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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잡았다.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실추되었던 선조는 명군의 존재를 구세 주 이자 王權을 지켜주는 보호자 로 인식했다. 선조는 그 같은 인 식을 바탕으로 扈聖功臣들을 높이 평가하고 宣武功臣들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제 명에 대한 숭 앙과 충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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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이며 나름 의식이 깨어있던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받은 간 호부들은 환자를 돌보는 그들의 직업적 소

Transcription:

로컬리티 인문학 2, 2009. 10, 257~285쪽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 1960년대 한국영화와 재외한인 양 인 실* 50) 국문초록 세계화 로컬리티는 특정장소나 경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시대에 따 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개념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는 유례없는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특이할 만한 사실은 미국과 일본의 영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던 재 외한인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미국이나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며 한미합작영화를 추진하거나 동시녹음으로 영화를 만들고 한국영화를 해 외에 수출하려고 했다. 이는 해방 후 20여년간 한국 이라는 민족국가의 경계내부에 서 만들어지고 소비되어 온 한국영화가 일본이나 아시아라는 외부를 상상하고 변화 의 기운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국민국가의 경계란 영토의 경 계를 의미하는 국경뿐만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경계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이다. 그 리고 이러한 변화들은 1960년대의 한국영화를 생각할 때 세계화와 로컬리티라는 시 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구체적으로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활약 했던 재외한인중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재미한인 필립 안과 재일조선인 류신노 스케였다. 본 연구에서는 1960년대의 한국영화에 있어서의 재외한인들의 역할과 영 화 <팔도강산>시리즈를 연관시켜 분석함으로서 이 시기에 일어났던 한국영화계의 지각변동이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의 시초였다는 점을 고찰했다. 주제어: 한미합작영화, 필립 안, 류신노스케, 재일조선인, <팔도강산>, 로컬리티 * 오사카시립대학 특별연구원(hanpit@yahoo.co.kr)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57

차례 1. 들어가면서 2. 한국영화사 속의 국경 밖 상상하기 3. 한국영화계의 세계화와 로컬리티 4. 나오면서 1. 들어가면서 세계화와 로컬리티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생각할 때 흔히 할리우드영 화와 한국영화와의 대비를 떠올리게 된다. 최근에는 한류붐에 의해 한국 영화도 글로벌자본, 서로 다른 국적이 혼합된 스탭, 배우들의 교차출연 이라는 현상에서 세계화와 로컬리티라는 단어로 설명되기도 한다. 세계 화 로컬리티의 개념이 특정장소나 경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와 시대에 따라 변형된다는 것은 지금은 정착된 개념이다. 1) 한류 붐 현상 은 한국이 문화 컨텐츠를 만드는 주체로 발돋움하여 대중문화를 발신하 는 주체가 되었다는 점 이외에도 한국 내 대중문화가 그 소비영역을 한 국이라는 국경을 넘어 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전지구로 넓혀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영화사를 보면 한류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던 1960년대 영화에도 세계화 로컬리티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음을 발 견하게 된다. 1960년대 한국영화를 세계화 로컬리티 개념으로 보기 위 해서는 이 시기 한국영화계 속의 재외한인들의 역할을 살펴보는 일이 매 우 중요하다. 본 연구는 1960년대 한국영화에 재외 한인들이 미친 영향 을 중심으로 그 속에서 세계화와 로컬리티라는 개념이 어떻게 상상되었 고 어떻게 좌절되었는가라는 점에 대해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1) 아르준 아파두라이, 차원현 외 옮김, 고삐풀린 현대성, 현실문화연구, 2004. 258 로컬리티 인문학 2

세계화란, 한국의 문화 컨텐츠가 한국이라는 특정 국민국가의 영역을 넘 어 세계를 상상하는 현상을 지칭하며, 로컬리티는 이런 현상들이 국민국 가의 영역을 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또 하나 1960년대 한국영화를 세계화 로컬리티라는 측면에서 생각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영화 <팔도강산>이다. 제6차대통령선거를 한 달, 제7대 국회의원총선거를 두 달 앞에 둔 1967년 4월 영화 <팔도강 산> 2) 이 개봉되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 영화는 특정 정당을 지지한 다는 비판을 받으며 선거법위반으로 재판에 서게 된다. 3) 그러나 판결에 서는 이 소송이 기각되고 선거에서는 여당이 승리했다. 그 후 이 영화는 계속되는 정부의 지원 하에 <속 팔도강산 세계를 간다>을 제작하는데, 속편에서는 한국 내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사는 한국인들을 노 부부가 방문하는 형식을 띠게 된다. 영화 속에서는 1968년에는 일본의 도쿄를 방문하며 그 후 유럽이나 이스라엘, 미국, 전쟁 중의 베트남까지 11개국을 순회한다. 일본에서는 불고기식당이, 서독에서는 간호사와 탄 광노동자가, 캘리포니아와 LA에서는 과수재배와 석유의 기술발전을 위 해 노력하는 한국인들이, 베트남에서는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용맹한 한국 군인들이 등장했다. 이 영화는 10년간 시리즈로 계속 만들어졌으며 나중에는 텔레비전판(1974~1975)으로도 등장했다. 1960년대를 대표하 는 영화 팔도강산은 한국에서 세계 각국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을 한국내 부의 입장에서 재현하고 그 속에서 한국경제의 발전상을 찾으려고 했다. 이 <팔도강산>이 유행했던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는 지금까지 없었 던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었다. 바로 해외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이 2) 영화 <팔도강산>과 당시 정치상황과의 관련에 대해서는 김한상, 조국 근대화를 유 람하기, 한국영상자료원, 2007 참조. 3) 팔도강산 논란, 조선일보 1967. 4. 13, 사설. (전략)야당인 신민당측은 이 영화 가 공화당의 업적을 지지 선전하는 영화이므로 이의 상영은 대통령선거법에 위반된다 는 해석을 내리고 그 상영중지를 요구하고 있는데 대해, 공보부장관은 이것은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계속 상영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후략)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59

한국영화계에 들어와 활약하고, 합작영화를 추진하거나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였으며,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영화 <팔도강 산>의 유행과 한국영화 속의 재외한인들의 활약, 그리고 이들에 대한 평 가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밀접한 관련 을 가지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 1960년대 한국영화계 속의 재외한 인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들이 한국영화에 어떤 영향을 부여했고 어떻 게 평가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본 후 영화 <팔도강산>과의 연관성에 대 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2. 한국영화사 속의 국경 밖 상상하기 1960년대 영화에서 국경 밖을 상상하며 영화를 만들기 전에도, 이미 1930년대에 국경을 넘는 영화인들이 존재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는 영화 의 양적 황금기와도 맞물린다. 1930년대, 1960년대, 1990년대 말이 이 시기에 해당하는데, 이 각각의 시기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닌다. 첫 번째 특징은 이 세 번의 시기에는 각각 외국영화를 제한하고 국내영화를 일정기간 상영해야 한다는 스크린 쿼터제가 화제가 되거나 새로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1930년대에는 식민지기였기 때문에 스크린 쿼터의 대상 은 조선영화를 포함한 일본영화였다. 두 번째 특징은 국경을 넘는 영화 인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1930년대에는 일본과 상해와 조선을 넘나들 며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이 존재했고, 1990년대 말에는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영화인들이 증가했다. 1960년대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도 록 하겠다. 그리고 세 번째 특징은 각각의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 중에 서 외국과의 합작영화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는 한 영화에서 자본이나 배우, 스탭들의 국적이 두 개 이상 존재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또한 이 세 260 로컬리티 인문학 2

번의 시기에 한국영화는 한국이라는 특정국가의 내부뿐만 아니라 국경 밖의 외부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일본제국이나 중국을 상 대로, 1960년대는 아시아를 상대로, 1990년대 말 부터는 세계를 상대로 영화가 수출되었다. 본고가 주 대상으로 삼는 1960년대는 한국영화가 무역상품 중의 하나 로 인식되어 외국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박정희정권은 1970년 대 중화학공업우선주의로 전환하기 전까지 경공업중심의 수출주도산업 정책을 실시했는데, 영화는 수출담론과 맞물리면서 외국으로 나가기 시 작했다. 또한 1960년대 한국영화는 다양한 장르물을 만들어 내면서, 연 간 평균제작편수는 100편을 넘었고, 1970년에는 231편의 영화를 만들어 내면서 양적으로 본다면 한국영화의 황금기라 불릴만한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에 한국영화계에는 외국에서 활동하던 재외한인들이 한국에 들 어와 활동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필립 안과 류신노스케는 1960 년대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인정받기 시작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 이었다. 1) 필립 안의 한국에 대한 관심 (1) 첫번째 한국방문 1950년대부터 한국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끊임없이 합작제 의를 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필립 안이다. 4) 그러나 필립 안에 대한 연구는 4) 필립 안에 대한 한국의 관심은 지금까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에 미 국드라마에 출연한 영화배우 김윤진과 같은 드라마에서 김윤진의 남편역할을 했던 다 니엘 김, 한류스타 비의 할리우드영화진출, 그리고 007시리즈에서 북한 장교로 출연했 던 릭 윤드이 화제가 되면서 할리우드영화계 속의 한국계열배우들을 되짚어 보려는 움 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 움직임속에 잘못된 정보가 유출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모방송국의 연예정보프로그램에서는 필립 안을 할리우드영화계에 진출한 최초의 아 시아인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SBS <한밤의 TV연예> 2008. 2. 13. 방영). 그러나 필 립 안이 할리우드에서 활약하기 전에 이미 일본출신의 하야가와 셋슈[ 早 川 雪 洲 ]나 중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61

정혜승이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다. 5) 정혜승의 연구는 필립 안이 할리 우드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으며 그가 아시아인으로 표상되어 온 시대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면서 필립 안에 대해 영화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이민 사적 측면에서도 재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했다. 한편 미국의 영화데이터 베이스(http://imdb.com)는 필립 안에 대해 다 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코리언 아메리컨 배우인 필립 안은 수백편에 달하는 영화 속에서 중국인과 일본인 역을 연기해 왔다. 그는 1905년 LA에서 한국외교관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 USC에 입학했다. 1935년에 영화에 출연 하기 시작하여 많은 아시아인의 역할 대체로 노란 얼굴 (Yellow Peril)을 연기해 왔다(이후 생략). 여기에서 한국의 외교관이란 도산 안창호를 가리킨다. 안창호는 1902 년 미국에 하일랜드파크(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는데, 이 시기는 한국에 서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으로 이민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많아지는 시 기와 일치한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5명의 자녀를 두게 되는데 장남 필립 안과 차남 필승 안은 할리우드 영화배우로, 삼남 랠프 안은 TV 배우로 활 약하게 된다. 앞서 서술한 정혜승의 연구에 의하면 필립 안은 하와이를 제외한 미 국본토에서 태어난 코리언 아메리컨의 최초의 한 사람 이며, 미국의 시 민권을 습득한 최초의 코리언이기도 하다. 6) 그리고 또한 그녀의 논문에 국출신의 안나 메이웡이 아시아출신 배우로 활약하고 있었다. 5) 정혜승, 애국자아들의 초상: 필립 안과 헐리웃에 나타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정체 성, 연세대학교 미디어 아트센터 편, 한국영화의 미학과 역사적 상상력, 소도, 93~ 119쪽; HYE SEUNG CHUNG, Hollywood ASIAN PHILIP AHN and the Politics of Cross-Ethnic Performance,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2006. 6) 정혜승, 앞의 책, 94쪽. 262 로컬리티 인문학 2

따르면 할리우드영화에서 최초의 한국인 역할을 연기한 배우도 필립 안 이었다. 그는 1945년 할리우드영화 <China Sky>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김의 역할을 했는데, 7) 이것이 할리우드영화 최초의 한국인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 끝난 후인 1954년에는 여동생 수라 안(Soorah Ahn)과 함께 샌 페르나 도 밸리(San Fernando Valley)의 최초의 중국음식 레스토랑인 필 안의 문게이트 레스토랑(Phil Ahn's Moongate Restaurant) 을 개업하여 화제 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만주영화협회의 히로인 리샹란이 셜리 야마구치 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동쪽은 동쪽>(1951)에서 다 시 일본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필립 안은 이렇듯 바쁘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한국에서 배우나 감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국이 해방된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편지를 교 환하기도 한다. 8) 이승만은 여기에서 필립 안에게 한국영화계에서 리더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그에게 이 자리를 제안(1949년 2월 28일)하지만, 같 은 해 연말에 보낸 편지에서는 한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미국 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할 필요는 없다 고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1949년 12월 8일). 필립 안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과 편지를 주고 받은지 몇 년이 지난 1959년이었다. 이 때 필립 안은 독립투사 안창호의 아들인 사실과 함께 할리우드 영화 <전송가>(Battle hymn) 9) 의 등장인 7) <China Sky>(1945, 미국)는 우리에게 소설 대지로 알려진 펄벅 원작의 영화이다. 일 본의 침략하에 놓인 완리라는 중국의 어느 가난한 마을의 미국인자선병원에서 일하 고 있던 랜돌프 스콧과 루스 와릭의 연애담이 주 내용을 이룬다. 여기에서 필립 안은 일본인군인 야스다(리처드 루)에게 이용당하고 끝내는 죽임을 당하고 마는 조선인 의 사 김을 연기했다(무라카미 유미코[ 村 上 由 美 子 ], 옐로 페이스イエロー フェース, 1993, 아사히 신문사, 136~138쪽). 8) 정혜승, 앞의 책, 109~110쪽. 9) 일본과 한국에서는 1957년 공개되었다. 한국전쟁시에 전쟁고아들을 돌봐주었다는 미 국 헤스 대령의 일생을 그린 영화였다.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63

물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필립 안의 첫번째 한국방문은 같은 해 5월1 일 영화촬영차 한국을 방문한 할리우드 서부극의 스타 존포드 관련기사 에 의해 묻혀졌다. 10) 한편 필립 안은 자신의 아버지 안창호의 일대기를 영화화하고 싶어했 는데, 이는 1959년 한국 영화계에서 기존의 실존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사극이 유행 11) 하고 있어 더 관심을 모았다. 특히 구한말의 독립투 사나 영웅들이 중심이 된 영화가 많았는데, 예를 들면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12) <성웅 이순신> 등이 그것이다. 1960년에 시나리오작가 최금동 13) 이 필립 안에게 안창호의 전기를 영화 할 계획인데 주연으로 필립 안을 채용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필립 안은 첫번째 한국방문에서 자신의 한국어에 평안남도사투리 가 강하게 남아있음을 의식하여, 스스로가 한국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는 것을 포기했다. 14) 당시 한국영화나 연극에서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은 터 부였다. 영화에서 방언을 사용하는 배우가 등장하는 것은 1961년 김기덕 이 감독한 <5인의 해병>에서부터이다. 김기덕에 의하면 영화 속 배우들 10) 당시의 한국미디어가 필립 안의 한국방문에 대해 기사화한 것은 국제영화 1959년 6월호의 인터뷰기사와 조선일보 3월14일의 기사 정도이다. 이 나마도 국제영화 의 인터뷰기사는 인터뷰기사와 함께 실린 영화 <모정>의 사진에서 리처드 루를 필 립 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정혜승, 앞의 책, 108쪽). 이에 비해 존포드 관련기사는 서울신문 (1959. 5. 1, 존포드 기록영화 촬영 때문에 방한 ), 한국일보 (1959. 5. 6, 4일밤 환영석상의 존포드, 동아일보 (1959. 5. 7, 존포드감독 환영파티 성황 ) 등이 있다. 11) 스펙터클 사극부움, 동아일보, 1959. 7. 22. 12) 이 영화는 반공예술단의 연간계획작품으로 제작되었는데 런닝타임 180분이며, 이승 만의 20세부터 30세까지의 업적을 그렸다. 후일 이승만이 하야한 후, 이 영화를 제작 한 업자에게 당시 정부홍보실이 4천만원을 부정으로 지출하여 지원한 사실이 밝혀졌 다( 경향신문, 1960. 5. 7). 13) 최금동은 한국에서 시나리오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4.19이후 김구의 전기영화 시나리오를 썼고, 안창호에 대한 영화 기획( 필립 안 섭섭히 이한 /도산의 생애 영화 꿈꾸며, 경향신문, 1962. 7. 26)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는 실현 되지 못했다. 14) 정혜승, 앞의 책, 112쪽. 264 로컬리티 인문학 2

의 대사에 방언을 넣는 것은 터부였지만 배우들의 의견으로 방언을 넣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15) 그러나 필립 안이 한국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포기 하게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한국영화에서 동시 녹음은 나중에 기술하는 재일조선인 감독 류신노스케에 의해 시도되지만, 일반적으로 1960년대까지 거의 모든 영화는 후시녹음이었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한국방문 이후 첫번째 방한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한 필립 안은 두번째 방 한(1962년 7월)에서는 한국과 미국과의 영화합작을 추진하려고 한다. 그 가 추진하려는 한미합작은 전체 제작비 35만 달러 16) 중에서 한국정부가 25만 달러를 부담하고 필립 안 자신이 나머지를 부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획안에서 한국측 영화사는 영화감독 신상옥이 주체가 된 신필름이 맡았다. 17) 구체적으로는 미국인 스탭, 한국인과 미국인의 배우를 채용하 며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고, 제목은 <롱 웨이 프럼홈(long way from home)>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필립 안이 두번째 방한에서 한미합 작을 꾀하면서 한국영화 안에서는 미국 이외의 나라와도 합작이 가능할 수 도 있다는 생각에서 홍콩, 이탈리아 등과의 합작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 합작을 위해 필립 안은 1962년9월에 세번째 방한을 추진한다. 이 방한에서 그는 합작영화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한국정부와 신필름과 협 의할 예정이었다. 이 때 미국측 스탭들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기 15)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2005, 이채, 27쪽. 16) 당시의 환율로 1만 달러는 약 1500만 원이다. 1958년도 한국영화 한 편의 평균제작비 가 3천만원이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35만 달러는 매우 큰 액수이며 한국정부가 부담 하기로 한 25만 달러도 꽤 큰 액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반면에 외국에서 영화를 수 입할 시의 가격은 5천 달러에서 1만 달러 정도였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자이언트>는 예외로 각각 5만4천 달러와 3만5천 달러에 수입되었다. 서울신문, 1958. 3. 30. 17) 실현될 한미합작영화, 서울신문, 1962. 7. 26; 신 필름 에서 제작키로/한미합작 영화, 한국일보, 1962. 7. 26; 한미합작영화 실현단계, 경향신문, 1962. 7. 27.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65

사가 보도되기도 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스탭들의 방문은 연기 되었다. 18) 그리고 1963년3월에는 필립 안의 4번째 방한이 추진되었다. 이 때 필 립 안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영화 <필리 오브 서울>의 한국 촬영 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4번째 방한에서 필립 안은 신필름과의 합작계획을 갑자기 변경하여, 한양영화공사와 재계약했다. 이에 대해 한 국의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필립 안 씨는 한미합작을 추진하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떠나 우리나라의 배우를 세계시장에 알리고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열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영화기술을 끌어올려 우선 동시녹음이 라도 실현하고 싶은 때문이라고 하면서 내가 할리우드에 오래 있었 던 경험과 친분을 한국영화계를 위해 바치고 싶을 따름 이라고 말했 다. 그는 처음에 신 필름 과 이러한 의도에서 일을 추진했으나 약속 한 대로 이행이 안 되어 날짜는 지연되고 기다리다 못해 궁금해서 다 시 이번에 귀국했던 것이라고 했다. 19) 필립 안의 한미합작계획은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려는 그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측 영화사를 한양영화공사로 변경하면서 처음 생각과는 달리 제작비 35만 달러 중 20만 달러를 부담하겠다고 한 다. 그러나 이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사 사상 최초의 한미 합작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2) 재일조선인 영화인 류신노스케[ 竜 伸 之 介 ] 필립 안에 비하면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재일조선인 류신노스케 18) 올해는 합작 붐, 한국일보, 1963. 1. 1. 19) 한미합작영화 만들기로, 경향신문, 1963. 4. 9. 266 로컬리티 인문학 2

라는 이름은 무척 생소한 이름이다. 그는 유진식( 劉 振 植 )이라는 한국명 으로 활동을 했는데, 한국영화사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기술 20) 을 살펴보자. 1930년 일본 동경 출생. 일본예술대학. 재일동포로 일본영화계에 몸담고 활약했다. 귀국하여 조국에서 감독의 길을 뚫어 볼까 해서 돌 아왔을 때 메스콤의 한때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 때 만든 작품이 <불 멸의 성좌>(1959, 최현 이빈화 김승호 출연)였다. 그는 혜성같이 나타난 시나리오 작가다. (중략) 이미 그는 갑자기 나타난 시나 리오작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시나리오는 너무도 고답적이어서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중략) 드디 어 그의 작품이 현상 공모에 당선된다. 두 번째 작품은 <대원군과 민 비>(1959). 그러나 유진식은 별로 한국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일본으 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의 이름은 곧 한국에서 잊혀졌다. 위 서술은 유진식에 대해 서술된 유일한 기술이다. 유진식은 1960년 제2도에이영화[ 第 二 東 映 映 画 ]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 第 三 次 世 界 大 戦 四 十 一 時 間 の 恐 怖 ]>( 日 高 繁 明 감독)에서는 미국과 일본을 비난하는 북 한의 평양방송의 아나운서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3년에는 한국 영화 <동경비가>의 극본을 유한철, 손태주와 함께 쓰기도 했다. 그는 일 본으로 돌아간 후 유명한 영화제작회사 도에이의 텔레비전프로덕션 연 출부분을 담당하게 된다. 그가 일본에서 제작한 대표작은 <특별수사기 동대-비뚤어진 꽃[ 特 別 捜 査 機 動 隊 歪 んだ 花 ]>(1965년 8월)과 <푸 른 태양[ 青 い 太 陽 ]>(NET-TV드라마, 1968), <방황하는 딸[さすらいの 娘 ]>(NET-TV드라마, 1972) 등이다. 20) 김종원 외 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출처는 한국영상자료원 데이 터베이스에서 인용한 것임.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67

류신노스케는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며 한일간의 문화교류에 이바지했 고 일본의 재일조선인 배우들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하고 한국의 연예인 들을 자신이 연출하는 방송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결성 된 재일영화인협회에서는 간사를 맡기도 했고, 21) 일본영화 <망향의 시 민족은 어떻게 사는가[ 望 郷 の 詩 民 族 はどう 生 きるのか]>(1977)에서는 감독, 각본, 제작을 맡기도 했다. 류신노스케는 이런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영화계에서도 활약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가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었다는 22) <불멸 의 성좌>는 한국에서 거의 최초의 동시녹음영화 23) 이기도 했다. 동시녹 음기술은 197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기술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해 마다 10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자들 입장에서 보면 동시녹음 이란 후시녹음에 비해 제작비를 2, 3배로 불리는 골치덩이였고, 배우들 의 입장에서 보면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하는데 동시녹음을 하면 직접 대 사까지 외워야 하는 고달픈 작업이 동반되는 기술이었다. 즉 동시녹음은 당시 한국영화의 현실에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라도 꼭 도입해야만 하 는 기술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멸의 성좌>는 어떻게 동시녹음으로 제작될 수 있었는가. 우선 스탭들의 대부분이 재일조선인들이었다. 기술감독은 앞서 서술한 일본의 재일영화인협회결성시 회장을 맡았던 유심평이었고, 카메라는 역시 재일조선인이었던 최영섭이었다. 이들 재일조선인 스탭들은 동시 녹음기술을 한국영화에 도입하고 싶어했고 자신들의 영화에서 실제로 적용했던 것이다. 21) 동아일보, 1961. 11. 9. 이 협회의 회장은 유심평이었고 간사는 류신노스케였다. 22) 재일교포 영화인이 본 국내영화계 이모저모, 동아일보, 1959. 1. 16. 23) 해방 이전의 영화를 보면, 한국 최초의 동시녹음 영화는 1936년의 <홍길동전> 이었 다. 1940년대 국책영화들도 동시녹음이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중단되었다(유선영 외 편, 한국의 미디어사회문화사, 한국언론재단, 2007, 276쪽). 268 로컬리티 인문학 2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활약했던 재일조선인들은 한국영화의 현실에 대 해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류신노스케는 한국영화의 장래에 대해 매우 희망적 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소재와 희망을 가진 국산영화계는 매우 희망 적인 장래를 예견할 수 있다. 감독들이 훌륭한 부레인 과 열성을 가 지고 있으며 올 아프레코 인데도 그것을 소화할 능력을 가지고 있 으나 언제까지나 뒤떨어진 흑백35미리 스탄다아드 와 올 아프레 코 에 머물러 있을 순 없다. 푸로덕슌 씨스팀 이 확립되고 더 단결 만 된다면 이러한 후진성을 극복하는데 큰 원동력이 될 것이다. 24) 류신노스케의 눈에 보인 한국영화계는 열성과 의지는 있으나 기술적 으로는 뒤떨어진 곳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큰 한국영화계의 문제는 후시녹음(올아푸레코)이었으며, 한국에서 만든 최초의 영화에서 동시녹 음을 도입했다는 점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한국영화가 기술적으로 뒤지고 있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유심평도 같 은 의견이었다. 재일교포 중에 (필자주-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40명의 영화인 이 있는데 30명의 촬영인, 연출 5명, 만화영화 3명, 편집 3명인데 비 록 한국인이라는 환경에서 마음껏 재질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하나 일본 영화인들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다. 국산영화계에 서 이들을 장차 받아들일 수 있는 터전만 닦아 준다면 언제든지 그들 은 조국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솔직한 견해를 말해서 국산영 화제작계에는 무엇보다도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25) (밑줄-필자) 24) 동아일보, 1959. 1. 16, 앞의 글. 25) 위의 글.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69

류신노스케가 기술적 부분에 국한해서 한국영화의 현실을 이야기한 데 비해 유심평은 재일교포들 을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인으로 규정하고 상황이 된다면 언제라도 조국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고 했다 는 점에서 차이가 보인다. 그러나 류신노스케나 유심평은 둘 다 국산 영 화계는 의지는 있지만 기술이 뒤떨어져 있었고, 자신들의 역할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류신노스케는 영화 이외에도 한국의 연예인들을 자신이 연출하 는 방송에 출연시키거나 자신의 회사가 제작하는 방송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이 때 류신노스케가 한국에서 데려온 연예인이 코미디언 곽규석이 었다. 류신노스케는 1963년 11월에 자신의 방송에 곽규석을 특별게스트 로 초대했는데, 일본 방송에 처음 출연하는 그를 배려하여 이미 재일조 선인스포츠인으로 알려진 장훈이나 백인천등과 같이 출연시켰다. 그 이 후 곽규석은 매주 일요일 방송되는 <도쿄아카사카록폰기[ 東 京 赤 坂 六 本 木 ]>의 고정게스트로 출연하게 된다. 또한 곽규석은 일본에 체류하면서 조선일보에 자신의 체류기를 연재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속에서 일본에서 얼마나 재일조선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다. 그 곳(필자주-나고야)거류민단본부는 크게 환영의 준비를 해 주 었고 하루 두 차례의 공연에 매 회마다 우리 교포가 객석의 삼분의 일 을 차지했으며 한국의 색동옷으로 단장한 어린 재일교포 소녀들이 무대가 바뀔 때마다 한아름씩 되는 꽃다발을 가슴에 안겨주어 감격 의 벅참으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읍니다. 재일 대한부인회 대 한민국 재일 거류민단 애지현 본부 한국교포문화 센터 등 여러 군 데서 보내준 오색이 찬란한 꽃다발을 받을 때마다 훈훈하게 코를 찌 르는 따뜻한 동포애를 맡곤 했던 것입니다. 26) 26) 후라이보이 동경통신/제2신, 조선일보, 1964. 12. 3. 270 로컬리티 인문학 2

곽규석이 보내온 동경통신 에 묘사된 재일조선인들은 영화 <팔도강 산>의 속편에 나타난 모습과 유사하다. 영화속에서 김희갑이 어느 나라 를 가던지 현지 교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동포애를 느끼고 자랑스러운 한국 을 느끼며 감격했던 것처럼 곽규석은 일본에서 동포애를 느끼면서 벅찬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한편 류신노스케는 재일조선인들을 일본의 방송에 소개시키기도 했 다. 예를 들면 1964년 6월 24일NET TV 27) 에서 방영한 <특별수사기동 대-밀항[ 特 別 捜 査 機 動 隊 - 密 航 ]> 28) 에 재일조선인배우 공미도리[ 孔 美 都 里 ]를 소개하기도 했다. 29) 그리고 한국영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 앞장 서기도 했는데 한일간의 국교가 정상화된 직후인 1966년에는 <이 땅에 도 저 별 빛을>(일본어 제목 愛 は 国 境 を 越 えて)을 일본에 수입했다. 이 영화는 그가 속해 있던 도에이의 교육영화로 수출되었으며 수출가는 1,960만 달러였다. 류신노스케는 이 영화의 일본어판 재편집을 담당했는 데 감수는 영화감독 후루하타 야스오[ 降 旗 康 男 ]가 맡았다. 이외에도 류신노스케는 도호가 제작한 1964년의 도쿄올림픽 기록영 화 30) 를 한국어판으로 재편집하기도 했는데, 그의 편집에 의해 일본국내 27) NET-TV는 1959년2월1일에 개국한 방송국으로 정식명칭은 일본교육텔레비전이 다. 처음에는 방송 컨텐츠의 50%는 교육방송으로 할 것 ( 東 京 ニュース 通 信 社 編, 텔리비전50년 in TV가이드 テレビ50 年 in TVガイド, 2000, 53쪽)이 요구되었지만 그 후 영화제작회사인 도에이[ 東 映 ]가 자본금의 3할을 출자하면서 도에이와 공동으 로 드라마를 제작하게 되었다(위의 책, 57쪽). 류신노스케는 도에이의 텔레비전제작 부 소속이었는데 도에이와 NET-TV의 합작에 의해 NET-TV의 방송에도 관여하 게 되었다. NET는 1977년 4월 1일에 회사명을 전국아사히방송[ 全 国 朝 日 放 送 ]으로 개명했다. 28) <특별수사기동대>는 1961년 10월 11일에 처음 방영되어, 1977년 3월 20일에 마지막 회가 방영되기까지 총 801회가 제작된, 장수 형사드라마이다. 29) 전파를 타고 일본의 하늘에, 조선일보, 1964. 5. 19. 당시의 일본신문을 보면 <특 별수사기동대-밀항편>의 연출은 나가타 야스다다[ 永 田 靖 忠 ]이다. 30) 1964년도쿄올림픽을 기록한 도쿄올림픽기록영화 <도쿄 올림픽[ 東 京 オリンピッ ク]>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한 영화 <올림피아>2부작을 의식한 것이었다. 레니 리펜슈탈이 제작한 <민족의 제전>과 <미의 제전>에 버금가는 영화를 만들기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71

판이 150분이었던 영화가 125분의 한국어판으로 재탄생되었다. 일본국 내에서 만들어진 수출용 도쿄올림픽기록영화가 135분이었던 점을 감안 하면 한국어판에서 많은 부분이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어판 재 편집과정에는 한국선수단의 입장이나 한국선수들의 시합모습, 재일조선 인들의 환영모습등 20분의 양이 삽입되었는데 이 영화의 제작책임은 당 시 거류민단도쿄본부의장이었던 양삼영이었다. 양삼영은 이를 제작하여 1966년 9월에 한국에서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한국측의 수입권을 둘러싸 고 트러블이 생기면서 영화는 공개되지 못했다. 한국판 필름은 현존하지 않지만 다른 나라에 수출된 도쿄올림픽기록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올림픽기록영화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올림픽기록영화는 편집과정에서 국내판, 자유진영 판, 공산주의 국가판의 세 종류로 나누어 편집되었고 편집은 이치가와 콘이 담당, 배급도 국내판과 동일하게 도호가 맡았다. 가장 먼저 수출된 국제판은 그리스와 말레이지아였다. 특히 말레이지아판에서는 국내판에 는 없는 고속도로나 경기장시설등이 보다 많이 소개되었고 말레이지아 팀의 입장장면, 그리고 말레이지아에서 인기가 있는 축구와 농구장면이 좀 더 길게 삽입되었다. 그 대신 복싱과 경보, 선수촌을 소개하는 장면이 삭제되어 영화는 국내판과 동일한 135분으로 재편집되었다. 31) 도쿄올림 픽 기록영화의 말레이지아판에서 고속도로나 경기장시설 등이 보다 많 이 소개된 점은 1960년대 영화 <팔도강산>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영화 위해 이치가와 콘이 감독을 맡았으며 배급은 도호가 담당했다. 도쿄올림픽은 예술적 으로나 영화적으로는 완성도가 높고 인간을 기능적으로 다룬 <민족의 제전>보다 인 간적 측면으로 선수들을 다루어 독자적인 인간의 기록을 만들어냈다는 평가( 映 画 東 京 オリンピック をみて, 読 売 新 聞, 1965. 3. 13)가 있었지만, 올림픽조직위원 회는 영화의 예술성을 인정하면서도 올림픽기록이라는 측면이 부족하다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었다. 결국 올림픽조직 위원회가 원래 제작하기로 했던 올림픽기록영화 속 편의 제작을 포기하고 이치가와 작품을 인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オリンピッ ク 映 画 論 争 にケリ, 読 売 新 聞, 1965. 3. 31). 31) 五 輪 映 画 海 外 版 を 発 送, 読 売 新 聞, 1965. 4. 5. 272 로컬리티 인문학 2

가 정부의 고도경제성장을 고속도로를 통해 국민들에게 선전했듯이 일 본의 올림픽영화는 외국에 자신들의 고도경제성장을 고속도로를 통해 선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3. 한국영화계의 세계화와 로컬리티 그렇다면 재미한인 필립 안이나 재일조선인들이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한국영화계는 큰 변화를 맞이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변화는 일본의 소설이나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 화가 유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조춘>(일본영화 <마고코로 [ 真 心 ]>가 원작), <구름은 흘러도>(야스모토 스에코[ 安 本 末 子 ]의 일기 <니안짱>이 원작으로 한일 간에 거의 동시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둘 다 일본의 영화나 출판물을 원작으로 한다. 두 번째 변화는 한국영화를 외국에 수출하려는 움직임이다. 홍콩과 합 작으로 제작한 영화 <러브 포 유>(1959, 홍콩현지촬영)가 3천만 달러에 동남아시아 각국에 수출된 것이다. 세 번째 변화는 영화계를 둘러싼 정 치적 사회적 변화이다. 정치적으로는 4.19를 맞아 영화에 대한 검열이 민간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 으로 넘어갔고(1960년), 각 대학에는 영화관련 학과가 설치되었으며(1959년 중앙대학교, 1960년 한양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각종 영화관련 상이 제정되기도 했다. 32) 그러나 이런 변화들은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정부의 감시 하에 이루어지게 된다. 정부는 우수영화 보상제도를 실시하여 국산영화의 양 적 증가를 도모하려고 하는데, 이는 우수영화에 선정된 영화를 만든 영 32) 鄭 秀 婉, 韓 国 映 画 の 黄 金 期 : 1960 年 代, 東 京 国 立 近 代 美 術 館 フィルムセンター 編, 2002 年 日 韓 国 民 交 流 記 念 事 業 韓 国 映 画 栄 光 の1960 年 代, 2002.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73

화사는 우선적으로 외국영화를 수입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내용이었 다. 그리고 영윤이 폐지되어 정부의 검열이 다시 부활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영화 <성춘향>이 일본의 국회의사당에서 1962년 상영되었고 같은 해 5 월 중순에는 일본전국주요도시에서 상영되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소 설가 이시자카 요지로[ 石 坂 洋 次 郎 ]의 소설이 유행하여 일본에서도 영화 화된 <푸른 산맥[ 青 い 山 脈 ]>(한국어 제목은 <푸른 꿈은 빛나리>)이나, <양지바른 비탈길[ 陽 のあたる 坂 道 ]>(한국어 제목은 <가정교사>) 등이 영화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한국영화계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변화는 두 번 에 걸친 국제영화제의 개최이다. 제9회 아시아영화제(1962년5월)와 제13회 아시아영화제(1966년 5월)의 영화제 개최는 한국영화계에 자 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일본에도 두 편의 영화를 수출하게 되는데 한 편은 홍콩의 쇼브라더즈를 경유하여 수출한 <빨간 마후라>이고 또 다른 한편이 류신노스케가 수출입을 담당한 <이 땅에도 저 별빛을>이 었다. 그런데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보면 필립 안이나 류신노스케 이외에 도 외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영화계에서 활약하려고 했던 이들이나 한국 에서 태어나 외국에서 활약하려던 영화인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한국 명이 강연옥인 린다왕은 부산의 동아대학교정치학과에 재학 중에 하와 이에 유학(1958년)한 후 할리우드영화계로 진출한 한국계 배우이다. 그 리고 류신노스케가 발굴한 재일조선인 배우 공미도리. 그녀의 민족명은 공순향( 孔 純 郷 )이었는데 항간에는 공미도리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조치 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일 때 한국에 갔으며 1961년 <현해탄은 알고 있 다>의 여주인공 히데코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1962년에 부산일보 영화상신인상을 수상했다. 1963년에는 <현해탄의 구름다리>라는 영화 274 로컬리티 인문학 2

에서 일본인여성 미도리역 33) 을 맡기도 했다. 앞서 서술했듯이 공미도리 는 일본의 NET-TV의 <특별수사기동대-밀항> 34) 에서 특별출연하기 도 하는데 이로 인해 일본드라마에 출연한 최초의 한국배우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일본어와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영화에 데뷔한 후에 는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해마다 열리는 해외영화제에 참가하 게 된다. 공미도리와는 반대로 일본영화에 먼저 출연한 후 한국영화에 데뷔한 재일조선인 배우도 있었다. 예명을 유수미애라고 지은 조문자는 21세 때 고노에 도시로감독의 영화 <추억의 달밤[ 思 い 出 の 月 の 夜 ]>에 출연 하면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는데, 그 후 한국에 와서 유현목감독의 <푸른 청춘은 빛나리>(1963)와 김기덕 감독의 <빗속으로 사라지다>에서 주인 공을 맡았다. 이 들 이외에 특이할 만 한 인물이 이강우( 李 康 友 )이다. 그는 1962년 미국학술회의가 수여하는 학술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에 알려졌는데 도쿄 의 외국영화전용상영관의 체인을 경영하는 실업가였으며 재일조선인상 공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35) 이러한 변화는 해방 후 20여 년간 한국 이라는 국민국가의 경계내부 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되어 온 한국영화가 일본이나 아시아라는 외부를 상상하고 변화의 기운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국민 국가의 경계란 영토의 경계를 의미하는 국경뿐만 아니라 문화적 사회 적 경계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이후 연결되지 않음으로서 좌절되고 만다. 33) <현해탄의 구름다리>는 종전을 만주에서 맞이했지만 부모를 잃은 일본인 소녀가 한 국인부부의 양녀로 받아들여진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 1963. 6. 15). 34) 이 드라마는 살인사건에 연루된 한국인이 일본으로 밀항하는데 그의 애인이 그 뒤를 따라 일본으로 밀항하고, 밀항사실이 발견될까 두려워 노심초사한다는 내용인데 공 미도리는 애인역할을 맡았다( 韓 国 の 女 優 が 登 場 NET, 読 売 新 聞, 1964. 6. 15). 35) 아카데상을 탄 최초의 한국인 일영화계의 왕자 이강우, 경향신문, 1962. 7. 29.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75

그렇다면 재외한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 을까? 우선 필립 안의 한미합작영화계획에 대해 살펴보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한미합작영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정부가 달러의 송 금제한을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36) 박정희정권은 수출위주의 정책, 즉 달러를 국내로 유입하는 데에는 관대했지만 국내의 달러를 외국으로 수 출하는 데에는 인색했다. 37) 이러한 문제는 한미합작영화 제작 계획이 논 의될 때부터 일부 문화인들이 예견했던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극작가 오영진은 한미합작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지난 날 우리 영화계가 국지적으로 몇 편의 합작영화를 시도한 적 이 있었지만 그 기획의 불충분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것이 우리의 기억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우리의 영화 시장을 넓히기 위해서 또는 그 밖의 얻는 것 을 위해서도 합작영화 제 작이 왕성한 기운을 보여도 좋을 것 같다. (중략) 이 합작영화 제작 에 있어서 우리가 지닌 현실적 핸디캡 은 외화를 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막힌 길이 틔어야 할 것이다. 오영진은 이미 외화의 송금제한이 한미합작영화에 걸림돌이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고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이후 필립 안은 한국영화계에 이바지하려고 했던 자신의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른 쪽으로 한국 과 연계를 맺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LA와 부산의 자매도시결연프로젝 36) 정혜승, 앞의 책. 37) 달러의 해외송금제한은 영화계뿐만 아니라 당시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들 의 생활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희극배우 김희갑이 미국을 돌아보고 나서 쓴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그때 그와 나눈 얘기 가운데 기억나는 것은 학 비나 용돈이 넉넉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외국으로의 송금액수에 제한이 있 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현금 대산 보내온 인삼 등을 팔아서 학비로 충당하고 있노라 했다. (김희갑, 어느 광대의 사랑, 삼진기획, 1992, 222쪽). 276 로컬리티 인문학 2

트를 추진하기도 했고, 1973년에는 도산기념공원의 추진위원회를 만들 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4번에 걸친 방한과 동시녹음기술을 한국에 도입하려던 노력, 그리고 한미합작영화를 추진하려던 그의 노력은 한국국내에서 그 다지 많이 알려진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면 1964년에 미국공보부의 초 청을 받아 미국국내를 여행하고 온 희극배우 김희갑은 LA에서 필립 안 을 만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도산 안창호의 자제인 필립 안 은 그 때에 LA외곽지역에서 문게 이트(Moon Gate) 라는 한국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한번은 그 의 초대를 받았다. 그의 식당에는 태극기를 선명하게 인각해 놓았고 지붕위에는 24시간 내내 봉화가 타올랐다. 바닥에 깔린 주단에도 그 의 성씨인 안( 安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성씨이기 때문 이 아니라 민족주의자였던 선친을 기리고자 해서였을 것이다. 그의 한국어는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의 배우인 내게는 기를 쓰고 우리말로 대화를 해보려고 애를 쓰는 듯 보였다. 풍선 타고 왔습네 까? 나는 그의 첫마디에 어리둥절해졌다. 비행기 타고 왔습니다 아, 비행기! 비행기라는 어휘가 쉬이 떠오르지 않아 풍선이라 한 것 이었다. 선친의 애국심을 계승하려는 그의 노력은 음식점 종업원을 채용하는 데에서도 나타나 있었다. 가난한 한국의 유학생들이 대거 그 식당에서 학비벌이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내내 필립 안과 우리는 주로 영화 얘기로(필립 안도 배우였었다) 밤을 지샜다. 38) 김희갑은 필립 안과의 만남에서 영화배우라는 동질감보다 먼저 태극 기, 한국음식, 봉화, 그리고 성씨를 새겨놓은 주단을 보며 같은 동포임을 느끼려고 한다. 김희갑의 미국여행에는 영화감독 배석인도 동행하고 있 38) 위의 책, 230~231쪽.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77

었다. 배석인은 주로 공보부의 홍보영화를 찍던 감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극배우 김희갑이나 배석인이 필립 안과의 만남에서 기억하 는 것은 그의 어눌한 한국어와 민족주의자 안창호의 아들이라는 이미지, 그리고 한국의 유학생들을 채용하여 같은 동포임을 느끼게 하는 점 등 이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은 김희갑이 영화 <속 팔도강산 세계를 간다> 속에서 외국안의 한국을 느끼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예를 들면 다음 과 같은 대사를 보자. 저길 봐! 저게 모두 우리 동포가 경영하는 집이 아닌가! 동경 한복 판에 우리 음식점이 저렇게 생길 줄 누가 알았겠나. 모든 사업가들도 한국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노력하고 있어.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지 위도 굳어질 게 아닌가! 도쿄의 한복판에서 한국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음식점을 경영하는 재 일조선인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영화 속의 대사와 실제로 미국에 간 김희 갑이 필립 안의 식당을 보고 필립 안과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 리 다르지 않다. 이는 미국여행에서 김희갑은 배석인과 함께 영화 <팔도 강산>을 구상했다 39) 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경제대국 일본과 미국적 이상을 추구해야 했던 한국의 현실에서 일본과 미국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사업가들은 한국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 주 면서 동시에 같은 한국 민족이라는 자부심도 심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 다. 한편 류신노스케, 그리고 같은 시기에 한국에 와 있었던 재일조선인들 은 필립 안과 다른 맥락에서 평가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대중문화가 유 행하던 상황에서 이른바 왜색 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 39) 위의 책, 239쪽. 278 로컬리티 인문학 2

나로 인식 40) 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인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실제로 일본인 배우를 채용할 수 없으므로 기모노를 입을 수 있는 배우 41) 가 그 역할을 대신함으로서 왜색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필립 안이나 류신노스케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익혔던 기술을 한국에 도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류신노스케가 도입하려고 했던 동시녹음 기술, 그리고 필립 안이 추진했던 한미합작영화계획 등에서 그들이 한국영화 에 선진 적 기술을 도입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한국영화기술의 역사나 한국영화사에서 이들의 이름은 찾아 보기 힘들다. 42) 또한 이들은 미국과 한국, 일본과 한국이라는 두 나라 사 이에서 민간차원에서의 기술협력을 도모하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 려고 했고 한국영화를 미국이나 일본에 소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한국영화의 세계화는 1970년 대에는 정부주도의 한국영화진흥공사가 담당하게 된다. 1973년 4월 3일 영화법 4차 개정으로 탄생한 영화진흥공사는 국가주도의 영화보호와 육 성이 목적이었다. 영화진흥공사는 또한 대형국책영화의 제작과 영화사에 대한 융자, 43) 영화수출진흥대책(박정희정권의 수출우선주의에 따라, 영 화도 적극적으로 외화벌이에 나서야 한다)을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영화 진흥공사의 역할은 1960년대에 필립 안이나 류신노스케가 추진하려고 했 던 것들이었다. 40) 방화계에 일본조 교포신인모집 성행, 대한신문, 1966. 6. 4. 41) 위의 글. 42) 당시 영화계에 몸담았던 인물들의 인터뷰에서 유진식이나 유심평의 이름은 자주 등 장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의 영화사에서 이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43)영화사에 대한 융자가 실제 영화제작비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영화관련회사는 5천만 원을 영화진흥공사에 등록비로 내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진흥 공 사는 이 등록비를 다시 영화제작비 명목으로 융자했기 때문에 영화사 입장에서 보면 자 신들의 자금이 돌아온 것에 불과했다(이효인 외, 한국 영화사 공부 1960~1979, 이채, 2004).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79

마지막으로 1960년대 한국영화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영화사적 측면 이외에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미국과 일본 은 다른 나라이면서도 한국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곧 반공을 의미했고 일본은 조총 련 등의 이미지로 인해 반공영화의 주요 촬영지로 지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영화계와 연관을 맺은 필립 안이나 류신노스케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4. 나오면서 세계화와 로컬리티는 동시에 진행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세계 화 안에 로컬리티가 포함되기도 한다. 식민지기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영 화계에서 국민국가의 국경 밖을 상상하기 시작했던 1960년대 한국에서 일본은 동경의 대상이며 따라잡아야 할 목표였고 미국은 자유우방이었 다. 이는 영화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국경을 넘는 일이 자유롭지 않 았던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이 두 나라에서 온 영화인들은 같은 동 포 임과 동시에 두 나라를 대표하는 선진 의 메타포였다. 이 시기 국경 을 넘는 사물의 이동이나 사람들의 이주는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그럼에 도 불구하고 1960년대 한국영화는 세계 속으로 진출하려고 하고 있었으 며,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재외거주한국인들이 한국영화계에 들어와 활약하기도 했다. 1960년대 한국영화는 한국이라는 내부에 만족하지 않고 외부 영역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화계의 세계화와 로 컬리티의 개념은 이 시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 력들은 영화 <팔도강산>과 <속 팔도강산>에 나타난 재외거주 한인들의 280 로컬리티 인문학 2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영화속에서 자랑스러운 한국 에 긍지를 느꼈던 교민들과 달 리, 실제로는 당시 한국의 영화계의 여건상 그들의 기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들의 노력은 기록되는 일 없이 영화사에서 사라져갔다. 그리 고 한국영화계에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개념을 다시 적용하기까지는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1970년대 홍콩에서 활약했던 영화감독 정창화도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2005년부터 1년에 한번 서울에서는 재외동포영화제가 열리고 있 다. 이 재외동포영화제에는, 외국에서 활약하거나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 는 재외한인들의 영화가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영화관의 스크린속 에서 이들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조 선족 출신의 장률( 張 律 )(대표작으로는 <망종>), 카자흐스탄의 라울렌티 송(대표작으로는 <고려사람>(1993), <교장선생님>(1999), 우즈벡스탄 의 루슬란 박(대표작으로는 <원 슈트>(2006)), 할리우드의 SF영화감독 넬슨 송(대표작으로는 <심청>(2005))등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반 도에 뿌리를 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고 작품 속에서도 그런 성향을 명 확히 하고 있는 감독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도 앞으로 많은 관심과 연구 가 요구된다. 참고문헌 1. 1차자료(신문, 잡지) 재일교포 영화인이 본 국내영화계 이모저모, 동아일보, 1959. 1. 16. 조선일보, 1959. 3. 14. 존포드 기록영화촬영때문에 방한, 서울신문, 1959. 5. 1. 4일밤 환영석상의 존포드, 한국일보, 1959. 5. 6. 존포드감독환영파티 성황, 동아일보, 1959. 5. 7.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81

스펙터클 사극부움, 동아일보, 1959. 7. 22. 국제영화, 1959. 6. 경향신문, 1960. 5. 7. 서울신문, 1958. 3. 30. 동아일보, 1961. 11. 9. 경향신문, 1962. 7. 26. 실현될 한미합작영화, 서울신문, 1962. 7. 26. 신 필름 에서 제작키로/한미합작영화, 한국일보, 1962. 7. 26. 한미합작영화 실현단계, 경향신문, 1962. 7. 27. 올해는 합작 붐, 한국일보, 1963. 1. 1. 아카데상을 탄 최초의 한국인 일영화계의 왕자 이강우, 경향신문, 1962. 7. 29. 한미합작영화 만들기로, 경향신문, 1963. 4. 9. 조선일보, 1963. 6. 15. 전파를 타고 일본의 하늘에, 조선일보, 1964. 5. 19. 후라이보이 동경통신/제2신, 조선일보, 1964. 12. 3. 방화계에 일본조/교포신인모집 성행, 대한신문, 1966. 6. 4. 韓 国 の 女 優 が 登 場 NET, 読 売 新 聞, 1964. 6. 15. 映 画 東 京 オリンピック をみて, 読 売 新 聞, 1965. 3. 13. オリンピック 映 画 論 争 にケリ, 読 売 新 聞, 1965. 3. 31. 五 輪 映 画 海 外 版 を 発 送, 読 売 新 聞, 1965. 4. 5. 2. 논저 김한상, 조국 근대화를 유람하기, 한국영상자료원, 2007. 김희갑, 어느 광대의 사랑, 삼진기획, 1992. 김종원 외 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아르준 아파두라이, 차원현 외 옮김, 고삐풀린 현대성, 현실문화연구, 2004. 유선영외 편, 한국의 미디어사회문화사, 한국언론재단, 2007. 이효인 외, 한국 영화사 공부 1960~1979,이채, 2004.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이채, 2005. 鄭 秀 婉, 韓 国 映 画 の 黄 金 期 :1960 年 代 東 京 国 立 近 代 美 術 館 フィルムセンター 編, 2002 年 日 韓 国 民 交 流 記 念 事 業 韓 国 映 画 栄 光 の1960 年 代, 2002. 東 京 ニュース 通 信 社 編, テレビ50 年 in TVガイド, 2000. HYE SEUNG CHUNG, Hollywood ASIAN PHILIP AHN and the Politics of Cross -Ethnic Performance,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2006. 282 로컬리티 인문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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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s Setbacks of Globalization and Locality - Korean Cinema in the 1960s and Korean Residents Abroad Yang, In-Sil Recently, due to the Korean Wave, the concepts of globalization and locality are being used to explain the penetration of foreign capital into Korean cinema, the internationalization of its staff and the participation of foreign actors in Korean movies, as well as of Korean actors in foreign movies. However, internationalization and locality should not be understood as pointing at a specific place or limits, but as fluctuating according to their mutual relationship and the time period. During the 1960s Korean cinema underwent a great change. The most important change in that period was that Korean residents abroad involved in American and Japanese cinema begun to take part in Korean cinema. These Koreans, moving between the two countries, tried to make co-production movies between America and Korea, to introduce the synchronous recording technology into Korean cinema, and to export Korean movies to Japan and America. This means that, during 20 years after the war, the movies made and consumed inside the limits of the Korean nation-state were made as image of the outside Japan and Asia. Here, nation-state refers not only to territorial limits, but also to cultural and social limits. These changes imply that, when considering the Korean cinema of the 1960s, the point of view of globalization and locality becomes indispensable. In this paper, the cases of Philip Ahn, a Korean resident in America, and Shinnosuke Ryu, a Korean resident in Japan, are analyzed as examples of two Korean residents abroad who showed great activity in the Korean cinema of the 1960s. Nevertheless, Ahn s plan for making co-production movies between America and Korea, and Ryu s attempts to introduce the synchronous recording technology into Korean cinema, were rejected. Contrasting with this, the movie series The Land of Korea reflects well how internationalization and locality where understood in the Korean cinema of the 1960s. In this paper, analyz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ole of the Korean residents abroad and the "The Land of 284 로컬리티 인문학 2

Korea", it is made clear that the changes in the 1960s were the beginning of the globalization that Korean cinema is undergoing at present. Key Words: Co-Production Movies between America and Korea, Philip Ahn, Shinnosuke Ryu, Korean Residents in Japan, "The Land of Korea", Locality ㆍ논문투고일: 2009년 9월 5일 ㆍ심사완료일: 2009년 10월 7일 ㆍ게재결정일: 2009년 10월 15일 좌절된 세계화와 로컬리티 285