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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나로 5호

120~151역사지도서3

Transcription:

實例의 하나로 平北義州郡의 北區交通局의 경우 그 陣容은 2) 이러하였다. <그림> </그림> 위와같이 임시정부는 재빨리 국내 동포와의 유대와 행동통일을 공고히 하고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비밀 조직망의 구성을 서둘렀다. 이러한 기본적인 행정 및 연락 機構의 기틀 위에서 비로소 임시정부의 施 政방침의 침투 실현을 기약할 수가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弘報활동은 우선 法令을 비롯한 國務院令, 布告 등 각종 公示事項을 수록하여 국내의 국민에게 傳達告知케 하는 公報 를 비 롯한 독립신문 新韓靑年 등을 발행하여 전기한 聯通制 및 交通局 등의 地下조직 기구를 통해 전체 동포와의 직접적인 對話의 通路로 삼았다. 對外 조직 한편 對外的 弘報 활동의 조직 발판으로는 파리(金奎植), 런던(黃杞煥), 워싱턴(李承晚), 펜실바니아(徐載弼) 등지에 한국 민족 대표들의 활동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 試圖는 大韓靑年團대표로 급거 파리 講和會議에 金奎植를 한국민족 대표로 보내, 대한민국의 독립 實現을 꾀한 文書 및 面 2) 朝鮮民族運動年鑑(在 上海 日本總領事館 警察部 第2課, 1933) pp. 28 29. 그리고 이 年鑑은 1932년 4월 29일, 尹奉吉義士가 日本天皇의 天長節을 慶 祝하는 上海虹口公園에서 爆彈을 던져 한국 민족의 獨立精神을 세계에 널리 편친 義擧가 있었던 바로 다음날인 4월 30일 日本警察이 上海 프랑스租界 馬 浪路 普慶里 제4호 大韓僑民團事務所를 急襲하여 押收한 각종 文害를 整理 편집한 것임. 즉 大韓民國 臨時政府 및 同 僑民國保管의 內治, 外交 등 각종 文書를 個別的으로 發生事項대로 歷年度別로 分類하고 이를 다시 發生年月日 順으로 編輯한 것으로 對外秘로 된 것. - 165 -

우리 國民의 最大 最高한 能力을 發揮하여야 할지니 이러함에는 萬人 의 意見을 吐露하여서 信憑할만한 有力한 輿論을 喚起하여서 一은 政 府를 督勵하며 一은 國民의 思想과 行動의 方向을 指導하여야 할지 라. 輿論의 喚起가 本報의 使命의 三이요. 오래 異族의 箝制下에 在하야 世界와 交渉을 斷하였던 우리 民族은 今으로부터 獨立한 國民이 되어 世界列國民으로부터 角逐의 生活을 始하려 하는지라. 이러함에는 우리 國民은 相當한 準備를 必要할지니 即 文明國民에 必要한 知識의 準備라. 吾等은 吾等의 눈을 通하야 吾 等에게 適當하다고 생각하는 新學術과 新思想을 攝取하여야 할지니 新思想紹介가 本報의 使命의 四요. 우리 國民은 過去에 榮譽로운 歴史를 有하였고 此를 通하야 傳하는 高潔하고 勇壯한 國民性을 有하였으나 一은 儒敎의 横暴에 一은 日本 族의 横暴에 많이 消滅하고 掩蔽된지라 有形한 國土는 차라리 失할지 언정 先祖의 精神이야 엇지 참아 失할가. 健全한 國民敎育을 受치못 한 不幸한 우리는 그 榮譽로운 歷史를 닛고 高潔 勇壯한 國民性을 活 用치 못함에 至하도다. 그러나 우리의 精神에는 아직도 高貴한 萌芽 가 有하니 一風一雨가 足히 此를 蘇生케 할지니 國史와 國民性을 鼓 吹하고 並하여 新思想을 攝取하여서 改造 或은 復活한 新國民을 造하 려고 努力함이 本報의 使命의 五라 (이하 8行 省略) 위와 같은 編輯方針아래 등장된 獨立新聞 은 오로지 한국 민족의 자 주 독립을 위한 민족 정신의 앙양과 독립 달성에 그 焦點을 맞쳐 나가는 데 진력 하였다. 이제 獨立 이라는 제호아래 나타난 초창기의 紙面 構成을 살펴 보면 1面은 社說을 비롯하여 國務院令, 時務感言, 時事漫評 등이고 2面에서는 議政院의 動靜을 비롯하여 獨立軍의 활동상황, 海外각지의 僑胞들의 움직 임, 그리고 歐美 각국의 弱小民族에 대한 政治動向 등을 실었다. 3面에서 는 本國 消息欄을 두어 각종 국내에 있어서의 움직임을 보도하였고 이어 韓國과 日本 이란 欄을 두어 日本의 조선에 대한 각종의 침략政策 및 人事 등 중요한 것을 외국 통신을 이용하여 이를 보도하는 한편 이에 대한 q - 170 -

論評은 社說을 통해 단행되었다. 이를테면 海軍大將 齋藤實이 새로 朝鮮總 督에 任命된 사실을 이 欄에서 보도함과 동시에 1面 社說欄에서 所謂朝鮮 總督의 任命 이란 제목으로 재빨리 이렇게 날카로운 論評을 加한다. 즉 日本人의 生覺에 韓人이 日本에게 不服함은 總督의 武官이요 警察이 憲兵인 緣故로 思하야 韓人의 思想을 單純하다고 嘲笑하는 日 本人이야말로 韓人에게 嘲笑밧을 單純한 者로다. 6) 또 3面에서는 宣傳欄을 두어 長白山人의 改造 란 長編의 連載읽을 거리 를 비롯한 東京, 北京, 間島 등지의 特派員에 의한 각 通信이 역시 교대로 실렸다. 그리고 4面에는 其月의 小說 피눈물 을 비롯하여 海日의 詩 獨立 日 그리고 韓國獨立運動史 등을 실어 일종 文藝 및 敎養에 관한 것들이 담겨졌다. 때로는 日本人의 論文도 번역 연재하곤 했다. 이를테면 吉野作 造의 朝鮮統治에 關한 最少限度의 要求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同報 창간호에 나타난 중요한 記事 중에는 파리 講和會議에 대한 민족 및 국가의 要求로서 제출되었던 大韓民族及國家는 玆에 日本의 覊絆을 벗 어나 獨立國을 再建키를 請願하노라 한 장문의 請願書를 3,4兩面에 걸쳐 발표한 것이 있다. 뒤늦게 그 全文을 獨立 신문에 발표되었으나 이는 역사적인 귀중한 文獻으로서 당시 이를 받아 읽었던 독자들의 感懷는 자 못 깊고 컸었을 것이 면하다. q q 7) 2. 獨立新聞의 論調와 評價 獨立新聞 의 論調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一連의 社說을 分析해 보는것이 그 첩경이 된다. 여기서 그 대충을 훑어 보기 위해 年度 別로 중요한 社說 제목을 일단 列擧해 보아야겠다. 1919년 國恥第九回를 哭함(3호), 政府改造案에 對하야(4호, 韓 日兩族의 合하지 못할 理由(5호), 爆發彈事件에 對하야(9호), 日本國民 6) 7) 獨立 1919년 8월 26일자(제2호) 黎明 講演集(第6集) 朝鮮問題號에서 번역한 것(東京 大鐙閣, 1919년) pp. 1 40-171 -

告하노라(10호), 愛國者여(14호), 臨時政府와 國民(22호), 敵의 虛 僞(25호) 財產家에게(26호), 絕對獨立(31호), 信賴하라 容恕하라(32호) 1920년 우리 國民이 斷定코 實行할 六大事業(35호), 本國同胞에게 (41호), 國民皆兵(46호), 在外同胞에게 警告하노라(52호), 議政院議員에게 (55호), 美國上院의 韓國獨立承認案(59호), 俄領同胞에게(61호), 韓中提携 의 要(66호), 獨立公債募集(71호), 間島事變과 獨立運動의 將來(87호) 1921년 悲憤懷慨(103호), 自由와 死(105호), 國民的 自覺(106 호), 統 一運動과 國民代表會의 使命(109호),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 (115호), 華盛頓會의 進展(116호), 噫平和世界(118호) 1922년 國務員總辭職에 對하야(122호), 故孫秉熙先生을 吊하노라 (127호), 我臨時政府의 現在와 將來(128호), 우리의 三一運動과 中國의 五四運動(131호), 獨立運動의 民衆化(141호), 實際運動의 威力(148호) 1923년 今後의 獨立運動은 엇더케할가(162호), 敵地災變에 對하야 (164호), 敵의 罪惡(165호), 開天節紀念(166호), 年末의 느낌(168호) 1924년 新春의 狩獵物(169호), 우리 運動과 名詞(170호), 權道 와 手段에 對하야(173호), 우리 前途에 方法(176호) 1925년 議政院開會期를 當하야(183호), 李承晚博士에게(184호), 海內外 同志에게 檄하야 大同團結을 促하노라(185호). 위와 같이 年代別로 나타난 同報의 社說제목에서 보듯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탄생한 해로부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論調에도 변화가 뒤따랐 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초년도에는 한국 민족은 자주 독립 하지 않으면 아 니된다는 原理 原則에 충실하였고 이어 국제적인 提携에 그 力點을 두고 있었음을 엿 볼 수가 있다. 3년째를 맞이한 임시정부는 改造派와 創造派 간의 對立이 노골화됨에 따라 이를 收拾 統一하는데 한 方便으로 國民代 表會를 열것에 主力하였으며, 4년 머리에 들어가서는 3 1운동과 中國의 5 4운동을 比較對照하면서 독립운동의 民衆化를 꾀하여 그 실제적인 威力 발휘를 鼓吹하였다. 다시 5년째가 되는 1923년에 들어서는 임시정부가 새 에게 - 172 -

方向을 模索하면서 일부, 離脫者 내지 日帝의 앞잡이들에 대한 對策을 세 워 長期 체제를 갖추는 데 대해 발맞춰 나갔음을 엿 볼 수가 있겠다. 한편 社說을 제외한 각 面에 나타난 논문을 비롯한 각종 읽을거리를 들 춰 보면 그 編輯 方針에서 밝혔듯이 각 分野에 걸쳐 골고루 그 時點에 있 어 주요하다고 인정된 것들을 다루고 있었다. 이를테면 국제적인 것으로는 초기의 講和會議와 國際聯盟(李灌鎔특파)등에 많은 관심과 기대를 걸었던 것과 같이 1921년 11월에 워싱턴에서 열린 太平洋會議 一名 워싱턴會議 에는 많은 紙面을 제공해가면서 이를 보도하고 논평하였다. 太平洋會議 好機會? 非機會? 란 社說을 들고 나왔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 대통령 李承晚, 外交委員長 徐載弼을 대표로 선정, 파송키로 했다. 다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제적인 承認문제에도 같은 配慮와 노력을 기울여 萬國 社會黨大會와 孫文의 護法政府로부터의 承認을 얻어 낸 사실을 보도 하여 국민을 기쁘게 하였다. 더구나 安東縣事件을 비롯한 間島事件, 그리 고 1萬의 한국인 犠牲者를 낸 關東震災때의 日本의 蠻行 등을 대대적으로 폭로, 규탄하는데 그 紙面을 아끼지 않았다. 또 思想的인 읽을 거리로서는 韓國獨立運動史(1記者), 韓國獨立運動의 眞相(페퍼), 義戰(뒤바보), 그리고 李舜臣(孤松) 및 安重根傳(羅南山) 등 의 傳記物을 게제, 국사와 애국심을 북돋았으며 한편 國家(럿설 玄寶譯), 社會主義(바커 柳瑩譯), 社會主義硏究(孫斗煥) 등도 連載되었다. 특히 長白山人의 改造 란 제목아래 人爲와 實, 밋분, 十年生聚 十年敎 訓, 遠慮, 團合 등에 관해 논술한 連載物과 송아지란 筆名으로 婦人解放 問題에 關하야 가 1920년 3월 11일자부터 전후 6회에 걸쳐 발표되어 많 은 독자들을 啓蒙시켰다. 전자는 春園 李光洙이고 후자는 頌兒 朱요한의 筆名이다. 이들은 또한 독립 정신에 불타오르는 心懷를 詩로 읍조려 同報 紙面을 장식하기도 했다. 즉 春園의 경우 1920년 12월 18일자에 三千의 怨魂, 저 바람소리, 間島同胞의 慘狀 등 3편을 동시에 발표했고 1921년 에는 元旦 三曲, 光復會 祈禱會에서 등을 발표하였다. 頌兒의 경우도 - 173 -

紙上에서 즐김노래 새해 노래 서울에 있는 벗에게 祖國 등을 발표했다. 이 때 金輿濟도 三月一日 郷愁 등을 발표했다. 獨立新聞 에 제일 먼저 詩를 집필한 것은 1919년 8월 29일자(제3호) 紙上에 海日의 아아 庚戌八月二十九日 과 해의 오오 나라의 한 아바지들 의 두 編이다. 海日과 해는 모두 筆名이겠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분명지 않 다. 亡命한 젊은 독립운동자 중의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朱요한, 金輿濟보다 한달쯤 앞서서 정든 해님을 을음 을 발표한 云丁 崔昌植도 있 었으며 그후 노힌 同胞를 마즘 의 尹富植, 三月하루 의 金泰淵, 쳐러워 라 저 비 보아라 등의 金暻載의 작품도 보였다. 요컨대 亡命地에서 발행된 독립운동의 선봉인 同紙에는 위와 같은 情緒 的인 일면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한다. 이처럼 同紙는 민족의 통일과 단결 을 주장하였고 자주 독립과 민주 공화제의 확립을 위해 注力하였다. 이러한 同紙論調 및 편집 내용에 대해 批判의 소리가 없지도 않았다. 그것은 너무 開放的이고 事實 報告에 치우쳤다는 점이다. 독립을 쟁취하는 데 있어 非能率的이라는데 그 초점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同紙는 한낫 정부의 機關紙的인 성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편협의 어리석음을 의 식적으로 피했다. 이에 대해 同紙는 本報의 主義 라고 다음과 같이 그 편 집 태도를 再闡明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즉 어떤이는 本報의 論調에 對하야 그 넘어 開放的이오 事實報告主義 임을 論難한다. 이는 秘密의 漏洩되기를 두려워하며 國民을 鼓動하는 힘이 적을 것을 憂慮함일지니 我等은 그 忠告의 眞情을 諒知하노라. 我等도 秘密의 必要를 아노라. 或論者보다 더 잘 알리라. 그러나 敵 의 눈을 가리우기 爲하야 同胞의 눈을 가리우는 愚를 擧치 아니하리 라. 또 同胞를 激勵할 必要를 아노라. 그러나 事實을 誇張하거나 한갓 虛張聲勢의 論으로 同胞를 欺岡하는 罪를 作치 아니하리라. 本報의 初號에 임의 聲言함과 갓히 本報는 어 지든지 참되리라. 誠實하리라. 虛爲나 誇張이나 論를 爲한 論, 文을 爲한 文은 我等의 決코 取치 아니할바라 8) 1920년 3월 1일자 q - 174 -

同紙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른 어느 신문보다도 擁護支持하는 데 앞장을 섰어서도 事實을 결코 外面할 수 없다는 의연한 편집 태도의 확 립으로 말미암아 그 紙價는 한층 높아만 갔다. 사실 獨立新聞 은 거듭되 는 財政難과 日帝 警察의 날카로운 捜索網을 避해 민족의 소리 임을 自負하 고 萬難을 헤쳐나가면서 발행되었다. 그 紙面에 담은 내용은 그대로 민족의 소리이며 또한 민족의 결의이고 민족의 앞길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同紙는 어느 한 단체나 한 黨派에 치우칠 수도 없었다. 公正한 大道를 걸어 야만 하였다. 이러한 편집 태도와 그 내용은 국내의 뭇 동포는 물론 해외 각 지에 흩어져 있는 많은 동포들의 呼應과 好評을 받을 수가 있었다 하겠다. 이제 獨立新聞 에 대한 당시의 한 격려의 글을 보면 嗚呼 可憐한 我等의 過般情景은 辛酸莫甚이거니와 君과 如한 主 義主張을 가진 志士는 이서스나 志報는 업서스며 君과 如한 公道는 가졌으나 公認은 업섯나니 이제 報紙가 이와갓치 窮春爐憐에 지 傳達되며 우리의 獨立眞相을 온 世界가 公認케 됨은 실로 不思議의 無量驅運이 目前에 大擧하였도다. 憶哉라 君의 主張이여 吾族의 對해 自由, 平等, 正義, 人道를 鼓吹 奮發하며 此로써 世界萬邦에 紹介宣傳하야 最後目標를 見樣하고 前進 하는 代表勇將이 엿스며 月光風이엇섯도다. 偉 신 獨立報君이여 우리 二千萬 國民性을 收拾케 하소서 奮發케 하소서 前進케 하소서 9) q 이처럼 q q Ⅲ. 統一團結과 獨立戰取의 鼓吹 1. 정부와 8) 9) 言論기관의 相關관계 傳單 獨立新聞, 1919년 11월 1일자(제24호). 獨立新聞, 1921년 2월 17일字(제94호) 夏亭山夫 獨立新聞의 續刊을 迎하야. - 175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當面 課題는 겨레의 정신적인 통일, 단결로서 日 帝로부터의 자주 獨立을 전취하는데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독립 운동에 있어서는 1) 입으로 부르짖는 舌戰(獨立宣言, 主義演說, 萬歲 示威) 2) 筆戰(新聞, 雜誌, 宣傳文), 3) 精神戰(納稅拒否, 官公吏의 共同 退職, 학생의 罷業, 公私間의 고용된 職工의 罷業)등을 들 수가 있는데, 1),2)를 합친 言論 思想戰의 展開에는 주목할만한 것이 있었다. 임시정부 의 초대大統領으로 취임한 李承晩은 獨立新聞 記者와의 會見석상에서 新聞의 記事는 某條록 某黨과 某側에 偏치 안코 共通을 要하 며 한 局部에 限치 안코 普遍的을 要하는 것이며 虛張을 避하고 事實에 注重하야 公正을 爲主함이 可함은 說明을 要 할 餘地가 업소. 針小棒大의 記事는 도로히 實際에 損되는 點이 잇는터인대 貴報는 毋論 如上의 缺陷이 업는줄 認함니다 10) 하여 신문의 公正性을 强調하였고 그후 軍務總長 盧伯麟은 上海 靑年界 주최 演說會에서 (1) 獨立運動을 준비하여야 할 것, (2) 獨立精神을 鼓吹 하여야 할터인대 精神을 鼓吹하는데는 新聞政策을 用하여야 될 것 등을 力說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言論政策에 있어서 한결같이 新聞, 雜誌 등을 重要視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겠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呂運亨이 上海在留僑胞연설회에서 指摘하 였듯이 만세운동 이후 統一的인 기관의 필요성을 切感하고 부랴 부랴 조직된 것 이었던만큼 時日이 흘러감에 따라 내부적으로 脆弱性을 서서히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은 첫째, 임시정부 조직 자체가 국내의 대표를 비롯 한 美洲, 間島, 北京, 露領 등의 각종 정치 단체의 지도자급으로 이룩된 연합체 였다는것, 둘째는 독립 方法 내지 견해의 差異, 이를테면 外交的인 q q 11) 12) 10) 11) 12) 獨立新聞, 1921년 2월 5일자(제93호). 獨立斩聞, 1922년 6월 14일자(제129호). 獨立新聞, 1922년 5월 14일자(제106호). - 176 -

점 느냐 아니면 軍事的인 面에 치중할 것이냐 하는 것이 그것이 었고, 셋째는 思想的인 面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왕성해진 民主主義 를 택하느냐 아니면 共産主義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理由와 潮 流로 말미암아 마침내 國務總理 李東輝는 1921년 1월 辭職하였고 동 5월 에는 大統領 李承晚도 上海를 떠나 美國으로 가버렸다. 이에 대해 獨立 新聞 은 전자에 대해서는 政府에서 意思不合으로 因하야 辭職하다 하였고 후자에 대해서도 諸閣員의 退閣問題로 結束이 如意치 못하고 美國에 外交事件이 緊急하다하야 上海를 離하야 美洲로 往하다 라고 보 도 하였다. 특히 전기 두 首腦者에 대한 그 후의 不信任문제는 大統領의 경우 委任統治論 이 크게 禍根이 되었고 國務總理의 경우는 蘇聯으로부터 받은 政治資金이 크게 문제가 되어 한층 불을 붙혀놓았다. 委任統治論의 데 중 을 두 13) 발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약 한달전인 1919년 2월 25일, 당 美國에 있었던 李承晩이 鄭翰景과 더불어 大韓人 國民會中央總會의 名 義로 윌슨 大統領에게 제출한 請願書에서 비롯되었다. 그 內容인즉 1) 列 强은 韓國을 日本虐政속에서 救出할 것, 2) 列强은 將來 韓國의 完全獨立 을 保證할 것, 3) 韓國을 당분간 國際聯盟 統治下에 둘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제3項이 뒤늦게 문제가 되었다. 蘇聯共產黨의 政治資金提供說에 대하여서는 大韓赤十字會회장 李喜儆으로 하여금 직접 조사토록 모스크바 로 派送한 결과 사실이었음으로 나타났다. 이로 말미암아 國務院秘書室長 이었던 金 立은 上海에서 1922년 2월 上旬 被殺되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자연 紛糾와 沉滞를 免할 수가 없었고 이를 打開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 國民代表會의 召集으로 모든 것을 公論에 붙여 새 局面을 열어나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즈음 에 임시정부에 대한 改造派 또는 創造派로 나눠져 論難을 거듭하였다. 이 러한 때 임시정부에 올바른 存在 樣式과 獨立운동의 方向 提示를 게을리 시 14) 13) 14) 過去一年間의 獨立運動 獨立新聞 1922년 1월 1일자(제19호). 前掲, 朝鲜民族運動年鑑, p. 1. - 177 -

않은 것은 역시 獨立新聞 이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주 는 역할을 한 것이 言論기관이었다. 同紙는 각계 각층의 意見과 主張을 골 고루 소개, 공표하는데 注力하였고 전체 국민이 받아드릴 수 있는 良識을 그 紙面에 反映시키는데 몰두하였다. 이러한 때일수록 勇氣있고 公正한 言 論기관의 활 은 政局의 安定과 국민의 輿論을 善導 定着시키는데 커다란 힘이 되는 것을 如實히 보여 주었다. 獨立新聞 은 統一과 團結을 주장 하였고 모든 것을 이 한 길로 이끌어 갔다. 어느 패, 어느 黨에도 기울어 지지를 않았다. 기울어 졌다면 오직 祖國, 대한민국의 自主獨立의 길로만 달렸을 뿐인 것이다. 특히 同紙는 임시정부의 存續을 위해 國民代表會의 개최를 支持하였고 초대 內務總長으로 한때 國務總理를 兼任한 후, 다시 勞動局總辦을 역임한 安昌浩의 上海僑胞들을 위한 大演說會에서 행한 時局문제의 해결 방침에 관한 연설내용을 1面으로부터 2面, 3面, 그리고 4面 상반부에 걸쳐 보도 하였다. 異例的인 편집을 거리낌없이 해내는 데에는 민족의 통일 단합 과 독립달성 을 위한 一念에서였다. 同紙의 이러한 公正하고 良識있는 편집 태도는 呂運亨이 上海의 韓人居留民團長때 日本政府의 要請을 받아드려 渡日하였을 때에도 뚜렷하였다. 呂運亨이 上海를 떠나 東京으로 向發한 것은 1919년 11 월 14일의 일 로 同紙는 呂運亨氏渡日 이란 제목으로 渡日하게 된 경위와 목적 등을 밝 히는 동시에 그의 말대로 日本政府 當局에게 獨立運動에 對한 韓族의 意思를 說明함이요 日本側에서 余를 請함도 此를 爲함이니 余의 所見으로 는 韓族의 意思는 오직 이 確信의 聲明에 不過하리라 는 것과 流配中 인 張德秀君을 放免하야 余와 同行케 하고 또 余等一行의 往復及 行動의 自由와 安全을 保證하였으므로(중략) 渡日을 결심했는데 이는 우리 政府나 자신의 관계하는 어떤 단체와도 相關없고 오직 個人 資格으로 떠나는 것이라 는 것을 客觀的으로 담담하게 報道하였다. 하지 15) - 178 -

個人의 資格이라 했어도 그가 주위의 反對와 挽留에도 불 구하고 渡日한데 대한 일부 上海在留 僑胞간의 輿論은 분분하였고 따라서 居留國民大會를 열게 되었다. 마침내 國務總理 李東輝는 동 15일 布告 제 1호를 頒布하여 呂運亨一行의 渡日을 政府의 意思를 違反한 순전한 個人 單獨的인 行動이요 임시정부와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뚜렷이했다. 同紙는 이에 대해 內務總長 李東寧, 勞動局 總辦 安昌浩 등의 談話를 통해 한결같 이 임시정부와는 아무 관계 없는 呂運亨 個人의 行動이며 그의 純實熱烈 한 誠忠에 대해 절대로 信任하며 閔元植等 같은 不義에서 出한바 아니라 했다. 그리고 獨立新聞 은 李總理布告에 對하야 라는 解說記事를 통해 呂氏의 此行은 오직 絕對獨立을 主張하려 함이며 呂氏의 性格과 過去의 來歷과 功績으로 보더라도 決코 獨立運動에 害될 行爲를 할 人物 이 아니오 氏와 同行한 張德秀, 崔謹愚, 申尙琓 三氏도 自初로 獨立을 爲 하야 盡力하던 者라. 그를진대 政府로셔 布告할 것은 오직 呂氏의 此行이 個人의 資格으로 한 것임과 或 日人이 呂氏의 言을 變改하거나 僞造할 慮 가 잇슴을 內外에 周知케 할 일지라. 功績만코 有爲한 同志를 輕率히 攻 擊하야 그 名譽와 前除를 害함은 넘어 刻薄不人情한 일이 아니뇨 하여 呂運亨 一行의 渡日로 말미암아 일어난 激昻된 일부 輿論에 鎭靜劑 의 소임을 했다. 특히 同紙는 絕對獨立 이란 제목의 社說로서 國家의 獨 立에 무슨 絕對獨立 相對獨立의 區別이 있으리오 獨立이라 하면 이미 그 自身 絕對性을 內包한 것이라. 그런데 同人中에 三月以來로 絕對獨立의 句 를 자죠 듯게됨은 웬 일이냐 反問하면서 그 原因을 詳考한 후 그러 나 一部 人士中에는 絕對獨立이라는 말을 自治에 對하는 말갓치 誤認하는 듯 하도다. (중약) 假令 今番 呂運亨氏 渡日間題로 보더라도 決코 獨 立 非獨立의 問題가 아니오 그 方法의 問題니 말하자면 呂氏等은 日本人 에게 對한 宣傳을 必要하게 보는지라 今次의 渡日을 斷行함이오 呂氏等의 그러나 비록 16) 15) 16) 獨立新聞, 1919년 11월 15일자(제28호). 獨立新聞, 1919년 11월 20일자(제28호). - 179 -

渡日을 反對하는 者는 日本人에게 對한 宣傳을 不必要하게 보는지라 反對 함일지니 呂氏等을 攻孽하려 할진대 먼저 呂氏等에 獨立이라는 우리運動 의 主旨에 違反되는 무슨 言行의 證據가 必要할지라 하여 자기 意 見과 다르다고 해서 聲討한다든가 同志의 名譽를 손상하는 言辭를 弄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斷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同紙는 信賴하라 容恕하 라 라는 社說로 獨立운동 同志들끼리의 서로 믿고 너그러운 寬容의 태 도가 바람직한 일이라고 권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呂運亨 一行은 예정대로 日本首相 原敬을 비롯한 田中義一(陸相), 古 賀廉造(拓殖局長官) 등과 面談을 마치고 동년 12월 10일 다시 上海로 돌아 왔다. 同紙는 이내 1920년 1월 1일자(제34호)부터 崔謹愚의 呂運亨氏行渡 日記 를 여러 차례에 걸쳐 連載하여 東京에 있어서의 動靜을 자세히 報道하였 다. 國務總理 李東輝도 1919년 12월 29일자로 該一行이 獨立에 違反되 는 行動이 없음으로 呂運亨 一行의 前過를 特恕함을 一般國民에게 布告하노 라 는 布告 제2호를 공포하여 한때 크게 紛糾의 불씨로 되었던 문제에 終 止符를 찍었다. 이처럼 同紙의 역할은 獨立同志들간의 見解 내지 方法論의 差異로부터 오는 摩擦과 軋轢등을 解消시키는데도 많은 이바지를 했다. 17) 18) 19) 2. 목숨을 건 交通事務局員들의 活動 所在地인 上海 프랑스租界地에는 獨立新聞 외 에도 여러가지 群小신문과 雜誌등이 있었다. 이제 1919년으로부터 1923 년대에 나타난 것을 들어 보면 週刊紙로 新大韓報, 大韓獨立報, (그후 新生活 로 改題), 新韓靑年, 東亞青年, 倍達公論 등 의 雜誌 등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震壇, 天鼓, 四民報 등의 漢文紙誌가 나왔다. 그러므로 國務總理 李東輝는 1920년 1월 4일, 獨立 新聞 社長 李光洙 외 7명, 新大韓報 편집장 金枓奉 외 9명을 招待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7) 18) 19) 獨立新聞, 1919년 12월 2일자(제31호). 獨立新聞, 1919년 12월 25일자(제32호). 獨立新聞, 1920년 1월 10일자(제36호). - 180 -

獨立운동에 指導者 되기를 바란다는 격려사를 했다. 한편 동 9일에는 中國의 新聞記者들을 招待 한국의 獨立운동에 公 筆로 誠心賛助함을 致賀한 후 東洋平和를 위해서도 韓中 두 나라 국민은 서로 軍國主義와 侵略主義를 擊退하는데 突進해야 되겠다는 뜻의 연설을 하는 등 외국 言論기관과의 紐帶관계를 두텁게 하기도 했다. 한편 각 地方의 宣傳總辦이기도 한 安昌浩가 敵과 一切關係斷絕 勸告 文 3萬장, 官公吏退職 警告文 1萬장을 安東縣 光復軍營앞으로 발송한다 든가 또는 獨立新聞 을 국내 동포에게 보내는 일 같은 것은 密派되 는 人便과 怡隆洋行의 運送船편을 이용하였다. 국내로 발송한 獨立新 聞 의 경우 大韓民國臨時政府의 言論活動 많을 때는 2萬여장에 달했 다. 이처럼 정부의 公報 를 비롯한 각종 文書는 交通事務局 및 동支 局 등의 秘密遞傳網을 통해 전달, 배포되었고 獨立新聞, 新韓靑年 등도 이에 편승하여 발송되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의 行政 능력이 국내에서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먼저 각종 文書와 신문, 잡지 등이 국민들의 손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 중요한 임무를 執行하는 것이 交通總長의 所管事務이었고 그 行政기구로서는 첫 章에서 언 급되었듯이 臨時地方聯通制와 臨時地方交通事務局이 있어 物品을 비롯한 각 종 文書, 신문, 잡지들을 직접 전달, 배포하는 소임을 맡았다. 初代 交通總長 으로 申錫雨가 잠시 동안 취임한 후 이내 日本警察에 체포되어 국내로 押送 되었다. 2代 總長으로는 文昌範이 選出되었으나 취임치 않았고 이어 金徹(代 理) 南亨祐 孫貞道 李沰 金圭冕(代理) 등이 大任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交通 部의 委員으로서는 鮮于 爀 梁璿明.申國權 李範權 高 漢 尹愿三 李奎禎(揆廷) 金 甲 孫晋衡 金潽源 李泳賛 李鳳洙 林玄 등이었다. 국내의 交通局長 등은 본래부터 日帝의 눈을 피해 활동해야 되는 까닭으로 그 身邊에는 처음부터 여 兩新聞이 앞으로 더욱 20) 21) 22) 20) 21) 22) 前掲, 朝鮮民族運動年鑑, p. 87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3卷(東京 原書房, 1967) p. 457 前掲, 朝鮮民族運動年鑑, pp. 7 9. - 181 -

험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介意치 않고 그 任務를 自進 맡아 遂行 하다가 日本警察에 체포되어 목숨을 잃은 수많은 愛國志士들을 잊을 수가 없 겠다. 이를테면 安東交通事務局長 洪盛益이 新義州刑務所에서 慘殺된 것을 들 수가 있겠다. 洪은 同地 泰盛堂病院에 入院加療 중 日本의 앞잡이 金克 田의 密告로 同局 書記 黃大闢 張載舜 金基濬과 더불어 日本警察에 체포되어 慘變을 당했다. 한편 京城 交通局長 李元植도 서울 宗橋예배당內의 李明姬집 (吳華英 牧師부인)과 勝洞예배당 石炭 창고 속에 은익해 두었던 大韓民國 臨 時政府公報를 비롯한 獨立新聞, 新韓靑年 이 發覺되어 李起夏 李炳儀 와 더불어 日本警察에 체포되었다. 이는 上海로부터 고리작 2個에 獨立 新聞 4천장과 기타 文書, 잡지 등을 넣어 郵送된 것이었다. 또 慶南 河東 郡 출신의 朴齋雄은 上海에서 南亨祐 金徹 등 交通局總長 및 次長과 面談 후 忠南 交通局長 趙成眠, 忠北 交通局長 洪承學, 全南 交通局長 李得洙, 全北 交通局長 梁濟傳 등의 任命狀 및 獨立新聞 4장, 新韓靑年 2권을 갖 고 귀국활동 중 日帝에 체포되었다. 이렇듯 交通事務局관계로 체포되어 獄 苦를 치른 獨立志士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종 指示와 文書, 신문, 잡지 등이 국내 동포가 받아 읽을 수가 있었다. 당시 日帝는 이 러한 文書, 신문, 잡지를 가리켜 不穩文書 라 했다. 사실 交通事務局 관계자 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특파원, 통신원들이 日帝 監視網을 뚫고 국내로 들어 온 獨立新聞 은 이 역시 日本 警察의 査察의 눈을 피해 몰래 읽어야만 되 었다. 왜냐 하면 獨立新聞 을 가지고만 있어서도 警察에 連行되어 날카로 운 審問과 拷問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獨立新聞 을 번화한 거리에서 撒布하고 도망하거나 (平壤 寺洞派出所 앞), 그렇지 않으면 정면 으로 당당히 警察官駐在所를 襲擊하여 이를 燒却하고 獨立軍歌를 부르면서 獨立新聞 를 역시 撒布하고 철수하는(1922년 平北 湖州郡 外南面 大舘洞 위 성을 23) 24) 25) 26) 23) 24) 25) 26) 同上, p. 68 東亞日報, 1920년 8월 1일자(제121호). 東亞日報, 1920년 6월 20일자(제79호). 東亞日報, 1920년 5월 22일자(제50호). - 182 -

출동한 大韓義軍府隊員의 경우) 따위의 手法도 사용되었다. 이렇듯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言論정책 및 독립운동에 能動的으로 이바지 하는 獨立新聞 을 국내에서 받아 읽기가 어려웠으나 發行地인 上海에서 도 역시 日本總領事館警察의 監視와 干渉으로 항상 威脅을 받아야만 했다. 日本은 임시정부의 閣員 전원을 체포할 工作까지 하고 있었으므로 그 弘報 기관으로 본 獨立新聞社를 破壤하려던 것은 그들로서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 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그 閣員 및 獨立新聞社는 모두 프랑스 租界地에 있었기 때문에 日本總領事舘警察로서는 손이 닫지않았다. 이리하 여 우선 李始榮 孫貞道 呂運亨 등 3명을 政治犯이 아닌 단순한 普通犯이라 속여 프랑스總領事의 確認書를 얻어 프랑스警察의 협조아래 令狀이 집행되 었다. 마침 본인들은 不在하였고 그 자리에 있었던 申錫雨 尹愿三 양인이 체포되어 국내로 押送되고 말았다. 이는 1919년 8월 초의 일이었다. 그후 1920년 6월 9일 프랑스 工務局은 突然, 三印書舘에 대해 封鎻令을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獨立新聞 의 인쇄 발행이 不可能하게 되었다. 이 때 外交界에 널리 알려졌던 安昌浩 呂運亨은 프랑스領事를 찾아 不當性 과 그 철폐를 要求하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側은 該新聞은 曾年 前領事時 에 廢鎻한 것인대日本領事가 該社址를 持來하야 曰 如何한 理由로 繼刊케 하나 함으로 不得己 廢鎻시키게 되었다 고 대답하였다. 프랑스側은 三一 印書舘이 파괴적인 過激主義書籍 등을 印刊하고 있다는 日本側의 奸計에 떨어졌던 것이다. 日本으로서는 獨立新聞 을 發行不可能케 하기 위해 同紙를 찍어내는 三一印書舘을 閉鎻시키는 것이 그 捷徑이라 보았기 때문 이다. 이리하여 同紙는 6월 24일자 제86호를 내놓은 후 일단 停刊으로 들 어갔다. 다시 復刊 하기까지에는 6개월이란 시간을 허비했는데 그것은 프 랑스 당국과의 三一印書舘封鎻解除에 대한 교섭도 있었으나 그 보다도 財 에27) 28) 29) 27) 28) 29) 金承學編著, 獨立運動史 p. 349 獨立文化社, 1964 前揭, 독립운동사자료집, 9권, p. 85 島山安昌浩日記, 1920년 6월 24일條 - 183 -

政的인 궁핍 때문 에 더욱 時日이 걸렸음이 또한 사실이다. 同紙의 계속 되는 財政難은 독립운동을 뒷받침하는 그것도 外地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에 購讀料의 回收는 거의 不可能하였다. 따라서 유지 및 열성자의 義損金과 부녀자들의 貴金屬品 같은 寄附 등, 그리고 임시정부로부터 약간의 보조금 을 얻어 同紙는 계속 발행되었다. 이러한 財政的인 脆弱性을 지니고 있으 면서도 自給自足을 위한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 구체적인 事例로서 三一 印書舘이란 이름아래 신문만이 아니라 餘他 印刷物의 注文을 받았으며 또 한편 自體 出版에도 손을 뻗쳤다. 즉 獨立叢書로서 다니엘 페퍼 著, 金輿濟 譯 韓國獨立運動의 眞相 을 비롯하여 李光洙 著 獨立新聞論評集 그 리고 金秉祚 編著 大韓獨立運動史略 등을 발간하였다. 다시 다니엘 페 퍼의 글을 李英烈 金弘叙 共譯의 純漢文으로 韓國眞相 이라 하여 중국 민중들에게도 널리 판매 공포하였다. 그리고 朴殷植 編述의 李舜臣傳 은 순한글版으로 발간하여 애국심과 자부심을 북 돋는데 힘썼다. 특히 金承學은 白狂雲(本名 蔡 燦), 張基礎 등과 더불어 出資를 확대하 여 1922년 7월 20일에 中文版의 獨立新聞 을 따로 발행하여 中國 各 省의 官公署, 學校, 단체 등에 반포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널리 선전하 기도 했다. 이에는 朴殷植이 주동되어 中國人記者 張黑地도 활약하였 다. 이 즈음 同紙 국문版의 主筆에는 파리에서 돌아온 尹海가 취임하여 편집장 車利錫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5년에는 社長에 朴殷植을 맞아 드렸고 主筆 金樂山(一名, 賓光國), 經理에 崔天浩 등이 담당하다가 얼마 아니가서 제198호를 마지막으로 停刊되었다. 그후 임시정부가 重慶으로 옮기자 1943년 6월 1일 中文版 獨立新聞 을 또다시 復刊했다. 이것이 重慶版 제1호였고 1945년 7월 20일자 제7호가 마지막호가 되었다. 그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閣員들이 光復한 祖國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30) 31) 32) 30) 31) 32) 獨立新聞, 1921년 10월 5일자, 社說(제 111호). 前揭, 韓國獨立運動史, p. 294 前掲, 독립운동자료집 8권, p. 11-1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