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 빌 게이츠(이규행 감역) 차례 혁명이 시작된다 정보시대의 개막 컴퓨터 산업의 최후의 패자 손가락 하나로 모든 정보를 꿈의 통신망, 정보고속도로 멀티미디어 문서혁명 기업이 달라진다 이상적인 시장 미래의 학교 집은 우주의 중심 황금을 찾아서 황홀한 여행 용어 해설 저자 소개 빌 게이츠/William Henry Gates III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회장이자 최고 경영자다. 1955년 미국 시애틀에서 태어나 13세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하기 시작했다. 1973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장차 개인용 컴퓨터가 모든 사무실과 가정에 중요한 도구로 자리잡게 될 것을 예견, 1975년 학교를 그만두고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했다. 빌 게이츠는 탁월한 비전과 끊임 없는 연구로 보다 많은 사람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소프트웨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컴퓨터 산업을 눈부신 발전과 진보의 길로 이끌었다.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개발한 주요 소프트웨어로는 MS-DOS, EXCEL, WINDOWS 등이 있다. 제1장 혁명이 시작된다 A REVOLUTION BEGINS 나는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삼목(tic-tac-toe: 3개의 O또는 X를 연달아놓으면 이기는 서양식 오목-역주)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용하던 컴퓨터는 크기가 커서 부담스러웠으며 느리고 아주 일방적이었다. 나는 그때 레이크사이드에 있는 사립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육성회에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위해 컴퓨터를 한 대 들여놓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어머니들은 자선 바자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단말기 한 대를 구입하고 학생들의 컴퓨터 사용료를 내주기로 결정했다. 1960년대 말 시애틀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컴퓨터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는 늘 그 점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이 컴퓨터 단말기에는 모니터가 없었다. 놀이를 할 때, 우리는 순서대로 타자기처럼 생긴 키보드의 자판을 누른 다음 얌전히 앉아서 프린터가 치리릭치리릭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결과를 종이에 찍어 보여줄 때까지 기다렸다. 결과가 나오면 우리는 냅따 그리로 뛰어가서 누가 이겼는지를 확인하거나 아니면 자판을 눌러 다음 칸을 메꾸었다. 연필과 종이로 30초면 너끈히 해치울 수 있는 삼목놀이로 점심시간을 몽땅 허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컴퓨터가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거기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은 거대하고 값비싼 번듯한 기계를 우리 같을 어린애가 조작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희열 때문이었음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차를 운전하는 따위의 어른들이 하는 재미있어 보이는 활동을 하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다. 그런 우리가 거대한 기계한테 명령을 내리고, 그러면 또 기계는 꼬박꼬박 지시에 따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컴퓨터가 대단한 것은 작업을 하면서 나의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즉각즉각 결과를 내놓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제공하는 피드백 경험은 다른 데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렵다. 내가 처음 소프트웨어에 매료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간단한 프로그램에서 피드백은 더더둑 명료하다. 지금도 나는 프로그램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컴퓨터가 언제나 완벽하게 작동하며 내가 지시하는 명령을 어김없이 수행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감동한다. 점점 자신이 붙은 우리는 속도를 빠르게 한다든지 게임을 더 어렵게 만든다든지 하면서 컴퓨터를 갖고 놀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모노폴리(Monopoly: 판 위에서 말을 움직이며 하는 부동산 취득 게임-역주)를 모방한 프로그램을 베이식어로 개발했다. 베이식(BASIC-Beginner's All-purpose Symbolic Instruction Code: 초보자를 위한 다복적 상징 명령부호)은 이름 그대로 비교적 배우기 쉬운 프로그램 언어였으므로 우리는 베이식으로 점점 복잡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친구는 컴퓨터가 수백가지의 게임을 정말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우리는 다양한 게임 방법을 테스트하기 위해 컴퓨터에 명령어를 쳐넣었다. 우리가 알고 싶었던 것은 가장 승률이 좋은 게임 전략이었다. 컴퓨터는 치리릭치리릭 하면서 우리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우리는 장난감을 그냥 갖고 노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을 변화시켜놓았다. 판지에 그려진 만화에다가 아이가 크레용으로 멋진 계기반까지 달린 우주선을 그려넣거나 또는 빨간 차는 다른 모든 차를 건널 수 있다 는 규칙을 자기가 임의로 정해놓고 중얼거리며 노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장난감에다 좀더 많은 기능을 덧붙이려는 충동은 아이들을 창조적으로 놀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것은 창의력의 본질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빈둥거렸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놀던 장난감은 예사 장난감이 아니었다. 레이크사이드 국민학교에는 컴퓨터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나 같은 아이들이 몇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나 아이들은 우리를 보면 대번에 컴퓨터를 떠올릴 정도였다.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 수업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도 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공연될 연극 블랙 코미디 의 주연을 맡게 되자 어떤 아이들은 이렇게 수근거렸다. 컴퓨터쟁이를 왜 뽑았지? 아직도 사람들은 종종 나를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 어려서 좋아하던 장난감을 어른이 되어서도 끌고 다닌 것이 우리 세대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일종의 혁명-대체로 평화적인-을 일으켰다. 이제 컴퓨터는 사무실과 가정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컴퓨터의 크기는 작아졌지만 성능은 향상되었고 가격은 엄청나게 떨어졌다. 이 모든 것이 아주 빠르게 일어났다. 내가 한때 예상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빨랐다. 저렴한 컴퓨터 칩은 이제 엔진, 시계, 브레이크 잠김 방지장치(ABS), 팩시밀리, 엘리베이터, 급유장치, 카메라, 자동 온도조절장치, 자동판매기, 경보장치, 심지어는 멜로디 카드에까지 쓰이고 있다. 요즘 국민학생들은 공책만한 크기의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30년 전에 최대 용량을 가진 컴퓨터가 하지 못했던 일도 척척 해낸다. 놀라우리 만큼 저렴해진 컴퓨터가 생활 구석구석으로 파고든 지금, 또 하나의 혁명이 막 시작되려고 한다. 다가올 혁명은 통신비용을 엄청나게 떨어뜨릴 것이다. 모든 컴퓨터가 연결되어 다양한 통신망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범세계적으로 상호 연결된 네트워크를, 이름하여 정보고속도로라고 부른다. 정보고속도로의 바로 전 단계가 이즈음의 인터넷으로, 이는 현행 기술을 바탕으로 연결된 컴퓨터 집단이 정보를 다각적으로 주고받는 것이다. 이 새로운 네트워크의 범위와 효용성, 그것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알아보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앞으로 전개될 모든 사태를 생각하면 그저 가슴이 떨릴 뿐이다. 나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나름대로 앞날의 세계를 점치고 내가 옳다고 여긴 방향에 나의 미래를 걸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열아홉 살의 빌 게이츠와 지금의 내가 처한 입장은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의 나는 겁없이 뛰어드는 십대 특유의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게다가 나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사람이 전혀
없었으므로 설령 실패한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지금의 나는 70년대를 풍미한 혜성 같은 컴퓨터 업계의 거인들이 처했던 입장에 더 가깝다. 그들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한때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려는 생각도 가졌다. 결국 마음을 돌리고 말았지만, 어찌 보면 컴퓨터 산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했던 모든 경험이 경제학 수업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상승나선(positive spiral)효과와 경직된 경영 모델의 폐해를 내 눈으로 목격했다. 업계의 수준이 발전되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호환성, 피드백, 끊임없는 혁신의 중요성에도 눈떴다. 나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이 주도하는 이상적인 시장이 머지않아 현실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단지 미래에 관한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미래에 승부를 걸고 있다. 십대 때 나는 저렴한 컴퓨터가 가져올 미래상을 꿈꾼 적이 있다. 그것은 책상마다, 집집마다 한 대씩 놓인 컴퓨터 였다. 그 꿈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이념이 되었다. 우리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껏 노력해오고 있다. 이제 그 컴퓨터들은 서로 연결되고 있으며, 우리는 개개인이 이 연결되 통신망을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다. 그 통신망이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를 정확히 예상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양한 기구를 써서 통신망을 이용할 것이다. 그중 어떤 것은 TV처럼 보일 것이고 어떤 것은 오늘날의 PC처럼 보일 것이다. 전화기처럼 생긴 것, 모양이나 크기가 지갑과 비슷한 것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기구의 심장부에는 강력한 컴퓨터가 있다. 이 컴퓨터는 다른 수백 수천만의 컴퓨터와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서 사업을 하고, 공부를 하고, 세계 각국의 문화를 탐구하고, 신나는 공연을 즐기고, 친구를 사귀고, 가까운 시장에 장을 보러 가고, 멀리 떨어진 친지에게 사진을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통신망과의 접속이 반드시 사무실이나 교실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컴퓨터는 우리가 구입해서 들고 다니는 물건 이상의 기능을 갖고 있다. 컴퓨터는 놀라운 간접경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통행증이 될 것이다. 직접적인 경험이나 괘락은 어떤 매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몸소 하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진보한다 하더라도 해변에 누워 있거나 숲속을 거닐거나 마음에 드는 코미디 클럽에 앉아 있거나 벼룩시장에서 쇼핑을 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경험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령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도 직접경험이지만, 우리는 줄 서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묘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인류가 진보의 길을 걸어온 것은 누군가가 더 우수하고 강력한 도구를 발명한 데 힘입은 바가 크다. 물리적인 도구는 작업속도를 향상시키고 힘겨운 노동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켰다. 쟁기와 바퀴, 불도저와 크레인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의 육체적 능력에 보탬이 되었다.
정보도구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의 근육보다는 지혜에 보탬이 되는 매개물이다. 당신은 이 책을 읽으면서 간접경험을 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방에 있지 않다. 그런데도 당신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작업이 의사결정과 지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자연히 정보도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발명가들의 관심을 점점 더 끌게 될 것이다. 문자의 배열로 어떤 글이든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 정보도구는 어떤 형태의 정보든 컴퓨터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전기적 부호, 곧 디지털 형태로 표현되는 길을 터준다. 오늘날 정보처리를 주임무로 하는 컴퓨터의 수는 전세계적으로 1억 대가 넘는다. 컴퓨터는 디지털 형태로 되어 있는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훨씬 간편화하여 우리를 돕고 있다. 머지않아 컴퓨터는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줄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컴퓨터망의 구축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착수한 대형 국책사업이었던 주간 고속도로망 건설사업에 비유한다. 새로운 네트워크를 정보고속도로 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정보고속도로라는 용어의 보급에 앞장선 사람이 앨 고어 부통령이다. 고어 부통령의 아버지는 1956년 연방지원 고속도로 건설법 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바 있다. 하지만 고속도로라는 비유는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다. 이런 표현은 풍경과 지형, 점과 점 사이의 거리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새로운 통신술의 가장 감동적인 측면이 바로 거리를 없앤다는 점에 있는데도 말이다. 내가 접속하는 상대가 옆방에 있건 바다 건너 대륙에 있건 상관없다. 새로운 통신술은 거리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라는 말은 또한 모든 사람이 같은 길에서 운전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새로운 통신망은 느긋하게 창밖 경치를 내다볼 수도 있고 마음 내키면 아무 때나 샛길로 빠질 수 있는 시골길과 비슷하다. 고속도로는 또 정부가 주도적으로 건설하는 공사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나는 이것이 대부분의 국가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는 크게 잘못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비유가 노력의 결실인 응용물보다는 하부구조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우리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는 네트워크 자체보다는 거기서 누리는 혜택에 초점을 맞춘 손가락 하나로 모든 정보를(Infomation At Your Fingers)'이란 표현은 즐겨 쓴다. 앞으로 전개될 다양한 활동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비유로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이 최고의 시장(ultimate market)'이란 말이다. 증권거래소에서 상가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장은 인간사회에 필수적인 것이다. 나는 새로운 통신망이 전세계의 중심 백화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곳은 사회적 동물인 우리 인간이 물건을 팔고 거래하고 투자하고 깎고 고르고 따지고 새 사람을 만나고 서성거리는 장소가 될 것이다. 앞으로 정보고속도로 란 말을 듣거든 도로를 떠올리지 말고 시장이나 증권거래소를 연상하라. 뉴욕
증권거래소나 농산물시장, 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나 정보를 찾는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서점의 활기와 소란을 연상하라. 수십억 달러 규모의 거래에서 청춘남녀의 풋사랑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형의 인간활동이 그 안에서 펼쳐진다. 대부분의 거래는 현찰의 수수가 아니라 디지털화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비단 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온갖 종류의 디지털 정보가 이 시장의 새로운 교환수단이 될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큰 세계 정보시장은 인간의 물자, 서비스, 사고가 교환되는 방식을 다양하게 결합시킬 것이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 시장은 당신에게 물건을 선택할 수 있는 좀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언제 수익을 기대하고 언제 투자해야 할지, 무엇을 얼마에 살 것인지, 당신의 친구가 누구고 그 친구와 어느 정도 어울려 지내야 할지, 어떤 동네로 가야 당신의 가족이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를 그 시장에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일터에 대한 관념이나 교육받는다 는 것에 대한 관념은 당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송두리째 바뀔 것이다. 내가 누구고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자아관념도 아주 개방적으로 변할 것이다.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며 그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내 말이 잘 믿어지지 않는가? 아니면 믿고 싶지가 않은가? 어쩌면 당신은 끼어들기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기술이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것을 일거에 바꾸어놓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흔히 그런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 자전거는 바보스러운 물건이었다. 자동차는 시끄러운 불청객이었다. 휴대용 전자계산기는 수학을 위협하는 암적 존재였다. 라디오는 문자매체의 종말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사태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기계들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갔다. 우리의 수고를 덜어주는 편리함 때문만이 아니라 그 기계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의 영감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로운 기계는 우리의 다른 도구들 옆에서 굳건하게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다. 기계와 함께 자란 새로운 세대는 그 기계를 바꾸고 인간화한다. 기계를 가지고 논다. 전화는 쌍방향 통산에 중대한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처음에는 성가신 물건으로 취급되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사람들은 가정에 침투한 이 기계가 거북살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새로운 기계를 얻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통신을 배우고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화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처럼 격식을 갖출 필요도 길게 끌 필요도 없었다.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바로 그 점 때문에 당혹스러워했지만 점차 그것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화가 등장하기 전에는 한 번 오붓한 대화를 나누려면 직접 상대방을 찾아가서 때로는 식사까지 곁들여야 했다. 그러다 보면 한나절이 금세 지나갔다. 대부분의 기업이나 가정에 전화기가 놓이게 되면서 사람들은 이 통신수단의 독특한 개성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냈다. 전화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전화상의 특수한 표현, 관습, 예절, 문화가 싹텄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비서가 연결해주는 전화만을 받는다 는 사장족의 시시한 허세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새로운 형태의 통신-전자우편(e-mail)-은 자신의 규율과 관습을 정하면서 그와 비슷한 과도기를 거치고 있다. 기계는 조금씩 인간의 일부로 편입될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비행사이며 작가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1939년에 나온 자신의 회상록 바람, 모래,별 에서 쓴 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 나타내는 반응에 대해서 쓰면서 19세기 말에 등장한 철도가 서서히 수용되는 과정을 예로 들었다. 연기를 토하며 굉음을 지르는 기관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것을 철괴물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철로는 꾸준히 깔렸고 도시마다 기차역을 지어갔다. 물자와 서비스가 그곳으로 넘나들었다. 멋진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 새로운 운송수단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가 발전하면서 경멸은 수용으로, 심지어는 찬성으로 바뀌었다. 한때는 철괴물로 불리던 것이 가장 중요한 물자를 실어나르는 강력한 운송수단이 되었다. 인식의 변화는 우리가 쓰던 말에 어김없이 반영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철마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 6시면 찾아와 공손히 기적을 울리는 친구가 없다면 마을 사람들은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묻는다. 1450년 통신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 마인츠의 금 세공사였던 요하네스 쿠텐베르크가 위치를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활자를 고안하여 유럽에서는 최초로 인쇄기를 만들었다(중국과 한국에는 이미 인쇄기가 있었다). 구텐베르크는 성서를 인쇄하기 위한 활판을 뜨는 데 꼬박 2년이 걸렸지만 일단 그것이 완성되자 성서를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모든 책을 손으로 베꼈다. 필사작업은 주로 수도사들이 했는데 한 권을 베끼는 데 보통 1년이 넘게 걸렸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고속 레이저 프린터였던 셈이다. 인쇄기는 책을 더 빠르게 만드는 방법만 서양에 알려준 것이 아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세대가 바뀌어도 지역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것만을 알았다. 고향마을을 벗어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믿을만한 지도가 없어 한번 고향을 뜨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도 사람들의 발을 고향에 묶어두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제임스 버크도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세계에서 모든 경험은 직접적인 것이었다. 지평선은 작았고 공동체의 시선은 안으로 향했다. 바깥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그저 풍문으로만 알았다. 인쇄된 언어가 그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것은 최초의 대중매체였다. 사상 처음으로 지식과 의견, 경험이 휴대할 수 있고 보관이 가능하며
통용될 수 있는 형태로 전파되었다. 인쇄된 언어는 주민들의 관심영역을 마을 바깥으로 넓혀주었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상업도시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인쇄소들은 정보교환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람들이 읽고 쓸 줄 알게 되면서 교육에 혁명이 일어났고 사회구조가 바뀌었다. 구텐베르크 이전에 유럽 대륙에 있던 책은 약 3만 권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대부분은 성경과 성경 주해서였다. 그러던 것이 1500년에는 온갖 종류의 주제를 다룬 책이 무려 900만 권에 이르렀다. 전단을 비곳한 각종 인쇄물은 정치, 종교, 과학,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사상 처음으로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글로 적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정보고속도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중세를 뒤흔들었듯이 우리 문화를 드라마틱하게 변혁시킬 것이다. PC는 이미 우리의 작업환경을 바꾸어놓았지만 아직도 우리 생활을 대대적으로 변화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강력한 정보처리장치가 고속도로에 연결되면 사람, 기계, 오락, 정보 서비스에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과 접촉하기를 원하는 그 누구와도 접촉할 수 있을 것이며, 수천 개의 도서관을 밤이건 낮이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분실했거나 도난당한 당신의 카메라는 자신이 있는 곳을 알리는 메시지를 당신에게 보낼 것이다. 설령 당신이 다른 도시에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집에 걸려온 전화를 사무실에서 받을 수 있으며 사무실로 온 연락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구하기 힘든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버스가 제시간에 오는가? 사무실로 출근할 때 이용하는 도로에 무슨 사고가 나지 않았는가? 목요일 극장표를 내가 갖고 있는 수요일 극장표와 바꾸려는 사람은 없는가? 아이의 학교 출석률은 어떤가? 가자미를 맛있게 요리하는 법은? 맥박을 잴 수 있는 손목시계를 내일 아침까지 가장 싼 가격으로 배달해줄 수 있는 상점은? 나의 낡은 무스탕 컨버터블 차는 누가 얼마에 사려고 할까? 바늘구멍은 어떻게 만드나? 세탁소에 맡긴 셔츠를 지금 가면 찾을 수 있을까? 월스트리트 저널 지를 가장 싸게 구독하는 방법은? 심장마비의 증세는 어떤가? 오늘 지방법원에서 혹시 재미난 증언이라도 있었나? 물고기는 색을 분간하나? 지금 샹젤리제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목요일 밤 9시 2분에 나는 어디에 있었나?
처음 가려는 레스토랑의 메뉴, 와인 종류, 그날의 스페셜 요리를 알아보고 싶다고 하자.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식도락 평론가가 그 식당에 대해서 어떻게 평했는지가 우선 궁금할 것이다. 당신은 또 보건당국으로부터 그 식당이 위생점수를 몇 점이나 받았는지도 알고 싶어할 수 있다. 식당 주변이 왠지 꺼림칙하다면 경찰 기록을 근거로 안전도를 확인할 수도 있다. 그래도 가고 싶은가? 그럼 당신은 예약을 하고 싶고, 약도를 얻고 싶고, 현재의 교통상황에서 어느 길로 가야 막히지 않을지를 알고 싶을 것이다. 당신이 운전을 하는 동안 목적지까지 가장 신속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최신 정보가 종이에 찍혀서 또는 음성 메시지로 전달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정보를 개개인이 아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흥미를 느끼는 정보를 당신이 편리한 방식으로 원하는 시간만큼 이용할 수 있다. 방송사가 정한 시간이 아니라 당신에게 편리한 시간에 마음대로 프로를 시청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쇼핑을 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동호인들과 접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언제든지 마음대로 알릴 수 있다. 밤 뉴스는 당신이 지정한 시간에 시작될 것이며, 당신이 원하는 만큼 지속될 것이다. 그 뉴스는 당신의 관심사를 잘 아는 서비스 업체나 당신 스스로가 고른 주제만을 다룰 것이다. 도쿄나 보스턴, 시애틀 특파원이 전해주는 좀더 자세한 보도를 요구할 수도 있다. 특정 뉴스를 자세히 파고들 수도 있다. 당신이 좋아하는 칼럼니스트가 어떤 사건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를 알아볼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그 뉴스를 인쇄물로 받아볼 수도 있다. 이런 정도의 변화에도 사람들은 불안에 떤다. 세계 각지에서 매일매일 사람들은 정보고속도로에 함축된 의미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묻곤 한다. 우리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사람들이 현실세계로부터 물러나 컴퓨터 뒤에서 대리 인생을 살게 되지나 않을까?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지는 않을까? 컴퓨터가 대도시 슬럼가의 빈민과 에티오피아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새로운 통신망이 몰고 올 변화 중에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도 있다. 제12장에서 나는 내가 자주 듣는, 전혀 근거가 없지만은 않은 우려와 불안에 대해서 나 자신의 생각을 상세히 밝히겠다. 나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결국 미래를 낙관하고 잘 되리라 믿는다. 그것은 원래 낙천적인 나의 천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컴퓨터와 함께 자라온 우리 세대의 무한한 잠재력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새로운 길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유용한 도구를 제공할 것이다. 나는 역사는 진보하게 마련이며 우리는 그 진보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나는 지금도 내가 미래를 곁눈질하면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혁명적 변혁의 징후를 간파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전율에 휩싸인다. 막 시작되고 있는 제2의 획기적인 변혁에 참여할 기회를 얻은 것을 나는 크나큰
행운이라고 여긴다. 내가 이 남다른 희열을 처음으로 맛본 것은 값싼 고성능 컴퓨터가 등장하리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십대 시절이었다. 1968년 우리가 삼목놀이를 했던 컴퓨터를 비롯한 당시의 컴퓨터는 주로 온도조절장치가 부착된 커다란 고치 안에 들어앉은 변덕스러운 괴물이었다. 육성회에서 제공한 돈을 모두 써버린 뒤, 나는 나중에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차리게 된 학교친구 폴 앨런과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돈이 있어야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컴퓨터의 성능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별볼일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한 대에 몇백만 달러를 호가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컴퓨터가 우리 눈에는 경이롭게만 보였다. 그때는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덜그럭거리는 타자기 모양의 단말기들을 전화선을 통해 컴퓨터에 연결해 썼다. 따라서 우리는 컴퓨터의 실물을 접한 적이 거의 없다. 컴퓨터 사용료는 엄청나게 비쌌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컴퓨터 공동 사용료는 시간당 40달러였다. 40달러가 있어야 도도한 컴퓨터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끌 수 있었다. PC를 한 대 이상 가진 사람이 적지 않고 그것도 하루종일 놀려두기 일쑤인 요즘과 비교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물론 그 시절에도 컴퓨터를 살 수는 있었다. 18,000달러를 주면 디지털 이퀴프먼트사(DEC)에서 만든 PDP-8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 컴퓨터는 중형 컴퓨터 로 불렸지만 요즘 기준으로 보면 대형이었다. PDP-8은 가로 세로 각각 60센티미터에 높이는 180센티미터였으며 무게는 120킬로그램 정도였다. 우리 고등학교에도 한때 그 컴퓨터를 들여놓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컴퓨터 앞에 붙어 살았다. PDP-8은 우리가 전화선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대형 컴퓨터에 비하면 용량이 무척 작았다. 계산능력은 아마 오늘날의 손목시계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값비싼 대형 컴퓨터처럼 프로그램을 처리할 수 있었으므로 어쨌든 컴퓨터는 컴퓨터였다. 즉 소프트웨어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비록 성능은 보잘것 없었지만 PDP-8은 누구나 개인 컴퓨터를 가지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내가 PC 개발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도 나 자신이 컴퓨터를 그만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는 컴퓨터 하드웨어처럼 소프트웨어도 값이 비쌌다. 컴퓨터 기종마다 소프트웨어를 따로따로 만들어야 했다. 컴퓨터 하드웨어가 바뀔 때마다(그런 일이 자주 생겼다) 소프트웨어 구축을 위한 표준적인 블록(예를 들면 수학공식표)을 기계와 함께 제공했지만 기업체 고유의 특수한 문제를 처리하려면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일부 공유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있었고 몇몇 회사에서는 범용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도 했지만, 시판되는 소프트웨어는 극소수였다. 학비와 용돈은 부모님이 대주셨지만 컴퓨터 사용료는 내 혼자 힘으로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소프트웨어 산업의 상업성에 눈뜬 것도 그런 계기를 통해서였다. 폴 앨런과 나는 초보 수준의 프로그래밍 일자리를 얻었다. 여름 한철을 일하고 5천 달러를 받았으니
고등학생에게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일부는 현금으로 받았고 나머지는 그 액수만큼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받았다. 우리는 또 소프트웨어의 오류를 알려주는 대신 해당 기업의 컴퓨터를 공짜로 쓰기도 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을 배정하는 프로그램도 작성했다. 몇 가지 명령어를 몰래 덧붙여서 여학생반에 혼자 들어가는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컴퓨터의 세계에서 손을 떼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중독되어 있었다. 폴은 컴퓨터 하드웨어에 대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알았다. 내가 열여섯 살이고 폴이 열아홉 살이던 1972년 어느 여름날, 폴은 나에게 일렉트로닉스(Electronics)'지 143쪽 한귀퉁이에 실린 열 줄짜리 기사를 보여주었다. 인텔이라는 신생기업에서 8008이라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내놓았다는 내용이었다. 마이크프로세서는 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하는 부분을 송두리째 담고 있는 간단한 칩이다. 폴과 나는 이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가진 성능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폴은 이 칩의 성능이 빠르게 향상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컴퓨터도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 업계에서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핵심으로 컴퓨터를 만든다는 발상은 못하고 있었다. 일렉트로닉스 지의 기사를 봐도 8008을 계산, 제어 시스템, 또는 고성능 단말기 같은 의사결정 시스템 에 적합한 물건으로 소개했다. 그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범용 컴퓨터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느렸고,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 한계가 있었다. 8008은 프로그래머에게 익숙한 언어들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했다. 따라서 8008용으로 복잡한 프로그램을 작성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8008 칩이 이해할 수 있는 몇십 가지의 간단한 명령어로 모든 응용 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했다. 8008은 복잡하지 않은 단순 반복작업을 묵묵히 수행하는 데 적격이었다. 그래서 계산기와 엘리베이터에 많이 쓰였다. 달리 표현하자면, 엘리베이터 조작반 같은 데 내장된 간단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비숙련자가 연주하는 북이나 뿔피리 같은 단순한 악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으로는 기본적인 리듬이나 복잡하지 않은 가락을 연주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프로그래밍 언어를 가진 강력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뛰어난 오케스트라와도 같다. 제대로 된 소프트웨어나 악보만 있으면 어떤 곡이든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다. 폴과 나는 8008이 어떤 프로그램을 처리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폴은 인텔에 전화를 걸어 매뉴얼을 요청했다. 인텔은 곧바로 매뉴얼을 보내왔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약간 놀랐다. 우리는 매뉴얼을 파고들었다. 나는 용량이 작은 DEC사의 PDP-8용으로 베이식 버전을 작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인텔의 작은 칩을 위해 똑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8008 매뉴얼을 읽어보고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8008은 정교하지 못했다. 트랜지스터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우리는 시내도로의 차량소통 감지기가 집계한 수치를 분석하는 기계에 이 작은 칩을 활용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주요 도로에 고무 호스를 깔아 차량의 흐름을 측정하고 있었다. 호스 위를 통과하는 차량은 호스 끝에 연결된 금속함 속의 종이 테이프에 자동 확인되었다. 우리는 이 테이프를 8008로 처리하여 각종 그래프와 통계자료를 내놓을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우리는 회사이름을 트래프-오-데이터(Traff-O-Data: 교통자료 포착) 로 지었다. 이것이 당시 우리에게는 시적인 멋진 이름으로 여겨졌다. 나는 트래프-오-데이터 장치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폴이 다니는 대학이 있는 워싱턴주 풀먼과 시애틀을 왕복하는 장거리 버스 속에서 주로 작성했다. 우리가 만든 시제품의 성능은 뛰어났다. 우리는 새로운 장비를 미국 전역에 보급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몇몇 고객이 가져온 교통자료 테이프를 이것으로 처리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 기계를 사려는 사람은 나타나기 않았다. 우리가 어려서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1973년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을 때 폴은 보스턴의 허니웰사에 취직했다. 중형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었다. 그는 회사에 들어간 뒤에도 하버드 대학까지 차를 몰고 와서 미래의 계획을 놓고 나와 장시간 토론을 벌였다. 1974년 봄 일렉트로닉스 지에 인텔의 새로운 8080 칩 기사가 실렸다. 그것은 트래프-오-테이터 장치에 들어간 8008보다 용량이 10배나 컸다. 8080은 크기가 8008과 비슷했지만 트랜지스터를 2,700개나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우리는 진짜 컴퓨터의 핵심을 보고 있었다. 가격도 200달러 미만이었다. 우리는 매뉴얼을 공략했다. DEC는 이제 더 이상 PDP-8을 팔 수 없을 것 이라고 그때 내가 폴에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만만찮은 용량을 가진 칩이 등장함으로써, 대형 컴퓨터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 업체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협적인 상대로 보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칩이 진짜 컴퓨터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데까지 그들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는 인텔의 전문가들조차도 8080이 갖고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8080은 성능이 향상된 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단기적으로 보면 컴퓨터 업계의 판단이 옳았다. 8080은 또 하나의 미미한 진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폴과 나는 이 새로운 칩을 통해 응용이 자유롭고 성능이 완벽한 컴퓨터가 탄생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저렴한 가격에 컴퓨터를 구입할 수 있게 되 거라고 생각했다. 컴퓨터의 구입가격이 떨어지면 컴퓨터 사용료도 따라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 값이 싸지면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작업을 무궁무진하게 개발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되면 이 만능 기계의 엄청난 잠재성을 살려주는 소프트웨어가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폴과 나는 하드웨어는 대부분 일본 기업들과 IBM이 생산하리라 예상했다. 우리는 새롭고 혁신적인 소프트웨어에 승부를 걸 필요가 있었다. 기죽을 이유가 없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컴퓨터 업계의 구조개편을 몰고 올 것이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활동영역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대학생들은 온갖 새로운 경험을 하며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으니까. 우리는 젊었고, 이 세상이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하버드 대학을 1년 더 다녔지만 정신은 온통 어떻게 하면 소프트웨어를 더 잘 굴러가게 할 수 있을까에 있었다.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우리는 기숙사 내 방에서 새로운 인텔 칩에 맞는 베이식 프로그램을 작성해주겠다는 제안서를 세계 굴지의 컴퓨터 회사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12월이 되어도 답장은 오지 않았고 우리의 실망감은 컸다. 연휴가 다가오기 사작했다. 폴은 보스턴에 남아 있겠다고 했지만 나는 시애틀의 집에 가서 연휴를 보내기로 했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 메사추세스의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어느 날 아침 폴과 나는 하버드 스퀘어의 신문가판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폴이 포퓰러 일렉트로닉스 지 1월호를 집어들었다. 그때의 일은 내가 머리말 초두에서 묘사한 바 있다. 그 일 덕분에 우리의 꿈은 미래의 현실이 되었다. 잡지 표지에는 토스터 크기만한 작은 컴퓨터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컴퓨터의 이름은 트래프-오-테이터만큼이나 엉뚱한 알테어 8800이었다.( 알테어 는 스타 트랙 에 나오는 행선지 이름이다). 가격은 사용자가 조립해서 쓰는 조건으로 한 세트에 397달러였다. 다 조립해도 거기에는 키보드나 화면이 없었다. 대신에 명령을 내리기 위한 16개의 번지(address) 스위치와 16개의 미등이 있었다. 앞 조작판의 미등을 깜박거리게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문제는 알테어 8800을 위한 소프트웨어가 없다는 거였다. 알테어 8800은 프로그래밍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참신한 발명품이긴 해도 유용한 도구라고는 볼 수 없었다. 알테어의 진가는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두뇌로 장착했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다급해졌다. 이럴 수가! 우리 없이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8080을 위한 제대로 된 소프트웨어도 곧 나올 거야. 발전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처음부터 그 일에 관여하고 싶었다. PC 혁명의 초기 단계에 참여한다는 것은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로 보였고, 나는 그 기회를 붙들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주변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내가 갖는 느낌은 그 때와 비슷하다. 당시 나는 남들이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봐
불안했다. 지금 나는 수천 명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차 혁명은 전세계적으로 매년 5천만 대의 PC 판매고를 유산으로 남겼고, 그 유산이 지금 둘도 없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동안 승자도 많았고 패자도 많았다. 이제 새롭게 무한한 기회를 창출하는 변화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남에게 뒤질세라 너도나도 몰려오고 있다.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면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다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된 대기업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으로 20년 뒤에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보더라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통신혁명에 대한 자신의 통찰력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업에 뛰어들 젊은이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활용하기 위해 수많은 혁신적인 기업이 세위질 것이다. 1975년 폴과 나는, 헛간에서 뮤지컬 연습을 하면서 스타의 꿈을 키우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젊은 패기 하나만으로 회사를 차렸다. 우리에게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작은 컴퓨터를 위한 베이식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의 첫 사업이었다. 우리는 컴퓨터의 작은 기억장치에 많은 능력을 우겨넣어야 했다. 알테어는 보통 4,000개의 문자를 기억할 수 있었다. 요즘 나오는 PC는 대부분 4배만(4메가) 또는 8백만(8메가) 개의 문자를 기억할 수 있다. 알테어가 없었으므로 우리의 작업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알테어의 실물조차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정말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인텔 8080마이크로프로세서였지만, 그것도 우리 눈으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폴은 기죽지 않고 8080 매뉴얼을 연구하여 하버드에 있는 대형 컴퓨터가 작은 알테어 흉내를 낼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오케스트라한테 간단한 2중주를 들려달라고 부탁하는 격이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완벽하게 돌아갔다.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알테어를 위한 베이식을 짜는 동안 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생각에 집중할 때 나는 방 안을 왔다갔다 하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하면 잡념 없이 하나의 문제를 파고드는 데 도움이 된다. 1975년 겨울 나는 기숙사 방 안을 수없이 맴돌았다. 폴과 나는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우리는 밤낮을 잊고 살았다. 책상에 앉아 있거나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이 일쑤였다. 어떨 때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온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베이식은 5주 만에 완성되었다. 드디어 세계 최초의 중형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가 탄생했다. 이번에는 회사이름을 마이크로소프트 로 지었다. 회사를 세우려면 많은 걸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뛰어들지 않으면 장래의 소형 컴퓨터를 위한 소프트웨어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영원히 놓치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1975년 폴은 프로그래머 일을 그만두었고 나는 대학에 휴학원을 제출했다.
나는 부모님과 상의했다. 두 분은 원래 사업감각이 있었다.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리겠다는 나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를 깨달은 부모님은 내 뜻을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나의 계획은 잠시 공부를 그만두고 회사를 차렸다가 나중에 돌아와 학업을 마친다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을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나는 아직도 장기휴학 상태에 있는 셈이다. 대학이 싫어서 떠나는 학생들도 있지만 나는 대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내 또래의 똑똑한 친구들과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릴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아홉 살의 나이로 그렇게 나는 사업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처음부터 폴과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각자 모아둔 돈이 조금씩 있었다. 폴은 허니웰에서 봉급을 두둑히 받았었고, 나 역시 기숙사에서 벌어지는 심야 포커판에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고 있던 터였다. 다행히 우리가 차린 회사에는 많은 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곧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성공비결을 알려달라고 나에게 청한다. 두 사람이 구멍가게처럼 벌인 사업이 어떻게 16,000여 명의 종업원에 연간 매상이 60억 달러가 넘는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물론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행운도 따랐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음에 가진 비전이었다. 우리는 인텔의 8080 칩에 잠재된 가능성을 통찰하고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기로 했다. 컴퓨터 처리비용이 공짜나 다름없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의 화두는 그것이었다. 컴퓨터 처리비용이 내려가면 그 점을 십분 활용한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출현하게 되므로 컴퓨터가 널리 보급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했다. 우리는 컴퓨터가 일반화되리라는 믿음 하나로 회사를 차렸고 남들이 한눈을 파는 동안 그런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처음에 가진 통찰력은 그 다음 일을 수월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적기에 급소를 공략했다. 우리는 남보다 한발 앞섰고, 초반의 성공은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쓸 수 있는 여력을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벌어들인 돈을 신제품개발에 투자했다. 처음부터 방향을 제대로 잡고 달려온 셈이었다. 이제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다. 통신비용이 공짜나 다름없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지금 우리의 화두는 이것이다. 모든 가정과 사무실을 고속 통신망으로 연결한다는 아이디어는 우주개발계획 이후 처음으로 미국인의 상상력에 불을 당기고 있다. 아니 미국인만이 아니라 전세계인의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수천 개의 기업이 똑같은 미래상을 그리며 뛰어들고 있지만,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인가, 중간단계들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어느 만큼의 추진력이 있는가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날 것이다. 나는 사업구상에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편이다. 그만큼 내가 하는 일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정보고속도로에 관한 생각을 주로 한다.
20년 전 마이크로칩 PC의 앞날에 대해서 생각할 때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나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택한 길을 고수했으며, 안개가 걷히면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바로 그 일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불확실한 요인이 많지만, 내 느낌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피를 말리는 긴장의 순간도 있지만 그만큼 즐겁기도 하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개인들과 기업들이 정보고속도로의 구축에 필요한 요소들을 만드는 데 자신의 사활을 걸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기술발전의 잠재성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는 지점까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모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쨌는 지금은 흥미로운 시기다. 여기에 참여한 기업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새로운 혁명의 장점을 깨닫고 있는 모든 개인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제2장 정보시대의 개막 THE BEGINNING OF THE INFORMATION AGE 처음 정보시대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철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새로은 물질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어 쓰던 시대를 가리키는 특수한 역사 용어였다. 그러다가 나는 천연자원이 아니라 정보의 장악을 두고 국가간의 각축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학자들의 글을 읽었다. 참으로 신기한 소리였다. 도대체 그들이 말한 정보가 무엇을 뜻했을까? 정보가 미래를 규정한다는 주장을 들으면 나는 1967년에 만들어진 영화 졸업(The Graduate)'에 나오는 유명한 파티 장면이 떠오른다. 더스틴 호프먼이 분한 대학 졸업생 벤저민을 한 기업인이 붙들고 늘어진다. 그리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장래 진로를 위한 조언을 한 마디 한다. 성형외과에 가보게. 만일 그 파티 장면이 몇십 년 뒤에 씌어졌더라면 아마 그 기업인의 말은 이렇게 달라졌으리라. 한 마디 충고하지, 벤저민. 정보 를 잡게. 나는 미래의 사무실에서 오갈 시시껄렁한 잡담도 상상해보았다. 자네, 정보는 얼마나 갖고 있나? 스위스는 정보가 많아서 대국이래! 정보 주가가 올라간다는구만!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정보는 청동이나 철처럼 만질 수도 없고 측정하기도 곤란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는 우리에게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정보혁명은 이제 시작되었다. 통신비는 과거에 컴퓨터 가격이 그랬던 것처럼 큰 폭으로 떨어질 것이다. 통신비가 대폭 내려가고 다른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과 맞물리면 정보고속도로 는 열성적인 기업인이나 들뜬 정치인이 부르짖는 한낱 구호로 그치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전기 처럼 세상 구석구석에 깔릴 것이다. 정보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정보를 다루는 방식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 장에서는 그 점을 중점적으로 설명하겠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컴퓨터의 원리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를 위해 씌어졌다. 그런 배경 지식이 있어야 이 책 전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디지털 컴퓨터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이 장을 건너뛰어서 3장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미래의 정보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될 근본적인 차이점은 거의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적잖은 인쇄물이 이미 전자 데이터로 디스크나 CD롬에 저장되고 있다. 신문, 잡지도 일단 컴퓨터로 편집되고 보관된다. 전자정보는 원한다면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영원히 저장할 수 있다. 언론사의 거대한 정보은행을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 사진, 필름, 비디오가 모두 디지털 정보로 변환되고 있다. 정보를 수량화하여 원자처럼 미세한 수많은 정보영역에 저장되도록 하는 방법이 해마다 크게 발전하고 있다. 일단 디지털 정보만 저장되어 있으면, 사용권과 PC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검색하고 비교하고 활용할 수 있다. 정보를 조작하고 변환하는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정보처리속도도 눈부시게 빨라진다는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디지털 정보를 싸고 빠르게 처리하고 전달해주는 컴퓨터의 능력은 가정과 사무실에서 기존의 통신장비를 바꾸어놓을 것이다. 도구를 써서 수를 계산한다는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1642년 프랑스의 과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19살의 나이로 기계식 계산기를 발명했지만, 동양에서는 이미 5,000년 전부터 주판이 쓰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독일의 수학자 곳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는 파스칼의 계산기를 개량하여 단계적 계산기(Stepped Reckoner)'를 만들었다. 그것은 곱셈 나눗셈은 물론 제곱근까지 계산할 수 있었다. 단계적 계산기의 개량품으로 나온, 다이얼과 기어로 움직이는 기계식 계산기는 정확해서 전자 계산기가 나올 때까지 상업분야에서 폭넓게 쓰였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금전등록기는 돈 넣는 서랍에 기계식 계산기를 단 것이었다. 150년 전 통찰력 있는 영국의 한 수학자가 컴퓨터의 가능성에 눈을 떴다. 그런 통찰력 덕분에 그는 생전에 벌써 이름을 날렸다. 케임브리지 대학 수학교수였던 찰스 배비지는 일련의 계산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장치를 구상했다. 1830년대에 벌써 그는 정보를 일단 수로 바꾸어야 그 정보를 기계로 처리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배비지가 구상한 증기작동기계는 새로운 산업시대의 상징물이었던 톱니바퀴, 실린더, 고정쇠 같은 기계부품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배비지는 이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이 정확성을 보장하면서 계산의 고역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의 컴퓨터를 구성하는 부품에 대해서 배비지가 알 리 만무했다 그는 자기 기계의 핵심부, 곧 중앙처리장치를 공작소 라고 불렀다.
기억장치는 창고 라고 이름지었다. 배비지는 창고에서 꺼낸 면화로 새로운 직물을 만드는 공정으로 정보처리과정을 상상한 듯싶다. 비록 해석기관은 기계식이었지만, 배비지는 그럿이 여러 종류의 명령어군을 처리하여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는 특정한 과제를 처리하는 방법을 기계에게 제시하는 포괄적인 규칙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배비지는 이 명령어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 문자, 화살표 같은 부호로 그런 언어를 고안했다. 그는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작동방식을 수정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명령어를 길게 조합하여 해석기관을 프로그램 할 수 있었다. 배비지는 하나의 기계가 수많은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데 착안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다음 세기의 수학자들은 베비지가 터놓은 물꼬를 부지런히 넓혔다. 드디어 1940년대 중반 배비지의 해석기관 원리에 바탕을 둔 전자 컴퓨터가 만들어졌다. 최초의 전자 컴퓨터를 누가 개발했는가를 정확히 가려내기란 어렵다. 2차대전 기간중 극도의 보안 속에 미국과 영국에서 컴퓨터를 연구개발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앨런 튜링, 클로드 섀넌, 존 폰 노이만이 그중에서도 특히 많은 기여를 했다. 배비지처럼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일급 수학자였던 앨런 튜링은 1930년대에 오늘날 튜링 머신이라고 알려진 기계를 고안했다. 튜링 머신은 종류에 구애받지 않고 거의 모든 정보를 처리할 수 있도록 개발한 범용 계산기계였다. 클로드 섀넌은 아직 학생이던 1930년대 말 논리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가 정보를 처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학위논문의 주제이기도 했던 이 발견의 내용은 참이면 닫히고 거짓이면 열리는 컴퓨터 회로가, 참 을 1로 거짓 을 0으로 나타내서 논리연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2진법이다. 2진수는 부호이며 전자 컴퓨터의 알파벳이다. 2진수는 컴퓨터가 모든 정보를 번역하고 저장하고 활용하는 데 쓰는 기본 언어다. 당신의 방을 250와트짜리 전구로 밝힌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당신은 조명을 0와트에서 250와트까지 자유롭게 조절하고 싶다. 먼저 회전식 조명 스위치를 250와트 전구에 연결하는 방법이 있다. 완전히 어둡게 하려면 스위치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끝까지 돌리면 된다. 최대한으로 밝게 하려면 시계 방향으로 끝까지 돌린다. 중간 정도의 밝기를 원한다면 양 극단 사이의 적당한 지점까지 스위치를 돌린다. 이 시스템은 사용하기는 쉽지만 한계가 있다. 스위치가 중간 위치에 있으면 -가령 조명이 중간 정도의 밝기라면-당신은 밝기를 눈대중으로밖에는 알 수 없다. 사용되는 전력의 양이 얼마이며 스위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당신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근사치에 머물기 때문에 그것을 저장하거나 재생하기가 곤란하다. 다음주에 똑같은 밝기로 전등을 켜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만큼 돌려야 할지를 알기 위해 스위치 판에다 표시를 해놓을 수도 있지만, 정확하지가 않다. 다른 밝기로 전등을 켜고 싶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만일 친구가 당신과 똑같은 밝기의 조명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치자. 스위치를 시계방향으로 5분의 1쯤 돌리라 든가 화살표가 2사 방향에 올 때까지 스위치를 돌리라 고 친구에게 말해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친구의 조명은 어디까지나 근사치에 머문다. 만일 당신의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그 정보를 전하고, 그 친구는 또 다른 친구에게 그것을 전한다고 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보가 한 다리를 건널 때마다 정확도는 점점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아날로그 형태로 저장되는 정보의 단점이다. 조명들의 스위치는 전구의 밝기에 대한 아날로지, 곧 비슷한 꼴을 제공한다. 스위치가 절반 가량 돌아가면 당신은 사용 가능한 전력의 약 절반을 쓰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스위치를 어느 만큼 돌렸는지 측정하거나 남에게 설명할 때, 실은 밝기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밝기의 비슷한 꼴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날로그 정보도 취합하고 저장하고 재생할 수는 있지만 부정확하다. 매번 전달될 때마다 정확도가 떨어지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제 방의 밝기를 기술하는 전혀 다른 방식을 알아보기로 하자. 정보를 저장하고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이것은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방식이다. 모든 정보는 오직 0과 1만을 써서 수로 변환할 수 있다. 0과 1로만 표현되는 수를 2진수라 한다. 0과 1은 각각 비트라고 부른다. 일단 수로 변환된 정보는 컴퓨터 안에 기다란 비트의 나열로 입력 저장될 수 있다. 이런 수들을 디지털 정보 라 일컫는다. 당신이 250와트짜리 전구 하나가 아닌, 밝기가 1에서 128까지 2배씩 높아지는 여덟 개의 전구를 갖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 전구들 하나하나는 별도의 스위치에 연결되어 있고 가장 와트수가 낮은 전구가 오른쪽에 놓인다. 그런 배열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스위치들을 켜고 끔으로써 당신은 조명을 0와트(모든 스위치를 끈다)에서 255와트(모든 스위치를 켠다)까지 1와트 단위로 키울 수 있다. 즉 당신에게 256가지의 가능성이 주어진 것이다. 1와트 밝기로 하고 싶으면 1와트 전구에 연결된 가장 오른쪽의 스위치를 켜면 된다. 2와트로 하고 싶으면 2와트 전구만 켜면 된다. 3와트로 하고 싶으면 1와트 전구와 2와트 전구를 켠다. 1과 2를 더하면 3이 되기 때문이다. 4와트로 하고 싶으면 4와트 전구를 켠다. 5와트로 하고 싶으면 4와트 전구와 1와트 전구를 켠다. 250와트로 하고 싶으면 4와트 전구와 1와트 전구를 제외한 모든 전구를 켠다. 저녁식사를 하기에 가장 알맞은 실내조명이 137와트라면 128와트 전구, 8와트 전구, 1와트 전구를 켜면 된다. 이 시스템은 현재의 밝기를 기록했다가 나중에 다시 쓰거나, 똑같은 밝기의 조명을 원하는 사람에게 정보를 전달할 때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2진 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은 만국
공통이므로-오른쪽이 가장 작은 수이며 왼쪽으로 2배씩 커진다-어떤 와트수의 전구인지를 일일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켜짐 꺼짐 꺼짐 꺼짐 켜짐 꺼짐 꺼짐 켜짐 식으로 스위치의 상태만 기록하면 된다. 그 정보만 있으면 친구는 당신의 방과 같은 137와트의 밝기를 충실히 재현할 수 있다. 중간에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런 정보는 백만 단계를 거친다 하더라도 최종값은 똑같이 137와트로 나올 것이다. 기호를 좀더 간단히 만들면 꺼짐 은 0으로 켜짐 은 1로 바꿀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첫째, 다섯째, 여덟째를 켜고 나머지는 끄라는 지시를 내리고 싶을 경우, 켜짐 꺼짐 꺼짐 꺼짐 켜짐 꺼짐 꺼짐 켜짐 대신 1,0,0,0,1,0,0,1 또는 10001001이라고만 적으면 된다. 이것이 2진수다. 여기서 2진수 10001001은 137을 가리킨다. 당신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알린다. 완벽한 밝기를 알아냈어! 10001001이야. 해보라구. 당신의 친구는 필요한 스위치만 껐다 켰다 하여 같은 밝기를 정확히 얻을 수 있으리라. 광원의 밝기를 묘사하는 방법치고는 다소 복잡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현대의 모든 컴퓨터가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2진 표현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든 하나의 예다. 2진 표현은 전자회로를 활용하여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방법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2차대전 때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무어 전자공학 대학원에서 프레스퍼 에커트와 존 모클리가 이끄는 일군의 수학자들이 전자식 수리 적분 계산기 곧 에니악(ENIAC)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에니악은 탄도표를 작성하기 위한 계산을 빠르게 하려는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에니악은 컴퓨터라기보다는 계산기에 가까웠지만, 기계식 계산기처럼 바퀴를 통한 점멸 위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공관 스위치 를 이용하여 2진수를 나타냈다. 이 거대한 기계를 조작하는 부대에 배속된 군인들은 삐걱거리는 부식 운반용 손수레에다 진공관을 가득 싣고 동분서주했다. 진공관이 하나라도 나가면 에니악은 작동이 중지되었고, 그렇게 되면 탈이 난 진공관을 찾아내 재빨리 새 것으로 바꿔야 했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일설에 따르면 진공관을 자주 갈아야 했던 것은 진공관에서 나오는 열과 빛이 나방을 불러들였고 이 나방이 거대한 기계 안으로 날아들어와서 회로를 차단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컴퓨터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에 종종 나타나는 사소한 고장을 뜻하는 버그(bug) 라는 말의 어원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겠다. 모든 진공관에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엔지니어들이 6,000개의 전선을 일일이 손으로 연결해놓아야 에니악은 비로소 문제풀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종류의 함수를 계산하게 하려면 엔지니어들은 전선을 매번 다시 깔아야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미국의 과학자 존 폰 노이만이다. 노이만은 모든 디지털 컴퓨터가 지금도 채택하고 있는 기본틀을 마련했다. 요즘도 노이만 아키텍처 라 불리는 이것은 노이만이 1945년에 제시한 이론에 바탕을 두로 있다. 그 이론에서 노이만은 컴퓨터 기억장치 안의 저장명령만 바꾸면 회로접속을 바꾸는
번거로운 작업을 피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앴다. 이 착상이 실현된 순간 오늘날의 컴퓨터가 태어났다. 요즘 컴퓨터에 쓰이는 두뇌는 1970년대에 폴과 내가 충격을 받았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후예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PC의 성능은 거기에 장착된 마이크로프로세서가 한 번에 몇 비트의 정보(앞서 예로 든 전구에서는 스위치의 개수)를 처리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기억용량이 몇 바이트(8비트의 묶음)인가에 따라 평가한다. 에니악의 무게는 30톤이었고 방 하나를 다 차지했다. 그 안에서 계산을 위한 전기신호는 1,500개의 전기기계식 중계장치와 17,000개의 진공관을 통과했다. 한 번 전원을 넣으면 15만 와트의 전기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그러나 에니악이 저장할 수 있는 문자정보의 양은 고작 80개였다. 1960년대에 이르자 가전제품에서 트랜지스터가 진공관을 대신하게 되었다. 벨 연구소에서 얇은 실리콘 박편이 진공관과 동일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지 10여 년 뒤의 일이었다.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처럼 전기 스위치 작용을 하지만 전기 소모량이 훨씬 적었다. 따라서 발생되는 열도 적었고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았다.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 회로를 하나의 칩에서 결합하여 집적회로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가 요즘 쓰는 컴퓨터 칩은 손톱만한 실리콘 안에 수백만 개의 트랜지스터를 쌓아올린 집적회로다. 1977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지에 실린 논문에서 인텔을 설립한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바브 노이스는 인텔이 개발한 300달러짜리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컴퓨터 시대의 태동기에 나방에 시달리던 공룡 에니악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꼬마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속도가 스무 배는 빠르고 기억용량도 크며 몇천 배나 더 믿음직스럽다. 소모하는 전기량도 기관차급이 아니라 전구급이며 덩치는 3만분의 1, 가격은 1만분의 1이다. 우편주문으로도 구입할 수 있고 근처 상점에서도 살 수 있다. 물론 1977년의 마이크로프로세서도 지금 보면 장난감 같다. 실제로 소형 컴퓨터 혁명을 일으켰던 1970년대의 칩보다 더 강력한 성능을 가지 컴퓨터 칩을 장착하고도 비싸지도 않은 장난감이 요즘에는 길가에 널려 있다. 그러나 크기나 용량과는 상관없이 오늘날의 모든 컴퓨터는 2진수로 저장된 정보를 처리한다. 2진수는 PC에 글을 저장하고 콤팩트 디스크에 음악을 저장하고 은행의 현금 자동입출금기에 돈을 저장하는 데도 사용된다. 정보를 컴퓨터 안으로 집어넣으려면 먼저 2진수로 바꾸어야 한다. 디지털 장치는 그렇게 변환된 정보를 다시 원래의 유용한 형태로 바꾼다. 각각의 장치가 스위치를 넣거나 끊으며 전자의 흐름을 조절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대개 실리콘으로 된 이 스위치들은 아주 작기 때문에 전기 변화를 번개처럼 짧게 주어도 컴퓨터 화면에 글을 띄우고 CD플레이어를 통해 음악을 내보내며 현금 자동입출금기에 돈을 결제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전등 스위치의 예를 통해 우리는 어떤 수든 2진수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글은 어떻게 2진수로 표시될까? 약속에 따라 A는 65, 곧 01000001이 된다. B는 66, 그러니까 01000010이다. 띄어쓰기는 32, 곧 00100000이다. 따라서 Socrates is a man"(소크라테스는 남자다)이라는 문장은 다음처럼 136자리의 1과 0으로 표현될 수 있다. 01010011 01101111 01100011 01110010 01100001 01110100 01100101 01110011 00100000 01101001 01110011 00100000 01100001 00100000 01101101 01100001 01101110 문장 한 줄을 2진수로 나타내기는 비교적 쉽다. 다른 종류의 정보가 어떻게 디지털화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그런 종류의 아날로그 정보의 예를 들어보겠다. 레코드는 소리의 진동을 아날로그로 표현한 것이다. 레코드는 음향정보를 미세한 흘림선으로 기록한다. 레코드의 기다란 나선형 홈이 이 자국이다. 어떤 악절의 소리가 커지면 흘림선이 더 깊은 홈을 파며, 음정이 높아지면 흘림선이 더 촘촘해진다. 홈의 흘림선은 최초의 진동음, 다시 말해서 마이크가 포착한 음파의 아날로그다. 턴테이블의 바늘이 홈을 따라 이동하면 바늘은 미세한 흔적에 맞추어 진동한다. 여전히 처음 소리의 아날로그 형태인 이 진동이 증폭되어 스티커를 통해 음악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정보를 아날로그 형태로 저장하는 모든 장치가 가진 결함을 레코드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레코드 표면에 묻은 먼지, 지문, 또는 긁힌 자국이 바늘의 진동을 흐트러뜨리면 소리가 튀거나 잡음이 생긴다. 레코드가 정상속도로 돌아가지 않으면 소리의 고저도 부정확해진다. 레코드를 틀 때마다 바늘은 레코드 표면의 미세한 흘림선을 약간씩 닳게 만들고, 따라서 소리의 재생력은 갈수록 떨어진다. 레코드에 수록된 노래를 테이프에다 녹음하면 레코드의 결함이 테이프에 그대로 전이될 뿐 아니라 새로운 결함이 추가된다. 카세트 테이프 역시 대개 아날로그식이기 때문이다. 재녹음이 거듭될수록 정보의 질은 떨어진다. CD에서 음악은 일련의 2진수로 저장된다. 음악을 구성하는 정보의 한 비트는 CD 표면에 있는 미세한 구멍(또는 스위치)으로 표현된다. 요즘의 CD는 50억 개 이상의 구멍을 갖고 있다. CD 플레이어 안의 레이저 반사광이 구멍 하나하나를 읽어 0의 위치인지 1의 위치인지를 판독한 다음 그 정보를 재조합하여 특수한 전기신호를 보내면 스피커가 이것을 음파로 바꾸어 원래의 음악을 내보낸다. 디스크를 아무리 여러 번 틀어도 음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디지털 정보로 바꾸는 것은 분명히 편리한 방법이지만 비트의 양이 너무 빠른 속도로 늘어난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다. 자연히, 처리되어야 할 정보의 양이 컴퓨터의 기억용량을 초과하거나 컴퓨터 전송시간이 길어진다. 디지털 데이터를 압축시켜서 저장하거나 전송한 다음 그것을 원래의 형태로 확장시키는 컴퓨터 기술이 그래서 날로 각광을 받고 있다. 컴퓨터가 어떻게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는지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1930년대에 정보를 2진수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낸 수학자 클로드 섀넌이 여기서도 큰 기여를 했다. 섀넌은 정보를 불확실성의 감소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가령 당신이 토요일임을 알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당신에게 토요일임을 알려주면 당신이 얻은 정보는 하나도 없다. 반대로, 당신이 요일을 모르는데 누군가가 토요일임을 알려주면 당신에게는 정보가 주어진 셈이다. 불확실성이 감소되었기 때문이다. 섀넌의 정보이론은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 그중의 하나가 컴퓨터와 통신에 모두 중요한 효율적인 데이터 압축법이다. 섀넌의 주장은 명쾌했다. 독특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데이터는 중복되는 내용이므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문편집자가 제목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단어를 빼버리고, 사람들이 전보를 치거나 신문광고를 낼 때 가급적 단어를 줄이는 것도 같은 원리다. 섀넌은 일례로 영어에서 q다음에 항상 뒤따라나오는 u를 든다. q다음에 u가 나온다는 것은 누구나 알기 때문에 u는 전보문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섀넌의 이론은 소리와 그림을 압축하는 데 두루 활용되었다. 1초 길이의 비디오를 이루는 30장의 개별 필름 안에는 중복되는 정보가 많다. 원래의 정보가 2,700만 비트라면 그것을 100만 비트로 줄여 전송할 수 있다. 그렇게 줄여도 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나 압축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앞으로 우리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보내야 할 비트의 양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트는 동선이나 공중파를 통해, 또는 정보고속도로를 통해 전달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정보고속도로의 중추신경이 바로 광섬유다. 광섬유는 유리나 플라스틱으로 된 아주 부드럽고 투명한 물질이다. 어느 정도로 투명한가 하면, 100킬로미터 두께의 광섬유 맞은편에서 타고 있는 촛불을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다. 광선으로 변조된 2진 신호는 이 광섬유를 통해 멀리 전달된다. 광섬유를 흐르는 신호는 동선을 이용하는 신호와 빠르기가 같다. 모두 광속으로 움직인다. 광섬유의 큰 장점은 대역폭이 넓다는 데 있다. 대역폭은 1초 동안 회로를 통해 전달될 수 있는 정보의 양을 말한다. 도로를 예로 들면, 먼지가 폴폴 날리는 좁은 시골길보다는 8차선 고속도로가 더 많은 차량을 오가게 할 수 있다. 대역폭이 커질수록 더 많은 차선을 통해서 더 많은 차량이 달릴 수 있다. 1초 동안에 각 회로를 통과하는 정보의 양도 당연히 늘어난다. 문자나 음성을 전송하는 데 쓰이는 제한된 대역폭을 가진 케이블을 협대역 회로(narrow-band circuit) 라고 부른다. 영상이나 제한적인 동화상을 전달하는 좀더 용량이 큰 케이블은 중간대역(mid-band) 능력 을 가졌다고 말한다. 멀티미디어를 전송하는 더 넓은 대역폭을 가진 케이블은 광대역 능역을 가졌다고 말한다. 정보고속도로는 압축기술을 활용하겠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큰 대역폭이 요구된다. 우리가 쓸모있는 정보고속도로를 아직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통신망은 새로운 종류의 모든 통신을 충분히 수용할 만큼 대역폭이 넓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섬유 케이블이
구석구석까지 깔려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광섬유 케이블은, 배비지는 물론 심지어 에커트나 모클리조차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기술발달의 대표적인 예다. 광섬유와 마찬가지로 칩의 용량과 처리속도도 빠르게 발전했다. 뒤에 바브 노이스와 함께 인텔을 창립하는 고든 무어는 1965년 컴퓨터 칩의 용량이 매년 두 배씩 커지리라고 예상했다. 무어는 과거 3년 동안 컴퓨터 칩의 가격과 성능을 비교 조사하여 얻은 수치를 바탕으로 미래의 추세를 점쳤던 것이다. 사실 무어는 그런 향상 속도가 오래 유지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났을 때 무어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는 다시 컴퓨터 칩의 용량이 2년에 두 배씩 커지리라고 전망했다. 오늘날까지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18개월에 2배씩 늘어나는 이 향상률을 전문가들은 무어의 법칙 이라 부른다. 수가 2배씩 자꾸자꾸 커진다는 것-이것을 전문용어로는 지수함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를 일상생활에서는 잘 실감하지 못한다. 우화를 통해 이를 이해해보자. 인도의 시람왕은 한 신하가 체스 놀이를 발명한 것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주마고 했다. 그러자 신하가 입을 열었다. 폐하, 체스판의 첫째 칸은 밀 한 톨, 둘째 칸은 밀 두 톨, 셋째 칸은 밀 네 톨, 이런 식으로 두 배씩 쳐서 예순네 개의 칸에 해당하는 밀을 저에게 주십시오. 왕은 신하의 욕심 없는 마음에 감복하여 밀 한 자루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왕은 약속한 낟알을 헤아려 체스판 위에 놓으라고 지시했다. 첫째 칸에는 곡식 한 톨이 놓였다. 둘째 칸에는 곡식 두 톨이 놓였다. 셋째 칸에는 네 톨, 다시 여덟, 열여섯, 서른둘, 예순넷, 백스물여덟 톨이 각각 놓였다. 첫째줄의 여덟째 칸에 이르러 시람왕의 시종은 모두 256톨의 밀을 헤아렸다. 그래도 왕은 걱정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많은 밀이 체스판 위에 놓인다고는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밀 한 톨을 세는 데 1초가 걸린다고 가정할 때 지금까지 곡식을 헤아리는 데 걸린 시간은 모두 4분이었다. 한줄을 4분 안에 끝낸다면 예순네 칸에 들어갈 밀알을 모두 헤아리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네 시간? 나흘? 사 년? 두 줄이 끝나갈 무렵 시종은 65,530여 개의 낟알을 헤아리고 있었다. 약 18시간이 경과했다. 셋째 줄의 마지막인 스물넷째 칸의 1,680만 개의 낟알을 헤아리는 데 194일이 걸렸다. 아직도 채워야 할 칸은 마흔 개가 더 남아 있었다. 왕은 신하와의 약속을 깨뜨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칸에는 18,446,744,073,709,551,616개의 낟알을 놓아야 하는데 그걸 모두 세려면 5,840억 년이 걸린다. 현재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시람왕은 어는 순간에 가서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하의 목을 벴다고 한다. 이처럼 지수함수적 성장은 실로 무섭다. 무어의 법칙은 앞으로 20년은
더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은 하루가 꼬박 걸리는 계산도 속도가 1만 배나 빨라지는 20년 뒤에는 10초도 채 안 걸릴 것이다. 일선 연구소에서는 이미 펨토세컨드 단위로 점멸하는 탄도 트랜지스터를 운영하고 있다. 펨토세컨드는 1/1,000,000,000,000,000초, 말하자면 지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장착된 트랜지스터 점멸시간보다 천만배나 짧은 시간이다. 전류가 흐르는 회로의 크기를 축소함으로써 이동하는 전자들이 서로 충돌하는 현상을 막은 것이 이런 빠르기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이것이 발전하면 단일 전자 트랜지스터 가 등장할 것이다. 이 트랜지스터에서는 전자 1개가 정보 1비트를 나타낸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에 따르면 더 이상의 효율적인 트린지스터는 불가능하다. 분자 수준으로 크기를 줄이면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질 것이므로 컴퓨터도 깨알처럼 작아질 것이다. 우리는 이 초고속 컴퓨터의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다. 기술적인 난점민 해결된다면 이런 컴퓨터가 속속 등장할 것이다. 충분한 속도만 확보된다면 정보의 저장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1983년 봄 IBM은 하드 디스크가 달린 IBM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XT를 선보였다. 저장장치로 내장된 하드 디스크는 10메가(바이트)의 정보를 담을 수 있었다. 이미 컴퓨터가 있는 사람은 기존 컴퓨터에다 10메가짜리 하드 디스크를 추가로 장착할 수 있었다. IBM은 별도의 전원이 마련된 이 하드 디스크를 3,000달러에 판매했다. 1메가당 300달러였다. 무어의 법칙에 따른 지수함수적 발전 덕분에 개인용 컴퓨터는 1.2기가바이트-12억 개의 문자정보-급의 하드 디스크를 250달러에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1메가당 21센트에 불과하다! 앞으로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테라바이트(조) 단위의 정보를 호두알만한 크기에 저장할 수 있는 홀로그래픽 메모리도 출현할 것이다. 사람 주먹만한 크기의 홀로그래픽 메모리면 미국 의회도서관의 모든 장서를 수록할 수 있다. 지수함수적 발전 덕분에 지금의 2,000달러짜리 PC가 20년 전에 천만달러를 호가하던 IBM 대형 컴퓨터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갖게 된 것처럼, 디지털화가 이루어질수록 통신기술도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집안의 모든 디지털 데이터를 처리해주는 통신선이 각 가정마다 깔릴 것이다. 그 통신선은 지금의 장거리통화에 쓰이는 광케이블일 수도 있고 케이블 텔레비전에 쓰이는 동축 케이블일 수도 있다. 음성으로 판명되면 디지털 신호는 전화벨을 울릴 것이다. 비디오 영상으로 판명된 신호는 텔레비전에 나타날 것이다. 온라인 뉴스 서비스는 인쇄된 종이나 컴퓨터 화면에 화상으로 전달될 것이다. 통신망을 연결하는 그 개별 통신선은 전화, 영화, 뉴스만을 전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투박한 칼을 썼던 석기시대의 인간이 기베르티(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의 뛰어난 조각가-역주)가 만든 피렌체의 세례당 청동문을 상상할 수 없었듯이, 우리도 앞으로 25년 뒤에 정보고속도로를 타고 어떤 것이 오갈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고속도로가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의 디지털 혁명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미래에 전개될 몇가지 중요한 원리와 가능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제3장 컴퓨터 산업계 최후의 패자 LESSONS FROM THE COMPUTER INDUSTRY 성공은 별로 좋은 스승이라 할 수 없다. 성공은 똑똑한 사람에게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성공에 자만하는 사람의 미래는 위험하다. 8트랙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진공관 TV, 대형 컴퓨터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은 최신 기술, 완벽한 사업계획처럼 보이는 것이 하루아침에 구닥다리로 전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나는 두 눈으로 그것을 목격했다. 오랜 기간을 두고 이루어진 수많은 기업들의 흥망성쇠를 세심하게 관찰하면 미래의 전략을 수립하는 데 지침이 될 만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정보고속도로에 투자하는 기업들은 지난 20년 동안 컴퓨터 산업에서 발견된 크고 작은 오류를 가급적 피하고 싶을 것이다. 대다수의 오류는 몇가지 중요한 요소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상승나선효과와 하강나선효과, 흐름을 뒤쫓지 않고 선도할 수 있는 안목, 하드웨어에 대한 소프트웨어의 비중, 호환성과 그것이 낳은 상승작용 등이 그런 요소에 포함될 것이다. 이제까지의 상식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어제의 상식은 어제의 시장에서만 통용된다. 지난 30년 동안 컴퓨터 하드웨어 맟 소프트웨어 시장은 확실히 기존의 시장과는 판이한 발전양상을 보여주었다. 한때 천문학적인 매상을 올리고 수많은 고객을 거느리던 굴지의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었다. 애플, 컴팩, 로터스, 오러클, 선,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무일푼에서 출발한 신생기업들이 눈깜박할 사이에 수십억 달러의 매출액을 올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나는 이 젊은 기업들의 성공이 부분적으로는 내가 상승나선곡선 이라고 부르는 요소에 의해 촉진되었다고 본다. 투자자들은 좋은 제품을 가진 기업에 관심을 두고 그 기업에 돈을 대려고 한다. 여기저기서 인재들이 모여든다. 장래성 있는 유망한 기업에서 일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재 하나가 문을 두드리면 또 다른 인재가 찾아온다. 유능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일하고 싶어한다. 절로 신바람이 난다. 협력업체와 소비자의 관심이 높아지며 상승나선곡선이 이어진다. 다음번에도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와는 반대로 기업이 휘말릴 수 있는 하강나선곡선이라는 것도 있다. 상승나선곡선을 타는 기업은 지향점을 갖고 있는 반면, 하강나선곡선을 긋는 기업에는 몰락의 기운이 감돈다. 어떤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떨어지거나 새로 나온 제품이 신통치 않으면 세간의 평가가 달라진다.
왜 그런 회사를 다니지? 다른 회사에 투자하지 그래? 그 회사 물건은 안 사는 게 좋다니까. 언론과 투자분석가는 냄새를 맡고 누가 싸웠다느니 누구의 경영 잘못 때문이라느니 따위의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소비자는 그 회사의 제품을 앞으로도 계속 사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진다. 병든 기업은 모든 것을 의심받는다. 아무리 잘해도 빛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전략을 수립해도 사람들은 고루한 방식을 고수할 뿐 이라며 색안경을 끼고 대한다. 회사는 점점 수렁에 빠져든다. 그래서 하강나선곡선을 반전시킨 리 아이아코카 같은 사람이 위대한 인믈로 대접받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한창 잘 나가던 회사는 DEC, 곧 디지털 이퀴프먼트사였다. 20년을 이어온 그 기업의 상승나선곡선은 도저히 멈춰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DEC를 창업한 전설적인 인믈 켄 올슨은 나에게는 영웅이며 신과 같은 존재였다. 1960년 그는 최초의 소형 컴퓨터를 내놓아 소형 컴퓨터 산업에 초석을 마련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내가 고등학교 때 써본 PDP-8의 원조격인 PDP-1이다. 사람들은 수백만 달러를 주고 IBM의 공룡 을 사느니 차라리 12만 달러를 주고 PDP-1을 구입했다. PDP-1은 대형 컴퓨터의 성능에는 못 미쳤지만 그래도 다양한 쓰임새를 갖고 있었다. DEC는 다종다양한 컴퓨터를 속속 내놓아 8년 만에 연 매출이 67억 달러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나자 DEC는 휘청거렸다. 올슨은 소형 탁상용 컴퓨터가 주도하는 미래를 예견하지 못했고 결국 DEC에서 물러나야 했다. 올슨은 개인용 컴퓨터를 한때의 유행이라고 줄기차게, 그것도 공개적으로 강변한 인물로 적잖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올슨을 떠올릴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는 제품을 혁신하는 데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차 하는 순간 그만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왕 안도 남다른 비전을 갖고 있다가 중도탈락한 인물이다. 중국계 이민인 그는 왕 연구소를 차려 1960년대에 전자계산기 공급시장을 주도했다. 1970년대에 들어 왕 안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자계산기 시장에서 과감히 손을 뗐다. 만일 계산기 시장을 계속 고수했더라면 곧바로 불어닥친 가격경쟁 바람에 휘말려 아마 도산하고 말았으리라. 결과적으로 그는 현명한 판단을 한 셈이었다. 기업조직을 개편한 왕 안은 워드프로세서 시장에 뛰어들어 다시 정상에 올라섰다. 세계 전역의 사무실에서 타자기가 왕 워드프로세서에게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왕 워드프로세서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용 컴퓨터라고 볼 수는 없었다. 오직 문서편집기능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왕은 앞서가는 엔지니어였다. 계산기 시장을 포기했던 통찰력이라면 1980년대의 PC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도 충분히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두 번째 시장변화를 예견하는 데는 실패했다. 왕은 우수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지만 그 소프트웨어는 그의
워드프로세서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워드스타, 워드퍼펙트, 멀티메이트(왕 소프트웨어의 모방작) 같은 문서편집용 소프트웨어를 처리할 수 있는 범용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한 순간부터 그의 소프트웨어는 무력해졌다. 만일 왕이 호환성을 갖춘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에 눈떴더라면 아마 오늘날의 마이크로소프트는 없었을 것이고 나는 그저 이름없는 수학자나 변호사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겁없이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뛰어들었던 젋은 시절은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었으리라. PC 혁명과 함께 도래한 기술적인 변화를 간과한 또 하나의 대기업으로 IBM을 들 수 있다. IBM을 키운 주역은 금전등록기 세일즈맨 출신의 무서운 기업인 토머스 J. 왓슨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왓슨은 IBM을 창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격적인 경영에 힘입어 1930년대 초부터 IBM은 계산기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IBM은 1950년대부터 컴퓨터 사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많은 기업들이 컴퓨터 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1964년까지만 하더라도 각각의 컴퓨터 모델은, 워낙 독자성이 강해서 심지어 같은 회사에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별도의 운영체계와 응용 소프트웨어를 준비해야 했다. 운영체계(disk-operating system, 또는 줄여서 그냥 DOS라고도 부른다)는 컴퓨터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을 조정하고 통제하여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총괄하는 기초 소프트웨어다. 운영체계가 없는 컴퓨터는 무용지물이다. 운영체계는 회계, 급료명세, 문서편집, 전자우편 같은 모든 웅용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토대라 할 수 있다. 컴퓨터의 가격이 다르면 내부설계도 달라졌다. 과학연구용 컴퓨터와 상업용 컴퓨터가 달랐다. 다양한 종류의 개인용 컴퓨터를 위한 베이식 프로그램을 작성하면서 나는 한 기종에서 다른 기종으로 소프트웨어를 옮길 때마다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코볼(COBOL)이나 포트란(FORTRAN) 같은 표준 프로그램 언어로 소프트웨어를 작성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IBM의 후계자로 지목되던 왓슨의 아들 톰의 지휘 아래 IBM은 구조기준화 사업에 착수, 자그마치 50억 달러를 투자했다. 구조기준화는 시스템/360 컴퓨터 시리즈에 포함된 모든 컴퓨터는 크기나 기종에 상관없이 동일한 명령어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야심만만한 구상이었다. 저속 컴퓨터에서 초고속 컴퓨터까지, 일반 사무실에 놓이는 소형 컴퓨터에서 벽면이 유리로 되고 냉방이 잘되는 방 안에 자리잡은 대형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구조적으로 차이가 나는 기종들이 같은 운영체계에 따라 움직였다. 소비자는 응용 프로그램과 디스크, 테이프 드라이브, 프린터 같은 주변장치를 이 모델에서 저 모델로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었다. 구조기준화는 컴퓨터 업계의 판도를 한껏 뒤흔들어놓았다. 시스템/360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IBM은 그후 30년 동안 대형 컴퓨터 시장을 장악했다. 소비자들은 360에 많은 투자를 했다.
소프트웨어와 그것을 운용하기 위한 훈련에 공을 들여도 헛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큰 컴퓨터가 필요한 사람은 같은 시스템을 운용하며 구조적으로 동일한 IBM기종을 구입하면 그만이었다. 1977년 DEC도 VAX라는 독자적인 구조기준화 시리즈를 선보였다. VAX 계열의 컴퓨터는 탁상용 컴퓨터에서 대형 컴퓨터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으며 시스템/360이 IBM을 성장시켰듯이 DEC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DEC는 소형 컴퓨터 분야의 선두주자로 급부상했다. 구조기준화에 성공한 IBM의 시스템/360과 그 후속작인 시스템/370은 경쟁사들을 따돌렸다. IBM의 위세에 눌려 다른 기업들은 감히 컴퓨터 시장에 뛰어들 엄두를 못 냈다. 그러나 1970년 IBM의 선임 엔지니어였던 유진 앰덜이 새로운 경쟁사를 설립했다. 앰덜에게는 참신한 사업계획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앰덜 이라고 이름붙인 그의 기업은 IBM 360 소프트웨어와 완벽한 호환성을 갖는 컴퓨터를 만든다는 구상하에 세워졌다. 앰덜이 만든 컴퓨터는 IBM 제품과 동일한 운영체계를 갖고 응용 프로그램을 너끈히 돌렸을 뿐 아니라 가격 대비 성능도 IBM 컴퓨터를 능가했다. 얼마 안 가서 컨트롤 데이터, 히타치, 아이텔에서도 IBM 제품과 플러그 호환성 (plug-compatible) 을 갖는 대형 컴퓨터를 새발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자 360과의 호환성은 더욱 중요해졌다. IBM의 운영체계를 사용하는 대형 컴퓨터를 만들어내는 기업만이 뒤처지지 않았다. 360이 등장하기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 회사는 일부러 타사 제품과 호환이 되지 않도록 컴퓨터를 만들었다. 막대한 돈을 들여 자기 회사의 컴퓨터를 설치한 소비자가 쉽게 다른 회사의 컴퓨터를 구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컴퓨터를 구입한 소비자는 싫든 좋든 그 컴퓨터를 만든 회사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소프트웨어를 고치는 방법도 있었지만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앰덜은 그 관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시장에서 호환성이 각광받았다는 것은 미래의 PC 산업에도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정보고속도로의 구축에 뛰어든 기업들도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비자는 자신에게 하드웨어의 선택권을 주고 가장 폭넓은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시스템으로 몰리게 마련이다. 컴퓨터 업계의 판도가 그렇게 돌아가는 동안 나는 학교공부 하랴 컴퓨터와 씨름하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73년 가을 나는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생에게는 치기라는 것이 있다. 내가 다니던 하버드 대학에서는 여유만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나도 1학년 때는 수업을 거의 듣지 않고 학기말에 가서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주위에는 공부를 그렇게 몰아서 하는 친구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마치 누가 가장 적은 시간을 투자해서 가장 높은 학점을 따는가를 겨루는 시합에 나선 듯한 분위기였다. 여유가 있을 때는 주로 포커로 시간을 보냈다. 나는 포커에 빠져들었다. 포커를 치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각종 정보, 즉 누가 과감한 베팅을 하는가, 어떤 카드가 나왔는가, 이 친구의 베팅술과 연막술은 어떤가 등등을 모두 모은
다음 그 정보들을 종합해서 자신의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그런 정보를 처리하는 데 나는 자신이 있었다. 포커에서 딴 돈과 거기서 얻은 전략수립 경험은 사업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공부를 미루는 버릇은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걸 몰랐다. 오히려 나와 함께 늑장을 부리는 친구가 있어 더욱 기고만장했다. 1학년 때 같은 기숙사에서 만난 수학 전공의 스티브 볼머라는 친구였다. 스티브와 나는 생활습관은 달랐지만 학점을 얻기 위해 들이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기를 쓴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스티브는 활달한 친구였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사람도 잘 사귀었다. 그는 당연히 이런 저런 활동에 시간을 많이 뺏길 수밖에 없었다. 2학년 때는 미식축구 팀의 간사를 맡았고 학교신문 하버드 크림슨(Harvard Crimson)'의 광고부장으로 일했으며 한 문예지의 대표로도 활동했다. 그는 또 하버드 내의 사교모임에도 가입했다. 우리 두 사람은 강의와는 담을 쌓고 지냈고 시험을 코앞에 두고서야 중요한 책을을 미친 듯이 읽어댔다. 한번은 경제학 2010이라는 대학원 수준의 딱딱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교수는 원하는 사람에게는 기말시험 성적만으로 학점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스티브와 나는 학기 내내 다른 일에만 열중하다가 기말시험을 1주일 남겨두고 처음으로 경제학 책을 집어들었다. 우리는 미친 듯이 공부했고 둘 다 A를 받았다. 폴과 나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차린 후 그런 식으로 늑장부리는 것이 기업경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처음 거래한 고객 중에는 일본 기업도 있었다. 일본 기업은 철저했다. 약속한 기일을 우리가 지키지 못하면 제꺽 우리를 도울 사람을 보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아마 일본 기업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직원은 하루 열여덟 시간을 우리 사무실에서 죽치고 지냈다. 부담스러워서라도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진지했다. 그들은 이렇게 묻곤 했다. 왜 작업이 늦어진 겁니까? 우리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작업이 늦어진 원인을 규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우리는 작업방식을 차츰 고쳐나갔다. 요즘도 원래의 예정보다 지연되는 사업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무서운 시어머니 등쌀에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75년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문을 열었다. 그곳에 MITS가 있었기 때문이다. MITS는 포퓰러 일렉트로닉스 표지에 실렸던 알테어 8800을 만든 조그만 회사였다. 우리가 MITS와 손을 잡은 이유는 MITS가 값싼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에게 보급한 최초의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1977년에 이르러 애플, 카머도, 라디오 섀크도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초기에 나온 개인용 컴퓨터의 베이식 프로그램은 대부분 우리가 만들었다. 당시에는 베이식이 중요한 소프트웨어 언어였다. 시판되는 응용 소프트웨어가 거의 없어서 사용자가 베이식으로 직접 프로그램을 짜야 했기 때문이다. 베이식을 파는 것도 처음에 내가 했던 일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 3년
동안 마이크로소프트의 직원들은 오직 연구에만 몰두했다. 나는 틈틈이 프로그램을 짜면서 영업, 경리, 마케팅 업무를 주로 혼자서 처리했다. 아직 스무 살도 안된 젊은이에게 영업은 고역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전략은 라디오 섀크 같은 컴퓨터 회사로 하여금 개인용 컴퓨터(가령 라디오 섀크의 TRS-80)와 우리의 소프트웨어를 일괄 판매하게 만들어 로열티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전략을 세운 건 해적판 소프트웨어가 범람했기 때문이다. 알테어 베이식이 처음 나왔을 무렵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당장에 호평을 받아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매상은 형편없이 낮았다. 나는 컴퓨터 애호가들에게 드리는 공개서한 을 각계각층에 보내, 더 많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 해적행위를 중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열 명의 프로그래머를 고용하여 우수한 소프트웨어를 시장에 내놓는 것보다 보람찬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쓴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컴퓨터 애호가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프로그램을 즐겨 사용했지만 돈 주고 구입하는 것보다는 빌려 쓰기를 원했다. 다행히 요즘은 소프트웨어의 저작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내렸다.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는 저작권법을 만들지 않았거나 시행에 옮기지 않아 무역분쟁을 낳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 정부에 서적, 영화, CD, 소프트웨어에 대한 저작권법을 좀더 강력히 시행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정보고속도로가 해적들의 천국이 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햐 한다. 미국 컴퓨터 회사들한테도 많은 매상을 올렸지만, 1979년까지 우리 회사 매상의 거의 절반은 일본이 차지했다. 그것은 니시 가즈히코라는 뛰어난 젊은이 덕분이었다. 니시는 1978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나와 손잡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우연히도 니시와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나이도 같았고, 니시도 개인용 컴퓨터에 미쳐서 나처럼 대학을 휴학한 상태였다. 우리는 몇달 뒤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의 한 전시회장에서 만났다. 앨버커키로 함께 돌아온 우리 두 사람은 한 페이지 반 분량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베이식의 동아시아 독점 배급권을 니시에게 준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의기투합했으므로 변호사를 개입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 계약에 따라 우리는 1억 5천만 달러 이상의 거래를 했다. 당초 예상의 10배가 넘는 규모였다. 니시는 일본과 미국의 기업문화를 매끄럽게 중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본 기업들이 자신만만한 니시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무서운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출장을 가면 나는 니시와 함께 호텔에 묵었다. 그럼 밤새도록 전화통에 불이 났다. 몇백만 달러 규모의 거래가 척척 이루어졌다. 신바람이 절로 났다. 한번은 새벽 3시부터 전화가 한 통도 걸려오지 않다가 5시가 되어서야 전화벨이
울렸다. 니시는 수화기로 선을 뻗으면서 농담을 던졌다. 오늘밤은 사업이 더디게 진행되는군. 우리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 다음 8년 동안 니시는 굴러들어오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었다. 1981년인가는 시애틀에서 도교로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일본 교세라사의 이나모리 가즈오 사장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일본에서 아스키사를 경영하던 니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협조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 아래 이나모리 사장에게 새로운 사업안을 설명했다. 간단한 소프트웨어가 내장된 랩톱 컴퓨터를 개발하자는 발상이었다. 제품설계는 나와 니시가 맡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직 규모가 작았으므로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도 한 사람 몫을 맡아 참여할 수 있었다. 그 신제품은 1983년 미국에서 라디오 섀크사에 의해 모델 100이라는 이름으로 799달러에 시판되었다. 일본에서는 NEC PC-8200으로, 유럽에서는 올리베티 M-10으로 팔렸다. 니시의 열정이 탄생시킨 이 컴퓨터는 최초의 랩톱 컴퓨터로서 수년간 기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시 몇 년이 흐른 1986년, 니시는 내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끌고 가려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아스키사를 끌고 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일본에 자회사를 차렷다. 니시의 회사는 지금 일본 굴지의 소프트웨어 업체로 성장했다. 지금도 친구처럼 지내는 니시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자세로 PC를 좀더 보편화된 도구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정보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에는 범세계적인 PC 시장이 꼭 필요하다. 개인용 컴퓨터 분야에서의 미국, 유럽, 아시아 기업들간 협력은 과거보다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자신의 활동을 세계화하는 데 실패하는 국가나 기업은 미래를 주도할 수 없다. 1979년 1월 마이크로소프느는 앨버커키에서 시애틀 교외로 이전했다. 폴과 나는 십여 명의 직원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개인용 컴퓨터 산업이 부상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컴퓨터들이 널리 보급, 확산될 수 있도록 공들여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사람들은 엄청난 수익성을 가진 흥미있는 프로젝트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을 요청하는 소리가 우리가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쇄도했다. 나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리고 하버드에서 경제학 2010을 함께 들었던 스티브 볼머를 떠올렸다. 스티브는 대학 졸업 후 신시내티의 프록터 앤드 갬블사에서 상품관리부 차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뉴저지 일원의 소규모 소매점들을 관리하는 것도 그의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직장생활을 몇년 한 뒤 스티브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들어갔다.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스티브는 일 년을 마친 상태였고 대학원 과정을 마저 이수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내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지분을 주겠다고 하자 그 역시 나처럼 무기휴학에 들어갔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대다수 종업원에게 주식을 제공하면서 추진한 공동소유제도는 예기치 못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수십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종업원지주제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미국은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했다. 이 제도를 받아들인 덕분에 창업한 지 얼마 안되어 성공을 거둔 기업이 상당수 있다. 스티브가 마이크로소프트에 합류한 지 3주일 만에 우리는 처음 언쟁을 벌였다. 물론 그후 우리가 견해차이를 보인 적은 거의 없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직원은 서른 명이었는데 스티브는 당장 오십 명은 더 고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안돼. 나는 반대했다. 우리와 처음 거래를 한 회사들 가운데 도산한 기업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가급적 회사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장사가 잘 된다고 무리하게 사업을 키우다가는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소수정예로 꾸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완강했다. 결국 내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당장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들여. 나는 스티브에게 말했다. 단 우리 힘에 부친다고 생각될 때는 자네한테 말하겠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사업은 스티브가 인재를 발굴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확대되었다. 처음에 나를 가장 불안하게 했던 것은 다른 회사가 달려들어 시장을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작은 기업이 한두 곳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다행해 우리가 하는 방식으로 소프트웨어 시장을 공략하는 기업은 하나도 없었다. 또 한 가지 걱정은 대기업이 자기 회사에서 만든 대형 컴퓨터용 소프트웨어를 마이크로프로세서에 토대를 둔 소형 컴퓨터용으로 수정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IBM과 DEC는 뛰어난 소프트웨어를 많이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다행스럽게도 대기업은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수정하여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공략하는 데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가장 위급했던 순간은 1979년 DEC가 소형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를 채택한 PDP-11 개인용 컴퓨터를 내놓았을 때였다. 그러나 DEC는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별 매력을 못 느꼈는지 그 제품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목표는 컴퓨터 하드웨어를 만들거나 파는 데 직접 참여하지 않고 대부분의 개인용 컴퓨터에 쓸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소프트웨어를 아주 싼 값에 팔았다. 박리다매가 우리의 신조였다. 우리는 베이식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각각의 컴퓨터에 맞게 수정했다. 그러면서 하드웨어 업체의 요구를 발빠르게 수용했다. 우리는 한 명의 고객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을 산 사람이 후회하지 않도로 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의 전략은 먹혀들었다. 실질적으로 개인용 컴퓨터를 제작하는 모든 업체가 우리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하고 로열티를 지불했다. 비록 두 회사의 컴퓨터 하드웨어가 다르더라도 둘 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베이식을
쓰면 어느 정도 서로 호환이 되었다. 호환성은 컴퓨터를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하드웨어 업체들은 자사 제품을 광고하면서 베이식을 비롯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베이식은 업계의 표준 소프트웨어로 자리잡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느냐로 값어치를 판가름할 수 없는 물건도 있다.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이 좋은 예다. 그것을 구입한 사람이 당신 혼자라 하더라도 프라이팬의 값어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통신기기처럼 서로 손발이 맞아야 하는 물건의 값어치는 그것이 얼마나 널리 보급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단 한 종류의 규격봉투만 집어넣을 수 있는 구멍을 가진 멋진 수제 우편함과 누구든지 당신에게 전할 편지와 메모를 떨굴 수 있는 낡은 골판지 상자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아마 당신은 사용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골판지 상자를 선택할 것이다. 당신은 호환성이 높은 쪽을 선호할 것이다. 때로는 정부나 무슨무슨 위원회에서 호환성을 높이기 위해 표준을 정한다. 법률상의(de jure) 표준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그러나 성공을 거둔 표준의 대부분은 사실상의(de facto)' 표준, 즉 시장이 발견한 표준이다. 대부분의 아날로그 시계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간다. 영미권의 타자기와 컴퓨터 키보드의 자판 배열은 예외없이 같다. 법이 그렇게 만들라고 명령한 것도 아닌데 다들 그렇게 만들고, 소비자도 새로운 배열의 키보드에 아주 두드러진 장점이 없는 한 굳이 바꾸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의 표준은 법적 강제력이 아닌 시장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것이 채택된 데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다. 또 정말로 뛰어난 것이 나타나면 그것에 의해 대치된다. 콤팩트 디스크(CD)가 레코드를 몰아낸 과정도 그랬다. 사실상의 표준은 성공한 기업에서 나타나는 상승나선효과와 비슷한 경제원리를 통해 시장점유율을 높여가는 수가 많다. 성공이 또 다른 성공을 낳는 것이다. 긍정적 피드백이라 불리는 이 개념은 사람들이 호환성을 추구할 때 사실상의 표준이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한다. 긍정적 피드백은 시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어떤 방식이 그와 경합하는 다른 방식들에 비해 약간의 우위를 점할 때 시직된다. 긍정적 피드백은 가격을 거의 올리지 않고 대량생산할 수 있으며 호환성에서 약간이라도 유리한 첨단제품을 누릴 가능성이 높다. 가정용 게임기가 좋은 예다. 게임기는 게임용 소프트웨어를 운영할 수 있는 특수 운영체계를 탑재한 특수 컴퓨터다. 여기서 호환성이 중요한 것은 더 많응 응용 소프트웨어-여기서는 게임-를 제공할수록 그 게임기가 소비자에게 주는 매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게임기를 구입하는 소비자자 늘어나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에서는 그 게임기에 맞는 게임을 더욱 많이 만들어낸다. 어떤 제품의 지명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아지면 긍정적
피드백이 시작되어 매상이 늘어난다. 긍정적 피드백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유명한 예가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벌어진 비디오 표준형식을 둘러싼 싸움이었다.VHS 방식과 베타 방식 중에서 베타 방식이 기술적으로는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VHS가 승리를 거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긍정적 피드백 덕분만은 물론 아니었다. 베타 테이프는 1시간을 녹화할 수 있었던 데 비해 VHS는 3시간을 녹화할 수 있었다. 1시간이면 영화 한 편이나 축구 한 경기를 녹화하기에도 모자랐다. 소비자는 전문 엔지니어가 작성한 제품설명서보다는 테이프의 녹화시간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VHS방식은 소니의 베타맥스 비디오 플레이어에서 사용한 베타 방식에 비해 근소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VHS 표준을 개발한 JVC는 다를 비디오 제조업체들이 아주 낮은 사용료만 내고도 VHS 표준방식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VHS와 호환성을 갖는 비디오가 늘어나면서 대여점에서도 베타보다는 VHS 테이프를 더 많이 갖다놓기 시작했다. 따라서 VHS 비디오를 가진 사람은 베타 비디오를 가진 사람보다 대여점에서 더 많은 영화를 빌려볼 수 있게 되었다. VHS의 장점이 널리 알려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VHS 비디오를 구입했다. 대여점은 대여점대로 더 많은 VHS 테이프를 갖다놓았다. VHS가 표준방식으로 더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믿음이 확산되면서 베타는 급속히 경쟁력을 잃어갔다. VHS는 긍정적 피드백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성공이 성공을 낳은 것이다. 물론 그만큼 질적인 뒷받침이 따랐다. 베타와 VHS 방식의 결투가 벌어지는 동안 대여점으로 나가는 비디오 테이프의 판매량은 거의 제자리 걸음이었다. 1년에 몇백만 개 팔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983년을 고비로 VHS가 표준방식으로 부상하자 소비자의 호응도도 일정한 문턱을 넘어서 테이프 판매량이 갑자기 치솟았다. 그해 판매된 테이프는 950만 개가 넘었다. 전년 대비 50퍼센트 증가한 양이었다. 1984년에는 2,200만 개가 팔렸다. 1985년에는 5,200만 개, 1986년에 8,400만 개, 1987년에는 1억 1천만 개가 팔려 이제 비디오 감상은 가장 대중화된 오락형식이 되었고 집집마다 비디오 플레이어를 구비하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기술이 얼마만큼 수용되느냐에 따라 그 기술의 질이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또 다른 예로 텔레비전을 들 수 있다. 1946년 미국에서 팔린 텔레비전은 모두 10,000대였고, 이듬해에는 겨우 16,000대였다. 그러던 것이 1948년에는 19만 대로 불었다. 성장세에 들어선 것이다. 그 다음해에 100만 대, 또 그 다음해에는 400만 대, 1,000만 대로 꾸준히 늘어나 1955년에는 무려 3,200만 대가 팔렸다. 텔레비전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프로그램 제작비도 증액되었고 그것이 다시 사람들의 텔레비전 구매욕을 자극했다. CD가 처음 출현했을 때 CD와 CD 플레이어의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다. 레코드점에 비치된 CD의 종류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꾸준히 팔리고 CD의 종수도 불어나자 호응도가 일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