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國史館論叢 第83輯 구면을 통하고 실오리로 짜듯 덮였으며 금, 은, 석탄, 철 등의 개발과 각종 공작기계 등의 발명으로 인민들의 일상생활에 편리를 주는 허다한 사실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러나, 이러기 위한 세계 각국에서 실시하는 정치의 요점을 찾아본다면 첫째 위생이요 둘째 농상이요 셋째는 도로이다.26) 이는 세계의 변화가 과학기술에 의해 주도되고 인간의 삶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정치가 국민의 생활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과학 기술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며, 이와 관련시켜 위생교육의 필요성 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일찌기 어떤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유람하고 돌아가 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는데 그 사람은 말하기를 조선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민가가 희소하며 사람들이 비록 강하고 포부가 있으나 사람과 가축의 똥 오줌이 길가에 가득 차 있는 것이 기막히더라라고 하였다. 어찌 차마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슬프다 날이 서늘하여지고 전염병이 없어지면 다시 즐거워하며 지난 일을 잊어버리니 가히 어리석고 불쌍하다 할 것이다. 현재 구미 각국 은 배우는 바 기술의 과목이 심히 많으며 그중 의학으로서 첫째를 삼으니 인민의 생명에 관 계되는 까닭이다27) 우리 나라가 위생 상태가 뒤떨어져 외국인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면 서 과학시술교육 특히 위생상태를 향상기키기 위한 의학교육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 다. 나는 또한 듣기를 일본은 유신 이후에 개혁을 잘하여 도로공사에 많은 힘을 기울였기 때 문에 그 성과가 매우 크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은 실로 이 사업부터 시작해야 한 다.28) 일본이 추진한 도로공사의 성과가 크게 나타난 것을 보아 우리도 도로 사업을 추진하 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기술교육이 부국강병의 과정에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김옥균은 구체적 교육제도나 교육 내용에 대한 언급은 하 고 있지 않지만 治道를 위한 전제조건과 그 수반하는 여러 문제들이 교육과 긴밀하게 연 26) 當今宇內氣運丕變 萬國交通輪舶交駛洋面 電線織羅全毬也 如開採金銀煉炭鐵工作器械等 一切民 生日用便利之事 殆指不勝屆而 求其各國切要之政術則 一曰衛生 二曰農桑 三曰道路 27) 余嘗聞外人之遊邦者歸必語人曰 朝鮮山川雖佳人衆小 富强猝雖圖也 人畜之屎溺充塞于道路 此可 畏 是豈忍聞者 耶於乎 天氣銷肅 染症少息 人皆洋洋 自喜習而忘焉 可謂甚愚 亦可衰矣 現今 歐米 各邦技術之科目甚多 惟醫置之第一等 以爲生民之命所關係也 28) 余又聞日本自變法以來 更張萬端惟治道之功 收効爲大 我富强之策 實肇於此
開化勢力의 敎育思想 - 57 - 계되는 것으로서, 과학기술교육과 실용교육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을 알 수 있다. 3) 池運永事件糾彈上疏文에 나타난 敎育思想 이 글은 김옥균이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인 1886 년 6월에 작성한 것이다. 이 때 본국에서 김옥균을 살해하기 위하여 池運永(統理軍國事 務衙門 主事)이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김옥균 살해를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행적 이 폭로되었다. 이에 김옥균은 국왕에게 자신을 암살하려는데 대해 항의하는 상소문을 작 성하였다.29) 이 글은 1886년 7월 9일 자에 東京日日新聞에 게재되었다. 상소문은 원래 한문으로 작성되었을 것이지만 한문을 혼용한 일어로 발표되었고, 김옥균전집 에는 국한 문으로 번역되어 수록되었다.30) 김옥균은 이 글에서 문벌 폐지와 민권 신장의 개혁 필요, 이를 위해 인민의 교육이 필 요함을 주장, 서양 각국과 교섭하여 산업과 기술을 발달시키고 군대를 양성하여 국가의 부강을 이룩하자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今에 天下의 形勢가 日로 變하고 日로 換하여 瞬時라도 安心키 不可하오니 全羅道三島의 巨文島는 이미 英國의 奪한 바 되어 前事의 覆轍이 玆에 在하니 陛下는 써 如何타 하나이 까? 在朝의 諸臣은 果然 何計가 있나이까? 今日의 朝鮮에서 英國의 名을 知하는 者가 果然 幾人이나 되나이까? 設令 在朝의 諸臣이라도 英國이 何處에 在하냐 問하면 茫然하여 答키 不能한자가 往往 皆然하오니 此를 譬하면 或物이 來하여 我나의 肢體를 咬하여도 그 苦痛을 感치 못할 뿐 아니라 何物이 我를 咬하는지도 不知함과 如한바 그 國家의 存亡을 論함이 痴 人이 夢을 說함과 如함은 足 히 怪事라 할 것이 없나이다. 김옥균은 세상이 변하여도 이를 알지 못하고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도 못하는 조정의 대신들을 거느리고 어찌하겠는가를 국왕에게 질문하고 있다. 마치 벌레가 물어도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무엇이 나를 무는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이는 국가와 정부의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조선이 하루빨리 서양에 대 한 지식과 대외정세의 변동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어야 함을 지적 하고 있다. 이제 朝鮮을 爲하여 謨하건대 淸國은 本來 足히 恃치 못할 것이오 日本도 亦然하여 此 二 29)김옥균의 상소문은 거문도 사건에 대한 상소문 으로 불리우기도 하다. 이는 상소문 안에 1885 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일을 지적하고 이에 대비한 조선의 개혁방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 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소문의 전체 내용으로 보아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지운영을 파견한데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의미가 강하다. 보고에서는 아세아문화사 간행 김옥균전집 에 있는 대 로 지운영사건규탄상소문 이라고 하였다. 30)李光麟, 김옥균전집 해제
- 58 國史館論叢 第83輯 國은 各其 自家維持에 餘力이 無한 모양이온대 何暇에 他國을 扶助함을 得하리이까. 近年에 淸國의 安南, 琉球를 他國이 占領하여도 淸國이 敢히 一言의 抵抗을 試치 못하였나이다. 그 런데 我邦으로 하여금 高枕安臥를 得케 하리라 云함은 實로 可笑할만한 事이오. 日本은 前 年來로 何等의 思考인지 一時 熱心으로 我邦의 國事에 干涉하더니 一變의 後로는 忽然 此를 棄하여 顧치 아니할 모양이오니 또한 足히 恃할 수 업삽나이다. 그러하온즉 장차 如何히 하 여야 可하오리까? 오직 外로는 널리 歐美各國과 信義로써 親交하고 內로는 政略을 改革하여 愚昧의 人民을 敎하되 文明의 道로써 하고, 商業을 興起하여 財政을 整理하고 또 兵을 養함 도 難事가 아니오니 果然 能히 斯와 如히 하면 英國은 巨文島를 還附할 것이오 其他 또한 侵略의 念을 絶함에 至하리이다. 김옥균은 당시 대외적 정세를 파악하면서 청국이나 일본이 자국의 사정으로 우리 나라 를 도와줄 수 없으므로 누구도 믿지 말고 오직 자력으로 나라의 위기를 타개할 것을 주 장하였다. 이는 주변 정세가 시기적으로 자주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임을 말하는 것 으로서 이에 대비하여 추진할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방법은 구미각국과의 친교, 우매 한 국민을 문명으로의 교육, 상업의 발전과 재정의 정리, 군사의 양성 등으로 이러한 정 책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으로 나아가면 어떤 나라도 우리를 침략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김옥균은 국민의 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우매한 국민을 문 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그가 교육을 국민을 계몽시키는 수단으로 보 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실업교육과 외교를 위한 외국어교육 및 군사교육을 필요 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민을 우매한 존재로 인식하고 이들을 계몽시키는 일이 개혁의 한 방향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今에 我邦의 人口가 2千萬에 過하고 物産과 如한 것은 設令 人造의 精品은 無할지라도 天 産의 物品에 至하여서는 此를 日本 및 淸國의 兩國에 比하여 遙히 優한 者가 多은하온데 就 中 五金各鑛은 可히 勝數치 못하오니 斯와 如한 固有의 富한 財源을 擧하여 他國에 委賴하 고자 함은 臣이 悲를 금치 못하는 바로소이다. 臣이 多年 見聞에 據하여 陛下께 奏上한바 有하온데 陛下는 此를 記憶하시나이까. 그 뜻은 今日 我邦 所謂 兩班을 芟除함에 있나이다. 我邦 中古以前 國運이 隆盛할 時에는 一切의 器械物産이 東洋二國에 冠하였는데 今에 總히 廢絶에 屬하여 다시 그 痕迹도 無함은 他故아니옵고 兩班의 跋扈專橫에 因하여 그렇게 되었 나이다. 김옥균의 애국주의사상은 그의 혁명활동의 기반이었다. 국가의 발전과 인민의 이익에 대한 염원과 조국 강토에 대한 사랑은 낙후된 사회제도에 대한 자각과 결부되었다. 물산 과 재원이 충분하데 이를 두고 다른 나라에 의지하려 함을 크게 슬퍼하는 마음을 나타내 고 있다. 과거의 문화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앞섰던 발전을 하기 위하여 그는 양반제도의 혁파에서 그 핵심을 찾고 있다. 국가가 오늘날 이렇게 어려워지고 백성의 삶이 곤란하게
開化勢力의 敎育思想 - 59 - 된 것이 양반의 횡포와 잘못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이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다. 양반 출신이면서도 양반제도의 혁파를 주장하는 것은 김옥균의 애국주의사상과 함께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그의 개혁사상을 나타내는 주장이다. 方今 世界가 商業을 主로 하여 서로 生業의 多를 競할 時에 當하여 兩班을 除하여 그 弊 源을 盡할 事를 務치 아니하면 國家의 廢亡을 期待할 뿐이오니 陛下 幸히 此를 猛省하사 速 히 無識無能, 守舊頑陋의 大臣 輔國을 黜하여 門閥을 廢하고 人才를 選하여 中央集權의 基 礎를 確立하여 人民의 信用을 收하고 널리 學校를 設하여 人智를 開發하고 外國의 宗敎를 誘入하여 敎化에 助함과 如함도 亦一方便이라 하노이다. 상업의 발달이 산업의 중심을 이루는 시대의 변화에서 상업을 천시하던 양반의 존재는 국가 발전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문벌을 폐하고 인재를 선발하자는 것은 그 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혁정강에도 들어 있던 중요한 내용이다. 정치를 바로하여 인 민의 신뢰를 확립하는 것은 물론 특히 학교를 설립하여 국민의 지식을 키우며, 외국의 종 교를 수용하여 이를 통해 국민 교화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봉건적 사회 제도의 타파와 인재양성을 위한 학교설립을 강조하며, 국민교화의 수단으로 외래 종교의 수용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종래의 유교적 도덕주의에서 탈피하는 커다란 사상적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낡은 유교적 전통과 권위를 무시하고 서양의 종교(여기서 의 외국 종교는 기독교를 뜻하는 것으로 보임)를 수용하여 국민을 교화시키려는 혁신적 내지 계몽적 입장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김옥균의 교육사상은 국가발전을 위해 교육이 인재양성의 기본적 수단이며, 국 민의 계몽을 위한 교육으로서 국가가 학교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으로 교육 정책을 추진 할 것을 의미한다. 김옥균은 또한, 국민은 교화되어야 할 대상으로서 보았으며 이와 함께 국민을 교화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기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하여 이를 현실정치에 구현하기 위한 욕구를 가지 고 있었다. 그 자신 직접 일본에 건너가 시찰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과거에 조선과 같이 낙후하였었고 미국의 침략을 당한 조건하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서구의 문명을 도입하였 으며, 어떠한 절차로 개혁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 기타 모든 부분에 걸쳐 구체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빈약함이 일반 국민의 기술적 교육이 없는 것과 상류층 인사들의 신 문화에 대한 무지와 몰각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며,31) 이를 해결하고 나라를 구 하기 위하여는 청년층을 교육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보았다. 당시 국내에서는 근대 과학 31) 김도태, 서재필박사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 60 - 國史館論叢 第83輯 기술 지식이 미약하고 해외에서 선진 과학 기술을 학습해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 하여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전에도 자신의 경비를 들여 해외에 판견한 유학생이 수십명이 되었으며, 1883년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본국 청년들의 유학을 열심히 주선하였다. 또한 그는 외국의 기술을 수용하기 위해 직접 외국인을 본국에 초빙하여 국내 공인들 에게 학습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의견이 박영효가 귀국할 때 일본인 신문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한성순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김옥균의 유학생 파견은 자주국 방을 위하여 청년들을 외국의 사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도 미쳤으며, 그들을 활용하여 국내에 사관학교를 세우려고도 계획하였다. 3. 朴泳孝의 敎育思想( 開化上疏文 을 중심으로)32) 박영효는 김옥균과 함께 개화세력의 증심인물일 뿐만 아니라 일본 망명이 끝난 후 1894년 말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귀국하여 金弘集과 聯立政權을 구성하고 동료 인 유길준, 徐光範과 함께 1895년의 개혁을 이끌어간 인물이다. 박영효는 정변의 가장 가까운 동지인 김옥균이 끝까지 정부와 타협을 이루지 못하고 1894년 상해에서 암살당하 여 그의 혁명적 개혁 사상이 꿈으로 사라져 갔지만 박영효는 그의 개혁 사상을 실제로 정치 일선에서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던 행운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1895년의 개 혁에서 가장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남긴 근대교육개혁은 그가 政局을 주도하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洪範14條 를 비롯하여 敎育立國詔書 와 뒤를 이은 각급 근대학교의 설립절차가 역시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특히, 근대교육개혁이 그의 주도하에 전개되었다는 면에서 그의 교육사상은 개화세력 의 교육사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단서가 될 것으로 생각되며, 실제로 교육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 내용이 담긴 자료를 남긴 사람이 박영효이다. 그가 국가의 근대적 개혁을 주장하는 내용 가운데 교육개혁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바로 開化上疏文 이다. 1) 開化上疎文의 작성 1884년 갑신정변의 주도자 가운데 한사람인 박영효가 정변 실패 후 그의 동지들과 일 본에 망명하고 있던 중인 1888년 2월 24일(음력 1월 13일)에 작성한 것이다. 근대민족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 변혁운동의 중심인물인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세력의 사상 을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이 상소문은 한국의 개화 32) 박영효의 교육 사상은 拙稿 朴泳孝의 歷史敎育觀 - 開化上疏文中 敎育改革案의 내용을 중심 으로-, 아시아 문화 12,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년)의 내용 가운데 많은 부 분을 轉載하였다.
開化勢力의 敎育思想 - 61 - 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것으로서, 입헌군주제와 자유민권과 문명 개화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한국 근대화의 사상적 배경과 갑신정변의 개혁 사상을 이해하 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박영효의 상소문에서 우리는 근대적 교육개혁이 구체화되기 이전에 개화 세력이 품고 있었던 새로운 교육, 근대민족교육에 대한 構想을 엿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한 국 근대민족교육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근대민족국가를 향한 개혁운동의 전개는 이를 뒷밪침할 수 있는 민족의식의 고양을 필 요로 하였으며, 이는 自國本位의 역사의식을 生成시켰다. 개혁의 과정에서 근대국가의 건 설을 위하여 새로운 서구문물의 적극적 수용과 민족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방도로 한 국 본위의 새로운 교육이 성립 발전하였고, 이는 한국근대교육이 민족교육의 성격을 내포 하게 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상소문은 모두 13,100字에 달하는 것으로 그 내용은 前文과 本文으로 구성되었는데 前文은 상소문을 작성하게 된 동기와 이유를 들고 있어 序文의 성격과 같으며, 本文은 모 두 8개 항목으로 이루어졌는데 처음의 항목에서는 세계의 정세를 논하고 나라의 갈길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다음의 7개 항목은 법률, 경제, 보건, 군사, 교육 문화, 정치, 종교 등 7개의 분야를 하나의 주제로 하고 해당분야의 개혁방안을 세부항목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분야별로 제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뒤의 숫자는 세부항목을 나타낸 것이다. 一曰 宇內之形勢 三曰 經濟以潤民國-43 五曰 治武備保民護國-10 七曰 定政治使民國有定-15 二曰 興法紀安民國-11 四曰 養生以健殖人民-19 六曰 敎民才德文藝以治本-10 八曰 使民得當分之自由以養元氣-3 2) 敎育改革案의 內容 前文 박영효의 교육개혁안은 그가 개화상소문에서 제시한 개혁안 가운데 6번 째로 敎民才 德文藝以治本 의 제목으로 제시되어 있으며, 구체적으로 세부항목은 10개가 있다. 박영 효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교육을 治本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治本이라는 표현을 다른 분야의 개혁안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교육 에서 이를 사용한 것은 교육개혁이 당시 한국의 근대적 개혁에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파 악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먼저 교육개혁안의 앞 부분에 제시된 前文의 내용을 통하여 박영효의 교육관에 대한
- 62 - 國史館論叢 第83輯 전체적인 윤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문명이 발달하는 방향을 가르키는 것이다. 즉, 교육을 자석에 비유하여 문명을 일으키는 길을 가르켜 주는 것이 마치 자석이 방 향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고 하여 문명이 발달하는데 있어서 교육이 중요한 도구가 된다 고 보고 있으며, 이와 함께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이며 필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33)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국가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교육 교육을 받지 못하여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선악과 시비의 구별을 잘하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만을 차려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무엇이 이로운 가를 판단하지 못하며, 죄를 지어 형벌을 받는 사람이라도 이들을 교육을 통해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실용주의 교육 그는 과거의 교육이 갖고 있는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종래 經典이나 諸子百家 書를 읽어 암기하거나 文華를 일삼는 교육은 백성과 나라를 잘못 이끌어 나라를 쇠퇴하 게 한 근원으로 파악하고, 末을 버리고 本을 취하여 실용을 앞세우는 교육은 동서양을 막 론하고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그는 서양의 실용적 학문을 格物窮理之學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교육에서 필요 한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박영효의 교육개혁안의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34) 국가 주도의 교육 정부의 교육 문화정책을 비판하면서, 학교를 많이 세워 교육을 국가적으로 장려할 것 을 주장하였다. 조상들이 이루어 온 문화 유산과 교육활동을 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어 이 를 계승하지 못하고 오늘날 전해오는 것이 없으니, 정부에서 하여야 할 급한 일은 학교 를 크게 이르켜, 왕자로부터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학교에 나아가 교육을 받 게 함으로써 학문의 중흥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부의 교육 정책은 과학 기술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신분의 구별없이 누구나 교육을 받는 國民敎育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35) 33) 敎者猶磁石也 人在大洋或沙漠之中雖不能辨南北 然有磁石卽可辨之 故磁石卽通四方就文明之要 具也 人生而無知其所以知者敎育也 子生卽父母先敎之而導之 開其知識 而次入學校以成其學 故設 校之事 天下之急務也 要務也 34) 然及於近世敎化陵夷 風修頹敗 不知格物致知之本意 而但以玩弄文華尋章摘句爲要 若讀誦四書 三經及諸子百家之書 而能作文章 則雖愚癡之腐儒 乃稱大學士 而列於上大夫 以誤民國 此卽亞洲 諸邦衰頹之源也 若棄其末取其本 而自格物窮理之學 至於平天下之術 則與當今歐美方盛之學同也 故臣愚謂學者 勿論東西洋 先其實用而後其文華 夫實用如橘文華如香 香因而生 豈有橘因香而生哉 故棄其實 而取其華 則格物窮理修身治國之學 一時幷廢 乃致浮華之風也. 35) 臣案古事 新羅設博物館於慶州 堂宇宏暢 極其壯麗 列波斯印度漢唐日本及本國之 古今珍奇異寶
開化勢力의 敎育思想 - 63 - 자유로운 종교정책 정부의 종교정책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면서 儒敎의 부흥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하고 국민의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주장하였다.36) 즉, 종교라는 것은 인민들이 의지하고 교화의 본이 되는 것으로서 세계 각국이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가 성할 때는 그 나라도 성하였는데 우리 나라도 유교가 어느정도 성하였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 우리 나 라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유교와 불교가 다 폐하여져서 나라의 힘이 약해졌다는 것 이다. 우리 나라가 다시 부강하려면 우리 나라의 종교, 즉 유교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하 며, 종교는 국민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고 하면서 과거에 종교에 의 한 싸움으로 인심이 동요되고 나라와 개인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제창하였는데 여기서의 종교는 유교를 말하는 것으로 현대적 의미 의 종교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종교 정책에 있어서 정부의 불간섭정책을 요구 하고 있다. 교육개혁안 이상에서 박영효 상소문의 前文을 통해서 그의 교육에 관한 생각의 일단을 살펴보았 다. 박영효는 교육을 治本 으로 인식하면서 교육이 문명을 발달시키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 하며 국가 발전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실용주의 교육을 강조하 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국민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학교를 세우 는 일이 현재로서 국가가 할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敎化 에는 전통의 儒敎를 부흥시키는 것이 나라의 힘을 이르키는 방법이기도 하며, 정부는 이 에 간섭하지 말고 국민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는 불간섭정책을 제시하였다. 또한, 교육을 통하여 국민의 수준이 높아지고 국민 스스로 국가 발전에 참여하게 한다 盛國中之美 至]於壬辰遂爲灰塵全無痕跡 又敎民以修身窮理天文地理 法律醫藥算術音樂等學 及 漢蒙古滿洲日本及印度等諸文語之學 以後發明諸物 然至今日形影具絶 或有己明無其實 此皆因政 府不獎勵文學技術 以開窮理發明之路 反有妨碍之之政 故雖有己明之理 不能益明之 反失己明之理 矣 可不惜哉 今日之急務 大興學校 而迎博學達理之士 以敎國人 上春宮殿下 以之於庶人之子弟 使就校受學 以明天地無窮之理 則文德才藝燦然復盛也 36) 宗敎者人民之所依 而敎化之本也 故宗敎衰則國衰 宗敎盛則國盛 昔儒敎之盛 漢土致强盛 佛敎之 盛 印度及東洋諸部致强盛 回回敎之盛 西域土耳古等諸部强盛 今天主耶蘇敎之盛 歐美諸邦最强盛 我朝鮮儒敎之敎 曾有小盛之時 然至近日儒佛俱廢國勢浸弱 豈不寒心嘆息哉 嗚呼 使儒敎復熾以修 文德 則國勢亦因而之復盛 可期而待焉 凡宗敎者 任民自由信奉 而政府不可關涉者也 自古以來 以宗敎之爭論 動搖人心滅國害命者 不可承數 可以鑑也
- 64 - 國史館論叢 第83輯 고 함으로써 전통시대의 교육관과 국민관을 전면으로 수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박영효의 주장은 일본의 대표적 文明開化論者인 福澤諭吉의 영향을 상당 부분 받은 것으로 보인 다.37) 상소문의 전체 내용을 보면 福澤諭吉이 지은 西洋事情 이나 文明論之槪略 등과 많 은 관련이 있으며, 특히 西洋事情 의 내용은 상소문 곳곳에서 그 흔적이 있을뿐 아니라 표현마저 같게 인용되고 있기도 하다. 상소문 全文 가운데서 약 4분의 1 정도가 福澤諭 吉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정되는 부분이다.38) 그러나 福澤諭吉이 전통 유교사상을 부정하고 있으나 박영효는 유교사상을 확대 해석한 바탕 위에 서구의 근대 사상을 파악하려고 했다는 점이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이 다. 이는 앞에서 언급된 儒敎에 관한 정부 정책을 건의하는 속에서 잘 알 수 있다. 박영효는 한국의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현실적인 한국 사회의 낙후성을 극복하려는 과 정에서 서구의 사상과 사회제도를 수용하려는 變法的인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영효 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의 서구화가 아니라 전통의 유교적 사회 문화를 부인하 지 않으면서 현실 문제를 타개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즉, 박영효는 한국의 전통문 화를 바탕으로 근대적인 자주국가로의 개혁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박영효의 상소문에서 제시한 敎民才德文藝以治本 의 개혁안에서 10개의 細部項目은 다 음과 같다. 一 設小中學校 使男女六歲以上 皆就校受學事 一 設壯年校 以漢文 或以諺文 譯政治 財政 內外法律 歷史地理 及算術 理化學大意等書 敎官 人之少壯者(此似湖堂古事而其益必大也) 或徵壯年之士于八道以敎之 待其成業 以科擧之法試 之 而擇用於文官事 一 先敎人民以國史及國語國文事(不敎本國之歷史 文章而但敎淸國之歷史 文章故人民以淸本而重 之 至有不知自國之典故者 此可謂捨本取末也) 一 雇外國人 敎人民以法律 財政 政治 醫術 窮理及諸才藝事 一 鑄活字 造紙 而多設印板所 以繁富書籍事(人欲學 而無書籍 卽不能學 故文明之國 書籍殷 富臣之 所大羨於日本者 紙價賤 而活字多印刷便 而書籍殷富 學校多 而學生衆也) 一 設博物館 以廣人民之見識事 一 許人民 或使有識者 時時聚衆 演說世事 以開固陋事 一 盛興東西洋諸邦之語學 以便交親事 37) 실제로 박영효는 1882년말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을 당시 21세의 혈기방장한 청년 지식 인으로서, 일본에서 가장 대표적인 서양통이며 개화주의자로서 신문사를 경영하고 대학을 설 립하였으며 개화에 관한 저서를 내고 있던 福澤諭吉에게서 많은 기대를 하였을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박영효의 개혁안에 하나로 신문을 발행할 것을 주장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 니었다. 38) 靑木功一, 朝鮮開化思想と福澤諭吉の著作, 朝鮮學報 52, 1969.
開化勢力의 敎育思想 - 65 一 定規則 許人民設新聞局 而印賣事(新聞者 評議朝廷之事 及公告官命 官吏進退 市街風說外 國形勢 學藝盛衰 耕作豊凶 物價高低 交易盛衰 民間苦樂 死生存亡 異事珍談 凡人耳目之所 新者 逐一記載 或附圖畵 無不鮮明 其他人人賴之 廣告凡百之事 大爲便利 故雖閉居一室 不 見戶外 或居萬里殊域 不得鄕信 而一見新聞 則瞭然知世間之情 恰如現接其事物 故使人民博 聞見 明事情者莫過 於此 是以方今歐美諸邦 以新聞局之多少 較國之文明與否云) 一 勿論其敎 或可黙許不問 任民自由 然姑不可許建築堂宇 以惹起禍亂事 위의 10개 세부 항목의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하여 그 순서대로 열거하면 소 중학교의 설립으로 의무교육 실시 國史와 國文의 교육 書籍의 출판 계몽강연회 개최 신문의 발행 고등교육의 실시 외국인을 고빙하여 신학문 교육 박물관의 설치 외국어의 학습과 교류 信敎의 자유 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내용 가운데서 박영효가 영향을 받은 福澤諭吉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1 번, 2번, 6번, 7번, 9번, 10번 등 여섯 항목이 해당되고 다른 3번, 4번, 5번, 8번 등은 박영효가 독자적으로 제시한 것이다.39) 박영효가 독자적으로 제시한 것은 그를 포함한 한국의 개화파가 근대적 개혁을 추진함 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였던 가장 필수적인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 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는 또한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과 어떻게 다른 역 사적 상황에 처하여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루 빨리 개화를 이룩하기 위 해 신학문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인을 직접 고빙하는 것이 빠른 길이었으며, 선진 학 문과 지식을 넓히기 위한 내외의 서적을 출판하는 일이 필요하였고, 많은 나라와 교류하 고 신학문을 수용하기 위해 외국어의 교육은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특히 교육개혁안에서 인민에게 國史와 國語 國文의 교육을 먼저 실시할 것을 제시한 것 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는 당시에 신문물의 수용과 근대적 제도의 실시가 중 요한 일이겠지만 민족의 자각과 정신적 각성을 통한 부국강병의 정신적 기반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는 박영효 내지 개화세력의 애국 사상과 관련있는 것일 것이다. 이로 보면 개화세력의 교육사상에서 애국주의적 교육사상 은 그들이 개화운동을 전개하는 목표와 연결시켜 보았을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으로 파악된다. 39) 靑木功一, 앞의 논문.
- 66 - 國史館論叢 第83輯 박영효는 국사와 국어를 먼저 인민에게 교육시켜야 하는 이유를 본국의 역사와 문장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청국의 역사와 문장을 가르치기 때문에 청국을 本으로 하고 그를 중 히 여기며 自國의 典故를 알고 있지 않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本을 버리고 末을 취하 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종래 중국을 중시하는 학문 세계와 정신적 풍토를 벗어나서 자국을 중심으로 하 는 문화 전통을 확립하려는 것으로서, 조선 후기 이래의 實學思想의 自主的 思想의 정신 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는 국사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교육개혁안에서뿐만이 아니라 상소문의 다른 개 혁안에서도 주장하고 있다. 즉, 교육개혁안에 앞에 군사적 개혁안인 治武備 保民護國 의 前文에서 삼국시대 수당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잇었던 것은 국민정신이 통일되어 있었 기 때문이며,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싸움에서 패한 것은 군인과 백성들이 치욕 을 잊고 있었던 것이 그 이유라고 지적하면서,40) 뒤이어 인민에게 國史를 가르침이 국 가의 急務라고 하고 인민에게 국사를 배우게 하여 역사상에 있었던 榮과 辱의 사실을 마 음 속에 깊이 새겨서 그 시비를 판별하여, 과거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긍지를 가지게 하며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서는 다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함으로써 나라의 부강을 도모한다는 것 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41) 이러한 박영효의 교육관은 당 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국민이 일치 단결하여 자주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부국강병의 정 신적 기반을 國史敎育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제국주의 침략에서 국가의 자주권을 유지하여야 하는 민족의 대 응이 병행되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시기에 민족의 정신적 기반으로 민족 의식이 성장하고 민족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고 하는 것이 한국근대사에 대한 인식이다. 바로 그 민족의식의 바탕으로 강조된 것이 국사를 국민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국사교육에 대한 인식이 정치 지도층에서 이미 제기되고 있었으며, 바로 그러한 의식을 간직한 인사들이 앞으로 근대적 정치 개혁을 담당하면서 구체적인 교육활동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는 1895년 이후 한국 근대 민족 교육이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을 이 루었다고 하겠다. 40) 往昔三國之盛時 以高句麗之偏少孤軍 破隋百萬之衆 而蓋蘇文亦以二萬之兵 破唐數十萬之衆 皆 因於心一之故也 至高麗與契丹戰一勝一敗 終喪鴨綠江以西之地 而不克回復 且至本朝見敗於壬辰 納降於丙子 將相軍民皆忘其恥辱故也 41) 臣愚謂方今之急務 莫先於敎人民以國史 使之知本國得勝之榮 致敗之辱 而銘之肝肺則能辨其是非 而恥心乃復 以致剛勇 始與之同事也
開化勢力의 敎育思想 4. 敎育立國詔書의 敎育思想 - 67 - 박영효의 역사교육관, 즉 국사를 국민에게 먼저 교육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1895년 2 월 2일에 발표된 敎育立國詔書 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總理大臣 金弘集, 內務大臣 朴泳 孝, 學務大臣 朴正陽이 連名으로 副署한 詔勅, 敎育에 關한 件 42)은 교육이 국가 발전 의 기반이 됨과, 교육이 국가 보존의 긴요한 방법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1) 敎育立國詔書의 내용(1895년) 교육입국조서에서 교육을 국가발전의 기본이 되며 국가 보존의 긴요한 방법이라고 한 것은 그동안 전통사회에서 교육이 가지고 있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 며, 자주 독립의 주요 수단으로 인식되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교육이 당면한 국 가 발전과 왕실의 안전에 가장 긴요한 것이므로 학교를 널리 세우고 국민이 교육을 받음 으로써 외국에 의해 나라가 받는 억울함도 막고 모욕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敎育立國 의 명제는 박영효가 상소문에서 교육을 治本 이라고 규정한 것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박영효의 교육개혁안의 정신이 그대로 교육입국조서에서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입국조서의 내용 전문을 현대문으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짐이 생각하건대 조종께서 업을 시작하시고 통을 이으사 이제 504년이 지났다. 이제 실 로 우리 열조의 교화와 덕택이 인심에 젖고 우리 신민이 능히 그 충애를 다한데도 있다. 그 러므로 짐이 무한이 큰 이 역사를 잇고저 밤낮으로 조바심하여 조종의 유훈을 받드노니 너 희들 신민은 짐의 마음을 본받을지어다. 오직 너희들 신민의 조선은 또한 우리 조종이 보육 한 어진 신민이었고, 너희들 신민은 또한 너희들 조선의 충애를 잘 이었으니 또한 내가 보 육한 어진 신민이로다. 짐과 너희들 신민이 힘을 합하여 조종의 큰 터를 지켜 억만년 아름 다운 명을 맞아 이어가야 할 것이로다. 아아 짐이 가르치지 아니하면 국가가 공고하기를 바 라기 심히 어렵도다. 온 세상내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부하고 강하며 독립하여 웅시하는 모 든 나라는 다 국민의 지식이 개명하였도다. 이 지식의 개명은 교육의 선미로 되었으니 교육 은 실로 국가를 보전하는 근본이라 하겠도다. 그러므로 짐이 君師의 자리에 있어 교육의 책 임을 스스로 맡노라. 또 교육은 그 길이 있는 것이니 헛된 이름과 실용을 먼저 분별하여야 할 지로다. 독서나 습자로 고인의 찌꺼기나 줍기에 몰두하여 시세대국에 어두운 자는 비록 문장이 고금을 능가할지라도 쓸데없는 서생에 지나지 못하리로다. 이제 짐이 교육의 강령을 보이니 헛이름을 물리치고 실용을 취할지어다. 첫째는 덕양이니, 오륜의 행실을 닦아 속강을 문란케 하지 말고 풍교를 부식하여 인세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행복을 증진시킬지어다. 42) 당시 정부에서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할 때 순한문체와 국한문혼용체 2본을 동시에 작성하여 발표하였다(순한문체본; 증보문헌비고 卷209, 학교고. 국한문혼용체본; 고종실록 卷33, 고종 32년 2월 2일) 당시 정부에서 발표한 돌립서고문이나 홍법14조 등은 이외에도 순국문 체를 따로 발표하여 모두 3개의 문서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 68 國史館論叢 第83輯 둘째는 체양이니, 동작을 떳떳이 하여 근로와 역행을 주로 하며, 게으름과 편안함을 탐내 지 말고 괴롭고 어려운 것을 피하지 말며, 그대의 근육을 굳게하고 뼈대를 튼튼히 하여서 강장하고 병없는 樂을 누려 받을지어다. 셋째는 지양이니,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性을 깨쳐 좋고 미운 것과 옳고 그른 것과 길 고 짧은 데서 나와 남의 구역을 세우지 말아서 자세히 연구하여 널리 통하기를 힘쓸지어다. 그리고는 한 몸의 사를 꾀하지 말고 공중의 이익을 도모할지어다. 가로되, 이 세가지는 교육의 기강이니라. 짐은 정부에 명하여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며 그대들 신민의 학식으로써 국가중흥의 대공을 찬성케 하려하노니 그대들 신민은 충군하고 애국하는 심성으로 그대의 덕과 몸과 지를 기를지어다. 왕실의 안전은 그대들 신 민들의 교육에 있고, 국가의 부강도 그대들 신민의 교육에 있도다. 너희들 신민이 선미한 지 경에 이르지 못하면 어찌 짐의 다스림을 이루었다 할 수 있으며 정부가 어찌 감히 그 책임 을 다 하였다고 할 수 있고 또한 너희들 신민이 감히 교육의 도에 마음을 다하여 협력하였 다 할 수 있으리오. 아비는 이것으로서 아들을 고무하고 형은 이것으로서 벗의 도움의 도를 행하고 분발하여 멎지 말지어다. 국가의 분한을 대적할 이가 오직 너희들 신민이요 국가의 모욕을 막을 이 또한 너희들 신 민의 본분이로다. 학식의 등급으로 그 공효의 고하를 아뢰되 이러한 일로 상을 위하는데는 비록 사소한 결단이 있더라도 너희들 신민은 또한 오직 말하기를 너희들이 교육을 받지 못 한 탓이라고 하며, 상하가 마음을 같이 하기를 힘쓸지어다. 너희들 신민의 마음이 곧 짐의 마음이니 힘쓸지어다. 진실로 이같을진대 짐은 조종의 덕광을 사방에 날릴 것이요 너희들 신민 또한 祖先의 어린자식과 손자가 될 것이니 힘쓸지어다. 위의 입국조서의 내용을 보면 19세기 말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근대교육이 기존의 전통교육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교육으로 전개되는 커다란 변화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먼저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변화를 찾을 수 있다. 즉, 전통교육은 기존체제 를 유지하고 신분과 특권을 유지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를 삼고 있었음에 대하여 이제 교 육은 일부 특정 계층이나 정치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발전의 기반으로 인식 하게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함께 교육 대상에 있어서도 정치적 사회적 기득권을 갖고 있는 특별계층으로부터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종래의 漢學 중 심의 유교경전교육 내지 숭문교육이 실용교육, 실용을 중시하고 과학기술을 수용하며 실 질적인 교육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육사상의 기본에 있어서는 유교도덕 중심 에서 벗어나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교육의 근거를 이루고 있으며, 과거의 공리적 숭문주 의에서 全人敎育을 지향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교육의 목표도 도덕적 수양을 높이는 것에서 나아가 국가독립의 기초로서 국민을 육성하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한국의 근대교육은 교육입국조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전통교육을 계승발전하면서 국민교육체제로 체계화되고 이와 관련된
開化勢力의 敎育思想 - 69 - 신교육제도가 실시되면서 공교육제도의 실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육방법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보이고 있으니 즉 독서와 사색, 암기 위주의 교육에서 부터 연설회, 토론회, 운동회 등 특별활동을 중시하는 경향이 보이고 있다. 2) 敎育立國詔書의 敎育思想 교육이 국가를 보존하는데 근본이 되는 교육제일주의 내지 교육구국을 강조하고 있 다. 이제 교육은 과거 전통사회에서 지배세력의 정치적 사회적 기득권을 유지 확보하기 위 한 수단으로서의 제한적 차별적인 기능이 아니라 국가 발전이라는 보편적 기능을 갖는 것으로서, 국민 전체를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민중 지배의 도구로서 이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함과 동시에 특권계층의 지배권이 강대한 전통사회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43) 이는 학교설립과 인재양성이 민족의 중흥과 국가보존에 직 결되며, 이의 수행은 신민의 본분이라고 함으로서 국가 권력의 절대화를 지향함을 나타내 고 있다. 과학적 지식과 학문, 실용을 추구하는 실용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교육은 서양의 새로운 과학문명을 수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개 화세력은 근대국가운동을 추진하면서 국가의 부국강병을 지향하였고 그 구체적인 방법이 서양의 과학을 수용하여 이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근대교육은 그 내용이 서양의 과학 기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문과 이와 관련된 교과목이 특징적인 것으로 받아들 여졌던 것이다. 또한 실용을 중시하였으니, 이는 조서의 내용 가운데 과거 사람에 의해 이룩된 학문적 성과를 단순히 독서하는 것으로나 또는 글쓰기 하는 것으로 공부하는 것 은 이를 虛學으로 평가하면서 실용을 취하라고 한 내용에서 단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 한, 개화사상의 연원을 실학사상에서 찾으려는 역사성에서 보았을 때 실학사상에서 중추 를 이루는 현실중심적이고 실용적 성격을 계승하려는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 다. 德 體 智의 三育을 조화시킨 전인교육을 지향하였다. 여기서의 전인교육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한 전인교육 이 아니라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전통체제에서 국가에 충성하는 도덕을 중심으로 하는 전인교육이었다. 이는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교육을 도덕교육과 才藝교육 및 공업교육으 로 구분하면서 그 중에서도 도덕교육을 제1순위에 둔 것과 연결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44) 43) 尹健次, 앞의 책, p.60. 44) 서유견문 제3편 인민의 교육 참조
- 70 - 國史館論叢 第83輯 德 體 智 三育의 목표가 개인의 완성이 아닌 尊王愛國에 있음은 입국조서 본문에 덕 육과 체육과 지육을 논한 후 너희들 신민은 충군하고 애국하는 마음으로 너희들 덕과 몸과 지를 기를지어다. 왕실의 안전이 너희들 신민의 교육에 있고 또 국가의 부강도 또한 너희들 신민교육에 있도다 라고 한 것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교육은 그 기능이 왕 실의 안전과 국가의 부강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Ⅳ. 開化勢力의 敎育思想에 나타난 共通點 이상에서 유길준, 김옥균, 박영효 등 세 사람의 교육사상을 개별적으로 저서나 자료를 통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몇가지의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들에게서 나타나는 교육사상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개화운동을 추진하던 대표적 개화 세력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교육사상의 공통점은 개 화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교육사상을 대표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1) 내정개혁의 최우선 과제로서의 교육 개화세력의 교육사상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그 첫 번째가 교육을 내정개혁의 최우선 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교육을 통해서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의 길을 찾아 나가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과거의 전통교육은 虛 學으로서 이는 국가가 쇠약하게 된 원인으로 보았으며, 현재의 뒤떨어지고 국력이 약한 상황에서 舊學을 버리고 新學을 추진하는 것은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교육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유효한 수단으로 보고 교육개혁을 개혁의 중심에 두었던 것이다. 개화세력에게 있어서 국가존립의 기초가 국민에 대한 교육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2) 국민의 계몽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 내정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국민이 개혁에 뒤딸아올 수 있도록 계몽하는 일이 교육에 기대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개화세력에게 있어서 국민은 교육을 받아야 할 愚民이었으며, 교육을 통해 이들이 계몽되고 개혁을 따라주어야 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국 민이 개혁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개화세력이 개혁의 주인으로 사회를 이끌어 간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개화세력의 개혁의 출발은 계몽교육활동 이었으며, 이는 개화세력이 추진한 근대교육의 원점이었다.45) 45) 尹健次, 앞의 책, p.52.
開化勢力의 敎育思想 - 71-3) 국가의 통치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교육 개화세력에게 국민은 계몽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개화세력에게 있어서 국민들은 어떠한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나 저항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 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국민은 사회를 혼란시킬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이며, 이들을 교 육을 통해서 국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46) 국민들이 그들의 불만을 표출할 때 사회가 혼란하며 국가의 통치질서가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란을 막고 국가를 안전과 국민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개화세력이 개혁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국가존립의 기초를 국민에게 실시하는 교육에 있다고 보는 것은 국민들이 국가의 통치 질서를 잘 지킬 수 있도록 길들이는 것을 교육이 기능하도록 기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통치 질서 는 국민들이 교육을 통해 법을 존중하고 법을 지킬 줄 알게 되어야만 유지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볼 때, 개화세력에게 국민은 개혁을 함께 추진하는 동지적 관계가 아니라 언제 든지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위험스런 대상이었다. 이들을 교육을 통하여 통 치에 순응하고 복종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인식이다. 4) 실용기술교육의 강조 과거의 교육을 虛學이라고 하여 이를 국가 쇠약의 원인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실제 생 활과 관련없는 文華에 치우친 것이라는데서 이유를 찾고 있다. 새로운 교육은 국가의 부 강을 위해 실생활에 유용한 교육이어야 한다고 하여 실용성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과학기 술교육을 중시하여 이를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단서로 삼았다. 5) 충군애국의 도덕과 국민 교화로서의 교육 개화세력에 있어서 교육의 최종 목적은 국민의 이익 증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발전에 있었다. 그러므로, 충군애국을 중심으로 도덕정신을 강조하였다. 즉 교육은 국민 을 국가 통치에 복종하도록 교화시키는 중요한 기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교육은 인민의 덕성을 함양하는데 중요한 수단이었다. 국민교화를 위해 기독교의 수용을 긍정적 으로 이해하였으며, 오히려 적극적인 수용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6) 외국과의 교섭능력을 증진시키는 교육 외국과의 교섭이 증대되고 외교활동이 확대되는 시대적 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 가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또는 서구의 신문물과 과학기술을 수용하기 위해서 외국어의 사용과 이해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에 외국어교육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실 46) 위의 책,
- 72 - 國史館論叢 第83輯 제로 전통 교육제도에 의해서가 아닌 신교육체제로 처음 학습이 이루어진 것은 다름 아 닌 외국어였다. 이러한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은 교육개혁이 진행될 때 사범학교나 소학교 등 정규 학교의 설립 이전에 이미 외국어 학습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미 1880년대 초 김옥 균의 개인적 노력으로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이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지만 미국 에도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갑오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발표된 洪範14條에도 유학생 을 파견한다는 조항이 따로 포함되기도 하였으며, 갑오개혁 이후 많은 숫자의 일본유학생 이 파견됨을 볼 수 있다. 7) 계몽주의적 교육 무식한 국민들을 교육을 통하여 지식을 갖게 하고 법률을 지키게 할 수 있도록 계몽시 키고, 그렇게함으로서 국가의 통치나 사회질서의 유지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Ⅴ. 甲午改革에서 敎育改革의 성격 1880년대 중반 이후에 형성되어 표현된 개화세력의 교육사상은 1894년~1895년의 교 육개혁에서 정치적으로 제도화되고 구체적으로 현장의 학교 교육으로 나타났다. 갑오개혁 으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와 관리임용제도의 개혁에 의하여 교육의 기회균등이 법적 으로 보장되고 광범한 학교교육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과거제가 폐지되고 새로운 시험제 도에 의해 인재가 등용될 수 있게 된 것은 그동안 개화세력이 주장해 온 근대적인 관리 등용제도와 근대 교육제도가 현실화되었음을 뜻한다. 교육관리를 위한 중앙정부의 제도도 대폭적으로 변혁되었다. 종래 외교와 교육 및 儀 禮를 담당하던 禮曹에 대신하여 교육전담기구로 學務衙門이 설치되었으며, 학무아문은 그 직제를 편제함에 있어서 근대적 체제를 이룩하였으니 이는 일본 제도의 골격이 원용되었 을 것이다. 학무아문의 직제는 총무국, 성균관 및 庠校書院事務局, 전문학무국, 보통학무 국, 편집국, 회계국 등으로 이루어졌다.47) 학무아문은 고종 23년(1895년) 3월 관제 개편시 學部로 개칭되면서 전문학무국과 보 통학무국을 학무국으로 통합하고 업무내용을 조절하였다. 이러한 학부의 조직을 보면 1894년 갑오개혁 초기에 앞으로의 學制를 마련하는 등 근대교육의 골격이 짜여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앞으로 설립되는 학교는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전 47) 官報, 草記, 甲午 6月28日
開化勢力의 敎育思想 - 73 - 문학교, 대학교, 기예학교 등에 이르기가지 보통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특수교육으로 그 체제를 갖추려고 한 것이다. 한편, 정부는 국내에서 학교의 설립을 통한 인재 양성과 함께 해외의 신문물을 신속하게 수용하기 위해서 유학생 파견 계획을 개혁 초기에 수립 해 놓고 있었다.48) 이러한 정부의 교육개혁의 추진은 그동안 개화세력이 갖고 있던 교육사상이 구체화되 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학교의 교육지표와 교육내용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1895년 4월 설립한 사범학교의 교육요지는 다음과 같다.49) 정신을 단련하며 德操를 연마함은 교원에게 중요한 바로 학원으로 하여금 평소에 이에 用 意함을 要함 존왕애국의 志氣에 富를함은 교원에게 중요한 바로 학원으로 하여금 평소에 충효의 대의 에 明하며 국민의 志操를 振起함을 要함 규율을 지키며 질서를 유지하고 사표될 威儀를 具함은 교원에게 중요한 바로 학원으로 하 여금 평소에 長上의 명령과 訓誨에 복종하며 起居와 언동의 正함을 要함 교원 교육에서 강조된 가치는 충군애국과 규율 중시 및 질서 존중이었다. 이는 개화세 력의 교육사상에서 그대로 나타났던 것들이다. 사범학교의 이와같은 교육지표는 소학교에 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소학교 修身 과목의 교육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50) 아동의 심신을 계도하여 그 덕성을 함양하며 人道를 실천하는 방법 을 가르치며, 孝悌, 友愛, 禮敬, 仁慈, 信實, 義勇, 恭儉 등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별로 존왕애국하는 士氣 를 기르는데 힘쓰고, 또 臣民으로서 국가에 대해 가져야 할 책무의 대요를 지시하고 겸하여 염치의 重가함을 알게 하고 아동을 誘掖하여 풍속과 품위의 純正에 趨함에 주의함 여기서도 존왕애국과 질서 존중을 가장 중요한 기본 가치로 인식되고 있으며, 특히 교 육이 국가 발전과 왕실의 안전을 궁극 목표로 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처럼 개화세력의 교육사상이 교육개혁의 진행과정에서 반영되는 모습은 교육 지표에서만이 아니라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근대교육이 새로운 문물 과 신학문을 수용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또한 개화세력이 지향하는 교육의 방향도 그러하였는데 이는 사범학교와 소학교의 교과목 명칭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51) 48) 黃玹, 梅泉野錄, 국사편찬위원회(送聰俊弟 遊學外國以資用需用) 49) 漢城師範學校規則 제13條, 官報 1895年 7月 24日 50) 小學校敎則大綱 제2條, 官報 1895년 8月 15日 51) 漢城師範學校規則 및 小學校敎則大綱 參照
- 74 國史館論叢 第83輯 한성사범학교의 교과목 : 修身, 國文, 漢文, 歷史, 地理, 數學, 物理, 博物, 化學, 習字, 作文, 體操 소학교의 교과목 : 修身, 讀書와 作文, 習字, 算術, 本國地理와 外國地理, 本國歷史, 理科, 圖畵, 體操, 裁縫, 外國語 한편, 忠君愛國敎育의 강조는 당시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야 되는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학교 교육에서 이와 관련된 교육이 중시되었으니 국문과 역사 교육이 이에 해당되었다. 이는 박영효의 1888년 상소문이나 1895년의 지방관에 대 한 지시사항에서 나타난 인민에게 국문과 국사를 먼저 가르치라 고 한 내용과 상통한다. 한국근대교육에서 역사교육의 중시는 한국근대교육이 근대사 전개과정에서 한민족의 내 재적 발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動力을 제공하였다고 했을 때52) 이를 가장 대표적으 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다. Ⅵ. 結 論 이상에서 개화세력의 교육사상에서 공통적인 내용을 찾아보았다. 근대교육은 근대적 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전통사회의 신분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능력에 의한 인재 등용 의 길이 열리고 이에 따라 교육에 있어서 기회의 균등이 보장되어갔다. 교육이 사회를 변 혁시키는 중심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통교육과는 다른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서구의 근대적 사상과 학문의 도입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 내부에 잔존하고 있는 전근대적 요소는 교육의 현실적 역할을 전통적인 봉건적 교화의 기능을 상당한 수 준 계승하고 있는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53) 개화세력이 사회 변혁의 지향점을 근대 사회라고 할 수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사회 내부에 잔존한 전근대적 요소는 이들의 사고에도 엿보이는 것으로서, 국민을 근대화의 주 체로서가 아니라 계몽해야 할 대상이라고 인식하였다든지, 교육의 기능을 국민교화적 측 면을 강조하거나, 국민을 교육을 통해 국가 통치 질서에 융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교육사 상은 이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긍정적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개화세력에게서 이와같은 전근대적 교육사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한국의 근대교육이 한국의 전통교육을 자연적 으로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였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52)金興洙, 韓國近代歷史敎育硏究, 삼영사, 1990, p. 4 53)윤건차, 위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