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1980~1987 년 전재호 _ 서강국제한국학선도센터 논문요약이글은한국의민주화이행에참여했던여러세력중정치사회의역할이과소평가되었다는문제의식에서, 정치사회의가장대표적인인물이던김대중의역할을고찰했다. 그는군부권위주의정권에의해많은탄압을받았음에도불구하고, 1980년대국내외에서한국의민주화를위해많은활동을전개했다. 김대중은 1982년 12월미국으로추방된이후언론과의인터뷰및대중강연을통해군부권위주의정권을지원하는레이건정부의대한정책을비판했고, 한국민주화운동에대한미국인들의지지를호소했다. 그의활동은한국의민주화를지지하는미국언론과의원들이레이건정부에압력을넣도록만들었다. 이는직간접적으로레이건정부의대한정책및민주화운동에대한전두환정권의정책에도영향을미친것으로보인다. 1985년 2월귀국후김대중은김영삼과함께직선제개헌투쟁을주도했다. 그는민주화를위해서는참여세력모두의연합을통한민주화운동의구심체형성과중산층및미국의지지가필요하다고판단했다. 그래서참여세력들의연합을위해노력하는한편, 학생운동및사회운동의급진성을비판하면서비폭력, 비용공, 비반미의 3비원칙을주장했다. 결국김대중의의도대로 1987년민주화운동에참여했던대부분의세력이국민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43
운동본부로결집했고, 직선제개헌구호를통해중산층이대거참여하면서 1987 년 6월민주항쟁은승리했다. 비록정치사회의분열로인해민주화세력이집권에실패했을지라도, 1980년대민주화이행에서정치사회와김대중이했던중요한역할은평가절하될수없다. 주요어 : 민주화이행, 민주화운동, 김대중, 레이건정부, 정치사회 1. 들어가는말 한국의 민주화이행 (democratic transition) 은체제의근본적인변혁을지향하는급진적학생운동및사회운동세력, 제도적으로권력에접근할수있는공정한기회를요구하는정치사회의야당과재야세력, 그리고군부독재의종식을바라는일반시민들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목표를매개로광범위하게연대하여투쟁하는과정에서성취되었다. 이렇게한국의민주화이행에는여러세력이참여했음에도불구하고, 야당의역할은학생운동과시민들에비해상당히평가절하되고있다. 그이유는 1987년대통령선거에서야당정치인의분열이군부권위주의세력이재집권을가져왔다고생각하기때문이다. 그러나이글은대선패배와민주화이행에서야당의역할은분리하여평가해야한다고생각한다. 대선은패배했지만민주화이행에서그들의역할은공정히평가되어야한다. 따라서이글은야당의역할을평가하는작업의 244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일환으로가장대표적인인물인김대중을선택하여, 그가민주화이행에서어떤역할을했는지를고찰한다. 한국의민주화이행에대해서는이미많은연구들이진행되었다. 그것들은이론적으로설명하는사회과학적접근, 사건을중심으로설명하는역사적접근, 그리고양자를결합한접근으로구분할수있다. 전자는 1987년민주화이행이왜, 어떻게일어났는가를설명하는데초점을맞추었다. 대표적연구로는첫째, 합리적선택이론에기초하여지배세력과대항세력모두온건파의타협에의해한국에서민주화가가능했다는 전략적선택이론 ( 임혁백 1990), 둘째, 국가 - 사회관계에서정복국가와저항사회가상호작용하는가운데 강력한국가 와 강력한사회 가동시성장하면서양자간의치열한갈등과투쟁으로정치변동이전개되었다는사회운동론 ( 성경륭 1995), 셋째, 초보적인수준에서조절이론적시각에한국의민주화과정을설명하려는시도 ( 김호기 1995, 309-319) 등이있다. 그러나이연구들은개별이론이지닌내재적한계뿐아니라한국민주화이행과정에서전개되었던현실의다양한모습들을보여주지못했다 ( 손호철 1999). 다음으로사건을중심으로한역사적접근은주로 1987년의민주화이행을 1980년대민주화운동의결과로인식한다. 1980년대민주화운동의역사를다룬연구들이대부분이영역에속한다. 2010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한국민주주의연구소에서수행한 한국민주화운동사 3: 서울의봄부터문민정부수립까지 가대표적인연구이다. 이책은민주화운동의역사를통시적으로서술했을뿐아니라종교계, 언론 출판계, 교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45
육계 학계, 문화예술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여성운동등사회부문별운동사까지종합적으로정리했다. 그런데이연구는당시민주화운동과밀접히관련되고민주화이행에서중요한역할을했던정치사회, 곧재야와야당, 그리고정치인에대해서는거의다루지않았다. 그리고이론적시각과역사적접근을결합시킨연구들이존재한다. 조연현 (1997) 은민주화에있어민중의주도적역할과민주화운동의체제변혁적지향을강조하는급진주의적인식을보여준데비해, 윤상철 (1997) 은민주화에있어중간계급의역할을상대적으로강조했다. 그리고양자를비판적으로계승한정해구 김혜진 정상호 (2004) 는민주화세력이 최대민주화연합 으로결집하는과정을중심으로 1980년대민주화운동을설명했다. 그런데기존연구들은대부분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야당과재야세력등정치사회의역할을중요하게다루지않았다. 이는앞서지적했듯이김대중과김영삼의분열로인해 1987년대통령선거에서군부권위주의세력이재집권한것도큰영향을미쳤을것이다. 그러나정치사회는민주화운동에서학생운동이나시민들과마찬가지로중요한역할을했다. 특히 1984년민주화추진협의회 ( 이하민추협 ) 의결성과 1985년 2 12 총선에서신한민주당 ( 이하신민당 ) 의부상은직선제개헌을공론화시켰고, 이는중간계급을끌어들이는데결정적역할을했다. 윤상철 (1997) 과강원택 (2015) 의연구가이러한정치사회의중요성을잘지적했다. 그리고민추협을다룬김삼웅 (2013) 과강원택 (2015) 의연구도이에 246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포함된다. 그러나당시정치사회에서핵심적인역할을했던정치인에대한학술적연구는여전히미진하다. 예를들어김대중을다룬출판물을보면, 주로자서전과평전, 그리고에세이일뿐학술적연구는드물다. 후자의경우에도주로대통령시기통일정책이나경제정책또는리더십을분석했다. 그의민주화투쟁과관련된연구는장신기 (2013) 의연구가유일한데, 그것은김대중의활동이아닌사고, 곧민주화이행전략을분석했다. 장신기는김대중이평화와자주를원칙으로삼아, 야당과재야의연합을운동방법론으로, 그리고선민주후통일, 비폭력 비용공 비반미 ( 非反美 ) 의 3비 ( 非 ) 노선, 국제적연대의필요성등을민주화운동의외연확장을위한전략으로제시했다고설명한다. 결국기존연구들은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을전혀다루지않았다. 따라서이글은기존연구가주목하지않았던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을고찰한다. 왜냐하면그는 1980년대이후한국의정치사회를주도했던핵심인물중하나인동시에, 민주화운동에서도중심역할을했던정치인이었기때문이다. 게다가그는 1972년총선유세지원중일어난의문의교통사고이후 1980년대까지가장많은박해와탄압을받은정치인이었다. 1973년도쿄에서의납치, 구속과가택연금, 1980년내란음모사건으로인한사형선고와투옥, 미국망명, 가택연금등은그를한국민주화와인권의상징으로만들었다. 이러한고난으로인해그는국내외 양심세력 으로부터일종의 상징적권위 또는 지도력 을부여받았다. 따라서 1980년대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정치사회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47
의역할을평가하기위해서는김대중의활동을고찰하는것이반드시필요하다. 이연구는 1980년대김대중의활동을네시기로나누어고찰한다. 첫째, 1979년 10 26 이후의정치활동과 1980년 5월 17일검거이후의투옥생활을살펴본다. 둘째, 1982년 12월도미이후의활동을다룬다. 이부분은그동안전혀연구되지않았기때문에정부문서를비판적으로참고하여세부적으로고찰한다. 셋째, 1985년 2월 8일귀국이후 1987 년 6월항쟁시기까지의활동을다룬다. 넷째로 1987년 6월항쟁이후 12 월대통령선거시기까지의활동을살펴본다. 결론에서는 1980년대민주화이행과정에서김대중의역할을평가한다. 2. 1980 년대민주화운동과김대중 1) 서울의봄 시기와제 5 공화국초기 (1979.11~1982.12) 1979년 10월 26일박정희가사망하자, 가택연금중이던김대중은 11 월 10일 시국에대한담화 를발표하면서정치활동을재개했다. 그는유신체제희생자들의조속한석방과복권단행, 민주정부수립까지의분명한일정발표, 거국적인중립내각과범국민적협의체구성등을주장했다. 그리고 12월 8일긴급조치 9호해제로가택연금에서풀리자, 조속한민주정부수립의합의위에국민적화해와단결을성취하고자 248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라는성명을발표하여긴급조치해제와민주인사들의석방을환영하고그들의복권과기타옥중인사들의석방을요구했다. 그러나최규하대통령은국회를무시하고정부주도로헌법개정안을만들려시도했고신군부는 12 12 군사반란을일으켜권력장악에나섰다. 이에대해김대중은계엄령해제와전두환의활동제어가필요하다고생각했지만공민권이회복되지않은상태였기에활동에제약을받을수밖에없었다. 1980년 1월 30일김대중은윤보선, 김영삼, 양일동등과함께계엄해제, 사면복권, 정치범석방등을요구하는기자회견을했다. 2월 29일사면복권된이후그는여러모임과대중강연에서민주화요구를지속하는한편대통령후보를둘러싸고김영삼과의경쟁을벌였다. 그는반유신투쟁에기여한재야민주인사들과신민당이통합하여범야단일세력을이룰것을요구했지만, 김영삼은신민당이주도가되어야한다는입장을고수함으로써결국양자는결별했다. 1980년초학원에서는재적학생복교및해직교수복직이이루어졌고, 그들이중심이되어개강직후부터 학원민주화 투쟁이전개되었다. 5월 2일서울대 민주화대총회 를시발로각대학에서 민주화대행진 이진행되었는데, 학생들은유신세력퇴진, 계엄철폐, 이원집정부제반대, 정부주도개헌반대등을외치며가두시위를전개했다. 대학생의시위는 5월 15일전국대학생계엄해제시위에서절정을이루었다. 당시신군부는계엄령을해제하지않고전두환이중앙정보부장서리직을겸임하는등실제권력을장악하고있었다. 당시상황의심각성을인식하고있던김대중은 5월 14일글라이스틴 (William H. Gleysteen) 주한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49
미대사가사태수습을요청하자, 기자회견을통해과격시위가민주화거부세력에게빌미를줄수있으니학생들이시위를자제할것을요구했다. 또한재야인사들에게도강경한내용대신 계엄령해제와전두환, 신현확퇴진 등의내용을담은시국선언문을발표하도록설득했다. 16 일에는김영삼과회동하여계엄령해제, 정치범석방, 정치일정연내완결등시국수습책 6개항실시를촉구했다 ( 김삼웅 2010a, 508~511). 그러나신군부는 5월 18일밤 0시를기해비상계엄을전국으로확대하고, 김대중을비롯하여자신들의권력장악에방해가되는정치인, 재야인사, 학생운동세력등을기습적으로검거했다. 그런데신군부는김영삼에대해서는가택연금시킨데비해, 김대중은장남홍일, 동생대현등가족과친인척을비롯하여문익환, 예춘호, 김녹영, 김상현, 이용희, 이문영, 장을병, 송건호, 리영희, 한승헌, 고은, 김종완, 김윤식, 김승훈, 함세웅, 한화갑, 김옥두등 김대중계열 로알려진재야인사들및종교, 학계, 언론계인사 26명과함께모두중앙정보부로연행했다 ( 김삼웅 2010a, 517). 이후신군부는연행자들에게온갖고문을가해자신들이날조한범죄를고백하도록강요했고, 결국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을조작, 발표했다. 8월 14일부터김대중은 24명의동료와함께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재판을받기시작했고, 9월 17일내란음모와반국가단체수괴죄로사형을선고받았다. 이판결은국내는물론국외에서도큰발발을일으켰다. 미국정부는 억지혐의 라고비난했고에드먼드머스키 (Edmund Muskie) 미국국무장관, 헬무트콜 (Helmut Koh) 독일총리, 스즈키젠코 ( 鈴木善幸 ) 250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일본총리등이한국정부에강력히항의를전달했다 ( 김삼웅 2010a, 547). 특히미국은김대중의구명을위해많은노력을기울였다. 글라이스틴주한미대사는 12월 6일전두환과의면담에서 브라운장관의한국방문을전한후김대중의사면을정중히요청하는 12월 1일자카터대통령의친서를전달 했다 ( 글라이스틴 1999, 261). 그리고 13일브라운 (Harold Brown) 미국방장관은전두환과의회담에서김대중의처형이장래안보와경제관계에심각한영향을미칠것이라고경고했다. 이후김대중의감형을이끈것은레이건대통령당선자와국가안보보좌관인리처드앨런 (Richard Allen) 이었다. 앨런은전두환의특사자격으로미국을방문한특전사사령관정호용소장에게김대중을죽이면 벼락이당신들을치는듯한 미국의반발에부닥칠것이고, 한미정부사이의거북한관계를청산할수있는절호의기회를놓치게될것 이라고말했다 ( 글라이스틴 1999, 263; 오버도퍼 2002, 216). 앨런은레이건의취임식에전두환을초청해달라는정호용의요청에대해김대중의대폭감형을조건으로취임후방문을허락했다 ( 글라이스틴 1999, 264). 1981년 1월 23일김대중은대법원에서상고가기각됨으로써사형이확정되었지만, 당일국무회의는그를무기징역으로감형했다. 이로써전두환이레이건대통령취임식바로다음날백악관을방문할수있었다. 이렇게미국의도움으로감형된김대중은수감생활중정신적으로는물론고관절통증과이명등육체적으로도많은고통을겪었지만꾸준한독서를통해지식과식견을넓혔다. 전두환정권은 1982년 3월 12일다시그를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감형했다. 또한김대중의수감이라는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51
부담스러운짐을덜기위해 12월 16일그를서울대학병원으로이송시킨다음, 23일신병치료를빌미로미국으로추방했다. 결국유신체제붕괴이후김대중은민주화국면에서주도적역할을할것으로기대되었으나, 신군부의민주화지연과정에서대통령후보단일화문제로갈등을빚다가, 내란음모사건으로정치사회에서강제적으로축출되었다. 이후재판과투옥생활을통해많은고난을겪었지만, 1982년 12월미국의도움으로수감생활에서풀려나미국으로추방되었다. 곧 1980년이후추방될때까지그는민주화운동에서의미있는역할을하지못했다. 2) 미국망명시기 (1982.12~1985.1) 1982년 12월 23일한국에서추방된김대중은미국에도착하자마자언론과기자회견을갖고한국의민주화를위해계속투쟁할것임을표명했다. 그는미국이한국의민주화를위해독재자에게압력을가할수있는최적의장소이고, 미국의회지도자들에게한국독재의실상을알리는것이한국민주화에도움이되는가장효과적인방안이라고생각했다. 그래서체류기간내내미국이한국의독재자를지지하는것이미국의국익에전혀도움이되지않는다는사실을지속적으로미국인들에게전달했다 ( 김대중 2010, 426). 김대중은 25일부터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등주요언론들과의인터뷰를비롯하여미국내기독교계지도자, 엠네스티인터내셔널관계 252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자등과면담을가졌다. 또한 1983년 1월 14일슈스미스 (Shoesmith) 미국무부부차관보와오찬을가졌고, 15일에는문부식, 김현장구명을호소하는대중연설을하면서 미국이한국국민에죄의식을느껴야한다 고주장했다. 1) 도미직후김대중이강조한주요발언은첫째, 자신은강제출국당했고신병치료후돌아가겠다. 사정이허락하면 1년내귀국을희망한다. 둘째, 대통령이될생각은없으나, 한국의민주주의와인권회복을위해싸울것이다. 셋째, 한반도전쟁억지위해미군주둔을지지한다. 넷째, 미국과일본이서울의억압적통치에대해공개적으로비판하기를바란다. 현정권의인권억압은박정권때보다더하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관련자를석방하라, 다섯째, 한국정부가루머를퍼뜨려국민과의자신사이를이간시켰다. 여섯째, 한국정부가한미일관계에서이득을보느냐는관건은자신에게달렸다등이었다. 2) 전두환정권은김대중이 반정부 활동을전개하자, 그를밀착감시하고자신들에게불리한상황전개를막으려고노력했다. 1983년 1월 17 일외무부는클리블랜드주한미대리대사에게미국무성산하의 VOA ( 미국의소리 ) 가김대중의재미동정과육성방송을방영한것은 한미관 1) 김대중도미이후의주요언론보도경향 (1983.1), 한국외교문서 70-18782, 136-176./ 주미대사가외무부장관에서보낸전문 (1983.1.29), 한국외교문서 70-18782, 120. 2) 김대중도미이후언론동향전망및대책자료 (1983.1.30), 한국외교문서 70-18782, 131-135.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53
계의긴장을조성시키는요인 이된다고항의하고즉각적인시정조치를요구했다. 3) 전두환정권은 VOA가한국에대해비판성향의보도로인해국제사회에서자신들의이미지가하락되고, 국내에서는김대중선전효과를초래하며향후종교단체, 학원소요를통해보도내용이거론되면서국내비판세력을자극할것을우려했다. 4) 2월 15일김대중은미국에드워드케네디 (Edward Kennedy) 상원의원의환영행사에서 미국이우리의국내정치에개입하기를바라지않 지만, 다만 우리의민주주의에대한열망을정신적으로지원 하고 미국정부가안정과안보라는구실아래독재를합리화하거나고무하지말 것을요청했다 ( 김대중 2010, 426). 5) 또한 3월부터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에모리대등에서한국의민주화투쟁의지를천명하고미국의안보우선정책이한국의민주화를저해했다고비난하는내용의강연을했다. 그는 3월 30일에모리대강연후에는카터전대통령과면담을했고, 5월 16일에는에모리대에서명예법학박사학위를받았다. 5월 17일에는 NBC-TV 와인터뷰를갖고한국의인권상황과민주주의회복을위한자신의노력을피력했다. 이에대해전두환정권은미국내에서전두환정권에대한불리한여론이조성될것을우려하여 NBC 측의방 3) 외무부장관이주일대사에게보낸전문 (1983.1.18.20:20), 한국외교문서 701-18782, 68. 4) 미국의소리방송 (VOA) 김대중관련내용보도에따른문제점검토 (1983.1), 한국외교문서 701-18782, 85-90. 5) 케네디상원의원의김대중환영파티 (1983.2.16), 한국외교문서 701-18783, 41. 254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영취소를원했지만실패했다. 6) 김대중은 5월 18일김영삼이광주항쟁 3주년을맞이하여단식투쟁을전개하자, 24일연대의사를표명하는성명서를발표하고, 6월 4일에는 김영삼을구하라 는팻말을들고워싱턴의한국대사관및국무부와백악관앞에서시위를벌였다. 7) 또한뉴욕타임스에 김영삼의단식투쟁 (Kim s Hunger Strike) 을기고하고단식투쟁을지지했다. 또한광복절에는서울과워싱턴에서양김공동명의로 민주화투쟁은민족의독립과해방을위한투쟁이다 라는성명서를발표했다. 여기서양김은군사정권이재창출된데대한대국민사죄와함께향후민주주의를위해함께싸우겠다고천명했다 ( 김대중 2010, 431-432). 김대중은 6월워싱턴에서한국의민주화열기를미국전역으로퍼뜨리고, 이를다시한국에보낼의도로 한국인권문제연구소 를설립했다. 연구소운영과소식지발행비용은자신의서예전수익금, 강의료에서도출현했지만, 대부분은한국의민주화를원하는재미교포들의지원으로조달했다 ( 김대중 2010, 429). 7월 26일에는엘리엇에이브럼스 (Elliott Abrams) 국무부인권담당차관보와한국의인권문제및민주회복에관해의견교환을했다. 이에전두환정권은 8월 2일이범석외무장관이리처드워커 (Richard Walker) 주한미국대사를만나 국내외적으로불필 6) NBC-TV의김대중초청인터뷰 (1983.5.23). 한국외교문서 701-18785, 68. / 무제 (1983.5.31) 한국외교문서 701-18785, 261. 7) 김영삼단식지지데모 (1983.6.6) 한국외교문서 701-18785, 265.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55
요한오해와부작용을가져올것을우려 하여 미정부에신중과자제를요청 하는등상당히민감하게반응했다. 8) 김대중은 8월 1일뉴욕타임스계열의라디오방송인 WQXR에출연하여전두환정권등장이후한국인의대미감정이점점나빠지고있으니, 미국은안보보다민주화에우선을두어우방을지원할것을주장했다. 9) 9월부터는하버드대학국제문제연구소에서 1년간객원연구원으로활동했고, 이후에도계속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예일대, 매사추세츠공대 (MIT) 등에서한국의민주주의전망, 한일관계, 옥중생활의경험등에대해강연을했다. 1983년 10월레이건미국대통령이한국을방문하게되자, 김대중은백악관앞에서레이건방한반대시위를전개했고, 10월 14일김경원주미대사, 솔라즈 (Stephen Solarz) 하원의원과함께 NBC-TV 투데이쇼 (Today Show) 에출현하여한국의인권유린실태를설명하고레이건방한반대의사를표명했다. 10) 그는레이건의방한이한국의독재정권을격려하고인권탄압을용인하는일이기에, 민주적인한국인들을실망시키고, 미국에대한반감을갖게만들것이라고주장했다 ( 김대중 2010, 439-441). 당시미의회의많은의원들도레이건에게인권문제가심각한상황에서방한하면독재정권을강화시킬수있으므로방한하지말 8) 김대중의국무성관리면담 (1983.8.2) 한국외교문서 701-18786, 26. 9) 김대중방송내용보고 (1983.8.3) 한국외교문서 701-18786, 53. 10) NBC-TV(1983.11.15) 한국외교문서 701-18786, 234. 256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것을요구했다 ( 김대중 2010, 439). 물론레이건은한국을방문했지만, 미국민주당의원들의조언을받아들여한국의민주화를언급하고전두환정권의인권탄압을비판했다 (Dunlop, 1998). 먼저, 전두환과의정상회담에서주요의제로인권과민주주의를다루었다. 또한국회연설에서강력한어조로 지속적으로정치제도의민주화를이루는것이야말로국민전체가합의하여진정한안보를구출하는유일한방법 이며, 전두환의약속대로 1988년자유선거실시공약을반드시실행해야할것이라고주장했다 ( 브라진스키 2011, 404~405). 그리고 11월 12일주한미대사관의연회에서한국에대한미국의최대공헌이국가안보라는점을지적한후, 한국이민주주의의길을걸어가야만하고미국은민주주의를향한한국인들의노력을지속적으로지지할것이라는점을밝혔다 ( 전재호 2014, 248-250). 이러한미국의민주화요구직후였던 1983년 12월 21일전두환정권은학생사범을포함한공안관련자 172명을석방하고 142명의공민권을복권시키는 유화조치 를실시했다. 또한 1984년초부터대학에상주했던경찰병력을철수시켰다. 이로인해 1984년부터대학내학생운동이급속히성장하기시작했고, 이는차례로민주화운동의성장을견인했다. 더욱이 유화국면에서민주화운동은청년학생들과재야세력을넘어사회운동세력과야권까지포괄하는민주화의연합운동으로성장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한국민주주의연구소엮음 2010, 33). 따라서유화국면은 1980년대민주화운동의결절점으로평가받는다. 결국전두환정권의유화조치가한국민주화에대한미국의요구를수용한것이었는지는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57
확실치않지만, 미국의요구이후전두환정권이취한유화조치는한국민주화운동의성장을가져왔다. 레이건방한이후에도김대중은계속하여미국의대한정책을비판했다. 그는 12월 20일 LA타임스에기고하여, 방한중한국정치발전과인권존중에대한언급을환영하지만 민주주의와인권에대한강조가너무약해한국인의소망을충족시키지못했고, 점차일고있는반미감정을누그러뜨리지못했 다고비판하면서, 대한정책의수정을강하게요구했다. 또한만일미국이군사정권에대한지지를철회하고군의중립을지키도록한후한국인들의민주주의주장을공개지지한다면한국인들이헌신적인노력으로남은문제를해결하겠다고주장했다. 11) 1984년에도김대중은미국정계와행정부의정책변화를유도하기위해정계, 언론계, 종교계, 학계인사들과접촉했고, 교포사회의지원을확대시키기위해강연이외에도출판활동을전개했다 ( 김대중 2010, 443-444). 먼저 1월 1일한국인권문제연구소기관지 행동하는양심 창간호를발간하여각계에배포했다. 여기에는민주회복과민족통일을우리의과업으로제시한창간사, 한국민주주의에대한좌담, 김대중체류 1년간의기록, 1983년김대중의연설내용등이담겨있었다. 12) 다음으로 1980년부터 1982년까지투옥시절부인이희호에게보냈던 29 통의편지를묶어옥중서한집 민족의한을안고 ( 갈릴리문고 ) 로출간했 11) 김대중의 LA 타임지보도내용 (1983.12.22) 한국외교문서 701-18786, 246-247. 12) 김대중의 행동하는양심 지창간 (1984.2.9) 한국외교문서 701-18770, 35. 258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고 1월 8일뉴욕, 28일필라델피아, 4월 22일 LA, 5월 13일시카고등지에서출판기념회를하면서교포들과모임을가졌다. 한편김대중은 1983년후반부터한국으로귀국할의사를제시했는데, 그의귀국문제는 1985년그가귀환할때까지계속전두환과레이건정부모두에게딜레마를안겨주었다. 우선, 1984년 2월 28일미국민주당의바니프랭크 (Barney Frank) 등하원의원 20명은전두환정권이김대중의귀국과자유로운정치활동을허용하도록레이건행정부가압력을넣을것을요구하는서한을대통령에게보냈다. 13) 이에류병현주미대사는 3월 29일백악관보좌관과면담을갖고이문제에대해레이건행정부가한국정부에우호적인내용을담은답신을보낼것을요청했고, 4월 5일에는프랭크의원을면담하여한국의인권상황이개선되었음을설명했다. 14) 김대중은 3월 27일 84년도국정소신 을통해발표하여현상황에대한인식과한국민주화를위한구체적인방안을제시했다. 그는 현재와같은언론, 선거의자유등국민의기본권이보장되지않는상황에서의정권교체는독재자끼리의정권교체에불과 하며, 직선제개헌이바로민주주의가아닐수있음을경고했다. 또한언론기본법폐기, 선거법의제3공화국수준으로의개정, 노동관계법개폐, 시위와집시법 13) 김대중관계서한 (1984.3.15) 한국외교문서 701-18770, 121-125). 14) 김대중관계서한 (1984.3.30) 한국외교문서 701-18770, 128; 김대중관계서한 (1984.4.7) 한국외교문서 701-18770, 139-140.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59
전면개정등제도적법적조치에의한인권보장을요구했다. 15) 또한 6 월 21일시카고트리뷴의퍼스펙티브 (Perspective) 난에 Let s back Korean Democrats 란글을게재하고, 미국정부가현한국정부지원을중단하고한국민주화세력에대한도덕적지원을해야한다고주장했다. 16) 7월 16일부터 3일간은샌프란시스코에서열린민주당전당대회에참여하여민주당인사들을만나한국민주화에대한지원을요청했다. 김대중은 8월 22일미국무성에이브람스 (Abrams) 인권문제담당차관보를만나귀국의사를전달하고, 미국의관심을요청했다. 17) 9월 11일에는 12월귀국하겠다는내용의서한을전두환에게발송하는동시에슐츠 (George Shultz) 미국무장관에게도전달했다. 그는귀국이유로하버드대학교수학및신병치료완료, 민주주의를위한고통을함께나누어야할시기도래, 비폭력투쟁및온건주의통합촉진에기여등을제시했다. 18) 그리고 9월 20일에는워싱턴에서하원의원 17명과조찬간담회를갖고자신의귀국문제와한국의민주주의회복필요성에대해의견을교환했다. 19) 또한 9월 10일케네디상원의원과리치 (J. Leach) 하원의 15) 김대중의소위 84년도국정소신 발표내용 (1984.4.19) 한국외교문서 701-18770, 149-151. 16) 기사보고 (1984.6.22) 한국외교문서 701-18771, 3. 17) 김대중귀국문제 (1984.8.25) 한국외교문서 701-18771, 139. 18) 김대중의국무장관앞서한 (1984.9.12) 한국외교문서 701-18772, 46. / 김대중귀국동향 (1984.9.14) 한국외교문서 701-18772, 85. 260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원등미국의원들은김대중의안전귀국과정치활동자유를보장을요구하는서한을전두환에게보냈다. 이렇게미국조야에서김대중의귀국문제가본격적으로논의되자, 전두환정권은 9월 21일김대중이귀국하면법에따라필요한조치를취할것이라는정부입장을발표했다. 20) 또한외무부장관이방미중케네디상원의원과솔라스하원의원을방문하여남북대치상황과한국의자유화조치를설명하고김대중이귀국할경우재수감등법적조치를받을것이라는논리로그들을설득하려계획했다. 21) 그러나마이쿨스키 (Barbara Mikulski) 민주당의원을비롯한 64명의미하원의원은 10월 16일자로김대중귀국시신변안전및그의복권을요망하는대통령앞연서서한을보내전두환정권을압박했다. 이에이원경외무부장관은 10월 UN총회참석차미국을방문하면서슐츠국무장관, 밴스 (Cyrus Vance) 전국무장관, 홀부르크 (Richard Holbrook) 전국무성아태차관보, 솔라즈하원의원, 풀러 (Keith Fuller) AP 통신사장등을만나그가귀국한다면법에따라잔여형기를복역해야할것이라는한국정부의입장을설명했다 ( 외교부 2015, 60). 그리고 한국정부는자유민주주의를지향하고있으며남북분단의제약하에서도최대한의민주주의가치실현을위하여노력하고있 다는점을강조했다. 22) 19) 김대중의귀국문제 (1984.9.27) 한국외교문서 701-18772, 169. 20) 김대중귀국관련정부발표문 (1984.9.21) 한국외교문서 701-18772, 100-102. 21) 미의회인사접촉 (1984.9.19) 한국외교문서 701-18772, 86-99. 22) 각하지시사항 (1984.9.19) 한국외교문서 701-18772, 87-88.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61
그러나전두환정권은미국내김대중의가장강력한후원자인케네디상원의원을설득시키지는못했다. 전두환정권은 케네디상원의원에대한접촉순화활동강화 (10.10) 계획을세워노력했지만그와의면담은성사되지못하고서신왕래를통해상호간의인식차만을확인했다. 23) 결국김대중의귀국은전두환정권에게는해결하기힘든딜레마였다. 전두환정권으로서는김대중이귀국할시, 잔여형기를내세워투옥시키면국내지지세력의반발은물론국제여론과한미관계에부정적인영향을끼칠것이고, 그렇게하지않는다면정부가엄정하게법을집행하지않은것으로간주될뿐아니라반정부조직에게굴복한것으로보일것이기때문이었다. 1985년에도 1월 10일약 130명의학계, 법조계인사들이연서한 Campaign to assure for safe return for KIM DAE JUNG 제하의안전귀국요청서한이전두환정권에게전달되는등, 그의안전귀국은계속한미정부의쟁점이되었다. 24) 이때전두환정권은귀국후그를투옥시키는것은포기하고 2.12 총선이후귀국시키려했다. 그래서그에게귀국을총선후로연기한다면그가원하던유럽방문을허락하겠다는입장을전달했다. 25) 그러나김대중은이를거부하고 19일에는 LA에서교포들과환송회를, 23일에는미국국무성에서오픈포럼을가진후, 23) 김대중동정 (1984.10.5) 한국외교문서 701-18773, 47-49. 24) 김대중동정 (1985.1.14) 한국외교문서 701-18754, 12. 25) 김대중귀국문제 (1985.1.11) 한국외교문서 701-18754, 9. 262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마침내 2.12 총선을나흘앞둔 2월 8일한국으로귀환했다. 전두환정권은국제적인압력에밀려귀국을허용했을뿐아니라공언한대로다시투옥시키지도못한채가택연금조치를취했다. 한편김대중은미국에서민주화를위한활동을전개하면서도국내의민주화운동과계속관계를지속했다. 1983년초재야인사들은제2국민선언을주도하고김영삼단식에동참하는동시에양김의단합과재야정치인들의결속을촉구했다. 특히문익환, 이문영, 예춘호는 1984년 5 월 30일 8개항의합의서를만들어국내의김영삼및미국의김대중을접촉하여협력관계강화에합의했다 ( 김삼웅 2013, 112-113). 그결과 5월 18일김대중계와김영삼계가연합하여민주화투쟁기구인민추협을발족했다. 비록그가미국에있었지만한국을대표하는정치사회의민주화운동조직인민추협의한축이되었다는사실은그의상징성과대중적영향력이여전했음을보여준다. 결국김대중은미국에거주하던 2년 3개월동안지속적으로미정부와의회관계자, 학계, 종교계, 재미교포, 그리고언론과접촉했다. 그는동포들이많이사는지역들과 20개이상의대학으로부터초청받아한국의민주주의와인권에대해연설을했고, 주요언론은물론지역방송국이나신문사와인터뷰를하면서한국의실상을알리고민주주의회복을위해지원해줄것을호소했다 ( 김대중 2010, 428). 비록이시기그의활동이국내의민주화운동과직접연관되지는않았을지라도, 미국에서한국의민주화문제를계속제기함으로써미국내한국민주화지지세력을확장시키는것은물론, 그들이레이건정부에압력을넣어대한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63
정책에영향을미치도록했다는점에서한국민주화에미친영향을무 시할수없다. 3) 귀국이후부터 6 월항쟁까지의시기 (1985.1~1987.6) 김대중의귀국문제가한미간의뜨거운쟁점이되고있던 1984년 11월 30일전두환정권은총선에서야당을분열시키기위해피규제자 84명을해금했다. 그러나이때도김영삼과김대중은제외되었다. 이러한상황에서민추협에서는선거참여를둘러싸고찬반양론이맞섰다. 이에대해김대중은박형규목사와이돈명변호사에게정치활동이가능한정치인은본인의사에따라개인자격으로참여해도좋다는의견을제시했다 ( 김삼웅 2013, 120). 이에대해김상현은그가초기에신당창당에부정적입장을보였고신민당결성후에도성공가능성을높게보지않아동교동측근들의출마를만류했다고주장했다 ( 강원택 2015, 25). 결국민추협은민주화투쟁을위해총선에참여할것을결정하고, 12월 11일김영삼 김대중공동의장, 김상현공동의장대행명의로새로운정당창당을공식선언했다. 이후민추협을중심으로비민추협계열의정치인들이참여하여, 2 12 총선을불과 25일앞둔 1985년 1월 18일창당대회를통해신한민주당 ( 신민당 ) 이탄생했다. 이런상황에서김대중은신민당의선거지원을위해 2월 8일귀국했다. 그런데그의안전귀국에대해국내외에서많은우려가제기되었다. 특히 2년전인 1983년 8월 21일필리핀의아퀴노상원의원이귀국 264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중마르코스정권에의해공항에서살해당한전례가있었고, 전두환정권이귀국하면재수감하겠다고위협했기때문이다. 그러나김대중은 AP 통신과인터뷰에서 귀국해서한국의민주화를도와야할도의적책임 을느끼며 만일한국이민주화의길에서영원히멀어져버린다면나의전생애는아무런의미가없게된다 고말하며귀국을강행했다 ( 김삼웅 2013, 118). 김대중의안전귀국을위해미국하원의원인에드워드페이건 (Edward Feighan) 와토머스포글리에타 (Thomas M. Foglietta), 카터행정부시기국무부인권담당차관보패트데리언 (Pat Derian) 을비롯하여예비역해군대장, 목사, 다수의인권운동가, 그리고기자단수십명이동행했다. 전두환정권은공항주변에경찰력을배치하여환영인파를막았지만, 학생 500여명은이를뚫고 환영김대중선생귀국 등의펼침막을들고시위를벌였고공항가도에는학생과시민 3만여명이 독재타도 를연호했다 ( 김삼웅 2010b, 20-22). 귀국직후김대중은격리되어동교동자택으로호송된후통신수단이단절된채가택연금되었다. 그러나총선 현장 에서그의존재는큰이슈가되고유권자들의관심을불러일으켰다. 그래서야권후보들은김대중및김영삼과맺은이런저런인연을선거공보나홍보물에개제하여이용했고, 이는지지층을결속시키는강력한효과를발휘했다 ( 이용마 2015, 70). 그결과 2.12 총선에서창당된지한달도되지않은신민당이제1야당으로등극했다. 신민당은서울, 부산, 인천, 광주, 대전에서전원당선되면서 260석중 67석을획득하고 29.3% 의득표율을획득했다. 여당인민정당의득표율이 35.25% 인것과비교하면, 선거결과는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65
전두환정권에대한유권자들의경고인동시에관제야당에대한불신임이었다. 그래서선거직후야당통합논의가시작되자마자민한당당선자들은대부분탈당하여신민당에입당했고, 그결과신민당은 103석의거대야당이되었다. 26) 이에전두환정권은 3월 6일정치활동규제자 16명을다시해금시키면서김영삼은포함시키고김대중은제외했다. 이는양김을분열시키려는책략이었지만양김은연대하여계속투쟁을전개했다. 3월 15일김대중, 김영삼, 김상현이회동하여양김이민추협공동의장을, 김상현은부의장을맡기로결정했다. 이로써민추협은정통야당세력을대표하는양김체제로전환되었다. 그리고자연스럽게양김은실질적인의사결정권한을갖고신민당에큰영향력을행사했다 ( 이용마 2015, 71). 선거승리이후민추협과신민당은계속개헌논의를제기했는데, 전두환정권은이를무시하다가 1986년 1월 16일대통령국정연설을통해개헌논의를 1988년올림픽이후로미루자고제안했다. 이에 2월김 26) 그런데 2 12 총선에서신민당이승리하는데는양김과신민당의노력이외에도학생운동을비롯한사회운동의지원역시큰역할을했다. 학생운동세력은총선을반 ( 反 ) 민정당전선형성에활용해야한다는인식아래신민당과연대하여총선투쟁을전개했다. 특히선거유세장에서전두환정권의부패와실정을폭로하는유인물을배포하고가두시위를벌이는한편, 신민당후보가전두환정권을공격할때박수와환호로힘을불어넣었다. 이러한학생들의활동은전두환정권에염증을느낀많은시민들을투표장으로이끌었을뿐아니라신민당의황색돌풍과승리에크게기여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한국민주주의연구소엮음 2010, 234-235). 266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대중, 김영삼, 이민우 3인이모여 직선제개헌 1천만명서명운동 을추진하기로결정했다. 3월 11일서울에서시작된개헌추진본부결성대회는많은시민이참여하여성공적으로진행되었다 ( 김대중 2010, 464). 물론김대중은가택연금당해참여하지못했지만서울과부산시지부결성대회에서녹음축사를통해 1980년 4월이래처음으로대중들과만나게되었다. 또한 3월 17일에는두공동의장과문익환민통련의장, 박형규한국 NCC위원, 이돈명한국가톨릭정의평화위원장등이회동하여 민주화를위한국민연락기구 를결성하여개헌서명운동을전개하기로결정했다 ( 김삼웅 2013, 127). 곧개헌서명운동을매개로신민당과사회운동세력들이본격적으로연대하게되었다. 그러나 5월 3일신민당의인천, 경기지부개헌추진본부결성대회에서 4,000 여명의재야, 학생, 노동자들이대회장을점거하고대규모폭력시위가전개되자대회는무산되었다. 이에김대중은기자회견을열어 소수학생들의과격한주장에동의할수없다 는뜻을밝히고, 비반미, 비폭력, 비용공 3비( 非 ) 원칙 을재야와운동권에호소했다 ( 김삼웅 2010b, 34-38; 장신기 2013, 194-197). 전두환정권은개헌투쟁의열기를누그러뜨리고신민당과민주화운동세력의연대를와해시키기위해신민당의개헌논의요구를받아들여국회에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설치했다. 그러나민정당은국회에서신민당의대통령직선제개헌주장을무시한채계속내각제개헌을주장했다. 결국개헌협상은무산되었고, 신민당과민추협은다시거리로나서게되었다. 이에전두환정권은공안사건을이용하여민주화운동을강력히탄압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67
하기시작했다. 10월 14일통일국시발언을빌미로신민당의유성환의원을구속하고, 10월 28일에는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발대식을위해참석한대학생들을좌경용공으로몰아붙이면서강경진압했다. 이사건을빌미로전두환정권은친위쿠데타를의도했다 ( 김삼웅 2013, 43). 곧전두환정권은헌정중단을계획했고, 전두환은 김대중이에게는 군에서죽이기로했으니정계은퇴하지않으면수감하겠다 고경고하도록보안사령관에게지시했다 ( 박철언 2005, 235~238). 더욱이금강산댐사건까지터지면서정국상황이긴박하게돌아가자, 김대중은 11월 5일민추협에서 시국수습을위한조건부불출마를결심하면서 라는성명서를발표했다. 그는 현난국을수습하는길은국민의절대다수가원하는대통령중심직선제로의개헌에의한조속한민주화의실현밖에없다. 그러나전두환정권은이러한국민적열망에귀를기울일생각이없는것이다. 이제나는여기서대통령중심제개헌을전두환정권이수락한다면비록사면 복권이되더라도대통령선거에출마하지않겠다 고선언했다 ( 김대중 2010, 466-467). 그가성명을발표한것은전두환정권의친위쿠데타를막고직선제개헌을이끌어내기위해서였다. 김영삼도난국수습을위한고심과충정에서나온발언으로자신도김대중과같은심정이라고말했다 ( 김삼웅 2010b, 47-49). 이렇게민주화를위해김대중과김영삼이협력하자전두환정권은양김을따돌리고야당일부세력과내각제개헌을추진했다. 1986년 12월 24일이민우신민당총재는언론자유등 7개항목을전제로내세우면서의원내각제를내세운정부와협상할용의가있다고발표했다. 이는직 268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선제개헌이라는신민당의당론에어긋난것으로, 이민우총재가독자적인행보를걸으려했던것이었다. 신민당내부에서도이철승을비롯하여비주류의원 9명이 이민우구상 을지지했지만양김은단호히거부했다. 김대중은 대통령직선제개헌없이 7개항만이뤄지면민주주의가된다는것은어림없는소리다. 직선제와민주화 7개항의병행투쟁은백지화가마땅하다 고비판했다 ( 김대중 2010, 476). 결국양김은내각제지지자들과함께하기어렵다고결론내고국회의원 74명과함께신민당을탈당하여 1987년 4월 13일통일민주당 ( 이하민주당 ) 을창당했다. 이렇게상황이긴박한돌아가던 1987년 1월 14일 박종철고문치사사건 이일어났다. 취조받던대학생을물고문으로사망시킨이사건은전두환정권에대한국민들의엄청난공분을일으켰다. 민추협은 박종철군고문살인사건조사단 을구성하고사회단체들과공동으로 2월 7일국민추도회를개최했다. 2월 13일김대중, 김영삼공동의장은정부의인권유린행위중지, 내각제개헌강행중지, 선택적국민투표실시, 두의장과전두환대통령의대화촉구등을제안하는 난국타개를위한제언과우리의결의 를공포했다. 그러나전두환정권은양김을비롯한주요인사들을가택연금시키고, 집회를원천봉쇄하거나또는개최되는경우에는최루탄을터트리며강경진압했다. 특히전두환은민주당이창당되던 4월 13일, 자신의임기중헌법개정이불가능하다고판단되기때문에현행헌법에따라차기대통령을선출하고, 개헌논의는 1988년올림픽이후까지중지하겠다는 4 13 호헌조치 를발표했다. 그러나이는개헌논의를중단시키려던전두환정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69
권의의도와달리국민들의더큰반발을가져왔다. 교수, 종교인, 변호사, 의사, 예술인, 교사, 영화인등지식인들이성명서를발표하고이의부당성을주장했고, 일부종교인들도단식기도에들어갔다. 게다가 5월 18일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의진상이축소은폐되었다는사실을발표함으로써국민적분노는더욱커졌다. 이를계기로민추협, 민주당, 재야, 종교계등은민주헌법쟁취와대여투쟁을위한공동기구를결성하기로결정하고, 5월 27일 호헌철폐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이하국본 ) 를결성했다. 국본은민정당에서대통령후보를선출하는전당대회가열리는 6월 10일에맞추어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및호헌철폐민주헌법쟁취국민대회 를개최했는데, 이날집회에는전국 22개도시 514곳에서수십만명의시민이참여했다. 이어국본은 6월 9일시위중최루탄에맞아숨진연세대생이한열군을추모하는 최루탄추방의날 행사를 6월 18일개최했는데, 전국에서 150만명이시위에참여했다. 국본의집회에는야당과민주화운동세력뿐아니라화이트칼라로대변되는중산층이참여함으로써정권에게큰타격을가했다 ( 강원택 2015, 36~37). 그런데김대중은 4월 10일부터 6월 25일새벽 0시까지, 곧 1987년민주화투쟁이가장뜨겁게진행되던시기에 78일동안이나가택연금을당했다. 심지어가족과내외신기자들의출입까지봉쇄했다. 그러나많은시민과학생들이자택부근으로와서 김대중불법감금을즉각해제하라, 독재타도 등을외치며기습시위를전개했다. 전두환정권은도청을하면서도전화를끊지않았기에김대중은 20여개국 40여개언론 270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사와전화로인터뷰를통해민주화투쟁을지지했다 ( 김대중 2010, 467-471). 그리고김대중은가택연금으로현장에참여할수는없었지만이협비서가전화로현장상황을수시로알려주었고, 한화갑비서는외신기자들의보도내용을자세히알려주었다. 6월 25일 0시를기해 78 일간의연금이풀리자김대중은 4 13 호헌조치철회, 직선제또는선택적국민투표실시, 거국중립내각구성등을요구하는성명을발표했다. 또한모든민주세력에게어떤폭력도물리쳐달라고호소했다 ( 김대중 2010, 483-486). 6월 26일열린민주헌법쟁취국민평화대행진은전국에서 180만명이넘게참가했고, 경찰은시위대의위세에밀렸다. 이런절체절명의상황에서결국민정당노태우대표위원은기자회견을열고직선제개헌, 시국사범석방, 대통령선거법개정, 국민기본법신장, 언론자유창달, 지방자치제실시, 김대중의사면 복권등 8개항을담은 6 29 선언 을발표했다. 그리고 7월 9일전두환정권은김대중에대한사면 복권조치를내렸다. 결국 1985년 2월 8일김대중은귀국이후진행된민주화투쟁과정에서매우중요한역할을했다. 과감한귀국을통해 2 12 총선에서신민당이승리하는데기여했고, 신민당의광주항쟁진상규명요구와직선제개헌투쟁을막후에서지원했다. 특히 1986년 11월 조건부불출마선언 을통해전두환정권의친위쿠데타명분을약화시켰고, 야당분열공작에맞서김영삼과함께신민당을탈당하여통일민주당을결성했으며, 학생및사회운동세력과연대하여국민운동본부를결성함으로써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71
직선제개헌투쟁이성공하는데기여했다. 4) 6 29 이후시기 (1987.7~12) 6 29 직후부터김대중은본격적으로정치활동을재개했다. 가장먼저그는여야의개헌협상에서막후역할을담당했다. 개헌협상은야당이주도했고, 8인정치회담에서합의가되면야당은김대중, 김영삼씨에게보고한후최종합의문을만들었다 는이용희의증언에서볼수있듯이양김은헌법제정과정을실질적으로주도했다 ( 강원택 2015, 41). 다만양김은대통령 4년중임제와부통령제를주장했지만, 양김이각각대통령과부통령후보로나설것을우려한민정당의반대로관철되지못했다. 이에대해임혁백은대통령이 5년단임제로결정된것이노태우, 김영삼, 김대중등 3자모두의집권가능성을보장해줄수있었기때문이었다고지적한다 ( 임혁백 2008, 11). 곧그는 5년단임대통령제도는양김의의중이반영된것으로본다. 6 29 선언이후부터대중들의가장큰관심은누가야권의대통령후보가되느냐의문제였다. 야권후보단일화는김대중이 8월 8일민주당에상임고문으로입당하면서민주당내부에서결정될것으로기대되었다. 그러나양김의입장은팽팽히대립했다. 김대중은김영삼이 김대중씨가사면복권되면대통령후보를양보하겠다 는말을믿고후보단일화에큰문제가없을것으로생각했다고진술했다 ( 김대중 2010, 489). 그러나김영삼계에서는김대중에게 불출마선언 의약속을지킬것을 272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요구하며, 대통령후보조기공천을주장했다. 이에대해김대중계는불출마선언은전두환정권이자발적으로직선제를수락했을경우유효한것인데, 4 13 호헌조치로거부했으니무효라는논리를전개했고, 대통령후보공천도여권의집중적인공격을피하기위해선거직전에하자고주장했다. 또김영삼계는기존대의원으로전당대회를열자고한데비해, 김대중계는민주화에기여도가큰재야민주인사들을영입하여범야단일후보를선출하자고맞섰다 ( 김삼웅 2010b, 63). 양김은대통령후보단일화가난항을겪던 9월 14일다시만났지만성과를내지못했다. 이후김대중은자신의취약한당내기반을보완하기위해민주당내최소한의공정경쟁의틀과꼴을갖추어야한다는명분을내세워 36개미창당지구당조직책임명권을달라고요구했지만, 김영삼은이를거부했다. 또한김대중은텔레비전토론이나전국공동유세를하고국민의지지가높은사람이후보가되도록하자고제안했지만역시거절당했다. 양김은 9월 29일에도만나후보단일화담판을가졌다. 이에대해김대중은김영삼에게양보를요구했지만그는김대중에대한군부의비토를내세우며반대하여협상이결렬되었다고주장했다 ( 김대중 2010, 493). 그러나김영삼은자신에게후보양보를권고했지만김대중이끝내양보하지않음으로써협상이결렬되었다고주장했다 ( 김영삼 2000, 103). 양자의발언이상이하지만결국양자모두포기할생각이없었다는점은분명하다. 10월 10일김영삼은대통령출마를선언했고, 김대중도신당창당작업에돌입했다. 10월 22일양김은다시만났고김영삼은당내경선을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73
제안했지만김대중은거부했다. 결국김대중은 10월 30일민주당을탈당하여평화민주당 ( 이하평민당 ) 을창당하고제13대대통령선거출마를공식선언했다. 이로써 1983년김영삼의단식투쟁을계기로다시연대했던양김이대통령을눈앞에두고다시결별했다. 이는정권교체를통해민주화를원하던많은국민들의소망을짓밟은것으로, 양김모두에게패배를가져다주었을뿐아니라결정적으로군부권위주의세력인노태우에게대권을넘겨주었다. 이러한결과는일반적으로한국의민주화이행을지체시킨것으로간주되었다. 그러나 1988년총선에서야당이승리하고, 이후여소야대정국에서야당, 그리고제1야당의총재인김대중이군부권위주의청산과민주화의진전을주도한것을고려한다면, 민주화이행의지체는일시적인것이었다. 결국 1987년대통령선거에서당시민주화세력이기대했던결과를거두지는못했지만이것이 1980년대민주화이행에서정치사회, 그리고김대중이수행했던중요한역할을부정하는근거는될수는없다. 3. 나가는말 1987년한국의민주화이행은야당과재야, 학생운동과사회운동, 그리고일반시민들이광범위하게연대하여권위주의군부정권에대해투쟁했기때문에가능했다. 또한전두환정권에게민주화를요구하고 1987년 6월민주항쟁기간중군동원에반대했던미국의역할또한무 274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시할수없다. 물론가장결정적인역할은한것은민주화이행에서선도적인투쟁을전개했던학생운동이주축이된민주화운동세력이다. 그러나오직그들의투쟁으로만민주화이행이가능했다고설명하는것은공정하지않은평가이다. 다른참여세력도일정정도역할을했기때문에, 민주화투쟁에참여했던다른세력들이각기어떤역할을했는지를살펴보는것은한국의민주화이행을 온전히 이해하고평가하는데필요한작업이다. 이글은민주화이행에참여했던여러세력중정치사회의역할이과소평가되었다는문제의식에서정치사회의가장대표적인인물이던김대중의역할을고찰했다. 그는 1970년대박정희정권은물론 1980년대전두환정권에의해서도가장많은탄압을받은정치인이다. 비록 서울의봄 시기에는김영삼과의분열로대중들을실망시켰지만, 그가받은탄압은김대중을권위주의통치에의해고통을당한 희생자 이자민주화운동의지도자로인식되도록했다. 물론박정희정권에의해시작된반복적이고악의적인좌경, 용공이미지덧씌우기는그를사상적으로 불온한 인물로인식시키기도했다. 이러한상반된인식에도불구하고, 그가한국의민주화이행에매우중요한역할을했다는사실은부정할수없다. 흥미로운점은김대중에대한미국의태도이다. 박정희정권시기는물론전두환정권시기에도미국은그의생명을구하기위해많은노력을기울였다. 그가사형에서무기징역으로감형되고미국으로추방되는데는 진보적인 카터행정부와 보수적인 레이건행정부의힘이작용했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75
다. 정치성향과무관하게미국이그에게호의를보인이유는무엇인가? 물론그가미국의상식에걸맞은정치인이기도했지만, 한국민주화에대한자신들의의지를보여주는데가장적절한인물이었기때문이아닐까? 곧미국은김대중을지원함으로써자신들이권위주의정권만을지원하는것이아니라한국의민주화도원하고있다는점을보여줄수있었다. 그들에게김대중은한국민주주의에대한자신들의공약을입증해줄수있는 본보기 였다. 그러면김대중에대한미국의지원은한국의민주화이행에어떤역할을했는가? 그는김영삼의단식투쟁지지, 한국민주화촉구성명서발표, 1984년민추협결성지원등한국의민주화운동을지원하는역할을수행했다. 또한주요언론과의인터뷰, 대학과연구소에서의강연, 교포들과의대화와강연등을통해레이건정부의전두환정권지원을비판하고, 한국민주화에대한미국인들의지원을요청했다. 이러한그의활동은한국의민주화를지지하는미국인들을움직였고, 언론과의원들이레이건정부에압력을넣도록만들었다. 1983년 10월방한당시레이건대통령이전두환에게민주화조치를요구한데서볼수있듯이그의활동은일정정도미국정부의대한정책에영향을미친것으로보인다. 한편이러한활동은미국여론을의식하지않을수없었던전두환정권에게도큰부담이되었다. 이는전두환정권은김대중의주장에대해일일이대응또는변명을하고, 국제적으로한국에서민주주의가진전되고있다는모습을강조했던사실에서잘드러난다. 결국미국에서김대중의활동은미국의여론을통해직접적으로는미국행정부의 276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대한정책에, 그리고간접적으로한국정부에영향을미쳤다고평가할수있다. 1985년 2월귀국후김대중은김영삼과함께직접민추협과신민당의직선제개헌투쟁을주도했다. 그는한국의민주화를위해서는참여세력모두가연합하여민주화운동의구심점을만들어야하고, 미국과중산층의지지가필요하다고판단했다. 그래서그는참여세력모두의연합을위해노력했고학생및사회운동의급진성을비판하면서비폭력, 비용공, 비반미의 3비원칙을주장했다. 또한그는해외에서한국의민주화를지원하는세력들과국제적연대를통해전두환정권은물론그들을지원하는미국의대한정책을변화시키기위해계속노력했다. 결국김대중의의도대로민주화운동에참여했던대부분의세력이참여하는국민운동본부가결성되고, 직선제개헌구호를통해중산층이대거참여하면서 6월민주항쟁은승리했다. 비록 6 29 이후정치사회의분열로민주화세력이집권에실패했을지라도, 1980년대민주화이행과정에서정치사회와김대중이했던중요한역할은평가절하될수없다. 참고문헌 강원택. 2015. 87 년체제 와민주화추진협의회. 강원택외. 한국의민주화와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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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Kim Dae-jung s Key Role in the Democratization Process in South Korea in 1980-1987 Jeon, Jaeho Sogang Global Korea Initiative Based on the assumption that the role played by political society in the democratization process of South Korea in the 1980s has been underestimated, this article examines the role of Kim Dae-jung, one of the key players in this society. Throughout the 1980s, Kim Dae-jung was engaged in various kinds of domestic and overseas activities related to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in South Korea, despite severe oppression of him by the authoritarian regime. Through interviews and public lectures during his exile in the United States, which began in December 1982, Kim Dae-jung criticized the Reagan Administration s backing of South Korea s military regime and appealed to the U.S. public for support of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in South Korea. His activities enabled the U.S. media and members of Congress in favor of South Korean democratization to put pressure on the Reagan Administration. The evidence shows that this pressure influenced the U.S. administration s policy toward South Korea and the policy of the Chun Doo-hwan regime toward the domestic democratization movement, both directly and indirectly. After returning to Korea in February 1985, Kim Dae-jung, together with opposition party leader Kim Young-sam, led a nationwide fight for a 280 기억과전망겨울호 ( 통권 35 호 )
constitutional amendment that would proclaim a direct presidential election system. Furthermore, Kim Dae-jung realized that the success of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in South Korea depended on a coalition of all the forces participating in the movement, as well as support by the middle class in Korea and sympathetic allies in the U.S. As a result, while working to form such a coalition, he also criticized radical student and social movements and argued for the three principles of nonviolence, non-pro-communism, and non-anti-americanism. In 1987, most of the forces participating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formed a coalition, the National Movement for the Democratic Constitutional Amendment. This coalition attracted broad participation by the middle class, under the banner of a constitutional amendment for a direct presidential election system, and led to the historic victory of the June Democratization Struggle in that year. Although the democratic forces failed to take power immediately, the success of opposition parties in the general election in 1988 contributed greatly to further progress in democratization in Korea, reinforcing this article s thesis: that the political society and, in particular, Kim Dae-jung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democratization of South Korea in the 1980s. Keyword: Democratization Process, Democratization Movement, Kim Dae-Jung, Reagan Administration, Political Society 투고 : 2016/9/27 심사 : 2016/10/11 확정 : 2016/11/15 일반논문 한국의민주화이행에서김대중의역할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