다면, 이와같은제도권언론중심의공론장환경은 1990년대중반이후커다란전기를맞이하게된다. 그것은인터넷과같은새로운정보통신기술의발전과확산에힘입어, 일반시민들이정보의생산과전달, 확산의주체로등장하게된것이다. 제도권중심의공론장환경에비제도적영역으로서의시민들이참여함으로써한국사회의공론장환경에구조적변혁이발생하게된것이다. 이와같이새롭게등장한공론장활동이주로온라인을통해서이루어지기에온라인공론장, 인터넷공론장, 사이버공론장이라고도불리기도하는데, 이와같은새로운공론장의활성화는 2000년대이후한국사회의여론형성에큰역할을담당하고있다. 2002년의주한미군지위협정 (SOFA) 의개정을위한촛불시위, 노사모 의결성과이에힘입은노무현대통령의당선, 2004년의탄핵과총선, 2008년의광우병촛불시위등에서확인되는새로운공론장의역할과영향력은더이상한국사회의공론장이정보의생산과확산을독점하는기존의제도권언론에의해서통제될수없다는것을분명하게보여준다. 5. 나가며 시민사회를국가와건전한긴장관계를형성함으로써개인의자유와민주주의의유지 보호 발전에기여할수있는국가와구분되는영역으로이해한다면, 이와같은시민사회가제역할을수행하기위해서는시민사회가사회속에존재하는다양한이해와의견들이자유로이조직되고, 논의되는하나의거대한공론장으로기능해야할것이다. 이와같은공론장으로서의시민사회에서시민단체와언론의역할은매우중요한의미를가진다. 이글에서우리는 1987년의민주화이후발생한시민사회의변화를시민단체와언론을중심으로, 그이전의모습과대비하여살펴보았다. 정치적민주주의의달성은시민사회에큰변화를발생시켰다. 우선자율적인사적결사체라고할수있는시민단체가크게활성화되었다. 권위주의정부하에서시민단체의자유로운조직은사실상불가능했다. 국가는권력의견제자로서의시민사회를원치않았고, 한국의권위주의국가는이를강제할만한압도적인힘이있었기때문이다. 하지만민주화이후시민단체의결성은폭발적으로이루어졌고, 그위상또한크게증가했다. 시민단체에대한국민들의신뢰는때로는정부에대한신뢰보다높아우리사회여론을좌우하는중요한역할을수행했다. 이에따라정부와국회역시시민단체의높아진위상을인정하고시민단체가제기한의제를적극적으로정책에반영하거나시민

15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단체인사들을영입하는등공동거버넌스를추진하는모습을보이기도했다. 최근에는정보통신기술의발달을배경으로 2008년광우병촛불시위처럼아래로부터의시민운동이활발해지면서기존시민단체의위상에또다른변화가발생하고있다. 시민단체의발달과함께언론의자유역시크게확대되었으며, 그결과언론의위상과역할도민주화를전후해크게변화되었다. 억압과보상의이중적언론정책을택한권위주의정부하에서정부에순응하는언론은정부정책의홍보를담당하는준국가기관의역할을하며그보상을얻는지배권력의하위동반자로서기능했으며, 비판적인언론은탄압의대상이되었다. 하지만민주화이후언론의자유가신장되면서언론사노동조합이설립되어편집권독립을요구하고, 한겨레신문과같은대항언론이제도권에진출했으며, 시청자운동 신문개혁운동이전개되는등언론의민주화를위한운동이언론계안팎에서활발하게전개되었다. 한편권위주의정부의비호아래언론재벌로성장할수있었던기존의제도언론, 관제언론은지배권력의하위동반자에서스스로의이해를적극적으로보호하는지배권력의대등한동반자로역할하는모습을보이게되었다. 이와같은양극화 이분화에따라치열한언론전쟁, 이념전쟁이발생하고있지만, 다른한편으로이는민주화의과정에서국가와언론의관계가일반적인지배관계에서보다균형잡힌변모해왔다는것을보여준다. 민주화가이루어진후지배권력내부의균열이발생하고기득권세력의지배력은상대적으로감소한반면, 여론에미치는언론의영향력이보다중요해졌기때문이다. 시민단체와언론은민주화이후한국의공론장을형성하며시민사회를구성하는가장핵심적인요소이다. 권위주의시기여론은국가에의해주조되어강압적인방식을통해국민들에게일방적으로주입되었다. 국가가자발적결사체로서시민단체의결성을억압하고, 언론을준국가기구로만들어통제한이유이다. 이에따라민주적공론장은사실상존재하기어려웠다. 하지만민주화이후여론은아래로부터형성되어국가를압박하고추동하는상향식견제기능을수행하고있다. 즉자발적결사체로서시민단체와자율적인기구로서언론등이시민사회를형성하고, 이들이국가와사적개인을연결하는일종의매개체이자공론장으로서의기능을수행하고있다. 적어도서구에서형성되었던 부르주아공론장 ( 하버마스 ) 에가깝게국가를견제하는기능을할수있는토대가형성되어온것이다.

민주화 30 년 : 국가와시민사회 159 < 참고문헌 > 강명구. 1994. 한국시민사회의변화와언론정책. 신문과방송. 1994년 6월호, 3-13. 강명구. 2004. 한국언론의구조변동과언론전쟁. 강명구. 박상훈. 1997. 정치적상징과담론의정치. 한국사회학 31권, 123-161. 강문구. 2003. 한국민주화의비판적탐색. 서울 : 당대. 경실련. 1989. 경실련발기선언문. 고성국. 1994. 한국시민사회의형성과발전. 아시아문화 제10호, 181-203 권혁범. 2004. 국민으로부터의탈퇴 : 국민국가, 진보, 개인. 서울 : 삼인. 김동노. 2013. 시민운동의정치참여를통해본시민운동의성장과한계. 현상과인식 제37권 3호, 59-85. 김동춘. 2000. 근대의그늘 : 한국의근대성과민족주의. 서울 : 당대. 김동춘. 2006. 한국의분단국가형성과시민권 : 한국전쟁, 초기안보국가하에서 국민됨 과시민권. 경제와사회 70호. 한국산업사회학회, 168-260. 김선미. 2003. 정책과정에서의 NGO의영향력과분석모델. 시민사회와 NGO. 1(1). 김성국. 1992. 한국자본주의발전과시민사회의성격 1960년대이후를중심으로. 한국의국가와시민사회. 서울 : 한울. 김성국. 2001. 손호철교수에대한재반론 : 자본주의국가를넘어서. 시민사회와시민운동2. 서울 : 한울, 123-143. 김성국. 2009. 시민사회와시민운동. 한국사회학회 ( 편 ). 대한민국 60년의사회변동 : 성찰과성과, 그리고과제, 139-185. 김세균. 1992. 시민사회론 의이데올로기적함의비판. 진보평론이론2, 104-135. 김영래. 2007. 민주주의와시민사회가치의재정립. NGO 연구. 5(1). 김윤식. 1985. 해방공간의문학. 강만길 김광식외. 해방전후사의인식2. 서울 : 한길사. 김정훈. 2010. 87년체제를넘어서. 서울 : 한울. 김해식. 1994. 한국언론의사회학. 파주 : 나남. 김호기. 1995a. 그람시적시민사회론과비판이론의시민사회론. 시민사회와시민운동. 서울 : 한울. 김호기. 1995b. 현대자본주의와한국사회 - 국가 시민사회 민주주의. 서울 : 사회비평사. 김호기. 2001. 한국의시민사회 - 현실과유토피아에서. 서울 : 아르케. 김호기. 2007. 한국시민사회의성찰. 서울 : 아르케. 류한호. 2004. 언론의자유와민주주의. 서울 : 커뮤니케이션북스. 박영선. 2010. 자율성, 대화, 지원과협력의측면에서바라본이명박정부와시민사회관계. 시민사회와 NGO. 8(1). 박홍원. 2012. 공론장의이론적진화 : 다원적민주주의에대한함의. 언론과사회 20권 4호, 179-229. 박희. 1996. 또끄빌의다원적중간집단론과시민사회론의흐름. 알렉시스드또끄빌을찾아서 :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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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63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조희정 ( 서강대학교 ) 1. 문화한국과민주주의 1) 자유사회, 자유문화 권위주의사회는경직되어있기때문에자유로운문화의향유가어렵다. 표현의자유를억압하거나감시와검열등각종규제가압도적인상황에서문화발전을기대할수없기때문이다. 간혹, 정부에의해동원된관제문화나정권을비판하는저항문화가생산될수도있지만그것을보편적인대중문화라고부르지는않는다. 한국가의자유문화를부러워하는것은문화다양성때문이기도하지만그국가의자유로운분위기를상징하는것이기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문화가형성되는사회는그만큼민주적인사회라고할수있다. 1987년이후한국사회에서자유문화형성은 -경제발전만큼- 민주주의수준의성숙을의미하는것이다. 대표적인한국문화로서정보문화를들수있다. 우리나라의정보문화는세계최고수준으로발전하고있다. 인터넷강국답게한국의초고속인터넷속도는세계최고수준이고정부가추진하는전자정부 (e-government) 는 -다른분야의세계지표가낮은수준임에비해- 언제나세계 1위수준으로평가되고있다. 산업화는뒤졌지만정보화는앞서가자 는정보통신 (Information Communication Technology, 이하 ICT) 정책의원칙시행을통해누구나 PC와스마트폰을사용하는것이전혀이상하지않은시대가되었고, 소통의급속한확장이일어나게되었다. 이와같이인프라 (infra structure) 가탄탄하다보니그기반위에다양한문화콘텐츠 (contents) 생산과유통이이루어지고있다. 인터넷게임서비스는다수의국민들이즐기고있는문화로서여타산업의수출실적에뒤지지않는다. 또한우리사회고유의공동체문화는그동안아이러브스쿨 (iloveschool), 프리챌 (freechal), 미니홈피 (cyworld) 와같은온라인공동체를만들었고, 이제는그수를헤아리기어려울정도의막강한온라인커뮤니티 (online community) 가곳곳에서활동하고있다. 매일매일사람들의일상속에휴대폰이자리하고있고, 메신저 (messenger), 뉴스, 음악, 쇼핑을하면서정보화환경을풍성하게만들어가고있다. 다른국가들은여전히브로드밴드 (broadband) 를확충하고, 인프라기반을다지는데주력하고있지만적어도우리나라에서는인프라에대한고민

16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없이안정적인통신환경속에서온라인문화의질적인발전을고민해야하는행복한상황이진행되고있다. 또한, 지난 30년간대외적으로이루어진문화발전사례로는 한류 ( 韓流, Korean wave) 를들수있다. 싸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의유튜브조회수가 26억뷰 (view, 2016년 7월말기준 ) 이고, 이란에서드라마 대장금 시청률이 90% 라는가공할만한수치로나타났다. 콘텐츠산업매출액이년간 100조원에이르고, 관광한류의폭발에서울부터제주도까지온국토가외국인들의방문때문에들썩이고있다. 한류문화발전에힘입어한국의국가브랜드가치는높아졌고, 한류때문에한국문화를알고자하는외국학생들의한국유학행렬이이어지고있다. 케이팝 (K-pop) 팬클럽은전세계에걸쳐수백만명인데, 처음에는단지가수에게만관심을가졌다가한국에대한관심으로심화되어한국을동경하고, 좋아하며한국어까지배우게되었다는이야기는이미새로운이야기가아니다. 딴따라에불과하다고폄하되던대중문화는아이돌 (idol) 과기획사라는체계적인시스템속에서글로벌한류와엔터테인먼트 산업 으로서의지위를획득하게되었다. 국내수준에머물거나국제대회에서의성적이좋지않았던스포츠는 1988년서울올림픽과 2002 년월드컵유치를통해국제적수준으로거듭났고, 야구 골프 피겨스케이트 리듬체조 수영등에서수많은글로벌스타를만들면서또하나의문화블루오션을형성하게되었다. 2) 소프트파워와국가브랜드 새로운시대에문화가가지는힘을이해하기위해서는소프트파워 (soft power) 와국가브랜드개념 1 에대한이해가필요하다. 과거, 냉전시대의권력은하드파워 (hard power) 중심으로형성되었다. 하드파워란처벌위협이나보상약속으로하지않으려했던것을강제하여일방적으로하게하는것을의미한다. 오랫동안경제보상이나군사제재를통해치켜세우거나강제하는하드파워는권력의주된요소가되어왔다. 이에대해조셉나이 (Joseph S. Nye Jr.) 는변화된사회의권력을논의하면서, 하드파워와대비되는소프트파워개념을주창하였다. 군사력과경제력중심의하드파워에비교되는권력으로서소프트파워는의지를강제하는것이라기보다는스스로원하게만듦으로써기대하는결과를얻어내는능력을의미한다. 즉, 강제보다는 매력 으로바라는결과를얻는능력이며, 타인이따라오도록확신시키거나기대하는행동규범이나제도에동의하도록하는방법이며, 이슈 (issue) 를구성하는능력이다. 1 국가브랜드개념에대해서는국가브랜드위원회 (2010) 참조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65 쉽게말하면, 소프트파워란상대를설득하는수단으로서강제 무력동원 돈을이용하기보다는, 상대를저절로매료시키고상대의마음을흡수하는능력이다. 국가의소프트파워는문화가치, 정치가치, 외교정책의세자원으로결정되는데나이의개념대로라면한류, 일본의 zen( 禪 ), 프랑스의요리, 이탈리아의패션, 감성경영등이대표적인국가의소프트파워에해당한다. 한편, 국가브랜드개념은 한국가의자연환경, 국민, 역사, 문화, 전통, 정치체제, 경제수준, 사회안정, 제품, 서비스, 문화등의유형또는무형의정보와경험을활용하여내외국민들에게의도적으로심어주고자기획된상징체계 이다 ( 조동성 2003: 18). 얀홀트 (Anholt) 는 다른이들이한국가를보는방법 을국가브랜드라고정의하였으며, 함 (Peter van Ham, 2001) 은지정학과힘의모던사회 (modern society) 에서이미지와영향력의포스트모던사회 (postmodern society) 로이동한것을암시한다고분석하였다. 길보아 (Eytan Gilboa, 2008) 는국제관계의혁명이외교정책목표와수단을바꾸어, 매력과설득을통해호의적이미지나명성을얻는것이군사적힘이나경제수단을통해영토나원자재등을얻는것보다더중요해졌다고평가하였다 (Peter van Ham 2001: 2-6; Eytan Gilboa 2008. 3: 56). 소프트파워와국가브랜드개념은문화주권의신장이단지한국가의일국적차원의권력신장을의미하는것이아니라국제적차원의권력문제이며, 동시에새로운시대변화에따른가치변화를반영하는개념임을보여준다. 이러한틀안에서새로운독창적인문화로서정보화와한류에대한분석이이루어질필요가있다. 2. IT 강국, 정보화와민주주의 1) 정보화의형성과정 1987년민주화이후, 권위주의시대에서민주주의시대로이행이이루어지기시작할때, 산업사회에서정보사회로의도입도급격히진행되었다. 단지계산기로만평가되고, 공학전문가들의복잡한기계로만평가되던컴퓨터를 PC(Personal Computer) 형태로모든개인이사용하게되었고, 어린학생들이유학가고싶지않을정도로한국의인터넷환경은세계최고수준에이르렀다. 모르는것이있으면사전을찾는것이아니라 검색해보라 는말이일반적인말이되었고, 종이신문이사라지는위협적환경속에인터넷공간에는정보와뉴스가차고넘치게되었다. 또한, OECD 기준교통사고사망률과자살률이다른나라보다월등히높다는부끄러운발표속에서 한국의전자정부세계 1위, IT 강국코리아 와같은뉴스는한국의위상을높이고움츠린국민들의어깨를펼수있는자랑스러운소식으로평가되었다.

16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우리나라정보화의전개과정은 3단계로구분할수있는데, 도입기인 1987-1997년까지는 PC통신을통해온라인공간이형성되었고, 전개기인 1998-2007년까지는인터넷대중화와함께전자정부 ( 정치 ), 닷컴기업 ( 경제 ), 온라인커뮤니티 ( 사회 ) 등사회전영역에서새로운시도가다양하게나타났다. 2008-2016년현재에이르는활성기에는스마트폰의등장으로모바일이용이증가하여 내손안의인터넷시대 가구현되었으며, 소셜미디어 (social media) 를통해인간관계가확장되고네트워크사회로의진화가이루어지고있다. 이와같은시대변화는인터넷을중심으로하는정보시대 (Informing Age) 에서커뮤니티를중심으로모이는집합시대 (Community Age) 그리고서로연결된네트워크가위력을발휘하는네트워크시대 (Network Age) 로의진화를의미하는것이기도하다. (1) 도입기 (1987-1997 년 ) 인터넷이전의네트워크전신 ( 前身 ) 이라고할수있는 PC 통신시대에이미자유로운표현과문화생산이이루어졌다. 천리안 (1985년대한민국최초의상용 BBS 서비스시작후 2002년 PC 통신사업종료 ), 하이텔 (1988년케텔 (KETEL) 에서 1992년하이텔로변화후 2003년서비스종료 ), 나우누리 (1994-2013년), 유니텔 (1996년서비스시작 ) 등의다양한서비스에는많은동호회와뉴스게시판, 대화방이존재했다 ( 이외에넷츠고, 신비로, 채널 i 등의서비스도있었는데이서비스들은기존의 PC 통신서비스를인터넷상에구현한것으로초기의 PC 통신형태와는차이가있다 ). 지금은너무나생소한 이야기 접속파란화면에 atdt 01420 과같은접속번호를입력하면 1,200bps 속도의모뎀이연결음을내며통신망에연결하였는데, 접속자가너무많으면그마저도접속이쉽지않았다 (PC 통신마다접속번호는달랐는데그이전의케텔 (KETEL) 시대의접속번호는 atdt 157 이었다 ). 1989년 12월무료소프트웨어로배포된 이야기 는한글로채팅하기위해만들어진 PC 통신접속프로그램 ( 통신에뮬레이터 ) 으로서그래픽도없고한글사용도불가능했던당신 PC 환경에서는파격적인프로그램이었다. 이야기 가없었을때에는 안녕하세요 를 annyeonghaseyo 로표현할수밖에없을정도로한글사용이어려웠다. 2 PC 통신에접속할때에는다른곳에서오는전화를받을수없었다. 이야기 에서는전화가올경우끊겼을때자동으로접속해주는기능이있었지만이마저도너무많은사람들이사용했기때문에유명무실할정도로 PC 통신의인기가좋았다. 그러다보니개인사용자들은전화요금과통신요금을합쳐서천문학적인이용요금을납부해야했고, 액수가매월 10만-20만원이라는거액을부담 3 하 2 이야기개발자들의이야기프로그램에대한회고는 PC 통신 이야기 에서 큰사람컴퓨터 까지 ( 블로터닷넷 2015 년 9월 24일자 ) 참조 3 천리안의통신비는정액제가아니었고, 하이텔과나우누리는정액제였다. 심지어당시천리안에서는보관함에편지나프로그램을보관할때 1,000자에하루 9원을받기도했다. 초보자들의경우는자료실에서받은게임이나친구들이보내준게임을일단모두보관함에저장했다가나중에몇백만원짜리고지서를들고울며겨자먹기로 PC통신을끊기도했다 ( PC통신접속소리요란하던그때그추억. 이비즈 2010년 9월 14일자 ).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67 면서도 TV 나라디오에서볼수없었던새로운세상과만남에열광하던시기가 PC 통신시대였다 ( 류석진 조희정 이헌아 2016: 35-36). 그림 1 PC 통신접속화면 * 자료 : http://www.memorystory.net/bbs/board.php?bo_table=b74s01&wr_id=12 이시기의주이용자들은주로 20대, 남성, 대학생들이었으며, 이용규모는꾸준한규모로증가하다가 2001년부터 1,000만명을기점으로감소세를보이기시작했다. 연령별로는 20대가 69% 로압도적으로많았고, 거주지는서울및대도시거주자가 62.5% 로대부분이었으며, 직업별로는학생이 59% 로나타나현재보다는상당히높은비율이었음을알수있다 ( 전문직은 18.9% 에불과했다, 이만제 1995, YMCA 1995, 조사규모 : 271명, 임현경 1996, 한국갤럽조사연구소 1996, 조사규모 : 1,000명, 한국정보문화센터 1996, 김지화 조효래 1997, 조사규모 : 천리안이용자 450명, 한국정보문화센터 1998, 조사규모 : 하이텔이용자 1,977명 )( 류석진 조희정 이헌아 2016: 37-38). PC 통신서비스는기술적으로는전자게시판, 전자우편, 채팅, 온라인 DB 서비스로구성되어있는데, 이외의기능은이들의조합에의해만들어질수있다. 즉, 동호회는전자게시판, 채팅, 전자우편기능의조합이며다운로드기능은전자게시판에바이너리 (binary) 자료를게시하는방식으로구성되었다. 천리안은매일 오늘의통신매니아 100 이라는통계를발표하였는데, 가장많이이용하는이용자는하루평균 20시간이상을초과하는경우도있었으며, 10시간이상이용자가 100명을넘는경우가많았다. 이용자들은하루평균 1시간 30분, 평균밤 10시-새벽 2시사이에 PC 통신을이용

16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하였는데, 주로자정부터통신료할인 ( 야간정액제 ) 이이루어졌기때문에주이용시간이꽤늦은시간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현재의주단위로평가하는인터넷이용시간과비교해볼때꽤많은시간을 PC 통신이용에할애한것으로볼수있다 ( 류석진 조희정 이헌아 2016: 38). (2) 전개기 (1998-2007년) 1999년 5월, 포털다음 (Daum) 은업계최초로카페 (cafe) 서비스를시작하였으며, 1년뒤인 2000 년카페수는 100만개를넘어섰다. 2000년에는아이러브스쿨과프리챌도서비스를시작하였다. 한편, 2002년 11월 4일프리챌서비스의유료화선언을기점으로사용자들이대거이탈하면서카페경쟁및독립커뮤니티형성시대가되었다. 2002년과 2003년에는포털카페에서성장한많은커뮤니티들이독립을하며거대커뮤니티로성장하였고, 현재까지유명한커뮤니티들이모두 2002 년과 2003년에만들어졌다. 2015년은국내에서온라인커뮤니티가시작된지 30년이되는해이다. 그동안국내네트워크공간의역동성은개인사용자뿐만아니라집합적인온라인커뮤니티의주도하에확장되었다. 자발적으로형성되는온라인커뮤니티는수백만명의회원과폭발적인콘텐츠 (contents) 생산력그리고집단행동 (collective action) 을통해주목받았고영향력있는사회적행위자로부상하게되었다. 현대사회에서정당당원이나시민단체의회원수가급감한것에비하면온라인커뮤니티의종류뿐만아니라회원수는날이갈수록증가하고있으며, 50만명이상의회원을가진거대커뮤니티도매우많다. 서키의 많아지면달라진다 는명제그리고시공간을초월하여연결되는수많은노드 (node) 의네트워크효과를고려할때, 온라인커뮤니티의거대한회원수는이것이가져올사회변화의잠재적규모와깊이를다시생각하게만든다 (Clay Shirky 2011). 네트워크의힘이란네트워크에연결된사람들의생각 의지 관계의힘을의미하기때문이다. 전개기의정치활동으로는 2000년의낙천낙선운동, 2002년여중생추모촛불집회, 2004년탄핵반대촛불집회를들수있다. 네이트온메신저를통한추모분위기확산, 다양한패러디등자유로운표현과함께사회참여현상이매우활성화되었다. (3) 활성기 (2008-현재) 인터넷의발전이더욱심화되면서온라인쇼핑, 게임, 교육, 미디어도급속히확산되었다. 온라인을기반으로생활양식이변화하게되었고, 사고방식및인간관계의변화도나타났다. 또한, 이시기는소셜미디어나스마트폰이발전하게되는시기와도겹친다. 이제는책상앞의 PC를통해서만인터넷을사용하는시대가아니라이동하면서개인적으로혹은언제어디서든내가까이에서미디어를이용하는것이보편적인시대가되었다. 쉴새없이메시지가도착하고, 너무많은정보가쏟아져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69 당혹스럽기도하고, 앱위에떠있는빨간색의안읽음메시지수가스트레스가되고, 퇴근후에도메시지를받아야하기때문에 24시간미디어의노예가된것같은기분이들지만그모든고통을감안하면서도손에서휴대폰을놓지않는것이현실이되었다. 모바일이나의모든정보를저장하고나를대변하는 또하나의뇌 가되고있는상황에서신문, TV, 라디오만보던시대에비해많은것이복잡해지고빨라졌다. 그림 2 세계인터넷평균속도순위 (2016 년 ) * 자료 : Statista(2016) 정부부문에서는나라장터, 국민신문고와같은정부서비스의발전이이루어졌고, 시장부문에서는반도체, 컴퓨터, 무선통신기기, 평판디스플레이, 센서, 전자응용기기등의분야에서수출주도력이강해졌고, 글로벌 ICT생태계가구축되었다. 한편, 트위터와페이스북등소셜미디어를통해네트워크내에서의이용자간관계성이급격히강해졌다. 이제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클라우드 (Cloud Computing), 가상현실 (Virtual Reality), 사물인터넷 (Internet of Things) 등의신기술을통해네트워크공간, ICT 산업, 온라인사회의발전이이루어지고있다.

17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그림 3 G20 국가 IoT 발전기회순위 * 자료 : IDC, G20 국가 IoT 발전기회지수순위발표, 한국 2 위에랭크. ( 데일리시큐 2016 년 11 월 9 일자 ) 2) 정보문화이용규모 (1) 인터넷미디어이용인터넷초창기라할수있는 1999-2003년조사에의하면인터넷을매일이용하는이용자는 59.6% 수준이고, 가구당 PC 보유율은 59.3% 이며, 주평균이용시간은 11시간으로나타났다. 성별로는남성 : 여성비율이 56 : 43으로서과거에비해여성인터넷이용자의비율이증가하는경향이나타나고, 연령별로는 30대와 40대의이용률이크게증가하였으며, 직업별로는학생이그집단의 93% 로역시가장높았지만사무직과전문 / 관리직도그집단의 81.5% 를보여크게증가했음을알수있다. 인터넷의주이용목적은정보검색이 49.7%, 오락 게임이 22.7% 로나타났다 ( 한국인터넷정보센터 2001, 조사규모 : 10,978명 ). 2000년에는남성네티즌은컴퓨터 인터넷 (46.7%) 분야에, 여성은취미 오락 (33.3%) 을비롯한영화, 학교동문동호회참여가상대적으로활발하게나타났다. 2006년조사에서는이용자들의평균커뮤니티활동기간은 8.8개월, 평균커뮤니티이용시간은주당 3.6시간, 평균커뮤니티접속횟수는주당 8.2회인것으로나타났다 ( 박유진 김재휘 2006 : 61). 2007년의인터넷이용률은 76.3% 로서이용자수는 3,400만명으로인터넷사용이보편화되었다 ( 한국인터넷진흥원 2007).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71 2008년촛불집회를계기로 10대이용자들의인터넷이용률에대한관심이높아졌다. 실제로도 13-19세이용자의인터넷이용시간은 29시간, 1인당평균페이지뷰는 431만회로 35-39세보다 2 배이상많았다. 이용자수는 20-30대가 10대보다많았지만 1인당페이지뷰는월등히높게나타난것이다. 특히 2007년 12월기준으로우리나라 10대인터넷이용률은 99.8% 로전연령대가운데가장높게나타났다 ( 랭키닷컴 2008). 2010년에는 50대의인터넷이용률이급증하였다. 2000년에는 50대인터넷이용자가 43만명이었지만 2010년에는 370만명으로 8.6배증가하였다. 이와같은변화는커뮤니티회원의세대구성에서도변화로나타나고있다. 2014년국내만 3세이상인구의인터넷이용률은 83.6% 에달한다. 이는 2001년의 56.6% 부터꾸준히증가한규모로서만 60세이상고령층의인터넷이용률도 32.8% 에달하는등가히 ICT 강국으로서규모를보이고있는것이다. 그림 4 인터넷이용용도 (2013 년 ) * 자료 : 미래창조과학부 한국인터넷진흥원 (2014) ** 복수응답

17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2) 소셜미디어이용이제는스마트폰을통한소셜미디어이용이자연스러운시대이다. 2010년대부터는스마트폰을통한소셜미디어이용이 50% 를넘어현재에는거의 90% 의이용자들이스마트폰을사용하여소셜미디어에접속하고있다. 그림 5 소셜미디어이용기기 * 자료 : DMC 미디어 (2014: 5) 2014 년이용률을보면스마트폰을이용한소셜미디어이용률이 84% 로가장높게나타났고, 주 로사용하는이유는친구와지인과의연락및교류 (58.4%) 가가장높게나타났다. 그림 6 소셜미디어이용시간과이용기기 * 자료 : DMC 미디어 (2014: 7)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73 3) 정보화효과 국내인터넷의진화과정의특성은다음과같이정리할수있다. 첫째, 디지털세대가출현하였다. 국내에서세대를규정짓는용어는매우많지만디지털세대는 1990년이후출생자로서태어날때부터인터넷을사용한세대들이다. 이들은이전시대의성인이냉장고나티브이를사용하기위해매뉴얼을보지않았던것처럼프로그램이나스마트폰사용을위해매뉴얼을읽지않으며, 기술이환경으로자연스럽게존재하는상황에서성장한세대들이다. 또한다층적인평판에예민하고, 지나친상업성이나위계에대한강한거부감을가지고있는탈물질주의적성향을가지고있다. 이들이형성하게된다중은시민관여력 (empowerment) 을갖춤으로서민주주의사회에서자유로운참여시민, 네트워크시민으로성장하였다. 둘째, 미디어의영향력이절대적인것처럼과대평가되었다. 미디어만이독립변수가될수는없다. 미디어때문에참여가활발해졌다기보다는정보를많이접하고, 오프라인보다상대적으로의사표출할수있는기회와공간이확장됨으로써참여에순기능적인영향을미친다고볼수있다. 물론미디어는그러한시민들의욕구를매개할뿐이다. 셋째, 소통성이기하급수적으로증가하였다. 뉴미디어의미덕은매스미디어의대규모필터링된정보전달이놓치고있던쌍방향성과정보의다양성을회복한데있다. 넷째, 스마트폰사용이보편화됨에따라사회보다개인의가치가더증가하였다. 쌍방향성의확장은이제개인맞춤형정보의시대 (My Age, Me Age) 로전환되고있는중이다. 스마트폰앱도철저히자기맞춤형정보이다. 물론그과정에서불필요한정보수집, 개인정보에대한감시와침해가능성, 지나친정보편향등의문제도남아있지만효율적인빅데이터분석이이루어진다면개인맞춤형의시대가소셜미디어시대이후를규정할것이다. 이제는 OPM(One Person Media) 과같은개인미디어가대안미디어로자리잡을것이다. 다섯째, 생각하기 보다 보기 의역할이훨씬중요해졌다. 최근에각광받고있는것은드론이나 VR, AR과같은기술이다. 모두가이미지미디어의중요성을포함하고있는기술들이다. 2016년 4월페이스북이발표한 미래 10년플랜 에서도이와같은특징이나타났다. 기왕에페이스북에내재되어있는비디오, 메신저, 이미지공유, 그룹서비스를바탕으로연결성, 인공기능, 영상서비스의약진을이루겠다는것이핵심내용이다. 단시간에신속하게정보가유통되다보니텍스트만으로정보를알리는것은어느새비효율적인것이되었고동영상을통해종합정보를알리고시각적으로좀더실감나는기술을동원하는것이중요해진것이다. (1) 정치적효과 : 온라인공론장과여론확산 정보화의발전은민주주의발전에도큰기여를하였다. 이른바뉴미디어를통한국민들간의의사

17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소통이급증하였고, 정부나정치인에대한과거와현재의정보를쉽게접할수있게되었으며, 한편으로는뉴미디어를활용한선거운동이나홍보가일반적인모습이되었다. 민주주의가다수의참여와의견반영을자유롭게할수있는정치환경이라면정보화는민주의의활성화에큰기여를한것이다. 독일철학자하버마스 (Harbemas) 의개념을인용하여온라인공간을공론장 (public sphere) 으로규정하는경우가많은데, 하버마스의공론장은이성적인시민, 근대시민을둔개념이다. 오히려지금의온라인공간은옛 장터 개념이더적합하다. 물건을팔고, 서로의소식을전하고, 중매나싸움도이루어지는종합적인생활공간인것이다. 단지과거의장터처럼 3일장, 5일장이아닌초단위로움직이는장터라는시간적개념만상이한것이다. (2) 사회적효과 : 집단행동과사회자본의축적공간과미디어차원에서온라인커뮤니티는핵심적인정보생산 유통 확산의공간으로서온라인콘텐츠의흐름의공간및새로운대안미디어와공론장기능을수행하고있다. 전통적인매스미디어는온라인공간에서여러다양한미디어로확대재생산되고있는것이다. 블로그 (blog) 와같은 1인미디어, 메신저 (messenger), 팟캐스트 (podcast), 소셜미디어뿐만아니라온라인커뮤니티도쌍방향의사소통이가능한하나의거대한뉴미디어역할을하고있으며, 다수의의견을수렴하는온라인공론장의역할을수행하고있다. 참여인원이확대되었기때문에참여규모증가와더불어다양한개별적화자 (speaker) 가등장했다. 사회 정치적차원에서온라인커뮤니티의현실공간에의영향력이점차강해지고있다. 일베의극단적인주장뿐만아니라온라인커뮤니티에서생산되는의제와사회적결집력은매우강한추동력으로정치사회적시민권을형성하고있다. 온라인커뮤니티의광범위한규모뿐만아니라정치차원에서의의제생성 유통 확산을통한집단행동, 경제차원에서의소비자운동, 사회차원에서의수많은의제운동 (advocacy) 의중심에서도중요한역할을하고있다. 즉, 온라인커뮤니티에서생성되는콘텐츠의다양성과소통적인콘텐츠가양적으로증가하고질적으로확대되고있는것이다. 집단행동에서개인행동의네트워크로표출방식이변화하고있다. 노동조합이나정당이중요하던시대는점점사라지고사무실조차없는네트워크정당의출현이나타나고있다. 이제중요한것은미디어의종류가아니라모든것이연결되어있다는사실하나뿐이다. 네트워크내에서위계성과권위보다는수평성과협업이효과적인방식으로운영되고있다. (3) 문화적효과 : 자유로운콘텐츠생산과다양성 정보화는문화적인측면에서도활발하게발전하였다. 디지털파일 ( 데이터 ), e-book( 출판 ), 웹툰 ( 만화 ), 음원 ( 음악 ), 팬클럽 ( 엔터테인먼트 ) 등의용어는과거에는없었던디지털문화의새로운산물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75 들이다. 모든문화적인자료들이디지털파일로변화하면서네트워크공간에서생산 공유 유통되었으며, 누구나갖고있는단말기를통해책을볼수있는 e-book의시대, 만화창작자가외국에수천만명의애독자를갖게되었고, 국내외수천만명의팬클럽이자신들의영웅을찬양하고연구할수있는시대가된것이다한편, 1998년개발된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대규모다중사용자온라인롤플레잉게임 ) 리니지 (Lineage) 가현재까지인기를끌고있지만게임은단순한놀이가아니라전세계인들에게 한국의리니지 를알려준수출효자상품이기도하다. 3. 한류와문화활성화 1) 한류의출현과형성과정 민주주의공고화의한축으로한류의화려한도약이진행되고있다. 전세계누구나한국의것임을너무나잘알고있는태권도, 공한증 ( 恐韓症 ) 을유발할정도로초강력한권위가있는조훈현 조치훈 이창호 이세돌의바둑, 정명훈 조수미 장한나등이맹위를떨치고있는클래식음악, 1987년강수연의베니스영화제여우주연상수상으로전세계에존재를알리게된한국영화등은이미오래된한류분야였다. 한때는 가장한국적인것이세계적인것이다 라는말이유행하기도했지만, 과거의한류는말그대로큰흐름 (wave) 을형성하기보다는몇몇특출난유명인의재능혹은지극히제한된분야에국한되었기때문에넓은범위의세계적인흐름으로평가하기는어려웠다. 그러나 1999년 11월 19 일자중국잡지 베이징청년보 ( 北京靑年報 ) 에서 한류 라는표현이등장할정도로, 한류의분야나강도가이전시기에비해훨씬더강력하게확산되고있다. 우선분야별로드라마와케이팝 (K-pop) 4 에대한열기가가속되었다, 익히알려진대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나드라마 별에서온그대 열풍이대표적인데, 그이면에서는훨씬더많은케이팝과드라마의외국수출과인기가이어졌다. 이러한한류의출현에는몇가지특징이있다. 첫째, 이전에는단 3개에불과하던 TV 채널그리고공영방송과지상파방송중심의구조는이후에점차적으로종편 ( 종합편성채널, 2009년관련법통과 ), 유선방송 ( 케이블 TV) 채널로확대되었고여기에인터넷이가세하면서문화를향유할수있는공간자체가폭넓게확장되었다. 공간이확장되다보니공간을채우기위한콘텐츠들이풍부해졌다. 풍부한콘텐츠간경쟁속에서양질의콘텐츠가생산되었다. 또한신속한정보공유속에인터넷을통해시공간을넘어콘텐츠의유통이이루어졌다. 4 한국의음악을지칭하는 케이팝 은 2008 년부터보편적으로씌여진용어이다 ( 이규탁 2016: 90).

17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민주화에의해정부의일방적인방송통제, 검열및규제가아닌방송자율화정책이이루어졌고, 인터넷이라는대중적공간을통해실시간으로한국콘텐츠들이세계로알려졌다. 이와같은양적공간확장이현재한류성공의발판이된것이다. 둘째, 또다른한류발전의원동력은네트워크이다. 한국에서매주드라마방송후외국동영상플랫폼에현지어자막까지넣어서즉각적으로업로드, 한국거대기획사들의유튜브채널에서볼수있는아이돌의공연동영상과뮤직비디오동영상, 웹툰의현지언어번역, 입수한한류동영상및파일의신속한전파등이모든활동은인터넷과소셜미디어를통해이루어진다. 전세계가인터넷으로연결되어있지않았다면한류라는현상이나타날수있었을까싶을정도로네트워크위력은강력하다. 그림 7 유튜브에서의케이팝재생회수 * 자료 : 류성일 (2014. 11. 19: 4) 그림 8 유튜브조회 8 억건달성기간 * 자료 : 류성일 (2014. 11. 19: 4)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77 셋째, 다양한분야로의확산은문화의풍부함과자유로운사회의표현을나타낸다. 클래식음악과오페라공연등특정계층만향유할수있던제한적인문화가아니라대중문화폭발이라는가장강력한한류의특징이나타난것이다. 저발전권위주의시대에는먹고사는문제에급급하고, 문화는사치품에불과하였지만이제는수많은문화상품의하나를고르는것조차어려운풍요의시대가되었다. 딴따라 라는비하의속어가 셀럽 (celebrity, 유명인 ) 이라는동경의언어가된것처럼문화인의위상도높아졌다. 자유로운민주주의와문화발전이동시에이루어지는상황이된것이다. 넷째, 산업분야도다양화되었다. 영화 쥬라기공원 의수익이현대자동차 150만대판매액과맞먹는다는 1990년대중반의통계가진부하게느껴질정도로한류의많은문화상품은국내외수출구조를변화시키고있다. 드라마 별에서온그대 여주인공천송이의 눈오는날엔치맥이다 라는한마디에중국관광객수천명이한국으로와서치맥파티를하고, 지방자치단체에서중국관광객유치를위한행사지원을하고, 천송이코트가품절되는사태만의미하는것이아니다. 케이팝아이돌의외국공연을수만명이관람을하고, 드라마속촬영지가꼭가서보아야만하는관광지가되어외국관광객이증가하는것등의현상은단순한유행이아니라이제는하나의거대한수익구조처럼작동하고있기때문이다. 나아가한국작품을리메이크하고, 한국문화의생산시스템을배우려는움직임까지나타나가히전방위적인문화수출이이어지고있다. 그림 9 요우커 4,500 명의인천월미도치맥파티 * 자료 : 별그대처럼, 요우커 4,500 명, 인천월미도서치맥파티. ( 한국경제신문 2016 년 3 월 29 일자 ) 다섯째, 노래한곡, 드라마한편의세계적인성공은단지하나의작품성공에그치지않고국가의위상변화에까지영향을미친다. 노래가사를알기위해한국어를배우고싶어서유학오는외국유학생들, 한국에대해알고싶어서한국의문화와역사까지궁금해하는사람들의방문은한국이라는국가브랜드상승과국가이미지제고에큰기여를하게되었다. 북한인지남한인지구분도못하

17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던 한국 이라는국가, 38선이있고서로군사적으로대치하고있기때문에당장전쟁이일어날것같은냉전이후의유일한분단국가라는무서운국가이미지는유명배우와유명드라마와유명노래의국가로서문화적위상을획득하게되었다. 여섯째, 국가위상이강화되는분위기속에는국민들의활력이라는또다른소중한기여가있다. 권위주의시대에는항상 수출액몇억달성, GNP 몇달러돌파 와같은수치화된목표치가국민들을억압하였다. 모두가산업역군이었고모두가애국자였다. 그나름대로의경제적성과는달성했을지라도개인의권익과권리에대한이야기는거대담론의하위담론으로크게대접받지못하던시대였다. 그러나자유로운문화향유로인해내가생산하는콘텐츠가세계적으로유명해질수도있다는가능성을확인하고, 나의창작으로인해사회기여가가능해질수있다는희망은문화가주는가장큰혜택이라고할수있다. 즉, 단지산업기계가되어 할수있다 는단선적인성장가치가아니라 모두가함께즐기는것이발전이다 라는가치의전환이이루어지고있는것이다. 민주주의는정치적가치에만머무는것이아니라사회전분야의가능성과희망을통해더욱발전할수있다는것을한류의성공을통해확인하게되었다. 3) 한류콘텐츠확산과관심규모 한류콘텐츠의확산과관심규모는익히알려져있다시피세계적이다. 드라마나음악뿐만아니라다양한콘텐츠까지한류의영역에포함되고있다. 한식, 태권도, 관광, 게임, 뮤지컬, 영화, 킵합 (khip-hop, korean hiphop, 한국힙합 ), 공연, 웹드라마, 한국어, 콘텐츠, 음식, 패션, 광고, 뷰티분야로까지확대되고있는것이다. 이와같은범위확장을통해일시적인이벤트가아니라국가전반을알릴수있는일상적인콘텐츠확산이일어나고있다. 표 1 한류콘텐츠별확산규모 콘텐츠 음악 확산규모 클론 (1999 년, 중국베이징공연, 공연직후 한류 라는표현출현 ) 동방신기 (2006 년, 일본진출 ) 소녀시대 ( 앨범발매첫날일본오리콘차트 1 위 ) SM 타운 (2011 년, 월드투어티켓 10 분만에매진되고관객 14,000 명, 미국뉴욕매디슨스퀘어공연관객 15,000 명, 슈퍼주니어 는한국그룹최초로프랑스파리에서단독콘서트 ) 샤이니 (2011 년, 영국애비로드스튜디오에서아시아가수최초로공연 ) 슈퍼쥬니어 (2011 년, 대만음악사이트 KKBOX 차트사상최장기간인 63 주간 1 위 ) JYJ (2011 년, 스페인바르셀로나에서한국가수최초로단독공연 ) 빅뱅 (2011 년 MTV 유럽뮤직어워드수상, 2014 년일본콘서트관객동원수 2 위, 2015 년까지 3 년연속일본돔콘서트투어 ) 원더걸스 ( 한국인최초로미국빌보드 100 위이내진입, 76 위 ) 강남스타일 (2012 년, 2016 년 7 월말유튜브조회수 26 억뷰로 1 위, 빌보드핫 200( 싱글차트 ) 7 주연속 2 위, 아이튠스음원차트에서 30 개국에서 1 위 )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79 콘텐츠 확산규모 티아라 (2015년, 미국빌보드팬투표 1위 ) EXO (2014년, 2015년밀리언셀러기록, 일본도쿄돔에서 3일연속공연 ) 킵합 지드래곤, 지코, 랩몬스터 드라마 웹콘텐츠 게임 사랑이뭐길래 (1997 년중국에서 1 억 5 천만명시청 ) 별은내가슴에, 해바라기, 안녕내사랑 (1998 년중국에서인기 ) 보고또보고, 애드버킷, 의가형제, 별은내가슴에 (1999 년베트남에서인기 ) 가을동화 (2000 년, 아시아권에서인기 ) 이브의모든것 (2002 년, 멕시코에서인기 ) 명랑소녀성공기 (2003 년, 필리핀에서인기 ) 겨울연가 (2004 년, 욘사마신드롬 ) 어여쁜당신 (2005 년, 중국에서인기 ) 대장금 (2005 년, 이란에서의시청률 90%, 91 개국에서방영 ) 풀하우스, 아내의유혹, 소문난칠공주 (2009 년, 중국에서인기 ) 태국의국영방송채널 7 은 2009 년 1 년간총 15 편의한국드라마방영 찬란한유산 (2010 년, 일본에서시청률 1 위 ) 별에서온그대 (2013 년, 2014 년중국전동영상사이트기준조회수 40 억건, 콘텐츠수입업계매출 1,500 억원, 총경제적파급효과 2 조원 ) 프로듀사 (2015 년, 33 개국에수출 ) 태양의후예 (2016 년, 2016 년누적조회수 26 억뷰 ) 그외 꽃보다남자, 내이름은김삼순, 냄새를보는소녀, 드림하이, 메리는외박중, 미남이시네요, 미스터 Q, 밤을걷는선비, 분홍립스틱, 상속자들, 시티헌터, 아이리스, 웨딩드레스, 자이언트, 제빵왕김탁구, 주몽, 천국의계단, 치즈인더트랩, 커피프린스 1 호점, 토마토, 파리의연인, 풀하우스 등다수 아빠어디가, 런닝맨, 복면가왕, 냉장고를부탁해, 꽃보다할배 등예능프로그램포맷수출 드라마 : 드림나이트 ( 태국 LINE TV 에서 600 만뷰, 미국피버에서 400 만뷰, 중국에서 9,000 만뷰 ), 고결한그대, 고품격짝사랑, 우리옆집에염소가산다, 후유증 웹툰 : 기기괴괴, 영어, 중국어웹툰 372 편 (215 년 ), 0.0MHZ ( 중국 QQ 닷컴조회수 1,000 만회돌파 ) 웹소설 리니지, 카트라이더, 던전앤파이터, 마비노기, 심심이, 크로스파이어, 로스트아크 메이플스토리 (2015 년, 회원 170 만명이상 ) 모두의마블 (2015 년, 누적다운로드수 2 억건, 누적매출 5,000 억원 ) 서머너즈워 (2015 년, 글로벌누적 5,000 만다운로드, 42 개국애플앱스토어게임매출 1 위 ) 컴뱃암즈 (2015 년회원 1,500 만명이상 ) 포인트블랭크 (2015 년전세계회원 1 억명, 100 개국에진출 ) 국내시장 9 조 9,706 억원, 수출 31 억 7,925 만달러 (2015 년 ) 서편제 (1993년) 를시작으로 오아시스 (2002년), 취화선 (2002년), 올드보이 (2004년), 사마리아 (2004년), 밀양 (2007년), 박쥐 (2007년), 파란만장 (2010년), 시 (2010년), 피에타 (2012년) 등다수의작품이세계 3대국제영화제에서수상 강수연 (1987년베니스영화제에서 씨받이 로여우주연상수상 ) 을시작으로, 문소리 (2002년), 김기덕감독 (2004년, 2012년 ), 임권택 (2002년, 2005년 ), 박찬욱 (2004년, 2009년, 2010년 ), 전도연 (2007년), 영화이창동 (2010년) 등다수의배우와감독들이세계 3대국제영화제에서수상 수상한그녀 를중국과베트남에서리메이크 (2015년) 그외 8월의크리스마스, 고스트, 괴물, 내여자친구를소개합니다, 마더, 미녀는괴로워, 설국열차,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부산행, 실미도, 여행자, 엽기적인그녀, 왕의남자, 의형제, 최악의하루, 추격자, 태극기휘날리며 등다수뮤지컬 명성황후, 상해탄 음식 2009 년한식에대한세계적인지도는제로 프랑스파리소재한국식당 110 곳 (2011 년, 5 년사이에 2 배증가 ) 비빔밥

18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콘텐츠 기타 외식기업의전세계수출확산 확산규모 비보이팀 익스프레션, 갬블러, 라스트포원 의세계대회우승 1997 년부터국제무대에서난타공연 태권도 : 191 개국에서 7,000 만명이상이수련. 2012 년런던올림픽에서정식종목으로채택 패션, 광고 뷰티한류 : 아모레퍼시픽매출 1 조원 (2015 년 ), LG 생활건강 984 억원 (2015 년 ) * 자료 : 김덕중 남상현외 (2016: 96-137); 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 (2005. 2. 22: 129-130); 차종환 (2016: 11-17, 32-33, 42-57);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1. 1, 2011. 12. 19, 2014, 2016); 한국콘텐츠진흥원 (2013. 5. 25: 7);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 30: 19); 한국수출입은행 (2012. 5: 55) 및보도자료를참조하여재구성 2014년에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에서 14개국 5,600여명의외국인들을대상으로 한국하면떠오르는이미지 에대해조사한결과, 1위는 K-Pop(17.2%), 2위는한식 (10.5%), 3위는 IT 첨단 (10.4%), 4위는드라마 (9.9%), 5위는미용 (7.9%) 으로나타났다. 포괄적으로 K-Pop, 드라마, 한식을합쳐 한류이미지 로환산할경우응답자의 37.6% 가한국의이미지로 한류 를떠올리고있는것이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 30: 30). 한류에대한관심은지역이나참여규모에있어서매우광범위하게진행되고있다. 미국이나유럽과같은서구국가뿐만아니라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그리고북한에서의한류가형성되고있다는지역적특성이있다. 2015년외국한류동호회는 86개국에 1,493개, 회원수는 3,559만명으로 2014년보다 7개국 1,229개, 1,370만명이증가하였다 ( 차종환 2016: 9-10). 표 2 한류동호회와동호인규모 구분 동호회 ( 개 ) 동호인 ( 명 ) 증가 2014 2015 2014 2015 증가 아시아 대양주 267 310 43 17,674,090 26,213,832 8,539,742 아메리카 715 804 89 2,676,962 7,581,117 4,904,155 유럽 182 306 124 1,363,037 1,625,271 262,234 아프리카 중동 65 73 8 108,313 170,341 62,028 합계 1,229 1,493 264 21,822,402 35,590,561 13,768,159 * 자료 : 차종환 (2016: 10) 표 3 국가별한류동호회규모 (30 개이상, 2015 년 ) 구분 국가 ( 동호회수, 개 ) 아시아 대양주 중국 (63개), 일본 (56개), 태국 (55개), 베트남 (30개) 아메리카 페루 (114개), 파나마 (98개), 베네주엘라 (85개), 칠레 (79개), 에콰도르 (48개), 엘살바도르 (44개), 브라질 (37개), 미국 (34개) 유럽 헝가리 (112개), 프랑스 (30개) 아프리카 중동 - * 자료 : 차종환 (2016: 72) 을참조하여재구성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81 대표적인한류스타배우이민호의페이스북팬은 1,691 만명이며, 중국웨이보의팔로어도 2,847 만명에달한다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6: 12). 표 4 한류스타페이스북팬순위 순위 연예인 페이스북팬수 1 이민호 16,910,731 2 싸이 12,012,136 3 빅뱅 10,211,883 4 2NE1 9,325,183 5 슈퍼주니어 8,066,084 6 소녀시대 7,372,749 7 지드래곤 6,322,151 8 김범 6,244,811 9 샤이니 6,062,784 10 EXO-K 5,313,914 * 자료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6: 29-30) 그러나한편으로는, 지역편중성문제를제기할수있다. 수출대상국가의경우중국 일본및동남아지역국가에대한편중 (77%) 이두드러진다. 또한, 유럽과중남미등의지역에서는여전히 ( 보편적인인기보다는일부 ) 매니아적인기에한정되어있거나오히려시간이지날수록퇴보되는양상을보이고있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 30: 22). 그림 10 지역별문화콘텐츠수출규모 * 자료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 30: 33)

18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최근조사에의하면, 관심도와소비에있어서지역별변화가크게나타나고있다. 구글검색량 (K-POP, 영화 ) 과한류동호회활동을이용하여최근한류현황을살펴본결과일부국가를제외하고는한류붐이크게위축되고있는것이다. 즉, 1990년대후반형성된 1차한류지역인중국, 일본, 아세안지역은중국을제외하고는한류가둔화또는하향추세이고, 2012년말 싸이 의인기로인해확대된 2차한류지역에서도중남미 중동지역의일부국가를제외하고는성장모멘텀이부족한것으로드러났다. 한류관련소비재수출도 1차한류지역에서는지속적인성장세인데반해, 2차한류지역에서는한류가아직소비패턴에까지는영향을미치지않는것으로나타났다 ( 한국무역협회 2015. 8: 24). 그림 11 2015 년한류콘텐츠검색상위 7 개국가 * 자료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6: 662)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83 표 5 지역별한류동향 * 자료 : 한국무역협회 (2015. 8: 24) 3) 한류효과 (1) 경제적효과 : 수출과관광한류로인한부가가치창출에의해경제적효과가크게나타날뿐만아니라국부증진으로까지이어지고있다. 한류의경제적파급효과에대해서는수출효과 6조 4,873억원, 부가가치유발효과 4조 6,897억원으로경제적파급효과가 12조 5,598억원이라는평가가있고, 과거 11년간수출액으로평균변화율을초정하면문화상품수출이 100달러증가할때소비재수출이 412달러증가한다는평가도있다 ( 한국수출입은행 2012. 5: 22;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6. 2: 15).

18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표 6 한국콘텐츠산업분야별매출액추이 (2012-2015 년 ) 단위 : 조원 * 자료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6)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에따르면 2014년기준, 한류로인해발생된생산유발효과가 12조 5,598 억원인것으로나타났다. 항목별로는, 게임이 2조 2,476억원, 관광이 2조 1,068억원, 식음료가 1조 8,188억원순으로수익을창출하였다. 방송콘텐츠수출은 500만달러 (1999년) 에서 1억 2,350만달러 (2005년) 로 10여년사이에무려 22배상승하였다 ( 박장순 2014: 125). 한류로인한화장품수출이 2014년높은성장세를보였던것과같이화장품생산유발효과또한 2013년에비해 2014년 56.6% 로크게성장한수치를보였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 30: 21). 관광부문에서는방문외국인관광객수가비약적으로증가하여 2015년에는 1,500만명규모에이르고, 한국방문관광객 80% 가한류의영향으로방문한다고밝혔으며한류관광객은일반관광객보다재방문률이높고개별여행과소비지출액의비율이훨씬높은것으로나타났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 30: 20). 아시아지역의여행수입은 2007년약 33억달러에서 2012년에는약 97억달러로 3배급증하였다 ( 현대경제연구원 2014. 8. 22: 9). 외래관광객의유입이나방한외래관광객에게도움이되었던정책으로 2015 코리아그랜드세일 과 공연티켓1 +1 지원 등이있다. 2015 코리아그랜드세일 은총 342개기업과 3만 4,909개매장이참여한정책사업으로, 할인을실시한 9월부터 10월까지 2014년동기대비 3% 증가한 259 만명의외래관광객이방문하였다. 더불어 공연티켓 1+1 지원 은공연티켓을한장사면한장을무료로제공하는사업으로문화체육관광부와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진행했다. 1차오픈에이어 2차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85 오픈에포함된공연을비롯해이미공연이종료된공연까지합치면이사업의수혜작품수는 1,000 개가넘는다. 성과에서도연극과뮤지컬의판매매수는 3.6%, 3.4% 그리고판매금액은 1.2%, 2.8% 전년대비상승한것으로확인되었다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 20). 그림 12 연도별한국방문외래관광객규모 단위 : 명 * 자료 : 한국관광공사 그러나, 일반적인한류평가에서지역편중성이나타나는것과마찬가지로관광에있어서도국가편중성이매우강하게나타나고있다. 일례로 2015년방한외래관광객순위를보면중국, 일본이압도적인다수를차지하고있다.

18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그림 13 2015 년방한외래관광객국가순위 단위 : 명 * 자료 : 한국관광공사 또한 겨울연가 나 가을동화 의촬영지, 스타가쓰는화장품완판효과, 성형및의료관광, 외국리메이크나제작방식수출에의한저작권수입등경제적효과를거두고있다. 별에서온그대 에서주인공들이라면을끓여먹는장면때문에한국라면매출이 38% 상승했고, 치맥 장면으로치킨매장매출이 300% 증가했으며, 전지현이바른립스틱의 1일판매량은 4배이상증가했고, 착용했던천송이코트는 10일만에 2,500벌이완판되었다. 태양의후예 에서송혜교가바른립스틱은 1개월동안전문매장에서 16만개이상판매되었고, 쿠션팩트화장품의매출액은 80% 증가하였다 ( 김덕중 남상현외 2016: 40-41). 한국문화산업이외국에서벌어들인수입은 1996년까지전무했지만 1997년에들어서 440만달러를기록하였고, 2013년에는 7억달러를넘어섰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 30: 21). 그림 14 한류검색량과화장품수출액비교 ( 미국 ) * 자료 : 류성일 (2014. 11. 19: 3)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87 한국을많이찾는아시아지역의관광객을대상으로조사한연구결과에의하면, 한국방문시선호하는활동으로는한국음식경험과쇼핑활동이가장높게나타났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3. 5. 25: 3). 그림 15 관광객들의한국에서의선호활동 * 자료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3. 5. 25: 3) (2) 사회적효과 : 자유로운사회문화와한국어교육한류의대표적인사회적효과로는자유로운사회문화와한국어에대한관심을들수있다. 첫째, 자유로운사회문화란한류생산의토대를이루고있는사회환경을의미한다. 서태지의등장이신세대의출현을의미했던것처럼, 전쟁세대와학생으로만구분하던권위주의시대의단순구분은이제는수많은세대의출현으로다양화되고있다. 1980년대후반부터물질적풍요와함께청소년층이새로운구매세력으로등장하였고, 이들이가장먼저소비한문화상품이대중음악이었다 ( 이규탁 2016: 46-49). 둘째, 우리민족으로서는민족적자긍심이대단한한글이기는하지만여전히영어가국제어이고, 중국이발전하는요즘과같은때에는중국어도꼭배워야하는국제어의하나가되고있다. 그러나한국어에대한관심은국제어에대한의무감에서기인한다기보다는, 순수한문화적관심으로형성되는특징이있다.

18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표 7 한국어교육증가현황 시기 특징 2010년 한류가유행하게된 2010년부터미국내한국어반공립학교수증가세 경희대국제교육원한국어과정수강생 1,000명 (2002년) 에서 5,053명으로증가 2011년 프랑스파리소재대학의한국학전공신입생이 8개대학 1,000여명, 고등학교에서제2외국어로한국어교육시작 한국어능력시험 (TOPIK) 응시자 2,274명 (1997년) 에서 53,613명 (37개국 139개지역 ) 으로증가 2012년 NHK 한글강좌 안녕하십니까 교재 20만부완판 2013년 세종학당을 52개국 129개소개설하여총수강생 36,000여명 ( 전년대비 25% 증가 ) 2016 년 세종학당 54 개국 138 개소 재외한국문화원 31 개국 36 개소 온라인세종학당 ( 누리 - 세종학당 ) 가입자수 6 만명 * 자료 : 김덕중 남상현외 (2016: 9); 차종환 (2016: 42);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4: 19; 2016: 12) 를참조하여재구성 그림 16 권역별세종학당운영현황 * 자료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6: 33) 그림 17 외국인유학생규모 * 자료 : 교육부 (2015)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89 그러나한편으로는한국으로의유학생이증가하고있음에도불구하고, 유학후한국에대한이미지가좋지않아진점이나유학동기에서한류가큰원인이아닐수도있다는점을유념할필요가있다. 외국인유학생들의한국유학동기는한국어전공등학문적관심 (19.6%), 장학금등경제적지원 (15.7%), 한국학위취득이자국에서의취업이나창업에도움됨 (15.5%), 본인전공경쟁력이한국이우수하기때문 (13.8%) 등학문적목적이크고, 한류콘텐츠에대한관심은 9.2% 정도밖에안되는것으로나타났다. 이는한류가한국을알리고한국에호감을느끼게한주요수단일수있지만한류가한국유학까지이끄는결정적동기로기능하지않는다는것을나타낸다 ( 김덕중 남상현외 2016: 188). (3) 문화적효과 : 문화강국의소프트파워한류의문화적효과는무엇보다한국이라는국가의대외적지명도를높이고문화콘텐츠강국으로서국가브랜드이미지를전환시켰으며, 매력국가로서의소프트파워를획득했다는데있다. 어디에있는어떤나라인지도모르던혹은북한과전쟁직전의위험한나라일것만같던이미지의한국이싸이의나라, 대장금의나라, 겨울연가의나라, EXO의나라로서친숙한이미지를갖게된것이다. 4. 문화발전과민주주의의과제 명실공히문화민주화와문화민주주의시대의도래하고있지만여전히해결을위해노력해야할많은문제가남아있다. 독재와권위주의시대에정부는정치적으로민감한내용이나정부비판내용을끊임없이감시하였고, 방송과공연에서의표현내용을일일이지시하고통제하였다. 누군가감시하고있다고생각하는사회에서자유로운문화발전은당연히기대하기어려웠다. 지난 30년민주화시기에정치적발전이이루어진만큼문화발전이이루어졌지만, 민주의공고화를유지하기어려운만큼문화발전을유지하기위한과제는여전히많이남아있다. 1) 정보화의과제 (1) 표현의자유 민주화이후문화예술분야의다양화와확장뿐만아니라표현의자유에대한권리의식등가치관의변화와권리의식이강화되었다. 그러나강화된의식만큼표현의자유가완전히이루어졌는가

19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는그렇지않는많은사례들이존재한다. 2016년통계에의하면우리나라의언론자유지수는세계 70위로사실상최하위수준이고국민이느끼는행복지수는세계 157개국중에 58위로나타났다 (UN 2016). 또한프리덤하우스 (Freedom House) 는인터넷으로의사를자유롭게표현할수있는 인터넷자유도 에있어한국이 65개국가운데 22위에그쳐 6년째 부분적자유국 에머물고있다고발표하였다. 프리덤하우스는한국에서인터넷을얼마나자유롭게쓸수있는지에대해서는 25점만점에 3점을매겼지만, 인터넷으로주고받는내용들이얼마나자유로운지에대해서는 35점만점에 15점, 그리고사용자권리보호에대해서는 40점만점에 18점을각각부여했다. 이들척도모두점수가높을수록부정적이다 (Freedom House 2016). 그림 18 한국의언론자유지수순위 * 자료 : 한국언론자유지수 70 위, 사상최악. ( 미디어오늘 2016 년 4 월 20 일자 )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는행정기관이사법적판단없이인터넷게시물에대한삭제 차단결정을할수있고, 이에따라한해 10만건이넘는 URL이삭제, 차단되고있다. 또한명예훼손을주장하는자의신고만으로인터넷서비스사업자들이인터넷게시글을차단하도록하는 임시조치제도 로도한해 45만건이넘는인터넷게시글이차단되고있다. 한편정부가인터넷이용자의통신정보도비교적손쉽게취득할수있어, 연간최소 100만명이상의인터넷이용자의통신정보가제공되고있다 ( 고려대학교공익법률상담소한국인터넷투명성보고팀 2016: 3).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91 (2) 사회적격차해소정보화발전에의해거의모든국민이인터넷과스마트폰을사용하고있지만이제중요한것은단지기기를가지고있다는것에그치는것이아니라기술을생활에유용하게사용할수있어야한다는것이다. 초기의정보사회에서는기기소유의불균형때문에정보격차 (digital divide) 라는용어가있었지만이제는기기소유의시대가아니라기기활용의시대가되었다. 즉, 구슬이서말이라도꿰어야보배이듯이눈부신신기술이있어도생활에유용하게사용할줄아는실용적지혜가필요하다. 이미디지털사회혁신 (Digital Social Innovation) 이라는용어로사회각분야에디지털기술을적용하기위한노력이전개되고있는데, 이와같은실험을사회각영역에잘정착할수있는집단지성의지혜를모아야한다. (3) 제도적장벽또한실명제와같은제도적장애요인도장애물이된다. 특히나국내서비스에만엄격하고외국서비스는적용조차못한다는역규제, 비대칭규제에대한불만이높다. 시공간을초월한디지털정보의특성상국내규제가국내에진출한외국기업에대한규제에적용되기는불가능하다. 이런상황에서국내기업에대한규제만진행된다면국내산업위축효과가나타날수있는것이다. 따라서규제프레임에대한종합적인검토가필요하다. 2) 한류의과제 한류연구자들은한류의발전시기를 1997년부터 2016년현재까지 20년동안세개의시기로구분하고있지만현재필요한것은한류발전사에대한낙관적인전망보다소프트파워의유지와국내의편향적현실문제를검토해야할때이다. (1) 한류의실익한류의경제적효과에대한비판으로서는첫째, 상승하는콘텐츠의인기와파급효과에비해콘텐츠업계자체의수익은미미한수준이라는것이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 30: 22). 일례로 별에서온그대 의직간접적경제효과는 3,000억원으로추정되지만정작드라마제작사수익은 5억원에불과하여소위한류콘텐츠인기는 대박, 콘텐츠업계수익은 쪽박 이라는것이다.

19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2) 편향한류와문화의균형발전둘째, 한류의콘텐츠편중성도문제이다. 문화에는게임, 음악, 방송, 애니메이션, 만화등다양한분야가있음에도불구하고, 한류문화의경우는게임분야 (50%) 에수출비중이집중되어있다. 한편, 또한, 양적규모확대에비해질적수준도높아졌는가에대해서는재평가의여지가있다. 상상력과이미지가중요한시대에지나치게산업적측면에만몰입한다는문화산업주의에대한비판도있을수있다. 그림 19 한국콘텐츠수출현황 (2015 년 2 분기 ) * 자료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 30: 22) (3) 대외적취약성셋째, 외교관계의영향을크게받는등시류의영향에지나치게종속되는비준비성이나타나고있다. 일본에대해서는정치 역사적이해관계와일본내우경화분위기, 중국에대해서는각종규제및사드에따른진출위축효과등을볼수있다. 중국정부는 수입드라마입안강화에대한국가광전총국의통지 (2002년), 해외 TV프로그램도입의방영관리규정 (2004년), 해외영화드라마수입및방영관리강화에관한통지 (2011년), 경외드라마수입및방송관리강화에대한통지 (2012년) 등일련의외산방송콘텐츠수입및방송규제조치와자국문화보호정책을추진중이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3. 5 25: 4; 김덕중 남상현외 2016: 26-27).

한국문화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193 < 참고문헌 > DMC 미디어. 2014. 소셜미디어이용실태. 고려대학교공익법률상담소한국인터넷투명성보고팀. 2016. 한국인터넷투명성보고서 2016. 국가브랜드위원회. 2010. 대한민국국격 ( 國格 ) 증진방안에대한연구. 국제문화산업교류재단. 2009. 11. 2009 해외한류의현황과과제. 기획재정부. 2015. 한국대중문화산업의성공 : 게임산업을중심으로. 서울 : 휴먼컬처아리랑. 김광식. 2014. 문화와정책 : 지난시대를회고하다. 서울 : 시간의물레. 김덕중 남상현외. 2016. 싸이, 그이후의한류 : 융합한류에관한 4가지시선. 서울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김종법. 2015. 한류와혐한의문화갈등과충돌의경계넘기를위한제안 : 동북아시아혼종문화거버넌스체제의모색. 아태연구 22(2): 159-185. 김평수 윤홍근 장규수. 2016. 문화콘텐츠산업론 2016. 서울 : 커뮤니케이션북스. 류석진 조희정 이헌아. 2016. 공동체의오늘, 온라인커뮤니티시대. 미래인. 류성일. 2014. 11. 19. 한류, SNS와모바일날개달고도약. 서울 : KT경제경영연구소. 박광무. 2013. 한국문화정책론 : 21세기최강대국의가장강력한아이콘. 서울 : 김영사. 박광무 김창규 심장섭 오양열 오형일외. 2015. 문화정책의역사적변동과전망. 서울 : 문우사. 박장순. 2014. 한류학개론. 서울 : 도서출판선. 방송통신위원회. 2014. 12. 방송한류확산을위한글로벌진출방안연구. 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 2005. 2. 22. 한류실태파악을통한활성화방안연구 : 문화산업현황조사보고서. 영화진흥위원회. 2013. 2013 한국영화연감. 서울 : 커뮤니케이션북스. 영화진흥위원회. 2014. 2014 한국영화연감. 서울 : 산지니. 이규탁. 2016. 케이팝의시대 : 카세트테이프부터스트리밍까지. 서울 : 한울. 정진석 서경석 한기호 이인규 이상해 이선민 김종원 박성서 조현범. 2015. 한국의문화 70년. 서울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정철현. 2015. 문화정책. 서울 : 서울경제경영. 조병철 심희철. 2013. K-POP 한류의성공요인분석과한류지속화방안연구 : 스마트미디어기반실감콘텐츠활용을중심으로.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3(5): 91-102. 조희정. 2010. 네트워크사회의정치와민주주의 : 정부, 정당, 시민사회의변화와전망. 서울 : 서강대학교출판부. 차종환. 2016. 세계각국문화와한류열풍. 서울 : 예가. 한국국제교류재단. 2015a. 지구촌한류현황 Ⅰ: 아시아 대양주 / 아메리카. 한국국제교류재단. 2015b. 지구촌한류현황 Ⅱ: 유럽 / 아프리카 중동. 한국무역협회. 2015. 8. 한류의현주소와확산방안 : 인터넷검색량및동호회활동을중심으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16. 문화산업정책 20년평가와전망. 서울 : 휴먼컬처아리랑.

19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한국문화사회연구원. 2014. 2015 한국문화예술연감. 한국문화사회연구원. 2015. 2016 한국문화예술연감. 한국문화사회진흥원. 2016. 2016 한국문화산업정보총람.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1. 1. 2010 해외한류동향.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1. 12. 19. 2011 한류동향보고서.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4a. 2013 한류백서.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5a. 2014 한류의경제적효과에관한연구.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5b. 2014 한류백서.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5c. 2014 해외한류실태조사보고서.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6. 2015 대한민국한류백서.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6. 2. 2015 한류의경제적효과에관한연구.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1-2016. 글로벌한류동향 1-118호. 한국수출입은행. 2012. 5. 한류수출파급효과분석및금융지원방안. 한국콘텐츠진흥원. 2013. 5. 25. 국가별한류콘텐츠수출동향과한국상품소비인식분석 : 중국, 일본, 태국, 베트남사례비교.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11.30. 2015 한류지도구축연구. 한국콘텐츠진흥원. 2016. 2015 콘텐츠산업통계. 현대경제연구원. 2014. 8. 22. 한류의경제적파급효과분석과시사점. Freedom House. 2016. Freedom on the Net 2016. Nye, Joseph S. Jr. 2004. Soft Power: The Means to Success in World Politics. Perseus Books. 홍수원역. 2004. 소프트파워. 서울 : 세종서적. UN. 2016. World Happiness Report.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제 2 부대한민국민주주의발전의세계사적함의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197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김형철 ( 성공회대학교 ) 1. 왜다시민주주의공고화인가? 2017년은한국이권위주의체제에서민주주의체제로의이행한지 30주년이되는해이다. 제3의민주화물결기간에민주화이행을경험한 60개국가중민주화이행이안정적으로진행된국가가존재하는가하면태국과같이군부의쿠데타에의한민주주의가역류하는국가도존재한다. 또한민주화이행이후많은국가에서민주주의결손 (democratic deficit) 현상이나민주주의가후퇴 (backslides) 하는현상이목격되고있다. 즉, 절차나형식에있어민주주의의조건이결여되었거나, 시민적자유가제한되고국가권력기관사이에견제와균형그리고민주적책임성이결여된민주주의의현상 (Schedler ed. 2006), 또는 2000년대에들어서면서쿠데타에의한군부정권의재등장, 민주주의에대한대중의지지감소, 푸틴과같은선거로선출된독재자의등장등민주주의위기또는권위주의로의후퇴현상이보이고있다 (Kurlantzick 2015). 이같은현상은이론적그리고현실적차원에서민주주의공고화 (democratic consolidation) 에대한관심을다시금불러일으키고있다. 공고화란사전적으로 굳고단단하게됨 을의미하는것으로민주주의공고화는민주주의를위협하는대내외적영향에도불구하고민주주의가치와규칙이흔들림없이유지되는상태로이해할수있다. 즉, 민주화이후과거권위주의체제부터내재된정치적관행을청산하고민주주의체제를약화시킬수있는다양한장애요인들을제거하는과정이다. 그러나민주주의공고화를정의함에있어학자마다서로다른현상을지칭함으로써다의성과모호성을갖는다. 민주주의공고화라는개념은매우논쟁적이다 (Schneider and Schmitter 2004). 이같은논쟁적사례는한국의민주주의공고화에대한평가에서잘나타난다. 즉, 한국은민주화이행이매우안정적으로진행되었으며, 짧은시간동안에민주주의공고화가이루어진사례로평가받는가하면, 아직민주주의공고화가이루어지지않았다는평가도동시에받고있다. 이렇듯한국가의민주주의상태에대한상반된평가는학자사이에민주주의공고화를바라보는관점과평가기준의차이로부터기인한다. 이는이론적이고방법론적으로민주주의공고화에대한개념정의와측정에

19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있어학자사이의합의가이루어지지못하고있음을의미한다. 공고화에대한합의된개념정의가이루어지지못하고있는것은민주주의공고화라는개념의추상적수준이높기때문이다. 즉, 공고화를정의하는학자들의가치정향에따라개념정의가다양하게이루어짐으로써개념적혼란과모호성을갖는다. 즉, 사르토리 (G. Sartori 1970) 가지적한 개념잡아늘이기 (conceptual stretching) 에의한개념정립의오류가발생하고있다. 이는개념정의의문제만이아니라측정에있어서도오도넬 (G. O Donnell 2001) 이지적한방법론적엄밀성이결여된산만하고일치하지않는방법에의해이루어지는원인을제공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민주주의공고화개념은민주주의의최소한의기준을설명하고민주주의의질적차이를보여주기때문에민주주의에대한비교연구에있어핵심개념으로사용되고있다 (Puhle 2005, 4). 그리고린쯔와슈미터 (J. Linz and A. Stepan) 가 많은경우에민주화이행이완수된후민주주의가공고화되기전까지이루어야할많은업무가있고, 수립해야할많은조건들과, 함양해야할태도와습관들이여전히남아있다 (1999, 29) 고하듯이민주화이행의완성과달리공고화를위한조건을분명히한다는점에서정치적이고학문적인이점을찾을수있다. 또한현실적으로민주주의공고화는이행과정에서만들어진민주적제도들이현실의정치과정에서발현되는정치적과정, 즉일련의태도와행위들의평가를통해규정된다는점에서실질적민주주의로의발전을의미한다 ( 이동윤 2007, 176-177). 이같은민주주의공고화개념의필요성은이를측정하려는학문적노력 (Schedler 2001) 과더불어민주주의공고화에우호적인조건을추적하려는많은연구들을생산하였다 (Huntington 1991; Gasiorowski and Power 1998). 민주주의공고화에대한연구는 1990년대중반부터민주주의로의이행을다루는이행학 (transitology) 과달리공고화학 (consolidology) 이란이름으로진행되었다. 그이유는민주주의이행과공고화에있어행위자와전략의차이에따른비연속적과정이라는인식이넓게받아들여졌기때문이다. 1 즉, 많은민주화국가에서민주화단계의주체가공고화단계의주체로서역할을담당하지못하고배제되는현상이나타났으며, 민주화를가능하게한조건이공고화에있어장애요인으로작용하고있기때문이다 ( 임혁백 2001, 199). 이장에서는민주주의공고화와관련된논쟁점, 즉개념, 측정지표, 그리고우호조건을중심으로이론적인검토를한후제3의민주화물결을경험한국가들의민주주의공고화를평가하기위한개념화와우호조건을제시하고자한다. 이를위해먼저민주주의공고화의개념과측정에대한기존논의들을검토하고재정의하고자한다. 그리고민주주의공고화에영향을주는우호조건을검토하고자한다. 마지막으로제2부에서다루는각장에서다룬사례들을간단하게소개하고자한다. 1 한국의경우, 권위주의에서민주주의로의전환을가져온중요한조건중에하나로중산층, 즉 넥타이부대 라는화이트칼러의자발적이고대중적인동력을들수있다. 그러나이들은민주주의로의전환이후과거권위주의정권의경제발전우선정책등을지지하는보수적성격을보임으로써한국사회에서민주주의공고화를위해필수적으로수행해야할사회경제적개혁이지체되고있다 ( 최장집 1997; 2003).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199 2. 민주주의공고화와평가기준 1) 민주주의공고화의개념 민주주의 (democracy) 는어의적으로고대그리스어인인민 (demos) 과지배 (kratos) 가합쳐진용어로서국민주권 (popular sovereignty) 이실현되는상태이다. 국민주권이실현되는민주주의는모든구성원이평등한권리 (equality of rights) 를가지며집단적의사결정에대한대중통제 (popular control) 가이루어짐을의미한다 (Beetham and Boyle, 1999: 17). 그러나오랜역사를가진민주주의는개념적으로다의성과모호성을특징으로하고있다 (Saward 1994, 6). 그이유는민주주의가상이한시간과상이한장소에서상이한사람들에게상이한의미를지녀왔기때문이며 (Dahl 2002, 17), 또한민주주의가문명에대한지칭으로사용되거나서구문명의최종의정치적산물을지칭함으로써 용어적 이념적왜곡의확대 가이루어졌기때문이다 (Sartori 1987). 그럼에도불구하고기원적 5세기초부터 21세기인오늘날까지관통하는민주주의에대한기본인식은 보통사람들이자신들의삶에영향을미치는결정에대해발언권을갖게해야한다 (Beetham and Boyle, 1999: 21-22) 는것이다. 즉, 자치 (autonomy) 가실현되는상태가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크게두가지관점에기초해서정의되고있다. 하나는공정하고자유로운주기적선거, 평등한투표권의확대, 시민적 정치적자유의권리등절차적최소요건 (procedural minimum) 이실현되는정치체제로인식하는최소정의적관점이며, 다른하나는정치적영역에서뿐만아니라사회경제적영역에서 자신스스로삶의조건을결정함에있어자유롭고평등한상태 (Held 1987, 271) 로인식하는최대정의적관점이다. 민주주의공고화는일반적으로최대정의적민주주의보다는최소정의적민주주의에기초하여정의하고있다 (Valenzuela 1992, 61). 민주주의공고화는정치영역에서민주화이행의산물인민주적제도와절차에대해구성원들이가치를부여하고동시에안정성을확보하는과정인것이다. 즉, 정권적수준에서의게임의규칙에관한국민적합의를바탕으로합헌적질서가상당기간유지됨으로써쉽게붕괴되지않는틀로자리잡는과정이다 ( 이행 1996, 158). 민주주의공고화를소극적정의와적극적정의로구분한쉐들러 (A. Schedler 1996a) 는소극적정의를민주주의가비민주주의또는반 (semi) 민주주의로회귀됨을피할수있는것이며, 적극적정의를자유민주주의또는높은질의민주주의로진보하는것으로정의하였다. 먼저소극적정의에기초한대표적인학자는린쯔 (J. Linz) 이다. 린쯔 (1990a) 는어떤주요한정치적행위자 ( 정당조직화된이익집단등 ) 에게민주적과정외에는권력을장악할수있는다른대안이없으며, 민주적으로선출된결정권자의행위에거부권을행사할수없다고생각하는상태로공고화를정의하고있다. 그리고군터 풀 다이아만두로스 (Gunther, Diamandouros and Puhle 1995) 는정치적으로반민주적인정당또는사회운동이부재한상태를민주주의공고화로보았다. 그리고구체적인내용으로

20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1 경쟁세력간의정권교체, 2 안보적, 경제적위기에도불구하고민주주의체제에대한광범위한지지, 3 반민주적인극단주의자들의세력화제한, 4 민주화로인한정당제도의급격한재구조화에도불구하고민주주의의유지를제시한다. 또한민주주의공고화를행태적, 태도적그리고헌법적인차원에서정의한린쯔와스테판은민주주의공고화를제도, 규칙및정형화된유인과억제의복합체계로서의민주주의가정치사회에서유일한게임으로받아들여지는과정으로정의한다 (Linz and Stepan 1999). 소극적정의는최소정의적관점에서절차적수준의민주주의의지속성에초점이맞춰짐으로써내용적수준에서어떠한민주주의의질을갖는민주주의인지를설명하지못하고있다. 즉, 소극적정의는공고화된민주주의가어떤모습을띠고있는가를구체적으로보여주지못하는결함이있다. 반면적극적정의는규칙적이고공정한선거경쟁이라는절차적최소조건을넘어기본적인시민권의보장, 민주적책임성과응답성, 군부에대한문민통제, 토그빌적인사회민주화와같은좀더실질적인요건들이추가되어야한다는것이다 (Collier and Levitsky 1995: 임혁박 2001 재인용, 222). 또한마라발 (Maravall 1993) 은민주주의의실질적공고화를 최소한의사회적경제적평등의실현이새정치질서의목표가되고, 제도를통해사회경제적과제를해소하는사회또는경제구조의개혁이진행되는단계 (92-93) 로정의한다. 즉, 적극적정의는민주주의성격과질에초점을맞추고있다는점에서소극적정의를보완하고있다. 민주주의공고화는소외받고억압된사회집단또는계급등이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영역에서광범위한참여가보장되고, 정치적시민권뿐만아니라사회경제적시민권을실현하는복지제도가확대된상태이다 ( 최장집 1997). 또한정치문화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를민주적절차와규범의일상화, 내면화, 신조화수준으로발전된상태로보는입장도존재한다 (Diamond 1996). 정리하면적극적정의로서의민주주의공고화는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영역에서엘리트와대중이공히민주적절차와규범을안정화, 제도화, 일상화, 내면화, 습관화, 그리고정당화하는과정이라고정의할수있다 ( 임혁백 2001).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201 그림 1 민주화와공고화단계 민주화단계 공고화의초기단계 ( 소극적정의 ) 공고화된민주주의단계 ( 적극적정의 ) 민주주의공고화에대한소극적정의와적극적정의는민주주의공고화라는하나의국면 (phase) 을구성하는두단계이라고볼수있다. 소극적정의에의한공고화는민주화에대한심각한도전의차단과민주주의체제에대한또다른대안의전망을효과적으로제거하는단계로서 소극적공고화 (negative consolidation) (Pridham 1995) 또는 공고화의초기단계 (Sørensen 1993) 로이해될수있다. 2 반면적극적정의에의한공고화는 소극적공고화단계 또는 공고화의초기단계 를거쳐정치영역을넘어사회영역과경제영역에서공정하고자유로운경쟁, 자유롭고평등한정치적 시민적권리의보장, 민주적책임성과응답성, 그리고법의지배가내면화된단계라고할수있다. 지금까지살펴본민주주의공고화개념은두가지핵심적속성을내포하고있음을알수있다. 하나는정치제도화 (political institutionalization) 이며다른하나는민주적가치와규칙의내면화라는문화적가치이다. 즉, 공고화를어렵게만드는것은민주주의적가치와명확한민주주의제도에관하여의견이일치하고있지않기때문이다 (Linz and Stepan 1999, 29). 따라서민주주의공고화를다음과같이정의하고자한다. 즉, 민주주의공고화는새로운민주적규칙과절차가제도화되고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영역에서민주적규칙과절차가엘리트와대중모두에게 유일한게임 으로인정될뿐만아니라, 더나아가사회경제적영역에서민주주의의가치와규범, 그리고민주적규칙이습관화, 일상화그리고내면화되는과정이다. 2) 민주주의공고화, 어떻게평가할것인가? 민주주의공고화는하나의목적이아니라다원적인목적에의해정의되는목적론적개념이다. 3 따라서민주주의공고화를논의하는연구는정부형태의변화, 경제사회에대한국가의민주적개입, 권력분점의합의제적헌정체제의필요성등민주주의공고화를향한미래적가치지향에주안점을 2 쇠렌센는로스토우의 결정국면 을제한된민주주의에서보다실질적인민주주의로이끄는단계로설정하고결정국면의점진적발전이공고화를증대시킬것이라고주장한다 (Sørensen 1993). 3 오도넬 (G. O Donnell 2001) 은민주주의공고화개념이강한목적론적정취 (strong teleological flavor) 에빠져있다고지적하고있다.

20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두는경향이강하다 ( 이영재 2015, 84). 이같은목적론적경향은린쯔와스테판의공고화된민주주의에대한정의에서잘드러나고있다 (Linz and Stepan 1999, 30). - 행태적차원에서한영역내의민주주이정권은어떤중요한국가적 사회적 정치적또는제도적행위자들이비민주적정권을창출하거나, 국가로부터분리하기위해폭력이나외국의간섭을허용함으로써자신들의목적을이루려는데막대한자원을소비하지않을경우공고화된다. - 태도적차원에서강력한다수의여론이민주화과정과제도가그들자신들과같은사회의공동의삶을지배하는가장적합한방법이라고믿을때와반체제에대한지지가아주낮거나민주주의호응세력으로부터이탈이덜되어있을경우공고화된다 - 헌법적차원에서민주주의정권은전국가의영역내에서정부세력과비정부세력이새로운민주화과정에의해서인가된법, 과정, 제도내에서갈등을해소시키도록일상화된경우공고화된다. 공고화된민주주의는높은수준의정당성 (legitimacy) 을유지하고있는민주주의국가를의미한다. 정당성은민주주의에대한엘리트와대중의긍정적인태도로서민주주의안정성과밀접하게결합되어있다는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를구성하는중요한속성중하나이다 (Diamond, Linz & Lipset 1995). 즉, 민주주의와정치제도에대한높은신뢰와태도를보이고있다는점, 그리고민주주의를위협하는문제에대한치유및자정능력을갖고있다는점은체제위기에따른역류의위험가능성을낮출수있다. 린쯔와스테판의공고화된민주주의에대한정의는민주주의공고화가이루어졌는지또는이루어지지않았는지를평가하는기준으로제시될수있으나, 민주주의공고화의질적수준또는심화정도를평가할수없다는한계가존재한다. 즉, 공고화된민주주의의범주내에는낮은질부터높은질까지연속적인스펙트럼이존재하는데 (Linz and Stepan 1999), 민주주의공고화의질적차이에대한평가가어렵다는한계에의해민주주의공고화개념의유용성에대한의문을갖게한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영역에서의민주적가치와규칙이내면화되는과정을의미하는민주주의공고화는이들영역간의상호보완적관계를통해도달할수있다. 즉, 민주주의공고화는단일한체제로구성된것이아니라부분체제 (partial regimes) 들로구성된다 (Schneider and Schmitter 2004, 62). 민주주의공고화를갈등조정과사회통합의제도화로정의한선학태 (2010) 는각부분체제들이자신의영역에서갈등해결에기여하면서상호보완적으로결합하고순기능적으로작동할때공고화가이루어졌다고보고있다. 이같은부분체제의복합체로서민주주의공고화를평가하려는노력은린쯔와스테판 (1999) 에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203 의해시도되었다. 이들은공고화된민주주의를시민사회, 정치사회, 법의지배, 국가기제, 경제사회라는 5개의영역으로구성하고각영역에서의공고화조건을제시하고있다 (Linz and Stepan 1999, 22-40). 첫째, 시민사회는결사와의사표현의자유등조직된단체들과개인에게시민적기본권이보장되고경제사회로부터자율성이보장되는영역을의미한다. 둘째, 정치사회는자율적이고포괄적인선거경쟁이보장되는영역으로서민주적절차와제도가가치를가지며원활하게기능할수있는자율성이보장됨을의미한다. 셋째, 법의지배는헌정주의에기초하여시민사회와정치사회의자율성과독립성을보호하는영역을의미한다. 넷째, 국가기제는시민의권리보호와공공재를제공하기위해효과적인역량을갖는합법적-법적관료주의적규범과권위가인정되는영역을의미한다. 마지막으로경제사회는정치사회에의해만들어지고시민사회에의해존중되며국가기제에의해강요되는법적 규율구조를갖는그리고다원주의에기초한시장의자율성이제도화된시장의영역이다. 이와같은각영역은민주주의공고화를구성하는속성임과동시에평가기준인것이다. 메르켈 (W. Merkel 2004) 과풀 (Hans-Jurgen Puhle 2005) 등은자유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 와결손민주주의 (defective democracy) 를구분하기위해내재된민주주의 (embedded democracy) 라는새로운개념을제시하였다. 내재된민주주의란내적으로민주주의를구성하는서로다른부분체제가독립적이고상호의존적관계를맺으면서민주주의의규범적이고기능적인양존재성이보장되고외적으로는이들부분체제가대내외적인위기나불안정한조건으로부터보호할수있는민주주의의조건이마련되어있는것을의미한다. 이는앞서살펴본민주주의공고화와개념적차이가없다. 다만내재된민주주의는민주주의를평가함에있어 선거주의의오류 로부터벗어나고민주주의질적수준을평가할수있다는점에서이론적또는방법론적의미를갖는개념이다. 표 1 내재된민주주의의부분체제와결손민주주의유형 부분체제구성요소결손민주주의유형 민주적선거체제 선출된공직포괄적투표참정권보장공정하고자유로운선거 배제적민주주의 정치적자유 의사표현, 언론, 정보의자유결사의자유 비자유민주주의 통치를위한효과적권력 선출된정부 후견민주주의 수평적책임성 견제와균형 위임민주주의 시민적자유와법의지배 출처 : Puhle 2005, 9 재구성. 시민적권리법의지배와위헌심사권소수의권리와보호 비자유민주주의

20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메르켈과풀은내재된민주주의는 3가지영역과 5가지부분체제로구성된다. 3가지영역은상황맥락적차원에서사회경제적조건, 시민사회그리고정치체제를위한필요조건을포함하는국가성 (stateness) 으로구분된다. 민주주의가작동되기위한불가결한조건으로상대적자율성을갖는국가의존재, 초월적경제세력의부재, 권력과정치를배타적으로통제하려는종교및문화적근본주의자들의결여, 시장경제의기제에기초하지않은경제체제의부재를제시하고있다 (Puhle 2005, 10). 이들이제시한 5가지의부분체제는국가성과관련된것으로민주적선거체제 (a democratic electoral regime), 참여의정치적권리 (political rights of participation), 시민적권리 (civil rights), 수평적책임성 (horizontal accountability), 그리고통치를위한효과적권력 (the effective power to govern) 이다. 이러한부분체제는정치적민주주의또는정치영역에서의민주주의가요구하는조건이라할수있으며, 부분체제가효과적으로작동될때자유민주주의라고분류할수있다 ((Puhle 2005, 9-10; Merkel 2004, 36). 그럼에도불구하고민주주의공고화를평가하는기준으로서내재된민주주의의 5가지부분체제가유용한이유는린쯔와스테판이제시한각영역들간의긴장과갈등을줄이고상호의존적관계를통해민주주의공고화라는규범적이고기능적인특성을강화할수있기때문이다. 민주주의공고화의정도를측정하는문제는매우어렵고논쟁적이다. 그이유는민주주의공고화가포함하고있는속성이다양하며, 연구자마다강조하는민주주의공고화의속성이차이를보이고있기때문이다. 또한민주주의공고화의측정이정당화되지않는일반화, 우연히만들어진, 경험적으로추적할수없는측정범주, 그리고극도의불명확성에의한혼란스럽고일관되지않기때문이다 (O Donnell 1996). 그럼에도불구하고많은연구자들은민주주의공고화가내포하고있는속성을중심으로평가지표를제시하고이를정량적으로측정하고있다. 우선민주주의공고화에대한평가지표를살펴보면대표적으로헌팅턴 (S. P. Huntington 1991) 을지적할수있다. 그는최소정의적관점에서정초선거 (founding election) 이후자유롭고의미있는선거가두번이상진행되고선거결과에순응하여평화로운정권교체가이루어지며, 군에대한문민통제가이루어졌을때민주주의공고화가이루어졌다고본다. 헌팅턴의평가기준에기초하여민주주의공고화를측정한연구는민주주의공고화의구조적요인을분석한가시오롭스키와파워 (M. Gasiorowski and T. Power 1998) 의연구이다. 그리고메인워링 (S. Mainwaring 1999) 도이러한기준을중심으로민주주의질서 (order) 가 25년간중단없이지속될때민주주의가공고화되었다고지적한다. 그러나이러한민주적질서의지속년수는민주주의공고화의정도 (degree) 와질 (quality) 을평가할수없다는점에서한계를갖고있다. 반면최대정의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를정의한임혁백 (2001) 은 1 헌정주의의정착, 2 대표와대표기구들이시민의이익을대표하며, 이에반할때시민들에의해항상처벌된다는규범의존재 ( 책임성 ), 3 시민들은민주적절차와규범을내면화하며, 대표들을통제할수있는수단과능력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205 을보유하고민주주의전복세력을축출할준비가되어있어야한다는점을평가기준으로제시하고있다. 또한쉐들러 (Schedler 2001a) 도구체적으로대중적정당성, 민주적가치의확산, 반체제행위자의중립화, 군부의문민통제, 권위주의세력의근절, 정당건설, 기능적이익의조직화, 선거규칙의안정화, 정치의일상화, 국가권력의분권화, 직접민주주의의기제의소개, 사법개혁, 빈곤의탈피, 그리고경제안정화를민주주의공고화의평가지표로제시하고있다. 쉐들러 (Schedler 2001b) 는민주주의공고화의정도과질을측정하기위해개념과측정이인과적주장과사실적근거에의해서이루어져야함을지적한다. 그리고측정지표로서민주주의정당성, 1인당 GNP, 그리고 GINI계수를제시하고있다. 즉, 민주주의공고화란민주주의체제의안정성이며, 안정성에대한인과적가정과경험적사실에따르면이들요소들이민주주의공고화를측정하는데타당성을갖는다고주장한다. 그러나쉐들러 (2001) 가제시한지표또한오도넬이지적한문제로부터자유롭지않다. 그가제시한 1인당 GNP와 GINI계수는민주주의공고화를구성하는속성이기보다는민주주의공고화에영향을주는설명요인으로제시할수있을것이다. 즉, 민주주의공고화의속성과이에영향을주는원인이명확하게구분되지않는문제점을갖고있다. 이같은측정의문제를해결하기위해서는민주주의공고화를연구하는연구자집단이구체적이고엄밀하게정의한 체계화된개념 (systematized concept) (Adcock and Collier 2001, 530) 을구축하기위한노력으로부터출발해야할것이다. 그리고민주주의공고화의다양한속성들중경험적으로추적가능하고인과적주장이가능한속성을선택해야할것이다. 민주주의공고화는정치제도의제도화, 민주주의규칙과가치의내면화를의미한다. 따라서민주주의원리를실현하는정치제도의수행력과민주주의규칙과가치에대한행위자들의태도와행위를측정하기위한지표를생산해야할것이다. 3. 민주주의공고화를위한우호조건 그렇다면, 민주주의공고화에영향을주는우호조건은무엇인가? 일반적으로민주주의공고화를위한조건, 구체적으로민주주의체제의제도화와민주주의가치에대한내면화에영향을주는요인은역사적유산과이행경로, 사회경제적요인, 정치제도요인그리고정치문화요인등다양하게제시되고있다. 그리고이와같은요인들이민주주의의공고화, 안정성과질 (democratic quality) 에비교적강하고유의미한영향을미치고있음을경험적으로제시하고있다.

20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1) 역사적유산과민주화이행모델 (1) 민주화이전정치체제민주주의라는규범과제도의지속과성격이그규범과제도가만들어지는맥락에의존한다고할때, 민주화이전의민주주의체제유형과민주화이행모델은민주주의성격을설명하는주요한요인이될것이다. 린쯔와스테판 (J. Linz and A. Stepan) 은민주주의로새롭게진입한체제의경우, 공고화된민주주의로의발전을위해서는민주화이전의비민주적정권의특성과이행경로에따라직면하는해결해야할과제가다르며, 민주화이전체제의성격과이행경로라는두조건에대한충분한고려가신생민주주의국가들을대상으로하는민주주의연구에있어중요함을지적한다 (Linz and Stepan 1996). 먼저민주화이전의정치체제유형과민주주의공고화의관계를분석하는것은중요하다. 그이유는종전의비민주적정치체제가어떠한성격을갖고있는가에따라최소한의필요조건이차이를나타내기때문이다 (Linz and Stepan 1996). 일반적으로권위주의정권은민주화및공고화를위해서자율성과권위, 권력과민주기관의합법성의창출등과같은과제를해결해야하며, 전체주의정권은정치사회와경제사회뿐만아니라시민사회, 법의지배그리고국가관료의자율성등각영역에서의해결해야할과제들을갖고있다. 역사적유산과민주주의공고화의관계에있어중요한요인은군부의문제이다. 대표적으로헌팅턴 (1991) 은전체주의로부터의민주화이행이군부권위주의로부터의민주화이행보다어렵지만지속될가능성이있다고지적한다. 그이유는군부권위주의하에서덜억압적이고성공적인경제성장이이루어졌다는역사적기억때문이다. 즉, 이러한역사적기억은군부의정치개입에의한권위주의로의회귀가능성을높인다. 따라서군부의정치개입을억제하는것은단순히제도적절차적민주주의를확보하는것뿐만아니라시민사회의성숙과민주적정치역량을통해실질적민주주의의정치적태도와정향을내면화하는민주주의공고화의중요한우호조건이된다 ( 이동윤 2007, 179). (2) 민주화이행모델민주주의공고화를위한다른우호적인조건은민주화이행모델이다. 민주화이행모델은이행이후민주주의체제와엘리트의경쟁패턴, 이행단계에서만들어진제도적규칙, 새로운게임규칙에대한주요행위자들의동의여부에영향을주는강한유산 (legacies) 을형성하기때문에중요하다 (Munck and Leff 1997, 345). 민주화이행경로는일반적으로거래 (transaction) 에의한민주화가탈출 (extrication) 에의한민주화, 그리고붕괴 (defeat) 에의한민주화로구분한다. 이는행위자의합리성을전제로비용-편익 (cost and benefit) 의고려에따른선택을강조하는것으로민주화이행을행위자들이억압과관용에따른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207 위험회피의균형점을찾는과정으로보는입장이다 ( 김형철 2012). 헌팅턴 (1991) 은거래에의한민주화가공고화에더우호적이라고평가한다. 대부분의연구또한민주화이행모델과민주주의공고화사이의관계에대한연구는거래에의한민주화가민주주의공고화에긍정적영향을있음을주장한다 (O Donnell and Schmitter 1986). 즉, 거래에의한민주화는엘리트들사이의협력적관계와합의를위한동기를부여하고시민사회가권위주의유산으로부터점진적으로벗어날수있기때문이다. 붕괴에의한민주화이행은엘리트들간협력적관계와합의를위한동기를감소시킴으로써위험성을갖는다고지적한다 (Stradiotto and Guo 2010, 8). 즉, 이이행모델은급속한지배엘리트의전면적교체, 사회경제적개혁에따른구권위주의세력과기득권세력의극단적인도전과그에따른권위주의로의회귀가능성이높다. 붕괴에의한민주화는민주화이행의불확실성과이행이후낮은민주주의수준이라는결과를가져올가능성이높은것으로평가된다 (Ward and Gleditsch 1998). 최근북아프리카와중동지역에서의민주화의흐름중하나는외부효과즉, 외국의개입에의한민주화이행의모습을보이고있다. 그대표적인예는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아이티그리고파나마등이있다. 스트라디토와구오 (2010) 는외국의개입에의한결과가한가지성격으로나타나기보다는혼합적인성격을보이고있다고지적한다. 즉, 파나마의경우처럼미국이선거관리를통해민주정부를세우는경우민주화이후민주주의가진전되는경향을보이고있으나,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그리고아이티와같이군사적개입이있었던경우는정당성의문제, 시민의폭동, 민주적규칙의붕괴등이결과한다 (Stradiotto and Guo 2010, 12-13). 그러나이러한주장에대한반대주장도존재한다. 즉, 거래에의한민주화가민주주의공고화를지체시키고민주주의성격또한제한된또는배제된민주주의에영향을준다고주장한다주장도존재한다 ( 임혁백 1995). 다양한세력의자유로운경쟁을억제하는배제적속성과권력카르텔의형성, 그리고아래로부터제기되는사회경제적개혁의제의간과에의해민주주의성격이제한적이며또한공고화에부정적영향을준다는것이다 (Przeworski 1991). 반면에붕괴에의한민주화는민주화이행과정에있어불안정성이높지만민주주의의공고화를위한개혁수행능력이다른민주화모델보다높은것으로평가된다 ( 임혁백 1995). 이렇듯민주화이행모델과민주주의공고화사이의관계에대한상반된주장이존재하지만둘사이에경험적관계가존재한다는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에영향을주는주요한조건으로고려할필요가있다. 2) 사회경제적우호조건 (1) 경제발전과수행력 사회경제적조건을강조하는구조주의 (structuralism) 시각은경제발전수준, 경제적수행력, 문화

20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구조의동질성과이질성, 그리고민주주의에대한신뢰와지지등을민주주의에영향을주는주요한결정요인으로제시하고있다. 일반적으로민주주의의형성과발전의추동력으로지적되는것은사회경제적발전이다. 사회경제적발전이란사회적그리고경제적근대화또는성장의수준을의미하는것으로서, 사회경제적발전이민주주의의발전에강한영향력을행사한다는것이다. 대표적으로 한국가가부유해질수록민주주의를유지할수있는가능성이높다 고주장한립셋 (S. Lipset 1959, 75) 은민주주의의필요조건으로서높은경제적수준, 도시화, 교육의확대, 중산층의증가, 그리고매스커뮤니케이션의발전등을제시하고있다. 그는이와같은조건이사회경제적그리고정치적갈등을온건하게하는경향을가지며, 이러한경향이안정적인민주주의체제를실현할수있는가능성을높인다고주장한다. 이후립셋의명제를받아들인수많은학자들이경제적수행력의측면에서실업률, 인플레이션, 경제성장률, 소득불평등그리고사회복지에대한공공지출비율등이민주주의와어떠한관계를갖고있는지를탐색하고있다. 예컨대신근대화론자로분류되는쉐보르스키등 (Przeworski, et al. 2000; 2001, 169-170) 은경제발전이민주주의에긍정적상관성을가지고있지만, 가난한국가에서도온건한인플레이션과경제성장에의해민주주의가유지되고있음을지적한다. 이들은 1인당국민총소득이매년 6,000불이상인부유한국가들일때민주주의생존이확실하지만, 가난한국가들에서도온건한인플레이션의수준에서경제성장이이루어진다면민주주의가지속될수있음을경험적으로증명하고있다 (Przeworski, et al. 2000). 또한뮬러 (Muller 1988) 는소득불평등이심화될수록정치불안정수준이증대됨을발견함으로써민주주의와소득불평등사이의상관관계가있음을지적하였다. 이러한견해들은경제발전뿐만아니라정치체제의경제적수행력, 즉인플레이션, 실업률, 경제성장률, 그리고소득불평등등이민주주의에유의미한영향을미치고있음을보여주는것이다. 반면달 (R. Dahl 2002) 은사회경제적수준이높은국가일수록민주주의가되기쉽고안정된다는사실에대해서는거의논박할여지가없다고지적하면서도, 경제발전수준과경제적수행력이민주주의에위협요인으로작용함을밝히고있다. 그는경제발전또는경제성장을가져오는시장자본주의는민주주의에우호적조건이지만, 반면에시장자본주의의결과로서불평등이불가피하게야기되며이는정치적자원의배분에있어불평등을발생시킴으로써민주주의발전을저해한다고주장한다 (Dahl 2002, 229-232). 또한민주화이행에있어국면 (phase) 과시점 (timing) 을강조하는학자들은사회경제적발전수준이민주화이행국면에서필요한조건일수있으나, 민주주의공고화또는제도화의국면에서는사회경제적발전보다정치제도가더중요한역할을수행한다고비판한다. (2) 정치문화 정치문화의중요성을강조하는시각은동질적문화를갖는국가에서민주주의가발전유지되기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209 쉽지만, 이질적문화를갖는국가에서는민주주의가발전유지되기어렵다는가설을받아들인다. 즉, 성공적인민주주의는관용적이며, 참여적인규범을존중하고, 신뢰도가높은시민들, 사회적자본이축적된시민사회의토대위에서만가능하다는주장이여러국가의시민들을대상으로한광범위한여론조사등을통하여경험적으로검증되고있다 ( 강신구 2012, 45). 고대표적으로정치문화와민주주의사이에상호의존적관계를강조하는다이아몬드 (L. Diamond) 는민주주의가시민들의중용, 관용, 그리고시민성등정치적가치와정향에기초하고있다고지적하고, 정치문화의요인이경제적요인보다더중요하다고주장한다 (Diamond 1999). 또한립셋도이전에자신이강조했던경제적조건과더불어시민문화적조건들을추가하여민주주의안정성에대한비교분석을수행하였다 (Lipset 1996). 그는민주주의안정성에있어정치제도적요인의효과가중요하다는증거가거의없다고지적하면서정치문화의중심성을주장한다. 이러한정치문화의중심성에대한지적은잉글하트 (R. Inglehart) 의정치문화의역할에대한주장에서잘보인다. 즉, 그는정치문화가경제발전과민주주의사이에결정적인연결고리의역할을수행한다고지적한다 (Inglehart 1990, 45). 즉, 민주주의지속과생존에있어민주주의에대한지지와더불어신뢰와관용의정치문화가중요함을주장한다 (Inglehart and Welzel 2005; Diamond 1999). 이와같은시각의문제점은엘리트수준에서민주주의에대한지지수준의검증과민주주의에대한상이한개념화때문에대중들의지지수준에대한보편적측정방법과해석이어렵다는점이다 ( 지병근 2008, 275). 3) 정치제도우호조건 정치제도를강조하는신제도주의 (new institutionalism) 시각은민주주의공고화에있어정부형태, 정당체계, 선거제도그리고이익대표체계등의특성과제도적배열 (institutional arrangement) 또는제도적설계 (institutional design) 의중요성을강조한다. 즉, 민주화이행단계에있어사회경제적발전수준은민주주의로의이행국면에서필요한조건일수있으나, 민주주의공고화또는제도화의국면에서는정치제도요인이사회경제적발전보다더욱중요한역할을수행한다는것이다 (Huntington and Dominguez 1975; Przeworski, et al. 2000; 최장집 2002). 그이유는첫째, 민주주의가공고화되기위해서사회세력사이의갈등의해결을제도화할수있는정치적기제 (mechanism) 가필요하기때문이며, 둘째민주적정치제도가공정한경쟁과그결과에대한순응을이끌어내며한사회를위해가장적절하고타당하다는신념을유지하는정당성과정치적문제를해결할수있는효율성을보장하고셋째, 정치제도는민주주의의수행력과생존에영향을미치기때문이다 (Gunther & Mughan 1993; Przeworski 1995). 신제도주의적시각은정부형태의유형, 의회구조, 선거제도, 그리고정당체계등을강조하고있으

21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며, 특히주요한논의는대통령제를중심으로이루어졌는데그이유는제3의민주화물결을경험한국가들대부분이대통령제를채택하였고이들국가에서민주주의의불안정성이보였기때문이다. 대표적으로린쯔 (1990b) 는대통령제가민주주의에적합한정부형태가아님을주장하였다. 즉, 대통령제의본질적특성인이원적정당성, 고정된임기그리고승자독식등은심각한정치적교착상태, 시의적인경직성, 그리고대화와타협의정치를축소시킴으로써갈등의심화를결과한다는것이다. 그러나대통령제는이러한갈등을해결할수있는제도적기제가없기때문에대통령이초법적방법 (extra-constitutional) 을통해해결하려고함으로써민주주의를위협하거나또는불안정하게한다. 즉, 대통령제에서의심각한갈등은정부차원의위기가아니라체제차원의위기를결과하며이는민주주의공고화과정에서치명적이다 ( 이행 1996, 161). 반면에대통령제를채택한민주주의의위기는대통령제의본질적특성때문이아니라정당체계등의외적조건에의한것이라는주장도존재한다 ((Bernhard, Nordstorm, and Reenock 2001; Gasiorowski and Power 1998; Mainwaring 1993). 대표적으로메인워링 (S. Mainwaring 1993) 은라틴아메리카를대상으로한연구에서대통령제와다당제의조합이불완전한결합 (difficult combination) 이며민주주의공고화에부정적영향을준다고지적한다. 또한체이법과리몽기 (Cheibub and Limongi 2002) 는다수제의원리가지배하는대통령제에서연합정치의불가능성, 정책결정과정의집중화등이행정-입법사이의교착상태와정당사이의갈등의심화를결과하여민주주의생존을위협한다고주장한다. 민주주의공고화를사회경제적그리고정치적영역에서갈등해결의제도화로정의한선학태 (2010) 는다수제정치제도보다합의제정치제도로의디자인이중요함을강조하고있다. 반면에다수제정치제도가합의제정치제도보다민주주의에더효과적이란주장도존재한다. 즉, 이러한정치제도의민주적효과에대한논쟁은오랫동안지속되고있으며, 어떠한주장도이론적우위를보이고있지않다. 다수제정치제도와합의제정치제도분류하여각주장들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4 먼저다수제정치제도가민주주의공고화에우호적이라는입장은다수선거제의결과에의해구조화된양당제가유권자에대한공공정책의명확한선택조건을제공하고, 정책경쟁의온건화를가져오며마지막으로단일정당구성과책임성을보장함으로써민주주의안정성과효율성을가져온다는것이다. 이에대해앤더슨 (L. Anderson) 은다음과같이지적한다. 선거제도와민주주의안정성사이의관계에서비례대표제에기초한체계가공평하고더욱높은대표성을갖는의회를구성하지만, 그결과로서구성되는연합정부는덜안정적이며, 덜효율적이라고지적한다. 반면에단순다수제는불비례성에의해선거과정을왜곡하지만강력하고더욱결정적인단일정당정부를구성하기때문에민주주의안정성과효율성의측면에서더효과적이다 (Anderson 2001, 429). 4 이러한분류는레이프하트 (A. Lijphart 1999) 의민주주의유형에기초하고있다. 여기서는선거제도와정당체계를중심으로다수선거제, 그리고양당제를다수제정치제도로, 비례선거제와다당제를합의제정치제도로구분하였다.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211 즉, 양당경쟁을가능하게하는소선거구-다수선거제는책임있는공공정책을생산할수있는배타적이고, 강력하고, 결단력있고, 책임있는정당들과일당정부를가져오며, 민주주의를위협하는환경하에서안정성, 생존성그리고문제해결능력이뛰어나다는것이다 (Armingeon 2002; 박기덕 1998, 61). 또한정당체계와내각정부의안정성사이의관계를분석한연구는내각정부의안정성과의회정당의분열도가가장큰상관성을보이고있다는점에서의회정당의분열도가낮은양당제그리고반체제정당및비구조적정당의의석비율이적을수록민주주의안정성에더효과적이라고지적한다 (Powell 1980). 이들의논리에따르면, 민주주의공고화는다수선거제에의해양당간경쟁이이루어지고그경쟁에서승리한하나의정당에의해강력하고책임있는정부를구성함으로써우호적임을알수있다. 다음으로합의제정치제도의채택이다수제정치제도의채택보다민주주의공고화에더우호적이라는주장이존재한다. 이주장은다수제정치제도가좌파와우파또는인종-언어에따른사회적갈등이심한사회에서양극화의위험성을가져오며, 투표의변화가정부정책의큰변화를야기할수있으며, 영구적인소수가발생됨으로써심한갈등을초래할수있다는한계를지적하고있다 (Kaiser, et al. 2002). 그러나비례선거제, 다당제, 그리고강력한균형적의회구조를특징으로하는합의제정치제도는소수이익의대표, 선거경쟁에있어공평성보장그리고투표참여에있어다수의정치참여를가져오기때문에민주주의안정성에우호적이라고주장한다 (Crepaz 1996; Powell 1982; Tavits 2004). 그리고포웰 (G. B. Powell) 은 29개민주주의국가에대한비교연구를통해의회제와비례대표제의결합이정치참여를확대하고정치적위협을낮게한다고지적한다 (Powell 1982). 또한다수제민주주의와합의제민주주의중심으로정부규모와의상관성을분석한타비츠 (M. Tavits) 는합의제정치제도로서비례대표제의특징을공평한제도, 유권자선택의다양성과정당의수증가그리고다수제보다더경쟁적이라고지적하고, 비례대표제는국민의투표참여율과국민의요구에대한반응성을향상시킨다고주장한다 (Tavits 2004, 346). 정리하면합의제정치제도는비례성과대표성그리고참여성을보장함으로써사회내에존재하는소수세력과반대세력의이탈 (exit) 을방지하고그결과로민주주의안정성을보장한다는것이다. 즉, 합의제정치제도는정치적타협의촉진과소수집단의통합을촉진함으로써민주주의에대한가치와신념을확대시키고, 소수자들의참여성과대표성을보장하며, 반응성과수행력에있어다수적정치제도보다더안정적이며효과적이다 (Anderson and Guillory 1997; Armingeon 2002; Wilensky 2002). 그러나민주주의공고화에대한정치제도의효과가크지않음을지적한연구도존재한다. 대표적으로민주화이행국가들을대상으로민주주의공고화에영향을주는구조적결정요인을탐색한연

21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구는정치제도로서정부유형과정당분절도의영향은매우낮다는지적도존재한다 (Gasiorowski and Power 1998, 764-767). 또한립셋도민주주의안정성에있어정치제도요인의효과가중요하다는증거가거의없다고지적하면서정치문화가중요함을주장한다 (Lipset 1992). 민주주의공고화가정치제도의일상화와민주적정치문화가형성되는과정되ᅟᅳᆫㄴ지금까지민주주의공고화의우호조건에대해기존연구를중심으로살펴보았다. 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논의에있어포괄적인이해는정치과정과정치과정의구조적요인모두들설명해야할필요가있다. 다시말해정치변동, 특히민주화이행과민주주의공고화를연구하는데있어하나의특정한결정요인이아닌다양한요인의포괄적인이해가필요하다. 요컨대민주주의공고화에대한논의는사회구조적요인과정치제도요인, 그리고맥락속에서행위자들의선택요인등에대한종합적이고포괄적인이해속에서분석해야할필요가있다. 4. 각장의구성 : 비교론적시각에서의민주주의공고화사례 2000년대중반에들어서면서세계곳곳에서민주주의의후퇴와붕괴의현상이보이고있다. 오래된민주주의국가에서는투표율하락, 주요정당에대한불만족, 정치지도자와정당재정과관련된부패스캔들, 개혁수행의비효과성그리고정부에대한불신의증가등민주적불안 (democratic malaise) 현상이나타나고있다 (Berg-Schlosser 2004, 28). 그리고제3의민주화물결을경험한국가들은군부에대한민간통제가약화됨으로서쿠데타에의해민주주의가붕괴되거나, 정치적 시민적자유가제한되거나인권이침해되고, 부정선거또는선거로뽑힌정치인들이법의지배를무시하고. 민주주의에대한대중의지지가약화되고있다. 5 또한여전히많은민주화이행국가들이적절한질적수준과제도화에도달하지못하고있으며, 불법적이고자의적인국가의권력행사로인해개인과집단의인권침해가사라지지않고있다 ( 임혁백 2001, 198). 이와같은현상은민주주의를평가하는미국의프리덤하우스 (Freedom House), 영국의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 (Economist Intelligence Unite: EIU) 의민주주의지표, 독일의바텔리스만재단 (Bertelesmann Foundation) 의바텔스만이행지수등의조사에서동일하게보고되고있다. 프리덤하우스의보고서에따르면, 2015년자유국가의비율이 44% 로 2005년의 46% 에비해 2% 감소하였음을알수있다. 그리고자유국가중에서 2014년에비해점수가하락한국가는미국, 헝가리, 몬테네그로, 엘살바도르등이있다. 5 2006년에서 2010년사이에기니, 온두라스, 모리타니, 니제르, 기니비사우, 방글라데시, 태국, 피지, 마다가스카르등여러나라에군부가권력을잡았으며, 대한민국을포함해서성공적으로민주화를이뤄낸국가들에서조차도언론의자유와대중의민주주의에대한지지가약화되고있다 (Kurlantzick 2015).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213 그림 2 프리덤하우스의자유국가변화추이 ( 비율 ) 출처 : 프리덤하우스 (https://freedomhouse.org/report/freedom-world-2016( 검색일 2016/12/11)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 (EIU) 의민주주의지표는선거절차, 다원주의, 정치참여, 정치문화그리고정부의기능, 시민적자유를조사하는데 2010년조사를보면, 167개국가중에서 91개국가의민주주의지수가악화되었다 (Kurlantzick 2015). 그리고 2015년조사에서는완전한민주주의국가가 20개국으로 2010년의 24개국보다 4개국감소하였음을보여주고있다 (http://www.yabiladi.com/img/content/eiu-democracy-index-2015.pdf. 검색일 2016/12/11). 20 개국가중에민주화이행국가는스페인과우루과이가포함되어있다. 이보고서는제3의민주화물결을경험한국가들은최근에민주주의가후퇴그리고역전되고있다고보고하고있다 http://www.yabiladi.com/img/content/eiu-democracy-index-2015.pdf). 표 2 완전한민주주의국가수의변화 ( 이코노미스트의민주주의지표 ) 2012 2013 2014 2015 북미 2 2 2 2 서유럽 15 15 15 14 동유럽 1 1 0 0 중남미 2 2 2 1 아시아및남태평양 4 4 4 2 중동및북아프리카 0 0 0 0 사하라남부아프리카 1 1 1 1 출처 : 이코노미스트홈페이지 (https://www.eiu.com/home.aspx)( 검색일 2016/12/11). 따라서 2부에서는민주주의공고화를정치제도의제도화와민주주의가치의내면화로정의하고제3의민주화물결을경험한국가들중각지역을대표하는국가들을대상으로민주주의공고화의

21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정도와특징을평가하였다. 우선강우진은제3의민주화물결의시발점이된남부유럽의스페인과그리스를대상으로민주적수행력의차이에영향을미치는영향변수를탐색하였다. 두나라는내전의경험, 국제적맥락, 정당체제의제도화요인들에서유사성을나타낸다. 하지만이행기의정의의처리, 군부의탈정치화과정, 이행의양식에서는차별성이나타난다. 특히이행의양식은이행기정의의처리와군부의탈정치화과정에영향을미친중요한변수였다. 스페인은대표적인거래에의한민주화이행국가로서안정적인민주화과정을거친반면에그리는단기간에급진적인이행에성공한국가의대표적인사례이다. 스페인은민주주의이행과정에서거의모든중요한행위자들이이해당사자들로참여할수있었고엘리트간협약에의해서평화적이고점진적인이행을이룩할수있었다. 이러한이행의특성은몽클로아협약의체결을통해서잘나타났다. 하지만그리스의이행의양식은스페인에비해서단절적이었고주요정치행위자들이이해당사자로참여하는과정이존재하지않았다. 스페인민주주의는 1980년대중반공고화된이후에안정적으로발전해왔다. 스페인민주주의가가까운장래에위기에직면할가능성은높지않다. 하지만다원적인정체성으로이루어진국가인스페인의분리독립의원심력을어떻게극복하는가가중요한도전이될것이다. 그리스민주주의당면한가장중요한위기는경제적위기이다. 그리스경제위기는그리스민주화과정에서발전시켜왔던그리스스타일의후원수혜관계가잉태한것이었다. 결국중요한시사점은민주화과정에서주요행위자들이이해당사자가되는것이이후의민주주의발전과정에도중요한영향을미친다는점이다. 다음으로라틴아메리카의주요국가인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를대상으로민주주의공고화를비교한안용흔은민주화이행기과거의제도적유산으로물려받았거나혹은이행과정에서선택했던정치제도적맥락, 특히선거제도적맥락에주목했다. 경제규모와경제정책에있어서아르헨티나, 브라질, 그리고칠레는상이한양태를보이고있음에도불구하고, 이들세국가의정치제도의검토과정속에서우리는이들국가가매우유사한선거제도를채택하고있다는사실을발견하였다. 구체적인형태에있어서다소간의차이가존재하기는하지만, 이들세국가는공통적으로의회선거제도로비례대표제그리고대통령선거제도로결선투표제를채택하고있다는점이다. 그리고이와같은선거제도적틀안에서정당간경쟁이전개되었으며, 이러한정당간경쟁구도하에서이들세국가의정당체제는다당체제로전환되었음을지적한다. 또한민주주의공고화의성패는 ( 대의 ) 민주주의적방식의원활한작동에의해자신들의이해와요구가해결되고있다는사회구성원들의강한믿음여부에달려있음을전제로정당경쟁구도에초점을맞추었다. 즉, 민주주의적운영에있어서핵심적인행위자는정당이며, 정당이자신들의지지그룹의이해와요구를집산, 조정, 대변하는역할을잘수행한다면, 민주주의운영기제에대한사회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215 구성원의정치적신뢰감은강화된다고보았다. 그의연구는 갈등지수 와 요구 / 책임성지수 라는두가지지표를활용하여다당제로의정당경쟁구도의변화와민주주의공고화사이의관계를규명하였다. 그리고이러한규명작업을통해세국가에서공통적으로나타나는다당제로의정당체제의변화가사회갈등의완화및정부의책임성강화와밀접한관계를맺고있음을발견하였다.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를비교연구한지은주는권위주의국가에서민주주의로전환한사례인필리핀, 한국, 대만, 태국그리고인도네시아를분석하였다. 민주적전환이시작되고약 30년이진행된시점에서아시아의민주주의는상당한변화가있었음을지적한다. 다섯개의사례중태국의민주주의는붕괴했으며, 필리핀과인도네시아는불안정한민주주의이며, 대만과한국만이민주주의로서생존해있다. 그렇다면동아시아민주주의의이러한차이를가져온원인은무엇인가? 동일한지역에서유사한시기에민주적전환을경험한국가들이왜서로다른민주적성취를보이는가라는질문에대해답하고있다. 민주화이행원인의차원에서한국과대만의민주화가성공한경제를바탕으로한민주적전환이라면태국과필리핀그리고인도네시아는경제적위기가권위주의의위기를가져왔다는것이다. ㄸ라서동남아시아의경우민주주의를경제회복과성장을위한도구로이해하고있으며, 대중은민주주의를경제발전, 경제회생을위한도구로써필요로한다고본다. 이렇듯민주주의에대한도구적이해는민주주의가원하는경제적인성과를충족시키지못할때민주주의는쉽게붕괴될수있음을지적한다. 그대표적인사례로서태국의민주주의의붕괴와필리핀의반인권적인우파정부의등장임을제시한다. 그리고인도네시아도 1998년의경제위기가민주적전환을가져온이래여전히민주정부가과거정부와비교할때괄목할만한경제적성과를내지못하면서민주주의는지속적으로위협받고있다고주장한다. 마지막으로동유럽국가인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를비교한김대순은체제전환기민주화의기수였던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공고화와제문제점을진단하고동시대대한민국의민주주의와비교하여시사점을도출하였다. 그에따르면 1989-2004년헝가리와폴란드는체제전환을성공적으로이행하여유럽연합 (EU) 과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에가입하는등외형적인측면에서는가시적인성과를거둔반면, 2010년이래양국의민주제는오히려퇴행의면모를나타낸다고주장한다. 그러한근거로서저자는양국의민주제에서현재가장논란이되고있는국내정치의현안을분석하였고이로써민주주의공고화를나타내는지표만으로는알수없는동유럽정치의이면을밀도있게고찰하였다. 예컨대, 저자는사법부결정에과도한정치적개입을시도하는현헝가리오르반행정부 (Orbán government) 와폴란드커진스키행정부 (Kaczyński government) 는권력의균형과견제의원칙을심각하게침해하였다고강조한다. 궁극적으로저자는공고화된민주제는고정적인상태로머무는것이아니라끊임없는시행착오를거쳐건설적으로발전시켜야한다고제언한다.

21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참고문헌 강신구. 2012. 어떤민주주의인가?: 제도와가치체계의조응을통해바라본한국민주주의의발전방향모색.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3호, 39-67. 김형철. 2012. 민주화이행모델과 좋은민주주의 : 민주주의수행력을중심으로. 한국정치연구 제21집제1호. 박기덕. 1998. 정치제도연구의문제영역과관련변수. ; 박기덕편. 민주주의와정치제도. 서울 : 세종연구소. 선학태. 2010. 한국민주주의공고화관점에서본헌정체제디자인 : 합의제형. 민주주의와인권 제 10권 1호, 69-130. 이동윤. 2007. 민주주의공고화와퇴보사이에서 : 태국의탁씬정부와민주주의논쟁. 국제정치논총 47집 2호 173-196. 이영재. 2015. 한국민주주의의공고화와 5 18특별법. 민주주의와인권 15-3, 79-112. 이행. 1996. 민주적공고화를위한정치제도. 21세기한국사회와정치학의과제 한국정치학회. 153-170. 임혁백. 1995. 시장 국가 민주주의. 서울 : 사회비평사임혁백. 2001. 세계화시대의민주주의 : 현상 이론 성찰 서울 : 나남출판. 지병근. 2008. 민주주의이행 : 민주화이론의한국적수용. 한국정치학회 2008년건국 60주년기념공동학술회의. 속초. 8월. 최장집. 1997. 한국민주화의현단계와질높은민주주의를위한과제, 한국사회와민주주의, 387-409. 서울 : 나남신서. 최장집. 2002. 민주화이후의민주주의. 서울 : 후마니타스. Adcock, Robert and David Collier. 2001. Measurement Validity: A Shared Standard for Qualitative and Quantitative Research.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95, No, 3. Anderson, Christopher. and Christine A. Guillory,. 1997. Political Institutions and Satisfaction with Democracy: A Cross-National Analysis of Consensus and Majoritarian System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91(March). pp. 66-81. Anderson, Liam. 2001. The Implications of Institutional Design for Macroeconomic Performance.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Vol. 34, No. 4. pp.429-452. Armingeon, Klaus. 2002. The Effects of Negotiation Democracy: A Comparative Analysis.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Research. Vol. 41. pp. 81-105. Beetham, David. 1994. Defining and Measuring Democracy. London: Sage. Beetham, David and Kevin Boyle. 1995. Democracy: 80 Questions and Answers. UNESCO. Berg-Schlosser, Dirk. 2004. The Quality of Democracies in Europe as Measured by Current Indicators of Democratization and Good Governance. Journal of Communist Studies and

비교론적관점에서민주주의공고화검토 : 개념, 측정, 그리고우호조건 217 Transition Politics 20. No. 1, 28-55. Bernhard, Michael,. Timothy Nordstorm, and Christopher Reenock,. 2001. Economic Performance, institutional Intermediation, and Democratic Survival. The Journal of Politics. Vol. 63, No. 3. Anderson, L. 2001. The Implications of Institutional Design for Macroeconomic Performance.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34:4, 429-452. Cheibub, Jose Antonio. and Fernando Limongi,. 2002. Democratic Institutions and Regime Survival: Parliamentary and Presidential Democracies Reconsidered. Annual Review Political Science. Vol. 5. Crepaz, Markus M. L. 1996. Consensus versus Majoritarian Democracy: Political Institutions and their Impact on Macroeconomic Performance and Industrial Disputes.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Vol. 29, No. 1. Dahl. Robert( 김왕식외 ). 2002. 민주주의 (On Democracy). 서울 : 동명사 5판. Diamond, Larry. 1999. Developing Democracy: Toward Consolidation. Baltimore and London: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Diamond, Larry., Juan J. Linz, and Seymour Martin Lipset,. 1995. Politics in Developing Countries: Comparing Experiences with Democracy. Boulder and London: Lynne Rienner Publishers, Inc. Gasiorowski, Mark J. and Power. Timothy J. 1998. The Structural Determinants of Democratic Consolidation.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31:6, 740-771. Gunther, Richard, P. Nikiforos Diamandouros and Hans-Jurgen Puhle. 1995. The Politics of Democratic Consolidation. Baltimore and London: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Gunther, Richard. and Anthony Mughan,. 1993. Political Institutions and Cleavage Management. in Weaver, R. Kent and Bert A. Rockman,(eds). Do Institutions Matter? Government Capabilities in the United States and Abroad. Washington: The Brookings Institution. Held, David( 이정식옮김 ). 1987. 민주주의의모델 (Models of Democracy). 서울 : 인간사랑. Huntington, Samuel. 1991.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The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Huntington, Samuel P. & Jorge I. Domingues,. 1975. Political Development. in Greenstein, Fred I. and Nelson W. Polsby,. Handbook of Political Science Vol. 3. Massachusetts and London: Addison-Wesley Publishing Company. Huntington. Samuel. P. 1996. Democracy for the Long Haul. Journal of Democracy 7-2 Inglehart, Ronald and Christian Welzel. 2005. Modernization, Cultural Change and Democrac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nglehart, Ronald. 1990. Culture Shift in Advanced Industrial Society. 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21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Kaiser, Andre., Matthias Lehnert, Bernhard Miller and Ulrich Sieberer. 2002. The Democratic Quality of Institutional Regimes: a Conceptual Framework. Political Studies. Vol. 50. pp. 313-331. Kurlantzick, Joshua( 노정태옮김 ). 2015. 민주주의어떻게망가지는가 (Democracy in Retreat). 경기도 : 들녘. Lijphart, Arend. 1999. Patterns of Democracy: Government Forms and Performance in Thirty-Six Countries.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Linz, Juan J. 1990a. Transition to Democracy. Washington Quarterly Vol. 13, No. 3. Linz, Juan J. 1990b. The Perils of Presidentialism. Journal of Democracy. 1(Winter). Linz, Juan J. and Alfread Stepan( 김유남외옮김 ). 1999. 민주화의이론과사례 : 이상과현실의갈등 (Problems of Democratic Transition and Consolidation). 서울 : 삼영사. Lipset, Seymour M. 1959. Some Social Requisites of Democracy: Economic Development and Political Legitimacy.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XLIII, No. 1(March). Lipset, Seymour M. 1996. The Centrality of Political Culture. in Diamond, Larry. and Marc F. Plattner,(eds). The Global Resurgence of Democracy. Baltimore and London: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Mainwaring, Scott. 1993. Presidentialism, Multipartism and Democracy: the difficult Combination.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Vol. 26, No. 2. Mainwaring, Scott. 1999. Democratic Survivability in Latin America. in Handelman, Howard. and Mark Tessler,.(eds). Democracy and Its Limits: Lessons from Asia, Latin America, and the Middle East.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Maravall, Jose Maria. 1993. politics and Policy: Economic Reforms in Southern Europe, in Luiz Carlos Bresser, Jose Maria Maravall and Adam Przeworski, Economic Reform in New emocracies: A social Democratic Approacj: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Merkel, Wolfgang. 2004. Embedded and Defective Democracies. Democratization 11, No. 5, 33-58. Muller, Edward N. 1988. Democracy, Economic Development, and Income Inequality.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53, 50-68. Munck, Gerardo L. and Carol Skalnik Leff. 1997. Modes of Transition and Democratization: South America and Eastern Europe in Comparative Perspective. Comparative Politics 29. No. 3, 343-352. O Donnell, Guillermo and Philippe. C. Schumitter. 1986. Transitions from Authoritarian Rule: Tentative Conclusions about Uncertain Democracies. Baltimore and London: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O Donnell. Guillermo. 2001. Illusions about Consolidation. in Larry Diamond and Marc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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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21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강우진 ( 경북대학교 ) 1. 들어가며 남부유럽은지리적으로볼때이베리아반도, 이탈리아반도, 발칸반도와그주변섬들로구성되어있다. 서구에서보통선거권이확산되었던제1의물결에남부유럽은포함되지않았다. 또한제2 차대전이후신생민주국가에서나타났던민주화를지칭하는제2의민주화물결또한남부유럽을비켜갔다. 이후 1974년포르투갈의군부독재가붕괴하면서남부유럽은제삼의물결을선도하였다. 포르투갈에이어서그리스의군사체제가붕괴하였다. 스페인에서는스페인내전이후스페인을 40년이상지배해왔던프랑코가사망하면서민주화가시작되었다. 전세계적인민주화흐름에서벗어나있었던남부유럽 3개국의민주화는전세계적인제3의물결을촉발시켰다 (Huntington 1991). 1 이장은스페인과그리스를중심으로남부의유럽의민주화이후민주적발전과정에대한분석을목적으로한다. 스페인과그리스의서로다른민주주의발전과정은민주화이후민주주의수행력에중요한영향을미쳤다. 스페인과그리스는제삼의물결을통해서비슷한시기에민주주의로이행한이후 40여년동안민주주의를발전시켜왔다. 하지만두나라는서로다른민주주의발전의궤적과구별되는민주적수행력 (democratic performance) 를나타내고있다. 그렇다면두나라가서로다른민주적수행력을나타낸이유는무엇인가? 이장은두나라의민주적수행력의차이에영향을미치는영향변수를탐색하는것을목적으로한다. 두나라는내전의경험, 국제적맥락, 정당체제의제도화요인들에서유사성을나타낸다. 하지만이행기의정의의처리, 군부의탈정치화과정, 이행의양식 (mode of transition) 에서는차별성이나타난다. 특히이행의양식은이행기정의의처리와군부의탈정치화과정에영향을미친중요한변수였다. 이러한면에서두나라는비교가능한사례를구성한다고할수있다. 2 1 헌팅톤은제삼의물결에영향을미친요인으로서다섯가지요인을들고있다. 먼저, 권위주의체제의정통성의쇠락과수행력에의한정통성약화이다. 둘째, 1960년대의전례없는세계적경제성장이다. 셋째, 바티칸으로대표되는가톨릭의역할이다. 넷째, 유럽공동체 (EC), 미국의정책변화, 소련의극적인변화와같은외부효과이다. 다섯째, 민주화의확산을가져온눈덩이효과를들수있다 (Huntington 1991). 2 이러한특성은두나라를최대유사체계 (most similar systemic analysis design) 의방법을통해서분석할수있다는점을시사한다. 최대유사체계는분석과정에서유사성은극대화되고차별성은극소화될수있는사례를구성한다. 극대화

22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이장은다음과같이구성된다. 먼저객관적인지표에대한분석과개인적인수준의여론조사자료를활용하여민주화이후두나라의민주적수행력을비교분석한다. 다음으로두나라의민주화궤적에서나타난공통요인들에대해서분석한다. 또한, 두나라의서로다른민주적수행력에영향을미쳤을수있는차별적인요인들에대한논의를진행한다. 추가적으로두나라민주주의가직면하고있는도전에대해서간략히논의한다. 마지막으로분석의결과를요약하고함의를논의한다. 2. 스페인과그리스민주주의의개략적인역사 표 1 스페인민주화과정의주요사건 1936.7.17 스페인내전발생 1939.4.1 스페인내전종료, 프랑코집권 1975.11.20 프랑코사망 1976.11 정치개혁법제정 1977.4 공산당합법화 1977.6.15 첫민주선거실시 1977.10.26 몽클로아협약 (Pactos de la Moncloa) 체결 1978 신헌법선포 1982 PSOE( 사회노동당 ) 집권 1982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가입 1986 EC 가입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 2002.1 유로존가입 표 2 그리스민주화과정의주요사건 1967.4.21 파파도풀로스가주도한군사쿠데타발생 1973.11.17 아테네폴리테크닉대학에서대학생주도의반독재시위 1974.7.24 군사독재종식 1974.12.8. 왕정폐지, 공화정출범 1981 EC 가입 1981.1 PASOK(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 ) 집권 1996.6.23 안드레아스파판드레우총리사망 2001 그리스유럽통화연맹과유로존가입 된유사성은일반화를위한전제조건으로통제되며극소화된차별성은독립변인으로상정된다 ( 김웅진 1995). 이연구가남유럽의민주화를대표하는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중에서스페인과그리스에초점을맞춘이유는이러한분석적인목적때문이다.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23 2004 아테네올림픽 2010.5.2 IMF 구제금융신청 2012.3.14. 2차구제금융 2015.1 SYRIZA( 급진좌파연합 ) 집권 2015.8.19. 3차구제금융합의 < 표1> 과 < 표2> 는스페인과그리스민주화과정의주요사건들을정리하여제시하고있다. 앞서언급한대로스페인과그리스는민주화의세계사적인흐름중에서민주화의제삼의물결을선도한나라의대표적인사례이다. 두나라는모두 1970년대중후반오랜군사독재를종식하고민주주의로이행했다. 또한두나라이후민주화이후권위주의로의퇴행없이민주주의를지속적으로발전시켜왔다. 스페인민주화의과정의가장중요한특징은안정적인민주화과정이다. 스페인의민주화는포르투갈의경우처럼군부독재를이끌어왔던군부가패배하여급격히몰락하지않았다. 또한그리스의경우처럼전쟁과같은외부로부터의충격에의해서민주화가추동되지않았다. 더구나남미의많은국가들과동유럽의공산주의국가들의경우에서와같이경제적위기에직면하지도않았다 (Linz and Stephan 1996). 스페인은 36년동안군부독재를이끌어왔던프랑코체제내부로부터의민주화가시작되었다. 아래로부터의민주화의압력이존재하였지만구정권이이행과정에중요한역할을하였다. 3 민주적이행과정에서주요행위자들이모두이해당사자가되었고타협과협약에의한민주화 (elite-pacted democracy) 가성공적으로이루어졌다. 1982년총선이후사회주의정당으로정권이이행한이후스페인민주주의가공고화되었다는데에는별다른이견이없었다. 그리스는스페인의점진적인이행에비해서단기간 (1974년 7월 21-1974년 12월 9일 ) 에급진적인이행에성공한예외적인나라에속한다. 민주화이행전에군부는스페인과는달리제도로서군부는분열되어있었다. 1967년에는파파도벌로스 (Papadopoulos) 와연결된대령들에의한쿠데타가발생하였다. 쿠데타에성공하였지만그리스의군부는비교적으로볼때사회적지지기반이취약했다. 정당성의지지기반이취약했던군부는키프로스위기에서섣부른개입의무리수를감행한다. 터키의침공으로촉발된위기는망명중인보수정치지도자카라만리스 (Karamanlis) 를불러들이게되었다. 위기속에전권을위임받은카라만리스는그리스의민주적이행과정을주도하게되었다. 그렇다면민주적이행이후안정적인민주주의를발전시켜온스페인과그리스는어떠한민주적수행력을나타냈는가? 3 이러한이유때문에스페인의민주적이행과정이군부권위주의체제의자기전환과정 (self-transformation) 과정으로보는시각도존재한다 (Maravall and Santamaria 1989).

224 대한민국 민주화 30년, 평가와 세계사적 함의 학술연구 용역 최종보고서 3. 스페인과 그리스의 민주주의 수행력에 대한 평가 제3의 물결을 통해서 신흥민주주의의 출현을 주도했던 남유럽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인 스페 인과 그리스는 1970년대 중반 민주화로 이행한 이후 지난 40여 년 동안 어떠한 민주주의 수행력을 나타냈는가? 민주주의의 수행력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인 지표를 통한 평가와 여론조사 자료 분석을 통한 개인적 수준의 평가 두가지 수준에서 살펴보자. 1) 객관적 지표 그림 1 스페인과 그리스 민주주의 수준 비교-폴리티 지수와 프리덤 하우스 지수 출처: 폴리티 지수(http://www.systemicpeace.org/polity/polity4.htm) : 프리덤 하우스 지표(www.freedomhouse.org) 그림 2 스페인과 그리스 언론자유 순위와 부패지수 순위 비교 출처: 언론자유 지수(https://rsf.org/en/ranking); 부패지수 (www.transprancy.org)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25 < 그림1> 과 < 그림 2> 는민주화의이행이시작되었던 1970년대중반이후두나라의민주적수행력을대표적인민주주의지표를통해서제시하고있다. 먼저 < 그림1> 은민주화의수준을측정하는데가장많이사용되는두가지지표인폴리티지수 (Polity index) 와프리덤하우스 (freedom house) 지표를활용하여두나라의민주주의의수행력의시계열적인변화를나타내고있다. 한편 < 그림2> 는언론의자유 (press freedom index) 와부패인식지수 (Corruption Perception Index) 의이용하여폴리티지수와프리덤하우스지표에서포착하지못한언론자유와부패에관한수행력의시계열적인변화를나타내고있다. 먼저폴리티지수 (Polity Index) 4 를살펴보자. 스페인의경우 1978-1981년까지 9점을유지했으나 1982년 10점으로상승한이후 2015년까지 10점을유지하고있다. 그리스의경우도 1978-1985 년까지 8점에머물렀으나 1986년 10점으로상승한이후 2015년까지 10점을유지하였다. 즉폴리티지수에따르면스페인과그리스는 4년의격차는있었지만 1980년대중반이후가장높은수준의민주주의를유지하고있다고평가할수있다. 한편프리덤하우스지표 (Freedom House Index) 는각국의민주화정도를정치적권리 (political rights) 와시민적권리 (civil rights) 로나누어측정하여발표하고있다. 이지표는 1부터 7까지등급으로각나라를평가한후 1.0부터 2.5까지는자유국가로, 3.0부터 5.5까지는부분적자유국가로, 그리고 5.5부터 7.0은비자유국가로분류하고있다. 프리덤하우스를두나라를비교하면일정한차이를발견할수있다. 먼저정치적권리를살펴보면스페인은 1978년처음 2점을획득한후 1983년에가장높은점수인 1점으로상승한다음 2015년까지같은점수를유지하고있다. 그리스의경우도 1975년에점을획득하여처음자유로운국가로분류된이후 2015년까지자유로운국가를유지하고있다. 하지만그리스의정치적권리는 1점과 2점을오르내리는변화를겪었다. 1970년대중반 (1975-1980) 2점을기록하였다. 이후 1980년대초반에는 (1981-1984) 은 1점으로상승하였으나후반부 (1985-1988) 2점으로하락하였다. 1989년에다시 1점으로상승하여 2011년까지유지되었다. 하지만최근 (2012-2015) 에는다시 2점으로하락하였다. 둘째, 두나라모두에서사회적권리는정치적권리에비해서발전이더디었으며등락폭이컸다. 하지만그리스의사회적권리와정치적권리의발전수준이스페인의발전속도보다늦었다. 스페인은 1979년 2점을처음획득하였으나 1981-1982년에는다시 3점으로하락하였다. 1983년다시 2점을회복한후 1989년에는 1점으로상승하였다. 1993년에는다시 2점으로하락하였다가 2003년에다시 1점을회복하여 2015년까지유지하였다. 한편그리스는 1975년 2점을처음획득하여 1992년까지유지되었다. 하지만 1993년에는다시 3점으로하락하여 2002년까지 3점을유지하였다. 이후 4 폴리티지수스코어의범위는 -10점부터 10점까지이다. -10점부터 -6점까지는권위주의 (autocracy) 로분류된다. -5점부터 5점까지는비민주주 (anocracy) 의국가로분류된다. 6점부터 10점까지는민주주의국가로분류된다.

22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2003년에다시 2점을회복하여 2015년까지같은점수를유지하고있다. 5 요약하면, 민주주의수행력을평가하는가장대표적인지표인폴리티지수에따르면스페인과그리스의민주주의수행력의차이는잘드러내지않는다. 하지만프리덤하우스의세부지표인정치권과시민권을통해서두나라를비교해보면스페인민주주의가상당히안정적으로발전해온반면에그리스민주주의는진전과퇴행을경험했다는것이나타난다. 같은맥락에서이코노미스트지표는스페인과그리스민주주의가질적으로다른민주주의의범주에있다고평가한다. 언론의자유와부패와같은민주주의질 (quality of democracy) 을구성하는중요한지표를비교해보면두나라의수행력차이가잘드러난다. 먼저언론자유를살펴보면스페인은 2002년 29위를기록하여가장높은수준을기록한후등락을겪었다. 하지만이후다시회복하여 2015년 33위를기록하고있다. 그리스는 2002년 19위를기록하여스페인보다약간높은순위를기록하였다. 하지만이후지속적으로하락하여 2010년처음 70위를기록하였다. 그리스의언론자유는이후에도계속악화되어 2014년에는 99위까지하락하였다. 가장최근조사인 2015년에는 91위를기록하고있다. 부패인식지수의순위를살펴보면스페인은 1996년이후 2015년까지전체적으로 20~30위권을유지하고있다 (2013년은 40위 ). 하지만그리스의부패인식지수는스페인보다훨씬등폭이컸다. 1996년에는그리스의부패인식지수순위는스페인보다높은 28위를기록하였으나이후지속적으로악화되어 2009년에는 71까지떨어졌다. 이후에도하락을계속하여 2012년에는 94위까지하락하였다. 이후반등하였으나 2015년에 58위에머무르고있다. 한편, 데모크라시바로미터 (www.democracybarometer.org) 는자유 ( 개인적자유, 법의지배, 공적인영역 ), 통제 ( 경쟁, 상호제약, 정부의능력 ), 평등 ( 투명성, 참여, 정치적대표 ) 의세가지영역을중심으로민주주의지표를구축하여발표하고있다. 이지표의장점은폴리티지수나프리덤하우스지표가전문가여론조사를통해서구축된반면에데모크라시바로미터는객관적인지표를포함하여분석의엄밀성을추구하고있다. 또한기존의폴리티지수나프리덤하우스지표가최소정의적의존하고있는반면에데모크라시바로미터는민주주의를세가지영역으로세분화하고각영역을세가지지표를통해서측정하였다. 이렇게세분화된지표를통해서최소정의적민주주의를달성한민주주의국가간수행력의차이를분석해낼수있는장점이있다. < 그림 3> 는 1990-2014년사이두나라의자유, 통제, 평등의영역지표를종합한민주주의질의수행력의변화를제시하고있다. 프리덤하우스지표나언론의자유나부패인식지수에서일부확인 5 위의두지표와함께민주주의의수준을나타내는지표로서많이사용되는지표는이코노미스트지에서발표하는민주주의지표이다 (Economist Intelligence Unit, http://www.eiu.com/home.aspx). 이지표에따르면스페인은 2006년이후완전한민주주의 (full democracy) 의수준을유지하고있다. 2010-2014년에는완전한민주주의의경계선인 8점근처까지하락하였으나 2015년다시회복하여 8.30점을기록하고있다. 반면에그리스는 206-2008년에는각각 8.13점을기록하여완전한민주주의의하한선까지하락하였다. 이후 2010년에다시결함있는민주주의 (flawed democracy) 로하락하여 2015 년까지같은범주를유지하고있다.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27 되었던두나라간수행력의차이가 < 그림 3> 의데모크라시지표분석을통해서확연히드러난다. 스페인은민주주의질에있어서안정적인수행력을보이고있는반면에그리스의민주주의의질은 1990 년대이후지속적으로하락하고있다. 그림 3 스페인과그리스의민주주의질수행력비교 출처 : 데모크라시바로미터 (www.democracybarometer.org) 2) 개인적수준의민주주의평가 표 3 스페인과그리스시민들의민주주의만족과제도적신뢰 변수 스페인 그리스 민주주의에대한만족 4.248 (2.516) 2.978 (2.437) 정부에대한신뢰 2.756 (2.411) 1.838 (1.999) 정당에대한신뢰 2.210 (2.166) 1.382 (1.846) 의회에대한신뢰 3.671 (2.591) 2.042 (2.273) 법쳬계에대한신뢰 4.018 (2.658) 3.819 (2.824) 정치인에대한신뢰 2.232 (2.235) 1.360 (1.824) 유럽의회에대한신뢰 3.854 (2.554) 2.556 (2.470) 출처 : ESS (European Social Survey) 2010; 각항목은 11점척도 (0: 매우불만족 ~10: 매우만족 ). 수치는각항목에대한 평균값을나타내며괄호안수치는표준편차를나타낸다, 앞선논의에서민주주의를측정하는다양한지표를통해서스페인과그리스의민주주의의수행력을평가해보았다. 이를통해서민주화이후의두나라의수행력에는두드러진차이가있다는점이나타났다. 그렇다면민주주의의핵심적인행위자인대중들의평가는앞서살펴본객관적인지표와일치하는가? 아니면서로다른결과를나타내는가? < 표3> 은유럽사회조사 (European Social Survey 2010) 에기반을두어스페인과그리스의민주주의에대한만족과제도신뢰수준을비교하

22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고있다. 유럽사회조사에서스페인과그리스모두가포함된가장최근조사는 2010년조사이다. 두나라에서개인수준의민주적수행력평가를논의하기이전에민주적지지 (democratic support) 에대한다수의선행연구들이논의의출발점으로삼고있는이스턴 (Eastern, 1965, 1975) 의정치적지지 (political support) 의개념을간단히논의할필요가있다. 정치적지지는정치적대상 (political objects) 에대한지지의수준에따라서세가지로수준으로구분할수있다. 즉정치적공동체 (political community) 와, 정치레짐 (political regime), 그리고정치적권위 (political authority) 가그것이다. 정치적공동체는좁은의미에서는지역공동체, 인종적공동체크게넓은의미에서는국가를나타낸다. 따라서정치적공동체에대한지지는가장높은수준에대한지지로이해할수있다. 둘째, 정치적레짐은일반적으로정치체제를나타내는개념이다. 이에따라서정치적레짐에대한지지는정치적권위구조의원칙과규범에대한지지를나타낸다. 셋째, 정치적권위는가장낮은수준의정치적지지로서정치인과같은정치적행위자에대한지지를나타낸다. 정치적공동체에대한지지가가장광범위한지지 (diffuse support) 라면정치인에대한지지는가장구체적인지지 (specific support) 라고할수있다. 정치적지지에관한이스턴개념은많은연구의출발점이되었다. 특히노리스 (Norris, 1991, 9-12쪽 ) 는구제적인지지 (specific support) 로부터광범위한지지 (diffuse support) 를다섯가지수준으로세분화한다음연속선상에위치시켰다. 이에따르면정치적레짐에대한지지는레짐의원칙 (regime principle) 과레짐의수행능력 (regime performance) 그리고레짐의제도 (regime institution) 로추가적으로나눌수있다. 이연구가민주주의수행력에대한분석에서주목하는것은레짐의수행능력과레짐의제도에대한시민들의평가이다. 이러한중범위수준의평가가민주화이후두나라민주주의의수행력을평가하는데적합하기때문이다. < 표3> 에서제시된개인수준의민주주의수행력에대한평가는앞서분석한객관적지표에대한분석에서나타난결과를확인하고있다. 먼저스페인민주주의에대한스페인시민들의만족도는 11점척도에서 4.248로나타났다. 반면에그리스의민주주의에대한시민들의만족도는 2.978에지나지않았다. 이자료가그리스의경제위기가발생하기이전자료라는점을감안할때그리스민주주의수행력은경제위기훨씬이전부터남부유럽의민주주의중에서뒤쳐져있었다고할수있다. 스페인과비교할때그리스의민주주의의낮은수행력은다양한제도적신뢰에대한비교를통해서도확인할수있다. 제도신뢰는중앙정부, 정당, 의회, 법체계와같은정치제도에대한신뢰와정치인에대한신뢰그리고초국적행위자인유럽의회에대한신뢰를포함하여 6가지영역에서측정되었다. 양국간제도신뢰에대한비교는흥미로운분석결과를나타냈다. 먼저, 모든영역에서스페인시민들은그리스시민들에비해서높은제도적인신뢰를가지고있었다. 하지만두나라사이에가장큰차이가나타난제도신뢰영역은의회신뢰의영역이었다. 스페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29 인의의회신뢰는평균 3,671을기록하였지만그리스의의회신뢰는 2.042를기록해거의두배에가까운차이를나타냈다 (1.629). 의회가민주주의핵심적인제도라는점과두나라모두의회중심제를채택하고있다는점을감안한다면그리스시민들이민주주의제도적기제에대한불만이크다는것을확인할수있다. 둘째, 두번째로큰차이가나타난영역은초국가제도인유럽의회에대한신뢰영역이었다. 스페인시민들의유럽의회에대한신뢰는 3.854로나타났다. 하지만그리스시민들의유럽의회에대한신뢰는 2.556에지나지않았다 (1.298차이) 셋째, 두나라에서중앙정부에대한신뢰의차이 (0.918) 와정치인에대한신뢰의차이 (0.872), 정당에대한신뢰의차이 (0.828) 은비슷한수준이었다. 넷째, 법체계 (legal system) 에대한신뢰는양국모두제도적 6개의신뢰의영역중에서가장높은신뢰를나타냈다. 또한두나라에서법체계에대한신뢰의차이는여타의영역에서나타난신뢰의차이보다가장작았다 (0.1999). 요약하면스페인과그리스는비슷한시기에민주주의로이행하였으며제삼의물결을선도한남유럽의대표적인국가들이었다. 하지만민주주의수행력에대한객관적지표와개인적수준의여론조사자료에대한분석모두에서두나라민주주의는상당히다른수행력을나타냈다. 스페인민주주의는비교적안정적으로발전해온반면에그리스민주주의는부침을거듭했으며민주주의수행력의퇴보현상을경험하고있다. 그렇다면스페인과그리스민주주의의수행력의차이를설명하는요인들로서는어떠한요인들을들수있나? 지난 40년의역사적경로를설명하는인과적요인들을추출하기는쉽지않다. 하지만두나라에서민주화에영향을미친역사적요인들을살펴봄으로써두나라의서로다른민주주의발전궤적에대한시사점을얻을수있다. 4. 공통적인요인들 스페인과그리스의민주주의발전과정은서로다른역사적궤적을밟아왔지만민주화과정에영향을미친중요한공통적요인들도존재한다. 스페인과그리스모두내전을경험하였다. 또한두나라모두유럽공동체 (EC) 와이후유로존 (Euro zone) 에가입하였다. 유럽공동체가입은민주화과정에서외부로부터의압력으로기능하였다. 또한학자들에의해서민주화과정에서중요한변수로논의되어왔던정당체제의제도화의수준에서스페인과그리스는비슷한양상을나타냈다. 두나라의민주화과정이공유하는세가지요인들에대해서살펴보자.

23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1) 내전의경험 스페인과그리스모두극심한내전을겪었다. 스페인내전 (1936-1939) 의경우스페인민주주의의지체에엄청난영향을미쳤다. 1931년선거에서공화파는대승을거두었고알폰소 13세는프랑스로망명을하였다. 총선결과스페인제2공화국이출범하였고온건파인알칼라사모라가초대대통령에취임하였다. 제2공화국의최대현안이었던토지개혁의지체와경제위기로인해서총리였던아사나내각은위기에직면하였고 1933년결국퇴진한다. 총선결과우파가다시집권하였다, 하지만우파내각의극심한탄압정책으로인해서우파내각은지지율하락에직면하였다. 1936년선거에서는좌파공화당, 사회주의노동자당, 공산당을아우르는좌파연합인민전선이집권에성공하였다. 집권에성공한인민전선은지체되었던토지개혁을비롯한개혁정책을급격히추진하였다. 인민전선의개혁정책에대한지주와자본가, 가톨릭세력을중심으로한우파의불만이고조되었다. 이에스페인령모로코에머무르던프랑코를중심으로스페인군부가쿠데타를일으키고스페인내전이시작되었다. 스페인내전은시작과함께곧바로국제화되었다. 나치히틀러와이탈리아의무솔리니가스페인군부쿠데타를지원하였고미국과유럽을중심으로한각국에서자원한자원병으로구성된국제여단이공화파를지원하였다. 결국조직력과물리력에서압도적인우위를지녔던군부가승리하였다. 스페인내전이스페인의민주화의지체에미친영향을지대하다. 100만명이넘는사상자와수십만의망명자가발생했으며스페인내전의결과탄생한프랑코독재는 40여년간지속되었다. 그리스의또한극심한내전을겪었다 (1946-1949). 그리스내전은그리스의독립을촉발하였다. 이차대전으로인해권력의공백상태가발생하면서영국과미국의지원을받는그리스정부군과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의지원을받은그리스민주군사이의내전이발생하였다. 1차내전과 2차내전을거치면서공산주의세력은영국에이어서미국의지원을받은정부군에패배하여내전은종식되었다. 내전은양국모두극심한후유증을낳았다. 양국모두에서민주화의지체라는부정적인영향을미쳤다. 양국의내전은내전과식민지를경험한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제기되는이행기의정의 (transitional justice) 의처리방식에도중요한영향을미쳤다 (Pinto 2010). 2) 국제적요인 : 유럽공동체 두나라의내전이국제전으로치러졌던것으로부터유추할수있듯이국제정치적역학관계는스페인과그리스의민주화과정에중요한영향을미쳤다. 민주화의제1차물결과제2차물결의세계적흐름에서벗어난채오랜군부독재를경험했던남부유럽, 특히스페인과그리스는민주주의라는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31 시대정신 (zeitgeist) 에서벗어나있었다. 이에따라서스페인과그리스는민주주의의확산이라는외부로부터의압력에오랫동안노출되어있었다. 제3의물결을통한민주화과정에서외부행위자는큰역할을하였다. 세계적인수준에서민주화에기여한외부행위자는냉전시기두축이었던미국과소련, 바티칸, 유럽공동체를들수있다. 미국은라틴아메리카와아시아의민주화를압박하였으며소련은동유럽의민주화과정의장애물을제거하는데기여하였다. 바티칸은가톨릭국가의권위주의정권의정통성을약화시켰다. 이장에서분석하고있는남부유럽, 특히스페인과그리스민주화과정에서중요한역할을한외부행위자로서는유럽공동체를들수있다 (Huntington 1991). 유럽공동체는회원국의자격을민주국가로한정함으로써스페인과그리스의민주화에경제적유인을통한외부로부터의압력을가했다. 민주화의물결에서벗어나독재체제하에있던남부유럽국가들은유럽의정체성에대한열망이있었다. 유럽공동체에가입한다는것은유럽의정체성을가질수있는첫번째단계였다. 민주화를통해서유럽공동체에가입할수있는자격을얻었고유럽공동체가입을통해서경제적이익을확보할수있었다. 스페인은 1985년 6월에유럽공동체가입에서명하였으며 1986년 1월에유럽공동체에공식적으로가입하였다. 스페인의유럽공동체가입은스페인민주주의유연한이행과공고화에긍정적인기능을하였다는점에는의문의여지가없다. 제1의민주화와제2의민주화의물결에서고립되었던스페인이유럽공동체에가입함으로써스페인의신생민주주의를민주주의국가의초국가적연합에의해서공인받는효과가있었다. 그리스는 1962년부터유럽공동체의준회원이었다. 민주화를사실상이끌었던카라만리스 (Karamanlis) 는그리스의유럽연합가입을중요한정치적과제로추진하였다. 유럽공동체의가입을통해서그리스는미국에의의존도를줄이고터키와슬라브국가에대항하고자하였다 (Huntington 1991). 1978년 5월카리만리스는가입조약에서명하였고 1981년 1월에유럽공동체의정식구성원이되었다. 유럽연합에가입함으로써그리스는재정적이점뿐만아니라민주적이행과정을발생하는불안정성 (uncertainty) 을완화시켜민주적이행과정을안정화시키는효과를얻었다 (Papas 2013). 유럽공동체가회원들에게부여했던조건은화이트헤드 (Whitehead 1996) 가이야기한 수렴을통한민주화 (democratization through convergence) 의개념을떠오르게한다. 권위주의국가였던스페인과그리스가유럽공동체에가입함으로써민주화가촉진되었다. 3) 정당체제의제도화의수준 (party system institutionalization) 민주주의를공정하고자유로운선거를통해서정부가시민들에게책임을지는체제라고정의할

23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때핵심적인행위자는정당이다. 민주화과정에서나타나는불확실성 (uncertainty) 으로인해서정당간이해관계의조정 (coordination) 의문제가민주화와민주주의의안정적제도화에중요한변수가되는배경에된다. 따라서정당간상호작용을나타내는정당체제의제도화의수준은신생민주주의국가의민주주의의안정성에매우중요한역할을한다 (Dix 1992). 정당체제의제도화에대해서는다양한논의가존재한다. 이분야의선구적인연구를한메인워링과스컬리 (Mainwaring and Scully 1995) 는정당체제의제도화를정당체제의안정성 (stability), 사회적기반 (social roots), 정당성 (legitimacy), 정당조직 (party organization) 을중심으로측정한다. 반면에메이어 (Mair 2001,2007) 은정당간상호작용의패턴이안정화되는차원 (stability) 에초점을맞춘다. 여기서는메이어의논의를남부유럽에적용한카살 (Casal 2008) 의논의를중심으로살펴보자. 표 4 스페인과그리스정당체제의제도화 스페인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 (128) 공산당 (89) 주요정당의나이 공산주의정당 (86) 신민주당 (33) 인민당 (31) 펜헬레닉사회주의운동 (33) 소계 (81.7) 소계 (51.7) 선거유동성 ( 블럭유동성 ) 11.5 (4.3) 9.3(5.4) 불비례성 7.2 7.9 분극화지수 2.6 2.2 정당체제제도화 79.2% 83.3% 출처 : Casal (2008). 위의분석에서알수있듯이스페인과그리스의정당체제는정당체제의제도화를측정하는다양한지표에서큰차이가없이비슷한양상을나타냈다. 오히려그리스의정당체제의제도화의수준이스페인의그것보다약간높다는것을알수있다. 주요정당의나이 (age of major political parties) 를살펴보면스페인정당들이그리스정당들보다더오래되었다는것을알수있다 ( 스페인인민당은예외 ). 하지만선거유동성 (electoral volatility) 와블록유동성 (bloc volatility) 에서는두나라큰차이가없었다. 전체적인유동성은그리스가약간낮았지만블록유동성은스페인이낮았다. 선거체제의불비례성은스페인이 7.2, 그리스가 7.9로나타나크게차이가없었다. 분극화지수 (factionalization) 또한그다지차이가없었다. 메이어 (Mair) 의안정성을중심으로한정당체제의제도화개념으로두나라를비교할때두나라의지수가비슷했지만그리스의지수가스페인의지수보다약간높았다.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33 5. 차별적인요인들 위에서논의한바와같이스페인과그리스두나라에서공통적으로나타난변수들과는달리두나라에서차별적으로나타난변수들이존재한다. 이장이주목하는것은이행의양식 (mode of transition) 이다. 이행의양식은나머지차별적인변수인군부의탈정치화과정 (depoliticization of the military) 과이행기의정의 (transitional justice) 의처리문제에도중요한영향을미쳤다. 1) 군부의탈정치화 신생민주주의국가의민주적전환과정에서가장중요한행위자중의하나는제도로서군부라는데는그다지큰이견이없다. 하지만군부는내적으로통일된단일한행위자가아니다. 때로는통일된이해를가지고단일한행위자로행동하기도하였지만군내부의역학관계에따라서다양한파벌이갈등하기도했다. 이러한면에서스페인과그리스는서로달랐다. 스페인을 40여년간지배했던프랑코독재는우파의정치연합-군부, 팔랑해와카톨릭-으로구성된계급연합정권이었다. 이러한다양한세력의연합정권을유지할수있었던동력은강력한카리스마를지닌프랑코와정권이배분할수있었던공직과물질적후원이었다. 하지만프랑코는권위주의정권의안정적인승계를위한제도적절차를마련하지못한채사망하였다. 스페인군부세력은프랑코사망이전부터강경파 ( 벙커파 ) 와온건파 ( 개혁파 ) 로구분되었었다. 스페인군부내강경파와온건파는민주적이행과정에서서로다른전략을가지고지속적으로대립하였다. 군부내파벌간대립은민주화과정을주도했던수아레스정부와의역학관계속에서쿠데타미수사건 (1981년 2.23) 으로발전하였다. 쿠데타와중에서국왕이었던후안카를로스 1세는군사정부의부활에확고한반대입장을가지고쿠데타의실패에결정적인역할을하였다. 스페인의군부가벙커파와개혁파로분열되었던데에반해서그리스의군부는비교적통일성을유지해왔다. 1829년독립후그리스는 군인동맹 쿠데타를통해서친영불세력인공화파와친독세력인왕당파가대립하였다. 군부도양대세력으로나뉘어대립하였다. 공화파군부는터키와전쟁에서참패와베니젤로스쿠데타의실패로인해서정치적으로세력을상실하였다. 전세계 1차대전이후볼세비키혁명과파시즘의대두는그리스가군부권위주의독재화되는배경이되었다. 제 2차세계대전과정에서발발한좌우파간의내전은영국의절대적인지원을받는우파의승리로귀결되었다 ( 진영재 노정호 2003). 내전에서승리를통해서군부는이념적동질성을강화할수있었다. 이후군부는반공우파정권의수호자역할을해왔다. 군부와지배연합은게리멘더링과부정선거를통해서 61년선거에서압승하였다. 하지만자유주의세력인파판드레우 (Papandreou) 가이끄는자유당은여러정치세력을포괄하는중도연맹을구성하였다. 중도연맹은 64년선거에서과반수를

23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획득하여집권에성공하였다 ( 김일영 1989). 강력한영향력을행사하고있던군부의반격은 대령들의정권 (Colonels Regime) 이라는강성독재정권을출현시켰다. 그리스의민주화는그리스의사이프러스병합과터키의사이프러스침공으로촉발된국제위기로부터시작되었다. 그리스군부는스페인의경우와같이강경파와개혁파로분열되었다가보다는제도로서군부의집합적이익의유지를둘러싸고분열하였다. 군부는군부의집합적이익을유지하기위해서쿠데타를통해서정권을장악했으나강압통치와무리한사이프러스병합을통해서위기를초래한이오니데스 (Ioannides) 를해임하고카라만리스를불러들여민주화로의이행을시도하였다. 2) 역사적유산에대한처리 : 이행기의정의 (Transitional Justice) 앞서논의한대로스페인과그리스모두극심한내전을겪었다. 하지만민주화과정에서내전과그로인해서구축된오랜독재의역사적유산에대한처리방식은두나라가매우달랐다. 스페인에서프랑코독재의추종자들과주요반체제세력지도자들간에합의가가능했던역사적배경은역설적이게도프랑코독재가스페인현대사의발전을가로막았다는공유된인식이었다. 극심한내전끝에태어난 40년간의철권통치에대한역사적기억은민주적이행과정에서스페인의주요행위자들이역사적후퇴를막아야한다는최소한의합의를준수하게만드는역사적배경이되었다. 이에따라서스페인의민주화는과거의고통스러운역사적기억을다루지않음으로써성공적인처리를한사례에속한다 (Pinto 2010, 350). 스페인에비해서그리스에서역사적유산에대한처리문제는훨씬복잡했다. 그리스는민주적이행 (1974) 이후상대적으로매우짧은시기동안 (1974-1975) 그리스군부독재의지도자들과협력자들에대한처리가이루어졌다. 이러한과정은스페인과포르투갈과같은여타의남부유럽국가들에비해서매우광범위하게이루어졌다. 이과정에서군부독재에관련이있었던군부심지어는국왕까지도국내정치에서철저히배제되었다 (Sotiropoulo 2010). 이행기정의에대한비교적철저한처리에도불구하고이행기처리양식은민주적이행과정에서그리스국민들의통합에기여하지못했다. 스페인과그리스모두군부독재로부터의유산은매우컸다. 스페인이과거로부터의유산의처리에점진적이고불완전했던반면에그리스는보다급진적이고철저했다. 하지만이행기의정의에대한처리효과는역설적이었다. 스페인의시민들은군부독재과거에대한부정적인인식이광범위했다고할수없다. 하지만그리스에서사이프러스사태에서보여준군부정권의무력함은그리스대중들로하여금과거에대한부정적인기억의유산으로부터자유롭지못하게했다.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35 3) 이행의양식 (mode of transition) 스페인의민주화이행의양식의가장큰특징은엘리트협약에의한민주주의라는점이다 (Gunther 1992). 이에따라서프랑코독재로부터민주주의체제로의이행이법질서내에서점진적으로상대적으로평화적으로이루어졌다. 이러한과정은단절 (ruptura) 보다는개혁 (reforma) 의특징을나타냈다. 6 이과정의첫관문은합의의정치 (politics of consensus) 라고불리는새로운 정치개혁법 제정과정이다. 아리아스를대체하여새로이임명된수아레스가좌우의극단적인주장을제어하고중재자로서중요한역할을수행하였다 (Maravall and Santamaria 1988). 이과정에공산당과극우파정당을아우르는거의모든정치세력이참여하였다. 또한스페인사회의가장큰사회균열이었던바스크와카탈루나의자치독립문제도타협적인방식을통해서자치권을보장하는방식으로타결되었다. 국민들은 1976년 12월국민투표에서 94% 의지지를보냄으로써개혁파가압도적인승리를거두게되었다. 수아레스는민주중도동맹 (Union of Centro Democratico, UCD) 을창당하고 1936년이후 40여년만에치러진 1977년 6월자유총선거에서다수당이됨으로써개혁추진의동력을확보하였다. 선거승리를바탕으로수아레스정부는정치적으로 신헌법 의제정과사회경제적으로는몽끌로아협약 (Pactos De la Moncloa) 의제정을통해서대화와협상을통한점진적인민주화를완성시키고자하였다. 스페인스타일의협약의형성은민주주의공고화와나아가민주주의질에긍정적인영향을주었다. 이러한긍정적인기능을가능하게했던스페인협약의정치의특징은다음과같다. 먼저협약의과정에많은이해당사자들이대표들이참여하게되었다. 둘째, 이러한포괄적인협약의과정은거리의저항과불필요한쟁의행위의전략적탈동원이가능하게했다. 이를통해서엘리트간협약이성공할수있는여지가생겼던것이다. 스페인이대표적인협약에의한민주주의로분류될수있는반면에그리스는같은범주로분류하기어렵다. 오히려그리스에서이루어진민주적이행은엘리트간의수렴현상이다 (elite convergence). 터키와의전쟁에서패배로붕괴한군부정권으로부터의권력이양을위해서구성된비상협의체는파리에망명하고있던우파의지도자인카라만리스 (Constantine Karamanlis) 를불러들었다. 카라만리스는민주주의의이행과정에서결정적인역할을하였다. 그는좌 우파를합법화함으로써점진적으로민주적으로이행하는전략을취했다. 군부정권에의해서불법화되었던공산당 (KKE) 을합법화시켰으며중도우파정당인신민주당 (Nea Dimokaratia, ND). 스페인에서각이해당사자들간의협약이안정적인민주화과정에서중요한역할을했던것에반해서그리스민주화과정에서는유명인들의전략적인역할 (strategic role of personalities) 이매우중요했던것이다. 엘리트간협약은민주주의이행과공고화에필요한사전조건이라고할수는없다. 왜냐하면스페 6 관련된논의로서대표적인학자는린츠 (Linz 1978) 이있다. 일부학자는협약에의한민주화를 거래에의한민주화 로보기도한다 (Share 1985).

23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인과그리스모두에서민주주의로의이행이가능했으며두나라민주주의모두장시간존속했기때문이다. 하지만엘리트간협약에의한민주적이행의양식은민주주의의질에장기적으로긍정적인영향을미쳤다고평가할수있다. 특히스페인과같이좌우간갈등이극심했고중앙과지방의갈등또한존재했던사회에서정치엘리트간전략적협약은분열적으로나아갈수있었던사회를안정화시키는데기여했다. 7 6. 스페인민주주의와그리스민주주의가직면한도전들 스페인민주주의는 1982년총선을통해서정권이사회주의반대파들에게정권이평화롭게이양되었다. 그리스에서는 1981년선거를통해서사회당이집권에성공하였다. 이로서모든주요행위자들이민주주의의가치와규칙을수용한다는의미에서민주주의는유일한게임이되었다. 다수의학자들이스페인과그리스민주주의가사회주의정권의출현과함께공고화를달성했다고평가했다. 그렇다면스페인과그리스의민주주의가붕괴되거나결정적인위기에직면할가능성이있느냐? 쉐보르스키와리몽기 (Przeworski and Limongi 1997, 165) 는일인당 GDP가 $6,005 도달한민주주의국가가붕괴할가능성은거의없다고주장하였다. 스페인은 1986년에일인당 GDP $6,000($6504.072) 를달성하였다. 그리스도비슷한시기인 1987년에일인당 GDP $6,000를달성하였다 ($6564.88). 만약에쉐보르스키와리몽기의주장이맞는다면두나라민주주의가가까운장래에위기에직면한가능성은매우낮다고할수있다. 하지만스페인민주주의와그리스민주주의는중대한내부적도전과외부적도전에직면하고있다. 스페인민주화과정에서존재했던어려운이슈중의하나는다원적정체성을가진스페인에서카탈로니아와바스크의민족주의문제를처리하는국가성 (stateness) 의문제였다. 스페인은새로운민주헌법을국민투표 (1978년 12월 6일 ) 와바스크와카탈린지역의자치를위한국민투표 (1979년 10월 25일 ) 를통해서국가성의문제를큰충돌없이해결했다. 하지만국가성의문제는여전히스페인민주주의뇌관이다. 특히바르셀로나를주도로삼고있는카탈루냐는최근에는분리독립의움직임을더욱본격화하고있다. 8 카탈루나분리독립을지지하는정당들은 2015년 9월지방선거에 7 하지만, 엘리트간협약에의한민주적이행의부정적인영향을지적하는논의도다수존재한다. 오도넬과슈미터 (O Donell and Schmitter 1986, 38) 는협약은비민주적인수단을통해서민주화를달성한다는점을지적하였다. 협약에의한민주주의는소수의이해당사자만을대표하여경쟁성을약화시켜며책임성을제한한다. 따라서정책적아젠다를통제하며시민들의평등성의원칙을왜곡할수있다는것이다. 8 카탈루냐지역은면적은스페인전체의 6.3% 를차지하고있지만인구는 750만명으로서전체인구의 16.1% 를차지하고있다. 지역총생산은스페인전체국내총생산의 19.8% 에해당하는 2090유로에달한다. 카탈루냐지역은스페인어와카탈루냐어를공용어로사용하고있다.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37 서전체의석 135석중에서 72석을차지해과반을확보하였다. 또한카탈루나주의회는 2017년까지공화국형태의독립국을건설하겠다는결의안을통과시켰다 (2015년 11월 8일 ). 영국의스코틀랜드분리독립움직임을비롯한유럽지역에불고있는분리독립움직임은다원적정체성을가진스페인민주주의의원심력으로작용할것이다. 민주화과정에서국가성의문제를잘처리했던스페인민주주의가경제적이익을바탕으로불고있는분리독립의원심력을어떻게극복하느냐가스페인의장래에중요한영향을미칠것이다. 반면에그리스민주주의당면하고있는가장중요한도전은경제위기이다. 2008년세계경제위기가유럽을강타했을때그리스가첫번째희생양이었다. 경제위기속에서정부부채가급증했던그리스는결국 2010년 5월 7일국제통화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 에구제금융을신청하였다. 그리스경제는치솟는물가와 25% 에달하는실업률 ( 젊은층실업률은 55% 에달함 ) 로나타나듯이극심한경제위기에빠져들었다. 이후유럽연합과는재정긴축정책을위한지루한협상이지속되었고그리스는유럽연합의탈퇴를위한국민투표를공언하기도하였다. 2012년 2월에 2차구제금융협상을비준하였다. 경제적혼란의와중에 2012년이후정치적으로부상했던급진좌파연합 (SYRIZA) 이 2015년 1월치러진총선에서그리스역사상최초로집권에성공하였다. 하지만그리스의경제적위기는해소되지않고지속되고있다. < 그림 4> 는그리스와스페인의국내총생산대비정부부채비율의변화양상을나타내고있다. 그림에서나타나듯이그리스의정부부채는지속적으로악화되고있고개선되지않았다. 그리스의위기는그리스민주주의의특성으로부터내재되어있었다. 그리스는파판드레우가이끌었던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 (PASOK) 이 1981년집권이후포풀리스트적인민주주의를발전시켜왔다. 포풀리스트적인민주주의의성격을갖는그리스민주주의의특징은그리스스타일의정치적후원관계이다. 그리스는정치적후원관계에서일반적으로나타나는물질적인후원뿐만아니라시장의위험으로부터특권화된보호 (privilege protection) 와법적인처벌에서면제되는그리스스타일의후원관계를발전시켜왔다 (Papas 2013). 그리스민주주의가직면한가장중요한도전은경제적위기를잉태한그리스스타일민주주의특성이다. 7. 나가며 스페인과그리스는제삼의물결의민주화를이끌었던남부유럽의대표적인국가들이다. 스페인과그리스모두극심한내전을겪었다. 또한비슷한수준의제도화된정당체제를발전시켰다. 두나라모두민주화과정에서유럽공동체에가입함으로써민주화를촉진시켰다. 하지만스페인과그리스의민주주의이행의양식은뚜렷이구별되었다. 스페인은민주화과정에서다수의주요행위자

23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들이이해관계자가되었고민주적이행과정은협약에의해서평화적으로이루어졌다. 하지만그리스의민주주의이행과정은사이프러스사태로인해서촉발된외부로부터의위기에의해서촉발되었다. 그리스의이행은비위계적인군부에의해서내부로부터의대체과정으로이루어졌다. 이과정에서카라만리스가결정적인역할을하였다. 즉그리스에서민주화과정은스페인의몽클로아협약과같이다수의중요행위자들이이해당사자가되는과정을겪지못했다. 민주화제도화과정에서다수의행위자가이해당사자가되었던사회적협약의역사는이후스페인민주주의가상대적으로안정적으로발전하는데중요한요인이되었다. 그림 4 국내총생산 (GDP) 대비정부부채비율 출처 : OECD (https://data.oecd.org/gga/general-government-debt.htm)

남부유럽의민주주의의발전 - 스페인과그리스비교연구 239 참고문헌 김일영. 1988. 그리스에있어서정치체제의변동과민주화의전망. 사회과학. 제27권, 제2호. 성균관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pp. 95-127. 진영재. 노정호. 2003. 남부유럽의정치변동- 근대화전환과정의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을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43(1), pp. 431-452. 홍익표. 1998. 남유럽의민주주의이행과공고화 :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비교. 국제지역연구. 제2권, 제4호. 한국외국어대학교국제지역연구센터. pp. 67-92 Bermeo, N..1992. Democracy and the lessons of dictatorship. Comparative Politics 24 (3), 3:273 291. Casal Fernado. 2008. Source of Party System Institutionalization-Lessons from Southern Europe, Paper presented 58th Annual Meeting of Political Science Assocaition, UK. Dix Robert. 1992. Democratization and the Institutionalization of Latin American Political Parties.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24(4): 488-511. Eastern David. 1975. A Re-Assessment of the Concept of Political Support. British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5(4): 435-457. Huntington Samuel P.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Laurence Whitehead, 1996. Democracy by Convergence: Southern Europe in Laurence Whitehead (ed.), The International Dimensions of Democratization, Europe and the America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61 84. Linz, Juan. 1978. The Breakdown of Democratic Regimes: Crisis, Breakdown, and Re-equilibration.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Linz, Juan and Stepan, Afred. 1996. Problems of Democratic Transition and Consolidation.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Baltimore. Norris Pippa. 1999. Critical Citizens: Global Support for Democratic Govern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rzeworski, Adam and Henry Teune, 1970. The Logic of Comparative Social Inquiry. New York: Wiley. Przeworski, Adam and Fernando Limongi. 1997. Modernization: Theories and Facts. World Politics 49(2): 155-183 O Donell Guillermo. 1986. Transitions from Authoritarian Rule: Comparative Perspectives.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Pappas Takis S. 2013. Why Greece Failed. Journal of Democracy 24(2): 31-45. Share, Donald. 1987. Transitions to Democracy and Transition through Transaction.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19 (January): 525-548.

24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안용흔 ( 대구가톨릭대 ) 1. 들어가며 1979년에콰도르의권위주의정권이와해되고새로이민주적인정권이들어서는것을필두로 1 라틴아메리카와아시아지역에서강고하게유지되어왔던다수의권위주의정권은 제 3의물결 (Third Wave) 이라는거대한정치적변혁앞에서민주주의정권으로의민주화이행의길을걷게되었다 (Huntington 1993). 이들민주화이행국가의민주적정치 사회세력들앞에놓인중차대한정치적과제는권위주의정권하에서금지되었던민주적선거과정의단순한복원이아니라, 권위주의정권의오랜정치및경제적억압에의해억눌러왔던민주적변화의다양한요구를여하히민주적제도틀안으로흡수하여민주주의체제를안착, 공고화시켜나가느냐이었다. 1920-30년대권위주의정권의퇴진에이은민주주의정권의수립, 1950-70년대군부권위주의세력의재등장, 그리고 1980년대의재민주화 (redemocratization) 라는이들국가가경험한굴곡의역사는민주주의정권이와해되지않고정치적으로생존케하는, 소위민주주의정권을공고화하는것 2 이얼마나험난한것인지를경험적으로보여주고있다 (Schedler 1998, 94-95). 본연구는 1980년대재민주화이후라틴아메리카국가가경험하게되는민주주의공고화를비교, 검토하려한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대표적인국가라고할수있는아르헨티나, 브라질, 그리고칠레에있어서이들국가가과거권위주의정권으로부터물려받았거나혹은민주화과정중채택한상이한정치제도와그정치제도적배열을비교하려한다. 나아가이러한차별적인정치제도적배열 1 에콰도르에이어 1980년페루, 1982년볼리비아, 1983년아르헨티나와태국그리고터키, 1984년엘살바도르와니카라과, 1985년브라질과우루과이, 1986년과테말라와온두라스그리고필리핀, 1988년한국, 그리고 1989년칠레와파나마그리고스리랑카가민주화이행의정치적격변을경험하게되었다. 민주화이행시점에대한판단은학자들마다다소간차이를보이는데, 이연구논문에서는체이법 (J. Cheibub) 의것을따랐다. 노리스 (P. Norris) 교수의홈페이지 (http://ksghome.harvard.edu/~pnorris/data/data.htm( 검색일 : 2016년 8월15일 ) 에서이에대한체이법의자료는구할수있다. 2 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논의에서강조되는논점은, 민주주의정권의정치적생존이 1 민주주의적가치를일반대중들에게확산시키는것과함께 2 정당이라는대의민주주의적정치조직이의회라는민주주의적제도안에서이들의다양한이해와요구를원활하게표출, 집산, 조정하여정책적균형점을구축하고, 이를통해 4 대중으로부터통치의정당성을안정적으로확보하는것에달려있다는것이다 (Schedler 1998, 95-96).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41 하에서대의민주주의의핵심적인정치행위자인정당간의경쟁구도가이들세국가에서어떻게상이하게전개, 변화해나가는지를추적해보려하며, 정당간경쟁구도의국가간편차가이들국가의민주주의공고화에여하한정치적효과를발휘하는지를다양한지표를활용하여검토, 평가하려한다. 이글의구성은다음과같다. 이어지는 민주화이행과정치제도적유산 부분에서는세국가의민주화에서나타나는일반적인특징을알아보고, 민주화과정에서지난정권으로부터물려받았거나혹은민주화이후새로이채택한정치제도, 특히정부형태와대통령및의회선거제도의유형은무엇이었는지를살펴보려한다. 정당경쟁구도와정당체제의변화, 그리고민주주의공고화 부분에서는유산으로물러받았거나혹은제도개혁을통해채택된상이한정치제도적틀안에서펼쳐지는정당간의경쟁이어떻게전개되는지에연구의관심을기울이려한다. 그리하여궁극적으로정당간의경쟁과이를통해변화하는정당체제가이후이들국가의민주주의공고화에여하한기여를하는지를규명하고평가할것이다. 2. 민주화이행과정치제도적유산 1) 세국가의민주화이행이전시기의정치 경제상황 민주화의격변이이루어진 1980년대시기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경제상태는공통적으로경제성장의둔화와인플레이션율의상승으로요약된다. 이와같은경제상황은민주화요구를분출시키는촉매제로서작용하게된다. 논문은이들세국가의경제상황을경제성장률과인플레이션율이라는두가지경제지표를활용하여살펴보려한다.

24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그래프 1 아르헨티나의민주화이행이전시기의정치경제상황 출처 :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http://data.worldbank.org/data-catalog/world-development-indicators 해당년도경제성장률, 인플레이션율 ). Banks, Arthur S., and Wilson, Kenneth A. 2013. Cross-National Time-Series Data Archive. Databanks International ( 해당년도반정부시위 ). < 그래프 1> 이나타냈듯이, 1980년직전시기의아르헨티나경제는경제성장률이 10.2% 에이를정도로호의적이었다. 경제의적신호는 1980년경제성장률이전년도 10.2% 에훨씬못미치는 4.2% 를기록하면서켜지기시작했다. 1970년대후반의제 2차석유파동위기의여파가여타개발도상국가에서처럼아르헨티나경제를흔들었다. 마침내경제성장률이 5.7% 와 5.0% 로추락하면서, 아르헨티나경제는마이너스경제성장을하게되었다. 이뿐만아니라, 1982년을기점으로인플레이션율은 100% 를넘어서게된다. 경제상황의악화는아르헨티나권위주의정부에정치적위기를몰고왔다. 1981년을기점으로반정부시위는폭발하기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영국과펼쳤던포크랜드전쟁에서아르헨티나는패배하게된다.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43 그래프 2 브라질의민주화이행이전시기의정치경제상황 출처 :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http://data.worldbank.org/data-catalog/world-development-indicators 해당년도경제성장률, 인플레이션율 ). Banks, Arthur S., and Wilson, Kenneth A. 2013. Cross-National Time-Series Data Archive. Databanks International ( 해당년도반정부시위 ). < 그래프 2> 는브라질또한여타대다수의개발도상국처럼 1980년대초반들어서서저조한경제성장을보였다는사실을보여준다. 1981년의 9.1% 를정점으로브라질의경제성장률은 4.4% 로급락하게된다. 특히심각한것은인플레이션율이었다. 100% 에이르던인플레이션율은더욱악화되어 1984년에와서는 200% 를넘어서게되었다. 이러한경제상황에서치러진 1982년의회선거는분기점이되었다. 친정부적인민주사회당 (Democratic Social Party: PDS) 는비록 43.22% 의득표를했지만전체의석 479석에서 235석을확보하는바람에과반의석을상실하게되었다. 다른한편열악한선거환경속에서야당인브라질민주운동당 (Brazilian Democratic Movement Party: PMDB) 은 42.96% 의득표를거둠으로써사실상의선거승리를획득했다. 1984년의반정부시위가웅변해주듯이, 1982년선거를기점으로억눌렸던브라질민주화의요구가분출되기시작했던것이다.

24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그래프 3 칠레의민주화이행이전시기의정치경제상황 출처 :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http://data.worldbank.org/data-catalog/world-development-indicators 해당년도경제성장률, 인플레이션율 ). Banks, Arthur S., and Wilson, Kenneth A. 2013. Cross-National Time-Series Data Archive. Databanks International ( 해당년도반정부시위 ). < 그래프 3> 이보여주듯이, 칠레도 1980년대초반에는경제성장율이하락하기는했지만, 전자의두국가와는달리그이후에는꾸준한경제성장을보였다. 특히인플레이션율지표에있어서는아르헨티나와브라질과대조를보인다. 아르헨티나와브라질의인플레이션수치가 100% 와 200% 를넘나드는상황이전개된반면, 칠레는이시기평균 20.9% 의상대적으로매우안정적인인플레이션율을유지하고있었다. 아르헨티나와브라질에비해상대적으로안정적인경제상태에놓여있었음에도불구하고, 1982년의마이너스경제성장은권위주의적인피노체트정부에대한반정부시위로이어졌다. 칠레경제에서주목할부분은피노체트대통령의임기연장여부를묻는국민투표가실시되었던 1988년도이전인 1986년과 1987년이전시기의경제성장증감율이그전년도에비해상대적으로둔화되고있었다는점이다. 피노체트권위주의정부가견인해왔던경젱성장의거품이꺼지기시작했다고하겠다.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45 2) 민주화시기의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정치제도 (1) 아르헨티나의민주화시기정치제도 1983년민주주의체제로의이행이이루어지기이전의아르헨티나의정치제도는기본적으로 1957 년헌법을 1972년일부수정한개정헌법에기반을두고있었다. 1972년개정헌법의모태가되는 1957년헌법은 1955년쿠데타에의해페론정부를와해시킨군사정부에의해서만들어졌다. 군사정부의지도자인아람부루 (Pedro Aramburu) 장군은제헌의회선거를통해대표자를선출하여제헌의회를구성하였고, 1957년제헌의회는페론정부가만든 1949년헌법 3 의폐기와함께이전헌법인 1853년헌법의복원을선언했다. 1853년헌법으로의복원은대통령의연이은재선출마기회를불허하는것을의미했다. 또한하원의원선거제도로비례대표제를도입했다. 비례대표제도입의정치적계산은페론주의자들의정치적영향력확대를저지하는데에맞추어져있었다 (Nohlen 2005b, 61). 군사정부는페론주의자들의정의당 (Justialist Party: PJ) 이다수지배정당으로서정치적지위를누릴수있었던것은정의당과급진시민연대 (Radical Civic Union: UCR) 두정당이경쟁하는양당구도에기인한다고보았다. 따라서비례대표제를도입하여양당제의정당체제가다당제로전환하게되면, 정의당이다수지배정당이되기가힘들어질것으로예상했던것이다. 민주화조치후첫번째로실시된 1983년의총선거는기본적으로 1957년헌법에의해서복원된 1853년헌법에규정한선거제도하에서치러졌다. 단순다수제 (plurality system) 에의한선거인단 (electoral college) 제도에의해서임기 6년의대통령이선출되었고, 주단위의선거구에서동트 (D Hondt) 방식의정당명부식비례대표제 (party-lis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system) 로임기 4 년의하원의원을선출했다. 1853년헌법에뿌리를둔이러한기본적인정치체계는 1994년변화를맞이한다. 1994년의헌법개정을요구하는정치세력이제기한핵심적인쟁점은대통령의연이은재선출마기회를허용하느냐에관한것이었다. 정의당 (PJ) 의메넴 (Carlos Menem) 대통령과정의당지지자들은 1991년하원선거에서보다 11석이더많은 127석을획득한 11993년하원의원선거결과에힘입어현직대통령의재선금지조항을수정하려했다 (Nelson 1993, 286). 대통령의연이은출마를금지하고있는 77조항을폐지하려는헌법개정시도에대한비판은정치권은물론이고, 언론, 종교계, 그리고심지어집권정부내에서도제기되었다. 3 1853년헌법을폐기하고 1949년페론정부가새로이제정한 1949헌법의핵심적인내용은대통령재선금지조항의폐기이다. 대통령의연이은재선을금지했던 1853년의헌법조항을폐지하고대통령의무제한재선을허용했다. 비록개헌과정중페론은재선출마에나서지않겠다고공언하기는했지만, 궁극적으로 1949년헌법은페론대통령의재선도전의 길을열어주었다 (Ilsley 1952, 226). 실제, 1949 년헌법개정덕택에, 페론대통령은 1952 년재선에출마할수있었으며, 재선에성공한다.

24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헌법개정의실마리는급진시민연대 (UCR) 의지도자인알폰신 (R. Alfonsín) 전대통령의입장변화에서시작되었으며, 이후급진시민연대는정의당의헌법개정시도에지지표를보낸다는내용의메넴 (C. Menem) 과알폰신 (R. Alfonsín) 간의올리보스협약 (Olivos Pact) 을통해완성되었다. 1995 년총선거에서의대패가예상되는상황에서급진시민연대가직면하고있는문제, 즉당내분열과급진시민연대의추락을해결할수있는방법은정의당이장악하게될것으로점쳐지는행정부의수장자리인대통령의권한을축소시키는것이었다 (Nelson 1993, 287-288). 그리하여알폰신 (R. Alfonsín) 은대통령의임기를 6년에서 4년으로축소하고세금과선거및정당관련이슈에있어서대통령의행정결정 (executive decree) 권한을제한하는것을대가로메넴의헌법개정을지지해주었다. 또한대통령을선출하는데에있어서도선거인단에의한간접선출방식을전체유권자에의한직접선출방식으로개정하고, 45% 이상의표를얻은후보가없거나또는 1위와 2위의득표율의차이가 10% 미만이면결선투표제 (run-off system) 를실시하는방식으로대통령선거제도를개혁하게된다 (Nohlen 2005b). (2) 브라질의민주화시기정치제도 민주화이전의브라질의정치체계는 1964년브라질경제의근본질서를개혁하려던굴라 (João Goulat) 정부를쿠데타를통해무너뜨린군사정부에의해제정된 1967년헌법체계에기반을두었다. 1967년헌법은의사표현, 집회시위에관한개인의기본자유권을제한했으며, 대통령의판사임명과해임권한을강화시켜사법부를행정부의통제하에두게만들었다. 또한유권자가직접대통령과주지사를선출하는방식에서연방의회와주의회에서선출하는간접선거방식의대통령과주지사선출방법이채택되었다. 4 앞에서지적했듯이, 1982년의회선거에서야권진영이보인선거결과는브라질정치에새로운변화의밑거름이되었다. 승기를잡은야권진영의대통령직선제로의개혁요구에도불구하고, 간접선거로치러진 1985년의대통령선거에서야권후보네베스 (Tancredo Neves) 의승리 5 는브라질을민주화로의긴장정에접어들게했다. 민주화과정속에서 1988년헌법은제정되었다. 1988년헌법은기본적으로국가의권한을제한하고모든유형의개인의권리를확대하는데에목적을두었다. 예를들어, 1988년헌법은국가기관의개인정보접근행위를금지해고시민의자유와권리침해행위에대해중형을부과하기로했으며, 국민투표 (plebiscite) 를도입했다. 6 그리고마침내문맹자에게도참정권을부여하기도했다. 4 군사정부는 1969년에 1967년헌법을개정하지만, 1969년헌법역시대통령에게의회를해산할수있는권한과같은입법부에대한강력한권력을행사할수있게하는등권위주의적성격을지닌것이었다. 5 대통령취임전네베스 (T. Neves) 는병사하여그의대통령직위는부통령인사니 (Jóse Sarney) 에게로승계된다. 6 1988년헌법은 http://pdba.georgetown.edu/constitutions/brazil/brazil88.html ( 검색일자 : 2016년 8월25일 ) 에서구할수있다.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47 1988년헌법은대통령선출에관한선거제도를이전의간접선거방식의단순다수제에서브라질유권자의직접선거방식의결선투표제로변경했다. 단순히최다득표자가아니라과반득표를획득한대통령후보를대통령당선자로정했다. 과반득표를한후보가 1차선거에서나오지않으면, 최다득표를한 2명의후보를대상으로 2차선거를치르도록한것이다. 새헌법에는현직대통령의차기대선출마를금지하는조항이삽입되었다. 하원의원은전면공개명부식비례대표제 (open-lis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system) 7 를통해서선출하게되었으며, 선거구제는중대선거구제를채택하도록규정했다. 다른한편, 상원의원은단순다수제에의해서선출하도록했다. 1988년헌법은 1996년에개정된다. 1996년개정된헌법에서는대통령의재선출마를허용하는방향으로수정되었으며, 1997년 6월헌법개정안은의회에서통과되었다. (3) 칠레의민주화시기정치제도 칠레의민주주의적헌법의모태가되는 1925년헌법 8 은 1973년군사쿠데타를통해아엔데 (Salvador Allende) 정부를무너뜨린피노체트 (Augusto Pinochet) 군사정부가추진한 1980년입헌국민투표 (constitutional referendum) 를통해개정되었다. 9 1980년개정헌법에서주목할부분은피노체트 (A. Pinochet) 대통령에게 8년의통치임기를허용해주었으며, 대통령에게강력한권한을부여했다는것이다. 예를들어, 32조항은대통령이의회를해산할수있도록했다. 또한 1980년개정헌법에서는대통령을선출하는대통령선거제도로결선투표제를채택되었으며 (Nohlen 2005b, 254), 하원의원을선출하는의회선거제도로공개명부식비례대표제 (open-lis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system) 의변형인이명체계 (binomial system) 10 가도입되었다 (Siavelis 1997, 653-654). 11 그리고대통령선거와의회선거를분리해서실시하는방향으로헌법 7 게디스 (B. Geddes) 와네토 (A. Neto) 는공개명부식비례대표제가브라질정당의정당규율을약화시켰으며, 이로인해브라질의대통령은법률제정시소속의원들의지지를이끌어내기위한수단으로정당규율에의존하지못하고정치자금을활용할수밖에없었다는점을강조한다. 이는결국브라질대통령으로하여금막대한정치자금의마련을위해기업과의불법정치자금거래라는정치부패의고리에빠지도록작용했다는것이다 (Geddes and Neto 1992). 8 자유주의세력의등장에반대하는보수세력의군사쿠데타에대해비판적인군부내진보세력은또다른쿠데타를통해축출되었던자유주의연대의알레산드리 (A. Alessandri Palma) 를대통령직에복귀시킨다. 쿠데타에성공한이들세력은 1925년새헌법을제정하여새로운정치체제를구축하게된다. 새헌법은우선종교와정치를분리했다. 또한대통령을의회가아닌국민들에의한선거에의해선출하도록했다. 하지만국민투표에서과반득표를획득한후보가없으면, 의회에서상위득표자 2인을대상으로 2차결선투표를하도록했다. 그리고대통령의임기를 5년에서 6년으로확대했다. 다음의웹사이트 (http://www.sudd.ch/event.php?lang=en&id=cl011925 ( 검색일자 : 2016 년 9 월 15 일 ) 에서칠레의 1925 년헌법의특징에대한정보를구할수있다. 9 1980년개정된헌법에대한자료는죠지타운대학교의라틴아메리카연구센터 (Center of Latin American Studies) 에서운영하는아메리카정치데이터베이스 (Political Database of Americas) 의웹사이트 (http://pdba.georgetown.edu/constitutions/chile/chile89.html ( 검색일자 : 2016년 9월15일 ) 에서구할수있다. 10 칠레의이명체계의선거제도는선거연대블록을구성하는과정에서정당들간의협상정치를활성화하는데에기여한것으로평가받고있다 (Siavelis 1997, 668-669). 11 1925년헌법에서정하고있는대통령의임기가 6년인부분과현직대통령의다음대통령선거에참여하는것을금지한

24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이개정되었다. 이명체계의선거제도에서각정당들은각자 2명의후보자의명부를작성하여제출할수도있고, 아니면타정당과의선거연대블록 (electoral alliance bloc) 을형성하여해당선거구에후보리스트를낼수있다. 유권자들은정당의후보리스트혹은선거블록의후보리스트를보고선호하는후보에게투표하게된다. 승자는해당선거구에서이렇게얻어진각각의선거연대블록의총득표수를토대로정한다. 예를들어, 만약가장많이득표를한선거연대블록의총득표수가다른여타선거블록의총득표수보다 2배이상많거나선거블록의총득표수가해당선거구의총득표수의 2/3를넘는다면, 그선거연대블록의두후보가해당선거구의하원의원으로선출된다. 하지만가장많은득표를한선거연대블록의총득표수가다른선거연대블록의총득표수보다 2배이상많지않거나, 총득표수의 2/3을넘지못한다면, 총득표수가큰두개의선거연대블록에서각각득표를많이한후보자가승자가된다. 민주화의물결속에서 1980년헌법은몇번의개정에의해수정되었다. 첫번째개정은 1989년에이루어졌다. 1989년의개정헌법에서는비상계엄령사용에대해제한을두었을뿐아니라, 정치적다원주의를확인했다는점, 그리고정치참여와민주적근본원리를강화시켰다는점에서칠레민주화의흐름을수용하려했다고할수있다. 두번째개정은 2005년에이루어졌는데, 2005년개정된헌법은우선대통령의임기를 4년으로단축했고, 무엇보다도특히국가안전이사회 (National Security Council) 를대통령의자문기구로전환시켰을뿐아니라대통령에게군사령관을해임할수있는권한을부여해줌으로써군부의영향력을축소시켰다는점에서칠레의정치체제를민주주의체제로도약시킨헌법으로평가받는다. 3. 정당경쟁구도와정당체제의변화, 그리고민주주의공고화 1) 세국가의정당간경쟁과정당체제의변화 (1) 아르헨티나에서의정당간경쟁과정당체제민주화와함께치러진 1983년총선거에서 ( 민중 ) 급진시민연대 (UCRP) 는알폰신을대통령후보로내세워정의당의루더 (Italo Luder) 후보를누르고승리했으며, 하원의원선거에서도전체 254석의 50.8% 에해당하는 129석을획득했다. 반면정의당은 43.7% 인 111석을획득하는데머물렀다. ( 민중 ) 급진시민연대 (UCRP) 는 1985년과 1987년연이어이루어진의회선거에서정의당을누르고승리 부분에는수정을가하지않았다.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49 한다. 정의당 (PJ) 의부활은대통령선거와의회선거가함께치러진 1989년총선거에서이루어진다. 정의당 (PJ) 의메넴은 ( 민중 ) 급진시민연대의엔젤로스 (E. Angeloz) 를누르고대통령으로당선된다. 또한하원의원선거에서는급진시민연대 (UCR) 가 90석의의석획득에머무른반면, 정의당 (PJ) 은 120석의의석을획득했다. 현직대통령의재선도전을금지했던조항을삭제한 1994년개정헌법덕분에대통령재선에도전했던메넴은 1995년대통령선거에서승리하며, 정의당 (PJ) 또한급진시민연대 (UCR) 를누르고 1991년하원의원선거에서 116석, 1993년에는 127석, 그리고 1995년에 131석의의석을확보함으로써제1당의정치적지위를유지해나갔다. 1997년하원의원선거는국가연대전선 ((Front for a Country in Solidarity: FREPASO) 라는정당의절반의성공과함께아르헨티나정당체제의변화를예고했다. 메넴의신자유주의정책을반대하는알바레즈 (C. Álvarez) 를중심으로하는정의당 (PJ) 내진보주의세력이 1993년결성한대전선 (Great Front: FG) 을모태로여타좌파세력이결집된프레파소 (FrePaSo) 가 1994년결성되었다. 프레파소 (FrePaSo) 는 1995년하원의원선거에서제 3 정당으로의부상이라는의미있는선거결과를이룩하게되며, 1997년에는급진시민연대 (UCR) 와연합하여 노동, 정의, 그리고교육을위한연대 (Alliance for Work, Justice, and Education) 이라는정당연합을통해정의당의 99석보다 20석이나많은 119석의의석을확보하여제 1 당으로부상하게된다. 마침내 1999년총선거에서 노동, 정의, 그리고교육을위한연대 는급진시민연대 (UCR) 의루아 (Fernando Lúa) 를대통령후보로, 그리고프레파소 (FrePaSo) 의알바레즈 (C. Álvarez) 를부통령후보로내세워승리하기에이른다. 하지만이정당연합은뇌물수수로알바레즈 (C. Álvarez) 부통령이사임하는데이어 2001년경제위기와 12월폭동 (December Riots) 12 으로루아 (F. Lúa) 대통령이대통령직을사임하면서운명을맞이하게된다. 2001년급진시민연대 (UCR) 의루아 (F. Lúa) 대통령의사임이후, 급진시민연대 (UCR) 는정치적분열의시기를경험하게된다. 급진시민연대 (URI) 를탈당하여카리오 (Elisa Carrió) 의원이중도좌파성향의평등공화국지지 (Support for Egalitarian Republic: ARI) 라는정당을세우며, 또한루아 (F. Lúa) 정부시절경제부장관을역임했던머피 (Ricardo Lopéz Murphy) 가우파성향의 성장을위한재탄생 (Recreate for Growth: Recrear) 이라는정당을창당한다. 2003년총선거는급진시민연대 (UCR) 의완패와정의당 (PJ) 의압승으로정리될수있다. 급진시민연대 (UCR) 는독자적인대통령후보를내지도못했던반면, 정의당 (PJ) 에서는너무많은후보자간의후보경쟁이전개되었다. 비록대통령선거뿐아니라하원의원선거모두에서완승을하기는했지만, 대통령선거에서정의당내후보자간경쟁이너무치열하게전개되어서정의당후보들은정의 12 12월폭동은당시경제위기와이에대한정부의타개책으로서시행했던예금인출제한조치에대한중산층의저항으로시작되었다.

25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당후보로서가아니라각자자신의선거연대조직의후보로출마하는상황을연출했다. 13 2003년대통령선거에서전개되었던후보중심의선거연대조직간선거경쟁은 2005년의회선거에서도나타났다. 커취너 (N. Kirchner) 대통령은승리전선 (FV) 이라는정의당 (PJ) 내자신의파벌을중심으로다양한정치세력과연대하여이를선거연대정당조직으로전환했다. 그리하여승리전선 (FV) 은독자적인하원의원후보를내어정의당 (PJ) 후보와선거경쟁을벌였다. 급진시민연대 (UCR) 와정의당 (PJ) 은각각 19석과 11석을얻는데에머물렀던반면, 커취너 (N. Kirchner) 의승리전선 (FV) 은 127석을선출하는데에서 69석을획득할정도로대승을거두었다. 승리전선 (FV) 은 2007년총선거에서도대통령선거를비롯하여하원의회선거모두승리를거두었다. 승리전선의대통령후보인커취너 (N. Kirchner) 전대통령의영부인인크리스티나커취너 (Christina Fernández Kirchner) 가대통령으로당선되었고, 127석의하원의석중 78석을획득했다. 살펴보았듯이, 아르헨티나의정당체제는급진시민연대와정의당이라는두주요정당과함께이들정당으로부터분열되어나온프레파소 (FrePaSo), 평등공화국지지 (ARI), 재탄생 (Recrear) 과같은정당, 그리고소정당중심의다양한선거연대정당들로구성되어변화해오고있다. < 그래프 4> 가보여주듯이, 14 아르헨티나정당체제는정의당 (PJ) 내중도좌파성향의알바레즈 (C. Álvarez) 를중심으로프레파소 (FrePaSo) 가결성되었던 1990년대초반, 급진시민연대 (UCR) 을탈당한세력들에의해평등공화국지지 (ARI) 와재탄생 (Recrear) 이창당되었던 2000년대초반, 그리고승리전선 (FV) 과같은정의당 (PJ) 내파벌이선거연대정당조직으로전환했던 2000년대중반시점에주목할만한변화를겪었다는것을알수있다. 그래프 4 민주화이후아르헨티나의정당체제변화 출처 : Nohlen 2005b. 13 메넴 (C. Menem) 전대통령은충성전선 (Front for Loyalty), 커취너 (Nestor Kirchner) 산타쿠르즈주주지사는승리전선 (Front for Victory: FV), 그리고사애 (Adolfo Rodreguez Saa) 샌루이스주전주지사는민중운동전선 (Front of Popular Movement) 라는자신들의선거연대조직후보로출마했다. 하지만의회선거에서는이들개별선거연대조직에의한 선거경쟁이이루어지지는않았다. 14 민주화이후아르헨티나정당들의득표율과의석율을중심으로선거정당수와의회정당수을계산하여나타냈다.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51 (2) 브라질에서의정당간경쟁과정당체제 브라질에서의자유화의바람은 1979년출범한피궤레도 (João Figueiredo) 정부에의해시작되었다. 피궤레도 (J. Figueiredo) 대통령은인위적인양당체제에서보다자유로운다당체제로의전환을허용했다. 친위정당인민족부흥연대 (ARENA) 를해산했으며, 새로운정당이출현하도록했다. 민주사회당 (Democratic Social Party: PDS) 은 1979년해산된민족부흥연대 (ARENA) 의후신으로 1980년에창당되었다. 다른한편, 브라질민주운동당 (Brazilian Democratic Movement Party: PMDB) 는브라질민주운동 (MDB) 을이어받아보수에서진보세력을망라한다양한정치세력을규합하여 1981년창당되었다. 두정당외에도좌파진보성향의민주노동당 (Democratic Labor Party: PDT), 중도우파성향의브라질노동당 (Brazilian Labor Party: PBL) 15, 그리고마르크시트, 가톨릭공동체활동가, 온건한지식인들, 그리고노조운동지도자들로구성된노동자당 (Worker s Party: P T) 16 이이러한자유화바람속에서창당되었다. 피궤레도 (J. Figueiredo) 정부의점진적인정치적인자유화조치는야권진영의대통령직선제요구에도불구하고간선제에의해치러진 1985년대통령선거 17 에서결국야권진영의후보가당선할수있게해주었다. 브라질의민주화라는이렇게점진적이고온건하게이루어졌다. 1986년의회선거에는 1985년창당한자유전선당 (PFL) 을포함한기존 6개의정당에더해 24개의신생정당들이참여할정도로민주화의봄바람이불었던선거이었다. 1986년선거는민주화개혁세력에게완전한승리를가져다주었다. 1986년하원의회선거에서브라질민주운동당 (PMDB) 이 260석을획득하여전체의석의 53.3% 를차지했을뿐만아니라, 자유전선당 (PFL), 노동자당 (PT), 그리고민주노동당 (PDT) 이획득한의석까지합치면민주화과정에서진보성향의정당은전체의석의약 86% 에해당하는의석을확보했다. 1988년새로제정된민주헌법에의해서브라질은드디어국민직선에의해대통령을선출하게된다. 브라질의정부형태와선거제도부분에서언급했듯이, 1989년대통령선거는결선투표제에의해서치러졌다. 22명의정당후보가참여한 1차선거의최다득표자는국가재건당 (National Reconstruction Party: PRN) 의콜로 (Fernando Collor) 이었으나, 과반이상의득표를얻지못해서노동자당의룰라 (Luiz Inácio Lula Silva) 와 2차결선투표끝에대통령으로당선되었다. 1989년선거결과에서주목할점은 3년전에실시되었던의회선거에서압도적인지지를얻어다수당이되었던브라질민주운동당 (PMDB) 이전체브라질유권자의 4.4% 밖에얻지못한정당으로추락했다는 15 브라질노동당 (PBL) 은바가스 (G. Vargas) 의조카인이베테바가스 (Ivete Vargas) 가 1981년창당한정당이다. 16 노동자당 (PT) 은노동지도자, 좌파성향의지식인, 그리고해방신학의가톨릭인등으로구성된이질적인정당이다. 노동자당 (PT) 은 2002년대통령선거에서룰라 (Luiz Lula da Silva) 를후보로내세워승리를얻어낸다. 노동자당의구성과변신에대해서는 Mainwaring (1995) 과 Samuels (2004) 의논문을참조하시오. 17 1985년대통령선거에서브라질민주운동당 (PMDB) 은민주전선당 (PFL) 과의선거연대를이루었다. 대통령후보에는브라질민주운동당 (PMDB) 의네베스 (T. Neves), 그리고부통령후보에는민주전선당 (PFL) 의사니 (J. Sarney) 를내세워집권민주사회당 (PDS) 의말루프 (Paulo S. Maluf) 후보를물리쳤던것이다.

25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것이다. 반면, 1985년청년당 (Youth Party: PJ) 이라는이름으로창당하여 1986년의회선거에서한석도얻지못했던정당이 1989년국가재건당 (PRN) 으로개명한후대통령선거에서후보를당선시키는정당으로성장했다는점또한주목할만한일이라고할수있겠다. 이러한선거결과에서알수있듯이, 브라질유권자들의정당에대한지지는매우유동적인 (volatile) 모습을보이고있으며, 18 이에따라민주화이후브라질의정당체제는매우불안정스러운형태의다당체제로의전환의진통을겪고있었다. 불행하게도, 콜로정부는오래지속되지못했다. 지속적인경제침체속에서도브라질경제는고인플레이션이라는문제에시달리고있었고, 설상가상으로콜로대통령은부패스캔들에휘말리게되었다. 19 결국콜로 (F. Collor) 대통령은 1992년정치부패스캔들로인해대통령직을사임하게되며, 콜로 (F. Collor) 대통령의사임과함께국가재건당 (PRN) 은몰락의길로접어들게된다. 1994년의대통령선거와의회선거는브라질정당체제가다당체제로정착되어가고있다는사실을감지하게해준다. 1994년의회선거에서어느정당도과반의석을확보하지못했으며, 또한같은해실시된대통령선거에서카르도소 (Fernando Henrique Cardoso) 대통령을배출한브라질사민당 (PSDB) 조차브라질민주운동당 (PMDB) 의 107석에훨씬못미치는 62석을차지하는정도에머물러야만했다. 따라서원활한국정운영을위해서는최소한정당간정책연합이반드시요구되는그러한정당구도가조성되었다. 이러한정당구도는카르도소 (F. Cardoso) 대통령이재선에성공했던 1998년대통령선거와의회선거, 노동자당 (PT) 의룰라 (Luis Inácio Lula da Silva) 가결선투표끝에대통령이당선되었던 2002년의대통령선거와의회선거, 그리고노동자당 (PT) 의룰라 (L. Lula) 대통령이결선투표끝에재선에성공했던 2006년대통령선거와의회선거에서도그대로재현되었다. 특히 2002년과 2006년의대통령선거에서는 1차선거에서과반이상의득표를획득한후보가없어서치러진결선투표는 1차선거에서의 1위득표자와 2위득표자가각각결선투표의문턱에서탈락했던정당후보와의연합이이루어져서브라질의다당체제가정착되어갔다. 18 1987 년과 1988 년에실시된 IBOPE 여론조사결과에의하면, 민주화이후시기의브라질유권자들은매우낮은정당지지 (party identification) 수준을나타냈다. 우루과이유권자의 2/3 정도가정당선호를가지고있었던반면, 브라질은단지응답자의 1/3정도만이선호하는정당이있다고답변했다 (Mainwaring 1995, 385). 19 게디스 (B. Geddes) 와네토 (O. Neto) 는콜로 (F. Collor) 대통령이기업과의정치자금거래라는정치적부패고리에빠질수밖에없었던요인을브라질이채택한공개명부식비례대표제 (open-lis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system) 라는선거제도에서찾는다 (Geddes and Neto 1992). 이에대해서는 Geddes and Neto (1992) 를보시오.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53 그래프 5 민주화이후브라질의정당체제변화 출처 : Nohlen 2005b. 1985년민주화조치이후브라질의정당체제의변천과정을나타낸 < 그래프 5> 가보여주듯이, 주목할부분은 1990년급작스럽게정당수가증가한다는것이다. 이러한변화의원인은브라질의정치제도개혁에서찾을수있을것이다. 브라질의헌법과정치제도에대한앞의논의에서언급했듯이, 브라질은 1988년대통령선거제도로결선투표제가도입되었고하원의회선거제도는비례대표제로개정되었던것이다. (3) 칠레에서의정당간경쟁과정당체제피노체트 (A. Pinochet) 군사정부의와해는 1988년국민투표에의해시작되었다. 1980년개정헌법의정치일정에따라치러지는 1988년국민투표는피노체트 (A. Pinochet) 대통령의임기를 1997 년까지연장할것인지아니면피노체트의임기가만료되는 1990년 11월이전에총선거를실시하여새로운정부를구성할것인지를결정하는중대선거이었다. 야권진영의 13개의정당은 반대를위한정당연합 (Concertation of Parties for NO) 이라는정당연대를구성하여임기연장반대운동을펼쳐나갔다. 92% 에이르는칠레유권자들이국민투표장에나왔으며, 이들중 54.7% 가피노체트 (A. Pinochet) 대통령의임기연장에반대표를던졌다. 이결과에따라새정부를구성할대통령과상하원의원을선출하기위한총선거가 1989년에실시된다. 반대를위한정당연합 을구성했던야권진영의정당들은또다시 1989년총선거에서 민주주의를위한정당연합 (Concertation of Parties for Democracy: Concertación) 을구성했으며, 정당연합의단일대통령후보로기독민주당 (PDC) 의아일윈 (Patricio Aylwin) 을결정한다. 아일윈 (P. Aylwin) 은 55.2% 의유권자의지지를얻어새로운대통령으로당선된다. 그리고 1980년개

25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정헌법에의해서새로도입된이명체계 (binomial system) 선거제도하에서치러진하원의회선거에서도 민주주의를위한정당연합 (Concertación) 은과반이상의의석을확보하는데에성공했다. 이명선거제도라는변형된비례대표선거제도하에서의회선거승리를위해결성된 민주주의를위한정당연합 (Concertación) 은대통령선거에서도활동했다. 1989년선거에이어 1993년, 1999 년, 그리고 2005년대통령선거에서서로공조를이루어승리를거두었던것이다. 1993년선거에서민주주의를위한정당연합 (Concertación) 은기독민주당 (PDC) 의프레이 (E. Frei Ruiz-Tagle) 를후보로내세워서대략유효표의 58.0% 를획득하여칠레진보연합 (UPC) 진영의알레산드리 (Arturo Alessandri Bessa) 후보를 1차선거에서따돌렸다. 1999년대통령선거에서민주주의정당연합 (Concertación) 은대통령후보로민주주의당 (Party for Democracy: PPD) 의라고스 (Ricardo Lagos)) 를선택했다. 이전선거에서칠레진보연합 (UPC) 진영을이끌었던우파성향의민족복원당 (National Renewal: RN) 은 1999년에는이전의연대세력인독립민주연합 (Indepedent Democratic Union: UDI) 에독립지역주의당 (Independent Regionalist Party) 과정치진화 (Political Evolution) 라는정당과함께칠레연대 (Alliance for Chile: APC) 을구성하여독립민주연합 (UDI) 의라빈 (Joaquín Lavín) 을후보로내세웠다. 1차선거에서는두진영의후보는각각대략유효표의 48.0% 와 47.5% 를득표하는박빙의승부를보여주었으며, 두후보간에치러진 2차결선투표에서라고스 (R. Lagos) 는공산당 (PC) 과인본주의당 (PH) 의지지를이끌어내어 2.7% 포인트차이로라빈 (J. Lavín) 후보를따돌려대통령이될수있었다. 2005년대통령선거도결선투표로가는접전을벌였다. 좌파및중도좌파성향의정당들로구성된민주주의정당연합 (Concertación) 은사회당 (PS) 의바셀레트 (Michelle Bachlet Jeria) 를후보로내세웠다. 다른한편중도우파와우파성향의정당들로이루어진칠레연합 (APC) 은단일후보를내세우는데에실패하여독립민주연합 (UDI) 에서는라빈 (J. Lavín) 이, 그리고민족복원당 (RN) 의피네라 (Sebastián Piñera Echenique) 가각각대통령후보로나섰다. 1차선거에서비록바셀레트 (M. Bachlet) 후보는최다득표를했지만유효표의 46.0% 를득표하는데에머물러서, 2위득표자인피네라 (S. Piñera) 후보와 2차결선투표를치렀으며, 마침내 2차결선투표에서유효표의약 53.5% 득표를획득하여약 46.5% 의득표율을기록한피네라 (S. Piñera) 후보로부터승리를거두었다. 이렇듯, 1993년에서 2005년대통령선거에이르기까지중도좌파또는좌파성향의정당들의민주주의정당연합 (Concertación) 은성공적인정당간공조를통해행정부를장악할수있었다. 의회선거에서의정당간경쟁결과또한기본적으로이명선거제도의제도적영향력을받았다. 다시말해, 칠레의정당정치는중도좌파성향의민주주의정당연합 (Concertación) 또는우리함께더 (Juntos PODEMOS Más) 와중도우파성향의칠레진보연합 (UPC), 칠레연합 (APC) 또는변화연대 (CFC) 간의경쟁으로특징지어질수있다는점이다. 120명의하원의원으로구성되는칠레의하원의회선거에서, 이두선거연대진영은각각 1993년에는 70석과 50석, 1997년에는 69석과 47석, 2001년에는 62석과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55 57석, 2005년에는 65석과 54석, 그리고 2009년선거에서는 57석과 58석을획득했다. < 그래프 6> 에서나타나듯이, 민주화이후정당체제의변천양상에서엿볼수있는특징은선거정당수에있어서나의회정당수에있어서커다란변화없이각각 6.56와 7.10 그리고 4.95와 5.94 사이에서증가하거나감소하고있다는점이다. 이는, 언급했다시피, 이미민주화되기이전인 1980 년도에도입되었던대통령선거의결선투표제나하원의회선거의공개명부식비례대표제의하나의변형된형태인이명선거제도 (binomial electoral system) 가이후변경되지않았기때문인것으로보인다. 살펴보았듯이, 칠레의정당정치는기독민주당 (PDC) 과사회당 (PS) 이주축을이루는중도좌파진영의민주주의정당연합 (Concertación) 과민족복원당 (RN) 과독립민주연합 (PDI) 가중심이된칠레진보연합 (UPC), 칠레연합 (APC) 또는변화연대 (CFC) 간의경쟁틀내에서이루어져왔다. 소정당들은이들진영에선택적으로참여하면서자신들의정치적생존을꾸려왔다고하겠다. 그래프 6 민주화이후칠레의정당체제변화 출처 : Nohlen 2005b. 2) 정당체제의변화와민주주의공고화평가 지금까지논문은제 3의민주화물결을경험한라틴아메리카의대표적인국가인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사례에서이루어진민주화이후정치제도의선택과이러한정치제도적틀안에서전개된정당간경쟁, 그리고정당체제의변화를살펴보았다. 이제우리는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에서전개된정당간경쟁과함께형성된정당체제와이들국가의민주주의공고화사이의관계를다양한몇가지지표를사용하여평가해보려한다. 논문에서활용하고자하는민주주의평가지표는두가지이다. 그하나는사회갈등 (social con-

25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flict) 지수이고, 또다른하나는집권정부의요구 / 책임성 (voice and accountability) 지수이다. 이들두지수를선택 사용한이유는, 민주주의공고화의중요성을강조하는학자들이강조하듯이, 민주주의정권의정치적생존이라는것이대의민주주의적방식으로자신들의문제가해결될것이라는강한믿음에달려있고 (Linz and Stepan 1996, 16), 이러한믿음은사회구성원의다양한정치 경제적이해와요구를원활하게표출, 집산, 조정하느냐여부에의해형성되기때문이다 (Schedler 1998, 95-96). 알다시피, 대의민주주의제하에서일반시민들은선거라는민주주의적메커니즘을통해자신들의이해관계를대변해줄대리인으로서정당 ( 후보 ) 을선택하며, 정당 ( 후보 ) 간경쟁과정을거쳐이렇게선택되어당선, 집권하게되는정당혹은정당지도자가자신들의이해와요구를정부정책으로반영해주기를기대한다. 대의민주주의적제도가이러한정치적기대를충족시켜주지못한다면, 대의민주주의에대한이들의믿음은훼손되게될것이며이는종국에는민주주의적정권의전복, 또는와해를초래하게된다는것이다. 따라서대의민주주의의이러한기제가제대로작동하고있는지여부는민주주의적정권의생존, 나아가민주주의공고화의성패에결정적인요인이된다. 사회갈등지수와요구 / 책임성지수는대의민주주의의이러한작동기제를간접적으로측정한다. 자신들의정치 경제적이해가정부정책에반영되지못한다면, 다시말해대의민주주의적제도가제대로작동되고있다는정치적믿음이깨지게된다면이들일반시민들이선택할수있는또다른정치적대안은자신들의요구사항을주장하고관철시키기위해집회, 시위, 파업, 폭동과같은물리적방법에의존하는것이될것이다. 빙햄턴소재의뉴욕주립대학교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Binghamton) 의비교정치연구소는이러한집회, 시위, 파업, 폭동과같은사건에주목한다. 비교정치연구소는매년세계각국에서발생한사건, 즉암살, 총파업, 게릴라전, 중대정부위기, 20 숙청, 폭동, 혁명, 반정부시위자료를토대로계산한각국의가중갈등지수 (weighted conflict index) 21 를발표한다. 논문에서는이지표를사용하여민주화이후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수준을측정, 평가할것이다. 요구 / 책임성지수는세계은행 (World Bank) 이조사한세계각국의통치지표 (worldwide governance indicators) 중하나로서, 특히이지수는세계각국시민들이자유롭게결사체를조직하여자신들의이해와요구를표출하고정부를선택할수있는지에대한인식정도를조사, 측정한지표이다. 22 따라서요구 / 책임성지수는대의민주주의운영에대한각국시민들의정치적믿음을측정하는적절한지표가될수있으며, 이런점때문에논문은이지수를사용하여민주화이후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수준을측정, 평가할것이다. 20 중대정부위기 (major government crisis) 란 반란 (revolt) 은제외한, 현정부의몰락을초래또는이를위협하는상황 을일컫는다 (Wilson 2013, 11-12). 21 각사건에부과한가중치점수를보면, 암살은 25점, 총파업은 20점, 게릴라전은 100점, 중대정부위기는 20점, 숙청은 20 점, 폭동은 25 점, 혁명은 150 점, 반정부시위는 10 점이다 (Wilson 2013, 12). 이렇게구한점수를모두합하고, 합한총점에 100을곱한후 8로나누어서최종적으로가중갈등지수가구해진다. 22 세계은행이조사, 측정한세계각국정부의통치지표에관한통계자료는세계은행의홈페이지 (http://data.worldbank.org/data-catalog/worldwide-governance-indicators: 2016년 11월25일검색 ) 에서구할수있다.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57 (1) 아르헨티나앞에서살펴보았듯이, 아르헨티나의정당체제는폐쇄명부식비례대표제 (closed-lis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system) 라는선거제도하에서두주요정당인급진시민연대와정의당을주축으로프레파소, 평등공화국지지, 재탄생등을비롯한다수의소정당과이들간의다양한선거연대정당들로이루어져왔다. 이와같은정당체제하에서전개된아르헨티나의정당간경쟁은민주주의의공고화에어떤정치적효과를발휘했는가? 그래프 7 아르헨티나의정당체제와갈등지수의변화 출처 : Nohlen 2005b. Cross-National Time-Series Data Archive. < 그래프 7> 은아르헨티나의정당체제와갈등지수의변화를나타낸것이다. 정당들의의석율을바탕으로계산한 1983년에서 2010년기간의아르헨티나의의회정당수는평균적으로대략 3.68이었으며, 적게는 2.22에서많게는 6.32에이르고있다. 한편, 아르헨티나의갈등지수는평균 5.20이며작게는 0에서크게는 1989년의 8.43에이르고있다. 이들요인간의관계를보다명확하게살펴보기위해서, 우리는의회정당수와갈등지수각각의자료에서보이는추세선 (trend) 을추적해보았다. 이들추세선의분포를보면, 의회정당수가증가하면갈등지수가작아지는, 다시말해갈등의수준이완화되고있다는점을파악할수있다. 특히 2003년을기점으로아르헨티나의정당구도는 3.6개의정당이경쟁하는체제에서 5개이상의정당들이경쟁하는다당체제로전개되고있는데, 이시점부터아르헨티나의갈등지수는급격하게낮아지고있다는사실을알수있다. 앞에서서술했듯이, 2003년에는대통령선거와의회선거가모두치러졌으며진보적성향의커취너가대통령으로당선되어민주화이후의아르헨티나최초의진보성향정부가출범했던해이다. 여타다른요인들의영향력을통제한상태에서분석해야지만정확한추론을할수있겠지만, 논문은조심스럽게진보성향정부와갈등지수로측정한아르헨티나

25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민주주의발전수준사이에밀접한관계가있다는추정을제시해본다. 아르헨티나의정당체제와요구 / 책임성지수의변화를나타낸 < 그래프 8> 또한정당경쟁구도의변화와요구 / 책임성지수로측정한민주주의공고화수준간에는긍정적인관계가존재함을보여준다. 평균 57.08% 의수치를보이는아르헨티나의요구 / 책임성지수는의회정당수가증가함에따라, 비록그증가폭은크지는않지만, 조금씩커지고있다. 다시말해, 아르헨티나국민들은정당간의경쟁구도가다당제로전환할수록, 대의민주주의적운영에대해강한신뢰감을가지게된다는것이다. 그래프 8 아르헨티나의정당체제와요구 / 책임성지수의변화 출처 : Nohlen 2005b. Worldwide Governance Indictors (2) 브라질 공개명부식비례대표제 23 를하원의원선거제도로채택하고있는브라질은, 앞에서도서술했듯이, 여타라틴아메리카국가보다도월등히많은정당들이경쟁하는다당체제의국가이다. 민주화이후시점에서 2010년까지의브라질의평균의회정당수는대략 8.19개이고, 특히 2002년이후에는 8.46 또는 9.32, 심지어 10.44개의유효의회정당이경쟁하는매우파편화된다당체제를특징으로하고있다. 23 공개명부식비례대표제에서는정당이아닌인물을보고투표한결과에의해후보리스트가결정되는탓에브라질에는선거를앞두고주요정치적거물들에의해정당이만들어지는경향이발견된다. 공개명부식비례대표제의이러한제도적효과에대해서는 Geddes and Neto (1992) 를보시오.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59 그래프 9 브라질의정당체제와갈등지수의변화 출처 : Nohlen 2005b. Cross-National Time-Series Data Archive. 브라질의정당체제변화와갈등지수로측정한민주주의공고화수준사이의관계를검토하기위해, 이들간의변화양상을 < 그래프 9> 에나타냈다. 브라질의갈등지수는평균 5.18이며작게는 0에서크게는 1991년콜로정부시기의 7.13이었다. 브라질의의회정당수와갈등지수의추세선의흐름을살펴보면, 브라질에서도의회정당수가증가하면갈등지수가작아지는, 다시말해갈등의수준이완화되고있다는점을발견할수있다. 아르헨티나의 2003년총선거처럼브라질에서도주목해야하는선거는 2002년총선거이다. 2002년총선거에서결선투표끝에진보정당인노동자당의대통령후보인룰라가대통령으로당선되어진보성향의정부가탄생하게되었으며, 이시기를기점으로브라질의갈등지수는현격하게완화되고있다는점이다. 그래프 10 브라질의정당체제와요구 / 책임성지수의변화 출처 : Nohlen 2005b. Worldwide Governance Indictors

26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브라질정당체제와요구 / 책임성지수사이의변화를나타낸 < 그래프 10> 은브라질에있어서정당간경쟁과그에따라형성된정당체제의변화가민주주의공고화에긍정적인기여를하고있다는것을간접적으로파악할수있게해준다. 브라질의요구 / 책임성지수는평균 59.58% 의수치를보이고있으며, 비록그증가폭이점차조금씩감소하는경향이있기는하지만, 요구 / 책임성지수는의회정당수가증가함에따라증가하는경향이있다. 이그래프는브라질국민도정당간의경쟁구도가다당제로전환할수록대의민주주의적운영에대한강한신뢰감을가지게된다는것을알수있게해준다. (3) 칠레앞에서살펴보았듯이, 이명선거제도를채택하고있는칠레의정당체제는가장안정적으로변화해오고있다. 1989년민주화이후 2010년에이르는시기칠레의평균의회정당수는 5.40으로아르헨티나의 3.68에비해많기는하지만그변화의폭은상대적으로매우적었다. 가장적었을때의의회정당수가 4.95이었던반면가장많았을때의그것은 5.94로칠레는매우안정적인정당체제를갖추고있다고하겠다. 비교해보자면, 아르헨티나의의회정당수는가장적었을때가 2.22이고가장많았을때가 6.32로그차이가 4.1인것으로나타나고있다. 이렇듯다섯개의정당이경쟁하는정당체제이기는하지만, 실제칠레의정당경쟁은민주주의정당연합의중도좌파진영과칠레연합또는변화연대의중도우파진영간에이루어지는구도로되어있다. 그래프 11 칠레의정당체제와갈등지수의변화 출처 : Nohlen 2005b. Cross-National Time-Series Data Archive. 칠레의정당체제와갈등지수의변화양상을그려낸 < 그래프 11> 또한, 아르헨티나와브라질처럼, 정당체제가다당체제로변화할수록갈등지수도낮아지는, 다시말해안정적인사회로전환하는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61 경향이있다는점을보여주고있다. 이러한안정적인정당체제는평균 2.97의가장낮은칠레의갈등수준과연관이깊어보인다. 갈등수준의변화추세를보면, 칠레의갈등지수는 1.0에서 5.0으로그편차의폭도크지않을뿐아니라서서히낮아지는경향을보이고있다. 이처럼, 다당체제로의안정적인변화는갈등지수로측정한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수준과긍정적인관계를맺고있다. 정당체제의변화와민주주의공고화사이의긍정적인관계는정당체제와요구 / 책임성지수의변화양상을나타낸 < 그래프 12> 에서도확인할수있다. 칠레의요구 / 책임성지수는평균 79.17% 로세국가중에서가장높은수치를보이고있으며, 요구 / 책임성지수는의회정당수가증가함에따라증가하는경향이있다. 1996년이후칠레의정당체제의변화추세는 5.3에서 5.7로완만하게증가하고있으며, 요구 / 책임성지수의변화추세또한 70% 에서 87% 로서서히호전되고있다는점을드러내주고있다. 정당체제가완만하게다당화로변화하면서민주적정권의민주주의운영에대한칠레국민의신뢰감또한개선되고있는것이다. 그래프 12 칠레의정당체제와요구 / 책임성지수의변화 출처 : Nohlen 2005b. Worldwide Governance Indictors 4. 나가며 라틴아메리카주요세국가인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화이후민주주의공고화를조망하고평가하기위해, 이논문에서우리는민주화이행기과거의제도적유산으로물려받았거나혹은이행과정에서선택했던정치제도적맥락, 특히선거제도적맥락에주목했다. 경제규모와경제정책에있어서아르헨티나, 브라질, 그리고칠레는상이한양태를보이고있음 24 에도불구하고, 이들

26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세국가의정치제도의검토과정속에서우리는이들국가가매우유사한선거제도를채택하고있다는사실을발견할수있었다. 구체적인형태에있어서다소간의차이는있기는하지만, 이들세국가는공통적으로의회선거제도로비례대표제그리고대통령선거제도로결선투표제를채택하고있다. 이와같은선거제도적틀안에서정당간경쟁이전개되었으며, 이러한정당간경쟁구도하에서이들세국가의정당체제는다당체제로전환되었다. 이연구에서는이들국가에서전개된다당제로의정당체제의변화에초점을맞추려했다. 달리말해, 정당체제의변화와민주주의공고화의수준간의연관성에초점을맞추어서이들세국가의민주주의공고화를조망하려했던것이다. 민주주의공고화의중요성에주목하는학자들은민주주의공고화, 즉민주정권의정치적생존의성패가 ( 대의 ) 민주주의적방식의원활한작동에의해자신들의이해와요구가해결되고있다는사회구성원들의강한믿음여부에달려있다고주장한다 (Linz and Stepan 1996).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적운영에있어서핵심적인행위자는정당이다. 정당이라는존재가자신들의지지그룹의이해와요구를집산, 조정, 대변하는데에있어서역할을잘수행한다면민주주의운영기제에대한사회구성원의정치적신뢰감은강화되는반면, 그렇지않다면약화될것이다. 논문은갈등지수와요구 / 책임성지수라는두가지지표를활용하여다당제로의정당경쟁구도의변화와민주주의공고화사이의관계를규명하려했다. 이러한규명작업을통해, 우리는이들세국가에서공통적으로나타나는다당제로의정당체제의변화가사회갈등의완화와정부의책임성강화와밀접한관계를맺고있음을발견할수있었다. 민주주의의공고화에있어서정당및정당체제의제도적효과에주목한이논문의연구작업결과는성공적인민주화로한때세계를놀라게했던, 하지만최근민주주의발전과정속에서문제점이노정되고있는한국민주주의공고화사례에중요한정치적함의를제공해주고있다. 승자독식의단순다수제하에서전개되는정당경쟁구도로인해정치적생존에어려움을겪고있는군소정당의문제, 그리고이로인해민주주의적제도적장안으로대변되지못하는우리사회구성원의다양한정치 경제적이해의존재등과같은민주주의운영의근간을흔들수있는문제들이한국의민주주의발전에걸림돌로작용하고있는것이작금의실정이다. 한국의민주주의발전을저해하는이러한요소들은비례대표제의전면적확대와함께다당제로의정당체제의전환에의해해결될수있음을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사례연구는우리에게일깨워주고있는것이다. 24 민주화이후시점부터 2010년에이르는기간의아르헨티나의평균국내총생산액은대략 $220 billion이고, 브라질은대략 $766 billion이며, 칠레는이들국가에비해훨씬적은규모로대략 $93 billion이다. 다른한편, 무역의존도가평균 65.1% 인칠레는 25.7% 의아르헨티나와 20.5% 의브라질에비해수출중심의경제정책을추구하고있다.

민주주의공고화의정치제도와정당체제 :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민주주의공고화비교 263 참고문헌 Geddes, Barbara, and Artur R. Neto. 1992. Institutional Sources of Corruption in Brazil. Third World Quarterly 13 (4): 641-661. Huntington, Samuel P. 1993.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20th Century.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Ilsley, Lucretia L. 1952. The Argentine Constitutional Revision of 1949. Journal of Politics 14 (2): 224-240. Linz, Juan, and Alfred Stepan. 1996. Toward Consolidated Democracies. Journal of Democracy 7 (2): 14-33 Mainwaring, Scott. 1995. Brazil: Weak Parties, Feckless Democracy. In Scott Mainwaring and Timothy R. Scully, eds. Building Democratic Institutions: Party Systems in Latin Americ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Nelson, Christopher. 1993. An Opportunity for Constitutional Reform in Argentina: Re-Election 1995. The University of Miami Inter-American Law Review 25 (No. 2): 283-317. Nohlen, Dieter. 2005a. Elections in Americas: A Data Handbook, Vol. 1. Oxford: Oxford Universtiy Press.. 2005b. Elections in Americas: A Data Handbook, Vol. 2. Oxford: Oxford Universtiy Press. Román, Charles G. Pregger. 1979. Economic Interest Groups within Chilean Government, 1851 to 1891: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in Economic and Political Evolution. Science and Society 43 (2): 202-233. Roniger, Luis, and Mario Sznajder. 1999. The Legacy of Human-Rights Violations in the Southern Cone: Argentina, Chile, and Urugua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Rummel, Rudolph J. 1998. Statistics of Democide: Genocide and Mass Murder since 1990. LIT Verlag. Samuels, David. 2004. From Socialism to Social Democracy: Party Organization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Workers Party in Brazil.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37 (9): 999-1024. Schedler, Andreas. 1998. What is Democratic Consolidation? Journal of Democracy 9 (2): 91-107. Scully, R. Timothy. 1995. Reconstituting Party Politics in Chile. In Scott Mainwaring and Timothy R. Scully, eds. Building Democratic Institutions: Party Systems in Latin Americ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Siavelis, Peter. 1997. Continuity and Change in the Chilean Party System: On the Transformational Effects of Electoral Reform.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30 (6):

26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651-674. Walter, Richard J. 1984. Politics, Parties, and Elections in Argentina s Province of Buenos Aires, 1912-42. Hispanic American Historical Review 64 (4): 707-735. Wilson, Kenneth A. 2013. User s Manual. Cross-National Time-Series Data Archiv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inghamton.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65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지은주 ( 고려대학교 ) 1. 들어가며 1974년포르투갈에서시작되어약 20년동안진행된민주화의제 3의물결은남부유럽, 남미그리고동유럽을거쳐서아시아에도영향을미쳤다. 이물결속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동아시아국가들이도미도현상처럼차례로민주적전환을경험하였다. 동아시아는지리적으로동북아시아와동남아시아를포함하는데이지역 14개국가중 7개국가가이시기에민주주의체제로이행하였다. 그중에서권위주의국가에서민주주의로전환한사례는필리핀, 한국, 대만, 태국그리고인도네시아이며, 공산주의국가에서민주주의로전환한사례로는몽고와캄보디아이다. 본글에서는동아시아국가중권위주의국가에서민주주의로전환한다섯개의국가즉필리핀, 한국, 대만, 태국그리고인도네시아를대상으로하여민주적전환과공고화의현황을검토한다. 1986년필리핀의 민중의힘 (People Power) 이마르코스 (Marcos) 의하야를가져오면서동아시아민주주의물결이시작되었다. 이어서 1987년에는한국에서신군부가 6.29선언 을통해민주적전환을약속하였고, 개헌과함께민주적인대통령직접선거가실시되었다. 대만에서는 1987년국민정부 ( 國民政府 ) 가그동안금지되어있던정당의수립을허용하고계엄령을폐지하면서민주적개혁이진행되었다. 이어서태국에서는 1992년민주화운동이성공하였고, 1997년에는최초의민주적헌법인 인민헌법 (People s Constitution) 이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1998년인도네시아에서는 30 년넘게집권해오던수하르토 (Suharto) 대통령이하야하면서민주주의로이행이이루어졌다. 1986 년부터 1998년까지동아시아에서는필리핀, 한국, 대만, 태국, 그리고인도네시아의다섯개의국가가권위주의정권으로부터민주주의로전환하였다 (Shin and Tusalem 2009), 민주적전환이시작되고약 30년이경과한시점에서아시아의민주주의는상당한변화가있었다. 태국은 2006년군사쿠데타로인하여권위주의정부와군사정권이재등장하였고결국민주주의가붕괴되었다. 필리핀에서는좌파정치지도자에대한테러와같은인권침해가지속되고있으며, 2016 년대통령에당선된두테르테 (Duterte) 는 마약과의전쟁 을구실로민간인을대상으로한심각한인권침해를자행하고있다. 인도네시아는 2014년대통령선거에서민주적선거를통해위도도 (Widodo) 가당선되면서민주적인제도가건재함을과시했지만극심한종교갈등과군부의정치적영향력이여전히민주주의에대한위협으로남아있다. 이로인해민주적전환이후 30년이경과한

26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동아시아에서는민주화된국가중대만과한국은공고화된민주주의로분류되지만인도네시아와필리핀은불안정한민주주의이며, 태국은이미민주주의가아니다민주주의의이러한후퇴는아시아만의문제는아니다. 2006년이후세계의민주주의는전반적으로후퇴하였다. 프리덤하우스 (Freedom House) 는 2016년전세계의정치체제를 불안한독재, 흔들리는민주주의 : 억압속에있는세계의자유 (Anxious Dictators, Wavering Democracies: Global Freedom under Pressure) 로표현하였다. 그러나세계적인추세를고려한다고해도동아시아의민주주의는상당히심각한수준이다. 권위주의체제로부터민주적전환을경험한다섯개의사례중단지두개의민주주의만이생존해있다. 그렇다면동아시아민주주의의이러한후퇴를가져온원인은무엇인가? 동일한지역에서유사한시기에민주적전환을경험한국가들이왜서로다른민주적성취를보이는가? 동북아시아의대만과한국의민주주의는공고화된반면왜동남아시아국가들의민주주의는붕괴되거나후퇴하였는가? 본장에서는민주적전환이후 30년이경과한시기의아시아의민주주의의위기를진단하고위기를가져온원인과그함의를찾아보고자한다. 이를위해서제 2 장에서는아시아의민주주의이행과공고화그리고붕괴의과정을살펴본다. 이어지는제 3 장에서는 Polity IV와프리덤하우스지표를통해아시아민주주의를측정하고이에근거하여공고화된민주주의, 불안정한민주주의그리고비민주주의를구별한다. 제 4 장에서는아시아민주주의국가의정치제도와민주주의의안정성과의상관관계를점검한다. 여기에서는민주적전환의방법, 헌정제도, 그리고선거제도와정당체제를검토한다. 제 5 장에서는민주주의는물론이고체제의지속성에중요한영향을미치는구조적요인으로서경제적요소를점검한다. 아시아신생민주주의의경제적풍요, 경제성장, 그리고경제적불평등이체제의지속성과붕괴에일정한영향을미치는지를검토한다. 마지막의제 6 장에서는아시아국가의민주주의이행과공고화가한국의민주주의에주는함의를제시한다. 2. 아시아의민주주의이행, 공고화, 그리고붕괴 이장에서는동아시아다섯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그리고붕괴를검토한다. 각국가들의전환이전의권위주의통치의현황, 민주적전환의과정그리고공고화과정혹은후퇴의과정을포함한다. 다섯개의사례중민주적전환이후에안정적인민주주의를유지해오고있는한국과대만을공고화된민주주의로분류하고, 민주적제도는유지되고있으나그운용이비민주적인인도네시아와필리핀은불안정한민주주의로분류하였다. 마지막으로군부쿠데타로인해민주정부가붕괴된태국은비민주주의로분류하였다. 1 1 이순서는제 3 장의민주주의지수로측정한결과에의존하였다.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67 1) 공고화된민주주의 (1) 대만권위주의통치시기의대만은쟝졔스 ( 蔣介石 ) 가이끄는국민정부 ( 國民政府 ) 하에서국민당을중심으로한당국가 (party states) 체제를유지해왔다. 대만의권위주의통치는 1949년국민정부가중국대륙에서대만으로이주하면서부터시작되었다. 공산당과내전에서패배하여대륙에서쫓겨난국민정부의일차적인목표는중국과의통일이었다. 따라서대만에도착한국민당은먼저당을재정비하고민주집중제 (democratic centralism) 를강화하여사회통제시스템을확보하였다. 이과정에서정당의설립을금지시켰으며헌정제도를정지시킴으로써총통선거와입법원선거가중지되었다. 헌정제도와선거를중지한근거는통일이후에완전한영토를기반으로선거를치르겠다는의도에서였다 (Chu 1992). 대만의민주적전환은장기적인과정이었으며이는 1970년대부터시작된국민당주도의자유화정책과 1987년민진당을수립한야당세력인당외 ( 黨外 ) 의민주화를위한투쟁을통해서가능한것이었다. 1970년대자유화정책은당시국제사회에서대만의위상의변화에의한것이었다. 미중관계가개선되기시작하면서 1972년중화민국대만은유엔의상임이사국지위와회원자격을박탈당하였다. 이어 1978년미국과의국교가단절되었다. 이러한변화는대만중심의통일을불가능하게함은물론나아가통일을목표로한강압적인통치의정당성또한훼손시켰다. 위기를맞은국민당은부분적인자유화정책을주도했다. 이는사망이나고령으로인해서제기능을하지못하는입법위원 ( 한국의국회의원 ) 을대체할보궐선거를실시하는것이었다. 이과정에서당외가일부무소속으로의회에진출할수있었다 ( 지은주 2008; Cheng 1989). 당외는 1970년대에자유주의사상을고취하는잡지를발간하면서민주화운동을이끌었다. 당외의민주화운동은 1979년 메이리다오사건 ( 美麗島事件 ) 으로정부와충돌하게되었다. 당외는민주화를요구하는거리행진을이끌었고, 국민당은이를정부전복을기도했다는이유로불법으로규정하였다. 그러나국민당은자유화정책의일환으로 메이리다오사건 의재판과정을공개하였다. 재판과정에서민주인사의가족이살해당하는사건이발생하였고, 1984년에는쟝징궈 ( 蔣經國 ) 총통의전기를집필했던작가가미국의자택에서살해당하는사건이발생했다. 대부분의대만주민들이이를국민당이주도한것이라고믿게되면서국민당에대한부정적인여론이형성되었다. 이러한분위기속에서 1987년당외는민진당의창당을기습적으로선언했다 ( 지은주 2008; Rigger 2001). 이는불법적인시도였으나쟝징궈는이를묵인함으로써승인하였고, 이어계엄령을폐지함으로써민주화를향한전환점이형성되었다. 이후민주적인선거가복원되면서 1992년에는민주적인입법원선거를그리고 1996년에는주민이직접선출하는총통선거가실시되었다. 대만의민주적전환은 1970년대후반부터진행되어온국민당주도의점진적인자유화정책과

26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1980년대이후활성화되기시작한당외의민주화운동의결합에의해가능했다. 이후대만의민주주의는 1996년이후 6차례의총통선거와 1992년이후 8차례의입법원선거가공정하고평화롭게진행되면서안정적인민주주의를유지해오고있다. 2000년에는최초로야당인민진당으로정권교체를이루었으며또한민주화이후진행되었던헌정제도의개혁과 2005년의선거제도의개혁을통해서대만의현실에맞는민주적제도를지속적으로모색해오고있다. (2) 한국한국은식민지해방이후등장한이승만정권이장기집권을기도하며대통령종신제를추구하였다. 그러나 1960년이승만정권에반대하는 4.19혁명 으로인해정권이전복되면서최초의민주정권인의원내각제를바탕으로한제 2공화국이수립되었다. 그러나사회적혼란을막고질서를유지한다는명목에서발생한 1961년박정희장군의 5.16 쿠데타 로인해민주정부는붕괴되었고군사독재체제가시작되었다. 군사정권은박정희정권기와그이후전두환정권까지이어지면서, 1987년민주화운동으로신군부가대통령직선제를수용하기까지약 26년간지속되었다. 한국의군사정권은대통령선거의경우대통령선거인단에의한간접선거를적용하였지만, 국회의원선거는일부개방되어있었다. 또한정당의활동이원천적으로금지되어있지않았기때문에권위주의통치하에도반정부민주화운동이있었다. 그러나야당은전통적으로분열되어있었으며군사정부에대항할정치이념을개발하지못했다. 권위주의통치하에서저항세력의핵심은학생들이었는데이들은 1964년한일회담반대시위인 6.3사태 라는최초의대규모의정치적위기를이끌기도하였다. 그러나당시민주화운동은조직력과이념적체계성의부족, 그리고상대적인힘의열세로인해큰영향을미치지못했다. 박정희군사정권은공화당을창당하여군부지배의제도적인기반과통치정당성을확보하였다. 나아가 1972년에는유신헌법을선포하여일인독재의기반을확보하였다 ( 김영명 2006). 유신정권은박정희의일인지배구조였으며, 이러한구조는박정희의장기집권을가능하게하였다. 대통령의종신임기가실질적으로보장되었고, 대통령은국회해산권과국회의원 3분의 1의추천권을가졌고, 판사임면권과긴급조치권도장악하였다. 박정희는군을철저히통제하고그충성을이끌어냈는데, 이과정에서군은고도로정치화되었다. 당시국민들의정치적자유와시민권이축소되면서표현, 언론, 집회, 결사의자유는제한받았고, 노동의권리와법적절차를받을권리또한제한되었다 ( 김영명 2006). 박정희의갑작스러운피살은유신체제의붕괴를가져왔다. 그러나새롭게등장한정권역시전두환의신군부를중심으로한군부정권이었다. 박정희피살직후군사정권을대신할야당이준비되어있지않은가운데군대를장악한신군부를중심으로하여새로운지배블럭이형성되었다. 신군부는민주화를요구하는대중의요구를폭력적으로진압하였고집권에성공하였다. 집권초기의 3년간의강압적인통치와이기간에수립된다양한제도적인안전장치는신군부에게자신감을가져다주었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69 다. 더욱이당시경제제호전되면서신군부는통치에있어서자심감을갖게되었고, 1984년학원자율화조치, 정치인의해금과같은유화국면을허용하였다. 이는 1985년의국회의원선거를승리로이끌어서지배안정성을확보하기위함이었다 ( 임혁백 2000). 그러나이러한유화국면은억눌려있던학생운동과노동운동은물론이고광범위한사회운동을촉발시켰다. 1985년 2월 12일의국회의원선거에서야당인신민당이의회에진입함으로써경쟁적인야당으로성장할수있게되었다. 신민당은군부정권에게민주화로의이행을위한협상을제시했다. 그러나협상은실패하였고, 장외투쟁이전개되었다. 1987년 5월박종철군사건이발생하면서군부정권의강경파가퇴장하게되고온건파가주도권을잡게되었다. 체제반대세력은민주화를위한연합전선을동원하였고, 대통령제직접선거를위한개헌에집중하였다. 민주화를요구하는시위가격렬해지자당시노태우는 6.29선언 으로이들의제안을수용하고민주적개혁을약속하였다 ( 임혁백 2000). 노태우의 6.29선언 으로상호타협에의한민주화가가능했으며개헌안이통과되면서 1987년 12월국민들의직접선거에의한대통령선거일정이확정되었다. 투표결과는야당후보의분열로인해신군부의노태우가당선되었다. 이러한결과는다소실망스러운것이었지만이어진 1993년의선거에서는 3당합당으로여권에합류한민주투사출신인김영삼이당선되었고, 1997년에는야당인김대중이당선되면서민주화이후최초의정권교체를달성하였다. 이후한국은정기적이고공정한대통령선거와국회의원선거를통해안정적이고질높은민주주의를이어오고있다. 2) 불안정한민주주의 (1) 인도네시아수하르토이전의인도네시아는 1950년부터 57년까지짧은의회민주주의가실시된적이있었으나실패하였다. 이후실권을장악한수카르노 (Sukarno) 는계엄선포와군의동원으로가부장적인통치체제를구축하였다. 수카르노체제하에서강력한세력이었던군부와공산당은서로균형을이루고있었는데이균형이깨지면서위기가발생하였다. 정국이불안한가운데소수장교들을중심으로수카르노에반대하는쿠데타가발생하였다. 당시수하르토소장은 1965년 9월쿠데타를신속히진압하면서새로운실세로떠올랐다 ( 배긍찬 1989, 20-22). 이후 1966년수하르토는수카르노대통령으로부터행정권한을이양받았고, 1967년국민협의회 (Majelis Permusyawaratan Rakyat, 이하 MPR) 에의해대통령직무대리로임명되었다. 다음해에대통령으로추대된수하르토는 1998년까지인도네시아를통치하였다. 수하르토는자신의정권을 신질서 (Orde Baru) 라고명명하고군부를중심으로하여이슬람세력과균형을유지하면서권위주의체제를강화하였다. 집권초기의수하르토는해외파경제관료를

27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등용하였고, 다양한출신의정치보좌관을기용하였다. 이를기반으로하여성공적인경제성장을이룰수있었다. 그러나이과정에서체제비판세력에대해서는철저히탄압하였다. 수하르토집권시기의경제성장과생활수준의향상은수하르토집권의중요한기반이되었다. 수하르토정권의위기는경제가악화되면서시작되었다. 1990년대말외환위기에처한인도네시아의경제는 1997년 9월 IMF로부터구제금융을받는상황에이르렀다. 루피아의가치가급락하고, 인플레이션과실업이빠르게상승하였다. 이과정에서국민들중빈곤수준이하의인구가 2000만명에서 5000만명으로증가하였다. 또한수하르토개인의건강악화도악재가되었지만친족중심의권력구상이많은반감을낳았다 ( 윤진표, 제대식 2000, 321-325). 1998년 3월수하르토는 MPR에서만장일치로대통령에추대되었다. 그러나수하르토의재선에반대하는학생시위와폭동이지속되었다. 경제가심각한상황에서수하르토는석유가격을대폭인상하였는데이는국민들의불만을폭발시켰다. 학생시위가확대되는가운데수하르토는이집트방문을위해출국하였고, 그가부재한가운데 5월 12일뜨리삭띠 (Trisakti) 대학교에서학생시위가발생하였고, 이과정에서 4명이사망하였다. 수하르토의무모한대응은군부의신임을상실하는계기가되었다. 5월 18일 MPR의장은수하르토의하야를공식적으로요구하였고, 군부내의온건파가이결정을지지하였다. 결국수하르토는 1998년 5월하야성명을발표하였다. 수하르토가하야한이후대통령에취임한하비비 (Habibie) 는수하르토의남은임기를채우지않고 1999년총선과대선을앞당겨치르겠다는일정을발표하였다. 정치참여가허용됨으로인해약 150여개의정당이설립되었고, 정치범석방, 언론규제철폐, 경제개혁조치등이단행되었다 ( 윤진표, 제대식 2000, 325-326). 1998년 MPR은인도네시아의민주화를위한중요한결정을하였다. 이는인도네시아국회와 MPR 의장단을분리하고, 대통령과부통령의임기를 5년중임제로하며, 새로운총선을 1999년 6월까지실시하고, 군부의임명직국회의원수를축소하고, 독립적인선거관리위원회를설치하는것이었다. 1999년정당법, 선거법, 국회법을포함하는정치개혁법이통과되었다. 1999년치러진 8 대총선에서투쟁인도네시아민주당 (PDI-P) 이제 1 당이되었으며, 이어서꼴까르당 (Golkar), 민족중흥당 (PKB) 이득표에성공하였다 ( 윤진표, 제대식 2000). 선거의결과어느정당도과반의의석을차지하지못했고, 여전히군부세력과이슬람세력을대표하는정당이득표에성공하였다. 대통령선거에서는이슬람세력을대표하는와히드 (Wahid) 가대통령후보로대중적인인기가있는메가와티 (Megawati) 가부통령후보로국민협의회에의해추대되었다 ( 윤진표, 제대식 2000, 328-329). 2001년부패로인해와히드가탄핵되면서메가와티가대통령직을승계하였다. 이후대통령직선제가적용되면서 MPR은그기능을상실하였다. 2004년최초로실시된대통령선거에서는군출신인유도요노 (Yudhoyono) 가당선되었다. 그는연임에성공하여 2014년까지대통령직을수행하였다. 2014년의대통령선거에서는투쟁인도네시아민주당의위도도가당선되었다. 위도도는가난하고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71 평범한집안의출신으로선거에서행정개혁, 의료보험제도및복지정책의확대, 인프라개발, 교육발전, 지역통합을주요캠페인으로삼았다 ( 정은숙 2014). 인도네시아는제도적으로민주주의를유지해오고있지만심각한종교갈등이항시적으로민주적제도를위협하고있다. 특히인구의다수를차지하고있는이슬람세력은다른소수종교집단을박해하고있으며, 최근에는이슬람내에서의시아파와수니파의갈등도심각한양상으로변화하고있다. (2) 필리핀필리핀의민주화는민주화의제 3의물결에서아시아의민주화를촉발시킨첫번째사건이었다. 필리핀은미국식민통치시기부터이미선거에의한대의제민주주의제도를갖추고있었다. 1946 년독립한이후필리핀은대통령, 부통령, 상하양원이선출되는민주정부를구성하였고, 1969년까지선거를통해서정권교체가이루어지는절차적민주주의를유지해왔다 ( 김동엽 2016, 145-8). 그러나 1972년마르코스대통령이계엄령을선포하면서민주주의가붕괴되었다. 1965년대통령에당선된마르코스는군조직의개편과인사이동을통해그동안정치적으로중립을지켜왔던군을개인적인통제하에장악하였다. 1969년대통령선거에서마르코스는군을활용하여유권자들을강제로동원하였으며, 이를통해필리핀최초의재선대통령이될수있었다 ( 서경교 1999; 147-51). 마르코스는공산세력의위협으로인한사회불안정을근거로하여 1972년비상계엄령을선포하였다. 이로인해의회활동이정지되었고, 반대파지도자들이체포되었으며, 정치적집회와결사가금지되었고, 언론통제가이루어졌다. 마르코스정권은 1973년새로운헌법을제정하여모든권력을대통령에게집중시켰다. 당시미국은베트남전쟁에깊이개입하고있었고, 마르코스정부가반공을내세우자그전횡을묵인했다. 1970년대중반필리핀은필리핀에주둔해있는미군기지의임대료협상과정에서미국으로부터많은재정적지원을받았으며국제금융기구으로부터도막대한차관을들여올수있었다. 이를통해 1970년대중반높은경제성장률을누릴수있었다 ( 김동엽 2016b, 150-2). 정권이안정되면서마르코스는 1981년계엄령을해제하였다. 대통령제를의원내각제로바꾸었으며, 임기 6년의대통령을국민이직접선출하도록하였다, 그러나수상은대통령이임명하도록하였다. 마르코스는대통령과수상을겸하면서절대적인권한을갖게되었다. 1981년계엄령은해제되었으나동원된군의영향력은사라지지않았다. 당시마르코스통치하에서특혜를누린군부는상당히정치화되어있었고, 이과정에서 1983년유망한대권후보였던아키노 (Aquino) 상원의원이암살되는사건이발생했다. 아키노암살사건의배후는명백히드러나지는않았으나마르코스정권의도덕성에치명타를안겨주었다. 이로인해민주화운동이확산되었으며, 마르코스는 1986년 2월임시대선을실시할것을약속했다. 여기에암살당한아키노의부인인코라손아키노가마르코스와양자대결을벌였다. 개표결과정부발표와민간단체의집계가상이한가운데정부가마르코스의당선을

27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공식화하자야권은이에불복하고거리시위를전개하였다 ( 서경교 1999; 147-151; 김동엽 2016b, 153-5). 당시군부에서는마르코스의특혜를받지못한세력이있었고이들은군개혁운동 (Reform the Armed Forces Movement, RAM) 을조직하여마르코스의편애주의, 무능력, 부패등을비난하였다. RAM은마르코스에대해직접적으로반기를들었으며그를제거할쿠데타를계획하였다. 그러나사전에발각됨으로써관련된인사들이체포되었다. 이러한과정에서국방장관이마르코스에대한충성을거부하였고, 그에대한무력진압이임박했다는소문에시위대는더욱증가하였다. 반란군을진압하기위해출동한군부와시민이대치하는가운데미국이마르코스의퇴진을종용하였으며, 마르코스는미국으로망명하면서민주적전환이이루어졌다. 이어아키노정부가등장하였으며, 필리핀의민주화는동아시아민주주의의물결의시발점이되었다 ( 김동엽 2016b, 153-6). 필리핀은이른바마르코스에반대하는 민중의힘 으로독재정권을몰아낸동아시아최초의민주주의였다. 이후민주헌법에의한주기적인선거를통해서대통령을선출하는등절차적민주주의가유지되어왔다. 그러나전통적인엘리트가다시국가권력의중심에등장하면서필리핀의민주주의는위기를맞게되었다. 1998년국민의절대적인지지로당선된에스트라다 (Estrada) 대통령이집권후 2년만에부정부패의혐의가드러나면서하원에의해탄핵안이제출되었다. 탄핵심판이상원에서진행되던중재판절차에불만을가진야당의원이재판장에서퇴장하였고, 이를지켜보던국민들이다시거리시위를전개하였다. 결국에스트라다가헌법적절차가아닌민중의힘으로물러나게되었으며, 이는헌법적절차가아닌민중의힘에의해서물러남으로써필리핀민주정치의취약성을드러낸사건이되었다 ( 김동엽 2016b, 140-1). 3) 비민주주의 태국은 1932년쿠데타로인해입헌군주제가실시된이래쿠데타로만정권이교체되는 태국정치의악순환 (vicious circle of Thai politics) 을겪다가 1992년민주적전환을이루었다 ( 이동윤 2016, 87). 1944년부터 1947년까지, 그리고 1973년부터 1976년까지태국에서는민간정부가수립되기는하였으나이를제외하고태국은군부의통치가지속되었다. 이러한조건속에서민주적전환이가능했던것은 1980년수상을맡은쁘렘 (Prem) 장군의온건한군부통치하에서민주화를위한개혁이진행되었기때문이다. 태국은당시악화된경제와외교정책문제로국가적혼란상황에있었다. 쁘렘은청렴하고효율적인지휘관이었으며군부는물론이고민간정치인, 국왕모두에게강한지지를받았다. 쁘렘의내각은군부, 민주당 (Democrat Party), 사회행동당 (Social Action Party), 찻타이당 (Chart Thai Party) 과함께연립내각을구성하였으며, 37명의각료중국가안보와관련된직을제외한대부분을민간인으로충원했다 ( 서경교 1997)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73 1983년실시된총선에서쁘렘이다시수상에추대되었다. 그러나당시아팃 (Arthit) 장군이영향력을확대하기시작했다. 아팃은군부의강력한정치적영향력의유지를주장했고쁘렘의민주적개혁에반대했다. 1984년아팃은쁘렘정부의바트 (baht) 평가절하정책을강하게비판하였으며, 1986년일부정당과공모하여쁘렘에대한불신임결의안을통과시켰고, 이로인해 1986년 7월총선이실시되었다. 선거는태국에서가장오랜역사와조직력을갖춘민주당이당일정당으로는 100석을차지하여최대의석을차지하였다. 이어서찻타이당이 63석, 사회행동당이 51석을차지하였다. 쁘렘은민주당, 사회행동당, 찻타이당을중심으로연립내각을구성하였다. 그러나불안한정국으로인해 1988년 7월에다시총선이실시되었다. 선거결과찻타이당이최다의석을차지하였다. 이후결성된연합정부는쁘렘에게수상직을부탁하였으나거절하였고, 대신찻타이당의찻차이 (Chaichai) 가수상에올랐다. 그는 1976년의민간통치가종결된이후처음으로선거에의해선출된수상이었다 ( 서경교 1997). 그러나찻차이수상은민주적개혁을진행하지않았고, 농민에게부를분배하는데실패하였다. 또한정부내에서지속적으로발생하는부패문제로인해군부와의관계가악화되었다. 결국 1991년 2월군부는찻차이정부를붕괴시켰다. 그러나군부의복귀에불만을가진도시의시민들이 1992년 5월대대적으로봉기하였다. 이과정에서군부기득권세력과민주화세력간에충돌과유혈사태가발생하였다. 사태가극단으로치닫게되자국왕이개입하였고, 이는군부의정치적퇴진으로이어졌다. 아난 (Anand) 의과도정부하에 1992년 9월새로운총선이실시되었고민간정치인인추안 (Chuan) 이이끄는민주당이제1당이되었다 ( 이동윤 2016, 87; 서경교 1997). 민주적전환이후태국은민주적절차에입각한의회선거를통해정권교체가이루어졌다. 그러나추안총리가국유지불하과정에서생긴부패스캔들에책임을지고물러나게되었으며, 이후두면의총리역시내각의부패스캔들, 정책부진, 1997년의외환위기의책임을지고임기를채우지못하고사임했다. 한편태국은민주적전환이후 1997년새로운헌법을제정하였고, 이는태국역사상가장민주적인헌법이었다. 새헌법에의해상원의원을직선제로선출하고, 하원의원은소선거구제지역구선출과정당명부제비례대표제를적용한혼합제를채택하였다. 또한독립적인선거관리위원회, 헌법재판소, 국가부패방지위원회등다양한독립적인헌법기관을신설하였다. 태국의민주주의는 2000년대초까지만해도많은찬사를받았다. 2001년선거는태국역사상가장자유로운선거였다. 그러나 2001년과 2005년의회선거를통해집권한태국애국당 (Thai Rak Thai Party) 과탁씬 (Thaksin) 총리의권위주의적통치행태로인해민주주의의위기를가져왔다. 이후 2006년 9월군부쿠데타가발생하였고, 민주주의는전복되었다. 태국은탁씬지지세력과반대세력간의대립이지속되는가운데몇차례에걸쳐정권교체가이루어졌으나, 이때마다정치적혼란이지속되었고, 2014년 5월또다시군부쿠데타가발생하였다. 따라서태국의민주주의는 1992년부터 2006년까지 14년이라는짧은기간동안존속했으며, 붕괴이후군부쿠데타의악순환이다시반복되고있다.

27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3. 민주주의지표에의한아시아신생민주주의평가 1990년대초반까지만해도인도네시아를제외한 4개국은모두결함있는민주주의 (defective democracy) 였다. 한국과대만역시민주화이후에정권교체가일어나지않았고권위주의계승정당이선거를통해서통치를지속해왔다 (Hungtinton 1993. 298-311). 또한 2003년임성학의프리덤하우스 (Freedom House) 지표와정권교체의경험유무에의한비교연구에의하면당시한국과대만의민주주의가가장공고화되어있고, 필리핀과태국은중간정도의공고화를그리고인도네시아는낮은수준의공고화이다 ( 임성학 2003, 207). 2009년의신도철과투살렘의 2006년세계은행거버넌스지표 (World Bank Governance Indicators, WBI) 를사용한아시아민주주의의측정에의하면당시한국과대만은민주주의의높은성취도를보였다. 그러나인도네시아와태국은중간정도의성취도를보였고, 필리핀은낮은성취도를보였다 (Shin and Tusalem 2009, 366-369). 따라서 2000년대중반까지 5개국의민주주의는초기의결함있는민주주의에서출발하여한국과대만이안정적이고공고화된민주주의로발전해온반면, 필리핀과태국그리고인도네시아는불안정한민주주의가지속되어왔다. 그렇다면아시아 5개국의 2015년민주주의현황은어떠한가? < 표 1> 은 Polity IV에서측정한 1990년부터 2015년까지필리핀, 한국,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의민주주의지수이다. < 표 1> 의결과에의하면 2015년모든국가들이지수의 6과 10사이에위치함으로써민주주의로분류된다. 그러나이중에서대만은 10점으로완전한민주주의이며, 한국과인도네시아그리고필리핀에게는 8점이부과되었다. 태국은 2010년 4로떨어지면서혼합정으로구분되었으나 2015년에는 7점으로약간의회복을보였다. Polity IV의민주주의측정을위한기준이 (1) 행정부의경쟁성, (2) 행정부의개방성, (3) 행정부에대한견제, (4) 정치적참여의조절 (regulation), (5) 정당의경쟁성임을고려할때, 이는정치제도의민주적운영에대한평가를제공해준다. 따라서 Polity IV의평가에서민주주의로분류되는경우에는적어도경쟁 (contestation) 과포용 (inclusion) 을보장하는정치적제도가갖추어져있다고평가할수있다. 따라서 2015년다섯국가는정치제도의측면에서는민주주의의외피를유지하고있다. 표 1 동아시아 5개국 Polity IV 지수 (1990 2015) 1990 1995 2000 2005 2010 2015 대만 -1 7 8 10 10 10 한국 6 6 8 8 8 8 인도네시아 -7-7 6 8 8 8 필리핀 8 8 8 8 8 8 태국 3 9 9 9 4 7 note: 6~10: 민주주의 / -5~5: 혼합정 (anocracy)/ -10~-6: 독재 출처 : http://www.systemicpeace.org/polity/polity4.htm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75 그러나민주주의를 자유 (freedom) 의개념으로이해하는프리덤하우스에서조사한아시아국가들의민주주의지수는 Polity IV의결과와차이를보여준다. 프리덤하우스는시민적자유와정치적권리의측면에서각국가의자유의정도를측정한다. < 표 2> 에의하면대만은 free 의 1.5를지속적으로유지하면서가장우수한지표를보여준다. 한국은 free 의수준을지속적으로유지하고있으나 2015년에는지수가다소하락하였다. 인도네시아는 2010년 2.5를기록하여 free 로분류되었으나대부분 partly free 로혼합정으로구분된다. 조사시점에필리핀은 2001년의 free 에서 2015년에는 partly free 의혼합정으로후퇴하였다. 태국은 2001년의 free 에서 partly free 로하락하였다가 2015년에는독재인 not free 로하락하였다. 따라서프리덤하우스의민주주의평가에의하면대만이 1.5점으로가장높은민주주의이며, 한국이 2점으로민주주의이다. 그러나인도네시아와필리핀은혼합정으로, 그리고태국은독재로분류된다. 표 2 동아시아 5개국의 Freedom House 지수 (2001 2015) 2001 2005 2010 2015 대만 1.5 1.5 1.5 1.5 한국 2 1.5 1.5 2 인도네시아 3.5 3.5 2.5 3 필리핀 2.5 2.5 3.5 3 태국 2.5 2.5 4.5 5.5 note: 1~2.5: free ( 민주주의 )/ 3~5.5: partly free ( 혼합정 )/ 5.5~7: not free ( 독재 ) 출처 : https://freedomhouse.org/regions/asia-pacific < 표 1> 과 < 표 2> 에의하면대만과한국의경우민주적전환이후전반적으로지수가상승하고있다. 정치적인제도의민주화와정치적권리나시민적자유의측면에서의발전이민주화이후지속되고있다. 인도네시아의경우는한국과대만의수준에이르지는못하지만민주적전환이가장늦었다는점을고려한다면그발전의방향은다소긍정적이라고볼수있다. 1988년민주적전환직후 Polity IV 지수는 6으로급상승하였고이후지속적으로개선되어오고있다. 그러나정치적권리와시민적자유의발전의속도는제도의발전을따라가지는못하고있다. 한편필리핀의 Polity IV 지수는 1990년이래로변화가거의없는것을고려할때제도로서의민주주의는어느정도안정된것으로볼수있다. 사실상필리핀은민주화의제 3의물결의선주주자였으며, 아시아에서민주주의의경험이가장오래된국가이기도하다. 그러나정치적권리나시민적자유의측면은취약함을보여준다. 마지막으로태국은군부의정치적인영향력을통제하는데실패하였고결국 2006년군부쿠데타로민주주의가전복되었다. 프리덤하우스지수는 2010년과 2015년태국의점수가 혼합정 내에서도지속적으로하락하고있는것을보여준다. 따라서 Polity IV와프리덤하우스의평가에의하면민주화의제 3의물결속에서권위주의정부로부터민주주의로전환한다섯국가중동북아

27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시아의대만과한국은안정적이고공고화된민주주의이다. 동남아시아의인도네시아와필리핀은여전히결함있는민주주의이며, 태국은이미민주주의가아니다. 그러나지표상으로도가장높은민주주의를실현하고있다고하더라도대만과한국의민주주의는여전히완전한민주주의는아니다. 가장높은점수를받은대만에서도민주주의의위기가존재했다. 2004년대선캠페인중발생한민진당총통후보를저격한 3.19총격사건 은중대한위기적상황이었다. 총격을가한범인이국민당의사주에의한것인지민진당의자작극인지에대한명백한결론이내려지지않은가운데위기상황으로인해군인이투표에참여할수없었고, 참여하지못한군인의수보다적은득표의차이로민진당후보가당선되면서선거이후정국의혼란으로이어졌다 ( 추윤한 2007, 114-5). 그러나혼란의상황에서도대만의민주주의는선거의결과를수용하였고정국은다시안정을회복할수있었다. 선거경쟁과정권교체가민주적인절차를통해서지속된다는것과비록의혹이존재함에도불구하고선거에서의패자가다음선거를통해서집권의가능성을가질수있다는믿음으로결과를수용하였다는점은대만민주주의가공고화되었다는것을말해준다. 한국의민주주의역시완전한민주주의는아니지만안정적으로유지되어왔다. 공고화과정에서우려되었던군부쿠데타나극심한대중의봉기, 반체제정당이등장하지않았다. 물론한국민주주의에위기가없었던것은아니다. 2004년에있었던노무현대통령탄핵의시도는국민의손으로선출한후보를정당이바꾸고자한시도로써민주적절차와과정을무시한것이었다. 그러나탄핵과관련하여대규모의소요나사회적혼란이따르지않았다는점과탄핵이후의헌법재판소의결정을정치권이수용하였다는점에서한국의민주주의는안정화되었다고평가할수있다 ( 강원택 2007, 51). 한국역시대만과마찬가지로민주화이후정기적이고공정한절차에따라대통령선거와국회의원선거가이루어지면서절차적민주주의를확립해가고있다. 민주주의가붕괴된태국은좋은민주적인제도를갖추는것이민주주의의공고화로이어지지는않는다는것을보여준다. 태국은역사상가장민주적인헌법으로칭송받았던 인민헌법 을제정하였지만군부쿠데타를막지는못했다. 그러나군부쿠데타를초래한탁신정권의통치행위또한비민주적이었다. 민주적절차에의해집권한탁신정부는야당과반대세력의요구를무시하면서일반적인통치행태를지속하였고, 정책의추진과정에서부패스캔들에연루되기도하였다. 결국탁신의퇴진을요구하는시위가전개되었고, 이과정에서사회적혼란과정치적불안이고조되면서 2006년에군부쿠데타가발생하였다 ( 이동윤 2016). 태국의사례는민주화이후정치제도의민주적인운영의실패가군부의개입을다시불러온사례이다.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77 4. 신생민주주의정치제도와민주주의의안정성 민주주의로전환한국가들이공고화된민주주의로발전하지못하거나권위주의체제로전복하는것에대한제도적인원인이다양하게제기된바있다. 신생민주주의공고화와관련하여정치제도와관련된요소로서전환의방법 (Huntington 1993), 헌정제도 (Przeworski 2005; Linz 1990; Mainwaring 1993), 정당체제와선거제도 (Przeworski 2005; Croissant 2004) 등이제기된바있다. 그렇다면동아시아의민주주의의성공과실패의차이는민주화이후적용된정치제도의차이에서비롯된것인가? 동남아시아의민주주의의실패에대해서가장많이지적되는부분은정치제도의한계로서그중에서도정당경쟁의미발달과정당체제의파편화가초래하는정치적불안정이다 ( 김동엽 2016b: 이동윤 2016; 서경교 2007). 그렇다면아시아민주주의 5개국의신생민주주의정치제도와관련된전환의방법, 헌정제도그리고정당체제와선거제도는어떠한차이점을보이는가? 일찍이헌팅턴은민주주의로의전환의방법이민주주의의생존에영향을미치는가를다양한전환사례를통해검토한바있다. 임성학역시 2003년의비교연구에서아시아국가들의전환의방법과체제안정성을연구하였다. 헌팅턴은전환의방법과민주주의의생존과는관련성이없다고결론지었지만 (Huntington 1993), 임성학은한국과대만이높은공고화를유지하는것은거래나개혁적인민주화과정때문이며, 따라서붕괴혹은혁명의과정을거친필리핀과인도네시아, 그리고부과의민주화과정을거친태국은낮은공고화를보인다고하였다 ( 임성학 2003). < 표 3> 은헌팅턴의분류방식에의한아시아 5개국의전환의방법과민주주의의현황이다. 인도네시아, 그리고태국이 타협 (transplacement) 의방법으로민주적전환을이루었고, 대만은 변환 (transformation), 그리고필리핀은 대체 (replacement) 의방법으로전환을이루었다. 전환의방법과 2015년의민주주의의현황과의관계를검토해보면동일한 타협 의방법을택한세국가의민주주의의성취는큰차이를보인다. 한국이공고화된민주주의라면인도네시아는불안정한민주주의이며, 태국은비민주주의이다. 또한서로다른방법인 변환 의대만과 타협 의한국은동일하게공고화된민주적성취를보인다. 따라서헌팅턴의전환의방법의분류를따른다면전환의방법은 2015년아시아민주주의의공고화와관련성이없는것으로나타난다. 표 3 동아시아 5개국의민주적전환의방법그리고민주주의현황 국가 전환의시기 전환의방법 민주주의 대만 1987 변환 (transformation) 공고화된민주주의 한국 1987 타협 (transplacement) 공고화된민주주의 인도네시아 1998 타협 (transplacement) 불안정한민주주의 필리핀 1986 대체 (replacement) 불안정한민주주의 태국 1992 타협 (transplacemnt) 비민주주의 참조 : Shin and Tusalem (2009); Croissant (2004)

27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한편제도의안정성과관련하여가장많은논의가이루어진영역은대통령제와의원내각제의효과이다. 린츠 (Linz 1990) 에의하면의원내각제가가대통령제보다훨씬안정적이다. 대통령제의경우승자독식의게임에의해서패자는선거이후에그역할이사라지지만, 의원내각제는야당의수장으로그역할을보장받기때문에체제의유지에있어서보다안정적이다. 또한대통령제는의회의다수를야당이차지하는경우행정부와의화간의교착관계 (executive-legislative deadlock) 를형성할수있고이경우그수명이짧아질수있다. 특히대통령제가파편화된정당체제와결합할경우그생존율은더욱낮아진다 (Mainwaring 1993). 그러나아시아국가들의정치제도는이러한제도의효과성과상반된결과를보여준다. < 표 4> 에의하면대만, 한국, 인도네시아그리고필리핀이모두대통령제를적용하고있으며태국만이의원내각제를적용하고있다. 즉공고화된두민주주의국가인대만과한국이체제의불안정성을초래하는것으로알려진대통령제를택하고있는반면권위주의로후퇴한태국은의원내각제를채택하고있다. 그렇다면헌정제도는아시아의민주주의의공고화와관련하여상반된효과가있거나, 혹은그영향력이없다고할수있다. 표 4 동아시아 5 개국의정치제도, 정당체제, 의회선거제도 국가 정치제도 정당체제 의회선거제도 대만 대통령제 양당제적다당제 단순다수결소선거구제 / 정당비례대표혼합제 (2005) 한국 대통령제 양당제적다당제 단순다수결소선거구제 / 정당비례대표혼합제 (2001) 인도네시아 대통령제 불안정한다원정당체제 폐쇄형정당명부식비례대표제 (1999) 필리핀대통령제과두엘리트적경쟁적다당제 태국의원내각제 경쟁적다당제 (2001 년이전 ) 양당제적다당제 (2001 년이후 ) 참조 : 임성학 (2003); 이동윤 (2016, 109); 김동엽 (2006, 90-91) 개방형투표용지를사용하는소선거구제 / 정당비례대표혼합제 (1987) 소선거구제 / 정당비례대표혼합제 (1997) 그렇다면선거제도와정당체제의효과는어떠한가? 민주화이후선거제도의개혁으로인해대만과한국은소선거구제-정당비례대표혼합제를채택하였다. 비록혼합제이기는하지만단수다수결의특징이강함으로인해한국과대만의정당체제는양당제적성격이강한다당제의특징을가진다. 태국역시 1997년소선거구제-정당비례대표혼합제로선거제도를개혁하였다 (< 표 4> 참조 ). 이로인해 2001년이후의선거는태국애국당과민주당의양당을중심의다당제적특징을지닌다. 그러나인도네시아의정당명부식비례대표제와필리핀의개방형투표용지를사용한소선거구제는불안정한다당제를이끄는경향이있다. 선거제도개혁이전의태국과인도네시아그리고필리핀의경우극심한다당제로인하여이러한정당의파편화가정치적불안정을초래했다는비판을받아왔다. 그러나정당의파편화가민주주의안정성을위협하는가의문제는좀더조심스럽게검토해야한다. 민주주의가붕괴된태국의경우 1997년의선거제도개혁으로인해서양당제적다당제를형성하였고, 탁신이이끄는태국애국당과민주당이비교적안정적인정당체제를형성하였다. 그러나탁신의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79 권위주의적인통치운영방식에반대하는세력에의해 2006년민주주의의붕괴로이어졌다. 즉태국의민주주의의붕괴는정당의파편성과는관련성이없으며아시아민주주의의지속가능성은정당체제로설명할수없다는결론에이른다. 그러나태국의사례만가지고인도네시아와필리핀의다당제가초래하는체제불안정성을부인할수는없다. 폐쇄형정당명부식비례대표제를적용하는인도네시아의정당파편성은상당히높은편이다. 인도네시아는 2014년총선에서총 10개의정당이하원의의석을획득했다. 또한필리핀의개방형투표용지를사용하는소선구제는지역의유권자들이원하는혜택을제공하고자하는동기를후보자에게부여하며, 이는가난한유권자의수요에부응하여정당이거시경제정책보다는선심성혜택을제공하는동기를갖게한다. 이는정책을중심으로하는정당경쟁보다는사적인이익과네트워크를기반으로한선심성정책과나아가서는정치적부패로이어지게되면서신생민주주의의안정성을크게위협한다 ( 신재혁 2014). 따라서아시아신생민주주의의정치제도는민주주의의안정성과큰상관성이없어보인다. 제도가탄생할시기의전환의방식의차이는민주적안정성과관련성이없으며, 헌정제도또한민주주의의지속성과관련성이없는것으로나타난다. 선거제도와정당체제의경우양당제와다당제의차이즉정당체제의파편성역시태국의사례를고려한다면사실상관련성이없는것으로나타난다. 그러나다당제이든양당제이든경제적으로어려운유권자와결합될경우동남아시아의민주제도안정성은심각하게위협받는것으로나타난다. 필리핀과인도제시아의다당제의사례에서도나타나지만, 양당제적특성이강한태국의경우에도태국애국당의사례도이에포함된다. 탁신의태국애국당은가난한유권자들을위한선심성공약으로표를획득할수있었던고, 이로인해의회의다수의석을차지할수있었다. 그러나이러한배경이탁신의위임민주주의의근거가되었고, 이로인해민주주의의붕괴를가져온일방적이고권위주의적리더십을초래하였다. 5. 경제적풍요, 경제성장, 그리고경제적불평등 많은학자들은어느제도이든지경제적성과의효과앞에서는무력하다고지적한다 (Przeworski 1996; Diamond and Linz 1989; Lipet 1959). 따라서어떠한정치제도이든지체제의안정성이유지되기위해서는경제적풍요 (affluence), 약간의인플레이션을동반한경제성장그리고부의불평등완화가수반되어야한다 (Przeworski 1996). 역으로말하면신생민주주의가충분한경제적풍요를제공하지못하고, 경제성장을이루지못하며, 나아가부의불평등문제를해결하지못한다면체제는쉽게전복될수있다. 그렇다면경제와체제안정성간의상관성을고려할때동아시아신생민주주의는어떻게평가할수있는가? 경제적풍요와관련하여립셋 (Lipset 1959:75) 은신생민주주의에서경제적으로번영된국가의

28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경우그민주주의의생존력이높다는것을발견한바있다. 한편국가들사례분석을통한경험적인증거를통해서쉐보르스키는민주주의가일인당 GDP 6,000US$ 를넘는경우그체제생존가능성이높아진다는것을발견했다. 이는풍요로운국가일수록자본배분을둘러싼갈등이축소되며, 보다나은정치제도를도입하고자하는동기를갖게때문이다 (Przeworski 1996). < 그림 1> 과 < 표 5> 는 1985부터 2015년까지의 World Bank에서측정한동아시아 4개국과대만통계청에서발표한각사례의 1인당 GDP이다. 모든동아시아국가들의 1인당 GDP는 1997년외환위기와 2008년세계경제위기의영향을받아일시적으로하락하였다가다시회복되었으며전반적으로는상승하는추세를보이고있다. 그중대만과한국은 1990년이전에이미일인당소득 6,000US$ 의문턱을넘었으며, 2015년에는각각 22,294US$ 와 27,222US$ 를기록하면서높은경제적풍요를누리고있다. 인도네시아는 1997년외환위기직후민주적전환을경험하였고, 이후 1인당 GDP는조금씩상승하여 2010년에는외환위기이전의수준을회복하였다. 필리핀역시민주적전환이후 1인당 GDP가상승하였다가 1997년외환위기직후에하락하였고, 2010년이후에야 1990년대초반의수준을회복하였다. 태국역시이와유사한패턴을보이지만그상승의폭은인도네시아나필리핀보다는큰편이다. 2010년 5,112US$ 를넘었으며 2015년에는 5,816US$ 를달성하였다. 그러나인도네시아와필리핀, 그리고태국은쉐보르스키가제시한 6,000US$ 의문턱에아직미치지못하였다.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81 그림 1 동아시아 4 개국의 GDP per capita (1985-2015) 표 5 동아시아 5개국의 GDP per capita (1985-2015) 1985 1990 1995 2000 2005 2010 2015 대만 3,315 8,216 13,129 14,941 16,532 19,278 22,294 한국 2,542 6,642 12,404 11,948 18,658 22,151 27,222 인도네시아 529 3,125 1,026 780 1,264 3,125 3,347 필리핀 566 2,145 1,061 1.040 1,197 2,145 2,899 태국 748 5,111 2,856 2,016 2,874 5,112 5,816 출처 : The World Bank(http://data.worldbank.org/indicator/NY.GDP.PCAP.CD), National Statistics, Republic of China, (http://statdb.dgbas.gov.tw/pxweb/dialog/saveshow.a) 그러나이러한풍요의기준에도달하지못하더라도꾸준히경제가성장하는경우라면민주주의는가난한국가에서도지속될수있다고주장한다 (Przeworski 1996). 따라서다이아몬드와린츠는경제적인위기야말로민주주의안정성에가장일반적인도전이라고지적한바있다 (Diamond and Linz 1989). 그렇다면개발도상국의경우민주주의를유지하기위해서는경제성장을유지하는것이중요하다. 동아시아국가들은 1990년대중반이후두번의경제위기를경험했다. 1997년태국의바트화절상에서시작된동아시아금융위기는모든국가들의경제성장률을크게후퇴시켰다. 인도네시아가가장큰폭으로하락했으며이어서태국, 한국, 필리핀의순이었다. 인도네시아는 1997년경제위기를계기로하여권위주의정권이붕괴되었다. 2008년동아시아를다시강타한세계경제위기는 1997년의수준은아니지만역시이지역국가들의경제성장을후퇴시켰다.

28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그림 2 동아시아 4 개국의경제성장률 (1985-2015) 표 6 동아시아 5개국의경제성장률 (1985-2015) (GDP growth (annual %) 1985 1990 1995 2000 2005 2010 2015 대만 5.0 5.7 6.5 5.8 4.2 10.6 0.8 한국 7.5 9.3 8.9 8.8 3.9 6.5 2.6 인도네시아 3.5 9.0 8.4 4.9 5.7 6.2 4.8 필리핀 -7.3 3.0 4.7 4.4 4.8 7.6 5.8 태국 4.6 11.2 8.1 4.5 4.2 7.2 2.8 출처 : The World bank(http://data.worldbank.org/indicator/ny.gdp.mktp.kd.zg_); National Statistics, Republic of China, (http://statdb.dgbas.gov.tw/pxweb/dialog/saveshow.a) 경제성장률과관련하여사실상한국과대만의하락은다른사례들보다크다고볼수있다. 한국과대만은발전국가시기에 12-13% 에이르는높은경제성장률을달성하였다. 그러나 < 그림 2> 와 < 표 6> 에의하면민주화이후한국과대만의경제성장률은하락하기시작하였으며두번의경제위기동안두국가는최초로마이너스성장을경험하였다. 인도네시아는 1997년 13.13의성장률로권위주의정권이붕괴되었으며, 이후성장률은회복하여 2009년을제외하고는 4-6% 의성장률을보이고있다. 필리핀의경우도 1986년민주적전환의직전인 1984년과 1985년에모두 7.3% 로성장률이하락하였다. 이후경제위기의충격을받기는하였으나 5개국가군중에서가장그충격이덜했으며, 경제성장률은민주화이후비교적우수한성적을보이고있다. 태국은인도네시아와필리핀과는달리민주화가진행된이후경제위기를맞았다. 1992년민주적전환이이루어졌을때태국의경제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83 성장률은하락하고있기는했지만 8% 대의높은수준을유지하고있었다. 따라서 2008년의 7.63% 으로의하락은신생민주주의에큰타격이되었다. 민주주의가붕괴하고 2007년이후에는성장률의변화가상당히큰폭으로상승과하강을반복해오고있다. 한편민주주의를유지하기위해서는쉐보르스키의경험적인결과에의하면, 불평등이완화되는민주주의의수명은약 84세인반면, 소득불평등이높아지는민주주의의수명은약 22세에불과했다. 대중은민주주의가소득불평등을완화시켜줄것을기대하며, 만약민주주의가그러한성과를내지못한다면체제로서생존하기어렵다 (Przeworski 1996). 다알역시민주화는높은경제적불평등에의해서붕괴될수있다고보았다. 그는경제적인자원은정치적자원으로전환될수있기때문에집중된경제적권력은엘리트로하여금자유와권리를확대하려는정치적개혁을제한할것이라고보았다. 또한다알은경제적불평등이약자들에게분노와좌절을가져다주기때문에공동체의식이사라지고결국민주주의의정통성은훼손될것이라고보았다 (Dahl 1971). < 표 6> 는동아시아 2005년부터 2013년까지의소득불평등수준이다. 5분위비율 (Quntile ratio) 의경우필리핀이가장높으며, 이어서태국, 대만, 인도네시아, 한국의순서이다. 지니계수경우역시필리핀이가장높고, 이어서태국, 인도네시아, 대만, 그리고한국의순서이다. 전반적으로동아시아에서민주주의가취약하거나붕괴된국가의소득불평등이더높게나타난다. 그러나고무적인부분은필리핀, 태국의소득불평등이지속적으로감소하고있다는점이다. 반면한국과대만의소득불평등은지속적으로상승하고있다. 표 6 동아시아 5 개국의소득불평등수준 (2005-2013) Quintile ratio (2005-2013) Gini coefficient (2005-2013) 대만 6.1 0.340 한국 5.5 0.306 인도네시아 5.7 0.381 필리핀 8.4 0.430 태국 6.9 0.393 1) 한국과대만의자료는 UNDP의 Human Development Report의기준에맞추어 2005년부터 2013년까지의자료의평균을구한것이다. 2) Gini coefficient의경우 UNDP의자료는한국과대만의자료에맞추어소수점자리이하로표시되도록환산하였다. 출처 : 한국 http://kostat.go.kr/ 대만 http://www.cepd.gov.tw /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http://hdr.undp.org/en/composite/ihdi 지난 12년간소득불평등의평균은필리핀이가장심각하며, 뒤를이어태국이심각하다. 필리핀의여론조사기관인사회기상청 (SWS) 에의하면필리핀의계층구조는 1-2% 의상류층, 7-8% 의중산층, 55-60% 의빈곤층, 그리고 20-25% 의극빈층으로구분되어있다. 즉전체인구의 90% 가빈곤층과극빈층으로구분된다 ( 김동엽 2016b). 또한지난 10년간의경제성장에도불구하고빈부격차와

28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부의불평등은인도네시아민주주의의장애물로여겨지고있다 ( 서경교 2015, 4-5). 태국의경우, 1992년민주적전환이이루어졌을때, 새로운문민정부에대한기대는당시정치적불안정의원인으로지적된농촌지역의심각한빈곤문제와도시와농촌간의빈부격차를해소하는것이었다 ( 서경교 1996, 368). 그러나두국가의불평등의구조가전반적으로는완화되고는있다고는하나빈곤의여전히심각한사회적불만의원인이되고있으며, 국민들의생활수준은개선되지않았다. 더욱이민주화이후등장한신생민주정부가이러한문제들을해결하고자하였으나경제적인성과를창출하는데실패하였고나아가부패에연루되면서그통치정당성을잃게되었다. 6. 아시아국가의민주화이행과공고화가한국의민주화에주는함의 민주화의제 3의물결속에서권위주의체제에서민주주의로전환한다섯국가중민주주의지수의평가에의하면 2015년동북아시아의대만과한국만이공고화된민주주의이며, 인도네시아와필리핀은불안정한민주주의, 그리고태국은비민주주의이다. 세계적인민주주의의후퇴현상속에서아시아의민주주의역시후퇴하고있다. 이러한아시아민주주의의후퇴에영향을미칠것으로생각되는정치제도는아시사의민주주의지속성과큰관련성이없어보인다. 전환의방식과헌정제도는민주주의의지속성과관련성이없으며, 선거제도와정당체제역시중요한원인은아닌것으로판명되었다. 그러나정치제도가경제적으로어려운유권자와결합될경우민주제도의안정성은심각하게위협받는것으로나타났다. 필리핀과인도네시아의다당제의불안정성과태국의양당제는가난한유권자의요구와정당의대중영합주의적인정책이결합되면서민주주의에위협을초래한것으로나타났다. 이러한현상은민주주의의지속과발전에있어서경제적요소의중요성을다시고려하도록만든다. 민주주의가유지되기위해서제시된세가지경제적요소중경제적풍요에서동북아시아국가와동남아시아국가간의차이는극명하게드러난다. 공고화된민주주의인한국과대만은 1인당 GDP가 20,000US$ 가넘지만, 동남아시아세국가들의경우 1인당 GDP가 2015년에도 6,000US $ 가넘지않는다. 따라서국가의부는아시아민주주의안정성에핵심적인요인으로보인다. 경제성장률과관련하여서는한국과대만이민주화이후두번의경제위기를경험하고이후경제적침체를지속하고있는반면, 인도네시아와필리핀은민주화이후에완만한경제성장을보이고있다. 그러나태국의 2008년경제위기와상당히큰폭의경제성장률의변화는신생민주주의의안정성에큰타격이되었다. 소득불평등의경우에도동남아시아가더욱심각하다. 동남아시아의경우빈곤의문제가해결되지않은상황에서필리핀의소득불평등이가장높으며, 이어서태국이그뒤를따르고있다.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85 따라서민주주의가붕괴한태국의경우낮은국가의부, 경제성장의침체와불안정한변동, 그리고높은소득불평등이민주주의에위협이되었고, 이러한문제들은여전히상존하고있다. 2006년군부쿠데타로인해실권한탁신은여전히그영향력을지속하고있는데그배경에는경제적으로어려운국민들의지지가있다. 태국북부와동북부지방을중심으로한도시빈민과농어촌주민들은여전히탁신을지지하고있다. 또한낮은국가의부와높은부의불평등을특징으로하는필리핀은에스트라다정권시기의고무적인경제성장에도불구하고정치적불안정이상존하고있다. 독재자들의부정축재에이용된외채를상환하기로했던아키노대통령은민주화초기부터많은재정적부담을가지고있었으며, 이는경제발전과공공복지를위한정부의능력을위축시켰다. 대중적지지를받은에스트라다대통령이또다른 민중의힘 으로퇴출되면서필리핀민주주의는한계를드러내었다. 헌텅턴은민주적전환의유형을설명하면서민주주의를하나의처방으로여기고도입하는경우를구분한바있다. 서로다른배경과문제점을가지고있는국가들이라하더라도문제의해결에대해동일한해법을생각하게되는경우이다. 국가가지닌문제는인플레이션, 법과질서의붕괴, 경제위기, 군사적패배등다양하다. 그러나이러한위기에대해서정치지도자나대중이해법으로오직민주주의만생각하게되는경우민주주의는정치적자유를획득하기위해서도입하기도하지만산적한경제문제를해결하기위한목적에서도입되기도한다. 헌팅턴은민주화의제 3의물결이이러한특징을포함한다고보았다 (Huntington 1993, 33-34). 민주적전환이전의동아시아각국가들의상황은모두상이했다. 그러나문제의해결을위해모두동일한해법, 즉민주주의로의전환을선택했다. 동북아시아의대만과한국이과거의경제발전과정에서성장한중산계층이정치적권리를획득하기위해민주적전환을주도했다면, 동남아시아의태국과필리핀그리고인도네시아는경제적인어려움을초래한권위주의정권을심판하고민주적인제도속에서해결책을모색하기위한목적에서민주주의로의전환을선택했다. 두상반된사례군에서는각각민주주의에대한기대도다르지만더나아가민주주의에대한기본적인이해에서의차이가있다. 즉동남아시아의경우민주주의를경제성장을위한도구로이해하고있는것이다. 이경우대중은민주주의를정치적자유를확대하기위한제도로서도입하는것이아니라경제발전, 경제회생을위한도구로서필요로한다 (Bratton and Mattes 2001). 그러나이러한민주주의에대한기대는민주주의에대한본질적인지지라고볼수없다. 웰젤과잉글하트는민주주의에대한본질적인지지가없다면실질적인민주주의수준은낮을수밖에없다고지적한바있다 (Welzel and Inglehart 2006). 도구적으로이해하는민주주의가원하는경제적인성과를충족시키지못할때민주주의는쉽게붕괴될수밖에없기때문이다. 필리핀과태국의경우 1인당 GDP가민주적전환이후부터현재까지 6.000US$ 를넘지못하고있고, 그성장의속도또한매우느리다. 또한민주화이후경험한두번의경제위기는두국가의

28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경제에심각한타격을주었으며빈곤층의증가를가져왔다. 이러한경제적실패는결국민주주의에대한실망과함께태국의민주주의의붕괴와필리핀의반인권적인우파정부의등장을가져왔다. 인도네시아의경우 1998년의경제위기가민주적전환을가져온이래로여전히민주정부는과거정부와비교할때괄목할만한경제적성과를내지못하고있다. 2014년대통령선거에서비록패배하기는하였으나강한이슬람주의와국수주의를주장하는수하르토의사위인수안비토가상당한지지를받았다는점은인도네시아의민주주의역시불안함을말해준다. 한편한국과대만의민주주의가동아시아에서우수한민주주의기는하지만완전한민주주의는아니다. 아시아에서프리덤하우스평가의최고점인 1점을받는국가는 2014년이후의일본이유일하다. 한국과대만의일인당 GDP는꾸준하게상승하고있지만경제성장률이둔화되고있는점, 그리고두번의경제위기를거치면서경제적불평등이심화되고있는점은민주주의에좋은상황은아니다. 또한쉐보르스키는국가가속해있는지역내의민주주의의숫자역시민주주의의생존과관련성이있음을지적한바있다. 지역내의민주주의의수가높아질수록민주주의의생존율이높아지며, 그반대의경우도성립된다 (Przeworski 1996). 따라서아시아에서붕괴되고불안정한민주주의국가의숫자가늘어난다는것은한국과대만의민주주의에있어서좋은징조는아니다.

아시아민주주의의이행과공고화비교연구 287 참고문헌 강원택. 2007. 민주화 20년을넘어서는새로운정치개혁의과제 역사비평 81: 50-74. 김동엽. 2005. 필리핀선거제도의내용과평가 : 민주주의공고화의관점에서 동남아시아연구 15(2), 67-111. 김동엽. 2006. 필리핀의선거와권력구조의변화 : 민주화이후대통령선거를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40(5), 301-322. 김동엽. 2016a. 필리핀 2016 대선결과 Chindiaplus 117, 62-63. 김동엽. 2016b. 필리핀민주주의공고화의구조적한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편. 민주화운동의세계사적배경 서울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40-187. 김영명. 2006. 한국의정치변동 서울 : 을유문화사. 배긍찬. 1989. 인도네시아의정치와사회 아세아연구 32(2): 149-193. 서경교. 1997. 태국과필리핀의민주화비교연구. 국제정치논총 36(3): 355-381. 서경교. 1999. 필리핀의정치변동과민주화 : 군부의정치적영향력을중심으로 국제지역연구 3(4): 145-178. 서경교. 2007. 민주화의위기 : 태국과필리핀의비교연구 국제지역연구 11(3): 261-288. 서경교. 2012. 태국의정치변동과민주주의 : 주요정치행위자를중심으로. 한국태국학회논총 제18 권 2호. 서경교. 2015. 인도네시아대중들의정치와민주주의에대한인식. 신재혁. 2014. 동남아시아신생민주국가의선거정치 :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비교 JPI정책포럼 151권 ; 1-13. 윤진표, 제대식. 2000. 인도네시아의민주화연구 : 군부와이슬람세력간의동학 국제정치논총 제 40집 3호 : 317-336. 이동윤. 2010. 태국의정치개혁확산과내재화의실패 : 1997년헌법개정을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제50집 1호. 이동윤. 2016. 태국의민주화와민주주의공고화 : 성공과좌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편. 민주화운동의세계사적배경 서울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6-139. 임성학. 2003. 아시아민주주의의비교분석과공고화 한국사회과학 25, 191-211. 임혁백. 1990. 한국에서의민주화과정분석 : 전략적선택이론을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4(1). 정은숙. 진보후보 극적승리로끝난인도네시아대선드라마 ( 프레시안 2014.8.5)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254 ( 접속일 2016. 9.20) 지은주. 2008. 대만의독립문제와정당정치 : 민주화이후정당체제의재편성 파주 : 나남. 지은주. 2016. 대만의민주주의는공고화되었는가? 국제정치논총 56(3), 263-297. 추윤한. 2007. 대만의힘겨운민주주의. 조희연, 박은홍편. 동아시아와한국 : 민주화와민주주의의위기를넘어 서울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pp. 89-122.

28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Bratton, Michael and Robert Mattes. 2001. Support for Democracy in Africa: Intrinsic or Instrumental? British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31(3), 447-474. Cheng, Tun-jen. 1989. Democratizing the Quasi-Leninist Regime in Taiwan, World Politics 42, No. 4, 471-499. Chu, Yun-han. 1992. Crafting Democracy in Taiwan. Institute for National Policy Research. Croissant A. 2004. From Transition to Defective Democracy: Mapping Asian Democratization. Democratization 11, 156-321. Dahl, Robert. 1972. Polyarch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Diamond, Larry and Juan J. Linz. 1989. Introduction: Politics, Democracy, and Society in Latin America, in Larry Diamon, Juan Linz, and Seymour M. Lipset eds. Democracy in Developing Countries: Latin America. Boulder, Colo.: Lynne Rienner. Hadiz, Vedi R. 2012. Democracy and Money Politics: The Case of Indonesia. in Richar Robinson ed. Routledge Handbook of Southeast Asian Politics. New York: Routledge, 71-82. Huntington, Samuel P. 1993.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Linz, Juan and Alfred Stepan. 1996. Problems of Democratic Transition and Consolidation: Southern Europe, South Africa, and Post-Communist Europ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Linz, Juan J. 1990. The Perils of Presidentialism. Journal of Democracy 1, 84-91. Mainwaring, Scott. 1993. Presidentialism, Multipartism, and Democracy: The Difficult Combination,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26, 198-228. Przeworski, Adam et al. 1996. What makes Democracies Endure? Journal of Democracy 7(1), 39-55. Przeworski, Adam et al. 2005. Sustainable Democrac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rzeworski, Adam. 1991. Democracy and the Market: Political and Economic Reforms in Eastern Europe and Latin America.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Rigger, Shelley. 2001. From Opposition to Power: Taiwan s Democratic Progressive Party. Boulder: Lynne Rienner Publishers. Shin, Doh Chull and Rollin F. Tusalem. 2009. East Asia in Christian W. Haerpfer eds. Democratiza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356-37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289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김대순 ( 한국외국어대학교 ) 1 1. 들어가며 구동구권에서민주체제전환이발생한지어언사반세기가흘렀다. 냉전체제하한때소련의위성국혹은공산주의국가로일컬어졌던제동유럽국은 1999년에는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2004년 5월 1일에는유럽연합 (EU) 에가입함으로써명실공이시장자본주의와민주주의공고화라는역사적인과업을달성하였다. 특히, 구공산국가중이른바비셰그라드지역협력체 (the Visegrád Regional Cooperation) 라고불리는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그리고폴란드는체제전환의기수로평가받으며, 1989년 2월대한민국과외교관계수립이래로정치 경제협력은물론문화교류그리고최근에는통일 안보분야에이르기까지그협력의범위를광범위하게확대하고있다 ( 구본영, 2015; 한기흥, 2015; 장진모, 2015). 이러한성과와는대조로국내외학계와주요언론에서지목하는비셰그라드 4개국의현민주주의에관한평가는다소부정적이며 (Plattner and Diamond, 2007: 5-6; Rupnik, 2007: 17-25), 특히헝가리와폴란드에서는비자유적민주주의 (Illiberal Democracy) (Ágh, 2013: 25-52; Kornai, 2015: 34-48) 또는결손민주주의 (Defective Democracy) 현상이출현하고있다고간주된다 (Merkel, 2004). 비자유적민주주의양태가나타난한가지공동사례를들어보면, 2014년총선후재임에성공한헝가리총리오르반빅토르 (Orbán Viktor) 와 2015년 10월득세한폴란드총리야로쉬로커진스키 (Jarosław Kaczyński) 모두헌법재판소의사법적판단에정치적개입을하는것은물론헌재의재판관도친정부인사로대거교체하였다. 이러한사법부에대한과도한정치적인개입은민주주의에서가장근본적이면서도중요하게간주하는권력의균형과견제의원칙을훼손하는것이며, 실제적으로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정치는퇴행중이다. 이러한움직임에대응하여유럽연합은신생민주주의국가에대하여좀더강력한법적제재를동원하고차후폴란드와헝가리와같이회원국내비민주적인조치의발생에관해서는유럽연합차원에서좀더적극적인개입을추진해야한다고목소리를높이고있다 (Müller, 2015: 141-160). 1 한국외국어대학교헝가리어과강사

29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본고는이러한동시대의현상을주목하여전환기민주주의기수에서권위주의국가로퇴행하고있는폴란드와헝가리의현민주주의주소를진단하고, 그것이대한민국의민주주의와비교하여어떠한함의가있는지시사점을도출하고자한다. 본고의구성은다음과같다. 1, 2장에서는헝가리와폴란드의역사적인민주주의전통을간략히살펴보고민주주의이행경로과정을고찰한다. 3장은헝가리와폴란드의정치적제도화과정을첫토대선거부터최근총선까지통시적으로분석하여정당체제의발전과민주적공고화과정을연계하여분석한다. 4장은헝가리와폴란드의실질적민주주의를각종민주주의지표로살펴보고이와함께현재각국에서공통으로논란이되고있는현안들을중점적으로분석하여현민주주의의주소를진단한다. 끝으로현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를동시대대한민국의민주주의와비교하여시사점을도출하는것으로본고를마친다. 2. 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전통 신생민주주의국가인헝가리와폴란드는유사하면서도상이한민주적전통이존재한다. 전자의경우 1848년시민혁명발발이후절대군주의권력을법률로제한하는입헌군주제가성립하였으며, 이러한헌정체제는 1867년오스트리아와헝가리왕국의대타협 (the Great Compromise) 으로성사된오스트리아-헝가리이중왕국시대에서도 (the Austro-Hungarian Empire, 1867-1919) 유지되었다. 이중왕국시대에헝가리왕국의주권은일부제약받았으나헝가리왕국은자치권을부여받았으며, 이에단독의회를개최하는등정치적인영역에서는독자적인의회주의를실현할수있었다. 반면폴란드왕국은 1772년, 1793년, 그리고 1795년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그리고제정러시아열강삼국의분할점령에따라주권을완전히상실하였고, 이러한분할체제는사실상 1918년제 1차세계대전의종전시점까지유지되었다. 즉, 폴란드와헝가리는 18-19세기유럽대륙에서당시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제정러시아와같은열강의영향하에놓이면서독자적인정치발전을이룰수있는기회를제약받은점이공통적인특성이지만, 헝가리는오스트리아와의이중왕국체제하에서제한된형태로의회민주주의를실현할수있는역사적전통이존재하였다 (Bölöny and Hubai, 2004). 제 1차세계대전이종결된후폴란드와헝가리는주권을회복하였으나전자는 1926-35년육군원수요제프피우수트스키 (Józef Piłsudski) 의독재하에놓이면서의회민주주의를실현할수없었다. 비슷한시기헝가리도이중왕국시대해군제독이었던호르티미클로시 (Horthy Miklós, 재위 1920-1944년 3월 18일 ) 의섭정이시작되면서제한된형태의의회민주주의특성을나타내었다. 2 제 2 예컨대, 호르티시대에는보통, 비밀투표는보장되지않았으며언론과표현의자유와같은정치적시민의권리는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291 2차세계대전이종결된후폴란드는스탈린의결정에따라소련의직접적인지배하에놓이면서소련주도의공산주의체제가성립되기시작하였고, 이러한정치체제는 1989년 2월원탁협상에이르기까지유지되었다. 헝가리도 1948년친소련공산정권이수립되면서폴란드와유사한운명에놓였으나, 제 2차세계대전종전후 3년간 (1945-48년) 한시적이지만전후첫자유총선결과에따른민주정부체제가수립되었다 (Bihari, 2005: 19-65). 종합하자면 18-20세기헝가리와폴란드의정치발전은당시국제정세를주도하던열강의경쟁구도하에놓이면서동시대의서구의회민주주의와같은민주주의발전은구현할수없었다고요약할수있다. 이러한상황에서 80년대말민주화는이들에게새로운민주역사를쓸수있는기회를의미하였으며, 그러한역사적기회의실현은민주주의꽃자유선거에서시작되었다. 3. 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이행과정의특징 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이행경로는정치엘리트간원탁협상에서이루어진위로부터의전환이었다 (Linz and Stepan, 1996: 264-69, 296-316; Tőkés, 1996). 집권공산당과야권대표간타협으로성사된원탁협상은평화적인정권교체에는기여하였으나밀실정치 (Backdoor Arrangement) 혹은그들만의신사협정이라는내재적한계성을안고출발하였다. 폴란드는솔리다리티 (Solidarity) 라고불리는자유노조가폴란드시민의목소리와이권을일부대변할수있었으나헝가리는그러한강력한시민사회조직이부재하였다. 또한폴란드의민주화에는크라쿠프 (Cracow) 출신교황요한바오로 2세 ( 폴란드어로는 Karol Józef Wojtyła) 의역할을주목할수있는데, 그는냉전당시로마가톨릭교회의수장으로서반체제인사를비롯한솔리다리티자유노조를후방에서지지했던강력한저항의상징이었다. 반면헝가리는공산주의체제하종교의자유가억압받는상황에놓여있었으며요한바오로 2세와같은상징적인종교인사도부재하였다. 한가지흥미로운사실은폴란드는시민사회를대변할수있는솔리다리티라는강력한시민사회조직이존재하였음에도불구하고 3 민주화이행기야권대표는집권공산당의이권을상당히보장해주는조건부타협을수용했다는점이다. 반면헝가리는폴란드와유사한강력한시민사회조직이부재하였음에도불구하고야권대표는집권공산당의이권보장을거부하며첫자유총선을위한핵심법안마련에박차를가하였다. 이러한사실을바탕으로본장에서는양국의민주화이행경로과정의특성을비교 고찰해본다. 크게제약받았다. 3 당시솔리다리티연대노조는폴란드전체인구 4000만명중 1000만명이상의노조회원을두고있을만큼솔리다리티노조가사회에미치는영향력은지대하였다.

29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1) 폴란드민주주의이행과정 폴란드에서원탁협상은 1989 년 2 월 6 일을시작으로 4 월 5 일까지두달에걸쳐서진행되었다. 본석상에서바웬사 (L. Wałesa) 가이끄는솔리다리티자유노조대표와집권공산당은주로권력분배에관하여협상하였는데이들간성사된타협의결과는다음과같다. 부분자유선거실시 ( 선거결과와상관없이하원 65% 의석은공산당이확보 ); 상원신설및상원의석확보를위한완전자유선거실시 ; 집권공산당의대통령직확보 ( 야루젤스키의대통령직보장 ); 솔리다리티자유노조의합법화 ; 언론의자유보장 ; (Henderson and Robinson, 1997: 97; Curry, 2011: 164-65). 결국야권대표는집권공산당의특권을상당히보장해주며권력분배문제에있어서양보한것인데이러한정치적타협은당시폴란드의안보문제를반영한결정이었다. 즉, 1985년소련의고르바초프 (M. Gorbachev) 가등장한이후동유럽민주화의서막은태동하였으나 89년봄폴란드는아직영내주둔하고있던소련군이완전히철수하지않은상황이었다. 이러한상황에서야권연대는완전한자유선거실시와같은급속한정치개혁을집권공산당에게요구할수없었고이에공산당의이권을일부인정해주는타협안을받아들였다. 당시원탁협상에참여하였던대표적인반체제인사쿠론 (J. Kuroń) 은협상조건중공산당출신야루젤스키의대통령직확보의근거를다음과같이회고하였다 : 폴란드는소련의심장과같은위치에놓여있고그러한지정학적인이유를고려할때공산당출신의대통령선출은필요하였다 (Swain, 2006: 144). 원탁협상합의에따라같은해 6월 4일과 6월 18일첫부분자유선거가실시되었다. 선거를치룬결과솔리다리티연대노조는상원 1석을제외한나머지 99/100석을확보하였으며, 하원에서는사전에정해진 35% 의석비율중 35%(161/460석 ) 를모두차지하였다. 압도적인표차로승리한솔리다리티자유노조는이후그들이차지한정치적비중에따라집권공산당을압박하였는데, 이들이요구한사항은첫민주행정부구성에있어서총리는공산당출신이아닌솔리다리티자유노조출신인사마조비에츠키 (T. Mazowiecki) 를임명해야한다는것이었다. 결국공산당은자유노조의요구조건을마지못해수긍하였고이로서전환기폴란드민주주의이행은공산당출신대통령과야권출신총리가함께공생하는이원체제로출범하였다. 스웨인 (N. Swain) 의말을빌리자면 당신의대통령 (your President) 과 우리의총리 (our Prime Minister) 라는방정식은원탁협상결과에따른권력분배의결과이었던것이다 (Swain, 2006: 144-45).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293 2) 헝가리민주주의이행과정 폴란드와마찬가지로전환기헝가리민주주의의이행은당시집권공산당대표와재야야권세력간의협상에서비롯되었다. 단헝가리는폴란드솔리다리티자유노조와같은통합된시민사회조직이부재하였고, 이에당시재야에서서로상이한정치노선을걷고있었던 9개의정당과사회조직이연합하여한시적인야권연대원탁협상 (Ellenzéki Kerekasztal) 을구성하였다 (Bozóki, 2003: 143-167). 4 이들은원탁협상에서집권공산당대표를상대로 7개의안건에대해서협의하였다. 신선거법 ; 형법과이와관련된절차개정안 ; 신미디어법과홍보를위한법안 ; 개헌 ; 정당과정당재원에관한법안 ; 헌법재판소와대통령직신설을위한법안 ; 평화적체제전환을보장하기위한법안 ( 공산당의준군사기구및민병대해체, 작업장에서공산당의정당활동금지 ) ( 김철민외, 2014: 185). 즉폴란드와는달리헝가리원탁협상에서는권력분배문제가사전에합의된것이아니라평화적체제전환을위한일련의핵심법안마련에협상의주안점이놓여있었다. 예컨대, 첫자유총선을평화적으로치루기위한신선거법마련과공산당이보유했던민병대해체에관한합의안이그러하다. 물론당시집권공산당이위의 7가지안건모두를야권연대가요구했던대로수용한것은아니다. 협상결과는엇갈렸으며, 특히집권공산당과야권연대는대통령직문제를두고서가장첨예하게대립하였다 (Elster, 1993: 96). 집권공산당은직선제를요구하며대선은 1990년 4월첫자유총선이치러지기이전에시행되어야한다고주장하였다. 반면야권연대는대통령은자유총선실시후의회에서간선으로대통령을선출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 특히, 당시자유민주연합과청년민주연합의반발이가장거세었는데, 이들은대선시기에관한결정을국민투표방식으로해결하고자하였다 (Ripp, 2006). 실제로 1989년 11월 26일국민투표가치러졌으며투표결과 0.2% 라는매우근소한차이로대선은첫자유총선이후에치러지는것으로일단락되었다 (Dezső and Bragyova, 2007: 91-2). 한가지주목해야할사실은본국민투표는대선의시기를단순히국민에게물어본것이아니라집권공산당의치밀한정치적계산을무마시킨사건이었다는것이다. 당시집권공산당은포 4 당시야권연대에참여한조직및정당은헝가리민주포럼, 자유민주연합, 청년민주연합, 기독교민주시민당, 독립소지주당, 사회민주당, 헝가리시민당, 버이취질린스키우정사회, 독립노동조합민주연맹이다.

29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즈거이 (Pozsgay) 라는유명한개혁공산주의자가있었는데, 5 그의대중지지도와인기는 90% 를상위할정도이었다. 이러한인지도는집권공산당입장에서바라볼때매우고무적인현상이었는데, 첫자유총선을준비하는과정에서대중정서는반공산주의 (anti-communism) 가지배적이었으며, 이러한상황에서집권공산당은첫자유총선에서승리할보장이없었다. 본상황에서대선을총선보다먼저치룰경우집권공산당은포즈거이라는유력인사를대통령으로당선시킬수있었고, 이는설령그들이첫자유총선에서패배하더라도포즈거이를통하여그들의권력을재공고화할수있었던것이다. 반면포즈거이에견줄만한대항마를확보하고있지못했던청년민주연합과자유민주연합은이러한집권공산당의정치적술수를사전에감지하였고, 이에총선을대선보다먼저치러야한다고주장하였다. 만일집권공산당의입장이관철되었다면헝가리도폴란드와마찬가지로공산당출신의대통령이선출되었을것이다. 또한 1990년 4월치러진첫자유총선에서비공산계열정당인헝가리민주포럼이득세한사실을고려하면헝가리도폴란드와마찬가지로공산당출신의대통령과야권출신의총리가함께공생하는이원적정치체제가구성되었을것이다. 그러나이러한정치체제의성립은국민투표로무산되었고향후헝가리는첫자유총선에따른완전한민주정부를구성할수있었다. 종합하자면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의이행은집권공산당과야권연대대표간의협상으로성사된평화적인정권교체라고할수있다. 헝가리의경우개헌을포함한주요 7개의안건모두는 1990년 4월첫자유총선을성공적으로치루기위한필수법안들이었다. 이와유사한맥락에서폴란드의집권공산당과야권대표도상원의완전한자유선거실시와솔리다리티자유노조의합법화에합의함으로써평화적인체제전환을위한전기를마련하였다. 양국의원탁협상에서집권공산당은대통령직이라는정치적기반으로권력재공고화를모색하였으나폴란드는그러한정치적행보가성공하였던반면헝가리는국민투표로무산되었다. 결국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이행의서막은정치엘리트주도의위로부터의전환이었으며, 그러한과정에서정작시민사회는의사결정과정에참여할수없었다. 폴란드의경우이러한제약은솔리다리티자유노조를통하여일부상쇄되었으나그러한사회적기반이부재한전환기헝가리민주주의는정통성이매우취약한상태에서시작하였다. 협상혁명 (Tőkés, 1996) 은바로그러한명과암을내포한민주주의이행방식이었던것이다. 5 포즈거이는 1989년 1월말라디오인터뷰에서헝가리혁명의의미를재평가함으로써대중의지지를얻기시작하였다. 40년이상지배체제로군림하였던공산주의체제하에서 56년헝가리혁명은사회주의체제전복을시도했던반혁명으로간주되었다. 포즈거이는이러한기존의공식적인당의역사관을재해석하였는데그는 56년혁명은 반혁명이아니라민중봉기 라고주장하였다. 본발언은당시로서는매우과격한선언이었는데당시헝가리에서는소련군이아직주둔한상태이었으며정권도강경파공산당그로스까로이 (Grósz Károly) 손에쥐어있었다.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295 4. 민주적제도의공고화 1) 헝가리와폴란드의정당체제발전과민주주의공고화 민주주의이론에서성공적인민주주의의공고화를객관적으로측정하여비교할수있는표준화된지표는없다. 학자마다민주주의공고화를조금씩상의하게정의하고있으며그러한다양성에따라민주주의발전의견고성을평가하는척도도조금씩다르기마련이다. 달은 (R. Dahl) 그의저서 민주주의와비평 에서진정한민주주의는공정하고자유로운선거에따른평화적정권교체이외에도정보, 표현, 집회, 결사의자유를비롯한다양한시민의이해관계를보다효과적으로반영할수있는제도적장치가구비되어야비로소민주주의가발전할수있다고바라보았다 (Dahl, 1989). 헌팅턴 (S. Huntington) 은그의저서 제 3의물결 : 20세기후반의민주화 에서민주주의공고화로나아갈수있는전제조건은자유선거를통한정권교체가최소한두번이상에걸쳐서 (Two Turnover Tests) 평화적으로이루어져야한다고주장하였다 (Huntington, 1991). 린즈와스테판 (J. Linz and A. Stepan) 은그들의공저 민주적체제전환과공고화의문제점 : 남유럽, 남미, 그리고탈공산주의유럽에서민주주의 에서자유로운정치사회, 경제사회, 시민사회, 가용할수있는관료제, 그리고법치주의원리가조화롭게확립되었을때민주주의는공고화된다고주장하였다 (Linz and Stepan, 1996). 동유럽민주주의의공고화를심도있게연구한다위시화 (K. Dawisha) 와패럿 (B. Parrott) 그리고질론카 (J. Zielonka) 는앞서제시한비교정치학자가활용한지표를널리수용하여민주주의공고화에필수적인선결여건으로제시하였다 (Dawisha and Parrott, 1997; Zielonka, 2001). 본선행연구로바라볼때민주주의공고화에있어서가장근본적이면서도절차상최소한의제반여건은공정하고자유로운선거에따른평화적인정권교체라고할수있다. 특히, 동유럽처럼공산주의체제가 40년이상지속된정치환경에서는진정한의미에서의자유롭고공정한선거가치러질수없었던상황에놓여있었기에, 이지역의자유선거에따른평화적정권교체와정치변동은동유럽민주주의의공고화를가늠할수있는가장중요한분석틀중하나라고할수있다. 루이스말을빌리자면체제전환기신생민주주의동유럽국가에서민주주의공고화를촉진했던가장중요한요소중하나는공정한선거에따른평화적인정권교체와안정적인정당체제의발전이었던것이다 (Lewis, 2000: 20). (1) 헝가리총선과정당체제 1989년 10월 23일민주체제전환이발생하기이전이미다당제의형틀을갖춘헝가리에서는 1990년첫자유총선실시후현재까지 7번의정권교체가발생하였다. 좌우로의빈번한정권교체에도불구하고정권이군부쿠데타와같은사건으로중도에퇴진하는사태는발생하지않았으며, 정권

29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은임기말기까지안정적으로유지되었다. 정당체제를바라보면 1998년총선이전까지는 6개의정당이원내중심을이루는육자구도의체제이었으나, 1998년이후부터는사실상양당구도로변모하였다. 표 1 헝가리총선결과분석 : 1990~2014> 6 1990 1994 1998 2002 2006 2010 2014 정당들 비율 / 의석 비율 / 의석 비율 / 의석 비율 / 의석 비율 / 의석 비율 / 의석 비율 / 의석 헝가리사회당 10.9/33 33.0/209 32.9/134 42.1/178 43.2/186 19.3/59 19.1/29 자유민주연합 21.4/92 19.7/69 7.6/24 5.6/19 6.5/18 -/- -/- 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 9.0/21 7.0/20 29.5/113 41.1/188 42.0/164 52.7/263 66.8/133 헝가리민주포럼 24.7/164 11.7/38 2.8/2 * 5.0/11 -/- -/- 독립소지주당 11.7/44 8.8/26 13.2/48 0.8/- -/- -/- -/- 기독교민주시민당 6.5/21 7.0/22 -/- -/- -/- ** ** 헝가리인의삶과정의당 -/- -/- 5.5/14 -/- -/- -/- -/- 더나은헝가리를위한운동 -/- -/- -/- -/- -/- 16.6/47 11.5/23 다른정치를위한연합 -/- -/- -/- -/- -/- 7.48/16 2.51/5 Notes: * 2002년헝가리민주포럼은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과함께연합공천으로총선에출마하였다. ** 2010/2014년기독교민주시민당은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과함께연합공천으로총선에출마하였다. 헝가리민주포럼은 2010년총선에서의회내단일석도확보하지못하였고이후정계에서소멸하였다. 독립소지주당은 2002년의회진입실패이래로헝가리정계에서소멸하였다. 헝가리인의삶과정의당은 1998년단한차례의회진입하였으나이후진입에거듭실패하였고정계에서소멸하였다. 1990년총선에서는민족주의노선을추구하는보수당헝가리민주포럼이집권하였고야권은당시급진적인시장경제개혁을주창하였던자유민주연합이가장큰야당이었다. 헝가리공산당의계승정당인헝가리사회당은겨우명맥을유지할수있었는데, 이는다른동유럽국가에서도그러하였듯이당시유권자의지배적인반공산주의정서가반영된결과이었다. 이와는대조로 1994년총선에서는헝가리사회당이압승을거두며정계에화려한부활에성공하였다. 반면기존집권당인헝가리민주포럼을비롯한다른정당들은정치적비중이크게감소하였다. 당시선거분석에따르면 1994년총선에서구공산당인헝가리사회당이승리할수있었던주요원인은구공산주의체제의안정적인사회에대한헝가리유권자의향수이었다 (Körösényi, 1999: 48). 즉, 헝가리유권자는민주주의가곧과거공산주의시대와비교하여좀더안정적인사회복지제반여건을구비해줄것으로기대하였으나, 현실은시장경제의원리에입각한이른바전환기 소수의수혜자 와 다수의패배자 라는현상을경험하자집권당에대한징벌적투표 (penal voting) 형태로사회적불만이표출되었다는것이다. 1998년총선은다시중도우파보수노선으로의정권교체가발생하였는데, 청년민주연합및시민 6 http://www.parlament.hu 에서총선결과를분석하여저자가작성함.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297 정당 (Fidesz) 7 이집권당을차지하였다. 근소한차이로패배한헝가리사회당은원내가장큰야당의입지를구축하였는데, 본시점부터사실상집권당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과헝가리사회당의양당구도체제가성립하였다. 또한이시기가헌팅턴이주장한두번의턴오버테스트 (Turn-over Tests) 를거친시점으로헝가리정당체제의안정화가표면화되기시작하였다. 실제로 2002년총선부터 2010년까지는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과헝가리사회당간의경쟁이중심을이루면서안정적인양당제양상을나타내었다. 반면, 2010년총선은기존양당구도의판도변화를일으킨선거이었는데, 본시점부터는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의지배적인입지가공고화되기시작하였다. 2010 년총선에서의회내 2/3 이상의의석수를확보한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은 2014년총선에서도절대다수를확보하면서재집권에성공하였다 (Scheppele, 2014: 27-33). 반면헝가리사회당을비롯한 90년대기존의주축정당들은입지가점차로축소되면서큰정당에병합되거나정계에서고사하였다. 특이한사실은 2010년이래로신생정당이등장한것인데서방녹색당정치노선을표방하는다른정치를위한연합 (Lehet Más Politika) 과극단적헝가리민족주의를주창하는극우정당더나은헝가리를위한운동 (Magyarországért Mozgalom, Jobbik) 이그러하다. 특히 Jobbik은 2016 년현재집권당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의입지를위협하는세력으로급부상하면서헝가리정계의변수로지목되고있다. 요컨대, 체제전환후헝가리정당체제는 6개의정당이주축을이룬다당제구도로출범하여 1998 년을기점으로안정적인양당제체제로변모하였다고할수있다. 이러한양당제구도는 2010년총선까지유지되었으나이후중도우파보수노선을표방한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이지배적인우위를확보하면서헝가리사회당을비롯한좌파계열정당의입지는축소되었다. 첫자유총선부터안정적인정당체제의면모를나타나며연이은정권교체에성공한것이전환기헝가리민주주의의특성일것이다. 이러한정당정치는빈번한좌우대립의정권교체에도불구하고줄곧안정적인면모를나타내었으며, 무엇보다도그러한정치변동은공정하고자유로운총선에따른결과이었다는점이다. 정치엘리트와유권자는선거라는절차상의제도를통하여정권변화를모색하였고총선결과에따른정치변동에수긍하였다. 아그 (Ágh) 의말을빌리자면 선거에따른헝가리의안정적인정당정치와정치체제는전환기헝가리민주주의의공고화에기여 했던중요한요소중하나이었던것이다 (Ágh, 2001: 157-179). 7 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은본래중도좌파성격의정당이었다. 본래당의명칭은청년민주연합이었는데 1993년중반부터정치노선을중도우파로서서히선회하였고, 1995년당의명칭을청년민주연합및시민정당으로개칭하면서노선을탈바꿈하였다. 청년민주연합의중도우파로의노선선회는헝가리민주포럼과의관계에서비롯되었는데, 헝가리민주포럼은 1992년이래로정계에서입지가급격히약화되었다. 기회를엿본청년민주연합은정치적공백을메꾸고자노선을선회하였고본전략은성공하였다.

29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2) 폴란드총선과정당체제 폴란드의정당체제는헝가리와비교할때상대적으로매우불안정하고파편화된구도를나타낸다. 1989년첫선거가치러진이래로총 8번의정권교체가발생하였으며, 이중세번은 4년의임기를채우지못한채 1991년, 1993년, 그리고 2007년중도에재차총선이치러졌다. 표 2 < 폴란드하원총선결과 : 1991~2015> 8 년도정당들 1991 1993 1997 2001 2005 2007 2011 2015 민주연합 12.3/62 10.6/74 솔리다리티선거연합 33.8/201 민주좌파연합 12.0/60 20.4/171 27.1/164 41.0/216** 11.3/55 13.2/53 가톨릭선거운동 8.7/49 중도시민연대 * 8.7/44 자기방어 10.2/53 11.4/56 자유연맹 13.4/60 폴란드시민당 8.7/48 노동조합 7.3/41 폴란드농민당 15.4/132 7.3/27 9.0/42 7.0/25 8.9/31 8.4/28 5.1/16 독립폴란드연맹 7.5/46 자유민주연합 7.5/37 농민연합 5.5/28 맥주애호당 3.3/16 시민연단 12.7/65 24.1/133 41.5/209 39.2/207 24.0/138 법과정의당 9.5/44 27.0/155 32.1/166 29.9/157 37.5/235 Note: 전체의석은 460석이고정치적비중이미약한군소정당의석수와비율은생략하였다. * 중도시민연대는 1993년해체되었다. ** 2001년총선당시민주좌파연합은노동조합과선거연대를하였고 216석은합산결과이다. 1991년총선은총 67개의정당이참여한가운데 25개의정당이하원의회에진출하였던매우파편화된정당체제의양상을나타낸다. 25개정당의대부분은솔리다리티계열에서분리된정당으로어느한정당이단독정부를구성하기위한다수를확보하지못하였고, 이에민주연합과가톨릭선거운동그리고중도시민연대가연립정부를구성하였다. 그러나당시구성된연립정부는당내계파분열을겪으면서정국이매우불안정하였고, 이에 1993년 5월수초츠카 (Suchocka) 정부에대한의회의불신임안이가결되면서같은해 9월조기총선이치러졌다. 솔리다리티계열정당의극심한분열은결국 93년총선의참패로이어지면서구공산당계승정당인민주좌파연합이집권에성공하였다. 당시민주좌파연합의집권은 1994년헝가리사회당의정권탈환과매우흡사한면모이다. 8 http://stat.gov.pl 에서총선결과를참조하여저자가작성함.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299 1993년총선에서당내극심한분열로참배한솔리다리티계열정당은패배의교훈을일삼아 97 년총선에서는선거연대를구성하여출마하였다. 총선결과선거연대는민주좌파연합을상대로다수의석을확보하였고이에정권탈환에성공하였다. 본시점부터폴란드정당체제는구공산당계승정당인민주좌파연합과솔리다리티계열의우파정당중심으로좌우대립이되는양당제구도가성립하였다. 이러한정당체제는 1998년헝가리사회당과청년민주연합이좌우대립경쟁구도를구성한것과흡사하지만, 폴란드는헝가리와달리이후로도안정적인양당제구도를확립하지못하였다. 오히려 2005년이후부터폴란드정당체제는우파계열중심의정당체제로재편성되었는데, 이러한구도는중도우파계열의시민연단 (Civic Platform) 과폴란드보수민족주의성향의법과정의당 (Law and Justice) 의경쟁으로압축되었다. 전자는친유럽연합, 유럽통합및대서양주의외교노선을지향하며후자는긴축반대, 반이민정서와유로회의론적입장을나타낸다. 우파계열의정당이주축을이루는정치구도에서 2015년총선은야로쉬로커진스키 (Jaroslaw Kaczynski) 가이끄는법과정의당이집권에성공하였고, 이로서폴란드의정당체제는헝가리와마찬가지로민족주의성향의우파정당이권력의중심을구성하고있다. 헝가리사회당은 2010년이래정치적비중이급감하였으나의회내제 1야당의입지를유지하고있는반면, 2005년총선이후원내진출에실패한폴란드민주좌파연합의열세는매우이례적인특징이다. 요컨대, 1991년총선이후등장한폴란드정당체제는동시대의헝가리와비교해볼때상대적으로파편화되고불안정한면모를나타낸다고할수있다. 그러한배경에는 90년대초주축정당으로활동하였던솔리다리티계열정당의분열이주요원인이었다. 폴란드정당체제는 97년을기점으로좌우대립구도가서서히형성되면서안정적인양당제구도로변모하였으나, 이후에는다시우파계열의정당이중심을이루면서현재에도재편성중이다. 기아즈다 (Gwiazda) 의말을빌리자면현폴란드정당체제는 선거시장 이라는영역내에서아직신생정당이그들의아젠다와정치적기회를모색해볼수있는 준제도화된 면모를나타내고있으며 (Gwiazda, 2009: 350-376), 이러한정당체제의변동성은폴란드민주주의의현주소를나타낸다고할수있다. 헝가리와폴란드의주요정치제도를비교해보면다음과같다. 표 3 요약 : 헝가리와폴란드의주요헌정및정치제도특징 헝가리 폴란드 국가형태 공화국 공화국 정치체제 의원내각제 의원내각제 개헌 1989 년원탁협상에따른공산헌법대폭개정 2011 년신헌법채택 1989 년 4 월원탁협상에따른공산헌법개정, 1992 년개헌 ( 대통령권한축소 ), 1997 년신헌법채택 행정부수반총리총리

30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국가수반 ( 상징적인사 ) 의회형태 의회진입에필요한최소한계치 (Threshold) 선거제도 헝가리 대통령 ( 간선, 5 년임기제, 한차례에한하여연임가능 ) 단원제, 개헌에따라 386 석에서 199 석으로축소 폴란드 대통령 ( 직선, 5 년임기제, 한차례에한하여연임가능 ) 양원제, 하원 (Sejm, 460 석 ) 상원 (Senate, 100 석 ) 5% 5% 혼합형 1990-2010 년 2012 년 ~ 현재 소선거구 176 비례대표 152 보상명부 58 총 386 석 소선거구 106 비례대표 93 총 199 석 하원 비례대표제 460 석 상원 다수대표제 100 석 5. 실질적민주주의 ( 민주주의현실 ) 선거와정당체제라는변수로살펴볼때절차상의관점에서는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는공고화된것으로판단할수있다. 자유선거에따른빈번한좌우대립정권교체에도불구하고선거의승자와패자는결과에수긍하였으며, 정권획득을위한강제적수단의동원예컨대쿠데타와같은사건은발생하지않았다. 정치엘리트는선거라는합법적인제도를통하여정권변화를모색하였고정당체제또한초창기파편화된구도에서점차로양당제로전환되면서안정화되었다. 실제로민주주의의안정성혹은견고성을측정한각종지표에따르면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는서구의민주주의와비교하여거의동일한수준에서공고화된민주주의로평가된다. 예컨대정치적자유와시민의자유를측정한프리덤하우스 (Freedom House) 지표에따르면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는매우자유로운민주주의로분류된다. 표 4 프리덤하우스자유지수 : 2007~2012년도기준 9 국가 정치적자유 시민의자유 종합민주주의지수 독일 1 1 1 영국 1 1 1 그리스 2012년에기존 1에서 2로하락 2 2012년에기존 1.5에서 2로하락 스페인 1 1 1 헝가리 1 2012년에기존 1에서 2로하락 2012년에기존 1에서 1.5로하락 폴란드 1 1 1 대한민국 1 2 1.5 9 https://freedomhouse.org. ( 접속일 : 2016 년 7 월 10 일 ).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301 Note: 1~7 지수중 1은매우자유로운체제이며 7은독재체제이다. 즉, 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는동시대의서구민주제와거의동등하며폴란드의경우는오히려대한민국의민주주의보다도좀더공고화된것으로판단된다. 이와유사한맥락에서정기적인자유선거결과에따른정치제도의제도화정도, 균등한정치경쟁참여의보장, 그리고행정부권력의견제와균형의정도에따라독재와민주제를구분한폴리티지수 (Polity IV) 에따르면역시헝가리와폴란드의정치제도는서구의그것과동일한수준에서민주제로분류된다. 국가 행정부수반충원에관한규정 표 5 폴리티 IV 지수 : 2007~2012 년기준 10 행정부충원의경쟁도 행정부충원의개방성 행정부권력제약정도 정치참여반영을위한규정 정치참여경쟁도 종합민주주의지수 독일 3 3 4 7 5 5 10 영국 3 3 4 7 5 5 10 그리스 3 3 4 7 5 5 10 스페인 3 3 4 7 5 5 10 헝가리 3 3 4 7 5 5 10 폴란드 3 3 4 7 5 5 10 대한민국 3 3 4 6 2 4 8 Note: 종합민주주의지수에따르면 -10~6은독재, -5~5는준독재 / 준민주제 / 혼합제, 6~10은민주제로분류된다. 개별항목의민주주의공고화지수범위는서로상이하다. 예컨대정치참여경쟁도지수에서완전경쟁이제도적으로보장된지수는 5이며이와반대로심각하게제약을받는경우는 1에해당한다. 프리덤하우스와폴리티 IV 지표상에나타난민주주의특성과는대조로정치학자들이공통적으로지적한현실에따르면현헝가리와폴란드민주주의는공고화된민주제에서오히려퇴행중이다. 이러한비판적견해가표출된원인은현헝가리와폴란드의정치체제를바라볼때권력균형과견제의원칙이제대로지켜지지않으며시민과정치적자유또한상당히제약받는상황에놓여있기때문이다. 이러한현실은표준화된민주주의지표만으로는감지할수없으며그러한괴리는각국의국내정치에서발생한주요사건과현안을분석하지않고서는파악할수없다. 따라서본장에서는현헝가리와폴란드민주주의를고찰할때공통적으로논란과이슈가되고있는현안을중점적으로고찰하여민주주의의질적측면을가늠해볼것이다. 1) 권력의균형과견제원칙훼손 : 헌법재판소독립성의침해 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사법부독립성보장의중요성은아무리강조해도지나치지않다. 케네디 (C. Kennedy) 가지적하였듯이 민주주의기반은법치주의원리의확립에있으며이는정치적인 10 http://www.systemicpeace.org. ( 접속일 : 2016 년 7 월 10 일 ).

30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영향에서벗어난독립적인사법부가존재함 으로써가능하다. 11 특히, 동유럽처럼구공산주의체제하에서독립적인사법부가존재할수없었던상황에서는정치적인영향에서벗어난사법부의독립성보장이더욱중요하다. 이러한중요성을인식하여헝가리와폴란드에서도민주화이행기사법부의독립성을제도적으로보장하기위한정치엘리트간합의가있었고이에사법부의최고기관인헌법재판소를신설하였다. 폴란드는공산주의가붕괴되기훨씬이전인 1982년에헌재가창설되었으며, 12 헝가리는원탁협상결과에따라 1990년 1월 1일부로헌재가가동하였다. 양국모두헌재의권한은매우광범위한데헌재는헌법소원판결을비롯한제출된법안의위헌여부심사그리고핵심권력기관간마찰이발생했을경우이와관련된관할권논쟁에대해서도판결할수있다. 판사의독립성을보장하기위하여정권변화의주기와는상관없이판사는 9년임기가보장되며한차례에한하여연임할수있다. 그러나정작판사의임명은의회내헌정위원회에서적임자의추천과공천회형식으로결정이되는데보통여야의상대적인권력비중에따라서재판관선출도달라지기마련이다. 즉집권여당이헌정위원회에서좀더큰비중을차지하면서그들의정치노선에부합한법조인을보통천거하기마련이다. 따라서엄밀하게판단하자면폴란드와헝가리헌법재판소의독립성은애초부터한계점에노출되어있으며일종의정치적협상에따른부산물이라고해석할수있다. 이러한제약성도불구하고민주화이행기폴란드와헝가리헌재는법치주의원리확립에있어서매우중요한역할을하였고민주적공고화에기여했다고평가받는다 (Halmai, 2002; Schwartz, 2002; Sólyom, 2003). 한가지주목할만한점은최근양국헌재의독립성이심각하게침해받고있다는사실인데이러한원인은사법부에깊숙이개입한행정부의정치적압력을들수있다. 현재양국헌재는권력의균형과견제라는원칙을지킬수없는입지에놓여있으며, 민주주의근간인법치주의가크게흔들리고있다. (1) 폴란드헌정위기폴란드헌법재판소독립성침해와관련된논란은 2015년당시집권당인시민연단의정치적개입에서비롯되었다. 같은해 10월치러진총선에서승리를확신할수없었던시민연단은정권임기말기에헌재판사 5명을친정부인사로교체했는데, 이중 2명의판사는임기가채만료되지않은기존의판사를대체하여임명하였다. 시민연단은교체된 5명의판사로헌재전체판사 15명중 14 명을정부측에가까운인사로확보하였으나, 10월 25일치러진총선에서새로집권한법과정의당은헌재를다시손질하였다 (The Guardian, 29 February 2016). 법과정의당은기존에시민연단에의해서가결된판사임명안은모두위헌이며따라서 5명모두를재차교체할필요가있다고주장하였다 (The Economist, 5 December 2015). 실제로기존에임명되었던 5명의판사는같은해 12월 11 http://www.goodreads.com/quotes/tag/justice. ( 접속일 : 2016 년 7 월 20 일 ). 12 솔리다리티자유노조의요구조건중하나가헌법재판소신설이었고당시집권공산당은이를수락하였다.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303 법과정의당에가까운친인사로교체되었다. 또한법과정의당은헌법재판소법안을개정하여헌재의의결권을대폭축소하였는데, 이개정안에따르면헌재는판결에있어서기존에이행했던단순다수결원칙에서재판권정원최소 2/3 이상의찬성을확보해야하는정족수를충족시켜야만한다 (The New York Times, 18 March 2016). 즉변경된의사결정방식에따르면중요한법안의위헌여부심사와같은사항에있어서헌재는신속하고효과적인판결을내리기가더욱어려워진것이다. 이러한변화에대응하여 2016년 3월 9일헌재판사들은본행정부결정은사법부의독립성을심각하게침해하는불합리한조치라고판결하며불순응했으나의회내다수를차지한법과정의당은본개정안을통과시켰다. 결국본현안은삼권분립의원칙에서핵심기관중하나인사법부가과도한행정부의정치개입으로독립성을상실한사건이라고해석할수있다. 논란이지속되는가운데폴란드상황을주시한유럽연합집행부는법치주의원칙이훼손될수있는우려의상황을타개할수있는방법이고안될때까지법안의집행을정지하라고권고하였으나커진스키행정부는이를묵과하였다 (The Wall Street Journal, 6 April 2016). 이에유럽의회의장인마틴슐츠 (Martin Schulz) 는성명서에서커진스키행정부가현재사법부를상대로진행하고있는일련의조치들은일종의 쿠데타와같은사건으로유럽정치의푸틴화 라고맹비난하였다 (The Telegraph, 15 December 2015). 이와유사하게미국의회에서도존맥케인 (John McCain) 을중심으로한상원의원들은공동서안에서커진스키행정부는기존의결정을재고하고유럽연합의권고를준수해야한다고엄중히경고하였다 (Daily Mail. 15 February 2016). 미국상원의원의견해에따르면현폴란드행정부의결정은한때민주화의기수에서주변국에모델이되었던폴란드가이제그러한역할을상실한퇴행의국가로비추어진다. 요컨대폴란드헌정위기는행정부가사법부를상대로깊숙한정치적개입을하면서전개되었다고할수있으며, 그러한조치는권력균형과견제의원칙은물론법치주의원리의근간을심각하게훼손하는정치적행위라고할수있다. (2) 헝가리헌정위기폴란드와마찬가지로헝가리헌정위기에서나타난공통적인현상은사법부에대한과도한정치적개입과이로인한권력균형과견제원칙의훼손이다 (Népszabadság, 27 September 2014). 헝가리헌재판사임명역시의회내헌정위원회에서천거와공청회형식으로진행되며상대적인권력도의비중에따라정당이분배하는형식이다 (Körösényi, Tóth and Török, 2003: 524-49). 따라서집권당에서친인사안을좀더가결할수있는권한과정치적비중이있으며행정부는이러한인사권으로사법부를간접적으로통제하기마련이다. 실례를들면현오르반행정부가단행한친정부인사안판사수는 15명중 11명으로 (Bíró, 2016), 이중판사슈틈프이슈트반 (Stumpf István) 과포콜빌

304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러 (Pokol Béla) 가전형이다. 전자는현총리의대학선배로정치학자이며법학지식과경험은전무하다. 13 후자도헝가리보수주의를추구하는대표적인정치학자로법의해석과집행에관련된경험이없다. 현헌재소장인버르너바쉬렌코비츠 (Barnabás Lenkovics) 는 2014년 12월총리의천거하에국회에서임명한판사로그의임기는 2027년까지확보되었다 (Magyar Nemzet, 1 December 2014). 관련법안에따르면본래헌재소장선출은판사들간투표로결정하였으나오르반행정부는관련법안을개정하였고이에사법부최고결정권자임명조차도통제할수있게되었다. 또한현정부는기존판사들의정년을 70세에서 62세로낮추었는데, 14 이조치또한기존행정부에서임명되었던노년의판사들을친정부인사로대거물갈이하기위한정치적인술수이다. 이외에도현오르반행정부는헌재의의결권을축소하는조치를취하였는데, 본헌재개정안에따르면헌재는정부예산안과재정관리에대한판결을일체할수없게되었다 (Blokker, 2014: 154). 본조치에대하여국내외법조인들과 NGOs 그리고국제민주주의, 인권감시기구들은한결같이비판의목소리를높이고있다. 특히, 유럽평의회 (the Council of Europe) 산하베니스위원회 (the Venice Commission) 는성명서에서오르반행정부가헌재를상대로취한조치는비단헝가리뿐만아니라유럽의법치주의와질서그리고민주주의를훼손하는위법행위로간주하면서이에문제되는조항을즉각개정하라고경고하였다. 15 또한유럽연합집행부도성명서에서판사의연령을임의적으로개정하는행위는유럽연합이추구하는성, 인종, 연령등의차별없이동등한기회를유럽시민에게부여한다는 등가성의원칙 을훼손하는조치로판단하였고이에징계절차를고려중이다. 16 종합하자면현헝가리와폴란드사법부의독립성은정치적개입으로인하여독립성을상실하였고이에민주주의의근본인권력균형과견제의원칙이심각하게훼손되었다고판단할수있다. 이러한상황에대응하여주요국제민주주의감시기관들은헝가리와폴란드정부를상대로시정조치를강력히권고하고있으나, 주권침해와내정간섭이라는명목하에관련행정부는일부조치만눈속임으로시늉할뿐이다. 물론현상황이헝가리와폴란드사법부전체가부패하여본래의기능을상실했다는것은아니다. 체제전환기헝가리와폴란드헌법재판소는법치주의원리확립에기여했던가장중요한기관이었고그러한기능은신생민주주의의공고화에기여하였다. 그러나현헝가리와폴란드행정부가헌재를상대로취한조치는한때민주주의공고화에기여했던사법부의독립성을심각하게저해하는비민주적인행위라고할수있으며, 따라서공고화된정치기관간권력균형과견제의원칙도퇴행하고있다고할수있다. 13 Dr. Stumpf István, in http://www.mkab.hu/tagok/dr-stumpf-istvan-1957 ( 접속일 : 2016년 7월 15일 ). 14 Court of Justice rules Hungarian forced early retirement of judges incompatible with EU law, in http://europa.eu/rapid/press-release_memo-12-832_en.htm ( 접속일 : 2016년 7월 18일 ). 15 http://www.venice.coe.int/webforms/documents/?pdf=cdl-ad(2013)012-e ( 접속일 : 2016년 7월 18일 ). 16 Court of Justice rules Hungarian Forced Early Retirement of Judges Incompatible with EU Law, in http://europa.eu/rapid/press-release_memo-12-832_en.htm ( 접속일 : 2016년 7월 18일 ).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305 2) 언론의자유와정보의공정성훼손 민주주의에서언론과표현에관한자유의중요성은아무리강조해도지나치지않다. 1948년채택된유엔인권헌장에서도명확히밝히고있듯이 개개인은의사표현의자유가있으며그러한권리는개개인이현재거주하고있는지역과국경과는상관없이미디어를통하여자유롭게정보와의견을표출할수있다. 17 이러한중요성을인식하여체제전환직후헝가리와폴란드신생민주정부에서도미디어의독립성과표현의자유를보장하기위한다양한강구책을구상하였다. 양국에서발견된공통적인현상은서로다른정치세력간미디어의독립성을보장해야한다는원칙에는동의하였으나, 실제로는미디어가중립적인입장에서감시견의역할을충실히이행할수있도록필요한제반여건을조성하지못하고있다는사실이다. 그러한배경에는권력변동에따른미디어에관한과도한정치적개입을손꼽을수있으며, 헝가리는 2010년오르반행정부이후폴란드는 2015년 10월집권한커진스키행정부등장후정치적개입현상이더욱두드러지게표출되었다. 현재세계언론자유지표 (World Press Freedom Index) 에따르면 2016년기준폴란드는 47위, 헝가리는 67위로부분적인자유국가 (partly free) 로분류된다. 18 (1) 헝가리언론과정보의자유헝가리에서언론의중립성과독립성을보장해야한다는원칙은 89년원탁협상에서논의되었다. 당시집권공산당과야권연대는정치적개입에서벗어난언론의독립성을보장해주기로합의하였으며, 이에국영방송텔레비전과라디오방송국국장에정치적배경과는전혀무관한사회학자를임명하였다. 또한공영방송국장은국회내언론위원회의공천과총리의천거, 그리고대통령의동의를거쳐가결하는합의적인절차안으로임명되었다. 그러나체제전환기헝가리언론의중립성은이러한제도적인구비와는상관없이줄곧정치적인개입에자유롭지못했으며 (author s e-mail interview with Wisinger, 2016년 8월 30일 ), 특히 1991-1993년발생한이른바 미디어전쟁 (Média Háború) 사건은정치권의언론통제가얼마나극심하였는지를단적으로나타낸것이었다 (Kim, 2014: 134-47). 당시언론의중립성을행정부간섭으로부터차단하여위하여대통령을비롯한헌법재판소그리고민주헌장 (Democratic Charter) 이라고불리던시민사회단체가출현하였으며 (Bozóki, 1996: 173-213), 본사건은여 야의합으로임명된공영방송텔레비전과라디오방송국장이사임함으로써종결되었다. 이후헝가리는 1996년신미디어법을채택하였고이에민영방송설립허가를비롯한사설출판물업체의신설도허용되었다. 본조치는유럽연합에가입하기위한필수수렴조건중하나이었으며, 2004년 5월헝가리가유럽연합에가입하기전까지관계행정부는 17 http://www.un.org/en/universal-declaration-human-rights ( 접속일 : 2016 년 7 월 20 일 ). 18 https://rsf.org/en/ranking ( 접속일 : 2016 년 7 월 20 일 ).

306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언론의독립성과자유를보장하기위한일련의법안을마련하였다. 가입후헝가리미디어는다시정치권의간섭으로부터자유롭지못하였는데, 특히 2010년집권한보수오르반행정부의언론통제는그정도가매우지나치다 (Győri, 2015: 64-69; Scheppele, 2014: 32-33). 실례를들면오르반행정부가새롭게개정한미디어법에따르면국회내언론위원회의원중진대부분은친정부인사로물갈이되었으며, 이에국영방송국장의천거또한친정부인물로교체되었다 (Bánkuti, Halmai, and Scheppele, 2012: 140-41). 아울러오르반행정부는정부에비판적인민영방송과프로그램편성에대응하기위하여친정부방송과프로그램을대거편성하였는데, 인터넷과공중파로실시간방영되는 Hír TV와대표주간지 Heti Válasz가전형이다. 이외에현오르반행정부는정부에비판적인민영방송국의라이선스발행또는재연장을차단하여강제폐쇄시켰는데클럽라디오 (Klub Rádió) 방송국이대표적이다 (Heti Világ Gazdaság, 16 February 2016). 19 이러한조치에대하여국제주요언론기관과 NGOs는헝가리언론의독립성은심각하게위협받고있다고비판하고있으며관련조치에대한시정을촉구하고있다. 예컨대, 유럽연합집행부는유럽의회와유럽이사회에헝가리정부를상대로징계조치를권고하였으며, 회원국대표들은헝가리의유럽이사회투표권을한시적으로정지시킬필요성에관하여검토중이다 (Müller, 2015: 141-60). 요컨대체제전환직후헝가리언론은정치엘리트의이해득실에따라독립성이심각하게저해받았으며이러한상황은 90년대중반신미디어법을채택하면서그정도가완화되었다고할수있다. 유럽연합수렴조건달성에관한의무사항이헝가리언론의자유와독립성을신장시키는데기여한원동력이었으나헝가리가정식회원국이된이후언론의독립성은재차정치권의간섭을받게되었다. 언론과표현의자유에관한정치적개입은오르반행정부에들어서정점에도달하였으며, 현헝가리언론은정부가허용한범위내에서비판과표현을할수있는부분적자유 (partly free) 상태에머물러있다. 어러토 (A. Arató) 가지적하였듯이현헝가리민주주의는언론과표현의자유라는관점에서판단할때, 그양질의정도가동시대서구의그것에는미치지못한준민주제라고할수있다 (Arató, 1999: 217-44). (2) 폴란드언론과정보의자유공산체제가붕괴된후폴란드에서도출판물을비롯한방송프로그램시장이완전개방되었다. 체제전환기정치엘리트는언론의자유와독립성을보장하기위하여원칙적으로필요한제도적장치마련에합의하였고이러한합의안은폴란드헌법에명시되었다. 폴란드헌법 14조와 61조는정보와표현그리고언론의자유를법적으로보장해주고있으며, 20 2001년정보공개법의채택에따라기존에미공개로남아있었던일부비밀문서와정보들도대중에게공개되었다. 역시이러한변화의원동 19 클럽라디오는이후정부를상대로재판에서승소하여배상금과함께부활하였다. 20 http://www.sejm.gov.pl/prawo/konst/angielski/kon1.htm ( 접속일 : 2016 년 7 월 20 일 ).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307 력은헝가리와마찬가지로폴란드의유럽연합가입을위한수렴조건의달성이었으며, 실제로유럽연합집행부는매년감시보고서를통하여폴란드언론과정보의자유신장정도를평가하였다. 유럽연합가입전후폴란드언론과정보의자유는꾸준히신장되면서당시어느특정정파에따라편향적으로휘둘리는모습을나타내지는않았다. 이러한균형성을나타낸원인중하나는폴란드미디어와언론을관장하는국영방송위원회 (KRRiT) 위원선출이대통령, 하원, 상원의합의하에임명되었기때문이었다. 21 즉, 폴란드정치엘리트는언론의독립성과정보의공정성을보장하기위하여어느한쪽으로편향될수있는인사안을합의적절차를통하여제도적으로차단하려고시도한것이다. 그러나국영방송위원회위원선출과관련된절차상의합의안만으로는현실적으로언론의독립성을보장하는데는한계가있다. 특히, 이러한한계성은정국의판도변화에따라노출되기마련인데이를테면의회와대통령모두집권당측인사와행정부정당이정국의주도권을잡고있을경우이다. 본상황에서는의회내야당이여당측인사안을검토하고견제할수있는의결권을행사할수없기때문에국영방송위원회는정부측에편향된인물로채워지기마련이다. 물론같은정당출신의대통령이의회내행정부정당의의견을맹목적으로따르는것은아니다. 폴란드헌법에명시된대로대통령은국가를대표하는수반으로서어느특정정파에치우치지않는독립적인판단을내릴수있으며, 이에거부권행사등으로종종이견을표출할수있다. 22 그러나이러한원칙과는달리 2015년 8월당선된안제이두다 (Andrzej Duda) 대통령은특정정파에편향되지않는독립적인행동을보여주지못하고있다. 오히려대통령두다는현총리인커진스키정치노선을수동적으로따르는경향을나타내고있는데, 이러한사실은과거그가정치활동을시작한법과정의당이라는정치적연계성에서기인한다. 한가지실례를들면 2015년 12월커진스키내각은기존미디어법을개정하였는데, 본개정안에따르면국영텔레비전과라디오방송국장은더이상국영방송위원회에서선출할수없게되었으며대신재무부장관이인사권을갖게되었다 (Day, 2016). 본조치가폴란드언론의중립성을저해한다고판단한국내외주요언론감시기관과언론인단체들은서신을통해대통령두다에게개정안에서명하지말것을촉구하였으나 2016년 1월두다는개정안에서명하였다. 이후폴란드국영텔레비전과라디오방송편성프로그램은대거친정부적인프로그램으로개편되었다. 또한 2015년총선선거공약에따라커진스키행정부는현재폴란드미디어시장에서압도적으로차지하고있는외국계기업자본의비중 (75%) 을재국유화를통하여점차적으로줄이는과정에있다 (Foy and Wasik, 2016). 종합하자면폴란드언론의독립성과자유는절차상에있어헌법과주요관련법안채택그리고국영방송위원회구성합의절차안등의제도적장치마련으로보장되있다고할수있다. 그러나최근커진스키행정부가단행한언론법개정안과이에따른후속조치는현헝가리오르반행정부와그양태가매우흡사한양상으로전개해가고있다고판단할수있다. 헝가리와마찬가지로현폴란 21 https://freedomhouse.org/report/freedom-press/2015/poland ( 접속일 : 2016 년 7 월 20 일 ). 22 폴란드대통령의거부권은국회의원정족수 3/5 이상의찬성의결로무효화할수있다.

308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드언론의자유와독립성은정치적간섭으로부터자유롭지못하며이에공고화된민주주의도한걸음더퇴보하고있다. 애쉬 (T.G. Ash) 가지적하였듯이체제전환기한때민주주의기수로서이웃국가에게모범사례를보여주었던폴란드민주주의의기반이이제는서서히붕괴하고있는것이다 (Ash, 2016). 6. 폴란드와헝가리그리고대한민국실질적민주주의비교 1) 언론의자유 언론의자유라는관점에서바라볼때헝가리, 폴란드, 그리고대한민국삼국모두에서발견된공통점은언론의자유는법적으로보장되어있으며그러한제도적인장치는 80년대말민주화이행기구비되었다는점이다. 2장에서살펴보았듯이폴란드와헝가리는 89년체제전환이후언론을비롯한국민의기본권조항보장의중요성이원탁협상에서논의되면서이와관련된핵심법안이마련되었다. 대한민국도 1987년 6월항쟁이후군부정권을퇴장시키고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자유를비롯한국민의기본권보장조항을강화및확대하는개헌을채택하였다 ( 이인호외, 2015: 291). 이후대한민국의민주주의가공고화됨에따라언론의자유를비롯한정치 시민적자유는그범위가더욱확대되었고, 이에시민들은법이허용하는범주내에서그들의다양한이해관계를비교적자유롭게표출하고관철할수있게되었다. 예컨대, 전세계정치 시민적자유를측정한 2015년프리덤하우스지표에따르면대한민국국민의기본권은정치, 경제, 법적인환경에서널리자유롭게보장된자유민주주의국가로분류된다. 이러한전반적인긍정적인평가와는달리대한민국은물론폴란드와헝가리민주제에서나타난공통점은언론의자유와공정성이문제가되고있다는사실이다. 특히, 이러한논란은개별국이처해있는특수성을고려할때언론과표현의자유에관한논쟁의원인이더욱분명하게드러나는데, 대한민국의경우국가보안법이언론과표현의자유를제약할수있는화두로지목되고있다. 1948 년채택이래로개정안을거쳐오늘날이이른국가보안법의주요취지에따르면 국가의안전을위태롭게하는반국가활동을규제함으로써, 국가의안전과국민의생존및자유를확보하기위해서제정된법률 로정의하고있다. 23 반국가활동이구체적으로무엇을의미하는지는다소모호하지만전반적으로국가보안법은국내질서를교란시키거나북한정권을지지혹은이에동조및찬양하는종북활동을하는사람을대상으로구금등의사법처리를할수있는법적근거이다. 권위주의정권하국가보안법은표현의자유를비롯하여민주주의체제가보장한국민의기본권을광범위한 23 http://www.law.go.kr/lsinfop.do?lsiseq=116750&efyd=20120701#0000 ( 접속일 : 2016 년 8 월 23 일 ).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309 범위내에서침해하는것은물론인권을유린하는데오용되었다. 이른바 색깔 혹은이념논쟁의법적근거로활용되었던국가보안법은민주화가공고화되면서법적인적법성은물론폐지자체에관한논쟁이정치권의대립구도를형성한주요원인이기도하다. 북한의도발이라는잠재적인위협이한반도에서완전히소멸되지않는이상국가보안법폐지는다소현실감이동떨어진문제라고볼수있다. 반면, 현남북한대치상황에서국가보안법의적용이어느특정인과단체활동만을선별적으로제약할수있는가의적법성문제도표현의자유라는관점에서는논란이될수있다 ( 박용상, 2012; 박주민, 2012; 심희기 이석수, 2004). 헝가리와폴란드는대한민국이직면해있는북한의안보위협과같은상황에처해있지는않지만, 실질적인언론과표현의자유는역시현정권이허용한제약된범위내에서만보장되어있다. 앞서살펴보았듯이양국모두언론에관한정치의직 간접적인개입과통제그리고이로인한언론의독립성상실이가장큰문제이었다. 본논란은헝가리오르반행정부가채택한신미디어법과폴란드커진스키행정부의미디어개정법에의거한것이며, 양국에서단행한현정치권의언론통제를고려할때동유럽신생민주주의는오랜민주전통의기반하에놓여있는서구의민주제와유사한정도의성숙한양태를나타내지못한다고할수있다. 즉, 미국의민주주의는 언론및표현의자유를제약할수있는법안을채택할수없다 고헌법에명시할만큼언론자유의중요성에관한매우관용적인사회적합의가존재하는반면 ( 홍유진, 2012: 19-20), 대한민국을비롯한헝가리와폴란드민주제에서는아직미국에부응하는정도의정치 사회적합의는부재하다. 2) 사법부의독립성 언론과표현의자유와같은국민의기본권보장이민주화이행기에관련법안의채택으로마련된것처럼헝가리, 폴란드, 그리고대한민국사법부의독립성보장을골자로한법적 제도적장치마련은 1980년대말구비되었다. 대한민국은 1987년개헌에따라최고사법기관인헌법재판소설립이추진되었으며 ( 이인호외, 2015: 291), 헝가리는원탁협상에서헌법재판소신설에관한전기를마련하였다 (2장참조 ). 폴란드의경우헌법재판소는공산주의체제가붕괴되기이전인 1986년부터작용하고있었으나 (Schwartz, 2002: 49), 정치권의간섭에서벗어나독립적인사법부의판결을내릴수있는시점은역시민주체제전환이후이었다. 삼국모두법치주의원칙확립이라는기치하에헌법재판소를비롯한사법부의독립성을헌법과관련법안으로보장하고있으며, 오늘날사법부는행정부와입법부와함께권력의균형과견제원칙을지켜나가는핵심기관중하나이다. 법적인환경에서사법부의독립성이확립된반면,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대한민국사법부의현실은원칙과는다소괴리가있다. 특히, 삼국에서발견된공통점은헌법재판소를비롯한사법부수장의임명

310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은행정부수반이결정하며그결과사법부의독립적인판단은애초부터정치적인환경에따라영향을받을수있는취약성에노출되어있다는점이다. 예컨대, 대한민국의경우헌법재판소판사 9명중 3명은대통령이직접임명하며, 3명은대법원장이그리고나머지 3명은국회에서지명하도록규정되어있다 (Rhee, 2009: 53-81; Choi, 1999: 53-66). 또한대법원장역시대통령의천거하에국회가비준하는형식으로규정되어있는바대법원장이추천하는헌재판사 3명또한사실상대통령의결정에가까운방식이다. 이와유사하게헝가리와폴란드도헌재재판관의임명은행정부수반인총리의천거에따라국회에서비준하는사실을고려하면, 국회내정치적비중에따른행정부정당이사법부에미치는직 간접적인영향력은지대하다고볼수있다. 물론임명된판사가자신의정치적선호도와성향에맞게법을해석한다는말은아니다. 정치권의천거방식으로임명된판사도개개인이평소지니고있는소신과철학, 양심, 그리고엄격한법의잣대를적용하여논란이되고있는소송과사건들에대하여독립적인판결을내릴수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헝가리, 폴란드, 그리고대한민국사법부의수반에관한현임명안절차를고려할때법관의임명은당시지배적인정치환경의영향으로부터자유롭다고볼수없다. 오히려사법부는정치환경의영향을받는정치과정의부산물이라는위험에노출되어있으며, 이에권력균형과견제의원칙이실제로잘지켜지고있는지에관해서도의구심이남는다. 실제로대한민국의경우최근법조계고위인사의의심되는비리연루사건은해당판사에관한도덕적인실추는물론사법계전체의중립성과독립성에관한국민의신뢰를추락시킬수있는문제로지목되고있다 ( 세계일보, 2016년 8월 18일, 조선일보, 2016년 5월 3일 ). 단, 대한민국사법부의현실을동시대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제와비교할때한가지긍정적인측면은대한민국의경우사법계를비롯한정치권의비리와같은현안은독립적인언론과시민단체의노력으로최소한표면상에있어서는관련문제에관한조사가진행되고있다는점이다. 특히세계에서가장빠른인터넷망구축과보급률을바탕으로소셜네트워크서비싱 (Social Network Serving) 이라는가상공간안에서이루어지는네티즌간정보교환과소통활동은주요공영방송과출판기관에서그냥간과할수도있는현안들과이슈를쟁점화함으로써언론의감시기능을하고있다. 반면헝가리와폴란드는대한민국에비하여상대적으로인터넷보급률과커뮤니티활동도저조한편이며주요언론또한현집권세력의직접적인통제하에놓여있는바사법부의비리연루와같은사건에대한조명이제대로이루어질수있는지에관해서는의구심이남는다. 요컨대,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대한민국의실질적민주주의를사법부의독립성이라는관점에서바라볼때관련법적 제도적장치는구비되었으나사법부수장임명절차안을비롯하여법의해석과정에서발생할수있는제문제들에관한처리는아직성숙하지못한민주주의단면을나타낸다고할수있다.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311 7. 나가며 본고의목적은체제전환기민주화의기수이었던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주의공고화와제문제점을진단하고동시대대한민국의민주주의와비교하여시사점을도출하는데있었다. 비교고찰결과본고는다음과같은결론에도달하였다. 첫째, 현헝가리와폴란드민주제는법적 제도적인관점에서공고화된민주주의로평가할수있으나현실은정치 시민적자유가극히제한된비자유적또는결손민주주의라고해석할수있다. 2, 3장에서살펴보았듯이체제전환기헝가리와폴란드민주주의는과도기특성상정치적불확실성이지배적이었다. 이러한상황에도불구하고헝가리와폴란드는비교적자유롭고공정한선거를거쳐연이어평화적인정권교체를달성하였다. 이행기초기에는좌우의빈번한정권교체와같은유동성이존재하였으나헝가리와폴란드에서는선거결과불복, 부정선거, 또는군부쿠데타와같은민주제의전복시도는발생하지않았다. 오히려 90년대말을기점으로양국의정당체제는기존의파편적이고불안정한다당제구도에서점차로서구의정당체제와흡사한경쟁적인양당제로전환되면서정당체제는안정적인면모를나타내었다. 또한언론 집회 결사 표현의자유를비롯한정치 시민적자유가헌법과관련법안의마련으로제도화되면서, 권력의균형과견제원칙을준수할수있는헌정적기반도갖추었다. 그결과민주화이행기세계민주주의견고성을측정하는각종지표에서헝가리와폴란드는매우빠른속도로서구민주제의수준에근접할만큼발전된모습을각영역에서나타내었다. 이러한전반적인긍정적인평가와는달리현헝가리와폴란드의실질적인민주주의는퇴보된특성을나타낸다. 2010년집권한오르반행정부는언론통제를비롯하여사법부의독립성을훼손하는일련의조치를관련법안개정안으로가시화하였으며, 이러한비자유적인조치에관하여유럽연합집행부를비롯한국제사회는깊은우려를표명하였다. 폴란드도 2015년 10월집권한커진스키행정부는언론통제를비롯한정치권의사법부개입을조직적으로시도하는등현민주주의는헝가리와매우유사한양태로변모중이다. 대한민국은폴란드와헝가리와마찬가지로 80년대말정치 시민의자유를대폭확대하는개헌과아울러관련법안마련으로민주주의의전기를마련하였다. 90년대에는문민정부가들어섰으며평화적인정권교체가연이어순조롭게이루어지는등민주적절차라는관점에서는매우안정적이고견고한민주제특성을나타내었다. 그결과민주주의견고성을나타내는각종지표에서대한민국은상위집단에속할만큼민주주의의발전을짧은시간내에압축적으로이룩해내었다. 그러나이러한긍정적인성과와는달리공고화된대한민국의민주주의도헝가리 폴란드와유사한제문제가지목된다. 우선표현의자유라는관점에서바라볼때국가보안법이어느특정집단의활동을선별적으로제약할수있는지에관한적법성이논란이되고있다. 본현안은권위주의체제하에서부터현재까

312 대한민국민주화 30 년, 평가와세계사적함의학술연구용역최종보고서 지줄곧정치권의찬반논쟁과분쟁을야기하였던화두이었으며, 실제로정치권은북한의안보위협과국가보안법의정당성그리고표현의자유라는문제를두고서대립적인구도를나타내고있다. 한반도가위치한특수성을고려할때국가보안법폐지를둘러싼찬반논쟁과표현의자유제약은현헝가리와폴란드의언론통제와는다소성격이다른문제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표현의자유라는엄격한잣대를현재실질적인민주주의단면과함께놓고고찰해볼때는삼국모두동시대서구의민주제와유사한정도의성숙한민주주의의특성을나타낸다고볼수없다. 삼국모두에서언론의중립성과표현의자유는정치권이허용한한도내에서작용하고있으며, 특히공영미디어는집권세력의직 간접적인개입에서자유롭지못하다. 각국이처한특수한상황을고려하여표현과언론의자유그리고국가안보라는문제를두고서그균형점이어디에소재해있는지정치엘리트를비롯한시민사회집단은꾸준한소통과정보교환으로양질의민주주의를확립할수있도록견제와균형의역할을이행해야할것이다. 둘째, 현헝가리와폴란드민주제가우리에게시사하는점은공고화된민주주의는고정된상태로머무는것이아니라끊임없는시행착오를거쳐건설적으로발전시켜나가야한다는것이다. 2장에서살펴보았듯이헝가리와폴란드민주주의의근간은체제전환당시집권공산당과야권대표간정치협상에서이루어진위로부터의개혁에서비롯되었다. 원탁협상방식의체제전환은평화로운정권교체에는기여하였으나정작시민은중요한정치의사결정과정에참여할수없음으로써시민들은민주주의발전에있어수동적인역할을할뿐이었다. 특히, 구공산주의체제하에서시민사회는집권공산당이허용하는한도내에서 방어적인활동 을하는비동원화된사회의특성을나타내었다는점에서, 80년대민주화는지금껏수동적인역할에머물렀던각시민사회단체가일선에서정치참여를모색할수있었던역사적인기회를의미하였다. 그러나민주화이행기폴란드와헝가리시민사회는엘리트주도의원탁협상을주로지켜보는수동적인자세로일관하였고, 이에정치는위정자들만의세계로비추어졌다. 물론 80년대폴란드의경우솔리다리티자유노조와로마가톨릭교회가일부시민사회집단을대변했던 동원적시민사회 특성을나타내었다. 그러나첫자유총선이치러진후폴란드시민사회를대변했던리더들간이전에그들이몸소실천하였던민주주의실현을위한열정과용기, 그리고연대정신은소멸하였고대신주로정권획득을위해서경쟁하는분열적인국면을나타내었다. 더욱이헝가리는체제전환직후부터안정적인육자구도의정당정치가시작되었고그러한정치엘리트간경쟁은 90년대말양당제구도로전환되면서사회내다양한소외계층과주변세력의이해관계를좀더폭넓게대변해줄수있는정치참여기회가제한되었다. 폴란드와헝가리에비하여대한민국의시민사회는상대적으로좀더능동적이고적극적인정치참여역할을모색했던 동원적사회 의특성을나타낸다. 민주주의를이끈주요행위자가권위주의정권에도전했던각시민사회단체이었고 ( 임혁백, 2009: 137-169; 김병국외, 2007: 128; Yeo, 2013), 이러한저항적인특성이 60-80년대에걸쳐지속적으로표출된점을감안하면한국의민주화

체제전환후폴란드와헝가리의민주주의공고화에관한비교연구 313 역사는시민사회의저항과대중동원의역사라고해도과언이아닐것이다. 4 19혁명, 6 3 사태, 반유신투쟁, 부마항쟁, 5 18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87년 6월항쟁모두는대한민국의시민사회가구권위주의체제를상대로어떻게저항하며투쟁했는지 항의의정치 면모를잘나타낸다. 이러한시민사회의특성은대한민국의민주화가실현되고민주주의체제가공고화됨에따라좀더완화된형태로변모하면서사회내복잡한갈등양상과이해관계를좀더폭넓게대변할수있는다원적인성격으로탈바꿈하였다. 통일운동, 반미운동, 임금차별철폐, 환경, 여성, 인권, 윤리적소비, 성소수자의동등한권리보장에이르기까지현시민사회는탈물질적이고글로벌한다양한현안들을포함하여사회내다양한구성원들의이해관계를정치의사결정과정에반영하려고역할을모색한다. 이러한추세는 신사회운동 이라고도볼수있으며 ( 정태석, 2006: 132-133) 혹은대한민국의시민사회가매우표현적이고일상화된정치참여방법을제도화한 제도적시민사회 로발전했다고도해석할수있다 ( 임혁백, 2009: 137-169). 또한참여적인시민문화는공고화된민주제에서매우긍정적인효과를창출할수있는데, 능동적인시민사회의정치참여는정당정치가대변할수없는사회내소외계층과저변의이해관계를좀더폭넓게반영할수있도록정치기회구조를확대할수있다. 대한민국에비하여헝가리와폴란드의시민사회는이러한정치참여를모색할수있는기회가상대적으로협소하며그러한이면에는원탁협상이라는엘리트주도의체제전환방식과공산주의유산중하나인비동원적시민사회의정치문화를문제의원인으로들수있다. 물론체제전환직후헝가리와폴란드를비롯하여구공산권국가에서시민사회단체는양적인팽창은물론질적으로도괄목할만한성장을나타내고있다는연구결과도있지만 (Cox and Gallai, 2014: 51-67), 이연구조차특정시민사회단체의정치적참여와효과를연구했다는점에서한계가있다. 오히려우리는현헝가리와폴란드의민주제는언론의자유를비롯한정치 시민적자유가상당히제약받고있는비자유적인민주주의특성에주목해야한다. 본현실을고려할때폴란드와헝가리시민들의좀더적극적이고능동적인정치참여는비자유적인민주주의의단면을개선할수있는매우중요한열쇄이다. 다가오는정치변혁과민주주의발전의열쇄는바로시민들이쥐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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