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서의배경사 헬라유대디아스포라와칠십인경 (LXX) - 바리새파, 사두개파, 젤롯당 - 김창선 <<< 루터대학교교수 / 신약학 신약성서의배경이되는헬레니즘 (Hellenismus) 시대의유대인을크게두부류로나눌수있다. 즉본토팔레스타인에살고있는유대인과지중해여러지방에흩어져살고있던디아스포라유대인으로구분할수있다. 이에따라유대교를아람어혹은히브리어에친숙한팔레스타인유대교와오히려그리스어에친숙한헬라디아스포라유대교로양분한다. 팔레스타인자체가헬라화되었다는이유에서이러한구분을부정적으로보는시각도있으나, 팔레스타인유대교와헬라디아스포라유대교를구분짓는일은여전히가능하다. 전자가이스라엘신앙의토대인히브리어성서에근거하여신앙을증거하고생각을표현한반면, 후자는히브리어성경을그리스어로번역한이른바칠십인경 (= 셉투아긴타 Septuaginta) 에근거하여그와같은것을드러냈기때문이다. 유대인의디아스포라는유대종교철학가필로 (Philo) 를통해잘알려진알렉산드리아디아스포라뿐만아니라, 시리아와소아시아또한그리스와로마에도퍼져있었다. 유대디아스포라는초기그리스도교의확장에적지않은기여를한다. 예컨대, 바울이이방지역에서선교할때우선적으로유대회당에들어가복음을전하면서, 유대교로개종한이방인 프로셀뤼토이 (proshvlutoi) 뿐만아니라회당에는출석하나유대교로개종하 성서의배경사헬라유대디아스포라와칠십인경 (LXX) 77
지않은이방인인 하나님을경외하는사람들 (sebovumenoi 혹은 fobouvmenoi to;n qeovn) 이복음을수용하였기때문이다. 또한헬라유대디아스포라가초기그리스도교에끼친영향은그들이남긴그리스어성경번역을통해서도드러난다. 그들은디아스포라회당예배에서사용할목적으로히브리어성경을그리스어로번역한이른바 칠십인경 을만들었다. 사도바울을포함해서그리스어로기록한신약성서저자들은바로칠십인경을그들의경전으로사용하였다. 이렇듯헬라유대디아스포라의유산은그리스어를말하는유대그리스도교전통으로이어지고, 바울을필두로하는신약성서의여러저자들은헬라유대그리스도교전통과긴밀하게연결되어있다. 1. 헬라유대디아스포라헬라유대디아스포라는당시그리스로마세계도처에산재해있었다. 유대문헌 (Sib III 271; 1 Makk 15:15-23; Philo, leg. 281f) 뿐만아니라그리스도교문헌 ( 행 2:5, 9-11; 15:21) 이나이방문헌 (Strabo bei Josephus, AJ XIV 7,2) 들이한결같이이를증언하고있다. 당시유대인의숫자에대해서정확히말하기어려우나, 필로는이집트에있는가장큰디아스포라유대인의숫자를백만명정도로간주한다 (Philo, Flacc. 43). 또한수많은유대인들이바벨론과시리아와소아시아에도살았다. 그리하여외국에살고있는유대인이모두 4-6백만명에달할것으로추산한다. 당시로마제국의전체인구를 6천만명정도로추산할때, 대략 10분의 1에해당하는사람들이유대인인셈이다. 이처럼유대인수가많은이유를헤거만 (H. Hegermann) 은다음의세가지와관련시킨다 : 1. 유대인은아이를많이낳았으며, 2. 유대인은상대적으로유리한 사회보장제도 를갖고있었고, 3. 유대교로개종한사람들이적지않았다는것이다. 또한유대교의확장은전쟁포로로붙잡혀간유대인들이많았을뿐만아니라, 경제적목적에서 통일된헬라세계의곳곳으로이주했다는사실과도관련이있다. 요세푸스의보도에따르면, 예수시대에수많은유대인들이시리아, 특히안디옥에살았다 (BJ VII 3,3). 또한다메섹에서유대전쟁기간중 10,500명내지는 18,000명의유대인이살해되었다고말한다. 그밖에도북아프리카와퀴레나이카 (Kyrenaika) 로많은유대인들이이주하였고, 제국의수도로마에도예수님당시수만명의유대인이살았다. 바벨론에도많은유대인들이살았을것으로추정되나, 이에관한어떤정보도없다. 단지요세푸스는유프라테스강저편에 셀수없을정도로많은수 의유대인들이살고있다고전할뿐이다 (AJ XI 5,2). 헬레니즘시대는다양한문화와종교가혼합되는시기였다. 즉그리스종교와로마종교및동방종교들이조우하며혼합되는시기였다. 이시기에도시를관통하는화려한대로, 극장, 경기장, 목욕탕, 박물관또한화려한대건축물등으로대표할수있는헬라도시문화 (Stadtkultur) 가커다란영향력을발휘한다. 이와함께현대적으로계몽화된형태로사고하며살아가는것이유행을이루면서, 많은유대인들도이에이끌리게된다. 한예를마카베오상 ( 공동번역개정판 ) 에서읽을수있다. ( 마카베오상 1:10-15) 10 그들중에서죄악의뿌리가돋아났는데그는안티오쿠스왕의아들로서로마에인질로갔던안티오쿠스에피파네스였다. 그는그리스왕국백삼십칠년에왕이되었다. 11 그무렵, 이스라엘에서는반역자들이생겨많은사람들을선동하면서 주위의이방인들과맹약을맺읍시다. 그들을멀리하고지내는동안얼마나많은재난을당하였습니까 하고꾀었다. 12 이말이그럴듯하여 13 백성들중에서여럿이왕에게달려가, 이방인들의생활풍습을받아들이자고청하여허가를받았다. 14 그들은곧이방인들의풍속을따라예루살렘에운동장을세우고 15 할례받은흔적을없애고거룩한계약을폐기하고이방인들과어울렸다. 이렇게그들은자기민족을팔고악에가담하였다. 78 2007 년겨울성서마당 성서의배경사헬라유대디아스포라와칠십인경 (LXX) 79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은민족적종교적통일성을보존했으며민족과종교의중심인예루살렘과밀접한관계를맺고있었다. 이들은성전세를내며경우에따라서는큰명절이되면예루살렘순례를하기도했다. 그러나헬라유대교는대체로회당예배를통해유지되었다. 유대인이어느정도모여살게되는장소에는어김없이유대회당 ( 시나고그 ) 이생긴다. 주전 3-2세기경에이집트의여러곳에회당이존재하였음을알수있으며, 알렉산드리아와로마와안디옥에도회당이있었다 ( 당시에는 Proseuche[proseuchv = 기도, 기도처, 시나고그 ] 라고불렀다 ). 알렉산드리아의주회당은금을입힌 71개의의자가있었다고탈무드는전한다 (bsukka 51a). 이회당은규모와장식이대단하여외부사람들이보기에는타종교의성전에비교될수있을정도였다. 시나고그예배의주요내용은토라를그리스어로낭송하는것이다. 디아스포라유대인들도팔레스타인의경건한자들처럼그렇게엄격하지는않더라도제식주의형태의삶을살았다. 그래서디아스포라유대인들은할례와안식일엄수또한당시사회가이상하게보았을돼지고기먹는것을금하는규정과같은정결규정을통해주변사람들과구분되었다. 이들은당시헬라세계의공용어인그리스어를사용하였는데, 그로말미암아자신들의언어에대한이해가점차쇠퇴하게되어성경도히브리어나아람어로는더이상이해할수없게되었다. 그리하여그리스어번역성경이나타나게되었으며, 이와더불어그리스적인유대문학이자라나게되었다. 그에따라그리스적인문학양식과역사서술기법등을수용하였으며, 그리스사상도받아들이게된다. 2. 칠십인경 (Septuaginta = LXX) 팔레스타인본토에살던유대인공동체는히브리어로, 또한부분적으로아람어로기록된성서를읽었다. 그러나많은유대인들이본토를떠나 이방세계에이른바 디아스포라 에정착하여살면서그들의조상언어인히브리어나아람어에대한지식을점차잃게되면서정착해사는지방의이방언어를자기들의통상언어로사용하는경향이늘어났다. 이러한현상과더불어성서를그리스어로번역해야할필요성이제기되었다. 이들에게율법을가르치기위해서는그리스어로설명할수밖에없었기때문이다. 처음에는유대회당에서히브리어성서본문을구전으로번역하였으리라추정되나, 점차번역문서가생겨났을것이다. 그리스어를말하는유대인들은칠십인경을히브리어로기록된성서에상응하는권위를가진문서로이해하였다. 헬라유대교뿐만아니라초창기그리스도교역시칠십인경을성령의영감으로기록된 성서 로, 즉정경으로인정한하나님의말씀으로받아들였다. 칠십인경의문화사적인의미에대해하르낙 (A. von Harnack) 은다음과같이말했다 : 이책과온세상은서로연합되었으며동일한판단에놓여있다는사실은구약성서를접했던그리스인들사이에가장만연된견해였다. 그들이이책에대해마치이세상과병행하는세상이있는듯다양하게생각할지라도, 이두세계가한구원자에게귀속된다는사실을자명한것으로보았다. 사고하는인간사가운데어느다른책에대해이와유사한판단을내렸던적이있던가! (Sitzungsberichte der Berliner Akademie, 1902, 509). 칠십인경으로인해헬라세계는구약의계시에접할수있게되었다. 헬라유대교에서비롯된모든문서들은바로칠십인경에근거를두었다고말할수있다. 그리스도교의처음 2세기동안칠십인경은그리스도인의성경그자체였다. 칠십인경은주후 200년경정경으로간주되기시작한신약성서의저자들에게영향을끼친다. 게다가초기그리스도교가칠십인경을정경으로받아들여기독론적으로해석한결과, 유대교는칠십인경을 2세기경에완전히포기하고, 그대신디아스포라공동체를위해새로운그리스어번역들 (130년경 Aquila; 170년경 Symmachus; 2세기말경 Theodotion) 로대체하였다. 칠십인경은하나로통일된번역이아니라수 80 2007 년겨울성서마당 성서의배경사헬라유대디아스포라와칠십인경 (LXX) 81
세기에걸쳐여러번역물이수집된것으로각역자들의번역술, 히브리어지식, 문체등에따라아주다양하게번역되었다. 칠십인경은 ( 불가타와더불어 ) 고대교회로부터오늘에이르기까지기독교와서구문화에커다란영향을끼쳤다. 1) 명칭의유래 칠십인경 ( 혹은 칠십인역 ) 이란명칭은 70을나타내는그리스어 호이헵도메콘타 (oij ejbdomhvkonta) 혹은라틴어 셉투아긴타 (Septuaginta = LXX[ 라틴어숫자 ]) 에서비롯된것이다. 이명칭은대략주전 150-100 년사이에기록된것으로간주되는위경가운데하나인 아리스테아스서신 (The Letter of Aristeas) 에들어있는한전설로부터유래한다. 이에따르면예루살렘에서 ( 각지파로부터 6명씩 ) 온 72명의장로들이히브리어성서를그리스어로번역했다고한다. 이때 72라는숫자가 70으로줄어든것은출애굽기 24장에의해영향받은것으로보인다. 즉하나님께서시내산에서모세와 70명의장로들에게율법을계시했다는전승에따른것으로추측된다 ( 출 24:1 또모세에게이르시되너는아론과나답과아비후와이스라엘장로칠십명과함께여호와께로올라와멀리서경배하고 ; 24:9 모세와아론과나답과아비후와이스라엘장로칠십인이올라가서 ). 칠십인경 이란명칭은교회의사본과인쇄물가운데만나타나는기독교적인명칭이다. 주후 2세기전에는그리스어성서본문을가리켜칠십인경이라고부른적이없다. 토라와예언서에대한전체번역을가리켜칠십인경이라부른최초의사람은초기기독교작가인저스틴 (Justinus, 165 년에사망 ) 이다. 2) 생성전설과역사성칠십인경은알렉산더대왕의원정에따른헬레니즘의영향이지중해인근지역에널리퍼진사실과관련이있다. 아리스테아스서신에나오는 전설에따르면프톨레마이오스필라델포스왕 (Ptolemaios II. Philadelphos, 주전 285/4-246) 의지시에따라 70인의번역자들이제일먼저모세오경에대한그리스어번역을마치게된다. 이전설에제시된주전 3세기는신뢰할만하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 ( 주전 222-205) 때활동했던팔레스타인의유대역사가데메트리오스 (Demetrios, 참조. 마카베오상 8:17-18) 가 유대왕들의역사 를 150년경에집필했을때이번역을이용한것으로보이기때문이다. 모세오경에이어서주전 130년경에이르는동안예언서와나머지부분들이연속적으로번역된것으로보인다. 주전 2세기중엽에 유폴레모스 (Eupolemos) 는역대기서의그리스어번역을사용하였으며, 주전 115년경에예수벤시라 (Jesus ben Sira) 의손자는토라와예언서그리고기타문서의세부분으로구성된알렉산드리아그리스어성경에대해알고있었다. 넓은의미에서볼때칠십인경의생성은이스라엘이안고있던신학적이며문화정치적인차원과관련되었다고말할수있다. 아리스테아스서신 (The Letter of Aristeas) 에나오는이야기알렉산드리아의유명한도서관책임자로잘못소개되고있는사서데메트리오스 (Demetrios of Phaleron) 는어느날유대인들의율법서 (=Tora) 역시왕국도서관에들여놓을가치가있다고프톨레마이오스필라델포스왕 (Ptolemaios II. Philadelphos) 에게보고하면서이를위해우선적으로유대인의율법서를그리스어로번역할필요가있음을말한다. 데메트리오스의보고를듣고이를부끄럽게여긴왕은적절한조치를취한다. 왕은아리스테아스를포함한사절단을예루살렘의대제사장엘레아잘에게보내번역작업에필요한인원을마련해주기를청한다. 이러한청원에예루살렘측이부합하도록유화책으로이집트에있는 10만명이넘는유대인전쟁포로들을석방하겠다고말한다. 그리하여왕의청에따라엘레아잘은이스라엘의각지파로부터 6명씩선출하여번역작업을수행하기에적합한 72명의학자를값진토라두루마리를갖춰 82 2007 년겨울성서마당 성서의배경사헬라유대디아스포라와칠십인경 (LXX) 83
알렉산드리아로파송한다. 이들은귀한대접을받는가운데알렉산드리아시와댐으로연결된파로스 (Pharos) 섬에서조용히번역작업을시작한다. 그들은매일저녁마다함께모여각자가번역한것을모아서로비교하면서본문을일치시킨다. 일치된본문은데메트리오스가기록하는가운데 72일간의작업후에율법이그리스어로번역되었고, 이번역본이유대공동체앞에서낭독되자모든사람들은정확하며세심한번역에감탄하면서환호하며, 이번역은아름답고경건하며매우정확하게완성되었기때문에이본문을지켜변경하지않는것이옳다 고선언한다. 이에첨가나변화나삭제를하는자는저주를받을것이라한다. 유대신앙공동체의허락이있은뒤이번역물은이집트왕에게전해지고, 왕은율법을제정한이의정신에놀라워하며풍성한선물을주어번역자들을고향으로돌려보낸다. 이와같은기적적인전설의내용을담고있는아리스테아스서신의이야기는헬라세계에살고있는유대공동체가율법의가치와권위를높이려는의도에서만들어낸전설임에틀림없다. 이방세계의왕조차율법의귀함을확신하여그리스어번역을만들어자기의도서관에비치할정도였다는사실을강조하고있는것이다. 비록전설의형태로전해내려오나, 이전설의배후에서몇가지역사적사실을찾아낼수있다. 칠십인경연구의대가로통하는로베르트한하르트 (Robert Hanhart) 교수는이전설에담겨있는역사성을세가지차원으로나눈다. 우선적으로, 정치적차원이담겨있는역사성의핵을다음과같이설명한다. 이스라엘은프톨레미왕가의통치자를하나님이세우신지배자로인정하며, 동시에이스라엘은이통지자에게예속된제의공동체로서인정받은신 1) 이어지는문맥에서요세푸스는에센파사람들에대하여도한마디를언급하고있다. 에센파사람들의가르침은모든것을하나님께맡기기를선호하고있다 (AJ XVIII, 18). 앙공동체라는사실이다. 따라서모세오경의그리스어번역은양자간의합의에따라이루어진것이며상호간에정치적인인정을확정짓는시도로이해할수있다. 프톨레마이오스필라델포스는공의로운지배자의대표자로서나타나고번역작품은프톨레마이오스 1세라고스 (Ptolemaios I Lagos, 주전 304-285/84) 가앞서예루살렘공격시자행하였던유대동족의불법적인노예화상태를제거하는동기로이해된다. 이로써알렉산더대왕에의해시작된고대세계의헬라화정치가토라에대한그리스어번역을통해이스라엘에게합법화되었다고볼수있다. 문화적측면에서의역사성은토라에대한그리스어번역은프톨레미왕조의백과사전식문화정치의현상으로규정될수있다는사실에놓여있다. 이번역작품은프톨레미왕국에속하는문화영역의문서보관소인알렉산드리아왕립도서관의책임자로있던데메트리오스가제안하여이루어진유대종교문서로이해된다. 그런데이점과관련해이전설의역사성에문제가있다. 번역을누가최초로제기하였는가하는질문이다. 아리스테아스서신을역사비평적으로다룬스칼리거 (Ioseph Iustus Scaliger, 1540-1609) 와하디 (Humphry Hody, 1659-1707) 의연구이후정설로받아들이고있는것은번역의주창자는프톨레미왕가에있지않고, 예속되어있던유대공동체라는설이다. 급속도로퍼지고있는헬라화시대에유대공동체는조상들의언어를상실하기시작했으며전통을고수함으로써신앙과예배행위를지키고자하는강력한열망이있었다. 번역작업의최초발기가유대공동체에있었다는점은칠십인경의번역자체를통해알수있다. 그리스어토라번역은헬라화를지향하는새로운해석을피하고자하며가능하면히브리어원문에충실하려고하는특성을갖고있다는사실을통해확인할수있다. 이는헬라문서의전통에서볼때낯선현상이다. 이런의미에서그리스어성서번역의제1 원인 (causa prima) 은이스라엘내부에서찾아야하고, 프톨레미왕가의문화정치는기껏해야제2 원인 (causa secunda) 으로이해될수있다. 84 2007 년겨울성서마당 성서의배경사헬라유대디아스포라와칠십인경 (LXX) 85
끝으로아리스테아스서신에담긴전설에서신학적인차원에서의역사성을발견할수있다. 이전설은강압적인상황가운데조상의언어를잃고그리스어에익숙해진헬라시대의유대공동체가토라의그리스어번역을예배때사용하는성서로인정하였다는사실에대한역사적증거로간주할수있다. 칠십인경이원형에대한모형으로서조상들의언어인히브리원문에부여된것과똑같은중요성을갖게된것이다. 즉번역본인칠십인경역시하나님의계시로서인정되었다는사실이다. 이와같은중요성은아리스테아스서신에묘사되는칠십인경이생성되는모습을통해드러난다 : 그들은서로비교를통해모든것이일치하도록표현함으로써 ( 번역을 ) 완성하였다. 이처럼일치에의해이루어진것을데메트리오스는문서로기록할것을허락하였다. 이말은그리스어토라의계시성은히브리원문의번역이되었다는사실에있지않고, 히브리원문과일치한다는사실에놓여있다는것이다. 그리스말을하는유대인의성서로서의두번째중요성은첨가와삭제와변화를금하는 정경양식문 (Kanonformel) 에나타난다 : 그들은첨가하거나변화시키거나제거함으로써본문을건드리는자를저주하라고명령하였다. 신학적인차원에서의세번째중요성은유대공동체의성서가이스라엘외부세계와맺고있는관계성에서드러난다. 이번역성서가예배사용에적합하다고규정한사람들은다름아닌알렉산드리아에있는유대공동체의제사장들과장로들그리고최고책임자들이었다는사실이다. 왜냐하면그것이멋지고하나님보시기에흡족하며또한모든점에서본문에합당하게번역되었기때문이다. 이들은이번역성서의영원한정당성을선언하였다. 그리스어성서에따른이스라엘의하나님에대한신앙고백은이스라엘과헬라세계사이의영적인교제를여는유일한길이다. 위의전설을통해분명한것은, 이집트에거주하던유대공동체는율법을그리스어로번역해야하는일이절대적으로필요했다는사실이다. 그리스어번역본을디아스포라의여러공동체에게보내기에앞서디아스 포라유대인들은예루살렘유대인들과연락하여이들의지지를얻어이러한계획을달성하고자했을것이다. 전설에따른주전 3세기전반에그러한일이있었을것이라는사실을인정해도좋으리라생각된다. 이때는이집트를다스리던프톨레마이오스왕조가팔레스타인을자신의통치에귀속시켰으나, 유대나라는계속해서자치권을유지하였기때문에이집트와팔레스타인사이의왕래가자유로웠던시기였기때문이다. 또한아리스테아스서신은율법의번역에대해서만언급하고있을뿐이며, 구약성서의다른부분의번역에대해서는침묵하고있다는사실에유의해야한다. 예나지금이나유대인들은모세오경을가장중시여기며, 모세오경으로부터성서의나머지책들도이해한다. 따라서모세오경이제일먼저번역되었을것이분명하다. 구약성서의나머지책들도차례차례그리스어로번역되었는데, 번역의정확성과신빙성이떨어진다고말할수있다. 예컨대, 몇몇예언서본문에는빠진글자도있으며다니엘서의경우번역이라기보다차라리자유로운해석으로간주할수있을정도이다. 당시헬라유대교에게는정경의범위가아직확정된상태가아니었기때문에칠십인경에는주전 2-1세기에생성된다양한문서들이포함될수있었다. 이러한이유에서칠십인경은히브리어성서보다더욱많은내용을담고있다. 칠십인경은히브리어성서보다아홉권의책을더담고있다 : 유딧, 토비트, 네권의마카베오, 시락서 (= 집회서 ), 지혜서, 솔로몬의시편. 그외에도구약성서의문서를수정하거나보충하는몇개의책들이더있다 : 그리스어에스라, 송시, 바룩, 예레미아의편지, 수산나, 벨과뱀, 또한에스더에관한몇몇보충부분도담고있다. 칠십인경의일부는히브리어원문으로소급되나, 다른일부는 ( 예컨대, 지혜서, 마카베오 3, 4서 ) 본래부터그리스어로기록된것들이다. 그리스어성경은헬레니즘시대의유대교에게대단히중요했다. 히브리어성서를그리스어로번역한것은헬라시대유대인의예배에필요한 86 2007 년겨울성서마당 성서의배경사헬라유대디아스포라와칠십인경 (LXX) 87
책을만들었다는사실을넘어, 새로운문화환경에서유대교신학이새롭게출발할수있는토대를제공했다고말할수있다. 3) 칠십인경의역사칠십인경의역사와관련하여한하르트교수는파악하기어려운두가지현상을지적한다. 하나는칠십인경, 즉 알렉산드리아정경 (alexandrinischer Kanon) 이언제완성되었는가하는질문이고, 다른하나는유대헬라공동체와원시그리스도교가어느정도로그것의정경적인권위를인정하였는가하는질문이다. 자료의부족으로이들질문에답하기가쉽지않다. 알렉산드리아정경의역사에대하여간접적이나마정보를얻을수있는문서로시락서 (= 집회서 ) 를들수있다. 히브리어로기록된시락서원문의저자는주전 2세기초에조상들에대한찬양을묘사하는부분에서일종의이미 12소선지서를담고있는 (Sir 49:10) 정경화된구약성서모음집을전제하고있다. 히브리어시락서를쓴저자의조카가이를그리스어로번역했는데, 이번역문의서문에서우리는다음과같은내용을얻을수있다. 이때까지만해도 ( 대략주전 110년경 ) 성서로인정된문서들을 본래의발음에따라히브리어원문으로읽는것과다른언어로번역된것을읽는것이같은효력을갖지않는다 (21-22) 고여겼다는사실이다. 또한 토라자체와예언서, 그리고그밖의문서는그본래적인단어의의미에있어서 ( 그리스어번역과비교할때 ) 적지않은차이를보여주고있다 고말한다 (23-26). 이와같은대립구조에서볼때다음과같은결론이나온다. 주전 2세기말경에비정경적인문서와정경적인문서사이의경계가확연히서있었다. 즉당시에이미 율법, 예언서, 성문서 라는세가지구분이완성되었다는것이다. 뿐만아니라이와같은구분이이미이들문서의그리스어번역에도적용되었다는사실이다. 시락서서문의진술을통해볼때, 칠십인경의정경화과정은히브리 어내지는아람어를말하는팔레스타인유대교와그리스어를말하는헬라유대교가서로접촉하는가운데이루어졌다고간주된다. 예루살렘의대제사장이정경성을결정짓는최고의권위자역할을했다고말할수있다. 이것도아리스테아스서신을통해알수있는역사적사실로간주된다. 이러한시각에서볼때주전 170년경셀류시드왕가의헬라화정책과관련하여당시적법한오니아스 4세의이집트로의망명이분기점으로부상되는데, 이때를기점으로예루살렘성전에대적하여이집트의레온토폴리스 (Leontopolis) 에세운성전의제사장들이그들의번역된성서에의지하여자신들의합법성과정통성을주장하였을것으로보인다. 하지만팔레스타인유대교와알렉산드리아유대교사이의논쟁에관한직접적인증거는알려져있지않다. 양자간의관계를논쟁의관계보다는오히려상호간의합의의관계로파악하는것이보다타당하리라생각된다. 따라서 1세기말경요세푸스의작품인 아피온반박문 (Contra Apionem I 36-42) 에나오는카논명세서에전승된마소라본문의범위에따른팔레스타인정경이완성된것과외경을포함한알렉산드리아정경이완성된것은서로영향을주고받으며합의에이른과정의결과로보는것이옳을것같다. 분명한것은, 칠십인경의정경화작업은팔레스타인이나헬라지역에서건한결같이유대적인기원을갖고있다는사실이다. 아울러두가지상이한형태의정경을결정지은것은비록직접적인증거가없다할지라도주후 1세기말경으로잡아야한다는사실도분명하다 ( 얌니아회합은단지팔레스타인정경에만적용될수있다 ). 4) 칠십인경번역에나타나는몇가지특징헬라시대지중해동편전역에서보편적으로사용되던대중어이며표준어는이른바코이네 (Koine) 이다. 마케도니아의알렉산더대왕이지중해일대를점령함과더불어 헬라그리스어 인코이네의사용이급속하게확대된다. 칠십인경은바로이코이네로기록되었고, 코이네에대한주요증 88 2007 년겨울성서마당 성서의배경사헬라유대디아스포라와칠십인경 (LXX) 89
인에속한다. 칠십인경의번역자들이히브리어원문에충실한번역을하려고노력함으로인해히브리어적인특징 ( 예, 창 4:5) 및아람어적인특징 ( 예, 출 12:19) 들이남아있다. 헬라세계의영향을받은헬라화된번역자들은히브리성서에나오는신인동형론적표현 (Anthropomorphismus) 을피하고하나님에관해보다추상적이며철학적으로묘사한다. 예를들면, 출애굽기 19장 3절에서모세가하나님에게올라가는것이아니라, 하나님의산으로올라가는것으로묘사하고, 출애굽기 24장 10절에서장로들은하나님을보지못하고하나님이계신장소를본다. 여호수아 4장 24절에서는 여호와의손 (hwhy dy) 을 주님의힘 (duvnami" tou' kurivou) 으로번역한다. 특히의미심장한것은하나님명칭인 야훼 (hwhy) 를 퀴리오스 (kuvrio", 주님 ) 로번역함으로써, 하나님을야훼로부르는사람들의성서가한민족의성서에국한되지않고온누리의성서 (Weltbibel) 가되었다는사실이다. :: 김창선연세대학교 (B.A.) 와독일괴팅엔대학교를나와독일튀빙엔대학교 (Mag.theol., Dr.theol.) 에서공부했다. 지금은루터대학교신약학교수로있다. 90 2007 년겨울성서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