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평화지수 연구: 미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를 중심으로 인남식 ( 외교안보연구원) 1. 들어가면서 중동지역을 흔히들 체질적 불안정성 (inherent quality of instability)' 을 지닌 지역이 라 부른다. 이 짧은 어휘 속에 함축된 의미는 중동지역 전체에 편만한 분쟁은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 적인 분열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즉 첨예한 분쟁의 쟁점 및 특정 사안으로부터 발원하는 갈등 요소도 상존하지만 역사적 맥락과 배경 속에 용해되어 있는 분쟁의 요인들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기존의 갈등해소 (conflict resolution) 의 접근법으로만 중동의 분쟁 사안을 접근하 다보면 구조적인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고질적인 중동지역의 핵심적 분쟁 사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결국 이스라엘과 팔 레스타인 ( 아랍) 간의 갈등으로 규정된다. 즉 미국 및 영국을 위시한 서방 기독교 세력의 대중동 핵 심전략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이 세워졌다는 점은 모든 중동, 아랍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후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여전히 중동 지역 전역에 걸쳐 불안정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특히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1)에서 아랍 연합군이 패퇴하며 자존심 에 상처를 입었고, 전면전과는 다르게 발생한 일련의 테러 및 폭력사태에 의해 양자 간의 갈등과 분 노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2) 연후에 발생하는 일련의 구도, 특히 냉전 해체 이 후 문명론적 갈등양상이 가시화되면서 이스라엘은 서구 기독교 문명권의 역내 전위로 인식되고 분쟁 의 화약고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중동 지역에 퍼져있는 고질적 갈등 구도의 배경적, 구조적 원인 중 가장 결정적이 고 중요한 사안이 바로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국제 분쟁의 주요 지역인 중동의 불안정성을 해소하여야 범세계적 안정화의 기초가 놓인다는 인식하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를 접근하여야하는 시점이다. 이-팔 분쟁에 관한 이해의 증진은 곧 중동분쟁의 상당부분을 해석할 수 있게 한다. 평화지수 연구에서 나타나듯 전세계 분쟁의 빈도와 가중치를 볼 때 가장 높은 수준의 불 안정성과 갈등 구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이- 팔 분쟁의 의미를 방증한다. 여기에 미국 대외정책의 주요 이슈 중 하나가 이- 팔 분쟁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중동 지역은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투사지역으로서 자리잡아왔다. 미국이 중동문제를 접근할 1)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국과의 4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을 의미한다. 1차 중동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및 팔 레스타인의 축출에 따른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전쟁 이라 칭하며, 2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낫세르 대통령의 수 에즈 국유화가 발단이 되어 영, 불, 이스라엘 연합군과 이집트간의 교전이 발생한 1956 년, 그리고 1967년 3 차 중동전쟁은 현재 이스라엘 북부 구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 (Golan Heights), 시나이 반도, 그리고 웨스트 뱅크가 병합된 6 일전쟁 이다. 마지막 4차 중동전쟁은 1973 년 발생한 10 월전쟁 이다. 2) 특히 1988 년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발생한 사브라 샤틸라 사건의 후유증이 컸다. 본 사건은 이스라엘 정규군의 지원을 받아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 세력인 팔랑헤당 전투요원들이 팔레스타인 난 민촌의 비무장 난민을 사살한 것으로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서의 패배라는 상흔보다 훨씬 심각한 심리적 상흔과 적대감을 낳았다. 1
때 크게 걸프우선 정책과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우선 정책으로 나뉘어진다. 일반적으로 석유이익과 관련된 이해관계가 강조될 경우에는 이란, 이라크, 사우디를 중점으로 접근하는 걸프우선 정책을 편 다. 반면 보다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중동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경우에는 이스라엘 -팔레스 타인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석유 안보와 이스라엘 안보가 미국 대중동정책의 양 대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미국 내 유태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 니기에 이스라엘 안보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게 남아있고,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는 미국 대외정책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최근 논란이 된 미어샤이머와 왈트의 논쟁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고민을 반영하고 있 다. 저자들은 " 이스라엘의 로비와 미국의 대외정책 " 이라는 책에서 미국 대외정책의 혼란은 대이스라 엘 정책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은 전반적인 중동정책 실패를 초래 했고, 이에 따라 대중동정책의 정상화는 이스라엘에 대한 중립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논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평화의 ' 지수화' 의미는 심대한 의미가 있다. 전 술한대로 이스라엘은 중동평화의 핵심 이슈이며, 이스라엘을 둘러싼 평화 구축 노력의 성패 여부는 곧 중동평화 및 세계평화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기존의 중동평 화연구는 발발한 사건의 인과율 (causality) 및 설명적 분석에 집중되어 왔다. 중동, 특히 이스라엘 문제에 천착할 때 분쟁의 만연화 라는 주어진 조건을 당연하게 인식해 온 것이다. 본 연구는 이 러한 한계를 일정정도 극복하고 전반적 추세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는 비교적 객관적 지표를 구성하 려 하였다. 이는 평화지수의 해석을 근거로 한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3자 역학 관계 추적으로 귀결 지어진다. 2. 평화지수의 시계열 분석 중동의 분쟁을 분석함에 있어 에드워드 아자르 (Edward Azar) 는 ' 고질적 사회분쟁 이론' (theory of protracted social conflicts) 개념을 정립했다. 아자르는 중동 분쟁의 정치적 현상 이면 에 존재하는 갈등 유발 요소는 누적된 역사적 상흔과 문화적 맥락에 기인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즉 정치적 아젠다의 해결을 통해 평화 구축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분쟁의 다 양한 층위, 즉 문화, 역사, 종교, 사회, 그리고 경험되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드러난 분쟁 이면에 침착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단순히 이 지역을 둘러싼 이슈 중심의 평화연구는 피상적인 분석에 그칠 가능성이 높으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그리고 이와 연관된 중재자로서의 미국과의 관계 역시 보다 역사 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 쟁 분석 추세는 대개 구체적인 쟁점별 접근에 가까웠다. 즉 오슬로 평화협상 이후에 최종 단계 협상 조건에 포함된 4 대 이슈, 즉 정착촌, 난민귀환, 동예루살렘 영유권 및 국경획정 문제 등의 쟁점에 관 한 이해관계에 집중했다. 또한 본 평화문제는 주로 친아랍, 친이스라엘의 정파적 진영론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아 객관적인 시각에서의 흐름과 구조에 천착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분석적이고 거시적 인 얼개를 보기보다는 정파적이고 감정적인 분위기가 압도해왔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의 의의는 이러한 감정적 지향성을 탈피하고 구체적인 사례 빈도의 트렌드와 그에 대한 분석 및 의미부여를 통해 새로운 예측의 기법을 구축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2
가. 분석 기간 (1990-2004) 설정의 의미 본 연구의 분석기간은 냉전붕괴 직후인 1990년부터 부시 행정부 1기말인 2004년까지로 설정되었다. 반세기를 지배하던 이념적 이항대립의 구도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제관계 역학구도가 편 성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특히 냉전 해체 후 10년의 기간 동안 국제 사회는 이념구도를 대체할 21 세기 국제관계의 장을 탐색하는 기간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국제분쟁의 핵심 지역인 이스 라엘 팔레스타인간의 갈등 및 협력의 관계구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 는 일이다. 이스라엘은 1948 년 5월 14일 독립 이후 서방 및 유태인 네트워크의 지원으로 국가 건설에 매진해왔다. 2차 중동전쟁인 1956 년 수에즈 전쟁을 계기로 중동 전역에 편만하게 불어온 아랍 민족 주의로 인해 냉전 구도에서 친소비에트 및 비동맹의 입지를 강화해 온 아랍측은, 자유진영의 핵심 동맹국가인 이스라엘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미국 및 서방의 친이스라엘 노선과 아랍 공화정의 친팔레스타인 노선간 대척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냉전 구도하에서의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은 사실상 상수적 형태였다. 즉 정세변화나 리 더십의 변화와는 상관없는 항상적 분쟁을 나타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냉전이라는 거대 한 틀이 붕괴되고, 이를 갈음하는 국제정치 신역학구도의 등장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 쟁 국면의 새 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더 이상 미국의 일방적 지지가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불안감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즉 미국의 대외정책상 이스라엘이 갖는 전략적 가치가 냉전 해체와 더불어 급속히 하강하리라는 예상에 의거한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러한 냉전 해체의 국면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일어나 1 차 걸프전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타격을 입 었고, 미국의 역내 영향력은 강화되면서 중동에서의 미국의 입지가 한층 상승했다. 즉 고질 적인 사회분쟁 성격을 나타내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미국의 중재자적 입지가 강 화되어 새로운 해결 실마리가 포착되는 분위기로 전개되었다. 즉 1990년대 초반부터 강력 한 평화협상 중재 국면이 미국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는 곧 오슬로 평화협상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냉전 해체와 동시에 시작된 새로운 평화무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지수를 구 성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평화협상에 반하는 역내 근본주의의 반동적 행태도 상승하는 국면이 전개된다. 결국 평화협상의 주인공 이츠하크 라빈의 피살을 기점으로 1996년부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내부 정세는 격랑에 휩싸이게 되고 이러한 급변하는 정세 구도가 2000 년까지 이어진다. 결국 1998년 와이리버 협정에도 불구하고 2000년 2차 인티파다를 통한 불안정성 증대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여기에 2001년 9.11 사태는 냉전 해체 이후에 이념적 진공상태였던 중동권역 전체 에 이슬람주의 가 확산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야세르 아라파트의 사망 및 하마 스의 부상 등 팔레스타인 내부 정치구도의 변화가 수반되어 정세는 혼란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냉전 붕괴, 1 차 걸프전과 임팩트 그리고 9.11 이라는 3대 사건을 중심으로, 냉전 이후 새롭게 재편되는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 구도 속에서 평화지수의 흐름 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가를 살펴보려 하였다. 이는 분쟁의 만연성으로 대표되는 중동 정치 를 중요한 역사적 시점 도라 할 수 있다. (watershed) 을 지형지물 근거로 평화구축 흐름을 분석해 보려는 시 3
나. 주요 사건 관련 평화지수의 시기별 전개 양태 (1) 1990-1992: 1차 걸프전 전후 이 시기는 냉전 붕괴 이후 이팔분쟁의 탐색 조정기라 할 수 있다. 특히 냉전 시기 이스라 엘이 점유하던 고전적 친서방 동맹 파트너로서의 전략적 의미 상실에 대한 이스라엘 내 불안감이 상 승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라크의 쿠웨이트침공에 따른 1차 걸프전이 발생하면서 역내 불 안감이 상승하고 전반적인 안보환경의 불안정성이 점증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내 불안감은 곧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국면 전개로 연결되었다. 1990 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이어 1991 년 1월 16일 개전되어 44일간 지속된 1차 걸프전 ' 사막의 폭풍' 작전 시기에 전반적인 지수 상승추세가 나타난다. 침공 직후인 1990 년 9월 대 이스라 엘 팔레스타인 평화 지수가 -63.3, 10월 지수는 -135.9 로 악화되며 개전 당시까지 유사한 추이를 이 어나간다. 특히 11월에는 이스라엘 영토인 텔아비브 내에서의 거리 테러가 빈발하여 이팔 양측간의 긴장이 최고도에 달하게 된다. 이는 쿠웨이트 침공이후 다국적군의 반격을 예상한 이라크가 이스라 엘에 대한 호전적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냄에 따라 이스라엘 내부의 안보 불안이 상승한 상황임을 유추할 수 있다. 반면 이 기간 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평화지수는 기존의 고질적인 테러행위의 추이와 별 다른 특이 사항이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의 대 이스라엘 압박이 증가되는 추이를 나타낸다. 특히 1990년 10월 이라크의 대 이스라엘 압박에 대해 강경대응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국면에서 팔레스타인 자극을 막으려 하는 미국의 대 이스라엘 평화 지수는 -59.1 ( 적대행위빈도 28 건) 을 나타 내는 등 이전 추이와 확연하게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결국 1991년 1월 걸프전이 발생하고 1, 2월 두 달간 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평화지수는 가장 갈등수준이 높은 -140 과 -92.1 을 기록한다. 특히 전쟁의 종결 국면으로 들어가면서 팔레스타인 의 저항적 움직임도 고조되어 1991 년 2월에는 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평화지수가 -35.8 로 갈등이 높아지는 현상을 나타낸다. 걸프전의 당사자는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과 이라크였으나, 반 이라크 아랍전선을 붕괴시키려는 이라크의 대 이스라엘 도발로 인해 이스라엘의 안보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 에 대한 반작용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압박과 갈등이 상승한 것으로 분석된다. (2) 1993-1995: 오슬로 평화협상 전후 1993 년 9 월 역사적인 오슬로 평화협상이 마무리되면서 역내 평화구도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에 따라 협정 당시였던 9월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평화지수는 사상 유례없는 평화국면을 나타낸다. 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평화지수가 57.1 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수는 62.3을 나타내 는 등 평화의 분위기가 고조된 상황이었다. 주목할만한 점은 1992 년 하반기 온건파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수상의 집권 이후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시까지 이스라엘의 대 팔레스타인 압박 강도가 심각한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 스라엘과의 평화협상을 놓고 이를 추진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및 제 정파내부의 갈등이 확산되면 서 폭력사태의 빈도가 높아진 상황을 방증한다. 즉 1992 년 12월부터 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갈등 관련 평화지수 (dip) 는 지속적으로 -246.9, -198.9, -160.6, -185.7, -153.5, -188.9 등 악화 일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갈등양상은 주로 이스라엘 점령지 중 하나인 가자지구에서 발생하는 바, 이는 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평화무드를 해체하고 자신들의 강경 노선을 추진하기 원하는 하마스 등의 과 격 정파들의 움직임이 활성화되고 있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강경 대 응으로 갈등 국면이 고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1993 년 9월의 경우 일시적이나마 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평화지수는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갈등과 관련된 평화지수 상황은 약간의 상황 호전을 나타내고 있지만 평화 협력지수는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인 57.1 (cpi) 과 62.3 (cip) 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 이스라엘 입장이 매우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추세를 나타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이츠하크 라 빈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최선의 편의와 협조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화협상의 일환으로 웨스트뱅크 내 헤브론 반환 논의가 완결되었던 1994 년 3월 역시 이 례적일만큼 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평화지수는 최악 상황을 나타냈다. 이스라엘 내에서 평화협정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던차, 1994년 3월 30일 웨스트뱅크 이스라엘 점령지구내 자발리야 (Jabaliyyah) 에서 야세르 아라파트 PLO수반의 강경 측근 6명이 이스라엘 정규군에 의해 사살당하 는 사건이 발생했다. 본 사건과 연동된 일련의 폭력행위가 급등하게 되면서 dip는 -295.2 를 나타냈 다. 결국 평화협정으로 인한 내부적 균열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상황이 더욱 불안정해져가는 역설이 드러나고 있다. 1994 년 6월 야세르 아라파트가 망명생활을 끝내고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면서 상황은 조 금씩 평화국면이 전개된다. 특히 1994년 10월은 이스라엘과 요르단간 평화협상이 맺어지면서 중동 전역의 평화구도가 가일층 가시화되었던 시기이다. 비록 가자지구 하마스가 주도하는 자살테러의 빈 도가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줄지 않고 일정부분 지속되고 있었으나, 전반적인 안보 환경의 개선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던 시기였다. 특히 미국의 대 이스라엘 협력 체제가 눈에 띄는 바, 1994년의 cui 는 기존에 비해 상당부분 높은 수준인 44.6, 44.4 를 나타내고 있다. 오슬로 평화협정은 그 자체가 평화 구축을 담보해주지 못하는 형국으로 분석된다. 즉 양측 의 근본주의적 강경론자들은 이러한 평화협상의 진척 자체가 자신들의 정체성 위기로 연결된다고 보 았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평화협상의 진척과 더불어 이를 반대하는 갈등 요인이 강하게 표출되는 경 향성을 나타내었다고 해석된다. 한편 이팔 평화협상의 적극적 중재자로 나선 미국으로서는 사실상 평화협상의 핵심당사자인 이스라엘에 대한 협력 구도를 강화시킴으로써 평화에의 적극적 견인을 시 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1995-2000: 격랑기 ( 라빈 암살, 네타냐후 집권 및 와이리버 협정 그리고 인티파다) 이 시기는 ' 격랑기' 로 표현될 수 있을만큼 이팔관계가 요동친 기간이었다. 평화지수 측면에 서 볼 때 협력과 갈등의 진폭이 매우 크게 나타나고 월별로 다양한 형태의 부침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라빈이 암살된 1995 년 11월부터 1996 년 6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베냐민 네타냐후 리쿠드당수 가 집권할 때까지 약 네타냐후의 집권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7 개월동안 이팔 정세는 일정정도 안정국면을 지속시켰다. 그러나 보수인사인 1996 년 9월 13일 네타냐후 수상은 오슬로 평화협정에 의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이양하 기로 되어있던 웨스트뱅크내 고도시 헤브론의 이양을 철회했다. 그리고 9월 20일 웨스트뱅크내 정착 촌을 확대하여 약 2000 가구를 추가 배치했다. 27일에는 비상사태 선포와 더불어 예루살렘 올드시티 의 치안불안을 이유로 현지 이스라엘 경찰을 배가 증파하고, 28일에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은 희 망이 없음을 선언하는 등 이팔관계는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이 시기 즉 1996년 9월의 평화지 수는 기록적인 수준인 dip -365.4 (52 건의 갈등 빈도) 를 나타냈다. 5
결국 상황의 악화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급격한 개입이 시작되었고, 1996년 10월 미국의 지속적인 중재 개입으로 인해 상황은 반전되었다. 10월 2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야세 르 아라파트, 이스라엘 수상 베냐민 네타냐후, 요르단 국왕 후세인 및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백 악관에서 긴급 평화회담을 개최하면서 평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어 10월 8일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에제르 와이즈만 대통령을 예방하면서 상황은 진전되었다. 이 때의 cip가 109.2 로 협력이 강화되는 상황으로 나타났고, 동시에 dip는 전월 -365.4 에서 -53.6 으로 급감 하는 추세를 나타냈다. 히 평화 국면은 1997 년 1 월 이스라엘의 헤브론 이양 재개 선언으로 진전되는 분위기였다. 특 2월에는 오슬로 평화협정 이행 조항에 의거하여 이스라엘내 수감된 팔레스타인 여성 죄수들을 석 방했다. 그러나 동년 3월 4일 동예루살렘에 소재한 팔레스타인 정부기구 사무실들을 강제 폐쇄하고 웨스트뱅크 영토의 획정 관계로 분쟁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3월 21일에 텔아비브 지중해 변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하면서 양자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1997년 3월의 dpi는 -74.9 를 기록하고 있으며, dip는 -165.7 이다. 하마스는 이러한 자살테러를 확대하여 동년 여름에는 월 평균 45 건의 적대적 행위 ( 테러포함) 가 발생할만큼 치안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듬해인 1998 년 1월 미국의 중동특사 데니스 로스의 중재로 이팔 양자간 평화 대화 재개 구도가 시작이 되 었고, 동년 5월 13일 당시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중재로 이팔 양자 정상이워싱턴에서 회동 하여 오슬로 협정의 이행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사실상 이팔 평화협상관련 미국 중재의 절정은 2000년 7 월이었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클 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이팔 양자 정상이 모여 팔레스타인 최종지위 협상을 벌였다. 2000년 7월의 평화지수는 전체적으로 볼 때 가장 평화분위기가 무르익었음을 나타낸다. cui 88.1, ciu 95.9, cpi 54.4, cip 44.5 등으로 협력 구도가 매우 확연하게 입증되고 있다. 또 dpi -14.2, dip -27.8 등 이 례적일만큼 이팔 양자간의 적대 행위도 상당부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회담이 결렬되고 이스라엘 에후드 바락 총리는 실각하게 됨에따라 상황은 급변 했다. 곧바로 2008 년 9월 28일 동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아리엘 샤론 당시 이스라엘 주택 장관의 진입을 막으려는 팔레스타인 인사들의 저항이 증폭되어 제2 차 인티파다 ( 무장봉기 ) 가 발생했 다. 이는 이팔 분쟁의 수위를 기존의 분쟁 수위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심화시키는 사건이었다. 이후 본 연구의 분석 기간의 종착점인 2004 년까지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테러 심화와 이에 대 응하여 이스라엘의 강경진압 양면 구도가 얽혀 걷잡을 수 없는 불안상황으로 전개되었다. 2000년 10월부터 2004년 12월말까지 dip 평균이 -446.62, dpi 평균치가 -95.68 에 달할 정도로 상시적 분 쟁상태가 지속되었다. 다. 리더십 변수 분쟁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 또는 협력 구도를 결정하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국제환경의 변화라는 틀속에서 제반 구조적 요인들이 존재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구조적 요인들 중 평화협상 당사자들의 리더십에 주목했다. 특히 양자 외에 평화 중재자 역할을 수임하는 미국의 리더십 역할도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동한다. 이스라엘의 리쿠드 -노 동당간 권력 교체 빈발, 미국의 공화- 민주당의 리더십 변화, 그리고 팔레스타인 리더십은 본 평화협 상의 주요 행위자이자 주요 독립변수가 된다. ( 본 연구에서는 팔레스타인 리더십 분석은 제외했다. 이는 본 연구가 다루는 시기적 구분상 야세르 아라파트가 전기간 리더십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마흐 무드 압바스 행정부는 2004 년말 출범했다) 6
( 가) 미국의 리더십 본 연구의 분석기간 동안 미국은 3 개의 행정부가 교차했다. ( 시니어 부시, 빌 클린턴 1,2 기, 및 조지 부시 행정부 1 기) 이 기간 동안의 미국 리더십 변화에 따른 이팔 평화지수 추이는 다음 표 1 과 같다. [ 표 1] 미 행정부 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지수 평균 행정부 cpi cip dpi dip 시니어 부시 4.90 4.9-16.49-84.04 클린턴 1기 19.06 30.70-35.99-94.67 클린턴 2기 10.00 16.98-22.04-50.00 조지 부시 1기 16.90 29.81-92.90-433.19 시니어 부시 (1989-1993) 시기에는 협력의 수준은 낮게 유지되고 있고, 반면 갈등 수준은 약간 높은 추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냉전 붕괴 이후 국제정치 질서의 변화가 나타나며 향후 변화 의 흐름을 관망하는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서서는 협력의 수준이 높아지고 동시에 갈등 수준도 약간 상승 하는 등 전반적인 양자 관계가 활발해지는 추이를 보여주고 있다. 클린턴 1기는 역사적인 오슬로 협 정이 체결되었고 이에 따라 협력 지수도 증가했지만 내부적인 반발 여론이 증대되면서 갈등 지수 증 가폭도 높게 나타났다. 클린턴 행정부 2기에 들어서서는 오슬로 협정 이행 조치들에 제동이 걸리면 서 협력 구도는 약화되었고 동시에 갈등 구도도 정체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은 조지 부시 1 기이다. 9.11 이라는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했고 전반적 으로 국제정치질서에 혼란이 가중되면서 이팔 분쟁 역시 국제 문명분쟁의 전장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부시 대통령은 고질적 사회분쟁 양상을 나타내는 이팔 분쟁 해소에 대한 관심 보다는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주도하면서 걸프 안보 및 대테러전에 집중했 다. 이는 곧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자간의 중재자 역할의 부재를 의미하게 되면서 dpi -92.90, dip -433.19 라는 놀라운 수준의 갈등과 분쟁 요소를 나타냈다. 이는 중재자 미국의 리더십이 이팔 분쟁 에 부재할 경우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리더십은 다음 [ 표 2] 와 같은 양상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정치구도는 일종의 시계추 현상을 나타내왔다. 즉 온건파 노동당과 강경보수파 리쿠드 간의 권력 교체가 반복되어 온 것이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온건과 보수파 사이에서 사안에 따라 교차투표를 하기에 이러한 정권 교체 현상이 지속되었다. 안보 상황이 급박하게 변화하는 추세를 나타내기에 유권자들의 성향이 평 화와 강경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이다. [ 표 2] 이스라엘 행정부 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지수 평균 행정부 cpi cip dpi dip 리쿠드 ( 샤미르) 5.27 4.75-15.50-78.66 7
노동당 ( 라빈, 페레스) 16.50 25.86-33.80-97.03 리쿠드 ( 네타냐후) 11.38 20.64-26.75-63.98 노동당 ( 바라크) 23.80 32.27-43.82-154.52 리쿠드 ( 샤론) 16.25 29.08-93.89-437.28 일반적인 통념상 강경 리쿠드 집권시 팔레스타인에 대한 압박이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본 지수 상으로는 오히려 극우 강경파로 분류되는 네타냐후 수상이 집권했을 시기 (1996. 6-1999. 7) 가 대 이스라엘 압박 강도가 가장 낮은 기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츠하크 라빈이 주도했던 오슬로 협정의 이행과 관련하여 미국 클린턴 2기 행정부의 중재 압력이 가장 활발하게 작 동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결국 이스라엘의 안전보장은 미국의 리더십과 연동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 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네타냐후 집권시기 외에는 전반적으로 갈등 구도는 점증하는 추이를 나타내다가 아리엘 샤 론 수상에 이르러 정점에 달한다. 하마스의 지도자 야신이 이스라엘에 의해 암살당하고, 이에 대한 보복공격이 격화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 시기에는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9.11 이 겹치면서 중재자 부재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하마스의 대 이스라엘 투쟁이 격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미국의 적극적 중재가 존재할 경우 강경 리쿠드당이라도 협력적 행태를 보인 반면, 미국의 관심사가 걸프로 이동했을 때인 샤론 내각 당시에는 사실상 이팔 관계 빠른 속도로 악화된 추세를 발견할 수 있다. 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지수의 전반적 추이 대체로 절대값이 큰 달(month) 에는 특기할만한 사건이 있는 경향이 관측된다. 특히 평화회 의가 있었거나 평화협정이 맺어진 시기에 미국과 이스라엘 간 평화지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지수가 상승하는 경향성을 나타낸다. 이는 협력 구도 뿐만아니라 갈등구도도 동반상승하는 결과를 의미한다. 미국과 이스라엘 간 협력 구도의 평화 지수가 가장 높게 나타났던 시기는 2000년 7월 캠 프 데이비드 협정 추진 기간이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평화구축을 위해 진 력하고 있었고, 당시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수상은 동예루살렘 영유권 문제등 팔레스타인 최종지 위 협상에서 이스라엘의 파격적 양보안을 제시했었다. 이 과정에서 협력구도가 증가되었으나, 결국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아라파트 의장의 최종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는 곧바로 2 차 인티파다로 이어지고, 아리엘 샤론 강경 정권이 이스라엘에 들어서는 계 기가 되었다. 즉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평화지수를 해독함에 있어서 평화협력의 구도가 증가되는 지 수 변화가 감지되는 상황에서 평화협력이 무산되는 순간 곧바로 분쟁 국면으로 진입하는 굴곡이 나 타난다. 인티파다 발생 및 2004 년 12월 이후 반복적 자살폭탄테러와 공습이 반복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또한 절대값과 사건의 규모( 사망자 수) 와 횟수는 비례관계에 있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평화지수가 사건발생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96년 2-3 월에 하마스에 의 한 폭탄테러가 있었으나 양자간 갈등 지수의 절대값은 크게 상승하지 않았다. 또한 2003 년 6월 하 마스와 파타가 휴전을 선언했음에도 이스라엘과의 분쟁 절대값은 여전히 높은 상태로 나타난다. 이 는 주요 사안에 따라 정세가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워낙 양자간에는 고질적인 분쟁이 상수 처럼 작동하고 있기에 만성적 분쟁상태를 기준점으로 진폭이 조정되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 한다. 8
결론적으로 볼 때 이 지역에 상존하는 구조적 분쟁요인으로 인해 분쟁의 만성화 상태 속에 서 휘발성이 있는 쟁점들이 뒤엉켜 있기에 평화 협정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감대와 노력이 있음에도 리더십 내부의 불안정성으로 인한 전반적 갈등 양상이 유지된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3. 이스라엘 평화 협상 관련 주요 쟁점 가. 정착촌 및 분리장벽의 문제 3차 중동전쟁은 1967 년의 6일전쟁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역의 정치지형을 뒤바꾸어 놓 았다. 이스라엘은 기존의 아랍거주지역인 웨스트뱅크를 완전 점령하였고, 나아가 이집트 영토인 시나 이반도와 가자지구, 그리고 시리아의 골란고원까지 점령하였다. 이스라엘은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 정착촌을 설치하면서 영토의 확정을 추구했다. 즉 자신들의 점령지인 웨스트뱅크에 145 개, 가자지구 에 21개 및 예루살렘 15개 등 2005년까지 40만명이 거주하는 180 개의 정착단지를 조성하였다. 샤 론 수상 취임 이전까지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 내의 정착촌은 공고히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 및 이에 이은 샤론 구상의 따라 가자지구의 경우 팔레스타인 인구가 100 만을 상회하고, 이스라엘 정착민이 7,500 명에 불과함에 따라 아리엘 샤론 수상은 자신의 팔레 스타인 국가독립 구상 (two states solution)' 을 추진하면서 가자지구의 정착촌을 2006년 9월에 완 전 철수 시켰다. 동시에 웨스트뱅크에서도 전략적 요충지 일부를 제외한 정착촌에서 철수할 것을 밝혔으나, 샤론 수상의 유고로 인해 더 이상의 진전은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최근 선거에서 강경파가 의회 다 수 의석을 점유함에 따라 향후 정착촌 철수 전망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사실상 3차 중동전쟁 후 채 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에서 이스라엘이 점령지역에서 즉각적으로 군을 철수시킬 것을 명시 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점령지역에 정착촌 건설을 지속해 왔다. 특별히 자원하여 정착촌으로 이주해 들어가는 정통유대주의자 공동체의 경우 (Gush Emunim, bloc of faithfulness) 현지에서 강력한 반 아랍노선을 견지하며 분쟁의 최전선으로 자리잡아왔다.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정부 차원에서 전략적 요충지에 정착촌을 계속 유지해 왔던 관성과, 개별적 유대 열심주의자들의 자원 거주 추세가 맞물리면서 웨스트뱅크 정착촌의 완전 철폐는 현재로 서는 실현이 난망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샤론 수상이 추진했고, 올메 르트 수상이 계승한 가자지구에서의 정착촌 완전 철수 및 웨스트뱅크 주요 정착촌의 유지' 프로젝 트에 관한 논란이 분분했다. 샤론 구상' 의 일환으로 추진된 정착촌 재배치 프로그램에 의하면 가자 지구를 팔레스타인에 내주고, 대신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되는 웨스트뱅크의 주요 도 시 예닌, 툴카렘, 카킬라 등의 정착촌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는 비판적 평가가 있다. 국제법적 규범으로 볼 때, 정착촌 철수는 3차 중동전쟁 이후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 호에 기초한다. 특히 1993 년 오슬로 협상 이후 명시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착촌 철수가 선언된 이 래 이스라엘의 협정 불이행 상태로 남아 있다. 더불어 제네바 협약 49 조 점령국은 자국의 국민을 피점령국의 영토로 강제 이주시킬 수 없다" 는 조항에 의거하여 정착촌 건설은 그 자체로 협약 위반 성격이 강하다. 명분이 약한 웨스트뱅크 주요 지역 정착촌 유지와 분리 장벽 건설은 국제사회의 비 난 여지가 있으며 이스라엘의 전향적 재검토가 요구되는 사안이라 할 수 있다. 나. 동예루살렘의 지위 및 귀속 관련 쟁점 9
동예루살렘의 지위 및 귀속과 관련된 쟁점은 역사, 문화, 종교적 의미들이 중첩적으로 연결 되어 있다. 법적으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자간 자국 국내법의 규범에 의해 각기 자신들의 영토임 을 선언하고 있다. 1980 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영구수도법' 과 팔레스타인 자치의회의 2002년 팔레스타인 수도로서의 예루살렘 ' 관련법 양자 모두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구수도 임을 명시한다. 디아스포라 (diaspora) 로 1900 여년 넘게 유리하던 유태민족이 이스라엘 땅에 정주하게 되 는 시오니즘' 의 본원적 고향인 예루살렘에는 유태교의 핵심인 솔로몬과 헤롯 성전의 기초가 존재 하고 있다. 사실상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예루살렘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단순하다. 전 세계에 편만하게 흩어진 유태인들의 정신적,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이자 정치적인 핵심거점이었던 것 이며 서기 72년에 로마에 의해 패망한 이스라엘이 1948 년에 독립을 달성하게 된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2000 년 동안 늘 예루살렘을 그리며 지중해 각국을 떠돌던 유태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자리 잡았다. 팔레스타인인에게 예루살렘은 이슬람 3대 성지 중 하나로 과거 살라딘 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는 이슬람의 영화가 용해되어 있는 역사적 지역이다. 나아가 예루살렘은 웨스트뱅크의 주요 도시 를 방사형으로 연결하는 제반 도로와 물류시설의 중심인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팔레스타인으로서는 향후 완전독립을 이루었을 경우 국가의 안전보장이란 측면에서 양보 가능성은 전무하다 할 수 있다. 1차 중동전쟁 이후 예루살렘이 분할되며 동예루살렘이 요르단의 치하에 편입된 후 1973 년 4 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했다. 이후 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관할 하에 있지만 실질 적으로 동예루살렘은 대부분 아랍 거주지역으로 고착되어왔다. 2000 년 에후드 바라크와 아라파트간 동예루살렘 지위협상에서 이스라엘 측이 당시까지의 강경한 노선에 비추어볼 때 파격적인 동예루 살렘 구시가지 상당부분 양여방안까지 '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라파트는 예루살렘 영유권의 완전한 팔레스타인 이양을 주장하다가 회담이 결렬되었던 사례가 있었다. 결국 역사- 종교적 함의와 지정학적으로 전략적 의미를 갖는 이 지역의 영유권 문제는 사실 상 공동관리 외의 적실성 있는 대안을 도출하기는 힘든 사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실질적 행정수도인 텔아비브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행정수도인 라말라를 양측의 공식적 수도로 명시하고, 예루살렘을 종교 성시( 聖 市 ) 로 선언하여 종교기관에 의한 공동관리체제로의 재편하는 방안 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다.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의 문제 1948 년 1 차 중동전쟁 ( 팔레스타인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국가 수립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나온 아랍인들이 인근 국가로 대거 유입되었다. 4차례의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발생한 난민 들까지 현재 약 500여만 명 정도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인근 아랍국가 혹은 점령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가운데 110 만 명이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 (UNRWA) 에서 운용하는 59 개 난민수용소에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도시 빈민 생활을 전전하 며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지속적인 평화협상의 의제로 등장하는 난민 귀환의 문제가 실현될 경우, 이스라엘로서는 심 각한 국가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완전 분리 독립이 실현되기 전까지는 현재 와 같은 불안정한 국가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서 난민귀환 인정은 곧 인구비율의 변화를 의미 하기 때문이다. 현재 530만 유태인과 150만 아랍인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인구분포에 500여만의 10
팔레스타인 난민이 귀환할 경우, 인구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들 난민들의 팔레스타인 유입은 이스라엘 안전보장에 심대한 위협이 될 가능성이 크 게 높아진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사실상 아리엘 샤론 전 수상이 팔레스타인 완전독립 구상 (two states solution) 을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인구변수 (demographic factor) 가 가 장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따라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정착촌과 예루살렘 문제에 관한 한 협상의 여지를 보이고 있 지만, 난민 귀환에 관하여는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취하며 여하한 타협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 이다. 결국 난민귀환 문제는 팔레스타인의 완전 독립 이후 단계적인 난민 허입 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며, 이스라엘과의 불가침 협정 등 고도의 안전보장 기제를 담보하여야 할 것으로 추측된 다. 4. 미-이스라엘-팔레스타인 3자 역학관계의 동학 가. 협상 당사자의 불안정성 주요 당사자의 내부적 의견 균열 요소가 상존함에 따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 협상 추 진을 방해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온건 노동당과 강경 리쿠드 간의 정권 교체가 지속되면서 일 관된 대( 對 ) 팔레스타인 협상 추진에 제동이 걸리는 사례가 빈발했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불안한 연정 으로 정부가 구성되는 이스라엘 크네세트 ( 의회) 의 특성상 쟁점 이슈로 인한 논란이 증폭될 경우 소 수 정파의 연정탈퇴가 다반사이므로 특정 리더쉽의 비전이 강력하게 이행될 수 있는 토대가 매우 취 약한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탈피하고자 아리엘 샤론 전 수상은 리쿠드와 노동당의 일부 인사들과 함께 카디마 ( 전진) 당을 결성, 크네세트 제1 당의 지위를 유지해 왔으나, 에후드 올메르트 수상의 실각으 로 인한 후임 지피 리프니 외무장관이 연정 구성에 실패, 총선을 실시했으나 보수파에게 패퇴함으로 써 샤론 구상의 추진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이스라엘 내부 정치 구도의 불안정성 뿐만아니라 팔레스타인 내부의 균열요인도 중요한 변 수로 등장한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를 이끌던 야세르 아라파트의 부재로 인한 리더쉽의 약화 에 기인한다. 사실상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35년간 모든 팔레스타인 의 협상 창구는 아라파트 일인에게 수렴되었었다. 아라파트는 망명정부 지도자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독점적 정치권력을 행사했으며 이러한 절대 권력에는 14개에 달하는 군벌들을 독립적으로 산개시켜 운용하며 때로는 폭력적 투쟁을, 때로는 대화와 협상 등 강온 양동 전략을 구사했었다. 아라파트의 부재 상태에서 등장한 마흐무드 압바스 정권은 국민들의 지지로 정권을 잡았으 나 하마스의 강력한 부상을 견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2006 년 1월 132석을 두고 경합한 팔 레스타인 입법의회 (Palestinian Legislative Council) 선거에서 하마스가 74석을 차지함에 따라 행 3) 2004년에 발표된 팔레스타인 중앙통계청의 발표자료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영토 밖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 은 공식적으로 요르단에 2,797,674 명, 레바논에 415,066, 시리아 436,157, 이집트 61,917, 사우디아라비아 309,582, 사우디를 제외한 GCC 국가 163,632, 기타 아랍국가 6,523 및 미국 등 서방국가에 537,334 명 등 총 4,834,427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기관에 따라 다른 추산이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Salman Abu Sitta의 통계를 따르면 총 4,493,465 명, Justin McCarthy 의 추산에 의하면 총 4,667,000 명이다. 통계간 오차를 인정 하고 대략 추정한다면 인구증가율을 반영해 볼 때 2008년 현재 500 만 내외 정도로 추산이 가능하다. Palestinian Central Bureau of Statistics, Demographic Statistics, 2004 11
정수반과 입법부의 정파가 나뉘어지는 이른바 팔레스타인판 여소야대 현상이 나타났다. 갈등이 지속되며 의회 해산까지 이르는 등 팔레스타인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한 상황도 전 반적으로 이- 팔 평화 협상의 진전에 난항을 초래하고 있다. PLO 및 파타 출신의 온건 협상파와 하 마스 류의 강경 무장 투쟁 노선이 극단적인 이항대립을 표출하고 있으며, PLO 및 자치정부에서 무 장 해제를 추진해도 이를 강제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내부 갈등이 고조되는 형국이 다. 나. 중재자의 이행 감독 강제력 및 불편부당성의 부재 ( 엄밀한 국제중재 필요) 미국 및 국제사회가 중재하는 다양한 합의 일정 설정 이후에도 이를 이행하도록 강제하고 감독할 만한 국제사회의 개입 수단이 실질적으로 없다. 이러한 구체적 수단의 부재로 인해 합의사항 불이행에 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아랍 입장에서는 외부 중재세력, 특히 미국의 불편부당성이 담보되지 않음으로 인해 미국을 중재자로서 신뢰하기 힘들다는 정서가 편만해 있다. 대표적 사례로 이스라엘의 핵문제에 대해 미국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데 대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권은 반발하고 있다. 특히 2006년 7 월에 일어났던 레바논과의 교전 당시, 베이루트를 폭격하고 공항과 항만을 봉쇄하는 군사작전을 감행한 이스라엘에 대해 국제사회가 과잉대응 으로 규정하고 이를 유엔 결 의안으로 상정하려 하였다. 이 때, 미국이 이를 내정간섭 으로 받아들이고 결의안 상정에 반대하 는 등 이스라엘에 대하여 국제사회가 표명하는 적정수준에서의 비판도 거부하는 행태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가자 공격 사태에 대하여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의 공격 기조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려하자 미국은 여전히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아랍권의 반발을 샀다. 오바마 행정부의 등장은 과거 부시행정부와는 다른 입장을 취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불러일 으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으로 가시적인 대 중동, 대 이팔 정책의 기조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미국의 불편부당한 입장 견지 및 중재자로서의 공정성 확보는 사실상 이팔분쟁 해결을 위한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쟁점 자체의 비타협적 성격 앞에서 기술한 평화구축 도전요인들은 사실상 타협이 거의 불가능한 사안이다. 단순히 일부 영토의 양여 차원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권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 필수 안보관련 쟁점에 관해서 는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으려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정착촌의 경우 웨스트뱅크 지역 의 3 대 거점을 반드시 유지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으며 요르단과의 접경지역인 요르단 밸리 (Jordan Valley) 지역의 정착촌들도 유지하려 하고 있다. 이 지역은 향후 예측가능한 아랍국가와의 교전 상 황에 대비하여 군사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지역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팔레스타인 입장 에서는 독립 이후 자신들의 영토내에 27 만에 달하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국가내 섬 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에 이 쟁점은 타협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또 한 전술한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귀환할 경우, 접경지역의 안보상황의 악화를 초 래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바 이 문제 역시 타결이 난망한 사안이다. 핵심 쟁점 중 민족적,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현안의 경우에는 더더욱 복잡하다. 사실상 이 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논의되어야 할 정치적 문제에 관하여 신앙과 신념으로 자살테러까지 감행하는 상황에서 영토 주권의 문제 등에서의 타협을 도출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예루살 12
렘 영유권 문제는 종교와 역사, 문화가 결집되어 용해된 곳으로 양자가 인식하고 있기에 더더구나 타협이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예루살렘의 경우 양자가 공히 공동관리 혹은 분할을 인정하는 방향을 취하지 않는 한 사실상 협상 타결 가능성은 별무하다. 5. 평화지수의 적용과 전망: 오바마 행정부 이후 미-이-팔 평화 구축 경로에의 함의 가. 오바마 행정부의 인식론 오바마 행정부 대외정책팀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아버지 부시, 클린 턴 행정부 및 브루킹스 연구소의 기조와 동일 선상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공통 적으로 비교적 유화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 군사조치를 최소화하는 데 강조 점을 둔다. 즉 지난 부시 행정부가 견지해왔던 강력한 ' 부시 독트린' 4) (Bush Doctrine) 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프트파워 또는 스마트파워 외교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초국가적 지위를 누리는 미국의 강력한 리더쉽 대신 다자주의적 외교전략의 강조를 의미한다. 유럽, 나토, 여타 서방 민주국가들과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오바마 행정부는 명시적으로 이러한 노선에 대한 친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대외정책을 형성하는 데 있어 유엔을 중심적인 행위자로 인정하고 고려한다. 오바마 대통 령은 수전 라이스 (Susan Elisabeth Rice) 브루킹스 연구소 연구위원을 유엔 대사로 임명하면서 유 엔 중시 외교 가능성을 명확히 했다. 라이스 유엔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대외정책을 조언하는 최측근 인사이다. 이는 미국의 유엔 관련 정책에 있어 상당한 변화를 예견하게 하며 어느 전 행정부보다도 친 유엔 외교 노선을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 테러와 관련해서 오바 마 행정부는 카터 및 클린턴 행정부와 같은 시각에서 테러 대처를 위한 일방주의적 군사조치 대신 국제법규와 규범확립 및 제도화와 같은 다자주의적 접근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브루킹스 연구소 의 핵심적 제안사항이며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같은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민주당의 접근법이기도 하거니와, 오바마 대통령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문화적 성장배경과 세계관과 맞물린다 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슬람권에 대한 새로운 접근 가능성을 예견하게 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 연설 에서는 대외 관계에 관한 비중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외교 문제 중에서는 비교적 이슬람 세 계에 관한 언급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이슬람 국가에 보다 전향적으로 다가설 것임을 시사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동 평화를 희구하는 이들에게 오바마 행정부 등장은 많은 기대를 가져 다 주었다. 전임 부시 대통령이 9/11 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흔에서 기인한 미국의 일방주의 노선을 채 택하면서 발생하게 된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실제로 오바마 행정부에 의해 중동 특사로 임명된 조지 미첼 전 상원의원은 이스라엘 방문에서 기존 특사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어떠한 정치적 공감대를 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유대 사회를 긴장시켰다. 사실상 미국내에서 지금까지의 친이스라엘 정책기조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4) 부시독트린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먼저 초월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세계를 이분법적 선악의 세계로 보는 ' 도덕적 절대주의 ' (Moral Absolutism), 위협이 되는 세력과 집단에 대해서는 선제적 조치를 취 할 수 있다는 ' 패권적 일방주의 ' (Hegemonic unilateralism), 힘의 압도적 우위에 의하여 평화를 이룩해 나가 겠다는 ' 공세적 현실주의 ' (offensive realism), 그리고 안보 아젠다의 다변화 등으로 구성된다. 13
특히 2006 년 3 월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월트와 시카고 대학의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 이스라엘 로 비와 미국의 대외정책' 이라는 책을 통해 미국의 친 이스라엘 편향 정책을 신랄히 비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국제정치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이 책에서 저자들은 미국 자국이 아닌 특정국 이스라엘 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국과 동맹국들의 안보를 기꺼이 제쳐두는 상황에 관해 매우 비판적으 로 기술한다. 사실상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이 중동지역이므로 미국의 대중동외교는 명실상부한 국 제정치 역학관계 형성의 주요 독립변수가 된다. 그렇기에 불편부당하고 중립적인 외교적 행보가 필 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친 이스라엘 일방기조로 말미암아 중동외교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대외정책이 안정기조로 접어들게 하기 위해서는 중동의 안정이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접근이 요구된다고 저자들은 주 장한다. 부시 행정부가 이끌어낸 대테러전의 논리속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입장 변화가 심각하게 논 의되지는 못했으나, 당시 일부 학계나 언론계에서는 이러한 논의들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나. 오바마 행정부 대외정책 관련 주요 인사 특정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가늠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최고통치권자 본인의 명시적인 의사 표명의 향방과 또한 대외정책 관련 주요 포스트의 인사배치 현황이다. 현재까지 이스라엘 팔레스타 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오바마 행정부는 명확하고 확고한 입장을 천명한 바 없다. 특사들의 중동 순방과 검토 (reviewing) 과정을 통해 탐색과정 (probational period) 을 거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원칙론적 입장에서 평화 희구의 멧세지를 언급하기는 하나 구체적인 장기 전략이나 행동 계획을 감지하기에는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 경우 대외정책 관련 주요 인사들의 배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볼 때 미국 사회 내에서의 유대인의 영향력과 현 정치 지형에서의 친 이스라엘 기조를 뒤바꿀 가능 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람 엠마뉴엘이나, 오바마 대통령에게 중동문제를 조언 하는 데니스 로스 및 대니얼 커쳐 전 이스라엘 대사 등은 대표적인 친 이스라엘파 인사들이다. 이들 의 면면으로 볼 때 정책기조의 획기적인 전환을 예상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동문제를 보좌하는 지근거리에 친 유대계인사들을 배치하되 공식적인 정책 라인에는 중립적 인사 및 친 아랍계 인사를 임명함으로써 균형을 취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유대 사회 의 반발은 작지 않다. 특히 국가정보위원회 (National Intelligence Council) 위원장으로 지명되었던 찰스 프리먼 전 사우디주재 미국대사가 유대인 로비단체의 적극적인 반대로 인해 낙마한 사례가 대 표적인 예이다. 미국 의회에서 대표적인 기독교 시온주의자로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를 지낸 딕 에메 이 의원은 자신의 최우선 과제는 미국 국무부의 대외정책 상에서 이스라엘의 국가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공언할만큼 친 이스라엘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비공식 라인과 외곽 라인에는 중도파 인사들을 포진시키며 일종의 균형점을 찾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유대인이지만 가장 가까운 보좌역을 맡고 있는 앤서니 레이크 (Anthony Lake)전 국가안보보좌관의 경우 대테러전을 펼치는 데 있어 명백한 증거 없이는 어떠한 사전 조치 를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마스에 대해서도 명확한 테러 증거가 입증될 때까지 하마스에 대한 압박을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펴고 있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부 대테러 책임자로 임 명된 다니엘 벤자민 (Daniel Benjamin) 역시 테러리즘 대처에 온건한 입장을 견지해 온 비둘기파의 대표적 인사이다. 무엇보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된 제임스 존스 (James Jones) 는 브렌트 스코크로포트 전 아버지 부시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의 시각을 추종하여 유럽 및 다자 협력의 중요 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며 이스라엘에 대해 비교적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몇 안되는 핵심 인사 중 하나였다. 또한 법무 장관으로 임명된 에 14
릭 홀더 (Eric Holder) 역시 클린턴 행정부 당시 법무차관을 역임하며 테러주의자들에 대한 법적 관 용을 베풀어야하고 테러리즘이 발호할 수 밖에 없는 불평등한 상황을 인지해야 한다는 바를 주장해 온 인물이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오바마 행정부는 극적인 정책기조 변화를 추구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부시 행정부가 보여주었던 일방주의적 행태로부터는 다소 변화하 여 백악관내 다양한 목소리들이 제기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절충점을 찾아나가는 ' 뉘앙스 변화를 ' 추 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 맥락에서 지난 부시 행정부가 보여주었던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지정책 자 체가 가져다 준 파장을 고려 아랍권의 이해를 구하는 행보를 보여줄 가능성이 있다. 클린턴 국무장 관은 지난 3월 4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방문 시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지구의 주택을 무차별 파괴하는 사실에 대해 비난하면서 이에 대한 이스라엘 측의 해명을 요구했다. 이는 매우 이 례적인 행보였으며, 이스라엘측은 미국이 동 문제에 관해 균형잡히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불 만을 표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클린턴 장관은 동시에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중동평화 4자회담 에서 약속된 이행 사항을 실행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으며 계속 지켜지지 않을 경우 미국은 가자지 구 재건 지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언급하면서 양자 모두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다. 미-이스라엘 관계 전망 이스라엘은 미국과 ' 인지적 동맹' 관계 (cognitive alliance) 를 맺고 있다. 이는 구체적 조 약이나 문건으로 맺어진 국제법적 효력에 근거하는 동맹이 아니라, 상호 인식론상 불가분의 동맹 협 력관계라는 자연적 동맹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유대- 크리스찬 전통 (Judaeo-Christian tradition) 의 문화적 동질성에서 기인하는 바이다. 따라서 이러한 극적인 상황 변화가 도래하지 않는 한 미-이스 라엘간 인지적 동맹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은 매우 낮은 편이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있어 현재 가장 시급한 이슈는 국제문제나 안보가 아니라 국내경제문제 이며 금융위기 탈출이라는 지상과제를 다루어야 한다. 현재 약 8000 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조치 가 성공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며, 실업증가 및 소비감소의 문제를 어떻게 선순환의 구조로 전환시키는가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여기에 2010 년 중간선거가 있을 예정이고, 중간선거에서 패배 시 오바마 행정부의 행정장악능력은 약화될 가능성이 있기에 당분간 국내문제에 전념할 것으로 예측 된다. 따라서 경제문제가 오바마 행정부 1기의 성패를 가늠하는 주요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므로 국 제문제는 극적 전환이나 무리 없이 진행시키려 할 가능성이 크다. 국제 문제의 경우 국제 테러리즘 약화 작전에 유념하면서 미국내 테러발생 방지를 위해 진 력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이란, 이라크,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러시아, 중국 등 전략적 중 요성을 가진 외교 문제가 산적해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고질적 분쟁 상태로 들어가 있는 이스 라엘- 팔레스타인 문제가 결코 대외정책 최우선순위에 놓일 가능성은 없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미국내 정치지형상 극단적인 반 이스라엘 노선을 채택할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며, 현재 지지부진한 폭력상태가 지속되는 가자지구 및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강경진압작전에 대한 특별한 아 디이어나 제재조치를 구현할 정책 수단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오바마 개인적인 성향상 이스라엘 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천명하고 강경한 대 이스라엘 정책을 펼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 지만 어느 국가보다도 막강한 권력을 보유한 미국 의회에서 이러한 대 이스라엘 정책전환이나 비판 을 용인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현재 기조인 샤론 구상에 따라 two states solution 의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달성을 위한 설득과 중재 역할을 지속하되, 부시 행정부와는 뉘앙스가 다른 접근을 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이 15
스라엘에 대한 동맹구도 재편의 형태로,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인근 아랍 및 중동 주요국가를 연계 시켜 협상 타결에 나서게 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접근, 즉 아나폴리스 회담의 연장선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중재안을 미국이 제시하고 나갈지에 관해서는 결정된 바 없다. 이는 철저하게 특사의 판단과 백악관 조율에 의해 진행될 것으로 보이나, 현재로서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가 이라크에서 아프가니 스탄으로 이동하여 병력이동과 관련된 쟁점이 압도하고 있어 이팔문제의 구체적인 안건들이 단시일 내에 제기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분간 이팔문제 관련 4 자외교 (quartet diplomacy) 에 치중하 며 특히 EU 의 아젠다 선정에 동의하면서 나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구체적 쟁점 제시나, 협상의 장 마련이라는 가시적인 행보보다는 정중동의 행보로 이팔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클린턴 행정부 당시의 실수를 거울 삼아 이팔문제 개입에 있어서 주어진 제약을 의식하여 보다 현명한 접근을 구사하려 할 것으로 보인 다. 이는 군사원조 및 합동군사훈련 중단이나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친이스라엘 행보 포기 등의 실 질적 압력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낮은 대신, 심리적 측면의 압박과 설득을 통해 이스라엘 지도부가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조언해 나가는 방향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라. 미국의 대팔레스타인 정책 전망 오바마 행정부가 아무리 극적이고 전향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할지라도 하마스에 대한 협상 주체 인정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에 미국이 규정해 왔던 테러리즘 집단의 틀과 기준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하마스에 대한 원칙적 비판의 각을 유지한 채, 균형접근 차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뉘앙스를 일부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있다. 최근 아프간 사태와 관련하여 미국과 이란간의 직간접 대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오바마 행정부에서 분출되고 있는데, 미국은 이란과의 대화 재개를 통한 관계 개선이 가시화되거나 최소한 안정적 관계 유지 가능성이 보일 경우, 이란을 통한 하마스 문제 접근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따 라서 당분간 하마스와의 관계 개선이나 대화 가능성은 거의 없되, 압바스 수반이 이끄는 파타 측과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며 현재 쟁점으로 제기되고 있는 고질적 분쟁 이슈들을 다루어 나가는 방향 을 택할 것이다.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