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2. 手工業 3. 商業과 對外貿易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1) 建國 직후의 狀態와 役分田의 設置 9세기말一10세기초의 後百濟의 혼란상태는 高麗王朝 및 개창 자인 王建에 의하여 수습되었다. 그는 일찌기 후삼국의 하나인 泰 封의 왕 弓裔의 副將으로 활약하다가 918년 궁예를 타도하고 스스로 새 왕조를 세워 高麗라 청하더니, 점차적으로 舊泰封領內의 不順勢 力을 복속시키고, 935년에는 新羅를 평화리에 병합하였으며, 그 다 음해에는 숙적 後百濟를 멸하여 일단 국내통일의 과업에 성공하였 다. 그러나 그 당시에 국내에 널리 산재하고 있던 각지의 호족들 은 비록 신왕조 高麗에 귀순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제각기 독자의 武力과 經濟的 地盤을 보유하여 마치 분권적 소왕국과 같 은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王建이 완수해야 할 다음의 과제는 이러한 분권적 세력을 정비 제거하여 전국에 중앙집권적 인 지배권력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王建에게 지워진 이 과업은 물론 그 당대에 이루어지지는 못하 고 제6대 成宗 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성되기 시작하였는데, 王建 이래 高麗王朝 초기의 정책은 주로 이 과업의 완수에 촛점을 두고 있었다. 중앙집권적 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여러 대책이 강구되었 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土地制度의 재 정비였다. 高麗王朝의 토지정책은 太祖 때에 시작하여 景宗에서 文宗에 아르는 사아에 정비 완성되는데, 그 根幹이 된 것은 田柴 科制度였다. 이하 田柴科制度를 중심으로 한 高麗前期의 토지정책 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하겠다. - 130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新羅를 멸망으로 이끈 내외의 여러 모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이 토지지배관계의 문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高麗太祖 王建은 건국 직후에 맨 처음으로 田制의 개혁 에 착수하여 우선 토지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高麗史 卷78 食貨志 서문을 보면, 太祖는 즉 위하여 먼저 田制를 바로잡아 백성을 收取함에 法度가 있게 하고 農桑에 정성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때 太祖가 首正田制 했다는 것의 내용과 그 성과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太祖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의 高麗의 토지제도는 대체로 新羅의 그것을 계승한 것이었으며 아직 高麗的인 특색은 없는 것이었다. 개국 직후의 토지지배관계의 상태를 살펴보면 당시 이미 內庄 食 邑 祿邑 등이 있었음이 주목된다. 1) 內庄 食邑 祿邑 內庄(內莊)은 王室 소속의 특수한 莊園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 은 왕실재정의 기반이 되는 御料地였다. 高麗의 건국 당시의 內庄 에 관해서는 太祖 원년 6월 乙丑의 詔에 소유하고 있는 內庄 및 東宮食邑에서는 穀糧을 쌓아둔지 세월이 오래되어 반드시 많이 朽 損되었을 것이므로 內奉郞中 能梵을 審穀使로 삼는다 1)라는 기록 이 있다. 원년 6월 乙丑은 즉위한 지 불과 10일 후의 일이므로, 여기에 보이는 內虫이나 東宮食邑은 물론 高麗王朝의 제도라고는 볼수가 없고, 弓裔시대의 제도를 承襲한 것에 불과하다. 이때의 內庄과 東宮食邑의 규모가 과연 어느 정도이었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것은 후일 점차 확대의 일로를 밟게 되어 왕실재정에 있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자리 를 바꾸어 다시 상술하기로 한다. 1) 高麗史 卷 1 太租世家 同年條 - 131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食邑에 관한 기록은 위에서 본 東宮食邑 이외에 太祖가 통일 직 전에 後百濟의 頸菅과 新羅의 敬順王 金傅에게 각각 楊州와 慶州 를 식읍으로 사급한 예가 보인다.2) 高麗의 식읍은 후대의 예로 미루어 보아 실속이 없는 형식상의 허례를 취하는 경우가 적지 아 니하였으나, 위에 든 楊州를 甄萱의 식읍으로 삼고, 慶州를 金傅 의 식읍으로 삼은 사례는 단순히 그들을 優待하기 위한 허례의 형 식이 아니라, 실제로 그 지역에 대한 일정한 수취의 특권을 부여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의 식읍은 그의 성격 내용이 대체로 新羅 의 그것을 계승한 것이며, 공로가 탁월한 고관이나 宗室의 貴戚에 대하여 사급한 것으로 보인다. 공로가 탁월한 인물들 중에는 지방 의 豪族들이 많이 포함되며 그들에게도 물론 식읍이 지급되었다. 食邑에 대한 지배의 내용은 단순한 租의 수취뿐 아니라 貢 賦 力 役도 수취하였을 것이 라고 생각한다.3) 祿邑에 관한 기록도 비교적 일찍부터 보이고 있다. 즉 太祖는 동왕 17년 夏 5월 乙巳에 詔하여, 王親權勢之家 나 혹은 公卿將 相食祿之人 들이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祿邑의 編戶人을 불쌍히 여겨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4) 여기에 보이는 녹읍은 직접적으로는 泰封, 간접적으로는 新羅의 제도를 계승한 것 이 분명하나, 그의 구체적인 내용은 新羅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 가지로 잘 알 수가 없다. 추측컨대, 이 녹읍은新羅의 제도가 그대로 남은 것이며 이것은 토지 그 자체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 니라, 생산노동력을 가진 인간과 그들이 거주하는 村落에 대한 일 정한 지배 租稅 貢賦 力役 를 의미한 듯하다.5) 건국 직후에 2) 高麗史 卷 2 太租世家 18年 夏 6月및 12月條 3) 河炫綱 高麗食邑考, 歷史學報 26輯 참조 4) 高麗史 卷 2 太祖世家 同年條 5) 姜晋哲 新羅의 祿邑에 대하여, 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 - 132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있어 관료들 전부에 대하여 녹읍이 사급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 으며, 아마 이 녹읍은 詔書에 보이는 王親權勢之家 나 혹은 公卿將相食祿之人 등 특수층에 국한하여 사급한 것으로 추측된 다. 太祖가 귀순한 城主 將軍들에 대하여 녹읍을 사급한 기록은 흔 히 보이며6) 요컨대 이것은, 그들 地方豪族이 가진 과거의 支配 圈 域을 녹읍의 형식으로 용인한 것을 의미한다. 식읍과 녹읍은 그 성격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여튼 이것은 호족의 경제지배의 큰 기반이었다. 뒤에 田柴科가 설정되어 科田 功蔭田 등 토지를 매개로 하는 경제적 우대가 이들 호족출신에게도 적용되자, 녹읍은 물론 식읍도 그의 대부분이 정 리되어 왕실토지로 편입되고, 이러는 과정에서 庄 處 등이 설 립된 것으로 이해된다. 2) 役分田의 설치 위에서 본 內庄 食邑 祿邑 등은 新羅 이래 내려오던 토지지배 관 계의 類型을 高麗가 계승한 것에 불과하며, 하등 高麗王朝의 창 안에 의한 것이 아니다. 高麗가 새 왕조로서 처음으로 시행한 토지 제도에 관한 정책은 太祖 23년에 설정한 役分田이었다. 役分田은 太祖가 後三國 통합시에 자기와 노고를 같이한 朝臣 軍 士에게 官階를 논하지 않고 각 인의 性行의 선악과 功勞의 대소를 보아 전토를 차등 있게 지급한 것이었다.7) 여기서 性行의 선악이 란 신왕조에 대한 충성도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給田의 기준으 로 되었다. 役分田의 제정은 뒤에 보이는 田柴科의 설치와 같이 토지제도 전반에 걸친 어떤 법제적 개편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오 6) 高麗史 卷 92 列傳 5 李忩言 興達 襲直條 등 참조 7) 高麗史 卷 7_ 食那志 1 田制 田柴科條 - 133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히려 論功行賞을 목적으로 하는 표창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役分田의 지급에 있어 官階가 給田의 第一義的인 기준 이 되지 아니한 것은 草創未暇의 당시에 있어 신왕조의 官階가 아 직 확립되지 아니하였음에도 이유가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役分田의 성격이 論功行賞的인 것이었으므로 반드시 給田의 기준 을 官階에 두어야 할 필요도 없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비록 이 役分田은 실질적으로 官階에 의한 給田은 아니었지만 高麗 신 왕조의 지배적 신분이 일원적으로 결성되는 제일보를 이루는 데 에 큰 의의가 있었다. 役分田은 흔히들 田柴科의 전신으로 이해하고 그와 계열이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功勳田 같은 性格도 상 당히 짙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役分田 지급의 자료로서 남은 유일 한 기록은 朴守卿에게 田 200結을 特賜한 것이 보일 뿐이다.8) 그 런데 여기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당시 高麗의 국가권력은 아직 지 방에까지 깊이 침투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으므로, 役分田 授 給의 범위도 대체로 국가의 지배권력이 확립된 京親 주변을 위주 로 삼았으리라는 점이다. 이 밖에 개국 초기의 공신들에게는 일반 적인 賜田이 널리 행하여진 기록이 列傳에 보이나 더 자세히 언급 치 않는다. 일반적 賜田의 예는 대개가 役分田 설정 이전의 일로 서 아마 이것은 그후 役分田으로 흡수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2) 田柴科의 制定과 土地支配의 諸類型 田柴科는,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冒頭에 설명이 있는 바와 같이, 文武百官으로부터 府兵 閑人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의 관 8) 高麗史 卷 92 朴守卿 列傳 - 134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직에 복무하거나 또는 職役을 부담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지 위에 따라서 응분의 田土와 柴地를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田柴科 이외에 공신 고급관료에 대해서는 세습이 허용 된 勳田 功蔭田柴가 사여되었고, 武散階 僧侶 地理師 등에도 田柴가 支給되었으며 中央과 地方의 각 官司에는 公廨田柴가 지급 되었 다. 高麗朝에 있어서 田柴科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제정 변개되었 다. 즉 景宗 원년에 始定 된 田柴科는 穆宗 원년에 改定 을 보았고, 다시 文宗 30년에 更定 되었다. 우리 들은 편의상 이 를 각각 始定田柴科 혹은 改定 更定田柴科 라 부르기로 한 다. 1) 始定田柴科 田柴科가 창설된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景宗 원년 11월의 일 이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田柴科 同王 同年條에 의하면, 職散官 各品의 田柴科를 始定하였는데 官品의 고저를 논하지 아 니하고 단지 人品으로써 정하였다 라는 前文을 싣고, 이에 이어서 四色公服制에 의한 급전대상자의 신분 서열을 ① 紫衫 이상 ② 文 班丹衫 이상 ③ 文班緋衫 이상 ④ 文班綠衫 이상 ⑤ 雜業丹衫 이 상 ⑥ 雜業緋衫 이상 ⑦ 雜業綠衫 이상 ⑧ 武班丹衫 이상이라는 四階八層으로 나누어, 각 층 밑에 다시 여러 品階를 細註하고, 이 렇게 細註된 각 품계에 대해서 응분의 田柴配定額을 규정하고 있 다. 이 始定田柴科의 내용을 알기 쉽게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前文에 보이는 職散官은 직관과 산관을 의미하는 것인데, 직관 은 正職 또는 實職을 가진 벼슬을 말하며, 散官은 閑散無職事 하 여 實職이 없는 額外 의 벼슬, 즉 단지 품계만을 가진 階官을 말 - 135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하는 것이다. 始定田柴科 역시 관품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만 인품 紫 衫 1-18品 文班 1-10品 丹 衫 雜業 1-10品 武班 1-5 品 文班 1-8 品 緋 衫 雜業 1-8 品 文班 1-10品 綠 衫 雜業 1-10品 雜 吏 其未及此年科等者 최고 최하 최고 최하 최고 최하 최고 田 110結 田 32結 田 65結 田 30結 田 65結 田 30結 田 65結 柴 110結 柴 25結 柴 55結 柴 18結 柴 55結 柴 18結 柴 55結 최하 田 45結 柴 39結 최고 최하 최고 田 田 田 50結 27結 40結 14結 缺 柴 柴 柴 缺 최하 田 27結 柴 14結 최고 최하 최고 田 田 田 45結 21結 35結 10結 缺 柴 柴 柴 缺 최하 田 21結 柴 10結 支 給 不 一律的으로 田 15結 同 의 우열에 따라서 전토와 시지를 분급한 것이라고 표방하기는 하 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官品 人品을 병용한 급전제였다. 紫 丹 緋 綠의 四色公服에 의한 구별은 관품의 표시일 것이 분명하고, 각 色 內에 細註된 품계는 아마 人品 役分의 표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게시한 表記에 의하면 文班 雜業과 아울러 武班이 형성되 어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절대적 우위에 놓인 紫衫은 文 武 未 分, 나머지 三衫은 文 雜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단 武班은 丹衫 에만 국한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그리고 始定田柴科 규정의 말미에 이하의 雜吏는 각기 人品에 - 136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따라 지급이 不同하며 其未及此年科等者는 일체 15結을 給田한다 라는 단서가 붙어 있어, 위에서 말한 급전 규정에서 누락된 자들을 위해서 별개의 조처가 취해져 있다. 이것이 이른바 限外科 인데, 여기에 포함된 雜吏는 雜種吏屬의 뜻임이 분명하다. 일률적으로 15結의 급전을 받은 其未及此年科等者 의 실태는 분명치 않다. 혹시 앞으로 등용 될 관료를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요컨대 始定 田柴科는 초창기의 科田法인만큼 職 散官의 四色公服制에 의하여 급전의 차등을 설정하면서도 太祖時의 役分田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품도 급전의 기준으로서 고려치 않을 수 없는 미묘한 측면을 가 지고 있었다. 2) 改定田柴科 景宗 때에 창설된 始定田柴科는 그후 成宗代를 거쳐 穆宗 원년 12월에 이르러 일대 개편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지배질서의 성장 과 이에 따르는 官人體制의 발전에 호응하여 마련된 토지제도의 재정비를 의미한다. 成宗代에는 각 지방에 外官이 설치 파견되고 文 武散階가 각 29階씩 분립 제정되는 등 자못 주목할 만한 지배 질서 및 관인체제의 진전이 있었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田 柴科條를 보면, 이때 개정 보수한 田柴科의 細則을 기술하는 본문 冒頭에 穆宗 원년 12월에 文武兩班 및 軍人田柴科를 改定하였 다 라는 前文을 싣고, 이에 이어서 田柴科 수급자의 科等을 모두 18科, 즉 18계층으로 나누어 제1과로부터 제18과에 이르기까지 각기 차등을 두어 각 科等에 대해서 응분의 田柴受給額을 규정하 고, 또 그 밑에 수급할 자의 해당 관직명을 細註하고 있다. 이를 表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穆宗代의 改定田柴科를 景宗代에 창설된 始定田柴科와 - 137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비교해 보면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이 주목된다. 즉 첫째로 改定 田 柴科는 始定田柴科에 비하여 그 규정 내용이 퍽 간편하고 체계 - 138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支給額數 科 田地 柴地 (結) (結) 1 100 70 2 95 65 3 90 60 4 85 55 5 80 6 75 50 45 7 70 40 8 65 35 9 60 33 10 55 30 11 50 25 12 45 22 13 40 20 14 35 15 15 30 10 16 27 17 23 18 20 科外 17 受 給 者 內史令 侍中 內史侍郞平章事 門下侍郞平章事 致仕侍中 參知政事 左右僕射 檢校太師 六尙書 御史大夫 左右散騎常侍 大常卿 致仕左右僕射 致仕 太子太保 秘書監 殿中監 少府監 將作監 開城尹 上將軍 散左右僕射 左右丞 諸侍郞 諫議大夫 大將軍 散六尙書 軍器少卿 大常少卿 給舍中丞 太子賓客 太子詹事 散卿 散 監 散侍郞 諸少卿 諸少監 國子司業 諸衞將軍 太卜監 散軍器監 散上將 軍 太子庶子 諸郞中 軍器少監 秘書丞 殿中丞 內常侍 國子博士 中郞將 折衝都尉 太醫監 閣門使 宣徽諸使 制事 散少卿 散少監 諸員外郞 侍御史 起居郞 起居舍 諸局奉御 內給事 諸陵令 郞將 果毅 太卜少監 太史令 閣門副使 散郞中 散大將軍 散 閣門使 散太醫監 散太子諭德 散太子家令 散太子率更令 散 太子僕 殿中侍御史 左石浦闕 寺丞 監丞 秘書郞 國子助敎 大學博士 太醫少監 尙藥奉御 通事舍人 宣徽諸副使 太子中允 中舍人 散員外郎 散太卜少監 散太史令 散諸奉御 散閣門副使 大常博士 左右拾遺 監察御使 內謁者監 六衞長史 六局直長 軍器丞 太子洗馬 四宮正 散諸衞將軍 散寺丞 散監丞 散太 醫少監 散尚藥奉御 散宣徽諸副使 主書 錄事 都事 內侍伯 寺注簿 監注簿 四門博士 大學助敎 中尙令 享市令 武庫令 大官令 大倉令 典廐令 供御令 典客 令 大樂令 諸陵丞 別將 太卜丞 太史丞 侍御醫 尙藥直長 內殿崇班 大理評事 閣門祗候 散宣徽諸使 散直長 散中郞將 散折衝都尉 散四官正 藥藏郞 典膳內直 宮門郞 典設郞 六衞錄事 正八品丞 正八品令 內謁者 東西頭供奉官 散員 指 揮使 協律郞 太子監丞 散寺注簿 散監注簿 散郞將 散果毅 散內殷崇班 散閣門祗候 散太卜丞 散太史丞 散侍御馨 散尙 藥直長 散宣徽副使 (從)八品丞 (從)八品令 秘書郞 校書郞 四門助敎 諸尉 校尉 靈臺郞 保章正 挈壶正 太醫丞 太醫博士 律學博士 左右侍禁 左右班锻直 散正八品 散別將 散指揮 散供奉官 大祝 司廩 司庫 九品丞 主事 錄事 秘書正字 製述登科將仕 郞 明經登科將仕郞 書學博士 算學博士 司辰 司曆 卜博士 卜正 監候 食醫 醫正 醫佐 律學助敎 篆書博士 宣徽諸使判 官 諸衞隊正 殿前承旨 中樞別駕 宣徽別駕 銀臺別駕 散校尉 散左右班殿直 散侍禁 諸業將仕郞 含史 書史 監事 監作 書令史 楷書內承旨 客省 承旨 閣門承旨 借殿前承旨 親事 內給事 馬軍 散殿前承旨 散隊正 散殿前副承旨 大常司儀 大常齋郞 國子典學 知班 注藥 藥童 軍將官 通引 廳頭 直省 殿驅官 堂引 追仗 監膳 引謁(等流 外雜職) 諸步軍 不及此限者 皆給田十七結 以爲常式 (高麗史 卷 78 食貨 志田柴科) - 139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화되어 전체 官人을 한 계통 안에 망라하고 있다. 文武兩班을 중 심으로 제정된 이 田柴科는 종전의 始定田柴科와는 달리 田柴의 급여에 있어서 소위 人品이라는 막연한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오직 관직과 位階의 고하만을 표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확 실히 官人體制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며, 官人體制內에서 이미 階層制 가 확립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이러한 階層制 에 의한 전시 급여의 원칙은 이 시기 이후 高麗 朝鮮의 두 왕조를 통하여 일관되었다. 給田基準으로 人品을 고려한 始定田柴科 같은 것은 하나의 과도적 현상에 불과하였다. 다음 둘째로 주목되는 것은 始定田柴科에서는 受給對象에 군인층 이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였는데, 이번 改定田柴科에서는 뚜렷이 군 인층이 田土의 수급대 상자로서 나타나 제17과에는 馬軍, 제18과 에는 步軍에 대한 전토의 배정액이 명시되어 있다. 군인뿐 아니라 始定田柴科에서는 限外科 에 속해 있던 諸種의 流外雜職이, 改定田 柴科에서는 科內에 편입되어 步軍과 더불어 제18과에 배치되어 있 다. 군인과 流外雜職 雜種吏屬 은, 그의 신분은 양반과 구별 되지만, 국가에 대하여 職役을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수로서 전토의 급여를 받았다. 改定田柴科 그 자체에서 주목 되 는 것은 文 武의 관직 사이에 큰 비중의 차이가 있어 무관에 대한 문관의 우위가 현저히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관의 최상위인 上將軍(正三品)은 제5과, 그 다음 大將軍(從二品)은 제6 과에 속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文官 四品官의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이러한 文 武의 차별대우는 散職의 경우에 도 그대로 나타나서 문관의 散職者는 時職者에 대해서 대개 1科 를 강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의 경우에 있어서는 3과 내지 4과를 강등하고 있다. 이러한 역대의 重文主義가 무관들의 반발 - 140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을 초래하여 후일 무신반란의 한 도화선이 되었음은 다시 말할 필 요가 없다. 田柴科라고 해서 전체의 科等에 대하여 골고루 田土 柴 地를 並給한 것이 아니라, 제16과부터는 田土만 지급되고 柴地는 급여되지 아니하였음은 앞의 도표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다. 改定田柴科도 限外科가 附置되어 있었음은, 관계 기사 말미에 不及此限者는 모두 田 17結을 지급함을 常式으로 삼는다 라고 明記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始定田柴科에서는 流外雜職이 限 外科 에 속하고 있었으나, 改定田柴科에서는 그들이 科內에 편입 되었으므로 限外科 의 대상은 流外雜職을 포함하는 것은 물 론 아니다. 限外科 의 대상이 된 계층의 실태는 명료치 않으나, 아마 이것은 始定田柴科의 경우와 같이 앞으로 새로 등용될 신임 관 료와 관계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限外科 의 수급액수는 始定田柴 科의 15結이 改定田柴科에서는 17結로 증가한 것이 또한 주목된 다. 穆宗代의 改定田柴科는 그후 德宗 3년 4월에 이르러 兩班及軍 閑人田柴科 가 다시 개정되고 있다.9) 이때 새로이 개편된 田柴 科의 내용은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가 없으나, 여기서 크게 주목되 는 것은 田柴科의 수급대상자로 兩班 軍人과 더불어 閑人 이 새 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閑人과 閑人田에 관해서는 자리를 바꾸 어 따로 언급하기로 한다. 3) 更定田柴科 德宗 3년에 개편된 田柴科는 그 후 文宗 30년에 이르러 또다시 전면적인 재편성을 보게 되었다. 즉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田柴 科條에 의하면, 文宗 30년 兩班田柴科를 更定하였다 는 前文 9)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田柴科條 - 141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을 싣고, 이에 이어서 갱정된 田柴科의 소상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이 更定田柴科는 穆宗代의 改定田柴科의 체제를 그대로 承 支給額數 科 田地 柴地 (結) (結) 1 2 3 4 100 90 85 80 50 45 40 35 5 75 30 6 70 27 7 65 24 8 60 21 9 55 18 10 50 15 11 45 12 12 40 10 13 35 8 14 30 5 15 25 16 22 17 20 18 17 受 給 者 中書令 尚書令 門下侍中 門下侍郞 中書侍郞 參知政事 左右僕射 上將軍 六尚書 御吏大夫 左右常侍 太子詹事 太子賓客 大將軍 七寺卿 秘書監 殿中監 國子祭酒 尚書左右丞 司天監 太子少 詹事 諸衛將軍 右少詹事 吏部諸曹侍郞 將作監 少府監 单器監 太醫監 左右庶子 左右 諭德 諸中郞將 七寺少卿 秘書少監 殿中少監 將作少監 少府少監 司天少監 給事中 中書舍人 御史中丞 國子司業 太子僕 太子率更令 太 子家令 諸郞中 太醫少監 軍器少監 內常侍 閣門引進使 太子左右贊 善大夫 太子中允 太子中舍人 閣門使 國子博士 諸郞將 秘書丞 殿中丞 閣門副使 諸員外郞 起居郞 起居舍人 侍御史 六局奉御 殿中內給事 太 史令 諸陵令 太廟令 內謁者監 太學博士 中尚令 四官正 太 子藥藏郞 典膳郞 太子洗馬 通事舍人 左右補闕 殿中侍御史 七寺丞 三監丞 司天丞 秘書 郞 六衛長史 國子助敎 京市令 內直 典設郞 宮門監 侍御醫 諸別將 監察御史_ 左右拾遺 閣門祗候 門下錄事 中書注書 軍器丞 六 局直長 四門博士 詹事府司直 內侍伯 內殿崇班 諸散員 六相 左丞 尙書都事 七寺主簿 三監主簿 太學助敎 太官令 大樂令 大盈 令 典廐令 內園令 供驛令 掌冶令 太史丞 諸陵丞 大廟丞 司 天主簿 東西頭供奉官 諸校尉 元甫 正朝 六衛錄事 軍器主簿 四門助敎 京市丞 中尚丞 武庫丞 大樂丞 大盈丞 大倉丞 大官丞 典廐丞 內園丞 供驛丞 掌冶丞 秘書 校書郞 良醞令 司儀令 守宮令 典獄令 都染令 雜職令 都校 令 掌牲令 太醫博士 太醫丞 挈壶正 保章正 律學博士 左右 侍禁 左右班殿直 諸隊正 元尹 都染丞 雜職丞 都校丞 掌牲丞 守宮丞 司儀丞 典獄丞 良醞 丞 司廩 司庫 太史 司辰 司曆 監候 尙食 食醫 律學助敎 書 學博士 算學博士 司天博士 太醫正 醫正 司天卜正 秘書正字 諸主事 御史臺錄事 中樞院別駕 門下待詔 文林郞 將仕郞 殿 前承旨 都知 船頭 典丘官 司引 馬軍 諸令史 書史 主事 中書書藝 秘書書藝 史館書藝 太史書藝 醫計師 司天卜師 卜助敎 副殿前承旨 禮賓承旨 閣門承旨 獸 醫博士 堂印 堂直 監膳 典食 典設 役步軍 諸書令史 諸史 尙乘內承旨 副內承旨 太史 典史 注藥 藥童 道引 直省 知班 呪禁師 供膳 酒食 供設 掌設 堂從 追仗 引 謁 計史 試計史 試書藝 監門軍 閑人 雜類 - 142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襲하여 18科等制를 채택하고 있으나, 科等에 따르는 田柴의 結數 는 전에 비하여 상당한 차이가 있고, 또 科等에 연결된 관직도 앞 의 표와 같이 전후의 출입이 심하다. 그리고 이 更定田柴科에는 武散階 와 別賜科 에 관한 田柴配分制가 병설되어 있음이 주목 되는데, 이것을 요약해서 표시하면 앞의 표와 같다. 文宗代에 갱정된 이른바 更定田柴科는 高麗前期의 토지제도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田柴科로서는 최종적 결정판이었다. 이 것을 그 이전의 穆宗代 改定田柴科에 비교해 보면 다음의 여러 가 지 사실이 주목된다. 첫째 更定田柴科에서는 지급하는 田柴의 액 수가 前制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감소된 대신 무관에 대한 대우가 현저히 상승되어 있는 것이 주의를 끈다. 前制인 改定田柴科에서는 무관의 최상위인 上將軍은 제5과에 위치하고 大將軍은 제6과에 위치하였으나 이번에는 제3과 제4과로 올라갔다. 諸衛將軍 諸中郞 將 이하 馬軍 步軍 등에 이르기까지 科의 등급이 상승하였다. 다음 에 주목되는 것은, 종전까지 田柴科의 대상으로 되어 있던 散官이 更定田柴科에서는 배제되어 수급대상에서 완전히 탈락되어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現職主義의 철저를 의미하는 것인데, 급여 규정 에 이러한 변화가 생긴 것은 아마 文宗 3년에 시행된 功蔭田柴科 의 설치와 서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종전까지 시행된 散官 에 대한 급전은 功蔭田柴科로써 대치된 모양 같다. 功蔭田柴科에 관 해서는 자리를 바꾸어 다시 언급하겠다. 끝으로 주목되는 것은, 종전까지 병설되어 오던 이른바 限外科 가 이번 更定田柴科에서 는 완전히 자태를 감추어 버렸다는 것이다. 限外科 가 없어진 것 은 그의 수급대상이 科內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제도 그 자체의 완비와 일원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更定田柴科에서 부대적 조항으로 武散階와 別賜科에 대한 田柴 - 143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科가 병설되었음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 있거니와, 그 내용은 다 음과 같다. 예에 따라서 武散階 田柴科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武 1 2 3 4 田 田 田 田 30結 柴 8結 30結 25結 22結 5 田 20結 6 田 17結 散 階 冠軍大將軍 雲麾將軍 掌武將軍 宣威將軍 明威將軍 寧遠將軍 定遠將軍 遊騎將軍 遊擊將軍 耀武校尉 同副尉 振威校尉 同副尉 致果校尉 同副尉 翊 麾(威 )校尉 同副尉 宣折校尉 同副尉 禦侮校尉 同副尉 仁勇校尉 同副尉 陪 戎校尉 同副尉 大匠 副匠 雜匠人 御前部樂伴樂人 地理業 僧人 위의 표시에 의하면 武散階라는 명목으로 지급되는 전토의 액수 는 6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제1급으로부터 제5급에 이르기까지 의 지급대상은 冠軍大將軍 이하 陪戎副尉까지로 되어 있다. 冠軍 大將軍은 무산계 29級 중에서 제4급에 속하는 정3품직이며, 陪 戎副尉는 말단의 제29級에 속하는 종9품 하직이므로, 이들이 무 산계 라는 명목의 급전규정에 따라서 전토를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제6급에 속하는 大匠 副匠 雜匠人 御前部樂伴樂人 地 理業 僧人들이 무산계라는 명목의 급전을 받은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 해서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에 관한 의혹을 풀기 위해서 는 우선 武散階에 대하여 좀더 살필 필요가 있다. 무산계에 대해서는 종전까지 막연히 武官散職階 혹은 武官職階 級의 뜻으로 해석하여 왔는데, 이 견해는 잘못인 듯하다. 무산계 는 成宗 14년에 문산계와 거의 시기를 같이 하여 제정되어 같은 시기에 서로 병존한 것으로서, 文散階는 문무양반, 즉 高麗의 관료 층에 부여되었는데 대하여, 武散階는 이와는 반대로 문무관료에 대해서가 아니라 관료층과는 별개의 계열에 속하는 老兵士 鄕吏 耽 羅의 王族 女眞의 替長 工匠 樂人 등에 대해서 수급되는 것이었다. - 144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문산계와 무산계는 그의 수급대상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즉 高麗 王朝는 관료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문산계 이외에 무산계를 따로 설정함으로써, 이 두 개의 체계에 입각하는 位階制에 의 하여 문 무관료층과 그에 속하지 않는 다른 계층의 인간들을 명확히 구분 하였다. 무산계 설정의 가장 큰 의도는 문무관료를 지방호족(그의 후신이 鄕吏) 기타로부터 구별함에 있었던 모양이며, 무관도 아닌 향리층이 무산계 수여의 주요 대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아마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더 억측을 가한다면, 향리 는 노동부대인 諸州 一品軍의 校尉 隊正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 므로, 이러한 면에서 무직과 전혀 관련이 없는 바는 아니었다. 무 산계는 본래부터 무관직과는 관계가 없는 별개의 계열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여기에는 향리는 물론 耽羅王族 女 眞酋長 工匠 樂人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단 工匠 樂人은 그의 전부가 武散階田柴科 지급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중의 특수 한 계층만이 이에 포함되었음은 前揭 表記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다. 工匠 樂人에 무산계가 수여된 것은 그들이 맡은 바 임무가 군 역과 같은 職役으로 간주되어, 일종의 기술 군인의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10) 原文에 武散階田柴科 제6급의 말미에 붙어 있는 地理業 僧人은 분명히 잘못이며, 이것은 高麗史 卷 78 食貨志(田制) 본문에 계속 되는 別賜 즉 別賜科 의 형용사로서, 別賜 위에 連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別賜田柴科는 僧人 地理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別賜田柴科에 대하여 말하기로 하겠는데, 이것은 大德 10) 武散階에 관해서는, 旗田巍 高麗の武階 朝鮮學報 第 21 22 合併特輯號 참조 - 145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大通 副通 등의 僧職과 地理師 地理博士 地理生 地理正 등의 풍수지 리에 관계되는 이른바 地師들을 수여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고 려시대에 불교와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였음은 유명한 사실이며, 이 에 종사하는 僧侶 地師가 특별한 사회적 우대를 받았음은 당연한 일로 생각되거니와 그들에 대한 給田이 제도화된 것은 이번이 처 음인 듯하다. 그의 내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別 1 2 3 4 5 6 田 田 田 田 田 田 賜 40 結 柴 10 結 35 結 柴 大徳 大通 副通 地理師 地理博士 地 理 生 地 理 正 8結 30 結 25 結 20 結 17 結 위에서 田柴科制度의 설치와 그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개관을 하였다. 田柴科制度의 성격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말하기로 하겠 지만, 형식상으로 볼 때 이것은 관직을 가진 문무양반과, 職役을 부담하는 胥吏 鄕吏 軍人 工匠, 樂人 등에 대하여 토지를 분급해 주 는 제도였다. 그들에 대한 토지의 급부는 그들이 국가에 봉사하는 일정한 공적인 복무에 대한 대가를 의미하였다. 田柴科 급부의 대 상은, 하나는 관직을 가진 귀족관료층이었고, 하나는 직역을 부담 한 이와는 구별되는 계층이었다. 이러한 일반 田柴料 이외에 官僚 및 그 遺族에 대해서는 功蔭田柴 閑人田 口分田 등의 名目으로 별 도로 土地가 支給되었으니, 우선 이에 대한 설명을 가하고 또 특 히 향리에 대한 外役田과 군인에 대한 軍人田 같은 것은 그의 역 사적인 의의가 중요하므로 좀더 자세한 해설을 붙이기로 하겠다. 아울러 公廨田柴 및 기타의 토지지배의 유형에 대해서도 설명을 가할 예정이다. - 146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4) 功蔭田柴 特殊田柴科에 속하는 功蔭田柴는 양반신분 그 자체에 대한 우대 의 특전으로 지급된 것으로서 일반 田柴科, 즉 兩班科田이 當代限 인 것에 대하여 자손들에게 상속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 큰 특 색이었다. 官人國家인 高麗는, 일단 官人의 신분을 취득한 특권층 에 대해서 그들이 자자손손으로 그 신분을 계승할 수 있도록 염려 해 주었고 또 그 신분을 유지함에 필요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蔭職과 功蔭田柴의 제도가 바로 이것을 입증한다. 高麗에서는 功蔭田柴의 제도가 실시되기 이전에 景宗 2년에 제정된 勳田의 제도가 있었다. 이 勳田은 아마 처음에 는 문자 그대로 공훈이 현저한 공신에 한하여 사급해서 자손에의 상속을 인정한 것인 모양인데, 그후 文宗代에 이르러서는 훈공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官人身分 그 자체 에 대한 우대 보호책으로서 5品 이상의 문무양반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功蔭田柴를 지급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功蔭田柴 文宗 3 년 5월條를 보면, 功蔭田柴는 1品부터 5品 이상의 고급관료에게 저들의 品秩에 따라서 최고 1品 田 25結 柴 15結, 최하 5品 田 15 結 柴 5結을 지급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散官은 각 品마다 원액에서 5結을 감하여 지급하였으며, 樂工 賤口에서 放良된 員吏 는 이 우대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울러 밝히고 있다. 功蔭田柴가 제정된 근본 취지는 5品 이상의 特權的 高級官人에 대해서 그들이 高級官人으로서 그들의 특권적인 생활을 세습적으 로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생활 토대를 마련해 줌에 있었다. 官人은 그가 관직에 재임하고 있는 동안은 兩班科田을 받았으나, 이 兩班 科田은 세습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本人이 身歿하면 兩班科田 - 147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은 국가에 환납되기 마련이었다. 5品이상의 官人의 자제는 대개 科擧 를 거치지 않더라도 蔭仕를 통하여 官途에 취임할 수 있는 특혜가 부여되어 있었으나 연령 관계 기타의 이유로 父가 死殁한 이후에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이럴 경우 高級官人層 의 가족은 官人으로서의 특권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막연하 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고 또 兩班科田이 當代限의 것이라 는 조건을 고려해서 제정된 것이 功蔭田柴였다. 세습적 상속이 허 용된 이 功蔭田柴는 私有財產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功蔭田柴 의 경영에 있어서는 受給者인 兩班이 代理人을 現地에 두어 경작 자인 佃戶의 생산을 감독 관리 하고 그들과 仙戶 사이 에 私的인 支 配 隷屬의 관계가 성립되어 小作制가 이루어질 가능성 같은 것도 생각된다. 5品 이상의 관인층에 대해서는 功蔭田柴가 설정됨으로 써 그들의 官人身分을 세습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면 같은 관인층에 속하는 6品 이하의 官人에 대 해서는 어떠하였는가.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閑人田 口分 田에대한 설명이 필요하다.11) 5) 閑人田 口分田 功蔭田柴가 5 品 이상의 官人 및 그들의 자제를 상대로 그들의 官人身分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경제적 조건을 마련해 주기 위하 여 설정된 것이라면, 閑人田은 이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6品 이하 의 관인자녀를 상대로 그들의 경제적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 하여 설정된 것이었다. 閑人田의 이러한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우 선 口分田에 관해서 먼저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田柴科條를 보면, 文宗 원년 2월 11) 功蔭田柴에 관해서는. 李佑成 閑人 白丁의 新解釋 歷史學報 19輯 참조 - 148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의 判으로서 口分田을 지급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 음과 같다. [口分田支給規定] ① 無連立子孫者之妻 6品 7品 8結 8品 以下 5結 戰亡軍人 5結 ② 夫妻皆死無男而有未嫁女子者 5品 以上 8結 6品 以下? 이 규정은 ① 連立할 자손이 없는 자의 妻와 ② 夫妻가 모두 사 망한 뒤, 남자는 없고 未嫁女子만 있을 경우에 대하여 국가가 일 정한 口分田을 지급하여 생활을 보장해 준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분명히 高麗時代의 口分田은 적어도 전기에 나타나는 그의 用例 를 보면, 官人 및 군인 유족의 보호를 위하여 지급하는 토지였다. 그런데 口分田의 지급규정에서 하나 크게 주목되는 것은, 그것 은 모두 자식 자손이 없을 경우에 대한 것이며, 자식 자손에 관한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여 주는 것이 바로 閑人田이다. 閑人田은 功蔭田과 等質視되는 토지로써 未仕 未嫁者, 특히 未仕者에게 주어 생활을 보장케 하는 토지였 다.12) 여기서 未仕者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이 관직을 취 득치 못한 사람을 의미 하는데, 이 未仕者는 응당 그 신분이 官人 層이면서도 아직 官途에 오르지 못한 사람, 즉 官人의 子弟를 의 12) 自是以來, 閑人 功蔭 投化 入鎭 加給 補給 登科 別賜之名 代有增益 已仕已 嫁者 尙食閑人之田 不踐行伍者 冒受軍田 旣食役分 又食閑人 又食軍田 授受 之官 不問其已見任在官 而當食役分者耶 未仕未嫁 當食閑人者耶 其身果府兵歟 (高随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辛禑 14年 7月 趙浚上書) 李佑成 閑人 白丁에 대한 新解釋, 歴史學報 19輯 - 149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미한다. 官人出身의 신분으로 아직 官途에 오르지 못한 자에 대하여 그 가 5品 이상의 양반의 자제일 경우에는 功蔭田柴가 지급되어 그 들 생활이 보장되었음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면 功蔭田柴와 等 質視되는 동시에, 그것과는 구별되는 閑人田을 받는 官人出身 의 未仕者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은 논리상 功蔭田柴 를 받지는 못하면서도, 그것을 받는 사람들과 같은 官人身分에 속 하는 6品 이하의 양반의 자제일 것이 분명하다. 田柴科 末尾에 규 정되어 있는 閑人田 17結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지급한 토지 였다. 閑人田은 6品 이하 官人의 未嫁女子에게도 지급되었는데 그 액수는 물론 남자에 비하여 훨씬 적었을 것이다. 5品이상 官人의 未嫁女子에 대하여 口分田 8結을 준 것을 감안해서 생각할 때 女 子에 지급된 閑人田은 8結보다는 더 적은 土地였을 것이 분명하 다. 閑人田의 문제에 있어 하나 의문으로 남는 것은 未仕閑居하는 6品 이하의 官人子弟에 대하여 무조건 閑人田이 지급되었는지 혹 은 官職은 아니더라도 國家에 대한 다른 일정한 奉仕라는 조건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지급되었는지 이 점이 분명치 않다. 이 문제 에 관해서는 장래의 연구가 기대되는 바이다. 6) 鄉吏 外役田 文武兩班에 대하여 田柴가 지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 및 지 방의 胥吏들에 대해서도 田柴가 지급되었다. 중앙의 서리들에 대 한 급전은 이미 표시한 田柴科 규정의 세칙에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으므로 이에 관해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鄉吏들에 지급한 토지 즉 外役田은 이에 관계되는 기록이 매우 애 매모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는 좀더 설명이 필요할 - 150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 外役田은 高麗初期의 豪族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도 그에 대한 설명은 좀더 보충되어야 한다. 향리들에 대하여 職田이 지급되었던 사실은, 穆宗 원년 郡縣의 安逸戶長에게 職田之半 을 賜給하도록 조처한 기사와,13) 顯宗 16년 諸州縣의 長吏가 병이 들어 100일이 된 자는 京官의 사례에 의거하여 파직하고 田土를 회수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기록으로14) 알 수 있다. 여기서 安逸戶長이란 나이 70이 되어 퇴역한 戶長을 말하며, 이들에게 職田의 절반을 사여한 것은 散職에 대해서 일정 한 액수를 감하여 토지를 지급한 田柴科의 예와 같은 정신에 입각 하는 것이다. 그리고 高麗王朝는 官吏가 병이 들어 100일이 넘도 록 出仕치 못하는 경우에는 罷職收田 하였던 것인데, 향리도 이 예에 따라서 出仕치 못하는 기간이 100일을 넘으면 그들에게 급 여 한 職田이 회수당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高麗時代의 향리에 대해서 職田 즉 外役田이 지급된 사 실은 충분히 확인되지만, 이 鄕吏外役田에 관한 지급규정은 高麗 史 기타의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그 구체적 내용은 알 수 가 없다. 이에 관해서는 高麗史 卷78 食貨志 田制 公廨田柴의 成 宗 2년 6월의 기사에 보이는 州府郡縣 의 長田 이 바로 外役 田(戶長)이라고 규정한 견해도 있지만15) 이에는 상당한 의문이 없지도 않다. 즉 公廨田柴의 기록에 의하면 長田은 公須田 紙田 등 과 더불어 지방 公廨田의 일환으로 지급되고 있는데 州府郡縣의 경우 丁 의 다과에 따라 그 액수가 5 3結로 제정되어 있다. 이 를 鄕 吏外役田으로 볼 때 그 지급액이 너무나도 적은 것이 잘 납 13)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條 14) 高麗史 卷 75 選擧志 3 銓注 鄕職條 15) 武田幸男 高麗 李朝時代の邑吏田, 朝鮮學報 39 40 合併特輯號 참조 - 151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득되지 않는다. 특히 일반 田柴科에서 流外雜職(胥吏)이 20結 정 도의 土地를 받고 있음에 비교해 보면 의혹의 느낌은 더욱 깊어진 다. 高麗는 그의 초기에 있어 향리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돌리 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新羅末期 이후 高麗 건국 직후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는 전국의 각 지방을 집권적으로 파악할 능력이 없었고 지방 각 처에서는 호족세력이 대두 성장하 여 이들은 중앙정부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분권적인 소왕국을 형성 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들은 새 왕조 高麗가 성립하는 과정 에서 지대한 정치적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高 麗 향리의 전신이었다. 건국 이후에 高麗의 호족들 중에는 적극 신 왕조 건국에 협력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하는 부류도 있었으며 이와 는 반대로 몰락의 과정을 밟은 부류도 있었으나, 본고장에 그대로 남아 처진 부류도 적지 않았다. 지방에 잔류한 호족들은 대체로 뒤 에 향리로 편성되어 국가권력의 말단을 장악함으로써 租稅 貢賦룔 수취하고 軍役 力役을 징발하며 또 간단한 소송을 재결하는 등 지 방통치의 중요한 기능을 행사하였다. 향리는 본래 지방의 호족으로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광대한 토지를 사유하고 있었으리라고 짐작되는데 이 토지가 건국 이후의 국가적 토지제도의 정비 개편에 즈음하여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아마 그의 상당한 부분이 勳田으로 사급되어 종전 의 지배권이 계속 공인되고, 나머지의 부분은 일단 국가에 흡수되 어 비교적 근소한 토지가 職田이라는 명목으로 지급된 것이 아닌 가 생각한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功蔭田柴條 景宗 2년의 기사에 의하면, 向義歸順城主 즉 신왕조의 개국에 협력한 지방호 족들은 개국공신과 더불어 국가로부터 50 20結의 토지를 勳田으 - 152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로서 받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勳田은 그것이 功蔭田柴科에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시피 鄕吏 豪族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서 우대한 優給田이지 그들이 받은 職役의 대가로서 준 職 田은 아니었다. 요컨대 高麗의 향리는 職田 이외에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勳田 (50 20結) 武散階田柴科(35 20結) 등의 형식으로 일정한 토지 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鄉吏로서 勳田 武散階田 柴 등을 받은 자는 그의 범위가 과히 넓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아 마 향리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경제적 토대를 주로 그들이 받은 職 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의 호 족이 향리로 떨어져 그들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밟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거니와 그렇다 하더라도 향리 특히 그 長인 戶長에 대한 給田이 불과 5 3結이었다는 것은 그 액수가 너무나 적은 것 같아 좀처럼 수긍이 가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鄕吏外役田과 公廨 田柴에 보이는 長을 일단 구별해서 취급하기로 하며 鄕吏外役田 의 實態는 앞으로 더 깊은 연구에 의하여 해명될 것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향리의 職田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밝혀 두어야 할 문제는 鄕 職과 外役田의 관계에 관해서이다. 종래 우리는 鄕職을 단순하게 鄉吏의 職 또는 鄉吏의 階로 이해하고, 따라서 文宗 30년의 更定 田柴科內에 보이는 제12과의 佐丞(3 品) 大相(4品), 제13과의 元 甫(4品) 正甫(5品), 제14과의 元尹(6品)과 같은 鄕職에 주목하여 이에 해당하는 田柴의 지급이 바로 鄉吏에 대한 職田의 지급인 것 같이 설명하여 왔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였다. 鄕職은 鄉吏의 職 또는 階와는 하 등의 관계가 없는 별개의 질서체계이며, 따라서 향직에 대한 田柴 - 153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의 지급을 향리에 대한 職田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16) 향직은 高 麗國家의 공적 조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兩班官職 鄕吏職 등 국 가적 관직과 같은 實職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爵과 같이 국가 적 신분질서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고 鄕職의 鄕 이 뜻 하는 것은, 唐樂에 대하는 鄕樂의 用例와 같이, 唐 즉 中國風에 대 하는 鄕으로서 國風 高麗風을 의미한다. 高麗王朝는 국가기구를 정비함에 있어서 중국적 요소를 많이 채용하였고 또 표면적으로는 그것을 완성시켜 나아갔다고 보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같은 경향과는 반대로 따로이 高麗的 특색을 유지 존속시킨 공직 질서체 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鄕職이었다. 鄕職은 高麗王朝를 중심으로 하는 高麗的 질서체계의 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鄕職을 소유할 수 있는 계층은 특정의 소수자에 불과하였다. 즉 향직을 보유한 계층으로서는 鄕吏 無官의 老人 武散階를 가 진 자 軍人 兩班 胥吏와 또 女眞의 齒長 등이 보인다. 향직은 양반계급 과는 일단 별개의 체계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저들과 비등한 국가 적 사회적 대우를 받았다. 전술한 更定田柴科의 향직에 대한 田柴 의 지급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향직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여 그 전부가 柴田의 지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田柴 지급의 혜택을 받은 것은 元尹(6品)이상의 상위에 속하는 향직이었고 佐 尹(6品) 이하의 하위 향직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에 향직의 階層性이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향직을 보유하는 계층에 鄉吏가 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鄕職은 모든 鄉吏가 이것을 가진 것은 아니며 또 鄕吏들만이 가지는 職階도 아니었 다.17) 16) 武田幸男 高麗時代の鄕職, 東洋學報 第47卷 참조 17) 同上 - 154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7) 軍 人 田 군인은 軍役에 복무하는 대가로서 국가로부터 軍人田의 지급을 받았다. 高麗 역대의 田柴科 제정에서 軍人田이 처음으로 설정된 것은 穆宗 원년의 改定田柴科에서였다. 高麗의 군제인 府兵制가 성립되는 것은 대체로 成宗 이후에 속하는 시기이므로 그 이전에 는 府兵制의 재정적 기반으로서 軍人田이 설치될 계제는 아니었 던 것이다. 改定田柴科에 나타난 급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위에서 圖解한 바 있거니와, 군인들은 馬軍이 田 23結, 諸步軍이 田 20結 의 토지를 받아 각각 제17과와 18과의 대우를 받았다. 改定田柴科에서 제정된 이 군인들에 대한 급전 규정은 다음의 文宗 30년의 更定田柴科에 이르러서는 科等이나 또는 수령 액수 에 있어 현저한 대우의 향상을 보이고 있다. 즉 馬軍이 제15과로 田 25結, 役步軍이 제16과로 田 22結, 監門軍이 제17과로 20結을 받고 있다. 아마 이것은 고려가 그간 契丹과의 오랜 전쟁을 겪는 사이에 그만큼 군인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높아진 결과라 생각된 다. 高麗의 병제는 府兵制 에 입각하고 있었으며, 府兵制의 본질 은 兵農一致의 원칙에 있었다. 高麗의 府兵制는 많은 특수성을 가 지고 있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唐의 府兵制와 성격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唐의 府兵制는 均田農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租 庸 調의 면제를 조건으로 府兵을 확보할 수가 있었으나, 高麗의 경우에 있어서는 唐과 같은 均田制度가 시행되 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府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軍人田을 설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田柴科 규정에서 특히 軍人田이 설치 된 역사적 사정은 여기에 있었다. 다만 주로 관료에 대한 급전을 - 155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규정한 一般田柴科에서 농민출신인 軍人 府兵 이 그들과는 출신계급이 다른 兩班 등과 동렬로 취급되어 있다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퍽 후기에 속하는 자료이지만, 恭愍王 5년의 下敎에, 국가가 田 17結로써 1 足丁으로 삼아 군인 一丁에게 주었 으니 이것은 옛날 田賦의 遺法이다 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18) 여기에서는 군인에 지급된 토지는 일률적으로 1足丁 즉 17結로 되어 있어, 이것은 兵種에 따라서 25結 20結을 차등 있게 지급한 상기의 更定田柴科 규정과는 전혀 다르다. 이 두 개의 자료를 조절 하여 어떤 하나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田柴 科의 細則에 나타나는 군인들에 대한 급전규정은 당초에 제도가 마련될 때의 것이며, 恭愍王의 敎書에 나타나는 것은 처음의 규정 이 시대의 경과와 주위의 제반사정으로 인하여 改變을 면치 못하 게 된 결과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文宗 이후 상당한 시기 를 경과한 일정한 시대에 이르러서부터는, 군인은 일률적으로 田 17結의 지급을 받게 된 모양이다. 高麗의 府兵制는 上番軍과 非番軍이 3년마다 교대 근무하는 조 직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軍戶編成은 單一家戶에 의하여 형 성된 것이 아니라 三家가 一戶를 형성하는 일종의 行政戶에 입각 한 것이며, 一軍戶를 형성하는 三家는 각기 軍丁 1명씩을 내어 합 계 3명의 軍丁이 한 軍戶에 배치되었다. 이 중에서 府兵으로서 정 식으로 立役하는 것은 上番侍衛의 正丁 1명뿐이며 나머지 2명은 非番의 休閑兵으로서 농경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軍人 田은 府兵 전체에 대해서 지급된 것이 아니라, 지급의 대상이 되 는 것은 형식상으로는 上番侍衛하는 正丁에 한한 것이며, 실질적 으로는 正丁을 내고 또 正丁으로써 대표되는 軍戶였다. 高麗王朝 18) 高麗史 卷 81 兵志 1 兵制條 - 156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에서 軍人田을 지급받는 兵員數는 대략 42,000명으로 추산되 며19) 이들에게 1足丁 즉 17結씩 지급한 것으로 계산하면 모두 70만여 결이 군인층에만 배당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는데, 실제에 있어 과연 이렇게 막대한 토지가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는지 극히 의심스럽다. 軍人田은, 田柴科에 속하는 토지의 대부분이 收租權에 입각하는 土地支配였으며 收租權者와 耕作者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양자의 분리 관계가 없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軍 人田은 非番의 休閑兵이 주로 토지의 경작을 담당하였다. 이때 토지를 경작하는 休閑兵은 正丁에 대하여 養戶가 된다. 養戶란 朝 鮮時代의 奉足과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주로 養戶의 경작에 의 하여 수확된 軍人田의 소출은, 그 일부는 軍戶를 형성하는 三家의 생계에 충당되고, 그 일부는 養兵之費 즉 국가의 군비에 충당되었 다. 국가에서는 軍人田을 설정하는 이외에 별도로 군사관계의 재 정예산을 편성하는 일이 없었으며, 그 비용은 軍戶 스스로가 부담 하기 마련이었다. 養戶制에 입각하고 있던 軍人田의 경영이 睿宗 3년 이후에 이르러 佃戶에 의한 경영으로 바뀌어지는 것 같이 전하 는 기록이 있다.20) 그러나 이것은 養戶制에 의한 경영이 어떤 중 대한 애로에 빠진 결과 일부지역에 한하여 부득이 仙戶制를 채택 한 것을 의미하는지 혹은 軍人田의 경영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의미하는지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여기에서는 일단 前 者의 경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둔다. 軍戶는 전체 농민들에 의하여 편성되는 것이 아니라 軍班民族이라는 農民의 特殊層만에 의하여 편성되었다.21) 19) 高麗 六衛의 兵力은 42領, 1領은 1000名 20) 高麗史 卷 79 食貨志 2 農桑 睿宗 3年 2月條 - 157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高麗의 군인에 대하여 그들은 職役의 담당자로서 향리와 더불어 高麗社會에 있어 일종의 중간층을 형성하는 신분이었으며 저들이 받는 軍人田은 순수히 收租權에 입각하는 토지였고 또 그들은 토 지를 경작하는 농민신분이 아니라 양반에 준하는 收租權者의 위 치에 있는 신분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22) 위에서 열거한 兩班科田 功蔭田 閑人田 口分田 胥史田 鄕 吏外役 田 軍人田 武散階田 別賜田 등은 다 私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8) 宫 院 田 宮 院은 왕족, 주로 妃嬪이 사는 住居를 의미한 듯하며 宮은 院 보다 더 格이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宮 院에는 그것을 관리하 는 직원이 있고 또 田庄 魚梁 舟揖 鹽盆 奴婢 등의 재산 이 부속되 어 있었다. 이 宮 院에 소속된 토지를 宮院田이라 하였으며 이것은 妃嬪을 비롯한 왕족들이 지배하는 토지였다. 高麗 田柴科의 규정 에 의하면 왕족들에 대해서는 兩班의 경우와 같이 田柴를 지급한 細則은 보이지 않고 다만 食貨志 田制 序文에 宮院에 대해서 公廨 田을 주었다는 말이 있을 뿐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宮 院에 公廨田이 지급되었다면 宮院田은 아마 宮院公廨田 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과연 宮 院에 公廨田이 지급되었는지 어떤 지 여기에는 상당히 큰 의문이 있다. 宮院田은 後述하는 바와 같이 高麗史에서는 분명히 私田으로 취급되어 있는데 宮院田을 宮院公廨田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 를 취하면 公廨田 역시 私田에 속한다는 결론이 나와 여기에 큰 문제가 있다. 公廨田이 公田이냐 私田이냐의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을 보지 못하고는 있으나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公 21) 高麗 軍人田에 대해서는 姜晋哲 高麗初期의 軍人田, 淑大論文集 第3輯 참조 22) 李基白 高麗軍役考, 高麗兵制史硏究 所收 一潮閣 (1968) 참조 - 158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田을 公田, 二科公田에 比定하는 해석이 가장 합리적인 듯하다.23) 이 見解에 따르면 아마 宮院田은 公廨田과는 그 성격이 다른 토지 인 듯하며 따라서 宮 院에 公廨田이 지급된 양으로 高麗史에 기록 되어 있는 것은 高麗史 撰者의 어떤 오해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라 고도 해석할 수 있다.24)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가 크 게 기대된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宮 院에는 많은 土地 奴婢 등의 재산이 부속 되어 있었다. 顯宗은 宮人 金氏(延慶院 德宗 生母)에게 金銀 匹段 田庄 奴婢 鹽盆 魚梁 등을 賜給한 일이 있고25) 또 文宗 때에는 왕 이 景昌院 소속의 田柴를 興王寺에 移屬케 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예가 있다.26) 국왕 혹은 국가가 宮 院에 대하여 土地 奴婢 등의 재 산을 賜給한 것은 왕족들에 대한 융숭한 禮遇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재산은 子孫萬世에 遺傳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점 宮院田 은 양반들에게 내린 賜田 및 兩班功蔭田과 그 성격이 비슷하며, 왕족들의 중요한 재정기반이었다. 여기서 나는 宮院田을 왕족들의 토지로 간주하고 왕실소속의 御料地와는 일단 구별해서 생각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異說도 있 다. 宮 院은 왕을 비롯한 왕족의 宮殿이며 여기에 부속된 토지 즉 宮院田 안에는 王領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 에 의하면 宮院田은 일종의 왕의 私領地이며 왕의 公領地인 王室 御料地와는 별개의 것이라 한다. 이러한 해석도 있다는 것을 아울 러 소개해 둔다.27) 단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高麗 史나 高麗圖經에 나오는 用例에 비추어 보면 宮 院은 주로 왕족들 旗田巍 高麗の公田,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同上 旗田氏의 견해에 따름 高願史 卷 4 顯宗世家 7年 5月條 高麗史 卷 8 文宗世家 12年 7月條 27) 前揭 旗田氏 論文 註 5 23) 24) 25) 26) - 159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의 住居를 의미하며28) 왕족재산과 宮院田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는 것을 거듭 말하여 둔다. 宮 院도 寺院과 더불어 庄 處를 소유하고 있었다. 宮院 寺院 소속 의 庄 處와 王室의 公領 御料地로서의 庄 處가 그 성격에 있어 같은 것인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인지 이 점은 아직 잘 알 수가 없다.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된다. 9) 寺 院 田 佛敎寺院들에 소속되는 田莊 기타의 토지를 寺田 혹은 寺院田 이라고 한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수입된 이래 크게 융성하였음은 주지되고 있는 바이거니와, 高麗王朝에 있어서는 특히 불교를 숭 상하여 건국 당초부터 사원은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아 왔다. 이 결과 사원은 국가의 보호와 국민의 신앙을 바탕으로 거대한 세 속적 財富를 지배하여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太祖 이후 高麗의 역대왕들은 막대한 토지를 사원에 기진하였는 데, 그 가장 현저 한 예로서는 成宗이 長安寺에 田地 1050結을 喜 捨하고 顯宗 11년 8월에 王이 安西道의 屯田 120結을 玄化寺에 施納한 것을 들 수 있다.29) 寺院田은 국가로부터의 기진뿐 아니 라 계급의 상하를 막론한 신도들로부터의 막대한 시납이 있었으 므로 날로 비대해 갔다. 사원뿐 아니라 승려들에 대한 토지의 사급이 또한 많았을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僧職에 대해서 別賜田이 지급되었음은 이 28) 高麗史 卷 77 百官志 2 內職條 高麗圖經 第5 6卷 宮殿條 29) 至若舊有之田 依國法以結計之 千有五十其在咸悅 仁義縣者各二百 扶寧 幸 州 白州各百五十 平州 安山各一百 即成王所捨也(新增東國輿地勝覽新 卷 47 淮 陽 佛 宇長安寺) 以安西道屯田一千二百四十結 施納于玄化寺(高麗史 卷4 顯宗世家 11年 8月條) - 160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미 文宗 30년의 更定田柴科의 규정에서 본 바와 같다. 사원의 토지는 절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할 경우도 있고 또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도 있었는데 대체로 그 경영은 仙戶를 부려 경작 하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원의 토지가 절 근처 에 위치하고 있을 경우 승려의 노동 혹은 사원노예의 사역에 의하 여 경작하는 일도 물론 있었으나, 隨院僧徒라는,30) 일종의 승려이 기는 하나 修道의 승려가 아니라 사원토지에 예속된 농민들에 의 하여 경작되는 것이 보통이었던 모양이다. 寺院田은 특히 免稅 免役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것이 또한 寺院田 확대의 큰 원인이 되었다. 사원경제의 비대 확장은 국가의 재정수입을 감소케 하는 큰 요인이 되었으며 또 불교의 세 속적 타락을 초래하였다. 高麗末에 이르러 불교배척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은 이러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이었다. 寺院 田은 宮院田과 더불어 私田의 대표적인 한 유형이었다. 寺院의 莊 處 지배에 관해서는 위에서 언급하였다. 10) 投化田 기타 私人 소속의 토지 고려에서는 宮院田 寺院田 兩班科田 功蔭田 閑人田 口分田 胥吏田 鄕 吏外役田 軍人田 武散階田 別賜田 등등의 명목으로 나오는 土地(私 田) 이외에, 그 양은 많지 않으나 몇몇 유형의 私人에 소속된 토 지가 또 있었다. 投化田 入鎭 加給 補給田 登科田 賜田 등이 그것이 다, 投化田은 외국인이 본국에 내투 귀화하였을 때 그들에게 지급한 땅이며, 入鎭 加給 補給田은 邊鎭에 入戍한 군인에 대해서 그의 노 30) 肅宗九年十二月 又選僧徒 爲降魔軍 國初 內外寺院 皆有隨院僧徒 常執 勞役 如郡縣之居民 有恒産者 多至千百 每國家興師 亦發內外諸寺隨院僧徒 分屬 諸軍(高麗史 卷 81 兵志 1 兵制條) - 161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고에 보답하는 의미로 일정한 토지를 가급 보급하는 토지였다. 登科田은 科擧에 합격한 登科者에 대해서 지급된 토지였다. 등 과자는 비록 관료는 아니지만 앞으로 관료가 될 후보자이기 때문 에 국가는 그들에게 특별한 우대를 가한 것이다. 文宗 30년의 제 정에 의하면 製述 明經 明法 明書 算業 출신자에게는 그해에 製述 甲科에는 20結, 기타에는 17結을 지급하고, 何論業 출신자에게는 그 익년에 급전하고, 기타 手品雜事 출신자는 합격 4년 후에 급전 하였으며 이외에 醫 卜 地理業 출신자에게도 明法 明書 算業의 구례 에 준하여 土地를 지급하는 새로운 제도를 세웠다. 또 어떤 州縣 에서 20 내지 50년 만에 나온 製述 明經科의 급제자에 겐 田 17 結을 지급하고, 100년 만에 나온 급제자에게는 20結을 지급하였 다.31) 이 이외에 국왕이 특별히 사급하는 賜田이 있었다. 국초 賜田의 예는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그 이후 高麗 역대의 국왕들은 兩班 田柴 功蔭田柴 등 일정한 명목을 붙인 토지 이외에 임시 임의로 특별히 賜田을 내리는 예가 많았다. 이러한 토지들도 다 私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11) 王室御料地 高麗時代에는 왕실이 지배하는 광대한 御料地가 있었는데, 이 토지는 內庄 庄宅田 內庄宅田 庄 處 등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庄宅 혹은 內庄宅은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이며 왕실의 御 料地 31) 文宗三十年十二月 判 凡州縣闕榜至三十年 或四五十年 登製述 明經科者 給田 十七結 百年後登者 給田二十結 奴婢各一口 是月判, 國制製述 明經 明法 明書 算 業出身 初年給田 甲科二十結 其餘十七結 何論業出身 義理通曉者 第二年給田 其他手品雜事出身者 亦於四年後給田 唯醫 卜 地理業未有定法 亦依明法 書 算 例 給田(高麗史 卷 74 選擧志 2 科 崇獎條) - 162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는 이 기관에 부속되어 있었다. 王室은 국초부터 광대한 넓은 토지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왕실의 지배토지는 高麗 一代를 통하여 전국의 토지중에서 가장 큰 비중 을 차지하는 것의 하나였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실 의 토지인 內庄 이 太祖의 즉위 당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 은 매우 주목된다. 高麗末期에는 料物庫소속의 庄 處가 적어도 360개 이상이나 전국 각처에 산재하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이것은 內庄宅의 관리하에 있었다.32) 主은 후기에 나타나는 處와 아울러 이른바 庄 處를 형성하였다. 庄 處는 주로 왕실에 부속된 특수한 형태의 莊園이며 단순히 일정한 면적의 토지의 集成이 아니라 郡 縣制度의 일환으로 특수한 地方行政區域의 한 단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왕실의 토지는 이러한 특수형태의 莊園뿐 아니라 一定 量의 토지면적으로 형성되어 宮中의 奴婢가 경작하는 경우도 있 었으며, 또 주변 농민의 徭役으로 경작되는 것도 있었다.33) 內庄 등 왕실의 御料地는 王室財政의 기반이었다. 莊 處에 대한 왕실의 수탈은 단지 租뿐만 아니라 庸 調, 즉 徭役과 貢賦도 포함되어 있 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밖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宮院田 도 왕의 私領으로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설령 그렇다 하 더라도 이것은 왕의 公領인 內皮宅 소속의 土地 庄 處 등에 비하 면 훨씬 그 비중이 약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高麗史 食貨志 1 田制 序文에 의하면 內庄宅에도 公廨田이 지급 된 양으로 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內庄宅 소속의 王室 御料地는 일종의 公廨田으로 이해하여야 하겠는데 王室御料地를 公 廨田과 같은 범주로 취급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은 아마 高麗史 撰 32) 周藤吉之 高麗より朝鮮初期に至る王室財政 東方學 東京 10册 33) 姜晋哲 高麗前期의 公田 私田과 그 差率收租에 대하여, 歷史學報 29輯 - 163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者의 오해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본래 公廨田은 中央 地方의 官司에만 지급되어 內庄宅에는 지급된 예가 없는 듯 하며 따라서 王室御料地는 公廨田과는 그 성격이 다른 地目인 것 같이 이해된다.34) 公廨田이 이른바 二科公田으로 比定되는 것인 듯함에 대하여 王室御料地는 이와는 범주가 다른 公田으로 比定되 며 그 대표적인 庄 處의 계보는 新羅의 祿邑에 연결되는 것으로 믿 어진다. 王室御料地와 公廨田의 관계는 아직 확실한 것 을 알 수 없으며 앞으로의 연구가 크게 기대된다. 12) 公廨田柴 公廨라는 말은 관청과 같은 국가의 公的인 기관을 말하는 것이 며 公廨田柴는 국가의 각 公廨에 지급된 田土와 柴地를 의미한다. 公廨田柴를 설정한 목적은 각 公廨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 한 것이었다. 公廨田柴는 庄宅 宮院 百司 州縣 館驛에 각각 차등 있게 지급되었 다 한다.35) 그러나 실제로 公廨田이 지급된 것은 이미 宮院田 王室御料地 등의 항목에서 본 바와 같이 百司 州縣 館 驛 등에 제 한되었으며 庄宅 宮院에 대해서는 이것이 지급된 예가 없었던 것으 로 본다. 公廨田 중에서 그 설치 연대와 내용이 가장 상세한 것은 州縣 館驛公廨田뿐이며 百司에 관해서는 그 내용을 알만한 구체적 사료가 거의 없다. 순서가 뒤바뀌는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여기에 서는 그 실태를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地方(州縣 館驛) 公廨田柴부 터 먼저 설명하겠다. 地方公廨田柴가 처음으로 성립한 것은 成宗 2 년(983)의 일이며 그 지급규정은 다음과 같다.36) 34) 旗田 巍 高麗の公田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35)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序文 36)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公廨田柴條 - 164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州縣 公廨田 州縣等級 公 須 田(結) 紙 田(結) 長 田(結) 1000丁 以上 300 (15) (5) 500丁 以上 150 15 5 200丁 以上 缺 缺 缺 100丁 以上 70 10 (4) 100丁 以下 60 (7) 4 60丁 以上 40 (7) (3) 30丁 以上 20 (7) (3) 20(30?) 丁 以下 10 7 3 公 須 田(結) 紙 田(結) 長 田(結) 1000丁 以上 20 (3) (2) 100丁 以上 15 (3) (2) 50丁 以上 10 3 2 鄉 部曲 公廨田 鄕 部曲等級 館 驛 公廨田 館 驛等級 公 須 田(結) 紙 田(結) 長 田(結) 大路驛 60 5 2 中路驛 40 2 2 少路驛 20 2 (2) 大路館 5 中路館 4 少路館 3 여기서 말하는 丁은 國役을 부담하는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 165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壯丁을 말한다. 20(30?)丁 이하의 州縣이 있었다는 것은 잘 이해 가 되지 않으나 아마 실제로 그런 州縣(縣)이 있었던 모양이다. 公須田은 賓客의 支待를 포함한 지방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한 토 지이며 또 外方官吏의 祿俸도 그 절반이 公須田의 수입에서 지출 되었다.(절반은 左倉에서 지출함) 紙田은 사무용 紙類를 공급하기 위한 재원으로서 설정된 것이다. 長田은 驛의 경우 驛長에 대한 보수로 지급되었으며 館의 경우도 같았을 것이다. 州 縣 鄕 部曲의 경우 長田이 어떻게 쓰여진 토지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종래 이것 은 州縣의 吏屬 따위에 주어진 땅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였으나 그래서는 長 의 뜻이 잘 풀리지 않는다. 이 長 을 戶長으로 보고 州縣의 長田을 戶長田 즉 鄕吏田(邑吏田)으로 해석하려는 견해도 있는데37) 戶長田으로서는 그 액수가 너무 적어 보이는 데 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成宗 12년(993)에는 公須柴地가 分給되 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8) 州 縣 柴地 驛 柴 地 驛區 州縣等級 結 東西道 西界 東西南北 1000丁 以上 80 大 路 驛 50結 40結 500丁 以上 60 中 路 驛 30結 20結 500丁 以下 40 小 路 驛 15結 100丁 以下 20 驛等 中央(百司)公廨田에 관해서는 참고할 史料가 없어 그 내용을 밝히기 어렵다. 中央의 각 官司는 官司의 格, 소속人員의 多少, 職 務의 성격 등에 따라 각기 응분의 公廨田을 받았을 것이며 각종의 운영경비는 물론이요 官吏의 午料 및 소속 下人들에 대한 보수같 37) 武田幸男 高麗 李朝の邑吏田 朝鮮學報 39 40 合併號 38) 註 36) 公廨田柴條 - 166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은 것도 그 수입에서 충당되었다. 公廨田은 후술하는 이른바 二科 公田에 해당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國用 즉 官司의 운영경비를 주로 하여 祭祀 賓客 등의 경비는 아마 원칙적으로 이 公廨田의 수입으로 支辨되었으며 公廨田 이 외에 다른 큰 재원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관해서는 뒤 에 다시 언급하겠다. 13) 學田 籍田 屯田 學田은 학생을 양성하는 學校에 지급되어 그들의 교육비에 충 당된 토지였다. 學田은 완전한 公廨田은 아니지만 그와 극히 성격 이 비슷한 것이었다. 新羅時代에 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재정적 기초로서 學生祿邑이 있었거니와, 高麗도 儒敎를 지배통치의 이념으로 삼았던만큼 주 로 양반들의 자제를 유교이념으로 교양시키고 유교이념으로 무장 된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서 학교기관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학교 의 운영재원이 된 것이 學田이었다. 學田이 어느때 창설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成宗代에 내려와 서 學校에 田庄을 지급한 예가 보이며,39) 睿宗代에 이르러서는 國 學에 養賢庫를 설립하였다.40) 養賢庫를 설치함에 있어 그의 재정 기반으로 많은 토지가 國學에 지급되었을 것은 다시 말할 필 요가 없다. 學田 이외의 公的 財源의 토지로서 籍田과 屯田이 있었다. 籍田 은 국왕이 이른바 親耕을 실행하고 그의 수확으로 神農 后稷을 제 사하기 위한 토지인데 高麗에서는 成宗代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39) 高麗史 卷 3 成宗世家 8年 夏4月條 40) 高麗史 卷 74 選擧志 2 學校 睿宗 14年 7月條 - 167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親耕은 국왕이 농업생산에 솔선수범한다는 重農思想의 한 표현이 었다. 籍田은 왕이 親耕하는 토지로 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였으며, 실제 그 경작을 담당하는 것은 籍田 에 붙어 있는 官奴婢였다. 그리고 屯田은 주로 邊境지대에 설치되어 鎭戍피과 移植농민들 이 경작하여 그 수확을 주로 군량에 충당하는 토지였다. 屯田은 국가에 직속된 토지의 한 유형인데, 그 경작이 군인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다. 이밖에 州縣에 설치된 屯田 도 있었으니 이것은 州縣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이러한 官屯田의 耕作은 주로 官奴婢가 맡은 것으로 생각된다.41) 學田 籍田 屯田은 다 公田으로 보아 둔다. 14) 民 田 田柴科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로 국가의 관직에 종사하 는 官僚와 職役을 부담하는 丁戶를 대상으로 지급된 것이며 그들 의 경제적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단 순수히 收祖權에 입각하는 官僚田柴科와 대표적인 丁戶인 軍人에 지급된 軍人田은 그 성격에 있어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田柴科 土地支配體制에 있어서는 종래 주로 田柴科制度에서 규정된 分給收租地만 주목되어 왔으나 高麗前期 사회에서는 이 밖에 또 매우 중요한 토지지배의 유형이 있었다. 관직에 있는 관료도 아니고 職役을 부담한 丁戶도 아닌 광범한 농 민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이들의 토지지배관계가 비 교적 등한시되어 왔다. 高麗史에 흔히 보이는 白丁은 바로 이러한 농민계층이며 이들은 국가로부터 토지의 지급을 받지는 아니하였 41) 姜晋哲 韓國土地制度史 上 韓麴文化史大系 Ⅱ p.1295-168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으나 조상 대대로 전래한 그들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토지가 바로 民田이었다. 이 民田은 官僚나 丁戶의 田柴科 와는 구별되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土地다.42) 民田은 高麗의 전 기간을 통하여 국가의 전 지역에 걸쳐 널리 존재하였다. 白丁農民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民田이 존재하였 다. 東西兩界에서는 다른 지역과 다른 토지정책이 시행되어 모든 토지를 국가의 직접적 지배하에 두고 私人에 대한 分給收租地는 설정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에도 民田이라고 불리어진 土地는 있 었다. 이것은 民田이 이른바 私田 과는 구별되는 매우 큰 특징 이었다. 民田은 高麗前期에 있어서는 그 존재가 뚜렷하였으나 중 기 이후 권력자의 大土地兼併이 진행되자 그들에 점거되어 침탈을 당하고 白丁農民의 토지라는 본래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民田의 소유자는 주로 광범한 白丁農民의 계층이었다. 그러나 祖上 전래의 토지는 白丁農民뿐 아니라 관료계층도 이를 가지고 있 었으니 民田의 소유자를 白丁農民에만 한정하여야 할 이유는 없다. 양반관료들은 分給收租地 이외에 祖上 전래의 家田도 갖고 있었는 데 아마 이것도 民田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 民田 家田은 국가에 대하여 税役을 부담하였다. 예를 들면 姜邯贊은 開寧縣에 땅 12結을 갖고 있다가 이를 軍戶에 寄進한 일이 있었다.43) 이것 은 그가 가진 民田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鄕吏가 갖고 있던 所 耕田 도 이 民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44) 民田은 문자 그대로 42) 民田에 관해서는 旗田 巍 高麗の民田について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有井智 德 高麗朝に於ける民田の所有關係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8 참조 43) 高麗史 卷 94 姜邯贊列博 44) 鄕吏는 그들의 外役田 이외에 所耕田을 따로 갖고 있었다. 外方人吏等 以所 耕田賂諸權勢 干請別常 謀避其役者有之 (高麗史 卷 85 刑法志 2 禁令 忠烈王 11年 3月 下旨) - 169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국민의 각 계층에 의하여 광범하게 소유되었으며 국가에 대한 일반 적 稅役을 부담하는 土地라고 생각한다. 稅役의 내용은 租 庸 調였 다. 富民은 自家經營의 범위를 넘는 비교적 넓은 民田을 지배하여 여기에서는 小作制經營이 성립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이러한 경영 이 民田經營의 전체에 있어 점하는 비중은 그렇게 대단 한 의미를 가졌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民田은 私田과는 다른 토지였다. 그러면 民田은 公田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같이 이해되어 왔다. 종래 民田을 公田으로 보 는 것은 다들 주저해 왔다. 그래서 民田을 公田도 아니고 私田도 아닌 특수한 토지의 범주로 생각하는 견해도 나왔다.45) 그 이유는 高麗史에서 民田을 公田과 대립시켜 이와는 대조적인 토지의 종목 인 것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民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된 결과 지금은 民田이 公田에 속한다는 견해가 거의 定說로 되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公田은 一科公田, 二科公田, 三科 公田으로 구별되어 있는데 民田은 三科公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광범한 國民層 특히 白丁農民이 民田의 소유자로서 주목되는데, 이들의 民田에 대한 소유의 내용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民田所有 權의 내용은 매매의 권리를 비롯해서 耕作 貸與 贈與 相續 등 광범 한 제권리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상속에 있어 서는 文契가 없는 한 嫡長爲先決結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규정이 토지의 嫡長子單獨相續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嫡長子에 게 유리한 優先權을 주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우며 이 문제는 앞으로의 더 깊은 연구가 요청되는 바이다.46) 45) 姜晋哲 高麗前期의 公田 私田과 그의 差率收租에 대하여 歷史學報 29輯 46) 이 문제에 관해서는 旗田 巍 高麗時代における土地の嫡長子相續と奴婢の子 女均分相續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有井智德 高麗朝における民田の所有關係に つい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 8 참조 - 170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전국 토지의 총면적에서 民田이 차지한 비율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굉장히 큰 것이었을 것만은 사실이다. 民田의 租는 주로 開 京의 大倉 右倉에 수송되어 國用에 충당되기도 하고 左倉에 수송 되어 祿俸에 충당되기도 하였다. 文宗 당시 일반 관리의 녹봉을 취 급하는 左倉의 歲入은 139,736石 13斗였으며 西京 官祿을 취급하 는 西京 大倉의 歲入은 17,722石 13斗로 기록되어 있으니 도합 약 16萬石이 관리의 녹봉으로 지출된 셈이다.47) 이 밖에 東界 西界의 兩界의 民田租는 현지에서 軍需에 충당되었다. 民田은 公田의 四分 取一의 租率에 입각하여 收穫高 25%의 租를 국고에 부담하였다. 民田은 國庫收租地라는 개념으로도 이해되고 있다. 民田의 수량은 左倉에 納租하여 祿俸의 財源이 되는 것만으로도 줄잡아서 대략 10 萬結 정도로 짐작되며 이에 大倉과 右倉 등에 納租하는 것을 가산 하면 막대한 수량에 이르러 전국의 총 토지면적에 있어 다른 地目 에 비하여 압도적인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믿어진다.48) 15) 食邑制度의 發展 食邑은 위에서 말한 여러 유형의 土地支配 관계와는 크게 그 성 격이 다른 특수한 土地支配의 유형이었다. 高麗初에 왕실의 재정 기초로서 東宮食邑이 있었다는 것과, 또 新羅의 왕인 金傅에게 慶州를, 그리고 後百濟 왕인 甄萱에게 楊州 47) 高麗史 卷 80 食貨志 3 祿俸 序文 48) 民田 1結의 出租額을 평균 2石 정도로 잡으면(실제는 그 이하일 것이다) 民田 의 총액은 약 8萬結로 계산되며 이에 兩界의 民田을 합치면 대략 10萬結 정도가 되리라는 推算을 내릴 수 있다. 전국의 토지는 대개 가 下等田이었으므로 民田의 出租額을 下等田 出租額 1石 11斗 정도를 기준으로 삼고 여기에 災免 기타의 減免規定을 고려 감안해서 국가가 매년 結當 1石 정도의 租税收取를 하였으리라 는 하나의 가정을 세울 수 있다면 民田의 총액은 16萬結 정도로 推算된다. 여기에 兩界의 民田을 합치고 제반사정에 대한 계산을 아주 넉넉히 잡으면 民田의 총액 을 약 20萬結 정도로도 추산할 근거가 서게 된다. - 171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를 食邑으로 給封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이 食邑 制度는 그 이후에도 계속 발전하였다. 食邑給與의 대상자들은 王子, 王室의 戚臣, 공로가 많은 高級官 僚들이었다. 食邑은 公 侯 伯 子 男의 5등으로 구분되는 爵位를 표 준으로 하여 수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爵位와 食邑지급에 관한 文 宗代의 규정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爵 位 國 公 郡 公 縣 侯 縣 伯 開國子 縣 男 食邑 3,000戶 2,000戶 1,000戶 700戶 500戶 300戶 品階 正 2品 從 2品 正 5品 正 5品 正 5品 從 5 品 49) 이 爵位는 형식상 국가에 특별 한 공훈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수 여하였는데 여기서 爵位에 붙어 있는 品階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爵位는 忠烈王 이후에는 전혀 폐지되었 다가 恭愍王代에 일시 부활되었는데 그 후 얼마 안가서 다시 폐지 되었다. 그런데 恭愍王代에 부활된 爵位制度에 의하면 公 侯 伯 子 男 並正一品 50)으로 되어 있어, 爵位에 붙은 品階의 성질이 더 不可思議하게 되어 있다. 하여튼 이 爵位에 붙은 품계는 일반품계 의 뜻과는 다른 모양이다. 위의 규정에 보이는 爵位에 따르는 食邑의 給俸은 아마 대개가 실속이 없는 虛禮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食邑을 封할 경 우에는 우선 食邑 몇 戶라고 기재를 하고, 이에 부수하여 食實 封 몇 戶라는 것이 대개의 경우에는 병기되어 있는데,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食實封 몇 戶에 대한 것 뿐이며, 이에 한해서 해당 戶數의 租税와 貢賦 力役 등을 취득할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食實封 조차 과연 어느 정도로 실질적 내 49) 高麗史 卷 77 百官志2 廨條 50) 同上 - 172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용을 가진 것인지 의문이 없지 않으나,51) 여기서는 일단 실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둔다. 高麗時代에 가장 많은 食邑을 받은 것은 王子를 비롯한 王族들 이었다. 王子들은 親等 地位 年齡에 따라서 거의 자동적으로 公 侯 伯 의 爵位를 받고 이에 따르는 食邑이 給封되었다. 이들 王族에 대한 食邑 給封의 예는 高麗史 宗室列傳에 거의 빠짐없이 나타나 있으므 로 일일이 예시치 않는다. 王의 戚臣에 대한 食邑 給封의 예로서는 반드시 戚臣이라는 의미만으로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 대 표적인 것을 仁宗의 丈人 李資謙의 경우에 구할 수 있다. 즉 그는 食邑八千戶 에 食實封二千戶 를 받고 있는데52) 이것은 高麗 일대를 통하여 가장 방대한 食實封의 예가 될 것이다. 이 외에 일반 高級官僚가 食邑을 받은 예는 金富.試이 食邑一千戶 에 食 實封 四百戶 를 받은 것을 비롯하여53) 高麗史의 기록에 보이는 것만 해 도 40명 내외에 달한다. 위의 事例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食邑은 일정한 戶數로써 封하 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食邑으로 給封되는 것은 이러한 형태 이 외에 州나 府 같은 행정구역 전체가 食邑으로 賜給되는 예가 있었 다. 晋州(晋陽)가 崔怡의 食邑이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 다.54) 이러한 형태의 食邑은 그의 성격이 戶를 分給하는 食邑과 는 상당히 달랐다. 戶를 分給하는 食邑은 일정한 개별적인 戶의 합쳐진 것을 수취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崔怡의 경우와 같은 식읍은 일정한 행정구역을 한 단위로 해서 그것을 집단적으로 지 51) 河炫網 高鹿食邑考 歷史學報 26輯 참조 52) 高麗史 卷 127 李資謙列傳 53) 高鹿史 卷 98 金富軾列傅 54) 左倉納晉陽稅 王以晉陽已爲怡食邑 命黜倉別監王仲宣 有司又請論仲宣及倉 官 怡奏曰 臣重違上命 雖已受封 今年稅 請依舊納倉 赦仲宣等罪 王從之(高麗史 卷 129 崔怡列傳) - 173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食邑은 그 성격이 內庄과 비슷한 것이었 으나, 그 규모는 더 큰 것이었다. 田柴科的인 토지의 지배는 대개 그것이 단순한 收租를 매개로 하는 것이었는데, 食邑은 단순한 收 租만이 아니라 그의 수탈이 貢賦 力役까지도 포함한 것으로 이해 되며, 여기에 食邑에 의한 토지지배의 특징이 있었다. (3) 田柴科體制下의 土地支配關係에 수반된 諸問題 위에서 田柴科體制下의 土地支配관계가 어떤 것인지 주로 각 土 地地目의 구체적 성격을 해설하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田柴科體 制下의 토지지배관계는 이밖에 해명해 두어야 할 많은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많은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田柴科體 制下에서 말하는 公田 私田이 무엇이며 이에 대한 差率收租는 무 엇을 의미하느냐는 문제다. 종전에는 公田租 私田租를 다 같이 일 종의 地代라고 보아 왔으나 여기에는 큰 의문이 있다. 다음 土地와 國家財政關係도 간단히나마 한번은 정리해 두어야 할 문제다. 또 田柴科體制下의 農民의 토지지배가 均田制度에 기초를 두는 것인 지 그렇지가 않은 것인지 이에 대해서도 약간의 언급이 없을 수 없다. 田柴科體制下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제문제를 대강 이 정도로 줄여 간단한 해설을 붙여 둔다. 1) 公田 私田과 그 差率收租의 문제 高麗時代에는 公田 私田이라는 토지의 종목이 있었다. 이에 관 해서는 과거에 많은 學者들이 주목하여 논급한 바가 있었는데 대 체로 公田과 私田을 구분하는 기준은 收租權의 歸屬關係에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公田은 그 租가 국가에 귀속하는 토지이며 私 - 174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田은 그 祖가 私人에 귀속하는 토지라고 이해되어 왔다. 이 견해 는 어느 정도의 타당성도 있지 마는 公田과 私田은 단순한 收租權 의 귀속관계만으로서는 풀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으 므로 여기에 어려운 큰 문제가 남아 있다. 顯宗 14년 윤 9월에 내린 判에 의하면, 무릇 州縣 義倉의 法은 都田丁(土地豪帳)에 기재된 土地의 수 량을 기초로 해서 收敛하되 一科公田에서는 1結에 租 3斗, 二科 公田과 宮 寺院 兩班田에서는 租 2斗, 三科公田과 軍 其人戶丁에서 는 租 1斗를 거두는 것이 이미 成規로 되어 있다. 만약 흉년을 만 나 백성이 阻飢하면 이것으로써 救急하고 가을에 還納하며 濫費 해서는 아니 된다 고 하였다. 이것은 公田과 私田의 성격을 구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史 料이므로 이 사료의 분석을 통하여 公田 私田의 문제를 살펴보기 로 하겠다. 이에 의하면 公田은 一科公田 二科公田 三科公田 으로 구분되어 있고 公田과 구별되는 私田으로서는 宮院田 寺院 田 兩班 田과 軍戶丁 其人戶丁 등을 열거하고 있다. 우선 公田의 문제인데 公田을 구분한 기준은 토지의 귀속 혹은 토지지배자의 차이에 있 었으며 이 차이에 따라서 토지의 格이 다르고 또 義倉租를 내는 額이 달랐다. 公田의 성격에 있어 주목되는 것은 王이 그것을 임의 자유로 처 분할 수 있는 토지였다는 것이다. 軍人田의 名田이 부족할 경우에 왕은 公田을 떼어 加給한 일이 있으며 왕이 寺院에 토지를 寄進할 경우에도 公田으로써 賜給하였고 또 宮院田이 어떤 이유로 減額되 었을 경우 왕은 역시 公田을 移給하여 보충하였다.55) 이러한 사례 55) 姜晋哲 高麗前期의 公田 私田과 그의 差率收租에 대하여 歷史學報 29輯 - 175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들은 公田이 왕의 임의로 자유롭게 처분될 수 있는 토지였다는 것 을 말하여 준다. 이러한 公田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이에 가장 알 맞는 토지의 종목을 구하여 보면 우선 王室 소속의 광대한 御料地 가 머리에 떠오른다. 이리하여 왕실의 御料地가 公田일 것은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왕실의 御料地는 一科, 二科, 三科 의 公田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 것이었을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一科公田은 다른 토지와는 대비가 되지 않는 독자의 토지였다. 이 독자성이야말로 一科公田의 특색이었다. 이러한 一科公田의 특색 에 비추어 그것은 王室에 부속되어 다른 것과는 대비가 허용되지 않는 토지 즉 왕실의 御料地이며 구체적으로는 內庄宅에 소속하는 토지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二科公田은 宮院田 寺院田 兩班田과 대비되는 토지였다. 宮 院 寺院 兩班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의 지배층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二科公田은 지배층과 무슨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배층에 지급된 토지는 私田이며 公田은 아니다. 二科公田이 지 배권력과 무슨 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성 격을 추리해 보면 이 二科公田은 국가의 지배기관 즉 중앙 지방 의 관청 에 부속된 公廨田 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마 屯田도 군사적인 기 관의 부속지 였다는 의미에서 二科公田에 해당하는 것같이 이해된 다. 二科公田을 公廨田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는 매우 합리적이며 二科公田 즉 公廨田으로 규정할 수만 있다면 二科公田의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56)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시피 公廨田이 公田이냐 私田이냐의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된 56) 旗田 巍氏는 公廨田을 二科公田으로 보았다. 同氏 高麗の公田, 朝鮮中世社會 史の硏究 - 176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것은 아니며 公廨田을 私田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57) 이러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自認 하면서도 여기에서는 公廨田을 일단 二科公田에 比定해 둔다. 이 公廨田은 官司公廨田에 국한해서 생각한 것이다. 三科公田은 軍 其人戶丁 즉 軍人田과 其人田에 대비되는 토지 였다. 군인은 군역이라는 職役을 부담하는 광범한 농민층이었다. 따라서 三科公田은 농민층과 깊은 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이 추측된 다. 군인은 군역을 부담하였기 때문에 그 보수로서 軍人田(私田) 의 지급을 받았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전부가 職役을 부담한 것 이 아니고 직역의 부담이 없는 白丁이라는 농민층에 광범히 존재 하고 있었다. 이들이 토지를 소유하여 국가에 租 庸 調를 부담하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를 民田이라고 불렀음은 이미 언급해 둔 바와 같다. 농민층과 관련이 깊은 三科公田은 바로 이들 白丁이 소유한 民田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一科公田 二科公田 三科公田의 윤 곽은 밝혀졌다. 公田에 대비된 私田의 종목에 관해서 는 이미 설 명한 바가 있으므로 거듭 말하기를 피하거니와 私田은 私人이나 寺院에 지급된 토지다. 其人戶丁은 上守의 직역을 부담하는 其人 에 지급된 토지며 이것은 鄕吏外役田과 그 성격이 비슷한 것이나 상세한 내용은 관계된 史料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다. 公田과 私田에 대한 수취는 크게 그 비율을 달리하고 있었다. 公田租의 收取率은 四分取一 즉 생산고의 을 취득하는 것인데 대하여 私田租의 收取率은 二分取一 즉 생산고의 을 취득하는 57) 宮院田은 高麗史에서는 분명히 私田으로 취급되어 있다. 宮院田을 宮院公廨 田과 같은 것으로 보면 公廨田 역시 私田에 속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宮院에는 公廨田이 지급된 例가 없으며 宮院에 대하여 公廨田을 지급한 양으로 기록된 것은 高麗史撰者의 어떤 오해에 기인하였으리라는 전제 밑에서 公廨田율 公田으로 간주해 두었다. - 177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것이었다. 이 중에서 私田主는 5升 내지 7升 5合의 税 를 국가 에 바쳤다.58)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私田租率은 公田租率의 2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公田과 私田이 본질적으로 그 성격이 같은 토지 였다면 이렇게 엄청나게 틀리는 租率의 차이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종래 公田의 租와 私田의 租는 다 같은 地代 인 양으로 이해되 어 왔다. 문제의 소재는 아마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우선 私田의 租인데, 수확의 절반을 수취하는 이 私田租는 일종의 地代라고 해 석해서 아마 무방할 것이다. 後代의 並作半收制의 조율이 二分取 一이었으며 이 租의 내용이 地代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비율인 초기의 私田租를 地代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어도 私田租의 일부에 한해서는 무리가 없다. 이에 대하여 公田租는 私田租의 절 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이 公田租도 私田租와 같은 地 代로 이해되어 왔다. 이와 같이 收取率에 현격한 차이가 있는 公 田租와 私田租를 다 같은 地代라고 同質視한 것은 잘못이며 公田 私田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기본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公田租는 地代 가 아니라 地稅 였으며 公田은 국가가 地代를 수취하는 토지가 아니라 단순한 課稅地였다.59) 여기서 말 하는 公田은 三科公田 즉 民田에 해당하는 것이며 王室御料地로 서의 一科公田과 公廨田으로서의 二科公田과는 일단 분리해서 생 각하였다. 王室御料地는 물론 公廨田에서도 直營의 형태를 취하는 경영을 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 예상된다.60) 이럴 경우에는 수 조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王室御料地 특히 庄 處 58) 姜晋哲 註 55) 論文 59) 旗田 巍 高麗の公田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60) 同上 - 178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에 있어서는 收租에 입각하는 경영이 기본적 형태였으므로 여기서 收取되는 租는 역시 地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庄 處의 토지는 왕실에 부속되어 租를 왕실에 바치기는 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일반 民田과 그 성격이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公田은 대체로 地税를 부담하는 課税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課税地인 公田에 대해서 私田은 일종의 地代관계가 성립하는 토 지였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특히 양반에 지급된 分給收租地의 경 우는 그렇다. 私田도 직영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있었는데61) 이 럴 경우에는 물론 지대관계는 성립치 않는다. 단 私田의 경영은 田 主와 耕作者 佃戶의 私的인 지배 예속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며 佃戶 경작의 관리, 田租의 수송은 지방관의 책임에 위임되 어 있었다. 私田 兩班科田의 田主는 일정한 기간 동안 分給된 토 지의 租를 취득하는 收租權者에 불과하였으며 토지에 대한 매매처 분권을 갖는 것도 아니고 그 토지의 경영 관리에 책임을 지는 地 主 도 아니었다. 私田에 관해서는 아직 그 연구가 충분치 못하여 그 실태가 잘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私田에 있어서의 田主 佃戶의 관계는 대체로 郡縣制에 의한 농민지배에 의하여 실현된 것으로 보 아도 좋다. 따라서 田柴科制度下에서 주로 兩班 田主(科田主)들이 佃戶로부터 거두어들이는 租는 그것이 비록 일종의 地代 였다 고 본다 하더라도 그 성격은 매우 미숙한 것이며 地主制 土地經營 위에 성립하는 지대관계와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田柴科體制下 의 私田을 일종의 地代를 수취하는 토지, 즉 지대관계가 성립하는 토지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합리적인 해석이지마는 그 地代 의 성격이 지주제 토지 경영 위에 성립한 地代의 성격과는 매우 61) 姜晋哲 註 55) 論文 - 179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큰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私田 중에서 아마 그 태반을 점하는 것은 軍人田이었다고 생각 한다. 그런데 이 軍人田은 이미 위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科田의 경우처럼 순수한 佃作關係에 입각하는 토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다. 따라서 軍人田의 租를 순수한 地代로 보기 위해서는 지대 자 체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정리해 두어야 할 많은 어려운 문제를 남 기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私田의 토지 전체에 대하여 일률적 으로 地代理論을 적용하는 것은 아직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2) 土地와 國家財政 田柴科制度는 이미 살펴본 그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王室 王族 文武兩班 등 특권계급의 물질적 경제적 기반을 준비 하고 鄕吏 軍人 工匠 등 職役을 부담하는 丁戶의 생활토대를 마련 하며 또 국가의 각 기관에 그 운영경비를 조달케 하는 등 국가재정 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하여 편성한 土地法이었다. 田柴科의 대표 적 형태는 兩班田柴科라고 볼 수 있거니와 양반관료에 토지를 지 급하는 제도는 이미 統一新羅期에도 존재한 일이 있었다. 統一新 羅期에 시행된 관료에 대한 토지지급법은 얼마 안가서 폐지되고 그 대신 옛날에 시행된 祿邑制가 다시 부활하였다. 이 녹읍 제도는 토지 그 자체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정한 지 역과 그 지역에 거주하는 人間 주로 인간의 노동력 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62) 그런데 高麗의 건국 이후 田柴科가 제정되고 관료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가 다시 부활하였다. 즉 統一新羅期에 있어서는 잠시 시행되었다가 실패한 관료에 대한 給 62) 祿邑에 관해서는 姜晋哲 新羅의 祿邑에 대하여 李弘植博士回甲紀念韓國史 學論叢 참조 - 180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田制度가 高麗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제도로서 성립되어 오래 존속 하였다. 田柴科制度에 있어서의 양반관료의 토지에 대한 지배는 대체로 郡縣制에 의한 農民支配에 바탕을 두어 地方官의 도움을 받 아 실현되는 지극히 미숙한 것이었으나 하여튼 토지 그 자체에 대 한 지배가 수립되어 祿邑 대신으로 田柴科가 제정되었다는 것은 토 지지배관계에 있어 하나의 주목할 만한 전진이라고 볼 수 있겠다. 國家財政은 원칙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징수하는 租 庸 調의 税赋 로써 충당되었는데 이 중에서 토지를 과세대상으로 한 경우에 한 하여 생각해 본다면, 田租가 바로 재정의 원천이 되는 것이며 따 라서 田租의 수입이 증대하면 국가재정이 풍부해지고 그것이 감 축되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高麗의 국가재정의 基本大綱을 살펴보건대 財政用途의 가장 중요한 항목은 上供 즉 궁중의 御需 와 國用 즉 政府 各官司의 財政費用 祿俸 즉 왕족 양반관료와 雜 職 胥吏 工匠 등에 대한 보수 지출 그리고 軍需 즉 군사비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재정운영의 방식을 살펴보면 전국 에서 수취하는 田租를 일단 歲入으로 잡아 일괄적으로 국고에 수납해 서 그것을 다시 재정용도별로 각 기관에 분할해서 지출하는 것이 아니라 田租가 소출되는 토지를 국가재정의 각 항목에 맞추어 구 분하고 토지 그 자체를 각종 재정의 항목에 따라 분할해서 재원을 미리 분배 고정시켜 놓았다. 이러한 재정운영의 원칙에 따라서 전 국의 토지는 각기 그 독자의 재정용도를 갖게 되었다. 供上 즉 御需를 위해서는 주로 內庄宅 소속의 광대한 御料地가 준비되어 왕실의 재정을 도맡았다. 祭祀 賓客 田役 喪荒 등에 소용 되는 재정비용 즉 國用은 麗末 鮮初의 제도에 의하면 주로 豊儲倉 이 이를 요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63) 麗初의 상황은 이 점이 애 63) 國家置豊儲倉 凡祭祀 賓客 田役 喪荒之用 皆於此出焉 謂之國用 朝鮮經國典 - 181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매하게 되어 있다. 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右倉(豊儲倉)은 다만 供上米廩만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되어 있을 뿐 國用과의 관계에 는 언급이 없다.64) 高麗史 食貨志 序文에 國用의 절약으로 大倉 의 粟이 紅腐相因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마 주로 大倉이 국용의 지출을 담당한 듯하며 그 재원은 左倉(廣興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民田의 出租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右倉이 국용과 전혀 관계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高麗圖 經에 의하면 右倉이 兵革 水旱의 준비를 儲蓄하고 있었음이 明記 되어 있으니65) 右倉이 국용과 깊은 관계가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리 하여 국용은 주로 大倉과 右倉에서 관장 된 것으로 설명해 둔다. 이 밖에 中央 및 地方 各官司의 운영경비 는 해당관사에 分結된 公廨田의 수입에 의하여 支辨되었다. 祿俸의 재원이 되는 것은 民田이었으며 民田의 租는 廣興倉(左 倉)에 수납되었다가 주로 祿俸으로 지출되었다, 祿俸의 지급을 받 는 계층, 주로 양반관료는 이 밖에 그 신분 직위에 따라 각기 응 분 의 토지도 받았다. 軍需, 즉 군사비를 부담하는 재원은 軍人田이었다. 軍人田을 受 給한 府兵은 피복 군량 병기 기타의 비용을 自辨하였으므로 국가에 서는 軍人田 이외에 군사비의 재원을 따로 책정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兩界의 田租가 軍需에 충당되었음은 이미 말해 둔 바와 같다. 高麗末期의 私田改革論者들은 量田의 결과 얻은 전국(兩界除外) 의 墾田 약 50萬結에서 供上 國用에 13萬結, 祿俸에 10萬結, 科田 에 10萬結을 각각 책정 하였는데 이로써 供上 國用 및 祿俸을 염출 賦典 國用 64) 高麗史 卷 77 百官志 2 豊儲倉條 65) 高麗圖經 卷 16 官府 倉廩條 - 182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하기 위한 토지와 科田의 양적 비중이 어떠했는지 대략 짐작된다. 위의 供上 및 國用에 배당된 土地 13萬結은 右倉(豊儲倉) 소속이 10萬結, 四庫(供上) 소속이 3萬結로 되어 있는데 麗末 鮮初의 제도 에 의하면 豊儲倉位田은 祭祀 賓客 田役 喪荒 등 國用의 재원이 되 는 것이라 한다. 이 점 高麗前期의 右倉과 麗末 鮮初의 右倉은 그 재정적 기능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어 보이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되는 바이다. 이와 같이 田柴科體制下의 전국의 토지는 국가재정의 용도에 따라서 그 소속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집권자들은 이 러한 토지들을 國田, 즉 국가소유의 토지라고 인정했다. 이것은 普天之下 莫非王土 라는 전통적 王土思想에 입각하는 관념의 所 產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이러한 王土思想에 분 식되어 전형적인 농민의 사유지인 民田도 公田 으로 의식되었 다. 民田뿐 아니라 丁戶에 지급된 토지도 丁戶의 세습재산이었으 며 양반의 功蔭田도 세습재산으로서 私有地와 다름이 없는 것이 었다. 이러한 토지들을 국유토지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王土思想과 이에 수반된 여러 관념적 所產에 의하여 誤導된 土地國有論은 지 양되어야 한다. 3) 均田制의 施行與否에 관한 문제 高麗時代의 토지제도에 관해서는 均田制가 시행되었으리라는 주장이 종래 유력하게 논의되어 왔다. 高麗初의 토지법 제정의 요령 을 개괄적으로 설명한 高麗史 食貨志 田制의 序文은 高麗의 田制 는 대개 唐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라고 해서 高麗의 토지제도가 마치 唐의 田制를 모범으로 삼은 것같이 말하고 있다. 唐의 田制 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均田制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食貨志 田 - 183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制의 序文에 따른다면 高麗에서도 均田制가 시행된 것으로 볼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高麗時代의 토지 제도를 소상히 살펴보고 그 실태를 검토해 보면 均田制가 시행된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많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다. 토지제도와 수취체계가 서로 表裏一體의 관계에 있음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 바이거니와 高麗初의 수취체계 특히 租税制度는 均田 制下의 그것과는 아주 딴판이다. 唐의 均田制下에서는 수취체계는 租 庸 調로 구체화되어 이것이 농민 每人當 얼마씩 일정한 量으로 均等 固定化되어 있었다. 그런데 高麗의 경우를 보면 이와 같이 수 취량이 균등하게 고정화된 혼적은 보이지 않고 특히 田租의 수취 는 면적 단위를 기준으로 每結當 얼마씩이라는 일종의 累進稅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경작면적에 대해서 田租를 차 등 있게 부과한 것이며 高麗의 토지제도가 均田制를 채택한 것이 라면 이러한 형태의 田租 수취는 있을 수 없다. 高麗에서는 唐과 비슷한 일종의 府兵制가 실시되었다. 高麗의 府兵義務(軍役負擔)는 軍班民族이라는 특수층에 제한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府兵은 광범한 농민으로 구성되었다고 이해된다. 高麗에 서는 부병에 대하여 一定量의 軍人田을 별도로 배정 지급하였다. 고려의 부병 즉 농민이 唐과 같은 均田農民이었다면 응당 高麗는 唐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租 庸 調의 면제를 조건으로 府兵을 확보하는 합리적 방법을 채택하였을 것인데 이러한 방식을 취하 지 않고 軍人田을 따로 설정하였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다. 가령 高麗의 농민이 均田農民이었다면 정부는 그들에게 이중 적으로 軍人田을 加給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도 均田制 시 행에 관한 큰 의문이 남아 있다. - 184 -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高麗에서는 白丁이라는 광범한 농민층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에게도 國家로부터 토지가 지급된 사실이 없었다는 것이다. 均田制가 시행되어 토지가 국민들에게 균등하게 配分되었다면 이러한 현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職役을 부담하 는 丁戶에 대하여 국가가 토지를 지급하였음은 이미 말한 바와 같 다. 高麗에서는 白丁을 丁戶로 삼을 경우에는 반드시 토지를 지급 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토지의 지급을 받음으로써 白丁은 丁戶가 되었다. 이것은 均田制 이론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高麗의 토지상속은 嫡長子의 단독상속이었거나 혹은 적어도 嫡 長子에게 우선적으로 유리하게 傳給되었다. 이것도 均田制 시행을 전제로 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위에서 말한 바를 요약 하면 高麗에서는 전체 국민에게 토지를 均給하는 均田制는 시행 된 일이 없고 다만 軍人 기타의 職役 담당자에게만 직역부담의 댓 가로서 일정한 토지가 배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高麗史를 읽어 보면 均田制가 시행된 것 같은 강렬한 인 상을 주는 史料를 간혹 발견한다. 예를 들면 高麗말기의 토지개혁 론자들은 당시의 토지소유관계의 혼란을 시정하기 위하여 先王均 田의 제도를 부활하자고 주장하였고, 또 전기의 史料에서도 民田의 多寡 膏塉이 不均하니 이것을 바로잡아 均其食役 하라느니 혹은 均定 하라는 말이 보인다.66) 전기의 사료는 토지의 均給 그 자 66) 右常侍許應等上䟽曰 臣等近與司憲府 版圖 典法 交章申聞 請復先王均田之制 而殿下依允, 四方聞者 莫不欣悅 (高麗史 卷 78 食货志 1 田制 祿科田다음 辛昌 即位年 9月條) 戶部奏 尙州管內中牟縣 洪州管內橻城郡 長湍縣管內臨津 臨江等縣 民田多寡膏 塉不均 請遣使量之 均其食役 從之 (高麗史 卷 78 食货志 1 田制 經理 靖宗 7年 正月條) 尙書戶部奏 楊州界內見州 置邑已百五年 州民田畝 累經水旱 膏塉不同 請遣使 均定 制可 (高麗史 同上 文宗 13年 2月條) 西北面兵馬使奏 安北都護及龜 泰 靈 渭等州, 通海縣民田 量給已久 肥塉不同 請 遣使均定 從之 (高麗史 同上 文宗 13年 3月條) - 185 -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課役負擔의 균등화를 도모한 것이 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데 설령 이 사료를 토지의 均給과 같은 의미 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항구적 보편적 제도로서의 농민에 대 한 土地均給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특별한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부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 임시적 방편으로 농민에게 토 지를 균급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이러한 시책이 高麗의 토지정책 전체에 있어 갖는 의의는 그렇게 큰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말 기의 토지개혁론자들이 거론한 先王의 均田制라는것은 文武兩班 吏 屬 軍人 樂人 工匠 등 국가의 官職 職役을 맡은 계층들에 대하여 토 지를 지급하여 준 초기의 田柴科 土地支配秩序를 말기의 改革論者 들이 선망의 뜻으로 회고한 것이며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姜 晋 哲 2. 手 工 業 (1) 官廳手工業 1) 官廳手工業組織 新羅시대에도 이미 官需品과 귀족층의 생활품 및 武器의 제조를 목적으로 하는 官廳手工業組織이 이루어져 있었지만, 高麗시대에 이르러서도 그 조직이 한층 더 확장 발전하였다. 新羅시 대에는 官廳手工業을 관리하는 각 官署가 그 제조되는 물품의 종류에 따라 조직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皮革製品의 제조 를 관리하는 기관으로서 皮典이 설치되어 있었고, 麻布 생산을 관 장하는 기관인 麻典과 絹織物 생산을 관장하는 綿典 등이 있었던 - 186 -
2. 手 工 業 것이다. 그러나 高麗시대에는 官廳手工業이 정부의 用途와 需要에 따라 분류되었고 각 官廳마다 생산을 담당한 물품을 제조하는데 필요 한 각종 工匠을 전속시켰다. 예를 들면 정부의 영선작업 일체를 담당한 繕工寺는 土工 石工 金屬工 등을 소속시키고 있었던 것이 다.1) 高麗시대의 官廳手工業은 新羅시대의 그것보다 한층 더 규 모가 커졌고 각 官廳手工業場마다 그 기능이 다양화한 것이었다. 高麗시대의 官廳手工業場을 관장하던 기관과 그것에 소속된 工 匠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2) 繕工寺 이 관서는 일명 將作監이라고도 하며 정부의 건축 및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이를 관장하는 官吏로서 從 3品 의 判事 1人과 그 밑에 正 4品의 監 1人, 從 4品의 少監 1.人, 從 6品의 丞 2人, 從 7品의 注簿 2人이 있었고, 또 監作 6人과 記官 3人, 算士 1人이 있었으며, 이들의 지휘 감독 아래 건축 및 각종 토목 공사에 종사하는 工匠, 즉 石工 木工 土工 등이 소속되어 있 었던 것이라 추측된다. 軍器寺 일명 軍器監이라고도 하며, 주로 武器를 제조하는 기관 이다. 官吏로서는 判事(從 3品) 1人과 監(正 4品) 1人, 少監(從 5 品) 1人, 丞(正 7品) 2人, 注簿(正 8品) 4人, 監吏 8人, 記官 4人, 算士 2人이 있었고, 그 밑에 皮甲匠 牟匠 和匠 白甲匠 長刀匠 角 弓匠 漆匠 鍊匠 弩筒匠 箭匠 箭頭匠 皮匠 등의 工匠이 소속되어 있었다. 掌服署 王族의 衣服類를 제조 조달하는 기관으로서 尚衣局이 라고도 한다. 管理職으로서 正 6品의 奉御 1人. 正 7品의 直長 1 1) 趙璣濬著 韓國經濟史 149面 2) 高麗史 志卷 30 白官 1 高麗史 志卷 34 食貨 2-1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